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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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w2999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5월 26일 (금) 00:2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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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紀

後梁紀

太祖皇帝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五代紀※

※ 按梁, 唐, 晉, 漢, 周가 舊各有一代之史러니 本朝歐陽文忠公이 始刪爲五代史하니 司馬溫公所修資治通鑑이 雖取歐公一二論說이나 而所援引事는 多是舊史니 其言辭詳略이 與歐陽公五代史로 多有同異하니라

太祖皇帝※ 在位七年이요 壽六十一이라

※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從黃巢爲盜러니 背降于唐하니 僖宗이 賜名全忠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니라 昭宗朝에 進封梁王하야 挾天子以令天下라가 遂移唐祚하니라

五代紀※

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1]([2])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3]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4]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5]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後梁紀

[##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太祖皇帝]는 이름이 [##晃]이고 성이 [##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溫]이다.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僖宗]이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6] 때에 승진하여[##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丁卯]唐天祐四年

[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에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太祖皇帝][##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春三月에 唐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한대 梁王이 更名【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梁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하다

봄 3월에 唐나라 [7]가 御札을 내려梁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禪讓하자, [##梁王]이 이름을 [##晃]으로 고치고【更은 平聲(고침)이고, 晃은 胡廣反(황)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고[8]를 받들어[9]으로 삼았다.[10]를 曹州로 옮겨 圍籬安置하고 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

○ 是時에 惟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李克用이요 鳳翔은 李茂貞이요 淮南은 王偓이라】이 稱天祐하고 西川王建이라 】이 稱天復【天祐, 天復은 竝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昭宣帝는 未有年號하니라 】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이때에 오직 河東, 鳳翔, 淮南만이【[頭註] 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李克用]이고, 鳳翔은 [11]이고, 淮南은 [##王偓]이다.】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西川은【西川은 [##王建]이다.】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天祐와 天復은 모두 [12]의 연호이니, 天復이 먼저이고 天祐가 뒤이다. [13]는 年號가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梁나라의 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蜀王이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이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이 封爲晉王이라 後에 其子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라 蜀王王建이니 唐昭宗이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蜀王(王建)]이 [##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李克用]이 [##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14]이 [##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莊宗]이다. [##蜀王]은 [##王建]이니, 唐나라 [15]이 [##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羸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岐王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이요 名은 文通이라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에 封岐王하고 唐莊宗이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16]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紀律이 없었다. 唐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17][18]이 鳳翔을 점거하니, 本姓은 [19]이고 이름은 [20]이다. [##僖宗] 때에 공을 세워 [21]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22] 때에 [23]에 봉해졌으며, 後唐의 [##莊宗]이 [24]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後唐[##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梁이 以武安節度使馬殷으로 爲楚王하다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梁나라가 武安節度使[##馬殷]을 [##楚王]으로 삼았다. - [##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以吳王로 爲吳越王하다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25][26][27]으로 삼았다. - [28]가 杭州를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淸海節度使劉隱으로 爲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淸海節度使[29][30]으로 삼았다. - [31]이 廣州를 점거하여 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國號를 漢이라고 고쳤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威武節度使王審知로 爲閩王하다 〈黃巢亂에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以權知荊南留後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威武節度使[32][33]으로 삼았다. - [##黃巢]의 난리에 [34]가 福州를 점거하여閩中과 嶺南의 다섯 州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35]이 建州에 있으면서殷이라고 이름하였는데, 後晉의 [##齊王] 때에 南唐이 멸망시켰다.- 權知荊南留後[##高季昌]을 節度使로 삼았다.- [##高季昌]이 江陵을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9월에 [##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에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寨塹【寨는 本作砦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而守之하다

梁나라가 保平節度使[36]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潞州를 공격하게하니, 晉나라 昭義節度使[37]가 성문을 닫고항거하며지켰는데, [38]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보름이 지나도록함락하지못하였다. 이에 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夾寨塹이라 이르며【寨는 본래 砦로 쓰니, 목책이다. 塹(참호)은 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지켰다.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이라〉

契丹 - [39]가 처음으로 건국한 元年이다. -

[戊辰]

[戊辰]〈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蜀高祖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에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高祖][##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正月에 晉王克用이 薨하니 其子存勖이 嗣爲晉王하다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都指揮使라 】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存勖小名이라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克用이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寇之平에 功爲第一이어늘 上源之變을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라 然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에 恥行墨勅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에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이 遠矣라 故로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는 蓋以此也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喪不二事라 故로 春秋於背喪而卽戎者에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는 存亡繫焉일새 然後에 從權制而無避하니 此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라 若李存勖夾寨之戰을 君子深有取者는 與是類耳라 蓋夾寨는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라 使存勖이 於是時에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아 是以로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에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이 大矣로다

정월에 [##晉王][##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存勖]이 뒤를 이어 [##晉王]이 되었다. [##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周德威]【[##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李亞子]는 [##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 淮南張顥【左牙指揮使라 】弑弘農威王楊偓諡也라 】하고 立其弟隆演하야 爲留後徐溫으로 弑이러니 復攻하야 殺之하니라 】하다 〈楊行密이 據淮南이러니 其子이 嗣爲弘農郡王하고 國號吳라 後爲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淮南의 [##張顥]가【[##張顥]는 左牙指揮使이다.】弘農[40]을 시해하고[41][42]의 시호이다.】 그 아우[43]을 세워留後로 삼았다.【[##張顥]가 [44]과 함께 [45]을 시해하였는데, [46]이 다시 [##張顥]를 공격하여죽였다.】 - [47]이 淮南을 점거하였는데, 그 아들[48]이 뒤를 이어 [49]이 되고 국호를 吳라 하였다. 뒤에 [50]에게 찬탈당하여 마침내 南唐이 되었다.-

○ 契丹 〈耶律阿保機改名이라 二年이라〉

契丹 - [51]가 이름을 [52]으로 고쳤다. 2년이다. -

[己巳]

[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梁主遷都洛陽하다

[##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辛未]

[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三月에 梁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卒하고 其弟이 襲位하다

3월에 梁나라 淸海節度使[53][54]이 죽고 그의 아우[55]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 八月에 燕王守光이 卽皇帝位하야 〈劉仁恭之子也니 據幽州하니라〉國號를 大燕이라하다

8월에 [56][57]이 황제에 즉위하여 - [58][59][60]의 아들이니, 幽州를 점거하였다. - 국호를 大燕이라 하였다.

晉王이 聞燕王守光稱帝하고 大笑曰 俟彼十年하야 吾當問其鼎矣【左傳에 楚子伐陸渾之戎하야 遂至于洛하고 觀兵于周郊하니 定王이 使王孫滿으로 勞[[楚(王)[子]]]어늘 [[楚(王)[子]]]가 問鼎大小輕重한대 對曰 在德이요 不在鼎이라 有昏德하야 鼎遷于殷하야 載祀六百하고 殷暴虐하야 鼎遷于周하니 德之休明이면 雖小必重이요 其姦回昏亂이면 雖大必輕이라 昔에 成王이 定鼎于郟鄏에 卜世三十이요 卜年七百이니 天所命也라 周德雖衰나 天命未改하니 鼎之輕重을 未可問也라하니라 】리라

[##晉王]은 [61][62]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春秋左傳》 宣公 3년에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定王]이 [63]으로 하여금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64]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65]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66]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契丹主 五年

契丹主 〈五年이라〉

[67] - 5년이다. -

[壬申]

[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梁主疾增甚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에 不意太原餘孽【目晉王也라 】이 更昌熾如此하니 吾觀其志不小라 天復奪我年하니 我死면 諸兒는 非彼敵也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哽咽하야 絶而復蘇하니라

[##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 梁高季昌【荊南節度使라 梁錫爵渤海王이러니 後改名季興하니라 唐莊宗이 封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이 潛有據荊南之志하야 乃奏築江陵外郭하야 增廣之하다

梁나라 [##高季昌]이【[##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莊宗(李存勖)]이 [##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 梁郢王友珪【梁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梁主愛假子友文之妻하야 將立友文爲嗣라가 遂爲友珪所弑하니라 】의 僕夫馮廷諤이 弑梁主어늘 友珪卽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朱溫이 爲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에 刑虐不悛하고 戕害無辜하며 不念聚麀之恥하야 釀成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梁나라 [##郢王][##朱友珪]의【[##郢王][##朱友珪]는 梁나라 [##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梁主]가 養子인 [##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마부인 [##馮廷諤]이 [##梁主]를 시해하자, [##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朱溫]이 [##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68]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契丹主 耶律億六年

○ 契丹主 〈耶律億六年이라 其弟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不治하니라〉

[69] - [70]의 6년이다. 그 아우[71]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않았다.-

均王
均王 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均王※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 初名은 友貞이러니 更名하니 朱溫第三子라 諡曰末帝

[##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均王]은 처음 이름이 [##友貞]이었는데 이름을 [##瑱]으로 고쳤으니,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末帝]라 하였다.

[癸酉]

[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梁主乾化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梁主][##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趙巖【駙馬都尉이니 尙太祖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이어늘 均王友貞이 密與之謀誅友珪할새 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令公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袁象先【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하다 庚寅旦에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友珪聞變하고 與妻張氏와 及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廷諤亦自殺이라 象先, 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하고 又更名하다

梁나라 [##趙巖]이【[##趙巖]은 駙馬都尉이니, [##太祖]의 딸인 [##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均王][##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72]에게[73]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74]를 설득하기를 “[##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75]가 마침내 그의 장수[##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76][77]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袁敬初]는 [##太祖]의 누이인 [78]에게 장가들었다.】도모하게하였다. 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79]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張氏] 및 [##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80]과 [##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均王]을 맞이하자, [##均王]이 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瑱]으로 고쳤다.

○ 晉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王緘하야 草露布【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凝]重이라하니라 】한대 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晉나라 [##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81]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82]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83]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晉王]이 掌書記[##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84]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 契丹主弟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85]의 아우[86] 등이 배반하자 그 도당을 주벌하고풀어주었다.

[乙亥]

[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二月에 梁魏博軍이 亂하야 劫節度使賀德倫하고 求援於晉이어늘 晉王이 引兵하야 進據臨淸하야 與劉鄩夾河爲營하다

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87]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梁主疎忌宗室하고 專任趙巖德妃【帝之母也 】兄弟張漢鼎, 漢傑과 從兄弟漢倫, 漢融하야 咸居近職하야 參預謀議하다 等이 依勢弄權하야 賣官鬻獄하고 離間舊將相하니 敬翔, 李振이 雖爲執政이나 所言이 多不用이라 이 每稱疾不預事하야 以避, 之族하니 政事日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趙巖] 및 [88][89]는 皇帝의 어머니이다.】형제인 [##張漢鼎]‧[##張漢傑]과 종형제인 [##張漢倫]‧[##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90][91]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92]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趙巖]과 [##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丙子]

[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春二月에 梁主屢趣(促)劉鄩하야 與晉王戰이러니 兵이 大敗라 王檀【匡國節度使라 】이 密疏하야 請發關西兵하야 襲晉陽한대 梁主從之하야 兵至晉陽하야 夜急攻之하니 城幾陷者數四라 昭義節度使李嗣昭 遣牙將石君立하야 救之하니 梁兵死傷者什二三이라 王檀이 引兵大掠而還하니 梁主劉鄩敗하고 又聞王檀無功하고 歎曰 吾事去矣라하니라

봄 2월에 [##梁主]가 여러 번 [93]을 재촉하여[##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94]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王檀]이【[##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95]가 牙將[##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梁主]는 [96]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 契丹主改元神冊하다

[97]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戊寅]

[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春에 晉兵이 侵掠至鄆, 濮而還이어늘 梁敬翔이 上疏曰 國家連年喪師에 疆域日蹙이라 陛下居深宮之中하야 所與計事者는 皆左右近習이니 豈能量敵國之勝負乎잇가 先帝之時에 奄有河北하고 親御豪傑之將호되 猶不得志【不得志는 謂不得志于晉이라 】어시늘 今敵至鄆州로되 陛下不能留意하시니 必若乏才인댄 乞於邊陲自效하노이다 疏奏에 , 之徒 言怨望이라하니 梁主遂不用하다

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98]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이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상소문을 올린 뒤에 [##趙巖]과 [##張漢鼎]의 무리가 “[99]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吳徐知誥 爲淮南節度行軍副使하다 〈知誥後簒吳하니 是爲南唐이라〉知誥吳王盡恭하고 接士大夫以謙하며 御衆以寬하고 約身以儉이라 以吳王之命으로 悉蠲天祐十三年以前逋稅【欠負官物과 亡匿不還을 皆謂之逋라하니라 】하고 餘俟豐年하야 乃輸之하고 求賢才, 納規諫하고 除姦猾, 杜請託하니 於是에 士民이 翕然歸心하야 雖宿將悍夫라도 無不悅服이러라 以宋齊丘로 爲謀主하니 由是로 江淮間에 曠土【空曠不耕之土也라 】盡闢하고 桑柘滿野하야 國以富强하니라

吳나라 [100]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101]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102][103]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104]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05][106]를 謀主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江淮 지방의 빈 땅이【曠土는 비워두고 경작하지 않는 농토이다.】 모두 개간되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들에 가득하여 국가가 부강하게 되었다.

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107] - [108]의 사당을 만들고 친히 배알하였다. -

[己卯]

[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 蜀乾德元年이요 吳宣王楊隆演武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기묘(919) - 晉‧岐는 唐나라 天祐 1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5년이다. ○ 蜀나라는 乾德 元年이고, 吳나라는 [109][110]의 武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徐溫【少販鹽이러니 及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行密吳王하니라 】이 自以權重而位卑라하야 勸吳王建國稱帝而治러니 吳王이 不許하다 夏에 卽吳國王位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爲大丞相하고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하다

吳나라 [111][112]은 젊었을 적에 소금을 팔았는데, [113]이 일어나자 [114]의 막하에 예속되었다가 마침내 吳나라의 將相이 되었다. 天復 2년(902)에 [115][116]에 봉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력은 막중하지만 지위가 낮다고 하여 [117]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여통치할 것을 권하였는데, [118]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에 [119][120]에 즉위하였다.[121]이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天子의 禮를 사용하여 [122]을 大丞相으로 삼고 [123]이 섭행하니, [124][125]의 둘째 아들이다.】

蜀主王建이 殂하니 太子이 卽皇帝位하다

[##蜀主][##王建]이 죽으니, 太子[##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이 擊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橫衝은 軍都之號也라 】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壖은 而緣反(연)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126]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127]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石敬瑭]과 [##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高祖]가 되었고, [##劉知遠]은 漢나라 [##高祖]가 되었다.-

○ 契丹이 城遼陽하다

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歷年圖曰 太祖始以黃巢降將으로 秉旄宣武僖宗이 以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하고 逞其詐力하야 蠶食諸夏하야 地廣兵彊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均王은 膏粱之子로 材不過人이어늘 棄敬翔, 王彦章하고 而用趙巖, 張歸霸하야 以與莊宗爲敵하니 能無亡乎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太祖(朱溫)]는 처음에 [##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僖宗]이 [##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128][129]을 버리고 [##趙巖]과 [##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

後唐紀

莊宗
莊宗在位三年이요 壽三十五라

後唐紀

莊宗※在位三年이요 壽三十五라

※ 名은 存勖이니 附唐屬籍하야 姓라 本西突厥種이니 姓朱邪氏라 父克用이 立功於唐하야 封晉王이러니 後滅梁하고 復稱唐하니라

[##莊宗]은 재위가 3년이고 壽가 35세이다.

[##莊宗]은 이름이 [##存勖]이니, 唐나라의 屬籍(왕실의 족보)에 붙여 姓을 [130]라 하였다. 본래 西突厥 종족이니, 姓은 [##朱邪氏]이다. 아버지[##李克用]이 唐나라에 공을 세워 [##晉王]에 봉해졌는데, 뒤에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唐이라고 칭하였다.

