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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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通鑑節要 卷之四十八
宣宗
名은 忱이니 憲宗第三子라
[ 宣宗]※【聖善周聞曰宣이라 】名은 [ 忱]이니 [ 憲宗]第三子라 在位十三年이요 壽五十이라
※精於聽斷하야 以察爲明하고 無復仁恩하야 自是而唐衰矣니라
[丁卯]大中元年
[丁卯]大中元年이라
初에 [ 李德裕]執政에 引[ 白敏中]하야 爲翰林學士러니 及[ 武宗]崩에 [ 德裕]失勢하니 [ 敏中]이 乘上下之怒하야 竭力排之하니라 [ 敏中]秉政에 凡[ 德裕]所薄을 皆不次用之하고 [ 德裕]는 尋貶潮州司馬하니라
[戊辰]二年
[戊辰]二年이라
二月에 以知制誥[ 令狐綯]【[ 令]은 音零이니 複姓이라 】로 爲翰林學士하다 上이 嘗以[ 太宗]所撰金鏡錄으로 授綯하야 使讀之러니 至亂은 未嘗不任不肖요 至治는 未嘗不任忠賢이라하야늘 上止之하고 曰 凡求致太平은 當以此言爲首라하고 又書貞觀政要於屛風하고 每正色拱手而讀之하니라
大中 2년(무진 848)
○ 秋九月에 再貶[ 李德裕]하야 爲崖州司戶러니 卒하다
[史略 史評][ 范氏]曰 [ 裴度], [ 李德裕] 皆有功烈하야 爲唐賢相하니 太中以後로 無能繼之者라 [ 德裕]는 才優於[ 度]나 而德器不及也하니 蓋[ 度]不爲黨而[ 德裕]爲黨이라 是以로 [ 度]는 雖爲小人所傾이나 而能以功名終하고 [ 德裕]는 一失勢而斥死海上也라 雖[ 牛僧孺]之黨이 多小人하고 [ 德裕]之黨이 多君子나 然其因私以害公하고 挾勢以報怨은 則一而已라 夫惟天吏라야 可以伐燕이니 [ 德裕]自爲朋黨하고 而欲罷朋黨하니 此는 以燕伐燕也라 [ 孔子]曰 克伐怨欲을 不行焉이면 可以爲難矣라하시고 又曰 君子는 矜而不爭하고 群而不黨이라하시니 [ 德裕]는 克伐怨欲을 必行焉하며 矜而爭하고 群而黨하니 豈能免乎아
가을 9월에 다시 李德裕를 崖州司戶로 좌천시켰는데 곧 죽었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裴度와 李德裕가 모두 功烈이 있어서 唐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으니, 太中 연간 이후로 이들을 계승할 자가 없었다. 李德裕는 재주는 裴度보다 넉넉하였으나 德器는 裴度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裴度는 朋黨을 하지 않았으나 李德裕는 붕당을 하였으니, 이 때문에 裴度는 비록 小人에게 배척당하였으나 功名으로 일생을 마쳤고, 李德裕는 한 번 권세를 잃자 배척당하여 바닷가에서 죽었다. 비록 牛僧孺의 黨에는 小人이 많고 李德裕의 黨에는 君子가 많았으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公義를 해치고 권세를 믿고서 원한을 갚은 것은 똑같을 뿐이다. 오직 天吏라야 燕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데, 李德裕는 자신이 붕당을 하면서 붕당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바로 燕나라를 가지고 燕나라를 정벌한다는 것이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남을 이기려 하고 자랑하고 원망하고 탐욕함을 행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君子는 씩씩하나 다투지 않고, 무리 지으나 偏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李德裕는 남을 이기려 하고 자랑하고 원망하고 탐욕함을 반드시 행하였으며, 씩씩하면서 다투고 무리 지어 편당하였으니, 어찌 禍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
[己巳]三年
[己巳]三年이라
閏十月에 宰相以克復河湟【二州는 西羌地라 是年六月에 涇原節度使[ 康季榮]이 取原州及石門驛, 藏木峽, 制勝, 六盤, 石峽等六(開)[關]하고 七月에 靈武節度使[ 朱叔明]이 取長樂州하고 邠寧節度使[ 張君緖] 取蕭關하고 鳳翔節度使[ 李玭]이 取秦川하다 河隴老幼千餘人이 詣闕하야 解胡服하고 襲冠帶하니 觀者皆呼萬歲하니라 】이라하야 請上尊號어늘 上曰 [ 憲宗]이 常有志復河湟이로되 以中原方用兵【方用兵於兩河也라 】으로 未遂而崩이러시니 今乃克成先志耳로라
大中 3년(기사 849)
윤10월에 재상이 河湟 지방을 수복했다 하여【河湟 두 州는 西羌 지역이다. 이 해 6월에 涇原節度使康季榮이 原州와 石門驛, 藏木峽, 制勝, 六盤, 石峽 등 여섯 관문을 점령하였고, 7월에 靈武節度使朱叔明이 長樂州를 점령하였으며, 邠寧節度使張君緖가 蕭關을 점령하였고鳳翔節度使[- 李玭]이 秦川을 점령하였다. 河西와 隴右 지방의 노인과 어린아이 천여 명이 대궐에 나아가 오랑캐 복장을 벗고 관과 띠를 착용하니,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上에게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자, 上이 말하기를 “憲宗이 항상 河湟 지방을 수복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당시에 中原에 막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당시에 막 兩河(河南과 河北)에서 藩鎭을 토벌하느라 군대를 동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셨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선조의 뜻을 이루었다.” 하였다.
[甲戌]八年
[甲戌]八年이라
秋九月에 上이 獵於苑北할새 遇樵夫하야 問其縣하니 曰 涇陽人也로소이다 令爲誰오 曰 [ 李行言]이니이다 爲政何如오 曰 性執하야 有强盜數人이 匿軍家【軍家는 謂北司諸軍也라 [通鑑要解] 唐人은 謂諸道節度觀察爲使家라하고 諸州爲州家라하고 諸縣爲縣家라하니라 】하야 索之호되 竟不與어늘 盡殺之하니이다 上이 歸하야 帖其名於寢殿之柱하다 冬十月에 [ 行言]이 除海州刺史하니 入謝어늘 上이 賜之金紫하고 問曰 卿이 知所以衣紫乎아 對曰 不知니이다 上이 命取殿柱之帖하야 示之하다
大中 8년(갑술 854)
가을9월에 上이 上林苑 북쪽에서 사냥할 적에 나무꾼을 만나 “어느 縣에 사는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涇陽 사람입니다.” 하였다. “수령이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 李行言]입니다.” 하였다. “정사를 어떻게 하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품이 고집스러워서 강도 몇 명이 軍家에 숨어【[頭註] 軍家는 宦官이 관장하는 北司의 諸軍을 이른다. [通鑑要解] 唐나라 사람들은 諸道의 節度使와 觀察使를 使家라 하고, 諸州를 州家라 하고, 諸縣을 縣家라 하였다.】 이를 수색하였으나 軍家에서 끝내 내주지 않자 끝까지 찾아서 다 죽였습니다.” 하였다. 上이 돌아와서 [- 李行言]의 이름을 寢殿의 기둥에 써 붙였다.
겨울 10월에 [- 李行言]이 海州刺史에 제수되자入朝하여사은하였는데, 上이 紫金魚袋와 紫色 관복을 하사하고 묻기를 “卿은 어떻게 紫金魚袋와 紫色 관복을 입게 되었는지 까닭을 아는가?” 하니, “알지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上이 명령하여 寢殿의 기둥에 써 붙인 名帖(그의 이름을 쓴 첩)을 가져오게 하여 그에게 보여주었다.
○ 上이 召翰林學士[ 韋澳]하야 託以論詩하고 屛左右【屛은 除也라 】하고 與之語曰 近日에 外間謂內侍權勢如何오 對曰 陛下威斷이 非前朝之比니이다 上이 閉目搖手하고 曰 全未, 全未하니 尙畏之在하니라 上이 又嘗與[ 令狐綯]로 謀盡誅宦官할새 綯恐濫及無辜하야 密奏曰 但有罪勿捨하고 有闕勿補하면 自然漸耗하야 至於盡矣리이다 宦者竊見其奏하고 由是로 益與朝士相惡하야 南北司如水火矣러라
[史略 史評][ 范氏]曰 [ 宣宗]이 抉摘細微하야 以驚服臣下하야 小過必罰이나 而大綱不擧하고 欲以一人之智로 周天下之務하야 而不能與賢人共天職也하니 豈人君之德哉아 其視輔相之臣엔 禮貌甚恭이나 而心實防之하고 如遇胥吏엔 惟恐其敗也하야 拘之以利祿하고 憚之以威嚴이라 故로 所用이 多流俗之人하야 而賢者不能有所施設也라 [ 令狐綯]謀除宦官之法이 雖善이나 終不面陳之하고 而露諸奏牘하니 易所以有不出戶庭之戒歟인저
上이 翰林學士韋澳를 불러 詩를 논한다는 핑계로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屛은 물리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말하기를 “근래에 외간에서는 내시들의 권세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韋澳가 대답하기를 “폐하의 위엄과 결단력은 이전의 조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上이 눈을 감고 손을 내저으며 말하기를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그들을 두려워할 만한 권세가 남아 있다.” 하였다.
上이 또 일찍이 令狐綯와 함께 환관들을 다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令狐綯는 죄 없는 자에게까지 죽임이 함부로 미칠까 염려하여 은밀히 아뢰기를 “다만 환관들이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지 말고 결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않으면 자연히 점점 숫자가 줄어들어서 모두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환관들은 令狐綯가 아뢴 내용을 훔쳐보고는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사대부들과 서로 사이가 나빠져서 南司와 北司가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이 되었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宣宗은 신하들의 작은 잘못을 지적하여 신하들을 두려워하고 복종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잘못도 반드시 벌주었으나 큰 강령이 거행되지 못하였고, 군주 한 사람의 지혜로 천하의 일을 두루 하고자 하여 賢人과 天職을 함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임금의 德이겠는가. 輔相하는 신하를 만나볼 적에는 禮貌가 매우 공손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실로 이들을 막았고, 만일 胥吏를 만날 경우에는 행여 이들이 실패할까 염려하여, 신하들을 이익과 녹봉으로 구속하고 위엄으로 두렵게 하였다. 그러므로 등용한 자들이 대부분 세간의 평범하고 용렬한 사람들이어서 賢者가 시행하는 바가 있지 못하였다. 令狐綯가 환관을 제거할 것을 모의한 방법은 비록 좋았지만 끝내 직접 대면하여 아뢰지 못하고 이것을 奏章에 드러냈으니, 《周易》에 이 때문에 ‘戶庭을 나가지 않는다.’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乙亥]九年
[乙亥]九年이라
二月에 以醴泉令[ 李君奭]으로 爲懷州刺史하다 初에 上이 校獵渭上할새 有父老以十數 聚於佛祠어늘 上問之한대 對曰 醴泉百姓也니이다 縣令[ 李君奭]이 有異政이나 考滿當罷하야 詣府乞留라 故로 此祈佛하야 冀諧所願耳니이다 及懷州刺史闕에 上이 手筆除[ 君奭]하다 宰相이 莫之測이러니 [ 君奭]入謝어늘 上이 以此獎厲【厲는 與勵通하니 勉力也라 】하니 衆始知之하니라
大中 9년(을해 855)
2월에 醴泉縣令[- 李君奭]을 懷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上이 渭水 가에 사냥 나갔을 적에 父老 십수 명이 佛祠에 모여 있었다. 上이 그 이유를 묻자, 父老들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은 醴泉縣의 백성입니다. 縣令[- 李君奭]이 남달리 훌륭한 정사를 베풀었으나 考課의 기한이 차서 마땅히 관직을 그만두어야 하므로 저희들이 府에 나아가 유임시켜주기를 청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기원하여 저희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懷州刺史가 결원이 생기자, 上이 손수 임명장을 써서 [- 李君奭]을 제수하였다. 재상들도 무슨 연유인지 헤아리지 못했는데, [- 李君奭]이 入朝하여 사은하자 上이 이로써 장려하니,【厲는 勵와 통하니, 힘쓰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비로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丁丑]十一年
[丁丑]十一年이라
上이 樂聞規諫【正君曰規라】하야 凡諫官論事와 門下封駁【駁者는 如色之間雜이라 唐制에 門下省[ 給事中]이 主封駁이어늘 詔勅有不可하면 則卽論駁封還之也하니라 [通鑑要解] 封駁은 定群議하야 所封上奏也라】이 苟合於理면 多屈意從之하고 得大臣章疏면 必焚香盥手而讀之하니라
大中 11년(정축 857)
上은 규간하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여【임금을 바로잡는 것을 規라고 한다.】 모든 諫官이 정사를 논하는 것과 門下省 給事中의 封駁이【[頭註] 駁은 색깔이 섞여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唐나라 제도에 門下省 給事中이 封駁하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조칙에 불가한 점이 있으면 즉시 논박하여 封還하였다. [通鑑要解] 封駁은 衆論을 정하여 봉함하여 上奏하는 것이다.】 만일 이치에 부합하면 대부분 뜻을 굽혀 따랐고, 大臣의 章疏를 얻으면 반드시 향을 사르고 손을 씻고 나서 읽었다.
[戊寅]十二年
[戊寅]十二年이라
上이 餌方士藥하고 已覺躁渴하다
[新增][ 范氏]曰 三代之時에 自天子로 至於庶人히 皆有常職하야 以食其力【言各以力耕得食이니 卽食己之力也요 又力祿也라 記曲禮에 有宰食力이라하니 謂食下民賦稅之力이라 】하고 有常行하야 以勤其生하니 壯而彊勉焉하고 老而敎誨焉하야 修身以俟死而已라 天下無異道하니 未有衆人皆死而欲一己獨不死者也요 執左道【左道는 非正之術이라 】以亂政者는 殺이라 故로 無迂怪【迂는 曲也라 】之士러니 由秦漢以來로 乃有神仙服食不死之說이라 故로 人心多惑하고 聖道不明이 此其一端也어늘 而人主尤甘心焉이라 以唐攷之하면 自[ 太宗]으로 至于[ 武宗]히 餌藥【餌는 食也라 】以敗者 六七君【[ 憲], [ 穆], [ 敬], [ 武], [ 宣]이요 二未詳이라 】이라 皆求長生이라가 而反夭其天年하니 亦可以爲戒矣어늘 而[ 宣宗]이 又敗以藥하야 至以儲嗣爲諱惡【上이 晩年에 寵愛少子[ 夔王][ 滋]하야 不定儲位어늘 [ 魏謩]上言하고 繼之以泣호되 不聽이라 [ 裴休]奏請한대 乃曰 若立太子면 朕遂爲閑人이라하고 [ 崔愼由]以建儲對라가 旬日에 斥罷하니라 】하니 豈不蔽甚也哉아
大中 12년(무인 858)
上이 方士가 올린 약을 먹고는 이미 조급증과 갈증을 느꼈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三代時代에는 天子로부터 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떳떳한 직책이 있어서 자기 능력에 따라 먹고,【食其力은 각자 자기 힘대로 농사지어 얻어 먹는 것이니, 바로 자기 힘대로 먹고 사는 것이요, 또 녹봉을 힘쓰는 것이다. 《禮記》〈曲禮〉에 “宰(家臣)가 있고 백성들이 내는 조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食力은 백성들이 내는 조세를 먹는 것을 이른다.】 떳떳한 행실이 있어서 생업에 부지런히 힘쓰니, 장성해서는 부지런히 힘쓰고 늙어서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몸을 닦아 죽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천하에 다른 道가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데 자기 혼자만 죽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있지 않았고, 左道(부정한 도)를 주장하여【左道는 바른 것이 아닌 方術이다.】 정사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활하고 괴탄한【迂는 굽은(바르지 않은) 것이다.】 선비가 없었다.
그런데 秦‧漢時代 이후로는 마침내 신선이 되고 불사약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人心이 많이 미혹되고 聖人의 道가 밝혀지지 못한 것은 이것이 한 단서인데, 군주가 더욱 마음에 달갑게 여겼다. 唐나라를 가지고 살펴보면 太宗으로부터 武宗에 이르기까지 불사약을 먹고【餌는 먹는 것이다.】 몸을 망친 군주가 6, 7명에 이른다.【6, 7명의 군주는 憲宗‧穆宗‧敬宗‧武宗‧宣宗이고, 나머지 두 명은 자세하지 않다.】 이들은 모두 약을 먹고 長生하기를 바라다가 도리어 타고난 수명을 재촉하였으니, 또한 경계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宣宗이 또다시 불사약 때문에 몸을 망쳐서 儲嗣(太子)를 싫어하고 꺼리기까지 하였으니,【上(宣宗)이 말년에 작은아들인 夔王李滋를 총애하여 儲位(태자의 지위)를 정하지 않자, 魏謩가 上言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으나 듣지 않았다. 裴休가 태자를 세울 것을 주청하자, 上이 마침내 말하기를 “만약 태자를 세우면 짐은 마침내 할 일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였고, [ 崔愼由]崔愼由가 建儲를 건의하였다가 열흘 만에 배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어찌 심히 몽매한 것이 아니겠는가.”
上이 詔호되 刺史毋得外徙하고 必令至京師하야 面察其能否然後에 除之하라 [ 令狐綯]嘗徙其故人하야 爲隣州刺史하고 便道之官이러니 上이 見其謝上表하고 以問[ 綯]한대 對曰 以其道近하야 省送迎耳니이다 上曰 朕以刺史多非其人하야 爲百姓害故로 欲一一見之하야 訪問其所施設하야 知其優劣하야 以行黜陟이어늘 而詔命旣行에 直廢格【史記淮南王安傳에 廢格明詔라한대 按[ 如淳]註에 廢는 止也요 格은 攱閣不得下也라하니라 [ 蘇林]曰 格은 音閣이니라 】不用하니 宰相이 可謂有權이로다 時方寒이러니 [ 綯]汗透重裘러라 上이 臨朝하야 接對群臣에 如賓客하고 雖左右近習이라도 未嘗見其有惰容하며 每宰相奏事에 旁無一人立者호되 威嚴하야 不可仰視라 奏事畢에 忽怡然曰 可以閑語矣로다하고 因問閭閻細事하고 或談宮中遊宴하야 無所不至라가 一刻許에 復整容하야 曰 卿輩는 善爲之하라 朕은 常恐卿輩負朕하야 後日不復得再相見이라하고 乃起入宮하니라 [ 令狐綯]謂人曰 吾十年秉政에 最承恩遇라 然이나 每延英奏事에 未嘗不汗霑衣也라하니라
上이 조서를 내리기를 “刺史를 제수할 적에 외지에서 곧바로 옮겨가게 하지 말고 반드시 京師에 오게 해서 그의 능하고 능하지 못함을 직접 대면하여 살핀 뒤에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令狐綯가 일찍이 그의 친구를 이웃 州의 刺史로 옮기고 곧바로 길을 떠나 부임하게하였다. 上이 그가 조정에 사은하여 올린 表文을 보고 令狐綯에게 물으니, 令狐綯가 대답하기를 “부임할 곳과 가깝기 때문에 전송하고 맞이하는 데 드는 비용을 생략하고자 하여 곧바로 부임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짐은 刺史들이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어서 백성들의 폐해가 되기 때문에 일일이 대면하여 그들이 부임한 뒤에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를 물어 그들의 우열을 알아서 내치고 올리는 일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詔命을 이미 내린 뒤에 곧바로 폐기하고【《史記》〈淮南王 劉安傳〉에 “밝은 조서를 廢格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如淳]의 註에 “廢는 그만두는 것이고 格은 시렁에 놓아두고 내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蘇林이 말하기를 “格은 음이 각이다.” 하였다.】 따르지 않으니, 재상이 권세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令狐綯는 식은땀이 흘러 두터운 갖옷을 적셨다.
上은 조정에 臨御하여 신하들을 접견할 적에 손님처럼 공경하여 비록 좌우의 친근한 자라도 일찍이 태만히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며, 매양 재상들이 일을 아뢸 적에 옆에 한 사람도 서 있는 자가 없었으나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황제의 얼굴을 우러러보지 못하게 하였다. 일을 다 아뢰고 나면 上이 갑자기 온화한 얼굴로 말하기를 “이제 閑談을 할 수 있다.” 하고는, 인하여 여염의 자질구레한 일을 묻거나 혹은 궁중에서 놀고 잔치하는 일을 물어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1刻이 지난 뒤에는 다시 용모를 정돈하고 말하기를 “경들은 직임을 잘 수행하라. 짐은 항상 경들이 짐을 저버려 후일에 다시 서로 만나보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는 마침내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令狐綯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 십 년 동안 정권을 잡음에 가장 많이 은혜와 대우를 받았으나 延英殿에서 정사를 아뢸 때마다 일찍이 식은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己卯]十三年
[己卯]十三年이라
上이 餌道士藥하고 疽發於背하야 八月에 崩하다
[新增][ 尹氏]曰 有生必有死하니 雖聖人이라도 不能易也라 若使長生可求면 則聖人已先求之矣시리라 唐人이 酷信【酷은 甚也라 】方士之說하야 而禍敗相踵하니 向使不妄服食이면 未必遽殞其生이라 將以延之라가 適以趣(促)之어늘 而乃覆車相尋하야 恬不知悟하니 豈不深可惜哉아
大中 13년(기묘 859)
上이 道士의 약을 먹고 등에 종기가 나서8월에 승하하였다.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비록 聖人이라도 이것을 바꿀 수가 없다. 만약 長生을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聖人이 이미 먼저 추구하였을 것이다. 唐나라 사람들은 方士의 말을 맹신하여【酷은 심함이다.】 화와 패망이 서로 이어졌으니, 그때 만일 함부로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장차 수명을 연장하려 하다가 다만 이로써 수명을 재촉하였는데, 마침내 전복된 수레의 前轍(前人의 실패)이 서로 이어져 편안히 여기고 잘못을 깨달을 줄을 몰랐으니, 어찌 깊이 애석할 만하지 않은가.”
[ 宣宗]이 性明察沈斷하야 用法無私하고 從諫如流하며 重惜官賞하고 恭謹節儉하고 惠愛民物이라 故로 大中之政이 訖於唐亡토록 人思詠之하야 謂之小太宗이라하니라
[新增][ 范氏]曰 [ 宣宗]之治 以察爲明하야 雖聽納規諫이나 而性實猜刻하고 雖吝惜爵賞이나 而人多僥倖하며 外則藩方이 數逐其帥守【如武寧軍逐其節度使[ 李廓]하고 浙東軍逐觀察使[ 李訥]하고 湖南軍逐觀察使[ 韓悰]하고 江西軍逐觀察使[ 鄭憲]之類라 】而不能治하고 內則宦者握兵柄, 制國命【如王宗實之輩라 】을 自如也라 然이나 百吏奉法하고 政治不擾하야 海內安靖이 幾十五年이러니 繼以[ 懿][ 僖]不君하야 唐室壞亂이라 是以로 人思大中之政하야 爲不可及이라 書曰 自成湯으로 至于[ 帝乙]히 罔不明德恤祀라하니 若[ 宣宗]者는 豈不足爲賢君哉아
宣宗은 성품이 明察하고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어 법을 적용함에 사사로움이 없고 흘러가는 물처럼 간언을 잘 따랐으며, 관작과 상을 매우 아끼며, 공손하고 절약하며, 백성과 물건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大中 연간의 정치를 唐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도록 백성들이 사모하고 칭송하여 宣宗을 일러 작은 太宗이라 하였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宣宗의 다스림은 하나하나 살피는 것을 총명함으로 여겨 비록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였으나 성질이 실로 의심하고 각박하였으며, 비록 관작과 상을 아꼈으나 요행으로 등용된 사람들이 많았다. 밖으로는 藩方에서 主帥(節度使)와 太守를 자주 축출하였으나【主帥와 太守를 축출하였다는 것은 武寧軍은 節度使李廓을 축출하고, 浙東軍은 觀察使[- 李訥]을 축출하고, 湖南軍은 觀察使[ 韓悰]韓悰을 축출하고, 江西軍은 觀察使[ 鄭憲]鄭憲을 축출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이들을 治罪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환관들이 兵權을 쥐고 국가의 명령을 제재하기를【국가의 명령을 제재했다는 것은 王宗實과 같은 무리이다.】 예전처럼 하였다. 그러나 백관들이 법을 받들어 시행하고 정치가 어지럽지 않아서 온 천하가 안정된 것이 거의 15년이었는데, 뒤이어 懿宗과 [- 僖宗]이 군주 노릇을 하지 못하여 唐나라가 무너지고 혼란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大中 연간의 정치를 그리워하여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書經》〈多士〉에 이르기를 ‘成湯으로부터 [ 帝乙]帝乙에 이르기까지 德을 밝히고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宣宗과 같은 이는 어찌 賢君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丙申]懿宗卽位年
[丙申][ 懿宗]【初名[ 溫]이라 上이 久不建儲러니 餌[ 李玄伯]藥이라가 疽發背하니 宰相不得見이라 上이 密以[ 夔王]으로 屬[ 王龜長]等立之러니 上崩에 中尉[ 王宗實]이 殺[ 龜長]하고 迎立[ 鄆王]하야 更名[ 漼]하니라 】이 卽位하다
懿宗
懿宗 名은 漼이니 宣宗長子라
[ 懿宗]※名은 [ 漼]이니 [ 宣宗]長子라 在位十四年이요 壽三十一이라
※ 驕奢無度하고 淫樂不悛하니 [ 李氏]之亡이 於玆決矣라
[庚辰]咸通元年
[庚辰]咸通元年이라
浙東賊[ 裘甫]【裘는 巨鳩反이니 姓也라 本作仇러니 避讐作裘하니라 】攻陷象山【縣名으로 在浙東하니 屬慶元府라 山在府東百六十里하니 東南北이 皆濱海요 惟西南有陸路하야 接台州寧海縣界라 按慶元은 古明州也라 】하니 浙東이 騷動이어늘 安南都護[ 王式]이 討平之하다
[戊子]九年
[戊子]九年이라
徐州戍卒[ 龐勛]【勛은 古勳字라 】이 作亂하니 衆至十萬이라 [ 康承訓]【右金吾大將軍也어늘 詔爲義成節度使徐州行營都招討使라 】이 與[ 朱邪赤心]【[ 克用]之父라 [附註] [ 朱邪赤心]은 出西突厥別〈種〉하니 自號曰沙陁라 [ 朱邪]는 複姓이요 [ 赤心]은 名이니 回(骨)[鶻]之相也라 沙陁三部落使也어늘 [ 承訓]이 奏乞帥其衆自隨하니 詔許之하니라 沙陁, 薩葛, 安慶이 分爲三部라 】으로 討平之어늘 [ 赤心]을 賜姓名[ 李國昌]하고 以爲大同軍節度使하다
咸通 9년(무자 868)
徐州에 수자리 살던 병졸인 龐勛이【勛은 勳의 古字이다.】 난을 일으키니, 무리가 십만 명에 이르렀다. 康承訓이【康承訓은 右金吾大將軍인데, 조서를 내려 義成節度使 徐州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하였다.】朱邪赤心과 함께【[原註] [ 朱邪赤心]朱邪赤心은 [ 李克用]李克用의 아버지이다. [附註] [ 朱邪赤心]朱邪赤心은 西突厥의 別種에서 나왔으니, 스스로 [- 沙陁]라 이름하였다. 朱邪는 複姓이고 赤心은 이름이니, 回鶻의 재상이다. 沙陁가 三部落의 使가 되었는데, 康承訓이 그 部衆을 거느리고 스스로 따르게 할 것을 奏請하니, 조칙을 내려 허락하였다. 沙陁, 薩葛, 安慶이 나뉘어 三部가 되었다.】 이들을 토벌하여평정하자, 朱邪赤心에게 李國昌이라는 성명을 하사하고大同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癸巳]十四年
[癸巳]十四年이라
秋七月에 上이 崩하고 [ 僖宗]이 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 懿宗]이 器本凡庸으로 流於近習하야 所親者巷伯이요 所昵者桑門이라 以蠱惑之侈言으로 亂驕淫之方寸하니 欲無怠忽이나 得乎아 及釁結蠻陬하야 姦生戍卒하고 五嶺轉輸하야 寰海動搖라 而況小人在位하야 納賂崇私하고 專權亂政하며 大臣忠諫을 斥逐遐方이라 是以로 干戈蔽野하야 窮歲彌年이로되 上下相蒙하니 百姓流殍하야 相聚爲盜하야 蝟毛而起라 帝於是時에 方且削軍賦而飾伽藍하고 困民財而修淨業하야 今年幸安國寺하고 明年迎佛骨이러니 未幾에 帝遂安駕하니 良可歎夫인저
咸通 14년(계사 873)
가을 7월에 上이 승하하고[- 僖宗]이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懿宗은 기국이 본래 용렬한데다 近臣에게 빠져서 친애한 사람은 巷伯(환관)이었고 가까이한 사람은 桑門(승려)이었다. 미혹하여 큰소리치는 말로 교만하고 음탕한 마음을 어지럽혔으니, 게으르고 소홀하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급기야 오랑캐와 원한을 맺어 간사한 역적이 수자리 사는 병졸 중에서 나오고, 五嶺 지방으로 군수물자를 수송하여 온 천하가 동요하였다. 더구나 小人이 지위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私恩을 높이며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정사를 어지럽히며, 충간하는 대신들을 먼 지방으로 축출하였다. 이 때문에 창과 방패가 들을 뒤덮어 한 해를 마치고 여러 해를 끌었으나 上下가 서로 은폐하니, 백성들이 유리하다가 굶어 죽어서 서로 모여 도둑이 되어 고슴도치 털처럼 떼 지어 일어났다. 懿宗이 이러한 때에 막 軍賦를 삭감하여伽藍(寺刹)을 꾸미고 백성의 재물을 고갈시켜 淨業(佛敎)을 닦아서 금년에는 安國寺에 행차하고 명년에는 佛骨을 맞이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懿宗이 마침내 승하하였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僖宗
名은 儇이니 懿宗第五子라
[ 僖宗]※【小心畏忌曰僖라 】名은 [ 儇]이니 [ 懿宗]第五子라 在位十五年이요 壽二十七이라
※昏庸相繼에 禍亂相仍하야 民愁盜起하야 不可復支하니 蓋亦天人之會歟인저
[- 僖宗]은【조심하여 두려워하는 것을 僖라고 한다.】 이름이 [- 儇]이니, 懿宗의 다섯째 아들이다. 재위가 15년이고 壽가 27세이다.
어둡고 용렬한 군주가 서로 계승함에 禍亂이 서로 이어져서 백성들이 시름에 빠지고 도적들이 일어나 다시는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과 인간의 일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甲午]乾符元年
[甲午]乾符元年이라
上이 年少하야 政在臣下하니 南牙(衙), 北司互相矛楯(盾)【楯은 時允反이니 互相矛楯은 謂不相合也라 [附註] 韓非子에 有鬻(牙)[矛]楯者 自譽其矛曰 吾矛之利는 物無不陷也라하고 又譽其楯曰 吾楯之堅은 物莫能陷也라한대 或謂之曰 以子之矛로 陷子之楯이면 可乎아하니 其人이 不能答이라 故로 後世에 謂議論自相反及爲事自相反者를 爲矛楯이라하니라 】이라 自[ 懿宗]以來로 奢侈日甚하고 用兵不息하야 賦斂愈急하며 關東이 連年水旱호되 州縣이 不以實聞하고 上下相蒙하야 百姓流殍하야 無所控訴하니 相聚爲盜하야 所在蜂起러라 是歲에 濮州人[ 王仙芝] 始聚衆數千하야 起於長垣하니라
乾符 元年(갑오 874)
上이 나이가 어려서 정사가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南衙와 北司가 서로 창과 방패처럼 대립하였다.【[釋義] 楯은 時允反(순)이니, 서로 창과 방패가 된다는 것은 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이른다. [附註] 《韓非子》에 “창과 방패를 파는 자가 스스로 창을 자랑하기를 ‘내 창의 예리함은 뚫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 하고, 또 방패를 자랑하기를 ‘내 방패의 견고함은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한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대의 창을 가지고 그대의 방패를 뚫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지 못했다.” 하였다. 그러므로 후세에 의논이 서로 상반되거나 일을 할 때에 서로 상반되는 것을 일러 矛楯이라 한다.】懿宗 이래로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군대를 동원하는 일이 그치지 아니하여 부세를 징수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급해졌으며, 關東 지방에 해마다 水災와 旱災가 들었으나 州縣이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상하가 서로 은폐하여 백성들이 유리하고 굶어 죽어서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백성들이 서로 모여 도둑이 되어서 곳곳마다 봉기하였다. 이해에 濮州 사람 王仙芝가 처음으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長垣에서 일어났다.
[乙未]二年
[乙未]二年이라
上之爲[ 晉王]也에 小馬坊使【亦內諸使之一也라】[ 田令孜]【宦官이라 】有寵이러니 及卽位에 使知樞密하고 遂擢爲中尉하다 上이 時年十四라 專事遊戲하고 政事를 一委[ 令孜]하니라
乾符 2년(을미 875)
上이 [- 晉王]이었을 적에 小馬坊使【小馬坊使도 宮內의 諸使 중 하나이다.】[ 田令孜]田令孜를【[ 田令孜]田令孜는 宦官이다.】총애하였는데, 上이 즉위하자 그를 知樞密使로 삼고 마침내 神策軍中尉로 발탁하였다. 上은 이때 나이가 14세였는데, 오로지 유희만 일삼고 정사를 한결같이 [ 田令孜]田令孜에게 위임하였다.
○ [ 黃巢]亦聚衆千餘人하야 應[ 王仙芝]하다 [ 巢]少與[ 仙芝]로 皆以販私鹽爲事라 [ 巢]善騎射하고 喜任俠【見漢[ 靈帝]甲子年이라 】하고 粗涉書傳이라 屢擧進士不第하고 遂爲盜하야 與[ 仙芝]로 剽掠州縣하고 橫行山東하니 民之困於重斂者 爭歸之하야 數月之間에 衆至數萬하니라
[戊戌]五年
[戊戌]五年이라
春에 沙陁兵馬使[ 李國昌]之子[ 克用]이 起兵하야 殺大同防禦使【大同은 古雲中郡也라 漢爲鴈門郡平城縣이러니 今置大同府하니 東南至燕京八百里라 】[ 段文楚]하고 自稱[ 留後]라하다 〈後爲後唐하니라〉
乾符 5년(무술 878)
봄에 沙陁兵馬使李國昌의 아들[ 克用]克用이 군대를 일으켜大同防禦使【大同은 옛날 雲中郡이다. 漢나라 때에는 鴈門郡平城縣이었는데 이제 大同府를 설치하니, 동남쪽으로 燕京까지 800리이다.】[- 段文楚]를 죽이고 스스로 留後라 칭하였다. - [ 李克用]李克用은 뒤에 後唐이 되었다 -
○ 招討使[ 曾元裕] 大破[ 王仙芝]於黃梅하야 殺五萬餘人하고 追斬[ 仙芝]하야 傳首하다
○ [ 黃巢]方攻亳州未下라 [ 尙讓]【[ 仙芝]之將이라 】이 帥[ 仙芝]餘衆하고 歸之하야 推[ 巢]爲主하고 號衝天大將軍이라하다
○ [ 王郢]之亂【僖宗二年에 浙西鎭遏使[ 王郢]等이 戰有功이어늘 節度使[ 趙隱]이 賞以職名하고 而不給衣糧한대 [ 郢]等이 遂劫庫兵하고 作亂收衆하야 攻陷諸州하니 大爲人患하니라 】에 臨安人[ 董昌]이 以土團【土는 謂土着이요 團은 謂團結이라 [ 代宗]이 定諸州兵하야 〈皆有常數하고〉其招募에 給家糧春冬衣者를 謂之官建(健)이요 其差點土人하야 春夏歸農이라가 秋冬追集하야 給身糧醬菜者를 謂之團結이라하니라 】으로 討賊有功이어늘 補石鏡都知兵馬使하다
王郢의 난리에【僖宗 2년(875)에 浙西鎭遏使王郢 등이 싸워서 공을 세웠는데, 節度使趙隱이 직명으로 賞을 주고 옷과 양식을 지급하지 않자, 王郢 등이 마침내 무기고의 병기를 탈취하고 난을 일으켜 병력을 모아 여러 州를 공격해서 함락시키니, 백성들의 큰 폐해가 되었다.】臨安 사람 董昌이 土團兵으로【土는 土着民을 이르고 團은 단결을 이른다. 代宗이 여러 州의 군대를 정하여 모두 정해진 수가 있게 하고 各州에서 이들을 불러 모집할 적에, 집안의 양식과 봄옷과 겨울옷을 공급해주는 병사를 일러 官健이라 하고, 토착민을 差遣하고 점고하여 봄과 여름에는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追集(召集)하여 官府에서 본인에게 필요한 양식과 장과 채소를 공급하는 것을 일러 團結이라 하였다.】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자, 石鏡都知兵馬使로 보임하였다.
[己亥]六年
[己亥]六年이라
春에 [ 高騈]【鎭海節度使라 】이 擊[ 黃巢]하야 屢破之하니 [ 巢]遂趣(趨)廣南하다 冬에 [ 黃巢]在嶺南할새 士卒罹瘴疫하야 死者什三四라 其徒勸之北還하야 以圖大事어늘 [ 巢]從之하다 十一月에 [ 黃巢]北趣襄陽이어늘 山南東道節度使[ 劉臣容]이 大破之하니 [ 巢]與[ 尙讓]으로 收餘衆하야 渡江東走하야 轉掠饒, 信, 池, 宣, 歙, 杭等十五州하니 衆이 至二十萬하니라
[庚子]廣明元年
[庚子]廣明元年이라
秋七月에 [ 黃巢]自采石渡江하야 圍天長, 六合【天長은 縣名이니 宋屬招信軍이러니 今改爲臨淮府하니라 六合은 古之棠邑也라 後爲六合縣하야 屬楊州러니 宋[ 太祖]升(陞)迎鸞鎭하야 爲建安軍하고 乃割六合隷焉하며 [ 眞宗]이 升建安爲眞州하니라 】하니 兵勢甚盛이라 丁卯에 [ 黃巢]陷東都하니 留守[ 劉允章]이 帥百官迎謁이어늘 [ 巢]入城하야 勞問而已하니 閭里晏然이러라 壬午에 賊攻潼關하니 關上兵皆潰라 [ 田令孜]奉帝하야 自金光門出하니 [ 黃巢]遂入長安하다
廣明 元年(경자 880)
가을 7월에 黃巢가 采石으로부터 揚子江을 건너天長縣과 六合縣을 포위하니,【天長은 縣의 이름이니, 宋나라 때에는 招信軍에 속하였는데 지금은 臨淮府로 개칭하였다. 六合은 옛날의 棠邑이다. 뒤에 六合縣이라 칭하여 楊州에 소속시켰는데, 宋나라 太祖가 迎鸞鎭을 승격시켜 建安軍이라 하고 마침내 六合縣을 떼어 여기에 소속시켰으며, 眞宗이 建安軍을 승격시켜 眞州라 하였다.】 군대의 형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丁卯日(17일)에 黃巢가 東都(洛陽)를 함락하니, 東都留守劉允章이 百官을 거느리고 나아가 맞이하고배알하였는데, 黃巢가 도성에 들어가 단지 위로하기만 하니 마을이 편안하였다. 壬午日에 적이 潼關을 공격하니, 관문 위에 있던 병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田令孜가 황제를 받들어金光門을 통해 나가니, 黃巢가 마침내 長安으로 들어왔다.
○ 上이 趣(趨)駱谷하니 鳳翔節度使[ 鄭畋]이 謁上於道次하고 請車駕留鳳翔이러니 上曰 朕不欲密邇巨寇하노니 且幸興元하야 徵兵以圖收復호리라 壬辰에 [ 巢]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齊라하고 改元金統하다
○ [ 鄭畋]이 還鳳翔하야 完城塹하고 繕器械하고 訓士卒하고 密約隣道하야 合兵討賊하니 軍勢大振이러라
鄭畋이 鳳翔으로 돌아와서 성벽과 참호를 완전하게 하고 器械(兵器)를 수선하고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은밀히 이웃의 道와 약속하여 군대를 연합해서 적을 토벌하니,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 [ 田令孜]勸上幸成都어늘 上이 從之하다
田令孜가 上에게 成都로 갈 것을 권하자, 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辛丑]中和元年
[辛丑]中和元年이라
三月에 [ 黃巢]遣其將[ 尙讓], [ 王播]하야 帥衆五萬하고 寇鳳翔이어늘 [ 畋]이 使[ 唐弘夫]【前朔方節度使라 】로 伏兵擊之하니 賊이 大敗於龍尾陂라 斬首二萬餘級하니 伏尸數十里라 [ 鄭畋]이 傳檄天下藩鎭하야 合兵討賊하다 時에 天子在蜀하야 詔令不通이라 天下謂朝廷不能復振이러니 及得[ 畋]檄에 爭發兵應之하니 賊懼하야 不敢復窺京西러니 未幾에 鳳翔司馬[ 李昌言]이 作亂하니 [ 畋]이 奔行在而薨【以[ 畋]爲司空同平章軍事하야 一以咨之하니라 】하다
中和 元年(신축 881)
3월에 黃巢가 그의 장수 [- 尙讓]과 王播를 보내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鳳翔을 침략하였다. 鄭畋이 [- 唐弘夫]로 하여금【[- 唐弘夫]는 前 朔方鎭節度使이다.】 군대를 매복시켜 적을 공격하게하니, 적군이 龍尾陂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2만여 명의 首級을 베니, 엎어진 시신이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
○ [ 黃巢]所署同州防禦使[ 朱溫]이 擧州降이어늘 賜名[ 全忠]하다 〈後爲梁[ 太祖]하니라〉
○ [ 黃巢]兵勢尙强이라 河中留後[ 王重榮]이 患之하야 謂行營都監[ 楊復光]曰 鴈門[ 李僕射]【時에 [ 克用]爲鴈門節度使라 】驍勇【驍은 健也요 武也라 】有强兵하고 彼亦有徇國之志하니 誠以朝旨召之면 必來하리니 來則賊不足平矣리라 [ 王鐸]이 在河中하야 乃墨勅【[ 鐸]爲都統하야 便宜從事러니 凡徵除授에 皆得用墨勅하니라 】召[ 李克用]하니 十一月에 [ 克用]이 將沙陁萬七千人하고 趣河中하다
黃巢의 병력이 아직도 강성하였다. 河中留後王重榮이 이를 근심하여 行營都監楊復光에게 이르기를 “鴈門의 李僕射(李克用)는【당시 李克用은 鴈門節度使였다.】 날래고 용맹하며【驍는 건장하고 용맹함이다.】 강성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그는 또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뜻이 있습니다. 진실로 조정의 명령으로 부른다면 반드시 올 것이니, 그가 오면 적을 평정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王鐸이 河中에 있으면서 마침내 墨勅으로【王鐸이 都統使가 되어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형편에 따라 從事하였는데, 무릇 사람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할 적에 모두 墨勅을 사용하였다.】李克用을 부르니, 11월에 李克用이 沙陁兵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河中으로 달려왔다.
[癸卯]三年
[癸卯]三年이라
二月에 [ 李克用]이 進軍乾阬하야 與河中, 易定, 忠武軍【河中將은 [ 白志遷]이요 易定은 義武[ 王處存]이요 忠武將은 [ 龐從]이라 】合하다 [ 尙讓]等이 將十五萬衆하고 屯于梁田陂어늘 明日에 大戰하야 自午至晡【日至申爲晡라 】하니 賊衆이 大敗하다 三月에 [ 克用]이 進軍渭橋하야 與[ 黃巢]軍으로 戰于渭南할새 一日三戰皆捷하고 義成, 義武【義成은 節度使[ 王鐸]이요 義武는 節度使[ 王處存]이라】等諸軍이 繼之하니 賊衆大奔이러라 四月에 [ 克用]等이 自光泰門으로 入京師하니 [ 黃巢]力戰不勝하고 焚宮室遁去하다 [ 克用]時年이 二十八이라 於諸將에 最少나 而破[ 黃巢]하고 復長安하니 功第一이요 兵勢最强하니 諸將皆畏之하니라 [ 克用]이 一目微眇하니 時人이 謂之[ 獨眼龍]이러라 詔以[ 克用]爲河東節度使하고 詔以[ 黃巢]未平이라하야 加[ 全忠]東北面都招討使하다
中和 3년(계묘 883)
2월에 李克用이 乾阬으로 진군하여河中, 易定, 忠武【[頭註] 河中, 易定, 忠武軍:河中軍 장수는 [- 白志遷]이고, 易定軍은 義武軍節度使王處存이고, 忠武軍 장수는 [- 龐從]이다.】 등의 군대와 연합하였다. [- 尙讓] 등이 1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梁田陂에 주둔하였는데, 다음날 크게 싸워 午時부터 저녁 때에 이르니,【해가 申時(오후 4시 전후)에 이르는 것을 晡라고 한다.】 적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3월에 李克用이 渭橋로 진군하여黃巢의 군대와 渭水 남쪽에서 싸웠는데 하루에 세 번 싸워 모두 이겼으며, 義成과 義武【義成은 義成軍節度使王鐸이고, 義武는 義武軍節度使王處存이다.】 등 여러 군대가 계속 이어오니, 적의 무리가 크게 패하여도망하였다.
[甲辰]四年
[甲辰]四年이라
春二月에 [ 克用]이 追及[ 巢]於中牟하야 奮擊大破之하니 [ 尙讓]이 帥其衆降하다
○ 六月에 武寧將[ 李師悅]이 與[ 尙讓]으로 追[ 黃巢]至瑕丘하야 敗之하니 [ 巢]衆殆盡이라 走至狼虎谷이어늘 [ 巢]甥[ 林言]이 斬[ 巢]兄弟妻子首하야 以降하다
○ 秋七月에 [ 李克用]이 至晉陽하야 大治甲兵하고 遣使하야 奉表詣行在하야 自陳호되 有破[ 黃巢]大功이나 爲[ 朱全忠]所圖【[ 克用]이 至汴州하야 營於城外러니 [ 全忠]이 固請館驛하고 置酒甚恭하다 [ 克用]이 乘酒使氣하야 語頗侵之한대 [ 全忠]이 不平하고 罷酒하다 從者皆醉러니 宣武將[ 楊彦洪]이 密與[ 全忠]謀하야 圍驛攻之호되 [ 克用]醉하야 不之聞이라 親兵[ 薛志勤], [ 史敬思]等이 格鬪할새 侍者扶[ 克用]하야 匿床下하고 以水沃其面告之하다 會에 夜大雨震雷하야 天地晦冥이라 [ 克用]이 帥左右數人하고 踰垣突圍하야 縋城得出하다 語頗侵之者는 [ 全忠]이 嘗從[ 黃巢]爲寇라 故로 觸其實也라 】하야 僅能自免하니 乞遣使按問하고 發兵誅討하소서 時에 朝廷이 以大寇初平이라하야 方務姑息이라 得[ 克用]表하고 大恐하야 但遣中使하야 賜優詔和解之하니라
[史略 史評][ 范氏]曰 天子所以制御天下者는 賞善罰惡하며 辨是非枉直하야 使人各當其所하고 物各安其分하야 而不相侵暴也라 [ 克用]이 有復唐室大功이어늘 而[ 全忠]輒欲殺之호되 [ 克用]이 不敢專兵復仇하고 而赴訴於朝廷하니 是는 諸侯有猶尊王室之心也라 爲天子者 詰其孰是孰非하야 使征伐號令으로 出於天子면 則誅一鎭에 而天下莫敢不從矣리라 [ 僖宗]則不然하야 知其直者而不恤하고 置其不直者而不問하니 不惟[ 全忠]無所忌憚이요 而[ 克用]心亦不服하니 欲兩存之는 乃兩失之라 自是로 藩鎭이 喜相征伐하야 不復稟命하니 以天子不足訴也일새라 書曰 有罪無罪에 惟我在어니 曷敢有越厥志리오하니 刑罰者는 所以爲天討也라 王者之於天下에 懲勸을 可不明哉아
가을 7월에 李克用이 晉陽에 이르러 갑옷과 병기를 크게 수선하고, 使者를 보내어 表文을 받들고 행재소에 이르러서 스스로 아뢰기를 “黃巢를 격파한 큰 공이 있으나 朱全忠에게 도모당하여【李克用이 汴州에 이르러 성 밖에서 진영을 쳤는데, 朱全忠이 굳이 館驛으로 올 것을 청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매우 공손히 대하였다. 李克用이 술김에 객기를 부려 자못 朱全忠을 침해하는 말을 하자, 朱全忠이 불편해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시종하는 자가 모두 취하자, 宣武軍의 장수인 [- 楊彦洪]이 은밀히 朱全忠과 함께 館驛을 포위하여 李克用을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李克用은 술에 취하여 이를 듣지 못하였다. 親衛兵인 薛志勤과 史敬思 등이 격투할 즈음에 모시는 자가 李克用을 부축하여 침상 아래에 숨기고 찬물을 그의 얼굴에 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여 이러한 사실을 고하였다. 마침 밤에 큰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벼락이 쳐서 천지가 캄캄하였는데, 李克用이 좌우의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담장을 뛰어넘어서 포위망을 뚫고 성에 밧줄을 매달아 탈출하였다. 자못 朱全忠을 침해하는 말을 하였다는 것은 朱全忠이 일찍이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겨우 스스로 죽음을 면하였으니, 바라건대 使者를 보내어 조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해주소서.” 하였다. 이때 조정은 큰 도둑(黃巢)이 처음으로 평정되었다 하여 우선 당장 눈앞의 편안함만 힘썼는데, 李克用의 表文을 얻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다만 中使를 보내어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 화해하게하였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天子가 천하를 제어하는 것은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며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을 분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제자리에 마땅하게 하고 물건으로 하여금 각각 분수에 편안하게 해서 서로 침략하고 포악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李克用이 唐나라 황실을 수복한 큰 功이 있었으나 朱全忠이 번번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는데, 李克用이 감히 자기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하여 보복하지 않고 조정에 달려와 하소연하였으니, 이는 諸侯들이 아직도 王室을 높이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天子 된 자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져서 정벌과 호령이 天子에게서 나오게 하였다면, 한 藩鎭을 주벌함에 천하에 감히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 僖宗]은 이렇게 하지 않아서 정직한 자인 줄을 알면서도 구휼하지 않았고 정직하지 않은 자를 내버려두고 문책하지 않았으니, 朱全忠이 기탄하는 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李克用도 심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둘 다 보존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둘 다 잃게 되었다. 이로부터 藩鎭이 서로 정벌하기를 좋아하여 다시는 황제에게 명령을 받지 않았으니, 이는 天子가 나약하여 天子에게 하소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書經》〈泰誓〉에 이르기를 ‘죄가 있든 죄가 없든 내가 있으니, 天下에 어찌 감히 그 마음을 지나치게 하여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형벌은 하늘의 토벌을 시행하는 것이다. 王者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권선징악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田令孜]益驕橫하야 禁制天子하야 不得有所主斷하니 上이 患其專하야 時語左右而流涕러라
田令孜가 더욱 교만하고전횡하여天子를 禁制(제재)하여天子가 주장하고 결단하는 바가 있지 못하니, 上이 그의 專橫을 근심하여 때때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乙巳]光啓元年
[乙巳]光啓元年이라
春二月에 車駕至京師하다
光啓 元年(을사 885)
봄 2월에 황제의 車駕가 京師에 이르렀다.
○ [ 秦宗權]【上蔡人이니 爲許牙將하다 [ 黃巢]涉淮에 許軍亂하니 [ 宗權]이 據蔡以叛하야 與[ 巢]和러니 [ 巢]死에 [ 宗權]兵勢張甚하야 有呑噬四海之志하니라 】이 稱帝於蔡州하다 〈[ 宗權]이 中和元年에 起兵하니라〉
○ [ 李克用]이 表請誅[ 令孜]어늘 詔和解之호되 [ 克用]이 不聽하다 十二月에 [ 克用]이 進逼京城하니 [ 令孜]夜奉天子하고 自開遠門으로 出幸鳳翔하다 初에 [ 黃巢]焚長安宮室而去한대 諸道兵이 入城縱掠하야 焚府寺하니 民居什六七이라 京兆尹[ 王徽]累年補葺하야 僅完一二러니 至是하야 復爲亂兵焚掠하야 無孑遺矣러라
[丙午]二年
[丙午]二年이라
春正月에 [ 李克用]이 還軍河中하야 與[ 王重榮]【河中節度使라 】으로 同表請大駕還宮하고 因罪狀[ 田令孜]하야 請誅之하다 [ 令孜]請上幸興元한대 不從이러니 是夜에 [ 令孜]引兵入宮【謂行宮이라 】하야 劫上幸寶鷄호되 宰相朝臣이 皆不知라 時에 [ 田令孜]弄權하야 再致播遷하니 天下共忿疾之러라 [ 朱玫]【邠寧節度使라 】, [ 李昌符]【鳳翔節度使[ 令孜]가 結[ 朱玫], 李昌符하야 攻河中이어늘 克用救之하야 進逼城하다 上幸寶鷄하니 朱玫, 昌符亦恥爲之用하고 且憚克用, [ 重榮]之强하야 追逼乘輿하니라 】引兵하야 追逼乘輿하다
光啓 2년(병오 886)
봄 정월에 李克用이 河中으로 回軍하여王重榮과【王重榮은 河中節度使이다.】 함께 表文을 올려 황제에게 환궁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田令孜의 죄상을 열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田令孜가 上에게 興元으로 파천할 것을 청하였으나 上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날 밤에 田令孜가 군대를 이끌고行宮으로 들어와서【宮은 行宮을 이른다.】 上을 위협하여寶鷄로 파천하게하였으나 재상과 朝臣들이 모두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봄 정월에 李克用이 河中으로 回軍하여王重榮과【王重榮은 河中節度使이다.】 함께 表文을 올려 황제에게 환궁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田令孜의 죄상을 열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田令孜가 上에게 興元으로 파천할 것을 청하였으나 上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날 밤에 田令孜가 군대를 이끌고行宮으로 들어와서【宮은 行宮을 이른다.】 上을 위협하여寶鷄로 파천하게하였으나 재상과 朝臣들이 모두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 三月에 車駕至興元하니 [ 朱玫]逼鳳翔이라 百官이 奉[ 襄王熅]하야 權監軍國事러니 [ 玫]部將[ 王行瑜]斬玫하고 執[ 襄王熅]【[ 肅宗]之子[ 襄王][ 僙]之曾孫이라 】하야 殺之어늘 詔以[ 行瑜]로 爲靜難節度使하다
[丁未]三年
[丁未]三年이라
以[ 錢鏐]【鏐는 音流요 又音聊라 】로 爲杭州刺史하다
○ 削[ 田令孜]官爵하야 長流端州하다
田令孜의 관작을 삭탈하여 멀리 端州로 유배보냈다.
