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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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紀

安皇帝

安皇帝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安皇帝【寬容和平曰安이라】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安皇帝【너그럽고 포용하여 화평한 것을 安이라 한다.】는 이름이 德宗이니 武帝의 태자이다. 재위가 22년이고 壽가 37세이다.

[丁酉]隆安元年

[丁酉]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요 秦皇初四요 魏皇始(三)[二]年이라 ○ 南涼王禿髮烏孤太初元年이요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小國二요 新小國二니 凡七僭國이라〉


魏王 自將圍中山하니 中山이 飢甚이라 慕容麟이 帥二萬餘人하고 出據新市어늘 甲子晦에 魏王進軍攻之할새 太史令太史令鼂崇曰 不吉하니이다 昔에 以甲子亡하니 謂之疾日【左傳昭九年 辰在子卯謂之疾日注에 疾은 惡也니 紂以甲子喪하고 桀以乙卯亡이라 故로 以爲忌라】이라 兵家忌之하니이다 는 以甲子亡이어니와 武王은 不以甲子興乎아 無以對러라 十月甲戌에 으로 戰於義臺하야 大破之하니 遂奔鄴하다 甲申에 魏克中山【是年三月에 魏王珪 圍中山한대 燕王寶走出이어늘 慕容詳이 城守拒魏하고 自謂能却魏兵하야 兵威已振이라하야 遂卽帝位러니 麟襲殺詳而自立이라 至是하야 珪克中山이라】하다 至鄴하야 復稱趙王하다

隆安 元年(정유 397) - 燕나라 永康 2년이고, 秦나라 皇初 4년이고, 魏나라 皇始 2년이다. ○ 南涼王禿髮烏孤의 太初 元年이고, 北涼王段業의 神璽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과 涼 등 小國이 둘이고,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魏王拓跋珪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中山을 포위하니, 中山이 饑饉이 몹시 심하였다. 慕容麟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新市를 점거하자, 甲子日(9월 29일) 그믐에 魏王拓跋珪가 진군하여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太史令太史令鼂崇이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옛날에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날을 疾日【≪春秋左傳≫ 昭公 9年條의 ‘辰在子卯 謂之疾日(일진이 甲子와 乙卯에 있는 것을 疾日이라 한다)’ 注에 “疾은 불길한 것이니, 紂王은 甲子日에 망하였고 桀王은 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이라 이르는 바, 兵家에서 이를 꺼립니다.” 하였다. 拓跋珪가 말하기를 “紂王은 갑자일에 망하였으나 武王은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는가?” 하니, 鼂崇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10월 甲戌日(10일)에 拓跋珪慕容麟과 義臺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慕容麟이 마침내 鄴城으로 도망하였다. 甲申日(20일)에 魏나라가 中山을 이겼다.【이해 3월에 魏王 拓跋珪가 中山을 포위하자 燕王 慕容寶가 달아나니 慕容詳이 城을 수비하여 魏나라를 막고서, 스스로 魏나라 군대를 물리쳐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졌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慕容麟이 慕容詳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拓跋珪가 中山을 이겼다.】慕容麟은 鄴城에 이르러 다시 趙王이라 칭하였다.

[戊戌]二年

[戊戌]二年이라 〈燕主慕容盛建平元이요 秦皇初五요 魏天興元年이라 ○ 南燕王慕容德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南涼, 北涼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正月에 慕容麟이 說范陽王하야 南徙滑臺하니 魏遂取鄴하다 이 上尊號於하니 이 用兄垂故事하야 稱燕王【燕은 南燕이라[釋義]慕容德은 字元明이니 少子也라 敗走에 燕王하고 據廣固하니라】하다

隆安 2년(무술 398) - 燕主慕容盛의 建平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5년이고, 魏나라 天興 元年이다. ○ 南燕王慕容德의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涼(後涼)‧南涼‧北涼 등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正月에 慕容麟范陽王慕容德을 설득하여 남쪽으로 도읍을 滑臺에 옮기니, 魏나라가 마침내 鄴城을 취하였다. 慕容麟慕容德에게 尊號를 올리니, 慕容德이 형 慕容垂의 故事를 따라 燕王이라 칭하였다.【[原註]燕은 南燕이다.[釋義]慕容德은 字가 元明이니 慕容皝의 작은아들이다. 慕容寶가 패주하자, 慕容德燕王을 칭하고 廣固를 점거하였다.】

燕王卒하니 長樂王【後燕也니 之子라】이 卽皇帝位하다

燕王慕容寶가 죽으니, 長樂王慕容盛長樂王慕容盛은 後燕이니, 慕容寶의 아들이다.】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一月에 魏王卽皇帝位하야 改元天興하고 命朝野하야 皆束髮加帽【帽는 小兒蠻夷蒙頭衣니 晉書輿服志曰 帽는 猶冠也라하니라】하다

○ 11월에 魏王拓跋珪가 황제에 즉위하여天興으로 개원하고, 朝野에 명해서 모두 중국식으로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쓰게【帽는 오랑캐 어린아이의 蒙頭衣(蒙頭里)니, ≪晉書≫〈輿服志〉에 이르기를 “帽는 冠과 같다.” 하였다.】 하였다.

[己亥]三年

[己亥]三年이라 〈燕長樂元이요 秦弘始元이요 魏天興二年이라 ○ 涼主呂纂咸寧元이요 北涼天璽元年이라〉


魏王置五經博士五經博士하고 增國子國子太學太學生員하야 合三千人하다

隆安 3년(기해 399) - 燕나라 長樂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元年이고, 魏나라 天興 2년이다. ○ 涼主呂纂의 咸寧 元年이고, 北涼天璽 元年이다.-


魏王拓跋珪가 五經博士五經博士를 설치하고國子學國子學과 太學太學의 生員生員을 늘려 모두 3천 명이 되게 하였다.

南燕王이 引師而南하니 北鄙諸郡이 皆降之어늘 遂定都廣固하다

南燕王慕容德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니, 북쪽 변방의 여러 郡이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廣固에 도읍을 정하였다.

會稽世子【會稽王은 道子이니 卽瑯琊王이라】元顯이 性苛刻하야 生殺任意하니 孫恩【琅琊人이니 世奉五斗米道라 恩叔父泰 有秘術하야 愚者敬之如神하야 皆竭財産하고 進子女하야 以祈福慶이러니 爲會稽王道子所誅한대 恩逃于海하다 衆聞泰死하고 惑之하야 皆謂蟬蛻登仙이라 故로 就海中資給하니 恩聚合亡命하야 志欲復讐하고 因民心騷動하야 遂叛하니라 後爲臨海太守辛景所討하야 窮蹙赴海自沈하니 妖黨謂之水仙이라하야 投水從死者百數러라 五斗米道는 見二十三卷米賊注하니라】이 因民心騷動하야 自海島로 帥其黨하야 殺上虞令上虞令하고 遂攻會稽하다 於是에 會稽及東陽, 新安凡八郡人이 一時起兵하야 殺長吏以應恩하니 旬日之中에 衆이 數十萬이러라 時에 三吳承平【承은 一作昇이라】日久하야 民不習戰이라 故로 郡縣兵이 皆望風奔潰라 恩據會稽하야 自稱征東將軍征東將軍하고 表會稽王道子及世子世子元顯之罪하야 請誅之하다

會稽王의 世子【會稽王은 司馬道子이니, 곧 瑯琊王이다.】司馬元顯이 성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孫恩【孫恩은 琅琊 사람이니, 대대로 五斗米道를 믿었다. 孫恩의 叔父인 孫泰가 비밀스런 방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神처럼 공경하여 모두 재산을 탕진하고 자녀를 바쳐 福을 빌었는데,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孫恩이 海島로 도망하였다. 사람들이 孫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혹하여 모두 이르기를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海島에 나아가 物資를 공급하니, 孫恩이 망명한 자들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자 하여 민심이 騷動한 틈을 타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뒤에 臨海太守 辛景에게 토벌당하여 궁지에 몰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요망한 무리가 水仙(水國의 神仙)이라 이르며 물속에 투신하여 따라 죽은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려졌다. 五斗米道는 23권 米賊 注에 보인다.】이 民心이 소요한 틈을 타서 海島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上虞令上虞令을 죽이고 마침내 會稽를 공격하였다. 이에 會稽와 東陽, 新安 등 모두 여덟 郡의 사람들이 일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수령을 죽이고 孫恩에게 호응하니,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三吳 지방은 태평을 누린【承은 다른 곳에는 昇으로 되어 있다.】 지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郡縣의 병력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었다. 孫恩이 會稽를 점거하여征東將軍征東將軍이라 자칭하고, 表文을 올려 會稽王司馬道子와 世子世子인 司馬元顯의 죄를 열거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 自帝卽位以來로 內外乖異하야 石頭以南은 皆爲荊, 江所據【荊은 殷仲堪이요 江은 王愉라】하고 以西는 皆豫州所專【豫는 庾楷라】이요 京口及江北은 皆劉牢之【彭城人이니 沈毅多計畫이라 爲桓玄參軍하야 領精銳하고 爲前鋒하야 百戰百勝하니 號爲北(部)[府]하고 敵人畏之라 復爲龍驤將軍, 領江州而死하니라】及廣陵相高雅之所制하야 朝政所行은 惟三吳而已러니 及孫恩作亂에 八郡【謂荊, 江, 豫, 京口, 江北及三吳라】이 皆爲恩有하야 畿內諸縣에 盜賊이 處處蜂起【言其衆也라】하고 黨이 亦有潛伏在建康者하니 人情危懼하야 常懼竊發이러라 於是에 內外戒嚴하야 加道子黃鉞하고 元顯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하고 命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하야 兼督吳興義興軍事하야 以討하고 劉牢之亦發兵討할새 拜表輒行하다 十二月에 謝琰이 與牢之로 轉鬪【轉相戰鬪也라】而前하니 所向輒克이러라

