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四十三 唐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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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紀

代宗 睿文孝武皇帝

요 初名이니 肅宗長子라

代宗【母는 吳氏代宗卽位하야 追尊爲章敬皇后하니라】睿文孝武皇帝※名요 初名이니 肅宗長子라 在位十七年이요 壽五十三이라

※平亂守成하야 足爲中材之主나 然藩鎭陸梁하야 上陵下替하야 養成亂階하니 唐之紀綱大壞하야 不可復振은 則之爲也니라

代宗【代宗의 어머니는 吳氏이니, 代宗이 즉위하자 章敬皇后로 추존하였다.】睿文孝武皇帝는 이름이 이고 처음 이름이 이니, 肅宗의 長子이다. 재위가 17년이고, 壽가 53세이다.

난리를 평정하고 선대가 성취한 것을 지켜서 충분히 中材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藩鎭이 날뛰어 위로 능멸하고 아래로 침체해서 亂의 階梯(발단)를 양성하였으니, 唐나라의 기강이 크게 무너져 다시 떨쳐지지 못한 것은 肅宗代宗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癸卯]廣德元年

[癸卯]廣德元年이라

僕固瑒等이 追及史朝義於莫州하야 圍之하니 朝義屢出戰皆敗하고 選精騎五千하야 自北門으로 犯圍而出이라 李懷仙【柳城胡也라 僕固懷恩이 奏爲幽州盧龍節度使러니 懷恩叛에 朝廷方勤西師라 故懷仙이 得招散亡하고 治城邑하니 天子不能制하니라 】이 遣兵追及之하니 朝義窮蹙하야 縊於林中이어늘 懷仙이 取其首以獻하니 僕固懷恩이 與諸軍皆還하다

廣德 元年(계묘 763)

僕固瑒 등이 史朝義를 莫州로 추격하여 따라잡아서 포위하니, 史朝義가 여러 번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는 정예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北門으로부터 포위를 뚫고 나갔다. 李懷仙李懷仙은 柳城의 오랑캐이다. 僕固懷恩이 아뢰어 그를 幽州와 盧龍의 節度使로 삼았는데, 僕固懷恩이 배반하자 조정에서 막 서쪽 지방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므로 李懷仙이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고 城邑을 다스리니, 天子가 제재하지 못하였다.】 군대를 보내어 따라잡게 하니, 史朝義가 곤궁하고 위축되어 숲 속에서 목을 매어죽었다. 李懷仙이 그의 머리를 취하여 바치니, 僕固懷恩이 여러 군대와 함께 모두 돌아왔다.

○ 閏月에 以史朝義降將薛嵩으로 爲相【商所都라 】, 衛, 邢, 洛, 貝, 磁六州節度使하고 田承嗣【亦降將이라 】로 爲魏, 博【魏博藩鎭은 自田承嗣始라 傳五世하야 至田(洪)[弘]正하야 入朝러니 七年復亂하야 更四姓, 傳十世하니라 有州七하니 曰貝, 魏, 相, 磁, 洛, 博, 衛라】, 德, 滄, 瀛五州都防禦使하고 李懷仙은 仍故地하야 爲幽州, 盧龍【盧龍藩鎭은 自李懷仙始라 更三姓, 傳五世하야 至劉總入朝러니 六月에 朱克融反하야 傳十二世하니라 有州九하니 曰幽, 涿, 營, 瀛, 莫, 平, 薊, 嬀, 檀이라 】節度使하니 時에 河北諸州皆已降이라 僕固懷恩이 恐賊平寵衰라 故로 奏留等及李寶臣祿山假子니 歸命於朝어늘 名其軍曰成德이라하고 卽拜節度使하니 有恒, 定, 易, 趙, 深, 冀, 卞州之地하야 雄冠山東하니라 】하야 分帥河北하야 自爲黨援이어늘 朝廷이 亦厭苦兵革하고 苟冀無事하야 因而授之하니라 〈懷恩傳〉

[新增]范氏曰 唐失河北이 實自此始하니 由任蕃夷爲制將也라 使爲將光弼, 子儀라 】이면 肯如是乎아

윤달에 史朝義의 항복한 장수 薛嵩을 相州,【相州는 商나라의 도읍터이다.】衛州, 邢州, 洛州, 貝州, 磁州 여섯 주의 절도사로 삼고, 田承嗣田承嗣 또한 항복한 장수이다.】魏州, 博州,【魏州와 博州의 藩鎭은 田承嗣로부터 시작되었다. 5代를 전하여 田弘正에 이르러 들어와 조회하였는데, 7년 만에 다시 반란하여 네 姓을 거치고 10代를 전하였다. 일곱 州를 소유하였으니, 貝州, 魏州, 相州, 磁州, 洛州, 博州, 衛州이다.】德州, 滄州, 瀛州 다섯 주의 都防禦使로 삼았으며, 李懷仙은 옛 땅을 그대로 차지하여 幽州와 盧龍의【盧龍의 藩鎭은 李懷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 姓을 거치고 5대를 전하여 劉總에 이르러 들어와 조회하였는데, 6월에 朱克融이 배반하여 12대를 전하였다. 아홉 州를 소유하였으니, 幽州, 涿州, 營州, 瀛州, 莫州, 平州, 薊州, 嬀州, 檀州이다.】節度使로 삼으니, 이때에 河北의 여러 州가 다 이미 항복하였다. 僕固懷恩은 적이 평정되면 자신의 총애가 쇠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임금께 아뢰어 薛嵩 등과 李寶臣李寶臣安祿山의 假子(양자)이다. 조정에 歸命(歸順)하였으므로 그 군대를 成德軍이라 이름하고 곧바로 節度使를 제수하니, 恒州‧定州‧易州‧趙州‧深州‧冀州‧卞州의 땅을 보유하여 세력이 山東 지방에 으뜸이었다.】 남겨 두어 河北 지방을 나누어 통솔하게 해서 스스로 黨援이 되게 하였는데, 조정에서도 전란을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고는 구차히 무사함을 바라서 그대로 제수하였다.- 《舊唐書 僕固懷恩傳》에 나옴 -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唐나라가 河北 지방을 잃은 것은 실로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蕃夷 출신에게 맡겨서 制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령 李光弼郭子儀가 장수가 되었다면李郭李光弼郭子儀이다.】 기꺼이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六月에 禮部侍郞楊綰이 上疏하야 以爲 古之選士엔 必取行實이러니 近世엔 專事文辭라 自隋煬帝로 始置進士科로되 猶試策而已러니 至高宗時하야 考功員外郞劉思立이 始奏하야 進士에 加雜文【進士는 謂所試一大經에 倂爾雅帖하야 皆通而後에 試文試賦各一篇하고 文賦通而後에 試策凡五條하야 三試皆通者를 爲第하니라 】하고 明經에 加帖括【明經帖括은 謂所試一大經에 倂孝經, 論語, 爾雅하고 其他有差帖을 皆通而口問之호되 一經에 問十義하야 得六者를 爲通하고 問通而後에 試策凡三條하야 三試皆通者를 爲(策)[第]하니라 [附註] 帖試는 謂以所習經으로 掩其兩端하고 中間에 (推間)[惟開]一行하며 裁紙爲帖하야 凡帖三字호되 隨時增損하야 可否不一하니 或得四得五得六者를 爲通하니라 】하니 從此積弊하야 轉而成俗이라 朝之公卿이 以此待士하고 家之長老【長老는 謂年長老成之人이라 】以此訓子하야 其明經則誦帖括【誦帖括曰帖誦이요 其明經則誦帖이니 括은 謂機括而誦之니라】하야 以求僥倖하고 又擧人이 皆令投牒自應하니 如此요 欲其返淳朴, 崇廉讓인들 何可得也리잇고 請令縣令으로 察孝廉하야 取行著鄕閭하고 學知經術하야 薦之於州어든 刺史考試하야 升之於省하야 任各占(二)[一]經하고 朝廷은 擇儒學之士하야 問經義二十條와 對策三道하야 上第【謂才優而品第最高者라 】는 卽注官하고 中第는 得出身하고 下第는 罷歸하소서 又道擧【唐制取士에 歲擧常選之外에 其天子自詔者曰制擧니 道其所欲問而親策之하니라 [頭註] 玄宗尊重道敎하야 置玄學博士하고 每歲에 依明經擧하니 卽道擧也라 】는 亦非理國所資望이니 與明經, 進士로 竝停하소서 或이 以爲明經, 進士는 行之已久라 不可遽改라하야 事雖不行이나 識者是之하니라

6월에 禮部侍郞楊綰이 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선비를 뽑을 때에 반드시 행실을 취하였는데, 근세에는 오로지 문장만을 일삼습니다. 隋나라 煬帝로부터 처음으로 進士科를 설치하였으나 오히려 策問으로 시험할 뿐이었는데, 高宗 때에 이르러 考功員外郞인 劉思立이 처음 아뢰어 進士科에 雜文을 가하고【進士는 시험하는 한 大經에 ≪爾雅≫의 帖까지 아울러서 모두 통과한 뒤에 文과 賦를 각각 한 편씩 시험하고, 文과 賦를 통과한 뒤에 策文을 모두 다섯 조항 시험하여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하는 것을 이른다.】明經科에 帖括을 가하였으니,【[釋義] 明經科의 帖括은 시험하는 한 가지 大經에 ≪孝經≫과 ≪論語≫와 ≪爾雅≫를 겸하고 기타 差帖이 있는 것을 다 통틀어 구두로 묻되 한 가지 經에 열 가지 뜻을 물어서 여섯 가지 이상을 아는 자를 通이라 하고, 물음에 통과한 뒤에 策文을 모두 세 조항 시험하여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하는 것을 이른다. [附註] 帖試는 擧人이 익힌 經을 가지고 양쪽을 가리고 중간에 오직 한 행을 열어 보여주며, 종이를 잘라 帖을 만들어서 무릇 帖에 세 글자를 쓰되 때에 따라 가감하여 가부가 똑같지 않으니, 혹 넷을 알고, 혹 다섯을 알고, 혹 여섯을 아는 자를 通이라 함을 이른다.】 이로부터 폐단이 쌓여 전전하여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公卿들은 이로써 선비를 대하고 집안의 長老들은【長老는 나이가 많고 老成한 사람을 이른다.】 이로써 자제들을 가르쳐서 明經科를 치르는 사람은 帖括을 외게 하여【帖括을 외는 것을 帖誦이라 한다. 明經科는 帖을 외웠으니, 括은 機括을 맞추어서 외우는 것을 이른다.】 요행으로 급제하기를 바라고, 또 擧人(응시생)들은 다 牒을 바쳐 스스로 응시하게 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淳朴한 데로 돌아가고 청렴과 겸양을 숭상하게 하고자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縣令으로 하여금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을 살펴서 행실이 鄕閭에 드러나고 학문이 經術(經學)을 아는 자를 취하여 州에 천거하게 하면 刺史는 考試하여 尙書省으로 올려보내어 각각 자기 마음대로 한 가지 經을 口述하게 하고, 조정에서는 儒學하는 선비들을 가려서 經義 20條와 對策文 세 가지를 물어서 上第는【上第는 재주가 뛰어나 품평한 등급이 가장 높은 자를 이른다.】 바로 관직을 제수하고, 中第는 出身하게 하고, 下第는 파하여 돌아가게 하소서. 또 道擧科는【[釋義] 唐나라 제도에 선비를 뽑을 적에 해마다 천거하여 항상 선발하는 것 외에 천자가 직접 詔命하는 것을 制擧라 하였으니, 그 묻고자 하는 바를 말하게 하여 천자가 친히 策問을 행하는 것이다. [頭註] 玄宗이 道敎를 존중하여 玄學博士를 설치하고 매년 明經科에 따라 시험보이니, 이것이 바로 道擧이다.】 또한 나라를 다스림에 의지하고 기대할 바가 아니니, 明經科와 進士科와 함께 모두 정지하소서.”

혹자는 말하기를 “明經科와 進士科는 행한 지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여 일이 비록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識者들이 옳게 여겼다.

○ 七月에 吐蕃이 入大震關【隴州汧源縣大震關이니 後改曰安戎이라 】하야 盡取河西, 隴右之地하다

7월에 吐蕃이 大震關으로 침입하여【隴州汧源縣의 大震關이니, 뒤에 이름을 고쳐 安戎이라 하였다.】河西와 隴右 땅을 모두 점령하였다.

