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十七 東漢紀(後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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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漢紀(後漢紀)

世祖光武皇帝 下

[庚寅]六年

[庚寅]六年이라

吳漢等이 拔朐【其于反이니 東海邑이라[附註]己丑年에 董憲이 合劉紆하야 奔傚强하고 龐萌叛하야 與憲連이어늘 帝自將討之한대 董憲, 劉紆 使蘇茂, 傚强救萌이러니 强以衆降하니 茂, 張步, 憲, 萌은 奔朐하고 梁人이 斬紆以降하니라】하야 斬董憲, 龐萌하니 江淮, 山東이 悉平하다

建武 6년(경인 30)

吳漢 등이 朐邑을 함락【[原註]朐는 其于反(구)이니, 東海의 邑이다.[附註]기축년에 董憲이 劉紆와 연합하여 傚强에게로 달려가고 龐萌이 배반하여 董憲과 연합하자, 光武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董憲과 劉紆가 蘇茂와 傚强으로 하여금 龐萌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傚强이 군대를 거느리고 光武帝에게 항복하였다. 蘇茂와 張步와 董憲과 龐萌은 胊邑으로 달아났으며, 梁나라 사람이 劉紆를 목 베고 항복하였다.】하여 董憲龐萌을 목 베니, 江淮 지방과 山東 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 帝積苦兵間【積은 久也라】이라 以隗囂遣子內侍하고 公孫述이 遠據邊陲라하야 乃謂諸將曰 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라하고 因休諸將於雒陽하고 分軍士於河內하고 數騰書【騰은 傳也라】, 하야 告示禍福【隴은 隗囂요 蜀은 公孫述이라 且書曰 君은 非吾亂臣賊子라 倉卒時에 人皆欲爲君事耳나 天下神器는 不可以力爭이니 宜留三思하라】하니라 〈出囂傳〉

○ 황제가 전쟁터에서 오랫동안【積은 오래이다.】 고생하였다. 隗囂가 아들을 보내어 안에서 모시게 하고 公孫述이 멀리 변방을 점령하고 있다 하여, 마침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우선 이 두 사람은 度外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고는 인하여 여러 장수들을 雒陽에서 쉬게 하고 군사들을 河內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며, 隴(隗囂)과 蜀(公孫述)에 자주 편지를 보내어【騰은 전함이다.】 禍福을 말하여 보여 주었다.【[通鑑要解]數騰書隴蜀 告示禍福:隴은 隗囂를 이르고 蜀은 公孫述을 이른다. 황제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그대들은 나의 亂臣賊子가 아니다. 창졸간에 사람은 누구나 다 임금의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神器(天子의 자리)는 힘으로써 다투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하였다.】 - 《後漢書 隗囂傳》에 나옴 -

馮異自長安入朝어늘 帝謂公卿曰 是는 我起兵時主簿【光武起兵하여 徇永川할새 馮異降하니 光武以爲主簿하니라】也라 爲吾하야 披荊棘【披는 開也요 荊棘은 榛梗之謂也라[頭註]荊棘은 以喩紛亂也라】, 定關中이라하고 旣罷에 賜珍寶錢帛하고 詔曰 倉卒【忽遽貌라】에 蕪蔞亭豆粥과 滹沱河麥飯厚意를 久不報로라 稽首謝曰 臣聞호니 管仲이 謂齊桓公曰 願君은 無忘射鉤【春秋에 齊襄公이 醉殺魯桓公하고 通其夫人하며 又數欺大臣하니 群弟恐及禍라 故次弟糾는 奔魯하니 管仲傅之하고 次弟小白은 奔莒하니 鮑叔傅之하다 後에 襄公被弑어늘 齊人이 召小白於莒한대 魯亦送子糾하고 而使管仲으로 將兵遮莒道하야 射中小白帶鉤러니 小白佯死라가 得先入하야 齊立之하니 是爲桓公이라 魯人患之하야 遂殺子糾하고 囚管仲이러니 及齊境에 鮑叔이 脫其桎梏하야 以見桓公이라 管仲旣任政에 九合諸侯하야 一匡天下하니라】하소서 臣은 無忘檻車【載囚之車也니 車上著板四周하야 如檻形이요 載囚其中이라】라하야 齊國賴之라하니 臣亦願國家【臣子率謂天子爲國家也라】는 無忘河北之難하소서 小臣은 不敢忘巾車之恩【異在巾車鄕이라가 爲漢兵所獲이러니 光武釋而用之하니라】호리이다 留十餘日에 令與妻子還西하니라 〈出異傳〉

