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四 唐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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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紀

德宗皇帝 上

名은 适이니 代宗長子라

德宗皇帝※ 上 名은 이니 代宗長子라 在位二十六年이요 壽六十四라

※ 猜忌刻薄하고 以强明自任하야 恥見屈於正論하고 而忘受欺於奸諛라 用盧杞, 趙贊하야 以至於敗하니 小人之能亂國也如此로다

德宗皇帝는 이름이 이니, 代宗의 長子이다. 재위가 26년이고, 壽가 64세이다.

시기하고 각박하며 강하고 총명함을 자임하여 올바른 의논에 굴복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간사한 자와 아첨하는 자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잊었다. 盧杞趙贊을 등용하여 실패함에 이르렀으니, 소인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이 이와 같다.

[庚申]建中元年

[庚申]建中元年이라

正月에 赦天下하고 始用楊炎議하야 命黜陟使하야 與觀察使, 刺史로 約百姓丁産定等級하야 作兩稅法【德宗이 相楊炎하고 作兩稅法하야 夏輸無過六月하고 秋輸無過十(二)[一]月호되 視大曆十四年墾田數爲定하고 廢租庸調法하니라 】하고 比來新舊徵科色目을 一切罷之하야 二稅外에 輒率一錢者【率은 斂也라 】는 以枉法論하다 唐初賦斂之法曰 租, 庸, 調니 有田則有租하고 有身則有庸하고 有戶則有調라 玄宗之末에 版籍【版은 補綰反이요 籍은 秦昔反이니 所以書戶口輿地也라】浸壞하야 多非其實하고 及至德兵起하야 所在賦斂하야 迫趣(促)取辦하야 無復常準하니 賦斂之司增數하야 而莫相統攝이라 各隨意徵科하고 自立色目하야 新故相仍하야 不知紀極이러라 至是하야 이 建議作兩稅法하야 先計州縣每歲所應費用과 及上供之數하야 而賦於人하야 量出以制入하고 戶無主客【主는 謂土著者요 客은 謂避役逃戶라】하야 以見居爲簿하고 人無丁中【中은 如字라 凡民始生爲黃이요 四歲爲小요 十六爲中이요 二十(二)[一]爲丁이요 六十爲老니 授田之制는 丁及男年十(六)[八]以上人一頃이라】하야 以貧富爲差하고 爲行商者는 在所州縣에 稅三十之一하야 使與居者로 均無僥利【僥는 謂倖其利也라 [頭註] 均無僥利는 言居行皆無僥倖之利也라 】하고 居人之稅는 秋夏兩徵之호되 其租庸調雜徭【徭는 賦也라 租庸調雜徭는 謂縠絹布帛繒纊이니 所出不一也라 】를 悉省하야 皆總統於度支하니 上이 用其言하야 因赦令行之하니라

[史略 史評]范氏德宗之政이 名廉而實貪이라 故로 其令이 始戒而終廢하니 蓋禁暴之法雖具나 而誅求之意 常出於法外하야 天下之吏 奉意而不奉法하야 逆意有罪하고 奉法無功이라 是以로 法雖存이나 而常爲無用之文也하니라

建中 元年(경신 780)

정월에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처음으로 楊炎의 의논을 따라 黜陟使에게 명해서 觀察使와 刺史와 함께 백성의 丁産(식구와 家産)을 통틀어 계산해서 빈부의 등급을 制定하여 兩稅法을 만들고,德宗楊炎을 재상으로 삼고 兩稅法을 만들어서 여름에 바치는 것은 6월을 넘기지 않고 가을에 바치는 것은 11월을 넘기지 않게 하였는데, 大曆 14년에 개간한 전지의 숫자를 살펴 정하고 租‧庸‧調의 法을 폐지하였다.】 그동안 시행하던 新‧舊의 세금을 징수하는 명목을 일체 혁파하여, 두 가지 세금 이외에 1錢이라도 거두는 자는【率은 거둠이다.】 국법을 위반한 것으로 논죄하였다.

唐나라 초기에 賦稅를 징수하는 법은 租‧庸‧調였으니, 田地가 있으면 租가 있고, 몸이 있으면 庸이 있고, 戶가 있으면 調가 있었다. 玄宗 말년에는 호구를 기재하는 것이【版은 補綰反(반)이고 籍은 秦昔反(적)이니, 版籍은 戶口와 輿地(地圖)를 쓴 것이다.】 점점 혼란해져서 호적이 실제 숫자와 차이가 많이 났고, 至德 연간에 병란이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각지에서 세금을 거두어, 독촉하여 재정을 마련해서 다시는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세금을 거두는 관서의 숫자가 늘어나서 서로 계통이 없었다. 각각 임의로 징수하고 스스로 명목을 세워서 새것과 옛것이 서로 이어져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楊炎이 건의하여 兩稅法을 만들어 州縣에서 매년 꼭 필요한 비용과 上供하는 숫자를 먼저 계산하여 백성들에게 부과하되 지출을 헤아려 수입을 제정하고, 戶는 主‧客의 구분없이【主는 대대로 그 지방에서 토착하여 사는 자를 이르고, 客은 부역을 피하여 도망온 民戶를 이른다.】 현재 거주하는 자로써 文簿를 만들고, 사람은 丁男과 中男의 구분없이【中은 본 글자대로 읽는다. 무릇 백성이 처음 태어난 것을 黃이라 하고, 4세를 小라 하고, 16세를 中이라 하고, 21세를 丁이라 하고, 60세를 老라 하니, 전지를 주는 제도는 丁과 남자 나이 18세 이상인 사람에게 1頃을 주었다.】 貧富로써 차등을 하며, 행상하는 자는 소재지의 州縣에서 3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하여 거주하는 자와 똑같이 세금을 부과해서 요행으로 얻는 이익이 없게 하고,【[釋義] 僥는 이익을 요행으로 바람을 이른다. [頭註] 均無僥利는 거주하는 자와 행상하는 자가 모두 요행으로 이익을 바람이 없음을 말한다.】 거주하는 자의 세금은 가을과 여름에 두 번 징수하되 租‧庸‧調와 여러 가지 부세와 요역을【徭는 賦稅이다. 租‧庸‧調와 雜徭는 縠‧絹‧布‧帛‧繒‧纊을 이르니, 내는 바가 똑같지 않다.】 모두 생략하여 다 度支에게 총괄하게 하니, 上이 그의 말을 따라 백성들이 이전에 바치지 못한 것은 면제해 주고 兩稅法을 시행하였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德宗의 정사는 명분은 청렴했지만 실제는 탐욕스러웠다. 그러므로 그 명령이 처음에는 경계하였으나 끝에는 폐지되었으니, 포악함을 금하는 法이 비록 갖추어졌으나 苛斂誅求하는 뜻이 항상 法 밖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天下의 관리들이 군주의 뜻만 받들고 法을 받들지 아니하여, 뜻을 거스르면 罪가 있고 法을 받들면 功이 없었다. 이 때문에 法이 비록 남아 있으나 항상 쓸모없는 文飾이 된 것이다.”

食貨志曰 古之善治其國而愛養斯民者는 必立經常簡易之法하야 使上愛物以養其下하고 下勉力以事其上하야 上足而下不困이라 故量人之力而授其田하고 量地之産而取以給公上【供給也요 又贍也라 】하고 量其入而出之하야 以爲用度之數하니 是三者는 常相須以濟【須는 待也라 】하야 而不可失이니 失其一則不能守其二라 及暴君庸主從(縱)其佚欲에 而苟且之吏從之하야 變制合時하야 以取寵於其上이라 故로 用於上者無節하고 而取於下者無限하야 民竭其力而不能供이라 由是로 上愈不足而下愈困이면 則財利之說興하야 而聚斂之臣用이라 記曰 與其有聚斂之臣으론 寧畜盜臣이라하니 盜臣이 誠可惡나 然一人之害爾요 聚斂之臣用이면 則經常之法壞하야 而下不勝其弊焉이라 唐之始時에 授人以口分世業田하고 而取之以租庸調之法하야 其用之也有節이라 蓋其蓄兵以府衛之制故로 兵雖多而無所損하고 設官有常員之數故로 官不濫而易祿하니 雖不及三代之盛時나 然亦可以爲經常之法也러니 及其弊也엔 兵冗官濫하야 爲之大蠹【蠹는 音妬니 食木蟲也라 若蟲食物也라 】라 自天寶以來【天寶는 玄宗年號라 】로 大盜屢起하고 方鎭數叛하야 兵革之興이 累世不息하야 而用度之數 不能節矣라 加以驕君昏主와 奸吏邪臣이 取濟一時하야 屢更其制하야 而經常之法이 蕩然盡矣라 蓋口分世業之田이 壞而爲兼幷하고 租庸調之法이 壞而爲兩稅하며 至於鹽鐵, 轉運, 屯田, 和糴【糴은 買米也라】, 鑄錢, 括苗, 榷利, 借商, 進奉, 獻助하야 無所不爲矣니 蓋愈煩而愈弊하야 以至於亡하니라

《新唐書》〈食貨志〉에 말하였다.

“옛날에 나라를 잘 다스리고 이 백성을 잘 기른 자들은 반드시 經常的인 법과 簡易한 법을 세워, 윗사람으로 하여금 물건을 아껴 아랫사람을 기르게 하고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써서 윗사람을 섬기게 해서, 윗사람이 재용이 풍족하면서도 아랫사람들이 곤궁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의 힘을 헤아려서 田地를 나누어주고, 田地에서 생산되는 것을 헤아려 세금을 취해서 公上에 공급하고,【給은 공급함이요, 또 넉넉함이다.】 수입을 헤아려 지출해서 用度의 숫자로 삼았으니, 이 세 가지는 항상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져서【須는 기다림이다.】 하나라도 잃을 수가 없으며, 하나를 잃으면 나머지 두 가지를 지킬 수가 없다.

그러다가 포악한 군주와 용렬한 군주가 그 佚欲(무절제한 욕심)을 마음대로 부림에 미쳐서는 구차한 관리들이 그것을 따라서 제도를 변경하고 시세에 영합하여 윗사람에게 총애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위에서 쓰는 것이 절제가 없고 아래에서 취하는 것이 제한이 없어서, 백성들이 힘을 다해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윗사람이 더욱 부족하고 아랫사람들이 더욱 곤궁하게 되면 財利에 대한 說이 일어나서 聚斂하는 신하가 등용되었다.

《禮記》에 이르기를 ‘聚斂하는 신하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기르라.’고 하였으니, 도둑질하는 신하가 진실로 가증스러우나 이는 군주 한 사람의 폐해일 뿐이고, 聚斂하는 신하가 등용되면 經常的인 법이 파괴되어서 아랫사람들이 그 폐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唐나라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口分田과 世業田을 나누어주고, 租‧庸‧調의 법으로써 취하여 用度가 절제가 있었다. 군대를 府衛의 제도로써 길렀기 때문에 군사들이 비록 많았지만 손해되는 바가 없었고, 관직을 설치한 것이 일정한 정원이 있었기 때문에 관직을 남발하지 않아서 녹봉을 주기가 쉬웠으니, 비록 흥성했던 三代 시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또한 經常的인 법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폐단이 생김에 미쳐서는 군사들이 남아돌고 관원이 지나치게 많아서 국가를 좀먹는 큰 해독[大蠹]이 되었다.【蠹는 음이 투(두)이니, 나무를 좀먹는 벌레이다. 나라에 화를 입히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좀벌레가 물건을 갉아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天寶 年間 이래로【天寶는 玄宗의 연호이다.】 큰 도둑이 여러 번 일어나고 方鎭이 자주 배반하여 兵革(전쟁)이 여러 대에 걸쳐 그치지 않아서 用度의 숫자를 절제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교만하고 昏愚한 군주와 간악하고 간사한 신하들이 일시적으로 구제하려고 하여 여러 번 그 제도를 변경하니, 經常的인 법이 소탕하여 다 없어졌다. 口分田과 世業田이 무너져서 겸병당하였고, 租‧庸‧調의 법이 무너져서 兩稅가 되었으며, 鹽鐵‧轉運‧屯田‧和糴‧【糴은 쌀을 사들이는 것이다.】鑄錢‧括苗‧榷利‧借商‧進奉‧獻助에 이르기까지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더욱 번거로우면 번거로울수록 더욱 폐해가 일어나서 당나라가 멸망함에 이른 것이다.”

崔祐甫以疾로 多不視事하니 楊炎이 獨任大政하야 專以復恩讐爲事하니라

崔祐甫가 병으로 정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楊炎이 홀로 큰 정사를 맡아서 오로지 은혜와 원수를 갚는 것을 일삼았다.

○ 術士桑道茂上言호되 陛下不出數年에 暫有離宮之厄이라 臣이 望奉天에 有天子氣하니 宜高大其城하야 以備非常하소서 辛丑에 命京兆하야 發丁夫數千하고 雜六軍之士하야 築奉天城하다

術士인 桑道茂가 上言하기를 “폐하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잠시 궁궐을 떠날 액운이 있습니다. 신이 바라보건대, 奉天에 천자의 기운이 있으니, 마땅히 그 성을 높고 크게 만들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소서.” 하였다. 辛丑日(6월 8일)에 京兆尹에게 명하여 丁夫 수천 명을 동원하고 六軍의 군사를 더 보태어 奉天城을 쌓게 하였다.

