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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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周紀

赧王 下

[甲辰]五十八年

[甲辰]五十八年이라

魏王이 使晉鄙救趙러니 秦王이 使謂曰 吾攻趙하야 旦暮에 且下하리니 諸侯敢救者면 必移兵先擊之하리라 魏王이 恐하야 止晉鄙壁鄴하고 又使將軍新垣衍으로 說趙王하야 欲共尊秦爲帝하야 以却其兵이러라 魯仲連이 聞之하고 往見曰 彼秦者는 棄禮義而上首功之國【譙周曰 秦用商鞅計하야 置爵二十等하고 以戰獲首級者로 計而受爵하니 天下謂之上首功之國이라하니 皆以惡之也라 索隱云 秦法에 斬首多爲上功하니 謂斬一人首면 賜爵一級이라 故謂之首功之國이라 】也라 彼卽肆然而爲帝면 則은 有蹈東海而死耳언정 不願爲之民也하노라 今秦도 萬乘之國也요 梁亦萬乘之國也어늘 從而帝之면 秦이 將行天子之禮하야 以號令於天下하고 變易諸侯之大臣하리니 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하며 奪其所憎而與其所愛하면 梁王이 安得晏然而已乎아 이 起再拜曰 吾乃今에 知先生天下之士也로니 不敢復言帝秦矣리이다

58년(갑진 B.C.257))

魏王晉鄙를 시켜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秦王이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에 이르기를 “내가 趙나라를 공격하여 조만간에 장차 항복시킬 것이니, 諸侯 중에 감히 구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군대를 옮겨 먼저 공격하겠다.” 하였다. 魏王이 두려워하여 晉鄙를 중지시켜鄴 땅의 성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장군 新垣衍을 시켜 趙王을 설득해서 함께 秦나라를 높여 황제로 삼아 秦나라의 군대를 퇴각하게 하고자 하였다.

魯仲連이 이 말을 듣고 가서 新垣衍을 보고 말하기를 “저 秦나라는 禮義를 버리고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이다.【譙周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商鞅의 계책을 써서 20등급의 작위를 설치하고 전투에서 잡은 적의 首級을 계산하여 작위를 주자, 천하에서 이를 일러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를 미워한 것이다.” ≪史記索隱≫에 말하였다. “秦나라 법에는 首級을 많이 벤 것을 상등의 功으로 삼았으니, 적 한 명의 목을 베면 한 등급의 작위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이를 일러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라고 한 것이다.”】 저들이 만약 방자하게(건방지게) 황제가 된다면 나(連)는 東海에 뛰어들어 죽음이 있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지금 秦나라도 萬乘의 나라이고 梁(魏)나라 또한 萬乘의 나라인데, 따라서 저 秦나라를 황제로 삼으면 秦나라는 장차 天子의 禮를 행하여 천하에 호령하고 제후들의 대신을 바꾸어 둘 것이니, 저 秦나라가 장차 不肖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어질다고 여기는 자에게 주고 미워하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사랑하는 자에게 준다면 梁王이 어떻게 편안히 있을 뿐이겠는가?” 하니, 新垣衍이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였다. “나는 지금에야 선생이 천하의 선비인 줄을 알았으니, 감히 다시는 秦나라를 황제로 삼자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 初에 魏公子無忌愛人下士【下는 謂禮遇之라 】하야 致食客이 三千人이라 魏有隱士하니 曰侯嬴【姓名也니 嬴은 音盈이라 索隱云 又音羸라】이라 年七十에 家貧하야 爲夷門監者【夷門은 梁城之東門이라 按魏公子傳曰 夷門之抱關者也라하니라 】러니 公子公子置酒하고 大會賓客할새 坐定에 公子公子從車騎虛左【師古曰 凡乘車에 尊者居左하고 御者居中하고 又一人處車之右하야 以備傾側이라하니 虛左者는 謂空左方一位以迎之니 蓋尊之也라 】하고 自迎侯生이라가 侯生至에 引坐上坐(座)하니 賓客이 皆驚이러라

처음에 魏나라 公子公子無忌가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下는 〈몸을 낮추어〉 예우함을 이른다.】 食客을 招致한 것이 3천 명이었다. 魏나라에 隱士가 있으니 侯嬴【侯嬴은 성명이니, 嬴은 음이 영이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또 다른 음은 리이다.” 하였다.】이라 하였다. 나이 70에 집이 가난하여 夷門의 監者(문을 감독하는 사람)【夷門은 梁나라 도성의 동쪽 문이다. 살펴보건대 ≪史記≫ 〈魏公子傳〉에 “夷門을 지키는 자이다.” 하였다.】가 되었는데, 公子公子가 술자리를 베풀고 빈객을 크게 모을 적에 빈객이 자리를 정하자, 公子公子가 車騎를 수행시키되 왼쪽을 비워두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무릇 수레를 탈 적에 높은 자는 왼쪽에 타고, 수레를 모는 자는 가운데에 타고, 또 한 사람은 수레의 오른쪽에 타서 수레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에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왼쪽을 비워두었다는 것은 왼쪽 한 자리를 비워두어 맞이함을 이르니, 높이는 것이다.】 직접 侯生을 맞이하러 갔다가 侯生이 이르자 인도하여 上座에 앉히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及秦圍趙에 趙平原君之夫人은 公子公子無忌之姊也라 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하야 讓公子公子曰 이 所以自附於婚姻者는 以公子之高義로 能急人之困也러니 今邯鄲이 旦暮降秦이어늘 而魏救不至라한대 公子公子數請魏王晉鄙救趙하고 及賓客辯士 遊說【荀悅曰 飾辯辭, 設詐謀하야 馳逐於天下하야 以要時勢者를 謂之遊說라 】萬端호되 王終不聽이러라 公子公子乃屬賓客하야 約車騎百餘乘하야 欲赴鬪以死於趙할새 過見侯生한대 曰 公子公子無他端하야 而欲赴秦軍하시니 如以肉投餒虎니 何功之有리잇고 公子公子再拜問計한대 曰 吾聞晉鄙兵符【慈湖王氏曰 符는 信也요 輔也니 所以輔信이라 古者에 以竹爲之라 故字從竹이러니 後世詐僞蜂起하니 以竹易得之物이라 不足爲之防이라하야 於是에 有銅鐵金銀으로 鑄爲物象而用之라 漢文帝初에 與郡國爲銅虎符竹使符라 應劭曰 銅虎符는 長六寸이니 第一至五는 國家發兵遣使에 至郡合符하야 符合이면 乃聽受之라 竹使符는 以竹箭五枚로 長五寸이요 旁鐫篆書하고 亦一至五하니 出人徵發에 用之라 張晏曰 符以代古之珪璋하니 從簡易也라 師古曰 與郡國爲符호되 各分一半하야 右留京師하고 左以與之하니 此漢制也라 唐高祖入長安에 罷隋竹使符하고 班銀菟符러니 其後에 改爲銅魚木契하니 朝廷徵發에 下敕書契魚어든 都督郡府參驗하야 皆合然後遣之하니라 】在王臥內하고 而如姬【其愛姬姓如氏라 】最幸이라하니 力能竊之요 且公子公子嘗爲報其父仇하니 如姬欲爲公子公子하야 死無所辭라 誠一開口면 則得虎符하야 奪鄙兵하리니 北救趙하고 西却秦이면 此는 五伯(霸)之功也니이다 公子公子如其言하야 得兵符한대 侯生曰 將在外에는 君令도 有所不受하나니 有如鄙疑而復請之면 則事危矣라 臣客朱亥는 力士니 可與俱라가 鄙不聽이어든 使擊之하소서

秦나라가 趙나라를 포위하자, 趙나라 平原君의 부인은 公子公子無忌의 누님이었으므로 平原君의 使者使者들의 冠蓋가 魏나라에 서로 이어져 公子公子를 꾸짖기를 “내()가 스스로 婚姻하여 장가든 것은 公子公子의 높은 의리로 남의 곤궁함을 급히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邯鄲이 조만간에 秦나라에게 항복하게 되었는데도 魏나라의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 하였다. 公子公子가 여러 번 魏王에게 晉鄙에게 명하여 趙나라를 구원하게 할 것을 청하고 빈객과 변사들도 萬端으로 설득하였으나【荀悅이 말하였다. “말을 잘 꾸미고 속이는 모략을 써서 천하를 놓고 角逐을 벌여 당시의 권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을 일러 유세라 한다.”】 왕은 끝내 듣지 않았다. 公子公子가 마침내 빈객들을 모으고 車騎 백여 乘을 모아 싸움에 달려가 趙나라에서 죽고자 할 적에 지나는 길에 侯生을 방문하니, 侯生이 말하기를 “公子公子가 별다른 방도가 없이 秦나라 군대에게 달려가 싸우고자 하시니, 이는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공(효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公子公子가 재배하고 계책을 물으니, 侯生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晉鄙의 兵符【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符는 符信이고 돕는 것이니, 信을 돕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가 竹자를 따랐는데, 후세에 속임수가 벌떼처럼 일어나자, 대나무는 얻기가 쉬운 물건이라 위조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해서 이에 銅과 鐵과 金과 銀을 주조하여 물건의 모양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漢나라 文帝 초년에 郡國에게 銅虎符와 竹使符를 만들어 주었다. 應劭는 말하기를 ‘銅虎符는 길이가 6寸이니 제1부터 제5까지는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낼 적에 郡에 이르러 兵符를 맞춰보아 兵符가 맞으면 비로소 명을 따랐다. 竹使符는 竹箭 5매로 길이가 5寸이고 옆에 篆書를 새기며 또한 1부터 5까지 있으니 사람을 내고 징발할 적에 이것을 썼다.’ 하였다. 張晏이 말하기를 ‘符는 옛날의 珪璋을 대신한 것인데 간편함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郡國에게 符를 만들어 주되 각각 반씩을 나누어 오른쪽은 京師에 남겨두고 왼쪽은 郡國에게 주었으니, 이는 漢나라의 제도이다. 唐나라 高祖가 長安에 들어가자 隋나라의 竹使符를 없애고 銀菟符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뒤에 銅魚와 木契를 만드니, 조정에서 징발할 적에 敕書와 契魚를 내리면 都督이 郡府의 것과 맞춰보아 모두 합치된 뒤에야 보냈다.’ 하였다.”】가 왕의 침실 안에 있고, 如姬【如姬는 王이 총애하는 여자의 姓이 如氏인 것이다.】가 가장 총애를 받는다 하니, 힘이 兵符를 훔쳐낼 수 있으며, 또 公子公子가 일찍이 그녀 아비의 원수를 갚아 주었으니, 如姬는 公子公子를 위하고자 하여 죽는 것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한번 입을 열면 虎符(兵符)를 얻어 晉鄙의 군대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니, 북쪽으로 趙나라를 구원하고 서쪽으로 秦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면 이는 五霸의 공입니다.”

公子公子가 그 말과 같이 하여 兵符를 얻으니, 侯生이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장군이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晉鄙가 의심하여 다시 청하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신의 門客인 朱亥는 힘이 센 장사이니, 함께 갔다가 晉鄙가 듣지 않거든 공격하게 하소서.”

公子公子至鄴하니 晉鄙合符하고 果疑之하야 擧手視公子公子曰 吾擧十萬之衆하야 屯於境上하니 國之重任이어늘 今單車來代之는 何如哉오 袖四十斤鐵椎라가 椎殺하다 公子公子下令曰 父子俱在軍中者는 父歸하고 兄弟俱在軍中者는 兄歸하고 獨子無兄弟者는 歸養하라하야 得選兵八萬人하야 將之而進하다 王齕이 久圍邯鄲호되 不拔하고 諸侯來救하야 數戰不利라 武安君이 聞之하고 曰 王不聽吾計러니 今何如矣오 秦王이 聞之하고 怒하야 免武安君하야 爲士伍【嘗有爵而有罪奪爵者를 稱士伍라하니 言使役士卒之伍也라 】하야 遷之陰密할새 至杜郵하야 使使者賜之劍한대 武安君이 遂自殺하니 秦人이 憐之러라 魏公子無忌 大破秦師於邯鄲下하니 王齕이 解邯鄲圍하고 走하다 公子公子無忌旣存趙에 遂不敢歸魏하고 使將으로 將其軍以還하다 〈無忌 封爲信陵君

公子公子가 鄴 땅에 이르자, 晉鄙가 兵符를 맞춰보고 과연 의심하여 손을 들어 公子公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니 국가의 중대한 임무인데, 이제 단 한 대의 수레로 와서 이를 대신함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朱亥가 40근짜리 철퇴를 소매 속에 넣고 있다가 晉鄙를 쳐서 죽였다.