馮異가 長安으로부터 들어와 조회하자, 황제가 公卿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군대를 일으킬 때 主簿였다.【光武帝가 군대를 일으켜 永川을 순행할 때에 馮異가 항복하니, 光武帝가 그를 主簿로 삼았다.】 나를 위해서 온갖 荊棘(苦難)을 헤치고【[釋義]披는 열어 헤침이요, 荊棘은 개암나무와 산느릅나무를 이른다.[頭註]荊棘은 紛亂을 비유한 것이다.】關中을 평정했다.” 하고는 접견을 파한 뒤에 진귀한 보물과 돈과 비단을 하사하고, 조서를 내리기를 “창졸간에【倉卒은 갑자기 급한 모양이다.】蕪蔞亭의 팥죽과 滹沱河의 보리밥을 올린 厚意를 오랫동안 갚지 못하였다.” 하였다. 馮異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기를 “신은 들으니, 管仲이 齊나라 桓公에게 이르기를 ‘원컨대 임금께서는 띠의 갈고리에 화살을 맞았던 것을 잊지 마소서.【≪春秋≫에 齊나라 襄公이 술에 취하여 魯나라 桓公을 죽이고 그 부인과 간통하였으며 또 자주 大臣들을 능멸하니, 여러 아우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다음 아우인 糾는 魯나라로 도망하였는데 管仲이 師傅가 되어 그를 가르쳤고, 다음 아우인 小白은 莒나라로 도망하였는데 鮑叔이 師傅가 되어 그를 가르쳤다. 뒤에 襄公이 시해당하자 齊나라 사람들이 小白을 莒나라에서 불렀는데, 魯나라에서도 子糾를 보내고는 管仲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莒나라에서 오는 小白의 길을 막게 하였다. 그리하여 管仲이 小白의 허리띠 갈고리를 쏘아 맞혔는데, 小白이 거짓으로 죽은 체하다가 驛馬를 타고 먼저 들어와서 齊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우니, 이가 桓公이다. 魯나라 사람은 〈齊나라의 보복을〉 염려하여 마침내 子糾를 죽이고 管仲을 수레에 가두어 齊나라로 보냈는데, 齊나라 국경에 이르자 鮑叔이 그의 형틀을 벗겨 주고 桓公을 뵙게 하였다. 管仲이 이미 국정을 맡자 諸侯들을 糾合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았다.】 신은 檻車에 갇혔던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檻車는 죄수를 실은 수레이니, 수레 위의 사방 둘레에 판자를 대어서 난간의 모양과 같게 하고, 죄수를 그 가운데에 실었다.】’ 하여 齊나라가 이에 힘입었다 하니, 신은 또한 國家(天子)【臣子는 대체로 天子를 일러 國家라 한다.】는 河北의 고난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小臣은 巾車鄕의 은혜【馮異가 巾車鄕에 있다가 漢나라 군대에 붙잡혔는데, 光武帝가 풀어 주고 그를 등용하였다.】를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10여 일 동안 머물러 있자, 妻子와 함께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後漢書 馮異傳》에 나옴 -

隗囂發兵反하다

隗囂가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였다.

○ 六月에 詔曰 夫張官置吏는 所以爲民也라 今百姓遭難하야 戶口耗少호되 而縣官吏職이 所置尙繁하니 其令司隷州牧【司隷校尉는 部管河南河內河東右扶風左馮翊京兆弘農七郡於洛陽이라 故로 謂東京爲司隷라】으로 各實所部【謂所部郡縣을 各考覈其實也라】하야 省減吏員하고 縣國에 不足置長吏者를 幷之하라 於是에 幷省四百餘縣하니 吏職이 減損하야 十置其一이러라 〈出本紀〉

○ 6월에 詔書를 내리기를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지금 백성들이 난리를 만나서 戶口가 줄어들었으나 縣官과 관리의 직책을 설치한 것이 아직도 많으니, 司隷에 속한 州牧【司隷校尉는 河南, 河內, 河東, 右扶風, 左馮翊, 京兆, 弘農의 7郡을 洛陽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므로 東京(洛陽)을 일러 司隷라고 한 것이다.】으로 하여금 각각 거느리고 있는 고을을 충실히 조사하여【관할하고 있는 고을에 대하여 각각 그 실제를 조사하여 밝힘을 이른다.】 관리의 수를 줄이고 縣과 國 중에 長吏(수령)를 둘 만하지 않은 곳을 겸병하라.” 하였다. 이에 4백여 縣을 모두 합병하여 줄이니, 관리의 직책이 줄어들어 10분의 1만 남겨 두었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 執金吾朱浮上疏曰 昔에 , 之盛에 猶加三考【書舜典에 三考에 黜陟幽明이라한대 蔡傳曰 考는 核實也라 三考는 九載也니 九載則人之賢否와 事之得失을 可見이라 於是에 陟其明而黜其幽라하니라】하고 大漢之興에도 亦累功效하니 吏皆積久하야 至長子孫【文帝時에 吏居官者 或長子孫이라한대 註云 時無事하야 吏不數遷하야 甚至於子孫長大而不轉職任이라하니라】이러니 間者에 守宰數換易하야 迎新相代에 疲勞道路하고 尋其視事日淺하야 未足昭見其職이요 旣加嚴切하니 人不自保라 願陛下는 遊意於經年之外하고 望治於一世之後【孔子曰 如有王者라도 必世而後에 仁이니라】하시면 天下幸甚이리이다 帝采其言하야 自是로 牧守易代頗簡하니라 〈出浮傳〉

○ 執金吾朱浮가 상소하기를 “옛날 과 같은 태평한 시대에도 오히려 세 번 考課【≪書經≫ 〈舜典〉에 “세 번 考課함에 成績이 나쁜 자를 내치고 좋은 자를 올려 준다.” 하였는데, 蔡沈의 傳에 이르기를 “考는 실제를 조사하는 것이다. 세 번 고찰함은 9년이니, 9년이면 사람의 賢愚와 일의 잘하고 잘못함을 볼 수 있다. 이에 그 실적이 분명한 자를 올려 쓰고 어두운 자를 내쫓는 것이다.” 하였다.】를 가하였고 大漢이 일어났을 때에도 공적을 쌓게 하였으니, 관리들이 모두 오랫동안 근무하여 자손들이 장성함에 이르렀습니다.【[釋義]吏皆積久 至長子孫:文帝 때에 관리로서 관직에 있는 자가 오랫동안 근무하여 혹 자손을 키우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前漢書≫ 〈王嘉傳〉 如淳의 註에 이르기를 “당시에는 아무 일이 없어 관리들이 자주 자리를 바꾸지 않아서 심지어는 자손이 장성하여 컸는데도 직임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守宰를 자주 바꾸어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여 서로 교대하느라 도로에서 지치고, 또 사무를 본 날짜가 짧아서 자신의 직책을 밝게 알지 못하며, 게다가 이미 준엄하게 견책을 가하니,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몇 해가 지난 뒤에 효과가 나타나는 데에 뜻을 두시고 한 代가 지난 뒤에【孔子가 말씀하기를 “만일 王者가 있더라도 반드시 한 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仁해진다.” 하였다.】 국가가 다스려지기를 바라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채택하여 이로부터 牧守들을 바꾸고 교대함이 자못 줄어들게 되었다.- 《後漢書 朱浮傳》에 나옴 -