○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 군벌이 서로 괴리되어서 石頭城 이남은 모두 荊州와 江州의 두 刺史刺史에게 점거당하였고【荊州刺史는 殷仲堪이요, 江州刺史는 王愉이다.】石頭城 이서는 모두 豫州의 전유물이 되었으며,【豫州刺史는 庾楷이다.】京口와 江北은 모두 劉牢之【劉牢之는 彭城 사람이니, 침착하고 굳세며 계책이 많았다. 桓玄의 參軍이 되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백전백승하니, 이름하기를 北府兵이라 하고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다시 龍驤將軍‧領江州刺史가 되었다가 죽었다.】와 廣陵相廣陵相인 高雅之에게 控制당하여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는 곳은 오직 三吳 지방뿐이었다. 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여덟 郡【여덟 郡은 荊州, 江州, 豫州, 京口, 江北 및 三吳(吳郡, 吳興, 丹陽)를 이른다.】이 모두 孫恩의 소유가 되자, 畿內畿內의 諸縣에서 도적들이 곳곳마다 봉기【蜂起는 많음을 말한 것이다.】하고 孫恩의 도당 중에 또한 建康에 잠복해 있는 자가 있으므로 人情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적이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안팎으로 엄밀하게 경계하여 司馬道子에게 黃鉞을 가하고 司馬元顯에게 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을 가하였으며 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에게 명하여 吳興과 義興郡의 軍事를 겸하여 도독해서 孫恩을 토벌하게 하였다. 劉牢之 또한 군대를 일으켜 孫恩을 토벌할 적에 표문을 올리고 즉시 떠났다.


12월에 謝琰劉牢之와 轉轉하여 싸우면서【轉鬪는 轉轉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 전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이겼다.

○ 初에 彭城劉裕【宋高祖라】 勇健有大志라 僅識文字하고 以賣履爲業하고 好樗蒲【老子所作이니 令人擲之爲戲라 以五木爲之子하니 有梟盧雉犢塞五者하야 爲勝負之策하니 卽今之骰子라 骰는 音頭니 骰子는 博陸彩具라】하니 爲鄕閭所賤이라 劉牢之孫恩할새 引參軍事하고 使將數十人하야 覘賊이러니 遇賊數千人하야 卽迎擊之라가 從者皆死하고 墜岸下라 賊이 臨岸欲下어늘 奮長刀하야 仰斫殺數人하고 乃得登岸하야 仍大呼逐之하니 賊皆走하고 所殺傷이 甚衆이러라 劉敬宣【牢之之子라】이 怪久不返하야 引兵尋之라가 見獨驅數千人하고 咸共歎息하야 因進擊賊하야 大破之하고 斬獲千餘人하다

○ 처음에 彭城의 劉裕【劉裕는 宋나라 高祖이다.】가 용맹하고 굳세며 큰 뜻이 있었다. 겨우 글자를 알고 짚신을 파는 것을 生業으로 삼으며 樗蒲(쌍륙과 골패 놀이)【老子가 만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던지게 하여 놀이를 하는 것이다. 五木으로 子를 삼는데, 梟‧盧‧雉‧犢‧塞의 다섯 가지가 있어 勝負의 策으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骰子(주사위)이다. 骰는 音이 두(투)이니, 骰子는 博陸(쌍륙)할 때 사용하는 彩具이다.】를 좋아하니, 鄕閭에서 천대를 받았다. 劉牢之孫恩을 공격할 적에 劉裕를 임용하여 參軍事參軍事로 삼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수천 명의 적을 만나 즉시 요격하였다가 수행했던 자는 모두 죽고 劉裕는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적이 언덕에서 굽어보고 내려오려 하자, 劉裕가 긴 칼을 휘둘러 몇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찔러 죽이고 마침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크게 고함치면서 그들을 쫓아가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으며, 劉裕에게 살상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劉敬宣【劉敬宣은 劉牢之의 아들이다.】劉裕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찾아 나섰다가 劉裕가 홀로 수천 명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함께 감탄하고 인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천여 명이었다.

○ 初에 聞八郡響應하고 謂其屬曰 天下無復事矣라 當與諸君으로 朝服至建康이라하더니 旣而오 聞牢之引兵濟江하고 驅男女二十餘萬口하야 復逃入海島하다

○ 처음에 孫恩이 여덟 郡이 호응한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 朝服을 입고 建康에 이르러 帝位에 오르겠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劉牢之가 군대를 이끌고 浙江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는 孫恩이 남녀 백성 20여만 명을 몰고 다시 海島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殷仲堪【時爲荊州剌史하니라】이 恐桓玄跋扈【見十九卷丙戌年注라】하야 乃與楊佺期【雍州刺史라】로 結婚爲援이어늘 이 引兵擊殺之하다 이 旣克荊, 雍하고 表求領荊, 江二州하니 朝廷이 不能違러라

○ 殷仲堪【殷仲堪이 이때 荊州剌史로 있었다.】桓玄이 跋扈【跋扈는 19권 丙戌年(146) 注에 보인다.】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楊佺期【楊佺期는 雍州刺史로 있었다.】와 혼인을 맺어 서로 원조하게 하였는데, 桓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殷仲堪楊佺期를 공격하여죽였다. 桓玄이 이미 荊州와 雍州를 점령하고 表文을 올려 荊州와 江州 두 州를 거느릴 것을 청하니, 朝廷에서 어기지 못하였다.

涼王이 卒하고 太子卽位하니 太原公【纂이 嗜酒好獵이어늘 隆安五年에 呂超殺之하고 而立呂隆이러니 安帝元興二年에 降于秦하야 涼遂滅하니라[頭註]太原公纂은 紹之庶兄이라】이 殺之하고 而卽天王位하다

涼王呂光이 죽고太子太子呂紹가 즉위하니, 太原公 呂纂【[原註]呂纂이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자, 隆安 5년(401)에 從弟 呂超가 그를 죽이고 呂隆을 세웠는데, 安帝 元興 2년(403)에 秦나라 姚興에게 항복함으로써 涼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頭註]太原公 呂纂은 呂紹의 庶兄이다.】이 그를 죽이고天王天王에 즉위하였다.

[庚子]四年

[庚子]四年이라 〈燕長樂二요 秦弘始二요 魏天興三年이라 ○ 南燕建平元이요 南涼王禿髮利鹿孤建和元年이요 西涼公李暠庚子元年이라 ○ 是歲에 西秦降秦하니 舊大國三이요 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隆安 4년(경자 400) - 燕나라 長樂 2년이고, 秦나라 弘始 2년이고, 魏나라 天興 3년이다. ○ 南燕建平 元年이고, 南涼王禿髮利鹿孤의 建和 元年이고, 西涼公李暠의 庚子 元年이다. ○ 이해에 西秦이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南燕王이 卽皇帝位于廣固하고 更名備德하다

南燕王慕容德이 廣固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

[辛丑]五年

[辛丑]五年이라 〈燕主慕容熙光始元이요 秦弘始三이요 魏天興四年이라 ○ 涼王呂隆神鼎元이요 北涼王沮渠蒙遜永安元年이라〉

隆安 5년(신축 401) - 燕主慕容熙의 光始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3년이고, 魏나라 天興 4년이다. ○ 涼王呂隆의 神鼎 元年이고, 北涼王沮渠蒙遜의 永安 元年이다.-

正月에 武威王利鹿孤【以元興元年卒하니 弟傉檀立하야 自稱南涼王하니라[附註]禿髮氏也니 鮮卑別種으로 與拓跋同祖라 晉志에 河西鮮卑人也라 七祖壽闐在孕할새 母因寢而産於被中하니 鮮卑謂被爲禿髮일새 因而氏焉이라 至孫樹機〈能〉하야 據有涼州之地하고 至烏孤嗣位러니 呂光이 署爲冠軍大將軍하다 丁酉年에 自稱西平王이러니 烏孤死에 弟利鹿孤立하니라】河西王하다 北涼沮渠蒙遜【沮渠는 官名이라 其先世爲匈奴左沮渠일새 蒙遜以官爲氏라】이 殺涼王業【建康太守段業也라 丁酉年叛하야 自稱涼州牧, 建康公하다 蒙遜이 以衆歸之하고 己亥年에 自稱涼王이러니 至是에 蒙遜殺之하니라】하고 自稱涼州牧涼州牧하다