[癸未]岐稱唐天祐二十年

[癸未]〈岐稱唐天祐二十年하고 梁龍德三年은 盡十月하고 四月以後는 唐莊宗李存勖同光元年이라 ○ 是歲에 梁亡하고 晉稱唐하니 凡五國, 四鎭이라〉

계미(923) - 岐나라는 唐나라 天祐 20년을 칭하였고, 梁나라 龍德 3년은 10월에 끝나고 4월 이후는 唐나라 [##莊宗][##李存勖]의 同光 元年이다. ○ 이해에 梁나라가 망하고 晉나라가 唐나라를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夏四月에 晉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唐이라하다 梁主段凝【內莊宅使라 妹爲梁太祖美人이라 故로 親信之러니 後率精兵五萬하고 降唐하니라 】하야 監大軍於河上하니 敬翔, 李振이 屢請罷之한대 梁主未有過하니라 曰 俟其有過면 則社稷危矣리이다 이 乃厚賂, 하야 求爲招討使어늘 , 이 力爭하야 以爲不可라호되 , 張主之하야 竟代王彦章【敵號王鐵槍이라 , 等이 惡彦章하야 相與協力傾之하다 段凝이 素疾彦章하고 諂附, 하야 百方沮撓하야 惟恐有功이라 每捷奏至에 , 이 悉歸功於하야 竟代彦章하다 已而요 梁亡하니 이 率精兵降(后)[唐]하야 奏趙巖, 張漢傑이 竊弄權兵하야 殘害群生하니 請族之하소서 劉后하야 以求恩寵하니 莊宗賜姓名曰李紹欽이라하고 以爲秦寧節度使하니라 】하야 爲北面招討使하니 於是에 宿將憤怒하고 士卒亦不服하니라

여름 4월에 [##晉王]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唐이라 하였다. [##梁主]가 [131]을 보내어[132]은 內莊宅使이다. [133]의 누이가 梁나라 [##太祖]의 美人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는데, 뒤에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였다.】河水 가에서 大軍을 감독하게하니, [134][135]이 여러 번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梁主]가 말하기를 “[136]이 아직 잘못한 것이 있지 않다.”라고 하자, [137]이 말하기를 “그가 잘못하기를 기다리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138]이 마침내 [##趙巖]과 [##張漢鼎]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어招討使가 되기를요구하였다. [139][140]이 강력히 간쟁하여불가하다고하였으나[##趙巖]과 [##張漢鼎]이 이것을 주장해서 끝내 [141]을 대신하여【적들이 [142][143]이라고 불렀다. [##趙巖]과 [##張漢傑] 등이 [144]을 미워하여 서로 힘을 합쳐 모함하였다. [145]이 평소 [146]을 미워하고 [##趙巖]과 [##張漢傑]에게 아첨하여 백방으로 [147]을 저지해서 [148]이 행여 공을 세울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승전보가 이를 때마다 [##趙巖]과 [##張漢傑]이 [149]에게 공을 모두 돌려 끝내 [150]으로 하여금 [151]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윽고 梁나라가 망하니, [152]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여 아뢰기를 “[##趙巖]과 [##張漢傑]이 병권을 훔쳐 농간하여 生民들을 잔인하게 해쳤으니, 멸족시키소서.”라고 하였다. [153]이 [##劉后]에게 뇌물을 바쳐 은총을 구하니, [##莊宗]이 [154]이라는 姓名을 하사하고 秦寧節度使로 임명하였다.】北面招討使에 임명하니, 이에 老將들이 분노하였고 사졸들 또한 복종하지않았다.

○ 八月에 梁右先鋒指揮使康延孝 帥百餘騎하고 來奔이어늘 唐主屛人하고 問延孝以梁事한대 對曰 梁朝는 地不爲狹하고 兵不爲少나 然迹其行事컨댄 終必敗亡이요 近에 又聞欲數道出兵하야 決以十月大擧라하니 臣이 竊觀梁兵컨대 聚則不少요 分則不多니 願陛下養勇蓄力하야 以俟其分兵하야 帥精騎五千하고 自鄆州로 直抵大梁하야 擒其僞主하시면 旬月之間에 天下定矣리이다 唐主大悅하다

8월에 梁나라 右先鋒指揮使[155]가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도망해오자, [##唐主]가 사람을 물리치고[156]에게 梁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梁나라 조정은 영토가 좁지도 않고 병력이 적지도 않으나 그 행하는 일을 살펴보면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근래에 또 듣자하니, 여러 길로 출병하여 10월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唐나라를 進攻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신이 적이 梁나라 군대를 살펴보건대, 한 곳에 모이면 적지 않고 분산하면 많지 않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용맹을 기르고 힘을 축적하여 그들이 병력을 분산하기를 기다려서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鄆州로부터 곧바로 大梁에 이르러 괴뢰 군주를 사로잡는다면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 하니, [##唐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唐主聞梁人欲大擧數道入寇【聞於康延孝之言也라 】하고 召諸將會議하니 郭崇韜【樞密使라 】對曰 段凝이 本非將才라 不能臨機決策하니 無足可畏요 降者皆言大梁無兵이라하니 陛下若留兵守魏하야 固保楊劉【地名이라 】하고 自以精兵으로 與鄆州合勢하야 長驅入汴이면 彼城中旣空虛라 必望風自潰하리니 苟僞主授首하면 則諸將自降矣리이다 唐主曰 此正合朕意로다 丈夫得則爲王이요 失則爲虜니 吾行決矣로라 冬十月에 唐主以大軍濟河하야 至鄆州하야 遇梁兵하야 一戰敗之하고 追至中都하야 圍其城하니 城無守備라 少頃에 梁兵이 潰圍出이어늘 擒王彦章하야 斬之하다

[##唐主]는 梁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여러 길로 들어와 침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는【[通鑑要解] 唐主聞梁人欲大擧數道入寇:[##唐主]가 [157]의 말을 들은 것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회의하니, [158][159]는 樞密使이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60]은 본래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결단하지 못하니 두려워할 만한 상대가 못 되며, 梁나라에서 항복해 온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大梁에는 군대가 없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군대를 남겨두어 魏州를 지켜 楊劉를【楊劉는 지명이다.】 굳게 막고, 스스로 정예병을 거느리고 鄆州와 합세하여 계속 몰아쳐서 汴京(大梁)으로 쳐들어간다면 저들의 성안은 이미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서 스스로 궤멸될 것이니, 만약 괴뢰 군주가 목을 바친다면 여러 장수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이에 [##唐主]가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나의 뜻과 부합한다. 대장부가 잘되면 왕이 되고 잘못되면 포로가 되는 것이니, 나는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하였다.

겨울 10월에 [##唐主]가 大軍을 거느리고黃河를 건너鄆州에 이르러서梁나라 군대를 만나 一戰에 패퇴시키고, 추격하여中都에 이르러서 그 성을 포위하니, 성에 수비가 없었다. 잠시 후에 梁나라 군대가 포위를 뚫고 나오자, [161]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康延孝請亟取大梁한대 李嗣源【唐遣嗣源하야 取梁鄆州하고 以嗣源爲節度使하니라 】曰 兵貴神速하니 今彦章就擒을 段凝이 必未之知라 此去大梁至近하고 前無山險하니 方陳【陳은 讀曰陣이니 方陣은 竝陣而進也라 】橫行하야 晝夜兼程이면 信宿【再宿曰信宿이라 】可至하리이다 段凝이 未離河上하야 友貞이 已爲吾擒矣리니 延孝之言이 是也니이다 唐主從之하야 令下에 諸軍이 皆踊躍願行이러라 梁主使人促段凝軍이러니 旣辭에 皆亡匿이라 梁主日夜涕泣하고 不知所爲하며 置傳國寶於臥內라가 忽失之하니 已爲左右竊之하야 迎唐軍矣러라 梁主皇甫麟【控鶴都指揮使라 】李氏는 吾世讐라 理難降首【降은 平聲이니 言迎降以自首也라 一說에 降은 讀如字하니 低頭爲之下也라하니라 】요 不可俟彼刀鋸라 吾不能自裁하니 卿可斷吾首하라 泣하고 遂弑梁主하고 因自殺하다

[162]가 大梁을 속히 점령할 것을 청하자, [##李嗣源]이【唐나라가 [##李嗣源]을 보내어 梁나라 鄆州를 점령하고 [##李嗣源]을 節度使로 임명하였다.】 말하기를 “군대는 신속함을 소중히 여기니, 지금 [163]이 사로잡힌 것을 [164]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곳은 大梁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앞에 險阻한 山川이 없으니, 方陣(方形의 陣)을 치고【陳은 陣으로 읽으니, 方陣은 나란히 陣을 치고 전진하는 것이다.】 횡행해서 밤낮으로 행군 속도를 배가한다면 이틀 밤이면【이틀밤을 묵는 것을 信宿이라 한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165]이 河水 가를 떠나기 전에 [##朱友貞]은 이미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166]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唐主]가 그의 말을 따라 명령을 내리자, 諸軍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출전하기를 원하였다.

[##梁主]가 사람을 시켜 [167]에게 군대를 출동할 것을 재촉하였는데, [168]이 하직하자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梁主]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줄을 몰랐으며, 傳國寶를 침실 안에 두었다가 갑자기 잃어버리니, 이미 좌우 사람들이 훔쳐가서唐나라 군대를 맞이하였다. [##梁主]가 [##皇甫麟]에게【[##皇甫麟]은 控鶴都指揮使이다.】 이르기를 “[169]는 우리와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도리상 머리를 숙이고 항복할 수도 없고,【降(항)은 平聲이니,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 자수하는 것을 말한다. 一說에 降(강)은 본자대로 읽으니, 머리를 숙여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칼과 톱(刑具)을 기다릴 수도 없다. 나는 용기가 없어 자결할 수 없으니, 卿이 나의 목을 자르라.” 하였다. 이에 [##皇甫麟]이 울면서 마침내 [##梁主]를 시해한 다음 인하여 자살하였다.

梁主爲人이 溫恭儉約하야 無荒淫之失호되 但寵信, 하야 使擅威福하고 疎棄敬翔, 李振이라 】舊臣하야 不用其言하야 以至於亡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均王이 誅友珪而嗣立하야 以義討賊하니 成功固宜나 然梁之稔禍가 非一日이라 天將廢之하니 誰能興之리오 況均王膏粱之子로 才不逮人하야 寵信趙張하고 疏棄하며 賣官鬻爵하야 貨賂公行하야 政事不修하고 威權日去라 唐兵一麾에 宗廟遽滅하니 是는 非李亞子用兵之善이요 乃梁之自不善耳라 夫朱三이 起自降賊하야 遽擁旌旗하니 小人負乘에 貪欲無厭이라 圍迫天子하고 害朝臣, 殺太后하며 勦諸王, 殺(弑)二帝하야 移唐鼎이라 跡其罪戾하면 盡南山之竹이라도 有不足書者니 自王莽以來로 一人而已요 而凶殘淫穢 抑又甚焉하니 再世而亡은 非不幸也요 宜也니라

[##梁主]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고 검약하여 酒色에 빠지는 잘못이 없었으나, 다만 [##趙巖]과 [##張漢鼎]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위엄과 복을 멋대로 행사하게 하고 [170][171]【敬李는 [172][173]이다.】[##太祖]의 옛 신하들을 소원히 하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아 멸망에 이르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均王]이 [##朱友珪]를 죽이고 뒤를 이어 즉위하여 의리로써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성공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梁나라가 禍를 키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므로 하늘이 장차 이를 폐하려 한 것이니, 누가 일으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子弟로 재주가 보통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여 [##趙巖]과 [##張漢鼎]을 총애하여 신임하고 [174][175]을 소원하게 대하여 버렸으며, 매관매작을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정사가 닦여지지 못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떠나갔다.

그리하여 당나라(後唐) 군대가 한번 지휘함에 종묘사직이 갑자기 멸망당하였으니, 이는 [##李亞子(李存勖)]가 用兵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요, 梁나라가 스스로 잘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朱三(朱溫)]이 항복한 역적으로서 일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藩鎭의 符節을 소유하니, 지고 있어야 할 小人이 君子의 수레를 탐에 욕심을 부림이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天子를 포위하여 압박하였으며 朝臣을 살해하고[##太后]를 죽였으며 여러 왕을 죽이고 두 황제를 시해하여 唐나라의 國統을 빼앗았다. 그의 죄를 살펴보면 南山의 대나무를 다 베어 기록한다 해도 다 쓸 수가 없으니 [176] 이래로 한 사람일 뿐이요, 흉포하고 잔악하고 음란함은 [177]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두 代 만에 망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唐主遣使하야 以滅梁告吳, 蜀하니 二國이 皆懼라 嚴可求曰 聞唐主始得中原에 志氣驕滿하고 御下無法하니 不出數年에 將有內變하리니 吾但當卑辭厚禮하야 保境安民以待之耳라하니라 唐主幼善音律이라 故로 伶人【伶은 樂官也니 伶倫은 古樂師라 故로 後世多號樂官爲伶官하니라 】이 多有寵하야 常侍左右하고 唐主或時自傅粉墨하고 與優人으로 共戲於庭하야 以悅劉夫人하니 優名謂之李天下【乃以優人自許하야 而自號曰李天下라하니라 】라 諸伶이 出入宮掖하야 侮弄縉紳하니 群臣이 憤嫉호되 莫敢出氣러라

[##唐主]가 사신을 보내어 梁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吳나라와 蜀나라에 알리니, 두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吳나라의 [178]가 말하기를 “臣이 들으니, [##唐主]가 처음 中原을 얻자 뜻과 기운이 교만하고 아랫사람을 다스림에 법도가 없다고 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內變(內亂)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하여 국경을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唐主(李存勖)]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잘하였다. 그러므로 광대들 중에【伶은 악관이니, 伶倫은 옛날 악사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대부분 악관을 伶官이라고 칭하였다.】 총애 받는 자가 많아서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唐主]가 때때로 스스로 얼굴에 분과 먹을 바르고 광대들과 뜰에서 희롱하여 [179]을 기쁘게 하니, [##唐主]가 광대로 자처하여 광대 이름을 [180]라 하였다.【唐主가 마침내 광대로 자처하여 스스로 [181]라고 칭하였다.】 여러 광대들이 궁중을 출입하면서 사대부들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니, 여러 신하들이 분노하고 미워하였으나 감히 노여운 기운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張全義【河南尹이니 初名은 이라 唐昭宗이 賜名全義하고 梁太祖가 賜名宗奭이러니 入朝于唐하야 復名全義하니라 】唐主遷都洛陽이어늘 從之하다

[##張全義]가【[##張全義]는 河南尹이니 처음 이름은 [##言]이다. 唐나라 [182]이 [##全義]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梁나라 [##太祖]가 [##宗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는 다시 [##全義]라고 이름하였다.】[##唐主]에게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 그의 말을 따랐다.

○ 契丹 天贊二年

○ 契丹 〈天贊二年이라〉

契丹 - 天贊 2년이다. -

[甲申]後唐同光二年

[甲申]〈後唐同光二年이라 ○ 是歲에 岐降後唐하니 凡四國, 四鎭이라〉

갑신(924) - 後唐同光 2년이다. ○ 이해에 [183]이 後唐에 항복하니,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正月에 唐以岐王李茂貞이라 】으로 改封秦王하다

정월에 [##唐主]가 [184][185][186]이다.】[187]으로 고쳐 봉하였다.

