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秦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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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秦紀

始皇帝 下

[庚辰]二十六年

[庚辰]二十六年이라

王賁이 自燕南攻齊하야 猝入臨淄하니 民莫敢格者러라 秦이 使人誘齊王하야 約封以五百里之地한대 齊王이 遂降이어늘 秦이 遷之共【音恭이니 屬河內郡이라 】하야 處之松柏之間이러니 餓而死하니라

26년(경진 B.C.221))

王賁이 燕나라에서 남쪽으로 齊나라를 공격하여 갑자기 도성인 臨淄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秦나라가 사람을 시켜 齊王을 유인하여 500리의 땅을 봉해주겠다고 약속하자, 齊王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秦나라가 그를 共【共은 음이 공이니, 河內郡에 속하였다.】 땅으로 옮겨서 松柏이 자라는 사이에 처하게 하였는데, 굶어 죽었다.

溫公曰 從衡之說이 雖反覆百端이나 然大要合從者는 六國之利也라 昔에 先王이 建萬國하고 親諸侯하야 使之朝聘以相交하고 饗宴以相樂하고 會盟以相結者는 無他라 欲其同心戮力하야 以保家國也라 鄕(曏)使六國이 能以信義相親이런들 則秦雖彊暴나 安得而亡之哉아 夫三晉者는 齊楚之藩蔽요 齊楚者는 三晉之根柢니 形勢相資하고 表裏相依라 故로 以三晉而攻齊楚는 自絶其根柢也요 以齊楚而攻三晉은 自撤其藩蔽也니 安有撤其藩蔽以媚盜曰 盜將愛我而不攻이리오 豈不悖哉아

蘇老泉曰 六國破滅은 非兵不利, 戰不善이요 弊在賂秦하니 賂秦而力虧는 破滅之道也라 思厥先祖父 暴霜露하고 斬荊棘하야 以有尺寸之地어늘 子孫視之不甚惜하야 擧以予人을 如棄草芥하야 今日割五城하고 明日割十城然後에 得一夕安寢하고 起視四境하면 而秦兵又至矣라 然則諸侯之地有限하고 暴秦之欲無厭하니 奉之彌繁에 侵之愈急이라 故로 不戰而强弱勝負已判하야 至於顚覆하니 理固宜然이라 齊人은 未嘗賂秦이로되 終繼五國遷滅은 何哉오 與嬴而不助五國也일새라 五國旣喪이면 齊亦不免矣라 嗚呼라 以賂秦之地로 封天下之謀臣하고 以事秦之心으로 禮天下之奇才하야 幷力西嚮이면 則臣恐秦人食之에 不得下咽也리니 悲夫라 有如此之勢어늘 而爲秦人積威之所劫하야 日削月割하야 以趨於亡하니 爲國者는 無使爲積威之所劫哉인저

蘇東坡曰 秦幷天下는 非有道也요 特巧耳니 非幸也라 然이나 愚以謂巧於取齊而拙於取楚하니 其不敗於楚者는 幸也라하노라 齊秦不兩立하니 秦未嘗須臾忘齊也어늘 而四十餘年不加兵者는 豈其情乎아 齊人不悟하고 與秦合이라 故秦得以取三晉이니 三晉亡이면 齊蓋岌岌矣라 方是時하야 猶有楚與燕也어늘 而齊不救라 故二國亡에 而齊亦虜【生得曰虜요 斬首曰獲也라 】不閱歲하야 如晉取虞虢也하니 可不謂巧乎아 二國旣滅에 齊乃發兵守西界하고 不通秦使하니 嗚呼라 亦晩矣라 秦初遣李信하야 以二十萬人으로 取楚不克하고 乃使王翦으로 以六十萬人攻之하니 蓋空國而戰也라 使齊有中主具臣하야 知亡之無日하고 而掃境以伐秦이런들 以久安之齊로 而入厭兵空虛之秦은 如反掌也라 吾故曰 拙於取楚라하노라 吳爲三軍하야 迭出以肄楚하야 三年而入郢하니 晉之平吳와 隋之平陳이 皆以是物也라 惟苻堅不然하니 使知出此하야 以百倍之衆으로 爲迭出之計런들 雖이라도 不能支어든 而況之之流乎아 以是로 知二秦之一律也니 始皇幸勝而不幸耳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合從과 連衡의 說이 비록 백 가지로 반복하였으나 큰 요점은 合從하는 것이 六國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先王이 萬國을 세우고 諸侯를 친하여 그들로 하여금 朝聘하여 서로 사귀게 하고 宴饗하여 서로 즐겁게 하고 會盟하여 서로 결속을 다지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여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려는 것이었다. 지난번 六國이 信義로써 서로 친하게 지냈더라면 秦나라가 비록 강포하나 어찌 六國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三晉은 齊나라와 楚나라의 울타리이고, 齊나라와 楚나라는 三晉의 뿌리이니, 형세가 서로 도와주고 表裏가 서로 의지하였다. 그러므로 三晉으로서 齊나라와 楚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 그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고, 齊나라와 楚나라로서 三晉을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 그 울타리를 철거하는 것이니, 어찌 울타리를 철거하여 도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장차 우리를 사랑하여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단 말인가. 어찌 사리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蘇老泉(蘇洵)이 말하였다.

“六國이 파멸한 것은 병기가 예리하지 못하고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병폐가 秦나라에 뇌물을 준 데에 있었으니, 秦나라에 뇌물을 주어 힘이 다한 것은 파멸하는 방법이다. 생각해 보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가시나무를 베어서 한 자와 한 치의 땅을 소유하였는데, 자손들은 이것을 보기를 그다지 아까워하지 아니하여 들어서 남에게 주기를 마치 草芥를 버리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 다섯 개의 성을 떼어 주고 다음날 열 개의 성을 떼어 준 뒤에 하루저녁의 편한 잠을 자고는 일어나서 사방의 국경을 보면 秦나라 군대가 또 쳐들어왔다. 그렇다면 제후들의 땅은 한계가 있고 포악한 秦나라의 욕심은 만족함이 없으니, 받들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침략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싸우지 않고도 强弱과 勝負가 이미 판별되어 전복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당연한 이치이다.

齊나라 사람들은 秦나라에 뇌물을 준 적이 없는데 끝내 다섯 나라의 뒤를 이어 옮겨 가고 멸망함은 어째서인가? 嬴秦을 편들고 다섯 나라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 나라가 망하고 나면 齊나라 또한 화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아! 秦나라에 뇌물로 준 땅을 가지고 천하의 謀臣을 봉해주고, 秦나라를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예우해서 힘을 합쳐 서쪽(秦나라)을 향했더라면, 내 생각에는 秦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적에 제대로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했을 듯하니, 슬프다. 이와 같은 형세가 있는데도 예전부터 쌓아온 秦나라 사람의 위세에 눌려서 영토가 날로 깎이고 달로 떼어 가 멸망으로 치달렸으니, 나라를 위하는 자는 위세에 눌리지 말아야 한다.”

蘇東坡(蘇軾)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함은 道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공교로웠기 때문이니, 요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秦나라가 齊나라를 취하는 데는 공교로웠고 楚나라를 취하는 데는 졸렬하였으니, 楚나라에 패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었다. 齊나라와 秦나라는 양립할 수 없었으니, 秦나라가 잠시도 齊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으나 40여 년 동안 침공을 가하지 않은 것은 어찌 그 진정이었겠는가. 그런데 齊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秦나라와 연합하였다. 그러므로 秦나라가 三晉을 점령할 수 있었으니, 三晉이 망하면 齊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이 당시에는 아직 楚나라와 燕나라가 남아 있었으나 齊나라가 이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 나라가 망하자 齊나라 또한 포로가 되어【사로잡는 것을 虜라 하고, 참수하는 것을 獲이라 한다.】 해를 넘기지 못해서 옛날 晉나라가 虞나라와 虢나라를 점령한 것처럼 하였으니, 공교하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나라(楚와 燕)가 이미 멸망하고 난 뒤에 齊나라가 비로소 군대를 내어 서쪽 국경을 지키고 秦나라 使者使者을 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 또한 늦었다. 秦나라가 처음에 李信을 보내어 20만의 병력으로 楚나라를 취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이에 王翦으로 하여금 60만의 병력으로 공격하게 하였으니, 국내에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싸운 것이다. 만일 齊나라에 평범한 군주와 웬만한 신하가 있어서 망할 날이 닥쳐왔다는 것을 알고 경내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秦나라를 쳤더라면 오랫동안 편안한 齊나라로서 오랫동안 전쟁하여 텅 비어 있는 秦나라로 쳐들어가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楚나라를 취하는 데는 졸렬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吳나라는 三軍三軍을 만들어 번갈아 출동하여 楚나라를 수고롭게 해서 3년 만에 도성인 郢 땅으로 쳐들어갔으니, 晉나라가 吳나라를 평정하고 隋나라가 陳나라를 평정할 때에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직 苻堅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만일 苻堅이 이렇게 할 줄을 알아서 백 배의 병력을 가지고 번갈아 출동하는 계책을 냈더라면 비록 韓信白起 같은 名將이라도 지탱할 수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謝玄劉牢之의 무리이겠는가. 이로써 二秦이 똑같은 방법임을 알 수 있으니, 始皇은 요행으로 이겼고 苻堅은 불행하였을 뿐이다.”

王이 初幷天下에 自以爲德兼三皇하고 功過五帝라하야 乃更號曰皇帝皇帝라하고 命爲制, 令爲詔하며 自今以來로 除諡法【史記諡法解에 惟周公, 太公이 開嗣王業하야 建功於牧野러니 終將葬에 乃制諡하야 遂敍諡法하니라 】하야 朕爲始皇帝하노니 後世以計數하야 二世三世로 至于萬世하야 傳之無窮이라하다

[新增]胡氏曰 古之聖人이 應時稱號하니 非帝貶於皇이요 王貶於帝也라 後世에 不知此義하고 遂以皇帝皇帝自居하고 而以王封其臣子하니 失之甚矣로다 王之爲名은 繼天撫世之謂니 曾是而可使臣子稱之乎아 孔子作春秋하사 尊周立號에 係王於天하시니 其禮隆矣라 有天下者는 必法孔子稱天王이요 其列爵은 自公以降이면 則名正言順하야 百世以俟而不惑矣리라

林之奇之爲君은 不自聖而人以爲聖이어늘 秦始皇은 除諡法하고 而謂以子議父, 臣議君이라하니 是는 畏天下之議己也라 天下不以爲聖이어늘 而自以爲德兼三皇하고 功過五帝라하야 乃更號曰皇帝라하니 則是自聖矣라 嗚呼라 若始皇者는 可謂大愚者也로다 其自爲謀는 則欲長生而不死하고 其爲子孫計는 則欲二世三世로 至于萬世하야 傳之無窮이라 昔光武之幸南頓也에 復田租一歲한대 父老願賜復十年이어늘 光武曰 天下는 重器라 常恐不任하야 日復一日이니 安敢遠期十年乎아하니 光武之言이 似若不如始皇者也라 然이나 自以爲遠期十歲로되 而子孫相承하야 至數百年而不替하고 始皇은 雖自以爲萬世之久로되 而其傳이 止於二世而遂亡者는 何哉오 易曰 危者는 安其位者也요 亡者는 保其存者也요 亂者는 有其治者也라하니 蓋以危亡自處면 則天下不可得亡이라 向若安而不思其危하고 存而不思其亡하고 治而不思其亂이면 則亂亡之至也必矣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子議父하고 臣議君而非其禮면 罪不容誅矣어니와 考德行之實하야 而以天誄之면 臣子亦安得而私之哉아 然이나 後世諡法雖存이나 而公道不暢하야 爲臣子者 往往加美諡於君親하야 使死受所不當하야 取世訕笑하니 則又不若不諡之爲愈也니라

[史略 史評]愚按 始皇이 更改古制하야 大虐無道하니 宜其畏天下議己而除諡法也요 其爲子孫計는 則欲萬世無窮이라 然이나 其傳이 止於二世而亡者는 何哉오 梁氏所謂治天下而法先聖이면 猶飢之必食하야 不可一日廢어늘 今也에 絶先聖之道而欲以長繼면 是猶却食而求生也니 豈不難哉아하니 斯言이 得之矣로다

王이 처음으로 천하를 겸병함에 스스로 德은 三皇三皇을 겸하고 功은 五帝보다 더하다 하여 마침내 이름을 고쳐 皇帝라 하고, 命을 制라 하고 令을 詔라 하였으며 “지금부터 이후로는 諡法(시호 짓는 법)을 없애어【≪史記≫ 〈諡法解〉에 “오직 周公과 太公이 王業을 開創하고 이어 牧野에서 공을 세웠는데, 죽어서 장차 장례 하려 할 적에 諡號를 지어 마침내 諡法을 제정하게 되었다.” 하였다.】朕이 始皇帝가 되니, 후세에는 숫자로 계산해서 2世, 3世로 萬世에 이르기까지 무궁토록 전한다.”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옛날에 聖人은 때에 따라 호칭하였으니, 帝가 皇만 못하고 王이 帝만 못한 것은 아니다. 후세에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皇帝라 자처하고는 그 臣子들을 王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王이라는 명칭은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세상을 어루만짐을 이르니, 일찍이 그 뜻이 이러한데 臣子로 하여금 王을 칭하게 할 수 있겠는가. 孔子께서 《春秋》를 지으시면서 周나라를 높여 호칭을 정할 때에 天王天王이라고 하셨으니, 그 禮가 높다. 천하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孔子께서 天王天王이라 칭한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이요, 여러 제후들의 爵位는 公으로부터 내려오면(公‧侯‧伯‧子‧男으로 이어지면) 이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 百代가 지난 뒤에 聖人을 기다려도 의혹함이 없을 것이다.”

林之奇가 말하였다.

, , , , 文王武王이 人君이 되었을 때에는 스스로 聖人이라고 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聖人이라고 하였는데, 秦나라의 始皇은 諡法을 없애며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의논하고(아버지의 행적을 논하여 시호를 짓고) 신하로서 군주를 의논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이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의 행적을 비난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자신더러 聖人이라고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이르기를 ‘德은 三皇三皇을 겸하고 功은 五帝보다 더하다.’ 하여 마침내 칭호를 고쳐 皇帝라고 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聖人이라고 한 것이다. 아! 秦始皇과 같은 자는 크게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자신을 위한 도모는 長生不死하고자 하였고, 자손들을 위한 계책은 二世와 三世로부터 萬世에 이르러서 무궁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옛날 光武帝가 南頓에 갔을 때에 田租를 1년 동안 면제해 주었는데, 父老들이 다시 10년 동안 면제해 줄 것을 원하자, 光武帝가 말하기를 ‘천하는 소중한 기물이라서 나는 항상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날마다 하루하루 연장해 갈 뿐이니, 어찌 감히 멀리 10년을 기약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光武帝의 말씀이 秦始皇만 못한 듯하다. 그러나 光武帝는 스스로 어찌 멀리 10년을 기약하겠느냐고 하였으나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수백 년에 이르도록 침체하지 않았고, 秦始皇은 비록 스스로 만세토록 오래간다고 하였으나 그 전함이 二世에 이르러 마침내 망한 것은 어째서인가? 《周易》〈繫辭傳〉에 이르기를 ‘위태롭게 여김은 지위를 편안히 하는 것이요, 망할까 두려워함은 보존함을 지키는 것이요, 어지러울까 염려함은 다스림을 보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위태롭게 여기고 망할까 염려함으로써 자처하면 천하 사람들이 망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편안하다고 하여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하여 망함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고 하여 어지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혼란과 멸망이 이름은 필연적인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자식이 아버지를 의논(논평)하고 신하가 임금을 의논하되 그 禮가 아니라면 죄가 죽음을 받아도 용서될 수 없거니와, 德과 행실의 실제를 상고하여 天命에 따라 시호를 내린다면 臣子가 또한 어찌 사사로이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에는 시호 짓는 법이 비록 남아 있었으나 공정한 道가 펴지지 못해서 臣子된 자들이 왕왕 아름다운 시호를 군주와 어버이에게 가하여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서는 안될 이름을 받게 해서 세상 사람들의 꾸짖음과 비웃음을 취하고 있으니, 이는 또 시호를 내리지 않는 것이 나음만 못한 것이다.”

[史略 史評]내가 살펴보건대, 秦始皇이 옛 제도를 고쳐서 크게 포악하고 무도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자신을 비판할까 두려워하여 시호 짓는 법을 없앤 것이 당연하고, 자손을 위한 계책은 만대토록 무궁하기를 바랐으나 국가를 전함이 2대에 그치고 멸망한 것은 어째서인가? 梁氏가 이르기를 “천하를 다스리면서 先聖을 본받는 것은 배가 고프면 반드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서 단 하루도 폐할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先聖의 道를 끊어버리고서 장구하게 계승하고자 한다면 이는 음식을 물리치고서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이 말이 맞다.

○ 初에 齊威宣之時에 鄒衍이 論著終始五德之運이러니 及始皇幷天下에 齊人이 奏之어늘 始皇이 采用其說하야 以爲周得火德【鄒衍이 蓋以火流王屋으로 爲周受命之符하고 且色尙赤故也라 胡氏庭芳曰 衍이 但取黃帝土德하야 以黃而推하니 乃一時詭談也라 古之王者 易代改號에 取法五行하야 更旺相生하니 先起於木이라 太昊以木德王하니 木德은 春令故로 易에 稱帝出乎震이라 木生火故로 神農以火德王하고 火生土故로 黃帝以土德王하고 土生金故로 少昊以金德王하고 金生水故로 顓頊以水德王하고 水生木故로 帝嚳以木德王하고 木又生火故로 帝堯火요 帝舜土요 夏金, 商水, 周木이니 木色靑故로 謂周爲蒼姬하니 此五德之終而復始也라 】하니 秦代周에 從所不勝이라하야 爲水德하고 始改年하야 朝賀를 皆自十月朔하고 衣服旌旄節旗【周禮에 日月爲常이요 交龍爲旂요 通帛爲旌[旜]이요 雜帛爲物이요 熊虎爲旗요 鳥隼爲旗[旟]요 龜蛇爲旐요 全羽爲旞요 析羽爲旌이라 旄는 幢也니 以旄牛尾着竿頭라 幢은 纛也니 以犛牛尾爲之하니 如斗라 秦文公時에 梓樹化爲旄牛而猛憨이어늘 使其牛하야 大有功하니 後世像而注之於旗竿之首라 又曰 梓樹化爲牛하니 以騎擊之나 不勝하고 或墮地하야 髻解被髮하니 牛畏入水라 秦因置旗[旄]頭騎하야 作先驅하니라 節은 操也니 謂持節者必盡人臣之節操라 編毛爲之하니 上下相重하야 取象竹節하야 因以爲名하니 長尺三寸이라 漢書[周禮]註에 節은 猶信也니 行者所執之信也라 長八尺이니 以旄牛라하야 爲其旄라 】를 皆尙黑【禮春官司常註에 旌旗之上에 綴旄牛尾於竿首하니 詳見九旗圖라 地官掌節註에 節은 猶信也니 行者所執之信이니 詳見八節圖라 秦以水德屬北方이라 故尙黑이라 】하고 數를 以六爲紀【水終數六이라 故以六寸爲符하고 六尺爲步하니라 】하니라

