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梁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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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div class="clsB"> ==通鑑節要 卷之五十== </div><div class="clsB"> ===五代紀=== </div><div class="clsB"> ====後漢紀==== </div><div class="clsB"> =====高祖=====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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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 卷之五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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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 卷之四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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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紀===
 
===五代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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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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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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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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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皇帝=====
</div>[[高祖]]在位二年이요 壽五十四<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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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溫]]이라<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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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在位二年이요 壽五十四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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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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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은 [[]]요 姓은 [[劉氏]]니 本名은 [[知遠]]이요 其先은 沙陀人이라 晉開運二年에 封[[北平王]]이러니 四年에 [[晉主]]北遷[[高祖]]한대 乃圖義擧하야 卽位於晉陽하니라
+
按梁, 唐, 晉, 漢, 周가 舊各有一代之史러니 本朝[[歐陽]][[文忠公]]이 始刪爲五代史하니 [[司馬溫]]公所修資治通鑑이 雖取[[歐公]]一二論說이나 而所援引事는 多是舊史니 其言辭詳略이 與[[歐陽公]]五代史로 多有同異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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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高祖]는 재위가 2년이고, 壽가 5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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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皇帝]]※ 在位七年이요 壽六十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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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高祖]는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暠]이고 姓이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5%A7%93##劉氏]이니, 本名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知遠]이고 그 선조는 沙陀사람이다. 晉나라 開運 2년(945)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北平王]에 봉해졌는데, 4년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晉主]([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石重貴])가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高祖]를 북쪽의 藩鎭으로 옮기자, 마침내 의거를 도모하여 晉陽에서 즉위하였다.
+
※ 名은 [[晃]]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溫]]이라 從[[黃巢]]爲盜러니 背[[巢]]降于唐하니 [[僖宗]]이 賜名[[全忠]]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니라 [[昭宗]]朝에 進封[[梁王]]하야 挾天子以令天下라가 遂移唐祚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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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漢高祖]][[劉知遠]]은 仍稱晉天福十二年하니라 ○ 是歲에 晉亡漢興하니 幷蜀, 南漢, 南唐하야 凡四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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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947) - 漢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高祖][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은 晉나라 天福 12년을 그대로 칭하였다. ○ 이해에 晉나라가 망하고漢나라가 일어나니, 蜀‧南漢‧南唐을 아울러 모두 네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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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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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 歐陽文忠公]([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 歐陽脩])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F%B8%E9%A9%AC%E5%85%89 司馬溫公]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 歐陽公]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 歐陽公]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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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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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朔에 [[契丹主]]至大梁하야 以[[晉主]]로 爲[[負義侯]]하야 置於黃龍府<font color="#0054FF" size="2">【黃龍府는 在臨潢府東南二百餘里라 按契丹國志에 東渡遼水하야 至(勃)[渤]海國鐵州요 又行七八日하야 過南海府하야 〈遂至黃龍府也라〉初에 [[契丹主]][[阿保機]] 見黃龍在其氈屋上하고 連發二矢殪之러니 後에 太子[[德光]]이 於其地에 置黃龍府하니라 】</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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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초하루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契丹主]가 大梁에 이르러[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晉主]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負義侯]로 강등시키고黃龍府에 유치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黃龍府는 臨潢府의 동남쪽 200여 리 지점에 있다. 살펴보건대 《契丹國志》에 “동쪽으로 遼水를 건너 渤海國의 鐵州에 이르고, 또 7, 8일을 걸어 南海府를 지나 〈마침내 黃龍府에 이른다.〉” 하였다. 처음에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契丹主][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耶律阿保機]가 黃龍이 털방석으로 만든 지붕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연이어 두 발의 화살을 쏘아 죽였는데, 뒤에 太子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耶律德光]이 이곳에 黃龍府를 설치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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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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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祖皇帝]는 이름이 [ ]이고 성이 [ 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 溫]이다. [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 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 僖宗]이 [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8%AD%E5%AE%97 昭宗] 때에 승진하여[ 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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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主]]縱胡騎四出하야 以牧馬爲名하고 分番剽掠<font color="#0054FF" size="2">【剽는 劫奪也라 】</font>하니 謂之打草穀이라 丁壯은 斃於鋒刃하고 老弱은 委於溝壑하야 自東西兩畿<font color="#0054FF" size="2">【東西二京也라 畿는 天子千里之地니 夏曰縣內요 殷曰畿內라 大梁屬縣은 爲東畿요 洛陽屬縣은 西畿니라 】</font>로 及鄭, , , 濮히 數百里間에 財畜殆盡하니 於是에 內外怨憤하고 始患苦契丹하야 皆思逐之矣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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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丁卯]唐天祐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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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契丹主]가 오랑캐 기병을 풀어놓아 사방으로 내보내서 말을 먹인다고 이름하고 番을 나누어 노략질하니,<font color="#0054FF" size="2">【剽는 위협하여 빼앗는 것이다.】</font> 이를 일러 打草穀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中國의 壯丁들은 칼날에 죽고 노약자들은 시신이 도랑에 버려져서 東京과 西京의 兩畿로부터<font color="#0054FF" size="2">【東西兩畿는 東京과 西京 두 京師이다. 畿는 天子가 다스리는 千里의 땅이니, 夏나라는 縣內라고 하였고 殷나라는 畿內라고 하였다. 大梁의 屬縣은 東畿가 되고, 洛陽의 屬縣은 西畿가 된다.】</font>鄭州‧滑州‧曹州‧濮州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에 재물과 가축이 거의 다 없어지니, 이에 內外가 원망하고 분노하였으며, 비로소 契丹을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모두 쫓아낼 것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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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劉知遠]]이 在河東하야 富强이 冠諸鎭하야 步騎至五萬人이라 [[晉主]]與契丹結怨하니 [[知遠]]이 知其必危호되 而未嘗論諫하다 契丹이 屢深入호되 [[知遠]]이 初無邀遮<font color="#0054FF" size="2">【邀도 亦遮也라 】</font>入援之志러니 及聞契丹入汴하고 [[知遠]]이 分兵守四境하야 以防侵軼이라 於是에 將佐勸[[知遠]]稱尊號하야 以號令四方한대 [[知遠]]이 不許어늘 軍士皆曰 今契丹이 陷京城, 執天子하야 天下無主하니 主天下者 非我王而誰오 宜先正位號하고 然後出師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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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이 河東에 있으면서 부강함이 여러 鎭 중에 으뜸이 되어 보병과 기병이 5만 명에 이르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晉主]가 契丹과 원한을 맺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은 반드시 위험을 초래할 줄을 알았으나 한번도 의논하고 간하지 않았다. 契丹이 여러 번 깊숙히 침입하였지만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은 애당초 적을 가로막고<font color="#0054FF" size="2">【邀 또한 가로막는 것이다.】</font>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었는데 契丹이 汴州로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은 군대를 나누어 사방의 경계를 수비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이에 장수와 막료들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에게 존호를 칭하여 사방을 호령할 것을 권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契丹이 京城을 함락하고 천자를 사로잡아 천하에 군주가 없으니, 천하를 주관할 자가 우리 왕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마땅히 먼저 皇帝의 지위와 존호를 바로잡고 그런 뒤에 출정하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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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月辛未에 晉[[知遠]]이 卽皇帝位하야 自言未忍改晉國이라하고 又惡開運<font color="#0054FF" size="2">【晉[[齊王]]年號라 】</font>之名하야 乃更稱天福<font color="#0054FF" size="2">【晉[[高祖]]年號라 】</font>十二年하다
+
[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에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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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辛未日(15일)에 晉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劉知遠]이 황제에 즉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차마 晉나라의 국호를 고칠 수 없다.” 하고, 또 開運이라는 명칭을 싫어하여<font color="#0054FF" size="2">【開運은 晉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6%B8%A9##齊王(石重貴)]의 연호이다.】</font> 마침내 다시 天福 12년이라고 칭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天福은 晉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C%B1%E7%86%B9##高祖(石敬瑭)]의 연호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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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 太祖皇帝][ 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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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方에 群盜大起어늘 契丹主謂左右曰 我不知中國之人을 難制如此로다 復召晉百官하야 諭之曰 天時向暑하니 吾難久留라하고 以[[蕭翰]]<font color="#0054FF" size="2">【[[契丹主]][[邪(耶)律德光〈太〉后]][[述律太后]]之兄子라 其妹復爲[[契丹主]]后하니 始以[[蕭]]爲姓이라 自是로 契丹后族을 皆稱[[蕭氏]]하니라 】</font>으로 爲節度使하다 契丹이 建國號遼하다 [[遼主]]發大梁하니 晉文武諸司從者數千人이라 盡載府庫之實以行하다
+
春三月에 唐[[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梁]]한대 [[梁王]]이 更名[[晃]]<font color="#0054FF" size="2">【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font>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梁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font color="#0054FF" size="2">【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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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에 도둑떼가 크게 일어나자,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契丹主]가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中國 사람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을 줄은 알지 못했다.” 하고, 다시 晉나라 百官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날씨가 더워지니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기가 어렵다.” 하고, [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7%BF%B0##蕭翰]<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7%BF%B0##蕭翰]은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契丹主][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耶律德光]의 太后인 [##述律太后]의 오라비의 아들이다. 그 누이가 다시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契丹主]의 后가 되니, 처음으로 [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5%A7%93##蕭氏]를 姓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契丹의 后族을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5%A7%93##蕭氏]라 칭하였다.】</font>節度使로 삼았다.
+
봄 3월에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93%80%E5%B8%9D 昭宣帝]가 御札을 내려梁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禪讓하자, [ 梁王]이 이름을 [ 晃]으로 고치고<font color="#0054FF" size="2">【更은 平聲(고침)이고, 晃은 胡廣反(황)이다.】</font>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고[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93%80%E5%B8%9D 昭宣帝]를 받들어[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93%80%E5%B8%9D 濟陰王]으로 삼았다.<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93%80%E5%B8%9D 昭宣帝]를 曹州로 옮겨 圍籬安置하고 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font>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契丹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遼라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遼主]가 大梁을 출발하니, 晉나라의 여러 文武 官司 중에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府庫에 가득한 물건을 모조리 싣고 갔다.
 
 
</div>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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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遼主]]至殺胡林<font color="#0054FF" size="2">【胡는 本作狐라 按契丹志에 殺狐林者는 村民이 於林中에 射殺一狐하고 因名焉이라 今名死狐嶺하니 在眞定府欒城縣北하니라 】</font>而卒이어늘 國人이 剖其腹하고 實鹽數斗하야 載之北去하니 晉人이 謂之帝羓<font color="#0054FF" size="2">【羓는 音巴니 腊屬이라 凡獸全乾者曰腊이니 卽[[太宗]][[德光]]也라 】</font>라하니라
+
是時에 惟河東, 鳳翔, 淮南<font color="#0054FF" size="2">【河東은 [[李克用]]이요 鳳翔은 [[李茂貞]]이요 淮南은 [[王偓]]이라】</font>이 稱天祐하고 西川<font color="#0054FF" size="2">【[[王建]]이라 】</font>이 稱天復<font color="#0054FF" size="2">【天祐, 天復은 竝[[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昭宣帝]]는 未有年號하니라 】</font>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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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遼主]가 殺胡林에 이르러죽자,<font color="#0054FF" size="2">【殺胡林의 胡는 본래 狐로 되어있다. 살펴보건대 《契丹志》에 “殺狐林은 마을 백성들이 숲속에서 여우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인하여 이렇게 이름했다.” 하였다. 지금은 死狐嶺이라고 이름하니, 眞定府欒城縣의 북쪽에 있다.】</font> 國人들이 그의 배를 가르고 소금 몇 말을 뱃속에 채워 수레에 싣고 북쪽으로 가니, 晉나라 사람들이 이를 일러 帝羓라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羓는 음이 巴이니, 포의 종류이다. 모든 짐승 고기를 완전히 말린 것을 포라고 하니, 帝羓는 바로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太宗][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5%A4%AA%E5%AE%97##耶律德光]이다.】</font>
+
이때에 오직 河東, 鳳翔, 淮南만이<font color="#0054FF" size="2">【[頭註] 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 李克用]이고, 鳳翔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李茂貞]이고, 淮南은 [ 王偓]이다.】</font>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西川은<font color="#0054FF" size="2">【西川은 [ 王建]이다.】</font>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font color="#0054FF" size="2">【天祐와 天復은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8%AD%E5%AE%97 昭宗]의 연호이니, 天復이 먼저이고 天祐가 뒤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93%80%E5%B8%9D 昭宣帝]는 年號가 있지 않았다.】</font> 나머지는 모두 梁나라의 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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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王]][[希範]]<font color="#0054FF" size="2">【[[馬殷]]子也니 見上卷하니라 】</font>卒하니 將佐奉其弟[[希廣]]立之하다
+
○ [[蜀王]]이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이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이 封爲[[晉王]]이라 後에 其子[[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라 [[蜀王]]은 [[王建]]이니 [[唐昭宗]]이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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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楚王][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馬希範]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馬希範]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馬殷]의 아들이니, 上卷에 보인다.】</font>죽으니, 장수와 막료들이 그의 아우[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希廣]을 받들어 세웠다.
+
[ 蜀王(王建)]이 [ 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 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 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 李克用]이 [ 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8%AD%E5%AE%97 昭宗]이 [ 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 莊宗]이다. [ 蜀王]은 [ 王建]이니,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8%AD%E5%AE%97 昭宗]이 [ 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 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 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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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主]]<font color="#0054FF" size="2">【[[劉知遠]]이라 】</font>發太原하야 自陰地關으로 出晉, 絳<font color="#0054FF" size="2">【地名이라 】</font>하니 [[史弘肇]]<font color="#0054FF" size="2">【侍衛都指揮使라 】</font>奏克澤州<font color="#0054FF" size="2">【契丹昭義節度使[[耿崇美]] 屯澤州하야 將攻潞州어늘 [[弘肇]]取之하니라 】</font>하다 [[弘肇]]爲人이 沈毅寡言하고 御衆[[]]整하야 所向必克하니 [[晉主]]自晉陽으로 安行하야 入洛及汴에 兵不血刃은 皆[[弘肇]]之力也라 [[晉主]]由是로 倚愛之하니라
+
○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羸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岐王]][[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이요 名은 [[文通]]이라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에 封[[岐王]]하고 [[唐莊宗]]이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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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劉知遠)]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劉知遠]이다.】</font>太原을 출발하여陰地關으로부터 晉州와 絳州로 나오니,<font color="#0054FF" size="2">【晉州와 絳州는 지명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는 侍衛都指揮使이다.】</font>澤州를 점령하였음을아뢰었다.<font color="#0054FF" size="2">【거란의 昭義節度使[##耿崇美]가 澤州에 주둔하여 潞州를 공격하려 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가 澤州를 점령하였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말이 적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엄격하고 정돈되어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가 晉陽으로부터 편안히 행군하여 洛陽과 汴州(大梁)들어갈 적에 병사들이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은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의 힘이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가 이로 말미암아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였다.
+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岐王(李茂貞)]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紀律이 없었다. 唐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岐王][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李茂貞]이 鳳翔을 점거하니, 本姓은 [https://zh.wikipedia.org/wiki/%E5%AE%8B 宋]이고 이름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文通]이다. [ 僖宗] 때에 공을 세워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李茂貞]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6%98%AD%E5%AE%97 昭宗] 때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岐王]에 봉해졌으며, 後唐의 [ 莊宗][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8%8C%82%E8%B2%9E 秦王]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後唐[ 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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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蕭翰]]이 聞[[晉主]]擁兵而南하고 欲北歸호되 恐中國無主하야 必大亂이러니 時에 唐[[明宗]]子[[許王]][[從益]]이 [[王淑妃]]<font color="#0054FF" size="2">【[[許王]]母라 】</font>로 在洛陽이어늘 [[翰]]이 迎而立之하야 以爲帝하다
+
梁이 以武安節度使[[馬殷]]으로 爲[[楚王]]하다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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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7%BF%B0##蕭翰]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가 군대를 거느리고 南下한다는 말을 듣고는 북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中國에 군주가 없어서 반드시 크게 혼란해질까 두려워하였다. 이때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明宗]의 아들[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許王][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9B%8A##李從益]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王淑妃]와 함께<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王淑妃]는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許王(李從益)]의 어머니이다.】</font>洛陽에 있었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8%95%AD%E7%BF%B0##蕭翰]이 그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웠다.
+
梁나라가 武安節度使[ 馬殷][ 楚王]으로 삼았다. - [ 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 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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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에 吳越[[忠獻王]][[弘佐]]卒할새 遺令하야 以丞相[[弘倧]]<font color="#0054FF" size="2">【[[弘佐]]之弟라 】</font>으로 爲鎭海, 鎭東節度使하다 〈是歲에 爲內牙統軍使[[胡進思]]所廢하고 更立其弟[[弘淑]]하니라〉
+
[[吳王]][[]]로 爲吳越王하다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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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吳越의 [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4%BD%90##忠獻王][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4%BD%90##錢弘佐]가 죽을 적에 遺命을 내려丞相[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5%80%A7##錢弘倧]을<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5%80%A7##錢弘倧]은 [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4%BD%90##錢弘佐]의 아우이다.】</font>鎭海‧鎭東節度使로 삼게하였다. - 이해에 [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5%80%A7##錢弘倧]이 內牙統軍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胡進思]에게 폐위당하고, 다시 그의 아우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錢弘淑]을 세웠다.-
+
[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吳王][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錢鏐][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吳越王]으로 삼았다. - [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錢鏐]가 杭州를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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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主]]至洛陽하야 命鄭州防禦使[[郭從義]]하야 先入大梁淸宮<font color="#0054FF" size="2">【灑掃殿內也라 】</font>하고 密令殺[[李從益]]及[[王淑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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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淸海節度使[[劉隱]]으로 爲[[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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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晉主(劉知遠)]가 洛陽에 이르러鄭州防禦使[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BE%9E%E7%BE%A9##郭從義]에게 명하여大梁(汴州)에 먼저 들어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게하고<font color="#0054FF" size="2">【淸宮은 궁전 안에 물을 뿌려 청소하는 것이다.】</font> 은밀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9B%8A##李從益]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8F%82##王淑妃]를 죽이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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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海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A%90 劉隱][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A%90 南海王]으로 삼았다. -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A%90 劉隱]이 廣州를 점거하여 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國號를 漢이라고 고쳤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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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번째 줄: 187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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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主]]<font color="#0054FF" size="2">【綱目에 作[[漢主]]라 】</font>至大梁하야 復以汴州爲東京하고 改國號曰漢이라하고 仍稱天福年하고 曰 余未忍忘晉也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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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威武節度使[[王審知]]로 爲[[閩王]]하다 〈[[黃巢]]亂에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以權知荊南留後[[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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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번째 줄: 195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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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9B%8A##晉主]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7%9B%8A##晉主]는 《資治通鑑綱目》에는 [##漢主]로 되어 있다.】</font>大梁에 이르러 다시 汴州를 東京이라 하고 국호를 漢으로 고치고, 天福이라는 연호를 그대로 칭하며 말하기를 “내가 晉나라를 차마 잊지 못해서이다.”라고 하였다.
+
威武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F%A9%E7%9F%A5 王審知][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F%A9%E7%9F%A5 閩王]으로 삼았다. - [ 黃巢]의 난리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F%A9%E7%9F%A5 王審知]가 福州를 점거하여閩中과 嶺南의 다섯 州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6%E6%94%BF 王延政]이 建州에 있으면서殷이라고 이름하였는데, 後晉의 [ 齊王] 때에 南唐이 멸망시켰다.- 權知荊南留後[ 高季昌]을 節度使로 삼았다.- [ 高季昌]이 江陵을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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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遼 大同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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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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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 〈大同元年九月에 [[世宗]](元)[]欲이 更名阮하고 天祿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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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
 
|}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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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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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나라 - 大同 元年 9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世宗][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耶律兀欲]이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阮]으로 고치고天祿 元年이라 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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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申]漢改乾祐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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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漢改乾祐元年하다 二月에 [[隱帝]][[承祐]]立하니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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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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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948) - 漢나라는 乾祐 元年으로 고쳤다. 2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9%AF%E8%BE%BE##隱帝][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劉承祐]가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
9월에 [ 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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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에 [[晉主]]不豫어늘 召[[蘇逢吉]], [[楊邠]], [[史弘肇]], [[郭威]]<font color="#0054FF" size="2">【[[蘇逢吉]]은 同平章事요 [[楊邠]]은 樞密使요 [[郭威]]는 副樞密使라 】</font>하야 入受顧命할새 曰 [[承祐]]幼弱하니 後事를 託在卿輩하노라 二月에 立皇子[[承祐]]爲[[周王]]하야 卽皇帝位하다
+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에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寨塹<font color="#0054FF" size="2">【寨는 本作砦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font>而守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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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晉主]가 편찮았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8%8B%8F%E9%80%A2%E5%90%89##蘇逢吉]‧[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郭威]를 불러<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8B%8F%E9%80%A2%E5%90%89##蘇逢吉]은 同平章事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樞密使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郭威]는 副樞密使였다.】</font> 궁궐에 들어와서 顧命을 받게 하고, 말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承祐]가 어리고 약하니, 뒷일을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였다.
+
梁나라가 保平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BA%B7%E6%80%80%E8%8B%B1 康懷貞]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潞州를 공격하게하니, 晉나라 昭義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97%A3%E6%98%AD 李嗣昭]가 성문을 닫고항거하며지켰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5%BA%B7%E6%80%80%E8%8B%B1 康懷貞]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보름이 지나도록함락하지못하였다. 이에 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夾寨塹이라 이르며<font color="#0054FF" size="2">【寨는 본래 砦로 쓰니, 목책이다. 塹(참호)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font>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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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皇子[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劉承祐]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周王]으로 세워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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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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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에 荊南節度使[[南平獻王]][[高從誨]]卒하니 其子[[保融]]이 知留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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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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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荊南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南平獻王][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高從誨]가 죽으니, 그의 아들[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B9%BC%E5%B2%8C##高保融]이 留後를 맡았다.
+
契丹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耶律阿保機]가 처음으로 건국한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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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遼 天祿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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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辰]<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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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 〈天祿二年이라 [[遼主]][[]][[太祖]]太子[[人皇王]][[倍]]子니 是爲[[孝和莊憲皇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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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辰]〈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蜀高祖]][[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에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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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나라 - 天祿 2년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遼主][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耶律阮][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太祖(耶律阿保機)]의 太子인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5%80%8D##人皇王][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5%80%8D##耶律倍]의 아들이니, 이가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孝和莊憲皇帝]이다.-
+
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 高祖][ 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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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隱皇帝=====
 
