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紀
資治通鑑總要通論(瀋榮)
陽節潘氏(潘榮)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를 다스림에 道가 있으니 賢者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함을 분명하게 할 뿐이요, 천하를 다스림에 法이 있으니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결단할 뿐이요, 천하를 다스림에 근본이 있으니 禮樂과 敎化를 순하게 할 뿐이다. 賢者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함을 분명히 하면 군자가 등용되고 소인이 물러나며,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결단하면 공이 있는 자가 권면되고 죄가 있는 자가 징계되며, 禮樂과 敎化를 순하게 하면 萬事가 다스려지고 人心이 기뻐하여 천하가 화목해진다. 세 가지의 요점은 군주 자신에게 있으니, 몸이 바르고 마음이 성실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진다. 그러므로 唐‧虞와 三代의 정치는 순전히 禮樂을 써서 敎化가 크게 행해져 말하지 않아도 믿고 성내지 않아도 두려워해서 함이 없이 저절로 다스려졌으니, 이와 같이 할 뿐이다. 그런데 나라가 쇠퇴함에 미쳐서 夏나라는 妺喜로, 商나라는 妲己로, 周나라는 褒姒로 인해 망하였으니, 이는 안일함과 욕망이 사람을 망쳐서 모든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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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王室이 동쪽(洛陽)으로 遷都한 뒤에는 王者의 정사가 행해지지 못하여 諸侯들이 참람한 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夫子(孔子)께서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오셔서 《春秋》를 지어 王化를 바로잡으셨는데,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왕실이 침체하여 국토가 분열되고 君臣間이 이산되었다. 그러므로 孟子께서 魏나라를 떠나齊나라에 가시어 王道를 말씀해서 人心을 바로잡으셨으니, 이는 모두 聖賢이 萬世의 生民을 위하여 하신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로 王者의 자취가 終熄되고 은택이 다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사사로이 하고 선비들은 자신의 학문을 사사로이 해서 異論이 蜂起하여 聖學이 황폐해졌다. 秦‧漢 이후로는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한결같지 않아 다 들기가 어렵기에 우선 紀綱에 가장 관계되는 것을 취하여 논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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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高之興은 去古未遠하고 豁達大度하야 從諫如流하니 可與有爲之君也라 然以輕士嫚罵하고 凌辱大臣하야 張良이 托以辟穀하고 何, 參, 平, 勃이 以詐以力하니 天下雖安이나 而古禮不復하고 古樂不作이 從玆始矣니 可勝惜哉아 漢文은 沈潛而不能剛克하고 漢武는 高明而不能柔克이라 西向讓三하고 南向讓再하니 夫何踐祚之初에 示民以詐오 短喪之制를 又安用之리오 故로 民雖富庶나 而修己立誠之道 幾乎息矣요 窮兵黷武하고 虐民事神하야 而海內虛耗러니 至輪臺之詔하야 天理藹然하니 其悔心之萌乎인저 不然이면 則亦亡秦之續耳리라 漢昭는 十四而識上官桀之詐하니 似可有爲로되 惜霍光不學無術하야 不能以道事君하고 光武는 有志於治나 而輔相亦非其人이라 孔明은 有王佐之才로되 而當姦雄僭竊之際하고 董子는 雖有大意【董子는 蜀漢董和也라 昭烈이 以和爲邑宰러니 以禮樂敎民이라 一說에 卽仲舒也라 大志는 謂王道也라 】나 而亦不得其位하며 鄧騭(즐), 楊震之徒는 不識保身之機하야 外戚之禍와 內竪(豎)之變으로 中移於王莽하고 卒壞於董卓하고 曹操承之하야 以移漢祚하니 又何言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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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나라 高祖가 일어남은 옛날과의 거리가 멀지 않고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諫言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으니, 더불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군주였다. 그러나 선비를 경시하여 함부로 꾸짖고 대신들을 능욕하였다. 그리하여 張良은 辟穀을 하여 신선이 된다고 칭탁하고 떠나갔으며 蕭何‧曹參‧陳平‧周勃은 속임수와 힘을 사용하였으니, 천하가 비록 편안하였으나 옛 禮가 회복되지 못하고 옛 음악이 일어나지 못함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文帝는 沈潛하였으나 剛克하지 못하였고, 武帝는 高明하였으나 柔克하지 못하였다. 〈文帝가〉 西向하여 세 번 사양하고 南向하여 두 번 사양하였으니, 어찌 즉위하는 초기에 백성들에게 거짓을 보인단 말인가. 부모의 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또 어찌 쓴단 말인가. 그러므로 백성들이 비록 풍족하였으나 군주가 몸을 닦아 성실함을 세우는 道가 거의 무너지게 되었다. 