[新增]尹氏孔子曰 行夏之時라하시니 以商之建丑과 周之建子로도 且不可用이어든 況以十月爲歲首乎아 秦不師古하니 無足道也니라

처음에 齊나라 威王宣王의 때에 鄒衍이 五德이 끝나고 시작하는 運을 논하여 저술하였는데, 始皇이 천하를 겸병하자 齊나라 사람이 이것을 아뢰었다. 始皇이 그 말을 채용하여 이르기를 “周나라가 火德으로 천하를 얻었으니,【鄒衍은, 불이 武王이 머무는 집으로 흘러든 것을 周나라가 天命을 받은 징조로 여기고 또 색깔은 적색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周나라를 火德이라 한 것이다. 胡氏 庭芳(胡一桂)이 말하였다. “鄒衍이 다만 黃帝의 土德을 취하여 黃色으로 유추하였으니, 바로 한때의 궤변이다. 옛날의 王者는 代(왕조)가 바뀌어 號를 고칠 때에 五行에서 法을 취하여 번갈아 왕성하고 서로 낳게 하였으니, 먼저 木에서 시작하였다. 太昊 伏羲氏는 木德으로 王하였으니 木德은 春令이기 때문에 ≪周易≫에 ‘帝가 震方에서 나왔다.’고 칭하였다. 木은 火를 낳으므로 炎帝 神農氏는 火德으로 王하였고, 火는 土를 낳으므로 黃帝 軒轅氏는 土德으로 王하였고, 土는 金을 낳으므로 少昊氏는 金德으로 王하였고, 金은 水를 낳으므로 顓頊은 水德으로 王하였고, 水는 木을 낳으므로 帝嚳은 木德으로 王하였고, 木은 또 火를 낳으므로 帝堯는 火이고, 帝舜은 土이고, 夏나라는 金, 商나라는 水, 周나라는 木이니, 木의 색깔은 靑色이다. 그러므로 周나라를 일러 蒼姬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五德이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秦나라가 周나라를 대신함에 이기지 못하는 것을 따르겠다.” 하여 水德으로 하고, 처음으로 연도를 고쳐 朝會와 賀禮를 모두 10월 초하루부터 하고, 衣服과 旌旄와 節旗를【≪周禮≫에 “해와 달을 그린 것을 常이라 하고, 龍을 엇갈려 그린 것을 旂라 하고, 通으로 된 흰 비단을 旜이라 하고, 잡색 비단을 物이라 하고, 곰과 호랑이를 그린 것을 旗라 하고, 새와 매를 그린 것을 旟라 하고, 거북과 뱀을 그린 것을 旐라 하고, 온전한 새깃으로 만든 것을 旞라 하고, 새깃을 쪼개어 만든 것을 旌이라 한다.” 하였다. 旄는 幢이니 깃대 끝에 들소꼬리를 매단 것이다. 幢은 纛이니 들소의 꼬리로 만드는데, 모습이 斗와 같다. 秦나라 文公 때에 梓나무가 변하여 들소가 되어 용감하였는데, 이 소를 부려 큰 공을 세우니 후세에 본떠서 들소꼬리를 깃대 끝에 매달았다. 또 말하였다. “梓나무가 변하여 소가 되니, 騎兵으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혹 땅에 떨어져 상투가 풀어져 머리가 흩어지자, 소가 두려워하여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秦나라가 인하여 旄頭騎를 설치하여 先驅로 삼았다.” 節은 잡는 물건이니, 節을 잡은 자는 반드시 신하의 節操를 다해야 함을 뜻한다. 털로 짜서 만드니, 上下가 서로 겹쳐서 대나무의 마디 모양을 취하여 본떴으므로 인하여 이로써 이름을 삼았으니, 길이가 1척 3촌이다. ≪周禮≫ 註에 “節은 信과 같으니, 길 떠나는 자가 잡는 신표이다.” 하였다. 길이가 8척이니 들소[旄]꼬리를 사용했다 하여 旄라 칭하였다.】 모두 黑色을 숭상하고,【≪周禮≫ 〈春官 司常〉 註에 “旌旗의 위에 있는 깃대 끝에 들소꼬리를 매단다.” 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九旗圖에 보인다. 〈地官 掌節〉 註에 “節은 信과 같으니, 길 떠나는 자가 잡는 信標이다.” 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八節圖에 보인다. 秦나라는 水德을 따르니, 水는 北方에 속하기 때문에 검은색을 숭상한 것이다.】 數는 6을 기준으로 삼았다.【水의 마침 數가 6이다. 그러므로 6촌으로 符를 만들고 6尺을 1步라 하였다.】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夏나라의 철(月曆)을 행한다.’ 하셨으니, 商나라의 建丑月과 周나라의 建子月도 오히려 쓸 수 없는데, 하물며 10월을 歲首로 삼는단 말인가. 秦나라는 옛것을 본받지 않았으니, 굳이 말할 것이 없다.”

○ 丞相丞相【王氏曰 丞은 承也요 相은 助也니 謂掌承天子하야 助理萬機也라 綰은 姓王氏라 】等이 言 燕, 齊, 荊地遠하야 不爲置王이면 無以鎭之하니 請立諸子하소서 始皇이 下其議한대 廷尉廷尉【王氏曰 廷은 平也니 治獄貴平이라 故號廷尉라 斯는 姓李氏라 】曰 周所封子弟同姓이 甚衆이나 然後屬이 疏遠하야 相攻擊을 如仇讐호되 周天子弗能禁止하니이다 今海內賴陛下神靈하야 一統하야 皆爲郡縣하니 諸子功臣을 以公賦稅로 重賞賜之면 甚足易制요 天下無異意하리니 則安寧之術也니 置諸侯不便하니이다 始皇曰 天下共苦戰鬪不休는 以有侯王이러니 賴宗廟宗廟하야 天下初定이어늘 又復立國이면 是는 樹兵也니 而求其寧息이면 豈不難哉아 廷尉廷尉議是라하고 於是에 分天下爲三十六郡하야 郡置守守, 尉尉, 監監【郡守는 掌治其郡하고 丞尉는 掌佐守하야 典武職甲卒하고 監은 御史니 掌監郡이라 】하고 收天下兵하야 聚咸陽하야 銷以爲鍾, 鐻(虡), 金人十二【周禮에 榟人爲筍虡하니 厚脣弇口하고 出目短耳하며 大胸燿後하고 大體短脰하니 若是者를 謂之(臝)[羸]屬이라 其聲大而宏하니 則於鐘宜라 若是者는 以爲鐘鐻라 是故로 擊其所縣而由其虡鳴이라 註에 橫曰筍이요 植曰虡라 王氏曰 始皇二十六年에 有大人十二 見於臨洮하니 身長五丈이요 足履六尺이요 皆夷狄服이니 天誡若曰 勿大爲夷狄하라 行將滅其國이라하야늘 始皇不知하고 反以爲瑞라하야 乃銷兵器하야 鑄爲金人象之하니라 】하니 重各千石이라 置宮庭中【各重千石이요 坐高二丈이니 號曰翁仲이라 漢世에 在長樂宮門하니라 】하다

[新增]胡氏曰 聖人理天下에 以萬物各得其所로 爲極至라 封建也者는 帝王所以順天理, 承天心하야 公天下之大端大本也요 郡縣也者는 霸世暴主之所以縱人欲, 悖天道하야 私一身之大孽大賊也라 分天下有德有功者以地하야 而不敢以天下自私일새 於是에 有百里, 七十里, 五十里, 不能五十里의 邦國之制【記王制曰 公侯는 田方百里요 伯은 七十里요 子男은 五十里요 不能五十里者는 不合於天子하야 附於諸侯하니 曰附庸이라하니라 】焉하고 於是에 有君朝, 卿大聘, 大夫小聘, 王巡狩, 侯述職之禮樂法度【記王制에 諸侯之於天子也에 比年一小聘하고 三年一大聘하고 五年一朝하며 天子는 五年一巡狩라하니라 公羊傳註에 諸侯卽位하면 比年에 使大夫小聘하고 三年에 使上卿大聘하고 四年에 又使大夫小聘하고 五年一朝하고 因助祭以述職이라하니라 】焉하고 於是에 有千雉, 百雉, 三之一, 五之一의 高城深池【按左傳隱元年에 大都는 不過三國之一이요 中은 五之一이요 小는 九之一이라한대 註에 方丈曰堵요 三堵曰雉니 一雉는 長三丈, 高一丈이라 天子는 千雉요 侯伯은 三百雉요 大都는 三分國城之一하야 不過百雉요 中都는 五分之一하야 不過六十雉요 小都는 九分之一하야 不過三十三雉라하니라 】焉하고 於是에 有井, 邑, 丘, 甸, 縣, 都之夫數【禮地官小司徒에 經土地而井牧其田野하야 九夫爲井이요 四井爲邑이요 四邑爲丘요 四丘爲甸이요 四甸爲縣이요 四縣爲都니 以任地事而令貢賦하고 凡稅斂之事라하니라 群書考索曰 周禮所謂夫家之數者는 一夫受田百畝하야 家出一夫而已요 其合居者는 亦惟計其丁壯而用之하야 與別居者無異라하니라 】焉하고 於是에 有十乘, 百乘, 千乘, 萬乘之車數【禮地官小司徒註에 司馬法曰 畝百爲夫요 夫三爲屋이요 屋三爲井이요 井十爲通이요 通十爲成이니 革車一乘이요 十成爲終이니 革車十乘이요 十終爲同이니 革車百乘이라하니라 諸侯大國은 一封三百六十六里니 兵車千乘이요 天子畿內는 方千里니 兵車萬乘이라 】焉하고 於是에 有伍, 兩, 卒, 旅, 師, 軍之制【禮地官小司徒에 五人爲伍요 五伍爲兩이요 四兩爲卒이요 五卒爲旅요 五旅爲師요 五師爲軍이니 以起軍旅하고 以作田役이라하니라 】焉하고 於是에 有鄕大夫, 司徒, 樂正取士之法【禮에 鄕大夫受敎法于司徒하고 退而頒之于其鄕吏하나니 三年則大比하야 考其德行道藝하야 而與賢者能者라하니라 記王制에 命鄕論秀士하야 升之司徒曰選士요 司徒論選士之秀者하야 升之學曰俊士라 樂正이 順先王詩書禮樂하야 以造士라하니라 】焉이라 邦國之制廢에 而郡縣之制作矣요 郡縣之制作에 而世襲之制亡矣요 世襲之制亡에 而數易之弊生矣요 數易之弊生에 而民無定志矣라 巡狩述職之禮廢면 則上下之情不通하야 攷文案而不究事實하고 信文案而不信仁賢하야 其弊를 有不可勝言者矣요 城池之制廢면 而禁禦暴客, 威服四夷之法이 亡矣요 夫家之法廢면 而民數를 不可詳矣요 民數不可詳이면 而車乘不可出矣요 車乘不可出이면 而軍師不隱於農矣요 軍師不隱於農이면 坐食者衆而公私困窮矣라 世儒는 不知王政之本하고 反以亡秦爲可法하며 所謂明君良臣者도 亦未免以天下自私하야 無意於裁成輔相【易泰卦大象注에 裁成은 謂體天地交泰之道而裁制하야 成其施爲之方也요 輔相天地之宜는 天地通泰면 則萬物茂遂하나니 人君體之而爲法制하야 使民用天時, 因地利하야 輔相化育之功하야 成其豐美之利也라 】하야 使萬物各得其所하니 所以歷千五百餘歲토록 未有能復之者也라 聖人이 制四海之命하야 法天而不私하고 盡制而不曲防하야 分天下之地하야 以爲萬國하야 而(擧)[與]英才共焉하니 非後世擅天下者의 以大制小, 以强制弱之謀也요 誠盡制而已矣라 是以로 虞夏商周는 傳於長久하여 皆千餘載하니 論興廢則均有焉이어니와 語絶滅이면 則至暴秦郡縣天下然後에 極也라 自秦滅先王之制로 海內蕩然【無檢束也니 法度廢壞貌라 】하야 無有根本之固라 有今世王天下而繼世無置錐之地者하고 有今年貴爲天子而明年欲爲匹夫라도 不可得者하니 天子尙然이온 況其下者乎아 物有其根이면 則常而靜하고 安而久하나니 常靜安久면 則理得其終하고 物遂其性이라 封建者는 政之有根者也라 故로 上下辨하고 民志定하고 敎化【以道業誨人曰敎요 躬行於上하야 風動於下曰化也라 】行하고 風俗【上所化爲風이요 下所習爲俗이라 又上行下效를 謂之風이요 衆心安靜을 謂之俗이라 】美하야 理之易治하고 亂之難亡하며 扶之易興하고 亡之難滅하나니 郡縣은 反是니라 ○ 〈愚按封建之議는 說者不一이라 五峯胡氏此說을 子朱子已分註於綱目하고 東萊呂氏又筆之於大事記하니 蓋至當不易之論也라 故로 愚錄而附焉하노니 學者詳之니라〉

丞相丞相 王綰【王氏가 말하였다. “丞은 받듦이고 相은 도움이니, 天子를 받들어 萬機를 도와 다스림을 이른다. 綰은 姓이 王氏이다.”】 등이 말하기를 “燕‧齊‧荊(楚나라)은 땅이 멀어서 王을 두지 않으면 鎭撫鎭撫할 수가 없으니, 여러 아들을 왕으로 세우소서.” 하자, 始皇이 이 의논을 내렸다. 廷尉廷尉 李斯가【王氏가 말하였다. “廷은 공평함이니, 옥사를 다스림은 공평함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廷尉라고 이름한 것이다. 斯는 姓이 李氏이다.”】 말하기를 “周나라 文王武王이 봉한 子弟와 同姓들이 심히 많았으나 후손들이 소원해져서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였지만 周나라 天子가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海內가 폐하의 신령스러움에 힘입어 통일되어서 모두 郡縣이 되었으니, 여러 아들과 功臣들에게 公的인 賦稅로 후하게 상을 내려주시면 매우 풍족하여 제재하기가 쉬울 것이요 천하에 딴 뜻을 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편안한 방법이니,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하였다.

始皇이 말하기를 “천하가 함께 괴롭게 전투하면서 그치지 않은 것은 侯와 王이 있었기 때문이다. 宗廟의 도움을 입어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었는데, 또다시 나라를 세우면 이것은 병란(전쟁의 화근)을 세우는 것이니, 이러고서 편안히 쉬기를 바란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廷尉廷尉의 의론이 옳다.” 하고는 이에 천하를 나누어 36개 郡으로 만들고 郡마다 守와 尉尉와 監을 두었으며,【郡守는 郡을 다스리는 일을 맡고, 丞尉는 郡守를 보좌하는 일을 맡아 무관의 일과 甲兵을 주관하고, 監은 御史이니 郡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咸陽에 모아서 녹여 鍾과 종틀과 金人 12개를 만드니,【≪周禮≫에 “榟人이 종과 경쇠를 거는 틀을 만드니, 틀의 모양이 입술은 두껍고 입은 크고 깊으며 눈은 불거져 나오고 귀는 짧으며 가슴은 크고 점점 작아지며 몸은 크고 장딴지는 짧으니, 이와 같은 것을 羸屬(맹수류)이라 한다. 그 소리가 커서 울리니 鐘에 적합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종과 종틀을 만들기 때문에 매달아 놓은 경쇠나 종을 치면 종틀에 따라 울리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註에 “가로로 된 것을 筍이라 하고, 세로로 된 것을 虡라 한다.” 하였다. 王氏가 말하였다. “始皇 26년에 大人 12명이 臨洮에 나타나니 신장이 다섯 길이고 신발 크기가 여섯 자이며 모두 오랑캐 복장을 하였는데, 하늘에서 경계하기를 ‘오랑캐를 크게 정벌하지 말라. 장차 너희 나라를 멸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始皇帝는 이것을 모르고 도리어 祥瑞라 하여 마침내 병기를 녹여 金人을 만든 것이다.”】 무게가 각각 천 石이었다. 이것을 宮庭의 가운데에【각각 무게가 千石이고 앉은 키가 2丈이니, 이름하기를 翁仲이라고 하였다. 漢나라 때에 長樂宮 문에 있었다.】 두었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聖人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는 것을 지극함으로 삼는다. 封建制度라는 것은 帝王이 天理를 따르고 天心을 받들어서 천하를 공정히 하는 큰 단서이고 큰 근본이며, 郡縣制度라는 것은 세상을 제패한 포악한 군주가 人欲을 부리고 天道를 어겨서 자기 한 몸을 사사로이 하는 큰 재앙이고 큰 賊이다. 군주가 천하의 德이 있는 자와 功이 있는 자에게 땅을 나누어 주어 감히 천하를 사사로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에 100리, 70리, 50리, 50리가 못 되는 邦國의 제도가 있었고,【≪禮記≫ 〈王制〉에 이르기를 “公과 侯는 田地가 100리이고, 伯은 70리이고, 子와 男은 50리이고, 50리가 못되는 나라는 천자에게 직접 통하지 못하여 제후에게 붙으니, 이를 附庸國이라 한다.” 하였다.】 이에 人君이 조회하고 卿이 크게 聘問하고 大夫大夫가 작게 빙문하고 王이 巡狩하고 諸侯가 述職하는 禮樂과 法度가 있었고,【≪禮記≫ 〈王制〉에 “諸侯는 天子에게 比年(매년)마다 한 번 작게 빙문하고 3년에 한 번 크게 빙문하고 5년에 한 번 조회하며, 天子는 5년에 한 번 巡狩한다.” 하였다. ≪公羊傳≫의 註에는 “諸侯는 즉위하면 比年마다 大夫로 하여금 작게 빙문하게 하고, 3년에 上卿으로 하여금 크게 빙문하게 하고, 4년에 또 大夫로 하여금 작게 빙문하게 하고, 5년에 한 번 조회하며 인하여 제사를 도와 述職을 한다.” 하였다.】 이에 千雉, 百雉, 3分의 1, 5分의 1의 높은 城과 깊은 垓子가 있었고,【살펴보건대 ≪春秋左傳≫ 隱公 元年條에 “城은 大都는 國都의 3分의 1을 넘지 않고, 中都는 5分의 1이고, 小都는 9분의 1이다.” 하였는데, 그 註에 “사방 1丈을 堵라 하고 3堵를 雉라 하니, 1雉는 길이가 3丈이고 높이가 1丈이다. 天子의 나라는 千雉이고, 侯와 伯은 300雉이고, 大都는 國城의 3分의 1이어서 百雉를 넘지 않고, 中都는 5分의 1이어서 60雉를 넘지 않고, 小都는 9分의 1이어서 33雉를 넘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井, 邑, 丘, 甸, 縣, 都의 夫數(세대의 수)가 있었고,【≪周禮≫ 〈地官 小司徒〉에 “土地를 다스려 田地를 구획해서 혹은 井田을 만들어 경작하고 혹은 牧地를 만들어 牧畜하니, 9夫를 井이라 하고, 4井을 邑이라 하고, 4邑을 丘라 하고, 4丘를 甸이라 하고, 4甸을 縣이라 하고, 4縣을 都라 하는 바, 이로써 농사일을 맡겨 貢物과 부역을 내게 하고 세금 거두는 일을 명령한다.” 하였다. ≪群書考索≫에 이르기를 “≪周禮≫에 이른바 ‘夫家의 數라는 것은 1夫(세대주)가 田地 100畝를 받아서 1가호에서 1夫를 낼 뿐이고 함께 사는 자는 또한 다만 丁壯의 수를 헤아려 동원해서 별거하는 자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十乘, 百乘, 千乘, 萬乘의 車數가 있었고,【≪周禮≫ 〈地官 小司徒〉의 註에 “≪司馬法≫에 이르기를 ‘100畝를 1夫라 하고, 3夫를 屋이라 하고, 3屋을 井이라 하고, 10井을 通이라 하고, 10通을 成이라 하니 革車 1乘을 내고, 10成을 終이라 하니 革車 10乘을 내고, 10終을 同이라 하니 革車 100乘을 낸다.’ 하였다. 諸侯의 大國은 封地가 사방 366리이니 兵車가 千乘이요, 天子의 畿內는 사방 1천 리이니 兵車가 萬乘이다.” 하였다.】 이에 伍, 兩, 卒, 旅, 師, 軍의 제도가 있었고,【≪周禮≫ 〈地官 小司徒〉에 “5人을 伍라 하고, 5伍를 兩이라 하고, 4兩을 卒이라 하고, 5卒을 旅라 하고, 5旅를 師라 하고, 5師를 軍이라 하니, 이로써 군대를 일으키고 이로써 부역을 낸다.” 하였다.】 이에 鄕大夫鄕大夫, 司徒司徒, 樂正樂正이 선비를 취하는 법이 있었다.【≪周禮≫에 “鄕大夫가 가르치는 법을 司徒에게서 받아 가지고 물러가 鄕吏에게 반포해 주니, 3년이면 大比를 하여 德行과 道藝를 상고해서 德이 있는 자와 유능한 자를 올려 보낸다.” 하였다. ≪禮記≫ 〈王制〉에 “鄕에 명하여 뛰어난 선비를 논평해서 司徒에게 올려 보내는 것을 選士라 하고, 司徒가 選士 중에 빼어난 자를 논평하여 國學에 올려 보내는 것을 俊士라 한다. 樂正이 先王의 詩‧書‧禮‧樂을 따라서 선비를 양성한다.” 하였다.】 邦國의 제도가 폐지됨에 郡縣의 제도가 시작되었고, 郡縣의 제도가 시작됨에 세습하는 제도가 없어졌고, 세습하는 제도가 없어짐에 守令守令을 자주 바꾸는 병폐가 생겨났고, 자주 바꾸는 병폐가 생겨남에 백성들이 안정된 뜻이 없어지게 되었다. 巡狩하고 述職하는 禮가 폐해지면 上下의 情이 통하지 못하여 문서만 살펴보고 사실을 구명하지 않으며 문서만 믿고 仁者와 賢者를 믿지 않아서 그 병폐를 이루 말할 수 없으며, 城과 垓子의 제도가 폐지되면 포악한 사람을 금지하고 사방의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종시키는 법이 없어지고, 夫家의 법이 없어지면 백성들의 숫자를 자세히 알 수 없고, 백성들의 숫자를 자세히 알 수 없으면 兵車를 낼 수 없고, 兵車를 낼 수 없으면 군대가 농사에 숨어 있지 못하고(유사시에는 종군하고 무사할 때에는 농사짓게 하지 못하고), 군대가 농사에 숨어 있지 못하면 앉아서 놀고 먹는 자가 많아져 국가와 개인이 곤궁해진다.