○ 二月에 唐主祀南郊하고 大赦러니 郭崇韜首獻勞軍錢【唐分天下財賦하야 爲內外府하야 州縣上供者는 入外府하야 充經費하고 方鎭貢獻者는 入內府하야 充宴賜라 於是에 外府虛竭하고 內府山積이러니 及是에 乏勞軍錢이어늘 崇韜言於上曰 臣已傾家所有하야 以助大禮하니 願陛下亦出內府財하야 以賜有司하소서 唐主黙然久之라가 曰 吾晉陽에 自有儲積하니 可令輦取以相助라하니라 】十萬緡하다 唐主內府之財山積호되 不肯給賜하고 曰 吾晉陽에 自有儲積하니 可令租庸【租庸使는 主運輸하니라 】輦取以相助라하니 於是에 軍士皆不滿望하야 始怨恨有離心矣러라

2월에 [##唐主]가 南郊에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는데, [188]가 첫 번째로 勞軍錢(군사들을 위로하는 돈)【唐나라가 천하의 재물을 內府와 外府로 나누어 州縣에서 上供한 것은 外府에 넣어 국가의 經費에 충당하고, 方鎭에서 貢物로 바친 것은 內府에 넣어 임금의 宴會와 賞賜에 충당하였다. 이에 外府는 텅 비어 고갈되고 內府는 물건이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勞軍錢이 부족하자, [189]가 上에게 아뢰기를 “臣이 이미 소유한 家産을 모두 기울여 郊祀의 큰 禮를 도왔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도 內府의 재물을 내어 有司에게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唐主]가 묵묵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 하였다.】 10만 緡을 바쳤다. [##唐主]는 內府의 재물이 산처럼 쌓였으나 군사들에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租庸使는 실어 나르는 것을 주관한다.】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에 차지 못하여 비로소 원망하고 한하여 배반할 마음이 있었다.

○ 唐郭崇韜位兼將相崇鞱爲樞密使하고 加侍中領成德節樞密使하니 天下事無所不關이라 】하고 復領節旄하야 以天下爲己任하니 權侔人主라 由是로 嬖倖이 疾之於內하고 勳舊怨之於外하니라

唐나라 [190]가 장수와 재상의 지위를 겸하고[191]를 樞密使로 임명하고 侍中領成德節度使樞密使를 더하니, 천하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다시 절도사의 節旄(符節)를 겸하여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권력이 人主와 대등하였다. 이 때문에 총애하는 환관들은 안에서 미워하고 훈구대신들은 밖에서 원망하였다.

○ 四月에 秦忠敬王李茂貞卒할새 遺奏하야 以其子繼曮으로 權知鳳翔軍府事하다

4월에 秦나라 [192][193]이 죽을 적에 遺表를 올려 아들[194]을 權知鳳翔軍府事로 삼게하였다.

○ 契丹 〈肖阿古只 寇唐幽蔚州하니라〉唐遣李嗣源하야 鎭成德禦之하다

契丹 - [##肖阿古只]가 唐나라 幽州와 蔚州를 침략하였다. - 唐나라가 [##李嗣源]을 보내어成德에 주둔하여막게하였다.

[乙酉]後唐同光三年

[乙酉]〈後唐同光三年이라 ○ 蜀咸康元年이요 漢白龍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四鎭이라〉

을유(925) - 後唐同光 3년이다. ○ 蜀나라 咸康 元年이고, 漢나라 白龍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唐主性剛好勝하야 不欲權在臣下하야 入洛之後에 信伶宦之讒하고 頗疎忌宿將하니라

[史略 史評]胡氏孔子曰 欲速則不達이요 見小利則大事不成이라하시니 晉王以夷狄賜姓하니 豈親宗室之比리오 朱氏未滅에 偏霸大國하야 周匝三垂(陲)하니 存勖戰克攻取之才 固爲群雄所服이나 而輔世長民之德은 天下未聞也라 於是에 而遽登宸極하니 則欲速見小利라 是以로 其行不達하야 而大事不成也하니라

[##唐主]는 성품이 굳세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권력이 신하에게 있는 것을 싫어해서 洛陽으로 들어온 뒤에는 광대와 환관들의 참언을 믿고 자못 옛 장수들을 소원히하고의심하였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195]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晉王]이 오랑캐로서 李氏姓을 하사받았으니, 어찌 친족의 종실에 비할 수 있겠는가. [##朱氏]가 멸망하기 전에 편벽되이 一方을 점거하고 大國에 霸者가 되어서 세 변방을 포위하여 차지하였으니, [##李存勖]이 싸워서 승리하고 공격하여 점령한 재주는 진실로 群雄에게 복종을 받았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돕고 백성을 기른 德은 천하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에 갑자기 帝位에 올랐으니,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달성하지 못하고 큰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九月에 唐主與宰相으로 議伐蜀하야 以魏王繼岌莊宗長子라 初에 唐主遣宦官李從襲等하야 從繼岌하니 雖爲都統이나 軍中制置 皆出崇韜하야 將吏賓客이 趨走盈庭이로되 而都統牙門이 索然하니 從襲等이 恥之하다 崇韜素疾宦官하야 嘗密謂繼岌曰 大王他日에 (騍)[騬]馬도 亦不可乘이어든 況任宦官이리오 宜盡去之하고 專用(土)[士]人하라하니 由是로 宦官이 皆切齒하다 及崇韜不出迎延嗣하야 〈延〉嗣怒하니 從襲郭公專權하고 其子[[(延)[廷]誨]] 日與驍將狎飮하며 指天畫地니이다 近聞自其父請表己以爲蜀帥라하니 一朝有變이면 吾屬이 不知委骨何地니이다 延嗣歸하야 以語(對)[[[劉]后]]하고 后又訴於主하야 請早救繼岌하다 前此에 唐主聞蜀人請崇韜爲帥하고 已不平이러니 至是에 不能無疑라 遣宦官馬彦珪하야 詣成都한대 彦珪見(對)[劉]后하고 曰 蜀中事勢는 憂在朝夕이어늘 安能禀命二千里乎아하니 后復言之라 唐主曰 傳聞之言은 未知虛實이니라 后退하야 自爲敎與繼岌하야 令殺崇韜하다 繼岌將發에 彦珪至하야 以敎示之하니 繼岌曰 彼無釁端이어늘 安可爲此리오 且主上無勅이어늘 獨以皇后敎로 殺招討使可乎아 從襲等泣하고 相與陳利害하니 繼岌從之하다 (騍)[騬]音(果)[繒]이니 犗馬也라 】으로 充西川四面行營都統하고 崇韜로 充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하야 軍事를 悉以委之하다 戊申에 大軍이 西行入散關하야 倍道而進하니 王承捷【武興節度使라 】이 以鳳, 興, 文, 扶四州印節로 迎降하고 自餘城鎭은 皆望風款附라 遂進兵逼成都한대 蜀王이 輿櫬銜璧王氏曰 古者相見之禮에 皆有所執以爲贄하니 公侯伯子男은 執玉이라 賈逵曰 銜璧者는 蓋以手縛于後하야 不能執璧이라 故로 銜之라 】하고 出降하니 大軍이 入成都하다 崇韜禁軍士侵掠하야 市不改肆하니 自出師로 至克蜀히 凡七十日이러라

9월에 [##唐主]가 재상들과 蜀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고서 [196][197][198]은 [##莊宗]의 長子이다. 처음에 [##唐主]가 환관[##李從襲] 등을 보내어 [199]을 따르게 하였다. [200]이 비록 都統이 되었으나 군중의 制置가 모두 [201]에게서 나와, 將吏(軍官)와 빈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뜰에 가득하였으나 都統의 아문은 쓸쓸하였으므로 [##李從襲] 등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202]가 평소 환관을 미워하여 일찍이 은밀히 [203]에게 말하기를 “大王은 후일에 騬馬(거세한 말)도 타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환관에게 맡기신단 말입니까? 마땅히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선비를 등용해야 합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모두 이를 갈며 그를 미워하였다. [204]가 환관인 [##向延嗣]를 나와서 맞이하지 않자 [##向延嗣]가 노여워하니, [##李從襲]이 말하기를 “[205]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아들 [##廷誨]가 날마다 용맹한 장수들과 친하여 술을 마시고 기고만장하여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로 땅에 긋곤 합니다. 근래에 들으니, 그의 아비가 表文을 올려 스스로 蜀 지방의 장수가 될 것을 청했다 하니,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은 어디에 뼈를 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向延嗣]가 돌아가서 이것을 [##劉后]에게 말하고, [##劉后]가 또 [##唐主]에게 참소하여 [206]을 일찌감치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唐主]는 蜀 지방 사람들이 [207]를 장수로 삼을 것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심이 없지 못하였다. 이에 환관[##馬彦珪]를 보내자, [##馬彦珪]가 成都에 이르러서 [##劉后]를 보고 말하기를 “蜀 지방은 事勢로 볼 때 조석간에 우환이 닥쳐오게 되었는데, 어찌 2천 리 밖의 명령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劉后]가 다시 [##唐主]에게 말하였다. [##唐主]가 말하기를 “전해들은 말은 허실을 알 수 없다.” 하니, [##劉后]가 물러가서 스스로 敎書를 만들어 〈[##馬彦珪]로 하여금〉[208]에게 주어 [209]를 죽이게 하였다. [210]이 장차 출발하려 할 적에 [##馬彦珪]가 이르러 敎文을 보이니, [211]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잘못한 단서가 없는데 어찌 이렇게 한단 말인가? 또 主上의 칙령이 없는데 오직 皇后의 교서로 招討使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李從襲]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함께 利害를 말하니, [212]이 그 말을 따랐다. 騬은 음이 繒이니 거세한 말이다.】
西川四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고[213]를 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로 임명하여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戊申日(6월 18일)에 大軍이 서쪽으로 출동하여散關으로 들어가서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전진하니, [##王承捷]이【[##王承捷]은 武興節度使이다.】鳳州‧興州‧文州‧扶州 네 州의 印信 및 武興節度使의 印信과 旌節을 가지고 大軍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그 나머지 城鎭도 모두 소문만 듣고 歸附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전진하여 成都를 핍박하였는데, [##蜀王]이 관을 수레에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214]가 말하였다. “옛날의 상견례에는 모두 손에 잡고서 禮物로 삼는 것이 있었으니, 公‧侯‧伯‧子‧男은 옥을 잡는다. [215]가 말하기를 ‘구슬을 문다는 것은 손을 뒤로 묶어서 구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입에 문 것이다.’ 하였다.”】 나와서 항복하니, 大軍이 成都로 들어갔다. [216]가 군사들에게 침략과 노략질을 금지하여 시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교역하니, 출병한 뒤로부터 蜀을 점령하기까지 모두 70일이 걸렸다.

○ 十二月에 閩王審知卒하니 子延翰이 自稱威武留後하다

12월에 閩中의 [217]가 죽으니, 아들[218]이 스스로 威武留後라 칭하였다.

○ 時에 成都雖下나 而蜀中盜賊群起하야 布滿山林이라 崇韜恐大軍旣去에 更爲後患하야 命任圜, 張筠하야 分道招討하니 以是로 淹留未還이라 唐主遣宦者向延嗣하야 促之어늘 崇韜待之倨러니 延嗣歸言호되 崇韜專權하니 王이 寄身於虎狼之口니이다 唐主馬彦珪하야 馳詣成都하야 觀崇韜去就할새 皇后自爲敎하야 與繼岌하야 令殺崇韜하고 以孟知祥으로 爲西川節度使하다

이때 成都가 비록 함락되었으나 蜀 지방에는 도둑이 떼 지어 일어나서 山林에 가득하였다. [219]는 대군이 이미 떠나간 다음 다시 후환이 될까 걱정하여 [220]과 [##張筠]에게 명해 길을 나누어 가서 토벌하게하니, 이 때문에 지체하고 돌아오지못하였다. [##唐主]가 宦官인 [##向延嗣]를 [221]에게 보내어 빨리 돌아오라고재촉하였는데, [222]가 [##向延嗣]를 매우 거만하게 대하자, [##向延嗣]가 돌아와 말하기를 “[223]가 권력을 독단하니, 왕은 호랑이의 입에 몸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唐主]가 [##馬彦珪]를 보내어成都로 달려가서[224]의 거취를 살펴보게하였는데, 이때 皇后가 따로 敎書를 만들어 [225]에게 주어서[226]를 죽이게하고[##孟知祥]을 西川節度使로 임명하였다.

契丹主이 丙戌年에 卒于扶餘하니 廟號太祖皇帝라 是年에 改天顯하고 次子德光立하니 是爲太宗하니라〉

[227] - [228]이 병술년(926)에 扶餘에서 죽으니, 廟號가 [229]이다. 이해에 天顯으로 改元하고次子[230]을 세우니, 이가 [231]이다.-

明宗
明宗 在位八年이요 壽六十七

明宗※在位八年이요 壽六十七이라

※ 本北狄種이니 莊宗以爲子라 名嗣源이니 改名이라 在位에 年穀屢豐하고 兵革罕用하니 校於五代에 粗爲小康하니라

[##明宗]은 재위가 8년이고 壽가 67세이다.

[##明宗]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莊宗]이 길러 양자로 삼았다. 이름이 [##嗣源]이니, 뒤에 이름을 [##亶]으로 고쳤다. 재위할 적에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무력을 드물게 사용하니, 五代時代에 비교함에 그런대로 小康이었다.

[丙戌]後唐同光四年

[丙戌]〈後唐同光四年四月은 明宗李嗣源天成元年이라 ○ 吳越寶正元年이라 ○ 是歲에 蜀亡하고 閩建國하니 凡四國, 三鎭이라〉

병술(926) - 後唐同光 4년 4월은 [##明宗][##李嗣源]의 天成 元年이다. ○ 吳越의 寶正 元年이다. ○ 이해에 蜀이 망하고 閩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正月에 唐魏王繼岌이 將發成都할새 馬彦珪至하야 以皇后敎로 示繼岌한대 繼岌이 命召崇韜하야 計事하고 繼岌은 登樓避之하다 崇韜方升階어늘 繼岌從者李環이 撾碎其首【撾는 張瓜切이니 箠也라 】하고 幷殺其子廷誨하다

정월에 唐나라 [232][233]이 장차 成都를 출발하려 할 적에 [##馬彦珪]가 이르러서 皇后의 교서를 [234]에게 보이니, [235]이 명하여 [236]를 불러 일을 계책한다 하고는 [237]은 누대에 올라가 그를 피하였다. [238]가 막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239]의 종자[240]이 채찍으로 그의 머리를 깨부수고【撾는 張瓜切(좌)이니, 채찍이다.】 아울러 그의 아들[##廷誨]를 죽였다.

