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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div class="clsB"> ===南北朝=== </div><div class="clsB"> ====梁紀==== </div><div class="clsB"> =====高祖武帝===== </div>名衍이요 姓蕭니<div class="contData"> {|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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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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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 卷之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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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梁紀====
+
===晉紀===
 
</div><div class="clsB">
 
</div><div class="clsB">
=====高祖武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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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
</div>名衍이요 姓蕭니<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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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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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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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紀 附北朝東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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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高祖武帝]] [[]]이요 姓[[]]니 在位四十八年이요 壽八十六이라
+
[[安皇帝]]<font color="#0054FF" size="2">【寬容和平曰安이라】</font>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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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紀 - 北朝의 東魏를 붙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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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高祖]][[武帝]]는 이름이 [[]]이고 姓이 [[蕭氏]]이니, 재위가 48년이고 壽가 86세이다.
+
安皇帝<font color="#0054FF" size="2">【너그럽고 포용하여 화평한 것을 安이라 한다.】</font>는 이름이 [[德宗]]이니 [[武帝]]의 태자이다. 재위가 22년이고 壽가 37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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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壬午] 齊中興二年, 梁高祖天監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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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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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隆安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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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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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壬午] 〈齊中興二年이요 [[梁高祖]]天監元年이요 魏景明三年이라 ○ 是歲에 齊亡하고 梁代之하니라〉
+
[丁酉]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요 秦皇初四요 魏皇始(三)[二]年이라 ○ [[南涼王]][[禿髮烏孤]]太初元年이요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小國二요 新小國二니 凡七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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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502) - 齊나라 中興 2년이고, 梁나라 [[高祖]]의 天監 元年이고, 魏나라 景明 3년이다. ○ 이해에 齊나라가 망하고梁나라가 이를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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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齊進大司馬大司馬[[]]하야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하고 詔進大司馬大司馬位相國相國, 總百揆<font color="#0054FF" size="2">【揆는 度也니 揆度庶政之官也라】</font>, 揚州牧揚州牧하고 封十郡爲[[梁公]]하다 二月에 詔[[梁公]]하야 進爵爲王하다
+
[[魏王]][[珪]] 自將圍中山하니 中山이 飢甚이라 [[慕容麟]]이 帥二萬餘人하고 出據新市어늘 甲子晦에 [[魏王]][[珪]]進軍攻之할새 太史令太史令[[鼂崇]]曰 不吉하니이다 昔에 [[紂]]以甲子亡하니 謂之疾日<font color="#0054FF" size="2">【左傳昭九年 辰在子卯謂之疾日注에 疾은 惡也니 紂以甲子喪하고 桀以乙卯亡이라 故로 以爲忌라】</font>이라 兵家忌之하니이다 [[珪]]曰 [[]]는 以甲子亡이어니와 [[武王]]은 不以甲子興乎아 [[崇]]無以對러라 十月甲戌에 [[珪]]與[[麟]]으로 戰於義臺하야 大破之하니 [[麟]]遂奔鄴하다 甲申에 魏克中山<font color="#0054FF" size="2">【是年三月에 魏王珪 圍中山한대 燕王寶走出이어늘 慕容詳이 城守拒魏하고 自謂能却魏兵하야 兵威已振이라하야 遂卽帝位러니 麟襲殺詳而自立이라 至是하야 珪克中山이라】</font>하다 [[麟]]至鄴하야 復稱[[趙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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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齊나라가 大司馬大司馬[[蕭衍]]을 승진시켜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齊主]]가 명령하여 大司馬大司馬의 지위를 相國相國으로 승진시켜 百揆<font color="#0054FF" size="2">【揆는 헤아리는 것이니, 百揆는 庶政을 헤아려 처리하는 관직이다.】</font>를 총괄하게 하고 揚州牧으로 삼으며, 10개 郡을 봉해 주어 [[梁公]]으로 삼았다.
+
隆安 元年(정유 397) - 燕나라 永康 2년이고, 秦나라 皇初 4년이고, 魏나라 皇始 2년이다. [[南涼王]][[禿髮烏孤]]의 太初 元年이고, [[北涼王]][[段業]]의 神璽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과 涼 등 小國이 둘이고,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2월에 [[齊主]]가 명령하여[[梁公]]의 작위를 올려서 [[梁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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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齊主]]下詔하야 禪位于梁王하니 卽皇帝位하다
+
[[魏王]][[拓跋珪]]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中山을 포위하니, 中山이 饑饉이 몹시 심하였다. [[慕容麟]]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新市를 점거하자, 甲子日(9월 29일) 그믐에 [[魏王]][[拓跋珪]]가 진군하여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太史令太史令[[鼂崇]]이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옛날에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날을 疾日<font color="#0054FF" size="2">【≪春秋左傳≫ 昭公 9年條의 ‘辰在子卯 謂之疾日(일진이 甲子와 乙卯에 있는 것을 疾日이라 한다)’ 注에 “疾은 불길한 것이니, 紂王은 甲子日에 망하였고 桀王은 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font>이라 이르는 바, 兵家에서 이를 꺼립니다.” 하였다. [[拓跋珪]]가 말하기를 “[[紂王]]은 갑자일에 망하였으나 [[武王]]은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는가?” 하니, [[鼂崇]]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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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齊主]]가 조서를 내려 [[梁王]]에게 帝位를 禪讓하니, [[梁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10월 甲戌日(10일)에 [[拓跋珪]]가 [[慕容麟]]과 義臺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慕容麟]]이 마침내 鄴城으로 도망하였다. 甲申日(20일)에 魏나라가 中山을 이겼다.<font color="#0054FF" size="2">【이해 3월에 魏王 拓跋珪가 中山을 포위하자 燕王 慕容寶가 달아나니 慕容詳이 城을 수비하여 魏나라를 막고서, 스스로 魏나라 군대를 물리쳐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졌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慕容麟이 慕容詳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拓跋珪가 中山을 이겼다.】</font>[[慕容麟]]은 鄴城에 이르러 다시 [[趙王]]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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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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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甲申] 梁天監三年, 魏正始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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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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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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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甲申] 〈梁天監三年이요 魏正始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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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二年이라 〈[[燕主]][[慕容盛]]建平元이요 秦皇初五요 魏天興元年이라 ○ [[南燕王]][[慕容德]]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南涼, 北涼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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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504) - 梁나라 天監 3년이고, 魏나라 正始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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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詔營繕國學하다 時에 魏平寧日久하니 學業이 大盛하야 燕, 齊, 趙, 魏之間에 敎授者 不可勝數라 弟子著錄이 多者는 千餘人이요 少者도 猶數百이라 州擧茂異하고 郡貢孝廉하야 每年逾(愈)衆이러라
+
正月에 [[慕容麟]]이 說[[范陽王]][[德]]하야 南徙滑臺하니 魏遂取鄴하다 [[麟]]이 上尊號於[[德]]하니 [[德]]이 用兄垂故事하야 稱[[燕王]]<font color="#0054FF" size="2">【燕은 南燕이라[釋義][[慕容德]]은 字[[元明]]이니 [[皝]]少子也라 [[寶]]敗走에 [[德]]稱[[燕王]]하고 據廣固하니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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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主(北魏)]]가 명령하여 國學을 새로 짓고 수리하게 하였다. 이때 魏나라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니, 학문하는 氣風이 크게 성하여 燕‧齊‧趙‧魏 등지에서 학생들에게 敎授하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弟子로 기록된 자가 많게는 천여 명이고 적은 경우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州에서는 재능이 뛰어나고 특이한 자를 천거하고 郡에서는 효도하고 청렴한 자를 추천해서, 해마다 사람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
隆安 2년(무술 398) - [[燕主]][[慕容盛]]의 建平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5년이고, 魏나라 天興 元年이다. ○ [[南燕王]][[慕容德]]의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涼(後涼)‧南涼‧北涼 등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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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十月에 梁이 大擧伐魏하다
+
正月에 [[慕容麟]]이 [[范陽王]][[慕容德]]을 설득하여 남쪽으로 도읍을 滑臺에 옮기니, 魏나라가 마침내 鄴城을 취하였다. [[慕容麟]]이 [[慕容德]]에게 尊號를 올리니, [[慕容德]]이 형 [[慕容垂]]의 故事를 따라 [[燕王]]이라 칭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原註]燕은 南燕이다.[釋義][[慕容德]]은 字가 [[元明]]이니 [[慕容皝]]의 작은아들이다. [[慕容寶]]가 패주하자, [[慕容德]]이 [[燕王]]을 칭하고 廣固를 점거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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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梁나라가 군대를 크게 일으켜 魏나라를 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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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丙戌] 梁天監五年, 魏正始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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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丙戌] 〈梁天監五年이요 魏正始三年이라〉
+
[[燕王]][[寶]]卒하니 [[長樂王]][[盛]]<font color="#0054FF" size="2">【後燕也니 [[寶]]之子라】</font>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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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506) - 梁나라 天監 5년이고, 魏나라 正始 3년이다. -
+
○ [[燕王]][[慕容寶]]가 죽으니, [[長樂王]][[慕容盛]]<font color="#0054FF" size="2">【[[長樂王]][[慕容盛]]은 後燕이니, [[慕容寶]]의 아들이다.】</font>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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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太子統]]<font color="#0054FF" size="2">【諡曰昭明이라】</font>이 生五歲에 能遍誦五經이어늘 始自禁中<font color="#0054FF" size="2">【謂門戶有禁하야 非侍御通籍之臣이면 不得入也라】</font>으로 出居東宮하다
+
○ 十一月에 [[魏王]][[珪]]卽皇帝位하야 改元天興하고 命朝野하야 皆束髮加帽<font color="#0054FF" size="2">【帽는 小兒蠻夷蒙頭衣니 晉書輿服志曰 帽는 猶冠也라하니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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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梁나라 太子太子 蕭統<font color="#0054FF" size="2">【梁나라 太子 蕭統은 시호를 昭明이라 하였다.】</font>은 나이 다섯 살에 五經을 두루 외웠다. 처음으로 太子太子가 궁중<font color="#0054FF" size="2">【禁中은 門戶에 금령이 있어서 侍御하는 신하나 門籍에 이름을 올린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음을 이른다.】</font>에서 나가 東宮에 거처하였다.
+
○ 11월에 [[魏王]][[拓跋珪]]가 황제에 즉위하여天興으로 개원하고, 朝野에 명해서 모두 중국식으로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쓰게<font color="#0054FF" size="2">【帽는 오랑캐 어린아이의 蒙頭衣(蒙頭里)니, ≪晉書≫〈輿服志〉에 이르기를 “帽는 冠과 같다.” 하였다.】</font> 하였다.
 
</div>
 
</div>
 
</div>
 
</div>
|}</div>[己丑] 梁天監八年, 魏永平二年<div class="contData">
+
|}</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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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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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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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己丑] 〈梁天監八年이요 魏永平二年이라〉
+
[己亥]三年이라 〈燕長樂元이요 秦弘始元이요 魏天興二年이라 ○ [[涼主]][[呂纂]]咸寧元이요 北涼天璽元年이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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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509) - 梁나라 天監 8년이고, 魏나라 永平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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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十一月에 [[魏主]]專尙釋氏하니 遠近이 承風하야 無不事佛이라 比及延昌<font color="#0054FF" size="2">【世宗宣武帝恪之末年號라】</font>히 州郡에 共有一萬三千餘寺러라
+
[[魏王]][[珪]]置五經博士五經博士하고 增國子國子太學太學生員하야 合三千人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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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11월에 [[魏主(宣武帝)]]가 오로지 佛敎를 숭상하니, 이로 인하여 원근에서 영향을 받아 부처를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延昌<font color="#0054FF" size="2">【延昌은 世宗 宣武帝 元恪의 말년의 연호이다.】</font> 年間에 이르기까지 北魏 境內의 州郡에 모두 1만 3천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
隆安 3년(기해 399) - 燕나라 長樂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元年이고, 魏나라 天興 2년이다. ○ [[涼主]][[呂纂]]의 咸寧 元年이고, 北涼天璽 元年이다.-
</div>
 
