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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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太祖高皇帝

西漢之史는 司馬遷이 作之於前하고 班固述之於後라

〈按 西漢之史는 司馬遷이 作之於前하고 班固述之於後라 史는 止於武帝之太初하고 而書則備西漢之一代로되 其間元成二紀는 又係班彪所作이라 大抵書는 祖述史하야 其間辭語 微有改易이나 大同小異而已라 溫公所著通鑑은 武帝已前은 大槩全用史하고 其間亦參用書之文이라 今逐一參攷하야 附註其下하야 庶幾學者用事不至有之差라 然이나 詳考通鑑一書는 易紀傳而爲編年하야 合君臣事迹하야 貫而一之하야 興亡治亂이 了然在目이라 其間脈絡關鍵을 欲其聯屬인댄 些小增減은 所不能免이라 今將詞賦中合用要切字하야 則表而出之하고 其他不干利害處는 則不復附載라 然이나 通鑑一書는 已係經進之史하니 除詞賦押韻外에 散文用之는 卽無妨碍라 如歐陽脩撰唐史에 學者亦通用하니 以此觀之하면 則些小異同은 似亦不必太泥也니라 〉

- 살펴보건대 西漢(前漢)의 역사는 司馬遷이 앞에서 지었고 班固가 뒤에서 기술하였다. 司馬遷의 《史記》는 武帝의 太初 年間에 그쳤고 班固의 《漢書》는 西漢의 한 왕조를 구비하였는데, 그 사이에 元帝成帝의 두 本紀는 또 班彪가 지은 것이다. 대체로 班固의 《漢書》는 司馬遷의 《史記》를 원조로 하여 그 사이에 말을 약간 고치고 바꾼 것이 있으나 大同小異할 뿐이다. 溫公이 지은 《資治通鑑》은 武帝 이전은 대체로 司馬遷의 《史記》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그 사이에 또한 班固의 《漢書》의 내용을 참고하여 사용하였다. 이제 하나하나 이것을 참고해서 그 아래에 附註하여, 배우는 자들이 故事를 사용함에 班固司馬遷의 오류가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資治通鑑》 한 책은 紀傳體를 바꾸어 編年體로 만들어서 君臣의 事迹을 합하여 꿰어서 하나로 만들어 興亡과 治亂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게 하였다. 그 사이에 脈絡과 關鍵을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약간의 增減은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詞賦 가운데 인용할 만한 요긴한 글자를 가져다가 表出하였고, 기타 利害에 관계되지 않는 부분은 다시 附註하여 기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資治通鑑》 한 책은 이미 황제에게 올린 역사책이니, 詞賦에 韻을 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산문에 쓰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다. 예컨대 歐陽脩가 唐나라 역사를 편찬함에 배우는 자들이 또한 통용하고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는 또한 굳이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諱邦이요 字季니 姓劉氏라 在位十二年이요 壽五十三이라

太祖高皇帝※ 上 諱이요 字니 姓劉氏라 在位十二年이요 壽五十三이라

※ 豁達大度하야 寬仁愛人하며 好謀能聽하고 知人善任하야 五載而成帝業이라 然이나 不事詩書하야 禮文制度 大抵襲秦하니 所以漢治不能復古니라

太祖高皇帝※는 諱가 이고 字가 이니 姓은 劉氏이다. 재위가 12년이요, 壽가 53세이다.

太祖 高皇帝는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너그럽고 인자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계책을 잘 따르고 인재를 알아 맡기기를 잘해서 5년 만에 帝業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詩‧書에 종사하지 않아 禮文과 制度는 대체로 秦나라의 것을 답습하였으니, 이 때문에 漢나라의 정치가 옛날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乙未]楚義帝心元年

[乙未]〈楚義帝元이요 西楚霸王項籍元이요 漢王劉邦元이요 韓三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니 新舊大國三이요 小國十七이니 凡二十國【凡二十國 楚, 西楚, 漢大國三이요 韓王, 雍王章邯, 塞王司馬欣, 翟王董翳, 西魏王, 河南王申陽, 殷王司馬卬, 代王趙歇, 常山王張耳, 九江王英布, 衡山王吳芮, 臨江王共敖, 遼東王韓廣, 燕王臧荼, 膠東王田市, 齊王田都, 濟北王田安 小國十七이라 凡二十國이니 皆項王所立이라 是歲에 韓, 塞, 翟, 遼東, 膠東, 齊, 濟北七國亡이라 】이라〉

을미(B.C.206) - 楚나라 義帝 元年, 西楚霸王項籍 元年, 漢王劉邦 元年, 韓나라 3년이다. ○ 이 해에 秦나라가 망하니, 新舊의 大國이 3개국이고 小國이 17개국이니, 모두 20개국이다.【卷之四 漢紀 楚(懷王), 西楚(項羽), 漢의 大國이 3개국이요, 韓王 成, 雍王 章邯, 塞王 司馬欣, 翟王 董翳, 西魏王 豹, 河南王 申陽, 殷王 司馬卬, 代王 趙歇, 常山王 張耳, 九江王 英布, 衡山王 吳芮, 臨江王 共敖, 遼東王 韓廣, 燕王 臧荼, 膠東王 田市, 齊王 田都, 濟北王 田安의 小國이 17개국이다. 합하여 20개국이니, 모두 項王이 세운 것이다. 이 해에 韓, 塞, 翟, 遼東, 膠東, 齊, 濟北의 7개국이 망하였다.】 -

冬十月【如淳註曰 以高祖十月至霸上이라 故因秦以十月爲歲首라 】沛公이 至霸上하니 秦王子嬰【趙高殺二世하고 曰 秦은 古王國이러니 始皇君天下故로 稱帝라 今六國復立하니 爲王如古라하고 便立子嬰爲秦王也하니라 】이 素車白馬로 係頸以組【組는 天子之韍也라 係頸者는 以示降服이니 欲其自殺이라 】하고 封皇帝璽符節하야 降軹道旁【軹道亭은 東去霸城觀四里요 觀은 東去霸水百步라 括地志에 軹道在雍州萬年東北十六里苑中이라 】이어늘 諸將이 或言誅秦王한대 沛公曰 始에 懷王遣我는 固以能寬容이라 且人已服降이어늘 殺之不祥이라하고 乃以屬吏하다 〈出本紀〉

[史略 史評]司馬公孔子曰知(智)及之라도 仁不能守之면 雖得之나 必失之라하시니 秦之謂也라 善夫라 賈生之言曰 秦以區區之地로 致萬乘之權하야 招八州而朝同列이 百有餘年이라 然後에 以六合爲家하고 殽函爲宮이러니 一夫作難에 而七廟隳하고 身死人手하야 爲天下笑者는 何也오 仁義不施하고 而攻守之勢異也라하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攻守無異勢라 秦以詐力得之하니 豈有能施仁義之理邪아

겨울 10월에【冬十月은 如淳의 註에 이르기를 “高祖가 10월에 霸上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秦나라를 따라 10월을 歲首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沛公이 霸上에 이르니, 秦王 子嬰이【趙高가 二世를 시해하고 말하기를 “秦나라는 옛 왕국이었는데, 始皇이 천하에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帝라고 칭한 것이다. 이제 六國이 다시 섰으니, 옛날과 같이 王이 되어야 한다.” 하고는 곧 子嬰을 세워 秦王이라 하였다.】 흰 수레와 흰 말로 목에 인끈을 매고【組는 天子의 韍(인끈)이다. 목에 매는 것은 항복함을 보이는 것이니, 자살하고자 하는 것이다.】 황제의 玉璽와 符節을 봉함하여 軹道 가에서【軹道亭은 동쪽으로 霸城觀과의 거리가 4리이고 觀은 동쪽으로 霸水와의 거리가 100보이다. ≪括地志≫에 “軹道는 雍州 萬年縣 동북쪽 16리 苑中에 있다.” 하였다.】 항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혹 秦王을 죽일 것을 말하자, 沛公은 말하기를 “처음에 懷王이 나를 보낸 것은 진실로 寬容하기 때문이었다. 또 사람이 이미 항복하였는데,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子嬰을 관리에게 맡겼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史略 史評]司馬溫公이 말하였다.

孔子가 말씀하기를 ‘지혜가 거기에 미치더라도 仁이 그것을 지킬 수 없으면 비록 얻더라도 반드시 잃는다.’ 하셨으니, 秦나라를 두고 말한 것이다. 아, 훌륭하다. 賈生(賈誼)의 말에 이르기를 ‘秦나라가 구구한 雍州 땅을 가지고 萬乘 天子의 권세를 이룩하여 八州를 점령하고 동렬들에게 조회 받은 지가 백여 년이나 되었다. 그런 뒤에 六合을 집으로 삼고 殽函(殽山과 函谷關)을 궁궐로 삼았는데, 한 匹夫가 난을 일으키자 七廟가 무너지고 황제의 몸이 남의 손에 죽어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仁義를 베풀지 않아서였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공격과 수비는 형세가 다르지 않다. 秦나라가 속임수와 무력으로 天下를 얻었으니, 어찌 仁義를 베풀 리가 있겠는가.”

沛公이 西入咸陽하니 諸將이 皆爭走金帛財物之府하야 分之호되 蕭何獨先入收秦丞相府圖籍하야 藏之【藏之 漢書高祖紀云 收秦丞相御史律令圖書藏之라 】라 以此로 沛公이 得具知天下阨塞, 戶口多少, 彊弱之處러라 〈出蕭相國世家〉

朱氏高帝入關에 而蕭何獨先收秦丞相府律令圖書하니 其慮深矣라 然獨不念治天下之道는 非圖籍之所能備요 保天下之道는 非律令之所能紀者乎아 秦人以四方書籍으로 盡付之烈焰之中이로되 而先王遺書가 猶幸略存於博士掌故之府하니 使何與高帝少有王天下之志하야 因丞相府하야 以收圖籍하고 因博士學官하야 以收遺書하야 用圖籍之形勢하야 以收效於百戰搶攘之日하고 用帝王之遺書하야 以保治於一定甫安之時런들 則漢之基業이 當與商周比隆矣리라 不知出此하야 遂使先王遺典으로 復灰於項籍之手하야 使天下不見帝王之全書하니 蕭何不得辭其責矣니라

沛公이 서쪽으로 咸陽에 들어가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금과 비단과 재물을 보관한 창고로 달려가서 이를 나누어 가졌으나 蕭何는 홀로 먼저 秦나라 丞相府에 들어가서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보관하였다.【≪漢書≫ 〈高祖紀〉에 이르기를 “秦나라 丞相府와 御史臺의 律令과 圖書를 거두어 보관했다.” 하였다.】 이 때문에 沛公은 천하의 요새와 戶口의 많고 적음과 강하고 약한 곳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 《史記 蕭相國世家》에 나옴 -

朱氏(朱黼)가 말하였다.

高帝가 關中에 들어가자 蕭何가 홀로 먼저 秦나라 丞相府에 보관되어 있던 律令과 圖書를 수습하였으니, 생각함이 깊다. 그러나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는 圖籍(지도와 호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천하를 보존하는 방도는 律令으로 기록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어찌 생각하지 않았는가. 秦나라 사람들이 四方의 서적을 모두 뜨거운 화염 속에 던져 태웠으나 先王의 遺書(남은 책)가 오히려 다행히 博士와 掌故(故事를 맡은 관원)의 府庫에 남아 있었으니, 만일 蕭何高帝가 조금이라도 천하에 왕 노릇 할 뜻이 있어 丞相府를 인하여 圖籍을 수습하고 博士와 學官들을 인하여 遺書를 거두어서, 圖籍의 형세를 사용하여 백 번 싸워 혼란할 때에 효험을 거두고 帝王의 遺書를 사용하여 한 번 정하여 겨우 편안할 때에 다스림을 보존했더라면 漢나라의 基業이 마땅히 商나라, 周나라와 함께 똑같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할 줄을 몰라서 마침내 先王의 남은 典籍으로 하여금 다시 項籍의 손에 불타게 하여, 천하로 하여금 帝王의 온전한 글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蕭何가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沛公이 見秦宮室帷帳과 狗馬重寶와 婦女以千數하고 意欲留居之러니 樊噲諫曰 沛公이 欲有天下耶잇가 將爲富家翁耶잇가 凡此奢麗之物은 皆秦所以亡也니 沛公이 何用焉이리잇고 願急還霸上하고 無留宮中하소서 沛公이 不聽이어늘 張良曰 秦爲無道故로 沛公이 得至此하니 夫爲天下除殘賊인대 宜縞素爲資【王氏曰 縞는 繒之精白者요 素는 謂無采飾也요 資는 藉也라 欲令沛公으로 反秦奢服하고 儉服以爲藉也라 】어늘 今始入秦하야 卽安其樂이면 此는 所謂助爲虐이니이다 且忠言逆耳나 利於行이요 毒藥苦口나 利於病이니 願沛公은 聽言하소서 沛公이 乃還軍霸上하다 〈出留侯世家 及徐廣注〉

沛公은 秦나라의 宮室과 帷帳과 개와 말과 귀중한 보물과 부녀자가 천으로 헤아려지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자 하였다. 이에 樊噲가 간하기를 “沛公께서는 천하를 소유하고자 하십니까? 부잣집 늙은이가 되고자 하십니까? 무릇 이 사치하고 화려한 물건들은 모두 秦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이니, 沛公은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원컨대 급히 霸上으로 돌아가고 宮中에 머물지 마소서.” 하였으나 沛公이 듣지 않았다.

張良이 말하기를 “秦나라가 무도하였기 때문에 沛公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으니, 천하를 위하여 殘賊(백성을 괴롭히는 자)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흰 명주옷(검소함)을 바탕(밑천)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王氏가 말하였다. “縞는 비단 중에 곱고 흰 것이고, 素는 채색과 꾸밈이 없는 것을 이르며, 資는 바탕이다. 沛公으로 하여금 秦나라의 사치한 의복과 반대로 하여 검소한 의복을 바탕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처음 秦나라에 들어와서 그들이 즐기던 것을 편안히 여긴다면 이는 이른바 ‘桀王을 도와 포악함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충성스러운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고 독한 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이로우니, 원컨대 沛公樊噲의 말을 들으소서.” 하니, 沛公이 마침내 霸上으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史記 留侯世家》와 徐廣의 注에 나옴 -

○ 十一月에 沛公이 悉召諸縣父老豪傑하야 謂曰 父老苦秦苛法이 久矣라 誹謗者를 族하고 偶語者를 棄市러니 吾當王關中이라 與父老約하노니 法三章耳라 殺人者는 死하고 傷人及盜는 抵罪【抵는 至也, 當也니 除秦酷政하고 但至於罪也라 張氏曰 秦法에 一人犯罪면 擧家及隣伍皆坐之러니 今但當其身坐하고 父子兄弟 罪不相及이라 】하고 餘는 悉除去秦法하노니 諸吏民【此用漢書及史記로되 作吏人하니 下同이라 】은 皆案堵如故하라 凡吾所以來는 爲父老除害요 非有所侵暴니 無恐하라 且吾所以還軍霸上은 待諸侯至而定約束【漢書에 作要束이라 】耳라하고 乃使人으로 與秦吏行縣鄕邑하야 告諭之하니 秦民이 大喜하야 爭持牛羊酒食하야 獻饗軍士어늘 沛公이 又讓不受曰 倉粟多하야 非乏하니 不欲費民이라한대 民又益喜하야 唯恐沛公不爲秦王이러라 〈出史記本紀〉

[史略 史評]唐氏曰 不殺子嬰, 約法三章이 此理最好하야 爲得天下之根本也니 項羽는 一切反是니라

[史略 史評]廬陵劉氏高帝入咸陽하야는 則除秦苛法하고 光武至河北하야는 則除苛政하니 二漢之興이 宜哉인저

11월에 沛公이 여러 縣의 父老와 豪傑들을 다 불러 이르기를 “父老들이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에 고생한 지가 오래되었다. 정부를 비방하는 자는 三族을 멸하고 둘이 모여 말하는 자는 棄市하였는데, 내가 마땅히 關中에 왕 노릇 할 것이다. 父老들과 약속하노니, 法은 단지 3章일 뿐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도둑질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죄에 이르게 하고,【抵는 이르고 해당함이니, 秦나라의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다만 〈죄를 지은 자만〉 죄에 이르게 한 것이다. 張氏(張晏)가 말하였다. “秦나라 法에는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온 집안과 隣伍가 모두 연좌되었는데, 지금은 다만 그 사람에게만 죄를 해당시키고 부자와 형제는 죄가 서로 미치지 않게 한 것이다.”】 나머지는 秦나라의 법을 모두 제거하노니, 여러 관리와 백성들은【이는 ≪漢書≫와 ≪史記≫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吏民이 원래 吏人으로 되어 있으니, 아래도 이와 같다.】 모두 옛날과 같이 편안히 살라. 무릇 내가 여기에 온 까닭은 父老를 위하여 해로움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지 침략하고 포악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 또 내가 霸上으로 돌아와 주둔한 것은 제후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약속을 정하려【約束이 ≪漢書≫에는 ‘要束’으로 되어 있다.】 해서일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사람을 시켜서 秦나라의 관리와 함께 縣‧鄕‧邑을 순행하여 이를 告諭하게 하였다. 秦나라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소와 양과 술과 밥을 가지고 와서 바쳐 군사들에게 먹게 하였으나 沛公은 또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창고에 곡식이 많아 부족하지 않으니, 백성의 재물을 허비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였다. 백성들이 또 더욱 기뻐하여 행여 沛公秦王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史略 史評]唐氏가 말하였다.

沛公子嬰을 죽이지 않고 三章의 法을 약속한 것은, 이 이치가 매우 좋아서 天下를 얻는 근본이 되었으니, 項羽는 일체 이와 반대로 하였다.”

[史略 史評]廬陵劉氏가 말하였다.

高帝가 咸陽에 들어가서는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였고, 光武帝가 河北에 이르러서는 王莽의 까다로운 정사를 제거하였으니, 前漢과 後漢이 일어남이 당연하다.”

項羽旣定河北하고 率諸侯兵하야 欲西入關이러니 秦降卒이 多怨言이어늘 乃夜擊하야 坑秦卒二十餘萬人新安【邑名이니 去弘農東三百餘里라 括地志云 新安古城은 在洛州澠池縣東二十里라 】城南하다 〈出羽本紀〉

胡氏管見曰 莫强於人心이로되 而可以仁結이요 可以誠感이요 可以德化요 可以義動也며 莫柔於人心이로되 而不可以威劫이요 不可以術計요 不可以法持요 不可以利奪也라 二十萬人不服은 得而坑之어니와 諸侯王不服하야 四面而起엔 獨且奈何哉아

項羽가 河北을 평정하고 諸侯들의 병력을 인솔하여 서쪽으로 關中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秦나라의 항복한 군사들이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項羽는 마침내 밤에 이들을 공격하여秦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新安의【新安은 邑의 이름이니, 弘農 동쪽 300여 리 지점이다. ≪括地志≫에 “新安의 옛 城은 洛州 澠池縣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城 남쪽에 파묻어죽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胡氏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보다 더 강한 것이 없으나 仁으로 맺을 수 있고 정성으로 감동시킬 수 있고 德으로 교화시킬 수 있고 義로 감동시킬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보다 더 유순한 것이 없으나 위엄으로 협박할 수 없고 꾀로 계산할 수 없고 법으로 억누를 수 없고 이익으로 빼앗을 수 없다. 20만 명의 군사가 복종하지 않은 것은 項羽가 구덩이에 묻어 죽일 수 있었으나 諸侯王들이 복종하지 않아 사면에서 일어날 때에는 項羽가 홀로 장차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 或說沛公曰 秦富는 十倍天下하고 地形彊이라 聞項羽號秦降將章邯하야 爲雍王하고 王關中이라하니 今卽來하면 沛公이 恐不得有此하니 可急使兵守函谷關하야 無內(納)諸侯軍하고 稍徵關中兵하야 以自益하야 距之하소서 沛公이 然其計하야 從之하다 〈出史高祖紀〉

혹자가 沛公을 설득하기를 “秦나라는 부유함이 천하의 열 배이고 땅의 형세가 강합니다. 들으니 項羽가 秦나라의 항복한 장수 章邯을 칭호하여雍王이라 하고 關中에 왕 노릇 하게 한다 하니, 지금 만일 項羽가 오면 沛公이 이곳을 소유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급히 병력으로 函谷關을 지켜 諸侯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차츰 關中의 병력을 징발하여 스스로 보태어 이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니, 沛公이 그 계책을 옳게 여겨 따랐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已而요 項羽至關하니 關門이 閉라 聞沛公已定關中하고 大怒하야 使黥布等으로 攻破函谷關하다 十二月에 項羽進至戲【水名이니 在新豐東이라 】러니 沛公의 左司馬曹無傷이 使人言沛公이 欲王關中하야 珍寶를 盡有之하고 欲以求封이라한대 大怒하야 饗士卒하고 期旦日擊沛公軍하니 當是時하야 兵은 四十萬이니 號百萬이라하야 在新豐鴻門【鴻門은 地名이니 在戲西라 姚察曰 在新豐古城東하니 未至戲水하야 道南有斷原하니 南北洞門이 是라 】하고 沛公兵은 十萬이니 號二十萬이라하야 在霸上하다 范增이 說沛公이 居山東時에 貪財好色이러니 今入關에 財物을 無所取하고 婦女를 無所幸하니 此는 其志不小라 吾令人望其氣러니 皆爲龍成五采하니 此는 天子氣也라 急擊勿失하소서

[史略 史評]唐氏曰 入關에 不取財物하고 不幸婦女하니 此高帝創業規模也니라

얼마 후 項羽가 函谷關에 이르니, 關門이 닫혀 있었다. 沛公이 이미 關中을 평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黥布 등으로 하여금 函谷關을 공격하여 부수게 하였다. 12월에 項羽가 전진하여 戲水에【戲는 물 이름이니 新豐 동쪽에 있다.】 이르렀는데, 沛公의 左司馬曹無傷이 사람을 보내어 項羽에게 말하기를 “沛公이 關中에 왕 노릇 하고자 하여 진귀한 보물을 모두 소유하고 關中王에 봉해줄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項羽가 크게 노하여 사졸들을 먹이고 다음날 아침 沛公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에 項羽의 병력은 40만인데 100만이라 일컬어 新豐의 鴻門에【鴻門은 地名이니 戲水 서쪽에 있다. 姚察이 말하기를 “鴻門은 新豐 古城의 동쪽에 있다. 戲水에 이르기 전에 길 남쪽에 끊긴 언덕이 있으니 南北의 洞門이 이곳이다.” 하였다.】 있었고, 沛公의 병력은 10만인데 20만이라 일컬어 霸上에 있었다.