〈武帝는〉 兵難을 궁극히 하여 무력을 함부로 사용하며 백성들을 모질게 대하고 神을 섬겨서 海內가 텅 비었는데 輪臺의 詔書에 이르러 天理가 성하게 일어났으니, 이는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한 망한 秦나라의 연속일 뿐이다. 昭帝는 14세에 上官桀의 속임수를 알았으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霍光이 배우지 않아 무식해서 道로써 군주를 섬기지 못하였고, 後漢의 光武帝는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보필하는 자들이 또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諸葛孔明(諸葛亮)은 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가 있었으나 姦雄(曹操)이 참람하여 도둑질하는 즈음을 당하였고, 董子는 비록 王道를 행하려는 큰 뜻이 있었으나【董子는 蜀漢의 董和이다. 昭烈皇帝(劉備)가 董和를 邑宰로 삼았는데, 禮樂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一說에는 董仲舒라 한다. 큰 뜻은 王道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며, 鄧騭과 楊震의 무리는 몸을 보존하는 기미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外戚(王莽)의 禍와 內竪(宦官)의 변고로 중간에 〈天子의 자리가〉 王莽에게 옮겨 가고 마침내 董卓에게 파괴되었으며, 曹操가 이를 이어 漢나라의 國運을 바꾸었으니, 또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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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之太宗은 號爲英主라 百戰而有天下하야 偃武修文하고 勵精求治하야 身致太平하고 刑措不用하니 亦希世之賢君也라 然以君德論之하면 則用宮人私侍하야 以劫其父하고 納巢刺王妃而封子明하니 其謬已甚이라 若非魏徵辰嬴之喩면 則明母又繼文德而后矣리라 閨門如此하니 其子孫이 又烏得有正家之法乎아 是故로 武氏經事先帝하고 太眞已配壽王하며 中宗이 親爲點籌於韋后하고 明皇이 賜洗兒錢於貴妃하야 卒爲天下後世非笑하니 豈不皆由太宗垂統之所致歟아 房, 杜, 王, 魏, 無忌, 遂良, 狄仁傑, 張九齡, 姚崇, 宋璟, 李泌, 裴度之賢으로도 猶不能救其君於蕩敗禮義之際하야 而或以見疎하며 張柬之, 桓彦範, 崔玄暐, 袁恕己, 敬暉等은 討武氏之亂하고 反正廢主하야 有大功於唐이로되 而凌辱以死하며 韓愈, 陸贄는 勤勤懇懇於章奏之間이로되 而亦以獲罪하니 它(他)尙何說哉아 蓋唐之亂也 始於武, 韋하야 危於貴妃하고 壞於藩鎭하고 亡於宦官이라 而李勣, 李義府, 許敬宗, 鄭愔, 崔湜, 武三思, 李林甫, 楊國忠, 李輔國, 盧杞, 元載之流가 與后妃宦竪로 內外交締하야 始終爲難하니 非一朝一夕之故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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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 太宗은 영특한 군주로 이름이 났다. 백번 싸워 천하를 소유하고는 武를 억제하고 文을 닦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해서 몸소 태평을 이룩하고 형벌을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았으니, 또한 세상에 드문 賢君이다. 그러나 군주의 德을 가지고 논한다면 사사로이 모시는 宮人을 사용하여 자기 아버지(高祖)를 위협하였고, 巢刺王妃를 받아들여 아들明을 봉하였으니, 그 잘못이 너무 심하다. 만약 魏徵의 辰嬴의 비유가 없었더라면 明의 어미가 또다시 文德皇后를 이어 后妃가 되었을 것이다. 閨門이 이와 같으니 그의 자손들이 또 어찌 집안을 바로잡는 법도가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武氏(則天武后)는 先帝인 太宗을 섬긴 적이 있었고 太眞(楊貴妃)은 이미 壽王의 배필이었으며, 中宗은 친히 韋皇后를 위하여 주판을 놓아 주었고 明皇(玄宗)은 安祿山의 洗兒錢을 楊貴妃에게 하사하여 마침내 天下와 後世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어찌 모두 太宗이 나쁜 전통을 드리운 소치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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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秦이 以呂易嬴하니 是嬴亡於莊襄之手요 弱晉이 以牛易馬하니 是馬滅於懷愍之時라 隋楊廣은 弑其父而自立하야 卽以敗亡하니 又何足與論治天下之道乎아 蓋以趙高, 楊素之姦으로 而致扶蘇, 楊勇之死하니 是天所以速秦, 隋之滅也라 且秦政之暴가 過於隋堅하고 楊廣之惡이 浮於胡亥하니 覆宗絶祀가 不亦宜乎아 宋, 齊, 梁, 陳으로 至於五季히 禍亂相尋하야 戰爭不息하니 名爲君臣이나 實爲仇敵이라 世降至此하야 壞亂極矣라 惟柴世宗은 粗有三代之風이나 而使之不壽하니 豈天將啓宋世之治也歟아 且自晉武之後로 惠懷無親하야 骨肉相殘하고 群胡乘釁하야 濁亂中原하니 生民塗炭이 未有甚於此時者也라 王, 謝, 陶, 阮의 富貴風流와 節行標致가 沛乎有餘하야 江左之民이 亦賴以安이라 然이나 朝廷之得失과 姦雄之簒弑는 則亦邈乎其不能正也라 逮拓跋氏興하야 佐以崔浩, 高允之徒하야 旣治且安하고 至於孝文하야 風移俗易하야 庶幾爲禮義之邦矣라 宇文高祖와 完顔世宗이 其亦賢乎인저 江左君臣이 寧不知愧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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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악한 秦나라는 呂氏로 嬴氏를 바꾸었으니 이는 嬴氏가 莊襄王의 손에 멸망한 것이요, 약한 晉나라는 牛氏로 司馬氏를 바꾸었으니 이는 司馬氏가 懷帝와 愍帝의 때에 멸망한 것이다. 