○ 十二月에 詔曰 頃者에 師旅未解하야 用度不足이라 故로 行什一之稅러니 今糧儲稍積하니 其令郡國으로 收見(現)田租호되 三十稅一하야 如舊制【景帝元年에 令田租三十而稅一이러니 今依景帝故로 云舊制라】하라 〈出本紀〉

○ 12월에 詔書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군대가 해산되지 아니하여 用度(재정)가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시행하였는데 지금 양식의 저축이 다소 비축되었으니, 郡國으로 하여금 현재 있는 田租를 거두되 30분의 1을 내게 하여 옛 제도【景帝 元年에 백성들로 하여금 30분의 1을 田租로 내게 하였는데, 지금 景帝 때 시행했던 것을 따랐으므로 옛 제도라 한 것이다.】와 같게 하라.”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 先是에 馬援이 聞隗囂欲貳於漢하고 數以書責譬【譬는 比也니 比而喩之라】之한대 得書增怒러니 及發兵反에 이 乃上書하야 願聽詣行在所하야 極陳滅之術하니 帝乃召之하야 具言謀畫하다 〈出援傳〉

○ 이보다 먼저 馬援隗囂가 漢나라를 배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주 편지를 보내어 꾸짖고 타이르니,【譬는 비유함이니, 비유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隗囂가 편지를 받고 더욱 노하였다. 隗囂가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馬援은 마침내 글을 올려서 行在所에 나아가 隗囂를 없앨 방법을 지극히 아뢰는 것을 들어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마침내 그를 불러서 계책을 자세히 말하게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辛卯]七年

[辛卯]七年이라

三月晦에 日有食之어늘 詔百僚하야 各上封事호되 其上書者 不得言聖하라하다 〈出本紀〉

[新增]尹氏曰 人君이 莫不憚於聽言이어늘 而詔各上封事하고 人君이 莫不喜於好高어늘 而詔不得言聖하야 書之于冊하니 光武於是乎不可及矣로다

建武 7년(신묘 31)

3월 그믐에 日食이 있자 〈황제가〉 百官들에게 명하여 각각 封事를 올리게 하였는데, 글을 올리는 자들이 〈황제를〉 聖이라고 칭하지 못하게 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人君은 신하들의 말을 듣는 것을 꺼리지 않는 이가 없는데 光武帝는 각각 封事를 올리도록 명하였고, 人君은 높은 것을 좋아함을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皇帝를〉 聖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이것을 史冊에 썼으니, 光武帝의 훌륭함을 이에 따라갈 수가 없다.”

太中大夫鄭興이 上疏曰 頃年日食이 每多在晦하야 先時而合【先은 去聲이니 謂不俟朔日而會合이라 [通鑑要解]凡先事而爲曰先은 則平聲이니 易先天, 先甲先庚之類 是也요 又當後而前曰先은 則去聲이니 左傳不先父食과 孟子疾行先長之類 是也라】하니 皆月行이 疾也라 日은 君象이요 月은 臣象이니 君亢急【亢은 高極也니 謂君之行이 過於嚴急이라】則臣促迫이라 故로 月行이 疾하나니 今陛下高明하사 而群臣惶促하니 宜留思柔克之政하고 垂意洪範之法【書洪範에 六三德은 高明柔克이라한대 蔡傳曰 高明者는 高亢明爽하야 過乎中也요 克은 治也니 高明柔克은 宜以柔治剛也라하니라】이니이다 帝躬勤政事하야 頗傷嚴急이라 故로 興奏及之러라 〈出本傳 無末三句〉

太中大夫鄭興이 상소하기를 “近年의 日食이 매번 대부분 그믐에 있어서 시기보다 앞서 해와 달이 합하였으니,【[釋義]先은 去聲이니, 초하룻날을 기다리지 않고 해와 달이 앞서 합하여 日蝕이 일어남을 이른다. [通鑑要解]일보다 앞서서 먼저 하는 것을 先이라고 할 때의 先은 平聲이니 ≪周易≫의 先天, 先甲 先庚 따위가 이것이고, 또 뒤에 있어야 하는데 앞에 가는 것을 先이라고 할 때의 先은 去聲이니 ≪春秋左傳≫의 ‘不先父食’과 ≪孟子≫의 ‘疾行先長’ 따위가 이것이다.】 이는 모두 달의 운행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해는 군주의 象이고 달은 신하의 象이니, 임금이 높고 급하면【亢은 높음이 지극한 것이니, 군주의 행실이 지나치게 엄하고 급함을 말한 것이다.】 신하가 촉박합니다. 이 때문에 달의 운행이 빠른 것이니, 이제 폐하께서 高明하시어 여러 신하들이 황급해 하니, 마땅히 柔克의 정사에 유념하고 洪範의 법에 뜻을 두소서.【[釋義]陛下高明……洪範之法:≪書經≫ 〈洪範〉에 “여섯 번째 三德은 高明한 사람은 柔로 이겨야 한다.[高明柔克]” 하였는데, 蔡沈의 傳에 이르기를 “高明은 高亢(뜻이 높음)하고 明爽(밝음)하여 中道를 넘는 것이고 克은 다스림이니, 高明柔克은 마땅히 유순함으로써 강함을 다스려야 함을 이른다.” 하였다.】” 하였다. 이때 황제가 몸소 정사를 부지런히 하여 자못 지나치게 엄하고 급했다. 그러므로 鄭興이 아룀에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後漢書 鄭興傳》에 나오는데 끝의 세 句가 없다.-

