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十六 東漢紀(後漢紀)

yjw2999
이동: 둘러보기, 검색

東漢紀(後漢紀)

世祖光武皇帝 上

名秀요 字文叔이니 南陽人이라

世祖光武皇帝【能紹前業曰光이요 克定禍亂曰武라】※ 名요 字文叔이니 南陽人이라 漢景帝七世孫이요 長沙定王之後요 南頓令之子也라 在位三十三年이요 壽六十二라

※ 恢廓大度요 才明勇略이라 故能芟刈群雄하고 克復舊物하며 未及下車에 先訪儒雅하고 表行義, 興學校하야 東漢之俗이 於斯爲美라 然不任三公하야 事歸臺閣하고 建武, 永平之間에 吏事刻深하니 所以中興之美 蓋未盡焉이라

世祖光武皇帝※【前代의 功業을 능히 잇는 것을 光이라 하고 禍亂을 평정하는 것을 武라 한다.】는 이름이 이고 字가 文叔이니, 南陽 사람이다. 漢나라 景帝의 7世孫이고 長沙定王의 후손이며, 南頓令의 아들이다. 재위가 33년이고 壽가 62세이다.

光武帝는 탁 트인 큰 도량에 재주와 지혜가 있고 용맹과 智略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群雄들을 제거하고 옛 물건(나라)을 수복하였으며, 미처 戎車에서 내리기 전에 먼저 선비를 방문하였으며,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를 표창하고 학교를 일으켜서 東漢의 풍속이 이에 아름답게 되었다. 그러나 三公에게 맡기지 아니하여 정사가 臺閣으로 돌아가고, 建武와 永平 연간에 관리들의 일이 까다롭고 혹심하였으니, 이 때문에 中興의 아름다움이 미진하였다.

[乙酉]建武元年

[乙酉]建武元年이라

蕭王이 北擊尤來, 大槍, 五幡【槍은 梢也요 幡은 幟也라 更始初에 諸賊竝起하야 各以軍容强盛爲號라 故로 鐵脛, 大槍, 五幡三者에 幷尤來하여 四者는 皆賊之名也라】於元氏하야 追至北平하야 連破之【元氏는 縣名이라 蕭王이 是年四月에 擊諸部하야 連破之라가 反爲所敗하고 歸保范陽하니 軍中不見王이라 或云已死라하니 諸將不知所爲러니 吳漢曰 卿曹努力하라 王兄子章及興이 在南陽하니 何憂無主리오한대 衆乃定이라 居數日에 王從范陽하야 悉破諸賊也하니라】하다

建武 元年(을유 25)

蕭王이 북쪽으로 尤來‧大槍‧五幡【槍은 창이고 幡은 깃발이다. 更始 초기에 여러 적들이 함께 일어나서 각각 군대의 威容의 강성함을 가지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鐵脛(정강이가 쇠처럼 단단함), 大槍, 五幡 세 가지에 尤來까지 아울러 네 가지가 모두 賊의 명칭이다.】을 元氏縣에서 공격하여 北平에서 따라잡아 연달아 격파하였다.【元氏는 縣의 이름이다. 蕭王이 이해 4월에 여러 部를 공격하여 연달아 격파하다가 도리어 패배를 당하고는 范陽으로 돌아가 보전하였다. 軍中에서 王을 볼 수 없으므로 혹자가 이르기를 “王이 이미 죽었다.”고 하니, 諸將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吳漢이 말하기를 “卿들은 努力하라. 王의 兄의 아들인 劉章과 劉興이 南陽에 있으니, 어찌 군주가 없음을 걱정하는가?” 하니, 무리들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며칠 뒤 王이 范陽으로부터 여러 賊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馮異, 寇恂은 擊走朱鮪【更始將으로 見上卷癸未年이라】하고 吳漢은 率耿弇, 景丹等十三將軍하고 追尤來等하야 斬首萬三千餘級하니 賊이 散入遼西, 遼東이라가 爲烏桓, 貊人의 所鈔(抄)擊略盡【略은 取也라】하다

馮異寇恂은 朱鮪【朱鮪는 更始의 장수로 上卷(15권) 癸未年條(23 更始元年)에 보인다.】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吳漢耿弇景丹 등 13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尤來 등을 추격하여 1만 3천여 명의 수급을 베니, 적들이 흩어져 遼西와 遼東으로 들어갔다가 烏桓과 貊人에게 습격당하여 모두 다 잡혔다.【略은 취함이다.】

○ 都護將軍賈復이 與五校로 戰於眞定이라가 이 傷瘡甚이어늘 王이 大驚曰 我所以不令賈復別將者는 爲其輕敵也러니 果然失吾名將이로다 聞其婦有孕이라하니 生女耶인댄 我子娶之요 生男耶인댄 我女嫁之하야 不令其憂妻子也호리라 이 病尋愈하야 追及於薊하니 相見甚讙이러라 〈出復傳〉

○ 都護將軍賈復五校와 眞定縣에서 싸우다가賈復이 부상당하여 상처가 심했는데, 왕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賈復으로 하여금 별도로 군대를 거느리지 않게 한 것은 그가 적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과연 나의 名將을 잃었도다. 내 들으니 그의 부인이 임신했다 하니, 딸을 낳는다면 나의 아들을 장가보내고, 아들을 낳는다면 나의 딸을 시집보내어 그로 하여금 처자식을 걱정하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賈復이 얼마 후 상처가 나아서 뒤따라 薊 땅에 이르니, 서로 만나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後漢書 賈復傳》에 나옴 -

○ 還至中山하니 諸將이 請上尊號호되 王이 不聽하고 行至南平棘【地志에 常山郡에 有平棘縣이라】하야 諸將이 固請之호되 王이 不許라 耿純이 進曰 天下士大夫 捐親戚, 棄土壤하고 從大王於矢石之間者는 其計固望攀龍鱗, 附鳳翼하야 以成其志耳어늘 今大王이 留時逆衆하야 不正號位하시니 은 恐士大夫望絶計窮이면 則有去歸之思하야 無爲久自苦也일까하노니 大衆이 一散이면 難可復合이니이다 王이 深感曰 吾將思之호리라 行至鄗【地志에 常山郡에 有鄗邑이라하니 光武於鄗南에 卽帝位하고 改曰高邑이라】하야 召馮異하야 問四方動靜한대 更始必敗라 宗廟之憂 在於大王하니 宜從衆議니이다 〈出耿純馮異傳〉會에 儒生彊華【姓名이니 光武同舍生也라】 自關中으로 奉赤伏符【讖記之書曰符니 赤伏은 其符之名이라 漢德尙火하니 赤은 火色이라 伏은 藏也라】來하야 詣王하니 曰 劉秀發兵捕不道하니 四夷雲集하야 龍鬪野【龍鬪野는 謂群雄角力也니 易坤卦云 龍戰于野라하니라】라 四七之際에 火爲主【王氏曰 四七은 二十八也라 自高祖로 至光武初起히 合二百二十八年이니 卽四七之際也라 或謂光武以二十八歲起兵이라 故云四七之際라 又二十八將도 亦應四七之數라 漢火德이라 故火爲主也라】라하야늘 群臣이 因復奏請한대 六月에 王이 卽皇帝位于鄗南【設壇於鄗南千秋亭五城之陌이라】하고 改元大赦하다 〈出本紀〉

[史略 史評]石氏更始는 雖庸才나 南面之君也요 光武는 雖豪傑이나 北面之臣也라 更始未亡而光武先立하니 是叛君也니라

[史略 史評]愚謂更始雖君而柔懦無爲하고 遊燕無度하며 加以諸將暴橫하야 億兆離心하니 其亡을 可立而待也요 光武는 以帝室之冑로 才明勇略하야 中外屬心하니 苟不早正位號하야 以收衆望이면 則社稷爲他人有也 必矣니 蓋當此之時하야 社稷爲重이요 君爲輕하니 卽位於鄗南者는 所以爲社稷計也니 何叛之有哉리오 故로 綱目於其起兵也에 書興復帝室하고 於其卽位也에 書卽皇帝位하니 則其予之意를 可見矣니 學者宜玩心焉이니라

○ 돌아와 中山郡에 이르니 여러 장수들이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고, 행군하여 南平棘【≪漢書≫ 〈地理志〉에 “常山郡에 平棘縣이 있다.” 하였다.】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耿純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하의 士大夫(勇士와 大夫)들이 친척을 버리고 土壤(고향)을 떠나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大王을 따르는 것은 그 계책(목적)이 진실로 용의 비늘을 붙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어서 그 뜻을 이루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大王께서 시일을 지체하고 무리들의 마음을 거슬려 황제의 칭호와 지위를 바로잡지 않으시니, 저는 천하의 士大夫들이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이 궁해지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두어 오랫동안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두려우니, 큰 무리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왕이 깊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생각하겠다.” 하였다.

행군하여 鄗邑【≪漢書≫ 〈地理志〉에 “常山郡에 鄗邑이 있다.” 하였으니, 光武帝가 鄗邑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高邑으로 고쳤다.】에 이르러서 馮異를 불러 사방의 動靜을 묻자, 馮異가 대답하기를 “更始(劉玄)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宗廟 社稷의 우려가 대왕에게 있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後漢書》〈耿純傳〉과 〈馮異傳〉에 나옴 -

이때 마침 儒生 彊華【彊華는 성명이니, 光武帝의 同舍生(學舍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다.】가 關中에서 赤伏符【圖讖說을 기록한 글을 符라 하니, 赤伏은 符의 이름이다. 漢나라는 火德을 숭상하니, 赤은 불[火]의 색깔이다. 伏은 감춘다는 뜻이다.】를 받들고 왕에게 찾아오니, 여기에 이르기를 “劉秀가 군대를 내어 無道한 자를 토벌하니, 사방 오랑캐들이 구름처럼 모여 龍이 들에서 싸우는데【용이 들에서 싸운다는 것은 群雄들이 힘을 겨룸을 이르니, ≪周易≫ 坤卦에 이르기를 “용이 들에서 싸운다.” 하였다.】 四七의 즈음에 火가 주인이 된다.【[釋義]四七之際 火爲主:王氏가 말하였다. “四七은 28이다. 高祖로부터 光武帝가 처음 起兵할 때까지가 합하여 228년이니, 이것이 바로 四七의 즈음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光武帝가 28세에 起兵하였기 때문에 四七의 즈음이라 했다.’ 한다. 또 28명의 장수도 또한 四七의 數에 응한다. 漢나라는 火德이기 때문에 火가 주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로 인하여 다시 주청하자, 6월에 왕이 鄗邑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鄗邑의 남쪽 千秋亭 五城의 경계에 壇을 설치하였다.】 연호를 바꾸고大赦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史略 史評]石氏가 말하였다.

更始는 비록 용렬한 재주이나 南面한 군주였고, 光武帝는 비록 호걸이었으나 北面한 신하였다. 更始가 망하기 전에 光武帝가 먼저 즉위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배반한 것이다.”

[史略 史評]내가 생각건대 更始가 비록 군주였으나 나약하여 무슨 일을 하지 못하였고 놀고 잔치하여 법도가 없었으며, 겸하여 여러 장수들이 횡포를 부려 억조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그 망함을 서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光武帝는 皇室의 후손으로 재주와 지혜와 勇略이 있어서 中外의 마음이 그에게 돌아갔으니, 만일 일찍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여러 사람의 희망을 거두지 않는다면 社稷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社稷은 중하고 군주는 가벼우니, 鄗邑의 남쪽에서 즉위한 것은 社稷을 위한 계책이었으니, 무슨 배반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은 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황실을 다시 일으켰다고 썼고, 즉위했을 때에는 황제에 즉위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 허여한 뜻을 볼 수 있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赤眉西向帝城할새 以名爲群賊이면 不可以久라하야 乃立宗室劉盆子【高帝孫朱虛侯章之後로 在軍中하야 爲人牧羊이라】하야 爲上將軍【故式侯萌이 有三子하니 恭, 茂, 盆子라 恭在長安하고 茂, 盆子는 留軍中하야 主牧羊이라 是時에 立將軍할새 求軍中景王後하야 得茂盆子及西安侯孝三人하다 崇이 乃以三札置(筒)[笥]中하고 書其一爲符曰上將軍이라하고 於鄭北에 設壇場하고 劉盆子等三人이 居中立하야 以年次로 探札이러니 盆子得符한대 諸將皆稱臣拜하니 盆子時年十五也라】하다 〈出盆子傳〉

赤眉가 서쪽으로 帝城(長安)을 향할 때에 이름을 여러 賊이라 하면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해서 마침내 宗室인 劉盆子【劉盆子는 高帝의 손자인 朱虛侯(景王) 章의 후손으로, 軍中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남을 위하여 羊을 길렀다.】를 세워 上將軍으로 삼았다.【예전에 式侯였던 劉萌은 세 아들이 있었으니 恭, 茂, 盆子이다. 恭은 長安에 있고 茂과 盆子는 軍中에 남아서 양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이때 將軍을 세우려고 할 적에 景王(朱虛侯 劉章)의 후손을 軍中에서 찾아 茂와 盆子 및 西安侯 孝 세 사람을 얻었다. 樊崇이 마침내 세 개의 簡札을 상자 속에 넣고 그중 하나에 ‘上將軍’이라는 信標를 써서 鄭나라 북쪽에 壇場을 설치하고 劉盆子 등 세 사람이 가운데에 서서 나이 순서대로 簡札을 뽑게 하였는데, 劉盆子가 上將軍이라 쓴 신표를 얻으니, 諸將들이 모두 신하라 칭하고 절을 하였는 바, 劉盆子는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 《後漢書 劉盆子傳》에 나옴-

○ 七月에 帝使使持節하야 拜鄧禹爲大司徒하고 封酇侯【酇은 音贊이니 卽蕭何所封이니 屬南陽이라 [通鑑要解]蕭何所封이니 蓋以禹功比於蕭何故로 封之라】하니 時에 二十四러라 〈出禹傳〉又議選大司空할새 帝以赤伏符曰 王梁主衛作玄武【帝以野王은 衛之所屬이요 玄武는 水神之名이요 司空은 水土之官이라 故로 用(武)[梁]爲司空也라】라하야 以野王令王梁爲大司空하고 吳漢爲大司馬하다 〈出王梁傳〉

○ 7월에 황제가 使者를 보내어 節을 가지고 가서 鄧禹를 임명하여 大司徒로 삼고 酇侯【[釋義]酇은 음이 찬이니 바로 蕭何를 봉한 곳이니, 南陽에 속하였다. [通鑑要解]酇은 蕭何를 봉한 곳이니, 鄧禹의 功이 蕭何에게 비할 만하기 때문에 이곳에 봉한 것이다.】에 봉하니, 鄧禹가 이때 24세였다. -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또 大司空을 뽑을 것을 의논할 적에 황제가 赤伏符에 “王梁이 衛 지방을 주장하여 玄武가 된다.”【光武帝가 野王은 衛의 땅이고 玄武는 水神의 이름이고 司空은 水土를 맡은 관직이므로 王梁을 司空으로 삼은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해서 野王令인 王梁을 大司空으로 삼고, 吳漢을 大司馬로 삼았다. - 《後漢書 王梁傳》에 나옴 -

○ 初에 更始以伏爲平原太守하니 時에 天下兵起호되 이 獨晏然撫循百姓이러니 門下督이 謀爲起兵이어늘 이 收斬之하니 於是에 吏民이 信向하야 平原一境이 賴以全이라 帝徵爲尙書하야 使典定舊制하고 又以鄧禹西征이라하야 拜爲司直하야 行大司徒事하니 車駕每出征伐에 常留鎭守러라 〈出伏湛傳〉

○ 처음에 更始伏湛을 平原太守로 삼으니, 이때 천하에 병란이 일어났으나 伏湛만은 홀로 편안히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문하에 있는 伏湛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자 伏湛이 거두어 목을 베니, 이에 관리와 백성들이 믿고 향하여 平原 한 고을이 伏湛을 힘입어 온전하였다. 황제가 伏湛을 불러 尙書로 삼아서 옛 제도를 주관하여 정하게 하고, 또 鄧禹가 서쪽으로 정벌 갔다 하여 伏湛을 司直으로 임명해서大司徒의 일을 행하게 하니, 車駕(天子)가 나가서 정벌할 때마다 伏湛이 항상 남아 鎭撫하고 지켰다.- 《後漢書 伏湛傳》에 나옴 -

○ 九月에 赤眉入長安하니 更始走하고 將相이 皆降이어늘 詔封更始하야 爲淮陽王하다 〈出本紀及劉玄傳 後爲赤眉所殺〉

[史略 史評]司馬公更始는 雖漢宗室이나 以懦而立이라 考其卽位하면 南面立하야 朝群臣에 羞愧刮席하야 殊失人君之態러니 厥後에 委政趙萌하고 日夜飮宴하여 群臣이 欲見言事에 輒醉而不視朝하니 是以로 旣得之하고 又失之矣니라

○ 9월에 赤眉가 長安으로 들어가니, 更始가 달아나고 將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에 명하여 更始를 봉하여 淮陽王으로 삼았다.- 《後漢書》〈光武帝紀〉와 〈劉玄傳〉에 나옴. 更始는 뒤에 赤眉에게 살해당하였다.-

[史略 史評]司馬溫公이 말하였다.

更始(劉玄)는 漢나라의 宗室이었으나 나약한 재주로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하였을 때를 살펴보면 南面하여 서서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서 자리를 만지작거려 자못 임금의 태도를 잃었는데, 그 후에 정사를 趙萌에게 맡기고는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여 신하들이 뵙고 정사를 말하려 하면 그때마다 술에 취하여 조회를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미 황제의 자리를 얻었으나 또 잃은 것이다.”