○ 唐趙在禮【魏博指揮使楊仁晸이 將兵屯貝州하니 時에 天下莫知郭崇韜之罪하고 民間訛言皇后弑帝라하야 人情愈駭라 仁晸部兵皇甫暉作亂하야 劫仁晸曰 主上所以有天下者는 吾魏軍力也어늘 天下已定에 不念舊勞하고 更加猜忌니이다 今聞皇后弑逆하야 京師已亂이라하니 願與公歸면 安知不更爲富貴之資乎잇가 仁晸이 不從한대 殺之하고 又劫小校하야 不從한대 又殺之하다 效節指揮使趙在禮 聞亂而走어늘 追及하야 示以(一)[二]首하니 在禮懼而從之하니라 】于鄴이어늘 命李嗣源【成德節度使니 是爲明宗이라 】하야 討之하다 三月에 嗣源이 至鄴都하야 下令軍中하야 詰旦【平旦也라 】攻城이러니 是夜에 從馬直莊宗選驍勇親軍하야 分置四指揮하고 號從馬直이라】軍士張破敗 作亂하야 帥衆大譟하고 殺都將하고 焚營舍하다 詰旦에 亂兵이 逼中軍이어늘 嗣源이 叱而問之曰 爾曹欲何爲오 對曰 將士從主上十年에 百戰以得天下러니 今主上이 棄恩任威하야 云 克城之後에 當盡坑【鄴都亂이어늘 遣歸德節度使李紹榮하야 招撫러니 紹榮이 至鄴한대 皇甫暉拒戰하니 紹榮이 攻之不克이라 以狀聞한대 唐主怒曰 克城之日에 勿遺噍類하라 紹榮이 合諸道兵再攻하고 又遣嗣源하야 將親軍討之호되 不得通이라 嗣源之爲亂兵所逼也에 紹榮이 陳於城南이어늘 嗣源이 相繼召之하야 欲與共討호되 紹榮이 疑之하야 引避不應이라 及嗣源入鄴都에 遂引兵退하야 保衛州하고 奏嗣源已(判)[叛]하야 與賊合이라하니 嗣源이 遣使上章自理호되 不得通하니라 】魏博之軍이라하니 我輩初無叛心이요 但畏死耳라 今衆議欲城中合勢하야 擊退諸道之軍하오니 請主上帝河南하고 令公帝河北하야 爲軍民之主니이다 嗣源이 泣諭之호되 不從이러라 嗣源所奏 皆爲李紹榮所遏하야 不得通하니 嗣源이 由是疑懼라 石敬瑭【尙明宗永寧公主한대 後爲晉高祖하니라 】曰 夫事는 成於果決而敗於猶豫니이다 康義誠【突騎都指揮使라 】曰 主上無道하야 軍民怨怒하니 公이 從衆則生하고 守節則死니이다 嗣源이 乃令安重誨【中門使也니 後爲樞密使하니라 】로 移檄會兵하니 軍勢大盛이러라 李紹榮이 請唐主幸關東하야 招撫之한대 唐主從之하다 唐主至萬勝鎭하야 聞嗣源已據大梁하고 諸軍離叛하고 神色沮喪하야 登高歎曰 吾不濟【濟는 成也라 】矣로다 卽命旋師하야 歸入洛城하다 四月에 從馬直指揮使郭從謙【伶人이라 】이 作亂하니 近臣宿將이 皆釋甲潛遁이라 俄而요 唐主爲流矢所中하야 須臾遂殂하니라

[史略 史評]胡氏莊宗初立에 決勝夾寨하야 解潞州之圍하고 歸而治國訓兵에 事各有理하니 使朱溫未死면 固必爲所擒矣리라 旣違張承業忠謀하고 亟稱尊號하니 則擧措之失이 已稍形見이요 逮滅梁之後하야는 遂無一善可稱하야 與向者猶二人然하니 是何也오 才器有限也일새라 若曰天數면 則裂膚汗血하고 沐雨櫛風하야 凡十五年而後得이어늘 好遊畋하고 幸婦女하고 寵伶人하고 信宦官하야 不三年而滅亡이라 其心이 昔明而今暗하고 先戒而後肆하니 豈亦天邪아 故로 莊宗之命哲, 命吉凶, 命歷年은 皆所自貽니 不可歸之天數也니라

唐나라 [##趙在禮]가 鄴都에서 배반하자,【魏博指揮使[##楊仁晸]이 군대를 거느리고 貝州에 주둔하니, 당시에 천하 사람들은 [241]의 죄를 알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황후가 황제를 시해했다고 와전되어 人情이 더욱 놀랐다. [##楊仁晸]의 부하 병사인 [##皇甫暉]가 난을 일으켜 [##楊仁晸]을 위협하기를 “主上께서 천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 魏博軍의 힘이었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된 뒤에 옛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의심하십니다. 지금 들으니 황후가 弑逆을 저질러서 京師가 이미 혼란하다고 하니, 바라건대 公과 함께 돌아간다면 어찌 다시 부귀의 밑천이 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楊仁晸]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皇甫暉]가 그를 죽였고, 또 [##小校]를 위협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또다시 [##小校]를 죽였다. 效節指揮使[##趙在禮]가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자, [##皇甫暉]가 쫓아가서 따라잡아 두 사람의 머리를 보이니, [##趙在禮]가 두려워하여 따랐다.】[##李嗣源]에게 명하여【[##李嗣源]은 成德節度使이니, 이가 [##明宗]이다.】토벌하게하였다. 3월에 [##李嗣源]이 鄴都에 이르러 軍中에 명령을 내려서 다음날 아침【詰旦은 平旦(동이 틀 때)이다.】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날 밤에 [##從馬直]의【[##莊宗]이 날래고 용감한 親軍을 선발하여 네 指揮使를 나누어 설치하고 從馬直이라 호칭하였다.】 軍士인 [##張破敗]가 난을 일으켜 병사들을 거느리고 크게 함성을 지르며 都將을 죽이고 營舍(막사)를 불태웠다.

다음날 아침 난을 일으킨 군사들이 中軍을 핍박하자, [##李嗣源]이 꾸짖고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병들이 主上을 따른 지가 이미 십 년인데 몸소 수많은 전투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 은혜를 버리고 위엄에 맡겨서 성을 점령한 뒤에는 마땅히 魏博鎭의 군대를 다 묻어 죽인다고 하니,【鄴都가 혼란하자 歸德節度使[242]을 보내어 招撫하게 하였는데, [243]이 鄴都에 이르자 [##皇甫暉]가 항거하여 싸우니, [244]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狀啓로 이 사실을 아뢰자, [##唐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성을 점령하는 날에 씨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하였다. [245]이 諸道의 군대를 규합하여 다시 공격하였으며 또다시 [##李嗣源]을 보내어 親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李嗣源]이 반란군에게 핍박받을 때에 [246]이 성의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李嗣源]이 계속하여 불러서 함께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247]이 의심하여 몸을 피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李嗣源]이 鄴都로 들어가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여 衛州를 지키면서 ‘[##李嗣源]이 이미 배반하여 적과 연합했다.’고 아뢰니, [##李嗣源]이 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애당초 배반할 마음이 없고 다만 죽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衆論은 城中과 합세하여 諸道의 군대를 격퇴하고자 하오니, 청컨대 주상께서는 河南의 황제가 되시고 [##令公]께서는 河北의 황제가 되어서 군사와 백성들의 군주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李嗣源]이 눈물을 흘리면서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李嗣源]이 [##唐主]에게 아뢰는 것을 [248]에게 모두 저지당하여 통하지 못하니, [##李嗣源]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石敬瑭]이【[##石敬瑭]은 [##明宗]의 딸 [249]에게 장가들었는데, 뒤에 晉나라 [##高祖]가 되었다.】 말하기를 “일은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망설이는 데서 실패합니다.” 하였다. [250][251]은 突騎都指揮使이다.】 말하기를 “주상이 무도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니, 公이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 살고 신하의 절개를 지키면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李嗣源]이 마침내 [252]로 하여금[253]는 中門使이니, 뒤에 樞密使가 되었다.】 檄文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하니, 軍勢가 크게 성하였다.

[254]이 [##唐主]에게 청하여 關東 지방에 가서招撫할 것을 청하자, [##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唐主]가 萬勝鎭에 이르러[##李嗣源]이 이미 大梁을 점거하고 諸軍들이 이반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神色이 沮喪되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한탄하기를 “내가 성공하지 못하겠다.” 하고는【濟는 이룸이다.】 즉시 회군할 것을 명하여 돌아와 洛陽城으로 들어갔다.

4월에 從馬直指揮使[255][256]은 악공이다.】 난을 일으키니, 가까이 모시던 신하와 옛 장수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몰래 도망하였다. 얼마 후에 [##唐主]가 流矢를 맞아 잠깐 만에 마침내 죽었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莊宗]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夾寨에서 승리를 결정지어 潞州의 포위를 풀었고, 돌아와서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들을 훈련함에 일마다 각각 조리가 있었으니, 가령 [##朱溫]이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莊宗]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 [##張承業]의 충성스런 계책을 어기고 황제의 尊號를 급히 칭하니, 거조의 잘못이 이미 차츰 드러났다. 그리고 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마침내 칭찬할 만한 善行이 한 가지도 없어서 예전과 다른 것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재주와 器局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天運이라고 한다면 살이 터지고 피땀을 흘리며 객지에서 비바람에 시달려서 모두 15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뒤에야 얻었는데,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고 부녀자들을 사랑하며 악공을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해서 3년이 못 되어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옛날에는 밝다가 지금은 어둡고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뒤에는 방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또한 天運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이 [##莊宗]에게 어짊을 명할 것인지, 길흉을 명할 것인지, 오랜 역년을 명할 것인지는 모두 스스로 부르는 것이니, 이를 天運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 是日에 李嗣源이 至罌子谷하야 聞之慟哭하고 謂諸將曰 主上이 素得士心이나 正爲群小蔽惑하야 致此하니 今吾將安歸乎아 己丑에 嗣源이 入洛陽하니 百官이 三上牋(箋)하야 請嗣源監國한대 嗣源이 乃許之하고 於柩前에 卽皇帝位하다

이날 [##李嗣源]이 罌子谷에 이르러[##唐主]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諸將들에게 이르기를 “主上이 평소 군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나 다만 여러 소인배들에게 가리워지고 미혹되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己丑日(4월 3일)에 [##李嗣源]이 洛陽으로 들어가니, 백관들이 세 번 牋文을 올려 [##李嗣源]에게 監國할 것을 청하였다. [##李嗣源]이 마침내 허락하고 靈柩 앞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唐主目不知書하야 四方奏事를 皆令安重誨讀之하니 重誨亦不能盡通이라 乃奏호되 願倣前朝侍講侍讀【盛唐之制라 】과 近代直崇政樞密院【直崇政院은 梁制요 直樞密院은 莊宗制也라 】하야 選文學之臣하야 與之共事하야 以備應對니이다 乃置端明殿學士할새 以翰林學士馮道, 趙鳳으로 爲之하다

[##唐主(李嗣源)]가 눈으로 글을 읽을 줄 몰라 사방에서 아뢰는 일을 모두 [257]에게 읽게 하니, [258] 또한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아뢰기를 “전대의 侍講과 侍讀,【侍講과 侍讀은 盛唐 때의 제도이다.】 근대의 直崇政院과 直樞密院의 고사를 따라【直崇政院은 梁나라의 제도이고, 直樞密院은 [##莊宗]의 제도이다.】 文學하는 신하를 뽑아 그와 함께 일을 논하여 황제의 下問의 대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端明殿學士를 둘 적에 翰林學士[##馮道]와 [##趙鳳]을 端明殿學士로 임명하였다.

○ 昭武節度使王延翰審知子也라 】이 自稱大閩國王하다

昭武節度使[259][260][261]의 아들이다.】 스스로 [262]이라 칭하였다.

[丁亥]後唐天成二年

[丁亥]〈後唐天成二年이라 ○ 吳乾貞元年이라 ○ 是歲에 後唐, 漢, 吳, 閩凡四國이요 吳越, 荊南, 湖南凡三鎭이라〉

정해(927) - 後唐天成 2년이다. ○ 吳나라 乾貞 元年이다. ○ 이해에 後唐‧漢‧吳‧閩 모두 네 나라이고, 吳越‧荊南‧湖南 모두 세 鎭이다.-

春正月에 馮道, 崔協이 竝爲中書侍郞同平章事하다

봄 정월에 [263][264]이 아울러 中書侍郞同平章事가 되었다.

○ 秋八月에 楚王馬殷也라 初爲孫儒裨將이라가 唐明宗時에 拜潭州刺史하고 梁太祖가 封爲楚王하니라 】이 始建國하다

가을 8월에 [265][266][267][268][269]이다. 처음에 [270]의 裨將이 되었다가 唐나라 [271] 때에 潭州刺史에 제수되었고, 梁나라 [272][273]에 봉하였다.】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 十一月에 吳王楊行密第四子楊溥라 】이 卽皇帝位하다 吳丞相徐溫이 卒하니 吳主以其子知誥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11월에 [274][275][276]의 넷째 아들인 [277]이다.】황제에 즉위하였다. 吳나라 丞相[278]이 죽으니, [279]가 그의 아들[280]를 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 契丹 〈太宗德光立하야 仍稱天顯二年하다〉

契丹 - [281][282]이 즉위하여 그대로 天顯 2년이라 칭하였다. -

[戊子]後唐天成三年

[戊子]〈後唐天成三年이라 ○ 漢大有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무자(928) - 後唐 天成 3년이다. ○ 漢나라 大有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十二月에 荊南節度使高季興이 卒하니 命其子從誨하야 權知軍府事하다

11월에 荊南節度使[283]이 죽으니, 그의 아들[284]를 명하여 權知軍府事로 임명하였다.

○ 契丹 〈天顯三年이라〉

契丹 - 天顯 3년이다. -

[己丑]唐天成四年

[己丑]〈唐天成四年이라 ○ 吳大和元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라〉

기축(929) - 唐나라 天成 4년이다. ○ 吳나라 大和 元年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九月에 唐(王)[主]與馮道로 從容語及年穀屢登하고 四方無事한대 曰 臣常記昔在先皇幕府【謂爲河東掌書記時也라 】하야 奉使中山하야 歷井陘之險할새 臣이 憂馬蹶하야 執轡甚謹하야 幸而無失이러니 逮至平路하야 放轡自逸이라가 俄至顚隕하니 凡爲天下者도 亦猶是也니이다 唐主深以爲然하다 又問호되 今歲雖豐이나 百姓贍足否아 曰 農家歲凶則死於流殍하고 歲豐則傷於穀賤하니 豐凶皆病者는 惟農家爲然이니이다 臣記進士聶夷中詩云 二月賣新絲하고 五月糶新穀하니 醫得眼前瘡이나 剜却心頭肉【剜은 烏官切이니 削也라 謂絲穀未熟에 農家艱食일새 先稱貸以自給하고 至於賣絲糶穀하야 僅足以償債耳라 註에 剜은 剔也라하니라 】이라하니 語雖鄙俚나 曲盡田家之情狀이라 農於四人【謂士農工商이라 】之中에 最爲勤苦하니 人主不可不知也니이다

9월에 [285][286]와 함께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사방이 무사함을 조용히 언급하자, [287]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기억하건대, 옛날 [288]의 幕府에 있으면서【先皇帝의 幕府에 있었다는 것은 河東府 掌書記가 되었을 때를 이른다.】中山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느라 井陘의 험한 길을 지날 적에 신이 말이 넘어질까 염려해서 고삐를 꽉 잡고 매우 조심하여 다행히 실수가 없었는데, 평탄한 길에 이르자 고삐를 놓고 스스로 안일하다가 잠시 후 넘어지고 떨어짐에 이르렀으니,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289]는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다.

[290]가 또다시 [291]에게 묻기를 “금년에 비록 풍년이 들었으나 백성들이 풍족한가?” 하니, [292]가 말하기를 “농가는 흉년이 들면 유리하여 굶어죽고 풍년이 들면 곡식값이 싸서 손해를 보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폐해를 입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렇습니다. 신이 기억하건대 進士[293]의 詩에 이르기를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미리 판다오. 당장 눈앞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나 심장의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구나.【剜은 烏官切(완)이니, 도려내는 것이다. 生絲가 나오지 않고 곡식이 성숙하기 전에 농가에서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빚을 내어 스스로 공급하고, 생사를 팔고 곡식을 팔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빚을 갚을 뿐임을 이른다. 註에 “剜은 도려내는 것이다.” 하였다.】[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비록 비루하나 농가의 실정을 곡진히 다하였습니다. 농부는 四民【四人은 士, 農, 工, 商을 이른다.】 중에 가장 고생하니, 人主가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契丹 〈天顯四年이라〉

契丹 - 天顯 4년이다. -

[庚寅]唐長興元年

[庚寅]〈唐長興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경인(930) - 唐나라 長興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唐以前忠武節度使張延朗으로 行工部尙書하고 充三司【鹽鐵戶部度支라 】使하니 三司使之名이 自此始하니라

唐나라가 前 忠武節度使[294]을 行工部尙書로 임명하고三司使를 맡게 하니,【三司는 鹽鐵, 戶部, 度支이다.】三司使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十一月에 楚王이 卒하고 子希聲이 襲位하야 稱遺命하야 去建國之制하고 復藩鎭之舊어늘 唐主希聲爲武安, 靜江節度使하다

11월에 [295][296]이 죽고아들[297]이 왕위를 세습하여遺命이라고 칭하면서 建國하는 제도를 버리고 藩鎭의 옛 제도를 회복하자, [298][299]을 武安‧靜江節度使로 삼았다.