○ 荊南節度使庾準이 希楊炎旨하야 奏忠州刺史劉晏【初에 爲吏部尙書하고 楊炎爲侍郞하야 不相悅이러니 及獨任大政에 專以復恩讐爲事하야 貶爲忠州刺史하니라 】이 與朱泚朱泚初爲盧龍節度使李懷仙部將이러니 與弟滔로 殺懷仙하니 衆推知留後어늘 德宗이 改鎭鳳翔하니라 】에 辭多怨望이라하고 이 證成之어늘 上이 下詔賜死하니 天下冤之러라

荊南節度使庾準楊炎의 뜻에 따라 ‘忠州刺史劉晏【처음에 劉晏은 吏部尙書가 되고 楊炎은 吏部侍郞이 되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 楊炎이 홀로 國政을 맡게 되자 오로지 은혜와 원수를 보복하는 것을 일삼아서 劉晏을 좌천하여 忠州刺史로 삼았다.】朱泚에게 준 편지에朱泚는 처음에 盧龍節度使李懷仙의 部將이 되었는데, 朱泚가 아우 朱滔와 함께 李懷仙을 죽이니, 군사들이 朱泚를 추대하여 留後를 맡게 하였다. 德宗이 鎭을 鳳翔으로 고쳤다.】 조정을 원망하는 말이 많다.’고 誣告하고楊炎이 증명하여 이루었다. 上이 조서를 내려 劉晏에게 賜死하니, 천하가 원통하게 여겼다.

○ 初에 安史之亂에 數年間에 天下戶口 什亡八九하고 州縣이 多爲藩鎭所據하야 貢賦不入하니 朝廷府庫耗竭하고 中國多故하며 戎狄이 每歲犯邊이라 所在宿重兵【宿은 留也라 】하야 仰給縣官하니 所費不貲를 皆倚辦於하니라

처음에 安祿山史思明의 난리에 몇 년 동안 천하의 戶口가 10에 8, 9가 없어지고 州縣들이 대부분 藩鎭에 점거당하여 貢賦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조정의 府庫가 고갈되었으며 중국에 연고가 많고 오랑캐들이 매년 변경을 침범하였다. 그리하여 변경에 많은 군대를 주둔시키면서【宿은 머무는 것이다.】縣官에게 의뢰하여 공급받으니, 적지 않은 비용을 모두 劉晏에게 의지하여 마련하였다.

이 有精力, 多機智하고 變通有無하야 曲盡其妙라 常以厚直(値)로 募善走者하야 置遞【立郵以傳送也라 】相望하야 覘報四方物價하니 雖遠方이라도 不數日에 皆達使司【轉運使司也라 】하야 食貨輕重之權을 悉制在掌握하니 國家獲利하고 而天下無甚貴甚賤之憂라 이 常以爲辦集衆務는 在於得人이라 故로 必擇通敏精悍廉勤之士【精悍은 謂精彊悍勇也라 精은 子正反이라 】而用之하고 至於句檢簿書【唐官志에 考功郞中이 掌百官功過하야 敍以四善하고 善狀之外에 有二十七最하니 其十七曰 明於勘覆하야 稽失無隱이 爲句檢之最라 [頭註] 句는 稽也요 檢은 校也라 】와 出納錢穀하야는 事雖至細나 必委之士類하고 吏는 惟書符牒이요 不得輕出一言이러라 常言 士陷贓賄면 則淪棄於時하니 名重於利故로 士多淸修하고 吏雖廉潔이나 終無顯榮하니 利重於名故로 吏多貪汚라하니라 然이나 惟能行之하고 它(他)人效者는 終莫能逮라 其場院要劇之官을 必盡一時之選이라 故로 沒之後에 掌財賦有聲者는 多之故吏也러라

劉晏은 精力이 왕성하고 機智가 많으며 재물의 있고 없음을 잘 변통하여 그 묘리를 곡진히 다하였다. 항상 후한 값으로 달리기를 잘하는 자들을 모집해서 각지에 驛站을 설치하여【置遞는 驛站을 세워 소식이나 서신을 전송하는 것이다.】 전후로 서로 이어지게 해서 이들로 하여금 각지의 물가를 살펴보고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무리 먼 곳이라도 며칠이 못되어 모두 轉運使司에 도달하게 해서【使司는 轉運使司이다.】 양식과 貨物 가격의 騰落에 대한 권한을 모두 손안에 쥐고 제재하니, 국가는 이익을 얻고 천하는 양식과 화물 가격이 폭등하거나 폭락하는 근심이 없었다.

劉晏은 항상 말하기를 “여러 가지 일을 잘 수행하는 것은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에 통달하고 민첩하고 정밀하고 굳세고 청렴하고 부지런한 선비를 가려【精悍은 정밀하고 강하고 굳세고 용감함을 이른다. 精은 子正反(정)이다.】 등용하였으며, 문서를 句檢(점검)하고【[釋義] 문서(장부)를 상고하고 조사하는 것이니, ≪唐書≫ 〈百官志〉에 “考功郞中이 百官의 功過를 관장하여 네 가지 善行으로써 서열을 매기고, 善狀 외에 스물일곱 가지 最(治績이 우수한 것)가 있으니, 열일곱 번째에 이르기를 ‘조사가 철저하고 잘못을 찾아내어 숨김이 없는 것이 句檢의 最이다.’ 했다.” 하였다. [頭註] 句는 상고하는 것이고, 檢은 조사하는 것이다.】 돈과 곡식을 출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士類에게 맡기고, 아전은 오직 符牒만 쓰고 한 마디 말도 가볍게 내지 못하게 하였다. 劉晏은 항상 말하기를 “선비는 부정한 재물과 뇌물을 취하는 데에 빠지면 세상에 버림을 받으니 명예가 이익보다 중하기 때문에 선비들은 청렴함으로 행실을 닦는 자가 많고, 아전은 비록 청렴하고 결백하나 끝내 현달한 영화가 없으니 이익이 명예보다 중하기 때문에 아전들은 탐욕스러운 자가 많다.” 하였다.

그러나 오직 劉晏만이 이것을 잘 행하였고, 다른 사람들 중에 劉晏을 모방한 자들은 끝내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場院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관원을 반드시 당시의 인물 중에서 지극히 정밀하게 선발하였다. 그러므로 劉晏이 죽은 뒤에 財賦를 맡아 명성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劉晏의 옛 관리였다.

이 又以戶口滋多則賦稅自廣이라 故로 其理財에 常以養民爲先하야 諸道에 各置知院官하고 每旬月에 具州縣雨雪豐歉之狀【豐은 稔也요 歉은 吉念反이니 一曰食不滿也라】하야 白使司하야 豐則貴糴하고 歉則賤糶하며 或以穀易雜貨하야 供官用하고 及於豐處에 賣之하며 知院官이 始見不稔之端【穀熟曰稔이라 】이면 先申至某月須若干【干은 猶介也니 若干은 猶言幾許枚也라 】蠲免하고 某月須若干救助라가 及期하야는 劉晏이 不俟州縣申請하고 卽奏行之하야 應民之急하야 未嘗失時하고 不待其困弊流亡餓殍【殍는 餓死也라 】然後에 賑之也하니라 由是로 民得安其居業하야 戶口蕃息하니 이 始爲轉運使時에 天下見戶 不過二百萬이러니 其季年에 乃三百餘萬이로되 在所統則增하고 非所統則不增也하며 其初에 財賦歲入이 不過四百萬緡이러니 季年에 乃千餘萬緡이러라

劉晏은 또 戶口가 점점 많아지면 부세가 저절로 많아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재물을 다스릴 적에 항상 백성을 기르는 것을 우선시하여 여러 도에 각각 知院官을 두고 매번 열흘이나 한 달마다 州縣에 비가 오고 눈이 오며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든 상황을 자세히 갖추어【豐은 곡식이 잘 영그는 것이요, 歉은 吉念反(겸)이니, 一說에 이르기를 “먹는 것이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轉運使司에게 보고하게 해서 풍년이 들면 곡식을 비싸게 사들이고 흉년이 들면 곡식을 싸게 방출하며, 혹은 곡식을 가지고 민간의 雜貨와 교역하여 官用에 공급하고 또 풍년이 든 곳에 이것을 팔았다. 知院官이 풍년이 들지 못할 단서를 처음 발견하면【곡식이 잘 성숙하는 것을 稔이라 한다.】 ‘아무 달에 이르러 약간의【干은 介와 같으니, 若干은 몇 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감면(탕감)이 필요하고 아무 달에 이르러 약간의 구원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轉運使司에게 미리 보고하게 하였다가 그 시기에 이르면 劉晏이 州縣에서 신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아뢰어 시행해서 백성들의 위급한 정황에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때를 놓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하여 유리하고 도망하며 굶어 죽기를【殍는 굶어죽는 것이다.】 기다린 뒤에 구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고 생업을 즐거워하여 호구가 점점 불어났다.

劉晏이 처음 轉運使가 되었을 때에 천하의 호구가 2백만 戶에 불과하였는데, 말년에는 마침내 3백 여만 戶가 되었으나 劉晏이 통솔한 곳은 인구가 증가하였지만 劉晏이 통솔하지 않은 곳은 인구가 증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轉運使를 맡은 초기에는 財賦의 수입이 매년 4백만 緡에 불과하였는데, 말기에는 마침내 천여만 緡이 되었다.

이 專用榷鹽法하야 充軍國之用하니 時에 自許, 汝, 鄭, 鄧之西는 皆食河東池鹽【河東解州에 有鹽池하니 池水煮以爲鹽이라 】하니 度支主之하고 汴, 渭, 唐, 蔡【本豫州러니 避代宗諱하야 爲蔡州也라】之東은 皆食海鹽하니 主之라 以爲官多則民擾라 故로 但於出鹽之鄕에 置鹽官하고 取鹽戶所煮之鹽하야 轉鬻於商人하야 任其所之하고 自餘州縣은 不復置官하며 其江嶺間에 去鹽鄕遠者는 轉官鹽於彼하야 貯之라가 或商絶鹽貴면 則減價鬻之하고 謂之常平鹽【後又榷茶하고 遂置常平茶鹽官이라 】이라하니 官獲其利하고 而民不乏鹽이라 其始에 江淮鹽利 不過四十萬緡이러니 季年에 乃六百餘萬緡이라 由是로 國用充足호되 而民不困弊라 其河東鹽利는 不過八十萬緡이요 而價復貴於海鹽이러라

劉晏이 오로지 榷鹽法(소금을 전매하는 법)을 사용하여 軍國의 비용을 충당하니, 이때 許州‧汝州‧鄭州‧鄧州의 서쪽은 모두 河東에서 나오는 池鹽을 먹었는데【河東의 解州에 鹽池가 있으니, 鹽池의 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것이다.】度支部에서 주관하였고, 汴州‧渭州‧唐州‧蔡州의【蔡州는 본래 豫州였는데, 代宗의 諱를 피하여 蔡州라고 하였다.】 동쪽은 모두 海鹽을 먹었는데 劉晏이 주관하였다. 劉晏은 ‘관리가 많으면 백성들이 소요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소금이 나오는 지방에만 소금을 관리하는 鹽官을 두어 鹽戶에서 구운 소금을 가져다가 상인들에게 轉賣하여 鹽商들이 각 지역을 다니면서 판매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나머지 州縣에는 다시 관원을 두지 않았다. 楊子江과 五嶺 사이에 소금이 나는 지방과 거리가 먼 곳은 官鹽을 그곳으로 옮겨 가서 저축해 두었다가 혹 장사꾼이 끊기고 소금값이 비싸지면 값을 깎아 소금을 팔고 이것을 常平鹽이라 이르니,【뒤에 또 차를 전매하고 마침내 常平茶鹽官을 두었다.】 관청에서는 이익을 얻고 백성들은 소금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楊子江과 淮水 지방의 소금 이익이 40만 緡에 불과하였는데, 말년에는 마침내 6백 여만 緡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의 財用이 충족하였지만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지 않았다. 그러나 河東의 소금 이익은 80만 緡에 지나지 않았고 값도 海鹽보다 비쌌다.

○ 先是에 運關東穀하야 入長安者 以河流湍悍【湍은 他官反이니 水之急流니 其勢勇悍也라】하야 率一斛에 得八斗하고 至者則爲成勞하야 受優賞이러니 以爲江, 汴, 河, 渭水力不同이라하야 各隨便宜하야 造運船하고 敎漕卒【漕는 在到反이니 水運也요 卒은 藏沒反이니 漕運中所役卒也라】하야 江船【船自江行者를 爲江船이라하니 與汴船, 河船, 渭船으로 同義라】은 達楊州하고 汴船은 達河陰하고 河船은 達渭口하고 渭船은 達太倉호되 其間에 緣水置倉하야 轉相受給하니 自是로 每歲運穀이 或至百餘萬斛【斛은 十斗라 】이로되 無斗升沈覆者라 船十艘爲一綱【艘는 音搔니 船之總名이라 】하고 使軍將領之하야 十運無失이면 授優勞官하니 其人數運之後에 無不斑白者러라

이보다 앞서 關東의 곡식을 운반하여 長安에 들여오는 자들은 河水의 물살이 거세고 사나워서【湍은 他官反(단)이니, 물이 급하게 흐르는 것이니, 湍悍은 그 형세가 사나운 것이다.】 대체로 1斛을 운반하면 8斗를 얻었고, 목적지에 도달하면 공로를 이루었다 해서 우대하는 賞을 받았다. 劉晏은 이르기를 ‘楊子江과 汴水와 黃河와 渭水는 水力(浮力)이 똑같지 않다.’고 하여 각각 편의대로 漕運船을 만들고 漕運하는 병졸들을 가르쳐서【漕는 在到反(조)이니 水路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것이고, 卒은 藏沒反(졸)이니 漕運할 때에 부역하는 병졸이다.】楊子江의 배는【楊子江으로 다니는 배를 江船이라 하니, 汴船‧河船‧渭船과 같은 뜻이다.】楊州에 도달하게 하고 汴水의 배는 河陰에 도달하게 하고 黃河의 배는 渭水에 도달하게 하고 渭水의 배는 太倉에 도달하게 하였는데, 그 사이에 물가를 따라 창고를 설치하여 돌려가면서 서로 받아들이고 내주게 하니, 이때부터 매년 곡식을 운반한 것이 혹 백여 만 斛에 이르렀으나【斛은 10斗이다.】 한 말이나 한 되의 곡식도 침몰하거나 전복된 것이 없었다.