○ 初에 宛人卓茂 寬仁恭愛하고 恬淡樂道하야 雅實不爲華貌하고 行己在於淸濁之間하야 自束髮至白首히 與人未嘗有爭競하니 〈出東觀記 又茂傳〉 鄕黨故舊 雖行能이 與茂不同이라도 而皆愛慕欣欣焉이러라 , 間에 爲密【北魏置高密郡하고 隋改密州하니라】令하야 視民如子하야 擧善而敎하고 口無惡言하니 吏民이 親愛하야 不忍欺之러라

○ 처음에 宛 땅 사람 卓茂가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사랑하며 性情이 편안하고 담박하며 道를 좋아해서, 바르고 진실하여 화려한 외모에 치중하지 않고 몸가짐이 淸濁의 사이에 있어서 총각 때부터 老年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일찍이 경쟁하는 일이 없으니, - 《東觀漢記》에 나오고, 또 《後漢書 卓茂傳》에도 나옴 - 鄕黨의 오래된 벗들이 비록 행실과 재능이 卓茂와 똑같지 않더라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사모하여 기뻐하였다. 哀帝平帝 때에 密縣【北魏에서는 高密郡을 두고 隋나라에서는 密州로 고쳤다.】의 令이 되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여겨서 善한 사람을 들어 가르치고 입으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여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民이 常(嘗)有言部亭長【部는 謂所部也요 亭者는 停留니 行旅宿食處니 猶今之館驛也라 秦法에 十里一亭이요 亭置長하여 主督盜賊이라】이 受其米肉遺者어늘 曰 亭長이 爲從汝求乎아 爲汝有事囑之而受乎아 將平居에 自以恩意遺之乎아 民曰 往遺之耳니이다 曰 遺之而受어늘 何故言耶오 民曰 竊聞賢明之君은 使民不畏吏하고 吏不取民이라하니 今我畏吏라 是以遺之러니 吏旣卒受故로 來言耳니이다 曰 汝爲敝民【敝民은 爲敝壞之民이라】矣로다 凡人이 所以群居不亂하야 異於禽獸者는 以有仁義禮愛하야 知相敬事也어늘 汝獨不欲修之하니寧能高飛遠走하야 不在人間耶아 吏顧不當乘威力彊求請耳니 亭長은 素善吏요 歲時遺之는 禮也니라 民曰 苟如此인댄 律에 何故禁之닛고 笑曰 律은 設大法이요 禮는 順人情이니 今我以禮敎汝면 汝必無怨惡어니와 以律治汝면 汝何所措其手足乎리오 一門之內에 小者는 可論이요 大者는 可殺也니 且歸念之하라

백성이 일찍이 部(屬縣)의 亭長【部는 관할하는 部門을 이르고, 亭은 가다가 멈추어 머무르는 것이니, 여행객들이 宿食하는 곳으로 지금의 館驛과 같다. 秦나라 法에 10里마다 1亭이 있고 亭에는 長을 두어 도적을 감독하게 하였다.】이 자신이 뇌물로 준 쌀과 고기를 받아먹었다고 말하자, 卓茂가 말하기를 “亭長이 너에게 요구하였느냐? 아니면 네가 일이 있어서 청탁하였는데 받았느냐? 아니면 평소에 은혜로운 뜻으로 주었느냐?”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가서 그냥 주었습니다.” 하였다. 卓茂가 말하기를 “주어서 받았는데, 무슨 이유로 나에게 말하는가?” 하니, 백성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관리가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관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물건을 준 것인데, 관리가 끝내 받았기 때문에 와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卓茂가 말하기를 “너는 〈禮義를〉 파괴하는 백성이다.【敝民은 禮義를 피폐하게 하고 파괴하는 백성이다.】 무릇 사람이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어지럽지 않아서 금수와 다른 까닭은 仁義와 禮와 사랑이 있어서 서로 공경하고 섬길 줄 알기 때문인데 너만 홀로 이것을 닦으려 하지 않으니, 어찌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서 인간에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관리는 다만 위엄과 힘을 이용하여 억지로 요구하거나 청하지 않을 뿐이니, 亭長은 평소 선량한 관리이고 歲時에 선물을 주는 것은 禮이다.” 하였다.

백성이 말하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법률에 무슨 연고로 이것을 금합니까?” 하니, 卓茂가 웃으며 말하기를 “법률은 큰 法(강령)을 베풀어 놓은 것이고 禮는 人情을 따르는 것이니, 지금 내가 禮로써 너를 가르치면 네가 반드시 원망과 미움이 없겠지만 법률로써 너를 다스리면 네가 어디에 수족을 두겠느냐. 한 廳舍(동일한 종류의 일) 안에서 작은 잘못은 죄를 논할 수 있고 큰 잘못은 죽일 수 있으니, 우선 돌아가 생각하라.” 하였다.

初에 到縣하야 有所廢置하니 吏民이 笑之하고 隣城聞者 皆嗤【輕侮也라】其不能이라 河南郡이 爲置守令【茂正爲令이어늘 郡復置守令하야 使與茂竝居也라】호되 不爲嫌하고 治事自若이러니 數年에 敎化大行하야 道不拾遺【言雖遺棄於道라도 人不拾之니 言其俗淳也라】라 遷京部丞하니 密人老少 皆涕泣隨從이러라 及王莽居攝에 以病免歸러니 上卽位에 先訪求하니 時七十餘라 甲申에 詔曰 夫名冠天下면 當受天下重賞이니 今以爲太傅【太傅는 位上公이니 絶席在三公之右也라】하고 封褒德侯하노라

처음에 卓茂가 縣에 이르러 폐지하고 새로 설치하는 바가 있자, 관리와 백성들이 〈이해하지 못하여〉 그를 비웃고, 이웃 城의 듣는 자들도 모두 그의 무능함을 비웃었다.【嗤는 경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卓茂가 수령으로 있는데〉 河南郡에서 다시 수령을 두었으나【卓茂가 바로 수령으로 있는데, 河南郡에서 다시 수령을 두어 卓茂와 한 곳에 함께 거하게 한 것이다.】卓茂는 혐의하지 않고 일을 다스리기를 예전과 똑같이 하였는데 몇 년 만에 교화가 크게 행해져 길에 버려진 물건을 사람들이 줍지 않게 되었다.【비록 길에 물건이 버려져 있더라도 사람들이 줍지 않는 것이니, 풍속이 순후함을 말한 것이다.】京部의 丞으로 승진하니密縣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따랐다. 王莽이 居攝할 때에 병으로 면직하고 집에 돌아가 있었는데, 上이 즉위하자 맨 먼저 卓茂를 찾아 구하니, 卓茂가 이때 70여 세였다. 甲申日에 詔書를 내리기를 “이름이 천하에 으뜸이면 마땅히 천하의 중한 상을 받아야 하니, 지금 卓茂를 太傅로 삼고【太傅는 지위가 上公이니, 자리를 띄워 三公의 위에 있었다.】褒德侯로 봉한다.” 하였다.

溫公孔子稱 擧善而敎不能이면 則勸이라하시니 是以로 皐陶하고 伊尹에 而不仁者遠은 有德故也라 光武卽位之初에 群雄競逐하야 四海鼎沸하니 彼摧堅陷敵之人과 權略詭辯之士가 方見重於世어늘 而獨能取忠厚之臣하고 旌循良之吏하야 拔於草萊之中하야 寘(置)諸群公之首하니 宜其光復舊物하고 享祚久長이니 蓋由知所先務而得其本原故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善한 이를 들어 쓰고 능하지 못한 이를 가르치면 백성들이 권면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皐陶를 등용하고 湯임금이 伊尹을 등용함에 不仁한 자가 멀어진 것이니, 이는 德이 있었기 때문이다. 光武帝가 즉위한 초기에 群雄들이 角逐을 벌여 온 천하가 솥 안에 끓는 물처럼 떠들썩하였으니, 저 견고한 敵陣을 꺾고 적을 무찌르는 사람과 권모술수와 詭辯을 늘어놓는 선비가 막 세상에 소중하게 여겨졌을 터인데, 光武帝가 홀로 忠厚한 신하를 취하고 循良한 관리를 표창해서 초야에서 선발하여 여러 公의 위에 두었으니, 예부터 내려오는 물건(漢나라 王室)을 光復하여 國祚(國統)를 장구하게 누린 것이 마땅하니, 이는 먼저 힘쓸 바를 알아서 그 本原을 얻었기 때문이다.”

帝遣諸將하야 圍洛陽한대 朱鮪出降이어늘 十月에 車駕入洛陽하야 幸南宮하고 遂定都焉하다 〈出本紀〉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洛陽을 포위하자, 朱鮪가 나와 항복하였다. 10월에 車駕가 洛陽에 들어가서 南宮에 행차하였고, 마침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劉盆子數暴虐吏民하야 百姓이 不知所歸러니 聞鄧禹乘勝獨克而師行有紀【謂軍師之行이 有紀律이라】하고 皆望風하야 相携負【携는 在手요 負는 在背也라】以迎軍하니 降者日以千數라 衆號百萬이러라 所止에 輒停車駐節하야 以勞來之【勞來는 謂慰勉而招延之也라】하니 父老童穉【幼稚也니 與稚同이라】 垂髮戴白【垂髮은 謂小兒髮之垂者요 戴白은 謂老人頭戴白髮者라】이 滿其車下하야 莫不感悅하니 於是에 名震關西라 諸將豪傑이 皆勸徑攻長安이어늘 曰 不然하다 今에 吾衆이 雖多나 能戰者少하며 前無可仰之積【積는 韻會에 訓聚也라 [通鑑要解]仰은 猶恃也라】하고 後無轉饋之資어늘 赤眉新拔長安하야 財穀充實하니 鋒銳를 未可當也라 夫盜賊群居에 無終日之計하야 財穀이 雖多나 變故萬端이니 寧能堅守者也리오 上郡, 北地, 安定三郡이 土廣人稀하고 饒穀多畜하니 吾且休兵北道하고 就糧養士하야 以觀其敝면 乃可圖也라하고 於是에 引軍北至栒邑【地志에 在扶風이라】하니 所到에 諸營堡郡邑이 皆開門歸附러라 〈出禹傳〉

劉盆子가 관리와 백성들을 자주 포악하게 대하여 백성들이 돌아갈 곳을 알지 못했는데, 鄧禹가 승세를 타고 홀로 이기며 군사들이 紀律이 있다【師行有紀는 군사들의 행렬이 紀律이 있음을 이른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명망을 듣고 사모하여 서로 물건을 손에 들고 등에 짊어지고【携는 짐이 손에 있는 것이고, 負는 짐이 등에 있는 것이다.】 와서 군대를 위로하니, 항복하는 자가 날마다 천 명으로 헤아려졌다. 그리하여 무리를 百萬이라 이름하였다. 鄧禹는 머무는 곳마다 수레를 정지하고 節을 멈추어(세워) 백성들을 위로하고 오게 하니,【勞來는 위로하고 권면하여 불러서 맞이함을 이른다.】 父老과 어린아이들,【穉는 어린 것이니, 稚字와 같다.】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아이들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垂髮은 머리를 땋아서 늘어뜨린 小兒를 이르고, 戴白은 머리에 백발을 이고 있는 老人을 이른다.】이 그 수레 아래에 가득히 모여서 감격하여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에 명성이 關西(長安) 지방에 진동하였다.

여러 장수와 호걸들이 모두 鄧禹에게 곧바로 長安을 공격할 것을 권하자, 鄧禹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많으나 싸울 수 있는 자가 적으며, 앞에는 믿을 만한 저축【[釋義]積(자)는 ≪古今韻會擧要≫에 聚라고 訓하였다. [通鑑要解]仰은 恃와 같다.】이 없고 뒤에는 실어다가 먹일 만한 물자가 없는데, 赤眉는 새로 長安을 함락하여 재물과 곡식이 충실하니, 저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저 도적들이 모여 삶에 장구한 계책이 없어서 재물과 곡식이 비록 많으나 변고가 수없이 많을 것이니, 어찌 이것을 굳게 지킬 수 있는 자이겠는가. 上郡, 北地, 安定 세 郡은 토지가 넓고 인민이 적으며 곡식이 풍부하고 가축이 많으니, 내 우선 이 북쪽 지역에서 군대를 휴식시키고 양식을 가져다가 군사들을 기르면서 저들의 피폐함을 살핀다면 이에 도모할 수 있다.” 하고, 이에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栒邑【栒邑은 ≪漢書≫ 〈地理志〉에 “扶風郡에 있다.” 하였다.】에 이르니, 이르는 곳마다 여러 軍營과 堡壘와 郡邑들이 모두 성문을 열고 귀순하였다.-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 初에 成紀【縣名이니 屬天水郡이라】隗囂 起兵應漢이어늘 更始한대 至長安이라가 後에 逃歸天水하야 復招聚其衆하고 興修故業하야 自稱西州上將軍이라하니 三輔士大夫避亂者 多歸傾身引接하야 爲布衣交하야 以馬援, 彪之屬으로 爲賓客하니 由此로 名震西州하야 聞於山東이러라 〈出囂傳〉

○ 처음에 成紀縣【成紀는 縣의 이름이니 天水郡에 속하였다.】隗囂가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에 호응하자, 更始隗囂를 불렀는데 隗囂가 長安에 이르렀다가 뒤에 도망하여 天水로 돌아가서 다시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옛 기반을 일으켜 닦아서 스스로 西州上將軍이라 칭하니, 三輔 지방의 피난하는 士大夫들이 隗囂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隗囂가 힘을 다해 선비들을 맞이하여 대접해서 布衣의 사귐을 맺어 馬援班彪 등을 빈객으로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西州에 진동하여 山東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後漢書 隗囂傳》에 나옴 -

馬援이 少時에 以家用不足이라하야 辭其兄하고 欲就邊郡田牧이어늘 曰 汝는 大才니 當晩成이라 良工은 不示人以朴(璞)이니 且從所好하라 遂之北地하야 田牧이러니 常謂賓客曰 丈夫爲志에 窮當益堅이요 老當益壯이라하더라 後有畜數千頭, 穀數萬斛이러니 旣而嘆曰 凡殖【興生財利曰殖이라】財産은 貴其能賑施也니 否則守錢虜耳라하고 乃盡散於親舊하다 聞隗囂好士하고 往從之한대 甚敬重하야 與決籌策이러라 〈出馬援傳〉

馬援이 젊었을 때에 집에 財用이 부족하다 하여 그 형 馬況을 하직하고 변방 고을에 나아가 농사와 목축을 하고자 하니, 馬況이 말하기를 “너는 큰 재목이니, 마땅히 늦게 이루어질 것이다. 훌륭한 工人은 다듬지 않은 거친 玉石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법이니, 우선 너 좋을대로 하라.” 하였다. 馬援이 마침내 北地에 가서 농사짓고 목축을 하였는데, 항상 빈객들에게 이르기를 “대장부가 뜻을 세울 때에는 곤궁할수록 더욱 견고하고, 늙을수록 더욱 건장해야 한다.” 하였다. 뒤에 수천 마리의 가축과 수만 斛의 곡식을 소유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기를 “무릇 재산을 늘리는【재물을 경영하여 이익을 내는 것을 殖이라 한다.】 것은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베푸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그렇지 않으면 돈만 지키는 노예일 뿐이다.” 하고는, 이에 친구들에게 재물을 다 흩어 주었다. 隗囂가 선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馬援이 찾아가 따르자, 隗囂가 매우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겨서 그와 함께 계책을 결정하였다.-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丙戌]二年

[丙戌]二年이라

悉封諸功臣하야 爲列侯할새 陰鄕侯陰識는 貴人之兄也라 以軍功으로 當增封이러니 識叩頭讓曰 臣이 托屬掖庭【掖庭은 謂宮苑之中이라】하니 仍加爵邑이면 不可以示天下니이다 帝從之하다 〈出陰識傳〉

建武 2년(병술 26)

여러 功臣들을 다 봉하여 列侯로 삼을 때에 陰鄕侯陰識는 貴人의 오라비였다. 軍功이 있으므로 더 봉해 주려 하자, 陰識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기를 “신은 掖庭에 친족을 의탁하고 있으니,【掖庭은 宮苑 가운데를 이른다.】 그대로 爵邑을 가한다면 이것을 천하에 보여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後漢書 陰識傳》에 나옴 -

○ 故事에 尙書郞을 以令史久次로 補之러니 帝始用孝廉하야 爲尙書郞하다

○ 故事(국가의 前例)에 尙書郎을 令史(書記) 중에 오래 근무한 차례에 따라 補任하였는데, 황제가 처음으로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을 등용하여 尙書郞으로 삼았다.