正月에 武威王 禿髮利鹿孤【[原註]禿髮利鹿孤가 元興 元年(402)에 죽자 아우 禿髮傉檀이 즉위하여 스스로 南涼王이라 칭하였다.[附註]利鹿孤는 禿髮氏이니 鮮卑族의 別種으로 拓跋氏와 조상이 같다. ≪晉書≫ 〈載記〉에 “禿髮利鹿孤는 河西 鮮卑族 사람이다. 7세조 壽闐이 胎中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잠을 자다가 이불 속에서 그를 낳으니, 鮮卑族은 이불을 禿髮이라 하기 때문에 인하여 姓氏로 삼았다. 손자인 禿髮樹機能에 이르러 涼州 지역을 점령하였고 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呂光이 임명하여 冠軍大將軍으로 삼았다. 정유년(397)에 西平王이라 자칭하였는데, 禿髮烏孤가 죽자 아우 禿髮利鹿孤가 즉위했다.” 하였다.】河西王을 칭하였다. 北涼의 沮渠蒙遜【沮渠는 官名이다. 그 선조가 匈奴의 左沮渠였으므로 蒙遜이 관명으로써 姓氏를 삼은 것이다.】涼王 段業【涼王 業은 建康太守 段業이다. 정유년(397)에 배반하여 스스로 涼州牧‧建康公이라 칭하였다. 沮渠蒙遜이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였고, 기해년(399)에 스스로 涼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때(401)에 沮渠蒙遜이 그를 죽인 것이다.】을 죽이고 스스로 涼州牧涼州牧이라 칭하였다.

燕主이 卒하고 【垂之少子라】卽位하다

燕主慕容盛이 죽고 慕容熙【慕容熙는 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가 즉위하였다.

[壬寅]元興元年

[壬寅]元興元年이라 〈燕光始二요 秦弘始四요 魏天興五年이라 ○ 南涼王禿髮傉檀弘昌元年이라〉

元興 元年(임인 402) - 燕나라 光始 2년이고, 秦나라 弘始 4년이고, 魏나라 天興 5년이다. ○ 南涼王禿髮傉檀의 弘昌 元年이다.-

以尙書令尙書令元顯으로 爲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하야 討桓玄할새 以劉牢之로 爲前鋒前鋒하고 譙王尙之로 爲後部後部하다 이 大驚하야 欲完聚保江陵이어늘 長史長史卞範之曰 明公은 英威振於遠近하고 元顯은 口尙乳臭요 劉牢之는 大失物情하니 若兵臨近畿하야 示以禍福이면 土崩之勢를 可翹足【翹는 企也라】而待하리니 何有延敵入境하야 自取窮蹙者乎잇가 이 從之하다 至新亭【在江寧縣南十里하니 俯近江渚라 周顗嘗與群公으로 遊宴于此하니라】하니 元顯이 引兵欲還宮이어늘 이 遣人拔刀하야 隨後大呼曰 放仗【放仗은 謂呼令放棄兵仗也라】하라하니 軍人이 皆崩潰러라 이 入京하야 摠百揆【書云納于百揆라한대 蔡氏傳曰 揆는 度也니 百揆는 揆度庶政之官이라 惟唐, 虞有之하니 猶周之冢宰也라】하고 斬元顯東海王彦璋, 譙王尙之等於建康市하니 劉牢之는 北走至新州하야 縊而死하고 道子等도 皆死하다 自隆安【帝之初年號라】以來로 中外之人이 厭於禍亂이라 及初至하야 黜奸佞하고 擢雋(俊)賢하니 京師欣然하야 冀得少安이러니 旣而오 이 奢豪縱逸하야 政令이 無常하고 朋黨이 互起하야 陵侮朝廷하고 裁損乘輿供奉之具하니 帝幾不免飢寒이라 由是로 衆心이 失望이러라

尙書令尙書令司馬元顯을 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으로 삼아 桓玄을 토벌할 때에 劉牢之를 前鋒都督前鋒都督으로 삼고 譙王司馬尙之를 後部都督後部都督으로 삼았다. 桓玄이 크게 놀라서 성곽을 수리하고 식량을 모아 江陵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長史長史卞範之가 말하기를 “明公께서는 용맹과 위엄이 원근에 떨쳐졌는데, 司馬元顯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고 劉牢之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만일 우리 군대가 近畿에 가서 禍福의 道理를 보여 준다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를 발돋움하고【翹는 발돋움하고 바라는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맞아들여 경내로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곤궁하고 위축됨을 취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玄이 그의 말을 따랐다.


桓玄이 新亭【新亭은 江寧縣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 부근이다. 周顗가 일찍이 여러 공들과 여기에서 놀고 잔치하였다.】에 이르니, 司馬元顯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桓玄이 사람을 보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따라가며 크게 고함치기를 “병장기를 버리라.” 하니,【放仗은 고함을 쳐서 병장기를 버리게 함을 이른다.】 군사들이 모두 와해되었다. 桓玄이 서울로 들어가서 百官을 총령하고【≪書經≫ 〈舜典〉에 이르기를 “百揆에 앉혔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揆는 헤아림이니, 百揆는 여러 정사를 헤아리는 관원이다. 오직 唐‧虞 시대에만 있었으니, 周나라의 冢宰와 같다.” 하였다.】司馬元顯, 東海王司馬彦璋, 譙王司馬尙之 등을 建康의 시장에서 목 베니, 劉牢之는 북쪽으로 달아나 新州에 이르러 목을 매어죽고司馬道子 등도 모두 죽었다.


隆安【晉나라 安帝의 처음 年號이다.】 이래로 中外의 사람들이 재앙과 난리를 싫어하였다. 桓玄이 처음에 이르러서 간신들을 물리치고 준걸들을 발탁하니, 京師가 기뻐하여 다소 편안해지기를 바랐는데, 이윽고 桓玄이 사치하고 방종하여 정사와 명령이 일정함이 없고 朋黨이 서로 일어나서 조정을 능멸하고 乘輿(皇帝)에게 供奉하는 물품을 대폭 줄이니, 황제가 거의 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뭇사람들이 실망하였다.

孫恩이 赴海死하니 衆이 推妹夫盧循하야 爲主하다

孫恩이 바다에 뛰어들어죽으니, 무리들이 孫恩의 매부인 盧循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癸卯]二年

[癸卯]二年이라 〈燕光始三이요 秦弘始五요 魏天興六年이라 ○ 是歲에 涼亡하니 大三이요 小四니 凡七僭國이라〉

元興 2년(계묘 403) - 燕나라 光始 3년이고, 秦나라 弘始 5년이고, 魏나라 天興 6년이다. ○ 이해에 涼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九月에 冊命하야 爲相國相國하야 摠百揆하고 封十郡하야 爲楚王하고 加九錫九錫하다

9월에 桓玄을 책봉하여相國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열 郡을 봉해 주어 楚王으로 삼고九錫을 가하였다.

○ 十二月에 玄이 卽皇帝位하다 이 入建康宮建康宮하야 登御座할새 而床忽陷이라 群臣이 失色이어늘 殷仲文【侍中也니 玄之妹夫라】曰 將由聖德深厚하야 地不能載라한대 이 大悅하다 辛亥에 玄이 遷帝於尋陽하다

○ 12월에 桓玄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桓玄이 建康宮에 들어가서 御座에 오를 적에 龍床이 갑자기 바닥이 꺼졌다. 여러 신하들이 사색이 되었는데 殷仲文【殷仲文은 侍中이니, 桓玄의 妹夫이다.】이 말하기를 “아마도 聖德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닥이 꺼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桓玄이 크게 기뻐하였다. 辛亥日(22일)에 桓玄이 황제를 尋陽으로 옮겼다.

[甲辰]三年

[甲辰]三年이라 〈燕光始四요 秦弘始六이요 魏天賜元年이라〉


劉裕桓脩【徐兗州刺史, 安成王이라】入朝어늘 謂王謐【司徒니 爲玄佐命元臣이라】風骨不常하니 蓋人傑也라하더라 玄后劉氏 有智鑑이라 謂劉裕龍行虎步하고 視瞻不凡하니 恐終不爲人下하노니 不如早除之라한대 曰 我方平蕩【蕩은 滌也라】中原호니 非裕면 莫可用者라 俟關, 河平定然後에 別議之爾라하더라

元興 3년(갑진 404) - 燕나라 光始 4년이고, 秦나라 弘始 6년이고, 魏나라 天賜 元年이다. -


劉裕가 桓脩【桓脩는 徐州兗州刺史‧安成王으로 있었다.】를 따라 入朝하자, 桓玄이 王謐【王謐은 司徒이니, 桓玄의 佐命元臣이다.】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풍채와 골격이 비범하니, 인걸이다.” 하였다. 桓玄의 아내인 劉氏는 智謀와 識鑑이 있었는데, 桓玄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걸음을 걷는 모양이 용과 범 같고 눈초리가 비범하여 끝내 남의 아랫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내가 막 중원을 평정【蕩은 씻어내는 것이다.】하려 하니, 劉裕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다. 關中과 黃河 지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 裕與何無忌【琅琊內史라】로 同舟還京口하야 密謀復興晉室하다 劉毅家於京口하야 亦與無忌로 謀討이러니 無忌曰 天下草澤之中에 非無英雄也니라 曰 所見에 唯有劉下邳【裕爲下邳太守하니라】니라 無忌笑而不答하고 還以告裕하고 遂與定謀하다