公子公子가 명령을 내리기를 “父子가 함께 軍中에 있는 자는 아버지가 돌아가고, 兄弟가 함께 軍中에 있는 자는 兄이 돌아가고, 獨子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하여 선발한 병사 8만 명을 얻어서 이들을 거느리고 전진하였다.

王齕이 오랫동안 邯鄲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諸侯들이 와서 구원하여 여러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武安君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왕께서 내 계책을 듣지 않더니, 지금 어떠한가?” 하니, 秦王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武安君을 파면하여 士伍(卒兵)로 만들고【일찍이 벼슬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벼슬을 빼앗긴 자를 士伍라 칭하니, 사역하는 士卒의 대오를 말한다.】陰密로 유배 보낼 적에, 杜郵라는 곳에 이르러 使者使者를 시켜 검을 하사하니, 武安君이 마침내 자살하였다. 이에 秦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魏나라 公子公子無忌가 秦나라 군대를 邯鄲 아래에서 대파하니, 王齕이 邯鄲의 포위를 풀고 도망하였다. 公子公子無忌가 趙나라를 보존하고는 마침내 감히 魏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수를 시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無忌信陵君으로 봉하였다.-

秦太子之子異人【孝文王子也니 後更名楚하니라 】이 自趙逃歸秦하다 太子妃曰華陽夫人이니 無子하고 夏姬生子異人하야 質於趙러니 秦數伐趙하니 趙不禮之하야 困不得意라 陽翟大賈【索隱曰 翟은 音狄이니 俗又音宅이라 地理志에 潁川陽翟縣이라 慈湖王氏曰 按戰國策에 以不韋爲濮陽人이라하니라 正義云 陽翟은 今河南府也라 賈는 音古니 往來賤買貴賣者也라 】呂不韋 適邯鄲이라가 見之하고 曰 此는 奇貨可居【慈湖王氏曰 以異人으로 方財貨也라 居는 蓄積也라 漢張湯傳에 田信居物致富라한대 註云 謂居蓄賤物하야 以乘時射利也라 】라하고 乃說之曰 秦王老矣요 太子太子愛華陽夫人而無子하고 子之兄弟二十餘人에 子居中하야 不甚見幸하니 太子太子卽位라도 子不得爭爲嗣矣리라 異人曰 奈何오 不韋曰 能立適(嫡)嗣者는 獨華陽夫人耳니 不韋雖貧이나 請以千金爲子西游하야 立子爲嗣호리라 異人曰 必如君策인대 秦國을 與子共之호리라

秦나라 太子太子의 아들 異人【異人은 孝文王의 아들이니, 뒤에 이름을 楚로 고쳤다.】이 趙나라에서 도망하여 秦나라로 돌아왔다.

太子의 妃는 華陽夫人인데 아들이 없었고, 夏姬가 아들異人을 낳아 趙나라에 인질이 되었는데, 秦나라가 자주 趙나라를 정벌하니 趙나라가 그를 예우하지 아니하여 곤궁해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陽翟의 큰 장사꾼【≪史記索隱≫에 말하였다. “翟은 음이 적이니, 시속의 또 다른 음은 택(책)이다. ≪漢書≫ 〈地理志〉에 ‘潁川郡 陽翟縣이다.’ 하였다.” 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戰國策≫에 ‘呂不韋는 濮陽 사람이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陽翟은 지금의 河南府이다.’ 하였다. 賈는 음이 고이니, 왕래하면서 싼 것을 사다가 비싸게 파는 자이다.”】呂不韋가 邯鄲에 갔다가 異人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기이한 보화이니 쌓아둘 만하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異人을 재화에 견준 것이다. 居는 쌓아두는 것이다. ≪漢書≫ 〈張湯傳〉에 ‘田信이 물건을 사서 쌓아두어 부자가 되었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싼 물건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기회를 틈타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설득하기를 “秦王이 늙었고 太子가 華陽夫人을 사랑하나 아들이 없으며, 그대의 형제 20여 명 중에 그대는 중간에 있어 그리 총애받지는 못하니, 태자가 즉위하더라도 그대가 後嗣(후계자)가 됨을 다투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異人이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묻자, 呂不韋가 말하기를 “嫡嗣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華陽夫人뿐이니, 내(不韋)가 비록 가난하나 청컨대 천금을 가지고 그대를 위하여 서쪽으로 가서, 그대를 세워 후사로 삼게 하겠다.” 하니, 異人이 말하기를 “반드시 그대의 계책처럼 한다면 秦나라를 그대와 함께 하겠다.” 하였다.

不韋乃與五百金하야 令結賓客하고 復以五百金으로 買奇物玩好하야 自奉而西하야 見夫人姊而以獻於夫人하고 因譽異人之賢호되 賓客이 遍天下하고 日夜에 泣思太子太子及夫人曰 異人也 以夫人爲天이라한대 夫人이 喜러라 不韋因使其姊說曰 夫人이 愛而無子하니 不以繁華時로 蚤(早)自結於諸子中賢孝者하야 擧以爲適이라가 卽色衰愛弛면 雖欲開一言이나 尙可得乎아 今異人賢而自知中子不得爲適하니 誠以此時拔之면 是는 異人은 無國而有國이요 夫人은 無子而有子也니 則終身有寵於秦矣리이다 夫人이 以爲然하야 乘間言之러니 太子太子與夫人으로 又刻玉符하야 約以爲嗣하고 因請不韋하야 傅之하다

不韋가 마침내 5백 금을 異人에게 주어서 賓客賓客을 맺게(사귀게) 하고, 다시 5백 금을 가지고 기이한 물건과 玩好品을 사서 스스로 받들고 서쪽으로 가서 부인의 언니를 만나 이것을 부인에게 바치게 하고, 인하여 異人의 어짊을 칭찬하되 〈異人은 교유하는〉 빈객이 온 천하에 두루 널리 퍼져 있으며 밤낮으로 울면서 태자와 부인을 생각하여 ‘異人은 부인을 하늘로 여긴다.’고 말한다 하니, 부인이 기뻐하였다.

不韋가 인하여 그 언니를 시켜 부인을 설득하기를 “부인이 사랑을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으니, 번화할 때에 일찍 스스로 여러 아들 중에 어질고 효성스러운 자를 맺어서 그를 들어 嫡子로 삼지 않았다가 만일 미모가 쇠하여 사랑이 풀어지면 비록 한마디 말을 하고자 한들 오히려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異人이 어질지만 스스로 中子라서 嫡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진실로 이러한 때에 그를 嫡子로 뽑는다면 異人은 나라가 없다가 나라가 있게 되고 부인은 자식이 없다가 자식이 있게 되는 것이니, 종신토록 秦王에게 총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그 말을 옳게 여겨 틈을 타서 태자에게 말하니, 태자가 부인과 함께 또 玉符를 새겨 後嗣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인하여 呂不韋를 청하여 異人을 가르치게 하였다.

不韋娶邯鄲姬絶美者하야 與居하야 知其有娠이러니 異人이 見而請之어늘 不韋佯怒라가 旣而요 獻之하야 期年而生子【慈湖王氏曰 呂不韋傳에 姬自匿有身(娠)하야 至大期時하야 生子政이라 註에 徐廣曰 期는 十二月也라 索隱曰 譙周云 人十月生이어늘 此過二月이라 故云大期라하니 蓋當然也라 旣云自匿有娠이면 則生政自當踰常期也라 政後爲秦始皇帝하니라 】하니 異人이 遂以爲夫人하다 邯鄲之圍에 趙人이 欲殺之어늘 不韋賂守者하야 得脫이라 亡赴秦軍하야 遂歸하다 異人이 楚服而見夫人【慈湖王氏曰 不韋以王后楚人이라 故使異人服楚製而說(悅)之하니라 】한대 夫人曰 吾는 楚人也니 當自子之【慈湖王氏曰 子는 嗣也니 我當自養之爲嗣也라 】라하고 更名曰楚【戰國策曰 本名異人이러니 王后說其狀하고 高其(智)[志]하야 曰 吾楚人也니 而(自子)[子字]之라하고 乃變其名曰楚라하니라 更은 改也라 】라하다

呂不韋는 邯鄲의 여자로 絶色인 자를 취하여 함께 살아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는데, 異人이 그녀를 보고 청하였다. 呂不韋는 거짓으로 노한 체하다가 이윽고 그녀를 바쳐 期年(1년) 만에 아들을 낳으니,【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史記≫ 〈呂不韋傳〉에 ‘여자가 스스로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大期에 이르러 아들 政을 낳았다.’ 하였는데, 註에 徐廣이 말하기를 ‘期는 12개월이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譙周가 이르기를 「사람이 열 달 만에 태어나는데, 이는 두 달이 더 지난 것이다. 그러므로 大期라고 이른 것이다.」 하였으니, 마땅하다. 이미 스스로 임신한 사실을 숨겼다고 했으면 政을 낳은 것은 마땅히 보통 기한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政은 뒤에 秦始皇帝가 되었다.’ 하였다.”】異人이 마침내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邯鄲이 포위되자 趙나라 사람들이 異人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呂不韋가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어 탈출할 수 있었다. 異人이 도망하여 秦나라 군영으로 달려와서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왔다.

異人이 楚나라 복식을 하고 부인을 뵈니,【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王后가 楚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呂不韋가 異人에게 楚나라 옷을 입게 하여 王后를 기쁘게 한 것이다.”】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사람이니, 마땅히 스스로 너를 길러 아들(後嗣)로 삼겠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子는 후사이니, 내가 마땅히 스스로 길러 후사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하고는 이름을 고쳐 라고 하였다.【≪戰國策≫ 〈秦策〉에 이르기를 “본명이 異人이었는데 王后가 그의 모습을 좋아하고 그의 뜻을 높이 여겨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사람이니 너를 아들로 삼아 기르겠다.’ 하고 마침내 그의 이름을 고쳐 楚라고 했다.” 하였다. 更은 고침이다.】

[乙巳]五十九年

[乙巳]五十九年이라

秦伐韓하야 取陽城負黍【徐廣曰 陽城에 有負黍聚라 括地志云 陽城은 洛州縣也요 負黍亭은 在陽城西南三十五里하니 故周之邑이라 左傳云 鄭伐周負黍 是也니 戰國屬韓이라 慈湖王氏曰 取者는 春秋傳例曰 克邑에 不用師徒曰取라 左傳昭四年에 取鄫하니 言易也라하니 是已라 】하니 斬首四萬이요 伐趙하야 取二十餘縣하니 斬首九萬이라 赧王이 恐하야 倍(背)秦하고 與諸侯約從하야 欲伐秦이러니 秦이 使將軍【將軍之名也니 史失其姓이라 前漢百官表曰 前後左右將軍은 皆周末官이니 秦因之라 位上卿이요 漢不常置하니라 】로 攻西周하니 赧王이 入秦하야 頓首【下首也라 拜而額至手伏地久라가 方起를 謂之稽首니 稽는 遲也라 拜而額至手卽起를 謂之頓首요 拜而頭不至地卽起를 謂之控首라 】受罪하고 盡獻其邑三十六과 口三萬이어늘 秦受其獻而歸赧王於周러니 是歲에 赧王崩하다

59년(을사 B.C.256))

秦나라가 韓나라를 정벌하여 陽城의 負黍를 점령하니【徐廣이 말하기를 “陽城에 負黍聚가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陽城은 洛州縣이고 負黍亭은 陽城 서남쪽 35리 지점에 있으니, 옛날 周나라 읍이다. ≪春秋左傳≫에 ‘鄭나라가 周나라 負黍를 쳤다.’는 것이 이곳이다.” 하였다. 戰國時代에 韓나라에 속하였다. 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取는 ≪春秋集傳纂例≫에 이르기를 ‘邑을 점령할 적에 군대를 사용하지 않고 취하는 것을 取라고 한다.’ 하였다. ≪春秋左傳≫ 昭公 4年에 ‘鄫을 取하였으니, 쉬움을 말한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首級을 벤 것이 4만이었고, 趙나라를 정벌하여 20여 縣을 점령하니 首級을 벤 것이 9만이었다. 赧王이 두려워하여 秦나라를 배반하고 諸侯들과 合從을 약속하여 秦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秦나라가 장군 樛를【樛는 장군의 이름이니, 姓은 史策에 전해지지 않는다. ≪漢書≫ 〈百官表〉에 이르기를 “前後左右의 將軍은 모두 周나라의 말단 관직이니, 秦나라가 이것을 따랐다. 지위는 上卿이고, 漢나라 때에는 항상 설치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시켜 西周를 공격하니, 赧王이 秦나라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頓首는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아 오랫동안 엎드려 있다가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稽首라 이르니 稽는 지체한다는 뜻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으면 즉시 일어나는 것을 頓首라 이르고, 절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고 즉시 일어나는 것을 控首라 이른다.】 죄를 받고 고을 36개와 戶口 3만을 모두 바쳤다. 秦나라가 그 바치는 것을 받고 赧王을 周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이 해에 赧王이 崩하였다.