○ 起高廟於洛陽하야 四時에 合祭高祖, 太宗, 世宗하고 建社稷于宗廟之右하고 立郊兆於城南【制郊兆於雒陽城南七里호되 爲〈圓〉壇八陛하고 中又爲重壇하야 天地位皆在壇上하고 其外壇上에 爲五帝位하니 靑帝位在甲寅하고 赤帝位在丙巳하고 黃帝位在丁未하고 白帝位在庚申하고 黑帝位在壬亥하며 其外爲壝하고 重營〈皆紫〉하야 〈以〉像紫宮하고 有四通道하야 以爲門이라 日月은 在營內南道하니 日在東, 月在西요 北斗在北道之西라 外營, 中營에 凡千五百一十四神이니 高皇帝配食焉하니라】하다

高廟를 洛陽에 건립하여 四時에 高祖, 太宗(文帝), 世宗(武帝)을 합하여 제사하고, 社稷을 宗廟의 오른쪽에 세우고 郊兆를 城의 남쪽에 세웠다.【郊兆를 雒陽城 남쪽 7리 되는 곳에 세우되 8층의 등근 壇을 만들고 둥근 단 가운데에 또다시 작은 壇을 二重으로 만들어서, 하늘과 땅의 자리가 모두 작은 壇 위에 있고 그 바깥의 큰 壇 위에 五帝의 자리를 만드니, 靑帝의 자리는 甲寅方에 있고 赤帝의 자리는 丙巳方에 있고 黃帝의 자리는 丁未方에 있고 白帝의 자리는 庚申方에 있고 黑帝의 자리는 壬亥方에 있으며, 큰 단 밖에 담을 치고 中營과 外營의 두 營은 모두 자주색으로 하여 하늘의 紫微宮을 형상하고, 네 개의 통로가 있어서 문을 만들었다. 해와 달은 營 안의 남쪽 길에 있으니, 해는 동쪽에 있고 달은 서쪽에 있으며 北斗星이 北道의 서쪽에 있었다. 外營과 中營에 모두 1,514개의 神이 있으니 高皇帝를 배향하였다.】

○ 長安城中이 糧盡하니 赤眉縱火殺掠하고 遂入安定, 北地하다 〈出盆子傳〉

○ 長安城 안에 양식이 떨어지니, 赤眉가 불을 놓아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고는 마침내 安定과 北地로 들어갔다. - 《後漢書 劉盆子傳》에 나옴-

鄧禹引兵南至長安하야 軍昆明池하야 謁高廟하고 收十一帝【高, 惠, 文, 景, 武, 昭, 宣, 元, 成, 哀, 平也라】神主하야 送詣洛陽하고 因巡行園陵【行은 去聲이니 巡視也라 帝王所葬曰陵이요 栽植草木處를 謂之園이라】하야 爲置吏士하고 奉守焉하다 〈出禹傳〉

鄧禹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長安에 이르러서 昆明池에 군대를 주둔시킨 다음 高廟를 배알하고, 11명의 皇帝【11명의 皇帝는 高帝‧惠帝‧文帝‧景帝‧武帝‧昭帝‧宣帝‧元帝‧成帝‧哀帝‧平帝이다.】의 神主를 거두어 洛陽으로 보내었다. 인하여 園陵(帝王의 무덤)을 순행하여【行은 去聲이니 巡視하는 것이다. 帝王을 장례한 곳을 陵이라 하고, 草木을 심은 곳을 園이라고 이른다.】 관리와 군사를 두고 받들어 지키게 하였다.-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 以宋弘爲大司空하다 湖陽公主【帝姊也라】新寡러니 帝與共論朝臣하야 微觀其意한대 主曰 宋公의 威容德器는 群臣莫及【弘薦桓譚하야 爲議郞한대 譚善鼓琴하니 帝聞而悅之이어늘 不悅하고 後에 坐府中하야 召譚讓之하다 明日에 大會群臣하고 使譚鼔琴할새 譚見하고 失其常度어늘 帝怪而問之하니 弘直讓之라 故로 群臣莫能及矣라하니라】이러이다 帝曰 方且圖之호리라 後에 이 被引見에 帝令主坐屛風後하고 因謂曰 諺에 言貴易交요 富易妻라하니 人情乎아 曰 臣은 聞貧賤之知는 不可忘이요 糟糠之妻는 不下堂이라하니이다 帝顧謂主曰 事不諧矣로다 〈出本傳〉

宋弘을 大司空으로 삼았다. 湖陽公主【光武帝의 누이이다.】가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가 공주와 함께 조정의 신하들을 논하여 은근히 그녀의 뜻을 관찰하려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宋公의 위엄 있는 용모와 덕스러운 도량은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못합니다.【宋弘이 桓譚을 천거하여 議郞에 임명하였는데 桓譚이 거문고를 잘 타니 황제가 듣고서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宋弘은 기뻐하지 않았으며, 그 후 宋弘이 府中에 앉아 桓譚을 불러 〈오게 하여〉 꾸짖었다. 다음 날 황제가 신하들을 크게 모아놓고 桓譚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자, 桓譚이 宋弘을 보고는 어찌할 줄 모르므로 황제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으니, 宋弘이 곧은 말로 꾸짖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장차 도모해 보겠다.” 하였다. 뒤에 宋弘이 인견을 당할 적에 황제가 공주로 하여금 병풍 뒤에 앉아 있게 하고, 인하여 宋弘에게 이르기를 “속담에 ‘귀해지면 사귀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으니, 이것이 人情인가?” 하니, 宋弘이 대답하기를 “신은 들으니 ‘빈천할 때 알았던 친구는 잊을 수 없고, 술지게미와 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 아내는 堂을 내려가게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공주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겠다.” 하였다.- 《後漢書 宋弘傳》에 나옴 -

○ 帝之討王郞也에 彭寵이 發突騎하야 以助軍하고 轉糧食하야 前後不絶이라 自負其功이러니 帝接之에 不能滿其意하니 以此로 懷不平하야 遂發兵反하야 攻朱浮於薊【光武拜浮幽州牧이러니 漁陽太守彭寵이 不從其令하고 頗有不平이라 浮奏之하니 寵聞攻之라】하다

○ 황제가 王郞을 토벌할 때에 彭寵이 突騎(돌격 기병)를 징발하여 군대를 도왔으며 양식을 수송하여 전후로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므로 그 공로를 自負하였는데, 황제가 그를 대하는 것이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자, 이 때문에 불평하는 마음을 품고서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여朱浮를 薊에서 공격하였다.【光武帝가 朱浮를 幽州牧에 임명하였는데, 漁陽太守 彭寵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다. 朱浮가 이를 아뢰자, 彭寵이 그 말을 듣고 朱浮를 공격하였다.】

更始諸大將이 時在南方하야 未降者尙多라 遣賈復하야 擊郾破之하니 尹尊이 降하고 吳漢이 擊宛하니 宛王賜【賜奉更始妻子來降하니 帝封愼侯라】하다

更始의 여러 대장이 이때 南方에 있어서 항복하지 않은 자가 아직 많았다. 賈復을 보내어 郾을 공격하여 격파하니尹尊이 항복하였고, 吳漢이 宛을 공격하니 宛王劉賜가 항복하였다.【宛王 劉賜가 更始의 妻子를 받들고 와서 항복하니, 황제가 그를 愼侯에 봉하였다.】

○ 秋에 賈復이 南擊召陵, 新息하야 平之하다 의 部將이 殺人於潁川이어늘 潁川太守寇恂이 捕得繫獄하다 時尙草創하야 軍營犯法을 率多相容호되 이 戮之於市하다 以爲恥하야 過潁川할새 謂左右曰 吾與寇恂으로 竝列將帥어늘 而爲其所陷하니 今見이면 必手劍之하리라 이 知其謀하고 不與相見이어늘 姊子谷崇은 將也라 得帶劍侍側이라가 卒有變이면 足以相當하리이다 曰 不然하다 昔에 藺相如不畏秦王而屈於廉頗者는 爲國也라하고 乃勅屬縣하야 盛供具, 儲酒醪라가 執金吾【時復爲執金吾라하니 本中尉兵으로 屬北軍이어늘 武帝更名爲執金吾라 吾는 禦也니 執金革以禦非常也라】軍이 入界어든 一人을 皆兼兩人之饌하라하고 이 出迎於道라가 稱疾而還하다 이 勒兵欲追之호되 而吏士皆醉라 遂過去하다 이 遣谷崇하야 以狀聞한대 帝乃徵하니 至引見할새 時에 賈復이 先在坐라가 欲起相避어늘 帝曰 天下未定에 兩虎安得私鬪리오 今日에 朕이 分之호리라 於是에 竝坐極歡하고 遂共車同出하야 結友而去하다 〈出寇恂傳〉

[新增]胡氏曰 議者或以之事로 擬諸하니 之釁은 先起於하니 釁은 爭端也라 相如降心에 頗卽引罪하니 此所以爲賢也라 賈復이 不戢部將【戢은 斂也, 止也니 訓勅戒也라】하야 殺人他境이어늘 寇恂戮之하니 天下之惡一也라 使復明達이면 必且謝過어늘 乃更蓄憤하야 欲手刃之하고 逮至帝前하야도 忿猶未解하야 殊無責己訓勅不嚴之意어늘 待以禮而避其鋒하니 則得矣어니와 이 豈可與廉將軍班乎아 帝當先以曲直曉之하야 使慚謝然後에 開宣慰勉하야 聽其自釋이면 則尤善矣리라

○ 가을에 賈復이 남쪽으로 召陵과 新息을 공격하여평정하였다. 賈復의 部將이 潁川에서 사람을 죽이자, 潁川太守寇恂이 체포하여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때는 아직 초창기여서 軍營에서 법을 범한 자들을 대부분 서로 용납해 주었으나 寇恂이 그 部將을 시장에서 죽였다. 賈復은 이를 수치로 여겨 潁川을 지날 때에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寇恂과 똑같이 장수의 대열에 있는데 그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이제 寇恂을 보면 반드시 내 손으로 劍을 사용하여 직접 그를 죽이겠다.” 하였다. 寇恂이 이 계책을 알고는 서로 만나 보려 하지 않자, 누이의 아들谷崇이 말하기를 “저는 장수입니다. 검을 차고 곁에서 모시다가 갑작스럽게 변고가 생기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寇恂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 藺相如秦王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廉頗에게 굽혔던 것은 국가를 위해서였다.” 하였다.

마침내 屬縣에 명하여 군사들에게 먹일 음식을 성대히 장만하고 술과 막걸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執金吾(賈復)【이때에 賈復이 執金吾로 있었으니, 본래 中尉兵으로 北軍에 속하였는데, 武帝가 이름을 고쳐 執金吾라 하였다. 吾는 막는 것이니, 金革(병기)을 잡고서 비상시를 대비하는 것이다.】의 군대가 경내에 들어오거든 한 사람마다 모두 두 사람 분의 음식을 겸하여 주라고 하고는, 寇恂이 나가 길에서 맞이하다가 병을 칭탁하고 돌아왔다. 賈復이 군대를 무장하고 추격하려 하였으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취했으므로 마침내 그대로 지나갔다.

寇恂谷崇을 보내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황제가 마침내 寇恂을 부르니, 寇恂이 조정에 이르러 인견할 때에 賈復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서 서로 피하려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두 마리 범이 어찌 사사로이 싸운단 말인가. 금일에 朕이 이것을 풀어주겠다.” 하고는 이에 함께 앉아서 지극히 즐거워하고 마침내 함께 수레를 타고 나와서 친구를 맺고 떠났다.- 《後漢書 寇恂傳》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은 혹 賈復寇恂의 일을 가지고 廉頗藺相如에게 비하는데 藺相如의 틈은 먼저 廉頗에게서 일어났으니 틈은 다투는 단서이다. 藺相如가 마음을 낮추자 廉頗가 즉시 죄를 자기 몸에 돌렸으니 이 때문에 어진 것이다. 賈復이 部將을 단속하지 못해서【戢은 거두고 그치는 것이니, 타일러서 경계하는 것이다.】 딴 境內에서 사람을 죽였으므로 寇恂이 그를 죽였으니, 천하 사람의 증오함이 똑같은 것이다. 만약 賈復이 밝고 통달했다면 반드시 장차 사과하였을 터인데 도리어 다시 분한 마음을 쌓아서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이고자 하였고, 황제의 앞에 이르러서도 분이 오히려 풀리지 않아서 부하를 엄하게 훈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할 뜻이 전혀 없었는데, 寇恂은 禮로써 대우하고 그 칼날을 피하였으니, 寇恂은 잘했지만 賈復은 어찌 廉將軍과 똑같이 놓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먼저 잘잘못을 가지고 타일러서 賈復으로 하여금 부끄러워하여 사죄하게 한 뒤에 열어 타일러서 위로하고 권면하여 스스로 풀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鄧禹馮愔【愔은 禹之部將也라 攻上郡時에 馮愔宗歆守栒邑이러니 爭權相攻하야 遂殺하고 因反擊하니 帝聞之하고 使之親人黃防送之하야 縛而歸하니라】後로 威名이 稍損하고 又乏糧食하야 戰數不利하니 歸附者日益離散이러라 〈出禹傳〉赤眉暴亂三輔하고 郡縣大姓이 各擁兵衆하니 不能定이라 帝乃遣偏將軍馮異하야 代討之할새 車駕送至河南하야 勅曰 三輔遭王莽, 更始之亂하고 重以赤眉, 延岑之酷하야 元元塗炭【元者는 善人也니 元元者는 非一人也라 民이 陷於塗하고 爇於炭이라】하야 無所依訴라 將軍이 今奉辭하야 討諸不軌營堡하니 降者는 遣其渠帥하야 詣京師하고 散其小民하야 令就農桑하고 壞其營壁하야 無使復聚하라 征伐은 非必略地屠城이라 要在平定安集之耳니 諸將이 非不健鬪나 然好虜掠이라 卿은 本能御吏士하니 念自修勅하야 無爲郡縣所苦하라 異頓首受命하고 引而西하야 所至에 布威信하니 群盜多降이러라 〈出馮異傳〉

鄧禹馮愔이 배반【馮愔은 鄧禹의 部將이다. 鄧禹가 上郡을 공격할 때에 馮愔과 宗歆이 栒邑을 지키고 있었는데 권세를 다투어 서로 공격하여 馮愔이 마침내 宗歆을 죽이고는 배반하여 鄧禹를 공격하니, 황제가 이 말을 듣고 馮愔의 친구인 黃防을 보내어 포박하여 돌아오게 하였다.】한 뒤로부터 위엄과 명망이 차츰 떨어지고 또 양식이 부족하여 싸움에서 자주 승리하지 못하니, 歸附했던 자들이 날로 더욱 이산하였다. -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赤眉가 三輔 지방에서 포악한 짓을 하고 어지럽히며 郡縣의 큰 姓氏들이 각기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鄧禹가 평정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이에 偏將軍(副將軍)馮異를 보내 鄧禹를 대신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할 때에 車駕가 친히 전송하여 河南에 이르러 馮異에게 칙명하기를 “三輔 지방은 王莽更始의 난리를 만나고 赤眉延岑의 혹독함까지 겹쳐서 善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元은 善한 사람이니, 元元은 한 사람이 아니다. 塗炭은 백성들이 진흙에 빠지고 숯불에 타는 것이다.】 의지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다. 장군이 이제 황제의 辭命을 받들어 법을 따르지 않는 營堡들을 토벌하니, 항복하는 자들은 그 추장을 보내어 京師에 오게 하고, 백성들을 해산하여 농사짓고 뽕나무를 가꾸게 하며 그 營壁을 파괴해서 다시 모이지 않게 하라. 征伐은 굳이 땅을 經略하고 城을 屠戮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점이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데에 있을 뿐이니, 諸將들이 용감히 싸우지 않는 것은 아니나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卿은 본래 관리와 군사들을 잘 제어하니, 생각건대 스스로 닦고 신칙하여 郡縣들이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馮異가 머리를 조아리고 명령을 받고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이르는 곳마다 위엄과 신의를 베푸니, 여러 도적들이 대부분 항복하였다.- 《後漢書 馮異傳》에 나옴 -

溫公曰 昔에 周人武王之德曰 鋪時繹思하야 我徂惟求定【周頌賚篇注에 敷는 布요 時는 是也라 布此文王功德之在人而可繹思者하여 以賚有功하여 而往求天下之安定이라하니라】이라하니 言王者之志가 在布陳威德安民而已라 觀光武所以取關中하면 用是道也니 豈不美哉아

溫公이 말하였다.

“옛날에 周나라 사람이 武王의 德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이 백성들이 생각하는 文王의 功德을 펴서 내가 가서 천하를 안정시키기를 구한다.’【≪詩經≫ 〈周頌 賚篇〉 注에 “敷는 폄이요, 時는 이것이다. 이 文王의 功德이 사람에게 남아 있어 찾아 생각하는 것을 펴서 功이 있는 이에게 주어 가서 天下의 안정을 구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으니, 王者의 뜻은 위엄과 덕을 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에 있을 뿐임을 말한 것이다. 光武帝가 關中을 취한 것을 보면 이 道를 사용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又詔徵鄧禹還曰 愼毋與窮寇爭鋒하라 〈本傳에 無此句라〉赤眉無穀하니 自當來라 吾以飽待飢하며 以逸待勞하야 折箠笞之하리니 非諸將憂也라 無得復妄進兵하라 〈出鄧禹傳〉

또 詔書를 내려 鄧禹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말하기를 “조심하여 궁지에 몰린 賊과 銳鋒을 다투지 말라. - 《後漢書 鄧禹傳》에는 이 句가 없다.- 赤眉는 곡식이 없으니 저절로 항복해 올 것이다. 우리는 배불리 먹으면서 적이 굶주리기를 기다리고, 편안하게 있으면서 적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다가 회초리를 꺾어 때리면 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다시는 함부로 군대를 진격시키지 말라.” 하였다.-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丁亥]三年

[丁亥]三年이라

立四親廟【祀父南頓君以上하야 至舂陵節侯라 景帝子長沙定王發이 生舂陵節侯買하고 買生鬱林太守處하고 處生鉅鹿都尉回하고 回生南頓令欽하고 欽生光武하니라】於雒陽【雒本作洛하니 成周洛陽也라 在澗水東하니 漢河南郡(寓)[屬]縣이라 (漁)[魚]豢云 光武以漢火行忌水라 故去水加隹라 自光武後로 改爲雒字하니 其地在成皐西宛縣北하니라】하다

建武 3년(정해 27)

四親의 사당【四親의 사당은 光武帝의 아버지인 南頓君 이상을 제사하여 舂陵節侯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景帝의 아들인 長沙定王 發이 舂陵節侯 買를 낳았고, 買가 鬱林太守 處를 낳았고, 處가 鉅鹿都尉 回를 낳았고, 回가 南頓令 欽을 낳았고, 欽이 光武帝를 낳았다.】을 雒陽【雒은 본래 洛으로 썼으니, 成周의 洛陽이다. 澗水의 동쪽에 있으니, 漢나라 河南郡에 속한 縣이다. 魚豢의 ≪魏略≫에 이르기를 “光武帝가 漢나라는 火行(火德)이어서 水를 꺼리므로 洛字에 水를 버리고 隹를 가했다.” 하였다. 光武帝 이후로 雒字로 고쳤으니, 그 지역이 成皐의 서쪽, 宛縣의 북쪽에 있다.】에 세웠다.