劉裕가 何無忌【何無忌는 琅琊內史이다.】와 함께 배를 같이 타고 京口로 돌아와 은밀히 晉나라 황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였다. 劉毅가 京口에 거주하여 또한 何無忌와 함께 桓玄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何無忌가 말하기를 “천하의 초야 가운데에 영웅이 없지 않다.” 하니, 劉毅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직 劉下邳(劉裕)【劉裕가 이때 下邳太守로 있었다.】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何無忌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서 돌아가 이것을 劉裕에게 고하고 마침내 劉毅와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 二月乙卯에 裕託以遊獵하고 與無忌로 收合徒衆하야 得百餘人하다 詰旦【平旦也라】에 京口城開어늘 無忌著傳詔服하고 稱勅居前하니 徒衆이 隨之齊入하야 卽斬桓脩以徇【行示也라】하다 衆推爲盟主하니 이 憂懼特甚이라 或曰 劉裕等은 烏合【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微弱하야 勢必無成하리니 陛下何慮之深이니잇고 劉裕는 足爲一世之雄이요 劉毅는 家無襜石之儲【襜은 齊人이 名小甖爲襜이라 石은 斗石也라】로되 樗蒲에 一擲百萬하고 何無忌는 酷似其舅【酷은 甚也라 舅는 謂劉牢之라】어늘 共擧大事하니 何謂無成고

○ 2월 乙卯日(27일)에 劉裕가 사냥을 나간다고 칭탁하고서 何無忌와 함께 무리를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詰旦은 平旦(동틀 때)이다.】京口의 성문이 열리자, 何無忌가 傳詔(詔令을 전달하는 관원)의 옷을 입고 勅使라 칭하고 앞에 있으니, 무리가 뒤를 따라 일제히 城에 들어가서 곧바로 桓脩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려 보였다.【徇은 다니면서 보이는 것이다.】


무리가 劉裕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桓玄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특히 심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劉裕 등은 烏合之卒【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이라 역량이 미약하여 형세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깊이 염려하십니까?”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劉裕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될 만하고, 劉毅는 집안에 한 말과 한 섬의 저축【襜은 齊나라 사람들이 작은 술단지를 이름하여 襜이라 한다. 石은 말[斗]과 섬[石]이다.】도 없었으나 樗蒲 놀이할 때에 한 번에 백만 전을 걸었으며, 何無忌는 모습이 그의 외삼촌(劉牢之)과 매우 흡사한데,【酷은 매우이다. 外叔은 劉牢之를 이른다.】 이들이 함께 大事를 일으켰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 三月에 劉毅等으로 分爲數隊하야 竝進할새 以身先之하니 將士皆殊死戰하야 無不一當百이요 呼聲이 動天地라 時에 東北風이 急이어늘 因縱火焚之하니 煙火熛【火飛也라】天하고 鼓譟之音이 震動京邑하니 諸軍이 大潰라 이 帥親信數千人하고 走趨石頭하니 入建康하야 帥百官하야 奉迎乘輿하고 誅宗族在建康者하다

○ 3월에 劉裕劉毅 등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함께 진군할 적에 劉裕가 앞장서서 솔선하니, 장병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동북풍이 맹렬히 불자, 이 틈을 타서 불을 놓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고【熛는 불똥이 튀는 것이다.】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京邑을 진동하여 〈桓謙 등의〉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桓玄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石頭城으로 향하니, 劉裕가 建康에 들어가 백관을 거느리고 尋陽에서 乘輿(황제)를 맞이하고 建康에 있는 桓玄의 宗族들을 죽였다.

始至建康하야 諸大處分【處는 區處也요 分은 分別也라】을 皆委於劉穆之【裕召爲主簿라】하니 倉猝立定에 無不允愜이라 遂託以心腹하야 動止를 諮焉하니 穆之亦竭節盡誠하야 無所遺隱이러라 時에 晉政寬弛하야 綱紀不立하고 豪族陵縱하야 小民窮蹙하며 重以司馬元顯의 政令違舛【舛은 錯謬也라】하니 桓玄이 雖欲釐整이나 而科條繁密하야 衆莫之從이러니 穆之斟酌時宜하야 隨方矯正【揉曲爲矯니 言隨事矯揉하야 使歸於正이라】하고 以身範物하야 先以威禁하니 內外百官이 皆肅然奉職하야 不盈旬日에 風俗이 頓改러라

劉裕가 처음 建康에 이르러서 모든 중대사의 처분【處는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고, 分은 分別이다.】을 劉穆之【劉穆之는 劉裕가 불러서 主簿를 삼았다.】에게 다 맡기니, 창졸간에 신속하게 결정함에 사람들이 지당하게 생각하고 흡족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劉裕가 마침내 그를 心腹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막론하고 그에게 자문하니, 劉穆之 또한 충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빠뜨리거나 숨기는 바가 없었다. 이때 晉나라의 정사가 해이해져 紀綱이 서지 않고 豪族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庶民들이 곤궁하였으며 여기에 司馬元顯의 정사와 명령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니,【[釋義]重以司馬元顯 政令違舛:舛은 어그러지고 잘못됨이다.】桓玄이 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法條文이 번거롭고 세밀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다. 劉穆之가 時宜를 참작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로잡고【휘어서 구부리는 것을 矯라 하니, 일에 따라 바로잡아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劉裕가 앞장서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 먼저 위엄으로 금지시키니, 내외의 백관들이 모두 숙연히 직책에 종사해서 열흘이 못 되어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 四月에 劉毅, 何無忌等이 襲破尋陽城하다 桓玄이 挾帝하고 單舸西走하야 入江陵이어늘 遂斬之하다 乘輿反正於江陵하다

○ 4월에 劉毅何無忌 등이 尋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桓玄이 황제를 끼고 한 척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여 江陵으로 들어가자, 〈益州督護益州督護馮遷이〉 마침내 桓玄을 목 베었다. 乘輿(황제)가 강릉에서 反正(復位)하였다.

魏主 置六謁官하니 準古六卿六卿이요 又官名을 多不用漢, 魏之舊하고 倣上古龍官, 鳥官【伏羲氏受命時에 有龍瑞故로 以龍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龍爲名號하고 少昊氏之時에 鳳鳥適至故로 以鳥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鳥爲名號하니라】하야 謂諸曹之使하야 爲鳧鴨이라하니 取其飛之迅疾也요 謂候官伺察者하야 爲白鷺라하니 取其延頸遠望也라 餘皆類此러라

魏主拓跋珪가 여섯 명의 謁官을 두니 옛날의 六卿六卿을 따른 것이요, 또 관직명에 漢나라와 魏나라 때의 옛 명칭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上古時代의 龍官과 鳥官【伏羲氏가 天命을 받았을 때에 龍의 상서가 있었으므로 龍으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龍으로써 명칭을 삼았고, 少昊氏 때에 鳳鳥가 마침 이르렀으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새로써 명칭을 삼았다.】을 따라서 여러 曹의 使者使者를 일러 鳧鴨(오리)이라 하였으니 鳧鴨은 나는 것이 신속한 뜻을 취한 것이요, 斥候와 伺察을 맡은 자를 일러 白鷺라 하였으니 白鷺는 목을 늘여 멀리 바라보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았다.

[乙巳]義熙元年

[乙巳]義熙元年이라 〈燕光始五요 秦弘始七이요 魏天賜二年이라 ○ 南燕主慕容超太上元이요 西涼建初元年이라〉

義熙 元年(을사 405) - 燕나라 光始 5년이고, 秦나라 弘始 7년이고, 魏나라 天賜 2년이다. ○ 南燕主南燕主慕容超의 太上 元年이고, 西涼建初 元年이다.-

三月에 帝至建康하야 以劉裕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四月에 還鎭京口하다 八月에 南燕王備德【上庚子年에 南燕王慕容德이 稱帝하고 更名備德하니라】이 卒하고 兄子【備德이 無子일새 以兄北海王納之子超로 爲嗣하니라】襲位하다

3월에 황제가 建康에 이르러서 劉裕를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4월에 劉裕가 돌아와 京口에 주둔하였다.


8월에 南燕王 慕容備德【위의 庚子年條(400)에 南燕王 慕容德이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이 죽고 형의 아들 慕容超【慕容備德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兄인 北海王 慕容納의 아들 慕容超를 후사로 삼았다.】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丁未]三年

[丁未]三年이라 〈秦弘始九요 魏天賜四年이라 ○ 燕主高雲正始元年이요 夏主赫連勃勃【自謂夏后氏之苗裔하야 稱大夏하니 匈奴南單于苗裔也라 謂帝王繼天爲子하니 是爲徽赫이 實與天連이라하고 改姓曰赫連氏라하니라】龍昇元年이라 ○ 是歲에 燕慕容熙亡하니 舊大國二요 小國四요 新小國二니 凡八僭國이라〉

義熙 3년(정미 407) - 秦나라 弘始 9년이고, 魏나라 天賜 4년이다. ○ 燕主(北燕)高雲高雲의 正始 元年이고, 夏主 赫連勃勃【赫連勃勃이 스스로 夏后氏의 후손이라 하여 大夏天王이라 칭하였으니, 匈奴 南單于의 후손이다. 말하기를 “帝王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들이 되니, 이것은 그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실로 하늘과 이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劉氏姓을 고쳐 赫連氏라 하였다.】의 龍昇 元年이다. ○ 이해에 燕나라(後燕) 慕容熙가 망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初에 魏主滅劉衛辰【劉淵之族也라】하니 其子勃勃이 奔秦이어늘 秦主이 見而奇之하야 使鎭朔方이러니 久之에 復叛秦하고 自稱大夏天王하다

처음에 魏主拓跋珪가 劉衛辰【劉衛辰은 劉淵의 종족이다.】을 멸하자, 그 아들劉勃勃(赫連勃勃)이 秦나라로 도망하였다. 秦主姚興이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朔方을 鎭撫鎭撫하게 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시 秦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大夏天王이라 칭하였다.