○ 八月에 [ 高騈]【淮南節度使라 】部將[ 楊行密]【[ 高騈]이 聞[ 秦宗權]將寇淮南하고 遣其都將[ 畢師鐸]하야 出屯高郵하야 備[ 宗權]하다 時에 嬖將[ 呂用之]用事하야 宿將이 多爲所誅라 [ 師鐸]이 自以[ 黃巢]降將이라하야 常自危러니 及與[ 用之]有隙에 謀誅[ 用之]하야 引兵至廣陵하니 [ 用之]力戰却之하다 [ 師鐸]이 乞師於宣州觀察使[ 秦彦]하야 攻之城陷하니 [ 用之]亡走라 [ 師鐸]이 搜捕[ 用之]親黨하야 悉誅之하고 執[ 騈]幽之하다 [ 秦彦]이 自稱淮南節度使하고 以[ 師鐸]行軍司馬하다 初에 [ 師鐸]이 攻廣陵也에 [ 用之]詐爲[ 高騈]牒하야 署廬陵刺史[ 楊行密]行軍司馬하야 入援하다 [ 高騈]이 爲諸道都統하니 朝廷이 給空名告身이라 故得署之하니라 [ 行密]이 帥諸軍하고 抵廣陵하니 [ 秦彦]이 閉城自守하고 遣[ 師鐸]出戰이러니 [ 師鐸]이 屢敗라 [ 秦彦]이 恐[ 騈]內應하야 殺[ 騈]하고 幷其親黨無遺하니 [ 行密]聞之하고 帥士卒縞素하고 向城大哭三日하니라 [ (陳)[秦]彦], [ 師鐸]이 與[ 秦宗權]之弟[ 宗衡]合이러니 [ 宗衡]副將[ 孫儒] 知[ 宗權]勢不能久하고 殺[ 宗衡]하야 傳首於[ 朱全忠]하고 又殺[ 秦彦], [ 師鐸]하니라 】이 自稱[ 淮南留後]하다 〈後爲吳하니라〉
8월에 [- 高騈]의【[- 高騈]은 淮南節度使이다.】部將楊行密이【[- 高騈]은 秦宗權이 장차 淮南 지방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都將畢師鐸을 보내 高郵로 나가 주둔하여 秦宗權을 대비하게 하였다. 당시에 군주가 총애하는 장수인 呂用之가 用事하여 老將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였다. 畢師鐸은 자신이 黃巢의 항복한 장수라 하여 항상 스스로 위태롭게 여겼는데, 呂用之와 틈이 생기자 呂用之를 죽일 것을 모의하여 병력을 이끌고 廣陵에 이르니, 呂用之가 강력히 싸워 퇴각시켰다. 畢師鐸이 宣州觀察使秦彦에게 구원병을 청해서 呂用之를 공격하여 성이 함락되니, 呂用之가 도망하였다. 畢師鐸이 呂用之의 친당들을 수색하여 체포해서 모두 죽이고 [- 高騈]을 사로잡아 유치하였다. 秦彦은 스스로 淮南節度使라 칭하고 畢師鐸을 行軍司馬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畢師鐸이 廣陵을 공격할 적에 呂用之가 거짓으로 [- 高騈]의 牒을 만들어 廬陵刺史楊行密을 行軍司馬로 임명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다. [- 高騈]이 諸道都統이 되니, 조정에서 그에게 空名告身牒을 주었다. 그러므로 楊行密을 行軍司馬로 임명할 수 있었다. 楊行密이 諸軍을 거느리고 廣陵에 이르니, 秦彦은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며 畢師鐸을 보내어 나가서 싸우게 하였는데, 畢師鐸이 여러 번 패하였다. 秦彦은 [- 高騈]이 內應할까 두려워하여 [- 高騈]을 죽이고 아울러 그의 친당들을 남김없이 모두 죽이니, 楊行密이 이 말을 듣고는 사졸들을 거느려 소복을 입고, 城을 향해 3일 동안 크게 통곡하였다. 秦彦과 畢師鐸이 秦宗權의 아우 秦宗衡과 연합하였는데, 秦宗衡의 副將인 孫儒가 秦宗權의 세력이 오래 가지 못할 줄을 알고는 秦宗衡을 죽이고 首級을 朱全忠에게 전달하였으며, 또 秦彦과 畢師鐸을 살해하였다.】 스스로 淮南留後라 칭하였다. - 뒤에 국호를 吳라 하였다.-
[戊申]文德元年
[戊申]文德元年이라
上疾大漸이어늘 觀軍容使[ 楊復恭]【宦官名이라 】이 立[ 壽王][ 傑]【更名[ 敏]하고 又更名[ 曄]하니라 】하야 爲皇太弟하다 癸卯에 上이 崩하고 [ 昭宗]이 卽位하니 體貌明粹하고 有英氣라 以[ 僖宗]威令不振하야 朝廷日卑라하야 有恢復前烈之志하야 尊禮大臣하고 夢想賢傑하니 踐阼之始에 中外欣欣焉이러라
文德 元年(무신 888)
贊曰 唐自[ 穆宗]以來로 八世에 而爲宦官所立者(六)[七]君【本贊에 六作七하니 [ 陳弘志]立[ 穆宗]하고 [ 王守澄]立[ 文宗]하고 [ 仇士良]立[ 武宗]하고 [ 馬元贊]立[ 宣宗]하고 [ 王宗實]立[ 懿宗]하고 [ 劉行深]等立[ 僖宗]하고 [ (劉)[楊]復恭]立[ 昭宗]하니라 】이니 然則唐之衰亡이 豈止方鎭之患哉아 蓋朝廷은 天下之本也요 人君者는 朝廷之本也요 始卽位〈者〉는 人君之本也라 其本始不正하니 欲以正天下면 其可得乎아
[史略 史評]史斷曰 [ 僖宗]이 以童孺之年으로 爲宦者所立하야 政在內臣하야 初無遠謀하니 苟聲色毬獵이 足饜其欲이면 則政事一以付之 固無怪矣라 [ 巢]寇는 本區區負販으로 乘飢鼠竊하니 何足以媒大亂이리오 正由王室衰微하고 奸回誤計하야 不五六年間에 攻陷州郡하야 渡江渡淮를 如越無人之境이라 遂陷兩都하야 汚穢宮闕하니 乘輿播遷하야 投身無所라 時事浸乖에 天星示變하야 或交流如織하고 或大如杯椀하니 其爲譴異 抑又甚矣로다
《新唐書》〈僖宗本紀〉贊에 말하였다.
“唐나라는 穆宗 이래로 8世에 환관에 의해 옹립된 군주가 일곱이었으니,【[附註] 爲宦官所立者(六)[七]君:《新唐書》〈僖宗本紀〉贊에 六이 七로 되어 있으니, 陳弘志가 穆宗을 세우고, 王守澄이 文宗을 세우고, 仇士良이 武宗을 세우고, [- 馬元贊]이 宣宗을 세우고, 王宗實이 懿宗을 세우고, 劉行深 등이 [- 僖宗]을 세우고, 楊復恭이 昭宗을 세웠다.】 그렇다면 唐나라가 쇠퇴하고 멸망한 것이 어찌 다만 方鎭의 우환 때문일 뿐이었겠는가. 조정은 천하의 근본이고 임금은 조정의 근본이고 처음 즉위하는 것은 임금의 근본이다. 그 근본과 시작이 바르지 못하니, 천하를 바로잡고자 한들 어찌 될 수 있었겠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僖宗]은 어린 나이로 宦官에 의해 擁立되어 정권이 內臣(宦官)에게 있어 애당초 원대한 계책이 없었으니, 만일 음악과 여색과 擊毬와 狩獵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만 한다면 정사를 한결같이 宦官들에게 맡긴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다. 반란을 일으킨 黃巢는 본래 구구하게 등짐장사 하던 자로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틈을 타서 쥐새끼처럼 도둑질하였으니, 어찌 큰 난리를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이는 바로 왕실이 쇠미하고 간사한 자들이 계책을 잘못 세움으로 말미암아 5, 6년이 못 되는 사이에 州郡을 공격하고 함락하여 揚子江을 건너오고 淮水를 건너오기를 무인지경을 건너오듯 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長安과 洛陽을 함락시켜 궁궐을 더럽히니, 황제의 乘輿가 播遷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時事가 점점 어긋남에 하늘의 별이 변고를 보여서 혹은 流星이 서로 떨어져 베를 짜는 듯하였고 혹은 크기가 술잔과 사발만 하였으니, 견책하여 災異를 나타냄이 또한 심하였다.”
昭宗
名은 曄이니 懿宗第七子라
[ 昭宗]※【聖聞周達曰昭라 】名은 [ 曄]이니 [ 懿宗]第七子라 在位十六年이요 壽三十八이라
※天祿已去하고 民心已離하니 雖欲救之나 其將能乎아
[己酉]龍紀元年
[己酉]龍紀元年이라
[ 朱全忠]이 大破[ 秦宗權]하야 斬之하다 [ 全忠]이 旣克蔡州하니 兵勢益盛이러라
[庚戌]大順元年
[庚戌]大順元年이라
上在藩邸하야 素嫉宦官이러니 及卽位에 [ 楊復恭]이 恃援立功하고 所爲多不法이라 上意不平하야 政事多謀於宰相하니라
大順 元年(경술 890)
上은 藩邸에 있을 때에 평소 환관을 미워하였는데 황제에 즉위하게 되자, 楊復恭이 황제를 옹립한 공을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였다. 이에 上이 마음속으로 불평하여 정사를 대부분 재상들과 도모하였다.
○ 夏四月에 [ 朱全忠]이 上言호되 [ 克用]이 終爲國患이니 今因其敗【[ 克用]이 攻雲州러니 防禦使[ 赫連鐸]이 求救於盧龍하야 [ 李匡威]將兵三萬赴之하니 [ 克用]引還하니라 】하야 臣請帥汴, 滑, 孟三軍과 與河北三鎭【盧龍[ 李匡威], 成德[ 王鎔], 魏博[ 羅弘信]이라 】하야 共除之하노이다 [ 張濬]曰 先帝再幸山南은 沙陁所爲【沙陁는 謂[ 克用]이니 本沙陁人이라 】也라 臣常(嘗)慮其與河朔相表裏하야 致朝廷不能制러니 今兩河藩鎭이 共請討之【河南[ 朱全忠], 河北[ 李匡威] 請討之하니라 】하니 此는 千載一時라 但乞陛下付臣兵柄하시면 旬月可平하리이다 上이 從之하다
여름 4월에 朱全忠이 上言하기를 “[- 李克用]이 끝내 국가의 환난이 될 것이니, 이제 그가 패전한 틈을 타서【[- 李克用]이 雲州를 공격하였는데, 雲州防禦使赫連鐸이 盧龍鎭에 구원을 청하여 李匡威가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오니, [ 李克用]李克用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신은 汴州, 滑州, 孟州 세 鎭의 군대와 河北의 세 鎭을【河北의 三鎭은 盧龍鎭의 李匡威, 成德鎭의 王鎔, 魏博鎭의 羅弘信이다.】 거느리고 가서 함께 그를 제거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張濬이 아뢰기를 “先帝께서 두 번이나 山南으로 파천한 것은 沙陁族(李克用)이【沙陁族은 [- 李克用]이니, 본래 沙陁人이다.】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그가 河朔(河北)과 서로 表裏가 되어 조정에서 그를 제재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였는데, 지금 兩河의 藩鎭이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을 청하니,【河南의 朱全忠과 河北의 李匡威가 [ 李克用]李克用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 좋을 기회입니다. 다만 陛下께서 신에게 병권을 맡겨주신다면 열흘이나 한 달 안에 그들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하니, 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 五月에 詔하야 削奪[ 克用]官爵하고 以[ 濬]으로 爲河東行營招討【招는 擧也라 】制置宣慰使하다
5월에 황제가 명하여 [ 李克用]李克用의 관작을 삭탈하고, 張濬을 河東行營招討[頭註] 招討招는 드는 것이다.制置宣慰使로 임명하였다.
○ 官軍이 出陰地關하야 不戰而走하고 [ 張濬]이 又敗하니 [ 克用]이 上表訴寃하다
官軍이 陰地關을 나가싸우지 않고패주하였고張濬이 또다시 패하니, [ 李克用]李克用이 表文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辛亥]二年
[辛亥]二年이라
賜[ 克用]詔하야 悉復其官爵하고 使歸晉陽하다
大順 2년(신해 891)
황제가 조칙을 내려[ 李克用]李克用의 관직과 작위를 모두 회복시키고晉陽으로 돌아가게하였다.
○ 八月에 [ 王建]【許州人이라 少屠牛販鹽이라가 爲[ 田令孜]養子永平節度使하야 取蜀成都하야 自稱西川留後하니라 】이 自稱[ 西川留後]하다 〈後爲[ 蜀王]하니라〉
[壬子]景福元年
[壬子]景福元年이라
五月에 [ 楊行密]이 屢敗[ 孫儒]【初爲[ 秦宗權]副將하야 討[ 黃巢]러니 及[ 宗權]叛에 遂屬焉하고 後自稱節度使라 】兵하고 擒儒於陳하야 斬之하고 傳首京師하니 儒衆이 多降於[ 行密]하니라 先是에 楊州富庶甲天下라 時人이 稱楊一益二러니 及經[ 秦], [ 畢], [ 孫], [ 楊]【[ 秦彦], [ 畢師鐸], [ 孫儒], [ 楊行密]也라 】兵火之餘에 江淮之間이 東西千里掃地盡矣러라
景福 元年(임자 892)
5월에 楊行密이 孫儒의【孫儒는 처음에 秦宗權의 副將이 되어黃巢를 토벌하였는데, [ 秦宗權]秦宗權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침내 그에게 소속되었고, 뒤에 스스로 節度使라 칭하였다.】 군대를 여러 차례 패퇴시키고孫儒를 陳에서 사로잡아 그의 목을 베고 首級을 京師에 전달하니, 孫儒의 무리가 대부분 楊行密에게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楊州는 백성들이 풍족하고 백성의 숫자가 많은 것이 천하에 으뜸이어서 당시 사람들이 楊州가 첫 번째이고 益州가 두 번째라고 칭하였는데, 秦彦‧畢師鐸‧孫儒‧楊行密【[頭註] 秦, 畢, 孫, 楊:秦‧畢‧孫‧楊은 秦彦‧畢師鐸‧孫儒‧楊行密이다.】의 병란을 겪은 뒤에는 江‧淮 지역이 동서로 천 리가 비로 쓴 것처럼 다 없어졌다.
○ 八月에 以[ 楊行密]로 爲淮南節度使하다 淮南被兵六年에 士民이 轉徙幾盡이라 [ 行密]初至하야 賜與將吏에 帛不過數尺이요 錢不過數百이라 而能以勤儉足用하고 非公宴이면 未嘗擧樂하며 招撫流散하고 輕徭薄斂하니 未及數年에 公私富庶하야 幾復承平之舊하니라
[癸丑]二年
[癸丑]二年이라
春正月에 以[ 李茂貞]으로 爲山南西道節度使하고 以渝州刺史[ 柳玭]으로 爲瀘州刺史하다 柳氏自[ 公綽]【[ 玭]은 [ 公綽]之孫也라 】以來로 世以孝悌禮法으로 爲士大夫所宗이라 [ 玭]이 爲御史大夫러니 上欲以爲相이나 宦官惡之라 故로 久謫於外하니라 [ 玭]이 嘗戒其子弟曰 凡門地高는 可畏요 不可恃也라 立身行己에 一事有失이면 則得罪重於他人하고 死無以見先人於地下하리니 此其所以可畏也라 門高則驕心易生하고 族盛則爲人所嫉하야 懿行, 實才를 人未之信하고 小有疵纇【疵는 才之反이니 玉病也요 纇는 盧對反이니 絲節也라 】면 衆皆指之하나니 此其所以不可恃也라 故로 膏粱子弟【膏는 肥肉也요 粱은 似粟而大하니 米之善者라 】는 學宜加勤하고 行宜加勵라야 僅得比他人爾니라
景福 2년(계축 893)
봄 정월에 李茂貞을 山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고, 渝州刺史柳玭을 瀘州刺史로 임명하였다. 柳氏는 柳公綽【柳玭은 [- 公綽]의 손자이다.】 이래로 대대로 효도와 공경과 예법으로 士大夫들에게 尊崇을 받았다. 柳玭이 御史大夫가 되었는데, 上은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환관들이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외지에 좌천되어 있었다. 柳玭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門地(門閥)가 높은 것은 두려워할 만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문벌이 높은 자는〉자기 몸을 세우고 처신함에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죄를 얻음이 남들보다 무겁고 죽은 뒤에 지하에서 先人을 뵐 낯이 없으니,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이유이다. 문벌이 높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고 가문이 번창하면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아서, 아름다운 행실과 진실한 재주를 사람들이 믿지 않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疵는 才之反(자)이니 옥의 티이고, 纇는 盧對反(뢰)이니 실의 매듭이다.】 무리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니, 이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은【膏는 살진 고기이고, 粱은 조와 비슷한데 크니, 膏粱은 쌀 중에 좋은 것이다.】 학문을 더욱 부지런히 힘쓰고 행실을 더욱 힘써 닦아야 겨우 다른 사람에게 견줄 수 있다.”
○ [ 李茂貞]이 恃功【見下壬戌年不臣之心註라 】驕橫이어늘 上怒하고 欲討之하야 命[ 杜讓能]【太尉라 】하야 專掌其事하다
○ 九月에 以[ 覃王][ 嗣周]로 爲招討使하야 帥兵三萬하고 軍于興平이러니 [ 茂貞]이 約[ 王行瑜]【邠寧節度使라 】하야 合兵六萬하야 以拒之하니 禁軍이 皆望風奔潰라 [ 茂貞]等이 乘勝하야 進至(二)[三]橋【在長安西十八里하니라 】하니 京師大震이러라
[甲寅]乾寧元年
[甲寅]乾寧元年이라
春正月에 以右散騎常侍[ 鄭綮]로 爲禮部侍郞同平章事하다 [ 綮]好詼諧【好는 去聲이요 詼諧는 俳優戲也라 】하고 多爲歇後詩【敍所以爲詩호되 而歇後語하고 不發이라 】하야 譏嘲時事어늘 上以爲有所蘊이라하야 手注班簿【[ 綮]每以詩謠託諷하니 中人有誦之天子前者라 [ 昭宗]은 意其有所蘊未盡이어늘 因有司上班簿하니 遂署其側曰 可禮部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라하니라 班簿는 著在朝者姓名이라 】하야 命以爲相하니 聞者大驚이러라 堂吏往告之한대 [ 綮]笑曰 諸君大誤로다 使天下更無人이라도 未至[ 鄭綮]니라 吏曰 特出聖意니이다 [ 綮]曰 果如是면 奈人笑何오 旣而요 賀客至어늘 [ 綮]搔首言曰 歇後[ 鄭五]【[ 鄭綮]第五요 爲歇後詩하니 時謂之歇後鄭五體라하니라 】作宰相하니 時事可知矣로다 累讓不獲하니 乃視事하다
乾寧 元年(갑인 894)
봄 정월에 右散騎常侍[ 鄭綮]鄭綮를 禮部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 鄭綮]鄭綮는 해학을 좋아하고【好는 去聲(좋아함)이고, 詼諧는 배우들의 놀이이다.】 歇後詩를 많이 지어서【歇後詩는 시를 짓는 이유를 서술하되 뒤에 붙은 말을 생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일을 풍자하였다. 上은 그가 속에 깊이 쌓아둔 경륜이 있다고 여겨서 그의 이름을 班簿에 직접 기재하고【[ 鄭綮]鄭綮가 매양 시와 노래로써 풍자하니, 宮中 사람 중에 天子의 앞에서 이것을 외우는 자가 있었다. 昭宗은 그가 가슴속에 온축하고 있는 바를 다 토로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有司가 班簿를 올리니, 마침내 그 옆에 쓰기를 “禮部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가 가하다.”라고 하였다. 班簿는 조정에 있는 자의 姓名을 쓴 것이다.】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니, 듣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堂吏(政事堂의 관리)가 [ 鄭綮]鄭綮에게 가서 고하자, [ 鄭綮]鄭綮는 웃으며 말하기를 “諸君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구나. 가령 천하에 다시 인물이 없다 하더라도 재상 자리가 [ 鄭綮]鄭綮에게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堂吏가 말하기를 “이는 특별히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 鄭綮]鄭綮는 말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축하객들이 이르자, [ 鄭綮]鄭綮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기를 “歇後詩를 짓던 [ 鄭五]鄭五가【[ 鄭綮]鄭綮는 형제의 항렬이 다섯 번째이고 歇後詩를 지으니, 당시에 이를 일러 歇後鄭五體라고 하였다.】 재상이 되었으니, 세상일을 알 만하다.” 하였다. [ 鄭綮]鄭綮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니, 마침내 정사를 보았다.
[乙卯]二年
[乙卯]二年이라
[ 王行瑜], [ 李茂貞], [ 韓建]【鎭國節度使라 】이 各將精兵數千하고 入朝하야 奏稱호되 南北司互有朋黨하야 墮(隳)紊朝政하고 [ 韋昭度]討西川【[ 昭度]將諸道十餘萬하고 與[ 王建]으로 討西川[ 陳敬瑄]이로되 三年不能克하니 詔罷兵하다 [ 昭度]卽東還하니 [ 王建]이 急攻成都克之하고 自稱西川留後하니라 [頭註] [ 韋昭度]는 同平章事也라 辛亥年에 以行營招討使山南西道節度使로 討西川하니라 】에 失策하고 [ 李谿]作相에 不合衆心하니 請誅之하노이다 上이 未之許러니 是日에 [ 行瑜]等이 殺[ 昭度], [ 谿]於都亭驛【在朱雀門前西街하니라 】하다
乾寧 2년(을묘 895)
王行瑜, 李茂貞, [ 韓建]韓建이【[ 韓建]韓建은 鎭國節度使이다.】 각각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입조하여奏稱하기를 “南司와 北司가 서로 붕당이 있어서 조정의 정사를 무너뜨리고 문란하게 하며, 韋昭度는 西川을 토벌할 적에【[附註] 韋昭度가 諸道의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 王建]王建과 함께 西川의 [ 陳敬瑄]陳敬瑄을 토벌하였는데 3년이 지나도 점령하지 못하자, 황제가 군대를 파할 것을 명하였다. 韋昭度가 즉시 동쪽으로 돌아오니, [ 王建]王建이 급히 成都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西川留後라 칭하였다. [頭註] 韋昭度는 同平章事이다. 辛亥年(891)에 行營招討使山南西道節度使로 西川을 토벌하였다.】 실책을 저질렀고, 李谿는 정승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지못하니, 그들을 죽이소서.” 하였다. 上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날에 王行瑜 등이 韋昭度와 李谿를 都亭驛에서 죽였다.【[- 都亭驛]은 [ 朱雀門]朱雀門 앞의 서쪽 거리에 있다.】
○ [ 李克用]이 大擧蕃漢【猶言夷夏也라 】兵南下하야 討[ 王行瑜]等하다 上詔[ 克用]하야 令且赦[ 茂貞]하고 倂力討[ 行瑜]하다 十一月에 [ 克用]이 進逼邠州어늘 [ 行瑜]棄城走하니 [ 克用]이 追斬之하다
[ 李克用]李克用이 蕃漢(오랑캐와 중국)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蕃漢은 夷夏(오랑캐와 華夏)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쪽으로 내려가서王行瑜 등을 토벌하였다. 上이 [ 李克用]李克用에게 명하여 우선 李茂貞을 사면하고 힘을 합쳐王行瑜를 토벌하게하였다.
11월에 [ 李克用]李克用이 전진하여 邠州를 핍박하자, 王行瑜가 성을 버리고도망하니, [ 李克用]李克用이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 十二月에 進[ 克用]爵[ 晉王]하다
[史略 史評][ 胡氏]曰 [ 克用]於三鎭에 非有父兄之怨이요 特爲王室雪恥하야 仗義而來어늘 [ 昭宗]不明하야 陰疑[ 克用]하고 偏黨[ 茂貞]하니 他日困辱凶終이 蓋始乎此謀矣니라 又曰 [ 克用]은 於是에 正當入覲하야 力陳[ 茂貞]不誅면 必爲後患之意요 不然이면 將在軍에 君令을 有所不受하나니 蕩淸岐華하고 駐師郊畿하야 釋戎服以見天子하며 身輔朝廷하고 修明紀律하야 使東寇不得西略이면 王室安矣리라 釋此不爲하고 而區區疲力於幽州하고 爭地於慈隰하야 遂使[ 全忠]先手하야 遂移唐祚하고 晉陽岌岌하야 幾不自保하니 豈非初謀之不遠也歟아
12월에 [ 李克用]李克用의 관작을 [ 晉王]晉王으로 승진시켰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胡氏(胡寅)가 말하였다.
“[ 李克用]李克用은 三鎭에 있어서 父兄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王室을 위해 치욕을 씻고자 하여 義理를 내세우고 왔는데, 昭宗이 현명하지 못하여 남몰래 [ 李克用]李克用을 의심하고 李茂貞을 치우치게 편들었으니, 후일에 곤욕을 겪고 잘 끝마치지 못한 것은 이 모의에서 비롯되었다.”
또 말하였다.
“[ 李克用]李克用이 이때에 바로 입조하여 天子를 뵙고서 ‘李茂貞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라는 뜻을 강력히 아룄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장수가 軍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岐華 지방을 깨끗이 소탕하고 郊畿 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서 군복을 벗고 天子를 알현하며, 몸소 조정을 보필하고 紀律을 닦고 밝혀서 동쪽 도적으로 하여금 서쪽 지방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으면 왕실이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버리고 하지 않고는 구구하게 幽州에 힘을 다 쓰고 慈州와 隰州에서 땅을 다투어 [ 朱全忠]朱全忠이 선수를 쳐서 마침내 唐나라 왕실이 옮겨가게 하고 晉陽은 위급하여 거의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당초의 계책이 원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丙辰]三年
[丙辰]三年【三上有丙辰二字라 】이라
乾寧 3년(병진 896)【三字 앞에 丙辰 두 글자가 있어야 한다.】
[ 李茂貞]이 犯京師어늘 帝將幸太原이러니 [ 韓建]이 請幸華州【華州는 [ 建]之治也라 請幸華州는 遂欲制之하니라 】한대 上從之하다 [ 茂貞]이 遂入長安하니 自中和【[ 僖宗]年號라 】以來로 所葺宮室市肆가 燔燒俱盡이러라
○ [ 錢鏐]克越州하고 斬[ 董昌]【[ 董昌]은 義勝節度使也니 爲政苛虐하고 掊斂以充貢獻이라 由是로 寵命相繼하다 請爲越王이어늘 未許한대 昌不悅하니 有諂之者曰 與爲越王으론 曷若爲越帝리오하니라 於是에 僭號於越州하니 制削奪官爵하고 委[ 錢鏐]討之하니라 】하니 以[ 鏐]爲鎭海節度使하다
[丁巳]四年
[丁巳]四年이라
[ 王審知]【武威節度使[ 王潮]之弟也라 唐末盜起하니 壽州屠者[ 王緖] 聚衆하야 攻陷固始하고 招固始縣佐[ 王潮]兄弟하야 以[ 潮]爲軍正이러니 及[ 緖]以猜忌로 爲下所廢한대 衆共推[ 潮]爲主하다 唐以[ 潮]爲福建觀察使하고 [ 審知]爲副러니 [ 潮]卒에 [ 審知]代之하니라 】自稱福建留後하다 〈後爲[ 閩王]하니라〉
[戊午]光化元年
[戊午]光化元年이라
[ 李茂貞]이 與[ 朱全忠]으로 皆欲發兵하야 迎天子어늘 八月에 車駕還京師【[ 朱全忠]營洛陽宮하고 累表하야 欲迎駕어늘 [ 茂貞]與建聞之하고 皆懼하야 請修復宮闕하고 奉上歸長安하니라 】하다
[史略 史評][ 范氏]曰 唐末藩鎭에 惟[ 李克用]이 最爲有功이라 雖嘗跋扈나 而終不失臣節하니 若倚爲藩扞하야 使太原之勢常重이면 則諸鎭이 未敢窺唐也어늘 而唐疑而不信이라 是以로 不競於汴而[ 全忠]獨强하야 呑噬諸鎭하야 卒滅唐室이라 自古로 忠者不見信하고 而所信者不忠이면 豈有不亡者乎아
光化 元年(무오 898)
李茂貞과 [ 朱全忠]朱全忠이 모두 군대를 동원하여 천자를 맞이하려 하자, 8월에 황제의 車駕가 京師(長安)로 돌아왔다.【[ 朱全忠]朱全忠이 洛陽의 궁궐을 짓고 여러 차례 表文을 올려 御駕를 맞이하려 하자, 李茂貞과 [ 王建]王建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여 궁궐을 수복할 것을 청하고 上을 받들어 長安으로 돌아왔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唐나라 말기에 藩鎭 중에 오직 [ 李克用]李克用이 가장 공이 있었다. 비록 일찍이 발호하였으나 끝내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으니, 만약 唐나라가 그를 의지하여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로 삼아서 太原의 형세로 하여금 항상 중하게 하였다면 여러 藩鎭이 감히 唐나라를 엿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唐나라가 [ 李克用]李克用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 이 때문에 汴(朱全忠) 지방보다 강하지 못하고 [ 朱全忠]朱全忠이 홀로 강성해져서 여러 藩鎭을 집어삼켜 마침내 唐나라 황실을 멸망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충성스러운 자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신임을 받은 자가 충성스럽지 못하다면 어찌 망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庚申]三年
[庚申]三年이라
以[ 崔胤]으로 爲門下侍郞同平章事하야 專制朝政하다 初에 [ 崔胤]이 與上으로 密謀盡誅宦官하니 宦官이 益懼라 上이 自華州還으로 忽忽不樂하야 多縱酒하고 喜怒不常하니 左右尤自危라 於是에 中尉[ 劉季述], [ 王仲先]과 樞密使[ 王彦範], [ 薛齊]偓等이 陰謀廢立【上이 獵苑中이라가 夜醉歸하야 手殺黃門侍女數人하니라 明日에 宮門不開어늘 [ 季述]이 率禁兵하고 破門入하야 陳兵殿庭하고 請太子監國하니라 】하고 乃引兵하야 突入宣化門하다 [ 季述]이 進曰 陛下厭倦大寶이실새 中外群情이 願太子監國하니 請陛下保頤東宮【頤는 養也니 言於少陽院自保養也라 】하소서하고 乃扶上하야 與后同輦하니 嬪御侍從者 纔十餘人이라 適少陽院하니 [ 季述]이 以銀檛【銀捶也라 本傳에 以所持釦杖이라하니라 釦는 音口니 金飾也라 】畫地하야 數上罪數十하고 乃鎖其門하야 鎔鐵錮之【錮는 音固니 鑄塞之也라 】하고 穴墻【謂穿墻爲穴也라 】하야 以通飮食하다 [ 季述]等이 矯詔하야 令[ 太子裕]로 監國하고 尋使卽皇帝位하다 [ 朱全忠]이 聞亂하고 至大梁하니 [ 季述]이 遣其養子[ 希度]하야 詣[ 全忠]하야 許以唐社稷輸之라 [ 李振]【天平節度副使라 】이 勸[ 全忠]誅[ 季述]이어늘 [ 全忠]이 乃囚[ 希度]하고 遣振하야 如京師詗事【詗은 休正反이니 伺候采察之名이라 】러니 [ 崔胤]이 密遣人하야 說神策指揮使[ 孫德昭]하야 誅[ 季述]等하다
[史略 史評][ 范氏]曰 [ 崔胤]이 本與[ 韓全誨]有隙이라 故로 各倚强藩하야 以爲外援하고 而岐汴亦憑宦臣宰相하야 以制朝廷이라 故로 胤召[ 全忠]하고 而[ 全誨]劫帝西幸하니 唐室之亡은 由南北司相呑滅하야 而人主受其禍니 豈不足爲將來之永監哉아
光化 3년(경신 900)
[ 崔胤]崔胤을 門下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여 조정의 정사를 오로지 결정하게하였다. 처음에 [ 崔胤]崔胤이 上과 함께 은밀히 환관들을 다 죽일 것을 모의하니, 환관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上이 華州로부터 돌아온 뒤로 실의에 빠지고 즐겁지 않아서 술을 많이 마시고 기쁨과 노여움이 일정하지 않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더욱 스스로 위태롭게 여겼다.
이에 中尉인 劉季述, 王仲先과 樞密使인 [- 王彦範], [- 薛齊偓] 등이 은밀히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울 것을 모의하고는【上이 上林苑에서 사냥을 하다가 한밤중에 술에 취하여 돌아와서 黃門(宦官)과 侍女 몇 명을 직접 죽였다. 다음날 궁궐문이 열리지 않자, 劉季述이 禁兵을 거느리고 궁궐문을 부수고 들어가 병사들을 대궐의 뜰에 진열하고 太子에게 監國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宣化門으로 돌입하였다. 劉季述이 나아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大寶(천자의 자리)를 싫어하여 권태를 느끼시므로 中外의 民心이 太子가 監國하기를 원하니, 청컨대 폐하께서는 東宮에서 몸을 保養하여 天壽를 누리소서.” 하고는【頤는 기름이니, 少陽院에서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기름을 말한다.】 마침내 上을 부축하여 황후와 함께 輦을 타게하니, 嬪御와 시종하는 자가 겨우 십여 명이었다.
上이 少陽院으로 가니, 劉季述이 은채찍으로【銀檛는 은채찍이다. 劉季述의 本傳에 ‘以所持釦杖(쥐고 있던 금테를 두른 지팡이)”이라고 하였다. 釦는 음이 구이니, 금으로 장식한 것이다.】 땅에 그으면서 上의 죄 수십 가지를 열거하고 마침내 少陽院의 문을 자물쇠로 잠근 다음 쇳물을 부어 자물쇠를 봉함하고【錮는 음이 고이니, 쇳물을 부어 구멍을 막은 것이다.】 담장에 구멍을 뚫어서【穴墻은 담장을 뚫어서 구멍을 낸 것을 이른다.】 음식을 통하게 하였다. 劉季述 등이 황제의 조칙을 사칭하여太子李裕로 하여금 監國하게하고, 얼마 후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 朱全忠]朱全忠이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大梁에 이르니, 劉季述이 그의 양자인 [- 劉希度]를 [ 朱全忠]朱全忠에게 보내어唐나라 社稷을 그에게 바칠 것을 허락하였다. 李振이【李振은 天平節度副使이다.】[ 朱全忠]朱全忠에게 劉季述을 죽일 것을 권하자, [ 朱全忠]朱全忠은 마침내 [- 劉希度]를 가두고李振을 보내어京師에 가서 일을 염탐하게하였는데,【詗은 休正反(형)이니, 엿보고 살피는 것의 명칭이다.】[ 崔胤]崔胤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神策指揮使孫德昭를 설득해서劉季述 등을 죽였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 崔胤]崔胤이 본래 [ 韓全誨]韓全誨와 틈이 있었다. 그러므로 [ 崔胤]崔胤과 [ 韓全誨]韓全誨가 각각 강한 藩鎭에게 의지하여 외부의 원조로 삼았고, 岐의 李茂貞과 汴의 [ 朱全忠]朱全忠도 환관과 재상에게 기대어 조정을 제재하였다. 그러므로 [ 崔胤]崔胤은 汴의 [ 朱全忠]朱全忠을 불러오고 [ 韓全誨]韓全誨는 황제를 위협하여 서쪽(岐)으로 가게 하였으니, 唐나라가 멸망한 것은 南司와 北司가 서로 병탄하고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군주가 그 禍를 받은 것이다. 어찌 장래의 영원한 鑑戒가 되지 않겠는가.”
[辛酉]天復元年
[辛酉]天復元年이라
春正月朔에 [ 王仲先]이 入朝어늘 [ 孫德昭]擒斬之하다 [ 崔胤]이 乃迎上하야 御長樂門樓하고 帥百官稱賀하다 [ 周承誨]【右軍淸遠都尉라 】擒[ 劉季述], [ 王彦範]하야 繼至라 方詰責이러니 已爲亂梃【持鼎反이니 杖이라 】所斃하고 [ 薛齊偓]은 赴井死어늘 出而斬之하고 滅四人之族【四人은 竝宦官이라 】하다
天復 元年(신유 901)
봄 정월 초하루에 王仲先이 들어와서 조회하자, 孫德昭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崔胤]崔胤이 마침내 上을 맞이하여長樂門樓에 모시고 백관들을 거느리고축하하였다. [ 周承誨]周承誨가【[ 周承誨]周承誨는 右軍淸遠都尉이다.】劉季述과 [- 王彦範]을 사로잡아 가지고 이어서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을 막 힐책하려 하였는데 이미 이 사람 저 사람이 사정없이 내리치는 몽둥이에【梃은 持鼎反(정)이니 몽둥이이다.】맞아죽었고, [- 薛齊偓]은 우물에 뛰어들어죽었는데꺼내어 시신의 목을 베고, 王仲先‧劉季述‧[- 王彦範]‧[- 薛齊偓] 등 네 사람을 멸족시켰다.【王仲先, 劉季述, [- 王彦範], [- 薛齊偓] 등 네 사람은 모두 환관이다.】
○ 鳳翔節度使[ 李茂貞]이 入朝어늘 進[ 爵岐王]하다
○ [ 崔胤]이 以宦官典兵이면 終爲肘腋【肘는 臂節也라 】之患이라하야 諷[ 茂貞]하야 留兵三千於京師하야 充宿衛하다 時에 [ 朱全忠], [ 李茂貞]이 各有挾天子令諸侯之意하야 [ 全忠]은 欲上幸東都하고 [ 茂貞]은 欲上幸鳳翔이라 [ 胤]이 知謀泄事急【[ 崔胤]이 欲盡誅宦官之謀也라 】하고 遺[ 朱全忠]書호되 稱被密詔라하야 令[ 全忠]으로 以兵迎車駕하고 且言 昨者返正은 皆令公良圖어늘 而鳳翔先入朝하야 抄取其功하니 今不速來하면 必成罪人하리니 豈惟功爲他人所有리오 且見征討矣리라 [ 全忠]이 得書하고 十月에 大擧兵하야 發大梁하다
[ 崔胤]崔胤은 환관들이 군대를 맡으면 끝내 팔꿈치와 겨드랑이(가까운 신변)의【肘는 팔의 관절(팔꿈치)이다.】 뜻하지 않은 우환이 될 것이라 하여, 李茂貞에게 넌지시 말하여 3천 명의 병력을 京師에 남겨두어宿衛에 충당하게하였다. 이때 [ 朱全忠]朱全忠과 李茂貞이 각각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 朱全忠]朱全忠은 上이 東都로 오게 하고자 하고 李茂貞은 上이 鳳翔으로 오게 하고자 하였다.
[ 崔胤]崔胤은 환란을 제거하려던 계책이누설되어 일이 급박하다는 것을 알고【[ 崔胤]崔胤이 환관을 모두 죽이려고 한 계책이다.】[ 朱全忠]朱全忠에게 글을 보내면서 ‘密詔를 받았다.’고 사칭하여[ 朱全忠]朱全忠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황제의 車駕를 맞이하게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제가 지위를 회복한 것은 모두 [ 令公]令公의 훌륭한 계책인데, 鳳翔의 李茂貞이 먼저 입조하여 그 공을 가로챘으니, 지금 빨리 오지 않으면 반드시 죄인이 될 것이다. 어찌 다만 공로가 타인의 소유가 될 뿐이겠는가. 장차 정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 [ 朱全忠]朱全忠이 그 편지를 받고는10월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大梁을 출발하였다.
○ [ 朱全忠]이 至河中하야 表請車駕幸東都한대 京師大駭라 十一月에 中尉[ 韓全誨]等이 陳兵殿前하고 請幸鳳翔이어늘 上이 不得已하야 乃與皇后妃嬪諸王百餘人으로 皆上馬하니 慟哭聲不絶이라 [ 全誨]等이 遂火宮城하니 車駕幸鳳翔하다
[ 朱全忠]朱全忠이 河中에 이르러서 表文을 올려 황제의 車駕가 東都(洛陽)로 행차할 것을 청하니, 京師가 크게 놀랐다.
11월에 中尉[ 韓全誨]韓全誨 등이 대궐 앞에 군대를 진열하고鳳翔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上이 부득이하여 마침내 皇后, 妃嬪, 諸王 등 백여 명과 함께 말에 오르니,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韓全誨]韓全誨 등이 마침내 궁성을 불태우니, 황제의 車駕가 鳳翔으로 행차하였다.
[壬戌]二年
[壬戌]二年이라
十一月에 [ 朱全忠]이 進攻鳳翔하니 [ 李茂貞]이 出戰累敗하고 儲峙已竭【食盡하야 死者不可數라 或臥未死에 肉已爲人所咼하며 市中賣人肉하야 一斤錢百이요 犬肉錢三百이며 帝鬻御衣하니라 】이라 上이 乃召[ 李茂貞]等하야 議與[ 全忠]和하다
[癸亥]三年
[癸亥]三年이라
正月에 [ 茂貞]이 獨見上하고 請誅[ 韓全誨]等하고 與[ 朱全忠]和하야 奉車駕還京한대 上喜하야 卽收[ 全誨]斬之하고 遣使하야 囊[ 全誨]等首하야 以示[ 全忠]하다 時에 鳳翔所誅宦官이 已七十二人이요 [ 朱全忠]이 又密令京兆하야 捕誅九十人이라 甲子에 車駕出鳳翔하야 幸[ 全忠]營이라가 己巳에 入長安하다
天復 3년(계해 903)
정월에 李茂貞이 홀로 上을 뵙고는[ 韓全誨]韓全誨 등을 죽이고[ 朱全忠]朱全忠과 화해하고서 황제의 車駕를 받들어長安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上이 기뻐하여 즉시 [ 韓全誨]韓全誨를 체포해서 목을 베고使者를 보내어[ 韓全誨]韓全誨 등의 머리를 자루에 넣어[ 朱全忠]朱全忠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鳳翔에서 죽은환관이 이미 72명이었고, [ 朱全忠]朱全忠이 또 은밀히 京兆尹에게 명하여환관들을 체포해서죽인 것이 90명이었다. 甲子日(22일)에 車駕가 鳳翔을 나와[ 朱全忠]朱全忠의 진영으로 갔다가己巳日(27일)에 長安으로 돌아왔다.
○ [ 崔胤]奏호되 國初承平之時에 宦官이 不典兵預政이러니 天寶以來로 宦官寖盛하고 貞元之末에 分羽林衛하야 爲左右神策軍하야 以便衛從이라하야 始令宦官主之하야 以二千人爲定制하니이다 自是로 參掌機密하야 奪百司權하고 上下彌縫하야 共爲不法이라 大則構扇藩鎭하야 傾危國家하고 小則賣官鬻獄하야 蠹害朝政하니 王室衰亂이 職此之由라 不翦其根이면 禍終不已하리니 請悉罷內諸司하야 使其事務로 盡歸之省寺【寺는 嗣也니 理事者 嗣續其中이라 三公所居曰省이요 九卿所居曰寺라 】하고 諸道監軍을 俱召還闕下하소서 上이 從之하다 是日에 [ 全忠]이 以兵驅[ 第五可範]已下數百人於內侍省하야 盡殺之하니 冤號之聲이 徹於內外라 又出使者는 詔所在하야 收捕誅之하고 止留黃衣幼弱者三十人하야 以備洒掃하니라
[ 崔胤]崔胤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國初에 천하가 태평할 때에는 宦官들이 병권을 맡고서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玄宗의 天寶 연간 이래로 환관들이 점점 강성해지고 德宗의 貞元 말기에 羽林衛를 나누어 左右神策軍을 만들고는 호위와 시종을 편리하게 한다 하여 이때 처음으로 환관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여 2천 명을 定制로 삼았습니다. 이로부터 환관이 機密의 事務에 참여하여 관장해서 百司의 권한을 빼앗고 上下가 서로 彌縫하여 함께 不法을 자행하였습니다. 크게는 藩鎭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켜서 국가를 傾覆하고 위태롭게 하며, 작게는 매관매직하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아 조정을 좀먹고 해쳤으니, 王室이 쇠약하고 혼란해진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 근원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화가 끝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내시의 여러 司를 모두 파하여 그들의 사무를 다 省寺로【寺는 잇는 것이니, 일을 다스리는 자가 이 가운데에서 일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三公이 거처하는 곳을 省이라 하고 九卿이 거처하는 곳을 寺라 한다.】 돌려보내고 諸道의 監軍을 모두 불러 대궐 아래로 돌아오게 하소서.”
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날 [ 朱全忠]朱全忠이 군대를 이끌고 환관인 [ 第五可範]第五可範 이하 수백 명을 內侍省에서 몰아내어 모두 죽이니,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대궐 안팎에 진동하였다. 또 환관 중에 外方의 使者로 나간 자는 황제가 소재지에 명하여체포해서죽이게 하고, 다만 黃衣(환관)로 유약한 자 30명만을 남겨두어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 溫公]曰 宦者用權하야 爲國家患이 其來久矣라 蓋以出入宮禁하야 人主自幼及長히 與之親狎하니 非如三公六卿의 進見有時하야 可嚴憚也라 其間에 復有性識儇利【儇은 呼緣反이니 慧也요 利는 銛也라 [ 徐廣]曰 儇은 謂察慧輕薄小才라 】하고 語言辯給【給은 捷也라 】하야 善伺候顔色하고 承迎志趣하야 受命則無違忤之患하고 使令則有稱愜之效하니 自非上智之主 燭知物情하고 慮患深遠하야 侍奉之外에 不任以事면 則近者日親하고 遠者日疎하야 甘言卑辭之請이 有時而從하고 浸潤膚受【浸潤은 如水浸灌하야 滋潤漸漬而不驟也요 毁는 毁人之行也라 膚受는 謂肌膚所受 利害切身이니 如易所謂剝牀以膚하야 切近災者也요 愬는 愬己之寃也라 毁人에 漸漬而不驟면 則聽者不覺其入하야 而信之深矣요 愬寃에 急迫而切身이면 則聽者不及致詳하야 而發之暴矣니 二者는 皆難察이니라 】之愬 有時而聽이라 於是에 黜陟【黜은 貶也요 陟은 升也라 】刑賞之政이 潛移於近習이로되 而不自知하나니 如飮醇酒에 嗜其味而忘其醉也라 黜陟刑賞之柄移하고 而國家不危亂者는 未之有也라 東漢之衰에 宦官이 最名驕橫【橫은 胡孟反이니 不順理曰橫이라 [頭註] [ 桓帝]時五侯는 見卄卷하고 又[ 靈帝]時[ 曹節][ 侯覽][ 王甫]之類는 見卄一卷하니라】이나 然皆假人主之權하야 依憑城社【[ 洪容齋]曰 城狐不灌하고 社鼠不燻하니 謂其所棲定者 得所憑依니 此古語也라 故로 議論者 率指人君左右近習하야 爲城狐社鼠라 予嘗讀[ 劉向]說苑所載하니 [ 孟嘗君]之客曰 狐는 人之所攻이요 鼠는 人之所燻이나 臣未見城狐見攻과 社鼠見燻하니 何則고 所託者然也라하니라 】하야 以濁亂天下요 未有能劫脅天子하야 如制嬰兒하고 廢置在手하야 東西出其意하야 使天子畏之하야 若乘虎狼而挾蛇虺를 如唐世者也라 所以然者는 非他라 漢不握兵하고 唐握兵故也일새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환관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의 환난이 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들은 궁중에 출입하여 군주가 어릴 때부터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친압하니, 三公과 六卿이 나아가 뵙는 것이 일정한 때가 있어서 엄격하고 공경할 만한 것과는 같지 않다. 환관 중에는 다시 재주가 영리하고【儇은 呼緣反(현)이니 지혜로운 것이요, 利는 날카로움이다. 徐廣이 말하기를 “儇은 살피고 지혜로우며 경박한 작은 재주를 이른다.” 하였다.】 언어가 민첩하여【給은 민첩한 것이다.】 군주의 안색을 잘 살피고 군주의 志趣를 받들어 영합하는 자가 있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으면 위배하거나 거스르는 근심이 없고, 일을 시키면 군주의 뜻에 맞는 효험이 있으니, 만일 上智의 군주가 물정을 훤히 알고 화를 염려함이 깊고 멀어서 侍奉하는 일 이외에 환관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군주 곁에 가까이 있는 자는 날로 친해지고 군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는 날로 소원해져서, 환관들의 甘言利說과 겸손한 청탁을 군주가 때때로 따라주고,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피부로 받는【浸潤은 물이 점점 스며드는 것처럼 점점 젖어들게 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요, 毁는 남의 행실을 헐뜯는 것이다. 膚受는 직접 피부로 받는 것으로 利害가 몸에 간절함을 이르니, 《周易》에 이른바 “牀을 깎아 피부에까지 이르러서 재앙에 매우 가깝다.”는 것과 같은 것이요, 愬는 자신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남을 헐뜯을 적에 점점 젖어들게 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으면 듣는 자가 그 말에 빠져들어감을 깨닫지 못하여 깊이 믿게 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할 적에 급박(절박)하여 몸에 간절하게 하면 듣는 자가 미처 상세함을 다하지 못하여 대번에 성을 내게 되니, 두 가지는 모두 살피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소연을 군주가 때때로 들어주게 된다. 이에 관리를 내치고 올려주며【黜은 관직을 낮추는 것이고, 陟은 올리는 것이다.】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정사가 가깝고 친숙한 환관에게 슬그머니 옮겨가되 군주가 스스로 알지 못하니, 이는 마치 독한 술을 마심에 그 맛을 좋아하여 술에 취함을 잊는 것과 같다. 관리를 내치고 올려주며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이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 옮겨가고서, 국가가 위태롭고 혼란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東漢이 쇠망할 때에 宦官들이 가장 교만하고 횡포하다고 이름났다.【[釋義] 東漢之衰 宦官最名驕橫:[釋義] 橫은 胡孟反(횡)이니,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을 橫이라 한다. [頭註] [- 桓帝] 때의 환관인 五侯는 20卷에 보이고, 또 靈帝 때의 환관인 [ 曹節]曹節, [ 侯覽]侯覽, 王甫의 무리는 21卷에 보인다.】 그러나 모두 군주의 권한을 빌려서 군주 곁에 의지하여【[ 洪容齋(洪邁)]洪容齋(洪邁)가 말하였다. “城에 사는 여우굴에는 물을 대지 않고 社에 사는 쥐구멍에는 불을 놓지 않으니, 깃들어 사는 곳이 의지할 곳을 얻었음을 말한 것으로, 이는 옛말이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대체로 군주의 좌우에 있어서 군주와 가깝고 친숙한 자(환관)들을 가리켜 城에 사는 여우와 社에 사는 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劉向의 《說苑》에 기재된 것을 읽어보니, 孟嘗君의 문객이 말하기를 ‘여우는 사람들이 공격하는 대상이고 쥐는 사람들이 불을 놓는 대상이지만, 臣은 城에 사는 여우가 공격당하고 社에 사는 쥐가 불에 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어째서입니까? 의탁한 곳이 그렇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천하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혔을 뿐이요, 천자를 겁박하고 위협하여 어린아이를 제재하듯이 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세움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어서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 것이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하여 천자로 하여금 호랑이를 타고 뱀을 끼고 있는 것처럼 두려워하게 하기를 唐나라 때와 같이 한 적은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漢나라의 환관들은 병권을 장악하지 않았고 唐나라의 환관들은 병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 太宗]이 監(鑑)前世之弊하고 深抑宦官하야 無得過四品이러니 [ 明皇]이 始墮(隳)舊章하고 是崇是長이라 晩節에 令[ 高力士]로 省決章奏하고 乃至進退將相에도 時與之議하야 自太子王公으로 皆畏事之하니 宦官이 自此熾矣라 及中原板蕩【板蕩은 謂喪亂이라 】에 [ 肅宗]이 收兵靈武【[ 肅宗]卽位於靈武는 見上하니라 】할새 [ 李輔國]이 以東宮舊隷로 參預軍謀하니 寵過而驕하야 不復能制하야 遂至愛子慈父皆不能庇【[ 輔國]譖[ 肅宗]次子[ 建寧王][ 倓]而殺之하고 又劫[ 玄宗]하야 居西內하니 [ 肅宗]畏[ 輔國]하야 不能詣西內하니라 】하야 以憂悸終【悸는 其季反이니 心動也라 】이러니 [ 代宗]踐阼에 仍遵覆轍하야 [ 程元振], [ 魚朝恩]이 相繼用事하야 竊弄刑賞하고 壅蔽聰明하야 視天子如委裘하고 陵宰相如奴虜라 是以로 [ 來瑱]【山南東道節度使也라 [ 元振]有所請이로되 不從이어늘 [ 元振]이 譖殺之하니라 】이 入朝에 遇讒賜死하고 吐蕃이 深侵郊甸호되 匿不以聞하야 致狼狽幸陝이라 [ 李光弼]이 危疑憤鬱하야 以隕其生하고 [ 郭子儀]擯廢家居하야 不保丘壟【盜發[ 子儀]父塚이어늘 捕之不獲하니 [ 魚朝恩]素惡[ 子儀]하야 疑[ 朝恩]使之라 】하고 [ 僕固懷恩]이 寃抑無訴하야 遂棄勳庸하고 更爲叛亂이라 [ 德宗]初立에 頗振綱紀하야 宦官稍絀이러니 而返自興元【漢之漢中郡也라 晉置梁州러니 [ 德宗]改爲興元府하니라 】으로 猜忌諸將하야 以[ 李晟], [ 渾瑊]爲不可信이라하야 悉奪其兵하고 而以[ 竇文場], [ 霍仙鳴]으로 爲中尉하야 使典宿衛라 自是로 太阿之柄이 落其掌握矣라 [ 憲宗]末年에 [ 吐突承璀]欲廢嫡立庶하야 以成[ 陳弘志]之變【[ 憲宗]見弑라 】하고 寶曆【[ 敬宗]年號라 】에 狎暱群小하야 [ 劉克明], [ 蘇佐明]이 爲逆【見四十七卷하니라 】이라 其後에 [ 絳王]【名[ 悟]니 [ 憲宗]子也라 宦官[ 劉克明]等이 殺[ 敬宗]하고 立[ 絳王]이러니 宦官[ 王守澄]等이 討[ 克明]殺王하고 立[ 文宗]하니라】及[ 文], [ 武], [ 宣], [ 懿], [ 僖], [ 昭]六帝 皆爲宦官所立하야 勢益驕橫이라 [ 王守澄], [ 仇士良], [ 田令孜], [ 楊復恭], [ 劉季述], [ 韓全誨] 爲之魁傑하야 自稱定策國老라하고 目天子爲門生이라하야 根深蔕固하야 疾成膏肓【膏는 心下也요 肓은 膈上也라 春秋左傳云 在肓之上, 膏之下하야 攻之不可라하니라 】하야 不可救藥矣라
太宗은 前代의 폐습을 거울로 삼고 환관을 깊이 억제하여 이들의 벼슬이 4품을 넘지 못하게 하였는데, 明皇(玄宗)이 비로소 옛 법을 무너뜨려 이들을 높이고 이들을 조장하였다. 말년에 환관인 高力士로 하여금 章奏를 살펴보고 결정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장수와 재상을 올리고 물리침에 이르러서도 때로 高力士와 상의하여 太子와 王公으로부터 모두 高力士를 두려워하여 섬기니, 환관의 세력이 이로부터 강성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安史의 亂으로〉 中原이 어지러워 문란하게 되자,【板蕩은 喪亂함을 이른다.】肅宗이 靈武에서 즉위하여 병력을 수습할 적에【肅宗이 靈武에서 즉위한 것은 上卷에 보인다.】환관인 李輔國이 東宮의 옛 관료로 군대의 계책에 참여하니, 황제의 총애가 지나쳐 교만해져서 다시는 제재하지 못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자식과 자애로운 아버지가 모두 비호받지 못하여【[頭註] 遂至愛子慈父皆不能庇:李輔國은 肅宗의 次子인 建寧王李倓을 참소하여 죽이고, 또 玄宗을 협박하여 西內에 거처하게 하니, 肅宗이 李輔國을 두려워하여 西內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죽게 하기까지 하였다.【悸는 其季反(계)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代宗은 즉위하자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따라서 환관인 [ 程元振]程元振과 魚朝恩이 서로 이어 用事하여 형벌과 상을 내리는 권한을 도둑질하여 농간하고 군주의 총명을 가려서, 天子를 보기를 버려놓은 갖옷처럼 여기고 재상을 능멸하기를 종과 포로처럼 여겼다. 이 때문에 來瑱이【來瑱은 山南東道節度使이다. [ 程元振]程元振이 요청한 것이 있었으나 來瑱이 따르지 않자, [ 程元振]程元振이 그를 참소하여 죽였다.】 들어와서 조회할 적에 [ 程元振]程元振의 참소를 만나 사약을 하사받았고, 吐蕃이 郊甸을 깊이 침략하였으나 환관들이 숨기고 아뢰지 않아서 황제가 낭패하고 陝州로 파천하게 만들었다. 환관들 때문에 李光弼은 위태롭고 의심하여 울분을 느껴서 그의 목숨을 잃었고, 郭子儀는 배척을 당하고 버려져 집에 거처하여 丘壟(先塋)을 보전하지 못하였고,【도적이 郭子儀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魚朝恩이 평소 郭子儀를 미워하였으므로 사람들은 魚朝恩이 시킨 것으로 의심하였다.】僕固懷恩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마침내 옛 공훈을 버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德宗은 처음 즉위하자 자못 기강을 떨쳐서 환관의 세력이 다소 꺾였는데 興元에서 돌아온 뒤로【興元은 漢나라 漢中郡이다. 晉나라 때 梁州를 설치하였는데 德宗이 興元府로 개칭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시기하여 李晟과 [ 渾瑊]渾瑊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병권을 다 빼앗고, 환관인 竇文場과 霍仙鳴을 中尉로 삼아 이들로 하여금 궁중의 宿衛를 맡게 하니, 이로부터 칼자루(兵權)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憲宗은 말년에 환관인 [ 吐突承璀]吐突承璀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고자 하여 [ 陳弘志]陳弘志의 변란을【憲宗은 [ 陳弘志]陳弘志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빚어냈고, 敬宗은 寶曆 연간에【寶曆은 敬宗의 연호이다.】 여러 소인들을 친압하여 劉克明과 [- 蘇佐明]이 반역을 하였다.【[頭註] 劉克明 蘇佐明 爲逆:劉克明과 [- 蘇佐明]이 반역을 한 것은 47권에 보인다.】 그 뒤에 絳王李悟와【絳王은 이름이 悟이니 憲宗의 아들이다. 환관劉克明 등이 敬宗을 시해하고 絳王을 세웠는데, 환관인 王守澄 등이 劉克明이 王을 시해한 것을 토벌하고 文宗을 세웠다.】文宗, 武宗, 宣宗, 懿宗, [- 僖宗], 昭宗의 여섯 황제가 모두 환관들에게 옹립되어서 환관의 세력이 더욱 교만해지고 전횡하였다. 王守澄, 仇士良, [ 田令孜]田令孜, 楊復恭, 劉季述, [ 韓全誨]韓全誨가 환관의 괴수가 되어 자칭 定策國老라 하고 天子를 지목하여 門生이라 하여, 뿌리가 깊고 꼭지가 단단하여 膏肓의【膏는 심장 아래이고, 肓은 명치 위이다. 《春秋左傳》에 이르기를 “병이 명치 위와 심장 아래에 있어서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 하였다.】 병이 되어서 치료할 수가 없게 되었다.