</div>名은 [[承祐]]니 [[高祖]]第二子라<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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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皇帝]] 名은 [[承祐]]니 [[高祖]]第二子라 在位三年이요 壽二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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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隱皇帝]는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承祐]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高祖(劉知遠)]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20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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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庚戌]漢乾祐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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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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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漢乾祐三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러니 漢亡하니라〉
+
正月에 [[晉王]][[克用]]이 薨하니 其子[[存勖]]이 嗣爲[[晉王]]하다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font color="#0054FF" size="2">【都指揮使라 】</font>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font color="#0054FF" size="2">【[[存勖]]小名이라 】</font>니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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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950) - 漢나라 乾祐 3년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었는데, 漢나라가 망하였다.-
+
[史略 史評]史斷曰 [[克用]]이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巢]]寇之平에 功爲第一이어늘 上源之變을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라 然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에 恥行墨勅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에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이 遠矣라 故로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는 蓋以此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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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四月에 漢朝以契丹近入寇橫行호되 河北諸藩鎭이 各自守하고 無扞禦之者라하야 制하야 以[[郭威]]로 爲鄴都留守天雄節度使하야 樞密使는 如故<font color="#0054FF" size="2">【[[漢主]]卽位하야 以威로 仍爲樞密使同平章事하니라 】</font>하고 以左監門衛將軍[[郭榮]]으로 爲天雄衙內都指揮使하다 [[榮]]은 本姓이 [[柴]]니 父[[守禮]]는 [[郭威]]之妻兄也라 [[威]]未有子時에 養以爲子하니라 〈威微時에 刺其頂上하야 爲雀兒하니 人皆稱爲[[郭雀兒]]러니 後爲[[周高祖]]하고 [[]][[世宗]]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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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胡氏]]曰 喪不二事라 故로 春秋於背喪而卽戎者에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는 存亡繫焉일새 然後에 從權制而無避하니 此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라 若[[李存勖]]夾寨之戰을 君子深有取者는 與是類耳라 蓋夾寨는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라 使[[存勖]]이 於是時에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아 是以로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에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이 大矣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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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에 漢나라 조정에서는 契丹이 가까이 침입하여 횡행하였으나 河北의 여러 藩鎭들이 각각 자신만 지키고 거란을 막는 자가 없다 하여, 制書를 내려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를 鄴都留守天雄節度使로 임명하여樞密使는 예전처럼 맡게 하고,<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漢主(劉承祐)]가 즉위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를 樞密使 同平章事에 그대로 임명하였다.】</font>左監門衛將軍[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榮]을 天雄衙內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榮]은 本姓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F%B4%E7%81%AB##柴]이니, 아버지[https://zh.wikipedia.org/wiki/%E6%9F%B4%E5%AE%88%E7%A6%AE##守禮][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의 妻兄이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가 아들이 없었을 때에 길러서 양자로 삼았다.-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가 미천했을 때 이마 위에 雀兒라고 刺字하니, 사람들이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雀兒]라고 칭하였는데, 뒤에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는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高祖]가 되고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榮]은 [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世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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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 晉王][ 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存勖]이 뒤를 이어 [ 晉王]이 되었다. [ 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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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主]]自卽位以來로 [[楊邠]]은 總機政하고 [[郭威]]는 主征伐하고 [[史弘肇]]는 典宿衛하고 [[王章]]<font color="#0054FF" size="2">【三司使同平章事라 】</font>은 掌財賦하니 以是로 國家粗安이러라 [[章]]이 聚斂刻急하야 有犯鹽礬<font color="#0054FF" size="2">【礬은 藥石也니 有白靑黃黑赤五種이라 或染者 借以成色하니라 】</font>酒麯之禁者면 錙銖涓滴이라도 罪皆死하다 [[章]]尤不喜文臣하야 嘗曰 此輩는 授之握算이면 不知縱橫<font color="#0054FF" size="2">【算之橫豎니 [[王章]]爲三司使하야 寔掌財賦故로 云然也라 】</font>이니 何益於用이리오 [[史弘肇]]曰 安定國家는 在長搶大劍이니 安用毛錐<font color="#0054FF" size="2">【筆也라 以束毛爲筆하니 形如錐也라 】</font>리오 [[章]]曰 無毛錐면 則財賦何從可出고하니 於是에 將相이 始有隙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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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 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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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漢主(劉承祐)]가 즉위한 이래로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은 機務와 정사를 총괄하고[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郭威]는 정벌을 주관하고[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는 宿衛를 맡고[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王章]<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A2%81%E6%9C%AB%E5%B8%9D##王章]은 三司使 同平章事이다.】</font> 財賦를 맡으니, 이 때문에 국가가 다소 편안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AD%A6%E5%88%99%E5%A4%A9##王章]은 재정을 거두어들일 적에 각박하고 급박해서 소금과 백반과<font color="#0054FF" size="2">【礬은 藥石이니, 백색‧청색‧황색‧흑색‧적색 다섯 종류가 있다. 염색하는 자가 이를 이용하여 색(물감)을 만들기도 한다.】</font> 술과 누룩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가 있으면 저울눈만한 것과 물방울만한 것이라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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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周德威]<font color="#0054FF" size="2">【[ 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font>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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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AD%A6%E5%88%99%E5%A4%A9##王章]은 더욱이 文臣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들은 握算(주판)을 주면 다룰 줄 모르니,<font color="#0054FF" size="2">【縱橫은 주판의 가로와 세로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6%AD%A6%E5%88%99%E5%A4%A9##王章]이 三司使가 되어 실로 財賦를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font> 등용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가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긴 창과 큰 검에 달려 있으니, 毛錐(붓)를<font color="#0054FF" size="2">【毛錐는 붓이다. 털을 묶어서 붓을 만드니, 모양이 송곳과 같다.】</font>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7%8C%AE%E5%B8%9D##王章]이 말하기를 “毛錐가 없다면 財賦가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수와 정승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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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 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font color="#0054FF" size="2">[ 李亞子][ 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font>[ 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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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主]]年益壯에 厭爲大臣所制하야 積不能平이어늘 左右因乘間하야 譖之於[[漢主]]호되 云 [[邠]]等이 專恣하니 終當爲亂이라한대 [[漢主]]信之하야 遂謀誅[[邠]]等하다 十一月丙子에 [[邠]]等이 入朝할새 有甲士數十이 自廣政殿出하야 殺[[邠]], [[弘肇]], [[章]]於東廡下하다 [[漢主]]遣供奉官[[孟業]]하야 齎密詔하고 詣澶州及鄴都하야 殺[[王殷]]<font color="#0054FF" size="2">【侍衛步軍都指揮使니 時在澶州하니라 】</font>, [[郭威]], [[王峻]]<font color="#0054FF" size="2">【監軍宣徽殿使니 時與[[郭威]]로 在鄴都하니라 】</font>하니 [[郭威召]][[郭崇威]]<font color="#0054FF" size="2">【行營馬軍都指揮使라 】</font>, [[曹威]]<font color="#0054FF" size="2">【行營步軍都指揮使라 】</font>及諸將하야 告以[[楊邠]]等寃死와 及有密詔之狀하고 且曰 吾與諸公으로 披荊棘<font color="#0054FF" size="2">【荊棘은 喩亂也라 】</font>하고 從先帝하야 取天下하야 受託孤之任하야 竭力以衛國家러니 今諸公已死하니 吾何心獨生이리오 [[郭崇威]]等이 皆泣曰 天子幼沖하니 此必左右群小所爲리니 願從公入朝自訴하야 盪滌鼠輩하야 以淸朝廷이요 不可爲單使所殺이니이다 [[郭威]]乃留其養子[[榮]]하야 鎭鄴都하고 命[[郭崇威]]하야 將騎兵前驅하고 自將大軍繼之하야 至封丘하니 人情恟懼러라 [[漢主]]遣[[慕容彦超]]<font color="#0054FF" size="2">【奉寧節度使니 時徵諸帥하야 以從兵衛宮闕하니라 】</font>等하야 將兵拒之러니 [[彦超]]等이 戰敗遂還이어늘 是日에 [[漢主]]出勞軍이라가 兵敗하야 爲亂兵所弑하다 [[郭威]]自迎春門入하야 丁亥에 帥百官하고 起居太后하고 具奏稱호되 軍國事殷<font color="#0054FF" size="2">【殷은 盛也라 】</font>하니 請早立嗣君이니이다 太后誥迎[[漢主]]弟河東節度使贇<font color="#0054FF" size="2">【[[贇]]은 [[漢主]]弟요 河東節度使[[崇]]之子요 [[高祖]][[暠]]之猶子니라 】</font>하야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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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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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7%8C%AE%E5%B8%9D##漢主(劉承祐)]는 나이가 더욱 장성하자 大臣들에게 제재받는 것을 싫어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쌓여갔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를 틈타서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7%8C%AE%E5%B8%9D##漢主]에게 참소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 등이 전횡하고 방자하니, 끝내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漢主]가 말을 믿고 마침내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 등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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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 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 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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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丙子日(13일)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 등이 들어와 조회할 적에 甲士 수십 명이 廣政殿으로부터 뛰쳐나와서[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https://zh.wikipedia.org/wiki/%E5%8F%B2%E5%BC%98%E8%82%87##史弘肇]‧[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王章]을 동쪽 행랑채 아래에서 죽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漢主]가 供奉官[##孟業]을 보내어 密詔를 가지고 澶州와 鄴都로 가서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王殷]‧<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王殷]은 侍衛步軍 都指揮使이니, 이때 澶州에 있었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郭威]‧[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王峻]을<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王峻]은 監軍宣徽殿使이니, 이때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郭威]와 함께 鄴都에 있었다.】</font>죽이게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郭威]가 [##郭崇威]와<font color="#0054FF" size="2">【[##郭崇威]는 行營馬軍 都指揮使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曹威]<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9%9A%90%E5%B8%9D##曹威]는 行營步軍 都指揮使이다.】</font> 및 여러 장수들을 불러 [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9%82%A0##楊邠] 등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과 황제가 密詔를 내린 실상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諸公들과 온갖 고난을 헤치고<font color="#0054FF" size="2">【荊棘은 난리를 비유한 것이다.】</font> 先帝([https://zh.wikipedia.org/wiki/%E6%B4%AA%E8%BF%88##劉知遠])를 따라 천하를 차지하여 孤兒(나이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중임을 받고 힘을 다해 국가를 보위하였는데, 이제 諸公들이 이미 죽었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살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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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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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崇威] 등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天子의 나이가 어리니, 이는 반드시 좌우에 있는 여러 소인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公을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황제에게 하소연하고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소탕하여 조정을 깨끗이 청소해야 할 것이요, 일개 使者에게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B8%BE%E7%91%8A##郭威]가 마침내 그의 養子인 [https://zh.wikipedia.org/wiki/%E7%89%9B%E5%83%A7%E5%AD%BA##郭榮]을 남겨두어鄴都에 鎭駐하게하고, [##郭崇威]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려 先鋒이 되게 하고 자신은 大軍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封丘縣에 이르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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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 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 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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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4%BB%B2%E5%85%88##漢主]가 [https://zh.wikipedia.org/wiki/%E6%85%95%E5%AE%B9%E5%BD%A6%E8%B6%85##慕容彦超]<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85%95%E5%AE%B9%E5%BD%A6%E8%B6%85##慕容彦超]는 奉寧節度使이니, 이때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호위하였다.】</font>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게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6%85%95%E5%AE%B9%E5%BD%A6%E8%B6%85##慕容彦超] 등이 싸움에 패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이날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E%97%E5%AE%9E##漢主]가 친히 나가 군사를 위로하다가 군사들이 패하여 亂兵에게 시해당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E%97%E5%AE%9E##郭威]가 迎春門으로 들어와丁亥日(24일)에 百官을 거느리고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E%97%E5%AE%9E##太后]의 안부를 물었으며, 글을 갖추어 上奏하기를 “軍國의 일이 많으니<font color="#0054FF" size="2">【殷은 많은 것이다.】</font> 뒤를 이을 군주를 일찍 세우소서.”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太后]가 誥命을 내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漢主]의 아우(從弟) 河東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劉贇]을<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劉贇]은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漢主(劉承祐)]의 아우이고, 河東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의 아들이며,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高祖][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劉暠]([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劉知遠]의 改名)의 조카이다.】</font>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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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平節度使[[馬希萼]]<font color="#0054FF" size="2">【[[希廣]]之兄이라 】</font>攻[[楚王]][[希廣]]殺之하고 自稱[[武安]], [[靜江]], [[寧遠]]等軍節度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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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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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平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3%BB_(%E5%BE%8C%E5%91%A8)##馬希萼]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馬希萼]은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馬希廣]의 형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楚王][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馬希廣]을 공격하여죽이고, 스스로 武安軍‧靜江軍‧寧遠軍 등의 節度使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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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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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主]]入寇어늘 [[漢太后]][[郭威]]하야 將大軍擊之하다 十二月에 [[]]發大梁하야 館于澶州러니 癸丑旦에 將發할새 將士數千人이 忽大譟어늘 [[]]命閉門하니 將士踰垣登屋而入曰 天子는 須侍中自爲之요 將士已與[[劉氏]]<font color="#0054FF" size="2">【漢姓이라 】</font>爲仇하니 不可立也라하고 或裂黃旗하야 以被[[]]體하고 共扶抱之하야 呼萬歲震地하고 因擁[[]]南行이라 [[]]乃上太后牋호되 請奉漢宗廟하고 事太后爲母라하다 己未에 太后誥廢[[]]하야 [[湘陰公]]하고 以侍中[[]]로 監國하니 百官藩鎭이 相繼上表勸進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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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南[[張顥]]<font color="#0054FF" size="2">【左牙指揮使라 】</font>弑弘農[[威王]]<font color="#0054FF" size="2">【[[]][[楊偓]]諡也라 】</font>하고 立其弟[[隆演]]하야 爲[[留後]]<font color="#0054FF" size="2">【[[顥]]與[[徐溫]]으로 弑[[]]이러니 [[]]復攻[[]]하야 殺之하니라 】</font>하다 〈[[楊行密]]이 據淮南이러니 其子[[偓]]이 嗣爲[[弘農郡王]]하고 國號吳라 後爲[[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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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遼主]가 들어와 침략하자漢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太后]가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에게 명하여 大軍을 거느리고공격하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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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南의 [ 張顥]가<font color="#0054FF" size="2">【[ 張顥]는 左牙指揮使이다.】</font>弘農[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威王(楊偓)]을 시해하고<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威][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楊偓]의 시호이다.】</font> 그 아우[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楊隆演]을 세워留後로 삼았다.<font color="#0054FF" size="2">【[ 張顥]가 [https://zh.wikipedia.org/wiki/%E5%BE%90%E6%BA%AB 徐溫]과 함께 [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楊偓]을 시해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5%BE%90%E6%BA%AB 徐溫]이 다시 [ 張顥]를 공격하여죽였다.</font> -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楊行密]이 淮南을 점거하였는데, 그 아들[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偓]이 뒤를 이어 [https://zh.wikipedia.org/wiki/%E5%A8%81%E7%8E%8B 弘農郡王]이 되고 국호를 吳라 하였다. 뒤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 徐知誥]에게 찬탈당하여 마침내 南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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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가 大梁을 출발하여澶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癸丑日(20일) 아침 장차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병 수천 명이 갑자기 크게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가 성문을 닫도록 명하니, 장병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지붕 위로 올라와 궁중 안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천자는 모름지기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侍中(郭威)]께서 스스로 해야 할 것이요, 장병들은 이미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5%A7%93##劉氏]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5%A7%93##劉氏]는 漢나라의 姓이다.】</font>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혹자는 황색 깃발을 찢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의 몸에 입혀주고 함께 부둥켜 안고서 만세를 불러 만세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인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를 옹위하고 남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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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B%BA_(%E5%89%8D%E8%9C%80)##郭威]가 마침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C%8F##태후]에게 牋文을 올려 “漢나라 종묘를 받들고 태후를 섬겨 어머니로 삼겠다.”고 청하였다. 己未日(26일)에 太后가 誥命을 내려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劉贇]을 폐하여[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湘陰公]으로 삼고侍中[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郭威]를 監國으로 삼으니, 百官과 藩鎭이 서로 이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郭威]에게 표문을 올려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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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번째 줄: 350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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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高祖]]擁精銳之兵하고 居形便之地러니 屬胡騎北旋하고 中州乏主라 故로 雍容南面而天下歸之하니 豈其材德之首出哉아 乃會其時之可爲也라 夫根疏者不固하고 基薄者易危라 [[隱帝]]는 雖有南面之號나 而政非己出하야 民不知君하고 輕信群小之謀하야 欲除跋扈之臣이라가 禍不旋踵하니 自然之勢也라 父子相繼四年而滅하니 自古享國之短이 未有若玆也니라
+
○ 契丹 〈[[耶律阿保機]]改名[[]]이라 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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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번째 줄: 358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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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
契丹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耶律阿保機]가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億]으로 고쳤다.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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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高祖(劉知遠)]는 정예한 병력을 보유하고 지형이 유리한 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오랑캐의 기병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中原에 주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온화하게 南面하여 천하가 그에게 歸附하였으니, 어찌 그의 재주와 덕이 크게 뛰어났기 때문이겠는가. 바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기 때문이다. 뿌리가 엉성한 자는 견고하지 못하고, 기반이 약한 자는 위태롭기가 쉽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隱帝(劉承祐)]는 비록 南面(제왕)의 칭호를 소유하였으나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였고, 여러 소인들의 계책을 가볍게 믿어서 발호하는 신하를 제거하고자 하다가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禍가 미쳤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이다. 父子가 서로 계승해서 4년 만에 멸망하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누린 것이 이와 같이 짧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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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己巳]<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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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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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右後漢은 二主에 共四年이라
+
[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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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번째 줄: 375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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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漢은 두 군주에 모두 4년이다.
+
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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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後周紀====
 