[戊申]四年

[戊申]四年이라 〈秦弘始十이요 魏天賜五年이요 南涼嘉平元年이라〉


禿髮傉檀【傉은 力沃切이니 利鹿孤之子라】이 稱涼王하다

義熙 4년(무신 408) - 秦나라 弘始 10년이고, 魏나라 天賜 5년이고, 南涼의 嘉平 元年이다. -


禿髮傉檀【傉은 음이 力沃切(녹)이니 禿髮利鹿孤의 아들이다.】涼王을 칭하였다.

[己酉]五年

[己酉]五年이라 〈秦弘始十一이요 魏太宗拓跋嗣永興元年이라 ○ 燕王馮跋太平元年이요 西秦更始元年이라 ○ 舊大國二요 南涼, 北涼, 南燕, 西涼, 燕, 夏小國六이요, 新小國一이니 凡九僭國이라〉

義熙 5년(기유 409) - 秦나라 弘始 11년이고, 魏나라 太宗拓跋嗣의 永興 元年이다. ○ 燕王馮跋의 太平 元年이고, 西秦의 更始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南涼‧北涼‧南燕‧西涼‧燕‧夏 등 小國이 여섯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아홉이다.-

劉裕抗表【抗은 擧也라】伐南燕할새 帥舟師하고 自淮入泗하니 或謂曰 燕人이 若塞大峴【山名이니 其地險固하니 在琅邪郡陽都縣이라】之險하고 或堅壁淸野면 大軍深入하야 不唯無功이요 將不能自歸하리니 奈何오 曰 吾慮之熟矣로라 鮮卑貪婪하야 不知遠計하야 進利虜獲하고 退惜禾苗라 謂我孤軍遠入하야 不能持久라하야 不過進據臨朐【東莞郡邑이니 屬靑州라 今益都府臨朐縣이라】하고 退守廣固요 必不能守險淸野하리니 敢爲諸君保之하노라 過大峴호되 燕兵不出이라 擧手指天하야 喜形于色이어늘 左右曰 公이 未見敵而先喜는 何也잇고 曰 兵已過險하야 士有必死之志하고 餘粮棲畝하야 人無匱乏之憂하니 虜已入吾掌中矣로다 進與燕兵戰于臨朐하니 燕衆이 大敗라 斬段暉等大將十餘人하니 遁還廣固하다 乘勝逐北【北은 乃陰方이니 軍敗曰北라 】하야 至廣固하야 克其大城하니 收衆入保小城이어늘 築長圍守之하니 北方之民이 執兵負粮하고 歸裕者日以千數러라

劉裕가 表文을 올리고【抗은 들어 올리는 것이다.】南燕을 정벌할 때에 舟師(水軍)를 거느리고 淮水로부터 泗水에 들어가니, 혹자가 劉裕에게 이르기를 “燕나라 사람이 만약 大峴山【大峴은 山의 이름이니 지역이 험고하다. 琅琊郡 陽都縣에 있다.】의 험한 요새를 막고 혹 성벽을 굳게 지키고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의 곡식을 깨끗이 없앤다면 큰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서 공을 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심사숙고해 보았다. 鮮卑(慕容超)는 탐욕스러워서 장구한 계책을 알지 못하여, 전진하면 노획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후퇴하면 벼싹을 아까워한다. 내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와서 지구전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들은 전진하면 臨朐【臨朐는 東莞郡의 邑이니, 靑州에 속하였다. 지금의 益都府 臨朐縣이다.】를 점거하고 후퇴하면 廣固를 지킴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험한 곳을 지키고 들의 곡식을 말끔히 없애지 못할 것이니, 감히 諸君에게 보장하겠다.” 하였다.


劉裕가 大峴山을 지났는데도 燕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자, 劉裕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하였다. 좌우가 말하기를 “公이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기뻐함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劉裕가 대답하기를 “군대가 이미 험한 곳을 빠져나와서 군사들이 필사의 각오가 있을 것이요, 그들이 남겨 놓은 양식이 밭에 있어서 우리들이 궁핍할 우려가 없으니, 적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전진하여 燕나라 군대와 臨朐에서 싸웠는데,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段暉 등 大將大將 십여 명의 목을 베니, 慕容超가 도망하여 廣固로 돌아갔다. 劉裕가 승세를 타고 도망하는 자들【北은 바로 陰方이니, 군대가 패한 것을 北라 한다.】을 추격하여 廣固에 이르러 큰 성(外城)을 함락하니, 慕容超가 군사들을 거두어 작은 성(內城)에 들어가 지켰다. 劉裕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니, 북방의 백성들이 병기를 쥐고 양식을 짊어지고 劉裕에게 귀의하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 魏淸河王【珪之庶子라】魏主어늘 齊王【珪之長子也니 是爲太宗明元皇帝라】聞變而出하니 大臣이 翕然奉迎이라 하고 卽皇帝位하다

○ 魏나라 淸河王 拓跋紹【淸河王 拓跋紹는 拓跋珪의 庶子이다.】魏主拓跋珪를 시해하였다. 齊王 拓跋嗣【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太宗 明元皇帝이다.】가 변고를 듣고 출동하니,大臣大臣들이 翕然히 받들어 맞이하였다. 拓跋嗣拓跋紹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庚戌]六年

[庚戌]六年이라 〈秦弘始十二요 魏永興二年이라 ○ 是歲에 南燕亡하니 大二, 小六이니 凡八僭國이라〉

義熙 6년(경술 410) - 秦나라 弘始 12년이요,魏나라 永興 2년이다. ○ 이해에 南燕이 망하였다. 大國이 둘이요 小國이 여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南燕尙書尙書悅壽【姓名也라】 開門納晉師하니 與左右數十騎로 踰城하야 突圍出走어늘 追獲之하다 忿廣固久不下하야 欲阬之하고 以妻女賞將士러니 韓範諫曰 晉室南遷에 中原鼎沸라 士民이 無援하야 彊則附之하니 旣爲君臣이면 必須爲之盡力이라 彼皆衣冠舊族이요 先帝遺民이라 今王師弔伐이어늘 而盡阬之【阬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阬而殺之라】면 使安所歸乎잇가 竊恐西北之人이 無復來蘇之望【書曰 徯我后하노니 后來하시면 其蘇라한대 蔡傳曰 蘇는 復生也니 謂后來면 我其復生也라】矣일까하노이다 改容謝之라 然이나 猶斬王公以下三千人하고 沒入家口萬餘하고 夷其城隍【夷는 平之也요 城隍은 外塹也라 有水曰池요 無水曰隍이라】하고 送詣建康하야 斬之하다

南燕의 尙書尙書 悅壽【悅壽는 姓名이다.】가 성문을 열고 晉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慕容超가 좌우에서 따르던 騎兵 수십 명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했는데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劉裕는 廣固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서 성 안의 병사들을 묻어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晉나라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는데, 韓範이 간하기를 “晉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中原이 물 끓듯 소란하였습니다. 선비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든 강대하면 그에게 歸附한 것이니, 이미 군신간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舊族(예부터 내려온 지체 높은 집안)이요, 先帝의 遺民들입니다. 지금 王의 군대가 죄 있는 자를 정벌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모조리 묻어 죽인다면【阬은 구덩이(참호)이고 빠지는 것이니,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이른다.】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西北 사람들이 다시는 의로운 군대가 와서 소생하게 해줄 것이라 희망【≪書經≫ 〈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소생할 것이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蘇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다시 살아남을 이른다.” 하였다.】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劉裕가 낯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王公 이하 관원 3천 명을 목 베고 그들의 家屬 1만여 명을 籍沒하여 노비로 삼고 廣固의 城隍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夷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요, 城隍은 바깥 참호이다. 물이 있는 곳을 池라 하고 물이 없는 곳을 隍이라 한다.】慕容超를 建康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溫公曰 晉自濟江以來로 威靈不競하니 戎狄橫騖하야 虎噬中原이라 劉裕始以王師로 翦平東夏어늘 不於此際에 旌禮賢俊하고 慰撫疲民하야 宣愷悌之風하고 滌殘穢之政하야 使群士嚮風하고 遺黎企踵하고 而更恣行屠戮하야 以快忿心하니 迹其施設하면 曾, 【苻堅與姚萇이라】之不如라 宜其不能蕩壹四海하야 成莫大之業이니 豈非雖有智勇이나 而無仁義하야 使之然哉아

溫公이 말하였다.