세상의 학자들은 王政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멸망한 秦나라를 본받을 만하다고 여기며, 이른바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란 자들도 천하를 스스로 사사롭게 함을 면치 못해서 裁成(지나친 것을 억제함)하고 輔相(부족한 것을 보태줌)하여【≪周易≫ 泰卦 大象傳 注에 “裁成은 天地가 交泰(서로 통함)하는 道를 체행하여 裁制해서 시행하는 방법을 이루는 것이고, 天地의 마땅함을 輔相한다는 것은 天地가 通泰하면 만물이 무성하게 이루어지니, 人君이 이것을 체행하여 法制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天時를 따르고 地利를 인하여 化育하는 功을 도와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이익을 이루는 것이다.” 하였다.】 萬物로 하여금 각각 제자리를 얻게 하는 데에 뜻이 없으니, 이 때문에 1천 5백여 년이 지나도록 이를 회복한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聖人이 온 천하의 命을 제재하여 하늘을 본받고 사사롭게 하지 못하게 하며 제도를 다하고 제방을 굽게 쌓지 않게 하여, 천하의 땅을 나누어 萬國으로 삼아서 英才들과 함께 하였으니, 후세에 천하를 독점한 자들이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제재하고 강함으로써 약함을 제압하는 계책이 아니요, 진실로 제도를 다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虞‧夏‧商‧周는 장구하게 전하여 모두 천여 년을 누린 것이니, 흥하고 폐함을 논하면 똑같이 있었으나 아주 끊어 없앤 것으로 말하면 지극히 포악한 秦나라가 천하를 郡縣으로 만든 뒤에 지극하게 되었다.

秦나라가 先王의 제도를 없앤 뒤로부터 온 천하가 탕진【蕩然은 檢束함이 없는 것이니, 法度가 해이하고 무너진 모양이다.】하여 근본의 견고함이 있지 못하였다. 지금 세상에는 천하에 왕 노릇 하였으나 대를 이은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자가 있었고, 금년에는 귀함이 천자가 되었으나 명년에는 匹夫가 되려 해도 될 수 없는 자가 있었으니, 천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그보다 아래인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물건은 근본이 있으면 항상하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오래가니, 항상하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오래가면 이치가 끝마침을 얻고 물건이 본성을 이룬다. 封建制度는 정사에 근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가 분별되고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교화가【道理와 術業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敎라 하고, 몸소 위에서 실천하여 아랫사람을 風動(백성들이 스스로 좇아서 감화됨)함을 化라 한다.】 행해지고 풍속이【위에서 교화함을 風이라 하고, 아래에서 익히는 것을 俗이라 한다. 또 위에서 행하여 아래에서 본받는 것을 風이라 하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여김을 俗이라 이른다.】 아름다워서, 다스리면 쉽게 다스려지고 어지러워도 쉽게 망하지 않으며, 붙들어 주면 쉽게 일어나고 멸망시키려 해도 멸망시키기 어려운 것이니, 郡縣 제도는 이와 반대이다.”

○ - 내가 살펴보건대 封建制度에 대한 논의는 말한 자들이 똑같지 않다. 五峯胡氏의 이 말을 朱子가 이미 《資治通鑑綱目》에 分註하였고, 東萊呂氏가 또 《大事記》에 썼으니, 지극히 합당하여 바꿀 수 없는 의논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록하여 붙이는 것이니, 배우는 자들은 자세히 살펴보라.-

[壬午]二十八年

[壬午]二十八年이라

始皇이 東行郡縣할새 上鄒嶧山【正義曰 邾嶧山은 一名鄒山이니 在兗州鄒縣南이라 魯繆公이 改邾作鄒하고 遂因縣名山하니라 】하야 立石頌功業하고 上太(泰)山陽至顚(巓)하야 立石頌德하고 從陰道下하야 禪於 梁父【梁父는 泰山下小山名也니 因以名縣하니 屬泰山郡이라 梁父는 在兗州泗水縣北八十里하니 父는 音甫라 】하다 遂東遊海上이러니 方士徐市(불)等이 上書호되 請得與童男女로 入海하야 求三神山不死藥이라하다 浮江할새 至湘山祠하야 逢大風하야 幾不能渡라 上問 湘君何神고 對曰 女, 妻니이다 始皇이 大怒하야 使伐湘山樹하야 赭其山하다

28년(임오 B.C.219))

始皇이 동쪽으로 郡縣을 순행할 적에 鄒嶧山에【≪史記正義≫에 말하였다. “邾嶧山은 一名 鄒山이니, 兗州 鄒縣 남쪽에 있다. 魯나라 繆公이 邾를 고쳐 鄒라 하고, 마침내 縣을 따라 산을 이름하였다.”】 올라 비석을 세워 功業을 칭송하고, 泰山의 남쪽으로 올라가 정상에 이르러 비석을 세워 德을 칭송하고, 泰山의 북쪽 길을 따라 내려와 梁父에서 禪을【梁父는 泰山 아래의 작은 산 이름인데, 산 이름을 따라 縣을 이름하였으니 泰山郡에 속하였다. 梁父는 兗州 泗水縣 북쪽 80리 지점에 있으니, 父는 음이 보이다.】 하고는 마침내 동쪽으로 海上에 유람하였다. 이때 方士方士인 徐市 등이 글을 올려 “童男‧童女와 海島에 들어가 三神山의 不死藥을 구해오겠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上이〉 江에 배를 띄워 갈 적에 湘山祠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거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上이 묻기를 “湘君은 어떤 神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딸이고 임금의 아내입니다.” 하였다. 始皇이 크게 노하여 湘山의 나무를 베어 그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 初에 韓人張良이 父祖以上五世相韓【祖開地 相韓昭侯, 宣惠王, 襄王하고 父平이 相釐王, 桓惠王하야 凡五世라 】이라 韓亡에 이 欲爲韓報仇러니 始皇이 東遊하야 至陽武博浪沙【地理志에 陳留에 有陽武縣이라 括地志云 今鄭州陽武東北十八里漢陽武城也니 博浪沙는 在陽武南이라 王氏曰 按輿地要覽컨대 汴梁路延州陽武南에 有博浪沙亭이 是也라 】中이어늘 張良이 令力士操鐵椎하야 狙擊【狙之伺物에 必伏而候之하니 凡伏而擊者를 謂之狙擊이라 】始皇이라가 誤中副車라 始皇이 驚하야 求弗得하고 令天下하야 大索十日하다

처음에 韓나라 사람 張良은 父‧祖 이상이 5대에 걸쳐 韓나라의 정승이 되었다.【張良의 할아버지인 開地가 韓나라의 昭侯‧宣惠王‧襄王을 도왔고, 아버지인 平이 釐王‧桓惠王을 도와 모두 5代에 걸쳐 정승 노릇을 하였다.】韓나라가 망하자 張良은 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始皇이 동쪽 지방을 유람하여 陽武의 博浪沙【≪漢書≫ 〈地理志〉에 “陳留에 陽武縣이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지금의 鄭州 陽武 동북쪽 18리 지점이 漢나라 陽武의 옛 城이니, 博浪沙는 陽武 남쪽에 있다.” 하였다. 王氏가 말하였다. “≪輿地要覽≫을 살펴보건대 汴梁路 延州 陽武 남쪽에 博浪沙亭이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가운데에 이르니, 張良力士를 시켜 철퇴를 잡고서 始皇을 저격하게【원숭이가 물건을 엿볼 적에 반드시 엎드려서 기다리니, 무릇 엎드려 있다가 습격하는 것을 일러 狙擊이라고 한다.】 하였으나 잘못하여 副車副車를 맞추었다. 始皇이 놀라 찾았으나 잡지 못하자, 천하에 명령하여 열흘 동안 크게 수색하게 하였다.

[丙戌]三十二年

[丙戌]三十二年이라

始皇이 巡北邊할새 盧生이 入海還【始皇이 使燕人盧生으로 求古仙人羨門子高也라 】하야 因奏錄圖書【河圖符命之書와 後世讖緯之書가 始此라 】曰 亡秦者는 胡也【所謂亡秦者胡는 乃胡亥也라 】라하야늘 始皇이 乃遣蒙恬하야 發兵三十萬人하야 北伐匈奴하고 收河南地【河南은 竝匈奴地니 今亦謂之新秦中이라 】하야 爲四十四縣하고 築長城호되 因地形하야 用制險塞하야 起臨洮【縣臨洮水라 故名臨洮하니 屬隴西郡이라 西魏改岷州하고 隋唐改臨洮郡하고 宋改西和州하니 洮는 音滔라 】하야 至遼東하니 延袤【延은 長行也요 南北曰袤라 】萬餘里라 威振匈奴러라

32년(병술 B.C.215))

始皇이 북쪽 변경을 순행할 적에 盧生이 海島에 들어갔다가 돌아와【始皇이 燕나라 사람인 盧生으로 하여금 옛 신선인 羨門子高를 찾게 한 것이다.】 인하여 錄圖書를【河圖‧符命의 글과 후세의 圖讖書와 緯書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아뢰기를 “秦나라를 멸망하게 할 자는 胡이다.”【이른바 秦나라를 멸망하게 할 자는 胡라는 것은 바로 始皇의 아들인 胡亥이다.】 하였다. 始皇이 마침내 蒙恬을 보내어 군대 30만 명을 징발해서 북쪽으로 匈奴를 정벌하고 河南 땅을【河南은 모두 匈奴의 땅이니, 지금 또한 이를 일러 新秦中이라 한다.】 거두어 44개 縣을 만들었으며, 長城을 쌓되 地形을 따라 험한 요새를 이용하여 적을 제어해서 臨洮에서【縣이 洮水에 임해 있기 때문에 臨洮라 이름한 것이니, 隴西郡에 속하였다. 西魏 때 岷州로 고치고, 隋‧唐 때에는 臨洮郡으로 고치고, 宋나라 때에는 西和州로 고쳤으니, 洮는 음이 도(조)이다.】 시작하여 遼東에 이르니, 뻗친 길이가【延은 길게 늘어선 행렬이며, 남북의 길이를 袤라 한다.】 만여 리에 이어져 위엄이 匈奴에 떨쳤다.

[戊子]三十四年

[戊子]三十四年이라

丞相丞相李斯上書曰 異時에 諸侯竝爭하야 厚招遊學이러니 今天下已定에 法令이 出一하니 百姓當家則力農工하고 士則學習法令이어늘 今諸生이 不師今而學古하야 以非當世하고 惑亂黔首하며 相與非法敎【敎句라 李斯傳에 作相與非法敎之制라 】하야 人聞令下면 則各以其學議之하야 入則心非하고 出則巷議하야 誇主以爲名하고 異趣以爲高하야 率群下以造謗하니 如此弗禁이면 則主勢降乎上하고 黨與成乎下리니 禁之便하니이다 臣은 請史官史官이 非秦記어든 皆燒之하고 非博士官所職이요 天下에 有藏詩書百家語者어든 皆詣守尉守尉【守는 掌治其郡하고 尉는 掌佐守典武職甲卒이라 百官志에 大郡曰守요 小郡曰尉라 】하야 雜燒之하고 有偶語詩書者어든 棄市【刑人於市하야 與衆棄之라 故令律에 謂絞刑爲棄也라 】하고 以古非今者는 族【謂滅族이라 】하고 所不去者는 醫藥卜筮種樹之書요 若欲有學法令이어든 以吏爲師라한대 制曰可【群臣有所奏請이면 尙書奉之하야 下有司曰制요 天子答曰可라 】라하다

蘇東坡曰 昔者에 嘗怪李斯荀卿【名은 況이니 云荀卿者는 時人尊重之號라 】이라가 旣而滅其書하고 大變古先聖王之法하야 於其師之道에 不啻若寇讐러니 及今觀荀卿之書然後에 知李斯之所以事秦者가 皆出於荀卿而不足怪也로라 荀卿者는 喜爲異說而不遜하고 敢爲高論而不顧者也라 子思孟軻는 世之所謂賢人君子也어늘 荀卿獨曰 亂天下者는 子思孟軻也라하니 天下之人如此其衆也요 仁人義士如此其多也어늘 荀卿獨曰 人性惡하니 는 性也요 은 僞也라하니라 由是觀之하면 意其爲人이 必也剛愎不遜而自許太過하고 彼李斯者는 又特甚者耳라 彼見其師歷詆天下之賢人하야 以自是其愚하고 以爲古先聖王이 皆無足法者라하니 不知荀卿이 特以快一時之論이요 而荀卿亦不知其禍之至於此也라 其父殺人報仇하면 其子必且行劫하나니 荀卿이 明王道하고 述禮樂이어늘 而李斯以其學亂天下하니 其高談異論이 有以激之也라 之論은 未嘗異也로되 而天下卒無有及者하니 苟天下果無有及者면 則尙安以求異爲哉리오

34년(무자 B.C.213))

丞相丞相李斯가 글을 올리기를 “지난날 諸侯들이 함께 다투어서 遊學(遊說)하는 자를 후하게 초청하였는데,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法令이 하나로 나오니, 백성들이 집안을 담당하면 농사와 공업에 힘쓰고 선비는 法令을 배워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諸生諸生들이 지금 것을 스승 삼지 않고 옛것을 배워 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혼란하게 하며, 서로 더불어 법과 敎令敎令을 비난합니다.【敎에서 句를 뗀다. ≪史記≫ 〈李斯列傳〉에는 ‘서로 더불어 법과 敎令의 制를 비난하다.[相與非法敎之制]’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명령이 새로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각기 자신이 배운 것을 가지고 비판하여 들어가서는 마음으로 그르다 하고 나와서는 골목에서 모여 비판해서, 군주에게 과시함으로써 명예를 삼고 취향을 달리함으로써 고상함을 삼아 아랫사람들을 유도하여 비방을 만들어 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군주의 권세가 위에서 내려가고 黨與가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을 금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신은 청컨대 史官史官이 〈보관하고 있는 책들 중에〉 秦나라의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태우고, 博士博士의 관직을 맡은 자가 아니면서 천하에 詩書와 百家의 서적을 보관한 자가 있으면 모두 守와 尉에게【守는 郡을 맡아 다스리고, 尉는 守를 보좌하여 무관의 일과 甲兵을 맡았다. ≪後漢書≫ 〈百官志〉에 “큰 郡을 守라 하고, 작은 郡을 尉라 한다.” 하였다.】 나아가서 모두 불태우게 하고,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詩書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棄市하고,【시장에서 사람을 형벌하여 뭇사람들과 함께 그 시체를 버렸다. 그러므로 律令에 絞刑을 일러 棄라 하였다.】 옛날 법을 가지고 지금을 비판하는 자는 三族을 멸하며,【族은 滅族함을 이른다.】 없애지 않을 것은 醫藥‧卜筮‧種樹(곡식과 나무 심는 방법)에 대한 책이고 만약 法令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로 스승을 삼게 하소서.” 하니, 制하기를 “좋다.” 【여러 신하들이 奏請할 일이 있으면 尙書가 이것을 받들어 올려서 有司에게 내리는 것을 制라 하고 天子가 답하는 것을 可라 하였다.】하였다.

蘇東坡가 말하였다.

“나는 옛날에 일찍이 李斯가 荀卿을【荀卿은 이름이 況이니, 荀卿이라고 말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높인 칭호이다.】事師하다가 이윽고 그 책을 없애고 옛날 聖王聖王의 법을 크게 바꾸어 스승의 도를 원수처럼 여길 뿐만이 아님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제 荀卿의 책을 본 뒤에야 李斯가 秦나라를 섬긴 방법이 모두 荀卿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荀卿이란 자는 異說을 하기 좋아하여 공손하지 못하였고 과감하게 高談峻論을 하여 돌아보지 않은 자이다. 子思孟軻는 세상의 이른바 賢人 君子인데 荀卿이 홀로 말하기를 ‘천하를 어지럽힌 자는 子思孟軻이다.’라고 하였고, 천하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고 仁人과 義士가 이렇게 많은데 荀卿이 홀로 말하기를 ‘人性은 악하니, 는 本性대로 하였고 은 거짓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해보면 생각하건대 그의 사람됨이 반드시 까다롭고 괴팍하여 공손하지 못해서 스스로 허여함이 너무 지나쳤고, 저 李斯란 자는 특히 더 심한 자라고 여겨진다. 저 李斯는 그 스승이 천하의 賢人을 차례로 비방하여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옳다고 하는 것을 보고는 옛 聖王聖王들을 모두 본받을 것이 없다고 여겼으니, 李斯荀卿이 다만 一時의 의론을 쾌하게 하였음을 알지 못하였고, 荀卿 또한 그 화가 여기에 이를 줄을 알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여 원수를 갚으면 그의 자식이 반드시 장차 劫掠을 행하나니, 荀卿이 王道를 밝히고 禮樂을 기술하였는데 李斯가 그의 학문으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그 高談과 異論이 激發함이 있었던 것이다. 孔子孟子의 議論은 일찍이 특이하지 않았으나 천하에 끝내 그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으니, 만일 천하에 과연 그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오히려 어찌 특이함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己丑]三十五年

[己丑]三十五年이라

使蒙恬으로 除直道【除는 治也라 括地云 秦故道在慶州華池縣西四十五里子午山上하니 自九原으로 至雲陽히 千八百里라 】호되 道九原【道는 由也라 括地云 勝州(九原)[連谷]縣이 本秦九原郡이니 今豐州是라 】하야 抵雲陽【抵는 至也라 括地云 今京兆雲陽縣이라 】하야 塹 山堙谷【塹은 阬也요 堙은 塞也라 】하니 千八百里라 數年不就러라

35년(기축 B.C.212))

蒙恬을 시켜 直道를 다스리게【除는 다스림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秦나라의 옛길이 慶州 華池縣 서쪽 45리 지점인 子午山 위에 있으니, 九原으로부터 雲陽에 이르기까지 1,800리이다.” 하였다.】 하되 九原에서 시작하여【道는 부터(시작)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勝州 連谷縣은 본래 秦나라 九原郡이니 지금 豐州가 이곳이다.” 하였다.】雲陽에 이르러【抵는 이름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지금 京兆 雲陽縣이다.” 하였다.】 산을 파서 골짜기를 메우니,【塹은 구덩이를 파는 것이고, 堙은 막는 것이다.】 길이가 1,800리였다. 여러 해가 지나도 이루지 못하였다.