馮異赤眉로 約期會戰할새 使壯士變服하야 與赤眉同하고 伏於道側하다 旦日에 赤眉使萬人으로 攻前部어늘 少出兵以救之한대 賊見勢弱하고 遂悉衆攻異어늘 乃縱兵大戰이러니 日昃에 賊氣旣衰하고 伏兵이 卒(猝)起하야 衣服이 相亂이라 赤眉不復識別하야 衆遂驚潰어늘 追擊大破之於殽底【殽는 通作崤하니 山名也니 今陜縣東二崤 是也라 底는 下也라 括地志에 洛州永寧西北二十里가 古殽道也라 杜預曰 在弘農澠池縣西하니라】하야 降男女八萬人하다 帝降璽書勞異曰 始雖垂翅回谿【翅는 翼也라 回谿는 在澠池之北하니 俗名回坑이라】나 終能奮翼澠池하니 可謂失之東隅【隅는 陬也니 東隅는 日出處也라】요 收之桑楡【木名이라 王氏曰 前書에 谷永曰 太白出西方六十하면 日法當參入이어늘 今已過期로되 尙在桑楡之間이라한대 註에 桑楡는 謂晩也라 或云 日入處也라 淮南子曰 西日垂하야 景在樹端을 謂之桑楡라】로다 方論功賞하야 以答大勳하리라 赤眉餘衆이 東向宜陽이어늘 帝親勒六軍하야 嚴陳(陣)以待之러니 赤眉忽遇大軍에 驚震不知所謂(爲)하야 乃遣劉恭하야 乞降曰 盆子將百萬衆降하리니 陛下將何以待之잇고 帝曰 待汝以不死耳니라 盆子及丞相徐宣以下三十餘人이 肉袒降하고 上所得傳國璽綬【王氏曰 璽는 王者印也요 綬는 帶也니 所以繫璽라 黃赤綬四采요 武都紫泥封하고 盛以靑囊白素裹호되 兩端無縫하고 尺一版中約署라 衛宏云 秦以前엔 以金銀爲方寸璽러니 秦得和氏璧하고 乃以玉爲之하니 螭獸(組)[紐]요 在六璽之外라 李斯書其文曰 受命于天 旣壽永昌이라하고 號曰傳國璽라하다 漢高定三秦에 子嬰獻之러니 後王莽簒逆하고 就元后取之하다 莽敗에 王憲得之러니 李松入長安하야 斬憲取璽하고 送上更始하며 更始奉赤眉하고 赤眉立劉盆子러니 盆子奉上光武하다 後에 董卓作亂한대 掌璽者投諸井이러니 孫堅入洛하야 討卓軍於城南할새 見井中有五色光하고 堅乃浚井得璽하다 袁術僭逆하야 乃拘堅妻奪之러니 時에 徐璆被徵하고 詣京師라가 道爲術所刦하다 後術死에 璆得璽하야 還以上獻帝하고 曹氏取之漢이러니 後以奉于晉하다 前趙劉聰이 使劉曜入洛陽하야 執晉懷하고 取璽하야 詣平陽하고 後爲石勒所幷(倂)하야 璽乃屬勒하다 勒爲冉閔所滅하고 璽屬閔이러니 閔敗에 璽存閔大將軍蔣幹하다 幹求救於晉謝尙하니 時에 尙使戴施로 據杭頭라 遂入鄴하야 助守給幹하고 得璽러니 以晉穆帝永和八年에 還建康하니라】하고 積兵甲宜陽城西하니 與熊耳山齊라 赤眉衆이 尙十餘萬人이어늘 帝令縣廚【縣은 宜陽縣이니 縣有廚官也라】하야 皆賜食하다

馮異赤眉와 期日을 약속하고 會戰할 때에 壯士들로 하여금 赤眉와 똑같이 變服하고 길가에 매복하게 하였다. 아침에 赤眉가 1만 명으로 하여금 馮異의 先鋒 부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馮異가 병력을 조금 내보내 구원하자, 賊은 馮異의 軍勢가 약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무리들을 다 동원하여 馮異를 공격하였다. 馮異가 이에 군대를 풀어 크게 싸웠는데, 해가 기울자 賊의 기운이 이미 쇠하였고, 馮異가 매복해 놓은 군사들이 갑자기 일어나니, 의복이 서로 비슷하여 혼란하였다. 赤眉가 다시 彼我를 식별하지 못하여 무리들이 마침내 놀라 潰走하였는데, 추격하여 殽山 아래【殽는 崤와 통하니, 山 이름으로 지금의 陜縣 동쪽의 두 崤山이 이곳이다. 底는 아래이다. ≪括地志≫에 “洛州 永寧縣 서북쪽 20리 지점이 옛날 殽道이다.” 하였다. 杜預가 말하기를 “殽山은 弘農의 澠池縣 서쪽에 있다.” 하였다.】에서 크게 격파하여 남녀 8만 명을 항복시켰다.

황제가 璽書(옥새가 찍힌 친서)를 내려 馮異를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回谿에서 날개를 펴지 못하였으나(失意하였으나)【翅는 날개이다. 回谿는 澠池의 북쪽에 있으니, 세속에서는 回坑이라 한다.】 끝에는 澠池에서 나래를 떨쳤으니(得意하였으니), 東隅【隅는 모퉁이이니, 東隅는 해가 뜨는 곳이다.】에서는 잃고 桑楡【桑(뽕나무)과 楡(느릅나무)는 나무 이름이다. 王氏가 말하였다. “≪漢書≫에 谷永이 이르기를 ‘太白星이 西方에서 60도를 나오면 해가 마땅히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이미 시기가 지났으나 아직도 桑楡의 사이에 있다.’ 하였는데, 註에 ‘桑楡는 늦음을 이른다.’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해가 들어가는 곳이다.’ 하였다. ≪淮南子≫에 이르기를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그림자가 나무 끝에 있는 것을 桑楡라 이른다.’ 하였다.”】에서 거두었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功을 논하여 賞을 내려서 큰 공로에 보답하겠다.” 하였다.

赤眉의 잔당들이 동쪽으로 宜陽을 향하자, 황제가 친히 六軍을 무장시켜 엄하게 陣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赤眉는 갑자기 황제의 大軍을 만나자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마침내 劉恭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기를 “劉盆子가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우해 주시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너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대우하겠다.” 하니, 劉盆子와 승상徐宣 이하 30여 명이 웃통을 벗어 항복하고, 노획한 傳國璽와 인끈【王氏가 말하였다. “璽는 王者의 印이고, 綬는 띠(끈)이니 옥새를 매는 것이다. 黃赤色 끈으로 네 가지 채색을 하고 武都의 붉은 인주로 봉함한 다음 흰 비단으로 안감을 댄 푸른 주머니에 넣되 양끝을 꿰매지 않고 한 자쯤 되는 판자 가운데에 글을 새겼다. 衛宏이 말하기를 ‘秦나라 이전에는 金과 銀으로 사방 한 치 크기의 옥새를 만들었는데 秦나라가 和氏璧을 얻고는 마침내 玉으로 만드니, 끈에 용과 짐승 모양이 서려 있으며 여섯 옥새 이외에 따로 있었다.’ 하였다. 李斯가 그 글을 쓰기를 ‘受命于天 旣壽永昌[하늘에서 천명을 받아 이미 장수하고 길이 창성하다.]’ 하고는 이름하기를 傳國璽라 하였다. 漢高祖가 三秦을 평정할 때에 子嬰이 이것을 바쳤는데, 뒤에 王莽이 찬탈하고서 元后에게서 가져갔다. 王莽이 패망하자 王憲이 이것을 얻었는데 李松이 長安으로 들어가 王憲을 목 베고 옥새를 취하여 更始에게 보내어 올렸으며, 更始가 赤眉에게 받들어 올리고 赤眉가 劉盆子를 세웠는데 劉盆子가 光武帝에게 받들어 올렸다. 뒤에 董卓이 난을 일으키자 옥새를 관장하는 자가 우물 속에 던져 넣었는데, 孫堅이 洛陽에 들어가서 도성 남쪽에서 董卓의 군대를 토벌할 때에 우물 속에서 五色의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는 孫堅이 마침내 우물을 치워 옥새를 얻었다. 袁術이 참람하여 반역을 하고는 마침내 孫堅의 아내를 구류하고 옥새를 빼앗았는데, 이때 徐璆가 天子의 부름을 받고 京師로 가다가 길에서 袁術에게 협박당하여 袁術에게 귀의하였다. 뒤에 袁術이 죽자 徐璆가 옥새를 얻어 다시 獻帝에게 올렸고, 曹氏(曹丕)가 이것을 漢나라에서 취하였는데, 뒤에 이것을 晉나라에 받들어 올렸다. 前趙의 劉聰이 劉曜로 하여금 洛陽에 들어가 晉나라 懷帝를 사로잡고 옥새를 취하여 平陽으로 가져갔으며, 뒤에 石勒에게 합병당하여 옥새가 마침내 石勒에게 귀속되었다. 石勒이 冉閔에게 멸망당하고 옥새가 冉閔에게 귀속되었는데, 冉閔이 패하자 옥새가 冉閔의 大將軍 蔣幹에게 보관되었다. 蔣幹이 晉나라 謝尙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때 謝尙이 戴施로 하여금 杭頭를 점거하게 하였다. 마침내 鄴城에 들어가 蔣幹을 도와주고 옥새를 얻었는데, 晉나라 穆帝 永和 8년에 建康으로 돌아왔다.”】을 올리며 병기와 갑옷을 宜陽城 서쪽에 쌓아 놓으니, 높이가 熊耳山과 똑같았다. 赤眉의 무리가 아직도 10여만 명이었는데, 황제가 宜陽縣의 廚官으로 하여금【縣은 宜陽縣이니, 縣에 廚官이 있다.】 모두 음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 初에 梁王劉永【文帝子梁孝王武八世孫이라】이 據國起兵하야 以董憲, 張步로 爲將軍하고 專據東方하야 稱帝睢陽하고 復立齊王이러니 帝方北憂漁陽하고 南事梁, 楚라 故로 步得專集齊地하야 據郡十二焉하다

○ 처음에 梁王 劉永【劉永은 文帝의 아들 梁孝王 武의 8세손이다.】이 나라를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켜 董憲張步를 장군으로 삼고 東方을 독차지하여 睢陽城에서 황제라 칭하고, 다시 張步를 세워 齊王으로 삼았다. 황제가 이때 막 북쪽으로 漁陽을 근심하고 남쪽으로 梁과 楚를 정벌하였기 때문에 張步가 齊나라 땅을 독차지하여 12개 郡을 점거할 수 있었다.

○ 涿郡太守張豐이 反하야 與彭寵連兵하다 時에 關中衆寇猶盛이라 馮異且戰且行하야 屯兵上林苑中하야 以擊豪傑不從令者하니 威行關中이러라

○ 涿郡太守張豐이 배반하여彭寵과 군대를 연합하였다. 이때 關中의 여러 도둑들이 아직 성하였으므로, 馮異가 한편으로는 전투를 하고 한편으로는 행군을 하여 上林苑 가운데에 군대를 주둔하고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호걸들을 공격하니, 위엄이 關中 지방에 행해졌다.

蓋延이 圍睢陽하야 斬劉永한대 蘇茂奔垂惠하야 共立하야 爲梁王하다

蓋延睢陽城을 포위하여劉永을 목 베자, 蘇茂가 垂惠로 달아나 〈周建 등과〉 함께 劉永의 아들를 세워서 梁王으로 삼았다.

耿弇이 從容言於帝하야 自請北收上谷兵하야 定彭寵於漁陽하고 取張豐於涿郡하고 還收富平, 獲索하고 東攻張步하야 以平齊地한대 帝壯其意하야 許之하다

[新增]養心吳氏曰 此事는 與韓信請益兵事同이니라

耿弇이 조용히 황제에게 말하여 북쪽으로 上谷의 군대를 수습하여 彭寵을 漁陽에서 평정하고 張豐을 涿郡에서 취하고, 돌아와 富平과 獲索을 거두고 동쪽으로 張步를 공격해서 齊나라 땅을 평정할 것을 자청하자, 황제가 그의 뜻을 장하게 여겨서 이를 허락하였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이 일은 韓信이 병력을 증가해 줄 것을 요청한 일과 똑같다.”

[戊子]四年

[戊子]四年이라

吳漢, 王梁이 擊破五校於臨平하다

建武 4년(무자 28)

吳漢王梁五校를 臨平에서 격파하였다.

耿弇, 祭遵等이 討張豐於涿郡하야 禽(擒)之하다

耿弇祭遵 등이 張豐을 涿郡에서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王莽末에 天下亂이어늘 臨淮大尹侯霸 獨能保全其郡이러니 帝徵會壽春하야 拜尙書令하다 時에 朝廷에 無故典하고 又少舊臣이라 明習故事하야 收錄遺文하야 條奏前世善政法度하야 施行之하다 〈出霸傳〉

王莽 말엽에 천하가 혼란하였는데, 臨淮大尹侯霸가 홀로 그 고을을 보전하니, 황제가 侯霸를 불러 壽春에서 만나 尙書令을 제수하였다. 이때 조정에는 옛 典籍이 없고 또 옛 신하가 적었다. 侯霸가 故事를 밝게 익혀 遺文을 수록해서 前代의 좋은 정사와 법도를 조목조목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後漢書 王霸傳》에 나옴 -

更始之末에 公孫述이 卽皇帝位於成都하다 隗囂使馬援으로 往觀述한대 이 素與述同里閈相善【閈은 閭也니 里門曰閈이라 蓋援, 述이 皆扶風茂陵人故云이라】이라 以爲旣至에 當握手歡如平生이러니 而述이 盛陳陛衛【於階陛間에 大布兵衛也라】하고 以延援入하야 交拜禮畢에 使出就館하고 更爲援하야 製都布單衣【都는 一作答하니 答布는 白疊布也니 出安子國이라 單衣는 若朝服中單也라】, 交讓冠【謂賓主相見禮之冠이라】하고 會百僚於宗廟中하고 立舊交之位하다 이 鸞旗【編羽毛하야 列繫幢傍하고 載於車上을 謂之鸞旗니 駕出則陳於道而先行이라】旄騎【旄頭之騎也라】로 警蹕【所警者는 戒肅也요 蹕은 止行人也라[頭註]天子出則稱警하니 示戒肅也요 入則言蹕하니 所以止行人淸道也라 言出入者는 互文耳라】就車하야 磬折【謂人曲體揖之를 若磬之形也라 按磬은 一片黑石이니 縣(懸)在虡上하여 擊之라 其形中曲하야 垂兩頭하니 言人要(腰)側似也라】而入하니 禮饗官屬이 甚盛이러라 欲授援以封侯大將軍位하니 賓客이 皆樂留어늘 이 曉之曰 天下雌雄이 未定이어늘 公孫이 不吐哺走迎國士【按魯世家에 周公戒伯禽曰 我嘗一沐三握髮하고 一飯三吐哺하야 起以待士로되 猶恐失天下之賢人이라하니라】하야 與圖成敗하고 反修飾邊幅【王氏曰 邊은 畔也니 田有界畔이라 布帛廣曰幅이니 修飾者 若布帛之修整邊幅也라】하야 如偶人形하니 此子何足久稽天下士乎아하고 因辭歸하야 謂子陽은 井底蛙【蛙는 水蟲이니 形似蝦蟆하니 言如蛙坐井中하야 所見者小也라】耳라 而妄自尊大하니 不如專意東方이니이다 乃使하야 奉書洛陽하니 이 初到에 帝在宣德殿南廡下하야 但幘【廡는 堂下周屋也라 髮有巾曰幘이라】坐迎이라 笑謂曰 卿이 遨遊二帝間하니 今見卿에 使人大慙【言自慙德薄而稱帝也라】이로다 이 頓首辭謝하고 因曰 當今之世에 非但君擇臣이라 臣亦擇君耳니이다 臣與公孫述同縣하야 少相善이라 臣前至蜀에 述陛戟【謂陳列棨戟於階陛之下하야 以爲儀衛라】而後에 進臣하더니 臣今遠來어늘 陛下何知非刺客姦人而簡易若是잇고 帝復笑曰 卿非刺客이라 顧說客耳로다 曰 天下에 反復盜名字者【盜名字는 謂僭竊名號하야 稱帝稱王也라】를 不可勝數러니 今見陛下호니 恢廓大度 同符高祖라 乃知帝王이 自有眞也로소이다 〈馬援傳〉