배 열 척을 1綱이라 하고【艘는 음이 소이니, 배의 총칭이다.】 軍將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열 번 운반하고 손실이 없으면 우대하고 위로하여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그 사람이 몇 번 운반한 뒤에는 머리가 斑白이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於楊子【縣名이니 南有楊子江하니라 】에 置十場造船하고 每艘에 給錢千緡이러니 或言所用이 實不及半하니 虛費太多한대 曰 不然하다 論大計者는 固不可惜小費니 凡事는 必爲永久之慮라 今始置船場에 執事者至多하니 當先使之私用無窘이면 則官物堅完矣리라 若遽與之屑屑較計錙銖면 安能久行乎아 異日에 必有患吾所給多而減之者리니 減半以下는 猶可也어니와 過此則不能運矣라하니라 其後五十年에 有司果減其半하고 及咸通【懿宗年號라 】中하야는 有司計費而給之하고 無復羨餘하니 船益脆薄易壞하야 漕運遂廢矣러라 은 爲人勤力하야 事無閑劇하고 必於一日中決之하야 不使留宿하니 後來言財利者 皆莫能及之하니라

劉晏은 楊子縣에【楊子는 縣의 이름이니, 남쪽에 양자강이 있다.】 열 곳의 造船場을 설치하고 매 선박마다 천 緡의 돈을 지급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배 한 척을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실제로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허비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 하니, 劉晏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큰 계책을 논하는 자는 진실로 작은 비용을 아껴서는 안 되니, 모든 일은 반드시 장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 지금 처음 造船場을 설치함에 일을 집행하는 자들이 매우 많으니, 먼저 이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쓰는 재용이 군색함이 없게 하면 官物(官船)이 견고하고 완전해질 것이다. 만일 별안간 이들과 더불어 시시콜콜 작은 비용을 비교하고 따진다면 어찌 오랫동안 행할 수 있겠는가. 후일에 반드시 내가 지급한 것이 많음을 근심하여 줄이는 자가 있을 것이니, 〈造船하는 재료와 工錢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절반 이하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절반을 초과한다면 배가 곡식을 제대로 운반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50년 뒤에 有司가 과연 그 절반을 줄였고, 咸通 연간에【咸通은 懿宗의 연호이다.】 이르러서는 有司가 造船하는 비용을 일일이 계산하여 지급하고 다시는 쓰고 난 나머지가 없으니, 배가 더욱 취약하고 얇아 쉽게 부서져서 漕運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劉晏은 사람됨이 부지런하여 한가로운 일과 급한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하루 안에 결정하여 묵혀두지 않으니, 뒤에 財利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贊曰 人生之本은 食與貨而已니 知所以取면 人不怨하고 知所以予면 人不乏이라 道御之而王하고 權用之而霸하니 古今一也라 劉晏이 因平準法【漢武置平準官하야 籠天下鹽鐵於京師하니라 】하야 幹山海【幹은 管也라 】하고 排商賈하야 制萬物低昂하고 操天下贏貲하야 以佐軍興이라 雖拏兵數十年이나 斂不及民而用度足하야 唐中僨而復振은 有勞焉하니 可謂知取予矣로다

《新唐書》〈劉晏列傳〉贊에 말하였다.

“民生의 근본은 양식과 재화 뿐이니, 취할 줄을 알면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줄 줄을 알면 백성들이 궁핍하지 않게 된다. 正道대로 어거하면 王者가 되고 權道를 쓰면 霸者가 되니, 이는 古今이 똑같다. 劉晏이 平準法을 이용하여【漢나라 武帝가 平準官을 두어 京師에서 천하의 소금과 철을 독점하였다.】 산과 바다에서 나오는 물건을 관장하고【幹은 주관하는 것이다.】 상인들을 배척해서 만물의 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통제하고 천하에 남아도는 재화를 운용하여 군대의 비용을 도왔다. 그리하여 비록 병란으로 시끄러운 지가 수십 년이었지만 백성들에게 세금이 미치지 않고 用度가 풍족하여 唐나라가 중간에 쓰러졌다가 다시 振作한 것은 劉晏의 공이 컸으니, 백성들에게 취하고 줄 바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胡氏管見曰 劉晏은 言利之臣이니 君子所不道也나 而其言이 有不可廢者하니 一曰集衆務는 在得人이라하야 句檢簿書와 出納錢穀을 必委之士類하고 吏惟書符牒而已하니 此不獨可施之轉運事也라 二曰戶口多則貢賦廣이라하니 故로 其理財가 以養民爲先하니 此雖爲守爲令이라도 皆當力行者也라 三曰官多則民擾라하야 但於出鹽之鄕에 置鹽官하고 自餘州縣은 不復置라 故로 雖天下吏員이라도 皆當減省이요 不貴多也라 四曰論大事에 不計小費니 凡事를 必爲永久之慮라하니 此又合孔子所謂見小利則大事不成이요 無遠慮則必有近憂也라 五曰事無閑劇하고 必於一日中決之라 凡獄訟文移는 自上行下에 未有不以決遣爲利하고 滯淹爲害者也니 此可法之五事也라 然이나 專用之於理財則狹矣라 之足國은 其功이 豈王鉷, 韋堅, 楊愼矜【鉷은 音洪이니 竝唐臣이라 皆以聚斂進이라가 皆不免誅死하니라 】之比리오 然이나 亦不免於誅死는 何也오 財者는 猶泉也니 其名曰布泉이라 泉行而不可壅이요 利布而不可專이니 壅而專之하야 利於上이면 必不利於下요 利於公이면 必不利於私니 不利則怨起하고 怨積則生禍矣라 方之總利權也에 史言衆頗疾之라하니 夫能爲國足用이요 非歸於己也어늘 衆何自而生疾이리오 是必有說矣라 以故로 善爲國者는 不謀利하고 善持身者는 不以利하나니 利者는 對害而言이니 背於義者也니라

[史略 史評]胡氏雖非賢者나 然於國家에 有足食之功하고 罪不至死어늘 而置之死하니 欲以服奸雄之心이면 難矣니라

胡氏(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劉晏은 이익을 말한 신하이니, 이익은 군자가 말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나 그 말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첫 번째는 ‘여러 가지 사무를 이루는 것은 인물을 얻음에 달려 있다.’고 하여, 문서를 句檢하고 錢穀을 출납하는 것을 반드시 士類에 맡기고 아전은 오직 符牒만 쓸 뿐이었으니, 이는 비단 轉運하는 일에만 시행할 뿐만이 아니다. 두 번째는 ‘호구가 많아지면 부세가 많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理財는 백성을 기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이는 비록 군수가 되고 현령이 된 자라도 모두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관원이 많으면 백성들이 소요된다.’고 하여, 소금이 나는 지방에만 鹽官을 두고 그 나머지 州縣에는 다시 관원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천하의 관리라 하더라도 모두 줄여야 하고 많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는 ‘大事를 논할 때에는 작은 비용은 따지지 않아야 하니, 모든 일은 반드시 장구한 생각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또 孔子가 말씀한 ‘작은 이익을 보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하고 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는 것에 부합된다. 다섯 번째는 ‘한가로운 일과 급한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하루 안에 결정한다.’는 것이다. 무릇 獄訟과 문서를 보내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시행함에 결단하여 보내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지체하는 것을 해로움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劉晏을 본받을 만한 다섯 가지 일이다. 그러나 劉晏이 이것을 오로지 理財에만 쓴 것은 너무 좁다.

劉晏이 나라를 풍족하게 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王鉷韋堅楊愼矜에게【[頭註] 王鉷, 韋堅, 楊愼矜:鉷은 음이 홍이니, 王鉷, 韋堅, 楊愼矜은 모두 唐나라 신하이다. 이들은 모두 취렴하는 것으로 등용되었다가 모두 주벌당함을 면치 못하였다.】 견주겠는가. 그러나 또한 주벌당함을 면치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재물은 샘물과 같으니, 이것을 布泉이라 이름한다. 샘물은 두루 흘러다녀야 하고 막혀서는 안 되며, 이익은 퍼뜨려야 하고 독점해서는 안 되니, 막히고 독점하여 윗사람에게 이로우면 반드시 아랫사람에게 이롭지 못하고, 국가에 이로우면 반드시 민간에게 이롭지 못하니, 이롭지 못하면 원망이 일어나고 원망이 쌓이면 화가 생겨난다.

劉晏이 이권을 총괄했을 때에 史官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자못 그를 미워했다.’ 하였으니, 국가를 위하여 재용을 풍족하게 하고 재물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는가. 이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자신을 잘 유지하는 자는 이익을 따르지 않는다. 이익이라는 것은 해로움을 상대하여 말한 것이니, 의리에 배반되는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劉晏이 비록 賢者는 아니었으나 國家에 있어서는 양식을 풍족하게 한 功이 있고 죽을 罪에 이르지 않았는데 그를 死地에 두었으니, 이로써 奸雄의 마음을 복종시키고자 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上이 初卽位에 疎斥宦官하고 親任朝士하야 而張涉은 以儒學入侍하고 薛邕은 以文雅登朝러니 繼以贓敗라 宦官武將이 得以藉口하야 曰 南牙【唐分宰相하야 爲南司라 故稱南牙하고 分宦寺하야 爲北寺라 故稱北門하니라 】文臣이 贓動至巨萬이로되 而謂我曹濁亂天下라하니 豈非欺罔邪아하니 於是에 上心始疑하야 不知所倚仗矣러라

上이 처음 즉위했을 때에는 宦官들을 소원히 하여 배척하고 조정의 선비들을 가까이 하고 신임하여 張涉은 儒學으로 들어와 모시고 薛邕은 文雅로 조정에 등용되었는데, 뒤이어 뇌물을 받아 실패하였다. 宦官과 武將들이 이것을 구실삼아 말하기를 “南牙(南衙)의【唐나라는 재상을 나누어 南司라 하였기 때문에 南牙(衙)라 칭하고, 환관을 나누어 北寺라 하였기 때문에 北門이라 칭하였다.】 文臣들은 뇌물을 받은 것이 걸핏하면 巨萬에 이르되 도리어 우리들더러 천하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힌다고 하니, 어찌 임금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上의 마음이 비로소 의심해서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辛酉]二年

[辛酉]二年이라

正月에 成德【恒冀가 成德軍이라 】節度使李寶臣이 薨하다 初에 寶臣이 與淄靑李正己와 魏博田承嗣로 相結하야 期以土地傳之子孫이라 故로 承嗣之死에 寶臣이 力爲之請於朝하야 使以節授田悅한대 代宗이 從之러니 至是하야 이 屢爲寶臣子惟岳하야 請繼襲이어늘 上이 欲革前弊하야 不許하다 이 乃與李正己로 各遣使詣惟岳하야 謀勒兵【勒은 猶戒嚴也라 】拒命하니 河南士民이 騷然驚駭러라

建中 2년(신유 781)

정월에 成德軍[頭註] 成德恒冀鎭이 成德軍이다.節度使李寶臣이 죽었다. 처음에 李寶臣은 淄靑節度使李正己, 魏博節度使田承嗣와 서로 결탁하여 土地를 자손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田承嗣가 죽었을 때에 李寶臣田承嗣를 위해 강력히 조정에 청해서 節鉞을 田悅에게 주게 하였는데, 代宗이 그의 청원을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田悅李寶臣의 아들惟岳을 위하여 李寶臣의 뒤를 이어 세습시킬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上이 예전의 폐습을 개혁하고자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田悅이 마침내 李正己와 함께 각각 李惟岳에게 사자를 보내어 군대를 계엄해서【勒은 계엄과 같다.】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것을 모의하니, 河南 지방의 士民들이 소요하여 놀랐다.

○ 御史中丞盧杞之子懷愼子也니 謹重寡欲이라 留臺東都라가 被執하여 將殺之할새 卽數祿山罪하고 西向再拜하며 罵賊不絶口하니 逆黨變色하니라 】也라 貌醜하고 色如藍호되 有口辯하니 上이 悅之하야 擢爲京畿觀察使하다 郭子儀每見賓客에 姬妾不離側이러니 嘗往問疾할새 子儀悉屛侍妾하고 獨隱几【隱은 憑也라 】待之라 或이 問其故한대 子儀貌陋而心險하니 婦人輩見之必笑하리니 他日에 得志면 吾族이 無類矣리라 楊炎이 旣殺劉晏에 朝野側目이어늘 上이 惡之하야 遷中書侍郞하고 擢盧杞爲門下侍郞하야 竝同平章事하고 不專任矣러라 陰狡【狡는 猾也라 】하야 欲起勢立威하야 小不附者는 必欲寘(置)之死地하고 引太常博士裴延齡【性苛刻하야 專剝下附上하고 譎怪辯給이라 帝知其詐로되 但以不隱하야 欲聞外事라 故斷用不疑하니 恃得君하고 少所降下하야 嫚罵近臣하니 人皆仄目이라 及卒에 人語以相安호되 惟帝悼不已하니라 】하야 爲集賢直學士하야 親任之하니라

御史中丞盧杞盧弈의 아들이다.盧弈盧懷愼의 아들이니, 근후하고 욕심이 적었다. 東都에서 留臺(留守)로 있다가 붙잡혀 살해될 적에 곧 安祿山의 죄를 열거하고 서쪽을 향하여 재배하였으며 적을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니, 역당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모습이 추악하고 낯빛이 쪽빛과 같았으나 口辯이 있으니, 上이 그를 좋아해서 京畿觀察使로 발탁하였다. 郭子儀가 빈객들을 만나볼 때마다 姬妾들이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盧杞가 일찍이 郭子儀를 찾아가서 문병할 적에 郭子儀가 侍妾들을 다 물리치고 홀로 안석에 기대어【隱은 기댐이다.】 그를 접대하였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郭子儀가 말하기를 “盧杞는 모습이 추악하고 마음이 음험하니, 부인들이 그를 보면 반드시 웃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훗날 盧杞가 뜻을 얻을 경우 우리 집안은 살아남는 무리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楊炎劉晏을 죽인 뒤에 朝野가 곁눈질하면서 똑바로 보지 못하니, 上이 楊炎을 미워하여中書侍郞으로 옮기고盧杞를 門下侍郞으로 발탁하여 함께 同平章事가 되게 하고楊炎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盧杞는 음흉하고 교활하여【狡는 교활함이다.】 세력을 일으켜 위엄을 세우고자 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死地에 두고자 하였고, 太常博士인 裴延齡【裴延齡은 성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오로지 아랫사람에게 깎아내어 윗사람에게 붙이며 허탄하고 기이하며 말을 잘하였다. 황제가 그의 속임수를 알았으나 다만 숨기지 아니하여 바깥일을 듣고자 하였기 때문에 결단하여 등용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裴延齡은 군주의 신임을 얻은 것을 믿고는 자기 몸을 낮추는 경우가 드물어서 근신들을 업신여기고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서로 편안하다고 말하였으나 오직 황제만은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끌어들여 集賢殿直學士로 삼아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다.