隋나라 楊廣은 그 아버지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즉시 패망하였으니, 또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를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趙高와 楊素의 간악함으로 扶蘇와 楊勇을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秦나라와 隋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다. 또 秦政(始皇帝)의 포악함이 隋나라 楊堅보다 더하고 楊廣의 죄악이 胡亥보다 더하였으니, 宗族을 전복시키고 後嗣를 끊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宋‧齊‧梁‧陳으로부터 五季(五代)에 이르기까지 禍亂이 서로 이어져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니, 명색은 군신간이나 실제로는 원수와 적이었다. 세상이 나빠져서 이에 이르러 파괴되고 혼란함이 지극하였다. 오직 周나라 柴世宗은 다소 三代의 遺風이 있었으나 하늘이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마도 하늘이 장차 宋나라의 다스림을 열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晉나라 武帝 이후로 惠帝와 懷帝가 친애함이 없어서 골육간에 서로 해치고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타고서 中原을 혼란하게 하니, 生民들이 塗炭에 빠짐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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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三年之喪은 自天子로 達於庶人이어늘 文, 景以後로 能行之者 惟晉武帝, 魏孝文, 周高祖數君而已니 此夫子所謂不如諸夏之亡也라 然自晉至隋히 南北之君이 率多不得其死하야 盡以國亡族滅하니 其故는 何也오 蓋得之以不仁하니 上行而下效라 身爲天子하야 死無噍類하니 嗚呼哀哉라 至於宋祖하야는 未嘗爲學이러니 晩好讀書라 歎曰 堯舜之世에 四凶之罪가 止於投竄하니 何近代法網之密邪아하고 於是立法에 鞭扑이 不行於殿陛하고 罵辱이 不及於公卿이라 故臣下得以有爲하야 而忠君愛國之心이 油然而興矣라 命曹彬下江南엔 則戒以切勿暴掠生民이라 故로 彬至城下에 焚香約誓하야 一不妄殺하고 凱還之日에 行李蕭然하며 遣吳越歸國而使知不留之意라 處將相之間엔 則喩以相安之情하고 待諸降主以賓禮하며 易諸節鎭以儒臣하고 使擧德行孝悌之士하야 以隆禮義廉恥之風하니 嗚呼라 人主如是면 亦庶乎其知九經之義哉인저 且曰 洞開重門하야 正如我心하야 少有邪曲이면 人皆見之라하니 蕩蕩平平之道 不外是矣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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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의 父母喪은 天子로부터 庶人에 통용되는데 漢나라 文帝와 景帝 이후로 이것을 행한 자는 오직 晉나라 武帝와 北魏의 孝文帝, 北周의 高祖 등 몇 명의 군주일 뿐이니, 이는 孔子의 이른바 ‘〈夷狄에게도 君主가 있으니〉 諸夏(中國의 여러 諸侯國)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晉나라로부터 隋나라에 이르기까지 南北朝의 군주가 대부분 제대로 죽지 못하여 모두 나라가 망하고 종족이 멸망하였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不仁함으로써 천하를 얻어 윗사람이 이것을 행함에 아랫사람들이 본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天子가 되었으나 죽은 뒤에는 후손들이 남은 무리가 없이 다 죽었으니, 아! 애통하다. 宋나라 太祖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말년에 독서하기를 좋아하며 한탄하기를 ‘堯舜의 세대에 四凶의 죄가 귀양가는 데 그쳤는데, 어찌하여 근대에는 法網이 이처럼 치밀하단 말인가?’ 하고는 이에 법을 제정할 적에 채찍과 매질이 殿陛에서 행해지지 않고 꾸짖음과 욕이 公卿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어서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曹彬에게 명하여 江南을 정벌할 때에는 절대로 生民들을 모질게 대하거나 노략질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曹彬은 성 아래에 이르자 焚香하고 맹세하여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개선하는 날에 행장이 초라하였으며, 항복한 吳越王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억류하지 않겠다는 뜻을 알게 하였다. 將相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는 서로 편안한 마음으로 깨우치고 항복한 여러 군주들을 賓客의 禮로 대우하였으며, 여러 節鎭(鎭의 節度使)들을 儒臣으로 바꾸고 德行이 있고 孝悌하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禮義와 廉恥의 기풍을 높이게 하였으니, 아! 군주가 이와 같다면 또한 九經의 뜻을 거의 알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궁궐문을 크게 열어 바로 내 마음과 같게 해서 조금이라도 간사하거나 굽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하라.’ 