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十四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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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孝元皇帝

名은 이니 宣帝長子라 在位十六年이요 壽四十三이라

※ 名은 이니 宣帝長子라 在位十六年이요 壽四十三이라

※ 牽制文義하고 優游不斷하야 孝宣之業이 衰焉하니라

孝元皇帝※는 이름이 이니, 宣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16년이고 壽가 43세이다.

孝元皇帝는 문장의 뜻에 구애되고 우유부단해서 孝宣皇帝의 업적이 쇠퇴하였다.

[癸酉]初元元年

[癸酉]初元元年이라

上이 素聞王吉, 貢禹皆明經潔行하고 遣使者徵之러니 은 道病卒하고 는 至라 拜爲諫大夫하고 上이 數虛己하야 問以政事한대 奏言호되 古者에 人君節儉하야 什一而稅하고 亡(無)他賦役이라 故로 家給人足하니 臣愚는 以爲如太古는 難이어니와 宜少放古하야 以自節焉이라하노이다 天子納善其言하야 〈出貢禹本傳〉詔令諸宮館希(稀)御幸【衣服之加於身과 飮食之入於口와 妃妾之接於寢을 皆曰御요 上之親愛者曰幸이라】者를 勿繕治하고 太僕에 減穀食馬하고 水衡【水衡都尉는 主都水及上林苑이라】에 省肉食獸【減은 謂損其數요 省은 謂全去之라】하다 〈出本傳〉

初元 元年(계유 B.C.48)

上이 평소에 王吉貢禹가 모두 經學에 밝고 행실이 깨끗하다는 말을 듣고 使者를 보내어 부르니, 王吉은 도중에 병으로 죽고 貢禹는 이르렀다. 貢禹를 임명하여 諫大夫로 삼고 上이 자주 자기 몸을 겸손히 하여 정사를 묻자 貢禹가 上奏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人君이 절약하고 검소해서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받고 딴 부역(세금과 신역)이 없었으므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太古처럼 하기는 어려우나 마땅히 다소 옛날을 본받아 스스로 절약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天子는 그 말을 좋게 여겨 받아들여서 - 《漢書 貢禹傳》에 나옴 - 명령을 내려 여러 宮館 중에 황제가 자주 행차【몸에 가하는 의복과 입에 넣는 음식과 침소에서 시중하는 妃와 妾을 모두 御라 하고, 上이 친애하는 자를 幸이라 한다.】하지 않는 곳을 수선하지 말게 하고 太僕에는 곡식을 먹이는 말을 줄이게 하고, 水衡【水衡의 都尉는 都城의 물과 上林苑을 주관하였다.】에는 고기를 먹이는 짐승을 전부 없애도록 하였다.【[頭註]減穀……省肉食獸:減은 숫자를 줄임을 이르고, 省은 전부 없앰을 이른다.】 - 《漢書 貢禹傳》에 나옴 -

溫公曰 忠臣之事君也에 責其所難이면 則其易者不勞而正이요 補其所短이면 則其長者不勸而遂라 孝元踐位之初에 虛心以問하니 宜先其所急하고 後其所緩이니 然則優游不斷과 讒佞用權은 當時之大患也어늘 而不以爲言하고 恭謹節儉은 孝元之素志也어늘 而孜孜言之는 何哉아 使之智不足以知인댄 烏得爲賢이리오 知而不言인댄 爲罪愈大矣리라

[新增]通鑑筆義曰 嗟夫라 漢元帝唐文宗은 寬厚恭儉하야 有人君之德이로되 而受制閹宦하야 百度廢弛하야 賢不肖雜亂하고 賞罰倒置하야 終身泯黙하야 至於不振하니 可哀也已라 故로 予嘗謂漢之業이 所以遂衰而不振者는 元帝柔弱之過요 漢之祚 所以旣亡而復興者는 元帝恭儉之功이라하노라

溫公이 말하였다.

“忠臣이 君主를 섬길 적에 군주가 하기 어려운 것을 군주에게 요구하면 쉬운 것은 수고롭지 않고도 바루어지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면 잘하는 것은 권하지 않고도 이루어진다. 孝元帝가 즉위하던 초기에 마음을 겸허히 하여 貢禹에게 물었으니, 貢禹는 마땅히 급한 것을 먼저 하고 늦추어도 되는 것을 뒤에 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유부단함과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것은 당시의 큰 병폐였는데 貢禹가 이것을 말하지 않고, 공손하고 절약함은 孝元帝의 평소의 뜻이었는데 貢禹가 이것을 부지런히 말함은 어째서인가? 만일 貢禹의 지혜가 이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죄가 됨이 더욱 크다.”

[新增]《通鑑筆義》에 말하였다.

“아! 漢나라 元帝와 唐나라 文宗은 寬厚하고 恭儉하여 人君의 德이 있었으나 宦官들에게 제재를 받아서 온갖 법도가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賢者와 不肖한 자들이 뒤섞여 어지럽고 賞罰이 도치되어 종신토록 침묵해서 振作하지 못함에 이르렀으니, 가련하다. 그러므로 내(戴溪)가 일찍이 이르기를 ‘漢나라의 基業이 마침내 쇠퇴하여 振作하지 못한 까닭은 元帝의 柔弱한 과실 때문이고, 漢나라의 國運이 이미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까닭은 元帝의 恭儉한 공로 때문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甲戌]二年

[甲戌]二年이라

史高以外屬으로 領尙書事하다 蕭望之周堪이 皆以師傅舊恩으로 天子任之하야 數宴見에 言治亂, 陳王事【陳王者之事라】러니 望之選白宗室의 明經有行劉更生【劉向也라】하야 與金敞으로 竝拾遺左右하니 史高는 充位而已라 由是로 與望之有隙이러라 弘恭, 石顯이 自宣帝時로 久典樞機하야 明習文法이러니 帝卽位에 多疾이라 委以政事하니 望之等이 患苦許史放縱하고 又疾, 擅權하야 建白【建議而告白於上이라】以爲 中書는 政本이요 國家樞機니 宜以通明公正處之니이다 武帝游宴後庭이라 故로 用宦者하시니 非古制也라 宜罷中書宦官하야 應古不近刑人【公羊傳襄二十九年에 君子不近刑人이니 近刑人은 則輕死之道也라한대 註云 刑人不自賴也라하니라】之義니이다하니 由是로 大與, , 顯忤러라 〈出石顯及蕭望之傳〉 , 이 因奏望之, , 更生이 朋黨하야 毁離親戚【父黨曰親이요 母黨曰戚이라】하고 欲以專擅權勢하니 請召致廷尉하노이다 上曰 蕭太傅素剛하니 安肯就吏리오 等曰 人命이 至重하니 望之所坐를 語言薄罪면 必無所憂리이다 上이 乃可其奏하다 使者召望之한대 望之仰天歎曰 吾嘗備位將相하야 年踰六十矣라 老入牢獄하야 苟求生活이 不亦鄙乎아하고 飮鴆自殺하다 天子聞之하고 驚拊手曰 曩에 固疑其不就牢獄이러니 果然殺吾賢傅로다

初元 2년(갑술 B.C.47)

史高가 外屬(外戚)으로 尙書의 일을 관장하였다. 蕭望之周堪이 모두 옛날의 師傅였던 은혜로 天子가 임용하여 자주 사사로이 뵐 적에 治亂을 말하고 王道의 일을 아뢰었다.【王者의 일을 아뢰는 것이다.】蕭望之가 宗室 중에 經學에 밝고 훌륭한 행실이 있는 劉更生(劉向)【劉更生은 劉向이다.】을 선발하여 아뢰어서 金敞과 함께 좌우에서 拾遺가 되게 하니, 史高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蕭望之와 틈이 있게 되었다.

弘恭石顯宣帝 때로부터 樞機(중요한 부서로 中書謁者令을 가리킴)를 오랫동안 맡아 법조문에 밝고 익숙하였는데, 황제가 즉위하자 병이 많아 이들에게 정사를 맡겼다. 蕭望之 등은 許氏史氏가 방종함을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또 弘恭石顯이 권력을 독단하는 것을 미워해서 건의하여 아뢰기를【建白은 건의하여 上에게 아뢰는 것이다.】 “中書는 정사의 근본이고 국가의 樞機이니, 마땅히 通明하고 公正한 자를 그 자리에 있게 해야 합니다. 武帝가 後庭에서 놀이하고 잔치하였기 때문에 宦官을 中書로 등용하셨으니, 이는 옛 제도가 아닙니다. 마땅히 中書의 宦官을 혁파하여 옛날에 형벌 받은 사람(환관)을 가까이하지 않는【≪春秋公羊傳≫ 襄公 29年에 “군자는 형벌 받은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형벌 받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길이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형벌 받은 사람은 스스로 自重하지 못한다.” 하였다.】 뜻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史高, 弘恭, 石顯과 크게 틀어졌다.- 《漢書》〈石顯傳〉과 〈蕭望之傳〉에 나옴 -

弘恭石顯이 인하여 아뢰기를 “蕭望之周堪, 劉更生이 붕당하여 황제의 친척【아버지의 친족을 親이라 하고, 어머니의 친족을 戚이라 한다.】을 헐뜯고 이간질하며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불러서 廷尉에게 맡겨 治罪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蕭太傅는 평소 강직하니, 어찌 獄吏에게 나아가려 하겠는가?” 하자, 石顯 등이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니, 蕭望之가 범한 罪를 言語上의 작은 죄로 한다면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上이 마침내 石顯 등이 아뢴 것을 허락하였다. 使者가 蕭望之를 부르자, 蕭望之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내 일찍이 將相의 지위에 있었고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다. 늙어서 감옥에 들어가 구차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 비루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鴆毒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天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손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지난번에 진실로 그가 牢獄에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과연 나의 어진 師傅를 죽였도다.” 하였다.

溫公曰 甚矣라 孝元之爲君이여 易欺而難寤也로다 夫, 之譖愬望之엔 其邪說詭計를 誠有所不能辨也어니와 至於始疑望之不肯就獄에 , 以爲必無憂라하더니 已而요 果自殺【顯等이 知望之不就獄하고 發軍圍第하야 欲自盡其命이라 望之問門下生朱雲한대 雲은 好節士라 勸望之自殺하니 望之飮酖而死하니라】하야는 則, 之欺亦明矣라 在中智之君이면 孰不感動奮發하야 已底邪臣之罰이리오 孝元則不然하야 雖涕泣不食하야 以傷望之로되 而終不能誅, 하고 纔得其免冠謝而已니 如此면 則姦臣이 安所懲乎아 是使, 得肆其邪心而無復忌憚者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심하다. 孝元帝의 임금 노릇 함이여. 속기는 쉽고 깨닫기는 어렵도다. 弘恭石顯蕭望之를 참소할 때에는 그 간사한 말과 속임수를 진실로 분별할 수 없었으나 蕭望之가 獄에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孝元帝가 처음에 의심했을 때에 弘恭石顯은 굳이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얼마 후 과연 蕭望之가 자살함【石顯 등은 蕭望之가 옥에 나오지 않을 줄 알고 군대를 동원하여 집을 포위하여 蕭望之가 스스로 그 목숨을 끊게 하고자 하였다. 蕭望之가 문하생인 朱雲에게 물었는데, 朱雲은 절개를 좋아하는 선비였으므로 蕭望之에게 자살할 것을 권하니, 蕭望之가 酖毒을 마시고 죽었다.】에 이르러서는 弘恭石顯이 속인 것이 또한 분명하다. 中等 정도의 지혜가 있는 임금이라면 그 누가 감동하고 분발하여 간사한 신하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孝元帝는 그렇지 아니하여 비록 눈물을 흘리고 밥을 먹지 않으며 蕭望之의 죽음을 서글퍼하였으나 끝내 弘恭石顯을 주벌하지 못하고 겨우 그들이 冠을 벗고 사죄하게 하였을 뿐이니, 이와 같다면 간신들이 어떻게 징계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弘恭石顯으로 하여금 간사한 마음을 제멋대로 부려서 다시는 기탄함이 없게 만든 것이다.”

初에 武帝滅南越하고 置珠厓, 儋耳郡하니 在海中洲上하야 率數年一反이라 上이 卽位之明年에 珠厓山南縣이 反이어늘 上이 博謀於群臣하고 欲大發軍擊之러니 待詔賈捐之曰 臣聞, , 之聖德에 地方이 不過數千里로되 東漸于海하고 西被流沙하고 朔南에 曁聲敎【書禹貢에 孔氏曰 此言五服之外가 皆與王者聲敎而朝見也라 朔南은 北方也라 蔡氏傳曰 漸은 漬也요 被는 覆也요 曁는 及也니 地有遠近이라 故言有淺深이라 聲은 謂風聲이요 敎는 謂敎化라 王氏曰 按五代晉高居誨使于闐記에 自靈州로 過黃河하야 行三十里에 始涉沙하야 入党項界하고 自此沙로 行四百餘里하야 登沙嶺하고 渡白亭河하야 至涼州하고 自涼州西五百里에 至甘州하고 甘州西에 始涉磧하니 磧無水라 西北五百里에 至肅州하고 渡金河하야 西百里에 出天門關하고 又西百里에 出玉門關하야 西至瓜州하고 瓜州南十里에 鳴沙山이니 冬夏에 殷殷有聲如雷하니 云禹貢流沙也라】하니 言欲預聲敎則治之하고 不欲預者는 不强治也라 臣願遂棄珠厓하고 專用恤關東爲憂【賈捐之傳에 今天下獨有關東이 連年流離하야 相枕〈席〉於道路하야 以至嫁妻賣子호되 不能禁止하니 此社稷之憂也라하니라】하노이다 上이 從之하다 〈出捐之本傳〉

처음에 武帝가 南越을 멸망하고珠厓郡과 儋耳郡을 설치하니, 이들 郡이 海中의 섬에 있어서 대략 몇 년에 한 번씩 배반하였다. 上이 즉위한 다음 해에 珠厓郡의 山南縣이 반란하자, 上이 여러 신하들과 널리 상의하고 군대를 크게 징발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待詔賈捐之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임금‧임금‧禹王과 같은 聖德으로도 땅이 수천 리에 불과하였으나 敎化가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流沙에 입혀지고 朔方(북방)과 남쪽에 聲敎가 미쳤으니,【[釋義]堯, 舜, 禹……曁聲敎:≪書經≫ 〈禹貢〉의 註에 孔氏(孔安國)가 말하기를 “이는 五服의 밖이 모두 王者의 聲敎에 참여하여 조회함을 말한 것이다. 朔南은 北方이다.” 하였다. 蔡沈의 傳에 이르기를 “漸은 젖음이고 被는 덮혀짐이고 曁는 미침이니, 땅에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있기 때문에 말에 얕고 깊음이 있는 것이다. 聲은 風聲을 이르고, 敎는 교화를 이른다.” 하였다. 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五代時代 晉나라 高居誨가 于闐에 사신 간 기록에 靈州로부터 黃河를 지나 30리를 가야 비로소 사막을 지나 党項界에 들어가고, 이 사막으로부터 400여 리를 가서 沙嶺에 오르고, 白亭河를 건너 涼州에 이르고, 涼州로부터 서쪽 500리를 가서 甘州에 이르고, 甘州의 서쪽으로 가서 비로소 磧을 건너니, 磧은 물이 없다. 서북쪽으로 500리를 가서 肅州에 이르고, 金河를 건너 서쪽으로 100리를 가서 天門關으로 나오고, 또다시 서쪽 100리를 가서 玉門關으로 나와 서쪽으로 瓜州에 이르고, 瓜州의 남쪽 10리를 가서 鳴沙山이 있으니, 겨울과 여름에 은은하게 우레 같은 소리가 있는 바, 이것을 〈禹貢〉의 流沙라 한다.” 하였다.】 聲敎에 참여하고자 하면 다스려 주고 참여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억지로 다스리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珠厓郡을 버리고 오로지 關東 지방을 구휼할 것을 걱정했으면【≪漢書≫ 〈賈捐之傳〉에 “지금 천하에는 關東 지방만이 매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流離하여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즐비하게 널려 있어서 아내를 시집보내고 자식을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것을 금지하지 못하니, 이는 社稷의 우환이다.” 하였다.】 합니다.” 하니, 上이 그 말을 따랐다.- 《漢書 賈捐之傳》에 나옴 -

[乙亥]三年

[乙亥]三年이라

春에 詔罷珠厓하다

初元 3년(을해 B.C.46)

봄에 명하여 珠厓郡을 파하였다.