○ 契丹 〈天顯五年이라〉

契丹 - 天顯 5년이다. -

[壬辰]唐長興三年

[壬辰]〈唐長興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임진(932) - 唐나라 長興 3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三月에 吳越武肅王錢鏐卒하니 年八十一이라 中子傳瓘【後改名元瓘이라 】이 立하다

3월에 吳越의 [300][301]가 죽으니, 나이가 81세였다. 둘째 아들[302]이 즉위하였다.[303]은 뒤에 [304]으로 개명하였다.】

○ 秋七月에 唐武安, 靜江節度使馬希聲이 卒하니 六軍使袁詮, 潘約等이 迎希範希聲之弟라 】於朗州하야 而立之하다

가을7월에 唐나라 武安‧靜江節度使[305]이 죽으니, 六軍使[306]과 [##潘約] 등이 [307][308][309]의 아우이다.】朗州에서 맞이하여세웠다.

[癸巳]唐長興四年

[癸巳]〈唐長興四年이라 ○ 閩主王延鈞龍啓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계사(933) - 唐나라 長興 4년이다. ○ [310][311]龍啓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正月에 閩王延鈞延翰之弟요 審知次子니 改名이라 】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閩이라하다

봄 정월에 [312][313][314][315]의 아우이고 [316]의 차자이니, [317]으로 개명하였다.】 황제에 즉위하여 國號를 大閩이라 하였다.

○ 三月에 唐以孟知祥으로 爲東西川節度使蜀王하다

3월에 唐나라가 [318]을 東西川節度使[319]으로 임명하였다.

○ 十一月에 唐主殂하다 唐主性不猜忌하야 與物無競하고 登極之年에 已踰六十이라 每夕에 於宮中焚香祝天하야 曰 某는 胡人이라 因亂하야 爲衆所推하니 願天早生聖人范仲淹曰 我太祖應期而生하니라 】하야 爲生民主하소서 在位八年에 年穀屢豐하고 兵革罕用하니 校於五代에 粗爲小(唐)[康]하니라

11월에 [320]가 죽었다. [321]는 성품이 시기하지 아니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고, 등극할 때의 나이가 이미 60세를 넘었다. 매일 밤마다 궁중에서 향을 사르고 하늘에 축원하기를 “저는 오랑캐 사람입니다. 난리로 인하여 대중들에게 임금으로 추대되었으니, 바라건대 하늘은 빨리 성인을 탄생시켜[322]이 말하기를 “우리 [323]께서 天命에 응하여 태어나셨다.” 하였다.】 生民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재위한 8년 동안 年事가 여러 번 풍년 들고 兵革을 드물게 사용하니, 五代時代에 비교함에 그런대로 小康이었다.

○ 契丹 〈天顯八年이라〉

[新增]胡氏明宗은 美善頗多하고 過擧亦不至甚하니 求於漢唐之間하면 蓋亦賢主也라 其尤足稱者는 內無聲色하고 外無遊畋하며 不任宦官하고 廢內藏庫하며 賞廉吏하고 治贓蠹하니 若輔相得賢이면 則其過擧 當又損矣리라 其焚香祝天之言은 發於誠心하니 天旣厭亂하야 遂生聖人이라 用是觀之하면 天人交感之理를 不可誣矣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明宗이 初無黃屋之心이러니 遭時之亂하야 邂逅得國이라 蒞政之初에 斬孔謙而去苛法하고 誅宦寺而委宰相하며 命諸道以均民田하고 廢內藏庫以崇儉約하며 誅贓吏以示蠹民之戒하고 褒孫岳以化淸廉之風하며 遠女色而減後宮之員하고 優民力而免逋負之租하며 絶音樂之好而黜伶官하고 薄口體之奉而省庖廚하며 戒田獵之爲民害하야 而縱鷹犬하고 惡冗官之費하야 而罷有名無益之吏하며 戒橫斂, 斥私獻하야 而抑牧守進奉하며 有年之書 兩見于策이요 且目不知書로되 而所行이 暗合古訓이라 有如是者로되 惜其以戲殺從璨而無父子之恩하고 以誣殺安重誨而無君臣之義하며 年幾七十에 諱言儲嗣라가 卒致從榮稱兵하야 驚亂宮闈하야 父子祖孫이 一日而絶하야 身肉未寒에 家國俱破하니 雖曰輔相非人이나 亦不學之所致也니라

契丹 - 天顯 8년이다. -

[新增][324]가 말하였다.

[325]은 아름다운 善行이 자못 많고 지나친 행동 또한 심함에 이르지 않았으니, 漢나라와 唐나라 사이에서 찾아보면 또한 어진 군주이다. 그 중에 더욱 칭찬할 만한 것은 안으로 음악과 여색에 빠짐이 없고 밖으로 놀이와 사냥에 빠짐이 없었으며, 환관에게 맡기지 않고 內藏庫를 폐지하였으며, 청렴한 관리에게 상 주고 부정하게 뇌물을 받아 백성을 좀먹는 자들을 다스렸으니, 만약 輔相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지나친 행동이 마땅히 또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을 사르며 하늘에 축원한 말은 성심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이미 혼란함을 싫어해서 마침내 聖人을 탄생시켰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동하는 이치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326]은 애당초 황제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혼란한 때를 만나서 우연히 나라를 얻었다. 정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327]의 목을 베어 가혹한 법을 제거하고 환관을 주벌하여 재상에게 맡겼으며, 여러 道에 명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균등하게 하고 內藏庫를 폐지하여 검약을 숭상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을 주벌하여 백성을 좀먹는 것에 경계함을 보이고 [##孫岳]에게 포상하여 청렴한 기풍을 강화하였으며, 女色을 멀리하여 後宮의 인원수를 줄이고 백성들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여 체납된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음악의 嗜好를 끊어 伶官(樂工)을 내치고 자신의 입과 몸을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여 庖廚를 줄였으며, 田獵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을 경계하여 매와 사냥개를 풀어주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이 國祿을 허비하는 것을 미워하여 명칭만 있고 유익함이 없는 관리를 혁파하였으며, 멋대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경계하고 사사로이 진상하는 것을 물리쳐 牧守(지방관)들이 進奉하는 것을 억제하였으며,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이 두 번이나 史策에 보이고, 또 눈으로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행동하는 바는 은연중에 옛 교훈과 부합하였다.

이와 같은 미덕이 있었는데도 애석하게 장난으로 [328]을 죽여 부자간의 은혜가 없었고, 誣告 때문에 [329]를 죽여 군신간의 의리가 없었으며, 나이가 거의 70세가 되어서도 儲嗣(後嗣)에 대해 말하기를 싫어하다가 끝내 [330]이 군대를 일으켜 宮闈(궁중의 내전)를 어지럽혀 父子間과 祖孫間이 하루아침에 끊겨 육신이 차가워지기도 전에 집안과 나라가 모두 망하였으니, 비록 輔相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하나 또한 배우지 못한 소치이다.”

○ 十二月에 宋王從厚明帝第五子라 】卽皇帝位하니 是爲閔帝라 改元應順하다〈甲午四月에 潞王卽位하야 改元淸泰하다〉

12월에 [331][332][333][334]의 다섯째 아들이다.】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335]이다. 應順으로 改元하였다.- 甲午年(934)4月에 [336]이 즉위하여淸泰로 改元하였다.-

潞王
潞王 在位二年

潞王※在位二年이라

※ 名은 從珂明帝養子요 本姓王氏라 廢閔帝而自立이러니 石敬瑭反에 遂自焚하니 史曰廢帝

[337]은 재위가 2년이다.

[338]은 이름이 [339]이니, [340]의 養子이고 本姓은 [341]이다. [342]를 폐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343]이 배반하자 마침내 스스로 불타죽으니, 역사책에 [344]라고 하였다.

[甲午]唐閔帝從厚應順元年

[甲午]〈唐閔帝從厚應順元年이요 四月以後는 唐主從珂淸泰元年이라 ○ 蜀主孟知祥明德元年이라 ○ 是歲에 蜀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갑오(934) - 唐나라 [345][346]의 應順 元年이고, 4월 이후는 [347][348]의 淸泰 元年이다. ○ [349][350]의 明德 元年이다. ○ 이해에 蜀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唐鳳翔節度使兼侍中潞王從珂石敬瑭으로 少從明帝征伐하야 有功名하야 得衆心이라 朱弘昭, 朱弘昭는 樞密使同平章事요 馮贇은 音彬이니 同中書門下二品이라 】位望이 素出二人下遠甚이러니 一旦에 執朝政하니 皆忌之【忌從珂敬唐이라 】潞王이 由是疑懼하니라

唐나라 鳳翔節度使兼侍中인 [351][352][353]과 함께 젊어서부터 [354]를 따라 정벌해서 공명이 있어 민심을 얻었다. [355][356][357]는 樞密使 同平章事이고, [358]의 贇은 음이 彬이니, 同中書門下 2품이다.】 지위와 인망이 평소 두 사람보다 크게 뒤졌는데, 하루아침에 조정의 정권을 잡자 두 사람을 모두 시기하였다.【모두 시기하였다는 것은 [359][360]을 시기한 것이다.】[361]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 閏月에 蜀將吏勸蜀王知祥하야 稱帝어늘 知祥이 卽皇帝位于成都하다

閏月에 蜀나라 장수와 관리들이 [362][363]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하자, [364]이 成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 唐潞王이 旣與朝廷猜阻【猜忌阻隔也라 】라 乃移檄隣道하야 言 朱弘昭等이 乘先帝疾亟하야 殺長【長은 謂秦王從榮也라 明宗이 疾從榮이 擁兵入하야 宮門皆閉한대 乃走歸河南하니 安從益이 殺之하다 從榮死六日에 而帝崩하니라 】立少하고 專制朝權하니 今從將入朝하야 以淸君側之惡호리라 三月에 潞王이 建大將旗鼓하고 整衆而東하니 唐主潞王至陜하고 憂駭하야 不知所爲라 是夕에 唐主以五十騎로 出玄武門하야 至衛州하야 依刺史王弘贄하다

唐나라 [365]이 이미 조정과 서로 의심하고소원하였다.【猜阻는 시기하고 격조한 것이다.】 이에 이웃 道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366] 등이 先帝의 병환이 위독한 틈을 타서 長子([367])를 죽이고【長子는 [368][369]을 이른다. [370][371]이 병력을 보유하고 들어오는 것을 미워하여 궁궐문을 모두 닫자, [372]이 마침내 달아나 河南으로 돌아가니, [##安從益]이 그를 죽였다. [373]이 죽은 지 6일 만에 황제(明宗)가 승하하였다.】 少子([374])를 세우고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지금 이 [375]가 장차 조정에 들어가 군주 곁에 있는 악인들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라고 하였다.

3월에 [376]이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군대를 정돈하여 동쪽으로 진출하니, [377][378]이 陜州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근심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날 밤 [379]가 50명의 騎兵을 데리고 玄武門을 나가衛州에 이르러서刺史[380]에게 의지하였다.

○ 唐潞王이 至蔣橋하니 馮道等이 皆上牋勸進이어늘 太后下令하야 廢少帝鄂王하고 令潞王으로 卽位於柩前하다

唐나라 [381]이 蔣橋에 이르니, [382] 등이 모두 牋文을 올려 황제의 지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383]가 명령을 내려 [384]를 폐하여[385]으로 삼고[386]으로 하여금 靈柩 앞에서 즉위하게하였다.

唐主欲更命相하야 問所親信以朝臣聞望宜爲相者한대 皆以盧文紀, 崔居儉對라 唐主不能決하야 乃寘(置)其名於琉璃甁하고 夜焚香祝天하고 且以箸挾之하야 首得文紀하야 遂以爲相하니라

[387]가 다시 재상을 임명하고자 하여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에게 조정의 신하 중에 명성과 인망이 정승이 될 만한 자를 물으니, 모두 [388][389]이라고 대답하였다. [390]가 결정하지 못하여 마침내 종이쪽지에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유리병에 넣은 다음 밤중에 향을 사르며 하늘에 축원하고 또 젓가락으로 병 속의 종이쪽지를 집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391]의 이름을 쓴 쪽지를 집어 마침내 그를 정승으로 삼았다.

唐主石敬瑭이 皆以勇力善鬪로 事明宗하야 爲左右나 然心競하야 素不相悅이러니 帝卽位에 敬瑭이 不得已入朝어늘 乃復以爲河東節度使하다

[392][393]이 모두 용력이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394]을 섬겨 좌우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음속으로 경쟁하여 평소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즉위하자[395]이 부득이 들어와 조회하니, 이에 다시 河東節度使로 삼았다.

蜀主孟知祥이라 】殂하니 太子仁贊이 卽皇帝位하야 更名하다

[396]【[##蜀主]는 [397]이다.】죽으니, 太子[398]이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399]으로 고쳤다.

○ 契丹主 德光天顯九年

契丹主德光天顯九年이라〉

[400] - [401]의 天顯 9년이다. -

[乙未]唐淸泰二年

[乙未]〈唐淸泰二年이라 ○ 吳天祚元年이요 閩永和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을미(935) - 唐나라 淸泰 2년이다. ○ 吳나라 天祚 元年이고, 閩나라 永和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六月에 唐河東節度使石敬瑭이 旣還鎭에 陰爲自全之計러라

6월에 唐나라 河東節度使[402]이 鎭으로 돌아간 뒤에 은밀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웠다.

○ 吳徐知誥 進封齊王하다

吳나라 [403]를 승진시켜[404]으로 봉하였다.

歷年圖曰 武皇李克用이라 】이 以沙陀微種으로 奄有河東하고 黃巢之亂에 有大功於唐室이러니 上源之變上源은 驛名이라 】에 訟於朝廷이나 而不能自直克用이 還晉陽하야 治兵하고 上表自陳하야 乞討全忠한대 僖宗이 方務姑息하야 優詔和解之하니라 】하야 遂與朱氏로 治兵相攻하야 糾紛不解하야 流血成川하고 僵尸蔽野라 至其晩節하야는 鋒銳益衰하야 窮居一隅하야 僅能自保라 莊宗存勖이라 】은 以弱齡襲位하니 麾下諸將이 皆白首行陣하야 與武皇으로 竝轡齊驅之人이어늘 乃能以恩信結其心하고 英果折其氣하야 莫不竭力致命하야 頤指如意하야 遂服眞定하고 從山東하며 取漁陽, 兼魏博하며 策馬度(渡)河에 而朱氏失國이라 當是之時하야 天下莫不震動하니 諸侯陸梁【猶强梁也니 逃走貌이요 又跳梁也라 】踞(倨)肆者 皆駭愕相顧하야 莫敢保其土地라 王衍이 恃其險遠하고 辭禮踞(倨)慢이어늘 偏師西指에 而劍閣不守하니 觀其行兵하면 可謂能矣라 惜其志小氣近하야 驕心易生하야 矜功自喜하고 御衆無法하며 便嬖是用하야 纔及三年에 隕身亡族하니 悲夫라 明宗은 無取國之心이러니 而爲衆所附하고 資性寬厚하야 克終天祿이라 淸泰는 於危難之中에 坐受神器之重하야 得之非難이요 失之亦易라 負扆【扆는 於豈切이니 狀如屛風하니 以絳爲質하고 高八尺이며 繡爲斧文이라 天子負扆하야 南面而立이라 】未安하야 家爲煨燼하야 十年之中에 易姓者四莊宗은 本西突厥種朱邪氏니 附唐屬籍하야 賜姓李氏하고 明宗은 本北狄種이니 莊宗養子라 閔帝明宗子也요 [[(路)[潞]王]]은 明宗養子니 本姓王氏라 共三姓이어늘 而云易姓者四는 未詳이라 通要云 國姓三變이라하니라 】니 禍福相尋이 何其速哉아

[史略 史評]史斷曰 潞王明宗養子로 僥倖奪人之國하니 蓋至是而國姓三變焉이라 方其入洛에 許軍士以人賞百緡이러니 及其至洛에 府庫枵然하야 金帛不盈三萬이어늘 顧乃掊剝聚斂하야 括民以給之하니 民心愁嗟하야 思亂者衆이라 其始也에 戕民以買國하고 其終也에 民散而國亦隨之하니 宜其不能久有其國이어든 而況奪敬瑭之節度하고 殺敬瑭之子弟하야 以自促其亡哉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405][406][407]이다.】 미천한 沙陀族으로서 곧바로 河東 지방을 소유하고 [408]의 난에 唐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上源驛의 변고가【上源은 驛의 이름이다.】 일어나자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바로잡아주지 못하였다.[409]이 晉陽으로 돌아가 군대를 다스리고 表文을 올려 스스로 아뢰어서 [410]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僖宗]이 우선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힘써서 우대하는 조칙을 내려 화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411]와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하여 紛糾가 풀리지 않아 흘린 피가 냇물을 이루고 쓰러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예봉이 더욱 꺾여 곤궁하게 한 귀퉁이에 거주하면서 겨우 스스로 보존하였다.