○ 六月에 汾陽忠武王郭子儀薨하다 子儀爲上將擁兵하니 程元振, 魚朝恩이 讒謗百端이로되 詔書一紙徵之하면 無不卽日就道라 由是로 讒謗不行이러라 嘗遣使至田承嗣所러니 承嗣西望拜之하고 曰 此膝不屈於人이 若干年矣라하고 李靈曜據汴州作亂하야 公私物過汴者를 皆留之호되 惟子儀物은 不敢近하고 遣兵衛送出境이러라 校中書令考凡二十四【肅宗乾元戊戌年에 始爲中書令하고 至德宗建中辛酉年하여 薨하니 通二十四年이라 】에 月入俸錢이 二萬緡이로되 私産은 不在焉하고 府庫珍貨山積하다 家人三千人이요 八子【曜晞旰𣇕晤曖曙映이라 】七婿 皆爲朝廷顯官하고 諸孫數十人이 每問安에 不能盡辨하고 頷之而已【頷은 五感反이니 首肯也라 [釋義] 左傳襄二十六年에 衛侯復歸할새 逆於門者頷之而已라한대 註에 頷은 搖其頭也하니라 [頭註] 頷은 點頭而應之라 】러라 僕固懷恩【鐵勒部人이라 初에 祿山叛에 從郭子儀하야 討賊雲中하고 代宗時에 拜太保兼中書令, 太寧郡王이러니 德宗二年에 病死靈武하니라 】, 李懷光【渤海靺鞨人이라 父茹以功賜姓李하고 爲朔方節度使하다 德宗時에 懷光이 率兵敗朱泚하야 加副元帥러니 爲盧杞阻隔하야 陰連朱泚어늘 帝遣渾瑊討之한대 爲朔方副將所斬하고 傳首以獻하니라】, 渾瑊【本鐵勒九姓之渾部也라 從子儀하야 與慶緖戰하야 功多하야 拜太常卿하고 德宗時에 平朱泚하고 論功拜兼侍中하고 封咸寧郡이러니 卒諡忠武하니라 】輩 皆出麾下하야 雖貴爲王公이나 常頤指役使하야 趨走於前하고 家人亦以僕隷視之하니 天下以其身爲安危者 殆三十年이라 功盖天下而主不疑하고 位極人臣而衆不疾하고 窮奢極欲而人不非之하니라 年八十五而終하니 其將佐至大官爲名臣者 甚衆하니라

6월에 汾陽忠武王郭子儀가 별세하였다. 郭子儀가 上將이 되어 병력을 보유하니, 程元振魚朝恩이 백방으로 참소하고 비방하였으나 한 장의 詔書로 부르면 당일로 길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참소와 비방이 행해지지 못하였다.

郭子儀가 일찍이 田承嗣가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었는데, 田承嗣가 서쪽을 바라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이 무릎을 남에게 꿇지 않은 지가 약간 년이 되었다.” 하였으며, 李靈曜가 汴州를 점거하고 난을 일으키고서 汴州를 통과하는 것은 공사간의 물건을 막론하고 모두 억류하였으나 오직 郭子儀의 물건만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고 군사들을 보내 호위하여 경내를 나가게 하였다. 中書令을 맡은 것이 모두 24년인데,【郭子儀가 肅宗 乾元 무술년(758)에 처음 中書令이 되고 德宗 建中 신유년(781)에 이르러 죽으니, 통틀어 24년이다.】 매월 봉급으로 들어오는 돈이 2만 緡이었으나 사사로운 재산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府庫의 진귀한 재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집안 식구가 3천 명이었고, 여덟 명의 아들과郭子儀의 여덟 아들은 郭曜, 郭晞, 郭旰, 郭𢌝, 郭晤, 郭曖, 郭曙, 郭映이다.】 일곱 명의 사위가 모두 조정의 현달한 관원이 되었으며, 몇십 명의 손자들이 문안할 때마다 다 구별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原註] 頷은 五感反(함)이니, 머리를 끄덕여 응하는 것이다. [釋義] ≪春秋左傳≫ 襄公 26년조에 “衛侯가 다시 돌아올 적에 문에서 맞이하는 자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하였는데, 註에 “頷은 머리를 아래위로 흔드는 것이다.” 하였다. [頭註] 頷은 머리를 끄덕거려 응대하는 것이다.】

僕固懷恩,僕固懷恩은 鐵勒部 사람이다. 처음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郭子儀를 따라 雲中에서 적을 토벌하였고, 代宗 때에 太保 兼 中書令에 제수되고 太寧郡王에 봉해졌는데, 德宗 2년에 靈武에서 병으로 죽었다.】李懷光,李懷光은 渤海靺鞨 사람이다. 아버지 가 功으로 李氏姓을 하사받고 朔方節度使가 되었다. 德宗 때에 李懷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朱泚를 패퇴시켜부원수에 임명되었는데, 盧杞에게 저지당하자 은밀히 朱泚와 연합하였다. 황제가 渾瑊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朔方副將에게 참수당하고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바쳤다.】渾瑊渾瑊은 본래 鐵勒九姓의 渾部이다. 郭子儀를 따라 安慶緖와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太常卿에 제수되었으며, 德宗 때에 朱泚를 평정하고는 공을 논하여 兼侍中에 제수되고 咸寧郡王에 봉해졌는데, 죽자 忠武라고 시호하였다.】 등이 모두 郭子儀의 휘하에서 나와 비록 王公의 귀함에 이르렀으나 郭子儀가 항상 턱으로 부리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면 급히 앞으로 달려 나왔고, 郭子儀의 집안 사람들 역시 그들을 노비로 여기니, 천하의 安危가 그의 한 몸에 달려 있은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功이 천하를 덮을 정도로 큰데도 군주가 의심하지 않고,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에 도달했는데도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고, 사치와 욕망을 극도로 누렸는데도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았다. 나이 85세에 죽었다. 그의 장수와 보좌로서 大官에 이르고 名臣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贊曰 天寶之末에 盜發幽陵【盜는 謂安祿山이라 】하야 外阻內訌【訌은 亂也라 】이러니 子儀自朔方으로 提孤軍하고 轉戰逐北하야 誓不還顧라 當是時하야 天子西走하야 唐祚若綴旒【旒는 旗之垂者니 旗之縿이 爲旒所綴者也라】러니 而能輔太子하야 再造王室하고 及大難略平에 遭讒惎【惎는 音忌이니 毒也라 】하야 詭奪兵柄이나 然朝聞命이면 夕引道하야 無纖芥自嫌이라 及被圍涇陽에 單騎見虜하야 壓以至誠하야 猜忍沮謀【猜忍은 謂回紇也라 】하니 雖唐命方永이나 亦由忠貫日月하야 神明扶持者哉인저 及光弼等은 畏偪不終光弼子儀齊名하야 世稱, 이러니 卒爲魚朝恩, 程元振所忌하야 日謀有以中傷之하니 光弼恐이라 會에 吐蕃寇京師어늘 代宗이 詔入援한대 光弼이 畏禍(還)[遷]延하니 見上卷甲辰年하니라 】이로되 而子儀完名高節하야 爛然【爛은 明也라 】獨著하야 福祿永終하니 雖齊桓晉文이라도 比之爲褊【褊은 陜陋也라 】이라 唐史臣裴(洎)[垍]가 稱權傾天下而朝不忌하고 功蓋一世而上不疑하고 侈窮人欲而議者不之貶이라하니 嗚呼라 (洎)[垍]誠知言이라 其子孫이 多以功名顯하니 蓋盛德後云이라

[新增]胡氏曰 功蓋天下而上不疑하고 位極人臣而衆不疾은 此漢唐以來將相所難者어늘 子儀以何道而能然고 惟仗忠信하고 安義命而已矣라 史又稱其窮奢極欲하니 愚切(竊)恐其言之過矣라 窮奢極欲은 小人處富貴者之所爲也니 曾謂子儀之賢而有是哉아

《新唐書》〈郭子儀列傳〉贊에 말하였다.

“天寶 말년에 도둑이 幽陵에서 일어나【도둑은 安祿山을 이른다.】 밖에서 막고 안으로 어지러웠는데,【訌은 어지러움이다.】郭子儀가 朔方에서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전전하면서 싸워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고 맹세코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서쪽으로 도망하여 唐나라 국운이 깃술[綴旒]처럼 위태로웠는데,【旒는 旗의 술이 아래로 늘어져 있는 것이니, 旗의 기폭이 기의 술에 매여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郭子儀가 태자를 보필하여 다시 왕실을 재건하였고, 큰 난리가 대략 평정되자 참소와 시기를 당하여【惎는 음이 기이니,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속임수로 兵權을 빼앗겼으나 아침에 명령을 들으면 저녁에 길을 떠나서 털끝만큼도 스스로 혐의함이 없었다. 涇陽에서 포위당하자 單騎로 오랑캐를 만나 至誠으로 진압하여 시기심 많고 잔인한 回紇의 계책을 막았으니,【시기심 많고 잔인한 것은 回紇을 이른다.】 비록 唐나라의 국운이 장구하였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의 충성심이 해와 달을 꿰뚫어 神明이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李光弼 등은 핍박함을 두려워하여 잘 끝마치지 못하였으나【李光弼은 郭子儀와 명성이 똑같아서 세상에서는 李‧郭이라고 일컬었는데, 끝내 魚朝恩과 程元振에게 시기를 당하여 이들이 날마다 李光弼을 중상모략할 것을 모의하니, 李光弼이 이들을 두려워하였다. 마침 吐蕃이 京師를 침략하자 代宗이 그에게 조칙을 내려 구원하게 하였는데, 李光弼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머뭇거렸다. 이 내용은 上卷 甲辰年條에 보인다.】郭子儀는 명예를 온전히 보전하고 절개를 드높여 찬란하게【爛은 밝음이다.】 홀로 드러나서 복록을 누려 길이 잘 마쳤으니, 비록 齊나라 桓公과 晉나라 文公에게 견준다 해도 부족하다.【褊은 누추하고 좁음이다.】唐나라 史臣 裴垍(기)가 그를 칭찬하여 ‘권세가 천하를 휩쓸었으나 조정에서 시기하지 않았고, 功이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컸으나 임금이 의심하지 않았고, 사치함이 사람의 욕망을 다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폄하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아! 裴垍는 진실로 진리를 알았다. 그 자손들이 功名으로 현달한 자가 많았으니, 이는 盛德을 쌓은 뒤이기 때문이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郭子儀는 功이 천하를 뒤덮을 정도로 큰데도 임금이 의심하지 않고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에 도달하였는데도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漢‧唐 이래로 장수와 재상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郭子儀가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하였는가. 이는 오직 忠信에 의거하고 의리와 천명을 편안히 여겼기 때문일 뿐이다. 史臣이 또 ‘그가 사치함과 욕망을 지극히 하였다.’고 칭하였으니, 내 생각에는 이 말이 지나친 듯하다. 사치함과 욕망을 지극히 하는 것은 소인으로서 부귀에 처한 자가 하는 짓이니, 郭子儀와 같이 어진 사람이면서 이런 일이 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七月에 詔馬燧【河東節度使라 】하야 將步騎二萬하야 與李抱眞【昭義節度使라 】으로 討田悅하고 又遣李晟【神策都將이라 】하야 將神策兵【天子禁軍이라 】하야 與之俱하다

7월에 馬燧에게 명하여馬燧는 河東軍節度使이다.】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李抱眞과 함께李抱眞은 昭義軍節度使이다.】田悅을 토벌하게 하고, 또 李晟을 보내어李晟은 神策軍 都將이다.】神策軍을 거느리고【神策兵은 천자의 禁軍이다.】 그와 함께 田悅을 공격하게 하였다.

○ 盧杞譖楊炎하야 十月에 貶崖州司馬하고 遣中使護送이러니 未至崖州하야 縊殺之하다

盧杞楊炎을 참소하여10월에 崖州司馬로 좌천시키고中使를 보내어 호송하였는데, 崖州에 이르기 전에 그를 목졸라죽였다.