[戊寅]永光元年

[戊寅]永光元年이라

秋에 上酎祭宗廟【上은 獻也요 酎는 三重釀酒也라 漢制에 正月旦作酒하야 八月乃熟을 名曰酎니 以獻宗廟라】할새 出便門【便은 宜也라 凡言便殿便宮便坐者는 皆非正大之處니 所以就便安也라】하야 欲御樓船이러니 薛廣德이 當乘輿車하야 免冠頓首曰 宜從橋니이다 詔曰 大夫는 冠하라 廣德曰 陛下不聽臣하시면 臣自刎하야 以血汚車輪하리니 陛下不得入廟矣【見死傷하야 犯於齋潔이면 不得入廟祀也라】시리이다 上이 不說이어늘 光祿大夫張猛이 進曰 臣聞主聖臣直이라하니 乘船은 危하고 就橋는 安이라 聖主는 不乘危하나니 御史大夫言을 可聽이니이다 上曰 曉人에 不當如是耶아하고 乃從橋하다 〈出廣德傳〉

永光 元年(무인 B.C.43)

가을에 醇酒를 올려 종묘에 제사【上은 올림이고, 酎는 三重으로 빚은 술(醇酒)이다. 漢나라 제도에 정월 초하루에 술을 제조하여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익는 것을 酎라 이름하니, 이것을 종묘에 올린다.】할 때에 便殿의 門【便은 편의함이다. 무릇 便殿‧便宮‧便坐라고 말한 것은 모두 正大한 곳이 아니니, 편안함에 나아가는 것이다.】으로 나가서 樓船을 타고자 하였는데, 御史大夫薛廣德이 乘輿의 수레를 가로막고는 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마땅히 다리로 가셔야 합니다.” 하였다. 上이 명하기를 “大夫는 冠을 쓰라.” 하자, 薛廣德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면 신은 스스로 목을 찔러 피로써 수레바퀴를 더럽힐 것이니, 이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실 것입니다.【[頭註]臣自刎……陛下不得入廟矣:죽거나 다친 것을 보아 齋潔을 범하면 사당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였다. 上이 기뻐하지 않자, 光祿大夫張猛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군주가 성스러우면 신하가 곧다 하였습니다. 배를 타는 것은 위태롭고 다리로 가는 것은 편안하니, 聖主는 위험한 것을 타지 않는 법입니다. 御史大夫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남을 깨우침에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다리로 갔다.- 《漢書 薛廣德傳》에 나옴 -

石顯이 憚周堪, 張猛等하야 數譖毁之어늘 劉更生이 懼其傾危하야 上書曰 臣聞命九官【書舜典에 命禹宅百揆하고 命棄爲后稷하고 命契爲司徒하고 命皐陶爲士하고 命垂爲共工하고 命益爲虞하고 命伯夷爲秩宗하고 命夔爲典樂하고 命龍爲納言하니라】에 濟濟【濟濟는 盛多貌요 又威儀貌라】相讓은 和之至也라 衆臣和於朝하면 則萬物和於野라 故로 簫韶九成【簫韶는 舜樂之總名이요 九成者는 樂之九成이니 猶周禮所謂九變也라】에 而鳳凰來儀러니 至周, 之際하야는 朝廷不和하야 轉相非怨하니 則日月薄蝕【天文志注에 日月無光曰薄이라 一曰赤黃爲薄이라하고 或曰不交而食曰薄이라 韋昭曰 氣往迫之爲薄이요 虧毁曰蝕이라 又薄은 迫也니 謂被掩迫也라 [通鑑要解]薄은 迫也니 謂被掩迫也라】하고 水泉沸騰하고 山谷易處하고 霜降失節하니 由此觀之컨대 和氣는 致祥하고 乖氣는 致異라 祥多者는 其國安하고 異衆者는 其國危하나니 天地之常經이요 古今之通義也니이다 正臣이 進者는 治之表요 正臣이 陷者는 亂之機也라 夫執狐疑之心者는 來讒賊之口하고 持不斷之意者는 開群枉之門하나니 讒邪進則衆賢退하고 群枉成則正士消라 故로 易有否泰하니 小人道長하고 君子道消면 則政日亂이요 君子道長하고 小人道消면 則政日治하니이다 今以陛下明知(智)로 誠深思天下之心하사 杜閉群枉之門하시고 廣開衆正之路하사 使是非炳然可知면 則百異消滅而衆祥竝至하리니 太平【餘三年食曰登이요 再登曰平이라하니 餘六年食也요 三登曰太平이라하니 餘九年食也라】之基요 萬世之利也니이다 顯이 見其書하고 愈與比而怨更生等이러라

石顯周堪張猛 등을 두려워하여 자주 참소하고 훼방하자, 劉更生은 그들(周堪張猛)의 모함을 받아 위태로울까 두려워해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이 들으니, 임금이 九官【九官은 ≪書經≫ 〈舜典〉에 “禹임금을 임명하여 百揆에 거하게 하고, 棄를 임명하여 后稷으로 삼고, 契을 임명하여 司徒로 삼고, 皐陶를 임명하여 士(法官)로 삼고, 垂를 임명하여 共工으로 삼고, 益을 임명하여 虞로 삼고, 伯夷를 임명하여 秩宗(禮官)으로 삼고, 夔를 임명하여 典樂으로 삼고, 龍을 임명하여 納言으로 삼았다.” 하였다.】을 임명할 때에 성대하게【濟濟는 성대한 모양이요, 또 威儀가 있는 모양이다.】 서로 사양함은 화합함의 지극함이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서 화합하면 萬物이 들에서 화합합니다. 그러므로 簫韶를 아홉 번 연주하자【簫韶는 舜임금 음악의 총칭이요, 九成은 음악이 아홉 번 끝나는 것이니, ≪周禮≫에 이른바 ‘九變’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鳳凰이 와서 춤을 추었는데, 周나라 幽王厲王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신하들이 不和하여 돌려가며 서로 비방하고 원망하자 日蝕과 月蝕이 있고【[附註]≪漢書≫ 〈天文志〉 注에 “해와 달이 빛이 없는 것을 薄이라 한다.” 하였다. 一說에는 “赤黃色을 薄이라 한다.” 하였고, 혹자는 말하기를 “해와 달이 엇갈리지 않고 먹힘을 薄이라 한다.” 하였다. 韋昭가 말하기를 “기운이 가서 핍박함을 薄이라 하고, 이지러짐을 蝕이라 한다.” 하였다. 또 薄은 핍박함이니, 핍박당함을 이른다. [通鑑要解]薄은 핍박함이니, 엄폐되고 핍박당함을 이른다.】 水泉이 끓어오르며 산과 골짜기가 뒤바뀌고 서리가 절기에 맞지 않게 내렸으니,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건대 화목한 기운은 祥瑞를 부르고 간사한 기운은 災異를 부릅니다. 祥瑞가 많으면 그 나라가 편안하고 災異가 많으면 그 나라가 위태로우니, 이는 天地의 떳떳한 經道이고 古今에 공통된 義理입니다. 정직한 신하가 등용되는 것은 다스려질 징표이고, 정직한 신하가 모함당하는 것은 혼란해질 기틀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여 해치는 말을 오게 하고, 우유부단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여러 부정한 문을 열어 놓으니, 참소하는 자와 간사한 자가 등용되면 여러 賢者들이 물러나고, 여러 부정한 것이 이루어지면 올바른 선비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周易》에는 否卦와 泰卦가 있으니, 泰가 되어 小人의 道가 자라고 君子의 道가 사라지면 정사가 날로 혼란해지고, 否가 되어 君子의 道가 자라고 小人의 道가 사라지면 정사가 날로 다스려집니다. 지금 폐하의 현명함과 지혜로움으로 진실로 천하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시어 여러 간사한 문을 막으시고 여러 바른 길을 널리 열어 놓으셔서 是非가 분명하여 알 수 있게 하시면 온갖 災異가 사라져 없어지고 여러 가지 祥瑞가 함께 이를 것이니, 태평함【3년 먹을 양식이 남은 것을 登이라 하고, 두 번 登이 된 것을 平이라 하니 6년 먹을 양식이 남은 것이요, 세 번 登이 된 것을 太平이라 하니 9년 먹을 양식이 남은 것이다.】의 터전이고 萬世의 이로움입니다.”

石顯은 이 글을 보고 더욱 許氏史氏와 친하고, 劉更生 등을 원망하였다.

[己卯]二年

[己卯]二年이라

匡衡이 上疏曰 治天下者는 審所上(尙)而已니 敎化之流는 非家至而人說之【言非家家皆到, 人人勸說也라】也라 賢者在位하고 能者布職하야 朝廷崇禮하고 百僚敬讓하야 道德之行이 由內及外하야 自近者始然後에 民知所法하야 遷善日進而不自知也니이다

永光 2년(기묘 B.C.42)

匡衡이 상소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숭상할 바를 살필 뿐이니, 교화가 흐름(베풀어짐)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사람마다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집집마다 다 찾아가고 사람마다 권면하여 설득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어진 자가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자가 직책에 있어서 조정이 禮를 숭상하고 百官들이 공경하고 겸양하여 道德의 행해짐이 안으로부터 밖에까지 미쳐서 가까운 자로부터 비롯된 뒤에야 백성들이 본받을 바를 알아서 날마다 善으로 옮겨 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 上이 好儒術文辭하야 頗改宣帝之政하니 言事者多進見이라 人人이 自以爲得上意라하더라

○ 上이 儒學과 文章을 좋아하여 宣帝의 정사를 많이 고치니, 일을 말하는 자가 나아가 뵙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마다 자신이 上의 뜻을 얻었다고 여겼다.

[甲申]建昭二年

[甲申]建昭二年이라

是時에 石顯이 顓(專)權이라 京房이 嘗宴見할새 問上曰 , 之君이 何以危며 所任者何人也잇고 上曰 君不明而所任者巧佞이니라 曰 陛下視今컨대 爲治耶잇가 亂耶잇가 上曰 亦極亂耳니 今爲亂者誰哉오 曰 明主宜自知之시리이다 上曰 不知也로라 如知인댄 何故用之리오 曰 上이 最所信任하야 與圖事帷幄之中하야 進退天下之士者是矣니이다 指謂石顯【京房之指意 謂石顯也라】이라 上亦知之하고 謂曰 已諭【爲句니 諭는 曉也라】로라 이 罷出後에 上亦不能退顯也러라 〈出京房本傳〉

建昭 2년(갑신 B.C.37)

이때 石顯이 권력을 독단하였다. 京房이 일찍이 사사로이 알현했을 때에 上에게 묻기를 “幽王厲王은 어찌하여 위태로웠으며 임용한 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자, 上이 말하기를 “군주가 현명하지 못해서 임용한 자가 교묘하게 아첨하였다.” 하였다. 京房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지금을 보시건대 治世라고 여기십니까? 亂世라고 여기십니까?” 하자, 上이 말하기를 “또한 지극히 혼란하니, 지금 혼란하게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하였다. 京房이 말하기를 “明主께서 마땅히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알지 못하노라. 만일 안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등용하겠는가?” 하였다. 京房이 말하기를 “上께서 가장 신임하시고 함께 帷幄의 안에서 정사를 도모하여 천하의 선비를 등용하고 물러가게 하는 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니, 京房의 뜻은 石顯을 이른 것이었다.【京房의 의향은 石顯을 이른 것이다.】上 또한 이것을 알고는 京房에게 이르기를 “이미 알았노라.” 하였다.【[釋義]上亦知之……已諭:已諭에서 句를 떼니, 諭는 깨달음이다.】京房이 파하고 나간 뒤에 上은 역시 石顯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漢書 京房傳》에 나옴 -

初에 京房이 對上曰 古之帝王이 以功擧賢이면 則萬化成하고 瑞應著러니 末世엔 以毁譽取人이라 故로 功業廢而致災異하니 宜令百官으로 各試其功하면 災異可息하리이다 詔使作其事한대 이 奏考功課吏法이어늘 上이 令公卿朝臣으로 與會議溫室하니 皆以言煩碎하야 令上下相司하니 不可許라 帝於是에 以爲魏郡太守하야 得以考功法治郡하다

[史略 史評]胡氏曰 君臣之交 有淺深하니 交深者도 聖人猶存不可則止와 數斯辱矣之戒어든 況交淺者乎아 京房이 事元帝에 纔得爲郞하니 其交固淺이라 陳考功法에 帝雖鄕(向)之나 而公卿朝臣이 皆以爲不可라하고 又欲去上所親信호되 而不量元帝之庸懦하야 不可信也하니 亦難乎其免矣로다 京房이 學易에 不明其道하고 徒以災變占候로 爲事하니 此는 易之末也라 易曰 不出戶庭이면 無咎라하고 又曰 樂天知命이라 故로 不憂라하야늘 皆違之하고 而於其術에 亦不能自信也라 故로 占候前知之學을 君子不貴焉이니 惟明乎消息盈虛之理와 語黙進退之幾하야 以不失乎時中이 則易之道也니라

[史略 史評]荀悅曰 夫佞臣之惑君也 甚矣라 故로 孔子遠佞人에 非但不用而已요 乃遠而絶之하야 隔塞其源하니 戒之極也라 孔子曰 政者는 正也라하시니 要道之本은 正己而已라 平正眞實者는 正之主也니 賢能功罪와 言行事物을 必核其實然後에 應之면 則衆正積於上하야 而萬事實於下矣리라

예전에 京房이 上에게 대답하기를 “옛날 帝王들이 공로에 따라 賢者를 등용하면 온갖 교화가 이루어지고 祥瑞의 감응이 나타났는데, 末世에는 남의 훼방과 칭찬에 따라 인물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功業이 폐해지고 災異를 불렀으니, 마땅히 百官들로 하여금 각각 功績을 시험하게 한다면 災異를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명하여 京房으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하자, 京房이 功績을 상고하여 관리들을 考課하는 법을 아뢰었다. 上이 公卿과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京房과 溫室殿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모두들 京房의 말이 번거롭고 자질구레하여 上下로 하여금 서로 伺察하게 하니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황제는 이에 京房을 魏郡太守로 삼아서 공적을 고과하는 법으로 郡을 다스리게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君臣의 사귐은 깊고 얕음이 있으니, 사귐이 깊은 자도 聖人께서 오히려 불가하면 그만두라는 말씀과 자주 간하면 욕된다는 경계를 두셨는데, 하물며 사귐이 얕은 자에 있어서랴. 京房元帝를 섬길 적에 겨우 郎官이 되었으니, 그 사귐이 진실로 얕다. 공로를 考課하는 法을 아뢸 적에 황제가 비록 좋아하였으나 公卿과 朝臣들은 모두 불가하다 하였고, 또 上이 친애하고 믿는 자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元帝가 용렬하고 나약해서 믿을 수 없음을 헤아리지 않았으니, 또한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京房이 《周易》을 배울 적에 그 道理를 밝히지 않고 한갓 災變과 占候만을 일삼았으니, 이는 《周易》의 지엽적인 것이다. 《周易》 節卦 初九爻에 이르기를 ‘戶庭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 하였고, 또 〈繫辭傳〉에 이르기를 ‘天理를 즐거워하고 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京房은 모두 이것을 어겼고 易術에 있어서도 또한 자신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占을 쳐서 미리 아는 학문을 군자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오직 消息盈虛의 이치와 語黙進退의 기미를 밝게 알아서 時中을 잃지 않는 것이 《周易》의 道인 것이다.”

[史略 史評]荀悅이 말하였다.

“奸臣이 君主를 혹하게 함이 심하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佞人(말을 잘하는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라고 하실 때에 다만 쓰지 말라고 말씀할 뿐이 아니었고 마침내 멀리하여 끊어서 그 근원을 막게 하셨으니, 경계함이 지극하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정사는 바로잡는 것이다.’ 하셨으니, 要道의 근본은 자기 몸을 바로잡는 것일 뿐이다. 平正하고 진실한 것은 바름의 주체이니, 어진 자와 유능한 자, 功과 罪, 言行과 事物을 반드시 그 실제를 상고한 뒤에 응한다면 여러 바름이 위에 쌓여 萬事가 아래에서 진실해질 것이다.”

[乙酉]三年

[乙酉]三年이라

冬에 西域都護甘延壽와 副校尉陳湯이 共誅斬郅支單于於康居하다

建昭 3년(을유 B.C.36)

겨울에 西域都護甘延壽와 副校尉陳湯이 함께 康居에서 郅支單于를 토벌하여목을 베었다.