[ 文宗]이 深憤其然하야 志欲除之나 以[ 宋申錫]【[ 王守澄]誣告하야 貶爲開州司馬라가 卒於貶所하니라 】之賢으로도 猶不能有所爲하고 反受其殃하니 況[ 李訓], [ 鄭注]는 反覆小人으로 欲以一朝譎詐之謀로 翦累世膠固之黨이라가 遂至涉血禁塗하고 積尸省戶하며 公卿大臣이 連頸就誅【[ 仇士良]等이 令禁兵으로 殺[ 王涯]等兩省金吾吏卒千六百餘人하고 賈餗[ 舒元輿] 皆收繫斬之하니라 】하야 闔門屠滅이라 天子陽瘖【瘖은 於金反이니 不能言也라 】縱酒하야 飮泣呑氣하야 自比[ 赧], [ 獻]【[ 赧]은 謂周[ 赧王]이요 [ 獻]은 謂[ 漢獻帝]라 】하니 不亦悲乎아 以[ 宣宗]之嚴毅明察로도 猶閉目搖首하고 自謂畏之하니 況[ 懿], [ 僖]之驕侈하야 苟聲色毬獵으로 足充其欲이면 則政事一以付之하고 呼之以父가 固無怪矣라 賊汚宮闕【賊은 謂黃巢라 】하야 兩幸梁, 益은 皆[ 令孜]所爲也라 [ 昭宗]이 不勝其恥하고 力欲淸滌이나 而所任이 不得其人하고 所行이 不由其道하야 始則[ 張濬]이 覆軍於平陽하야 增[ 李克用]跋扈之勢하고 [ 復恭]이 亡命於山南하야 啓[ 宋文通]不臣之心【[ 楊復恭]이 摠宿衛하야 潛殺上舅[ 王環]하니 上恨之하야 出[ 復恭]爲鳳翔監軍한대 [ 復恭]慍懟하야 不肯行하고 謀反走興元하야 與山南西道節度使[ 楊守亮]으로 擧兵拒命하다 [ 茂貞]이 上言호되 [ 守亮]이 容匿反臣하니 請出兵討之하소서 朝議以爲[ 茂貞]이 得[ 山南]이면 不可復制라하야늘 下詔和解之러니 [ 茂貞]이 擅擧兵하야 擊取興元하니 [ 守亮], [ 復恭]等이 奔閬州하니라 [ 茂貞]이 自請鎭興元한대 以[ 茂貞]爲山南西道節度使러니 [ 茂貞]이 不奉詔어늘 遣[ 覃王][ 嗣周]하야 討[ 茂貞]하니 [ 茂貞]拒官軍이라 於是에 [ 茂貞]이 盡有鳳翔, 興元, 洋隴等十五州之地하니라 】하며 終則兵交闕庭하고 矢及御衣하야 漂泊莎城【[ 李茂貞]假子右軍指揮使[ 李繼鵬]이 作亂하야 謀劫上幸鳳翔이라 中尉[ 劉景宣]이 與[ 王行實]知之하고 欲劫上幸邠州러니 [ 繼鵬]이 以鳳翔兵으로 攻侍衛하야 矢拂御衣하니 上出宿莎城하고 幸石門鎭하니라 邠州는 [ 王行瑜]也라 】하고 流寓華陰【[ 韓建]이 請幸華州하니라 】하며 幽辱東內하고 劫遷岐陽【岐陽은 鳳翔也라 】하니 [ 崔昌遐]無如之何【[ 崔胤]은 字[ 昌遐]니 [ 宋太祖]諱故로 稱字라 [ 全忠]이 脅帝遷洛하고 長安居人을 悉東하니 老幼於路에 啼號不絶하고 皆大罵曰 國賊[ 崔胤]이 導[ 全忠]賣社稷하야 使我及此라하니라 】하야 更召[ 朱全忠]以討之라 連兵圍城에 再罹寒暑하야 御膳이 不足於糗糒【糗는 去久反이고 又丘救反이라 糒는 平秘反이니 乾糧也라 】하고 王侯斃踣【踣은 蒲墨反이니 僵也요 仆也라 】於飢寒하니 然後에 [ 全誨]就誅하고 乘輿東出하야 翦滅其黨하야 靡有孑遺나 而唐之廟社 因以丘墟矣니라
文宗은 이것을 깊이 분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宋申錫처럼【宋申錫은 王守澄의 무고로 開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좌천된 곳에서 죽었다.】 어진 자도 오히려 제거한 바가 있지 못하고 도리어 앙화를 받았는데, 하물며 李訓과 [ 鄭注]鄭注는 반복무상한 소인으로서 하루아침의 음모와 속임수를 가지고 여러 대에 걸쳐 아교로 풀칠해놓은 것처럼 견고한 환관의 붕당을 제거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궁중의 길에 유혈이 낭자하고 臺省의 문 앞에 시체가 쌓이는 데에 이르렀으며, 公卿과 大臣들이 연달아 죽임을 당하여 온【仇士良 등이 禁兵으로 하여금 王涯 등 兩省과 金吾의 吏卒 1600여 명을 죽이게 하였고, 賈餗과 舒元輿는 모두 잡혀서 참수당하였다.】 가문이 도륙당하고 멸망하였다. 이에 천자가 거짓으로 벙어리가 되어【瘖은 於金反(음)이니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술을 실컷 마시고 속으로 울면서 슬픈 기운을 삼키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여 스스로 周나라 [ 赧王]赧王과 漢나라 [ 獻帝]獻帝에게【[ 赧]赧은 周나라 [ 赧王]赧王을 이르고, [ 獻]獻은 漢나라 [ 獻帝]獻帝를 이른다.】 비유하였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宣宗의 엄하고 굳셈과 명찰함으로도 오히려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며 스스로 환관들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였으니, 하물며 懿宗과 [- 僖宗]이 교만하고 사치해서 만일 음악과 여색과 擊毬와 사냥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기만 하면 政事를 한결같이 환관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적(黃巢)이 궁궐을 더럽혀서【賊은 [ 黃巢]黃巢를 이른다.】[- 僖宗]이 두 번이나 梁州(興元)와 益州(成都)로 파천해 간 것은 모두 환관인 [ 田令孜]田令孜의 소행이다.
昭宗은 이러한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힘써 소탕하고자 하였으나 임용한 것이 적임자가 아니었고 행한 바가 그 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 張濬]張濬이 平陽에서 군대를 전복시켜 [ 李克用]李克用의 跋扈하는 기세를 더하였고, 楊復恭이 山南으로 망명하여宋文通의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도하였으며,【楊復恭이 궁중의 宿衛를 총괄하면서 上의 외숙인 王環을 은밀히 죽이니, 上이 이것을 통한으로 여겨 楊復恭을 鳳翔監軍으로 내보냈는데, 楊復恭이 성내고 원망하여 任地로 가려 하지 않고 모반하여 興元으로 달아나서 山南西道節度使楊守亮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황명을 거역하였다. 李茂貞이 上言하기를 “楊守亮이 배반한 신하를 용인하여 숨겨주었으니, 군대를 출동하여 토벌하게 해주소서.”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李茂貞이 山南을 얻으면 다시는 제재할 수 없다.” 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화해하게 하였는데, 李茂貞이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서 興元을 공격하여 점령하니, 楊守亮과 楊復恭 등이 閬州로 도망하였다. 李茂貞이 興元에 진주할 것을 자청하자, 上이 李茂貞을 山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였는데, 李茂貞이 칙명을 받들지 않았다. 황제가 覃王李嗣周를 보내어 李茂貞을 토벌하게 하니, 李茂貞이 官軍에게 항거하였다. 이에 李茂貞이 鳳翔, 興元, 洋隴 등 15州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종말에는 병기가 대궐 뜰에서 交戰하고 화살이 황제의 御衣에 미쳤다. 그리하여 昭宗이 莎城으로 떠돌아다니고【李茂貞의 養子인 右軍指揮使[- 李繼鵬]이 난을 일으켜서 上을 위협하여 鳳翔으로 갈 것을 모의하였다. 中尉[- 劉景宣]이 [- 王行實]과 함께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上을 위협하여 邠州로 가게 하고자 하였는데, [- 李繼鵬]이 鳳翔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侍衛하는 자들을 공격하여 화살이 御衣를 스치니, 上이 궁궐을 나가 莎城에서 유숙하고 石門鎭으로 갔다. 邠州節度使는 王行瑜이다.】華陰에서 이리저리 우거하였으며,【[ 韓建]韓建이 華州(華陰)로 갈 것을 청하였다.】東宮에 갇혀 치욕을 당하고 협박을 받아 岐陽으로 옮겨가니,【岐陽은 鳳翔이다.】[ 崔昌遐(崔胤)]崔昌遐(崔胤)가 어찌할 수가 없어【[ 崔胤]崔胤은 字가 [ 昌遐]昌遐이니, 宋나라 太祖의 諱가 [- 胤]이기 때문에 字를 칭한 것이다. [ 朱全忠]朱全忠이 황제를 위협하여 洛陽으로 천도하게 하고 長安에 거주하는 자들을 모두 동쪽으로 옮기니,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도로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모두 크게 꾸짖기를 “國賊인 [ 崔胤]崔胤이 [ 朱全忠]朱全忠을 유도하여 社稷을 팔아먹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하였다.】 다시 [ 朱全忠]朱全忠을 불러 토벌하였다. [ 朱全忠]朱全忠이 군대를 연합하여 岐陽城을 포위하자, 황제가 두 번이나 추위와 더위의 고통을 만나고 御膳은 말린 밥과 미숫가루도 부족하였으며【糗는 去久反(구)이고 또 丘救反(구)이다. 糒는 平秘反(비)이니 말린 양식이다.】 王侯가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져 죽었다.【踣은 蒲墨反(북)이니 쓰러지고 눕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 韓全誨]韓全誨가 죽임을 당하고 황제의 乘輿가 동쪽으로 나와 [ 韓全誨]韓全誨의 무리를 제거하고 멸망시켜 남김이 없게 하였으나 唐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이로 인해 빈 터가 되었다.
然則宦者之禍 始於[ 明皇]하야 盛於[ 肅], [ 代]하고 成於[ 德宗]하고 極於[ 昭宗]이라 易曰 履霜하면 堅冰至라하니 爲國家者 防微杜漸을 可不愼其始哉아 此其爲患이 章章尤著者也라 自餘傷賢害能하야 召亂致禍하며 賣官鬻獄하고 沮敗師徒하며 蠹害烝民을 不可徧擧라 夫寺人之官【寺는 奄官也라 】은 自三王之世로 載於詩, 禮하니 所以謹閨闥之禁이요 通內外之言이니 安可無也리오 如巷伯之疾惡【巷伯은 詩篇名이라 詩曰 取彼譖人하야 投畀豺虎호리라 豺虎不食이어든 投畀有北호리라 有北不受어든 投畀有昊라하니 寺人孟子作爲此詩라 文公傳曰 巷은 是宮中道名이니 秦漢所謂永巷也요 伯은 長也니 主宮內道官之長이니 卽寺人也라 蓋以譖被宮而爲此官이니 [ 孟子]는 其字也라 投棄畀與之而不食不受는 言譖讒之人은 物所共惡니 投畀昊天하야 使制其罪니 此皆設言하야 以見欲其死亡之甚也니라 】과 寺人披之事君【寺人은 內小臣也니 名披니 春秋에 作勃鞮하니라 史晉世家에 晉[ 獻公]子[ 重耳] 遭[ 驪姬]之譖하야 走保蒲한대 [ 獻公]이 命寺人[ 披]하야 伐蒲러니 [ 重耳]踰垣而走어늘 寺人[ 披]追之하야 斬其衣袪하다 後에 [ 重耳]立하니 是爲[ 文公]이라 寺人[ 披]請見이어늘 [ 文公]讓之한대 [ 披]對曰 君命無二는 古之制也라하니라】과 [ 鄭衆]之辭賞【漢[ 和]時에 [ 鄭衆]이 首謀誅[ 竇憲]하여 以功遷大長秋러니 策勳班賞할새 每辭多受少하니라 】과 [ 呂彊]之直諫【漢[ 靈]時에 [ 呂彊]이 諫止封賞하고 諫導行費하고 諫選擧法하니라 】과 [ 曹日升]之救患【[ 肅宗]時에 賊圍南陽甚急이러니 [ 曹日升]이 請與十騎로 冒圍入城하야 宣慰한대 賊不敢逼하니 城中大喜하니라 】과 [ 馬存亮]之弭亂【[ 敬宗]初에 染署工[ 張韶] 與卜者[ 蘇元明]으로 爲變이러니 [ 存亮]이 遣神策騎兵하야 射韶及[ 元明]하야 皆死하니라 】과 [ 楊復光]之討賊【[ 楊復光]이 [ 僖宗]時에 帥八都將하야 以敗[ 朱溫]하니라 】과 [ 嚴遵美]之避權【[ 嚴遵美]는 [ 昭宗]時에 歷軍容使라 嘗嘆曰 北司供奉官은 以胯衫給事니 今執笏은 過矣라하더니 後隱靑城山하니라】과 [ 張承業]之竭忠【[ 張承業]은 [ 僖宗]時宦者라 後唐[ 莊宗]이 將卽位한대 [ 承業]이 諫求前唐之後立之호되 [ 莊宗]不聽이어늘 遂不食卒하니라 】은 其中에 豈無賢才乎아 顧人主不當與之謀議政事하고 進退士大夫하야 使有威福하야 足以動人耳라 果或有罪면 小則刑之하고 大則誅之하야 無所寬赦니 如此면 雖使之專橫이나 孰敢哉아 豈可不察臧否하고 不擇是非하고 欲草薙而禽獮之【[ 王氏]曰 草薙禽獮은 謂翦除其根之義也라 記月令篇에 季夏에 燒薙行水하야 利以殺草라한대 註에 薙는 芟草也라하니라 獮은 殺也라 說文에 秋獵曰獮이니 應殺氣也라하니라 】리오 能無亂乎아 是以로 [ 袁紹]行之於前에 而[ 董卓]弱漢하고 [ 崔昌遐]襲之於後에 而[ 朱氏]簒唐하야 雖快一時之忿이나 而國隨以亡하니 是猶惡衣之垢而焚之하고 惡木之蠹而伐之니 其爲害 豈不益多哉아 [ 孔子]曰 人而不仁을 疾之已甚이 亂也라하시니 斯之謂矣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 昭宗]이 天姿明雋(俊)하야 有恢復前烈之志라 然이나 當是時하야 奸臣擅權하고 藩鎭跋扈하며 而宦官이 方恃功驕恣하야 自號定策國老하고 斥天子爲門生하야 疾成膏肓하야 不可捄藥하니 可勝歎哉아 是故로 始則[ 張濬覆]軍於平陽하야 增[ 李克用]不平之志하고 中則[ 楊復恭]亡命於山南하야 啓[ 宋文通]不臣之心하고 終則兵交闕庭하야 矢及宸衣하야 漂泊莎城하고 流寓華陰하며 幽辱東內하고 劫遷岐陽하야 流離東都라 至不得已하야 遣使持密詔하야 告難於四方이로되 而不聞一人惻然赴難者라 事勢至此하야 瓦解土崩하니 悲夫라
그렇다면 환관의 화가 明皇(玄宗)에게서 시작되어 肅宗과 代宗 때에 흥성하였으며 德宗 때에 크게 이루어지고 昭宗 때에 지극하였다. 《周易》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은미할 때에 막고 점점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를 처음에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환관들이 초래한 禍 가운데에 분명하게 더욱 드러난 것이다. 그 나머지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을 해치고 禍亂을 부르며, 돈을 받고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고 옥사를 그릇되게 판결하며, 군대를 패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을 이루 다 들 수가 없다.
寺人(宦官)의 관직은【寺는 환관이다.】 三王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詩經》과 《禮記》에 기재되어 있다. 이는 閨闥(궁전)의 통행을 삼가고 內外의 말을 통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예컨대 周나라 幽王 때 [ 巷伯]巷伯이 악한 자를 미워한 것과【巷伯은 《詩經》의 篇名이다. 이 詩에 “저 참소하는 사람을 취하여 승냥이와 호랑이에게 던져 주리라. 승냥이와 호랑이가 먹지 않거든 북쪽의 불모지에 던져 주리라. 북쪽의 불모지에서 받지 않거든 하늘에 던져 주리라.”라고 하였으니, 寺人인 孟子가 이 시를 지은 것이다. [ 朱文公(朱熹)]朱文公(朱熹)의 《詩經集傳》에 이르기를 “巷은 宮中의 길 이름이니, 秦‧漢시대에 이른바 永巷이라는 것이요, 伯은 우두머리이니 궁궐 안의 길을 주관하는 장관인 바, 이것이 바로 寺人이다. 참소로 인해 宮刑을 당하고 이 관직을 맡았으니, 孟子는 그의 字이다. 던져 버리고 주어도 먹지 않고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소하고 모함하는 사람은 만물이 함께 미워하는 바이니, 하늘에 던져 주어서 그 죄를 제재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이는 모두 가설하여 말해서 그가 죽고 망하기를 바람이 심함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晉나라 [ 獻公]獻公 때 寺人인 [ 披]披가 군주를 섬긴 것과【寺人은 궁중의 낮은 신하로 이름이 披이니, 《春秋》에 勃鞮로 되어 있다. 《史記》〈晉世家〉에 晉[ 獻公]獻公의 아들 [ 重耳]重耳가 驪姬의 참소를 만나 달아나서 蒲 땅을 지키자, [ 獻公]獻公이 寺人 [ 披]披에게 명하여 蒲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 重耳]重耳가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나자, 寺人 [ 披]披가 쫓아가서 옷섶을 베었다. 뒤에 [ 重耳]重耳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 文公]文公이다. 寺人 [ 披]披가 뵙기를 청하자 [ 文公]文公이 꾸짖으니, [ 披]披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령에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옛 제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漢나라 [- 和帝] 때 [ 鄭衆]鄭衆이 賞을 사양한 것과【漢나라 [- 和帝] 때에 [ 鄭衆]鄭衆이 竇憲을 죽이는 일을 主謀하여 그 공으로 大長秋에 승진하였는데, 공훈을 기록하고 상을 줄 적에 매번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받았다.】漢나라 靈帝 때에 [- 呂彊]이 直諫한 것과【漢나라 靈帝 때에 [- 呂彊]이 封賞을 중지하도록 간하였고, 導行費에 대해 간하고 選擧法에 대해 간하였다.】唐나라 肅宗 때에 [ 曹日升]曹日升이 患難을 구원한 것과【唐나라 肅宗 때에 賊(武令珣)이 南陽을 포위하여 매우 위급하였는데, [ 曹日升]曹日升이 황제에게 청하여 10명의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고 성 안에 들어가 宣慰하자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니,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敬宗 때에 馬存亮이 禍亂을 그치게 한 것과【敬宗 초년에 [ 染署工]染署工인 [ 張韶]張韶가 점치는 자인 [- 蘇元明]과 함께 변란을 일으켰는데, 馬存亮이 神策軍의 騎兵을 보내어 [ 張韶]張韶와 [- 蘇元明]을 활로 쏘아 모두 죽였다.】[- 僖宗] 때에 楊復光이 역적을 토벌한 것과【楊復光이 [- 僖宗] 때에 8명의 都將을 거느리고 [ 朱溫(朱全忠)]朱溫(朱全忠)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昭宗 때에 嚴遵美가 권세를 사양한 것과【嚴遵美는 昭宗 때에 軍容使를 지냈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北司의 供奉하는 관원들은 胯衫 차림으로 시봉해야 하니, 지금 笏을 잡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는데, 뒤에 靑城山에 은둔하였다.】[- 僖宗] 때에 [ 張承業]張承業이 충성을 다한 것과【[ 張承業]張承業은 [- 僖宗] 때의 환관이다. 後唐의 [ 莊宗]莊宗이 장차 즉위하려 하자 [ 張承業]張承業이 예전 唐나라의 후손을 찾아 세울 것을 간하였는데, [ 莊宗]莊宗이 듣지 않자 마침내 밥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같은 것은 그들 가운데 어찌 어질고 재주 있는 자가 없겠는가.
다만 군주가 마땅히 이들과 정사를 모의하고 사대부를 올리고 물리치지 않게 해서 이들로 하여금 위엄과 복을 소유하여 충분히 사람들을 놀라지 않게 해야 할 뿐이다. 그리고 과연 환관이 죄가 있을 경우 죄가 작으면 형벌을 내리고 죄가 크면 죽여서 너그럽게 사면하는 바가 없어야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이들로 하여금 專橫하게 하더라도 누가 감히 하겠는가. 어찌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살피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서 풀을 베는 것처럼 제거하고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죽이고자【王氏가 말하였다. “풀을 베는 것처럼 제거하고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죽인다는 것은 그 뿌리를 잘라 제거하는 뜻을 이른다. 《禮記》〈月令篇〉에 ‘季夏에 말린 풀을 태워 물을 흘러가게 해서 풀을 썩혀 죽이는 데 이롭다.’라고 하였는데, 註에 ‘薙는 풀을 베는 것이다.’ 하였다. 獮은 죽이는 것이다. 《說文解字》에 ‘가을사냥을 獮이라 하니, 가을의 肅殺하는 기운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한단 말인가. 이렇게 하면 혼란이 없겠는가. 이 때문에 袁紹가 앞에서 행함에 董卓이 반란하여 漢나라를 약하게 만들었고, [ 崔昌遐]崔昌遐가 뒤에서 인습함에 [ 朱氏(朱全忠)]朱氏(朱全忠)가 당나라를 찬탈하여, 비록 한때의 분함을 상쾌하게 하였으나 나라가 뒤따라 멸망하였다. 이는 옷의 때를 싫어하여 옷을 불태우고 나무의 좀벌레를 싫어하여 나무를 베는 것과 같으니, 그 폐해가 어찌 더욱 많지 않겠는가.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仁하지 못함을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이 난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씀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昭宗은 天姿가 총명하고 준걸스러워서 前代의 功烈을 회복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奸臣이 권력을 독단하고 藩鎭이 跋扈하였으며, 宦官이 功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스스로 定策國老라 칭하고 天子를 지목하여 門生이라 칭하여, 膏肓의 病이 되어서 구원하고 치료할 수가 없었으니,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처음에는 [ 張濬]張濬이 平陽에서 군대를 전복시켜 [ 李克用]李克用의 불평하는 마음을 더하였고, 중간에는 楊復恭이 山南으로 亡命하여 宋文通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도하였고, 종말에는 대궐 뜰에서 병란이 일어나 화살이 황제의 옷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莎城에서 떠돌아다니고 華陰에서 이리저리 우거하였으며 東宮에 유폐되어 곤욕을 당하고 협박에 의해 岐陽으로 옮겨가서 東都를 유리하였다. 심지어 부득이하여 使者를 보내어 密詔를 가지고 가서 四方에 難을 고하였으나, 한 사람도 측은히 여겨 國難에 달려온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러 기와장이 깨지듯 흙이 무너지듯 나라가 망하였으니, 아! 슬프다.”
[甲子]天祐元年
[甲子]天祐元年이라
春正月에 [ 朱全忠]이 密表[ 崔胤]專權亂國【[ 崔胤]이 時司徒兼判六軍十二衛事하니라 】하고 離間君臣이라하야 幷其黨[ 鄭元規], [ 陳班]【[ 鄭元規]는 刑部尙書兼京兆尹六軍諸衛副使요 [ 陳班]은 威遠軍使라 】等하야 皆誅之하고 遣牙將[ 寇彦卿]하야 奉表稱邠岐兵逼畿甸이라하고 請上遷都洛陽하다 壬戌에 車駕發長安이어늘 [ 全忠]이 以[ 張廷範]【[ 全忠]之將也라 】으로 爲御營使하야 毁長安宮室百司及民間廬舍하니 長安이 自是로 遂丘墟矣라 上이 至洛陽하니 [ 全忠]이 使[ 蔣玄暉]【[ 全忠]之腹心也니 [ 全忠]以爲樞密使하니라 】弑之하고 立[ 輝王]하야 爲皇太子하다
天祐 元年(갑자 904)
봄 정월에 [ 朱全忠]朱全忠이 은밀히 表文을 올려 ‘[ 崔胤]崔胤이 권력을 독단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군신을 이간질한다.’고 하였다.【[ 崔胤]崔胤이 당시 司徒 兼判六軍十二衛事였다.】 그리하여 [ 崔胤]崔胤의 무리인 [ 鄭元規]鄭元規, [ 陳班]陳班【[ 鄭元規]鄭元規는 刑部尙書兼京兆尹六軍諸衛副使였고, [ 陳班]陳班은 威遠軍使였다.】 등과 함께 모두 죽이고牙將寇彦卿을 보내어 表文을 받들어邠岐(李茂貞)의 군대가 畿甸을 핍박한다고칭하고는 上에게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였다.
임술일(26일)에 황제의 車駕가 長安을 출발하자, [ 朱全忠]朱全忠이 [ 張廷範]張廷範을【[ 張廷範]張廷範은 [ 朱全忠]朱全忠의 장수이다.】御營使로 삼고長安의 宮室과 百司와 민간의 집을 부수니, 長安이 이로부터 마침내 폐허가 되었다. 上이 洛陽에 이르니, [ 朱全忠]朱全忠이 [ 蔣玄暉]蔣玄暉로 하여금【[ 蔣玄暉]蔣玄暉는 [ 朱全忠]朱全忠의 심복이니, [ 朱全忠]朱全忠이 그를 樞密使로 삼았다.】 황제를 시해하게하고輝王을 皇太子로 세웠다.
○ [ 封錢鏐]하야 爲[ 吳越王]하다
昭宣帝
名은 祝이니 昭宗第九子라
[ 昭宣帝]【初諡[ 哀帝]라 [ 梁主][ 朱晃]이 廢之하야 爲[ 濟陰王]이러니 後遇害하니라】名은 [ 祝]이니 [ 昭宗]第九子라 諡曰[ 哀帝]니 在位三年이요 壽十七이라
[乙丑]天祐二年
[乙丑]天祐二年이라
[新增][ 朱氏黼]曰 自古卽位에 未有不改元者하니 雖垂亡殆盡之國이 有革命遜位之勢라도 而亂臣賊子未嘗不使嗣君改元以欺天下也라 惟[ 呂后]立[ 常山王]【[ 常山王]은 卽[ 恒山王]朝也라 】하고 [ 朱溫]立[ 昭宣帝]【[ 朱溫]은 卽[ 全忠]이라 又改名[ 晃]이니 是爲梁[ 太祖]라】에 不復改元하니 蓋示天下之出於己요 嗣君之擁虛器也어늘 而朝士猶與[ 全忠]爭九錫禮制次第하니 不亦愚乎아
天祐 2년(을축 905)
[新增][ 朱氏(朱黼)]朱氏(朱黼)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즉위함에 改元하지 않은 자가 있지 않았으니, 비록 멸망하여 거의 끝나게 된 나라로서 혁명하여 황제의 자리를 양보할 형세가 있다 하더라도 난신적자가 일찍이 뒤를 이은 군주로 하여금 改元하게 하여 천하를 속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직 呂后가 [ 常山王]常山王을 세우고【[ 常山王]常山王은 바로 [ 恒山王]恒山王[ 李朝]李朝이다.】[ 朱溫]朱溫이 昭宣帝를 세울 적에【[ 朱溫]朱溫은 바로 [ 朱全忠]朱全忠이다. 또 [ 晃]晃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가 바로 後梁의 [ 太祖]太祖이다.】 다시 改元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가 자신에게서 나오고 뒤를 이은 군주는 빈 기물(자리)만 끼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선비들이 오히려 [ 朱全忠]朱全忠과 九錫을 하사하는 禮制의 차례를 논쟁하였으니, 어리석지 않은가.”
五月에 彗星長竟天하니 占者曰 君臣俱災하리니 宜誅殺以應之라하니라
5월에 彗星의 길이가 하늘 끝까지 이르니,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군주와 신하가 모두 재앙을 받을 것이니, 마땅히 사람들을 죽여서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야한다.” 하였다.
○ 六月에 [ 全忠]이 聚朝士貶官者三十餘人於白馬驛하야 一夕에 盡殺之하야 投尸于河【諫議大夫同平章事[ 李璨]이 恃[ 全忠]之勢하고 恣爲威福이러니 會有星變이라 [ 璨]이 因疏其素所不快者於[ 全忠]하야 曰 此曹皆怨望腹誹하니 宜以之塞災하소서 靑州留後[ 李振]이 亦言於[ 全忠]曰 王欲圖大事인댄 此曹는 皆朝廷之難制者니 不若盡去니이다 [ 全忠]以爲然하야 貶[ 獨孤損], [ 裴樞], [ 崔遠], [ 陸扆], [ 王溥], [ 趙崇], [ 王贊]等三十餘人於白馬驛하야 盡殺之하야 投尸于河하니라 】하다 初에 [ 李振]이 屢擧進士호되 竟不中第라 故로 深嫉搢紳之士하야 言於[ 全忠]曰 此輩常自謂淸流라하니 宜投之黃河하야 使爲濁流라하니 [ 全忠]이 笑而從之하니라
6월에 [ 朱全忠]朱全忠이 조정의 인사 중에 좌천된 자 30여 명을 白馬驛에 모아서 하룻저녁에 모두 죽여 시신을 黃河에 던졌다.【諫議大夫同平章事인 李璨이 [ 朱全忠]朱全忠의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위엄과 복을 행사하였는데, 마침 彗星의 변고가 있었다. 李璨이 이를 이용하여 자신이 평소 좋아하지 않던 자들을 적어서 [ 朱全忠]朱全忠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조정을 원망하고 마음속으로 비방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들로써 재앙을 막으소서.” 하였다. 靑州留後李振 또한 [ 朱全忠]朱全忠에게 말하기를 “王께서 大事를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이들은 모두 조정에서 제재하기 어려운 자들이니, 모두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 朱全忠]朱全忠이 그 말을 옳게 여겨 獨孤損, 裴樞, [ 崔遠]崔遠, 陸扆, 王溥, [ 趙崇]趙崇, 王贊 등 30여 명을 白馬驛으로 貶斥하여 모두 죽여서 시신을 黃河에 던졌다.】 이보다 앞서 李振은 여러 번 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搢紳의 선비들을 깊이 미워하여, [ 朱全忠]朱全忠에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항상 스스로 淸流라고 말하니, 마땅히 이들을 黃河에 던져 넣어 그들로 하여금 濁流가 되게 해야 합니다.” 하니, [ 朱全忠]朱全忠이 웃고 그의 말을 따랐다.
○ [ 吳王][ 楊行密]이 薨커늘 其子[ 偓]이 自立하야 爲[ 弘農郡王]하다
○ 以[ 朱全忠]爲相國하야 進封梁王하고 加九錫하다
[ 朱全忠]朱全忠을 相國으로 삼아[ 梁王]梁王으로 進封하고 九錫의 禮를 가하였다.
歷年圖曰 [ 高祖]擧晉陽精兵【[ 高祖]는 自晉陽宮監而起하니라 】하고 承亡隋之弊하야 席卷長驅하야 奄有關中이라 命將出師하야 掃除亂略【書武成에 略은 謀略也라하니라 】하야 遂降[ 李密], 繫[ 建德]하고 擒[ 世充], 芟[ 武周]하고 翦[ 黑闥], 夷[ 蕭銑]하야 六年之中에 海內咸服하니 何成功之速哉아 蓋以[ 太宗]之爲子也일새라 [ 太宗]은 文武之才 高出前古라 驅策英雄하고 罔羅俊乂【才過千人爲俊이요 乂는 才也라 】하며 好用善謀하고 樂聞直諫하야 拯民於水火之中하야 而措之於衽席【臥者爲衽이요 坐者爲席이라 】之上하야 使盜賊化爲君子하고 呻吟轉爲謳歌하며 衣食有餘하고 刑措不用이라 突厥之渠가 繫頸闕庭하고 北海之濱이 悉爲州縣하니 蓋三代以還으로 中國之盛이 未之有也라 惜其好尙功名而不及禮樂하고 父子兄弟之間에 慙德【[ 太宗]이 弑兄殺弟逼父하야 爲帝하고 納弟之妃라 】多矣라 [ 高宗]은 沈溺宴安하야 仁而不武라 使[ 天后]【則天武后라 】로 斲喪唐室하야 屠害宗支하고 毒流縉紳하니 迹其本源하면 有自來矣라 [ 中宗]은 久罹憂辱하야 備嘗險阻러니 一旦得志에 荒淫不悛하니 糞土之墻을 安可杇(圬)也리오 [ 睿宗]은 鑑前之禍하고 立嗣以功하니 所謂可與權矣라
《歷年圖》에 말하였다.
“唐나라 高祖는 晉陽에서 정예병을 일으키고【高祖는 隋나라 말기에 晉陽宮監으로 있다가 일어났다.】 망한 隋나라의 피폐한 뒤를 이어받아 천하를 석권하고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관중 지방을 소유하였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모략을 세우는 자들을 소탕하였다.【《書經》〈武成〉의 註에 “略은 모략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李密을 항복시키고竇建德을 공격하고王世充을 사로잡고劉武周를 목 베고劉黑闥을 제거하고蕭銑을 평정하여 6년 동안에 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으니, 어쩌면 이리도 成功이 신속하였는가? 이는 太宗이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太宗은 文武의 재주가 前古에 크게 뛰어났다. 여러 영웅들을 채찍질하고 준걸들을 망라하였으며,【재주가 천 명 중에 뛰어난 것을 俊이라 하고, 乂는 재주가 있는 것이다.】 좋은 계책을 쓰기를 좋아하고 직간을 듣기를 좋아해서 백성들을 물과 불(塗炭) 속에서 구원하여 편안한 자리 위에 내려놓았다.【누울 적에 까는 것을 衽이라 하고, 앉을 적에 까는 것을 席이라 한다.】 그리하여 도적으로 하여금 변하여 군자가 되게 하고 신음하는 자들로 하여금 바뀌어 노래를 부르게 하였으며 衣食이 풍족하고 형벌을 폐지하여 쓰지 않았다. 突厥의 추장이 목을 묶고 대궐 뜰로 와서 항복하고 北海의 바닷가가 모두 州縣이 되었으니, 三代 이후로 中國의 강성함이 이와 같았던 적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功名을 좋아하고 禮樂에 미치지 않았으며 부자간과 형제간에 부끄러운 德(일)이 많았다.【太宗은 형 建成을 시해하고 아우 [ 元吉]元吉을 죽였으며, 아버지 高祖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고 아우 [ 元吉]元吉의 妃(巢剌王妃)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高宗은 안일함에 빠져서 인자하기만 하고 武威가 없었다. 그리하여 則天武后로 하여금【天后는 [ 則天武后]則天武后이다.】唐나라 황실을 망하게 하여 宗孫과 支孫들을 도륙하고 해독이 縉紳(사대부)들에까지 미쳤으니, 그 근본을 따라가보면 유래가 있다.
中宗은 오랫동안 근심과 욕을 당하여 험난하고 어려운 일을 빠짐없이 겪었는데, 하루아침에 뜻을 얻자 주색에 빠져 잘못을 고치지 않았으니, 거름흙으로 만든 담장을 어떻게 흙손질할 수 있겠는가.
睿宗은 前日의 화를 거울로 삼고 공이 있는 자(玄宗)를 後嗣로 세웠으니, 이른바 함께 權道를 행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
[ 明皇]은 能謀有斷하야 再淸內難【謂誅[ 太平公主]事라 】이라 開元之初에 憂勤庶政하야 好賢樂善하고 愛民利物하야 海內富庶하고 四夷賓服하야 浸淫【隨理也니 隨其脈理而浸漬라 】於貞觀之風矣러니 及天寶以降으로 自以功成治定하야 無有後艱이라하야 志欲旣滿에 侈心乃生이라 忠直【忠直은 [ 姚崇], [ 宋璟], [ 韓休], [ 張九齡]之屬이라 】寖疏하고 讒諛竝進하야 以遊娛爲良謀하고 以聲色爲急務하며 以[ 李林甫][ 楊國忠]爲[ 周召]하고 以[ 安祿山][ 哥舒翰]爲[ 方虎]하야 癰疽結於心腹而不寤(悟)하고 豺狼遯於藩籬【遯은 隱也라 】而不知라 一旦에 變生所忽하야 兵起邊隅하니 廟堂執檄而心醉하고 猛將望塵而束手하야 腥膻【膻은 羊臭也라 】이 汚於伊洛하고 流血이 染於河潼이라 乘輿播蕩에 生民塗炭하고 禍亂竝興하야 不可救藥하야 使數百年之間으로 干戈爛熳(漫)而不息하니 嗚呼라 靡不有初나 鮮克有終하니 安之不可恃와 治之不可保 如此夫인저
明皇(玄宗)은 계책을 잘 세우고 결단력이 있어서 다시 내란을 평정하였다.【다시 내란을 평정하였다는 것은 [ 太平公主]太平公主를 죽인 일을 이른다.】開元 연간 초기에는 여러 정사를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써 현자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거워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이롭게 해서 나라 안이 부유하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조공을 바치고 복종하여 貞觀의 유풍에 젖어들었다.【浸淫은 脈理(결)를 따르는 것이니, 脈理를 따라 물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런데 天寶 연간 이후로는 스스로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어 뒷날의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서 뜻과 욕망이 이미 만족스럽자 사치한 마음이 마침내 생겨났다. 그리하여 충직한 자들이【충직한 자는 姚崇, 宋璟, [ 韓休]韓休, [ 張九齡]張九齡 등이다.】 점점 소원해지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함께 등용되어, 놀고 즐기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음악과 여색을 급선무로 여기며, 李林甫와 楊國忠을 [ 周公]周公과 召公 같은 명재상이라고 여기고 安祿山과 哥舒翰을 方叔과 召虎 같은 명장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종기가 心腹에 곪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豺狼이 울타리에 숨어있는데도【遯은 숨어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였다. 하루아침에 變亂이 소홀히 하는 곳에서 생겨나 난리가 변방에서 일어나니, 廟堂에서는 檄文을 쥠에 마음이 동요되고 용맹한 장수들은 먼지만 바라보고도 손을 묶은 것처럼 꼼짝 못하여 오랑캐의 누린내가【膻은 양고기의 누린내이다.】伊水와 洛水 사이(중국의 중앙 지역)를 더럽히고 흐르는 피가 黃河와 潼關을 물들였다. 황제의 乘輿가 西蜀으로 파천함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화와 난이 함께 일어나서 다시는 치료할 수가 없게 되어 수백 년 동안 창과 방패가 번쩍거려 그치지 않게 하였다. 아! 처음은 있지 않음이 없으나 종말이 있는 자가 드무니, 편안함을 믿을 수 없고 다스림을 보존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다.
[ 肅宗]은 以國之元子로 收兵靈武하고 反旆而東하야 不失舊物[頭註] 不失舊物【不失治天下之舊事라 】하며 [ 代宗]은 分命群帥【若[ 郭子儀]等이라 】하고 翦除兇醜【若[ 僕固懷恩], 回紇, 吐藩이라 】하야 使大河南北으로 復爲唐臣하니 其功이 皆不細矣라 然이나 此兩君者는 武不足以決疑하고 明不足以燭理하니 曏無[ 郭子儀]之忠과 [ 李光弼]之智하고 因[ 僕固懷恩]하야 以(困)[用]回紇之衆이런들 則天下已非唐有矣리라 夫以[ 肅宗]之孝慈로 而制於[ 李輔國]하야 不能養其父【見四十二卷庚子辛丑年이라 】하고 惑於[ 張后]하야 不能庇其子【見四十二卷辛丑年이라 】하니 則其武를 可知矣라 以[ 代宗]之寬仁으로 而聽讒臣之言【讒臣者는 [ 程元振]이라 】하야 使[ 光弼]不敢入朝하야 慙憤而死하고 [ 懷恩]招引外寇하야 幾再亡國하니 則其明을 可知矣라 而又不思經遠之謀하고 專爲姑息之政하야 盜賊據州郡者를 因用爲牧守【[ 盧龍][ 朱泚]를 衆推爲留後어늘 [ 代宗]詔許之하다 梁[ 崇義從][ 來瑱]하야 得衆心이러니 [ 瑱]死에 衆推爲帥어늘 上不能討하고 以爲山南節度使하고 授之旄鉞하며 平盧將[ 李懷玉]이 逐其節度使[ 侯希逸]이어늘 [ 代宗]이 詔以[ 懷玉]留後하고 賜名[ 正己]하며 幽州將[ 朱希彩] 殺其節度使[ 李懷仙]이어늘 詔以[ 希彩]知留後하며 淮西[ 李希烈]이 逐其節度使[ 李忠臣]이어늘 詔以[ 希烈]爲留後하니라 】하고 士卒殺主帥者를 因授之旄鉞하야 使彊暴縱橫하야 下陵上替하야 積習成俗하야 莫知其非하니 唐之紀綱大壞하야 不可復振은 則[ 肅][ 代]之爲也라
肅宗은 나라의 元子로 靈武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깃발을 되돌려 동쪽으로 가서 천하를 다스리는 옛일을 잃지 않았으며,【舊物을 잃지 않았는다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다.】代宗은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명령하고【여러 장수들은 郭子儀 등과 같은 사람이다.】 흉악한 자들을 제거하여【흉악한 자들은 僕固懷恩과 回紇, 吐藩과 같은 무리이다.】大河의 남북으로 하여금 다시 唐나라의 신하가 되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모두 작지 않다. 그러나 이 두 군주는 威武는 의심스러움을 결단하지 못하였고 밝음은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하였으니, 그때 만일 郭子儀의 충성과 李光弼의 지혜가 없고 僕固懷恩을 이용하여 回紇의 무리를 쓰지 않았더라면 천하는 이미 唐나라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肅宗의 효도와 사랑으로도 李輔國에게 제재를 받아 아버지(玄宗)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고【아버지(玄宗)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것은 42권 庚子年(760)과 辛丑年(761)에 보인다.】[ 張后]張后에게 미혹되어 자식을 비호하지 못하였으니,【자식을 비호하지 못한 것은 42권 辛丑年(761)에 보인다.】 그렇다면 그 威武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代宗의 관대함과 인자함으로도 참소하는 신하([ 程元振]程元振)의 말을 들어서【참소하는 신하는 [ 程元振]程元振이다.】李光弼로 하여금 감히 입조하지 못하여 부끄럽고 분하여 죽게 만들고, 僕固懷恩이 바깥의 적을 불러들여 나라를 다시 망칠 뻔하였으니, 그의 밝음을 알 수 있다. 또 떳떳하고 장구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姑息的인 정사를 행하여, 州郡을 점거한 도적들을 그대로 등용하여 牧守로 삼고【盧龍의 [ 朱泚]朱泚를 무리(군사)들이 留後로 추대하자 代宗이 조칙을 내려 허락하였다. 梁崇義가 來瑱을 따라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는데, 來瑱이 죽자 군사들이 그를 장수로 추대하니, 上이 이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梁崇義를 山南節度使로 임명하고 깃발과 斧鉞을 내려주었으며, 平盧의 장수인 李懷玉이 節度使[ 侯希逸]侯希逸을 쫓아내자 代宗이 조칙을 내려 李懷玉을 留後로 삼고 [- 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幽州의 장수 [ 朱希彩]朱希彩가 節度使李懷仙을 죽이자 조칙을 내려 [ 朱希彩]朱希彩를 知留後로 삼았으며, 淮西의 李希烈이 節度使李忠臣을 쫓아내자 조칙을 내려 李希烈을 留後로 삼았다.】 主帥를 죽인 사졸들에게 깃발과 부월을 그대로 주어서 강하고 사나운 자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행동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윗사람의 권위가 침체되어 폐습이 쌓여 나쁜 풍속을 이루어서 나쁜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唐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다시 떨쳐지지 못함은 肅宗과 代宗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 德宗]은 憤積世之弊하고 憫王室之卑하야 南面之初에 赫然有撥亂之志로되 而識度闇淺하고 資性猜愎하야 親信이 多非其人이요 擧措不由其道하며 賦斂煩重하고 果於誅殺이라 故로 關外之寇未平에 而京師之盜先起라 於是에 困辱於奉天하고 播遷於山南하며 公卿拜於賊庭하고 鋒鏑集於黃屋이리니 尙賴[ 陸贄]盡心於內하고 [ 李晟][ 渾瑊]輸力於外라 故能誅夷元兇【[ 朱泚]라 】하고 還奉宗社하니 自是之後로 消剛爲柔하고 刓方爲圓하야 逮其晩節하야는 偸懦之政【偸는 苟且也라 】이 甚於祖考矣라 [ 順宗]은 不幸嬰疾하야 奸邪肆志로되 而能委政冢嗣하야 以安社稷하니 足爲賢矣라 [ 憲宗]은 聰明果決이 得於天性이요 選[ 任忠良]하고 延納善謀라 師老財屈하야 異論輻湊로되 而不爲之疑하며 盜發都邑하야 屠害元宰로되 而不爲之懼하야 卒能取靈夏, 淸劍南하고 誅浙西, 俘澤潞하고 平淮右, 復齊魯하니 於是에 天下深根固蔕之盜가 皆狼顧鼠拱하야 納質效地하고 稽顙入朝하야 百年之憂가 一旦廓然矣로되 而怠於防微하야 變生肘腋하니 悲夫라
德宗은 여러 대 동안 누적된 폐단을 분하게 여기고 王室이 낮아짐을 민망하게 여겨서 南面(즉위)하던 초기에 赫然히 난을 다스릴 뜻을 두었으나 지식과 도량이 어둡고 얕으며 타고난 자품이 시기하고 괴팍하였다. 그리하여 친애하고 신임한 자가 대부분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고 擧措가 바른 도를 따르지 않았으며, 부역과 세금이 번거롭고 무거우며 사람들을 처벌하고 죽이는 데에 과감하였다. 그러므로 關中 이외의 도적을 평정하기 전에 京師(關中)의 도둑이 먼저 일어났다. 이에 奉天에서 곤욕을 당하였고 山南으로 파천하였으며, 公卿들이 적의 조정에서 절하고 칼날이 黃屋(임금의 수레)에 집중되었는데, 다행히 陸贄가 안에서 마음을 다하고 李晟과 [ 渾瑊]渾瑊이 밖에서 힘을 쏟음에 힘입었다. 그러므로 능히 [ 원흉(朱泚)]원흉(朱泚)을 주벌하고【元兇은 [ 朱泚]朱泚이다.】 종묘의 제사를 다시 받들었으니, 이 뒤로부터 강한 것이 사라져 부드러운 것이 되고 네모난 것이 깎여서 둥근 것이 되어 말년에 이르러서는 구차하고 나태한 정사가【偸는 구차함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도 심하였다.
順宗은 불행히 병에 걸려서 간사한 자들이 뜻을 얻었으나 정사를 큰아들에게 맡겨서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니, 충분히 어질다고 할 만하다.
憲宗은 총명함과 과단함을 천성에서 얻었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을 선발하여 임용하고, 좋은 계책을 맞이하여 받아들였다. 군사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어서 異論이 폭주하였으나 의심하지 않았으며, 도적(자객)이 도읍에 나타나 [- 元宰(大臣)]를 도륙하고 해쳤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靈夏를 점령하고 劍南을 소탕하며 浙西를 토벌하고 澤潞를 사로잡으며 淮右(淮西)를 평정하고 齊魯를 회복하였다. 이에 천하에 뿌리가 깊고 꼭지가 단단한 도적들이 모두 이리처럼 돌아보고 쥐처럼 두 손을 모아 인질을 바치고 땅을 바쳤으며, 이마를 조아리고 입조하여 백 년 동안의 우환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사라졌으나 은미함을 막는 데에 태만해서 변란이 가까운 곳에서 생겨났으니, 슬프다.