范增項羽를 설득하기를 “沛公이 山東에 있을 때에는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였는데, 지금 關中에 들어와서는 재물을 취하는 바가 없고 부녀자들을 총애하는 바가 없으니, 이는 그 뜻이 작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시켜 그 기운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모두 ‘龍이 되어 五采를 이루고 있다.’ 하니, 이는 天子의 기운입니다. 급히 공격하여 놓치지 마소서.” 하였다.

[史略 史評]唐氏가 말하였다.

“關中에 들어가서는 재물을 취하지 않고 부녀자들을 총애하지 않았으니, 이는 高帝가 漢나라를 創業한 규모이다.”

項伯【伯은 其字也라 一云名纏이요 字伯陵이라 】項羽의 季父也라 素善張良이러니 夜馳見하야 具告以事하고 欲呼與俱去한대 張良曰 臣爲韓王하야 送沛公이러니 沛公이 今有急이어늘 亡去는 不義라 不可不語니라 乃入하야 具告沛公하고 固要項伯하야 入見沛公한대 沛公이 奉巵酒爲壽【巵는 飮酒禮器也라 上酒爲稱壽요 非大行酒也라 】하고 約爲婚姻曰 吾入關하야 秋毫를 不敢有所近하고 籍吏民, 封府庫하야 而待將軍호니 所以遣將守關者는 備他盜也라 豈敢反乎리오 願은 明言不敢倍(背)德하라 項伯이 許諾하고 謂沛公曰 旦日에 不可不蚤(早)自來謝니라 沛公曰 諾다 於是에 項伯이 復夜去하야 俱以沛公言報하고 因言曰 沛公이 不先破關中이면 公이 豈敢入乎아 今人有大功이어늘 而擊之는 不義也니 不如因善遇之라한대 項羽許諾하다

項伯이란 자는【伯은 字이다. 一說에는 “이름이 纏이고 字가 伯陵이다.” 하였다.】項羽의 季父(叔父)이다. 평소 張良과 친하였는데 밤에 달려가 張良을 보고서 자세히 사태를 말하고 불러내어 함께 떠나가고자 하였다. 張良이 말하기를 “신은 韓王을 위하여 沛公을 전송하는 중입니다. 沛公이 이제 위급한 일이 있는데, 도망가는 것은 의롭지 못하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張良이 마침내 들어가 沛公에게 자세히 말하고 굳이 項伯에게 요청하여 들어와서 沛公을 만나 보게 하였다.

沛公이 술잔을 받들어 祝壽를 하고【巵는 술을 마시는 禮器이다. 술잔을 올리는 것을 壽라 칭한 것이요, 크게 술잔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혼인할 것을 약속하며 말하기를 “내가 關中에 들어와 털끝만큼도 감히 가까이한 바가 없으며, 관리와 백성을 장부에 올리고 府庫를 봉함하여 장군을 기다렸으니, 장수를 보내어 關門을 지키게 한 이유는 다른 도적을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배반하겠습니까? 원컨대 項伯은 내가 감히 은덕을 배반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말해주십시오.” 하였다.

項伯이 허락하고 沛公에게 이르기를 “내일 아침에 일찍 스스로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沛公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項伯이 다시 밤에 가서 項羽에게 沛公의 말을 자세히 전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沛公이 먼저 關中을 격파하지 않았다면 公이 어찌 감히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이제 이 사람이 큰 공이 있는데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니, 인하여 잘 대우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項羽가 허락하였다.

沛公이 旦日에 從百餘騎하야 來見鴻門하고 謝曰 臣與將軍으로 戮力而攻秦할새 將軍은 戰河北하고 臣은 戰河南이러니 不自意先入關하야 能破秦하고 得復見將軍於此로라 今者에 有小人之言하야 令將軍與臣有隙이로다 項羽曰 此는 沛公의 左司馬曹無傷이 言之니 不然이면 이 何以至此리오 因留沛公飮할새 范增이 數目【謂頻數動目以諭之라 】하고 擧所佩玉玦【玦은 玉佩也니 如環而有缺이라 左閔二年에 衛懿公이 與石祁子玦이라한대 註에 玦은 玉玦也니 示以當決斷也라하니 卽此라 】하야 以示之者三이로되 不應하다 起出하야 召項莊하야 謂曰 君王爲人이 不忍하니 若이 入前爲壽하고 壽畢이어든 請以劍舞하야 因擊沛公於坐하야 殺之하라 不(否)者면 若屬이 皆且爲所虜하리라 이 入爲壽하고 壽畢에 曰 軍中에 無以爲樂하니 請以劍舞하노이다 曰 諾다 項莊이 拔劍起舞어늘 項伯이 亦拔劍起舞할새 常以身翼蔽沛公하니 이 不得擊이라

沛公이 다음날 아침 백여 명의 騎兵을 데리고 鴻門에 와서 項羽를 보고 사과하기를 “신이 장군과 힘을 다하여 秦나라를 공격할 적에 장군은 河北에서 싸우고 신은 河南에서 싸웠는데, 스스로 뜻하지 않게 먼저 關中에 들어와서 秦나라를 격파하고 다시 장군을 이곳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小人의 이간질하는 말이 있어서 장군으로 하여금 신과 틈이 있게 하였습니다.” 하니, 項羽가 말하기를 “이는 沛公의 左司馬인 曹無傷이 말한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項羽가 인하여 沛公을 머물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하였는데, 范增이 여러 번 項羽에게 눈짓을 하고【數目은 자주 눈짓을 하여 깨우침을 이른다.】 차고 있던 玉玦을 들어 보이기를【玦은 玉佩이니, 고리(반지)와 같은데 터진 틈이 있다. ≪春秋左傳≫ 閔公 2年條에 “衛나라 懿公이 石祁子에게 玦을 주었다.” 하였는데, 註에 “玦은 玉玦이니 마땅히 결단해야 함을 보인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다.】 세 번이나 하였으나 項羽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范增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項莊을 불러 이르기를 “군왕의 사람됨이 차마 못하니, 그대가 들어가 앞에 나아가 祝壽하고 祝壽가 끝나거든 검으로 춤출 것을 청하여, 이 틈을 타서 沛公을 그 자리에서 쳐서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이 모두 장차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項莊이 들어가 축수하고, 축수가 끝나자 말하기를 “軍中에 오락으로 삼을 것이 없으니, 검으로 춤을 출 것을 청합니다.” 하니, 項羽가 이를 허락하였다. 項莊이 검을 뽑아 일어나 춤을 추자, 項伯 또한 검을 뽑아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항상 몸으로 沛公을 좌우에서 엄호하여 項莊이 공격할 수가 없었다.

於是에 張良이 至軍門하야 見樊噲하고 曰 今項莊이 拔劍舞하니 其意常在沛公也니라 曰 此迫矣라하고 卽帶劍擁盾【兵也니 所以扞身이라 】하고 入軍門하야 披帷立하야 瞋目視項羽하니 頭髮이 上指하고 目眦盡裂이라 曰 壯士로다 賜之巵酒하라 則與斗巵酒【巵는 受四升이요 斗巵는 受一斗之巵也라 】한대 飮之어늘 曰 賜之彘肩하라 則與一生彘肩한대 拔劍切而啗之어늘 曰 壯士로다 復能飮乎아 曰 臣이 死且不避어든 巵酒를 安足辭리오 夫秦有虎狼之心하야 殺人을 如不能擧하고 刑人을 如恐不勝하니 天下皆叛之라 懷王이 與諸將約曰 先破秦入咸陽者를 王之라하시더니 今에 沛公이 先破秦入咸陽하야 毫毛를 不敢有所近하고 還軍霸上하야 以待將軍하니 勞苦而功高如此어늘 未有封爵之賞하고 而聽細人之說하야 欲誅有功之人하시니 此는 亡秦之續耳라 竊爲將軍不取也하노이다 須臾에 沛公이 起如厠할새 因招出하야 間行趣(趨)霸上하고 留張良하야 使謝하다 〈出項羽紀〉

止齋陳氏曰 昔에 鄧侯不殺楚文王하야 而楚卒滅鄧하고 楚子不殺晉文公하야 而晉卒敗楚【而晉卒敗楚 魯莊公六年에 楚文王伐申할새 過鄧이어늘 鄧侯止而饗之한대 三甥이 請殺楚子호되 鄧侯不許러니 後楚伐鄧滅之하니라 魯僖公二十三年에 晉公子重耳出奔及楚어늘 楚子饗之한대 子玉이 請殺之호되 楚子不聽이러니 後與楚人戰于城濮하야 楚軍敗績也하니라 】하고 項籍不殺高帝하야 而漢卒誅하니 志士至今惜之라 嗚呼라 必殺其所忌하야 而以得國이면 則安知天下之禍 將不出於其所不足忌者哉아 夫變之來也無常하고 而英雄豪傑이 其伏也無盡하니 變之來也無常이면 則不可以逆定이요 英雄豪傑이 其伏也無盡이면 則必有出於意料之所不及이라 是故로 詳於禁者는 有法外之遺姦하고 工於謀者는 有術中之隱禍라 詩曰 魚網之設에 鴻則罹之라하니 網以伺魚也로되 而顧以得鴻하니 天下之事 又焉用專於其所忌하야 而淫怒焉以逞哉아 彼范增者는 滋之暴하야 徒欲斃漢於一擊하니 吾恐沛公雖死나 而天下之爲沛公者를 可得以盡殺耶아

이에 張良이 軍門에 이르러 樊噲를 보고 말하기를 “지금 項莊이 검을 뽑아 춤을 추는데, 그 뜻이 항상 沛公에게 있다.” 하니, 樊噲가 말하기를 “이는 매우 급박하다.” 하고는 즉시 검을 차고 방패를 끼고【盾은 무기이니, 몸을 막아 지키는 것이다.】軍門에 들어가 휘장을 헤치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項羽를 보니, 頭髮이 위를 향해 서고 눈초리가 모두 찢어졌다.

項羽가 말하기를 “壯士이다. 큰 잔에 술을 주어라.” 하니, 즉시 한 말 들이 큰 술잔【巵는 4升이 들어가고, 斗巵는 1斗가 들어가는 술잔이다.】을 주었다. 樊噲가 이를 마시자, 項羽가 “돼지 다리를 주어라.” 하니, 즉시 생돼지 앞다리 하나를 주었다. 樊噲가 검을 뽑아 이것을 베어 먹자, 項羽가 말하기를 “장사이다. 다시 더 마실 수 있겠는가?” 하니, 樊噲가 말하였다. “신이 죽는 것도 피하지 않는데, 잔의 술을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秦나라는 호랑이와 이리같이 사나운 마음이 있어서 사람 죽이기를 다 거행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사람을 형벌하기를 이루 다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니, 천하가 모두 배반하였습니다. 懷王이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먼저 秦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咸陽에 들어가는 자를 왕으로 삼겠다.’ 하였습니다. 이제 沛公이 먼저 秦나라를 격파하고 咸陽에 들어가 털끝만큼도 감히 가까이한 바가 없고, 霸上으로 돌아와 군을 주둔하고 장군을 기다렸으니, 노고가 많고 공이 높음이 이와 같은데도 관작을 봉하는 賞은 없고 細人(小人)의 말을 듣고서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고자 하시니, 이는 망한 秦나라를 답습하는 것일 뿐입니다. 적이 장군을 위하여 취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沛公이 일어나 측간에 가면서 인하여 樊噲를 불러내어 샛길로 달려 霸上으로 가고 張良을 남겨두어 項羽에게 사과하게 하였다. -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止齋陳氏(陳傅良)가 말하였다.

“옛날에 鄧侯가 楚나라 文王을 죽이지 않아서 楚나라가 끝내 鄧나라를 멸망시켰고, 楚子가 晉나라 文公을 죽이지 않아서 晉나라가 끝내 楚나라를 패퇴시켰고,【魯나라 莊公 6년에 楚나라 文王이 申나라를 정벌할 때에 鄧나라를 지나가자 鄧侯가 그를 머물게 하여 연향을 베푸니, 三甥이 楚王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鄧侯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뒤에 楚나라가 鄧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魯나라 僖公 23년에 晉나라 公子 重耳가 망명하여 楚나라에 이르자 楚王이 그에게 연향을 베푸니, 子玉이 그를 죽일 것을 청했으나 楚王이 듣지 않았는데, 뒤에 晉나라 重耳가 城濮에서 楚人과 싸워 楚軍이 대패하였다.】項籍高帝를 죽이지 않아서 漢나라가 끝내 項籍을 죽였으니, 志士들이 지금까지 애석해한다. 아! 반드시 꺼리는 바를 죽여서 나라를 얻는다면 천하의 禍가 장차 꺼릴 만하지 않은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변고가 옴은 일정함이 없고 영웅호걸이 숨어 있음은 무궁무진하니, 변고가 옴이 일정함이 없다면 미리 정할 수가 없고 영웅호걸이 숨어 있음이 무궁무진하다면 반드시 뜻으로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데에서 나올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禁令을 자세하게 하면 法 밖에 〈법망을 빠져나가는〉 간사함이 있고, 꾀하기를 공교하게 하면 꾀 속에 숨어 있는 禍가 있는 것이다. 《詩經》에 이르기를 ‘魚網을 설치하였는데 기러기가 걸렸다.’ 하였으니, 魚網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나 도리어 기러기를 잡았으니, 천하의 일이 또 어찌 꺼리는 바에 오로지 힘을 써서 지나치게 노여워하여 화풀이할 필요가 있겠는가. 저 范增이란 자는 項羽의 포악함을 증가시켜 단지 漢나라를 일격에 패망시키려 하였으니, 내 생각에는, 沛公이 비록 죽었더라도 천하의 沛公이 될 자를 어찌 다 죽일 수 있었겠는가.”

○ 居數日에 項羽引兵西屠咸陽하야 殺秦降王子嬰하고 燒秦宮室하니 火三月不滅이라 收其貨寶婦女而東하니 秦民이 大失望이러라 〈此句는 出高祖紀요 餘는 出項羽紀라 〉

며칠 머문 뒤에 項羽가 병력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가서 咸陽을 屠戮한 다음, 秦나라의 항복한 王 子嬰을 죽이고 秦나라 宮室을 불태우니, 불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았다. 보화와 부녀자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니, 秦나라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이 句는 《史記》〈高祖本紀〉에 나오고 나머지는 〈項羽本紀〉에 나옴 -

韓生【漢書云韓生이라하고 史記云 人或說라하니라 】이 說項羽曰 關中은 阻山帶河하야 四塞之地【戰國秦策에 被山帶渭라한대 註言 山關之險阻如被요 河渭之圍繞如帶라 正義曰 東有黃河, 函谷, 蒲津, 龍門, 合河等關하고 南有南山及武關, 嶢關하고 西有大隴山及隴山關, 大震, 烏闌等關하고 北有黃河, 南塞하니 是謂四塞之地라 】요 〈此一句는 出漢書하니 史記엔 只云 阻山河四塞이라 〉 地肥饒하니 可都以霸니이다 見秦宮室이 皆已燒殘破하고 又心思東歸하야 曰 富貴不歸故鄕이면 如衣繡夜行【漢書에 作衣錦이라 】이니 誰知之者리오 韓生이 退曰 人言楚人은 沐猴而冠耳【沐猴는 獼猴也니 雖著人衣冠이나 心不類人이라 索隱曰 言沐猴(獼猴)不任久著冠帶니 以喩楚人性躁暴라 】라하더니 果然이로다 聞之하고 烹韓生하다 〈出項羽紀〉

韓生이【≪漢書≫에는 韓生이라 하였고, ≪史記≫에는 “어떤 사람이 혹 설득하였다[人或說]”라고 하였다.】項羽를 설득하기를 “關中은 산이 막혀 있고 黃河가 띠처럼 둘러 있어 사방이 막혀 있는 요새의 땅이고【≪戰國策≫ 〈秦策〉에 “산에 덮여있고 渭水가 띠처럼 에워싸고 있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山과 關門의 험함이 이불과 같고 黃河와 渭水가 에워싸고 있는 것이 띠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동쪽에는 黃河‧函谷‧蒲津‧龍門‧合河 등의 關門이 있고, 남쪽에는 南山 및 武關‧嶢關이 있고, 서쪽에는 大隴山 및 隴山關‧大震‧烏闌 등의 關門이 있고, 북쪽에는 黃河‧南塞가 있으니, 이를 일러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 이 한 句는 《漢書》에 나오니, 《史記》에는 다만 ‘阻山河四塞’라고 되어 있다. - 토지가 비옥하니, 도읍하여 霸者가 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項羽는 秦나라 宮室이 모두 이미 불타 殘破함을 보았고 또 마음에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衣繡’가 ≪漢書≫에는 ‘衣錦’으로 되어 있다.】 같으니,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韓生이 물러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楚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冠을 씌운 것일 뿐이라고 말하더니,【沐猴는 원숭이이니, 원숭이가 비록 사람의 옷을 입고 冠을 쓰더라도 마음은 사람과 같을 수가 없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원숭이가 오랫동안 冠帶를 착용할 수 없음을 말하였으니, 楚나라 사람의 성질이 조급하고 사나움을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과연 그렇다.” 하였다. 項羽가 이 말을 듣고 韓生을 삶아죽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使人致命懷王한대 懷王曰 如約하라 懷王者는 吾家所立爾요 非有功伐하니 何以得專主約이리오 春正月에 陽尊懷王하야 爲義帝하니 實不用其命이러라 〈出史高紀〉

項羽가 사람을 시켜 懷王에게 명령을 전하게 하니, 懷王이 “약속과 같이 하라.”고 말하였다. 項羽가 말하기를 “懷王은 우리 집안에서 세웠을 뿐이고 공로가 없으니,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약속을 주관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봄 정월에 項羽가 겉으로는 懷王을 높여 義帝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 二月에 分天下하야 王諸將하고 自立爲西楚霸王하야 王梁, 楚地九郡하고 都彭城【都彭城 猗頓傳曰 夫自淮北沛郡, 陳州, 汝南, 南郡이 此西楚也요 彭城以東東海, 吳郡, 廣陵이 此東楚也요 衡山, 九江, 江南, 豫章, 長沙 此南楚也라 】하다 范增으로 疑沛公이나 而業已講解【業已講解 王氏曰 講은 和也요 解는 折伏也니 漢書作媾解라 注에 媾는 和也라 已然曰業이니 言雖有疑心이나 然事已和解也라 】하고 又惡負約하야 乃陰謀曰 巴蜀【今成都, 潼州, 夔州等路라 括地志云 巴子城은 在台州石鏡縣南五里요 蜀都益州라 】은 道險하고 秦之遷人이 皆居之라하야 乃曰 巴蜀亦關中地也라하고 故立沛公漢王하야 王巴蜀, 漢中하야 都南鄭【漢中郡邑이니 今興元所理縣이라 】하고 而三分關中하야 王秦降將章邯, 司馬欣, 董翳하야 以距塞漢路하다 〈出史項羽紀〉

2월에 項羽가 천하를 나누어 여러 장수들을 왕으로 삼고 項羽는 스스로 서서 西楚霸王이 되어梁과 楚의 땅 아홉 郡에 왕 노릇 하고 彭城에 도읍하였다.【≪史記≫ 〈猗頓傳〉에 “淮北으로부터 沛郡‧陳州‧汝南‧南郡은 西楚이고, 彭城 以東의 東海‧吳郡‧廣陵은 東楚이고, 衡山‧九江‧江南‧豫章‧長沙는 南楚이다.” 하였다.】

