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九 後晉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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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晉紀

高祖
高祖 在位七年이요 壽五十一이라

後晉紀

高祖※在位七年이요 壽五十一이라

※ 名은 敬瑭이요 姓은 石氏니 其先은 本出西夷種이라 勇力善戰하니 唐明宗이 愛之하야 妻以永寧公主라 淸泰元年에 鎭太原이라가 徙鎭天平하야 不受命하고 因求援於契丹이러니 尋卽帝位하니라

高祖는 재위가 7년이고 壽가 51세이다.

高祖는 이름이 敬瑭이고 성이 石氏이니, 그 선조는 본래 西夷의 종족에서 나왔다. 용력이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니, 唐나라 明宗石敬瑭을 총애하여 永寧公主를 시집보냈다. 淸泰 元年에 太原節度使로 있다가 天平節度使로 옮기자 명령을 받지 않고 인하여 契丹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얼마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附丙申 契丹主太宗德光天顯十一年

附丙申 〈契丹主太宗德光天顯十一年이라〉

병신년 - 契丹主太宗耶律德光의 天顯 11년 - 을 붙였다.

[丙申]唐淸泰三年

[丙申]〈唐淸泰三年十一月以後는 晉高祖石敬瑭天福元年이라 ○ 閔主通文元年이라 ○ 是歲에 唐亡晉興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병신(936) - 唐나라 淸泰 3년 11월 이후는 晉나라 高祖石敬瑭의 天福 元年이다. ○ 閔主孟昶의 通文 元年이다. ○ 이해에 唐나라가 망하고晉나라가 일어나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正月에 唐主以千春節置酒러니 晉國長公主上壽畢에 辭歸晉陽이어늘 唐主醉하야 曰 何不且留하고 遽歸오 欲與石郞反邪아 石敬瑭이 聞之하고 益懼러라

봄 정월에 唐主가 千春節에 酒宴을 베풀었는데, 晉國長公主가 술잔을 올려 獻壽를 마친 다음 하직하고 晉陽으로 돌아가자, 唐主가 술에 취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더 머물지 않고 빨리 돌아가는가? 石郞과 함께 배반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石敬瑭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 初에 唐主欲使敬瑭移鎭鄆州한대 李崧, 呂琦李崧은 翰林學士요 呂琦는 知制誥라 】等이 皆力諫하야 以爲不可어늘 薛文遇【知制誥라 】曰 河東은 移亦反이요 不移亦反하야 在旦暮耳니 不若先事圖之니이다 唐主大喜曰 卿言이 殊豁吾意하니 成敗에 吾決行之호리라 卽爲除目하야 付學士院하야 使草制하야 以敬瑭으로 爲天平節度使하니 制出에 兩班【文武官을 爲東班西班하니라 】이 相顧失色이러라 敬瑭이 疑懼하야 謀於將佐曰 吾之再來河東也에 主上이 面許終身不除代러니 今忽有是命하니 得非如今年千春節與公主所言乎아 我不興亂이면 朝廷發之하리니 安能束手死於道路乎아 都押衙劉知遠曰 明公이 久將兵하야 得士卒心하고 今據形勝之地하야 士馬精彊하니 若稱兵傳檄이면 帝業을 可成하리니 奈何以一紙制書로 自投虎口乎잇가 掌書記桑維翰契丹主部落이 近在雲, 應하니 公誠能推心하야 屈節【屈折肢節하야 以服事也라 】事之하면 萬一有急에 朝呼夕至하리니 何患無成이릿고 敬瑭이 意遂決하야 表唐主호되 養子潞王이라 】는 不應承祀하니 請傳位許王【名從益이니 明宗子라 】하노이다 唐主手裂其表하야 抵地하고 制하야 削奪敬瑭官爵하고 以張敬達로 兼太原四面排陳使하야 率諸將討之하다

처음에 唐主石敬瑭을 鄆州의 鎭으로 옮기고자하니, [ 李崧]과 [ 呂琦]【[ 李崧]은 翰林學士이고, [ 呂琦]는 知制誥이다.】 등이 모두 강력히 간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 薛文遇]가【[ 薛文遇]는 知制誥이다.】 말하기를 “河東(石敬瑭)은 鎭을 옮겨도 배반하고 鎭을 옮기지 않아도 배반하여, 반란이 조석간에 있을 것이니, 사전에 미리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唐主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卿의 말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니, 成敗에 관계없이 내 결행하겠다.” 하였다. 즉시 除目을 만들어 學士院에 맡겨 制書를 草해서 石敬瑭을 天平節度使로 임명하니, 制書가 나오자 文班과 武班이【文官과 武官을 東班과 西班이라 하였다.】 서로 돌아보고 사색이 되었다.

石敬瑭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장수‧막료들과 상의하기를 “내가 다시 河東에 올 때에 主上이 나와 대면하고서 종신토록 딴 곳으로 바꾸어 제수하지 않기로 허락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령이 있으니, 금년 千春節에 공주와 말씀한 바와 똑같지 않은가.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킬 것이니, 어찌 손을 묶고 도로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都押衙인 劉知遠이 말하기를 “明公은 오랫동안 군대를 거느려서 사졸들의 마음을 얻었고, 지금 지형이 유리한 곳을 점거하여 군사와 말들이 정예하고 강하니, 만약 군대를 일으키고 격문을 돌린다면 황제의 기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한 장의 制書 때문에 자신을 호랑이의 입에 던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掌書記桑維翰이 말하기를 “契丹主의 部落이 가까이 雲州와 應州에 있으니, 公이 진실로 마음을 다 바쳐 복종하여 섬긴다면【사지의 관절을 굽혀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다.】 만에 하나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하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石敬瑭이 마침내 결심하고 唐主에게 表文를 올리기를 “養子가【養子는 潞王이다.】 帝位를 계승해서는 안 되니, 許王에게 전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許王은 이름이 從益이니, 明宗의 아들이다.】唐主石敬瑭의 表文을 손수 찢어 땅에 내던지고 制書를 내려서 石敬瑭의 관직을 삭탈하고張敬達을 임명하여太原四面排陳使를 겸임하게하여 諸將을 거느리고 토벌하게하였다.