○ 先是에 東, 西周分治【雙湖胡氏曰 赧王微弱하야 東西周分王正理하야 各居一都라 故曰東西周라 高誘曰 西周王城은 今河南이요 東周鞏은 今成周洛陽也라 】러니 赧王이 徙都西周【自洛陽徙河南이라 】하니 〈出史記〉 蓋以微弱하야 不能主盟이라 會武公【武公은 西周君也라 】焉하니라

이보다 앞서 周나라가 東周와 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졌는데【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赧王이 미약하여 周나라가 東周와 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져서 각각 한 도읍에 거하였기 때문에 東西周라 한 것이다. 高誘가 말하기를 ‘西周의 王城은 지금의 河南이고, 東周의 鞏은 지금의 成周 洛陽이다.’ 하였다.”】赧王이 도읍을 西周로 옮기니,【赧王이 도읍을 洛陽으로부터 河南으로 옮긴 것이다.】 - 《史記》에 나옴 - 이는 미약하여 盟約을 주관할 수 없어서였다. 武公에게 의지하였다.【武公은 西周의 임금이다.】

東周君

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以續周公官職이러니 桓公卒에 子威公立하고 威公卒에 子惠公立이라 惠公이 乃封其少子於鞏하야 以奉王하고 號東周惠公이라하니라 〈出史記 ○ 東西周之稱이 又起於此라 索隱曰 惠公立長子하니 曰西周公이요 又封少子於鞏하야 仍襲父號하니 曰東周惠公이라 於是에 又稱東西二周也하니라 按世本에 西周桓公은 名니 居河南하고 東周惠公은 名이니 居洛陽이 是也라 復齋胡氏曰 其後에 揭沒而長子成公이 襲有其地하고 少子이 專制洛陽하야 兄弟角立하니 史冊逸其世數名氏라 至赧王三十四年하야 楚謀入寇어늘 王使東周君으로 諭止之하니 蓋之後也라 至赧王入秦하야 秦遷西周君於★{單/心}狐聚하야 而河南亡하고 莊襄元年에 遷東周君於陽人聚而洛陽之鞏亡하니라〉

南宮氏靖一曰 周自武王으로 至東周君滅而周始亡于秦하니 斯實錄也라 後有秉春秋之筆者면 盍改而正諸리오 按舊本엔 仍溫公之書하야 自赧王入秦之後로 卽以秦昭襄承周統爲秦紀러니 剡旣已遵朱子綱目之例하야 正之矣요 今復得南宮氏之說이어늘 而雙湖胡氏深有取焉하니 極爲確論하니 眞所謂發先賢之所未發者也라 舊本正之而未盡이어늘 今復正之于左하야 以俟質于高明史學先生云이라〉

東周는 考王이 그 아우를 河南에 봉함으로부터 비롯되니, 이가 桓公이다. 周公의 官職을 이었는데, 桓公이 죽자 아들威公이 서고, 威公이 죽자 아들惠公이 섰다. 惠公은 마침내 그 少子(작은아들)를 鞏 땅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 이름을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史記》에 나옴 ○ 東周와 西周의 칭호가 또 여기서 시작되었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惠公이 長子를 세우니西周公이라 하였고, 또 少子를 鞏 땅에 봉하여 아버지의 칭호를 그대로 세습하니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이에 또 東周와 西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世本에 “西周의 桓公은 이름이 이니 河南에 거주하고, 東周의 惠公은 이름이 이니 洛陽에 거주하였다.” 하였다. 復齋胡氏가 말하기를 “그 뒤에 揭가 죽고 長子인 成公이 세습하여 河南을 소유하고 少子인 이 오로지 洛陽을 점령하여 형제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그 世數와 名氏를 잃었다. 赧王 34년에 이르러 楚나라가 周나라를 침입할 것을 도모하자 赧王東周君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 東周君의 후손일 것이다. 赧王이 秦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秦나라가 西周君을 ★{單/心}狐聚로 옮겨서 河南이 망하였고, 莊襄王 元年에 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겨서 洛陽의 鞏이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南宮靖一이 말하였다. “周나라는 武王으로부터 東周君이 멸망함에 이르러 周나라가 비로소 秦나라에게 망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기록이다. 뒤에 春秋의 붓을 잡는 자(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지 않겠는가.” - 살펴보건대 舊本에는 溫公의 《資治通鑑》을 따라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뒤로부터 곧바로 秦나라 昭襄王이 周나라의 계통을 이어받아 秦紀로 삼았는데, 내(劉剡)가 이미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의 例를 따라서 바로잡았고, 이제 다시 南宮氏의 說을 얻었는데 雙湖胡氏(胡一桂)가 이것을 깊이 취함이 있었으니, 지극히 확고한 논의가 되는 바, 진실로 이른바 ‘先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舊本에는 바로잡았으나 미진하였는데, 이제 다시 아래에 바로잡아서 高明한 史學先生을 기다려 질정하는 바이다.-

[丙午]元年

[丙午]元年이라 〈秦昭襄王五十二요 楚考烈王八이요 燕孝王三이요 魏安釐王二十二요 趙孝成王十一이요 韓桓惠王十八이요 齊王十年이라 ○ 凡七國이라〉

周民이 東亡이어늘 秦이 取其寶器하고 遷西周公於★{單/心}狐聚【索隱曰 西周公은 武公子文公也라 ★{單/心}狐는 地名이니 ★{單/心}은 音憚이라 徐廣曰 ★{單/心}狐聚는 近陽人聚하니 在洛陽南百五十里라 括地志에 汝州之外古梁城이 卽★{單/心}狐聚라 】하다 ○ 秦丞相丞相范睢免하다

元年(병오 B.C.255)) - 秦昭襄王 52년, 楚 考烈王8년,燕孝王 3년, 魏安釐王22년,趙孝成王11년,韓桓惠王18년,齊王 10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周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도망하자, 秦나라가 그 寶器를 취하고 西周公을 ★{單/心}狐聚로 옮겼다.【≪史記索隱≫에 말하기를 “西周公은 武公의 아들 文公이다.” 하였다. ★{單/心}狐는 지명이니 ★{單/心}은 음이 탄이다. 徐廣이 말하기를 “★{單/心}狐聚는 陽人聚에 가까우니, 洛陽 남쪽 150리에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汝州의 밖 옛 梁城이 곧 ★{單/心}狐聚이다.” 하였다.】

○ 秦나라 승상 范睢가 면직하였다.

[丁未]二年

[丁未]二年이라 〈秦五十三, 楚九, 燕王元, 魏二十三, 趙十二, 韓十九, 齊十一年이라〉

秦伐魏하야 取吳城하다 ○ 韓王이 入朝於秦하다

2년(정미 B.C.254)) - 秦나라 53년, 楚나라 9년, 燕王 元年, 魏나라 23년, 趙나라 12년,韓나라 19년,齊나라 11년이다. -

秦나라가 魏나라를 정벌하여吳城을 점령하였다.

韓王이 秦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다.

[庚戌]五年

[庚戌]五年이라 〈秦五十六, 楚十二, 燕四, 魏二十六, 趙十五, 韓二十二, 齊十四年이라〉

秋에 秦昭襄王이 薨하고 子孝文王立하다 ○ 趙公子勝이 卒하다

5년(경술 B.C.251)) - 秦나라 56년, 楚나라 12년,燕나라 4년, 魏나라 26년, 趙나라 15년,韓나라 22년,齊나라 14년이다. -

가을에 秦나라 昭襄王이 죽고아들孝文王가 즉위하였다.

○ 趙나라 公子公子이 별세하였다.

[辛亥]六年

[辛亥]六年이라 〈秦孝文王, 楚十三, 燕五, 魏二十七, 趙十六, 韓二十三, 齊十五年이라〉

十月에 秦王卽位三日에 薨하고 子立하니 是爲莊襄王이러라

6年(신해 B.C.250)) - 秦孝文王 元年, 楚나라 13년,燕나라 5년, 魏나라 27년, 趙나라 16년,韓나라 23년, 齊나라 15년이다. -

10月에 秦王가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고子楚가 즉위하니, 이가 莊襄王이다.

○ 燕將燕將이 攻齊聊城慈湖王氏曰 聊城은 在平原이라 〈括〉地志에 故聊城은 在博州聊城縣西二十里하니 戰國時에 亦齊地라 秦漢이 皆爲東郡之聊城하니라 慈湖王氏는 名幼學이요 字行卿이니 後只稱王氏曰이라 】하야 拔之러니 或이 譖之燕王한대 燕將燕將이 保聊城하고 不敢歸라 齊田單이 攻之歲餘에 不下어늘 魯仲連이 乃爲書하야 約之矢【王氏曰 纏束書於矢上이라 】하야 以射城中하야 遺燕將燕將하야 陳利害【遺燕將燕將曰 爲公計者컨대 不歸燕則歸齊니 今猶守孤城이라가 齊兵日益而燕救不至면 將何爲乎아 】한대 燕將燕將이 見書하고 泣三日에 遂自殺하니 聊城이 亂이라 田單이 克聊城하고 歸言魯仲連齊王하야 欲爵之한대 仲連이 逃之海上曰 吾與富貴而詘於人【記儒行曰 不充詘於富貴라한대 註에 〈充〉詘은 喜失節也라 】으론 寧貧賤而輕世肆志【輕世는 眇視天下也요 肆志는 放縱志意也라 】焉이라하더라

燕나라 장수가 齊나라 聊城을 공격하여【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聊城은 平原에 있다. ≪括地志≫에 ‘옛 聊城은 博州 聊城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니, 戰國時代에도 齊나라 땅이었다. 秦나라와 漢나라가 모두 東郡의 聊城으로 삼았다.’ 하였다.” 慈湖王氏는 이름이 幼學이고 字가 行卿이니, 이 뒤로는 다만 ‘王氏曰’이라고 칭하였다.】함락하였는데, 혹자가 燕王에게 참소하니, 燕나라 장수가 聊城을 지키고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齊나라 田單이 이를 공격한 지 1년이 넘었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자, 魯仲連이 마침내 편지를 써서 이것을 화살에 묶어【王氏가 말하였다. “편지를 화살 위에 묶은 것이다.”】 城안으로 쏘아 燕나라 장수에게 보내서 利害를 말하였다.【燕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公을 위하여 계획해 보건대 燕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齊나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도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齊나라 군대는 날로 증강되고 燕나라의 구원은 이르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燕나라 장수가 그 편지를 보고 3일 동안 울다가 마침내 자살하니, 聊城이 혼란하였다. 田單이 聊城을 이기고 돌아가 魯仲連齊王에게 말하여 벼슬을 주려 하자, 魯仲連이 海上으로 도망하며 말하기를 “내 부귀하면서 남에게 예절을 잃기보다는【≪禮記≫ 〈儒行〉에 이르기를 “부귀 때문에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註에 “充詘은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는 것이다.” 하였다.】 차라리 빈천하면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내 뜻대로 하겠다.”【輕世는 천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고, 肆志는 뜻대로 방종하는 것이다.】 하였다.

