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十五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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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孺子嬰

舊以王莽紀年이어늘 今黜而正之하노라

孺子【[增校]舊以王莽紀年이어늘 今黜而正之하노라】廣威侯之孫이요 之子也니 年二歲에 王莽立之라 在位三年이라 附王莽※이라 字巨君이니 王曼子라 改國號曰新이라 ○ 僭位一十八年에 漢兵殺之하니라

이 匿情求名하고 繼四父而輔政하야 遂移漢祚러니 恃其詐慝하고 煩民玩兵이라가 罪盈怨積하야 而天下畔之하니라

孺子【[增校]옛날에는 王莽을 紀元하여 햇수를 기록하였는데, 지금 물리치고 바로잡았다.】廣威侯劉勳의 손자이고 劉顯의 아들이니, 2세 때에 王莽이 그를 황제로 세웠다. 재위가 3년이다. 뒤에 王莽※을 붙인다. 王莽은 字가 巨君이니, 王曼의 아들이다. 王莽은 국호를 新으로 고쳤다.

王莽이 황제의 지위를 참람하게 차지한 지 18년 만에 漢나라 군사가 죽였다.

王莽이 實情을 숨겨 명예를 구하고 네 叔父를 이어 정사를 보필하여 마침내 漢나라 國統을 옮겼는데, 사특함을 믿고는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고 군대를 함부로 동원하였다가 죄가 가득 차고 원망이 쌓여서 천하가 배반하였다.

[丙寅]居攝元年

[丙寅]居攝元年이라

三月에 이 立宣帝玄孫하야 爲皇太子하고 號曰孺子【幼少之稱也라 元帝世絶하고 宣帝曾孫은 有見王五人, 列侯四十八人하니 莽惡其長大하야 曰 兄弟不得相爲後라하고 乃悉徵宣帝玄孫하야 選立之하니 時年{十}二라 託以卜吉이라하야 立之하니라】라하다

居攝 元年(병인 6)

3월에 王莽宣帝의 玄孫을 세워 황태자로 삼고, 이름을 孺子【孺子는 어린아이의 칭호이다. 元帝는 代가 끊겼으며, 宣帝의 曾孫은 현재 王의 지위에 있는 자가 5명이고 列侯가 48명이 있었는데, 王莽이 그들이 장성함을 싫어하여 말하기를 “형제는 서로 후계자가 될 수 없다.” 하고는 이에 宣帝의 玄孫을 모두 불러서 그중에 가려 세웠으니, 이때 孺子의 나이가 2세였다. 점괘가 길하다고 칭탁하여 그를 세웠다.】라 하였다.

○ 五月에 詔假皇帝하다

○ 5월에 〈太皇太后가〉 명하여 王莽假皇帝라 칭하게 하였다.

[丁卯]二年

[丁卯]二年이라

東郡太守翟義【翟方進之子也라】 擧兵西하야 誅不當攝者라하고 移檄郡國하니 衆이 十餘萬이라 이 聞之하고 惶懼不能食하야 乃使王邑等으로 擊義하고 이 依周書하야 作大誥하야 諭告天下以當返位孺子之意하니 於是에 吏士攻義破之하다 〈出莽傳〉

居攝 2년(정묘 7)

東郡太守翟義【翟義는 翟方進의 아들이다.】가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攝政해서는 안 되는 자를 주벌한다.’ 하고는 郡國에 檄文을 돌리니, 병력이 10여만 명이었다. 王莽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밥을 먹지 못하고는 이에 王邑 등으로 하여금 翟義를 공격하게 하였다. 王莽이 〈周書〉를 따라 〈大誥〉를 지어서 天子의 지위를 孺子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천하에 告諭하니, 이에 관리와 군사들이 翟義를 공격하여격파하였다.- 《漢書 王莽傳》에서 나옴 -

[戊辰]初始元年

[戊辰]初始元年이라

이 自謂威德日盛하야 大獲天人之助라하야 遂謀卽眞之事矣라 十一月에 以居攝三年으로 爲初始元年하고 卽眞天子位하야 定有天下之號曰新이라하다

初始 元年(무진 8)

王莽은 스스로 위엄과 德이 날로 성대하여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크게 얻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진짜 황제에 즉위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11월에 居攝 3년을 初始 元年이라 하고 진짜 天子의 지위에 즉위하여 천하를 소유한 칭호[國號]를 정하여 新이라 하였다.

[己巳]新莽始建國

[己巳]〈新始建國元年〉

春正月에 이 廢孺子하야 爲安定公하고 孝平皇后로 爲安定太后하다

기사(9) - 新나라 王莽始建國 元年 -

봄 정월에 王莽孺子를 폐하여 安定公으로 삼고, 孝平皇后安定太后라 하였다.

이 因漢承平之業과 府庫百官之富하야 百蠻이 賓服하고 天下晏然이라 이 一朝有之하니 其心意未滿하야 陿小漢家制度하고 欲更爲疏闊하야 乃曰 古者에 一夫田百畝하고 什一而稅호되 則國給民富하야 而頌聲作이러니 秦이 壞聖制하야 廢井田하니 是以로 兼幷起하고 貪鄙生하야 彊者는 規田以千數하고 弱者는 曾無立錐之居라 漢氏減輕田租하야 三十而稅一호되 常有更賦하야 罷癃咸出하고 而豪民侵陵하야 分田劫假【劫은 謂富人이 劫奪其稅하야 侵欺之也요 假는 謂貧人이 賃富人之田也라[釋義]分田은 謂貧者無田하야 取富者田耕하고 共分所取也라】하니 厥名은 三十稅一이나 實什稅伍也라 故로 富者는 犬馬餘菽粟하야 驕而爲邪하고 貧者는 不厭糟糠하야 窮而爲姦하야 俱陷于辜하야 刑用不錯【錯는 置也라 古者에 民不犯法하야 刑錯而不用이러니 今則刑用而不錯라】라 今更名天下田曰王田이라하고 奴婢曰私屬이라하야 皆不得賣買하고 其男口不盈八而田過一井者는 分餘田하야 予九族隣里鄕黨하고 敢有非井田聖制하야 無法惑衆者어든 投諸四裔【四裔之地는 去王城四千里라 裔는 衣裾也라】하야 以禦魑魅【魑는 音螭니 山神也요 魅는 音媚니 老物精也라】하라 〈出莽傳〉

[新增]胡氏曰 井田은 良法이니 致治之本也라 古之帝王이 以天下爲公하여 視民飢寒을 如在己라 故로 均地利以子民하고 而不專其奉하며 加以公卿諸侯選賢擧德하야 共行此道하야 持以悠久라 故로 法立而弊不生하여 維持千有餘年이러니 及秦廢之하고 漢不能復이라 至董仲舒하여 始欲以限田으로 漸復古制하여 其意甚美라 然이나 終不能行者는 以人主自爲兼幷하여 無以使民興於廉也라 又況賊而能行乎아 然이나 井田은 實萬世之良法이요 而買賣奴婢之禁도 亦仁政所當先이니 不可以所嘗爲而指以爲非也니라

王莽은 漢나라의 承平(太平)한 基業과 府庫‧百官의 풍부함을 인습하여 여러 오랑캐들이 복종하고 천하가 편안하였다. 王莽이 하루아침에 이를 소유하니, 그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여 漢나라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기고는 다시 크게 넓히고자 하여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에 한 지아비가 백 묘를 경작하고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나라가 넉넉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칭송하는 소리가 일어났는데, 秦나라가 聖人의 제도를 파괴하여 井田法을 폐지하니, 이 때문에 한 사람이 田地를 兼幷하는 폐단이 일어나며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서, 강한 자는 전답을 소유한 것이 千으로 헤아리고 약한 자는 일찍이 송곳을 꽂을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漢나라는 농지의 조세를 경감하여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으나 항상 그 밖에 다시 걷는 세금이 있어서 늙고 병든 자들이 모두 나오고, 豪族들이 침해하고 능멸해서 가난한 자들은 부자의 전답을 부쳐 먹고 부자는 도지세를 받아가니,【[原註]劫은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가난한 사람의〉 세금을 빼앗아 침해하고 속이는 것이고, 假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의 田地를 세내어 경작하는 것이다.[釋義]分田은 가난한 자가 田地가 없어서 부자의 田地를 취하여 경작하고 소득을 함께 나눔을 이른다.】 명목상으로는 3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나 실제는 10분의 5를 세금으로 거두었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개와 말에게 곡식과 콩을 먹이고도 남아서 교만하여 간사한 짓을 하고, 가난한 자는 술지게미와 겨도 배불리 먹지 못해서 곤궁하여 간악한 짓을 하여, 모두 죄에 빠져서 형벌이 이 때문에 폐지되지 못하였다.【錯는 버려둠이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법을 범하지 않아서 형벌을 폐지하고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형벌을 쓰고 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천하의 田地를 명칭을 바꾸어 王田이라 하고 노비를 私屬이라 하여 모두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숫자가 여덟 명 미만이면서 田地가 1井(9百畝)을 넘는 자는 남는 토지를 나누어 주어 九族과 隣里와 鄕黨에 주게 하며, 감히 聖人의 제도인 井田法을 비난하여 법을 무시하고 대중을 미혹시키는 자가 있으면 四裔(사방 먼 곳)【四裔의 땅은 王城에서 4천 리 떨어진 곳이다. 裔는 옷깃이다.】로 귀양 보내어 魑魅(도깨비)【魑는 음이 리이니 山神이고, 魅는 음이 미(매)이니 낡고 오래된 물건의 妖精이다.】를 막게 하라.” 하였다.- 《漢書 王莽傳》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井田은 좋은 제도이니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이다. 옛날 帝王들은 天下를 公共으로 여겨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자신의 몸에 飢寒이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얻는 이익을 균등하게 하여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 봉양을 독차지하지 않았으며, 겸하여 公卿과 諸侯들을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함께 이 道를 행하여 오랫동안 지켰다. 그러므로 法이 확립되고 폐단이 생기지 않아서 천여 년을 유지하였는데, 秦나라에 이르러 井田法을 폐지하였고 漢나라는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董仲舒에 이르러 처음으로 限田法으로 옛 제도를 점차 회복하고자 하여 그 뜻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끝내 이것을 시행하지 못한 것은 군주가 스스로 兼幷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청렴함을 흥기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하물며 역적인 王莽이 이것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井田法은 실로 萬代의 좋은 법이고 奴婢의 賣買를 금지한 것도 또한 仁政에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王莽이 일찍이 했던 것이라 하여 나쁜 제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辛未]新莽三年

[辛未]〈新莽三年〉

이 恃府庫之富하고 欲立威匈奴하야 乃遣[[孫(惠)[建]]]等하야 率十二將하고 分道竝出이어늘 嚴尤諫曰 匈奴爲害 所從來久矣로되 未聞上世有必征之者也니이다 後世三家周, 秦, 漢이 征之나 然而未有得上策者也요 周得中策하고 漢得下策하고 秦無策焉이라 周宣王時에 玁狁【按匈奴之號는 唐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獯鬻이요 夏曰淳維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漢曰匈奴라】內侵하야 至于涇陽이어늘 命將征之하야 盡境而還하니 其視玁狁之侵을 譬猶蟁(蚊)蝱하야 敺之而已라 故로 天下稱明하니 是爲中策이니이다 漢武帝는 選將鍊兵하고 約齎輕糧하야 深入遠戍하야 雖有克獲之功이나 胡輒報之라 兵連禍結하야 三十餘年에 中國疲弊하고 匈奴亦創艾(刈)而天下稱武하니 是爲下策이니이다 秦皇은 不忍小恥而輕民力하야 築長城하니 延袤萬里라 轉輸之行이 起於負海하야 疆境旣全호되 中國內竭하야 以喪社稷하니 是爲無策이니이다 今天下比年飢饉【穀不熟曰飢요 菜不熟曰饉이라】호되 北邊이 尤甚하니 大用民力이라도 功不可必이니 臣伏憂之하노이다 이 不聽하다

신미(11) - 新莽 3년 -

王莽은 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孫建 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이에 嚴尤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匈奴가 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세 나라인 周나라‧秦나라‧漢나라가 정벌하였으나 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周나라는 中策을 얻었고 漢나라는 下策을 얻었으며 秦나라는 無策이었습니다.