始皇이 以爲咸陽人多하고 先王之宮廷小라하야 乃營作朝宮渭南上林苑中할새 先作前殿阿房【初에 秦惠文王이 作宮阿基房이라가 未成而亡이러니 始皇이 廣其宮規하야 恢三百餘里하니라 房은 一作旁하고 或讀如房室之房이라 阿는 曲也니 言殿之四阿 皆爲房이라 一說에 大陵曰阿니 言殿高若於阿上爲房이라 括地云 阿房宮은 亦曰阿城이니 在雍州長安西北三十四里라 宮在上林苑中하니 雍州郭(州)[城]西南面이 卽宮城東面也라 】하니 東西五百步요 南北五十丈이라 上可以坐萬人이요 下可以建五丈旗러라 周馳爲閣道【架木爲棚而行을 名閣道라 】호되 自殿下로 直抵南山하고 表南山之顚(巓)하야 以爲闕【門觀也니 人臣至此하면 思其所闕이라 爲二臺於門外하고 作樓觀於上하니 以其懸法이라하야 謂之象魏라 象은 治象也요 魏者는 狀其巍然高大하니 使民觀之하야 因謂之觀하니 是觀與象魏一物而三名이라 又闕은 缺也니 兩觀雙植하고 中央闕然而爲道라 故謂之闕이니 宮門, 寢門, 冢門을 皆曰闕이라 】하고 爲複道【複은 音福이니 重復也라 [頭註]架起爲道하야 不與民庶相雜하고 天子自行其上하며 有私路處엔 則作穴竇處如城門하야 百姓自其中往來라 】호되 自阿房渡渭하야 屬之咸陽하니 以象天極閣道絶漢抵營室【營室은 星名이라 天官書曰 天極紫宮後十七星이 絶漢抵營室을 曰閣道라하니 閣道者는 星名也니 北斗輔也라 】也러라 隱宮徒刑者【宮刑在於隱室이라 故曰隱宮也라 [釋義]宮은 淫刑也니 男子割勢하고 婦人幽閉하니 次死之刑이라 正義曰 餘刑은 見於市朝로되 宮刑은 一百日을 隱於蔭室養之라야 乃可라 故曰隱宮이니 下蠶室이 是也라 徒刑은 徒奴役也니 以罪供徭作이라 】七十餘萬人이라 乃分作阿房宮阿房宮하고 或作驪山【在雍州新豐南하니 古驪戎國이라 驪는 舊音黎러니 或音力知反이라 】할새 發北山石槨【美石이 出於京兆北山하니 細密하야 可爲棺槨故로 云石槨이라 】하고 寫(瀉)蜀【舍車解馬爲寫니 或作卸라】, 荊地材하야 皆至하니 關中【東有函谷關하고 南有嶢關武關하고 北有蕭關하고 西有散關하야 居四關之中故로 名이라 】에 計宮三百이요 關外에 四百餘라 於是에 立石東海上朐界中하야 以爲秦東門하고 因徙三萬家驪邑하고 五萬家雲陽하야 皆復【除其賦役이라 】하야 不事十歲하다

始皇이 “咸陽에는 사람이 많고 先王의 宮廷이 작다.” 하여, 마침내 朝宮을 渭水 남쪽 上林苑 가운데에 지을 적에 먼저 前殿(앞 궁전)인 阿房宮을 지으니,【처음에 秦나라 惠文王이 阿基房에 궁궐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始皇이 그 궁궐의 규모를 키워 300여 리를 넓혔다. 房은 一本에는 旁으로 되어 있고, 혹 房室의 房과 같이 읽는다. 阿는 모퉁이이니, 궁전의 네 모퉁이가 모두 房이 됨을 말한 것이다. 一說에 큰 언덕을 阿라 하니, 궁전의 높음이 큰 언덕 위에 방을 만든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阿房宮은 또한 阿城이라고도 하니, 雍州 長安 서북쪽 34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궁궐이 上林苑 가운데에 있으니, 雍州의 郭城 서남쪽이 바로 阿房宮城의 동쪽이다.】 東西가 500步이고 南北이 50丈이어서 위에는 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5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빙둘러 閣道(複道)를【나무를 가설하여 棚(시렁이나 선반과 같은 모양을 한 것)을 만들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한 것을 閣道라고 한다.】 만들되 궁전 아래로부터 곧바로 南山에 이르게 하고, 南山의 꼭대기를 표하여 대궐문을【闕은 門觀이니, 신하가 여기에 이르면 빠뜨린 것을 생각한다 하여 이름한 것이다. 문밖에 두 臺를 세우고 그 위에 樓觀을 지으니, 여기에 法令을 게시한다 하여 象魏라 이름한다. 象은 治象(옛날에 政敎와 法令을 기재하는 문자)이요, 魏는 巍然히 높고 큼을 형상하니, 백성들로 하여금 이 法令을 보게 하고 인하여 觀이라 이름하였으니, 觀과 象과 魏는 한 물건이면서 명칭이 세 가지인 것이다. 또 闕은 빠뜨림이니 두 觀을 앙쪽에 세우고 中央은 비워서 길을 만들기 때문에 이를 일러 闕이라고 하니, 宮門‧寢門‧冢門을 모두 闕이라고 한다.】 만들고, 複道를【複은 음이 복이니, 중복함이다. [頭註] 複道는 나무를 가설하여 길을 만들어서 庶民들과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고 天子만이 그 위로 다녔으며, 사사로운 길이 있는 곳에는 구멍을 내어 城門처럼 만들어서 백성들이 그 가운데로 왕래하였다.】 만들되 阿房宮으로부터 渭水를 건너가 咸陽에 연결하게 하니, 이는 天極(北極星)의 閣道星이 漢(은하수)을 건너 營室星에 이름을 형상한 것이었다.【營室은 별 이름이다. ≪史記≫ 〈天官書〉에 이르기를 “天極(북극성)의 紫微宮 뒤에 위치한 17개의 별이 은하수를 건너 營室星에 이른 것을 閣道라 한다.” 하였다. 閣道는 별 이름이니, 北斗星의 左輔이다.】

隱宮(宮刑)과 徒刑을 당한 자가【宮刑을 받은 자는 어두운 방에 있으므로 隱宮이라고 한 것이다. [釋義] 宮은 음란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니 男子는 거세하고 婦人은 幽閉하는 바, 사형의 다음 형벌이다. ≪史記正義≫에 “나머지 형벌은 市朝에서 보이게 하나 宮刑은 백일 동안 그늘진 방에 숨어서 요양해야 하므로 隱宮이라고 한 것이니, 蠶室에 가두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徒刑은 죄수로 노역하는 것이니, 죗값으로 徭役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이다.】 70여만 명이었으므로 마침내 이들을 나누어 阿房宮을 짓고 혹은 驪山을【驪山은 雍州 新豐 남쪽에 있으니, 옛날 驪戎國이다. 驪는 옛 음이 려인데, 혹은 음을 力知反(리)로 읽는다.】 만들게 할 적에 北山의 石槨을 파오고【아름다운 돌이 京兆의 北山에서 나오니, 石質이 세밀하여 棺槨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石槨이라 한 것이다.】【수레를 멈추고 말을 풀어놓는 것을 寫라고 하니, 혹은 卸로 되어 있다.】‧荊 지방의 재목을 실어와서 모두 이르니, 關中에【동쪽에는 函谷關이 있고 남쪽에는 嶢關과 武關이 있고 북쪽에는 蕭關이 있고 서쪽에는 散關이 있어, 네 관문의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關中이라 이름한 것이다.】 있는 궁궐을 세어보면 300개이고 關外에 있는 궁궐이 400여 개였다. 이에 東海 가에 있는 胊縣 경계 가운데에 돌을 세워 秦나라의 東門으로 삼고, 인하여 3만 가호를 驪邑에 이주시키고 5만 가호를 雲陽에 이주시켜 모두 부역을 면제하여【復은 그 賦役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10년 동안 일(부역)하지 않게 하였다.

侯生, 盧生이 相與譏議始皇하고 因亡去어늘 始皇이 聞之하고 大怒曰 盧生等을 朕이 尊賜之甚厚러니 今乃誹謗我로다 諸生在咸陽者를 吾使人廉問호니 或爲妖言하야 以亂黔首라하고 於是에 使御史御史로 悉按問諸生하니 諸生이 傳相告引하야 乃自除하니 犯禁者四百六十餘人이라 皆坑之咸陽하다 始皇長子扶蘇諫曰 諸生이 皆誦法孔子어늘 今上이 皆重法繩之하시니 臣은 恐天下不安일까하노이다 始皇이 怒하야 使扶蘇로 北監蒙恬軍於上郡하다

[史略 史評]廬陵劉氏曰 秦所以亡은 以立少子胡亥也요 胡亥所以得立은 以長子扶蘇在外也요 扶蘇所以在外는 以諫坑儒也라 然則秦亡之禍가 自坑儒始하니 天道亦昭昭哉인저

侯生盧生이 서로 始皇을 譏議(비난)하고 인하여 도망가니, 始皇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盧生 등을 朕이 높여 주고 하사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는데, 이제 마침내 나를 비방하는구나. 諸生諸生으로서 咸陽에 있는 자를 내가 사람을 시켜 염탐해 물어보니, 혹 요망한 말을 하여 백성을 어지럽힌다.” 하고, 이에 御史御史로 하여금 諸生諸生들을 모두 조사하여 묻게 하니, 諸生諸生들이 돌아가며 서로 끌어들여 고발해서 마침내 자신의 죄를 면제하였다. 그리하여 法禁을 범한 자가 460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咸陽에 파묻어죽였다.

始皇의 長子인 扶蘇가 간하기를 “諸生諸生들이 모두 孔子를 외고 본받는데 이제 上께서 모두 중한 법으로 다스리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해할까 두렵습니다.” 하자, 始皇이 노해서 扶蘇로 하여금 북쪽으로 蒙恬의 군대를 上郡에서 감독하게 하였다.

[史略 史評]廬陵劉氏(劉義眞)가 말하였다.

나라가 멸망한 까닭은 少子인 胡亥를 세웠기 때문이요, 胡亥가 설 수 있었던 까닭은 長子인 扶蘇가 외지에 있었기 때문이요, 扶蘇가 외지에 있었던 까닭은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는 것을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秦나라가 멸망한 화는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天道가 또한 분명하다 할 것이다.”

[辛卯]三十七年

[辛卯]三十七年이라

冬十月에 始皇이 出遊할새 左丞相左丞相從하고 少子胡亥最愛러니 請從이어늘 上이 許之하다 西至平原津【平原은 地名이라 水經云 濁河東北過高唐이라하니 按高唐卽平原이니 在河西라 漢置平原郡하야 屬靑州하니 今德州是라 】而病하야 秋七月丙寅에 始皇이 崩於沙丘平臺하다 丞相丞相爲上崩在外하니 恐諸公子公子及天下有變이라하야 乃秘之하야 不發喪하고 獨胡亥, 趙高及幸宦者五六人이 知之러라 趙高乃與丞相丞相謀하고 詐爲受始皇詔라하야 立胡亥爲太子太子하고 更爲書【更은 改也라 始皇至平原津而病하니 始皇惡言死하야 群臣莫敢言死라 病益甚한대 迺令中書府令으로 行符璽事하다 趙高爲書하야 賜扶蘇曰 與喪하야 會咸陽而葬하라하더니 未付使者하야 始皇崩이라 後에 趙高迺言斯曰 上賜長子書及符璽가 皆在胡亥所하니 定太子皆在君侯與高之口耳라 事將何爲오 斯曰 安得亡國之言고 非人臣所當議也니라 趙高固請하니 斯許之하야 更爲書하니라 】하야 賜扶蘇하야 數【謂以一二而記之라 】以不能闢地立功하고 上書誹謗하며 將軍將軍은 不矯正하니 知其謀라하야 皆賜死한대 扶蘇自殺이라 胡亥至咸陽하야 發喪襲位하고 九月에 葬始皇於驪山下하다

蘇東坡李斯始皇하야 定天下하니 不可謂不智라 扶蘇는 親始皇子니 秦人戴之久矣라 陳勝이 假其名하야도 猶足以亂天下하고 而蒙恬이 持重兵在外하니 使扶蘇不卽受誅而復請之면 則無遺類矣어늘 以之智로 而不慮此는 何哉오 曰 嗚呼라 秦之失道가 有自來矣니 豈獨始皇之罪리오 自商鞅變法으로 以誅死爲輕典하고 以參夷爲常法하야 人臣이 狼顧脅息【狼은 性㤼하야 走善回顧하니 言恐也요 脅息은 言不能息이라 】하야 以得死爲幸하니 何暇復請이리오 方其法之行也에 求無不獲하고 禁無不止하니 自以爲軼而駕矣러니 及其出亡而無所舍然後에 知爲法之弊하니 夫豈獨悔之리오 秦亦悔之矣리라 荊軻之變에 持兵者熟視始皇環柱而走하고 莫之救者는 以秦法重故也라 李斯之立胡亥에 不復忌扶蘇者는 知威令之素行하야 而臣子不敢復請也요 扶蘇之不敢請은 亦知始皇之鷙悍而不可回也니 豈料其僞也哉아 周公曰 平易近民이면 民必歸之라하시고 孔子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는 其恕矣乎인저하시니 夫以忠恕爲心하고 而以平易爲政이면 則上易知而下易達하야 雖有賣國之姦이라도 無所投其隙하야 倉卒之變이 無自發焉이라 然이나 其令行禁止는 蓋有不及商鞅者矣어늘 而聖人이 終不以彼易此라 商鞅이 立信於徙木하고 立威於棄灰하고 刑其親戚師傅하야 積威信之極하니 以及始皇하야는 秦人이 視其君을 如雷電鬼神하야 不可測也라 古者에 公族有罪면 三宥然後制刑이어늘 今至使人矯殺其太子太子而不忌하고 太子太子亦不敢請하니 則威信之過也라 故로 夫以法毒天下者는 未有不反中其身, 及其子孫者也니라

37년(신묘 B.C.210))

겨울 10월에 始皇이 나가 유람할 적에 左丞相左丞相李斯가 수행하고, 少子인 胡亥가 가장 총애를 받았는데 수행할 것을 청하자 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서쪽으로 平原津【平原은 지명이다. ≪水經≫에 이르기를 “濁河가 동북쪽으로 高唐을 지난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高唐이 바로 平原이니 河西에 있다. 漢나라 때 平原郡을 두어 靑州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德州가 이곳이다.】에 이르러 병이 들어 가을7월병인일에 始皇이 沙丘平臺에서 崩하였다. 丞相丞相李斯는 上의 승하가 밖에 있으니 여러 公子公子와 천하에 변란이 있을까 두렵다 하여, 마침내 이를 숨겨 喪을 발표하지 않고 다만 胡亥趙高 및 총애하는 宦官 5, 6명만이 이것을 알았다.

趙高가 마침내 승상 李斯와 모의하고 거짓으로 始皇의 詔命을 받았다 하여 胡亥를 세워 太子로 삼고, 다시 편지를 조작해서【更은 고침이다. 始皇이 平原津에 이르러 병이 드니, 始皇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여 신하들이 감히 죽음을 말하지 못하였다. 병이 더욱 심해지자 中書府令인 趙高로 하여금 符璽의 일을 맡게 하였다. 趙高가 始皇의 편지를 만들어 扶蘇에게 내리기를 “喪에 참여하여 咸陽에서 모여 장례하라.” 하였는데, 이 편지를 使者에게 주기 전에 始皇이 죽었다. 뒤에 趙高가 李斯에게 말하기를 “上께서 長子에게 내리신 편지와 符璽가 모두 胡亥의 처소에 있으니, 太子를 정하는 것은 君侯와 이 趙高의 입에 모두 달려 있습니다.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자, 李斯는 말하기를 “어찌 나라를 망칠 말을 한단 말인가. 이는 신하가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趙高가 굳이 청하자, 李斯가 이를 허락하여 편지를 고쳐서 만든 것이다.】扶蘇에게 내려 ‘땅을 개척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고 글을 올려 비방하였다.’고 數罪하였으며,【數는 〈죄목을〉 하나, 둘 세어서 열거함을 이른다.】 장군 蒙恬은 이것을 바로잡지 않았으니 그 計謀를 알았을 것이라 하여 모두 賜死하니, 扶蘇가 자살하였다. 胡亥가 咸陽에 이르러 喪을 발표하고 皇帝의 지위를 세습하고, 9월에 始皇을 驪山 아래에 장례하였다.

蘇東坡가 말하였다.

李斯始皇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지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扶蘇秦始皇의 친자식이니, 秦나라 사람들이 떠받든 지가 오래되었다. 陳勝이 그 이름만 빌리고서도 오히려 천하를 어지럽힐 수 있었고, 蒙恬이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밖에 있었으니, 만일 扶蘇가 죽임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청했더라면 李斯趙高는 남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李斯의 지혜로 이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 秦나라가 道를 잃은 것은 유래가 있으니, 이 어찌 다만 始皇의 죄이겠는가. 商鞅이 법을 변경한 뒤로부터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벼운 법으로 여기고 三族을 멸하는 것을 일상적인 법으로 여겨서, 신하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이리처럼 돌아보고 숨을 죽여【이리는 성질이 겁이 많아 달리면서 뒤를 잘 돌아보니, 狼顧는 두려움을 말한 것이고, 脅息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제대로 죽는 것을 요행으로 여겼으니, 어느 겨를에 다시 청하였겠는가. 그 법이 행해질 때에는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함이 없고 禁令이 그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商鞅은 스스로 을 능가하고 를 능가한다고 여겼는데, 도망하여 달아나서 머물 곳이 없음에 이른 뒤에야 자신이 만든 법의 폐단을 알았으니, 어찌 다만 商鞅만 후회하였겠는가. 秦나라 또한 후회했을 것이다.

荊軻의 변고에 병기를 잡고 있는 자가 秦始皇이 기둥을 잡고 빙빙 도는 것을 눈여겨 보고도 구원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秦나라의 법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李斯胡亥를 세울 적에 다시 扶蘇를 꺼리지 않았던 것은 위엄 있는 명령이 평소에 행해져서 臣子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요, 扶蘇가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한 것도 始皇이 사나워서 되돌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니, 어찌 거짓임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周公이 말씀하기를 ‘평이하게 하여 백성을 가까이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돌아온다.’ 하였고, 孔子가 말씀하기를 ‘한 마디 말로써 종신토록 행할 수 있는 것은 恕일 것이다.’ 하였으니, 忠恕를 마음으로 삼고 평이하게 정사를 한다면 윗사람이 알기 쉽고 아랫사람이 통달하기 쉬워서 비록 나라를 팔아먹는 奸臣이 있더라도 그 틈에 낄 곳이 없어서 창졸간의 변란이 말미암아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령이 행해지고 禁令이 그쳐짐은 商鞅에게 미치지 못함이 있었으나 그런데도 聖人이 끝내 저것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지 않았다. 商鞅이 나무를 옮기는 데에서 신의를 세우고 재[灰]를 버리는 데에서 위엄을 세우며 군주의 친척과 사부를 형벌하여 위엄과 신의를 지극히 쌓았는데, 始皇에 이르러서는 秦나라 사람들이 군주를 보기를 우레와 벼락과 귀신처럼 여겨서 측량할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公族이 죄를 저지르면 세 번 용서해 준 뒤에 형벌하였는데, 지금은 사람으로 하여금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태자를 죽이면서도 꺼리지 않고 태자 또한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위엄과 신의가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법으로써 천하에 해독을 끼치는 자는 해독이 도리어 자기 몸에 적중되고 그 자손에게 미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二世皇帝

名胡亥니 在位三年이요 壽二十四라

二世皇帝※ 名胡亥니 在位三年이요 壽二十四라

※ 繁刑重役하고 誅殺任情하야 罪盈怨積하여 而天下叛之라 在位三年에 爲趙高所殺하고 立子爲王이러니 凡四十六日而降于漢하니라

二世皇帝※는 이름이 胡亥이니, 재위가 3년이고 壽가 24세이다.