</div><div class="clsB">
 
=====太祖=====
 
</div>[[太祖]] 名[[威]]요 姓[[郭氏]]요 字[[仲文]]이니<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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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周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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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太祖]] 名[[威]]요 姓[[郭氏]]요 字[[仲文]]이니 邢州堯山人이라 在位三年이요 壽五十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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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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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太祖]는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威]이고 성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郭氏]이고 字가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仲文]이니, 邢州堯山사람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52세이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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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辛亥]周太祖郭威廣順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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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辛亥]〈周[[太祖]][[郭威]]廣順元年이라 ○ 北漢主[[劉崇]]乾祐四年이라 ○ 是歲에 周代漢하고 北漢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
[[梁主]]遷都洛陽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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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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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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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951) -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郭威]의 廣順 元年이다. ○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의 乾祐 4년이다. ○ 이해에 周나라가 漢나라를 대신하고 北漢이 건국하였으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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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辛未]<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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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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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에 漢監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周라하다
+
[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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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에 漢나라의 監國([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B6%AF##郭威])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周라 하였다.
+
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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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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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初에 漢河東節度使兼中書令[[劉崇]]<font color="#0054FF" size="2">【漢[[高祖]]母弟라 】</font>[[隱帝]]遇害하고 欲起兵南向이러니 聞迎立[[湘陰公]]하고 乃止曰 吾兒爲帝하니 吾又何求리오 及[[贇]]廢에 [[崇]]乃卽皇帝位於晉陽하야 更名[[旻]]하고 仍用乾祐<font color="#0054FF" size="2">【隱帝年號라 】</font>年號하다 〈是爲北漢이라〉
+
三月에 梁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卒하고 其弟[[]]이 襲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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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번째 줄: 426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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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漢나라 河東節度使兼中書令[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은 漢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B7%91%E5%A6%83##高祖(劉知遠)]의 同母弟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BD%AE##隱帝(劉承祐)]가 시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湘陰公(劉贇)]을 맞이하여 황제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내가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B4%87##劉贇]이 폐위되자,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 晉陽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旻]으로 고치고乾祐라는<font color="#0054FF" size="2">【乾祐는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92%B0##隱帝]의 연호이다.】</font>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것이 北漢이다. -
+
3월에 梁나라 淸海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A%90 南平襄王][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A%90 劉隱]이 죽고 그의 아우[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BE%91 劉巖]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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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번째 줄: 435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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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周主]]討河中<font color="#0054FF" size="2">【己酉年에 節度使[[李守貞]]反이어늘 討殺之하니라 】</font>하니 已爲人望所屬이라 [[李穀]]이 時爲轉運使러니 [[周主]]數以微言諷之호되 穀이 但以人臣盡節로 爲對라 [[周主]]以是賢之하야 卽位에 首用爲相하니라 時에 國家新造하야 四方多故어늘 [[王峻]]<font color="#0054FF" size="2">【左僕射兼門下侍郞이라 】</font>은 夙夜盡心하야 知無不爲하야 軍旅之謀를 多所裨益하고 [[范質]]<font color="#0054FF" size="2">【戶部侍郞判三司라 】</font>은 明敏彊記하야 謹守法度하고 [[李穀]]<font color="#0054FF" size="2">【中書侍郞 同平章事라 】</font>은 沈毅有器略하야 在[[周主]]前論議할새 辭氣忼(慷)慨<font color="#0054FF" size="2">【忼은 亦作慷하니 竭誠也요 又倜儻貌라 】</font>하고 善譬諭하야 以開主意하니라
+
八月에 [[燕王]][[守光]]이 卽皇帝位하야 〈[[劉仁恭]]之子也니 據幽州하니라〉國號를 大燕이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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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번째 줄: 443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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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92%B0##周主(郭威)]가 河中을 토벌하니,<font color="#0054FF" size="2">【己酉年(949)에 河中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E%88%E8%B4%9E##李守貞]이 반란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AB%A0##周主]가 토벌하여 죽였다.】</font> 이미 사람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이 당시 轉運使로 있었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AB%A0##周主]가 여러 번 은미한 말로 넌지시 말하였으나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은 단지 ‘신하는 충절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AB%A0##周主]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즉위한 뒤에 첫 번째로 등용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
8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燕王][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劉守光]이 황제에 즉위하여 -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燕王][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劉守光]은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4%BB%81%E6%81%AD 劉仁恭]의 아들이니, 幽州를 점거하였다. - 국호를 大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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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국가를 새로 세워 사방에 사고가 많았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AB%A0##王峻]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8%99%95%E5%AD%98##王峻]은 左僕射兼門下侍郞이다.】</font>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여 아는 것을 시행하지 않음이 없어 군대의 계책에 도움이 되는 바가 많았고,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은 戶部侍郞 判三司이다.】</font> 밝고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법도를 삼가 지켰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은 中書侍郞 同平章事이다.】</font> 침착하고 굳세고 기국과 지략이 있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8%A1%8C%E7%91%9C##周主] 앞에서 의논할 적에 말소리가 비분강개하고<font color="#0054FF" size="2">【忼은 또한 慷으로도 쓰니, 정성을 다하고 또 기개가 있는 모양이다.】</font> 비유를 잘하여 군주의 마음을 열어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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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번째 줄: 452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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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主]][[邊鎬]]<font color="#0054FF" size="2">[[唐主]][[李昪]]長子[[]]也요 [[邊鎬]]는 信州刺史라 】</font>하야 平湖南<font color="#0054FF" size="2">【湖南은 [[楚馬氏]]】</font>하고 以[[鎬]]로 爲武安節度使하다
+
○ [[晉王]]이 聞[[燕王]][[守光]]稱帝하고 大笑曰 俟彼十年하야 吾當問其鼎矣<font color="#0054FF" size="2">【左傳에 [[楚子]]伐陸渾之戎하야 遂至于洛하고 觀兵于周郊하니 [[定王]]이 使[[王孫滿]]으로 勞[[楚(王)[子]]]어늘 [[楚(王)[]]]가 問鼎大小輕重한대 對曰 在德이요 不在鼎이라 [[]]有昏德하야 鼎遷于殷하야 載祀六百하고 殷[[紂]]暴虐하야 鼎遷于周하니 德之休明이면 雖小必重이요 其姦回昏亂이면 雖大必輕이라 昔에 [[成王]]이 定鼎于郟鄏에 卜世三十이요 卜年七百이니 天所命也라 周德雖衰나 天命未改하니 鼎之輕重을 未可問也라하니라 】</font>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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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https://zh.wikipedia.org/wiki/%E8%BE%B9%E9%95%90##邊鎬]를 보내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李昪]의 長子인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李璟]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8%BE%B9%E9%95%90##邊鎬]는 信州刺史이다.】</font>湖南을 평정하고<font color="#0054FF" size="2">【湖南은 楚나라 馬氏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8%BE%B9%E9%95%90##邊鎬]를 武安節度使로 임명하였다.
+
[ 晉王]은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燕王][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劉守光]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春秋左傳》 宣公 3년에 [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 定王]이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D%99%E6%BB%A1 王孫滿]으로 하여금 [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D%99%E6%BB%A1 王孫滿]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https://zh.wikipedia.org/wiki/%E6%A1%80 桀王]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B8%9D%E8%BE%9B 紂王]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 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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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遼 穆宗璟應曆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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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契丹主 五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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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穆宗]][[璟]]應曆元年이라〉
+
○ [[契丹主]] 〈五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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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나라 -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7%A9%86%E5%AE%97##穆宗][https://zh.wikipedia.org/wiki/%E9%81%BC%E7%A9%86%E5%AE%97##耶律璟]의 應曆 元年이다. -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契丹主] - 5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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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壬子]周廣順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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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壬申]<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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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周廣順二年이라 ○ 是歲에 周, 南漢, 蜀, 唐, 北漢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
[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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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952) - 周나라 廣順 2년이다. ○ 이해에 周‧南漢‧蜀‧唐‧北漢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
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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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主]]自入秋로 得風痺疾<font color="#0054FF" size="2">【脚冷濕病이라 】</font>하야 害於食飮及步趨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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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疾增甚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에 不意太原餘孽<font color="#0054FF" size="2">【目[[晉王]]也라 】</font>이 更昌熾如此하니 吾觀其志不小라 天復奪我年하니 我死면 諸兒는 非彼敵也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哽咽하야 絶而復蘇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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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83%A2##周主]가 가을이 된 뒤로 중풍에 걸려 수족이 마비되어서<font color="#0054FF" size="2">【痺疾은 다리가 차고 습한 병이다.】</font> 음식을 먹을 때와 걸음을 걸을 때 장애가 되었다.
+
[ 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font color="#0054FF" size="2">【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 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font>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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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遼 應曆二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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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 〈應曆二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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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나라 - 應曆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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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甲寅]周顯德元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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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周顯德元年正月에 [[睿武孝文皇帝]][[]]立하고 北漢乾祐七年에 [[孝和帝]][[]]立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
○ 梁[[高季昌]]<font color="#0054FF" size="2">【荊南節度使라 梁錫爵[[渤海王]]이러니 後改名[[季興]]하니라 唐[[莊宗]]이 封[[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font>이 潛有據荊南之志하야 乃奏築江陵外郭하야 增廣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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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954) - 周나라 顯德 元年 정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87%8D%E6%A6%AE##睿武孝文皇帝][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87%8D%E6%A6%AE##郭榮]이 즉위하고, 北漢乾祐 7년에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孝和帝][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劉鈞]이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
梁나라 [ 高季昌]이<font color="#0054FF" size="2">【[ 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 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 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 莊宗(李存勖)][ 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font>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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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에 周加[[晉王]][[]]<font color="#0054FF" size="2">[[太祖]]養子니 是爲[[世宗]]이라 】</font>兼侍中判內外兵馬事하다 時에 群臣이 希(稀)得見[[周主]]하야 中外恐懼러니 聞[[晉王]]典兵하고 人心稍安하니라 壬辰에 [[周主]]殂하니 [[晉王]]이 卽皇帝位하다
+
○ 梁[[郢王]][[友珪]]<font color="#0054FF" size="2">【梁[[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梁主]]愛假子[[友文]]之妻하야 將立[[友文]]爲嗣라가 遂爲[[友珪]]所弑하니라 】</font>의 僕夫[[馮廷諤]]이 弑[[梁主]]어늘 [[友珪]]卽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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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周祖]]兩弑其君하고 簒取大位러니 得國之初에 罷四方貢獻珍食하고 詔百官上封事하며 毁漢宮寶器하고 立訴訟法하며 定稅牛皮法하고 罷戶部營田務하고 除租牛課하며 又如曲阜하야 謁[[孔子]]祠하고 拜其墓라 況有[[王峻]]以贊軍事하고 [[范質]]以守法度하고 [[李穀]]以道上意하니 雖享國日淺이나 而施爲有足稱者라 故로 先儒稱其爲[[唐明]], [[周世]]之亞는 蓋以此耳라 然이나 其旣已文身而甘心從夷하고 又偃然自處天位하니 則是黃屋之中에 居一黥人耳니 何以令天下衆庶乎아 觀其語[[劉崇]]曰 自古豈有花項天子리오하니 則[[周祖]]之自處 亦是明矣니라
+
[史略 史評]史斷曰 [[朱溫]]이 爲[[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에 刑虐不悛하고 戕害無辜하며 不念聚麀之恥하야 釀成[[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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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에 周나라가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87%8D%E6%A6%AE##晉王][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95%95##郭榮]에게<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9B%84##晉王][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郭榮][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太祖(郭威)]의 양자이니, 이가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世宗]이다.】</font>兼侍中判內外兵馬事를 가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周主]를 만나보는 일이 드물어서 中外가 두려워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晉王]이 군대를 맡았다는 말을 듣고는 인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壬辰日에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周主]가 죽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晉王]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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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 郢王][ 朱友珪]<font color="#0054FF" size="2">【[ 郢王][ 朱友珪]는 梁나라 [ 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 梁主]가 養子인 [ 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 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 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font>마부인 [ 馮廷諤]이 [ 梁主]를 시해하자, [ 朱友珪]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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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太祖(郭威)]는 두 번이나 군주를 시해하고 大位를 찬탈하였는데, 나라를 얻은 초기에 四方에서 貢獻과 진귀한 음식을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고 百官들에게 명하여 封事疏를 올리게 하였으며, 後漢의 궁궐과 寶器를 부수고 訴訟하는 法을 만들었으며, 牛皮에 세금을 매기는 法을 정하고 戶部의 營田하는 일을 파하고 소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을 면제하였으며, 曲阜에 가서 [https://zh.wikipedia.org/wiki/%E5%AD%94%E5%AD%90##孔子]의 祠堂에 배알하고 묘소에 참배하였다. 더구나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王峻]이 軍事를 돕고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이 法度를 지키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이 上의 뜻을 말하게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누린 것은 日淺하였으나 시행한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先儒가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明宗]과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世宗]의 다음이라고 칭찬한 것은 이 때문이다.
+
[ 朱溫][ 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9%90%B8 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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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文身을 하여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또 버젓이 스스로 天子의 자리에 거하였으니, 이는 黃屋(임금의 자리)의 가운데에 文身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니, 어떻게 천하의 백성들을 호령할 수 있겠는가. 그가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에게 ‘예로부터 어찌 花項天子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을 보면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4%BB%A4%E5%AD%9C##太祖]가 자처한 것이 또한 분명하다.”
+
[ 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 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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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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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契丹主 耶律億六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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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번째 줄: 566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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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漢主]]<font color="#0054FF" size="2">【[[劉崇]]이라 】</font>聞[[太祖]]晏駕하고 甚喜하야 謀大擧入寇할새 遣使請兵于遼하다
+
契丹主 〈耶律億六年이라 其弟[[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不治하니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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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
761번째 줄: 574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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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劉崇)]는<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는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7%95%A2%E5%B8%AB%E9%90%B8##太祖(郭威)]가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대를 크게 일으켜 침략할 것을 도모할 적에 遼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청하였다.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契丹主]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耶律億]의 6년이다. 그 아우[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5%89%8C%E8%91%9B 耶律剌葛]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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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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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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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月에 [[遼主]]遣其將[[楊]]兗하야 將萬餘騎하고 如晉陽한대 [[北漢主]]自將兵三萬하고 與契丹으로 南趣(趨)潞州하다 [[周主]][[世宗]]이 聞[[北漢主]]入寇하고 欲自將兵禦之하니 群臣皆曰 [[劉崇]]이 自平陽遁走<font color="#0054FF" size="2">【辛亥年에 崇稱帝於晉陽하고 乞師契丹하야 會伐周러니 久不克하고 乏食이어늘 燒營夜遁하니라】</font>以來로 勢蹙氣沮하야 必不敢自來요 陛下新卽位하사 山陵有日하니 人心易搖라 不宜輕動이니 宜命將禦之니이다 [[世宗]]曰 [[崇]]이 幸我大喪하고 輕朕年少新立하야 有呑天下之心하야 此必自來하리니 朕不可不往이니라 乙酉에 [[周主]]發大梁하야 壬辰에 過澤州하야 宿於州東北이러니 [[北漢主]]不知[[周主]]至하고 過潞州不攻하고 引兵而南하야 是夕에 軍於高平之南하다 [[周主]]介馬<font color="#0054FF" size="2">【介는 甲也라 】</font>하고 自臨陣督戰할새 合戰未幾에 [[樊愛能]], [[何徽]]<font color="#0054FF" size="2">【[[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요 [[何徽]]는 步軍都指揮使라 】</font>引騎兵先遁하야 右軍潰하니 步兵千餘人이 解甲呼萬歲하고 降于北漢이라 [[周主]]見兵勢危하고 自引兵하야 親犯矢石督戰하니 [[太祖皇帝]]時爲宿衛將<font color="#0054FF" size="2">【[[太祖皇帝]]는 謂宋[[太祖]][[趙匡胤]]也라 】</font>하야 謂同列曰 主危如此하니 吾屬이 何得不致死리오 又謂[[張永德]]<font color="#0054FF" size="2">【殿前都指揮使也라 [[太祖]]之壻니 掌禁兵하니라 】</font>曰 賊氣驕하니 力戰이면 可破也라하고 乃身先士卒하야 馳犯其鋒한대 士卒死戰하야 無不一當百하니 北漢兵披靡<font color="#0054FF" size="2">【披는 分也니 言相違라 】</font>라 時에 南風益盛이어늘 周兵爭奮하니 北漢兵이 大敗라 追至高平하니 僵尸滿山谷하고 委棄御物<font color="#0054FF" size="2">【謂服御之物이라 】</font>及輜重器械雜畜이 不可勝紀러라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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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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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2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4%B8%96%E5%AE%97##遼主]가 그의 장수[##楊兗]을 보내어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晉陽으로 가게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가 스스로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契丹과 함께 남쪽으로 潞州로 진출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95%A2%E5%B8%AB%E9%90%B8##周主][https://zh.wikipedia.org/wiki/%E7%95%A2%E5%B8%AB%E9%90%B8##世宗(郭榮)]은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가 쳐들어와 침략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군대를 인솔하여 막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 平陽에서 패하여 도망간<font color="#0054FF" size="2">【辛亥年(951)에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 晉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거란에 군대를 요청하여 모여서 周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바닥나자, 진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였다.】</font> 이래로 형세가 위축되고 기운이 꺾여서 반드시 감히 직접 오지 못할 것이고, 폐하께서는 새로 즉위하여 山陵에 장례를 모실 날이 잡혀 있으니, 인심이 동요되기 쉽습니다.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니, 마땅히 장수에게 명하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https://zh.wikipedia.org/wiki/%E7%95%A2%E5%B8%AB%E9%90%B8##世宗]이 말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이 우리나라에 大喪(國喪)이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며, 朕이 나이가 젊고 새로 즉위한 것을 깔보아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이번에 반드시 스스로 올 것이니,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乙酉日(11일)에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周主]가 大梁을 출발하여壬辰日(18일)에 澤州를 지나澤州의 동북쪽에 유숙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는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周主]가 온 것을 알지 못하여潞州를 지나가면서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이날 저녁 高平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周主]가 갑옷을 입힌 戰馬를 타고<font color="#0054FF" size="2">【介는 갑옷이다.】</font> 스스로 陣에 임하여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교전한 지 얼마 안 되어 [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과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何徽]가<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何徽]는 步軍都指揮使이다.】</font> 기병을 이끌고 먼저 도망하여右軍이 무너지니, 보병 천여 명이 갑옷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北漢에 항복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9A%87%E7%94%AB%E6%9A%89##周主]는 전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니,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趙匡胤)]가 이때 宿衛將으로 있으면서<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는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趙匡胤]을 이른다.】</font> 同列들에게 이르기를 “군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永德]에게 이르기를<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永德]은 殿前都指揮使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太祖(郭威)]의 사위이니 禁兵을 관장하였다.】</font> “적의 기세가 교만하니, 우리가 힘써 싸우면 격파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달려가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병졸들이 결사적으로 싸워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으니, 北漢의 군대가 패하여흩어져달아났다.<font color="#0054FF" size="2">【披는 나뉘는 것이니, 서로 떠남을 말한다.】</font>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이때 남풍이 매우 거세게 불어오므로 周나라 군사들이 다투어 분발하니, 北漢軍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高平에 이르니, 쓰러진 시체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버려진 御用 物品과<font color="#0054FF" size="2">【御物은 임금의 服飾과 車馬 따위의 물건을 이른다.】</font> 輜重, 병기와 각종 가축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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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周[[樊愛能]]等이 聞周兵大捷하고 與士卒로 稍稍復還이라 [[周主]]欲誅[[樊愛能]]等하야 以肅軍政하야 卽收[[愛能]], [[徽]]及所部軍吏以上七十餘人하야 責之曰 汝輩皆累朝宿將으로 非不能戰이어늘 今望風奔逃者는 無他라 正欲以朕爲奇貨하야 賣與[[劉崇]]耳라하고 悉斬之하니 自是로 驕將惰卒이 始知所懼하야 不行姑息之政矣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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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 등이 周軍이 크게 승리했다는 말을 듣고, 사졸들과 함께 차츰차츰 다시 돌아왔다.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周主]는 [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 등을 죽여 軍政을 엄숙하게 하고자 해서 즉시 [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과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何徽] 및 그들 휘하의 軍吏 이상 70여 명을 잡아 꾸짖기를 “너희들은 모두 여러 조정을 섬긴 옛 장수로서 잘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지금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도망한 것은 딴 이유가 없다. 바로 짐을 奇貨로 여겨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劉崇]에게 팔아넘기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고 모두 목을 베니, 이로부터 교만한 장수와 나태한 사졸들이 비로소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당장 눈앞의 편안함만 구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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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周太師中書令[[瀛文懿王]][[馮道]]卒하다 [[道]]少以孝謹知名이러니 唐[[莊宗]]世에 始貴顯하야 自是로 累朝에 不離將相三公三師之位하다 爲人이 淸儉寬弘하야 人莫測其喜慍하고 滑稽<font color="#0054FF" size="2">【滑은 音骨이니 亂也요 稽는 音鷄니 同也라 言辯捷之人은 言非若是하고 言是若非하야 能亂異同也라 】</font>多智하야 浮沈取容이라 嘗著長樂老敍<font color="#0054FF" size="2">【道自號[[長樂老]]하고 著書數百言하야 陳己更事四姓과 契丹所賜階勳官爵하고 以爲榮하야 自謂 孝於家하고 忠於國하며 有子有孫이라 時開一卷하고 時飮一杯하니 何樂如之리오하니 其自述之(意)[敍] (太)[大]略如是하니라 】</font>할새 自述累朝榮遇之狀하니 時人이 往往皆以德量推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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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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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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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太師中書令[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瀛文懿王][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가 별세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는 젊어서부터 효도와 恭謹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莊宗] 때에 처음으로 부귀하고 현달하여 이후로 역대의 조정에 장수와 재상, 三公과 三師의 지위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소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사람들이 그의 기쁨과 성냄을 측량하지 못하였고, 익살을 부리고<font color="#0054FF" size="2">【滑은 음이 골이니 어지럽힘이요, 稽는 음이 계이니 같음이다. 말을 잘하고 빨리하는 사람은 그른 것을 말하면서 옳은 것처럼 하고 옳은 것을 말하면서 그른 것처럼 하여 同異를 혼란시킴을 말한 것이다.】</font> 지혜가 많아서 세상을 따라 부침하여 임금에게 용납됨을 취하였다. 일찍이 〈長樂老敍〉를<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가 스스로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長樂老]라 이름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네 姓氏의 王朝를 번갈아 섬긴 것과 契丹에서 하사한 品階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 영화롭게 여겨 스스로 이르기를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훌륭한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다. 때로 책 한 권을 펼치고 때로 술 한 잔을 마시니,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니, 그 스스로 지은 敍文의 내용이 대략 이와 같았다.】</font> 지을 적에 역대의 조정에서 총애와 예우를 받은 내용을 스스로 기술하니, 당시 사람들이 왕왕 모두 德量이 있다고 推重하였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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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歐陽修]]論曰 禮義廉恥는 國之四維<font color="#0054FF" size="2">【維는 綱也라 】</font>니 四維不張이면 國乃滅亡이라 禮義는 治人之大法이요 廉恥는 立人之大節이니 況爲大臣而無廉恥면 天下其有不亂이요 國家其有不亡者乎아 予讀[[馮道]]長樂老敍컨대 見其自述以爲榮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니 則天下國家를 可從而知也라 予於五代에 得全節之士三<font color="#0054FF" size="2">【五代史에 [[王彦章]], [[裴均]], [[劉仁贍]]이라 】</font>과 死事之臣十有五<font color="#0054FF" size="2">【[[張源德]], [[夏魯奇]], [[姚洪]], [[王思同]], [[張敬達]], [[翟進宗]], [[沈斌]], [[王淸]], [[史彦超]], [[孫晟]], [[鄭遨]], [[張薦明]], [[石昂]], [[程福斌]], [[李自倫]]이니 訓義엔 [[鄭(邊)[遨]]]以下五人을 作[[馬彦超]], [[宋〈令〉詢]], [[李遐]], [[張彦卿]], [[鄭昭業]]하니라 】</font>하니 皆武夫戰卒이니 豈於儒者에 果無其人哉아 得非高節之士는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아 抑君天下者不足顧而莫能致之歟아 予嘗聞五代時에 有王凝者하니 家靑齊之間하야 爲虢州司戶參軍이러니 以疾卒于官이라 凝家素貧하고 一子尙幼어늘 妻[[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이라가 止於旅舍하니 主人不納이라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이 牽其臂而出之한대 [[李氏]]仰天慟曰 我爲婦人하야 不能守節하야 而此手爲人所執邪아하고 卽引斧하야 自斷其臂하니 見者爲之嗟泣이라 開封尹이 聞之하고 白其事於朝하야 厚恤[[李氏]]하고 而笞其主人하니라 嗚呼라 士不自愛其身하고 而忍恥以偸生者 聞[[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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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歐陽修]가 논평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禮‧義‧廉‧恥는 국가를 다스리는 네 가지 綱維이니,<font color="#0054FF" size="2">【維는 벼릿줄이다.】</font> 네 가지 綱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마침내 멸망한다. 禮義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요, 廉恥는 사람을 세우는 큰 절개이니, 하물며 大臣이 되어서 염치가 없다면 천하가 어찌 혼란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국가가 어찌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내가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의 〈長樂老敍〉를 읽어보건대 스스로 기술하고 영화라고 여겼으니, 廉恥가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하니 천하와 나라와 집안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이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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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五代時代의 역사 가운데에 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과<font color="#0054FF" size="2">【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은 《五代史》의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王彦章], [https://zh.wikipedia.org/wiki/%E8%A3%B4%E5%9D%87##裴均],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이다.】</font> 국사를 위해 죽은 신하 15명을 얻었는데<font color="#0054FF" size="2">【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 15명은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源德]‧[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夏魯奇]‧[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姚洪]‧[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80%9D%E5%90%8C##王思同]‧[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敬達]‧[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翟進宗]‧[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沈斌]‧[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王淸]‧[##史彦超]‧[##孫晟]‧[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鄭遨]‧[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薦明]‧[##石昂]‧[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程福斌]‧[##李自倫]이니, 《資治通鑑訓義》에는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鄭遨] 이하 5명을 [##馬彦超]‧[##宋令詢]‧[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9%81%90##李遐]‧[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張彦卿]‧[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鄭昭業]이라 하였다.】</font> 모두 武夫와 戰士이니, 어찌 儒者 중에 과연 그러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이는 절개가 높은 선비들은 세상이 혼란한 것을 싫어하여 세상을 비루하게 여겨 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 노릇하는 자가 돌아볼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초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내가 일찍이 들으니, 五代時代에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王凝]이란 자가 있었으니, 靑州와 齊州 사이에 거주하면서 虢州司戶參軍이 되었는데 병으로 인해 관청에서 죽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王凝]은 집이 평소 가난하고 한 아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그의 아내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7%93##李氏]가 아들을 데리고 그의 遺骸를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동쪽으로 開封府를 지나다가 여관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인이 받아주지 않았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7%93##李氏]가 하늘을 보니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가려고 하지 않자, 주인이 그녀의 팔뚝을 잡아 끌어 나가게 하였다. 이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7%93##李氏]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아녀자의 몸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팔뚝을 남의 남자에게 잡힌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도끼를 가져다 스스로 자기 팔뚝을 자르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開封府尹이 이 말을 듣고 그 일을 조정에 아뢰어서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7%93##李氏]를 후하게 구휼하고 그 여관 주인을 매질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아! 선비들 가운데 스스로 자기 몸의 지조를 아끼지 않고 부끄러움을 참고 구차하게 살기를 꾀한 자들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A7%93##李氏]의 유풍을 들으면 마땅히 다소 부끄러움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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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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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溫公]]曰 天地設位어늘 聖人則之하야 以制禮立法하야 內有夫婦하고 外有君臣하니 婦之從夫에 終身不改하고 臣之事君에 有死無貳는 此人道之大倫也니 苟或廢之면 亂莫大焉이라 [[范質]]이 稱[[馮道]]厚德稽古하고 宏材偉量하야 雖朝代遷貿나 人無間言하야 屹若<font color="#0054FF" size="2">【危峻貌라 】</font>巨山하야 不可轉也라하니 臣愚以爲正女는 不從二夫하고 忠臣은 不事二君하나니 爲女不正<font color="#0054FF" size="2">【正은 本作貞하니 避宋[[仁宗]]嫌名하야 作正하니라 】</font>이면 雖復華色之美하고 織(袵)[絍]<font color="#0054FF" size="2">【絍은 繒帛之屬이라 】</font>之巧라도 不足賢矣요 爲臣不忠이면 雖復才智之多하고 治行之優라도 不足貴矣니 何則고 大節已虧故也라 [[道]]之爲相에 歷五朝八姓하야 若逆旅之視過客하야 朝爲仇敵이라가 暮爲君臣하야 易面變辭하야 曾無愧怍이라 大節如此하니 雖有小善이나 庸足稱乎아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5%8F%B8%E9%A9%AC%E5%85%89##溫公]이 말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하늘과 땅이 높고 낮은 자리를 베풀자, 聖人이 이것을 본받아 禮를 만들고 法을 세워서 안에는 夫婦가 있고 밖에는 君臣이 있게 하였다. 부인이 남편을 따름에 종신토록 바꾸지 않고, 신하가 군주를 섬김에 죽음은 있고 두 마음이 없는 것은 이는 人道의 큰 윤리이니, 만일 혹시라도 이것을 폐하면 禍亂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이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를 칭찬하기를 ‘후덕하고 옛일을 상고하여 잘 알며 재주가 크고 도량이 뛰어나서 비록 朝代(王朝)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이 없어 큰 산이 우뚝히<font color="#0054FF" size="2">【屹若는 높고 험한 모양이다.】</font>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동요시킬 수 없다.’ 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그러나 어리석은 내가 생각건대 貞操를 지키는 여자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 법이니,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면<font color="#0054FF" size="2">【正은 본래 貞으로 되어 있으니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AE%8B%E4%BB%81%E5%AE%97##仁宗]의 이름을 휘하여 正으로 쓴 것이다.】</font> 비록 다시 꽃다운 용모가 아름답고 길쌈하는 솜씨가<font color="#0054FF" size="2">【絍은 비단 등속이다.】</font> 공교롭더라도 어질게 여길 것이 못 되며, 신하가 충성스럽지 않으면 비록 다시 재주와 지혜가 많고 다스린 업적이 뛰어나더라도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어째서인가? 큰 절개가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가 재상이 되었을 적에 다섯 王朝와 여덟 姓의 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逆旅(여관)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는 것처럼 아침에는 원수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군신간이 되어 얼굴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서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큰 절개가 이와 같았으니, 비록 작은 善行이 있으나 어찌 칭찬할 것이 있겠는가.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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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或以爲自唐室之亡으로 群雄力爭하야 帝王興廢가 遠者는 十餘年이요 近者는 四三年이니 雖有忠智나 將若之何오 當是之時하야 失臣節者 非[[道]]一人이니 豈得獨罪[[道]]哉아하니 臣愚는 以爲忠臣은 憂公如家하고 見危致命이라 君有過어든 則强諫力爭하고 國敗亡이면 則竭節效死하며 智士는 邦有道則見하고 邦無道則隱하야 或滅跡山林하고 或優遊下僚하나니 今[[道]]는 尊寵則冠三師하고 權任則首諸相이어늘 國存則依違拱黙하야 竊位素餐하고 國亡則圖全苟免하야 迎謁勸進하야 君則興亡接踵이나 [[道]]則富貴自如하니 玆乃奸臣之尤라 安得與他人爲比哉리오 或謂 [[道]]能全身遠害於亂世하니 斯亦賢已라하니 臣謂君子有殺身成仁이요 無求生害仁하나니 豈專以全身遠害爲賢哉리오 然則[[盜跖]]病終而[[子路]]醢<font color="#0054FF" size="2">【許亥反이니 肉醬也라 】</font>하니 果誰賢乎아 抑此非特[[道]]之愆也요 時君亦有責焉이라 何則고 不正之女는 中士羞以爲家하고 不忠之人은 中君羞以爲臣하나니 彼相前朝하야 語其忠하면 則反君事讐하고 語其智면 則社稷爲墟어늘 後來之君이 不誅不棄하고 乃復用以爲相하니 彼又安肯忠於我而能獲其用乎아 故로 曰非特[[道]]之愆이요 亦時君之責也라하노라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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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혹자는 말하기를 ‘唐나라 황실이 멸망한 뒤로부터 여러 영웅들이 힘으로 다투어서 제왕들이 흥하고 망한 것이 오래가면 십여 년이고 짧으면 3, 4년이었으니, 비록 충성과 지혜가 있으나 장차 어찌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하의 절개를 잃은 자가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홀로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만 나무랄 것이 있는가.’라고 한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충신은 국가를 근심하기를 자기 집안일처럼 여기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군주가 잘못이 있으면 강력히 간쟁하고 나라가 패망하면 충절을 다하여 목숨을 바치며, 지혜로운 선비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나타나고 나라에 道가 없으면 은둔하여, 혹은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혹은 낮은 벼슬아치가 되어 한가롭게 논다. 그런데 지금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는 존귀함과 총애가 三師(三公) 중에 으뜸이었고 권력과 직임이 여러 재상 중에 으뜸이었는데, 나라가 보존되면 依違(觀望)하여 팔짱을 끼고 침묵해서 지위를 도둑질하고 공밥을 먹으며, 나라가 망하면 生命을 보전하기를 도모하고 죽음을 구차히 면해서 새 군주를 맞이하여 뵙고 즉위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군주는 흥망이 서로 이어졌지만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는 부귀함이 그대로였으니, 이는 바로 간신 중에 뛰어난 자이다. 어찌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혹자는 말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가 난세에 자기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하였으니, 이 또한 어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군자는 목숨을 바쳐 仁을 이룸은 있고 삶을 구하여 仁을 해침은 없으니, 어찌 오로지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한 것만 가지고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https://zh.wikipedia.org/wiki/%E7%9B%9C%E8%B7%96##盜跖]은 天壽를 누리다가 병들어 죽었고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子路]는 죽임을 당하여 젓 담가졌으니,<font color="#0054FF" size="2">【醢는 許亥反(해)이니 肉醬이다.】</font> 과연 누가 어질단 말인가.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그러나 이것은 비단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의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보통의 남자도 室家(아내)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보통의 군주도 신하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저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가 前朝의 재상이 되어 그 충성으로 말하면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겼고, 그 지혜로 말하면 사직이 폐허가 되었는데, 후래의 군주가 그를 죽이거나 버리지 않고 도리어 다시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으니, 저가 또 어찌 기꺼이 나에게 충성하여 그를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단 [https://zh.wikipedia.org/wiki/%E7%9F%B3%E6%95%AC%E7%91%AD##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이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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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主]]違衆議하고 破北漢하니 自是로 政事無大小히 皆親決하고 百官은 受成於下而已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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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周主]가 衆論을 어기고 北漢을 격파하니, 이로부터 크고 작은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 직접 결정하고 백관들은 이뤄놓은 계책을 아래에서 받을 뿐이었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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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初에 宿衛之士 累朝相承하야 務求姑息하고 不欲簡閱<font color="#0054FF" size="2">【簡은 選也요 閱은 數也라 】</font>하야 恐傷人情하니 由是로 羸老者居多하고 但驕蹇<font color="#0054FF" size="2">【驕는 恣也요 蹇은 險難也라 】</font>不用命하야 實不可用이라 每遇大敵에 不走卽降하니 其所以失國이 亦多由此라 [[周主]]因高平之戰하야 始知其弊하고 謂侍臣曰 凡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라 今以農夫百으로 未能養甲士一이어늘 奈何浚<font color="#0054FF" size="2">【浚은 取出之也라 】</font>民之膏澤하야 養此無用之物乎아 且健懦不分이면 衆無所勸이라하고 乃命大簡諸軍하야 精銳者는 升之上軍하고 羸弱者는 斥去之하다 又以驍勇之士 多爲諸藩鎭所蓄이라하야 詔募天下壯士하야 咸遣詣闕하고 命[[宋太祖]]皇帝하야 選其尤者하야 爲殿前諸班하고 其騎步諸軍은 各命將帥選之하다 由是로 士卒精强이 近代無比하야 征伐四方에 所向皆捷하니 選練之力也러라
 
</div>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新增][[胡氏]]曰 五代之主 多刻於民而紓於軍이어늘 [[世宗]]則嚴於軍而寬於民이라 旣得柄에 制輕重之權하고 又沙汰羸老하야 簡升驍銳라 且曰 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니 百農夫未能養一甲士어늘 奈何浚民膏血하야 養無用之物고 且健懦不分이면 衆何所勸고하니 聖人復起사도 不易此言矣시리라
 
</div>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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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처음에 宿衛하는 군사들이 여러 왕조를 서로 이어오면서 되도록 당장의 편안함을 구하고, 군사들을 선발하고 사열하여<font color="#0054FF" size="2">【簡은 선발함이고, 閱은 헤아림이다.】</font>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거나 상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약하고 늙은 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오직 교만하기만 하여<font color="#0054FF" size="2">【驕는 방자함이고, 蹇은 험난함이다.】</font>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실로 쓸 수가 없었다. 매번 큰 적을 만날 때마다 도망가지 않으면 항복하니, 나라를 잃게 된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周主]는 高平의 전투로 인해 비로소 그 폐단을 알고는 近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는다. 지금 농부 백 명으로 甲士 한 명을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font color="#0054FF" size="2">【浚은 착취하는 것이다.】</font>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또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권면하는 바가 없다.” 하고, 마침내 명하여 여러 군사들을 크게 사열하여 정예한 자는 上軍으로 올리고 파리하고 약한 자는 물리쳐 보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또 날래고 용감한 군사들은 대부분 여러 藩鎭에서 길러지고 있다 하여, 천하의 壯士들을 모집해서 모두 서울로 보내어 대궐에 이르게 해서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太祖皇帝]에게 명하여 그 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殿前諸班으로 삼고, 기병과 보병의 여러 군사들은 각각 장수에게 명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들의 정예롭고 강함이 근대에 견줄 데가 없어서 사방을 정벌할 적에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니, 이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여 훈련하였기 때문이었다.
 