[ 穆宗]은 蒙已成之業하고 承旣平之緖로되 授任非才하고 爲謀不臧하야 使柙中之虎로 復縱暴於原野하고 網中之魚로 得自脫於深淵하야 元和之功이 於茲墜矣라 寶曆은 輕易荒縱하야 自貽顚覆하고 [ 文宗]은 優游不斷하야 受制家臣하니 雖有好賢之心과 文雅之美나 皆不足稱也라 [ 武宗]은 英敏特達하고 委任能臣하야 克上黨을 如拾芥하고 取太原을 如反掌이로되 〈饗國日淺하야〉功業不究하니 惜哉라 [ 宣宗]은 少歷艱難하고 長年踐位하야 人之情僞를 靡不周知하야 盡心民事하고 精勤治道하야 賞簡而當하고 罰嚴而必이라 故로 方內樂業하고 殊方順軌하니 求諸漢世하면 其[ 孝][ 宣]之流亞與인저 [ 懿宗]은 驕奢無度하고 賊虐不忌하야 輔弼之任을 委於嬖寵【上荒宴하야 不親庶政하고 委任路巖하니 乃通賂遺하고 奢肆不法하니라 與[ 韋保衡]으로 同當國하야 二人勢動天下하니 時에 目其黨하야 爲牛頭阿旁이라하니 言如鬼陰惡하야 可畏也라 】하고 四海之財를 竭於淫樂하야 民怨不知하고 神怒不恤하니 [ 李氏]之亡이 於茲決矣라 且唐은 自至德已來로 近習用權하고 藩臣跋扈하니 譬如羸病之人이 以糜粥養之라도 猶懼不濟어든 又況飮之毒酒면 其能存乎아 及[ 僖][ 昭]嗣位하야는 天祿已去하고 民心已離하야 盜賊徧於寰區하고 蓬蒿塞於城闕이라 漂泊幽辱하야 寄命諸侯하니 當是之時하야 雖欲救之나 其將能乎아
[新增][ 胡氏]曰 唐有天下하야 歷二十君에 爲子所逼奪者三焉이요 爲婦所乘者三焉이요 爲賊所逐者五焉이요 爲妻所弑者一焉이요 爲宦官所立者九【通要에 作七하니 七君은 見上戊申六君註요 其二는 [ 絳王]與[ 代宗]也라 絳王은 見上癸亥年溫公論中이요 代宗은 雖已爲太子나 然[ 張后]謀欲廢러니 而因[ 李輔國]하야 得立하니라 】焉이요 爲所弑者三焉이요 爲所廢者一焉이요 爲方士所敗者七焉이요 爲强臣所弑者二焉이니 不爲小人所惑者 僅得二三하야 而無全德者矣라 其治效則亦亞於兩漢이로되 而賢君如是其鮮은 何也오 得之以兵力하고 守之以智術이라 知仁義爲美慕하야 而行之其淺者는 則[ 文皇]矣어니와 若夫躬履聖人之道하고 希跡先王之治는 雖文皇이라도 亦未足與議也라 故로 雖至於斗米數錢하고 外戶不閉하고 四夷賓服하야 號稱太平하며 傳祚二十하고 享年三百이나 而家國之禍는 乃最盛於前代焉하니 豈無所自哉아 [ 文皇]이 弑兄殺弟하고 滅其十子【綱目及資治唐書本紀에 竝不見하니 未詳이라 】하니 非爲天下除害也요 一身之計爾라 他日宗枝竝罹戕毒【見三十九卷誅鉏宗室注하니라 】하니 出乎爾者反乎爾는 天理之必然者也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必修身齊家然後에 治國平天下하니 身之不修하고 顧欲以威勢機詐로 禽制百千萬人하야 使必我之報而不敢動이면 其可哉아 [ 文皇]이 誠以[ 堯][ 舜][ 文王]爲師면 則其道必始於父子兄弟夫婦之間하야 不至於慙德愧行之多요 而其治必臻於敎化之行, 風俗之美하야 而無家法陵遲하야 爲人魚肉之患矣리라
穆宗은 이미 이루어놓은 基業을 이어받고 이미 평정한 실마리를 계승하였으나 제수하여 맡긴 자가 재주 있는 자가 아니었고 도모한 계책이 좋지 못해서 우리 안에 있는 호랑이로 하여금 다시 原野에서 포악함을 부리게 하고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못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元和 연간의 공이 이에 훼손되었다.
寶曆(敬宗)은 경솔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스스로 전복됨을 초래하였고, 文宗은 우유부단하여 家臣(환관)에게 제재를 받았으니, 비록 현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文雅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나 모두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武宗은 영민하여 특별히 明達하고 유능한 신하에게 위임해서 上黨을 이기기를 지푸라기를 줍듯이 하고 太原을 점령하기를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하였으나 〈나라를 누린 것이 日淺하여〉공업을 끝마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宣宗은 어린 시절에 어려움을 겪고 장성한 나이에 즉위해서 사람들의 실정과 거짓을 두루 알지 못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일(농사)에 마음을 다하고 다스리는 방도에 마음을 쏟아 부지런히 힘써서 賞은 간략하면서도 합당하고 罰은 엄격하면서도 반드시 내렸다. 그러므로 方內(나라 안)의 백성들이 생업을 즐거워하였고 殊方(異域)의 오랑캐들이 법도를 따랐으니, 漢나라 세대에 찾아보면 [ 孝宣帝]孝宣帝의 亞流일 것이다.
懿宗은 교만하고 사치함이 한도가 없고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보필하는 임무를 총애하는 자에게 맡기고【上(懿宗)이 宴飮에 빠져 여러 정사를 직접 다스리지 않고 路巖에게 위임하니, 路巖이 마침내 賂遺(뇌물)을 받았으며 사치하고 방자하여 불법을 자행하였다. 韋保衡과 함께 국사를 담당하여 두 사람의 권세가 천하를 진동하니, 이때에 그 당을 지목하여 牛頭阿旁이라 하였으니, 마귀와 같이 음흉하고 악하여 두려워할 만함을 말한 것이다.】 온 천하의 재물을 지나친 향락에 탕진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원망하는데도 알지 못하고 神明이 노여워하는데도 근심하지 않았으니, 李氏의 멸망이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또 唐나라는 至德 연간 이래로 황제 가까이에서 모시는 환관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藩臣들이 발호하였으니, 비유하면 파리하고 병든 사람이 미음과 죽으로 滋養해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또다시 독주를 마시게 한다면 어찌 보존할 수 있겠는가.
[- 僖宗]과 昭宗이 지위를 계승함에 이르러서는 天祿이 이미 떠나가고 民心이 이미 배반하여 도적이 온 천하에 널려있고 쑥대(잡초)가 성과 대궐을 메웠다. 그리하여 황제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幽置되어 치욕을 당해서 제후들에게 목숨을 맡겼으니, 이때를 당하여 비록 구원하고자 하나 장차 되겠는가.”
[新增][ 胡氏(胡寅)]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唐나라는 천하를 소유하여 20명의 군주를 거쳤는데, 자식에게 핍박당하여 빼앗긴 자가 3명이고, 부인에게 능멸당한 자가 3명이고, 역적에게 쫓겨난 자가 5명이고, 아내에게 시해된 자가 1명이며, 환관에 의해 옹립된 자가 9명이고【《通鑑要解》에 九가 七로 되어 있으니, 七君은 앞의 戊申年(888) 六君의 註에 보이며, 그 둘은 絳王과 代宗이다. 絳王은 앞의 癸亥年(903)溫公의 史論 가운데에 보이며, 代宗은 이미 태자가 되었으나 張后가 폐위하고자 모의하였는데 李輔國으로 인해 즉위할 수 있었다.】 시해당한 자가 3명이고 폐위당한 자가 1명이며, 方士 때문에 그르친 자가 7명이고, 강한 신하에게 시해당한 자가 2명이니, 소인에게 미혹되지 않은 자가 겨우 두세 명뿐이어서 덕을 온전히 한 자가 없다.
정치를 잘한 효험은 또한 兩漢에 버금갔으나 어진 군주가 이와 같이 드문 것은 어째서인가? 당나라는 병력으로써 천하를 얻고 지혜와 꾀로써 이를 지켰다. 仁義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서 사모하여 얕게(조금) 행한 것은 文皇(太宗)이었으니, 몸소 聖人의 道를 행하고 先王의 정치를 따르기를 바라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文皇이라 해도 함께 의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비록 쌀 한 말의 값이 몇 전에 불과하고 도둑이 없어 바깥문을 닫지 않으며, 사방의 오랑캐들이 복종하여 태평성세라고 일컬어지고 國祚를 전한 군주가 20명이고 나라를 누린 햇수가 300년에 이르렀으나 집안과 나라의 화가 마침내 前代에 비하여 가장 성하였으니, 어찌 연유된 바가 없겠는가? 文皇이 형을 시해하고 아우를 죽이며 열 명의 아들을 멸망시켰으니,【太宗이 열 명의 아들을 멸망시킨 일은 《資治通鑑綱目》과 《資治通鑑》, 《唐書》〈太宗本紀〉에 모두 보이지 않으니, 미상이다.】 이것은 천하를 위하여 해로운 자들을 제거한 것이 아니요, 자기 한 몸을 위한 계책일 뿐이었다. 후일에 宗孫과 支孫이 함께 해독에 걸렸으니,【후일 宗孫과 支孫이 함께 해독에 걸린 일은 39권 誅鋤宗室의 註에 보인다.】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天理이다.
이 때문에 옛날의 훌륭한 王者들은 반드시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히 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몸이 닦여지지 않고 다만 위세와 機智와 속임수로써 백천만 명을 사로잡고 제재하여 저들로 하여금 반드시 나에게 은혜를 갚게 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면 어찌 될 수 있겠는가.
右唐은 二十一帝에 二百八十九年이라
이상 唐나라는 21명의 황제에 역년이 289년이었다.
[ 范祖禹]曰 唐自[ 高祖]取隋로 五年而四方底平하고 九年而[ 太宗]立하야 正觀之治幾於三代라 然一傳而有武氏之篡하야 國命中絶이 二十餘年이요 [ 中][ 睿]는 享國日淺하야 朝廷濁亂【[ 中宗]爲[ 韋后]所制하야 [ 武氏]復振하니라 [ 睿宗]은 因其子之功하고 在位不久하야 無可稱者하니라 】이라 [ 明皇]이 以兵取而後得之【斬[ 韋后]及[ 安樂公主]하니 事見三十九卷庚戌年 】하야 開元之治 幾於正觀이나 而終之以天寶之亂하야 唐室遂微하고 [ 肅宗]以後론 無可稱者라 [ 憲宗]元和之政이 號爲中興이나 而晩節不終하야 身且不保하니 凡唐之世에 治日이 如此其少하고 亂日이 如彼其多也라 昔三代之君은 莫不修身齊家以正天下어늘 而唐之人主는 起兵而誅其親者를 謂之定內難이라하고 偪父而奪其位者를 謂之受內禪이라하니 此其閨門無法하야 不足以正天下하니 亂之大者也라 其治安之久者는 不過數十年이라 或變生於內하고 或亂作於外하야 未有內外無患하야 承平百年者也라
范祖禹가 말하였다.
“唐나라는 高祖가 隋나라를 차지한 것으로부터 5년 만에 사방이 평정되었고, 9년 만에 太宗이 즉위하여 貞觀의 다스림이 거의 三代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 번 전해짐에 [ 武氏]武氏의 찬탈이 있어서 국가의 운명이 중도에 끊어진 것이 20여 년이었고, 中宗과 睿宗은 나라를 누린 날짜가 日淺하여 조정이 혼탁하고 어지러웠다.【中宗은 韋后에게 제압당하여 [ 武氏]武氏가 다시 위세를 떨쳤다. 睿宗은 아들(玄宗)의 공을 이어받았고 재위한 지가 오래지 않아서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明皇(玄宗)은 병력으로 취한 뒤에 帝位를 얻어서【玄宗(李隆基)이 韋后와 安樂公主를 베어 죽였으니, 이에 대한 일은 39卷 庚戌年(710)에 보인다.】開元의 다스림이 貞觀에 가까웠으나 끝내 天寶의 혼란으로 끝마쳐 唐나라가 마침내 미약해졌고, 肅宗 이후로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憲宗의 元和 연간의 정사는 中興하였다고 호칭하지만 말년에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여 자기 몸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무릇 唐나라 시대에 다스려진 날이 이와 같이 적고 혼란한 날이 저와 같이 많았다.
옛날 三代의 군주들은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여 천하를 바로잡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唐나라의 군주들은 군대를 일으켜 친족을 죽인 자를 일러 내란을 평정했다고 말하고, 아버지를 핍박하여 황제의 지위를 빼앗은 자를 일러 內禪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이는 閨門에 법도가 없어서 천하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혼란 중에 큰 것이다. 나라를 오랫동안 편안하게 다스린 자도 수십 년을 넘지 못하였으니, 혹은 변란이 안에서 생기거나 혹은 난리가 밖에서 일어나서 내외가 아무 근심 없이 백년 동안 태평을 누린 자가 있지 않았다.
[ 揚雄]曰 陰不極則陽不生이요 亂不極則德不形이라하니 唐室之亂이 (及)[極]于五代하야 而天祚有宋하야 [ 太祖皇帝]【姓[ 趙氏]요 諱[ 匡胤]이니 晉三家[ 趙籍]之後라 】順天人之心하야 兵不血刃하고 市不易肆【陳物處曰肆라 】하야 而天下定하니 [ 神武]所臨에 海內有截【截은 整齊也라 】이라 繼以{無}[ 太宗]【諱[ 炅]이니 [ 太祖]母弟라 】文治하고 四宗【[ 太宗]之子[ 眞宗][ 恒], [ 眞宗]之子[ 仁宗][ 禎], [ 仁宗]從兄[ 濮王]之子[ 英宗][ 曙], [ 英宗]之子[ 神宗][ 頊]이라 】守成하야 太平百有餘年하니 雖三代之盛이라도 未有如此其久者也라 其取之也는 雖無以遠過於前代나 其守也는 則不愧於三王이라 內則家道正而人倫明하야 其養民也仁하고 其奉己也儉하야 德澤從厚하고 刑罰從薄하며 外則縣之政을 聽於令하고 郡之政을 聽於守하며 守之權이 歸於按察하고 按察之權이 歸於朝廷하야 上下相維하고 輕重相制하야 藩鎭이 無擅兵之勢하고 郡縣이 無專殺之威하야 士自一命以上으로 刑辱不及也라 故로 無大臣之誅하고 施及群生하야 功利無窮하니 校(較)之唐世하면 天壤不侔라 夫唐之已事如彼하고 祖宗之成效如此하니 然則今當何監고 不在唐乎아 今當何法고 不在祖宗乎아 夫惟取監於唐하고 取法於祖宗이면 則永世保民之道也니라
揚雄이 말하기를 ‘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양이 생겨나지 않고, 혼란이 지극하지 않으면 덕이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唐나라의 혼란이 五代時代에 극에 이르자, 하늘이 우리 宋나라를 도와주셨다. 그리하여 太祖皇帝(趙匡胤)가【太祖皇帝는 성이 趙氏이고 이름이 匡胤이니, 晉나라 三家인 [ 趙籍]趙籍의 후손이다.】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을 순히 따라서 병사들은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시장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교역하여【시장에 물건을 진열한 곳을 肆(가게)라 한다.】 천하가 평정되니, 神武로 임어함에 온 천하가 정돈되었다.【截은 정돈되고 가지런한 것이다.】 뒤이어 太宗이【太宗은 諱가 炅이니, 太祖의 同母弟이다.】 文治를 하고 四宗이【四宗은 太宗의 아들인 眞宗[ 趙恒]趙恒, 眞宗의 아들인 仁宗[ 趙禎]趙禎, 仁宗의 從兄인 濮王의 아들 英宗[ 趙曙]趙曙, 英宗의 아들인 神宗[ 趙頊]趙頊이다.】 守成을 하여 백여 년 동안 태평을 누렸으니, 비록 三代의 융성함이라도 이와 같이 오랜 적은 있지 않다.
우리 宋나라가 천하를 취한 것은 비록 전대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없었지만 천하를 지킨 것은 三王에게 부끄럽지 않다. 안으로는 家道가 바르고 人倫이 밝아져서 백성을 기르는 것은 인자하였고 자기 몸을 받드는 것은 검소하여, 덕택은 후함을 따르고 형벌은 박함을 따랐으며, 밖으로는 縣의 정사를 縣令에게 다스리게 하고 郡의 정사를 郡守에게 다스리게 하며 郡守의 권한이 按察使에게 돌아가고 按察使의 권한이 조정으로 돌아가서 上下가 서로 유지하고 輕重이 서로 제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藩鎭에서는 군대를 마음대로 동원하는 권력이 없고 郡縣에서는 마음대로 죽이는 위엄이 없어서 一命 이상의 선비로부터는 형벌과 욕됨이 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大臣이 주벌당함이 없었고 이것이 여러 生民들에게까지 미쳐서 功利가 무궁하였으니, 唐나라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唐나라의 이미 지나간 일이 저와 같고, 우리(宋나라) 祖宗이 이루어놓은 효과가 이와 같으니, 그렇다면 지금 마땅히 무엇을 거울로 삼아야 하겠는가? 唐나라에 있지 않겠는가. 지금 마땅히 무엇을 법으로 삼아야 하겠는가? 우리 祖宗에게 있지 않겠는가. 오직 唐나라에서 鑑戒를 취하고 우리 祖宗에게서 법을 취한다면 영세토록 백성을 보존하는 방법일 것이다.”
[附契丹]
[附契丹]
契丹之先이 自唐[ 昭宗]天復元年으로 契丹[ 痕德菫可汗]이 以[ 耶律阿保機]로 爲夷離菫【掌部族軍民之政하니 猶中國使相也라】하다 初에 [ 炎帝]之裔는 曰[ 葛烏兎]라 世雄朔漠하니 號東胡라 匈奴[ 冒頓單于]襲破之하니 餘衆이 保鮮卑山하다 魏靑龍中에 幽州刺史[ 王雄]이 殺其酋[ 比能]하니 衆이 散徙潢水러니 至酋[ 莫那]하야 遷于遼西하고 九傳而爲[ 慕容(晃)[皝]]所破하야 分其衆爲三하니 曰宇文과 曰庫莫奚와 曰契丹이라 元魏初에 衆이 稍滋蔓이요 而契丹酋[ 奇首] 居潢河, 土河之間하야 有子八人하니 各自爲部러라 高句麗[ 柔然]이 謀擊之한대 大酋[ 莫弗賀勿于]懼하야 率部落三千乘하고 請附于魏하고 因居白狼水東하다 唐初에 大酋號[ 大賀氏] 有勝兵八萬이라 貞觀中에 [ 太宗]伐高麗할새 [ 首領窟哥]來朝어늘 詔分其地하야 爲十州하고 以其部長으로 爲刺史하고 拜[ 窟哥]하야 爲松漠都督하고 賜姓[ 李氏]하야 統領其衆하다 [ 窟哥]死에 其孫[ 盡忠]이 叛이어늘 [ 武后]遣師二十萬하야 連年乃克하니 餘衆이 附于突厥하다 開元中에 [ 盡忠]從弟[ 失活]이 請降이어늘 詔復以爲都督하다 [ 失活]이 傳[ 沙固]러니 [ 沙固]爲衙官[ 可突干]所殺하고 弟[ 鬱于]嗣하다 [ 鬱于]死에 弟[ 咄于]嗣한대 [ 可突干]이 復逐之어늘 部人이 共立[ 咄于]之弟[ 邵固]러니 [ 可突干]이 殺[ 邵固]而立[ 屈列]하야 以附于突厥하다 幽州刺史[ 張守珪] 討殺[ 可突干]이어늘 詔封其別部長[ 過折]하야 爲[ 北平王]하야 以統大賀氏諸部하다 [ 可突干]之黨[ 雅里] 殺[ 過折]하고 而立[ 迪輦組里]하야 爲[ 阻午可汗]하고 改號遙輦氏하고 [ 雅里]自爲迭剌部하야 輔阻午以爲政할새 始立制度하야 設官分地하고 刻木爲契하고 穴地爲牢焉하니라
契丹의 선조는 唐나라 昭宗天復 元年으로부터 契丹의 痕德菫可汗이 耶律阿保機를 夷離菫으로 임명하였다.【夷離菫은 部族의 군사와 백성의 政事를 관장하였으니, 中國의 使相과 같다.】처음에 炎帝의 후손으로 [- 葛烏兎]가 있었다. 이들은 대대로 朔漠 지방에 웅거하니, 東胡라 칭하였다. 匈奴의 冒頓單于가 습격하여격파하니, 남은 무리가 鮮卑山을 확보하였다. 魏나라 靑龍 연간에 幽州刺史王雄이 그의 추장인 比能을 죽이니 무리들이 潢水로 옮겨갔는데, 추장 [- 莫那]에 이르러 遼西로 옮겨갔고, 아홉 번 전하여 [ 慕容皝]慕容皝에게 격파당하여 그 무리가 셋으로 나누어지니, 宇文과 庫莫奚와 契丹이었다.
元魏 초기에 무리들이 차츰 불어났고, 契丹의 추장인 [- 奇首]가 潢河와 土河의 사이에 거주하여 8명의 아들을 두니, 각자 部가 되었다. 高句麗柔然이 이들을 공격할 것을 도모하자, 大酋인 [- 莫弗賀勿于]가 두려워하여 部落 3천 乘을 거느리고 魏나라에 歸附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白狼水 동쪽에 거주하였다.
唐나라 초기에 大賀氏라 칭하는 大酋가 정예병 8만을 보유하였다. 貞觀 연간에 太宗이 高句麗를 정벌할 적에 首領인 窟哥가 조회하러 오자, 황제가 명하여 그 땅을 나누어 10州를 만들고 그 部長을 刺史로 임명하였으며窟哥를 松漠都督으로 임명하고李氏 姓을 하사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게하였다. 窟哥가 죽자 그의 손자인 李盡忠이 배반하였으므로則天武后가 20만 대군을 보내어 여러 해를 이어 공격해서 마침내 이기니, 남은 무리가 突厥에게 붙었다.
開元 연간에 李盡忠의 從弟인 [- 失活]이 항복을 청해오자, 황제가 명하여 다시 都督으로 삼았다. [- 失活]이 [- 沙固]에게 전하였는데[- 沙固]가 衙官인 [- 可突干]에게 살해당하고아우[- 鬱于]가 뒤를 이었다. [- 鬱于]가 죽자아우[- 咄于]가 뒤를 이었는데[- 可突干]이 다시 축출하니, 部族 사람들이 함께 [- 咄于]의 아우[- 邵固]를 세웠으나[- 可突干]이 [- 邵固]를 죽이고[- 屈列]을 세워서突厥에게 붙었다.
[ 雅里]者는 本[ 奇首]之後라 居潢河濱하야 號[ 審吉氏]러니 及易氏[ 迭剌]하야 因譯其始興之地世里하야 爲[ 耶律]而姓之하다 天寶四年에 詔賜阻午姓名하야 曰[ 李懷秀]라하야 仍爲松漠都督이러니 [ 懷秀]尋叛이어늘 詔更封別部長[ 楷落]하야 爲[ 恭仁王]하야 以代[ 懷秀]하니 [ 楷落]이 自稱[ 契丹王]하다 會에 [ 安祿山]反하야 朝貢阻絶하니 其世次를 莫得而詳이러라 或言 其國凡八部에 常推其一部大人하야 建旗鼓하고 以主號令이라 然이나 其所稱[ 耶瀾可汗]과 [ 屈戍巴剌可汗], [ 習爾]之類는 不知何部大人也라 是年에 [ 習爾]死어늘 其族人[ 欽德]이 立하니 是爲[ 痕德菫可汗]이라 [ 痕德菫]之世에 諸部多微로되 而迭剌部自[ 雅里]以後로 世爲[ 遙輦氏]하고 [ 夷離菫]이 掌其國政하다 [ 雅里]子는 曰[ 毗牒]이라 [ 毗牒]이 生[ 頦領]하고 [ 頦領]이 生[ 耨里思]하니 大度寡欲하고 令嚴衆附하야 部益盛强이러라 [ 耨里思]生[ 薩剌德]하고 [ 薩剌德]이 生[ 勻德實]하니 敎民稼穡하고 善畜牧하야 部以殷富하니라 [ 勻德實]이 生[ 撒剌的]하니 始敎民鼓鑄하고 其弟[ 述瀾]이 又善用兵하니 于厥, 室韋, 奚, 霫이 畏服之하니라 初築城邑屋廬以居하고 樹藝桑麻以織組焉하다 [ 阿保機]는 [ 撒剌的]長子也라 小字[ 啜里只]니 生而英異하야 初爲撻馬狨沙里하니 猶中國扈從官也라 數立功하니 國人服之하야 號[ 爲阿主沙里]러니 至是에 授大迭烈府[ 夷離菫]하야 得專用兵하니 遂大破室韋, 于{及}厥, 奚【皆契丹之國名이라 】諸國하니라
[- 雅里]라는 자는 본래 [- 奇首]의 후예였다. 潢河 가에 거주하여[- 審吉氏]라 호칭하였는데 迭剌로 氏를 바꾸고는 처음 일어난 지역인 世里를 번역하여耶律이라 하고 姓으로 삼았다. 天寶 4년에 황제가 명하여 [ 阻午可汗]阻午可汗에게 姓名을 하사해서李懷秀라 하고 인하여 松漠都督으로 임명하였는데, 李懷秀가 얼마 후 배반하였으므로 황제가 명하여 다시 별도의 部族長인 [ 楷落]楷落을 [- 恭仁王]으로 봉하여李懷秀를 대신하게 하니, [ 楷落]楷落이 스스로 契丹王이라 칭하였다.
마침 安祿山이 배반하여 朝貢하는 길이 끊기니, 그 世次를 자세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들 나라는 여덟 부족에 항상 한 부족의 大人을 추대하여 깃발과 북을 세우고 號令을 주관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칭한 耶瀾可汗과 [- 屈戍巴剌可汗]과 [- 習爾] 따위는 어떤 부족의 大人인지 알지 못한다. 이해에 [- 習爾]가 죽자 그 집안사람인 [ 欽德]欽德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痕德菫可汗이다.
痕德菫可汗의 세대에는 여러 부족들이 대부분 미약하였으나 迭剌部는 [- 雅里] 이후로부터 대대로 [- 遙輦氏]가 되고 [- 夷離菫]이 國政을 맡았다. [- 雅里]의 아들은 [- 毗牒]이다. [- 毗牒]이 [ 頦領]頦領을 낳고[ 頦領]頦領이 [- 耨里思]를 낳으니, 도량이 크고 욕심이 적으며 명령이 엄격하고 무리들이 따라서 部가 더욱 강성해졌다. [- 耨里思]가 [- 薩剌德]을 낳고 [- 薩剌德]이 [- 勻德實]을 낳으니,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목축을 잘하여 부족이 번성하고 부강하였다.
[- 勻德實]이 [- 撒剌的]을 낳으니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북을 만들고 쇠를 주조하는 것을 가르쳤고, 그 아우[- 述瀾]이 또 用兵을 잘하니于厥‧室韋‧奚‧霫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城邑과 집을 만들어 거주하였고, 뽕나무와 삼을 심고 가꾸어 직물을 직조하였다.
阿保機는 [- 撒剌的]의 長子이다. 어렸을 때 字가 [ 啜里只]啜里只이니,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처음에 撻馬狨沙里가 되었으니, 이는 中國의 扈從官과 같은 것이다. 여러 차례 공을 세우니, 國人들이 복종하여 [- 阿主沙里]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大迭烈府[- 夷離菫]에 제수되어 마음대로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마침내 室韋‧于厥‧奚【[通鑑要解] 室韋, 于{及}厥于{及}厥, 奚:室韋, 于厥, 奚는 모두 契丹의 나라 이름이다.】 등 여러 나라를 대파하였다.
○ 天復二年이라 [ 阿保機]寇河東하야 陷九郡하다
天復 2년(902)이다. 阿保機가 河東을 침략하여 아홉 개의 郡을 함락시켰다.
○ 天復三年이라 十月에 契丹이 以[ 阿保機]爲于越【于越은 契丹至貴之職이니 非有大功德者면 不授라 [ 阿保機]乃廣龍化州之東城하고 建東樓以紀功하니라 】하야 總知國事하고 遂作東樓于龍化州하다
○ [ 昭宣帝]天祐二年이라 秋八月에 [ 晉王][ 李克用]이 遣使如契丹한대 九月에 契丹[ 阿保機] 以騎兵七萬으로 會[ 晉王]于雲中하야 約爲兄弟하고 宴甚驩이어늘 [ 克用]이 因與會師하야 進擊[ 劉仁恭]하야 拔數州하고 盡徙其民하고 復期共擊[ 朱全忠]하니 [ 阿保機]許之하다 或勸[ 克用]하야 乘間拘[ 阿保機]于會어늘 [ 克用]이 不許曰 讐敵을 未滅이어늘 而失信夷狄은 自亡之道也니라 [ 阿保機]旣去에 聞之하고 乃背盟하고 更附[ 朱全忠]하니 [ 克用]이 由是怨之하니라
昭宣帝天祐 2년(905)이다. 가을 8월에 [ 晉王]晉王[ 李克用]李克用이 契丹으로 使者를 보내자, 9월에 契丹의 阿保機가 기병 7만 명을 거느리고[ 晉王]晉王과 雲中에서 회합하여 형제가 되기로약속하고 잔치를 열어 매우 즐거워하였다. [ 李克用]李克用이 인하여 함께 군대를 모아 전진해서 劉仁恭을 공격하여 여러 주를 함락시키고 그 백성들을 다 옮기고는 다시 [ 朱全忠]朱全忠을 함께 공격하기로약속하니, 阿保機가 이를 허락하였다.
○ 丙寅天祐三年이라 春二月에 [ 朱全忠]이 遣使如契丹하다 十一月에 契丹[ 阿保機] 侵奚, 霫【下音은 習이라 國名이니 中京地也라 】하니 女眞諸部降之하다 十二月에 契丹[ 痕德菫可汗][ 欽德]이 死하다
○ 丁卯라 春正月에 其衆이 請[ 阿保機]爲可汗이어늘 [ 阿保機]乃命設壇告天하고 卽皇帝位하니 北宰相[ 蕭轄剌]과 南宰相[ 耶律歐里思] 率其下하고 上尊號曰[ 天皇帝]라하고 后[ 述律氏]曰[ 地皇后]라하다 [ 阿保機]更名[ 億]하고 以[ 曷魯]總軍事하고 是爲元年【是年은 爲梁[ 太祖]開平元年하니라 】하니라
○ 戊辰二年이라 十月에 作明王樓하다 丙子에 改元神冊하고 大赦하며 立子[ 倍]【[ 倍]는 小字[ 突欲]이라 】하야 爲太子하다 丙戌에 改元天顯하고 滅渤海하야 改爲東丹國하야 以子[ 倍]爲[ 人皇王]이라하야 居之하다 七月에 [ 契丹主][ 億]이 卒于扶餘어늘 廟號[ 太祖]라하고 諡曰[ 大聖神烈天皇帝]라하다
史臣贊曰 [ 遼太祖]始建國하고 在位二十年이라 東征西討에 如折枯拉朽하야 東自海로 西至于流沙하고 北絶大漠하야 信(伸)威萬里하고 歷年二百하니 豈一日之故哉아 [ 周公]誅[ 管][ 蔡]에 人未有能非之者어늘 [ 剌葛][ 安端]之亂에 [ 遼祖]旣貸其死而復用之하니 非人君之度乎【辛未五年에 [ 契丹主]弟[ 剌葛]等이 謀亂이어늘 盟而釋之하고 壬申六年에 [ 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之하고 不治하고 癸酉에 [ 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니라 】아
史臣의 贊에 말하였다.
“遼나라 太祖는 처음 건국하고 재위한 햇수가 20년이었다. 동쪽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토벌함에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썩은 가지를 꺾듯이 수월하게 취하여, 동쪽으로는 東海로부터 서쪽으로는 流沙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大漠을 넘어가서 만리에 위엄을 떨치고 역년이 200년이었으니, 어찌 하루 동안에 이룩한 연고이겠는가. [ 周公]周公이 管叔과 [ 蔡叔]蔡叔을 죽임에 사람들 중에 이것을 비난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剌葛安端의 반란에 遼나라 太祖는 이미 그의 사형을 사면하고 다시 등용하였으니, 임금의 도량이 아니겠는가.”【[原註] 周公誅管蔡……非人君之度乎:遼나라 太祖辛未 5년(911)에 契丹主의 아우인 剌葛 등이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契丹主는 맹약하고 풀어주었으며, 壬申 6년(912)에 剌葛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풀어주고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며, 癸酉年(913)에 剌葛 등이 배반하였는데 그 黨만 죽이고 풀어주었다.】
後梁紀
太祖皇帝
五代紀※
※ 按梁, 唐, 晉, 漢, 周가 舊各有一代之史러니 本朝[ 歐陽][ 文忠公]이 始刪爲五代史하니 [ 司馬溫]公所修資治通鑑이 雖取[ 歐公]一二論說이나 而所援引事는 多是舊史니 其言辭詳略이 與[ 歐陽公]五代史로 多有同異하니라
[ 太祖皇帝]※ 在位七年이요 壽六十一이라
※ 名은 [ 晃]이요 姓은 [ 朱氏]니 初名[ 溫]이라 從[ 黃巢]爲盜러니 背[ 巢]降于唐하니 [ 僖宗]이 賜名[ 全忠]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니라 [ 昭宗]朝에 進封[ 梁王]하야 挾天子以令天下라가 遂移唐祚하니라
五代紀※
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歐陽文忠公(歐陽脩)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司馬溫公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歐陽公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歐陽公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後梁紀
[ 太祖皇帝]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 太祖皇帝]太祖皇帝는 이름이 [ 晃]晃이고 성이 [ 朱氏]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 溫]溫이다. [ 黃巢]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 黃巢]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 僖宗]이 [ 全忠]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昭宗 때에 승진하여[ 梁王]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 梁太祖皇帝][ 朱晃][ 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에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 太祖皇帝]太祖皇帝[ 朱晃]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春三月에 唐[ 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 梁]한대 [ 梁王]이 更名[ 晃]【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梁이라하고 奉帝爲[ 濟陰王]【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하다
○ 是時에 惟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 李克用]이요 鳳翔은 [ 李茂貞]이요 淮南은 [ 王偓]이라】이 稱天祐하고 西川【[ 王建]이라 】이 稱天復【天祐, 天復은 竝[ 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 昭宣帝]는 未有年號하니라 】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 [ 蜀王]이 遺[ 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 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 李克用]이 平[ 黃巢]하야 有大功하니 [ 唐昭宗]이 封爲[ 晉王]이라 後에 其子[ 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 莊宗]也라 [ 蜀王]은 [ 王建]이니 [ 唐昭宗]이 封爲[ 蜀王]이러니 後爲[ 唐莊宗]所滅하고 [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蜀王(王建)]蜀王(王建)이 [ 晉王(李克用)]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 朱溫]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 晉王]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 李克用]李克用이 [ 黃巢]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昭宗이 [ 晉王]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存勖]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 莊宗]莊宗이다. [ 蜀王]蜀王은 [ 王建]王建이니, 唐나라 昭宗이 [ 蜀王]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 莊宗]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 孟知祥]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羸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 岐王][ 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 宋]이요 名은 [ 文通]이라 [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 昭宗]時에 封[ 岐王]하고 [ 唐莊宗]이 改封[ 秦王]이러니 至唐[ 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 梁이 以武安節度使[ 馬殷]으로 爲[ 楚王]하다 〈[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 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梁나라가 武安節度使[ 馬殷]馬殷을 [ 楚王]楚王으로 삼았다. - [ 馬殷]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 太祖]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以[ 吳王][ 鏐]로 爲吳越王하다 〈[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以淸海節度使[ 劉隱]으로 爲[ 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以威武節度使[ 王審知]로 爲[ 閩王]하다 〈[ 黃巢]亂에 [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以權知荊南留後[ 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九月에 [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9월에 [ 蜀王(王建)]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 梁遣保平節度使[ 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 李嗣昭] 閉城拒守어늘 [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에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寨塹【寨는 本作砦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而守之하다
○ 契丹 〈[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이라〉
契丹 - 耶律阿保機가 처음으로 건국한 元年이다. -
[戊辰]〈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 蜀高祖][ 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에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 高祖]高祖[ 王建]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正月에 [ 晉王][ 克用]이 薨하니 其子[ 存勖]이 嗣爲[ 晉王]하다 [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 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 周德威]【都指揮使라 】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 存勖]小名이라 】니 [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 克用]이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 巢]寇之平에 功爲第一이어늘 上源之變을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라 然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에 恥行墨勅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 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에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이 遠矣라 故로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는 蓋以此也니라
[史略 史評][ 胡氏]曰 喪不二事라 故로 春秋於背喪而卽戎者에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는 存亡繫焉일새 然後에 從權制而無避하니 此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라 若[ 李存勖]夾寨之戰을 君子深有取者는 與是類耳라 蓋夾寨는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라 使[ 存勖]이 於是時에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아 是以로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에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이 大矣로다
정월에 [ 晉王]晉王[ 李克用]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存勖]存勖이 뒤를 이어 [ 晉王]晉王이 되었다. [ 晉王]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 朱溫(朱晃)]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晉王]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周德威]周德威【[ 周德威]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 梁主(朱溫)]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 李亞子(李存勖)]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 李亞子]李亞子는 [ 李存勖]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李克用]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李克用]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 黃巢]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 蜀主]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 李存勖]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 李存勖]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 [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 晉王]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 淮南[ 張顥]【左牙指揮使라 】弑弘農[ 威王]【[ 威]는 [ 楊偓]諡也라 】하고 立其弟[ 隆演]하야 爲[ 留後]【[ 顥]與[ 徐溫]으로 弑[ 偓]이러니 [ 溫]復攻[ 顥]하야 殺之하니라 】하다 〈[ 楊行密]이 據淮南이러니 其子[ 偓]이 嗣爲[ 弘農郡王]하고 國號吳라 後爲[ 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 契丹 〈[ 耶律阿保機]改名[ 億]이라 二年이라〉
[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 梁主]遷都洛陽하다
[ 梁主]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三月에 梁淸海節度使[ 南平襄王][ 劉隱]이 卒하고 其弟[ 巖]이 襲位하다
○ 八月에 [ 燕王][ 守光]이 卽皇帝位하야 〈[ 劉仁恭]之子也니 據幽州하니라〉國號를 大燕이라하다
○ [ 晉王]이 聞[ 燕王][ 守光]稱帝하고 大笑曰 俟彼十年하야 吾當問其鼎矣【左傳에 [ 楚子]伐陸渾之戎하야 遂至于洛하고 觀兵于周郊하니 [ 定王]이 使[ 王孫滿]으로 勞[ 楚(王)[子]]어늘 [ 楚(王)[子]]가 問鼎大小輕重한대 對曰 在德이요 不在鼎이라 [ 桀]有昏德하야 鼎遷于殷하야 載祀六百하고 殷[ 紂]暴虐하야 鼎遷于周하니 德之休明이면 雖小必重이요 其姦回昏亂이면 雖大必輕이라 昔에 [ 成王]이 定鼎于郟鄏에 卜世三十이요 卜年七百이니 天所命也라 周德雖衰나 天命未改하니 鼎之輕重을 未可問也라하니라 】리라
[ 晉王]晉王은 燕王劉守光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春秋左傳》 宣公 3년에 [-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 定王]定王이 王孫滿으로 하여금 [-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王孫滿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桀王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紂王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 成王]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 契丹主] 〈五年이라〉
契丹主 - 5년이다. -
[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梁主]疾增甚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에 不意太原餘孽【目[ 晉王]也라 】이 更昌熾如此하니 吾觀其志不小라 天復奪我年하니 我死면 諸兒는 非彼敵也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哽咽하야 絶而復蘇하니라
[ 梁主]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 晉王(李存勖)]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 梁[ 高季昌]【荊南節度使라 梁錫爵[ 渤海王]이러니 後改名[ 季興]하니라 唐[ 莊宗]이 封[ 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이 潛有據荊南之志하야 乃奏築江陵外郭하야 增廣之하다
梁나라 [ 高季昌]高季昌이【[ 高季昌]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 渤海王]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 季興]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 莊宗(李存勖)]莊宗(李存勖)이 [ 南平王]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 梁[ 郢王][ 友珪]【梁[ 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 梁主]愛假子[ 友文]之妻하야 將立[ 友文]爲嗣라가 遂爲[ 友珪]所弑하니라 】의 僕夫[ 馮廷諤]이 弑[ 梁主]어늘 [ 友珪]卽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 朱溫]이 爲[ 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에 刑虐不悛하고 戕害無辜하며 不念聚麀之恥하야 釀成[ 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梁나라 [ 郢王]郢王[ 朱友珪]朱友珪의【[ 郢王]郢王[ 朱友珪]朱友珪는 梁나라 [ 太祖]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 梁主]梁主가 養子인 [ 朱友文]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 朱友文]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 朱友珪]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마부인 [ 馮廷諤]馮廷諤이 [ 梁主]梁主를 시해하자, [ 朱友珪]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朱溫]朱溫이 [ 黃巢]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 朱溫]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 朱友珪]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 契丹主 〈耶律億六年이라 其弟[ 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不治하니라〉
均王
[ 均王]※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 初名은 [ 友貞]이러니 更名[ 瑱]하니 [ 朱溫]第三子라 諡曰[ 末帝]라
[ 均王]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 均王]均王은 처음 이름이 [ 友貞]友貞이었는데 이름을 [ 瑱]瑱으로 고쳤으니, [ 朱溫]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 末帝]末帝라 하였다.
[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 梁主][ 瑱]乾化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 梁主]梁主[ 朱瑱]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梁[ 趙巖]【駙馬都尉이니 尙[ 太祖]女[ 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이어늘 [ 均王][ 友貞]이 密與之謀誅[ 友珪]할새 [ 巖]曰 此事成敗는 在招討[ 楊令公]【[ 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 楊師厚]曰 [ 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 師厚]乃遣其將[ 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 袁象先]【親軍都指揮使니 乃[ 太祖]之甥也라 其父[ 敬初]는 尙[ 太祖]妹[ 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하다 庚寅旦에 [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 友珪]聞變하고 與妻[ 張氏]와 及[ 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 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 廷諤]亦自殺이라 [ 象先], [ 巖]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 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 鍠]하고 又更名[ 瑱]하다
梁나라 [ 趙巖]趙巖이【[ 趙巖]趙巖은 駙馬都尉이니, [ 太祖]太祖의 딸인 [ 長樂公主]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 均王]均王[ 朱友貞]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 朱友珪]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 趙巖]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楊令公(楊師厚)에게【楊師厚(楊令公)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均王]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楊師厚를 설득하기를 “[ 郢王(朱友珪)]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袁象先과【袁象先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 太祖]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 袁敬初]는 [ 太祖]太祖의 누이인 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도모하게하였다.
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袁象先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 朱友珪]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 張氏]張氏 및 [ 馮廷諤]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馮廷諤]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 張氏]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 馮廷諤]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袁象先과 [ 趙巖]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 均王]均王을 맞이하자, [ 均王]均王이 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 鍠]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 瑱]瑱으로 고쳤다.
○ 晉[ 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 劉仁恭]及其妻妾하니 [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 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 王緘]하야 草露布【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凝]重이라하니라 】한대 [ 緘]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晉나라 [ 李嗣源]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 晉王]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 晉王]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 晉王]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 晉王]晉王이 掌書記[- 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宋均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 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 契丹主弟[ 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二月에 梁魏博軍이 亂하야 劫節度使[ 賀德倫]하고 求援於晉이어늘 [ 晉王]이 引兵하야 進據臨淸하야 與[ 劉鄩]夾河爲營하다
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 賀德倫]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 晉王]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劉鄩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 [ 梁主]疎忌宗室하고 專任[ 趙巖]及[ 德妃]【帝之母也 】兄弟[ 張漢鼎], [ 漢傑]과 從兄弟[ 漢倫], [ 漢融]하야 咸居近職하야 參預謀議하다 [ 巖]等이 依勢弄權하야 賣官鬻獄하고 離間舊將相하니 [ 敬翔], [ 李振]이 雖爲執政이나 所言이 多不用이라 [ 振]이 每稱疾不預事하야 以避[ 趙], [ 張]之族하니 政事日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 梁主]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 趙巖]趙巖 및 德妃의【德妃는 皇帝의 어머니이다.】형제인 [ 張漢鼎]張漢鼎‧[ 張漢傑]張漢傑과 종형제인 [ 張漢倫]張漢倫‧[ 張漢融]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 趙巖]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敬翔과 李振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李振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 趙巖]趙巖과 [ 張氏]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春二月에 [ 梁主]屢趣(促)[ 劉鄩]하야 與[ 晉王]戰이러니 [ 鄩]兵이 大敗라 [ 王檀]【匡國節度使라 】이 密疏하야 請發關西兵하야 襲晉陽한대 [ 梁主]從之하야 兵至晉陽하야 夜急攻之하니 城幾陷者數四라 昭義節度使[ 李嗣昭] 遣牙將[ 石君立]하야 救之하니 梁兵死傷者什二三이라 [ 王檀]이 引兵大掠而還하니 [ 梁主]聞[ 劉鄩]敗하고 又聞[ 王檀]無功하고 歎曰 吾事去矣라하니라
봄 2월에 [ 梁主]梁主가 여러 번 劉鄩을 재촉하여[ 晉王]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劉鄩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王檀]이【[- 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 梁主]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李嗣昭가 牙將[- 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 梁主]梁主는 劉鄩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 契丹主改元神冊하다
契丹主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春에 晉兵이 侵掠至鄆, 濮而還이어늘 梁[ 敬翔]이 上疏曰 國家連年喪師에 疆域日蹙이라 陛下居深宮之中하야 所與計事者는 皆左右近習이니 豈能量敵國之勝負乎잇가 先帝之時에 奄有河北하고 親御豪傑之將호되 猶不得志【不得志는 謂不得志于晉이라 】어시늘 今敵至鄆州로되 陛下不能留意하시니 必若乏才인댄 乞於邊陲自效하노이다 疏奏에 [ 趙], [ 張]之徒 言[ 翔]怨望이라하니 [ 梁主]遂不用하다
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敬翔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이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상소문을 올린 뒤에 [ 趙巖]趙巖과 [ 張漢鼎]張漢鼎의 무리가 “敬翔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 梁主]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吳[ 徐知誥] 爲淮南節度行軍副使하다 〈[ 知誥]後簒吳하니 是爲南唐이라〉[ 知誥]事[ 吳王]盡恭하고 接士大夫以謙하며 御衆以寬하고 約身以儉이라 以[ 吳王]之命으로 悉蠲天祐十三年以前逋稅【欠負官物과 亡匿不還을 皆謂之逋라하니라 】하고 餘俟豐年하야 乃輸之하고 求賢才, 納規諫하고 除姦猾, 杜請託하니 於是에 士民이 翕然歸心하야 雖宿將悍夫라도 無不悅服이러라 以[ 宋齊丘]로 爲謀主하니 由是로 江淮間에 曠土【空曠不耕之土也라 】盡闢하고 桑柘滿野하야 國以富强하니라
吳나라 徐知誥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徐知誥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가 吳王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吳王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 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 蜀乾德元年이요 [ 吳宣王][ 楊隆演]武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吳[ 徐溫]【少販鹽이러니 及[ 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 行密]爲[ 吳王]하니라 】이 自以權重而位卑라하야 勸[ 吳王]建國稱帝而治러니 [ 吳王]이 不許하다 夏에 卽吳國王位【[ 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 溫]爲大丞相하고 [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하다
○ [ 蜀主][ 王建]이 殂하니 太子[ 衍]이 卽皇帝位하다
[ 蜀主]蜀主[ 王建]王建이 죽으니, 太子[ 衍]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 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이 擊[ 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橫衝은 軍都之號也라 】[ 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 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 敬瑭], [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 知遠]은 爲[ 漢高祖]하니라〉
[ 晉王]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 石敬瑭]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壖은 而緣反(연)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 石敬瑭]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 劉知遠]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 石敬瑭]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王氏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 石敬瑭]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石敬瑭]石敬瑭과 [ 劉知遠]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 石敬瑭]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 高祖]高祖가 되었고, [ 劉知遠]劉知遠은 漢나라 [ 高祖]高祖가 되었다.-
○ 契丹이 城遼陽하다
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歷年圖曰 [ 太祖]始以[ 黃巢]降將으로 秉旄宣武【[ 僖宗]이 以[ 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하고 逞其詐力하야 蠶食諸夏하야 地廣兵彊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 均王]은 膏粱之子로 材不過人이어늘 棄[ 敬翔], [ 王彦章]하고 而用[ 趙巖], [ 張歸霸]하야 以與[ 莊宗]爲敵하니 能無亡乎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 太祖(朱溫)]太祖(朱溫)는 처음에 [ 黃巢]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 僖宗]이 [ 朱全忠]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 均王]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敬翔과 王彦章을 버리고 [ 趙巖]趙巖과 [ 張歸霸]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 莊宗]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
後唐紀
莊宗
後唐紀
[ 莊宗]※在位三年이요 壽三十五라
※ 名은 [ 存勖]이니 附唐屬籍하야 姓[ 李]라 本西突厥種이니 姓[ 朱邪氏]라 父[ 克用]이 立功於唐하야 封[ 晉王]이러니 後滅梁하고 復稱唐하니라
[ 莊宗]莊宗은 재위가 3년이고 壽가 35세이다.
[ 莊宗]莊宗은 이름이 [ 存勖]存勖이니, 唐나라의 屬籍(왕실의 족보)에 붙여 姓을 李氏라 하였다. 본래 西突厥 종족이니, 姓은 [ 朱邪氏]朱邪氏이다. 아버지[ 李克用]李克用이 唐나라에 공을 세워 [ 晉王]晉王에 봉해졌는데, 뒤에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唐이라고 칭하였다.
[癸未]〈岐稱唐天祐二十年하고 梁龍德三年은 盡十月하고 四月以後는 唐[ 莊宗][ 李存勖]同光元年이라 ○ 是歲에 梁亡하고 晉稱唐하니 凡五國, 四鎭이라〉
계미(923) - 岐나라는 唐나라 天祐 20년을 칭하였고, 梁나라 龍德 3년은 10월에 끝나고 4월 이후는 唐나라 [ 莊宗]莊宗[ 李存勖]李存勖의 同光 元年이다. ○ 이해에 梁나라가 망하고 晉나라가 唐나라를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夏四月에 [ 晉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唐이라하다 [ 梁主]遣[ 段凝]【內莊宅使라 [ 凝]妹爲梁[ 太祖]美人이라 故로 親信之러니 後率精兵五萬하고 降唐하니라 】하야 監大軍於河上하니 [ 敬翔], [ 李振]이 屢請罷之한대 [ 梁主]曰 [ 凝]未有過하니라 [ 振]曰 俟其有過면 則社稷危矣리이다 [ 凝]이 乃厚賂[ 趙], [ 張]하야 求爲招討使어늘 [ 翔], [ 振]이 力爭하야 以爲不可라호되 [ 趙], [ 張主]之하야 竟代[ 王彦章]【敵號[ 王鐵槍]이라 [ 趙], [ 張]等이 惡[ 彦章]하야 相與協力傾之하다 [ 段凝]이 素疾[ 彦章]하고 諂附[ 趙], [ 張]하야 百方沮撓하야 惟恐有功이라 每捷奏至에 [ 趙], [ 張]이 悉歸功於[ 凝]하야 竟代[ 彦章]하다 已而요 梁亡하니 [ 凝]이 率精兵降(后)[唐]하야 奏[ 趙巖], [ 張漢傑]이 竊弄權兵하야 殘害群生하니 請族之하소서 [ 凝]賂[ 劉后]하야 以求恩寵하니 [ 莊宗]賜姓名曰[ 李紹欽]이라하고 以爲秦寧節度使하니라 】하야 爲北面招討使하니 於是에 宿將憤怒하고 士卒亦不服하니라
여름 4월에 [ 晉王]晉王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唐이라 하였다. [ 梁主]梁主가 段凝을 보내어【段凝은 內莊宅使이다. 段凝의 누이가 梁나라 [ 太祖]太祖의 美人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는데, 뒤에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였다.】河水 가에서 大軍을 감독하게하니, 敬翔과 李振이 여러 번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 梁主]梁主가 말하기를 “段凝이 아직 잘못한 것이 있지 않다.”라고 하자, 李振이 말하기를 “그가 잘못하기를 기다리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段凝이 마침내 [ 趙巖]趙巖과 [ 張漢鼎]張漢鼎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어招討使가 되기를요구하였다. 敬翔과 李振이 강력히 간쟁하여불가하다고하였으나[ 趙巖]趙巖과 [ 張漢鼎]張漢鼎이 이것을 주장해서 끝내 王彦章을 대신하여【적들이 王彦章을 王鐵槍이라고 불렀다. [ 趙巖]趙巖과 [ 張漢傑]張漢傑 등이 王彦章을 미워하여 서로 힘을 합쳐 모함하였다. 段凝이 평소 王彦章을 미워하고 [ 趙巖]趙巖과 [ 張漢傑]張漢傑에게 아첨하여 백방으로 王彦章을 저지해서 王彦章이 행여 공을 세울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승전보가 이를 때마다 [ 趙巖]趙巖과 [ 張漢傑]張漢傑이 段凝에게 공을 모두 돌려 끝내 段凝으로 하여금 王彦章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윽고 梁나라가 망하니, 段凝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唐나라에 항복하여 아뢰기를 “[ 趙巖]趙巖과 [ 張漢傑]張漢傑이 병권을 훔쳐 농간하여 生民들을 잔인하게 해쳤으니, 멸족시키소서.”라고 하였다. 段凝이 [- 劉后]에게 뇌물을 바쳐 은총을 구하니, [ 莊宗]莊宗이 李紹欽이라는 姓名을 하사하고 秦寧節度使로 임명하였다.】北面招討使에 임명하니, 이에 老將들이 분노하였고 사졸들 또한 복종하지않았다.
