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十九 後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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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紀

孝和皇帝

不剛不柔曰和라

孝和【不剛不柔曰和라】皇帝※ 名章帝第四子니 在位十七年이요 壽二十七이라

※ 宦官外戚이 迭爲消長하니 漢家之禍 自此始矣라

孝和【강하지도 않고 유순하지도 않은 것을 和라고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章帝의 넷째 아들이니, 재위가 17년이고 壽가 27세이다.

※ 宦官과 外戚이 번갈아 쇠하고 성하니, 漢나라의 禍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己丑]永元元年

[己丑]永元元年이라

六月에 竇憲, 耿秉이 將精騎萬餘하고 與北單于로 戰于稽落山【稽落山은 在燕然山南하니 匈奴中山也라】하야 大破之하니 降者 前後八十一部二十餘萬人이라 , 이 出塞三千餘里하야 登燕然山【燕然山은 在匈奴速耶烏地中하니 稽落山之北이라】하야 命中護軍【西都有護軍都尉러니 今始有中護軍也라】班固하야 刻石勒功하야 紀漢威德而還하다

永元 元年(기축 89)

6월에 竇憲耿秉이 정예 기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北單于와 稽落山【稽落山은 燕然山 남쪽에 있으니, 匈奴 지역의 山이다.】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항복한 자들이 전후에 걸쳐 81部에 20여만 명이었다. 竇憲耿秉은 변방에서 3천여 리를 나가 燕然山【燕然山은 匈奴의 速耶烏 지역 가운데에 있으니, 稽落山 북쪽이다.】에 올라가서 中護軍【西都에 護軍都尉가 있었는데, 지금 비로소 中護軍을 둔 것이다.】班固에게 명령하여 비석에 공적을 새겨 漢나라의 威容과 德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辛卯]三年

[辛卯]三年이라

正月에 竇憲이 以北匈奴微弱이라하야 欲遂滅之하야 遣耿夔【國之子也라】, 任尙하야 圍於金微山하야 大破之하고 出塞五千餘里而還하니 自漢出師로 所未嘗至也러라 〈出憲傳〉

永元 3년(신묘 91)

정월에 竇憲이 北匈奴가 미약하다 하여 마침내 멸망시키고자 해서 耿夔【耿夔는 耿國의 아들이다.】任尙을 보내어 金微山에서 포위하여크게 격파하고 변방에서 5천여 리를 나갔다가 돌아오니, 漢나라가 출병한 이후로 이른 적이 없었던 곳이었다. - 《後漢書 竇憲傳》에 나옴 -

竇憲이 旣立大功에 威名이 益盛하니 刺史守令이 多出其門하야 競賦斂吏民하야 共爲賂遺러라

竇憲이 큰 공을 세우자 위엄과 명성이 더욱 성대해지니, 刺史와 守令들이 그 門下에서 많이 나와 관리와 백성들에게 다투어 세금을 거두어서 함께 〈竇憲에게〉 뇌물을 바쳤다.

[壬辰]四年

[壬辰]四年이라

竇氏父子兄弟 充滿朝廷하니 是時에 兄弟專權이라 帝以朝臣上下 莫不附이나 獨中常侍【宦者常侍左右라】鄭衆이 謹敏有心幾【幾는 讀作機니 關機라】라하야 遂與衆定議誅할새 帝以太后故로 不欲名誅하야 迫令自殺하다 〈出憲傳〉

[新增]胡氏竇氏根據하야 已生逆謀하니 誠欲誅之나 未易擧手어늘 和帝年纔十四로 乃能選用秘臣하고 密求故事하야 勒兵收捕하야 中外肅淸하니 足以繼孝昭之烈矣라 所可恨者는 三公이 不與大政하고 而鄭衆有功이라 由是로 宦者用權하야 馴致亡漢하니 可勝歎哉아

永元 4년(임진 92)

竇氏의 父子와 兄弟가 조정에 가득하니, 이때 竇憲의 형제가 권력을 전횡하였다. 황제는 조정의 높고 낮은 신하들이 竇憲에게 붙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中常侍【中常侍는 宦官이 좌우에서 항상 모신다는 뜻이다.】鄭衆만은 삼가고 민첩하며 心機(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함)【幾는 機로 읽어야 하니, 機關이다.】가 있다 하여 마침내 鄭衆과 의논을 정하여 竇憲을 죽이기로 하였는데, 황제는 竇憲竇太后의 오라비이므로 죄명으로 竇憲을 주살하고자 하지 않아서 竇憲에게 압박을 가하여자살하게 하였다.- 《後漢書 竇憲傳》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竇氏가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차지하여 이미 반역할 꾀를 내었으니, 진실로 이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和帝가 겨우 14세의 나이로 마침내 秘臣을 가려 쓰고 故事를 은밀히 찾아서 군대를 무장시켜 체포하여 中外가 肅淸되었으니, 충분히 孝昭皇帝의 功烈을 계승할 수 있었다. 한스러운 것은 三公이 國政에 참여하지 못하고 鄭衆이 공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권세를 부려 점점 漢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班固竇氏賓客으로 收捕死獄中하다 嘗著漢書러니 尙未就라 詔女弟曹壽妻【壽妻名昭니 所謂曹大家者也라】하야 踵【追也요 繼也라】而成之하다 〈出列女傳〉

華嶠【晉人이니 撰後漢書라 】論曰 之序事에 不激詭하고 不抑抗【激은 揚也요 詭는 毁也며 抑은 退也요 抗은 進也니 皆指史家作意以爲文之病이라】하야 贍而不穢【穢는 蕪也요 惡也라】하고 詳而有體하야 使讀之者로 亹亹【不倦之意라】而不厭하니 信哉라 其能成名也여 司馬遷是非頗謬於聖人【言遷所是非與聖人乖謬하니 卽崇黃老而薄六經하고 輕仁義而賤守節이 是也라】이라 然이나 其論議常排死節하고 否正直【排死節은 謂言龔勝竟夭天年之類요 否正直은 謂言王陵汲黯之戇之類라】하야 而不敍殺身成仁之美【謂不立忠義傳이라】하니 則輕仁義, 賤守節이 甚矣니라

班固竇氏의 賓客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班固가 일찍이 《漢書》를 저술하였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班固의 여동생인 曹壽의 아내 班昭【曹壽의 아내로 이름이 昭이니, 이른바 曹大家라는 자이다.】에게 명하여 뒤이어【踵은 좇음이고, 이음이다.】 완성하게 하였다.- 《後漢書 列女傳 曹世叔妻》에 나옴 -

華嶠【華嶠는 晉나라 사람이니, ≪後漢書≫를 지었다.】의 《後漢書》〈班固傳〉 論에 말하였다.

班固가 일을 서술할 때에 지나치게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지 않고 물리치거나 올려 주지 않아서,【激은 칭찬함이고 詭는 헐뜯음이며, 抑은 물리침이고 抗은 올려 줌이니, 모두 史家들이 자신의 뜻으로 글을 쓰는 병통을 가리킨 것이다.】 넉넉하되 거칠지 않고【穢는 거칠고 나쁨이다.】 자세하되 체통이 있어 《漢書》를 읽는 자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쓰고【亹亹는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싫증 내지 않게 하였으니, 진실하다! 그가 훌륭한 이름을 이룸이여. 班固司馬遷의 是非가 자못 聖人(孔子)과 다름【謬於聖人은 司馬遷이 옳다 하고 그르다 한 것이 聖人과 다름을 말하니, 곧 黃老를 숭상하고 六經을 하찮게 여기며 仁義를 경시하고 節義를 지킴을 천하게 여긴 것이 이것이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논은 항상 절개에 죽은 사람을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하여【[頭註]排死節 否正直:절개에 죽은 사람을 배척했다는 것은 龔勝이 끝내 요절했음을 말한 따위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했다는 것은 王陵과 汲黯의 우직함을 말한 따위를 이른다.】 殺身成仁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았으니,【殺身成仁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것은 ≪漢書≫에 忠義傳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이른다.】 그렇다면 仁義를 경시하고 절개를 지킴을 천하게 여김이 심한 것이다.”

帝策勳班賞할새 鄭衆이 每辭多受少하니 帝由是賢之하야 常與之議論政事하니 宦官用權이 自此始矣러라 〈出宦者傳〉

황제가 공훈을 策錄하여 상을 나눠 줄 때에 鄭衆이 항상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받으니, 황제가 이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항상 그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니, 환관이 권세를 부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後漢書 宦者列傳 鄭衆傳》에 나옴 -

[丁酉]九年

[丁酉]九年이라

皇太后竇氏崩이어늘 追尊母梁貴人하야 爲太后하고 封梁竦【帝母梁貴人之父라】三子하야 爲侯하니 梁氏自此盛矣러라 〈出梁竦傳〉

永元 9년(정유 97)

皇太后竇氏가 별세하자, 生母인 梁貴人을 追尊하여太后로 삼고梁竦梁竦은 황제의 生母인 梁貴人의 아버지이다.】의 세 아들을 봉하여 侯로 삼으니, 梁氏가 이로부터 번성하였다. - 《後漢書 梁竦傳》에 나옴 -

[壬寅]十四年

[壬寅]十四年이라

班超久在絶域하야 年老思土하야 上書乞歸曰 臣不敢望到酒泉【去長安二千八百里라】郡이요 但願生入玉門【去長安三千六百里라】關이니이다 乃徵超還【班超年老하야 乞歸어늘 久之未報러니 超妹曹大家上書하야 爲超求哀하니 帝感言하야 徵還이라】하고 以戊己校尉任尙으로 代爲都護【〈尙〉謂曰 小人이 猥承君後하야 任重慮淺하니 宜有以誨之니라 曰 塞外吏士는 本非孝子順孫이니 宜蕩佚簡易云云이라】하다

永元 14년(임인 102)

班超가 오랫동안 먼 異域에 있으면서 나이가 들어 늙으니 고향을 그리워하여 글을 올려 돌아갈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臣은 감히 酒泉郡【酒泉郡은 長安과 2천8백 리 떨어져 있다.】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살아서 玉門關【玉門關은 長安과 3천6백 리 떨어져 있다.】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班超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班超가 나이가 들어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회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班超의 누이 曹大家가 글을 올려 班超를 위하여 애걸하니, 和帝가 그 말에 감동하여 班超를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戊己校尉任尙으로 대신 都護를 삼았다.【[通鑑要解]以戊己校尉任尙 代爲都護:任尙이 임무를 교대할 때에 班超에게 이르기를 “小人이 외람되이 君의 뒤를 이어서 책임은 무겁고 생각은 얕으니, 가르쳐 주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班超가 말하기를 “변방의 관리와 군사들은 본래 효도하는 자식과 순종하는 손자가 아니니, 소탈하고 簡易한 정사를 펴야 할 것이다…….” 하였다.】

[乙巳]元興元年

[乙巳]元興元年이라

十二月에 帝崩하니 少子이 生始百餘日이라 卽皇帝位하고 太后臨朝【太后는 太傅鄧禹之孫이요 和帝之后요 殤帝之母라】하다 〈出本紀〉

[新增]唐仲友曰 自和帝以後로 漢統數絶에 皆是諸侯王入繼하고 又不得明君하니 所以愈亂이라 然所以不得賢君者는 正緣權不在大臣하야 外戚宦官이 利於立昏故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孝和以幼沖之資로 嗣守大業하야 年才(纔)十四에 而能慨然獨斷하야 芟除大憝하야 使朝廷肅淸하고 宮闈寧晏하야 遠紹昭帝之烈하니 何其明哉오 竇憲誅後에 又能躬總萬機하야 威權不失하며 發倉廩以周不給하고 弛苑囿以假貧民하며 優禮賢臣하고 克納直諫이라 是以로 內則生民歲增하고 拓土日廣하며 外則北空朔庭하고 西通重譯하니 方之章帝하면 或者過之라 惜其誅之時에 不與大臣計事하고 而與刑臣決謀하야 以致宦豎弄權하야 卒亡漢室하니 後之言治亂者 每於斯而太息焉이라 自是以來로 漢統屢絶이어늘 大抵皆以諸侯王入繼에 多是幼沖하니 所以然者는 蓋由權在外戚宦官하야 利於立昏故也니라

元興 元年(을사 105)

12월에 황제가 별세하니, 작은아들 이 태어난 지 겨우 백여 일째였다. 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太后【太后는 太傅 鄧禹의 손녀이고, 和帝의 后妃이고, 殤帝의 母后이다.】가 조정에 臨御하였다.- 《後漢書 孝和皇帝紀》에 나옴 -

[新增]唐仲友가 말하였다.