</div>
 
|}</div>[乙未] 梁天監十四年, 魏延昌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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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 〈梁天監十四年이요 魏延昌四年이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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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515) - 梁나라 天監 14년이고, 魏나라 延昌 4년이다. -
+
[[魏王]][[拓跋珪]]가 五經博士五經博士를 설치하고國子學國子學과 太學太學의 生員生員을 늘려 모두 3천 명이 되게 하였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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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魏主]]殂하고 [[太子詡]]卽皇帝位<font color="#0054FF" size="2">【宣武(長)[第二]子니 (世)[肅]宗孝明皇帝라】</font>하니 [[胡太后]]<font color="#0054FF" size="2">【宣武帝恪之后而帝詡母라】</font>臨朝稱制하다 [[于忠]]<font color="#0054FF" size="2">【姓名이니 侍中, 領軍將軍이라】</font>居門下하야 總宿衛하야 遂專朝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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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이 引師而南하니 北鄙諸郡이 皆降之어늘 遂定都廣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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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魏主]]가 죽고 太子太子[[元詡]]가 〈6세의 나이로〉 [[皇帝]]에 즉위하니,<font color="#0054FF" size="2">【太子 元詡는 宣武帝의 둘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肅宗 孝明皇帝이다.】</font> 胡太后<font color="#0054FF" size="2">【胡太后는 宣武帝 元恪의 后妃이고, 황제 元詡의 母后이다.】</font>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于忠<font color="#0054FF" size="2">【于忠은 姓名이니, 侍中‧領軍將軍이었다.】</font>이 門下省門下省에 侍中侍中으로 있으면서 또 宿衛宿衛를 총괄하여 마침내 조정의 정사를 전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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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慕容德]]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니, 북쪽 변방의 여러 郡이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廣固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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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魏[[世宗]]이 作瑤光寺라가 未就러니 是歲에 [[胡太后]] 又作永寧寺永寧寺하니 皆極土木之美하야 爲九層浮圖호되 掘地築基하야 下及黃泉하고 浮圖<font color="#0054FF" size="2">【見二十九卷이라】</font>高九十丈에 上刹<font color="#0054FF" size="2">【梵言刹은 華言竿이니 卽幡柱라 】</font>復高十丈이라 每夜靜에 鈴鐸聲이 聞十里하고 僧房千間에 珠玉錦繡 駭人心目하니 自佛法入中國으로 塔廟<font color="#0054FF" size="2">【佛弟子 收奉舍利를 號爲塔이라하니 猶華言宗廟也라】</font>之盛이 未之有也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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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會稽世子]]<font color="#0054FF" size="2">【會稽王은 道子이니 卽瑯琊王이라】</font>[[元顯]]이 性苛刻하야 生殺任意하니 [[孫恩]]<font color="#0054FF" size="2">【琅琊人이니 世奉五斗米道라 恩叔父泰 有秘術하야 愚者敬之如神하야 皆竭財産하고 進子女하야 以祈福慶이러니 爲會稽王道子所誅한대 恩逃于海하다 衆聞泰死하고 惑之하야 皆謂蟬蛻登仙이라 故로 就海中資給하니 恩聚合亡命하야 志欲復讐하고 因民心騷動하야 遂叛하니라 後爲臨海太守辛景所討하야 窮蹙赴海自沈하니 妖黨謂之水仙이라하야 投水從死者百數러라 五斗米道는 見二十三卷米賊注하니라】</font>이 因民心騷動하야 自海島로 帥其黨하야 殺上虞令上虞令하고 遂攻會稽하다 於是에 會稽及東陽, 新安凡八郡人이 一時起兵하야 殺長吏以應恩하니 旬日之中에 衆이 數十萬이러라 時에 三吳承平<font color="#0054FF" size="2">【承은 一作昇이라】</font>日久하야 民不習戰이라 故로 郡縣兵이 皆望風奔潰라 恩據會稽하야 自稱征東將軍征東將軍하고 表[[會稽王]][[道子]]及世子世子[[元顯]]之罪하야 請誅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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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魏나라 [[世宗]]이 瑤光寺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해에 [[胡太后]]가 또다시 永寧寺를 지으니, 두 절 모두 건축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여 9층의 浮圖(佛塔)를 만들되 땅을 파서 기반을 다져 아래로 黃泉에까지 미쳤고, 浮圖<font color="#0054FF" size="2">【浮圖는 해설이 29권에 보인다.】</font>의 높이가 90길인데 浮圖 위에 다시 10길 높이의 相輪<font color="#0054FF" size="2">【梵語의 刹은 중국어로 장대이니, 곧 幡柱이다.】</font>이 있었다. 매일 밤 고요할 때에는 浮圖 위의 鈴鐸(風磬) 소리가 10리 밖에까지 들렸고, 僧房 천 칸에 珠玉과 錦繡가 휘황찬란하여 사람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니, 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塔廟(寺塔)<font color="#0054FF" size="2">【佛弟子가 舍利를 거두어 봉안한 것을 塔이라고 이름하니, 중국어의 宗廟와 같다.】</font>의 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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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會稽王]]의 世子<font color="#0054FF" size="2">【會稽王은 司馬道子이니, 곧 瑯琊王이다.】</font>인 [[司馬元顯]]이 성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孫恩<font color="#0054FF" size="2">【孫恩은 琅琊 사람이니, 대대로 五斗米道를 믿었다. 孫恩의 叔父인 孫泰가 비밀스런 방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神처럼 공경하여 모두 재산을 탕진하고 자녀를 바쳐 福을 빌었는데,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孫恩이 海島로 도망하였다. 사람들이 孫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혹하여 모두 이르기를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海島에 나아가 物資를 공급하니, 孫恩이 망명한 자들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자 하여 민심이 騷動한 틈을 타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뒤에 臨海太守 辛景에게 토벌당하여 궁지에 몰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요망한 무리가 水仙(水國의 神仙)이라 이르며 물속에 투신하여 따라 죽은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려졌다. 五斗米道는 23권 米賊 注에 보인다.】</font>이 民心이 소요한 틈을 타서 海島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上虞令上虞令을 죽이고 마침내 會稽를 공격하였다. 이에 會稽와 東陽, 新安 등 모두 여덟 郡의 사람들이 일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수령을 죽이고 [[孫恩]]에게 호응하니,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三吳 지방은 태평을 누린<font color="#0054FF" size="2">【承은 다른 곳에는 昇으로 되어 있다.】</font> 지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郡縣의 병력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었다. [[孫恩]]이 會稽를 점거하여征東將軍征東將軍이라 자칭하고, 表文을 올려 [[會稽王]][[司馬道子]]와 世子世子인 [[司馬元顯]]죄를 열거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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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丁酉] 梁天監十六年, 魏肅宗孝明帝詡熙平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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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 〈梁天監十六年이요 魏[[肅宗孝明帝]][[]]熙平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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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帝卽位以來로 內外乖異하야 石頭以南은 皆爲荊, 江所據<font color="#0054FF" size="2">【荊은 殷仲堪이요 江은 王愉라】</font>하고 以西는 皆豫州所專<font color="#0054FF" size="2">【豫는 庾楷라】</font>이요 京口及江北은 皆[[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彭城人이니 沈毅多計畫이라 爲桓玄參軍하야 領精銳하고 爲前鋒하야 百戰百勝하니 號爲北(部)[府]하고 敵人畏之라 復爲龍驤將軍, 領江州而死하니라】</font>及廣陵相高雅之所制하야 朝政所行은 惟三吳而已러니 及[[孫恩]]作亂에 八郡<font color="#0054FF" size="2">【謂荊, 江, 豫, 京口, 江北及三吳라】</font>이 皆爲恩有하야 畿內諸縣에 盜賊이 處處蜂起<font color="#0054FF" size="2">【言其衆也라】</font>하고 [[恩]]黨이 亦有潛伏在建康者하니 人情危懼하야 常懼竊發이러라 於是에 內外戒嚴하야 加[[道子]]黃鉞하고 [[元顯]]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하고 命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하야 兼督吳興義興軍事하야 以討[[恩]]하고 [[劉牢]]之亦發兵討[[恩]]할새 拜表輒行하다 十二月에 [[謝琰]]이 與[[牢之]]로 轉鬪<font color="#0054FF" size="2">【轉相戰鬪也라】</font>而前하니 所向輒克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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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517) - 梁나라 天監 16년이고, 魏나라 [[肅宗]][[孝明帝]][[元詡]]의 熙平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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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 군벌이 서로 괴리되어서 石頭城 이남은 모두 荊州와 江州의 두 刺史刺史에게 점거당하였고<font color="#0054FF" size="2">【荊州刺史는 殷仲堪이요, 江州刺史는 王愉이다.】</font>石頭城 이서는 모두 豫州의 전유물이 되었으며,<font color="#0054FF" size="2">【豫州刺史는 庾楷이다.】</font>京口와 江北은 모두 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劉牢之는 彭城 사람이니, 침착하고 굳세며 계책이 많았다. 桓玄의 參軍이 되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백전백승하니, 이름하기를 北府兵이라 하고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다시 龍驤將軍‧領江州刺史가 되었다가 죽었다.】</font>와 廣陵相廣陵相인 [[高雅之]]에게 控制당하여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는 곳은 오직 三吳 지방뿐이었다. [[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여덟 郡<font color="#0054FF" size="2">【여덟 郡은 荊州, 江州, 豫州, 京口, 江北 및 三吳(吳郡, 吳興, 丹陽)를 이른다.】</font>이 모두 [[孫恩]]의 소유가 되자, 畿內畿內의 諸縣에서 도적들이 곳곳마다 봉기<font color="#0054FF" size="2">【蜂起는 많음을 말한 것이다.】</font>하고 [[孫恩]]의 도당 중에 또한 建康에 잠복해 있는 자가 있으므로 人情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적이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안팎으로 엄밀하게 경계하여 [[司馬道子]]에게 黃鉞을 가하고 [[司馬元顯]]에게 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을 가하였으며 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에게 명하여 吳興과 義興郡의 軍事를 겸하여 도독해서 [[孫恩]]을 토벌하게 하였다. [[劉牢之]] 또한 군대를 일으켜 [[孫恩]]을 토벌할 적에 표문을 올리고 즉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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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梁이 詔以宗廟用牲牢<font color="#0054FF" size="2">【牛羊豕曰太牢요 羊豕曰小牢니 牢는 閑防也라】</font>는 有累冥道하니 宜皆以麪爲之하라하니 於是에 朝野諠譁하야 以宗廟去牲은 乃是不復血食이라호되 [[梁主]]竟不從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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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謝琰]][[劉牢之]]와 轉轉하여 싸우면서<font color="#0054FF" size="2">【轉鬪는 轉轉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font> 전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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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朱氏(黼)]]曰 仁者는 以其所愛로 及其所不愛하고 不仁者는 以其所不愛로 及其所愛하나니 仁不仁之辨은 義與利之間也라 [[伏羲]]作綱罟하고 [[舜]]焚山澤하고 [[禹]]驅龍蛇하고 [[周公]]驅虎豹犀象하시니 夫豈不仁哉아 原其設心하면 正欲萬物遂性하고 生民奠居而已라 鳥獸魚鱉이 由是咸若하고 山川鬼神이 亦莫不寧하니 是之謂以其所愛로 及其所不愛라 梁武帝는 不以生類爲藥하고 不以犧牲爲祀하고 不以仙人鳥獸之形爲衣하니 其設心이 豈誠仁恕<font color="#0054FF" size="2">【梁天監十六年에 勅太醫하야 不以生類爲藥이라 又詔曰 文錦不得爲人獸之形하라하니 爲其裁翦이 有乖仁恕라】</font>리오 不過信佛氏之說하야 求將來福報而已라 然이나 一有利取國之心이면 至弑二君<font color="#0054FF" size="2">【二君은 東昏侯寶卷, 和帝寶融이라】</font>, 殺六寶<font color="#0054FF" size="2">【寶晊, 寶玄, 寶夤, 寶攸, 寶嵩, 寶貞이라】</font>而不之恤하고 一有利守國之心이면 作浮山堰<font color="#0054FF" size="2">【魏降人이 陳計하야 堰淮水以灌壽陽하니 梁主發徐, 揚民二十萬하야 築之하다】</font>하야 以灌壽陽하야 緣百里內老少皆役하야 負者肩穿하고 寒暑疾疫에 死者相枕이러니 一日潰決에 緣淮數十萬이 盡葬魚腹하야 顧雖鷄犬이라도 不得寧也하니 是之謂以其所不愛로 及其所愛也라 以義而殺이 不害其爲仁이요 以利而不殺이 不免爲不仁이니 仁不仁之效는 義與利之別而已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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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梁主]]가 명령하여 宗廟의 제사에 희생<font color="#0054FF" size="2">【소와 양과 돼지를 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를 小牢라 하니, 牢는 짐승을 가두어 놓는 우리이다.】</font>을 사용하는 것은 冥道에 방해가 되니, 마땅히 모두 밀가루로 희생 모양을 빚어 대신하라고 하였다. 이에 朝野가 의론이 분분하여 宗廟의 제사에 희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다시는 血食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梁主]]는 끝내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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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朱氏(朱黼)]]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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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한 자는 사랑하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지 않는 바에까지 미치고 不仁한 자는 사랑하지 않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는 바에까지 미치니, 仁과 不仁의 분별은 義와 利의 차이일 뿐이다. [[伏羲氏]]는 그물을 만들어 짐승과 물고기를 잡았고, [[舜]]임금은 산과 늪에 불을 놓아 금수를 몰아내었고, [[禹王]]은 용과 뱀을 몰아내었고, [[周公]]은 범과 표범과 무소와 코끼리를 몰아내셨으니, 그 마음이 어찌 不仁해서였겠는가. 그 마음씀을 미루어 근원해 보면 바로 萬物이 本性을 이루고 生民들이 편안히 살게 하고자 해서일 뿐이다. 새와 짐승과 물고기와 자라가 이로 말미암아 모두 순하게 살고 山川과 鬼神이 또한 편안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를 일러 사랑하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지 않는 바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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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武帝]]는 생명이 있는 것으로 藥을 만들지 않고, 희생으로 제사 지내지 않고, 비단에 신선과 鳥獸의 모양을 수놓아 옷을 만들지 않았으니, 그 마음씀이 어찌 참으로 어질고 너그러워서였겠는가.<font color="#0054FF" size="2">【[頭註]不以生類爲藥……豈誠仁恕:梁나라 天監 16년(517)에 太醫에게 명령을 내려 생명이 있는 것으로 藥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령을 내리기를 “무늬 있는 비단에 仙人과 鳥獸의 모양을 수놓지 못하게 하라.” 하니, 옷을 재단할 때에 비단 위에 있는 사람과 조수의 무늬가 가위에 잘리는 것이 仁恕의 도리에는 어긋난다고 생각해서였다.】</font> 佛氏의 말을 믿어서 장래의 복과 보답을 바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한번 나라를 취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자 심지어 두 군주<font color="#0054FF" size="2">【두 군주는 齊나라 東昏侯 蕭寶卷과 和帝 蕭寶融이다.】</font>를 시해하고 六寶<font color="#0054FF" size="2">【六寶는 蕭寶晊‧蕭寶玄‧蕭寶夤‧蕭寶攸‧蕭寶嵩‧蕭寶貞이다.】</font>를 죽이면서도 돌아보지 않았고, 한번 나라를 지키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자 浮山堰<font color="#0054FF" size="2">【北魏에서 항복해 온 자가 계책을 올려 淮水에 제방을 쌓아 壽陽城에 물을 댈 것을 청하니, 梁主가 徐州와 揚州의 백성 20만 명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았다.】</font>을 만들어 壽陽城에 물을 대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 리 안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모두 부역해서 등짐을 지는 자들이 어깨가 헐어서 살이 뚫리고 추위와 더위와 역병에 죽은 자가 서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둑이 터지자 淮水 연안에 있는 수십만 명이 모두 물고기 밥이 되어 비록 닭과 개라도 편안할 수가 없었으니, 이를 일러 사랑하지 않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는 바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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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으로 죽이는 것이 仁이 됨에 해롭지 않고, 이익으로 죽이지 않는 것이 不仁이 됨을 면치 못하니, 仁과 不仁의 효험은 義와 利의 구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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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己亥] 梁天監十八年, 魏神龜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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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 〈梁天監十八年이요 魏神龜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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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彭城[[劉裕]]<font color="#0054FF" size="2">【宋[[高祖]]라】</font> 勇健有大志라 僅識文字하고 以賣履爲業하고 好樗蒲<font color="#0054FF" size="2">【老子所作이니 令人擲之爲戲라 以五木爲之子하니 有梟盧雉犢塞五者하야 爲勝負之策하니 卽今之骰子라 骰는 音頭니 骰子는 博陸彩具라】</font>하니 爲鄕閭所賤이라 [[劉牢之]]擊[[孫恩]]할새 引[[裕]]參軍事하고 使將數十人하야 覘賊이러니 遇賊數千人하야 卽迎擊之라가 從者皆死하고 [[裕]]墜岸下라 賊이 臨岸欲下어늘 [[裕]]奮長刀하야 仰斫殺數人하고 乃得登岸하야 仍大呼逐之하니 賊皆走하고 [[裕]]所殺傷이 甚衆이러라 [[劉敬宣]]<font color="#0054FF" size="2">【牢之之子라】</font>이 怪[[裕]]久不返하야 引兵尋之라가 見[[裕]]獨驅數千人하고 咸共歎息하야 因進擊賊하야 大破之하고 斬獲千餘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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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519) - 梁나라 天監18년이고, 魏나라 神龜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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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彭城의 劉裕<font color="#0054FF" size="2">【劉裕는 宋나라 高祖이다.】</font>가 용맹하고 굳세며 큰 뜻이 있었다. 겨우 글자를 알고 짚신을 파는 것을 生業으로 삼으며 樗蒲(쌍륙과 골패 놀이)<font color="#0054FF" size="2">【老子가 만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던지게 하여 놀이를 하는 것이다. 五木으로 子를 삼는데, 梟‧盧‧雉‧犢‧塞의 다섯 가지가 있어 勝負의 策으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骰子(주사위)이다. 骰는 音이 두(투)이니, 骰子는 博陸(쌍륙)할 때 사용하는 彩具이다.】</font>를 좋아하니, 鄕閭에서 천대를 받았다. [[劉牢之]]가 [[孫恩]]을 공격할 적에 [[劉裕]]를 임용하여 參軍事參軍事로 삼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수천 명의 적을 만나 즉시 요격하였다가 수행했던 자는 모두 죽고 [[劉裕]]는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적이 언덕에서 굽어보고 내려오려 하자, [[劉裕]]가 긴 칼을 휘둘러 몇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찔러 죽이고 마침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크게 고함치면서 그들을 쫓아가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으며, [[劉裕]]에게 살상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劉敬宣<font color="#0054FF" size="2">【劉敬宣은 劉牢之의 아들이다.】</font>이 [[劉裕]]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찾아 나섰다가 [[劉裕]]가 홀로 수천 명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함께 감탄하고 인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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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殿中尙書殿中尙書[[崔亮]]이 爲吏部尙書吏部尙書하다 [[]]이 奏爲格制하야 不問士之賢愚하고 專以停解<font color="#0054FF" size="2">【停官解任也라】</font>日月爲斷하니 沈滯者皆稱其能이라 洛陽令洛陽令[[]]琡이 上書言 黎元之命이 係於長吏하니 若以選曹唯取年勞하고 不簡<font color="#0054FF" size="2">【簡은 與揀通이라】</font>賢否인댄 義均行雁하야 次若貫魚하야 執簿呼名에 一吏足矣니 數人而用이면 何謂銓衡銓衡<font color="#0054FF" size="2">【稱量人物也라 銓은 衡也, 量也라】</font>이리잇고 書奏에 不報러니 其後에 甄琛等이 繼[[亮]]爲吏部尙書吏部尙書하야 利其便己하야 踵而行之하니 魏之選擧失人이 自[[亮]]始也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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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聞八郡響應하고 謂其屬曰 天下無復事矣라 當與諸君으로 朝服至建康이라하더니 旣而오 聞[[牢之]]引兵濟江하고 [[]]驅男女二十餘萬口하야 復逃入海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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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堂]]管見曰 聖帝明王이 代天理物에 莫急於求賢才而任使之라 今夫抱關者는 啓閉必以時하고 擊柝者는 晨夕必有節이니 爲委吏而會計不當이면 則蓄積缺焉하고 爲乘田而牛羊不息이면 則芻牧闕焉이니 是皆小役細務로되 猶不可任非其才라 若夫環百里而爲縣에 縣有令하고 環千里而爲州에 州有守하니 所統凡幾民이며 所治凡幾事완대 乃不選擇勝其任者하야 畀之하고 而付諸年格고 夫天下之善人少하고 不善人多하며 才者無幾하고 不才者皆是也어늘 不問其才하고 專以停解日月爲斷이면 其爲蠹政害民이 不旣多乎아 自[[崔亮]]制年格으로 後世襲以爲常하야 更明君碩輔 亦衆矣로되 而竟不能易이라 彼其以一定之法으로 用天下之才면 其爲力이 若不勞라 故로 後世守之而勿失하니 不知天下之人被其害者 深矣니 吁可歎哉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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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의 殿中尙書殿中尙書[[崔亮]]이 吏部尙書吏部尙書가 되었다. [[崔亮]]이 새로운 선발 제도를 만들 것을 奏請하여 선비(관원)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재직<font color="#0054FF" size="2">【停解는 停官과 解任이다.】</font>한 年數로써 단정을 하니, 승진하지 못했던 자들이 모두 [[崔亮]]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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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孫恩]]이 여덟 郡이 호응한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 朝服을 입고 建康에 이르러 帝位에 오르겠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劉牢之]]가 군대를 이끌고 [[浙江]]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는 [[孫恩]]이 남녀 백성 20여만 명을 몰고 다시 海島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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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陽令洛陽令[[薛琡]]이 上書하기를 “만백성의 목숨이 長吏(지위가 높은 지방관)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選曹(吏部)에서 관원을 선발할 때에 오직 재직한 年數를 취하여 기준으로 삼고 재능의 高下를 가리지<font color="#0054FF" size="2">【簡字는 揀字(선별)와 통한다.】</font> 않는다면 〈재직한 연수가 차면 저절로 관직에 임용되어서〉 行義는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항렬과 같아지고 차례는 줄줄이 꿰어놓은 물고기 꿰미와 같아져서 장부를 쥐고 호명할 때에 아전 한 명이면 충분할 것이니, 사람이 재직한 연수만을 헤아려서 등용한다면 어찌 銓衡<font color="#0054FF" size="2">【銓衡은 人物을 저울질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銓은 저울질하는 것이고 헤아리는 것이다.】</font>이라고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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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書를 올린 뒤에 [[魏主]]가 회답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 뒤 [[甄琛]] 등이 [[崔亮]]을 이어 吏部尙書吏部尙書가 되어서 자신에게 편리함을 이롭게 여겨 뒤따라서 이를 시행하니, 魏나라가 인재를 선발할 때 적임자를 뽑지 못한 것이 [[崔亮]]으로부터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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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堂(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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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明한 帝王이 하늘을 대신하여 물건(사람)을 다스릴 때에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찾아 임무를 맡기고 일을 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지금 관문을 지키는 자는 관문을 열고 닫는 것을 반드시 제때에 하고, 목탁을 치는 자는 새벽과 저녁에 반드시 절도가 있게 하니, 委吏(창고를 맡은 관리)가 되어서 회계를 마땅하게 하지 못하면 저축이 모자라게 되고, 乘田(축산을 맡은 관리)이 되어서 소와 양을 번식시키지 못하면 芻牧(가축)이 부족하게 되니, 이는 모두 작은 일과 하찮은 일인데도 오히려 재주 없는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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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리를 한정하여 縣을 만들되 縣에는 縣令縣令이 있고, 천 리를 한정하여 州를 만들되 州에는 太守太守가 있으니, 통솔하는 백성이 모두 몇 명이며 다스리는 일이 모두 몇 가지이기에 마침내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가려서 맡기지 않고 停年格에 맡긴단 말인가. 천하에 善한 사람은 적고 不善한 사람은 많으며, 재주 있는 자는 몇 명 안 되고 재주 없는 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이러한 사람들인데, 그 재주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오직 재직한 연수로써 단정을 한다면 정사를 좀먹고 백성을 해침이 너무 많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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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亮]]이 停年格을 만든 뒤로 후대에 이를 인습하여 떳떳한 법으로 삼아서, 현명한 군주와 훌륭한 輔弼之臣이 다스리는 세상을 거쳐온 것이 또한 많았으나 끝내 이것을 바꾸지 못하였다. 저들은 일정한 법으로써 천하의 인재를 등용한다면 별로 수고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후세에 이것을 지키고 잃지 않았으니, 천하 사람 중에 그 폐해를 입은 자가 많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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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丙午] 梁普通七年, 魏孝昌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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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 〈梁普通七年이요 魏孝昌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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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仲堪]]<font color="#0054FF" size="2">【時爲荊州剌史하니라】</font>이 恐[[桓玄]]跋扈<font color="#0054FF" size="2">【見十九卷丙戌年注라】</font>하야 乃與[[楊佺期]]<font color="#0054FF" size="2">【雍州刺史라】</font>로 結婚爲援이어늘 [[玄]]이 引兵擊殺之하다 [[玄]]이 旣克荊, 雍하고 表求領荊, 江二州하니 朝廷이 不能違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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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526) - 梁나라 普通 7년이고, 魏나라 孝昌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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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殷仲堪<font color="#0054FF" size="2">【殷仲堪이 이때 荊州剌史로 있었다.】</font>은 [[桓玄]]이 跋扈<font color="#0054FF" size="2">【跋扈는 19권 丙戌年(146) 注에 보인다.】</font>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楊佺期<font color="#0054FF" size="2">【楊佺期는 雍州刺史로 있었다.】</font>와 혼인을 맺어 서로 원조하게 하였는데, [[桓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殷仲堪]]과 [[楊佺期]]를 공격하여죽였다. [[桓玄]]이 이미 荊州와 雍州를 점령하고 表文을 올려 荊州와 江州 두 州를 거느릴 것을 청하니, 朝廷에서 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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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魏[[葛榮]]<font color="#0054FF" size="2">【魏五原降戶單于修禮가 反魏하니 長孫稚討不克이라 賊帥元洪業이 殺修禮降魏러니 其黨葛榮이 復殺洪業하고 又襲殺魏都督章武融而自稱天子하다】</font>이 自稱天子하고 國號를 齊라하고 改元廣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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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涼王]][[光]]이 卒하고 [[太子]][[紹]]卽位하니 [[太原公]][[纂]]<font color="#0054FF" size="2">【纂이 嗜酒好獵이어늘 隆安五年에 呂超殺之하고 而立呂隆이러니 安帝元興二年에 降于秦하야 涼遂滅하니라[頭註]太原公纂은 紹之庶兄이라】</font>이 殺之하고 而卽天王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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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魏나라 葛榮<font color="#0054FF" size="2">【魏나라 五原의 降戶인 單于 修禮가 魏나라를 배반하자, 長孫稚가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賊의 장수인 元洪業이 單于 修禮를 죽이고 魏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 도당인 葛榮이 다시 元洪業을 죽이고 또 魏나라 都督인 章武融을 습격하여 죽이고서 스스로 天子라 칭하였다.】</font>이 스스로 天子라 칭하고, 國號를 齊라 하고 廣安으로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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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涼王]][[呂光]]이 죽고太子太子[[呂紹]]가 즉위하니, [[太原公]] 呂纂<font color="#0054FF" size="2">【[原註]呂纂이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자, 隆安 5년(401)에 從弟 呂超가 그를 죽이고 呂隆을 세웠는데, 安帝 元興 2년(403)에 秦나라 姚興에게 항복함으로써 涼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頭註]太原公 呂纂은 呂紹의 庶兄이다.】</font>이 그를 죽이고天王天王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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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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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盜賊日滋하야 征討不息하니 國用이 耗竭하야 豫徵六年租調호되 猶不足이라 乃罷百官所給酒肉하고 又稅入市者人一錢하고 及邸店에 皆有稅하니 百姓이 嗟怨이러라
+
[庚子]四年이라 〈燕長樂二요 秦弘始二요 魏天興三年이라 南燕建平元이요 [[南涼王]][[禿髮利鹿孤]]建和元年이요 [[西涼公]][[李暠]]庚子元年이라 ○ 是歲에 西秦降秦하니 舊大國三이요 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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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경내에 도적이 날로 불어나서 정벌하고 토벌함이 그치지 않으니,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6년치 租調(조세)를 미리 징수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였다. 이에 백관들에게 지급하는 술과 고기를 없애고, 또 시장에 들어오는 자에게 한 사람당 一錢씩 세금을 징수하고 邸店에도 모두 세금을 물리니, 백성들이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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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4년(경자 400) - 燕나라 長樂 2년이고, 秦나라 弘始 2년이고, 魏나라 天興 3년이다. 南燕建平 元年이고, [[南涼王]][[禿髮利鹿孤]]의 建和 元年이고, [[西涼公]][[李暠]]의 庚子 元年이다. ○ 이해에 西秦이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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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申] 梁大通二年, 魏孝昌四<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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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 〈梁大通二年이요 魏孝昌四요 [[敬宗孝莊帝]][[子攸]]永安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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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이 卽皇帝位于廣固하고 更名[[備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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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528) - 梁나라 大通 2년이고, 魏나라 孝昌 4년이고, [[敬宗]]孝莊帝孝莊帝[[元子攸]]의 永安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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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慕容德]]이 廣固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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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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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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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魏太后]]再臨朝<font color="#0054FF" size="2">【太后胡氏는 肅宗詡之母니 而武始伯國珍之女也라 頗事粧飾하고 穢德彰聞이라 太傅(靑)[淸]河王懌이 美風儀러니 胡太后逼而幸之라 江陽王繼子元叉 爲侍中, 領軍將軍하고 叉妻胡氏爲女侍中하니 叉恃寵驕恣어늘 懌이 每裁抑之하니 叉怨之하다 庚子年에 遂殺懌하고 幽太后于北宮하고 詐爲太后詔하야 稱有疾하야 還政魏主러니 乙巳年에 太后復臨朝하야 誅元叉하니라】</font>以來로 嬖倖用事하니 政事縱弛하고 威恩不立<font color="#0054FF" size="2">【羽林, 虎賁作亂하야 殺將軍張彛之子仲瑀어늘 只誅八人하고 其餘는 不復窮治하다 高歡見之하고 還家하야 傾財結客曰 宿衛焚大臣之第어늘 朝廷懼而不問하니 事可知矣라하니라】</font>하야 盜賊蜂起<font color="#0054FF" size="2">【言盜賊之衆이 如蜂之飛起也라】</font>하고 封疆日蹙<font color="#0054FF" size="2">【日蹙은 謂秦, 隴以西와 冀, 幷以北은 皆爲盜區요 淮汝淮泗之間은 皆爲梁所侵也라】</font>이라 是時에 討虜大都督討虜大都督[[爾朱榮]]<font color="#0054FF" size="2">【爾朱는 複姓이라 其先은 契胡部落人이니 代爲酋帥하야 居爾朱川일새 因以爲氏하니라[頭註]爾朱榮은 本東胡種이니 高歡妃父라】</font>이 兵勢彊盛하니 魏朝憚之라 [[高歡]]<font color="#0054FF" size="2">【渤海蓨人이라 字賀六渾이니 是爲北齊神武帝라】</font>이 往歸[[]]한대 [[]]曰 但言爾意하라 [[]]曰 今天子闇弱하고 太后淫亂하야 嬖孼<font color="#0054FF" size="2">【孼者는 猶木之有蘖生也라】</font>擅命하고 朝政不行하니 以明公雄武로 乘時奮發이면 霸業<font color="#0054FF" size="2">【霸는 把也니 把持諸侯之權이요 又把持天子之政이라 或作伯하니 蓋取牧伯長諸侯之義러니 後人이 恐與侯伯字相混이라 故借用霸字하야 以別之하니라】</font>을 可擧鞭而成하리이다 [[]]이 大悅하야 自是로 每參軍謀하다
+
[辛丑]五年이라 〈[[燕主]][[慕容熙]]光始元이요 秦弘始三이요 魏天興四年이라 ○ [[涼王]][[呂隆]]神鼎元이요 [[北涼王]][[沮渠蒙遜]]永安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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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曰 魏之中葉엔 以門地<font color="#0054FF" size="2">【家門地位라】</font>取士러니 及其衰也하야는 以停年<font color="#0054FF" size="2">【卽停解日月이니 見上己亥年이라】</font>用人이라 於是에 英雄散逸하고 才智不用하니 思有以振而發之로되 而天下始多故矣라 向使魏朝收而用之런들 二百年之基業이 豈易傾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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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魏나라 [[胡太后]]가 다시 조정에 臨御<font color="#0054FF" size="2">【太后 胡氏는 肅宗 元詡의 母后이니, 武始伯 胡國珍의 딸이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추문이 자자하였다. 太傅인 淸河王 元懌이 풍채가 아름다웠는데, 胡太后가 강제로 핍박하여 총애하였다. 江陽王 元繼의 아들인 元叉는 侍中‧領軍將軍이 되고 元叉의 아내인 胡氏는 女侍中이 되었는데, 元叉가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자 元懌이 그때마다 제재하고 억제하니 元叉가 그를 원망하였다. 庚子年(520)에 元叉가 마침내 元懌을 죽이고 太后를 北宮에 유폐시키고, 거짓으로 太后의 詔書를 만들어 병이 있다고 칭하고서 정권을 魏主에게 돌려주었는데, 乙巳年(525)에 太后가 다시 조정에 임어하여 元叉를 죽였다.】</font>한 뒤로 총애하는 小人들이 用事하니, 정사가 해이하고 조정의 위엄과 은혜가 서지 못하여<font color="#0054FF" size="2">【羽林軍과 虎賁衛가 난을 일으켜서 將軍 張彛의 아들 張仲瑀를 죽였는데, 胡太后가 다만 8명만 주벌하고 그 외의 사람은 더 이상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 高歡이 이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재물을 털어 문객과 교분을 맺으며 말하기를 “宿衛兵이 大臣의 집을 불태웠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못하니, 일을 알 만하다.” 하였다.】</font>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font color="#0054FF" size="2">【도적의 무리가 벌이 떼 지어 일어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font> 국경이 나날이 축소되었다.<font color="#0054FF" size="2">【나날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秦‧隴 이서와 冀州‧幷州 이북은 모두 도적들의 소굴이 되고, 淮‧汝와 淮‧泗 지역은 모두 梁나라에게 침식당하였음을 이른다.】</font> 이때 討虜大都督討虜大都督 爾朱榮<font color="#0054FF" size="2">【[釋義]爾朱는 複姓이다. 그 선조는 契胡(긱호, 글호) 부락 사람이니, 대대로 酋長이 되어 爾朱川에 거주하였으므로 인하여 姓氏로 삼은 것이다.[頭註]爾朱榮은 본래 동쪽 오랑캐 종족이니, 高歡의 后妃의 아버지이다.】</font>의 군세가 강성하니, 魏나라 조정에서 그를 두려워하였다. 高歡<font color="#0054FF" size="2">【高歡은 渤海 蓨縣 사람이다. 字가 賀六渾이니, 이가 바로 北齊의 神武帝이다.】</font>이 [[爾朱榮]]을 찾아가자, [[爾朱榮]]이 말하기를 “다만 너의 뜻을 말해 보라.” 하였다. [[高歡]]이 말하기를 “지금 天子는 어리석고 약하며 [[太后]]는 음란하여 총애하는 小人들<font color="#0054FF" size="2">【孼은 나무에 움이 싹트는 것과 같은 것이다.】</font>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明公의 뛰어난 武略을 가지고 이러한 기회를 틈타 분발한다면 채찍만 들고도 霸業<font color="#0054FF" size="2">【霸는 손으로 쥐는 것이니, 제후의 권력을 쥐고 또 천자의 정사를 거머쥐는 것이다. 혹은 伯으로 쓰니, 牧伯이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는 뜻을 취한 것인데, 후인들이 侯伯이라는 글자와 혼동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霸字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font>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爾朱榮]]이 크게 기뻐하여 이로부터 늘 군사 작전에 [[高歡]]을 참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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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5년(신축 401) - [[燕主]][[慕容熙]]의 光始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3년이고, 魏나라 天興 4년이다. [[涼王]][[呂隆]]의 神鼎 元年이고, [[北涼王]][[沮渠蒙遜]]의 永安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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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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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중엽에는 門地(門閥)<font color="#0054FF" size="2">【門地는 家門의 地位이다.】</font>로써 선비를 뽑았는데, 쇠퇴함에 미쳐서는 재직한 연수<font color="#0054FF" size="2">【停年은 곧 직임을 맡은 세월이니, 停解는 앞의 己亥年條(519)에 보인다.】</font>로써 사람을 등용하였다. 이에 영웅들이 흩어지고 재주 있는 자와 지혜로운 자가 등용되지 못하니, 진작하여 분발하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천하에 비로소 변고가 많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魏나라 조정에서 인재를 거두어 등용했더라면 2백 년의 基業이 어찌 쉽게 기울어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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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肅宗]]<font color="#0054FF" size="2">【明帝詡라】</font>이 亦惡[[鄭儼]], [[徐紇]]等호되 逼於太后하야 不能去라 密詔[[榮]]하야 擧兵內向하야 欲以脅太后한대 [[榮]]이 以[[高歡]]爲前鋒前鋒하야 行至上黨하니 [[魏主]]復以私詔止之하다 [[儼]], [[紇]]이 恐禍及己하야 陰與太后로 謀酖[[魏主]]하다 二月癸丑에 [[魏主]]暴殂<font color="#0054FF" size="2">【暴은 急也라】</font>어늘 太后改立故臨洮<font color="#0054FF" size="2">【隴西邑이니 屬後魏라】</font>王寶暉世子釗<font color="#0054FF" size="2">【文帝宏之孫이니 太后欲久專政故로 利其幼而立之라】</font>하니 [[釗]]始生三歲라 [[爾朱榮]]이 聞之하고 與[[元天穆]]<font color="#0054FF" size="2">【幷州刺史라】</font>議하야 以彭城[[武宣王]]<font color="#0054FF" size="2">【勰은 顯祖獻文帝弘之子라】</font>이 有忠勳하고 其子[[長樂王]][[子攸]] 素有令望이라하야 欲立之하다 四月에 [[榮]]이 濟河하니 百官이 奉璽綬하고 備法駕하야 迎[[敬宗]]<font color="#0054FF" size="2">【名子攸니 獻文之孫이라 卽帝位하니 是爲敬宗孝莊皇帝라】</font>於河橋<font color="#0054FF" size="2">【榮이 沈太后胡氏及幼主釗于河하고 殺王公以下二千人하야 自爲太原王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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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武威王]][[利鹿孤]]<font color="#0054FF" size="2">【以元興元年卒하니 弟傉檀立하야 自稱南涼王하니라[附註]禿髮氏也니 鮮卑別種으로 與拓跋同祖라 晉志에 河西鮮卑人也라 七祖壽闐在孕할새 母因寢而産於被中하니 鮮卑謂被爲禿髮일새 因而氏焉이라 至孫樹機〈能〉하야 據有涼州之地하고 至烏孤嗣位러니 呂光이 署爲冠軍大將軍하다 丁酉年에 自稱西平王이러니 烏孤死에 弟利鹿孤立하니라】</font> [[河西王]]하다 北涼[[沮渠蒙遜]]<font color="#0054FF" size="2">【沮渠는 官名이라 其先世爲匈奴左沮渠일새 蒙遜以官爲氏라】</font>이 殺[[涼王業]]<font color="#0054FF" size="2">【建康太守段業也라 丁酉年叛하야 自稱涼州牧, 建康公하다 蒙遜이 以衆歸之하고 己亥年에 自稱涼王이러니 至是에 蒙遜殺之하니라】</font>하고 自稱涼州牧涼州牧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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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曰 魏氏之亂이 始於[[世宗]]奉佛하야 政事不修하고 重以[[肅宗]]幼弱하고 胡后稱制하야 穢德彰聞이요 [[元澄]], [[雍]], [[懌]]<font color="#0054FF" size="2">【司徒任城王澄과 太保高陽王雍이 同總國事라 懌은 太傅淸河王也라】</font>은 才薄力弱하고 [[劉騰]], [[元叉]]<font color="#0054FF" size="2">【劉騰은 衛將軍이니 後爲司空이요 元叉는 見上再臨朝注라】</font>는 擅權黷貨하야 以召六鎭<font color="#0054FF" size="2">【時에 爾朱榮爲車騎將軍으로 幷, 肆, 汾, 廣, 恒, 雲六州討虜大都督이라】</font>之兵이라 雖然이나 其間에 非無忠謀至計로 排難解紛者어늘 而朝廷忽焉하야 如[[元匡]], [[崔(洸)[光]]], [[袁飜]], [[李崇]], [[張普惠]], [[薛(淑)[琡]]], [[元孚]], [[元(深)[諶]]], [[元順]], [[元(纂)[贊]]], [[辛雄]], [[路思令]], [[楊椿]], [[源子(邕)[雍]]]之言을 皆不聽也라 然則非[[爾朱榮]], [[高歡]]이 能爲魏毒也요 魏自亡爾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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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肅宗<font color="#0054FF" size="2">【肅宗은 明帝 元詡이다.】</font>이 또한 [[鄭儼]]과 [[徐紇]] 등을 미워하였으나 [[太后]]에게 견제당하여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魏主]]가 은밀히 [[爾朱榮]]에게 명령을 내려 군대를 일으켜서 서울로 향하게 하여 [[太后]]를 협박하고자 하였다. [[爾朱榮]]이 [[高歡]]을 先鋒으로 삼아 행군하여 上黨에 이르자, [[魏主]]가 다시 은밀히 명령을 내려 중지하게 하였다. [[鄭儼]]과 [[徐紇]]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은밀히 [[太后]]와 함께 [[魏主]]를 독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
正月에 [[武威王]] 禿髮利鹿孤<font color="#0054FF" size="2">[原註]禿髮利鹿孤가 元興 元年(402)에 죽자 아우 禿髮傉檀이 즉위하여 스스로 南涼王이라 칭하였다.[附註]利鹿孤는 禿髮氏이니 鮮卑族의 別種으로 拓跋氏와 조상이 같다. ≪晉書≫ 〈載記〉에 “禿髮利鹿孤는 河西 鮮卑族 사람이다. 7세조 壽闐이 胎中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잠을 자다가 이불 속에서 그를 낳으니, 鮮卑族은 이불을 禿髮이라 하기 때문에 인하여 姓氏로 삼았다. 손자인 禿髮樹機能에 이르러 涼州 지역을 점령하였고 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呂光이 임명하여 冠軍大將軍으로 삼았다. 정유년(397)에 西平王이라 자칭하였는데, 禿髮烏孤가 죽자 아우 禿髮利鹿孤가 즉위했다.” 하였다.】</font>[[河西王]]을 칭하였다. 北涼의 沮渠蒙遜<font color="#0054FF" size="2">【沮渠는 官名이다. 그 선조가 匈奴의 左沮渠였으므로 蒙遜이 관명으로써 姓氏를 삼은 것이다.】</font>이 [[涼王]] 段業<font color="#0054FF" size="2">【涼王 業은 建康太守 段業이다. 정유년(397)에 배반하여 스스로 涼州牧‧建康公이라 칭하였다. 沮渠蒙遜이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였고, 기해년(399)스스로 涼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때(401)에 沮渠蒙遜이 그를 죽인 것이다.】</font>을 죽이고 스스로 涼州牧涼州牧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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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癸丑日(25일)에 [[魏主]]가 갑자기<font color="#0054FF" size="2">【暴은 갑자기이다.】</font> 죽자, [[太后]]가 다시 죽은 臨洮<font color="#0054FF" size="2">【臨洮는 隴西의 고을이니, 後魏에 속한다.】</font>王 [[元寶暉]]의 世子世子인 元釗<font color="#0054FF" size="2">【元釗는 文帝 元宏의 손자이니, 太后가 정사를 오랫동안 전횡하고자 하였으므로 元釗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롭게 여겨 세운 것이다.】</font>를 세우니, [[元釗]]의 나이 세 살이었다. [[爾朱榮]]이 말을 듣고 元天穆<font color="#0054FF" size="2">【元天穆은 幷州刺史이다.】</font>과 의논하여 彭城[[武宣王]] 元勰<font color="#0054FF" size="2">【元勰은 顯祖 獻文帝 元弘의 아들이다.】</font>이 충성을 다해 세운 공훈이 있고 그 아들[[長樂王]][[元子攸]]가 평소에 훌륭한 명망이 있다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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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爾朱榮]]이 黃河를 건너오니, 百官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法駕를 갖추어서 敬宗(元子攸)<font color="#0054FF" size="2">【敬宗은 이름이 子攸이니 獻文帝의 손자이다.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敬宗 孝莊皇帝이다.】</font>을 河橋에서 맞이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爾朱榮이 太后 胡氏와 어린 군주인 元釗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王公 이하 2천 명을 죽이고서 스스로 太原王이 되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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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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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의 혼란은 [[世宗]]이 佛法을 신봉하여 정사가 닦여지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고, 다시 [[肅宗]]이 어리고 약하며 [[胡后]]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해서 추문이 드러난 데에서 더욱 심해졌다. 元澄‧元雍‧元懌<font color="#0054FF" size="2">【司徒 任城王 元澄과 太保 高陽王 元雍이 함께 國事를 총괄하였다. 元懌은 太傅 淸河王이다.】</font>은 재주가 부족하고 힘이 약하였으며, [[劉騰]]과 元叉<font color="#0054FF" size="2">【劉騰은 衛將軍이니 뒤에 司空이 되었고, 元叉는 앞의 戊申年(528) ‘魏太后再臨朝’의 注에 보인다.】</font>는 권력을 독점하고 재물을 탐하여 [[爾朱榮]]의 六鎭<font color="#0054FF" size="2">【당시에 爾朱榮은 車騎將軍으로 幷州‧肆州‧汾州‧廣州‧恒州‧雲州 등 6州의 討虜大都督이었다.】</font>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충성스러운 모의와 지극한 계책으로 國難을 물리치고 紛亂을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홀대하여 [[元匡]]‧[[崔光]]‧[[袁飜]]‧[[李崇]]‧[[張普惠]]‧[[薛琡]]‧[[元孚]]‧[[元諶]]‧[[元順]]‧[[元贊]]‧[[辛雄]]‧[[路思令]]‧[[楊椿]]‧[[源子雍]] 같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爾朱榮]]과 [[高歡]]이 魏나라의 해독이 된 것이 아니라, 魏나라가 스스로 망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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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海王]][[]]<font color="#0054FF" size="2">【於帝爲從兄弟라】</font>來奔이어늘 [[梁主]]以[[顥]]爲[[魏王]]하고 遣[[陳慶之]]하야 將兵送之還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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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主]][[盛]]이 卒하고 [[熙]]<font color="#0054FF" size="2">【垂之少子라】</font>卽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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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北海王]] 元顥<font color="#0054FF" size="2">【北海王 元顥는 황제에게 從兄弟가 된다.】</font>가 梁나라로 도망오자, [[梁主]]가 [[元顥]]를 [[魏王]]으로 삼고[[陳慶之]]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호송하여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燕主]][[慕容盛]]이 죽고 慕容熙<font color="#0054FF" size="2">【慕容熙는 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font>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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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己酉] 梁中大通元年, 魏永安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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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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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元興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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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 〈梁中大通元年이요 魏永安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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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元興元年이라 〈燕光始二요 秦弘始四요 魏天興五年이라 ○ [[南涼王]][[禿髮傉檀]]弘昌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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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529) - 梁나라 中大通 元年이고, 魏나라 永安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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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元年(임인 402) - 燕나라 光始 2년이고, 秦나라 弘始 4년이고, 魏나라 天興 5년이다. ○ [[南涼王]][[禿髮傉檀]]의 弘昌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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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顥]][[陳慶之]]로 進拔滎城하고 卽帝位於睢陽城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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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尙書令尙書令[[元顯]]으로 爲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하야 討[[桓玄]]할새 以[[劉牢之]]로 爲前鋒前鋒하고 [[譙王]][[尙之]]로 爲後部後部하다 [[玄]]이 大驚하야 欲完聚保江陵이어늘 長史長史[[卞範之]]曰 明公은 英威振於遠近하고 [[元顯]]은 口尙乳臭요 [[劉牢之]]는 大失物情하니 若兵臨近畿하야 示以禍福이면 土崩之勢를 可翹足<font color="#0054FF" size="2">【翹는 企也라】</font>而待하리니 何有延敵入境하야 自取窮蹙者乎잇가 [[玄]]이 從之하다 [[玄]]至新亭<font color="#0054FF" size="2">【在江寧縣南十里하니 俯近江渚라 周顗嘗與群公으로 遊宴于此하니라】</font>하니 [[元顯]]이 引兵欲還宮이어늘 [[玄]]이 遣人拔刀하야 隨後大呼曰 放仗<font color="#0054FF" size="2">【放仗은 謂呼令放棄兵仗也라】</font>하라하니 軍人이 皆崩潰러라 [[玄]]이 入京하야 摠百揆<font color="#0054FF" size="2">【書云納于百揆라한대 蔡氏傳曰 揆는 度也니 百揆는 揆度庶政之官이라 惟唐, 虞有之하니 猶周之冢宰也라】</font>하고 斬[[元顯]]及[[東海王]][[彦璋]], [[譙王]][[尙之]]等於建康市하니 [[劉牢之]]는 北走至新州하야 縊而死하고 [[道子]]等도 皆死하다 自隆安<font color="#0054FF" size="2">【帝之初年號라】</font>以來로 中外之人이 厭於禍亂이라 及[[玄]]初至하야 黜奸佞하고 擢雋(俊)賢하니 京師欣然하야 冀得少安이러니 旣而오 [[玄]]이 奢豪縱逸하야 政令이 無常하고 朋黨이 互起하야 陵侮朝廷하고 裁損乘輿供奉之具하니 帝幾不免飢寒이라 由是로 衆心이 失望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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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元顥]]가 [[陳慶之]]와 함께 진격하여 滎城을 함락시키고睢陽城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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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令尙書令[[司馬元顯]]을 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으로 삼아 [[桓玄]]을 토벌할 때에 [[劉牢之]]를 前鋒都督前鋒都督으로 삼고 [[譙王]][[司馬尙之]]를 後部都督後部都督으로 삼았다. [[桓玄]]이 크게 놀라서 성곽을 수리하고 식량을 모아 江陵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長史長史[[卞範之]]가 말하기를 “明公께서는 용맹과 위엄이 원근에 떨쳐졌는데, [[司馬元顯]]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고 [[劉牢之]]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만일 우리 군대가 近畿에 가서 禍福의 道理를 보여 준다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를 발돋움하고<font color="#0054FF" size="2">【翹는 발돋움하고 바라는 것이다.】</font>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맞아들여 경내로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곤궁하고 위축됨을 취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玄]]이 그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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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月에 [[魏顥]]克梁國<font color="#0054FF" size="2">【今汴州也라】</font>하고 引兵西하야 拔滎陽하니 [[魏主]]出避[[顥]]어늘 [[顥]]入洛陽宮하야 改元建武하다 [[慶之]]以數千之衆으로 自發銍縣으로 至洛陽히 取三十二城하고 四十七戰하야 所向皆克이라 [[爾朱榮]]이 聞[[魏主]]北出하고 馳傳하야 見[[魏主]]於長子<font color="#0054FF" size="2">【註見周威烈王二十三年하니라】</font>하고 行且部分이라 卽日南還할새 [[]]이 爲前驅하야 與[[爾朱兆]], [[賀拔勝]]<font color="#0054FF" size="2">【兆는 榮之從子也요 賀拔은 複姓이니 大都督이라】</font>等으로 進擊[[]]하니 [[]]帥麾下數百騎하고 南走어늘 [[陳慶之]]帥衆東還하니 所得諸城이 復降於魏하다 [[]]至臨潁縣하니 卒[[江豐]]이 斬之하야 傳首洛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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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玄]]이 新亭<font color="#0054FF" size="2">【新亭은 江寧縣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 부근이다. 周顗가 일찍이 여러 공들과 여기에서 놀고 잔치하였다.】</font>에 이르니, [[司馬元顯]]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桓玄]]이 사람을 보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따라가며 크게 고함치기를 “병장기를 버리라.” 하니,<font color="#0054FF" size="2">【放仗은 고함을 쳐서 병장기를 버리게 함을 이른다.】</font> 군사들이 모두 와해되었다. [[桓玄]]이 서울로 들어가서 百官을 총령하고<font color="#0054FF" size="2">【≪書經≫ 〈舜典〉에 이르기를 “百揆에 앉혔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揆는 헤아림이니, 百揆는 여러 정사를 헤아리는 관원이다. 오직 唐‧虞 시대에만 있었으니, 周나라의 冢宰와 같다.” 하였다.】</font>[[司馬元顯]], [[東海王]][[司馬彦璋]], [[譙王]][[司馬尙之]] 등을 建康의 시장에서 목 베니, [[劉牢之]]는 북쪽으로 달아나 新州에 이르러 목을 매어죽고[[司馬道子]] 등도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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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魏나라 [[元顥]]가 梁國<font color="#0054FF" size="2">【梁國은 지금의 汴州이다.】</font>을 점령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滎陽을 함락하니, [[魏主]]가 성을 나가 [[元顥]]를 피하였다. [[元顥]]가 洛陽宮으로 들어가 建武로 개원하였다. [[陳慶之]]가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銍縣을 출발한 뒤로 洛陽에 이르기까지 32개의 성을 취하고 47차례 싸워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爾朱榮]]은 [[魏主]]가 북쪽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역마를 달려 長子縣<font color="#0054FF" size="2">【長子는 周 威烈王 23年條에 註가 보인다.】</font>에서 [[魏主]]를 뵙고 한편으로는 행군하고 한편으로는 구원 부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魏主]]가 당일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爾朱榮]]이 선두가 되어서 [[爾朱兆]]‧[[賀拔勝]]<font color="#0054FF" size="2">【[頭註]爾朱兆, 賀拔勝:爾朱兆는 爾朱榮의 從子이고, 賀拔은 複姓이니 賀拔勝은 大都督이다.】</font> 등과 함께 [[元顥]]를 공격하니, [[元顥]]가 휘하의 수백 騎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陳慶之]]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陳慶之]]가 차지했던 여러 城이 다시 魏나라에 항복하였다. [[元顥]]가 [[臨潁縣]]에 이르니, 병졸 [[江豐]]이 그의 목을 베어서 首級을 洛陽에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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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font color="#0054FF" size="2">【晉나라 安帝의 처음 年號이다.】</font> 이래로 中外의 사람들이 재앙과 난리를 싫어하였다. [[桓玄]]이 처음에 이르러서 간신들을 물리치고 준걸들을 발탁하니, 京師가 기뻐하여 다소 편안해지기를 바랐는데, 이윽고 [[桓玄]]이 사치하고 방종하여 정사와 명령이 일정함이 없고 朋黨이 서로 일어나서 조정을 능멸하고 乘輿(皇帝)에게 供奉하는 물품을 대폭 줄이니, 황제가 거의 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뭇사람들이 실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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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梁主]]幸同泰寺하야 設四部無遮大會하다 釋御服, 持法衣하고 行淸淨大捨<font color="#0054FF" size="2">【釋氏語錄에 三捨는 謂內外身心을 一時俱捨하고 隨方應物하야 能所皆忘을 是謂大捨요 行道布德하야 無所希望을 是謂中捨요 修行衆善하야 有所希望을 是謂小捨라】</font>하고 素床瓦器하며 親爲四衆<font color="#0054FF" size="2">【釋氏經云 比丘, 尼는 出家二衆也니 比丘는 僧也요 尼는 女僧也라 梵語比丘는 華言乞士니 謂士於諸佛에 乞法하야 資益色身也라 優婆塞, 優婆夷 在家二衆也니 如今之苦行이라 中華翻爲近住하니 言受戒行하야 堪近住也라】</font>하야 講涅槃經<font color="#0054FF" size="2">【梵語涅槃은 華言示寂也라 佛以人死면 其精神尙存하니 佛之死는 示寂滅而已요 非眞死也라 多心經注에 梵語涅槃은 此云無爲라하고 楞伽經云 乃不生不死之地니 一切修行之所依歸也라하니라】</font>하니 群臣이 以錢一億萬으로 奉贖하고 表請還宮이어늘 三請에 乃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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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恩]]이 赴海死하니 衆이 推[[]]妹夫[[盧循]]하야 爲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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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朱子]][[胡氏]]云 佛行有五要하니 舍(捨)其一也라 [[梁武]]爲帝王하야 享天位하야 內蓄姬妾하고 外列官師하며 富貴之崇하고 子孫之衆하고 宮室城池로 守衛之密이로되 猶以爲未足하야 又命將出兵하야 爭奪于外하야 惟恐失之하니 安在其能舍乎아 不惟君子非之라 爲佛之道如達磨<font color="#0054FF" size="2">【南天竺國人이니 得般若多羅하야 傳正法眼藏이러니 梁武詔至金陵하야 問道라 後至于嵩山少林寺하야 面壁九年에 端坐而逝라】</font>者 亦不取也니라 或曰 然則達磨之言이 不亦可取歟아 曰 爲佛之道者는 淺深精粗 雖所得不同이나 要其極致하면 歸于殄滅倫理라 以之爲己면 則逆而不祥이요 以之爲人이면 則偏而不公이요 以之爲天下國家면 蓋無所處而得其當이니 儒者棄而絶之 可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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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氏]]曰 甚哉라 [[梁武]]之愚也여 人生天地間에 有此生則有此身이라 生不可滅이면 則身不可捨니 抑不知[[梁武]]之所謂捨者 以何爲捨爾라 若以屛<font color="#0054FF" size="2">【屛은 除也요 斥也라】</font>富貴, 棄妻子로 爲捨耶인댄 則是爲捨物이요 而非曰捨身也며 若以委其身於佛氏로 爲捨耶인댄 則爲佛者 當取其身而用之 可也라 今旣曰捨로되 而其身猶在면 則是初未嘗捨也니 身未嘗捨而强名曰捨면 則固已昧其心於不誠矣라 他時諸臣이 又以金而贖其身하니 不知當其捨之之時에 孰從而受之며 而贖之之時에 又孰從而歸之也오 [[梁主]]는 身非賣僮而可捨可贖이니 此不惟愚誑其民, 愚誑其身이요 抑且愚誑其所謂佛者라 末年荷荷之時<font color="#0054FF" size="2">【見下己巳年이라】</font>에 又復戀戀而不能捨는 何哉오 [[孟子]]有言捨魚而取熊掌하고 捨生而取義라하시니 夫魚熊掌은 二物也니 固可捨其一而取其一이어니와 若捨生取義면 則必殺身徇義而後可니 萬一其生猶在면 則亦不謂之捨矣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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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梁主]]가 同泰寺에 행차하여 四部無遮大會를 열었다. 이때 [[梁主]]가 御衣를 벗고 法衣를 입으며, 淸淨大捨<font color="#0054FF" size="2">【釋氏의 語錄에 “三捨는 內外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모두 버리고 방편에 따라 사물에 응해서 能(인식의 주체)과 所(인식의 대상)를 모두 잊는 것을 大捨라 이르고, 道를 행하고 德을 펴면서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을 中捨라 이르고, 많은 善行을 닦으면서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을 小捨라 이른다.” 하였다.】</font>를 행하고 밥을 먹을 때에 소박한 상과 질그릇을 사용하며, 친히 四衆<font color="#0054FF" size="2">【釋氏의 經에 이르기를 “比丘와 比丘尼는 出家한 두 무리이니, 比丘는 승려이고 比丘尼는 여승이다. 梵語의 比丘는 중국어로 乞士이니, 선비가 여러 부처에게 法을 청하여 色身(육신)을 유익하게 함을 이른다. 優婆塞(우바새)와 優婆夷(우바이)는 在家의 두 무리이니, 지금의 苦行과 같다. 중국어로 번역하면 近住라 하니, 戒行을 받아서 三寶에 가까이 머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font>을 위하여 涅槃經<font color="#0054FF" size="2">【梵語의 涅槃은 중국어로 示寂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불교의 죽음은 寂滅을 보일 뿐이고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多心經≫ 注에 “梵語의 涅槃은 無爲를 이른다.” 하였고, ≪楞伽經≫에 “이것(涅槃)은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 곳이니, 일체의 수행이 의귀하는 바이다.” 하였다.】</font>강하니, 여러 신하들이 一億萬錢을 바쳐 대속하고 表文을 올려 환궁할 것을 청하였는데, 세 번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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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恩]]이 바다에 뛰어들어죽으니, 무리들이 [[孫恩]]의 매부인 [[盧循]]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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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朱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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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胡氏]]가 이르기를 ‘부처의 행실에는 五要가 있으니, 捨身(육신을 버림)이 그중 하나이다. 梁[[武帝]]가 帝王이 되어 天子의 지위를 누려서 안으로는 姬妾을 기르고 밖으로는 백관을 나열하며, 부귀가 높고 자손들이 많고 宮室과 城池로 호위하기를 치밀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다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밖에서 다투고 빼앗아 행여 잃을까 두려워하였으니, 捨身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君子들이 비난할 뿐만 아니라 佛法을 행하는 達磨<font color="#0054FF" size="2">【達磨는 南印度 사람이니 般若多羅尊者의 제자가 되어 正法을 전수받았는데, 梁나라 武帝가 명령을 내려 金陵에 이르게 하여 道에 대해 물었다. 뒤에 嵩山의 少林寺에 이르러 面壁한 지 9년 만에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font> 같은 자도 또한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達磨達磨의 말도 취할 만하지 않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佛法을 행하는 자들은 깊고 얕음과 정밀하고 거친 것이 비록 얻은 바가 똑같지 않으나 그 극치를 요약해 보면 윤리를 없애는 데로 귀결된다. 이것을 자신에게 행하면 逆이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이것을 남에게 베풀면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하며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면 처하는 곳마다 마땅함을 얻지 못하니, 儒者는 버리고 끊는 것이 옳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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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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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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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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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다, [[梁 武帝]]의 어리석음이여.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남에 이 生命이 있으면 이 육신이 있으니, 生命을 없앨 수 없다면 육신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梁 武帝]]의 이른바 ‘捨’라는 것은 무엇을 捨라고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약 富貴를 물리치고<font color="#0054FF" size="2">【屛은 제거하는 것이고 물리치는 것이다.】</font> 妻子를 버리는 것을 捨라고 했다면 이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요 육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만약 자기 육신을 佛氏에게 바치는 것을 捨라고 했다면 부처가 그 육신을 취하여 써야 할 것이다. 이제 이미 捨라고 말하였으나 육신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는 애당초 육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니, 육신을 일찍이 버리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捨라고 이름한다면 참으로 이미 그 마음을 진실하지 못함으로 어둡게 한 것이다. 후일 여러 신하들이 또 돈으로 贖身하였으니, 捨身할 때에는 이 육신을 누가 받았으며 贖身할 때에는 이 육신을 또 누가 돌려주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梁나라 군주의 육신은 팔려간 하인처럼 捨身하거나 贖身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백성들을 우롱하고 속이며 자신을 우롱하고 속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부처를 우롱하고 속인 것이다. 말년에 한탄하고 죽을 때에<font color="#0054FF" size="2">【荷荷는 해설이 뒤의 己巳年條(549)에 보인다.】</font> 다시 연연해하며 捨身하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孟子]]가 말씀하기를 ‘魚物을 버리고 熊掌을 취하며,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한다.’ 하였다. 어물과 웅장은 두 가지 물건이어서 진실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있지만, 만약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해야 한다면 반드시 몸을 죽이고 義를 따른 뒤에야 가능하니, 만일 생명이 그대로 있다면 또한 이것을 捨라고 이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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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庚戌] 梁中大通二年, 魏永安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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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 〈梁中大通二年이요 魏永安三年이요 [[曄]]建明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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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二年이라 〈燕光始三이요 秦弘始五요 魏天興六年이라 ○ 是歲에 涼亡하니 大三이요 小四니 凡七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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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530) - 梁나라 中大通 2년이고, 魏나라 永安 3년이고, [[元曄]]의 建明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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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2년(계묘 403) - 燕나라 光始 3년이고, 秦나라 弘始 5년이고, 魏나라 天興 6년이다. ○ 이해에 涼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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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月이라 魏[[爾朱榮]]이 雖居外藩이나 遙制朝政하니 樹置親黨하야 布列魏主左右하야 伺察動靜<font color="#0054FF" size="2">【伺는 候也라】</font>하야 大小를 必知라 [[魏主]]雖受制於[[榮]]이나 然性勤政事하야 朝夕不倦하야 數親覽辭訟하고 理寃獄하니 [[榮]]이 聞之하고 不悅이라 [[魏主]]旣外逼於[[榮]]하야 恒怏怏不樂이러니 遂與[[城陽王]][[徽]]로 圖[[榮]]殺之하다 是夜에 [[爾朱世隆]]<font color="#0054FF" size="2">【榮之從弟니 時爲僕射라】</font>이 帥[[榮]]部曲하야 焚西陽門하고 出屯河陰하다 十月에 汾州刺史汾州刺史[[爾朱兆]] 聞[[榮]]死하고 自汾州로 帥騎據晉陽이러니 [[世隆]]이 至長子어늘 [[兆]]來會之하야 共推太原太守太原太守[[長廣王]][[曄]]<font color="#0054FF" size="2">【太武帝燾子요 追尊景穆皇帝晃之孫이라】</font>하야 卽皇帝位하고 大赦하고 改元建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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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冊命[[]]하야 爲相國相國하야 摠百揆하고 封十郡하야 爲[[楚王]]하고 加九錫九錫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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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다.魏나라 [[爾朱榮]]이 비록 몸은 外藩(太原王의 封地)에 있었으나 멀리서 조정의 정사를 控制하니, 黨與와 신임하는 자들을 많이 심어놓아서 [[魏主]]의 좌우에 포진시키고 조정의 動靜을 사찰<font color="#0054FF" size="2">【伺는 살핌이다.】</font>하게 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정사를 반드시 알았다. [[魏主]]가 비록 [[爾朱榮]]에게 控制당하였으나 타고난 성품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조석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자주 辭訟을 직접 살피고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니, [[爾朱榮]]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魏主]]가 이미 밖으로 [[爾朱榮]]에게 핍박당하여 항상 앙앙불락했는데, 마침내 [[城陽王]]元徽와 함께 도모하여 [[爾朱榮]]을 죽였다. 이날 밤(9월 25일)에 爾朱世隆<font color="#0054FF" size="2">【爾朱世隆은 爾朱榮의 從弟이니, 이 당시 尙書左僕射였다.】</font>이 [[爾朱榮]]의 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西陽門을 불태우고 나가서 河陰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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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桓玄]]을 책봉하여相國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열 郡을 봉해 주어 [[楚王]]으로 삼고九錫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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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汾州刺史汾州刺史[[爾朱兆]]가 [[爾朱榮]]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汾州로부터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晉陽을 점거하였는데, [[爾朱世隆]]이 長子縣에 이르자 [[爾朱兆]]가 와서 회동하여 太原太守太原太守인 [[長廣王]] 元曄<font color="#0054FF" size="2">【長廣王 元曄은 太武帝 拓跋燾의 아들이고, 景穆皇帝로 追尊된 拓跋晃의 손자이다.】</font>을 함께 추대해서 황제에 즉위하게 한 다음 크게 사면하고 建明으로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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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輕兵으로 倍道兼行하야 從河橋西渡하다 先是에 [[敬宗]]<font color="#0054FF" size="2">【魏莊帝子攸廟號라】</font>이 以大河深廣이라하야 謂[[]]未能猝濟러니 是日에 水不沒馬腹하고 暴風에 黃塵이 漲天이라 [[兆]]騎叩宮門이어늘 宿衛乃覺하고 彎弓欲射로되 矢不得發이라 一時散走어늘 [[兆]]騎執其主하야 鎖於永寧寺樓上이러니 遷於晉陽하야 縊殺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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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玄이 卽皇帝位하다 [[]]이 入建康宮建康宮하야 登御座할새 而床忽陷이라 群臣이 失色이어늘 [[殷仲文]]<font color="#0054FF" size="2">【侍中也니 玄之妹夫라】</font>曰 將由聖德深厚하야 地不能載라한대 [[]]이 大悅하다 辛亥에 玄이 遷帝於尋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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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魏나라 [[爾朱兆]]가 경무장한 기병으로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河橋의 서쪽으로부터 건너왔다. 이보다 앞서 敬宗<font color="#0054FF" size="2">【魏나라 莊帝 元子攸의 廟號이다.】</font>은 黃河가 깊고 넓어서 [[爾朱兆]]가 갑자기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날 黃河의 물이 말의 배에도 차지 않았고 폭풍이 불어 누런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爾朱兆]]의 기병이 궁궐 문을 공격하자, 宿衛兵이 비로소 깨닫고 활을 당겨 쏘고자 하였으나 바람이 너무 거세어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일시에 흩어져 도망하니, [[爾朱兆]]의 기병이 군주를 사로잡아 永寧寺 樓上에 가두었는데, 晉陽으로 옮겨서 목 졸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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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桓玄]]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桓玄]]이 建康宮에 들어가서 御座에 오를 적에 龍床이 갑자기 바닥이 꺼졌다. 여러 신하들이 사색이 되었는데 [[殷仲文]]<font color="#0054FF" size="2">【殷仲文은 侍中이니, 桓玄의 妹夫이다.】</font>이 말하기를 “아마도 聖德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닥이 꺼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桓玄]]이 크게 기뻐하였다. 辛亥日(22일)에 [[桓玄]]이 황제를 尋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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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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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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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初에 葛榮葛榮部衆流入幷, 肆<font color="#0054FF" size="2">【二州名이라】</font>者 二十餘萬이러니 爲契胡<font color="#0054FF" size="2">【謂爾朱氏也니 見上戊申年이라 契은 音喫이니 如契丹之契이라】</font>陵暴하야 皆不聊生하야 謀亂不止라 [[兆]]患之하야 問計於[[高歡]]한대 [[歡]]曰 宜選王腹心하야 使統之라한대 [[兆]]遂以其衆委焉하다 [[歡]]이 以[[兆]]醉로 恐醒而悔之하야 遂出宣言호되 受委하야 統州鎭兵하니 可集汾東하야 受號令하라하고 乃建牙陽曲川하니 軍士素惡[[兆]]而樂屬[[歡]]하야 莫不皆至라 長史長史[[慕容紹宗]]이 諫曰 不可하다 方今에 四方紛擾하야 人懷異望하고 [[高公]]은 雄才蓋世하니 復使握大兵於外면 譬如借蛟龍以雲雨하야 將不可制矣리이다 [[兆]]弗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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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三年이라 〈燕光始四요 秦弘始六이요 魏天賜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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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나라 초기에 [[葛榮]]의 部衆으로서 流落하다가 幷州와 肆州<font color="#0054FF" size="2">【幷과 肆는 두 州의 이름이다.】</font>로 들어간 자가 20여만 명이었는데, 契胡(爾朱氏)<font color="#0054FF" size="2">【契胡는 爾朱氏를 이르니, 앞의 戊申年條(528)에 보인다. 契은 音이 긱(글)이니, 契丹(글안)의 契과 같다.】</font>에게 능멸당하여 모두 살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爾朱兆]]가 이를 걱정하여 [[高歡]]에게 계책을 묻자, [[高歡]]이 말하기를 “왕의 심복을 뽑아서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爾朱兆]]가 마침내 [[葛榮]]의 무리를 [[高歡]]에게 맡겼다. [[高歡]]은 [[爾朱兆]]가 이때 술에 취했으므로 술이 깨면 후회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軍營에 나와서 선언하기를 “내가 王의 위임을 받아 州鎭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니, 汾河 동쪽에 집결하여 나의 호령을 받으라.” 하고는 마침내 陽曲川(汾水)에 牙旗를 꽂으니, 軍士들이 평소 [[爾朱兆]]를 미워하고 [[高歡]]에게 소속되는 것을 즐거워하여 모두 이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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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史長史[[慕容紹宗]]이 간하기를 “안 됩니다. 지금 사방이 분분하고 소란해서 사람마다 모반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며 [[高公]]은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으니, 그로 하여금 다시 밖에서 大軍을 장악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면 蛟龍에게 구름과 비를 빌려 주는 것과 같아서 장차 控制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爾朱兆]]가 듣지 않았다.
+
[[劉裕]][[桓脩]]<font color="#0054FF" size="2">【徐兗州刺史, 安成王이라】</font>入朝어늘 [[玄]]謂王謐<font color="#0054FF" size="2">【司徒니 爲玄佐命元臣이라】</font>曰 [[裕]]風骨不常하니 蓋人傑也라하더라 [[玄后劉氏]] 有智鑑이라 謂[[]]曰 [[劉裕]]龍行虎步하고 視瞻不凡하니 恐終不爲人下하노니 不如早除之라한대 [[]]曰 我方平蕩<font color="#0054FF" size="2">【蕩은 滌也라】</font>中原호니 非裕면 莫可用者라 俟關, 河平定然後에 別議之爾라하더라
</div>
 