○ 八月에 梁右先鋒指揮使[ 康延孝] 帥百餘騎하고 來奔이어늘 [ 唐主]屛人하고 問[ 延孝]以梁事한대 對曰 梁朝는 地不爲狹하고 兵不爲少나 然迹其行事컨댄 終必敗亡이요 近에 又聞欲數道出兵하야 決以十月大擧라하니 臣이 竊觀梁兵컨대 聚則不少요 分則不多니 願陛下養勇蓄力하야 以俟其分兵하야 帥精騎五千하고 自鄆州로 直抵大梁하야 擒其僞主하시면 旬月之間에 天下定矣리이다 [ 唐主]大悅하다
8월에 梁나라 右先鋒指揮使康延孝가 백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도망해오자, [ 唐主]唐主가 사람을 물리치고康延孝에게 梁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梁나라 조정은 영토가 좁지도 않고 병력이 적지도 않으나 그 행하는 일을 살펴보면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근래에 또 듣자하니, 여러 길로 출병하여 10월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唐나라를 進攻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신이 적이 梁나라 군대를 살펴보건대, 한 곳에 모이면 적지 않고 분산하면 많지 않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용맹을 기르고 힘을 축적하여 그들이 병력을 분산하기를 기다려서 정예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鄆州로부터 곧바로 大梁에 이르러 괴뢰 군주를 사로잡는다면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 하니, [ 唐主]唐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 [ 唐主]聞梁人欲大擧數道入寇【聞於[ 康延孝]之言也라 】하고 召諸將會議하니 [ 郭崇韜]【樞密使라 】對曰 [ 段凝]이 本非將才라 不能臨機決策하니 無足可畏요 降者皆言大梁無兵이라하니 陛下若留兵守魏하야 固保楊劉【地名이라 】하고 自以精兵으로 與鄆州合勢하야 長驅入汴이면 彼城中旣空虛라 必望風自潰하리니 苟僞主授首하면 則諸將自降矣리이다 [ 唐主]曰 此正合朕意로다 丈夫得則爲王이요 失則爲虜니 吾行決矣로라 冬十月에 [ 唐主]以大軍濟河하야 至鄆州하야 遇梁兵하야 一戰敗之하고 追至中都하야 圍其城하니 城無守備라 少頃에 梁兵이 潰圍出이어늘 擒[ 王彦章]하야 斬之하다
[ 唐主]唐主는 梁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여러 길로 들어와 침략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는【[通鑑要解] 唐主聞梁人欲大擧數道入寇:[ 唐主]唐主가 康延孝의 말을 들은 것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회의하니, 郭崇韜가【郭崇韜는 樞密使이다.】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段凝은 본래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결단하지 못하니 두려워할 만한 상대가 못 되며, 梁나라에서 항복해 온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大梁에는 군대가 없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군대를 남겨두어 魏州를 지켜 楊劉를【楊劉는 지명이다.】 굳게 막고, 스스로 정예병을 거느리고 鄆州와 합세하여 계속 몰아쳐서 汴京(大梁)으로 쳐들어간다면 저들의 성안은 이미 텅 비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서 스스로 궤멸될 것이니, 만약 괴뢰 군주가 목을 바친다면 여러 장수들이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
이에 [ 唐主]唐主가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나의 뜻과 부합한다. 대장부가 잘되면 왕이 되고 잘못되면 포로가 되는 것이니, 나는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하였다.
겨울 10월에 [ 唐主]唐主가 大軍을 거느리고黃河를 건너鄆州에 이르러서梁나라 군대를 만나 一戰에 패퇴시키고, 추격하여中都에 이르러서 그 성을 포위하니, 성에 수비가 없었다. 잠시 후에 梁나라 군대가 포위를 뚫고 나오자, 王彦章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 康延孝]請亟取大梁한대 [ 李嗣源]【唐遣[ 嗣源]하야 取梁鄆州하고 以[ 嗣源]爲節度使하니라 】曰 兵貴神速하니 今[ 彦章]就擒을 [ 段凝]이 必未之知라 此去大梁至近하고 前無山險하니 方陳【陳은 讀曰陣이니 方陣은 竝陣而進也라 】橫行하야 晝夜兼程이면 信宿【再宿曰信宿이라 】可至하리이다 [ 段凝]이 未離河上하야 [ 友貞]이 已爲吾擒矣리니 [ 延孝]之言이 是也니이다 [ 唐主]從之하야 令下에 諸軍이 皆踊躍願行이러라 [ 梁主]使人促[ 段凝]軍이러니 旣辭에 皆亡匿이라 [ 梁主]日夜涕泣하고 不知所爲하며 置傳國寶於臥內라가 忽失之하니 已爲左右竊之하야 迎唐軍矣러라 [ 梁主]謂[ 皇甫麟]【控鶴都指揮使라 】曰 [ 李氏]는 吾世讐라 理難降首【降은 平聲이니 言迎降以自首也라 一說에 降은 讀如字하니 低頭爲之下也라하니라 】요 不可俟彼刀鋸라 吾不能自裁하니 卿可斷吾首하라 [ 麟]泣하고 遂弑[ 梁主]하고 因自殺하다
康延孝가 大梁을 속히 점령할 것을 청하자, [ 李嗣源]李嗣源이【唐나라가 [ 李嗣源]李嗣源을 보내어 梁나라 鄆州를 점령하고 [ 李嗣源]李嗣源을 節度使로 임명하였다.】 말하기를 “군대는 신속함을 소중히 여기니, 지금 王彦章이 사로잡힌 것을 段凝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곳은 大梁과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앞에 險阻한 山川이 없으니, 方陣(方形의 陣)을 치고【陳은 陣으로 읽으니, 方陣은 나란히 陣을 치고 전진하는 것이다.】 횡행해서 밤낮으로 행군 속도를 배가한다면 이틀 밤이면【이틀밤을 묵는 것을 信宿이라 한다.】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니, 段凝이 河水 가를 떠나기 전에 [ 朱友貞]朱友貞은 이미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康延孝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 唐主]唐主가 그의 말을 따라 명령을 내리자, 諸軍들이 모두 기뻐 날뛰며 출전하기를 원하였다.
[ 梁主]梁主가 사람을 시켜 段凝에게 군대를 출동할 것을 재촉하였는데, 段凝이 하직하자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 梁主]梁主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줄을 몰랐으며, 傳國寶를 침실 안에 두었다가 갑자기 잃어버리니, 이미 좌우 사람들이 훔쳐가서唐나라 군대를 맞이하였다. [ 梁主]梁主가 [ 皇甫麟]皇甫麟에게【[ 皇甫麟]皇甫麟은 控鶴都指揮使이다.】 이르기를 “李氏는 우리와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도리상 머리를 숙이고 항복할 수도 없고,【降(항)은 平聲이니,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 자수하는 것을 말한다. 一說에 降(강)은 본자대로 읽으니, 머리를 숙여 그의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칼과 톱(刑具)을 기다릴 수도 없다. 나는 용기가 없어 자결할 수 없으니, 卿이 나의 목을 자르라.” 하였다. 이에 [ 皇甫麟]皇甫麟이 울면서 마침내 [ 梁主]梁主를 시해한 다음 인하여 자살하였다.
○ [ 梁主]爲人이 溫恭儉約하야 無荒淫之失호되 但寵信[ 趙], [ 張]하야 使擅威福하고 疎棄[ 敬][ 李]【[ 敬翔], [ 李振]이라 】舊臣하야 不用其言하야 以至於亡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 均王]이 誅[ 友珪]而嗣立하야 以義討賊하니 成功固宜나 然梁之稔禍가 非一日이라 天將廢之하니 誰能興之리오 況[ 均王]은 [ 膏粱]之子로 才不逮人하야 寵信[ 趙張]하고 疏棄[ 敬][ 李]하며 賣官鬻爵하야 貨賂公行하야 政事不修하고 威權日去라 唐兵一麾에 宗廟遽滅하니 是는 非李亞子用兵之善이요 乃梁之自不善耳라 夫朱三이 起自降賊하야 遽擁旌旗하니 小人負乘에 貪欲無厭이라 圍迫天子하고 害朝臣, 殺太后하며 勦諸王, 殺(弑)二帝하야 移唐鼎이라 跡其罪戾하면 盡南山之竹이라도 有不足書者니 自[ 王莽]以來로 一人而已요 而凶殘淫穢 抑又甚焉하니 再世而亡은 非不幸也요 宜也니라
[ 梁主]梁主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고 검약하여 酒色에 빠지는 잘못이 없었으나, 다만 [ 趙巖]趙巖과 [ 張漢鼎]張漢鼎을 총애하고 신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위엄과 복을 멋대로 행사하게 하고 敬翔과 李振 등【敬李는 敬翔과 李振이다.】[ 太祖]太祖의 옛 신하들을 소원히 하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아 멸망에 이르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均王]均王이 [ 朱友珪]朱友珪를 죽이고 뒤를 이어 즉위하여 의리로써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성공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梁나라가 禍를 키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므로 하늘이 장차 이를 폐하려 한 것이니, 누가 일으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 均王]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子弟로 재주가 보통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하여 [ 趙巖]趙巖과 [ 張漢鼎]張漢鼎을 총애하여 신임하고 敬翔과 李振을 소원하게 대하여 버렸으며, 매관매작을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정사가 닦여지지 못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떠나갔다.
그리하여 당나라(後唐) 군대가 한번 지휘함에 종묘사직이 갑자기 멸망당하였으니, 이는 [ 李亞子(李存勖)]李亞子(李存勖)가 用兵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요, 梁나라가 스스로 잘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 朱三(朱溫)]朱三(朱溫)이 항복한 역적으로서 일어나 하루아침에 갑자기 藩鎭의 符節을 소유하니, 지고 있어야 할 小人이 君子의 수레를 탐에 욕심을 부림이 끝이 없었다. 그리하여 天子를 포위하여 압박하였으며 朝臣을 살해하고[ 太后]太后를 죽였으며 여러 왕을 죽이고 두 황제를 시해하여 唐나라의 國統을 빼앗았다. 그의 죄를 살펴보면 南山의 대나무를 다 베어 기록한다 해도 다 쓸 수가 없으니 王莽 이래로 한 사람일 뿐이요, 흉포하고 잔악하고 음란함은 王莽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두 代 만에 망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 [ 唐主]遣使하야 以滅梁告吳, 蜀하니 二國이 皆懼라 [ 嚴可求]曰 聞[ 唐主]始得中原에 志氣驕滿하고 御下無法하니 不出數年에 將有內變하리니 吾但當卑辭厚禮하야 保境安民以待之耳라하니라 [ 唐主]幼善音律이라 故로 [ 伶人]【伶은 樂官也니 伶倫은 古樂師라 故로 後世多號樂官爲伶官하니라 】이 多有寵하야 常侍左右하고 [ 唐主]或時自傅粉墨하고 與優人으로 共戲於庭하야 以悅[ 劉夫人]하니 優名謂之[ 李天下]【乃以優人自許하야 而自號曰[ 李天下]라하니라 】라 諸伶이 出入宮掖하야 侮弄縉紳하니 群臣이 憤嫉호되 莫敢出氣러라
[ 唐主]唐主가 사신을 보내어 梁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吳나라와 蜀나라에 알리니, 두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吳나라의 嚴可求가 말하기를 “臣이 들으니, [ 唐主]唐主가 처음 中原을 얻자 뜻과 기운이 교만하고 아랫사람을 다스림에 법도가 없다고 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內變(內亂)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을 후하게 하여 국경을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하였다.
[ 唐主(李存勖)]唐主(李存勖)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잘하였다. 그러므로 광대들 중에【伶은 악관이니, 伶倫은 옛날 악사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대부분 악관을 伶官이라고 칭하였다.】 총애 받는 자가 많아서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 唐主]唐主가 때때로 스스로 얼굴에 분과 먹을 바르고 광대들과 뜰에서 희롱하여 劉夫人을 기쁘게 하니, [ 唐主]唐主가 광대로 자처하여 광대 이름을 李天下라 하였다.【唐主가 마침내 광대로 자처하여 스스로 李天下라고 칭하였다.】 여러 광대들이 궁중을 출입하면서 사대부들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니, 여러 신하들이 분노하고 미워하였으나 감히 노여운 기운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 [ 張全義]【河南尹이니 初名은 [ 言]이라 唐[ 昭宗]이 賜名[ 全義]하고 梁[ 太祖]가 賜名[ 宗奭]이러니 入朝于唐하야 復名[ 全義]하니라 】請[ 唐主]遷都洛陽이어늘 從之하다
[ 張全義]張全義가【[ 張全義]張全義는 河南尹이니 처음 이름은 [ 言]言이다. 唐나라 昭宗이 [ 全義]全義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梁나라 [ 太祖]太祖가 [ 宗奭]宗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는 다시 [ 全義]全義라고 이름하였다.】[ 唐主]唐主에게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 그의 말을 따랐다.
○ 契丹 〈天贊二年이라〉
契丹 - 天贊 2년이다. -
[甲申]〈後唐同光二年이라 ○ 是歲에 岐降後唐하니 凡四國, 四鎭이라〉
갑신(924) - 後唐同光 2년이다. ○ 이해에 岐王이 後唐에 항복하니,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正月에 唐以[ 岐王]【[ 李茂貞]이라 】으로 改封[ 秦王]하다
○ 二月에 [ 唐主]祀南郊하고 大赦러니 [ 郭崇韜]首獻勞軍錢【唐分天下財賦하야 爲內外府하야 州縣上供者는 入外府하야 充經費하고 方鎭貢獻者는 入內府하야 充宴賜라 於是에 外府虛竭하고 內府山積이러니 及是에 乏勞軍錢이어늘 [ 崇韜]言於上曰 臣已傾家所有하야 以助大禮하니 願陛下亦出內府財하야 以賜有司하소서 [ 唐主]黙然久之라가 曰 吾晉陽에 自有儲積하니 可令輦取以相助라하니라 】十萬緡하다 [ 唐主]內府之財山積호되 不肯給賜하고 曰 吾晉陽에 自有儲積하니 可令租庸【租庸使는 主運輸하니라 】輦取以相助라하니 於是에 軍士皆不滿望하야 始怨恨有離心矣러라
2월에 [ 唐主]唐主가 南郊에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는데, 郭崇韜가 첫 번째로 勞軍錢(군사들을 위로하는 돈)【唐나라가 천하의 재물을 內府와 外府로 나누어 州縣에서 上供한 것은 外府에 넣어 국가의 經費에 충당하고, 方鎭에서 貢物로 바친 것은 內府에 넣어 임금의 宴會와 賞賜에 충당하였다. 이에 外府는 텅 비어 고갈되고 內府는 물건이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勞軍錢이 부족하자, 郭崇韜가 上에게 아뢰기를 “臣이 이미 소유한 家産을 모두 기울여 郊祀의 큰 禮를 도왔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도 內府의 재물을 내어 有司에게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 唐主]唐主가 묵묵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 하였다.】 10만 緡을 바쳤다. [ 唐主]唐主는 內府의 재물이 산처럼 쌓였으나 군사들에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晉陽에 따로 저축한 재물이 있으니, 租庸使로 하여금【租庸使는 실어 나르는 것을 주관한다.】 輦으로 실어와서 경비를 돕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에 차지 못하여 비로소 원망하고 한하여 배반할 마음이 있었다.
○ 唐[ 郭崇韜]位兼將相【[ 崇鞱]爲樞密使하고 加侍中領成德節樞密使하니 天下事無所不關이라 】하고 復領節旄하야 以天下爲己任하니 權侔人主라 由是로 嬖倖이 疾之於內하고 勳舊怨之於外하니라
○ 四月에 秦[ 忠敬王][ 李茂貞]卒할새 遺奏하야 以其子[ 繼曮]으로 權知鳳翔軍府事하다
○ 契丹 〈[ 肖阿古只] 寇唐幽蔚州하니라〉唐遣[ 李嗣源]하야 鎭成德禦之하다
契丹 - [ 肖阿古只]肖阿古只가 唐나라 幽州와 蔚州를 침략하였다. - 唐나라가 [ 李嗣源]李嗣源을 보내어成德에 주둔하여막게하였다.
[乙酉]〈後唐同光三年이라 ○ 蜀咸康元年이요 漢白龍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四鎭이라〉
을유(925) - 後唐同光 3년이다. ○ 蜀나라 咸康 元年이고, 漢나라 白龍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네 鎭이다.-
[ 唐主]性剛好勝하야 不欲權在臣下하야 入洛之後에 信伶宦之讒하고 頗疎忌宿將하니라
[史略 史評][ 胡氏]曰 [ 孔子]曰 欲速則不達이요 見小利則大事不成이라하시니 [ 晉王]以夷狄賜姓하니 豈親宗室之比리오 [ 朱氏]未滅에 偏霸大國하야 周匝三垂(陲)하니 存勖戰克攻取之才 固爲群雄所服이나 而輔世長民之德은 天下未聞也라 於是에 而遽登宸極하니 則欲速見小利라 是以로 其行不達하야 而大事不成也하니라
[ 唐主]唐主는 성품이 굳세고 이기기를 좋아하여 권력이 신하에게 있는 것을 싫어해서 洛陽으로 들어온 뒤에는 광대와 환관들의 참언을 믿고 자못 옛 장수들을 소원히하고의심하였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다. [ 晉王]晉王이 오랑캐로서 李氏姓을 하사받았으니, 어찌 친족의 종실에 비할 수 있겠는가. [ 朱氏]朱氏가 멸망하기 전에 편벽되이 一方을 점거하고 大國에 霸者가 되어서 세 변방을 포위하여 차지하였으니, [ 李存勖]李存勖이 싸워서 승리하고 공격하여 점령한 재주는 진실로 群雄에게 복종을 받았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돕고 백성을 기른 德은 천하에 알려지지 못하였다. 이에 갑자기 帝位에 올랐으니, 속히 하고자 하고 작은 이익을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달성하지 못하고 큰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九月에 [ 唐主]與宰相으로 議伐蜀하야 以[ 魏王][ 繼岌]【[ 莊宗]長子라 初에 [ 唐主]遣宦官[ 李從襲]等하야 從[ 繼岌]하니 雖爲都統이나 軍中制置 皆出[ 崇韜]하야 將吏賓客이 趨走盈庭이로되 而都統牙門이 索然하니 [ 從襲]等이 恥之하다 [ 崇韜]素疾宦官하야 嘗密謂[ 繼岌]曰 大王他日에 (騍)[騬]馬도 亦不可乘이어든 況任宦官이리오 宜盡去之하고 專用(土)[士]人하라하니 由是로 宦官이 皆切齒하다 及[ 崇韜]不出迎[ 延嗣]하야 [ 〈延〉嗣]怒하니 [ 從襲]曰 [ 郭公]專權하고 其子[ (延)[廷]誨] 日與驍將狎飮하며 指天畫地니이다 近聞自其父請表己以爲蜀帥라하니 一朝有變이면 吾屬이 不知委骨何地니이다 [ 延嗣]歸하야 以語(對)[ [劉]后]하고 后又訴於主하야 請早救[ 繼岌]하다 前此에 [ 唐主]聞蜀人請[ 崇韜]爲帥하고 已不平이러니 至是에 不能無疑라 遣宦官[ 馬彦珪]하야 詣成都한대 [ 彦珪]見(對)[劉]后하고 曰 蜀中事勢는 憂在朝夕이어늘 安能禀命二千里乎아하니 后復言之라 [ 唐主]曰 傳聞之言은 未知虛實이니라 后退하야 自爲敎與[ 繼岌]하야 令殺[ 崇韜]하다 [ 繼岌]將發에 [ 彦珪]至하야 以敎示之하니 [ 繼岌]曰 彼無釁端이어늘 安可爲此리오 且主上無勅이어늘 獨以皇后敎로 殺招討使可乎아 [ 從襲]等泣하고 相與陳利害하니 [ 繼岌]從之하다 (騍)[騬]音(果)[繒]이니 犗馬也라 】으로 充西川四面行營都統하고 [ 崇韜]로 充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하야 軍事를 悉以委之하다 戊申에 大軍이 西行入散關하야 倍道而進하니 [ 王承捷]【武興節度使라 】이 以鳳, 興, 文, 扶四州印節로 迎降하고 自餘城鎭은 皆望風款附라 遂進兵逼成都한대 [ 蜀王]이 輿櫬銜璧【[ 王氏]曰 古者相見之禮에 皆有所執以爲贄하니 公侯伯子男은 執玉이라 [ 賈逵]曰 銜璧者는 蓋以手縛于後하야 不能執璧이라 故로 銜之라 】하고 出降하니 大軍이 入成都하다 [ 崇韜]禁軍士侵掠하야 市不改肆하니 自出師로 至克蜀히 凡七十日이러라
9월에 [ 唐主]唐主가 재상들과 蜀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고서 魏王繼岌을【繼岌은 [ 莊宗]莊宗의 長子이다. 처음에 [ 唐主]唐主가 환관[- 李從襲] 등을 보내어 繼岌을 따르게 하였다. 繼岌이 비록 都統이 되었으나 군중의 制置가 모두 郭崇韜에게서 나와, 將吏(軍官)와 빈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뜰에 가득하였으나 都統의 아문은 쓸쓸하였으므로 [- 李從襲] 등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郭崇韜가 평소 환관을 미워하여 일찍이 은밀히 繼岌에게 말하기를 “大王은 후일에 騬馬(거세한 말)도 타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환관에게 맡기신단 말입니까? 마땅히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선비를 등용해야 합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모두 이를 갈며 그를 미워하였다. 郭崇韜가 환관인 [ 向延嗣]向延嗣를 나와서 맞이하지 않자 [ 向延嗣]向延嗣가 노여워하니, [- 李從襲]이 말하기를 “郭公이 권력을 독점하고 그 아들 [- 廷誨]가 날마다 용맹한 장수들과 친하여 술을 마시고 기고만장하여 위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로 땅에 긋곤 합니다. 근래에 들으니, 그의 아비가 表文을 올려 스스로 蜀 지방의 장수가 될 것을 청했다 하니, 하루아침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은 어디에 뼈를 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 向延嗣]向延嗣가 돌아가서 이것을 [- 劉后]에게 말하고, [- 劉后]가 또 [ 唐主]唐主에게 참소하여 繼岌을 일찌감치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 唐主]唐主는 蜀 지방 사람들이 郭崇韜를 장수로 삼을 것을 청한다는 말을 듣고 이미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심이 없지 못하였다. 이에 환관[- 馬彦珪]를 보내자, [- 馬彦珪]가 成都에 이르러서 [- 劉后]를 보고 말하기를 “蜀 지방은 事勢로 볼 때 조석간에 우환이 닥쳐오게 되었는데, 어찌 2천 리 밖의 명령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 劉后]가 다시 [ 唐主]唐主에게 말하였다. [ 唐主]唐主가 말하기를 “전해들은 말은 허실을 알 수 없다.” 하니, [- 劉后]가 물러가서 스스로 敎書를 만들어 〈[- 馬彦珪]로 하여금〉繼岌에게 주어 郭崇韜를 죽이게 하였다. 繼岌이 장차 출발하려 할 적에 [- 馬彦珪]가 이르러 敎文을 보이니, 繼岌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잘못한 단서가 없는데 어찌 이렇게 한단 말인가? 또 主上의 칙령이 없는데 오직 皇后의 교서로 招討使를 죽여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 李從襲] 등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함께 利害를 말하니, 繼岌이 그 말을 따랐다. 騬은 음이 繒이니 거세한 말이다.】西川四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고郭崇韜를 東北面行營都招討制置等使로 임명하여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戊申日(6월 18일)에 大軍이 서쪽으로 출동하여散關으로 들어가서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전진하니, [- 王承捷]이【[- 王承捷]은 武興節度使이다.】鳳州‧興州‧文州‧扶州 네 州의 印信 및 武興節度使의 印信과 旌節을 가지고 大軍을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그 나머지 城鎭도 모두 소문만 듣고 歸附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전진하여 成都를 핍박하였는데, [ 蜀王]蜀王이 관을 수레에 싣고 입에 구슬을 물고【王氏가 말하였다. “옛날의 상견례에는 모두 손에 잡고서 禮物로 삼는 것이 있었으니, 公‧侯‧伯‧子‧男은 옥을 잡는다. 賈逵가 말하기를 ‘구슬을 문다는 것은 손을 뒤로 묶어서 구슬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입에 문 것이다.’ 하였다.”】 나와서 항복하니, 大軍이 成都로 들어갔다. 郭崇韜가 군사들에게 침략과 노략질을 금지하여 시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교역하니, 출병한 뒤로부터 蜀을 점령하기까지 모두 70일이 걸렸다.
○ 十二月에 [ 閩王][ 審知]卒하니 子[ 延翰]이 自稱[ 威武留後]하다
○ 時에 成都雖下나 而蜀中盜賊群起하야 布滿山林이라 [ 崇韜]恐大軍旣去에 更爲後患하야 命[ 任圜], [ 張筠]하야 分道招討하니 以是로 淹留未還이라 [ 唐主]遣宦者[ 向延嗣]하야 促之어늘 [ 崇韜]待之倨러니 [ 延嗣]歸言호되 [ 崇韜]專權하니 王이 寄身於虎狼之口니이다 [ 唐主]遣[ 馬彦珪]하야 馳詣成都하야 觀[ 崇韜]去就할새 皇后自爲敎하야 與[ 繼岌]하야 令殺[ 崇韜]하고 以[ 孟知祥]으로 爲西川節度使하다
이때 成都가 비록 함락되었으나 蜀 지방에는 도둑이 떼 지어 일어나서 山林에 가득하였다. 郭崇韜는 대군이 이미 떠나간 다음 다시 후환이 될까 걱정하여 任圜과 [ 張筠]張筠에게 명해 길을 나누어 가서 토벌하게하니, 이 때문에 지체하고 돌아오지못하였다. [ 唐主]唐主가 宦官인 [ 向延嗣]向延嗣를 郭崇韜에게 보내어 빨리 돌아오라고재촉하였는데, 郭崇韜가 [ 向延嗣]向延嗣를 매우 거만하게 대하자, [ 向延嗣]向延嗣가 돌아와 말하기를 “郭崇韜가 권력을 독단하니, 왕은 호랑이의 입에 몸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 [ 契丹主] 〈[ 億]이 丙戌年에 卒于扶餘하니 廟號[ 太祖皇帝]라 是年에 改天顯하고 次子[ 德光]立하니 是爲[ 太宗]하니라〉
明宗
[ 明宗]※在位八年이요 壽六十七이라
※ 本北狄種이니 [ 莊宗]이 [ 養]以爲子라 名[ 嗣源]이니 改名[ 亶]이라 在位에 年穀屢豐하고 兵革罕用하니 校於五代에 粗爲小康하니라
[ 明宗]明宗은 재위가 8년이고 壽가 67세이다.
[ 明宗]明宗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 莊宗]莊宗이 길러 양자로 삼았다. 이름이 [ 嗣源]嗣源이니, 뒤에 이름을 [ 亶]亶으로 고쳤다. 재위할 적에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무력을 드물게 사용하니, 五代時代에 비교함에 그런대로 小康이었다.
[丙戌]〈後唐同光四年四月은 [ 明宗][ 李嗣源]天成元年이라 ○ 吳越寶正元年이라 ○ 是歲에 蜀亡하고 閩建國하니 凡四國, 三鎭이라〉
병술(926) - 後唐同光 4년 4월은 [ 明宗]明宗[ 李嗣源]李嗣源의 天成 元年이다. ○ 吳越의 寶正 元年이다. ○ 이해에 蜀이 망하고 閩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正月에 唐[ 魏王][ 繼岌]이 將發成都할새 [ 馬彦珪]至하야 以皇后敎로 示[ 繼岌]한대 [ 繼岌]이 命召[ 崇韜]하야 計事하고 [ 繼岌]은 登樓避之하다 [ 崇韜]方升階어늘 [ 繼岌]從者[ 李環]이 撾碎其首【撾는 張瓜切이니 箠也라 】하고 幷殺其子[ 廷誨]하다
○ 唐[ 趙在禮]反【魏博指揮使[ 楊仁晸]이 將兵屯貝州하니 時에 天下莫知[ 郭崇韜]之罪하고 民間訛言皇后弑帝라하야 人情愈駭라 [ 仁晸]部兵[ 皇甫暉]作亂하야 劫[ 仁晸]曰 主上所以有天下者는 吾魏軍力也어늘 天下已定에 不念舊勞하고 更加猜忌니이다 今聞皇后弑逆하야 京師已亂이라하니 願與公歸면 安知不更爲富貴之資乎잇가 [ 仁晸]이 不從한대 [ 暉]殺之하고 又劫[ 小校]하야 不從한대 又殺之하다 效節指揮使[ 趙在禮] 聞亂而走어늘 [ 暉]追及하야 示以(一)[二]首하니 [ 在禮]懼而從之하니라 】于鄴이어늘 命[ 李嗣源]【成德節度使니 是爲[ 明宗]이라 】하야 討之하다 三月에 [ 嗣源]이 至鄴都하야 下令軍中하야 詰旦【平旦也라 】攻城이러니 是夜에 [ 從馬直]【[ 莊宗]選驍勇親軍하야 分置四指揮하고 號[ 從馬直]이라】軍士[ 張破敗] 作亂하야 帥衆大譟하고 殺都將하고 焚營舍하다 詰旦에 亂兵이 逼中軍이어늘 [ 嗣源]이 叱而問之曰 爾曹欲何爲오 對曰 將士從主上十年에 百戰以得天下러니 今主上이 棄恩任威하야 云 克城之後에 當盡坑【鄴都亂이어늘 遣歸德節度使[ 李紹榮]하야 招撫러니 紹榮이 至鄴한대 [ 皇甫暉]拒戰하니 [ 紹榮]이 攻之不克이라 以狀聞한대 [ 唐主]怒曰 克城之日에 勿遺噍類하라 [ 紹榮]이 合諸道兵再攻하고 又遣[ 嗣源]하야 將親軍討之호되 不得通이라 [ 嗣源]之爲亂兵所逼也에 [ 紹榮]이 陳於城南이어늘 [ 嗣源]이 相繼召之하야 欲與共討호되 [ 紹榮]이 疑之하야 引避不應이라 及[ 嗣源]入鄴都에 遂引兵退하야 保衛州하고 奏[ 嗣源]已(判)[叛]하야 與賊合이라하니 [ 嗣源]이 遣使上章自理호되 不得通하니라 】魏博之軍이라하니 我輩初無叛心이요 但畏死耳라 今衆議欲城中合勢하야 擊退諸道之軍하오니 請主上帝河南하고 [ 令公]帝河北하야 爲軍民之主니이다 [ 嗣源]이 泣諭之호되 不從이러라 [ 嗣源]所奏 皆爲[ 李紹榮]所遏하야 不得通하니 [ 嗣源]이 由是疑懼라 [ 石敬瑭]【尙[ 明宗]女[ 永寧公主]한대 後爲晉[ 高祖]하니라 】曰 夫事는 成於果決而敗於猶豫니이다 [ 康義誠]【突騎都指揮使라 】曰 主上無道하야 軍民怨怒하니 公이 從衆則生하고 守節則死니이다 [ 嗣源]이 乃令[ 安重誨]【中門使也니 後爲樞密使하니라 】로 移檄會兵하니 軍勢大盛이러라 [ 李紹榮]이 請[ 唐主]幸關東하야 招撫之한대 [ 唐主]從之하다 [ 唐主]至萬勝鎭하야 聞[ 嗣源]已據大梁하고 諸軍離叛하고 神色沮喪하야 登高歎曰 吾不濟【濟는 成也라 】矣로다 卽命旋師하야 歸入洛城하다 四月에 從馬直指揮使[ 郭從謙]【伶人이라 】이 作亂하니 近臣宿將이 皆釋甲潛遁이라 俄而요 [ 唐主]爲流矢所中하야 須臾遂殂하니라
[史略 史評][ 胡氏]曰 [ 莊宗]初立에 決勝夾寨하야 解潞州之圍하고 歸而治國訓兵에 事各有理하니 使[ 朱溫]未死면 固必爲所擒矣리라 旣違[ 張承業]忠謀하고 亟稱尊號하니 則擧措之失이 已稍形見이요 逮滅梁之後하야는 遂無一善可稱하야 與向者猶二人然하니 是何也오 才器有限也일새라 若曰天數면 則裂膚汗血하고 沐雨櫛風하야 凡十五年而後得이어늘 好遊畋하고 幸婦女하고 寵伶人하고 信宦官하야 不三年而滅亡이라 其心이 昔明而今暗하고 先戒而後肆하니 豈亦天邪아 故로 [ 莊宗]之命哲, 命吉凶, 命歷年은 皆所自貽니 不可歸之天數也니라
唐나라 [ 趙在禮]趙在禮가 鄴都에서 배반하자,【魏博指揮使[- 楊仁晸]이 군대를 거느리고 貝州에 주둔하니, 당시에 천하 사람들은 郭崇韜의 죄를 알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황후가 황제를 시해했다고 와전되어 人情이 더욱 놀랐다. [- 楊仁晸]의 부하 병사인 [ 皇甫暉]皇甫暉가 난을 일으켜 [- 楊仁晸]을 위협하기를 “主上께서 천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 魏博軍의 힘이었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된 뒤에 옛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의심하십니다. 지금 들으니 황후가 弑逆을 저질러서 京師가 이미 혼란하다고 하니, 바라건대 公과 함께 돌아간다면 어찌 다시 부귀의 밑천이 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楊仁晸]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 皇甫暉]皇甫暉가 그를 죽였고, 또 [- 小校]를 위협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또다시 [- 小校]를 죽였다. 效節指揮使[ 趙在禮]趙在禮가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자, [ 皇甫暉]皇甫暉가 쫓아가서 따라잡아 두 사람의 머리를 보이니, [ 趙在禮]趙在禮가 두려워하여 따랐다.】[ 李嗣源]李嗣源에게 명하여【[ 李嗣源]李嗣源은 成德節度使이니, 이가 [ 明宗]明宗이다.】토벌하게하였다. 3월에 [ 李嗣源]李嗣源이 鄴都에 이르러 軍中에 명령을 내려서 다음날 아침【詰旦은 平旦(동이 틀 때)이다.】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날 밤에 [ 從馬直]從馬直의【[ 莊宗]莊宗이 날래고 용감한 親軍을 선발하여 네 指揮使를 나누어 설치하고 從馬直이라 호칭하였다.】 軍士인 [ 張破敗]張破敗가 난을 일으켜 병사들을 거느리고 크게 함성을 지르며 都將을 죽이고 營舍(막사)를 불태웠다.
다음날 아침 난을 일으킨 군사들이 中軍을 핍박하자, [ 李嗣源]李嗣源이 꾸짖고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병들이 主上을 따른 지가 이미 십 년인데 몸소 수많은 전투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 은혜를 버리고 위엄에 맡겨서 성을 점령한 뒤에는 마땅히 魏博鎭의 군대를 다 묻어 죽인다고 하니,【鄴都가 혼란하자 歸德節度使李紹榮을 보내어 招撫하게 하였는데, 李紹榮이 鄴都에 이르자 [ 皇甫暉]皇甫暉가 항거하여 싸우니, 李紹榮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狀啓로 이 사실을 아뢰자, [ 唐主]唐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성을 점령하는 날에 씨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하였다. 李紹榮이 諸道의 군대를 규합하여 다시 공격하였으며 또다시 [ 李嗣源]李嗣源을 보내어 親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 李嗣源]李嗣源이 반란군에게 핍박받을 때에 李紹榮이 성의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 李嗣源]李嗣源이 계속하여 불러서 함께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李紹榮이 의심하여 몸을 피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 李嗣源]李嗣源이 鄴都로 들어가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여 衛州를 지키면서 ‘[ 李嗣源]李嗣源이 이미 배반하여 적과 연합했다.’고 아뢰니, [ 李嗣源]李嗣源이 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애당초 배반할 마음이 없고 다만 죽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衆論은 城中과 합세하여 諸道의 군대를 격퇴하고자 하오니, 청컨대 주상께서는 河南의 황제가 되시고 [ 令公]令公께서는 河北의 황제가 되어서 군사와 백성들의 군주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 李嗣源]李嗣源이 눈물을 흘리면서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 李嗣源]李嗣源이 [ 唐主]唐主에게 아뢰는 것을 李紹榮에게 모두 저지당하여 통하지 못하니, [ 李嗣源]李嗣源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 石敬瑭]石敬瑭이【[ 石敬瑭]石敬瑭은 [ 明宗]明宗의 딸 永寧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뒤에 晉나라 [ 高祖]高祖가 되었다.】 말하기를 “일은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망설이는 데서 실패합니다.” 하였다. 康義誠이【康義誠은 突騎都指揮使이다.】 말하기를 “주상이 무도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니, 公이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 살고 신하의 절개를 지키면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 李嗣源]李嗣源이 마침내 安重誨로 하여금【安重誨는 中門使이니, 뒤에 樞密使가 되었다.】 檄文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하니, 軍勢가 크게 성하였다.
李紹榮이 [ 唐主]唐主에게 청하여 關東 지방에 가서招撫할 것을 청하자, [ 唐主]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唐主]唐主가 萬勝鎭에 이르러[ 李嗣源]李嗣源이 이미 大梁을 점거하고 諸軍들이 이반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神色이 沮喪되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한탄하기를 “내가 성공하지 못하겠다.” 하고는【濟는 이룸이다.】 즉시 회군할 것을 명하여 돌아와 洛陽城으로 들어갔다.
4월에 從馬直指揮使郭從謙이【郭從謙은 악공이다.】 난을 일으키니, 가까이 모시던 신하와 옛 장수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몰래 도망하였다. 얼마 후에 [ 唐主]唐主가 流矢를 맞아 잠깐 만에 마침내 죽었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胡氏(胡寅)가 말하였다.
“[ 莊宗]莊宗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夾寨에서 승리를 결정지어 潞州의 포위를 풀었고, 돌아와서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들을 훈련함에 일마다 각각 조리가 있었으니, 가령 [ 朱溫]朱溫이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 莊宗]莊宗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 [ 張承業]張承業의 충성스런 계책을 어기고 황제의 尊號를 급히 칭하니, 거조의 잘못이 이미 차츰 드러났다. 그리고 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마침내 칭찬할 만한 善行이 한 가지도 없어서 예전과 다른 것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재주와 器局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天運이라고 한다면 살이 터지고 피땀을 흘리며 객지에서 비바람에 시달려서 모두 15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뒤에야 얻었는데,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고 부녀자들을 사랑하며 악공을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해서 3년이 못 되어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옛날에는 밝다가 지금은 어둡고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뒤에는 방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또한 天運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이 [ 莊宗]莊宗에게 어짊을 명할 것인지, 길흉을 명할 것인지, 오랜 역년을 명할 것인지는 모두 스스로 부르는 것이니, 이를 天運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 是日에 [ 李嗣源]이 至罌子谷하야 聞之慟哭하고 謂諸將曰 主上이 素得士心이나 正爲群小蔽惑하야 致此하니 今吾將安歸乎아 己丑에 [ 嗣源]이 入洛陽하니 百官이 三上牋(箋)하야 請[ 嗣源]監國한대 [ 嗣源]이 乃許之하고 於柩前에 卽皇帝位하다
이날 [ 李嗣源]李嗣源이 罌子谷에 이르러[ 唐主]唐主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諸將들에게 이르기를 “主上이 평소 군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나 다만 여러 소인배들에게 가리워지고 미혹되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己丑日(4월 3일)에 [ 李嗣源]李嗣源이 洛陽으로 들어가니, 백관들이 세 번 牋文을 올려 [ 李嗣源]李嗣源에게 監國할 것을 청하였다. [ 李嗣源]李嗣源이 마침내 허락하고 靈柩 앞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 [ 唐主]目不知書하야 四方奏事를 皆令[ 安重誨]讀之하니 [ 重誨]亦不能盡通이라 乃奏호되 願倣前朝侍講侍讀【盛唐之制라 】과 近代直崇政樞密院【直崇政院은 梁制요 直樞密院은 莊宗制也라 】하야 選文學之臣하야 與之共事하야 以備應對니이다 乃置端明殿學士할새 以翰林學士[ 馮道], [ 趙鳳]으로 爲之하다
○ 昭武節度使[ 王延翰]【[ 審知]子也라 】이 自稱[ 大閩國王]하다
[丁亥]〈後唐天成二年이라 ○ 吳乾貞元年이라 ○ 是歲에 後唐, 漢, 吳, 閩凡四國이요 吳越, 荊南, 湖南凡三鎭이라〉
정해(927) - 後唐天成 2년이다. ○ 吳나라 乾貞 元年이다. ○ 이해에 後唐‧漢‧吳‧閩 모두 네 나라이고, 吳越‧荊南‧湖南 모두 세 鎭이다.-
春正月에 [ 馮道], [ 崔協]이 竝爲中書侍郞同平章事하다
○ 秋八月에 [ 楚王][ 殷]【[ 馬殷]也라 初爲[ 孫儒]裨將이라가 唐[ 明宗]時에 拜潭州刺史하고 梁[ 太祖]가 封爲[ 楚王]하니라 】이 始建國하다
○ 十一月에 [ 吳王]【[ 楊行密]第四子[ 楊溥]라 】이 卽皇帝位하다 [ 吳丞相][ 徐溫]이 卒하니 [ 吳主]以其子[ 知誥]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 契丹 〈[ 太宗][ 德光]立하야 仍稱天顯二年하다〉
[戊子]〈後唐天成三年이라 ○ 漢大有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무자(928) - 後唐 天成 3년이다. ○ 漢나라 大有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十二月에 荊南節度使[ 高季興]이 卒하니 命其子[ 從誨]하야 權知軍府事하다
○ 契丹 〈天顯三年이라〉
契丹 - 天顯 3년이다. -
[己丑]〈唐天成四年이라 ○ 吳大和元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라〉
기축(929) - 唐나라 天成 4년이다. ○ 吳나라 大和 元年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九月에 唐(王)[主]與[ 馮道]로 從容語及年穀屢登하고 四方無事한대 [ 道]曰 臣常記昔在先皇幕府【謂爲河東[ 掌書記]時也라 】하야 奉使中山하야 歷井陘之險할새 臣이 憂馬蹶하야 執轡甚謹하야 幸而無失이러니 逮至平路하야 放轡自逸이라가 俄至顚隕하니 凡爲天下者도 亦猶是也니이다 [ 唐主]深以爲然하다 又問[ 道]호되 今歲雖豐이나 百姓贍足否아 [ 道]曰 農家歲凶則死於流殍하고 歲豐則傷於穀賤하니 豐凶皆病者는 惟農家爲然이니이다 臣記進士[ 聶夷中]詩云 二月賣新絲하고 五月糶新穀하니 醫得眼前瘡이나 剜却心頭肉【剜은 烏官切이니 削也라 謂絲穀未熟에 農家艱食일새 先稱貸以自給하고 至於賣絲糶穀하야 僅足以償債耳라 註에 剜은 剔也라하니라 】이라하니 語雖鄙俚나 曲盡田家之情狀이라 農於四人【謂士農工商이라 】之中에 最爲勤苦하니 人主不可不知也니이다
9월에 唐主가 馮道와 함께 年事가 여러 번 풍년이 들고 사방이 무사함을 조용히 언급하자, 馮道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기억하건대, 옛날 先皇帝의 幕府에 있으면서【先皇帝의 幕府에 있었다는 것은 河東府 掌書記가 되었을 때를 이른다.】中山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느라 井陘의 험한 길을 지날 적에 신이 말이 넘어질까 염려해서 고삐를 꽉 잡고 매우 조심하여 다행히 실수가 없었는데, 평탄한 길에 이르자 고삐를 놓고 스스로 안일하다가 잠시 후 넘어지고 떨어짐에 이르렀으니,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唐主는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다.
唐主가 또다시 馮道에게 묻기를 “금년에 비록 풍년이 들었으나 백성들이 풍족한가?” 하니, 馮道가 말하기를 “농가는 흉년이 들면 유리하여 굶어죽고 풍년이 들면 곡식값이 싸서 손해를 보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폐해를 입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렇습니다. 신이 기억하건대 進士聶夷中의 詩에 이르기를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미리 판다오. 당장 눈앞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나 심장의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구나.【剜은 烏官切(완)이니, 도려내는 것이다. 生絲가 나오지 않고 곡식이 성숙하기 전에 농가에서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선 빚을 내어 스스로 공급하고, 생사를 팔고 곡식을 팔 때에 이르러서야 겨우 빚을 갚을 뿐임을 이른다. 註에 “剜은 도려내는 것이다.” 하였다.】[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비록 비루하나 농가의 실정을 곡진히 다하였습니다. 농부는 四民【四人은 士, 農, 工, 商을 이른다.】 중에 가장 고생하니, 人主가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契丹 〈天顯四年이라〉
契丹 - 天顯 4년이다. -
[庚寅]〈唐長興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경인(930) - 唐나라 長興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唐以前忠武節度使[ 張延朗]으로 行工部尙書하고 充三司【鹽鐵戶部度支라 】使하니 三司使之名이 自此始하니라
唐나라가 前 忠武節度使張延朗을 行工部尙書로 임명하고三司使를 맡게 하니,【三司는 鹽鐵, 戶部, 度支이다.】三司使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十一月에 [ 楚王][ 殷]이 卒하고 子[ 希聲]이 襲位하야 稱遺命하야 去建國之制하고 復藩鎭之舊어늘 [ 唐主]以[ 希聲]爲武安, 靜江節度使하다
○ 契丹 〈天顯五年이라〉
契丹 - 天顯 5년이다. -
[壬辰]〈唐長興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임진(932) - 唐나라 長興 3年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三月에 吳越[ 武肅王][ 錢鏐]卒하니 年八十一이라 中子[ 傳瓘]【後改名[ 元瓘]이라 】이 立하다
○ 秋七月에 唐武安, 靜江節度使[ 馬希聲]이 卒하니 六軍使[ 袁詮], [ 潘約]等이 迎[ 希範]【[ 希聲]之弟라 】於朗州하야 而立之하다
[癸巳]〈唐長興四年이라 ○ [ 閩主][ 王延鈞]龍啓元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 閩王][ 延鈞]【[ 延翰]之弟요 [ 審知]次子니 改名[ 璘]이라 】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閩이라하다
○ 三月에 唐以[ 孟知祥]으로 爲東西川節度使蜀王하다
○ 十一月에 [ 唐主]殂하다 [ 唐主]性不猜忌하야 與物無競하고 登極之年에 已踰六十이라 每夕에 於宮中焚香祝天하야 曰 某는 胡人이라 因亂하야 爲衆所推하니 願天早生聖人【[ 范仲淹]曰 我[ 太祖]應期而生하니라 】하야 爲生民主하소서 在位八年에 年穀屢豐하고 兵革罕用하니 校於五代에 粗爲小(唐)[康]하니라
○ 契丹 〈天顯八年이라〉
[新增][ 胡氏]曰 [ 明宗]은 美善頗多하고 過擧亦不至甚하니 求於漢唐之間하면 蓋亦賢主也라 其尤足稱者는 內無聲色하고 外無遊畋하며 不任宦官하고 廢內藏庫하며 賞廉吏하고 治贓蠹하니 若輔相得賢이면 則其過擧 當又損矣리라 其焚香祝天之言은 發於誠心하니 天旣厭亂하야 遂生聖人이라 用是觀之하면 天人交感之理를 不可誣矣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 明宗]이 初無黃屋之心이러니 遭時之亂하야 邂逅得國이라 蒞政之初에 斬孔謙而去苛法하고 誅宦寺而委宰相하며 命諸道以均民田하고 廢內藏庫以崇儉約하며 誅贓吏以示蠹民之戒하고 褒孫岳以化淸廉之風하며 遠女色而減後宮之員하고 優民力而免逋負之租하며 絶音樂之好而黜伶官하고 薄口體之奉而省庖廚하며 戒田獵之爲民害하야 而縱鷹犬하고 惡冗官之費하야 而罷有名無益之吏하며 戒橫斂, 斥私獻하야 而抑牧守進奉하며 有年之書 兩見于策이요 且目不知書로되 而所行이 暗合古訓이라 有如是者로되 惜其以戲殺從璨而無父子之恩하고 以誣殺[ 安重誨]而無君臣之義하며 年幾七十에 諱言儲嗣라가 卒致從榮稱兵하야 驚亂宮闈하야 父子祖孫이 一日而絶하야 身肉未寒에 家國俱破하니 雖曰輔相非人이나 亦不學之所致也니라
契丹 - 天顯 8년이다. -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明宗은 아름다운 善行이 자못 많고 지나친 행동 또한 심함에 이르지 않았으니, 漢나라와 唐나라 사이에서 찾아보면 또한 어진 군주이다. 그 중에 더욱 칭찬할 만한 것은 안으로 음악과 여색에 빠짐이 없고 밖으로 놀이와 사냥에 빠짐이 없었으며, 환관에게 맡기지 않고 內藏庫를 폐지하였으며, 청렴한 관리에게 상 주고 부정하게 뇌물을 받아 백성을 좀먹는 자들을 다스렸으니, 만약 輔相이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지나친 행동이 마땅히 또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향을 사르며 하늘에 축원한 말은 성심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이미 혼란함을 싫어해서 마침내 聖人을 탄생시켰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동하는 이치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明宗은 애당초 황제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혼란한 때를 만나서 우연히 나라를 얻었다. 정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孔謙의 목을 베어 가혹한 법을 제거하고 환관을 주벌하여 재상에게 맡겼으며, 여러 道에 명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균등하게 하고 內藏庫를 폐지하여 검약을 숭상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을 주벌하여 백성을 좀먹는 것에 경계함을 보이고 [- 孫岳]에게 포상하여 청렴한 기풍을 강화하였으며, 女色을 멀리하여 後宮의 인원수를 줄이고 백성들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여 체납된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음악의 嗜好를 끊어 伶官(樂工)을 내치고 자신의 입과 몸을 봉양하는 것을 박하게 하여 庖廚를 줄였으며, 田獵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됨을 경계하여 매와 사냥개를 풀어주고 쓸데없는 관원(冗官)이 國祿을 허비하는 것을 미워하여 명칭만 있고 유익함이 없는 관리를 혁파하였으며, 멋대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경계하고 사사로이 진상하는 것을 물리쳐 牧守(지방관)들이 進奉하는 것을 억제하였으며, 풍년이 들었다는 기록이 두 번이나 史策에 보이고, 또 눈으로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행동하는 바는 은연중에 옛 교훈과 부합하였다.
○ 十二月에 [ 宋王][ 從厚]【[ 明帝]第五子라 】卽皇帝位하니 是爲[ 閔帝]라 改元應順하다〈甲午四月에 [ 潞王]卽位하야 改元淸泰하다〉
潞王
[ 潞王]※在位二年이라
※ 名은 [ 從珂]니 [ 明帝]養子요 本姓[ 王氏]라 廢[ 閔帝]而自立이러니 [ 石敬瑭]反에 遂自焚하니 史曰[ 廢帝]라
[甲午]〈唐[ 閔帝][ 從厚]應順元年이요 四月以後는 [ 唐主][ 從珂]淸泰元年이라 ○ [ 蜀主][ 孟知祥]明德元年이라 ○ 是歲에 蜀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唐鳳翔節度使兼侍中潞王[ 從珂]與[ 石敬瑭]으로 少從[ 明帝]征伐하야 有功名하야 得衆心이라 [ 朱弘昭], [ 馮]贇【[ 朱弘昭]는 樞密使同平章事요 [ 馮贇]은 音彬이니 同中書門下二品이라 】位望이 素出二人下遠甚이러니 一旦에 執朝政하니 皆忌之【忌[ 從珂]及[ 敬唐]이라 】라 [ 潞王]이 由是疑懼하니라
○ 閏月에 蜀將吏勸蜀[ 王知祥]하야 稱帝어늘 [ 知祥]이 卽皇帝位于成都하다
○ 唐[ 潞王]이 旣與朝廷猜阻【猜忌阻隔也라 】라 乃移檄隣道하야 言 [ 朱弘昭]等이 乘先帝疾亟하야 殺長【長은 謂[ 秦王][ 從榮]也라 [ 明宗]이 疾[ 從榮]이 擁兵入하야 宮門皆閉한대 乃走歸河南하니 [ 安從益]이 殺之하다 [ 從榮]死六日에 而帝崩하니라 】立少하고 專制朝權하니 今從[ 珂]將入朝하야 以淸君側之惡호리라 三月에 [ 潞王]이 建大將旗鼓하고 整衆而東하니 [ 唐主]聞[ 潞王]至陜하고 憂駭하야 不知所爲라 是夕에 [ 唐主]以五十騎로 出玄武門하야 至衛州하야 依刺史[ 王弘贄]하다
唐나라 潞王이 이미 조정과 서로 의심하고소원하였다.【猜阻는 시기하고 격조한 것이다.】 이에 이웃 道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朱弘昭 등이 先帝의 병환이 위독한 틈을 타서 長子(李從榮)를 죽이고【長子는 秦王李從榮을 이른다. 明宗은 李從榮이 병력을 보유하고 들어오는 것을 미워하여 궁궐문을 모두 닫자, 李從榮이 마침내 달아나 河南으로 돌아가니, [- 安從益]이 그를 죽였다. 李從榮이 죽은 지 6일 만에 황제(明宗)가 승하하였다.】 少子(李從厚)를 세우고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지금 이 從珂가 장차 조정에 들어가 군주 곁에 있는 악인들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라고 하였다.