○ 魏安釐王이 問天下之高士於子順【孔斌字니 孔子六世孫이라 】한대 子順曰 世無其人也어니와 抑可以爲次는 其魯仲連乎인저 王曰 魯仲連은 彊作之者니 非體自然也니라 子順曰 人皆作之하나니 作之不止면 乃成君子요 作之不變하야 習與體成이면 則自然也니이다

魏나라 安釐王이 천하에 道德이 높은 선비를 子順(孔斌)에게 묻자,子順孔斌의 字이니, 孔子의 6세손이다.】子順이 대답하기를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으나 그 다음이 될 만한 자는 魯仲連일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魯仲連은 억지로 힘써서 作爲하는 자이니, 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子順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모두 作爲하니, 作爲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君子를 이루고, 作爲하기를 변치 아니하여 습관이 體와 더불어 이루어지면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였다.

[壬子]七年

[壬子]七年이라 〈秦莊襄王楚元, 楚十四, 燕六, 魏二十八, 趙十七, 韓二十四, 齊十六年이라 是歲에 周亡이라〉

秦이 以呂不韋爲相國하야 封文信侯하다 ○ 東周君이 與諸侯로 謀伐秦이어늘 秦王이 使相國呂不韋로 帥師滅之하고 遷東周君於陽人聚【地理志云 河南梁縣에 有陽人聚라 括地志云 陽人故城은 在汝州梁縣西四十里라 】하니 周遂不祀하다 周比亡에 凡有七邑【徐廣曰 周比亡時에 凡七縣이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是也라 】이러라

[新增]雙湖胡氏曰 西都는 自涇舟膠楚澤【涇은 水名이니 在西周地라 昭王이 巡狩濟漢이러니 漢濱人이 以膠膠舟하야 中流膠液하야 王溺死하니라 漢은 楚地라 】하고 下堂見諸侯【平王東遷하야 都于洛邑한대 王室微弱하야 政由下하니 下堂見諸侯하니라 】로 綱常陵遲하야 已爲春秋之漸이요 東都는 自春秋已來로 弱不可支로되 猶幸五霸【齊桓, 晉文, 秦穆, 宋襄, 楚莊이라 】挾天子하야 以令諸侯하야 尙寄空名於天下라 然이나 繻葛倒懸【周桓王伐鄭한대 鄭與王戰于繻葛할새 射王中肩하니 易理猶倒懸也라 】하야 已爲戰國之漸이요 戰國엔 首命韓趙魏爲諸侯하야 綱常之道盡矣라 於是에 七雄競彊하야 蘇秦張儀肆從橫之術하니 從者는 猶知合六國以抗秦이로되 橫者는 甘於事秦而不恥라 事秦者는 固不知有周요 抗秦者도 不過自爲니 亦豈復知有周哉아 而周亡에 亦無一能倡大義於天下하고 僅有魯仲連이 義不帝秦하야 負當世高士重名이라 使當時之士에 有如三老董公之遮說하고 當時之君에 有如漢王三軍縞素하야 爲赧王하야 與東周君發喪하야 爲天下誅無道秦하야 名其爲賊이면 敵乃可服이리니 齊桓晉文之事를 寧不可復見於今日이리오 何計不出此하고 顧乃區區欲與秦鬪智角力이라가 卒之賓服恐後하야 以待滅亡之不暇하니 可痛也哉인저 又嘗合三代論之컨대 三代之王은 有天下가 一千九百六十九年이어늘 何聖賢之君無幾하야 夏有, , 少康하고 商有成湯, 太甲, 太戊, 盤庚, 武丁하고 周有武王, 成王, 康王, 宣王이요 外無聞焉이라 然이나 後之言治者 以三代爲稱首하야 巍巍皇皇하야 卓冠千古하야 而莫及者는 以聖王之道로 立經陳紀하고 創法定制라 其尤卓卓然者는 如井田封建學校學校兵師之要가 靡不備具하고 而又固結之以仁하고 維持之以禮하야 端本洪源하야 自足與天無極이라 故其後世子孫이 非有剛惡如之暴하고 非有柔惡如赧王之衰면 皆足以世守之而勿失也니 豈偶然哉아

溫公歷年圖曰 周自平王東遷으로 日以衰微하고 至於戰國하야는 又分而爲二하야 其土地人民이 不足以比彊國之大夫라 然이나 天下猶尊而事之하야 以爲共主하야 守之宗祧하야 綿綿然久而不絶하니 其故는 何哉오 植本固而發源深也일새라 昔周之興也에 禮以爲本하고 仁以爲源이라 自后稷以來로 至於히 其講禮也備矣요 其施仁也深矣라 民習於耳目하고 浹於骨髓하야 雖後世微弱이나 其民將有陵慢之心이면 則畏先王之禮而不敢爲하고 將有離散之心이면 則思先王之仁而不忍去하니 此其所以享國長久之道也라 不然이면 以區區數邑으로 處於七暴國之間하야 一日不可存이어든 況於數十年乎아 〈歷年圖는 乃溫公未作通鑑之前에 先進此圖하니 歷述古今治亂호되 於一代之終엔 則立一論하야 以斷其興亡하니 後倣此하니라〉

7년(임자 B.C.249) - 秦莊襄王 元年, 楚나라 14년,燕나라 6년, 魏나라 28년, 趙나라 17년,韓나라 24년, 齊나라 16년이다. 이 해에 周나라가 망하였다. -

秦나라가 呂不韋를 相國相國으로 삼아文信侯에 봉하였다.

東周君이 諸侯와 더불어 秦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자, 秦王이 相國相國呂不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망시키고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기니,【陽人聚는 ≪漢書≫ 〈地理志〉에 “河南 梁縣에 陽人聚가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陽人의 古城이 汝州 梁縣 서쪽 40리에 있다.” 하였다.】周나라가 마침내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개 고을을 소유하였다.【徐廣이 말하였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縣이 있었으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이것이다.”】

[新增]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西都(西周)는 涇水의 배가 楚나라의 못에서 아교가 녹아 침몰되고,【涇은 물 이름이니, 西周의 땅에 있다. 周나라 昭王이 巡狩하여 漢水를 건너가는데, 漢水 가에 있는 사람이 아교풀로 배를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중류에 이르러서 아교가 녹자 昭王이 漢水에 빠져 죽었다. 漢水는 楚나라 땅이었다.】 堂 아래로 내려가서 제후를 만나 본 뒤로부터【平王이 동쪽으로 遷都하여 洛邑에 도읍하자, 왕실이 미약해져서 정사가 아랫사람에게서 나오니, 天子가 堂을 내려가 諸侯를 보게 되었다.】 綱常이 침체되어 이미 春秋時代의 조짐이 있었으며, 東都(東周)는 春秋時代 이후로 미약하여 지탱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다행히 五霸가【五霸는 齊나라 桓公, 晉나라 文公, 秦나라 穆公, 宋나라 襄公, 楚나라 莊王이다.】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여 天子라는 빈 칭호를 천하에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繻葛의【周나라 桓王이 鄭나라를 정벌하자, 鄭나라가 王과 繻葛에서 싸울 적에 왕을 쏘아 어깨를 맞혔으니, 이치를 거역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것이다.】 싸움에서 군신간의 도리가 도치되어서 이미 戰國時代의 조짐이 되었고, 戰國時代에는 먼저 韓‧趙‧魏를 명하여 제후로 삼아서 綱常의 道가 다 없어졌다. 이에 七雄이 강성함을 다투어 蘇秦張儀가 合縱과 連橫의 술책을 펴니, 合縱하는 자들은 그래도 六國을 모아 秦나라에 항거할 줄을 알았으나, 連橫하는 자들은 秦나라를 섬기는 것을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秦나라를 섬기는 자들은 진실로 周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秦나라에 대항하는 자들도 또한 자신을 위함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또한 어찌 다시 周나라가 있음을 알았겠는가. 周나라가 망하자 또한 大義를 천하에 제창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겨우 魯仲連이 있어서 의리상 秦나라를 황제로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당대 高士의 두터운 名望을 지니게 되었다. 만일 당시의 선비 중에 三老三老인 董公漢王(劉邦)을 가로막고 설득한 것과 같이 하고, 당시의 군주 중에 漢王이 三軍三軍에게 소복을 입힌 것과 같이 하여, 赧王을 위해 東周君과 함께 發喪해서 천하를 위해 무도한 秦나라를 주벌하여 역적임을 분명히 밝혔으면 적이 비로소 굴복하였을 것이니, 齊나라 桓公과 晉나라 文公의 일을 어찌 다시 今日에 보지 못하였겠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고, 도리어 마침내 구구히 秦나라와 지혜를 다투고 힘을 겨루고자 하다가 끝내 복종함이 뒤늦을까 두려워하여 멸망함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하다.

또 일찍이 三代를 합하여 논하건대, 三代가 왕 노릇 함은 천하를 소유한 것이 1천 9백 69년이었는데,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몇 명이 못되어서 夏나라에는 禹王少康이 있었고, 商나라에는 成湯太甲太戊盤庚武丁이 있었고, 周나라에는 武王成王康王宣王이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알려진 군주가 없다. 그러나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들은 三代를 첫 번째로 칭하여, 드높고 위대하여 우뚝이 千古에 뛰어나서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禹王成湯文王武王이 聖王聖王의 道로써 떳떳한 법칙을 세우고 기강을 펴며 법을 창건하고 제도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중에도 더욱 우뚝이 드러난 것은 井田, 封建封建, 學校, 兵師와 같은 중요한 제도들이 자세히 구비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 仁으로 굳게 맺고 禮로 유지하여, 뿌리를 바로잡고 근원을 키워서 스스로 하늘과 더불어 무궁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자손들이 剛惡(剛이 過함)함으로 桀王紂王幽王厲王 같은 포악함이 있지 않고, 柔惡(柔가 過함)함으로 赧王과 같이 나약한 자가 있지 않으면 모두 충분히 대대로 지켜서 잃지 않은 것이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溫公의 《歷年圖》에 말하였다.

“周나라는 平王이 東遷(東都인 洛邑으로 遷都)한 뒤로부터 날마다 쇠약해졌고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또 나뉘어 둘이 되어서 그 土地와 人民이 강대국의 大夫大夫에도 비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하가 오히려 周나라를 높여 섬겨서 共主라 하여, 文王武王의 宗廟를 지켜 綿綿히 이어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으니, 그 연고는 어째서인가?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고 나오는 근원이 깊기 때문이었다. 옛날 周나라가 일어날 때에 禮로써 뿌리를 삼고 仁으로써 근원을 삼았다. 后稷后稷으로부터 이래로 文王, 武王, 成王, 康王에 이르기까지 禮를 강론함이 구비되었고 仁을 베풂이 깊었다. 백성들이 귀와 눈에 익숙하고 골수에 젖어 들어서 비록 후세가 미약하였으나 그 백성들이 장차 능멸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禮를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고, 장차 離反할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仁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향유하기를 장구하게 한 방도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구한 몇 고을을 가지고 포악한 일곱 나라의 사이에 처하여 단 하루도 보존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수십 년을 보존함에 있어서이겠는가.” - 《歷年圖》는 바로 溫公이 《資治通鑑》을 저술하기 전에 먼저 이 《歷年圖》를 올렸는 바, 古今의 다스려짐과 혼란함을 차례로 서술하되 한 왕조가 끝날 때에는 한 議論을 세워서 興亡을 결단하였으니, 뒤도 이와 같다.-

右周는 三十七王이니 幷東周君이라 按經世書하면 始武王己卯하야 終東周君壬子히 該八百七十三年이라

[新增]愚按 南宮氏曰 作史者는 〈司馬氏〉 當於莊襄元年東周旣滅에 方書周亡하고 然後進秦하야 使接周統이요 於莊襄終年呂政嗣位에 特書秦亡하고 然後正其姓氏하야 別爲後秦이니 斯實錄矣라 今乃不然하야 東周未滅에 遽進昭襄之秦하고 呂政嗣位로되 猶冒嬴秦之姓하야 於周則絶之如恐其不亟하고 於秦則進之如恐其不多하야 好惡不公하고 是非逆置하니 其諸謂之何哉오 秦自孝公以來로 累世窺周하야 一念僭竊이라가 至莊襄하야 百有餘年에 東周始滅하니 彼固謂嬴氏之業이 可傳之不墜러니 未幾에 呂政立而嬴氏之秦이 已亡이라 嗚呼라 赧王入秦之後에 歷七年而東周如線之緖尙存이러니 莊襄取周之餘才(纔)三載에 而柏翳【書 稱伯益이라 周平王이 封伯益之裔襄公於秦하니라 】數百年之宗祀遽滅【襄公始封諸侯로 至莊襄甲寅히 五百七十年이라 】이라 孟子曰 殺人之父면 人亦殺其父하고 殺人之兄이면 人亦殺其兄이라하시니 天道好還하야 福善禍淫이 無毫髮爽이어늘 而世之窺覦僭竊于人之國者 每迷而不悟하니 悲夫라

이상 周나라는 37왕이니, 東周君까지 넣었다. 《皇極經世書》를 살펴보면 武王己卯年에서 시작하여 東周君壬子年에 이르기까지 총 873년이다.