[壬戌]三年

[壬戌]三年이라

馬燧等諸軍이 直趨魏州하니 田悅이 率軍四萬하고 踰橋【燧與悅夾洹水而軍이러니 燧爲三橋하야 踰洹水하야 日往挑戰하니라 】掩其後어늘 燧結陣하고 縱銳兵擊之하니 軍이 大敗라 이 收餘兵千餘人하야 走魏州하다 李抱眞不協하야 頓兵平邑浮圖【佛寺也니 在魏州南하니라 浮圖는 見二十九卷하니라】하고 遷延不進이러니 이 入城旬餘日에 等諸軍이 始至城下하야 攻之不克하다

建中 3년(임술 782)

馬燧 등 諸軍이 곧바로 魏州로 달려가니, 田悅이 군대 4만 명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너와馬燧田悅과 洹水를 끼고 주둔하였는데, 馬燧가 세 개의 교량을 만들어 洹水를 건너가 날마다 가서 도전하였다.】 그 후미를 엄습하였다. 馬燧가 진을 치고 정예병을 풀어 공격하니, 田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田悅은 남은 군사 천여 명을 수습하여 魏州로 달아났다. 馬燧李抱眞과 화합하지 못하여 平邑의 사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浮圖는 불교의 사찰이니, 魏州 남쪽에 있다. 浮圖는 29권에 보인다.】 지체하여 전진하지 않았다. 田悅이 성에 들어간 지 10여 일이 지나서야 馬燧 등 諸軍이 비로소 성 아래에 이르러 공격하였으나이기지 못하였다.

○ 三月에 上이 遣中使하야 發盧龍, 恒冀, 易定【盧龍은 朱滔요 恒冀는 王武俊이요 易定은 張孝忠이니 本奚乞失活種이라 】兵萬人하야 詣魏州하야 討田悅이러니 王武俊은 不受詔하고 朱滔亦擧兵而南하야 以救魏州하다

3월에 上이 中使를 보내어 盧龍‧恒冀‧易定【[頭註] 盧龍, 恒冀, 易定:盧龍鎭은 朱滔이고, 恒冀鎭(成德軍)은 王武俊이고, 易定鎭(義武軍)은 張孝忠이니, 본래 奚族의 乞失活 종족이다.】 三鎭의 병력 만 명을 징발하여 魏州에 나아가 田悅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王武俊은 詔命을 받지 않았고朱滔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와서 魏州(田悅)를 구원하였다.

○ 時에 兩河【河南北이니 河南은 淄靑李正己요 河北은 魏博田悅, 盧龍朱滔, 成德王武俊, 鎭冀李惟岳也라 共謀拒命하니 見上辛酉年하니라 [通鑑要解] 兩河는 河南北也라 】用兵에 月費百餘萬緡하니 府庫不支數月이라 太常博士韋都賓, 陳京【陳宣帝子叔明之五世孫也라 】이 建議하야 以爲貨利所聚는 皆在富商하니 請括富商錢【括은 檢也라 】하야 出萬緡者는 借其餘하야 以供軍하소서 計天下컨대 不過借一二千商이면 則數年之用이 足矣리이다 上이 從之하야 詔借商人錢할새 令度支杜佑로 大索長安中商賈所有貨호되 意其不實이면 輒加榜棰하니 人不勝苦하야 有縊死者라 長安囂然하야 如被寇盜러라 計所得하니 纔八十餘萬緡이라 又括僦櫃質錢【僦는 卽就反이니 賃也요 質은 物相贅也라 [通鑑要解] 僦는 賃借也라 民間에 以物質錢이라가 異時贖出하되 於母錢之外에 復還子錢하니 謂之僦櫃라 質은 贅以物質錢也니 質은 之日切이라 又音致니 信也라 】하야 凡蓄積錢帛粟麥者를 皆借四分之一하고 封其櫃窖하니 百姓이 爲之罷市라 計幷借商所得하니 纔二百萬緡이로되 人已竭矣러라

이때에 兩河 지방에서【[附註] 兩河는 河南과 河北이니, 河南은 淄靑軍의 李正己이고, 河北은 魏博軍의 田悅, 盧龍軍의 朱滔, 成德軍의 王武俊, 鎭冀軍의 李惟岳이다. 이들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으니, 앞의 辛酉年(781)에 보인다. [通鑑要解] 兩河는 河南과 河北이다.】 군대를 운용함에 매월 백여 만 緡을 허비하니, 국가의 府庫가 고갈되어서 지급하지 못한 지가 몇 달이었다. 太常博士韋都賓陳京陳宣帝의 아들인 叔明의 5세손이다.】 건의하여 이르기를 “재화의 이익은 모두 부유한 장사꾼에게 모여 있으니, 청컨대 부유한 상인들의 재화를 조사하여【括은 조사하는 것이다.】 만 緡을 넘는 자는 그 남는 것을 빌려서 군대에 공급하도록 하소서. 천하를 계산해보건대 불과 1, 2천 명의 상인에게 빌리면 수년의 비용이 충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그 말을 따라 조칙을 내려 상인들의 돈을 빌릴 적에 度支의 일을 맡은 杜佑로 하여금 長安에 있는 장사꾼들이 소유한 재화를 대대적으로 조사하게 하되 보고한 숫자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번번이 곤장을 치니,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목을 매달아 죽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長安이 시끄러워 도둑의 폐해를 입은 것과 같았다. 또 얻은 재화를 계산해보니, 겨우 80여만 緡이었다.

또 僦櫃의 質錢(전당잡힌 돈)을 조사하여【[釋義] 僦는 卽就反(취)이니 빌리는 것이요, 質은 물건을 서로 저당잡히는 것이다. [通鑑要解] 僦는 빌리는 것이다. 民間에서 물건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렸다가 후일에 갚되 本錢 이외에 다시 이자를 상환하니, 이를 일러 僦櫃라고 한다. 質은 물건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리는 것이니, 質은 之日切(질)이다. 또 다른 음은 지이니 진실함이다.】 무릇 돈과 비단과 곡식과 보리를 저축한 자들에게는 모두 저축한 숫자의 4분의 1을 빌리고 僦櫃와 質錢와 窖(지하창고)를 봉함하니, 백성들이 이 때문에 시장을 파하였다. 상인들에게서 빌린 것을 계산해보니, 겨우 2백여 만 緡이었으나 백성들은 이미 재정이 고갈되었다.

朱滔, 王武俊軍이 至魏州하니 是日에 李懷光軍亦至라 馬燧等이 盛軍容迎之하니 以爲襲己라하야 遽出陳이러니 懷光이 勇而無謀하야 遂擊滔於愜山之西라가 官軍大敗라 退保魏縣하야 以拒하다

朱滔王武俊의 군대가 魏州에 이르니, 이날李懷光의 군대 역시 도착하였다. 馬燧 등이 軍容을 성대히 하여 이들을 맞이하니 朱滔는 자신들을 기습하는 것이라고 여기고는 급히 나와서 진을 쳤는데, 李懷光은 용감하기만 하고 智謀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朱滔를 愜山 서쪽에서 공격하다가官軍이 대패하였다. 이에 후퇴하여魏縣을 지키면서朱滔를 막았다.

○ 上이 初卽位에 崔祐甫爲相하야 務崇寬大라 故로 當時政聲藹然하야 以爲有貞觀之風이라하더니 及盧杞爲相에 知上性多忌하고 因以疑似로 離間群臣하고 始勸上以嚴刻御下하니 中外失望하니라

上이 처음 즉위했을 때에 崔祐甫가 재상이 되어 힘써 관대함을 숭상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이 크게 나서 貞觀之治의 유풍이 있다고 여겼는데, 盧杞가 재상이 되자 上의 성품이 시기가 많음을 알고는 인하여 의심스럽고 유사한 일로써 群臣들을 이간질하였으며, 처음으로 上에게 엄하고 각박한 방법으로 아랫사람들을 어거할 것을 권하니, 中外가 실망하였다.

○ 十一月에 田悅이 德朱滔之救하야 與王武俊議하야 奉爲王하고 稱臣事之한대 不可【幽州判官李子千等이 共議하야 以爲如此면 則常爲叛臣하야 用兵無名이라 使將吏無所依歸하니 請與鄆州爲四國하야 俱稱王이라한대 滔等이 皆以爲然하야 於是에 各稱王하니라 鄆州는 淄靑所領이라 】라 於是에 自稱冀王하고 田悅魏王하고 王武俊趙王하고 李納齊王하다

11월에 田悅朱滔가 구원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王武俊과 의논하여 朱滔를 받들어 왕으로 삼고 자신은 臣을 칭하여 그를 섬겼는데, 朱滔가 허락하지 않았다.【幽州判官李子千 등이 함께 의논하여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면 항상 반역한 신하가 되어서 군대를 출동할 적에 명분이 없다. 장수와 관리들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하니, 鄆州와 함께 네 나라가 되어서 함께 왕을 칭하기를 청한다.” 하니, 朱滔 등이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이에 각각 왕을 칭하였다. 鄆州는 淄靑의 李正己가 관할하는 곳이다.】 이에 朱滔는 스스로 冀王을 칭하고, 田悅魏王을 칭하고, 王武俊趙王을 칭하고,李納齊王을 칭하였다.

○ 十二月에 李希烈이 亦自稱天下都元帥하다

12월에 李希烈도 스스로 天下都元帥라 칭하였다.

[癸亥]四年

[癸亥]四年이라

初行稅間架와 除陌錢【除는 留也요 陌者는 借百字用之라 其實은 只是百字니 如什與伍爾니라 】法하다 舊制에 諸道軍出境이면 則仰給度支【給은 供給也니 下之給同이라 度支는 戶部屬官이니 掌天下租賦物産하야 歲計所出而支調之하니라 】러니 上이 優恤士卒하야 每出境에 加給酒肉하고 本道粮을 仍給其家호되 一人에 兼三人之給이라 故로 將士利之하야 各出軍에 纔踰境而止라도 月費錢百三十餘萬緡하야 常賦不能供이라 判度支趙贊이 乃奏行二法하니 所謂稅間架者는 每屋에 兩架爲間하야 上屋은 稅錢二千하고 中은 稅千하고 下는 稅五百이라 吏執筆하고 入人室廬하야 計其數할새 或有宅屋多而無他資者도 出錢이 動數百緡이요 敢匿一間이면 杖六十하고 賞告者는 錢五十緡이러라 所謂除陌錢者는 公私給與及買賣에 每緡에 官留五十錢하고 給他物及相貿易【貿는 莫侯反이니 易財也라 】者는 約錢爲率하고 敢隱錢百이면 杖六十과 罰錢二千이요 賞告者는 錢十緡호되 其賞錢이 皆出坐事之家라 愁怨之聲이 盈於遠近하니라

[史略 史評]范氏德宗이 有平一海內之志로되 而求欲速之功하야 不務養民而先用武하니 民愁兵怨하야 激而成亂이라 自古로 不固邦本而攻戰不息者는 必有意外之患하니 此後王之深戒也니라

建中 4년(계해 783)

처음으로 間架稅와 除陌錢[頭註] 稅間架 除陌錢稅間架 除陌錢:除는 남겨두는 것이고, 陌은 百字를 빌려 쓴 것이다. 陌은 실은 百字이니 什, 伍와 같을 뿐이다.法을 시행하였다. 옛 제도에 여러 도의 군대가 경내를 나가면 비용을 度支에게 우러러 공급받았는데,【給은 공급받는 것이니, 아래의 ‘加給酒肉’의 給字도 같다. 度支는 戶部에 속한 관청이니, 천하의 조세와 물산을 관장하여 해마다 세금이 나오는 것을 헤아려 알맞게 처리한다.】上은 사졸들을 넉넉히 구휼하여 경내를 나갈 때마다 술과 고기를 더 지급하고 본도의 양식을 그의 집에 지급하되 한 사람에게 세 사람분의 양식을 겸하여 지급하였다. 그러므로 장병들이 이것을 이롭게 여겨 각각 출병할 때에 경내를 나가자마자 중지해도 매월 돈 130여만 緡을 허비하여 정상적인 세금으로는 공급할 수가 없었다.

判度支趙贊이 마침내 위의 두 가지 법을 아뢰어 시행하니, 이른바 間架稅라는 것은 매 집마다 두 架(보)를 한 칸으로 쳐서 최상의 집은 2,000전을, 중간의 집은 1,000전을, 하등의 집은 500전을 세금으로 내었다. 아전이 붓을 잡고 백성들의 집에 들어가 숫자를 계산할 적에 혹 집의 칸수는 많지만 다른 資産이 없는 자도 번번이 수백 緡을 간가세로 내었으며, 감히 한 칸을 숨기는 자가 있으면 곤장이 60대였고 고발하는 자에게는 돈 50緡을 상으로 주었다. 소위 除陌錢이라는 것은 公私間에 지급하는 재물과 물건을 매매할 적에 매 1緡마다 관청에서 50전을 징수하였고, 다른 물건을 주거나 서로 물건을 가지고 무역하는【貿는 莫侯反(무)이니 재물을 교역하는 것이다.】 자들은 돈으로 계산하여 비율로 삼아 세금을 내었으며, 감히 100전을 숨기는 자가 있으면 곤장 60대와 벌금 2천 전을 내었고, 고발하는 자에게는 돈 10緡을 상으로 주되 상으로 주는 돈은 모두 규정을 위반한 집에서 나왔다. 이에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원근에 가득하였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德宗은 海內를 평정하여 통일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속히 달성하고자 하는 功을 구하여 백성을 기르기를 힘쓰지 않고 먼저 武力을 사용하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병사들이 원망하여 격해져서 난을 이루었다. 예로부터 나라의 근본(백성)을 견고하게 하지 않고 공격과 전투를 그치지 않은 자는 반드시 뜻밖의 환난이 있었으니, 이는 後王들이 깊이 경계해야 할 바이다.”