項羽范增과 함께 沛公을 의심하였으나 이미 講解(講和)하였고,【王氏가 말하였다. “講은 講和이고 解는 굴복함이니, ≪漢書≫에는 ‘媾解’라고 되어 있는데 注에 ‘媾는 和함이다.’ 하였다. 이미 그러한 것을 業이라고 하니, 비록 의심함이 있으나 일이 이미 화해되었음을 이른다.”】 또 약속을 저버린다는 말을 싫어하여 마침내 은밀히 모의하기를 “巴‧蜀은【巴‧蜀은 지금 成都, 潼州, 夔州 등의 路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巴子城은 台州 石鏡縣 남쪽 5리에 있고, 蜀都는 益州이다.” 하였다.】 길이 험하고 秦나라의 귀양간 사람이 모두 살고 있다.” 하여, 마침내 이르기를 “巴‧蜀도 關中 땅이다.” 하고는 일부러 沛公을 세워 漢王으로 삼아서巴‧蜀과 漢中에 왕 노릇 하여 南鄭에【南鄭은 漢中郡의 邑이니, 지금 興元府에서 다스리는 縣이다.】도읍하게 하고關中을 셋으로 나누어 秦나라의 항복한 장수인 章邯司馬欣董翳를 왕으로 삼아 漢나라의 길을 막게 하였다. -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漢王이 怒하야 欲攻項羽한대 周勃, 灌嬰, 樊噲皆勸之러니 蕭何諫曰 雖王漢中之惡이나 不猶愈於死乎잇가 能詘(屈)於一人之下하야 而信(伸)於萬乘之上者는 是也니이다 臣願大王은 王漢中하사 養其民以致賢人하시고 收用巴蜀하사 還定三秦【雍王章邯, 塞王司馬欣, 翟王董翳를 項羽三分關中地而王之하니 是謂三秦이라 】하시면 天下를 可圖也리이다 漢王曰 善타하고 乃遂就國하야 以爲丞相하다 〈出漢書蕭何傳〉

林之奇高祖項羽爭天下에 其勢力才氣가 相去遠甚이라 然이나 項羽所以終失天下而爲高祖之所斃者는 能勇而不能怯故也라 高祖之封於漢中也에 周勃, 灌嬰, 樊噲가 乃欲勸之以攻하니 曾不知勢力弗敵而與之抗이면 則是蹙之亡耳라 故로 蕭何以爲能詘於一人之下而信(伸)於萬乘之上者는 是也라하니 高祖隱忍從之하야 卒以巴蜀之衆으로 還取三秦하야 以成漢家四百年之社稷하니 此則能勇而能怯之效也라 項羽之敗於烏江也에 亭長이 艤船待之하야 以爲江東雖小나 亦足王也니 願大王急渡하소서하니 此卽蕭何之謀耳라 使能從其言이면 則天下之事를 未可知矣어늘 不勝區區之忿하야 乃曰 與江東子弟八千으로 渡江而西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兄이 憐而王我인들 我何面目見之리오하니 此所謂能勇而不能怯者也라 是故로 高祖는 百戰而百敗하니 惟其不勝也일새 一勝則必至於王하고 項羽는 百戰而百勝하니 惟其必勝也일새 一不勝則必至於亡하니라

[新增]胡氏曰 人有常言호되 皆曰 用賢은 所以養民也어늘 蕭相國乃謂養民以致賢人은 何也오 曰此無所因襲獨見之言也라 夫天之立君은 以爲民也니 君之求臣은 以行保民之政也요 臣之事君은 以行安民之術也라 故로 世主無養民之心이면 則天下之賢人君子不爲之用하야 而上之所得者 莫非殘民害物之人이라 是以로 民心日離하고 君勢日孤하니 亡秦之轍이 可以鑑矣라 蕭何有見於此어늘 而高祖聞言卽悟하니 漢業之興이 不亦宜哉아

漢王이 노하여 項羽를 공격하고자 하니, 周勃灌嬰樊噲가 모두 이를 권하였다. 그런데 蕭何가 간하기를 “비록 漢中의 나쁜 땅에 왕 노릇 하나 죽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의 아래에 굽혀서 萬乘의 위에 편 것은 湯王武王이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신은 원컨대 대왕이 漢中에 왕 노릇 하시어, 백성을 길러 어진 사람을 招致하시며 巴‧蜀의 인물을 거두어 등용하시고 돌아가 三秦을【雍王 章邯, 塞王 司馬欣, 翟王 董翳를 項羽가 關中의 땅을 셋으로 나누어 왕 노릇 하게 하니, 이를 三秦이라 일렀다.】 평정하신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漢王은 “좋다.” 하고 마침내 나라에 나아가서 蕭何를 丞相으로 삼았다.- 《漢書 蕭何傳》에 나옴 -

林之奇가 말하였다.

高祖項羽와 천하를 다툴 때에 그 勢力과 才氣의 차이가 매우 현격하였다. 그러나 項羽가 끝내 천하를 잃고 高祖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項羽는 용맹하기만 하고 두려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高祖를 漢中에 봉할 때에 周勃灌嬰樊噲가 마침내 高祖에게 권하여 項羽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니, 일찍이 세력이 대등하지 못한데 항거하면 이는 멸망을 재촉하는 길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蕭何가 이르기를 ‘한 사람의 아래에 굽혀 萬乘의 위에 편 것은 湯王武王이 이러한 사람들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高祖가 분노를 참고 이 말을 따라서 마침내 巴‧蜀의 병력을 가지고 다시 三秦을 취하여 漢나라의 4백 년 社稷을 이루었으니, 이는 용맹하면서도 능히 두려워한 효험이다.

項羽가 烏江에서 패했을 때에 亭長이 배를 대고 말하기를 ‘江東이 비록 작으나 또한 충분히 왕 노릇 할 수 있으니,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하였으니, 이는 바로 蕭何高祖에게 올린 계책인 것이다. 만일 項羽가 그 말을 따랐더라면 천하의 일을 알 수 없었을 터인데, 구구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내가 江東의 子弟 8천 명과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었는데, 이제 한 사람도 돌아가는 자가 없으니, 비록 江東의 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 노릇 시킨다 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만나 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용맹하기만 하고 두려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高祖는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였으니 오직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 번 이기면 반드시 왕 노릇 함에 이르렀고, 項羽는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으니 오직 반드시 이겼기 때문에 한 번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멸망함에 이른 것이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사람들이 항상 말할 적에 모두들 말하기를 ‘賢者를 등용함은 백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蕭相國(蕭何)은 도리어 ‘백성을 길러서 賢人을 초치한다.’고 말함은 어째서인가? 이는 因襲한 바가 없이 홀로 안 말이다. 하늘이 군주를 세움은 백성을 위해서이니, 군주가 신하를 구함은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려 해서이고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법을 행하려고 해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군주가 백성을 기르려는 마음이 없으면 천하의 賢人 君子가 그를 위해 쓰여지지 않아서 윗사람이 얻는 자는 모두 백성을 해치고 물건을 해치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民心이 날로 이반하고 君主의 형세가 날로 외로워지는 것이니, 망한 秦나라의 前轍이 거울이 될 만하다. 蕭何가 이것을 알고 있었는데 高祖가 그의 말을 듣고 즉시 깨달았으니, 漢나라의 王業이 일어남이 당연하지 않은가.”

○ 夏四月에 諸侯罷戲(麾)下兵하고 各就國할새 項王이 使卒三萬人으로 從漢王之國하다 張良이 送至褒中【括地志云 漢中郡褒中縣은 又名南鄭이니 一云卽褒城也라 】이어늘 漢王이 遣良歸韓한대 이 因說漢王하야 燒絶所過棧道하야 以備諸侯盜兵하고 且示項羽無東意하다 〈出漢書本紀及張良傳史記同〉

여름 4월에 諸侯가 麾下의 군대를 해산하고 각기 봉해진 나라로 나갈 적에 項王이 병졸 3만 명으로 하여금 漢王을 따라 봉해준 나라로 가게 하였다. 張良이 褒中까지【褒中은 ≪括地志≫에 “漢中郡 褒中縣은 또 南鄭이라고 이름하니, 일설(≪史記正義≫)에는 褒城이라고 한다.” 하였다.】 와서 전송하자, 漢王張良을 보내어 韓나라로 돌아가게 하니, 張良이 인하여 漢王을 설득해서 지나는 곳의 棧道를 불태워끊어서 제후의 침략군을 대비하게 하고, 또 項羽에게 동쪽으로 진출할 뜻이 없음을 보이게 하였다.- 《漢書》〈高帝紀〉와 〈張良傳〉에 나옴. 《史記》도 같음 -

○ 初에 淮陰韓信이 家貧하야 釣於城下러니 有漂母見信飢하고 飯【以水打絮爲漂라 飯은 飼之也라 】이어늘 이 喜하야 謂漂母曰 吾必有以重報母호리라 母怒曰 大丈夫不能自食일새 吾哀王孫【如言公子也니 蓋尊稱之耳라 】而進食호니 豈望報乎리오 淮陰屠中少年이 有侮者하야 因衆辱之曰 아 能死어든 剌我하고 不能死어든 出 我袴【王氏曰 袴는 一作胯하니 胯는 股間也라 依字讀도 亦通이니 何須作胯下리오 】하라 於是에 이 俛出袴下하야 蒲伏(匍匐)【俛은 音免이라 蒲는 亦作匍하니 手行也요 伏은 亦作匐하니 伏地也라 】하니 一市人이 皆笑以爲怯이러라 及項梁渡淮에 이 杖劍從之하야 居麾下【麾는 大將之旗也니 所以指麾也라 】호되 無所知名이러니 項梁敗에 又屬項羽하니 以爲郞中이어늘 數以策干호되 不用이러라 漢王之入蜀에 이 亡楚歸漢한대 王이 以爲治粟都尉호되 亦未之奇也러니 이 數與蕭何語에 奇之러라

처음에 淮陰 사람 韓信이 집이 가난하여 성 아래에서 낚시질하고 있었는데, 漂母(빨래하던 부인)가 韓信이 굶주린 것을 보고 韓信에게 밥을 먹였다.【물로 솜을 빠는 것을 漂라고 한다. 飯은 밥을 먹여 주는 것이다.】韓信이 기뻐하여 漂母에게 이르기를 “내가 반드시 漂母에게 중하게 보답하겠소.” 하니, 漂母가 노하여 말하기를 “대장부가 자력으로 먹지 못하기에 내 王孫을【王孫은 公子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높여서 칭한 것이다.】 딱하게 여겨 음식을 올린 것이니, 어찌 보답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淮陰의 백정 중에 韓信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어서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주어 말하기를 “韓信아, 죽을 수 있거든 나를 찌르고, 죽을 수 없거든 내 바짓가랑이 아래로 나가라.”【王氏가 말하였다. “袴는 다른 곳에는 胯로 되어 있으니, 胯는 다리 사이(사타구니)이다. 袴字로 읽어도 또한 통하니, 어찌 굳이 胯下로 써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韓信이 고개를 숙이고 바짓가랑이 아래로 나와 기어가니,【俛은 음이 면이다. 蒲는 또한 匍로 되어 있으니 손으로 기어가는 것이고, 伏 또한 匐으로 되어 있으니 땅에 엎드리는 것이다.】 온 시장 사람들이 모두 韓信을 비웃으며 겁쟁이라고 하였다.

項梁이 淮水를 건너가자, 韓信이 검을 차고 따라가 麾下에【麾는 大將의 깃발이니, 지휘하는 것이다.】 있었으나 이름이 알려진 바가 없었다. 項梁이 패하자 또다시 項羽에게 소속되니, 項羽가 郎中으로 삼았는데, 여러 번 계책을 가지고 項羽에게 써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項羽가 써주지 않았다.

漢王이 蜀으로 들어갈 때에 韓信이 楚나라에서 도망하여 漢나라에 귀의하니, 漢王이 治粟都尉로 삼았으나 또한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韓信이 여러 번 蕭何와 말할 적에 蕭何는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漢王이 至南鄭하니 諸將及士卒이 皆歌謳思東歸하야 多道亡者라 이 亡去어늘 亡하고 不及以聞하고 自追之러니 人有言王曰 丞相亡이라한대 王이 大怒하야 如失左右手러니 居一二日에 來謁王이어늘 王이 且怒且喜하야 罵曰 諸將亡者以十數로되 公이 無所追하니 追은 詐也로다 曰 諸將은 易得耳어니와 至如者하야는 國士無雙【漢國之中에 僅有信一人也요 他無與比라 一云 國士는 國家之奇士라 】이니 王이 必欲長王漢中인대 無所事【謂無所用信이라 】이어니와 必欲爭天下인댄 非이면 無可與計事者니 顧王策安〈所〉決耳니이다 王曰 吾亦欲東耳니 安能鬱鬱久居此乎리오 乃召하야 拜大將한대 曰 王이 素慢無禮하사 今拜大將을 如呼小兒하시니 此乃所以去也니이다 王이 必欲拜之인댄 擇良日齋戒하시고 設壇場具禮라야 乃可耳니이다 王이 許之하니 諸將이 皆喜하야 人人이 各自以爲得大將이러니 至拜大將하야는 乃韓信也라 一軍이 皆驚이러라

漢王이 南鄭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과 士卒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며 동쪽(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도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韓信이 도망가자, 蕭何韓信이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미처 왕에게 아뢰지도 못하고 직접 韓信을 쫓아갔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기를 “丞相蕭何가 도망갔습니다.”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좌우의 손을 잃은 것처럼 여겼다.

하루 이틀이 지나 蕭何가 와서 왕을 뵙자, 왕이 한편으로는 노하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여 蕭何를 꾸짖기를 “여러 장수로서 도망한 자가 열로 헤아려지는데 公이 이들을 쫓아간 적이 없었으니, 韓信을 쫓아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였다.

蕭何가 말하기를 “여러 장수들이야 얻기가 쉽지만 韓信과 같은 자는 國士이어서 둘도 없는 사람【漢나라 안에 겨우 韓信 한 사람이 있을 뿐이요, 다른 사람은 더불어 견줄 자가 없는 것이다. 一說에 “國士는 국가의 기이한 선비이다.” 하였다.】이니, 왕께서 반드시 오래도록 漢中에서 왕 노릇 하고자 하신다면 韓信을 쓸 곳이 없지만【韓信을 쓸 곳이 없음을 이른다.】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韓信이 아니고는 더불어 일을 계획할 만한 자가 없으니, 다만 왕의 계책이 어디로 결정하시느냐일 뿐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하니, 어찌 답답하게 오랫동안 이곳에 거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韓信을 불러 대장에 임명하려 하였다. 蕭何가 말하기를 “왕이 평소 거만하고 무례하시어 이제 대장을 임명하시기를 어린아이를 부르듯 하시니, 이것이 바로 韓信이 떠나간 이유입니다. 왕께서 반드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고자 하신다면 좋은 날을 가려 재계하시고 壇과 마당을 마련하고 禮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여 사람마다 각각 자신이 대장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대장을 임명함에 이르러서는 바로 韓信이었으므로 온 군중이 모두 놀랐다.

이 拜禮畢에 上坐하니 王曰 丞相이 數言將軍하니 將軍이 何以敎寡人計策고 이 辭謝하고 因問王曰 今東鄕(向)하야 爭權天下 豈非項王邪잇가 漢王曰 然하다 曰 大王이 自料勇悍仁强컨대 孰與項王이니잇고 漢王이 良久에 曰 不如也로라 亦以爲大王不如也라하노이다 然이나 臣嘗事之하니 請言項王之爲人也호리이다 項王이 喑噁叱咤【喑噁는 漢書에 作音烏하고 叱咤는 漢書에 作猝嗟라 [釋義]喑噁는 懷怒氣요 叱咤는 發怒聲이라 】에 千人이 自廢【千人皆失氣하야 不敢當也라 】나 然不能任屬賢將하니 此는 特匹夫之勇耳요 項王이 見人에 恭敬慈愛하야 言語嘔嘔【悅言也라 漢書에 作姁姁하니 音同이라 】하며 人有疾病에 涕泣分食飮호되 至使人有功當封爵者하야는 印刓敝로되 忍不能予【刓은 角之刓訛缺也니 言封爵之印이 雖已刻而手弄角訛호되 不忍授也라 】하니 此所謂婦人之仁也라 項王이 雖霸天下而臣諸侯나 不居關中而都彭城하고 放逐義帝하며 所過에 無不殘滅하니 名雖爲霸나 實失天下心이라 故로 其彊이 易弱이니이다 今大王이 誠能反其道하사 任天下武勇하시면 何所不誅며 以天下城邑으로 封功臣하시면 何所不服이며 以義兵으로 從思東歸之士하시면 何所不散【師古云 散은 謂四散而立功이라 [釋義]索隱曰 用東歸之兵하야 擊東方之敵이면 此敵이 無不散敗也라 】이리잇고 且三秦王이 爲將하야 將秦子弟數歲矣라 欺其衆하야 降諸侯【王氏曰 先是에 秦圍鉅鹿이어늘 羽遣兵救之하니 秦軍數卻이라 二世使人讓章邯한대 邯遂降羽하니 羽立爲雍王하야 置楚軍中하고 乃使長史欣爲上將하야 將秦軍前行하다 是年에 羽將諸侯兵三十萬하고 略地至河南하며 遂西到長安이러니 及秦軍降諸侯에 諸侯吏卒乘勝하야 奴虜折辱之하니라 】러니 至新安하야 項王이 詐坑秦降卒二十餘萬하고 唯獨, , 得脫하니 秦父兄이 怨此三人하야 痛入骨髓라 今楚彊以威로 王此三人하니 秦民이 莫愛也요 大王은 入關하야 秋毫를 無所害하고 除秦苛法하시니 秦民이 無不欲得大王王秦者라 今大王이 擧而東하시면 三秦을 可傳檄而定也【檄은 尺書也니 傳檄書하야 以責所伐者라 師古曰 可傳檄而定은 言不足用兵也라 】리이다 於是에 漢王이 大喜하야 自以爲得晩이라하고 遂聽信計하다 〈以上 出史記韓信傳〉

蘇老泉曰 御賢將之術은 以이요 御才將之術은 以智니 人君이 當觀其才之大小而爲制御之術也라 漢高一見韓信에 而授之上將하야 解衣衣之하고 推食哺之하며 一見黥布에 而供具飮食을 皆如王者하고 一見彭越에 而以爲相國하니 當是時하야 三人者未有功於漢也라 厥後에 追項籍垓下하야 與期而不至어늘 捐數千里之地以畀之하야 項氏未滅하고 天下未定이로되 而三人者已極富貴矣니 高帝知三人者之志大하야 不極於富貴면 則不爲我用也라 若樊噲滕公灌嬰之徒는 則不然하야 拔一城, 陷一陳而後에 增數級之爵하고 否則終歲不遷也하니 嗚呼라 高帝는 可謂知大計者矣로다

韓信이 임명하는 禮가 끝나자 자리에 오르니, 왕이 말하기를 “승상이 여러 번 장군을 말하였는데, 장군은 무엇으로 寡人에게 계책을 가르쳐 주겠는가?” 하였다. 韓信이 사례하고 인하여 왕에게 묻기를 “지금 동쪽을 향하여 천하에 권력을 다툴 자가 어찌 項王(項羽)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漢王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韓信이 말하기를 “대왕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용맹하고 사납고 인자하고 강함이 項王과 더불어 누가 낫습니까?” 하니, 漢王이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그만 못하다.” 하였다.

韓信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도 또한 대왕이 그만 못하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項王을 섬겼으니, 項王의 사람됨을 말하겠습니다. 項王이 노하여 질타하면【喑噁는 ≪漢書≫에 音烏로 되어 있고, 叱咤는 ≪漢書≫에 猝嗟로 되어 있다. [釋義]喑噁는 노기를 품은 것이고, 叱咤는 노한 목소리를 발하는 것이다.】 천 사람이 기가 꺾여 당해내지 못합니다.【千人自廢는 천 사람이 모두 용기를 잃어 감히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진 장수에게 맡기지 못하니, 이는 다만 匹夫의 용맹일 뿐입니다. 項王은 사람을 볼 적에 공경하고 자애로워 언어가 온화하며【嘔嘔는 기쁘게 말하는 것이다. ≪漢書≫에는 姁姁로 되어 있으니, 음이 같다.】 사람들이 질병을 앓으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주지만 사람을 부려 공이 있어서 封爵해야 할 자에 이르러서는 印章이 모서리가 닳아서 망가져도 차마 주지 못하니,【刓은 모서리가 닳아서 망가진 것이니, 封爵하는 印章을 비록 이미 새겨 놓았으나 손으로 만지작거려 모서리가 닳아도 차마 주지 못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婦人의 仁이라는 것입니다. 項王이 비록 천하에 霸王이 되어 諸侯들을 신하로 삼고 있으나 關中에 거하지 않고 彭城에 도읍하며, 義帝를 추방하고 지나가는 곳마다 잔인하게 멸망시키지 않음이 없으니, 이름은 비록 霸王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천하의 인심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강함은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이제 대왕이 진실로 그 道를 반대로 하시어 천하의 굳세고 용감한 자에게 맡기시면 어떤 사람인들 주벌하지 못하겠으며, 천하의 城邑을 가지고 공신들을 봉하시면 어떤 사람인들 굴복시키지 못하겠으며, 義로운 군대를 데리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군사들을 따르시면 어떤 사람인들 해산시키지 못하겠습니까?【[原註]顔師古가 이르기를 “散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공을 세움을 이른다.” 하였다. [釋義]≪史記索隱≫에 말하기를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동방의 적을 공격하면 이 적이 와해되어 흩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또 三秦의 왕은 장수가 되어 秦나라 자제를 거느린 지가 여러 해였습니다. 그 무리를 속이고 諸侯에게 항복하였는데,【王氏가 말하였다. “이에 앞서 秦나라가 鉅鹿을 포위하였는데 項羽가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니, 秦나라 군대가 자주 퇴각하였다. 二世皇帝가 사람을 보내어 章邯을 꾸짖자 章邯이 마침내 項羽에게 항복하니, 項羽가 그를 세워서 雍王을 삼아 楚나라 軍中에 두고 마침내 長史인 司馬欣으로 하여금 上將이 되어 秦軍을 거느리고 전진하게 하였다. 이 해에 項羽가 諸侯의 군대 30만을 이끌고 땅을 경략하여 河南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서쪽으로 長安에 이르렀는데, 秦軍이 諸侯에게 항복하자 諸侯의 吏卒들이 승세를 타고 秦나라 군사들을 노예와 포로로 대하여 노략질하고 기를 꺾어 욕보인 것이다.”】新安에 이르자 項王이 秦나라의 항복한 군사 20여만 명을 속여서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유독 章邯司馬欣董翳만이 빠져 나오니, 秦나라 父兄들이 이 세 사람을 원통해 하는 마음이 골수에 들어있습니다. 이제 楚나라가 억지로 위엄을 가지고 이 세 사람을 왕으로 삼으니, 秦나라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왕께서는 關中에 들어가 털끝만큼도 해친 바가 없고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을 제거하시니, 秦나라 백성들이 대왕을 얻어 秦나라에 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 대왕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출하시면 三秦은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檄文은 한 자쯤 되는 글이니, 檄書를 전하여 토벌할 자를 꾸짖는 것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은 군대를 쓸 필요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漢王이 크게 기뻐하여 스스로 韓信을 얻음이 늦었다고 여기고 마침내 韓信의 계책을 따랐다. - 이상은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蘇老泉이 말하였다.