○ 初에 河東節度使辛雲京이 與僕固懷恩으로 構隙하야 奏懷恩謀反이라하야늘 上이 優詔和解之하다 懷恩이 自以兵興以來로 所在力戰하야 一門死王事者 四十六人이요 女嫁絶域【回紇求婚이어늘 肅宗懷恩女妻하니라 】하야 說諭回紇【在上卷壬寅年하니라 】하야 再收兩京하고 平定河南北하야 功無與比어늘 而爲人所構陷이라하야 憤怨殊深하야 上書自訟호되 言甚切至라 上이 遣使慰諭之하다

처음에 河東節度使辛雲京僕固懷恩과 틈이 있어 僕固懷恩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아뢰자, 上이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 이들을 화해시켰다. 僕固懷恩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란이 일어난 뒤로 이르는 곳마다 힘껏 싸워 한 가문에서 王事에 죽은 자가 46명이며, 딸을 먼 이역인 回紇로 시집보내어【回紇에서 혼인을 요구하자, 肅宗僕固懷恩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回紇을 설득하고 타일러서【回紇을 설득하고 타이른 일은 上卷의 壬寅年(762)에 있다.】 〈출병하게 하여〉다시 東京과 西京을 수복하고 河南과 河北을 평정하여, 공이 〈나와〉견줄 자가 없는데 사람들에게 모함을 당했다.’ 하여, 분노하고 원망함이 특별히 심하였다. 그리하여 글을 올려 자책하였는데, 말이 몹시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上이 그에게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

○ 吐蕃之初入寇也에 邊將이 告急호되 程元振이 皆不以聞이러니 冬十月辛未에 寇奉天, 武功하니 京師震駭라 詔以雍王로 爲關內元帥하고 郭子儀로 爲副元帥하야 出鎭咸陽하야 以禦之하다 子儀閑廢日久하야 部曲【將軍領軍에 皆有部曲하야 大將軍營五部니 部校尉一人이요 部有曲하니 曲有軍侯一人하니라 】離散이라 至是하야 召募得二十騎而行하야 至咸陽하니 吐蕃이 帥吐谷渾, 党項【三苗羌姓之別裔니라 】, 氐, 羌二十餘萬衆하야 彌漫數十里라 子儀使判官王延昌으로 入奏請益兵이러니 程元振이 遏之하야 竟不召見하다 上方治兵에 而吐蕃이 已度便橋하니 倉猝에 不知所爲하야 丙子에 出幸陝州하다 戊寅에 吐蕃이 入長安하야 剽掠府庫市里하고 焚廬舍하니 長安中이 蕭然一空이러라

吐蕃이 처음 쳐들어와 침략할 적에 변방의 장수들이 조정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程元振이 모두 보고하지 않았는데, 겨울 10월 辛未日(2일)에 奉天과 武功을 침략하니, 京師가 진동하고 놀랐다. 조칙을 내려 雍王李适을 關內元帥로 삼고郭子儀를 副元帥로 삼아 출병하여 咸陽에 진주해서 吐蕃을 막게 하였다.

郭子儀는 한직으로 폐출 당한 지가 오래되어 部‧曲들이【將軍이 군대를 거느릴 적에 모두 部와 曲이 있었다. 그리하여 大將軍의 營은 5部가 있으니 部에 校尉 1명이 있고, 部에 曲이 있으니 曲에 軍侯 1명이 있었다.】 모두 이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들을 불러 모집하여 20명의 기병을 얻고 길을 떠나 咸陽에 이르니, 吐蕃이 吐谷渾과 党項,【党項은 三苗族인 오랑캐 성씨의 후예이다.】氐族과 羌族 등 20여 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군대가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 郭子儀가 判官인 王延昌으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가 군대를 더 증원해 줄 것을 奏請하게 하였는데, 程元振이 이를 저지하여 上이 끝내 불러 만나보지 않았다.

上이 막 군대를 다스릴 적에 吐蕃이 이미 便橋를 건너오니,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丙子日(7일)에 성을 나가 陝州로 행차하였다. 戊寅日(9일)에 吐蕃이 長安에 들어와서 府庫와 시장과 마을을 노략질하고 廬舍를 불태우니, 長安이 쓸쓸하게 모두 비었다.

郭子儀引三十騎하고 自御宿川【在長安城南하니라 漢武帝爲離宮別館하고 禁禦人하야 不得往來遊觀하고 止宿其中이라 故로 曰御宿이니 見三輔黃圖記也하니라 】으로 循山而東할새 謂王延昌曰 六軍將士逃潰者 多在商州하니 今速往收之호리라하더니 比至商州하야 行收兵하야 合四千人하니 軍勢稍振이라 子儀乃泣諭將士以共雪國恥, 取長安하니 皆感激受約束이라 子儀使張孫, 全緖로 將二百騎하고 出藍田하야 觀虜勢러니 全緖至韓公堆하야 晝則擊鼓張旗幟하고 夜則多燃火하야 以疑吐蕃하고 百姓이 又紿之曰 郭令公【郭子儀時爲中書令이라 故로 稱令公하니라 】이 自商州로 將大軍하야 不知其數至矣라하니 虜以爲然하야 悉衆遁去어늘 詔以子儀로 爲西京留守하다

[新增]胡氏曰 郭子儀之德之才는 可以兼任將相이어늘 乃置之閑處라가 及有急難이면 又遽委用之라 代宗이 於閹尹之言에 受命如響하야 進退子儀를 如待奴隸라 自李光弼已下로 恃功負氣하니 夫豈堪此리오 獨子儀는 無纖芥于胸中하야 一聞君命이면 不俟駕而行하야 蹈危履險하야 死生以之라 其忠義精誠이 仰貫白日이요 而度量宏偉하야 無所不包하니 眞可以爲人臣之師表矣라 使代宗挈國權兵柄而付之런들 于以復太宗之業이 何難焉이리오마는 而不能也하니 可勝歎哉아

郭子儀가 30명의 기병을 이끌고 御宿川으로부터【御宿川은 長安城 남쪽에 있다. 漢武帝가 離宮의 別館을 만들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여, 왕래하며 구경하거나 이 가운데에서 유숙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御宿川이라 하였으니, ≪三輔黃圖記≫에 보인다.】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갈 적에 王延昌에게 이르기를 “六軍의 장병 중에 도망하여 궤멸된 자들이 대부분 商州에 있으니, 지금 속히 가서 수습하겠다.” 하였는데, 商州에 이르렀을 무렵 가면서 군대를 수습한 것이 도합 4천 명이니, 군세가 약간 떨쳐졌다. 郭子儀가 마침내 울면서 장병들에게 함께 국가의 치욕을 씻고 長安을 탈환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니, 모두 감격하여 約束(지휘)을 받았다.

郭子儀張孫全緖로 하여금 2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藍田으로 나가서 오랑캐의 군세를 관찰하게 하였는데, 全緖가 韓公堆에 이르러 낮에는 북을 치고 旗幟를 늘어세우고, 밤이면 불을 많이 피워서 吐蕃을 의심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이 또한 거짓말하기를 “郭令公郭子儀가 당시 中書令이 되었으므로 令公이라 칭한 것이다.】商州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고 오는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숫자가 몰려온다.” 하니, 오랑캐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도망하였다. 조칙을 내려 郭子儀를 西京留守로 임명하였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郭子儀의 덕과 재주는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 맡길 만하였는데 마침내 한직에 두었다가 국가가 위급하고 난리가 나면 또 급히 벼슬을 맡겨 등용하였다. 代宗이 환관의 말에는 메아리가 응하듯이 지시를 따라서 郭子儀를 내고 물리기를 노예를 대하듯이 하였다. 李光弼로부터 이하는 자신의 공을 믿고 자신의 기상을 자부하였으니, 어찌 이것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홀로 郭子儀만은 가슴 속에 조금도 서운한 마음이 없어서 한 번 임금의 명령을 들으면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떠나서 위험함을 밟아 죽고 사는 것을 여기에 맡겼다. 그 충의와 정성이 위로 白日(太陽)을 꿰뚫고, 度量이 크고 넓어서 포함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참으로 인신의 師表가 될 만하다. 만일 代宗이 國權과 兵權을 가져다가 그에게 맡겼던들 이에 太宗의 功業을 회복하는 것이 어찌 어려웠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루 탄식할 수 있겠는가.”

程元振이 專權自恣하니 人畏之를 甚於李輔國이요 諸將에 有大功者면 元振이 皆忌疾(嫉)欲害之러라 吐蕃入寇에 元振이 不以時奏하야 致上狼狽出幸하고 上이 發使徵諸道兵호되 李光弼等이 皆忌元振居中하야 莫有至者하니 中外咸切齒로되 而莫敢發言이라 太常博士柳伉이 上疏하야 以爲 犬戎이 犯關度隴에 不血刃而入京師하야 刦宮闈하고 焚陵寢호되 武士無一人至者하니 此는 將帥叛陛下也요 自十月朔으로 召諸道兵하야 盡四十日호되 無隻輪入關하니 此는 四方叛陛下也라 內外離叛하니 陛下以今日之勢로 爲安耶잇가 危耶잇가 若以爲危신댄 豈得高枕하야 不爲天下討罪人乎잇가 必欲存宗廟社稷이신댄 獨斬元振首하야 馳告天下하고 悉出內使【時에 宦官이 皆爲內諸司使라 故曰內史니 言悉出諸宦官하야 隷諸州하니라 】하야 隷諸州하고 持神策兵하야 付大臣【謂時魚朝恩領神策軍하니라 】하소서 然後에 削尊號하고 下詔引咎曰 天下其許朕自新改過어든 宜卽募士하야 西赴朝廷이요 若以朕惡未悛이어든 則帝王大器를 敢妨聖賢이리오 其聽天下所往이라하사 如此而兵不至, 人不感하고 天下不服이어든 臣은 請闔門寸斬하야 以謝陛下호리이다 上以元振嘗有保護功【殺張后事니 見上卷壬寅年하니라 】이라하야 十一月에 削元振官爵하고 放歸田里하다

程元振이 권력을 독점하여 제멋대로 방자하니 사람들이 그를 李輔國보다도 더 심하게 두려워하였으며, 諸將 중에 큰 공이 있는 자는 程元振이 모두 시기하고 미워하여 살해하고자 하였다. 吐蕃이 쳐들어와 침략했을 적에 程元振이 제때에 아뢰지 않아서 上이 낭패하여 파천하도록 만들었고, 上이 사자를 보내어 여러 도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나 李光弼 등이 모두 程元振이 중앙에 있는 것을 꺼려 아무도 달려온 자가 없으니, 中外가 모두 이를 갈았으나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太常博士柳伉이 上疏하여 아뢰기를 “犬戎이 관문을 범하고 隴 지방을 건너왔는데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京師에 들어와서 宮闈를 위협하고 陵寢을 불태웠으나 武士 중에 한 사람도 달려온 자가 없으니 이는 將帥가 陛下를 배반한 것이요, 10월 초하루 이후로 여러 도의 군대를 불러 40일이 다 지나도록 단 한 대의 수레도 관문에 들어온 것이 없으니 이는 사방이 폐하를 배반한 것입니다. 內外가 離叛하였으니, 陛下께서는 금일의 형세를 편안하다고 여기십니까? 위태롭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위태롭다고 여기신다면 어찌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만 자고〉천하를 위하여 죄인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陛下께서 반드시 宗廟와 社稷을 보존하고자 하신다면 오직 程元振의 머리를 베어 급히 천하에 고하시고, 內史(宦官)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이때 宦官들이 모두 宮內에 있는 諸司의 使가 되었다. 그러므로 內史라 칭하였으니, 悉出內史는 宦官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 여러 州에 예속시킴을 말한 것이다.】 여러 州에 예속시키고 神策軍을 가져다가 大臣에게 맡기소서.【이때에 魚朝恩이 神策軍을 거느리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 뒤에 尊號를 삭제하고 조서를 내려 자책하시기를 ‘천하 사람들이 짐이 스스로 새로워져 허물을 고치는 것을 허락하거든 마땅히 즉시 군대를 모집하여 서쪽으로 달려와 조정을 구원할 것이요, 만약 짐의 악을 고칠 수 없다고 여기거든 帝王의 지위를 가지고 내 감히 聖賢을 방해하겠는가. 나는 천하가 가는 바를 따르겠다.’ 하소서. 이와 같이 하여 구원하는 군사들이 오지 않고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고 천하가 복종하지 않거든, 신은 온 가문사람을 한 치 한 치 베어 죽여서 폐하께 사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上은 程元振이 일찍이 保護한 공로가 있다 하여【保護한 공은 張后를 죽인 일이니, 上卷 壬寅年(762)에 보인다.】11월에 程元振의 官爵을 삭탈하고추방하여 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 十二月甲午에 上이 至長安하니 郭子儀帥城中百官及諸軍하고 迎於滻水東하야 伏地待罪어늘 上이 勞之曰 用卿不早라 故로 及於此로다

12월 甲午日(26일)에 上이 長安에 이르니, 郭子儀가 城中의 百官과 諸軍들을 거느리고 滻水 동쪽에서 大駕를 맞이하여 땅에 엎드려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上은 위로하기를 “경을 일찍 등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甲辰](三)[二]이라

