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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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紀

後梁紀

太祖皇帝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五代紀※

※ 按梁, 唐, 晉, 漢, 周가 舊各有一代之史러니 本朝歐陽文忠公이 始刪爲五代史하니 司馬溫公所修資治通鑑이 雖取歐公一二論說이나 而所援引事는 多是舊史니 其言辭詳略이 與歐陽公五代史로 多有同異하니라

太祖皇帝※ 在位七年이요 壽六十一이라

※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從黃巢爲盜러니 背降于唐하니 僖宗이 賜名全忠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니라 昭宗朝에 進封梁王하야 挾天子以令天下라가 遂移唐祚하니라

五代紀※

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歐陽文忠公(歐陽脩)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司馬溫公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歐陽公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歐陽公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後梁紀

[ 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 太祖皇帝]는 이름이 [ 晃]이고 성이 [ 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 溫]이다. [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 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 僖宗]이 [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昭宗 때에 승진하여[ 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丁卯]唐天祐四年

[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에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 太祖皇帝][ 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春三月에 唐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한대 梁王이 更名【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梁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하다

봄 3월에 唐나라 昭宣帝가 御札을 내려梁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禪讓하자, [ 梁王]이 이름을 [ 晃]으로 고치고【更은 平聲(고침)이고, 晃은 胡廣反(황)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고昭宣帝를 받들어濟陰王으로 삼았다.昭宣帝를 曹州로 옮겨 圍籬安置하고 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

○ 是時에 惟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李克用이요 鳳翔은 李茂貞이요 淮南은 王偓이라】이 稱天祐하고 西川王建이라 】이 稱天復【天祐, 天復은 竝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昭宣帝는 未有年號하니라 】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이때에 오직 河東, 鳳翔, 淮南만이【[頭註] 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 李克用]이고, 鳳翔은 李茂貞이고, 淮南은 [ 王偓]이다.】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西川은【西川은 [ 王建]이다.】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天祐와 天復은 모두 昭宗의 연호이니, 天復이 먼저이고 天祐가 뒤이다. 昭宣帝는 年號가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梁나라의 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蜀王이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이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이 封爲晉王이라 後에 其子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라 蜀王王建이니 唐昭宗이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蜀王(王建)]이 [ 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 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 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 李克用]이 [ 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昭宗이 [ 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 莊宗]이다. [ 蜀王]은 [ 王建]이니, 唐나라 昭宗이 [ 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 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 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羸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岐王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이요 名은 文通이라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에 封岐王하고 唐莊宗이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岐王(李茂貞)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紀律이 없었다. 唐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岐王李茂貞이 鳳翔을 점거하니, 本姓은 이고 이름은 文通이다. [ 僖宗] 때에 공을 세워 李茂貞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昭宗 때에 岐王에 봉해졌으며, 後唐의 [ 莊宗]이 秦王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後唐[ 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梁이 以武安節度使馬殷으로 爲楚王하다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梁나라가 武安節度使[ 馬殷]을 [ 楚王]으로 삼았다. - [ 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 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以吳王로 爲吳越王하다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吳王錢鏐吳越王으로 삼았다. - 錢鏐가 杭州를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淸海節度使劉隱으로 爲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淸海節度使劉隱南海王으로 삼았다. - 劉隱이 廣州를 점거하여 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國號를 漢이라고 고쳤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威武節度使王審知로 爲閩王하다 〈黃巢亂에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以權知荊南留後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威武節度使王審知閩王으로 삼았다. - [ 黃巢]의 난리에 王審知가 福州를 점거하여閩中과 嶺南의 다섯 州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王延政이 建州에 있으면서殷이라고 이름하였는데, 後晉의 [ 齊王] 때에 南唐이 멸망시켰다.- 權知荊南留後[ 高季昌]을 節度使로 삼았다.- [ 高季昌]이 江陵을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9월에 [ 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에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寨塹【寨는 本作砦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而守之하다

梁나라가 保平節度使康懷貞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潞州를 공격하게하니, 晉나라 昭義節度使李嗣昭가 성문을 닫고항거하며지켰는데, 康懷貞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보름이 지나도록함락하지못하였다. 이에 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夾寨塹이라 이르며【寨는 본래 砦로 쓰니, 목책이다. 塹(참호)은 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지켰다.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이라〉