○ 初에 上이 在東宮할새 聞監察御史陸贄名이러니 及卽位에 召爲翰林學士하고 數問以得失하니 時에 兩河用兵이 久不決하야 賦役日滋라 以兵窮民困하야 恐別生內變이라하야 乃上奏하니 其略曰 克敵之要는 在乎將得其人이요 馭將之方은 在乎操得其柄이니 將非其人者는 兵雖衆이나 不足恃요 操失其柄者는 將雖材나 不爲用이라하고 又曰 將不能使兵하고 國不能馭將이면 非止費財翫寇之弊라 亦有不戢自焚之災【戢은 仄立反이니 藏兵也라 [頭註] 左傳에 兵은 猶火也니 不戢이면 將自焚이라하니라 】라하고 又曰 無紓目前之虞【紓는 舒也라 】면 或興意外之患이니 人者는 邦之本也요 財者는 人之心也라 其心傷則其本傷하고 其本傷則枝榦顚瘁矣라하고 又論關中形勢하야 以爲王者蓄威以昭德이니 偏廢則危요 居重以馭輕이니 倒持則悖니 王畿者는 四方之本也라 太宗이 列置府兵하야 分隷禁衛하시니 大凡諸府八百餘所에 而在關中者 殆五百焉이라 擧天下라도 不敵關中之半하니 則居重馭輕之意明矣라 承平漸久하야 武備浸微하니 雖府衛具存이나 而卒乘罕習이라 故로 祿山이 竊倒持之柄하고 乘外重之資하야 一擧滔天에 兩京不守하니 是는 皆失居重馭輕之權하고 忘深根固柢【柢는 根也라 】之慮니 陛下追想及此하시면 豈不爲之寒心哉잇가 今朔方, 太原之衆【李懷光은 以朔方軍馬하고 燧는 以太原軍으로 討田悅하니라 】이 遠在山東하고 神策六軍【皆屯苑中이러니 時悉在行營이라 [通鑑要解] 左右羽林, 左右龍武, 左右神策을 爲六軍이라 】之兵이 繼出關外【時에 李晟, 哥舒曜, 劉德信等이 皆以禁兵으로 出關討賊하니라 】하야 關輔之間【漢關中之三輔也라 曰京兆尹이요 曰左馮翊이요 曰右扶風이니 唐改爲關內道也하니라 】에 徵發已甚하고 宮苑之內에 備衛不全하니 萬一將帥之中에 有如朱滔, 希烈하야 或負固邊壘하야 誘致豺狼하고 或竊發郊畿하야 驚犯城闕이면 未審陛下復何以備之시리잇고 陛下儻過聽愚計신댄 所遣神策六軍李晟等及節將子弟【卽白志貞所奏遣東征者라 本傳에 作將家子占而東者라 節은 卽節度使也라 】를 悉可追還하고 明敕涇, 隴, 邠, 寧하사 但令嚴備封守하소서 仍云更不徵發이라하사 使知各保安居하시고 又降德音하사 罷京師及畿縣間架等雜稅하시면 則冀已輸者弭怨【彌는 綿婢反이니 止也라】하고 見處者獲寧하야 人心不搖하야 邦本自固하리이다 上이 不能用하다

처음에 上이 東宮에 있을 적에 監察御史陸贄의 명성을 들었는데, 즉위한 뒤에 그를 불러 翰林學士로 임명하고 정사의 득실을 자주 물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兩河에 군대를 출동시켜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아서 부역이 날로 늘어났다.

陸贄는 군사들이 피로하고 백성들이 곤궁하여 별도로 내란이 생길까 두렵다 하여 마침내 上奏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적을 이기는 요점은 장수를 선발함에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고, 장수를 어거하는 방법은 권력을 잡음에 칼자루를 얻는데 달려 있으니,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면 군사가 비록 많더라도 믿을 수가 없고, 권력을 잡음에 칼자루를 잃으면 장수가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쓰이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수가 병사들을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국가에서 장수들을 제대로 어거하지 못하면 다만 재물을 허비하고 반역한 자들을 방치하는 폐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단속하지 않으면 자신을 불태우게 된다.” 하였다.【[釋義] 戢은 仄立反(집)이니, 병기를 감추는 것이다. [頭註] ≪春秋左傳≫ 隱公 4년조에 “군사는 불과 같으니,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을 불태우게 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목전의 근심을 늦추지 않으면【紓는 느슨하게 늦추는 것이다.】 혹 의외의 환난이 일어날 수 있으니, 백성은 나라의 뿌리이고 재물은 백성의 심장입니다. 심장이 상하면 그 뿌리가 상하고, 뿌리가 상하면 가지와 줄기가 쓰러지고 병이 듭니다.” 하였다.

또 關中 지방의 형세를 논하여 아뢰기를 “王者는 위엄을 쌓아 덕을 밝혀야 하니 덕과 위엄 중에 한 가지라도 폐하면 위태롭고, 중한 위치에 있으면서 가벼운 것을 어거해야 하니 거꾸로 잡으면 어그러집니다. 王畿는 사방의 근본입니다. 太宗이 府兵을 설치하여 禁衛에 나누어 예속시키셨으니, 대략 800여 곳의 軍府가 있는데 그중에 關中에 있는 것이 거의 500곳이었습니다. 천하의 軍府를 모두 동원한다 해도 關中에 있는 兵力의 반을 대적하지 못하였으니, 중한 위치에 있으면서 가벼운 것을 어거한 뜻이 분명합니다.

태평한 지가 점점 오래되어 조정의 武備가 차츰 미약해지니, 비록 軍府와 戍衛가 모두 남아 있으나 보병과 전차병이 騎馬 훈련을 익히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安祿山이 거꾸로 잡은 칼자루를 훔쳐서 쥐고 外地의 강대한 밑천을 이용하여 일거에 하늘을 찌를 듯이 쳐들어오자 長安과 洛陽 두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중한 위치에 있으면서 가벼운 것을 어거하는 권세를 잃고, 뿌리를 깊게 하고 바탕을 견고하게 하는 생각을【柢는 뿌리이다.】 잊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만약 이러한 점을 추념하신다면 어찌 한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朔方과 太原의 군사들이【李懷光은 朔方의 軍馬를, 馬燧는 太原의 군사를 거느리고 田悅을 토벌하였다.】 멀리 山東에 나가 있고, 神策六軍의 군사들이【[頭註] 六軍은 모두 禁苑(대궐) 안에 주둔하는데, 이 당시에는 모두 行營에 있었다. [通鑑要解] 左‧右羽林, 左‧右龍武, 左‧右神策을 六軍이라 한다.】 계속하여 關外에 나가서,【[頭註] 神策六軍之兵 繼出關外:이때 李晟, 哥舒曜, 劉德信 등이 모두 禁軍을 데리고 관외로 나가 적을 토벌하였다.】 關輔의 사이에【關輔는 漢나라 關中의 三輔이다. 京兆尹과 左馮翊과 右扶風이니, 唐나라는 이를 고쳐 關內道라 하였다.】 징발이 이미 심하고 宮苑의 안에 수비와 호위가 온전하지 못하니, 만일 장수 중에 朱滔李希烈과 같은 자가 있어 혹 변방 보루에서 지형의 험함을 믿고 저 豺狼과 같은 오랑캐들을 데려오고, 혹 郊畿에서 몰래 일어나 도성과 대궐을 놀라게 하고 침범한다면 폐하께서는 다시 무엇으로써 수비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혹시라도 신의 어리석은 계책을 들으신다면 이미 파견한 神策六軍의 李晟 등 및 절도사와 장수의 자제들을【절도사와 장수의 자제들은 바로 白志貞이 주청하여 동쪽을 정벌하러 보낸 자들이다. ≪新唐書≫ 〈陸贄傳〉에는 ‘將家子占而東者’로 되어 있다. 節은 곧 節度使이다.】 모두 되돌아 오게 하고 涇隴과 邠寧에 분명하게 신칙하여 다만 국경의 수비를 엄하게 대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이어서 ‘다시는 징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살 수 있음을 알게 하시고, 또 德音을 내려서 京師와 畿縣의 間架稅 등 여러 가지 세금을 없앤다면 이미 세금을 바친 자들은 원망을 그치고【彌는 綿婢反(미)이니 그치는 것이다.】 현재 살고 있는 자들은 편안함을 얻어서 인심이 동요되지 아니하여 나라의 근본이 저절로 견고해질 것입니다.” 하였으나 上이 따르지 못하였다.

李希烈이 圍襄城하니 上이 發涇原等諸道兵하야 救之하다 十月에 涇原節度使姚令言이 將兵五千하고 至京師하니 軍士冒雨寒甚이라 多携子弟而來하야 冀得厚賜하야 遺其家러니 旣至에 一無所賜하고 發至滻水에 詔京兆尹翃하야 犒師할새 惟糲食菜餤【犒는 口到反이니 軍餉也요 餤은 杜覽反이니 餠餤也라 麵裹菜爲之라 】이라 衆怒하야 蹴而覆之【蹴은 七六反이니 蹋也라 】하고 因揚言曰 吾輩將死於敵이어늘 而食且不飽하니 安能以微命拒白刃邪아 聞瓊林, 大盈【內庫也니 以中人主之라 至德中에 第五琦 始悉以租賦進入大盈러니 天子以出納爲便이라 故로 不復하니라 】二庫에 金帛盈溢이라하니 不如相與取之라하고 乃擐甲張旗하고 鼓譟【擐은 胡貫反이니 貫也니 春秋傳에 擐甲執兵이라하니라 譟는 先到反이니 群呼也라 】하야 還趣(趨)京師하다

李希烈이 襄城을 포위하니, 上이 涇原 등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10월에 涇原節度使姚令言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京師에 이르니, 軍士들이 비를 무릅쓰고 행군하여 추위가 심하였다. 이들은 자제들을 많이 거느리고 와서 후한 하사를 얻어 집으로 보내줄 것을 기대하였는데, 도착한 뒤에 한 가지도 하사해 준 것이 없고, 출발하여 滻水에 이르자京兆尹王翃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犒饋하였는데 오직 좁쌀밥과 채소로 싼 떡이었다.【犒는 口到反(고)이니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고, 餤은 杜覽反(담)이니 떡이니, 밀가루를 채소로 싸서 만든 것이다.】

여러 군사들이 노하여 음식을 발로 차서 뒤엎고【蹴은 七六反(축)이니 발로 차는 것이다.】 인하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장차 적에게 달려들어 싸우다가 죽을 터인데 먹는 것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어떻게 하찮은 목숨으로 시퍼런 칼날을 막겠는가. 듣자하니 瓊林庫와 大盈庫【大盈庫는 內庫이니 中人(宦官)이 주관하였다. 至德 연간에 第五琦가 처음으로 조세를 모두 大盈庫로 올리게 하였는데, 天子가 출납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전대로 회복시키지 않았다.】 두 창고에는 금과 비단이 가득 차서 넘친다고 하니, 서로 함께 가져가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갑옷을 꿰어 입고 깃발을 펼치고는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擐은 胡貫反(환)이니 꿰어 입는 것이니, ≪春秋左傳≫에 “갑옷을 꿰어 입고 병기를 잡는다.” 하였다. 譟는 先到反(소)이니 여럿이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다시 京師로 달려갔다.

○ 初에 神策軍使白志貞이 掌召募禁兵이러니 東征死亡者를 志貞이 皆隱하야 不以聞하고 但受市井富兒賂而補之하니 名在軍籍하야 受給賜나 而身居市廛하야 爲販鬻이라 至是에 上이 召禁兵以禦賊하니 竟無一人至者라 賊已斬關而入이어늘 上이 乃與王貴妃, 韋淑妃, 太子, 諸王으로 自苑北門出하다

처음에 神策軍使白志貞이 禁兵을 불러 모집하는 일을 관장하였는데, 동쪽을 정벌하다가 사망한 자들을 白志貞이 모두 숨기고보고하지 않았으며, 단지 市井에 사는 부자집 자제들의 뇌물을 받고 그들로 충원하니, 이름은 軍籍에 있어 조정에서 지급하는 것과 賞賜를 받았으나 몸은 시장의 가게에 있으면서 물건을 팔았다. 이때에 이르러 上이 禁兵을 불러 적을 막게 하니, 마침내 한 사람도 온 자가 없었다. 적이 관문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서울로 들어오자, 上이 마침내 王貴妃, 韋淑妃, 太子 및 諸王과 함께 上林苑의 북문으로 탈출하였다.

○ 初에 魚朝恩旣誅에 宦官이 不復典兵이라 有竇文場, 霍仙鳴者 嘗事上於東宮이러니 至是하야 帥宦官左右僅百人以從하다

처음에 魚朝恩이 죽임을 당한 뒤에 宦官이 다시는 군대를 주관하지 않았다. 竇文場霍仙鳴이 일찍이 上이 東宮으로 있었을 때에 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환관과 좌우의 측근 겨우 백 명만을 거느리고 수행하였다.

姚令言이 與亂兵謀曰 今衆無主면 不能久持라 朱太尉閑居私第하니 請相與奉之라한대 衆이 許諾이어늘 乃遣數百騎하야 逆朱泚於晉昌里第【逆은 迎也라 朱泚는 見上本傳하니 朱滔合田悅叛하고 陰遣人하야 與泚相聞이러니 馬燧獲其書한대 帝召泚還京師하니라 】하다 入宮하야 居含元殿하야 設警嚴하고 自稱權知六軍이라하다

姚令言이 난리를 일으킨 병사들과 의논하기를 “지금 군대에 주장이 없으면 오랫동안 버틸 수가 없다. 朱太尉가 자기 집에서 한가로이 거처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를 추대하여 받들자.” 하니, 군사들이 허락하였다. 마침내 수백 명의 기병을 보내어 朱泚를 晉昌里 집에서 맞이해 왔다.【逆은 맞이함이다. 朱泚는 앞의 本傳에 보인다. 朱滔田悅과 함께 배반하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朱泚와 소식을 주고 받았는데, 馬燧가 그 편지를 가로채자 황제가 朱泚를 불러 京師로 돌아오게 하였다.】朱泚는 궁중에 들어와 含元殿에 거처하면서 매우 삼엄하게 경계하고 스스로 權知六軍이라 칭하였다.