“晉나라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온 뒤로부터 국가의 威勢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범처럼 中原을 집어 삼켰다. 劉裕가 처음에 王의 군대로 東夏(齊나라 지역)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때에 어진 이와 준걸스런 이를 표창하고 예우하며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여, 화락한 풍속을 펴며 잔학하고 더러운 정사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風聞만 듣고도 향하게 하고 오랑캐의 통치하에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발돋움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는 도리어 살육을 자행하여 분한 마음을 쾌하게 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일찍이 苻氏와 姚氏【苻와 姚는 前秦의 苻堅과 後秦의 姚萇이다.】만도 못하다. 그가 四海를 통일하여 위대한 기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당연하니, 지모와 용맹은 있었으나 仁義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初에 徐道覆이 聞劉裕北伐하고 勸盧循【徐道覆은 廣州刺史盧循之妹夫也요 循은 乃孫恩之黨而恩之妹夫也니 見上己亥年이라】하야 乘虛襲建康하니 이 從之하다 朝廷이 急徵劉裕하니 方議留鎭下邳하야 經營司, 雍【二州名이니 司州는 洛陽이요 雍州는 長安이라】이러니 會得詔書하고 引兵還할새 以船載輜重하고 自帥精銳步歸라 至山陽하야 聞何無忌敗死【無忌引兵討盧循이라가 遇道覆하야 戰敗死之라】하고 慮京邑失守하야 卷甲兼行하다

처음에 徐道覆劉裕가 북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盧循에게 권하여【徐道覆은 廣州刺史 盧循의 妹夫이고, 盧循은 바로 孫恩의 黨이면서 孫恩의 妹夫이니, 앞의 己亥年條(399)에 보인다.】 빈틈을 타서 建康을 습격하게 하니, 盧循이 그 말을 따랐다. 朝廷에서 급히 劉裕를 부르니, 劉裕가 막 下邳에 주둔해서 司州와 雍州【司州와 雍州는 두 州의 이름이니, 司州는 洛陽이고 雍州는 長安이다.】를 경영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침 詔書를 받게 되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올 적에 배에다 輜重을 싣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보로 돌아왔다. 山陽에 이르러 何無忌가 패전하여 죽었다【何無忌가 군대를 이끌고 盧循을 토벌하다가 徐道覆을 만나 전투에 패하여 죽었다.】는 말을 듣고 京邑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해서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였다.

○ 五月에 劉毅으로 戰于桑落(州)[洲]하야 兵이 大敗라 乙丑에 盧循이 至淮口하니 中外戒嚴이라 謂將佐曰 賊이 若於新亭直進이면 其鋒을 不可當이니 宜且迴避어니와 若回泊西岸이면 此成擒爾니라 十二月에 裕帥衆軍하고 齊力擊하니 兵이 大敗라 走趣豫章이라가 收散卒하야 徑還番禺【番는 音波라】하다

○ 5월에 劉毅盧循과 桑落洲에서 싸워 劉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乙丑日(14일)에 盧循이 淮口에 이르니, 中外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劉裕가 장수와 보좌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만약 新亭에서 곧바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의 銳鋒(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해낼 수 없으니 마땅히 우선 회피해야 하겠지만, 만약 진로를 바꾸어 西岸에 정박한다면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盧循을 공격하니, 盧循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도망하여 豫章으로 향했다가 흩어진 군대를 수합하여 곧바로 番禺【番는 음이 파이다.】로 돌아갔다.

[辛亥]七年

[辛亥]七年이라 〈秦弘始十三이요 魏永興三年이라〉


四月에 盧循이 奔交州어늘 刺史刺史杜慧度斬之【循至龍編津하니 杜慧度 悉散家財以賞軍士하고 與循合戰할새 擲雉尾炬하야 焚其艦하고 以步兵俠岸射之하니 衆潰하야 自投于水어늘 慧度取尸斬首하야 函送建康하니라】하야 送首建康하다

義熙 7년(신해 411) - 秦나라 弘始 13년이고, 魏나라 永興 3년이다. -


4월에 盧循이 交州로 도망하자, 交州刺史交州刺史杜慧度가 그의 목을 베어【盧循이 龍編津에 이르니, 杜慧度가 家財를 다 털어 軍士들에게 상을 주고 盧循과 맞붙어 싸울 때에 雉尾炬를 던져서 戰艦을 불태우고 步兵을 거느리고서 강 언덕을 끼고 활을 쏘니, 盧循의 무리가 궤멸되었다. 盧循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자, 杜慧度가 盧循의 시체를 건져서 목을 베어 함에 넣어 建康으로 보냈다.】 首級을 建康으로 보내었다.

[癸丑]九年

[癸丑]九年이라 〈秦弘始十五요 魏永興五年이요 夏鳳翔元年이라〉


夏王勃勃이 以[[叱(于)[干]阿利]]【叱干은 代北複姓也요 阿利는 其名이라】로 領將作大匠將作大匠하야 發嶺北夷, 夏十萬人하야 築都城於朔方水北, 黑水之南【朔方水北은 資治에 水作郡이라 [通鑑要解]勃勃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하다 阿利性巧而殘忍하야 蒸土築城할새 錐入一寸이면 卽殺作者而幷築之어늘 勃勃이 以爲忠이라하야 委任之하니 凡造兵器成에 呈之하면 工人이 必有死者라 射甲不入則斬弓人하고 入則斬甲匠하니 由是로 器物이 皆精利러라 勃勃이 謂古人氏族無常이라하야 改姓赫連氏【言其徽赫與天連也라】하다

義熙 9년(계축 413) - 秦나라 弘始 15년이고, 魏나라 永興 5년이고, 夏나라 鳳翔 元年이다. -


夏王劉勃勃이 叱干阿利【叱干은 代北 지방의 複姓이고, 阿利는 이름이다.】로 將作大匠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嶺北에서 오랑캐와 漢族 10만 명을 징발해서 朔方水 이북과 黑水 이남에 都城을 쌓게 하였다.【[頭註]朔方水北은 ≪資治通鑑≫에 水字가 郡字로 되어 있다. [通鑑要解]赫連勃勃이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叱干阿利는 성품이 아첨을 잘하고 잔인하여 진흙을 쪄서 성을 쌓을 때에 송곳이 한 치 깊이만 들어가면 즉시 그 담장을 쌓은 자를 죽여서 그 시체를 진흙과 함께 쌓았다. 劉勃勃이 이것을 충성이라 여겨서 그에게 위임하니, 무릇 병기를 만들어 올리면 工人 중에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었다. 갑옷을 활로 쏘아서, 화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활을 만든 사람을 목 베고 화살이 들어가면 갑옷을 만든 자를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기물이 모두 정교하고 예리했다. 劉勃勃이 古人의 姓氏에 일정한 규정이 없다 하여 姓을 赫連氏【赫連은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이른다.】로 고쳤다.

[乙卯]十一年

[乙卯]十一年이라 〈秦弘始十七이요 魏神瑞二年이라〉


正月에 秦王이 卒하고 太子이 卽帝位하다

義熙11년(을묘 415) - 秦나라 弘始 17년이고, 魏나라 神瑞 2년이다. -


정월에 秦王(後秦)姚興이 죽고태자태자姚泓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三月에 太尉太尉戒嚴하야 將伐秦할새 劉穆之爲左僕射左僕射하야 入居東府【東府城은 安帝所築이라】하야 總攝內外하니 穆之內總朝政하고 外供軍旅할새 決斷如流라 賓客輻湊【輻은 輪中木之直指轂者니 凡輪有三十輻하야 共湊於一轂일새 以諭四方皆來라】하야 求訴百端하고 內外諮稟이 盈堦滿室호되 目覽辭訟하고 手答牋書하며 耳行聽受하고 口竝酬應하야 不相參涉하고 悉皆贍擧러라

○ 3월에 太尉太尉劉裕가 삼엄하게 경계하여 秦나라(後秦)를 정벌하려 할 적에 劉裕劉穆之를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로 삼아 東府【東府城은 安帝가 쌓은 것이다.】에 들어가 있으면서 조정 안팎의 일을 總攝하게 하니, 劉穆之가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대에 군수품을 공급할 적에 일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처리하였다. 賓客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輻은 수레바퀴 가운데의 나무가 곧게 바퀴통으로 향한 것이니, 수레바퀴에는 30개의 바퀴살이 있어서 모두 한 바퀴통으로 집중되므로 이로써 사방에서 모두 몰려옴을 비유한 것이다.】 요구하고 소송하는 것이 천만 가지이고, 내외에서 자문하고 보고하는 자들이 뜰에 가득하고 방 안에 가득하였으나, 눈으로는 글과 訟辭를 보고 손으로는 牋書에 답을 하며 귀로는 남의 말을 듣고 입으로는 함께 수응(응대)하되 서로 뒤섞임 없이 모두 여유 있게 행하였다.

○ 八月丁巳에 發建康할새 遣王鎭惡, 檀道濟, 沈田子等하야 數道竝進하다

○ 8월 丁巳日(12일)에 劉裕가 建康을 출발할 때에 王鎭惡檀道濟沈田子 등을 보내어 여러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하였다.