하였으니, 넓고 공평한 道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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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은 즉위하던 초기에 崇文館을 개설하고 여러 왕과 재상들과 함께 서적을 열람하였으며, 다음으로 文章과 德行이 있는 선비를 뽑아 王子들을 가르치고 敎導하게 하였고, 또 경계하기를 ‘반드시 忠孝를 우선하라.’ 하였으며, 또 文學을 振作하여 사방을 風動하니 인재가 이에 크게 배출되었다. 仁宗에 이르러서는 공손함과 검소함을 힘써 행하고 몸을 바루어 사람들에게 솔선을 보여서 始終如一하였다. 그리하여 升遐한 날에 비록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분주히 달려와 슬피 울부짖어 父母의 喪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으니, 人心을 얻지 않고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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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宗은 뜻을 다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할 것을 도모하여, 위로 唐虞(堯舜)를 사모하고 王安石에게 마음을 쏟았다. 君臣間에 이 道를 이루려 하여 일찍이 堯‧舜으로 기약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東周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세상에서는 막 훌륭한 정치를 기대하여 행여 다시 都兪吁咈의 정치를 볼까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王安石의 학문이 이미 고집스러워 가리워졌고, 흉악한 자와 간사한 자들을 등용하여 다스려짐을 뒤집어서 혼란함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소란스러워 사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게 하였으며, 마침내 여러 姦臣들이 뒤이어 등용되어서 靖康의 禍를 빚어냈으니, 인물을 등용함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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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宋之人君은 仁厚有餘而剛斷不足하고 宋之人臣은 德業有加而道則未盡이요 明乎二帝三王之道하야 以接夫孟氏之傳者는 又謹其進退之義라 故로 終宋之世토록 亦只如此而已하니 使學者로 不能無遺恨於斯世也라 且眞宗이 不知寇準之貶하고 神宗이 不識惠卿之姦하니 又豈不爲明君之累邪아 至於哲宗하야는 昏庸尤甚하야 信任姦慝하고 屛逐忠賢이라 却問 大防이 何以至虔州오한대 左右不對하니 亦可羞也라 岳飛破虜하야 幾還兩宮이어늘 秦檜矯詔하야 班師而殺之로되 高宗이 若不聞也하니 通天之罪를 尙忍言哉아 張浚, 趙鼎, 眞德秀, 魏了翁之賢은 立朝未久하야 非惟不能以正群邪之罪요 而反有貶責竄逐之寃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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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나라의 임금은 仁厚함은 유여하였으나 剛斷이 부족하였고, 宋나라의 신하는 德業은 유여하였으나 道가 미진하였으며, 二帝三王의 道에 밝아서 孟氏(孟軻)의 전함을 이은 자들은 또 進退하는 義理를 삼갔다. 그러므로 宋나라를 마치도록 또한 다만 이와 같았을 뿐이니,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宋나라 시대에 遺恨이 없지 못하게 하였다. 또 眞宗은 寇準이 좌천됨을 알지 못하였고 神宗은 呂惠卿의 간악함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 어찌 현명한 군주의 累가 되지 않겠는가. 哲宗에 이르러서는 어둡고 용렬함이 더욱 심하여 간사한 자들을 신임하고 忠賢들을 쫓아내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呂大防이 어찌하여 虔州에 귀양을 갔는가?’ 하고 묻자, 左右의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수치스러울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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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檜, 韓侂冑, 史彌遠, 賈似道는 元兇으로서 首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同類들을 등용하여 온 조정에 가득 채우고는 다만 자기 한 몸의 계책만 세워 끝내 나라를 망쳤는데도 군주는 이들을 忠臣이라고 여겼으니, 어찌 다시 三代의 훌륭한 정치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文天祥은 國事가 이미 틀려버린 뒤에 정승에 임명되어 자기 한 몸으로 3백년 綱常의 무거운 책임을 맡아서 顚沛하고 流離하는 즈음에 조용히 義理를 따라 죽어서 국가의 광채가 되었으니, 이 또한 어찌 祖宗朝에 현자를 높이고 선비를 공경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宋나라가 일어난 것은 大臣의 어짊 때문이었고, 宋나라가 망한 것은 大臣의 간악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大臣이 나라를 그르침이 있었으나 또한 大臣의 보답이 있었던 것이니, 人君이 된 자가 邪와 正을 분별하여 그 근본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을 바루어 朝廷을 바로잡고 朝廷을 바루어 百官을 바로잡으니, 百官이 바루어지면 萬民이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고 萬民이 바루어지면 사방 오랑캐들이 공물을 바치고 복종하여 天下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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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 西戎, 南蠻, 北狄은 예로부터 있었다. 