○ 唐[ 潞王]이 至蔣橋하니 [ 馮道]等이 皆上牋勸進이어늘 太后下令하야 [ 廢少帝]爲[ 鄂王]하고 令[ 潞王]으로 卽位於柩前하다
○ [ 唐主]欲更命相하야 問所親信以朝臣聞望宜爲相者한대 皆以[ 盧文紀], [ 崔居儉]對라 [ 唐主]不能決하야 乃寘(置)其名於琉璃甁하고 夜焚香祝天하고 且以箸挾之하야 首得[ 文紀]하야 遂以爲相하니라
○ [ 唐主]與[ 石敬瑭]이 皆以勇力善鬪로 事[ 明宗]하야 爲左右나 然心競하야 素不相悅이러니 帝卽位에 [ 敬瑭]이 不得已入朝어늘 乃復以爲河東節度使하다
○ [ 蜀主]【[ 孟知祥]이라 】殂하니 太子[ 仁贊]이 卽皇帝位하야 更名[ 昶]하다
[乙未]〈唐淸泰二年이라 ○ 吳天祚元年이요 閩永和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을미(935) - 唐나라 淸泰 2년이다. ○ 吳나라 天祚 元年이고, 閩나라 永和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六月에 唐河東節度使[ 石敬瑭]이 旣還鎭에 陰爲自全之計러라
6월에 唐나라 河東節度使石敬瑭이 鎭으로 돌아간 뒤에 은밀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웠다.
○ 吳[ 徐知誥] 進封[ 齊王]하다
歷年圖曰 [ 武皇]【[ 李克用]이라 】이 以沙陀微種으로 奄有河東하고 [ 黃巢]之亂에 有大功於唐室이러니 上源之變【[ 上源]은 驛名이라 】에 訟於朝廷이나 而不能自直【[ 克用]이 還晉陽하야 治兵하고 上表自陳하야 乞討[ 全忠]한대 [ 僖宗]이 方務姑息하야 優詔和解之하니라 】하야 遂與[ 朱氏]로 治兵相攻하야 糾紛不解하야 流血成川하고 僵尸蔽野라 至其晩節하야는 鋒銳益衰하야 窮居一隅하야 僅能自保라 [ 莊宗]【[ 存勖]이라 】은 以弱齡襲位하니 麾下諸將이 皆白首行陣하야 與[ 武皇]으로 竝轡齊驅之人이어늘 乃能以恩信結其心하고 英果折其氣하야 莫不竭力致命하야 頤指如意하야 遂服眞定하고 從山東하며 取漁陽, 兼魏博하며 策馬度(渡)河에 而[ 朱氏]失國이라 當是之時하야 天下莫不震動하니 諸侯陸梁【猶强梁也니 逃走貌이요 又跳梁也라 】踞(倨)肆者 皆駭愕相顧하야 莫敢保其土地라 [ 王衍]이 恃其險遠하고 辭禮踞(倨)慢이어늘 偏師西指에 而劍閣不守하니 觀其行兵하면 可謂能矣라 惜其志小氣近하야 驕心易生하야 矜功自喜하고 御衆無法하며 便嬖是用하야 纔及三年에 隕身亡族하니 悲夫라 [ 明宗]은 無取國之心이러니 而爲衆所附하고 資性寬厚하야 克終天祿이라 淸泰는 於危難之中에 坐受神器之重하야 得之非難이요 失之亦易라 負扆【扆는 於豈切이니 狀如屛風하니 以絳爲質하고 高八尺이며 繡爲斧文이라 天子負扆하야 南面而立이라 】未安하야 家爲煨燼하야 十年之中에 易姓者四【[ 莊宗]은 本西突厥種[ 朱邪氏]니 附唐屬籍하야 賜姓[ 李氏]하고 [ 明宗]은 本北狄種이니 [ 莊宗]養子라 [ 閔帝]는 [ 明宗]子也요 [ (路)[潞]王]은 [ 明宗]養子니 本姓[ 王氏]라 共三姓이어늘 而云易姓者四는 未詳이라 通要云 國姓三變이라하니라 】니 禍福相尋이 何其速哉아
[史略 史評]史斷曰 [ 潞王]以[ 明宗]養子로 僥倖奪人之國하니 蓋至是而國姓三變焉이라 方其入洛에 許軍士以人賞百緡이러니 及其至洛에 府庫枵然하야 金帛不盈三萬이어늘 顧乃掊剝聚斂하야 括民以給之하니 民心愁嗟하야 思亂者衆이라 其始也에 戕民以買國하고 其終也에 民散而國亦隨之하니 宜其不能久有其國이어든 而況奪[ 敬瑭]之節度하고 殺[ 敬瑭]之子弟하야 以自促其亡哉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武皇(李克用)은【武皇은 李克用이다.】 미천한 沙陀族으로서 곧바로 河東 지방을 소유하고 黃巢의 난에 唐나라에 큰 공을 세웠는데, 上源驛의 변고가【上源은 驛의 이름이다.】 일어나자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조정에서 바로잡아주지 못하였다.【李克用이 晉陽으로 돌아가 군대를 다스리고 表文을 올려 스스로 아뢰어서 朱全忠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 僖宗]이 우선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힘써서 우대하는 조칙을 내려 화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朱氏(朱全忠)와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하여 紛糾가 풀리지 않아 흘린 피가 냇물을 이루고 쓰러진 시체가 들을 뒤덮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예봉이 더욱 꺾여 곤궁하게 한 귀퉁이에 거주하면서 겨우 스스로 보존하였다.
莊宗(李存勖)은【莊宗은 李存勖이다.】 어린 나이로 지위를 세습하니,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行伍(군대) 사이에서 늙어 武皇과 함께 고삐를 잡고 나란히 말을 몬 사람들이었는데, 마침내 은혜와 신의로써 그 마음을 결속시키고 英明함과 과단함으로써 그 기운을 꺾으니, 힘을 다하고 명령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턱과 손가락으로 마음대로 지시하여 마침내 眞定을 복종시키고 山東을 따르게 하였으며 漁陽을 점령하고 魏博을 겸병하였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黃河를 건너가자 朱氏가 나라를 잃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에 놀라서 동요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발호하여【陸梁은 强梁(강포함)과 같으니, 달아나는 모습이고 또 발호하는 것이다.】 오만방자한 제후들이 모두 놀라 서로 돌아보며 감히 자기의 토지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西蜀의 王衍이 지형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는 말과 禮가 거만하자, 일부의 군대[偏師]를 가지고 서쪽을 향함에 劍閣關이 지켜지지 못하였으니, 그 군대를 운용한 것을 살펴보면 능하다고 이를 만하다. 애석하게도 뜻이 작고 기개가 천근하여 교만한 마음이 쉽게 생겨나서 공을 과시하여 스스로 자만하였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법도가 없었고 총애하는 자들을 등용해서 즉위한 지 겨우 3년에 몸이 죽고 집안이 망하였으니, 슬프다.
明宗은 나라를 취할 마음이 없었는데 무리들에게 추종을 받았고 타고난 천성이 寬厚하여 하늘이 준 녹을 잘 마쳤다.
淸泰(潞王李從珂)는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중요한 神器(제왕의 자리)를 받아서 얻은 것이 어렵지 않았고 잃은 것이 또한 쉬웠다. 병풍을 등지고 帝王의 자리에 있는 것이【扆는 於豈切(의)이니 모양이 병풍과 같으니, 붉은 비단으로 바탕을 삼고 높이가 8척이며 도끼 문양을 수놓았다. 천자는 扆를 등지고서 남면하여 선다.】 편안하지 못하여 집안이 잿더미가 되어서 10년 동안에 國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었으니,【莊宗은 본래 西突厥의 종족인 朱邪氏이니 唐나라의 屬籍에 붙여 李氏姓을 하사받았고, 明宗은 본래 北狄의 종족이니 莊宗의 양자이다. 閔帝는 明宗의 아들이고 潞王은 明宗의 양자이니, 본래 姓이 王氏이다. 모두 세 姓인데, 姓을 바꾼 것이 네 번이라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 《通鑑要解》에 “國姓이 모두 세 번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禍와 福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신속하였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潞王이 明宗의 養子로서 요행히 남의 나라를 빼앗으니, 後唐이 이때에 이르러 國姓이 세 번 바뀌었다. 潞王이 洛陽에 들어올 적에 군사들에게 사람마다 百緡의 돈을 賞으로 줄 것을 허락하였는데, 洛陽에 이르자 府庫가 텅 비어 황금과 비단이 채 3만이 못 되었으므로 마침내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아 군사들에게 賞을 주니, 민심이 근심하고 서글퍼하여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백성을 해쳐서 나라를 사고 종말에는 백성이 흩어져서 나라가 또한 뒤따라 망하였으니, 오랫동안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데, 더구나 石敬瑭의 節度使 지위를 빼앗고 石敬瑭의 子弟를 죽여서 스스로 그 멸망을 재촉함에 있어서랴.”
右後唐은 四主에 共一十三年이라
이상 後唐은 네 군주에 모두 13년이다.
後晉紀
高祖
後晉紀
[ 高祖]※在位七年이요 壽五十一이라
※ 名은 [ 敬瑭]이요 姓은 [ 石氏]니 其先은 本出西夷種이라 勇力善戰하니 唐[ 明宗]이 愛之하야 妻以[ 永寧公主]라 淸泰元年에 鎭太原이라가 徙鎭天平하야 不受命하고 因求援於契丹이러니 尋卽帝位하니라
[丙申]〈唐淸泰三年十一月以後는 晉[ 高祖][ 石敬瑭]天福元年이라 ○ [ 閔主][ 昶]通文元年이라 ○ 是歲에 唐亡晉興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 唐主]以千春節置酒러니 [ 晉國長公主]上壽畢에 辭歸晉陽이어늘 [ 唐主]醉하야 曰 何不且留하고 遽歸오 欲與[ 石郞]反邪아 [ 石敬瑭]이 聞之하고 益懼러라
○ 初에 [ 唐主]欲使[ 敬瑭]移鎭鄆州한대 [ 李崧], [ 呂琦]【[ 李崧]은 翰林學士요 [ 呂琦]는 知制誥라 】等이 皆力諫하야 以爲不可어늘 [ 薛文遇]【知制誥라 】曰 河東은 移亦反이요 不移亦反하야 在旦暮耳니 不若先事圖之니이다 [ 唐主]大喜曰 卿言이 殊豁吾意하니 成敗에 吾決行之호리라 卽爲除目하야 付學士院하야 使草制하야 以[ 敬瑭]으로 爲天平節度使하니 制出에 兩班【文武官을 爲東班西班하니라 】이 相顧失色이러라 [ 敬瑭]이 疑懼하야 謀於將佐曰 吾之再來河東也에 主上이 面許終身不除代러니 今忽有是命하니 得非如今年千春節與公主所言乎아 我不興亂이면 朝廷發之하리니 安能束手死於道路乎아 都押衙[ 劉知遠]曰 明公이 久將兵하야 得士卒心하고 今據形勝之地하야 士馬精彊하니 若稱兵傳檄이면 帝業을 可成하리니 奈何以一紙制書로 自投虎口乎잇가 掌書記[ 桑維翰]曰 [ 契丹主]部落이 近在雲, 應하니 公誠能推心하야 屈節【屈折肢節하야 以服事也라 】事之하면 萬一有急에 朝呼夕至하리니 何患無成이릿고 [ 敬瑭]이 意遂決하야 表[ 唐主]호되 養子【[ 潞王]이라 】는 不應承祀하니 請傳位[ 許王]【名[ 從益]이니 [ 明宗]子라 】하노이다 [ 唐主]手裂其表하야 抵地하고 制하야 削奪[ 敬瑭]官爵하고 以[ 張敬達]로 兼太原四面排陳使하야 率諸將討之하다
처음에 唐主가 石敬瑭을 鄆州의 鎭으로 옮기고자하니, [- 李崧]과 [- 呂琦]【[- 李崧]은 翰林學士이고, [- 呂琦]는 知制誥이다.】 등이 모두 강력히 간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 薛文遇]가【[- 薛文遇]는 知制誥이다.】 말하기를 “河東(石敬瑭)은 鎭을 옮겨도 배반하고 鎭을 옮기지 않아도 배반하여, 반란이 조석간에 있을 것이니, 사전에 미리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唐主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卿의 말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니, 成敗에 관계없이 내 결행하겠다.” 하였다. 즉시 除目을 만들어 學士院에 맡겨 制書를 草해서 石敬瑭을 天平節度使로 임명하니, 制書가 나오자 文班과 武班이【文官과 武官을 東班과 西班이라 하였다.】 서로 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石敬瑭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수‧막료들과 상의하기를 “내가 다시 河東에 올 때에 主上이 나와 대면하고서 종신토록 딴 곳으로 바꾸어 제수하지 않기로 허락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금년 千春節에 공주와 말씀한 바와 똑같지 않은가.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킬 것이니, 어찌 손을 묶고 도로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都押衙인 劉知遠이 말하기를 “明公은 오랫동안 군대를 거느려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고, 지금 지형이 유리한 곳을 점거하여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강하니, 만약 군대를 일으키고 격문을 돌린다면 황제의 기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한 장의 制書 때문에 자신을 호랑이의 입에 던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掌書記桑維翰이 말하기를 “契丹主의 部落이 가까이 雲州와 應州에 있으니, 公이 진실로 마음을 다 바쳐 복종하여 섬긴다면【사지의 관절을 굽혀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하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 敬瑭]이 遣間使【間은 去聲이니 從間道遣使라 】하야 求救於契丹할새 令[ 桑維翰]으로 草表하야 稱臣於[ 契丹主]하고 且請以父禮事之하고 約事捷之日에 割盧龍一道及鴈門關以北諸州하야 與之하다 [ 劉知遠]이 諫曰 稱臣은 可矣어니와 以父事之는 太過요 厚以金帛賂之라도 自足以致其兵이니 不必許以土田이니 恐異日大爲中國之患이면 悔之無及이리이다 [ 敬瑭]이 不從하다 表至契丹하니 [ 契丹主]大喜하야 許俟仲秋하야 傾國赴援하다
石敬瑭이 은밀히 間使를 보내어【間은 去聲이니, 사잇길을 따라 은밀히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契丹에 구원을 요청할 적에 桑維翰으로 하여금 表文을 草하게 하여, 契丹主에게 臣이라 칭하고 또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길 것을 청하였으며, 일이 성공하는 날에 盧龍의 한 道와 鴈門關 이북의 여러 州를 떼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劉知遠이 간하기를 “신을 칭하는 것은 가하나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치며,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어도 충분히 그 군대를 부를 수 있으니, 굳이 토지를 떼어줄 것을 허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일에 크게 중국의 후환거리가 되면 후회막급일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石敬瑭이 따르지 않았다. 表文이 契丹에 이르자, 契丹主가 크게 기뻐하여 仲秋(8월)를 기다려 국력을 기울여 달려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였다.
○ 九月에 [ 契丹主]將五萬騎하고 號三十萬이라하야 自楊武谷而南하니 旌旗不絶이 五十餘里라 至晉陽하야 屯於汾北之虎北口하야 與唐騎將[ 高行周], [ 苻彦卿]合戰할새 [ 敬瑭]이 乃遣[ 劉知遠]하야 出兵助之하니 唐兵이 大敗라 [ 敬達]이 遣使하야 告敗於唐한대 [ 唐主]大懼하야 下詔親征하니 諸軍이 自鳳翔推戴【[ 潞王]이 自鳳翔節度卽位하니라 】以來로 驕悍하야 不爲用이로되 [ 苻彦饒]【[ 彰聖都指揮使]니 時爲大軍後援하니라 】恐其爲亂하야 不敢束之以法이러라 [ 唐主]至河陽하야 心憚北行하야 但日夕酣飮悲歌하고 群臣이 或勸其北行이면 則曰 卿輩勿言하라 [ 石郞]이 使我心膽墮地라하니라
9월에 契丹主가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30만 대군이라 이름하면서 楊武谷으로부터 남진하니, 旌旗가 50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晉陽에 이르러서汾水의 북쪽인 虎北口에 주둔하고서唐나라 騎兵將인 高行周와 [- 苻彦卿]과 교전할 적에 石敬瑭이 마침내 劉知遠을 보내 출병하여 돕게하니, 唐軍이 크게 패하였다. 張敬達이 사자를 보내어 唐나라에 패전을 알리자, 唐主가 크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리고 친히 정벌하니, 鳳翔에서 潞王을 황제로 추대한【潞王이 鳳翔節度使로 있다가 즉위하였다.】 이래로 諸軍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져서 부릴 수가 없었으나 [- 苻彦饒]는【[- 苻彦饒]는 彰聖都指揮使이니, 당시 大軍의 후원이 되었다.】 이들이 반란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군법으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唐主는 河陽에 이르러서 마음속에 북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만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슬피 노래하며, 신하들이 혹 북쪽으로 출동할 것을 권하면 말하기를 “경들은 말하지 말라. 石郞이 나로 하여금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하였다.
○ 十一月에 [ 契丹主]謂[ 石敬瑭]曰 吾三千里來赴難하니 必有成功이라 觀汝氣貌識量하니 眞中原之主也라 吾欲立汝爲天子하노라 [ 敬瑭]이 辭讓數四러니 將吏復勸進한대 乃許之하다 [ 契丹主]作冊書하야 命[ 敬瑭]爲大晉皇帝하니 是日에 卽皇帝位하야 割幽, 薊十六州하야 以與契丹하고 仍許歲輸帛三十萬匹하고 制改長興【[ 明宗]年號라 】七年하야 爲天福元年하다
[史略 史評][ 胡氏]曰 [ 敬瑭]之罪는 在不助[ 閔帝]라 苟以[ 閔帝]失國이면 則當尊奉[ 許王]이니 不爲衛州之事하야 而歸奪國弑君之惡於[ 從珂]하고 兵以義擧하야 名實皆正이면 則其德美矣리라 乃急於近利하야 稱臣契丹하고 割棄土壤하야 以父事之러니 其利不能以再世하고 其害乃及於無窮이라 故로 以功利謀國而不本於禮義면 未有不旋中其禍者也니라
11월에 契丹主가 石敬瑭에게 이르기를 “내가 3천 리 밖에서 난리에 달려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너의 기풍과 모습, 지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내 너를 세워 천자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石敬瑭이 서너 차례 사양하였는데, 장수와 관리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契丹主가 책봉하는 글을 만들어 石敬瑭을 大晉皇帝로 임명하니, 石敬瑭이 이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幽州와 薊州 등 16주를 떼어서 契丹에게 주고 인하여 해마다 비단 30만 필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으며, 制書를 내려 長興【長興은 明宗의 연호이다.】 7년을 고쳐 天福 元年이라고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石敬瑭의 죄는 閔帝를 돕지 않은 데에 있다. 만일 閔帝가 나라를 잃었으면 마땅히 許王을 높이 받들었어야 하니, 衛州의 일을 하지 아니하여 나라를 찬탈하고 군주를 시해한 죄를 李從珂에게 돌리고, 의리에 입각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名과 實이 모두 바르게 되었다면 그 德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契丹에게 신하를 칭하고 영토를 떼어주어 契丹의 군주를 아버지로 섬겼는데, 그 이익이 두 代를 가지 못하였고 그 폐해가 마침내 무궁한 후세에 미쳤다. 그러므로 功利로 나라를 도모하고 禮義에 근본하지 않으면 곧바로 禍를 당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 [ 唐主]又與[ 宋審虔]【馬軍都指揮使라 】等四將으로 議復向河陽이러니 而將校皆已飛狀하야 迎[ 晉主]하니 [ 唐主]遂携傳國寶하고 登玄武樓하야 自焚하다
[丁酉]〈晉天福二年이라 ○ 南唐[ 烈祖][ 徐誥]昇元元年이라 ○ 是歲에 吳亡하니라 晉, 蜀, 漢, 閩에 南唐代吳하야 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晉以[ 李崧]으로 爲中書侍郞同平章事하야 充樞密使하고 [ 桑維翰]으로 兼樞密使하다 時에 晉이 新得天下하니 藩鎭이 多未服從하고 或雖服從이나 反仄【不安也라 】不安하고 兵火之餘에 府庫殫竭하야 民間困窮이어늘 而契丹徵求無厭이라 [ 維翰]이 勸晉推誠棄怨하야 以撫藩鎭하고 卑辭厚禮하야 以奉契丹하고 訓卒繕兵하야 以修武備하고 務農桑하야 以實倉廩하고 通商賈하야 以豐貨財하니 數年之間에 中國稍安하니라
晉나라가 [- 李崧]을 中書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여樞密使를 맡기고, 桑維翰을 兼樞密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晉나라가 새로 천하를 얻으니, 藩鎭들이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고, 혹 복종하더라도 反仄하여【反仄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전란을 겪은 뒤에 조정의 府庫가 고갈되어서 민간이 곤궁하였는데 契丹의 무리한 요구는 만족함이 없었다.
○ 三月에 [ 晉主]謀徙都大梁하니 [ 桑維翰]이 因說[ 晉主]하야 以大梁北控燕, 趙하고 南通江, 淮하야 水陸都會하야 資用富饒라하니 [ 晉主]乃下詔東巡하다
○ 夏四月에 [ 晉主]至汴州하다
여름 4월에 晉主가 汴州(大梁)에 이르렀다.
○ 八月에 [ 吳主]【[ 楊溥]라 】下詔하야 禪位于齊【後復姓李하니라 】하다 [ 齊王][ 誥]卽皇帝位于金陵【[ 徐知誥]也라 】하야 大赦하고 改元昇元하고 國號唐【是爲南唐이라 [ 徐知誥]는 改名[ 昇]이라 [通鑑要解] [ 徐知誥]는 本以李氏之子라 旣擧大號에 欲纂唐緖라 故로 改國號唐이라 】이라하고 尊[ 吳主]曰讓皇이라하다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8월에 吳主가【吳主는 楊溥이다.】 조서를 내려 帝位를 齊王徐知誥에게 禪讓하였다.【齊王徐知誥는 뒤에 本姓인 李氏姓을 회복하였다.】齊王徐知誥가 金陵에서 황제에 즉위하여【[原註] 齊王誥卽皇帝位于金陵:齊王誥는 徐知誥이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昇元으로 개원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으며,【[頭註]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는 昇으로 개명하였다. [通鑑要解] 徐知誥는 본래 李氏의 아들이다. 이미 大號(황제의 칭호)를 거행한 뒤에 唐나라의 계통을 잇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국호를 唐으로 고쳤다.】吳主를 높여讓皇이라 하였다. - 宋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없어졌다.-
[戊戌]〈晉天福三年이라 ○ 蜀廣政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무술(938) - 晉나라 天福 3년이다. ○ 蜀나라 廣政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閏月에 [ 閩主]殂하니 其叔父[ 延羲] 自稱[ 閩國王]하고 更名[ 曦]하다
○ 八月에 晉以[ 馮道]로 守司徒兼侍中하고 詔中書하야 知印【舊制에 凡宰臣이 更日知印이라 】을 止委上相하니 由是로 事無巨細히 悉委於[ 道]하니라 [ 晉主]嘗訪以軍謀한대 對曰 征伐大事는 在聖心獨斷이요 臣은 書生이라 惟知謹守歷代成規而已라한대 [ 晉主]以爲然하니라
○ 契丹이 改元會同하다
契丹이 會同으로 개원하였다.
[庚子]〈晉天福五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경자(940) - 晉나라 天福 5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閩主][ 曦]旣立에 驕淫苛虐이어늘 建州刺史[ 延政]이 數以書諫之하다 於是에 兄弟積相猜恨하야 治兵相攻하야 互有勝負하니 福建之間에 暴骨如莽矣러라
○ 唐倉吏歲終에 獻羨餘萬石이어늘 [ 唐主]曰 出納有數하니 苟非掊民【掊는 聚斂也라 】刻軍이면 安得羨餘邪아
唐나라의 창고관리가 연말에 남은 곡식 1만 석을 바치자, 唐主가 말하기를 “出納은 일정한 수가 있으니, 만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掊는 聚斂하는 것이다.】 군량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남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晉[ 李崧]이 奏호되 諸州倉糧이 於計帳【謂歲計其數하야 造帳以申三司者요 又具來歲課役之大數以報度支者라 】之外에 所餘頗多라하니 [ 晉主]曰 法外稅民은 罪同枉法이라 倉吏를 特貸其死하노니 各痛懲之하라
晉나라 [- 李崧]이 아뢰기를 “여러 州의 창고에 있는 양식이 計帳(회계장부)【計帳은 해마다 그 수를 계산하여 장부를 만들어 三司에 보고하는 것이요, 또 다음 해에 부과할 부역의 큰 수를 갖추어 度支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외에 남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말하기를 “법으로 정한 것 이외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죄가 법을 부정하게 적용하는 것과 같다. 창고관리는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니, 각각 통렬히 징계하라.” 하였다.
○ 自[ 黃巢]犯長安以來로 天下血戰數十年하니 然後에 諸國이 各有分土【凡聚土하야 以封諸侯호되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하야 兵革稍息이러니 及[ 唐主]卽位에 江淮比年豐稔하야 兵食有餘라 群臣이 爭言호되 陛下中興에 今北方多難하니 宜出兵하야 恢復舊疆이니이다 [ 唐主]曰 吾少長軍旅하야 見兵之爲民害深矣라 不忍復言하노니 使彼民安이면 則吾民亦安矣니 又何求焉이리오
黃巢가 長安을 침범한 이래로 천하가 수십 년 동안 혈전을 겪으니, 그런 뒤에 여러 나라가 각각 영토를 소유하여【영토를 모아서 諸侯를 봉하되 封地를 받은 것이 각각 구분이 있는 것이다.】 전쟁이 다소 잠잠해졌는데, [- 唐主]가 즉위하자 江‧淮 지방에 매년 풍년이 들어서 군량이 남아돌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중흥하심에 지금 북방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출병하여 옛날 소유했던 강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였다. [- 唐主]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軍中에서 자라 군대가 백성들의 폐해가 됨이 심함을 직접 보아왔다. 차마 다시는 출병하는 일을 말하지 못하겠다. 가령 저들의 백성들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들 또한 편안하니, 또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晉成德節度使[ 安重榮]이 恥臣契丹하야 上表數千言하니 大抵斥[ 晉主]父事契丹하고 竭中國以媚無厭之虜러라 [ 桑維翰]이 密上疏曰 陛下免於晉陽之難【在上丙申年하니라 】而有天下는 皆契丹之功也니 不可負之어늘 議者以歲致繒帛으로 謂之耗蠹하고 有所卑遜으로 謂之屈辱하니 殊不知兵連而不休하고 禍結而不解하면 財力將匱하리니 耗蠹孰甚焉이며 用兵則武吏功臣이 過求姑息하고 邊藩遠郡이 得以驕矜하야 下陵上替하리니 屈辱이 孰大焉이니잇고 臣은 願陛下訓農習戰하고 養兵息民하야 俟國無內憂하고 民有餘力이니 然後觀釁而動이면 動必有成矣리이다
晉나라 成德節度使安重榮이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천 자의 表文을 올리니, 대저 晉主가 契丹을 아버지로 섬기고 中國의 재정을 고갈시켜 만족함이 없는 오랑캐에게 잘 보이는 것을 배척하였다. 이에 桑維翰이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晉陽의 난을 벗어나【晉陽의 난리는 앞의 丙申年(936)에 있었다.】 천하를 소유하신 것은 모두 契丹의 공이니, 이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해마다 비단을 바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소모한다고 이르고, 몸을 낮추고 겸손한 것을 가지고 굴욕을 겪는다고 이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져 그치지 않고 화가 맺혀서 풀리지 않는다면 재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니, 국가의 재정을 소모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무력을 동원하게 되면 武官과 功臣들이 우선 당장의 편안함만 지나치게 바라고 邊方의 藩鎭과 먼 郡들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여 아랫사람은 능멸하고 윗사람은 침체할 것이니, 굴욕을 당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농사를 가르치고 군사들에게 전술을 익히게 하며 군대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여, 나라에 內憂가 없고 백성들에게 남은 힘이 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틈을 보아 출동하시면 출동함에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 [ 吳越王][ 弘佐]【[ 錢鏐]子[ 元瓘]之子라 】卽王位하다
[壬寅]〈晉天福七年六月에 [ 晉主][ 重貴]立하니라 ○ [ 漢主][ 玢]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夏四月에 [ 漢高祖]【南漢也라 [ 劉隱]之弟니 初名[ 巖]이라 梁封[ 隱]하야 爲[ 南平王]이러니 [ 隱]卒에 [ 巖]이 繼封爲[ 南海王]이라가 丁丑年에 稱帝하고 國號大越하며 戊寅年에 改國號大漢하고 改名[ 龑]하니라 [ 弘度]는 [ 龑]之子也라 本傳에 龑音嚴이라 】殂하니 [ 秦王][ 弘度] 卽皇帝位하야 更名[ 玢]하다
○ 六月에 [ 晉主]殂하니 [ 馮道]【守司徒兼侍中이라 】與[ 景延廣]으로 議以國家多難하니 宜立長君이라하고 乃奉[ 廣晉尹][ 齊王][ 重貴]【帝兄之子라 [頭註] [ 廣晉]은 本紀에 作大(太)原하니라】爲嗣하니 是日에 [ 齊王]이 卽皇帝位하다 [ 延廣]以爲己功이라하야 始用事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晉祖以唐朝禁臠之親으로 地尊勢重이어늘 迫於猜疑하야 請兵契丹하야 賂以土地하고 而取人之國이라 跡其以中國之君으로 而屈身夷狄하면 玩好珍異 旁午道途호되 小不如意하면 譙責繼之하야 當時朝野 莫不痛心이로되 而晉祖事之에 殊無赧色이라 夫以古人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라도 猶且不爲어든 況附夷狄以伐中國하고 又從而取之者乎아 綱目에 書晉上尊號於契丹하고 契丹加[ 晉主]尊號는 所以著中國夷狄首足倒懸之極이니 其惡契丹而賤[ 敬瑭]也 甚矣로다
6월에 晉主(石敬瑭)가 죽으니, 馮道가【馮道는 守司徒 兼侍中이다.】景延廣과 함께 의논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長君(長子)을 세워야 한다.” 하고 마침내 廣晉尹齊王石重貴를【[原註] 石重貴는 황제(石敬瑭)의 兄(石敬儒)의 아들이다. [頭註] 廣晉은 〈高祖本紀〉에 太原으로 되어 있다.】받들어 후사로 삼으니, 이날 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景延廣은 〈황제를 세운 것이〉자신의 공이라 하여 비로소 권력을 행사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晉나라 高祖는 唐나라 禁臠의 친척(駙馬)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였는데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아 거란에게 군대를 청하여 土地로써 뇌물을 주고 남의 나라를 차지하였다. 中國의 군주로서 오랑캐에게 몸을 굽힌 것을 찾아보건대, 완호품과 진귀한 물건을 거란에 바친 것이 도로에 이어졌으나 조금이라도 거란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견책이 이어져서, 당시 朝野의 사람들 가운데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晉나라 高祖는 거란을 섬김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 晉主]之初卽位也에 大臣이 議奉表稱臣告哀於契丹이러니 [ 景延廣]【天平節度使侍衛馬步都虞侯라 】이 請致書稱孫而不稱臣【因[ 契丹主]令[ 高祖]稱兒皇帝하야 用家人之禮致書也라 】하다 契丹이 大怒하야 遣使來責讓이어늘 [ 延廣]이 復以不遜語【[ 延廣]이 囚契丹使라가 已而요 遣歸曰 說爾主호되 先帝는 爲北朝所立이라 故로 稱臣奉表어니와 今上은 中國所立이니 稱孫足矣라 翁怒來하면 則孫有十萬橫磨劍이라하니라 】答之하다 契丹盧龍節度使[ 趙延壽]【本唐人이니 晉初에 爲契丹所虜하니라 】欲代晉帝中國하야 屢說契丹擊晉한대 [ 契丹主]頗然之하니라
晉主가 처음 즉위할 적에 大臣들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臣이라 칭하며 契丹에게 喪事를 알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景延廣은【景延廣은 天平節度使 侍衛馬步都虞侯이다.】 〈표문을 올리지 말고〉편지를 보내되 孫이라 칭하고 臣이라 칭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景延廣의 의논은〉契丹主가 高祖(石敬瑭)로 하여금 兒皇帝라고 칭하게 한 것을 이용하여 家人의 禮를 써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契丹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꾸짖자, 景延廣이 다시 불손한 말로【불손한 말이란 景延廣이 契丹의 사신을 가두었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네 임금에게 말하기를 ‘先帝는 北朝(契丹)에서 세웠기 때문에 臣이라고 칭하고 표문을 받들어 올렸지만, 今上은 中國에서 세웠으니 孫이라고 칭하면 충분하다. 할아버지(契丹主)가 노하여 와서 교전한다면 손자는 십만 자루의 잘 연마한 검을 차고 상대할 뿐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답하였다. 契丹의 盧龍節度使趙延壽는【趙延壽는 본래 唐나라 사람인데, 晉나라 초기에 契丹에게 사로잡혔다.】晉나라를 대신해서 中國의 황제가 되고자 하여 자주 契丹을 설득해서 晉나라를 공격하게하니, 契丹主가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契丹 〈[ 太宗]會同五年이라〉
契丹 - 太宗會同 5년이다. -
齊王
[ 齊王]은 名[ 重貴]니 [ 高祖]兄[ 敬儒]之子로 史曰[ 出帝]라 在位四年이라
[癸卯]〈晉天福八年이라 凡五國, 三鎭이라〉
계묘(943) - 晉나라 天福 8년이다.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에 [ 唐主]【南唐[ 李昇]이라 】餌方士靈丹하고 浸成躁急하다 二月에 [ 唐主]疽發背어늘 召[ 齊王璟]【[ 昇]之長子라 】하야 入侍疾할새 [ 唐主]謂[ 璟]曰 吾餌金石은 始欲益壽어늘 乃更傷生하니 汝宜戒之하라 是夕에 殂하니 [ 元宗]이 卽位하다
[新增][ 胡氏]曰 生不可益而疾可治라 [ 漢高]도 猶曰 命乃在天하니 雖[ 扁鵲]인들 何益이리오하니 今無疾以求益生之祥하니 其惑을 不待貶也라 然坐此致斃者幾何人이완대 而莫之戒者는 貪本不除也일새라 方士敎人延年不死하고 釋氏敎人死而得果하니 惟貪者入之라 故로 曰 養心莫善於寡欲이라하니라 異端佛[ 老]之學은 或割除親愛하고 或遺棄萬事하야 灰心槁形於寂寞之濱하야 若無欲者로되 而望輕擧하고 冀後果하야 其欲莫大焉하니 君子不可不愼也니라
2월에 唐主가 등창이 났는데, 齊王李璟을 불러【李璟은 李昇의 長子이다.】 궁중에 들어와서 병을 간호하게 할 적에 唐主가 李璟에게 이르기를 “내가 金石의 丹藥을 복용한 것은 본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해서였는데 도리어 생명을 더 손상시켰으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죽으니, 元宗이 즉위하였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약은〉생명을 더 연장할 수는 없으나 병은 치료할 수 있다. 漢나라 高祖도 오히려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마침내 하늘에 달려있으니, 비록 扁鵲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병이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祥瑞를 구하였으니, 그 미혹됨을 굳이 폄하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들어 죽음을 초래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는 자가 없는 것은 탐욕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方士는 사람들에게 수명을 연장하여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고, [- 釋氏]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證果를 얻을 것을 가르치니, 오직 탐욕스러운 자들이 여기에 빠진다. 그러므로 《孟子》에 이르기를 ‘마음을 기름은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異端과 佛老의 학문은 혹 친애하는 마음을 잘라서 제거하기도 하고 혹 세상만사를 버려 적막한 물가에서 마음이 불꺼진 재와 같고 형체가 마른 나무와 같아서 욕망이 없는 자와 같다. 그러나 道士들은 신선이 되어 가볍게 날아다니기를 바라고 佛者들은 후일의 果報를 바라서 그 욕망이 더 클 수가 없으니, 군자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 閩王][ 延政]【[ 王審知]子라 】이 稱帝於建州하고 國號를 大殷이라하다
○ [ 漢晉王][ 弘熙]【[ 玢]之弟也니 殺[ 玢]自立者라 】卽皇帝位하야 更名[ 晟]하다
○ 晉[ 桑維翰]이 屢請遜辭以謝契丹호되 每爲[ 延廣]所沮러니 [ 晉主]以[ 延廣]有定策功이라 故로 寵冠群臣하고 又總宿衛兵이라 故로 大臣이 莫能與之爭이러라 河東節度使[ 劉知遠]【河東節度使니 是爲後漢[ 高祖]라 】이 知[ 延廣]必致寇로되 而畏其方用事하야 不敢言하고 但益募兵하야 以備契丹이러니 [ 契丹主]乃集山後及盧龍兵五萬人하야 使[ 趙延壽]將之하고 [ 委延壽]經略中國하야 曰 若得之면 當立汝爲帝라하니 由是로 爲契丹盡力하야 畫取中國之策하니라
晉나라 桑維翰이 여러 번 공손한 말로 契丹에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매번 景延廣에게 저지당하였다. 晉主는 景延廣이 계책을 결정하고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공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총애가 여러 신하 중에 으뜸이었고, 또 景延廣이 宿衛의 군대를 총괄하였으므로 大臣들이 감히 그와 다투지 못하였다. 河東節度使劉知遠은【劉知遠은 河東節度使이니, 이가 後漢의 高祖이다.】景延廣이 반드시 거란의 침입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다만 더욱 군대를 모집하여 契丹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 契丹 〈會同六年이라〉
契丹 - 會同 6년이다. -
[甲辰]〈晉開運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三鎭이라〉
갑진(944) - 晉나라 開運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正月에 契丹이 陷貝州하다 時에 用兵方略號令이 皆出[ 延廣]하고 宰相以下는 皆無所預라 [ 延廣]이 乘勢使氣하야 陵侮諸將하니 雖天子라도 亦不能制러라
○ 閩拱宸都指揮使[ 朱文進]이 弑[ 閩王][ 曦]하다
○ 或謂[ 晉主]曰 陛下欲禦北狄, 安天下인댄 非[ 桑維翰]이면 不可라한대 乃復置樞密院하고 以[ 維翰]爲中書令兼樞密使하야 事無大小히 悉以委之하니 數月之間에 朝廷이 差治하니라
○ 契丹之入寇也에 [ 晉主]再命[ 劉知遠]하야 會兵山東호되 皆後期不至하니 [ 晉主]疑其有異圖라 [ 郭威]【藩漢孔目官이니 是爲後周[ 太祖]라 】見[ 知遠]有憂色하고 謂[ 知遠]曰 河東은 山河險固하고 風俗尙武하며 土多戰馬하야 靜則勤稼穡하고 動則習軍旅하니 此는 霸王之資라 何憂乎리오하니라
○ 契丹 〈會同七年이라〉
契丹 - 會同 7년이다. -
[乙巳]〈晉開運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殷改稱閩而亡하니라〉
을사(945) - 晉나라 開運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殷나라가 閩이라고 개칭하였으나 바로 망하였다.-
契丹이 復大擧入寇라가 大敗北歸하다
契丹이 다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침입하였다가대패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 [ 契丹]이 連歲入寇하니 中國이 疲於奔命하고 邊民塗地어늘 [ 桑維翰]이 屢勸[ 晉主]하야 復請和於契丹하야 以紓國患하다
○ [ 晉主]自陽城之捷【是年三月에 都排陳使[ 苻彦卿]等이 至陽城하야 擊契丹하야 大敗之하니라 】으로 謂天下無虞라하야 驕侈益甚하고 [ 馮玉]【同平章이라 】이 乘勢弄權하야 四方賂遺 輻輳其門하니 由是로 朝政이 益壞하니라
○ 契丹 〈會同八年이라〉
契丹 - 會同 8년이다. -
[丙午]〈晉開運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병오(946) - 晉나라 開運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十一月에 [ 契丹主]大擧入寇어늘 [ 晉主]以[ 杜威]爲上將【謂北面行營都招討使也라 】이러니 威與[ 李守貞]【以天平節度使로 爲兵馬都監하니라 】, [ 宋彦筠]【以前威勝節度使로 爲步軍左廂都指揮使하니라 】謀降契丹하다 [ 契丹主]紿之曰 [ 趙延壽]威望素淺하야 恐不能帝中國이라 汝果降者면 當以汝爲之호리라 威喜하야 遂降하고 命軍士釋甲하니 軍士皆慟哭하야 聲振原野러라 [ 張彦澤]【彰德節度使니 引兵爲前鋒하니라 】이 倍道疾驅하야 夜度白馬津하야 未明에 自封丘門으로 斬關而入하야 遷[ 晉主]於開封府하다
11월에 契丹主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들어와 침략하자, 晉主가 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는데,【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北面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한 것을 이른다.】杜威는 李守貞【李守貞은 天平節度使로서 兵馬都監이 되었다.】, 宋彦筠과【宋彦筠은 前 威勝節度使로서 步軍左廂都指揮使가 되었다.】 함께 契丹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契丹主가 이들을 속여 말하기를 “趙延壽는 위엄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여 中國의 황제가 되지 못할까 두렵다. 너희들이 과연 항복한다면 마땅히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였다. 杜威가 기뻐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으라고 명하니,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언덕과 들판에 진동하였다.
○ [ 契丹] 〈會同九年이라〉
契丹 - 會同 9년이다. -
歷年圖曰 [ 高祖]【[ 石敬塘]이라 】以地尊勢重으로 迫於猜嫌한대 親執臣子之禮하야 以事戎狄하고 賂之土地하야 籍其兵力하야 以取天下하니 羽翼未成이면 不可以高飛요 國家未治면 不可以應敵이라 [ 齊王]은 捨[ 桑維翰]之深謀하고 信[ 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而外挑彊隣하야 使流民塗野草하고 胡騎汚宮闕하야 生爲降虜하고 死爲羈魄하니 非不幸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少主信[ 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外挑强胡라 自陽城一捷之後로 顧謂國勢無虞라하야 驕奢益甚하야 四方貢獻을 皆歸內府하며 廣置宮室하고 崇飾後庭하며 賞賜伶優에 多寡無算하고 委任[ 馮玉]하야 倚勢弄權이라 當旱蝗水潦 國脈如線之時하야 方且今年에 遣使括民穀하고 明年에 遣使括民財하며 迨夫契丹入寇하야 境內皇皇이로되 猶且調鷹苑內하고 排沮人言하야 遂使橫尸蔽野하고 宗廟丘墟하니 跡其人謀하면 豈不幸哉아 夫以晉之立國이 絶滅三綱하고 屛棄五常이라 報叔母爲妻하야 而夫婦亂矣요 尊夷狄爲父하야 而父子亂矣요 爲中國主하야 臣于契丹하야 而君臣亂矣라 三綱旣失에 中國已淪胥爲夷하니 不待[ 契丹主]服赭袍坐崇元殿하야 令百官行入閤禮하고 而風聲氣習之來侵이 已非一日矣라 此蓋人道之大變이요 中國之巨禍라 至使斯人으로 與禽獸雜處하야 而又離其害焉하니 此豈容以常理斷哉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石敬塘)는【高祖는 石敬塘이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이유로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자, 신하의 예를 친히 행하여 戎狄(거란)을 섬기고 토지를 바쳐 병력을 빌려서 이로써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높이 날 수가 없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적에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齊王(石重貴)은 桑維翰의 깊은 계책을 버리고 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內政을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이웃나라에 도전하여, 유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풀에 피를 뿌리게 하고 오랑캐 기병으로 하여금 궁궐을 더럽히게 하여, 살아서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죽어서는 떠돌아다니는 혼백이 되었으니, 이는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少主(石重貴)가 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안으로 정사를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陽城에서 한 번 승리한 뒤로는 도리어 國勢가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四方에서 貢物로 바친 것을 모두 內府로 돌리며, 궁실을 널리 건축하고 後庭을 성대하게 꾸미며, 광대들에게 賞을 줄 적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외척인 馮玉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권세를 믿고 농간하게 하였다. 가뭄이 들고 蝗蟲이 발생하며 수해가 들어 국가의 명맥이 실낱 같은 때를 당하여, 도리어 금년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곡식을 긁어모으고, 다음해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거란이 쳐들어옴에 미쳐서 境內가 위급하였으나 오히려 上林苑 안에서 매를 조련하고 사람들의 간언을 배척하고 막아서 마침내 시신이 들을 뒤덮고 宗廟가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사람의 잘못된 계책을 살펴보면 어찌 불행이라 하겠는가.
晉나라가 건국할 때에 三綱을 끊어 없애고 五常(五倫)을 물리쳐 버렸다. 叔母를 간음하고 아내로 삼아 夫婦의 윤리가 문란하였고, 夷狄을 높여 아버지라 칭하여 父子의 윤리가 혼란하였고, 中國의 군주로서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여 君臣의 도리가 혼란해졌다. 三綱을 잃은 뒤에 中國이 이미 몰락하여 서로 오랑캐가 되었으니, 굳이 契丹의 군주가 붉은 도포를 입고 崇元殿에 앉아서 百官들로 하여금 入閤禮를 행하게 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랑캐의 風聲(風敎)과 氣習에 침입당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이는 人道의 큰 변고이고 中國의 큰 禍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禽獸와 함께 처하게 하여 또다시 그 폐해를 입게 하였으니, 이 어찌 떳떳한 이치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右後晉은 二主에 共十一年이라
이상 後晉은 두 군주에 모두 11년이다.
後漢紀
高祖
[ 高祖]※在位二年이요 壽五十四라
※ 名은 [ 暠]요 姓은 [ 劉氏]니 本名은 [ 知遠]이요 其先은 沙陀人이라 晉開運二年에 封[ 北平王]이러니 四年에 [ 晉主]北遷[ 高祖]한대 乃圖義擧하야 卽位於晉陽하니라
[丁未]〈[ 漢高祖][ 劉知遠]은 仍稱晉天福十二年하니라 ○ 是歲에 晉亡漢興하니 幷蜀, 南漢, 南唐하야 凡四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春正月朔에 [ 契丹主]至大梁하야 以[ 晉主]로 爲[ 負義侯]하야 置於黃龍府【黃龍府는 在臨潢府東南二百餘里라 按契丹國志에 東渡遼水하야 至(勃)[渤]海國鐵州요 又行七八日하야 過南海府하야 〈遂至黃龍府也라〉初에 [ 契丹主][ 阿保機] 見黃龍在其氈屋上하고 連發二矢殪之러니 後에 太子[ 德光]이 於其地에 置黃龍府하니라 】하다
○ [ 契丹主]縱胡騎四出하야 以牧馬爲名하고 分番剽掠【剽는 劫奪也라 】하니 謂之打草穀이라 丁壯은 斃於鋒刃하고 老弱은 委於溝壑하야 自東西兩畿【東西二京也라 畿는 天子千里之地니 夏曰縣內요 殷曰畿內라 大梁屬縣은 爲東畿요 洛陽屬縣은 西畿니라 】로 及鄭, 滑, 曹, 濮히 數百里間에 財畜殆盡하니 於是에 內外怨憤하고 始患苦契丹하야 皆思逐之矣러라
契丹主가 오랑캐 기병을 풀어놓아 사방으로 내보내서 말을 먹인다고 이름하고 番을 나누어 노략질하니,【剽는 위협하여 빼앗는 것이다.】 이를 일러 打草穀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中國의 壯丁들은 칼날에 죽고 노약자들은 시신이 도랑에 버려져서 東京과 西京의 兩畿로부터【東西兩畿는 東京과 西京 두 京師이다. 畿는 天子가 다스리는 千里의 땅이니, 夏나라는 縣內라고 하였고 殷나라는 畿內라고 하였다. 大梁의 屬縣은 東畿가 되고, 洛陽의 屬縣은 西畿가 된다.】鄭州‧滑州‧曹州‧濮州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에 재물과 가축이 거의 다 없어지니, 이에 內外가 원망하고 분노하였으며, 비로소 契丹을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모두 쫓아낼 것을 생각하였다.
○ 晉[ 劉知遠]이 在河東하야 富强이 冠諸鎭하야 步騎至五萬人이라 [ 晉主]與契丹結怨하니 [ 知遠]이 知其必危호되 而未嘗論諫하다 契丹이 屢深入호되 [ 知遠]이 初無邀遮【邀도 亦遮也라 】入援之志러니 及聞契丹入汴하고 [ 知遠]이 分兵守四境하야 以防侵軼이라 於是에 將佐勸[ 知遠]稱尊號하야 以號令四方한대 [ 知遠]이 不許어늘 軍士皆曰 今契丹이 陷京城, 執天子하야 天下無主하니 主天下者 非我王而誰오 宜先正位號하고 然後出師하소서
晉나라 劉知遠이 河東에 있으면서 부강함이 여러 鎭 중에 으뜸이 되어 보병과 기병이 5만 명에 이르렀다. 晉主가 契丹과 원한을 맺으니, 劉知遠은 반드시 위험을 초래할 줄을 알았으나 한번도 의논하고 간하지 않았다. 契丹이 여러 번 깊숙히 침입하였지만 劉知遠은 애당초 적을 가로막고【邀 또한 가로막는 것이다.】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었는데 契丹이 汴州로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劉知遠은 군대를 나누어 사방의 경계를 수비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이에 장수와 막료들이 劉知遠에게 존호를 칭하여 사방을 호령할 것을 권하자, 劉知遠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契丹이 京城을 함락하고 천자를 사로잡아 천하에 군주가 없으니, 천하를 주관할 자가 우리 왕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마땅히 먼저 皇帝의 지위와 존호를 바로잡고 그런 뒤에 출정하소서.” 하였다.
○ 二月辛未에 晉[ 知遠]이 卽皇帝位하야 自言未忍改晉國이라하고 又惡開運【晉[ 齊王]年號라 】之名하야 乃更稱天福【晉[ 高祖]年號라 】十二年하다
○ 東方에 群盜大起어늘 契丹主謂左右曰 我不知中國之人을 難制如此로다 復召晉百官하야 諭之曰 天時向暑하니 吾難久留라하고 以[ 蕭翰]【[ 契丹主][ 邪(耶)律德光〈太〉后][ 述律太后]之兄子라 其妹復爲[ 契丹主]后하니 始以[ 蕭]爲姓이라 自是로 契丹后族을 皆稱[ 蕭氏]하니라 】으로 爲節度使하다 契丹이 建國號遼하다 [ 遼主]發大梁하니 晉文武諸司從者數千人이라 盡載府庫之實以行하다
東方에 도둑떼가 크게 일어나자, 契丹主가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中國 사람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을 줄은 알지 못했다.” 하고, 다시 晉나라 百官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날씨가 더워지니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기가 어렵다.” 하고, 蕭翰을【蕭翰은 契丹主耶律德光의 太后인 [- 述律太后]의 오라비의 아들이다. 그 누이가 다시 契丹主의 后가 되니, 처음으로 蕭氏를 姓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契丹의 后族을 모두 蕭氏라 칭하였다.】節度使로 삼았다.
契丹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遼라 하였다. 遼主가 大梁을 출발하니, 晉나라의 여러 文武 官司 중에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府庫에 가득한 물건을 모조리 싣고 갔다.
○ [ 遼主]至殺胡林【胡는 本作狐라 按契丹志에 殺狐林者는 村民이 於林中에 射殺一狐하고 因名焉이라 今名死狐嶺하니 在眞定府欒城縣北하니라 】而卒이어늘 國人이 剖其腹하고 實鹽數斗하야 載之北去하니 晉人이 謂之帝羓【羓는 音巴니 腊屬이라 凡獸全乾者曰腊이니 卽[ 太宗][ 德光]也라 】라하니라
○ [ 楚王][ 希範]【[ 馬殷]子也니 見上卷하니라 】이 卒하니 將佐奉其弟[ 希廣]立之하다
○ [ 晉主]【[ 劉知遠]이라 】發太原하야 自陰地關으로 出晉, 絳【地名이라 】하니 [ 史弘肇]【侍衛都指揮使라 】奏克澤州【契丹昭義節度使[ 耿崇美] 屯澤州하야 將攻潞州어늘 [ 弘肇]取之하니라 】하다 [ 弘肇]爲人이 沈毅寡言하고 御衆[ 嚴]整하야 所向必克하니 [ 晉主]自晉陽으로 安行하야 入洛及汴에 兵不血刃은 皆[ 弘肇]之力也라 [ 晉主]由是로 倚愛之하니라
晉主(劉知遠)가【晉主는 劉知遠이다.】太原을 출발하여陰地關으로부터 晉州와 絳州로 나오니,【晉州와 絳州는 지명이다.】史弘肇가【史弘肇는 侍衛都指揮使이다.】澤州를 점령하였음을아뢰었다.【거란의 昭義節度使[- 耿崇美]가 澤州에 주둔하여 潞州를 공격하려 하자, 史弘肇가 澤州를 점령하였다.】史弘肇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말이 적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엄격하고 정돈되어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하니, 晉主가 晉陽으로부터 편안히 행군하여 洛陽과 汴州(大梁)에 들어갈 적에 병사들이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은 모두 史弘肇의 힘이었다. 晉主가 이로 말미암아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였다.