</div>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新增][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胡氏(胡寅)]가 말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五代의 군주들은 대부분 백성들에게서 깎아 군사들에게 후하게 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世宗]은 군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하였다. 정권을 얻은 뒤에 輕重의 권한을 통제하였고, 또 약하고 늙은 자들을 도태시켜 날래고 정예한 자들을 簡拔하여 올렸다.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周主(郭榮)]가 또 말하기를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으니, 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甲士를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어떻게 권면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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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北漢主]]殂하니 子[[承鈞]]이 立하야 更名[[鈞]]이라하다 北漢[[孝和帝]] 性孝謹이러니 旣嗣位에 勤於爲政하고 愛民禮士하니 境內粗安이러라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北漢主(劉崇)]가 죽으니, 아들[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劉承鈞]이 즉위하여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鈞]이라고 고쳤다. 北漢의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孝和帝(劉鈞)]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恭謹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한 뒤에 정사를 다스림에 부지런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예우하니, 경내가 다소 편안해졌다.
 
</div>
 
</div>
 
|}</div>遼 應曆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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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遼 〈應曆四年이라〉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遼나라 - 應曆 4년이다. -
 
 
</div>
 
</div>
 
</div>
 
</div>
 
|}</div><div class="clsB">
 
|}</div><div class="clsB">
=====世宗=====
+
=====均王=====
</div>名은 榮이요 姓은 柴氏니 太祖柴皇后兄守禮之子라<div class="contData">
+
</div>均王 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div class="contData">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
 
|-
1,002번째 줄: 585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世宗]]※在位六年이요 壽三十九라
+
[[均王]]※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div>
 
</div>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名은 [[]]이요 姓은 [[柴氏]][[太祖]][[柴皇后]]兄[[守禮]]之子라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五代之君에 [[世宗]]이 最號英武어늘 而享年不永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
初名은 [[友貞]]이러니 更名[[]]하니 [[朱溫]]第三子라 諡曰[[末帝]]
 
</div>
 
</div>
 
</div>
 
</div>
1,013번째 줄: 596번째 줄: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世宗]은 재위가 6년이고 壽가 39세이다.
+
[ 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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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世宗]은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榮]이고 성이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柴氏]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AE%97%E6%AC%8A##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8%81%96%E7%A9%86%E7%9A%87%E5%90%8E##柴皇后]의 오라비인 [https://zh.wikipedia.org/wiki/%E6%9F%B4%E5%AE%88%E7%A6%AE##柴守禮]의 아들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BD%A5##太祖]가 後嗣가 없으므로 길러서 아들로 삼았다. 五代의 군주 중에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BD%A5##世宗]이 가장 英明하고 武勇이 있다고 이름났으나 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太平한 업적을 하늘이 장차 聖人(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趙匡胤])에게 열어서 주려고 한 것이니, 人力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 均王]은 처음 이름이 [ 友貞]이었는데 이름을 [ ]으로 고쳤으니, [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 末帝]하였다.  
</div>
 
</div>
 
|}</div>[乙卯]<div class="contData">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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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乙卯]〈周[[世宗]]이 仍稱顯德二年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div>
 
</div>
 
|}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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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을묘(955) -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BD%A5##世宗]은 顯德 2년이라고 그대로 칭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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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世宗]]이 常憤廣明<font color="#0054FF" size="2">【唐[[僖宗]]廣明元年에 [[黃巢]]入長安하니 自此之後로 彊藩割據하야 中國日蹙矣라 】</font>以來로 中國日蹙하더니 及高平旣捷에 慨然有削平天下之志하니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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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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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A7%A6%E5%BD%A5##世宗]이 廣明 연간<font color="#0054FF" size="2">【唐나라 [##僖宗]廣明 元年(880)에 [https://zh.wikipedia.org/wiki/%E7%A8%8B%E5%85%83%E6%8C%AF##黃巢]가 長安으로 쳐들어오니, 이로부터 이후로 강한 藩鎭들이 할거하여 中國의 영토가 날로 위축되었다.】</font> 이래로 中國의 영토가 날로 위축됨을 항상 분하게 여겼는데, 高平에서 승리한 뒤에 慨然히 천하를 평정할 뜻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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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周[[世宗]]이 謂宰相曰 朕이 每思致治之方호되 未得其要하야 寢食不忘하노라 又自唐, 晉以來로 吳, 蜀, 幽, 幷<font color="#0054FF" size="2">【吳는 李氏요 蜀은 孟氏요 幽는 入於契丹하고 幷은 爲北漢하니라 】</font>이 皆阻聲敎하야 未能混一하니 宜命近臣하야 著爲君難爲臣不易論及開邊策一篇하라 朕將覽焉호리라 比部郞中<font color="#0054FF" size="2">【官名이라 】</font>[[王朴]]이 獻策하야 以爲中國之失吳, 蜀, 幽, 幷<font color="#0054FF" size="2">【梁失吳하고 唐得蜀而復失之하고 晉失幽하고 周失幷하니라 】</font>이 皆由失道하니 今必先觀所以失之之原이니 然後에 知所以取之之術이니이다 其始失之也에 莫不以君暗臣邪하고 兵驕民困하며 姦黨內熾하고 武夫外橫하야 因小致大하고 積微成著하니 今欲取之인댄 莫若反其所爲而已니이다 夫進賢, 退不肖는 所以收其才也요 恩德誠信은 所以結其心也요 賞功罰罪는 所以盡其力也요 去奢節用은 所以豐其財也요 時使薄斂은 所以阜其民也라 俟群才旣集하고 政事旣治하고 財用旣充하고 士民旣附하야 然後에 擧而用之하면 功無不成矣리이다 彼之人이 觀我有必取之勢하면 則知其情狀者는 願爲間諜하고 知其山川者는 願爲嚮導하야 民心旣歸면 天意必從矣리이다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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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7%A8%8B%E5%85%83%E6%8C%AF##世宗]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매양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그 요점을 얻지 못하여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것을 잊지 못하였다. 또 唐(後唐)나라와 晉(後晉)나라 이후로 吳‧蜀과 幽州‧幷州가<font color="#0054FF" size="2">【[頭註] 吳, 蜀, 幽, 幷:吳 지방은 李氏([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李璟]의 南唐)이고, 蜀땅은 孟氏([https://zh.wikipedia.org/wiki/%E7%A8%8B%E5%85%83%E6%8C%AF##孟知詳])이고, 幽州는 契丹으로 들어갔고, 幷州는 北漢이 되었다.】</font> 모두 聲敎가 미치지 못하여 통일되지 못하니, 마땅히 近臣에게 명하여 爲君難爲臣不易論과 開邊策을 한 편씩 지으라. 짐이 장차 이것을 보겠다.” 하였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이에 比部郞中<font color="#0054FF" size="2">【比部郞中은 관직명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9C%B4##王朴]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中國이 吳‧蜀과 幽州‧幷州를<font color="#0054FF" size="2">【[頭註] 中國之失吳, 蜀, 幽, 幷:梁나라는 吳를 잃었고, 唐나라는 蜀을 얻었다가 다시 잃었고, 晉나라는 幽州를 잃었고, 周나라는 幷州를 잃었다.】</font> 잃은 것은 모두 군주가 道를 잃은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이제 반드시 먼저 영토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잃어버린 영토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토를 잃었을 적엔 군주가 어둡고 신하가 간사하며, 군사들이 교만하고 백성들이 곤궁하며, 간사한 무리들은 안에서 치성하고 武夫들은 밖에서 횡행하여 작은 것으로부터 커지게 되고 은미한 것이 쌓여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잃어버린 영토를 취하고자 한다면 그 시행한 바를 예전과 반대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어진 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침은 인재를 거두는 방법이요, 은덕을 베풀고 성실하게 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방법이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내림은 그 힘을 다하게 하는 방법이요, 사치를 제거하고 財用을 절약함은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요, 철(농한기)에 따라 농민을 부역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둠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 인재들이 이미 모이고 정사가 이미 다스려지고 財用(財政)이 이미 충족하고 士民들이 이미 따르기를 기다려서 그런 뒤에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쓴다면 공을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저 적국의 백성들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저들을 취할 수 있는 형세가 있음을 보게 되면 이러한 정상을 아는 자는 간첩이 되기를 원할 것이요, 산천의 지리를 잘 아는 자는 嚮導가 되기를 원할 것이니, 그리하여 민심이 이미 돌아오면 하늘의 뜻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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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凡攻取之道는 必先其易者하나니 唐<font color="#0054FF" size="2">【[[李璟]]이라 】</font>與吾接境이 幾二千里하야 其勢易擾也라 擾之는 當以無備之處爲始하야 備東則擾西하고 備西則擾東이면 彼必奔走而救之하리니 奔走之間에 可以知其虛實强弱이라 然後에 避實擊虛하고 避强擊弱호되 未須大擧요 且以輕兵擾之하면 南人懦怯하야 聞小有警이면 必悉師以救之하리니 師數動이면 則民疲而財竭하고 不悉師면 則我可以乘虛取之니이다 如此면 江北諸州 將悉爲我有하리니 旣得江北이어든 則用彼之民하야 行我之法이면 江南을 亦易取也라 得江南이면 則巴蜀은 可傳檄而定이요 南方旣定이면 則燕地<font color="#0054FF" size="2">【時에 契丹이 跨有燕地하니라 】</font>必望風內附하니 若其不至어든 移兵攻之하면 席卷可平矣리이다 惟河東<font color="#0054FF" size="2">【北漢據河東하야 與周爲世仇也라 】</font>은 必死之寇라 不可以恩信誘요 必當以强兵制之니이다 然이나 彼自高平之敗로 力竭氣沮하야 必未能爲邊患이니 宜且以爲後圖하야 俟天下旣平하고 然後伺間一擧하면 可擒也니이다 今士卒精練하고 甲兵有備하며 群下畏法하고 諸將效力하야 期年之後에 可以出師니 宜自夏秋로 蓄積實邊矣니이다 [[世宗]]이 欣然納之러라 時에 群臣이 多守常偸安하야 所對少有可取者로되 惟[[朴]]이 神峻氣勁하고 有謀能斷하야 凡所規畫<font color="#0054FF" size="2">【規圖也라 】</font>이 皆稱[[世宗]]意하니 [[世宗]]이 由是로 重其器識하니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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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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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적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방법은 반드시 쉬운 곳을 먼저 공격해야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南唐(李璟)]은<font color="#0054FF" size="2">【唐은 南唐의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李璟]이다.】</font> 우리와 접경하고 있는 것이 거의 2천 리여서 그 형세가 동요시키기가 쉽습니다. 적국을 동요시킬 때에는 마땅히 대비가 없는 곳부터 시작하여, 적국이 동쪽을 대비하면 서쪽을 동요시키고 서쪽을 대비하면 동쪽을 동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분주히 달려가 구원할 것이니, 분주히 달려가는 사이에 그들의 虛實과 强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견실한 곳을 피하고 허약한 곳을 공격하며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되, 굳이 크게 군대를 일으킬 것 없이 우선 경무장한 군대로 적을 동요시킨다면 남쪽 사람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소소한 警報만 들어도 반드시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구원할 것이니, 군대가 자주 출동하면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군대를 다 동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빈틈을 타고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이와 같이 하면 江北의 여러 州가 장차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니, 이미 江北을 얻고 난 뒤에 저들의 백성을 사용하여 우리의 방법을 시행한다면 江南도 취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江南을 얻으면 巴蜀은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고, 南方이 이미 평정되면 燕 지방(幽州)은<font color="#0054FF" size="2">【당시에 契丹이 燕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font>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歸附할 것이니, 만약 歸附해 오지 않거든 군대를 옮겨 공격한다면 석권하여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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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다만 河東(北漢)은<font color="#0054FF" size="2">【北漢이 河東을 차지하여 周나라(後周)와 대대로 원수가 되었다.】</font>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도적이니, 은혜와 신의로 유인할 수 없고 반드시 강한 군대로 제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高平에서 패전한 뒤로 힘이 다하고 사기가 꺾여 반드시 변경의 우환이 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우선 후일을 도모하여 천하가 이미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틈을 타서 한번 출동하면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7%BB##漢主(劉崇)]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지금 사졸들이 정예롭고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며 갑옷과 병기가 모두 충분한 대비가 있으며, 아랫사람들이 군법을 두려워하고 諸將들이 힘을 다 바쳐서 期年이 지난 뒤에는 군대를 출동할 수 있으니, 마땅히 가을과 겨울로부터 저축하여 변경을 충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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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83%A1%E5%AF%85##世宗]이 흔연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일상적인 방법을 지키고 구차하게 安逸을 탐하여 대답한 내용이 취할 만한 것이 적었으나 오직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9C%B4##王朴]만은 정신이 높고 기개가 굳세며 책략이 있고 결단력이 있어서 모든 계획한 바가<font color="#0054FF" size="2">【規畫은 계획하는 것이다.】</font>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8%83%A1%E5%AF%85##世宗]의 뜻에 맞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8%83%A1%E5%AF%85##世宗]이 이로 말미암아 그의 기국과 식견을 소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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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丙辰]周顯德三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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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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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周顯德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四鎭이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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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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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956) - 周나라 顯德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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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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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庚子에 [[周世宗]]이 下詔하고 親征淮南할새 命歸德節度使[[李重進]]하야 將兵先赴正陽하다 [[李谷(穀)]]<font color="#0054FF" size="2">【谷은 綱目에 作穀이라 以穀爲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하니 淮南은 謂唐也라 】</font>이 攻壽州호되 久不克이러니 唐[[劉彦貞]]<font color="#0054FF" size="2">【北面行營都部署라 】</font>이 引兵救之어늘 [[李重進]]이 度淮하야 逆戰於正陽東하야 大破之하고 斬[[彦貞]]하다
 
</div>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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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15px;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정월 庚子日(6일)에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83%A1%E5%AF%85##世宗]이 조서를 내리고 친히 淮南(南唐)을 정벌할 적에 歸德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9%87%8D%E9%80%B2##李重進]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正陽으로 달려가게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이<font color="#0054FF" size="2">【‘谷’은 《資治通鑑綱目》에 ‘穀’으로 되어 있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을 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로 임명하니, 淮南은 南唐을 이른다.】</font>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못하였는데, 唐나라(南唐)의 [##劉彦貞]이<font color="#0054FF" size="2">【[##劉彦貞]은 北面行營都部署이다.】</font>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9%87%8D%E9%80%B2##李重進]이 淮水를 건너 正陽의 동쪽에서 그를 맞아 싸워 크게 쳐부수고[##劉彦貞]의 목을 베었다.
 
 
</div>
 
</div>
 
</div>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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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癸酉]<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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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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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是時에 江淮久安하고 民不習戰하니 [[彦貞]]旣敗에 唐人이 大恐이라 [[皇甫暉]], [[姚鳳]]<font color="#0054FF" size="2">【[[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요 [[姚鳳]]은 常州團鍊使라 】</font>이 退保淸流關이어늘 丙辰에 [[周世宗]]이 至壽州城下하야 命諸軍하야 圍壽州하다 二月에 [[世宗]]이 命[[太祖皇帝]]하야 倍道襲淸流關하니 [[皇甫暉]]等이 陳(陣)於山下하고 方與前鋒戰할새 [[太祖皇帝]]引兵出山後하니 [[暉]]等이 大驚하야 走入滁州하야 欲斷橋自守라 [[太祖皇帝]]躍馬麾兵하고 涉水하야 直抵城下하니 [[暉]]曰 人各爲其主니 願容成列而戰하노라 [[太祖皇帝]]笑而許之하니 [[暉]]整衆而出이라 [[宋太祖皇帝]]擁馬頸하고 突陳而入하야 大呼曰 吾止取[[皇甫暉]]요 他人은 非吾敵也라하고 手劍擊[[暉]]中腦하야 生擒之하고 幷擒[[姚鳳]]하야 遂克滁州하다 後에 [[世宗]]이 遣翰林學士[[竇儀]]하야 籍滁州帑藏<font color="#0054FF" size="2">【帑은 音儻이니 金帛所藏이라 】</font>이러니 [[宋太祖皇帝]]遣親吏하야 取藏中絹한대 [[儀]]曰 公이 初克城時엔 雖傾藏取之라도 無傷也어니와 今旣籍爲官物하니 非有詔書면 不可得也니라 [[宋太祖皇帝]]由是로 重[[儀]]하니라
+
[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梁主]][[]]乾化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div>
 