周나라 宣王 때에 玁狁(匈奴)【살펴보건대 匈奴의 칭호는 唐‧虞 이전에는 山戎이라 하고 또한 獯鬻이라 하였으며, 夏나라는 淳維, 殷나라는 鬼方, 周나라는 玁狁, 秦‧漢은 匈奴라 하였다.】이 국내로 침입하여 涇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쫒고 돌아왔으니, 玁狁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中策이 됩니다.

漢나라 武帝는 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軍裝과 양식을 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 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戰亂과 禍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지 30여 년에 中國이 피폐해지고 匈奴 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武帝라고 일컬으니 이는 下策이 됩니다.

秦나라 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無策이 됩니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飢饉【곡식이 성숙하지 않은 것을 飢라 하고, 채소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饉이라 한다.】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功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엎드려 이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王莽이 듣지 않았다.

○ 北邊이 自宣帝以來로 數世를 不見煙火之警하야 人民熾盛하고 牛馬布野러니 及이 撓亂匈奴하야 與之構難에 邊民이 死亡係獲하니 數年之間에 北邊이 空虛하고 野有暴骨矣러라 〈出匈奴傳〉

○ 북쪽 邊境이 宣帝 이래로 여러 대 동안 봉화불을 올려 경계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人民들이 번성하고 소와 말이 들에 널려 있었는데, 王莽이 흉노를 소란하게 하여 그들과 병란을 일으킴에 미쳐서는 변경의 백성들이 사망하고 포로로 잡히니, 몇 년 사이에 북쪽 변경이 텅 비고 들에는 버려진 해골이 있었다. - 《漢書 匈奴傳》에 나옴 -

이 遣使者하야 奉璽書印綬하고 迎龔勝하니 이 稱病篤이라 使者以印綬로 就加身한대 이 輒推不受하고 謂門人高暉等曰 吾受漢家厚恩하야 無以報요 今年老矣라 誼豈以一身事二姓이리오하고 語畢에 遂不復開口飮食하야 積十四日에 死하니라 〈出勝傳〉

王莽이 使者를 보내어 璽書와 印綬를 받들고 가서 龔勝을 맞이하니, 龔勝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었다. 使者가 印綬를 가지고 가서 龔勝의 몸에 가하자 龔勝이 곧 물리치고 받지 않고, 門人 高暉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漢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하지 못하고 이제 나이가 늙었다. 의리상 어찌 한 몸을 가지고 두 姓의 군주를 섬기겠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자, 마침내 다시는 입을 벌려 음식을 먹지 않아서 14일 만에 죽었다.- 《漢書 龔勝傳》에 나옴 -

○ 是時에 淸名之士에 又有逡, 薛方, 越, 郇相, 唐林, 唐遵하니 皆以明經飭行으로 顯名於世라 紀逡兩唐은 皆仕하고 郇相은 爲太子四友【莽爲太子하야 置師友各四人호되 秩以大夫하니 師疑傅丞阿輔保弼이 是爲四師요 胥附犇走先後禦侮是爲四友라】하다 이 以安車迎薛方한대 謝曰 , 在上에 下有, 【巢父, 許由也라 高士傳에 許由는 字武仲이니 聞堯治天下而讓焉하고 遁於潁水之陽, 箕山之下하니라 堯又召爲九州之長한대 由不欲聞之하야 洗耳於潁濱이러니 巢父牽犢欲飮之라가 見由洗耳하고 曰 汚吾犢口라하고 遂牽犢上流하야 飮之하니라】라 今明主方隆唐虞之德하시니 小臣이 欲守箕山之節하노이다 이 說其言하야 不彊致하니라

班固贊曰 春秋列國卿大夫로 及至漢興將相名臣히 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라 是故로 淸節之士 於是爲貴나 然大率多能自治而不能治人이라 王貢之材【前漢王吉與貢禹라】는 優於龔鮑로되 守死善道는 勝實蹈焉이요 貞而不諒【貞은 正而固也요 諒은 則不擇是非而必於信이라】薛方近之하고 郭欽蔣詡는 好遯不汚하야 絶矣니라 〈出鮑宣等傳〉

○ 이때 깨끗한 명성이 있는 선비 중에 또 紀逡薛方郇越郇相唐林唐遵이 있었는데, 모두 經學에 밝고 행실을 삼가는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紀逡唐林唐遵은 모두 王莽에게 벼슬하였고, 郇相王莽의 太子의 四友【王莽이 太子를 위하여 師와 友를 각각 네 사람씩 두었는데 大夫의 품계로 하였는 바, 師疑‧傅丞‧阿輔‧保弼을 四師라 하고 胥附‧犇走‧先後‧禦侮를 四友라 하였다.】가 되었다. 王莽이 安車로 薛方을 맞이하자, 薛方은 사양하기를 “이 임금으로 계실 때에 아래에는 巢父許由【[附註]巢, 由:巢와 由는 巢父와 許由이다. ≪高士傳≫에 “許由는 자가 武仲이니, 堯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다가 그에게 사양한다는 말을 듣고는 潁水의 물가 箕山의 아래에 은둔하였다. 堯임금이 또다시 불러 九州의 長으로 삼자, 許由는 그 말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여 潁水 가에서 귀를 씻었는데, 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서 이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許由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내 송아지 입을 더럽힐 뻔 했다.’ 하고는 마침내 송아지를 끌고 上流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하였다.】가 있었습니다. 지금 현명한 군주께서 막 의 德을 높이시니, 小臣은 箕山의 절개를 지키고자 합니다.” 하니, 王莽이 그 말을 기뻐하여 억지로 데려가지 않았다.

班固의 《漢書》〈王貢兩龔鮑傳〉 贊에 말하였다.

“春秋時代 列國의 卿大夫로부터 漢나라가 일어난 뒤의 將相과 名臣들에 이르기까지 祿을 생각하고 은총을 탐하여 대대로 지켜 오는 문벌을 잃는 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깨끗한 절개를 지키는 선비가 이에 귀하였다. 그러나 깨끗한 절개가 있는 선비들은 대체로 자기 몸은 잘 다스리지만 남을 잘 다스리지는 못한다. 王吉과 貢禹【王貢은 前漢 때의 王吉과 貢禹이다.】의 재주가 龔勝鮑宣보다 나았지만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道를 잘한 것은 龔勝이 실로 이를 행하였으며, 바르고 곧으며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貞은 바르고 곧음이요, 諒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信만 기필하는 것이다.】薛方이 이에 가까웠고, 郭欽과 蔣詡는 은둔하기를 좋아하고 몸을 더럽히지 않아 紀逡唐林唐遵보다 크게 뛰어났다.”

[丁丑]天鳳四年

[丁丑]〈天鳳四年〉

이 性躁擾하야 不能無爲라 每有所興造에 動欲慕古하야 不度時宜하고 制度를 又不定하니 吏緣爲姦【吏는 治人者也니 旁緣而爲姦欺라】이라 天下謷謷하야 陷刑者衆이러라 〈出食貨志〉

정축(17) - 天鳳 4년 -

王莽은 성품이 조급하여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매번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만들 때마다 번번이 옛 제도를 흠모하여 時宜適切함을 헤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르려 하였으며 제도를 또 정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이로 인해 간악한 짓을 하였다.【吏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이니, 이를 인연하여 간사한 속임수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이 원망하여 형벌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漢書 食貨志》에 나옴 -

의 法令이 煩苛하니 民이 搖手觸禁하야 不得耕桑하고 繇役煩劇하며 而枯旱蝗蟲이 相因하고 獄訟不決이라 吏用苛暴立威하고 旁緣【吏依旁因緣莽之禁制하야 而爲侵刻이라】하야 侵刻小民하니 富者는 不能自保하고 貧者는 無以自存이라 於是에 竝起爲盜賊이라 荊州新市人王匡, 王鳳과 南陽馬武와 潁川王常, 成丹이 共聚藏於綠林山中하야 至七八千人이러라

王莽의 법령이 번거롭고 까다로우니, 백성들이 손만 흔들면 禁網에 저촉되어 농사짓고 누에치지 못하고 繇役이 번다하고 심하였으며, 旱害와 蝗蟲이 서로 이어지고 獄訟을 결단하지 못하였다. 관리들이 가혹하고 포악함으로 위엄을 세우고 王莽의 禁網을 인연(이용)하여【관리들이 王莽의 禁制를 따라서 인연하여 침해한 것이다.】 백성들을 침해하니, 부유한 자는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가난한 자는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어서 이에 함께 일어나 도적이 되었다. 荊州의 新市 사람인 王匡王鳳, 南陽의 馬武, 潁川의 王常成丹이 함께 모여 綠林山 가운데 숨어서 무리가 7, 8천 명에 이르렀다.

[戊寅]五年

[戊寅]〈五年〉

琅琊樊崇이 起兵於莒하니 一歲間에 至萬餘人이러라

무인(18) - 天鳳 5년 -

琅琊 사람 樊崇이 莒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1년 사이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壬午]地皇三年

[壬午]〈地皇三年〉

樊崇等이 聞將討之하고 恐其衆與兵亂하야 乃皆朱其眉하야 以相識別【識는 讀曰誌니 別異也라】하니 由是로 號曰赤眉라하다

임오(22) - 地皇 3년 -

樊崇 등은 王莽이 장차 자신들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 무리들이 王莽의 군대와 뒤섞일까 염려하여, 마침내 모두 눈썹을 붉게 칠하여 서로 표시해서 구별하니,【識는 誌로 읽으니, 구별하여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赤眉라고 불렀다.