○ [ 蕭翰]이 聞[ 晉主]擁兵而南하고 欲北歸호되 恐中國無主하야 必大亂이러니 時에 唐[ 明宗]子[ 許王][ 從益]이 與[ 王淑妃]【[ 許王]母라 】로 在洛陽이어늘 [ 翰]이 迎而立之하야 以爲帝하다
○ 六月에 吳越[ 忠獻王][ 弘佐]卒할새 遺令하야 以丞相[ 弘倧]【[ 弘佐]之弟라 】으로 爲鎭海, 鎭東節度使하다 〈是歲에 爲內牙統軍使[ 胡進思]所廢하고 更立其弟[ 弘淑]하니라〉
○ [ 晉主]至洛陽하야 命鄭州防禦使[ 郭從義]하야 先入大梁淸宮【灑掃殿內也라 】하고 密令殺[ 李從益]及[ 王淑妃]하다
○ [ 晉主]【綱目에 作[ 漢主]라 】至大梁하야 復以汴州爲東京하고 改國號曰漢이라하고 仍稱天福年하고 曰 余未忍忘晉也라하니라
[戊申]〈漢改乾祐元年하다 二月에 [ 隱帝][ 承祐]立하니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 晉主]不豫어늘 召[ 蘇逢吉], [ 楊邠], [ 史弘肇], [ 郭威]【[ 蘇逢吉]은 同平章事요 [ 楊邠]은 樞密使요 [ 郭威]는 副樞密使라 】하야 入受顧命할새 曰 [ 承祐]幼弱하니 後事를 託在卿輩하노라 二月에 立皇子[ 承祐]爲[ 周王]하야 卽皇帝位하다
봄 정월에 晉主가 편찮았는데, 蘇逢吉‧楊邠‧史弘肇‧郭威를 불러【蘇逢吉은 同平章事이고, 楊邠은 樞密使이고, 郭威는 副樞密使였다.】 궁궐에 들어와서 顧命을 받게 하고, 말하기를 “承祐가 어리고 약하니, 뒷일을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였다.
○ 冬十月에 荊南節度使[ 南平獻王][ 高從誨]卒하니 其子[ 保融]이 知留後하다
○ 遼 〈天祿二年이라 [ 遼主][ 阮]은 [ 太祖]太子[ 人皇王][ 倍]子니 是爲[ 孝和莊憲皇帝]라〉
隱皇帝
[庚戌]〈漢乾祐三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러니 漢亡하니라〉
경술(950) - 漢나라 乾祐 3년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었는데, 漢나라가 망하였다.-
夏四月에 漢朝以契丹近入寇橫行호되 河北諸藩鎭이 各自守하고 無扞禦之者라하야 制하야 以[ 郭威]로 爲鄴都留守天雄節度使하야 樞密使는 如故【[ 漢主]卽位하야 以威로 仍爲樞密使同平章事하니라 】하고 以左監門衛將軍[ 郭榮]으로 爲天雄衙內都指揮使하다 [ 榮]은 本姓이 [ 柴]니 父[ 守禮]는 [ 郭威]之妻兄也라 [ 威]未有子時에 養以爲子하니라 〈威微時에 刺其頂上하야 爲雀兒하니 人皆稱爲[ 郭雀兒]러니 後爲[ 周高祖]하고 [ 榮]爲[ 世宗]하니라〉
여름 4월에 漢나라 조정에서는 契丹이 가까이 침입하여 횡행하였으나 河北의 여러 藩鎭들이 각각 자신만 지키고 거란을 막는 자가 없다 하여, 制書를 내려 郭威를 鄴都留守天雄節度使로 임명하여樞密使는 예전처럼 맡게 하고,【漢主(劉承祐)가 즉위하여 郭威를 樞密使 同平章事에 그대로 임명하였다.】左監門衛將軍郭榮을 天雄衙內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郭榮은 本姓이 柴이니, 아버지守禮는 郭威의 妻兄이었다. 郭威가 아들이 없었을 때에 길러서 양자로 삼았다.- 郭威가 미천했을 때 이마 위에 雀兒라고 刺字하니, 사람들이 모두 郭雀兒라고 칭하였는데, 뒤에 郭威는 周나라 高祖가 되고 郭榮은 世宗이 되었다.-
○ [ 漢主]自卽位以來로 [ 楊邠]은 總機政하고 [ 郭威]는 主征伐하고 [ 史弘肇]는 典宿衛하고 [ 王章]【三司使同平章事라 】은 掌財賦하니 以是로 國家粗安이러라 [ 章]이 聚斂刻急하야 有犯鹽礬【礬은 藥石也니 有白靑黃黑赤五種이라 或染者 借以成色하니라 】酒麯之禁者면 錙銖涓滴이라도 罪皆死하다 [ 章]이 尤不喜文臣하야 嘗曰 此輩는 授之握算이면 不知縱橫【算之橫豎니 [ 王章]爲三司使하야 寔掌財賦故로 云然也라 】이니 何益於用이리오 [ 史弘肇]曰 安定國家는 在長搶大劍이니 安用毛錐【筆也라 以束毛爲筆하니 形如錐也라 】리오 [ 章]曰 無毛錐면 則財賦何從可出고하니 於是에 將相이 始有隙하니라
漢主(劉承祐)가 즉위한 이래로 楊邠은 機務와 정사를 총괄하고郭威는 정벌을 주관하고史弘肇는 宿衛를 맡고王章은【王章은 三司使 同平章事이다.】 財賦를 맡으니, 이 때문에 국가가 다소 편안하였다. 王章은 재정을 거두어들일 적에 각박하고 급박해서 소금과 백반과【礬은 藥石이니, 백색‧청색‧황색‧흑색‧적색 다섯 종류가 있다. 염색하는 자가 이를 이용하여 색(물감)을 만들기도 한다.】 술과 누룩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가 있으면 저울눈만한 것과 물방울만한 것이라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王章은 더욱이 文臣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들은 握算(주판)을 주면 다룰 줄 모르니,【縱橫은 주판의 가로와 세로이니, 王章이 三司使가 되어 실로 財賦를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등용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하였다. 史弘肇가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긴 창과 큰 검에 달려 있으니, 毛錐(붓)를【毛錐는 붓이다. 털을 묶어서 붓을 만드니, 모양이 송곳과 같다.】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 王章이 말하기를 “毛錐가 없다면 財賦가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수와 정승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다.
○ [ 漢主]年益壯에 厭爲大臣所制하야 積不能平이어늘 左右因乘間하야 譖之於[ 漢主]호되 云 [ 邠]等이 專恣하니 終當爲亂이라한대 [ 漢主]信之하야 遂謀誅[ 邠]等하다 十一月丙子에 [ 邠]等이 入朝할새 有甲士數十이 自廣政殿出하야 殺[ 邠], [ 弘肇], [ 章]於東廡下하다 [ 漢主]遣供奉官[ 孟業]하야 齎密詔하고 詣澶州及鄴都하야 殺[ 王殷]【侍衛步軍都指揮使니 時在澶州하니라 】, [ 郭威], [ 王峻]【監軍宣徽殿使니 時與[ 郭威]로 在鄴都하니라 】하니 [ 郭威召][ 郭崇威]【行營馬軍都指揮使라 】, [ 曹威]【行營步軍都指揮使라 】及諸將하야 告以[ 楊邠]等寃死와 及有密詔之狀하고 且曰 吾與諸公으로 披荊棘【荊棘은 喩亂也라 】하고 從先帝하야 取天下하야 受託孤之任하야 竭力以衛國家러니 今諸公已死하니 吾何心獨生이리오 [ 郭崇威]等이 皆泣曰 天子幼沖하니 此必左右群小所爲리니 願從公入朝自訴하야 盪滌鼠輩하야 以淸朝廷이요 不可爲單使所殺이니이다 [ 郭威]乃留其養子[ 榮]하야 鎭鄴都하고 命[ 郭崇威]하야 將騎兵前驅하고 自將大軍繼之하야 至封丘하니 人情恟懼러라 [ 漢主]遣[ 慕容彦超]【奉寧節度使니 時徵諸帥하야 以從兵衛宮闕하니라 】等하야 將兵拒之러니 [ 彦超]等이 戰敗遂還이어늘 是日에 [ 漢主]出勞軍이라가 兵敗하야 爲亂兵所弑하다 [ 郭威]自迎春門入하야 丁亥에 帥百官하고 起居太后하고 具奏稱호되 軍國事殷【殷은 盛也라 】하니 請早立嗣君이니이다 太后誥迎[ 漢主]弟河東節度使贇【[ 贇]은 [ 漢主]弟요 河東節度使[ 崇]之子요 [ 高祖][ 暠]之猶子니라 】하야 卽皇帝位하다
漢主(劉承祐)는 나이가 더욱 장성하자 大臣들에게 제재받는 것을 싫어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쌓여갔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를 틈타서 漢主에게 참소하기를 “楊邠 등이 전횡하고 방자하니, 끝내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니, 漢主가 그 말을 믿고 마침내 楊邠 등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11월 丙子日(13일)에 楊邠 등이 들어와 조회할 적에 甲士 수십 명이 廣政殿으로부터 뛰쳐나와서楊邠‧史弘肇‧王章을 동쪽 행랑채 아래에서 죽였다. 漢主가 供奉官[- 孟業]을 보내어 密詔를 가지고 澶州와 鄴都로 가서 王殷‧【王殷은 侍衛步軍 都指揮使이니, 이때 澶州에 있었다.】郭威‧王峻을【王峻은 監軍宣徽殿使이니, 이때 郭威와 함께 鄴都에 있었다.】죽이게하니, 郭威가 [- 郭崇威]와【[- 郭崇威]는 行營馬軍 都指揮使이다.】曹威【曹威는 行營步軍 都指揮使이다.】 및 여러 장수들을 불러 楊邠 등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과 황제가 密詔를 내린 실상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諸公들과 온갖 고난을 헤치고【荊棘은 난리를 비유한 것이다.】 先帝(劉知遠)를 따라 천하를 차지하여 孤兒(나이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중임을 받고 힘을 다해 국가를 보위하였는데, 이제 諸公들이 이미 죽었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살겠는가.” 하였다.
[- 郭崇威] 등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天子의 나이가 어리니, 이는 반드시 좌우에 있는 여러 소인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公을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황제에게 하소연하고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소탕하여 조정을 깨끗이 청소해야 할 것이요, 일개 使者에게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郭威가 마침내 그의 養子인 郭榮을 남겨두어鄴都에 鎭駐하게하고, [- 郭崇威]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려 先鋒이 되게 하고 자신은 大軍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封丘縣에 이르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漢主가 慕容彦超【慕容彦超는 奉寧節度使이니, 이때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호위하였다.】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게하였는데, 慕容彦超 등이 싸움에 패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이날 漢主가 친히 나가 군사를 위로하다가 군사들이 패하여 亂兵에게 시해당하였다. 郭威가 迎春門으로 들어와丁亥日(24일)에 百官을 거느리고 太后의 안부를 물었으며, 글을 갖추어 上奏하기를 “軍國의 일이 많으니【殷은 많은 것이다.】 뒤를 이을 군주를 일찍 세우소서.” 하였다. 太后가 誥命을 내려 漢主의 아우(從弟) 河東節度使劉贇을【劉贇은 漢主(劉承祐)의 아우이고, 河東節度使劉崇의 아들이며, 高祖劉暠(劉知遠의 改名)의 조카이다.】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 武平節度使[ 馬希萼]【[ 希廣]之兄이라 】이 攻[ 楚王][ 希廣]殺之하고 自稱[ 武安], [ 靜江], [ 寧遠]等軍節度使하다
○ [ 遼主]入寇어늘 [ 漢太后]命[ 郭威]하야 將大軍擊之하다 十二月에 [ 威]發大梁하야 館于澶州러니 癸丑旦에 將發할새 將士數千人이 忽大譟어늘 [ 威]命閉門하니 將士踰垣登屋而入曰 天子는 須侍中自爲之요 將士已與[ 劉氏]【漢姓이라 】爲仇하니 不可立也라하고 或裂黃旗하야 以被[ 威]體하고 共扶抱之하야 呼萬歲震地하고 因擁[ 威]南行이라 [ 威]乃上太后牋호되 請奉漢宗廟하고 事太后爲母라하다 己未에 太后誥廢[ 贇]하야 爲[ 湘陰公]하고 以侍中[ 威]로 監國하니 百官藩鎭이 相繼上表勸進하다
12월에 郭威가 大梁을 출발하여澶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癸丑日(20일) 아침 장차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병 수천 명이 갑자기 크게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郭威가 성문을 닫도록 명하니, 장병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지붕 위로 올라와 궁중 안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천자는 모름지기 郭侍中(郭威)께서 스스로 해야 할 것이요, 장병들은 이미 劉氏와【劉氏는 漢나라의 姓이다.】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혹자는 황색 깃발을 찢어 郭威의 몸에 입혀주고 함께 부둥켜 안고서 만세를 불러 만세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인하여 郭威를 옹위하고 남쪽으로 갔다.
歷年圖曰 [ 高祖]擁精銳之兵하고 居形便之地러니 屬胡騎北旋하고 中州乏主라 故로 雍容南面而天下歸之하니 豈其材德之首出哉아 乃會其時之可爲也라 夫根疏者不固하고 基薄者易危라 [ 隱帝]는 雖有南面之號나 而政非己出하야 民不知君하고 輕信群小之謀하야 欲除跋扈之臣이라가 禍不旋踵하니 自然之勢也라 父子相繼四年而滅하니 自古享國之短이 未有若玆也니라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劉知遠)는 정예한 병력을 보유하고 지형이 유리한 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오랑캐의 기병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中原에 주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온화하게 南面하여 천하가 그에게 歸附하였으니, 어찌 그의 재주와 덕이 크게 뛰어났기 때문이겠는가. 바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기 때문이다. 뿌리가 엉성한 자는 견고하지 못하고, 기반이 약한 자는 위태롭기가 쉽다.
隱帝(劉承祐)는 비록 南面(제왕)의 칭호를 소유하였으나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였고, 여러 소인들의 계책을 가볍게 믿어서 발호하는 신하를 제거하고자 하다가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禍가 미쳤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이다. 父子가 서로 계승해서 4년 만에 멸망하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누린 것이 이와 같이 짧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右後漢은 二主에 共四年이라
이상 後漢은 두 군주에 모두 4년이다.
後周紀
太祖
後周紀
[ 太祖] 名[ 威]요 姓[ 郭氏]요 字[ 仲文]이니 邢州堯山人이라 在位三年이요 壽五十二이라
[辛亥]〈周[ 太祖][ 郭威]廣順元年이라 ○ 北漢主[ 劉崇]乾祐四年이라 ○ 是歲에 周代漢하고 北漢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漢監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周라하다
봄 정월에 漢나라의 監國(郭威)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周라 하였다.
○ 初에 漢河東節度使兼中書令[ 劉崇]【漢[ 高祖]母弟라 】이 聞[ 隱帝]遇害하고 欲起兵南向이러니 聞迎立[ 湘陰公]하고 乃止曰 吾兒爲帝하니 吾又何求리오 及[ 贇]廢에 [ 崇]乃卽皇帝位於晉陽하야 更名[ 旻]하고 仍用乾祐【隱帝年號라 】年號하다 〈是爲北漢이라〉
○ 初에 [ 周主]討河中【己酉年에 節度使[ 李守貞]反이어늘 討殺之하니라 】하니 已爲人望所屬이라 [ 李穀]이 時爲轉運使러니 [ 周主]數以微言諷之호되 穀이 但以人臣盡節로 爲對라 [ 周主]以是賢之하야 卽位에 首用爲相하니라 時에 國家新造하야 四方多故어늘 [ 王峻]【左僕射兼門下侍郞이라 】은 夙夜盡心하야 知無不爲하야 軍旅之謀를 多所裨益하고 [ 范質]【戶部侍郞判三司라 】은 明敏彊記하야 謹守法度하고 [ 李穀]【中書侍郞 同平章事라 】은 沈毅有器略하야 在[ 周主]前論議할새 辭氣忼(慷)慨【忼은 亦作慷하니 竭誠也요 又倜儻貌라 】하고 善譬諭하야 以開主意하니라
처음에 周主(郭威)가 河中을 토벌하니,【己酉年(949)에 河中節度使李守貞이 반란하자 周主가 토벌하여 죽였다.】 이미 사람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李穀이 당시 轉運使로 있었는데, 周主가 여러 번 은미한 말로 넌지시 말하였으나 李穀은 단지 ‘신하는 충절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周主가 이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즉위한 뒤에 첫 번째로 등용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 [ 唐主]遣[ 邊鎬]【[ 唐主]는 [ 李昪]長子[ 璟]也요 [ 邊鎬]는 信州刺史라 】하야 平湖南【湖南은 [ 楚馬氏]라 】하고 以[ 鎬]로 爲武安節度使하다
[壬子]〈周廣順二年이라 ○ 是歲에 周, 南漢, 蜀, 唐, 北漢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임자(952) - 周나라 廣順 2년이다. ○ 이해에 周‧南漢‧蜀‧唐‧北漢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 周主]自入秋로 得風痺疾【脚冷濕病이라 】하야 害於食飮及步趨하니라
周主가 가을이 된 뒤로 중풍에 걸려 수족이 마비되어서【痺疾은 다리가 차고 습한 병이다.】 음식을 먹을 때와 걸음을 걸을 때 장애가 되었다.
○ 遼 〈應曆二年이라〉
遼나라 - 應曆 2년이다. -
[甲寅]〈周顯德元年正月에 [ 睿武孝文皇帝][ 榮]立하고 北漢乾祐七年에 [ 孝和帝][ 鈞]立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周加[ 晉王][ 榮]【[ 太祖]養子니 是爲[ 世宗]이라 】兼侍中判內外兵馬事하다 時에 群臣이 希(稀)得見[ 周主]하야 中外恐懼러니 聞[ 晉王]典兵하고 人心稍安하니라 壬辰에 [ 周主]殂하니 [ 晉王]이 卽皇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 周祖]兩弑其君하고 簒取大位러니 得國之初에 罷四方貢獻珍食하고 詔百官上封事하며 毁漢宮寶器하고 立訴訟法하며 定稅牛皮法하고 罷戶部營田務하고 除租牛課하며 又如曲阜하야 謁[ 孔子]祠하고 拜其墓라 況有[ 王峻]以贊軍事하고 [ 范質]以守法度하고 [ 李穀]以道上意하니 雖享國日淺이나 而施爲有足稱者라 故로 先儒稱其爲[ 唐明], [ 周世]之亞는 蓋以此耳라 然이나 其旣已文身而甘心從夷하고 又偃然自處天位하니 則是黃屋之中에 居一黥人耳니 何以令天下衆庶乎아 觀其語[ 劉崇]曰 自古豈有花項天子리오하니 則[ 周祖]之自處 亦是明矣니라
봄 정월에 周나라가 晉王郭榮에게【晉王郭榮은 太祖(郭威)의 양자이니, 이가 世宗이다.】兼侍中判內外兵馬事를 가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周主를 만나보는 일이 드물어서 中外가 두려워하였는데, 晉王이 군대를 맡았다는 말을 듣고는 인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壬辰日에 周主가 죽으니, 晉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周나라 太祖(郭威)는 두 번이나 군주를 시해하고 大位를 찬탈하였는데, 나라를 얻은 초기에 四方에서 貢獻과 진귀한 음식을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고 百官들에게 명하여 封事疏를 올리게 하였으며, 後漢의 궁궐과 寶器를 부수고 訴訟하는 法을 만들었으며, 牛皮에 세금을 매기는 法을 정하고 戶部의 營田하는 일을 파하고 소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을 면제하였으며, 曲阜에 가서 孔子의 祠堂에 배알하고 묘소에 참배하였다. 더구나 王峻이 軍事를 돕고 范質이 法度를 지키고 李穀이 上의 뜻을 말하게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누린 것은 日淺하였으나 시행한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先儒가 唐나라 明宗과 周나라 世宗의 다음이라고 칭찬한 것은 이 때문이다.
○ [ 北漢主]【[ 劉崇]이라 】聞[ 太祖]晏駕하고 甚喜하야 謀大擧入寇할새 遣使請兵于遼하다
○ 二月에 [ 遼主]遣其將[ 楊]兗하야 將萬餘騎하고 如晉陽한대 [ 北漢主]自將兵三萬하고 與契丹으로 南趣(趨)潞州하다 [ 周主][ 世宗]이 聞[ 北漢主]入寇하고 欲自將兵禦之하니 群臣皆曰 [ 劉崇]이 自平陽遁走【辛亥年에 崇稱帝於晉陽하고 乞師契丹하야 會伐周러니 久不克하고 乏食이어늘 燒營夜遁하니라】以來로 勢蹙氣沮하야 必不敢自來요 陛下新卽位하사 山陵有日하니 人心易搖라 不宜輕動이니 宜命將禦之니이다 [ 世宗]曰 [ 崇]이 幸我大喪하고 輕朕年少新立하야 有呑天下之心하야 此必自來하리니 朕不可不往이니라 乙酉에 [ 周主]發大梁하야 壬辰에 過澤州하야 宿於州東北이러니 [ 北漢主]不知[ 周主]至하고 過潞州不攻하고 引兵而南하야 是夕에 軍於高平之南하다 [ 周主]介馬【介는 甲也라 】하고 自臨陣督戰할새 合戰未幾에 [ 樊愛能], [ 何徽]【[ 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요 [ 何徽]는 步軍都指揮使라 】引騎兵先遁하야 右軍潰하니 步兵千餘人이 解甲呼萬歲하고 降于北漢이라 [ 周主]見兵勢危하고 自引兵하야 親犯矢石督戰하니 [ 太祖皇帝]時爲宿衛將【[ 太祖皇帝]는 謂宋[ 太祖][ 趙匡胤]也라 】하야 謂同列曰 主危如此하니 吾屬이 何得不致死리오 又謂[ 張永德]【殿前都指揮使也라 [ 太祖]之壻니 掌禁兵하니라 】曰 賊氣驕하니 力戰이면 可破也라하고 乃身先士卒하야 馳犯其鋒한대 士卒死戰하야 無不一當百하니 北漢兵披靡【披는 分也니 言相違라 】라 時에 南風益盛이어늘 周兵爭奮하니 北漢兵이 大敗라 追至高平하니 僵尸滿山谷하고 委棄御物【謂服御之物이라 】及輜重器械雜畜이 不可勝紀러라
周主世宗(郭榮)은 北漢主가 쳐들어와 침략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군대를 인솔하여 막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劉崇이 平陽에서 패하여 도망간【辛亥年(951)에 劉崇이 晉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거란에 군대를 요청하여 모여서 周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바닥나자, 진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래로 형세가 위축되고 기운이 꺾여서 반드시 감히 직접 오지 못할 것이고, 폐하께서는 새로 즉위하여 山陵에 장례를 모실 날이 잡혀 있으니, 인심이 동요되기 쉽습니다.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니, 마땅히 장수에게 명하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世宗이 말하기를 “劉崇이 우리나라에 大喪(國喪)이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며, 朕이 나이가 젊고 새로 즉위한 것을 깔보아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이번에 반드시 스스로 올 것이니,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乙酉日(11일)에 周主가 大梁을 출발하여壬辰日(18일)에 澤州를 지나澤州의 동북쪽에 유숙하였다. 北漢主는 周主가 온 것을 알지 못하여潞州를 지나가면서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이날 저녁 高平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周主가 갑옷을 입힌 戰馬를 타고【介는 갑옷이다.】 스스로 陣에 임하여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교전한 지 얼마 안 되어 樊愛能과 何徽가【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이고, 何徽는 步軍都指揮使이다.】 기병을 이끌고 먼저 도망하여右軍이 무너지니, 보병 천여 명이 갑옷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北漢에 항복하였다.
周主는 전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니, 宋나라 太祖皇帝(趙匡胤)가 이때 宿衛將으로 있으면서【太祖皇帝는 宋나라 太祖趙匡胤을 이른다.】 同列들에게 이르기를 “군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張永德에게 이르기를【張永德은 殿前都指揮使이다. 太祖(郭威)의 사위이니 禁兵을 관장하였다.】 “적의 기세가 교만하니, 우리가 힘써 싸우면 격파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달려가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병졸들이 결사적으로 싸워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으니, 北漢의 군대가 패하여흩어져달아났다.【披는 나뉘는 것이니, 서로 떠남을 말한다.】
이때 남풍이 매우 거세게 불어오므로 周나라 군사들이 다투어 분발하니, 北漢軍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高平에 이르니, 쓰러진 시체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버려진 御用 物品과【御物은 임금의 服飾과 車馬 따위의 물건을 이른다.】 輜重, 병기와 각종 가축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 周[ 樊愛能]等이 聞周兵大捷하고 與士卒로 稍稍復還이라 [ 周主]欲誅[ 樊愛能]等하야 以肅軍政하야 卽收[ 愛能], [ 徽]及所部軍吏以上七十餘人하야 責之曰 汝輩皆累朝宿將으로 非不能戰이어늘 今望風奔逃者는 無他라 正欲以朕爲奇貨하야 賣與[ 劉崇]耳라하고 悉斬之하니 自是로 驕將惰卒이 始知所懼하야 不行姑息之政矣러라
周나라 樊愛能 등이 周軍이 크게 승리했다는 말을 듣고, 사졸들과 함께 차츰차츰 다시 돌아왔다. 周主는 樊愛能 등을 죽여 軍政을 엄숙하게 하고자 해서 즉시 樊愛能과 何徽 및 그들 휘하의 軍吏 이상 70여 명을 잡아 꾸짖기를 “너희들은 모두 여러 조정을 섬긴 옛 장수로서 잘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지금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도망한 것은 딴 이유가 없다. 바로 짐을 奇貨로 여겨 劉崇에게 팔아넘기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고 모두 목을 베니, 이로부터 교만한 장수와 나태한 사졸들이 비로소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당장 눈앞의 편안함만 구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았다.
○ 周太師中書令[ 瀛文懿王][ 馮道]卒하다 [ 道]少以孝謹知名이러니 唐[ 莊宗]世에 始貴顯하야 自是로 累朝에 不離將相三公三師之位하다 爲人이 淸儉寬弘하야 人莫測其喜慍하고 滑稽【滑은 音骨이니 亂也요 稽는 音鷄니 同也라 言辯捷之人은 言非若是하고 言是若非하야 能亂異同也라 】多智하야 浮沈取容이라 嘗著長樂老敍【道自號[ 長樂老]하고 著書數百言하야 陳己更事四姓과 契丹所賜階勳官爵하고 以爲榮하야 自謂 孝於家하고 忠於國하며 有子有孫이라 時開一卷하고 時飮一杯하니 何樂如之리오하니 其自述之(意)[敍] (太)[大]略如是하니라 】할새 自述累朝榮遇之狀하니 時人이 往往皆以德量推之하니라
周나라 太師中書令瀛文懿王馮道가 별세하였다. 馮道는 젊어서부터 효도와 恭謹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唐나라 莊宗 때에 처음으로 부귀하고 현달하여 이후로 역대의 조정에 장수와 재상, 三公과 三師의 지위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소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사람들이 그의 기쁨과 성냄을 측량하지 못하였고, 익살을 부리고【滑은 음이 골이니 어지럽힘이요, 稽는 음이 계이니 같음이다. 말을 잘하고 빨리하는 사람은 그른 것을 말하면서 옳은 것처럼 하고 옳은 것을 말하면서 그른 것처럼 하여 同異를 혼란시킴을 말한 것이다.】 지혜가 많아서 세상을 따라 부침하여 임금에게 용납됨을 취하였다. 일찍이 〈長樂老敍〉를【馮道가 스스로 長樂老라 이름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네 姓氏의 王朝를 번갈아 섬긴 것과 契丹에서 하사한 品階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 영화롭게 여겨 스스로 이르기를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훌륭한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다. 때로 책 한 권을 펼치고 때로 술 한 잔을 마시니,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니, 그 스스로 지은 敍文의 내용이 대략 이와 같았다.】 지을 적에 역대의 조정에서 총애와 예우를 받은 내용을 스스로 기술하니, 당시 사람들이 왕왕 모두 德量이 있다고 推重하였다.
[ 歐陽修]論曰 禮義廉恥는 國之四維【維는 綱也라 】니 四維不張이면 國乃滅亡이라 禮義는 治人之大法이요 廉恥는 立人之大節이니 況爲大臣而無廉恥면 天下其有不亂이요 國家其有不亡者乎아 予讀[ 馮道]長樂老敍컨대 見其自述以爲榮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니 則天下國家를 可從而知也라 予於五代에 得全節之士三【五代史에 [ 王彦章], [ 裴均], [ 劉仁贍]이라 】과 死事之臣十有五【[ 張源德], [ 夏魯奇], [ 姚洪], [ 王思同], [ 張敬達], [ 翟進宗], [ 沈斌], [ 王淸], [ 史彦超], [ 孫晟], [ 鄭遨], [ 張薦明], [ 石昂], [ 程福斌], [ 李自倫]이니 訓義엔 [ 鄭(邊)[遨]]以下五人을 作[ 馬彦超], [ 宋〈令〉詢], [ 李遐], [ 張彦卿], [ 鄭昭業]하니라 】하니 皆武夫戰卒이니 豈於儒者에 果無其人哉아 得非高節之士는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아 抑君天下者不足顧而莫能致之歟아 予嘗聞五代時에 有王凝者하니 家靑齊之間하야 爲虢州司戶參軍이러니 以疾卒于官이라 凝家素貧하고 一子尙幼어늘 妻[ 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이라가 止於旅舍하니 主人不納이라 [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이 牽其臂而出之한대 [ 李氏]仰天慟曰 我爲婦人하야 不能守節하야 而此手爲人所執邪아하고 卽引斧하야 自斷其臂하니 見者爲之嗟泣이라 開封尹이 聞之하고 白其事於朝하야 厚恤[ 李氏]하고 而笞其主人하니라 嗚呼라 士不自愛其身하고 而忍恥以偸生者 聞[ 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歐陽修가 논평하였다.
“禮‧義‧廉‧恥는 국가를 다스리는 네 가지 綱維이니,【維는 벼릿줄이다.】 네 가지 綱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마침내 멸망한다. 禮義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요, 廉恥는 사람을 세우는 큰 절개이니, 하물며 大臣이 되어서 염치가 없다면 천하가 어찌 혼란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국가가 어찌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내가 馮道의 〈長樂老敍〉를 읽어보건대 스스로 기술하고 영화라고 여겼으니, 廉恥가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하니 천하와 나라와 집안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五代時代의 역사 가운데에 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과【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은 《五代史》의 王彦章, 裴均, 劉仁贍이다.】 국사를 위해 죽은 신하 15명을 얻었는데【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 15명은 張源德‧夏魯奇‧姚洪‧王思同‧張敬達‧翟進宗‧沈斌‧王淸‧[- 史彦超]‧[- 孫晟]‧鄭遨‧張薦明‧[- 石昂]‧程福斌‧[- 李自倫]이니, 《資治通鑑訓義》에는 鄭遨 이하 5명을 [- 馬彦超]‧[- 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業이라 하였다.】 모두 武夫와 戰士이니, 어찌 儒者 중에 과연 그러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이는 절개가 높은 선비들은 세상이 혼란한 것을 싫어하여 세상을 비루하게 여겨 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 노릇하는 자가 돌아볼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초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으니, 五代時代에 王凝이란 자가 있었으니, 靑州와 齊州 사이에 거주하면서 虢州司戶參軍이 되었는데 병으로 인해 관청에서 죽었다. 王凝은 집이 평소 가난하고 한 아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그의 아내 李氏가 아들을 데리고 그의 遺骸를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동쪽으로 開封府를 지나다가 여관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인이 받아주지 않았다. 李氏가 하늘을 보니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가려고 하지 않자, 주인이 그녀의 팔뚝을 잡아 끌어 나가게 하였다. 이에 李氏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아녀자의 몸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팔뚝을 남의 남자에게 잡힌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도끼를 가져다 스스로 자기 팔뚝을 자르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開封府尹이 이 말을 듣고 그 일을 조정에 아뢰어서 李氏를 후하게 구휼하고 그 여관 주인을 매질하였다.
아! 선비들 가운데 스스로 자기 몸의 지조를 아끼지 않고 부끄러움을 참고 구차하게 살기를 꾀한 자들이 李氏의 유풍을 들으면 마땅히 다소 부끄러움을 알 것이다.”
[ 溫公]曰 天地設位어늘 聖人則之하야 以制禮立法하야 內有夫婦하고 外有君臣하니 婦之從夫에 終身不改하고 臣之事君에 有死無貳는 此人道之大倫也니 苟或廢之면 亂莫大焉이라 [ 范質]이 稱[ 馮道]厚德稽古하고 宏材偉量하야 雖朝代遷貿나 人無間言하야 屹若【危峻貌라 】巨山하야 不可轉也라하니 臣愚以爲正女는 不從二夫하고 忠臣은 不事二君하나니 爲女不正【正은 本作貞하니 避宋[ 仁宗]嫌名하야 作正하니라 】이면 雖復華色之美하고 織(袵)[絍]【絍은 繒帛之屬이라 】之巧라도 不足賢矣요 爲臣不忠이면 雖復才智之多하고 治行之優라도 不足貴矣니 何則고 大節已虧故也라 [ 道]之爲相에 歷五朝八姓하야 若逆旅之視過客하야 朝爲仇敵이라가 暮爲君臣하야 易面變辭하야 曾無愧怍이라 大節如此하니 雖有小善이나 庸足稱乎아
溫公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이 높고 낮은 자리를 베풀자, 聖人이 이것을 본받아 禮를 만들고 法을 세워서 안에는 夫婦가 있고 밖에는 君臣이 있게 하였다. 부인이 남편을 따름에 종신토록 바꾸지 않고, 신하가 군주를 섬김에 죽음은 있고 두 마음이 없는 것은 이는 人道의 큰 윤리이니, 만일 혹시라도 이것을 폐하면 禍亂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范質이 馮道를 칭찬하기를 ‘후덕하고 옛일을 상고하여 잘 알며 재주가 크고 도량이 뛰어나서 비록 朝代(王朝)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이 없어 큰 산이 우뚝히【屹若는 높고 험한 모양이다.】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동요시킬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내가 생각건대 貞操를 지키는 여자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 법이니,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면【正은 본래 貞으로 되어 있으니 宋나라 仁宗의 이름을 휘하여 正으로 쓴 것이다.】 비록 다시 꽃다운 용모가 아름답고 길쌈하는 솜씨가【絍은 비단 등속이다.】 공교롭더라도 어질게 여길 것이 못 되며, 신하가 충성스럽지 않으면 비록 다시 재주와 지혜가 많고 다스린 업적이 뛰어나더라도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어째서인가? 큰 절개가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馮道가 재상이 되었을 적에 다섯 王朝와 여덟 姓의 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逆旅(여관)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는 것처럼 아침에는 원수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군신간이 되어 얼굴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서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큰 절개가 이와 같았으니, 비록 작은 善行이 있으나 어찌 칭찬할 것이 있겠는가.
或以爲自唐室之亡으로 群雄力爭하야 帝王興廢가 遠者는 十餘年이요 近者는 四三年이니 雖有忠智나 將若之何오 當是之時하야 失臣節者 非[ 道]一人이니 豈得獨罪[ 道]哉아하니 臣愚는 以爲忠臣은 憂公如家하고 見危致命이라 君有過어든 則强諫力爭하고 國敗亡이면 則竭節效死하며 智士는 邦有道則見하고 邦無道則隱하야 或滅跡山林하고 或優遊下僚하나니 今[ 道]는 尊寵則冠三師하고 權任則首諸相이어늘 國存則依違拱黙하야 竊位素餐하고 國亡則圖全苟免하야 迎謁勸進하야 君則興亡接踵이나 [ 道]則富貴自如하니 玆乃奸臣之尤라 安得與他人爲比哉리오 或謂 [ 道]能全身遠害於亂世하니 斯亦賢已라하니 臣謂君子有殺身成仁이요 無求生害仁하나니 豈專以全身遠害爲賢哉리오 然則[ 盜跖]病終而[ 子路]醢【許亥反이니 肉醬也라 】하니 果誰賢乎아 抑此非特[ 道]之愆也요 時君亦有責焉이라 何則고 不正之女는 中士羞以爲家하고 不忠之人은 中君羞以爲臣하나니 彼相前朝하야 語其忠하면 則反君事讐하고 語其智면 則社稷爲墟어늘 後來之君이 不誅不棄하고 乃復用以爲相하니 彼又安肯忠於我而能獲其用乎아 故로 曰非特[ 道]之愆이요 亦時君之責也라하노라
혹자는 말하기를 ‘唐나라 황실이 멸망한 뒤로부터 여러 영웅들이 힘으로 다투어서 제왕들이 흥하고 망한 것이 오래가면 십여 년이고 짧으면 3, 4년이었으니, 비록 충성과 지혜가 있으나 장차 어찌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하의 절개를 잃은 자가 馮道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홀로 馮道만 나무랄 것이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충신은 국가를 근심하기를 자기 집안일처럼 여기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군주가 잘못이 있으면 강력히 간쟁하고 나라가 패망하면 충절을 다하여 목숨을 바치며, 지혜로운 선비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나타나고 나라에 道가 없으면 은둔하여, 혹은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혹은 낮은 벼슬아치가 되어 한가롭게 논다. 그런데 지금 馮道는 존귀함과 총애가 三師(三公) 중에 으뜸이었고 권력과 직임이 여러 재상 중에 으뜸이었는데, 나라가 보존되면 依違(觀望)하여 팔짱을 끼고 침묵해서 지위를 도둑질하고 공밥을 먹으며, 나라가 망하면 生命을 보전하기를 도모하고 죽음을 구차히 면해서 새 군주를 맞이하여 뵙고 즉위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군주는 흥망이 서로 이어졌지만 馮道는 부귀함이 그대로였으니, 이는 바로 간신 중에 뛰어난 자이다. 어찌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馮道가 난세에 자기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하였으니, 이 또한 어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군자는 목숨을 바쳐 仁을 이룸은 있고 삶을 구하여 仁을 해침은 없으니, 어찌 오로지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한 것만 가지고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盜跖은 天壽를 누리다가 병들어 죽었고 子路는 죽임을 당하여 젓 담가졌으니,【醢는 許亥反(해)이니 肉醬이다.】 과연 누가 어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단 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의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보통의 남자도 室家(아내)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보통의 군주도 신하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저 馮道가 前朝의 재상이 되어 그 충성으로 말하면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겼고, 그 지혜로 말하면 사직이 폐허가 되었는데, 후래의 군주가 그를 죽이거나 버리지 않고 도리어 다시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으니, 저가 또 어찌 기꺼이 나에게 충성하여 그를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단 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이다.”
[ 周主]違衆議하고 破北漢하니 自是로 政事無大小히 皆親決하고 百官은 受成於下而已러라
周主가 衆論을 어기고 北漢을 격파하니, 이로부터 크고 작은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 직접 결정하고 백관들은 이뤄놓은 계책을 아래에서 받을 뿐이었다.
○ 初에 宿衛之士 累朝相承하야 務求姑息하고 不欲簡閱【簡은 選也요 閱은 數也라 】하야 恐傷人情하니 由是로 羸老者居多하고 但驕蹇【驕는 恣也요 蹇은 險難也라 】不用命하야 實不可用이라 每遇大敵에 不走卽降하니 其所以失國이 亦多由此라 [ 周主]因高平之戰하야 始知其弊하고 謂侍臣曰 凡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라 今以農夫百으로 未能養甲士一이어늘 奈何浚【浚은 取出之也라 】民之膏澤하야 養此無用之物乎아 且健懦不分이면 衆無所勸이라하고 乃命大簡諸軍하야 精銳者는 升之上軍하고 羸弱者는 斥去之하다 又以驍勇之士 多爲諸藩鎭所蓄이라하야 詔募天下壯士하야 咸遣詣闕하고 命[ 宋太祖]皇帝하야 選其尤者하야 爲殿前諸班하고 其騎步諸軍은 各命將帥選之하다 由是로 士卒精强이 近代無比하야 征伐四方에 所向皆捷하니 選練之力也러라
[新增][ 胡氏]曰 五代之主 多刻於民而紓於軍이어늘 [ 世宗]則嚴於軍而寬於民이라 旣得柄에 制輕重之權하고 又沙汰羸老하야 簡升驍銳라 且曰 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니 百農夫未能養一甲士어늘 奈何浚民膏血하야 養無用之物고 且健懦不分이면 衆何所勸고하니 聖人復起사도 不易此言矣시리라
처음에 宿衛하는 군사들이 여러 왕조를 서로 이어오면서 되도록 당장의 편안함을 구하고, 군사들을 선발하고 사열하여【簡은 선발함이고, 閱은 헤아림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거나 상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약하고 늙은 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오직 교만하기만 하여【驕는 방자함이고, 蹇은 험난함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실로 쓸 수가 없었다. 매번 큰 적을 만날 때마다 도망가지 않으면 항복하니, 나라를 잃게 된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周主는 高平의 전투로 인해 비로소 그 폐단을 알고는 近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는다. 지금 농부 백 명으로 甲士 한 명을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浚은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또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권면하는 바가 없다.” 하고, 마침내 명하여 여러 군사들을 크게 사열하여 정예한 자는 上軍으로 올리고 파리하고 약한 자는 물리쳐 보냈다.
또 날래고 용감한 군사들은 대부분 여러 藩鎭에서 길러지고 있다 하여, 천하의 壯士들을 모집해서 모두 서울로 보내어 대궐에 이르게 해서 宋나라 太祖皇帝에게 명하여 그 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殿前諸班으로 삼고, 기병과 보병의 여러 군사들은 각각 장수에게 명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들의 정예롭고 강함이 근대에 견줄 데가 없어서 사방을 정벌할 적에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니, 이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여 훈련하였기 때문이었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五代의 군주들은 대부분 백성들에게서 깎아 군사들에게 후하게 하였는데, 世宗은 군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하였다. 정권을 얻은 뒤에 輕重의 권한을 통제하였고, 또 약하고 늙은 자들을 도태시켜 날래고 정예한 자들을 簡拔하여 올렸다. 周主(郭榮)가 또 말하기를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으니, 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甲士를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어떻게 권면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 北漢主]殂하니 子[ 承鈞]이 立하야 更名[ 鈞]이라하다 北漢[ 孝和帝] 性孝謹이러니 旣嗣位에 勤於爲政하고 愛民禮士하니 境內粗安이러라
○ 遼 〈應曆四年이라〉
遼나라 - 應曆 4년이다. -
世宗
[ 世宗]※在位六年이요 壽三十九라
※ 名은 [ 榮]이요 姓은 [ 柴氏]니 [ 太祖][ 柴皇后]兄[ 守禮]之子라 [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五代之君에 [ 世宗]이 最號英武어늘 而享年不永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乙卯]〈周[ 世宗]이 仍稱顯德二年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을묘(955) - 周나라 世宗은 顯德 2년이라고 그대로 칭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周世宗]이 常憤廣明【唐[ 僖宗]廣明元年에 [ 黃巢]入長安하니 自此之後로 彊藩割據하야 中國日蹙矣라 】以來로 中國日蹙하더니 及高平旣捷에 慨然有削平天下之志하니라
○ 周[ 世宗]이 謂宰相曰 朕이 每思致治之方호되 未得其要하야 寢食不忘하노라 又自唐, 晉以來로 吳, 蜀, 幽, 幷【吳는 李氏요 蜀은 孟氏요 幽는 入於契丹하고 幷은 爲北漢하니라 】이 皆阻聲敎하야 未能混一하니 宜命近臣하야 著爲君難爲臣不易論及開邊策一篇하라 朕將覽焉호리라 比部郞中【官名이라 】[ 王朴]이 獻策하야 以爲中國之失吳, 蜀, 幽, 幷【梁失吳하고 唐得蜀而復失之하고 晉失幽하고 周失幷하니라 】이 皆由失道하니 今必先觀所以失之之原이니 然後에 知所以取之之術이니이다 其始失之也에 莫不以君暗臣邪하고 兵驕民困하며 姦黨內熾하고 武夫外橫하야 因小致大하고 積微成著하니 今欲取之인댄 莫若反其所爲而已니이다 夫進賢, 退不肖는 所以收其才也요 恩德誠信은 所以結其心也요 賞功罰罪는 所以盡其力也요 去奢節用은 所以豐其財也요 時使薄斂은 所以阜其民也라 俟群才旣集하고 政事旣治하고 財用旣充하고 士民旣附하야 然後에 擧而用之하면 功無不成矣리이다 彼之人이 觀我有必取之勢하면 則知其情狀者는 願爲間諜하고 知其山川者는 願爲嚮導하야 民心旣歸면 天意必從矣리이다
周나라 世宗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매양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그 요점을 얻지 못하여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것을 잊지 못하였다. 또 唐(後唐)나라와 晉(後晉)나라 이후로 吳‧蜀과 幽州‧幷州가【[頭註] 吳, 蜀, 幽, 幷:吳 지방은 李氏(李璟의 南唐)이고, 蜀땅은 孟氏(孟知詳)이고, 幽州는 契丹으로 들어갔고, 幷州는 北漢이 되었다.】 모두 聲敎가 미치지 못하여 통일되지 못하니, 마땅히 近臣에게 명하여 爲君難爲臣不易論과 開邊策을 한 편씩 지으라. 짐이 장차 이것을 보겠다.” 하였다.
이에 比部郞中【比部郞中은 관직명이다.】王朴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中國이 吳‧蜀과 幽州‧幷州를【[頭註] 中國之失吳, 蜀, 幽, 幷:梁나라는 吳를 잃었고, 唐나라는 蜀을 얻었다가 다시 잃었고, 晉나라는 幽州를 잃었고, 周나라는 幷州를 잃었다.】 잃은 것은 모두 군주가 道를 잃은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이제 반드시 먼저 영토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잃어버린 영토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토를 잃었을 적엔 군주가 어둡고 신하가 간사하며, 군사들이 교만하고 백성들이 곤궁하며, 간사한 무리들은 안에서 치성하고 武夫들은 밖에서 횡행하여 작은 것으로부터 커지게 되고 은미한 것이 쌓여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잃어버린 영토를 취하고자 한다면 그 시행한 바를 예전과 반대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침은 인재를 거두는 방법이요, 은덕을 베풀고 성실하게 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방법이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내림은 그 힘을 다하게 하는 방법이요, 사치를 제거하고 財用을 절약함은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요, 철(농한기)에 따라 농민을 부역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둠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 인재들이 이미 모이고 정사가 이미 다스려지고 財用(財政)이 이미 충족하고 士民들이 이미 따르기를 기다려서 그런 뒤에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쓴다면 공을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저 적국의 백성들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저들을 취할 수 있는 형세가 있음을 보게 되면 이러한 정상을 아는 자는 간첩이 되기를 원할 것이요, 산천의 지리를 잘 아는 자는 嚮導가 되기를 원할 것이니, 그리하여 민심이 이미 돌아오면 하늘의 뜻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입니다.
凡攻取之道는 必先其易者하나니 唐【[ 李璟]이라 】與吾接境이 幾二千里하야 其勢易擾也라 擾之는 當以無備之處爲始하야 備東則擾西하고 備西則擾東이면 彼必奔走而救之하리니 奔走之間에 可以知其虛實强弱이라 然後에 避實擊虛하고 避强擊弱호되 未須大擧요 且以輕兵擾之하면 南人懦怯하야 聞小有警이면 必悉師以救之하리니 師數動이면 則民疲而財竭하고 不悉師면 則我可以乘虛取之니이다 如此면 江北諸州 將悉爲我有하리니 旣得江北이어든 則用彼之民하야 行我之法이면 江南을 亦易取也라 得江南이면 則巴蜀은 可傳檄而定이요 南方旣定이면 則燕地【時에 契丹이 跨有燕地하니라 】必望風內附하니 若其不至어든 移兵攻之하면 席卷可平矣리이다 惟河東【北漢據河東하야 與周爲世仇也라 】은 必死之寇라 不可以恩信誘요 必當以强兵制之니이다 然이나 彼自高平之敗로 力竭氣沮하야 必未能爲邊患이니 宜且以爲後圖하야 俟天下旣平하고 然後伺間一擧하면 可擒也니이다 今士卒精練하고 甲兵有備하며 群下畏法하고 諸將效力하야 期年之後에 可以出師니 宜自夏秋로 蓄積實邊矣니이다 [ 世宗]이 欣然納之러라 時에 群臣이 多守常偸安하야 所對少有可取者로되 惟[ 朴]이 神峻氣勁하고 有謀能斷하야 凡所規畫【規圖也라 】이 皆稱[ 世宗]意하니 [ 世宗]이 由是로 重其器識하니라
무릇 적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방법은 반드시 쉬운 곳을 먼저 공격해야 하니, 南唐(李璟)은【唐은 南唐의 李璟이다.】 우리와 접경하고 있는 것이 거의 2천 리여서 그 형세가 동요시키기가 쉽습니다. 적국을 동요시킬 때에는 마땅히 대비가 없는 곳부터 시작하여, 적국이 동쪽을 대비하면 서쪽을 동요시키고 서쪽을 대비하면 동쪽을 동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분주히 달려가 구원할 것이니, 분주히 달려가는 사이에 그들의 虛實과 强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견실한 곳을 피하고 허약한 곳을 공격하며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되, 굳이 크게 군대를 일으킬 것 없이 우선 경무장한 군대로 적을 동요시킨다면 남쪽 사람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소소한 警報만 들어도 반드시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구원할 것이니, 군대가 자주 출동하면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군대를 다 동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빈틈을 타고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江北의 여러 州가 장차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니, 이미 江北을 얻고 난 뒤에 저들의 백성을 사용하여 우리의 방법을 시행한다면 江南도 취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江南을 얻으면 巴蜀은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고, 南方이 이미 평정되면 燕 지방(幽州)은【당시에 契丹이 燕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歸附할 것이니, 만약 歸附해 오지 않거든 군대를 옮겨 공격한다면 석권하여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河東(北漢)은【北漢이 河東을 차지하여 周나라(後周)와 대대로 원수가 되었다.】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도적이니, 은혜와 신의로 유인할 수 없고 반드시 강한 군대로 제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高平에서 패전한 뒤로 힘이 다하고 사기가 꺾여 반드시 변경의 우환이 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우선 후일을 도모하여 천하가 이미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틈을 타서 한번 출동하면 漢主(劉崇)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졸들이 정예롭고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며 갑옷과 병기가 모두 충분한 대비가 있으며, 아랫사람들이 군법을 두려워하고 諸將들이 힘을 다 바쳐서 期年이 지난 뒤에는 군대를 출동할 수 있으니, 마땅히 가을과 겨울로부터 저축하여 변경을 충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丙辰]〈周顯德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四鎭이라〉
병진(956) - 周나라 顯德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正月庚子에 [ 周世宗]이 下詔하고 親征淮南할새 命歸德節度使[ 李重進]하야 將兵先赴正陽하다 [ 李谷(穀)]【谷은 綱目에 作穀이라 以穀爲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하니 淮南은 謂唐也라 】이 攻壽州호되 久不克이러니 唐[ 劉彦貞]【北面行營都部署라 】이 引兵救之어늘 [ 李重進]이 度淮하야 逆戰於正陽東하야 大破之하고 斬[ 彦貞]하다
○ 是時에 江淮久安하고 民不習戰하니 [ 彦貞]旣敗에 唐人이 大恐이라 [ 皇甫暉], [ 姚鳳]【[ 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요 [ 姚鳳]은 常州團鍊使라 】이 退保淸流關이어늘 丙辰에 [ 周世宗]이 至壽州城下하야 命諸軍하야 圍壽州하다 二月에 [ 世宗]이 命[ 太祖皇帝]하야 倍道襲淸流關하니 [ 皇甫暉]等이 陳(陣)於山下하고 方與前鋒戰할새 [ 太祖皇帝]引兵出山後하니 [ 暉]等이 大驚하야 走入滁州하야 欲斷橋自守라 [ 太祖皇帝]躍馬麾兵하고 涉水하야 直抵城下하니 [ 暉]曰 人各爲其主니 願容成列而戰하노라 [ 太祖皇帝]笑而許之하니 [ 暉]整衆而出이라 [ 宋太祖皇帝]擁馬頸하고 突陳而入하야 大呼曰 吾止取[ 皇甫暉]요 他人은 非吾敵也라하고 手劍擊[ 暉]中腦하야 生擒之하고 幷擒[ 姚鳳]하야 遂克滁州하다 後에 [ 世宗]이 遣翰林學士[ 竇儀]하야 籍滁州帑藏【帑은 音儻이니 金帛所藏이라 】이러니 [ 宋太祖皇帝]遣親吏하야 取藏中絹한대 [ 儀]曰 公이 初克城時엔 雖傾藏取之라도 無傷也어니와 今旣籍爲官物하니 非有詔書면 不可得也니라 [ 宋太祖皇帝]由是로 重[ 儀]하니라
이때 江淮 지방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으니, [- 劉彦貞]이 이미 패한 뒤에 南唐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皇甫暉와 姚鳳이【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이고, 姚鳳은 常州團鍊使이다.】후퇴하여淸流關을 지켰다. 丙辰日(22일)에 周나라 世宗이 壽州城 아래에 이르러서 諸軍에게 명해 壽州城을 포위하게 하였다.
2월에 世宗이 太祖皇帝(趙匡胤)에게 명하여 행군속도를 배가해서 淸流關을 습격하게 하니, 皇甫暉 등이 산 아래에 진을 치고 周나라의 선봉부대와 싸울 적에 太祖皇帝가 군대를 거느리고 산 뒤로 나오니, 皇甫暉 등이 크게 놀라서 도망하여滁州로 들어가 다리를 끊고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太祖皇帝가 말에 뛰어올라 병기를 휘두르며 물을 건너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니, 皇甫暉가 말하기를 “사람은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니, 대열을 이루기를 기다린 뒤에 싸우기를 원한다.” 하였다. 太祖皇帝가 웃으면서 허락하니, 皇甫暉가 무리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다.
宋나라 太祖皇帝가 말의 목을 끼고 陣中으로 돌진하여 들어가서 크게 고함치기를 “나는 다만 皇甫暉를 잡고자 할 뿐이요, 다른 사람은 나의 적수가 아니다.” 하고는 손에 잡은 검으로 皇甫暉를 공격하여 그의 뇌를 맞혀 사로잡고 아울러 姚鳳을 사로잡아 마침내 滁州를 함락시켰다.
