SKKU2025 김경민 디지털큐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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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뿌리깊은 나무»(1976-1980)의 편집체제 및 필자 분석
저자 : 김경민 |
발행연월 : 2025.06. |
학과/전공 : 국어국문학 현대분과 |
학교 : 성균관대학교 |
연구 배경 및 목적
이 연구는 1976년 3월에 창간해 1980년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던 월간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체제와 필진 네트워크를 분석한다. 월간 『뿌리깊은 나무』는 모회사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 [1]의 사장이었던 한창기의 주도 하에 1976년 3월 창간된 종합교양지였다. 1980년 8월까지 총 53호를 발행했으며, 발간 내내 단순 정보 전달을 넘어 깊이있는 분석과 담론 형성을 추구했다. 지식인, 작가, 학자 등으로 구성된 전문적인 필진 등을 동원하며 전통과 문화, 언어, 민속, 예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잡지였던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전용, 가로쓰기, 4×6 배판의 판형 등의 획기적인 지면 기획을 선보였다. 또한 독점적 편집권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었는데, 국한문혼용체가 대다수였던 당시의 원고들을 취합해 한글전용체에 맞게 과감히 손질하는 바람에 필자들의 불평을 사기도 했다. [2]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체제와 필진 네트워크를 분석해야 하는 이유는 이 시기 사회통제의 기능이 비단 텍스트의 제작과 유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피검열자의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키는 일”[3]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신개헌 이후 확대 및 재편된 검열체제는 검열의 범위와 수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제9호[4] 는 집회·시위를 포함한 집단적·사회적 공론활동 및 신문·방송·도서·음반·공연물 등의 제작, 그리고 이들의 전파·배포·판매·전시 등의 유통 일체에 대한 법적·제도적 통제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특히 이 시기의 검열은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점차 강화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1970년대 박정희 체제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이었던 총력안보와 국민총화의 선전과 동원이 절정을 이룬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반정부 투쟁의 고조와 그에 따른 금압과 통제의 격화 등 지배/저항 세력의 분극화가 확대 및 고착되는 한편 라디오의 전국적인 보급에 따른 “국민 미디어화”[5] 와 텔레비전의 확대로 인해 일정한 대중적 매체환경이 조성되고, 외부적으로는 냉전체제의 데탕트 국면으로 강제된 한반도 분단의 내재화에 이어 남북간 대화·체제경쟁의 왕복 등으로 포착되는 한반도 질서의 급격한 전환, 한미간 불화와 주한미군 철수, 베트남전 종전 등 대외적 변수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당시 박정희 정권이 맞이한 중층적인 유동성에 따른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론을 전파하며 이와 같은 국면을 위기로 과장해 규정했고, 긴급조치 시기에 이르러 공세적 방어(offensive defense)에서 전면적인 공세로 전환된 프로파간다는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라는 시좌에서 “체제 간 대결과 동시에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한 통제”를 완수하고자 했다.[6] “‘통치성’이 권력의 복합적 작용효과며 사회와 국가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면, 박정희 정권 통치성의 본원적 차원 또는 무의식적 차원은 냉전을 사회 내부로 내재화한 것”[7] 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 검열의 양상에서 주목을 요하는 사안은 민간자율기구에 의한 심의의 활성화다.
1965년 탄생한 민간자율기구[8] 는 유신체제에 이르러 관계법령 및 시행령의 개정을 통해 법제화된 윤리위원회로 재편되고, 관권검열과 민간검열의 이원구조가 구축된다. 이로 인해 검열 당국의 경제적 부담과 업무상 과부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검열 주체들에게 부정적·사후적 통제를 넘어 능동적·선제적 문화통제, 즉 프로파간다의 효과적인 운용이 가능해진다. 이처럼 전방위적인 억압의 사정권이라는 상황은 『뿌리깊은 나무』가 처한 바로 그 풍경이었다. 명목상 등록제였던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1961.12)이 사실상 허가제로 운용되며 정기간행물 발행 인가는 요원한 상태였다. 이에 발행인 한창기는 모회사인 한국브리태니커사에서 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고객들을 상대로 펴내고 있던 사보(社報) 『배움나무』를 『뿌리깊은 나무』로 확대해 펴내게 된다. 창간호가 법적으로는 ‘제7권 제2호’로 발행된 정황이다.