내(胡一桂의 《史纂通要》)가 살펴보건대, 南宮氏(南宮靖一)가 말하기를 “역사책을 지은 자(司馬光을 가리킴)가 마땅히 莊襄王元年에 東周가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周나라가 망한 것을 쓰고 그런 뒤에 秦나라를 올려서 周나라의 계통을 이었어야 하고, 莊襄王의 마지막 해에 呂政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는 秦나라가 망한 것을 특별히 쓰고 그런 뒤에 姓氏를 바로잡아 별도로 後秦이라고 했어야 하니,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진실한 기록이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東周가 멸망하기 전에 갑자기 昭襄王의 秦나라를 올리고, 呂政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대로 嬴秦의 姓을 무릅써서, 周나라에 있어서는 끊어버리기를 행여 빨리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하고, 秦나라에 있어서는 올리기를 행여 많이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해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도치되었으니 이를 일러 뭐라고 하겠는가.

秦나라는 孝公 이래로 여러 대 동안 周나라 왕실을 엿보아 한결같이 참람하고 도둑질할 것을 생각하다가 莊襄王에 이르러 백여 년 만에 東周가 비로소 멸망하자, 저들은 진실로 嬴氏의 基業이 길이 전해져 실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呂政이 즉위하자 嬴氏의 秦나라가 이미 망하였다. 아,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후에 7년이 지나도록 東周의 실낱같은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었는데, 莊襄王이 周나라를 취한 뒤로 겨우 3년 만에 柏翳의【柏翳를 ≪書經≫에는 伯益이라 칭하였다. 周나라 平王이 伯益의 후손인 襄公을 秦나라에 봉하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宗祀가 마침내 멸망하였다.【襄公을 처음 제후로 봉한 뒤로부터 莊襄王 갑인년까지 570년이다.】孟子가 말씀하기를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형을 죽인다.”라고 하였으니, 天道는 돌려주기를 좋아하여 선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려줌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는데, 세상에 남의 나라를 엿보고 도둑질하는 자들은 매양 어두워 깨닫지 못하니, 슬프다.

秦紀

莊襄王

※名孝文王子라 初質於趙러니 因不韋策하야 歸以爲嗣하니라 其先은 柏翳이니 佐有功하야 賜姓이라 後有非子封秦하고 秦仲始大하며 自孝公商鞅하야 以利而致富强하고 廢井田, 開阡陌하며 莊襄滅周러니 三年而亡하니라

秦紀

※莊襄王은 이름이 楚이니 孝文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趙나라에 볼모가 되었는데 呂不韋의 계책을 따라 秦나라로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었다. 그 선조는 柏翳이니 舜임금을 도와 공이 있어서 嬴氏姓을 하사받았다. 뒤에 非子가 있어 秦나라에 봉해지고 秦仲이 비로소 나라를 키웠으며, 孝公이 商鞅을 등용하여 이익으로 부강함을 이룩하였으며 井田法을 폐지하고 阡陌을 개간하였다. 莊襄王이 周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즉위한 지 3년에 망하였다.

[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喜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建十七年

[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十七年이라 ○ 凡七國이라〉

日食하다 ○ 秦이 伐趙하야 定太原하고 取三十七城하다

계축(B.C.248) - 秦莊襄王 2년, 楚 考烈王 15년, 燕王 7년, 魏安釐王 29년, 趙孝成王 18년, 韓桓惠王 25년, 齊王 17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

日食이 있었다.

○ 秦나라가 趙나라를 쳐서 太原을 평정하고 37개 성을 점령하였다.

[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

[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고 呂政代하니라〉

蒙驁【齊人이니 蒙武之父요 蒙恬之祖也라 】帥師伐魏하니 魏師數敗라 魏王이 患之하야 乃使人請信陵君【卽公子公子無忌也라 】於趙한대 信陵君이 畏得罪하야 不肯還이라 毛公, 薛公이 見信陵君하고 曰 公子公子所重於諸侯者는 徒以有魏也라 今魏急而公子公子不恤이라가 一旦에 秦人이 克大梁【魏地라 按魏有小梁이라 故以大梁別之라 】하고 夷先王之宗廟면 公子公子何面目立天下乎잇가 語未畢에 信陵君이 色變하야 趣(促)駕還魏하니 魏王이 持信陵君而泣하고 以爲上將軍爲上將軍하다 信陵君이 使人求援於諸侯한대 諸侯聞信陵君復爲魏將魏將하고 皆遣兵救魏하니 信陵君이 率五國之師하야 敗蒙驁於河外【謂陝華二州也라 河外者는 河南岸也니 魏州地라 】하다

[史略 史評]臨江梁氏寅曰 從橫之說이 固皆詭術이나 然爲從者는 實六國之利也라 當無忌之時하야 六國이 益不支於秦矣라 然이나 無忌一旦爲魏將魏將에 五國이 助之하야 大破秦軍하니 況於其初에 能以信義相親하여 幷力西向이면 則秦雖强暴나 安得而亡之哉아 故로 曰滅六國者는 六國也요 非秦也라하니라

갑인(B.C.247) - 秦나라 3년, 楚나라 16년,燕나라 8년, 魏나라 30년, 趙나라 19년,韓나라 26년, 齊나라 18년이다. ○ 이 해에 秦나라가 망하고 呂政이 대신하였다. -

蒙驁가【蒙驁는 齊나라 사람이니, 蒙武의 아버지이고 蒙恬의 조부이다.】 군대를 이끌고 魏나라를 정벌하니, 魏나라 군대가 자주 패하였다. 魏王이 근심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趙나라에 있는 信陵君(公子 無忌)을 청하니,【信陵君은 바로 公子 無忌이다.】信陵君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毛公薛公信陵君을 만나 말하기를 “公子公子께서 諸侯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다만 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魏나라가 급한데 公子公子가 돌보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秦나라 사람들이 大梁을 이기고【大梁은 魏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魏나라에 小梁이 있기 때문에 大梁이라 하여 구별한 것이다.】 先王의 宗廟를 부순다면 公子公子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말을 마치기 전에 信陵君이 낯빛이 변해서 수레를 재촉하여 魏나라로 돌아오니, 魏王信陵君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上將軍上將軍으로 삼았다. 信陵君이 사람을 시켜 諸侯들에게 구원을 청하니, 諸侯들이 信陵君이 다시 魏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대를 보내어 魏나라를 구원하였다. 信陵君이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河外에서 蒙驁를 패배시켰다.【河外는 陝州와 華州 두 州를 이른다. 河外는 黃河의 남쪽 기슭이니, 魏州 땅이다.】

[史略 史評]臨江梁氏(梁寅)가 말하였다.

“合從과 連橫의 내용이 진실로 모두 속이는 술책이나, 六國이 合從하는 것은 실로 六國의 이익이었다. 無忌의 때를 당해서는 六國이 더욱 秦나라를 버텨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無忌가 하루아침에 魏나라 장수가 되자, 다섯 나라가 도와서 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니, 하물며 六國이 처음에 신의로써 서로 친하여 힘을 합해 서쪽으로 秦나라를 향하였더라면 秦나라가 비록 강하고 포악하나 어떻게 六國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六國을 멸망시킨 것은 六國 자신이고 秦나라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 五月에 秦王薨하니 立三年이라 其子이 立【時政生十三年矣라 ○ 潁濱蘇轍이 嘗謂六國未亡에 而嬴氏先亡이라하니 信哉라 言乎여 】하야 封相國呂不韋하야 爲文信侯하고 號稱仲父라하다

[新增]胡氏不韋能以其子로 爲秦王之子하니 豈不能疾去二君하야 以其子爲王哉아 要之孝文莊襄이 蓋死於弑也니라

[史略 史評]雙湖胡氏曰 七國이 莫强於秦이요 亦莫强於六國이로되 은 用遠交近攻之策하야 卒以蠶食天下하고 六國은 爲謀不固하며 齊獨坐視五國之亡하고 自謂得計라가 同歸于盡하니 吁라 秦이 非强也라 詐有餘也요 六國이 非弱也라 智不足也니 使智足以燭秦之詐하고 信足以結六國之交하고 義足以尊周而爲之主면 雖族秦하여 求吾所大欲이라도 可也어늘 奈何其不然하고 以待覆亡之不暇하니 可勝歎哉아

5월에 秦王이 죽으니, 즉위한 지 3년이었다. 그 아들이 즉위해서【이때 政이 태어난 지 13년이었다. ○ 潁濱 蘇轍이 일찍이 이르기를 “六國이 멸망하기 전에 嬴氏가 먼저 망하였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다.】相國相國呂不韋를 봉하여 文信侯로 삼고 仲父라 칭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呂不韋가 자기 자식을 秦王의 자식으로 삼았으니, 어찌 속히 두 人君을 제거하여 자기 자식을 왕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요컨대 孝文王莊襄王呂不韋의 시해에 죽은 것이다.”

[史略 史評]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七國은 秦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고 또한 六國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으나, 秦나라는 遠交近攻의 계책을 써서 끝내 천하를 잠식하였고, 六國은 계책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齊나라는 五國이 망하는 것을 단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여겼다가 똑같이 멸망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秦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가 有餘해서였고, 六國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해서였으니, 만일 지혜가 秦나라의 속임수를 환히 알 수 있고 믿음이 六國의 교제를 공고히 할 수 있고 義理가 천자국인 周나라를 높여 宗主로 삼을 수 있었더라면 비록 秦나라를 멸망시켜 자신들이 크게 원하는 바를 구하더라도 가능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고는 손쓸 새도 없이 전복하고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後秦紀

始皇帝

이요 實姓은 呂氏니 卽王位二十五年이요

始皇帝※上 名이요 實姓은 呂氏니 卽王位二十五年이요 幷天下하야 卽帝位 凡十二年이요 壽五十이라

※ 恃嬴秦之富强하고 滅六國하야 遂幷天下러니 專以刑威立國하고 焚書坑儒하며 暴虐不道라가 二世而亡하니라 ○ 愚按正月之正을 蓋秦法에 諱政爲征이라 故當時呼爲征月하야 而轉其聲이라 且無道之君이 歷千有餘年이어늘 而俗仍呼作平聲者 豈不謬哉아 今正月〈之〉正은 當讀如字하야 去聲爲是라 凡六經四書中에 皆當以此例之니라

後秦紀

始皇帝※는 이름이 이고 실제 姓은 呂氏이니, 王位에 오른 것이 25년이고, 천하를 兼幷하여 帝位에 오른 것이 모두 12년이며, 壽가 50세이다.

始皇帝는 嬴秦의 부강함을 믿고서 六國을 멸하여 마침내 천하를 겸병하였는데, 오로지 형벌과 위엄으로 나라를 세우고는 서적을 불태우고 儒生들을 묻어 죽였으며 포학무도하다가 2세 만에 망하였다. ○ 살펴보건대 正月의 正을, 秦나라 法에 政을 휘하여 征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征月이라 하여 그 聲調를 바꾼 것이다. 지금 무도한 임금의 때가 천여 년이 지났는데 시속에서 아직도 正字를 平聲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지금 正月의 正은 마땅히 본래 글자대로 읽어 去聲으로 읽는 것이 옳다. 六經과 四書에서도 모두 마땅히 이것을 준례로 삼아야 한다.