和帝 이후로 漢나라의 國統이 자주 끊기자 모두 諸侯王이 들어와 大統을 이었고, 또 밝은 군주를 얻지 못하니, 이 때문에 더욱 혼란하였다. 그러나 어진 人君을 얻지 못한 까닭은 바로 권력이 大臣에게 있지 않아서 外戚과 宦官들이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孝和皇帝는 幼沖한(어린) 몸으로 大業을 이어받아 겨우 14세에 慨然히 홀로 결단해서 크게 악한 자를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고 궁중을 편안하게 하여 昭帝의 功烈을 멀리 이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총명한가. 竇憲이 誅殺된 뒤에 또 몸소 萬機를 총괄하여 위엄과 권력을 잃지 않았으며, 창고를 열어 부족한 자들을 구휼해 주고 苑囿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으며, 어진 신하들을 예우하고 直言으로 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백성이 해마다 증가하고 영토를 개척하여 영지가 날로 넓어졌으며, 밖으로는 북쪽으로 朔方에 있는 흉노의 조정을 텅 비게 하고 서쪽으로 여러 번 통역을 거쳐야 하는 나라에까지 통하였으니, 章帝에 비하면 혹 낫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竇憲을 죽일 때에 대신과 일을 도모하지 않고 형벌 받은 신하(환관)와 계책을 결정하여 환관들이 권력을 농간해서 끝내 漢나라 황실을 망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治亂을 말하는 자들이 매양 이에 대하여 크게 탄식한다. 이후로 漢나라의 國統이 여러 번 끊어졌는데, 대저 모두 諸侯王으로 들어와 系統을 이음에 대부분 나이가 어렸으니, 이러한 까닭은 권력이 外戚과 宦官에게 있어 사리에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孝殤皇帝

皇帝 名隆이요 和帝少子니

孝殤【短折不成曰殤이라】皇帝 名이요 和帝少子니 在位一年이요 壽二歲라

孝殤【夭折하여 이루지 못함을 殤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和帝의 작은아들이니, 재위가 1년이고 壽가 2세이다.

[丙午]延平元年

[丙午]延平元年이라

八月에 帝崩하니 太后迎淸河王【和帝之兄이라】慶의 子祜하야 爲孝和皇帝嗣하야 卽皇帝位하고 太后猶臨朝하다 〈出本紀〉

延平 元年(병오 106)

8월에 황제가 별세하니, 太后가 淸河王【淸河王은 和帝의 형이다.】의 아들를 맞이하여 孝和皇帝의 後嗣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太后가 그대로 조정에 臨御하였다. - 《後漢書 孝殤皇帝紀》에 나옴 -

○ 尙書郞樊準이 以儒風寖衰라하야 上疏曰 人君은 不可以不學이라 光武皇帝 受命中興하사 東西誅戰하야 不遑啓處나 然猶投戈講藝하고 息馬論道하며 孝明皇帝 庶政萬機를 無不簡心【簡은 分別之也요 閱也라】호되 而垂情古典하고 遊意經藝하사 每饗射禮畢에 正坐自講하야 諸儒竝聽하니 四方이 欣欣하니이다 又多徵名儒하야 布在廊廟【廊은 殿下屋이요 廟는 太廟니 國事를 先謀於廊廟之所라】하고 每讌會【讌은 伊甸反이니 合語也라】에 則論難衎衎【衎衎은 和樂貌라】하야 共求政化하니 期門羽林介冑之士 悉通孝經이라 化自聖躬하야 流及蠻荒하니 是以로 議者每稱盛時에 咸言永平이니이다 今學者益少에 遠方이 尤甚하야 博士倚席不講【倚席은 謂不施講坐(座)也라】하고 儒者競論浮麗하야 忘謇謇【謇은 九輦反이니 易曰 蹇은 難也라하니라 】之忠하고 習諓諓【諓音踐이니 諂言也라】之辭하니 臣愚는 以謂宜下明詔하야 博求幽隱하고 寵進儒雅하야 以俟聖上講習之期하노이다 太后深納其言하다 〈出準傳〉

○ 尙書郞樊準이 儒風이 점점 쇠퇴한다 하여 상소하여 아뢰기를 “人君은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光武皇帝가 天命을 받고 중흥하사 東西로 토벌하고 싸워서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으나 오히려 창을 던지고 經書를 講하며 말을 쉬게 하고 道를 논하였습니다. 孝明皇帝는 여러 政事와 萬機를 마음속에 분별【簡은 분별하는 것이고, 살펴보는 것이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古典에 情을 쏟고 經藝(經學)에 뜻을 두어서 언제나 손님들에게 연향을 하고 射禮가 끝날 때마다 바르게 앉아 스스로 講學하여 여러 선비들이 함께 들으니, 사방이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또 유명한 선비들을 많이 불러서 廊廟(朝廷)【廊은 宮殿 아래의 집이고 廟는 太廟이니, 國事를 廊廟가 있는 곳에서 먼저 도모하는 것이다.】에 포진해 있게 하고, 讌會【讌은 伊甸反(연)이니, 모여서 말하는 것이다.】할 때마다 經傳을 논란하며 즐거워하여【衎衎은 和樂한 모양이다.】 함께 政事와 敎化를 구하니, 期門과 羽林의 갑옷 입고 투구 쓴 병사들도 모두 《孝經》에 통달하였습니다. 교화가 聖上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흘러 변방의 오랑캐에게까지 미치니, 이 때문에 의논하는 자들이 언제나 훌륭한 시대를 일컬을 때마다 모두 永平年間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학자가 더욱 적어졌는데 먼 지방은 특히 심해서 博士들은 講하던 자리를 치워 놓고 강론하지 않고【자리를 치움은 강론하는 자리를 베풀지 않음을 이른다.】 儒者들은 다투어 浮華하고 화려함을 논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謇은 九輦反(건)이니, ≪周易≫에 이르기를 “蹇은 어려움이다.” 하였다.】 충성을 잊고 아첨하는【諓은 음이 천(전)이니, 아첨하는 말이다.】 말만을 익히고 있으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밝은 詔書를 내리시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은사들을 널리 찾고 儒雅한 선비를 높여 등용해서 聖上께서 成長하여 강습하실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太后가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後漢書 樊準傳》에 나옴 -

孝殤皇帝

章帝孫이요 淸河孝王慶之子라

孝安【寬容和平曰安이라】皇帝※ 名章帝孫이요 淸河孝王慶之子라 在位十九年이요 壽三十二라

※ 卽位數年은 太后臨朝하고 親政之後에 內寵益盛하니라

孝安【너그럽게 포용하고 화평함을 安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니, 章帝의 손자이고 淸河孝王의 아들이다. 재위가 19년이고 壽가 32세이다.

※즉위한 뒤 몇 년은 太后가 조정에 臨御하였고, 親政한 뒤에는 內寵(궁중의 총애)이 더욱 성하였다.

[丁未]永初元年

[丁未]永初元年이라

秋九月庚午에 太尉徐防이 以災異寇賊으로 策免【策은 王言也요 免은 黜也라 漢儀에 丞相有他過하야 使者奉策書하면 卽時步出〈府〉하야 乘棧車하고 歸田里하니라】하니 三公이 以災異免이 自防始라 仲長統【仲長은 複姓이요 統은 名也라[頭註]獻帝時人이니 丙戌年에 以統으로 爲尙書郞이라】昌言【統이 論說古今行事하고 名曰昌〈言〉이라 昌은 當也니 當理之言이라】光武皇帝慍數世【謂元成平哀라】之失權하고 忿彊臣【謂王莽이라】之竊命하야 矯枉過直하야 政不任下하니 雖置三公이나 事歸臺閣【謂尙書라】이라 自此以來로 三公之職이 備員而已라 然이나 政有不治면 猶加譴責하니 而權移外戚之家하고 寵被近習之豎하야 水旱爲災라 此皆戚宦之臣이 所致然也어늘 反以(責)[策]讓【王氏曰 策은 王言也요 讓은 責也라】三公하야 至於死免하니 如此而欲望三公勳立於國家하고 績加於生民이면 不亦遠乎잇가 今人主 誠專委三公하야 分任責成호되 而在位病民하고 擧用失賢하고 百姓不安하고 爭訟不息하고 天地多變하고 人物多妖【妖는 災也라】어든 然後에 可以分此罪也니이다

永初 元年(정미 107)

가을 9월 庚午日에 太尉徐防이 천재지변과 外賊 때문에 策免【策은 王의 말씀이고, 免은 퇴출하는 것이다. 衛宏의 ≪漢舊儀≫에 “丞相이 다른 과실이 있어서 使者가 策書를 받들어 올리면 丞相은 곧바로 걸어서 丞相府를 나가 棧車를 타고 田里로 돌아간다.” 하였다.】되니, 三公이 천재지변 때문에 면직당하는 것이 徐防으로부터 시작되었다. 仲長統【[釋義]仲長은 複姓이고 統은 이름이다.[頭註]獻帝 때 사람인데, 병술년에 仲長統을 尙書郞으로 삼았다.】의 《昌言》【仲長統이 古今의 行事를 논설하고 이름하기를 ≪昌言≫이라고 하였다. 昌은 마땅함이니, 昌言은 이치에 합당한 말이다.】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光武皇帝가 몇 대【몇 대는 元帝‧成帝‧平帝‧哀帝를 이른다.】 동안 권력을 잃은 것을 노여워하고 강한 신하(王莽)【彊臣은 王莽을 이른다.】가 명령을 도둑질한 것을 분하게 여겨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지나치게 곧게 하여 아랫사람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으시니, 비록 三公을 두었으나 일이 臺閣【臺閣은 尙書를 이른다.】으로 돌아가서 이로부터 三公의 직책은 숫자만 채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음이 있으면 오히려 三公에게 견책을 가하니, 권력은 外戚의 집안으로 옮겨 가고 총애는 가깝고 친숙한 환관에게 가해져서 水災와 旱災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모두 외척과 환관들이 이렇게 만든 것인데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三公을 꾸짖어서【[釋義](責)[策]讓:王氏가 말하였다. “策은 왕의 말씀이고, 讓은 꾸짖음이다.”】 죽거나 면직함에 이르니, 이렇게 하고서 三公이 국가에 공훈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공적을 더하기를 바란다면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이제 人主가 진실로 三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책임을 분담하여 성공을 책임지게 하되, 〈三公이 선발하여〉 지위에 있게 한 자가 백성들을 해치고 추천하여 등용함에 賢者를 잃으며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하고 爭訟이 그치지 않으며 天地에 변고가 많고 사람과 물건에게 재앙【妖는 재앙이다.】이 많다면, 그런 뒤에야 이 죄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庚戌]四年

[庚戌]四年이라

騭이 在位에 頗能推進賢士라 弘農楊震이 孤貧好學하야 通達博覽하니 諸儒爲之語曰 關西孔子楊伯起【震의 字라】라하야늘 이 聞而辟之하다 累遷荊州刺史, 東萊太守하다 當之郡할새 道經昌邑이러니 故所擧荊州茂才王密이 爲昌邑令하야 夜懷金十斤하고 以遺이어늘 曰 故人은 知君이어늘 君不知故人은 何也오 曰 暮夜라 無知者니이다 曰 天知, 地知, 我知, 子知하니 何謂無知者오하니 이 愧而出하니라 性이 公廉하야 子孫이 常素食【麤飯이니 凡草菜可食者를 通名爲蔬라】步行이어늘 故舊或欲令爲開産業【王氏曰 欲令楊震自爲開置産業이라】한대 不肯曰 使後世로 稱爲淸白吏子孫하야 以此遺之면 不亦厚乎아

[史略 史評]熊氏曰 君子之德이 明不欺天하고 幽不欺神하고 內不欺心하고 外不欺人하나니 持行於昭昭之際하고 昧心於冥冥之中이 可乎아 令以利來어늘 以義責이라 故로 懷慙而退也하니라

[史略 史評]胡氏安帝三公이 無出之右者라 然이나 人臣以道事君하야 合則留하고 違則去어늘 이 以三公之尊으로 兩奏一乳媼而不能動하니 宜去久矣로되 至是極言하야 遂取殺身之禍하니 忠則忠矣나 然其燭理不明하고 處義不精하니 亦不足稱也니라

永初 4년(경술 110)

鄧騭이 지위에 있자 자못 어진 선비를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弘農의 楊震이 외롭고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통달하고 박람하니, 여러 선비들이 말하기를 “關西의 孔子는 楊伯起【伯起는 楊震의 字이다.】이다.”라고 하였는데, 鄧騭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등용하였다. 楊震이 여러 번 승진하여 荊州刺史와 東萊太守가 되었다.