</div>
 
|}</div>[辛亥] 梁中大通三年, 魏節閔帝恭普泰元<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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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辛亥] 〈梁中大通三年이요 魏[[節閔帝]][[]]普泰元이요 (王)[[[]]]中興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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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531) - 梁나라 中大通 3년이고, 魏나라 [[節閔帝]][[元恭]]의 普泰 元年이고, [[元朗(後廢帝)]]의 中興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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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3년(갑진 404) - 燕나라 光始 4년이고, 秦나라 弘始 6년이고, 魏나라 天賜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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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에 魏[[爾朱世隆]]이 以[[長廣王]]之命<font color="#0054FF" size="2">【以曄疎遠하고 又無人望일새 欲更立近親이라】</font>으로 禪位于[[廣陵王]]<font color="#0054FF" size="2">【是爲節閔皇帝라[頭註]爾朱世隆이 廢其主曄하야 爲東海王하고 立廣陵王恭이라 恭은 獻文帝弘之孫이요 而廣陵王羽之子라】</font>하다 魏[[高歡]]이 起兵討[[爾朱氏]]하니 [[]][[敬宗]]也일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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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桓脩<font color="#0054FF" size="2">【桓脩는 徐州兗州刺史‧安成王으로 있었다.】</font>를 따라 入朝하자, [[桓玄]]이 王謐<font color="#0054FF" size="2">【王謐은 司徒이니, 桓玄의 佐命元臣이다.】</font>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풍채와 골격이 비범하니, 인걸이다.” 하였다. [[桓玄]]의 아내인 [[劉氏]]는 智謀와 識鑑이 있었는데, [[桓玄]]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걸음을 걷는 모양이 용과 범 같고 눈초리가 비범하여 끝내 남의 아랫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내가 막 중원을 평정<font color="#0054FF" size="2">【蕩은 씻어내는 것이다.】</font>하려 하니, [[劉裕]]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다. 關中과 黃河 지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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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魏나라 [[爾朱世隆]]이 [[長廣王]][[元曄]]의 命으로<font color="#0054FF" size="2">【元曄이 소원하고 또 人望이 없으므로 가까운 친족으로 바꾸어 세우고자 한 것이다.】</font>[[廣陵王]] 元恭(前廢帝)<font color="#0054FF" size="2">【[原註]廣陵王은 바로 節閔皇帝이다.[頭註]爾朱世隆이 그 군주 元曄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고 廣陵王 元恭을 세웠다. 元恭은 獻文帝 拓跋弘의 손자이고, 廣陵王 元羽의 아들이다.】</font>에게 讓位하였다. 魏나라 [[高歡]]이 군대를 일으켜 [[爾朱氏]]를 토벌하니, [[爾朱兆]]가 [[敬宗(孝莊帝)]][[元子攸]]를 시해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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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壬子] 梁中大通四年, 魏普泰二, 中興二, 孝武帝脩永熙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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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 〈梁中大通四年이요 魏普泰二요 中興二요 [[孝武帝]][[]]永熙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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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裕與[[何無忌]]<font color="#0054FF" size="2">【琅琊內史라】</font>로 同舟還京口하야 密謀復興晉室하다 [[劉毅]]家於京口하야 亦與[[無忌]]로 謀討[[玄]]이러니 [[無忌]]曰 天下草澤之中에 非無英雄也니라 [[毅]]曰 所見에 唯有[[劉下邳]]<font color="#0054FF" size="2">【裕爲下邳太守하니라】</font>니라 [[無忌]]笑而不答하고 還以告裕하고 遂與[[]]定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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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532) - 梁나라 中大通 4년이고, 魏나라 [[元恭]]의 普泰 2년이고, [[元朗]]의 中興 2년이고, [[孝武帝]][[元脩(出帝)]]의 永熙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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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劉裕]]가 何無忌<font color="#0054FF" size="2">【何無忌는 琅琊內史이다.】</font>와 함께 배를 같이 타고 京口로 돌아와 은밀히 晉나라 황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였다. [[劉毅]]가 京口에 거주하여 또한 [[何無忌]]와 함께 [[桓玄]]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何無忌]]가 말하기를 “천하의 초야 가운데에 영웅이 없지 않다.” 하니, [[劉毅]]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직 劉下邳(劉裕)<font color="#0054FF" size="2">【劉裕가 이때 下邳太守로 있었다.】</font>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何無忌]]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서 돌아가 이것을 [[劉裕]]에게 고하고 마침내 [[劉毅]]와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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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歡]]이 進擊[[爾朱兆]]等於鄴하야 大破之하니 [[兆]]自殺이어늘 盡滅[[爾朱氏]]之黨하고 遂幽[[節閔帝]]於崇訓佛寺하고 更立[[平陽王]][[脩]]<font color="#0054FF" size="2">【獻文帝弘之子가 彭城王勰이요 勰子가 莊帝子攸요 子攸子가 廣平王懷니 懷之子也라】</font>하니 戊子에 [[孝武帝]]<font color="#0054FF" size="2">【名脩니 孝莊孫이요 廣平王之子也라】</font>卽位於東郭之外하야 酖[[節閔帝]]於門下省門下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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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月乙卯에 裕託以遊獵하고 與[[無忌]]로 收合徒衆하야 得百餘人하다 詰旦<font color="#0054FF" size="2">【平旦也라】</font>에 京口城開어늘 [[無忌]]著傳詔服하고 稱勅居前하니 徒衆이 隨之齊入하야 卽斬[[桓脩]]以徇<font color="#0054FF" size="2">【行示也라】</font>하다 衆推[[]]爲盟主하니 [[]]이 憂懼特甚이라 或曰 [[劉裕]]等은 烏合<font color="#0054FF" size="2">【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font>微弱하야 勢必無成하리니 陛下何慮之深이니잇고 [[玄]]曰 [[劉裕]]는 足爲一世之雄이요 [[劉毅]]는 家無襜石之儲<font color="#0054FF" size="2">【襜은 齊人이 名小甖爲襜이라 石은 斗石也라】</font>로되 樗蒲에 一擲百萬하고 [[何無忌]]는 酷似其舅<font color="#0054FF" size="2">【酷은 甚也라 舅는 謂劉牢之라】</font>어늘 共擧大事하니 何謂無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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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高歡]]이 鄴城으로 진격하여 [[爾朱兆]] 등을 대파하니, [[爾朱兆]]가 자살하였다. [[爾朱氏]]의 黨을 모두 없앤 다음 마침내 [[節閔帝]]를 崇訓佛寺에 유치하고 다시 [[平陽王]][[元脩]]<font color="#0054FF" size="2">【獻文帝 拓跋弘의 아들이 彭城王 元勰이요, 元勰의 아들이 莊帝 元子攸요 元子攸의 아들이 廣平王 元懷이니, 平陽王 元脩는 元懷의 아들이다.】</font>를 세우니, 戊子日(4월 25일)에 [[孝武帝]]<font color="#0054FF" size="2">【孝武帝는 이름이 脩이니, 孝莊帝(元子攸)의 손자이고 廣平王(武穆王 元懷)의 아들이다.】</font>가 [[東郭]] 밖에서 즉위하고[[節閔帝]]를 門下省門下省에서 독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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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癸丑] 梁中大通五年, 魏永熙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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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 〈梁中大通五年이요 魏永熙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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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533) - 梁나라 中大通 5년이고, 魏나라 永熙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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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乙卯日(27일)에 [[劉裕]]가 사냥을 나간다고 칭탁하고서 [[何無忌]]와 함께 무리를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font color="#0054FF" size="2">【詰旦은 平旦(동틀 때)이다.】</font>京口의 성문이 열리자, [[何無忌]]가 傳詔(詔令을 전달하는 관원)의 옷을 입고 勅使라 칭하고 앞에 있으니, 무리가 뒤를 따라 일제히 城에 들어가서 곧바로 [[桓脩]]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려 보였다.<font color="#0054FF" size="2">【徇은 다니면서 보이는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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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賀拔岳]]<font color="#0054FF" size="2">【勝之弟也니 時爲關中行臺라】</font>이 遣使詣晉陽하야 與[[]]約爲兄弟<font color="#0054FF" size="2">【謂勝與岳也라】</font>어늘 司馬司馬[[宇文泰]]<font color="#0054FF" size="2">【代郡武川人이라 其先은 出自炎帝하니 炎帝子孫이 遁居朔野하다 其後에 有葛烏(老)[]者 有雄略하니 鮮卑奉以爲主하야 世爲大人이라 裔孫普回 得玉璽하니 文曰 皇帝璽라하니 普回以爲天授라 其俗謂天子曰宇文이라 故로 國號宇文하고 幷以爲氏하다 泰는 乃普回十四世孫也라 追諡德皇帝하니 (耽)[]之少子也라 世子覺이 簒西魏하니 是謂後周라】</font>自請詣晉陽하야 以觀[[]]之爲人하다 [[]]이 奇其狀貌하야 曰 此兒視瞻非常이라하고 將留之러니 [[泰]]固求復命이어늘 [[歡]]이 旣遣而悔之하다 [[泰]]至長安하야 謂[[岳]]曰 [[高歡]]이 所以未簒者는 正憚公兄弟爾니 公이 但潛爲之備면 圖[[歡]]不難하리이다하니 [[岳]]이 大悅하다 以夏州被邊要重<font color="#0054FF" size="2">【謂要害重地라】</font>이라하야 欲求良刺史刺史以鎭之한대 衆擧[[宇文泰]]어늘 [[岳]]이 表用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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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劉裕]]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桓玄]]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특히 심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劉裕]] 등은 烏合之卒<font color="#0054FF" size="2">【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font>이라 역량이 미약하여 형세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깊이 염려하십니까?” 하니, [[桓玄]]말하기를 “[[劉裕]]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될 만하고, [[劉毅]]는 집안에 한 말과 한 섬의 저축<font color="#0054FF" size="2">【襜은 齊나라 사람들이 작은 술단지를 이름하여 襜이라 한다. 石은 말[]과 섬[]이다.】</font>도 없었으나 樗蒲 놀이할 때에 한 번에 백만 전을 걸었으며, [[何無忌]]는 모습이 그의 외삼촌([[劉牢之]])과 매우 흡사한데,<font color="#0054FF" size="2">【酷은 매우이다. 外叔은 劉牢之를 이른다.】</font> 이들이 함께 大事를 일으켰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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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賀拔岳<font color="#0054FF" size="2">【賀拔岳은 賀拔勝의 아우이니, 이 당시 關中行臺였다.】</font>이 使者使者를 보내어 晉陽에 가서 [[高歡]]과 함께 형제<font color="#0054FF" size="2">【兄弟는 賀拔勝과 賀拔岳을 이른다.】</font>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司馬]]인 宇文泰<font color="#0054FF" size="2">【宇文泰는 代郡 武川 사람이다. 그 선조는 炎帝氏로부터 나왔으니, 〈炎帝가 黃帝에게 멸망당하자〉 炎帝의 자손이 도망하여 朔方의 들에 거주하였다. 그 후에 葛烏免라는 자가 웅대한 지략이 있으니, 鮮卑族이 그를 받들어 군주로 삼아 대대로 大人이 되었다. 후손 중에 普回가 〈사냥하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옥새의 내용에 “황제의 옥새”라고 되어 있으니, 普回는 이를 하늘이 준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 풍속에 天子를 宇文이라 하였으므로 國號를 宇文이라 하고 아울러 이로써 姓氏를 삼았다. 宇文泰는 바로 普回의 14세손이다. 德皇帝라 追諡하니, 宇文肱의 작은 아들이다. 世子 宇文覺이 西魏를 찬탈하니, 이를 後周라 이른다.】</font>가 晉陽에 가서 [[高歡]]의 사람됨을 관찰하기를 자청하였다. [[高歡]]이 〈[[宇文泰]]를 보고〉 그의 얼굴 생김새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눈길이 비범하다.” 하고는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였는데, [[宇文泰]]가 한사코 復命할 것을 청하자 [[高歡]]이 보낸 뒤에 후회하였다. [[宇文泰]]가 長安에 이르러 [[賀拔岳]]에게 말하기를 “[[高歡]]이 帝位를 찬탈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公의 형제를 두려워해서일 뿐이니, 公이 단지 은밀히 대비하기만 하면 [[高歡]]을 도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賀拔岳]]이 크게 기뻐하였다. [[賀拔岳]]은 夏州가 변방의 요충지<font color="#0054FF" size="2">【要重은 요해처가 되는 중요한 곳을 이른다.】</font>라 하여 어진 刺史刺史를 구하여 진무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宇文泰]]를 천거하자 [[賀拔岳]]이 [[孝武帝]]에게 表文을 올려 그를 등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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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甲寅] 梁中大通六年, 魏永熙三年,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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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 〈梁中大通六年이요 魏永熙三年이요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이라 ○ 是歲에 魏分爲二하니 凡三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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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月에 [[裕]]與[[劉毅]]等으로 分爲數隊하야 竝進할새 [[裕]]以身先之하니 將士皆殊死戰하야 無不一當百이요 呼聲이 動天地라 時에 東北風이 急이어늘 因縱火焚之하니 煙火熛<font color="#0054FF" size="2">【火飛也라】</font>天하고 鼓譟之音이 震動京邑하니 諸軍이 大潰라 [[玄]]이 帥親信數千人하고 走趨石頭하니 [[]]入建康하야 帥百官하야 奉迎乘輿하고 誅[[]]宗族在建康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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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534) - 梁나라 中大通 6년이고, 魏나라 永熙 3년이고, 東魏[[孝靜帝]][[元善見]]의 天平 元年이다. ○ 이해에 魏나라가 나뉘어 둘이 되니, 모두 세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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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에 [[劉裕]]가 [[劉毅]] 등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함께 진군할 적에 [[劉裕]]가 앞장서서 솔선하니, 장병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동북풍이 맹렬히 불자, 이 틈을 타서 불을 놓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고<font color="#0054FF" size="2">【熛는 불똥이 튀는 것이다.】</font>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京邑을 진동하여 〈[[桓謙]] 등의〉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桓玄]]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石頭城으로 향하니, [[劉裕]]가 建康에 들어가 백관을 거느리고 尋陽에서 乘輿(황제)를 맞이하고 建康에 있는 [[桓玄]]의 宗族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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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軍將軍中軍將軍[[王思政]]이 言於[[魏主]][[高歡]]之心은 昭然可知라 洛陽은 非用武之地요 [[宇文泰]]는 乃心王室하니 今往就之하면 還復舊京을 何慮弗克이리잇고 [[魏主]]深然之하야 以五千騎로 西出長安하니 [[]]備儀衛하고 迎帝하야 謁見於東陽驛이라 [[魏主]]遂入長安하야 以[[]]爲尙書令尙書令하야 軍國之政을 咸取決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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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至建康하야 諸大處分<font color="#0054FF" size="2">【處는 區處也요 分은 分別也라】</font>을 皆委於[[劉穆之]]<font color="#0054FF" size="2">【裕召爲主簿라】</font>하니 倉猝立定에 無不允愜이라 [[]]遂託以心腹하야 動止를 諮焉하니 [[穆之]]亦竭節盡誠하야 無所遺隱이러라 時에 晉政寬弛하야 綱紀不立하고 豪族陵縱하야 小民窮蹙하며 重以[[司馬元顯]]의 政令違舛<font color="#0054FF" size="2">【舛은 錯謬也라】</font>하니 [[桓玄]]이 雖欲釐整이나 而科條繁密하야 衆莫之從이러니 [[穆之]]斟酌時宜하야 隨方矯正<font color="#0054FF" size="2">【揉曲爲矯니 言隨事矯揉하야 使歸於正이라】</font>하고 [[]]以身範物하야 先以威禁하니 內外百官이 皆肅然奉職하야 不盈旬日에 風俗이 頓改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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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軍將軍中軍將軍[[王思政]][[魏主]]에게 말하기를 “[[高歡]]의 야심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습니다. 洛陽은 무력을 쓸 수 있는 요충지가 아니고 [[宇文泰]]는 마침내 王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지금 그에게 찾아가서 의지한다면 다시 옛 서울인 洛陽을 수복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魏主]]가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겨서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長安으로 나가니, [[宇文泰]]가 의장대와 호위병을 갖추고 황제를 맞이하여 東陽驛에서 알현하였다. [[魏主]]가 마침내 長安으로 들어가서 [[宇文泰]]를 尙書令尙書令으로 삼아 軍國軍國의 정사를 모두 그에게서 결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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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처음 建康에 이르러서 모든 중대사의 처분<font color="#0054FF" size="2">【處는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고, 分은 分別이다.】</font>을 劉穆之<font color="#0054FF" size="2">【劉穆之는 劉裕가 불러서 主簿를 삼았다.】</font>에게 다 맡기니, 창졸간에 신속하게 결정함에 사람들이 지당하게 생각하고 흡족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劉裕]]가 마침내 그를 心腹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막론하고 그에게 자문하니, [[劉穆之]] 또한 충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빠뜨리거나 숨기는 바가 없었다. 이때 晉나라의 정사가 해이해져 紀綱이 서지 않고 豪族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庶民들이 곤궁하였으며 여기에 [[司馬元顯]]의 정사와 명령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니,<font color="#0054FF" size="2">【[釋義]重以司馬元顯 政令違舛:舛은 어그러지고 잘못됨이다.】</font>[[桓玄]]이 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法條文이 번거롭고 세밀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다. [[劉穆之]]가 時宜를 참작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로잡고<font color="#0054FF" size="2">【휘어서 구부리는 것을 矯라 하니, 일에 따라 바로잡아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font>[[劉裕]]가 앞장서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 먼저 위엄으로 금지시키니, 내외의 백관들이 모두 숙연히 직책에 종사해서 열흘이 못 되어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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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에 魏丞相魏丞相[[]]이 至洛陽하야 集百官耆老하고 立[[淸河]][[世子]]<font color="#0054FF" size="2">【淸河는 亶이니 乃文帝宏之孫이라】</font>[[善見]]하야 爲帝하니 [[孝靜帝]]卽位於城東北하고 遷都鄴<font color="#0054FF" size="2">【世號東魏가 始於此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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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劉毅]], [[何無忌]]等이 襲破尋陽城하다 [[桓玄]]이 挾帝하고 單舸西走하야 入江陵이어늘 遂斬之하다 乘輿反正於江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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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魏나라 丞相丞相[[高歡]]이 洛陽에 이르러서 百官과 元老들을 모아놓고 淸河王<font color="#0054FF" size="2">【淸河王은 元亶이니, 바로 孝文帝 元宏의 손자이다.】</font>의 世子世子인 [[元善見]]을 세워 황제로 삼으니, [[孝靜帝]]가 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鄴城으로 천도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原註]孝靜帝卽位於城東北 遷都鄴:孝靜帝가 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 鄴城으로 천도하니, 세상에서 東魏라고 이름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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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劉毅]]와 [[何無忌]] 등이 尋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桓玄]]이 황제를 끼고 한 척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여 江陵으로 들어가자, 〈益州督護益州督護[[馮遷]]이〉 마침내 [[桓玄]]을 목 베었다. 乘輿(황제)가 강릉에서 反正(復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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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孝武帝]] 復與[[泰]]有隙<font color="#0054FF" size="2">【孝武閨門無禮하야 從妹不嫁者三人을 〈皆封公主라〉 平原公主明月은 南陽王寶炬之同産也라 從入關이러니 泰使人殺之하니 孝武不悅이라 由是로 復與泰有隙하니라】</font>이라 十二月에 [[魏主]]飮酒遇酖而殂하니 [[泰]]乃奉太宰太宰[[南陽王]][[寶炬]]<font color="#0054FF" size="2">【文帝宏子京兆王愉之子라】</font>而立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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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主]][[]] 置六謁官하니 準古六卿六卿이요 又官名을 多不用漢, 魏之舊하고 倣上古龍官, 鳥官<font color="#0054FF" size="2">【伏羲氏受命時에 有龍瑞故로 以龍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龍爲名號하고 少昊氏之時에 鳳鳥適至故로 以鳥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鳥爲名號하니라】</font>하야 謂諸曹之使하야 爲鳧鴨이라하니 取其飛之迅疾也요 謂候官伺察者하야 爲白鷺라하니 取其延頸遠望也라 餘皆類此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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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孝武帝]]가 다시 [[宇文泰]]와 틈이 있었다.<font color="#0054FF" size="2">【孝武帝는 閨門에 禮가 없어 從妹 중에 시집가지 않은 자 세 명을 모두 봉하여 公主로 삼았다. 平原公主 明月은 南陽王 元寶炬의 동복형제로 孝武帝를 따라 關中에 들어왔는데, 宇文泰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니, 孝武帝가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宇文泰와 틈이 생겼다.】</font>12월에 [[魏主]]가 술을 마시다가 짐독에 중독되어 죽으니, [[宇文泰]]가 마침내 太宰太宰인 [[南陽王]] 元寶炬<font color="#0054FF" size="2">【元寶炬는 孝文帝 元宏의 아들인 京兆王 元愉의 아들이다.】</font>를 받들어 그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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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主]][[拓跋珪]]가 여섯 명의 謁官을 두니 옛날의 六卿六卿을 따른 것이요, 또 관직명에 漢나라와 魏나라 때의 옛 명칭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上古時代의 龍官과 鳥官<font color="#0054FF" size="2">【伏羲氏가 天命을 받았을 때에 龍의 상서가 있었으므로 龍으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龍으로써 명칭을 삼았고, 少昊氏 때에 鳳鳥가 마침 이르렀으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새로써 명칭을 삼았다.】</font>을 따라서 여러 曹의 使者使者를 일러 鳧鴨(오리)이라 하였으니 鳧鴨은 나는 것이 신속한 뜻을 취한 것이요, 斥候와 伺察을 맡은 자를 일러 白鷺라 하였으니 白鷺는 목을 늘여 멀리 바라보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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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乙卯] 梁大同元年, 魏文帝寶炬大統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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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義熙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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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 〈梁大同元年이요 [[魏文帝]][[寶炬]]大統元年이요 東魏天平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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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義熙元年이라 〈燕光始五요 秦弘始七이요 魏天賜二年이라 ○ [[南燕主]][[慕容超]]太上元이요 西涼建初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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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535) - 梁나라 大同 元年이고, [[魏文帝]][[元寶炬]]의 大統 元年이고, 東魏天平 2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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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元年(을사 405) - 燕나라 光始 5년이고, 秦나라 弘始 7년이고, 魏나라 天賜 2년이다. ○ 南燕主南燕主[[慕容超]]의 太上 元年이고, 西涼建初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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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朔에 [[魏文帝]]卽位<font color="#0054FF" size="2">【帝名寶炬니 孝文之孫이라】</font>하다 進丞相丞相[[]]하야 爲[[安定公]]하다
+
三月에 帝至建康하야 以[[劉裕]]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四月에 [[裕]]還鎭京口하다 八月에 [[南燕王]][[備德]]<font color="#0054FF" size="2">【上庚子年에 南燕王慕容德이 稱帝하고 更名備德하니라】</font>이 卒하고 兄子[[]]<font color="#0054FF" size="2">【備德이 無子일새 以兄北海王納之子超로 爲嗣하니라】</font>襲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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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에 魏나라 文帝<font color="#0054FF" size="2">【文帝는 이름이 寶炬이니, 孝文帝(元宏)의 손자이다.】</font>가 즉위하였다. 丞相丞相[[宇文泰]]를 승진시켜 [[安定公]]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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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황제가 建康에 이르러서 [[劉裕]]를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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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font color="#0054FF" size="2">【始於上甲寅年이라】</font>封丞相丞相[[歡]]之子[[洋]]<font color="#0054FF" size="2">【洋이 纂東魏하니 是爲北齊라 歡嘗欲觀諸子意識하야 使治亂絲하니 洋獨抽刀斬之하고 曰 亂者必斬이라하다】</font>하야 爲[[太原公]]하다 二年九月에 東魏以定州刺史定州刺史[[侯景]]으로 兼尙書右僕射尙書右僕射, 南道行臺<font color="#0054FF" size="2">【行臺는 見二十六卷이라】</font>하고 督諸將入寇하다 十月에 [[景]]이 進軍淮上이어늘 [[陳慶之]]擊破之하니 [[景]]이 棄輜重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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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font color="#0054FF" size="2">【東魏는 앞의 甲寅年條(534)에서 시작되었다.】</font>가 丞相丞相[[高歡]]의 아들 高洋<font color="#0054FF" size="2">【高洋이 東魏를 찬탈하니, 이것이 바로 北齊이다. 高歡이 일찍이 여러 아들들의 識見을 살펴보고자 하여 아들들로 하여금 엉킨 실을 다스리게 하니, 유독 高洋만은 칼을 뽑아 엉킨 실을 끊어버리고 말하기를 “엉킨 것은 반드시 끊어버려야 한다.” 하였다.】</font>을 봉하여 [[太原公]]으로 삼았다. 梁나라 大同 2년(536) 9월에 東魏가 定州刺史定州刺史[[侯景]]으로 하여금 尙書右僕射‧南道行臺<font color="#0054FF" size="2">【行臺는 해설이 26권에 보인다.】</font>를 겸임하게 하고 諸將을 독려하여 梁나라를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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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劉裕]]가 돌아와 京口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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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侯景]]이 淮水 가에 진군하자 [[陳慶之]]이를 격파하니, [[侯景]]이 輜重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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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南燕王]] 慕容備德<font color="#0054FF" size="2">【위의 庚子年條(400)에 南燕王 慕容德이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font>죽고 형의 아들 慕容超<font color="#0054FF" size="2">【慕容備德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兄인 北海王 慕容納의 아들 慕容超를 후사로 삼았다.】</font>왕위를 세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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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乙丑] 梁大同十一年, 魏大統十一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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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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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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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 〈梁大同十一年이요 魏大統十一年이요 東魏武定三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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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三年이라 〈秦弘始九요 魏天賜四年이라 ○ [[燕主]][[高雲]]正始元年이요 [[夏主]][[赫連勃勃]]<font color="#0054FF" size="2">【自謂夏后氏之苗裔하야 稱大夏하니 匈奴南單于苗裔也라 謂帝王繼天爲子하니 是爲徽赫이 實與天連이라하고 改姓曰赫連氏라하니라】</font>龍昇元年이라 ○ 是歲에 燕[[慕容熙]]亡하니 舊大國二요 小國四요 新小國二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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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545) - 梁나라 大同11년이고, 魏나라 大統 11년이고, 東魏武定 3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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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3년(정미 407) - 秦나라 弘始 9년이고, 魏나라 天賜 4년이다. ○ [[燕主(北燕)]]高雲高雲의 正始 元年이고, [[夏主]] 赫連勃勃<font color="#0054FF" size="2">【赫連勃勃이 스스로 夏后氏의 후손이라 하여 大夏天王이라 칭하였으니, 匈奴 南單于의 후손이다. 말하기를 “帝王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들이 되니, 이것은 그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실로 하늘과 이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劉氏姓을 고쳐 赫連氏라 하였다.】</font>의 龍昇 元年이다. ○ 이해에 燕나라(後燕) [[慕容熙]]가 망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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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賀琛]]이 啓陳四事<font color="#0054FF" size="2">【一曰 今北邊稽服하니 正是生聚敎訓之時어늘 而天下戶口減落하며 郡不堪州侵하고 縣不堪郡責하고 民不堪縣徵하니 此豈非牧守之過歟잇가 二曰 今守宰風俗侈靡하니 欲使人守廉白이나 可得耶잇가 三曰 陛下憂念四海하야 不憚勤勞나 至於百司하야는 奏事에 詭競求進하고 不論大體하니 誠願責其公平之效하고 黜其讒慝之心이면 則下安上謐이리이다 四曰 今天下無事하니 省事省費하고 養民聚財云云하다 啓奏하니 梁主大怒하야 切責之하니라】</font>하야 言奢侈賦役之敝한대 梁主切責之<font color="#0054FF" size="2">【惡其觸實故로 怒라】</font>하다 梁主爲人이 孝慈恭儉하고 博學能文하며 陰陽卜筮와 騎射聲律과 草隷圍棊를 無不精妙라 勤於政務하야 冬月四更竟이면 卽起視事하니 執筆觸寒하야 手爲皴裂<font color="#0054FF" size="2">【皴은 細皮起也라】</font>이러라 自天監中으로 用釋氏法하야 長齋斷魚肉하고 日止一食호되 惟菜羹糲飯<font color="#0054FF" size="2">【糲는 麤米也니 所謂脫粟飯也라 [通鑑要解]糲는 與䊪通하니 張宴曰 一斛粟舂하야 七斗米爲糲라 】</font>而已요 或遇事繁하야 日移中이면 則嗽(漱)口以過러라 身衣布衣하고 木綿皁帳<font color="#0054FF" size="2">【皁는 柞實也니 可染黑色이라 故通用爲黑色也라 木綿은 丘濬曰 禹貢島夷卉服注에 以爲吉貝라하니 則虞時에 已有之하야 時或以充貢이라 漢, 唐之世에 遠夷雖以入貢이나 中國未有也러니 宋, 元之間에 始傳其種하야 關, 陜, 閩, 廣이 先得其利하니 蓋閩, 廣은 海通商舶하고 關, 陜은 壤接西域故也라 今則遍布天下하야 地無南北히 皆宜之하니라】</font>하며 一冠三載하고 一衾二年이요 後宮貴妃貴妃以下 衣不曳地<font color="#0054FF" size="2">【曳는 引也니 衣長不被土라】</font>라 性不飮酒하고 非宗廟祭祀大饗宴及諸法事<font color="#0054FF" size="2">【法事는 謂奉佛爲梵唄也니 梵音曰唄라】</font>면 未嘗作樂하고 雖居暗室이나 恒理衣冠하고 小坐盛暑에 未嘗褰袒하며 對內豎小臣을 如遇大賓이라 然이나 優假士人大(太)過하니 牧守多侵漁百姓하고 使者干擾郡縣이러라 又好親任小人<font color="#0054FF" size="2">【小人은 謂朱异, 周石珍輩也라】</font>하고 頗傷苛察하며 多造塔廟하야 公私費損하고 江南久安에 風俗奢靡라 故로 [[]]奏及之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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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魏主]][[珪]]滅劉衛辰<font color="#0054FF" size="2">【劉淵之族也라】</font>하니 其子[[勃勃]]이 奔秦이어늘 [[秦主]][[]]이 見而奇之하야 使鎭朔方이러니 久之에 復叛秦하고 自稱[[大夏天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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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賀琛]]이 네 가지 일<font color="#0054FF" size="2">【賀琛이 아뢰기를 “첫째는 지금 북쪽 변경의 東魏가 복종하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백성을 길러 군대를 양성하고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천하의 戶口가 줄어들며 郡에서는 州의 침탈을 감당하지 못하고 縣에서는 郡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며 백성들은 縣의 징발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어찌 지방 수령들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지금 지방의 수령들의 풍속이 사치스러우니, 사람들로 하여금 청렴하고 결백하게 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폐하께서는 四海를 근심하고 염려하여 근로함을 꺼리지 않으시나 百司들에 이르러서는 정사를 아뢸 적에 속이고 다투어 승진되기만을 구하고 大體를 논하지 않으니, 진실로 바라건대 公平한 성과를 책임지우며 참소하고 간사한 마음을 물리친다면 아랫사람이 편안하고 윗사람이 고요할 것입니다. 넷째는 지금 천하가 무사하니 일을 줄이고 비용을 줄여서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하고 운운하였다. 이 네 가지 일을 아뢰자, 梁主가 크게 노하여 심하게 책망하였다.】</font>을 아뢰어 사치함과 부역의 병폐를 말하자, [[梁主]]가 심하게 책망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梁主는 그의 말이 실제를 저촉하여 말이 너무 솔직한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노여워한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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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魏主]][[拓跋珪]]가 劉衛辰<font color="#0054FF" size="2">【劉衛辰은 劉淵의 종족이다.】</font>을 멸하자, 그 아들[[劉勃勃(赫連勃勃)]]이 秦나라로 도망하였다. [[秦主]][[姚興]]이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朔方을 鎭撫鎭撫하게 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시 秦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大夏天王]]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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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는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陰陽‧卜筮와 말타기‧활쏘기‧聲律과 草書‧隷書‧바둑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精妙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에 부지런하여 겨울철에도 4경만 지나면 즉시 일어나 정사를 보았는데, 날씨가 추워서 붓을 잡은 손이 얼어 터졌다.<font color="#0054FF" size="2">【皴은 얇은 피부가 일어나는 것이다.】</font>天監 연간으로부터 [[釋氏(佛法)]]를 신봉하여 오랫동안 채식을 하고 魚肉을 먹지 않았으며, 하루에 단지 한 끼만 먹되 나물국과 거친밥<font color="#0054FF" size="2">【[釋義]糲는 거친 쌀이니, 糲飯은 이른바 脫粟飯이라는 것이다. [通鑑要解]糲는 䊪와 통하니, 張宴이 말하기를 “1斛의 곡식을 찧어 7斗의 쌀이 나오는 것을 糲라 한다.” 하였다.】</font>뿐이었고, 혹 일이 많고 번거로울 때를 만나 해가 中天을 지나면 물로 입을 헹구고 넘어갔다. 몸에는 삼베옷을 입고 침상에는 木綿으로 짠 검은 휘장을 쳤으며,<font color="#0054FF" size="2">【皁는 도토리(상수리) 열매이니, 흑색을 물들일 수 있으므로 통용하여 흑색을 말한다. 木綿은 丘濬이 이르기를 “≪書經≫ 〈禹貢〉 ‘島夷卉服’의 注에 ‘吉貝’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虞나라 때에 이미 이것이 있어서 때로 혹 貢物로 충당한 것이다. 漢‧唐 시대에는 먼 오랑캐들이 비록 공물로 바쳤으나 중국에는 있지 않았는데, 宋‧元 시대에 비로소 그 종자가 전래되어 關‧陜과 閩‧廣에서 먼저 그 이익을 얻었으니, 閩‧廣은 바다로 상인들의 선박이 통행하고 關‧陜은 땅이 西域과 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온 천하에 두루 퍼져서 남쪽 북쪽 지역 할 것 없이 모두 잘 된다.” 하였다.】</font> 冠 하나로 3년을 쓰고 이불 한 채로 2년을 지냈으며, 後宮과 [[貴妃]] 이하의 부인들은 옷이 땅에 끌리지 않았다.<font color="#0054FF" size="2">【曳는 끄는 것이니, 衣不曳地는 옷의 길이가 땅을 덮지 않는 것이다.】</font> 성품이 술을 마시지 않고 宗廟의 祭祀와 큰 연향과 여러 法事<font color="#0054FF" size="2">【法事는 佛法을 신봉하여 梵唄를 연주하는 것을 이르니, 불교 음악을 唄라 한다.】</font>가 아니면 일찍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비록 어두운 방에 거처하더라도 항상 衣冠을 정제하였고, 궁중의 別室에 앉아 있거나 무더운 여름철에도 일찍이 옷을 풀어헤치거나 걷어 올리지 않았으며, 宦官과 小臣小臣들을 큰 손님을 대하듯이 공경하였다. 그러나 선비를 너무 지나치게 우대하여 지방의 관원들이 백성들을 많이 침탈하였고 조정의 使者使者들이 郡縣을 소란하게 하였다. 또 간사한 소인들<font color="#0054FF" size="2">【小人은 朱异와 周石珍의 무리를 이른다.】</font>을 친애하고 등용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등용할 때에 까다롭게 살피는 실책을 범하였고, 佛塔과 佛殿을 많이 지어서 공사간에 비용을 낭비하였다. 江南이 오랫동안 태평하여 풍속이 사치하고 화려하였으므로 [[賀琛]]이 아뢸 때에 이것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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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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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이 敦尙文雅하고 疎簡刑法하야 自公卿大臣大臣으로 咸不以鞫獄<font color="#0054FF" size="2">【鞫은 見上卷覆獄注라】</font>爲意하니 奸吏招權弄法하야 貨賂成市하야 枉濫者多라 時에 王侯子弟多驕淫不法호되 上이 年老하야 厭於萬幾(機)하고 又專精佛戒하야 每斷重罪면 則終日不懌하고 或謀反逆이라가 事覺이라도 亦泣而宥之<font color="#0054FF" size="2">【如臨賀王正德父子가 是也라】</font>하니 由是로 王侯益橫하야 或白晝殺人於都街하고 或晝夜公行剽掠하며 有罪亡命者 匿於主家하면 有司不敢搜捕라 上이 深知其敝나 而溺於慈愛하야 不能禁也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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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四年이라 〈秦弘始十이요 魏天賜五年이요 南涼嘉平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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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이 文雅를 지극히 숭상하고 刑法을 소략히 하여 公卿과 大臣大臣으로부터 모두 옥사를 鞫問<font color="#0054FF" size="2">【鞫은 해설이 上卷의 ‘覆獄’ 注에 보인다.】</font>하여 처벌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간사한 아전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법을 농간해서 뇌물이 성행하여 억울하게 형벌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때에 王侯의 子弟들이 교만하고 음란하여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上이 연로하여 萬機(政務)를 처리하는 것을 싫증 내고, 또 오로지 불교의 계율을 專心으로 닦아서 매번 중죄를 판결하면 종일토록 기뻐하지 않았으며, 혹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주었다.<font color="#0054FF" size="2">【[頭註]或謀反逆……亦泣而宥之:臨賀王 蕭正德 父子와 같은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font> 이 때문에 王과 諸侯들이 더욱 횡포를 부려 혹은 대낮에 도로에서 사람을 죽이고 혹은 밤낮없이 공공연하게 약탈을 행하였으며, 죄를 짓고 도망한 자가 王侯의 집안에 숨으면 有司가 감히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다. 上이 그 폐해를 깊이 알았으나 佛敎의 慈悲에 빠져 이러한 불법 행위를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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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丙寅] 梁中大同元年, 魏大統十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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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 〈梁中大同元年이요 魏大統十二年이요 東魏武定四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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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禿髮傉檀]]<font color="#0054FF" size="2">【傉은 力沃切이니 利鹿孤之子라】</font>이 稱[[涼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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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546) - 梁나라 中大同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2년이고, 東魏武定 4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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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4년(무신 408) - 秦나라 弘始 10년이고, 魏나라 天賜 5년이고, 南涼의 嘉平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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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上이 幸同泰寺하야 遂停寺省<font color="#0054FF" size="2">【同泰寺에 有便省이라 上臨幸時에 居之故로 曰便省이라하니 言留停於同泰寺便省也라】</font>하고 講三慧經이러니 是夜에 同泰寺浮圖災<font color="#0054FF" size="2">【同泰寺는 在臺城內라 梁武造大佛閣七層이러니 爲天火所焚하니라 浮圖는 塔也니 梵語浮圖는 華言聚相이라 左傳에 天火曰災요 人火曰火라하고 公羊傳에 大者曰災요 小者曰火라하니 大者는 謂正寢, 宗廟, 社稷, 朝廷也요 下此則小矣라 疏云 本實是火로되 而謂之災하니 災者는 害物之名이라 故로 可以見其大於火也니라】</font>어늘 上曰 此는 魔也니 宜廣爲法事라하고 遂起十二層浮圖러니 將成에 値[[侯景]]亂而止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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禿髮傉檀<font color="#0054FF" size="2">【傉은 음이 力沃切(녹)이니 禿髮利鹿孤의 아들이다.】</font>[[涼王]]을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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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曰 [[梁武]]溺於佛이나 而亦不知佛也라 江南雖小나 號爲帝王이면 則一日二日之間에 幾事豈少哉아 乃留居僧寺하야 至於逾月<font color="#0054FF" size="2">【三月에 講三慧經於同泰寺하야 四月에 解講이라】</font>하니 必以境內爲晏然하야 無所廢闕也하야 而不知所失多矣라 浮屠之災는 蓋天火之所以警戒也어늘 方且迷而不復하고 歸於魔障<font color="#0054FF" size="2">【下詔曰 道高魔盛하고 行善障生이라하니라 障은 障礙也라】</font>하야 窮極土木하야 以肆(狠)[狼]心하니 烏在乎其爲淸心能捨也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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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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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上이 同泰寺에 행차하여 마침내 절 안의 便省에 머물면서<font color="#0054FF" size="2">【同泰寺에 便省이 있다. 上이 거둥하였을 때에 이곳에 거처하기 때문에 便省이라 하였으니, 停寺省은 同泰寺의 便省에 머물렀음을 말한다.】</font>《三慧經》을 강하였는데, 이날 밤에 同泰寺의 浮圖에 화재가 발생하자,<font color="#0054FF" size="2">【同泰寺는 臺城 안에 있다. 梁 武帝가 大佛閣 7층을 조성하였는데, 天火(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에 불타 없어졌다. 浮圖는 塔이니, 梵語의 浮圖는 중국어로 聚相이다. ≪春秋左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을 災라 하고 사람이 낸 불을 火라 한다.” 하였고, ≪春秋公羊傳≫에 “큰 것을 災라 하고 작은 것을 火라 한다.” 하였으니, 큰 것은 正寢과 宗廟와 社稷과 朝廷을 이르고, 그 이하는 작은 것이다. 疏에 이르기를 “본래 실제는 火인데 이것을 災라 일렀으니, 災는 물건을 해치는 것을 이름하므로 火보다 재앙이 더 큼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font>上이 말하기를 “이는 마귀의 장난이니, 크게 佛事를 거행해야 한다.” 하고는 마침내 12층의 浮圖를 건립하였는데,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侯景]]의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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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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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武帝]]는 佛法에 빠졌으나 또한 佛法을 알지 못하였다. 江南이 비록 작지만 帝王이라고 이름했으면 하루 이틀 사이에도 중요한 政務가 어찌 적겠는가. 그런데 僧寺에 머물러서 달을 넘기기까지<font color="#0054FF" size="2">【3월에 同泰寺에서 ≪三慧經≫을 講하여 4월에 講을 끝맺었다.】</font>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境內가 태평하여 폐지되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겨서 잘못된 바가 많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浮屠에 화재가 난 것은 天火(하늘이 내린 불)로 경계한 것인데, 그런데도 미혹되어 돌이켜 살피지 않고 魔障<font color="#0054FF" size="2">【詔書를 내리기를 “道가 높으면 魔가 성하고 善을 행하면 장애를 만나게 된다.” 하였다. 障은 장애이다.】</font>의 탓으로 돌려서 토목공사를 크게 벌여 이리처럼 욕심을 부렸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여 捨身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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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丁卯] 梁太淸元年, 魏大統十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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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 〈梁太淸元年이요 魏大統十三年이요 東魏武定五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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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547) - 梁나라 太淸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3년이고, 東魏武定 5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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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東魏獻武王[[高歡]]이 卒하다 [[]]이 性深密하야 終日儼然하니 人不能測이라 機權之際에 變化若神하고 制馭軍旅에 法令嚴肅하며 聽斷明察하니 不可欺犯이라 由是로 文武樂爲之用이러라
+
[己酉]五年이라 〈秦弘始十一이요 [[魏太宗]][[拓跋嗣]]永興元年이라 ○ [[燕王]][[馮跋]]太平元年이요 西秦更始元年이라 ○ 舊大國二요 南涼, 北涼, 南燕, 西涼, 燕, 夏小國六이요, 新小國一이니 凡九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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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東魏[[獻武王]][[高歡]]이 죽었다. [[高歡]]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엄숙하니, 사람들이 그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임기응변할 때에는 변화함이 신출귀몰하고, 군대를 제어할 때에는 법령이 엄숙하며, 정사를 처단함에 분명히 살피니, 속이거나 범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를 위해 쓰여지는 것을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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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5년(기유 409) - 秦나라 弘始 11년이고, 魏나라 [[太宗]][[拓跋嗣]]의 永興 元年이다. ○ [[燕王]][[馮跋]]의 太平 元年이고, 西秦의 更始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南涼‧北涼‧南燕‧西涼‧燕‧夏 등 小國이 여섯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아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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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이 素輕高澄이라 自念己與[[高氏]]有隙하고 內不自安하야 據河南叛하야 歸于魏하고 又遣丁和來하야 上表言호되 臣與[[高澄]]<font color="#0054FF" size="2">【歡之子요 洋之兄이라】</font>有隙하니 請擧十三州하야 內附하노이다 上이 召群臣廷議하니 尙書僕射尙書僕射[[謝擧]]等이 皆曰 頃歲에 與魏通和하야 邊境이 無事어늘 今納其叛臣이면 竊謂非宜라하노이다 上曰 得[[景]]則塞北을 可淸이니 機會難得이라 豈宜膠柱리오 然이나 意未決하야 嘗獨言호되 我國家如金甌<font color="#0054FF" size="2">【甌는 小盆也라】</font>하야 無一傷缺이어늘 今忽受景地면 詎是事宜리오 脫致<font color="#0054FF" size="2">【脫은 或然之辭라】</font>紛紜이면 悔之何及이리오 朱异揣知上意하고 對曰 聖明御宇에 南北歸仰하니 拒而不內(納)이면 恐絶後來之望하노이다 上이 乃定議納景하야 以[[]]爲大將軍하고 封[[河南王]]하다 [[周弘正]]<font color="#0054FF" size="2">【時에 平西諮議也라】</font>이 善占候러니 前此에 謂人曰 國家數年後에 當有兵起라하더니 及聞納[[]]하고 曰 亂階在此矣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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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抗表<font color="#0054FF" size="2">【抗은 擧也라】</font>伐南燕할새 帥舟師하고 自淮入泗하니 或謂[[]]曰 燕人이 若塞大峴<font color="#0054FF" size="2">【山名이니 其地險固하니 在琅邪郡陽都縣이라】</font>之險하고 或堅壁淸野면 大軍深入하야 不唯無功이요 將不能自歸하리니 奈何오 [[裕]]曰 吾慮之熟矣로라 鮮卑貪婪하야 不知遠計하야 進利虜獲하고 退惜禾苗라 謂我孤軍遠入하야 不能持久라하야 不過進據臨朐<font color="#0054FF" size="2">【東莞郡邑이니 屬靑州라 今益都府臨朐縣이라】</font>하고 退守廣固요 必不能守險淸野하리니 敢爲諸君保之하노라 [[裕]]過大峴호되 燕兵不出이라 [[裕]]擧手指天하야 喜形于色이어늘 左右曰 公이 未見敵而先喜는 何也잇고 [[裕]]曰 兵已過險하야 士有必死之志하고 餘粮棲畝하야 人無匱乏之憂하니 虜已入吾掌中矣로다 進與燕兵戰于臨朐하니 燕衆이 大敗라 斬[[段暉]]等大將十餘人하니 [[]]遁還廣固하다 [[]]乘勝逐北<font color="#0054FF" size="2">【北은 乃陰方이니 軍敗曰北라 】</font>하야 至廣固하야 克其大城하니 [[超]]收衆入保小城이어늘 [[裕]]築長圍守之하니 北方之民이 執兵負粮하고 歸裕者日以千數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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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이 평소 [[高澄]]을 경시하였다. 그러므로 〈[[高歡]]이 죽자〉 자신과 [[高氏]]가 틈이 있음을 염려하고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河南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西魏에 歸附하였으며, 또 [[丁和]]를 보내어 梁나라에 와서 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高澄<font color="#0054FF" size="2">【高澄은 高歡의 아들이고, 高洋의 형이다.】</font>과 틈이 있으니, 13州를 들어 內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上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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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表文을 올리고<font color="#0054FF" size="2">【抗은 들어 올리는 것이다.】</font>南燕을 정벌할 때에 舟師(水軍)를 거느리고 淮水로부터 泗水에 들어가니, 혹자가 [[劉裕]]에게 이르기를 “燕나라 사람이 만약 大峴山<font color="#0054FF" size="2">【大峴은 山의 이름이니 지역이 험고하다. 琅琊郡 陽都縣에 있다.】</font>의 험한 요새를 막고 혹 성벽을 굳게 지키고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의 곡식을 깨끗이 없앤다면 큰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서 공을 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심사숙고해 보았다. 鮮卑(慕容超)는 탐욕스러워서 장구한 계책을 알지 못하여, 전진하면 노획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후퇴하면 벼싹을 아까워한다. 내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와서 지구전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들은 전진하면 臨朐<font color="#0054FF" size="2">【臨朐는 東莞郡의 邑이니, 靑州에 속하였다. 지금의 益都府 臨朐縣이다.】</font>를 점거하고 후퇴하면 廣固를 지킴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험한 곳을 지키고 들의 곡식을 말끔히 없애지 못할 것이니, 감히 諸君에게 보장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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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僕射尙書僕射[[謝擧]] 등이 모두 말하기를 “지난해 西魏와 화친하여 변경에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반역한 신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삼가 생각건대 옳지 않습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侯景]]을 얻으면 변방 북쪽을 깨끗이 평정할 수 있으니 이런 기회는 얻기 어렵다. 어찌 고지식하여 변통할 줄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아직 결정하지 못하여 일찍이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金甌<font color="#0054FF" size="2">【甌는 작은 동이이다.】</font>와 같아서 한 곳도 흠난 곳이 없다. 이제 갑자기 [[侯景]]의 땅을 받는다면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것이겠는가. 만일 이로 인하여 혼란을 야기한다면<font color="#0054FF" size="2">【脫은 혹시 그럴까 의심하는 말이다.】</font>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朱异]]가 임금의 뜻을 미루어 헤아리고는 대답하기를 “聖明하신 군주께서 천하를 다스리심에 남쪽과 북쪽에서 歸附하여 우러러 사모하니, 이들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후로 歸附하려는 자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上이 이에 [[侯景]]을 받아들이기로 의론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侯景]]을 대장군대장군으로 삼고 [[河南王]]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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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大峴山을 지났는데도 燕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자, [[劉裕]]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하였다. 좌우가 말하기를 “公이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기뻐함은 어째서입니까?하니, [[劉裕]]가 대답하기를 “군대가 이미 험한 곳을 빠져나와서 군사들이 필사의 각오가 있을 것이요, 그들이 남겨 놓은 양식이 밭에 있어서 우리들이 궁핍할 우려가 없으니, 적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전진하여 燕나라 군대와 臨朐에서 싸웠는데,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段暉]] 등 大將大將 십여 명의 목을 베니, [[慕容超]]가 도망하여 廣固로 돌아갔다. [[劉裕]]가 승세를 타고 도망하는 자들<font color="#0054FF" size="2">【北은 바로 陰方이니, 군대가 패한 것을 北라 한다.】</font>을 추격하여 廣固에 이르러 큰 성(外城)을 함락하니, [[慕容超]]가 군사들을 거두어 작은 성(內城)에 들어가 지켰다. [[劉裕]]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니, 북방의 백성들이 병기를 쥐고 양식을 짊어지고 [[劉裕]]에게 귀의하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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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弘正<font color="#0054FF" size="2">【周弘正은 이 당시 平西諮議參軍이었다.】</font>이 天象의 변화를 보고 길흉을 잘 점쳤다. 이 일에 앞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수년 뒤에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侯景]]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禍亂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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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高澄]]이 入朝于鄴<font color="#0054FF" size="2">【東魏都鄴하니 見上甲寅年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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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河王]][[紹]]<font color="#0054FF" size="2">【珪之庶子라】</font> 弑[[魏主]][[珪]]어늘 [[齊王]][[嗣]]<font color="#0054FF" size="2">【珪之長子也니 是爲太宗明元皇帝라】</font>聞變而出하니 大臣이 翕然奉迎이라 [[嗣]]殺[[紹]]하고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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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의 [[高澄]]이 鄴城에 들어가 조회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東魏는 鄴城에 도읍하였으니, 앞의 甲寅年條(534)에 보인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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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淸河王]] 拓跋紹<font color="#0054FF" size="2">【淸河王 拓跋紹는 拓跋珪의 庶子이다.】</font>가 [[魏主]][[拓跋珪]]를 시해하였다. [[齊王]] 拓跋嗣<font color="#0054FF" size="2">【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太宗 明元皇帝이다.】</font>가 변고를 듣고 출동하니,大臣大臣들이 翕然히 받들어 맞이하였다. [[拓跋嗣]]가 [[拓跋紹]]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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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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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靖)[[[靜]帝]]<font color="#0054FF" size="2">【靜字之誤라】</font> 美容儀하고 膂力過人하야 射無不中하고 好文學하야 從容沈雅하니 時人이 以爲有孝文風烈<font color="#0054FF" size="2">【靜帝善見은 乃文帝宏之孫이라】</font>이라 大將軍大將軍[[澄]]이 深忌之어늘 帝謀誅[[澄]]이라가 事覺하니 [[澄]]이 幽帝於含章堂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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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六年이라 〈秦弘始十二요 魏永興二年이라 ○ 是歲에 南燕亡하니 大二, 小六이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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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의 靜帝<font color="#0054FF" size="2">【靖은 靜字의 誤字이다.】</font>는 용모가 아름답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文學을 좋아하여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침착하며 고상하니, 당시 사람들이 “[[孝文帝]]의 풍채가 있다.”<font color="#0054FF" size="2">【靜帝 元善見은 바로 北魏 孝文帝 元宏의 손자이다.】</font>고 하였다. 대장군대장군[[高澄]]이 그를 매우 시기하였으므로 황제가 [[高澄]]을 도모하여 죽이고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高澄]]이 황제를 含章堂에 유폐하였다.
+
義熙 6년(경술 410) - 秦나라 弘始 12년이요,魏나라 永興 2년이다. ○ 이해에 南燕이 망하였다. 大國이 둘이요 小國이 여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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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使軍司軍司[[杜弼]]로 作檄移梁<font color="#0054FF" size="2">【魏侯景이 以河南降魏라가 又以河南으로 叛附于梁하니 梁封景爲河南王하고 遣兵援之하니라】</font>[[侯景]]이 自生猜貳하야 遠託關, 隴하고 依憑奸僞<font color="#0054FF" size="2">【關隴과 奸僞는 皆指西魏라】</font>하야 逆主<font color="#0054FF" size="2">【指魏主寶炬라】</font>로 定君臣之分하고 僞相<font color="#0054FF" size="2">【指宇文泰라】</font>으로 結兄弟之親하니 豈曰無恩이리오마는 終成難養이어늘 今乃授之以利器<font color="#0054FF" size="2">【威權也라】</font>하고 誨之以慢藏하니 使其勢得容奸하고 時堪乘便이면 則必自據淮南하야 亦欲稱帝<font color="#0054FF" size="2">【用黥布事하니 見漢高乙巳年이라】</font>하리니 但恐楚國亡猿에 禍延林木하고 城門失火에 殃及池魚<font color="#0054FF" size="2">【池魚는 人姓名이라 風俗通에 有池仲魚러니 城門失火하야 仲魚燒死라 故로 諺曰 城門失火에 殃及池魚라하니라 一云汲池救火하야 患及於魚也라】</font>라하더니 其後에 梁室禍敗 皆如[[]]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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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尙書尙書[[悅壽]]<font color="#0054FF" size="2">【姓名也라】</font> 開門納晉師하니 [[超]]與左右數十騎로 踰城하야 突圍出走어늘 追獲之하다 [[裕]]忿廣固久不下하야 欲阬之하고 以妻女賞將士러니 [[韓範]]諫曰 晉室南遷에 中原鼎沸라 士民이 無援하야 彊則附之하니 旣爲君臣이면 必須爲之盡力이라 彼皆衣冠舊族이요 先帝遺民이라 今王師弔伐이어늘 而盡阬之<font color="#0054FF" size="2">【阬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阬而殺之라】</font>면 使安所歸乎잇가 竊恐西北之人이 無復來蘇之望<font color="#0054FF" size="2">【書曰 徯我后하노니 后來하시면 其蘇라한대 蔡傳曰 蘇는 復生也니 謂后來면 我其復生也라】</font>矣일까하노이다 [[裕]]改容謝之라 然이나 猶斬王公以下三千人하고 沒入家口萬餘하고 夷其城隍<font color="#0054FF" size="2">【夷는 平之也요 城隍은 外塹也라 有水曰池요 無水曰隍이라】</font>하고 [[]]詣建康하야 斬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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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魏에서 軍司軍司[[杜弼]]을 시켜 檄文을 지어 梁나라에 보내어<font color="#0054FF" size="2">【東魏의 侯景이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했다가 또 河南을 가지고 배반하여 梁나라에 붙으니, 梁나라가 侯景을 봉하여 河南王으로 삼고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였다.】</font> 이르기를 “[[侯景]]이 스스로 의심하여 두마음을 품어서 멀리 關中과 隴 지방에 몸을 의탁하며 간사하고 참람한 조정(西魏)에 의지하여<font color="#0054FF" size="2">【[頭註]遠託關隴 依憑奸僞:關‧隴과 奸僞는 모두 西魏를 가리킨다.】</font> 반역한 군주인 西魏의 文帝(元寶炬)<font color="#0054FF" size="2">【반역한 군주는 魏主인 元寶炬를 가리킨다.】</font>와 군신간의 분수를 정하고 가짜 조정의 정승인 宇文泰<font color="#0054FF" size="2">【가짜 재상은 宇文泰를 가리킨다.】</font>와 형제간의 친분을 맺었으니, 어찌 은혜가 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반역한 小人은 끝내 기르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제 도리어 저들에게 예리한 병기<font color="#0054FF" size="2">【利器는 위세와 권력을 이른다.】</font>를 주고 허술하게 관리하여 盜心을 불러일으키니, 만약 형세상 간교한 계책을 행할 수 있고 시기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에 편리하다고 판단되면 반드시 스스로 淮南을 점거하여 또한 황제라 칭하고자 할 것이다.<font color="#0054FF" size="2">【黥布의 故事를 인용한 것이니, 漢나라 高祖 乙巳年條(B.C.196)에 보인다.】</font> 다만 楚나라에서 원숭이를 잃자 화가 숲의 나무에 뻗치고, 성문에 불이 나자 재앙이 [[池魚]]에게 미칠까<font color="#0054FF" size="2">【池魚는 사람의 姓名이다. ≪風俗通義≫에 “池仲魚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城門에 불이 나서 池仲魚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城門에 불이 나자 재앙이 池魚에게 미쳤다.’ 한다.” 하였다. 一說에는 “연못의 물을 길어다 불을 꺼서 재앙이 물고기에게 미쳤다.”고 한다.】</font> 두렵다.” 하였는데, 그 뒤에 梁나라의 禍敗가 모두 [[杜弼]]의 말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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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의 尙書尙書 悅壽<font color="#0054FF" size="2">【悅壽는 姓名이다.】</font>가 성문을 열고 晉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慕容超]]가 좌우에서 따르던 騎兵 수십 명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했는데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劉裕]]는 廣固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서 성 안의 병사들을 묻어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晉나라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는데, [[韓範]]이 간하기를 “晉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中原이 물 끓듯 소란하였습니다. 선비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든 강대하면 그에게 歸附한 것이니, 이미 군신간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舊族(예부터 내려온 지체 높은 집안)이요, 先帝의 遺民들입니다. 지금 王의 군대가 죄 있는 자를 정벌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모조리 묻어 죽인다면<font color="#0054FF" size="2">【阬은 구덩이(참호)이고 빠지는 것이니,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이른다.】</font>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西北 사람들이 다시는 의로운 군대가 와서 소생하게 해줄 것이라 희망<font color="#0054FF" size="2">【≪書經≫ 〈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소생할 것이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蘇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다시 살아남을 이른다.” 하였다.】</font>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劉裕]]가 낯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王公 이하 관원 3천 명을 목 베고 그들의 家屬 1만여 명을 籍沒하여 노비로 삼고 廣固의 城隍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font color="#0054FF" size="2">【夷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요, 城隍은 바깥 참호이다. 물이 있는 곳을 池라 하고 물이 없는 곳을 隍이라 한다.】</font>[[慕容超]]를 建康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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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辰] 梁太淸二年, 魏大統十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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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 〈梁太淸二年이요 魏大統十四年이요 東魏武定六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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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548) - 梁나라 太淸 2년이고, 魏나라 大統 14년이고, 東魏武定 6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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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이 與東魏戰敗하고 自求貶削이어늘 [[梁主]][[]]兵新破라하야 未忍移易하고 卽以[[景]]爲南豫州牧南豫州牧한대 [[蕭介]]上表諫曰 竊聞凶人之性不移는 天下之惡이 一也라하니이다 [[侯景]]이 以凶狡之才로 荷[[高歡]]卵翼之遇어늘 [[歡]]墳土未乾에 卽還反噬라가 逃死關西하니 [[宇文]]不容이라 故로 復投身於我니이다 棄鄕國을 如脫屣<font color="#0054FF" size="2">【履不躡跟曰屣(躧)니 脫之者는 言易棄也라】</font>하고 背君親을 如遺芥하니 豈知遠慕聖德하야 爲江, 淮之純臣乎잇가 [[梁主]]不能用이러라