舜임금은 諸馮에서 출생하시니東夷의 사람이었고, 文王은 岐周에서 출생하시니西夷의 사람이었다. 匈奴, 突厥, 五胡, 北魏, 契丹, 女眞이 대대로 지위와 칭호가 있었으니, 만약 우리 中華에 들어올 만한 틈이 없었다면 周나라 幽王이 犬戎에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唐나라 明皇(玄宗)이 安祿山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며, 呼延晏과 劉曜가 晉나라 도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懷帝와 愍帝가 강한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金나라의 幹离不粘罕이 宋나라의 汴京을 침범하지 못하여 徽宗과 欽宗이 사막의 북쪽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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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道가 있으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와서 복종하여 萬邦이 모두 아름답고, 천하에 道가 없으면 兵亂의 禍가 다만 四夷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蕭墻(집안의 병풍)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道를 얻으면 다스려지고 그 道를 잃으면 혼란한 것이니, 堯舜의 道는 孝悌일 뿐이다. 자기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함은 唐虞의 다스림이요, 몸을 수고롭게 하여 노심초사한 것은 夏禹의 다스림이요, 六事로써 자책함은 成湯의 다스림이요, 〈無逸〉을 짓고 〈豳風 七月〉을 진열함은 文王‧武王‧成王‧康王의 다스림이며,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을 제거하여 백성들과 함께 스스로 새로워지고, 武를 억제하고 文을 닦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자 하여 德行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孝悌를 일으키며 禮義를 높이고 廉恥를 숭상함은 漢나라 高祖와 唐나라 太宗과 宋나라 太祖가 흥성한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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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世에 이르러서는 老莊의 허무함을 숭상하고 간사한 말을 믿어 패망함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다. 齊元(北齊의 後主인 高緯)은 周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으면서도 오히려 《老子》를 講하였고, 梁나라 武帝는 侯景에게 압박받으면서도 오직 佛學의 苦行과 空을 말하였다. 삼가 부처를 섬김과 보시의 많음이 梁나라 武帝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고, 道를 부지런히 받듦과 醮祭를 후하게 베풂이 또 어찌 道君(송나라 徽宗)보다 더하였겠는가. 그런데도 梁나라 武帝는 臺城에서 굶어 죽었으나 부처가 구원해 주지 않았고, 道君은 사막의 북쪽에서 욕을 당하였으나 道를 또한 듣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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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漢나라 이래로 三王의 道를 계승하지 못하고 佛老의 가르침이 도리어 明帝로부터 시작되었다. 永平年間에 天竺國에 사신을 보내어 佛經 42章을 얻어 와서 이것을 蘭臺石室에 봉함하여 보관하였고, 佛像을 淸凉臺와 顯陵‧節陵에 그렸으며, 靈帝는 처음 즉위하자 궁중에서 제사하여 받들었다. 그리고 또 하늘을 날아다녀 신선으로 변화하는 방법과 丹藥‧符籙의 방술과 神祠에 기도하는 醮祭의 법과 餓鬼 地獄에 빠진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老氏를 종주로 삼고 道敎라 이름한다. 