일찍이 郡으로 부임할 때에 길이 昌邑을 경유하였는데, 옛날에 천거했던 荊州의 茂才王密이 昌邑令이 되어 밤에 금 10근을 품고 와서 楊震에게 주었다. 楊震이 말하기를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가 나를 알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王密이 대답하기를 “늦은 밤이어서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楊震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가?” 하자, 王密이 부끄러워 그대로 나갔다.

楊震은 성품이 공정하고 청렴하여 자손들이 항상 素食【素食은 거친 밥이니, 먹을 수 있는 모든 풀과 나물을 통틀어 蔬라고 이름한다.】을 하고 도보로 다녔다. 친구들이 혹 자손들을 위하여 産業을 장만하게 하려고 하자,【王氏가 말하였다. “楊震으로 하여금 스스로 産業을 마련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楊震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후세로 하여금 淸白吏의 자손이라고 칭하게 하여 이것을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厚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史略 史評]熊氏가 말하였다.

“君子의 德은 밝은 곳에서는 하늘을 속이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는 神을 속이지 않으며, 안으로는 마음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는 남을 속이지 않으니, 밝게 드러난 데서는 훌륭한 행실을 지키고 어두운 데서는 마음을 속이는 것이 옳겠는가. 昌邑令은 이익을 가지고 왔는데 楊震은 義理로써 책하였다. 이 때문에 昌邑令이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물러간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安帝의 三公 중에 楊震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신하는 道로써 군주를 섬겨서 道가 맞으면 머물고 어긋나면 떠나가야 하는데, 楊震은 존귀한 三公으로서 한 乳母에 대해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군주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떠나야 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지극히 말하여 마침내 몸을 죽이는 화를 취하였다. 충성스럽기는 충성스러우나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고 義에 처함이 정밀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 朝歌賊【朝歌는 河內邑也니 康叔所封之地라 甯은 姓也라】等 數千人이 攻殺長吏하고 屯聚連年하니 州郡이 不能禁이라 鄧騭이 惡詡하야 以爲朝歌長하니 故舊皆弔之【弔之는 謂其將得罪也라】어늘 笑曰 事不避難은 臣之職也라 不遇盤根錯節이면 無以別利器【樹根之盤互와 木節之交錯은 非堅利之器면 不能治之라】니 此乃吾立功之秋也라하다 及到官에 設三科하야 以募求壯士할새 自掾吏以下로 各擧所知하니 其攻劫者爲上하고 傷人偸盜者次之하고 不事家業者爲下하야 收得百餘人하다 爲饗會하야 悉貰其罪【貰는 赦也라 [通鑑要解]此三等人은 皆惡少年負宿罪者也니 悉貰之하야 使入賊爲間이라】하고 使入賊中하야 誘令劫掠하고 乃伏兵以待之하야 遂殺賊數百人하고 又潛遣貧人能縫者하야 傭作賊衣호되 以采線으로 縫其裾하야 有出市里者어든 吏輒禽之하니 賊이 由是駭散하야 咸稱神明하니 縣境이 皆平이러라

○ 朝歌의 도적인 甯季【朝歌는 河內의 고을이니, 周나라 때 康叔을 봉한 곳이다. 甯은 姓이다.】 등 수천 명이 長吏(守令)를 공격하여죽이고 무리 지어 한데 모여서 수년간 亂을 계속하니, 州郡에서 금하지 못하였다. 鄧騭虞詡를 미워하여 虞詡를 朝歌의 長으로 삼으니, 친구들이 모두 위문하였으나【친구들이 모두 위문한 것은 虞詡가 장차 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虞詡는 웃으며 말하기를 “국가의 일에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서린 뿌리와 뒤엉킨 마디를 만나지 않으면 예리한 연장을 분별할 수가 없으니,【[釋義]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나무의 뿌리가 서린 것과 나무의 마디가 뒤엉킨 것은 견고하고 예리한 연장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한다.】 이는 바로 내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하였다.

관청에 부임하자, 세 조목을 마련하여 壯士를 모집하여 구할 때에 掾吏 이하로부터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니, 사람을 공격하여 겁탈한 자를 上等으로 삼고, 사람을 부상시키거나 도둑질한 자를 다음으로 삼고, 家業에 일삼지 않은 자를 下等으로 삼아서 백여 명을 거두어 얻었다. 虞詡가 연향을 베풀어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고도【[釋義]貰는 용서함이다. [通鑑要解]이 세 등급의 사람은 모두 악한 少年으로서 예전에 죄를 지은 자들이니, 이들을 모두 용서해 주고 도적 속으로 들어가 反間 노릇을 하게 한 것이다.】 적 속으로 들어가서 적들을 유인하여 위협하고 노략질하게 하고는 군대를 매복시켜 기다렸다가 마침내 적 수백 명을 죽였다. 또 가난한 사람 중에 옷을 잘 꿰매는 자를 몰래 보내어 삯바느질을 하여 적의 옷을 만들되 채색 실로 옷자락을 꿰매게 하여 이 옷을 입고 시장 거리로 나오는 자가 있으면 관리가 그때마다 사로잡으니, 적들이 이로 말미암아 놀라 흩어져 모두 神明하다고 일컬었다. 그리하여 縣의 경내가 모두 평안하였다.

[乙卯]元初二年

[乙卯]元初二年이라

太后聞虞詡有將帥之量하고 以爲武都太守하다 羌衆數千이 遮於陳倉崤谷【括地志에 岐州陳倉縣이 是崤谷이니 今陜州陜縣東二崤是라】이어늘 卽停軍不進하고 而宣言호되 上書請兵하야 須到當發이라하니 羌이 聞之하고 乃分鈔【掠取也라】傍縣이어늘 因其兵散하야 日夜進道할새 兼行百餘里하고 令吏士로 各作兩竈하야 日增倍之하니 羌이 不敢逼이라 或問曰 臏은 減竈【孫臏減竈事는 在周顯王二十八年하니라】어늘 而君이 增之하고 兵法에 日行이 不過三十里하야 以戒不虞어늘 而今日且二百里는 何也오 曰 虜衆多하고 吾兵少하니 徐行則易爲所及이요 速進則彼所不測이라 虜見吾竈日增이면 必謂郡兵來迎이라하리니 衆多行速이면 必憚追我라 孫臏은 見弱하고 吾今示彊하니 勢有不同故也니라

元初 2년(을묘 115)

太后虞詡가 장수의 器量이 있다는 말을 듣고 武都太守로 삼았다. 羌族의 무리 수천 명이 陳倉의 崤谷【≪括地志≫에 “岐州 陳倉縣이 바로 崤谷이니, 지금 陜州 陜縣 동쪽의 二崤가 이곳이다.” 하였다.】에서 虞詡를 가로막자, 虞詡가 즉시 군대를 멈추어 전진하지 않고 선언하기를 “조정에 글을 올려 병력을 요청해서 이들이 오기를 기다려 출발하겠다.” 하니, 羌族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이웃 고을을 약탈【鈔는 약탈함이다.】하였다. 虞詡는 羌族의 군대가 흩어진 틈을 타서 밤낮으로 길을 갈 적에 행군 속도를 倍加하여 하루에 100여 리를 가고, 관리와 병사들로 하여금 사람마다 각각 아궁이(취사장)를 두 개씩 만들게 하여 날마다 배로 늘리니, 羌族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孫臏은 아궁이 수를 줄였는데【孫臏이 아궁이 수를 줄인 일은 周나라 顯王 28년에 있다.】 그대는 숫자를 늘렸고, 兵法에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는 30리를 넘기지 않아서 비상사태를 경계하는데 지금 하루에 장차 200리를 감은 어째서인가?” 하니, 虞詡가 대답하기를 “오랑캐 무리는 많고 우리 군대는 적으니, 천천히 가면 따라잡히기가 쉽고 속히 전진하면 저들이 예측하지 못한다. 오랑캐들이 우리의 아궁이 숫자가 날마다 늘어난 것을 보면 반드시 고을의 군대가 와서 맞이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병력이 많고 행군 속도가 빠르면 반드시 우리를 추격하기를 꺼릴 것이다. 孫臏은 상대방에게 약한 점을 보여 주었고 지금 나는 상대방에게 강한 점을 보여 주었으니, 이는 형세상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壬戌]延光元年

[壬戌]延光元年이라

皇太后鄧氏【宮人誣告太后兄弟悝弘閶等이 謀立平原君이라하니 帝怒하야 遂廢西平侯廣宗等하야 爲庶人하니라】커늘 帝始親政事하다 帝少號聰明故로 鄧太后立之러니 及長에 多不德하야 稍不可【言意不以爲可也라】太后意라 及太后崩에 鄧氏五侯【西平侯廣宗, 葉侯廣德, 西華侯, 陽安侯, 都鄕侯甫德이니 皆安帝之舅之子也라】를 皆廢爲庶人하고 以閻皇后兄弟로 竝爲卿校【卿은 九卿이요 校는 校尉라】하야 典禁兵하니 於是에 內寵이 始盛이라 中常侍江京等이 動內外하야 競爲侈虐이러라

延光 元年(임술 122)

皇太后鄧氏가 별세하자,【宮人이 鄧太后의 兄弟인 悝, 弘, 閶 등이 平原君을 황제로 세울 것을 모의한다고 誣告하니, 황제가 노하여 마침내 〈鄧弘의 아들인〉 西平侯 廣宗 등을 폐하여 庶人으로 삼았다.】 황제가 비로소 정사를 직접 다스렸다. 황제가 어렸을 적에 총명하다고 이름이 났기 때문에 鄧太后가 세운 것인데, 장성하자 부덕한 일이 많아서 차츰 太后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稍不可는 마음에 可하다고 여기지 않음을 말한다.】太后가 별세하자 鄧氏의 五侯【五侯는 西平侯 廣宗, 葉侯 廣德, 西華侯 忠, 陽安侯 珍, 都鄕侯 甫德이니, 모두 安帝의 외숙의 아들이다.】를 모두 폐하여庶人으로 삼고, 閻皇后의 형제를 모두 九卿과 校尉【卿은 九卿이고, 校는 校尉이다.】로 삼아서禁兵을 맡게 하니, 이에 內寵이 비로소 성하였다. 中常侍江京 등이 內外를 선동하여 다투어 사치하고 포악한 짓을 하였다.