※ 二世皇帝는 형벌을 많이 내리고 부역을 무겁게 하며 형벌하고 죽이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죄가 가득 차고 원망이 쌓여서 천하가 배반하였다. 그리하여 在位 3년 만에 趙高에게 죽임을 당했고, 子嬰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모두 46일 만에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壬辰]元年

[壬辰]元年이라

春에 二世東行郡縣하고 夏至咸陽하야 謂趙高曰 人生世間이 譬猶騁六驥過決隙也라 吾欲悉耳目之所好하고 窮心志之所樂하야 以終吾年壽하노니 可乎아 趙高曰 陛下嚴法而刻刑하사 盡除先帝之故臣하시고 更置陛下之所親信하시면 則高枕肆志寵樂矣리이다 二世然之하야 乃更爲法律하야 務益刻深하니 大臣大臣諸公子公子有罪면 輒僇死러라 〈出李斯傳〉

元年(임진 B.C.209))

봄에 二世가 동쪽으로 郡縣을 순행하고 여름에 咸陽에 이르러 趙高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비유하면 여섯 필의 驥馬를 달려 작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빠르다. 나는 귀와 눈의 좋아하는 바를 다하고 마음과 뜻의 즐거워하는 바를 다하여 나의 年壽(수명)를 마치고자 하니, 이것이 可하겠는가?” 하니, 趙高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까다롭게 하여 先帝의 옛 신하들을 모두 제거하시고, 폐하께서 친애하고 믿는 사람으로 바꾸어 두신다면 베개를 높게 하고 마음을 펴고 영광과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二世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법률을 변경하여 되도록 더욱 까다롭고 심하게 하니, 大臣大臣과 公子公子들이 죄가 있으면 번번이 죽음을 당하였다. - 《史記 李斯傳》에 나옴 -

○ 復作阿房宮할새 盡徵材士【有材多力之士也라 】五萬人하야 屯衛咸陽하다

다시 阿房宮을 지을 적에 才士【재주가 있고 힘이 많은 용사이다.】 5만 명을 징발해서 咸陽에 주둔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 秋에 陽城陳勝과 陽夏人吳廣이 起兵於蘄하다 是時에 發閭左하야 戍漁陽【王氏曰 閭左는 言居閭里之左也라 秦時에 復除者居閭左러니 今力役煩하야 在閭左者를 盡發之也라 一說에 所在에 以富强爲右하고 貧弱爲左하니 秦役戍多하야 富者役盡일새 兼取貧者發之라 戍者는 屯兵而守也라 漁陽은 幽州漁陽郡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檀州密雲縣南十八里漁水之北하니 今薊州是라 】할새 九百人이 屯大澤鄕【在沛郡蘄縣이라 】하고 , 【勝은 姓陳이요 字涉이며 廣은 姓吳요 字叔이라 】이 皆爲屯長屯長【屯은 猶營也니 每營에 置將卒하니라 】이러니 會에 天大雨하야 道不通이라 度已失期하고 乃召令徒屬曰 公等이 皆失期하니 當斬이라 且壯士不死則已어니와 死則擧大名耳니 王王侯侯將將相相이 寧有種乎아한대 衆이 皆從之하다 乃詐稱公子公子扶蘇, 項燕【公子扶蘇는 始皇長子也니 (今)[令]聞無罪러니 而二世殺之하야 百姓未知其死하고 項燕은 楚之良將也니 或以爲死라하고 或以爲亡이라 今故詐自稱二人하야 以爲天下倡이라 】하고 爲壇而盟하야 稱大楚하고 이 自立爲將軍將軍하고 이 爲都尉都尉하야 入據陳하다 〈出陳涉傳〉

가을에 陽城 사람 陳勝과 陽夏 사람 吳廣이 蘄 땅에서 起兵(군대를 일으킴)하였다. 이때 閭左까지 징발하여 漁陽에 수자리 살게 할 적에【王氏가 말하였다. “閭左는 閭里의 왼쪽에 거하는 자들을 말한다. 秦나라 때에 〈가난하여〉 부역을 면제받은 자들은 閭左에 거하였는데, 이제 力役이 번거로워 閭左에 있는 자들까지 모두 징발한 것이다. 一說에 거주하는 곳이 부유하고 강한 자를 右라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左라 하니, 秦나라가 부역과 수자리 살러 가는 자가 많아서 부유한 자들의 力役이 다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까지 겸하여 징발한 것이라 한다. 戍는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는 것이다. 漁陽은 幽州의 漁陽郡이다. ≪括地志≫에 ‘옛 城이 檀州 密雲縣 남쪽 18리 되는 漁水의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薊州가 이곳이다.”】 900명이 大澤鄕【大澤鄕은 沛郡 蘄縣에 있다.】에 주둔하고 陳勝과 吳廣이【勝은 姓이 陳이고 字가 涉이며, 廣은 姓이 吳이고 字가 叔이다.】 모두 屯長【屯은 營과 같으니, 매 營마다 將卒을 두었다.】이 되었는데, 마침 날씨가 큰비가 내려 길이 통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이미 기한을 놓쳤음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徒屬을 불러 명령하기를 “公 등이 모두 기한을 놓쳤으니, 마땅히 斬刑에 처해질 것이다. 또 壯士가 죽지 않으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날려야 하니, 王侯와 將相이 어찌 種子가 있겠는가?” 하니, 무리들이 모두 따랐다.

마침내 자기들이 公子公子扶蘇項燕이라고 사칭하고는【公子 扶蘇는 始皇의 長子이니, 지금 扶蘇가 훌륭한 명성이 있고 죄가 없는데 二世가 그를 죽여서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고, 項燕은 楚나라의 훌륭한 장수이니 혹은 죽었다고 하고 혹은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이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을 사칭하여 天下의 倡導로 삼은 것이다.】 壇을 만들어 맹세하고 國號를 大楚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陳勝이 스스로 서서 將軍將軍이 되고 吳廣이 都尉都尉가 되어 陳 땅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史記 陳涉世家》에 나옴 -

陳中父老 請立楚王이어늘 張耳, 陳餘曰 秦爲無道하야 暴虐百姓일새 將軍이 出萬死之計하야 爲天下除殘이어늘 今始至陳而王之면 示天下私라 願將軍은 毋王하고 急引兵而西하야 遣人立六國後하야 自爲樹黨하야 爲秦益敵하소서 敵多則力分이요 與衆【黨與衆多也라 】則兵强이니 誅暴秦하고 據咸陽하야 以令諸侯면 則帝業이 成矣리이다 이 不聽하고 自立爲王하니 諸郡縣이 苦秦法하여 爭殺長吏하고 以應이러라 〈出陳餘傳〉

陳 땅의 父老들이 陳涉(陳勝)楚王으로 세울 것을 청하자, 張耳陳餘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무도한 짓을 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였으므로 장군(陳勝)이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천하를 위해 잔인한 자들을 제거하려 하는데, 이제 처음으로 陳 땅에 이르러 왕 노릇 하면 천하에 私心을 보이는 것이니, 원컨대 장군은 왕이 되지 말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사람을 보내어 六國의 후손을 세워 스스로 黨을 심어 秦나라에 적이 더 많아지게 하십시오. 적이 많아지면 〈秦나라의〉 힘이 분산되고 黨與(同類)가 많아지면【與衆은 黨與가 많은 것이다.】 우리 군대가 강해질 것이니, 포악한 秦나라를 주벌하고 咸陽을 점거하여 諸侯들을 명령한다면 皇帝의 基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陳涉이 듣지 않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니, 여러 郡縣들이 秦나라 법을 괴롭게 여겨서 다투어 長吏(지방 장관)를 죽이고 陳涉에게 호응하였다. - 《史記 陳餘傳》에 나옴 -

○ 謁者使라가 從東方來하야 以反者聞이어늘 二世怒하야 下之吏러니 後使者至에 上問之한대 對曰 群盜는 鼠竊狗偸니 不足憂也니이다 上이 悅하다

謁者가 使者使者로 나갔다가 東方으로부터 와서 모반한 자가 있다고 아뢰자, 二世가 노하여 그 使者使者를 獄吏에게 회부시켰다. 뒤에 使者使者가 이르자 上(二世)이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여러 도적들은 쥐가 도둑질하고 개가 도둑질하는 정도이니,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陳王이 以陳人武臣으로 爲將軍하고 以張耳, 陳餘로 爲左右校尉左右校尉하야 予卒二千人하야 徇趙【略地曰徇이니 謂行而取之也라 】하고 使周文【史記에 作周章이라 】으로 西擊秦하다 武臣等이 行收兵하야 得數萬人이라 號武臣爲武信君이라하고 下趙三十餘城하다 八月에 武信君이 自立爲趙王하다 〈出武臣傳〉

陳王(陳勝)이 陳 땅 사람 武臣을 將軍將軍으로 삼고張耳陳餘를 左右 校尉左右 校尉로 삼아 兵卒 2천 명을 주어서 趙 지방을 순행하게 하고,【땅을 經略함을 徇이라 하니, 순행하여 취함을 이른다.】 周文을【周文은 ≪史記≫에는 周章으로 되어 있다.】 시켜 서쪽으로 秦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武臣 등이 지방을 순행하며 병력을 거두어 수만 명을 얻었다. 이에 武臣을 이름하여 武信君이라 하고趙 지방의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에 武信君이 스스로 서서 趙王이 되었다.- 《史記 張耳陳餘傳》에 나옴 -

○ 九月에 沛人劉邦王氏曰 漢高本紀에 作沛豐邑人하니 沛는 今徐州縣이라 漢改泗水爲沛하니 郡治相城이라 】은 起兵於沛하고 下相人項梁은 起兵於吳하고 狄人田儋은 起兵於齊하다

9월에 沛郡 사람 劉邦王氏가 말하였다. “≪漢書≫〈高帝紀〉에 沛郡豐邑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沛는 지금의 徐州縣이다. 漢나라가 泗水郡을 고쳐 沛郡이라고 하였으니 郡의 治所는 相城이다.”】沛郡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下相 사람 項梁은 吳縣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狄 땅 사람 田儋은 齊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劉邦은 字니 爲人이 隆準龍顔王氏曰 準은 鼻也니 音은 準的之準이라 顔은 額顙也니 謂之龍顔은 見其非凡이라 】이요 左股에 有七十二黑子【赤帝七十二日之數也라 木火土金水 各一方이니 一歲三百六十日을 四方分之하면 各得九十日이요 土居中하야 竝索四季各十八日하면 俱成七十二日이라 故高祖七十二黑子者는 應火德七十二日之徵也니 黑子는 卽黶子也라 】하고 愛人喜施班固漢紀云 寬仁愛人이라 】하야 意豁如也하고 常有大度하야 不事家人生産作業이러라

劉邦은 字가 이니, 사람됨이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이마)이고,【王氏가 말하였다. “準은 코이니, 음은 準的의 準(준)이다. 顔은 이마이니, 이를 일러 龍顔이라 한 것은 비범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 넓적다리에 72개의 黑子(검은 사마귀)가【72개의 黑子는 赤帝 72일의 數이다. 木‧火‧土‧金‧水가 각각 한 方位이니, 1년 360일을 四方으로 나누면 각각 90일을 얻고, 土가 중앙에 거하여 四時의 마지막 달 각 18일을 아울러 얻으면 모두 72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高祖에게 있는 72개의 黑子는 火德 72일에 응하는 징조이니, 黑子는 곧 검은 사마귀이다.】 있었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班固의 ≪漢書≫〈高帝紀〉에는 ‘寬仁愛人(관대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으로 되어 있다.】 뜻이 활달하였으며 항상 큰 도량이 있어서 집안 사람의 産業(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史記本紀에 曰 常(嘗)繇咸陽할새 縱觀秦皇帝하고 喟然太息曰 嗟乎라 大丈夫【周制에 八寸爲尺이요 十尺爲丈이니 人長八尺이라 故曰丈夫라 詩疏에 夫有傅相之德而可倚仗을 謂之丈夫라하고 易師卦丈人註에 尊嚴之稱이라하니라 】當如此矣라하더라

《史記》〈項羽本紀〉에 이르기를 “일찍이 咸陽에서 부역할 적에 秦나라 皇帝를 마음껏 구경하고 탄식하여 크게 한숨 쉬며 ‘아! 대장부는【周나라 制度에 8寸을 尺이라 하고 10尺을 丈이라 하였으니, 남자의 身長이 8尺이므로 丈夫라고 하였다. ≪詩經疏≫에는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만한 德이 있어서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자를 일러 丈夫라 한다.” 하였고, ≪周易≫ 師卦의 丈人 註에는 “尊嚴함의 칭호이다.” 하였다.】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했다.” 하였다.

○ 單父人呂公【濟陰單父縣이니 音善甫니 今縣屬濟寧路單州라 索隱曰 呂公은 史失其名이라 又相經云 魏人也니 名文이요 字淑平이라 】이 好相人이러니 見狀貌하고 因重敬之하야 曰 臣이 相人多矣로되 無如相하니 願는 自愛하라 臣有息女【息은 生也니 己所生女也라 】하니 願爲箕帚妾하노라하고 卒與劉季하니 乃呂后也러라

單父 사람 呂公이單父는 濟陰單父縣으로 음이 선보이니, 지금 縣이 濟寧路單州에 속하였다. ≪史記索隱≫에 “呂公은 史策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였고, 또 ≪相經≫에 이르기를 “魏나라 사람이니, 이름이 文이고 字가 淑平이다.” 하였다.】 사람의 相을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劉季의 狀貌(모습)를 보고 인하여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여 말하기를 “臣이 많은 사람을 관상 보았으나 의 相과 같은 이는 없었으니, 는 自重自愛하십시오. 臣이 女息이【息은 낳는다는 의미이니, 息女는 자기 所生의 딸이다.】 있으니 箕帚(청소)하는 妾으로 삼아주기를 원합니다.” 하고 마침내 劉季에게 주니, 그녀가 바로 呂后이다.

秦始皇帝常(嘗)曰 東南에 有天子氣【晉天文志에 天子氣는 內赤外黃하니 所發之處에 當有王者라 若天子欲游往處엔 其地亦先發此氣하니 或如城門하야 隱隱在氛霧中하고 或如龍馬雜色하야 鬱鬱衝天者하니 皆帝王氣라 】라하야 於是에 因東游以厭(壓)之어늘 卽自疑亡匿하야 隱於芒, 碭山澤間【碭은 音唐이요 又音宕이라 芒縣은 屬臨淮郡하고 碭縣은 屬梁國하니 二縣之界에 有山澤之固라 故隱其間이라 按今歸德府秦碭郡也라 】이러니 呂后與人俱求에 常得之라 怪問之한대 呂后所居上에 常有雲氣라 故로 從往이면 常得라하니 沛中子弟聞之하고 多欲附者러라

秦始皇帝가 일찍이 말하기를 “東南 지방에 天子의 기운이【≪晉書≫〈天文志〉에 “天子의 기운은 안은 붉고 밖은 누르니, 천자의 기운이 발하는 곳에는 마땅히 王者가 있게 된다. 만약 天子가 가고자 하면 그곳에도 또한 이 기운이 먼저 나타나니, 혹은 城門이 은은하게 안개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龍馬나 뒤섞인 색깔과 같아서 성대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기도 하니, 이는 모두 帝王의 기운이다.” 하였다.】 있다.” 하여, 이에 동쪽 지방을 유람해서 그 기운을 누르려 하였다. 劉季가 즉시 스스로 의심하고 도망해 숨어서 芒縣과 碭縣의 山과 늪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碭은 음이 당이고, 또 다른 음은 탕이다. 芒縣은 臨淮郡에 속하고 碭縣은 梁國에 속하니, 두 縣의 경계에 산과 늪이 험고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숨은 것이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歸德府秦碭郡이다.】呂后가 사람과 함께 찾으면 항상 찾아내곤 하였다. 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呂后가 말하기를 “가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구름 기운이 있기 때문에 따라가면 항상 를 찾아냅니다.” 하니, 沛縣 가운데의 자제들이 이 말을 듣고 따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初에 爲泗上亭長泗上亭長【亭者는 停留니 行旅宿食處니 猶今之館驛也라 秦法에 十里一亭이요 亭置長하야 督盜賊하니 泗水亭은 在沛縣東百步라 】하야 爲縣送徒驪山【時에 始皇葬驪山하니 郡縣이 皆送徒하야 土役作하니라】【徒는 卽徒刑이라】 이러니 徒多道亡이라 自度比至에 皆亡之하고 乃解縱所送徒曰 公等은 皆去하라 吾亦從此逝矣라하니 徒中壯士願從者十餘人이러라

처음에 泗上亭長泗上亭長이 되어【亭은 멈추어 머무는 것으로 나그네가 숙식하는 곳이니, 지금의 館驛(驛舍)과 같다. 秦나라의 法에 10里마다 1亭이 있고 亭에는 長을 두어 도적을 감독하였으니, 泗水亭은 〈沛郡의〉 沛縣 동쪽 100보 되는 곳에 있었다.】 縣을 위해 徒刑을 받은 무리를 驪山으로 호송하였는데,【[釋義] 이때에 始皇을 驪山에 장례하니, 郡縣에서 모두 徒刑(노역에 종사하는 형벌)을 받은 자를 보내어 土役을 하였다.】【[頭註] 徒는 바로 徒刑이다.】 무리들이 도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도착할 때에 이르면 이들이 모두 도망할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마침내 호송하던 무리들을 풀어 놓아주며 말하기를 “公들은 모두 떠나가라. 나 또한 여기서부터 가겠다.” 하니, 무리 가운데 壯士로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10여 명이었다.

劉季被酒【謂爲酒所加被也라 】하야 夜徑澤中【徑은 小道也니 從小道而行하야 過於澤中이라 一說에 徑은 斜過也라 】할새 有大蛇當徑이어늘 拔劍斬蛇하다 後人이 來至蛇所하니 有老嫗夜哭曰 吾子는 白帝子【秦以居西戎하야 主少昊之神하고 作西疇하야 祠白帝하니라 】也라 化爲蛇하야 當道러니 今赤帝子【赤帝는 謂漢也니 漢承堯緖하야 爲火德也라 】斬之吾子……今赤帝子斬之라하고 嫗因忽不見이어늘 後人이 告劉季한대 乃心獨喜自負하고 諸從者日益畏之러라

劉季가 술에 취하여【被酒는 술에 사역 당함을 이른다.】 밤에 작은 길을 따라 늪 가운데를 지나는데,【徑은 작은 길이니, 작은 길을 따라서 늪 가운데를 지나간 것이다. 一說에 徑은 비스듬히 지나가는 것이라 한다.】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므로 劉季가 검을 뽑아 뱀을 베었다. 뒷사람이 오다가 뱀이 있는 곳에 이르니, 늙은 할미가 밤에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白帝의 아들이다.【秦나라는 西戎에 거하여 少昊의 神을 받들고 西疇를 만들어 白帝를 제사하였다.】 변하여 뱀이 되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이제 赤帝의 아들【赤帝는 漢나라를 이르니, 漢나라는 堯임금의 전통을 이어 火德이다.】이 베었다.” 하고는 할미가 인하여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뒷사람이 이 사실을 劉季에게 알리니, 劉季는 마침내 마음에 홀로 기뻐하여 자부하였고 여러 따르는 자들이 날로 더욱 敬畏하였다.