○ 上이 至咸陽하야 思桑道茂之言【在上庚申年하니라 】하야 乃幸奉天하니 文武之臣이 稍稍繼至라 己酉에 左金吾大將軍渾瑊이 至奉天하니 이 素有威望이라 衆心이 恃之稍安이러라

上이 咸陽에 이르러서桑道茂의 말을 생각하고桑道茂의 말은 앞의 庚申年(780)에 있다.】 마침내 奉天으로 행차하니, 文武大臣들이 차츰 뒤이어 이르렀다. 己酉日(10월 5일)에 左金吾大將軍渾瑊이 奉天에 이르니, 渾瑊은 평소 위엄과 명망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믿고 조금 편안해졌다.

又以司農卿段秀實【初爲涇原節度使러니 及楊炎專政에 欲浚陵陽渠하야 以興屯田하야 訪以利害한대 秀實이 以爲今邊備尙虛하니 未宜興事以召寇라하니 炎怒하야 以爲沮己라하야 徵爲司農卿하니라 】이 久失兵柄하니 意其必怏怏이라하야 遣騎士하야 劫之以兵【秀實謂其子弟曰 吾當死而殉社稷耳라하고 迺往見泚하니라】한대 秀實이 自度不免하고 乃往見하다 喜曰 段公來하니 吾事濟矣라하고 延坐問計어늘 秀實이 說之하야 使開諭將士하야 示以禍福하고 奉迎乘輿하야 復歸宮闕하라하니 黙然不悅하니라

朱泚는 또 司農卿段秀實【段秀實이 처음에 涇原節度使가 되었는데 楊炎이 정사를 전횡할 때에 陵陽의 도랑을 깊이 파서 屯田을 일으키고자 하여 利害를 물으니, 段秀實이 말하기를 “지금 변방의 수비가 아직도 허술하니, 공사를 일으켜 적을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楊炎이 노하여 자신의 계책을 저지했다 하여 불러들여서 司農卿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병권을 잃었으니, 그가 반드시 마음속으로 怏怏不樂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騎士를 보내어 병기로 위협하였다.段秀實이 그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 마땅히 죽어서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칠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가서 朱泚를 만났다.】段秀實이 스스로 화를 면치 못할 줄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朱泚를 만나보았다. 朱泚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段公이 왔으니, 내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고는 맞이하여 앉히고 계책을 물었다. 段秀實이 설득하기를 “장병들을 잘 타일러 화복을 보여주고 乘輿(황제)를 받들어 맞이해서 다시 還宮하라.” 하니, 朱泚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좋아하지 않았다.

○ 上이 初至奉天하야 詔徵近道兵하야 入援이러니 聞群臣勸奉迎하고 乃詔諸道援兵至者를 皆營於三十里外하다 姜公輔【翰林學士라 】諫曰 今宿衛單寡하니 防慮를 不可以不深이라 若竭忠奉迎이면 何憚於兵多리잇고 如其不然이면 有備라야 無患이니이다 上이 乃悉召援兵하야 入城하다

上이 처음 奉天에 이르자 부근의 도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朱泚에게 ‘大駕를 받들어 맞이하여 還宮할 것’을 권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여러 도에서 구원하러 온 병사들을 모두 30리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姜公輔姜公輔는 翰林學士이다.】 간하기를 “지금 宿衛가 고단하고 적으니, 방비하고 염려함을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朱泚가 충성을 다하여 폐하를 받들어 맞이한다면 수비하는 군사가 많음을 어찌 꺼리겠습니까? 만일 朱泚가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대비가 있어야 근심이 없습니다.” 하니, 上이 마침내 구원병을 모두 불러서 奉天城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遣涇原兵馬使韓旻하야 將銳兵三千하야 聲言迎大駕라호되 實襲奉天이라 時에 奉天守備單弱이어늘 段秀實이 謂岐靈岳曰 事急矣【秀實이 與將軍劉海賓, 涇原將吏何明禮, 岐靈岳으로 謀誅泚未發하니라 】라하고 使靈岳으로 詐爲姚令言符하야 令旻且還하야 當與大軍俱發이라하다 是日에 李忠臣【淮西節度使也니 爲族子李希烈所逐하야 奔在京師하니라 】, 源休【光祿卿이라 】, 姚令言秀實等하야 議稱帝事하니 秀實이 勃然起하야 奪休象笏하고 前唾面하고 大罵曰 狂賊아 吾恨不斬汝萬段하노니 豈從汝反耶아하고 因以笏擊러니 擧手扞之하야 纔中其額하니 濺血灑地라 秀實相搏이어늘 忠臣이 前助【前은 進也라 】하니 得匍匐脫走라 秀實이 知事不成하고 謂黨曰 我不同汝反이니 何不殺我오 衆이 爭前殺之【旻得符而還이어늘 泚令言大驚이라 靈岳獨承其罪而死하고 海賓明禮等이 後又死하니라 】하다 上이 聞秀實死하고 恨委用不至하야 涕泗久之하니라

朱泚가 涇原兵馬使韓旻을 보내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大駕를 맞이하여 還宮한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실제로는 奉天을 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奉天城의 수비가 고단하고 약하므로 段秀實岐靈岳에게 이르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다.” 하고는【段秀實이 將軍 劉海賓, 涇原將吏 何明禮, 岐靈岳과 함께 朱泚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행동을 개시하지 못하였다.】岐靈岳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姚令言의 印符를 만들어서 韓旻으로 하여금 우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大軍과 함께 출발하게 하였다.

이날 朱泚李忠臣,【李忠臣은 淮西節度使이니, 조카인 李希烈에게 쫓겨나 京師로 도망와 있었다.】源休,【源休는 光祿卿이다.】姚令言, 段秀實 등을 불러서 황제를 칭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에 段秀實이 발끈하고 일어나서 源休의 象牙笏을 빼앗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朱泚의 얼굴에 침을 뱉고 크게 꾸짖기를 “미친 도적놈아! 내가 너를 죽여 만 조각을 내지 못함을 한하노니, 어찌 너를 따라 배반하겠는가.” 하고는 인하여 笏로 朱泚를 쳤는데, 朱泚가 손을 들어 막아서 겨우 그 이마를 맞추니, 피를 흘려 땅에 뿌려졌다. 朱泚段秀實과 서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李忠臣이 앞으로 나와 朱泚를 도우니,【前은 앞으로 나아감이다.】朱泚가 포복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段秀實은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 朱泚의 무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와 함께 배반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하여 나를 죽이지 않는가?” 하니, 무리들이 앞다투어 나아가 段秀實을 죽였다.【韓旻이 印符를 얻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朱泚와 姚令言이 크게 놀랐다. 岐靈岳이 홀로 그 죄를 지고 죽었고, 劉海賓과 何明禮 등도 뒤에 또 죽었다.】

上은 段秀實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당초에 그를 중용하지 못한 것을 한하여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朱泚自稱大秦皇帝하고 改元應天하다

朱泚가 스스로 大秦皇帝라 칭하고 應天으로 改元하였다.

○ 上이 與陸贄로 語及亂故하야 深自克責이어늘 曰 致今日之患은 皆群臣之罪也니이다 上曰 此亦天命이요 非由人事니라 退하야 上疏하야 以爲陛下徵師日滋하고 賦斂日重하야 內自京邑으로 外洎邊陲히 行者는 有鋒刃之憂하고 居者는 有誅求【誅는 責也라 】之困이라 是以로 叛亂繼起하고 怨讟【讟은 痛怨也라 】竝興이니이다 陛下有股肱之臣하고 有耳目之任하고 有諫諍之列하고 有備衛之司로되 見危에 不能竭其誠하고 臨難에 不能效其死하니 臣所謂致今日之患群臣之罪者 豈徒言歟잇가 臣聞理或生亂하고 亂或資理라 有以無難而失守하고 有因多難而興邦이라하니 今生亂失守之事則旣往이라 不可復追矣어니와 其資理興邦之業은 在陛下克勵而謹修之니 何憂乎亂人이며 何畏乎厄運이리잇고 勤勵不息이면 足致升平하리니 豈止蕩滌祅氛【祅氛은 兵塵不祥之氣라 】하야 旋復宮闕而已리잇고

上이 陸贄와 함께 난리가 난 이유를 언급하면서 깊이 스스로 자책하였다. 陸贄가 말하기를 “금일의 환난을 초래하게 된 것은 모두 여러 신하들의 죄입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이는 또한 天命이요 人事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陸贄가 물러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군사를 징발하는 것이 날로 늘어나고 부세를 거두는 것이 날로 무거워져서 안으로는 京邑으로부터 밖으로는 변방에 이르기까지 길을 가는 자들은 칼날을 맞는 근심이 있고 거주하는 자들은 苛斂誅求의【誅는 책망하는 것이다.】 곤궁함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고 원망이【讟은 원통함이다.】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폐하께서 股肱의 신하가 있고, 耳目을 맡은 직임이 있고, 간쟁하는 대열의 言官이 있고, 수비하고 호위하는 관서가 있으나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 목숨을 바치지 못하니, 신이 이른바 ‘금일의 환난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신하들의 죄’라는 것이 어찌 빈 말이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다스림이 혹 난을 낳기도 하고 난이 혹 다스림의 밑천이 되기도 한다. 난이 없기 때문에 지킴을 잃는 경우가 있고, 난이 많음으로 인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 난이 생겨서 지킴을 잃은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서 다시 추론할 것이 없거니와 다스림의 밑천이 되고 나라를 일으키는 業은 폐하께서 분발하여 힘쓰고 신중하게 닦는데 달려 있으니, 〈이렇게 한다면〉어찌 난을 일으키는 자를 근심하며 어찌 액운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지런히 힘쓰고 쉬지 않으면 충분히 태평한 세상을 이룩할 것이니, 어찌 다만 요망한 기운을 깨끗이 소탕하여【祅氛은 병란의 상서롭지 않은 기운이다.】 궁궐을 회복할 뿐이겠습니까?”

○ 十一月에 神策河北行營節度使李晟이 聞上幸奉天하고 引兵出飛狐道【飛는 與蜚通하니 注見漢高三年蜚狐口하니라 】하야 晝夜兼行하야 至代州어늘 詔加神策行營節度使【唐祿山叛에 邊兵之精銳者를 皆徵하니라 】하다

11월에 神策河北行營節度使李晟이 上이 奉天으로 행차했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이끌고 飛狐道로 나가【飛는 蜚와 통하니, 注가 漢高祖 3년 蜚狐口에 나온다.】 밤낮으로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代州에 이르자, 上이 조칙을 내려 李晟에게 神策行營節度使를 가하였다.【唐나라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변방의 정예병을 모두 징발하여 行營에 있었다.】

朱泚攻圍奉天經月하니 城中에 資糧俱盡하야 時에 供御纔有糲米二斛이라 每伺賊之休息하야 夜縋人於城外하야 采蕪菁根而進之러라 李懷光이 入援할새 晝夜倍道하야 至河中하니 有衆五萬이요 李晟이 行且收兵하니 旬月間에 至萬餘人이라 急攻奉天하니 城中死傷者 不可勝數요 賊已有登城者어늘 上이 與渾瑊對泣하다 時에 士卒凍餒하고 又乏甲胄러니 이 撫諭하야 激以忠義하니 皆鼓譟力戰이라 李懷光이 自蒲城으로 引兵趣(趨)涇陽하야 竝(傍)北山而西하야 癸巳에 敗兵於醴泉한대 聞之懼하야 引兵遁歸長安하니 衆以爲懷光이 復三日不至면 則城不守矣라하니라

朱泚가 奉天을 포위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으니, 성 안에 물자와 식량이 모두 다 떨어져 당시에 황제에게 공양할 양식이 겨우 좁쌀 두 斛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매번 적이 휴식할 때를 엿보아서 밤중에 사람을 밧줄로 매달아 성 밖으로 내보내서 순무 뿌리를 채취하여 황제에게 올리곤 하였다. 李懷光이 들어와 구원할 적에 밤낮으로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河中에 이르니 군대가 5만 명이었고, 李晟이 행군하면서 한편으로 군대를 수습하니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만여 명에 이르렀다.

朱泚가 奉天을 맹렬히 공격하니 성 안의 사상자를 이루 셀 수가 없었고, 적들 중에 이미 성에 올라오는 자가 있으므로 上이 渾瑊과 마주보고 눈물을 흘렸다. 당시에 병사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또 甲胄가 없었는데 渾瑊이 병사들을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충의로써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힘써 싸웠다. 李懷光이 蒲城에서 군대를 이끌고 涇陽으로 달려와 北山을 따라 서쪽으로 와서 癸巳日(11월 20일)에 朱泚의 군대를 醴泉에서 패퇴시켰다.

朱泚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끌고 도망하여長安으로 돌아가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李懷光이 다시 3일을 지체하여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면 봉천성은 지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朱泚至長安하야 據府庫之富하고 不愛金帛하야 以悅將士하고 公卿家屬在城者를 皆給月俸이라 神策及六軍에 從車駕及李晟者를 皆給其家糧하고 加以繕完器械하야 日費甚廣이라 及長安平에 府庫에 尙有餘蓄하니 議者皆追怨有司之暴斂焉이러라

朱泚가 長安에 이르러 府庫의 부유함을 점거하고 금과 비단을 아끼지 아니하여 將兵들을 기쁘게 하였고, 公卿의 가솔로서 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 모두 月俸을 지급하였다. 神策軍과 六軍 중에 황제의 車駕와 李晟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朱泚가 그들의 집에 양식을 모두 지급하였고, 겸하여 각종 병기를 수리하고 완비하여 날로 허비함이 매우 많았다. 長安이 평정된 뒤에 府庫에 아직도 남은 저축이 있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有司가 포악하게 세금을 거둔 것을 원망하였다.