○ 大司農江馮이 上言호되 宜令司隷校尉로 督察三公이니이다 司空掾陳元이 上疏曰 臣聞호니 師臣者는 帝하고 賓臣者는 霸라 故로 武王이 以太公爲師하고 齊桓이 以夷吾仲父하고 近則高帝 優相國之禮하고 太宗이 假宰輔之權하니 陛下宜修文武之聖典하고 襲祖宗之遺德하야 勞心下士하고 屈節待賢이요 誠不可使有司察公輔之罪니이다 帝從之하다

○ 大司農江馮이 上言하기를 “마땅히 司隷校尉로 하여금 三公을 감독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司空掾으로 있는 陳元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이 들으니, 신하를 스승으로 삼는 자는 皇帝가 되고 신하를 손님으로 예우하는 자는 霸者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武王太公을 스승으로 삼았고 齊나라 桓公管夷吾(管仲)를 仲父로 삼았으며, 근래에 高帝는 相國을 禮로 우대하고 太宗(文帝)은 宰輔에게 권한을 빌려 주었으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文王武王의 성스러운 법을 닦고 祖宗이 남기신 德을 따라서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선비에게 몸을 낮추고 절개를 굽혀 현자를 대해야 할 것이요, 진실로 有司들로 하여금 公輔의 죄를 살피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 帝好圖讖이라 與鄭興으로 議郊祀事할새 帝曰 吾欲以讖斷之하노니 何如오 對曰 臣은 不爲讖이니이다 帝怒曰 卿不爲讖은 非之耶아 興이 皇(惶)恐曰 臣이 於書에 有所未學이요 而無所非也니이다 帝意乃解하다 〈出興傳〉

[新增]胡氏曰 知道者는 以義處命하야 理行則行하고 理止則止하니 術數之學을 蓋不取也라 鄭興이 身遇明君하니 當極論以解主惑이어늘 一被詰責에 遽出孫(遜)言하니 君子非之하니라

通鑑筆義曰 讖記之說이 果孰爲之初乎아 左氏傳春秋할새 雜取神怪卜筮【龜曰卜이요 蓍曰筮니[蓍는]草名이니 用之以筮라 左僖四年에 筮短龜長이라한대 注에 物生而後有象하고 有象而後有數하니 龜는 象也요 筮는 數也니 象在先하고 數在後라 故以先爲長하고 以後爲短이라하니라】하야 論說禍福에 皆有據依로되 有童謠而無讖語【徒歌曰謠니 童穉未有念慮之感而會成嬉戲之言이 似若有憑者라】러니 至司馬遷作史記하야 言秦人築長城以備胡는 謂亡秦者胡也나 曾不知爲胡亥하고 陳涉起事에 託鬼以威衆【陳涉, 吳廣起事에 卜者曰 事皆成이나 然卜之鬼乎인저 勝, 廣喜曰 此敎我先威衆耳라하고 乃以丹書帛十四卷하니라】하고 取帛書하야 置魚腹中하니 世之姦人이 始假文書以惑衆矣라 漢宣帝未卽位時에 眭弘이 推說災異【昭帝元鳳三年에 泰山石起하고 上林僵柳復起生하며 有蟲食葉成字曰 公孫病已立이라하니 病已는 宣帝少字也라 弘乃上言호되 當有匹庶爲天子라하니 弘坐說妖言惑衆伏誅하니라】하야 以爲漢當再受命이라하고 至成帝하야 齊人甘忠可 詐造天官等書하야 以授其徒하니 而後에 讖記【讖은 纖也니 其義纖微也라】盛矣라 王莽因之하야 造作符命하야 代漢天下하니 殆之遺智也라 光武明智有餘하니 當懲欺罔하야 絶其端倪하야 勿使遺禍後世어늘 卽位之初에 首從事焉이라 彼其崎嶇南陽新野間할새 聞劉秀當爲天子舊矣【光武는 南陽蔡陽人이라 王莽時에 天下連歲災蝗하니 南陽尤飢라 光武避吏新野하야 因賣穀於宛이러니 宛人李通이 以圖讖說光武호되 劉氏復起라하니 乃市兵弩하야 起於宛하니라】러니 一旦에 以赤伏符卽位하니 意者以謂天誠有是書하야 天人之秘를 眞不可誣邪아 王莽은 假符命以欺衆하고 光武는 信讖記以自欺하니 是孰爲愚智乎아 且王氏殘虐하야 百姓思漢이 久矣라 光武之爲民望也하니 向使無赤符說이면 當不有天下乎아 彼彊華者 果安從得此書오 是는 {以}不過哀章【哀章이 作銅匱할새 爲兩檢하고 署其一曰 天帝行璽金匱圖라하고 其一署曰 赤帝璽니 邦傳與皇帝金策書라하다 日昏時에 衣黃衣하고 持匱至高廟하야 以付僕射한대 僕射以聞이어늘 莽至高廟하야 拜受金櫃하고 下書曰 皇天上帝降顯大祐하야 屬予以天下兆民이라 赤帝漢氏高皇帝之靈이 承天命하야 傳國金策之書하니 敢不欽受리오 乃御王冠하고 卽眞天子位하야 建有天下之號曰新이라하다 邦은 高帝名이니 廟有令僕射하니라】之類耳어늘 舍人事而托符讖하니 是何不自信이 若此也오 三代之王이 固嘗受命이나 其符安在오 夫亦卜諸人心而已矣라 雖然이나 神器至重이라 一旦而得之가 誠非偶然者니 萬一有前世博物道術之士 察見興亡하고 形諸讖記를 或未可知也라 然亦不足盡信矣어늘 彼進用人材하고 興建禮樂이 何與讖記완대 而拳拳若此오 是殆蔽溺過甚하야 不自知義理所在乎인저 吾觀光武컨대 不特自信而已요 又將移之群臣하야 至附於聖人之經하고 以此明示百官하야 則而象之하야 妄說符命하니 其患이 何所不至哉아 流弊旣廣에 餘孽日深이라 以唐太宗之明智로도 猶以秘記로 殺功臣【左武衛將軍武連縣公 李君羨이 直玄武門時에 太白이 屢晝見하니 太史占云 女主昌이라하고 民間에 又傳秘記云 唐三世之後에 女主武王이 代有天下라하니 上惡之하다 會에 與諸武臣으로 宴宮中行酒할새 令實言少名하니 君羨自言 名五娘이라하야늘 上笑曰 何物女子 乃爾勇健고하다 又以君羨官稱邑封에 皆有武字라하야 深惡之하다 出爲華州刺史러니 有布衣員道信이 自言 能絶粟, 曉佛法이라하니 君羨이 深敬信之하야 數相從屛人語라 御史奏 君羨이 與妖人交通하야 謀不軌라하야 坐誅하니라】하고 亂臣賊子 私自譔(撰)述하야 欺天罔人하야 行盜竊之計多矣니 孰謂光武之明智而慮不及此哉아