○ 九月에 王鎭惡【王猛孫也라】, 檀道濟入秦境하야 所向皆捷이라 進逼洛陽하야 克之하다

○ 9월에 王鎭惡【王鎭惡은 王猛의 손자이다.】檀道濟가 秦나라 경내에 들어가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전진하여 洛陽을 압박하여 점령하였다.

[丁巳]十三年

[丁巳]十三年이라 〈秦永和二요 魏泰常二年이라 ○ 西涼公李歆嘉興元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니 大一, 小五니 凡六僭國이라〉

義熙13년(정사 417) - 秦나라 永和 2년이고, 魏나라 泰常 2년이다. ○ 西涼公李歆의 嘉興 元年이다. ○ 이해에 秦(後秦)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다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五月에 魏主【拓跋珪長子라】問於崔浩劉裕姚泓하니 果能克乎아 對曰 克之니이다 才何如慕容垂오 對曰 勝之니이다 는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를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劉裕는 奮起寒微하야 不階尺土하야 討滅桓玄하고 興復晉室하고 北禽慕容超하고 南梟盧循하야 所向無前하니 非其才之過人이면 安能如是乎잇가 克秦而歸면 必簒其主하리이다 關中은 華, 戎雜錯하야 風俗勁悍하니 欲以荊, 揚之化로 施之函秦【秦地에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라 故曰函秦이라】이면 此는 無異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니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治)[洽]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願按兵【按은 止也라】息民하야 以觀其變이면 秦地는 終爲國家之有하야 可坐而守也리이다 笑曰 卿이 料之審矣로다 曰 臣이 嘗私論近世將相之臣컨대 若王猛之治國은 苻堅之管仲也요 慕容恪之輔幼主는 慕容暐之霍光也요 劉裕之平禍亂은 司馬德宗【安帝之諱라】曹操也니이다

5월에 魏主 拓跋嗣【魏主 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다.】崔浩에게 묻기를 “劉裕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말하기를 “劉裕의 재주는 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崔浩가 대답하기를 “劉裕慕容垂보다 낫습니다. 慕容垂는 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桓玄을 토벌하고 晉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劉裕가 秦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關中은 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劉裕가 荊州와 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函谷關 안의 秦나라 땅【秦나라 땅에 函谷關이 있으니, 秦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函秦이라 한 것이다.】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按은 중지하는 것이다.】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秦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苻堅(前秦)管仲이고, 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慕容暐(前燕)霍光이고, 劉裕가 禍亂을 평정함은 司馬德宗(安帝)【司馬德宗은 安帝의 諱이다.】曹操입니다.” 하였다.

○ 七月辛丑에 至潼關하니 秦主이 使姚丕로 守渭橋어늘 王鎭惡이 大破於渭橋하니 兵이 不戰而潰라 單馬로 還宮하야 癸亥에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鎭惡이 撫慰하고 號令嚴肅하니 百姓이 安堵러라

○ 7월 辛丑日(2일)에 劉裕가 潼關에 이르니, 秦主(後秦) 姚泓姚丕로 하여금 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王鎭惡이 渭橋에서 姚丕를 대파하니, 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王鎭惡의 軍門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 九月이라 始에 太尉裕 欲留長安하야 經略【疆理也라】西北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라 會에 劉穆之卒이어늘 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라 以王鎭惡으로 爲司馬司馬하다 鎭惡功多라 由是로 南人이 皆忌之러라 沈田子自以嶢柳之捷【是年七月에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이러니 將還할새 田子傅弘之 屢言於鎭惡이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니 勿復多言하라 私謂田子鍾會不得遂其亂者는 以有衛瓘【鍾會, 衛瓘은 曹魏人이라】故也라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이 何懼王鎭惡이리오

○ 9월이다. 처음에 太尉太尉劉裕가 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 劉穆之가 죽자, 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次子인 桂陽公劉義眞을 都督雍‧梁‧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王鎭惡司馬로 삼았다. 〈長安을 수복할 때〉 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沈田子가 스스로 嶢柳의 승리【이해 7월에 東晉의 군대가 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首級을 베어서 姚泓이 달아나 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에 공로가 있다 하여 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沈田子傅弘之가 여러 번 劉裕에게 말하기를 “王鎭惡은 집안이 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卿과 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다시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劉裕가 은밀히 沈田子에게 이르기를 “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衛瓘【[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鍾會와 衛瓘은 曹操의 魏나라 사람이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卿들 십여 명이 어찌 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溫公曰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라 惜乎라 百年之寇와 千里之土를 得之艱難하고 失之造次【急遽也라】하야 使豐, 鄗(鎬)之都로 復輸寇手로다 荀子曰 兼幷은 易能也요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溫公이 말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劉裕가 이미 王鎭惡에게 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애석하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 잃어서, 豐과 鄗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三秦父老 聞將還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이 不霑王化가 於今百年이러니 始覩衣冠하니 人人相賀라 長安十陵은 是公家墳墓요 咸陽宮殿은 是公家室宅이니 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는 擧大數也라 長安宮殿이 皆漢故跡이요 〈裕는〉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잇가 爲之愍然【愍은 悲也, 憐也라】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하니 不得擅留라 誠多諸君懷本之志하야 今以次息【義眞也니 長曰義符요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與文武賢才로 共鎭此境하니 勉與之居하라하다 十二月에 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三秦의 父老들이 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中原의 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長安의 열 개 陵은 公의 집안의 墳墓이고 咸陽의 宮殿은 公의 집안의 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나라 高帝의 長陵, 惠帝의 安陵, 文帝의 霸陵, 景帝의 陽陵, 武帝의 茂陵, 昭帝의 平陵, 宣帝의 杜陵, 元帝의 渭陵, 成帝의 延陵, 哀帝의 義陵, 平帝의 康陵이니 모두 關中에 있다. 모두 11陵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長安의 宮殿이 모두 漢나라의 故跡이었고 劉裕는 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劉裕가 민망히 여겨【愍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진실로 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둘째 자식은 劉義眞이니, 첫째는 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劉義隆이다.】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鎭守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長安을 출발하여 洛水로부터 黃河로 들어올 적에 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 閏月에 夏王勃勃이 聞太尉太尉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卿이 試言其方略하라 買德曰 關中은 形勢之地어늘 而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라 不暇復以中原爲意하리니 此는 天以關中賜我니 不可失也니이다 勃勃이 乃使其子【璝는 瑰라】로 帥騎二萬하야 向長安하고 勃勃은 自將大軍하고 爲後繼하다

○ 閏月(윤12월)에 夏王赫連勃勃이 太尉太尉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王買德에게 묻기를 “朕이 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卿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王買德이 말하기를 “關中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다시는 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關中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赫連勃勃이 아들인 赫連璝【璝는 瑰이다.】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後繼(후원군)가 되었다.

[戊午]十四年

[戊午]十四年이라 〈魏泰常三年이요 夏昌武元年이라〉


正月에 夏赫連璝 至渭하니 關中民降之者 屬路라 沈田子將兵拒之하다 田子王鎭惡으로 素有相圖之志러니 俱出北地하야 以拒夏兵할새 田子鎭惡傅弘之營하야 計事라가 田子求屛人語하고 使其宗人【官名이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家宗人은 掌家禮라 此는 猶田單宗人이니 乃田子之族人이라】沈敬仁斬之하다 弘之奔告劉義眞한대 義眞이 與王脩로 被甲登撗門【撗은 音光이니 長安城門名也라】하야 以察其變이러니 脩執田子하야 數以專戮하야 斬之하다 弘之大破赫連璝하니 夏兵이 乃退하다

義熙 14년(무오 418) - 魏나라 泰常 3년이고, 夏나라 昌武 元年이다. -


正月에 夏나라 赫連璝가 渭水에 이르니, 關中의 백성들 중에 항복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沈田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沈田子王鎭惡과 평소에 서로 상대방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함께 북쪽 지방에 나가서 夏나라 군대를 막게 되자 王鎭惡에게 傅弘之의 진영에 이르러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가 〈王鎭惡이 이르자〉 사람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할 것을 요구하고는 宗人【宗人은 官名이다. ≪周禮≫에 都宗人과 家宗人이 있으니, 家宗人은 家禮를 맡는다. 이것은 田單宗人과 같으니, 바로 沈田子의 族人이다.】沈敬仁으로 하여금 王鎭惡의 목을 베게 하였다. 傅弘之劉義眞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劉義眞王脩와 함께 갑옷을 입고 撗門【撗은 音이 광이니, 撗門은 長安의 城門 이름이다.】에 올라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王脩沈田子를 잡아서 將領을 제멋대로 죽인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 傅弘之赫連璝를 대파하니, 夏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 六月에 宋公 始受相國相國, 九錫之命【太尉裕 始受相國, 宋公, 九錫之命이라】하다

○ 6월에 宋公劉裕가 비로소 相國相國과 九錫의 命을 받았다.【太尉 劉裕가 비로소 相國‧宋公‧九錫의 명을 받은 것이다.】

○ 十月에 夏王勃勃이 進據咸陽【山南曰陽이요 水北曰陽이니 在渭水北, 九峻諸山之南이라 故로 名咸陽이라】하니 長安樵采路絶이라 聞之하고 召義眞東歸하고 以朱齡石으로 代鎭長安하다 赫連璝帥衆三萬하고 追義眞하야 力戰連日에 晉兵大敗라 義眞이 僅得免歸하다