契丹 - 耶律阿保機가 처음으로 건국한 元年이다. -

[戊辰]

[戊辰]〈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蜀高祖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에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 高祖][ 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正月에 晉王克用이 薨하니 其子存勖이 嗣爲晉王하다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都指揮使라 】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存勖小名이라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克用이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寇之平에 功爲第一이어늘 上源之變을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라 然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에 恥行墨勅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에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이 遠矣라 故로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는 蓋以此也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喪不二事라 故로 春秋於背喪而卽戎者에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는 存亡繫焉일새 然後에 從權制而無避하니 此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라 若李存勖夾寨之戰을 君子深有取者는 與是類耳라 蓋夾寨는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라 使存勖이 於是時에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아 是以로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에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이 大矣로다

정월에 [ 晉王][ 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存勖]이 뒤를 이어 [ 晉王]이 되었다. [ 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 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周德威]【[ 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 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 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 李亞子]는 [ 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 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 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 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 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 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 淮南張顥【左牙指揮使라 】弑弘農威王楊偓諡也라 】하고 立其弟隆演하야 爲留後徐溫으로 弑이러니 復攻하야 殺之하니라 】하다 〈楊行密이 據淮南이러니 其子이 嗣爲弘農郡王하고 國號吳라 後爲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淮南의 [ 張顥]가【[ 張顥]는 左牙指揮使이다.】弘農威王(楊偓)을 시해하고楊偓의 시호이다.】 그 아우楊隆演을 세워留後로 삼았다.【[ 張顥]가 徐溫과 함께 楊偓을 시해하였는데, 徐溫이 다시 [ 張顥]를 공격하여죽였다.】 - 楊行密이 淮南을 점거하였는데, 그 아들이 뒤를 이어 弘農郡王이 되고 국호를 吳라 하였다. 뒤에 徐知誥에게 찬탈당하여 마침내 南唐이 되었다.-

○ 契丹 〈耶律阿保機改名이라 二年이라〉

契丹 - 耶律阿保機가 이름을 으로 고쳤다. 2년이다. -

[己巳]

[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梁主遷都洛陽하다

[ 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辛未]

[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三月에 梁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卒하고 其弟이 襲位하다

3월에 梁나라 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죽고 그의 아우劉巖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 八月에 燕王守光이 卽皇帝位하야 〈劉仁恭之子也니 據幽州하니라〉國號를 大燕이라하다

8월에 燕王劉守光이 황제에 즉위하여 - 燕王劉守光劉仁恭의 아들이니, 幽州를 점거하였다. - 국호를 大燕이라 하였다.

晉王이 聞燕王守光稱帝하고 大笑曰 俟彼十年하야 吾當問其鼎矣【左傳에 楚子伐陸渾之戎하야 遂至于洛하고 觀兵于周郊하니 定王이 使王孫滿으로 勞[[楚(王)[子]]]어늘 [[楚(王)[子]]]가 問鼎大小輕重한대 對曰 在德이요 不在鼎이라 有昏德하야 鼎遷于殷하야 載祀六百하고 殷暴虐하야 鼎遷于周하니 德之休明이면 雖小必重이요 其姦回昏亂이면 雖大必輕이라 昔에 成王이 定鼎于郟鄏에 卜世三十이요 卜年七百이니 天所命也라 周德雖衰나 天命未改하니 鼎之輕重을 未可問也라하니라 】리라

[ 晉王]은 燕王劉守光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春秋左傳》 宣公 3년에 [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 定王]이 王孫滿으로 하여금 [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王孫滿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桀王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紂王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 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契丹主 五年

契丹主 〈五年이라〉

契丹主 - 5년이다. -

[壬申]

[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梁主疾增甚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에 不意太原餘孽【目晉王也라 】이 更昌熾如此하니 吾觀其志不小라 天復奪我年하니 我死면 諸兒는 非彼敵也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哽咽하야 絶而復蘇하니라