이처럼 긴급조치 시기의 글쓰기, 특히 여러 자본이 투입되며 출판 시장에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잡지의 글쓰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특정한 임계 및 한계와 끊임없이 마주칠 수 밖에 없게 하는 검열이라는 근원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렵게 탄생한 『뿌리깊은 나무』는 한때 87,000부를 상회하는 판매고를 기록[9]
하며 당대의 가장 유력한 종합교양지로 등극하기도 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모회사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사은품처럼 증정된 바를 일정부분 감안하더라도, 당시 대표적 월간지인 『신동아』의 판매 부수가 2-30,000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뿌리깊은 나무』의 파급력을 으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검열 당국인 문공부의 입장에서 『뿌리깊은 나무』가 보다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즉 검열 당국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뿌리깊은 나무』의 필진과 편집체제의 분석을 통해 이 잡지가 검열체제 하 어떤 좌표 속에 놓여있었는지를 파악하고, 잡지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문학과지성』에 주요하게 가담한 논자들이 『뿌리깊은 나무』와 일정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연구 내용
※본문 작성 시 글상자 삭제※
연구 방법과 내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어디에서 어떤 자료들을 보았고,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그 중에서 어떤 데이터들을 추출했으며, 그렇게 범위를 설정한 기준과 근거는 무엇인지 등을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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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맨틱 DB 온톨로지 설계
※본문 작성 시 글상자 삭제※
본 연구의 온톨로지 설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아래의 문장을 적절한 위치에 삽입하여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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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
Class | Descri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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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 «뿌리깊은 나무»를 비롯한 잡지의 총칭 |
Issue | «뿌리깊은 나무» 발행 호수 |
Person | «뿌리깊은 나무» 제작에 참여하거나, 잡지와 관련한 인물들 |
Text | «뿌리깊은 나무»에 수록된 글 |
Subject | 글의 세부 종류 |
University | 인물들의 출신 대학 |
Major | 인물들의 출신 전공 |
Work | 인물들의 외부 작업물 |
Company | «뿌리깊은 나무»와 관련한 회사 |
Relation
Data
데이터 보러가기 |
Semantic Data Network Graph
Semantic Storytelling
참고문헌
※본문 작성 시 글상자 삭제※
각주는 하단의 수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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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출판 200주년이었던 1968년 1월 24일, 한창기 등의 주도로 설립된 백과사전 전문 출판사. 초창기 수입해 판매했던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성공으로 1971년과 1970년대 후반 한국어판의 개발을 추진했으나 1980년 『뿌리깊은 나무』의 폐간으로 계획이 무산된다. 이후 1987년 다시 한국어판의 개발 계획이 수립되어 1988년 브리태니커에서 사전 연구 작업을 진행, 1989년부터 편집 위원회 구성 및 항목 선정 작업과 같은 편찬 실무 작업에 착수한다. 그 결과 1992년 9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어판인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의 첫 3권이 출간되었고 1994년 27권으로 완간된다.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출판과 온라인 서비스 사업으로 진출했으며, 2015년 9월 한국 사무소의 업무를 종료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백과사전 제작에 관한 세부 사항은 장경식,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구성과 특징: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5판과 한국어판『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을 중심으로」, 『한국사전학』11, 한국사전학회, 2008 참조.
- ↑ 2대 편집장을 지낸 김형윤은 훗날 선우휘가 자신의 원고를 절대 고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여지없이 손질된 글을 보고 “가져가서 실어라, 그러나 다신 내게 찾아올 생각 말아라!”라고 격노한 사실을 회고한 바 있다. 김형윤, 「베고 자기에는 불편한 잡지의 그 편함과 불편함」, 강운구 외, 『특집! 한창기』, 창비, 2008, 68쪽.
- ↑ 이봉범, 「유신체제와 검열, 검열체제 재편성의 동력과 민간자율기구의 존재방식」, 『한국학연구』 6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2, 385쪽.
- ↑ 「憲法비방·改廢선전 禁止」, 『조선일보』 1975.05.14., 1면.
- ↑ 임태훈, 「박정희체제의 사운드스케이프와 문학의 대응」,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71쪽.
- ↑ 이봉범, 위의 글, 360-368쪽. 이봉범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의사헤게모니 지배-프로파간다-검열의 동학을 당시 총력안보체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긴급조치 제9호 발동 이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최상의 이념으로 격상”된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는 박정희 체제의 종식까지 정권의 핵심적 통치수단으로 기능했다.
- ↑ 천정환, 「현대 한국 검열의 계보학: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검열과 문예진흥정책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2017년 3월호, 문화과학사, 2017, 97쪽.
- ↑ 이봉범은 1960년대 각종 윤리위원회의 자율심의가 보편화된 가운데 관권검열을 능가하는 권능이 발휘됐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조직 체계와 실행력을 갖추고 명실상부한 검열기관으로서의 위상과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봉범은 ‘민간자율기구’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있다. 1960년대 민간자율기구는 국가권력의 사회문화적 통제력 극대화 전략과 사회문화주체들의 독자적 권역 확보라는 이해 관계의 충돌에서 탄생한 제도적 산물이었으며, 정권이 문화검열을 민간에 위임하고 이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민간자율기구는 박정희 정권이 구사했던 검열 기예(技藝)의 일환이었다. 이봉범, 「1960년대 검열체재와 민간검열기구」, 『대동문화연구』 75, 대동문화연구원, 2011.
- ↑ 강준만, 「샘이깊은물: 당돌하고 발칙한 잡지」, 『특집! 한창기』, 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