[412][413][414]이다.】 어린 나이로 지위를 세습하니,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行伍(군대) 사이에서 늙어 [415]과 함께 고삐를 잡고 나란히 말을 몬 사람들이었는데, 마침내 은혜와 신의로써 그 마음을 결속시키고 英明함과 과단함으로써 그 기운을 꺾으니, 힘을 다하고 명령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턱과 손가락으로 마음대로 지시하여 마침내 眞定을 복종시키고 山東을 따르게 하였으며 漁陽을 점령하고 魏博을 겸병하였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黃河를 건너가자 [416]가 나라를 잃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에 놀라서 동요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발호하여【陸梁은 强梁(강포함)과 같으니, 달아나는 모습이고 또 발호하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제후들이 모두 놀라 서로 돌아보며 감히 자기의 토지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西蜀의 [417]이 지형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는 말과 禮가 거만하자, 일부의 군대[偏師]를 가지고 서쪽을 향함에 劍閣關이 지켜지지 못하였으니, 그 군대를 운용한 것을 살펴보면 능하다고 이를 만하다. 애석하게도 뜻이 작고 기개가 천근하여 교만한 마음이 쉽게 생겨나서 공을 과시하여 스스로 자만하였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법도가 없었고 총애하는 자들을 등용해서 즉위한 지 겨우 3년에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슬프다.

[418]은 나라를 취할 마음이 없었는데 무리들에게 추종을 받았고 타고난 천성이 寬厚하여 하늘이 준 녹을 잘 마쳤다.

淸泰([419][420])는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중요한 神器(제왕의 자리)를 받아서 얻은 것이 어렵지 않았고 잃은 것이 또한 쉬웠다. 병풍을 등지고 帝王의 자리에 있는 것이【扆는 於豈切(의)이니 모양이 병풍과 같으니, 붉은 비단으로 바탕을 삼고 높이가 8척이며 도끼 문양을 수놓았다. 천자는 扆를 등지고서 남면하여 선다.】 편안하지 못하여 집안이 잿더미가 되어서 10년 동안에 國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었으니,[421]은 본래 西突厥의 종족인 朱邪氏이니 唐나라의 屬籍에 붙여 李氏姓을 하사받았고, [422]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423]의 양자이다. [424][425]의 아들이고 [426][427]의 양자이니, 본래 姓이 [428]이다. 모두 세 姓인데, 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라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通鑑要解》에 “國姓이 모두 세 번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禍와 福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신속하였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429][430]의 養子로서 요행히 남의 나라를 빼앗으니, 後唐이 이때에 이르러 國姓이 세 번 바뀌었다. [431]이 洛陽에 들어올 적에 군사들에게 사람마다 百緡의 돈을 賞으로 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洛陽에 이르자 府庫가 텅 비어 황금과 비단이 채 3만이 못 되었으므로 마침내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군사들에게 賞을 주니, 민심이 근심하고 서글퍼하여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백성을 해쳐서 나라를 사고 종말에는 백성이 흩어져서 나라가 또한 뒤따라 망하였으니, 오랫동안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 더구나 [432]의 節度使 지위를 빼앗고 [433]의 子弟를 죽여서 스스로 그 멸망을 재촉함에 있어서랴.”

右後唐은 四主에 共一十三年이라

이상 後唐은 네 군주에 모두 13년이다.

後晉紀

高祖
高祖 在位七年이요 壽五十一이라

後晉紀

高祖※在位七年이요 壽五十一이라

※ 名은 敬瑭이요 姓은 石氏니 其先은 本出西夷種이라 勇力善戰하니 唐明宗이 愛之하야 妻以永寧公主라 淸泰元年에 鎭太原이라가 徙鎭天平하야 不受命하고 因求援於契丹이러니 尋卽帝位하니라

[434]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51세이다.

[435]는 이름이 [436]이고 성이 [437]이니, 그 선조는 본래 西夷의 종족에서 나왔다. 용력이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니, 唐나라 [438][439]을 총애하여 [440]를 시집보냈다. 淸泰 元年에 太原節度使로 있다가 天平節度使로 옮기자 명령을 받지 않고 인하여 契丹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얼마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附丙申 契丹主太宗德光天顯十一年

附丙申 〈契丹主太宗德光天顯十一年이라〉

병신년 - [441][442][443]의 天顯 11년 - 을 붙였다.

[丙申]唐淸泰三年

[丙申]〈唐淸泰三年十一月以後는 晉高祖石敬瑭天福元年이라 ○ 閔主通文元年이라 ○ 是歲에 唐亡晉興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병신(936) - 唐나라 淸泰 3년 11월 이후는 晉나라 [444][445]의 天福 元年이다. ○ [446][447]의 通文 元年이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고晉나라가 일어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正月에 唐主以千春節置酒러니 晉國長公主上壽畢에 辭歸晉陽이어늘 唐主醉하야 曰 何不且留하고 遽歸오 欲與石郞反邪아 石敬瑭이 聞之하고 益懼러라

봄 정월에 [448]가 千春節에 酒宴을 베풀었는데, [449]가 술잔을 올려 獻壽를 마친 다음 하직하고 晉陽으로 돌아가자, [450]가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더 머물지 않고 빨리 돌아가는가? [451]과 함께 배반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452]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 初에 唐主欲使敬瑭移鎭鄆州한대 李崧, 呂琦李崧은 翰林學士요 呂琦는 知制誥라 】等이 皆力諫하야 以爲不可어늘 薛文遇【知制誥라 】曰 河東은 移亦反이요 不移亦反하야 在旦暮耳니 不若先事圖之니이다 唐主大喜曰 卿言이 殊豁吾意하니 成敗에 吾決行之호리라 卽爲除目하야 付學士院하야 使草制하야 以敬瑭으로 爲天平節度使하니 制出에 兩班【文武官을 爲東班西班하니라 】이 相顧失色이러라 敬瑭이 疑懼하야 謀於將佐曰 吾之再來河東也에 主上이 面許終身不除代러니 今忽有是命하니 得非如今年千春節與公主所言乎아 我不興亂이면 朝廷發之하리니 安能束手死於道路乎아 都押衙劉知遠曰 明公이 久將兵하야 得士卒心하고 今據形勝之地하야 士馬精彊하니 若稱兵傳檄이면 帝業을 可成하리니 奈何以一紙制書로 自投虎口乎잇가 掌書記桑維翰契丹主部落이 近在雲, 應하니 公誠能推心하야 屈節【屈折肢節하야 以服事也라 】事之하면 萬一有急에 朝呼夕至하리니 何患無成이릿고 敬瑭이 意遂決하야 表唐主호되 養子潞王이라 】는 不應承祀하니 請傳位許王【名從益이니 明宗子라 】하노이다 唐主手裂其表하야 抵地하고 制하야 削奪敬瑭官爵하고 以張敬達로 兼太原四面排陳使하야 率諸將討之하다

처음에 [453][454]을 鄆州의 鎭으로 옮기고자하니, [##李崧]과 [##呂琦]【[##李崧]은 翰林學士이고, [##呂琦]는 知制誥이다.】 등이 모두 강력히 간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薛文遇]가【[##薛文遇]는 知制誥이다.】 말하기를 “河東(石敬瑭)은 鎭을 옮겨도 배반하고 鎭을 옮기지 않아도 배반하여, 반란이 조석간에 있을 것이니, 사전에 미리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455]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卿의 말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니, 成敗에 관계없이 내 결행하겠다.” 하였다. 즉시 除目을 만들어 學士院에 맡겨 制書를 草해서 [456]을 天平節度使로 임명하니, 制書가 나오자 文班과 武班이【文官과 武官을 東班과 西班이라 하였다.】 서로 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457]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수‧막료들과 상의하기를 “내가 다시 河東에 올 때에 主上이 나와 대면하고서 종신토록 딴 곳으로 바꾸어 제수하지 않기로 허락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금년 千春節에 공주와 말씀한 바와 똑같지 않은가.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킬 것이니, 어찌 손을 묶고 도로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都押衙인 [458]이 말하기를 “[459]은 오랫동안 군대를 거느려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고, 지금 지형이 유리한 곳을 점거하여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강하니, 만약 군대를 일으키고 격문을 돌린다면 황제의 기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한 장의 制書 때문에 자신을 호랑이의 입에 던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掌書記[460]이 말하기를 “[461]의 部落이 가까이 雲州와 應州에 있으니, 公이 진실로 마음을 다 바쳐 복종하여 섬긴다면【사지의 관절을 굽혀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하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462]이 마침내 결심하고 [463]에게 表文를 올리기를 “養子가【養子는 [464]이다.】 帝位를 계승해서는 안 되니, [465]에게 전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466]은 이름이 [467]이니, [468]의 아들이다.】[469][470]의 表文을 손수 찢어 땅에 내던지고 制書를 내려서 [471]의 관직을 삭탈하고[472]을 임명하여太原四面排陳使를 겸임하게하여 諸將을 거느리고 토벌하게하였다.

敬瑭이 遣間使【間은 去聲이니 從間道遣使라 】하야 求救於契丹할새 令桑維翰으로 草表하야 稱臣於契丹主하고 且請以父禮事之하고 約事捷之日에 割盧龍一道及鴈門關以北諸州하야 與之하다 劉知遠이 諫曰 稱臣은 可矣어니와 以父事之는 太過요 厚以金帛賂之라도 自足以致其兵이니 不必許以土田이니 恐異日大爲中國之患이면 悔之無及이리이다 敬瑭이 不從하다 表至契丹하니 契丹主大喜하야 許俟仲秋하야 傾國赴援하다

[473]이 은밀히 間使를 보내어【間은 去聲이니, 사잇길을 따라 은밀히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契丹에 구원을 요청할 적에 [474]으로 하여금 表文을 草하게 하여, [475]에게 臣이라 칭하고 또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길 것을 청하였으며, 일이 성공하는 날에 盧龍의 한 道와 鴈門關 이북의 여러 州를 떼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476]이 간하기를 “신을 칭하는 것은 가하나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치며,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어도 충분히 그 군대를 부를 수 있으니, 굳이 토지를 떼어줄 것을 허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일에 크게 중국의 후환거리가 되면 후회막급일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477]이 따르지 않았다. 表文이 契丹에 이르자, [478]가 크게 기뻐하여 仲秋(8월)를 기다려 국력을 기울여 달려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였다.

○ 九月에 契丹主將五萬騎하고 號三十萬이라하야 自楊武谷而南하니 旌旗不絶이 五十餘里라 至晉陽하야 屯於汾北之虎北口하야 與唐騎將高行周, 苻彦卿合戰할새 敬瑭이 乃遣劉知遠하야 出兵助之하니 唐兵이 大敗라 敬達이 遣使하야 告敗於唐한대 唐主大懼하야 下詔親征하니 諸軍이 自鳳翔推戴潞王이 自鳳翔節度卽位하니라 】以來로 驕悍하야 不爲用이로되 苻彦饒彰聖都指揮使니 時爲大軍後援하니라 】恐其爲亂하야 不敢束之以法이러라 唐主至河陽하야 心憚北行하야 但日夕酣飮悲歌하고 群臣이 或勸其北行이면 則曰 卿輩勿言하라 石郞이 使我心膽墮地라하니라

9월에 [479]가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30만 대군이라 이름하면서 楊武谷으로부터 남진하니, 旌旗가 50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晉陽에 이르러서汾水의 북쪽인 虎北口에 주둔하고서唐나라 騎兵將인 [480]와 [##苻彦卿]과 교전할 적에 [481]이 마침내 [482]을 보내 출병하여 돕게하니, 唐軍이 크게 패하였다. [483]이 사자를 보내어 唐나라에 패전을 알리자, [484]가 크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리고 친히 정벌하니, 鳳翔에서 [485]을 황제로 추대한[486]이 鳳翔節度使로 있다가 즉위하였다.】 이래로 諸軍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져서 부릴 수가 없었으나 [##苻彦饒]는【[##苻彦饒]는 彰聖都指揮使이니, 당시 大軍의 후원이 되었다.】 이들이 반란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군법으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487]는 河陽에 이르러서 마음속에 북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만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슬피 노래하며, 신하들이 혹 북쪽으로 출동할 것을 권하면 말하기를 “경들은 말하지 말라. [488]이 나로 하여금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하였다.

○ 十一月에 契丹主石敬瑭曰 吾三千里來赴難하니 必有成功이라 觀汝氣貌識量하니 眞中原之主也라 吾欲立汝爲天子하노라 敬瑭이 辭讓數四러니 將吏復勸進한대 乃許之하다 契丹主作冊書하야 命敬瑭爲大晉皇帝하니 是日에 卽皇帝位하야 割幽, 薊十六州하야 以與契丹하고 仍許歲輸帛三十萬匹하고 制改長興明宗年號라 】七年하야 爲天福元年하다

[史略 史評]胡氏敬瑭之罪는 在不助閔帝라 苟以閔帝失國이면 則當尊奉許王이니 不爲衛州之事하야 而歸奪國弑君之惡於從珂하고 兵以義擧하야 名實皆正이면 則其德美矣리라 乃急於近利하야 稱臣契丹하고 割棄土壤하야 以父事之러니 其利不能以再世하고 其害乃及於無窮이라 故로 以功利謀國而不本於禮義면 未有不旋中其禍者也니라

11월에 [489][490]에게 이르기를 “내가 3천 리 밖에서 난리에 달려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너의 기풍과 모습, 지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내 너를 세워 천자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491]이 서너 차례 사양하였는데, 장수와 관리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492]가 책봉하는 글을 만들어 [493][494]로 임명하니, [495]이 이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幽州와 薊州 등 16주를 떼어서 契丹에게 주고 인하여 해마다 비단 30만 필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으며, 制書를 내려 長興[頭註] 長興長興은 明宗의 연호이다. 7년을 고쳐 天福 元年이라고 하였다.

[史略 史評][496]가 말하였다.