[ 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 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 梁高季昌【荊南節度使라 梁錫爵渤海王이러니 後改名季興하니라 唐莊宗이 封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이 潛有據荊南之志하야 乃奏築江陵外郭하야 增廣之하다

梁나라 [ 高季昌]이【[ 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 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 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 莊宗(李存勖)]이 [ 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 梁郢王友珪【梁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梁主愛假子友文之妻하야 將立友文爲嗣라가 遂爲友珪所弑하니라 】의 僕夫馮廷諤이 弑梁主어늘 友珪卽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朱溫이 爲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에 刑虐不悛하고 戕害無辜하며 不念聚麀之恥하야 釀成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梁나라 [ 郢王][ 朱友珪]의【[ 郢王][ 朱友珪]는 梁나라 [ 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 梁主]가 養子인 [ 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 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 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마부인 [ 馮廷諤]이 [ 梁主]를 시해하자, [ 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朱溫]이 [ 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 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 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契丹主 耶律億六年

○ 契丹主 〈耶律億六年이라 其弟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不治하니라〉

契丹主 - 耶律億의 6년이다. 그 아우耶律剌葛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않았다.-

均王
均王 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均王※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 初名은 友貞이러니 更名하니 朱溫第三子라 諡曰末帝

[ 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 均王]은 처음 이름이 [ 友貞]이었는데 이름을 [ 瑱]으로 고쳤으니, [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 末帝]라 하였다.

[癸酉]

[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梁主乾化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 梁主][ 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趙巖【駙馬都尉이니 尙太祖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이어늘 均王友貞이 密與之謀誅友珪할새 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令公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袁象先【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하다 庚寅旦에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友珪聞變하고 與妻張氏와 及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廷諤亦自殺이라 象先, 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하고 又更名하다

梁나라 [ 趙巖]이【[ 趙巖]은 駙馬都尉이니, [ 太祖]의 딸인 [ 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 均王][ 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 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 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楊令公(楊師厚)에게楊師厚(楊令公)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楊師厚를 설득하기를 “[ 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袁象先袁象先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 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 袁敬初]는 [ 太祖]의 누이인 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도모하게하였다. 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袁象先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 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 張氏] 및 [ 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 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 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袁象先과 [ 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 均王]을 맞이하자, [ 均王]이 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 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 瑱]으로 고쳤다.

○ 晉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王緘하야 草露布【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凝]重이라하니라 】한대 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晉나라 [ 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 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 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 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 晉王]이 掌書記[ 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宋均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 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 契丹主弟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契丹主의 아우耶律剌葛 등이 배반하자 그 도당을 주벌하고풀어주었다.

[乙亥]

[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二月에 梁魏博軍이 亂하야 劫節度使賀德倫하고 求援於晉이어늘 晉王이 引兵하야 進據臨淸하야 與劉鄩夾河爲營하다

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 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 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劉鄩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梁主疎忌宗室하고 專任趙巖德妃【帝之母也 】兄弟張漢鼎, 漢傑과 從兄弟漢倫, 漢融하야 咸居近職하야 參預謀議하다 等이 依勢弄權하야 賣官鬻獄하고 離間舊將相하니 敬翔, 李振이 雖爲執政이나 所言이 多不用이라 이 每稱疾不預事하야 以避, 之族하니 政事日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 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 趙巖] 및 德妃德妃는 皇帝의 어머니이다.】형제인 [ 張漢鼎]‧[ 張漢傑]과 종형제인 [ 張漢倫]‧[ 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 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敬翔李振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李振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 趙巖]과 [ 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丙子]

[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春二月에 梁主屢趣(促)劉鄩하야 與晉王戰이러니 兵이 大敗라 王檀【匡國節度使라 】이 密疏하야 請發關西兵하야 襲晉陽한대 梁主從之하야 兵至晉陽하야 夜急攻之하니 城幾陷者數四라 昭義節度使李嗣昭 遣牙將石君立하야 救之하니 梁兵死傷者什二三이라 王檀이 引兵大掠而還하니 梁主劉鄩敗하고 又聞王檀無功하고 歎曰 吾事去矣라하니라