○ 汝南太守王龔이 好才愛士하야 以袁閬爲功曹하고 引進郡人陳蕃, 黃憲【初擧孝廉하고 又辟公府하니 人勸仕한대 暫至京師라가 卽還하야 四十八終하니라】等하니 은 不屈하고 은 遂就吏【就辟而爲吏也라】하다 이 世貧賤하야 父爲牛醫러니 潁川荀淑이 遇於逆旅【客舍라 [通鑑要解]設館舍하야 迎客故로 逆旅라】하니 時年이 十四라 이 竦然異之하야 揖與語하야 移日【日移晷也라】不能去하고 謂曰 子는 吾之師表也로다 旣而오 前至【前은 進也라】袁閬所하야 問曰 子國에 有顔子하니 寧【豈也라】識之乎아 曰 見吾叔度【憲의 字叔度라】耶아 是時에 同郡戴良이 才高倨傲호되 而見이면 未嘗不正容하고 及歸에 罔然若有失也어늘 其母問曰 汝復從牛醫兒來耶아 對曰 이 不見叔度엔 自以爲無不及이러니 旣其人엔 則瞻之在前이라가 忽然在後하야 固難得而測矣라하더라 陳蕃周擧 常相謂曰 時月之間【自朔至晦爲一月이요 三月爲一時라】에 不見黃生이면 則鄙吝之萌【鄙吝은 猶茅塞之意라[頭註]作事可卑賤者를 謂之鄙요 作事可羞愧者를 謂之吝이라】이 復存乎心矣라하더라 太原郭泰【郭泰는 字林宗이라】 少遊汝南할새 先過袁閬하야 不宿而退하고 進往從하야 累日方還이어늘 或以問한대 奉高之器【奉高는 袁閬字也라】는 譬諸氿濫【王氏曰 氿音軌니 字從九無點이라 或作汍하니 誤也라 濫은 通作檻이라 爾雅註云 氿는 泉仄出也니 從傍出也요 濫은 泉涌出也라】이 雖淸而易挹【挹은 量也라】이어니와 叔度는 汪汪若千頃波하야 澄之不淸하고 淆之不濁하야 不可量也라하더라

[史略 史評]范曄黃憲의 言論風旨 無所傳聞焉이로되 士君子見之者 靡不服深遠하야 去玼吝이라 故로 予曾祖穆侯以爲 이 隤然其處順하고 淵乎其似道하니 若及門於孔氏면 其殆庶乎인저하시니라

○ 汝南太守王龔이 인재를 좋아하고 선비를 아껴서 袁閬을 功曹로 삼고 고을 사람인 陳蕃과 黃憲【黃憲이 처음에 孝廉으로 천거되고 또 公府에서 부르자 사람들이 벼슬할 것을 권하니, 잠시 京師에 이르렀다가 곧바로 돌아와 48세에 죽었다.】 등을 이끌어 등용하니, 黃憲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陳蕃은 마침내 관리에 취직【부름에 나아가 관리가 된 것이다.】하였다. 黃憲은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천하여 아버지가 牛醫(소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가 되었는데 潁川의 荀淑黃憲을 여관【[頭註]逆旅는 객사이다. [通鑑要解]館舍를 설치하여 손님(나그네)을 맞이하기 때문에 逆旅라 한 것이다.】에서 만나니,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荀淑이 공경히 예우하여 읍하고서 더불어 말을 하되 한참이 지나도록【移日은 〈시간이 흘러〉 해 그림자가 옮겨 가는 것이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黃憲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나의 師表이다.” 하였다. 이윽고 앞으로 나아가【前은 나아감이다.】袁閬의 처소에 이르러 묻기를 “그대의 고을에 顔子가 있으니, 그대는 알고 있는가?【寧은 豈이다.】” 하니, 袁閬이 말하기를 “우리 叔度(黃憲)【黃憲의 字가 叔度이다.】를 보았는가?” 하였다.

이때 같은 고을의 戴良이 재주가 뛰어나 거만하였으나 黃憲을 보면 용모를 단정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돌아와서는 망연자실하였다. 그 어머니가 묻기를 “네가 또 牛醫의 아들을 따라 놀다가 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叔度를 보기 전에는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미 그를 본 뒤에는 바라봄에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있어서 진실로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陳蕃周擧가 항상 서로 이르기를 “한 철이나 한 달 동안【초하루부터 그믐까지를 한 달[月]이라 하고, 3개월을 한 철[時]이라 한다.】黃生을 보지 않으면 비루하고 인색한 생각【[釋義]鄙吝은 茅塞이라는 뜻과 같다.[頭註]일을 함에 낮고 천하게 여길 만한 것을 鄙라 이르고, 일을 함에 부끄러워할 만한 것을 吝이라 이른다.】이 다시 마음속에 생긴다.” 하였다. 太原의 郭泰【郭泰는 字가 林宗이다.】가 젊어서 汝南에서 놀 때에 먼저 袁閬을 방문했을 때에는 留宿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 나오고, 나아가서 黃憲을 따라 놀 때에는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혹자가 郭泰에게 그 이유를 묻자, 郭泰가 말하기를 “奉高(袁閬【奉高는 袁閬의 字이다.】)의 器局은 비유하면 氿濫【王氏가 말하였다. “氿는 음이 궤이니, 글자 모양이 九字를 따르고 점이 없다. 혹은 汍으로 쓰니, 잘못이다. 濫은 檻과 통한다. ≪爾雅≫의 註에 이르기를 “氿는 샘물이 옆으로 나오니 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濫은 샘물이 용솟음쳐 곧바로 나오는 것이다.” 하였다.】이 비록 맑지만 측량하기 쉬운【挹은 헤아림이다.】 것과 같다. 그러나 叔度는 넓디넓은 千頃의 물결과 같아서 맑게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흐리게 해도 흐려지지 않아 측량할 수가 없다.” 하였다.

[史略 史評]范曄이 말하였다.

黃憲의 언론과 風旨는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으나 선비와 君子 중에 그를 만나 본 자들은 그의 深遠함에 감복하여 자신의 잘못과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曾祖이신 穆侯는 이르시기를 ‘黃憲은 유순하여 순함에 처하고 마음이 깊어 道와 같았으니, 만약 孔氏의 문하에 이르렀다면 顔回처럼 거의 道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였다.”

[乙丑]四年

[乙丑]四年이라

三月에 帝崩하니 年三十二라 太后臨朝【太后는 卽安帝閻后라】하야 欲久專國政하야 貪立幼年하야 與閻顯等으로 定策禁中하고 迎濟北惠王【濟北惠王은 章帝第七子이니 名壽라】의 子北鄕侯【北鄕은 郡名이니 在濟北地라】하야 爲嗣하다 乙酉에 北鄕侯卽皇帝位하다

延光 4년(을축 125)

3월에 황제가 별세하니, 향년이 32세였다. 太后【太后는 바로 安帝의 閻后이다.】가 조정에 臨御하여 오랫동안 國政을 독차지하고자 해서 나이 어린 임금을 세우려고 하여 閻顯 등과 궁중에서 계책을 정하고 濟北惠王【濟北惠王은 章帝의 일곱째 아들이니, 이름이 壽이다.】의 아들北鄕侯【北鄕은 고을 이름이니, 濟北 땅에 있었다.】를 맞이하여 後嗣로 삼았다. 乙酉日에 北鄕侯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冬十月에 北鄕侯薨하다

○ 겨울10월에 北鄕侯가 죽었다.

○ 十一月에 中常侍孫程, 王康等十九人이 聚謀於德陽殿하고 迎濟陰王【閻皇后性妬忌하여 王母李氏生帝하니 閻后鴆殺之라 庚申年에 立爲皇太子라가 後被廢爲濟陰王이라】하야 卽皇帝位하니 時年이 十二라 收閻顯하야 下獄誅하고 遷太后於離宮하고 封孫程等하야 皆爲列侯하니 是爲十九侯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孝殤이 始生百日而爲君하니 無足道者요 淸河王孝章之長子라 嘗正位儲宮이러니 廢不以罪하고 且年齡益長에 過失無聞하니 使於此時迎立하야 以主漢祀면 不亦善哉아 而鄧后終利幼弱하고 欲久臨朝하야 安帝年才十三에 俾稱尊享御라 然이나 權歸外戚하고 令出房幃하야 帝年三十에 猶未及親政이라 故로 自永寧以後로 日食地震과 雨水風雹之變이 歲不一書하고 母后常隆에 宦寺得政하야 腐身薰子에 委寄國命하야 手握天爵하고 口銜天憲하야 擧動移山海하고 呼吸變霜露하야 海內愁怨하고 志士窮棲어늘 方且計金授官하며 移民逃寇하고 推咎台衡하야 以答災眚하니 吾誰欺오 欺天乎인저

○ 11월에 中常侍孫程王康 등 19명이 德陽殿에서 모여 모의하고는 濟陰王【閻皇后가 성품이 질투하여 濟陰王의 生母 李氏가 황제를 낳자, 그녀를 독살하였다. 濟陰王은 庚申年에 서서 皇太子가 되었다가 뒤에 폐위당하여 濟陰王으로 있었다.】을 맞이하여 皇帝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閻顯을 체포하여 하옥시켜 죽이고 太后를 離宮에 옮기고는 孫程 등을 봉하여 모두 列侯로 삼으니, 이들이 十九侯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孝殤皇帝는 갓 태어난 지 백일 만에 군주가 되었으니 굳이 말할 것이 없고, 淸河王孝章皇帝의 長子로 일찍이 東宮에서 太子의 자리에 올랐는데 죄 없이 폐위당하였고, 또 나이가 들어 더욱 장성하자 알려진 과실이 없었으니, 만일 이때 그를 맞이하여 세워서 漢나라 제사를 주관하게 했더라면 좋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鄧后는 끝내 유약한 자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오랫동안 조정에 臨御하고자 하여 나이 겨우 13세인 安帝에게 尊位를 칭하고 등극하게 하였다. 그러나 권세가 외척에게 돌아가고 명령이 궁중에서 나와서 황제의 나이가 30세인데도 오히려 親政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永寧年間 이후로 日食과 地震과 장마와 홍수와 바람과 우박의 변고가 해마다 한 번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고, 母后가 항상 융성함에 모시는 宦官들이 정권을 얻어 거세당한 자들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겨서, 손에는 天爵을 쥐고 입에는 天憲을 머금어서 一擧一動이 산과 바다를 움직이고 호흡하는 사이에 가을 서리와 봄 이슬로 변화하여, 海內가 근심하고 원망하며 志士들이 곤궁하였다. 그런데도 금전을 계산하여 관직을 주었으며 백성을 옮겨 敵侵을 피하게 하고 정승에게 허물을 돌려 재앙을 막으려 하였으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孝順皇帝

名保요 安帝長子也니 在位十九年이요

孝順【慈和徧服曰順이라】皇帝※ 名安帝長子也니 在位十九年이요 壽三十이라

※ 卽位之初에 天下想其風采하고 黃瓊, 李固之徒 相繼登庸하니 東京之士 於玆盛焉이라 然이나 閹宦弄權하고 梁氏用事하야 賢人君子不能救漢祚之衰하니라

孝順【자애롭고 온화하여 두루 복종시키는 것을 順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安帝의 長子이니, 재위가 19년이고 壽가 30세이다.