○ 及陳涉起에 沛令이 欲以沛應之어늘 掾主吏掾主吏【參爲獄掾하고 何爲主吏하니 謂分部列局之吏也라 史는 掌書者也요 吏는 治人者也니 治人之心이 主於一故로 吏字從一從史하니라 】蕭何, 曹參曰 君爲秦吏하야 今欲背之하고 率沛子弟하면 恐不聽이니 願君은 召諸亡在外者면 可得數百人하리니 因劫衆이면 衆不敢不聽이리이다 乃令樊噲로 召劉季하니 時에 劉季之衆이 已數十百人矣라 沛令이 後悔어늘 父老乃率子弟하야 共殺沛令하고 開門迎劉季하야 立以爲沛公【春秋時에 楚僭稱王하야 其大夫多封縣公하니 今立高祖爲沛公은 用楚制也라 】하고 旗幟를 皆赤하니 由所殺蛇者赤帝子故也라 , 等이 爲收沛子弟하야 得三千人하야 以應諸侯하다 〈已上 竝出史記高祖本紀〉

陳涉이 군사를 일으키자, 沛令沛令(沛縣의 현령)이 沛縣을 가지고 호응하고자 하였다. 掾主吏【曹參은 獄掾이 되고 蕭何는 主吏가 되었으니, 部를 나누고 局을 나열하는 관리를 이른다. 史는 문서를 관장하는 자이고 吏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이니, 사람을 다스리는 자의 마음은 하나를 주장하기 때문에 ‘吏’자가 ‘一’을 따르고 ‘史’를 따른 것이다.】蕭何曹參이 말하기를 “君께서 秦나라 관리가 되어 이제 秦나라를 배반하고 沛縣의 자제를 거느리고자 하면 이들이 듣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君께서 도망하여 밖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부르면 수백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들을〉 인하여 여러 사람들을 위협하면 사람들이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樊噲로 하여금 劉季를 부르게 하니, 이때 劉季의 무리가 이미 수십 백 명이었다. 沛令沛令이 후회하자 父老들이 마침내 子弟들을 거느리고 함께 沛令沛令을 죽이고 문을 열어 劉季를 맞이하여 그를 세워서 沛公으로 삼았다.【春秋時代에 楚나라가 王의 칭호를 僭稱하여, 大夫들을 縣의 公에 많이 봉하였으니, 지금 高祖를 세워 沛公이라 함은 楚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旗幟를 모두 赤色으로 하였으니, 이는 뱀을 죽인 자가 赤帝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蕭何曹參 등이 劉邦을 위하여 沛縣의 子弟를 거두어 3천 명을 얻어서 제후에게 호응하였다.- 이상은 모두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項梁者는 楚將項燕의 子也라 嘗殺人하고 與兄子으로 避仇吳中이러니 이 少時에 學書不成去하고 學劍又不成이어늘 項梁이 怒之한대 曰 書는 足以記名姓而已요 劍은 一人敵이라 不足學이니 學萬人敵하노이다 於是에 項梁이 乃敎兵法하다 이 長八尺餘요 力能扛鼎하고 才氣過人이러라 會稽守會稽守殷通이 聞陳涉起하고 欲發兵以應하야 使項梁將이어늘 이 乃使으로 拔劍斬守頭하고 佩其印綬【古者에 授官賜印〈綬〉하야 常佩於身이요 解官이면 解印綬러니 至唐에 始〈置〉職印하야 任其職者傳而用之하야 藏之以匣하고 當官者寘之於臥內하니라 】하니 門下大驚擾亂이러니 所擊殺이 數十百人【不定數也니 自百以下或至八十九十也라 】이라 一府中이 皆慴伏하야 莫敢起러라 이 乃擧吳中兵하고 使人收下縣【會稽管下諸縣이라 】하야 得精兵八千人하다 爲會稽守會稽守하고 爲裨將하야 徇下縣하니 이 是時에 年二十四러라 〈史項羽本紀〉

項梁이란 자는 楚나라 장수項燕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형의 아들項籍(項羽)과 함께 吳中에서 원수를 피하였다. 項籍은 젊었을 때에 글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고, 검술을 배웠으나 또 이루지 못하자 項梁이 노하였는데, 項籍이 말하기를 “글은 이름과 성을 기록하면 족할 뿐이요, 검술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만 사람을 대적하는 兵法을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項梁이 마침내 項籍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項籍은 신장이 8척이 넘고 힘이 九鼎을 들었으며 才氣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會稽守會稽守殷通陳涉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내어 陳涉에게 호응하고자 하여 項梁을 장수로 삼았다. 項梁이 마침내 項籍으로 하여금 검을 뽑아 太守太守의 머리를 베게하고 그 印綬를 차니,【옛날에 관직을 제수하면 印綬를 하사하여 항상 몸에 찼으며, 관직을 해임하면 印綬를 풀었는데, 唐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職印을 두어 그 직임을 맡은 자가 전해가면서 사용하여 갑 속에 보관하였으며 관직을 맡은 자가 이것을 臥內에 두었다.】 門下가 크게 놀라 어지러웠다. 項籍이 쳐죽인 자가 수십 백 명이나 되니,【數十百人은 정해지지 않은 수이니, 100부터 이하로 혹 80과 90에 이르는 것이다.】 온 府中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項梁이 마침내 吳中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고 사람을 시켜 下縣(管下의 縣)【下縣은 會稽 管下에 있는 여러 현이다.】을 거두어 정예병 8천 명을 얻었다. 項梁은 會稽守會稽守가 되고은 裨將裨將이 되어 下縣을 순행하니,이 이때 24세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田儋者는 故齊王族也라 自立爲齊王【儋은 古齊王族也라 從弟榮及橫이 皆豪健得人하다 儋死에 子市立이러니 項羽徙田市하야 爲膠東王하고 而立齊將田都하야 爲齊王한대 榮怒하야 擊都走之하고 留市하야 不令之膠東하다 市畏羽하야 亡之膠東한대 榮又怒하야 追殺之하고 而自立爲齊王하니라】하고 率兵東하야 略定齊地하다

田儋이란 자는 옛 齊나라 왕족이었다. 스스로 서서 齊王이 되고【田儋은 옛날 齊나라의 王族이었다. 從弟인 榮과 橫이 모두 豪健하여 민심을 얻었다. 田儋이 죽자 아들 田市가 섰는데, 項羽가 田市를 옮겨 膠東王으로 삼고 齊나라 장수 田都를 세워 齊王으로 삼자, 田榮이 노하여 田都를 공격해서 패주시키고 田市를 만류하여 膠東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田市가 項羽를 두려워하여 膠東으로 도망가자 田榮이 다시 노하여 쫓아가 그를 죽이고 스스로 서서 齊王이 되었다.】 군대를 인솔하여 동쪽으로 가서 齊 지방을 공략하여평정하였다.

韓廣이 自立爲燕王하다 ○ 周市魏公하야 爲魏王하다

韓廣이 스스로 서서燕王이 되었다.

周市가 魏나라 公子公子를 세워魏王으로 삼았다.

[癸巳]二年

[癸巳]二年이라

二世數誚讓李斯호되 居三公三公位하야 如何令盜如此오 李斯恐懼하야 乃阿二世意하야 以書對曰 賢主는 必能行督責之術하야 以獨斷於上하나니 群臣百姓이 救過不給이어니 何變之敢圖리잇고 二世說(悅)하야 於是에 行督責益嚴하야 稅民深者를 爲明吏하고 殺人衆者를 爲忠臣이라하니 刑者相半於道하고 而死人이 日成積於市라 秦民이 益駭懼思亂이러라 〈出李斯傳〉

2년(계사 B.C.208)

二世皇帝가 자주 李斯를 꾸짖기를 “三公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도적들로 하여금 이렇게 성하게 하는가?” 하니, 李斯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二世의 뜻에 아첨하여 글로써 대답하기를 “어진 군주는 반드시 督責하는 방법을 잘 행하여 홀로 위에서 결단합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자신의 과실을 구원하기에도 여유가 없으니, 어찌 변란을 감히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二世가 기뻐하여 이에 督責을 행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는 자를 현명한 관리라 하고 사람을 죽이기를 많이 하는 자를 충신이라 하니, 형벌받은 자가 길 가는 사람 중에 반이나 되었고 죽은 사람이 날마다 시장에 쌓였다. 秦나라 백성들이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여 반란할 것을 생각하였다.- 《史記 李斯傳》에 나옴 -

○ 趙將李良이 襲殺趙王이어늘 張耳, 陳餘【張耳, 陳餘一體러니 而羽徙趙王歇하야 爲代王하고 分趙地하야 立張耳爲常山王하다 餘不得封하고 怒하야 乃說齊王榮하야 擊常山하고 復趙王하야 以趙爲捍蔽하니 齊王許之하고 遣兵助之하다 時에 彭越이 在鉅野하야 有衆萬餘호되 無所屬이러니 榮與越將軍印하야 使擊楚하고 收魏地하니 魏는 卽梁也라】收散兵擊하고 乃求趙後하야 立趙趙王하다

趙나라 장수 李良趙王(武臣)을 습격하여죽이자, 張耳와 陳餘가【張耳와 陳餘는 본래 한 몸이었는데, 項羽가 趙王 歇을 옮겨 代王으로 삼고 趙나라 땅을 나누어 張耳를 常山王으로 봉하였다. 陳餘는 봉함을 받지 못하고는 노해서 마침내 齊王 田榮을 설득하여 常山王 張耳를 공격하고 趙王(趙歇)을 복위시켜 趙나라로써 齊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을 청하니, 齊王이 허락하고 군대를 보내어 그를 도왔다. 이때 彭越이 鉅野에 있어 병력 만여 명을 보유하였으나 소속된 곳이 없었는데, 田榮이 彭越에게 將軍의 印을 주어 楚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魏나라 땅을 거두게 하니, 魏나라는 곧 梁나라이다.】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李良을 공격하고 마침내 趙나라 후손을 구하여趙歇을 세워 趙王으로 삼았다.

二世益遣司馬, 董翳하야 佐章邯擊盜하니 陳王이 敗走어늘 其御莊賈陳王以降하다

二世司馬欣董翳를 더 보내어 章邯을 도와 도둑을 치게 하니, 陳王(陳勝)이 패주하였다. 그 마부인 莊賈陳王을 죽이고항복하였다.

○ 陳人秦嘉起兵 於郯【音談이라 東海郯縣이니 古郯國也니 今海寧州是라 】이러니 聞陳王軍敗하고 乃立景駒楚王하다 景駒在留【地名이라 漢置留城縣이러니 今廢爲鎭하고 屬徐州彭城縣하니 在沛縣東南五十里라 張良封留 卽此라 】沛公이 往從之러니 張良이 亦聚少年百餘人하야 道遇沛公【沛公이 以良爲廐將하니 廐將은 卽掌馬之官名也라 】하야 遂屬焉하다 이 數以太公兵法【太公은 姓姜이요 名牙니 蓋牙(太)[本]是字요 尙是名也라 其先祖封呂하니 從其封姓이라 故曰呂尙이라 文王出獵而遇之하야 載與俱歸하야 立爲師하고 言 吾先君太公이 望子久矣라하고 因號太公望하다 太公兵法은 一帙三卷이라 】으로 說沛公하니 沛公이 善之하야 常用其策이라 이 爲他人言에 皆不省하니 沛公은 殆天授라 故로 遂從不去라하더라 〈出本傳〉

陳 땅 사람 秦嘉가 郯에서【郯은 음이 담이다. 東海郡의 郯縣으로 옛날의 郯國이니, 지금의 海寧州가 이곳이다.】起兵하였는데, 陳王의 군대가 패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景駒를 세워楚王으로 삼았다. 景駒가 留【留는 지명이다. 漢나라 때 留城縣을 두었는데, 지금 폐하여 鎭을 만들고 徐州 彭城縣에 소속시키니, 沛縣의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張良을 留에 봉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땅에 있을 적에 沛公이 가서 따랐는데, 張良 또한 소년 100여 명을 모아 도중에서 沛公을 만나【沛公이 張良을 廐將으로 삼으니, 廐將은 곧 말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다.】 마침내 그에게 소속하였다. 張良이 자주 太公의 兵法을 가지고【太公은 姓이 姜이고 이름이 牙이니, 아마도 牙는 본래 字이고 尙이 이름인 듯하다. 그 先祖가 呂 땅에 봉해지니 그 封地를 따랐기 때문에 呂尙이라 한 것이다. 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呂尙을 만나 수레에 태우고 함께 돌아와 스승으로 삼고는 말하기를 “우리 先君인 太公(太王)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하고 인하여 太公望이라고 이름하였다. 太公의 兵法은 1帙 3卷이다.】沛公을 설득하니, 沛公이 그를 좋게 여겨 항상 그의 계책을 따랐다. 張良이 다른 사람에게 계책을 말할 적에는 모두 거들떠보지 않으니, 張良이 말하기를 “沛公은 아마도 하늘이 내려 주신 듯하다. 그러므로 마침내 따르고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項梁이 以八千人으로 渡江而西하다 ○ 黥布【布坐黥하야 論輸驪山이러니 亡之江中하야 爲群盜하다 番陽吳芮 甚得江湖心하야 其衆이 已數千人이러니 芮乃以女妻하고 使將其兵擊秦하니라 】者는 六人也니 姓英氏【夏紀에 封皐陶之後於英, 六하니 以英布是此苗裔라 正義曰 英은 蓋蓼字라 括地云 光州固始縣이 春秋蓼國也라 又志云 故六城은 在安豐西南百三十二里라 】라 亡之江中하야 爲群盜러니 聞項梁渡淮하고 引兵屬焉하다

項梁이 8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黥布【黥布가 刺字하는 죄에 걸려 논죄되어 驪山으로 보내졌는데, 도중에 도망하여 揚子江의 섬으로 가서 도적떼가 되었다. 番陽의 吳芮는 江湖 지방의 인심을 크게 얻어 무리가 이미 수천 명이었는데, 吳芮가 마침내 딸을 黥布에게 시집보내고 그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서 秦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자는 六 땅 사람이니, 姓이 英氏이다.【≪史記≫ 〈夏本紀〉에 皐陶의 후손을 英과 六에 봉하였다 하였으니, 英布는 바로 그 苗裔(먼 후손)이다. ≪史記正義≫에 말하였다. “英은 아마도 蓼字인 듯하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光州 固始縣이 春秋時代 蓼國이다.’ 하였고, 또 ≪括地志≫에 이르기를 ‘옛날 六城이 安豐 서남쪽 132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揚子江의 섬 가운데로 도망하여 도둑떼가 되었는데, 項梁이 淮水를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병력을 인솔하여 그에게 속하였다.

項梁이 衆至六七萬人이라 軍下邳하고 進擊秦嘉, 景駒하야 殺之하다 ○ 沛公이 往見한대 이 予沛公卒五千人하다 ○ 項梁이 使項羽로 別攻襄城하니 襄城이 堅守不下라 已拔에 皆坑之하다

項梁의 군대가 6, 7만 명에 이르렀다. 下邳에 주둔하고진격하여秦嘉景駒를 공격하여죽였다.

沛公이 찾아가項梁을 보니, 項梁沛公에게 병졸 5천 명을 주었다.

項梁項羽를 시켜 별도로 襄城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襄城이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성을 함락한 뒤에 〈項羽가〉 고을 사람들을 모두 묻어죽였다.

이 聞陳王死하고 召諸別將하야 會薛計事할새 沛公이 亦往焉하다 居鄛人范增【鄛는 音勦絶之勦라 然今皆用單巢字하야 讀爲鉏交反이라 地志에 廬江有居鄛縣하니 今無爲州의 巢縣이 是也라 〈荀悅 〉漢紀에 范增은 阜陵人이라 】이 年七十이라 素居家하야 好奇計러니 往說項梁陳勝이 首事【最先起兵也라 】에 不立楚後而自立하니 其勢不長이라 今君이 起江東에 楚蠭(蜂)起【言起兵者衆하야 如蜂之飛起也라 】之將이 皆爭附君者는 以君世世楚將楚將하야 能復立楚之後也라한대 於是에 項梁이 然其言하야 乃求得楚懷王【心은 名也니 楚懷王槐之孫이라 】하야 立以爲楚懷王하니 從民望也【懷王槐入秦한대 秦人留之하야 薨於秦하니 今順民望하야 以其祖諡爲號하니라 】러라 〈出史記項羽紀〉

項梁陳王이 참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別將別將들을 불러 薛 땅에 모여 일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沛公도 가서 참여하였다. 居鄛 사람 范增【鄛는 음이 勦絶의 초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巢字만을 사용하여 鉏交反(소)라고 읽는다. ≪漢書≫ 〈地理志〉에 “廬江郡에 居鄛縣이 있다.” 하였으니, 지금 無爲州의 巢縣이 이곳이다. 荀悅의 ≪漢紀≫에 “范增은 阜陵 사람이다.” 하였다.】은 나이가 70이었다. 평소 집에 있으면서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였는데, 項梁을 찾아가서 설득하기를 “陳勝이 첫 번째로 擧事【首事는 가장 먼저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함에 楚나라 후손을 세우지 않고 스스로 서니, 그 형세가 길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君이 江東에서 起兵하자楚 지방에서 蜂起【蠭起는 起兵하는 자가 많아서 벌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한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君을 따르는 까닭은 君이 대대로 楚나라 장군이어서 다시 楚나라의 후손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하였다. 이에 項梁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楚나라 懷王의 손자인 心【心은 이름이니, 楚나라 懷王 槐의 손자이다.】을 찾아서 세워楚나라 懷王이라 하니, 이는 백성들의 바람을 따른 것이었다.【懷王 槐가 秦나라로 들어가자, 秦나라 사람들이 억류하여 秦나라에서 죽으니, 이제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그 할아버지의 諡號를 號로 삼은 것이다.】 -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項梁이 自號武信君하다 ○ 張良이 說項梁曰 君이 已立楚後而韓諸公子에 橫陽君이 最賢하니 可立爲王하야 益樹黨이라한대 이 使으로 求韓成하야 立以爲韓王【漢元年에 羽殺之하니라 】하다

項梁이 스스로 武信君이라 號하였다.

張良項梁을 설득하기를 “君이 이미 楚나라 후손을 세웠는데, 韓나라 여러 公子公子 중에 橫陽君韓成이 가장 어지니, 그를 세워 왕을 삼아서 더욱 黨與를 만들도록 하라.” 하자, 項梁張良으로 하여금 韓成을 찾게 하여 그를 세워 韓王을 삼았다.【漢나라 元年에 項羽가 韓成을 죽였다.】

章邯이 擊魏어늘 齊王과 及楚將 項它【項羽從兄之子라 】皆將兵救魏러니 章邯이 大破齊楚軍하고 殺齊王하니 魏王咎自燒死라 其弟 亡之楚어늘 楚懷王이 予兵數千人하야 復徇魏地하고 立爲魏王하다 田榮이 收兄餘兵하야 東走東阿하니 章邯이 追圍之어늘 武信君이 引兵擊破章邯軍於東阿下하고 追至濮陽하야 又破之하다

〈秦나라 將軍將軍〉 章邯이 魏나라를 공격하자, 齊王田儋과 楚나라 장수 項它項它項羽의 從兄의 아들이다.】가 모두 병력을 거느리고 魏나라를 구원하였는데, 章邯이 齊‧楚의 군대를 대파하고齊王田儋을 죽이니, 魏王는 스스로 불타 죽었다. 그 아우魏豹가 楚나라로 도망가자, 楚나라 懷王이 병력 수천 명을 주어서 다시 魏나라 땅을 순행하게 하고 세워서 魏王으로 삼았다.

田榮이 형田儋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동쪽으로 東阿로 달아나니, 章邯이 쫓아가포위하였다. 武信君項梁이 병력을 인솔하고章邯의 군대를 東阿 아래에서 격파하고, 추격하여濮陽에 이르러 또다시 격파하였다.

○ 郞中令郞中令趙高 恃恩專恣하야 以私怨誅殺人이 衆多라 恐大臣이 入朝奏事言之하야 乃說二世曰 天子所以貴者는 但以聞聲이요 群臣이 莫得見其面也라 陛下陛下不如深拱禁中【門戶有禁하야 非侍御者면 不得入이라 故曰禁中이라 】하야 與臣及侍中侍中習法者로 待事라가 事來어든 有以揆之니 如此면 則大臣이 不敢奏疑事하야 天下稱聖主矣리이다 二世用其計하야 乃不坐朝廷見大臣하고 常居禁中하야 事皆決於趙高하다

郎中令郎中令趙高가 은총을 믿고는 전횡하고 방자하여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주벌하고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大臣大臣들이 조정에 들어가 일을 아뢰다가 이것을 말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二世를 설득하기를 “天子가 귀한 까닭은 다만 음성만 들을 수 있고 여러 신하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禁中【門戶에 금함이 있어서 모시는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禁中이라 한 것이다.】에서 깊숙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법률을 숙달한 신하와 侍中侍中들과 일을 기다리고 있다가 일이 오면 이를 헤아리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대신들이 감히 의심스러운 일을 아뢰지 못할 것이고 천하에서는 聖主聖主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하였다. 二世가 그의 계책을 따라 마침내 조정에 앉아서 대신을 만나 보지 않고 항상 禁中禁中에 거하여, 일이 모두 趙高에게서 결정되었다.