○ 初에 長沙定王【景帝子라】의 四世孫南頓令이 生三男하니 , , 은 性이 剛毅慷慨하야 有大節하고 는 隆準日角【隆은 高也요 準은 謂鼻頭也라 日角은 謂庭中骨起하야 狀如日也라】이요 性勤稼穡하니 이 常非笑之【縯好俠養士러니 每見其弟事田業하고 輒非而笑之하니라】하야 比於高祖兄仲【仲은 高祖兄之名也라 高祖曰 始大人이 常以臣亡(無)賴하야 不能治産業하야 不如仲力이라하시더니 今某之(力)[業]이 孰與仲多오하니라】이러라 宛人李守 好星曆讖記【符命之書라 讖은 驗也니 凡讖緯는 皆言將來之驗이라】러니 嘗謂其子劉氏當興이니 李氏爲輔라하더라 及新市, 平林兵【綠林賊이 乃各分散하야 王匡等은 北入南陽하야 號新市兵이라하고 王常等은 西入南郡하야 號下江兵이라하고 平林人陳牧, 廖湛等은 復聚衆千餘人하야 號平林兵이라하고 以應新市하니라】起하야 南陽이 騷動이어늘 의 從弟軼이 謂曰 今四方擾亂하니 漢當復興이라 南陽宗室에 獨劉伯升兄弟 汎愛容衆하니 可與謀大事라한대 이 笑曰 吾意也라하고 遣軼往迎秀하야 與相約結하야 定謀議하고 歸舂陵擧兵【舂陵은 鄕名이니 本屬零陵郡〈冷道縣〉이라 漢元時에 (從)[徙]南陽蔡陽縣白水鄕하고 仍號舂陵하니라 按今道州 古舂陵郡이라】하다 於是에 이 自發舂陵子弟【定王發이 生舂陵節侯買하니라】하니 諸家子弟恐懼하야 皆亡匿이러니 及見秀絳衣大冠【大冠은 武冠也라 俗爲之大冠에 環纓無蕤하고 以靑絲爲緄하야 加雙鶡尾하야 豎左右하고 謂之鶡冠이라하니 鶡은 音芬이니 勇雉也라 其鬪對一死而止니라[頭註]卽將軍服이라】하고 皆驚曰 謹厚者도 亦復爲之라하고 乃稍自安하야 凡得子弟七八千人하야 與下江將王常及新市, 平林兵合하니 於是에 諸部齊心하야 銳氣益壯이러라 〈出光武紀及劉縯, 王常傳〉

○ 처음에 長沙定王 劉發【定王 發은 景帝의 아들이다.】의 4대손인 南頓令劉欽이 세 아들을 낳으니, 劉縯劉仲劉秀이다. 劉縯은 성품이 剛毅하고 慷慨하여 큰 절개가 있고, 劉秀는 콧날이 우뚝하고 이마가 해처럼 불거져 나왔으며【隆은 높음이고 準은 콧날을 이른다. 日角은 이마 가운데의 뼈가 불거져 나와서 모양이 해와 같은 것이다.】 성품이 농사를 부지런히 힘쓰니, 劉縯이 항상 아우를 비웃어서【劉縯은 義俠을 좋아하고 선비를 길렀는데, 그 아우가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는 그때마다 비웃었다.】高祖의 형인 劉仲【劉仲은 高祖의 형의 이름이다. 高祖가 황제가 된 다음 그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처음 大人(부친)께서 항상 저더러 無賴하여 家産을 다스리지 못해서 仲의 힘(노력)만 못하다고 하시더니, 지금 제가 성취한 業이 仲과 더불어 누가 낫습니까?” 하였다.】에게 견주었다. 宛땅 사람 李守가 星曆(점성술)과 讖記(도참설)【讖記는 符命의 글이다. 讖은 징험(징조)이니, 무릇 讖緯는 모두 미래의 〈길흉화복에 대한〉 징조를 말한 것이다.】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그 아들李通에게 이르기를 “劉氏가 마땅히 일어날 것이니, 우리 李氏가 보필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新市와 平林의 군대【綠林山의 賊들이 마침내 각각 분산하여 王匡 등은 북쪽으로 南陽에 들어가 이름을 新市兵이라 하고, 王常 등은 서쪽으로 南郡에 들어가 이름을 下江兵이라 하고, 平林 사람 陳牧과 廖湛 등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平林兵이라 이름하고 新市에 응하였다.】가 일어나 南陽이 소란하자, 李通의 從弟인 李軼李通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방이 소란하니, 漢나라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이다. 南陽의 宗室 중에 유독 劉伯升(劉縯) 형제가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무리들을 포용하니, 함께 大事를 도모할 수 있다.”라고 하자, 李通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고, 李軼을 보내어 가서 劉秀를 맞이해서 서로 약속하여 計策을 정하고 舂陵으로 돌아가 군대를 일으키게 하였다.【舂陵은 고을 이름이니, 본래 零陵郡 冷道縣에 속하였다. 漢나라 元帝 때에 南陽郡의 蔡陽縣 白水鄕으로 옮기고 인하여 舂陵이라 이름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道州가 옛날의 舂陵郡이다.】

이에 劉縯이 스스로 舂陵의 자제들【定王 發이 舂陵節侯 買를 낳았다.】을 징발하니, 여러 집의 자제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해 숨었는데, 劉秀가 붉은옷에 큰 관【[釋義]大冠은 武冠이다. 세속에서 큰 冠을 만들 때에 고리로 갓끈을 만들되 끈을 늘어뜨림이 없고, 푸른 실로 끈을 만들어 鶡(새 이름)의 두 꼬리를 加하여 좌우에 세우고 이것을 鶡冠이라 하였다. 鶡은 음이 분이니, 용맹한 꿩인데, 둘이 싸워 하나가 죽어야만 싸움을 그친다.[頭註]붉은옷에 큰 관은 바로 장군의 복장이다.】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근후한 자도 다시 이 일을 한다.” 하고, 이에 차츰 저절로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7, 8천 명을 얻어서 下江의 장수인 王常新市平林의 군대와 합하니, 이에 여러 부대가 마음을 함께하여 銳氣가 더욱 壯大하였다.- 《漢書》〈光武帝紀〉와 〈劉縯傳〉, 〈王常傳〉에 나옴 -

漢紀 淮陽王

光武三從兄이라 乙酉十一月에 赤眉殺之한대

淮陽王光武三從兄이라 乙酉十一月에 赤眉殺之한대 光武鄧禹하야 葬之於霸陵하니라】※ 名이요 字聖公이니 光武族兄이라 在位二年이라

末에 漢兵起하야 無所統一이라 諸將共議하야 立聖公爲帝러니 其後兵敗하야 降於赤眉라 建武元年에 光武詔封爲淮陽王하니라 人心思漢하야 衆共立之나 天下大器 豈庸才所能得哉아

淮陽王※【淮陽王은 光武帝의 三從兄이다. 을유년 11월에 赤眉가 그를 죽이자, 光武帝가 鄧禹에게 명하여 霸陵에 장례하게 하였다.】은 이름이 이고 자가 聖公이니, 光武帝의 族兄이다. 재위가 2년이다.

王莽 말년에 漢나라 군대가 일어나 통일된 바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이 함께 의논하여 聖公을 세워 황제로 삼았는데, 그 뒤에 군대가 패배하여 赤眉에게 항복하였다. 建武 元年에 光武帝가 명하여 淮陽王에 봉하였다. 人心이 漢나라를 그리워하여 대중들이 함께 황제로 세웠으나 천하의 大器(황제의 자리)가 어찌 용렬한 재주를 가진 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癸未]更始元年

[癸未]〈更始元年〉

正月에 漢兵이 圍宛하다 舂陵戴侯【節侯生戴侯熊渠하니라】曾孫이 在平林兵中하야 號를 始將軍이라하니 時에 漢兵이 已十餘萬이라 欲立劉氏하야 以從人望할새 南陽豪傑과 及王常等은 皆欲立劉縯이로되 而新市, 平林將帥는 樂放縱하야 憚威明하고 貪玄懦弱하야 先共定策立之하다 이 卽皇帝位하야 朝群臣할새 羞愧流汗하고 擧手不能言하니 由是로 豪傑失望하야 多不服이러라 〈出齊武王縯傳〉三月에 偏將軍劉秀等이 徇昆陽, 定陵, 郾하야 皆下之하다 이 遣王邑, 王尋하야 發兵平定山東하고 又驅諸猛獸虎豹犀象之屬하야 以助威武하고 號를 百萬이라하야 縱兵圍昆陽하다

계미(23) - 更始 元年 -

정월에 漢나라 군대가 宛邑을 포위하였다. 舂陵 戴侯【舂陵節侯(劉買)가 戴侯 劉熊渠를 낳았다.】曾孫劉玄이 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漢나라 군대가 이미 10여 만이었다. 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南陽의 호걸들과 王常 등은 모두 劉縯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新市와 平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劉縯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劉玄을 세웠다. 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 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後漢書 齊武王縯傳》에 나옴 -

3월에 偏將軍劉秀 등이 昆陽, 定陵, 郾을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王莽王邑王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山東 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 여러 맹수인 호랑이‧표범‧무소‧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百萬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昆陽을 포위하였다.

彭이 守宛이러니 漢兵이 攻之數月에 乃擧城降이어늘 更始入都之하다

岑彭이 宛邑을 지키고 있었는데, 漢나라 군대가 공격한 지 수개월 만에 마침내 온 城이 항복하므로 更始가 들어가 도읍하였다.

劉秀至郾, 定陵하야 悉發諸營兵俱進할새 自將步騎千餘하야 爲前鋒하니 尋, 邑이 亦遣兵數千하야 合戰할새 犇之하야 斬首數千級한대 諸將이 喜曰 劉將軍이 平生에 見小敵怯이러니 今見大敵勇하니 甚可怪也라하더라 復進한대 , 兵이 却이어늘 諸部共乘之하야 斬首數百千級【八九百或千人也라】하고 連勝遂前하야 乘銳崩之하니 諸將이 膽氣益壯하야 無不一當百이라 遂殺王尋하고 城中이 亦鼓譟而出하야 中外合勢하니 震呼動天地라 兵이 大潰하다 會에 大雷風하야 屋瓦皆飛하고 雨下如注하야 滍川【滍水는 出南陽魯陽縣하야 東北入汝라】이 盛溢하니 虎豹皆股戰하고 士卒이 赴水溺死者以萬數라 水爲不流러라 王邑, 嚴尤 輕騎로 乘死人하고 度(渡)水逃去어늘 盡獲其軍實輜重【軍實은 謂車徒器械芻糧之類요 輜重은 註見前하니라】하니 於是에 海內豪傑이 翕然響應하야 皆殺其牧守하고 自稱將軍하야 用漢年號하고 以待詔命이러라

劉秀가 郾과 定陵에 이르러 여러 진영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함께 진격할 때에 스스로 步兵과 騎兵 천여 명을 인솔하여 선봉이 되니, 王尋王邑 또한 수천 명의 군대를 보내어 會戰하였다. 이때 劉秀가 적진으로 달려가 수천 명의 首級을 베니,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劉將軍이 평소에 대수롭지 않은 敵을 보고는 겁을 먹더니, 이제 강한 적을 보고는 용감하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劉秀가 다시 진격하자, 王尋王邑의 군대가 퇴각하였다. 여러 부대가 함께 이 틈을 타서 8, 9백 명에서 천 명에 이르는 적의 首級【數百千은 8, 9백 명 혹은 천 명이다.】을 베고 連戰連勝하여 마침내 전진해서 銳氣를 타고 적을 무너뜨리니, 여러 장수들의 담력이 더욱 커져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王尋을 죽였으며, 昆陽城 안에서 또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와 성의 안팎이 합세하니,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王莽의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마침 천둥이 크게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지붕의 기왓장이 모두 날아가고 비가 쏟아 붓듯이 내려서 滍川【滍水는 南陽 魯陽縣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汝水로 들어간다.】이 가득 넘치니, 호랑이와 표범이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떨고 士卒들이 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져서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않았다.