[戊子]竟寧元年

[戊子]竟寧元年이라

河南太守召信臣이 爲少府하다 信臣이 先爲南陽太守하고 後遷河南하니 治行이 常第一이라 視民如子하고 好爲民興利하야 躬勸耕稼하고 開通溝瀆하니 戶口增倍하고 吏民親愛하야 號曰召父라하니라 〈出本紀〉

竟寧 元年(무자 B.C.33)

河南太守召信臣이 少府가 되었다. 召信臣은 먼저는 南陽太守가 되고 뒤에는 河南으로 옮겼는데, 治績이 항상 제일이었다.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아끼고 백성들을 위해 이로운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몸소 농사일을 권장하고 水路를 개통하니, 戶口가 배로 증가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여 召父라고 불렀다.- 《漢書 元帝記》에 나옴 -

甘延壽, 陳湯이 旣至에 論功이러니 石顯, 匡衡이 以爲延壽, 이 擅興師矯制하니 幸得不誅라 如復加爵土면 則後奉使者 爭欲乘危徼幸하야 生事於蠻夷하야 爲國招難하리이다 帝內嘉延壽, 功이나 而重違, 之議하야 久之不決이라 故宗正劉向이 上疏曰 貳師將軍李廣利 捐五萬之師하고 靡億萬之費하고 經四年之勞하야 而僅獲駿馬三十匹하고 雖斬宛王毌寡之首나 猶不足以復【償也라】費요 其私罪惡이 甚多로되 孝武以爲萬里征伐이라하사 不錄其過하고 遂封拜兩侯【廣利等侯者二人이요 卿者三人이요 二千石이 百有餘人이라 [通鑑要解]兩侯는 武帝封廣利兄弟라】하시니이다 今康居之國이 彊於大宛하고 郅支之號 重於宛王하고 殺使者罪 甚於留馬어늘 而延壽, 이 不煩漢士하고 不費斗糧하니 比於貳師컨대 功德이 百之【言功與德이 百倍勝之라】니이다 於是에 天子下詔하야 赦延壽, 罪하야 勿治하고 令公卿議封焉하야 封延壽爲義成侯하고 賜湯爵關內侯하다 〈出陳湯傳〉

甘延壽陳湯이 이르자, 이들의 功을 논하였는데, 石顯匡衡이 말하기를 “甘延壽陳湯이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사칭하였으니, 죄를 받아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만일 다시 爵位와 土地를 더해 준다면 뒤에 使命을 받드는 자들이 다투어 위태로운 일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 오랑캐에게 일을 벌이고자 하여 국가에 난리를 초래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내심으로 甘延壽陳湯의 功을 가상히 여겼으나 匡衡石顯의 의논을 어기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하였다.

예전의 宗正인 劉向이 상소하기를 “貳師將軍李廣利가 5만의 군사를 버리고 억만 전의 비용을 허비하고 4년 동안의 수고로움을 감내하여 겨우 駿馬 30필을 얻었고 비록 大宛國의 王인 毌寡의 머리를 베었으나 오히려 비용을 다 보상【復은 보상함이다.】하지 못하였으며 사사로운 죄악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孝武帝는 만 리 먼 곳을 정벌했다 하여 그의 허물을 기록하지 않고 마침내 두 侯【[頭註]李廣利 등 侯에 봉해진 자가 두 명이고, 卿이 된 자가 세 명이고, 二千石이 된 자가 백여 명이었다. [通鑑要解]두 侯는 武帝가 李廣利 형제를 봉한 것이다.】에 봉하였습니다. 지금 康居國이 大宛國보다 강하고, 郅支의 칭호가 大宛王보다 중하고, 使者를 죽인 죄가 大宛國에서 말을 숨기고 내주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데, 甘延壽陳湯이 漢나라 군사를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고 한 말의 양식도 허비하지 않았으니, 貳師將軍에 비하건대 功과 德이 백배나 낫습니다.【功德百之는 功과 德이 백배나 나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天子가 조서를 내려 甘延壽陳湯의 죄를 사면하여 다스리지 말게 하고, 公卿들로 하여금 封爵을 의논하게 해서 甘延壽를 봉하여 義成侯로 삼고, 陳湯에게는 關內侯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漢書 陳湯傳》에 나옴 -

○ 夏五月에 帝崩하다

班彪贊曰 臣外祖兄弟 爲元帝侍中이러니 語臣曰 元帝多材藝하야 善史書【周宣王太史史籒所作大篆이라】하고 〈鼓琴瑟하고 吹洞簫하며 自度曲하야 被歌聲하야 分刌節度하야 窮極幼眇(要妙)라〉 少而好儒러니 及卽位에 徵用儒生하야 委之以政하야 貢薛韋匡이 迭爲宰相이로되 而上牽制文義하고 優游不斷하야 孝宣之業이 衰焉이라 然이나 寬弘盡下하야 出於恭儉하고 號令溫雅하야 有古之風烈이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元帝以昏懦之資로 繼統之初에 首以公田으로 賑業貧民하고 賦貸種食하며 未幾에 減樂府員하고 省苑馬하야 以賑困乏하며 又罷宮館하고 減馬獸肉食하야 數月之內에 善政이 迭書하니 率是而行이면 도 亦不是過어늘 奈何로 主德不明하고 群小在位하야 知之賢호되 善善而不能用하고 知恭顯之姦호되 惡惡而不能去하야 事無巨細히 悉委中書하야 專事邪僻하고 賊害忠良하니 西漢之衰 決於此矣로다

○ 여름 5월에 황제가 승하하다.

班彪의 《漢書》〈元帝紀〉 贊에 말하였다.

“臣의 外祖 형제가 元帝의 侍中이 되었었는데, 臣에게 말씀하기를 ‘元帝는 才藝가 많아 史籒의 글씨체【史書는 周나라 宣王 때의 太史였던 史籒가 만든 大篆이다.】를 잘 쓰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타고 퉁소를 잘 불며 스스로 곡조를 만들어 노랫소리에 입혀서 節度에 맞아 오묘함을 다하였다. 젊어서부터 儒學을 좋아하였는데, 즉위하자 儒生들을 초빙해서 정사를 맡겨 貢禹, 薛廣德, 韋玄成, 匡衡이 차례로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上은 글의 뜻에 구애되고 優游不斷하여 孝宣帝의 業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다하고 공손함과 검소함에서 나왔으며, 號令이 온화하고 고상하여 옛 풍모가 있었다.’ 하였습니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元帝가 昏愚하고 나약한 자질로 大統을 이은 초기에 첫 번째로 公田을 가지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을 도와주고 조세를 종자 곡식으로 꾸어 주며, 얼마 있지 않아 樂府의 인원을 줄이고 上林苑의 말을 줄여서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며, 또 宮館을 없애고 말과 고기 먹는 짐승을 줄여서 몇 달 사이에 善政이 번갈아 기록되었으니, 이를 따라서 행하였다면 文帝景帝 또한 이보다 더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군주의 德이 밝지 못하고 여러 소인들이 지위에 있어서 蕭望之周堪의 어짊을 알았으나 善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弘恭石顯의 간사함을 알았으나 惡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中書에 맡겨서 오로지 邪僻함을 일삼고 忠良한 사람을 해쳤으니, 西漢의 쇠퇴함이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太子卽皇帝位하야 以元舅【母之兄弟曰舅라】平陽侯王鳳으로 爲大司馬大將軍하야 領尙書事하다

[新增]尹氏曰 元舅未有書어늘 而此書之者는 所以著外氏得權之始와 新簒竊之漸爾니 履霜堅氷을 可不戒哉아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여 元舅(큰외삼촌)【어머니의 형제를 舅라 한다.】平陽侯王鳳을 大司馬大將軍으로 삼아서尙書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元舅를 기록한 적이 없는데, 여기에 특별히 쓴 것은 외척들이 권력를 얻은 시초와 新나라의 王莽이 찬탈한 조짐을 드러낸 것이니,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孝成皇帝

名驁니 元帝長子라 在位二十六年이요

孝成皇帝※ 名元帝長子라 在位二十六年이요 壽四十五라

※ 湛(沈)於酒色하야 委政外家러니 , 短祚하야 遂簒位하니 蓋其威福所由來者漸矣니라

孝成皇帝※는 이름이 이니, 元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26년이고 壽가 45세이다.

成帝는 酒色에 빠져서 정사를 外家에 맡겼는데, 哀帝平帝가 國祚(享國)가 짧아서 王莽이 마침내 天子의 지위를 찬탈하였으니, 그 위엄과 福을 독단한 유래가 점점 이루어진 것이다.

[己丑]建始元年

[己丑]建始元年이라

十二月朔에 日食하고 其夜에 地震未央宮殿中이어늘 詔擧賢良方正能直言極諫之士한대 杜欽谷永이 上對하야 乃皆以爲後宮女寵이 太盛하야 嫉妬專上하야 將害繼嗣之咎【蓋指許后及班婕妤也라】라하니라 〈出本傳 文小異〉

建始 元年(기축 B.C.32)

12월 초하루에 日食이 있었고, 그날 밤에 未央宮 궁전 안에 地震이 일어났다. 조서를 내려서 賢良하고 方正하여 直言하고 極諫할 수 있는 선비를 천거하게 하자, 杜欽谷永이 對策을 올려서 모두 아뢰기를 後宮의 女寵이 너무 성하여 질투하여 上을 독차지하려 해서 장차 繼嗣를 해치는 허물(재앙)【繼嗣를 해치는 허물은 許后와 班婕妤를 가리킨 것이다.】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漢書 谷永傳》에 나오는데, 글이 조금 다름 -

匡衡이 坐取封邑四百頃하고 監臨에 盜所主守直(値)十金以上【法에 有主守盜하니 斷官錢入己也라 律條에 (臧)[贓]直(値)十金이면 則至重罪라】하야 免爲庶人하고 以王商【成帝之舅也라】爲丞相하다 〈出匡衡王商傳〉

匡衡이 封邑 400頃을 취하였고 그가 監臨한 관속 중에 재물을 주관하는 자가 十金 이상에 해당하는 재물을 도둑질함【법에 主守盜(재물을 주관한 자가 공금을 횡령함)가 있으니, 관청의 돈을 도둑질하여 자기 수입으로 삼는 것이다. 刑律條에 贓物罪가 十金에 상당하면 중죄에 이른다.】으로 인하여 면직되어庶人이 되고, 王商【王商은 成帝의 外叔이다.】을 승상으로 삼았다. - 《漢書》〈匡衡傳〉과 〈王商傳〉에 나옴 -

[壬辰]四年

[壬辰]四年이라

夏에 召前所擧直言之士하야 詣白虎殿對策하다 是時에 上이 委政王鳳하니 議者多歸咎焉호되 谷永은 知方見柄用하고 陰欲自託하야 乃曰 方今四夷賓服하야 皆爲臣妾하니 北無薰粥(獯鬻)【匈奴別名이니 堯時曰薰粥이라】, 冒頓之患하고 南無趙佗, 呂嘉【佗는 眞定人이라 秦二世時에 南海尉任囂 病且死에 召龍川令佗하야 行南海尉事러니 後遂自立爲南海武王하니라 南越은 本禹貢楊州之域이라 高帝立佗爲南海王하고 與符剖通使러니 高后時에 稱〈爲南越武帝라〉 武帝時에 佗孫興嗣上書하야 請比內諸侯러니 其相呂嘉止之라 王不听(聽)이어늘 嘉謀作亂이라 天子聞之하고 遣韓千秋러니 嘉叛하야 攻殺漢使라 於是에 遣路博德等平之하고 遂以其地로 爲儋耳, 珠厓等九郡하니라】之難하야 三垂(陲)晏然하야 靡有兵革之警하고 諸侯大者라야 乃食數縣이라 漢吏制其權柄하야 無吳, 楚, 燕, 梁之勢하고 骨肉大臣이 有申伯之忠【申伯은 周宣王之元舅也라 鄭玄曰 申은 國名이니 以其忠於王室하야 使爲侯伯이라 故稱申伯이라】하야 洞洞屬屬【洞洞은 恭貌요 屬屬은 誠實無僞貌라】하고 小心畏忌하야 無重合, 安陽, 博陸之亂【重合侯馬通은 武帝時謀反者馬何羅之弟也라 安陽侯上官桀이 武帝時에 以捕斬重合侯功으로 封安陽侯러니 後事昭帝라가 謀反族誅하고 博陸侯霍光은 以捕得馬何羅等功으로 封博陸侯러니 其妻顯이 弑皇后許氏에 而光不發覺이라가 光卒之後에 霍氏謀反族誅하니라】하니 三者에 無毛髮之辜【三者는 卽重合, 安陽, 博陸三家也니 言鳳視三家면 則無纖芥之過라】라 切(竊)恐陛下舍昭昭之白過【舍는 釋也니 謂昭然明白有罪過者를 乃舍之라】하고 忽天地之明戒하고 聽晻(暗)昧之瞽說【晻은 藹暗不明也라 瞽는 非謂无目者요 但不察事而言之하야 不中於道하야 如無目之人也라】하사 歸咎乎無辜하고 倚異乎政事【依物曰倚라 異는 謂災異也라】하야 重失天心이 不可之大者也니이다 上이 以其書示後宮하고 擢爲光祿大夫하다

戴溪筆義曰 王氏代漢이 始於杜欽谷永하여 成於張禹孔光하고 終於劉歆【向之少子니 與莽俱爲黃門郞하야 爲莽腹心하여 唱導襃揚이러니 及莽簒位에 爲國師하니라 赤伏符에 有劉秀發兵捕不道라하야 歆이 更名曰秀라하니라】이라 此數子는 皆號稱儒者하여 以賢良直諫爲名하고 以通經學古爲賢하여 群臣所屬目이요 天子所取重이나 而相與誤國이 如此라 假託經術하고 緣飾古義하여 以售奸邪하고 以濟諛佞이라 蓋杜欽谷永劉歆三子는 依憑寵祿하여 以苟富貴하고 張禹孔光은 懦弱無立하여 規免禍患하니 曾不若鄙夫小人而已矣라 夫權臣始用事하여 僭竊國柄에 猶未敢肆然無忌憚也요 必有小人이 陰贊黙敎之하여 以助成其勢라 彼權臣者 亦自知其不爲公議所容하고 必假託名譽才智之士하여 以掩蓋其不義하나니 書生은 多慾少剛하여 易動以利하고 易怵以禍라 輕變所守하고 深自結納하여 其言曰 寧忤天子而不敢忤權臣이요 寧負公門而不敢負私室이라하니 嗚呼라 爲天子者 其無使權臣至是哉인저 權勢已成하여 熏灼可畏면 忠臣孝子不愛其死가 世寧幾何人哉아 黨與根據하여 臣下同心에 天子孤立於上하여 擧朝無一人可信者하니 可不爲大哀也哉아

建始 4년(임진 B.C.29)

여름에 예전에 천거한 直言하는 선비들을 불러서 白虎殿에 나와 對策을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上이 정사를 王鳳에게 맡기니, 의논하는 자가 王鳳에게 허물을 많이 돌렸으나 谷永王鳳이 막 임용되어 權柄을 잡은 것을 알고는 은근히 스스로 의탁하고자 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사방 오랑캐들이 복종하여 모두 臣妾이 되었으니, 〈밖으로는〉 북쪽으로 薰粥(훈육)【薰粥은 匈奴의 別名이니, 堯임금 때에 薰粥이라 하였다.】과 冒頓의 걱정이 없고 남쪽으로 趙佗呂嘉【[附註]趙佗, 呂嘉:趙佗는 眞定 사람이다.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南海尉 任囂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에 龍川令 趙佗를 불러서 南海尉의 일을 행하게 하였는데, 뒤에 마침내 스스로 서서 南海武王이 되었다. 南越은 본래 ≪書經≫ 〈禹貢〉의 楊州 지역이다. 高帝가 趙佗를 세워 南海王으로 삼고 符節을 나누어 주어 使者를 來往하였는데, 高后 때에 趙佗는 南越武帝라 칭하였다. 武帝 때에 趙佗의 손자 興嗣가 글을 올려 內地의 제후와 나란하게 되기를 청하였는데, 그 정승인 呂嘉가 이를 저지하였다. 王이 듣지 않자, 呂嘉는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天子가 듣고 韓千秋를 보내었는데, 呂嘉가 배반하여 漢나라 사신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에 路博德 등을 보내어 평정하고 마침내 그 땅을 가지고 儋耳郡과 珠厓郡 등 아홉 郡을 만들었다.】의 難이 없어서 세 변방이 편안하여 전쟁의 경보가 없으며, 〈안으로는〉 제후 중에 큰 자라야 비로소 몇 縣의 食邑을 누려서 漢나라 관리들이 그 權柄을 제재하여 吳‧楚‧燕‧梁의 권세가 없으며, 〈조정에는〉 骨肉의 大臣들이 申伯의 충성【申伯은 周나라 宣王의 元舅이다. 鄭玄이 말하기를 “申은 국명이니, 왕실에 충성하여 侯伯으로 삼았으므로 申伯이라 칭한 것이다.” 하였다.】이 있어서 공경하고【洞洞은 공손한 모양이요, 屬屬은 성실하여 거짓이 없는 모양이다.】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重合侯安陽侯博陸侯의 亂【[釋義]重合, 安陽, 博陸之亂:重合侯 馬通은 武帝 때에 반란을 도모한 馬何羅의 아우이다. 安陽侯 上官桀은 武帝 때에 重合侯를 체포하여 목을 벤 공으로 安陽侯에 봉해졌는데 뒤에 昭帝를 섬기다가 반란을 도모하여 三族이 죽임을 당하였고, 博陸侯 霍光은 馬何羅 등을 체포한 功으로 博陸侯에 봉해졌는데 그 아내 顯이 皇后 許氏를 독살함에 霍光이 발각하지 않았다가 霍光이 죽은 뒤 霍氏가 반란을 도모하여 三族이 죽임을 당하였다.】이 없으니, 〈王鳳은〉 세 집안에 비하면 털끝 만한 허물도 없습니다.【셋은 바로 重合侯‧安陽侯‧博陸侯의 세 집안이니, 王鳳은 이들 세 집안에 비하면 조그마한 잘못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적이 염려하건대 폐하께서 분명하게 드러난 과실이 있는 사람을 놓아주시고【舍는 놓아줌이니, 분명히 명백하게 죄와 과오가 있는 자를 마침내 놓아줌을 말한 것이다.】 天地가 내린 분명한 警戒를 소홀히 하고, 맹목적인 말【晻은 어두워 밝지 못한 것이다. 瞽는 눈이 없는 자를 이르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일을 살피지 않고 말하여 道理에 맞지 않아서 눈이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을 따라 죄 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돌리고, 災異를 정사의 잘못으로 돌려【물건에 의지하는 것을 倚라 한다. 異는 災異를 이른다.】 거듭 天心을 잃으시는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上이 이 글을 後宮에게 보이고, 谷永을 발탁하여 光祿大夫로 삼았다.