※ 즉위한 초기에 천하 사람들이 그 風采의 훌륭함을 생각하였고 黃瓊과 李固의 무리가 뒤이어 등용되니, 東京(後漢)의 선비들이 이때에 성하였다. 그러나 宦官들이 권력을 농간하고 梁氏가 권력을 행사해서 賢人 君子들도 쇠퇴하는 漢나라의 國運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丁卯]永建二年

[丁卯]永建二年이라

初에 南陽樊英이 少有學行하야 名著海內라 隱於壺山之陽하야 州郡이 前後禮請호되 不應하고 公卿이 擧賢良方正有道호되 皆不行하고 安帝賜策書【策은 王言也요 又通作冊이라 說文에 符命也라】徵之호되 不赴러니 是歲에 帝復以策書玄纁【韻會〈注〉云 玄纁者는 天地之正色이라 土無正位하야 托位南方火라 赤與黃爲纁이라】으로 備禮徵英하야 待以師傅之禮하다 이 初被詔命에 衆이 皆以爲必不降志라하더니 南郡王逸이 素與善이라 因與書호되 多引古譬諭하야 勸使就聘이러니 及後應對에 無奇謀深策이라 談者以爲失望이러라 河南張楷俱徵이러니 謂曰 天下에 有二道하니 出與處也라 吾前以子之出에 能輔是君也하고 濟斯民也라하더니 而子始以不訾之身【訾는 與貲(同)[通]하니 不訾는 言無訾量可以比之하니 貴重之極也라】으로 怒萬乘之主【按樊英傳컨대 英初稱病이라 故로 强輿入殿에 猶不以禮屈한대 帝怒하니라[附註]英固辭不得하야 到京하야 〈强〉輿入殿에 猶不以禮屈한대 帝怒曰 朕能生殺貴賤貧富어늘 君何以慢朕命고 英曰 受命於天하니 生盡其命도 天也요 死不得其命도 亦天也라 陛下焉能生殺臣耶잇가】라가 及其享受爵祿하야는 又不聞匡救之術하니 進退無所據矣로다

永建 2년(정묘 127)

처음에 南陽의 樊英이 젊어서부터 학식과 행실이 있어서 이름이 海內에 드러났다. 壺山 남쪽에 은둔하여 州郡에서 전후로 禮를 갖추어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公卿들이 현량하고 방정하며 道가 있다고 천거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安帝가 策書【策은 王의 말씀이고, 또 冊과 통용된다. ≪說文解字≫에 “冊은 符命(임금의 명령)이다.” 하였다.】를 내려 불렀으나 달려가지 않았다. 이 해에 황제가 다시 策書와 玄纁【≪古今韻會擧要≫ 注에 이르기를 “玄纁은 天地의 正色이다. 土는 바른(정해진) 자리가 없어서 南方火에 자리를 의탁한다. 赤色과 黃色을 纁이라 한다.” 하였다.】으로 禮를 갖추어 樊英을 불러서 師傅의 禮로 대우하였다.

樊英이 처음에 詔命을 받자, 사람들은 모두 樊英이 반드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南郡의 王逸은 평소 樊英과 친하였으므로 인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많이 옛날의 일을 끌어다 비유해서 聘問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는데, 뒤에 〈황제에게〉 응대할 때에 기묘한 꾀와 깊은 계책이 없으니, 말하는 자들이 실망하였다.

河南의 張楷樊英과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樊英에게 이르기를 “천하에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나가서 벼슬함과 은둔함이다. 나는 전에 그대가 나아가면 이 군주를 보필하고 이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대가 처음에 헤아릴 수 없이 귀한 몸【訾는 貲와 통하니, 不訾는 헤아려 견줄 수가 없음을 말하니, 귀중함이 지극한 것이다.】으로 萬乘의 군주를 노엽게 했다가【[通鑑要解]〈樊英傳〉을 살펴보건대 樊英이 처음에 병을 핑계 대었으므로 억지로 수레를 타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禮로 굽히지 않자, 황제가 노하였다.[附註]樊英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서울에 이르러서 억지로 수레를 타고 궁전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禮로 굽히지 않자, 황제가 노하여 이르기를 “朕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는 어찌 朕의 명령에 不敬하는가?” 하자, 樊英이 대답하기를 “하늘에서 命을 받았으니, 살아서 그 목숨을 다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죽어서 그 목숨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하늘의 뜻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臣을 살리고 죽이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爵祿을 누리고 받음에 미쳐서는 또 군주를 바로잡는 방법이 있단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거할 바가 없다.” 하였다.

溫公曰 古之君子 邦有道則仕하고 邦無道則隱하니 隱은 非君子之所欲也요 人莫己知而道不得行하고 群邪共處而害將及身이라 故로 深藏以避之라 王者擧逸民【逸民者는 節行超逸也니 如俊民之義요 非隱逸也라】하고 揚仄陋【仄은 古側字라 書曰 〈明〉明揚〈側〉陋라한대 註에 明擧明人在〈側〉陋者니 廣求賢也라 蔡氏〈傳〉曰 側陋는 謂微賤之人라】는 固爲其有益於國家요 非以徇世俗之耳目也라 是故로 有道德足以尊主하고 智能足以庇民이요 被褐懷玉하야 深藏不市면 則王者當盡禮以致之하고 屈體以下之하고 虛心以訪之하고 克己以從之니 然後에 能利澤施于四表하고 功烈格于上下라 蓋取其道요 不取其人이며 務其實이요 不務其名也라 若乃孝弟著於家庭하고 行誼隆於鄕曲【曲者는 里之一曲也니 鄕里曰鄕曲이라】하야 利不苟取하고 仕不苟進하야 潔己安分하야 優游卒歲면 雖不足以尊主庇民이나 是亦淸修之吉士也라 王者當褒優安養하야 俾遂其志하야 若孝昭之待韓福【昭帝賜郡國所選有行義者涿郡韓福等五人帛五十匹하야 遣歸하고 詔曰 朕不勞以官職之事호리니 其務修孝悌하야 以敎鄕里하라하고 令郡縣으로 常以正月賜羊酒하고 其有不幸者어든 賜衣一襲하고 祀以中牢하다】光武之遇周黨하야 以勵廉恥, 美風俗이 斯亦可矣니 固不當如范升之詆毁【王氏曰 范升之詆毁는 按光武時에 韓歆이 欲爲左氏春秋立博士한대 范升{之}曰 左氏不祖孔子하고 而出於丘明하니 無因得立이라하니 難者以太史公(名)[多]引左氏라한대 升又上太史公違戾五經하고 繆孔子言及左氏不(敢)[可]錄者三十一事하니라】요 又不可如張楷之責望【愚按司馬公謂范升之詆毁者는 謂范升之毁周黨也니 事在光武建武五年이요 張楷之責望者는 謂責樊英也니 見上史本文이라 王氏謂范升之毁左氏及太史公이라하니 學者詳之라】也라 至於飾僞以邀【與要通이라】譽하고 釣奇以警【綱目作驚이라】俗하야 不食君祿而爭屠沽【屠는 殺物也요 沽는 賣也라】之利하고 不受小官而規卿相之位하야 名與實反하고 心與迹違하야는 斯乃華士, 少正卯之流【太公戮華士於齊하고 孔子誅少正卯於魯라[附註]韓非子曰 太公封於齊하니 東海上에 有任矞, 華士昆弟二人이어늘 太公殺之하다 周公急傳而問曰 二子皆賢人이어늘 殺之는 何也오 太公曰 是昆弟立議曰 不臣天子라하니 是望不得而臣也요 不友諸侯라하니 是望不得而友也요 耕而食之하고 掘而飮之하야 無求於人이라하니 是望不得而賞罰勸禁也라 且聖人所以使之는 非爵賞이면 則刑罰也어늘 今四者不足以使之라 是以로 誅之也로라 孔子爲魯相七日而誅少正卯하신대 門人問曰 夫少正卯는 魯之聞人也어늘 夫子爲政而誅之하시니 得無失乎잇가 孔子曰 天下有大惡五하니 一曰心違而險이요 二曰行僻而堅이요 三曰言僞而辯이요 四曰記醜而博이요 五曰順非而澤이니 此五者有一이면 則不得免於君子之誅하나니 而少正卯兼有之니라 】니 其得免於聖人之誅 幸矣라 尙何聘召之有哉리오

溫公이 말하였다.

“옛날에 君子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道가 없으면 은둔하였으니, 은둔함은 君子가 원하는 바가 아니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여러 간사한 사람들이 함께 처하여 害가 자신에게 미치므로 깊이 숨어 피하는 것이다. 王者가 逸民【逸民은 節行이 뛰어난 것이니, 俊民과 같은 뜻이고 隱逸의 뜻이 아니다.】을 천거하고 미천한 사람을 세상에 드러내는【仄은 側의 古字이다. ≪書經≫ 〈堯典〉에 “덕이 밝은 사람을 밝히고 側陋한 이를 드날린다.” 하였는데, 註에 “밝은 사람으로서 누추한 처지에 있는 이를 밝게 천거하는 것이니, 어진 이를 널리 찾는 것이다.” 하였다. 蔡沈의 傳에 이르기를 “側陋는 미천한 사람을 이른다.” 하였다.】 것은 진실로 국가에 유익함이 있기 때문이요, 세속의 耳目을 따르려고 해서가 아니다. 이 때문에 道와 德이 충분히 군주를 높일 수 있고 지혜와 재능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갈옷을 입고 玉을 품고서 깊이 숨어 나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王者가 마땅히 禮를 다하여 招致하고 몸을 굽혀 낮추며 마음을 비워 묻고 私慾을 이겨 따라야 하니, 그런 뒤에야 은택이 四表(四方)에 베풀어지고 功烈이 上下(天地)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道를 취하고 사람을 취하지 않으며, 실제에 힘쓰고 이름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만약 효도와 우애가 가정에 드러나고 훌륭한 행실이 鄕曲【曲은 里의 한 曲이니, 鄕里를 鄕曲이라 한다.】에 드높아 이익을 구차히 취하지 않고 벼슬에 구차히 나아가지 않아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분수에 편안하여 한가로이 놀며 한 해를 마친다면 비록 군주를 높이고 백성들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 또한 깨끗이 닦는 선비이다. 王者가 마땅히 표창하고 우대하여 편안히 길러 그 뜻을 이루게 해서, 孝昭皇帝韓福을 대하고【昭帝는 郡國에서 훌륭한 행실이 있다고 뽑은 涿郡의 韓福 등 5명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여 돌아가게 하고 명하기를 “짐은 그대들에게 관직의 일로써 수고롭게 하지 않을 것이니, 孝悌를 힘써 닦아서 鄕里를 교화하라.” 하고는 郡縣으로 하여금 항상 正月에 양고기와 술을 내려 주게 하고, 불행히 죽은 자가 있으면 옷 한 벌을 하사하고 中牢로 제사하게 하였다.】光武帝周黨을 대우하듯이 하여 廉恥를 장려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또한 옳으니, 진실로 范升처럼 훼방【王氏가 말하였다. “范升의 훼방은 살펴보건대 光武帝 때에 韓歆이 ≪左氏春秋≫를 위하여 博士를 세우려고 하자, 范升이 말하기를 ‘≪左氏春秋≫는 孔子를 祖宗으로 삼지 않고 左丘明에게서 나왔으니, 이 때문에 五經博士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논란하는 자가 ‘太史公이 ≪左氏春秋≫를 많이 인용하였다.’고 말하자, 范升은 또 太史公이 五經에 어긋난 것, 孔子의 말씀과 부합되지 않은 것 및 ≪左氏春秋≫ 중에 기록해서는 안 되는 일 서른 한 가지를 올렸다.”】해서도 안 되고 또 張楷처럼 책망【내가 살펴보건대 司馬公이 말한 范升의 詆毁라는 것은 范升이 周黨을 훼방한 것을 이르니 이 일은 光武帝 建武 5년에 있고, 張楷의 책망이라는 것은 樊英을 책망함을 이르니 위의 史書 本文에 보인다. 그런데 王氏는 范升이 左氏와 太史公을 훼방한 것이라 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해서도 안 된다.