王邑嚴尤가 날랜 기병으로 죽은 사람을 타고 물을 건너 도망가자, 그 軍實과 輜重【軍實은 兵車‧步卒‧器械‧꼴‧糧食 따위를 이르고, 輜重은 註가 앞에 보인다.】을 모두 노획하였다. 이에 海內의 호걸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모두 王莽의 牧使와 守令들을 죽이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여 漢나라의 年號를 따르고 詔命을 기다렸다.

聞漢兵이 言鴆殺平帝하고 乃會公卿하야 開所爲平帝請命金縢之策하야 泣以示群臣하다 〈出莽傳〉

王莽은 漢나라 군사들이 자신이 平帝를 독살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마침내 公卿들을 모아 놓고 平帝를 위해서 泰畤에 명을 청하여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하고 金縢에 보관한 그 策文을 꺼내어 울면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 《漢書 王莽傳》에 나옴 -

○ 新市, 平林諸將이 以劉縯兄弟威名益盛이라하야 陰勸更始除之호되 更始不敢發이러니 部將劉稷이 聞更始立하고 怒曰 本起圖大事者는 伯升兄弟也어늘 今更始는 何爲者耶오 更始收稷將誅之어늘 이 固爭한대 李軼, 朱鮪 勸更始幷執하야 卽日에 殺之하다 〈出齊武縯傳〉

○ 新市와 平林의 여러 장수들이 劉縯 형제의 위엄과 명성이 더욱 성대하다 하여 은밀히 更始(劉玄)에게 그들을 제거하도록 권하였으나 更始가 감히 擧事하지 못하였는데, 部將劉稷更始가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본래 大事를 일으켜 도모한 것은 劉伯升(劉縯) 형제인데, 지금 更始는 무엇하는 자인가?” 하였다. 更始劉稷을 잡아 죽이려 하자 劉縯이 굳이 간쟁하였는데, 李軼朱鮪更始에게 劉縯까지 아울러 잡을 것을 권하여 그날로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後漢書 齊武王縯傳》에 나옴 -

○ 官屬이 迎弔어늘 不與交私語하고 惟深引過而已요 未嘗自伐昆陽之功하며 又不敢爲服喪하고 飮食言笑를 如平常하니 更始以是慙하야 拜爲破虜大將軍하고 封武信侯하니라 〈光武紀〉

○ 官屬들이 劉秀를 맞이하여 조문하자, 劉秀는 이들과 사사로운 말을 나누지 않고 오직 깊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었고, 일찍이 스스로 昆陽을 정벌한 功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또 감히 劉縯을 위하여 喪服을 입지 않고 평상시처럼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으니, 更始가 이 때문에 부끄러워하여 劉秀를 임명하여 破虜大將軍으로 삼고 武信侯에 봉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이 憂懣不能食하고 但飮酒啗鰒魚【鰒은 海魚名이라 鰒은 無鱗有殼하니 一面附石하고 細孔雜雜하야 或七或九라】하고 讀軍書라가 倦이면 因馮(憑)几寐하고 不復就枕矣러라 〈出莽傳〉

王莽이 근심하고 고민하여 밥을 먹지 못하고 다만 술만 마시고 전복【鰒은 바다 어물의 이름이다. 鰒은 비늘은 없고 껍질이 있으니, 한 面은 돌에 붙어 있고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혹은 일곱 개이고 혹은 아홉 개이다.】을 먹었으며 兵書를 읽다가 피곤해지면 그대로 책상에 기대어 자고 다시는 잠자리에 들어 잠을 자지 않았다. - 《漢書 王莽傳》에 나옴 -

○ 成紀【王氏曰 天水郡에 有成紀縣하니 今秦州是也라】人隗囂 與周宗等으로 起兵以應漢하야 移檄郡國하고 勒兵十萬하야 攻隴西, 武都하야 皆下之하다

○ 成紀【王氏가 말하기를 “天水郡에 成紀縣이 있으니, 지금의 秦州가 이곳이다.” 하였다.】 사람 隗囂周宗 등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漢나라에 호응하여 郡國에 檄文을 돌리고 10만 명의 군대를 무장시켜 隴西와 武都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茂陵公孫述이 起兵成都하야 自稱輔漢將軍兼益州牧이라하다

○ 茂陵의 公孫述이 成都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輔漢將軍 兼 益州牧이라 칭하였다.

更始遣將攻武關한대 三輔鄧曄, 于匡이 起兵應漢하야 開武關迎漢兵하고 諸縣大姓이 亦各起兵하야 稱漢將하고 而長安旁兵이 四會城下하다 九月戊申에 兵從宣平門入하니 火及掖庭【掖宮은 傍舍也니 如人之有臂掖也라】承明이라 이 避火宣室하야 旋席隨斗柄而坐【以五石銅爲之하니 若北斗요 長一尺五寸이니 欲以厭(壓)勝衆兵이라 令司命負之하고 出在前, 入在旁하니라 三奇吉門云 順罡者吉하고 逆罡者凶이라하니 卽斗柄也라 正月은 戌時建寅하니 至寅時라야 方指午하고 二月은 亥時建卯하니 至卯時라야 方指未라 餘月倣此하야 晝夜循環하니 斗罡杓所指之處에 必敗라】曰 天生德於予하시니 漢兵이 其如予何리오하다 庚戌旦明에 群臣이 扶之漸臺【漸은 浸也라 臺在池中하야 爲水所浸이라 故名漸臺라】러니 晡時【說文曰 申時食也라】에 衆兵이 上臺하야 斬【商縣人杜吳殺莽하고 校尉公賓이 斬莽首하니라】首하고 分身하야 節解臠分하니 爭相殺者數十人이라 傳首詣宛【詣宛句絶이니 宛은 音鴛이라 括地志云 南陽郡邑은 古(仲)[申]伯國이니 城在宛大城南이라 其西南二縣이 皆故宛城也라】이어늘 縣(懸)於市하니 百姓이 共提擊之하고 或切食其舌하니라 〈以上 出莽傳〉

[新增]尹氏曰 甚矣라 亂臣賊子之欺世也여 禮施於國은 宋鮑之所以弑其君【左文十六年에 宋公子鮑禮於國人하고 宋飢에 竭其粟而貸之러니 昭公無道한대 國人이 奉鮑而殺之하고 鮑卽位하니 是爲文公이니 昭公庶弟也라】이요 厚施於民은 田氏之所以倂其國이니 自古姦僞之徒가 往往若此라 方未簒之前에 折節下士하고 輕財好施하여 虛譽隆洽하니 元后爲其所惑하고 爲之宗主【元后詔莽하야 稱假皇帝라】하여 浸淫【隨其脈理而浸漬也라】至於盜國하여 毒流四海라 然後에 大兵四合하여 克殄元惡하여 雖漢祚復還이나 而其禍亦慘矣라 朱子綱目에 書衆共誅者는 明之極惡을 人人皆得而討니 衆所共誅之者也라 自之敗가 出於劉氏之復興이라 由是로 後世簒國之人이 往往殄滅前代種族하여 至無遺育하니 是는 不獨貽禍當時요 亦且貽禍萬世니 其爲害也大矣라 玆故로 因而及之하노라

[史略 史評]班固王莽이 始起外戚하여 折節力行하여 以要名譽하고 及居位輔政에 勤勞國家하야 直道而行하니 豈所謂色取仁而行違者耶아 旣不仁而有佞邪之材하고 又乘四父歷世之權하며 遭漢中微하야 國統三絶하고 而太后壽考하야 爲之宗主라 故로 得肆其奸慝하야 以成簒盜之禍라 及其竊位南面에 顚覆之勢 險於어늘 而이 晏然自謂黃虞復出也라하야 乃始恣睢하고 奮其威詐하여 毒流諸夏하고 亂延蠻貊호되 猶未足以逞其欲焉이라 是以로 四海囂然에 遠近俱發하야 城池不守하고 支體分裂하니 自書傳所載亂臣賊子로 考其禍敗하면 未有如之甚者也라 昔에 秦燔詩書하야 以立私議하고 誦六籍하야 以文姦言하니 同歸殊途하여 俱用滅亡이라 皆聖王之驅除云爾로다

更始가 장수를 보내어 武關을 공격하게 하자, 三輔의 鄧曄于匡이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에 호응해서 武關을 열어 漢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여러 縣의 大姓들이 또한 각각 군대를 일으켜 漢나라 장군이라 칭하였으며, 長安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사방에서 長安城 아래로 모여들었다. 9월 戊申에 군대가 宣平門을 따라 들어가니, 불길이 掖庭【掖宮은 곁에 딸린 집이니, 사람에게 팔과 겨드랑이가 있는 것과 같다.】의 承明殿에까지 미쳤다. 王莽이 불길을 피하여 宣室로 달아나서 자리를 돌려 北斗星 자루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앉으며【斗柄은 5石의 구리로 만드니 모양이 북두칠성과 같고 길이가 1尺 5寸인 바, 여러 군대를 눌러 이기고자 한 것이다. 司命에게 명하여 이것을 지게 하고 王莽이 나갈 때에는 앞에 있고 들어올 때에는 곁에 있게 하였다. 三奇吉門에 이르기를 “罡을 순히 하는 자는 길하고 罡을 거스르는 자는 흉하다.” 하였으니, 罡은 바로 북두성 자루이다. 正月은 戌時에 북두성 자루가 寅方을 가리키니 寅時에 이르러야 비로소 午方을 가리키고, 2월은 亥時에 卯方을 가리키니 卯時에 이르러야 비로소 未方을 가리킨다. 나머지 달도 이와 같아서 晝夜가 순환하니, 북두성 자루가 가리키는 곳에는 반드시 패한다.】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德을 내려 주셨으니, 漢나라 군대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庚戌日 아침에 여러 신하들이 王莽을 부축하여 漸臺【漸은 침몰함이다. 臺가 못 안에 있어서 물속에 잠기므로 이름을 漸臺라 한 것이다.】로 갔는데, 申時【晡時는 ≪說文解字≫에 이르기를 “晡는 申時(오후 3시~5시)에 밥을 먹는 것이다.” 하였다.】에 여러 군사들이 漸臺에 올라가 王莽의 머리를 베고【商縣 사람 杜吳가 王莽을 죽이고 校尉 公賓이 王莽의 목을 베었다.】王莽의 몸을 분해하여 마디마다 해체하고 살점을 나누니, 다투어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王莽의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宛邑에 이르자【詣宛에서 句를 떼니, 宛은 음이 원이다. ≪括地志≫에 “南陽郡邑은 옛날 申伯의 나라이니, 城이 宛邑의 큰 성 남쪽에 있다. 그 서남쪽의 두 縣이 모두 옛날 宛城이다.” 하였다.】 시장에 매다니, 백성들이 함께 때리고 혹은 그 혀를 잘라 먹었다.- 이상은 《漢書 王莽傳》에 나옴 -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심하다. 亂臣賊子들이 세상을 속임이여. 禮가 나라에 시행됨은 宋鮑가 군주를 시해한 이유이고,【[附註]禮施於國 宋鮑之所以弑其君:≪春秋左傳≫ 文公 16年條에 宋나라 公子 鮑가 나라 사람들을 예우하였고 宋나라가 흉년이 들었을 적에 곡식을 다 내어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는데, 昭公이 無道하자 나라 사람들이 鮑를 받들어 昭公을 죽이고 鮑가 즉위하니, 이가 文公인 바 昭公의 庶弟이다.】 백성들에게 후하게 은혜를 베푼 것은 田氏가 그 나라를 겸병한 이유이니, 예로부터 간사하고 속이는 무리들이 왕왕 이와 같았다. 王莽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기 전에는 몸을 낮추어 선비들에게 겸손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헛된 명예가 융숭하니, 元后가 그에게 현혹당하고 그를 宗主로 삼았다.【元后가 王莽에게 명하여 假皇帝를 칭하도록 한 일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점점【浸淫은 그 결을 따라서 젖어드는 것이다.】 國權을 도둑질함에 이르러서 해독이 온 천하에 퍼지게 되니, 그런 뒤에야 많은 군대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元惡인 王莽을 죽여서 비록 漢나라의 國統이 다시 돌아왔으나 그 禍가 또한 참혹하였다.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여러 사람이 王莽을 함께 죽였다.’고 쓴 것은 極惡無道한 王莽을 사람마다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여러 사람이 함께 죽일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王莽의 실패는 劉氏가 다시 일어난 데에서 연유하였다. 이 때문에 후세에 나라를 찬탈하는 자들은 왕왕 前代의 皇族들을 모조리 죽여 남은 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王莽이 당시에 禍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萬世에 화를 끼친 것이니, 그 폐해가 크다. 이 때문에 인하여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다.”