○ 황제가 圖讖說을 좋아하였으므로 鄭興과 함께 郊祀의 일을 의논할 때에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圖讖으로 결단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鄭興이 대답하기를 “신은 圖讖을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卿이 圖讖을 하지 않는 것은 圖讖說을 그르다고 여겨서인가?” 하니, 鄭興이 황공하여 아뢰기를 “신은 圖讖書에 대해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르다고 여기는 것은 없습니다.” 하니, 황제의 노여움이 비로소 풀렸다.- 《後漢書 鄭興傳》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道를 아는 자는 義理로써 天命에 대처하여 이치가 행할 만하면 행하고 이치가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어서 術數의 학문을 취하지 않았다. 鄭興이 몸소 明君을 만났으니, 마땅히 지극히 의논해서 군주의 의혹을 풀어 주어야 할 터인데 한 번 힐책을 당하자 갑자기 공손한 말을 내었으니, 군자가 이것을 그르다 하였다.”

戴溪의 《通鑑筆義》에 말하였다.

“圖讖說은 과연 누가 처음 만들었는가? 左丘明이 《春秋》의 傳을 지을 때에 신기하고 괴상한 말과 卜筮【거북점을 卜이라 하고 시초점을 筮라 하니, 蓍는 풀 이름인데 이것을 사용하여 ≪周易≫점을 친다. ≪春秋左傳≫ 僖公 4年條에 “시초점은 짧고 거북점은 길다.” 하였는데, 注에 “물건이 생겨난 뒤에 象이 있고 象이 있은 뒤에 數가 있으니, 거북점은 象이고 시초점은 數이니, 象은 앞에 있고 數는 뒤에 있다. 그러므로 앞의 것을 長이라 하고, 뒤의 것을 短이라 한다.” 하였다.】를 이것저것 취하여 禍福을 설명함에 모두 근거가 있었으나 童謠는 있고 讖語는 없었다.【奏樂은 없이 노래만 부르는 것을 謠라고 하니, 어린아이는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 마침 장난하고 희롱하는 말이 믿을 만한 예언이 되는 듯한 것이다.】 그러다가 司馬遷이 《史記》를 지음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秦나라 사람들이 萬里長城을 쌓아 오랑캐를 대비한 것은 圖讖書에 「秦나라를 망칠 자가 胡이다.」라고 한 말 때문이었으나 일찍이 이것이 胡亥인 줄을 알지 못하였으며, 陳涉이 일을 일으키자 귀신에게 가탁하여 사람들을 위협하고【陳涉과 吳廣이 거사할 때에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일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나 귀신에게 점을 쳐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陳勝과 吳廣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먼저 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붉은 글씨로 帛書 14권을 써서 사람들에게 보였다.】帛書를 취하여 물고기의 뱃속에 넣어 두어 세상의 간사한 사람들이 비로소 文書를 빌어 사람들을 의혹하게 했다.’ 하였다.

漢나라 宣帝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에 眭弘이 災異를 유추하여 말해서【昭帝 元鳳 3년에 泰山에 돌이 우뚝 일어나고, 上林苑에 쓰러졌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나 살아났으며, 벌레가 나뭇잎을 먹어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내용에 “公孫인 病已가 즉위한다.” 하였으니, 病已는 宣帝의 어렸을 적 字이다. 眭(휴)弘이 이에 上言하기를 “마땅히 庶人이 天子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眭弘은 요망한 말을 하여 무리를 미혹시킨 죄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다.】漢나라가 마땅히 다시 天命을 받을 것이라 하였고, 成帝에 이르러서 齊나라 사람 甘忠可는 거짓으로 《天官》 등의 책을 만들어서 그 무리에게 전수하니 이후에 圖讖書【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섬세하고 은미한 것이다.】가 성행하였다. 王莽이 이로 인하여 符命을 조작해서 漢나라의 천하를 대신하니, 아마도 陳勝吳廣의 남은 지혜인 것이다.