[丁巳]秦王政三, 楚十九, 燕十一, 魏三十三, 趙悼襄王偃元, 韓二十九, 齊二十一年

[丁巳]〈秦王三, 楚十九, 燕十一, 魏三十三, 趙悼襄王元, 韓二十九, 齊二十一年이라〉

趙王이 以李牧爲將하야 伐燕하야 取武遂, 方城【地理志에 武遂는 屬河間國하고 方城은 屬廣陽郡이라 〈括〉地志에 武遂는 易州遂城也요 方城은 在幽州固安南十七里라 】하다 李牧者는 趙之北邊良將也라 嘗居代雁門【雁門縣이 在代地라 故云代雁門이라 漢代郡城은 古代國也라 】하야 備匈奴【王氏曰 唐, 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獯鬻이요 夏曰淳維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 漢曰匈奴요 魏, 隋, 唐은 皆曰突厥이라 】할새 以便宜置吏하고 市租를 皆輸入莫(幕)府【莫府者는 以軍幕爲義하니 古字通用이라 古者出征에 以幕帳爲府署也라 】하야 爲士卒費하고 日擊數牛하야 饗士하다 習騎射하고 謹烽火하며 多間諜【諜은 卽游偵이니 使之間行하야 以伺敵하야 觀其變動이라 】하고 爲約曰 匈奴卽入盜어든 急入收保하고 有敢捕虜者면 斬하리라 匈奴每入에 烽火謹하고 輒入保不戰하니 如是數歲에 亦不亡失이라 匈奴皆以爲怯하고 邊士日得賞賜而不用【不用之以戰也라 】하야 皆願一戰이러라 於是에 大破殺匈奴十餘萬騎하고 滅襜襤【一作臨駰이라 如淳曰 胡名也니 在代地라 】하고 破東胡하니 單于犇走【趙東有瀛(洲)[州]之東北營州之境이 卽東胡烏丸地니 國在匈奴東이라 故曰東胡라 王氏曰 〈單于는〉 匈奴天子之號니 猶華言皇帝也라 漢書音義曰 單于者는 廣大貌니 言其象天單于然也라 單은 音蟬이라 】하야 十餘歲를 不敢近趙邊하니라

정사(B.C.244) - 秦王 3년, 楚나라 19년,燕나라 11년,魏나라 33년, 趙나라 悼襄王元年, 韓나라 29년, 齊나라 21년이다. -

趙王李牧을 장수로 삼아 燕나라를 정벌해서武遂와 方城을【武遂와 方城은 ≪漢書≫ 〈地理志〉에 “武遂는 河間國에 속하고 方城은 廣陽郡에 속한다.” 하였고, ≪括地志≫에 “武遂는 易州의 遂城이고 方城은 幽州 固安縣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점령하였다. 李牧이란 자는 趙나라 북쪽 변방의 훌륭한 장수이다. 일찍이 代郡의 雁門에 있으면서【雁門縣이 代 땅에 있으므로 代雁門이라고 이른 것이다. 漢나라의 代郡의 城은 옛날 代國이다.】匈奴를 방비할【王氏가 말하였다. “匈奴를 堯‧舜 이전에는 山戎이라 하고 또 獯鬻이라 하였으며, 夏나라 때에는 淳維, 殷나라 때에는 鬼方, 周나라 때에는 玁狁, 秦나라와 漢나라 때에는 匈奴, 魏나라‧隋나라‧唐나라 때에는 모두 突厥이라 하였다.”】 적에 편의에 따라 관리를 두고, 시장의 조세를 모두 幕府로 들여와서【莫府는 軍幕을 의미하니, 古字에 莫과 幕이 통용되었다. 옛날에 出征할 때에는 장막으로 府署를 만들었다.】 士卒들의 비용으로 쓰고,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였다.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烽火를 삼가며 간첩을 많이 이용하고,【諜은 바로 돌아다니며 정탐하는 자이니, 몰래 돌아다니면서 적을 정탐하여 그 변동을 살펴보는 것이다.】 약속하기를 “匈奴가 만약 들어와 도둑질하거든 급히 城으로 들어와 거두어 지킬 것이요, 감히 匈奴를 포로로 잡는 자가 있으면 斬刑에 처하겠다.” 하였다.

匈奴가 매번 쳐들어올 때마다 烽火를 삼가고(철저히 들어올리고) 번번이 城으로 들어와 지키고 싸우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년 동안 함에 또한 망실한 것이 없었다. 匈奴들은 모두 겁쟁이라 하였고 변방의 군사들은 날마다 상으로 하사하는 물건(병기)을 얻었으나 쓸 곳이 없어서【不用은 그것(병기)을 사용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다.】 모두 한 번 싸우기를 원하였다. 이에 〈출전하여〉 匈奴의 10여 만 騎兵을 대파하여 죽이고, 襜襤을 멸망시키고【襜襤은 一本에는 臨駰으로 되어 있다. 如淳이 말하기를 “오랑캐 이름이니 代 땅에 있다.” 하였다.】東胡를 격파하니, 單于가 달아나서【趙나라 동쪽 瀛州의 동북쪽 營州의 경계가 바로 東胡의 烏丸 땅이니, 나라가 匈奴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東胡라고 한 것이다. 王氏가 말하였다. “單于는 匈奴의 天子의 칭호이니 中華에서 皇帝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漢書音義≫에 이르기를 ‘單于는 廣大한 모양이니, 하늘의 광대함을 본떴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單은 음이 선이다.”】 10여 년 동안 감히 趙나라 변경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 是時에 天下冠帶之國七而三國【三國은 秦趙燕이라 】邊於戎狄이라 秦은 滅義渠하고 始於隴西, 北地, 上郡하야 築長城以拒胡하고 趙武靈王은 北破林胡【西胡國名이라 如淳曰 林胡는 卽(襜)[儋]林이니 爲趙武靈王所滅하니라 】, 樓煩【雁門郡에 有樓煩縣하니 胡之故地也라 輿地要覽云 樓煩故城은 在今太原府崞州東이라 】하고 築長城호되 自代竝(傍)陰山【北戎地라 在朔州北塞外하니 東西千餘里라 草木茂盛하니 匈奴依阻其中이러니 漢武克匈奴하고 置陰山縣하니라 】하야 下至高闕【括地志云 朔方郡臨戎縣北에 有連山하니 險於長城이라 其山中斷하야 兩峯極峻하고 相對若闕이라 故名焉이라 】하야 爲塞하고 其後에 燕은 破東胡하야 却千餘里하고 亦築長城하야 以拒胡러니 及戰國之末하야 而匈奴始大하니라

이때 천하에 冠을 쓰고 띠를 매는 예의의 나라가 일곱인데, 세 나라가 戎狄과 邊境을 접하고 있었다.【三國은 秦나라, 趙나라, 燕나라이다.】秦나라는 義渠를 멸하고隴西‧北地‧上郡에서부터 시작하여 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으며, 趙나라 武靈王은 북쪽으로 林胡와【林胡는 서쪽 오랑캐의 나라 이름이다. 如淳이 말하였다. “林胡가 바로 儋林이니, 趙나라 武靈王에게 멸망당하였다.”】樓煩을【樓煩은 雁門郡에 樓煩縣이 있으니, 오랑캐의 옛 땅이다. ≪輿地要覽≫에 이르기를 “樓煩의 옛 城이 지금 太原府 崞州 동쪽에 있다.” 하였다.】격파하고長城을 쌓되 代郡에서부터 陰山【陰山은 북쪽 오랑캐 땅이다. 朔州 북쪽 변방 밖에 있으니, 동서로 천여 리이다. 초목이 무성하니, 匈奴가 그 가운데에 의지하여 살았는데 漢나라 武帝가 匈奴를 이기고 陰山縣을 설치하였다.】 곁을 따라 아래로 高闕에【高闕은 ≪括地志≫에 이르기를 “朔方郡 臨戎縣 북쪽에 連山이 있으니 長城보다도 험하다. 산 중간이 끊어져 두 봉우리가 지극히 높고 서로 마주 대하여 闕門과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이르러 요새를 만들었으며, 그 후에 燕나라는 東胡를 격파하여 천여 리를 물리치고 또한 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는데, 戰國時代 말기에 이르러 匈奴가 비로소 커졌다.

[庚申]秦六, 楚二十二, 燕十四, 魏二, 趙四, 韓三十二, 齊二十四年

[庚申]〈秦六, 楚二十二, 燕十四, 魏二, 趙四, 韓三十二, 齊二十四年이라〉

楚, 趙, 魏, 韓, 燕이 合從【漢書音義에 以利合曰從이요 以威力相脅曰橫이라 】以伐秦할새 楚王이 爲從長하고 而春申君이 用事하야 取壽陵【在常山郡하니 本趙邑이라 】이러니 至函谷하야 秦師出에 五國之師皆敗走라 楚王이 以咎春申君하니 春申이 以此益疎러라

경신(B.C.241) - 秦나라 6년, 楚나라 22년,燕나라 14년,魏나라 2년, 趙나라 4년, 韓나라 32년, 齊나라 24년이다. -

楚‧趙‧魏‧韓‧燕이 合從하여【合從은 ≪漢書音義≫에 “이익으로써 합하는 것을 從이라 하고 威力으로써 서로 위협하는 것을 橫이라 한다.” 하였다.】秦나라를 정벌할 적에 楚王이 從約의 長이 되고 春申君이 用事(권력을 행사)하여 壽陵을【壽陵은 常山郡에 있으니, 본래 趙나라 읍이다.】 차지하였는데, 函谷關에 이르러 秦나라 군대가 나오자 다섯 나라의 군사가 모두 패주하였다. 楚王이 이것을 春申君에게 허물하니, 春申君이 이 때문에 더욱 소원해졌다.

[甲子]秦十, 楚幽王悍元, 燕十八, 魏六, 趙八, 韓二, 齊二十八年

[甲子]〈秦十, 楚幽王元, 燕十八, 魏六, 趙八, 韓二, 齊二十八年이라〉

宗室大臣이 諫曰 諸侯人來仕者 皆爲其主遊間耳니 請一切逐之하소서 於是에 大索逐客하니 客卿客卿楚人李斯亦在逐中이라 行且上書曰 昔에 穆公은 求士하야 西取由余於戎【由余者는 其先春秋晉人也러니 亡入戎耳라 】하고 東得百里奚於宛하고 迎蹇叔於宋【秦本紀云 百里奚謂穆公曰 臣友蹇叔이 賢而世莫知라한대 穆公이 遂厚幣迎之라하야늘 今云迎於宋이라하니 未詳所出이라 或曰 岐州人으로 〈時〉遊於宋耳라 】하고 求丕豹, 公孫支於晉【丕豹는 自晉奔秦하니 左傳〈有〉明文이라 公孫支는 卽子桑也니 是秦大夫어늘 而云求於晉이라하니 未詳이라 或曰 亦岐州人으로 時遊於晉이라 】하야 幷國二十하야 遂霸西戎하니이다 孝公은 用商鞅之法하야 諸侯親服하야 至今治彊하고 惠王은 用張儀之計하야 散六國之從하야 使之事秦하고 昭王은 得范睢하야 彊公室하고 杜私門하니 此四君者는 皆以客之功하시니 由此觀之컨대 客何負於秦哉잇가 臣聞太(泰)山은 不讓土壤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는 不擇細流故로 能就其深하고 王者는 不却衆庶故로 能明其德이라하니 此는 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라 今乃棄黔首【黔은 黧也라 始皇名民曰黔首라하니 以其頭黑也라 】하야 以資敵國하고 却賓客하야 以業諸侯하시니 所謂藉寇兵 而齎盜糧【藉는 或作借하니 謂以兵假(借)[寇]也요 齎는 持遺也니 言爲盜齎糧也라 】者也로소이다 王이 乃召李斯하야 復其官하고 除逐客之令하고 卒用李斯之謀하야 兼天下하다