[史略 史評]班固의 〈王莽傳〉 贊에 말하였다.

王莽이 처음에 外戚으로 일어나 몸을 낮추고 행실을 힘써 명예를 구하였고, 높은 지위에 올라 정사를 보필함에 미쳐서는 국가의 일에 힘을 다하여 정직한 道로 행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얼굴빛은 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王莽은 이미 不仁하면서 간사한 재주가 있었고, 또 네 叔父가 대대로 이어 온 권세를 탔으며, 漢나라가 중간에 미약해져서 國統이 세 번 끊어지고 太后가 장수하여 宗主가 됨을 만났다. 그러므로 그 간악한 꾀를 부려서 찬탈하고 도둑질하는 禍를 이룬 것이다. 皇帝의 지위를 도둑질하여 南面하자, 顚覆할 형세가 보다도 심하였으나 王莽은 태연하게 스스로 생각하기를 黃帝虞舜이 다시 나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함부로 행동하고, 위엄과 속임수를 부려 해독이 中夏에 퍼지고 혼란이 蠻貊에게까지 뻗쳤으나 오히려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四海가 시끄러워지자 遠近이 함께 일어나서 城과 垓子가 지켜지지 못하고 四肢가 분해되고 찢겼으니, 서책에 기재된 亂臣賊子 중에 그 禍敗를 상고해 보면 王莽같이 심한 자가 있지 않다. 옛날 秦나라는 詩‧書를 불태워서 사사로운 의논을 세웠고 王莽은 六經을 외워서 간사한 말을 문식하였으니, 길은 다르나 귀결되는 곳은 같아서 한결같이 멸망하였다. 그러니 이는 모두 聖王(光武帝)을 위하여 환란을 제거해 준 것이다.”

更始將都洛陽할새 以劉秀로 行司隷校尉하고 使前整修宮府어늘 乃置僚屬하고 作文移【移는 箋表之類也라 官曹公府에 不相臨敬이면 則爲移也라】하고 從事【官名이라 漢舊儀에 司隷校尉置從事(吏)[史]十二人하야 以主察擧하니라】司察을 一如舊章하다 時에 三輔吏士 東迎更始할새 見諸將過에 皆冠幘【冠은 弁冕之總名也요 幘은 巾也라 古有冠無幘하니 幘者는 卑賤執事者所服이러니 其後에 貴賤皆服之하고 稍稍作顔題하야 有赤幘, 靑幘, 素幘, 布幘하니라】而服婦人衣하고 莫不笑之러니 及見司隷僚屬하야는 皆歡喜不自勝하고 老吏或垂涕曰 不圖今日에 復見漢官威儀라하니 由是로 識者皆屬心焉이러라 〈出光武紀〉

更始가 장차 洛陽에 도읍하려 할 적에 劉秀로써 司隷校尉의 임무를 행하게 하고 미리 가서 宮府를 정돈하고 수리하게 하니, 劉秀가 마침내 官屬을 두고 移文을 만들어 州縣에 돌리고【移는 箋文과 表文의 종류이다. 官曹와 公府에서 서로 임하여 직접 상대할 수 없으면 移文을 만들어 돌린다.】 從事官【從事는 官名이다. 漢나라 옛 의식에 司隷校尉는 從事의 관리 12명을 두어서 察擧를 주관하게 하였다.】을 두어 사무를 맡아 다스리기를 한결같이 옛 법대로 하였다. 이때 三輔 지방의 관리와 군사들이 동쪽으로 洛陽에 이르러서 更始를 맞이할 때에 여러 장수들이 지나감에 모두 冠幘【冠은 弁冕의 총칭이고 幘은 頭巾이다. 옛날에는 冠은 있고 幘은 없었으니 幘은 비천한 執事들이 쓰는 것이었는데, 그 뒤에 귀한 자와 천한 자가 모두 썼고, 차츰 顔題(두건의 이마를 덮는 테두리 부분)를 만들어서 赤幘, 靑幘, 素幘, 布幘이 있었다.】을 쓰고 婦人의 의복을 입은 것을 보고는 비웃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司隷校尉의 官屬들을 보자 모두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고 늙은 관리는 혹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에 다시 漢나라 官吏의 威儀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유식한 자들이 모두 劉秀에게 마음을 두었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更始劉秀行大司馬事하야 持節北度河하야 鎭慰州郡이라 至河北하야 所過郡縣에 考察官吏하야 黜陟能否하고 〈上句文不同〉平遣囚徒【平은 音病이니 平其不平也요 遣은 縱放也라 囚徒는 械繫服役者라】하며 除王莽苛政하고 復漢官名하니 吏民이 悅喜하야 爭持牛酒迎勞어늘 皆不受하다 〈出光武紀 無末句〉

[新增]尹氏曰 帝王之興에 其施爲氣象이 必有大過人者라 觀漢祖入關之始에 除秦苛法과 與世祖徇河北之日에 除苛政하면 則區區逐鹿爭雄之徒 豈可同日而語리오 然則祀夏配天【祀夏祖宗以配天帝하야 不失治天下之舊事를 引以爲喩라】하야 不失舊物이 亦豈偶然之故哉리오

更始劉秀를 임명하여 大司馬의 일을 행하게 해서 節을 가지고 북쪽으로 黃河를 건너 州郡을 진정하고 慰撫하게 하였다. 劉秀가 河北에 이르러 지나가는 곳의 郡縣에 관리들을 고찰하여, 능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고 능력이 없는 자를 내치고 - 위의 句는 글이 똑같지 않음 - 죄수들을 공평히 다스려 석방하며【平은 음이 병(평)이니 공평하지 못함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고, 遣은 석방하는 것이다. 囚徒는 형틀에 매여 服役하는 자이다.】王莽의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漢나라의 官名을 회복시키니 관리와 백성들이 기뻐하여 다투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맞이하여 위로하였으나 劉秀는 모두 받지 않았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오는데, 末句가 없음 -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帝王이 일어날 때에 施行하는 것과 氣象이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다. 漢高祖가 關中에 들어간 초기에 秦나라의 가혹한 法을 제거한 것과 世祖(光武帝)가 河北을 순행하는 날에 王莽의 가혹한 정사를 제거한 것을 보면 구구하게 사슴(帝位)을 쫓아 雌雄(우열)을 겨룬 무리들과 어찌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夏나라 祖宗을 제사하여 天帝에게 짝해서【夏나라 祖宗을 제사하여 天帝에게 짝해서 禹王이 天下를 다스린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을 인용하여 비유한 것이다.】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南陽鄧禹 杖策追하야 及於鄴【鄴은 地理志에 魏郡에 有鄴縣이라 括地志에 故鄴都城은 在漳河北西南하니 去(漳)[彰]德府二十里라 [通鑑要解]禹年十三에 誦詩하고 受業長安하니 時光武亦遊學京師라 禹雖年少나 而光武知非常하야 遂相親附하니라】이어늘 曰 我得專封拜【言封侯拜將을 我得專擅此權이라】하니 生이 遠來는 寧欲仕乎아 曰 不願也요 但願明公威德이 加於四海어든 得効其尺寸하야 垂功名於竹帛爾로이다 笑하고 因留宿이러니 進說曰 今山東이 未安하야 赤眉, 靑犢之屬【赤眉與靑犢은 皆賊之號라】이 動以萬數요 更始旣是常才而不自聽斷하고 諸將이 皆庸人屈(崛)起【屈은 或作(掘)[崛]하니 說文曰 勃起曰(掘)[崛]起라】라 志在財幣하야 爭用威力하야 朝夕自快而已요 非有忠良明智深慮遠圖하야 欲尊主安民也라 明公이 素有盛德大功하야 爲天下所嚮服이라 軍政이 齊肅하고 賞罰이 明信하니 〈本傳에 無明公素有盛德以下四句〉爲今之計컨대 莫如延攬英雄하고 務悅民心하야 立高祖之業하고 救萬民之命이니 以公而慮【公은 稱劉秀也라 說文云 慮는 謀思也라】컨대 天下를 不足定也니이다 大悅하고 因令常宿止於中【謂幕府中이라】하야 與定計議하고 每任使諸將에 多訪於하니 皆當其才러라 〈出禹本傳〉

[新增]胡氏蕭王之至鄴에 杖策追及하야 從容畫策은 不如子房이요 險難出奇는 不如陳平이요 餉食補卒은 不如蕭何요 攻城略地는 不如曹參이요 纔一將兵出關에 又爲赤眉所敗어늘 而二十八將에 顧居首로되 當時無異議하고 後世無貶辭하니 光武何取於며 而何以致之也오 曰 初見帝에 觀其延攬英雄하고 務悅民心하야 立高祖之業하고 救萬民之命이라하니 此數語는 自李通耿弇賈復吳漢으로 皆未之嘗言이요 且任使諸將에 各當其才하니 此固高出諸將之上이라 一日에 帝披輿地圖曰 天下郡國如是어늘 今始得其一하니 如何오한대 曰 古之興者는 在德厚薄이요 不以小大라하니 是又非諸臣所能及이라 雖之徒 啓告其君者라도 不過如此하니 嗚呼라 此光武之所深知요 而之所以自許者乎인저 以此而圖形雲臺하고 藏名太室【淸廟中央之室이라】하야 爲東京元功이 眞無愧矣로다