</div>
 
</div>
 
</div>
1,159번째 줄: 616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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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이때 江淮 지방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으니, [##劉彦貞]이 이미 패한 뒤에 南唐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92%8B%E6%AE%B7##皇甫暉]와 [https://zh.wikipedia.org/wiki/%E8%92%8B%E7%8E%84%E6%99%96##姚鳳]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92%8B%E7%8E%84%E6%99%96##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8%94%A1%E5%8F%94%E5%BA%A6##姚鳳]은 常州團鍊使이다.】</font>후퇴하여淸流關을 지켰다. 丙辰日(22일)에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7%BB%8D##世宗]이 壽州城 아래에 이르러서 諸軍에게 명해 壽州城을 포위하게 하였다.
+
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 梁主][ 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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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世宗]이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趙匡胤)]에게 명하여 행군속도를 배가해서 淸流關을 습격하게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皇甫暉] 등이 산 아래에 진을 치고 周나라의 선봉부대와 싸울 적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군대를 거느리고 산 뒤로 나오니,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皇甫暉] 등이 크게 놀라서 도망하여滁州로 들어가 다리를 끊고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말에 뛰어올라 병기를 휘두르며 물을 건너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니,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皇甫暉]가 말하기를 “사람은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니, 대열을 이루기를 기다린 뒤에 싸우기를 원한다.”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웃으면서 허락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皇甫暉]가 무리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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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말의 목을 끼고 陣中으로 돌진하여 들어가서 크게 고함치기를 “나는 다만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皇甫暉]를 잡고자 할 뿐이요, 다른 사람은 나의 적수가 아니다.” 하고는 손에 잡은 검으로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皇甫暉]를 공격하여 그의 뇌를 맞혀 사로잡고 아울러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姚鳳]을 사로잡아 마침내 滁州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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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翰林學士[https://zh.wikipedia.org/wiki/%E7%AA%A6%E4%BB%AA##竇儀]를 보내어滁州 창고의 재물을<font color="#0054FF" size="2">【帑은 음이 儻(탕)이니, 황금과 비단을 보관하는 곳이다.】</font> 장부에 기재하게하였는데,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심복인 관리를 보내어 창고 안에 있는 비단을 가져가려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7%AA%A6%E4%BB%AA##竇儀]가 말하기를 “公이 처음 성을 함락시켰을 때엔 비록 창고에 있는 물건을 모두 가져가더라도 나쁠 것이 없지만, 지금은 이미 장부에 기재하여 관청의 물건이 되었으니 황제의 조서가 있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다.” 하였다.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이로 말미암아 [https://zh.wikipedia.org/wiki/%E7%AA%A6%E4%BB%AA##竇儀]를 소중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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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周[[劉詞]]遺表하야 薦其幕僚薊人[[趙普]]有才可用이러니 會에 滁州平이어늘 [[范質]]이 [[]]爲滁州軍事判官한대 宋[[太祖皇帝]]與語悅之하니라 宋[[太祖皇帝]] 威名日盛이라 每臨陳에 必繁纓<font color="#0054FF" size="2">【見一卷하니라 】</font>飾馬하고 鎧仗鮮明하니 或曰 如此면 爲敵所識이라한대 宋[[太祖皇帝]]曰 吾固欲其識之耳라하니라
+
[[趙巖]]<font color="#0054FF" size="2">【駙馬都尉이니 尙[[太祖]]女[[長樂公主]]하니라 】</font>이 奉使至大梁이어늘 [[均王]][[友貞]]이 密與之謀誅[[友珪]]할새 [[]]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令公]]<font color="#0054FF" size="2">【[[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font>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曰 [[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袁象先]]<font color="#0054FF" size="2">【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妹[[萬安大長公主]]하니라 】</font>謀하다 庚寅旦에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友珪]]聞變하고 與妻[[張氏]]와 及[[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廷諤]]亦自殺이라 [[象先]], [[巖]]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鍠]]하고 又更名[[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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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8%A9%9E##劉詞]가 죽을 때에 표문을 올려 그의 막료인 薊州 사람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趙普]가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였는데, 마침 滁州가 평정되자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이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趙普]를 천거하여滁州軍事判官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趙普]와 함께 말을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는 위엄과 명망이 날로 성하였다. 매번 적진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繁纓으로<font color="#0054FF" size="2">【繁纓은 1卷에 보인다.】</font> 말을 꾸미고 투구와 의장을 선명하게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적들에게 인식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는 말하기를 “내 진실로 저들에게 인식되고자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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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나라 [ 趙巖]이<font color="#0054FF" size="2">【[ 趙巖]은 駙馬都尉이니, [ 太祖]의 딸인 [ 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font>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 均王][ 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 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 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5%B8%88%E5%8E%9A 楊令公(楊師厚)]에게<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5%B8%88%E5%8E%9A 楊師厚(楊令公)]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font>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5%B8%88%E5%8E%9A 楊師厚]를 설득하기를 “[ 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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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主]]兵屢敗하니 懼亡하야 乃遣[[鍾謨]], [[李德明]]<font color="#0054FF" size="2">【[[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요 [[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라 】</font>하야 奉表稱臣하고 來請平<font color="#0054FF" size="2">【平은 和也라 】</font>하다 [[謨]], [[德明]]이 素辯口하니 [[周世宗]]이 知其欲遊說<font color="#0054FF" size="2">【飾辨辭하고 設詐謀하야 馳逐於諸侯하야 以要時勢者라 】</font>하고 盛陳甲兵而見之하야 曰 我非六國<font color="#0054FF" size="2">【戰國韓趙魏燕齊楚라 】</font>愚主니 豈汝口舌所能移邪아 可歸語汝主호되 亟來見朕하고 再拜謝過하면 則無事矣어니와 不然이면 朕欲往觀金陵城하고 借府庫하야 以勞軍하노니 汝君臣이 得無悔乎아 [[謨]], [[德明]]이 戰栗<font color="#0054FF" size="2">【恐懼貌라 】</font>하야 不敢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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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A8%E5%B8%88%E5%8E%9A 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 袁象先]<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 袁象先]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 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 袁敬初]는 [ 太祖]의 누이인 [https://zh.wikipedia.org/wiki/%E4%B8%87%E5%AE%89%E5%A4%A7%E9%95%BF%E5%85%AC%E4%B8%BB 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font>도모하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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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 袁象先]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 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 張氏] 및 [ 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 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 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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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李璟)]는 南唐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자, 나라가 망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鍾謨]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을<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였다.】</font>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올려 臣을 칭하고 와서 화평을 청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평은 화평함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鍾謨]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은 평소에 말을 잘하니,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은 이들이 유세하고자<font color="#0054FF" size="2">【말을 꾸미고 속임수를 써서 諸侯들을 쫓아 時勢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font> 한다는 것을 알고는 갑옷과 병기를 성대하게 진열하고 만나보며 말하기를 “나는 戰國時代六國의<font color="#0054FF" size="2">【六國은 戰國時代의 韓, 趙, 魏, 燕, 齊, 楚나라이다.】</font>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니, 어찌 너희들의 입과 혀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군주에게 말하여 빨리 와서 짐을 만나 재배하고 사과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짐이 직접 가서 金陵城을 구경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을 빌어 군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너희 군주와 신하가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鍾謨][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이 두려워 몸이 떨려서<font color="#0054FF" size="2">【戰栗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font>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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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A2%81%E8%B1%A1%E5%85%88 袁象先][ 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 均王]을 맞이하자, [ 均王]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 ]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 ]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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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主]]復使[[李德明]], [[孫晟]]<font color="#0054FF" size="2">【右僕射라 】</font>으로 言於[[周世宗]]하야 請去帝號하고 割壽, 濠, 泗, 楚, 光, 海六州之地하고 仍歲輸金帛百萬하야 以求罷兵이로되 [[世宗]]이 以淮南之地已半爲周有하고 諸將捷奏日至라하야 欲盡得江北之地하야 不許라 [[德明]]이 見周兵日進하고 奏稱호되 [[唐主]]不知陛下兵力如此之盛하니 願寬臣五日之誅하야 得歸白[[唐主]]면 盡獻江北之地하리이다 [[世宗]]이 乃許之하고 賜[[唐主]]詔書하니 其略曰 但存帝號면 何爽歲寒<font color="#0054FF" size="2">【爽은 差也라 言歲寒知松柏之後凋는 此約不差也니 許[[唐主]]自帝江南이라 】</font>이리오 倘堅事大之心이면 終不迫人于險하리라 又曰 俟諸郡<font color="#0054FF" size="2">【江北諸郡이라 】</font>之悉來하야 卽大軍之立罷호리니 言盡於此하고 更不煩云하노니 苟曰未然이면 請從玆絶하노라 [[德明]]이 [[世宗]]威德과 及甲兵之强하고 勸[[唐主]]割江北之地한대 [[唐主]]大怒하야 斬[[德明]]於市하고 命[[齊主]][[景達]]<font color="#0054FF" size="2">[[唐主]]之弟라 】</font>하야 將兵以拒周하다 [[景達]]이 將兵二萬하고 自瓜步<font color="#0054FF" size="2">【山名이라 】</font>로 濟江하야 距六合<font color="#0054FF" size="2">【縣名이라 】</font>二十餘里하야 設柵不進하니 諸將이 欲擊之어늘 [[宋太祖皇帝]]曰 彼設柵自固는 懼我也라 今吾衆이 不滿二千하니 若往擊之면 則彼見吾衆寡矣라 不如俟其來而擊之하니 破之必矣리라 居數日에 唐出兵趣(趨)六合이어늘 [[宋太祖皇帝]] 奮擊大破之하야 殺獲近五千人호되 餘衆이 尙萬餘라 走渡江하야 爭舟溺死者甚衆하니 於是에 唐之精卒이 盡矣러라 是戰也에 士卒有不致力者어늘 [[宋太祖皇帝]]陽(佯)爲督戰하야 以劍斫其皮笠이라가 明日에 徧閱皮笠하고 有劍跡者數十人을 皆斬之하니 由是로 部兵이 莫敢不盡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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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王緘]]하야 草露布<font color="#0054FF" size="2">【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重이라하니라 】</font>한대 [[]]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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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다시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과 [##孫晟]으로 하여금<font color="#0054FF" size="2">【[##孫晟]은 右僕射이다.】</font>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에게 말하여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는 한편 壽州‧濠州‧泗州‧楚州‧光州‧海州 등 여섯 州의 땅을 떼어 바치고, 이어서 해마다 황금과 비단 백만을 바쳐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은 淮南 땅의 절반이 이미 周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諸將들의 승전보고가 날로 이른다 하여 江北 땅을 다 얻고자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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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 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 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4%BB%81%E6%81%AD 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 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5%AE%88%E5%85%89 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 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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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은 周나라 군대가 날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에게 아뢰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는 폐하의 병력이 이처럼 강성한지 알지 못하니, 바라건대 臣을 5일 동안만 정벌하지 말아서 臣으로 하여금 돌아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아뢸 수 있게 해주신다면 江北의 땅을 모두 바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마침내 허락하고[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詔書를 내리니,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단지 황제의 칭호를 보존한다면 역경에도 변치 않는 歲寒의 志操를 어찌 어기겠는가.<font color="#0054FF" size="2">【爽은 어긋나는 것이다.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마른다고 말한 것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스스로 江南에서 황제 노릇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font> 진실로 그대가 大國을 섬기려는 마음만 견고하다면 나는 끝내 사람을 험난한 데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러 郡을<font color="#0054FF" size="2">【諸郡은 江北의 여러 郡이다.】</font> 다 바쳐 오기를 기다려서 당장 大軍을 철수하겠다. 말은 이에서 다하고 다시 번거롭게 말하고자 하지 않으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국교를 단절할 것을 청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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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이 돌아가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의 위엄과 덕망 및 군대의 강성함을 극구 말하고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江北의 땅을 떼어 바칠 것을 권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크게 노하여 시장에서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B7%E6%98%8E##李德明]의 목을 베고,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齊主][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李景達]에게<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李景達]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의 아우이다.】</font>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周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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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掌書記[ 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font color="#0054FF" size="2">【《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5%AE%8B%E5%9D%87 宋均]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font>[ 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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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李景達]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瓜步山로부터<font color="#0054FF" size="2">【瓜步는 山의 이름이다.】</font>양자강을 건너 六合縣에서<font color="#0054FF" size="2">【六合은 縣의 이름이다.】</font> 20여 리 떨어진 지점에 城柵을 만들고전진하지 않으니, 周나라의 諸將들이 이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말하기를 “저들이 城柵을 만들어 스스로 굳게 지킴은 우리를 두려워해서이다. 지금 우리의 병력이 채 2천 명이 되지 못하니, 만약 가서 공격한다면 저들은 우리의 병력이 적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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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다가唐나라가 出兵하여六合縣으로 진출하자,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분발하여 공격해서唐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5천 명에 가까웠으나 남은 무리가 아직도 만여 명이었다. 이들이 도망하여 강을 건너느라 배를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때문에 唐나라 정예병이 다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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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사졸들 가운데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있자,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가 거짓으로 督戰하는 체하면서 검으로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졸의 皮笠을 찍어 두었다가 다음날 皮笠을 살펴보고 검으로 찍은 흔적이 있는 자 수십 명을 모두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部下 병사들이 감히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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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以[[太祖皇帝]]로 爲定國節度使<font color="#0054FF" size="2">【定國軍은 卽同州匡國軍也라 [[太祖]]登極이어늘 避御名하야 始改爲定國軍이러니 史亦因以後所改軍號書之也라 】</font>兼殿前都指揮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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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主弟[[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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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가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趙匡胤)]를 定國節度使<font color="#0054FF" size="2">【定國軍은 바로 同州匡國軍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가 登極하자 御名의 匡을 피하여 비로소 定國軍이라고 고쳤는데, 역사책에도 이로 인해 이후로는 軍號를 고쳐서 쓴 것이다.】</font>兼殿前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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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契丹主]의 아우[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5%89%8C%E8%91%9B 耶律剌葛] 등이 배반하자 그 도당을 주벌하고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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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丁巳]周顯德四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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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乙亥]<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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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巳]〈周顯德四年이라 ○ 北漢天會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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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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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957) - 周나라 顯德 4년이다. ○ 北漢天會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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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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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兵이 圍壽春<font color="#0054FF" size="2">【縣名이니 屬壽州하니라 】</font>하야 連年未下어늘 議者以唐援兵尙强이라하야 多請罷兵하니 [[世宗]]疑之라 [[李穀]]이 寢疾在第러니 二月에 [[世宗]]이 使[[范質]], [[王溥]]<font color="#0054FF" size="2">【中書侍郞同平章事라 】</font>로 就與之謀한대 [[穀]]이 上疏하야 以爲壽春危困하야 破在旦夕하니 若鑾駕<font color="#0054FF" size="2">【和鑾은 皆鈴也니 和는 金口木舌이요 鑾은 金口金舌이니 所以節車之行이라 乘車則馬動하고 馬動則鑾鳴하고 鑾鳴則和應하야 自然有箇節奏로되 車駕大(太)速則不相應이요 大(太)遲則不響하며 若雜然響이면 則不合節奏也라 乘車는 和在軾하고 鑾在衡하며 戎車는 鑾(輿)[在]鑣하니 駟馬는 八鑾也라 】</font>親征하시면 則將士爭奮하고 援兵震恐하리니 城中知亡이면 必可下矣리이다 [[世宗]]이 悅하다
+
二月에 梁魏博軍이 亂하야 劫節度使[[賀德倫]]하고 求援於晉이어늘 [[晉王]]이 引兵하야 進據臨淸하야 與[[劉鄩]]夾河爲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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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군대가 壽春縣을<font color="#0054FF" size="2">【壽春은 縣의 이름이니, 壽州에 속하였다.】</font>포위하였으나여러 해가 지나도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南唐의 구원병이 아직도 강성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의심하였다. 이때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이 병이 들어 집에 있었는데, 2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과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BA%A5##王溥]로 하여금<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BA%A5##王溥]는 中書侍郞 同平章事이다.】</font> 찾아가서 그와 상의하게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A9%80##李穀]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壽春縣이 위태롭고 곤궁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격파당할 터인데, 만약 皇上이<font color="#0054FF" size="2">【和와 鑾은 모두 방울이니, 和는 쇠로 된 입에 나무로 된 혀이고, 鑾은 쇠로 된 입에 쇠로 된 혀이니, 수레가 가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수레를 타면 말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이면 鑾이 울리고 鑾이 울리면 和가 응하여 자연히 節奏(리듬)가 있게 되는데, 車駕가 너무 빠르면 서로 응하지 못하고 너무 느리면 소리가 나지 않으며, 만약 뒤섞여 소리가 나면 節奏에 합하지 않는다. 乘車는 和가 軾에 있고 鑾이 衡에 있으며, 戎車는 鑾이 재갈에 있으니, 駟馬는 鑾이 여덟 개이다.】</font> 친히 정벌하신다면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고 南唐의 구원병이 두려워할 것이니,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이 자기 나라가 망할 줄을 알게 되면 우리가 틀림없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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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 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 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4%A9 劉鄩]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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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乙亥에 [[周主]][[世宗]]이 發大梁하다 先是에 周與唐戰할새 唐水軍銳敏하야 周人이 無以敵之라 [[世宗]]이 每以爲恨이러니 返自壽春으로 於大梁城西汴水側에 造戰艦數百艘하고 命唐降卒하야 敎北人水戰하니 數月之後에 縱橫出沒이 殆勝唐兵이라 至是에 命右驍衛大將軍[[王環]]하야 將水軍數千하고 自閔河로 沿潁入淮하니 唐人이 見之하고 大驚하니라 壬辰旦에 [[世宗]]이 軍于趙步하니 諸將이 擊唐紫金山寨하야 大破之하고 殺獲萬餘人하다 甲辰에 [[世宗]]이 耀兵于壽春城北이라 唐淸淮節度使[[劉仁]]贍이 病甚하야 不知人하니 監軍使[[周廷構]]等이 [[仁贍]]表하야 舁[[仁贍]]하야 出城降하다 夏四月에 [[周世宗]]이 還大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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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疎忌宗室하고 專任[[趙巖]][[德妃]]<font color="#0054FF" size="2">【帝之母也 】</font>兄弟[[張漢鼎]], [[漢傑]]과 從兄弟[[漢倫]], [[漢融]]하야 咸居近職하야 參預謀議하다 [[]]等이 依勢弄權하야 賣官鬻獄하고 離間舊將相하니 [[敬翔]], [[李振]]이 雖爲執政이나 所言이 多不用이라 [[]]이 每稱疾不預事하야 以避[[趙]], [[張]]之族하니 政事日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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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乙亥日(17일)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周主][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周나라가 南唐과 싸울 적에 南唐의 수군이 예리하고 민첩해서 周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가 없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은 매번 이것을 통한으로 여겼는데, 壽春에서 돌아온 뒤로 大梁城 서쪽 汴水 가에 전함 수백 척을 建造하고南唐의 항복한 병졸들에게 명하여 북쪽 사람들에게 水戰을 가르치게 하니, 몇 달 뒤에 周나라 수군이 종횡으로 출몰함에 자못 南唐의 수군보다도 나았다. 이때에 이르러 右驍衛大將軍[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92%B0##王環]에게 명하여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閔河로부터 潁水를 따라 淮水로 들어가게하니, 南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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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 趙巖] 및 [https://zh.wikipedia.org/wiki/%E5%BC%A0%E5%BE%B7%E5%A6%83 德妃]의<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BC%A0%E5%BE%B7%E5%A6%83 德妃]는 皇帝의 어머니이다.】</font>형제인 [ 張漢鼎]‧[ 張漢傑]과 종형제인 [ 張漢倫]‧[ 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 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5%AC%E7%BF%94 敬翔]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8C%AF 李振]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8C%AF 李振]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 趙巖]과 [ 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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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日(3월 5일) 아침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趙步에 군대를 주둔하니, 諸將들이 南唐의 紫金山 城寨를 공격하여대파하고 만여 명을 죽이거나사로잡았다. 甲辰日(17일)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壽春城 북쪽에서 군용을 과시하였다. 唐나라 淸淮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이 질병이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監軍使[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周廷構] 등이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의 이름으로 표문을 지어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을 가마로 메고서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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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丙子]<div class="contData">
여름4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大梁으로 돌아왔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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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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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冬十月에 [[周世宗]]이 發大梁하야 十一月에 至濠州하야 大破唐兵於洞口하니 斬首五千餘級이요 降卒二千餘人이라 因鼓行而東하니 所至皆下하다 唐兵이 退保淸口러니 戊午旦에 [[世宗]]이 自將親軍하고 自淮北進하야 命[[宋太祖皇帝]]하야 將步騎하야 自淮南進하고 諸將은 以水軍으로 自中流進하야 共追唐兵하니 所獲戰船이 燒沈之餘에 得三百餘艘하고 士卒殺溺之餘에 得七千餘人이라 唐之戰船在淮上者 於是盡矣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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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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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에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여11월에 濠州에 이르러南唐의 군대를 洞口에서 대파하니, 머리를 벤 것이 5천여 수급이고 항복한 병사가 2천여 명이었다. 이어서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동쪽으로 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
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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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唐의 군대가 후퇴하여淸口를 지키자, 戊午日(12월 6일) 아침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은 스스로 친위군을 거느리고 淮水 북쪽으로부터 전진하고,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淮水 남쪽으로부터 전진하게 하고, 諸將들은 수군을 거느리고 中流로부터 전진하게 하여 함께 南唐의 군대를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노획한 전선은 불타고 침몰한 것 이외에 3백여 척을 얻었으며, 사졸은 죽임을 당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 이외에 7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淮水 가에 있던 南唐의 戰船이 이때에 다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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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午]周顯德五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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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周顯德五年이라 唐中興元年이요 [[南漢主]][[鋹]]大寶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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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958) - 周나라 顯德 5년이다 ○ 南唐의 中興 元年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B%B9##南漢主][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B%B9##劉鋹]의 大寶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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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周世宗]]이 如迎鑾鎭<font color="#0054FF" size="2">【今眞州是라 五代時에 僞吳置迎鑾鎭이러니 後에 宋改建安軍하고 [[眞宗]]時에 陞眞州하니라 】</font>하야 屢至江口하야 遣水軍하야 擊唐兵破之하니 [[唐主]][[世宗]]在江上하고 恐遂南渡하고 又恥降號稱藩하야 乃遣兵部侍郞[[陳覺]]하야 奉表請傳位於太子[[弘冀]]하야 使聽命於中國하니 時에 淮南에 惟廬, 舒, 鄿, 黃이 未下라 覺이 至迎鑾하야 見周兵之盛하고 白[[世宗]]하야 請遣人渡江取表하야 獻四州之地하고 畫江爲境하야 以求息兵호되 辭旨甚哀라 [[世宗]]曰 朕本興師는 止取江北이러니 今爾主能擧國內附하니 朕復何求리오 覺이 拜謝而退하야 遣其屬[[劉承遇]]<font color="#0054FF" size="2">【閤門承旨라 】</font>하야 如金陵<font color="#0054FF" size="2">【唐所都라 】</font>이라 [[世宗]]이 賜唐主書호되 稱 皇帝恭問江南國主하노라하고 慰納之하다 [[唐主]]復遣[[承遇]]하야 奉表獻江北四州하고 歲輸貢物數十萬하니 於是에 江北이 悉平이라 得州十四와 縣六十하다 是月에 浚汴口하야 導河流하야 達于淮하니 於是에 江淮舟檝(楫)이 始通<font color="#0054FF" size="2">【此卽唐時運路也라 自江淮爲南唐所據로 運漕不通하야 水路湮塞이러니 今復浚之하니라】</font>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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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二月에 [[梁主]]屢趣(促)[[劉鄩]]하야 [[晉王]]戰이러니 [[]]兵이 大敗라 [[王檀]]<font color="#0054FF" size="2">【匡國節度使라 】</font>이 密疏하야 請發關西兵하야 襲晉陽한대 [[梁主]]從之하야 兵至晉陽하야 夜急攻之하니 城幾陷者數四라 昭義節度使[[李嗣昭]] 遣牙將[[石君立]]하야 救之하니 梁兵死傷者什二三이라 [[王檀]]이 引兵大掠而還하니 [[梁主]]聞[[劉鄩]]敗하고 又聞[[王檀]]無功하고 歎曰 吾事去矣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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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迎鑾鎭에<font color="#0054FF" size="2">【迎鑾鎭은 지금의 眞州가 이곳이다. 五代時代에 괴뢰정권인 吳나라가 迎鑾鎭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宋나라가 建安軍으로 개칭하고 [https://zh.wikipedia.org/wiki/%E5%AE%8B%E7%9C%9F%E5%AE%97##眞宗] 때에 眞州로 승격시켰다.】</font> 가서 여러 차례 江口에 이르러 수군을 보내 南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강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남쪽으로 강을 건너올까 두렵고, 또 황제의 칭호를 貶降하고 藩臣을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兵部侍郞[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陳覺]을 周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太子[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C%98%E5%86%80##李弘冀]에게 傳位할 것을 청하고太子로 하여금 中原(周)명령을 듣게 하니, 이때 淮水 남쪽에 오직 廬州‧舒州‧鄿州‧黃州만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
봄 2월에 [ 梁主]여러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4%A9 劉鄩]을 재촉하여[ 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4%A9 劉鄩]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王檀]이<font color="#0054FF" size="2">【[ 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font>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 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97%A3%E6%98%AD 李嗣昭]가 牙將[ 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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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陳覺]이 迎鑾鎭에 이르러周나라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에게 아뢰어서 사람을 보내 양자강을 건너가 表文을 가져와 네 州의 땅을 바치고 江을 국경으로 삼아서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애처로웠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말하기를 “朕이 본래 군대를 일으킨 것은 다만 江北을 취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너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歸附하니, 朕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陳覺]이 절하고 사례하고물러가서 그의 관속인 [##劉承遇]를<font color="#0054FF" size="2">【[##劉承遇]는 閤門承旨이다.】</font>金陵에 보내었다.<font color="#0054FF" size="2">【金陵(南京)당나라가 도읍한 곳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8%B2%9E%E6%83%A0%E7%9A%87%E5%90%8E_(%E5%BE%8C%E5%91%A8)##世宗]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내린 서신에 이르기를 “皇帝는 공손히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85%9C##江南國主]에게 묻노라.”라고 하여 위무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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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다시 [##劉承遇]를 보내어 表文을 올려 江北의 네 州를 바치고 해마다 貢物 수십만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에 江北이 모두 평정되어 14州와 60縣을 얻었다. 이달에 汴口를 깊이 파서 黃河의 물을 인도하여 淮水에 도달하게 하니, 이에 江淮의 선박이 비로소 통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頭註] 江淮舟檝(楫) 始通:이는 唐나라 때 漕運하던 길이었다. 江‧淮가 南唐에게 점거당한 뒤로 漕運이 통하지 아니하여 水路가 막혔는데, 지금 다시 통하게 된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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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月에 [[唐主]]避周諱하야 更名[[景]]<font color="#0054FF" size="2">【[[唐主]]는 本名[[璟]]이니 以周[[太祖]]之高祖亦名[[璟]]이라 故로 避하니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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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周나라의 諱를 피하여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景]으로 고쳤다.<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는 본래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璟]이니,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太祖]의 高祖도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璟]이었다. 그러므로 피한 것이다.】</font>
+
[ 梁主]는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4%A9 劉鄩]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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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번째 줄: 774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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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中宗]]<font color="#0054FF" size="2">【漢[[晉王]][[晟]]也라 】</font>이 殂하니 [[長子]][[衛王]][[繼興]]이 卽帝位하야 更名[[鋹]]하다
+
契丹主改元神冊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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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번째 줄: 782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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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漢의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9%9F##中宗]이 죽으니,<font color="#0054FF" size="2">【南漢의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9%9F##中宗]은 漢나라의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9%9F##晉王][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6%99%9F##劉晟]이다.】</font>長子[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B%B9##衛王][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B%B9##劉繼興]이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https://zh.wikipedia.org/wiki/%E5%8A%89%E9%8B%B9##鋹]으로 고쳤다.
+
[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契丹主]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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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己未]周顯德六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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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戊寅]<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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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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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周顯德六年六月에 [[恭帝]][[宗訓]]이 立하다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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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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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번째 줄: 799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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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959) - 周나라 顯德 6년 6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恭帝][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柴宗訓]이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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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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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번째 줄: 808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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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淮南饑어늘 [[世宗]]이 命以米貸之한대 或曰 民貧하니 恐不能償이니이다 [[世宗]]曰 民은 吾子也라 安有子倒懸而父不爲之解哉며 安在責其必償也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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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에 晉兵이 侵掠至鄆, 濮而還이어늘 梁[[敬翔]]이 上疏曰 國家連年喪師에 疆域日蹙이라 陛下居深宮之中하야 所與計事者는 皆左右近習이니 豈能量敵國之勝負乎잇가 先帝之時에 奄有河北하고 親御豪傑之將호되 猶不得志<font color="#0054FF" size="2">【不得志는 謂不得志于晉이라 】</font>어시늘 今敵至鄆州로되 陛下不能留意하시니 必若乏才인댄 乞於邊陲自效하노이다 疏奏에 [[]], [[張]]之徒 言[[翔]]怨望이라하니 [[梁主]]遂不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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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淮南 지방이 굶주리자[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世宗]이 쌀을 꾸어주도록명하였다. 혹자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가난하니 제대로 갚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2%A9##世宗]이 말하기를 “백성들은 나의 자식이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곤궁한데) 아버지가 어찌 풀어주지 않겠으며, 어찌 반드시 갚기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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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5%AC%E7%BF%94 敬翔]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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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遼 應曆九年<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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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 〈應曆九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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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font color="#0054FF" size="2">【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font>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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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曰 [[世宗]]視民猶子하야 匡救其乏而不責其必償하니 仁人之心이요 王者之政也라 五代十二君에 愛民者三人<font color="#0054FF" size="2">【唐[[明宗]], 周[[太祖]], [[世宗]]이라 】</font>이로되 而[[世宗]]爲最라 漕運給耗<font color="#0054FF" size="2">【乙卯年에 漕運不給하야 斗耗更多하야 以虧欠抵罪한대 詔每斛에 給耗一斗하니라】</font>는 慮倍輸也요 保任令錄<font color="#0054FF" size="2">【或以父任爲官하고 或以兄任爲官者를 謂之任子하니 任亦保也라 乙卯年에 令翰林學士院으로 自擧令錄호되 除官之日에 仍署擧者姓名하고 若貪佞敗官이면 竝當連坐하니라 】</font>은 防貪穢也요 冬役春罷는 恐妨農也요 毁寺, 禁度僧<font color="#0054FF" size="2">【乙卯年에 廢(殷銅)[寺院]二萬七百三十六하고 存者二千六百九十四요 禁私度僧尼하야 令諸州로 每歲造僧帳하야 有死者歸俗이면 皆隨時開落하니 見存僧尼七萬六百九十이요 (殷)[毁]銅佛하야 (壽)[鑄]錢하니라 】</font>은 減蠹弊也요 立兩(歲)[稅]限<font color="#0054FF" size="2">【丙辰年에 立兩稅起徵할새 限以徵斂穀帛호되 多不竢收穫紡績之畢이러니 乃詔호되 自今으로 夏稅以六月하고 秋稅以十月起徵이라하니 民便之하니라 】</font>은 知早徵之害也요 設科求士는 欲吏治有方也요 均定田租는 使富不掩貧也요 倂鄕置團耆<font color="#0054FF" size="2">【戊午年에 諸州倂鄕村할새 率以百戶爲團하고 團置耆長三人하니 團은 聚也라 六十曰耆니 記曰 耆指使라하니 言指事使人也라 】</font>는 絶公皁<font color="#0054FF" size="2">【猶言公吏也라 】</font>侵漁也요 罷課戶俸戶<font color="#0054FF" size="2">【戊午年에 詔凡諸色課戶及俸戶를 竝勒歸州縣하고 自今으로 竝支俸錢及(未)[米]麥이라하다 唐初에 諸司置公廨本錢하야 以貿易取息하고 計員多少爲月料러니 其後에 罷諸司公廨本錢하고 以天下上戶七千人으로 爲胥士而收其課하고 計官多少而給之하니 此所謂課戶라 唐又簿斂一歲稅호되 以高戶主之하고 月收息給俸하니 此所謂俸戶라 】</font>는 省官方私擾也요 稱貸<font color="#0054FF" size="2">【稱은 去聲이니 擧也라 今所謂擧錢也라 貸는 從人求物也라】</font>不責償은 庶下沾實惠也라 蓋自[[唐宣宗]]而後로 政不及民하야 而置諸湯火<font color="#0054FF" size="2">【民之危險이 如墜湯火之中하니 卽書所謂塗炭也라】</font>之中者 將百年이러니 而後에 [[世宗]]이 有人君之德하야 行不忍人之政이라 蓋嘗因與將相食할새 曰 連日之寒에 朕深愧無功於民而坐享天祿하노니 惟親冒矢石하야 爲百姓除害라야 差可自安耳라하고 又命刻木爲耕夫織婦하야 置諸庭하야 留心邦本이 如此하니 宜其赫然南面指麾하야 而四海賓服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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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나라 - 應曆 9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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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胡氏(胡寅)]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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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世宗]은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여겨 궁핍함을 구휼해주고 꾸어준 곡식을 반드시 갚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仁人의 마음이고 王者의 정사이다. 五代時代 12명의 군주 중에 백성을 사랑한 자가 3명인데,<font color="#0054FF" size="2">【백성을 사랑한 군주 세 명은 唐나라(後唐)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明宗]과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太祖]와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世宗]이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BB%B6%E5%AF%BF##世宗]이 그 중에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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漕運할 때 耗穀을 지급한 것은<font color="#0054FF" size="2">【乙卯年에 漕運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한 말씩 지급하던 耗穀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漕運하는 자들이 곡식을 축낸 것으로 처벌받게 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매 斛마다 耗穀 한 말을 지급하게 하였다.】</font> 백성들이 곱절로 갚을까 염려해서였고, 保任한 자들을 기록하게 한 것은<font color="#0054FF" size="2">【혹은 아버지가 보증하여 관원이 되고 혹은 형이 보증하여 관원이 되는 것을 任子라 하니, 任 또한 보증하는 것이다. 乙卯年에 翰林學士院으로 하여금 스스로 천거하여 任子를 기록하게 하되 관직을 제수하는 날에 擧者의 姓名을 연이어 쓰고, 만약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관직을 망치면 모두 連坐하게 하였다.】</font> 탐욕을 부려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겨울에만 부역시키고 봄에는 부역을 중지한 것은 농사에 방해될까 염려해서였고, 사찰을 허물고 승려의 度牒을 주는 것을 금한 것은<font color="#0054FF" size="2">【乙卯年에 寺院 20,736개를 없애고 남은 것이 2,694개였으며, 도첩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여 여러 州로 하여금 매년 僧侶의 명부를 만들어서 사망하거나 환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때마다 제명하게 하니, 현재 남아있는 승려가 70,690명이었고, 구리로 만든 불상을 부수어 돈을 주조하였다.】</font> 재물을 좀먹는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兩稅의 기한을 정한 것은<font color="#0054FF" size="2">【丙辰年에, 예전에 兩稅法을 만들어 세금을 징수할 적에 곡식과 비단으로 거두되 대부분 곡식을 수확하거나 길쌈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는데, 이때 마침내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 여름세금은 6월에, 가을세금은 10월에 징수한다.” 하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font> 일찍 징수하는 폐해를 알기 때문이었고,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것은 관리의 다스림이 좋은 방법을 얻기를 바라서였고, 田租를 똑같이 정함은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鄕을 겸병하고 團耆를 둔 것은<font color="#0054FF" size="2">【戊午年에 여러 州에서 鄕村을 겸병할 적에 대체로 100戶를 團으로 삼고 團에는 耆長 3명을 두니, 團은 모은다는 뜻이다. 60세를 耆라 하니, 《禮記》에 이르기를 “60세 된 노인은 〈직접 일하지 않고〉손가락으로 남을 지시하여 부린다.” 하였으니, 일을 지시하여 사람을 부림을 말한 것이다.】</font> 公皁(公吏)가 백성들을 침탈함을 끊기 위해서였고,<font color="#0054FF" size="2">【公皁는 公吏(국가의 관리)라는 말과 같다.】</font> 課戶와 俸戶를<font color="#0054FF" size="2">【戊午年에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모든 종류의 課戶와 俸戶를 모두 강제로 州縣에 돌리고, 〈막료들과 州縣의 관원들에게는〉지금부터 官府에서 俸錢과 쌀과 보리를 아울러 지급한다.” 하였다. 唐나라 초기에 諸司에서는 公廨(공청)에 本錢을 적립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물건을 매매하여 利息을 취해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月料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諸司의 公廨에 있는 本錢을 없애고는 천하의 上戶(부유한 가호) 7천 명을 胥士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으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課戶라는 것이다. 唐나라는 또 1년의 세금을 장부에 기재하여 거두되 高戶(富戶)로써 이것을 주관하게 하고 매월 利息을 취하여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이른바 俸戶라는 것이다.】</font> 파한 것은 官方의 사사로운 소요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곡식을 꾸어주되<font color="#0054FF" size="2">【稱은 去聲이니, 빌리는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擧錢(빚을 빌림)이란 것이다. 貸는 남에게 물건을 구하는(빌리는) 것이다.】</font> 갚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랫사람들이 실제 혜택을 입기를 바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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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94%90%E5%AE%A3%E5%AE%97##宣宗] 이후로 어진 정사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을 끓는 물과 불 속(塗炭)에<font color="#0054FF" size="2">【백성들의 위태로움이 끓는 물과 불 속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니, 곧 《書經》의 이른바 塗炭이라는 것이다.】</font> 버려둔 지가 거의 백 년이었는데, 그런 뒤에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9%9A%90##世宗]이 임금의 덕이 있어서 백성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仁政)를 행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8%B6%99%E5%B4%87##世宗]이 일찍이 將相들과 밥을 먹을 적에 인하여 말하기를 ‘연일 계속되는 추위에 짐은 백성들에게 공이 없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天祿을 누리는 것이 매우 부끄러우니, 오직 내가 백성들을 위해 직접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서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제거하여야 다소 스스로 편안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나무를 조각하여 밭 가는 지아비와 길쌈하는 지어미의 像을 만들어서 이것을 뜰에다 놓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에게 마음을 둠이 이와 같았으니, 赫然히 남면하고 지휘함에 온 천하가 복종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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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世宗]]이 以北鄙未復이라하야 將幸滄州할새 卽日에 帥步騎數萬하고 直趍(趨)契丹之境하니 契丹守將이 皆擧城降이라 於是에 關南<font color="#0054FF" size="2">【瓦橋關以南이라 】</font>이 悉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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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6%99%E7%83%88%E4%BE%AF##世宗]이 북쪽 변방을 아직 수복하지 못했다 하여 장차 滄州로 행차하려 할 적에 당일로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契丹의 국경으로 곧장 향하니, 契丹의 수비하는 장수들이 모두 성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關南 지방이<font color="#0054FF" size="2">【關南은 瓦橋關 이남 지방이다.】</font> 모두 평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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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을 올린 뒤에 [ 趙巖]과 [ 張漢鼎]의 무리가 “[https://zh.wikipedia.org/wiki/%E6%95%AC%E7%BF%94 敬翔]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 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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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에 [[唐主]]遣其子紀公從善하야 與[[鍾謨]]로 俱入貢이어늘 [[周主]][[]]曰 江南<font color="#0054FF" size="2">【唐也라 】</font>이 亦治兵修守備乎아 對曰 旣臣事大國하니 不敢復爾<font color="#0054FF" size="2">【爾는 猶言如此也라 】</font>로소이다 上曰 不然하다 曏時則爲仇敵이어니와 今日則爲一家라 吾與汝國으로 大義已定하니 保無他虞라 然이나 人生難期하야 至於後世면 則事不可知니 歸語汝主호되 可及吾時하야 完城郭, 繕甲兵하고 據守要害하야 爲子孫計하라 謨歸하야 以告[[唐主]]한대 [[唐主]]乃城金陵하고 凡諸州城之不完者를 葺之하고 戍兵少者를 益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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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知誥]] 爲淮南節度行軍副使하다 〈[[知誥]]後簒吳하니 是爲南唐이라〉[[知誥]]事[[吳王]]盡恭하고 接士大夫以謙하며 御衆以寬하고 約身以儉이라 以[[吳王]]之命으로 悉蠲天祐十三年以前逋稅<font color="#0054FF" size="2">【欠負官物과 亡匿不還을 皆謂之逋라하니라 】</font>하고 餘俟豐年하야 乃輸之하고 求賢才, 納規諫하고 除姦猾, 杜請託하니 於是에 士民이 翕然歸心하야 雖宿將悍夫라도 無不悅服이러라 以[[宋齊丘]]로 爲謀主하니 由是로 江淮間에 曠土<font color="#0054FF" size="2">【空曠不耕之土也라 】</font>盡闢하고 桑柘滿野하야 國以富强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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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그의 아들[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5%96%84##紀公][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BE%9E%E5%96%84##李從善]을 보내어[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4%BA%91%E5%8F%9F##鍾謨]와 함께 入朝해서 공물을 바치게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6%B3%A8##周主]가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95%8B##鍾謨]에게 묻기를 “江南(南唐)<font color="#0054FF" size="2">【江南은 唐나라이다.】</font> 또한 군대를 다스려 수비를 하는가?”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95%8B##鍾謨]가 대답하기를 “이미 신하로서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감히 다시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爾는 이와 같다는 말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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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 徐知誥]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 徐知誥]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 徐知誥]가 [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吳王]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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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난날에는 우리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지만 지금은 한 집안이 되었다. 우리는 너희 나라와 군신간의 大義가 이미 정해졌으니, 보장하건대 딴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기약하기 어려워 후세에 이르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돌아가 너의 군주에게 고하되 ‘내가 살아있을 때에 성곽을 완전히 보수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요해처를 점거하고지켜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라.’고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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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92%B1%E9%95%A0 吳王]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font color="#0054FF" size="2">【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font>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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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95%8B##鍾謨]가 돌아가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이것을 아뢰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이에 金陵에 城을 쌓고 여러 州의 城 가운데 완전하지 못한 것들을 수리하고 수자리 사는 병사가 적은 곳을 보충하여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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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6%98%AA 徐知誥][https://zh.wikipedia.org/wiki/%E5%AE%8B%E9%BD%8A%E4%B8%98 宋齊丘]를 謀主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江淮 지방의 빈 땅이<font color="#0054FF" size="2">【曠土는 비워두고 경작하지 않는 농토이다.】</font> 모두 개간되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들에 가득하여 국가가 부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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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或問臣호되 五代帝王에 [[唐莊宗]], [[周世宗]]은 皆稱英武하니 二主孰賢고하니 臣應之曰 [[莊宗]]은 善戰者也라 故로 能以弱晉勝彊梁이러니 旣得之하야 曾不數年에 外內離叛하야 置身無所하니 誠由知用兵之術이요 不知爲天下之道故也라 [[世宗]]은 以信令御群臣하고 以正義責諸國이라 [[王環]]以不降受賞<font color="#0054FF" size="2">【[[王環]]이 爲蜀鳳州節度使러니 [[世宗]]이 攻之한대 堅守라가 力屈就擒하니 [[世宗]]嘆曰 用之면 可勸事君者라하고 乃拜爲右驍衛將軍하니라 】</font>하고 [[劉仁贍]]以堅守蒙褒<font color="#0054FF" size="2">【南唐이 以仁贍爲淸淮節度使하야 鎭壽州러니 [[世宗]]이 攻之하야 踰時不下라 [[仁贍]]子[[崇諫]]이 幸其病하야 謀降이어늘 [[仁贍]]이 命斬之하다 病甚에 副使[[孫羽]]詐爲書하야 以城降하니 是日에 卒이라 [[世宗]]이 復其軍曰忠正軍이라하야 以旌[[仁贍]]之節也하니라】</font>하고 [[嚴續]]以盡忠獲存<font color="#0054FF" size="2">【[[陳覺]]이 自周[[還]]하야 矯[[世宗]]之命하야 謂[[唐主]]曰 江南連歲拒命은 皆宰相[[嚴續]]之謀니 當爲我斬之하라 [[唐主]]知[[覺]]素與[[續]]有隙하고 未之信하야 使[[鍾謨]]復命曰 久拒王師는 皆臣愚迷요 非[[續]]之罪라하다 [[世宗]]聞之하고 大驚曰 審如此면 則[[續]]乃忠臣이니 朕爲天下主하야 豈敎人殺忠臣乎아하니라 】</font>하고 蜀兵以反覆就誅<font color="#0054FF" size="2">【[[世宗]]이 謀取蜀, 秦하고 遣鳳翔節度使[[王景]]攻之하야 虜其蜀將王(蠻)[巒]及其將士三千人하다 秦州降하니 [[世宗]]이 赦所俘蜀兵하야 隷軍籍하고 從征淮南이러니 (後王)[復亡]하야 走入唐이어늘 [[唐主]]獻五十人하니 [[世宗]]이 悉命斬之하니라】</font>하고 [[馮道]]以失節被棄하고 [[張美]]以私恩見疎<font color="#0054FF" size="2">【(宗族之類)[[[世宗]]之爲][[晉王]]也하야 在(亶)[澶]州할새 [[美]]掌州穀이러니 [[世宗]]이 或私有所求면 [[美]]曲爲供副하다 及其卽位에 以[[美]]治積穀이 當時鮮及이라 故로 以利權授之하니 征伐四方호되 用度不乏은 [[美]]之力也라 然이나 終不以公忠待之하니라 供副者는 供給軍需辦以應副所求라 】</font>하며 江南未服이면 則親犯矢石하야 期於必克하고 旣服이면 則愛之如子하야 推誠盡言하야 爲之遠慮하니 其宏規大度가 [[莊宗]]이 豈得同日語哉리오 書曰 無偏無黨하면 王道蕩蕩<font color="#0054FF" size="2">【偏은 不中也요 黨은 不公也라 蕩蕩은 廣遠也라 】</font>이라하고 又曰 大邦畏其力하고 小邦懷其德이라하니 [[世宗]]近之矣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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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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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5%8F%B8%E9%A9%AC%E5%85%89##溫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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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8%80%B6%E5%BE%8B%E9%98%BF%E4%BF%9D%E6%9C%BA 契丹主] - [https://zh.wikipedia.org/wiki/%E5%AD%94%E5%AD%90 孔子]의 사당을 만들고 친히 배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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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五代時代의 帝王 중에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莊宗]과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世宗]은 모두 英武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두 군주 중에 누가 더 어진가?’라고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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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己卯]<div class="contData">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莊宗]은 전투를 잘한 자이다. 그러므로 약한 晉나라를 가지고 강한 梁나라를 이겼는데,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일찍이 몇 년이 못 되어 내외가 이반하여 몸 둘 곳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用兵하는 방법만 알고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世宗]은 진실한 명령으로 신하들을 어거하고 正義로 여러 나라를 책망하였다. 그리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92%B0##王環]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상을 받았고<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92%B0##王環]이 蜀나라 鳳州節度使가 되었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世宗]이 공격하자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사로잡히니, [https://zh.wikipedia.org/wiki/%E9%83%91%E7%B6%AE##世宗]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등용하면 군주를 섬기는 자를 권면할 수 있다.” 하고 마침내 右驍衛將軍으로 임명하였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은 굳게 성을 지킴으로써 표창을 받았으며,<font color="#0054FF" size="2">【南唐이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을 淸淮節度使로 임명하여 壽州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壽州를 공격하여 한 철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의 아들[##劉崇諫]이 아버지의 병환을 요행으로 여겨 항복할 것을 모의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이 명령하여 자식의 목을 베게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의 병이 위독해지자, 副使[https://zh.wikipedia.org/wiki/%E5%AD%99%E7%BE%BD##孫羽]가 거짓으로 항복문서를 만들어 城을 가지고 항복하니, 이날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이 죽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그의 군대를 회복하여 忠正軍이라 이름해서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4%BB%81%E8%B5%A1##劉仁贍]의 충절을 표창하였다.】</font>[##嚴續]은 충성을 다함으로써 생존을 얻었고<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陳覺]이 周나라로부터 돌아와서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의 命을 사칭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에게 이르기를 “江南이 여러 해를 이어 황제(世宗)의 명령에 항거한 것은 모두 宰相 [##嚴續]이 모의한 것이니, 마땅히 나를 위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는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陳覺]이 평소 [##嚴續]과 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말을 믿지 않고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鍾謨]를 시켜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에게 복명하기를 “오랫동안 王의 군대에게 항거한 것은 모두 신의 어리석고 혼미함 때문이지, [##嚴續]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다면 [##嚴續]은 바로 충신이니, 짐이 천하의 군주가 되어서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충신을 죽이게 하겠는가.” 하였다.】</font>蜀나라의 병사들은 반복무상함으로써 죽임을 당하였으며,<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蜀과 秦지방을 점령할 것을 모의하고 鳳翔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99%AF##王景]을 보내어 공격하게 해서 蜀나라의 장수 [##王巒]과 그의 장병 3천 명을 사로잡았다. 秦州가 항복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사로잡은 蜀나라의 병사들을 사면하여 軍籍에 예속시키고 從軍하여 淮南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다시 도망하여 南唐으로 달아나자,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7%92%9F_(%E5%8D%97%E5%94%90)##唐主]가 이들 50명을 바치니,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모두 명하여 목을 베게 하였다.】</font>[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馮道]는 절개를 잃었다 하여 버림받고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張美]는 사사로운 은혜로 인해 소외당하였으며,<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晉王]가 되어 澶州에 있을 적에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張美]가 州의 곡식을 관장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혹 사사로이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張美]가 곡진히 장만하여 요구에 부응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즉위하자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張美]가 비축한 곡식을 다스림에 당시 그를 따라갈 만한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권을 그에게 주니, 사방을 정벌할 적에 用度가 궁핍하지 않은 것은 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張美]의 공로였다. 그러나 끝내 공평함과 충성함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供副는 軍需를 공급하고 마련하여 요구에 부응함을 이른다.】</font>江南 지방이 복종하기 전에는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기필코 이길 것을 기약하였고 이미 복종한 뒤에는 자식처럼 사랑하여 정성을 다하고 아는 것을 다 말해서 그들을 위하여 멀리 생각하였으니, 그 큰 규모와 큰 도량을 어찌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莊宗]과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書經》에 이르기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王道가 蕩蕩하다.」 하였고,<font color="#0054FF" size="2">【偏은 中하지 못한 것이요, 黨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蕩蕩은 넓고도 먼 것이다.】</font> 또 말하기를 「큰 나라는 그의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의 덕을 그리워한다.」라고 하였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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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主]]立皇子[[宗訓]]하야 爲[[梁王]]하다 癸巳에 [[周主]][[世宗]]이 殂하다 [[世宗]]이 在藩에 多務韜晦<font color="#0054FF" size="2">【謂韜光晦跡이라 】</font>러니 及卽位에 破高平之寇하니 人이 始服其英武하니라 其御軍에 號令이 嚴明하야 人莫敢犯하고 攻城對敵에 矢石이 落其左右하야 人皆失色이로되 而[[世宗]]이 略不動容하고 應機決策이 出人意表하다 又勤於爲治하야 百司簿籍을 過目無所忘하고 發奸擿伏<font color="#0054FF" size="2">【擿은 他歷反이니 挑也요 伏은 隱也니 凡隱匿者를 爲動發之라】</font>에 聰察如神이라 閑暇則召儒者하야 讀前史하야 商確<font color="#0054FF" size="2">【確은 訖岳反이니 博求義理當否也라 】</font>大義하며 性不好絲竹珍玩之物이라 常言[[太祖]]養成[[王峻]], [[王殷]]<font color="#0054FF" size="2">【[[王峻]]은 樞密使平虜節度使同平章事요 [[王殷]]은 邠郡節度使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라 】</font>之惡하야 致君臣之分不終<font color="#0054FF" size="2">【上庚戌年에 漢[[隱帝]]遣[[孟業]]하야 殺監軍[[王峻]]等이러니 [[王殷]]이 先知其事하고 (因多製書)[囚業遣人]하야 以密詔示[[太祖]]하다 [[太祖]]起兵할새 [[王殷]]이 以部兵數百하고 [[峻]]亦以監軍從하야 夙夜盡心하야 多有佐命功이라 由是로 恃功專橫하다 [[王峻]]言事에 帝或未允이면 輒慍하야 語多不遜하고 忌鎭寧節度使[[晉王]]榮之英烈하야 沮其入朝라 [[太祖]]不悅하고 因[[殷]]入朝하야 殺之하고 貶[[峻]]爲商州司馬而卒하니라 】</font>이라 故로 群臣有過則面責之하야 服則赦之하고 有功則厚賞之하고 文武參用하야 各盡其能하니 人無不畏其明而懷其惠라 故로 能破敵廣地하야 所向無前이러라 然이나 用法大(太)嚴하야 群臣職事 小有不擧하면 往往寘(置)之極刑하야 雖素有才幹聲名이라도 無所開宥하고 尋亦悔之러니 末年에 浸寬이러라 登遐之日에 遠邇哀慕焉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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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 蜀乾德元年이요 [[吳宣王]][[楊隆演]]武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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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歐陽氏脩]]曰 嗚呼라 五代는 可謂亂世也歟인저 [[世宗]]이 區區五六年間에 取秦隴<font color="#0054FF" size="2">【世宗二年에 克成階鳳州하니 時三州入于蜀하니라 】</font>하고 平淮右<font color="#0054FF" size="2">【世宗五年에 克淮南四十州하니라 】</font>하고 復三關<font color="#0054FF" size="2">【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皆中國故地라 】</font>하야 威武之聲이 震懾<font color="#0054FF" size="2">【懾은 懼也니 通作讋이니 失氣也라 】</font>夷夏하고 而方內(納)延<font color="#0054FF" size="2">【內은 與納通이라 】</font>儒學文章之士하야 考制度하고 修通禮하고 定正樂하고 議刑統하야 其制作之法이 皆可施於後世라 其爲人이 明達英果하고 論議偉然하야 卽位之明年에 廢天下佛寺三千<font color="#0054FF" size="2">【綱目及資治에 作二萬하니라 】</font>三百三十六이라 是時에 中國乏錢이어늘 乃詔悉毁天下銅佛像하야 以鑄錢이라 嘗曰 吾聞佛說이 以身世爲妄而以利人爲急이라하니 使其眞身尙在인댄 苟利於世면 猶欲割截이어든 況此佛像을 豈其所惜哉아하니 由是로 群臣이 皆不敢言이라 嘗夜讀書라가 見唐元稹均田圖하고 慨然嘆曰 此致治之本也니 王者之政이 自此始라하고 乃詔頒其圖法하야 使吏民先習知之하야 期以一歲大均天下之田하니 其規爲志意 大矣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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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周主(世宗)]가 皇子[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柴宗訓]을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梁王]으로 세웠다. 癸巳日(6월 19일)에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周主][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이 죽었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은 藩邸(藩王의 저택)에 있을 적에 되도록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감추었는데,<font color="#0054FF" size="2">【韜晦는 재능을 감추고 행적을 숨김을 이른다.】</font> 즉위하자 高平의 적을 격파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英明함과 武勇에 탄복하였다. 군대를 통솔할 적에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고, 적의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대할 적에 적의 화살과 포석이 좌우에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으나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世宗]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意表를 찔렀다. 또 정사를 다스림에 부지런하여 여러 官司의 장부를 눈으로 한 번 보고 지나가면 잊는 법이 없었으며, 간악한 일을 적발하고 숨겨진 일을 적발함에<font color="#0054FF" size="2">【擿은 他歷反(적)이니 들추어내는 것이고, 伏은 숨겨진 것이니, 모든 숨겨져 있는 것을 들추어 드러내는 것이다.】</font> 총명하게 살피는 것이 귀신과 같았다. 한가할 때에는 儒者들을 불러서 예전의 역사책을 읽게 하여 大義를 강구하고 의논하였으며<font color="#0054FF" size="2">【確은 訖岳反(확)이니, 의리에 합당한지 여부를 널리 찾는 것이다.】</font> 타고난 성품이 관현악과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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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919) - 晉‧岐는 唐나라 天祐 1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5년이다. ○ 蜀나라는 乾德 元年이고, 吳나라는 [https://zh.wikipedia.org/wiki/%E5%AE%A3%E7%8E%8B 宣王][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楊隆演]의 武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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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말하기를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太祖]가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峻]과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殷]의<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峻]은 樞密使 平虜節度使 同平章事이고,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殷]은 邠郡節度使 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였다.】</font> 惡을 양성하여 군신간의 분수를 잘 끝마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앞의 庚戌年(950)에 漢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隱帝]가 [##孟業]을 보내어서 監軍[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峻] 등을 죽이게 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殷]이 그 일을 미리 알고는 [##孟業]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密詔를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太祖]에게 보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太祖]가 군대를 일으킬 적에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殷]이 휘하의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수행하였으며, [https://zh.wikipedia.org/wiki/%E9%83%AD%E5%A8%81##王峻] 또한 監軍을 거느리고 수행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다해 왕이 창업할 때 보좌한 功이 많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들이 공을 믿고 專橫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84%AD%E6%86%B2##王峻]이 일을 말할 적에 황제가 혹 윤허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성을 내어 불손한 말이 많았으며, 鎭寧節度使[https://zh.wikipedia.org/wiki/%E9%84%AD%E7%9C%BE##晉王][https://zh.wikipedia.org/wiki/%E9%84%AD%E7%9C%BE##柴榮]의 英烈함을 시기하여 그가 들어와 조회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에 [https://zh.wikipedia.org/wiki/%E9%8C%A2%E5%BC%98%E4%BD%90##太祖]가 기뻐하지 않고 [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王殷]이 入朝함을 틈타 그를 죽였고, [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王峻]을 商州司馬로 좌천시켜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font> 그러므로 신하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대면하고 책망하여 죄를 인정하면 용서하고 공이 있으면 상을 후하게 내렸으며, 文武의 인재를 섞어 등용해서 각각 재능을 다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의 총명함을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혀서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너무 엄격하여 신하들 중에 직분에 관계된 일을 조금이라도 거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왕왕 극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평소에 재간과 명망이 있는 자라도 관대하게 용서해주는 법이 없었고 얼마 뒤엔 또한 이를 후회하였는데, 말년에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승하하는 날에 원근에서 모두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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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https://zh.wikipedia.org/wiki/%E6%AC%A7%E9%98%B3%E4%BF%AE##歐陽氏(歐陽脩)]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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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五代時代는 난세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런데 [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世宗]은 구구하게 5, 6년 동안에 秦隴을 취하고<font color="#0054FF" size="2">【世宗 2년(955)에 成州, 階州, 鳳州를 점령하니, 이 당시에 이 세 州가 蜀으로 들어가 있었다.】</font>淮右를 평정하고<font color="#0054FF" size="2">【世宗 5년(958)에 淮南의 40州를 점령하였다.】</font>三關을 수복하여<font color="#0054FF" size="2">【三關은 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모두 中原의 옛 영토이다.】</font>威武의 명성이 오랑캐 지방과 中夏에 진동하였고,<font color="#0054FF" size="2">【懾은 두려워하는 것으로 讋과 통하니 의기소침하여 기운을 잃은 것이다.】</font> 유학과 문장을 하는 선비들을 사방에서 받아들여<font color="#0054FF" size="2">【內은 納과 통한다.】</font> 제도를 고찰하고 통행하는 禮를 닦고 純正한 음악을 제정하고 刑統을 의논하여 제작한 법이 모두 후세에 시행할 만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고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의논이 훌륭하여 즉위한 다음 해에 천하의 佛寺 3<font color="#0054FF" size="2">【三千은 《資治通鑑綱目》과 《資治通鑑》에는 二萬으로 되어 있다.】</font>336개소를 폐지하였다. 이때 中國에 돈이 없자, 마침내 명하여 천하의 銅으로 만든 불상들을 모두 부수어서 돈을 주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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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世宗]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佛家의 학설은 몸과 세상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급하게 여긴다고 하니, 만약 眞身(부처)이 아직 살아있을 경우 만일 세상에 이롭기만 하다면 자기 몸을 베어주고자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불상을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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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밤중에 책을 읽다가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元稹]의 均田圖를 보고 慨然히 감탄하기를 ‘이는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이니, 王者의 정사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이 그림과 법을 천하에 반포해서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익숙히 알게 해서 1년 동안에 천하의 田地를 크게 균등하게 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그 規爲(규모)와 의지가 참으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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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에 宣遺詔하야 命[[梁王]][[宗訓]]하야 卽皇帝位하니 生七年矣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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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溫]]<font color="#0054FF" size="2">【少販鹽이러니 及[[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行密]]爲[[吳王]]하니라 】</font>이 自以權重而位卑라하야 勸[[吳王]]建國稱帝而治러니 [[吳王]]이 不許하다 夏에 卽吳國王位<font color="#0054FF" size="2">【[[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溫]]爲大丞相하고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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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日(6월 20일)에 遺詔를 선포해서[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梁王][https://zh.wikipedia.org/wiki/%E9%94%BA%E8%B0%9F##柴宗訓]에게 명하여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태어난 지 겨우 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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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5%BE%90%E6%BA%AB 徐溫]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BE%90%E6%BA%AB 徐溫]은 젊었을 적에 소금을 팔았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楊行密]이 일어나자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楊行密]의 막하에 예속되었다가 마침내 吳나라의 將相이 되었다. 天復 2년(902)에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楊行密]을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吳王]에 봉하였다.】</font>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력은 막중하지만 지위가 낮다고 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吳王]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여통치할 것을 권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吳王(楊隆演)]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에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吳王]이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吳國王]즉위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楊隆演]이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天子의 禮를 사용하여 [https://zh.wikipedia.org/wiki/%E5%BE%90%E6%BA%AB 徐溫]을 大丞相으로 삼고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楊隆演]이 섭행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9%9A%86%E6%BC%94 楊隆演]은 [https://zh.wikipedia.org/wiki/%E6%A5%8A%E8%A1%8C%E5%AF%86 楊行密]의 둘째 아들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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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이 仍歲征伐할새 宋[[太祖]]累立大功하고 加以法令嚴明하니 士卒畏服이라 [[恭帝]]幼沖하니 中外物情이 皆附于[[太祖]]하야 密有推戴之意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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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蜀主]][[王建]]이 殂하니 太子[[]]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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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95%B7%E6%A8%82%E5%85%AC%E4%B8%BB##世宗]이 해마다 정벌할 적에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가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게다가 法令이 엄격하고 분명하니, 사졸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https://zh.wikipedia.org/wiki/%E9%99%88%E5%BC%98%E5%BF%97##恭帝]는 나이가 어리니, 中外의 물정(인심)모두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에게 歸附하여 은밀히 황제로 추대할 뜻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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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蜀主][ 王建]이 죽으니, 太子[ ]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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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恭帝=====
 