거짓을 꾸며 명예를 바라고【邀는 要와 통한다.】 기이함을 낚아 時俗을 놀라게 하여,【警은 ≪資治通鑑綱目≫에 驚으로 되어 있다.】 군주의 녹봉을 먹지 않으면서 짐승을 도살하고 술 파는【屠는 짐승을 도살하는 것이고, 沽는 파는 것이다.】 이익을 다투고, 작은 벼슬을 받지 않으면서 卿相의 지위를 엿보아, 이름이 실제와 위반되고 마음이 행적과 어긋남에 이르러서는 바로 華士少正卯의 부류【[釋義]姜太公(呂尙, 呂望)은 華士를 齊나라에서 죽였고, 孔子는 少正卯를 魯나라에서 죽였다.[附註]韓非子가 말하였다. “太公을 齊나라에 봉하니, 東海 가에 任矞과 華士 형제 두 사람이 있었는데, 太公이 이들을 죽였다. 周公이 급히 파발마를 보내어 묻기를 ‘두 사람은 모두 賢人인데 그들을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太公이 대답하기를 ‘이들 형제는 의논을 세우기를 「天子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諸侯를 벗으로 삼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벗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내가 농사지어 먹고 내가 우물 파서 마셔서 남에게 구할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그를 상 주거나 벌 주어 권면하고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또 聖人이 사람을 부리는 것은 관작과 상이 아니면 형벌인데, 지금 네 가지로 이들을 부릴 수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이들을 죽인 것이다.’ 하였다.” 孔子가 魯나라 정승이 된 지 7일 만에 少正卯를 죽이자, 門人이 묻기를 “少正卯는 魯나라의 유명한 사람인데, 선생님께서 정사를 하시면서 그를 죽이셨으니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천하에 큰 惡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거슬려서 험한 것이요, 둘째는 행실이 편벽되면서 견고한 것이요, 셋째는 말이 거짓되면서 辯說을 잘하는 것이요, 넷째는 기억이 추하면서 해박한 것이요, 다섯째는 잘못인 줄 알면서 潤色하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군자의 죽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少正卯는 이 다섯 가지를 겸하여 소유했다.” 하였다.】이니, 聖人의 주벌을 면하는 것도 다행이다. 오히려 어찌 초빙하여 부를 것이 있겠는가.”

時에 又徵廣漢楊厚와 江夏黃瓊하다 旣至에 豫陳漢有三百五十年之厄【春秋命曆序曰 四百年之間에 閉四門하고 聽外難하여 群異竝賊하고 官有孼臣하고 州有兵亂하야 五七弱하니 暴漸之效也라하니 朱均注에 五七은 三百五十歲니 當順帝漸微하야 四方多逆賊也라】하야 以爲戒어늘 拜議郞하다 이 將至에 李固以書逆遺之曰 君子謂伯夷隘하고 柳下惠不恭이라하니 不하야 可否之間은 聖人居身之所珍也라 誠欲遂枕山棲谷하야 擬迹, 인댄 斯亦可矣어니와 若當輔政濟民인댄 今其時也로다 自生民以來로 善政少而亂俗多하니 必待之君인댄 此爲士行其志 終無時矣리라 嘗聞하니 語曰 嶢嶢者는 易缺하고 皦皦者는 易汚【嶢는 堅硬也요 皦는 明白也라 嶢嶢는 太堅하야 易爲玷缺하고 皦皦는 太白하야 易爲穢汚하니 卽虞詡所謂白璧不可爲也라】라하니 盛名之下에 其實難副라 近에 樊英이 被徵初至에 朝廷이 設壇席하고 猶待神明하니 雖無大異나 而言行所守 亦無所缺이어늘 而毁謗이 布流하야 應時折減【言其名譽折減也라】者는 豈非觀聽望深【言其聲名之深盛하야 素動人之觀聽이라 故로 所望者深也라】하고 聲名太盛乎아 是故로 俗論에 皆言處士純盜虛聲이라하니 願先生은 弘此遠謀하야 令衆人歎服하야 一雪此言爾니라

이때 또 廣漢楊厚와 江夏의 黃瓊을 불렀다. 楊厚가 이르자 漢나라는 建國한 지 350년 후에 厄運【≪春秋命曆序≫에 이르기를 “400년 사이에 사방의 문을 닫고 外亂을 내버려 두어 여러 災異가 함께 일어나고, 관리 중에는 孼臣(奸臣)이 있고 州에는 병란이 일어나서 五七에 약해지니, 포악함이 심해진 효험이다.” 하였는데, 朱均의 注에 “五七은 350년이니, 順帝 때에 점점 미약해져서 사방에 역적이 많았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말하여 경계하였는데, 議郞에 제수하였다. 黃瓊이 이르려 할 때에 李固가 편지를 미리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君子가 이르기를 ‘伯夷는 좁고 柳下惠는 공손하지 않다’ 하였으니, 伯夷처럼 하지도 않고 柳下惠처럼 하지도 않아서 可와 否의 중간에 있는 것은 聖人이 처신할 때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진실로 산꼴짝에 은거하여 행적을 巢父許由에게 비견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 정사를 돕고 백성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生民이 있은 이래로 잘 다스리는 정사는 적고 어지러운 풍속이 많았으니, 반드시 같은 임금을 기다리려고 한다면 이는 선비가 그 뜻을 행할 기회가 끝내 없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견고한 것은 망가지기 쉽고 깨끗한 것은 더럽혀지기 쉽다.’【嶢는 견고함이고, 皦는 명백함이다. 嶢嶢는 너무 견고하여 망가지기 쉽고 皦皦는 너무 희어서 더럽혀지기 쉬우니, 虞詡의 이른바 ‘흰 구슬처럼 깨끗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으니, 높은 명성의 아래는 그 실제에 부응하기가 어렵다. 근래에 樊英이 처음 부름을 받고 오자 조정에서 壇席을 설치하고 神明을 대하듯이 하니, 비록 크게 특이한 점은 없었으나 말과 행실을 지키는 것은 또한 결함이 없었는데 훼방이 유포되어 시간의 推移에 따라 명성이 꺾이고 줄어들었으니,【그 명예가 꺾이고 줄어듦을 말한다.】 이는 어찌 사람들이 보고 들음에 기대가 너무 컸고【명성이 깊고 성대하여 평소에 사람들의 보고 들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깊음을 말한 것이다.】 명성이 너무 성대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時俗의 의논에 모두 말하기를 ‘處士들은 순전히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니, 원컨대 先生은 이 원대한 계책을 넓혀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여 이러한 말을 한 번 설욕하기 바란다.”

至에 拜議郞하야 稍遷尙書僕射하다 이 昔隨父香하야 在臺閣【瓊父香이 和帝時에 爲尙書令이라】하야 習見故事러니 及後居職에 達練官曹하야 爭議朝堂하니 莫能抗奪【抗言以奪其議也라】이라 數上疏言事에 上이 頗采用之하니라 李固之子也라 少好學하야 常改易姓名하고 杖策驅驢하야 負笈從師【負笈은 負書箱也라 說文에 驢上負也라하니 猶今人爲木牀跨驢背하야 以負載物也라 古人多言負笈하니 謂自負之라】하야 不遠千里하야 究覽墳籍하야 爲世大儒하니라 每到太學에 密入公府하야 定省【記에 昏定而晨省이라하니 定은 安其牀衽이요 省은 問其安否如何라】父母하야 不令同業諸生으로 知其爲子也러라

黃瓊이 이르자, 議郞에 제수되고 차츰 옮겨 尙書僕射에 이르렀다. 黃瓊이 옛날에 아버지黃香을 따라 臺閣에 있으면서【黃瓊의 아버지 黃香이 和帝 때에 尙書令이 되어 臺閣에 있었다.】 故事를 익숙히 보았는데, 뒤에 관직에 있게 되자 관청의 여러 曹의 일에 밝고 익숙하여 朝堂에서 다투고 의논하니, 누구도 감히 맞서서 말하여 의논을 가로막는【맞서서 말하여 그 의논을 가로막는 것이다.】 자가 없었다. 자주 글을 올려 일을 아뢰니, 上이 자못 그 말을 채용하였다.

李固는 李郃의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이 姓名을 바꾸고는 채찍을 잡고 나귀를 몰아 책 상자를 지고 스승을 따라서【負笈은 책 상자를 지는 것이다. ≪說文解字≫에 “极(笈)은 나귀 위에 싣는 것이다.” 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나무 평상을 만들어 나귀 등에 걸쳐서 물건을 지거나 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옛사람들은 대부분 負笈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짊어짐을 이른다.】 천리 길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서적을 두루 보아 세상의 큰 학자가 되었다. 언제나 太學에 이르면 남모르게 公府에 들어가 부모의 안부를 살펴,【≪禮記≫ 〈曲禮〉에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날이 저물면 이부자리를 펴 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핀다.” 하였으니, 定은 요와 자리를 펴서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고, 省은 안부가 어떠한지를 묻는 것이다.】 함께 학문하는 諸生들로 하여금 자신이 李郃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辛未]六年

[辛未]六年이라

初에 安帝薄於藝文하니 博士不復講習하고 朋徒相視怠散하니 學舍頹敝하야 鞠爲園蔬【鞠은 詩에 鞠爲茂草라하니 窮也라】라 或牧兒蕘豎薪刈【蕘는 薪也라 又刈草曰芻요 采薪曰蕘라】其下어늘 將作大匠【官名이라】翟酺 上疏하야 請更修繕하야 誘進後學하니 帝從之하다

永建 6년(신미 131)

처음에 安帝가 藝文(六藝와 여러 책)을 하찮게 여기니, 博士들이 다시는 강론하여 익히지 않고 배우는 자들도 서로 보고 게을리 하고 흩어져서 學宮이 퇴락하여 마침내 동산과 채소밭이 되었다.【鞠은 ≪詩經≫ 〈小雅 小弁〉에 “마침내 무성한 풀밭이 되었다.” 하였으니, 鞠은 마침내이다.】 그리하여 혹 목동과 나무꾼이 그 아래에서 나무하고 풀을 베었는데,【蕘는 땔나무이다. 또 풀을 베는 것을 芻라 하고 땔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蕘라 한다.】 將作大匠【大匠은 官名이다.】翟酺가 상소하여 다시 學宮을 수리해서 後學들을 유도하여 나아가게 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이를 따랐다.

[壬申]陽嘉元年

[壬申]陽嘉元年이라

立貴人梁氏【梁商女라】하야 爲皇后하다

陽嘉 元年(임신 132)

貴人 梁氏【梁氏는 梁商의 딸이다.】를 세워 皇后로 삼았다.

○ 尙書令左雄이 上疏曰 昔에 宣帝 以爲吏數變易則下不安業하고 久於其事則民服敎化라하야 其有政治者를 輒以璽書勉勵하야 增秩賜金이라가 公卿缺이어든 則以次用之라 是以로 吏稱其職하고 民安其業하야 漢世良吏 於玆爲盛이러니 今典城百里에 轉動無常하니 各懷一切【王氏曰 一切은 苟且也니 猶言權時也라】하야 莫慮長久라 臣愚는 以爲守相長吏 惠和有顯效者어든 可就增秩하고 勿移徙하소서 帝感其言하야 復申無故去官之禁하니 而宦官이 不便이라 終不能行하다

○ 尙書令左雄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날 宣帝께서 ‘관리(守令)를 자주 바꾸면 아랫사람들이 生業에 편안하지 못하고 관리가 그 일을 오래 맡으면 백성들이 교화에 복종한다.’ 하여, 정사가 잘 다스려진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親書로 권면하고 장려하여 품계를 올려 주고 金을 하사하였다가 公卿 중에 결원이 있으면 차례로 등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生業에 편안하여 漢代의 어진 관리가 이때에 성하였는데, 지금 百里의 城邑(지방 고을)을 맡아 관리가 됨에 변동함이 심하여 일정함이 없으니, 각각 구차한 마음을 품어서【王氏가 말하였다. “一切은 구차함이니, 임시로 미봉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守相(郡守와 國相)과 長吏(令長) 중에 은혜롭고 온화하여 드러난 공효가 있는 자는 품계를 올려 주고 옮기지 마소서.”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연고 없이 관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禁令을 다시 펴니, 宦官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又上言호되 孔子曰 四十에 不惑이라하시고 禮稱彊仕【禮曲禮曰 四十〈曰〉彊이니 而仕라하니라】라하니 請自今으로 孝廉이 年不滿四十이어든 不得察擧하고 若有茂才異行이 如顔淵, 子奇어든 自可不拘年齒【男子는 八月生齒하야 八歲而齔이요 女子는 七月生齒하야 七歲而齔하니 是壽之數也라 齔은 音襯이니 毁齒也라】니이다 帝從之하다 久之오 廣陵所擧孝廉徐淑이 年未四十이라 臺郞이 詰之한대 對曰 詔書曰 有如顔回, 子奇【齊人也라 劉向新序曰 子奇年十八에 齊君使主東阿한대 阿縣大化라】어든 不拘年齒라하니 是故로 本郡이 以臣充選이라한대 郞不能屈이러니 左雄이 詰之曰 昔에 顔回는 聞一知十하니 孝廉은 聞一知幾耶아 淑이 無以對어늘 乃罷却之하고 郡守坐免하다 然이나 이 公直精明하야 能審覈眞僞하야 決志行之하니라 頃之오 胡廣이 出爲濟陰太守하야 與諸郡守十餘人으로 皆坐謬擧免黜호되 唯汝南陳蕃과 永川李膺과 下邳陳球等三十餘人이 得拜郞中하니 自是로 牧守畏慄하야 莫敢輕擧라 迄于永嘉【帝子沖帝年號라】히 察選이 淸平하야 多得其人이러라