南陽의 鄧禹가 지팡이를 짚고 劉秀를 따라 鄴縣에 이르자,【[釋義]鄴은 ≪漢書≫ 〈地理志〉에 “魏郡에 鄴縣이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옛날 鄴都의 城은 漳河 북쪽의 서남쪽에 있으니, 彰德府에서 20리쯤 떨어져 있다.” 하였다. [通鑑要解]禹가 나이 13세에 詩를 외우고 長安에서 수업하니, 이때 光武도 京師(長安)에서 遊學하였는데, 鄧禹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光武는 그가 비상한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마침내 서로 가까이하고 따랐다.】劉秀가 말하기를 “내가 마음대로 侯에 封하고 장수로 임명할 수 있으니,【侯에 봉하고 장수로 임명함에 자신이 이러한 권한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대가 멀리서 찾아 온 것은 벼슬을 원해서가 아니겠는가?” 하니, 鄧禹가 대답하기를 “벼슬하기를 원치 않고 다만 明公의 威嚴과 德이 四海에 가해지면 제가 얼마 안 되는 작은 功을 바쳐서 功名을 竹帛(역사책)에 남기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劉秀가 웃고는 인하여 유숙하였는데, 鄧禹가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지금 山東 지방이 편안하지 못해서 赤眉靑犢의 무리들【赤眉와 靑犢은 모두 賊의 이름이다.】이 모두 만으로 헤아려지고, 更始는 이미 보통의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여 스스로 다스리고 결단하지 못하며, 諸將들은 모두 용렬한 사람들이 흥기【屈은 혹 崛로도 쓰니, ≪說文解字≫에 이르기를 “勃起한 것을 崛起라 한다.” 하였다.】하였으므로 그 뜻이 재물과 폐백에 있어서 다투어 위엄과 무력을 사용하여 당장 스스로 만족하게 할 뿐이요, 충성스럽고 어질고 밝고 지혜로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도모해서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明公은 본래 성대한 德과 큰 功이 있어서 천하 사람들이 향하고 복종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軍政이 整齊되고 엄숙하며 賞罰이 분명하고 信實하니 - 《後漢書》〈鄧禹傳〉에는 ‘明公素有盛德’ 이하의 네 句가 없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영웅을 맞이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힘써서 漢高祖가 當年에 이룩한 功業을 세우고 만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公을 가지고 생각해 보건대【公은 劉秀를 이른다. ≪說文解字≫에 “慮는 도모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였다.】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이 못 됩니다.(천하를 평정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劉秀가 크게 기뻐하고, 인하여 鄧禹를 항상 군막 안【中은 幕府의 가운데를 이른다.】에 머물게 하여 그와 함께 계책과 의논을 결정하고, 매번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부릴 때에 鄧禹에게 많이 물었는데, 모두 그 재주에 합당하게 하였다. -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蕭王(光武帝)이 鄴縣에 이르렀을 때에 鄧禹가 지팡이를 짚고 쫓아와서 조용히 계책을 세운 것은 子房(張良)만 못하였고, 험난할 때에 기이한 계책을 낸 것은 陳平만 못하였고, 양식을 보급하고 병졸을 보충한 것은 蕭何만 못하였고, 성을 공격하고 땅을 경략한 것은 曹參만 못하였으며, 겨우 한 번 군대를 거느리고 關門을 나가자 또 赤眉에게 패하였다. 그런데도 28명의 장수 중에 鄧禹가 맨 앞에 있었으나 당시에 異論이 없었고 후세에 폄하하는 말이 없었으니, 光武帝는 어찌하여 鄧禹를 취하였으며 鄧禹는 무엇으로 이것을 이루었는가?

鄧禹가 처음 光武帝를 뵈었을 때에 ‘영웅을 맞이하고 민심을 기쁘게 하여 高祖의 功業을 세우고 萬民의 목숨을 구하라.’고 말하였으니, 이 몇 마디 말은 李通耿弇賈復吳漢이 모두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부릴 때에 각각 재능에 합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여러 장수들보다 높이 빼어난 것이다.

하루는 光武帝가 輿地圖를 펴놓고 ‘천하의 郡國이 이와 같이 많은데 이제 비로소 그 하나를 얻었으니, 어떠한가?’ 하고 묻자, 鄧禹는 대답하기를 ‘옛날에 興旺했던 자들은 德의 厚薄에 달려 있었고, 영토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또 여러 신하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록 伊尹周公의 무리가 군주에게 아뢴다 해도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 이는 光武帝가 깊이 인정한 바이고 鄧禹가 스스로 자신한 바일 것이다. 이 때문에 얼굴을 雲臺에 그리고 이름을 太室【淸廟 중앙에 있는 廟室이다.】에 보관하여 東京(東漢)의 元勳이 됨에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었던 것이다.”

自兄之死【更始殺縯이라】로 每獨居【無人傍侍라 故曰獨居라】에 輒不御酒肉하고 枕席에 有涕泣處라 主簿異 獨寬譬之【寬은 緩이요 譬는 匹也니 緩爲辭說하야 匹而諭之라】한대 止之曰 卿勿妄言하라 因進說曰 更始政亂에 百姓이 無所依戴라 夫人久飢渴이면 易爲充飽하나니 今公이 專命方面하시니 宜分遣官屬하야 循行郡縣【循은 謂撫徇之徇이니 徇其人民也라】하야 宣布惠澤하소서 〈本傳無宣字〉納之하다 〈出馮異傳〉

劉秀는 형劉縯이 죽은 뒤로【更始가 劉縯을 죽였다.】 언제나 홀로 거처【옆에서 모시는 사람이 없으므로 홀로 거처한다고 한 것이다.】할 때에는 번번이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베개와 자리에는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主簿馮異가 홀로 너그럽게 위안하고 타이르자,【寬은 관대함이고 譬는 비유함이니, 관대하게 말해서 딴 일을 비유하여 타이르는 것이다.】劉秀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卿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였다. 馮異가 인하여 나아가 설득하기를 “更始의 정사가 혼란하여 백성들이 의지하고 추대할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마르면 배 채우는 물건이 되기가 쉬운 법입니다. 이제 公께서 한 方面의 임무를 마음대로 명령할 수 있으니, 官屬들을 나누어 보내서 郡縣을 순행하여【循은 撫徇(어루만져 따르게 함)의 徇을 이르니, 人民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혜택을 펴게 하소서.” 하니, - 《漢書 馮異傳》에는 宣字가 없음 - 劉秀가 이 말을 받아들였다.- 《漢書 馮異傳》에 나옴 -

○ 騎都尉耿純이 謁於邯鄲이러니 退見官屬將兵法度不與他將同하고 遂自結納하니라 〈出純本傳〉

○ 騎都尉耿純劉秀를 邯鄲에서 뵈었는데, 물러 나와서 官屬과 將兵들의 법도가 다른 장수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마침내 스스로 교분을 맺었다. - 《後漢書 耿純傳》에 나옴 -

王莽時에 長安中에 有自稱成帝子輿者어늘 이 殺之러니 邯鄲卜者王郞【姓名이요 又名昌이라】이 緣是하야 詐稱眞子輿라한대 百姓이 多信之하야 立郞爲天子하니 趙國以北과 遼東以西 皆望風響應이러라

王莽 때에 長安에 成帝의 아들子輿라고 자칭하는 자가 있으므로 王莽이 그를 죽였는데, 邯鄲의 점치는 자인 王郞【王郞은 성명이고, 또 이름은 昌이다.】이 이로 인하여 자신이 진짜 子輿라고 사칭하자 백성들이 이를 많이 믿고서 王郞을 세워 천자로 삼으니, 趙나라 以北과 遼東 以西 지방이 모두 風聲만 듣고도 호응하였다.

[甲申]二年

[甲申]〈二年〉

更始至長安하야 居長樂宮할새 升前殿하니 郞吏以次列庭中이라 更始羞怍하야 俛首刮席【俛은 與俯同하니 低頭也라 刮은 古刹反이니 摩也라】하야 不敢視하고 委政於趙萌하고 日夜飮讌後庭하야 以至群小膳夫【具食也니 庖人知味하야 必加善故로 字形以善이라】히 皆濫授官爵하니 長安이 爲之語曰 竈下養은 中郞將【王氏曰 炊烹爲養이니 言此徒亦得授中郞將이라 按百官表에 中郞有五官左右三將하니 秩皆比二千石이라】이요 爛羊胃는 騎都尉【初에 武帝置羽林騎러니 至宣帝하야 令騎都尉監之하고 〈秩〉比二千石하니라】요 爛羊頭는 關內侯【列侯는 出關就國이요 侯但爵(身其)[其身]이니 有家累者는 與之關內之邑하야 食其租稅하니라】라하니 由是로 關中離心하고 四海怨叛이러라

갑신(24) - 更始 2년 -

更始가 長安에 이르러서 長樂宮에 거처할 적에 前殿에 오르니, 郎吏들이 차례로 뜰 가운데에 나열하였다. 更始가 부끄러워하여 머리를 숙이고 자리만 만지작거리며【俛은 俯와 같으니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刮은 古刹反(괄)이니 만지는 것이다.】 감히 신하를 쳐다보지 못하였으며, 정사를 趙萌에게 맡기고는 밤낮으로 後庭에서 술 마시고 잔치하면서 여러 소인들과 膳夫【膳夫는 음식을 장만하는 자이니, 푸줏간을 맡은 사람은 음식 맛을 잘 알아서 반드시 더 좋게 하기 때문에 字形에 善字를 붙인 것이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長安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말하기를 “부엌에서 밥 짓고 요리하는 사람은 中郞將이고【[釋義]竈下養 中郞將:王氏가 말하였다. “밥 짓고 요리하는 것을 養이라 하니, 이러한 무리 또한 中郞將에 제수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漢書≫ 〈百官表〉에 ‘中郞은 五官中郞將과 左中郞將, 右中郞將 3명이 있으니, 품계가 모두 比二千石이었다.’ 하였다.”】 羊의 밥통을 굽는 사람은 騎都尉【처음에 武帝가 羽林騎를 두었는데, 宣帝 때에 이르러서 騎都尉를 두어 이들을 감독하게 하고 품계가 比二千石이었다.】이고 羊의 머리를 삶는 사람은 關內侯【列侯는 關門을 나가 本國으로 나아가고, 關內侯는 다만 자신에게만 관작을 내리는 것이니, 딸린 家率이 있는 자는 關內의 邑을 주어 조세를 먹게 한 것이다.】이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關中 지방의 民心이 이반되고 온 천하가 원망하고 배반하였다.