[甲辰](三)[二]年이라

僕固懷恩이 反이어늘 上이 謂郭子儀懷恩父子 負朕實深이라 聞朔方將士思公을 如枯旱之望雨라하니 公爲朕하야 鎭撫河東이면 汾上之師【汾上은 謂汾州하니 時에 朔方軍多在焉하니라 】必不爲變하리라하고 乃以子儀로 爲關內河東副元帥, 河中節度使하니 懷恩將士聞之하고 皆曰 吾輩從懷恩爲不義하니 何面目으로 見汾陽王【卽子儀라 】이리오 僕固瑒이 圍楡次【楡次는 縣名이라 】에 旬餘不拔이러니 其將白玉, 焦暉【二人이라 】率衆攻瑒殺之하다 懷恩이 聞之하고 與麾下三百人으로 度河北走하다 子儀傳瑒首詣闕하니 群臣入賀호되 上이 慘然不悅曰 朕이 信不及人하야 致勳臣顚越하니 深用爲愧로니 又何賀焉이리오하고 命輦懷恩母하야 至長安하야 給待優厚러니 月餘에 以壽終이어늘 以禮葬之하니 功臣이 皆感歎이러라 郭子儀如汾州하니 懷恩之衆數萬이 悉歸之하야 咸鼓舞涕泣하고 喜其來而悲其晩也러라

廣德 2년(갑진 764)

僕固懷恩이 배반하자, 上은 郭子儀에게 이르기를 “僕固懷恩 父子가 짐을 저버림이 실로 깊다. 내 들으니 ‘朔方의 장병들이 공을 그리워하기를 마르고 가물 때에 비를 바라듯이 한다.’ 하니, 공이 짐을 위하여 河東 지방을 진무하면 汾州의 朔方 군사들이【汾上은 汾州를 이르니, 이때에 朔方軍이 汾州에 많이 있었다.】 반드시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郭子儀를 關內河東副元帥와 河中節度使로 임명하니, 僕固懷恩의 장병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말하기를 “우리들이 僕固懷恩을 따라 不義를 저질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汾陽王(郭子儀)을 뵙겠는가.” 하였다.【汾陽王은 바로 郭子儀이다.】

僕固瑒이 楡次縣을 포위하였으나楡次는 縣의 이름이다.】 열흘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자, 그의 장수인 白玉焦暉【白玉과 焦暉는 두 사람이다.】 무리를 거느리고 僕固瑒을 공격하여죽였다. 僕固懷恩이 이 소식을 듣고 휘하 병사 300명과 함께 黃河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郭子儀僕固瑒의 머리를 전달하여 대궐에 이르니, 群臣들이 들어와 축하하였으나 上은 서글퍼하고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짐이 신의가 남에게 미치지 못하여 勳臣이 전복하게 만들었으니, 깊이 부끄러워하노니 또 어찌 축하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명하여 僕固懷恩의 어머니를 輦을 태워 長安으로 오게 하여 물건을 지급하여 특별히 후대하였으며, 한 달이 넘어 천수로 죽자 예로 장례하니, 功臣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郭子儀가 汾州로 가니, 僕固懷恩의 무리 수만 명이 다 그에게 귀의하여 모두 북을 치고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며, 郭子儀가 온 것을 기뻐하고 그가 늦게 온 것을 슬퍼하였다.

○ 上之幸陝也에 李光弼이 竟遷延不至【遷延은 淹久也라 】라 上이 恐遂成嫌隙하야 其母在河中이어늘 數遣中使存問之【存은 恤問也라 】하고 吐蕃退에 除光弼東都留守하야 以察其去就러니 光弼이 辭以就江淮糧運하고 引兵歸徐州라 上이 迎其母하야 至長安하야 厚加供給하고 使其弟光進으로 掌禁兵하야 遇之加厚【加厚는 所以光弼이라 】하니라

上이 陝州로 파천할 적에 李光弼이 끝내 지체하고 오지 않았다.【遷延은 오래 지체하는 것이다.】上은 마침내 이로 인해 틈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의 어머니가 河中에 있었는데 여러 번 中使를 보내 위문하였으며,【存은 구휼하여 위문하는 것이다.】吐蕃이 물러가자 李光弼을 東都留守로 제수하여 그의 거취를 관찰하였다. 李光弼은 江淮에 나아가 양식을 운반해온다는 구실로 군대를 이끌고 徐州로 돌아갔다. 上이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長安에 이르게 하여 후하게 물건을 공급해주고 그의 아우 光進으로 하여금 禁兵을 관장하게 하여 대우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였다.【李光弼을 더욱 후대한 것은 李光弼을 회유하여 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 自喪亂以來로 汴水湮廢【湮은 塞也라 】하니 漕運者自江漢으로 抵梁洋하야 道險勞費라 三月에 以太子賓客劉晏으로 爲河南江淮以東轉運使하다 時에 兵火之後【兵火는 吐蕃入長安하야 焚廬舍하니 見上年十月이라 】라 中外艱食하야 關中에 米斗千錢하니 百姓은 挼穗【挼는 奴禾反이니 手縈摩也요 穗는 徐醉反이니 禾成秀也라 】以給禁軍하고 宮廚엔 無兼時之積이라 이 乃疏浚【疏는 通也라 】汴水하고 遺元載肅宗末年에 以載爲度支鹽鐵轉運使한대 載乃悉以天下錢穀으로 委之劉晏하니라 時에 載爲相하니라 】書하야 具陳漕運利病하니 中外相應이라 自是로 每歲에 運米數十萬石하야 以給關中하니 唐世에 稱漕運之能者 推爲首요 後來者皆遵其法度云이러라

喪亂이 있은 뒤로부터 汴水가 막혀서 뱃길이 폐지되니,【湮은 막힘이다.】 漕運하는 자들이 揚子江과 漢水로부터 梁州와 洋州에 이르러서 길이 험하여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3월에 太子賓客劉晏을 河南江淮以東 轉運使로 임명하였다. 당시에 兵火를 겪은 뒤라서【兵火는 吐蕃이 長安에 들어와서 廬舍에 불을 지른 것을 가리키니, 上年 10월조에 보인다.】 中外가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 關中 지방의 쌀 한 말 값이 천 錢을 하니, 백성들이 곡식의 푸른 이삭을 훑어【挼는 奴禾反(나)이니 손으로 훑어 만지는 것이고, 穗는 徐醉反(수)이니 벼가 팸을 이른다.】禁軍에게 공급하고, 궁궐의 부엌에는 한 철을 보존할 수 있는 양식이 없었다.

劉晏은 마침내 汴水를 소통하여 준설하고,【疏는 통함이다.】元載에게肅宗 末年에 元載를 度支‧鹽鐵‧轉運使로 삼았는데, 元載가 마침내 모든 天下의 錢穀을 劉晏에게 맡겼다. 당시에 元載가 재상이었다.】 편지를 보내어 漕運의 이해를 자세히 말하니, 중외가 서로 호응하였다. 이로부터 매년 쌀 수십만 석을 운반하여 關中에 공급하니, 唐나라 때의 漕運에 능한 자를 칭할 적에 劉晏을 첫 번째로 추대하였고, 뒤에 온 자들도 다 그의 법도를 따랐다.

○ 五月에 懷恩이 至靈武하야 收合散亡하니 其衆이 復振이러라

5월에 僕固懷恩이 靈武에 이르러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수합하니, 그의 무리가 다시 떨쳐졌다.

○ 七月에 稅天下靑苗錢【唐租庸調之法壞하니 代宗이 以畝定稅하야 斂以夏秋러니 時又以國用急이라하여 不及秋하야 苗方靑이면 卽征之하니 號靑苗錢이라 食貨志에 苗一畝에 稅錢十五라 又有地頭錢하야 每畝二十五니 通名爲靑苗錢이라하니라 】하야 以給百官俸하다

7월에 천하에 靑苗錢을 거두어서【唐나라 租‧庸‧調의 법이 파괴되니, 代宗이 畝에 따라 세금을 정하여 여름과 가을에 거두었는데, 당시에 또 국가의 재용이 급하다 하여 가을이 되기 전에 벼의 싹이 막 푸르기만 하면 바로 세금을 거두니, 이것을 靑苗錢이라 이름하였다. ≪新唐書≫ 〈食貨志〉에 “苗 1畝에 10錢 5分을 세금으로 냈다. 또 地頭錢이 있어 매 畝에 25전이니, 이것을 통칭하여 靑苗錢이라 한다.” 하였다.】백관들의 봉급을 지급하였다.

李光弼이 治軍嚴重하야 指顧號令에 諸將이 莫敢仰視하며 謀定而後戰하야 能以少制衆하니 與郭子儀齊名이러니 及在徐州에 擁兵不朝하니 諸將田神功等이 不復稟畏라 光弼이 愧恨成疾하야 薨하니라

李光弼이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엄격하고 신중하여 지휘하고 호령함에 여러 장수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계책을 결정한 뒤에 싸워서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을 제압하니, 郭子儀와 명성이 똑같았다. 그러다가 徐州에 있게 되자 병력을 보유하고 조회하지 않으니, 諸將인 田神功 등이 다시는 지시를 받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李光弼이 부끄러워하고 한하다가 병을 이루어서 죽었다.

○ 八月에 郭子儀自河中入朝하다 會에 涇原이 奏호되 僕固懷恩이 引回紇, 吐蕃十萬衆하야 將入寇라하니 京師震駭라 詔子儀하야 帥諸將하야 出鎭奉天하고 上이 召問方略한대 對曰 懷恩이 無能爲也니이다 上曰 何故오 對曰 懷恩이 勇而少恩하야 士心不附하니 所以能入寇者는 因思歸之士耳라 懷恩은 本臣偏裨요 其麾下皆臣部曲이라 必不忍以鋒刃相向하리니 以此로 知其無能爲也니이다 十月에 懷恩이 與回紇, 吐蕃으로 進逼奉天하니 京師戒嚴이라 諸將請戰이어늘 郭子儀不許曰 虜深入吾地하니 利於速戰이라 吾堅壁以待之면 彼以吾爲怯하야 必不戒하리니 乃可破也요 若遽戰而不利면 則衆心離矣리니 敢言戰者는 斬호리라 子儀夜出陳於乾陵之南【乾陵은 高宗陵이니 在奉天하니라 】이러니 未明에 虜衆이 大至라 虜始以子儀爲無備라하야 欲襲之러니 忽見大軍하고 驚愕하야 遂涉涇而遯하다

8월에 郭子儀가 河中으로부터 들어와 조회하였다. 마침 涇原 지방에서 아뢰기를 “僕固懷恩이 回紇과 吐蕃의 군사 10여만 명을 이끌고 장차 들어와 침략할 것입니다.” 하니, 京師가 놀라고 진동하였다. 郭子儀에게 명하여 諸將들을 거느리고 나가 奉天에 진주하게 하고, 上이 郭子儀를 불러 方略을 묻자, 郭子儀가 대답하기를 “僕固懷恩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僕固懷恩은 용맹하기만 하고 은혜가 적어서 군사들의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그가 쳐들어와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군사들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僕固懷恩은 본래 신의 偏裨였고 그의 휘하는 실제 모두 신의 部‧曲입니다. 반드시 칼날을 가지고 차마 서로 향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그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줄을 아는 것입니다.” 하였다.

10월에 僕固懷恩이 回紇‧吐蕃과 함께 전진하여 奉天을 핍박하니, 京師가 戒嚴하였다. 諸將들이 싸울 것을 청했으나 郭子儀는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오랑캐가 우리 땅에 깊이 쳐들어왔으니, 速戰하는 것이 이롭다. 우리가 성벽을 굳게 지키고 기다리면 저들은 우리가 겁먹는다고 여겨서 반드시 경계하지 않을 것이니 그제야 격파할 수 있다. 만약 갑자기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離散될 것이니, 감히 싸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였다.

郭子儀가 밤에 나가 乾陵의 남쪽에【乾陵은 高宗의 陵이니, 奉天에 있다.】 진을 쳤는데, 날이 새기 전에 오랑캐 무리가 크게 몰려왔다. 오랑캐들이 처음에는 郭子儀가 대비가 없다고 여겨 습격하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大軍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 마침내 涇水를 건너 도망하였다.