갑자(B.C.237) - 秦나라 10년, 楚나라 幽王元年, 燕나라 18년,魏나라 6년, 趙나라 8년, 韓나라 2년, 齊나라 28년이다. -

宗室 大臣大臣이 간하기를 “諸侯國의 사람으로 秦나라에 와서 벼슬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 나라 군주를 위하여 유세하고 이간질할 뿐이니, 청컨대 일체 축출하소서.” 하였다. 이에 객들을 크게 찾아서 쫓아내었는데, 客卿客卿인 楚나라 사람 李斯도 쫓겨나는 가운데 있었다. 그가 떠나면서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옛날 穆公은 선비를 구하여 서쪽으로 由余를 戎에서【由余는 그 선조가 春秋時代 晉나라 사람이었는데, 도망하여 戎으로 들어갔다.】취하고, 동쪽으로 百里奚를 宛에서 얻고, 蹇叔을 宋나라에서【≪史記≫ 〈秦本紀〉에 이르기를 “百里奚가 穆公에게 이르기를 ‘신의 벗 蹇叔이 어진데도 세상에 알아주는 자가 없습니다.’ 하자, 穆公이 마침내 후한 폐백으로 맞이하였다.” 하였는데, 지금 宋나라에서 맞이하였다고 말하였으니 出典이 자세하지 않다. 혹자(≪史記正義≫)는 말하기를 “岐州 사람으로 이때 宋나라에 가 있었다.” 한다.】맞이하고, 丕豹公孫支를 晉나라에서【丕豹는 晉나라에서 秦나라로 망명하였는데 ≪春秋左傳≫에 분명한 글이 있다. 公孫支는 바로 子桑이니, 이는 秦나라 大夫인데 晉나라에서 구했다고 하였으니, 자세하지 않다. 혹자(≪史記正義≫)는 말하기를 “公孫支 또한 岐州 사람으로 이때 晉나라에 가 있었다.” 한다.】구하여 20개국을 겸병해서 마침내 西戎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孝公商鞅의 法을 써서 諸侯들이 친근하고 복종하여 지금까지 秦나라가 다스려지고 강하며, 惠王張儀의 계책을 써서 六國의 合從을 와해시켜 六國으로 하여금 秦나라를 섬기게 하였고, 昭王范睢를 얻어 公室을 강하게 하고 私門(權臣의 가문)을 막았습니다. 이 네 군주는 모두 객의 공으로 성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客이 어찌 秦나라를 저버렸습니까?

신은 듣건대 ‘泰山은 작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기 때문에 그 큼을 이루고, 河海는 작은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깊음을 이루고, 王者는 여러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기 때문에 그 德을 밝힌다.’고 하였으니, 이는 五帝와 三王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던 이유입니다. 지금 도리어 黔首(백성)를【黔은 검음이다. 始皇帝가 백성들을 이름하여 黔首라 하였으니, 머리가 검기 때문이라 한다.】 버려서 적국을 돕게 하고 빈객들을 물리쳐 諸侯들에게 功業을 이루게 하니, 이른바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갖다 준다.’는【藉는 혹 借로 되어 있으니 병기를 빌려줌을 이르고, 齎는 가져다 주는 것이니 도적을 위하여 양식을 가져다 줌을 말한다.】 것입니다.”

왕이 마침내 李斯를 불러 그 관작을 회복시키고 客을 축출하는 명령을 제거하였으며, 마침내 李斯의 계책을 써서 천하를 겸병하였다.

[戊辰]秦十四, 楚五, 燕二十二, 魏十, 趙三, 韓六, 齊三十二年

[戊辰]〈秦十四, 楚五, 燕二十二, 魏十, 趙三, 韓六, 齊三十二年이라〉

韓王이 納地하야 請爲藩臣하고 使韓非로 來聘하니 韓非者는 韓之諸公子公子也라 善刑名法律之學이러니 見韓之削弱하고 數以書干韓王호되 韓王이 不能用이라 於是에 韓非 作說難【說는 音稅니 言遊說之道不易也라 】, 孤憤【言孤直不容於時라 】, 五蠹【蠹는 音妬니 言蠹政之事有五라 】, 說林【言廣說諸事하야 其多若林이라 】 五十六篇十餘萬言하다

무진(B.C.233) - 秦나라 14년,楚나라 5년, 燕나라 22년,魏나라 10년, 趙나라 3년, 韓나라 6년, 齊나라 32년이다. -

韓王이 땅을 바쳐 藩臣이 되기를 청하고 韓非를 시켜 와서 聘問하니, 韓非라는 자는 韓나라의 公子公子였다. 刑名刑名과 法律의 학문을 잘하였는데, 韓나라가 侵削당하고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자주 글로 韓王에게 등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韓王이 쓰지 못하였다. 이에 韓非는 〈說難〉,【說는 음이 세이니, 〈說難은〉 유세하는 길이 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孤憤〉,【孤憤은 외롭고 정직하여 세상에 용납받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五蠹〉,【蠹는 음이 투(두)이니, 〈五蠹는〉 정사를 좀먹는 일이 다섯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說林〉【說林은 여러 가지 일을 널리 말하여 그 많음이 숲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등 56편, 10여 만 글자를 지었다.

[己巳]秦十五, 楚六, 燕二十三, 魏十一, 趙四, 韓七, 齊三十三年

[己巳]〈秦十五, 楚六, 燕二十三, 魏十一, 趙四, 韓七, 齊三十三年이라〉

初에 燕太子이 嘗質於趙하야 與王善이러니 王卽位에 이 爲質於秦하니 王이 不禮焉이어늘 이 怒하야 亡歸하다

기사(B.C.232) - 秦나라 15년,楚나라 6년, 燕나라 23년, 魏나라 11년,趙나라 4년, 韓나라 7년, 齊나라 33년이다. -

당초에 燕나라 太子太子이 일찍이 趙나라에 볼모(인질)가 되어서 秦王과 친하였다. 왕이 즉위하자 이 秦나라에 볼모가 되었는데, 왕이 예우하지 않으니 이 노하여 도망해 돌아왔다.

[辛未]秦十七, 楚八, 燕二十五, 魏十三, 趙六, 韓九, 齊三十五年

[辛未]〈秦十七, 楚八, 燕二十五, 魏十三, 趙六, 韓九, 齊三十五年이라 ○ 是歲에 韓亡하니 凡六國이라〉

內史內史이 滅韓하야 虜韓王하고 以其地로 置潁川郡하다

신미(B.C.230) - 秦나라 17년,楚나라 8년, 燕나라 25년, 魏나라 13년,趙나라 6년, 韓나라 9년, 齊나라 35년이다. ○ 이 해에 韓나라가 망하니 모두 여섯 나라이다.-

內史內史이 韓나라를 멸하여韓王을 사로잡고 그 땅으로 潁川郡을 설치하였다.

[癸酉]秦十九, 楚十, 燕二十七, 魏十五, 趙八, 齊三十七年

[癸酉]〈秦十九, 楚十, 燕二十七, 魏十五, 趙八, 齊三十七年이라 ○ 是歲에 趙亡하니 凡五國이라〉

王翦이 擊趙軍하야 大破之하고 遂克邯鄲하야 虜趙王遷하다

계유(B.C.228) - 秦나라 19년,楚나라 10년, 燕나라 27년, 魏나라 15년,趙나라 8년, 齊나라 37년이다. ○ 이 해에 趙나라가 망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다.-

王翦이 趙나라 군대를 공격하여대파하고 마침내 邯鄲을 이기고서趙王을 사로잡았다.

○ 燕太子이 怨王欲報之러니 將軍於期得罪하고 亡之燕한대 太子太子受而舍之하다 太子太子聞衛人荊軻之賢하고 卑辭厚禮而請見之하야 欲使劫秦王하야 反諸侯侵地라가 不可어든 因刺殺之러라 曰 今行而無信이면 則秦을 未可親也니 誠得樊將軍首와 與燕督亢之地圖【劉向云 督亢은 燕之膏腴地니 今涿州南新城縣이 古督亢亭也라 燕欲以獻秦이라 故畫地獻之하니라 】하야 奉獻秦王이면 秦王이 必說(悅)見臣하리니 臣이 乃有以報라하고 乃私見樊於期曰 聞購將軍首를 金千斤, 邑萬家라하니 願得將軍之首하야 以獻秦王이면 秦王이 必喜而見臣하리니 臣이 左手把其袖하고 右手揕其胸이면 則將軍之仇報하고 而燕見陵之愧除矣리이다 樊於期曰 此는 臣之日夜切齒腐心也라하고 遂自刎이어늘 以函盛其首하고 太子豫求天下之利匕首【尺八短劍이니 其頭類匕故로 名匕首라 】하야 使工으로 以藥焠之하야 以試人하니 血濡縷【以匕首試人하야 血出이 如絲縷之細라 】에 人無不立死者라 乃遣入秦하다

燕나라 太子太子이 王을 원망하여보복하고자 하였는데, 장군 樊於期가 죄를 얻고 도망하여 燕나라로 가니, 太子太子가 받아들여 집에 머물게 하였다. 太子太子가 衛나라 사람 荊軻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낮추고(겸손하게 하고) 禮를 후하게 하여 만나 보기를 청해서 秦王을 위협하여 諸侯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환하게 하다가 그것이 불가하면 인하여 찔러 죽이고자 하였다.

荊軻가 말하기를 “이제 가면서 믿을 만한 신표가 없으면 秦王을 가까이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樊將軍의 머리와 燕나라 督亢의 지도를 얻어서劉向이 이르기를 “督亢은 燕나라의 비옥한 땅이니, 지금 涿州 남쪽 新城縣이 옛날 督亢亭이다.” 하였다. 燕나라가 이곳을 秦나라에 바치고자 하였으므로 지도를 그려서 바친 것이다.】秦王에게 받들어 올리면 秦王이 반드시 기뻐하여 臣을 만나 볼 것이니, 臣이 그제야 보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사사로이 樊於期를 보고 말하였다.

“내 들으니 秦나라에서 장군의 머리를 金 千斤과 萬家의 고을로 현상을 내걸었다 하니, 장군의 머리를 얻어 秦王에게 바치면 秦王이 반드시 기뻐하여 신을 만나 볼 것입니다. 신이 왼손으로 그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른다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燕나라가 능멸을 당한 수치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樊於期가 말하기를 “이는 신이 밤낮으로 이를 갈며 마음을 썩히는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그 머리를 함에 담았다. 태자가 천하의 예리한 匕首(단검)를 미리 구하여【1尺 8寸의 단검이니, 그 머리 부분이 숟가락과 비슷하기 때문에 匕首라 한 것이다.】 工人을 시켜 독약으로 담금질하게 해서 사람에게 시험해 보니, 피가 실오라기를 적실 만큼 조금만 나도【匕首를 사람에게 시험하여 피가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나온 것이다.】 사람이 당장에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荊軻를 秦나라로 들여보냈다.

[甲戌]秦二十, 楚王負芻元, 燕二十八, 魏王假元, 齊三十八年

[甲戌]〈秦二十, 楚王負芻元, 燕二十八, 魏王元, 齊三十八年이라 ○ 代王元年이라 ○ 舊國五요 新國一이라 ○ 凡六國이라〉

荊軻至咸陽하니 王이 大喜하야 朝服設九賓【文物大備를 卽謂九賓也라 或云 周禮九儀公侯伯子男公卿大夫士也라 一說에 賓은 謂傳儐之儐이니 儐者는 九人也라 】而見之하다 荊軻奉圖하야 以進於王이러니 圖窮而匕首見이어늘 因把王袖而揕之할새 未至身하야 王이 驚起하야 袖絶하니 荊軻逐王한대 王이 環柱而走하다 秦法에 群臣侍殿上者 不得操尺寸之兵이라 左右以手共搏之하고 且曰 王은 負劍【古者帶劍하니 劍長하야 未易拔故로 欲王推之於背하야 令前短하야 易拔也라 一曰 負猶持也라 曲禮에 負劍辟咡라한대 註에 以手挾童子於脅下하야 如帶劍然也라 】負劍하소서 王이 遂拔〈劍〉하야 以擊荊軻하야 斷其左股하고 遂體解以徇하다 於是에 益發兵伐燕하야 戰於易水【源出易州南安閻山하야 東經霸州文安하야 入寇[滱]하니 按卽漢固安縣也라 】之西하야 大破之하니 燕王이 斬獻王이어늘 王이 復進兵攻之하다

갑술(B.C.227) - 秦나라 20년,楚王 負芻元年, 燕나라 28년, 魏王 假元年,齊나라 38년이다. ○ 代王 元年이다. ○ 옛 나라가 다섯이고 새로운 나라가 하나이다. ○ 합해서 여섯 나라이다.-

荊軻가 咸陽에 이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朝服 차림으로 九賓의【文物을 크게 구비함을 九賓이라 이른다. 혹자는 말하기를 “≪周禮≫의 九儀이니, 公‧侯‧伯‧子‧男과 公‧卿‧大夫‧士이다.” 하였다. 一說에 “賓은 명령을 전달하는 儐을 이르니, 儐하는 자가 아홉 명이다.” 하였다.】 禮를 陳設하고 만나 보았다. 荊軻가 지도를 받들어 왕에게 올렸는데, 지도가 다하자 匕首가 보였다. 荊軻가 인하여 왕의 소매를 잡고 찌르려 할 적에 匕首가 왕의 몸에 이르기 전에 왕이 놀라 일어나 소매가 끊어졌다. 荊軻가 왕을 쫓자 왕이 기둥을 돌며 도망하였다.