敬瑭이 遣間使【間은 去聲이니 從間道遣使라 】하야 求救於契丹할새 令桑維翰으로 草表하야 稱臣於契丹主하고 且請以父禮事之하고 約事捷之日에 割盧龍一道及鴈門關以北諸州하야 與之하다 劉知遠이 諫曰 稱臣은 可矣어니와 以父事之는 太過요 厚以金帛賂之라도 自足以致其兵이니 不必許以土田이니 恐異日大爲中國之患이면 悔之無及이리이다 敬瑭이 不從하다 表至契丹하니 契丹主大喜하야 許俟仲秋하야 傾國赴援하다

石敬瑭이 은밀히 間使를 보내어【間은 去聲이니, 사잇길을 따라 은밀히 사신을 보내는 것이다.】契丹에 구원을 요청할 적에 桑維翰으로 하여금 表文을 草하게 하여, 契丹主에게 臣이라 칭하고 또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길 것을 청하였으며, 일이 성공하는 날에 盧龍의 한 道와 鴈門關 이북의 여러 州를 떼어줄 것을 약속하였다. 劉知遠이 간하기를 “신을 칭하는 것은 가하나 아버지를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은 너무 지나치며,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어도 충분히 그 군대를 부를 수 있으니, 굳이 토지를 떼어줄 것을 허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일에 크게 중국의 후환거리가 되면 후회막급일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石敬瑭이 따르지 않았다. 表文이 契丹에 이르자, 契丹主가 크게 기뻐하여 仲秋(8월)를 기다려 국력을 기울여 달려가 구원할 것을 허락하였다.

○ 九月에 契丹主將五萬騎하고 號三十萬이라하야 自楊武谷而南하니 旌旗不絶이 五十餘里라 至晉陽하야 屯於汾北之虎北口하야 與唐騎將高行周, 苻彦卿合戰할새 敬瑭이 乃遣劉知遠하야 出兵助之하니 唐兵이 大敗라 敬達이 遣使하야 告敗於唐한대 唐主大懼하야 下詔親征하니 諸軍이 自鳳翔推戴潞王이 自鳳翔節度卽位하니라 】以來로 驕悍하야 不爲用이로되 苻彦饒彰聖都指揮使니 時爲大軍後援하니라 】恐其爲亂하야 不敢束之以法이러라 唐主至河陽하야 心憚北行하야 但日夕酣飮悲歌하고 群臣이 或勸其北行이면 則曰 卿輩勿言하라 石郞이 使我心膽墮地라하니라

9월에 契丹主가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30만 대군이라 이름하면서 楊武谷으로부터 남진하니, 旌旗가 50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晉陽에 이르러서汾水의 북쪽인 虎北口에 주둔하고서唐나라 騎兵將인 高行周와 [ 苻彦卿]과 교전할 적에 石敬瑭이 마침내 劉知遠을 보내 출병하여 돕게하니, 唐軍이 크게 패하였다. 張敬達이 사자를 보내어 唐나라에 패전을 알리자, 唐主가 크게 두려워하여 조서를 내리고 친히 정벌하니, 鳳翔에서 潞王을 황제로 추대한潞王이 鳳翔節度使로 있다가 즉위하였다.】 이래로 諸軍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져서 부릴 수가 없었으나 [ 苻彦饒]는【[ 苻彦饒]는 彰聖都指揮使이니, 당시 大軍의 후원이 되었다.】 이들이 반란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군법으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唐主는 河陽에 이르러서 마음속에 북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만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슬피 노래하며, 신하들이 혹 북쪽으로 출동할 것을 권하면 말하기를 “경들은 말하지 말라. 石郞이 나로 하여금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하였다.

○ 十一月에 契丹主石敬瑭曰 吾三千里來赴難하니 必有成功이라 觀汝氣貌識量하니 眞中原之主也라 吾欲立汝爲天子하노라 敬瑭이 辭讓數四러니 將吏復勸進한대 乃許之하다 契丹主作冊書하야 命敬瑭爲大晉皇帝하니 是日에 卽皇帝位하야 割幽, 薊十六州하야 以與契丹하고 仍許歲輸帛三十萬匹하고 制改長興明宗年號라 】七年하야 爲天福元年하다

[史略 史評]胡氏敬瑭之罪는 在不助閔帝라 苟以閔帝失國이면 則當尊奉許王이니 不爲衛州之事하야 而歸奪國弑君之惡於從珂하고 兵以義擧하야 名實皆正이면 則其德美矣리라 乃急於近利하야 稱臣契丹하고 割棄土壤하야 以父事之러니 其利不能以再世하고 其害乃及於無窮이라 故로 以功利謀國而不本於禮義면 未有不旋中其禍者也니라