更始 말년에 公孫述이 成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隗囂馬援으로 하여금 가서 公孫述을 만나 보게 하였는데, 馬援은 평소 公孫述과 한 마을 사람으로 서로 친하였다.【閈은 마을이니, 마을의 문을 閈이라 한다. 馬援과 公孫述이 모두 扶風縣 茂陵 사람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馬援은 자신이 찾아가면 손을 잡고 평소처럼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公孫述이 뜰에 호위병을 진열하고【뜰에 호위병을 많이 세운 것이다.】馬援을 맞이하여 들어오게 해서 交拜禮를 마친 다음 나가서 館舍에 있게 하고, 다시 馬援을 위해서 都布單衣【都는 어떤 本에는 答으로 되어 있으니, 答布는 白疊布이니 安子國에서 나온다. 單衣는 朝服의 中單과 같은 것이다.】와 交讓冠【交讓冠은 賓主間에 禮로 서로 만나 볼 때에 쓰는 관을 이른다.】을 만들어 착용시키고 百官들을 종묘 가운데 모아놓고서 옛날 사귀던 친구의 자리를 세우게 하였다. 公孫述이 鸞旗【깃털과 털을 엮어서 깃발 옆에 나열하여 매달고 수레 위에 싣고 다니는 것을 鸞旗라 하니, 車駕가 출행하면 길에 늘어놓아 앞서 간다.】와 旄騎【旄騎는 旄頭의 騎兵이다.】로 警蹕(辟除)【[釋義]警은 경계하고 엄숙히 하는 것이고, 蹕은 行人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頭註]天子가 나갈 때에는 警이라고 칭하니 경계하고 엄숙히 함을 보이는 것이요, 들어올 때에는 蹕이라고 하니 行人을 멈추게 하여 길을 치우는 것이다. 出入이라고 말한 것은 互文이다.】을 하고 수레에 올라 경쇠 모양처럼 허리를 굽혀 揖을 하고【磬折은 사람이 몸을 굽혀 읍하기를 石磬의 모양과 같이 함을 이른다. 磬은 한 조각의 검은 돌이니, 이것을 종틀 위에 매달아 두드린다. 그 모양이 중간이 구부러져서 양끝이 아래를 향하니, 사람이 허리를 굽힌 모양이 이와 비슷함을 말한 것이다.】 들어오니 禮로 연향함과 官屬들이 매우 성대하였다. 馬援을 侯에 봉하고 大將軍의 지위를 제수하려 하니, 빈객들은 모두 머무는 것을 좋아하였다. 馬援이 그들을 깨우치기를 “천하가 아직 雌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公孫이 먹던 밥을 뱉고 달려가 國士를 맞이해서【살펴보건대 ≪史記≫ 〈魯世家〉에 “周公이 아들 伯禽에게 경계하기를 ‘〈식사할 때나 머리 감을 때에 선비가 찾아오면〉 나는 일찍이 한 번 머리 감을 때에도 세 번 감던 머리를 거머쥐고, 한 번 밥을 먹을 때에도 세 번 먹던 밥을 뱉고 일어나서 선비를 영접하면서도 행여 천하 賢人들의 마음을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했다.” 하였다.】 함께 成敗를 도모하지 않고, 도리어 邊幅(위의와 용모)을 수식하여【王氏가 말하였다. “邊은 밭두둑이니, 밭에는 경계에 두둑이 있다. 布帛의 너비를 幅이라 하니, 외면을 修飾하는 것이 布帛의 邊幅(올이 풀리지 않게 짠 가장자리 부분)을 정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허수아비 인형과 같으니, 이 사람이 어찌 천하의 선비를 오랫동안 머물게 하겠는가.” 하고는, 인하여 하직하고 돌아가서 隗囂에게 이르기를 “子陽(公孫述의 字)은 우물 안의 개구리【蛙는 물에서 사는 동물이니, 모양이 蝦蟆와 같은 바, 개구리가 우물 안에 앉아있는 것과 같아서 보는 것이 작음을 말한 것이다.】일 뿐입니다. 망령되이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東方(洛陽의 光武帝)에 전념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隗囂가 마침내 馬援을 사신으로 삼아 洛陽에 글을 받들어 올리게 하니, 馬援이 처음 이르렀을 때에 황제가 宣德殿 남쪽 행랑 아래에서 두건만 쓰고【[釋義]帝在宣德殿南廡下 但幘:廡는 堂 아래에 둘러 있는 집이다. 머리에 두건이 있는 것을 幘이라 한다.】 앉아서 맞이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馬援에게 이르기를 “卿이 두 황제(公孫述과 자신)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니, 지금 卿을 만남에 사람으로 하여금 크게 부끄럽게【德이 적으면서 황제라고 칭함을 스스로 부끄러워함을 말한 것이다.】 한다.” 하였다. 馬援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엔 단지 군주가 신하를 가려서 쓸 뿐만 아니라, 신하 또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합니다. 신은 公孫述과 한 고을 사람이라서 어려서부터 서로 친합니다. 신이 지난번 蜀에 이르렀을 때에 公孫述은 창을 잡은 호위병을 뜰에 세운【陛戟은 계단과 뜰 아래에 창을 진열하여 세워서 威儀와 護衛로 삼음을 이른다.】 뒤에야 신을 나오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먼 곳에서 왔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刺客과 간사한 사람이 아닌 줄을 아시고, 소탈하고 쉽게 대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황제가 다시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刺客이 아니라 다만 說客일 뿐이다.” 하였다. 馬援이 말하기를 “천하에 반복하여 帝王의 名字를 도둑질한 자【名字를 도둑질한다는 것은 帝王의 名號를 참람하게 훔쳐서 帝를 칭하고 王을 칭함을 이른다.】를 이루 셀 수가 없었는데, 이제 폐하를 뵈니 넓고 큰 도량이 高祖와 똑같습니다. 이제야 帝王이 본래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己丑]五年

[己丑]五年이라

帝使來歙持節하야 送馬援歸隴右하다 隗囂共臥起하야 問以東方事한대 曰 前到朝廷호니 上이 引見數十하사 每接燕語하사되 自夕至旦하시니 才明勇略이 非人敵也요 且開心見誠하야 無所隱伏하니 闊達多大節은 略與高帝同하고 經學博覽과 政事文辨【文華辨別也라】은 前世無比러이다 曰 卿謂何如高帝오 曰 不如也니 高帝는 無可無不可어니와 今上은 好吏事하야 動如節度하고 又不喜飮酒러이다 意不懌曰 如卿言인대 反復勝耶아하다 〈出援傳〉

[新增]胡氏曰 無可無不可는 孔子自謂之言也니 以五字成文은 當渾全以會其意요 不當分析以求其義라 設有人焉이 絶世離俗하야 無一可者면 有是理乎아 行之而善이라도 亦孤介一隅之士爾요 設有人焉이 和光同塵하야 無一不可者면 有是理乎아 行之而善이라도 亦委隨苟合之人爾라 蓋聖人은 從容中道하야 無所偏倚者也라 後世에 有狀人之通儻【通은 達也요 儻은 倜儻이니 卓異也라】不泥者면 必曰無可無不可라하나니 窮究要歸하면 則纔足謂之無不可爾니라

建武 5년(기축 29)

황제가 來歙으로 하여금 節을 가지고 馬援을 전송하여 隴右로 돌아가게 하였다. 隗囂馬援과 함께 기거하면서 東方(洛陽)의 일을 묻자, 말하기를 “지난번 조정에 이르니, 上이 수십 번 접견하여 접견할 때마다 사사로이 말씀하시되 저녁부터 아침까지 하였습니다. 才明(재주와 지혜)과 勇略은 보통 사람이 대적할 바가 아니고 또 마음을 열어 진심을 보여서 숨기는 바가 없으니, 활달하여 大節에 치중함은 대략 高帝와 같고 經學과 博覽, 政事와 文辨【문장이 아름답고 화려하며, 사물에 대한 분별이 있는 것이다.】은 前代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隗囂가 말하기를 “卿이 생각하기에 高帝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니, 馬援이 대답하기를 “高帝만 못하니 高帝는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거니와, 今上은 관리의 일을 처리하기를 좋아하여 번번이 節度대로 하고 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니, 隗囂가 마음에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卿의 말과 같다면 今上이 高帝보다 도리어 더 낫단 말인가?” 하였다. -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無可無不可]’는 것은 孔子께서 자신을 두고 스스로 하신 말씀이니, 다섯 글자를 가지고 문장을 이룸은 완전히 한 덩어리로 그 뜻을 이해해야 하고 분석해서 그 뜻을 찾아서는 안 된다. 설령 어떤 사람이 세속을 끊고 떠나가서 한 가지라도 可한 것이 없다면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을 행하여 善하더라도 또한 홀로 절개를 지켜 세속을 따르지 않는 협소한 선비일 뿐이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이 광채(德)를 감추고 塵世에 섞여 있어서 한 가지라도 不可한 것이 없다면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을 행하여 善하더라도 또한 나약하고 무능하여 구차히 영합하는 사람일 뿐이다. 聖人은 저절로 道에 맞아서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는 자이다. 후세에 통달하고 초탈하여【[通은 통달함이요, 儻은 뜻이 크고 기개가 뛰어난 것이니 卓異한 것이다.】 어느 한쪽에 빠지지 않는 자를 형용할 때에 반드시 ‘無可無不可’라 하니, 그 귀결을 궁구해 보면 겨우 ‘불가함이 없다[無不可]’고 이르기에 충분할 뿐이다.”

馬武, 王霸가 擊蘇茂, 周建하야 破之한대 은 於道死하고 는 犇下邳【邳는 東海邑이니 本在薛이러니 其後徙此라 有上邳라 故曰下邳라】하야 與董憲合하고 劉紆는 犇佼彊【佼는 姓也니 或作姣라[頭註]佼彊은 梁王永之將이라】하다

馬武王霸蘇茂周建을 공격하여 격파하자, 周建은 길에서 죽고, 蘇茂는 下邳【邳는 東海의 邑이니, 본래 薛에 있었는데 그 후 이곳으로 옮겼다. 上邳가 있기 때문에 下邳라 한 것이다.】로 도망하여 董憲과 연합하고, 劉紆는 佼彊【[釋義]佼는 姓이니 혹은 姣로도 쓴다.[頭註]佼彊은 梁王 劉永의 장수이다.】에게로 달려갔다.

彭寵의 蒼頭【漢名奴爲蒼頭者하니 (服)[非]純黑以別於良人也라】子密等三人이 殺以降이어늘 帝封子密하야 爲不義侯하다

權德輿議曰 伯通之叛命과 子密之戕君은 同歸於亂하니 罪不相蔽라 宜各置於法하야 昭示王度어늘 反乃爵於五等【謂公侯伯子男이라】하고 又以不義爲名이라 且擧以不義면 莫可侯也어늘 此而可侯하니 漢爵이 爲不足勸矣니라

彭寵의 蒼頭(노예)【漢나라는 노예를 蒼頭라 이름하였으니, 순흑색이 아닌 것으로 良人과 구별하였다.】子密 등 세 사람이 彭寵을 죽이고 항복하자, 황제가 子密을 봉하여 不義侯로 삼았다.

權德輿가 논하였다.

伯通(彭寵의 字)이 황제의 명령을 배반한 것과 子密이 군주를 해침은 똑같이 亂에 돌아가니, 죄가 서로 가릴 수 없다. 마땅히 각각 법대로 처치하여 왕의 法度를 밝게 보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公‧侯‧伯‧子‧男 다섯 등급【다섯 등급은 公‧侯‧伯‧子‧男을 이른다.】의 작위를 내리고 또 不義를 侯의 이름으로 삼았다. 또 不義한 짓을 거행하였으면 侯를 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런 사람에게 侯를 시켰으니, 漢나라의 官爵이 족히 善을 권할 수 없게 되었다.”

吳漢이 率耿弇等하고 擊富平獲索【地理志에 平原에 有富平縣이라 獲索은 賊名이라】於平原하야 大破之어늘 上이 因詔하야 進討張步齊王也라】하다

吳漢耿弇 등을 거느리고 富平의 獲索【≪漢書≫ 〈地理志〉에 “平原郡에 富平縣이 있다.” 하였다. 獲索은 賊의 이름이다.】을 平原郡에서 공격하여大破하자, 上이 인하여 耿弇에게 명해서 나아가 齊나라 王 張步【張步는 齊나라 王이다.】를 토벌하게 하였다.

○ 帝以伋爲漁陽太守하다 이 承離亂之後하야 養民訓兵하야 開示威信하니 盜賊이 銷散하고 匈奴遠迹하야 在職五年에 戶口增倍러라 〈出本傳〉

○ 황제가 郭伋을 漁陽太守로 삼았다. 郭伋은 난리를 치른 뒤를 이어서 백성들을 기르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엄과 신의를 열어서 보여 주니, 도적들이 사라지고 흉노가 멀리 도망하여 在職한 지 5년에 戶口가 배로 증가하였다.- 《後漢書 郭伋列傳》에 나옴 -

○ 平敵將軍龐萌의 爲人이 遜順하니 帝信愛之하야 常稱曰 可以托六尺之孤하고 寄百里之命者는 龐萌이 是也라하다 使與蓋延共董憲이러니 時에 詔書獨下延하고 而不及이라 以爲譖己라하야 自疑遂反하야 襲軍破之하고 與董憲連和하야 自號東平王하다 之大怒하야 自將討할새 與諸將書曰 吾常以龐萌社稷臣이러니 將軍이 得無笑其言乎아 老賊을 當族이니 其各厲兵馬하야 會睢陽하라

○ 平敵將軍龐萌의 사람됨이 겸양하고 공손하니, 황제가 믿고 사랑하여 항상 칭찬하기를 “六尺의 어린 군주를 맡길 수 있고, 百里(諸侯國)의 命令(國政)을 부탁할 수 있는 자는 龐萌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蓋延과 함께 董憲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조서가 蓋延에게만 내려지고 龐萌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龐萌蓋延이 자신을 참소한 것이라고 여겨 스스로 의심하고는 마침내 배반하여 蓋延의 군대를 기습 격파하고董憲과 연합하여 東平王이라 자칭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龐萌을 토벌할 적에 諸將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항상 龐萌을 社稷의 신하라고 하였는데, 장군들이 어찌 나의 말을 비웃지 않겠는가. 老賊을 마땅히 滅族해야 할 것이니, 각기 병기와 말을 정돈하여 睢陽으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隗囂問於班彪曰 往者周亡에 戰國이 竝爭하야 數世然後定하니 意者컨대 從橫之事 復起於今乎아 將承運迭興이 在於一人也아 曰 周之廢興은 與漢殊異라 昔에 周爵五等하야 諸侯從政하야 本根旣微에 枝葉彊大라 故로 其末流에 有從橫之事하니 勢數然也어니와 漢承秦制하야 改立郡縣하니 主有專己之威하고 臣無百年之柄이라 至於成帝하야 假借外家【外家는 王氏也니 謂以權勢로 假貸與諸舅라】하며 , 이 短祚하고 國嗣三絶이라 故로 王氏擅朝하야 能竊號位하니 危自上起요 傷不及下라 是以로 卽眞之後에 天下引領而歎이러니 十餘年間에 中外騷擾하고 遠近俱發하야 假號雲合에 咸稱劉氏하야 不謀同辭라 方今에 雄桀(傑)帶州域者 皆無六國世業之資하고 百姓이 謳吟思仰하니 漢必復興을 已可知矣니이다 曰 生言周, 漢之勢는 可也어니와 至於但見愚人의 習識劉氏姓號之故로 而謂漢復興은 疎矣로다 昔에 秦失其鹿에 劉季逐而掎之【按淮陰傳에 秦失其鹿에 天下共逐之하니 於是에 高材疾足者先得焉이라한대 註云 以鹿喩帝位也라 劉季는 高帝也니 諱邦이요 字季라 又左傳에 譬如捕鹿에 諸戎掎之라한대 註에 從後牽曰掎라하니라】하니 時民이 復知漢乎아

隗囂班彪에게 묻기를 “예전에 周나라가 멸망할 때에 戰國의 群雄들이 함께 다투어서 몇 대가 지난 뒤에야 天下가 정해졌으니, 생각건대 合從과 連橫의 일이 오늘날에 다시 일어나겠는가? 아니면 〈漢나라가 망하고〉 天命을 받아 漢나라를 대신하여 일어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겠는가?” 하니, 班彪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周나라가 망하고 흥함은 漢나라와는 크게 다릅니다. 옛날에 周나라는 다섯 등급의 관작을 두어서 제후들이 정사에 종사하여 根本(天子國)이 이미 미약해지자 枝葉(제후국)이 강대해졌습니다. 그러므로 末流에 合從과 連橫의 일이 있었으니, 이는 형세와 운수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漢나라는 秦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封建制度를 고쳐 郡縣制度를 세우니, 군주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위엄이 있고 신하는 百年의 장구한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成帝 때에 이르러 外戚에게 권력을 빌려 주었으며【外家는 王氏이니, 권세를 여러 외삼촌들에게 빌려 주었음을 이른다.】哀帝平帝가 제위를 누린 것이 짧고 國統이 세 번이나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王氏(王莽)가 조정을 제멋대로 차지하여 天子의 칭호와 지위를 도둑질하였으니, 위태로움이 위에서부터 일어났고 傷害가 아래의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王莽이 진짜 皇帝에 즉위한 뒤에 천하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한탄하였는데, 10여년 사이에 中外가 소란하고 遠近이 함께 일어나서 名號를 빌려 무리들을 구름처럼 모을 적에 모두 劉氏라고 칭하여 상의하지 않고도 똑같이 말하였습니다. 지금 영웅호걸로서 州의 경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六國처럼 대대로 基業을 이어 내려오는 바탕이 없고, 백성들은 漢나라를 노래하고 그리워하니, 漢나라가 반드시 부흥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 수 있습니다.”