[乙巳]永泰元年

[乙巳]永泰元年이라

李抱眞으로 爲澤潞節度副使【澤潞는 卽昭義藩鎭也라 有州五하니 曰彬, 汾, 晉, 澤, 潞라 】하다 抱眞以山東有變하고 上黨爲兵衝이어늘 而荒亂之餘에 土瘠民困하야 無以贍軍이라하야 乃籍民三丁하고 選一壯者하야 免其租徭하고 給弓矢하야 使農隙習射하고 歲暮都試【都試는 謂總閱試習武備也라 】하야 行其賞罰하니 比三年에 得精兵二萬이라 旣不費廩給하고 府庫充實하야 遂雄視山東하니 由是로 天下稱澤潞步兵하야 爲諸道最하니라

永泰 元年(을사 765)

李抱眞을 澤潞節度副使로 임명하였다.【澤潞는 곧 昭義軍의 藩鎭이다. 다섯 개의 州를 보유하였으니, 彬州, 汾州, 晉州, 澤州, 潞州이다.】李抱眞은 ‘山東 지방에 변란이 있고 上黨은 군대의 요충지인데, 흉년이 들고 난리를 겪은 뒤에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곤궁하여 군량을 공급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성 3丁을 장부에 올리고, 이 가운데 한 명의 건장한 자를 선발하여 조세와 요역(부역)을 면제해준 다음 활과 화살을 지급하여 농한기에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歲暮(年末)에 모두 시험하여【都試는 모두 사열하여 武備를 시험하고 훈련시킴을 이른다.】 賞罰을 시행하니, 3년 만에 정예병 2만 명을 얻었다. 그리하여 이미 국고로 지급하는 것을 허비하지 않고 또 府庫가 충실해져서 마침내 山東 지방의 으뜸이 되니, 이로 말미암아 천하가 澤潞의 보병을 칭하여 여러 도의 으뜸이라 하였다.

○ 吐蕃이 遣使請和어늘 詔元載, 杜鴻漸【兵部侍郞이라 】하야 與盟於興唐寺하다 上이 問郭子儀호되 吐蕃이 請盟하니 何如오 對曰 吐蕃이 利我不虞【利는 幸이요 虞는 度也니 不虞는 猶言不意也라 我不虞度이면 則彼之利라 】하니 若不虞而來면 國不可守矣리이다 乃相繼遣河中兵하야 戍奉天하고 又遣兵巡涇原하야 以覘之하다

吐蕃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자, 元載杜鴻漸에게 명하여杜鴻漸은 兵部侍郞이다.】吐蕃과 함께 興唐寺에서 맹약하게 하였다. 上이 郭子儀에게 묻기를 “吐蕃이 맹약을 청하니,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吐蕃은 우리가 적의 침략을 대비하지 않는 것을 이롭게 여기니,【利는 요행으로 여기는 것이요, 虞는 헤아림이니 不虞는 不意라는 말과 같다. 우리가 적의 침공에 대비할 것을 헤아리지 않으면 저들의 이익인 것이다.】 만약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뜻밖에 적들이 쳐들어온다면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서로 이어 河中의 군대를 보내어 奉天을 지키게 하고, 또 군대를 보내어 涇原 지방을 순시하면서 엿보게 하였다.

○ 時에 成德節度使李寶臣과 魏博節度使田承嗣와 相衛節度使薛嵩과 盧龍節度使李懷仙이 收餘黨하야 各擁勁卒數萬하야 治兵完城하고 自署文武將吏【署는 謂署置之也라 】하고 不供貢賦호되 朝廷이 專事姑息하야 不能復制하니 雖名藩臣이나 羇縻【羇는 馬絡頭也요 縻는 繫也라 】而已러라

이때에 成德節度使李寶臣과 魏博節度使田承嗣와 相衛節度使薛嵩과 盧龍節度使李懷仙安祿山史思明의 남은 무리를 수습해서 각각 강성한 병졸 수만 명을 보유하여 군대를 다스리고 성을 완전하게 하고는 스스로 文武의 장수와 관리들을 임명하고【署는 署置(관리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貢賦를 바치지 않았으나 朝廷에서는 오로지 姑息을 일삼아서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니, 비록 藩臣이라고 이름하였으나 겉으로만 매여 있을【羇는 말굴레이고, 縻는 얽어매는 것이다.】 뿐이었다.

○ 九月에 僕固懷恩이 誘回紇, 吐蕃, 吐谷渾, 党項, 奴剌【剌音辣이니 卽渾剌奴也라 吐谷渾이 自稱渾王이라 故로 以渾奴剌名之하니라】數十萬衆하야 俱入寇하고 懷恩이 又以朔方兵繼之어늘 郭子儀使諸道節度使로 各出兵하야 以扼其衝要하니 上이 從之하다 懷恩이 中途에 遇暴疾而歸라가 死於鳴沙하니 范志誠【懷恩之將이라 】이 領其衆하니라

9月에 僕固懷恩이 回紇, 吐蕃, 吐谷渾, 党項, 奴剌【剌은 음이 랄이니, 바로 渾剌奴이다. 吐谷渾이 스스로 渾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므로 渾奴剌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등 수십만의 병력을 유인하여 함께 쳐들어와 침략하였으며, 僕固懷恩이 또 朔方의 군대를 거느리고 뒤이어 왔다. 郭子儀가 여러 도의 節度使로 하여금 각각 군대를 내어 요충지를 굳게 지키게 하니, 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僕固懷恩이 도중에 暴疾(갑작스럽게 앓는 병)에 걸려 돌아가다가 鳴沙에서 죽으니, 范志誠【范志誠은 僕固懷恩의 장수이다.】 그 무리를 거느렸다.

懷恩이 拒命三年에 再引胡寇하야 爲國大患호되 上이 猶爲之隱하야 前後制勅에 未嘗言其反이러니 及聞其死하고 憫然曰 懷恩이 不反이요 爲左右所誤耳라하니라

僕固懷恩이 황제의 명령에 항거한 3년 동안 두 번 오랑캐들을 이끌고 침략하여 나라의 큰 환란이 되었으나 上은 오히려 그를 위해 숨겨주어서 전후에 내린 制勅에 일찍이 그의 반란을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僕固懷恩은 배반하지 않았고 좌우의 사람들 탓에 잘못되었을 뿐이다.” 하였다.

○ 丙寅에 回紇, 吐蕃이 合兵圍涇陽이어늘 子儀命諸將하야 嚴設守備而不戰하다 是時에 回紇, 吐蕃이 聞僕固懷恩死하고 爭長不相睦하야 分營而居하니 子儀知之라 回紇이 在城西어늘 子儀使牙將【牙는 見二十六卷牙門註하니라 】李光瓚等으로 往說之하야 欲與之共擊吐蕃이러니 回紇이 不信하고 曰 郭公이 固在此乎아 汝紿我耳로다 若果在此면 可得見乎아 光瓚이 還報한대 子儀曰 今에 衆寡不敵하니 難以力勝이라 昔에 與回紇로 契約甚厚하니 不若挺身【挺은 直也요 特也라 】往說之니 可不戰而下也라하고 遂與數騎로 開門而出하야 使人傳呼曰 令公來라하니 回紇이 大驚이러라 其太帥藥葛羅는 可汗之弟也라 執弓注矢하고 立於陳前이어늘 子儀免冑釋甲하고 投槍而進하니 回紇諸酋長이 相顧曰 是也라하고 皆下馬羅拜라 子儀亦下馬하야 前執藥葛羅【前은 進也라 】하고 讓之【讓은 責也라 】曰 汝回紇이 有大功於唐【大功於唐은 謂擧兵助唐하야 平安史也라 】하고 唐之報汝도 亦不薄이어늘 奈何負約하고 深入吾地하야 (浸)[侵]逼畿縣하야 棄前功하고 結怨仇하야 背恩德而助叛臣하니 何其愚也오 且懷恩이 叛君棄母【謂懷恩阻兵汾州러니 旣而요 叛歸靈武하야 棄母於汾州也라 】하니 於汝國에 何有리오 今吾挺身而來하야 聽汝執我而殺之하노니 我之將士必致死하야 與汝戰矣리라 藥葛羅懷恩이 欺我하야 言天可汗【見三十四卷하니 太宗因四夷之請하야 稱天可汗하니라 】이 已晏駕하고 令公이 亦捐館【不欲斥言死故로 託云捐館하니 館은 舍라 】하야 中國無主라하야늘 我是以로 敢與之來러니 今知天可汗在上都하시고 令公이 復摠兵於此하고 懷恩이 又爲天所殺하니 我曹豈肯與令公戰乎잇가 子儀乃說之曰 吐蕃이 無道하야 乘我國有亂하야 不顧舅甥之親【貞觀二十年에 以文成公主로 嫁吐蕃하니라】하고 呑噬我邊鄙【鄙亦邊也라 】하고 焚蕩我畿甸하니 其所掠之財를 不可勝載라 此는 天以賜汝시니 不可失也니라 藥葛羅曰 吾爲懷恩所誤하야 負公誠深하니 今請爲公하야 盡力擊吐蕃하야 以謝過호리이다 回紇觀者 左右爲兩翼稍前이어늘 子儀麾下亦進한대 子儀揮手却之하고 因取酒하야 與其酋長共飮하다 子儀遺之絹三千匹하고 竟與定約而還하니 吐蕃이 聞之하고 夜引兵遁去하다 藥葛羅帥衆追吐蕃이어늘 子儀使白元光으로 帥精騎하야 與之俱戰於靈臺【縣名이라 】西原하야 大破之하고 殺吐蕃萬計하다

[史略 史評]胡氏孔子謂 言忠信, 行篤敬이면 雖蠻貊之邦이라도 行矣라하시니 子儀輕騎見虜로되 非惟虜不敢害라 又聽其言하야 講解而去하야 賢於數十萬衆力戰之功은 惟忠信足以感動之而已矣라 然忠信은 非可一日而爲也라 積之旣久하고 行之旣著하야 名發於實而效見乎遠이면 則其音聲容貌 亦將有孚於人하나니 此回紇諸酋 所以釋兵下馬而拜者也라 夫豈可僞說而僥倖哉아 在易之師曰 師貞, 丈人吉이라하니 子儀其庶幾歟인저

丙寅日(10월 8일)에 回紇과 吐蕃이 병력을 연합하여 涇陽을 포위하자, 郭子儀가 諸將들에게 명하여 엄하게 수비하고 싸우지 않게 하였다. 이때 回紇과 吐蕃은 僕固懷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우두머리 자리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해서 진영을 나누어 거처하고 있었는데, 郭子儀가 이것을 알았다. 回紇의 군대가 성 서쪽에 있었는데 郭子儀가 牙將【牙는 26卷 牙門의 註에 보인다.】李光瓚 등으로 하여금 가서 설득하여 回紇과 함께 吐蕃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回紇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郭公이 참으로 이곳에 있는가?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만약 과연 이 곳에 있다면 만나볼 수 있는가?” 하였다.

李光瓚이 돌아와 보고하자, 郭子儀가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병력이 적어 대적하지 못하니, 힘으로는 이기기 어렵다. 옛날에 우리가 回紇과 맹약하기를 매우 친하게 하였으니, 내가 혼자 가서 설득하는 것만 못하다.【挺은 곧음이고 혼자이다.】 이렇게 하면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몇 명의 기병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가서 사람을 시켜 전달하여 고함치게 하기를 “令公이 오신다.” 하니, 回紇이 크게 놀랐다.

그의 太帥藥葛羅는 可汗의 아우였다. 활을 잡고 화살을 메기고 진영의 앞에 서 있었는데, 郭子儀가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고는 창을 던지고 전진하니, 回紇의 여러 酋長들이 서로 돌아보고 말하기를 “令公이 맞다.” 하고는 모두 말에서 내려 늘어서서 절하였다. 郭子儀 또한 말에서 내려 앞으로 나아가 藥葛羅의 손을 잡고【前은 앞으로 나아감이다.】 꾸짖기를【讓은 꾸짖음이다.】 “너희 回紇은 唐나라에 큰 공이 있고【唐나라에 큰 공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일으켜 唐나라를 도와서 安祿山과 史思明을 평정하였음을 말한다.】唐나라가 너희에게 보답한 것 또한 박하지 않은데, 어찌하여 맹약을 저버리고 우리 땅에 깊이 쳐들어와서 畿縣을 침략하고 핍박하여 전날의 공을 버리고 원한을 맺어 恩德을 저버리고 배반한 신하(僕固懷恩)를 도우니, 어쩌면 그리도 미련한가. 僕固懷恩이 군주를 배반하고 어머니를 버렸으니,【군주를 배반하고 어머니를 버렸다는 것은 僕固懷恩이 汾州에서 군대를 믿고 있었는데, 얼마 후 배반하여 靈武로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汾州에 버림을 이른다.】 너희 나라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금 내가 혼자 와서 너희가 나를 붙잡아 죽이도록 맡기노니, 너희가 나를 죽이면 우리 장병들이 사력을 다하여 너희와 싸울 것이다.” 하였다.

藥葛羅가 말하기를 “僕固懷恩이 우리들을 속여 말하기를 ‘天可汗(당나라 황제)이【天可汗은 34卷에 보이니, 太宗이 四夷의 請願으로 인하여 자신을 天可汗이라 칭하였다.】 이미 승하하셨고 令公 또한 죽어서【죽음을 곧바로 지척하여 말하려 하지 않으므로 가탁하여 捐館이라 하였으니, 館은 관사이다.】중국에 군주가 없다.’ 하므로 내가 이 때문에 감히 僕固懷恩과 함께 중국에 왔었는데, 이제 天可汗이 上都에 계시고 令公이 다시 이곳에서 군대를 통솔하심을 알았으며 僕固懷恩이 또 하늘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우리들이 어찌 令公과 싸우기를 즐겨 하겠습니까.” 하였다.