李懷光이 自山東來赴難하야 數與人言盧杞, 趙贊, 白志貞之奸侫하고 且曰 吾見上이면 當請誅之라하더니 旣解奉天之圍에 自矜其功하야 謂上必接以殊禮러라 或以懷光之言으로 告盧杞한대 懼하야 言於上曰 懷光勳業으로 社稷是賴라 賊徒破膽하야 皆無守心하니 若使之乘勝取長安이면 則一擧可以滅賊이리이다 今聽其入朝면 必當賜宴하야 留連累日하리니 使賊入京城하야 得從容成備면 恐難圖矣리이다 上以爲然하야 詔懷光하야 直引軍屯便橋하야 與李建徽, 李晟으로 刻期하야 共取長安하니 懷光이 自以數千里竭誠赴難하야 破朱泚하고 解重圍어늘 而咫尺【八尺曰咫라 】에 不得見天子라하야 意怏怏曰 吾今已爲姦臣所排하니 事可知矣라하고 遂引兵去할새 至魯店하야 留二日이라가 乃行하니라

李懷光이 山東에서 난리에 달려와 자주 사람들과 盧杞, 趙贊, 白志貞의 간사하고 아첨함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上을 뵈면 마땅히 이들을 죽일 것을 청하겠다.” 하였는데, 李懷光이 이미 奉天의 포위를 풀게 되자 스스로 자신의 공을 자랑하여 上이 반드시 특별한 예로 대접할 것이라고 여겼다.

혹자가 李懷光의 말을 盧杞에게 고하자盧杞가 두려워하여 上에게 아뢰기를 “李懷光의 큰 공훈과 업적으로 社稷이 의뢰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적도들이 간담이 서늘해져 모두 지킬 마음이 없으니, 만약 그로 하여금 승세를 타고서 長安을 탈취하게 한다면 일거에 적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들어와 조회하도록 허락한다면 반드시 잔치를 베풀어서 여러 날 동안 머물게 될 것이니, 적으로 하여금 京城에 들어가서 조용히 대비하게 한다면 도모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上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李懷光에게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便橋에 주둔하여 李建徽, 李晟과 함께 기일을 정해서 長安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李懷光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수천 리 먼 곳에서 정성을 다해 국난에 달려와서 朱泚를 격파하고 여러 겹의 포위를 풀었는데, 咫尺에 있는【8尺을 咫라고 한다.】 天子를 만나볼 수 없다.’고 하여 마음속으로 서운해하며 말하기를 “내 이제 이미 간신의 배척을 당하였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날 적에 魯店에 이르러서 이틀을 머물다가 비로소 길을 떠났다.

○ 上이 問陸贄以當今切務한대 以曏日致亂은 由上下之情不通이라하야 勸上接下從諫하고 又曰 易에 乾下坤上曰泰요 坤下乾上曰否요 損上益下曰益이요 損下益上曰損이라 夫天在下而地處上은 於位乖矣로되 而反謂之泰者는 上下交故也요 君在上而臣處下는 於義順矣로되 而反謂之否者는 上下不交故也니이다 上이 約己而裕於人이면 人必悅而奉上矣리니 豈不謂之益乎며 上이 蔑人而肆諸己면 人必怨而叛上矣리니 豈不謂之損乎잇가 上이 遣中使諭之曰 朕本性好推誠하고 亦能納諫하야 將謂君臣一體라하야 全不隄防이러니 緣推誠信不疑하야 多被姦人賣弄하니 今所致患害는 朕思에 亦無他요 其失이 反在推誠이라 又諫官論事에 少能愼密하고 例自矜衒【衒은 熒絹反이니 自賣也라 自誇曰矜이요 自媒曰衒이라】하야 歸過於朕하야 以自取名하니 朕이 從卽位以來로 見奏對論事者甚多로되 大抵皆是雷同【雷之發聲에 物無不同時應者하니 人之言이 當各由己요 不當事無可否而同之라 故로 謂之雷同也라하니라 】하야 道聽塗說이요 試加質問이면 遽卽辭窮이라 若有奇才異能이면 在朕에 豈惜拔擢이리오 卿은 宜深悉【悉은 詳盡也라 】此意하라 以〈爲〉人君臨下에 當以誠信爲本이요 諫者雖辭情鄙拙이나 亦當優容以開言路니 若震之以威하고 折之以辯이면 則臣下何敢盡言이릿고 又曰 臣은 聞仲虺贊揚成湯에 不稱其無過而稱其改過하고 吉甫歌誦周宣에 不美其無闕而美其補闕이라하고 又曰 爲下者 莫不願忠이요 爲上者 莫不求理나 然而下每苦上之不理하고 上每苦下之不忠하나니 若是者는 何오 兩情이 不通故也요 下之情이 莫不願達於上하고 上之情이 莫不求通於下나 然而下恒苦上之難達하고 上恒苦下之難知하나니 若是者는 何오 九弊不去故也라 所謂九弊者는 上有其六하고 而下有其三하니 好勝人, 恥聞過, 騁辯給, 眩聰明【眩은 黃絹反이니 目無常主也라 】, 厲威嚴, 恣彊愎【愎은 弼力反이니 强狠也라 】此六者는 君上之弊也요 諂諛, 顧望, 畏愞(偄)【偄은 奴亂反이니 畏懼而怯懦라 】此三者는 臣下之弊也니이다 又曰 諫者多는 表我之能好요 諫者直은 示我之能(賢)[容]이요 諫者之狂誣는 明我之能恕요 諫者之漏泄은 彰我之能從이니 有一于斯하면 皆爲盛德이니이다 上이 頗用其言하다

上이 陸贄에게 지금에 가장 긴요한 일을 묻자, 陸贄가 이르기를 지난날 난리를 초래한 것은 上下의 情이 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上에게 아랫사람을 접견하고 간언을 따를 것을 권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周易》에 乾이 아래에 있고 坤이 위에 있는 것을 泰卦라 하고, 坤이 아래에 있고 乾이 위에 있는 것을 否卦라 하며,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을 益卦라 하고,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것을 損卦라 합니다.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것은 자리에 어그러지나 도리어 이것을 泰라고 이르는 것은 上下가 사귀기 때문이고, 군주가 위에 있고 신하가 아래에 있는 것은 의리에 순하나 도리어 이것을 否라고 이르는 것은 상하가 사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윗사람이 자신에게는 검소하게 하고 사람(백성)들에게 풍부하게 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기뻐하여 윗사람을 받들 것이니 어찌 이것을 益이라고 이르지 않을 있겠으며, 윗사람이 사람들을 멸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윗사람을 원망하여 배반할 것이니 어찌 이것을 損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上이 中使를 보내 타이르기를 “짐은 본래 誠信을 다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한 간언을 잘 받아들여서 장차 君臣이 일체가 될 것이라고 여겨 전혀 막지 않았는데, 誠信을 다하고 의심하지 않음으로 인해 간사한 사람들에게 속임과 농간을 많이 당하였으니, 오늘날 患害를 초래한 것은 짐이 생각해보면 다른 이유가 없고, 그 잘못이 도리어 誠信을 다함에 있다. 또 諫官들이 일을 논할 적에 신중하고 周密하게 하는 자가 적고, 으레 스스로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어【衒은 熒絹反(현)이니 스스로 파는(자랑하는) 것이다. 스스로 과시하는 것을 矜이라 하고, 자신이 스스로 소개하는 것을 衒이라 한다.】짐에게 허물을 돌려서 스스로 명성을 취하니, 짐이 즉위한 이래로 上奏하고 대답하며 일을 논한 자가 매우 많았으나 대체로 모두 부화뇌동하여【우레가 소리를 낼 적에 물건이 동시에 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사람의 말은 마땅히 각각 자신의 의견을 따라야 하고, 일의 可否에 상관없이 똑같이 찬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雷同이라 하는 것이다.】 길에서 들으면 그대로 길에서 말하고, 시험삼아 질문을 가해보면 대번에 말이 궁해진다. 만약 기이한 재주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면 짐에게 있어 어찌 발탁을 아까워하겠는가. 卿은 마땅히 이 뜻을 자세히 살피라.” 하였다.【悉은 상세하고 극진함이다.】

陸贄는 말하기를 “임금이 아랫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마땅히 誠信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간언하는 자들이 비록 말과 실정이 비루하고 졸렬하더라도 군주가 또한 마땅히 우대하여 받아들여 言路를 열어야 하니, 만약 위엄으로써 두렵게 하고 말로써 꺾는다면 신하들이 어찌 감히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臣이 들으니 仲虺成湯을 찬양할 적에 허물이 없는 것을 칭찬하지 않고 허물을 고치는 것을 칭찬하였으며, 尹吉甫가 周나라 宣王의 덕을 謳歌하여 칭송할 적에 잘못이 없는 것을 찬미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찬미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랫사람이 된 자는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된 자는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은 매번 윗사람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함을 괴로워하고, 윗사람은 매번 아랫사람이 충성하지 않음을 괴로워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두 사람의 정이 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랫사람의 정은 위에 도달하기를 원치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의 정은 아래에 통하기를 원치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은 항상 윗사람에게 도달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고, 윗사람은 항상 아랫사람을 알기 어려움을 괴로워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아홉 가지 병폐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아홉 가지 병폐라는 것은 윗사람에게 여섯 가지가 있고, 아랫사람에게 세 가지가 있으니,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고 잘못을 듣기를 부끄러워하고 언변을 구사하고 총명을 자랑하고【眩은 黃絹反(현)이니, 눈이 어지러워서 일정한 초점이 없는 것이다.】 위엄을 힘쓰고 강함과 괴퍅함을 멋대로 부리는【愎은 弼力反(퍅)이니 강하고 사나운 것이다.】 여섯 가지는 君上의 병폐이며, 아첨하고 관망하고 겁을 먹어 나약한【偄은 奴亂反(난)이니, 두려워하고 겁먹는 것이다.】 세 가지는 신하의 병폐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간언하는 자가 많은 것은 군주 자신이 간언을 듣기를 좋아함을 표시하는 것이요, 간하는 자가 직언을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이 잘 용납함을 보이는 것이요, 간하는 자가 미친 말을 하고 진실이 아닌 말을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이 용서함을 밝히는 것이요, 간하는 자가 진심을 토로하는 것은 군주 자신이 간언을 따름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중에 한 가지가 있으면 모두 盛德이 됩니다.” 하였다.

上이 자못 그의 말을 따랐다.

李懷光이 頓兵不進하고 數上表하야 暴揚盧杞等罪惡하니 衆論喧騰하고 亦咎等이라 上이 不得已하야 十二月에 貶爲新州司馬하고 白志貞爲恩州司馬하고 趙贊爲播州司馬하다

[史略 史評]范氏德宗이 性與小人合이라 故로 其去小人也難하고 遠君子也易라 忠正之士는 一言忤意면 則終身擯斥하고 盧杞之徒는 迫於危亡하야 不得已然後去之하니 豈惡治而欲亂哉리오 蓋其性與小人合也니라

李懷光이 군대를 주둔하여 長安으로 전진하지 않고 여러 번 表文을 올려 盧杞 등의 죄악을 폭로하니, 여론이 비등하고 또한 盧杞 등을 질책하였다. 上이 부득이하여 12월에 盧杞를 新州司馬로 좌천시키고, 白志貞을 恩州司馬로 좌천시키고趙贊을 播州司馬로 좌천시켰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德宗은 성품이 小人과 부합하였다. 그러므로 小人을 제거하기는 어렵고 君子를 멀리하기는 쉬웠던 것이다. 충성스럽고 정직한 선비는 한마디 말이 뜻에 거슬리면 종신토록 배척하였고, 盧杞의 무리는 국가가 위태로움과 멸망에 임박하여 어쩔 수 없게 된 뒤에야 제거하였으니, 어찌하여 다스려지는 것을 싫어하고 혼란한 것은 좋아하였는가? 이는 그 성품이 小人과 더불어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陸贄言於上曰 今盜遍天下하야 輿駕播遷하시니 陛下宜痛自引過하야 以感人心이니이다 昔에 成은 以罪己勃興하고 楚昭는 以善言復國하니 陛下誠能不吝改過하고 以言謝天下하야 使書詔에 無所避忌하시면 臣雖愚陋나 可以仰副聖情하야 庶令反側之徒로 革心向化호리이다 上이 然之라 故로 奉天所下詔書를 雖狂將悍卒이라도 聞之에 無不感激揮涕러라 上이 又以中書所撰赦文으로 示한대 上言하야 以爲動人以言이면 所感已淺이어늘 言又不切이면 人誰肯懷릿고 又以知過非難이요 改過爲難이며 言善非難이요 行善爲難이니 假使赦文至精이라도 止於知過言善이니 猶願聖慮更思所難이니이다 上이 然之하다

陸贄가 上에게 아뢰기를 “지금 도적이 천하에 널려 있어서 大駕가 파천하셨으니, 폐하께서는 통렬히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시어 민심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옛날에 成湯은 자신을 책함으로써 나라가 크게 일어났고 楚나라 昭王은 善言으로써 나라를 회복시켰으니, 폐하께서 진실로 잘못을 고침에 인색하지 않으시고 말로써 천하에 사죄하시어 글과 조서에 피하고 꺼리는 바가 없으시면 신이 비록 어리석고 누추하나 성상의 마음에 우러러 부응해서 反側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조정으로 귀순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上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러므로 奉天에서 내린 조서는 비록 광포한 장수와 사나운 병졸이라도 그 내용을 들으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上이 또 中書省에서 찬한 사면하는 글을 陸贄에게 보이자, 陸贄가 上言하여 이르기를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키려 하면 감동하는 바가 이미 얕은데, 말이 또 간절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누가 진심으로 감동하겠습니까. 또 허물을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어려우며, 善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善을 행하는 것이 어려우니, 가령 사면하는 글이 지극히 정밀하다 하더라도 허물을 알고 善을 말함에 그칠 뿐입니다. 오히려 성상의 생각에 다시 어려운 바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上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