11월에 契丹主石敬瑭에게 이르기를 “내가 3천 리 밖에서 난리에 달려왔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너의 기풍과 모습, 지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내 너를 세워 천자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石敬瑭이 서너 차례 사양하였는데, 장수와 관리들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契丹主가 책봉하는 글을 만들어 石敬瑭大晉皇帝로 임명하니, 石敬瑭이 이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幽州와 薊州 등 16주를 떼어서 契丹에게 주고 인하여 해마다 비단 30만 필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으며, 制書를 내려 長興[頭註] 長興長興은 明宗의 연호이다. 7년을 고쳐 天福 元年이라고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石敬瑭의 죄는 閔帝를 돕지 않은 데에 있다. 만일 閔帝가 나라를 잃었으면 마땅히 許王을 높이 받들었어야 하니, 衛州의 일을 하지 아니하여 나라를 찬탈하고 군주를 시해한 죄를 李從珂에게 돌리고, 의리에 입각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名과 實이 모두 바르게 되었다면 그 德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契丹에게 신하를 칭하고 영토를 떼어주어 契丹의 군주를 아버지로 섬겼는데, 그 이익이 두 代를 가지 못하였고 그 폐해가 마침내 무궁한 후세에 미쳤다. 그러므로 功利로 나라를 도모하고 禮義에 근본하지 않으면 곧바로 禍를 당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唐主又與宋審虔【馬軍都指揮使라 】等四將으로 議復向河陽이러니 而將校皆已飛狀하야 迎晉主하니 唐主遂携傳國寶하고 登玄武樓하야 自焚하다

唐主가 또 宋審虔宋審虔은 馬軍都指揮使이다.】 등 네 장수와 함께 다시 河陽으로 향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將校들이 모두 이미 降書를 바쳐晉主를 맞이하니, 唐主가 마침내 傳國寶를 가지고 玄武樓에 올라가서 스스로 불타죽었다.

[丁酉]晉天福二年

[丁酉]〈晉天福二年이라 ○ 南唐烈祖徐誥昇元元年이라 ○ 是歲에 吳亡하니라 晉, 蜀, 漢, 閩에 南唐代吳하야 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정유(937) - 晉나라 天福 2년이다. ○ 南唐烈祖徐誥의 昇元 元年이다. ○ 이해에 吳나라가 망하였다. 晉‧蜀‧漢‧閩에 南唐이 吳나라를 대신하여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晉以李崧으로 爲中書侍郞同平章事하야 充樞密使하고 桑維翰으로 兼樞密使하다 時에 晉이 新得天下하니 藩鎭이 多未服從하고 或雖服從이나 反仄【不安也라 】不安하고 兵火之餘에 府庫殫竭하야 民間困窮이어늘 而契丹徵求無厭이라 維翰이 勸晉推誠棄怨하야 以撫藩鎭하고 卑辭厚禮하야 以奉契丹하고 訓卒繕兵하야 以修武備하고 務農桑하야 以實倉廩하고 通商賈하야 以豐貨財하니 數年之間에 中國稍安하니라

晉나라가 [ 李崧]을 中書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여樞密使를 맡기고, 桑維翰을 兼樞密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晉나라가 새로 천하를 얻으니, 藩鎭들이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고, 혹 복종하더라도 反仄하여【反仄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편안하지 못하였으며, 전란을 겪은 뒤에 조정의 府庫가 고갈되어서 민간이 곤궁하였는데 契丹의 무리한 요구는 만족함이 없었다.

桑維翰晉主에게 정성을 바치고 옛 원한을 버려 藩鎭을 어루만지고, 말을 낮추고 예를 후하게 하여 契丹을 받들며, 병졸을 훈련시키고 병기를 수선하여 武備를 닦고, 농업과 양잠을 힘써서 창고를 충실하게 하고, 商賈를 유통시켜 財貨를 풍족하게 할 것을 권하니, 몇 년 사이에 中國이 차츰 편안해졌다.

○ 三月에 晉主謀徙都大梁하니 桑維翰이 因說晉主하야 以大梁北控燕, 趙하고 南通江, 淮하야 水陸都會하야 資用富饒라하니 晉主乃下詔東巡하다

3월에 晉主가 大梁으로 천도할 것을 모의하니, 桑維翰이 인하여 晉主를 설득하기를 “大梁은 북쪽으로 燕 지방‧趙 지방과 통하고 남쪽으로 長江‧淮水와 통하여, 물에서 나오는 것과 육지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재용이 풍부합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동쪽으로 순행하였다.

○ 夏四月에 晉主至汴州하다

여름 4월에 晉主가 汴州(大梁)에 이르렀다.

○ 八月에 吳主楊溥라 】下詔하야 禪位于齊【後復姓李하니라 】하다 齊王卽皇帝位于金陵徐知誥也라 】하야 大赦하고 改元昇元하고 國號唐【是爲南唐이라 徐知誥는 改名이라 [通鑑要解] 徐知誥는 本以李氏之子라 旣擧大號에 欲纂唐緖라 故로 改國號唐이라 】이라하고 尊吳主曰讓皇이라하다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8월에 吳主吳主楊溥이다.】 조서를 내려 帝位를 齊王徐知誥에게 禪讓하였다.齊王徐知誥는 뒤에 本姓인 李氏姓을 회복하였다.】齊王徐知誥가 金陵에서 황제에 즉위하여【[原註] 齊王誥卽皇帝位于金陵:齊王徐知誥이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昇元으로 개원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으며,【[頭註] 이것이 南唐이다. 徐知誥으로 개명하였다. [通鑑要解] 徐知誥는 본래 李氏의 아들이다. 이미 大號(황제의 칭호)를 거행한 뒤에 唐나라의 계통을 잇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국호를 唐으로 고쳤다.】吳主를 높여讓皇이라 하였다. - 宋나라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없어졌다.-

[戊戌]晉天福三年

[戊戌]〈晉天福三年이라 ○ 蜀廣政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무술(938) - 晉나라 天福 3년이다. ○ 蜀나라 廣政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閏月에 閩主殂하니 其叔父延羲 自稱閩國王하고 更名하다

閏月에 閩主가 죽으니, 그의 숙부인 王延羲가 스스로 閩國王이라 칭하고로 이름을 고쳤다.