郭子儀가 마침내 설득하기를 “吐蕃이 無道하여 우리나라에 난리가 있는 틈을 타서 舅甥간의 친함을 돌아보지 않고,【舅甥(장인과 사위)의 친함이란 貞觀 20年에 文成公主를 吐蕃에게 시집보냈으므로 말한 것이다.】 우리의 邊鄙(변경)를 삼키고【鄙 또한 변방이다.】 우리 畿甸을 분탕질하니, 그들이 노략질한 재물을 이루 다 싣고 갈 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하늘이 너에게 주시는 것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藥葛羅가 말하기를 “우리가 僕固懷恩 탓에 잘못되어 公을 저버림이 실로 깊으니, 지금 공을 위하여 힘을 다해 吐蕃을 공격해서 사과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回紇의 구경하는 자들이 양 날개처럼 좌우로 나뉘어 점점 앞으로 나오자 郭子儀의 휘하 또한 앞으로 나오니, 郭子儀가 손을 저어 퇴각시키고 인하여 술을 가져다가 그 酋長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郭子儀가 비단 3천 필을 回紇에 보내고 끝내 그들과 맹약을 정하고 돌아오니, 吐蕃이 이 소식을 듣고 밤에 군대를 이끌고 도망갔다. 藥葛羅가 군대를 이끌고 吐蕃을 추격하였는데, 郭子儀白元光으로 하여금 정예 기병을 인솔하게 하여 回紇과 함께 靈臺縣의【靈臺는 縣의 이름이다.】西原에서 吐蕃과 교전하여 크게 격파하고吐蕃을 죽인 것이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孔子께서 이르시기를, ‘말이 忠信하고 행실이 篤敬(篤厚하고 恭敬)하면 비록 오랑캐 나라라도 행해진다.’ 하셨다. 郭子儀가 輕武裝한 기병으로 오랑캐를 만났으나, 오랑캐가 감히 해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의 말을 듣고서 講解하고 떠나가서 수십만 명이 힘써 싸운 功보다 나았던 것은 오직 忠信이 그들을 충분히 감동시켰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忠信은 하루 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쌓기를 오랫동안 하고 행한 것이 이미 드러나서 이름이 실제에 나타나고 효과가 먼 곳에 드러나면, 그 音聲과 容貌가 또한 장차 남에게 믿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回紇의 여러 추장들이 병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서 郭子儀에게 절한 이유이다. 어찌 거짓으로 설득하여 僥倖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周易》의 師卦에 이르기를, ‘군대의 출동 명분이 바르고 丈人(노련한 장수)이 통솔하여야 길하다.’ 하였으니, 郭子儀가 이에 가까울 것이다.”

○ 初에 肅宗이 以內侍魚朝恩으로 領神策軍使하야 悉以其軍歸禁中이라 然이나 尙未得與北軍齒【齒는 謂竝列如齒也라 言猶在北軍之下하니 北軍은 羽林及萬騎也라 見三十九卷丁未年千騎註하니라 】러니 至是하야 魚朝恩이 以神策軍으로 從上屯苑中하니 其勢浸盛이라 分爲左右廂하야 居北軍之右矣러라 〈其後에 宦官典兵하야 卒以亡唐하니라〉

처음에 肅宗이 內侍인 魚朝恩을 領神策軍使로 임명하여 그 군대를 모두 禁中에 귀속시켰으나 아직도 北軍과 나란히 나열될 수가 없었는데,【齒는 나란히 나열된 것이 이[齒]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神策軍은 北軍의 아래에 있었으니, 北軍은 羽林과 萬騎의 등속이다. 39卷 丁未年(707) 千騎의 註에 보인다.】 이때에 이르러 魚朝恩이 神策軍을 이끌고 上을 따라 苑中에 주둔하니, 그 형세가 점점 강성해져서 神策軍을 左廂과 右廂으로 나누어 北軍의 위에 있게 되었다. - 그 후 환관들이 병권을 맡아서 끝내 唐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

[丙午]大曆元年

[丙午]大曆元年이라

郭子儀以河中軍食이 常乏이라하야 乃自耕百畝하고 將校【卽將及校尉也라 校本軍壘之稱이라 故로 謂軍之一部曰一校니 軍尉, 馬官을 皆以校名하니라 】以是爲差하니 於是에 士卒이 皆不勸而耕이라 是歲에 河中이 野無曠土하고 軍有餘糧이러라

大曆 元年(병오 766)

郭子儀는 河中의 군량이 항상 궁핍하다 하여 마침내 스스로 1백묘를 경작하고 將校들은【將校는 바로 장수와 校尉이다. 校는 본래 군대 堡壘의 칭호이다. 그러므로 軍의 한 部隊를 1校라 하니, 軍尉와 馬官을 모두 校라고 이름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차등을 두니 이에 士卒들이 모두 권장하지 않는데도 경작하였다. 이해 河中 지방이 들에는 빈 땅이 없고 군대에는 남은 식량이 있었다.

[庚戌]五年

[庚戌]五年이라

正月에 觀軍容【時以宦官爲之하니라 】宣慰處置使魚朝恩이 專典禁兵하야 寵任無比하니 勢傾朝野라 上이 令元載爲方略하야 擒而縊殺之하다

大曆 5년(경술 770)

정월에 觀軍容【觀軍容使는 이때에 宦官으로 임명하였다.】宣慰處置使인 魚朝恩이 禁兵을 단독으로 주관하여 총애와 신임이 견줄 자가 없으니, 형세가 朝野를 휩쓸었다. 上이 元載로 하여금 方略을 만들어서 목을 졸라 죽이게 하였다.

元載旣誅魚朝恩에 上寵任益厚하니 遂志氣驕溢하야 每衆中大言하야 自謂有文武才略하야 古今莫及이라하고 弄權舞智하니 政以賄成하고 僭侈無度하니라

元載가 이미 魚朝恩을 죽이자 上의 총애와 신임이 더욱 두터우니, 元載가 마침내 뜻과 기운이 교만하고 넘쳐 매번 여러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치며 스스로 이르기를 ‘文武의 재주와 지략이 있어 古今의 사람이 미칠 수 없다.’ 하였고, 권력과 지혜를 농간하니, 정치가 뇌물로 결정되고 참람함과 사치함이 한도가 없었다.

[癸丑]八年

[癸丑]八年이라

九月에 晉州男子郇模【姓名也니 은 音恂이라 】以麻辮髮【辮은 音變이니 與編通이라 】하고 持竹筐葦席하고 哭於東市어늘 人問其故한대 對曰 願獻三十字하노니 一字爲一事라 若言無所取어든 請以席裹尸하야 貯筐中하야 棄於野라하야늘 京兆以聞하다 上이 召見하고 賜新衣하야 館於客省하니 其言團者는 請罷諸州團練使【團은 聚也요 練은 與鍊同하니 精熟曰練이라 】也요 監者는 請罷諸州監軍使【監軍은 時以宦官爲之하니라 】也러라

大曆 8년(계축 773)

9월에 晉州의 男子인 郇模가【郇模는 사람의 姓名이니, 郇은 음이 恂(순)이다.】 삼끈으로 머리를 묶고【辮은 음이 변이니, 編과 통한다.】 손에는 대나무광주리와 갈대 자리를 쥐고 長安의 동쪽 시장에서 통곡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30글자를 황제께 바치기를 원하노니, 한 글자가 한 가지 일이다. 만일 내 말이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면 이 갈대 자리에 시신을 싸서 광주리 안에 담아 시장에 버려지기를 청한다.” 하므로 京兆에서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上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새로운 옷을 하사하여 客省에 머물게 하였다. 그가 말한 ‘團’字는 여러 州의 團練使를【團은 모음이고, 練은 鍊과 같으니 精熟한 것을 練이라 한다.】 파할 것을 청한 것이고, ‘監’字는 여러 州의 監軍使를【監軍은 이때에 宦官을 임명하였다.】 파할 것을 청한 것이었다.

[丁巳]十二年

[丁巳]十二年이라

三月에 中書侍郞同平章事元載專橫【橫은 不順理也라 】이어늘 賜自盡【盡은 終也니 言自終其命也라 】하고 有司籍載家財하니 胡椒至八百石이요 他物도 稱是러라

大曆 12년(정사 777)

3월에 中書侍郞同平章事인 元載가 전횡하자,【橫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自盡하게 하고【盡은 마침이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마침을 말한 것이다.】 有司가 元載의 집에 있는 재물을 적몰하니, 胡椒가 800석에 이르렀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슷하였다.

○ 四月에 以楊綰爲中書侍郞하고 常袞爲門下侍郞하야 竝同平章事하다 은 性이 淸簡儉素하니 制下之日에 朝野相賀러라 郭子儀는 方宴客이라가 聞之하고 減坐中聲樂五分之四하고 京兆尹黎幹은 騶從甚盛이러니 卽日省之하야 止存十騎하고 中丞崔寬은 第舍宏侈러니 亟毁之하다 上이 方倚楊綰하야 使釐革【釐는 理也라 】弊政이러니 會에 有疾하야 七月에 薨하니 上이 悼痛之甚하야 謂群臣曰 天이 不欲朕致太平가 何奪朕楊綰之速고하니라

[史略 史評]范氏楊綰以淸名儉德爲相에 而天下從之如此하니 況人君能正己以先이면 海內其有不率者乎아 是以로 先王이 必正其心하고 修其身에 而天下自治라 孟子曰 一正君而國定矣라하시니 此之謂也니라

[史略 史評]胡氏郭公, 黎幹, 崔寬이 事類而情殊라 郭公은 成人之美者也요 則畏之者也라 謂有仰德化服之心者非也요 謂子儀有惕威踧踖之態者도 亦非也니라

4월에 楊綰을 中書侍郞으로 삼고常袞을 門下侍郞으로 삼아 모두 同平章事에 임명하였다. 楊綰은 성품이 청렴하고 소탈하고 검소하니, 制書(관작을 임명하는 조칙)가 내려지던 날에 朝野가 서로 축하하였다. 郭子儀는 막 손님들에게 잔치를 벌이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좌중의 음악에 5분의 4를 줄였고, 京兆尹黎幹은 추종꾼이 매우 많았는데 당일로 줄여서 다만 10명의 기병만을 남겨두었고, 中丞인 崔寬은 집이 크고 화려하였는데 급히 헐어버렸다.

上이 막 楊綰에게 의지하여 그로 하여금 정사의 폐단을 개혁하게 하였는데,【釐는 다스림이다.】 마침 楊綰이 질병이 있어 7월에 죽으니, 上이 심히 애통해 하여 群臣들에게 이르기를 “하늘은 짐이 태평세상을 이룩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가. 어찌하여 짐의 楊綰을 이리 빨리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史略 史評]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楊綰이 淸白한 名聲과 儉素한 德으로 재상이 되자 天下사람들이 따르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하물며 人君이 자기 몸을 바로잡아 솔선을 보인다면 海內에 어찌 따르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先王이 반드시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자기 몸을 닦음에 天下가 스스로 다스려졌던 것이다. 孟子가 말씀하시기를 ‘한 번 인군을 바로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 하셨으니,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史略 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郭公(郭子儀)黎幹崔寬은 일은 비슷하나 실정은 다르다. 郭公은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준 자이고 黎幹崔寬은 그들을 두려워한 자이다. 黎幹崔寬이 德을 우러러 사모하여 교화되고 복종한 마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요, 郭子儀가 위험을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태도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 平盧節度使李正己【本名懷玉이니 高麗人이라 以平盧將으로 逐其節度使侯希逸한대 詔以懷玉爲留後하고 賜名正己하다 先有淄, 靑, 齊, 海, 登, 萊, 沂, 密, 德, 棣十州之地하고 後得曹, 濮, 徐, 兗, 鄆五州하야 因徙治鄆하고 使子納守靑州하다 德宗建中初에 約田悅, 梁崇義, 李惟岳叛하야 河南騷然이러니 會發疽死하니라 】擁兵十萬하고 雄據東方하니 隣藩이 皆畏之러라 是時에 田承嗣, 李寶臣, 梁崇義【長安人이니 以羽林射生으로 從來瑱하야 鎭襄陽하고 累遷至右兵馬使하다 及瑱死에 衆推爲帥하니 朝廷不能討하고 遂以爲襄州刺史한대 據襄, 鄧, 均, 房, 復, 郢六州하고 有衆二萬하니라 】相與根據蟠結하야 雖奉事朝廷이나 而不用其法令하고 官爵甲兵租賦刑殺을 皆自專之호되 上이 寬仁하야 一聽其所爲하니 雖在中國하야 名藩臣이나 實如蠻貉(貊)【貉은 與貊通하니 蠻은 南蠻이요 貉은 北狄이라 】異域이러라

平盧節度使 李正己가【李正己는 본래 이름이 懷玉이니, 高麗 사람이다. 平盧의 장수로 節度使인 侯希逸을 축출하였는데, 조칙을 내려 李懷玉을 留後로 삼고 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먼저는 淄州, 靑州, 齊州, 海州, 登州, 萊州, 沂州, 密州, 德州, 棣州 등 열 州의 땅을 소유하였고, 뒤에는 曹州, 濮州, 徐州, 兗州, 鄆州 등 다섯 州를 얻고는 인하여 治所를 鄆州로 옮기고 아들 納으로 하여금 靑州를 지키게 하였다. 德宗 建中 초년에 田悅, 梁崇義, 李惟岳과 약속하고 반란을 일으켜 河南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마침 등창이 나서 죽었다.】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東方에 웅거하니, 이웃 藩鎭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때 田承嗣, 李寶臣, 梁崇義가【梁崇義는 長安 사람이니, 羽林軍의 射生으로 來瑱을 따라 襄陽에 진주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右兵馬使에 이르렀다. 來瑱이 죽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장수로 추대하니, 조정에서 토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襄州刺史로 임명하였는데, 襄州, 鄧州, 均州, 房州, 復州, 郢州의 여섯 州를 점거하고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서로 뿌리를 박고 또아리를 틀어 비록 겉으로는 朝廷을 받들어 섬겼으나 조정의 법령을 따르지 않았으며, 官爵과 甲兵과 租賦와 刑殺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였으나 上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한결같이 그들이 하는대로 따르니, 비록 中國에 있어서 이름은 藩鎭의 신하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蠻貊의【貉과 貊은 통하니, 蠻은 南蠻이고 貉은 北狄이다.】 異域과 같았다.