</div>名은 宗訓이니 世宗長子라<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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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帝]] 名은 [[宗訓]]이니 [[世宗]]長子라 在位半年에 禪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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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99%B3%E6%95%AC%E7%91%84##恭帝]는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9%9F%8B%E6%98%AD%E5%BA%A6##宗訓]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9%9F%8B%E6%98%AD%E5%BA%A6##世宗]의 長子이다. 재위한 지 반년 만에 宋나라에 禪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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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庚申]<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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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周[[恭帝]]는 仍稱顯德七年하니라 正月은 [[宋太祖皇帝]]建隆元年이라 ○ 是歲에 周禪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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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font color="#0054FF" size="2">【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font>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font color="#0054FF" size="2">【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font>할새 梁人이 擊[[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font color="#0054FF" size="2">【橫衝은 軍都之號也라 】</font>[[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font color="#0054FF" size="2">【[[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font>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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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960) -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9F%8B%E6%98%AD%E5%BA%A6##恭帝]는 顯德 7년을 그대로 칭하였다. 정월은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皇帝]의 建隆 元年이다. ○ 이해에 周나라가 宋나라에 禪讓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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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font color="#0054FF" size="2">【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font>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 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font color="#0054FF" size="2">【壖은 而緣反()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9%A1%8F%E5%B8%AB%E5%8F%A4 顔師古]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font>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 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font color="#0054FF" size="2">【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font>[ 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 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A7%93 王氏]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font>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 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石敬瑭]과 [ 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 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 高祖]가 되었고, [ 劉知遠]은 漢나라 [ 高祖]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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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鎭定驛告호되 河東[[劉鈞]]<font color="#0054FF" size="2">【[[北漢主]]라 】</font>이 結遼兵入寇라하니 [[周主]]命[[宋太祖]]北征이러니 至陳橋驛하야 諸將이 擁逼南歸하야 自仁和門入하다 [[宋太祖]]歸公署하니 宰相[[范質]]等이 詣崇元殿하야 召文武百僚하야 至晡班定<font color="#0054FF" size="2">【晡曰申時라 】</font>하다 [[周恭帝]]自內降制曰 天生蒸民에 樹之司牧이라 二帝는 惟公而禪位하고 三王은 乘時而革命하니 其極은 一也라 予末小子<font color="#0054FF" size="2">【末은 弱也라 】</font>遭家不造<font color="#0054FF" size="2">【造는 成也라 】</font>하야 人心已去하고 天命有歸라 咨爾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趙某]]는 禀上聖之姿하고 有神武之略하야 佐我[[高祖]]하야 格于皇天하고 逮事[[世宗]]하야 功存納麓<font color="#0054FF" size="2">【書에 納于大麓이라 】</font>하고 東征西怨하야 厥績懋焉<font color="#0054FF" size="2">【懋는 美也요 又通作茂하니 盛也라 】</font>하니 天地鬼神이 享于有德하고 謳歌獄訟이 歸于至仁이라 應天順人하야 法[[堯]]禪[[舜]]하니 如釋重負라 予其作賓하노니 嗚呼欽哉하라 祇畏天命하노라 〈[[陶穀]]所撰也라〉宣徽使引[[宋太祖]]하야 就龍墀하야 聽命訖에 宰相이 掖[[宋太祖]]升殿이어늘 由東序하야 服御服하고 登座하니 群臣朝賀하다 詔改周顯德七年하야 爲建隆元年하고 國號를 大宋이라하니 正月五日也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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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이 城遼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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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에 [https://zh.wikipedia.org/wiki/%E9%9F%8B%E6%98%AD%E5%BA%A6##鎭定驛]에서 아뢰기를 “河東의 [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劉鈞]이<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5%88%98%E9%92%A7_(%E5%8C%97%E6%B1%89)##劉鈞]은 北漢의 군주이다.】</font>遼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쳐들어와서 침략했다.” 하니, [https://zh.wikipedia.org/wiki/%E9%9F%93%E5%85%A8%E8%AA%A8##周主(恭帝)]가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에게 명하여 북쪽을 정벌하게하였다.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가 陳橋驛에 이르자, 諸將들이 옹위하고핍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하니, 仁和門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가 公署로 돌아가니, 재상 [https://zh.wikipedia.org/wiki/%E8%8C%83%E8%B4%A8##范質] 등이 崇元殿에 나와 文武百官을 불러 晡時(申時)에 이르자 반열을 정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晡는 申時(오후 4시 전후)를 이른다.】</font>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9F%93%E5%85%A8%E8%AA%A8##恭帝]가 大內에서 다음과 같은 制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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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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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司牧(군주)을 세웠다. [https://zh.wikipedia.org/wiki/%E5%B0%A7##堯]임금과 [https://zh.wikipedia.org/wiki/%E8%88%9C##舜]임금은 공변되어 禪位하였고 三王은 때를 틈타 혁명하였으니, 그 극치는 똑같다. 나 末小子는<font color="#0054FF" size="2">【末은 미약함이다.】</font> 국가가 편안하지 못할 때를 만나서<font color="#0054FF" size="2">【造는 이룸이다.】</font> 人心이 이미 떠나가고 天命이 딴 사람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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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 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https://zh.wikipedia.org/wiki/%E9%9F%A6%E4%BF%9D%E8%A1%A1##趙某]는 上聖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神武한 지략이 있어서 우리 [https://zh.wikipedia.org/wiki/%E9%9F%A6%E7%9A%87%E5%90%8E##高祖]를 보좌하여 皇天을 감동시키고 [https://zh.wikipedia.org/wiki/%E9%A6%AC%E5%B8%8C%E5%BB%A3##世宗]을 섬겨 큰 정사를 총괄함에 공적이 남아있으며,<font color="#0054FF" size="2">【《書經》〈舜典〉에 “[https://zh.wikipedia.org/wiki/%E5%B0%A7##堯]임금이 [https://zh.wikipedia.org/wiki/%E8%88%9C##舜]임금을 받아들여 萬機의 정사를 기록하게 했다.”라고 보인다.】</font> 동쪽 나라를 정벌하면 서쪽 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뒤에 정벌하는 것을 원망하여 그 공적이 성대하니,<font color="#0054FF" size="2">【懋는 아름다움이요, 또 茂로도 통용하여 쓰니, 성대함이다.】</font> 천지의 귀신은 덕이 있는 자에게 흠향하고 백성들의 謳歌하고 訟事함은 지극히 인자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는 하늘의 뜻에 부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https://zh.wikipedia.org/wiki/%E5%B0%A7##堯]임금이 [https://zh.wikipedia.org/wiki/%E8%88%9C##舜]임금에게 禪讓한 것을 본받으니, 나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이 홀가분하다. 나는 손님이 될 것이니, 아! 공경하라.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 - [https://zh.wikipedia.org/wiki/%E9%99%B6%E7%A9%80##陶穀]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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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徽使의 인도로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가 龍墀에 나아가 명령을 다 들은 다음 재상들이 宋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8%B5%B5%E5%8C%A1%E8%83%A4##太祖]를 부축하여 殿에 오르게 하였다. 東序를 통해 올라가서 御服을 입고 자리에 오르니, 여러 신하들이 조회하고 축하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周나라 顯德 7년을 고쳐 建隆 元年이라 하고 국호를 大宋이라 하니, 정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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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太祖]]<font color="#0054FF" size="2">【[[郭威]]라 】</font>負震主之威하고 挾不賞之功하야 措身無所하야 乘危而發<font color="#0054FF" size="2">【見上庚戌年하니라 】</font>하야 雖履天下之籍이나 而室家先覆<font color="#0054FF" size="2">【漢[[隱帝]][[太祖]]擧兵渡河하고 乃誅[[太祖]]家屬于京師하야 嬰孺無免者하니라 】</font>矣라 [[世祖]]는 以異姓之親<font color="#0054FF" size="2">【[[世宗]]은 名[[榮]]이니 [[太祖]][[柴皇后]]兄[[守禮]]之子라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font>으로 入承大統에 知近世之弊起於威令不行하야 下陵上替라 故로 高平之役에 首誅[[樊]], [[]]<font color="#0054FF" size="2">【[[]], [[]]는 見上甲寅年이라 】</font>하야 以振軍法하야 遂能變弱爲强하고 因敗爲功하야 乘勝逐北하야 至于太原이라 歸而簡師習戰하야 幷心進取하니 於是에 南割江淮하고 西克秦鳳하고 北開關南하야 攻無堅城하고 戰無彊陣이라 又以枹鼓之隙에 治律曆, 明典禮하고 審法令, 修政事하고 收賢才, 養百姓하니 可謂知治安之本矣라 大功未成에 中道而夭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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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太祖]]始以[[黃巢]]降將으로 秉旄宣武<font color="#0054FF" size="2">[[僖宗]]이 以[[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font>하고 逞其詐力하야 蠶食諸夏하야 地廣兵彊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均王]]은 膏粱之子로 材不過人이어늘 棄[[敬翔]], [[王彦章]]하고 而用[[趙巖]], [[張歸霸]]하야 以與[[莊宗]]爲敵하니 能無亡乎아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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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恭帝]]以區區孺子로 纂承大統하야 不足以當皇天之眷命이라 然이나 眞人德業日隆하야 已爲天下所歸戴면 則其重負를 安得而不釋乎아 昔聞諸先儒說호니 五代之君이 更十有二에 [[周世宗]]爲上이요 [[唐明宗]]次之요 餘無足稱焉이라하니라 歷考五代之世컨대 正如中夜晦冥하니 孤山窮谷之間에 鼯鼠鴟鴞와 狐狸鬼魅가 何物不有리오 故로 有以盜賊而君天下者하니 [[朱梁]]이 是也요 有以夷人而君天下者하니 後唐, 晉, 漢諸君이 是也요 有以黥卒而君天下者하니 [[周郭威]] 是也요 有以丐養之子而君天下者하니 [[唐明宗]], [[潞王]], [[周世宗]]이 是也라 其變之大者는 則同姓之親은 斃於刀鋸而不恤하고 盜賊夷人之裔는 則養爲己子하야 使紹大統而不顧하며 中國之君은 己之所嘗北面而委質者어늘 則叛逆簒弑而忍爲하고 夷狄之主는 中國所當拒絶者어늘 則稱父稱臣而不恥하야 首足倒懸하고 冠屨逆置라 自書契以來로 其禍敗之慘과 滅亡之速이 未有甚於斯時者也하니 人生斯世는 何其不幸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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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A6%AC%E5%B8%8C%E7%AF%84##太祖(郭威)]는<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A6%AC%E5%B8%8C%E8%90%BC##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9%A6%AC%E5%B8%8C%E8%90%BC##郭威]이다.】</font> 군주를 두렵게 할 만한 위엄을 가지고 상 줄 수 없는 큰 공을 지녀 몸 둘 곳이 없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하여<font color="#0054FF" size="2">【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한 것은 앞의 庚戌年(950)에 보인다.】</font> 비록 天子의 지위에 올랐으나 室家가 먼저 전복되었다.<font color="#0054FF" size="2">【漢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隱帝(劉承祐)]는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太祖(郭威)]가 군대를 일으켜 강을 건너온다는 말을 듣고, 京師에서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太祖]의 家屬을 죽여 갓난아이도 화를 면한 자가 없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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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祖(朱溫)]는 처음에 [ 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font color="#0054FF" size="2">【[ 僖宗][ 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font>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https://zh.wikipedia.org/wiki/%E6%95%AC%E7%BF%94 敬翔][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5%BD%A6%E7%AB%A0 王彦章]을 버리고 [ 趙巖]과 [ 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 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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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世祖]는 異姓의 친척으로<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世宗]은 이름이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榮]이니,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太祖][https://zh.wikipedia.org/wiki/%E8%81%96%E7%A9%86%E7%9A%87%E5%90%8E##柴皇后]의 오라비인 [https://zh.wikipedia.org/wiki/%E6%9F%B4%E5%AE%88%E7%A6%AE##柴守禮]의 아들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太祖]가 後嗣가 없어 그를 길러 아들로 삼았다.】</font> 들어와서 大統을 이음에 근세의 병폐가 군주의 위엄과 명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되어 아랫사람이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高平의 전쟁에 첫 번째로 [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何徽]를<font color="#0054FF" size="2">【[https://zh.wikipedia.org/wiki/%E6%A8%8A%E7%88%B1%E8%83%BD##樊愛能]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何徽]의 일은 앞의 甲寅年(954)에 보인다.】</font> 주벌하여 군법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함을 바꾸어 강하게 만들고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삼아서, 승세를 타고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太原에 이르렀다. 돌아와 군사들을 선발해서 전투하는 방법을 익히게 하여 進取하는 데에 온 마음을 쏟으니, 이에 남쪽으로 江淮를 할양받고 서쪽으로 秦州와 鳳翔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關南을 개척하여 공격하면 견고한 성이 없고 싸우면 강한 적이 없었다. 또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 틈에 律曆을 다스리고 典禮를 밝히며 법령을 살피고 정사를 닦으며 어진 이와 재능이 있는 자를 거두어 쓰고 백성을 길렀으니,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큰 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태평한 기업을 하늘이 장차 聖人(趙匡胤)에게 열어서 주려고 한 것이니, 사람의 지모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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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史官의 論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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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恭帝]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로 大統을 이어받아서 皇天의 돌아보는 天命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眞人(宋 太祖)의 德業이 날로 높아져서 이미 천하 사람들이 귀의하고 추대하는 바가 되었으니, 그 무거운 짐(帝位)을 어찌 벗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先儒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五代時代의 군주가 12명인데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世宗]이 가장 으뜸이고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明宗]이 그 다음이며 나머지는 칭찬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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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의 세상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바로 한밤중처럼 깜깜하니, 외로운 산과 깊은 골짜기에 날다람쥐와 올빼미, 솔개와 여우, 살쾡이와 도깨비 같은 것들이 어떤 나쁜 물건인들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도둑으로서 天下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朱全忠]의 梁나라가 이것이요, 오랑캐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後唐과 晉‧漢의 여러 군주가 이것이요, 文身한 병졸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郭威]가 이것이요, 데려다 기른 자식으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唐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明宗]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潞王], 周나라 [https://zh.wikipedia.org/wiki/%E9%A6%AE%E9%81%93##世宗]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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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고 중에 가장 큰 것은, 同姓의 친척이 칼과 톱에 형벌을 당하여 죽어도 걱정하지 않고, 도적과 오랑캐 자식을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아 大統을 잇게 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으며, 中國의 군주는 자신이 일찍이 북향하여 폐백을 바치고 섬겼던 자인데도 叛逆과 찬탈과 시해를 자행하였고, 夷狄의 군주는 中國에서 마땅히 거절해야 할 자인데도 아버지라고 칭하고 신하라고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머리와 발이 거꾸로 달리고 冠과 신발이 거꾸로 놓였다. 文字가 생긴 이래로 禍敗의 참혹함과 멸망의 신속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았으니, 이때에 태어난 사람은 어쩌면 그리도 불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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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後周는 三主에 共十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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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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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周는 세 임금에 모두 1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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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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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6일 (금) 00:49 기준 최신판