+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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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晉自濟江以來로 威靈不競하니 戎狄橫騖하야 虎噬中原이라 [[劉裕]]始以王師로 翦平東夏어늘 不於此際에 旌禮賢俊하고 慰撫疲民하야 宣愷悌之風하고 滌殘穢之政하야 使群士嚮風하고 遺黎企踵하고 而更恣行屠戮하야 以快忿心하니 迹其施設하면 曾[[]], [[]]<font color="#0054FF" size="2">【苻堅與姚萇이라】</font>之不如라 宜其不能蕩壹四海하야 成莫大之業이니 豈非雖有智勇이나 而無仁義하야 使之然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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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이 東魏와 싸워 패전하고 스스로 직책을 낮출 것을 청하자, [[梁主]]는 [[侯景]]의 군대가 처음으로 격파되었다 하여 차마 봉지를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고 곧 [[侯景]]을 南豫州牧南豫州牧으로 삼았다. [[蕭介]]가 表文을 올려 간하기를 “삼가 듣건대 흉악한 사람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 것은 천하의 악한 사람이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侯景]]이 흉악하고 교활한 재주로 [[高歡]]의 품어주고 길러주는 우대를 입었는데, [[高歡]]이 죽자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즉시 [[高氏]]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關西 지방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런데 [[宇文泰]]가 그를 용납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우리 梁나라에 투신한 것입니다. 故國을 저버리는 것을 헌신짝처럼 여기고<font color="#0054FF" size="2">【신발을 발꿈치까지 신지 않은 것(신을 발끝에 꿰고 바삐 걷는 것)을 屣라고 하니, 이것을 벗는다는 것은 쉽게 버림을 말한다.】</font> 군주와 친척을 배반하는 것을 草芥처럼 여기니, 멀리서 폐하의 聖德을 사모하여 江‧淮(梁나라)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으나, [[梁主]]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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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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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온 뒤로부터 국가의 威勢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범처럼 中原을 집어 삼켰다. [[劉裕]]가 처음에 王의 군대로 東夏(齊나라 지역)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때에 어진 이와 준걸스런 이를 표창하고 예우하며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여, 화락한 풍속을 펴며 잔학하고 더러운 정사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風聞만 듣고도 향하게 하고 오랑캐의 통치하에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발돋움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는 도리어 살육을 자행하여 분한 마음을 쾌하게 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일찍이 [[苻氏]]와 姚氏<font color="#0054FF" size="2">【苻와 姚는 前秦의 苻堅과 後秦의 姚萇이다.】</font>만도 못하다. 그가 四海를 통일하여 위대한 기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당연하니, 지모와 용맹은 있었으나 仁義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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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二月에 東魏大將軍東魏大將軍[[澄]]이 遣書復求通好어늘 [[梁主]]與朝臣議之하니 [[朱异]], [[張綰]]<font color="#0054FF" size="2">【朱异는 右衛將軍이요 張綰은 御史中丞이라】</font>等이 皆曰 靜寇息民은 和實爲便이니이다 司農卿司農卿[[傅岐獨]]曰 [[高澄]]이 何事須和리오 必是設間<font color="#0054FF" size="2">【間은 去聲이라】</font>하야 欲令[[侯景]]自疑니 [[景]]意不安이면 必圖禍亂하리니 若許通好면 正墮其計中이니이다 [[异]]等이 固執宜和어늘 [[梁主]]亦厭用兵하야 乃從[[异]]言하니 [[景]]이 果爲反計러라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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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2월에 東魏의 大將軍大將軍[[高澄]]이 梁나라에 편지를 보내어 다시 우호를 맺을 것을 청하였다. [[梁主]]가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니, [[朱异]]와 張綰<font color="#0054FF" size="2">【朱异는 右衛將軍이고, 張綰은 御史中丞이었다.】</font> 등이 모두 말하기를 “兵亂을 종식시키고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는 데는 화친하는 것이 실로 상책입니다.” 하였다. 司農卿司農卿[[傅岐]]만이 홀로 말하기를 “[[高澄]]이 무슨 일로 화친하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이간질<font color="#0054FF" size="2">【間은 去聲(이간질하다)이다.】</font>하는 계책을 써서 [[侯景]]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 [[侯景]]은 마음이 불안해지면 반드시 반란을 도모할 것입니다. 만약 東魏와 우호를 맺기를 허락한다면 바로 그들의 이간질하는 술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朱异]] 등이 화친해야 한다고 굳이 고집하자, [[梁主]] 또한 用兵하는 것을 싫어해서 마침내 [[朱异]] 등의 말을 따랐는데, [[侯景]]이 과연 모반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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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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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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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賀王]][[正德]]<font color="#0054FF" size="2">【臨川王宏之子라】</font>이 所至에 貪暴不法하야 屢得罪於[[梁主]]하니 由是로 憤恨하야 陰養死士하고 儲米積貨하고 幸國家有變이러니 [[景]]知之하고 致牋於[[正德]]曰 今天子年尊에 姦臣이 亂國하야 大王이 屬當[[儲貳]]어늘 中被廢黜하니 四海業業하야 歸心大王이라 [[景]]雖不敏이나 實思自效하노니 願王允副하소서 [[正德]]이 大喜曰 機事는 在速이니 今其時矣로다 [[景]]이 反於壽陽이어늘 [[梁主]]以[[臨賀王]][[正德]]으로 爲平北將軍平北將軍, 都督京師諸軍事都督京師諸軍事하야 屯丹陽郡丹陽郡하다 [[正德]]이 遣大船數十艘<font color="#0054FF" size="2">【艘는 音搔니 船之總名이라】</font>하야 詐稱載荻이라하고 密以濟[[]]한대 [[]]自橫江으로 濟于采石하니 有馬數百匹과 兵八千人이러라 至慈湖하니 是時에 梁興四十七年에 境內無事하야 公卿在位及閭里士大夫 罕見兵甲이러니 賊至猝迫하니 公私駭震이라 [[正德]]이 守宣陽門이라가 帥衆하고 於張侯橋에 迎[[景]]入宣陽門하야 至闕下하다 [[正德]]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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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徐道覆]]이 聞[[劉裕]]北伐하고 勸[[盧循]]<font color="#0054FF" size="2">【徐道覆은 廣州刺史盧循之妹夫也요 循은 乃孫恩之黨而恩之妹夫也니 見上己亥年이라】</font>하야 乘虛襲建康하니 [[]]이 從之하다 朝廷이 急徵[[劉裕]]하니 [[]]方議留鎭下邳하야 經營司, <font color="#0054FF" size="2">【二州名이니 司州는 洛陽이요 雍州는 長安이라】</font>이러니 會得詔書하고 引兵還할새 以船載輜重하고 自帥精銳步歸라 至山陽하야 聞[[何無忌]]敗死<font color="#0054FF" size="2">【無忌引兵討[[盧循]]이라가 遇道覆하야 戰敗死之라】</font>하고 慮京邑失守하야 卷甲兼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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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賀王]] 蕭正德<font color="#0054FF" size="2">【蕭正德은 臨川王 蕭宏의 아들이다.】</font>은 부임하는 곳마다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不法을 자행하여 [[梁主]]에게 자주 죄를 얻으니, 이로 말미암아 분하게 여기고 한하여 남몰래 결사대를 길렀으며 쌀을 비축하고 재화를 모으고서 국가에 변란이 생기기를 바랐다. [[侯景]]이 이것을 알고 [[蕭正德]]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지금 天子의 춘추가 높으시니 간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大王이 본래 儲貳(太子)儲貳(太子)가 되었어야 하는데 중간에 폐출당하니, 온 천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大王에게 민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실로 왕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바칠 것을 생각하니, 바라건대 왕은 민심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蕭正德]]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기밀의 일은 신속함에 달려 있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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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徐道覆]]이 [[劉裕]]가 북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盧循]]에게 권하여<font color="#0054FF" size="2">【徐道覆은 廣州刺史 盧循의 妹夫이고, 盧循은 바로 孫恩의 黨이면서 孫恩의 妹夫이니, 앞의 己亥年條(399)에 보인다.】</font> 빈틈을 타서 建康을 습격하게 하니, [[盧循]]이 그 말을 따랐다. 朝廷에서 급히 [[劉裕]]를 부르니, [[劉裕]]가 막 下邳에 주둔해서 司州와 雍州<font color="#0054FF" size="2">【司州와 雍州는 두 州의 이름이니, 司州는 洛陽이고 雍州는 長安이다.】</font>를 경영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침 詔書를 받게 되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올 적에 배에다 輜重을 싣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보로 돌아왔다. 山陽에 이르러 [[何無忌]]가 패전하여 죽었다<font color="#0054FF" size="2">【何無忌가 군대를 이끌고 盧循을 토벌하다가 徐道覆을 만나 전투에 패하여 죽었다.】</font>는 말을 듣고 京邑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해서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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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侯景]]이 壽陽에서 반란하자,[[梁主]]는 [[臨賀王]][[蕭正德]]을 平北將軍‧都督京師諸軍事平北將軍‧都督京師諸軍事로 삼아서 丹陽郡에 주둔하게 하였다. [[蕭正德]]이 큰 배 수십 척<font color="#0054FF" size="2">【艘는 음이 소이니, 배의 총칭이다.】</font>을 보내면서 갈대를 실어 온다고 속이고는 은밀히 [[侯景]]을 건네 주었다. [[侯景]]이 橫江으로부터 采石으로 건너오니, 軍馬가 수백 필이요 병사가 8천 명이었다. 慈湖에 이르니, 이때는 梁나라가 건국한 지 47년이었는데, 나라 안이 평안하고 무사하여 벼슬자리에 있는 公卿들로부터 閭里의 士大夫士大夫들에 이르기까지 병기와 갑옷을 본 일이 드물었으므로 적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관원과 백성들이 놀라고 진동하였다. [[蕭正德]]이 宣陽門을 지키다가 군대를 거느리고 張侯橋에서 [[侯景]]을 맞이하여 宣陽門으로 들어와 대궐 아래에 이르렀다. [[蕭正德]]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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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己巳] 梁太淸三年, 魏大統十五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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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巳] 〈梁太淸三年이요 魏大統十五年이요 東魏武定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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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549) - 梁나라 太淸 3년이고, 魏나라 大統 15년이고, 東魏武定 7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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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侯景]]이 百道攻城하야 晝夜不息이라 [[梁主]]聞城已陷하고 歎曰 自我得之하고 自我失之하니 亦復何恨이리오 俄而오 [[]]이 入見於太極東堂할새 以甲士五百人으로 自衛러니 [[]]이 稽顙殿下하야 不敢仰視하고 汗流被面이라 退謂[[王僧貴]]<font color="#0054FF" size="2">【景之親貴隆重者라】</font>曰 吾常跨鞍對陳(陣)에 矢刃交下로되 而意氣安緩하야 了無怖心이러니 今見[[蕭公]]에 使人自慴<font color="#0054FF" size="2">【慴은 音疊이니 懼怯也라】</font>하니 豈非天威難犯이리오 吾不可以再見之라하더라 是後에 [[梁主]]所求를 多不遂志<font color="#0054FF" size="2">【爲侯景所制라】</font>하고 飮膳도 亦爲所裁節하니 憂憤成疾하다 五月丙辰에 [[梁主]]臥淨居殿이라가 口苦하야 索蜜不得이라 再曰 荷荷라하고 遂殂하니 年八十六이라 是日에 太子卽位하다
+
○ 五月에 [[劉毅]][[]]으로 戰于桑落(州)[洲]하야 [[]]兵이 大敗라 乙丑에 [[盧循]]이 至淮口하니 中外戒嚴이라 [[]]謂將佐曰 賊이 若於新亭直進이면 其鋒을 不可當이니 宜且迴避어니와 若回泊西岸이면 此成擒爾니라 十二月에 裕帥衆軍하고 齊力擊[[]]하니 [[]]兵이 大敗라 走趣豫章이라가 收散卒하야 徑還番禺<font color="#0054FF" size="2">【番는 音波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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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梁武]]以齊之同姓으로 世系有考하고 遭時昏亂하야 遂移齊鼎이라 孝慈恭儉하고 博學能文하며 敬禮大臣하고 勤於庶政하며 立贖刑條하고 赦吉(翁)[翂]死하며 徵士求言하고 尊經興學하야 禮樂制度 相望于冊이라 是以로 天監之世에 時和歲豐하야 海內無事라 然이나 晩節末路에 釁起蕭墻하고 禍成戎羯하야 衣冠이 斃鋒鏑之下하고 老幼粉戎馬之足하야 金甌遂缺하고 寶鼎屢移하야 爲千古所閔笑者는 何哉오 議者僉謂 帝信[[朱异]]之謀하고 貪河南之地하야 棄與國하고 納叛人하야 其禍遂至於此라하니 殊不知帝崇尙釋敎하야 變夏爲夷하야 堂堂袞冕이 至加夷狄之衣하고 宗廟去牲하야 至具蔬果之薦하니 如是면 則不待[[侯景]]入國而江左已爲夷狄之區요 不待社稷社稷變遷而宗廟已不血食矣라 其後에 臣叛其君하고 子叛其父하야 或頓兵自固而不急君父之難하고 或擧州降仇而不恤宗國之亡하니 夫以浮屠之學이 棄君臣, 絶父子하야 而末流之禍 其烈如此어늘 有國家者 尙欲崇奉其敎而不悟하니 果何爲哉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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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侯景]]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梁主]]는 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스스로 천하를 얻었고 내가 스스로 천하를 잃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侯景]]이 들어와서 太極殿 東堂에서 뵐 적에 甲士 5백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侯景]]이 大殿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황제를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얼굴이 온통 땀으로 뒤덮였다. [[侯景]]이 물러가 王僧貴<font color="#0054FF" size="2">【王僧貴는 侯景이 친애하고 귀하게 여겨 높이고 중시하는 자이다.】</font>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안장에 올라 적진과 대치할 적에 화살과 칼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으나 뜻과 기운이 편안하고 느긋하여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蕭公]]뵙자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두렵게 만드니,<font color="#0054FF" size="2">【慴은 음이 접(습)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font> 아마도 天子의 위엄을 범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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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劉毅]][[盧循]]과 桑落洲에서 싸워 [[劉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乙丑日(14일)에 [[盧循]]이 淮口에 이르니, 中外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劉裕]]가 장수와 보좌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만약 新亭에서 곧바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의 銳鋒(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당해낼 수 없으니 마땅히 우선 회피해야 하겠지만, 만약 진로를 바꾸어 西岸에 정박한다면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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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梁主]]는 요구하는 바를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고,<font color="#0054FF" size="2">【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侯景에게 제재당한 것이다.】</font> 마시는 음료와 반찬도 제재당하니,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5월 丙辰日(2일)에 [[梁主]]가 淨居殿에 누워 있다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荷荷’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으니, 이때 나이가 86세였다. 이날 太子太子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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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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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武帝]]는 齊나라의 同姓으로서 상고할 만한 世系가 있고 혼란한 때를 만나서 마침내 齊나라의 政權을 잡았다.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博學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大臣들을 공경히 예우하고 政事에 부지런하였으며, 贖刑의 조목을 세우고 [[吉翂]]의 죽음을 용서해 주었으며, 선비를 초빙하여 훌륭한 말을 구하고, 經書를 높이고 학교를 일으켜서 禮樂과 制度가 서책에 서로 이어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天監 연간에는 四時가 조화롭고 年事가 풍년이 들어서 海內에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틈이 내부에서 생겨나고 禍가 오랑캐에게 이루어져서, 衣冠 차림의 士大夫들이 칼날 아래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혀 가루가 되게 하여, 金甌(국가)가 마침내 손상되고 寶鼎(정권)이 여러 번 바뀌어 천고에 불쌍히 여겨지고 비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武帝]]가 [[朱异]]의 계책을 믿고 河南 땅을 탐해서 동맹국을 버리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여 그 禍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武帝]]가 佛敎를 숭상해서 中夏를 바꾸어 오랑캐가 되게 하여, 당당한 곤룡포와 면류관을 오랑캐의 옷[袈裟]밑에 받쳐 입고, 宗廟에 희생을 없애고 채소와 과일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다면 [[侯景]]이 梁나라에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江東 지역이 이미 오랑캐의 구역이 되었고, 社稷이 바뀌고 옮겨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宗廟가 이미 血食을 못하게 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신하가 군주를 배반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혹은 군대를 주둔시켜 자신만 견고히 지키면서 君父의 어려움을 급히 구원하지 않고, 혹은 고을을 가지고 원수에게 항복하여 宗國(祖國)이 망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浮屠의 학문이 군신간의 의리를 버리고 부자간의 인륜을 끊어서 末流의 앙화가 그 혹독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國家를 소유한 군주가 오히려 佛敎의 가르침을 신봉하고자 하고 그 폐단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과연 어째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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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劉裕]]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盧循]]을 공격하니, [[盧循]]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도망하여 豫章으로 향했다가 흩어진 군대를 수합하여 곧바로 番禺<font color="#0054FF" size="2">【番는 음이 파이다.】</font>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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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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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月에 梁[[臨賀王]][[正德]]이 怨[[侯景]]賣己하야 密書로 召鄱陽王範<font color="#0054FF" size="2">【合州刺史라】</font>하야 使以兵入이러니 景이 遮得<font color="#0054FF" size="2">【謂遮截於路而得之라】</font>其書하고 縊殺之<font color="#0054FF" size="2">【侯景殺蕭正德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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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에 梁나라 [[臨賀王]][[蕭正德]]은 [[侯景]]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밀서로 [[鄱陽王]] 蕭範<font color="#0054FF" size="2">【鄱陽王 蕭範은 合州刺史였다.】</font>을 불러서 병력을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는데, [[侯景]]이 그 편지를 가로채고는<font color="#0054FF" size="2">【遮得은 길에서 가로막고 얻음을 이른다.】</font>[[蕭正德]]을 목 졸라죽였다.<font color="#0054FF" size="2">【侯景이 蕭正德을 죽인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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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月에 東魏[[高澄]]이 爲[[蘭京]]所殺<font color="#0054FF" size="2">【[[京]]은 衡州刺史衡州刺史[[蘭]](起)[欽]之子니 [[澄]]以爲膳奴라 京屢訴어늘 [[澄]]欲殺之하니 因是謀亂하니라 [通鑑要解]澄嘗獲衡州刺史蘭欽子京하야 爲膳奴라 京屢自訴하니 澄杖之曰 更訴하면 當殺하리라하다 後에 京이 進食할새 置刀盤下라가 殺之하다】</font>하다 時에 變起倉猝하니 內外震駭라 [[太原公]][[洋]]이 聞之하고 指麾部分하야 入討群賊하야 斬而臠之하다 [[洋]]至하야 大會文武할새 神彩英暢하고 言辭敏洽하니 衆皆大驚이러라 [[澄]]政令有不便者면 [[洋]]皆改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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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七年이라 〈秦弘始十三이요 魏永興三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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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高澄]]이 初爲世子에 以好色之故로 幾陷其父於槊刃之下하야 已不容誅어늘 及其嗣霸에 不承先志하고 肆爲悖逆하야 幽辱其主를 如拘寇仇라 未幾에 膳奴之刃이 禍起不測하니 天道好還이 有以也夫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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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盧循]]이 奔交州어늘 刺史刺史[[杜慧度]]斬之<font color="#0054FF" size="2">【循至龍編津하니 杜慧度 悉散家財以賞軍士하고 與循合戰할새 擲雉尾炬하야 焚其艦하고 以步兵俠岸射之하니 衆潰하야 自投于水어늘 慧度取尸斬首하야 函送建康하니라】</font>하야 送首建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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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東魏의 [[高澄]]이 [[蘭京]]에게 살해당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釋義]蘭京은 衡州刺史 蘭欽의 아들이니, 高澄이 음식을 만드는 종으로 삼았다. 蘭京이 여러 번 하소연하자 高澄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로 인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通鑑要解]高澄은 일찍이 衡州刺史 蘭欽의 아들 蘭京을 잡아 음식 만드는 종으로 삼았는데, 蘭京이 자주 하소연하니 高澄이 매질하며 이르기를 “다시 하소연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후에 蘭京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두었다가 高澄을 찔러 죽였다.】</font> 이때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내외가 진동하고 놀랐다. [[太原公]][[高洋]]이 이 말을 듣고 휘하의 부대를 지휘하여 들어와서 역적들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살을 저몄다. [[高洋]]이 晉陽에 이르러서 문무백관들을 크게 모을 때에 神彩가 英明하고 발랄하며 言辭가 민첩하고 흡족하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高澄]]의 政令政令 중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高洋]]이 모두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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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7년(신해 411) - 秦나라 弘始 13년이고, 魏나라 永興 3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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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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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澄]]이 과거 世子世子였을 때에 여색을 좋아한 것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高歡]])를 창과 칼날 아래에 거의 빠뜨릴 뻔하여 그 죄가 이미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 霸業을 잇게 되자 先王의 뜻을 계승하지 않고 제멋대로 悖逆한 짓을 하여 군주를 幽置하고 욕보이기를 도둑과 원수처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만드는 종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숨겼다가〉 [[高澄]]을 찔러 죽여 禍가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났으니, 天道가 돌려주기를 좋아함이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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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盧循]]이 交州로 도망하자, 交州刺史交州刺史[[杜慧度]]가 그의 목을 베어<font color="#0054FF" size="2">【盧循이 龍編津에 이르니, 杜慧度가 家財를 다 털어 軍士들에게 상을 주고 盧循과 맞붙어 싸울 때에 雉尾炬를 던져서 戰艦을 불태우고 步兵을 거느리고서 강 언덕을 끼고 활을 쏘니, 盧循의 무리가 궤멸되었다. 盧循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자, 杜慧度가 盧循의 시체를 건져서 목을 베어 함에 넣어 建康으로 보냈다.】</font> 首級을 建康으로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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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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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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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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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梁始興太守始興太守[[陳霸先]]<font color="#0054FF" size="2">【字[[興國]]이니 吳興長城人이라 其本甚微일새 自云漢太丘長寔之後也라하니 是爲陳高祖라】</font>이 結郡中豪傑하야 欲討[[侯景]]할새 郡人[[侯安都]]와 張偲等이 各帥衆千餘人하고 歸之어늘 遣使하야 間道<font color="#0054FF" size="2">【間은 去聲이니 微路也라 投空隙而行하야 不公顯也라】</font>詣江陵하야 受[[湘東王]][[繹]]<font color="#0054FF" size="2">【武帝第七子니 是爲元帝라】</font>節度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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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九年이라 〈秦弘始十五요 魏永興五年이요 夏鳳翔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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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魏主]][[]]이 殂하니 諡曰[[宣武皇帝]]라하고 廟號[[世宗]]이라하다 子[[詡]]立하니 甫六歲일새 母胡氏稱制러니 及[[魏主]]旣長에 好遊騁하야 不親視朝하고 而胡后方淫亂하니 魏政始衰하니라 將軍將軍[[張彛]]之子[[仲瑀]] 上封事하야 排抑武人하니 喧謗盈路라 立榜大巷하고 剋期會集하야 屠其家라호되 [[彛]]父子不以爲意러니 至是하야 羽林, 虎賁近千人이 相率至尙書省尙書省하야 詬罵하고 以瓦石으로 擊省門하니 上下懾懼하야 不敢禁討라 遂至[[彛]]第하야 焚其舍하고 曳[[彛]]父子하야 敺擊投火中하니 [[仲瑀]]는 重傷走免하고 [[彛]]는 死하니 遠近震駭라 [[胡后]]收其兇强八人하야 斬之하고 餘不復治하고 大赦以安之하니라 懷朔鎭函使高歡이 至洛陽이라가 見[[張彛]]之死하고 還家傾貲하야 以結客하니 或問其故한대 [[歡]]曰 宿衛相率하야 焚大臣之第호되 朝廷이 懼而不問이라 爲政如此하니 事可知矣니 財物을 豈可常守邪아 [[歡]]이 自先世로 坐法徙北邊하야 遂習鮮卑之俗하고 深沈有大志하야 與[[侯景]]等으로 相友善하고 以任俠으로 雄鄕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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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王]][[勃勃]]이 [[叱(于)[]阿利]]<font color="#0054FF" size="2">【叱干은 代北複姓也요 阿利는 其名이라】</font>로 領將作大匠將作大匠하야 發嶺北夷, 夏十萬人하야 築都城於朔方水北, 黑水之南<font color="#0054FF" size="2">【朔方水北은 資治에 水作郡이라 [通鑑要解]勃勃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font>하다 [[阿利]]性巧而殘忍하야 蒸土築城할새 錐入一寸이면 卽殺作者而幷築之어늘 [[勃勃]]이 以爲忠이라하야 委任之하니 凡造兵器成에 呈之하면 工人이 必有死者라 射甲不入則斬弓人하고 入則斬甲匠하니 由是로 器物이 皆精利러라 [[勃勃]]이 謂古人氏族無常이라하야 改姓[[赫連氏]]<font color="#0054FF" size="2">【言其徽赫與天連也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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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魏[[胡太后]] 臨朝以來로 嬖倖用事하야 政事縱弛하니 盜賊蜂起하고 封疆日蹙이라 [[魏主]][[詡]]寖長에 [[太后]]自知所爲不謹하고 務爲壅蔽하니 母子嫌隙日深이러라 時에 六州大都督秀容酋長爾朱榮이 兵强이라 [[高歡]]이 見[[榮]]하고 卽勸擧兵하야 淸帝側이러니 會에 [[魏主]]殂하니 [[胡太后]]鴆之也라 後에 諡曰[[孝明皇帝]]라하다 [[爾朱榮]]이 擧兵하야 立孝文之姪長樂王子攸하고 沈[[胡太后]]于河하니 封[[榮]][[太原王]]하야 還晉陽하다 [[北海王]][[顥]]奔梁이어늘 梁이 立之하고 遣將送入洛陽하니 [[子攸]]出奔이라 [[榮]]이 渡河來救하니 [[顥]]走死어늘 [[子攸]]歸하야 加[[榮]]天柱大將軍天柱大將軍하다 [[榮]]이 蓄不臣之志어늘 [[魏主]]密謀誅之하고 [[榮]]入에 手刺之하니 [[爾朱世隆]]이 與[[爾朱兆]]로 立宗室[[長廣王]][[曄]]하야 入洛陽하다 [[子攸]]遇弑하니 後에 諡曰[[孝莊皇帝]]라하다 [[世隆]]은 又以[[曄]]疏遠이라하야 廢之하고 而立[[孝文]]之姪[[廣陵王]][[恭]]이러니 [[高歡]]이 起兵誅[[爾朱氏]]하고 入洛陽하야 廢[[恭]]而立[[孝文]]之孫[[平陽王]][[脩]]하다 [[脩]]弑[[恭]]하니 後에 諡曰[[節閔皇帝]]라하다 [[歡]]이 自爲大丞相大丞相하야 建府於晉陽晉陽하고 居之하다 [[魏主]]畏[[歡]]하야 謀伐晉陽이러니 [[]]이 擁兵來어늘 [[魏主]]奔長安하야 依關西大都督關西大都督[[宇文泰]]하고 以[[泰]]로 爲大丞相大丞相하니 [[歡]]追[[魏主]]不及이라 遂立[[淸河王]]世子[[善見]]於洛陽하고 遷于鄴하니 魏自道武로 至是一百四十九年而分爲東魏, 西魏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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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脩]]至長安하야 踰半年에 又與[[泰]]로 有隙하니 [[泰]]鴆之러니 後에 諡曰[[孝武皇帝]]라하다 [[泰]]立[[南陽王]][[寶炬]]하니라 [[歡]]이 與[[泰]]로 連年相攻戰하야 互有勝負러니 [[歡]]卒에 遺書囑其子[[澄]]曰 [[侯景]]이 有飛揚跋扈之志하니 非汝所能制요 堪敵[[景]]者는 惟[[慕容紹宗]]이라하더니 [[景]]이 果叛하야 以河南으로 降西魏라가 未幾에 復附于梁하니 梁이 封[[景]]爲河南王河南王하다 [[景]]使至梁이어늘 梁群臣이 皆不欲納하고 [[梁主]]亦自謂我國家如金甌하야 無一傷缺하니 恐納[[景]]이면 因以生事라호되 惟朱异力勸納之하니라 東魏遣[[慕容紹宗]]하야 擊[[景]]하니 [[景]]이 敗南走하야 襲梁壽春據之하고 請命梁하니 就以爲南豫州牧南豫州牧하다 旣而요 東魏求成於梁하니 意欲得[[景]]이라 [[景]]恨梁通東魏하야 遂反於壽陽하야 引兵南渡하야 圍建康하니라 梁主自卽位以來로 江左久無事라 惟崇佛法하야 屢捨身佛寺하니 上下化之러니 及景逼臺城에 援兵至者 皆爲景所敗하고 城中飢甚이라 [[梁主]]遣人하야 與景盟하고 以爲大丞相하니 臺城이 受圍五月而陷이라 [[梁主]]爲景所制하고 飮膳을 亦被裁損이라 憂憤成疾하야 口苦索蜜이라가 不得하야 再曰荷荷라하고 遂殂하니 在位四十八年에 改元者七이니 曰天監, 普通, 大通, 中大通, 大同, 中大同, 太淸이라 先是에 太子統이 仁明孝儉하고 好學有文하야 在東宮三十年而終하니라 [[梁主]]舍嫡孫而立別子하야 至是卽位하니 是爲太宗簡文皇帝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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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梁나라 始興太守始興太守[[陳霸先]]<font color="#0054FF" size="2">【陳霸先은 字가 興國이니, 吳興 長城 사람이다. 근본이 매우 미미하므로 스스로 이르기를 “漢나라 太丘長 陳寔의 후예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가 바로 陳나라 高祖이다.】</font>이 郡內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侯景]]을 토벌하려고 할 적에 고을 사람 [[侯安都]]와 [[張偲]] 등이 각각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歸附하자, 使者를 보내어 샛길<font color="#0054FF" size="2">【間은 去聲이니 샛길이다. 좁은 틈으로 길을 가서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font>로 江陵에 이르러서 [[湘東王]] 蕭繹<font color="#0054FF" size="2">【湘東王 蕭繹은 武帝의 일곱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元帝이다.】</font>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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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9년(계축 413) - 秦나라 弘始 15년이고, 魏나라 永興 5년이고, 夏나라 鳳翔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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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魏主(北魏)[[元恪]]이 죽으니, 시호를 [[宣武皇帝]]라 하고 廟號를 [[世宗]]이라 하였다. 아들[[元詡]]가 즉위하니, 나이가 겨우 6세이므로 母后母后[[胡氏]]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魏主]]가 장성하자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여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지 않았고 [[胡后]]가 음란하니, 魏나라 정사가 비로소 쇠하였다. 장군 [[張彛]]의 아들[[張仲瑀]]가 封事를 올려 武人을 배척하고 억제하니, 비방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에 武人들이 큰 길거리에 비방하는 榜을 써 붙이고 날짜를 잡아 모여서 그의 집을 도륙하기로 약속하였으나 [[張彛]] 父子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에 侍從侍從을 맡은 羽林軍羽林軍과 虎賁衛虎賁衛 근 천 명이 서로 이끌고 尙書省에 이르러서 [[張彛]] 父子를 욕하고 꾸짖고는 기와와 돌로 尙書省의 門을 치니, 上下가 두려워하여 감히 금지하고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마침내 [[張彛]]의 집에 이르러서 집에 불을 지르고 [[張彛]] 父子를 끌어내어 구타하고 불 속에 던져넣으니, [[張仲瑀]]는 중상을 입고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張彛]]는 죽었다. 이에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胡后]]가 그들 중 흉악하고 세력이 강한 자 8명만 체포하여 목을 베고, 그 나머지는 다시 죄를 다스리지 않고 크게 사면하여 이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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懷朔鎭函使函使인 [[高歡]]이 洛陽에 왔다가 [[張彛]]가 죽은 것을 보고는 집에 돌아와 재산을 모두 털어 문객들과 교분을 맺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高歡]]이 말하기를 “宿衛兵들이 서로 이끌고서 大臣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않는다. 정사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만하다. 재물을 어찌 항상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高歡]]은 先代로부터 법에 걸려 북쪽 변방으로 이주당해서 마침내 鮮卑族의 풍속을 익혔으며,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큰 뜻이 있어서 [[侯景]] 등과 서로 친하였고 任俠으로 鄕里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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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魏나라 [[胡太后]]가 조정에 임어한 이후로 총애하는 小人들이 用事하여 政事가 해이해지니, 도적들이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고 국경이 날로 위축되었다. [[魏主]][[元詡]]가 점점 장성하자 [[太后]]는 자신의 행실이 신중하지 못하였음을 알고 은폐하기를 힘쓰니, 母子間에 틈이 날로 깊어졌다. 이때 六州大都督六州大都督인 秀容縣 酋長 [[爾朱榮]]의 군대가 강성하였다. [[高歡]]이 [[爾朱榮]]을 만나 보고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황제의 측근을 깨끗이 소탕할 것을 권하였는데, 마침 [[魏主]]가 죽으니[[胡太后]]가 독살한 것이었다. 후에 시호를 [[孝明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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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朱榮]]이 군대를 일으켜[[孝文帝]]의 조카인 [[長樂王]][[元子攸]]를 세우고[[胡太后]]를 黃河에 빠뜨려죽이니, 魏나라에서 [[爾朱榮]]을 [[太原王]]에 봉하여晉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北海王]][[元顥]]가 梁나라로 도망하자, 梁나라에서 그를 황제로 세우고 장수를 보내어 호송해서 洛陽으로 들여보내니, [[元子攸]]가 도망하였다. [[爾朱榮]]이 황하를 건너와서 구원하니, [[元顥]]가 패주하다가죽었으므로[[元子攸]]가 돌아와서[[爾朱榮]]을 天柱大將軍天柱大將軍에 임명하였다. [[爾朱榮]]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자 [[魏主]]가 은밀히 그를 죽일 것을 도모하고는 [[爾朱榮]]이 들어오자 직접 찔러죽이니, [[爾朱榮]]의 從弟인 [[爾朱世隆]]이 [[爾朱榮]]의 從子인 [[爾朱兆]]와 함께 宗室인 [[長廣王]][[元曄]]을 세워洛陽으로 들어갔다. [[元子攸]]가 시해당하니, 뒤에 시호를 [[孝莊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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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朱世隆]]은 또 [[元曄]]이 왕실과 혈연관계가 소원하다 하여 폐위하고[[孝文帝]]의 조카인 [[廣陵王]][[元恭]]을 세웠는데, [[高歡]]이 군대를 일으켜 [[爾朱氏]]를 죽이고는 洛陽으로 들어와 [[元恭]]을 폐위하고 [[孝文帝]]의 손자인 [[平陽王]][[元脩]]를 세웠다. [[元脩]]가 [[元恭]]을 시해하니, 뒤에 시호를 [[節閔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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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歡]]이 스스로 大丞相大丞相이 되어 晉陽에 府를 세우고 그곳에 거주하였다. [[魏主]]가 [[高歡]]을 두려워하여 晉陽을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高歡]]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魏主]]가 長安으로 도망하여 關西大都督關西大都督[[宇文泰]]에게 의지하고 [[宇文泰]]를 大丞相大丞相으로 삼았다.(이것이 西魏임) [[高歡]]이 [[魏主]]를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淸河王]]의 세자인 [[元善見]]을 洛陽에 세우고 鄴으로 돌아가니,(이것이 東魏임) 魏나라는 道武帝道武帝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149년 만에 東魏와 西魏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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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史略][[元脩]]가 長安에 이르러 반 년이 지나서 또다시 [[宇文泰]]와 틈이 생기자 [[宇文泰]]가 그를 독살하였는데, 뒤에 시호를 [[孝武皇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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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文泰]]가 [[南陽王]][[元寶炬]]를 세웠다. [[高歡]]과 [[宇文泰]]는 여러 해를 계속하여 공격하고 싸워서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高歡]]이 죽을 때에 遺書를 남겨 그의 아들[[高澄]]에게 부탁하기를 “[[侯景]]은 잘난 체하고 발호하려는 뜻이 있으니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侯景]]을 대적할 만한 자는 [[慕容紹宗]]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侯景]]이 과연 배반하여 河南 땅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梁나라에 붙으니, 梁나라에서 [[侯景]]을 봉하여 [[河南王]]으로 삼았다. [[侯景]]의 使者使者가 梁나라에 이르자, 梁나라 신하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梁나라 군주도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金甌(금으로 만든 작은 사발)와 같아서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으니, [[侯景]]을 받아들이면 이로 인하여 일이 생길까 두렵다.” 하였으나 오직 [[朱异]]가 강력히 권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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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가 [[慕容紹宗]]을 보내어 [[侯景]]을 공격하니, [[侯景]]이 패배하여 남쪽으로 도망가서 梁나라 壽春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梁나라에 은혜로운 명령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梁나라가 이에 그를 南豫州牧南豫州牧으로 삼았다. 이윽고 東魏가 梁나라에게 화해할 것을 청하니, [[侯景]]을 잡으려고 해서였다. [[侯景]]은 梁나라가 東魏와 통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마침내 壽陽(壽春)에서 배반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 建康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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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가 즉위한 뒤로 江東 지방이 오랫동안 태평하였으므로 오직 佛法을 숭상하여 여러 번 佛寺에 捨身하니, 上下가 모두 이를 따라하였다. [[侯景]]이 臺城을 압박해 들어오자 구원하러 온 군대가 모두 [[侯景]]에게 패하였고 城 안이 몹시 굶주렸다. [[梁主]]가 사람을 보내어 [[侯景]]과 맹약하고 [[侯景]]을 大丞相大丞相으로 삼으니, 臺城이 포위된 지 5개월 만에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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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王]][[劉勃勃]]이 叱干阿利<font color="#0054FF" size="2">【叱干은 代北 지방의 複姓이고, 阿利는 이름이다.</font>로 將作大匠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嶺北에서 오랑캐와 漢族 10만 명을 징발해서 朔方水 이북과 黑水 이남에 都城을 쌓게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頭註]朔方水北은 ≪資治通鑑≫에 水字가 郡字로 되어 있다. [通鑑要解]赫連勃勃이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font>[[叱干阿利]]는 성품이 아첨을 잘하고 잔인하여 진흙을 쪄서 성을 쌓을 때에 송곳이 한 치 깊이만 들어가면 즉시 그 담장을 쌓은 자를 죽여서 그 시체를 진흙과 함께 쌓았다. [[劉勃勃]]이 이것을 충성이라 여겨서 그에게 위임하니, 무릇 병기를 만들어 올리면 工人 중에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었다. 갑옷을 활로 쏘아서, 화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활을 만든 사람을 목 베고 화살이 들어가면 갑옷을 만든 자를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기물이 모두 정교하고 예리했다. [[劉勃勃]]이 古人의 姓氏에 일정한 규정이 없다 하여 姓을 赫連氏<font color="#0054FF" size="2">【赫連은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이른다.】</font>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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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가 [[侯景]]에게 제재당하고 음식 또한 삭감당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梁主]]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荷荷’ 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었다. 재위 48년 동안에 改元한 것이 일곱 번이니, 天監‧普通‧大通‧中大通‧大同‧中大同‧太淸이다. 이보다 앞서 太子 [[蕭統]]은 인자하고 총명하고 효도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이 있었는데, 東宮에 있은 지 30년 만에 죽었다. [[梁主]]가 嫡孫을 버리고 別子(蕭綱)를 세워 이때에 이르러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太宗]][[簡文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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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div><div class="clsB">
=====太宗簡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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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一年=====
</div>名綱이 武帝第三子라<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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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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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簡文帝]]<font color="#0054FF" size="2">【一德不懈曰簡이라】</font> 名[[綱]]이니 [[武帝]]第三子라 在位二年이요 壽四十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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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簡文帝<font color="#0054FF" size="2">【德을 한결같이 하여 게으르지 않은 것을 簡이라 한다.】</font>는 이름이 [[綱]]이니, [[武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49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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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庚午] 梁太宗大寶元年, 魏大統十六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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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 〈梁[[太宗]]大寶元年이요 魏大統十六年이요 東魏武定八年이요 齊[[顯祖文宣帝]][[高洋]]天保元年이라 ○ 是歲에 東魏亡하니 齊代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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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오(550) - 梁나라 [[太宗]]의 大寶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6년이고, 東魏武定 8년이고, 齊나라 [[顯祖]][[文宣帝]][[高洋]]의 天保 元年이다. ○ 이해에 東魏가 망하니, 齊나라가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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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進太原公太原公[[高洋]]位丞相丞相, [[齊郡王]]하고 下詔禪位於[[齊王]]<font color="#0054FF" size="2">【洋이 使侍中張亮으로 逼東魏主以禪하고 封東魏主爲中山王하니라】</font>하니 王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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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一年이라 〈秦弘始十七이요 魏神瑞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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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東魏之興이 實自[[孝靜]]이라 于時에 國政이 盡出[[高氏]]하니 雖篤好文學하고 從容沈雅라도 何救敗亡이리오 是可慨也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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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秦王]][[興]]이 卒하고 [[太子]][[]]이 卽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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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에서 [[太原公]][[高洋]]의 지위를 丞相丞相‧[[齊郡王]]으로 승진시키고 조서를 내려 [[齊王]]에게 讓位하니,<font color="#0054FF" size="2">【高洋이 侍中 張亮으로 하여금 東魏主를 핍박하여 讓位하게 하고 東魏主를 봉하여 中山王으로 삼았다.】</font>[[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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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11년(을묘 415) - 秦나라 弘始 17년이고, 魏나라 神瑞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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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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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魏가 흥한 것은 실로 [[孝靜帝(元善見)]]로부터이다. 이때에 國政이 모두 [[高氏]]에게서 나왔으니, [[孝靜帝]]가 비록 文學을 독실히 좋아하였으며 조용하고 침착하고 고상하였으나 어찌 패망을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개탄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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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秦王(後秦)]][[姚興]]이 죽고태자태자[[姚泓]]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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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湘東王]][[]]이 以天子制於賊臣이라하야 不肯從大寶之號하고 猶稱太淸四年하다 丙午에 [[]]이 下令하야 大擧討[[侯景]]할새 移檄遠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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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太尉太尉[[]]戒嚴하야 將伐秦할새 [[]][[劉穆之]]爲左僕射左僕射하야 入居東府<font color="#0054FF" size="2">【東府城은 安帝所築이라】</font>하야 總攝內外하니 [[穆之]]內總朝政하고 外供軍旅할새 決斷如流라 賓客輻湊<font color="#0054FF" size="2">【輻은 輪中木之直指轂者니 凡輪有三十輻하야 共湊於一轂일새 以諭四方皆來라】</font>하야 求訴百端하고 內外諮稟이 盈堦滿室호되 目覽辭訟하고 手答牋書하며 耳行聽受하고 口竝酬應하야 不相參涉하고 悉皆贍擧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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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湘東王]][[蕭繹]]이 天子가 賊臣인 [[侯景]]에게 제재를 받는다 하여 大寶라는 연호를 따르려 하지 않고 그대로 太淸 4년이라 칭하였다.
+
3월에 太尉太尉[[劉裕]]가 삼엄하게 경계하여 秦나라(後秦)를 정벌하려 할 적에 [[劉裕]][[劉穆之]]를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로 삼아 東府<font color="#0054FF" size="2">【東府城은 安帝가 쌓은 것이다.</font>에 들어가 있으면서 조정 안팎의 일을 總攝하게 하니, [[劉穆之]]가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대에 군수품을 공급할 적에 일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처리하였다. 賓客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font color="#0054FF" size="2">【輻은 수레바퀴 가운데의 나무가 곧게 바퀴통으로 향한 것이니, 수레바퀴에는 30개의 바퀴살이 있어서 모두 한 바퀴통으로 집중되므로 이로써 사방에서 모두 몰려옴을 비유한 것이다.】</font> 요구하고 소송하는 것이 천만 가지이고, 내외에서 자문하고 보고하는 자들이 뜰에 가득하고 방 안에 가득하였으나, 눈으로는 글과 訟辭를 보고 손으로는 牋書에 답을 하며 귀로는 남의 말을 듣고 입으로는 함께 수응(응대)하되 서로 뒤섞임 없이 모두 여유 있게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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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日(4월 27일)에 [[蕭繹]]이 명령을 내려 크게 군대를 일으켜 [[侯景]]을 토벌할 적에 遠近에 檄文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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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梁이 進[[侯景]]位相國하고 封二十郡한대 自稱[[漢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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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月丁巳에 [[]]發建康할새 遣[[王鎭惡]], [[檀道濟]], [[沈田子]]等하야 數道竝進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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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梁나라가 [[侯景]]의 지위를 相國相國으로 승진시키고 20개 郡을 봉해 주었는데, [[侯景]]이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였다.
+
8월 丁巳日(12일)에 [[劉裕]]가 建康을 출발할 때에 [[王鎭惡]][[檀道濟]]‧[[沈田子]] 등을 보내어 여러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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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丞相丞相[[]] 始籍民之才力者爲府兵하야 身租, 庸, 調<font color="#0054FF" size="2">【有田則有租하고 有身則有庸하고 有戶則有調하니 凡受田之丁이 歲輸粟을 謂之租요 用人之力호되 歲二十日하고 閏加二日하며 不役者는 日出絹三尺을 謂之庸이요 每丁隨鄕所出하야 歲輸絹綾絁繭布綿麻호되 非蠶鄕則歲輸銀을 謂之調라 調는 去聲이라】</font>를 一切蠲之하고 以農隙으로 講閱戰陳하고 馬畜粮備를 六家供之하야 合爲百府하고 每府에 一郞將郞將主之하야 分屬二十四軍<font color="#0054FF" size="2">【凡十二將軍이니 每將軍이 各統開府二人하고 開府各領一軍이라】</font>하니라
+
九月에 [[王鎭惡]]<font color="#0054FF" size="2">【王猛孫也라】</font>, [[檀道濟]]入秦境하야 所向皆捷이라 進逼洛陽하야 克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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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丞相丞相[[宇文泰]]가 처음으로 백성 중에 재주와 힘이 출중한 자를 장부에 올려 府兵府兵을 만들어서 이들의 租‧庸‧調<font color="#0054FF" size="2">【田地가 있으면 租가 있고, 몸이 있으면 庸이 있고, 戶가 있으면 調가 있으니, 무릇 田地를 받은 壯丁이 해마다 곡식을 바치는 것을 租라 이르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되 1년에 20일이고 윤달이 든 해에는 2일을 더하며 부역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루에 비단 3尺을 내게 하는 것을 庸이라 이르며, 壯丁마다 그 지방에서 나는 土産物에 따라 해마다 絹綾과 고치와 삼베와 綿과 麻를 바치게 하되 누에 치는 고을이 아니면 해마다 銀을 바치게 하는 것을 調라 일렀다. 調는 去聲이다.】</font>를 일체 면제해 주고, 〈장부에 올린 府兵府兵들은〉 농한기에 전투하고 진 치는 법을 조련하고 사열하였으며, 〈府兵府兵에게 필요한〉 馬匹과 양식과 꼴을 여섯 가호가 함께 공급하여 모두 100개의 軍府軍府를 만들고 府마다 郞將郞將 한 명이 주관하게 하여 24軍<font color="#0054FF" size="2">【24軍에는 모두 12장군이 있었으니, 매 장군마다 각각 開府 2인을 통솔하고 開府는 각각 1軍을 지휘하였다.】</font>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
9월에 王鎭惡<font color="#0054FF" size="2">【王鎭惡은 王猛의 손자이다.】</font>과 [[檀道濟]]가 秦나라 경내에 들어가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전진하여 洛陽을 압박하여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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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辛未] 梁大寶二年, 魏大統十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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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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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十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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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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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未] 〈梁大寶二年이요 魏大統十七年이요 齊天保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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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十三年이라 〈秦永和二요 魏泰常二年이라 ○ [[西涼公]][[李歆]]嘉興元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니 大一, 小五니 凡六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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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551) - 梁나라 大寶 2년이고, 魏나라 大統 17년이고, 齊나라 天保 2년이다. -
+
義熙13년(정사 417) - 秦나라 永和 2년이고, 魏나라 泰常 2년이다. ○ [[西涼公]][[李歆]]의 嘉興 元年이다. ○ 이해에 秦(後秦)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다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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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魏主]]<font color="#0054FF" size="2">【文帝寶炬也라】</font>하고 太子太子[[]]이 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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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에 [[魏主]][[嗣]]<font color="#0054FF" size="2">【拓跋珪長子라】</font>問於[[崔浩]]曰 [[劉裕]]伐[[姚泓]]하니 果能克乎아 對曰 克之니이다 [[嗣]]曰 [[裕]]才何如[[慕容垂]]오 對曰 勝之니이다 [[垂]]는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를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劉裕]]는 奮起寒微하야 不階尺土하야 討滅[[桓玄]]하고 興復晉室하고 北禽[[慕容超]]하고 南梟[[盧循]]하야 所向無前하니 非其才之過人이면 安能如是乎잇가 [[裕]]克秦而歸면 必簒其主하리이다 關中은 華, 戎雜錯하야 風俗勁悍하니 [[裕]]欲以荊, 揚之化로 施之函秦<font color="#0054FF" size="2">【秦地에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라 故曰函秦이라】</font>이면 此는 無異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니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治)[洽]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願按兵<font color="#0054FF" size="2">【按은 止也라】</font>息民하야 以觀其變이면 秦地는 終爲國家之有하야 可坐而守也리이다 [[嗣]]笑曰 卿이 料之審矣로다 [[浩]]曰 臣이 嘗私論近世將相之臣컨대 若王猛之治國은 苻堅之管仲也요 慕容恪之輔幼主는 慕容暐之霍光也요 [[劉裕]]之平禍亂은 司馬德宗<font color="#0054FF" size="2">【安帝之諱라】</font>之[[曹操]]也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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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魏主<font color="#0054FF" size="2">【魏主는 文帝 元寶炬이다.】</font>가 죽고太子太子[[元欽]]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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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魏主]] 拓跋嗣<font color="#0054FF" size="2">【魏主 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다.】</font>가 [[崔浩]]에게 묻기를 “[[劉裕]]가 [[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말하기를 “[[劉裕]]의 재주는 [[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崔浩]]가 대답하기를 “[[劉裕]]가 [[慕容垂]]보다 낫습니다. [[慕容垂]]는 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桓玄]]을 토벌하고 晉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劉裕]]가 秦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關中은 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劉裕]]가 荊州와 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函谷關 안의 秦나라 땅<font color="#0054FF" size="2">【秦나라 땅에 函谷關이 있으니, 秦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函秦이라 한 것이다.】</font>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font color="#0054FF" size="2">【按은 중지하는 것이다.】</font>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秦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苻堅(前秦)]]의 [[管仲]]이고, [[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慕容暐(前燕)]]의 [[霍光]]이고, [[劉裕]]가 禍亂을 평정함은 司馬德宗(安帝)<font color="#0054FF" size="2">【司馬德宗은 安帝의 諱이다.】</font>의 [[曹操]]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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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以[[湘東王]][[]]으로 爲梁相國相國하야 建梁臺建梁臺<font color="#0054FF" size="2">【臺는 行臺라 】</font>하야 摠百揆하고 承制하다
+
七月辛丑에 [[]]至潼關하니 [[秦主]][[泓]]이 使[[姚丕]]로 守渭橋어늘 [[王鎭惡]]이 大破[[丕]]於渭橋하니 [[泓]]兵이 不戰而潰라 單馬로 還宮하야 癸亥에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鎭惡]]이 撫慰하고 號令嚴肅하니 百姓이 安堵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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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나라가 [[湘東王]][[蕭繹]]을 梁相國梁相國으로 삼아 梁臺<font color="#0054FF" size="2">【臺는 行臺이다.】</font>세워 百揆를 총괄하고 [[皇帝]]의 制를 받들게 하였다.
+
7월 辛丑日(2일)에 [[劉裕]]가 潼關에 이르니, [[秦主]](後秦) [[姚泓]]이 [[姚丕]]로 하여금 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王鎭惡]]이 渭橋에서 [[姚丕]]대파하니, [[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王鎭惡]]의 軍門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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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侯景]]이 逼[[梁主]]하야 禪位於[[豫章王]]<font color="#0054FF" size="2">【棟은 昭明太子統子華容公歡之子也라】</font>이라가 尋弑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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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이라 始에 太尉裕 欲留長安하야 經略<font color="#0054FF" size="2">【疆理也라】</font>西北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라 會에 [[劉穆]]之卒이어늘 [[裕]]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라 以[[王鎭惡]]으로 爲司馬司馬하다 [[鎭惡]]功多라 由是로 南人이 皆忌之러라 [[沈田子]]自以嶢柳之捷<font color="#0054FF" size="2">【是年七月에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font>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이러니 [[裕]]將還할새 [[田子]]及[[傅弘之]] 屢言於[[]]曰 [[鎭惡]]이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裕]]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니 勿復多言하라 [[裕]]私謂[[田子]][[鍾會]]不得遂其亂者는 以有[[衛瓘]]<font color="#0054FF" size="2">【鍾會, 衛瓘은 曹魏人이라】</font>故也라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이 何懼[[王鎭惡]]이리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史略 史評]史斷曰 [[簡文]]이 幼而聰睿하야 多聞博達하고 富贍詞藻러니 不幸遭家不造하야 正位宸極에 受制賊臣하야 卒罹土囊之痛焉이라 當是時하야 太陰晝見하고 天雨黃沙하며 太白經天이라가 更日乃止하야 梁祚將傾에 天文告變하니 雖以才如[[周公]]이라도 猶難戡難이온 況是文成宮體 何補滅亡이리오 賊[[]]이 陰簒弑之謀하고 [[蕭棟]]이 陽受禪之號하야 而建康之梁이 爲[[]]汚矣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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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9월에 [[侯景]]이 [[梁主]]를 핍박하여 豫章王<font color="#0054FF" size="2">【豫章王 蕭棟은 昭明太子 蕭統의 아들인 華容公 蕭歡의 아들이다.】</font>에게 讓位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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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다. 처음에 太尉太尉[[劉裕]]가 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font color="#0054FF" size="2">【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font>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 [[劉穆之]]가 죽자, [[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次子인 [[桂陽公]][[劉義眞]]을 都督雍‧梁‧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王鎭惡]]을 [[司馬]]로 삼았다. 〈長安을 수복할 때〉 [[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沈田子]]가 스스로 嶢柳의 승리<font color="#0054FF" size="2">【이해 7월에 東晉의 군대가 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首級을 베어서 姚泓이 달아나 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font>에 공로가 있다 하여 [[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沈田子]]와 [[傅弘之]]가 여러 번 [[劉裕]]에게 말하기를 “[[王鎭惡]]은 집안이 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卿과 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다시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劉裕]]가 은밀히 [[沈田子]]에게 이르기를 “[[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衛瓘]]<font color="#0054FF" size="2">【[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鍾會와 衛瓘은 曹操의 魏나라 사람이다.】</font>이 있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卿들 십여 명이 어찌 [[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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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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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簡文帝]]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見聞이 많고 널리 통달하며 문장력이 풍부하였는데, 불행히도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 帝王의 자리[宸極]에서 왕위를 바로잡음에 賊臣(侯景)에게 제재당하여 끝내 土囊의 애통함을 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太陰(달)이 낮에 나타나고 하늘에서 黃沙가 내렸으며 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쳐 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쳐서 梁나라의 國運이 기울려 하자 天文이 변고를 알렸으니, 비록 [[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어도 오히려 난리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하니 더구나 문장이 宮體를 이루었다 한들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 무슨 보탬이 있었겠는가. 역적인 [[侯景]]은 남몰래 찬탈하고 시해할 계책을 세우고, [[蕭棟]]은 겉으로 禪讓을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建康의 梁나라가 [[侯景]]에게 더렵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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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王僧辯]]<font color="#0054FF" size="2">【大都督이라】</font>等이 聞[[太宗]]殂하고 啓[[湘東王]][[繹]]하야 請上尊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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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裕]]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라 惜乎라 百年之寇와 千里之土를 得之艱難하고 失之造次<font color="#0054FF" size="2">【急遽也라】</font>하야 使豐, 鄗(鎬)之都로 復輸寇手로다 [[荀子]]曰 兼幷은 易能也요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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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나라 王僧辯<font color="#0054FF" size="2">【王僧辯은 大都督이다.】</font> 등이 [[太宗(簡文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湘東王]][[蕭繹]]에게 아뢰어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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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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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劉裕]]가 이미 [[王鎭惡]]에게 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애석하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font color="#0054FF" size="2">【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font> 잃어서, 豐과 鄗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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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梁[[豫章王]][[]]이 禪位于[[]]하니 [[]]卽位하야 稱帝于南郊하다 大赦하고 改元太始하고 封[[棟]]爲[[淮陰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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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二十史略][[簡文皇帝]]는 名[[綱]]이니 在東宮十八年而後에 遇[[侯景]]之亂하야 旣立에 受制於[[景]]而已러라 [[湘東王]][[繹]]이 鎭江陵하야 自稱假黃越假黃越, 大都督大都督이라하야 中外諸軍이 承制러니 [[岳陽王]][[詧]]은 [[昭明太子]][[統]]之第三子也라 鎭襄陽하야 與[[繹]]으로 相攻할새 [[詧]]이 遣使降于西魏하야 以求援하니 西魏立梁[[蕭詧]]하야 爲[[梁王]]하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二十史略][[侯景]]이 自稱[[漢王]]이라하고 廢[[梁主]]弑之하니 尸位不及三年에 改元者一이니 曰大寶라 [[景]]이 立[[豫章王]][[棟]]이러니 已而요 簒位하다 先是에 始興太守始興太守[[陳霸先]]이 起兵討[[景]]하고 [[湘東王]]이 遣[[王僧辯]]討[[景]]하니 [[景]]이 簒位數月而爲[[僧辯]][[霸先]]所敗하야 亡走吳하야 欲入海라가 爲其下所斬이라 送尸建康하야 傳首江陵하고 截其手足하야 送於北齊하니라 [[湘東王]]立하니 是爲[[元皇帝]]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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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나라 [[豫章王]][[蕭棟]]이 [[侯景]]에게 讓位하니, [[侯景]]이 즉위하여南郊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크게 사면하고 太始로 改元하였으며, [[蕭棟]]을 봉하여 [[淮陰王]]으로 삼았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二十史略][[簡文皇帝]]는 이름이 [[蕭綱]]이니, 東宮에 있은 지 18년 만에 [[侯景]]의 난리를 만나 즉위하였는데, 즉위한 뒤에 [[侯景]]에게 제재당하기만 하였을 뿐이다. [[湘東王]][[蕭繹]]이 江陵에 鎭駐하여 假黃越假黃越‧大都督大都督이라 스스로 칭하여 中外의 여러 군대가 그의 통제를 받았다. [[岳陽王]][[蕭詧]]은 [[昭明太子]][[蕭統]]의 셋째 아들인데, 襄陽에 鎭駐하여 [[蕭繹]]과 서로 공격할 때에 [[蕭詧]]이 사신을 보내 西魏에 항복하고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西魏가 梁나라 [[蕭詧]]을 세워[[梁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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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二十史略][[侯景]]이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고[[梁主]][[簡文帝]]를 폐위하였다가시해하니, [[梁主]]가 자리만 지키고 있은 지가 채 3년이 못 되었고 改元한 것이 한 번이니, 大寶이다. [[侯景]]이 [[豫章王]][[蕭棟]]을 세웠는데 얼마 후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이보다 앞서 始興太守始興太守[[陳霸先]]이 군대를 일으켜 [[侯景]]을 토벌하고[[湘東王]][[蕭繹]]이 [[王僧辯]]을 보내어 [[侯景]]을 토벌하니, [[侯景]]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지 몇 개월 만에 [[王僧辯]]과 [[陳霸先]]에게 패하여 吳 지방으로 달아나서 海島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부하에게 참수당하였다. 그의 시신을 建康으로 보내어 머리는 江陵에 전달하고 손과 발은 잘라서 北齊로 보내었다. [[湘東王]]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元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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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世祖孝元帝=====
 