○ 大司馬至薊하니 會에 王子接【接은 名也니 武帝五世孫廣陽王嘉之子라】이 起兵薊中하야 以應王郞이라 城內擾亂【王郞移檄하야 購光武하니라】이어늘 趣(促)駕而出하야 不敢入城邑하고 舍食【師一宿曰舍라】道傍하다 〈出本紀〉至蕪蔞亭【蕪蔞故城은 在晉州饒陽縣北하니 亭亦在焉이라】하니 時에 天寒洌이라 馮異上豆粥하고 至下曲陽【在鉅鹿郡이라】傳하야 聞王郞兵在後하고 從者皆恐이러니 至滹沱河【沱는 或作沲라 地理志에 滹沱河는 自代郡鹵城縣東으로 去參合縣하고 又東經眞定南關하고 又東過霸州文安하야 入海라】하니 候吏還白호되 河水流凘【凘는 音斯니 流冰也라】하고 無船不可濟니이다 使王霸往視之한대 恐驚衆하고 欲且前阻水【前은 進也요 阻는 恃險自固也라】하야 還卽詭曰 冰堅可度(渡)라하니 官屬이 皆喜라 笑曰 候吏果妄語也로다하고 遂前比至河하니 河冰이 亦合이라 乃令王霸護度하야 未畢數騎而冰解하니라 〈出王霸傳〉

永嘉陳氏曰 古之人君이 不恃其或然之數而忽其必然之理하니 或然之數者는 天也요 必然之理者는 人也라 天意之不集이라도 人事猶可以自盡이어니와 幸乎天而人不繼之면 鮮有不敗事者矣라 漢之高帝光武는 蓋嘗得乎天矣라 睢水之圍에 幾入乎項氏之掌握이러니 而以大風脫하고 滹沱之役에 幾塡於餓虎之喙矣러니 而以冰合濟하니 是豈人力也哉아 天也라 二君於此에 不以其幾不免者自沮하고 亦不以其幸而免者自賀하야 方且益聽三傑【子房, 蕭何, 韓信이라】之謀하고 而延攬二十八將之族하야 以伺其隙하고 而俟其可乘之機하야 卒之垓下之圍合而項氏擒하고 邯鄲之戰交而王郞虜하니 是果天耶아 人耶아 能知高帝五年之業이 不成於睢水之脫而成於垓下之勝하고 光武之中興이 亦不在於滹沱之濟而在於邯鄲之克이면 則知人君之有爲於天下者 其始也는 雖天啓之나 而成之者는 常以人也라 嗟乎라 天之欲啓是君而使之有所就者는 不遽爾也라 置諸危而福之하고 投諸難而全之하야 使之迫於利害하야 而深其謀하고 臨於死生하야 以固其志하며 挫其驕矜하고 抑其果銳하야 以大其所受어늘 而人君者不能因乎天而善用之하고 而方且安乎天而棄其所以在人하야 退處乎無事之地하야 亦坐觀夫自定之勢면 則向之所以福之者는 乃所以禍之也요 全之者는 所以敗之也라 嗚呼라 人君이 有天下之慮어든 其毋以天之所以福我而全我者로 而自取禍敗也哉인저

○ 大司馬劉秀가 薊縣에 이르니, 마침 王子 接【接은 이름이니, 武帝의 5세손인 廣陽王 劉嘉의 아들이다.】이 薊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王郞에게 호응하였다. 城 안이 요란하자【王郞이 檄文을 돌려서 光武를 잡으면 상을 주겠다고 내걸었다.】劉秀가 멍에를 재촉하여 나와서 감히 城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묵으면서 밥을 먹었다.【군대가 하룻밤을 묵는 것을 舍라고 한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蕪蔞亭【蕪蔞의 옛 城이 晉州 饒陽縣 북쪽에 있으니, 정자도 있다.】에 이르니 이때 날씨가 몹시 추웠다. 馮異가 〈먹을 것이 없어서〉 팥죽을 올렸고, 下曲陽【曲陽은 鉅鹿郡에 있다.】의 여관에 이르러서 王郞의 군대가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수행하던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滹沱河【沱는 혹 沲로도 쓴다. ≪漢書≫ 〈地理志〉에 “滹沱河는 代郡 鹵城縣 동쪽으로부터 參合縣으로 흘러가고, 또 동쪽으로 眞定 南關을 경유하고, 또 동쪽으로 霸州 文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에 이르니 정탐하는 관리가 돌아와 아뢰기를 “河水가 解冰이 되어 流冰이 떠다니고【凘는 음이 사(시)이니 流冰(물 위에 떠다니는 얼음덩이)이다.】 배가 없어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劉秀王霸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자 王霸는 사람들이 놀랄까 염려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 물에 의지하여 막고자 해서【前은 전진함이고, 阻는 험함을 믿고 스스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돌아와 즉시 거짓말하기를 “얼음이 단단히 얼어 건널 수가 있습니다.” 하니, 官屬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劉秀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탐하는 관리가 참으로 망령된 말을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 河水에 이르니, 河水의 얼음이 또한 얼어 있었다. 이에 王霸로 하여금 호위하여 건너게 하였는데, 몇 騎가 남아 다 건너기 전에 얼음이 풀렸다.- 《後漢書 王霸傳》에 나옴 -

永嘉陳氏(陳傅良)가 말하였다.

“옛날의 人君은 或然(혹 그럴지도 모르는)의 운수를 믿고서 필연적인 이치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或然의 운수라는 것은 天運이고 필연적인 이치라는 것은 사람이다. 하늘의 뜻이 사람과 합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일은 오히려 스스로 다할 수 있지만 하늘에 요행만을 바라고 사람의 일이 뒤따르지 못하면 실패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漢나라 高帝光武帝는 일찍이 天運을 얻었었다. 高祖는 睢水에 포위되었을 때에 項氏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하였으나 큰 바람 때문에 벗어났고, 光武帝는 滹沱河의 싸움에서 굶주린 호랑이의 입에 들어갈 뻔하였으나 얼음이 얼어서 물을 건넜으니, 이것이 어찌 人力이었겠는가? 天運이다.

그러나 이 두 임금은 이때 거의 면하지 못할 뻔한 禍를 가지고 스스로 沮喪하지 않고, 또한 우연히 禍를 면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축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高祖는 세 豪傑【세 호걸은 子房(張良), 蕭何, 韓信이다.】의 계책을 더욱 따르고 光武帝는 스물여덟 장수의 무리를 취해서 상대방의 틈을 엿보고 탈 만한 기회를 기다려서, 高祖는 끝내 垓下에서 포위하여 項氏를 사로잡았고 光武帝는 邯鄲에서 交戰하여王郞을 사로잡았으니, 이것이 과연 天運인가? 人力인가?

高帝가 5년 동안 이룩한 帝業이 睢水의 탈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垓下의 승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며, 光武帝의 中興이 또한 滹沱河를 건넘에 있지 않고 邯鄲의 승리에 있었음을 안다면, 人君으로서 천하에 훌륭한 일을 행하는 자가 그 처음은 비록 하늘이 열어 주지만 성공함은 항상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 하늘이 이 임금을 열어 주어 성취하게 하려고 할 때에는 갑자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곳에 두어 福을 내려 주고 어려운 곳에 던져두어 온전하게 해 주어서 利害에 절박하여 그 계책을 깊게 세우고 死生에 임하여 의지를 굳게 하며, 교만함과 자랑하는 마음을 꺾고 과단성과 날카로운 기세를 억제해서 큰 器局을 만들어 受容하는 바를 크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임금된 자가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하늘이 정한 운수에 안주하여 사람에게 달려 있는 일을 버리고 아무 탈이 없는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또한 스스로 안정되는 형세를 앉아서 보기만 한다면 지난번에 복을 내려 준 것은 바로 禍를 준 것이고 지난번에 온전하게 해 준 것은 바로 패망하게 한 것이다. 아,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있다면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 주고 나를 온전하게 해 주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화와 패망을 취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至南宮【地理志에 信都郡南宮縣이라 按信都는 今冀州是也라】하야 遇大風하야 引車入道傍空舍하니 馮異는 抱薪하고 鄧禹는 爇火라 對竈燎衣러니 馮異復進麥飯하다 馳赴信都【地理志에 趙地北有信都라하니 按今冀州是라 春秋에 爲晉東陽地러니 三家分晉하야 因屬趙라 秦於此에 置信都縣하고 屬鉅鹿하니라】하니 是時에 郡國이 皆降王郞호되 獨信都太守任光과 和戎【郡名也니 王莽이 分鉅鹿〈郡〉하야 爲和戎하니라】太守邳肜이 不肯從이러니 이 聞至大喜하고 邳肜이 亦自和戎來會하다 〈以上 參用任光邳肜二傳文〉議者多言호되 可因信都兵하야 自送西還長安이라한대 邳肜曰 吏民이 歌吟思漢이 久矣라 今卜者王郞이 假名因勢하야 驅集烏合之衆하야 遂振燕, 趙之地나 無有根本之固하니 明公이 奮二郡之兵하야 以討之면 何患不克이리오 今釋此而歸면 豈徒空失河北이리오 必更驚動三輔하야 墮損威重하리니 非計之得者也니이다 乃止하다 任光이 發傍縣하야 得精兵四千人하니 衆이 稍合至萬人이라 移檄邊郡하야 共擊邯鄲하니 郡縣이 還復響應이러라 〈出本紀〉

南宮【南宮은 ≪漢書≫ 〈地理志〉에 “信都郡 南宮縣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信都는 지금의 冀州가 이곳이다.】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서 劉秀가 수레를 이끌고 길가의 빈집에 들어가니, 馮異는 나무섶을 안아 오고 鄧禹는 불을 피웠다. 劉秀가 아궁이에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馮異가 다시 보리밥을 올렸다. 달려서 信都郡【信都는 ≪漢書≫ 〈地理志〉에 “趙나라 땅 북쪽에 信都가 있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지금의 冀州가 이곳이다. 春秋時代에는 晉나라 東陽 땅이었는데, 三家(韓, 魏, 趙)가 晉나라를 나눔에 따라 趙나라에 소속되었다. 秦나라가 여기에 信都縣을 설치하고 鉅鹿郡에 소속시켰다.】에 이르니, 이때 郡國이 모두 王郞에게 항복하였으나 오직 信都太守任光과 和戎【和戎은 고을 이름이니, 王莽이 鉅鹿郡을 나누어 和戎을 만들었다.】太守 邳肜만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는데, 任光劉秀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였고 邳肜 또한 和戎에서 와서 모였다.- 이상은 《後漢書》〈任光傳〉과 〈邳肜傳〉의 글을 참고하여 썼음 -

의논하는 자들이 많이 말하기를 “信都의 군대를 인하여 스스로 호송하고 長安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자, 邳肜이 아뢰기를 “관리와 백성들이 노래하면서 漢나라를 그리워한 지가 오래입니다. 지금 점치는 자인 王郞이 이름을 빌리고 세력을 이용해서 오합지졸들을 모아 마침내 燕‧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으나 근본의 견고함이 없으니, 明公께서 信都와 和戎 두 郡의 군대를 분발시켜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들을 버려두고 돌아간다면 어찌 다만 헛되이 河北만을 잃을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다시 三輔 지방을 놀라게 하여 중한 위엄을 훼손시킬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劉秀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任光이 이웃 縣에서 징발하여 精兵 4천 명을 얻으니, 병력이 차츰 모여 만 명에 이르렀다. 변방 고을에 檄文을 돌려서 함께 邯鄲을 공격하게 하니, 郡縣들이 돌아와 다시 호응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披輿地圖【披는 閱視也요 圖는 畫也라 地象車輿載物이라 故曰輿(也)[地]라 】하야 指示鄧禹曰 天下郡國이 如是어늘 今始乃得其一【初得廣阿郡也라】하니 子前言以吾慮天下不足定은 何也오 曰 方今海內殽亂이라 人思明君을 猶赤子之慕慈母하나니 古之興者는 在德薄厚요 不以大小也니이다 〈出鄧禹傳〉

劉秀가 輿地圖를 펴서【披는 펴보는 것이고 圖는 그림이다. 땅은 수레가 물건을 싣는 것과 비슷하므로 輿地라고 한 것이다.】鄧禹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천하의 郡國이 이와 같이 많은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중 하나를 얻었으니,【그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처음으로 廣阿郡을 얻은 것이다.】 그대가 전에 나를 가지고 생각해 보건대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도 못 된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鄧禹가 대답하기를 “현재 海內가 소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明君을 생각하기를 赤子가 慈母를 사모하듯이 하니, 옛날에 興旺한 자는 德의 厚薄에 달려 있었고 국토의 크기로써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漢書 鄧禹傳》에 나옴 -

○ 四月에 進攻邯鄲하야 連戰破之하다

○ 4월에 劉秀가 邯鄲으로 진격하여 연달아 싸워 격파하였다.