○ 10월에 夏王赫連勃勃이 전진하여 咸陽【山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니, 咸陽(長安)은 渭水의 북쪽과 九峻山 등 諸山의 남쪽에 있으므로 咸陽이라고 이름한 것이다.】을 점거하니, 長安의 나무 채취하는 길이 끊겼다. 劉裕가 이 말을 듣고 劉義眞을 불러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朱齡石을 長安에 대신 진주하게 하였다. 赫連璝가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劉義眞을 추격하여 연일 힘써 싸우니, 晉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劉義眞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 十一月에 齡石【相國右司馬라】이 奔潼關이라가 爲人執送長安하니 勃勃이 殺之하다 勃勃이 卽皇帝位于灞上하고 都統萬【勃勃이 築城於朔方郡北黑水之南하고 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하다

○ 11월에 朱齡石【朱齡石은 相國 劉裕의 右司馬이다.】이 潼關으로 도망했다가 사람에게 사로잡혀 長安으로 보내지니, 赫連勃勃이 그를 죽였다. 赫連勃勃이 灞上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統萬【赫連勃勃이 朔方郡 북쪽과 黑水 남쪽에 都城을 쌓고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에 도읍하였다.

宋公 以讖【符命之書니 說文에 驗也라 凡讖, 緯는 皆言將來之驗이니 釋名曰 纖也니 其義纖微라】云昌明【簡文帝子武帝曜之字라 [通鑑要解]晉書帝紀曰 初에 簡文帝見讖하니 云 晉祚盡於昌明이라 及孝武帝之在孕也하야 李太后夢神人謂之曰 汝生男하리니 以昌明爲名하라 及産에 東方始明하니 因以爲名이라 簡文이 後悟流涕하니라】之後에 尙有二帝라하야 乃使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하야 與帝左右로 密謀弑帝하고 而立琅琊王德文하니 戊寅에 德文이 卽皇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安帝弗辨寒燠하고 口不能言이어늘 道子, 元顯이 幷傾朝政하야 納賄窮奢가 不知紀極하니 主昏臣亂이 莫熾於斯라 桓玄乘釁하야 遂行簒奪이어늘 劉裕擧兵誅하고 再安宗社라 自時厥後로 伐南燕, 斬盧循, 滅姚泓하야 晉之威令이 雖伸이나 而之權勢 駸駸乎非復前日劉下邳矣니 晉欲安이나 可得乎아

宋公劉裕가 圖讖書【讖은 符命의 글이니, ≪說文解字≫에 “징험(예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讖과 緯는 모두 장래의 일을 징험하는 것이니, ≪釋名≫에 이르기를 “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纖微한 것이다.” 하였다.】에 “昌明(司馬曜)【[頭註]昌明은 簡文帝의 아들인 武帝 司馬曜의 字이다. [通鑑要解]≪晉書≫ 〈孝武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簡文帝가 圖讖書를 보니, 도참서에 ‘晉나라의 국통이 昌明에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孝武帝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에 李太后의 꿈에 神人이 이르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昌明으로 이름을 삼으라.’ 하였다. 해산할 때에 東方이 비로소 밝아오니, 인하여 昌明이라고 이름하였다. 簡文帝가 뒤에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의 뒤에 아직도 두 황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여 마침내 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를 시켜서 황제의 좌우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를 시해하고琅琊王司馬德文을 세우니, 戊寅日(12월 17일)에 司馬德文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安帝는 추위와 더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司馬道子司馬元顯이 함께 朝廷의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뇌물을 받고 극도로 사치하여 끝을 알지 못하였으니,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어지러움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桓玄이 이 틈을 타서 찬탈하자,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주벌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 뒤로부터 南燕(慕容超)을 정벌하고 盧循을 목 베고 姚泓(後秦)을 멸망시켜 晉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비록 베풀어졌으나 劉裕의 권세가 점점 더해져 더 이상 전날의 下邳太守下邳太守인 劉裕가 아니었으니, 晉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恭皇帝

恭皇帝 名德文이요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恭皇帝德文이요 字德文이니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恭皇帝는 이름이 德文이고 자가 德文이니, 安帝의 同母弟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37세이니, 宋나라에 전위하였다.

[己未]元熙元年

[己未]元熙元年이라 〈魏泰常四年이요 夏眞興元年이라〉


七月에 宋公 進爵爲王하다


歷年圖曰 晉室旣衰에 中原雲擾하니 戎狄腥羶之氣 瀰漫河, 洛하고 薰蒸岱, 華하야 宮闕蕪沒하고 陵廟隳焚이라 元帝【琅琊王睿라】以宗室疎屬으로 遯居江表하니 天下士民有思晉者 皆裹糧而歸之하야 國於荊揚之間하야 子孫相承하야 不絶如線이라 獨明帝【紹니 元帝長子라】英武하야 克淸大憝【憝는 惡也니 謂王敦이라】러니 不幸享國不永하고 自餘는 孱弱孤危하야 外陵內叛하야 寄命於虎狼之口하야 幾遇呑食者數矣라 然이나 卒能保其位號하야 宗廟血食이 百有餘年은 何哉오 有王導, 卞壼, 溫嶠, 陶侃, 謝安, 謝幼度【玄字라】爲之臣也일새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史略 史評]史斷曰 劉裕安帝而立恭帝러니 卒爲所簒하니 而昌明後二帝之讖이 應矣로다


[史略 史評]胡氏曰 元帝는 忘國大讐하야 無恢復之志하고 惟明帝는 才略最優호되 又降年不永하고 餘皆碌碌하야 不足算也라 嘗怪王敦, 蘇峻構亂하고 桓溫廢立하야 屢起逆謀하고 桓玄已簒이라 然이나 猶綿歷百有餘年之久者는 尙賴王導, 祖逖, 溫嶠, 謝安, 謝玄, 王坦之諸賢이 忠義奮發하야 平內難하고 却强秦하야 以扶持之也일새라 然而卒莫能恢拓中原者는 蓋以知寬簡植國하야 而不能從祖逖雍丘益兵之語하고 安知和靜鎭國하야 而不能從謝玄乘勝自往彭城之謀故也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元熙 元年(기미 419) - 魏나라 泰常 4년이고, 夏나라 眞興 元年이다. -


7월에 宋公劉裕가 작위가 승진되어 宋王이 되었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晉나라 황실이 이미 쇠약해지자 中原이 소란하니, 오랑캐의 비린내 나는 기운(야만스러운 풍속)이 黃河와 洛水 지역에 가득히 퍼지고 岱山과 華山까지 올라가서 궁궐이 황폐해지고 능묘가 무너지고 불탔다. 元帝【元帝는 琅琊王 司馬睿이다.】가 종실의 먼 친족으로 도망하여 江東 지방에 거주하니,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천하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양식을 싸가지고 그에게 귀부하여荊州와 揚州의 사이에 나라를 세워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오직 明帝【明帝는 司馬紹이니, 元帝의 장남이다.】만이 英明하고 武勇이 있어서 악의 원흉인 王敦【憝는 악이니, 大憝는 王敦을 이른다.】을 깨끗이 제거하였으나 불행히도 국가를 소유한 햇수가 길지 못하였고, 그 밖에는 잔약하고 외롭고 위태로워서 밖에서는 능멸하고 안에서는 배반하여 호랑이의 입에 목숨을 맡겨서 거의 먹힐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지위와 명호를 보전하여 宗廟에 血食을 올린 것이 백여 년이나 이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王導‧卞壼‧溫嶠‧陶侃‧謝安‧謝幼度(謝玄)【幼度는 謝玄의 字이다.】가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劉裕安帝를 시해하고恭帝를 세웠는데, 끝내 劉裕에게 찬탈당하였으니, 昌明의 뒤에 두 황제가 있다는 讖言이 맞은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元帝는 국가의 큰 원수를 잊어 中原을 회복할 뜻이 없었고, 明帝는 재주와 지략이 가장 넉넉하였으나 또 하늘이 내려 준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며, 그 밖에는 모두 碌碌하여 따질 것이 못 된다. 내 일찍이 王敦蘇峻이 난리를 일으키고 桓溫이 자기 마음대로 군주를 폐위하고 세워서 여러 번 역모를 일으켰으며 桓玄이 이미 찬탈하였는데도 오히려 晉나라의 國統이 백여 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진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이는 王導祖逖溫嶠謝安謝玄王坦之 등 여러 賢人들이 忠義心을 분발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강한 秦나라를 물리쳐서 晉나라를 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王導는 너그러움과 간략함으로 나라를 세울 줄만 알아서 雍丘에 병력을 더 증원해 달라는 祖逖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고, 謝安은 온화함과 고요함으로 나라를 鎭定할 줄만 알아서 승세를 타고 직접 彭城으로 가겠다는 謝玄의 계책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右東西二晉은 合一百五十六年이니 凡一十五帝라

이상 東晉과 西晉은 합하여 156년이니, 모두 15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