</div>世祖孝元帝 名繹이니 武帝第七子라<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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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孝元帝]]<font color="#0054FF" size="2">【行義悅民曰元이라】</font> [[]]이니 [[武帝]]第七子라 在位三年이요 壽四十七이라
+
三秦父老 聞[[]]將還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이 不霑王化가 於今百年이러니 始覩衣冠하니 人人相賀라 長安十陵은 是公家墳墓요 咸陽宮殿은 是公家室宅이니 捨此欲何之乎<font color="#0054FF" size="2">【十陵은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는 擧大數也라 長安宮殿이 皆漢故跡이요 〈裕는〉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font>잇가 [[]]爲之愍然<font color="#0054FF" size="2">【愍은 悲也, 憐也라】</font>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하니 不得擅留라 誠多諸君懷本之志하야 今以次息<font color="#0054FF" size="2">【義眞也니 長曰義符요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font>與文武賢才로 共鎭此境하니 勉與之居하라하다 十二月에 [[]]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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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世祖]] 孝元帝<font color="#0054FF" size="2">【義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元이라 한다.】</font>는 이름이 [[繹]]이니, [[武帝]]의 일곱째 아들이다. 재위가 3년이요, 壽가 47세이다.
+
三秦의 父老들이 [[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中原의 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長安의 열 개 陵은 公의 집안의 墳墓이고 咸陽의 宮殿은 公의 집안의 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font color="#0054FF" size="2">【[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나라 高帝의 長陵, 惠帝의 安陵, 文帝의 霸陵, 景帝의 陽陵, 武帝의 茂陵, 昭帝의 平陵, 宣帝의 杜陵, 元帝의 渭陵, 成帝의 延陵, 哀帝의 義陵, 平帝의 康陵이니 모두 關中에 있다. 모두 11陵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長安의 宮殿이 모두 漢나라의 故跡이었고 劉裕는 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font> 하였다. [[劉裕]]가 민망히 여겨<font color="#0054FF" size="2">【愍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font>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진실로 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font color="#0054FF" size="2">【둘째 자식은 劉義眞이니, 첫째는 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劉義隆이다.】</font>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鎭守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長安을 출발하여 洛水로부터 黃河로 들어올 적에 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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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壬申] 梁世祖承聖元年, 魏主欽元年, 齊天保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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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 〈梁[[世祖]]承聖元年이요 [[魏主]][[欽]]元年이요 齊天保三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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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552) - 梁나라 [[世祖(元帝)]]의 承聖 元年이고, [[魏主]][[元欽]]의 元年이고, 齊나라 天保 3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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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湘東王]][[]]이 [[王僧辯]], [[陳霸先]]等으로 東擊[[侯景]]하니 [[]]兵大潰하야 與百餘騎東走어늘 追及斬之하다
+
○ 閏月에 [[夏王]][[勃勃]]이 聞太尉太尉[[]]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卿이 試言其方略하라 [[買德]]曰 關中은 形勢之地어늘 而[[]]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라 不暇復以中原爲意하리니 此는 天以關中賜我니 不可失也니이다 [[勃勃]]이 乃使其子[[璝]]<font color="#0054FF" size="2">【璝는 瑰라】</font>로 帥騎二萬하야 向長安하고 [[勃勃]]은 自將大軍하고 爲後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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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湘東王]][[蕭繹]]이 [[王僧辯]][[陳霸先]] 등과 함께 동쪽으로 [[侯景]]을 공격하니, [[侯景]]의 군대가 크게 무너져서 백여 명의 기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였는데, 추격하여 따라잡아 목을 베었다.
+
○ 閏月(윤12월)에 [[夏王]][[赫連勃勃]]이 太尉太尉[[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王買德]]에게 묻기를 “朕이 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卿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王買德]]이 말하기를 “關中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다시는 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關中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赫連勃勃]]이 아들인 赫連璝<font color="#0054FF" size="2">【璝는 瑰이다.】</font>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後繼(후원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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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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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十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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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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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己丑에 [[梁僧辯]]等이 上表勸進<font color="#0054FF" size="2">【勸進은 進上尊號也라】</font>하고 且迎都建業이어늘 [[湘東王]]答曰 淮海長鯨<font color="#0054FF" size="2">【長鯨은 喩侯景이라】</font>이 雖云授首나 襄陽[[短狐]] 未全革面<font color="#0054FF" size="2">【短狐는 喩岳陽王詧이요 革面은 言變革其面而從也라[附註]短狐는 𧌒也니 本草에 謂之射工이라 在水中하야 含沙射人이면 皮膚成瘡이라 梁主以捨詧而立綱爲太子라하야 內常愧之하야 寵亞諸子하고 詧亦內懷不平하고 遂畜財下士하야 招募勇敢士러니 庚午年에 魏(主)[立]詧하야 爲梁主하니라】</font>하니 太平玉燭<font color="#0054FF" size="2">【泰階六星이 平則治라 四時調曰玉燭이라[附註]爾雅에 春爲靑陽이요 夏爲朱明이요 秋爲白藏이요 冬爲玄英이니 四時和를 謂之玉燭이라하니라 此는 釋太平之時에 四氣和暢하야 以致嘉祥之事也라 謂之玉燭者는 言四時和氣 溫潤明照라 故로 謂之玉燭이라】</font>이어든 爾乃議之하라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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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己丑日(3월 21일)에 梁나라 [[王僧辯]] 등이 [[湘東王]]에게 表文을 올려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권하고<font color="#0054FF" size="2">【勸進은 皇帝의 尊號를 올린 것이다.】</font> 또 그를 맞이하여 建業에 도읍하게 하자, [[湘東王]]이 답하기를 “淮海의 큰 고래(侯景)<font color="#0054FF" size="2">【長鯨은 侯景을 비유한 것이다.】</font>가 비록 머리를 바쳤으나 襄陽의 [[短狐(蕭詧)]]가 아직 완전히 귀순하지 않았으니,<font color="#0054FF" size="2">【[釋義]襄陽短狐 未全革面:[釋義]短狐는 岳陽王 蕭詧을 비유한 것이고, 革面은 얼굴빛을 바꾸고 복종함을 말한다.[附註]短狐는 물여우이니, ≪本草綱目≫에 이를 일러 射工이라 하였다. 물속에 있으면서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쏘면 사람의 피부에 부스럼이 생긴다. 梁主(武帝)가 蕭詧을 버리고 蕭綱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해서 내심 항상 이를 부끄러워하여 蕭詧을 여러 아들 다음으로 총애하였고, 蕭詧 또한 내심 불평을 품고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어서 용감한 군사들을 불러 모집하였다. 庚午年(550)에 魏나라가 梁王 蕭詧을 梁主로 삼았다.】</font> 天下가 태평해지고 四時가 고르게 되거든<font color="#0054FF" size="2">【[釋義]泰階(三台星)의 여섯 별이 고르면 세상이 다스려진다. 四時가 고른 것을 玉燭이라 한다.[附註]玉燭은 ≪爾雅≫에 “봄을 春陽이라 하고 여름을 朱明이라 하고 가을을 白藏이라 하고 겨울을 玄英이라 하니, 四時가 조화로운 것을 玉燭이라 이른다.” 하였다. 이는 태평한 시대에는 四時의 기운이 화창해서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을 이르게 함을 말한 것이다. ‘玉燭’이라고 이른 것은 四時에 화기가 溫潤하고 밝게 비추기 때문에 玉燭이라 이른 것이다.】</font> 그대들은 그때 가서 비로소 이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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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益州刺史益州刺史[[武陵王]][[紀]]<font color="#0054FF" size="2">【[[元帝]][[繹]]之兄이라】</font> 頗有武略이러니 聞[[侯景]]陷臺城하고 四月에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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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十四年이라 〈魏泰常三年이요 夏昌武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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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益州刺史益州刺史[[武陵王]][[蕭紀]]<font color="#0054FF" size="2">【武陵王 蕭紀는 元帝 蕭繹의 형이다.】</font>가 자못 武略이 있었는데, [[侯景]]이 臺城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4월에 [[皇帝]]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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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十一月에 梁[[湘東王]][[繹]]이 卽位於江陵하야 改元大赦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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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에 梁나라 [[湘東王]][[蕭繹]]이 江陵에서 즉위하여 改元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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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癸酉] 梁承聖二年, 魏主欽二年, 齊天保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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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 〈梁承聖二年이요 [[魏主]][[]]二年이요 齊天保四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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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夏[[赫連璝]] 至渭하니 關中民降之者 屬路라 [[沈田子]]將兵拒之하다 [[田子]]與[[王鎭惡]]으로 素有相圖之志러니 俱出北地하야 以拒夏兵할새 [[田子]]請[[鎭惡]]至[[傅弘之]]營하야 計事라가 [[田子]]求屛人語하고 使其宗人<font color="#0054FF" size="2">【官名이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家宗人은 掌家禮라 此는 猶田單宗人이니 乃田子之族人이라】</font>[[沈敬仁]]斬之하다 [[弘之]]奔告[[劉義眞]]한대 [[義眞]]이 與[[王脩]]로 被甲登撗門<font color="#0054FF" size="2">【撗은 音光이니 長安城門名也라】</font>하야 以察其變이러니 脩執[[田子]]하야 數以專戮하야 斬之하다 [[弘之]]大破[[赫連璝]]하니 夏兵이 乃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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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553) - 梁나라 承聖 2년이고, [[魏主]]元欽의 2년이고, 齊나라 天保 4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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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14년(무오 418) - 魏나라 泰常 3년이고, 夏나라 昌武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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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梁[[王僧辯]]이 發建康하고 承制하야 使[[陳霸先]]으로 代鎭揚州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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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정월에 梁나라 [[王僧辯]]이 〈군대를 이끌어〉 建康을 출발하고, 皇帝皇帝의 制를 받들어 [[陳霸先]]으로 하여금 揚州를 대신 진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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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夏나라 [[赫連璝]]가 渭水에 이르니, 關中의 백성들 중에 항복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沈田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沈田子]]는 [[王鎭惡]]과 평소에 서로 상대방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함께 북쪽 지방에 나가서 夏나라 군대를 막게 되자 [[王鎭惡]]에게 [[傅弘之]]의 진영에 이르러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가 〈[[王鎭惡]]이 이르자〉 사람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할 것을 요구하고는 宗人<font color="#0054FF" size="2">【宗人은 官名이다. ≪周禮≫에 都宗人과 家宗人이 있으니, 家宗人은 家禮를 맡는다. 이것은 田單宗人과 같으니, 바로 沈田子의 族人이다.】</font>인 [[沈敬仁]]으로 하여금 [[王鎭惡]]의 목을 베게 하였다. [[傅弘之]]가 [[劉義眞]]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劉義眞]]이 [[王脩]]와 함께 갑옷을 입고 撗門<font color="#0054FF" size="2">【撗은 音이 광이니, 撗門은 長安의 城門 이름이다.】</font>에 올라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王脩]]가 [[沈田子]]를 잡아서 將領을 제멋대로 죽인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 [[傅弘之]]가 [[赫連璝]]를 대파하니, 夏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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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太師太師[[]] [[魏主]][[欽]]<font color="#0054FF" size="2">【[[文帝]][[寶炬]]長子이니 爲[[宇文泰]]所廢弑라】</font>하고 立其弟[[齊王]][[廓]]<font color="#0054FF" size="2">【[[文帝]]第四子니 是爲[[恭帝]]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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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에 [[宋公]][[]] 始受相國相國, 九錫之命<font color="#0054FF" size="2">【太尉裕 始受相國, 宋公, 九錫之命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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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太師太師[[宇文泰]][[魏主]] 元欽<font color="#0054FF" size="2">【魏主 元欽은 文帝 元寶炬의 長子이니, 宇文泰에게 폐위되어 시해당하였다.】</font>을 폐하고, 그의 아우[[齊王]] 元廓<font color="#0054FF" size="2">【齊王 元廓은 文帝의 넷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恭帝이다.】</font>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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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宋公]][[劉裕]]가 비로소 相國相國과 九錫의 命을 받았다.<font color="#0054FF" size="2">【太尉 劉裕가 비로소 相國‧宋公‧九錫의 명을 받은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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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好玄談<font color="#0054FF" size="2">【莊, 老尙玄이요 釋氏尙空이라】</font>하야 九月에 於龍光殿龍光殿에 講老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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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에 [[夏王]][[勃勃]]이 進據咸陽<font color="#0054FF" size="2">【山南曰陽이요 水北曰陽이니 在渭水北, 九峻諸山之南이라 故로 名咸陽이라】</font>하니 長安樵采路絶이라 [[裕]]聞之하고 召[[義眞]]東歸하고 以[[朱齡石]]으로 代鎭長安하다 [[赫連璝]]帥衆三萬하고 追[[義眞]]하야 力戰連日에 晉兵大敗라 [[義眞]]이 僅得免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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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가 玄談<font color="#0054FF" size="2">【莊子와 老子는 玄虛를 숭상하고, 釋氏는 空을 숭상하였다.】</font>을 좋아하여 9월에 龍光殿에서 《老子》를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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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夏王]][[赫連勃勃]]이 전진하여 咸陽<font color="#0054FF" size="2">【山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니, 咸陽(長安)은 渭水의 북쪽과 九峻山 등 諸山의 남쪽에 있으므로 咸陽이라고 이름한 것이다.】</font>을 점거하니, 長安의 나무 채취하는 길이 끊겼다. [[劉裕]]가 이 말을 듣고 [[劉義眞]]을 불러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朱齡石]]을 長安에 대신 진주하게 하였다. [[赫連璝]]가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劉義眞]]을 추격하여 연일 힘써 싸우니, 晉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劉義眞]]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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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遣[[于謹]], [[宇文護]], [[楊忠]]하야 將兵五萬하야 入寇하니 [[梁王]][[詧]]이 帥衆會之하다 [[梁主]]停講하고 內外戒嚴이러니 王[[琛]]이 報曰 吾至石梵하니 境上이 帖然이러이다 梁主聞而疑之러니 乃復開講一日하니 百官이 戎服以聽이라 丁亥에 魏兵이 至柵下호되 [[梁主]]巡城하야 猶口占爲詩하고 群臣이 亦有和者<font color="#0054FF" size="2">【和는 去聲이니 應也라】</font>라 甲寅에 魏人이 百道攻城하니 反者開(四)[西]門하고 納魏師어늘 [[梁主]]白馬素衣로 出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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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月에 [[齡石]]<font color="#0054FF" size="2">【相國右司馬라】</font>이 奔潼關이라가 爲人執送長安하니 [[勃勃]]이 殺之하다 [[勃勃]]이 卽皇帝位于灞上하고 都統萬<font color="#0054FF" size="2">【勃勃이 築城於朔方郡北黑水之南하고 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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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武帝<font color="#0054FF" size="2">【蕭衍이라】</font>當齊之季하야 任居方面<font color="#0054FF" size="2">【謂爲荊州刺史라】</font>하고 危不自安하야 乘時奮起하야 以除昏主而成大業이라 及享國日久에 普通, 大通之際에 遭魏氏衰微하야 王公牧守 繈屬<font color="#0054FF" size="2">【繈은 索也니 言若繩索之相屬이라】</font>而歸之하고 戎車北征하야 至於洛汭라 觀其勤身約己하고 好尙文雅하야 拊循士大夫하면 亦可謂恭儉寬惠之君矣라 然이나 以萬乘之主로 爲桑門之行하야 屈身傾國하야 以奉浮屠하고 恩勝於威하야 紀綱不立이라 信佞臣之謀하고 貪河南之地하야 棄與國<font color="#0054FF" size="2">【謂東魏라】</font>하고 寵叛人<font color="#0054FF" size="2">【侯景이라】</font>하야 遂使臺城覆沒하고 老而餒死하야 江淮以南이 鞠爲荊棘하니 其智未足稱也라 夫德澤不能及而享其大利를 聖人禍之하니 譬如悅盜賊之財而延之入室이면 財不可得而喪其所有 必矣라 其子孫이 各擁强兵하야 列居重鎭이나 不救君父之危하고 而窺間乘便하야 更相屠滅하니 [[元帝]]<font color="#0054FF" size="2">【繹이라】</font>於兄弟之中에 殘忍尤甚이라 是以로 雖翦兇渠<font color="#0054FF" size="2">【渠는 大也니 謂侯景이라】</font>하야 而克復故業이나 旋踵之間에 身爲俘馘<font color="#0054FF" size="2">【生獲曰俘요 斷耳曰馘이라】</font>하니 豈特人心之不與哉리오 亦天地之所誅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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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가 [[于謹]]‧[[宇文護]]‧[[楊忠]]을 보내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니, [[梁王]][[蕭詧]]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회합하였다. [[梁主]]가 講을 정지하고 내외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는데, [[王琛]]이 보고하기를 “제가 石梵에 이르니 국경이 조용하였습니다.” 하였다. [[梁主]]가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였는데, 다시 《老子》 講을 하루 동안 여니, 百官들이 군복 차림으로 講을 들었다. 丁亥日(11월 5일)에 魏나라 군대가 城柵 아래에 이르렀으나 [[梁主]]는 성을 순행하면서 여전히 입으로 詩를 지어 읊었고 신하들 중에도 화답하는 자<font color="#0054FF" size="2">【和는 去聲이니, 응답하는 것이다.】</font>가 있었다. 甲寅日(12월 2일)에 魏나라 사람들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니, 城안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서쪽 城門을 열어 魏나라 군대를 들어오게 하였다. [[梁主]]가 白馬에 素服 차림으로 나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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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朱齡石<font color="#0054FF" size="2">【朱齡石은 相國 劉裕의 右司馬이다.】</font>이 潼關으로 도망했다가 사람에게 사로잡혀 長安으로 보내지니, [[赫連勃勃]]이 그를 죽였다. [[赫連勃勃]]이 灞上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統萬<font color="#0054FF" size="2">【赫連勃勃이 朔方郡 북쪽과 黑水 남쪽에 都城을 쌓고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font>에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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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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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帝<font color="#0054FF" size="2">【武帝는 蕭衍이다.】</font>는 齊나라 말엽을 당하여 方面<font color="#0054FF" size="2">【方面은 荊州刺史가 되었음을 이른다.】</font>의 임무를 맡고는 위태롭게 여기고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않아서 때를 틈타 분발하여 일어나서 어두운 군주를 제거하고 大業을 이루었다. 황제의 지위에 오른 지 오래되자 普通 연간과 大通 연간 사이에 魏나라가 쇠미해질 때를 당하여 王公과 지방 수령들이 계속 이어서<font color="#0054FF" size="2">【繈은 끈이니, 繈屬은 마치 끈이 서로 이어진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font> 돌아오고 兵車로 북쪽을 정벌하여 洛汭에까지 이르렀다. 몸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하며 文雅를 좋아하고 숭상해서 士大夫들을 어루만진 것을 보면 또한 공손하고 검소하며 너그럽고 은혜로운 군주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萬乘의 군주로서 桑門(승려)의 행실을 하여 몸을 굽히고 나라를 기울여 浮屠를 받들었으며 은혜가 위엄을 이겨 기강이 서지 못하였다. 간신([[朱异]])의 꾀를 믿고 河南 땅을 탐내어 동맹국인 東魏<font color="#0054FF" size="2">【與國(동맹국)은 東魏를 이른다.】</font>를 배반하고 모반한 侯景<font color="#0054FF" size="2">【모반한 사람은 侯景이다.】</font>을 총애하여 마침내 臺城을 전복시켰으며 늙어서 굶어 죽어 江淮 이남 지방이 마침내 쑥대밭이 되게 하였으니, 그 지혜는 칭찬할 것이 못 된다. 덕택이 미치지 못하면서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을 聖人은 재앙으로 여겼으니, 비유하건대 도적의 재물을 좋아하여 도적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어오게 하면 재물을 얻기는커녕 자신의 소유를 잃을 것이 틀림없다. 자손들이 각각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서 重鎭에 포진하고 있었으나 君父의 위태로움을 구원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고 편리한 틈을 타서 번갈아 서로 도륙하고 멸망시켰으니, 元帝<font color="#0054FF" size="2">【元帝는 蕭繹이다.】</font>는 형제 중에서도 잔인함이 더욱 심하였다. 때문에 비록 元兇인 侯景<font color="#0054FF" size="2">【渠는 큼이니, 兇渠는 侯景을 이른다.】</font>을 제거하여 옛 기업을 회복하였으나 돌아서기도 전에 몸이 포로<font color="#0054FF" size="2">【사로잡은 것을 俘라 하고, 귀를 베는 것을 馘이라 한다.】</font>가 되었으니, 어찌 다만 人心이 허여하지 않았을 뿐이겠는가. 또한 天地가 벌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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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立[[梁王]][[]]하야 爲[[梁王]]하고 資以荊州之地하니 是爲後梁<font color="#0054FF" size="2">【梁昭明太子之子니 附於魏하니라[頭註]魏取襄陽하야 徙梁王詧하야 使稱帝于江陵하고 屯兵守之하니 名曰助防이라하나 實以制詧也라 詧은 音察이라】</font>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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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公]][[]] 以讖<font color="#0054FF" size="2">【符命之書니 說文에 驗也라 凡讖, 緯는 皆言將來之驗이니 釋名曰 纖也니 其義纖微라】</font>云昌明<font color="#0054FF" size="2">【簡文帝子武帝曜之字라 [通鑑要解]晉書帝紀曰 初에 簡文帝見讖하니 云 晉祚盡於昌明이라 及孝武帝之在孕也하야 李太后夢神人謂之曰 汝生男하리니 以昌明爲名하라 及産에 東方始明하니 因以爲名이라 簡文이 後悟流涕하니라】</font>之後에 尙有二帝라하야 乃使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하야 與帝左右로 密謀弑帝하고 而立[[琅琊王]][[德文]]하니 戊寅에 [[德文]]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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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元帝]][[武帝]]之子로 摠上流之重이라 方其京師覆沒하고 君父告危하니 於斯時에 奔走赴難이 可也어늘 而竟逡巡不進하고 繼而徵兵湘州하야 少不如意면 則含忍以就大事 可也어늘 而遽行骨肉之誅하고 終而簡文嗣位하야 國祚幸存이면 則翼戴以隆梁祚 亦可也어늘 而乃不稟正朔하고 復興成濟之謀라 觀其始終一念이 上不在其君親하고 下不在其兄弟하야 僥倖國釁하고 希覬身謀하야 師出無名하니 何以討賊이리오 是以로 纔誅[[侯景]]하고 卽安江陵이라가 未越三期에 寇戎交逼이라 身在漂搖扤捏之中하야 不思保國之計하고 方且躬御龍光하야 親講老子하야 使百官으로 戎服以聽하며 不思反己하고 猶焚圖書하니 其愚蔽亦甚矣라 卒之喪師覆旅하고 身就拘囚하니 豈非上靈降鑑에 此焉假手리오 天道人事를 其可誣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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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安帝]]弗辨寒燠하고 口不能言이어늘 [[道子]], [[元顯]]이 幷傾朝政하야 納賄窮奢가 不知紀極하니 主昏臣亂이 莫熾於斯라 [[桓玄]]乘釁하야 遂行簒奪이어늘 [[劉裕]]擧兵誅[[玄]]하고 再安宗社라 自時厥後로 伐南燕, 斬[[盧循]], 滅[[姚泓]]하야 晉之威令이 雖伸이나 而[[裕]]之權勢 駸駸乎非復前日[[劉下邳]]矣니 晉欲安이나 可得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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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가 [[梁王]][[蕭詧]]을 세워[[梁王]]으로 삼고 荊州 지역을 밑천으로 삼게 하니, 이것이 바로 後梁이다.<font color="#0054FF" size="2">【[原註]魏立梁王詧……是爲後梁:[原註]梁王 蕭詧은 梁나라 昭明太子의 아들이니, 魏나라에 붙었다.[頭註]魏나라가 襄陽을 취하고 梁王 蕭詧을 옮겨서 江陵에서 稱帝하게 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니, 명색은 방어를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蕭詧을 제재하고자 한 것이었다. 詧은 음이 찰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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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公]][[劉裕]]가 圖讖書<font color="#0054FF" size="2">【讖은 符命의 글이니, ≪說文解字≫에 “징험(예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讖과 緯는 모두 장래의 일을 징험하는 것이니, ≪釋名≫에 이르기를 “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纖微한 것이다.” 하였다.】</font>에 “昌明(司馬曜)<font color="#0054FF" size="2">【[頭註]昌明은 簡文帝의 아들인 武帝 司馬曜의 字이다. [通鑑要解]≪晉書≫ 〈孝武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簡文帝가 圖讖書를 보니, 도참서에 ‘晉나라의 국통이 昌明에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孝武帝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에 李太后의 꿈에 神人이 이르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昌明으로 이름을 삼으라.’ 하였다. 해산할 때에 東方이 비로소 밝아오니, 인하여 昌明이라고 이름하였다. 簡文帝가 뒤에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font>의 뒤에 아직도 두 황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여 마침내 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를 시켜서 황제의 좌우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를 시해하고[[琅琊王]][[司馬德文]]을 세우니, 戊寅日(12월 17일)에 [[司馬德文]]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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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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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帝(蕭繹)]]는 [[武帝(蕭衍)]]의 아들로 揚子江 上流 지역의 重任을 총괄하고 있었다. 京師인 建康이 함락되고 君父가 위태로움을 고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급히 달려가 國難을 구원하는 것이 옳았는데 끝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았으며, 뒤이어 湘州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에 치욕을 참고서 大事를 이루는 것이 옳았는데 대번에 골육간의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簡文帝]]가 왕위를 계승하여 國統이 다행히 보존되었으면 그를 돕고 추대하여 梁나라의 國統을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았는데 마침내 正朔을 받지 않고 다시 [[成濟]]의 계책을 일으켰다.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생각이 위로는 군주와 어버이에게 있지 않고 아래로는 형제들에게 있지 않아서, 국가의 災禍를 요행으로 여기고 오직 자신을 위한 계책만을 생각하여 명분 없는 군대를 출동시켰으니, 어떻게 역적을 토벌하겠는가. 이 때문에 겨우 [[侯景]]을 토벌하고 곧바로 江陵을 안정시켰다가 3년이 못 되어 오랑캐가 번갈아 핍박하였던 것이다. 몸이 飄搖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또 몸소 龍光殿에 나아가 친히 《老子》를 講해서 百官들로 하여금 군복 차림으로 듣게 하였으며, 자기 몸에 돌이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古今의 도서 14만 권을 불태웠으니, 어리석음과 가려짐이 또한 심하다. 끝내 군대를 패망시키고 자신이 구속되고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上天의 신령이 굽어보시어 이들에게 손을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天道와 人事를 어찌 속일 있겠는가.”
+
“[[安帝]]는 추위와 더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司馬道子]]와 [[司馬元顯]]이 함께 朝廷의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뇌물을 받고 극도로 사치하여 끝을 알지 못하였으니,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어지러움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桓玄]]이 이 틈을 타서 찬탈하자,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주벌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 뒤로부터 南燕(慕容超)을 정벌하고 [[盧循]]을 목 베고 [[姚泓(後秦)]]을 멸망시켜 晉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비록 베풀어졌으나 [[劉裕]]의 권세가 점점 더해져 더 이상 전날의 下邳太守下邳太守인 [[劉裕]]가 아니었으니, 晉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나 될 있었겠는가.”
 