[497]의 죄는 [498]를 돕지 않은 데에 있다. 만일 [499]가 나라를 잃었으면 마땅히 [500]을 높이 받들었어야 하니, 衛州의 일을 하지 아니하여 나라를 찬탈하고 군주를 시해한 죄를 [501]에게 돌리고, 의리에 입각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名과 實이 모두 바르게 되었다면 그 德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契丹에게 신하를 칭하고 영토를 떼어주어 契丹의 군주를 아버지로 섬겼는데, 그 이익이 두 代를 가지 못하였고 그 폐해가 마침내 무궁한 후세에 미쳤다. 그러므로 功利로 나라를 도모하고 禮義에 근본하지 않으면 곧바로 禍를 당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唐主又與宋審虔【馬軍都指揮使라 】等四將으로 議復向河陽이러니 而將校皆已飛狀하야 迎晉主하니 唐主遂携傳國寶하고 登玄武樓하야 自焚하다

[502]가 또 [503][504]은 馬軍都指揮使이다.】 등 네 장수와 함께 다시 河陽으로 향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將校들이 모두 이미 降書를 바쳐[505]를 맞이하니, [506]가 마침내 傳國寶를 가지고 玄武樓에 올라가서 스스로 불타죽었다.

[丁酉]晉天福二年

[丁酉]〈晉天福二年이라 ○ 南唐烈祖徐誥昇元元年이라 ○ 是歲에 吳亡하니라 晉, 蜀, 漢, 閩에 南唐代吳하야 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정유(937) - 晉나라 天福 2년이다. ○ 南唐[507][508]의 昇元 元年이다. ○ 이해에 吳나라가 망하였다. 晉‧蜀‧漢‧閩에 南唐이 吳나라를 대신하여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晉以李崧으로 爲中書侍郞同平章事하야 充樞密使하고 桑維翰으로 兼樞密使하다 時에 晉이 新得天下하니 藩鎭이 多未服從하고 或雖服從이나 反仄【不安也라 】不安하고 兵火之餘에 府庫殫竭하야 民間困窮이어늘 而契丹徵求無厭이라 維翰이 勸晉推誠棄怨하야 以撫藩鎭하고 卑辭厚禮하야 以奉契丹하고 訓卒繕兵하야 以修武備하고 務農桑하야 以實倉廩하고 通商賈하야 以豐貨財하니 數年之間에 中國稍安하니라

晉나라가 [##李崧]을 中書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여樞密使를 맡기고, [509]을 兼樞密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晉나라가 새로 천하를 얻으니, 藩鎭들이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고, 혹 복종하더라도 反仄하여【反仄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전란을 겪은 뒤에 조정의 府庫가 고갈되어서 민간이 곤궁하였는데 契丹의 무리한 요구는 만족함이 없었다.

[510][511]에게 정성을 바치고 옛 원한을 버려 藩鎭을 어루만지고, 말을 낮추고 예를 후하게 하여 契丹을 받들며, 병졸을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선하여 武備를 닦고, 농업과 양잠을 힘써서 창고를 충실하게 하고, 商賈를 유통시켜 財貨를 풍족하게 할 것을 권하니, 몇 년 사이에 中國이 차츰 편안해졌다.

○ 三月에 晉主謀徙都大梁하니 桑維翰이 因說晉主하야 以大梁北控燕, 趙하고 南通江, 淮하야 水陸都會하야 資用富饒라하니 晉主乃下詔東巡하다

3월에 [512]가 大梁으로 천도할 것을 모의하니, [513]이 인하여 [514]를 설득하기를 “大梁은 북쪽으로 燕 지방‧趙 지방과 통하고 남쪽으로 長江‧淮水와 통하여, 물에서 나오는 것과 육지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재용이 풍부합니다.”라고 하니, [515]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동쪽으로 순행하였다.

○ 夏四月에 晉主至汴州하다

여름 4월에 [516]가 汴州(大梁)에 이르렀다.

○ 八月에 吳主楊溥라 】下詔하야 禪位于齊【後復姓李하니라 】하다 齊王卽皇帝位于金陵徐知誥也라 】하야 大赦하고 改元昇元하고 國號唐【是爲南唐이라 徐知誥는 改名이라 [通鑑要解] 徐知誥는 本以李氏之子라 旣擧大號에 欲纂唐緖라 故로 改國號唐이라 】이라하고 尊吳主曰讓皇이라하다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8월에 [517][518][519]이다.】 조서를 내려 帝位를 [520][521]에게 禪讓하였다.[522][523]는 뒤에 本姓인 李氏姓을 회복하였다.】[524][525]가 金陵에서 황제에 즉위하여【[原註] 齊王誥卽皇帝位于金陵:[526][527][528]이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昇元으로 개원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으며,【[頭註] 이것이 南唐이다. [529][530]으로 개명하였다. [通鑑要解] [531]는 본래 李氏의 아들이다. 이미 大號(황제의 칭호)를 거행한 뒤에 唐나라의 계통을 잇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국호를 唐으로 고쳤다.】[532]를 높여[533]이라 하였다. - 宋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없어졌다.-

[戊戌]晉天福三年

[戊戌]〈晉天福三年이라 ○ 蜀廣政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무술(938) - 晉나라 天福 3년이다. ○ 蜀나라 廣政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閏月에 閩主殂하니 其叔父延羲 自稱閩國王하고 更名하다

閏月에 [534]가 죽으니, 그의 숙부인 [535]가 스스로 [536]이라 칭하고[537]로 이름을 고쳤다.

○ 八月에 晉以馮道로 守司徒兼侍中하고 詔中書하야 知印【舊制에 凡宰臣이 更日知印이라 】을 止委上相하니 由是로 事無巨細히 悉委於하니라 晉主嘗訪以軍謀한대 對曰 征伐大事는 在聖心獨斷이요 臣은 書生이라 惟知謹守歷代成規而已라한대 晉主以爲然하니라

8월에 晉나라가 [538]를 守司徒兼侍中으로 삼고中書省에 명하여 知印을【옛 제도에 모든 宰臣은 날짜를 번갈아가면서 印章을 맡았다.】 오직 上相(馮道)에게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큰 일과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539]에게 맡겼다. [540]가 일찍이 군사의 계략을 묻자, [541]가 대답하기를 “정벌하는 큰 일은 聖上의 마음으로 독단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書生이라서 오직 역대에 이루어놓은 규칙을 삼가 지킬 줄만 알 뿐입니다.” 하니, [542]가 옳게 여겼다.

○ 契丹이 改元會同하다

契丹이 會同으로 개원하였다.

[庚子]晉天福五年

[庚子]〈晉天福五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경자(940) - 晉나라 天福 5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閩主旣立에 驕淫苛虐이어늘 建州刺史延政이 數以書諫之하다 於是에 兄弟積相猜恨하야 治兵相攻하야 互有勝負하니 福建之間에 暴骨如莽矣러라

[543][544]가 즉위한 뒤에 교만하고음란하고가혹하고사나우므로建州刺史[545]이 자주 글로 간하였다. 이에 형제가 서로 시기와 원한이 쌓여서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해서 서로 승부가 있으니, 福州와 建州 사이에 드러난 해골이 풀더미처럼 많았다.

○ 唐倉吏歲終에 獻羨餘萬石이어늘 唐主曰 出納有數하니 苟非掊民【掊는 聚斂也라 】刻軍이면 安得羨餘邪아

唐나라의 창고관리가 연말에 남은 곡식 1만 석을 바치자, [546]가 말하기를 “出納은 일정한 수가 있으니, 만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掊는 聚斂하는 것이다.】 군량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남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晉李崧이 奏호되 諸州倉糧이 於計帳【謂歲計其數하야 造帳以申三司者요 又具來歲課役之大數以報度支者라 】之外에 所餘頗多라하니 晉主曰 法外稅民은 罪同枉法이라 倉吏를 特貸其死하노니 各痛懲之하라

晉나라 [##李崧]이 아뢰기를 “여러 州의 창고에 있는 양식이 計帳(회계장부)【計帳은 해마다 그 수를 계산하여 장부를 만들어 三司에 보고하는 것이요, 또 다음 해에 부과할 부역의 큰 수를 갖추어 度支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외에 남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라고 하니, [547]가 말하기를 “법으로 정한 것 이외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죄가 법을 부정하게 적용하는 것과 같다. 창고관리는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니, 각각 통렬히 징계하라.” 하였다.

○ 自黃巢犯長安以來로 天下血戰數十年하니 然後에 諸國이 各有分土【凡聚土하야 以封諸侯호되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하야 兵革稍息이러니 及唐主卽位에 江淮比年豐稔하야 兵食有餘라 群臣이 爭言호되 陛下中興에 今北方多難하니 宜出兵하야 恢復舊疆이니이다 唐主曰 吾少長軍旅하야 見兵之爲民害深矣라 不忍復言하노니 使彼民安이면 則吾民亦安矣니 又何求焉이리오

[548]가 長安을 침범한 이래로 천하가 수십 년 동안 혈전을 겪으니, 그런 뒤에 여러 나라가 각각 영토를 소유하여【영토를 모아서 諸侯를 봉하되 封地를 받은 것이 각각 구분이 있는 것이다.】 전쟁이 다소 잠잠해졌는데, [##唐主]가 즉위하자 江‧淮 지방에 매년 풍년이 들어서 군량이 남아돌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중흥하심에 지금 북방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출병하여 옛날 소유했던 강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였다. [##唐主]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軍中에서 자라 군대가 백성들의 폐해가 됨이 심함을 직접 보아왔다. 차마 다시는 출병하는 일을 말하지 못하겠다. 가령 저들의 백성들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들 또한 편안하니, 또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晉成德節度使安重榮이 恥臣契丹하야 上表數千言하니 大抵斥晉主父事契丹하고 竭中國以媚無厭之虜러라 桑維翰이 密上疏曰 陛下免於晉陽之難【在上丙申年하니라 】而有天下는 皆契丹之功也니 不可負之어늘 議者以歲致繒帛으로 謂之耗蠹하고 有所卑遜으로 謂之屈辱하니 殊不知兵連而不休하고 禍結而不解하면 財力將匱하리니 耗蠹孰甚焉이며 用兵則武吏功臣이 過求姑息하고 邊藩遠郡이 得以驕矜하야 下陵上替하리니 屈辱이 孰大焉이니잇고 臣은 願陛下訓農習戰하고 養兵息民하야 俟國無內憂하고 民有餘力이니 然後觀釁而動이면 動必有成矣리이다

晉나라 成德節度使[549]이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천 자의 表文을 올리니, 대저 [550]가 契丹을 아버지로 섬기고 中國의 재정을 고갈시켜 만족함이 없는 오랑캐에게 잘 보이는 것을 배척하였다. 이에 [551]이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晉陽의 난을 벗어나【晉陽의 난리는 앞의 丙申年(936)에 있었다.】 천하를 소유하신 것은 모두 契丹의 공이니, 이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해마다 비단을 바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소모한다고 이르고, 몸을 낮추고 겸손한 것을 가지고 굴욕을 겪는다고 이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져 그치지 않고 화가 맺혀서 풀리지 않는다면 재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니, 국가의 재정을 소모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무력을 동원하게 되면 武官과 功臣들이 우선 당장의 편안함만 지나치게 바라고 邊方의 藩鎭과 먼 郡들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여 아랫사람은 능멸하고 윗사람은 침체할 것이니, 굴욕을 당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농사를 가르치고 군사들에게 전술을 익히게 하며 군대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여, 나라에 內憂가 없고 백성들에게 남은 힘이 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틈을 보아 출동하시면 출동함에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吳越王弘佐錢鏐元瓘之子라 】卽王位하다

[552][553][554][555]의 아들인 [556]의 아들이다.】 왕에 즉위하였다.

[壬寅]晉天福七年

[壬寅]〈晉天福七年六月에 晉主重貴立하니라 ○ 漢主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임인(942) - 晉나라 天福 7년6월에 [557][558]가 즉위하였다. ○ [559][560]의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夏四月에 漢高祖【南漢也라 劉隱之弟니 初名이라 梁封하야 爲南平王이러니 卒에 이 繼封爲南海王이라가 丁丑年에 稱帝하고 國號大越하며 戊寅年에 改國號大漢하고 改名하니라 弘度之子也라 本傳에 龑音嚴이라 】殂하니 秦王弘度 卽皇帝位하야 更名하다

여름 4월에 漢나라 [561]【漢나라 [562]는 南漢의 군주이다. [563]의 아우이니, 처음 이름은 [564]이다. 梁나라가 [565][566]에 봉하였는데, [567]이 죽자 [568]이 뒤를 이어 [569]에 봉해졌다가 丁丑年(917)에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大越이라 하였으며, 戊寅年(918)에 국호를 大漢이라 고치고 이름을 [570]으로 고쳤다. [571][572]의 아들이다. 本傳에 “龑은 음이 嚴이다.” 하였다.】죽으니, [573][574]가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575]으로 고쳤다.

○ 六月에 晉主殂하니 馮道【守司徒兼侍中이라 】景延廣으로 議以國家多難하니 宜立長君이라하고 乃奉廣晉尹齊王重貴【帝兄之子라 [頭註] 廣晉은 本紀에 作大(太)原하니라】爲嗣하니 是日에 齊王이 卽皇帝位하다 延廣以爲己功이라하야 始用事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晉祖以唐朝禁臠之親으로 地尊勢重이어늘 迫於猜疑하야 請兵契丹하야 賂以土地하고 而取人之國이라 跡其以中國之君으로 而屈身夷狄하면 玩好珍異 旁午道途호되 小不如意하면 譙責繼之하야 當時朝野 莫不痛心이로되 而晉祖事之에 殊無赧色이라 夫以古人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라도 猶且不爲어든 況附夷狄以伐中國하고 又從而取之者乎아 綱目에 書晉上尊號於契丹하고 契丹加晉主尊號는 所以著中國夷狄首足倒懸之極이니 其惡契丹而賤敬瑭也 甚矣로다

6월에 [576]가 죽으니, [577][578]는 守司徒 兼侍中이다.】[579]과 함께 의논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長君(長子)을 세워야 한다.” 하고 마침내 廣晉尹[580][581]【[原註] [582]는 황제(石敬瑭)의 兄(石敬儒)의 아들이다. [頭註] 廣晉은 〈高祖本紀〉에 太原으로 되어 있다.】받들어 후사로 삼으니, 이날 [583]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584]은 〈황제를 세운 것이〉자신의 공이라 하여 비로소 권력을 행사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晉나라 [585]는 唐나라 禁臠의 친척(駙馬)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였는데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아 거란에게 군대를 청하여 土地로써 뇌물을 주고 남의 나라를 차지하였다. 中國의 군주로서 오랑캐에게 몸을 굽힌 것을 찾아보건대, 완호품과 진귀한 물건을 거란에 바친 것이 도로에 이어졌으나 조금이라도 거란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견책이 이어져서, 당시 朝野의 사람들 가운데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晉나라 [586]는 거란을 섬김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옛사람은 한 가지라도 不義의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무죄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더라도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랑캐에게 붙어서 中國을 정벌하고 또 따라서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랴. 《資治通鑑綱目》에 ‘晉나라가 거란에게 尊號를 올리고, 거란이 [587]에게 尊號를 가했다.’라고 쓴 것은 中國과 夷狄이 마치 머리와 발이 거꾸로 전도된 것처럼 상하가 도치됨이 극에 달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니, 거란을 미워하고 [588]을 천시함이 심하다.”