○ 五月에 王霸追斬王郞하다 收郞文書하야 得吏民與郞交關【交는 結이요 關은 通也라】謗毁者數千章하야 不省하고 會諸將燒之하고 曰 令反側子自安하노라 〈出本紀〉

○ 5월에 王霸王郞을 추격하여목을 베었다. 劉秀王郞의 문서를 거두어 관리와 백성들이 王郞과 交關(內通)【交는 결탁함이요, 關은 통함이다.】하여 劉秀를 훼방한 문서를 수천 장 얻었는데, 劉秀가 살펴보지 않고 諸將들을 모아 놓고 문서를 불태우며 말하기를 “反側子(輾轉反側하여 불안해 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한다.”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部分吏卒하야 各隷諸軍할새 士皆言願屬大樹將軍이라하니 大樹將軍者는 偏將軍馮異也라 爲人이 謙退不伐【(隷)[語]에 孟之反不伐이라한대 (堯)[饒]氏曰 伐은 如伐木之伐이니 凡人矜誇其能은 乃所以自(伐)[戕]其能也라 故謂之伐이라하니라】하야 勅吏士하야 非交戰受敵이면 常行諸營之後하고 每所止舍에 諸將이 竝論功이어든 常獨屛樹下라 故로 軍中이 號曰大樹將軍이라하니라 〈出馮異傳〉

劉秀가 관리와 병졸들을 나누어서 각각 諸軍에 예속시킬 때에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大樹將軍에게 소속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大樹將軍은 偏將軍馮異였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서【≪論語≫에 “孟之反은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饒氏(饒魯)가 말하기를 “伐은 伐木의 伐과 같으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함은 바로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공을 자랑함을 伐이라 한다.” 하였다.】 관리와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과 교전하거나 적의 침공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항상 여러 군영의 뒤에 있게 하고, 매번 머무는 곳에서 諸將들이 함께 功을 논하면 馮異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로 물러가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에서 그를 大樹將軍이라 불렀다.- 《後漢書 馮異傳》에 나옴 -

更始遣使하야 立蕭王【括地志에 今徐州縣이 古蕭叔國也라】하고 悉令罷兵이어늘 耿弇이 進曰 百姓이 患苦王莽하야 復思劉氏러니 今更始爲天子에 而諸將擅命하고 貴戚縱橫【縱은 放縱也요 橫은 恣橫也라】하야 虜掠自恣하니 元元叩心하야 更思朝라 是以로 知其必敗也하노이다 公이 功名已著하니 〈本傳에 無此句라〉以義征伐이면 天下를 可傳檄而定也라 天下는 至重하니 公可自取하고 毋令他姓得之하소서 〈以上 出弇本傳〉 蕭王이 乃辭以河北未平하야 不就徵하니 始貳於更始러라 〈以上 出本紀〉

更始가 使者를 보내어 劉秀를 세워 蕭王【蕭는 ≪括地志≫에 “지금 徐州縣이 옛날 蕭叔國이다.” 하였다.】으로 삼고 군대를 모두 해산하게 하자, 耿弇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王莽에게 시달려 다시 劉氏를 그리워하였는데, 이제 更始가 天子가 됨에 諸將들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貴戚들이 방종하고 횡포를 부려【縱은 방종함이요, 橫은 제멋대로 함이다.】 노략질을 자행하니, 백성들이 가슴을 치고 다시 王莽의 조정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更始가 반드시 패할 줄을 압니다. 公은 功名이 이미 드러났으니, - 《後漢書 更始傳》에는 이 句가 없음 - 義로써 정벌한다면 檄文만 돌리고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소중하니, 公은 스스로 취하고 他姓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상은 《後漢書 耿弇傳》의 내용임 -

蕭王이 마침내 河北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부름에 나아가지 않으니, 비로소 更始와 갈라지게 되었다. - 이상은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 是時에 諸賊銅馬, 鐵脛, 尤來, 大槍, 上江, 靑犢, 富平, 獲索【八者는 皆是賊名이라[頭註]獲索等諸賊이 或以山川土地爲名하고 或以軍容强盛爲號하니라】等이 各領部曲하니 衆이 合數百萬人이라 所在寇掠이러니 秋에 蕭王이 擊銅馬於鄡【地理志에 鉅鹿郡에 有鄡縣이라】할새 吳漢이 將突騎하고 來會淸陽하니 士馬甚盛이라 銅馬食盡夜遁이어늘 蕭王이 追擊於館陶하야 悉破降之하고 封其渠帥하야 爲列侯하다 諸將이 未能信賊하고 降者亦不自安이러니 王이 知其意하고 勅令降者로 各歸營勒兵하고 自乘輕騎하야 按行部陳한대 降者更相語曰 蕭王이 推赤心하야 置人腹中하니 安得不投死乎리오하고 由是皆服이어늘 悉以降人으로 分配諸將하니 衆이 遂數十萬이라 故로 關西號銅馬帝라하니라 〈出本傳〉

○ 이때 여러 賊인 銅馬, 鐵脛, 尤來, 大槍, 上江, 靑犢, 富平, 獲索【[釋義]銅馬 이하 여덟 가지는 모두 賊의 이름이다.[頭註]獲索 등 여러 賊들이 혹은 산천과 토지에 따라 이름하고, 혹은 軍容의 강성함을 따라 이름한 것이다.】 등이 각각 部曲(군대)을 거느리니, 무리가 합하여 수백만 명이었다. 있는 곳마다 도둑질하고 노략질하였는데, 가을에 蕭王銅馬를 鄡縣【鄡는 ≪漢書≫ 〈地理志〉에 “鉅鹿郡에 鄡縣이 있다.” 하였다.】에서 공격할 때에 吳漢이 突騎를 거느리고 淸陽으로 와서 모이니, 군사와 말이 매우 强盛하였다. 銅馬가 양식이 다하여 밤에 도망하자, 蕭王이 館陶에서 추격해서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키고 큰 우두머리를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諸將들도 賊을 믿지 못하고 항복한 자들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는데, 蕭王이 그 뜻을 알고는 칙령을 내려 항복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무장하게 한 다음 직접 경무장한 기마를 타고서 部隊와 陣營을 순행하니, 항복한 자들이 번갈아 서로 말하기를 “蕭王이 眞心을 미루어 사람의 뱃속에 넣어 두니,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로 말미암아 모두 복종하였다. 이에 항복한 사람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속시키니, 무리가 마침내 수십만이었다. 그러므로 關西 지방에서는 劉秀를 이름하여 銅馬帝라 하였다.- 《後漢書 吳漢傳》에 나옴 -

赤眉樊崇等이 將兵攻長安이어늘 蕭王이 將北徇燕, 趙러니 度赤眉必破長安하고 又欲乘釁幷關中이나 而不知所寄하야 乃拜鄧禹前將軍【漢有前將軍, 後將軍하니라】하야 中分麾下精兵三萬人하야 遣西入關하다

赤眉樊崇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長安을 공격하자, 蕭王이 장차 북쪽으로 燕‧趙 지방을 순행하려 하였는데, 赤眉가 반드시 長安을 격파할 것을 헤아리고는 또 이 틈을 타서 關中(長安)을 겸병하고자 하였으나 맡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鄧禹를 前將軍【漢나라에는 前將軍과 後將軍이 있었다.】에 임명하고 휘하의 精兵 3만 명을 반으로 나누어 주고 서쪽으로 보내 關中에 들어가게 하였다.

蕭王이 以河內險要富實이라하야 欲擇諸將守河內者而難其人하야 問於鄧禹한대 寇恂이 文武備足하야 有牧民御衆之才하니 非此子면 莫可使也니이다 乃拜河內太守하야 行大將軍事하고 蕭王이 謂曰 昔에 高祖蕭何守關中이러시니 吾今에 委公以河內하노니 當給足軍粮하고 率厲士馬하야 防遏他兵하야 勿令北度而已로라 〈出恂傳〉

蕭王은 河內 지방이 험한 요새이고 풍부하고 충실하다 하여 諸將 중에서 河內를 지킬 자를 뽑으려 하였는데 적임자를 신중히 가리기 위하여 鄧禹에게 물으니, 鄧禹가 대답하기를 “寇恂은 文武를 겸비하여 백성을 기르고 무리를 거느릴 수 있는 재주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寇恂을 河內太守로 임명하여 大將軍의 일을 행하게 하고는 蕭王寇恂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高祖蕭何를 남겨 두어 關中을 지키게 하였는데, 지금 내가 公에게 河內를 맡기노니, 마땅히 군량을 풍족하게 공급하며 병사와 軍馬를 인솔하고 격려하여, 다른 군대를 막아서 다시 북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할 뿐이다.” 하였다.- 《後漢書 寇恂傳》에 나옴 -

蕭王이 親送鄧禹하야 至野王이러니 旣西에 蕭王이 乃復引兵而北하다 寇恂이 調餱糧【調는 謂計發之也라 [通鑑要解]餱는 乾食也니 詩乃裹餱糧이라하니라】하고 治器械하야 以供軍하야 軍雖遠征이나 未嘗乏絶이러라 〈以上 出寇恂等傳〉

蕭王이 친히 鄧禹를 전송하여 野王에 이르렀는데, 鄧禹가 서쪽으로 가자 蕭王이 마침내 다시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갔다. 寇恂이 餱糧을 조달하고【[原註]調는 계산하여 징발함을 이른다. [通鑑要解]餱는 말린 밥이니 ≪詩經≫에 “말린 밥과 양식을 싼다.” 하였다.】 병기를 수리하여 군대에 공급해서 군대가 비록 멀리 정벌하였으나 일찍이 물자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상은 《後漢書 寇恂傳》 등에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