五代紀

後梁紀

太祖皇帝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五代紀※

※ 按梁, 唐, 晉, 漢, 周가 舊各有一代之史러니 本朝歐陽文忠公이 始刪爲五代史하니 司馬溫公所修資治通鑑이 雖取歐公一二論說이나 而所援引事는 多是舊史니 其言辭詳略이 與歐陽公五代史로 多有同異하니라

太祖皇帝※ 在位七年이요 壽六十一이라

※ 名은 이요 姓은 朱氏니 初名이라 從黃巢爲盜러니 背降于唐하니 僖宗이 賜名全忠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니라 昭宗朝에 進封梁王하야 挾天子以令天下라가 遂移唐祚하니라

五代紀※

살펴보건대 梁‧唐‧晉‧漢‧周는 옛날에 각각 한 왕조의 역사책이 있었는데, 本朝(宋나라)의 歐陽文忠公(歐陽脩)이 처음으로 산삭하여 《五代史》를 만들었다. 司馬溫公이 편수한 《資治通鑑》은 비록 歐陽公의 한두 가지 논설을 취하였으나 인용한 일이 대부분 옛 역사이니, 言辭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歐陽公의 《五代史》와 많은 차이가 있다.

後梁紀

[ 太祖皇帝]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61세이다.

[ 太祖皇帝]는 이름이 [ 晃]이고 성이 [ 朱氏]이니, 처음 이름은 [ 溫]이다. [ 黃巢]를 따라 도적이 되었는데, [ 黃巢]를 배반하고唐나라에 항복하니, [ 僖宗]이 [ 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고宣武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昭宗 때에 승진하여[ 梁王]에 봉해져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침내 唐나라 국통을 옮겨갔다.