“어진 장수를 제어하는 방법은 信으로써 하고, 재주 있는 장수를 제어하는 방법은 지혜로써 하니, 人君은 재주의 크고 작음을 보아 제어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 漢나라 高祖가 한 번 韓信을 보자 上將軍에 임명하여 옷을 벗어 입혀 주고 밥을 밀어 먹여 주었으며, 한 번 黥布를 보자 供具와 음식을 모두 王者와 같게 하였고, 한 번 彭越을 보자 相國으로 삼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이 세 사람은 아직 漢나라에 功이 있지 않았다. 그 후 垓下에서 項籍을 추격하여 韓信, 彭越과 회동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오지 않자 수천 리의 땅을 떼어서 이들에게 주어, 項氏가 아직 멸망하지 않고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으나 이 세 사람이 이미 지극히 부귀하였으니, 이는 高帝가 세 사람의 뜻이 커서 부귀를 지극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쓰임이 되지 않을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樊噲滕公灌嬰과 같은 무리는 그렇지 않아서 한 城을 함락하고 한 陣을 무너뜨린 뒤에야 몇 등급의 작위를 올려 주고 그렇지 않으면 일 년 내내 승진시키지 않았으니, 아! 高帝는 큰 계책을 안 者라고 이를 만하다.”

○ 八月에 引兵從故道出【括地志에 鳳州兩當縣이 漢故道也니 故亦作固라 後魏置固道郡하고 西魏改鳳州하니라 】하야 襲雍하니 雍王은 戰敗走하고 塞王翟王는 皆降하다 〈以上 出漢書高紀〉

8월에 〈漢王이〉 병력을 인솔하고 故道를 따라 나와서【故道는 ≪括地志≫에 “鳳州 兩當縣이 漢나라의 故道이니, 故는 또한 固로도 쓴다. 뒤에 魏나라가 固道郡을 설치하였고 西魏가 鳳州로 고쳤다.” 하였다.】雍을 습격하니, 雍王章邯은 싸우다가 패주하고塞王司馬欣翟王董翳는 모두 항복하였다. - 이상은 《漢書 高帝紀》에 나옴 -

王陵者는 沛人也라 先聚黨數千人하야 居南陽이러니 至是하야 始以兵屬漢하다 項王이 取母하야 置軍中하고 使至에 則東鄕(向)坐母하야 欲以招이러니 母私送使者할새 泣曰 願爲妾語호되 善事漢王하라 漢王은 長者니 毋以老妾故로 持二心하라 妾이 以死送使者라하고 遂伏劍而死하다 〈出漢書本紀〉

王陵이란 자는 沛縣 사람이다. 이보다 먼저 무리 수천 명을 모아 南陽에 거주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兵力을 인솔하고 漢나라에 소속되었다. 項王王陵의 어머니를 데려다가 군중에 두고는 王陵의 使者가 이르자 王陵의 어머니를 東向하여 앉혀서 王陵을 부르려 하였다. 王陵의 어머니가 은밀히 使者를 보낼 적에 울며 말하기를 “원컨대 妾을 위하여 에게 ‘漢王을 잘 섬기라. 漢王은 長者이니 늙은 妾 때문에 두 마음을 갖지 말라.’고 말하라. 妾은 죽음으로써 使者를 보낸다.” 하고는 마침내 칼에 엎드려 죽었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張良이 遺項王書曰 漢王이 失職하야 欲得關中하니 如約이면 卽止하야 不敢東이라하고 又以齊, 梁反書로 遺項王曰 齊欲與趙幷滅楚라하니 項王이 以此故로 無西意而北擊齊러라 〈出史記項羽紀〉

張良項王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漢王이 직책을 잃어 關中을 얻고자 하니, 약속대로 關中을 얻으면 즉시 중지하여 감히 동쪽으로 전진하지 않겠다.” 하였으며, 또 齊나라와 梁나라의 배반을 알리는 글을 項王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齊나라가 趙나라와 함께 楚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 하니, 項王이 이 때문에 서쪽으로 漢나라를 공격할 뜻이 없어 북쪽으로 齊나라를 공격하였다. -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丙申]西楚二年, 漢二年

[丙申]〈西楚二年이요 漢二年이라 ○ 是歲에 韓亡하니 凡二大國이요 小國凡十二國이라 〉

冬十月에 項王이 密使九江王等으로 擊義帝하야 殺(弑)之江中하다 〈出黥布傳及漢書高祖紀〉

[新增]愚按尹氏〈起莘〉曰 嗚呼라 君臣은 天地之大義也니 臣之事君은 猶子之事父하야 亘古今而不可易이라 是以로 陳恒之事를 孔子已告老矣사되 且沐浴請(封)[討]하시니 豈非天地大變이라 人理之所不容故로 不忍與之竝立乎世리오 此蓋萬世之通義也라 이 世爲楚將하야 北面事之하니 義帝懷王之孫이라 項梁立以爲君하야 大義已定이어늘 이 何得以弑之乎아 況起自偏裨하야 矯殺卿子冠軍하고 宰割天下하야 率徇己私어늘 義帝不能誅하고 而反弑帝하니 其惡을 可勝道哉아 朱子綱目에 揭而書之曰 西楚霸王項籍이 弑義帝於江中이라하니 稱國稱爵稱名은 所以著强暴大逆之罪니 至是에 始無所容於天地之間이니 然後에 義兵可擧하야 人皆得而誅之矣라 密擊江中이 果可以欺天下乎아

병신(B.C.205) - 西楚 2年, 漢나라 2년이다. ○ 이 해에 韓나라가 망하니, 大國이 모두 2개국이고 小國이 모두 12개국이다.-

겨울 10월에 項王이 은밀히 九江王黥布 등으로 하여금 義帝를 공격하게 하여 강 가운데에서 시해하였다. - 《史記 黥布傳》과 《漢書 高帝紀》에 나옴 -

[新增]내가 살펴보건대 尹氏(尹起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군주와 신하는 천지의 큰 義理이니,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아서 고금에 걸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陳恒의 일을 孔子께서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는데도 목욕재계하고서 토벌할 것을 청하신 것이니, 〈신하가 군주를 시해함은〉 어찌 천지간의 큰 변고여서 사람의 도리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므로 차마 그와 함께 세상에 서서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는 萬世의 공통된 義理이다.

項籍이 대대로 楚나라의 장수가 되어 北面하여 섬겼으니, 義帝懷王의 손자이다. 項梁이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아서 大義가 이미 정해졌는데, 項籍이 어떻게 그를 시해한단 말인가. 더구나 項籍이 偏裨(副將)로부터 일어나 義帝의 명령을 사칭하여 卿子冠軍을 살해하였고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분할하여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따랐는데, 義帝項籍을 죽이지 못하고 項籍이 도리어 義帝를 시해하였으니, 그 惡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게시하여 쓰기를 ‘西楚霸王項籍義帝를 강 가운데서 시해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칭하고 작위를 칭하고 이름을 칭함은 項籍의 强暴하여 大逆無道한 죄를 드러낸 것이니, 그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천지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義兵을 일으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은밀히 강 가운데에서 공격한다고 하여 과연 천하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陳餘襲破常山하니 張耳敗走漢이어늘 陳餘趙王於代하야 復爲趙王【陳餘擊張耳破走하고 迎趙王하니 王立餘爲代王이어늘 餘留傅趙王하고 而使夏說守代하니라 】하다 ○ 漢王이 立韓襄王하야 爲韓王하니 常將韓兵하야 從漢王이러라

陳餘가 습격하여常山을 격파하니, 常山王張耳가 패하여 漢나라로 달아났다. 陳餘趙王(趙歇)을 代國에서 맞이하여 다시 趙王으로 삼았다.【陳餘가 張耳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趙王 歇을 맞이하니, 趙王은 陳餘를 세워 代王으로 삼았는데, 陳餘는 남아서 趙王의 師傅가 되고 夏說로 하여금 代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漢王이 韓나라 襄王孫子을 세워 韓王으로 삼으니, 항상 韓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漢王을 따랐다.

○ 初에 陽武人陳平이 家貧好讀書러니 里中社【其里名庫上이라 蔡邕의 陳留東昏庫上里社碑云 惟斯庫里는 古陽武之〈戶〉牖鄕이니 陳平이 由此宰社하야 遂相漢高라하니라 [頭註]社는 后土也니 使民祀之하야 春以祈穀하고 秋以報功이라 周制에 大夫與民族居百家以上이면 則共立一社러니 秦漢以來로는 雖非大夫라도 民二十五家면 則得立社하니라 】이 爲宰하야 分肉食甚均이어늘 父老曰 善타 陳孺子之爲宰여 曰 嗟乎라 使平得宰天下라도 亦如是肉矣리라하다 及諸侯叛秦에 이 事魏王咎於臨濟하야 爲太僕이러니 說魏王호되 不聽하고 人或讒之어늘 이 亡去하다 後에 事項羽하야 拜爲都尉러니 後에 復杖劍歸漢하야 因魏無知하야 求見漢王한대 王이 與語而悅之하야 問曰 子之居楚에 何官고 曰 爲都尉니이다한대 是日에 卽拜爲都尉하야 使爲參乘【參은 一作驂이라 乘車之法은 尊者居左하고 御者居中하고 又一人處其右하야 以備傾側이라 】하고 典護軍【典은 掌也요 護는 監領也라 】하다 諸將이 盡讙【讙은 譁也니 讙囂而議也라 】曰 大王이 一日에 得楚之亡卒하야 未知其高下而卽與同載하시고 反使監護長者온여 漢王이 聞之하고 愈益幸이러라 〈出陳丞相世家〉

처음에 陽武 사람 陳平이 집이 가난하였으나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마을 안의 社祭에【[釋義]그 마을 이름은 庫上里이다. 蔡邕의 陳留 東昏庫上里 社碑에 이르기를 “이 庫上里는 옛날 陽武의 戶牖鄕이니, 陳平이 이로 말미암아 社祭에 宰가 되어서 마침내 漢나라 高祖를 도왔다.” 하였다. [頭註]社는 后土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하게 하여, 봄에는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고 가을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인 것에 감사하였다. 周나라 제도에 大夫가 백성들과 함께 거하여 100家戶 이상이 되면 함께 한 社를 세웠는데, 秦‧漢時代 이후로는 비록 大夫가 아니더라도 백성들이 25家戶가 되면 社를 세울 수 있었다.】陳平이 宰가 되어서 고기와 음식을 나누어 주기를 매우 균등하게 하였다. 父老들이 칭찬하기를 “잘한다. 陳孺子가 宰 노릇 함이여.” 하니, 陳平이 말하기를 “아, 만일 내가 천하에 재상이 되더라도 또한 이 고기와 같이 균평하게 하겠다.” 하였다. 제후들이 秦나라를 배반하자陳平魏王를 臨濟에서 섬겨 太僕이 되어 魏王을 설득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이 그를 참소하자 陳平이 도망하여떠났다.

뒤에 項羽를 섬겨 都尉에 임명되었는데, 뒤에 다시 검을 짚고 漢나라로 귀의하여魏無知를 통해서 漢王을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다. 漢王陳平과 함께 말해 보고는 기뻐하여 묻기를 “그대가 楚나라에 있을 때에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하니, “都尉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漢王은 이날 즉시 陳平을 都尉로 임명하여 參乘을【參은 一本에는 驂으로 되어 있다. 수레를 타는 법은 높은 자가 왼쪽에 있고, 말 모는 자가 중앙에 있고, 또 한 사람이 오른쪽에 있어서 수레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에 대비한다.】 하게 하고 군사들을 맡아 監護하게 하였다.【典은 관장함이고, 護는 감독하고 거느리는 것이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떠들며【讙은 시끄러움이니, 盡讙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비난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대왕이 어느 날 楚나라에서 도망해 온 병졸을 얻어 그 신분의 高下도 알지 못하고서 곧바로 그와 수레를 함께 타시며, 도리어 그로 하여금 長者들을 監護하게 하시는구나.” 하였다. 漢王이 이 말을 듣고 더욱더 陳平을 총애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漢王이 南渡平陰津하야 至洛陽新城한대 三老董公이 遮說王【三老는 見武帝紀라 橫道自言曰遮說라 】曰 臣聞順德者는 昌하고 逆德者는 亡이라하니 兵出無名이면 事故(固)不成이라 故로 曰明其爲賊이라야 敵乃可服이라하니이다 項羽爲無道하야 放殺(弑)其主하니 天下之賊也라 夫仁不以勇【以는 用也니 己有仁이면 天下歸之하야 可不用勇而天下自服이요 己有義면 天下奉之하야 可不用力而天下自定也라 】이요 義不以力이니 大王이 宜率三軍之衆하사 爲之素服하고 以告諸侯而伐之하소서 於是에 漢王이 爲義帝發喪하고 告諸侯曰 天下共立義帝러니 今項羽放殺之【放은 逐也요 殺는 讀曰弑니 下之殺同이라 】하니 寡人이 親爲發喪하야 兵皆縞素하고 悉發關中兵하고 收三河士하야 南浮江漢以下하야 願從諸侯王【諸侯王은 謂諸侯及王也라 】하야 擊楚之殺義帝者라하다 〈本紀〉

朱黼曰 自昔帝王之興에 憂天命之圮絶하야 而求與之保合하고 憫人心之陷溺하야 而思與之拯援하고 無所自容其力하야 不得已焉이어든 而見之兵革之間하니 亦豈其心之所欲哉아 反道敗德하고 侮慢自賢이면 則苗不可以不伐이요 狎侮五行하고 怠棄三正이면 則扈不可以不征이요 俶擾天紀면 於是에 有羲和之師요 矯誣上帝면 於是에 有鳴條之攻이요 謂祭無益하고 謂暴無傷하며 謂己有天命하고 謂敬不足行이라하면 於是에 有牧野之戰이라 去邠之慍不殄이면 則采薇之役을 不可不遣也요 不恭之怒方張이면 則方徂之旅를 不可不遏也요 整居之禍孔熾면 則六月之伐을 不可不亟也라 誅亂之兵不出이면 則仁義之統紀不明이요 仁義之統紀不明이면 則上下內外紊舛失敍하야 固將淪入禽獸夷狄而不自覺者리니 雖欲私一己而安歲月이나 詎可得乎아 使高帝不聞新城仁義之說하야 不爲洛陽縞素之擧하고 特以智力으로 與項氏相角하야 使幸而勝之면 則是吾與天下人民으로 亦獨以智力相尙耳니 智不足以相勝이면 則凡智於我者 孰不反面以相賊이며 力不足以相制면 則凡力於我者 孰不交臂以相戕이리오 禍亂之來가 曷有窮已리오 自仁義之言一明으로 使天下曉然知帝王統紀가 如日月之不可掩하고 自縞素之師一擧로 使天下灼知上下定分이 如天地之不可易하야 三綱九疇【洪範九疇也니 曰五行, 曰敬用五事, 曰農用八政, 曰協用五紀, 曰建用皇極, 曰乂用三德, 曰明用稽疑, 曰念用庶徵, 曰享用五福, 威用六極이라 】가 幾斷而復續하고 天命人心이 欲紊而復正이라 漢雖不純王道나 而猶培植扶持하야 至四百年之久하야 旣絶而復振하고 或欲竊取而猶不取者는 其由此也夫인저

[史略 史評]胡氏曰 天下苦秦하야 諸侯幷起하니 名其師者曰 誅無道秦이 可矣어니와 今秦已滅하고 諸侯各有分地어늘 而漢又起兵하니 雖曰項羽爲政不平이나 顧亦伸己私忿耳요 非義兵也러니 及董公獻言하야 漢王大臨然後에 項羽弑君之罪가 無所容於天地之間하야 而天下歸於漢王을 可坐而策矣라 故로 隨何가 陳此義而下九江하고 酈生이 陳此義而下全齊라 於是에 楚人이 背無所倚하고 右斷其臂하니 雖欲不亡이나 不可得矣니라

漢王이 남쪽으로 平陰 나루를 건너 洛陽의 新城에 이르니, 三老인 董公이 길을 가로막고 왕을 설득하기를【三老는 ≪漢書≫ 〈武帝紀〉에 보인다. 길을 가로막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遮說라 한다.】 “신이 들으니 순한 德을 간직한 자는 창성하고 거스르는 德을 가진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명분 없이 내면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적이 된 이유를 밝혀야 적이 비로소 복종한다.’고 한 것입니다. 項羽가 무도한 짓을 해서 그 군주를 추방하여 시해하였으니, 천하의 역적입니다. 仁은 용맹으로 하지 않고【以는 씀이니, 자기에게 仁이 있으면 천하가 돌아와 용맹을 쓰지 않아도 천하가 스스로 복종하고, 자기에게 의로움이 있으면 천하가 받들어 주어서 힘을 쓰지 않아도 천하가 스스로 안정되는 것이다.】 義는 힘으로 하지 않으니, 대왕은 마땅히 三軍의 무리를 거느리고 義帝를 위하여 素服을 입고 제후들에게 고하여 정벌하소서.” 하였다.