光武帝는 밝고 지혜로움이 有餘하였으니, 마땅히 王莽의 속임수를 징계해서 그 단서를 끊어 후세에 禍를 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즉위 초에 첫 번째로 이에 종사하였다. 저 南陽과 新野 사이에서 逆境에 처했을 때에 ‘劉秀가 마땅히 천자가 된다.’는 말을 예전부터 들었다.【光武는 南陽 蔡陽 사람이다. 王莽 때에 천하에 매년 蟲害가 있었는데, 南陽은 흉년이 더욱 심하였다. 光武帝가 新野로 관리를 피하여 宛에서 곡식을 팔았는데, 宛 땅 사람 李通이 圖讖說을 가지고 光武帝를 설득하기를 “劉氏가 다시 일어난다.” 하니, 이에 兵器와 弓弩를 사서 宛에서 起兵하였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赤伏符로 즉위하게 되자, 생각하기를 ‘하늘에 진실로 이러한 서책이 있어서 天人의 비밀을 참으로 속일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王莽은 符命을 빌어서 여러 사람들을 속이고 光武帝는 圖讖書를 믿어서 자신을 속였으니, 이는 누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되는가?

王氏는 잔인하고 포학해서 백성들이 漢나라를 생각한 지가 오래였다. 그리하여 光武帝가 백성들이 바라는 바가 되었으니, 그때 만약 赤伏符의 말이 없었더라면 마땅히 천하를 소유하지 못했겠는가? 저 彊華라는 자는 과연 어디에서 이런 책을 얻었는가? 이는 哀章【哀章이 구리궤짝을 만들 때에 두 개의 玉檢을 만들고, 그중 하나에는 “天帝行璽金匱圖”라 쓰고, 또 하나에는 “赤帝璽이니, 劉邦이 황제에게 金策書를 전해 준다.” 고 썼다. 날이 저물 때에 哀章이 黃衣를 입고 궤짝을 가지고 高祖의 사당에 이르러서 僕射에게 주니, 僕射가 이것을 보고하였다. 王莽이 高祖의 사당에 이르러서 절하고 金櫃를 받고는 글을 내리기를 “皇天上帝가 큰 福을 내리시어 나에게 천하와 억조의 백성을 맡기셨다. 赤帝인 漢나라 高皇帝의 神靈이 天命을 받들어서 金策書로 傳國하니, 감히 공경히 받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王冠을 쓰고 진짜 天子에 즉위하여 천하를 소유한 國號를 新이라 하였다. 邦은 高帝의 이름이니, 사당에는 令과 僕射가 있었다.】의 부류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람의 일을 버려두고 符書에 의탁하였으니, 스스로 믿지 않음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三代의 왕이 진실로 일찍이 天命을 받았으나 그 符書가 어디에 있었는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점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神器(天子의 지위)는 지극히 소중하다. 하루아침에 이것을 얻은 것이 진실로 우연이 아니니, 만일 前代에 온갖 사물을 널리 알고 道術에 능한 선비가 있어서 興亡盛衰의 이치를 살펴보고 이것을 圖讖書에 나타냈는지는 혹 알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다 믿을 것이 못 되는데, 저 人材를 등용하고 禮樂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圖讖書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와 같이 연연해 한단 말인가? 이는 자못 가리고 빠짐이 너무 심해서 스스로 義理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한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光武帝는 스스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또 이것을 여러 신하들에게 옮겨서 聖人의 經書에 붙이기까지 하였고, 이것을 百官들에게 분명히 보여서 본받아 따르게 하여 符命을 함부로 말하게 하였으니, 그 폐해가 어찌 이르지 못하는 바가 있겠는가. 폐해가 이미 넓어짐에 남은 싹이 날로 깊어졌다. 唐나라 太宗의 밝음과 지혜로도 오히려 秘記 때문에 功臣을 죽였고,【左武衛將軍 武連縣公 李君羨이 玄武門에서 숙직할 때에 太白星이 여러 번 낮에 나타나니, 太史가 점을 치기를 “女主가 창성할 조짐이다.” 하였으며, 민간에 또 秘記를 전하기를 “唐나라는 3대가 지난 뒤에 女主인 武王이 대신하여 천하를 소유한다.” 하니, 上(太宗)이 이를 싫어하였다. 마침 上이 여러 武臣들과 궁중에서 잔치하여 술잔을 돌릴 적에 신하들로 하여금 어렸을 때의 이름을 사실대로 말하게 하였는데, 李君羨이 자신의 이름이 五娘이라고 말하자, 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무슨 놈의 여자가 이와 같이 용맹하고 건장하단 말인가.” 하였으며, 또 李君羨의 官名과 食邑과 封號에 모두 武字가 들어있다 하여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李君羨이 華州刺史로 나갔는데, 布衣인 員道信이 스스로 말하기를 “곡식을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佛法을 안다.” 하니, 李君羨이 그를 깊이 존경하고 믿어 자주 따라서 놀며 사람을 물리치고 둘이서만 말하곤 하였다. 御史가 아뢰기를 “李君羨이 요망한 사람과 交通하여 不軌(반역)를 도모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죄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다.】 亂臣賊子들이 사사로이 스스로 글을 지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여서 도적질하는 계책을 행한 자가 많으니, 누가 光武帝의 밝음과 지혜로도 사려가 여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南陽太守杜詩 政治淸平하니 百姓이 便之하고 又修治陂池하야 廣拓土田하니 郡內比室殷足하야 時人이 以方召信臣【字翁卿이니 元帝時人이라】이라 南陽이 爲之語曰 前有召父러니 後有杜母라하더라 〈出本傳〉