○ 八月에 晉以馮道로 守司徒兼侍中하고 詔中書하야 知印【舊制에 凡宰臣이 更日知印이라 】을 止委上相하니 由是로 事無巨細히 悉委於하니라 晉主嘗訪以軍謀한대 對曰 征伐大事는 在聖心獨斷이요 臣은 書生이라 惟知謹守歷代成規而已라한대 晉主以爲然하니라

8월에 晉나라가 馮道를 守司徒兼侍中으로 삼고中書省에 명하여 知印을【옛 제도에 모든 宰臣은 날짜를 번갈아가면서 印章을 맡았다.】 오직 上相(馮道)에게 맡기니, 이로 말미암아 큰 일과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馮道에게 맡겼다. 晉主가 일찍이 군사의 계략을 묻자, 馮道가 대답하기를 “정벌하는 큰 일은 聖上의 마음으로 독단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은 書生이라서 오직 역대에 이루어놓은 규칙을 삼가 지킬 줄만 알 뿐입니다.” 하니, 晉主가 옳게 여겼다.

○ 契丹이 改元會同하다

契丹이 會同으로 개원하였다.

[庚子]晉天福五年

[庚子]〈晉天福五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경자(940) - 晉나라 天福 5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閩主旣立에 驕淫苛虐이어늘 建州刺史延政이 數以書諫之하다 於是에 兄弟積相猜恨하야 治兵相攻하야 互有勝負하니 福建之間에 暴骨如莽矣러라

閩主王曦가 즉위한 뒤에 교만하고음란하고가혹하고사나우므로建州刺史王延政이 자주 글로 간하였다. 이에 형제가 서로 시기와 원한이 쌓여서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 공격해서 서로 승부가 있으니, 福州와 建州 사이에 드러난 해골이 풀더미처럼 많았다.

○ 唐倉吏歲終에 獻羨餘萬石이어늘 唐主曰 出納有數하니 苟非掊民【掊는 聚斂也라 】刻軍이면 安得羨餘邪아

唐나라의 창고관리가 연말에 남은 곡식 1만 석을 바치자, 唐主가 말하기를 “出納은 일정한 수가 있으니, 만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고【掊는 聚斂하는 것이다.】 군량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남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晉李崧이 奏호되 諸州倉糧이 於計帳【謂歲計其數하야 造帳以申三司者요 又具來歲課役之大數以報度支者라 】之外에 所餘頗多라하니 晉主曰 法外稅民은 罪同枉法이라 倉吏를 特貸其死하노니 各痛懲之하라

晉나라 [ 李崧]이 아뢰기를 “여러 州의 창고에 있는 양식이 計帳(회계장부)【計帳은 해마다 그 수를 계산하여 장부를 만들어 三司에 보고하는 것이요, 또 다음 해에 부과할 부역의 큰 수를 갖추어 度支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외에 남은 것이 자못 많습니다.”라고 하니, 晉主가 말하기를 “법으로 정한 것 이외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죄가 법을 부정하게 적용하는 것과 같다. 창고관리는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니, 각각 통렬히 징계하라.” 하였다.

○ 自黃巢犯長安以來로 天下血戰數十年하니 然後에 諸國이 各有分土【凡聚土하야 以封諸侯호되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하야 兵革稍息이러니 及唐主卽位에 江淮比年豐稔하야 兵食有餘라 群臣이 爭言호되 陛下中興에 今北方多難하니 宜出兵하야 恢復舊疆이니이다 唐主曰 吾少長軍旅하야 見兵之爲民害深矣라 不忍復言하노니 使彼民安이면 則吾民亦安矣니 又何求焉이리오

黃巢가 長安을 침범한 이래로 천하가 수십 년 동안 혈전을 겪으니, 그런 뒤에 여러 나라가 각각 영토를 소유하여【영토를 모아서 諸侯를 봉하되 封地를 받은 것이 각각 구분이 있는 것이다.】 전쟁이 다소 잠잠해졌는데, [ 唐主]가 즉위하자 江‧淮 지방에 매년 풍년이 들어서 군량이 남아돌았다.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중흥하심에 지금 북방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출병하여 옛날 소유했던 강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였다. [ 唐主]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軍中에서 자라 군대가 백성들의 폐해가 됨이 심함을 직접 보아왔다. 차마 다시는 출병하는 일을 말하지 못하겠다. 가령 저들의 백성들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들 또한 편안하니, 또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晉成德節度使安重榮이 恥臣契丹하야 上表數千言하니 大抵斥晉主父事契丹하고 竭中國以媚無厭之虜러라 桑維翰이 密上疏曰 陛下免於晉陽之難【在上丙申年하니라 】而有天下는 皆契丹之功也니 不可負之어늘 議者以歲致繒帛으로 謂之耗蠹하고 有所卑遜으로 謂之屈辱하니 殊不知兵連而不休하고 禍結而不解하면 財力將匱하리니 耗蠹孰甚焉이며 用兵則武吏功臣이 過求姑息하고 邊藩遠郡이 得以驕矜하야 下陵上替하리니 屈辱이 孰大焉이니잇고 臣은 願陛下訓農習戰하고 養兵息民하야 俟國無內憂하고 民有餘力이니 然後觀釁而動이면 動必有成矣리이다

晉나라 成德節度使安重榮이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천 자의 表文을 올리니, 대저 晉主가 契丹을 아버지로 섬기고 中國의 재정을 고갈시켜 만족함이 없는 오랑캐에게 잘 보이는 것을 배척하였다. 이에 桑維翰이 다음과 같이 은밀하게 상소하였다.