晉‧魏 이래로 이 법이 점점 성하여 僧尼와 道士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元魏(北魏)의 孝文帝는 어진 군주라고 이름났으나 또한 사찰에 가서 齋를 올리고 講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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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趙의 石勒이 佛圖澄에 있어서와 先秦의 苻堅이 沙門 道安에 있어서와 後秦의 姚興이 鳩摩羅什에 있어서와 後魏의 拓跋太武(拓跋燾)가 寇謙之에 있어서와 唐나라 武宗이 趙歸眞에 있어서와 宋나라 道君(徽宗)이 林靈素에 있어서는 왕왕 스승의 禮로 섬겼으나 福利의 보답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모두 기이한 禍를 만나서 실패한 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나 미혹하여 깨닫지 못해서 천여 년 동안 폐단을 남겼으니, 漢나라 明帝가 어떻게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先儒가 말씀하기를 ‘佛老의 폐해가 楊朱와 墨翟보다 심하다.’ 하였는데, 더구나 다시 귀신의 괴이함과 사람의 요망함, 부정한 학설과 포악한 행실이 뒤섞여 함께 일어나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에 있어서이겠는가. 孟子가 말씀하기를 ‘楊朱와 墨翟의 道가 종식되지 않으면 孔子의 道가 드러나지 못한다.’ 하였고, 韓愈의 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승려와 도사)을 平民으로 만들고 그들의 책을 불태우고 그들의 거처(寺刹과 道觀)를 일반 사람들의 집으로 만들고 先王의 道를 밝혀 인도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아! 그 요점은 진실로 先王의 道를 밝힘에 있을 뿐이니, 이것이 성하면 저것이 쇠함은 자연의 이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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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才를 분별하고 정치하는 體統을 살피고 敎化를 아름답게 하고 人倫을 두터이 함은 이는 道를 밝히는 실제이다. 漢나라 武帝는 儒術을 좋아하여 董仲舒가 修己治人의 계책을 올렸으나 武帝가 더불어 논의한 상대는 公孫弘‧東方朔‧司馬相如의 무리들이었다. 그리하여 끝내 封禪을 일삼아 그 뜻을 방탕하게 하였으며, 宋나라 神宗은 王道를 사모하여 程伯子(程明道)가 옛날을 상고하고 학문을 바로잡고 뜻을 정하는 의논을 올렸으나 황제가 더불어 모의한 자는 王安石, 呂惠卿, 章惇, 蔡卞의 무리였다. 그리하여 이들이 新法을 창건하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인물을 등용하고 버리는 사이에 國家의 安危가 달려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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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紹不起면 則五族忠賢之禁不除요 劉裕不興이면 則藩鎭强臣之禍不息이요 朱溫不來면 則宦官宮妾之亂不止리라 然癰疽旣潰에 而大命隨之하니 蓋人君之喜用姦邪者는 冀得以從己之欲而已요 人臣之欺罔其君者는 亦欲以固其寵祿而已라 然君以逸欲滅國하고 臣以寵祿殺身하야 前車旣覆호되 後車不戒하야 及至君亡國滅이면 其臣이 又安得以獨存哉아 是故로 秦未亡에 而李斯, 趙高 先夷三族하고 漢未滅에 而宦官張讓等二千餘人이 已就誅夷하고 王莽이 盜竊神器로되 而傳首詣宛하고 梁冀七侯, 三后, 六貴人, 二大將軍, 卿將尹校五十七人이로되 無少長히 皆棄市하고 收其財貨하니 合三十餘萬萬이어늘 以充王府之用이라 明皇幸蜀에 李林甫斲棺鞭尸하고 楊國忠斷頭注槊하며 唐祚未終에 而先斬韓全誨等一百六十二人하고 復殺第五可範以下數百하야 寃號之聲이 徹于內外하며 崔胤之徒도 亦隨授首라 徽, 欽未亡에 而蔡京, 童貫, 王黼, 梁師成이 已先就戮하고 南宋未滅에 而賈似道先死于鄭虎臣之手하며 秦檜削奪官爵하고 韓侂冑梟首淮濱하니 由此觀之컨대 昔之壅蔽聰明하야 以圖利己者는 皆所以自滅而已니 可不戒哉아 故로 爲君難이요 爲臣不易니 治亂興亡之所由也를 可不愼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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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말엽에 袁紹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五族의 忠賢의 禁錮가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東晉 때에 劉裕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藩鎭의 강성한 신하들의 화가 그치지 않았을 것이요, 唐나라 말기에 朱溫이 오지 않았으면 宦官과 宮妾의 亂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큰 종기가 이미 터지자 큰 運命이 뒤따라 끊겼다. 人君이 간사한 자를 등용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를 바라서일 뿐이요, 신하가 군주를 속이는 것은 또한 자신의 寵祿을 견고히 하고자 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군주는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신하는 寵祿으로 자기 몸을 죽여서, 앞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도 뒷수레가 경계하지 아니하여, 군주가 죽고 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면 그 신하가 또 어떻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秦나라가 망하기 전에 李斯와 趙高가 먼저 三族이 멸망하는 화를 당하였고, 後漢이 멸망하기 전에 宦官인 張讓 등 2천여 명이 이미 죽임을 당하였고, 王莽이 神器(황제의 지위)를 도둑질하였으나 斬刑을 당하여 首級이 宛 땅에 이르렀고, 後漢 때에 梁冀는 侯가 7명, 后가 3명, 貴人이 6명, 