봄 2월에 [ 梁主]가 여러 번 劉鄩을 재촉하여[ 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劉鄩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王檀]이【[ 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 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李嗣昭가 牙將[ 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 梁主]는 劉鄩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 契丹主改元神冊하다

契丹主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戊寅]

[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春에 晉兵이 侵掠至鄆, 濮而還이어늘 梁敬翔이 上疏曰 國家連年喪師에 疆域日蹙이라 陛下居深宮之中하야 所與計事者는 皆左右近習이니 豈能量敵國之勝負乎잇가 先帝之時에 奄有河北하고 親御豪傑之將호되 猶不得志【不得志는 謂不得志于晉이라 】어시늘 今敵至鄆州로되 陛下不能留意하시니 必若乏才인댄 乞於邊陲自效하노이다 疏奏에 , 之徒 言怨望이라하니 梁主遂不用하다

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敬翔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이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상소문을 올린 뒤에 [ 趙巖]과 [ 張漢鼎]의 무리가 “敬翔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 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吳徐知誥 爲淮南節度行軍副使하다 〈知誥後簒吳하니 是爲南唐이라〉知誥吳王盡恭하고 接士大夫以謙하며 御衆以寬하고 約身以儉이라 以吳王之命으로 悉蠲天祐十三年以前逋稅【欠負官物과 亡匿不還을 皆謂之逋라하니라 】하고 餘俟豐年하야 乃輸之하고 求賢才, 納規諫하고 除姦猾, 杜請託하니 於是에 士民이 翕然歸心하야 雖宿將悍夫라도 無不悅服이러라 以宋齊丘로 爲謀主하니 由是로 江淮間에 曠土【空曠不耕之土也라 】盡闢하고 桑柘滿野하야 國以富强하니라

吳나라 徐知誥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徐知誥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吳王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吳王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徐知誥宋齊丘를 謀主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江淮 지방의 빈 땅이【曠土는 비워두고 경작하지 않는 농토이다.】 모두 개간되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들에 가득하여 국가가 부강하게 되었다.

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契丹主 - 孔子의 사당을 만들고 친히 배알하였다. -

[己卯]

[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 蜀乾德元年이요 吳宣王楊隆演武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기묘(919) - 晉‧岐는 唐나라 天祐 1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5년이다. ○ 蜀나라는 乾德 元年이고, 吳나라는 宣王楊隆演의 武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徐溫【少販鹽이러니 及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行密吳王하니라 】이 自以權重而位卑라하야 勸吳王建國稱帝而治러니 吳王이 不許하다 夏에 卽吳國王位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爲大丞相하고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하다

吳나라 徐溫徐溫은 젊었을 적에 소금을 팔았는데, 楊行密이 일어나자 楊行密의 막하에 예속되었다가 마침내 吳나라의 將相이 되었다. 天復 2년(902)에 楊行密吳王에 봉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력은 막중하지만 지위가 낮다고 하여 吳王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여통치할 것을 권하였는데, 吳王(楊隆演)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에 吳王吳國王에 즉위하였다.楊隆演이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天子의 禮를 사용하여 徐溫을 大丞相으로 삼고 楊隆演이 섭행하니, 楊隆演楊行密의 둘째 아들이다.】

蜀主王建이 殂하니 太子이 卽皇帝位하다

[ 蜀主][ 王建]이 죽으니, 太子[ 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이 擊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橫衝은 軍都之號也라 】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 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 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壖은 而緣反(연)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 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 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 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王氏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 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石敬瑭]과 [ 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 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 高祖]가 되었고, [ 劉知遠]은 漢나라 [ 高祖]가 되었다.-

○ 契丹이 城遼陽하다

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歷年圖曰 太祖始以黃巢降將으로 秉旄宣武僖宗이 以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하고 逞其詐力하야 蠶食諸夏하야 地廣兵彊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均王은 膏粱之子로 材不過人이어늘 棄敬翔, 王彦章하고 而用趙巖, 張歸霸하야 以與莊宗爲敵하니 能無亡乎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 太祖(朱溫)]는 처음에 [ 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 僖宗]이 [ 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敬翔王彦章을 버리고 [ 趙巖]과 [ 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 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