“폐하께서 晉陽의 난을 벗어나【晉陽의 난리는 앞의 丙申年(936)에 있었다.】 천하를 소유하신 것은 모두 契丹의 공이니, 이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해마다 비단을 바치는 것을 가지고 국가의 재정을 소모한다고 이르고, 몸을 낮추고 겸손한 것을 가지고 굴욕을 겪는다고 이릅니다. 그러나 전쟁이 이어져 그치지 않고 화가 맺혀서 풀리지 않는다면 재력이 점차 고갈될 것이니, 국가의 재정을 소모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무력을 동원하게 되면 武官과 功臣들이 우선 당장의 편안함만 지나치게 바라고 邊方의 藩鎭과 먼 郡들이 교만하고 잘난 체하여 아랫사람은 능멸하고 윗사람은 침체할 것이니, 굴욕을 당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농사를 가르치고 군사들에게 전술을 익히게 하며 군대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여, 나라에 內憂가 없고 백성들에게 남은 힘이 있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틈을 보아 출동하시면 출동함에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吳越王弘佐錢鏐元瓘之子라 】卽王位하다

吳越王錢弘佐錢弘佐錢鏐의 아들인 元瓘의 아들이다.】 왕에 즉위하였다.

[壬寅]晉天福七年

[壬寅]〈晉天福七年六月에 晉主重貴立하니라 ○ 漢主光天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임인(942) - 晉나라 天福 7년6월에 晉主石重貴가 즉위하였다. ○ 漢主劉玢의 光天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夏四月에 漢高祖【南漢也라 劉隱之弟니 初名이라 梁封하야 爲南平王이러니 卒에 이 繼封爲南海王이라가 丁丑年에 稱帝하고 國號大越하며 戊寅年에 改國號大漢하고 改名하니라 弘度之子也라 本傳에 龑音嚴이라 】殂하니 秦王弘度 卽皇帝位하야 更名하다

여름 4월에 漢나라 高祖【漢나라 高祖는 南漢의 군주이다. 劉隱의 아우이니, 처음 이름은 이다. 梁나라가 劉隱南平王에 봉하였는데, 劉隱이 죽자 劉巖이 뒤를 이어 南海王에 봉해졌다가 丁丑年(917)에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大越이라 하였으며, 戊寅年(918)에 국호를 大漢이라 고치고 이름을 으로 고쳤다. 劉弘度의 아들이다. 本傳에 “龑은 음이 嚴이다.” 하였다.】죽으니, 秦王劉弘度가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으로 고쳤다.

○ 六月에 晉主殂하니 馮道【守司徒兼侍中이라 】景延廣으로 議以國家多難하니 宜立長君이라하고 乃奉廣晉尹齊王重貴【帝兄之子라 [頭註] 廣晉은 本紀에 作大(太)原하니라】爲嗣하니 是日에 齊王이 卽皇帝位하다 延廣以爲己功이라하야 始用事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晉祖以唐朝禁臠之親으로 地尊勢重이어늘 迫於猜疑하야 請兵契丹하야 賂以土地하고 而取人之國이라 跡其以中國之君으로 而屈身夷狄하면 玩好珍異 旁午道途호되 小不如意하면 譙責繼之하야 當時朝野 莫不痛心이로되 而晉祖事之에 殊無赧色이라 夫以古人行一不義殺一不辜而得天下라도 猶且不爲어든 況附夷狄以伐中國하고 又從而取之者乎아 綱目에 書晉上尊號於契丹하고 契丹加晉主尊號는 所以著中國夷狄首足倒懸之極이니 其惡契丹而賤敬瑭也 甚矣로다

6월에 晉主(石敬瑭)가 죽으니, 馮道馮道는 守司徒 兼侍中이다.】景延廣과 함께 의논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長君(長子)을 세워야 한다.” 하고 마침내 廣晉尹齊王石重貴【[原註] 石重貴는 황제(石敬瑭)의 兄(石敬儒)의 아들이다. [頭註] 廣晉은 〈高祖本紀〉에 太原으로 되어 있다.】받들어 후사로 삼으니, 이날 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景延廣은 〈황제를 세운 것이〉자신의 공이라 하여 비로소 권력을 행사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晉나라 高祖는 唐나라 禁臠의 친척(駙馬)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였는데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아 거란에게 군대를 청하여 土地로써 뇌물을 주고 남의 나라를 차지하였다. 中國의 군주로서 오랑캐에게 몸을 굽힌 것을 찾아보건대, 완호품과 진귀한 물건을 거란에 바친 것이 도로에 이어졌으나 조금이라도 거란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견책이 이어져서, 당시 朝野의 사람들 가운데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晉나라 高祖는 거란을 섬김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옛사람은 한 가지라도 不義의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무죄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더라도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랑캐에게 붙어서 中國을 정벌하고 또 따라서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랴. 《資治通鑑綱目》에 ‘晉나라가 거란에게 尊號를 올리고, 거란이 晉主에게 尊號를 가했다.’라고 쓴 것은 中國과 夷狄이 마치 머리와 발이 거꾸로 전도된 것처럼 상하가 도치됨이 극에 달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니, 거란을 미워하고 石敬瑭을 천시함이 심하다.”