隗囂가 말하기를 “生이 周나라와 漢나라의 형세를 말한 것은 可하지만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劉氏의 姓과 이름을 익숙히 아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漢나라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고루하다. 옛날 秦나라가 사슴(帝位)을 잃자 劉季(劉邦)가 쫓아가서 잡았으니,【[釋義]秦失其鹿 劉季逐而掎之:살펴보건대 ≪史記≫ 〈淮陰侯列傳〉에 “秦나라가 그 사슴을 잃자 천하가 함께 쫓으니,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었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사슴을 가지고 황제의 지위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劉季는 高帝이니, 諱가 邦이고 字가 季이다. 또 ≪春秋左傳≫에 “비유하건대 사슴을 잡을 때에 여러 오랑캐들이 뒷다리를 잡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註에 “뒤에서 잡아끄는 것을 掎라 한다.” 하였다.】 그 당시 백성들이 다시 漢나라를 알았겠는가?” 하였다.

乃爲之著王命論하야 以風切之하니 〈出彪傳 末句不同〉曰 昔之禪【禪은 去聲이니 除地爲禪하야 告天而傳位를 後因謂之禪이라 改墠曰禪은 神之也라】에 曰 天之曆數【帝王相繼之次第가 猶歲時氣節之先後라】在爾躬이라하시고 亦以命하시며 洎于, 하야 咸佐, 러니 至, 而有天下라 劉氏는 承之祚하니 據火德이어늘 而漢紹之하야 有赤帝之符라 俗見高祖興於布衣하고 不達其故하야 至比天下於逐鹿하야 幸捷而得之라하고 不知神器有命하야 不可以智力求也하니 悲夫라 此世所以多亂臣賊子也로다 夫饑饉流隷【蔬不熟曰饉이라 流隷는 謂流離之人과 皀隷之徒也라】 飢寒道路에 所願이 不過一金이나 然終轉死溝壑은 何則고 貧窮亦有命也일새니 況乎天子之貴와 四海之富와 神明之祚를 可得而妄處哉아 故로 雖遭離阨會하야 竊其權柄하야 勇如, 【謂韓信, 黥布라】하고 强如, 【謂項梁, 項籍이라】하고 成如王莽【謂王莽簒位하야 其勢已成也라】이라도 然卒潤鑊伏質【質은 鍼也니 伏於鍼上而斬之라[頭註]質은 本作櫍하니 椹也라 古者 斬人에 伏於椹上而斫之라】하야 烹醢分裂이어든 又況么麽【皆微少之稱이라】不及數子요 而欲闇奸【闇은 隱晦貌요 奸은 犯非禮也라】天位者虖(乎)아

班彪가 이에 隗囂를 위하여 〈王命論〉을 지어서 풍자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後漢書 班彪傳》에 나오는데, 末句가 같지 않음 -

“옛날 임금이 임금에게 禪讓【禪은 去聲이니, 天子가 郊外에 나가 땅을 소제하여 禪을 만들어 하늘에 고하고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후세에 인하여 禪이라 하였다. 墠을 고쳐 禪이라 한 것은 神으로 여긴 것이다.】할 때에 말씀하기를 ‘하늘의 曆數(天運)【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가 歲時에 節氣의 〈변화가 철에 따라 돌아가는〉 순서와 같은 것이다.】가 네 몸에 있다.’ 하였고, 임금 또한 이로써 임금에게 명하셨으며, 에 이르러는 모두 를 도왔는데, 湯王武王에 이르러서 천하를 소유하였다. 劉氏임금의 옛 國統을 이으니, 임금은 火德에 의거하였는데 漢나라가 이것을 이어서 赤帝의 符瑞가 있었다. 俗人들은 高祖가 布衣로 일어난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해서 심지어 사슴을 쫓는 데에 천하를 견주어서 다행히 발이 빨라 얻었다 하고, 神器(황제의 지위)가 天命이 있어서 지혜와 힘으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슬프다. 이 때문에 세상에 亂臣賊子가 많은 것이다. 饑饉이 들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노예들【채소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饉이라 한다. 流隷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사람과 노예의 무리이다.】이 길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 적에 원하는 것이 1金에 지나지 않으나 끝내 전전하다가 도랑과 구덩이에서 죽는 것은 어째서인가? 貧窮도 天命이 있기 때문이니, 하물며 天子의 존귀함과 四海의 부유함과 神明이 복을 내리는 것을 망령되이 차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곤궁한 때를 만나 권력을 도둑질하여 용맹함이 韓信黥布【[釋義]信, 布:信, 布는 韓信과 黥布를 이른다.】와 같고 강함이 項梁項籍【[釋義]梁, 籍:梁, 籍은 項梁과 項籍을 이른다.】과 같고 형세가 이루어짐이 王莽과 같다【王莽이 천자의 지위를 찬탈하여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짐을 이른다.】 하더라도 끝내 가마솥에 들어가고 도끼 모탕에 엎드려서【[釋義]質은 도끼 모탕(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에 받쳐 놓는 나무토막)이니, 도끼 모탕 위에 엎드려 베어지는 것이다.[頭註]質은 본래 櫍로 쓰니 도끼 모탕이다. 옛날에 사람을 베어 죽일 때에 죄인을 모탕 위에 엎드리게 하고서 베었다.】 삶겨지고 젓 담가져 육신이 나뉘고 찢기는데, 더구나 저 하찮은 자들【么와 麽는 모두 매우 작음을 비유하는 칭호이다.】은 위의 몇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천자의 지위를 남몰래 범하고자【闇은 숨기는 모양이고, 奸은 禮가 아닌 것을 범하는 것이다.】 한단 말인가.

昔에 陳嬰之母는 以家世貧賤하니 卒富貴不祥이라하야 止勿王하고 王陵之母는 知漢必得天下하고 伏劍而死하야 以固勉陵하니 夫以匹婦之明으로도 猶能推事理之致하고 探禍福之機하야 而全宗祀於無窮하고 垂策書於春秋어든 而況大丈夫之事乎아 是故로 窮達有命하고 吉凶由人이라 嬰母는 知廢하고 陵母는 知興하니 審此二者면 帝王之分이 決矣라 加之高祖寬明而仁恕하고 知人善任使라 當食吐哺하야 納子房之策하고 拔足揮洗하야 揖酈生之說하며 擧韓信於行陳하고 收陳平於亡命하야 英雄陳力하고 群策畢擧라 此高帝之大略이 所以成帝業也라 若乃靈瑞符應은 其事甚衆이라 故로 淮陰, 留侯謂之天授요 非人力也라하니 英雄이 誠知覺寤하야 超然遠覽하고 淵然深識하야 收, 之明分하고 絶, 之覬覦【覬는 音冀요 覦는 音踰니 覬는 幸也요 覦는 欲也니 謂幸得其所欲이라】하면 則福祚流於子孫하야 天祿이 其永終矣리라 〈出前漢敍傳〉

옛날 陳嬰의 어머니는 陳嬰의 가문이 대대로 빈천하였으니 갑자기 부귀해지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陳嬰을 만류해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고, 王陵의 어머니는 漢나라가 반드시 천하를 얻을 것을 알고 칼에 엎드려 죽어 王陵을 굳게 권면하였으니, 匹婦의 밝음으로도 오히려 事理의 이치를 추측하고 禍福의 기미를 살펴서 宗祀를 무궁한 후세에 보전하고 策書를 春秋(역사책)에 전했는데, 하물며 大丈夫의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곤궁하고 영달함은 天命이 있고, 길하고 흉함은 사람에게 말미암는 것이다. 陳嬰의 어머니는 〈陳嬰이 王이 되면〉 망할 줄을 알았고 王陵의 어머니는 漢나라가 흥할 줄을 알았으니,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帝王의 구분이 결정될 것이다. 더구나 高祖는 활달하고 밝고 어질고 너그러우며 사람을 잘 알아보아 맡겼다. 밥을 먹다가 먹던 밥을 뱉고서 子房(張良)의 계책을 받아들이고, 발을 씻다가 씻던 발을 빼고서 酈生(酈食其)의 말을 읍하고 받아들이며, 韓信을 行伍에서 들어 쓰고 陳平을 망명한 데에서 거두어 써서 영웅들이 힘을 바치고 여러 계책이 모두 거행되었다. 이는 高帝의 큰 智略이 帝業을 이룬 것이다. 祥瑞와 符應으로 말하면 그 일이 매우 많다. 그러므로 淮陰(韓信)留侯(張良)가 이르기를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니, 영웅이 진실로 알고 깨달아서 超然히 멀리 보고 淵然히 깊이 알아서 王陵陳嬰의 명확한 구분을 받아들이고, 韓信黥布의 帝位를 엿봄【覬는 音이 기이고 覦는 音이 유이니, 覬는 요행이고 覦는 하고자 하는 것인 바, 요행으로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얻음을 이른다.】을 끊어 버린다면 福祚가 자손에게 전해져 天祿이 영원할 것이다.” - 《漢書 敍傳》에 나옴 -

不聽이어늘 遂避地河西한대 竇融이 以爲從事하야 甚禮重之라 遂爲畫策하야 使之專意事漢焉이러라 〈出彪傳〉

隗囂가 듣지 않자 班彪가 마침내 河西 지방으로 몸을 피하였는데, 竇融이 그를 종사관으로 삼아서 매우 예우하고 존중하였다. 班彪가 마침내 竇融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 竇融으로 하여금 오직 一念으로 漢나라를 섬기게 하였다.- 《後漢書 班彪傳》에 나옴 -

○ 初에 竇融이 自守河西러니 聞帝威德하고 心欲東向이나 以河西隔遠하야 未能自通이라하야 乃從隗囂하야 受建武正朔한대 皆假其將軍印綬하다 外順人望이나 內懷異心하야 使辯士張玄으로 說等曰 更始事已成이라가 尋復亡滅하니 此는 一姓不再興之效라 當各據土宇하야 與隴, 蜀合從【隴은 謂隗囂요 蜀은 謂公孫述이라 以和合爲從이요 以威勢相脅爲橫이라】이면 高可爲六國【戰國時 韓, 魏, 趙, 燕, 楚, 齊니 戰國之世에 各據其地하니라】이요 下不失尉佗【佗는 名也니 姓趙라 秦二世時에 南海尉任囂 病且死에 召龍川令趙佗하야 語曰 聞項羽, 劉季等이 各起兵하야 中國擾亂이라하니 吾欲興兵自備러니 會病甚이라 且南海는 東西數千里니 可以立國이라하고 卽以佗行南海尉事하니라 囂死에 佗卽自立爲南粤(越)武王하니라】니라 等이 召豪傑議之하니 其中識者皆曰 今皇帝姓名이 見於圖書하니 漢有再受命之符라하다

○ 처음에 竇融이 스스로 河西 지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황제의 위엄과 덕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光武帝에게 귀의하고자 하였으나 河西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할 수가 없다 하여 마침내 隗囂를 따라 建武의 正朔을 받으니, 隗囂가 將軍의 印綬를 임시로 맡겨 주어 그 지방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隗囂가 겉으로는 사람들의 바람을 따랐으나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어 辯士인 張玄으로 하여금 竇融 등을 설득하기를 “更始가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멸망하였으니, 이는 한 姓(劉氏)이 다시 興旺하지 않을 징험이다. 마땅히 각각 土宇(영토)를 점거하여 隴‧蜀과 합종【隴은 隗囂를 이르고 蜀은 公孫述을 이른다. 화합하는 것을 從이라 하고, 위엄과 형세로 서로 위협하는 것을 橫이라 한다.】한다면 높게는 六國【六國은 戰國時代의 韓, 魏, 趙, 燕, 楚, 齊이니, 戰國시대에 각각 그 지역을 점거하였다.】처럼 될 수 있고 낮아도 南海尉 趙佗【〈尉는 官名이고〉 佗는 이름이니, 姓이 趙氏이다.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南海尉 任囂가 병들어 죽으려 할 때에 龍川令 趙佗를 불러 이르기를 “내 들으니, 項羽와 劉季 등이 각각 군대를 일으켜서 中國이 소란하다 한다. 내가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방비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병이 심하다. 또 南海는 동서 지방이 수천 리이니, 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고는, 즉시 趙佗로 南海尉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 任囂가 죽자, 趙佗가 즉시 스스로 서서 南粤武王이라 하였다.】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竇融 등이 호걸을 불러 의논하니, 그 가운데 유식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皇帝의 姓名이 圖讖書에 보이니, 漢나라가 다시 天命을 받을 符瑞가 있다.” 하였다.

이 遂決策東向하고 遣長史劉鈞【時에 衆推融爲大將軍이라 故로 置長史也라】하야 奉書詣洛陽한대 帝見鈞懽甚하야 禮饗畢에 乃遣還할새 賜璽書曰 今益州에 有公孫子陽하고 天水에 有隗將軍하니 方蜀, 漢相攻에 權在將軍이라 擧足左右에 便有輕重【言左投則蜀重하고 右投則漢重也라】하니 以此言之컨대 欲相厚豈有量哉아 欲遂立, 하야 輔微國【齊桓公, 晉文公이 春秋時號爲賢君이라 能糾合諸侯하야 尊周室, 治强楚하니 諸侯皆尊之하야 以爲霸主하니라】인대 當勉卒功業이요 欲三分鼎足하야 連衡合從【註見周安王十五年이라】인대 亦宜以時定【衡은 橫通이라 時定은 開兩說以觀融去就라】하라 天下未幷하니 吾與爾絶域하야 非相呑之國이라 今之議者 必有任敎尉佗制七郡之計【秦二世時에 南海尉任囂病에 敎趙佗以制七郡之謀하다 按七郡은 南海, 鬱林, 蒼梧, 合浦, 交趾, 九眞, 日南이 是也라】하리니 王者는 有分土하고 無分民【凡裂土以封諸侯하니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地志註에 有分土者는 謂立封疆也요 無分民者는 謂通往來하야 不常厥居라】하니 自適己事【謂宜自謀順適己身之事라】而已라하고 因授爲凉州牧하다 璽書至河西하니 河西皆驚하야 以爲天子明見萬里之外라하더라 〈出竇融傳〉

竇融이 마침내 光武帝에게 귀의하기로 계책을 결단하고 長史劉鈞 등을 보내어【이때에 무리들이 竇融을 추대하여 大將軍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長史를 둔 것이다.】 글을 받들어 洛陽에 이르렀다. 황제가 劉鈞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禮로 연향하기를 마친 다음 마침내 돌려보낼 때에 竇融에게 내린 璽書에 이르기를 “지금 益州에는 公孫子陽이 있고 天水에는 隗將軍이 있으니, 蜀과 漢이 서로 공격함에 권세(결정권)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발을 들어 왼쪽으로 향하느냐 오른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곧 輕重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니,【왼쪽으로 향하면 蜀이 중해지고, 오른쪽으로 향하면 漢이 중해짐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 厚待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마침내 齊桓公과 晉文公처럼 이름난 盟主를 세워 미약한 나라를 돕고자 한다면【[釋義]欲遂立桓文 輔微國:齊 桓公과 晉 文公은 春秋時代에 어진 임금으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제후들을 규합하여 미약한 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강한 楚나라를 다스리니, 제후들이 모두 높여서 霸主로 삼았다.】 마땅히 힘써 功業을 끝마쳐야 할 것이요,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合從하고 連橫【註가 周 安王 15年條(B.C.387)에 보인다.】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때에 결정하라.【[頭註]連衡合從 亦宜以時定:衡은 橫과 通한다. 이때에 결정하라는 것은 合從과 連橫 두 가지 說을 말하여 竇融의 去就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못하였으니, 나와 그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병탄할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옛날 任囂尉佗에게 7郡을 제압하는 것을 가르쳐 준 계책【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南海尉 任囂가 병들자, 趙佗에게 7郡을 제압하는 계책을 가르쳐 주었다. 7郡은 南海, 鬱林, 蒼梧, 合浦, 交趾, 九眞, 日南이 바로 이곳이다.】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니, 王者는 땅을 나누어 分封해 줌은 있고 백성을 나누어 줌은 없으니,【[釋義]王者……無分民:무릇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해 주니, 封地를 받은 자가 각각 땅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漢書≫ 〈地理志〉 註에 “땅을 나누어 줌이 있다는 것은 封疆(국경)을 세움을 이르고, 백성을 나누어 줌이 없다는 것은 마음대로 왕래해서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음을 이른다.” 하였다.】 스스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自適己事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순하고 맞는 일을 도모해야 함을 이른다.】 뿐이다.” 하고는 인하여 竇融을 凉州牧에 제수하였다.