이에 漢王義帝를 위하여 喪을 발표하고 제후들에게 고하기를 “천하가 함께 義帝를 세웠는데 이제 項羽가 추방하여 시해하였으니,【放은 쫓아냄이요, 殺는 弑로 읽으니 아래의 殺도 같다.】寡人이 친히 義帝를 위해 喪을 발표하여 군사들에게 모두 흰옷을 입히고 關中의 병력을 총동원하고 三河의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江漢에 배를 띄워 내려가서 【諸侯王은 여러 侯와 王을 이른다.】여러 侯와 王을 따라 楚나라의 義帝를 시해한 자를 공격하려 한다.” 하였다. -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朱黼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帝王이 일어날 때에 天命이 끊어짐을 우려하여 그와 더불어 保合(변동 없이 계속됨)하기를 구하고, 人心이 〈惡에〉 빠짐을 민망히 여겨 그와 더불어 구원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그 힘을 용납하는 바가 없어 부득이하면 전쟁의 사이에 나타냈으니, 또한 어찌 그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였겠는가. 道를 배반하고 德을 무너뜨리고 업신여기고 태만하여 스스로 어진 체하면 三苗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고, 五行을 업신여기고 三正을 폐기하면 有扈를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고, 비로소 天紀를 어지럽히면 이에 羲和를 정벌하는 군대가 있었고, 上帝를 속이면 이에 鳴條의 공격이 있었고, 제사함은 유익함이 없다고 말하고 포악함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며 자기가 天命을 소유했다고 말하고 敬을 굳이 행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 이에 牧野의 전쟁이 있었다. 邠 땅을 떠나도 오랑캐의 성냄이 끊이지 않으면 采薇의 戍役(전투하는 군대)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不恭한 침략자에 대한 노여움이 막 일어나면 침략하러 가는 군대를 막지 않을 수가 없고, 오랑캐가 침입하여 內地에 정돈해 사는 禍가 매우 성하면 六月의 정벌을 빨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난을 토벌하는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으면 仁義의 統紀가 밝혀지지 못하고, 仁義의 統紀가 밝혀지지 못하면 上下와 內外가 문란하여 순서를 잃어서 진실로 장차 禽獸와 夷狄의 경지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니, 비록 자기 한 몸을 사사로이 하여 세월을 편안히 보내고자 하나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만일 高帝가 新城의 仁義의 말을 듣지 못하여 洛陽에서 素服을 입히는 조처를 하지 않고, 다만 지혜와 힘을 가지고 項氏와 서로 경쟁하여 다행히 이겼더라면 이는 내(高帝)가 천하의 人民과 더불어 또한 다만 지혜와 힘을 가지고 서로 숭상하는 것일 뿐이니, 지혜가 서로 이길 수 없으면 무릇 나보다 지혜로운 자가 어느 누가 얼굴을 돌려 서로 대적하지 않겠으며, 힘이 서로 제압할 수 없으면 무릇 나보다 힘이 센 자가 어느 누가 팔뚝을 교차하여 서로 해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禍亂이 오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仁義의 말이 한 번 밝혀짐으로부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帝王의 統紀가 해와 달처럼 가릴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 素服을 입은 군대를 한 번 일으킴으로부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上下의 정해진 분수가 하늘과 땅처럼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해서, 三綱과 九疇가【九疇는 ≪書經≫ 〈洪範〉의 九疇이니, 첫 번째는 五行이고, 두 번째는 공경하되 五事로써 함이요, 세 번째는 農事에 八政을 씀이요, 네 번째는 합함을 五紀로써 함이요, 다섯 번째는 세움을 皇極으로써 함이요,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三德으로써 함이요, 일곱 번째는 밝힘을 稽疑로써 함이요, 여덟 번째는 상고하기를 庶徵으로써 함이요, 아홉 번째는 享함을 五福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이기를 六極으로써 하는 것이다.】 거의 끊어질 뻔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天命과 人心이 문란해지려 하다가 다시 바로잡혔다. 漢나라가 비록 순수한 王道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북돋워 심고 부지하여 4백 년의 오램에 이르러서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떨쳐지고, 혹 도둑질하여 취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취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秦나라를 괴롭게 여겨서 諸侯들이 함께 일어났으니 그 군대를 이름하여 무도한 秦나라를 토벌한다고 한 것은 괜찮지만, 지금 秦나라가 이미 멸망하고 제후들이 각기 領地가 있는데 漢나라가 또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니 비록 項羽가 정사를 공평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돌아보건대 자신의 사사로운 분노를 풀려고 했을 뿐이요, 의로운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董公이 말을 아뢰어 漢王이 크게 發喪한 뒤에야 군주를 시해한 項羽의 죄가 천지의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어서 천하가 漢王에게 돌아올 것임을 앉아서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隨何가 이러한 의리를 말하여 九江王을 항복시켰고, 酈生이 이러한 의리를 말하여 齊나라의 전 국토를 항복시킨 것이다. 이에 楚나라 사람이 등 뒤에는 의지할 곳이 없고 그 오른팔이 잘렸으니, 비록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나 될 수가 없었다.”

項王이 雖聞漢東이나 欲遂破齊而後擊漢하니 漢王이 以故로 得率諸侯兵凡五十六萬人하야 伐楚하다 彭越이 將兵歸漢이어늘 漢이 遂入彭城【羽都니 時羽北擊齊하니라 】하야 收其貨寶美人하고 日置酒高會【皆召尊爵故로 曰高會라 一說에 大會也라하니라 】러니 項王이 聞之하고 自以精兵三萬人으로 至彭城하야 大破漢軍 於睢水【在彭城靈壁縣하니 東入泗라 括地志에 睢水首受浚儀縣蒗蕩渠水하고 東經臨慮縣하야 入泗過沛라 睢는 音雖라 】하니 漢軍이 爲楚所擠하야 卒十餘萬人이 皆入睢水하야 睢水爲之不流러라 圍漢王三匝이러니 會에 大風이 從西北起하야 折木發屋하고 揚沙石하야 窈冥晝晦하니 楚軍이 大亂壞散이어늘 漢王이 乃得與數十騎遁去하다 審食其從太公, 呂后하야 間行求漢王이라가 反遇楚軍하니 項王이 常置軍中하야 爲質이러라 〈此用漢書句 以上竝出史高祖紀〉

[新增]胡氏曰 盤水可奉이나 而志難持요 六馬可調나 而氣難御니 使漢王이 於是時에 兢兢業業하여 如初入關中, 見鴻門이런들 則亦何至於敗哉아 今에 志不持而氣爲帥하야 狃於小勝하야 而逸欲生焉이라 是以로 至於此耳라 且是行也에 直欲破之國都歟인댄 則宜亟還滎陽하야 以主待客이 可也요 若欲致而與戰歟인댄 則宜分部諸將하야 據險邀擊이 可也어늘 今乃淹留引日하야 肆志寵樂이로되 而群臣亦寂無諫者하니 豈諸公이 不在行歟아 嗚呼危哉인저

朱氏曰 自後世而觀高祖하면 攻守之心이 若出於一하야 未嘗有間이라 然이나 以史攷之하면 至咸陽則欲懷安하고 至彭城則已驕縱하고 天下旣平이면 則易敵愎諫하야 徑踰句注하야 幾陷不測이러니 自是以還으로 始畏兵厭功하야 不輕動妄作以禍天下하야 後世賴之라 吾嘗爲之說曰 高祖之能取天下는 本於彭城之敗요 而其能守天下也는 則自夫白登之圍라하노라

項王이 비록 漢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마침내 齊나라를 격파한 뒤에 漢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漢王이 이 때문에 무릇 제후의 병력 56만 명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정벌하게 되었다. 彭越이 병력을 인솔하고 漢나라에 귀의하자, 漢나라가 마침내 彭城에【彭城은 項羽가 도읍한 곳이니, 이때 項羽가 북쪽으로 齊나라를 공격하러 갔었다.】들어가서 그 보화와 미인을 거두고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고 크게 모여 잔치하였다.【높은 爵位가 있는 사람을 모두 불렀기 때문에 高會라 한 것이다. 一說에는 손님을 크게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項王이 이 말을 듣고 정예병 3만 명을 거느리고 彭城에 이르러 漢軍을 睢水에서【睢水는 彭城 靈壁縣에 있으니, 동쪽으로 泗水로 들어간다. ≪括地志≫에 “睢水는 처음에 浚儀縣 蒗蕩渠의 물을 받아 동쪽으로 臨慮縣을 경유해서 泗水로 들어가 沛縣을 지나간다.” 하였다. 睢는 음이 수이다.】대파하였다. 漢나라 군사들은 楚나라 군사들에게 밀려서 병졸 10여만 명이 모두 睢水로 들어가니, 睢水가 이 때문에 흐르지 못하였다.

漢王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일어나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가며 돌과 모래가 날려 캄캄해져서 낮인데도 어두우니, 楚나라 군사들이 크게 혼란하여 무너져 흩어졌으므로 漢王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과 도망갈 수 있었다. 審食其(심이기)太公呂后를 따라 샛길로 가서 漢王을 찾다가 도리어 초나라 군사를 만나니, 項王이 항상 이들을 군중에 두어 인질로 삼았다.- 이는 《漢書》의 句를 인용한 것이고, 이상은 모두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쟁반의 물은 받들 수 있으나 뜻은 지키기가 어렵고 여섯 필의 말은 제어할 수 있으나 기운은 제어하기 어려우니, 만일 漢王이 이때에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처음 〈秦나라를 격파하고〉 關中에 들어갔을 때와 鴻門宴에서 項羽를 만났을 때와 같이 했더라면 또한 어찌 패망함에 이르렀겠는가. 지금 뜻을 잡아 지키지 않고 기운을 장수로 삼아서 〈마음이 동요당하여〉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안일과 욕심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또 이번에 군대를 출동할 때에 곧바로 項羽의 國都를 격파하려고 했다면 마땅히 빨리 滎陽으로 돌아와서 主兵을 거느리고 客兵을 기다리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만약 項羽를 불러들여 싸우려고 했다면 마땅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해서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 邀擊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지체하고 날짜를 끌면서 영화와 향락에 뜻을 두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조용하여 간하는 자가 없었으니, 張良陳平 등 諸公들이 어찌 行列에 있지 않았던가. 아, 위태로웠다.”

朱氏가 말하였다.

“後世의 입장에서 高祖를 살펴보면 공격하고 수비하는 마음이 하나에서 나와서 일찍이 간격이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역사책을 가지고 고찰해 보면 咸陽에 이르러서는 편안한 마음을 품고자 하였고, 彭城에 이르러서는 이미 교만하고 방종하였으며,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적을 하찮게 여기고 간언을 듣지 않아서 곧바로 句注를 넘어가 거의 측량할 수 없는 화에 빠질 뻔하였는데, 이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전쟁을 두려워하고 功을 싫어해서 경거망동하여 천하에 禍를 끼치지 아니하여 후세가 이에 힘입었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高帝가 천하를 취한 것은 彭城의 敗戰에서 근본하였고 천하를 지킨 것은 白登의 포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漢王이 問 吾欲捐關以東하야 等棄之하노니 誰可與共功者오 張良九江王는 楚梟將【布는 英布也라 梟는 言勇倢(捷)이라】이어늘 與項王有隙하고 彭越은 與齊反梁地하니 此兩人을 可急使요 而漢王之將엔 獨韓信이 可屬大事하야 當一面이니 卽欲捐之인댄 捐之此三人이면 則楚可破也리이다 〈出留侯世家〉

漢王이 묻기를 “내 函谷關 以東 지방을 남에게 떼어 주어서 버린 것과 같이 하고자 하노니, 누가 더불어 공을 함께 할 만한 자인가?” 하자, 張良이 말하였다. “九江王黥布는 楚나라의 용맹한 장수인데【九江王 布는 英布이다. 梟는 용감하고 민첩함을 이른다.】項王과 틈이 있고, 彭越은 齊나라와 함께 梁나라 땅에서 배반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부릴 수 있으며, 漢王의 장수 중에는 오직 韓信만이 큰 일을 맡겨 한 방면을 담당하게 할 만하니, 만일 한 지방을 떼어 주고자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떼어 주신다면 楚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漢王이 謂左右호되 無足與計天下事로다 謁者隨何進曰 不審陛下所謂로이다 漢王曰 孰能爲我使九江하야 令之發兵倍楚오 留項王數月【言擧兵反楚면 則楚必留擊矣라 】이면 我之取天下 可以萬全이리라 隨何曰 臣請使之호리이다 漢王이 使與二十人俱하다 〈出黥布傳〉

漢王이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더불어 천하의 일을 계획할 만한 자가 없다.” 하였다. 謁者인 隨何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漢王이 말하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九江에 사신가서 九江王으로 하여금 군대를 내어 楚나라를 배반하게 할 수 있겠는가? 項王을 몇 달 동안만 묶어 두면【군대를 일으켜 楚나라를 배반하면 楚나라가 반드시 머물러 공격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내가 천하를 취하는 것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隨何가 아뢰기를 “신이 사신으로 가겠습니다.” 하니, 漢王隨何로 하여금 20명과 함께 가게 하였다.- 《史記 黥布傳》에 나옴 -

○ 五月에 漢王이 至滎陽하니 諸敗軍이 皆會하고 蕭何亦發關中老弱未傅者【王氏曰 民年二十三이 爲正이니 一歲爲衛士하고 一歲爲材官騎士하야 習射御騎馳戰陣하고 年五十六이 爲衰老니 乃得免爲庶民하야 就田里라 今老弱未嘗傅者를 悉詣軍이니 謂未二十三爲弱하고 過五十六爲老라 傅는 著也니 未著名籍給公家徭役者를 悉發之하야 以至漢屯이니 所以補其空缺이라 】하야 悉詣滎陽하니 漢軍이 復大振이러라 楚與漢戰滎陽南京, 索間【京, 索은 二地名也니 京은 卽京城이요 索水는 在河南之滎陽이라 】할새 漢王이 擊楚騎於滎陽東하야 大破之하니 楚以故로 不能過滎陽而西러라 漢이 軍滎陽하고 築甬道【王氏曰 恐敵鈔掠輜重이라 故로 築垣墻如街巷하니 是爲甬道라 甬音踊이라 】하야 屬之河하야 以取敖倉粟【敖는 地名이니 在滎陽西北山上이라 括地志에 敖山은 在鄭州滎陽西十五里하니 秦置大(太)倉於此라 故名敖倉이라 】하다

5월에 漢王이 滎陽에 이르니, 모든 패한 군사들이 다 모였고 蕭何 또한 關中의 노약자로서 兵籍에 올리지 않은 자들을 징발하여【王氏가 말하였다. “백성의 나이가 23세면 正丁이라 하니, 1년 동안 衛士가 되고 1년 동안 材官 騎士가 되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고 戰陣을 달리며, 나이 56세가 되면 衰老라 하니, 비로소 부역을 면제받아 庶民이 되어 田里로 나아간다. 이제 노약자로서 兵籍에 올리지 않은 자를 다 군에 나오게 한 것이니, 23세가 못된 자를 弱이라 하고 56세가 넘은 자를 老라고 함을 이른다. 傅는 붙임이니 兵籍에 올려 公家의 徭役을 맡기지 않은 자를 다 동원해서 漢나라 진영에 이르게 한 것이니, 空缺(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滎陽에 이르게 하니, 漢나라 군대가 다시 크게 떨쳤다.

楚나라가 漢나라와 滎陽의 남쪽 京城과 索水 사이에서【京과 索은 모두 지명이니, 京은 곧 京城이고 索水는 河南의 滎陽에 있다.】싸웠는데, 漢王이 楚나라 騎兵을 滎陽 동쪽에서 공격하여대파하니, 楚나라가 이 때문에 滎陽을 지나 서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漢나라가 滎陽에 군대를 주둔하고甬道를 쌓아【王氏가 말하였다. “적들이 輜重을 약탈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 골목길과 같이 만든 것이니, 이것을 甬道라 한다. 甬은 음이 용이다.”】黃河에 연결하여 敖倉의 곡식을【敖는 지명이니 滎陽 서북쪽 산 위에 있다. ≪括地志≫에 “敖山은 鄭州 滎陽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니, 秦나라가 이곳에 太君을 두었기 때문에 敖倉이라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가져갔다.

周勃等이 言於漢王陳平이 雖美如冠玉이나 其中은 未必有也【未必有也 飾冠以玉하면 光好外見이나 中非所有라 [頭註]陳平雖美如冠玉은 漢書에 作平雖美丈夫如冠玉耳라 】라 臣聞호니 居家時에 盜其嫂【盜는 猶私也니 私奪嫂志而改適也라 嫂는 兄之妻也라 】하고 事魏不容하야 亡歸楚로되 不中하고 又亡歸漢이러니 今日에 大王이 令護軍이어시늘 受諸將金【漢王이 召讓平한대 平曰 魏王不用臣故로 去하고 羽王不能信人故로 去러니 聞漢王能用人故로 來歸니이다 然이나 裸身而來하여 不受金이면 則無以資身이니이다 金具在하니 請封輸官하고 得乞骸骨하노이다 】하니 願王察之하소서 漢王이 召讓魏無知한대 無知曰 臣所言者는 能也요 陛下所問者는 行也라 今有尾生, 孝己之行【莊子曰 尾生이 與女子期於梁下러니 女子不來한대 水至不去하고 抱梁柱而死하니라 註에 一本作微生이라 或云 卽微生高也니 有信行이라 孝己는 殷高宗子니 有孝行하야 事親에 一夜五起러니 母早死어늘 高宗이 惑後妻之言하야 放之而死하니라 】이라도 而無益勝負之數하니 陛下何暇用之乎잇가 楚漢相距에 臣進奇謀之士하니 顧其計誠足以利國家事耳니 盜嫂受金을 何足疑乎잇가 〈出陳丞相世家〉

周勃 등이 漢王에게 말하기를 “陳平이 비록 아름답기가 冠玉 같으나 그 속은 반드시 있는 것이 없습니다.【[釋義]冠을 옥으로 꾸미면 광채의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속에 반드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頭註]陳平雖美如冠玉은 ≪漢書≫ 〈陳平傳〉에 “平雖美丈夫 如冠王耳[陳平이 비록 아름다운 장부이나 冠玉과 같을 뿐이다.]”로 되어 있다.】 신이 들으니 陳平이 집에 있을 때에 그 兄嫂를 개가시켰고,【盜는 私와 같으니, 형수의 수절하려는 뜻을 사사로이 빼앗아 改嫁시킨 것이다. 嫂는 형의 아내이다.】魏나라를 섬기다가 용납되지 못하자 楚나라로 도망갔으나 맞지 않자 또 도망하여 漢나라로 돌아왔다 합니다. 오늘날 대왕이 그로 하여금 군사들을 監護하게 하셨는데 여러 장수들의 金을 받아먹었으니,【왕이 陳平을 불러서 꾸짖으니, 陳平이 대답하기를 “魏王은 臣을 써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떠났고, 項王은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떠났는데, 漢王은 사람을 잘 쓴다고 하였기 때문에 漢나라에 귀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맨몸으로 떠나왔으므로 金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金이 모두 있으니, 청컨대 봉함하여 관청으로 실어 보내고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원컨대 왕은 이것을 살피소서.” 하였다.

漢王魏無知를 불러 꾸짖으니, 魏無知는 말하기를 “신이 말한 것은 재능이고 폐하께서 따지는 것은 행실입니다. 지금 尾生孝己와 같은 훌륭한 행실이【≪莊子≫에 “尾生이 女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女子가 오지 않자 홍수가 져서 물이 불어나는데도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안고 죽었다.” 하였는데, 註에 “一本에는 微生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곧 微生高이니, 신실한 행실이 있었다.” 하였다. 孝己는 殷나라 高宗의 아들이니, 孝行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하룻밤에도 다섯 번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일찍 죽자 高宗이 後妻의 말에 미혹되어 추방해서 죽게 하였다.】 있더라도 勝負의 數에는 유익함이 없으니, 폐하께서 어느 겨를에 행실이 훌륭한 선비를 쓸 수 있겠습니까? 楚나라와 漢나라가 서로 대치함에 신이 기이한 계책을 내는 인재를 올렸으니, 다만 그 계책이 진실로 국가의 일에 이로운가를 따질 뿐입니다. 형수를 개가시키고 금을 받아먹은 것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 八月에 漢王이 如滎陽하야 命蕭何守關中한대 計關中戶口하야 轉漕調兵【調는 謂計發之也라 】하야 以給軍하야 未嘗乏絶이러라

[史略 史評]張氏蕭何佐漢하여 定一代規模하니 亦宏遠矣로다 高帝征伐하여 多在外어늘 守關中하여 營緝根本하니 漢所以得天下者는 以關中根本固故也니라

8월에 漢王이 滎陽에 가면서 蕭何에게 명하여 關中을 지키게 하였는데, 蕭何는 關中의 戶口를 헤아려 수레와 뱃길로 식량을 수송[轉漕]하고 군대를 조달해서【調는 계산하여 징발함을 이른다.】 군에 공급하여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史略 史評]張氏가 말하였다.

蕭何가 漢나라를 도와 한 王朝의 규모를 정하였으니, 또한 크고 원대하도다. 高帝가 정벌하기 위해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는데 蕭何가 關中을 지키면서 근본을 잘 다스렸으니, 漢나라 高帝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關中의 근본이 견고하였기 때문이다.”