[史略 史評]袁宏曰 古者四十而仕는 非謂仕必是年也요 特擧其大限하야 以爲言耳라 且顔淵子奇는 曠代一有어늘 而欲以斯爲格이면 不亦偏乎아

左雄이 또 上言하기를 “孔子는 ‘40세에 의혹하지 않았다.’ 하였고, 《禮記》에는 ‘40세를 彊이라 하니, 벼슬한다.’【≪禮記≫ 〈曲禮〉에 이르기를 “40세를 彊이라 하니, 벼슬한다.” 하였다.】 하였으니, 청컨대 지금부터 孝廉이 나이가 만 40세가 못 되면 살펴서 천거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뛰어난 재주와 특이한 행실이 顔淵(顔回)子奇 같은 이가 있으면 나이【男子는 8개월에 이가 나서 8세에 이를 갈고, 女子는 7개월에 이가 나서 7세에 이를 가니, 이것이 壽命의 數이다. 齔은 음이 친(츤)이니 이를 가는 것이다.】에 구애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오랜 뒤에 廣陵에서 孝廉으로 천거된 徐淑이 나이가 40이 못 되었다. 臺의 郎官이 이를 힐문하자, 대답하기를 “詔書에 ‘顔回와 子奇【子奇는 齊나라 사람이다. 劉向의 ≪新序≫에 이르기를 “子奇는 나이 18세에 齊나라 임금이 東阿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阿縣이 크게 교화되었다.” 하였다.】 같은 이가 있으면 나이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本郡에서 臣을 선발하여 충당한 것입니다.” 하니, 郞官이 徐淑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左雄이 힐문하기를 “옛날에 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는데, 孝廉은 하나를 들으면 몇이나 아는가?” 하니, 徐淑이 대답하지 못하므로 마침내 파하여 물리치고, 그를 천거한 郡守도 이 일에 걸려 면직되었다. 그러나 左雄은 공정하고 정직하고 정밀하고 밝아 眞僞를 살펴서 결심하고 실행하였다.

얼마 후 胡廣이 濟陰太守로 나가서 여러 郡의 郡守 10여 명과 함께 모두 사람을 잘못 천거한 죄에 걸려 면직되었으나 오직 汝南의 陳蕃과 永川의 李膺과 下邳의 陳球 등 30여 명은 郞中에 제수되니, 이로부터 牧守(郡縣의 長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볍게 천거하지 못하였다. 永嘉【永嘉는 황제(順帝)의 아들 沖帝의 연호이다.】年間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선발함이 깨끗하고 공평하여 훌륭한 인물을 많이 얻었다.

[史略 史評]袁宏이 말하였다.

“옛날에 40세에 벼슬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이 나이에 벼슬하였음을 이른 것이 아니요, 다만 큰 한계를 들어서 말하였을 뿐이다. 또 顔淵子奇는 세상에 드문 분인데, 이것을 가지고 격식을 삼고자 한다면 편벽되지 않겠는가.”

○ 洛陽宣德亭이 地坼하야 長이 八十五丈이라 帝引公卿所擧敦樸之士하야 使之對策한대 李固對曰 陛下之有尙書는 猶天之有北斗也니 斗爲天喉舌이요 尙書亦爲陛下喉舌이라 斗는 斟酌【天文志曰 斗爲帝車하야 運乎四時하고 臨制四方하니 分陰陽, 建四時, 均五行, 移節度, 定諸紀가 皆繫於斗라】元氣하야 運平四時하고 尙書는 出納王命하야 敷政四海하니 權尊勢重하야 責之所歸라 宜審擇其人하야 以毗聖政하소서

○ 洛陽의 宣德亭이 땅이 갈라져서 길이가 85丈이나 되었다. 황제가 公卿들이 돈후하고 질박하다고 천거한 선비들을 引見하여 對策을 말하게 하자, 李固가 대답하기를 “폐하에게 尙書가 있음은 하늘에 북두성이 있는 것과 같으니, 북두성은 하늘의 喉舌이 되고 尙書는 또한 폐하의 喉舌이 됩니다. 북두성은 元氣를 알맞게 조절하여【≪漢書≫ 〈天文志〉에 이르기를 “北斗星은 上帝의 수레가 되어 四時에 운행하고 四方을 제어하니, 陰陽을 나누고 四時를 세우며 五行을 고르게 하고 節度(節候)를 바꾸며 여러 기강을 정하는 것이 모두 북두성에 달려 있다.” 하였다.】 四時를 고르게 하고 尙書는 王命을 출납하여 四海에 정사를 펴니, 권세가 높고 세력이 중하여 무거운 책임이 돌아가는 곳입니다. 마땅히 훌륭한 사람을 살펴 가려서 성스러운 정사를 돕게 하소서.” 하였다.

[乙亥]四年

[乙亥]四年이라

梁商으로 爲大將軍하다

陽嘉 4년(을해 135)

梁商을 大將軍으로 삼았다.

[辛巳]永和六年

[辛巳]永和六年이라

梁商이 薨하니 以梁冀子라】로 爲大將軍하다

永和 6년(신사 141)

梁商이 죽으니, 梁冀【梁冀는 梁商의 아들이다.】를 大將軍으로 삼았다.

[壬午]漢安元年

[壬午]漢安元年이라

八月에 遣杜喬, 周擧, 栩, 羨, 欒巴, 張綱, 郭遵, 劉班하야 分行【去聲이니 巡視也라】州郡하야 表賢良, 顯忠勤호되 其貪汚有罪者는 刺史二千石은 驛馬上之하고 墨綬以下는 便輒收擧【〈刺史, 二千石의 大吏는 驛馬〉上奏其罪하야 取旨黜免하니 驛馬는 欲速達京師也요 一千石, 六百石의 墨綬令長以下는 便收라 [通鑑要解]墨綬는 縣令, 長也니 令, 長以下는 便收案擧劾其罪라】케하니 等은 受命之部호되 張綱은 獨埋其車輪於雒陽都亭【近畿內라 凡言都亭者는 竝城內亭이니 漢郡國道에 皆有都亭하니라】하고 曰 豺狼이 當路하니 安問狐狸리오하고 遂劾奏호되 大將軍와 河南尹不疑【不疑는 梁冀之弟라】 以外戚蒙恩하고 居阿衡【阿衡은 伊尹號也니 謂保其國如阿하고 平其國如衡이라】之任하야 而專肆貪叨【叨는 與饕同하니 貪財曰饕라】하고 縱恣無極하야 以害忠良하니 謹條其無君之心十五事하노니 斯皆臣子所切齒者也니이다 書御【御는 進也라】에 京師震竦이러라 時에 皇后寵方盛하야 諸梁姻族이 滿朝하니 帝雖知綱言直이나 不能用也러라 杜喬至兗州하야 表奏泰山太守李固政爲天下第一하니 上이 徵爲將作大匠하다

漢安 元年(임오 142)

8월에 杜喬周擧周栩馮羨欒巴張綱郭遵劉班을 보내어서 州郡을 나누어 순행【行은 去聲이니, 순시함이다.】하여 賢良한 이를 표창하고 충성스럽고 근면한 자를 드러내게 하되 탐관오리로서 죄를 지은 刺史와 二千石의 관원은 驛馬로 전달하여 그 죄를 上奏하고, 墨綬(縣令) 이하의 관원은 곧바로 직접 체포하게 하였다.【[頭註]驛馬上之……便輒收擧:[頭註]刺史와 二千石의 높은 관원은 驛馬로 그 죄를 上奏하여 황제의 명령을 받아서 면직시킨 것이니, 驛馬는 속히 京師에 전달하고자 한 것이요, 一千石과 六百石의 墨綬를 차는 縣의 令과 長 이하는 곧바로 체포하는 것이다. [通鑑要解]墨綬는 縣의 令과 長이니 令, 長 이하는 곧바로 체포하여 조사해서 그 죄를 탄핵하는 것이다.】杜喬 등은 명령을 받고 部로 갔으나 張綱만은 홀로 雒陽의 都亭【都亭은 畿內에 가까이 있었다. 무릇 都亭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都城 안의 亭(客舍)이니, 漢나라는 郡‧國‧道에 모두 都亭이 있었다.】에 수레바퀴를 묻으며 말하기를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으니, 어찌 여우와 살쾡이를 물을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탄핵하여 아뢰기를 “大將軍梁冀와 河南尹 梁不疑【梁不疑는 梁冀의 아우이다.】는 외척으로서 은혜를 입고 阿衡【阿衡은 伊尹의 호이니, 그 나라를 보전함이 阿母와 같고 그 나라를 공평하게 다스림이 저울대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의 지위에 있으면서 오로지 탐욕【叨는 饕와 같으니, 재물을 탐하는 것을 饕라 한다.】을 부리고 방종함이 끝이 없어서 忠良한 사람을 해치므로 그들이 군주를 무시한 열다섯 가지 일을 삼가 아뢰니, 이는 모두 臣子들이 이를 갈며 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글을 아뢰자【御는 올림이다.】京師가 진동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皇后의 총애가 한창 성하여 梁氏의 姻戚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황제가 비록 張綱의 말이 곧은 줄을 알았으나 쓰지 못하였다. 杜喬가 兗州에 이르러서 表文을 올려 泰山太守李固의 정사가 천하의 제일이라고 아뢰니, 上이 李固를 불러 將作大匠으로 삼았다.

梁冀張綱하야 思有以中傷【中은 去聲이니 陰中害之라】之러니 時에 廣陵賊張嬰寇亂揚, 徐間하야 積十餘年에 二千石이 不能制라 乃以爲廣陵太守하니 前太守率多求兵馬호되 은 獨請單車之職하다 旣到에 徑詣壘門하니 이 大驚하야 遽走閉壘어늘 이 於門外에 罷遣吏兵하고 獨留所親者十餘人하고 以書諭하야 請與相見한대 이 見至誠하고 乃出拜謁이어늘 延【納也라】置上坐하고 譬之曰 前後二千石이 多肆貪暴故로 致公等懷憤相聚하니 二千石이 信有罪矣라 然이나 爲之者도 又非義也라 今主上이 仁聖하야 欲以文德服叛이라 故遣太守來하니 思以爵祿相榮이요 不願以刑罰相加하노니 今誠轉禍爲福之時【若聞義不服하야 天子震怒하야 荊揚兗豫大兵雲合이면 血嗣俱絶하리니 二者利害를 公其深計之하라하니 嬰聞泣下하니라】也니라 聞하고 泣下曰 荒裔【言邊遠也라 裔는 衣裾也라】愚民이 不能自通朝廷하야 不堪侵枉하야 遂復相聚偸生하니 若魚游釜中이라 知其不可久나 且以喘息須臾間【喘은 疾息也요 須臾는 不久貌니 猶苟延殘喘하야 少延視息之義라】爾러니 今聞明府之言하니 乃等更生之辰也라하고 乃辭還營이러니 明日에 率所部萬餘人하고 歸降하다

梁冀張綱을 원망하여 그를 해칠【中은 去聲이니, 남몰래 적중시켜 해를 입히는 것이다.】 것을 생각하였다. 이때 廣陵의 도적張嬰이 揚州와 徐州 사이에서 도둑질하고 어지럽혀 십여 년이 되도록 二千石(太守)이 제재하지 못하였다. 梁冀가 마침내 張綱을 廣陵太守로 삼으니, 전에 부임했던 太守들은 대체로 병사와 말을 많이 요구하였으나 張綱은 다만 수레 한 대를 타고 부임지로 갈 것을 청하였다.