兵志曰 唐立府兵之制는 頗有足稱焉이라 蓋古者兵法이 起於井田【司馬法에 六尺爲步니 步百爲畝요 畝百爲夫요 夫三爲屋이요 屋二爲井이요 井十爲通이요 通十爲成이니 成은 出革車一乘이라 甲士三人이니 左持弓하고 右持矛하고 中人御하며 步卒七十二人이요 將重車二十五人이라 又古者井田에 方里爲井이요 十井爲乘이니 百里之國이 通計萬井이면 則當有千乘矣라 漢志에 方一里爲井이니 井十爲通이요 通十爲成이니 成方十里며 成十爲終이요 終十爲同이니 同은 方百里며 同十爲封이요 封十爲畿니 畿는 方千里니 有稅有賦라 稅以足食하고 賦以足兵이라 故四井爲邑이요 四邑爲丘니 丘는 十六井也라 四丘爲甸이니 甸은 六十四井也라 有戎馬四匹, 兵車一乘, 甲士二人, 卒七十二人하야 干戈備具하니 是爲乘馬之法이라 五國爲屬이니 屬有長이요 十國爲連이니 連有帥요 三十國爲卒이니 卒有正이요 二百一十國爲州니 州有牧이라 連帥는 比歲簡車하고 卒正은 三年簡徒하고 群牧은 五年大簡車徒하니 此先王爲國立武足兵之大略也니라 】이러니 自周衰로 王制壞而不復이라 至於府兵하야 始一寓之於農하야 〈其〉居處敎養하고 畜材待事하고 動作休息이 皆有節目이라 雖不能盡合古法이나 蓋得其大意焉하니 此高祖太宗之所以盛也라 至其後世子孫하야는 驕弱하야 不能謹守하고 屢變其制라 夫置兵은 所以止亂이러니 及其弊也엔 適足爲亂이요 又其甚也엔 至困天下以養亂하야 而遂至於亡焉이라 蓋唐有天下(三百)[二百餘]年에 而兵之大勢三變【唐兵三變이라 】이라 其始盛時에 有府兵하고 府兵後廢而爲彍騎하고 彍騎又廢에 而方鎭之兵이 盛矣라 及其末也엔 彊臣悍將이 兵布天下한대 而天子亦自置兵於京師하고 曰禁軍이러니 其後에 天子弱하고 方鎭彊하야 而唐遂以亡滅者는 措置之勢使然也라 府兵之制는 起自西魏, 後周하야 而備於隋하고 唐興에 因之라 武德初【武德은 高祖年號라 】에 始置軍府하고 以驃騎車騎兩將軍府로 (鎭)[領]之하며 析關中하야 爲十二道【初析關中爲十二道러니 後又更置爲十二軍하니 萬年道爲參旗軍이요 長安道爲鼓旗軍이요 富平道爲元戎軍이요 醴泉道爲井鉞軍이요 同州道爲羽林軍이요 華州道爲騎官軍이요 寧州道爲折威軍이요 岐州道爲平道軍이요 幽州道爲招搖軍이요 西麟道爲苑遊軍이요 涇州道爲天紀軍이요 宜州道爲天節軍이라】하고 軍置將副各一人하야 以督耕戰하고 以車騎府統之하다 六年에 〈以〉天下旣定이라하야 改驃騎曰統軍이라하고 車騎曰別駕라하다 太宗貞觀十年에 更號統軍하야 爲折衝都尉하고 別將爲果毅都尉하고 諸府를 總曰折衝府라하다 凡天下十道【十道는 太宗分天下하야 爲十道하니 見三十六卷丁亥年하니라 】에 置府六百三十四하니 皆有名號하고 而關內二百六十有一이 皆以隸諸衛하다 高宗武后時에 天下久不用兵하니 府兵之法이 寖壞하야 番役更代를 多不以時하니 衛士稍稍亡匿이라 至是에 益耗散하야 宿衛不能給【給은 足也라 】하니 宰相張說이 乃請一切募士宿衛하고 號曰彍騎라하다 天寶以後에 彍騎之法이 又稍變廢하야 六軍宿衛皆市人이니 及祿山反에 皆不能受甲矣라

初府兵之置는 居無事時에 耕於野하고 其番上者는 宿衛京師而已라 若四方有事면 則命將以出이라가 事解輒罷하야 兵散于府하고 (歸將)[將歸]于朝라 故士不失業하고 而將帥無握兵之重하니 所以防微杜漸하야 絶禍亂之萌也라 及府兵法壞에 而方鎭盛하니 夫所謂方鎭者는 節度使之兵也니 其始는 起於邊將之屯防者라 自高宗永徽以後로 都督帶使持節者를 始謂之節度使나 然猶未以名官이러니 安祿山反에 而武夫戰卒以功起行陣者를 皆除節度使라 由是로 方鎭이 相望於內地하고 父子繼握其兵而不肯代하야 自擇將吏하고 號爲留後하야 以邀命於朝【邀는 與要通하니 求也라 】라 天子力不能制하니 則忍恥含垢하야 因而授之하고 謂之姑息之政이라 始爲朝廷患者는 號河朔三鎭【相衛薛嵩과 魏博田承嗣와 盧龍李懷仙이라】이러니 及朱全忠以梁兵【見四十八卷辛酉年하니라 昭帝封全忠하야 爲梁王하니 是爲後梁하니라 】하고 李克用以晉兵【見四十八卷甲戌年하니라 昭帝封克用하야 爲晉王하니 克用子存勖이 滅梁하고 復稱唐하니 是爲後唐이니라 】으로 更犯京師하야 唐遂以亡하니라

《新唐書》〈兵志〉에 말하였다.

“唐나라가 府兵의 제도를 세운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옛날에 병법이 井田에서 나왔는데,【≪司馬法≫에 6尺을 1步라 하니, 100步를 畝라 하고 100畝를 夫라 하고 3夫를 屋이라 하고 2屋을 井이라 하고 10井을 通이라 하고 10通을 成이라 하니, 成에서 革車 1乘을 낸다. 革車 1乘에는 甲士가 세 명이니, 왼쪽 사람은 활을 잡고 오른쪽 사람은 창을 잡고 가운데 사람은 말을 몰며, 步卒이 72명이고 重車(짐수레)를 맡고 있는 자가 25명이다. 또 옛날 井田은 方 1里를 井이라 하고 10井을 乘이라 하니, 100里의 나라는 만 井을 통틀어 계산하면 마땅히 千乘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前漢書≫ 〈刑法志〉에 “方 1리를 井이라 하니 10井을 通이라 하고 10通을 成이라 하니 成은 方 10里이며, 10成을 終이라 하고 10終을 同이라 하니 同은 方 100里이며, 10同을 封이라 하고 10封을 畿라 하니 畿는 方 1000里인데, 여기에는 稅가 있고 賦가 있다. 稅로써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賦로써 군대를 풍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4井을 邑이라 하고 4邑을 丘라 하니 丘는 16井이다. 4丘를 甸이라 하니 甸은 64井이다. 여기에는 戎馬 4필과 兵車 1乘과 甲士 2명과 보병 72명이 있어서 창과 방패를 구비하니, 이것이 乘馬의 법이다. 5國을 屬이라 하니 屬에는 長이 있고, 10國을 連이라 하니 連에는 帥가 있고, 30國을 卒이라 하니 卒에는 正이 있고, 210國을 州라 하니 州에는 牧이 있다. 連帥는 해마다 전차를 사열하고 卒正은 3년마다 보병을 사열하고 群牧은 5년마다 전차와 보병을 크게 사열하니, 이는 선왕이 나라를 만들어 武를 세우고 군대를 풍족하게 한 대략이다.】
周나라가 쇠함으로부터 王者의 제도가 파괴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 府兵制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결같이 군대를 농군에 붙여두어 평소 거처할 때에는 가르치고 기르며 재주를 쌓아 유사시에 대비하며 동작하고 휴식함이 모두 節目이 있었다. 비록 옛 법에 다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큰 뜻을 얻었으니, 이는 高祖太宗이 훌륭한 이유이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이 교만하고 약해져서 그 법을 삼가 지키지 못하고 제도를 자주 변경하였다. 군대를 설치함은 난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병폐가 생겨나자 다만 난이 되었으며, 또 병폐가 심해지자 천하를 곤궁하게 하여 난을 양성함에 이르러서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다.

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200여 년에 군대의 큰 형세가 세 번 바뀌었다.【唐나라 兵制가 세 번 변한 것이다.】 처음 성할 때에는 府兵이 있었고, 府兵이 뒤에 폐지되어 彍騎가 되었으며, 彍騎가 또 폐지됨에 方鎭의 군대가 성하게 되었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한 신하와 사나운 장수가 천하에 널려 있자, 천자 또한 스스로 京師에 군대를 두고 禁軍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뒤에 천자가 약해지고 方鎭이 강해져서 唐나라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 것은 措置한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府兵의 제도는 西魏와 後周로부터 시작되어 隋나라 때에 갖추어졌는데, 唐나라가 일어남에 이것을 인습하였다. 武德 초기에【武德은 高祖의 연호이다.】 처음으로 軍府를 두고는 驃騎와 車騎 두 將軍府로 하여금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關中을 나누어 12道를 만들고【처음 關中을 나누어 12道를 만들었는데 뒤에 또다시 12軍을 설치하니, 萬年道를 參旗軍, 長安道를 鼓旗軍, 富平道를 元戎軍, 醴泉道를 井鉞軍, 同州道를 羽林軍, 華州道를 騎官軍, 寧州道를 折威軍, 岐州道를 平道軍, 幽州道를 招搖軍, 西麟道를 苑遊軍, 涇州道를 天紀軍, 宜州道를 天節軍이라 하였다.】 軍마다 將帥와 副將 각각 한 명을 두어 농사와 전투하는 일을 감독하였으며, 車騎府로 이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6년에는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다 하여 驃騎府를 고쳐 統軍府라 하고 車騎府를 고쳐 別駕府라 하였다. 太宗貞觀 10년(636)에 다시 統軍府를 折衝都尉로 개칭하고 別將을 果毅都尉로 개칭했으며 여러 府를 모두 折衝府라 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천하의 10道에【10道는 太宗이 천하를 나누어 10道를 만들었으니, 36권 丁亥年條에 보인다.】 634개의 府를 두었는데 모두 명칭이 있었으며, 關內의 261곳은 모두 諸衛에 예속시켰다. 高宗과 則天武后 때에는 천하가 오랫동안 무력을 사용하지 않자, 府兵의 법이 점점 파괴되어 番役을 번갈아 교대하는 것을 대부분 제때에 하지 않으니, 衛士들이 점점 도망하여 숨었다.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군사들이 손실되고 흩어져서 宿衛하는 군사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니,【給은 만족함이다.】宰相張說이 마침내 청하여 일체 군사를 모집해서 宿衛하고 彍騎라 이름하였다. 그러다가 天寶 이후에는 彍騎의 법이 또 차츰 변하고 폐지되어 6군의 宿衛하는 자들이 모두 시장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安祿山이 배반하게 되자 모두 갑옷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처음 府兵을 설치한 것은 평소 무사할 때에는 들에서 농사를 짓고, 番上하는 자는 京師에서 宿衛할 뿐이었다. 만일 사방에 일이 있게 되면 장수를 임명하여 출동했다가 일이 해결되면 즉시 해산하여, 군사들은 府로 흩어지고 장수들은 조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병사들은 생업을 잃지 않고 장수들은 막중한 병권을 쥐지 못하니, 이는 은미함을 막고 조짐을 막아서 화와 난의 싹을 끊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府兵의 法이 무너지자 方鎭의 법이 성행하니, 이른바 方鎭이라는 것은 節度使의 군대이다. 그 시초는 변방 장수가 주둔하고 방어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高宗永徽 연간 이후로 使의 임무를 띠고 節을 잡은 都督을 節度使라 처음으로 불렀으나 오히려 관직의 이름으로 삼지는 않았는데, 安祿山이 배반하자 전공으로 行陣에서 일어난 武夫와 戰卒들을 모두 節度使에 제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方鎭이 內地에 서로 이어지고 父子가 계속하여 병권을 잡아서 〈다른 사람과〉교대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장수와 관리를 가려 뽑고 留後라 이름하여 조정에서 그대로 임명해 주기를 요구하였다.【邀는 要와 통하니, 요구하는 것이다.】 천자가 힘으로 제재하지 못하니, 치욕을 참고 더러움을 머금고는 그대로 관직을 제수하고 이것을 姑息之政이라 일렀다. 처음 조정의 걱정거리가 된 것은 河朔의 三鎭이라고【河朔의 三鎭은 相衛의 薛嵩과 魏博의 田承嗣와 盧龍의 李懷仙이다.】 이름났었는데, 朱全忠은 梁 지방의 군대를 데리고,【이 내용은 48卷 辛酉年(901)에 보인다. 昭帝가 朱全忠을 봉하여 梁王으로 삼으니, 이것이 後梁이다.】李克用은 晉 지방의 군대를 데리고【이 내용은 48卷 甲戌年(854)에 보인다. 昭帝가 李克用을 봉하여 晉王으로 삼았는데, 李克用의 아들 存勖이 梁을 멸하고 다시 唐이라 칭하니, 이것이 바로 後唐이다.】 다시 京師를 침범하자 唐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戊午]十三年