秦나라 법에 대궐 위에서 모시는 신하들은 한 자나 한 치의 병기도 휴대할 수가 없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손으로 함께 荊軻를 붙잡고, 또 말하기를 “왕은 칼을 등으로【옛날에 검을 차니, 검이 길어서 쉽게 뽑을 수가 없기 때문에 왕으로 하여금 등으로 밀어서 앞이 짧게 하여 뽑기 쉽게 하고자 한 것이다. 一說에 “負는 잡음과 같다. 〈曲禮〉에 ‘칼을 차듯이 옆에 끼고 입가까지 몸을 기울인다.’ 하였는데, 註에 ‘손으로 童子를 겨드랑이 밑에 잡아서 마치 칼을 차는 듯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다.】 돌려 뽑으소서.” 하니, 왕이 마침내 검을 뽑아 荊軻를 쳐서 왼쪽 다리를 자르고 마침내 해체하여조리돌렸다. 이에 더욱 군대를 일으켜 燕나라를 쳐서 易水의【易水는 근원이 易州 남쪽 安閻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霸州 文安을 지나 滱州로 들어가니, 바로 漢나라 固安縣이다.】 서쪽에서 싸워 대파하니, 燕王을 목 베어 왕에게 바쳤으나 왕이 다시 進軍하여 공격하였다.

○ 王이 問於將軍李信曰 吾欲取荊하노니 於將軍度에 用幾何人而足고 李信曰 不過用二十萬이니이다 問王翦한대 王翦曰 非六十萬人이면 不可하니이다 曰 王將軍은 老矣로다 何怯也오하고 遂使李信, 蒙恬으로 將二十萬人하야 伐楚하다

王이 장군 李信에게 묻기를 “내가 荊(楚나라)을 취하려고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몇 명의 병력을 쓰면 충분하겠는가?” 하니, 李信이 말하기를 “20만 명을 동원하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王翦에게 물으니, 王翦은 말하기를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王장군은 늙었도다. 어찌 그리도 겁을 내는가.” 하고는 마침내 李信蒙恬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丙子]秦二十二, 楚三, 燕三十, 魏三, 齊四十, 代三年

[丙子]〈秦二十二, 楚三, 燕三十, 魏三, 齊四十, 代三年이라 ○ 是歲에 魏亡이라 ○ 凡五國이라〉

王賁之子也라 賁은 音奔이라 】이 伐魏한대 魏王假降이어늘 殺之하고 遂滅魏하다 ○ 楚人이 大敗李信한대 李信이 犇(奔)還이어늘 王翦曰 必不得已用臣인댄 非六十萬人이면 不可하니이다 於是에 將六十萬人하야 伐楚하다

병자(B.C.225) - 秦나라 22년,楚나라 3년, 燕나라 30년, 魏나라 3년, 齊나라 40년, 代나라 3년이다. ○ 이 해에 魏나라가 망하였다. ○ 합해서 다섯 나라이다.-

王賁王賁의 아들이다. 賁은 음이 분이다.】魏나라를 정벌하자 魏王 假가 항복하였는데, 그를 죽이고 마침내 魏나라를 멸망시켰다.

○ 楚나라 사람이 李信을 대파하니, 李信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王翦이 말하기를 “부득이 신을 쓰신다면 60만 명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60만 명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정벌하였다.

[戊寅]秦二十四, 楚五, 燕三十二, 齊四十二, 代五年

[戊寅]〈秦二十四, 楚五, 燕三十二, 齊四十二, 代五年이라 ○ 是歲에 楚亡이라 ○ 凡四國이라〉

王翦이 虜楚王負芻하고 以其地로 置楚郡하다

무인(B.C.223) - 秦나라 24년, 楚나라 5년, 燕나라 32년, 齊나라 42년, 代나라 5년이다. ○ 이 해에 楚나라가 망하였다. ○ 모두 네 나라이다.-

王翦楚王負芻를 사로잡고 그 땅으로 楚郡을 설치하였다.

[己卯]秦二十五, 燕三十三, 齊四十三, 代六年

[己卯]〈秦二十五, 燕三十三, 齊四十三, 代六年이라 ○ 是歲에 燕, 代亡이라 ○ 凡二國이라〉

王賁이 攻遼東하야 虜燕王喜하다

기묘(B.C.222) - 秦나라 25년, 燕나라 33년, 齊나라 43년, 代나라 6년이다. ○ 이 해에 燕나라와 代나라가 망하였다. ○ 모두 두 나라이다.-

王賁이 遼東을 공격하여燕王 喜를 사로잡았다.

溫公曰 燕이 不勝一朝之忿하야 以犯虎狼之秦하야 輕慮淺謀로 挑怨速禍하야 使召公之廟로 不祀忽諸【言忽然而亡也라 】하니 罪孰大焉이리오 而論者或謂之賢이라하니 豈不過哉아 夫爲國家者는 任官以才하고 立政以禮하고 懷民以仁하고 交隣以信이라 是以로 官得其人하고 政得其節하고 百姓懷其德하고 四隣親其義하나니 夫如是면 則國家安如磐石하고 熾如焱火하야 觸之者碎하고 犯之者焦하나니 雖有彊暴之國이나 尙何足畏哉리오 이 釋此不爲하고 顧以萬乘之國으로 決匹夫之怒하고 逞盜賊之謀라가 功隳身僇하고 社稷社稷爲墟하니 不亦悲哉아 夫其膝行蒲伏(匍匐)이 非恭也요 復言重諾이 非信也요 糜金散玉이 非惠也요 刎頸決腹이 非勇也니 要之컨대 謀不遠而動不義면 其楚白公勝楚太子이 遇讒在鄭이러니 鄭人殺之한대 其子이 在吳라 子西欲召之한대 葉公曰 吾聞也好復言而期死라하니 復言은 非信也요 期死는 非勇也니 子必悔之리라 子西不從하고 召之爲白公하다 請伐鄭이어늘 子西許之러니 未起師에 晉人伐鄭한대 楚救之하니 勝怒하야 厲劍하고 遂作亂하야 殺子西, 子期, 子朝하고 劫惠王이러니 後奔山自縊하니라 】之流乎인저 荊軻懷其豢養【草食曰芻요 穀食曰豢이라 又牛馬曰芻요 犬豕曰豢이라 】之私하야 不顧七族【父之姓一이요 姑之娣[子]二요 妹之子三이요 女之子四요 母之姓五요 從子六이요 妻父母七이라 】하고 欲以尺八匕首로 彊燕而弱秦하니 不亦愚乎아

溫公이 말하였다.

“燕나라 이 하루아침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호랑이와 같은 秦나라를 범해서 짧은 생각과 얕은 꾀로 원망을 돋우고 화를 불러서 召公의 사당으로 하여금 갑자기 제사가 끊어지게 만들었으니,【忽諸는 갑자기 망함을 말한 것이다.】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그런데도 논하는 자들은 혹 어질다고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재주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禮로써 정사를 세우고 仁으로써 백성을 품어주고 信으로써 이웃 나라와 사귄다. 이 때문에 관원은 그 적임자를 얻고 정사는 그 절도를 얻고 백성은 그 덕을 그리워하고 사방의 이웃 나라는 그 의리(신의)로 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국가가 반석처럼 편안하고 타오르는 불꽃처럼 치성하여 대드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타버리니, 비록 彊暴한 나라가 있으나 오히려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이 이것을 버리고 하지 않고는 도리어 萬乘의 나라를 가지고 匹夫의 분노를 터뜨리고 도적(자객)을 보내어 사람을 죽이는 꾀를 부리다가 功이 무너지고 몸이 죽었으며 社稷이 빈터가 되었으니, 슬프지 않은가.

무릎으로 기어가고 포복하는 것이 공손함이 아니요, 말을 실천하고 승낙을 중히 하는 것이 信이 아니요, 金을 쓰고 玉을 흩어주는 것이 은혜가 아니요, 목을 찌르고 배를 가르는 것이 용맹이 아니니, 요컨대 계책이 원대하지 못하고 행동이 의롭지 못하면 楚나라 白公 勝【楚나라 太子 建이 참소당하여 망명해서 鄭나라에 있었는데, 鄭나라 사람이 그를 죽였다. 그 아들 勝이 吳나라에 있으므로 子西가 부르고자 하였는데, 葉公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勝은 말을 실천하고 죽기를 기약한다 하니, 말을 실천함은 信이 아니고 죽기를 기약함은 용맹이 아니니, 그대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西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불러와 白公으로 삼았다. 白公 勝이 鄭나라를 칠 것을 청하자 子西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晉나라 사람이 鄭나라를 정벌하자 楚나라가 이를 구원하니, 勝이 노하여 검을 갈고 마침내 난을 일으켜 子西와 子期, 子朝를 죽이고 惠王을 위협하였는데, 뒤에 산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부류인 것이다. 荊軻는 길러주는 사사로운 은혜를 고마워하여【풀을 먹여 키운 동물을 芻라 하고 곡식을 먹여 키운 동물을 豢이라 하며, 또 소와 말을 芻라 하고 개와 돼지를 豢이라 한다.】 七族을 돌아보지 않고【七族은 아버지의 姓이 첫 번째이고, 고모의 아들이 두 번째이고, 姊妹의 아들이 세 번째이고, 딸의 아들이 네 번째이고, 어머니의 姓(外族)이 다섯 번째이고, 從子가 여섯 번째이고, 妻父母가 일곱 번째이다.】 한 자 여덟 치의 匕首를 가지고 燕나라를 강하게 하고 秦나라를 약하게 만들고자 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初에 齊事秦謹하고 與諸侯信하며 齊亦東邊海上이라 秦이 日夜攻三晉燕楚하니 五國이 各自救라 以故로 齊王建이 立四十餘年에 不受兵이러라 後에 齊相及賓客이 多受秦間金하고 勸王朝秦하고 不修攻戰之備하며 不助五國攻秦이라 秦이 以故로 得滅五國하니라

[新增]雙湖胡氏曰 六國之滅에 惟齊最愚라 不悟姦人賓客之受間金하고 聽勸朝秦하야 不修攻戰之備하고 不助五國攻秦이라 秦以故로 得滅五國하니 殊不知五國滅矣면 齊其能獨存乎아 迨王賁猝入에 民莫敢格이로되 猶信五百里之約封하야 竟以餓死하니 觀松耶柏耶之歌하면 至今可爲於邑(嗚唈)也니라

처음에 齊나라는 삼가 秦나라를 섬기고 諸侯와 더불어 약속을 잘 지키며 齊나라는 또한 동쪽 변방 海上에 있었다. 그리하여 秦나라가 밤낮으로 三晉과 燕‧楚를 공격하니, 다섯 나라가 각각 스스로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齊王 建이 즉위한 지 40여 년에 병란을 입지 않았다. 그 후 齊나라의 재상과 빈객들이 秦나라의 反間(첩자)의 돈을 많이 받고는 왕에게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고 攻戰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新增]雙湖胡氏가 말하였다.

“六國이 멸망함에 오직 齊나라가 가장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들과 빈객들이 反間의 돈을 받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는 秦나라에 조회하도록 권하는 말을 따라서 공격과 전투의 대비를 닦지 않았으며 다섯 나라를 도와 秦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秦나라가 이 때문에 다섯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다섯 나라가 멸망하면 齊나라가 홀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王賁이 갑자기 臨淄로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는데 오히려 5백 리를 봉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서 항복했다가 끝내 굶어 죽었으니, ‘소나무여, 측백나무여’ 하는 노래를 보면 지금까지도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