張綱은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張嬰의 壘門에 이르니, 張嬰이 크게 놀라 급히 성문을 닫았다. 張綱이 문 밖으로 관리와 병사들을 내보내고 친한 사람 10여 명만을 남게 하고는 글로 張嬰을 타일러 서로 만나 볼 것을 청하니, 張嬰張綱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는 마침내 나와서 배알하였다. 張綱이 그를 맞이하여【延은 맞아들임이다.】 上席에 앉히고 타이르기를 “前後로 부임한 二千石이 탐욕과 포악함을 많이 부렸기 때문에 公 등이 분한 마음을 품고 서로 모여 도둑질하게 된 것이니, 二千石에게 진실로 죄가 있다. 그러나 도둑질하는 것도 義로운 일은 아니다. 지금 主上께서 인자하고 聖스러워서 배반한 이들을 文德으로 복종시키고자 하시므로 太守를 보내어 온 것이니, 나는 爵祿을 가지고 서로 영화롭게 할 것을 생각하고 형벌로 서로 가하기를 원치 않는 바, 지금이 바로 轉禍爲福의 시기【張綱이 말하기를 “만약 義로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여 天子가 震怒하시어 荊州‧揚州‧兗州‧豫州에 大軍이 구름처럼 모인다면 血嗣(제사 지내는 血孫)가 모두 끊어질 것이니, 두 가지의 利害를 公은 깊이 따져 보라.” 하니, 張嬰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이다.” 하였다.

張嬰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먼 변방【荒裔는 먼 변방을 말한다. 裔는 옷자락이다.】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에 직접 통할 수가 없어서 침해와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다시 서로 모여 구차하게 살기를 꾀한 것이니,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과 같아서 오래 버티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우선 잠시나마 숨을 쉬어 목숨을 부지【喘은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고 須臾는 오래지 않은 모양이니, 오히려 남은 목숨을 구차하게 연장하여 눈 뜨고 숨만 붙어 있는 목숨을 다소 연장한다는 뜻이다.】할 뿐이었는데, 지금 明府의 말씀을 들으니 바로 저희들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때입니다.” 하였다. 張嬰은 마침내 하직하고서 軍營으로 돌아갔는데, 다음 날 거느리고 있던 만여 명을 데리고 돌아와 항복하였다.

是時에 二千石長吏有能政者하니 有雒陽令任峻과 冀州刺史蘇章과 膠東相吳祐은 爲冀州刺史에 有故人이 爲淸河太守러니 이 行部하야 欲按其姦贓하야 乃請太守하고 爲設酒肴하야 陳平生之好하야 甚歡이라 太守喜曰 人皆有一天이로되 我獨有二天【二天은 謂章必覆蓋其惡也라】이로다 曰 今夕에 蘇孺文【蘇章字라】이 與故人飮者는 私恩也요 明日에 冀州刺史按事者는 公法也라하고 遂擧正其罪하니 州境이 肅然이러라

[新增]唐仲友曰 公義, 私恩이 固當竝行不相悖라 然이나 意는 蓋欲借以警衆이니 故舊之恩은 恐不如此니라 又曰 故人이 可喩之면 使可改行이 可也요 不可喩면 勿與飮이 可也라 聖人은 無意어시늘 有意하니 有意甚矣라 後世小人之薄於故舊者 鮮不以藉口하나니 君子無作俑【俑은 從葬木偶人也니 設關而能跳踊이라 故로 名俑이라】哉인저

[史略 史評]史斷曰 順帝享國에 漢業雖衰나 然當時可任公卿者 有李固, 杜擧하고 可任將帥者 有虞詡, 皇甫規하고 可任刺史者 有蘇章, 張綱, 任峻, 吳祐하니 若使之盡其才하고 又使各擧所知而彙征焉이면 國雖衰나 可興也어늘 而帝惟后黨預權하고 閹宦用事하야 忠良屈抑하야 不復得志하니 欲天下不亂이나 得乎아

이때 二千石의 長吏 중에 정사를 잘하는 이가 있었으니, 雒陽令任峻과 冀州刺史蘇章과 膠東相吳祐였다. 蘇章은 冀州刺史가 되었을 때에 故人(옛 친구)이 淸河太守로 있었는데, 蘇章이 部를 순행하여 그의 간사함과 부정함을 조사하려 하면서 마침내 太守를 청하고 그를 위하여 술과 안주를 진설해서 평소의 우호를 말하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太守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한 하늘이 있다고 말하는데 나만 홀로 두 하늘이 있다.【두 하늘이 있다고 말한 것은 蘇章이 반드시 자신의 악행을 덮어 줄 것임을 이른 것이다.】” 하였다. 蘇章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에 이 蘇孺文【孺文은 蘇章의 字이다.】이 벗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사사로운 은혜이고, 내일 冀州刺史로 일을 조사하는 것은 국가의 법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죄를 들어 바로잡으니, 州의 경내가 숙연하였다.

[新增]唐仲友가 말하였다.

“공적인 의리와 사사로운 은혜는 진실로 나란히 행해지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蘇章의 뜻은 이것을 빌어 여러 사람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니, 故舊의 은혜는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하다.”

또 말하였다.

“故人이 타이를 수 있다면 하여금 행실을 고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요, 타이를 수 없다면 함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옳다. 聖人은 사사로운 뜻이 없었는데 蘇章은 사사로운 뜻이 있었으니, 사사로운 뜻이 있음이 심하다. 後世의 小人으로서 故舊에게 박하게 하는 자들은 蘇章을 구실로 삼지 않은 이가 적으니, 君子들은 옳지 못한 前例를 만들지【俑은 장례에 쓰는 나무를 깎아 만든 사람의 형상이니, 機關을 설치하여 뛸 수가 있다. 그러므로 俑이라 이름한 것이다.】 말아야 할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順帝가 나라를 누릴 때에 漢나라의 功業이 비록 쇠하였으나 당시에 公卿을 맡길 만한 자로 李固杜擧가 있었고, 將帥를 맡길 만한 자로 虞詡皇甫規가 있었고, 刺史를 맡길 만한 자로 蘇章張綱任峻吳祐가 있었으니, 만약 이들로 하여금 재주를 다하게 하고 또 각각 아는 자를 천거하여 함께 나오게 하였다면 나라가 비록 쇠하였으나 다시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가 오직 后의 外戚만 권력에 참여하게 하고 宦官들이 用事하여 忠良한 자들이 억눌려서 다시는 뜻을 얻지 못하였으니, 天下가 어지럽지 않기를 바라나 될 수 있었겠는가.”

[甲申]建康元年

[甲申]建康元年이라

八月에 帝崩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니 年二歲라 梁太后臨朝하다

建康 元年(갑신 144)

8월에 황제가 별세하고太子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니, 나이가 2세였다. 梁太后가 조정에 臨御하였다.

孝沖皇帝

名炳이요 順帝之子니 在位一年이요

孝沖【幼少在位曰沖이라】皇帝 名이요 順帝之子니 在位一年이요 壽三歲라

孝沖【어리면서 帝位에 있는 것을 沖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順帝의 아들이니, 재위가 1년이고 壽가 3세이다.

[乙酉]永嘉元年

[乙酉]永嘉元年이라

正月에 帝崩하니 梁太后渤海孝王之子하야 卽皇帝位하니 年八歲러라

永嘉 元年(을유 145)

정월에 황제가 별세하자, 梁太后渤海孝王의 아들을 불러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나이가 8세였다.

太后委政宰輔하고 李固所言을 太后多從之하야 黃門宦官爲惡者를 一皆斥遣하니 天下咸望治平이라 而梁冀深忌疾之하야 策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沖帝二歲踐阼하고 梁后臨朝에 委政宰輔하야 李固所言을 多見采納하고 宦官黃門爲惡者를 一皆斥遣하니 天下方翹首太平이로되 而跋扈之冀 已仄目矣로다

太后가 정사를 宰輔들에게 맡기고 李固가 말하는 것을 太后가 많이 따라서 黃門의 宦官 중에 악행을 저지른 자를 모두 배척하여 보내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治平을 기대하였다. 梁冀李固를 매우 시기하고미워하여李固를 策免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沖帝는 2세에 즉위하고 梁后가 조정에 臨御하자 정권을 宰輔들에게 맡겨서 李固가 말하는 것을 대부분 받아들이고, 宦官과 黃門으로서 악행을 저지른 자를 한결같이 배척하여 보내니, 천하 사람들이 바야흐로 머리를 들고 태평함을 기대하였으나 跋扈將軍梁冀는 이미 눈을 흘기고 있었다.”

孝質皇帝

孝質皇帝 名纘이요 肅宗玄孫이니 在位一年이요 壽九歲라

孝質【忠正無邪曰質이라】皇帝 名이요 肅宗【章帝廟號라】玄孫이니 在位一年이요 壽九歲라

孝質【충성스럽고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는 것을 質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肅宗【肅宗은 章帝의 묘호이다.】의 玄孫이니, 재위가 1년이고 壽가 9세이다.

[丙戌]本初元年

[丙戌]本初元年이라

四月에 令郡國하야 擧明經하야 詣太學하니 自是로 遊學이 增盛하야 至三萬餘生이러라

本初 元年(병술 146)

4월에 郡國에 명하여 經學에 밝은 자를 천거해서 太學에 나오게 하니, 이로부터 遊學生이 점점 많아져서 3만여 명에 이르렀다.

○ 帝少而聰慧라 嘗因朝會하야 目梁冀曰 此는 跋扈【王氏曰 跋扈는 猶言彊梁也라 扈는 竹篱也라 水居者는 〈於〉水未至에 先作竹篱하야 候魚之入하니 水退면 小魚獨留하고 大者跳跋篱扈而出이라 故言跋扈也라】將軍也라하니 聞하고 深惡之하다 夏六月에 使左右로 置毒於煮餠【湯餠也라】하야 以進之하니 帝苦煩甚而崩이라 蠡吾侯志하야 卽皇帝位하니 時年十五라 太后猶臨朝聽政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質帝生才(纔)九歲에 而能面斥跋扈之姦하니 何其明智若是哉오 使於是時에 亟請太后하야 出御前殿하고 召宰輔大臣하야 共明證其罪而誅之면 則漢室之興을 猶未可量也라 惟其不能이라 是以로 言未脫口에 而餠中之毒이 已進矣니 哀哉인저

○ 황제는 어린데도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일찍이 조회할 때를 인하여 梁冀를 지목하며 말하기를 “이는 跋扈【王氏가 말하였다. “跋扈는 彊梁(흉포하다)이라는 말과 같다. 扈는 대나무로 만든 통발이다. 물가에 사는 자들은 물이 밀려오기 전에 먼저 대나무 통발을 만들어 고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물이 빠지면 작은 고기만 남고 큰 것은 통발을 뛰어넘어 나간다. 그러므로 큰 것을 跋扈라고 말한다.”】將軍이다.” 하니, 梁冀가 이 말을 듣고 매우 미워하였다. 여름 6월에 梁冀는 좌우의 측근을 시켜 삶은 떡【煮餠은 삶은 떡이다.】에 독약을 넣어올리게 하니, 황제가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번민하다가 별세하였다. 梁冀蠡吾侯를 맞이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太后가 그대로 조정에 臨御하여 정사를 다스렸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質帝는 태어나서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跋扈하는 간신을 대면하여 배척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밝고 지혜로움이 이와 같았는가. 만일 이때에 속히 太后에게 청하여 前殿(正殿)으로 나오게 하고 宰輔와 大臣들을 불러서 함께 梁冀의 죄를 명백하게 증명하고 처형했더라면 漢나라 皇室의 중흥을 오히려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떡 속의 독약이 이미 올려졌으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