大將軍이 2명, 卿‧將‧尹‧校가 57명에 이르렀으나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棄市를 당하였고, 그 재화를 몰수하자 모두 30여 萬萬이었는데 이것을 王府(國庫)의 財用에 충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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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인재의 吉凶(善惡)을 보면 국가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漢나라 儒者(董仲舒)가 말하기를 ‘그 義理를 바루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그 道를 밝히고 그 功을 계산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人品이 같지 않고 事業이 또한 다르니, 이는 成敗를 가지고 英雄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諸葛亮은 蜀에서 漢나라를 보필하였고 狄仁傑은 周나라를 뒤집어 唐나라로 만들었는데 그 마음은 똑같으며, 郭汾陽(郭子儀)은 長安과 洛陽 두 서울을 수복하여 종신토록 부귀를 누렸고 岳武穆(岳飛)은 金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을 마음먹었으나 몸이 權姦의 손에 죽었으니, 그 道는 똑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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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德이 睥睨神器하고 狐媚欺孤하야 恨文若九錫之勸而致之死하니 簒逆之所爲也요 子儀功蓋天下하고 位極人臣호되 杖郭曖肆言之失하고 而歸朝待罪하니 臣子之所安也라 平生姦僞라가 死見眞性은 操之所以如鬼也요 鞠躬盡力하야 死而後已는 亮之所以爲龍也라 蘇武는 持漢節於匈奴하니 是舍生而取義요 眞卿은 陳禍福於希烈하니 乃殺身以成仁이라 李陵, 衛律은 罪通于天하고 邦昌, 劉豫는 心委于虜라 霍光은 擁立二君이로되 而子孫夷滅하니 是履盛滿而不止也요 韓琦는 定策兩朝하야 而德望蓋世하니 識用舍(捨)行藏之道也라 陶潛은 爲晉處士하야 心逸而日休하고 揚雄은 爲莽大夫하야 心勞而日拙이라 諸葛入寇는 晉史自帝魏也요 丞相出師는 漢賊明大義也며 廢帝爲王은 唐經亂周紀也요 帝在房州는 萬古開群蒙也라 故로 自初命晉大夫爲諸侯以來로 千三百六十二年之間에 誅亂賊於旣死하고 正名分於當時하며 定褒貶於往前하고 示勸懲於來世하니 此綱目之所以繼獲麟而作也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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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孟德(曹操)이 神器를 노려보고 여우처럼 홀려 어린 군주를 속여서 九錫을 받지 말 것을 권한 것을 한하여 文若(荀彧)을 죽게 하였으니 이는 簒逆하는 자의 소행이요, 郭子儀는 功이 천하를 뒤덮고 지위가 신하의 최고 자리에 올랐으나 아들郭曖가 말을 함부로 한 잘못을 꾸짖어 곤장을 치고 조정에 돌아와 待罪하였으니 이는 臣子가 편안히 여기는 바이다. 평생 간사하게 속임수를 쓰다가 죽어서 진짜 性情을 나타낸 것은 曹操가 귀신과 같은 이유이고, 몸을 굽히고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둔 것은 諸葛亮이 龍이 된 이유이다. 蘇武는 匈奴에서 漢나라 節(깃발)을 잡고 있었으니 이는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한 것이요, 唐나라 顔眞卿은 李希烈에게 禍福을 말하였으니 이는 마침내 자기 몸을 죽여 仁을 이룬 것이다. 前漢의 李陵과 衛律은 흉노에게 항복하여 죄가 하늘에 통하였고, 宋나라의 張邦昌과 劉豫는 마음을 오랑캐에게 바쳤다. 前漢의 霍光은 두 군주(昭帝와 宣帝)를 옹립하였으나 자손이 멸망하였으니 이는 盛滿함에 처하고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요, 韓琦는 두 조정(仁宗과 英宗)에 계책을 정하여 덕망이 온 세상을 뒤덮었으니 이는 用捨와 行藏의 道를 알았기 때문이다. 陶潛은 晉나라 處士가 되어 마음이 편안하고 날로 아름다웠으며, 揚雄은 王莽의 大夫가 되어 마음이 수고롭고 날로 졸렬하였다. ‘ 諸葛亮이 中原에 쳐들어왔다.’고 쓴 것은 晉나라 역사책에 魏나라의 曹丕를 황제로 여긴 것이고, ‘丞相(諸葛亮)이 出師했다.’고 쓴 것은 漢나라의 역적인 魏나라를 드러내어 大義를 밝힌 것이며, ‘皇帝를 폐하여 王으로 삼았다.’고 쓴 것은 唐나라 國統이 周나라의 기록에 어지럽힘을 당한 것이고 ‘皇帝가 房州에 있었다.’고 쓴 것은 萬古의 여러 사람들의 몽매함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晉나라 大夫를 명하여 諸侯로 삼은 이래로 1362년 동안 亂臣賊子를 이미 죽은 뒤에 처벌하고 명분을 당시에 바로잡으며 이미 지나간 옛날의 褒貶을 정하고 앞으로 올 후세에 勸善懲惡을 보여주었으니, 이것이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이 獲麟을 이어 지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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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微魁天下於少年에 敬仲戒之호되 必念千里生民之寄하고 希元이 以命訊日者에 和叔이 敎以須忘富貴利達之心이라 是故로 建安與靑田이 俱爲百世師요 循序及修省이 工夫齊妙用이라 實殊轍而同歸하니 何後學之有異리오 旦晝所爲則夜必焚香하야 以奏于帝는 豈閱道之治其心乎아 因妻邪謀而毁謗朱子하야 以媚侂冑는 乃鄕人之喩於利也라 馮道는 歷事於五季하야 惟恐失之하고 嚴光은 加足於帝腹하니 忘其貴也라 明燭以達旦은 乃雲長之大節이요 郤衣而凍死는 實陳三之細事며 少事僞朝하야 官至郞署는 陳情之謬也요 求仁得仁하니 抑又何怨은 告墓之正也라 君親이 雖曰不同이나 忠孝本無二致하니 是非得失이 乃在乎人이라 千載之下에 公論不泯하니 其亦可畏也哉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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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微가 소년으로 천하의 狀元이 되자 敬仲은 경계하기를 ‘반드시 千里 生民의 중한 임무를 생각하라.’ 