晉主之初卽位也에 大臣이 議奉表稱臣告哀於契丹이러니 景延廣【天平節度使侍衛馬步都虞侯라 】이 請致書稱孫而不稱臣【因契丹主高祖稱兒皇帝하야 用家人之禮致書也라 】하다 契丹이 大怒하야 遣使來責讓이어늘 延廣이 復以不遜語延廣이 囚契丹使라가 已而요 遣歸曰 說爾主호되 先帝는 爲北朝所立이라 故로 稱臣奉表어니와 今上은 中國所立이니 稱孫足矣라 翁怒來하면 則孫有十萬橫磨劍이라하니라 】答之하다 契丹盧龍節度使趙延壽【本唐人이니 晉初에 爲契丹所虜하니라 】欲代晉帝中國하야 屢說契丹擊晉한대 契丹主頗然之하니라

[589]가 처음 즉위할 적에 大臣들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臣이라 칭하며 契丹에게 喪事를 알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590][591]은 天平節度使 侍衛馬步都虞侯이다.】 〈표문을 올리지 말고〉편지를 보내되 孫이라 칭하고 臣이라 칭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592]의 의논은〉[593][594]로 하여금 兒皇帝라고 칭하게 한 것을 이용하여 家人의 禮를 써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契丹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꾸짖자, [595]이 다시 불손한 말로【불손한 말이란 [596]이 契丹의 사신을 가두었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네 임금에게 말하기를 ‘先帝는 北朝(契丹)에서 세웠기 때문에 臣이라고 칭하고 표문을 받들어 올렸지만, 今上은 中國에서 세웠으니 孫이라고 칭하면 충분하다. 할아버지(契丹主)가 노하여 와서 교전한다면 손자는 십만 자루의 잘 연마한 검을 차고 상대할 뿐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답하였다. 契丹의 盧龍節度使[597][598]는 본래 唐나라 사람인데, 晉나라 초기에 契丹에게 사로잡혔다.】晉나라를 대신해서 中國의 황제가 되고자 하여 자주 契丹을 설득해서 晉나라를 공격하게하니, [599]가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契丹 〈太宗會同五年이라〉

契丹 - [600]會同 5년이다. -

齊王
名重貴니 高祖兄敬儒之子로

齊王은 名重貴高祖敬儒之子로 史曰出帝라 在位四年이라

[601]은 이름이 [602]이니, [603]의 형인 [604]의 아들로 역사책에 [605]라 칭하였다. 재위는 4년이다.

[癸卯]晉天福八年

[癸卯]〈晉天福八年이라 凡五國, 三鎭이라〉

계묘(943) - 晉나라 天福 8년이다.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에 唐主【南唐李昇이라 】餌方士靈丹하고 浸成躁急하다 二月에 唐主疽發背어늘 召齊王璟之長子라 】하야 入侍疾할새 唐主曰 吾餌金石은 始欲益壽어늘 乃更傷生하니 汝宜戒之하라 是夕에 殂하니 元宗이 卽位하다

[新增]胡氏曰 生不可益而疾可治라 漢高도 猶曰 命乃在天하니 雖扁鵲인들 何益이리오하니 今無疾以求益生之祥하니 其惑을 不待貶也라 然坐此致斃者幾何人이완대 而莫之戒者는 貪本不除也일새라 方士敎人延年不死하고 釋氏敎人死而得果하니 惟貪者入之라 故로 曰 養心莫善於寡欲이라하니라 異端佛之學은 或割除親愛하고 或遺棄萬事하야 灰心槁形於寂寞之濱하야 若無欲者로되 而望輕擧하고 冀後果하야 其欲莫大焉하니 君子不可不愼也니라

봄에 [606](南唐의 군주)가[607]는 南唐의 [608]이다.】 영험한 효험이 있다는 方士들의 丹藥을 먹고는 점점 조급증이 생겼다.

2월에 [609]가 등창이 났는데, [610][611]을 불러[612][613]의 長子이다.】 궁중에 들어와서 병을 간호하게 할 적에 [614][615]에게 이르기를 “내가 金石의 丹藥을 복용한 것은 본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해서였는데 도리어 생명을 더 손상시켰으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죽으니, [616]이 즉위하였다.

[新增][617]가 말하였다.

“〈약은〉생명을 더 연장할 수는 없으나 병은 치료할 수 있다. 漢나라 [618]도 오히려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마침내 하늘에 달려있으니, 비록 [619]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병이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祥瑞를 구하였으니, 그 미혹됨을 굳이 폄하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들어 죽음을 초래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는 자가 없는 것은 탐욕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方士는 사람들에게 수명을 연장하여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고, [##釋氏]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證果를 얻을 것을 가르치니, 오직 탐욕스러운 자들이 여기에 빠진다. 그러므로 《孟子》에 이르기를 ‘마음을 기름은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異端과 佛老의 학문은 혹 친애하는 마음을 잘라서 제거하기도 하고 혹 세상만사를 버려 적막한 물가에서 마음이 불꺼진 재와 같고 형체가 마른 나무와 같아서 욕망이 없는 자와 같다. 그러나 道士들은 신선이 되어 가볍게 날아다니기를 바라고 佛者들은 후일의 果報를 바라서 그 욕망이 더 클 수가 없으니, 군자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閩王延政王審知子라 】이 稱帝於建州하고 國號를 大殷이라하다

[620][621][622][623][624]의 아들이다.】建州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大殷이라 하였다.

漢晉王弘熙之弟也니 殺自立者라 】卽皇帝位하야 更名하다

南漢의 [625][626][627][628]의 아우이니, [629]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한 자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630]으로 고쳤다.

○ 晉桑維翰이 屢請遜辭以謝契丹호되 每爲延廣所沮러니 晉主延廣有定策功이라 故로 寵冠群臣하고 又總宿衛兵이라 故로 大臣이 莫能與之爭이러라 河東節度使劉知遠【河東節度使니 是爲後漢高祖라 】이 知延廣必致寇로되 而畏其方用事하야 不敢言하고 但益募兵하야 以備契丹이러니 契丹主乃集山後及盧龍兵五萬人하야 使趙延壽將之하고 委延壽經略中國하야 曰 若得之면 當立汝爲帝라하니 由是로 爲契丹盡力하야 畫取中國之策하니라

晉나라 [631]이 여러 번 공손한 말로 契丹에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매번 [632]에게 저지당하였다. [633][634]이 계책을 결정하고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공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총애가 여러 신하 중에 으뜸이었고, 또 [635]이 宿衛의 군대를 총괄하였으므로 大臣들이 감히 그와 다투지 못하였다. 河東節度使[636][637]은 河東節度使이니, 이가 後漢의 [638]이다.】[639]이 반드시 거란의 침입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다만 더욱 군대를 모집하여 契丹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640]가 마침내 山後와 盧龍의 군대 5만 명을 모아서 [641]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642]에게 中國을 경략하는 일을 맡기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中國을 얻으면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643]가 契丹을 위해 힘을 다해서 中國을 점령할 계책을 세웠다.

○ 契丹 〈會同六年이라〉

契丹 - 會同 6년이다. -

[甲辰]晉開運元年

[甲辰]〈晉開運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三鎭이라〉

갑진(944) - 晉나라 開運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正月에 契丹이 陷貝州하다 時에 用兵方略號令이 皆出延廣하고 宰相以下는 皆無所預라 延廣이 乘勢使氣하야 陵侮諸將하니 雖天子라도 亦不能制러라

정월에 契丹이 貝州를 함락하였다. 이때 용병하는 방략과 호령이 모두 [644]에게서 나오고 재상 이하는 모두 참여하지못하였다. [645]은 권세를 믿고 기세를 부려서 장수들을 능멸하고모욕하니, 비록 천자라도 제재하지못하였다.

○ 閩拱宸都指揮使朱文進이 弑閩王하다

閩나라 拱宸都指揮使[646][647][648]를 시해하였다.

○ 或謂晉主曰 陛下欲禦北狄, 安天下인댄 非桑維翰이면 不可라한대 乃復置樞密院하고 以維翰爲中書令兼樞密使하야 事無大小히 悉以委之하니 數月之間에 朝廷이 差治하니라

혹자가 [649]에게 이르기를 “폐하께서 北狄을 막고 천하를 편안히 하고자 하신다면 [650]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651]가 마침내 다시 樞密院을 설치하고[652]을 中書令兼樞密使로 임명하여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맡기니, 몇 달 만에 조정이 다소 다스려졌다.

○ 契丹之入寇也에 晉主再命劉知遠하야 會兵山東호되 皆後期不至하니 晉主疑其有異圖라 郭威【藩漢孔目官이니 是爲後周太祖라 】知遠有憂色하고 謂知遠曰 河東은 山河險固하고 風俗尙武하며 土多戰馬하야 靜則勤稼穡하고 動則習軍旅하니 此는 霸王之資라 何憂乎리오하니라

契丹이 침입하였을 적에 [653]가 다시 [654]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山東에서 회합하게하였으나 모두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655]가 그에게 딴 생각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656][657]는 藩漢孔目官이니, 이가 後周의 [658]이다.】[659]에게 근심하는 기색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660]에게 이르기를 “河東 지방은 산천이 험고하고 풍속이 武勇을 숭상하며, 이 지역에는 戰馬가 많아서 조용할 때에는 농사를 부지런히 힘쓰고 동요할 때에는 군대를 훈련시키니, 이는 霸王을 이룩할 수 있는 밑천입니다. 어찌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 契丹 〈會同七年이라〉

契丹 - 會同 7년이다. -

[乙巳]晉開運二年

[乙巳]〈晉開運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殷改稱閩而亡하니라〉

을사(945) - 晉나라 開運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殷나라가 閩이라고 개칭하였으나 바로 망하였다.-

契丹이 復大擧入寇라가 大敗北歸하다

契丹이 다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침입하였다가대패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契丹이 連歲入寇하니 中國이 疲於奔命하고 邊民塗地어늘 桑維翰이 屢勸晉主하야 復請和於契丹하야 以紓國患하다

契丹이 해마다 침입하니, 中國의 백성들은 명령을 받드느라 지치고 변방의 백성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661][662]에게 여러 번 권해서 다시 契丹에게 화친을 청하여 국가의 환난을 풀도록 하였다.

晉主自陽城之捷【是年三月에 都排陳使苻彦卿等이 至陽城하야 擊契丹하야 大敗之하니라 】으로 謂天下無虞라하야 驕侈益甚하고 馮玉【同平章이라 】이 乘勢弄權하야 四方賂遺 輻輳其門하니 由是로 朝政이 益壞하니라

[663]가 陽城에서 승리한 뒤로【이해 3월에 都排陳使[##苻彦卿] 등이 陽城에 이르러서 契丹을 공격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천하에 근심할 일이 없다 하여 교만하고사치함이 더욱 심하였고, [664][665]은 同平章事이다.】 세력을 믿고 권세를 농간하여 사방의 뇌물이 그의 집에 폭주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정사가 더욱 파괴되었다.

○ 契丹 〈會同八年이라〉

契丹 - 會同 8년이다. -

[丙午]晉開運三年

[丙午]〈晉開運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병오(946) - 晉나라 開運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十一月에 契丹主大擧入寇어늘 晉主杜威爲上將【謂北面行營都招討使也라 】이러니 威與李守貞【以天平節度使로 爲兵馬都監하니라 】, 宋彦筠【以前威勝節度使로 爲步軍左廂都指揮使하니라 】謀降契丹하다 契丹主紿之曰 趙延壽威望素淺하야 恐不能帝中國이라 汝果降者면 當以汝爲之호리라 威喜하야 遂降하고 命軍士釋甲하니 軍士皆慟哭하야 聲振原野러라 張彦澤【彰德節度使니 引兵爲前鋒하니라 】이 倍道疾驅하야 夜度白馬津하야 未明에 自封丘門으로 斬關而入하야 遷晉主於開封府하다

11월에 [666]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들어와 침략하자, [667][668]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는데,[669]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北面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한 것을 이른다.】[670][671][672]은 天平節度使로서 兵馬都監이 되었다.】, [673][674]은 前 威勝節度使로서 步軍左廂都指揮使가 되었다.】 함께 契丹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675]가 이들을 속여 말하기를 “[676]는 위엄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여 中國의 황제가 되지 못할까 두렵다. 너희들이 과연 항복한다면 마땅히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였다. [677]가 기뻐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으라고 명하니,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언덕과 들판에 진동하였다.

[678][679]은 彰德節度使이니, 군대를 이끌고 선봉이 되었다.】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급히 달려와서 밤에 白馬津을 건너 날이 밝기 전에 封丘門으로부터 관문을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와서[680]를 開封府로 옮겼다.

契丹 〈會同九年이라〉

契丹 - 會同 9년이다. -

歷年圖曰 高祖石敬塘이라 】以地尊勢重으로 迫於猜嫌한대 親執臣子之禮하야 以事戎狄하고 賂之土地하야 籍其兵力하야 以取天下하니 羽翼未成이면 不可以高飛요 國家未治면 不可以應敵이라 齊王은 捨桑維翰之深謀하고 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而外挑彊隣하야 使流民塗野草하고 胡騎汚宮闕하야 生爲降虜하고 死爲羈魄하니 非不幸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少主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外挑强胡라 自陽城一捷之後로 顧謂國勢無虞라하야 驕奢益甚하야 四方貢獻을 皆歸內府하며 廣置宮室하고 崇飾後庭하며 賞賜伶優에 多寡無算하고 委任馮玉하야 倚勢弄權이라 當旱蝗水潦 國脈如線之時하야 方且今年에 遣使括民穀하고 明年에 遣使括民財하며 迨夫契丹入寇하야 境內皇皇이로되 猶且調鷹苑內하고 排沮人言하야 遂使橫尸蔽野하고 宗廟丘墟하니 跡其人謀하면 豈不幸哉아 夫以晉之立國이 絶滅三綱하고 屛棄五常이라 報叔母爲妻하야 而夫婦亂矣요 尊夷狄爲父하야 而父子亂矣요 爲中國主하야 臣于契丹하야 而君臣亂矣라 三綱旣失에 中國已淪胥爲夷하니 不待契丹主服赭袍坐崇元殿하야 令百官行入閤禮하고 而風聲氣習之來侵이 已非一日矣라 此蓋人道之大變이요 中國之巨禍라 至使斯人으로 與禽獸雜處하야 而又離其害焉하니 此豈容以常理斷哉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681][682][683]이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이유로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자, 신하의 예를 친히 행하여 戎狄(거란)을 섬기고 토지를 바쳐 병력을 빌려서 이로써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높이 날 수가 없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적에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684][685]의 깊은 계책을 버리고 [686]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內政을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이웃나라에 도전하여, 유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풀에 피를 뿌리게 하고 오랑캐 기병으로 하여금 궁궐을 더럽히게 하여, 살아서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죽어서는 떠돌아다니는 혼백이 되었으니, 이는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687][688]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안으로 정사를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陽城에서 한 번 승리한 뒤로는 도리어 國勢가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四方에서 貢物로 바친 것을 모두 內府로 돌리며, 궁실을 널리 건축하고 後庭을 성대하게 꾸미며, 광대들에게 賞을 줄 적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외척인 [689]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권세를 믿고 농간하게 하였다. 가뭄이 들고 蝗蟲이 발생하며 수해가 들어 국가의 명맥이 실낱 같은 때를 당하여, 도리어 금년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곡식을 긁어모으고, 다음해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거란이 쳐들어옴에 미쳐서 境內가 위급하였으나 오히려 上林苑 안에서 매를 조련하고 사람들의 간언을 배척하고 막아서 마침내 시신이 들을 뒤덮고 宗廟가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사람의 잘못된 계책을 살펴보면 어찌 불행이라 하겠는가.

晉나라가 건국할 때에 三綱을 끊어 없애고 五常(五倫)을 물리쳐 버렸다. 叔母를 간음하고 아내로 삼아 夫婦의 윤리가 문란하였고, 夷狄을 높여 아버지라 칭하여 父子의 윤리가 혼란하였고, 中國의 군주로서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여 君臣의 도리가 혼란해졌다. 三綱을 잃은 뒤에 中國이 이미 몰락하여 서로 오랑캐가 되었으니, 굳이 契丹의 군주가 붉은 도포를 입고 崇元殿에 앉아서 百官들로 하여금 入閤禮를 행하게 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랑캐의 風聲(風敎)과 氣習에 침입당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이는 人道의 큰 변고이고 中國의 큰 禍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禽獸와 함께 처하게 하여 또다시 그 폐해를 입게 하였으니, 이 어찌 떳떳한 이치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右後晉은 二主에 共十一年이라

이상 後晉은 두 군주에 모두 1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