戴溪의 《通鑑筆義》에 말하였다.

王氏가 漢나라를 대신한 것이 杜欽谷永에게서 시작되어 張禹孔光에게서 이루어지고 劉歆【劉歆은 劉向의 작은아들이니, 王莽과 함께 黃門郞이 되어 王莽의 심복이 되어서 앞장서서 주창하고 襃揚하였는데, 王莽이 天子의 지위를 찬탈하자 國師가 되었다. 赤伏符에 劉秀가 군대를 내어 不道한 사람을 토벌한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劉歆이 자기 이름을 고쳐 秀라 하였다.】에게서 끝났다. 이 몇 사람들은 모두 儒學者라고 일컬어져 賢良과 直諫으로써 이름이 나고, 經書에 통달하고 옛것을 배운 것으로써 어질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이 촉망하는 바이고 天子가 소중히 여긴 바였으나 서로 더불어 나라를 그르침이 이와 같았다. 經學에 가탁하고 옛날의 義理를 수식하여 간사한 꾀를 쓰고 아첨함을 이루었다. 杜欽谷永劉歆 세 사람은 은총과 녹봉에 의지하여 구차히 富貴를 취하였고, 張禹孔光은 나약하고 자립하지 못하여 禍患을 면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일찍이 비루한 지아비와 小人만도 못할 뿐이다.

權臣이 처음에 用事하여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할 때에는 그래도 감히 버젓이 忌憚함이 없지 못하고, 반드시 小人이 은밀히 돕고 묵묵히 가르쳐 줌이 있어서 그 형세를 도와주어 이루게 한다. 저 權臣들은 또한 스스로 자신들이 公論에 용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반드시 명망과 재주와 지혜가 있는 선비에게 가탁해서 자신들의 不義를 엄폐하니, 書生들은 대부분 욕심이 많고 剛한(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 자가 적어서 이익으로 동요하기가 쉽고 禍로 위협하기가 쉽다. 그리하여 지조를 가볍게 바꾸고 깊이 스스로 결탁해서 그 말에 이르기를 ‘차라리 天子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權臣을 거스르지 못하고, 차라리 국가를 저버릴지언정 감히 권문세가를 저버리지 못한다.’ 하니, 아! 天子가 된 자들은 權臣으로 하여금 이러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權勢가 이미 이루어져서 기염이 두려울 만하면 忠臣과 孝子 중에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자가 세상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黨與(도당)가 뿌리를 잡아 신하들이 마음을 함께 함에 天子가 위에서 고립되어 온 조정에 한 사람도 믿을 만한 자가 없게 되니, 크게 슬퍼할 만하지 않겠는가.”

[乙未]河平三年

[乙未]河平三年이라

上이 以中秘書【言中以別外也니 外則有太常, 太史, 博士之藏하고 內則有延閣, 廣內, 秘室之府라】頗散亡이라하야 使謁者陳農으로 求遺書於天下하다

上은 궁중의 秘書【中이라 말하여 外와 구별한 것이니, 밖에는 太常‧太史‧博士의 藏書가 있고, 안에는 延閣‧廣內‧秘室의 書庫가 있었다.】가 많이 흩어지고 없어졌다 하여 謁者인 陳農으로 하여금 남아 있는 책을 천하에서 찾도록 하였다.

劉向이 以王氏權位太盛하고 而上方嚮詩, 書古文이라하야 이 乃因尙書洪範하야 〈以上 與傳文小異〉集合上古以來로 歷春秋六國하야 至秦, 漢히 符瑞災異之記호되 推迹行事하야 連傅(附)禍福하고 著其占驗하야 比類相從하야 各有條目하니 凡十一篇이라 號曰洪範五行傳【傳은 解說洪範正經者라】論이라하고 奏之한대 天子心知向忠精故로 爲鳳兄弟하야 起此論也라 然이나 終不能奪王氏權이러라 〈出向本傳〉

劉向王氏의 權勢와 地位가 너무 성하고 上이 한창 《詩經》과 《書經》의 古文에 유념하고 있다고 여겨 마침내 《尙書》의 〈洪範〉을 인하여 - 이상은 《漢書 劉向傳》의 글과 조금 다름 - 上古 이래로부터 春秋時代와 六國時代를 지나 秦‧漢에 이르기까지 符瑞와 災異의 기록을 모으되 행한 일을 추적해서 禍福을 연이어 붙이고 占驗(점괘의 징험)을 드러내어 같은 종류끼리 서로 따르게 해서 각각 조목을 두니, 모두 11편이었다. 《洪範五行傳論》【傳은 ≪書經≫ 〈洪範〉의 正經을 해설한 것이다.】이라 이름하고 이 책을 올렸는데, 天子는 내심으로 劉向이 충성과 정성이 있기 때문에 王鳳 형제를 위하여 이러한 의론을 일으킨 줄을 알았으나 끝내 王氏의 권력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漢書 劉向傳》에 나옴 -

[丁酉]陽朔元年

[丁酉]陽朔元年이라

京兆尹王章이 素剛直敢言하야 雖爲所擧나 非專權하고 不親附이러니 乃奏封事言호되 日食之咎는 皆專權蔽主之過니이다 於是에 이 薦馮野王【姓名이라 字君卿이니 奉世之子라】忠信質直한대 上이 自爲太子時로 數聞野王名이라 方倚하야 欲以代이러니 이 聞之하고 使尙書로 劾奏章하야 致其大逆하야 竟死獄中하니 自是로 公卿이 見에 側目而視하니라 〈出元后紀〉

陽朔 元年(정유 B.C.24)

京兆尹王章이 평소 강직하여 과감하게 말을 해서 비록 王鳳에 의해 천거되었으나王鳳이 권력을 독단하는 것을 비난하고 王鳳을 가까이 따르지 않았는데, 마침내 封事로 아뢰어 말하기를 “日食의 재앙은 모두 王鳳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군주의 총명을 가리운 잘못입니다.” 하였다. 이때 王章이, 馮野王馮野王은 姓名이다. 字가 君卿이니, 馮奉世의 아들이다.】이 충신하고 질박하며 정직하다고 천거하자, 上은 태자였을 때부터 馮野王의 명성을 자주 들었으므로 바야흐로 그에게 의지하여 그로써 王鳳을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王鳳이 이 말을 듣고는 尙書로 하여금 章奏로 탄핵하여 그를 大逆罪로 몰아서 끝내 獄中에서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公卿들이 王鳳을 볼 때에 두려워하여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곁눈질하였다.- 《漢書 元后傳》에 나옴 -

[戊戌]二年

[戊戌]二年이라

王音【元后從弟也라】爲御史大夫하니 於是에 王氏愈盛하야 郡國守相刺史皆出其門下하고 五侯群弟【五侯는 謂王譚, 王商, 王立, 王根, 王逢時니 皆成帝諸舅也라 [通鑑要解]五侯는 無群弟하니 群字當作兄이라】 爭爲奢侈하니 賂遺珍寶 四面而至라 이 通敏人事하야 好士養賢하고 傾財施予하야 以相高尙하니 賓客이 滿門하야 競爲之聲譽러라 〈出元后傳〉

陽朔 2년(무술 B.C.23)

王音【王音은 元后의 從弟이다.】을 御史大夫로 삼으니, 이에 王氏가 더욱 성해져서 郡國의 守‧相과 刺史가 모두 그 門下에서 나왔고, 五侯의 여러 아우들【[釋義]五侯는 王譚, 王商, 王立, 王根, 王逢時를 이르니, 모두 成帝의 외삼촌이다. [通鑑要解]五侯는 여러 아우가 없었으니, 群字는 마땅히 兄字가 되어야 한다.】이 다투어 사치한 짓을 하니, 뇌물과 진기한 보물이 사방에서 이르렀다. 王音은 人事에 통달하고 민첩하여 선비를 좋아하고 賢者를 기르며, 재물을 털어서 남에게 베풀어 주어 서로 높이고 숭상하니, 빈객들이 집에 가득하여 다투어 그를 칭찬하였다.- 《漢書 元后傳》에 나옴 -

劉向이 上封事極諫【書曰 臣聞호니 人君莫不欲安이나 然而常危하고 莫不欲存이나 然而常亡하니 人臣操權柄이면 國政未有不害者也니이다 今王氏一姓이 乘朱輪華轂者二十三人이요 大將軍秉事用權하고 五侯驕奢하야 竝作威福하니 因東宮之尊하고 假舅甥之親하야 以爲威福이라하니라】하니 書奏에 天子召見向하고 歎息悲傷其意하야 謂曰 君且休矣어다 吾將思之호리라 然이나 終不能用其言이러라 〈出劉向傳〉

劉向이 封事를 올려 지극히 간하니,【上書에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人君은 편안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항상 위태롭고, 보존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항상 망하니, 人臣이 權柄을 잡고 있으면 國政에 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王氏 한 姓이 붉은 수레바퀴와 화려한 轂으로 꾸민 수레를 타는 자가 23명이고, 大將軍으로서 정사를 잡고 권세를 부리며, 五侯가 교만하고 사치하여 함께 형벌과 복(관직)을 내리고 있으니, 東宮의 높음을 인하고 舅甥의 친함을 빌려서 위엄과 복을 베풉니다.” 하였다.】 글을 올리자 天子가 劉向을 불러 보고는 탄식하고 그 뜻을 슬퍼하여 이르기를 “君은 우선 쉬고 있어라. 내 장차 생각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漢書 劉向傳》에 나옴 -

[己亥]三年

[己亥]三年이라

秋에 王鳳이 薨커늘 以王音爲大司馬하다

陽朔 3년(기해 B.C.22)

가을에 王鳳이 죽자, 王音을 大司馬로 삼았다.

[乙巳]永始元年

[乙巳]永始元年이라

五侯子乘時【乘은 因也니 乘時는 謂貴戚之時라】侈靡하야 以輿馬聲色佚游【佚은 與逸同하니 樂也라】로 相高호되 王曼이 因折節【屈折肢節하야 以服事也라】爲恭儉하고 勤身博學하야 外交英俊하고 內事諸父【謂諸伯叔父也라】하야 曲有禮意러라 死에 以託太后及帝【鳳病에 莽이 侍疾湯藥하야 不解衣帶連月이라 故로 鳳託太后及帝하니 拜爲郞이라】러니 久之요 封爲新都侯하니 爵位益尊호되 節操愈謙하고 振(賑)施賓客하야 家無所餘하니 虛譽隆洽하야 傾其諸父矣러라 〈出莽傳〉

[新增]養心吳氏曰 (王介甫)[[[白居易]]]詩云 周公恐懼流言日하고 王莽謙恭下士時라 假使當年身便死하면 一生眞僞有誰知오하니라

永始 元年(을사 B.C.16)

五侯의 아들이 기회를 틈타【乘은 인함이니, 乘時는 貴戚(임금의 인척)의 때를 탐을 이른다.】 분에 넘치게 사치하고 화려해서 수레와 말, 음악과 여색, 즐겁게 노는 것【佚은 逸과 같으니, 즐김이다.】을 서로 숭상하였으나 王曼의 아들王莽은 인하여 자신을 낮추어【四肢의 關節을 굽히고 꺾어서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몸을 수고롭게 하고 널리 배워서, 밖으로는 英才와 俊傑들을 사귀고 안으로는 諸父들【諸父는 여러 伯父와 叔父를 이른다.】을 섬겨서 곡진히 禮意가 있었다. 王鳳이 죽을 때에 王莽태후와 황제에게 부탁하였는데【王莽의 叔父인 王鳳이 병들었을 때에 王莽이 병을 간호하고 약을 달여 옷과 띠를 풀지 않고 간병하기를 여러 달 동안 하였다. 그러므로 王鳳이 태후와 황제에게 王莽을 부탁하니, 太后가 王莽을 郎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 王莽을 봉하여新都侯로 삼으니, 관작과 지위가 더욱 높아졌으나 節操가 더욱 겸손하였고, 빈객들을 구휼하여 집에 남은 것이 없으니, 헛된 명예가 매우 높아져서 諸父들을 압도하였다.- 《漢書 王莽傳》에 나옴 -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白居易의 詩에 이르기를 ‘周公은 유언비어를 듣던 날에 두려워하였고 王莽은 찬탈하지 않았을 때에 겸손하고 공손하여 선비를 예우하였네. 만일 당년에 몸이 곧 죽었다면 일생의 眞僞를 누가 다시 알겠는가.’ 하였다.”

[丙午]二年

[丙午]二年이라

王音이 薨커늘 以王商爲大司馬하다

永始 2년(병오 B.C.15)

王音이 죽자, 王商을 大司馬로 삼았다.

○ 故南昌尉梅福이 上書曰 昔에 高祖納善을 若不及하시고 從諫을 若轉圜하사 陳平이 起於亡命而爲謀主하고 韓信이 拔於行陳而建上將이라 故로 爵祿束帛【見九卷辛丑年注라 又易賁卦六五爻注에 五匹爲束이라 禮雜記에 納幣一束이니 束五兩이요 兩五尋이라한대 注에 一束은 十卷이요 八尺爲尋이요 五尋爲匹이니 匹은 四十尺也라 從兩端至中이면 則每卷二十尺이니 合之則四十尺이라 五(尺)[匹]을 爲五箇兩卷이라 故曰束五兩이라하니 其實은 五匹也라 匹은 配偶之云이니 古人每匹에 作兩箇卷子하니라】者는 天下之砥石이니 高祖所以厲世摩(磨)鈍也니이다 至秦則不然하야 張誹謗之罔(網)하야 以爲漢敺(驅)除하고 倒持泰阿하야 授楚其柄이라 故로 誠能勿失其柄이면 天下雖有不順이나 莫敢觸其鋒이니이다 今陛下旣不納天下之言하시고 又加戮焉하사 天下以言爲戒하니 最國家之大患也니이다 方今에 君命犯而主威奪하야 外戚之權이 日以益隆하니 陛下不見其形이어든 願察其景(影)하소서 勢陵於君하고 權隆於主然後에 防之면 亦無及已리이다 上이 不納하다 〈出福本傳〉

○ 예전에 南昌尉를 지낸 梅福이 上書하였다.

“옛날 高祖께서는 善言을 받아들이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시고 諫言을 따르기를 둥근 것을 굴리듯이 하시어, 陳平이 망명 중에 발탁되어 謀主가 되고 韓信이 병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上將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爵祿과 束帛【束帛은 ≪通鑑節要≫ 9권 辛丑年 注에 보인다. 또 ≪周易≫ 賁卦 六五爻 注에 “5匹을 1束이라 한다.” 하였다. ≪禮記≫ 〈雜記〉에 “폐백 1束을 바치니, 1束은 5兩이고 兩은 다섯 길[尋]이다.” 하였는데, 注에 1束은 10두루마리[卷]이고 8尺을 尋이라 하고 5尋을 1匹이라 하니, 1匹은 40尺이다. 양끝에서부터 말아서 중앙에 이르면 두루마리마다 20尺이 되니, 둘을 합하면 40尺이다. 5匹을 다섯 개로 만들어 양쪽으로 말기 때문에 1束을 5兩이라 한 것이니, 실제는 5匹이다. 匹은 配偶를 이르니, 옛사람은 포목을 匹마다 두 개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은 천하의 숫돌이니, 高祖가 이것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장려하고 무딘 사람들을 연마하게 한 것입니다. 秦나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하여 비방하는 法網을 펼쳐서 漢나라를 위하여 백성들을 몰아 주고, 泰阿劍을 거꾸로 쥐고서 楚나라(項羽)에게 그 칼자루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자루를 잃지 않으면 천하에 비록 순종하지 않는 이가 있더라도 감히 그 칼날을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이미 천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또 죽임을 가하시어 천하가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니, 이는 국가의 큰 병폐입니다. 지금 군주의 명령을 범하고 군주의 위엄을 빼앗아 外戚의 권세가 날로 더욱 높아지니, 폐하께서 그 형체를 보지 못하시거든 바라건대 그 그림자를 살피소서. 형세가 군주를 능멸하고 권력이 군주보다 높아진 뒤에 막는다면 또한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漢書 梅福傳》에 나옴 -

[戊申]四年

[戊申]四年이라

司隷校尉何武 爲京兆尹하다 爲吏에 守法盡公하고 進善退惡하니 其所居에 無赫赫名이로되 去後에 常見思러라 〈出本傳〉

永始 4년(무신 B.C.13)

司隷校尉何武가 京兆尹이 되었다. 何武가 관리가 되었을 적에 법을 지키고 공정함을 다하며 선한 사람을 등용하고 악한 사람을 물리치니, 그가 부임한 곳에 혁혁한 功은 없었으나 떠나간 뒤에는 항상 백성들이 그리워하였다.- 《漢書 何武傳》에 나옴 -

[己酉]元延元年

[己酉]元延元年이라

王商이 薨커늘 以弟爲大司馬하다

元延 元年(기유 B.C.12)

王商이 죽자, 아우을 大司馬로 삼았다.