李斯以爲言하고 乃曰 丞相丞相長男李由 爲三川守三川守【李斯之子名由니 爲三川郡守라 按秦三川郡을 漢高改河南郡이라 韋昭曰 洛陽에 有伊, 洛, 河三水라 故名焉이라 或謂涇, 渭, 洛亦爲三川이라 】하야 與盜通하고 且丞相丞相이 居外하야 權重於陛下陛下니이다 二世以爲然하야 乃使人으로 按驗三川守三川守與盜通狀하고 下斯吏하니 斯就獄이어늘 二世以屬趙高治之한대 具斯五刑論【秦法에 當三族者는 皆先黥劓하고 斬左右趾者는 笞殺之하고 梟其首者는 葅其骨肉於市하고 其誹謗罵詛者는 又先斷舌하니 謂之具五刑이라 】하야 腰斬咸陽市하니 遂父子相哭而夷三族【夷는 滅也니 父母兄弟妻子 盡誅滅之也라 一說에 三族은 父母妻族也라 】하다 二世趙高爲丞相丞相하야 事無大小히 皆決焉하다 〈出李斯傳〉

趙高李斯가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丞相丞相의 장남인 李由가 三川守가 되어서【李斯의 아들 이름이 由이니 三川郡守가 되었다. 살펴보건대 秦나라 三川郡을 漢高祖가 河南郡으로 고쳤다. 韋昭가 말하였다. “洛陽에 伊水, 洛水, 河水의 세 물이 있기 때문에 三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혹은 涇水, 渭水, 洛水를 일러 또한 三川이라고 한다.】 도둑들과 내통하였고, 또 丞相丞相이 밖에 있어 권세가 폐하보다 무겁습니다.” 하였다. 二世가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사람을 시켜 三川守가 도적과 내통한 상황을 조사하여 징험하게 하고 李斯를 獄吏에게 내리니, 李斯가 옥에 나아갔다. 二世李斯趙高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니, 李斯를 五刑으로 갖추어 논죄하여【秦나라 法에 三族을 멸하는 죄에 해당하는 자는 모두 먼저 刺字하고 코를 베고, 좌우의 발을 벨 자는 笞刑을 가하여 죽이고, 머리를 梟示할 자는 뼈와 살을 시장에서 젓 담그고, 비방하고 꾸짖는 자는 또 먼저 혀를 잘랐으니, 이를 일러 ‘五刑을 갖춘다.’고 한다.】咸陽의 저자에서 腰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李斯는 마침내 父子가 서로 통곡하고 三族이 멸하였다.【夷는 멸함이니, 夷三族은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다. 一說(如淳의 說)에 三族은 父族, 母族, 妻族이라 한다.】二世趙高를 丞相丞相으로 삼아 큰 일과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결정하게 하였다.- 《史記 李斯傳》에 나옴 -

項梁이 已破章邯하고 引兵至定陶【定陶縣은 屬濟陰이라 按濟陰은 隋改曹州라 】하야 再破秦軍하고 項羽, 沛公이 又與秦軍으로 戰於雍丘하야 大破之하고 斬李由하니 이 益輕秦하야 有驕色이라 宋義諫曰 戰勝而將驕卒惰者는 敗하나니 臣이 爲君畏之하노이다 이 弗聽이러니 二世悉起兵하야 益章邯하고 擊楚軍하야 大破之定陶하니 項梁이 死하다

項梁章邯을 격파하고는 병력을 인솔하여 定陶【定陶縣은 濟陰에 속하였다. 살펴보건대 濟陰은 隋나라 때에 曹州로 고쳤다.】에 이르러서 또다시 秦軍을 격파하였으며, 項羽沛公이 또 秦軍과 雍丘에서 싸워 대파하고李由를 목 베니, 項梁이 더욱 秦나라를 경시하여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宋義가 간하기를 “전쟁에 싸워 이기고서 장수가 교만하고 병졸이 나태한 자는 패하는 법이니, 신은 君을 위하여 두려워합니다.” 하였으나 項梁이 듣지 않았다. 二世가 군대를 모두 일으켜 章邯에게 더 보태 주고 楚軍을 공격하게 하여 定陶에서 大破하니, 項梁이 전사하였다.

章邯이 已破項梁하고 乃渡河하야 北擊趙하니 趙數請救於楚라 楚王이 以宋義爲上將軍上將軍하고 項羽爲次將次將하야 以救趙할새 諸別將別將을 皆屬宋義하고 號爲卿子冠軍【王氏曰 王之孫爲王孫이요 公之子爲公子니 卿子는 謂卿之子也라 卿子는 時人相褒尊之辭라 上將故로 言冠軍이라 張氏曰 冠者는 加於首上이니 言功冠諸軍之上也라 】이라하다 〈出項羽本紀〉

章邯이 이미 項梁을 격파하고 마침내 黃河를 건너 북쪽으로 趙나라를 공격하니, 趙나라가 여러 번 楚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楚王宋義를 上將軍上將軍으로 삼고項羽를 次將次將으로 삼아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여러 別將別將들을 모두 宋義에게 속하게 하고 號를 卿子冠軍【王氏가 말하였다. “王(天子)의 손자를 王孫이라 하고 公의 아들을 公子라고 하니, 卿子는 卿의 아들을 이른다. 卿子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 기리고 높이는 말이다. 上將이기 때문에 冠軍이라고 말한 것이다. 張氏(張晏)가 말하기를 ‘冠은 머리 위에 가하는 것이니, 功이 諸軍의 위에 으뜸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이라 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 初에 楚懷王이 與諸將約호되 先入定關中者를 王之라하더니 當是時하야 秦兵彊하야 常乘勝 逐北【王氏曰 人好陽而惡陰하니 北方은 幽陰之地라 故軍敗曰北라 左傳註云 軍走曰北라 北은 如字요 一音佩라 】라 諸將이 莫利先入關【莫利는 謂不以入關爲利라 】호되 獨項羽怨秦之殺項梁하야 奮身하야 願與沛公西入關이라 懷王諸老將이 皆曰 項羽는 爲人이 慓悍猾賊【慓는 疾也요 悍은 勇也요 猾賊은 好爲禍害而殘賊也라 】하야 嘗攻襄城에 襄城이 無遺類하고 諸所過에 無不殘滅하니 不如更遣長者長者하야 扶義而西【言仗大義而西往也라 】하야 告諭秦父兄이니 秦父兄이 苦其主久矣라 今에 誠得長者하야 往無侵暴면 宜可下니 는 不可遣이요 獨沛公이 素寬大長者라 可遣이니이다 懷王이 乃不許하고 而遣沛公하야 西略地하다 〈出史高祖紀〉

처음에 楚나라 懷王이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먼저 關中에 들어가 평정하는 자를 왕으로 삼겠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秦나라 군대가 강하여 항상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자를 추격하였다.【王氏가 말하였다. “사람은 陽을 좋아하고 陰을 싫어하니, 北方은 幽陰한 곳이므로 군대가 패하는 것을 北라 한다. ≪春秋左傳≫ 註에 이르기를 ‘군대가 도망하는 것을 北라 한다. 北은 본래 글자대로 읽고, 또 다른 음은 패(배)이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秦나라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먼저 關中에 들어가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자가 없었으나【莫利는 關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음을 이른다.】 유독 項羽만은 秦나라가 項梁을 죽인 것을 원망하여 몸을 떨쳐 일어나 沛公과 함께 서쪽으로 關中에 들어갈 것을 원하였다.

懷王의 여러 老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項羽는 사람됨이 사납고 잔인해서,【慓는 빠름이고 悍은 용맹함이며 猾賊은 禍害를 만들기를 좋아하여 잔인하고 해치는 것이다.】 일찍이 襄城을 공격할 적에 襄城에 남은 무리가 없었고 지나가는 곳마다 해쳐서 멸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바꾸어 長者를 보내어 를 잡고 서쪽으로 가서【扶義而西는 大義를 내세워 서쪽으로 감을 말한다.】秦나라 父兄들에게 告諭하는 것만 못합니다. 秦나라 父兄들이 그 군주를 괴롭게 여긴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長者를 얻어 가서 침략하고 포악함이 없게 하면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니, 項羽를 보내서는 안되고, 오직 沛公만이 본래 관대한 長者이니 보낼 만합니다.” 하였다. 懷王이 마침내 項羽를 허락하지 않고沛公을 보내어 서쪽으로 가서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甲午]三年

[甲午]三年이라

冬十月에 宋義行至安陽【地形志에 己氏縣에 有安陽城하니 隋改己氏爲楚丘라하니 今宋州楚丘縣西北四十里安陽故城이 是也라 】하야 留四十六日【義遣其子襄하야 相齊하고 送之無鹽하야 高會飮酒하니 天寒大雨하야 士卒凍飢라 項羽曰 今歲飢民貧하야 卒食芋菽이어늘 而飮酒高會하야 不恤士卒而循其私하니 非社稷之臣也라하고 羽斬之하니라 】不進이라 曰 國兵이 新破에 王이 坐不安席하사 掃境內하야 以屬將軍하시니 國家安危 在此一擧어늘 今에 不恤士卒而徇其私하니 非社稷之臣也라하다 十一月에 項羽卽其帳中하야 斬宋義하고 乃悉引兵渡河하야 皆沈船하고 破釜甑, 燒廬舍하고 持三日粮하야 以示士卒必死하다 於是에 與秦軍遇하야 九戰大破之하고 虜王離하다 ○ 當是時하야 楚兵이 冠諸侯라 於是에 始爲諸侯上將軍上將軍하니 諸侯皆屬焉이러라 〈出項羽紀〉

3년(갑오 B.C.207)

겨울 10월에 宋義가 행군하여 安陽【安陽은 ≪魏書≫ 〈地形志〉에 “己氏縣에 安陽城이 있으니 隋나라 때 己氏를 고쳐 楚丘라고 하였다.” 하니, 지금 宋州 楚丘縣 서북쪽 40리 安陽의 옛 城이 이곳이다.】에 이르러서 46일 동안 머물고【宋義가 그 아들 襄을 보내어 齊나라의 相이 되게 하고, 襄을 無鹽에서 전송할 때에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셨는데, 이때 날씨가 춥고 큰비가 내려서 士卒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렸다. 項羽가 말하기를 “금년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가난해서 병졸들이 거친 음식을 먹고 있는데, 宋義는 술을 마시고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士卒들을 구휼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따르니, 社稷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고, 項羽가 宋義의 목을 베었다.】 전진하지 않았다. 項羽가 말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새로 격파됨에 왕이 앉아 있어도 자리가 편치 못하여 境內를 모두 총동원해서 장군에게 맡기셨으니, 國家의 安危가 이 한 번의 조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 士卒을 구휼하지 않고 사사로움을 따르니, 社稷의 신하가 아니다.” 하였다.

11월에 項羽가 그의 장막 가운데로 나아가 宋義를 목 베고, 마침내 병력을 모두 이끌고 黃河를 건너가 모든 배를 침몰시키고 가마솥과 시루를 부수고 廬舍를 불태운 다음 3일분의 양식만을 휴대하여 사졸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함을 보였다. 이에 秦나라 군대와 만나 아홉 번 싸워 크게 격파하고王離를 사로잡았다.

○ 이때를 당하여 楚나라 군대가 諸侯의 으뜸이었다. 이에 項羽가 비로소 諸侯의 上將軍上將軍이 되니, 諸侯들이 모두 그에게 속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 春二月에 沛公이 北擊昌邑【括地志云 昌邑在曹州成武縣東北三十二里하니 梁丘故城이 是라 】할새 過彭越하니 越이 以其兵從沛公이어늘 沛公이 拜越爲魏相하고 使將兵하야 略定魏地하다

봄 2월에 沛公이 북쪽으로 昌邑【昌邑은 ≪括地志≫에 “昌邑이 曹州 成武縣 동북쪽 32리 지점에 있었으니, 梁丘의 옛 城이 이곳이다.” 하였다.】을 공격할 적에 彭越을 방문하니, 彭越이 그의 병력을 거느리고 沛公을 따랐다. 沛公彭越을 魏나라 정승으로 삼고, 병력을 거느리고 魏나라 땅을 공략해서평정하게 하였다.

沛公이 引兵西過高陽【陳留圉縣에 有高陽鄕이라 括地云 圉城은 在汴州雍丘西南이라 】할새 高陽人酈食其爲里監門이러니 沛公의 麾下【麾는 通作戱하니 大將之旗也니 所以指麾라 】騎士 適食其里中人이라 食其見謂曰 吾聞沛公은 慢而易人이나 多大略이라하니 此는 眞吾所願從遊로라 騎士曰 沛公이 不好儒하야 諸客冠儒冠來者면 沛公이 輒解其冠하야 溲溺其中하니 未可以儒生說也니라 酈生曰 第言之하라 騎士從容言이러니 至高陽傳舍【從容은 不迫之貌라 傳者는 轉轉相傳之義요 舍는 亭也니 猶今館驛이라 】하야 使人召酈生하다

沛公이 병력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高陽【陳留圉縣에 高陽鄕이 있다. ≪括地志≫에 “圉城은 汴州 雍丘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을 지날 적에 高陽 사람 酈食其가 마을의 監門監門이 되었었다. 沛公 麾下의【麾는 戱와 통하니, 大將의 旗이니 지휘하는 것이다.】 騎兵이 마침 酈食其의 마을 사람이었다. 酈食其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沛公은 거만하여 사람을 함부로 대하나 큰 지략이 많다 하니, 이는 내가 참으로 從遊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하니, 騎士가 대답하기를 “沛公은 儒生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여러 빈객 중에 儒冠을 쓰고 오는 자가 있으면 沛公은 그때마다 그 관을 벗겨 그 속에다 오줌을 누니, 儒生으로는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酈生이 말하기를 “다만 말이나 해보라.” 하였다. 騎士가 조용히 말하였더니, 高陽의 驛舍에 이르러【從容은 박절하지 않은 모양이다. 傳은 轉轉하여 서로 전한다는 뜻이고 舍는 머무름이니, 傳舍는 지금의 驛舍와 같다.】 사람을 시켜 酈生을 불렀다.

酈生이 至하야 入謁이어늘 沛公이 方倨(踞)牀하야 使兩女子로 洗足而見酈生한대 生이 長揖不拜曰 足下必欲誅無道秦인대 不宜倨見長者니라 於是에 沛公이 輟洗起攝衣하고 延生上坐謝之하다 酈生이 因言六國從(縱)橫時한대 沛公이 喜問曰 計將安出고 酈生曰 足下起糾合之衆하고 收散亂之兵이 不滿萬人이어늘 欲以徑入彊秦하니 此는 所謂探虎口者也라 夫陳留【古兗州郡이니 今開封府縣이라 】는 天下之衝이요 四通五達之郊也라 今其城中에 又多積粟하고 臣善其令하니 請 得使之하야 令下【彼自歸伏曰下니 言我請得爲使而往說之면 可令其歸伏이라 】足下하리니 卽不聽이어든 足下擧兵攻之하시면 臣爲內應호리이다 於是에 遣酈生行하고 沛公이 引兵隨之하야 遂下陳留하고 號酈食其하야 爲廣野君【廣野는 在河內山陽縣이라 】하니 酈生이 常爲說客하야 使諸侯하다 〈出漢書食其傳〉

酈生이 이르러 들어와 뵈었는데, 沛公이 이때 막 평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로 하여금 발을 씻게 하면서 酈生을 만나 보았다. 酈生이 길게 읍만 하고 절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足下께서 반드시 무도한 秦나라를 주벌하고자 하신다면 거만하게 〈걸터앉아서〉 長者를 만나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沛公은 씻던 것을 치우고 일어나 옷을 정돈하고 酈生을 맞이하여 上座에 앉히고 사례하였다.

酈生이 인하여 六國이 合從‧連橫하던 때를 말하자, 沛公이 기뻐하여 묻기를 “계책을 장차 어떻게 내어야 하는가?” 하니, 酈生이 대답하였다. “足下께서 규합한 무리들을 일으키고 흩어져 혼란한 군사를 수습한 것이 만 명이 채 못되는데, 이들을 데리고 곧바로 강한 秦나라로 들어가고자 하시니, 이는 이른바 범의 아가리를 더듬는다는 것입니다. 陳留【陳留는 옛날의 兗州郡이니 지금의 開封府縣이다.】는 천하의 요충지이고 四通五達한 들입니다. 이제 그 성 안에는 또 쌓아놓은 곡식이 많고 臣이 그 縣令縣令과 친하니, 청컨대 臣이 使者使者로 가서 足下에게 항복하게 하겠습니다.【저(상대방)가 스스로 귀순하여 항복하는 것을 下라고 하니, 자신이 청컨대 사자로 가서 설득하면 항복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만일 듣지 않으면 足下께서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신이 內應하겠습니다.”

이에 酈生을 보내어 가게 하고 沛公이 병력을 이끌고 뒤따라가서 마침내 陳留를 항복시키고는 酈食其를 칭호하여廣野君이라 하였다.【廣野는 河內 山陽縣에 있다.】 이후로 酈生이 항상 遊說客이 되어 諸侯에게 사신 갔다. - 《漢書 酈食其傳》에 나옴 -

○ 夏四月에 沛公이 南攻潁川【秦潁川郡을 漢獻徙都之하고 改〈曰〉許昌이러니 後周改許州하니라 】屠之하고 因張良하야 遂略韓地【王氏曰 韓分晉하야 得南陽及潁川之父城, 定, 襄, 潁陽, 潁陰, 長社, 陽翟하니 東接汝南하고 西接弘農하야 得新安, 宜陽이라 】하다 이 引兵從沛公하야 略南陽郡【屬荊州라 括地志에 在鄧州東北百二十里라 】하니 南陽 守齮降【齮는 音蟻니 郡守之名이니 失其姓이라 守는 音狩라 按漢書컨대 景帝中二年에 始更郡守하야 爲太守하니라 】이어늘 引兵西하니 無不下者요 所過에 亡(毋) 得鹵掠【王氏曰 史記亡作毋라 按左傳襄二十一年에 云 周西鄙掠之라한대 註에 掠은 音亮이니 奪也라 】하니 秦民이 皆喜러라

여름 4월에 沛公이 남쪽으로 潁川을【秦나라 潁川郡을 漢나라 獻帝가 도읍을 옮기고 許昌이라고 고쳤는데, 後周가 許州라고 고쳤다.】 공격하여 도륙하고, 張良을 인하여 마침내 韓나라 땅을 공략하였다.【王氏가 말하였다. “韓나라가 晉나라 땅을 나누어 南陽郡 및 潁川의 父城, 定陵, 襄城, 潁陽, 潁陰, 長社, 陽翟을 점령하니, 동쪽으로 汝南과 연접하고 서쪽으로 弘農과 연접하여 新安과 宜陽을 얻었다.”】張良이 병력을 인솔하고沛公을 따라 南陽郡【南陽郡은 荊州에 속하였다. ≪括地志≫에 “鄧州 동북쪽 120리에 있다.” 하였다.】을 공략하니, 南陽守南陽守가 항복하였다.【齮는 음이 의이니, 郡守의 이름으로 그 姓은 전해지지 않는다. 守는 음이 수이다. ≪漢書≫를 살펴보건대 景帝 中元 2년에 비로소 郡守를 고쳐 太守라고 하였다.】沛公이 병력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향하니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지나는 곳에 노략질을 못하게 하니【王氏가 말하였다. “≪史記≫에는 亡자가 毋자로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春秋左傳≫ 襄公 21年條에 ‘周西鄙掠之’라 하였는데, 註에 ‘掠은 음이 량(략)이니 빼앗음이다.’ 하였다.”】秦나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王離軍이 旣沒에 章邯은 軍棘原【地名이니 在鉅鹿郡南이라 】하고 項羽는 軍漳南【漳水之南也라 括地云 漳水는 今俗名柳河니 在邢州平鄕縣南이라 】이러니 秦兵이 數却이라 二世使人讓章邯한대 이 恐하야 使長史欣으로 請事咸陽이러니 留司馬門【正義[集解]曰 凡言司馬門者는 宮垣中兵衛所在니 四面에 皆有司馬하야 主武事라 總言之하면 外門爲司馬門이라 如淳曰 宮衛令에 諸出入殿門, 公車司馬門에 乘軺傳者皆下호되 不如令이면 罰金四兩하니라 】三日호되 趙高不見하고 有不信之心이어늘 이 至軍報曰 用事于中하야 下無可爲者【言不可復爲軍旅事也라 】라 今에 戰勝이면 必嫉吾功이요 不勝이면 不免於死라한대 이 乃與約盟洹水之上하다 已盟에 이 見流涕하고 爲言趙高하니 乃立章邯雍王하야 置楚軍中하고 使長史欣으로 爲上將軍上將軍하야 將秦軍爲 前行【王氏曰 史記項籍紀註에 行은 胡郞反이라 漢書本傳엔 作行前하니 註에 置前而行也라 】하다 〈出史記項羽紀〉

朱氏曰 壅蔽之禍 其可畏也哉인저 邯鄲之役에 邯軍棘原하고 軍漳南하야 猶以勢力相持하야 勝負未決也라 使二世不加誚譴하고 趙高不懷忌嫉하야 長史欣이 請事咸陽에 無滯留扞格之苦런들 則陳餘之書 固未足以撼章邯之心이요 雖項羽善戰이나 亦未能旬日之間에 盡坑秦卒二十餘萬之衆也리라 今掃一國之衆하야 付之大將之手하야 存亡成敗가 係呼吸瞬息之間이어늘 司馬門司馬門奏事에 乃留三日而不得報하니 其趣(促)亡也宜哉인저

王離의 군대가 이미 패몰함에 章邯은 棘原【棘原은 지명이니, 鉅鹿郡 남쪽에 있다.】에 군대를 주둔하고項羽는 漳水의 남쪽【漳南은 漳水의 남쪽이다. ≪括地志≫에 “漳水는 지금 俗名이 柳河이니, 邢州 平鄕縣 남쪽에 있다.” 하였다.】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자주 퇴각하였다. 二世가 사람을 시켜 章邯을 꾸짖으니, 章邯이 두려워하여 長史長史인 司馬欣으로 하여금 咸陽에 가서 일을 청하게 하였는데, 司馬門【≪史記集解≫에 말하였다. “무릇 司馬門이라고 말한 것은 宮垣 안의 兵衛가 있는 곳이니, 사면에 모두 司馬가 있어서 군대의 일을 주관한다. 통틀어 말하면 外門을 司馬門이라 한다.” 如淳이 말하였다. “宮衛令에 ‘殿門과 모든 公車司馬門을 출입할 때에 軺傳을 탄 자를 모두 내리게 하되, 명령대로 하지 않으면 罰金이 4냥이다.’ 하였다.”】에 3일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趙高가 만나 보지 않고 믿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司馬欣이 군대에 이르러 보고하기를 “趙高가 중앙에서 用事하여 아래에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下無可爲者는 아래에서는 다시 군대의 일을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싸워서 승리하면 趙高는 반드시 우리들의 공을 질투할 것이고, 이기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니, 章邯이 마침내 項羽와 약속하고 洹水의 가에서 맹약하였다. 맹약이 끝나자, 章邯項羽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趙高에 대해 말하니, 項羽가 마침내 章邯을 세워 雍王을 삼아 楚나라 군중에 두고, 長史長史司馬欣을 上將軍上將軍으로 삼아서 秦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先鋒【王氏가 말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註에 ‘行은 胡郞反(항)이다.’ 하였고, ≪漢書≫ 〈項籍傳〉에는 行(행)前으로 되어 있으니, 註에 ‘앞에 배치하여 행군하는 것이다.’ 하였다.”】이 되게 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朱氏가 말하였다.