璽書가 河西에 이르니, 河西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르기를 “天子가 萬里 밖까지 밝게 내다본다.” 하였다. - 《後漢書 竇融傳》에 나옴 -

張步耿弇至하고 使其將軍歷下【地理志에 歷下古城이 枕泰山之麓하야 極爲雄壯하고 又襟帶濟水라】하고 又分兵屯祝阿【註見周烈王六年이라】하고 別於泰山, 鍾城에 列營數十하야 以待之어늘 이 渡河하야 先擊祝阿拔之하다 時에 張步都劇이라 이 至臨淄城하야 出不意하야 半日에 拔之하고 入據其城하야 以激怒러니 兵二十萬이 至臨淄大城東하야 將攻이어늘 이 大破之하다 是時에 帝在魯【今兗州曲阜縣이 古魯國也라 括地志에 故〈魯〉城은 今兗州許昌縣南四十里니 本魯之朝宿邑이라 】러니 聞所攻하고 自往救之할새 未至에 陳俊이 謂曰 劇虜【時에 張步都劇이라 故로 呼爲劇虜라 括地志에 菑川劇縣故城이 在靑州壽光南三十里라】兵盛하니 可且閉營休士하야 以須上來니이다 曰 乘輿且到하시니 臣子當擊牛釃酒【謂以筐篚★{氵+盝}(漉)酒也라】하야 以待百官이어늘 反欲以賊虜遺君父耶아하고 乃出兵大戰하야 自旦至昏에 復大破之하니 殺傷이 無數하야 溝塹이 皆滿이라 이 知困將退하고 豫置左右翼【旁引其騎하야 若鳥翼之爲也라】하야 爲伏以待之러니 人定【日入而群動息故로 甲夜를 謂之人定이라】時에 果引去어늘 復起兵縱擊하야 追至鉅昧水【鉅昧는 水名이니 一名巨洋이라 按洋水는 在靑州樂安國이라】上하니 八九十里에 僵尸相屬하고 收得輜重二千餘兩하다 還劇後數日에 車駕至臨淄하야 自勞軍할새 群臣이 大會라 帝謂曰 昔에 韓信이 破歷下以開基러니 今將軍이 攻祝阿以發迹하니 此는 皆齊之西界라 功足相方이요 而韓信은 襲擊已降이어늘 將軍은 獨拔勍敵하니 其功이 又難於也로다 又田橫이 烹酈生이러니 及田橫降에 高帝詔衛尉하야 不聽爲仇하니 張步前殺伏隆이나 若步來歸命이면 吾當詔大司徒하야 釋其怨하리니 又事尤相類也로다 將軍이 前在南陽에 建此大策하니 常以爲落落【猶疎闊也니 一云言不相入也라】難合이러니 有志者事竟成也로다 〈出弇傳〉

張步耿弇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장수로 하여금 歷下【≪漢書≫ 〈地理志〉에 “歷下의 옛 성이 泰山 기슭을 베고 있어서 지극히 웅장하고, 또 濟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 하였다.】에 주둔하게 하고, 또 군대를 나누어 祝阿【祝阿는 註가 周 烈王 6年條(B.C.370)에 보인다.】에 주둔한 다음 별도로 泰山의 鍾城에 수십 개의 陣營을 나열하여 대기하게 하였는데, 耿弇이 黃河를 건너 먼저 祝阿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때 張步가 劇縣에 도읍하였다. 耿弇은 臨淄城에 이르러 敵이 예상치 못했을 때에 출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하고, 들어가 그 城을 점거하여 張步를 격노케 하였다. 張步의 군사 20만이 臨淄의 큰 城 동쪽에 이르러 耿弇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耿弇이 이들을 大破하였다. 이때 황제가 魯【지금 兗州의 曲阜縣이 옛날 魯國이다. ≪括地志≫에 “옛 魯城은 지금 兗州의 許昌縣 남쪽 40리 지점이니, 본래 魯나라의 朝宿邑이다.” 하였다.】 지방에 있었는데, 耿弇張步에게 공격당한다는 말을 듣고는 직접 가서 구원하려 하였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陳俊耿弇에게 이르기를 “劇縣의 오랑캐【이때 張步가 劇에 도읍하였으므로 그를 불러 劇 땅의 오랑캐라 한 것이다. ≪括地志≫에 “菑川 劇縣의 옛 성이 靑州 壽光縣 남쪽 30리에 있다.” 하였다.】 군대가 강성하니, 우선 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上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였다. 耿弇이 말하기를 “大駕가 장차 이르실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釃酒는 소쿠리(용수)를 가지고 술을 거름을 이른다.】 百官을 대접하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저 오랑캐를 君父에게 남겨 드리고자 하는가?” 하고는 마침내 출병하여 크게 싸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하여 다시 대파하니, 張步의 군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도랑에 모두 시신이 가득하였다. 耿弇張步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하려 할 줄을 알고는 미리 左翼과 右翼【左右翼은 곁에 기병들을 배치하여 새의 날개처럼 하는 것이다.】을 설치하고 매복하여 기다렸는데, 人定(오후 10시경)【해가 지면 모든 움직임이 그친다. 그러므로 甲夜를 일러 人定이라고 한다.】 때에 張步가 과연 군대를 이끌고 떠나가자, 耿弇은 다시 매복했던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해서 추격하여 鉅昧水【鉅昧는 물 이름이니, 일명 巨洋이다. 살펴보건대 洋水는 靑州 樂安國에 있다.】 가에 이르니, 8, 90리에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으며, 輜重車 2천여 대를 거두어 얻었다.

張步가 劇縣으로 돌아간 뒤 며칠 만에 車駕가 臨淄에 이르러서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황제가 耿弇에게 이르기를 “옛날 韓信이 歷下를 격파하여 기반을 닦았는데, 지금 장군이 祝阿를 공격하여 자취를 드러냈으니, 이는 모두 齊나라의 서쪽 지역이다. 功이 충분히 서로 비견할 만하고, 韓信은 이미 항복한 齊나라를 습격하였는데 장군은 홀로 강한 敵을 함락시켰으니, 그 功이 韓信보다 더 어렵다. 또 옛날 田橫酈生(酈食其)을 삶아 죽였는데, 田橫이 항복하자 高帝는 衛尉(酈食其의 아우 酈商)에게 명하여 원수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張步가 전에 伏隆을 죽였으나 만약 張步가 귀순해 온다면 내 마땅히 大司徒(伏隆의 아들伏湛)에게 명하여 그 원한을 풀게 할 것이니, 또 일이 더욱 서로 비슷하다. 장군이 지난번 南陽에 있을 때에 이 큰 계책을 세웠는데 나는 항상 소활【落落은 疎闊과 같은 뜻이니, 一說에는 “말이 서로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한다.】하여 부합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나 뜻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일이 끝내 이루어지는군요.” 하였다.- 《後漢書 耿弇傳》에 나옴 -

帝進幸劇할새 耿弇이 復追張步하니 犇平壽라 蘇茂將萬餘人하야 來救之어늘 帝遣使하야 告, 호되 能相斬降者면 封爲列侯라하니 遂斬하고 詣軍門降하다 이 入據其城【其城은 卽平壽城也라】하니 衆이 尙十餘萬이요 輜重이 七(十)[千]餘兩이라 皆罷遣歸鄕里하고 封安丘【北海郡安丘縣이니 屬靑州라】侯하다 이 復引兵至城陽【地理志에 濟陰郡南에 有泰山城陽이라 括地志에 本濮州雷澤縣이 是라】하야 降五校餘黨하니 齊地悉平이어늘 振旅還京師하다 이 爲將에 凡所平郡이 四十六이요 屠城이 三百이라 未嘗挫折焉이러라 〈出弇步傳〉

황제가 전진하여 劇에 행차할 때에 耿弇이 다시 張步를 추격하니, 張步가 平壽로 도망하였다. 蘇茂가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자, 황제가 使者를 보내어 張步蘇茂에게 고하기를 “상대방을 베고 항복하면 봉하여 列侯로 삼겠다.” 하니, 張步가 마침내 蘇茂를 목 베고耿弇의 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耿弇이 들어가 그 城【그 성은 곧 平壽城이다.】을 점거하니, 병력이 아직 10여 만이고 輜重車가 7천여 대였다. 모두 파하여 鄕里로 돌려보내고 張步를 봉하여 安丘【安丘는 北海郡 安丘縣이니 靑州에 속하였다.】侯로 삼았다. 耿弇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城陽【≪漢書≫ 〈地理志〉에 “濟陰郡 남쪽에 泰山 城陽이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본래 濮州의 雷澤縣이 이곳이다.” 하였다.】에 이르러서 五校의 잔당을 항복시키니, 齊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므로 군대를 거두어 京師로 돌아왔다. 耿弇은 장수가 되어서 평정한 郡이 모두 46개이고 도륙한 城이 300개였는데, 일찍이 전투에 패한 적이 없었다.- 《後漢書 耿弇傳, 張步傳》에 나옴 -

○ 初起太學하고 車駕還宮【還은 音旋이니 幸魯하여 祀孔子而還宮也라】幸太學하야 稽式古典하고 修明禮樂하니 煥然文物이 可觀矣러라 〈出儒林傳〉

朱黼曰 帝方被甲躍馬하야 以平寇亂이어늘 乃首建學校하야 以復三代之盛하니 可謂得致治之本矣라 終漢之衰토록 學校修設하야 儒士半天下하야 獨以淸議로 扶持王室하야 姦夫大盜가 環視九鼎【禹收九州貢金하야 鑄九鼎하야 以象九州之物하니 乃三代傳國之寶라 後에 秦昭王取之하니 一은 飛入泗水하고 餘八은 入秦中이러니 始皇幷天下而蔑聞焉하니라】而不敢動者는 蓋權輿【始也니 造衡自權始요 造車自輿始故也라】於此歟인저

[新增]尹氏曰 禮王制에 王親視學하니 則學謂之視者古也라 自漢以來로 則爲之幸矣러니 朱子特書曰 初起太學하고 帝還(旋)視之라하니 蓋亦推原古制也라 然則崇師重道之意가 特嚴於一字之間하니 亦豈無所本歟아

○ 처음으로 太學을 일으키고 車駕(天子)가 궁중으로 돌아와【還은 音이 선이니, 魯 지방에 거둥하여 孔子를 제사하고 궁중으로 돌아온 것이다.】太學에 행차해서 옛날 법식을 상고하고 禮樂을 닦고 밝히니, 찬란하여 文物이 볼 만하였다. - 《後漢書 儒林傳》에 나옴 -

朱黼가 말하였다.

“황제가 막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올라서 寇亂을 평정하였는데 마침내 먼저 학교를 세워서 三代의 거룩함을 회복하였으니,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漢나라가 쇠하기까지 학교가 닦여지고 잘 베풀어져 儒士들이 천하의 반을 차지해서 홀로 淸議로써 王室을 유지하여 간사한 지아비와 큰 도둑들이 九鼎(황제의 자리)【禹임금이 九州에서 바친 쇠를 거두어 아홉 개의 솥[九鼎]을 만들어서 九州의 물건을 형상하니, 바로 三代時代에 나라를 물려주는 보배였다. 뒤에 秦나라 昭王이 이것을 취하니, 하나는 泗水로 날아 들어가고 나머지 여덟 개는 秦中으로 들여왔는데, 始皇이 천하를 겸병한 뒤로 알려진 것이 없다.】을 둘러보면서도 감히 동요하지 못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을【權輿는 시초이니, 저울을 만들 때에는 저울대[權]부터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에는 수레 바탕[輿]부터 만들기 때문이다.】 것이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禮記》〈王制〉에 ‘왕이 직접 학교를 시찰한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학교를 시찰한다고 말한 지가 오래되었다. 漢나라 이래로 이것을 ‘幸’이라 말하였는데 朱子가 특별히 쓰기를 ‘처음 太學을 일으키고 황제가 還宮하여 시찰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옛 제도를 미루어 근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을 높이고 道를 소중히 하는 뜻이 특별히 한 글자의 사이에서 엄격한 것이니, 또한 어찌 근본한 바가 없겠는가.”

馮異治關中하야 出入三歲에 上林이 成都【時異屯軍上林苑中이라 成都는 言歸附者衆也라 史記曰 三年成都라】라 人有上章言호되 威權至重하니 百姓歸心하야 號爲咸陽王이라하야늘 帝以章示한대 皇(惶)懼하야 上書陳謝어늘 詔報曰 將軍之於國家에 義爲君臣이요 恩猶父子하니 何嫌何疑완대 而有懼意리오 〈出異傳〉

馮異가 關中을 다스려서 출입한 지 3년 만에 上林苑이 도읍을 이루었다.【이때 馮異가 上林苑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도읍을 이루었다는 것은 歸附한 자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 ≪史記≫에 이르기를 “〈舜임금이 머무는 곳은〉 3년 만에 도읍을 이루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馮異의 위엄과 권세가 지극히 중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咸陽王이라고 부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글을 馮異에게 보이자, 馮異가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사례하니, 조서로 답하기를 “장군은 우리 국가에 있어서 의리는 군신간이요 은혜는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의심하고 혐의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있는가?” 하였다.- 《後漢書 馮異傳》에 나옴 -

隗囂矜己飾智하야 每自比西伯이라 其將王元이 說曰 天水完富하고 士馬最强하니 이 請以一丸泥로 爲大王하야 東封函谷關하리니 圖王不成이라도 其敝猶足以霸라 要之컨대 魚不可脫於淵이니 神龍失勢면 與蚯蚓同이니이다 心然元計하야 雖遣子入侍【囂聞劉永, 彭寵皆已破滅하고 乃遣長子恂하야 隨歙詣闕하니 帝以爲胡騎校尉하고 封鐫羌侯하니라】나 然負其險阨하야 欲專制方面이러라 〈出囂傳〉

隗囂가 자신을 자랑하고 지혜가 있는 것처럼 꾸며서 언제나 자신을 西伯(文王)에게 견주곤 하였다. 그 장수 王元隗囂를 설득하기를 “天水郡은 완전하고 풍부하며 군사와 말이 가장 강하니, 제가 청컨대 한 줌의 진흙(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大王을 위해서 동쪽으로 函谷關을 봉함할 것이니, 王天下를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종말에는 오히려 霸者가 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물고기는 깊은 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니, 신묘한 용이 형세를 잃으면 지렁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隗囂가 마음속으로 王元의 계책을 옳게 여겨서 비록 아들을 보내어 入侍하게 하였으나【隗囂가 劉永과 彭寵이 모두 이미 파멸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長子 恂을 보내어 來歙을 따라 대궐에 나오니, 황제가 胡騎校尉로 삼고 鐫羌侯에 봉하였다.】 지형의 험함을 믿고서 오로지 한 방면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 《後漢書 隗囂傳》에 나옴 -

○ 是歲에 詔徵處士太原周黨과 會稽嚴光【本姓莊이니 避明帝諱하야 改姓이라 嚴光은 一名遵이라 】等하야 至京師하니 이 入見할새 伏而不謁하고 自陳願守所志라 博士范升이 奏曰 伏見太原周黨과 東海王良과 山陽王成等이 蒙受厚恩하야 使者三聘에 乃肯就車하고 及陛見帝庭에 이 不以禮屈하고 伏而不謁하며 偃蹇驕悍【偃蹇은 驕傲貌라 悍은 猛也라】하야 同時俱逝하니이다 等이 文不能演義하고 武不能死君【言其武勇이 不能爲君盡死節이라】하고 釣采華名하야 庶幾三公之位하니 臣은 願與坐雲臺之下【與는 讀作預라 雲臺는 在南宮하니 明帝永平三年에 圖建武中名臣列將於其中하니라】하야 考試圖國之道하야 不如臣言이어든 伏虛妄之罪요 而敢私竊虛名하야 誇上求高어든 皆大不敬이니이다 書奏에 詔曰 自古로 明王聖主 必有不賓之士하니 伯夷, 叔齊【孤竹君之二子니 夷, 齊는 諡也라 姓은 黙氏요 或曰墨氏라 孤竹君은 是殷湯所封이니 夷, 齊父니 名은 初요 字子朝라 伯夷는 名元이니 或曰允이요 字公信이며 叔齊는 名致니 或曰智요 字公達이라 伯叔은 少長之字也라】는 不食周粟하고 太原周黨은 不受朕祿하니 亦各有志焉이라 其賜帛四十匹하야 罷之하라 帝少與嚴光同遊學이러니 及卽位에 以物色訪之【畫象其人物顔色以訪求之라】하야 得於齊國하야 累徵乃至어늘 拜諫議大夫한대 不肯受하고 去하야 耕釣於富春山【新安志云 漢富春縣西에 有富春山하니 後改富陽이라 按嚴光傳컨대 耕於富春山이라하니 圖經에 不載此山하고 但云 今名嚴陵山者 是其所耕處라 嚴光은 富陽人이요 耕於富春山하니 則嚴陵山〈卽富春山〉이 是無疑矣라】中하야 以壽終於家하니라 王良은 後歷沛郡太守, 大司徒, 司直하니 在位恭儉하야 布被瓦器하고 妻子를 不入官舍라 後에 以病歸러니 一歲에 復徵이어늘 至滎陽하야 疾篤하야 不任進道【任은 音壬이니 堪也니 不堪登途也라】일새 過其友人한대 友人이 不肯見曰 不有忠言奇謀하고 而取大位하야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오하고 遂拒之한대 良慙하야 自後로 連徵不應하고 卒於家하니라

[史略 史評]高平范氏曰 非光武면 不能遂子陵之高요 非子陵이면 不能成光武之大也니라

○ 이 해에 명하여 處士인 太原의 周黨과 會稽의 嚴光【嚴光은 본래의 姓이 莊이니 明帝의 諱를 피하여 姓을 고친 것이다. 嚴光은 一名 遵이다.】 등을 불러 京師에 이르게 하니, 周黨이 들어와 뵐 적에 엎드리기만 하고 拜謁하지 않고는 스스로 뜻한 바를 지키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博士范升이 아뢰기를 “삼가 보니, 太原의 周黨과 東海의 王良과 山陽의 王成 등이 국가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使者가 세 번이나 초빙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에 오르고, 섬돌에 미쳐 조정에서 뵐 적에 周黨은 禮로 자신을 굽히지 않고 엎드리기만 하고 拜謁하지 않았으며, 교만하고 사나워【偃蹇은 교만한 모양이다. 悍은 사나움이다.】 동시에 함께 가버렸습니다. 周黨 등은 文은 義理를 부연하지 못하고 武는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하면서【그 武勇이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절개를 다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화려한 명예를 낚아 취하여 거의 三公의 지위에 올랐으니, 신은 원컨대 그들과 雲臺의 아래에 앉아서【與는 預로 읽는다. 雲臺는 南宮에 있으니, 明帝 永平 3년에 建武 연간의 名臣들과 여러 장수들의 초상을 여기에 그렸다.】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를 考試해서 신의 말대로 저들이 형편없는 무리가 아니면 신이 허망한 죄를 받을 것이요, 만일 제 말대로 저들이 감히 헛된 이름을 사사로이 도둑질하여 上에게 과시하고 높아지기를 구한 것이라면 저들은 모두 크게 不敬한 것입니다.” 하였다.