安昌侯張禹雖家居나 以特進【漢制에 諸侯功德優盛하야 朝廷所敬異者를 賜位特進하니 位在車騎上, 三公下라 百官志에 列侯就第하면 特進奉朝請也라하니 時引見之稱이요 無官定制라】으로 爲天子師하니 國家每有大政이면 必與定議러라 時에 吏民이 多上書言災異之應하야 譏切王氏專政所致라하니 上이 意頗然之하야 親問以天變한대 曰 春秋에 日食地震이 或爲諸侯相殺하고 夷狄侵中國하니 災變之意 深遠難見이어늘 新學小生이 亂道誤人하니 宜無信用이니이다 上이 雅信愛라 由此로 不疑王氏러라 〈出張禹傳〉

安昌侯張禹가 비록 집에 있었으나 特進【漢나라 제도에 諸侯 중에 功德이 성대하여 조정에서 공경하여 특별히 대우하는 자에게 特進의 지위를 하사하였으니, 지위가 車騎將軍의 위와 三公의 아래에 있었다. ≪後漢書≫ 〈百官志〉에 “列侯가 집으로 나아가면 특진으로 朝請을 받든다.” 하였으니, 때로 引見함을 칭한 것이고 관직의 정해진 제도는 없다.】으로 天子의 師傅가 되니, 국가에 매양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참여하여 의논을 정하였다. 이때 관리와 백성들이 많이 글을 올려 災異의 응험을 말하여 王氏가 정권을 독단한 소치라고 비난하자, 上이 마음속으로 자못 옳게 여겨서 張禹에게 하늘의 변고에 대해 친히 물었는데, 張禹가 대답하기를 “《春秋》의 日食과 地震은 혹 諸侯가 서로 죽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夷狄이 중국을 침략하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니, 災變의 뜻은 심원하여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새로 배운 나이 젊은 유생들이 함부로 말하여 사람을 그르치니, 마땅히 信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上이 평소 張禹를 믿고 사랑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王氏들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漢書 張禹傳》에 나옴 -

故槐里令【朱雲이 元帝時에 爲槐里令이라가 坐論石顯하야 廢錮故로 稱求見이라】朱雲이 上書求見하니 公卿이 在前이라 曰 今朝廷大臣이 皆尸位素餐【尸는 主也요 素는 空也요 餐은 呑食也니 謂雖主此位나 而德不稱官하야 空食祿也라】하니 臣은 願賜尙方斬馬劍【斬馬劍은 言利可以斬馬也라】이면 斷佞臣一人頭하야 以厲其餘하노이다 上問誰也오 對曰 安昌侯張禹니이다 上大怒曰 小臣이 居下訕上하고 廷辱師傅하니 罪死不赦라 御史는 將下하라 이 攀殿檻하니 檻折이라 呼曰 臣得下從龍逄, 比干關龍逄은 夏桀之臣이요 比干은 殷紂之臣이니 皆以忠諫死하니라】하야 遊於地下足矣니이다 御史遂將去하다 於是에 左將軍辛慶忌 免冠叩頭殿下曰 此臣이 素著狂直하니 使其言이 是인댄 不可誅요 其言이 非라도 固當容之니이다 上意解러니 及後當治檻하야 上曰 勿易하고 因而輯之하야 以旌直臣하라하다 〈出雲本傳〉

예전에 槐里令【朱雲이 元帝 때에 槐里令이 되었다가 石顯을 논박한 죄에 걸려 禁錮를 당하였으므로 만나 보기를 구한다고 칭한 것이다.】을 지낸 朱雲이 글을 올려 뵙기를 청하니, 이때 公卿들이 앞에 있었다. 朱雲이 말하기를 “지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지위를 차지하여 녹만 먹고 있으니,【尸는 주관함이고 素는 한갓이고 餐은 밥을 먹는 것이니, 尸位素餐은 비록 그 지위를 주관하고 있으나 德이 관직에 걸맞지 못하여 한갓 녹만 먹음을 이른다.】 신은 바라건대 尙方에서 만든 斬馬劍을 내려 주시면【斬馬劍은 칼의 예리함이 말의 목을 벨 수 있음을 말한다.】 奸臣 한 사람의 목을 잘라서 그 나머지를 독려하겠습니다.” 하였다. 上이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安昌侯張禹입니다.” 하였다. 上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미천한 신하가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고 조정에서 師傅를 욕하였으니, 죽을 죄라 용서할 수가 없다. 御史는 朱雲을 데리고 내려가라.” 하였다. 朱雲이 대궐의 난간을 부여잡으니, 난간이 부러졌다. 朱雲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죽어서 龍逄比干【[釋義]龍逄, 比干:關龍逄은 夏나라 桀王의 신하이고 比干은 殷나라 紂王의 신하인데, 모두 충성스럽게 간하다가 죽었다.】을 따라 지하에서 놀면 만족합니다.” 하니, 御史가 마침내 朱雲을 데리고 갔다. 이에 左將軍辛慶忌가 冠을 벗고 대궐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이 신하가 평소 狂直하기로 알려졌으니, 만일 그 말이 옳다면 처벌해서는 안 되고 그 말이 그르더라도 진실로 용납해야 합니다.” 하니, 上의 노여움이 풀렸다. 뒤에 난간을 고칠 때를 당하여 上이 말하기를 “바꾸지 말고 그대로 보수해서 直言하는 신하를 旌表하라.” 하였다.- 《漢書 朱雲傳》에 나옴 -

[壬子]四年

[壬子]四年이라

王根이 薦谷永이어늘 徵入爲大司農하다 이 前後所上四十餘事 略相反覆하야 專攻上身與後宮而黨於王氏하니 上亦知之하고 不甚親信也러라

元延 4년(임자 B.C.9)

王根谷永을 천거하자, 중앙으로 불러들여 大司農을 삼았다. 谷永이 전후로 올린 40여 가지의 일이 대략 서로 반복되어 오로지 上의 몸과 後宮을 공격하고 王氏에게 편당하니, 上 또한 이것을 알고는 그다지 친애하고 믿지 않았다.

[癸丑]綏和元年

[癸丑]綏和元年이라

二月에 立定陶王하야 爲皇太子하다

綏和 元年(계축 B.C.8)

2월에 定陶王을 세워서 황태자로 삼았다.

○ 十一月에 王根이 薦自代어늘 丙寅에 以爲大司馬하니 時年이 三十八이라 이 旣拔出同列하야 繼四父而輔政이라 欲令名譽過前人하야 聘諸賢良하야 以爲掾史하고 賞賜邑錢【邑錢은 封邑所入之錢也라】을 悉以享士하고 愈爲儉約이러라 〈出王莽傳〉

○ 11월에 王根王莽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자, 丙寅에 王莽을 大司馬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38세였다. 王莽은 이미 동렬들 중에 빼어나 네 叔父들을 이어 정사를 보필하였다. 명예가 앞사람들보다 뛰어나고자 해서 여러 賢良한 사람들을 초빙하여 掾史(보좌하는 아전)로 삼고, 賞으로 하사받은 것과 封邑에서 거두어들이는 돈【邑錢은 封邑에서 거두어들이는 돈이다.】을 모두 털어 선비들을 연향하고 더욱 검약하였다.- 《漢書 王莽傳》에 나옴 -

○ 犍爲郡이 於水濱에 得古磬【樂石也니 古土母氏作磬石이라 或以玉爲之라】一十六枚하니 議者以爲善祥이라 劉向이 因是說上호되 宜興辟雍하고 設庠序【王氏曰 雍은 與廱通이라 記王制에 天子曰辟雍이라한대 鄭玄曰 辟은 明이요 廱(雍)은 和也니 所以明和天下라 陸佃曰 天子立四學하고 幷其中學而五니 直於一處竝建이라 周人辟雍은 則辟廱最居中하고 其南爲成均이요 北爲上庠이요 東爲東序요 西爲瞽宗이라 辟雍은 惟天子承師問道하고 養三老五更하고 出師受成等에 就焉이라 當天子入太學이면 則四學之人이 環水而觀之하니 是之謂辟雍이라 胡致堂曰 獨辟廱은 未有明其義者어니와 以詩考之하면 其義自明이라 王制에 紀天子曰辟廱이라하니 不知何所本〈始〉而云然也라 羅璧曰 竊謂辟廱은 非學也라 辟은 君이요 廱은 和也라 詩靈臺篇의 辟廱은 其中이 皆非學校中事요 文王有聲篇에 言鎬京辟廱도 其事亦於學无預라하니라 按二說을 當詳攷之니라[頭註]庠者는 養也요 序者는 (敎)[射]也라 古者에 黨有庠하고 (遂)[州]有序하니라】하고 陳禮樂하야 以風化天下니 如此而不治는 未之有也니이다 或曰【設爲難者之言而後에 答釋之也 】不能具禮라하나 禮는 以養人爲本하니 如有過差라도 是는 過而養人也어니와 刑罰之過는 或至死傷이니이다 今之刑이 非皐陶之法也어늘 而有司請定法하야 削則削하고 筆則筆호되 至於禮樂하야는 則曰不敢이라하니 是는 敢於殺人이요 不敢於養人也로소이다 夫敎化之比於刑法이면 刑法이 輕하니 是는 舍所重而急所輕也라 敎化는 所恃以爲治요 刑法은 所以助治也어늘 今에 廢所恃而獨立其所助하니 非所以致太平也니이다 帝以言으로 下公卿議한대 丞相翟方進과 大司空何武가 奏請立辟雍이러니 未作而罷하다 〈出禮樂志〉

[新增]胡氏之論이 美矣나 而未循其本也라 孔子曰 人而不仁이면 如禮何며 人而不仁이면 如樂何오하시니 不仁之人은 心非己有하야 視聽擧履가 皆迷其當이어늘 而何以爲禮樂哉리오 唯仁者는 所行皆禮而所安皆樂이니 是則禮樂之本也라 庠序聲容은 特其具矣니 無其本이면 則欲以其具敎人은 祗益趣(趨)之於虛僞之域이니 不若不爲之愈也니라

○ 犍爲郡이 물가에서 옛 石磬【古磬은 돌로 만든 악기이니, 옛날 土母氏가 磬石을 만들었다. 혹은 玉으로 만든다.】 16개를 얻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祥瑞라고 하였다. 劉向이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上을 설득하였다.

“마땅히 辟雍(太學)을 일으키고 庠序(鄕學 또는 四學)를 설치하며【[釋義]王氏가 말하였다. “雍은 廱과 통한다. ≪禮記≫ 〈王制〉에 ‘天子의 學宮을 辟雍이라 한다.’ 하였는데, 鄭玄이 말하기를 ‘辟은 밝음이요 廱은 和함이니, 천하를 밝히고 和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陸佃이 말하기를 ‘天子가 四學을 세우고 四學에 中學까지 아울러 다섯이니, 다만 한 곳에 함께 세운다. 周나라 사람의 辟雍은 辟廱이 가장 중앙에 있고, 그 남쪽을 成均이라 하고, 북쪽을 上庠이라 하고, 동쪽을 東序라 하고, 서쪽을 瞽宗이라 한다. 辟雍은 오직 天子가 스승을 받들어 道를 묻고 三老와 五更을 기르며, 군대를 출동하고 受成(정벌에 대한 모책을 결정)할 때에 이곳에 나아간다. 天子가 太學에 들어가게 되면 四學의 사람들이 물가에서 구경하니, 이것을 辟雍이라 한다.’ 하였다. 胡致堂(胡寅)이 말하기를 ‘오직 辟廱은 그 뜻을 분명히 밝힌 자가 있지 않으나 ≪詩經≫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그 뜻이 저절로 분명해진다. 〈王制〉에 天子의 學宮을 辟廱이라 하였으니, 무엇을 시초로 하여 이렇게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고, ≪羅璧識遺≫에 이르기를 ‘적이 생각건대 辟廱은 학교가 아닌 듯하다. 辟은 君主이고 廱은 화함이다. ≪詩經≫ 〈靈臺篇〉에 나오는 辟廱은 그 내용이 모두 학교의 일이 아니요, 〈文王有聲篇〉에 말한 鎬京辟廱도 그 일이 또한 학교와는 무관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두 가지 說을 마땅히 상고해야 할 것이다.”[頭註]庠은 기른다[養]는 뜻이고, 序는 활을 쏜다[射]는 뜻이니, 옛날에 黨에는 庠이 있고 州에는 序가 있었다.】 禮樂을 베풀어서 천하를 風化(敎化)시켜야 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다스려지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禮를 갖출 수 없다고 말하나【或曰은 詰難하는 자의 말을 가설한 뒤에 답하여 설명한 것이다.】 禮는 人民을 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니, 만약 過差(잘못)가 있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하여 人民을 기르는 것이 되지만 형벌이 과함은 혹 죽거나 상함에 이릅니다. 지금의 형벌이 皐陶의 법이 아닌데도 有司가 법을 제정하기를 청하여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쓸 것은 쓰나 禮樂에 이르러서는 감히 할 수 없다고 말하니, 이는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과감하고 人民을 기르는 데에는 과감하지 못한 것입니다. 敎化를 刑法에 비교하면 刑法이 가벼우니, 이는 중한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급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敎化는 믿고 의거하여 정치하는 것이고 刑法은 정치를 돕는 것인데, 이제 믿고 의거할 바를 버리고 다만 그 보조하는 것을 세우니, 태평을 이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황제가 劉向의 말을 公卿들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승상翟方進과 大司空何武가 辟雍을 세울 것을 주청하였으나 시작하지도 못하고 중지하였다. - 《漢書 禮樂志》에 나옴 -

[新增]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劉向의 의논이 아름다우나 그 근본을 따르지 못하였다. 孔子가 말씀하기를 ‘사람이 仁하지 못하면 禮를 어떻게 행하며, 사람이 仁하지 못하면 樂을 어떻게 행하겠는가.’ 하셨으니, 不仁한 사람은 마음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보고 듣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 마땅함을 잃는데, 어떻게 禮樂을 행할 수 있겠는가. 오직 仁한 자는 행하는 바가 모두 禮이고 편안하게 여기는 바가 모두 樂이니, 이것이 禮樂의 근본이다. 庠‧序와 聲音과 威儀는 다만 형식적인 도구일 뿐이니, 〈도구만 있고〉 근본이 없으면 그 도구만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려는 것은 다만 虛僞의 경지로 달려가게 할 뿐이니, 하지 않는 것이 나음만 못하다.”