[戊午]十三年이라

上이 召江西判官李泌하야 入見하니 常兗이 言於上曰 陛下久欲用李泌하시니 昔에 漢宣帝欲用人爲公卿이면 必先試理人하니 請且以爲刺史하야 使周知人間利病하야 俟報政而用之하소서

大曆 13년(무오 778)

上이 江西判官李泌를 불러 들어와 뵙게 하니, 常兗이 上에게 말하기를 “陛下께서 오랫동안 李泌를 등용하고자 하시니, 옛날에 漢나라 宣帝는 사람을 등용하여 公卿을 삼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시험하였습니다. 청컨대 李泌를 刺史에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민간의 이해를 두루 알게 하여 정사를 보고하기를 기다려 등용하소서.” 하였다.

[己未]十四年

[己未]十四年이라

五月에 上이 崩하고 德宗이 卽位러니 在諒陰【諒은 古作梁하고 陰은 古作闇하니 謂廬也니 卽倚廬之廬也라 在諒陰은 言居喪於諒陰也니라 】中하야 動遵禮法이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代宗이 少遇亂離하고 老於軍旅라 即位之初에 餘妖未殄이러니 乃能仗之精忠하고 憑諸將之戮力하야 剪除凶醜하고 克復京師하니 厥功懋矣라 然帝性仁而不勇하고 委靡太過하야 而剛斷不足하야 遂使太阿之柄으로 倒移於下라 故로 雖能罪三宦하고 誅元載나 其初亦由寵任之過요 而其末에 又皆未得爲盡善焉이라 至於專事姑息하야 逐殺主帥를 命爲主帥하야 遂爲後來故事하니 綱目에 尤深咎之라 而當時之所加意者는 不過置百高座하고 講仁王經하며 作章敬寺하고 廣度僧尼하며 出盂蘭盆하야 褒贈亡僧하니 唐室大壞가 實基於此라 故로 司馬公二帝에 以爲此兩君者는 明不足以燭理하고 武不足以決疑하니 向微郭子儀之忠과 李光弼之智면 則天下已非唐有라하니 意謂是夫인저

大曆 14년(기미 779)

5월에 上이 죽고德宗이 즉위하였는데, 諒陰(여막) 안에 있으면서【諒은 古文에 梁으로 되어 있고 陰은 古文에 闇으로 되어 있으니, 廬幕을 이르니, 즉 倚廬의 廬이다. 諒陰에 있다는 것은 諒陰에서 居喪함을 말한 것이다.】 모든 행동에 禮法을 따랐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代宗이 어려서 난리를 만나고 군대에서 늙었다. 즉위하던 초기에 남은 재앙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는데, 마침내 郭子儀李光弼의 깨끗한 충성에 의지하고 여러 장수들이 힘을 다함에 의뢰해서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능히 京師를 수복하였으니, 그 功이 크다. 그러나 황제는 성품이 인자하기만 하고 용감하지 못하며 나약함이 너무 지나쳐서 剛斷이 부족하여 마침내 太阿의 칼자루[政柄]를 거꾸로 쥐어 아랫사람에 옮겨주었다. 이 때문에 비록 세 宦官을 처벌하고 元載를 목베었으나 처음에 또한 이들을 너무 지나치게 총애하고 重用하였고, 종말에도 극진히 善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오로지 姑息을 일삼아서 主帥를 축출하거나 죽인 자를 명하여 主帥로 삼아 마침내 後來의 故事가 되게 함에 이르렀으니, 《資治通鑑綱目》에 더더욱 깊이 이것을 허물하였다.

當時에 유념한 것은 百高座를 설치하고《仁王經》을 講하며 章敬寺를 짓고 僧侶와 女僧을 널리 度牒하며 盂蘭盆을 내어서 도망해온 僧侶를 표창해 줌에 지나지 않았으니, 唐나라가 크게 무너짐이 실로 여기에 기인하였다. 그러므로 司馬公肅宗代宗 두 황제에 대하여 논하기를, ‘이 두 군주는 聰明은 이치를 밝게 보지 못하고 武는 의심을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지난번에 만일 郭子儀의 충성과 李光弼의 지혜가 없었더라면 天下는 이미 唐나라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

○ 以崔祐甫로 爲門下侍郞同平章事하다

崔祐甫를 門下侍郞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 初에 至德肅宗年號라 】以後로 天下用兵하니 諸將이 競論功賞이라 故로 官爵이 不能無濫이러니 及常袞爲相에 思革其弊하야 杜絶僥倖하야 四方奏請을 一切不與하고 而無所甄別【甄은 察也라 】하야 賢愚同滯하다 崔祐甫代之에 欲收時望하야 推薦引拔을 常無虛日하니 作相未二百日에 除官八百人이라 前後相矯【矯는 矯枉過直之矯也니 變改也라 】에 終不得其適이러라 上이 嘗謂祐甫曰 人或謗卿所用이 多涉親故라하니 何也오 對曰 臣爲陛下하야 選擇百官에 不敢不詳愼하오니 苟平生之未識이면 何以諳其才行而用之리잇고 上이 以爲然하다

처음에 至德 연간【至德은 肅宗의 年號이다.】 이래로 天下가 用兵을 하니, 諸將들이 다투어 功과 賞을 논하였다. 이 때문에 官爵이 범람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常袞이 재상이 되자 이 폐단을 개혁할 것을 생각하여 요행으로 승진하는 길을 막아서 사방의 奏請을 일체 들어주지 않고 선별하는 바가 없어서【甄은 살핌이다.】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함께 적체되었다. 그러다가 崔祐甫가 그를 대신하여 재상이 되자, 당시의 명망을 거두고자 하여 어느 날이고 인재를 추천하고 이끌어 발탁하지 않는 날이 없게 하니, 재상이 된 지 200일이 못되어 관직에 제수된 자가 800명이었다. 그리하여 두 재상이 前後로 서로 바로잡음에【矯는 矯枉過直의 矯이니, 바꾸고 고치는 것이다.】 끝내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다.

上이 일찍이 崔祐甫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은 혹 경이 등용한 바가 많이 親故(친척과 친구)에 해당된다고 비방하니, 어떠한가?” 하니, 崔祐甫가 대답하기를 “臣이 陛下를 위하여 百官을 선발할 적에 감히 자세하고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만일 평소 알지 못하는 사람이면 어떻게 그의 재주와 행실을 알아 등용하겠습니까?” 하였다. 上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溫公曰 臣聞用人者는 無親疎新故之殊요 惟賢不肖之爲察이니 其人이 未必賢也어늘 以親故而取之면 固非公也요 苟賢矣어늘 以親故而捨之도 亦非公也라 夫天下之賢은 固非一人所能盡也니 若必待素識熟其才行而用之면 所遺亦多矣라 古之爲相者則不然하야 擧之以衆하고 取之以公하야 衆曰賢矣어든 己雖不知其詳이라도 姑用之하야 待其無功然後에 退之하고 有功則進之하며 所擧得其人則賞之하고 非其人則罰之하야 進退賞罰이 皆衆人所共然也요 己不置毫髮之私於其間하니 苟推是心以行之면 又何遺賢曠官之足病哉리오

溫公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인재를 등용하는 자는 親疎와 新舊의 구별이 없이 오직 어진가, 不肖한가를 살펴야 하니, 그 사람이 반드시 어질지는 않은데 親故라 하여 취한다면 진실로 공정한 방법이 아니요, 만약 어진데 親故라 하여 버리는 것도 공정한 방법이 아니다. 천하의 어진 자는 진실로 한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만일 반드시 평소부터 잘 알고 그의 재주와 행실을 익숙히 알기를 기다린 뒤에야 등용한다면 버려지는 자가 또한 많을 것이다. 옛날에 재상이 된 자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여러 사람이 천거하고 공정하게 취해서 여러 사람이 어질다고 말하면 비록 자신이 그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우선 등용해서 그가 功이 없기를 기다린 뒤에 물리치고 공이 있으면 승진시키며, 천거한 바가 그 적임자이면 천거한 자에게 상을 주고 적임자가 아니면 천거한 자에게 벌을 주어서 進‧退와 賞‧罰이 모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옳게 여기는 바이고, 재상 자신은 털끝만한 사사로움도 그 사이에 두지 않았다. 만일 이 마음을 미루어 인재를 등용한다면 어찌 어진 이를 버리고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 澤州刺史李鶡이 上慶雲圖【慶雲은 天官書에 若烟非烟이요 若雲非雲이라 郁郁紛紛하고 蕭索輪囷하니 是爲卿雲이라 亦云景雲하니 此喜氣也라하니라 卿은 音慶이라 晉天文志에 瑞氣는 一曰慶雲이니 太平之應也라하니라 】어늘 詔曰 朕이 以時和年豐으로 爲嘉祥하고 以進賢顯忠으로 爲良瑞하노니 如慶雲, 靈芝, 珍禽, 奇獸, 怪草, 異木이 何益於人이리오 布告天下하야 自今有此어든 無得上獻케하라

澤州刺史李鶡이 慶雲圖를【慶雲은 ≪史記≫ 〈天官書〉에 “연기 같으나 연기가 아니고, 구름 같으나 구름도 아니다. 성대하고 분분하고 스산하고 높고 크니, 이것을 卿雲이라 한다. 또한 景雲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좋은 기운(구름)이다.” 하였다. 卿은 음이 경이다. ≪晉書≫ 〈天文志〉에 “상서로운 기운은 첫 번째가 慶雲이니, 세상이 태평해질 응험(징조)이다.” 하였다.】올리자, 上이 조서를 내리기를 “짐은 시절(기후)이 순조로워 年事가 풍년드는 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기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충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은 상서로 여기노니, 경사스러운 구름과 靈芝와 진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과 기이한 풀과 특이한 나무가 어찌 사람에게 유익하겠는가. 이것을 천하에 고해서 지금부터는 이런 것이 있거든 올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 內莊宅使上言호되 諸州에 有官租萬四千餘斛이라한대 上이 令分給所在하야 充軍儲하다 先是에 諸國이 累獻馴象【擾習也라 安南出象處曰象山이니 歲一捕之호되 縛欄道傍하고 中爲大穽하야 以雌象前行爲媒하고 遺甘蔗於地하고 傅藥蔗上하면 雄象來食蔗라가 漸引入欄이어늘 閉其中하고 就穽中하야 敎習馴擾之하니 始甚咆哮나 穽深不可出이라 牧者以言語喩之하니 久則漸解人意也니라 】하니 凡四十有二라 上曰 象은 費豢養【穀食曰豢이니 音宦이라 以穀食獸于圈中이니 牛馬曰芻요 犬豕曰豢이라 】而違物性하니 將安用之리오하고 命縱於荊山之陽하고 及豹貀【豹, 貀은 竝獸名이라 豹는 花如錢黑而小於虎文이요 貀은 女猾反이니 爾雅註에 似狗豹文이라 或云 似虎而黑이라하니라 】鬪鷄獵犬之類를 悉縱之하고 又出宮女數百人하니 於是에 中外皆悅이라 淄靑【李正己라 】軍士 至投兵相顧曰 明主出矣시니 吾屬이 猶反乎아하니라