晉主之初卽位也에 大臣이 議奉表稱臣告哀於契丹이러니 景延廣【天平節度使侍衛馬步都虞侯라 】이 請致書稱孫而不稱臣【因契丹主高祖稱兒皇帝하야 用家人之禮致書也라 】하다 契丹이 大怒하야 遣使來責讓이어늘 延廣이 復以不遜語延廣이 囚契丹使라가 已而요 遣歸曰 說爾主호되 先帝는 爲北朝所立이라 故로 稱臣奉表어니와 今上은 中國所立이니 稱孫足矣라 翁怒來하면 則孫有十萬橫磨劍이라하니라 】答之하다 契丹盧龍節度使趙延壽【本唐人이니 晉初에 爲契丹所虜하니라 】欲代晉帝中國하야 屢說契丹擊晉한대 契丹主頗然之하니라

晉主가 처음 즉위할 적에 大臣들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臣이라 칭하며 契丹에게 喪事를 알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景延廣景延廣은 天平節度使 侍衛馬步都虞侯이다.】 〈표문을 올리지 말고〉편지를 보내되 孫이라 칭하고 臣이라 칭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景延廣의 의논은〉契丹主高祖(石敬瑭)로 하여금 兒皇帝라고 칭하게 한 것을 이용하여 家人의 禮를 써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契丹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꾸짖자, 景延廣이 다시 불손한 말로【불손한 말이란 景延廣이 契丹의 사신을 가두었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네 임금에게 말하기를 ‘先帝는 北朝(契丹)에서 세웠기 때문에 臣이라고 칭하고 표문을 받들어 올렸지만, 今上은 中國에서 세웠으니 孫이라고 칭하면 충분하다. 할아버지(契丹主)가 노하여 와서 교전한다면 손자는 십만 자루의 잘 연마한 검을 차고 상대할 뿐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답하였다. 契丹의 盧龍節度使趙延壽趙延壽는 본래 唐나라 사람인데, 晉나라 초기에 契丹에게 사로잡혔다.】晉나라를 대신해서 中國의 황제가 되고자 하여 자주 契丹을 설득해서 晉나라를 공격하게하니, 契丹主가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契丹 〈太宗會同五年이라〉

契丹 - 太宗會同 5년이다. -

齊王
名重貴니 高祖兄敬儒之子로

齊王은 名重貴高祖敬儒之子로 史曰出帝라 在位四年이라

齊王은 이름이 重貴이니, 高祖의 형인 石敬儒의 아들로 역사책에 出帝라 칭하였다. 재위는 4년이다.

[癸卯]晉天福八年

[癸卯]〈晉天福八年이라 凡五國, 三鎭이라〉

계묘(943) - 晉나라 天福 8년이다.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에 唐主【南唐李昇이라 】餌方士靈丹하고 浸成躁急하다 二月에 唐主疽發背어늘 召齊王璟之長子라 】하야 入侍疾할새 唐主曰 吾餌金石은 始欲益壽어늘 乃更傷生하니 汝宜戒之하라 是夕에 殂하니 元宗이 卽位하다

[新增]胡氏曰 生不可益而疾可治라 漢高도 猶曰 命乃在天하니 雖扁鵲인들 何益이리오하니 今無疾以求益生之祥하니 其惑을 不待貶也라 然坐此致斃者幾何人이완대 而莫之戒者는 貪本不除也일새라 方士敎人延年不死하고 釋氏敎人死而得果하니 惟貪者入之라 故로 曰 養心莫善於寡欲이라하니라 異端佛之學은 或割除親愛하고 或遺棄萬事하야 灰心槁形於寂寞之濱하야 若無欲者로되 而望輕擧하고 冀後果하야 其欲莫大焉하니 君子不可不愼也니라

봄에 唐主(南唐의 군주)가唐主는 南唐의 李昇이다.】 영험한 효험이 있다는 方士들의 丹藥을 먹고는 점점 조급증이 생겼다.

2월에 唐主가 등창이 났는데, 齊王李璟을 불러李璟李昇의 長子이다.】 궁중에 들어와서 병을 간호하게 할 적에 唐主李璟에게 이르기를 “내가 金石의 丹藥을 복용한 것은 본래 수명을 연장하고자 해서였는데 도리어 생명을 더 손상시켰으니, 너는 마땅히 경계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죽으니, 元宗이 즉위하였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약은〉생명을 더 연장할 수는 없으나 병은 치료할 수 있다. 漢나라 高祖도 오히려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마침내 하늘에 달려있으니, 비록 扁鵲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병이 없이 생명을 연장하는 祥瑞를 구하였으니, 그 미혹됨을 굳이 폄하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들어 죽음을 초래한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는 자가 없는 것은 탐욕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方士는 사람들에게 수명을 연장하여 죽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고, [ 釋氏]는 사람들에게 죽어서 證果를 얻을 것을 가르치니, 오직 탐욕스러운 자들이 여기에 빠진다. 그러므로 《孟子》에 이르기를 ‘마음을 기름은 욕망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異端과 佛老의 학문은 혹 친애하는 마음을 잘라서 제거하기도 하고 혹 세상만사를 버려 적막한 물가에서 마음이 불꺼진 재와 같고 형체가 마른 나무와 같아서 욕망이 없는 자와 같다. 그러나 道士들은 신선이 되어 가볍게 날아다니기를 바라고 佛者들은 후일의 果報를 바라서 그 욕망이 더 클 수가 없으니, 군자가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閩王延政王審知子라 】이 稱帝於建州하고 國號를 大殷이라하다

閩王王延政閩王王延政王審知의 아들이다.】建州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大殷이라 하였다.

漢晉王弘熙之弟也니 殺自立者라 】卽皇帝位하야 更名하다

南漢의 晉王劉弘熙劉弘熙劉玢의 아우이니, 劉玢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한 자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으로 고쳤다.