劉向이 自見得信於上이라 故로 常顯訟宗室하고 譏刺王氏及在位大臣하야 其言이 多痛切하야 發於至誠이라 上이 數欲用爲九卿호되 爲王氏居位者와 及丞相御史所持라 故로 終不遷하고 居列大夫官하야 前後三十餘年而卒이러니 後十三歲而王氏代漢하니라 〈出劉向本傳〉

劉向은 스스로 上에게 신임받는 것을 알았으므로 항상 드러나게 宗室의 억울함을 변호하고王氏와 지위에 있는 大臣들을 비판해서 그 말이 대부분 통절하여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上이 자주 劉向을 등용하여 九卿을 삼고자 하였으나 지위에 있는 王氏들과 丞相과 御史들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그러므로 劉向이 끝내 승진하지 못하고 낮은 大夫의 관직에 있어 전후로 30여 년만에 죽었는데, 13년 뒤에 王氏가 漢나라를 대신하였다.- 《漢書 劉向傳》에 나옴 -

[甲寅]二年

[甲寅]二年이라

三月에 帝崩【趙昭儀之所殺(弑)也라】하다

班彪贊曰 〈臣之姑充後宮爲婕妤하고 父子昆弟侍帷幄이러니 數爲臣言호되〉 成帝善修容儀하야 升車正立하야 不內顧, 不疾言, 不親指하며 臨朝淵嘿하야 尊嚴若神하니 可謂有穆穆天子之容者矣라 博覽古今하고 容受直辭하며 公卿〈稱職〉하고 奏議可述이라 遭世承平하야 上下和睦이나 然湛(耽)乎酒色하야 趙氏亂內【初에 上微行하야 過陽阿主家라가 見歌舞者飛燕하고 悅之하야 召入宮大幸하고 有女弟어늘 復召入宮하니 姿性尤豔粹라 左右見之하고 皆嗟賞之러니 淖方成이 在帝後라가 唾曰 此는 禍水也니 滅火必矣라하니 言漢火德故也라 俱爲婕妤하야 貴傾後宮이라 於是에 廢許皇后而立爲皇后하고 封其父臨하야 爲成陽侯러니 無子라 多通侍郞宮奴多子者나 然卒無子하니라】하고 外家擅朝하니 言之면 可爲於邑(嗚唈)이라하시니라 建始以來로 王氏始執國命이러니 短祚하야 遂簒位하니 蓋其威福所由來者漸矣【言王氏之禍始於成帝라】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成帝善修容儀하야 臨朝若神하니 可謂有穆穆天子之容矣라 然이나 湛于酒色하야 飛燕媒私하고 赤鳳內亂하고 五侯秉政에 僭擬乘輿호되 縱惡不誅하야 蔓延滋長이라 遂致排擯宗室하고 孤弱公輔하야 斬戮無忌하고 擊斷不請이라 劉向, 王章이 精忠懇切호되 如水沃石하고 朱雲, 梅福이 披心讜論호되 動遭按劍이요 獨杜欽, 谷永, 張禹, 孔光之徒 諂諛苟容하야 保寵固祿하야 天地變異가 無與比數어늘 而當世君臣이 猶不警悟하니 欲久安長治나 得乎아

綏和 2년(갑인 B.C.7)

3월에 황제가 승하하였다.【趙昭儀가 시해한 것이다.】

班彪의 《漢書》〈成帝紀〉 贊에 말하였다.

“신의 고모가 후궁으로 들어가 婕妤가 되었고 父子와 兄弟가 모두 帷幄에서 모셨는데, 자주 나에게 말씀하기를 ‘成帝는 容儀를 잘 닦아서 수레를 탈 때에는 바르게 서서 안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빨리하지 않고 직접 가리키지 않았으며, 조정에 임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침묵하여 존엄함이 神明과 같았으니, 天子의 穆穆한 용모가 있다고 이를 만하였다. 古今의 역사를 널리 보고 정직한 말을 수용하였으며, 公卿들이 직책을 수행하고 奏議가 칭찬할 만하였다. 태평성대를 만나 上下가 화목하였으나 酒色에 빠져서 趙氏(趙飛燕)가 나라 안을 어지럽히고【처음에 上(成帝)이 미행하여 陽阿公主의 집을 지나다가 歌舞하는 자인 趙飛燕을 보고 좋아하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매우 총애하였고, 그녀에게 여동생이 있었는데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니 자태와 재주가 더욱 요염하고 순수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보고 모두 감탄하고 칭찬하였는데, 淖方成이 황제의 뒤에 있다가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이는 禍水이니, 火를 멸하게 할 것이 틀림없다.” 하였으니, 漢나라가 火德이기 때문에 〈漢나라를 멸망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들은 자매가 모두 婕妤가 되어서 귀함이 後宮들을 휩쓸었다. 이에 許皇后를 폐하고 趙飛燕을 세워 황후로 삼았으며, 그의 아비 臨을 봉하여 成陽侯로 삼았는데, 趙飛燕 자매는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侍郞(시중드는 남자)과 궁중의 노복 중에 자식을 많이 둔 자와 많이 간통하였으나 끝내 자식이 없었다.】 외척들이 조정의 정권을 독점하였으니, 이것을 말하면 한탄할 만하다.’ 하셨다. 建始 이래로 王氏가 처음으로 國政을 잡았는데, 哀帝平帝가 일찍 죽어서 王莽이 마침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였으니, 그 형벌과 복을 독단한 所由來가 점점 이루어진 것이다.【王氏의 禍가 成帝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成帝는 容儀를 잘 닦아서 조정에 임하면 神과 같았으니, 穆穆한 天子의 용모가 있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酒色에 빠져 趙飛燕이 사사로운 짓을 하고 赤鳳이 안에서 어지럽혔으며, 五侯가 정권을 잡자 참람하여 호화로움이 황제의 수레에 비견되었으나 악한 자를 내버려 두고 처벌하지 아니하여 蔓延하고 불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宗室을 배척하고公輔를 약하게 해서 사람을 베어 죽임에 거리낌이 없고 공격하고 단죄함에 주청하지 않았다. 劉向王章의 충성이 간절하였으나 돌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 먹혀들지 않았고, 朱雲梅福이 마음을 다하여 올바른 말을 하였으나 번번이 노여움을 만났으며, 다만 杜欽, 谷永, 張禹, 孔光의 무리들이 아첨하고 구차히 용납되어 은총을 보전하고 祿을 지켰다. 그리하여 天地의 變異가 그 횟수를 견줄 데가 없는데도 당세의 군주와 신하가 오히려 경계하고 깨닫지 못하였으니, 장구하게 편안하고 다스려지기를 바라나 될 수 있었겠는가.”

夏四月丙午에 太子卽皇帝位하다 哀帝初立에 躬行儉約하야 省減諸用하고 政事由己出하니 朝廷이 翕然望至治焉이러라 〈出本紀 无哀帝初立數句〉

여름 4월 병오에 太子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哀帝가 처음 즉위함에 몸소 검약함을 행하여 여러 비용을 절감하고 정사가 자신으로부터 나오니, 조정이 한결같이 지극한 정치를 바랐다.- 《漢書 元帝紀》에 나오는데 ‘哀帝初立’의 몇 句가 없음 -

○ 初에 董仲舒武帝호되 以秦用商鞅之法하야 除井田하니 民得賣買하야 富者는 田連阡陌하고 貧者는 亡(無)立錐之地라 邑有人君之尊하고 里有公侯之富하니 小民이 安得不困이리오 古井田法을 雖難卒(猝)行이나 宜少近古하야 限民名田【占田也니 各爲立限하야 不使富者過制하니 則貧弱之家可足矣라】하야 以贍不足하야 塞幷兼之路하고 薄賦斂, 省繇役하야 以寬民力然後에 可善治也리이다 及上卽位에 師丹이 復建言호되 今累世承平하야 豪富吏民이 訾(貲)數鉅萬이로되 而貧弱愈困하니 宜略爲限이니이다 天子下其議하니 丞相과 大司空奏請호되 自諸侯王列侯公主로 名田을 各有限하고 關內侯吏民名田을 皆毋過三十頃하고 奴婢를 毋過三十人하고 期盡三年호되 犯者는 沒入官하노이다 時에 田宅奴婢賈(價)爲減賤하니 貴戚近習이 不便也라 詔書且須後러니 遂寢不行하니라 〈以上 出食貨志〉

○ 이전에 董仲舒武帝를 설득하기를 “秦나라가 商鞅의 법을 따라 井田法을 없애니, 백성들이 田地를 매매할 수가 있어서 부유한 자는 田地가 阡陌(길)을 연하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세울 땅조차 없습니다. 그리하여 〈地主가〉 邑에는 人君처럼 존귀한 자가 있고 마을에는 公侯처럼 부유한 자가 있으니, 일반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井田法을 비록 갑자기 시행하기 어려우나 마땅히 다소 옛날과 비슷하게 해서 백성의 名田【名田은 田地를 점유하는 것이니, 각각 한계를 세워서 부유한 자로 하여금 制度를 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집이 풍족할 수가 있다.】을 제한하여 부족한 사람들을 도와서 〈부자들이〉 겸병하는 길을 막고 賦稅를 적게 거두며 繇役을 줄여서 백성의 힘을 펴 준 뒤에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즉위하자, 師丹이 다시 건의하기를 “지금 여러 대 동안 태평하여 부유한 관리와 백성들은 재물이 여러 鉅萬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더욱 곤궁하니, 대략 제한해야 합니다.” 하였다. 天子가 이 의논을 내리니, 丞相孔光과 大司空何武가 주청하기를 “諸侯王과 列侯, 公主로부터 名田을 각각 제한하고, 關內侯와 관리와 백성들의 名田을 모두 30頃을 넘지 못하고, 노비는 30명을 넘지 못하게 하며, 〈넘치는 것을 처분하는〉 기한을 3년으로 하되 범하는 자는 관청에 몰수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田宅과 노비의 값이 내리고 싸지니, 貴戚과 近臣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詔書를 내려 우선 뒤를 기다린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중지되고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상은 《漢書 食貨志》에 나옴 -

孝哀皇帝

名欣이니 元帝孫이요 定陶共王子也라 成帝無子일새

孝哀皇帝※ 名이니 元帝孫이요 定陶共王子也라 成帝無子일새 召入하야 立爲太子하니라 在位六年이요 壽三十五라

※ 欲强主威하야 以則이나 而剛愎不明하고 尊寵嬖倖하니 其能濟乎아

孝哀皇帝※는 이름이 이니, 元帝의 손자이고 定陶共王의 아들이다. 成帝가 아들이 없으므로 불러들여서 태자로 세웠다. 재위가 6년이고 壽가 35세이다.

哀帝는 군주의 위엄을 강화하여 武帝宣帝를 본받고자 하였으나 성질이 강하고 괴퍅하고 총명하지 못하였으며 宦官들을 높이고 총애하였으니, 어찌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丁巳]建平三年

[丁巳]建平三年이라

四月에 王嘉爲丞相하다 以時政苛急하야 郡國守相이 數有變動이라하야 乃上疏曰 孝文時에 吏居官者 或長子孫하야 以官爲氏【以官爲姓氏니 如下文倉氏庫氏是也라】하니 倉氏, 庫氏는 則倉庫吏之後也라 其二千石長吏 亦安官樂職하니 然後에 上下相望하야 莫有苟且之意니이다 其後에 稍稍變易하야 公卿以下或居官數月而退【言不敢操持群下也라】하니 中材는 苟容求全하고 下材는 懷危內顧【言常恐獲罪하야 每爲私計也라】라 唯陛下留神於擇賢하사 記善忘過하소서 此方今急務也니이다

建平 3년(정사 B.C.4)

4월에 王嘉가 승상이 되었다. 王嘉는 당시의 정사가 가혹하고 급박하여 郡國의 太守와 相이 자주 변동이 있다 해서 마침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孝文帝 때에는 관직에 있는 관리들이 혹 자손이 장성함에 이르러 관직을 氏로 삼았으니,【以官爲氏는 관직을 姓氏로 삼은 것이니, 아래 글에 倉氏와 庫氏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倉氏庫氏는 바로 창고 관리의 후손입니다. 二千石의 長吏(郡國의 守와 相) 또한 관직을 편안히 여기고 즐거워하였으니, 그런 뒤에야 상하가 서로 기대하여 구차한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차츰 바뀌어서 公卿 이하가 혹 관직에 있은 지 수개월 만에 물러나니,【[釋義]公卿以下……數月而退:公卿 이하가 관직에 있은 지 수개월 만에 물러난다는 것은 감히 아랫사람들을 장악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보통 재주는 구차히 용납하여 온전하기만을 구하고, 낮은 재주는 위태로운 마음을 품고 사사로운 일만을 돌아봅니다.【항상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매양 사사로운 계책을 세움을 말한 것이다.】 오직 폐하께서는 賢者를 가려 뽑는 일에 유념하시어 잘한 것은 기억하고 잘못한 것은 잊으소서. 이것이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戊午]四年

[戊午]四年이라

二月에 駙馬都尉【武帝置하니 掌御馬하니라 駙는 副也니 非正駕車를 皆爲駙馬라 魏晉尙公主者加之하니라】侍中董賢이 得幸於上하야 出則參(驂)乘하고 入御左右하니 賞賜累鉅萬이라 貴震朝廷이러라 〈出佞幸傳〉

建平 4년(무오 B.C.3)

2월에 駙馬都尉【駙馬都尉는 武帝가 설치하였으니, 御馬를 관장하였다. 駙는 副라는 뜻이니, 正式 車駕가 아닌 것을 모두 駙馬라 칭하였는 바, 魏晉 시대에 공주에게 장가든 자에게 이 벼슬을 가하였다.】인 侍中(宦官)董賢이 上에게 총애를 얻어서 나가면 參乘을 하고 들어오면 左右에서 모시니, 賞으로 하사받은 것이 여러 鉅萬이어서 귀함이 조정에 진동하였다. - 《漢書 佞幸傳》에 나옴 -

○ 匈奴單于上書願朝五年이라 公卿이 以爲虛費府帑【帑은 它莽反이요 又音奴라 府는 物所聚也요 帑은 藏金帛之所也라】이니 可且勿許니이다 揚雄이 上書諫曰 臣聞六經之治는 貴於未亂이요 兵家之勝은 貴於未戰이라하니이다 今單于上書求朝어늘 國家不許而辭之하니 臣愚는 以爲漢與匈奴從此隙矣라하노이다 匈奴는 本五帝所不能臣이요 三王所不能制니 其不可使隙이 明甚이니이다 以秦始皇之彊과 蒙恬之威로도 然不敢窺西河하야 乃築長城以界之하고 會漢初興에 以高祖之威靈과 三十萬衆으로도 困於平城하고 高皇后時에 匈奴悖慢이어늘 大臣이 權書遺之然後에 得解하고 及孝文時에 匈奴侵暴北邊하야 候騎至雍, 甘泉이라 京師大駭하야 發三將軍하야 屯細柳, 棘門, 霸上하야 以備之라가 數月乃罷하고 孝武卽位에 設馬邑之權하야 欲誘匈奴【武帝使馬邑人聶翁一로 誘致單于러니 單于疑之而還하니라】라가 徒費財勞師하야 一虜도 不可得見이어든 況單于之面乎잇가 其後에 深惟社稷之計하고 規恢萬載之策하야 乃大興師數十萬하야 使衛靑, 霍去病操兵이 前後十餘年이라 於是에 浮西河하고 絶大幕【幕은 卽沙漠也라 直度曰絶이요 沙土曰幕이라】하며 破窴顔【匈奴中山名이라】하고 襲王庭【單于無城郭하야 其穹廬前地若庭이라 故云王庭이라】하야 窮極其地하야 追犇逐北【註見周赧王三十一年이라】하야 封狼居胥山하고 禪於姑衍하고 以臨瀚海【瀚은 如字라 北海名이니 在沙漠北이라】하니 自是之後로 匈奴震怖하야 益求和親이나 然而未肯稱臣也하니이다

○ 匈奴의 單于가 글을 올려 조회할 것을 원한 지가 5년이었다. 公卿들이 말하기를 “國庫【帑은 음이 它莽反(탕)이고, 또 음이 노이다. 府는 물건을 모아 놓는 곳이고, 帑은 금과 비단을 보관하는 곳이다.】만 허비하니 우선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揚雄이 글을 올려 간하였다.