漢王이 使酈食其로 緩頰【徐言이니 引比喩也라 】往說魏王하고 且召之호되 不聽이라 於是에 漢王이 以韓信, 灌嬰, 曹參으로 俱擊魏할새 漢王이 問食其호되 大將은 誰也오 對曰 柏直이니이다 王曰 是는 口尙乳臭【言其少不經事하고 弱不任事하야 若未離乳保之懷者라 】니 安能當韓信이리오 騎將은 誰也오 曰 敬이니이다 曰 是는 秦將馮無擇의 子也니 雖賢이나 不能當灌嬰이리라 步卒將은 誰也오 曰 項它니이다 曰 不能當曹參이니 吾無患矣라하더라 〈出漢書本紀〉

漢王酈食其로 하여금 잘 비유하여【緩頰은 천천히 말하는 것이니, 부드러운 낯빛으로 비유하여 말함을 이른다.】魏王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또 불렀으나 魏王가 듣지 않았다. 이에 漢王韓信灌嬰, 曹參으로 함께 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漢王酈食其에게 묻기를 “魏나라 대장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柏直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입에서 아직도 젖내가 나니,【乳臭는 어려서 일을 경험하지 못하고 약하여 일을 맡을 수가 없어서, 乳母와 保姆의 품을 아직 떠나지 못한 자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어찌 韓信을 당해내겠는가. 기병장은 누구인가?” 하니, “馮敬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秦나라 장수 馮無擇의 아들이니, 비록 잘하나 灌嬰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보병의 장군은 누구인가?” 하니, “項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曹參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 遂進兵한대 魏王이 盛兵蒲坂【在魏爲垣〈曲〉이요 入秦爲蒲坂이요 漢爲河東邑이라 】하야 以塞臨晉이어늘 이 乃益爲疑兵하야 陳船欲渡臨晉하고 而伏兵從夏陽하야 以木罌渡軍【罌은 謂之木柙이니 縛罌缶以渡라 罌缶는 謂甁之大腹小口者라 】하야 襲安邑한대 魏王豹驚하야 引兵迎信이어늘 九月에 이 擊虜하야 傳詣滎陽하고 悉定魏地하다 〈出漢書高祖紀及信傳〉

마침내 진군하니, 魏王이 병력을 蒲坂에【蒲坂은 魏나라에서는 垣曲이라 하고, 秦나라에서는 蒲坂이라 하고, 漢나라에서는 河東邑이라 하였다.】 많이 진열하여 臨晉 나루를 막았다. 韓信이 마침내 더욱 疑兵을 만들어 배를 앞에 늘어놓아 臨晉 나루를 건너려고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군사를 숨겨 夏陽을 따라 나무통으로 군대를 도하시켜【罌은 나무궤짝(나무통)을 이르니, 罌缶를 묶고서 물을 건너는 것이다. 罌缶는 배는 크고 주둥이는 작은 항아리를 이른다.】安邑을 습격하였다. 魏王가 놀라 군대를 이끌고 韓信을 맞아 싸웠는데, 9월에 韓信魏王를 공격하여사로잡아 驛馬로 압송하여滎陽에 보내고魏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漢書 高帝紀》와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韓信이 旣定魏하고 使人請兵三萬하야 願以北擧燕趙하고 東擊齊하고 南絶楚粮道하고 西與漢王會於滎陽이라하야늘 漢王이 許之하고 乃遣張耳하야 與俱하다 〈出漢書本傳〉

韓信이 魏나라를 평정하고는 사람을 시켜 3만 명의 병력을 청해서 북쪽으로 燕나라와 趙나라를 함락하고 동쪽으로 齊나라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楚나라의 군량 수송로를 끊고 서쪽으로 漢王과 滎陽에서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니, 漢王이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張耳를 보내어 함께 가게 하였다. - 《漢書 韓信傳》에 보임 -

[丁酉]西楚三年, 漢三年

丁酉【是歲에 韓信定趙魏하니 西楚, 衡山, 燕, 齊, 韓 凡七國也라 】〈西楚三年이요 漢三年이라 是歲에 小國凡五라 〉

冬十月에 韓信, 張耳 以兵數萬으로 東擊趙하니 趙王成安君陳餘聞之하고 聚兵 井陘口【陘은 山名이니 在常山이라 】하야 號二十萬이라하다 廣武君李左車成安君韓信, 張耳 乘勝遠鬪하니 其鋒을 不可當이라 臣聞千里餽粮이면 士有飢色하고 樵蘇【樵는 取薪也요 蘇는 取草也라 】後爨이면 師不宿飽라하니 今井陘之道 車不得方軌하고 騎不得成列하야 行數百里하니 其勢糧食이 必在其後라 願足下假臣奇兵三萬人하야 從間路하야 絶其輜重【行者之資糧曰輜重이라 】하고 足下는 深溝高壘하야 勿與戰하시면 不十日하야 而兩將之頭를 可致於麾下【麾는 大將之旗也니 所以指麾라 正義曰 通作戲라 】요 否則必爲二子所擒矣리이다 成安君이 常自稱義兵하야 不用詐謀奇計하다

정유(B.C.204)【이 해에 韓信이 趙‧魏를 평정하였으니, 趙‧魏에 西楚‧衡山‧燕‧齊‧韓을 합하여 모두 7개국이다.】 - 西楚 3년, 漢 3년이라. 이 해에 작은 나라가 모두 5개국이었다.-

겨울 10월에 韓信張耳가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趙나라를 공격하니, 趙王成安君陳餘가 이 말을 듣고 井陘 어구에【陘은 山名이니, 常山에 있다.】 군대를 집결시키고 20만 대군이라고 하였다.

廣武君李左車成安君을 설득하기를 “韓信張耳가 승세를 타고 遠征하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천 리에서 군량을 수송하여 군사들을 먹이면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고, 나무하고 풀을 벤 뒤에【樵는 땔나무를 채취하는 것이고, 蘇는 풀을 채취하는 것이다.】 밥을 지어 먹으면 군사들이 배가 든든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井陘의 길이 좁아서 수레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고 騎兵이 대열을 이룰 수 없으면서 수백 리를 가니, 형편상 양식이 반드시 그 후미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足下께서 신에게 騎兵 3만 명을 빌려주시어 샛길을 따라 그 輜重隊를【길 가는 자의 물자와 양식을 실은 것을 輜重이라고 한다.】 끊게 하고, 足下는 垓子를 깊게 파고 堡壘(보루)를 높이 쌓아 저들과 더불어 싸우지 않으시면 10일이 못되어 두 장수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을 것이요,【麾는 大將의 깃발이니, 指麾하는 것이다. ≪史記正義≫에 “戲와 통용된다.”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두 사람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입니다.” 하니, 成安君이 항상 스스로 의로운 군대라 칭하여 속임수와 기이한 계책을 쓰지 않았다.

韓信이 使人間視【謂間諜窺視而得知라 】하야 知其不用廣武君策하고 大喜하야 乃敢引兵遂下할새 未至井陘口三十里하야 止舍【止舍句絶이니 舍는 猶息也라 】하고 夜半에 傳發【傳令軍中하야 使發이라 】하야 選輕騎輕騎【人馬不帶甲이라 】二千人하야 人持一赤幟하고 從間道하야 望趙軍【從間道望은 謂令從間道向前하야 望見陳餘軍營卽(往)[住]이라】하고 誡曰 趙見我走면 必空壁逐我하리니 若이 疾入趙壁하야 拔趙幟하고 立漢赤幟하라 令裨將傳餐【裨는 音皮니 將之(編)[偏]副라 史記에 餐作飱이니 註에 音餐이라 小飯曰飱이니 謂立駐傳飱而食하고 待破趙後에 方乃大食也라 】曰 今日에 破趙會食호리라 諸將이 皆莫信하고 佯應曰 諾다하다 乃使萬人으로 先行出背水陣하니 趙軍이 望見大笑러라 平朝(旦)에 이 建大將旗鼔하고 鼔行出井陘口하니 趙開壁擊之라 大戰良久에 張耳 佯棄鼓旗하고 走水上軍【走는 疾趨也라 綿蔓水는 一名阜將이요 一名回星이니 自幷州流入井陘界라 按韓信背水陣의 陷之死地 卽此水라 】한대 趙果空壁하야 爭漢旗鼓하고 逐, 已入水上軍하야 軍皆殊死戰殊死戰【殊는 絶也니 謂決意必死라 】하야 不可敗요 의 所出奇兵二千이 遂馳入趙壁하야 皆拔趙旗하고 立漢赤幟하다 趙軍이 已不能得等하고 還歸壁하니 壁皆漢幟라 見而大驚하야 兵亂遁走어늘 漢兵이 夾擊하야 大破趙軍하고 斬成安君泜水上【泜水는 出恒山하니 在趙州贊皇縣界라 泜音邸라 按地理志에 音脂爲是라 】하고 禽(擒)趙王하다

韓信이 사람을 시켜 몰래 엿보게 하여,【間視는 간첩이 몰래 엿보고 아는 것을 이른다.】廣武君의 계책을 쓰지 않음을 알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감히 병력을 인솔하고 마침내 내려갈 적에 井陘 어구에서 30리가 못되는 곳에 이르러 멈춰 휴식하고,【止舍에서 句를 떼니, 舍는 息과 같다.】 한밤중에 전령을 내려【軍中에 전령을 내려 출발하게 한 것이다.】 군대를 동원하여 정예 騎兵【輕騎는 사람과 말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이다.】 2천 명을 뽑아 사람마다 붉은 깃발을 하나씩 잡게 하고 샛길을 따라 가서 趙나라 군영을 바라보고【從間道望은 샛길을 따라 앞으로 향하여 陳餘의 軍營를 바라보고 즉시 중지함을 이른다.】 경계하기를 “趙나라 군사들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趙나라 성벽으로 들어가서 趙나라의 깃발을 뽑아버리고 우리 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라.” 하였다.

그리고 裨將들로 하여금 주먹밥을 전달하게 하고【裨는 음이 피(비)이니, 장수의 偏副(副將)이다. ≪史記≫에는 餐이 飱으로 되어 있으니, 註에 음이 손이라고 하였다. 간단하게 밥을 먹는 것을 飱이라고 하니, 서서 주먹밥을 전달하여 먹고 趙나라를 격파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크게 먹음을 이른다.】 말하기를 “오늘 趙軍을 격파하고 회식하겠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믿지 않고 건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1만 명으로 하여금 먼저 행군하여 나가 배수진을 치게 하니, 趙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비웃었다.

새벽에 韓信이 大將軍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북을 치며 행군하여 井陘 어구를 나가니, 趙나라가 성벽을 열고 공격하였다. 한동안 크게 싸우다가 韓信張耳가 거짓으로 북과 깃발을 버리고 물가에 주둔해 있는 군대로 도망하니,【走는 빨리 달리는 것이다. 〈물가는 綿蔓水이니〉 綿蔓水는 一名 阜將이고 一名 回星이니, 幷州로부터 井陘의 경계로 흘러 들어간다. 살펴보건대 韓信이 背水陣을 쳐서 死地에 빠지게 한 것이 바로 이 물이다.】趙나라가 과연 성벽을 비우고서 漢나라의 북과 깃발을 다투어 취하고 韓信張耳를 추격하였다. 韓信張耳가 이미 물가에 있는 군대로 들어가서 군사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殊는 절대로이니, 殊死戰은 반드시 죽기를 각오함을 이른다.】 패배시킬 수가 없었으며, 韓信이 내보낸 奇兵 2천 명이 마침내 달려가서 趙나라 성벽으로 들어가 趙나라 깃발을 모두 뽑아버리고 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웠다. 趙나라 군사들이 이미 韓信 등을 잡지 못하고 성벽으로 돌아가니, 성벽에는 모두 漢나라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군사들이 혼란하여 도망가자, 漢나라 군대가 협공하여 趙軍을 대파하고成安君을 泜水 가에서【泜水는 恒山에서 나오니, 趙州 贊皇縣 경계에 있다. 泜는 음이 저이다. 살펴보건대 ≪漢書≫ 〈地理志〉에 음이 지라고 한 것이 옳다.】목 베고趙王을 사로잡았다.

○ 諸將이 問曰 兵法에 右倍山陵하고 前左水澤이어늘 今者에 將軍이 令臣等으로 反背水陣以勝은 何也잇고 曰 此在兵法【孫子曰 前有高山하고 後有大水면 進不得하고 退有碍者라 】이어늘 顧諸君不察耳라 兵法에 不曰陷之死地而後生하고 置之亡地而後存乎아 且이 非得素拊循士大夫也라 此所謂驅市人而戰이니 予之生地면 皆走하리니 寧得而用之乎아하니 諸將이 皆服이러라

여러 장수들이 韓信에게 묻기를 “兵法에 오른쪽과 뒤에는 산과 구릉을 두고 앞과 왼쪽에는 水澤을 두라 하였는데, 지금 장군이 신들로 하여금 도리어 背水陣을 치게 하여 승리함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니, 韓信이 말하였다. “이는 병법에 나와 있는데,【≪孫子兵法≫에 “앞에 높은 산이 있고 뒤에 큰 물이 있으면 나아갈 수가 없고 물러갈 때에 장애가 된다.” 하였다.】 다만 제군들이 살피지 못하였을 뿐이다. 병법에 ‘死地에 빠진 뒤에 살고 망할 땅에 놓인 뒤에 보존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또 내(信)가 평소에 어루만져 복종하게 한 군사와 大夫(軍官)를 얻은 것이 아니니, 이는 이른바 ‘장꾼을 몰아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살 땅을 주면 모두 달아날 것이니, 어떻게 쓰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 募生得廣武君者면 予千金하리라하더니 有縛致麾下者어늘 이 解其縛하고 東鄕(向)坐師事之하고 問曰 僕이 欲北攻燕하고 東伐齊하노니 若何而有功고 廣武君曰 亡國之大夫는 不可以圖存이요 敗軍之將은 不可以語勇이니이다 百里奚亡하고 之秦而秦霸하니 非愚於虞而智於秦也라 用與不用과 聽與不聽爾니 向使成安君이 聽子計런들 僕亦禽矣리라 廣武君曰 智者千慮에 必有一失이요 愚者千慮에 必有一得이라 故曰 狂夫之言도 聖人擇焉이라하니이다 將軍이 虜魏王豹하고 誅成安君하야 威振天下라 然이나 欲擧倦敝之兵하야 頓之燕堅城之下하시니 欲戰不得이요 攻之不拔이라 今爲將軍計컨대 莫如按甲休兵하야 鎭撫趙民하고 遣辯士하야 奉咫尺之書하면 燕必聽從하리니 燕已從이어든 而東臨齊하시면 雖有智者라도 亦不知爲齊計矣리이다 韓信이 從其策하야 發使使燕【燕王은 臧荼라 】하니 燕이 從風而靡【靡는 順也, 偃也라 東風則草靡而西하고 西風則草靡而東하니 在風所向하야 草爲之靡라 】러라 〈出史記信本傳〉

韓信이 懸賞하기를 廣武君을 산 채로 잡는 자가 있으면 千金을 주겠다고 하였는데, 포박하여 휘하로 데려온 자가 있었다. 韓信은 그의 포박을 풀고 東向하여 앉혀 스승으로 섬기며 묻기를 “내가 북쪽으로 燕나라를 공격하고 동쪽으로 齊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노니, 어떻게 하면 공이 있겠는가?” 하니, 廣武君은 대답하기를 “망한 나라의 大夫는 보존함을 도모할 수 없고 패한 군대의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韓信이 말하기를 “百里奚가 虞나라에 있을 때에는 虞나라가 망하였고 秦나라에 가서는 秦나라가 霸者가 되었으니, 虞나라에서는 어리석고 秦나라에서는 지혜로웠던 것이 아니다. 써 주느냐 써 주지 않느냐와 들어주느냐 들어주지 않느냐일 뿐이니, 지난번에 만일 成安君이 그대의 계책을 따랐더라면 나 또한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니, 廣武君이 말하였다. “지혜로운 자가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어리석은 자가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狂夫의 말도 聖人은 채택하는 것입니다. 장군이 魏王를 사로잡고 成安君을 목 베어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피폐한 병졸을 동원하여 燕나라의 견고한 성 아래에 주둔하고자 하시니, 싸우고자 하여도 될 수 없고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장군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보건대 군대를 주둔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趙나라 백성들을 진무하고, 말 잘하는 辯士를 보내어 咫尺(짧은)의 글을 받들어 올리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燕나라가 반드시 들어 따를 것입니다. 燕나라가 이미 따르거든 그때 동쪽으로 齊나라에 임하시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齊나라를 위한 계책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韓信이 그의 계책을 따라 使者를 내어 燕나라【燕王은 이름이 臧荼이다.】에 보내니, 燕나라가 풀이 바람 부는대로 쓰러지듯이 따랐다.【靡는 따르는 것이고 눕는 것으로,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져 서쪽으로 눕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져 동쪽으로 누워, 바람이 부는대로 풀이 쓰러지는 것이다.】 -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隨何至九江하니 九江王 奉命至이어늘 漢王이 方踞牀(床)【謂伸其脚而坐于床이라 】洗足〈史記, 漢書에 竝無足字라〉이라가 召入見한대 大怒悔來하야 欲自殺이러니 及出就舍에 帳御飮食從官이 皆如漢王【御飮食者는 御用飮食也라 正義曰 漢王이 以布先分爲王이라하야 恐其自尊大라 故로 峻禮하야 令布折服하고 已而요 美其帷帳하고 厚其飮食하고 多其從官하야 以悅其心하니 權道也라 】又大喜過望이러라 漢이 益九江王兵하야 與俱屯成皐하다 〈出黥布傳〉

隨何가 九江에 이르니, 九江王黥布가 명령을 받들고 漢나라에 이르렀다. 漢王이 막 床에 걸터앉아【踞牀은 다리를 펴고 평상에 앉음을 이른다.】 발을 씻다가 - 《史記》와 《漢書》에는 모두 足字가 없다.- 黥布를 불러 들어와 보게 하니, 黥布가 크게 노하여 온 것을 후회해서 자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나와서 자기 관사로 나아가자, 휘장과 사용하는 물품과 음식 및 딸린 관원이 모두 漢王의 거처와 같으므로【御飮食은 御用(왕이 사용하는 물품)과 음식이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漢王은 黥布가 먼저 分封을 받아 왕이 되었다 해서, 그가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禮를 엄하게 하여 黥布로 하여금 기세를 꺾고 굴복하게 하였으며, 이윽고 帷帳을 아름답게 하고 음식을 후하게 하고 딸린 관원을 많게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니, 權道이다.” 하였다.】黥布는 또 기대했던 것보다 더함을 크게 기뻐하였다. 漢나라가 九江王에게 군사를 더 주어 함께 成皐에 주둔하였다.- 《史記 黥布傳》에 나옴 -

○ 楚數侵奪漢甬道하니 漢軍이 乏食이라 漢王이 與酈食其로 謀撓楚權할새 食其曰 陛下能復立六國之後하사 德義已行하시면 楚必斂衽而朝하리이다 漢王曰 善하다 趣(促)刻印하야 先生이 因行佩之【授與六國하야 使佩之也라 】하라하다 食其未行에 張良이 從外來謁이어늘 漢王이 方食이라가 曰 客有爲我計撓楚權者라하고 具以酈生語로 告良한대 曰 畫此計면 陛下事去矣리이다 請借前箸【求借所食之箸하야 用以指畫也라 或解云 借前世湯武箸(著)明之〈事〉하야 以籌度今時之不若也라 】하소서 爲大王籌之호리이다 其不可者八이니 天下游士 離親戚, 棄墳墓, 去故舊하야 從陛下游者는 徒欲日夜望咫尺之地어늘 今復立六國之後면 天下游士各歸事其主하리니 陛下誰與取天下乎잇가 誠用客謀면 陛下事去矣리이다 漢王이 輟食吐哺【哺는 謂食在口中者라 】하고 罵曰 竪儒幾敗迺公事【幾는 殆니 近也라 迺는 綱目에 作而하니 迺公은 漢王自謂也라 】로다하고 令趣銷印하다 〈出留侯世家〉

荀悅論曰 張耳陳餘陳涉以復立六國하야 自爲樹黨하고 酈生亦說漢王이로되 而得失異者는 陳涉은 未能專天下之地也니 所謂取非其有以與人하야 行虛惠而獲實福也요 立六國은 於漢王에 所謂割己之有以資敵하야 設虛名而受實禍也라 此同事而異形者也라 故로 曰權不可預設이요 變不可先圖요 與時遷移하야 應物變化가 設策之機也라하니라

楚나라가 자주 漢나라의 甬道를 침탈하니, 漢나라 군대가 식량이 떨어졌다. 漢王酈食其와 함께 楚나라 권력을 흔들 것을 도모하였는데, 酈食其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다시 六國의 후손을 세워 德과 義가 이미 행해지면 楚나라가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조회할 것입니다.” 하니, 漢王이 말하기를 “좋다. 빨리 인장을 새겨 선생이 인하여 가서 六國에게 주어 차게 하라.”【佩之는 六國에게 印章을 주어서 차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酈食其가 길을 떠나기 전에 張良이 밖에서 와서 뵙자, 漢王이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말하기를 “객 중에 나를 위하여 楚나라 권세를 흔들 것을 계획한 자가 있다.” 하고 酈生의 말을 張良에게 자세히 고하였다. 이에 張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계책대로 하면 폐하의 일이 틀어질 것입니다. 청컨대 앞의 젓가락을 빌려주소서.【請借前箸는 밥을 먹고 있는 젓가락을 빌려 이것을 사용해서 指畫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혹자는 해석하기를 “前代의 湯王과 武王의 밝게 드러난 일을 빌려서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헤아린 것이다.” 한다.】 대왕을 위하여 계책(계산)해 보겠습니다. 그 不可한 것이 여덟 가지이니,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이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산소를 버리고 故舊들을 버리고서 폐하를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은 한갓 밤낮으로 지척의 땅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六國의 후손을 세우면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이 각각 돌아가 자기 군주를 섬길 것이니, 폐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취하시겠습니까? 진실로 객의 계책을 따른다면 폐하의 일은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漢王이 식사를 중지하고 먹던 밥을 뱉고【哺는 밥이 입속에 있음을 이른다.】 꾸짖어 말하기를 “竪儒(못난 선비)가 하마터면 너의 公(漢王)의 일을 그르칠 뻔하였다.”【幾는 거의이니 가까움이다. 迺는 ≪資治通鑑綱目≫에 而로 되어 있으니, 迺公은 漢王 자신을 이른다.】 하고는 빨리 인장을 녹여 없애도록 하였다. -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荀悅의 論에 말하였다.