○ 晉桑維翰이 屢請遜辭以謝契丹호되 每爲延廣所沮러니 晉主延廣有定策功이라 故로 寵冠群臣하고 又總宿衛兵이라 故로 大臣이 莫能與之爭이러라 河東節度使劉知遠【河東節度使니 是爲後漢高祖라 】이 知延廣必致寇로되 而畏其方用事하야 不敢言하고 但益募兵하야 以備契丹이러니 契丹主乃集山後及盧龍兵五萬人하야 使趙延壽將之하고 委延壽經略中國하야 曰 若得之면 當立汝爲帝라하니 由是로 爲契丹盡力하야 畫取中國之策하니라

晉나라 桑維翰이 여러 번 공손한 말로 契丹에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매번 景延廣에게 저지당하였다. 晉主景延廣이 계책을 결정하고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공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총애가 여러 신하 중에 으뜸이었고, 또 景延廣이 宿衛의 군대를 총괄하였으므로 大臣들이 감히 그와 다투지 못하였다. 河東節度使劉知遠劉知遠은 河東節度使이니, 이가 後漢의 高祖이다.】景延廣이 반드시 거란의 침입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다만 더욱 군대를 모집하여 契丹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契丹主가 마침내 山後와 盧龍의 군대 5만 명을 모아서 趙延壽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고 趙延壽에게 中國을 경략하는 일을 맡기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中國을 얻으면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趙延壽가 契丹을 위해 힘을 다해서 中國을 점령할 계책을 세웠다.

○ 契丹 〈會同六年이라〉

契丹 - 會同 6년이다. -

[甲辰]晉開運元年

[甲辰]〈晉開運元年이라 ○ 是歲에 凡六國, 三鎭이라〉

갑진(944) - 晉나라 開運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正月에 契丹이 陷貝州하다 時에 用兵方略號令이 皆出延廣하고 宰相以下는 皆無所預라 延廣이 乘勢使氣하야 陵侮諸將하니 雖天子라도 亦不能制러라

정월에 契丹이 貝州를 함락하였다. 이때 용병하는 방략과 호령이 모두 景延廣에게서 나오고 재상 이하는 모두 참여하지못하였다. 景延廣은 권세를 믿고 기세를 부려서 장수들을 능멸하고모욕하니, 비록 천자라도 제재하지못하였다.

○ 閩拱宸都指揮使朱文進이 弑閩王하다

閩나라 拱宸都指揮使朱文進閩王王曦를 시해하였다.

○ 或謂晉主曰 陛下欲禦北狄, 安天下인댄 非桑維翰이면 不可라한대 乃復置樞密院하고 以維翰爲中書令兼樞密使하야 事無大小히 悉以委之하니 數月之間에 朝廷이 差治하니라

혹자가 晉主에게 이르기를 “폐하께서 北狄을 막고 천하를 편안히 하고자 하신다면 桑維翰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晉主가 마침내 다시 樞密院을 설치하고桑維翰을 中書令兼樞密使로 임명하여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맡기니, 몇 달 만에 조정이 다소 다스려졌다.

○ 契丹之入寇也에 晉主再命劉知遠하야 會兵山東호되 皆後期不至하니 晉主疑其有異圖라 郭威【藩漢孔目官이니 是爲後周太祖라 】知遠有憂色하고 謂知遠曰 河東은 山河險固하고 風俗尙武하며 土多戰馬하야 靜則勤稼穡하고 動則習軍旅하니 此는 霸王之資라 何憂乎리오하니라

契丹이 침입하였을 적에 晉主가 다시 劉知遠에게 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山東에서 회합하게하였으나 모두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晉主가 그에게 딴 생각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郭威郭威는 藩漢孔目官이니, 이가 後周의 太祖이다.】劉知遠에게 근심하는 기색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劉知遠에게 이르기를 “河東 지방은 산천이 험고하고 풍속이 武勇을 숭상하며, 이 지역에는 戰馬가 많아서 조용할 때에는 농사를 부지런히 힘쓰고 동요할 때에는 군대를 훈련시키니, 이는 霸王을 이룩할 수 있는 밑천입니다. 어찌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 契丹 〈會同七年이라〉

契丹 - 會同 7년이다. -

[乙巳]晉開運二年

[乙巳]〈晉開運二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殷改稱閩而亡하니라〉

을사(945) - 晉나라 開運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殷나라가 閩이라고 개칭하였으나 바로 망하였다.-

契丹이 復大擧入寇라가 大敗北歸하다

契丹이 다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침입하였다가대패하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契丹이 連歲入寇하니 中國이 疲於奔命하고 邊民塗地어늘 桑維翰이 屢勸晉主하야 復請和於契丹하야 以紓國患하다

契丹이 해마다 침입하니, 中國의 백성들은 명령을 받드느라 지치고 변방의 백성들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桑維翰晉主에게 여러 번 권해서 다시 契丹에게 화친을 청하여 국가의 환난을 풀도록 하였다.

晉主自陽城之捷【是年三月에 都排陳使苻彦卿等이 至陽城하야 擊契丹하야 大敗之하니라 】으로 謂天下無虞라하야 驕侈益甚하고 馮玉【同平章이라 】이 乘勢弄權하야 四方賂遺 輻輳其門하니 由是로 朝政이 益壞하니라

晉主가 陽城에서 승리한 뒤로【이해 3월에 都排陳使[ 苻彦卿] 등이 陽城에 이르러서 契丹을 공격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천하에 근심할 일이 없다 하여 교만하고사치함이 더욱 심하였고, 馮玉馮玉은 同平章事이다.】 세력을 믿고 권세를 농간하여 사방의 뇌물이 그의 집에 폭주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정사가 더욱 파괴되었다.