“신이 듣건대 六經의 다스림은 혼란하기 전에 다스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兵家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單于가 글을 올려 조회하기를 요청하는데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니, 어리석은 신은 漢나라와 匈奴가 이로부터 틈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匈奴는 본래 五帝도 신하로 삼지 못하였고 三王도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틈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됨이 매우 분명합니다. 秦나라 始皇의 강함과 蒙恬의 위엄으로도 감히 西河를 엿보지 못하여 마침내 長城을 쌓아서 경계로 삼았고, 마침 漢나라가 처음 일어남에 高帝의 위엄과 30만의 병력으로도 平城에서 곤궁하였으며, 高皇后 때에 匈奴가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한 짓을 하였는데 大臣들이 權書(임시방편으로 둘러댄 글)를 보낸 뒤에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孝文帝 때에 匈奴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정탐하는 기병이 雍州와 甘泉에 이르자 京師가 크게 놀라서 세 장군을 출동하여 細柳, 棘門, 霸上에 주둔시켜 대비한 지 수개월 만에야 비로소 파하였고, 孝武帝가 즉위함에 馬邑의 속임수를 써서 匈奴를 유인하려고 하다가【武帝가 馬邑 사람 聶翁一로 하여금 單于를 유인하게 하였는데, 單于가 의심하고 돌아간 일을 가리킨다.】 한갓 재물을 허비하고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기만 해서 한 명의 오랑캐도 볼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單于의 얼굴이겠습니까. 그 뒤에 社稷을 위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萬年의 계책을 계획하고 확대하여 마침내 수십만의 군대를 크게 일으켜 衛靑霍去病으로 하여금 군대를 조련하게 한 지가 전후로 십여 년이었습니다. 이에 西河에 배를 띄우고 大幕(沙漠)을 횡단하며,【幕은 바로 沙漠이다. 직선으로 횡단하는 것을 絶이라 하고, 모래흙을 幕이라 한다.】 窴顔山(祁連山)【窴顔은 匈奴 가운데에 있는 산 이름이다.】을 격파하고 王庭(單于가 있는 곳)【單于는 城郭이 없어서 그 집 앞의 땅이 庭과 같기 때문에 王庭이라 한 것이다.】을 습격하여 그들의 땅 끝까지 이르러서 도망하는 자들을 추격하고 패배하는 자들을 쫓아가서【逐北는 이에 대한 註가 周나라 赧王 31年條에 보인다.】狼居胥山에 封하고 姑衍에서 禪하며 瀚海【瀚은 본자대로 읽는다. 北海의 이름이니, 사막의 북쪽에 있다.】에 임하였으니, 이후로 匈奴가 두려워하여 더욱 화친하기를 구하였으나 臣이라고 칭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且夫前世에 豈樂傾無量之費하고 役無罪之人하야 快心於狼望【匈奴中地名이라】之北哉리오마는 以爲不一勞者는 不久佚하고 不暫費者는 不永寧이라하야 是以로 忍百萬之師하야 以摧餓虎之喙하고 運府庫之財하야 塡廬山【卽廬朐山也니 在匈奴中이라】之壑而不悔也하니이다 至本始之初하야 匈奴有桀心【桀은 堅也니 言其起立不順이라】하야 欲掠烏孫하고 侵公主【武帝元封六年에 以宗室女로 爲公主하야 嫁烏孫하니라】어늘 乃發五將【田廣明, 范明友, 韓增, 趙充國, 田順이라】之師十五萬騎하야 以擊之하니 時에 鮮有所獲이요 徒奮揚威武하야 明漢兵若雷風耳라 雖空行空反이나 尙誅兩將軍【田順은 不至期〈會〉하고 詐增虜獲하며 田廣明은 知虜在前하고 逗留不進이라 皆下吏하니 自殺하니라】故로 北狄이 不服하야 中國이 未得高枕安寢也니이다 逮至元康, 神爵之間하야 大化神明하고 鴻恩溥洽하며 而匈奴內亂하야 五單于【宣帝五鳳甲子年에 稽侯柵이 爲呼韓邪單于하고 日逐王薄胥堂이 爲屠耆單于하고 呼揭王이 爲呼揭單于하고 {右}奧鞬王이 爲車犁單于하고 烏籍都尉 爲烏籍單于하니라】爭立이라 日逐, 呼韓邪【呼韓邪는 匈奴單于之號라 宣帝五鳳元年에 稽侯柵이 爲呼韓邪單于하야 甘露二年에 款塞請朝하고 後光武建武中에 日逐王比 爲呼韓邪單于하야 款塞願爲藩蔽하니라】 携國歸死【歸死命於漢也라】하야 扶伏(匍匐)稱臣이라 然이나 尙羈縻【馬曰羇(羈)요 牛曰縻니 言制四夷를 如馬牛之受羇縻라】之하고 計不顓(專)制【不顓制는 言不爲臣妾이라】하니 自此之後로 欲朝者를 不距하고 不欲者를 不彊이라 今單于歸義어늘 奈何疑而隙之하야 使有恨心하야 因以自絶하야 終無北面之心이니잇고 書奏에 天子寤焉하고 更報單于書而遣之하다

致堂管見曰 帝王이 於中國無事時에 鮮不欲開闢土地하고 行師荒外하여 服前代所不能服하고 臣昔人所不能臣하여 以爲一時駿功하야 自偉其代也라 若漢武之於西北兩垂(陲)에 其勤勞費耗가 蓋前無比, 後無繼矣니 苟使匈奴款塞【款은 叩也니 叩塞門하고 來服從也라】面內하여 不自欺翫이면 亦可以少殺疲弊之恥而償侵侮之患也라 然이나 師行餘三十年에 卒不得如志러니 至於無意武功者하야는 乃坐享其成이라 至若渭上盛儀에 單于執國珍, 襲冠帶하고 稱臣贊謁하고 稽首而朝는 則武帝平生所願欲而不得見者어늘 哀帝之世엔 漢旣衰矣로되 匈奴烏孫이 猶不廢禮하고 西域佩印이 五十餘君이니 雖曰中國榮觀이나 譬猶大木遠條하야 枝葉尙茂로되 而蠹生心腹하여 根幹將顚矣니 于是時에 縱使九夷八蠻【多之稱也라 東方之夷九種이니 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요 又玄菟, 樂浪, 高麗, (蒲)[滿]飾, 鳧(吏)[更], 索(豕)[家], 東屠, 倭人, 天鄙也라 八蠻은 天竺, 咳首, 譙撓, 跛踵, 穿胸, 儋耳, 狗軹, 旁春이라】이 罔不扶伏闕庭之下인들 夫亦何補리오 是故로 聖主는 專務治內以固其本하고 不勤遠略而忽邇圖하니 其慮遠矣로다

또 前代에 어찌 한량없는 경비를 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부역시켜서 狼望【狼望은 匈奴 가운데에 있는 지명이다.】의 북쪽에서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수고롭지 않은 자는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하고 잠시 허비하지 않는 자는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백만의 군사를 차마 버려서 굶주린 호랑이의 입에 넣고, 府庫의 재물을 운반하여 廬山【廬山은 바로 廬朐山이니, 匈奴 가운데에 있다.】과 같은 골짜기를 메우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本始의 初年에 이르러 匈奴가 건방진 마음【桀은 견고함이니, 일어서서 순종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이 있어서 烏孫을 침략하고公主를 빼앗아 가고자 하자,【武帝 元封 6년에 宗室의 딸을 공주로 삼아 烏孫으로 시집보냈다.】 마침내 다섯 장군【다섯 장수는 田廣明‧范明友‧韓增‧趙充國‧田順이다.】의 군사 15만 기병을 징발하여 공격하였으니, 이때 노획한 것이 적고 다만 위엄과 무력을 떨치고 드날려서 漢나라 군대가 우레와 바람처럼 신속함을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비록 거저 갔다가 거저 돌아왔으나 오히려 두 장군【田順은 약속한 기한에 오지 않고 거짓으로 포로와 首級의 숫자를 부풀려 보고하였으며, 田廣明은 오랑캐가 앞에 있음을 알고는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옥리에게 회부하자 자살하였다.】을 처형하였기 때문에 북쪽 오랑캐들이 복종하지 않아 중국 사람들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元康과 神爵 연간에 이르러 큰 교화가 신명하고 큰 은혜가 널리 흡족하며, 匈奴에 내란이 일어나서 다섯 선우【다섯 單于는 宣帝 五鳳 갑자년에 稽侯인 柵이 呼韓邪單于가 되고, 日逐王 薄胥堂이 屠耆單于가 되고, 呼揭王이 呼揭單于가 되고, 奧鞬王이 車犁單于가 되고, 烏籍都尉가 烏籍單于가 된 것이다.】가 왕위를 다투었습니다. 日逐王呼韓邪單于【[釋義]日逐, 呼韓邪:呼韓邪는 匈奴單于의 칭호이다. 宣帝 五鳳 元年에 稽侯인 柵이 呼韓邪單于가 되어서 甘露 2년에 국경의 관문에 와서 복종하여 조회할 것을 청하였고, 뒤에 光武帝의 建武 연간에 日逐王 比가 呼韓邪單于가 되어서 복종하여 제후국이 될 것을 원하였다.】가 저들 나라의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와 목숨을 바쳐서【歸死는 죽음과 삶을 漢나라에 돌리는 것이다.】 부복하여 臣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매어두기만 하고【말의 굴레를 羈라 하고 소의 고삐를 縻라 하니, 四夷를 제어하기를 소와 말이 굴레와 고삐에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계책은 우리 마음대로 제재하지 않았으니,【專制하지 않았다는 것은 臣妾이 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후로부터 조회오려고 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고 하고자 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지금 單于가 義에 돌아오는데 어찌하여 의심하고 틈을 두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이로 인해 스스로 단절하여 끝내 北面할 마음이 없게 하십니까.”

글을 아뢰자, 天子가 깨닫고 다시 單于에게 답서를 써서 보내었다.

致堂(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帝王 중에 中國이 아무 일이 없을 때에 국경을 개척하고 변경에 군대를 출동하여 前代에 복종시키지 못한 곳을 복종시키고 옛사람이 신하로 삼지 못한 자를 신하로 만들어서 이것을 한 때의 큰 공으로 삼아 스스로 한 시대를 훌륭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漢나라 武帝는 西北의 두 변경에 들인 수고와 비용이 예전에 비할 데가 없고 후세에도 이을 자가 없었으니, 만일 匈奴가 국경의 관문에 와서【款은 두드림이니, 국경의 관문을 두드리고 와서 복종하는 것이다.】 복종하여 스스로 속이거나 희롱하지 않았으면 또한 국가를 피폐하게 만든 치욕을 다소 줄이고 침략과 모욕을 당한 근심을 보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대를 출동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끝내 뜻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武功에 관심이 없는 宣帝元帝, 成帝哀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앉아서 그 성공을 누리게 되었다.

渭水 가의 성대한 의식에 單于가 匈奴 지역에서 생산된 진기한 보물을 잡고 冠帶를 하고는 신하라고 칭하여 배알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조회하는 것으로 말하면 武帝가 평생토록 원하였지만 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哀帝 때에 漢나라가 이미 쇠약해졌으나 匈奴와 烏孫이 오히려 禮를 폐하지 않았으며 西域의 나라로서 漢나라의 印綬를 찬 것이 50여 군주였다. 이는 비록 中國의 영화로운 구경거리라고 말하겠지만 비유하면 큰 나무가 가지가 멀리 뻗어 가지와 잎이 무성하나 속은 좀이 먹어서 뿌리와 줄기가 장차 넘어지려 하는 것과 같으니, 이때에 비록 九夷와 八蠻【九夷八蠻은 많은 오랑캐를 칭한 것이다. 東方의 오랑캐가 아홉 종족이 있으니,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이고, 또 玄菟, 樂浪, 高麗, 滿飾, 鳧更, 索家, 東屠, 倭人, 天鄙이다. 八蠻은 天竺, 咳首, 譙撓, 跛踵, 穿胸, 儋耳, 狗軹, 旁春이다.】이 대궐 아래에 포복하지 않은 자가 없은들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 때문에 聖主는 오로지 나라 안을 다스려서 근본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힘쓰고, 수고롭게 멀리 경략하느라 가까운 계책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니, 그 생각함이 원대하다.”

[己未]元壽元年

[己未]元壽元年이라

孔光爲丞相하다 이 知上欲尊寵董賢하고 下車拜謁하야 不敢以賓客鈞敵之禮하니 이 由是로 權與人主侔矣러라

元壽 元年(기미 B.C.2)

孔光을 승상으로 삼았다. 孔光은 上이 董賢을 높이고 총애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는 그를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절하고 뵈어서 감히 賓客의 대등한 禮로 대하지 못하니, 董賢이 이로 말미암아 권세가 人主와 대등해졌다.

[庚申]二年

[庚申]二年이라

六月에 帝崩하다 帝睹孝成之世에 祿去王室【謂政在王氏也라】이러니 及卽位에 屢誅大臣【誅大臣朱博王嘉等이라】하야 欲彊主威하야 以則, 【則武宣은 謂以武帝宣帝爲法則也라】이나 然而寵信讒諂하고 憎疾忠直【讒諂은 趙昌, 董賢, 息夫躬等이요 忠直은 師丹, 傅喜, 鄭崇等이라】하니 漢業이 由是遂衰러라 〈出本紀 無然而寵信讒諂以下〉

元壽 2년(경신 B.C.1)

6월에 황제가 승하하였다. 황제는 孝成帝 때에 祿(政權)이 왕실에서 떠난 것【祿이 왕실에서 떠났다는 것은 정권이 王氏에게 있음을 이른다.】을 보았는데, 즉위하게 되자 여러 차례 大臣을 죽여서【대신인 朱博과 王嘉 등을 죽임을 이른다.】 군주의 위엄을 강화하여 武帝宣帝를 본받고자【則武宣은 武帝와 宣帝를 법칙으로 삼았음을 이른다.】 하였다. 그러나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총애하여 신임하고 충직한 자들을 미워하니,【[頭註]寵信讒諂 憎疾忠直:참소하고 아첨한 자들은 趙昌‧董賢‧息夫躬 등이요, 충직한 자들은 師丹‧傅喜‧鄭崇 등이다.】漢나라 王業이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쇠퇴하였다.- 《漢書 元帝紀》에 나오는데, ‘然而寵信讒諂’ 이하의 내용은 없음 -

孝平皇帝

名衎이니 元帝之孫이요 中山孝王之子라

孝平皇帝※ 名이니 元帝之孫이요 [[中山(箕)[孝]王]]之子라 哀帝崩에 無子라 太皇太后議迎立爲太子하야 九月에 卽皇帝位하니 帝年方九歲라 太皇太后臨朝하고 大司馬이 秉政하니라 在位五年에 王莽弑之하니 壽一十四라

孝平不造하고 新都作宰하야 不伊不周하야 喪我四海하니라

孝平皇帝※는 이름이 이니, 元帝의 손자이고 中山孝王의 아들이다. 哀帝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太皇太后가 의논하여 迎立해서 태자로 삼아 9월에 황제에 즉위하니, 이때 황제의 나이가 9세였다. 太皇太后가 조회에 임하고 大司馬王莽이 정권을 잡았다. 재위한 지 5년에 王莽이 시해하니, 壽가 14세이다.

孝平皇帝가 不幸하고, 新都侯(王莽)가 총재가 되어 伊尹처럼 하지 않고 周公처럼 하지 않아서 우리 四海를 망하게 하였다.

[辛酉]元始元年

[辛酉]元始元年이라

春正月에 王莽이 風(諷)益州하야 令塞外蠻夷로 自稱越裳氏하고 重譯獻白雉一, 黑雉二【越裳은 南方遠國名이니 在交趾南이라 周成王時에 嘗重九譯하야 獻白雉하니라】하니 於是에 群臣이 盛陳功德으로 致周成白雉之瑞하니 을 宜賜號安漢公이라하니라 〈出王莽傳〉

[新增]林氏陳勝將起할새 以丹書帛【勝以丹書帛曰 陳勝王이라하야 置魚腹中한대 卒買魚得書하고 已怪하니라】으로 置之魚腹하고 使吳廣效狐鳴於叢祠【令吳廣으로 之叢祠하야 中夜에 構(篝)火하고 狐鳴曰 大楚興, 陳勝王이라하니 卒皆夜恐이러니 旦日에 卒〈中〉往往指目勝廣하니라】러니 王莽將簒할새 風益州하야 塞外蠻夷自稱越裳氏하야 以獻白雉라 然이나 之謀는 僅足以誑戍卒이어늘 而漢朝公卿이 乃爲之所誑하니 其不知之耶아 抑知之而相率爲僞耶아

元始 元年(신유 A.D.1)

봄 정월에 王莽이 益州에 넌지시 지시하여 변방 밖에 있는 오랑캐들로 하여금 스스로 越裳氏라 칭하고, 여러 번 통역을 거쳐 흰 꿩 한 마리와 검은 꿩 두 마리를 바치게 하니,【[釋義]自稱越裳氏 重譯獻白雉一黑雉二:越裳은 남방에 있는 먼 나라의 이름이니, 交趾의 남쪽에 있다. 周나라 成王 때에 일찍이 아홉 번 통역을 거쳐 흰 꿩을 바쳤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王莽의 功德으로 周나라 成王 때 흰 꿩을 바친 祥瑞를 이루었으니, 王莽에게 마땅히 安漢公이라는 호를 하사해야 한다.’고 지극히 말하였다. - 《漢書 王莽傳》에 나옴 -

[新增]林氏가 말하였다.

陳勝이 起兵하려 할 때에 丹書를 쓴 비단【陳勝이 붉은색 朱砂로 비단에 “陳勝이 왕 노릇 한다.”라고 써서 물고기 뱃속에 넣어 두었는데, 병졸들이 이 물고기를 사서 글을 얻고는 이미 괴이하게 여겼다.】을 물고기의 뱃속에 넣어 두게 하였으며 吳廣으로 하여금 叢祠(樹木 가운데 세운 사당)【陳勝이 吳廣으로 하여금 叢祠에 가서 한밤중에 등불을 켜고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말하기를 “大楚가 일어나고 陳勝이 왕 노릇 한다.” 하니, 병졸들이 모두 밤에 두려워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 병졸들 중에서 陳勝과 吳廣이 제왕이 될 것이라고 지목하였다.】에서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陳氏가 황제가 된다고 말하게 하였는데, 王莽이 찬탈하려 할 때에 益州에 넌지시 지시해서 변방 밖의 오랑캐들이 越裳氏라 자칭하고는 흰 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陳勝의 꾀는 겨우 수자리 사는 병졸들을 속일 수 있을 뿐이었으나 漢나라 조정의 여러 公卿들은 도리어 王莽에게 속아 넘어갔으니, 이것을 알지 못하였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서로 따라서 거짓을 한 것인가?”