글을 아뢰자 조서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明王과 聖主는 반드시 빈객이 되지 않는 선비가 있었다. 伯夷와 叔齊【伯夷와 叔齊는 孤竹君의 두 아들이니, 夷와 齊는 시호이다. 姓은 黙氏요 혹은 墨氏(墨胎氏)라고 한다. 孤竹國은 바로 殷나라 湯王이 봉한 것으로 孤竹君은 伯夷, 叔齊의 아버지이니, 이름은 初이고 字는 子朝이다. 伯夷는 이름이 元이니 혹은 允이라 하고 字가 公信이며, 叔齊는 이름이 致이니 혹은 智라 하고 字가 公達이다. 伯과 叔은 少長(연소한 자와 연장자)의 字이다.】는 周나라의 녹을 먹지 않았고 太原의 周黨은 朕의 녹을 받지 않았으니, 또한 각기 뜻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비단 40필을 하사하여 돌려보내라.” 하였다.

황제가 젊었을 때 嚴光과 함께 遊學하였는데, 즉위하게 되자 嚴光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齊나라에서 찾아내어【物色은 그 생김새와 얼굴 모습을 그려서 찾아 구한 것이다.】 여러 번 부르니, 嚴光이 비로소 왔다. 諫議大夫를 임명하였으나 받으려 하지 않고 떠나가 富春山【≪新安志≫에 “漢나라 富春縣 서쪽에 富春山이 있으니, 뒤에 富陽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다. ≪後漢書≫ 〈嚴光傳〉을 살펴보면 “富春山에서 밭을 갈았다.” 하였는데, ≪圖經≫에 이 山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이르기를 “지금 嚴陵山이라고 이름한 것이 그가 밭 갈았던 곳이다.” 하였다. 嚴光은 富陽 사람이고 富春山에서 밭을 갈았으니, 그렇다면 嚴陵山이 바로 富春山임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운데에서 밭 갈고 낚시질하여 天壽를 누리고 집에서 죽었다. 王良은 뒤에 沛郡太守와 大司徒, 司直을 지냈는데, 지위에 있을 때에 공손하고 검소하여 삼베 이불을 덮고 질그릇을 사용하였으며 妻子들을 官舍에 들이지 않았다. 뒤에 병 때문에 돌아갔는데, 같은 해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王良이 上京次 滎陽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서 길에 오를 수가 없으므로【任은 音이 임으로 감당한다는 뜻이니, 길에 오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친구를 방문하였는데, 친구가 만나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스러운 말과 뛰어난 계책이 있지 않으면서 높은 지위를 취하고서 어찌 그리도 자주 왕래하여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가?” 하고 마침내 거절하니, 王良이 부끄러워하여 이후로는 연이어 불러도 응하지 않고 집에서 죽었다.

[史略 史評]高平范氏(范仲淹)가 말하였다.

光武帝가 아니었다면 子陵의 높은 절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요, 子陵이 아니었다면 光武帝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本傳曰 은 字子陵이니 少與光武로 同遊學이러니 及光武卽位에 이 乃變姓名하고 隱身不見하다 帝思其賢하야 乃令以物色訪之러니 後에 齊國上言호되 有一男子被羊裘하고 釣澤中이라하야늘 帝疑其光하야 乃備安車玄纁【纁은 淺絳色也라 玄纁은 天地之正色이니 幣帛之色이라】하야 遣使聘之러니 三反而後에 至라 車駕卽日에 幸其館하니 臥不起어늘 帝卽其臥所하야 撫腹曰 咄咄子陵아 不可相助爲理耶아 乃張目熟視曰 昔에 唐堯著德에 巢父洗耳하니 士故有志라 何至相迫乎잇가 帝曰 子陵아 我竟不能下汝耶아하고 於是에 升輿歎息而去러니 復引入하야 論道舊故하야 相對累日하고 因共偃臥할새 以足加帝腹上이라 明日에 太史奏호되 客星이 犯御座甚急이러이다 帝笑曰 朕이 故人嚴子陵으로 共臥爾로라 除爲諫議大夫한대 不屈하고 乃耕於富春山하니 後人이 名其釣處하야 爲嚴陵瀨焉이라하니라

致堂管見曰 善哉라 光武嚴陵君臣之際也여 高平范仲淹이 論之曰 光武於是時에 當屯之初九하야 陽剛方亨이어늘 而能以貴下賤【屯之爲卦 震下坎上이라 當屯難時하야 以陽下陰하야 爲民所歸하니 侯之象也라】하고 子陵於是時에 當蠱之上九하야 衆方有爲어늘 而獨不事王侯【蠱之爲卦 巽下艮上이라 蠱는 事也니 上九는 以剛明之才로 無應援而處事之外하야 無所事之地니 是는 賢人君子不遇於時而高潔自守하여 不累於世務者也라】하니 非光武면 不能遂子陵之高요 非子陵이면 不能成光武之大也라하니라 先君子有言曰 創業垂統與增光前烈之君이 待遇臣下에 其(體)[禮]雖一이나 然嚴威儼恪을 常施於爪牙介冑之士하야 以折其驕悍難使之氣하고 柔巽謙裕를 常施於林壑退藏之人하야 以厲其廉靖無求之節이라 故로 能駕馭人才하고 表正風俗이라 漢高祖能立召田橫於海島之中이로되 而終身不能致四皓하고 世宗이 踞見大將軍이로되 而不冠則不見汲黯하고 光武制御功臣에 不少假借로되 而詔徵處士嚴光等하야 或陛見帝廷할새 伏而不謁하고 或使者再聘호되 不肯就車라 雖博士范升이 有誇上求高之奏로되 帝亦不以爲然하야 各從所志하니라 夫三君者는 內平四海하고 外讋百蠻하니 可謂英雄豪傑之主矣라 然이나 高祖之威 能行於暴秦强楚로되 而不能行於四皓하고 世宗之威 能行於匈奴西域이로되 而不行於汲黯하고 光武之威 行於尋邑王郞【王尋王邑은 竝見十五卷癸未年이라】이로되 而不行於嚴光周黨은 何也오 威有所當加하고 勢有所當屈하니 加於所當加以立威則强이요 屈於所當屈以忘勢則昌이라 反是道者는 難乎免於亂亡之禍矣니라

[新增]尹氏嚴光之節이 奮乎百世之上하니 下聞者莫不興起而見之어늘 乃與周黨王良竝召하니 觀范升之毁黨과 與友人之誚良하면 則二人은 非之比 明矣니 宜之愈不屈也라 且은 乃帝握手故人이어늘 帝不以手書招致하고 乃以詔書從事는 何哉오 嘗卽光傳考之컨대 見其譏切侯霸之語【本傳에 光이 三聘而後至하니 司徒侯霸 與光素舊라 遣使奉書하고 使人因謂光曰 公聞先生至하고 區區欲卽詣造로되 迫於典司하야 是以不獲이로라 光乃投札하고 與之口授曰 君房이 位至鼎足하니 甚善이라 懷仁輔義天下悅이요 阿諛順旨要領絶이라하다 霸得書하고 封奏之한대 帝笑曰 狂奴古態也라하니라 君房은 霸字也라】하면 則은 固非碌碌隱者라 況은 少有高名하고 帝旣與之同學하니 必知其才智果有大過人者라 是以로 始焉에 帝思其賢하고 而終焉에 帝傷惜之하니 向使帝不屈以官爵하고 而惟以故人待之하야 從容訪問이면 必有興治致化之方하야 補益中興이어늘 惜乎라 帝不及此爾라 按中元二年丁巳歲에 帝聖壽六十二니 則是今年己丑은 蓋三十有四矣라 以建武十七年으로 再召不屈이라가 至年八十終이어늘 帝猶詔郡縣하야 賜錢穀하니 由是推之컨대 當光同學之時하야 固已年尊於帝라 至帝君臨大寶하야 召至闕下하야는 是時에 蓋亦年踰耳順矣라 以年尊德邵之人으로 帝不能待以賓師之禮하고 乃欲臣而用之하니 宜乎之不應也라 後之論者 但知之不屈爲高하고 而不知之所以不屈者 其意固自有在하야 特其識量素高라하니 此意渾然하야 不露圭角이라 是以로 天下後世 莫得而測識爾라 故로 備而論之하노라

《後漢書》〈嚴光傳〉에 말하였다.

嚴光은 字가 子陵이니, 젊어서 光武帝와 함께 遊學하였는데, 光武帝가 卽位하자 嚴光이 마침내 姓名을 바꾸고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어짊을 생각하여 마침내 물색해서 찾게 하였는데, 뒤에 齊나라에서 上言하기를 ‘한 남자가 양가죽 갖옷을 입고 못 가운데에서 낚시질을 한다.’ 하였다. 황제는 그가 嚴光인가 의심하여 마침내 安車와 玄纁【纁은 옅은 붉은색이다. 玄纁은 天地의 正色이니 幣帛의 색깔이다.】의 폐백을 갖추어서 使者를 보내 초빙하였는데, 세 번 갔다 돌아온 뒤에야 嚴光이 이르렀다. 車駕가 당일로 그가 머무는 館舍에 행차하니, 嚴光이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누워 있는 곳으로 나아가 嚴光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아, 子陵아. 서로 도와 정치를 할 수 없는가?’ 하니, 嚴光이 마침내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말하기를 ‘옛날에 가 德을 드러냄에 巢父가 귀를 씻었으니, 선비는 본래 뜻이 있는 법입니다. 어찌 내버려 두지 않고 서로 핍박함에 이르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子陵아, 내가 끝내 너를 굴복시킬 수 없단 말인가?’ 하고는 이에 수레를 타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뒤에 다시 嚴光을 불러 궐 안에 들어오게 해서 옛날 일을 논하고 말하여 여러 날 동안 상대하고, 인하여 함께 누워 잘 적에 嚴光이 발을 황제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太史가 아뢰기를 ‘客星이 御座星를 침범하여 몹시 급박하였습니다.’ 하니,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朕이 옛 친구인 嚴子陵과 함께 잤기 때문이다.’ 하였다. 嚴光에게 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富春山에서 밭을 가니, 후세 사람들이 그가 낚시질하던 곳을 이름하여 嚴陵瀨라 하였다.”

致堂(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훌륭하다. 光武帝嚴陵의 군신간이여! 高平의 范仲淹이 논하기를 ‘光武帝는 이때에 屯卦의 初九爻를 당하여 陽剛이 막 형통하였는데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낮추었고,【屯卦는 震이 아래에 있고 坎이 위에 있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 陽으로 陰에게 낮추어 백성들이 歸依하는 바가 되었으니, 王侯의 象이다.】子陵은 이때에 蠱卦의 上九爻를 당하여 여러 사람들이 막 훌륭한 일을 하였는데 홀로 王侯를 섬기지 않았으니,【蠱卦는 巽이 아래에 있고 艮이 위에 있다. 蠱는 일이니, 上九는 剛明한 才質로 應援이 없고 일의 밖에 처하여 일하는 바가 없는 자리이니, 이는 賢人과 君子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고결함으로 스스로 지켜서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이다.】光武帝가 아니었다면 子陵의 높은 절개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子陵이 아니었다면 光武帝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先君子(先親, 胡安國을 가리킴)께서 말씀하기를 ‘창업하여 전통을 드리우고 前烈을 빛내는 군주가 신하를 대우할 적에 그 禮가 비록 똑같으나 위엄 있고 엄숙하고 삼감을 항상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는 爪牙의 용사에게 베풀어서 그 교만하고 사나워 부리기 어려운 기운을 꺾었고, 유순하고 겸손하고 굽힘을 항상 林壑에 물러가 은둔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서 청렴하고 안정하여 바람이 없는 절개를 장려하였다. 그러므로 능히 人才를 마음대로 부리고 풍속을 바로잡은 것이다.

漢나라 高祖田橫을 海島의 가운데에서 불렀으나 종신토록 四皓를 데려오지 못하였고, 世宗(武帝)이 걸터앉아 大將軍衛靑를 만나 보았으나 冠을 쓰지 않고서는 汲黯을 만나 보지 못하였고, 光武帝가 功臣들을 제어할 때에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으나 處士嚴光 등을 詔書로 불러서 혹은 뜰에서 황제를 뵐 때에 엎드리기만 하고 배알하지 않았으며 혹은 使者가 두 번 聘問하였으나 수레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博士范升이 윗사람에게 과시하고 높은 것을 구한다는 아룀이 있었으나 황제는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각각 뜻한 바를 따르게 하였다.

세 군주들은 안으로 四海를 평정하고 밖으로 여러 오랑캐들을 두렵게 하였으니, 영웅호걸의 군주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高祖의 위엄이 사나운 秦나라와 강한 楚나라에 행해졌으나 四皓에게는 행해지지 못하였고, 世宗의 위엄이 匈奴와 西域에 행해졌으나 汲黯에게는 행해지지 못하였고, 光武帝의 위엄이 王尋‧王邑‧王郞【王尋과 王邑에 대한 내용은 모두 15卷 癸未年條(23 更始元年)에 보인다.】에게 행해졌으나 嚴光周黨에게 행해지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위엄은 마땅히 가해야 할 상대가 있고 세력은 마땅히 굽혀야 할 상대가 있으니, 마땅히 가해야 할 상대에게 가하여 위엄을 세우면 강해지고, 마땅히 굽혀야 할 상대에게 굽혀서 권세를 잊으면 창성해진다. 이 道를 반대로 하는 자는 亂亡의 禍를 면하기 어렵다.’ 하였다.”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嚴光의 절개가 百世의 위에서 떨치니 아래(뒤)에서 듣는 자들이 흥기하여 보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마침내 周黨王良과 함께 불렀으니, 范升周黨을 훼방한 것과 친구가 王良을 꾸짖은 것을 보면 이들 두 사람은 嚴光의 비교 대상이 아님이 분명한 바, 嚴光이 더욱 굽히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또 嚴光은 황제와 손을 잡는 친구였는데 황제가 手書(親書)로써 초치하지 않고 마침내 詔書로써 불러 종사함은 어째서인가?

일찍이 《後漢書》〈嚴光傳〉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侯霸를 기롱한 말【≪後漢書≫ 〈嚴光傳〉에 嚴光이 세 번 초빙한 뒤에 이르니, 司徒 侯霸는 嚴光과 평소 친구였다. 사자를 보내어 편지를 올리고, 사람을 시켜 嚴光에게 이르기를 “侯公은 선생이 왔다는 말씀을 듣고 구구히 즉시 찾아가고자 하나 맡은 사무에 급하여 이 때문에 오실 수 없습니다.” 하니, 嚴光이 마침내 편지를 던져 버리고 그에게 입으로 전하기를 “君房이 지위가 鼎足(정승)에 이르렀으니 매우 좋다. 仁을 품고 義로 도우면 천하가 기뻐할 것이요, 아첨하여 군주의 뜻에 순종하면 허리와 목이 끊어질 것이다.” 하였다. 侯霸가 이 편지를 받고는 봉함하여 아뢰자,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미친 종의 옛 태도이다.” 하였다. 君房은 侯霸의 字이다.】을 보면 嚴光은 진실로 녹록한 은자가 아니다. 더구나 嚴光은 젊어서부터 높은 명망이 있었고 황제가 이미 그와 함께 배웠으니, 반드시 그의 재주와 지혜가 과연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남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 皇帝가 그의 어짊을 생각하였고 나중에 皇帝가 그가 떠나는 것을 서글퍼하고 애석히 여긴 것이니, 그때 만일 황제가 嚴光에게 관작으로써 굽히지 말고 오직 친구로만 대우해서 조용히 계책을 물었더라면 반드시 다스림을 일으키고 교화를 이루는 방법이 있어서 中興에 보탬이 되었을 터인데 황제가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살펴보면 中元 2년 정사년에 황제의 聖壽가 62세였으니, 그렇다면 올해 기축년은 34세이다. 嚴光이 建武17년에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은둔한 뜻을 굽히지 않다가 나이 80세에 죽었는데, 황제는 오히려 郡縣에 명해서 돈과 곡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嚴光이 황제와 함께 배울 때를 당하여 진실로 이미 나이가 황제보다 많았을 것이다. 황제가 寶位에 군림해서 嚴光을 불러 闕下에 이르렀을 때에는 嚴光이 이때 또한 나이가 耳順(60세)을 넘었다. 나이가 많고 德이 높은 사람을 황제가 손님과 스승의 禮로 대우하지 못하고 도리어 신하로 삼아 등용하고자 하였으니, 嚴光이 응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은 다만 嚴光이 굽히지 않은 것이 높은 줄만 알고 嚴光이 굽히지 않은 까닭이 그 뜻이 진실로 다른 데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다만 그 지식과 도량이 평소 높았다고 하니, 이 뜻이 모나지 않고 渾然하여 圭角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하와 후세가 측량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자세히 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