南陽太守杜詩의 정치가 깨끗하고 공평하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고, 또 제방과 못을 다스려 田地를 널리 개척하니 郡 안에 즐비한 집들이 풍족하여 당시 사람들이 召信臣【召信臣은 字가 翁卿이니, 元帝 때 사람이다.】에게 비교하였다. 南陽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말하기를 “전에는 召父(召信臣)가 있었는데, 뒤에는 杜母가 있다.” 하였다.- 《後漢書 杜詩傳》에 나옴 -

[壬辰]八年

[壬辰]八年이라

夏에 帝自將征隗囂하니 光祿勳【百官志에 勳은 猶閽也니 主殿門宮戶라】郭憲이 諫曰 東方이 初定하니 車駕未可遠征이니이다하고 乃當車拔佩刀하야 以斷車靷【斷은 音短이니 截也요 靷은 音引이니 所以引軸이라 一云駕車靶니 在胸曰靷이라】호되 帝不從하고 西至漆【括地志에 漆水는 源出岐州普閏縣東南岐漆山漆溪하야 東入渭하니 今豳州新平縣이 古漆縣也라】하다 諸將이 多以王師之重으로 不宜遠入險阻라하야 猶豫未決이러니 帝召馬援問之한대 이 因說호되 隗囂將帥 有土崩之勢하니 兵進에 有必破之狀이라하고 又於帝前에 聚米爲山谷하야 指畫形勢하야 開示衆軍所從道徑往來하야 分析昭然可曉라 帝曰 虜在吾目中矣라하고 明旦에 遂進軍하다 〈出馬援傳〉數道上隴할새 使王遵으로 以書招牛邯【隗囂將이라】下之하고 拜邯太中大夫한대 於是에 의 大將十三人과 屬縣十六과 衆十餘萬이 皆降하다 將妻子하고 犇西城【西邑名이니 屬隴西郡이라 有嶓冢山하니 漢水所出이라】이어늘 〈出囂傳〉詔告隗囂曰 若束手自詣면 父子相見이요 保無他也니라 終不降하다

建武 8년(임진 32)

여름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隗囂를 정벌하니, 光祿勳【≪後漢書≫ 〈百官志〉에 “勳은 閽(문지기)과 같으니 宮殿의 門戶를 주관한다.” 하였다.】郭憲이 간하기를 “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 앞을 가로막고 佩刀를 꺼내어 수레의 고삐를 끊었으나【斷은 음이 단이니 끊음이요, 靷은 음이 인이니 수레의 축을 끄는 끈이다. 一說에는 “靷은 멍에 하는 고삐이니, 가슴에 있는 것을 靷이라 한다.” 하였다.】 황제가 따르지 않고 서쪽으로 漆水【≪括地志≫에 “漆水는 근원이 岐州 普閏縣 동남쪽 岐漆山 漆溪에서 나와 동쪽으로 渭水로 들어가니, 지금의 豳州 新平縣이 옛날 漆縣이다.” 하였다.】에 이르렀다.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귀중한 王師(천자의 군대)로서 험한 곳에 멀리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여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황제가 馬援을 불러 물으니 馬援이 인하여 말하기를 “隗囂의 장수들이 배반하여 와해될 형세에 있으니, 우리 군대가 진격하면 반드시 격파될 상황입니다.” 하였고, 또 황제의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짝 모양을 만들어 지형을 지적해 가면서 여러 군대가 따라갈 길의 오고 가며 경유할 곳을 보여 주어 분석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오랑캐가 일목요연하게 내 눈 안에 있다.” 하고는 다음 날 마침내 진군하였다.-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여러 길을 따라 隴으로 올라갈 때에 王遵으로 하여금 편지로 〈隗囂의 장수인〉 牛邯【牛邯은 隗囂의 장수이다.】을 招諭하여 항복하게 하고 牛邯을 太中大夫에 임명하니, 이에 隗囂의 大將 13명과 屬縣 16縣과 병사 10여만 명이 모두 항복하였다. 隗囂가 妻子를 거느리고 西城【西城은 서쪽 고을 이름이니 隴西郡에 속하였다. 嶓冢山이 있으니 漢水가 발원하는 곳이다.】으로 달아나자, - 《後漢書 隗囂傳》에 나옴 - 조서를 내려 隗囂에게 고하기를 “만약 손을 묶고 스스로 오면 父子가 서로 만나 보게 할 것이요, 딴 일이 없음을 보장하겠다.” 하였으나 隗囂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潁川盜賊이 群起하야 寇沒屬縣하고 河東守兵이 亦叛하야 京師騷動이라 〈出本紀〉帝聞之하고 曰吾悔不用郭子橫之言【先是에 郭憲嘗諫曰 東方初定하니 車駕未可遠征이라하니라】이로다

潁川에 도적이 떼지어 일어나서 도적들이 屬縣을 함락하고, 河東의 수비병들이 또한 배반하여 京師가 소란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 郭子橫(郭憲)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이보다 앞서 郭憲이 일찍이 간하기를 “東方이 처음 평정되었으니, 車駕가 멀리 정벌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하였다.