[丁卯]唐天祐四年

[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 是歲에 唐亡이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정묘(907)唐나라 天祐 4년 - 4월 이후는 梁나라 [ 太祖皇帝][ 朱晃]의 開平 元年이고, 西川은 唐나라 天復 7년을 칭하였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였다. 梁‧晉‧岐‧淮南‧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福建‧嶺南 등 모두 다섯 鎭이다.-

春三月에 唐昭宣帝降御札하야 禪位于한대 梁王이 更名【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梁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하다

봄 3월에 唐나라 昭宣帝가 御札을 내려梁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禪讓하자, [ 梁王]이 이름을 [ 晃]으로 고치고【更은 平聲(고침)이고, 晃은 胡廣反(황)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梁이라 하고昭宣帝를 받들어濟陰王으로 삼았다.昭宣帝를 曹州로 옮겨 圍籬安置하고 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

○ 是時에 惟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李克用이요 鳳翔은 李茂貞이요 淮南은 王偓이라】이 稱天祐하고 西川王建이라 】이 稱天復【天祐, 天復은 竝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昭宣帝는 未有年號하니라 】年號하고 餘皆禀梁正朔하야 稱臣奉貢이러라

이때에 오직 河東, 鳳翔, 淮南만이【[頭註] 河東, 鳳翔, 淮南:河東은 [ 李克用]이고, 鳳翔은 李茂貞이고, 淮南은 [ 王偓]이다.】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西川은【西川은 [ 王建]이다.】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天祐와 天復은 모두 昭宗의 연호이니, 天復이 먼저이고 天祐가 뒤이다. 昭宣帝는 年號가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梁나라의 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蜀王이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이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이 封爲晉王이라 後에 其子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라 蜀王王建이니 唐昭宗이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蜀王(王建)]이 [ 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 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 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 李克用]이 [ 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唐나라 昭宗이 [ 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國號를 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 莊宗]이다. [ 蜀王]은 [ 王建]이니, 唐나라 昭宗이 [ 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後唐의 [ 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 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及聞唐亡이로되 以兵羸地蹙이라하야 不敢稱帝하다 〈岐王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이요 名은 文通이라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에 封岐王하고 唐莊宗이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岐王(李茂貞)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紀律이 없었다. 唐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岐王李茂貞이 鳳翔을 점거하니, 本姓은 이고 이름은 文通이다. [ 僖宗] 때에 공을 세워 李茂貞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昭宗 때에 岐王에 봉해졌으며, 後唐의 [ 莊宗]이 秦王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後唐[ 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梁이 以武安節度使馬殷으로 爲楚王하다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梁나라가 武安節度使[ 馬殷]을 [ 楚王]으로 삼았다. - [ 馬殷]이 潭州를 점거하여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後周[ 太祖] 때에 이르러 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以吳王로 爲吳越王하다 〈錢鏐據杭州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吳王錢鏐吳越王으로 삼았다. - 錢鏐가 杭州를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淸海節度使劉隱으로 爲南海王하다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淸海節度使劉隱南海王으로 삼았다. - 劉隱이 廣州를 점거하여 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國號를 漢이라고 고쳤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以威武節度使王審知로 爲閩王하다 〈黃巢亂에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以權知荊南留後高季昌으로 爲節度使하다 〈據江陵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威武節度使王審知閩王으로 삼았다. - [ 黃巢]의 난리에 王審知가 福州를 점거하여閩中과 嶺南의 다섯 州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王延政이 建州에 있으면서殷이라고 이름하였는데, 後晉의 [ 齊王] 때에 南唐이 멸망시켰다.- 權知荊南留後[ 高季昌]을 節度使로 삼았다.- [ 高季昌]이 江陵을 점거하였는데,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9월에 [ 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국호를 大蜀이라 하였다.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에 更築重城하야 內以防奔突하고 外以拒援兵하고 謂之夾寨塹【寨는 本作砦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而守之하다

梁나라가 保平節度使康懷貞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潞州를 공격하게하니, 晉나라 昭義節度使李嗣昭가 성문을 닫고항거하며지켰는데, 康懷貞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보름이 지나도록함락하지못하였다. 이에 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夾寨塹이라 이르며【寨는 본래 砦로 쓰니, 목책이다. 塹(참호)은 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지켰다.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

○ 契丹 〈耶律阿保機始建國元年이라〉

契丹 - 耶律阿保機가 처음으로 건국한 元年이다. -

[戊辰]

[戊辰]〈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五年하고 梁開平二年이라 ○ 蜀高祖王建武成元年이라 ○ 是歲에 西川稱蜀하니 凡五國, 五鎭이라〉

무진(908)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2년이다. ○ 蜀나라 [ 高祖][ 王建]의 武成 元年이다. ○ 이해에 西川이 蜀을 칭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正月에 晉王克用이 薨하니 其子存勖이 嗣爲晉王하다 晉王이 與諸將謀曰 上黨, 潞州는 河東之藩蔽니 無上黨이면 是無河東也라 且朱溫所憚者는 獨先王耳러니 聞吾新立하고 以爲童子未閑軍旅라하야 必有驕怠之心하리니 若簡精兵하야 倍道趣(趨)之하야 出其不意하면 破之必矣라 取威定霸在此一擧하니 不可失也라하다 晉王이 大閱士卒하야 帥周德威【都指揮使라 】等하고 發晉陽하야 進兵直抵夾寨하야 塡塹燒寨하고 鼓譟而入하니 梁兵이 大潰南走라 失亡將校士卒이 以萬計요 委棄資糧器械 山積이러라 梁主聞夾寨不守하고 大驚이러니 旣而요 歎曰 生子를 當如李亞子存勖小名이라 】克用이 爲不亡矣로다 至如吾兒하야는 豚犬耳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克用이 雖沙陀微種이나 奄有河東하야 寇之平에 功爲第一이어늘 上源之變을 訴于朝廷而不獲伸하고 遂與賊梁相攻하야 積年不解라 然이나 安於爵列하야 爲唐純臣하야 每有除吏에 恥行墨勅하야 必表聞朝廷이라 觀其答蜀主書컨대 曰 誓此一生에 靡敢失節이라하니 此其忠義 上通於天이니 賢於一時方伯이 遠矣라 故로 先儒稱其得人臣之體하야 述其忠義功烈하야 爲唐末第一流는 蓋以此也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喪不二事라 故로 春秋於背喪而卽戎者에 皆深譏之로되 惟其門庭之寇는 存亡繫焉일새 然後에 從權制而無避하니 此費誓所以得列於典謨命誥之後也라 若李存勖夾寨之戰을 君子深有取者는 與是類耳라 蓋夾寨는 距晉陽不百里하니 可謂危急之秋也라 使存勖이 於是時에 執哀戚之常情하고 忽國家之大計하야 上黨淪陷이면 則晉陽不存하리니 又豈所以爲孝乎아 是以로 審緩急하고 量輕重하야 出奇制勝하야 以走梁師然後에 霸基復安이라 君子美之하니 垂訓이 大矣로다

정월에 [ 晉王][ 李克用]이 죽으니, 그의 아들[ 存勖]이 뒤를 이어 [ 晉王]이 되었다. [ 晉王]이 여러 장수들과 다음과 같이 모의하였다.

“上黨과 潞州는 河東의 울타리이니, 上黨이 없으면 河東도 없게 될 것이다. 또 [ 朱溫(朱晃)]이 꺼리는 것은 다만 先王(李克用)뿐인데, 내가 새로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동자가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교만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만약 정예병을 선발하여 행군 속도를 배가해서 달려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나오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엄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擧事에 달려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晉王]이 사졸들을 크게 사열하여[ 周德威]【[ 周德威]는 都指揮使이다.】 등을 거느리고晉陽을 출발해서진군하여 곧바로 夾寨에 이르러 참호를 메우고 城寨를 불태우며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도망하고 사망한 將校와 士卒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고, 물자와 식량과 병기를 버리고 간 것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 梁主(朱溫)]는 夾寨가 지켜지지 못했단 말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자식을 낳으려면 마땅히 [ 李亞子(李存勖)]와 같아야 하니,【[ 李亞子]는 [ 李存勖]의 어렸을 적 이름이다.】[ 李克用]이 아직 죽지 않았도다. 내 자식으로 말하면 돼지나 개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李克用]은 비록 沙陀의 미천한 종족이었으나 하루아침에 河東 지방을 소유하여 도적인 [ 黃巢]를 평정함에 功이 제일이었는데, 上源驛의 변고를 조정에 하소연하였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는 마침내 적국인 梁나라와 서로 공격하여 여러 해 동안 화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하의 爵列(爵位)을 편안히 여겨 당나라에 忠純한 신하가 되어 매번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墨勅을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반드시 表文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가 [ 蜀主]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건대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忠義가 위로 하늘에 통한 것이니, 당시의 方伯들보다 월등하게 낫다. 그러므로 先儒들이 人臣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여 그 忠義와 功烈을 기술하여 唐나라 말기의 第一流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史略 史評][ 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喪中에는 喪事 이외의 다른 일을 하지 않으므로 《春秋》에서 喪事를 저버리고 전쟁에 나간 자들을 모두 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門庭 안에 있는 도둑은 국가의 存亡이 달려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權制(權道)를 따르고 피함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書經》의 〈費誓〉가 典‧謨‧命‧誥의 뒤에 나열된 이유이다. [ 李存勖]의 夾寨의 전투 같은 것을 君子가 깊이 인정하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이다. 夾寨는 晉陽과 거리가 100리가 못 되었으니,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라고 이를 만하였다. 만약 [ 李存勖]이 이때에 喪을 슬퍼하는 常情을 고집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소홀히 하여 上黨이 함락당했다면 晉陽이 보존되지 못하였을 것이니, 또 어찌 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緩急을 살피고 輕重을 헤아려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승리함으로써 梁나라 군대를 敗走시킨 뒤에야 霸業의 기반이 다시 편안해졌다. 君子가 이것을 아름답게 여겼으니, 후세에 훈계를 남김이 크다.”

晉王이 歸晉陽하야 休兵行賞하고 命州縣하야 擧賢才, 黜貪殘하고 寬租賦, 撫孤窮하고 伸寃濫, 禁姦盜하니 境內大治러라

[ 晉王]이 晉陽으로 돌아와서군대를 휴식시키고 賞을 내리며 州縣에 명해서 어진 이와 인재를 천거하고 탐욕스러운 자와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내치며,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경감시키고 고아와 곤궁한 자들을 어루만지며, 억울한 자들을 풀어주고 간사한 자와 도둑을 금지하니,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 淮南張顥【左牙指揮使라 】弑弘農威王楊偓諡也라 】하고 立其弟隆演하야 爲留後徐溫으로 弑이러니 復攻하야 殺之하니라 】하다 〈楊行密이 據淮南이러니 其子이 嗣爲弘農郡王하고 國號吳라 後爲徐知誥所簒하야 遂爲南唐하니라〉

淮南의 [ 張顥]가【[ 張顥]는 左牙指揮使이다.】弘農威王(楊偓)을 시해하고楊偓의 시호이다.】 그 아우楊隆演을 세워留後로 삼았다.【[ 張顥]가 徐溫과 함께 楊偓을 시해하였는데, 徐溫이 다시 [ 張顥]를 공격하여죽였다.】 - 楊行密이 淮南을 점거하였는데, 그 아들이 뒤를 이어 弘農郡王이 되고 국호를 吳라 하였다. 뒤에 徐知誥에게 찬탈당하여 마침내 南唐이 되었다.-

○ 契丹 〈耶律阿保機改名이라 二年이라〉

契丹 - 耶律阿保機가 이름을 으로 고쳤다. 2년이다. -

[己巳]

[己巳]〈晉, 岐, 淮南은 稱唐天祐六年하고 梁開平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기사(909) - 晉‧岐‧淮南은 唐나라 天祐 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開平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

梁主遷都洛陽하다

[ 梁主]가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辛未]

[辛未]〈晉, 岐, 吳는 稱唐天祐八年하고 梁乾化元年이라 ○ 蜀永平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신미(911)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8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元年이다. ○ 蜀나라는 永平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三月에 梁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卒하고 其弟이 襲位하다

3월에 梁나라 淸海節度使南平襄王劉隱이 죽고 그의 아우劉巖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 八月에 燕王守光이 卽皇帝位하야 〈劉仁恭之子也니 據幽州하니라〉國號를 大燕이라하다

8월에 燕王劉守光이 황제에 즉위하여 - 燕王劉守光劉仁恭의 아들이니, 幽州를 점거하였다. - 국호를 大燕이라 하였다.

晉王이 聞燕王守光稱帝하고 大笑曰 俟彼十年하야 吾當問其鼎矣【左傳에 楚子伐陸渾之戎하야 遂至于洛하고 觀兵于周郊하니 定王이 使王孫滿으로 勞[[楚(王)[子]]]어늘 [[楚(王)[子]]]가 問鼎大小輕重한대 對曰 在德이요 不在鼎이라 有昏德하야 鼎遷于殷하야 載祀六百하고 殷暴虐하야 鼎遷于周하니 德之休明이면 雖小必重이요 其姦回昏亂이면 雖大必輕이라 昔에 成王이 定鼎于郟鄏에 卜世三十이요 卜年七百이니 天所命也라 周德雖衰나 天命未改하니 鼎之輕重을 未可問也라하니라 】리라

[ 晉王]은 燕王劉守光이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10년이 되기를 기다려 내 마땅히 솥의 輕重을 물을 것이다.(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하였다.【《春秋左傳》 宣公 3년에 [ 楚子]가 陸渾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마침내 洛陽에 이르러 周나라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하니, 周나라 [ 定王]이 王孫滿으로 하여금 [ 楚子]를 위로하게 하였는데, [ 楚子]가 천자를 상징하는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王孫滿이 대답하기를 “帝王의 지위는 德에 달려있지 九鼎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桀王이 어두운 덕이 있어 九鼎이 殷나라로 옮겨 가서 600년을 지냈고, 殷나라 紂王이 포악하여 九鼎이 周나라로 옮겨 갔으니,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솥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무겁고,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하면 솥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옛날 [ 成王]이 郟鄏에 도읍을 정하고 九鼎을 안치할 적에 周나라의 代數를 점치니 30대였고 年數를 점치니 700년이었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것입니다. 周나라 덕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九鼎의 무게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契丹主 五年

契丹主 〈五年이라〉

契丹主 - 5년이다. -

[壬申]

[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임신(912)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9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梁主疾增甚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에 不意太原餘孽【目晉王也라 】이 更昌熾如此하니 吾觀其志不小라 天復奪我年하니 我死면 諸兒는 非彼敵也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哽咽하야 絶而復蘇하니라

[ 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餘孽은 《資治通鑑綱目》에 [ 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 梁高季昌【荊南節度使라 梁錫爵渤海王이러니 後改名季興하니라 唐莊宗이 封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이 潛有據荊南之志하야 乃奏築江陵外郭하야 增廣之하다

梁나라 [ 高季昌]이【[ 高季昌]은 荊南節度使이다. 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 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 季興]으로 개명하였다. 唐나라 [ 莊宗(李存勖)]이 [ 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代를 전하여 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江陵의 外城을 수축할 것을 上奏하여 더 넓혔다.

○ 梁郢王友珪【梁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梁主愛假子友文之妻하야 將立友文爲嗣라가 遂爲友珪所弑하니라 】의 僕夫馮廷諤이 弑梁主어늘 友珪卽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朱溫이 爲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에 刑虐不悛하고 戕害無辜하며 不念聚麀之恥하야 釀成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梁나라 [ 郢王][ 朱友珪]의【[ 郢王][ 朱友珪]는 梁나라 [ 太祖]의 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亳州營의 娼妓였다. [ 梁主]가 養子인 [ 朱友文]의 妻를 사랑하여 장차 [ 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 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마부인 [ 馮廷諤]이 [ 梁主]를 시해하자, [ 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 朱溫]이 [ 黃巢]의 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同華의 節鎭(節度使의 藩鎭)을 받았고, 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宣武 등의 중요한 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唐나라의 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 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 朱友珪]의 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

契丹主 耶律億六年

○ 契丹主 〈耶律億六年이라 其弟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不治하니라〉

契丹主 - 耶律億의 6년이다. 그 아우耶律剌葛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않았다.-

均王
均王 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均王※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六이라

※ 初名은 友貞이러니 更名하니 朱溫第三子라 諡曰末帝

[ 均王]은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6세이다.

[ 均王]은 처음 이름이 [ 友貞]이었는데 이름을 [ 瑱]으로 고쳤으니, [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시호를 [ 末帝]라 하였다.

[癸酉]

[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梁主乾化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계유(913)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0년을 칭하였고, [ 梁主][ 朱瑱]은 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趙巖【駙馬都尉이니 尙太祖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이어늘 均王友貞이 密與之謀誅友珪할새 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令公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陰與袁象先【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하다 庚寅旦에 袁象先이 帥禁兵數千人하고 突入宮中하니 友珪聞變하고 與妻張氏와 及馮廷諤으로 趨北垣樓下하야 將踰城이러니 自度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하고 次殺己하니 廷諤亦自殺이라 象先, 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乃卽帝位於大梁하야 更名하고 又更名하다

梁나라 [ 趙巖]이【[ 趙巖]은 駙馬都尉이니, [ 太祖]의 딸인 [ 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使命을 받들고大梁에 이르자, [ 均王][ 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 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 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招討使楊令公(楊師厚)에게楊師厚(楊令公)가 北面道招討使가 되어 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 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 馬愼交]를 보내어魏州로 가서楊師厚를 설득하기를 “[ 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人望이 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王舜賢]을 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袁象先袁象先은 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 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 袁敬初]는 [ 太祖]의 누이인 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도모하게하였다. 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袁象先이 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 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 張氏] 및 [ 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 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하였으며, [ 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袁象先과 [ 趙巖]이 傳國寶(옥새)를 가지고大梁에 가서[ 均王]을 맞이하자, [ 均王]이 말하기를 “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 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 瑱]으로 고쳤다.

○ 晉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이 命掌書記王緘하야 草露布【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春秋佐〈助〉期曰 武露布, 文露沈이라 宋均云 甘露見其國에 布散者는 人尙武하고 文采者는 則甘露(運)[凝]重이라하니라 】한대 이 不知故事하야 書之於布하고 遣人曳之하니라

晉나라 [ 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燕山 뒤에 있는 여덟 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幽州를 핍박하였다. [ 晉王]이 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점령하고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도망갔다. [ 晉王]이 幽州에 들어가서 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 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 晉王]이 掌書記[ 王緘]에게 명하여 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文心雕龍》에 이르기를 “露布는 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初學記》에 이르기를 “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宋均이 이르기를 ‘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 王緘]이 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 契丹主弟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다

契丹主의 아우耶律剌葛 등이 배반하자 그 도당을 주벌하고풀어주었다.

[乙亥]

[乙亥]〈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二年하고 梁貞明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을해(915)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2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二月에 梁魏博軍이 亂하야 劫節度使賀德倫하고 求援於晉이어늘 晉王이 引兵하야 進據臨淸하야 與劉鄩夾河爲營하다

2월에 梁나라 魏博軍이 난리를 일으켜서節度使[ 賀德倫]을 위협하고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 晉王]이 군대를 이끌고전진하여臨淸을 점거해서梁나라 장수 劉鄩과 함께 黃河를 끼고대치하여 진영을 세웠다.

梁主疎忌宗室하고 專任趙巖德妃【帝之母也 】兄弟張漢鼎, 漢傑과 從兄弟漢倫, 漢融하야 咸居近職하야 參預謀議하다 等이 依勢弄權하야 賣官鬻獄하고 離間舊將相하니 敬翔, 李振이 雖爲執政이나 所言이 多不用이라 이 每稱疾不預事하야 以避, 之族하니 政事日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 梁主]가 종실을 멀리하고 꺼리며 오로지 정권을 [ 趙巖] 및 德妃德妃는 皇帝의 어머니이다.】형제인 [ 張漢鼎]‧[ 張漢傑]과 종형제인 [ 張漢倫]‧[ 張漢融]에게 맡겨서 모두 가까운 요직에 있게 하여 모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 趙巖] 등은 세력을 믿고 권력을 농간하여 재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으며 옛 장수와 정승들을 이간질하였다. 敬翔李振은 비록 執政大臣이 되었으나 말한 것이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李振은 매번 병을 핑계대고 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여 [ 趙巖]과 [ 張氏] 종족을 피하니, 정사가 날로 문란해져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丙子]

[丙子]〈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三年하고 梁貞明二年이라 ○ 蜀通正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五鎭이라〉

병자(916)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3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2년이다. ○ 蜀나라는 通正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鎭이다.-

春二月에 梁主屢趣(促)劉鄩하야 與晉王戰이러니 兵이 大敗라 王檀【匡國節度使라 】이 密疏하야 請發關西兵하야 襲晉陽한대 梁主從之하야 兵至晉陽하야 夜急攻之하니 城幾陷者數四라 昭義節度使李嗣昭 遣牙將石君立하야 救之하니 梁兵死傷者什二三이라 王檀이 引兵大掠而還하니 梁主劉鄩敗하고 又聞王檀無功하고 歎曰 吾事去矣라하니라

봄 2월에 [ 梁主]가 여러 번 劉鄩을 재촉하여[ 晉王]과 싸우게하였는데, 劉鄩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 王檀]이【[ 王檀]은 匡國節度使이다.】 은밀히 상소하여 關西의 군대를 징발해서晉陽을 습격할 것을 청하자, [ 梁主]가 그의 말을 따라 군대가 晉陽에 이르러서 밤중에 맹렬히 공격하니, 晉陽城이 거의 함락될 뻔한 것이 서너 번이었다. 昭義節度使李嗣昭가 牙將[ 石君立]을 보내어구원하게하니, 梁나라 군사들 중에 죽고 부상한 자가 10분에 2, 3이었다. [ 王檀]이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크게 노략질하고돌아왔다.

[ 梁主]는 劉鄩이 패했다는 말을 들었고 또 [ 王檀]도 공이 없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탄하기를 “내 일이 글렀다.” 하였다.

○ 契丹主改元神冊하다

契丹主가 神冊으로 改元하였다.

[戊寅]

[戊寅]〈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五年하고 梁貞明四年이라 ○ 蜀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무인(918) - 晉‧岐‧吳는 唐나라 天祐 15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4년이다. ○ 蜀나라는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春에 晉兵이 侵掠至鄆, 濮而還이어늘 梁敬翔이 上疏曰 國家連年喪師에 疆域日蹙이라 陛下居深宮之中하야 所與計事者는 皆左右近習이니 豈能量敵國之勝負乎잇가 先帝之時에 奄有河北하고 親御豪傑之將호되 猶不得志【不得志는 謂不得志于晉이라 】어시늘 今敵至鄆州로되 陛下不能留意하시니 必若乏才인댄 乞於邊陲自效하노이다 疏奏에 , 之徒 言怨望이라하니 梁主遂不用하다

봄에 晉나라 군대가 침략하여鄆州와 濮州까지 이르렀다가돌아가자, 梁나라 敬翔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나라가 여러 해를 계속해서 전쟁에서 패하여 疆域(領土)이 날로 축소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깊은 궁중에 거처하시어 함께 정사를 계획하는 자들이 모두 좌우의 측근들이니, 어찌 적국의 승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先帝 때에 곧바로 河北 지방을 소유하고 호걸스러운 장수를 직접 어거하였으나 오히려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셨는데,【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晉나라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음을 이른다.】 지금 적이 鄆州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 유념하지 않으시니, 폐하께서 만약 국가에 인재가 없다고 하신다면 臣이 변방에서 스스로 충성을 바칠 것을 청합니다.”

상소문을 올린 뒤에 [ 趙巖]과 [ 張漢鼎]의 무리가 “敬翔이 원망한다.”고 말하니, [ 梁主]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 吳徐知誥 爲淮南節度行軍副使하다 〈知誥後簒吳하니 是爲南唐이라〉知誥吳王盡恭하고 接士大夫以謙하며 御衆以寬하고 約身以儉이라 以吳王之命으로 悉蠲天祐十三年以前逋稅【欠負官物과 亡匿不還을 皆謂之逋라하니라 】하고 餘俟豐年하야 乃輸之하고 求賢才, 納規諫하고 除姦猾, 杜請託하니 於是에 士民이 翕然歸心하야 雖宿將悍夫라도 無不悅服이러라 以宋齊丘로 爲謀主하니 由是로 江淮間에 曠土【空曠不耕之土也라 】盡闢하고 桑柘滿野하야 國以富强하니라

吳나라 徐知誥가 淮南節度行軍副使가 되었다. - 徐知誥가 뒤에 吳나라를 찬탈하니,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吳王을 섬김에 공경을 다하고 겸손으로 士大夫를 대하며, 관대함으로 무리들을 다스리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다.

吳王의 명령으로 天祐 13년 이전에 체납된 세금을 모두 면제해주고【관아의 재물을 축낸 것과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숨기고 되돌려주지 않는 것을 모두 逋라고 이른다.】 나머지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바치게 하였으며,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발굴하고 規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제거하고 청탁을 막으니, 이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마음이 돌아와서 비록 老將과 사나운 지아비라도 기뻐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徐知誥宋齊丘를 謀主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江淮 지방의 빈 땅이【曠土는 비워두고 경작하지 않는 농토이다.】 모두 개간되고 뽕나무와 산뽕나무가 들에 가득하여 국가가 부강하게 되었다.

契丹主 〈作孔子廟하고 親謁之하니라〉

契丹主 - 孔子의 사당을 만들고 친히 배알하였다. -

[己卯]

[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 蜀乾德元年이요 吳宣王楊隆演武義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四鎭이라〉

기묘(919) - 晉‧岐는 唐나라 天祐 16년을 칭하였고, 梁나라는 貞明 5년이다. ○ 蜀나라는 乾德 元年이고, 吳나라는 宣王楊隆演의 武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徐溫【少販鹽이러니 及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行密吳王하니라 】이 自以權重而位卑라하야 勸吳王建國稱帝而治러니 吳王이 不許하다 夏에 卽吳國王位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爲大丞相하고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하다

吳나라 徐溫徐溫은 젊었을 적에 소금을 팔았는데, 楊行密이 일어나자 楊行密의 막하에 예속되었다가 마침내 吳나라의 將相이 되었다. 天復 2년(902)에 楊行密吳王에 봉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력은 막중하지만 지위가 낮다고 하여 吳王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여통치할 것을 권하였는데, 吳王(楊隆演)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에 吳王吳國王에 즉위하였다.楊隆演이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天子의 禮를 사용하여 徐溫을 大丞相으로 삼고 楊隆演이 섭행하니, 楊隆演楊行密의 둘째 아들이다.】

蜀主王建이 殂하니 太子이 卽皇帝位하다

[ 蜀主][ 王建]이 죽으니, 太子[ 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晉王이 如魏州하야 發徒數萬하야 廣德勝北城【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하야 大小百餘戰에 互有勝負러라 右射軍使石敬瑭이 與梁人으로 戰于河壖【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이 擊敬瑭하야 斷其馬甲이어늘 橫衝兵馬使【橫衝은 軍都之號也라 】劉知遠이 以所乘馬授之하고 自乘斷甲者하고 徐行爲殿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梁人이 疑有伏하야 不敢迫이라 俱得免하니 敬瑭이 以是親愛之하니라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 晉王]이 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德勝의 북쪽 성을【德勝의 남쪽과 북쪽 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右射軍使[ 石敬瑭]이 梁나라 사람들과 河壖에서【壖은 而緣反(연)이니 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韻書》에 본래 𤲬으로 되어 있고 혹은 堧으로 되어 있으니 訓은 郤이니, 郤은 空閑地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堧은 노는 땅이니, 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梁나라 사람이 [ 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橫衝兵馬使【橫衡은 軍都의 칭호이다.】[ 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 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王氏가 말하였다. “徐는 느림이니, 《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殿은 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 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石敬瑭]과 [ 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沙陀 사람이니, [ 石敬瑭]은 뒤에 晉나라 [ 高祖]가 되었고, [ 劉知遠]은 漢나라 [ 高祖]가 되었다.-

○ 契丹이 城遼陽하다

契丹이 遼陽에 築城하였다.

歷年圖曰 太祖始以黃巢降將으로 秉旄宣武僖宗이 以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하고 逞其詐力하야 蠶食諸夏하야 地廣兵彊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均王은 膏粱之子로 材不過人이어늘 棄敬翔, 王彦章하고 而用趙巖, 張歸霸하야 以與莊宗爲敵하니 能無亡乎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 太祖(朱溫)]는 처음에 [ 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宣武軍의 깃발을 잡고【[ 僖宗]이 [ 朱全忠]을 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 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敬翔王彦章을 버리고 [ 趙巖]과 [ 張歸霸]를 등용하여 後唐의 [ 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後梁은 二主에 共一十七年이라

이상 後梁은 두 군주에 모두 1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