</div>
 
</div>
 
</div>
 
</div>
 
|}</div><div class="clsB">
 
|}</div><div class="clsB">
=====敬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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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
</div>敬帝 名方智니 元帝第九子라<div class="contData">
+
</div><div class="clsB">
 +
=====恭皇帝 名德文이요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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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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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帝]] 名[[方智]][[元帝]]第九子라 在位二年이요 壽十六이라
+
[[恭皇帝]] 名[[德文]]이요 字[[德文]]이니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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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敬帝]]는 이름이 [[方智]]이니, [[元帝]]의 아홉째 아들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16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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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는 이름이 [[德文]]이고 자가 [[德文]]이니, [[安帝]]의 同母弟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37세이니, 宋나라에 전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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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乙亥] 梁敬帝紹泰元年, 魏恭帝廓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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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元熙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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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 〈梁[[敬帝]]紹泰元年이요 魏[[恭帝]]廓二年이요 齊天保六年이요 後梁[[中宗宣帝]][[蕭詧]](天)[大]定元年이라 ○ 凡四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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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元熙元年이라 〈魏泰常四年이요 夏眞興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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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555) - 梁나라 [[敬帝]]의 紹泰 元年이고, 魏나라 [[恭帝]][[元廓]]의 2년이고, 齊나라 天保 6년이고, 後梁[[中宗]][[宣帝]][[蕭詧]]의 大定 元年이다. ○모두 네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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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에 [[宋公]][[]] 進爵爲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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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晉室旣衰에 中原雲擾하니 戎狄腥羶之氣 瀰漫河, 洛하고 薰蒸岱, 華하야 宮闕蕪沒하고 陵廟隳焚이라 [[元帝]]<font color="#0054FF" size="2">【琅琊王睿라】</font>以宗室疎屬으로 遯居江表하니 天下士民有思晉者 皆裹糧而歸之하야 國於荊揚之間하야 子孫相承하야 不絶如線이라 獨明帝<font color="#0054FF" size="2">【紹니 元帝長子라】</font>英武하야 克淸大憝<font color="#0054FF" size="2">【憝는 惡也니 謂王敦이라】</font>러니 不幸享國不永하고 自餘는 孱弱孤危하야 外陵內叛하야 寄命於虎狼之口하야 幾遇呑食者數矣라 然이나 卒能保其位號하야 宗廟血食이 百有餘年은 何哉오 有[[王導]], [[卞壼]], [[溫嶠]], [[陶侃]], [[謝安]], [[謝幼度]]<font color="#0054FF" size="2">【玄字라】</font>爲之臣也일새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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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梁王]][[詧]]이 卽皇帝位於江陵하고 上疏於魏에 則稱臣하고 奉其正朔<font color="#0054FF" size="2">【[[周建子]], [[商建丑]], [[夏建寅]]이니 是改正也요 [[周夜半]], [[商鷄鳴]], [[夏平旦]]이니 是改朔也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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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梁王]][[蕭詧]]이 江陵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魏나라에 상소할 적에 신하라고 칭하고 正朔<font color="#0054FF" size="2">【周나라는 建子月, 商나라는 建丑月, 夏나라는 建寅月을 정월로 삼았으니 이는 정월을 고친 것이요, 周나라는 夜半, 商나라는 鷄鳴, 夏나라는 平旦을 썼으니 이는 초하루를 고친 것이다.】</font>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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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劉裕]]弑[[安帝]]而立[[恭帝]]러니 卒爲[[]]所簒하니 而昌明後二帝之讖이 應矣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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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月에 梁[[晉安王]][[方智]] 至自尋陽하야 卽[[梁王]]位하니 時年十三이라 以太尉太尉[[王僧辯]]으로 爲都督中外諸軍事하고 加[[陳霸先]]征西大將軍征西大將軍하다
+
[史略 史評]胡氏曰 [[元帝]]는 忘國大讐하야 無恢復之志하고 惟[[明帝]]는 才略最優호되 又降年不永하고 餘皆碌碌하야 不足算也라 嘗怪[[王敦]], [[蘇峻]]構亂하고 [[桓溫]]廢立하야 屢起逆謀하고 [[桓玄]]已簒이라 然이나 猶綿歷百有餘年之久者는 尙賴[[王導]], [[祖逖]], [[溫嶠]], [[謝安]], [[謝玄]], [[王坦]]之諸賢이 忠義奮發하야 平內難하고 却强秦하야 以扶持之也일새라 然而卒莫能恢拓中原者는 蓋以[[]]知寬簡植國하야 而不能從[[祖逖]]雍丘益兵之語하고 安知和靜鎭國하야 而不能從[[謝玄]]乘勝自往彭城之謀故也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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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에 梁나라 [[晉安王]][[蕭方智]]가 尋陽에서 와서 [[梁王]]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太尉太尉[[王僧辯]]을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陳霸先]]에게 征西大將軍征西大將軍을 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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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熙 元年(기미 419) - 魏나라 泰常 4년이고, 夏나라 眞興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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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font color="#0054FF" size="2">【北齊高洋이라】</font>與王僧辯書하야 以爲嗣主沖藐<font color="#0054FF" size="2">【沖은 與种通하니 稚也요 藐는 音妙니 弱也라】</font>하야 未堪負荷요 [[貞陽侯]][[淵明]]<font color="#0054FF" size="2">【武帝兄長沙王懿之子也라】</font>은 以年以望으로 堪保金陵이니 以爲[[梁主]]하야 納於彼國하라 癸卯에 [[淵明]]이 入建康하야 丙午에 卽皇帝位하고 以[[晉安王]]으로 爲皇太子皇太子하다
+
7월에 [[宋公]][[劉裕]]가 작위가 승진되어 [[宋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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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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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황실이 이미 쇠약해지자 中原이 소란하니, 오랑캐의 비린내 나는 기운(야만스러운 풍속)이 黃河와 洛水 지역에 가득히 퍼지고 岱山과 華山까지 올라가서 궁궐이 황폐해지고 능묘가 무너지고 불탔다. 元帝<font color="#0054FF" size="2">【元帝는 琅琊王 司馬睿이다.】</font>가 종실의 먼 친족으로 도망하여 江東 지방에 거주하니,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천하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양식을 싸가지고 그에게 귀부하여荊州와 揚州의 사이에 나라를 세워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오직 明帝<font color="#0054FF" size="2">【明帝는 司馬紹이니, 元帝의 장남이다.】</font>만이 英明하고 武勇이 있어서 악의 원흉인 王敦<font color="#0054FF" size="2">【憝는 악이니, 大憝는 王敦을 이른다.】</font>을 깨끗이 제거하였으나 불행히도 국가를 소유한 햇수가 길지 못하였고, 그 밖에는 잔약하고 외롭고 위태로워서 밖에서는 능멸하고 안에서는 배반하여 호랑이의 입에 목숨을 맡겨서 거의 먹힐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지위와 명호를 보전하여 宗廟에 血食을 올린 것이 백여 년이나 이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王導‧卞壼‧溫嶠‧陶侃‧謝安‧謝幼度(謝玄)<font color="#0054FF" size="2">【幼度는 謝玄의 字이다.】</font>가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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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齊<font color="#0054FF" size="2">【齊는 北齊의 高洋이다.】</font>나라가 [[王僧辯]]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嗣主는 어려서<font color="#0054FF" size="2">【沖은 种과 통하니 어린 것이요, 藐는 음이 묘이니 약한 것이다.】</font> 군주의 직임을 감당할 만하지 못하고 [[貞陽侯]] 蕭淵明<font color="#0054FF" size="2">【蕭淵明은 武帝의 형인 長沙王 蕭懿의 아들이다.】</font>이 나이로 보나 명망으로 보나 金陵을 보전할 만하니, 그를 [[梁主]]로 삼아서 저들의 나라로 들여보내라.” 하였다. 癸卯日(5월 24일)에 [[蕭淵明]]이 建康으로 들어가서 丙午日(5월 27일)에 황제에 즉위하고[[晉安王]]을 皇太子皇太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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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初에 [[梁王]][[僧辯]]이 與[[陳霸先]]으로 共滅[[侯景]]하고 情好甚篤이러니 及[[僧辯]]이 納[[貞陽侯]][[淵明]]하야는 [[霸先]]이 遣使苦爭之하야 往返數四호되 [[僧辯]]이 不從이라 [[霸先]]이 乃擧兵襲[[僧辯]]하야 執而縊殺之하니 [[貞陽侯]][[淵明]]이 遜位하고 出就邸하다 冬十月에 [[晉安王]]이 卽皇帝位하다
+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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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처음에 梁나라 [[王僧辯]][[陳霸先]]과 함께 [[侯景]]을 멸망시키고 情誼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王僧辯]]이 [[貞陽侯]][[蕭淵明]]을 받아들이자[[陳霸先]]이 사자를 보내어 극력 간쟁해서 사자가 왕복하기를 서너 차례 하였으나 [[王僧辯]]이 따르지 않았다. [[陳霸先]]이 이에 군대를 일으켜 [[王僧辯]]을 습격해서 사로잡아 목을 졸라죽이니, [[貞陽侯]][[蕭淵明]]이 황제의 자리를 내어놓고 나가서 私邸로 갔다. 겨울 10월에 [[晉安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劉裕]][[安帝]]를 시해하고[[恭帝]]를 세웠는데, 끝내 [[劉裕]]에게 찬탈당하였으니, [[昌明]]의 뒤에 두 황제가 있다는 讖言이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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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初에 魏太師太師[[泰]] 以漢, 魏官繁이라하야 命[[蘇綽]]及尙書令尙書令[[盧辯]]하야 依周禮하야 更定六官六官하다
+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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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처음에 魏나라 太師太師[[宇文泰]]가 漢과 魏의 관직이 너무 많다고 하여 [[蘇綽]]과 尙書令尙書令[[盧辯]]에게 명해서 《周禮》를 따라 다시 六官六官으로 정하게 하였다.
+
[[元帝]]는 국가의 큰 원수를 잊어 中原을 회복할 뜻이 없었고, [[明帝]]는 재주와 지략이 가장 넉넉하였으나 또 하늘이 내려 준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며, 그 밖에는 모두 碌碌하여 따질 것이 못 된다. 내 일찍이 [[王敦]]과 [[蘇峻]]이 난리를 일으키고 [[桓溫]]이 자기 마음대로 군주를 폐위하고 세워서 여러 번 역모를 일으켰으며 [[桓玄]]이 이미 찬탈하였는데도 오히려 晉나라의 國統이 백여 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진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이는 [[王導]]‧[[祖逖]]‧[[溫嶠]]‧[[謝安]]‧[[謝玄]]‧[[王坦之]] 등 여러 賢人들이 忠義心을 분발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강한 秦나라를 물리쳐서 晉나라를 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王導]]는 너그러움과 간략함으로 나라를 세울 줄만 알아서 雍丘에 병력을 더 증원해 달라는 [[祖逖]]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고, [[謝安]]은 온화함과 고요함으로 나라를 鎭定할 줄만 알아서 승세를 타고 직접 彭城으로 가겠다는 [[謝玄]]의 계책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와 [[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div>
 