“군주의 총명을 가리는 화가 참으로 두려울 만하다. 邯鄲의 戰役(전쟁)에 章邯의 군대는 棘原에 주둔하고 項羽의 군대는 漳水의 남쪽에 주둔하여, 오히려 세력을 가지고 서로 대치하여 아직 승부를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만약 二世가 견책을 가하지 않고 趙高가 시기하는 마음을 품지 않아서 長史長史인 司馬欣이 咸陽에 가서 일을 청했을 때에 지체되고 막히는 괴로움이 없었다면 陳餘의 편지가 진실로 章邯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였을 것이요, 비록 項羽가 전쟁을 잘했더라도 또한 열흘 만에 秦나라의 병졸 20여 만 명을 다 무찔러 죽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온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大將의 손에 맡겨서 국가의 존망과 성패가 숨 한 번 쉬고 눈 한 번 깜빡하는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司馬門司馬門에서 일을 아뢸 때에 마침내 3일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보고할 수가 없었으니, 멸망을 재촉함이 당연한 것이다.”

○ 初에 趙高欲專秦權호되 恐群臣不聽하야 乃先設驗하야 持鹿獻於二世曰 馬也라한대 二世笑曰 丞相丞相이 誤耶아 謂鹿爲馬온여 問左右한대 或黙, 或言馬어늘 因陰中【中은 陰中害之也라 】諸言鹿者以法하니 後에 群臣이 皆畏하야 莫敢言其過러라

처음에 趙高가 秦나라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먼저 시험 삼아 사슴을 가져다 二世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말입니다.” 하였다. 二世가 웃으며 말하기를 “丞相丞相이 오판하였는가?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나.” 하고 左右에게 물으니, 혹은 침묵하고 혹은 말이라고 하였다. 趙高는 인하여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법으로 은밀히 中傷【中은 은밀히 中害(中傷)하는 것이다.】하니, 뒤에 群臣들이 모두 趙高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前數言 關東盜는 無能爲也라하더니 及項羽王離等하고 而章邯等軍이 數敗에 關東이 皆畔이라 二世怒하야 誅及其身하야 乃謝病不朝하고 陰與其壻咸陽令閻樂으로 謀易置上하고 更立子嬰하다 이 將吏卒하고 入望夷宮【在長陵西北하니 長平觀道東故亭處是也라 臨涇水作之하야 以望北夷라 括地云 在雍州咸陽東南이라 】하야 與二世【樂前數二世曰 足下驕恣하야 殺無道故로 天下皆反하니 其自爲計하라 二世曰 願得一郡爲王하노라 不許한대 願爲萬戶侯하노라 又不許한대 願與妻子爲黔首하노라 樂曰 臣受命丞相하야 誅足下라하고 麾其兵進하니 二世自殺하다 曲禮註云에 與는 猶數也라 】曰 受命於丞相丞相하야 誅足下【群臣士庶相與言에 故呼在殿下, 閤下, 足下, 侍者, 執事者하야 而先與之言이니 因卑達尊之義니 皆謙辭也라 】라하고 麾其兵進하니 二世自殺이라 趙高乃立子嬰秦王하고 令子嬰으로 齋當廟見하야 受玉璽【始皇이 得和氏璧하고 命李斯篆之하고 孫壽刻之하니 方四寸이라 其文曰 受命于天 旣壽永昌이요 字形이 如魚龍鳳鳥之狀하니 自漢高以來로 遂爲傳國寶하니라 】라한대 子嬰이 與其子二人으로 謀曰 丞相丞相殺(弑)二世하고 恐群臣誅之하야 乃佯以義立我하고 使我齋見廟하니 我稱病不行이면 丞相丞相이 必自來하리니 來則殺之라하더니 果自往이어늘 子嬰이 遂刺殺於齋宮하고 三族家하다 〈出本紀〉

趙高가 전에 여러 번 “關東의 도둑은 상대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項羽王離 등을 사로잡고章邯 등의 군대가 자주 패하자關東이 모두 배반하였다. 趙高二世가 노하여 자기 몸에 주벌이 미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병으로 사퇴하여 조회하지 않고, 은밀히 그 사위인 咸陽令咸陽令閻樂과 上을 바꿔치우고 다시 子嬰을 세울 것을 도모하였다.

閻樂이 관리와 병졸을 거느리고 望夷宮【望夷宮은 長陵 서북쪽에 있으니, 長平觀 길 동쪽 옛 정자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涇水에 임하여 지어서 北夷를 바라본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雍州 咸陽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에 들어가서 二世를 꾸짖어【閻樂이 앞으로 나아가 二世를 꾸짖어 말하기를 “足下가 교만하고 방자해서 사람들을 죽여 無道하기 때문에 천하가 모두 배반하니, 스스로 계책을 세우라.” 하였다. 二世가 말하기를 “한 郡을 얻어 왕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萬戶의 侯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처자와 함께 평민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자, 閻樂이 말하기를 “신이 승상에게 명을 받아 足下를 죽이겠다.” 하고는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니, 二世가 자살하였다. ≪禮記≫ 〈曲禮〉의 註에 “與는 數(數罪)와 같다.” 하였다.】 말하기를 “丞相丞相에게 명령을 받아 足下【여러 신하들과 士庶人이 서로 함께 말할 적에 〈곧바로 가리킬 수 없기 때문에〉 殿下, 閤下, 足下, 侍者, 執事에 있는 자를 불러서 먼저 이들과 말을 하였으니, 낮은 자를 통하여 높은 자에게 전달하는 뜻이니, 모두 謙辭이다.】를 죽이겠다.” 하고 군사들을 지휘하여 나아가니, 二世가 자살하였다. 趙高는 마침내 子嬰을 세워 秦王으로 삼고 子嬰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사당에 뵈어 玉璽【玉璽는 始皇이 和氏璧을 얻고는 李斯에게 명하여 篆字를 쓰게 하고 孫壽에게 이를 새기게 하니, 사방 4寸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命을 받으니 이미 壽하고 길이 창성하리라.” 하였고, 글자의 모양이 魚龍과 봉황새의 형상과 같았는 바, 漢高祖 이래로 마침내 傳國寶가 되었다.】를 받으라고 하였다.

子嬰은 그의 아들 두 사람과 상의하기를 “丞相丞相趙高二世를 시해하고 여러 신하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거짓 의리를 내세워 나를 세우고는 나로 하여금 재계하고 사당에 뵙게 하니, 내가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으면 丞相丞相이 반드시 스스로 올 것이다. 오면 그를 죽이겠다.” 하였다. 趙高가 과연 스스로 오자, 子嬰이 마침내 趙高를 재계하던 宮에서 찔러 죽이고趙高의 집안을 三族을 멸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에 나옴 -

子嬰이 遣將將兵하야 距嶢關【嶢山關은 在京兆南이라 括地志에 雍州藍田縣東南에 有藍田關하니 卽秦之嶢關也라 】이어늘 沛公이 欲擊之러니 張良曰 秦兵이 尙彊하니 未可輕이라 願先遣人하야 益張旗幟於山上하야 爲疑兵하고 使酈食其, 陸賈로 往說秦將하야 啗【謂以利誘之니 如以食餧之하야 令其啗食耳라 】以利하소서 秦將이 果欲連和어늘 沛公이 欲許之한대 張良曰 此는 獨其將欲叛이니 恐其士卒不從이라 不如因其懈怠하야 擊之니이다 沛公이 引兵繞嶢關하고 踰蕢山하야 擊秦軍大破之하고 遂至藍田하야 又戰其北하야 秦兵이 大敗하다 〈出高祖紀〉

子嬰이 장수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嶢關【嶢山關은 京兆 남쪽에 있다. ≪括地志≫에 “雍州 藍田縣 동남쪽에 藍田關이 있으니, 秦나라의 嶢關이다.” 하였다.】을 막자, 沛公이 이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張良이 말하였다. “秦나라 군대가 아직 강성하여 경시할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먼저 사람을 보내어 더욱 旗幟를 산 위에 늘어놓아 의심스러운 군대를 만들고, 酈食其陸賈로 하여금 가서 秦나라 장수를 설득하여 이익으로 유인하게【啗은 이익으로 유인함을 이르니, 밥(미끼)을 주어 꾀어서 이것을 먹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소서.”

秦나라 장수가 과연 연합하여 화해하고자 하자, 沛公이 이를 허락하려 하니, 張良이 말하기를 “이는 다만 그 장수가 배반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의 사졸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들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沛公이 병력을 인솔하여 嶢關을 에워싸고 蕢山을 넘어 秦軍을 공격해서 크게 격파하였으며, 마침내 藍田에 이르러 또다시 그 북쪽에서 싸워 秦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右秦은 自莊襄王으로 至子嬰히 合四十三年이니 子嬰爲王四十六日而降于漢하니라

賈誼過秦論曰 秦孝公이 據殽函之固하고 擁雍州之地하여 有席捲天下, 包擧宇內, 囊括四海, 幷呑八荒之心이라 及至始皇하여 奮六世【孝公, 惠公, 武王, 昭王, 孝文王, 莊襄王也라 】之餘烈하여 振長策【乘馬爲喩하니 策은 所以撾馬者라 】而馭宇內하여 呑二周而亡諸侯하고 履至尊而制六合하여 執敲扑以鞭笞天下하니 威振四海라 南取百越之地하여 以爲桂林象郡하니 百越【謂非一種也니 猶言百蠻이라 韋昭曰 越有百邑故로 曰百越也라 】之君이 俛首係頸하여 委命下吏라 北築長城而守藩籬하여 却匈奴七百餘里하니 胡人이 不敢南下而牧馬하며 士不敢彎弓而報怨이라 於是에 廢先王之道하고 焚百家之言하여 以愚黔首하며 墮(隳)名城, 殺豪俊하고 收天下之兵하여 聚之咸陽하여 鑄以爲金人十二이라 然後에 踐華爲城하고 因河爲池하여 據億丈之城하고 臨不測之淵하여 以爲固하며 良將勁弩 守要害【在我爲要요 在彼爲害라 】之處하고 信臣精卒이 陳利兵而誰何하니 天下已定이라 始皇之心이 自以爲關中之固는 金城千里니 子孫帝王萬世之業也러니라 始皇旣沒에 餘威震乎殊俗이라 然而陳涉은 甕牖繩樞之子요 氓隷之人而遷徙之徒也라 躡足行伍之間하고 倔起阡陌之中하여 率罷散之卒하고 將數百之衆하여 轉而攻秦할새 斬木爲兵하고 揭竿爲旗하니 天下雲合響應하고 贏粮而景(影)從하여 山東豪俊이 遂竝起而亡秦族矣라 然而秦以區區之地로 致萬乘之權하여 招八州而朝同列이 百有餘年矣라 然後에 以六合爲家하고 殽函爲宮이러니 一夫作難에 而七廟墮하고 身死人手하여 爲天下笑者는 何也오 仁義不施하고 而攻守之勢異也일새니라

止齋先生曰 天下之事 有可畏之勢者는 易圖요 無可畏之形者는 難見이니 易圖者는 亦易應이요 難見者는 必難支라 故로 明智之君은 不畏乎方張之敵國하고 而深畏夫未見其隙之民心하나니라 蓋民心之搖가 慘於敵國之變이라 古者에 有畏民之君하야 是以로 無可畏之民이러니 後之人君은 狃於民不足畏하야 而民之大可畏者 始見於天下라 夫昔秦之先은 蓋七國也러니 自孝公以亟耕力戰으로 荐食東諸侯之境하야 歷七世而倂於始皇之手하니 吁亦艱矣라 始皇이 惟知天下之勢難合하고 而其患在六國也라 故로 墟其社稷하고 裂其土而守置之하야 以絶內爭之釁하니 中國은 不足慮요 而所以爲吾憂者 猶有四夷也라 於是에 郡桂林하고 城磧石하며 頸係百粤(越)而却匈奴於千里之外라 始皇之心이 自以爲天下擧無可虞하니 足以安意肆志하야 拱視乎殽函之上하야 而海內晏然者萬葉矣라하니 而不知天下之大可畏가 伏於大澤之卒하고 隱於鉅鹿之盜【彭越이 嘗漁鉅鹿澤中이라가 爲群盜하니라 】하야 而其睥睨覘覻者 已滿於江之西, 山之東也라 一呼而起에 氓隷雲合하야 雖章邯百萬之師가 建瓴而下라도 而全關之地가 已稅駕於霸上之劉季矣라 嗚呼라 秦以七世亡六國이러니 而民以期月亡秦하야 以秦之彊으로 不能當民之弱하니 天下之眞可畏者 果安在哉아

이상 秦나라는 莊襄王으로부터 子嬰에 이르기까지 모두 43년이니, 子嬰은 왕이 된 지 46일 만에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賈誼의 過秦論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秦나라 孝公이 殽函(殽山과 函谷關)의 험고한 요새를 점거하고 雍州의 땅을 차지하여, 天下를 席捲하고 宇宙 안을 온통 차지하며 四海를 주머니 속에 넣고 八荒(八方)을 幷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始皇帝에 이르러서는 六代【六世는 孝公‧惠公‧武王‧昭王‧孝文王‧莊襄王이다.】가 남긴 功烈을 떨쳐 긴 채찍【말을 타는 것을 가지고 비유하였으니, 채찍은 말을 때리는 것이다.】을 휘둘러 우주 안을 제어해서 二周를 竝呑하고 제후들을 멸망시키며 至尊至尊의 자리에 올라 六合(온 천하)을 제어하여 채찍을 잡고서 천하를 종아리 치고 볼기 치니, 위엄이 四海에 떨쳐졌다. 남쪽으로는 百越의 땅을 취하여 桂林郡과 象郡을 만드니, 百越【百越은 한 종류가 아니니, 百蠻이라는 말과 같다. 韋昭가 말하기를 “越나라에 백 개의 읍이 있기 때문에 百越이라 한다.” 하였다.】의 군주들이 머리를 숙이고 목에 올가미를 매어 秦나라의 낮은 관리에게 목숨을 맡겼다. 이에 북쪽으로 萬里長城을 쌓아 국경을 지키게 하여 匈奴를 7백여 리나 퇴각시키니, 오랑캐들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말을 먹이지 못하고, 오랑캐 군사들이 감히 활을 당겨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

이에 先王의 道를 폐하고 百家의 글을 불태워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며, 유명한 성을 허물고 豪傑들을 죽이며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다가 咸陽에 모아 녹여서 주조하여 金人 12개를 만들었다. 그런 뒤에 華山을 밟아 성을 만들고 河水를 따라 못을 만들어 억 길이나 되는 높은 성을 점거하고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못에 임하여 이로써 견고함을 삼으며, 훌륭한 장수와 강한 弓弩부대로 要害【要害는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곳이 되고, 저(상대방)에게 있어서는 해가 되는 곳이다.】處를 지키고 신임하는 신하와 精銳兵들이 예리한 병기를 들고 통행인을 검문하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 始皇이 마음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關中의 견고함은 金城(철옹성) 千里이니, 자손들이 제왕의 지위를 만세토록 누릴 수 있는 基業이라고 여겼다.

始皇이 별세한 뒤에도 남은 위엄이, 풍속이 다른 오랑캐에게 떨쳐졌다. 그러나 陳涉은 깨진 옹기로 창문을 내고 노끈으로 문 지도리를 만든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고 農奴의 천한 사람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무리였다. 行伍(兵卒)의 사이에서 출발하고 阡陌(밭두둑)의 가운데에서 일어나 피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이끌고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전전하여 秦나라를 공격할 적에 나무를 베어 병기를 만들고 대나무를 들어 깃발을 삼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양식을 싸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따라와 山東地方의 호걸들이 마침내 모두 일어나서 秦나라 일족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秦나라는 구구한 雍州 땅을 가지고 萬乘 天子의 권세를 이룩하여 八州를 점령하고 동렬들에게 조회 받은 지가 백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 뒤에 六合을 집으로 삼고 殽函을 宮闕로 삼았는데, 한 匹夫가 난을 일으킴에 七廟가 무너지고 몸이 남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仁義를 베풀지 않아서였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止齋先生(陳傅良)이 말하였다.

“천하의 일 중에 두려워할 만한 형세가 있는 것은 도모하기가 쉽고 두려울 만한 형세가 없는 것은 보기가 어려우니, 도모하기 쉬운 것은 또한 대응하기가 쉽고 보기 어려운 것은 반드시 지탱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군주는 막 강성한 적국을 두려워하지 않고 틈을 볼 수 없는 民心을 깊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民心의 동요는 적국의 변란보다도 참혹하다. 옛날에는 백성들을 두려워하는 군주가 있어서 이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백성이 없었는데, 후세의 군주가 백성들을 굳이 두려워하지 않음에 익숙해지자 크게 두려워할 만한 백성이 비로소 천하에 나타나게 되었다. 옛날 秦나라의 先代는 七國이었는데, 孝公이 농사를 급하게 여기고 전투를 힘씀으로부터 동쪽 제후들의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하여 7대를 지나 秦始皇의 손에서 제후들을 겸병하였으니, 아! 또한 어려웠다.

始皇은 천하의 형세가 합하기 어렵고 그 근심이 六國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六國의 社稷을 폐허로 만들고 그 땅을 나누어 수령을 두어서 內紛의 싹을 끊었으니, 中國은 굳이 염려할 것이 없고 자신의 근심거리는 오직 사방의 오랑캐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桂林을 郡으로 만들고 磧石에 城을 쌓으며 百越 군주의 목에 올가미를 매고 匈奴를 천리 밖으로 퇴각시키니, 始皇의 마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천하에 모두 걱정할 만한 것이 없으니, 충분히 안심하고서 뜻을 펼쳐 殽山과 函谷關 위에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아 海內의 편안함이 만대토록 장구할 것이라고 여겼다. 천하에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大澤의 병졸 속에 숨어 있고 鉅鹿의 도적떼【彭越이 일찍이 鉅鹿의 못 가운데에서 고기를 잡아먹다가 도적떼가 되었다.】 속에 숨어 있어서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엿보는 자들이 이미 揚子江의 서쪽과 山東 지방에 가득함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이 한번 고함치고 일어나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비록 章邯이 이끄는 백만의 군대가 물동이의 물을 쏟아 붓듯이 내려왔으나 全關의 땅이 이미 霸上의 劉季(劉邦)에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 秦나라는 7대 만에 六國을 멸망시켰는데 백성들은 期月(1년) 만에 秦나라를 멸망시켜서 秦나라의 강함으로써 백성들의 약함을 당해내지 못하였으니, 천하에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