하였고, 希元이 운명을 日者에게 묻자 和叔은 ‘모름지기 富貴와 利達의 마음을 잊으라.’고 당부하였다. 이 때문에 建安(眞德秀)과 靑田(袁甫)이 함께 백세의 스승이 되는 것이요, 순서를 따르는 공부와 닦고 살피는 공부가 妙用을 함께 한다. 실로 길이 다르나 돌아감이 같으니 어찌 後學이 다름이 있겠는가. 낮에 한 일을 밤이면 반드시 焚香하고 上帝에게 아뢴 것은 閱道가 자기 마음을 다스린 것이 아니겠는가. 아내의 간사한 계책으로 인하여 朱子를 훼방해서 韓侂冑에게 아첨한 것은 바로 鄕人이 이익을 깨달은 것이다. 馮道는 五代의 군주를 차례로 섬겨 행여 벼슬을 잃을까 두려워하였고 嚴光은 光武皇帝의 배에 발을 가하였으니 皇帝의 귀함을 잊은 것이다. 불을 밝혀 아침까지 이른 것은 바로 雲長(關羽)의 큰 절개이고, 옷을 물리쳐 얼어죽은 것은 실로 陳三(陳師道)의 작은 일이며, 젊어서 僞朝를 섬겨 벼슬이 郎署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陳情表의 잘못이고, 仁을 구하여 仁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겠느냐는 것은 告墓文의 올바름이다. 군주와 어버이가 비록 다르다고 말하나 충성과 효도는 본래 두 이치가 없으니, 是非와 得失이 마침내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천년 뒤에 公論이 없어지지 않으니, 이 또한 두려울 만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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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人才難得하니 爲民上者 宜有以作成之也라 是故로 欲治之君은 須知爲治之要라 夫治也者는 親賢遠奸하고 信賞必罰하며 明禮義, 謹學術하야 以身先之하야 使民知趨向之方하야 上下相師而人才出矣라 如此면 則師道尊而善人多하고 朝廷正而天下治하야 百姓大和하고 萬物咸若이라 蓋爲治는 必以人才爲本이요 求人才之道는 又以敎化爲先이며 欲行敎化인대 非興禮樂이면 不可也니 不興禮樂이면 則敎化不行이요 敎化不行이면 則民無所措手足이요 無所措手足이면 則三綱不正하고 九疇不敍하야 而欲致天下之治者遠矣라 故로 治天下者는 必本之身이니 身端心誠이면 則賢才輔而天下治矣라 書云 愼厥身修하야 思永이라하고 詩云 上帝臨汝하시니 無貳爾心이어다 無貳無虞라 上帝臨汝라하니 此之謂也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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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材를 얻기가 어려우니,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가 마땅히 人材를 양성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훌륭한 정치를 바라는 군주는 모름지기 정치하는 요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은 賢者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며,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내리며 예의를 밝히고 학술을 삼가서 자기 몸으로 솔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趨向할 방향을 알게 해서 상하가 서로 본받아 인재가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스승의 道가 높아지고 善人이 많아지며 朝廷이 바루어지고 천하가 다스려져서 백성들이 크게 화목하고 만물이 모두 순하게 된다. 정치를 함은 반드시 人材를 얻음을 근본으로 삼고 인재를 구하는 방법은 敎化를 우선으로 삼으며, 敎化를 행하고자 한다면 禮樂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니, 禮樂을 일으키지 않으면 敎化가 행해지지 못하고 敎化가 행해지지 못하면 백성들이 手足을 둘 곳이 없고, 手足을 둘 곳이 없으면 三綱이 바르게 되지 못하고 九疇가 제대로 펴지지 못하여 天下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기대가 멀어진다. 그러므로 天下를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자기 몸에 근본하는 것이니, 군주의 몸이 단정하고 마음이 성실하면 어진 이와 재능 있는 자가 보필하여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이다. 《書經》에 이르기를 ‘그 몸을 삼가 닦아서 영원함을 생각한다.’ 하였고, 《詩經》에 이르기를 ‘上帝가 너에게 강림하시니 네 마음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의심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라. 上帝가 너에게 강림하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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