內莊宅使가 상언하기를 “여러 州에서 거둔 官租가 1만 4천여 斛이 있습니다.” 하니, 上은 소재지에 나누어 주어서 군량의 저축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러 나라에서 자주 길들인 코끼리를 올리니,【馴은 길들이는 것이다. 安南(越南)에 코끼리가 나오는 곳을 象山이라 하니, 해마다 한번 코끼리를 잡되 코끼리 우리를 길옆에 묶어놓고 가운데에 큰 함정을 만든 다음 암코끼리를 앞에 가게 하여 매개물로 삼고 甘蔗(사탕수수)를 땅에 버려 놓으며, 甘蔗 위에 藥을 발라놓으면 수코끼리가 와서 감서를 먹다가 점점 유인되어 우리로 들어간다. 그러면 그 가운데를 닫고 함정 속에 넣어 코끼리를 가르치고 길들이니, 처음에는 매우 포효하나 함정이 깊어 나올 수가 없다. 코끼리를 사육하는 자가 말로 가르치니, 시간이 오래되면 점점 사람의 뜻을 알게 된다.】 모두 42마리였다. 上은 말하기를 “코끼리는 기르는 비용이 들고【穀食을 먹는 가축(개와 돼지)을 豢이라 하니, 음은 환이다. 곡식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에서 짐승을 먹이는 것이니, 소와 말을 芻라 하고 개와 돼지를 豢이라 한다.】 〈가두어 두면〉 동물의 천성을 어기는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는 荊山의 남쪽에 놓아주게 하였으며, 표범과 貀과【豹와 貀은 모두 짐승의 이름이다. 豹는 무늬가 돈[錢]과 같고 검은데 범의 무늬보다 작다. 貀은 女猾反(눌)이니, ≪爾雅≫의 註에 “개와 비슷하고 표범의 무늬이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호랑이와 비슷한데 검다.” 하였다.】鬪鷄와 사냥개 따위를 모두 놓아주고 또 궁녀 수백 명을 내보내니, 이에 中外가 모두 기뻐하였다. 淄靑의【淄靑軍의 節度使는 李正己이다.】 군사들은 심지어 병기를 버리고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明主가 나오셨으니, 우리들이 아직도 배반한단 말인가?” 하였다.

○ 先是에 劉晏, 韓滉이 分掌天下財賦하야 은 掌河南, 山南, 江淮, 嶺南하고 은 掌關內, 河東, 劍南이러니 至是하야 이 始兼之하니라 上이 素聞掊克【詩曰 曾是掊克이라하니 謂聚斂也라 】過甚이라 故로 罷其利權하야 出爲晉州刺史하다 至德初에 第五琦 榷鹽以佐軍用이러니 及劉晏代之에 法益精密하야 初歲에 入錢이 六十萬緡이러니 末年所入이 逾十倍호되 而人不厭苦하고 大曆代宗年號라 】末에 計一歲征賦【征은 取也라 孟子有布縷之征과 粟米之征과 力役之征也니라 】所入하니 總一千二百萬緡에 而鹽利居其太半이라 以鹽爲漕傭【水運曰漕요 雇直(値)曰傭이라 】하니 自江淮로 至渭橋히 率萬斛에 傭七千緡이라 自淮以北에 列置巡院하고 擇能吏主之하니 不煩州縣而集事【集은 成也라 】하니라

이보다 앞서 劉晏韓滉이 天下의 財賦를 나누어 관장하여, 劉晏은 河南, 山南, 江淮, 嶺南을 관장하고, 韓滉은 關內, 河東, 劍南을 관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劉晏이 처음으로 겸하였다. 上은 평소 韓滉이 가렴주구가【掊克은 ≪詩經≫에 이르기를 “일찍이 掊克(苛斂誅求)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으니, 백성에게서 聚斂함을 이른다.】 너무 심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의 이권을 파하여 晉州刺史로 내보냈다.

至德 초년에 第五琦가 소금을 전매하여 군대의 비용을 보충하였는데, 劉晏이 대신하게 되자 전매하는 법이 더욱 정밀하였다. 그리하여 초년에는 수입한 돈이 60만 緡이었는데 말년에는 수입이 열 배를 넘었으나 백성들이 싫어하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며, 大曆【大曆은 代宗의 年號이다.】 말년에는 1년에 부세로 징수한【征은 취함이다. ≪孟子≫ 〈盡心 下〉에 “삼베와 실에 대한 세금과 곡식에 대한 세금과 힘으로 부역하는 세금이 있다.” 하였다.】 수입을 계산해 보니, 총 1천 2백만 緡이었는데 그 중 소금의 이익이 태반을 차지하였다.

劉晏은 소금을 가지고 漕運하는 품삯으로 삼으니,【물길로 운반하는 것을 漕라 하고, 품삯을 傭이라 한다.】江‧淮로부터 渭橋에 이르기까지 대략 소금 1만 斛에 품삯이 7천 緡이었다. 淮水로부터 이북에는 沿路에 巡院을 설치하고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여 주관하게 하니, 州縣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일이 잘 이루어졌다.【集은 이룸이다.】

李正己畏上威名하야 表獻錢三十萬緡이어늘 上欲受之로되 恐見欺하고 却之則無辭라 崔祐甫請遣使하야 慰勞淄靑將士하고 因以正己所獻錢賜之하야 使將士로 人人戴上恩하고 又諸道聞之하면 知朝廷不重貨財하리이다 上이 悅從之하다 正己大慙服하니 天下以爲太平之治를 庶幾可望焉이라하니라

李正己는 上의 위엄과 명성을 두려워하고 표문을 올려 돈 30만 緡을 바쳤다. 은 이것을 받고자 하였으나 기만당할까 두렵고, 이것을 물리치자니 명분이 없었다. 崔祐甫가 청하기를 “사자를 보내어 淄靑의 장병들을 위로하고 인하여 李正己가 바친 돈을 그들에게 하사해서 장병들로 하여금 사람마다 上의 은혜를 추앙하게 하고, 또 여러 도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朝廷에서 재화를 중히 여기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기뻐하여 따르니, 李正己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복종하였다. 천하에서는 太平의 정치를 거의 바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 上之在東宮也에 國子博士河中張涉이 爲侍讀이러니 卽位之夕에 召涉入禁中하야 事無大小히 皆咨之하고 明日에 置於翰林하야 爲學士하니 親重無比러라

上이 東宮에 있을 적에 國子博士河中張涉이 侍讀官이 되었었는데, 卽位하는 날 저녁에 張涉을 불러 禁中으로 들어오게 하여 크고 작은 정사 할 것 없이 모두 자문하고 다음날에 翰林院에 두어 學士로 삼으니, 친애하고 소중히 여김이 견줄 자가 없었다.

○ 八月에 以道州司馬楊炎으로 爲門下侍郞하고 懷州刺史喬琳으로 爲御史大夫하야 竝同平章事하다 上이 方勵精求治하야 不次用人이라 卜相於崔祐甫한대 祐甫薦炎器業【器局功業也라 】하고 上亦素聞其名이라 故로 自遷謫中元載待炎親重無比러니 載敗에 坐貶道州司馬하니라 】用之하다 은 太原人이니 性粗率【猶言疎略이라 】하야 喜詼諧【喜는 悅也니 悅爲詼諧也라 詼는 譏戲也요 諧는 和韻之言이라】하고 無他長이로되 與張涉善이라 이 稱其才可大用이라한대 上이 信言而用之하니 聞者無不駭愕【愕은 驚也라 】이러라

8월에 道州司馬楊炎을 門下侍郞으로 삼고懷州刺史喬琳을 御史大夫로 삼아서 함께 同平章事에 임명하였다. 上은 이때 막 정신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해서 官階의 차례를 따르지 않고 인물을 등용하였다. 재상감을 崔祐甫에게 묻자, 崔祐甫楊炎의 기국과 공업을【器業은 器局과 功業이다.】 천거하였고 上 또한 평소 그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좌천되어 있던 그를 등용하였다.【元載가 楊炎을 친애하고 소중히 여김이 견줄 자가 없었는데, 元載가 패하자 楊炎이 道州司馬로 좌천되었다.】喬琳은 太原 사람이니, 성품이 거칠고 소략하여【粗率은 疎略이라는 말과 같다.】 詼諧(詼謔)를 좋아하고【喜는 좋아함이니, 詼諧를 좋아하는 것이다. 詼는 기롱하고 놀림이요, 諧는 韻에 맞는 말이다.】 다른 장점이 없었으나 張涉과 친하였다. 張涉은 그의 재주가 크게 쓸 만하다고 칭찬하였는데, 上이 張涉의 말을 믿고 그를 등용하니, 듣는 자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愕은 놀람이다.】

○ 舊制에 天下金帛을 皆貯於左藏大府【左藏庫는 蓋起於周하니 職內는 主賦入하고 職歲는 主賦出하고 而邦布之入出은 則外府又主之하니 皆其職也라 [頭註] 大府는 唐制에 掌廩藏財貨出納이라 】하고 四時로 上其數하야 比部覆其出入【比部는 掌句會內外賦斂經費俸祿之物하니라 覆은 審也라 】이러니 及第五琦爲度支鹽鐵使하니 時에 京師에 多豪將하야 求取無節이라 琦不能制하야 乃奏盡貯於大盈【庫名이니 始於玄宗하니라 】內庫하고 使宦官掌之하니 天子亦以取給爲便이라 故로 久不出이라 由是로 以天下公賦로 爲人君私藏하야 有司不復得窺其多少, 校其贏縮【贏은 益也라 】이 殆二十年이요 宦官領其事者 三百餘員이라 皆蠶食其中하야 蟠結根據하야 牢不可動이라 楊炎이 頓首於上前曰 財賦者는 國之大本이요 生民之命이니 重輕安危 靡不由之니이다 是以로 前世皆使重臣掌其事호되 猶或耗亂不集이어늘 今獨使中人으로 出入盈虛하고 大臣은 皆不得知하니 政之蠹敝(弊) 莫甚於此라 請出之하야 以歸有司하고 度(官)[宮]中歲用幾何하야 量數奉入이면 不敢有乏이니 如此然後에 可以爲政이리이다 上이 卽日下詔하야 凡財賦를 皆歸左藏하야 一用舊式하고 歲於數中에 擇精好者三五千匹하야 進入大盈庫하다 炎以片言으로 移人主意하니 議者稱之러라

옛 제도에 天下의 금과 비단을 모두 左藏의 큰 창고에【[釋義] 左藏庫는 周나라 때 시작되었으니, 職內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주관하고 職歲는 지출하는 것을 주관하였으며, 나라의 삼베의 출입은 外府가 또 주관하였으니, 모두 그 직책이다. [頭註] 大府는 唐나라 제도에 창고에 보관된 財貨의 出納을 관장하였다.】 보관하고, 四時로 그 숫자를 올려서 比部에서 그 출납을 句覆(조사)하였는데,【比部는 內外의 세금과 經費와 俸祿의 물건을 조사하고 계산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覆은 살핌이다.】第五琦가 度支鹽鐵使가 되니 이때 京師에 호걸스러운 장수가 많아서 요구하고 취하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第五琦는 이들을 제재하지 못하여 마침내 아뢰어 이것을 大盈의【大盈은 창고 이름이니, 玄宗 때에 시작되었다.】內庫에 모두 보관하고 환관을 시켜 관장하게 하니, 천자 또한 취하고 공급하는 것을 편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이것을 내놓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공적인 세금을 가지고 인군의 사사로운 창고로 삼아서 有司가 다시는 그 많고 적음을 엿보고 그 남고 부족함을 따지지 못한 것이【贏은 더함(남음)이다.】 거의 20년이었고, 宦官으로서 이 일을 맡은 자가 300여 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이 가운데에서 잠식하여 또아리를 틀고 뿌리를 내려서 견고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楊炎이 上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財賦라는 것은 나라의 큰 근본이요 生民의 목숨이니, 국가의 輕重과 安危가 여기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前代에는 모두 중신으로 하여금 이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혹 소모되고 혼란하여 제대로 모이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홀로 환관으로 하여금 내고 들이고 채우고 비우게 하며 大臣은 전혀 알지 못하니, 정사의 폐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이것을 내놓아서 有司에게 돌리고, 궁중에서 해마다 쓰는 것이 얼마인가를 헤아려서 숫자를 헤아려 받들어 들이면 감히 궁핍함이 있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제대로 된 정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上은 당일로 조칙을 내려 모든 財賦를 다 左藏庫로 돌려서 한결같이 옛 법식을 따르고, 해마다 그 숫자 안에서 정교하고 좋은 비단 3천 필 내지 5천 필을 가려서 大盈庫로 받들어 올리게 하였다. 楊炎이 한 마디 말로써 군주의 뜻을 바꾸니, 의논하는 자들이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