張耳陳餘陳涉을 설득하여 다시 六國을 세워서 스스로 黨을 만들게 하였고 酈生 또한 漢王을 설득하였으나 得失이 다른 것은, 陳涉은 천하의 땅을 아직 독점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여 남에게 주어서 헛된 은혜를 행하여 실제 福을 얻는다.’는 것이요, 六國을 세움은 漢王에게 있어서 이른바 ‘자신의 소유를 떼어 적에게 주어서 헛된 이름을 베풀어 실제 禍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은 같으나 일의 모양은 다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權道는 미리 만들 수가 없고 變은 미리 도모할 수가 없고, 때에 따라 바뀌고 변해서 사물에 대응하여 변화하는 것이 계책을 내는 기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漢王이 謂陳平曰 天下紛紛하니 何時定乎아 陳平項王의 骨鯁【隨事敢刺鯁하야 不從容也라 一說에 直言難受가 如骨之咈咽也라 】之臣은 亞父, 鍾離昩【亞는 次也니 羽尊之次於父니 猶齊威(桓)公稱管仲曰仲父라 鍾離는 複姓이요 昩은 名也라 字從日從末하니 莫葛反이라 】, 且, 周殷之屬으로 不過數人耳니 大王이 誠能出捐數萬斤金하야 行反間【以計離間敵人曰反間이라 】하야 間其君臣하야 以疑其心이면 項王의 爲人이 意(疑)忌信讒하야 必內相誅하리니 漢이 因擧兵而攻之면 破楚必矣리이다 漢王曰 善타하고 乃出黃金四萬斤하야 與하야 資所爲하고 不問其出入하다 이 多以金縱反間於楚하야 宣言 鍾離昩等이 爲項王將하야 功多矣나 然終不得裂地而王일새 欲與漢爲一하야 以滅項氏하고 而分王其地라한대 項羽果不信鍾離昩等이러라 〈出陳丞相世家〉

漢王陳平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분분하니 어느 때에나 안정되겠는가?” 하니, 陳平이 말하였다. “項王의 강직한【骨鯁은 일을 따라 감히 풍자하고 바른말을 하여 조용하지 않은 것이다. 一說에 “직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이 뼈가 목에 걸린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신하는 亞父(范增)와 鍾離昩【亞는 다음이니 亞父는 項羽가 그를 아버지에 버금가게 높인 것이니, 齊나라 桓公이 管仲을 일컬어 仲父라고 칭한 것과 같다. 鍾離는 複姓이고 昩은 이름이다. 글자가 日字를 따르고 末字를 따랐으니, 莫葛反(말)이다.】‧龍且‧周殷 등의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대왕이 진실로 수만 근의 금을 내시어 反間을【계책으로 적을 이간시킴을 反間이라 한다.】 행하여 저들 君臣間을 이간질해서 그 마음을 의심하게 하면 項王의 사람됨이 의심하고 시기하고 참소하는 말을 믿어서 반드시 안으로 서로 죽일 것이니, 漢나라가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楚나라를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

漢王이 “좋다.” 하고 마침내 황금 4만 근을 내어 陳平에게 주어서 하는 일에 이용하게 하고 그 출납을 묻지 않았다. 陳平이 금을 가지고 楚나라에 反間을 많이 놓아 ‘鍾離昩 등이 項王의 장수가 되어 공이 많은데도 끝내 땅을 分封받아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漢나라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서 項氏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왕 노릇 하고자 한다.’는 말을 퍼뜨리니, 項羽가 과연 鍾離昩 등을 믿지 않았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 夏에 楚圍漢王於滎陽【縣名이라 屬河南하니 古虢國也니 今鄭州是라 】急이어늘 漢王이 請和하야 割滎陽以西者爲漢이러니 亞父하야 急攻滎陽하니 漢王이 患之러라 〈出漢書本紀〉

여름에 楚나라가 漢王을 滎陽에서【滎陽은 縣의 이름이다. 河南郡에 속하였으니, 옛날 虢國으로 지금 鄭州가 이곳이다.】포위하여 위급하자, 漢王이 화친할 것을 청하여 〈滎陽 以東은 楚나라에게 떼어 주고〉 滎陽 以西를 떼어 漢나라 영토가 되게 하였는데, 亞父項羽에게 권하여 급히 滎陽을 공격하게 하니, 漢王이 이를 걱정하였다. - 《漢書 高帝紀》에 나옴 -

項王이 使使至漢이어늘 陳平이 使爲太牢具하야 擧進【王氏曰 凡用牲繫養曰牢니 詩傳에 牛曰大牢요 羊曰小牢라 擧進은 謂擧鼎俎來也라 】이라가 見楚使하고 卽佯驚曰 吾以爲亞父使러니 乃項王使라하고 復持去하야 更以惡草具進【草는 粗也라 】하다 楚使歸하야 具以報項王한대 王이 果大疑亞父러라 亞父欲急攻下滎陽城호되 項王이 不聽이라 亞父項王疑之하고 乃怒曰 天下事大定矣로니 君王은 自爲之하소서 願請骸骨【人臣이 委身以事君하야 身非我有라 故於其乞退에 謂之請骸骨이라 】하노이다하고 歸라가 未至彭城하야 疽發背而死하니라 〈出陳丞相世家〉

項王이 使者를 보내어 漢나라에 이르자, 陳平이 使者를 위하여 太牢를 갖추어 차려서 올리게 하다가【王氏가 말하였다. “무릇 희생을 묶어놓고 기르는 곳을 牢(우리)라고 하니, ≪詩傳≫에 소를 太牢라 하고 양을 小牢라 하였다. 擧進은 鼎俎(음식)를 차려 들고 올림을 이른다.】楚나라의 使者를 보고는 거짓으로 놀란 체하며 말하기를 “나는 亞父의 使者라고 여겼더니, 바로 項王의 使者이다.” 하고는 다시 밥상을 가지고 가서 나쁜 음식 차림으로 바꾸어 올렸다.【草는 거친 것이다.】楚나라 使者가 돌아가서 이것을 項王에게 자세히 보고하니, 項王이 과연 亞父를 크게 의심하였다. 亞父가 급히 滎陽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자 하였으나 項王이 듣지 않았다. 亞父項王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크게 결정되었으니, 君王께서는 스스로 하소서. 해골을 청하여【신하가 몸을 바쳐 군주를 섬겨서 자기 몸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러나기를 청할 때에 ‘해골을 청한다.[請骸骨]’고 이른 것이다.】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고는 돌아가다가 彭城에 도착하기 전에 등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 將軍紀信이 言於漢王曰 事急矣라 臣請誑楚호리니 王은 可以間出이리이다 於是에 陳平이 夜出女子東門二千餘人하니 楚因擊之어늘 紀信이 乃乘王車黃屋左纛하고 曰 食盡하야 漢王이 降楚라한대 楚皆呼萬歲하고 之城東觀이라 以故로 漢王이 得與數十騎로 出西門遁去러라 〈出漢書本紀〉

장군紀信漢王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급박합니다. 신이 청컨대 楚나라를 속이겠으니, 왕께서는 이 틈을 타서 나가소서.” 하였다. 이에 陳平이 밤에 〈갑옷을 입은〉 여자 2천여 명을 東門으로 내보내니, 楚나라가 인하여 공격하였다. 紀信이 마침내 黃屋을 하고 왼쪽에 纛旗를 매단 漢王의 수레를 타고 말하기를 “양식이 다하여 漢王이 楚나라에 항복한다.” 하니, 楚나라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가서 구경하였다. 이 때문에 漢王이 수십 명의 騎兵과 함께 西門을 나가 도망할 수 있었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漢王이 出滎陽하야 至成皐【縣名이라 屬河南하니 戰國鄭虎牢關也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洛州汜水縣西南二里라 】하야 入關收兵하야 欲復東이러니 轅生이 說漢王호되 深壁勿戰하야 令滎陽, 成皐間으로 且得休息하라한대 漢王이 從其計하야 出軍宛, 葉間하야 與黥布로 行收兵하다 漢王在宛하고 果引兵來어늘 漢王이 堅壁不與戰하다 〈出漢書本紀〉

漢王이 滎陽을 나와 成皐에【成皐는 縣의 이름이다. 河南郡에 속하였으니 戰國時代에 鄭나라의 虎牢關이다. ≪括地志≫에 “옛 城이 洛州 汜水縣 서남쪽 2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러서 關門에 들어가 군사들을 거두어 다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轅生漢王을 설득하기를 “성벽을 깊게 지키고 싸우지 말아서 滎陽과 成皐 사이로 하여금 우선 휴식하게 하라.”고 하였다. 漢王이 그 계책을 따라 군대를 宛 땅과 葉 땅 사이에 출동시켜 黥布와 함께 지방을 순행하며 병력을 수습하였다. 項羽漢王이 宛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과연 병력을 이끌고 싸우러 왔으나 漢王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彭越이 爲漢將하야 游兵擊楚어늘 乃使終公守成皐하고 而自東擊彭越이러니 漢王이 破終公하고 復軍成皐라 已破走彭越하고 乃引兵西하야 拔滎陽城하고 遂圍成皐하니 漢王이 逃【逃는 輕身而忽出也라 又史記本紀에 作漢王跳하니 註에 跳音逃니 走也라 】하야 獨與滕公共車하야 出成皐玉門하다 〈出史記項羽紀〉

彭越이 漢나라 장수가 되어서 遊兵(유격병)으로 楚나라를 공격하니, 項羽가 마침내 終公으로 하여금 成皐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彭越을 공격하였다. 漢王終公을 격파하고 다시 成皐에 주둔하였는데, 項羽가 이미 彭越을 패주시킨 다음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와서 滎陽城을 함락하고 마침내 成皐를 포위하였다. 漢王이 도망하여【逃는 몸을 가볍게 하여 갑자기 나가는 것이다. 또 ≪史記≫ 〈高祖本紀〉에 ‘漢王跳’로 되어 있는데, 註에 “跳는 음이 도이니, 달아남이다.” 하였다.】 홀로 滕公(夏侯嬰)과 함께 수레를 타고 成皐의 玉門을 나왔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 北渡河하야 宿小修武【地志에 小修武在河內修武縣이라 括地志에 今懷州獲嘉 古修武也라 】傳舍하고 晨에 自稱漢使라하고 馳入趙壁하니 張耳, 韓信이 未起라 卽其臥內하야 奪其印符하고 以麾로 召諸將易置之러니 , 起하야 乃知漢王來하고 大驚이러라 漢王이 旣奪兩人軍하고 卽令張耳循行하야 備守趙地하고 拜韓信爲相國하야 收趙兵未發者하야 擊齊하다 〈出史記韓信傳〉

북쪽으로 黃河를 건너 小修武의【小修武는 ≪漢書≫ 〈地理志〉에 “小修武는 河內의 修武縣에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지금 懷州 獲嘉가 옛날 修武이다.” 하였다.】 傳舍(역사)에서 유숙하고는 새벽에 漢나라 사신이라 자칭하고 趙나라 성벽으로 달려 들어가니, 張耳韓信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나아가서 그 印符(印章과 兵符)를 빼앗고 깃발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바꾸어 배치하였다. 韓信張耳가 일어나 비로소 漢王이 온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漢王은 두 사람의 군대를 빼앗은 다음 즉시 張耳로 하여금 순행하여 趙나라 땅을 수비하게 하고, 韓信을 相國으로 임명하여 趙나라 군사 중에 아직 징발하지 않은 자를 거두어서 齊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 諸將이 稍稍得出成皐하야 從漢王하다 楚遂拔成皐하고 欲西러니 漢이 使兵距之鞏하야 令其不得西하다 〈史記羽紀〉

여러 장수들이 차츰 成皐를 탈출하여漢王을 따랐다. 楚나라가 마침내 成皐를 함락하고 서쪽으로 공격해 오려 하였는데, 漢나라가 군사들로 하여금 鞏 땅에서 막아 서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漢王이 欲捐成皐以東하야 屯鞏, 洛【鞏은 縣名이라 屬河南하니 周考王이 封威公子惠公之少子於鞏하고 號爲東周惠公이 卽此라 洛은 在今河南府洛陽縣東北하니 故城在焉이라 】하야 以拒楚러니 酈生曰 知天之天者는 王事를 可成이라 王者는 以民爲天하고 民은 以食爲天하나니 夫敖倉은 天下轉輸久矣라 藏粟이 甚多어늘 楚人이 拔滎陽하야 不堅守敖倉하고 乃引而東하니 此는 天所以資漢也라 願足下는 急進兵하야 收取滎陽하야 據敖倉之粟하고 塞成皐之險하고 杜太行之路하고 距蜚狐之口【蜚는 古文飛字라 地〈道〉記云 上黨郡恒山北行四百五十里하면 得恒山岌하니 號蜚狐口라 今蔚州蜚狐縣이 北入嬀州懷戎縣하니 卽古蜚狐口라 】하고 守白馬之津【白馬津은 卽黎陽津也라 白馬城은 衛故之曹邑也니 今濬州 卽漢黎陽縣이라 州東一里五步에 有黎陽津하니 亦名白馬津이라 】하야 以示諸侯形制【猶言形勝이니 得形勢之勝便이라 地形險固故로 能勝人이니 以地形而制敵也라 】之勢하시면 則天下知所歸矣리이다 王從之하야 乃復謀取敖倉하다 〈出漢書本傳〉

漢王이 成皐 以東을 떼어 주고 鞏縣과 洛邑에【鞏은 縣의 이름이다. 河南郡에 속하였으니, 周나라 考王이 威公의 아들인 惠公의 少子를 鞏에 봉하고 東周 惠公이라고 이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洛은 지금 河南府 洛陽縣 동북쪽에 있으니, 옛 城이 남아 있다.】 주둔하여 楚나라를 막고자 하니, 酈生이 말하였다. “하늘의 하늘을 아는 자는 王者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王者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삼으니, 敖倉은 천하에서 곡식을 수송해 저축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보관된 곡식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楚나라 사람들이 滎陽을 함락하였으면서 敖倉을 굳게 지키지 않고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으니, 이는 하늘이 漢나라에게 이용하게 한 것입니다. 원컨대 足下는 급히 進軍하여 滎陽을 거두어 취한 다음 敖倉의 곡식을 점거하고 成皐의 험한 요새를 막으며, 太行의 길을 차단하고 蜚狐의 어구를【蜚는 飛의 古字이다. 蜚狐口는 ≪地道記≫에 이르기를 “上黨郡 恒山에서 북쪽으로 450리를 가면 恒山의 산마루가 나오니 蜚狐口라고 부른다.” 하였다. 지금 蔚州 蜚狐縣이 북쪽으로 嬀州 懷戎縣으로 들어가 있으니, 바로 옛날 蜚狐口이다.】 막고 白馬의 나루를【白馬津은 곧 黎陽津이다. 白馬城은 衛나라의 옛 曹邑이니, 지금 濬州가 바로 漢나라의 黎陽縣이다. 州에서 동쪽으로 1리 5보 떨어진 곳에 黎陽津이 있으니, 또한 白馬津이라 이름한다.】 지켜서 제후들에게 지형으로 제압할 수 있는 형세를【形制는 形勝이라는 말과 같으니, 형세의 좋음을 얻는 것이다. 지형이 험고하기 때문에 남(적)을 이길 수 있으니, 지형을 따라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보이시면 천하가 돌아갈 바를 알 것입니다.”

왕이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다시 敖倉을 도모하여 취하였다. - 《漢書 酈食其傳》에 나옴 -

食其又說王曰 方今燕趙已定하고 唯齊未下라 諸田宗彊하야 負海, 岱하고 阻河, 濟하니 雖遣數萬師라도 未可以歲月破也라 臣이 請得奉明詔說齊王하야 使爲漢而稱東藩호리이다 上曰 善타하고 乃使酈生齊王曰 天下之事歸漢을 可坐而策也라 王이 疾先下하면 齊國을 可得而保어니와 不然이면 危亡을 可立而待리이다 先是에 齊聞韓信且東兵하고 使華無傷, 田解로 將重兵하고 屯歷下하야 以距漢이러니 及納酈生之言하야 遣使하야 與漢平【平은 成也, 和也니 言成其和也라 】하고 乃罷歷下守戰備하다 〈出漢書田儋傳〉

酈食其가 또다시 漢王을 설득하였다. “방금 燕나라와 趙나라가 이미 평정되었고 유독 齊나라만 아직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田氏들은 종족이 강하여 바다와 岱山을 의지하고 黃河와 濟水로 막고 있으니, 비록 수만 명의 군대를 보내더라도 일 년이나 몇 달 이내에 격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밝으신 임금의 詔命을 받들어 齊王을 설득하여 漢나라를 위해 동쪽 藩屛을 칭하게 하겠습니다.”

上이 “좋다.” 하고 마침내 酈生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齊王을 설득하게 하였다. “천하의 일이 漢나라로 돌아올 것임을 앉아서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빨리 먼저 항복하면 齊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위태로움과 멸망을 당장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먼저 齊나라는 韓信이 장차 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 華無傷田解로 하여금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歷下에 주둔하여 漢나라를 막게 했었는데, 酈生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자 使者를 보내어 漢나라와 화평하고【平은 이룸이요 화친함이니, 화친을 이룸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歷下의 지키고 전투하는 대비를 파하였다. - 《漢書 田儋傳》에 나옴 -

韓信이 引兵東할새 未度(渡)平原하야 聞酈食其已說下齊하고 欲止러니 辯士蒯徹【徹은 避武帝名하야 史改徹作通이라 】이 說曰 將軍이 受詔擊齊어늘 而漢이 獨發間使下齊하니 寧有詔止將軍乎아 且酈生은 一士로 伏軾하야 掉三寸之舌【食其本傳에 伏作馮하고 讀作憑하니 據也라 伏亦憑也라 軾은 註見周威烈王二十三年必式이라 索隱曰 舌은 在口하야 長三寸이니 象斗玉衡이라 】하야 下齊七十餘城이어늘 將軍은 以數萬衆으로 歲餘에 乃下趙五十餘城하니 爲將數歲에 反不如一豎儒之功乎아하니 이 然之러라

韓信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갈 때 平原 나루를 건너기 전에 酈食其가 이미 齊나라를 설득하여 항복받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려 하였다. 이때 辯士인 蒯徹이【徹은 武帝의 이름을 피하여 史書에 徹을 고쳐 通으로 썼다.】韓信을 설득하기를 “장군이 詔命을 받고 齊나라를 공격하는데, 漢나라가 단독으로 중간에 使者를 보내어 齊나라를 항복시켰으니, 어찌 詔命으로 장군을 중지시킨 일이 있었습니까? 또 酈生은 한낱 선비로 수레의 軾에 기대어 세 치 혀를 놀려서【酈食其 本傳에는 伏이 馮으로 되어 있고 憑으로 읽으니 기대는 것이다. 伏 또한 기댐이다. 軾은 註가 周나라 威烈王 23년조의 “반드시 式하였다.[必式]”라고 한 데에 보인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혀는 입속에 있어 길이가 세 치이니, 北斗星의 玉衡과 비슷하다.” 하였다.】齊나라의 70여 성을 항복시켰는데, 장군은 수만 명의 병력으로 1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趙나라의 50여 성을 함락하였으니, 장수가 된 지 여러 해에 도리어 한 竪儒의 공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하니, 韓信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戊戌]西楚四年, 漢四年

[戊戌]〈西楚四年이요 漢四年이라 〉

이 襲破齊歷下軍하고 遂至臨淄하니 齊王이 以酈生爲賣己라하야 乃烹之하고 引兵東走高密【齊地니 北海郡高密縣은 在臨淄之東하니 密州是라 屬益都路라 】하다 〈出史記信本傳〉

무술(B.C.203) - 西楚 4年이고 漢나라 4年이다. -

韓信이 齊나라 歷下의 군대를 기습 격파하고 마침내 臨淄에 이르니, 齊王酈生이 자신을 속였다 하여 마침내 삶아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高密로【高密은 齊나라 땅이니, 北海郡 高密縣은 臨淄의 동쪽에 있으니, 密州가 이곳이다. 益都路에 속하였다.】도망하였다. -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 楚大司馬咎 守成皐할새 項王이 令謹守勿戰하니 漢이 數挑戰【挑身獨戰하고 不復須衆也니 如古之致師라 鄭氏曰 致師者는 致其必戰之志也라 古者에 將戰에 必先使勇力之士犯敵이라 】호되 楚軍이 不出이라 使人辱之數日한대 咎怒하야 渡兵汜汜水【汜는 舊讀作凡이러니 顔師古音祀라 [釋義]今成皐城東汜水是也라 汜水는 源出洛州汜水縣東南三十二里方山이라 】어늘 士卒半渡에 漢이 擊之하야 大破楚軍하고 盡得楚國寶貨하니 咎及司馬欣이 自剄하다 漢王이 引兵渡河하야 復取成皐하고 軍廣武하야 就敖倉食【〈於〉滎陽縣西二十里에 築兩城相對하고 爲廣武하니 在敖倉西三皇山이라 山有二城하니 東曰東廣武요 西曰西廣武라 各在一山頭하야 相去百步요 汴水從廣間中東南流러니 今涸이라 】하다 項羽聞成皐破하고 引兵軍廣武하야 與漢相守하다 〈出本紀〉

楚나라 大司馬曹咎가 成皐를 지킬 적에 項王이 삼가 지키고싸우지 말도록명령하였다. 그리하여 漢나라가 여러 번 싸움을 걸어도【挑戰은 몸소 도발하여 혼자 싸우고 다시 무리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옛날의 致師와 같다. 鄭氏(鄭玄)가 말하였다. “致師는 적으로 하여금 반드시 싸우려는 각오를 지극하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 장차 싸우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勇力있는 병사로 하여금 적을 침범하게 하였다.”】楚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수일 동안 욕하니, 曹咎가 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汜水를【[原註]汜는 옛날에는 범으로 읽었는데, 顔師古는 음이 사라고 하였다. [釋義]汜水는 지금 成皐城 동쪽 汜水가 이것이다. 汜水는 源泉이 洛州 汜水縣 동남쪽 32리 方山에서 나온다.】 건너려 하였다. 사졸이 반쯤 건넜을 때에 漢나라가 공격하여 楚軍을 대파하고楚나라의 보화를 모두 얻으니, 曹咎司馬欣이 스스로 목을 찔러죽었다.