○ 初에 周[ 劉詞]遺表하야 薦其幕僚薊人[ 趙普]有才可用이러니 會에 滁州平이어늘 [ 范質]이 薦[ 普]爲滁州軍事判官한대 宋[ 太祖皇帝]與語悅之하니라 宋[ 太祖皇帝] 威名日盛이라 每臨陳에 必繁纓【見一卷하니라 】飾馬하고 鎧仗鮮明하니 或曰 如此면 爲敵所識이라한대 宋[ 太祖皇帝]曰 吾固欲其識之耳라하니라
처음에 周나라 劉詞가 죽을 때에 표문을 올려 그의 막료인 薊州 사람 趙普가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였는데, 마침 滁州가 평정되자 范質이 趙普를 천거하여滁州軍事判官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宋나라 太祖皇帝가 趙普와 함께 말을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宋나라 太祖皇帝는 위엄과 명망이 날로 성하였다. 매번 적진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繁纓으로【繁纓은 1卷에 보인다.】 말을 꾸미고 투구와 의장을 선명하게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적들에게 인식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宋나라 太祖皇帝는 말하기를 “내 진실로 저들에게 인식되고자 한다.” 하였다.
○ [ 唐主]兵屢敗하니 懼亡하야 乃遣[ 鍾謨], [ 李德明]【[ 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요 [ 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라 】하야 奉表稱臣하고 來請平【平은 和也라 】하다 [ 謨], [ 德明]이 素辯口하니 [ 周世宗]이 知其欲遊說【飾辨辭하고 設詐謀하야 馳逐於諸侯하야 以要時勢者라 】하고 盛陳甲兵而見之하야 曰 我非六國【戰國韓趙魏燕齊楚라 】愚主니 豈汝口舌所能移邪아 可歸語汝主호되 亟來見朕하고 再拜謝過하면 則無事矣어니와 不然이면 朕欲往觀金陵城하고 借府庫하야 以勞軍하노니 汝君臣이 得無悔乎아 [ 謨], [ 德明]이 戰栗【恐懼貌라 】하야 不敢言하니라
唐主(李璟)는 南唐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자, 나라가 망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鍾謨와 李德明을【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고, 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였다.】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올려 臣을 칭하고 와서 화평을 청하였다.【평은 화평함이다.】鍾謨와 李德明은 평소에 말을 잘하니, 周나라 世宗은 이들이 유세하고자【말을 꾸미고 속임수를 써서 諸侯들을 쫓아 時勢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갑옷과 병기를 성대하게 진열하고 만나보며 말하기를 “나는 戰國時代六國의【六國은 戰國時代의 韓, 趙, 魏, 燕, 齊, 楚나라이다.】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니, 어찌 너희들의 입과 혀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군주에게 말하여 빨리 와서 짐을 만나 재배하고 사과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짐이 직접 가서 金陵城을 구경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을 빌어 군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너희 군주와 신하가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鍾謨와 李德明이 두려워 몸이 떨려서【戰栗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 [ 唐主]復使[ 李德明], [ 孫晟]【右僕射라 】으로 言於[ 周世宗]하야 請去帝號하고 割壽, 濠, 泗, 楚, 光, 海六州之地하고 仍歲輸金帛百萬하야 以求罷兵이로되 [ 世宗]이 以淮南之地已半爲周有하고 諸將捷奏日至라하야 欲盡得江北之地하야 不許라 [ 德明]이 見周兵日進하고 奏稱호되 [ 唐主]不知陛下兵力如此之盛하니 願寬臣五日之誅하야 得歸白[ 唐主]면 盡獻江北之地하리이다 [ 世宗]이 乃許之하고 賜[ 唐主]詔書하니 其略曰 但存帝號면 何爽歲寒【爽은 差也라 言歲寒知松柏之後凋는 此約不差也니 許[ 唐主]自帝江南이라 】이리오 倘堅事大之心이면 終不迫人于險하리라 又曰 俟諸郡【江北諸郡이라 】之悉來하야 卽大軍之立罷호리니 言盡於此하고 更不煩云하노니 苟曰未然이면 請從玆絶하노라 [ 德明]이 稱[ 世宗]威德과 及甲兵之强하고 勸[ 唐主]割江北之地한대 [ 唐主]大怒하야 斬[ 德明]於市하고 命[ 齊主][ 景達]【[ 唐主]之弟라 】하야 將兵以拒周하다 [ 景達]이 將兵二萬하고 自瓜步【山名이라 】로 濟江하야 距六合【縣名이라 】二十餘里하야 設柵不進하니 諸將이 欲擊之어늘 [ 宋太祖皇帝]曰 彼設柵自固는 懼我也라 今吾衆이 不滿二千하니 若往擊之면 則彼見吾衆寡矣라 不如俟其來而擊之하니 破之必矣리라 居數日에 唐出兵趣(趨)六合이어늘 [ 宋太祖皇帝] 奮擊大破之하야 殺獲近五千人호되 餘衆이 尙萬餘라 走渡江하야 爭舟溺死者甚衆하니 於是에 唐之精卒이 盡矣러라 是戰也에 士卒有不致力者어늘 [ 宋太祖皇帝]陽(佯)爲督戰하야 以劍斫其皮笠이라가 明日에 徧閱皮笠하고 有劍跡者數十人을 皆斬之하니 由是로 部兵이 莫敢不盡死하니라
唐主가 다시 李德明과 [- 孫晟]으로 하여금【[- 孫晟]은 右僕射이다.】周나라 世宗에게 말하여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는 한편 壽州‧濠州‧泗州‧楚州‧光州‧海州 등 여섯 州의 땅을 떼어 바치고, 이어서 해마다 황금과 비단 백만을 바쳐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世宗은 淮南 땅의 절반이 이미 周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諸將들의 승전보고가 날로 이른다 하여 江北 땅을 다 얻고자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李德明은 周나라 군대가 날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世宗에게 아뢰기를 “唐主는 폐하의 병력이 이처럼 강성한지 알지 못하니, 바라건대 臣을 5일 동안만 정벌하지 말아서 臣으로 하여금 돌아가 唐主에게 아뢸 수 있게 해주신다면 江北의 땅을 모두 바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世宗이 마침내 허락하고唐主에게 詔書를 내리니,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단지 황제의 칭호를 보존한다면 역경에도 변치 않는 歲寒의 志操를 어찌 어기겠는가.【爽은 어긋나는 것이다.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마른다고 말한 것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唐主가 스스로 江南에서 황제 노릇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진실로 그대가 大國을 섬기려는 마음만 견고하다면 나는 끝내 사람을 험난한 데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러 郡을【諸郡은 江北의 여러 郡이다.】 다 바쳐 오기를 기다려서 당장 大軍을 철수하겠다. 말은 이에서 다하고 다시 번거롭게 말하고자 하지 않으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국교를 단절할 것을 청한다.” 하였다.
李德明이 돌아가 世宗의 위엄과 덕망 및 군대의 강성함을 극구 말하고 唐主에게 江北의 땅을 떼어 바칠 것을 권하자, 唐主가 크게 노하여 시장에서 李德明의 목을 베고, 齊主李景達에게【李景達은 唐主의 아우이다.】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周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李景達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瓜步山로부터【瓜步는 山의 이름이다.】양자강을 건너 六合縣에서【六合은 縣의 이름이다.】 20여 리 떨어진 지점에 城柵을 만들고전진하지 않으니, 周나라의 諸將들이 이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宋나라 太祖皇帝가 말하기를 “저들이 城柵을 만들어 스스로 굳게 지킴은 우리를 두려워해서이다. 지금 우리의 병력이 채 2천 명이 되지 못하니, 만약 가서 공격한다면 저들은 우리의 병력이 적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唐나라가 出兵하여六合縣으로 진출하자, 宋나라 太祖皇帝가 분발하여 공격해서唐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5천 명에 가까웠으나 남은 무리가 아직도 만여 명이었다. 이들이 도망하여 강을 건너느라 배를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 때문에 唐나라 정예병이 다 없어졌다.
이 전투에서 사졸들 가운데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있자, 宋나라 太祖皇帝가 거짓으로 督戰하는 체하면서 검으로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졸의 皮笠을 찍어 두었다가 다음날 皮笠을 살펴보고 검으로 찍은 흔적이 있는 자 수십 명을 모두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部下 병사들이 감히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 周以[ 太祖皇帝]로 爲定國節度使【定國軍은 卽同州匡國軍也라 [ 太祖]登極이어늘 避御名하야 始改爲定國軍이러니 史亦因以後所改軍號書之也라 】兼殿前都指揮使하다
[丁巳]〈周顯德四年이라 ○ 北漢天會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정사(957) - 周나라 顯德 4년이다. ○ 北漢天會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周兵이 圍壽春【縣名이니 屬壽州하니라 】하야 連年未下어늘 議者以唐援兵尙强이라하야 多請罷兵하니 [ 世宗]疑之라 [ 李穀]이 寢疾在第러니 二月에 [ 世宗]이 使[ 范質], [ 王溥]【中書侍郞同平章事라 】로 就與之謀한대 [ 穀]이 上疏하야 以爲壽春危困하야 破在旦夕하니 若鑾駕【和鑾은 皆鈴也니 和는 金口木舌이요 鑾은 金口金舌이니 所以節車之行이라 乘車則馬動하고 馬動則鑾鳴하고 鑾鳴則和應하야 自然有箇節奏로되 車駕大(太)速則不相應이요 大(太)遲則不響하며 若雜然響이면 則不合節奏也라 乘車는 和在軾하고 鑾在衡하며 戎車는 鑾(輿)[在]鑣하니 駟馬는 八鑾也라 】親征하시면 則將士爭奮하고 援兵震恐하리니 城中知亡이면 必可下矣리이다 [ 世宗]이 悅하다
周나라 군대가 壽春縣을【壽春은 縣의 이름이니, 壽州에 속하였다.】포위하였으나여러 해가 지나도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南唐의 구원병이 아직도 강성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世宗이 의심하였다. 이때 李穀이 병이 들어 집에 있었는데, 2월에 世宗이 范質과 王溥로 하여금【王溥는 中書侍郞 同平章事이다.】 찾아가서 그와 상의하게 하니, 李穀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壽春縣이 위태롭고 곤궁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격파당할 터인데, 만약 皇上이【和와 鑾은 모두 방울이니, 和는 쇠로 된 입에 나무로 된 혀이고, 鑾은 쇠로 된 입에 쇠로 된 혀이니, 수레가 가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수레를 타면 말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이면 鑾이 울리고 鑾이 울리면 和가 응하여 자연히 節奏(리듬)가 있게 되는데, 車駕가 너무 빠르면 서로 응하지 못하고 너무 느리면 소리가 나지 않으며, 만약 뒤섞여 소리가 나면 節奏에 합하지 않는다. 乘車는 和가 軾에 있고 鑾이 衡에 있으며, 戎車는 鑾이 재갈에 있으니, 駟馬는 鑾이 여덟 개이다.】 친히 정벌하신다면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고 南唐의 구원병이 두려워할 것이니,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이 자기 나라가 망할 줄을 알게 되면 우리가 틀림없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世宗이 기뻐하였다.
○ 二月乙亥에 [ 周主][ 世宗]이 發大梁하다 先是에 周與唐戰할새 唐水軍銳敏하야 周人이 無以敵之라 [ 世宗]이 每以爲恨이러니 返自壽春으로 於大梁城西汴水側에 造戰艦數百艘하고 命唐降卒하야 敎北人水戰하니 數月之後에 縱橫出沒이 殆勝唐兵이라 至是에 命右驍衛大將軍[ 王環]하야 將水軍數千하고 自閔河로 沿潁入淮하니 唐人이 見之하고 大驚하니라 壬辰旦에 [ 世宗]이 軍于趙步하니 諸將이 擊唐紫金山寨하야 大破之하고 殺獲萬餘人하다 甲辰에 [ 世宗]이 耀兵于壽春城北이라 唐淸淮節度使[ 劉仁]贍이 病甚하야 不知人하니 監軍使[ 周廷構]等이 作[ 仁贍]表하야 舁[ 仁贍]하야 出城降하다 夏四月에 [ 周世宗]이 還大梁하다
2월 乙亥日(17일)에 周主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周나라가 南唐과 싸울 적에 南唐의 수군이 예리하고 민첩해서 周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가 없었다. 世宗은 매번 이것을 통한으로 여겼는데, 壽春에서 돌아온 뒤로 大梁城 서쪽 汴水 가에 전함 수백 척을 建造하고南唐의 항복한 병졸들에게 명하여 북쪽 사람들에게 水戰을 가르치게 하니, 몇 달 뒤에 周나라 수군이 종횡으로 출몰함에 자못 南唐의 수군보다도 나았다. 이때에 이르러 右驍衛大將軍王環에게 명하여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閔河로부터 潁水를 따라 淮水로 들어가게하니, 南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壬辰日(3월 5일) 아침에 世宗이 趙步에 군대를 주둔하니, 諸將들이 南唐의 紫金山 城寨를 공격하여대파하고 만여 명을 죽이거나사로잡았다. 甲辰日(17일)에 世宗이 壽春城 북쪽에서 군용을 과시하였다. 唐나라 淸淮節度使劉仁贍이 질병이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監軍使周廷構 등이 劉仁贍의 이름으로 표문을 지어 劉仁贍을 가마로 메고서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여름4월에 世宗이 大梁으로 돌아왔다.
○ 冬十月에 [ 周世宗]이 發大梁하야 十一月에 至濠州하야 大破唐兵於洞口하니 斬首五千餘級이요 降卒二千餘人이라 因鼓行而東하니 所至皆下하다 唐兵이 退保淸口러니 戊午旦에 [ 世宗]이 自將親軍하고 自淮北進하야 命[ 宋太祖皇帝]하야 將步騎하야 自淮南進하고 諸將은 以水軍으로 自中流進하야 共追唐兵하니 所獲戰船이 燒沈之餘에 得三百餘艘하고 士卒殺溺之餘에 得七千餘人이라 唐之戰船在淮上者 於是盡矣하니라
겨울 10월에 周나라 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여11월에 濠州에 이르러南唐의 군대를 洞口에서 대파하니, 머리를 벤 것이 5천여 수급이고 항복한 병사가 2천여 명이었다. 이어서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동쪽으로 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戊午]〈周顯德五年이라 ○ 唐中興元年이요 [ 南漢主][ 鋹]大寶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三月에 [ 周世宗]이 如迎鑾鎭【今眞州是라 五代時에 僞吳置迎鑾鎭이러니 後에 宋改建安軍하고 [ 眞宗]時에 陞眞州하니라 】하야 屢至江口하야 遣水軍하야 擊唐兵破之하니 [ 唐主]聞[ 世宗]在江上하고 恐遂南渡하고 又恥降號稱藩하야 乃遣兵部侍郞[ 陳覺]하야 奉表請傳位於太子[ 弘冀]하야 使聽命於中國하니 時에 淮南에 惟廬, 舒, 鄿, 黃이 未下라 覺이 至迎鑾하야 見周兵之盛하고 白[ 世宗]하야 請遣人渡江取表하야 獻四州之地하고 畫江爲境하야 以求息兵호되 辭旨甚哀라 [ 世宗]曰 朕本興師는 止取江北이러니 今爾主能擧國內附하니 朕復何求리오 覺이 拜謝而退하야 遣其屬[ 劉承遇]【閤門承旨라 】하야 如金陵【唐所都라 】이라 [ 世宗]이 賜唐主書호되 稱 皇帝恭問江南國主하노라하고 慰納之하다 [ 唐主]復遣[ 承遇]하야 奉表獻江北四州하고 歲輸貢物數十萬하니 於是에 江北이 悉平이라 得州十四와 縣六十하다 是月에 浚汴口하야 導河流하야 達于淮하니 於是에 江淮舟檝(楫)이 始通【此卽唐時運路也라 自江淮爲南唐所據로 運漕不通하야 水路湮塞이러니 今復浚之하니라】하니라
3월에 周나라 世宗이 迎鑾鎭에【迎鑾鎭은 지금의 眞州가 이곳이다. 五代時代에 괴뢰정권인 吳나라가 迎鑾鎭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宋나라가 建安軍으로 개칭하고 眞宗 때에 眞州로 승격시켰다.】 가서 여러 차례 江口에 이르러 수군을 보내 南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唐主는 世宗이 강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남쪽으로 강을 건너올까 두렵고, 또 황제의 칭호를 貶降하고 藩臣을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兵部侍郞陳覺을 周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太子李弘冀에게 傳位할 것을 청하고太子로 하여금 中原(周)의 명령을 듣게 하니, 이때 淮水 남쪽에 오직 廬州‧舒州‧鄿州‧黃州만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陳覺이 迎鑾鎭에 이르러周나라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世宗에게 아뢰어서 사람을 보내 양자강을 건너가 表文을 가져와 네 州의 땅을 바치고 江을 국경으로 삼아서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애처로웠다. 世宗이 말하기를 “朕이 본래 군대를 일으킨 것은 다만 江北을 취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너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歸附하니, 朕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陳覺이 절하고 사례하고물러가서 그의 관속인 [- 劉承遇]를【[- 劉承遇]는 閤門承旨이다.】金陵에 보내었다.【金陵(南京)은 당나라가 도읍한 곳이다.】世宗이 唐主에게 내린 서신에 이르기를 “皇帝는 공손히 江南國主에게 묻노라.”라고 하여 위무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唐主가 다시 [- 劉承遇]를 보내어 表文을 올려 江北의 네 州를 바치고 해마다 貢物 수십만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에 江北이 모두 평정되어 14州와 60縣을 얻었다. 이달에 汴口를 깊이 파서 黃河의 물을 인도하여 淮水에 도달하게 하니, 이에 江淮의 선박이 비로소 통하였다.【[頭註] 江淮舟檝(楫) 始通:이는 唐나라 때 漕運하던 길이었다. 江‧淮가 南唐에게 점거당한 뒤로 漕運이 통하지 아니하여 水路가 막혔는데, 지금 다시 통하게 된 것이다.】
○ 五月에 [ 唐主]避周諱하야 更名[ 景]【[ 唐主]는 本名[ 璟]이니 以周[ 太祖]之高祖亦名[ 璟]이라 故로 避하니라】하다
○ 南漢[ 中宗]【漢[ 晉王][ 晟]也라 】이 殂하니 [ 長子][ 衛王][ 繼興]이 卽帝位하야 更名[ 鋹]하다
[己未]〈周顯德六年六月에 [ 恭帝][ 宗訓]이 立하다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周淮南饑어늘 [ 世宗]이 命以米貸之한대 或曰 民貧하니 恐不能償이니이다 [ 世宗]曰 民은 吾子也라 安有子倒懸而父不爲之解哉며 安在責其必償也리오
○ 遼 〈應曆九年이라〉
[新增][ 胡氏]曰 [ 世宗]이 視民猶子하야 匡救其乏而不責其必償하니 仁人之心이요 王者之政也라 五代十二君에 愛民者三人【唐[ 明宗], 周[ 太祖], [ 世宗]이라 】이로되 而[ 世宗]爲最라 漕運給耗【乙卯年에 漕運不給하야 斗耗更多하야 以虧欠抵罪한대 詔每斛에 給耗一斗하니라】는 慮倍輸也요 保任令錄【或以父任爲官하고 或以兄任爲官者를 謂之任子하니 任亦保也라 乙卯年에 令翰林學士院으로 自擧令錄호되 除官之日에 仍署擧者姓名하고 若貪佞敗官이면 竝當連坐하니라 】은 防貪穢也요 冬役春罷는 恐妨農也요 毁寺, 禁度僧【乙卯年에 廢(殷銅)[寺院]二萬七百三十六하고 存者二千六百九十四요 禁私度僧尼하야 令諸州로 每歲造僧帳하야 有死者歸俗이면 皆隨時開落하니 見存僧尼七萬六百九十이요 (殷)[毁]銅佛하야 (壽)[鑄]錢하니라 】은 減蠹弊也요 立兩(歲)[稅]限【丙辰年에 立兩稅起徵할새 限以徵斂穀帛호되 多不竢收穫紡績之畢이러니 乃詔호되 自今으로 夏稅以六月하고 秋稅以十月起徵이라하니 民便之하니라 】은 知早徵之害也요 設科求士는 欲吏治有方也요 均定田租는 使富不掩貧也요 倂鄕置團耆【戊午年에 諸州倂鄕村할새 率以百戶爲團하고 團置耆長三人하니 團은 聚也라 六十曰耆니 記曰 耆指使라하니 言指事使人也라 】는 絶公皁【猶言公吏也라 】侵漁也요 罷課戶俸戶【戊午年에 詔凡諸色課戶及俸戶를 竝勒歸州縣하고 自今으로 竝支俸錢及(未)[米]麥이라하다 唐初에 諸司置公廨本錢하야 以貿易取息하고 計員多少爲月料러니 其後에 罷諸司公廨本錢하고 以天下上戶七千人으로 爲胥士而收其課하고 計官多少而給之하니 此所謂課戶라 唐又簿斂一歲稅호되 以高戶主之하고 月收息給俸하니 此所謂俸戶라 】는 省官方私擾也요 稱貸【稱은 去聲이니 擧也라 今所謂擧錢也라 貸는 從人求物也라】不責償은 庶下沾實惠也라 蓋自[ 唐宣宗]而後로 政不及民하야 而置諸湯火【民之危險이 如墜湯火之中하니 卽書所謂塗炭也라】之中者 將百年이러니 而後에 [ 世宗]이 有人君之德하야 行不忍人之政이라 蓋嘗因與將相食할새 曰 連日之寒에 朕深愧無功於民而坐享天祿하노니 惟親冒矢石하야 爲百姓除害라야 差可自安耳라하고 又命刻木爲耕夫織婦하야 置諸庭하야 留心邦本이 如此하니 宜其赫然南面指麾하야 而四海賓服也니라
遼나라 - 應曆 9년이다. -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世宗은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여겨 궁핍함을 구휼해주고 꾸어준 곡식을 반드시 갚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仁人의 마음이고 王者의 정사이다. 五代時代 12명의 군주 중에 백성을 사랑한 자가 3명인데,【백성을 사랑한 군주 세 명은 唐나라(後唐) 明宗과 周나라 太祖와 世宗이다.】世宗이 그 중에 으뜸이다.
漕運할 때 耗穀을 지급한 것은【乙卯年에 漕運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한 말씩 지급하던 耗穀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漕運하는 자들이 곡식을 축낸 것으로 처벌받게 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매 斛마다 耗穀 한 말을 지급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곱절로 갚을까 염려해서였고, 保任한 자들을 기록하게 한 것은【혹은 아버지가 보증하여 관원이 되고 혹은 형이 보증하여 관원이 되는 것을 任子라 하니, 任 또한 보증하는 것이다. 乙卯年에 翰林學士院으로 하여금 스스로 천거하여 任子를 기록하게 하되 관직을 제수하는 날에 擧者의 姓名을 연이어 쓰고, 만약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관직을 망치면 모두 連坐하게 하였다.】 탐욕을 부려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겨울에만 부역시키고 봄에는 부역을 중지한 것은 농사에 방해될까 염려해서였고, 사찰을 허물고 승려의 度牒을 주는 것을 금한 것은【乙卯年에 寺院 20,736개를 없애고 남은 것이 2,694개였으며, 도첩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여 여러 州로 하여금 매년 僧侶의 명부를 만들어서 사망하거나 환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때마다 제명하게 하니, 현재 남아있는 승려가 70,690명이었고, 구리로 만든 불상을 부수어 돈을 주조하였다.】 재물을 좀먹는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兩稅의 기한을 정한 것은【丙辰年에, 예전에 兩稅法을 만들어 세금을 징수할 적에 곡식과 비단으로 거두되 대부분 곡식을 수확하거나 길쌈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는데, 이때 마침내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 여름세금은 6월에, 가을세금은 10월에 징수한다.” 하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일찍 징수하는 폐해를 알기 때문이었고,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것은 관리의 다스림이 좋은 방법을 얻기를 바라서였고, 田租를 똑같이 정함은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鄕을 겸병하고 團耆를 둔 것은【戊午年에 여러 州에서 鄕村을 겸병할 적에 대체로 100戶를 團으로 삼고 團에는 耆長 3명을 두니, 團은 모은다는 뜻이다. 60세를 耆라 하니, 《禮記》에 이르기를 “60세 된 노인은 〈직접 일하지 않고〉손가락으로 남을 지시하여 부린다.” 하였으니, 일을 지시하여 사람을 부림을 말한 것이다.】 公皁(公吏)가 백성들을 침탈함을 끊기 위해서였고,【公皁는 公吏(국가의 관리)라는 말과 같다.】 課戶와 俸戶를【戊午年에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모든 종류의 課戶와 俸戶를 모두 강제로 州縣에 돌리고, 〈막료들과 州縣의 관원들에게는〉지금부터 官府에서 俸錢과 쌀과 보리를 아울러 지급한다.” 하였다. 唐나라 초기에 諸司에서는 公廨(공청)에 本錢을 적립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물건을 매매하여 利息을 취해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月料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諸司의 公廨에 있는 本錢을 없애고는 천하의 上戶(부유한 가호) 7천 명을 胥士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으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課戶라는 것이다. 唐나라는 또 1년의 세금을 장부에 기재하여 거두되 高戶(富戶)로써 이것을 주관하게 하고 매월 利息을 취하여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이른바 俸戶라는 것이다.】 파한 것은 官方의 사사로운 소요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곡식을 꾸어주되【稱은 去聲이니, 빌리는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擧錢(빚을 빌림)이란 것이다. 貸는 남에게 물건을 구하는(빌리는) 것이다.】 갚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랫사람들이 실제 혜택을 입기를 바라서였다.
唐나라 宣宗 이후로 어진 정사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을 끓는 물과 불 속(塗炭)에【백성들의 위태로움이 끓는 물과 불 속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니, 곧 《書經》의 이른바 塗炭이라는 것이다.】 버려둔 지가 거의 백 년이었는데, 그런 뒤에 世宗이 임금의 덕이 있어서 백성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仁政)를 행하였다. 世宗이 일찍이 將相들과 밥을 먹을 적에 인하여 말하기를 ‘연일 계속되는 추위에 짐은 백성들에게 공이 없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天祿을 누리는 것이 매우 부끄러우니, 오직 내가 백성들을 위해 직접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서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제거하여야 다소 스스로 편안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나무를 조각하여 밭 가는 지아비와 길쌈하는 지어미의 像을 만들어서 이것을 뜰에다 놓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에게 마음을 둠이 이와 같았으니, 赫然히 남면하고 지휘함에 온 천하가 복종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 周世宗]이 以北鄙未復이라하야 將幸滄州할새 卽日에 帥步騎數萬하고 直趍(趨)契丹之境하니 契丹守將이 皆擧城降이라 於是에 關南【瓦橋關以南이라 】이 悉平하다
周나라 世宗이 북쪽 변방을 아직 수복하지 못했다 하여 장차 滄州로 행차하려 할 적에 당일로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契丹의 국경으로 곧장 향하니, 契丹의 수비하는 장수들이 모두 성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關南 지방이【關南은 瓦橋關 이남 지방이다.】 모두 평정되었다.
○ 六月에 [ 唐主]遣其子紀公從善하야 與[ 鍾謨]로 俱入貢이어늘 [ 周主]問[ 謨]曰 江南【唐也라 】이 亦治兵修守備乎아 對曰 旣臣事大國하니 不敢復爾【爾는 猶言如此也라 】로소이다 上曰 不然하다 曏時則爲仇敵이어니와 今日則爲一家라 吾與汝國으로 大義已定하니 保無他虞라 然이나 人生難期하야 至於後世면 則事不可知니 歸語汝主호되 可及吾時하야 完城郭, 繕甲兵하고 據守要害하야 爲子孫計하라 謨歸하야 以告[ 唐主]한대 [ 唐主]乃城金陵하고 凡諸州城之不完者를 葺之하고 戍兵少者를 益之하니라
6월에 唐主가 그의 아들紀公李從善을 보내어鍾謨와 함께 入朝해서 공물을 바치게하였다. 周主가 鍾謨에게 묻기를 “江南(南唐)【江南은 唐나라이다.】 또한 군대를 다스려 수비를 하는가?” 하니, 鍾謨가 대답하기를 “이미 신하로서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감히 다시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爾는 이와 같다는 말이다.】
上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난날에는 우리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지만 지금은 한 집안이 되었다. 우리는 너희 나라와 군신간의 大義가 이미 정해졌으니, 보장하건대 딴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기약하기 어려워 후세에 이르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돌아가 너의 군주에게 고하되 ‘내가 살아있을 때에 성곽을 완전히 보수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요해처를 점거하고지켜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라.’고 하라.” 하였다.
[ 溫公]曰 或問臣호되 五代帝王에 [ 唐莊宗], [ 周世宗]은 皆稱英武하니 二主孰賢고하니 臣應之曰 [ 莊宗]은 善戰者也라 故로 能以弱晉勝彊梁이러니 旣得之하야 曾不數年에 外內離叛하야 置身無所하니 誠由知用兵之術이요 不知爲天下之道故也라 [ 世宗]은 以信令御群臣하고 以正義責諸國이라 [ 王環]以不降受賞【[ 王環]이 爲蜀鳳州節度使러니 [ 世宗]이 攻之한대 堅守라가 力屈就擒하니 [ 世宗]嘆曰 用之면 可勸事君者라하고 乃拜爲右驍衛將軍하니라 】하고 [ 劉仁贍]以堅守蒙褒【南唐이 以仁贍爲淸淮節度使하야 鎭壽州러니 [ 世宗]이 攻之하야 踰時不下라 [ 仁贍]子[ 崇諫]이 幸其病하야 謀降이어늘 [ 仁贍]이 命斬之하다 病甚에 副使[ 孫羽]詐爲書하야 以城降하니 是日에 卒이라 [ 世宗]이 復其軍曰忠正軍이라하야 以旌[ 仁贍]之節也하니라】하고 [ 嚴續]以盡忠獲存【[ 陳覺]이 自周[ 還]하야 矯[ 世宗]之命하야 謂[ 唐主]曰 江南連歲拒命은 皆宰相[ 嚴續]之謀니 當爲我斬之하라 [ 唐主]知[ 覺]素與[ 續]有隙하고 未之信하야 使[ 鍾謨]復命曰 久拒王師는 皆臣愚迷요 非[ 續]之罪라하다 [ 世宗]聞之하고 大驚曰 審如此면 則[ 續]乃忠臣이니 朕爲天下主하야 豈敎人殺忠臣乎아하니라 】하고 蜀兵以反覆就誅【[ 世宗]이 謀取蜀, 秦하고 遣鳳翔節度使[ 王景]攻之하야 虜其蜀將王(蠻)[巒]及其將士三千人하다 秦州降하니 [ 世宗]이 赦所俘蜀兵하야 隷軍籍하고 從征淮南이러니 (後王)[復亡]하야 走入唐이어늘 [ 唐主]獻五十人하니 [ 世宗]이 悉命斬之하니라】하고 [ 馮道]以失節被棄하고 [ 張美]以私恩見疎【(宗族之類)[[ 世宗]之爲][ 晉王]也하야 在(亶)[澶]州할새 [ 美]掌州穀이러니 [ 世宗]이 或私有所求면 [ 美]曲爲供副하다 及其卽位에 以[ 美]治積穀이 當時鮮及이라 故로 以利權授之하니 征伐四方호되 用度不乏은 [ 美]之力也라 然이나 終不以公忠待之하니라 供副者는 供給軍需辦以應副所求라 】하며 江南未服이면 則親犯矢石하야 期於必克하고 旣服이면 則愛之如子하야 推誠盡言하야 爲之遠慮하니 其宏規大度가 [ 莊宗]이 豈得同日語哉리오 書曰 無偏無黨하면 王道蕩蕩【偏은 不中也요 黨은 不公也라 蕩蕩은 廣遠也라 】이라하고 又曰 大邦畏其力하고 小邦懷其德이라하니 [ 世宗]近之矣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五代時代의 帝王 중에 唐나라 莊宗과 周나라 世宗은 모두 英武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두 군주 중에 누가 더 어진가?’라고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莊宗은 전투를 잘한 자이다. 그러므로 약한 晉나라를 가지고 강한 梁나라를 이겼는데,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일찍이 몇 년이 못 되어 내외가 이반하여 몸 둘 곳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用兵하는 방법만 알고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世宗은 진실한 명령으로 신하들을 어거하고 正義로 여러 나라를 책망하였다. 그리하여 王環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상을 받았고【王環이 蜀나라 鳳州節度使가 되었는데, 世宗이 공격하자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사로잡히니, 世宗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등용하면 군주를 섬기는 자를 권면할 수 있다.” 하고 마침내 右驍衛將軍으로 임명하였다.】劉仁贍은 굳게 성을 지킴으로써 표창을 받았으며,【南唐이 劉仁贍을 淸淮節度使로 임명하여 壽州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世宗이 壽州를 공격하여 한 철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劉仁贍의 아들[- 劉崇諫]이 아버지의 병환을 요행으로 여겨 항복할 것을 모의하자 劉仁贍이 명령하여 자식의 목을 베게 하였다. 劉仁贍의 병이 위독해지자, 副使孫羽가 거짓으로 항복문서를 만들어 城을 가지고 항복하니, 이날 劉仁贍이 죽었다. 世宗이 그의 군대를 회복하여 忠正軍이라 이름해서 劉仁贍의 충절을 표창하였다.】[- 嚴續]은 충성을 다함으로써 생존을 얻었고【陳覺이 周나라로부터 돌아와서 世宗의 命을 사칭하여 唐主에게 이르기를 “江南이 여러 해를 이어 황제(世宗)의 명령에 항거한 것은 모두 宰相 [- 嚴續]이 모의한 것이니, 마땅히 나를 위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唐主는 陳覺이 평소 [- 嚴續]과 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말을 믿지 않고 鍾謨를 시켜 世宗에게 복명하기를 “오랫동안 王의 군대에게 항거한 것은 모두 신의 어리석고 혼미함 때문이지, [- 嚴續]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世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다면 [- 嚴續]은 바로 충신이니, 짐이 천하의 군주가 되어서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충신을 죽이게 하겠는가.” 하였다.】蜀나라의 병사들은 반복무상함으로써 죽임을 당하였으며,【世宗이 蜀과 秦지방을 점령할 것을 모의하고 鳳翔節度使王景을 보내어 공격하게 해서 蜀나라의 장수 [- 王巒]과 그의 장병 3천 명을 사로잡았다. 秦州가 항복하니, 世宗이 사로잡은 蜀나라의 병사들을 사면하여 軍籍에 예속시키고 從軍하여 淮南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다시 도망하여 南唐으로 달아나자, 唐主가 이들 50명을 바치니, 世宗이 모두 명하여 목을 베게 하였다.】馮道는 절개를 잃었다 하여 버림받고 張美는 사사로운 은혜로 인해 소외당하였으며,【世宗이 晉王가 되어 澶州에 있을 적에 張美가 州의 곡식을 관장하였는데, 世宗이 혹 사사로이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張美가 곡진히 장만하여 요구에 부응하였다, 世宗이 즉위하자 張美가 비축한 곡식을 다스림에 당시 그를 따라갈 만한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권을 그에게 주니, 사방을 정벌할 적에 用度가 궁핍하지 않은 것은 모두 張美의 공로였다. 그러나 끝내 공평함과 충성함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供副는 軍需를 공급하고 마련하여 요구에 부응함을 이른다.】江南 지방이 복종하기 전에는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기필코 이길 것을 기약하였고 이미 복종한 뒤에는 자식처럼 사랑하여 정성을 다하고 아는 것을 다 말해서 그들을 위하여 멀리 생각하였으니, 그 큰 규모와 큰 도량을 어찌 莊宗과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書經》에 이르기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王道가 蕩蕩하다.」 하였고,【偏은 中하지 못한 것이요, 黨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蕩蕩은 넓고도 먼 것이다.】 또 말하기를 「큰 나라는 그의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의 덕을 그리워한다.」라고 하였으니, 世宗이 이에 가깝다.’”
[ 周主]立皇子[ 宗訓]하야 爲[ 梁王]하다 癸巳에 [ 周主][ 世宗]이 殂하다 [ 世宗]이 在藩에 多務韜晦【謂韜光晦跡이라 】러니 及卽位에 破高平之寇하니 人이 始服其英武하니라 其御軍에 號令이 嚴明하야 人莫敢犯하고 攻城對敵에 矢石이 落其左右하야 人皆失色이로되 而[ 世宗]이 略不動容하고 應機決策이 出人意表하다 又勤於爲治하야 百司簿籍을 過目無所忘하고 發奸擿伏【擿은 他歷反이니 挑也요 伏은 隱也니 凡隱匿者를 爲動發之라】에 聰察如神이라 閑暇則召儒者하야 讀前史하야 商確【確은 訖岳反이니 博求義理當否也라 】大義하며 性不好絲竹珍玩之物이라 常言[ 太祖]養成[ 王峻], [ 王殷]【[ 王峻]은 樞密使平虜節度使同平章事요 [ 王殷]은 邠郡節度使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라 】之惡하야 致君臣之分不終【上庚戌年에 漢[ 隱帝]遣[ 孟業]하야 殺監軍[ 王峻]等이러니 [ 王殷]이 先知其事하고 (因多製書)[囚業遣人]하야 以密詔示[ 太祖]하다 [ 太祖]起兵할새 [ 王殷]이 以部兵數百하고 [ 峻]亦以監軍從하야 夙夜盡心하야 多有佐命功이라 由是로 恃功專橫하다 [ 王峻]言事에 帝或未允이면 輒慍하야 語多不遜하고 忌鎭寧節度使[ 晉王]榮之英烈하야 沮其入朝라 [ 太祖]不悅하고 因[ 殷]入朝하야 殺之하고 貶[ 峻]爲商州司馬而卒하니라 】이라 故로 群臣有過則面責之하야 服則赦之하고 有功則厚賞之하고 文武參用하야 各盡其能하니 人無不畏其明而懷其惠라 故로 能破敵廣地하야 所向無前이러라 然이나 用法大(太)嚴하야 群臣職事 小有不擧하면 往往寘(置)之極刑하야 雖素有才幹聲名이라도 無所開宥하고 尋亦悔之러니 末年에 浸寬이러라 登遐之日에 遠邇哀慕焉하니라
[新增][ 歐陽氏脩]曰 嗚呼라 五代는 可謂亂世也歟인저 [ 世宗]이 區區五六年間에 取秦隴【世宗二年에 克成階鳳州하니 時三州入于蜀하니라 】하고 平淮右【世宗五年에 克淮南四十州하니라 】하고 復三關【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皆中國故地라 】하야 威武之聲이 震懾【懾은 懼也니 通作讋이니 失氣也라 】夷夏하고 而方內(納)延【內은 與納通이라 】儒學文章之士하야 考制度하고 修通禮하고 定正樂하고 議刑統하야 其制作之法이 皆可施於後世라 其爲人이 明達英果하고 論議偉然하야 卽位之明年에 廢天下佛寺三千【綱目及資治에 作二萬하니라 】三百三十六이라 是時에 中國乏錢이어늘 乃詔悉毁天下銅佛像하야 以鑄錢이라 嘗曰 吾聞佛說이 以身世爲妄而以利人爲急이라하니 使其眞身尙在인댄 苟利於世면 猶欲割截이어든 況此佛像을 豈其所惜哉아하니 由是로 群臣이 皆不敢言이라 嘗夜讀書라가 見唐元稹均田圖하고 慨然嘆曰 此致治之本也니 王者之政이 自此始라하고 乃詔頒其圖法하야 使吏民先習知之하야 期以一歲大均天下之田하니 其規爲志意 大矣哉라
周主(世宗)가 皇子柴宗訓을 梁王으로 세웠다. 癸巳日(6월 19일)에 周主世宗이 죽었다. 世宗은 藩邸(藩王의 저택)에 있을 적에 되도록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감추었는데,【韜晦는 재능을 감추고 행적을 숨김을 이른다.】 즉위하자 高平의 적을 격파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英明함과 武勇에 탄복하였다. 군대를 통솔할 적에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고, 적의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대할 적에 적의 화살과 포석이 좌우에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으나 世宗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意表를 찔렀다. 또 정사를 다스림에 부지런하여 여러 官司의 장부를 눈으로 한 번 보고 지나가면 잊는 법이 없었으며, 간악한 일을 적발하고 숨겨진 일을 적발함에【擿은 他歷反(적)이니 들추어내는 것이고, 伏은 숨겨진 것이니, 모든 숨겨져 있는 것을 들추어 드러내는 것이다.】 총명하게 살피는 것이 귀신과 같았다. 한가할 때에는 儒者들을 불러서 예전의 역사책을 읽게 하여 大義를 강구하고 의논하였으며【確은 訖岳反(확)이니, 의리에 합당한지 여부를 널리 찾는 것이다.】 타고난 성품이 관현악과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太祖가 王峻과 王殷의【王峻은 樞密使 平虜節度使 同平章事이고, 王殷은 邠郡節度使 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였다.】 惡을 양성하여 군신간의 분수를 잘 끝마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였다.【앞의 庚戌年(950)에 漢나라 隱帝가 [- 孟業]을 보내어서 監軍王峻 등을 죽이게 하였는데, 王殷이 그 일을 미리 알고는 [- 孟業]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密詔를 太祖에게 보였다. 太祖가 군대를 일으킬 적에 王殷이 휘하의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수행하였으며, 王峻 또한 監軍을 거느리고 수행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다해 왕이 창업할 때 보좌한 功이 많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들이 공을 믿고 專橫하였다. 王峻이 일을 말할 적에 황제가 혹 윤허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성을 내어 불손한 말이 많았으며, 鎭寧節度使晉王柴榮의 英烈함을 시기하여 그가 들어와 조회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에 太祖가 기뻐하지 않고 王殷이 入朝함을 틈타 그를 죽였고, 王峻을 商州司馬로 좌천시켜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대면하고 책망하여 죄를 인정하면 용서하고 공이 있으면 상을 후하게 내렸으며, 文武의 인재를 섞어 등용해서 각각 재능을 다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의 총명함을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혀서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너무 엄격하여 신하들 중에 직분에 관계된 일을 조금이라도 거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왕왕 극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평소에 재간과 명망이 있는 자라도 관대하게 용서해주는 법이 없었고 얼마 뒤엔 또한 이를 후회하였는데, 말년에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승하하는 날에 원근에서 모두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新增]歐陽氏(歐陽脩)가 말하였다.
“아! 五代時代는 난세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런데 世宗은 구구하게 5, 6년 동안에 秦隴을 취하고【世宗 2년(955)에 成州, 階州, 鳳州를 점령하니, 이 당시에 이 세 州가 蜀으로 들어가 있었다.】淮右를 평정하고【世宗 5년(958)에 淮南의 40州를 점령하였다.】三關을 수복하여【三關은 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모두 中原의 옛 영토이다.】威武의 명성이 오랑캐 지방과 中夏에 진동하였고,【懾은 두려워하는 것으로 讋과 통하니 의기소침하여 기운을 잃은 것이다.】 유학과 문장을 하는 선비들을 사방에서 받아들여【內은 納과 통한다.】 제도를 고찰하고 통행하는 禮를 닦고 純正한 음악을 제정하고 刑統을 의논하여 제작한 법이 모두 후세에 시행할 만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고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의논이 훌륭하여 즉위한 다음 해에 천하의 佛寺 3【三千은 《資治通鑑綱目》과 《資治通鑑》에는 二萬으로 되어 있다.】336개소를 폐지하였다. 이때 中國에 돈이 없자, 마침내 명하여 천하의 銅으로 만든 불상들을 모두 부수어서 돈을 주조하게 하였다.
世宗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佛家의 학설은 몸과 세상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급하게 여긴다고 하니, 만약 眞身(부처)이 아직 살아있을 경우 만일 세상에 이롭기만 하다면 자기 몸을 베어주고자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불상을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밤중에 책을 읽다가 唐나라 元稹의 均田圖를 보고 慨然히 감탄하기를 ‘이는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이니, 王者의 정사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이 그림과 법을 천하에 반포해서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익숙히 알게 해서 1년 동안에 천하의 田地를 크게 균등하게 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그 規爲(규모)와 의지가 참으로 훌륭하다.”
甲午에 宣遺詔하야 命[ 梁王][ 宗訓]하야 卽皇帝位하니 生七年矣러라
○ 周[ 世宗]이 仍歲征伐할새 宋[ 太祖]累立大功하고 加以法令嚴明하니 士卒畏服이라 [ 恭帝]幼沖하니 中外物情이 皆附于[ 太祖]하야 密有推戴之意하니라
恭帝
[庚申]〈周[ 恭帝]는 仍稱顯德七年하니라 正月은 [ 宋太祖皇帝]建隆元年이라 ○ 是歲에 周禪于宋하니라〉
正月에 鎭定驛告호되 河東[ 劉鈞]【[ 北漢主]라 】이 結遼兵入寇라하니 [ 周主]命[ 宋太祖]北征이러니 至陳橋驛하야 諸將이 擁逼南歸하야 自仁和門入하다 [ 宋太祖]歸公署하니 宰相[ 范質]等이 詣崇元殿하야 召文武百僚하야 至晡班定【晡曰申時라 】하다 [ 周恭帝]自內降制曰 天生蒸民에 樹之司牧이라 二帝는 惟公而禪位하고 三王은 乘時而革命하니 其極은 一也라 予末小子【末은 弱也라 】遭家不造【造는 成也라 】하야 人心已去하고 天命有歸라 咨爾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 趙某]는 禀上聖之姿하고 有神武之略하야 佐我[ 高祖]하야 格于皇天하고 逮事[ 世宗]하야 功存納麓【書에 納于大麓이라 】하고 東征西怨하야 厥績懋焉【懋는 美也요 又通作茂하니 盛也라 】하니 天地鬼神이 享于有德하고 謳歌獄訟이 歸于至仁이라 應天順人하야 法[ 堯]禪[ 舜]하니 如釋重負라 予其作賓하노니 嗚呼欽哉하라 祇畏天命하노라 〈[ 陶穀]所撰也라〉宣徽使引[ 宋太祖]하야 就龍墀하야 聽命訖에 宰相이 掖[ 宋太祖]升殿이어늘 由東序하야 服御服하고 登座하니 群臣朝賀하다 詔改周顯德七年하야 爲建隆元年하고 國號를 大宋이라하니 正月五日也러라
정월에 鎭定驛에서 아뢰기를 “河東의 劉鈞이【劉鈞은 北漢의 군주이다.】遼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쳐들어와서 침략했다.” 하니, 周主(恭帝)가 宋나라 太祖에게 명하여 북쪽을 정벌하게하였다. 宋나라 太祖가 陳橋驛에 이르자, 諸將들이 옹위하고핍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하니, 仁和門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宋나라 太祖가 公署로 돌아가니, 재상 范質 등이 崇元殿에 나와 文武百官을 불러 晡時(申時)에 이르자 반열을 정하였다.【晡는 申時(오후 4시 전후)를 이른다.】周나라 恭帝가 大內에서 다음과 같은 制書를 내렸다.
“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司牧(군주)을 세웠다. 堯임금과 舜임금은 공변되어 禪位하였고 三王은 때를 틈타 혁명하였으니, 그 극치는 똑같다. 나 末小子는【末은 미약함이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할 때를 만나서【造는 이룸이다.】 人心이 이미 떠나가고 天命이 딴 사람에게 돌아갔다.
아! 너 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趙某는 上聖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神武한 지략이 있어서 우리 高祖를 보좌하여 皇天을 감동시키고 世宗을 섬겨 큰 정사를 총괄함에 공적이 남아있으며,【《書經》〈舜典〉에 “堯임금이 舜임금을 받아들여 萬機의 정사를 기록하게 했다.”라고 보인다.】 동쪽 나라를 정벌하면 서쪽 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뒤에 정벌하는 것을 원망하여 그 공적이 성대하니,【懋는 아름다움이요, 또 茂로도 통용하여 쓰니, 성대함이다.】 천지의 귀신은 덕이 있는 자에게 흠향하고 백성들의 謳歌하고 訟事함은 지극히 인자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는 하늘의 뜻에 부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禪讓한 것을 본받으니, 나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이 홀가분하다. 나는 손님이 될 것이니, 아! 공경하라.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 - 陶穀이 지은 것이다.-
歷年圖曰 [ 太祖]【[ 郭威]라 】負震主之威하고 挾不賞之功하야 措身無所하야 乘危而發【見上庚戌年하니라 】하야 雖履天下之籍이나 而室家先覆【漢[ 隱帝]聞[ 太祖]擧兵渡河하고 乃誅[ 太祖]家屬于京師하야 嬰孺無免者하니라 】矣라 [ 世祖]는 以異姓之親【[ 世宗]은 名[ 榮]이니 [ 太祖][ 柴皇后]兄[ 守禮]之子라 [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으로 入承大統에 知近世之弊起於威令不行하야 下陵上替라 故로 高平之役에 首誅[ 樊], [ 何]【[ 樊], [ 何]는 見上甲寅年이라 】하야 以振軍法하야 遂能變弱爲强하고 因敗爲功하야 乘勝逐北하야 至于太原이라 歸而簡師習戰하야 幷心進取하니 於是에 南割江淮하고 西克秦鳳하고 北開關南하야 攻無堅城하고 戰無彊陣이라 又以枹鼓之隙에 治律曆, 明典禮하고 審法令, 修政事하고 收賢才, 養百姓하니 可謂知治安之本矣라 大功未成에 中道而夭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 恭帝]以區區孺子로 纂承大統하야 不足以當皇天之眷命이라 然이나 眞人德業日隆하야 已爲天下所歸戴면 則其重負를 安得而不釋乎아 昔聞諸先儒說호니 五代之君이 更十有二에 [ 周世宗]爲上이요 [ 唐明宗]次之요 餘無足稱焉이라하니라 歷考五代之世컨대 正如中夜晦冥하니 孤山窮谷之間에 鼯鼠鴟鴞와 狐狸鬼魅가 何物不有리오 故로 有以盜賊而君天下者하니 [ 朱梁]이 是也요 有以夷人而君天下者하니 後唐, 晉, 漢諸君이 是也요 有以黥卒而君天下者하니 [ 周郭威] 是也요 有以丐養之子而君天下者하니 [ 唐明宗], [ 潞王], [ 周世宗]이 是也라 其變之大者는 則同姓之親은 斃於刀鋸而不恤하고 盜賊夷人之裔는 則養爲己子하야 使紹大統而不顧하며 中國之君은 己之所嘗北面而委質者어늘 則叛逆簒弑而忍爲하고 夷狄之主는 中國所當拒絶者어늘 則稱父稱臣而不恥하야 首足倒懸하고 冠屨逆置라 自書契以來로 其禍敗之慘과 滅亡之速이 未有甚於斯時者也하니 人生斯世는 何其不幸歟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太祖(郭威)는【太祖는 郭威이다.】 군주를 두렵게 할 만한 위엄을 가지고 상 줄 수 없는 큰 공을 지녀 몸 둘 곳이 없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하여【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한 것은 앞의 庚戌年(950)에 보인다.】 비록 天子의 지위에 올랐으나 室家가 먼저 전복되었다.【漢나라 隱帝(劉承祐)는 太祖(郭威)가 군대를 일으켜 강을 건너온다는 말을 듣고, 京師에서 太祖의 家屬을 죽여 갓난아이도 화를 면한 자가 없었다.】
世祖는 異姓의 친척으로【世宗은 이름이 榮이니, 太祖의 柴皇后의 오라비인 柴守禮의 아들이다. 太祖가 後嗣가 없어 그를 길러 아들로 삼았다.】 들어와서 大統을 이음에 근세의 병폐가 군주의 위엄과 명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되어 아랫사람이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高平의 전쟁에 첫 번째로 樊愛能과 何徽를【樊愛能과 何徽의 일은 앞의 甲寅年(954)에 보인다.】 주벌하여 군법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함을 바꾸어 강하게 만들고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삼아서, 승세를 타고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太原에 이르렀다. 돌아와 군사들을 선발해서 전투하는 방법을 익히게 하여 進取하는 데에 온 마음을 쏟으니, 이에 남쪽으로 江淮를 할양받고 서쪽으로 秦州와 鳳翔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關南을 개척하여 공격하면 견고한 성이 없고 싸우면 강한 적이 없었다. 또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 틈에 律曆을 다스리고 典禮를 밝히며 법령을 살피고 정사를 닦으며 어진 이와 재능이 있는 자를 거두어 쓰고 백성을 길렀으니,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큰 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태평한 기업을 하늘이 장차 聖人(趙匡胤)에게 열어서 주려고 한 것이니, 사람의 지모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史略 史評]史斷(史官의 論斷)에 말하였다.
“恭帝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로 大統을 이어받아서 皇天의 돌아보는 天命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眞人(宋 太祖)의 德業이 날로 높아져서 이미 천하 사람들이 귀의하고 추대하는 바가 되었으니, 그 무거운 짐(帝位)을 어찌 벗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先儒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五代時代의 군주가 12명인데 周나라 世宗이 가장 으뜸이고 唐나라 明宗이 그 다음이며 나머지는 칭찬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五代의 세상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바로 한밤중처럼 깜깜하니, 외로운 산과 깊은 골짜기에 날다람쥐와 올빼미, 솔개와 여우, 살쾡이와 도깨비 같은 것들이 어떤 나쁜 물건인들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도둑으로서 天下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朱全忠의 梁나라가 이것이요, 오랑캐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後唐과 晉‧漢의 여러 군주가 이것이요, 文身한 병졸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周나라 郭威가 이것이요, 데려다 기른 자식으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唐나라 明宗과 潞王, 周나라 世宗이 이것이다.
변고 중에 가장 큰 것은, 同姓의 친척이 칼과 톱에 형벌을 당하여 죽어도 걱정하지 않고, 도적과 오랑캐 자식을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아 大統을 잇게 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으며, 中國의 군주는 자신이 일찍이 북향하여 폐백을 바치고 섬겼던 자인데도 叛逆과 찬탈과 시해를 자행하였고, 夷狄의 군주는 中國에서 마땅히 거절해야 할 자인데도 아버지라고 칭하고 신하라고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머리와 발이 거꾸로 달리고 冠과 신발이 거꾸로 놓였다. 文字가 생긴 이래로 禍敗의 참혹함과 멸망의 신속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았으니, 이때에 태어난 사람은 어쩌면 그리도 불행한가.”
右後周는 三主에 共十年이라
이상 後周는 세 임금에 모두 1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