</div>
 
|}</div>[丙子] 梁太平元年, 魏恭帝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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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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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 〈梁太平元年이요 魏恭帝三年이요 齊天保七年이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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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병자(556) - 梁나라 太平 元年이고, 魏나라 [[恭帝]]3년이고, 齊나라 天保 7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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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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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正月에 魏初建六官六官<font color="#0054FF" size="2">【大冢宰, 大司徒, 大宗伯, 大司馬, 大司寇, 大司空이라】</font>하야 以[[宇文泰]]로 爲太師太師, 大冢宰大冢宰하고 自餘百官은 皆倣周禮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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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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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東西二晉은 合一百五十六年이니 凡一十五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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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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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魏나라가 처음으로 六官<font color="#0054FF" size="2">【六官은 大冢宰‧大司徒‧大宗伯‧大司馬‧大司寇‧大司空이다.】</font>을 세워 [[宇文泰]]를 太師太師‧大冢宰大冢宰로 삼고, 그 나머지 백관은 모두 《周禮》를 따랐다.
+
<div class="para"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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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東晉과 西晉은 합하여 156년이니, 모두 15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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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十月에 魏[[安定文公]][[宇文泰]] 病이어늘 召[[中山公]][[護]]<font color="#0054FF" size="2">【泰之從子라】</font>하야 謂曰 吾諸子皆幼하고 外寇方彊하야 天下之事를 屬之於汝하노니 宜努力하야 以成吾志하라 乙亥에 卒하다 [[泰]]能駕馭英豪하야 得其力用하고 性好質素하야 不尙虛飾하며 明達政事하고 崇儒好古하야 凡所施設을 皆依倣三代而爲之러라 丙子에 世子世子[[覺]]이 嗣位하야 爲太師太師, 大冢宰大冢宰하야 出鎭同州하니 時年十五라 護綱紀內外하야 撫循文武하니 人心이 遂安이러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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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10월에 魏나라 [[安定文公]][[宇文泰]]가 병이 위독하자, [[中山公]] 宇文護<font color="#0054FF" size="2">【中山公 宇文護는 宇文泰의 從子이다.】</font>를 불러 말하기를 “나의 여러 아들은 모두 어리고 外寇는 막 강성하여 天下의 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마땅히 노력하여 내 뜻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乙亥日(4일)에 [[宇文泰]]가 죽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宇文泰]]는 영웅호걸들을 마음대로 부려서 그들로 하여금 전력을 다 기울이게 하였고, 성품이 질박하고 검소함을 좋아하여 겉치레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정사에 밝게 통달하고 선비를 높이고 옛것을 좋아하여 모든 시설을 모두 三代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丙子日(5일)에 世子世子[[宇文覺]]이 지위를 이어받아 太師太師‧大冢宰大冢宰가 되어 나가서 同州를 鎭守鎭守하니,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宇文護]]가 내외에 紀綱을 세워 문무백관을 어루만지니, 인심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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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十二月에 魏以(歧)[岐]陽之地로 封世子世子[[覺]]하야 爲[[周公]]하니 魏[[宇文護]] 以[[周公]]幼弱이라하야 欲早使正位하야 以定人心이라 庚子에 以魏[[恭帝]][[詔]]로 禪位于[[周]]<font color="#0054FF" size="2">【魏主廓이 禪位于周公하니 廢魏主爲宋公하고 又弑之하니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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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後魏之先은 世居朔野<font color="#0054FF" size="2">【北方曰朔이라】</font>하야 有國久矣라 [[道武]]<font color="#0054FF" size="2">【拓跋珪라】</font>乘燕氏之衰<font color="#0054FF" size="2">【燕主慕容垂 時叛燕하니 見二十九卷乙未年이라】</font>하고 悉擧引弓之民하야 以憑陵中夏하니 馬首所向에 無不望風奔潰라 南取幷州<font color="#0054FF" size="2">【道武가 丙申年에 擊燕하야 取幷州라】</font>하고 東擧幽, 冀하야 兵不留行하야 而數千里之地定矣라 繼以明元太武<font color="#0054FF" size="2">【明元嗣는 道武長子요 太武燾는 明元長子라】</font> 兼靑兗, 包司豫하고 摧赫連, 開關中하며 梟蒲弘<font color="#0054FF" size="2">【前秦也라 弘이 據枋頭하고 獲故趙將麻秋하야 爲將이라가 爲秋所酖하고 且前秦爲西秦乞伏乾歸所滅하니 此云梟蒲弘者는 未詳이라】</font>, 呑遼碣하고 虜沮渠<font color="#0054FF" size="2">【北涼也라】</font>, 幷河右하며 高車<font color="#0054FF" size="2">【北狄部落이라】</font>入臣하고 蠕蠕<font color="#0054FF" size="2">【蠕은 音軟이니 卽柔然이라 宋, 齊謂之芮芮라하니 北狄國이라 魏太武 以其無知하야 狀類動蟲이라 故로 改其號曰蠕蠕이라하니라】</font>遠遁하야 自淮以北으로 逾於大漠<font color="#0054FF" size="2">【北方流沙曰漠이라 沙漠之北은 匈奴南界也니 卽突厥中磧耳라】</font>히 悉爲其有요 子孫稱帝者 百有餘年하니 左袵之盛이 未之有也라 及[[孝文]]<font color="#0054FF" size="2">【宏이니 太武四世孫이라】</font>嗣世에 乃貶戎狄之俗하고 修帝王之政하야 崇儒雅하고 興禮樂하야 其風聲文物이 蔚然可觀矣라 [[宣武]]<font color="#0054FF" size="2">【恪이니 孝文第二子라】</font>懦弱하야 不克負荷라 寵信讒諛<font color="#0054FF" size="2">【趙邕, 高肇等也니 見上卷辛巳年이라】</font>하고 賊虐親賢하니 元氏<font color="#0054FF" size="2">【見上卷改姓元氏注라】</font>之業이 於玆始衰요 重之以[[孝明]]<font color="#0054FF" size="2">【詡이니 宣武第二子라】</font>幼沖하고 胡后<font color="#0054FF" size="2">【宣武后胡氏라】</font>淫恣하야 嬖倖盈朝하야 政出多門하니 賞罰無章하고 紀綱大壞라 守令貪殘하고 黎民愁怨하니 盜賊蜂起하야 日滋月益이라 上之人이 曾無悛心하고 而內自睽離하야 以招外盜라 於是에 [[爾朱榮]]이 乘之而起하야 興晉陽之甲하야 直指伊, 洛하니 母后幼主 沈於回淵<font color="#0054FF" size="2">【戊申年에 爾朱榮이 擧兵晉陽하야 立長樂王子攸하고 而沈太后胡氏及幼主釗于河라】</font>하고 公卿百官이 血濡馬足<font color="#0054FF" size="2">【爾朱榮이 殺王公以下二千人이라】</font>이라 雖[[孝莊]]<font color="#0054FF" size="2">【子攸이니 文帝弟요 彭城王勰之子라 勰은 音協이라】</font>勇決하야 手刃賊臣<font color="#0054FF" size="2">【庚戌年에 帝殺爾朱榮이라】</font>이나 而枝黨四集하야 禍不旋踵<font color="#0054FF" size="2">【見上庚戌年이라】</font>이라 [[孝武]]<font color="#0054FF" size="2">【脩니 文帝子廣平懷之第三子라】</font>惡[[高歡]]之偪하야 逃遁入關이라가 遭[[宇文]]之禍하야 不能自脫하야 東西分裂하야 相繼皆亡이라 嗚呼라 人主當國家全盛之時하야 宴安怠惰하야 以失其威福之柄이면 及民心已去하고 禍亂已成하야는 雖有明斷之才라도 猶不能救어든 況庸君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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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魏나라가 岐陽 땅을 世子世子[[宇文覺]]에게 봉해 주어 [[周公]]으로 삼으니, 魏나라 [[宇文護]]가 [[周公]]이 어리고 약하다 하여 일찍 황제의 자리를 바로잡아 인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庚子日(30일)에 魏나라 [[恭帝]]의 詔命으로 [[周公]]에게 讓位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魏主 元廓이 周公에게 讓位하니, 魏主를 폐하여 宋公으로 삼았다가 또다시 시해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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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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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魏의 선대는 대대로 朔方(北方)의 들<font color="#0054FF" size="2">【北方을 朔이라 한다.】</font>에 살면서 나라를 소유한 지가 오래되었다. 道武帝<font color="#0054FF" size="2">【道武帝는 拓跋珪이다.】</font>는 燕나라가 쇠약한<font color="#0054FF" size="2">【燕主 慕容垂가 이때 燕나라를 배반하였으니, 29권 乙未年條(395)에 보인다.】</font> 틈을 타서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백성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세력을 믿고 中夏를 침범하니, 말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幷州를 취하고<font color="#0054FF" size="2">【魏나라 道武帝가 丙申年(396)에 燕나라를 공격하여 幷州를 취하였다.】</font> 동쪽으로 幽州와 冀州를 점령하여,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아서 수천 리의 땅이 평정되었다. 뒤이어 [[明元帝]]와 太武帝<font color="#0054FF" size="2">【明元帝 拓跋嗣는 道武帝의 長子이고, 太武帝 拓跋燾는 明元帝의 長子이다.】</font>가 靑州와 兗州를 겸병하고司州와 豫州를 포괄하며, [[赫連氏]]를 꺾고關中 지방을 개척하며, [[蒲弘]]을 효수하고<font color="#0054FF" size="2">【蒲(苻)弘은 前秦을 가리킨다. 蒲弘이 枋頭를 점거하고 옛날 後趙의 장수인 麻秋를 사로잡아 장수로 삼았다가 麻秋에게 독살당하였으며, 또 前秦은 西秦의 乞伏乾歸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여기에서 蒲弘을 효수하였다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font>遼碣을 병탄하며, 沮渠氏<font color="#0054FF" size="2">【沮渠氏는 北涼이다.】</font>를 사로잡고河右를 겸병하며, 高車<font color="#0054FF" size="2">【高車는 北狄의 部落이다.】</font>가 들어와 신하가 되고 匈奴族의 別種인 蠕蠕<font color="#0054FF" size="2">【蠕은 음이 연이니, 곧 柔然이다. 宋나라와 齊나라에서는 이를 일러 芮芮라 하였으니, 北狄의 나라이다. 魏나라 太武帝가 그들이 無知하여 꿈틀거리는 벌레와 비슷하다 하여 호칭을 고쳐 蠕蠕이라 하였다.】</font>이 멀리 도망하여, 淮水 이북으로부터 大漠(고비 사막)<font color="#0054FF" size="2">【北方의 사막 지역을 漠이라 한다. 沙漠의 북쪽은 匈奴의 남쪽 경계이니, 바로 突厥의 沙磧이다.】</font>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자손 중에 황제를 칭한 자가 백여 년을 이어갔으니, 左袵한 오랑캐의 성함이 일찍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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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文帝<font color="#0054FF" size="2">【孝文帝는 元宏이니, 太武帝의 4세손이다.】</font>가 뒤를 잇자, 마침내 戎狄의 풍속을 물리치고 帝王의 정사를 닦아서 儒雅를 숭상하고 禮樂을 일으켜서 風敎와 文物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宣武帝<font color="#0054FF" size="2">【宣武帝는 元恪이니, 孝文帝의 둘째 아들이다.】</font>는 나약하여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참소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font color="#0054FF" size="2">【참소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는 趙邕과 高肇 등이니, 上卷의 辛巳年條(501)에 보인다.】</font>를 총애하고 신임하며 친척과 현자를 해치고 모질게 대하니, 元氏<font color="#0054FF" size="2">【元氏는 上卷의 ‘改姓元氏’ 注에 보인다.】</font>의 基業이 이에 비로소 쇠하였고, 게다가 孝明帝<font color="#0054FF" size="2">【孝明帝는 元詡이니, 宣武帝의 둘째 아들이다.】</font>는 어리고 약하며 胡后<font color="#0054FF" size="2">【胡后는 宣武后 胡氏이다.】</font>는 음란하고 방자하여 총애하는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서 정사가 여러 문에서 나오니, 상벌에 기준이 없고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수령들이 탐욕스러워 백성들을 해치며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니, 도적들이 봉기하여 나날이 불어나고 다달이 늘어났다. 그런데도 윗사람은 일찍이 잘못을 고칠 마음이 없고 內部에서는 서로 이반하여 밖의 도둑을 불러들였다. 이에 [[爾朱榮]]이 이 틈을 타고 일어나 晉陽의 군사를 일으켜서 곧바로 伊水와 洛水 지역으로 향하니, 母后와 어린 군주가 回淵에 빠져 죽고<font color="#0054FF" size="2">【戊申年(528)에 爾朱榮이 晉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長樂王 元子攸를 세우고 太后 胡氏와 幼主 元釗를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font> 公卿과 百官들의 피가 말발굽을 적셨다.<font color="#0054FF" size="2">【爾朱榮이 王公 이하 2천 명을 죽였다.】</font> 비록 孝莊帝<font color="#0054FF" size="2">【孝莊帝는 元子攸이니 文帝의 아우이고 彭城王 元勰의 아들이다. 勰은 음이 협이다.】</font>가 용감하게 결단하여 賊臣 [[爾朱榮]]을 손수 칼로 찔러 죽였으나<font color="#0054FF" size="2">【庚戌年(530)에 황제가 爾朱榮을 죽였다.】</font> 徒黨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발길을 돌려 돌아서기도 전에 화가 곧바로 닥쳤다.<font color="#0054FF" size="2">【앞의 庚戌年條(530)에 보인다.】</font> 孝武帝<font color="#0054FF" size="2">【孝武帝는 元脩이니, 文帝의 아들인 廣平王 元懷의 셋째 아들이다.】</font>는 [[高歡]]의 핍박을 싫어하여 도망쳐 關中으로 들어갔다가 [[宇文氏]]의 화를 만나 스스로 벗어나오지 못하여 東魏와 西魏로 분열되었다가 서로 뒤이어 모두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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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人主가 국가가 全盛할 때를 당하여 안일하고 태만하여 賞罰을 내리는 군주의 권한을 잃으면 민심이 이미 떠나고 禍亂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밝게 결단하는 재주가 있어도 구원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용렬한 군주에 있어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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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梁은 四主에 合五十六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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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北周起於[[宇文泰]]라 因元魏擾亂하야 [[孝武]]西奔에 遂挾天子而令之하야 披草萊하고 立朝廷하니 其爲國也 微矣라 然이나 卒收威定霸하고 以弱爲强하야 南淸江, 漢하고 西擧巴, 蜀하고 北控沙漠하고 東據伊, 瀍하며 而又得蘇綽之奇才하야 修一代之文物이라 乃擯黜晉魏하고 憲章古昔하야 依周禮而建六官하고 作九命以敍官爵하니 自三代以來로 官名法度 少有可觀者는 唯[[宇文氏]]耳라 然이나 泰旣鴆[[孝武]]하고 又黜廢帝하니 迹其所爲하면 特亂臣賊子之所作이니 視賀六渾에 有慙德焉이라 史謂其功業如此하야 能以善終이라하니 吾誰欺오 欺天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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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西魏自[[孝武]]西奔長安으로 軍國大權이 悉由於[[宇文氏]]하야 方坐困窮屯蹇之中이어늘 而恣情縱欲하야 爲人道所不爲之事하니 不亡其何待乎아 [[文帝]]雖負剛斷之資나 而權柄이 久有所屬하야 陵遲至[[恭帝]]而見滅於周矣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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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梁나라는 네 군주에 합하여 5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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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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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周는 [[宇文泰]]에게서 시작되었다. 元魏가 소란한 틈을 타서 [[孝武帝(元修)]]가 서쪽으로 도망하자 마침내 天子를 끼고 호령하여 황폐한 곳을 헤치고 조정을 세우니, 그 나라가 미약하였다. 그러나 끝내 위엄을 거두어 霸業을 정하고 약한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서, 남쪽으로는 江‧漢 지방을 깨끗이 소탕하고 서쪽으로는 巴‧蜀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控制하고 동쪽으로는 伊水와 瀍水를 점거하였으며, 또 기이한 재주가 있는 [[蘇綽]]을 얻어 한 시대의 文物을 닦았다. 이에 晉나라와 魏나라의 제도를 물리치고 옛 법을 憲章으로 삼아서 《周禮》를 따라 六官六官을 세우고 九命九命을 만들어 官爵을 서열하니, 三代 이후로 官名과 法度가 다소 볼 만한 것은 오직 [[宇文氏]]일 뿐이다. 그러나 [[宇文泰]]는 [[孝武帝]]를 독살하고 또 [[廢帝]]를 축출하였으니, 그가 한 짓을 살펴보면 다만 亂臣賊子의 행위일 뿐이니, [[賀六渾]]에게 비교함에 부끄러운 德(마음)이 있다. 史臣이 ‘그의 功業이 이와 같아서 잘 마쳤다.’고 말하였으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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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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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魏는 [[孝武帝]]가 서쪽 長安으로 달아난 뒤로부터 軍國의 大權이 모두 [[宇文氏]]에게서 나와서 곤궁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었는데도 마음대로 욕심을 부려서 사람의 도리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였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文帝]]가 비록 꿋꿋하게 결단하는 資品을 타고났으나 權柄이 오랫동안 소속한 곳이 있어서 침체되어 [[恭帝]]에 이르러 周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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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5일 (목) 22:44 기준 최신판

晉紀

安皇帝

安皇帝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安皇帝【寬容和平曰安이라】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安皇帝【너그럽고 포용하여 화평한 것을 安이라 한다.】는 이름이 德宗이니 武帝의 태자이다. 재위가 22년이고 壽가 37세이다.

[丁酉]隆安元年

[丁酉]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요 秦皇初四요 魏皇始(三)[二]年이라 ○ 南涼王禿髮烏孤太初元年이요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小國二요 新小國二니 凡七僭國이라〉


魏王 自將圍中山하니 中山이 飢甚이라 慕容麟이 帥二萬餘人하고 出據新市어늘 甲子晦에 魏王進軍攻之할새 太史令太史令鼂崇曰 不吉하니이다 昔에 以甲子亡하니 謂之疾日【左傳昭九年 辰在子卯謂之疾日注에 疾은 惡也니 紂以甲子喪하고 桀以乙卯亡이라 故로 以爲忌라】이라 兵家忌之하니이다 는 以甲子亡이어니와 武王은 不以甲子興乎아 無以對러라 十月甲戌에 으로 戰於義臺하야 大破之하니 遂奔鄴하다 甲申에 魏克中山【是年三月에 魏王珪 圍中山한대 燕王寶走出이어늘 慕容詳이 城守拒魏하고 自謂能却魏兵하야 兵威已振이라하야 遂卽帝位러니 麟襲殺詳而自立이라 至是하야 珪克中山이라】하다 至鄴하야 復稱趙王하다

隆安 元年(정유 397) - 燕나라 永康 2년이고, 秦나라 皇初 4년이고, 魏나라 皇始 2년이다. ○ 南涼王禿髮烏孤의 太初 元年이고, 北涼王段業의 神璽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과 涼 등 小國이 둘이고,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魏王拓跋珪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中山을 포위하니, 中山이 饑饉이 몹시 심하였다. 慕容麟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新市를 점거하자, 甲子日(9월 29일) 그믐에 魏王拓跋珪가 진군하여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太史令太史令鼂崇이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옛날에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날을 疾日【≪春秋左傳≫ 昭公 9年條의 ‘辰在子卯 謂之疾日(일진이 甲子와 乙卯에 있는 것을 疾日이라 한다)’ 注에 “疾은 불길한 것이니, 紂王은 甲子日에 망하였고 桀王은 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이라 이르는 바, 兵家에서 이를 꺼립니다.” 하였다. 拓跋珪가 말하기를 “紂王은 갑자일에 망하였으나 武王은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는가?” 하니, 鼂崇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10월 甲戌日(10일)에 拓跋珪慕容麟과 義臺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慕容麟이 마침내 鄴城으로 도망하였다. 甲申日(20일)에 魏나라가 中山을 이겼다.【이해 3월에 魏王 拓跋珪가 中山을 포위하자 燕王 慕容寶가 달아나니 慕容詳이 城을 수비하여 魏나라를 막고서, 스스로 魏나라 군대를 물리쳐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졌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慕容麟이 慕容詳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拓跋珪가 中山을 이겼다.】慕容麟은 鄴城에 이르러 다시 趙王이라 칭하였다.

[戊戌]二年

[戊戌]二年이라 〈燕主慕容盛建平元이요 秦皇初五요 魏天興元年이라 ○ 南燕王慕容德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南涼, 北涼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正月에 慕容麟이 說范陽王하야 南徙滑臺하니 魏遂取鄴하다 이 上尊號於하니 이 用兄垂故事하야 稱燕王【燕은 南燕이라[釋義]慕容德은 字元明이니 少子也라 敗走에 燕王하고 據廣固하니라】하다

隆安 2년(무술 398) - 燕主慕容盛의 建平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5년이고, 魏나라 天興 元年이다. ○ 南燕王慕容德의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涼(後涼)‧南涼‧北涼 등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正月에 慕容麟范陽王慕容德을 설득하여 남쪽으로 도읍을 滑臺에 옮기니, 魏나라가 마침내 鄴城을 취하였다. 慕容麟慕容德에게 尊號를 올리니, 慕容德이 형 慕容垂의 故事를 따라 燕王이라 칭하였다.【[原註]燕은 南燕이다.[釋義]慕容德은 字가 元明이니 慕容皝의 작은아들이다. 慕容寶가 패주하자, 慕容德燕王을 칭하고 廣固를 점거하였다.】

燕王卒하니 長樂王【後燕也니 之子라】이 卽皇帝位하다

燕王慕容寶가 죽으니, 長樂王慕容盛長樂王慕容盛은 後燕이니, 慕容寶의 아들이다.】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一月에 魏王卽皇帝位하야 改元天興하고 命朝野하야 皆束髮加帽【帽는 小兒蠻夷蒙頭衣니 晉書輿服志曰 帽는 猶冠也라하니라】하다

○ 11월에 魏王拓跋珪가 황제에 즉위하여天興으로 개원하고, 朝野에 명해서 모두 중국식으로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쓰게【帽는 오랑캐 어린아이의 蒙頭衣(蒙頭里)니, ≪晉書≫〈輿服志〉에 이르기를 “帽는 冠과 같다.” 하였다.】 하였다.

[己亥]三年

[己亥]三年이라 〈燕長樂元이요 秦弘始元이요 魏天興二年이라 ○ 涼主呂纂咸寧元이요 北涼天璽元年이라〉


魏王置五經博士五經博士하고 增國子國子太學太學生員하야 合三千人하다

隆安 3년(기해 399) - 燕나라 長樂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元年이고, 魏나라 天興 2년이다. ○ 涼主呂纂의 咸寧 元年이고, 北涼天璽 元年이다.-


魏王拓跋珪가 五經博士五經博士를 설치하고國子學國子學과 太學太學의 生員生員을 늘려 모두 3천 명이 되게 하였다.

南燕王이 引師而南하니 北鄙諸郡이 皆降之어늘 遂定都廣固하다

南燕王慕容德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니, 북쪽 변방의 여러 郡이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廣固에 도읍을 정하였다.

會稽世子【會稽王은 道子이니 卽瑯琊王이라】元顯이 性苛刻하야 生殺任意하니 孫恩【琅琊人이니 世奉五斗米道라 恩叔父泰 有秘術하야 愚者敬之如神하야 皆竭財産하고 進子女하야 以祈福慶이러니 爲會稽王道子所誅한대 恩逃于海하다 衆聞泰死하고 惑之하야 皆謂蟬蛻登仙이라 故로 就海中資給하니 恩聚合亡命하야 志欲復讐하고 因民心騷動하야 遂叛하니라 後爲臨海太守辛景所討하야 窮蹙赴海自沈하니 妖黨謂之水仙이라하야 投水從死者百數러라 五斗米道는 見二十三卷米賊注하니라】이 因民心騷動하야 自海島로 帥其黨하야 殺上虞令上虞令하고 遂攻會稽하다 於是에 會稽及東陽, 新安凡八郡人이 一時起兵하야 殺長吏以應恩하니 旬日之中에 衆이 數十萬이러라 時에 三吳承平【承은 一作昇이라】日久하야 民不習戰이라 故로 郡縣兵이 皆望風奔潰라 恩據會稽하야 自稱征東將軍征東將軍하고 表會稽王道子及世子世子元顯之罪하야 請誅之하다

會稽王의 世子【會稽王은 司馬道子이니, 곧 瑯琊王이다.】司馬元顯이 성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孫恩【孫恩은 琅琊 사람이니, 대대로 五斗米道를 믿었다. 孫恩의 叔父인 孫泰가 비밀스런 방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神처럼 공경하여 모두 재산을 탕진하고 자녀를 바쳐 福을 빌었는데,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孫恩이 海島로 도망하였다. 사람들이 孫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혹하여 모두 이르기를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海島에 나아가 物資를 공급하니, 孫恩이 망명한 자들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자 하여 민심이 騷動한 틈을 타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뒤에 臨海太守 辛景에게 토벌당하여 궁지에 몰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요망한 무리가 水仙(水國의 神仙)이라 이르며 물속에 투신하여 따라 죽은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려졌다. 五斗米道는 23권 米賊 注에 보인다.】이 民心이 소요한 틈을 타서 海島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上虞令上虞令을 죽이고 마침내 會稽를 공격하였다. 이에 會稽와 東陽, 新安 등 모두 여덟 郡의 사람들이 일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수령을 죽이고 孫恩에게 호응하니,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三吳 지방은 태평을 누린【承은 다른 곳에는 昇으로 되어 있다.】 지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郡縣의 병력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었다. 孫恩이 會稽를 점거하여征東將軍征東將軍이라 자칭하고, 表文을 올려 會稽王司馬道子와 世子世子인 司馬元顯의 죄를 열거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 自帝卽位以來로 內外乖異하야 石頭以南은 皆爲荊, 江所據【荊은 殷仲堪이요 江은 王愉라】하고 以西는 皆豫州所專【豫는 庾楷라】이요 京口及江北은 皆劉牢之【彭城人이니 沈毅多計畫이라 爲桓玄參軍하야 領精銳하고 爲前鋒하야 百戰百勝하니 號爲北(部)[府]하고 敵人畏之라 復爲龍驤將軍, 領江州而死하니라】及廣陵相高雅之所制하야 朝政所行은 惟三吳而已러니 及孫恩作亂에 八郡【謂荊, 江, 豫, 京口, 江北及三吳라】이 皆爲恩有하야 畿內諸縣에 盜賊이 處處蜂起【言其衆也라】하고 黨이 亦有潛伏在建康者하니 人情危懼하야 常懼竊發이러라 於是에 內外戒嚴하야 加道子黃鉞하고 元顯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하고 命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하야 兼督吳興義興軍事하야 以討하고 劉牢之亦發兵討할새 拜表輒行하다 十二月에 謝琰이 與牢之로 轉鬪【轉相戰鬪也라】而前하니 所向輒克이러라

○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 군벌이 서로 괴리되어서 石頭城 이남은 모두 荊州와 江州의 두 刺史刺史에게 점거당하였고【荊州刺史는 殷仲堪이요, 江州刺史는 王愉이다.】石頭城 이서는 모두 豫州의 전유물이 되었으며,【豫州刺史는 庾楷이다.】京口와 江北은 모두 劉牢之【劉牢之는 彭城 사람이니, 침착하고 굳세며 계책이 많았다. 桓玄의 參軍이 되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백전백승하니, 이름하기를 北府兵이라 하고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다시 龍驤將軍‧領江州刺史가 되었다가 죽었다.】와 廣陵相廣陵相인 高雅之에게 控制당하여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는 곳은 오직 三吳 지방뿐이었다. 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여덟 郡【여덟 郡은 荊州, 江州, 豫州, 京口, 江北 및 三吳(吳郡, 吳興, 丹陽)를 이른다.】이 모두 孫恩의 소유가 되자, 畿內畿內의 諸縣에서 도적들이 곳곳마다 봉기【蜂起는 많음을 말한 것이다.】하고 孫恩의 도당 중에 또한 建康에 잠복해 있는 자가 있으므로 人情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적이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안팎으로 엄밀하게 경계하여 司馬道子에게 黃鉞을 가하고 司馬元顯에게 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을 가하였으며 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에게 명하여 吳興과 義興郡의 軍事를 겸하여 도독해서 孫恩을 토벌하게 하였다. 劉牢之 또한 군대를 일으켜 孫恩을 토벌할 적에 표문을 올리고 즉시 떠났다.


12월에 謝琰劉牢之와 轉轉하여 싸우면서【轉鬪는 轉轉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 전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이겼다.

○ 初에 彭城劉裕【宋高祖라】 勇健有大志라 僅識文字하고 以賣履爲業하고 好樗蒲【老子所作이니 令人擲之爲戲라 以五木爲之子하니 有梟盧雉犢塞五者하야 爲勝負之策하니 卽今之骰子라 骰는 音頭니 骰子는 博陸彩具라】하니 爲鄕閭所賤이라 劉牢之孫恩할새 引參軍事하고 使將數十人하야 覘賊이러니 遇賊數千人하야 卽迎擊之라가 從者皆死하고 墜岸下라 賊이 臨岸欲下어늘 奮長刀하야 仰斫殺數人하고 乃得登岸하야 仍大呼逐之하니 賊皆走하고 所殺傷이 甚衆이러라 劉敬宣【牢之之子라】이 怪久不返하야 引兵尋之라가 見獨驅數千人하고 咸共歎息하야 因進擊賊하야 大破之하고 斬獲千餘人하다

○ 처음에 彭城의 劉裕【劉裕는 宋나라 高祖이다.】가 용맹하고 굳세며 큰 뜻이 있었다. 겨우 글자를 알고 짚신을 파는 것을 生業으로 삼으며 樗蒲(쌍륙과 골패 놀이)【老子가 만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던지게 하여 놀이를 하는 것이다. 五木으로 子를 삼는데, 梟‧盧‧雉‧犢‧塞의 다섯 가지가 있어 勝負의 策으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骰子(주사위)이다. 骰는 音이 두(투)이니, 骰子는 博陸(쌍륙)할 때 사용하는 彩具이다.】를 좋아하니, 鄕閭에서 천대를 받았다. 劉牢之孫恩을 공격할 적에 劉裕를 임용하여 參軍事參軍事로 삼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수천 명의 적을 만나 즉시 요격하였다가 수행했던 자는 모두 죽고 劉裕는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적이 언덕에서 굽어보고 내려오려 하자, 劉裕가 긴 칼을 휘둘러 몇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찔러 죽이고 마침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크게 고함치면서 그들을 쫓아가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으며, 劉裕에게 살상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劉敬宣【劉敬宣은 劉牢之의 아들이다.】劉裕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찾아 나섰다가 劉裕가 홀로 수천 명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함께 감탄하고 인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천여 명이었다.

○ 初에 聞八郡響應하고 謂其屬曰 天下無復事矣라 當與諸君으로 朝服至建康이라하더니 旣而오 聞牢之引兵濟江하고 驅男女二十餘萬口하야 復逃入海島하다

○ 처음에 孫恩이 여덟 郡이 호응한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 朝服을 입고 建康에 이르러 帝位에 오르겠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劉牢之가 군대를 이끌고 浙江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는 孫恩이 남녀 백성 20여만 명을 몰고 다시 海島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殷仲堪【時爲荊州剌史하니라】이 恐桓玄跋扈【見十九卷丙戌年注라】하야 乃與楊佺期【雍州刺史라】로 結婚爲援이어늘 이 引兵擊殺之하다 이 旣克荊, 雍하고 表求領荊, 江二州하니 朝廷이 不能違러라

○ 殷仲堪【殷仲堪이 이때 荊州剌史로 있었다.】桓玄이 跋扈【跋扈는 19권 丙戌年(146) 注에 보인다.】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楊佺期【楊佺期는 雍州刺史로 있었다.】와 혼인을 맺어 서로 원조하게 하였는데, 桓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殷仲堪楊佺期를 공격하여죽였다. 桓玄이 이미 荊州와 雍州를 점령하고 表文을 올려 荊州와 江州 두 州를 거느릴 것을 청하니, 朝廷에서 어기지 못하였다.

涼王이 卒하고 太子卽位하니 太原公【纂이 嗜酒好獵이어늘 隆安五年에 呂超殺之하고 而立呂隆이러니 安帝元興二年에 降于秦하야 涼遂滅하니라[頭註]太原公纂은 紹之庶兄이라】이 殺之하고 而卽天王位하다

涼王呂光이 죽고太子太子呂紹가 즉위하니, 太原公 呂纂【[原註]呂纂이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자, 隆安 5년(401)에 從弟 呂超가 그를 죽이고 呂隆을 세웠는데, 安帝 元興 2년(403)에 秦나라 姚興에게 항복함으로써 涼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頭註]太原公 呂纂은 呂紹의 庶兄이다.】이 그를 죽이고天王天王에 즉위하였다.

[庚子]四年

[庚子]四年이라 〈燕長樂二요 秦弘始二요 魏天興三年이라 ○ 南燕建平元이요 南涼王禿髮利鹿孤建和元年이요 西涼公李暠庚子元年이라 ○ 是歲에 西秦降秦하니 舊大國三이요 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隆安 4년(경자 400) - 燕나라 長樂 2년이고, 秦나라 弘始 2년이고, 魏나라 天興 3년이다. ○ 南燕建平 元年이고, 南涼王禿髮利鹿孤의 建和 元年이고, 西涼公李暠의 庚子 元年이다. ○ 이해에 西秦이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南燕王이 卽皇帝位于廣固하고 更名備德하다

南燕王慕容德이 廣固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

[辛丑]五年

[辛丑]五年이라 〈燕主慕容熙光始元이요 秦弘始三이요 魏天興四年이라 ○ 涼王呂隆神鼎元이요 北涼王沮渠蒙遜永安元年이라〉

隆安 5년(신축 401) - 燕主慕容熙의 光始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3년이고, 魏나라 天興 4년이다. ○ 涼王呂隆의 神鼎 元年이고, 北涼王沮渠蒙遜의 永安 元年이다.-

正月에 武威王利鹿孤【以元興元年卒하니 弟傉檀立하야 自稱南涼王하니라[附註]禿髮氏也니 鮮卑別種으로 與拓跋同祖라 晉志에 河西鮮卑人也라 七祖壽闐在孕할새 母因寢而産於被中하니 鮮卑謂被爲禿髮일새 因而氏焉이라 至孫樹機〈能〉하야 據有涼州之地하고 至烏孤嗣位러니 呂光이 署爲冠軍大將軍하다 丁酉年에 自稱西平王이러니 烏孤死에 弟利鹿孤立하니라】河西王하다 北涼沮渠蒙遜【沮渠는 官名이라 其先世爲匈奴左沮渠일새 蒙遜以官爲氏라】이 殺涼王業【建康太守段業也라 丁酉年叛하야 自稱涼州牧, 建康公하다 蒙遜이 以衆歸之하고 己亥年에 自稱涼王이러니 至是에 蒙遜殺之하니라】하고 自稱涼州牧涼州牧하다

正月에 武威王 禿髮利鹿孤【[原註]禿髮利鹿孤가 元興 元年(402)에 죽자 아우 禿髮傉檀이 즉위하여 스스로 南涼王이라 칭하였다.[附註]利鹿孤는 禿髮氏이니 鮮卑族의 別種으로 拓跋氏와 조상이 같다. ≪晉書≫ 〈載記〉에 “禿髮利鹿孤는 河西 鮮卑族 사람이다. 7세조 壽闐이 胎中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잠을 자다가 이불 속에서 그를 낳으니, 鮮卑族은 이불을 禿髮이라 하기 때문에 인하여 姓氏로 삼았다. 손자인 禿髮樹機能에 이르러 涼州 지역을 점령하였고 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呂光이 임명하여 冠軍大將軍으로 삼았다. 정유년(397)에 西平王이라 자칭하였는데, 禿髮烏孤가 죽자 아우 禿髮利鹿孤가 즉위했다.” 하였다.】河西王을 칭하였다. 北涼의 沮渠蒙遜【沮渠는 官名이다. 그 선조가 匈奴의 左沮渠였으므로 蒙遜이 관명으로써 姓氏를 삼은 것이다.】涼王 段業【涼王 業은 建康太守 段業이다. 정유년(397)에 배반하여 스스로 涼州牧‧建康公이라 칭하였다. 沮渠蒙遜이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였고, 기해년(399)에 스스로 涼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때(401)에 沮渠蒙遜이 그를 죽인 것이다.】을 죽이고 스스로 涼州牧涼州牧이라 칭하였다.

燕主이 卒하고 【垂之少子라】卽位하다

燕主慕容盛이 죽고 慕容熙【慕容熙는 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가 즉위하였다.

[壬寅]元興元年

[壬寅]元興元年이라 〈燕光始二요 秦弘始四요 魏天興五年이라 ○ 南涼王禿髮傉檀弘昌元年이라〉

元興 元年(임인 402) - 燕나라 光始 2년이고, 秦나라 弘始 4년이고, 魏나라 天興 5년이다. ○ 南涼王禿髮傉檀의 弘昌 元年이다.-

以尙書令尙書令元顯으로 爲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하야 討桓玄할새 以劉牢之로 爲前鋒前鋒하고 譙王尙之로 爲後部後部하다 이 大驚하야 欲完聚保江陵이어늘 長史長史卞範之曰 明公은 英威振於遠近하고 元顯은 口尙乳臭요 劉牢之는 大失物情하니 若兵臨近畿하야 示以禍福이면 土崩之勢를 可翹足【翹는 企也라】而待하리니 何有延敵入境하야 自取窮蹙者乎잇가 이 從之하다 至新亭【在江寧縣南十里하니 俯近江渚라 周顗嘗與群公으로 遊宴于此하니라】하니 元顯이 引兵欲還宮이어늘 이 遣人拔刀하야 隨後大呼曰 放仗【放仗은 謂呼令放棄兵仗也라】하라하니 軍人이 皆崩潰러라 이 入京하야 摠百揆【書云納于百揆라한대 蔡氏傳曰 揆는 度也니 百揆는 揆度庶政之官이라 惟唐, 虞有之하니 猶周之冢宰也라】하고 斬元顯東海王彦璋, 譙王尙之等於建康市하니 劉牢之는 北走至新州하야 縊而死하고 道子等도 皆死하다 自隆安【帝之初年號라】以來로 中外之人이 厭於禍亂이라 及初至하야 黜奸佞하고 擢雋(俊)賢하니 京師欣然하야 冀得少安이러니 旣而오 이 奢豪縱逸하야 政令이 無常하고 朋黨이 互起하야 陵侮朝廷하고 裁損乘輿供奉之具하니 帝幾不免飢寒이라 由是로 衆心이 失望이러라

尙書令尙書令司馬元顯을 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으로 삼아 桓玄을 토벌할 때에 劉牢之를 前鋒都督前鋒都督으로 삼고 譙王司馬尙之를 後部都督後部都督으로 삼았다. 桓玄이 크게 놀라서 성곽을 수리하고 식량을 모아 江陵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長史長史卞範之가 말하기를 “明公께서는 용맹과 위엄이 원근에 떨쳐졌는데, 司馬元顯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고 劉牢之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만일 우리 군대가 近畿에 가서 禍福의 道理를 보여 준다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를 발돋움하고【翹는 발돋움하고 바라는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맞아들여 경내로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곤궁하고 위축됨을 취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玄이 그의 말을 따랐다.


桓玄이 新亭【新亭은 江寧縣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 부근이다. 周顗가 일찍이 여러 공들과 여기에서 놀고 잔치하였다.】에 이르니, 司馬元顯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桓玄이 사람을 보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따라가며 크게 고함치기를 “병장기를 버리라.” 하니,【放仗은 고함을 쳐서 병장기를 버리게 함을 이른다.】 군사들이 모두 와해되었다. 桓玄이 서울로 들어가서 百官을 총령하고【≪書經≫ 〈舜典〉에 이르기를 “百揆에 앉혔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揆는 헤아림이니, 百揆는 여러 정사를 헤아리는 관원이다. 오직 唐‧虞 시대에만 있었으니, 周나라의 冢宰와 같다.” 하였다.】司馬元顯, 東海王司馬彦璋, 譙王司馬尙之 등을 建康의 시장에서 목 베니, 劉牢之는 북쪽으로 달아나 新州에 이르러 목을 매어죽고司馬道子 등도 모두 죽었다.


隆安【晉나라 安帝의 처음 年號이다.】 이래로 中外의 사람들이 재앙과 난리를 싫어하였다. 桓玄이 처음에 이르러서 간신들을 물리치고 준걸들을 발탁하니, 京師가 기뻐하여 다소 편안해지기를 바랐는데, 이윽고 桓玄이 사치하고 방종하여 정사와 명령이 일정함이 없고 朋黨이 서로 일어나서 조정을 능멸하고 乘輿(皇帝)에게 供奉하는 물품을 대폭 줄이니, 황제가 거의 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뭇사람들이 실망하였다.

孫恩이 赴海死하니 衆이 推妹夫盧循하야 爲主하다

孫恩이 바다에 뛰어들어죽으니, 무리들이 孫恩의 매부인 盧循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癸卯]二年

[癸卯]二年이라 〈燕光始三이요 秦弘始五요 魏天興六年이라 ○ 是歲에 涼亡하니 大三이요 小四니 凡七僭國이라〉

元興 2년(계묘 403) - 燕나라 光始 3년이고, 秦나라 弘始 5년이고, 魏나라 天興 6년이다. ○ 이해에 涼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九月에 冊命하야 爲相國相國하야 摠百揆하고 封十郡하야 爲楚王하고 加九錫九錫하다

9월에 桓玄을 책봉하여相國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열 郡을 봉해 주어 楚王으로 삼고九錫을 가하였다.

○ 十二月에 玄이 卽皇帝位하다 이 入建康宮建康宮하야 登御座할새 而床忽陷이라 群臣이 失色이어늘 殷仲文【侍中也니 玄之妹夫라】曰 將由聖德深厚하야 地不能載라한대 이 大悅하다 辛亥에 玄이 遷帝於尋陽하다

○ 12월에 桓玄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桓玄이 建康宮에 들어가서 御座에 오를 적에 龍床이 갑자기 바닥이 꺼졌다. 여러 신하들이 사색이 되었는데 殷仲文【殷仲文은 侍中이니, 桓玄의 妹夫이다.】이 말하기를 “아마도 聖德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닥이 꺼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桓玄이 크게 기뻐하였다. 辛亥日(22일)에 桓玄이 황제를 尋陽으로 옮겼다.

[甲辰]三年

[甲辰]三年이라 〈燕光始四요 秦弘始六이요 魏天賜元年이라〉


劉裕桓脩【徐兗州刺史, 安成王이라】入朝어늘 謂王謐【司徒니 爲玄佐命元臣이라】風骨不常하니 蓋人傑也라하더라 玄后劉氏 有智鑑이라 謂劉裕龍行虎步하고 視瞻不凡하니 恐終不爲人下하노니 不如早除之라한대 曰 我方平蕩【蕩은 滌也라】中原호니 非裕면 莫可用者라 俟關, 河平定然後에 別議之爾라하더라

元興 3년(갑진 404) - 燕나라 光始 4년이고, 秦나라 弘始 6년이고, 魏나라 天賜 元年이다. -


劉裕가 桓脩【桓脩는 徐州兗州刺史‧安成王으로 있었다.】를 따라 入朝하자, 桓玄이 王謐【王謐은 司徒이니, 桓玄의 佐命元臣이다.】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풍채와 골격이 비범하니, 인걸이다.” 하였다. 桓玄의 아내인 劉氏는 智謀와 識鑑이 있었는데, 桓玄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걸음을 걷는 모양이 용과 범 같고 눈초리가 비범하여 끝내 남의 아랫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내가 막 중원을 평정【蕩은 씻어내는 것이다.】하려 하니, 劉裕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다. 關中과 黃河 지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 裕與何無忌【琅琊內史라】로 同舟還京口하야 密謀復興晉室하다 劉毅家於京口하야 亦與無忌로 謀討이러니 無忌曰 天下草澤之中에 非無英雄也니라 曰 所見에 唯有劉下邳【裕爲下邳太守하니라】니라 無忌笑而不答하고 還以告裕하고 遂與定謀하다

劉裕가 何無忌【何無忌는 琅琊內史이다.】와 함께 배를 같이 타고 京口로 돌아와 은밀히 晉나라 황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였다. 劉毅가 京口에 거주하여 또한 何無忌와 함께 桓玄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何無忌가 말하기를 “천하의 초야 가운데에 영웅이 없지 않다.” 하니, 劉毅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직 劉下邳(劉裕)【劉裕가 이때 下邳太守로 있었다.】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何無忌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서 돌아가 이것을 劉裕에게 고하고 마침내 劉毅와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 二月乙卯에 裕託以遊獵하고 與無忌로 收合徒衆하야 得百餘人하다 詰旦【平旦也라】에 京口城開어늘 無忌著傳詔服하고 稱勅居前하니 徒衆이 隨之齊入하야 卽斬桓脩以徇【行示也라】하다 衆推爲盟主하니 이 憂懼特甚이라 或曰 劉裕等은 烏合【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微弱하야 勢必無成하리니 陛下何慮之深이니잇고 劉裕는 足爲一世之雄이요 劉毅는 家無襜石之儲【襜은 齊人이 名小甖爲襜이라 石은 斗石也라】로되 樗蒲에 一擲百萬하고 何無忌는 酷似其舅【酷은 甚也라 舅는 謂劉牢之라】어늘 共擧大事하니 何謂無成고

○ 2월 乙卯日(27일)에 劉裕가 사냥을 나간다고 칭탁하고서 何無忌와 함께 무리를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詰旦은 平旦(동틀 때)이다.】京口의 성문이 열리자, 何無忌가 傳詔(詔令을 전달하는 관원)의 옷을 입고 勅使라 칭하고 앞에 있으니, 무리가 뒤를 따라 일제히 城에 들어가서 곧바로 桓脩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려 보였다.【徇은 다니면서 보이는 것이다.】


무리가 劉裕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桓玄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특히 심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劉裕 등은 烏合之卒【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이라 역량이 미약하여 형세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깊이 염려하십니까?”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劉裕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될 만하고, 劉毅는 집안에 한 말과 한 섬의 저축【襜은 齊나라 사람들이 작은 술단지를 이름하여 襜이라 한다. 石은 말[斗]과 섬[石]이다.】도 없었으나 樗蒲 놀이할 때에 한 번에 백만 전을 걸었으며, 何無忌는 모습이 그의 외삼촌(劉牢之)과 매우 흡사한데,【酷은 매우이다. 外叔은 劉牢之를 이른다.】 이들이 함께 大事를 일으켰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 三月에 劉毅等으로 分爲數隊하야 竝進할새 以身先之하니 將士皆殊死戰하야 無不一當百이요 呼聲이 動天地라 時에 東北風이 急이어늘 因縱火焚之하니 煙火熛【火飛也라】天하고 鼓譟之音이 震動京邑하니 諸軍이 大潰라 이 帥親信數千人하고 走趨石頭하니 入建康하야 帥百官하야 奉迎乘輿하고 誅宗族在建康者하다

○ 3월에 劉裕劉毅 등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함께 진군할 적에 劉裕가 앞장서서 솔선하니, 장병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동북풍이 맹렬히 불자, 이 틈을 타서 불을 놓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고【熛는 불똥이 튀는 것이다.】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京邑을 진동하여 〈桓謙 등의〉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桓玄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石頭城으로 향하니, 劉裕가 建康에 들어가 백관을 거느리고 尋陽에서 乘輿(황제)를 맞이하고 建康에 있는 桓玄의 宗族들을 죽였다.