[壬戌]二年

[壬戌]二年이라

春에 越嶲郡이 上〈言〉黃龍游江中이라하야늘 太師孔光과 大司徒馬宮等이 咸稱功德하야 比周公이러라

元始 2년(임술 2)

봄에 越嶲郡이 강 가운데에서 黃龍이 논다고 上言하자,太師孔光과 大司徒馬宮 등이 모두 王莽의 공덕을 칭송하여 周公에 견주었다.

梅福이 知王莽必簒漢祚하고 一朝에 棄妻子去하야 不知所之러니 其後에 人有見福於會稽者하니 變名姓하고 爲吳市門卒云이러라 〈出本傳〉

梅福王莽이 반드시 漢나라 國統을 찬탈할 것임을 알고 하루아침에 妻子를 버리고 떠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뒤에 어떤 사람이 會稽에서 그를 보니, 姓名을 바꾸고 吳나라 市門의 병졸이 되었다고 한다. - 《漢書 梅福傳》에 나옴 -

[癸亥]三年

[癸亥]三年이라

北海逄萌이 謂友人曰 三綱이 絶【莽殺其叔父王商하고 又殺其冢嫡子하니 是滅其天性也요 殺其君之祖姑하고 又盡除忠直之臣 何武, 鮑宣, 辛慶忌等數百人하니 是無君也라 故曰三綱絶이라하니라】矣라 不去면 禍將及人이라하고 卽解冠하야 掛東都城門하고 歸하야 將家屬하야 浮海하야 客於遼東하다 〈出逄萌傳〉

[新增]林氏王莽逆節旣萌이로되 漢朝公卿이 爲之犬馬하여 曾不少愧어늘 而梅福은 隱會稽하고 逄萌은 客遼東하여 若將浼焉者라 夫子曰 篤信好學하고 守死善道하며 危邦不入하고 亂邦不居라하시니 二子爲得之로다

元始 3년(계해 3)

北海의 逄萌이 친구에게 이르기를 “三綱이 끊어졌다.【王莽이 숙부인 王商을 살해하고 또 그 큰 아들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그 天性을 멸한 것이요, 人君의 祖姑를 죽이고 또 충직한 신하인 何武, 鮑宣, 辛慶忌 등 수백 명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三綱이 끊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떠나가지 않으면 禍가 장차 사람(자신)에게 미칠 것이다.” 하고는 즉시 冠을 벗어 동쪽 도성문에 걸고 돌아와 家率들을 거느리고서 바다를 건너 遼東에 가서 나그네로 살았다. - 《漢書 逄萌傳》에 나옴 -

[新增]林氏가 말하였다.

王莽의 반역하는 일이 이미 싹텄는데도 漢나라 조정의 公卿들이 그의 忠犬 노릇을 하면서 일찍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梅福은 會稽에 은둔하고 逄萌은 遼東에 나그네가 되어서 자기 몸이 장차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 夫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 지키고 道를 잘하며,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 살지 않는다.’ 하였으니, 두 사람이 이것을 행하였다.”

[甲子]四年

[甲子]四年이라

夏에 采伊尹, 周公稱號하야 加安漢公하야 爲宰衡하다

元始 4년(갑자 4)

여름에 伊尹周公의 칭호를 채택하여 安漢公에 가하여 宰衡이라 하였다.

[乙丑]五年

[乙丑]五年이라

夏五月에 策命安漢公以九錫【王氏曰 禮緯云 禮有九錫하니 一輿馬요 二衣服이요 三樂則이요 四朱戶요 五納陛요 六虎賁이요 七弓矢요 八鈇鉞이요 九秬鬯이니 皆所以勸善扶不能이라 白虎通曰 能安民者는 賜輿馬하고 能富民者는 賜衣服하고 能和民者는 賜樂則하고 民衆多者는 賜朱戶하고 能進善者는 賜納陛하고 能退惡者는 賜虎賁하고 能誅有罪者는 賜鈇鉞하고 能征不順者는 賜弓矢하고 孝道備者는 賜秬鬯이라하니라 舊說解에 輿馬는 謂大(太)輅戎輅各一과 玄馬二也요 衣服은 謂玄袞也요 樂則은 謂軒縣(懸)之樂也요 朱戶는 謂所居之室에 朱其戶也요 納陛는 謂從中階而升也요 虎賁은 謂三百人也요 弓矢는 謂彤(旅)[玈]之弓矢也요 鈇鉞은 謂大柯斧니 賜之專殺也요 秬鬯은 謂秬鬯之酒니 賜以祭祀也라】하다

元始 5년(을축 5)

여름 5월에 安漢公王莽을 策命하여 九錫【王氏가 말하였다. “≪禮緯 合文嘉≫에 이르기를 ‘禮에 九錫이 있으니, 첫 번째는 輿馬, 두 번째는 衣服, 세 번째는 樂則, 네 번째는 朱戶, 다섯 번째는 納陛, 여섯 번째는 虎賁, 일곱 번째는 弓矢, 여덟 번째는 鈇鉞, 아홉 번째는 秬鬯이니, 모두 善을 권장하고 능하지 못함을 붙들어 주는 것이다.’ 하였다. ≪白虎通≫에 이르기를 ‘백성을 편안히 한 자에게는 輿馬를 하사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한 자에게는 衣服을 하사하고, 백성을 화목하게 한 자에게는 樂則을 하사하고, 백성이 많아지게 한 자에게는 朱戶를 하사하고, 善人을 등용한 자에게는 納陛를 하사하고, 악한 사람을 물리친 자에게는 虎賁을 하사하고, 죄 있는 자를 죽인 자에게는 鈇鉞을 하사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한 자에게는 弓矢를 하사하고, 孝道가 구비된 자에게는 秬鬯을 하사한다.’ 하였다. 옛날 해설에 輿馬는 太輅와 戎輅(兵車) 각각 한 대와 검은 말 두 필을 이르고, 衣服은 검은 곤룡포를 이르고, 樂則은 軒懸의 음악을 이르고, 朱戶는 거주하는 집에 그 문을 붉게 칠함을 이르고, 納陛는 가운데 계단을 따라 올라감을 이르고, 虎賁은 武士 300명을 이르고, 弓矢는 붉고 검은 활과 화살을 이르고, 鈇鉞은 큰 자루의 도끼를 이르니, 이를 하사함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고, 秬鬯은 검은 기장과 鬱金으로 빚은 술을 이르니, 하사하여 제사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을 가하였다.

○ 冬十二月에 이 因臘日【漢以大寒後戌日로 爲臘이라 記月令에 孟冬에 臘先祖라하니 按臘은 獵也니 獵取禽獸하야 祭先祖니 重本始也라】하야 上椒酒【元日에 服椒柏酒라】할새 置毒酒中이러니 帝有疾이라 이 作策하야 請命於泰畤하야 願以身代하고 藏策金縢【武王有疾이어시늘 周公이 請命(二)[三]王하야 欲以身代死러시니 史錄其策하야 藏之於匱할새 緘之以金이라 故曰金縢匱也라하니 縢은 卽束縛之義라】하야 置于前殿하고 勅諸公하야 莫敢言이러니 丙午에 帝崩하다

班固贊曰 孝平之世에 政自出하니 褒善顯功하야 以自尊盛이라 觀其文辭하면 方外百蠻이 無思不服하고 休徵嘉應이 頌聲竝作이러니 至于變異見於上하고 民怨於下하야는 亦不能文也하니라 〈出本紀〉

[新增]尹氏平帝之終은 前史엔 雖明言置毒酒中이나 然皆以帝崩爲文이러니 至朱夫子綱目하여 書之曰 安漢公이 弑帝라하여 始正名定罪하여 直書弑逆者는 所以誅亂臣賊子하여 爲萬世戒耳니라

○ 겨울12월에 王莽이 臘享日【漢나라는 大寒 후의 戌日을 臘享이라 하였다. ≪禮記≫ 〈月令〉에 “孟冬에 先祖에게 납향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臘은 사냥이니 禽獸를 사냥하여 先祖에게 제사 지내는 것으로, 本始(시초)를 중하게 여긴 것이다.】을 인하여 황제에게 椒酒【정월 초하루에 椒柏酒를 먹는다.】를 올릴 때에 술 속에 독약을 넣으니, 황제가 병이 났다. 王莽이 策文을 지어서 泰畤에 명을 청하여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하고 그 策文을 金縢에 보관하여【武王이 병환을 앓자, 周公이 세 왕(太王과 文王과 王季)에게 명을 청하여 자신이 대신 죽고자 하였는데, 史官이 그 策文을 기록하여 匱에 보관할 적에 쇠사슬로써 봉함하였다. 그러므로 금끈으로 묶은 궤라고 한 것이다. 縢은 바로 묶는다는 뜻이다.】 앞 宮殿에 두고는 諸公들에게 신칙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丙午日에 황제가 승하하였다.

班固의 《漢書》〈平帝紀〉 贊에 말하였다.

孝平帝 때에는 정사가 王莽으로부터 나오니, 善한 사람을 표창하고 功이 있는 사람을 드러내어 스스로 높이고 성대하게 하였다. 그 文辭를 살펴보면 外方의 온갖 오랑캐들이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고 아름다운 징조와 좋은 응험이 있어서 칭송하는 소리가 함께 일어났는데,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함에 이르러서는 王莽 또한 문식하지 못하였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平帝가 죽은 것을 예전의 역사책에는 비록 술에다가 독약을 탔다고 분명히 말하였으나 모두 ‘황제가 崩하였다.’고 썼는데,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서야 ‘安漢公王莽이 황제를 시해하였다.’라고 써서 비로소 이름을 바로잡고 죄를 정하여 弑逆함을 곧바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亂臣賊子를 주벌하여 萬世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是月에 前煇光【莽分京師하야 置前煇光, 後承烈二郡하니라】謝囂奏호되 武功長孟通이 浚井이라가 得白石하니 上圓下方하고 有丹書著石하야 文曰 告安漢公爲皇帝라하니 符命之起 自此始矣라 於是에 群臣이 奏太后【太皇太后也니 元帝之后요 成帝之母라】하야 請安漢公踐阼【記文王世子에 成王幼하야 不能涖阼어늘 周公相하야 踐阼而治하니라 注云 涖는 視요 踐은 履也니 成王不能視阼階하야 行人君之事일새 周公이 代履阼階하야 攝王位하야 治天下하니라】하고 謂之攝皇帝라한대 詔曰 可라하다 〈出莽傳〉

[史略 史評]史斷曰 孝平이 幼弱하여 政自出하니 褒善顯功하여 以自尊大어늘 漢士大夫 若崩厥角稽首하야 靡然從之하야 一時에 上書頌者 四十八萬人이라 而炎漢之宗社 已繫於하니 哀哉라

歷年圖曰 高祖奮布衣하야 提三尺劍하야 (五)[八]年而成帝業하니 其收功之速如是는 何哉오 惟其知人善任使而已라 故로 高祖曰 鎭國家, 撫百姓은 不如蕭何요 運籌策決成敗는 不如子房이요 戰必勝, 攻必取는 不如韓信이라 三者는 皆人傑이어늘 吾能用之하니 所以取天下라하고 韓信亦曰 陛下不善將兵而善將將이라하니 斯言이 盡之矣라 呂氏之亂에 漢氏不絶如綫(線)이라 然而卒不能爲患者는 外有宗藩之强하고 內有絳灌之忠也일새니라 之時에 天下家給人足하야 幾致刑措하니 後世皆知稱慕하야 而莫能及之라 夫民之情이 何嘗不欲安樂而富壽哉아 이 能勿擾之而已矣라 孝武는 喜淫侈하고 慕神仙하야 宮室無度하고 巡遊不息하며 窮兵於四夷하고 嚴刑而重賦하니 迹其行事하면 視秦皇에 何遠哉리오 止以崇儒重道하고 求賢納諫故로 其成敗若此之殊也라 孝昭는 以童稚之年으로 辨霍光之忠하야 確然不可動하니 何天資之明也오 然이나 猶專政而不歸하니 此則之罪矣라 孝宣은 (總)[綜]覈名實하고 信賞必罰하야 使吏稱其職하고 民安其業하니 方之孝武하면 功烈優焉이라 孝元은 優游不斷하야 漢業始衰하고 孝成은 荒于酒色하고 委政外家하며 孝哀는 狠愎不明하야 嬖幸盈朝러니 陵夷至于孝平하야 以幼冲嗣位하니 王莽因之하야 遂移漢祚라 恃其詐慝하고 煩民玩兵하야 罪盈怨積而天下叛之矣니라

이달에 前煇光【王莽이 京師를 나누어 前煇光과 後承烈 두 郡을 두었다.】 사람 謝囂가 아뢰기를 “武功縣長孟通이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으니,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며 붉은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安漢公王莽이 황제가 됨을 고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符命이 나옴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신하들이 太后【太后는 太皇太后이니, 元帝의 后이고 成帝의 어머니이다.】에게 아뢰어 安漢公을 踐阼(즉위)【≪禮記≫ 〈文王世子〉에 “成王이 어려서 帝位에 오를 수가 없자, 周公이 정승이 되어 踐祚하여 다스렸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涖는 봄(帝位에 임하여 살펴봄)이고 踐은 밟음이니, 成王이 동쪽 섬돌을 밟고서 人君의 일을 행할 수가 없기에 周公이 대신 동쪽 섬돌을 밟고서 王位를 대리하여 천하를 다스린 것이다.” 하였다.】하게 하고 攝皇帝라고 이름할 것을 청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한다고 하였다.- 《漢書 王莽傳》에 나옴 -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孝平帝가 幼弱하여 정사가 王莽에게서 나왔다. 王莽은 善한 사람을 표창하고 功이 있는 사람을 드러내어 스스로 높이고 큰 체하였는데, 漢나라의 士大夫들이 마치 짐승이 뿔을 숙이듯이 머리를 조아리고 모두 그를 따라서 일시에 글을 올려 王莽의 功德을 칭송한 자가 48만 명이었다. 그리하여 漢나라의 宗廟 社稷이 이미 王莽에게 매어 있었으니, 슬프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가 布衣로 일어나 三尺劍을 가지고서 8년 만에 皇帝의 業을 이루었으니, 그 공을 거둠이 이와 같이 신속하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오직 사람을 알아 잘 맡기고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高祖가 스스로 이르기를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짐은 蕭何만 못하고, 계책을 운용하여 成敗를 결단함은 子房(張良)만 못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人傑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취한 것이다.’ 하였으며, 韓信 또한 이르기를 ‘陛下는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잘하지 못하나 장수를 거느리는 것은 잘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다하였다.

呂氏의 亂에 漢氏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실낱같았다. 그러나 끝내 禍가 되지 못했던 것은 밖으로 宗藩(宗室諸侯)의 강함이 있고 안으로 絳侯(周勃)灌嬰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文帝景帝 때에는 天下가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후세가 모두 칭찬하고 사모할 줄 알아 이에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일찍이 안락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文帝景帝는 백성들의 이 바람을 소요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孝武帝는 지나친 사치를 좋아하고 神仙術을 사모하여 宮室을 꾸밈이 한도가 없고 순행과 유람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계속 정벌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고 부역을 무겁게 하였으니, 행한 일을 살펴보면 秦始皇에 비하여 어찌 차이가 멀겠는가. 다만 儒學을 높이고 道를 소중히 여기며 현자를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成敗가 이와 같이 달랐던 것이다.

孝昭帝는 어린 나이로 霍光의 충성을 분별해서 확고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天資가 총명하였는가. 그러나 霍光이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고 돌려주지 않았으니, 이는 霍光의 잘못이다. 孝宣帝는 名과 實을 자세히 살피고 賞과 罰을 분명히 내려서, 관리들은 직책을 잘 수행하고 백성들은 生業을 편안히 여겼으니, 孝武帝에 비하면 功烈이 더 낫다. 孝元帝는 우유부단하여 漢나라의 業이 처음으로 쇠하였고, 孝成帝는 酒色에 빠지고 정권을 外家에 맡겼으며, 孝哀帝는 성질이 모질고 괴팍하고 총명하지 못해서 총애하는 소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침체하여 孝平帝에 이르러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王莽이 이 틈을 타고 마침내 漢나라의 國統을 차지하였다. 王莽은 속임수와 간사함을 믿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동원하고 병난을 일으켜서 죄가 가득하고 원망이 쌓여 천하가 배반하였다.”

右西漢은 十二帝에 二百一十四年이요 幷王莽, 更始하면 合二百三十年이라

이상 西漢(前漢)은 12帝에 214年이고, 王莽更始(劉玄)까지 넣으면 도합 230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