○ 契丹 〈會同八年이라〉

契丹 - 會同 8년이다. -

[丙午]晉開運三年

[丙午]〈晉開運三年이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병오(946) - 晉나라 開運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十一月에 契丹主大擧入寇어늘 晉主杜威爲上將【謂北面行營都招討使也라 】이러니 威與李守貞【以天平節度使로 爲兵馬都監하니라 】, 宋彦筠【以前威勝節度使로 爲步軍左廂都指揮使하니라 】謀降契丹하다 契丹主紿之曰 趙延壽威望素淺하야 恐不能帝中國이라 汝果降者면 當以汝爲之호리라 威喜하야 遂降하고 命軍士釋甲하니 軍士皆慟哭하야 聲振原野러라 張彦澤【彰德節度使니 引兵爲前鋒하니라 】이 倍道疾驅하야 夜度白馬津하야 未明에 自封丘門으로 斬關而入하야 遷晉主於開封府하다

11월에 契丹主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들어와 침략하자, 晉主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는데,杜威를 上將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北面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한 것을 이른다.】杜威李守貞李守貞은 天平節度使로서 兵馬都監이 되었다.】, 宋彦筠宋彦筠은 前 威勝節度使로서 步軍左廂都指揮使가 되었다.】 함께 契丹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契丹主가 이들을 속여 말하기를 “趙延壽는 위엄과 인망이 본래 부족하여 中國의 황제가 되지 못할까 두렵다. 너희들이 과연 항복한다면 마땅히 너를 황제로 세우겠다.” 하였다. 杜威가 기뻐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으라고 명하니,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언덕과 들판에 진동하였다.

張彦澤張彦澤은 彰德節度使이니, 군대를 이끌고 선봉이 되었다.】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급히 달려와서 밤에 白馬津을 건너 날이 밝기 전에 封丘門으로부터 관문을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와서晉主를 開封府로 옮겼다.

契丹 〈會同九年이라〉

契丹 - 會同 9년이다. -

歷年圖曰 高祖石敬塘이라 】以地尊勢重으로 迫於猜嫌한대 親執臣子之禮하야 以事戎狄하고 賂之土地하야 籍其兵力하야 以取天下하니 羽翼未成이면 不可以高飛요 國家未治면 不可以應敵이라 齊王은 捨桑維翰之深謀하고 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而外挑彊隣하야 使流民塗野草하고 胡騎汚宮闕하야 生爲降虜하고 死爲羈魄하니 非不幸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少主信景延廣之狂策하야 內政不修하고 外挑强胡라 自陽城一捷之後로 顧謂國勢無虞라하야 驕奢益甚하야 四方貢獻을 皆歸內府하며 廣置宮室하고 崇飾後庭하며 賞賜伶優에 多寡無算하고 委任馮玉하야 倚勢弄權이라 當旱蝗水潦 國脈如線之時하야 方且今年에 遣使括民穀하고 明年에 遣使括民財하며 迨夫契丹入寇하야 境內皇皇이로되 猶且調鷹苑內하고 排沮人言하야 遂使橫尸蔽野하고 宗廟丘墟하니 跡其人謀하면 豈不幸哉아 夫以晉之立國이 絶滅三綱하고 屛棄五常이라 報叔母爲妻하야 而夫婦亂矣요 尊夷狄爲父하야 而父子亂矣요 爲中國主하야 臣于契丹하야 而君臣亂矣라 三綱旣失에 中國已淪胥爲夷하니 不待契丹主服赭袍坐崇元殿하야 令百官行入閤禮하고 而風聲氣習之來侵이 已非一日矣라 此蓋人道之大變이요 中國之巨禍라 至使斯人으로 與禽獸雜處하야 而又離其害焉하니 此豈容以常理斷哉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石敬塘)高祖石敬塘이다.】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한 이유로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자, 신하의 예를 친히 행하여 戎狄(거란)을 섬기고 토지를 바쳐 병력을 빌려서 이로써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羽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높이 날 수가 없고 국가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적에 대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齊王(石重貴)桑維翰의 깊은 계책을 버리고 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內政을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이웃나라에 도전하여, 유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풀에 피를 뿌리게 하고 오랑캐 기병으로 하여금 궁궐을 더럽히게 하여, 살아서는 항복한 포로가 되고 죽어서는 떠돌아다니는 혼백이 되었으니, 이는 불행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少主(石重貴)景延廣의 미친 계책을 믿고서 안으로 정사를 닦지 않고 밖으로 강한 오랑캐에게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陽城에서 한 번 승리한 뒤로는 도리어 國勢가 근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四方에서 貢物로 바친 것을 모두 內府로 돌리며, 궁실을 널리 건축하고 後庭을 성대하게 꾸미며, 광대들에게 賞을 줄 적에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외척인 馮玉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권세를 믿고 농간하게 하였다. 가뭄이 들고 蝗蟲이 발생하며 수해가 들어 국가의 명맥이 실낱 같은 때를 당하여, 도리어 금년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곡식을 긁어모으고, 다음해에 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거란이 쳐들어옴에 미쳐서 境內가 위급하였으나 오히려 上林苑 안에서 매를 조련하고 사람들의 간언을 배척하고 막아서 마침내 시신이 들을 뒤덮고 宗廟가 폐허가 되게 하였으니, 사람의 잘못된 계책을 살펴보면 어찌 불행이라 하겠는가.

晉나라가 건국할 때에 三綱을 끊어 없애고 五常(五倫)을 물리쳐 버렸다. 叔母를 간음하고 아내로 삼아 夫婦의 윤리가 문란하였고, 夷狄을 높여 아버지라 칭하여 父子의 윤리가 혼란하였고, 中國의 군주로서 契丹에게 신하 노릇하여 君臣의 도리가 혼란해졌다. 三綱을 잃은 뒤에 中國이 이미 몰락하여 서로 오랑캐가 되었으니, 굳이 契丹의 군주가 붉은 도포를 입고 崇元殿에 앉아서 百官들로 하여금 入閤禮를 행하게 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랑캐의 風聲(風敎)과 氣習에 침입당한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이는 人道의 큰 변고이고 中國의 큰 禍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로 하여금 禽獸와 함께 처하게 하여 또다시 그 폐해를 입게 하였으니, 이 어찌 떳떳한 이치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右後晉은 二主에 共十一年이라

이상 後晉은 두 군주에 모두 1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