始至建康하야 諸大處分【處는 區處也요 分은 分別也라】을 皆委於劉穆之【裕召爲主簿라】하니 倉猝立定에 無不允愜이라 遂託以心腹하야 動止를 諮焉하니 穆之亦竭節盡誠하야 無所遺隱이러라 時에 晉政寬弛하야 綱紀不立하고 豪族陵縱하야 小民窮蹙하며 重以司馬元顯의 政令違舛【舛은 錯謬也라】하니 桓玄이 雖欲釐整이나 而科條繁密하야 衆莫之從이러니 穆之斟酌時宜하야 隨方矯正【揉曲爲矯니 言隨事矯揉하야 使歸於正이라】하고 以身範物하야 先以威禁하니 內外百官이 皆肅然奉職하야 不盈旬日에 風俗이 頓改러라

劉裕가 처음 建康에 이르러서 모든 중대사의 처분【處는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고, 分은 分別이다.】을 劉穆之【劉穆之는 劉裕가 불러서 主簿를 삼았다.】에게 다 맡기니, 창졸간에 신속하게 결정함에 사람들이 지당하게 생각하고 흡족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劉裕가 마침내 그를 心腹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막론하고 그에게 자문하니, 劉穆之 또한 충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빠뜨리거나 숨기는 바가 없었다. 이때 晉나라의 정사가 해이해져 紀綱이 서지 않고 豪族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庶民들이 곤궁하였으며 여기에 司馬元顯의 정사와 명령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니,【[釋義]重以司馬元顯 政令違舛:舛은 어그러지고 잘못됨이다.】桓玄이 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法條文이 번거롭고 세밀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다. 劉穆之가 時宜를 참작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로잡고【휘어서 구부리는 것을 矯라 하니, 일에 따라 바로잡아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劉裕가 앞장서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 먼저 위엄으로 금지시키니, 내외의 백관들이 모두 숙연히 직책에 종사해서 열흘이 못 되어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 四月에 劉毅, 何無忌等이 襲破尋陽城하다 桓玄이 挾帝하고 單舸西走하야 入江陵이어늘 遂斬之하다 乘輿反正於江陵하다

○ 4월에 劉毅何無忌 등이 尋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桓玄이 황제를 끼고 한 척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여 江陵으로 들어가자, 〈益州督護益州督護馮遷이〉 마침내 桓玄을 목 베었다. 乘輿(황제)가 강릉에서 反正(復位)하였다.

魏主 置六謁官하니 準古六卿六卿이요 又官名을 多不用漢, 魏之舊하고 倣上古龍官, 鳥官【伏羲氏受命時에 有龍瑞故로 以龍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龍爲名號하고 少昊氏之時에 鳳鳥適至故로 以鳥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鳥爲名號하니라】하야 謂諸曹之使하야 爲鳧鴨이라하니 取其飛之迅疾也요 謂候官伺察者하야 爲白鷺라하니 取其延頸遠望也라 餘皆類此러라

魏主拓跋珪가 여섯 명의 謁官을 두니 옛날의 六卿六卿을 따른 것이요, 또 관직명에 漢나라와 魏나라 때의 옛 명칭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上古時代의 龍官과 鳥官【伏羲氏가 天命을 받았을 때에 龍의 상서가 있었으므로 龍으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龍으로써 명칭을 삼았고, 少昊氏 때에 鳳鳥가 마침 이르렀으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새로써 명칭을 삼았다.】을 따라서 여러 曹의 使者使者를 일러 鳧鴨(오리)이라 하였으니 鳧鴨은 나는 것이 신속한 뜻을 취한 것이요, 斥候와 伺察을 맡은 자를 일러 白鷺라 하였으니 白鷺는 목을 늘여 멀리 바라보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았다.

[乙巳]義熙元年

[乙巳]義熙元年이라 〈燕光始五요 秦弘始七이요 魏天賜二年이라 ○ 南燕主慕容超太上元이요 西涼建初元年이라〉

義熙 元年(을사 405) - 燕나라 光始 5년이고, 秦나라 弘始 7년이고, 魏나라 天賜 2년이다. ○ 南燕主南燕主慕容超의 太上 元年이고, 西涼建初 元年이다.-

三月에 帝至建康하야 以劉裕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四月에 還鎭京口하다 八月에 南燕王備德【上庚子年에 南燕王慕容德이 稱帝하고 更名備德하니라】이 卒하고 兄子【備德이 無子일새 以兄北海王納之子超로 爲嗣하니라】襲位하다

3월에 황제가 建康에 이르러서 劉裕를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4월에 劉裕가 돌아와 京口에 주둔하였다.


8월에 南燕王 慕容備德【위의 庚子年條(400)에 南燕王 慕容德이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이 죽고 형의 아들 慕容超【慕容備德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兄인 北海王 慕容納의 아들 慕容超를 후사로 삼았다.】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丁未]三年

[丁未]三年이라 〈秦弘始九요 魏天賜四年이라 ○ 燕主高雲正始元年이요 夏主赫連勃勃【自謂夏后氏之苗裔하야 稱大夏하니 匈奴南單于苗裔也라 謂帝王繼天爲子하니 是爲徽赫이 實與天連이라하고 改姓曰赫連氏라하니라】龍昇元年이라 ○ 是歲에 燕慕容熙亡하니 舊大國二요 小國四요 新小國二니 凡八僭國이라〉

義熙 3년(정미 407) - 秦나라 弘始 9년이고, 魏나라 天賜 4년이다. ○ 燕主(北燕)高雲高雲의 正始 元年이고, 夏主 赫連勃勃【赫連勃勃이 스스로 夏后氏의 후손이라 하여 大夏天王이라 칭하였으니, 匈奴 南單于의 후손이다. 말하기를 “帝王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들이 되니, 이것은 그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실로 하늘과 이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劉氏姓을 고쳐 赫連氏라 하였다.】의 龍昇 元年이다. ○ 이해에 燕나라(後燕) 慕容熙가 망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初에 魏主滅劉衛辰【劉淵之族也라】하니 其子勃勃이 奔秦이어늘 秦主이 見而奇之하야 使鎭朔方이러니 久之에 復叛秦하고 自稱大夏天王하다

처음에 魏主拓跋珪가 劉衛辰【劉衛辰은 劉淵의 종족이다.】을 멸하자, 그 아들劉勃勃(赫連勃勃)이 秦나라로 도망하였다. 秦主姚興이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朔方을 鎭撫鎭撫하게 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시 秦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大夏天王이라 칭하였다.

[戊申]四年

[戊申]四年이라 〈秦弘始十이요 魏天賜五年이요 南涼嘉平元年이라〉


禿髮傉檀【傉은 力沃切이니 利鹿孤之子라】이 稱涼王하다

義熙 4년(무신 408) - 秦나라 弘始 10년이고, 魏나라 天賜 5년이고, 南涼의 嘉平 元年이다. -


禿髮傉檀【傉은 음이 力沃切(녹)이니 禿髮利鹿孤의 아들이다.】涼王을 칭하였다.

[己酉]五年

[己酉]五年이라 〈秦弘始十一이요 魏太宗拓跋嗣永興元年이라 ○ 燕王馮跋太平元年이요 西秦更始元年이라 ○ 舊大國二요 南涼, 北涼, 南燕, 西涼, 燕, 夏小國六이요, 新小國一이니 凡九僭國이라〉

義熙 5년(기유 409) - 秦나라 弘始 11년이고, 魏나라 太宗拓跋嗣의 永興 元年이다. ○ 燕王馮跋의 太平 元年이고, 西秦의 更始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南涼‧北涼‧南燕‧西涼‧燕‧夏 등 小國이 여섯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아홉이다.-

劉裕抗表【抗은 擧也라】伐南燕할새 帥舟師하고 自淮入泗하니 或謂曰 燕人이 若塞大峴【山名이니 其地險固하니 在琅邪郡陽都縣이라】之險하고 或堅壁淸野면 大軍深入하야 不唯無功이요 將不能自歸하리니 奈何오 曰 吾慮之熟矣로라 鮮卑貪婪하야 不知遠計하야 進利虜獲하고 退惜禾苗라 謂我孤軍遠入하야 不能持久라하야 不過進據臨朐【東莞郡邑이니 屬靑州라 今益都府臨朐縣이라】하고 退守廣固요 必不能守險淸野하리니 敢爲諸君保之하노라 過大峴호되 燕兵不出이라 擧手指天하야 喜形于色이어늘 左右曰 公이 未見敵而先喜는 何也잇고 曰 兵已過險하야 士有必死之志하고 餘粮棲畝하야 人無匱乏之憂하니 虜已入吾掌中矣로다 進與燕兵戰于臨朐하니 燕衆이 大敗라 斬段暉等大將十餘人하니 遁還廣固하다 乘勝逐北【北은 乃陰方이니 軍敗曰北라 】하야 至廣固하야 克其大城하니 收衆入保小城이어늘 築長圍守之하니 北方之民이 執兵負粮하고 歸裕者日以千數러라

劉裕가 表文을 올리고【抗은 들어 올리는 것이다.】南燕을 정벌할 때에 舟師(水軍)를 거느리고 淮水로부터 泗水에 들어가니, 혹자가 劉裕에게 이르기를 “燕나라 사람이 만약 大峴山【大峴은 山의 이름이니 지역이 험고하다. 琅琊郡 陽都縣에 있다.】의 험한 요새를 막고 혹 성벽을 굳게 지키고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의 곡식을 깨끗이 없앤다면 큰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서 공을 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심사숙고해 보았다. 鮮卑(慕容超)는 탐욕스러워서 장구한 계책을 알지 못하여, 전진하면 노획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후퇴하면 벼싹을 아까워한다. 내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와서 지구전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들은 전진하면 臨朐【臨朐는 東莞郡의 邑이니, 靑州에 속하였다. 지금의 益都府 臨朐縣이다.】를 점거하고 후퇴하면 廣固를 지킴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험한 곳을 지키고 들의 곡식을 말끔히 없애지 못할 것이니, 감히 諸君에게 보장하겠다.” 하였다.


劉裕가 大峴山을 지났는데도 燕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자, 劉裕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하였다. 좌우가 말하기를 “公이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기뻐함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劉裕가 대답하기를 “군대가 이미 험한 곳을 빠져나와서 군사들이 필사의 각오가 있을 것이요, 그들이 남겨 놓은 양식이 밭에 있어서 우리들이 궁핍할 우려가 없으니, 적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전진하여 燕나라 군대와 臨朐에서 싸웠는데,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段暉 등 大將大將 십여 명의 목을 베니, 慕容超가 도망하여 廣固로 돌아갔다. 劉裕가 승세를 타고 도망하는 자들【北은 바로 陰方이니, 군대가 패한 것을 北라 한다.】을 추격하여 廣固에 이르러 큰 성(外城)을 함락하니, 慕容超가 군사들을 거두어 작은 성(內城)에 들어가 지켰다. 劉裕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니, 북방의 백성들이 병기를 쥐고 양식을 짊어지고 劉裕에게 귀의하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 魏淸河王【珪之庶子라】魏主어늘 齊王【珪之長子也니 是爲太宗明元皇帝라】聞變而出하니 大臣이 翕然奉迎이라 하고 卽皇帝位하다

○ 魏나라 淸河王 拓跋紹【淸河王 拓跋紹는 拓跋珪의 庶子이다.】魏主拓跋珪를 시해하였다. 齊王 拓跋嗣【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太宗 明元皇帝이다.】가 변고를 듣고 출동하니,大臣大臣들이 翕然히 받들어 맞이하였다. 拓跋嗣拓跋紹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庚戌]六年

[庚戌]六年이라 〈秦弘始十二요 魏永興二年이라 ○ 是歲에 南燕亡하니 大二, 小六이니 凡八僭國이라〉

義熙 6년(경술 410) - 秦나라 弘始 12년이요,魏나라 永興 2년이다. ○ 이해에 南燕이 망하였다. 大國이 둘이요 小國이 여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南燕尙書尙書悅壽【姓名也라】 開門納晉師하니 與左右數十騎로 踰城하야 突圍出走어늘 追獲之하다 忿廣固久不下하야 欲阬之하고 以妻女賞將士러니 韓範諫曰 晉室南遷에 中原鼎沸라 士民이 無援하야 彊則附之하니 旣爲君臣이면 必須爲之盡力이라 彼皆衣冠舊族이요 先帝遺民이라 今王師弔伐이어늘 而盡阬之【阬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阬而殺之라】면 使安所歸乎잇가 竊恐西北之人이 無復來蘇之望【書曰 徯我后하노니 后來하시면 其蘇라한대 蔡傳曰 蘇는 復生也니 謂后來면 我其復生也라】矣일까하노이다 改容謝之라 然이나 猶斬王公以下三千人하고 沒入家口萬餘하고 夷其城隍【夷는 平之也요 城隍은 外塹也라 有水曰池요 無水曰隍이라】하고 送詣建康하야 斬之하다

南燕의 尙書尙書 悅壽【悅壽는 姓名이다.】가 성문을 열고 晉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慕容超가 좌우에서 따르던 騎兵 수십 명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했는데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劉裕는 廣固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서 성 안의 병사들을 묻어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晉나라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는데, 韓範이 간하기를 “晉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中原이 물 끓듯 소란하였습니다. 선비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든 강대하면 그에게 歸附한 것이니, 이미 군신간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舊族(예부터 내려온 지체 높은 집안)이요, 先帝의 遺民들입니다. 지금 王의 군대가 죄 있는 자를 정벌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모조리 묻어 죽인다면【阬은 구덩이(참호)이고 빠지는 것이니,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이른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西北 사람들이 다시는 의로운 군대가 와서 소생하게 해줄 것이라 희망【≪書經≫ 〈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소생할 것이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蘇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다시 살아남을 이른다.” 하였다.】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劉裕가 낯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王公 이하 관원 3천 명을 목 베고 그들의 家屬 1만여 명을 籍沒하여 노비로 삼고 廣固의 城隍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夷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요, 城隍은 바깥 참호이다. 물이 있는 곳을 池라 하고 물이 없는 곳을 隍이라 한다.】慕容超를 建康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溫公曰 晉自濟江以來로 威靈不競하니 戎狄橫騖하야 虎噬中原이라 劉裕始以王師로 翦平東夏어늘 不於此際에 旌禮賢俊하고 慰撫疲民하야 宣愷悌之風하고 滌殘穢之政하야 使群士嚮風하고 遺黎企踵하고 而更恣行屠戮하야 以快忿心하니 迹其施設하면 曾, 【苻堅與姚萇이라】之不如라 宜其不能蕩壹四海하야 成莫大之業이니 豈非雖有智勇이나 而無仁義하야 使之然哉아

溫公이 말하였다.


“晉나라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온 뒤로부터 국가의 威勢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범처럼 中原을 집어 삼켰다. 劉裕가 처음에 王의 군대로 東夏(齊나라 지역)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때에 어진 이와 준걸스런 이를 표창하고 예우하며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여, 화락한 풍속을 펴며 잔학하고 더러운 정사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風聞만 듣고도 향하게 하고 오랑캐의 통치하에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발돋움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는 도리어 살육을 자행하여 분한 마음을 쾌하게 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일찍이 苻氏와 姚氏【苻와 姚는 前秦의 苻堅과 後秦의 姚萇이다.】만도 못하다. 그가 四海를 통일하여 위대한 기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당연하니, 지모와 용맹은 있었으나 仁義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初에 徐道覆이 聞劉裕北伐하고 勸盧循【徐道覆은 廣州刺史盧循之妹夫也요 循은 乃孫恩之黨而恩之妹夫也니 見上己亥年이라】하야 乘虛襲建康하니 이 從之하다 朝廷이 急徵劉裕하니 方議留鎭下邳하야 經營司, 雍【二州名이니 司州는 洛陽이요 雍州는 長安이라】이러니 會得詔書하고 引兵還할새 以船載輜重하고 自帥精銳步歸라 至山陽하야 聞何無忌敗死【無忌引兵討盧循이라가 遇道覆하야 戰敗死之라】하고 慮京邑失守하야 卷甲兼行하다

처음에 徐道覆劉裕가 북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盧循에게 권하여【徐道覆은 廣州刺史 盧循의 妹夫이고, 盧循은 바로 孫恩의 黨이면서 孫恩의 妹夫이니, 앞의 己亥年條(399)에 보인다.】 빈틈을 타서 建康을 습격하게 하니, 盧循이 그 말을 따랐다. 朝廷에서 급히 劉裕를 부르니, 劉裕가 막 下邳에 주둔해서 司州와 雍州【司州와 雍州는 두 州의 이름이니, 司州는 洛陽이고 雍州는 長安이다.】를 경영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침 詔書를 받게 되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올 적에 배에다 輜重을 싣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보로 돌아왔다. 山陽에 이르러 何無忌가 패전하여 죽었다【何無忌가 군대를 이끌고 盧循을 토벌하다가 徐道覆을 만나 전투에 패하여 죽었다.】는 말을 듣고 京邑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해서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였다.

○ 五月에 劉毅으로 戰于桑落(州)[洲]하야 兵이 大敗라 乙丑에 盧循이 至淮口하니 中外戒嚴이라 謂將佐曰 賊이 若於新亭直進이면 其鋒을 不可當이니 宜且迴避어니와 若回泊西岸이면 此成擒爾니라 十二月에 裕帥衆軍하고 齊力擊하니 兵이 大敗라 走趣豫章이라가 收散卒하야 徑還番禺【番는 音波라】하다

○ 5월에 劉毅盧循과 桑落洲에서 싸워 劉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乙丑日(14일)에 盧循이 淮口에 이르니, 中外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劉裕가 장수와 보좌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만약 新亭에서 곧바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의 銳鋒(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해낼 수 없으니 마땅히 우선 회피해야 하겠지만, 만약 진로를 바꾸어 西岸에 정박한다면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盧循을 공격하니, 盧循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도망하여 豫章으로 향했다가 흩어진 군대를 수합하여 곧바로 番禺【番는 음이 파이다.】로 돌아갔다.

[辛亥]七年

[辛亥]七年이라 〈秦弘始十三이요 魏永興三年이라〉


四月에 盧循이 奔交州어늘 刺史刺史杜慧度斬之【循至龍編津하니 杜慧度 悉散家財以賞軍士하고 與循合戰할새 擲雉尾炬하야 焚其艦하고 以步兵俠岸射之하니 衆潰하야 自投于水어늘 慧度取尸斬首하야 函送建康하니라】하야 送首建康하다

義熙 7년(신해 411) - 秦나라 弘始 13년이고, 魏나라 永興 3년이다. -


4월에 盧循이 交州로 도망하자, 交州刺史交州刺史杜慧度가 그의 목을 베어【盧循이 龍編津에 이르니, 杜慧度가 家財를 다 털어 軍士들에게 상을 주고 盧循과 맞붙어 싸울 때에 雉尾炬를 던져서 戰艦을 불태우고 步兵을 거느리고서 강 언덕을 끼고 활을 쏘니, 盧循의 무리가 궤멸되었다. 盧循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자, 杜慧度가 盧循의 시체를 건져서 목을 베어 함에 넣어 建康으로 보냈다.】 首級을 建康으로 보내었다.

[癸丑]九年

[癸丑]九年이라 〈秦弘始十五요 魏永興五年이요 夏鳳翔元年이라〉


夏王勃勃이 以[[叱(于)[干]阿利]]【叱干은 代北複姓也요 阿利는 其名이라】로 領將作大匠將作大匠하야 發嶺北夷, 夏十萬人하야 築都城於朔方水北, 黑水之南【朔方水北은 資治에 水作郡이라 [通鑑要解]勃勃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하다 阿利性巧而殘忍하야 蒸土築城할새 錐入一寸이면 卽殺作者而幷築之어늘 勃勃이 以爲忠이라하야 委任之하니 凡造兵器成에 呈之하면 工人이 必有死者라 射甲不入則斬弓人하고 入則斬甲匠하니 由是로 器物이 皆精利러라 勃勃이 謂古人氏族無常이라하야 改姓赫連氏【言其徽赫與天連也라】하다

義熙 9년(계축 413) - 秦나라 弘始 15년이고, 魏나라 永興 5년이고, 夏나라 鳳翔 元年이다. -


夏王劉勃勃이 叱干阿利【叱干은 代北 지방의 複姓이고, 阿利는 이름이다.】로 將作大匠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嶺北에서 오랑캐와 漢族 10만 명을 징발해서 朔方水 이북과 黑水 이남에 都城을 쌓게 하였다.【[頭註]朔方水北은 ≪資治通鑑≫에 水字가 郡字로 되어 있다. [通鑑要解]赫連勃勃이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叱干阿利는 성품이 아첨을 잘하고 잔인하여 진흙을 쪄서 성을 쌓을 때에 송곳이 한 치 깊이만 들어가면 즉시 그 담장을 쌓은 자를 죽여서 그 시체를 진흙과 함께 쌓았다. 劉勃勃이 이것을 충성이라 여겨서 그에게 위임하니, 무릇 병기를 만들어 올리면 工人 중에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었다. 갑옷을 활로 쏘아서, 화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활을 만든 사람을 목 베고 화살이 들어가면 갑옷을 만든 자를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기물이 모두 정교하고 예리했다. 劉勃勃이 古人의 姓氏에 일정한 규정이 없다 하여 姓을 赫連氏【赫連은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이른다.】로 고쳤다.

[乙卯]十一年

[乙卯]十一年이라 〈秦弘始十七이요 魏神瑞二年이라〉


正月에 秦王이 卒하고 太子이 卽帝位하다

義熙11년(을묘 415) - 秦나라 弘始 17년이고, 魏나라 神瑞 2년이다. -


정월에 秦王(後秦)姚興이 죽고태자태자姚泓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三月에 太尉太尉戒嚴하야 將伐秦할새 劉穆之爲左僕射左僕射하야 入居東府【東府城은 安帝所築이라】하야 總攝內外하니 穆之內總朝政하고 外供軍旅할새 決斷如流라 賓客輻湊【輻은 輪中木之直指轂者니 凡輪有三十輻하야 共湊於一轂일새 以諭四方皆來라】하야 求訴百端하고 內外諮稟이 盈堦滿室호되 目覽辭訟하고 手答牋書하며 耳行聽受하고 口竝酬應하야 不相參涉하고 悉皆贍擧러라

○ 3월에 太尉太尉劉裕가 삼엄하게 경계하여 秦나라(後秦)를 정벌하려 할 적에 劉裕劉穆之를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로 삼아 東府【東府城은 安帝가 쌓은 것이다.】에 들어가 있으면서 조정 안팎의 일을 總攝하게 하니, 劉穆之가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대에 군수품을 공급할 적에 일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처리하였다. 賓客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輻은 수레바퀴 가운데의 나무가 곧게 바퀴통으로 향한 것이니, 수레바퀴에는 30개의 바퀴살이 있어서 모두 한 바퀴통으로 집중되므로 이로써 사방에서 모두 몰려옴을 비유한 것이다.】 요구하고 소송하는 것이 천만 가지이고, 내외에서 자문하고 보고하는 자들이 뜰에 가득하고 방 안에 가득하였으나, 눈으로는 글과 訟辭를 보고 손으로는 牋書에 답을 하며 귀로는 남의 말을 듣고 입으로는 함께 수응(응대)하되 서로 뒤섞임 없이 모두 여유 있게 행하였다.

○ 八月丁巳에 發建康할새 遣王鎭惡, 檀道濟, 沈田子等하야 數道竝進하다

○ 8월 丁巳日(12일)에 劉裕가 建康을 출발할 때에 王鎭惡檀道濟沈田子 등을 보내어 여러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하였다.

○ 九月에 王鎭惡【王猛孫也라】, 檀道濟入秦境하야 所向皆捷이라 進逼洛陽하야 克之하다

○ 9월에 王鎭惡【王鎭惡은 王猛의 손자이다.】檀道濟가 秦나라 경내에 들어가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전진하여 洛陽을 압박하여 점령하였다.

[丁巳]十三年

[丁巳]十三年이라 〈秦永和二요 魏泰常二年이라 ○ 西涼公李歆嘉興元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니 大一, 小五니 凡六僭國이라〉

義熙13년(정사 417) - 秦나라 永和 2년이고, 魏나라 泰常 2년이다. ○ 西涼公李歆의 嘉興 元年이다. ○ 이해에 秦(後秦)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다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五月에 魏主【拓跋珪長子라】問於崔浩劉裕姚泓하니 果能克乎아 對曰 克之니이다 才何如慕容垂오 對曰 勝之니이다 는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를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劉裕는 奮起寒微하야 不階尺土하야 討滅桓玄하고 興復晉室하고 北禽慕容超하고 南梟盧循하야 所向無前하니 非其才之過人이면 安能如是乎잇가 克秦而歸면 必簒其主하리이다 關中은 華, 戎雜錯하야 風俗勁悍하니 欲以荊, 揚之化로 施之函秦【秦地에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라 故曰函秦이라】이면 此는 無異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니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治)[洽]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願按兵【按은 止也라】息民하야 以觀其變이면 秦地는 終爲國家之有하야 可坐而守也리이다 笑曰 卿이 料之審矣로다 曰 臣이 嘗私論近世將相之臣컨대 若王猛之治國은 苻堅之管仲也요 慕容恪之輔幼主는 慕容暐之霍光也요 劉裕之平禍亂은 司馬德宗【安帝之諱라】曹操也니이다

5월에 魏主 拓跋嗣【魏主 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다.】崔浩에게 묻기를 “劉裕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말하기를 “劉裕의 재주는 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崔浩가 대답하기를 “劉裕慕容垂보다 낫습니다. 慕容垂는 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桓玄을 토벌하고 晉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劉裕가 秦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關中은 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劉裕가 荊州와 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函谷關 안의 秦나라 땅【秦나라 땅에 函谷關이 있으니, 秦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函秦이라 한 것이다.】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按은 중지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秦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苻堅(前秦)管仲이고, 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慕容暐(前燕)霍光이고, 劉裕가 禍亂을 평정함은 司馬德宗(安帝)【司馬德宗은 安帝의 諱이다.】曹操입니다.” 하였다.

○ 七月辛丑에 至潼關하니 秦主이 使姚丕로 守渭橋어늘 王鎭惡이 大破於渭橋하니 兵이 不戰而潰라 單馬로 還宮하야 癸亥에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鎭惡이 撫慰하고 號令嚴肅하니 百姓이 安堵러라

○ 7월 辛丑日(2일)에 劉裕가 潼關에 이르니, 秦主(後秦) 姚泓姚丕로 하여금 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王鎭惡이 渭橋에서 姚丕를 대파하니, 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王鎭惡의 軍門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 九月이라 始에 太尉裕 欲留長安하야 經略【疆理也라】西北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라 會에 劉穆之卒이어늘 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라 以王鎭惡으로 爲司馬司馬하다 鎭惡功多라 由是로 南人이 皆忌之러라 沈田子自以嶢柳之捷【是年七月에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이러니 將還할새 田子傅弘之 屢言於鎭惡이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니 勿復多言하라 私謂田子鍾會不得遂其亂者는 以有衛瓘【鍾會, 衛瓘은 曹魏人이라】故也라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이 何懼王鎭惡이리오

○ 9월이다. 처음에 太尉太尉劉裕가 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 劉穆之가 죽자, 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次子인 桂陽公劉義眞을 都督雍‧梁‧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王鎭惡司馬로 삼았다. 〈長安을 수복할 때〉 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沈田子가 스스로 嶢柳의 승리【이해 7월에 東晉의 군대가 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首級을 베어서 姚泓이 달아나 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에 공로가 있다 하여 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沈田子傅弘之가 여러 번 劉裕에게 말하기를 “王鎭惡은 집안이 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卿과 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다시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劉裕가 은밀히 沈田子에게 이르기를 “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衛瓘【[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鍾會와 衛瓘은 曹操의 魏나라 사람이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卿들 십여 명이 어찌 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溫公曰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라 惜乎라 百年之寇와 千里之土를 得之艱難하고 失之造次【急遽也라】하야 使豐, 鄗(鎬)之都로 復輸寇手로다 荀子曰 兼幷은 易能也요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溫公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劉裕가 이미 王鎭惡에게 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애석하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 잃어서, 豐과 鄗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三秦父老 聞將還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이 不霑王化가 於今百年이러니 始覩衣冠하니 人人相賀라 長安十陵은 是公家墳墓요 咸陽宮殿은 是公家室宅이니 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는 擧大數也라 長安宮殿이 皆漢故跡이요 〈裕는〉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잇가 爲之愍然【愍은 悲也, 憐也라】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하니 不得擅留라 誠多諸君懷本之志하야 今以次息【義眞也니 長曰義符요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與文武賢才로 共鎭此境하니 勉與之居하라하다 十二月에 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三秦의 父老들이 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中原의 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長安의 열 개 陵은 公의 집안의 墳墓이고 咸陽의 宮殿은 公의 집안의 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나라 高帝의 長陵, 惠帝의 安陵, 文帝의 霸陵, 景帝의 陽陵, 武帝의 茂陵, 昭帝의 平陵, 宣帝의 杜陵, 元帝의 渭陵, 成帝의 延陵, 哀帝의 義陵, 平帝의 康陵이니 모두 關中에 있다. 모두 11陵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長安의 宮殿이 모두 漢나라의 故跡이었고 劉裕는 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劉裕가 민망히 여겨【愍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진실로 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둘째 자식은 劉義眞이니, 첫째는 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劉義隆이다.】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鎭守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長安을 출발하여 洛水로부터 黃河로 들어올 적에 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 閏月에 夏王勃勃이 聞太尉太尉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卿이 試言其方略하라 買德曰 關中은 形勢之地어늘 而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라 不暇復以中原爲意하리니 此는 天以關中賜我니 不可失也니이다 勃勃이 乃使其子【璝는 瑰라】로 帥騎二萬하야 向長安하고 勃勃은 自將大軍하고 爲後繼하다

○ 閏月(윤12월)에 夏王赫連勃勃이 太尉太尉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王買德에게 묻기를 “朕이 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卿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王買德이 말하기를 “關中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다시는 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關中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赫連勃勃이 아들인 赫連璝【璝는 瑰이다.】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後繼(후원군)가 되었다.

[戊午]十四年

[戊午]十四年이라 〈魏泰常三年이요 夏昌武元年이라〉


正月에 夏赫連璝 至渭하니 關中民降之者 屬路라 沈田子將兵拒之하다 田子王鎭惡으로 素有相圖之志러니 俱出北地하야 以拒夏兵할새 田子鎭惡傅弘之營하야 計事라가 田子求屛人語하고 使其宗人【官名이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家宗人은 掌家禮라 此는 猶田單宗人이니 乃田子之族人이라】沈敬仁斬之하다 弘之奔告劉義眞한대 義眞이 與王脩로 被甲登撗門【撗은 音光이니 長安城門名也라】하야 以察其變이러니 脩執田子하야 數以專戮하야 斬之하다 弘之大破赫連璝하니 夏兵이 乃退하다

義熙 14년(무오 418) - 魏나라 泰常 3년이고, 夏나라 昌武 元年이다. -


正月에 夏나라 赫連璝가 渭水에 이르니, 關中의 백성들 중에 항복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沈田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沈田子王鎭惡과 평소에 서로 상대방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함께 북쪽 지방에 나가서 夏나라 군대를 막게 되자 王鎭惡에게 傅弘之의 진영에 이르러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가 〈王鎭惡이 이르자〉 사람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할 것을 요구하고는 宗人【宗人은 官名이다. ≪周禮≫에 都宗人과 家宗人이 있으니, 家宗人은 家禮를 맡는다. 이것은 田單宗人과 같으니, 바로 沈田子의 族人이다.】沈敬仁으로 하여금 王鎭惡의 목을 베게 하였다. 傅弘之劉義眞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劉義眞王脩와 함께 갑옷을 입고 撗門【撗은 音이 광이니, 撗門은 長安의 城門 이름이다.】에 올라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王脩沈田子를 잡아서 將領을 제멋대로 죽인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 傅弘之赫連璝를 대파하니, 夏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 六月에 宋公 始受相國相國, 九錫之命【太尉裕 始受相國, 宋公, 九錫之命이라】하다

○ 6월에 宋公劉裕가 비로소 相國相國과 九錫의 命을 받았다.【太尉 劉裕가 비로소 相國‧宋公‧九錫의 명을 받은 것이다.】

○ 十月에 夏王勃勃이 進據咸陽【山南曰陽이요 水北曰陽이니 在渭水北, 九峻諸山之南이라 故로 名咸陽이라】하니 長安樵采路絶이라 聞之하고 召義眞東歸하고 以朱齡石으로 代鎭長安하다 赫連璝帥衆三萬하고 追義眞하야 力戰連日에 晉兵大敗라 義眞이 僅得免歸하다

○ 10월에 夏王赫連勃勃이 전진하여 咸陽【山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니, 咸陽(長安)은 渭水의 북쪽과 九峻山 등 諸山의 남쪽에 있으므로 咸陽이라고 이름한 것이다.】을 점거하니, 長安의 나무 채취하는 길이 끊겼다. 劉裕가 이 말을 듣고 劉義眞을 불러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朱齡石을 長安에 대신 진주하게 하였다. 赫連璝가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劉義眞을 추격하여 연일 힘써 싸우니, 晉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劉義眞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 十一月에 齡石【相國右司馬라】이 奔潼關이라가 爲人執送長安하니 勃勃이 殺之하다 勃勃이 卽皇帝位于灞上하고 都統萬【勃勃이 築城於朔方郡北黑水之南하고 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하다

○ 11월에 朱齡石【朱齡石은 相國 劉裕의 右司馬이다.】이 潼關으로 도망했다가 사람에게 사로잡혀 長安으로 보내지니, 赫連勃勃이 그를 죽였다. 赫連勃勃이 灞上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統萬【赫連勃勃이 朔方郡 북쪽과 黑水 남쪽에 都城을 쌓고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에 도읍하였다.

宋公 以讖【符命之書니 說文에 驗也라 凡讖, 緯는 皆言將來之驗이니 釋名曰 纖也니 其義纖微라】云昌明【簡文帝子武帝曜之字라 [通鑑要解]晉書帝紀曰 初에 簡文帝見讖하니 云 晉祚盡於昌明이라 及孝武帝之在孕也하야 李太后夢神人謂之曰 汝生男하리니 以昌明爲名하라 及産에 東方始明하니 因以爲名이라 簡文이 後悟流涕하니라】之後에 尙有二帝라하야 乃使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하야 與帝左右로 密謀弑帝하고 而立琅琊王德文하니 戊寅에 德文이 卽皇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安帝弗辨寒燠하고 口不能言이어늘 道子, 元顯이 幷傾朝政하야 納賄窮奢가 不知紀極하니 主昏臣亂이 莫熾於斯라 桓玄乘釁하야 遂行簒奪이어늘 劉裕擧兵誅하고 再安宗社라 自時厥後로 伐南燕, 斬盧循, 滅姚泓하야 晉之威令이 雖伸이나 而之權勢 駸駸乎非復前日劉下邳矣니 晉欲安이나 可得乎아

宋公劉裕가 圖讖書【讖은 符命의 글이니, ≪說文解字≫에 “징험(예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讖과 緯는 모두 장래의 일을 징험하는 것이니, ≪釋名≫에 이르기를 “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纖微한 것이다.” 하였다.】에 “昌明(司馬曜)【[頭註]昌明은 簡文帝의 아들인 武帝 司馬曜의 字이다. [通鑑要解]≪晉書≫ 〈孝武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簡文帝가 圖讖書를 보니, 도참서에 ‘晉나라의 국통이 昌明에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孝武帝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에 李太后의 꿈에 神人이 이르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昌明으로 이름을 삼으라.’ 하였다. 해산할 때에 東方이 비로소 밝아오니, 인하여 昌明이라고 이름하였다. 簡文帝가 뒤에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의 뒤에 아직도 두 황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여 마침내 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를 시켜서 황제의 좌우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를 시해하고琅琊王司馬德文을 세우니, 戊寅日(12월 17일)에 司馬德文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安帝는 추위와 더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司馬道子司馬元顯이 함께 朝廷의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뇌물을 받고 극도로 사치하여 끝을 알지 못하였으니,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어지러움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桓玄이 이 틈을 타서 찬탈하자,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주벌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 뒤로부터 南燕(慕容超)을 정벌하고 盧循을 목 베고 姚泓(後秦)을 멸망시켜 晉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비록 베풀어졌으나 劉裕의 권세가 점점 더해져 더 이상 전날의 下邳太守下邳太守인 劉裕가 아니었으니, 晉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恭皇帝

恭皇帝 名德文이요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恭皇帝德文이요 字德文이니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恭皇帝는 이름이 德文이고 자가 德文이니, 安帝의 同母弟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37세이니, 宋나라에 전위하였다.

[己未]元熙元年

[己未]元熙元年이라 〈魏泰常四年이요 夏眞興元年이라〉


七月에 宋公 進爵爲王하다


歷年圖曰 晉室旣衰에 中原雲擾하니 戎狄腥羶之氣 瀰漫河, 洛하고 薰蒸岱, 華하야 宮闕蕪沒하고 陵廟隳焚이라 元帝【琅琊王睿라】以宗室疎屬으로 遯居江表하니 天下士民有思晉者 皆裹糧而歸之하야 國於荊揚之間하야 子孫相承하야 不絶如線이라 獨明帝【紹니 元帝長子라】英武하야 克淸大憝【憝는 惡也니 謂王敦이라】러니 不幸享國不永하고 自餘는 孱弱孤危하야 外陵內叛하야 寄命於虎狼之口하야 幾遇呑食者數矣라 然이나 卒能保其位號하야 宗廟血食이 百有餘年은 何哉오 有王導, 卞壼, 溫嶠, 陶侃, 謝安, 謝幼度【玄字라】爲之臣也일새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史略 史評]史斷曰 劉裕安帝而立恭帝러니 卒爲所簒하니 而昌明後二帝之讖이 應矣로다


[史略 史評]胡氏曰 元帝는 忘國大讐하야 無恢復之志하고 惟明帝는 才略最優호되 又降年不永하고 餘皆碌碌하야 不足算也라 嘗怪王敦, 蘇峻構亂하고 桓溫廢立하야 屢起逆謀하고 桓玄已簒이라 然이나 猶綿歷百有餘年之久者는 尙賴王導, 祖逖, 溫嶠, 謝安, 謝玄, 王坦之諸賢이 忠義奮發하야 平內難하고 却强秦하야 以扶持之也일새라 然而卒莫能恢拓中原者는 蓋以知寬簡植國하야 而不能從祖逖雍丘益兵之語하고 安知和靜鎭國하야 而不能從謝玄乘勝自往彭城之謀故也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元熙 元年(기미 419) - 魏나라 泰常 4년이고, 夏나라 眞興 元年이다. -


7월에 宋公劉裕가 작위가 승진되어 宋王이 되었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晉나라 황실이 이미 쇠약해지자 中原이 소란하니, 오랑캐의 비린내 나는 기운(야만스러운 풍속)이 黃河와 洛水 지역에 가득히 퍼지고 岱山과 華山까지 올라가서 궁궐이 황폐해지고 능묘가 무너지고 불탔다. 元帝【元帝는 琅琊王 司馬睿이다.】가 종실의 먼 친족으로 도망하여 江東 지방에 거주하니,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천하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양식을 싸가지고 그에게 귀부하여荊州와 揚州의 사이에 나라를 세워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오직 明帝【明帝는 司馬紹이니, 元帝의 장남이다.】만이 英明하고 武勇이 있어서 악의 원흉인 王敦【憝는 악이니, 大憝는 王敦을 이른다.】을 깨끗이 제거하였으나 불행히도 국가를 소유한 햇수가 길지 못하였고, 그 밖에는 잔약하고 외롭고 위태로워서 밖에서는 능멸하고 안에서는 배반하여 호랑이의 입에 목숨을 맡겨서 거의 먹힐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지위와 명호를 보전하여 宗廟에 血食을 올린 것이 백여 년이나 이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王導‧卞壼‧溫嶠‧陶侃‧謝安‧謝幼度(謝玄)【幼度는 謝玄의 字이다.】가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劉裕安帝를 시해하고恭帝를 세웠는데, 끝내 劉裕에게 찬탈당하였으니, 昌明의 뒤에 두 황제가 있다는 讖言이 맞은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元帝는 국가의 큰 원수를 잊어 中原을 회복할 뜻이 없었고, 明帝는 재주와 지략이 가장 넉넉하였으나 또 하늘이 내려 준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며, 그 밖에는 모두 碌碌하여 따질 것이 못 된다. 내 일찍이 王敦蘇峻이 난리를 일으키고 桓溫이 자기 마음대로 군주를 폐위하고 세워서 여러 번 역모를 일으켰으며 桓玄이 이미 찬탈하였는데도 오히려 晉나라의 國統이 백여 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진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이는 王導祖逖溫嶠謝安謝玄王坦之 등 여러 賢人들이 忠義心을 분발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강한 秦나라를 물리쳐서 晉나라를 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王導는 너그러움과 간략함으로 나라를 세울 줄만 알아서 雍丘에 병력을 더 증원해 달라는 祖逖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고, 謝安은 온화함과 고요함으로 나라를 鎭定할 줄만 알아서 승세를 타고 직접 彭城으로 가겠다는 謝玄의 계책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右東西二晉은 合一百五十六年이니 凡一十五帝라

이상 東晉과 西晉은 합하여 156년이니, 모두 15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