漢王이 병력을 인솔하고 黃河를 건너 다시 成皐를 점령하고廣武에 군을 주둔하여 敖倉의 곡식을 갖다 먹었다.【滎陽縣 서쪽 20리에 두 성을 쌓아 서로 마주하게 하고 廣武라고 하였으니, 敖倉 서쪽 三皇山에 있다. 산에 두 성이 있으니, 동쪽은 東廣武라 하고 서쪽은 西廣武라 한다. 각각 한 산의 위에 있어 거리가 100보이고 汴水가 廣武 가운데를 따라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지금은 물이 말랐다.】項羽는 成皐가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이끌고 廣武에 주둔하여 漢나라와 서로 대치하였다. -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 楚軍이 食少라 項王이 患之하야 爲高俎하야 置太公其上【高俎는 俎机之類라 王氏曰 按左氏컨대 楚子登巢車以望晉軍이라한대 杜預謂車上櫓也라 故謂俎爲軍〈中〉巢櫓라 括地志에 東廣武城에 有高壇하니 卽項羽坐太公俎上者니 今名項羽堆요 亦名太公亭이라 師古曰 俎는 所以薦肉이니 示欲烹之라 故置俎之上이라 】하고 告漢王曰 今不急下면 吾烹太公호리라 漢王曰 吾與로 俱北面受命懷王하야 約爲兄弟하니 吾翁이 卽若翁이라 必欲烹而翁【必欲烹而翁 若은 猶爾也요 而는 猶汝也니 後皆倣此라 】인댄 幸分我一杯羹하라 項王이 怒하야 欲殺之러니 項伯曰 爲天下者는 不顧家하나니 雖殺之라도 無益也니라

楚나라 군대가 식량이 부족하니, 項王이 이를 염려하여 높은 도마를 만들어서 太公을 그 위에 올려놓고【高俎는 俎机(다리가 달린 도마)의 종류이다. 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春秋左傳≫에 ‘楚子가 巢車에 올라가 晉軍을 바라보았다.’ 하였는데, 杜預가 이르기를 ‘수레 위의 망루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俎를 일러 軍中의 巢櫓라고 한다. ≪括地志≫에 ‘東廣武城에 높은 壇이 있으니, 바로 項羽가 太公을 俎 위에 앉혔던 곳이니, 지금 項羽堆라고 이름하고 또한 太公亭이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俎는 고기를 올려놓는 것이니, 삶아 죽이고자 함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俎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하였다.”】漢王에게 통고하기를 “이제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太公을 삶아 죽이겠다.” 하였다. 漢王이 말하기를 “내가 項羽와 함께 北面하여 懷王에게 명령을 받아 兄弟가 되기로 약속하였으니, 내 아버지는 바로 너의 아버지이다. 반드시 아버지를 삶아 죽이고자 한다면【若은 爾와 같고 而는 汝와 같으니, 뒤도 모두 이와 같다.】 부디 나에게도 한 잔의 국을 나누어 달라.” 하였다.

項王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項伯이 말하기를 “천하를 위하는 자는 집안을 돌아보지 않는 법이니, 비록 죽이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項王이 謂漢王曰 願與王挑戰하야 決雌雄하야 毋徒苦天下之民父子爲也하노라 漢王曰 吾寧鬪智언정 不鬪力이라하고 相與臨廣武間하야 漢王이 數十罪【按十罪는 曰 羽負約하고 王我於漢이 罪一이요 矯殺卿子冠軍이 罪二요 救趙不報하고 而擅劫諸侯入關이 罪三이요 燒秦宮室하고 掘始皇塚하야 私其財 罪四요 殺秦降王子嬰이 罪五요 詐坑秦子弟新安二十萬이 罪六이요 王諸將善地하고 而徙逐故主 罪七이요 出逐義帝하고 自都彭城하고 奪韓梁地 罪八이요 使人陰殺(弑)義帝江南이 罪九요 爲政不平하고 主約不信하야 天下所不容하야 大逆無道 罪十이라 】한대 大怒하야 伏弩하야 射中漢王하니 漢王이 傷胸이라 乃捫足【捫은 音門이니 摸也라 傷胸而捫足者는 以安衆也라 】曰 虜中吾指라하더라 漢王이 病創臥【創은 讀作瘡하니 傷也라 】어늘 張良이 彊請漢王하야 起行勞軍하야 以安士卒하고 毋令楚乘勝이라한대 漢王이 出行軍이라가 疾甚하야 因馳入成皐하다 〈以上 出史記本紀〉

項王漢王에게 이르기를 “왕과 도전하여 雌雄(승부)을 결단해서 한갓 천하의 백성 중에 父子間이 된 자를 고생시키지 말기를 원한다.” 하였다. 漢王은 말하기를 “내 차라리 지혜로 싸울지언정 힘으로 싸우지는 않겠다.” 하고 서로 廣武의 사이에 대치하였는데, 漢王項羽의 열 가지 죄를【살펴보건대 열 가지 죄는, 項羽가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을 漢中에 왕 노릇 시킨 것이 첫 번째 죄이고, 懷王의 命을 사칭하여 卿子冠軍(宋義)을 죽인 것이 두 번째 죄이고, 趙나라를 구원한 다음 懷王에게 보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諸侯들을 협박하여 關中에 들어가게 한 것이 세 번째 죄이고, 秦나라 宮室을 불태우고 始皇의 무덤을 파내어 그 재물을 사사로이 소유한 것이 네 번째 죄이고, 秦나라의 항복한 왕 子嬰을 죽인 것이 다섯 번째 죄이고, 秦나라 자제 20만 명을 新安에 묻어 죽인 것이 여섯 번째 죄이고, 諸將들은 좋은 땅에 왕 노릇 시키고 옛 군주를 딴 지역으로 옮겨 축출한 것이 일곱 번째 죄이고, 義帝를 축출하고 스스로 彭城에 도읍하였으며 韓나라와 梁나라의 땅을 빼앗은 것이 여덟 번째 죄이고, 사람을 시켜 義帝를 江南에서 몰래 시해하게 한 것이 아홉 번째 죄이고, 정사를 함이 공평하지 못하고 맹약을 주관함이 신의가 없어 천하에 용납되지 못하여 大逆無道함이 열 번째 죄이다.】 열거하자 項羽가 크게 노하여 弩手를 매복시켜 漢王을 쏘아맞혔다. 漢王이 가슴을 다쳤으나 마침내 발을 어루만지며【捫은 음이 문이니, 어루만지는 것이다. 가슴을 다쳤으나 발을 어루만진 것은 무리(군사)들을 안심시키려 한 것이다.】 말하기를 “오랑캐가 내 발가락을 맞혔다.” 하였다.

漢王이 상처로 앓아눕자【創은 瘡으로 읽으니, 상처이다.】張良이 억지로 漢王에게 청하여 일어나 순행하며 군사들을 위로하여 사졸들을 안심하게 하고, 楚나라로 하여금 승세를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漢王이 나와 군영을 순행하다가 병이 심해져서 인하여 成皐로 달려 들어갔다.- 이상은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韓信이 已定臨淄하고 遂東追齊王한대 項王이 使且로 將兵救齊러니 龍且曰 吾平生에 知韓信爲人易與耳로라 寄食於漂母하니 無資身之策이요 受辱於胯(袴)下하니 無兼人之勇이라 不足畏也라하더라 齊楚與漢으로 夾濰水【地志에 濰水出琅邪箕屋山東北하야 經臺昌入海라 括地志에 密州莒縣山이 濰水所出이라 】而陣이러니 韓信이 夜令人爲萬餘囊하야 盛沙하야 壅水上流하고 引軍半渡하야 擊龍且라가 佯不勝還走한대 龍且果喜曰 固知信怯也라하고 遂追이어늘 이 使人決壅囊하니 水大至하야 龍且軍이 太半【太音泰니 凡數에 三分有二 爲太半이라 】不得渡라 卽急擊하야 殺龍且하고 虜齊王하고 盡定齊地하다

韓信이 이미 臨淄를 평정하고 마침내 동쪽으로 齊王을 추격하니, 項王龍且로 하여금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齊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龍且가 말하기를 “내 평소 韓信의 사람됨이 상대하기 쉬운 줄을 아노라. 漂母에게 밥을 얻어 먹었으니 資生할 만한 계책이 없는 것이요, 바짓가랑이 아래에서 욕을 받았으니 남보다 뛰어난 용맹이 없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齊나라와 楚나라가 漢나라와 濰水를【濰水는 ≪漢書≫ 〈地理志〉에 “濰水가 琅邪 箕屋山 東北에서 나와 臺昌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括地志≫에 “密州 莒縣山에서 濰水가 나온다.” 하였다.】 끼고 對陣하였다. 韓信이 밤에 사람을 시켜 만여 개의 주머니(포대)를 만들어서 모래를 담아 물의 상류를 막게 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반쯤 건너가 龍且를 공격하다가 거짓으로 이기지 못하는 체하고 다시 달아났다. 龍且가 과연 기뻐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韓信이 겁이 많은 줄을 알았다.” 하고 마침내 韓信을 추격하였다. 韓信이 사람을 시켜 막아놓았던 주머니를 터놓게 하니, 물이 크게 몰려와서 龍且의 군대가 태반이나【太는 음이 태이니, 무릇 수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을 太半이라 한다.】 건너지 못하였다. 〈韓信은〉 즉시 맹공을 가하여 龍且를 죽이고齊王을 사로잡고齊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 立張耳하야 爲趙王하다 〈出漢書本傳〉○ 韓信이 使人言漢王曰 齊는 僞詐多變하야 反覆之國也요 南邊楚하니 請爲假王以鎭之하노이다 漢王이 大怒어늘 張良, 陳平이 躡漢王足하고 因附耳語曰 漢方不利하니 寧能禁之自王乎잇가 不如因而立之하야 使自爲守니이다 漢王이 亦悟하고 因復罵曰 大丈夫定諸侯면 卽爲眞王耳니 何以假爲리오하고 遣張良하야 操印立하야 爲齊王하고 徵其兵하야 擊楚하다 〈出史記本傳〉

張耳를 세워 趙王으로 삼았다. - 《漢書 張耳傳》에 나옴 -

韓信이 사람을 시켜 漢王에게 말하기를 “齊나라는 속이기를 잘하고 변화가 많아 자주 번복하는 나라이고, 남쪽으로 楚나라와 국경이 접해 있으니, 청컨대 假王(임시 왕)이 되어 이를 진정시켰으면 합니다.” 하였다. 漢王이 크게 노하자, 張良陳平漢王의 발을 밟아 제지하고 인하여 귀에 대고 말하기를 “漢나라가 현재 불리하니, 어찌 韓信이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인하여 王으로 세워서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漢王이 또한 깨닫고 인하여 다시 꾸짖기를 “대장부가 제후를 평정했으면 즉시 眞王(진짜 왕)이 될 것이지, 어찌 假王이 된단 말인가?” 하고 張良을 보내어 印을 가지고 가서 韓信을 세워 齊王을 삼고 그 군대를 징발하여 楚나라를 공격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項王이 聞龍且死하고 大懼하야 使盱台人武涉으로 往說齊王曰 當今에 二王之事 權在足下라 足下右投則漢王勝하고 左投則項王勝하리니 項王이 今日亡이면 則次取足下하리이다 足下與項王有故하니 何不反漢하고 與楚連和하야 三分天下王之닛고 이 謝曰 臣事項王에 官不過郞中【宿衛執戟之人也라 】이요 位不過執戟이요 言不聽, 畫不用이라 故로 倍楚而歸漢이러니 漢王은 授我上將軍印하고 予我數萬衆하고 解衣衣我【下衣字는 著也라 】하고 推食食我하고 言聽計用이라 故로 吾得以至於此로라 夫人深親信我어늘 我倍之不祥이니 幸爲項王하라

項王龍且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盱台 사람 武涉으로 하여금 齊나라에 가서 齊王韓信을 설득하게 하기를 “당금에 두 왕의 일은 권세가 足下에게 달려 있습니다. 足下가 오른쪽으로 기울면 漢王이 이기고 왼쪽으로 기울면 項王이 이길 것이니, 項王이 오늘 망하면 다음은 足下를 취할 것입니다. 足下는 項王과 옛 정분이 있으니, 어찌하여 漢나라를 배반하고 楚나라와 連和하여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왕 노릇 하지 않습니까?” 하니, 韓信이 사양하기를 “신이 項王을 섬길 때에 벼슬은 郎中에【郞中은 숙직하면서 호위하여 창을 잡고 있는 사람이다.】 지나지 않았고 지위는 창을 잡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말이 먹혀들지 않고 계책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楚나라를 배반하고 漢나라에 돌아왔는데, 漢王은 나에게 上將軍의 印을 주고 나에게 수만 명의 병력을 주고, 옷을 벗어 나에게 입혀주고【아래의 衣字는 입힘이다.】 밥을 밀어 나에게 먹여 주고 말이 먹혀들고 계책이 쓰였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이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漢王)이 나를 깊이 친애하고 믿는데 내가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부디 나(信)를 위하여 項王에게 사절하라.” 하였다.

武涉이 已去에 蒯徹이 以相人之術로 說曰 僕이 相君之面【雖相面與背나 其實則面은 伏也니 面伏於漢王也요 背는 反也니 背反漢王也라 】하니 不過封侯요 相君之背하니 貴不可言【以微言動信이니 言背漢則大貴也라 】이로이다 韓信曰 何謂也오 蒯徹曰 楚, 漢分爭에 智勇俱困이라 當今兩主之命이 縣(懸)於足下하니 爲漢則漢勝이요 與楚則楚勝이라 誠能聽臣之計인댄 莫若兩利而俱存之니 參分天下하야 鼎足而居하면 其勢莫敢先動이라 案齊之故하야 有膠, 泗之地하고 深拱揖讓이면 則天下之君王이 相率而朝於齊矣리이다 天與弗取면 反受其咎요 時至不行이면 反受其殃이니 願足下는 熟慮之하소서 漢王이 遇我甚厚하니 吾豈可以鄕(向)利而倍義乎아 蒯生曰 勇略震主者는 身危하고 功蓋天下者는 不賞하나니 今足下戴震主之威하고 挾不賞之功하야 歸楚면 楚人이 不信하고 歸漢이면 漢人이 震恐하리니 足下安歸乎잇가 曰 先生은 且休矣어다 蒯徹이 復說曰 夫功者는 難成而易敗하고 時者는 難得而易失也니 時乎時乎여 不再來니이다 이 猶豫【猶는 獸名이니 性多疑하야 聞有聲이면 則豫登木하야 下上不一이라 故謂不一曰猶豫라 】하야 不忍倍漢하고 遂謝蒯徹하다 〈出史記本傳〉

武涉이 이미 떠나가자, 蒯徹이 사람을 관상 보는 방법을 가지고 韓信을 설득하기를 “제가 군주의 얼굴을 상 보니【비록 얼굴과 등을 상 본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面은 굴복함이니 漢王에게 굴복하는 것이요, 背는 배반함이니 漢王을 배반하는 것이다.】 侯에 봉해짐에 불과하고, 군주의 등을 상 보니 귀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은미한 말로 韓信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니, 漢나라를 배반하면 크게 귀해짐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韓信이 “무슨 말인가?” 하고 물으니, 이에 蒯徹이 대답하였다.

“楚나라와 漢나라가 나뉘어 다툼에 지혜와 용맹이 모두 곤궁합니다. 당금 두 군주의 운명이 足下에게 달려 있으니, 足下가 漢나라를 위하면 漢나라가 이기고 楚나라를 편들면 楚나라가 이깁니다. 진실로 신의 계책을 따른다면 둘 다 이롭고 모두 보존하는 것만 못하니,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거하면 그 형세가 감히 먼저 動하지 못할 것입니다. 齊나라의 옛 땅을 점거하여 膠‧泗의 땅을 소유하고는 깊이 팔짱 끼고서 읍하고 사양하면 천하의 군왕들이 서로 거느리고 와서 齊나라에 조회할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데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 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앙화를 받는 법이니, 원컨대 足下는 깊이 생각하소서.”

韓信이 말하기를 “漢王이 나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니, 내 어찌 이로움을 향하여 의리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하니, 蒯生이 말하였다. “용맹과 지략이 임금을 두렵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롭고, 공이 천하를 뒤덮는 자는 상을 줄 수 없습니다. 지금 足下가 임금을 두렵게 하는 위엄을 이고 상줄 수 없는 공을 가지고서 楚나라로 돌아가면 楚나라 사람이 믿지 않을 것이고, 漢나라에 돌아가면 漢나라 사람이 두려워할 것이니, 足下는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韓信이 말하기를 “선생은 우선 쉬시오.” 하니, 蒯徹이 다시 설득하기를 “功은 이루기는 어렵고 무너지기는 쉬우며 때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시기여! 시기여!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韓信은 망설여【猶는 짐승의 이름이니, 성질이 의심이 많아서 소리가 들리면 미리 나무로 올라가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되풀이한다. 그러므로 한 가지로 결정하지 않고 망설이는 것을 일러 猶豫라고 한다.】 차마 漢나라를 배반하지 못하고 마침내 蒯徹을 사절하였다. -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 秋에 立黥布하야 爲淮南王하다 ○ 項羽自知少助食盡하고 韓信이 又進兵擊楚하니 患之라 漢遣侯公하야 說太公한대 乃與漢約하고 中分天下하야 割鴻溝【王氏曰 於滎陽下에 引河하야 東南爲鴻溝하야 以通宋鄭(東)[陳]蔡曹衛하야 與濟汝淮泗로 會於楚하니 卽今官渡水也라 張氏云 大梁城이 在浚儀縣北하며 縣西北渠水 東經此城南하고 又北屈하야 分爲二渠하니 其一渠는 東南流라 始皇이 鑿引河水하야 以灌大梁하고 謂之鴻溝하니 今之汴河니 是漢楚會〈此〉處라 其一渠는 東經陽武縣南하야 爲官渡水라 】以西爲漢하고 以東爲楚하다 九月에 楚歸太公, 呂后하고 引兵解而東歸하다 漢王이 欲西歸러니 張良, 陳平이 說曰 漢은 有天下太半하고 而諸侯皆附하며 楚는 兵疲食盡하니 此는 天亡之時也라 今釋弗擊이면 所謂養虎自遺患也니이다 漢王이 從之하다

[新增]程子張良이 才識高遠하야 有儒者氣象이로되 而亦以此說漢王하니 則其不義甚矣로다

[史略 史評]陳氏程子張良此謀非義라하시니 固是라 然이나 項羽旣殺韓王成하야 而張良이 欲報君父之仇하니 奚暇惜其他耳리오

가을에 黥布를 세워 淮南王을 삼았다.

項羽는 도와주는 이가 적고 식량이 다한 줄을 스스로 알았으며, 韓信이 또 進軍하여 楚나라를 공격하니, 項羽는 이를 걱정하였다. 그런데 漢나라가 侯公을 보내어 項羽를 설득해서 太公을 보내줄 것을 청하니, 項羽가 마침내 漢나라와 약속하고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鴻溝를【王氏가 말하였다. “滎陽 아래에 黃河를 끌어다가 동남쪽에 鴻溝를 만들어서 宋, 鄭, 陳, 蔡, 曹, 衛와 통하여 濟水, 汝水, 淮水, 泗水와 함께 楚나라에서 모이니, 곧 지금의 官渡水이다. 張氏(張華)는 말하기를 ‘大梁城이 浚儀縣 북쪽에 있으며, 縣 서북쪽의 渠水가 동쪽으로 이 城의 남쪽을 경유하고 또 북쪽으로 굽어서 나누어져 두 도랑이 되니, 그중 한 도랑은 동남쪽으로 흐르므로 始皇이 땅을 파서 河水를 끌어다가 大梁에 대고 이를 일러 鴻溝라 하였는 바, 지금의 汴河이니 漢나라와 楚나라가 이곳에서 만난다. 그중 한 도랑은 동쪽으로 陽武縣 남쪽을 경유하여 官渡水가 된다.’ 하였다.”】 분할해서 以西는 漢나라 영토가 되고 以東은 楚나라의 영토가 되게 하였다.

9월에 楚나라가 太公呂后를 돌려보내고 병력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漢王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張良陳平이 설득하기를 “漢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소유하였고 제후가 모두 따르며, 楚나라는 병사들이 피로하고 식량이 다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멸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이제 놓아 주고 공격하지 않으면 이른바 범을 길러 스스로 화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하니, 漢王이 그 말을 따랐다.

[新增]程子가 말씀하였다.

張良의 재주와 식견이 高遠하여 儒者의 기상이 있었으나 또한 이것으로 漢王을 설득하였으니, 의롭지 못함이 심하다.”

[史略 史評]陳氏가 말하였다.

程子張良의 이 계책이 의롭지 못하다고 말씀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그러나 項羽가 이미 韓王을 죽였으므로 張良이 〈韓나라를 위하여〉 君父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돌아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