秋八月에 帝自上邽【地理志에 隴西郡上邽縣이라 邽는 音圭라】로 晨夜東馳할새 賜岑彭等書曰 兩城이 若下면 便可將兵하야 南擊蜀虜하리니 人苦不知足【苦는 甚也라】이로라 旣平隴에 復望蜀이온여 每一發兵에 頭須(鬚)爲白이로라 九月에 車駕還宮이러니 帝謂執金吾寇恂曰 潁川이 迫近京師하니 當以時定이라 惟念獨卿이 能平之耳니 從九卿復出하야 以憂國이 可也【按七制(註)[解]云 時에 寇恂이 爲執金吾하니 雖非九卿이나 亦陪卿也라 可也는 猶言可乎라】아 對曰 潁川이 聞陛下有事隴, 蜀이라 故로 狂狡乘間하야 相詿誤耳니 如聞乘輿南向이면 賊必惶怖歸死하리니 臣은 願執銳【銳는 謂利兵也라】前驅하노이다 帝從之하다 庚申에 車駕南征하니 潁川盜賊이 悉降이라 寇恂이 竟不拜郡한대 百姓이 遮道曰 願從陛下하야 復借寇君一年하노이다 乃留長社【地理志에 潁川郡에 有長社縣이라 括地志〈云〉 故城이 在今許州長社縣西하니 其社中에 有樹暴長하야 因名焉이라하니 長如字라】하야 鎭撫吏民하고 受納餘降하다 〈出恂傳〉東郡, 濟陰【東郡은 今東昌府是也라 濟陰은 括地志云 今曹州有濟陰縣이 是也라】에 盜賊이 亦起어늘 帝遣李通, 王常하야 擊之할새 以耿純이 嘗爲東郡太守하야 威信이 著於衛地【衛地는 亦東郡之別名이라】라하야 遣使拜太中大夫하야 使與大兵會東郡하다 東郡이 聞入界하고 盜賊九千餘人이 皆詣純降하니 大兵이 不戰而還이어늘 璽書復以爲東郡太守하다 〈出純傳〉

가을8월에 황제가 上邽【上邽는 ≪漢書≫ 〈地理志〉에 “隴西郡 上邽縣이다.” 하였다. 邽는 음이 규이다.】로부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쪽으로 달려갈 때에 岑彭 등에게 글을 내리기를 “두 城이 만약 함락되면 곧바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蜀 땅의 오랑캐(公孫述)를 공격할 것이니, 사람이 만족할 줄 모름이 심하도다.【苦는 심함이다.】 이미 隴(隗囂)을 평정하고 또다시 蜀(公孫述)을 바라는구나. 한 번 군대를 일으킬 때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다.” 하였다.

9월에 車駕가 궁중으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執金吾寇恂에게 이르기를 “潁川 지방은 京師(洛陽)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제때에 평정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오직 卿만이 평정할 수 있으니 九卿으로부터 다시 外職으로 나가서 國事에 매진하는 것이 가하겠는가?【살펴보건대 ≪七制解≫에 이르기를 “이때 寇恂이 執金吾가 되었으니, 執金吾가 비록 九卿은 아니나 또한 卿에 해당한다.” 하였다. ‘可也’는 ‘可乎’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寇恂이 대답하기를 “潁川의 도적들이 폐하께서 隴과 蜀을 정벌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친 자들이 틈을 타고서 서로 속이고 그르친 것일 뿐이니, 〈굳이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아도〉 만일 乘輿가 남쪽을 향해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도적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따를 것이니, 신은 원컨대 예리한 병기를 잡고【銳는 예리한 병기를 이른다.】 선봉이 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庚申日에 車駕가 남쪽을 정벌하니, 潁川의 도적이 모두 항복하였다. 寇恂이 끝내 郡守에 임명되지 않자, 백성들이 길을 가로막고 말하기를 “원컨대 폐하로부터 寇君을 다시 1년 동안 빌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寇恂을 長社【≪漢書≫ 〈地理志〉에 “潁川郡에 長社縣이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長社의 옛 城이 지금 許州 長社縣 서쪽에 있으니, 그 社 안에 나무가 갑자기 자랐으므로 인하여 長社라고 이름했다.” 하였으니, 長은 본래의 글자대로 읽는다.】에 남겨 두어 관리와 백성들을 鎭撫하게 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後漢書 寇恂傳》에 나옴 -

東郡과 濟陰【東郡은 지금 東昌府가 이곳이다. 濟陰은 ≪括地志≫에 “지금 曹州에 있는 濟陰縣이 이곳이다.” 하였다.】에도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황제가 李通王常을 보내어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耿純이 일찍이 東郡太守가 되어 위엄과 신의가 衛 지역(東郡)에 드러났다【衛 지방은 또한 東郡의 別名이다.】 해서 使者를 보내어 耿純을 太中大夫로 임명하여 大軍과 東郡에서 만나게 하였다. 東郡에서는 耿純이 경내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도적 9천여 명이 모두 耿純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大軍이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親書를 내려 다시 耿純을 東郡太守로 임명하였다.- 《後漢書 耿純傳》에 나옴 -

[癸巳]九年

[癸巳]九年이라

祭(蔡)遵【祭는 側界切이니 征虜將軍潁陽侯라】이 薨하다 은 爲人이 廉約小心하야 克己奉公하고 賞賜를 盡與士卒하고 約束이 嚴整하니 所在에 吏民이 不知有軍이러라 取士에 皆用儒術하고 對酒設樂에 必雅歌投壺【雅歌는 謂歌詩(樂)[雅]하고 投壺爲樂也라 投壺는 詳見禮記하니라 [通鑑要解]雅歌는 謂歌雅詩라 投壺는 禮記註曰 壺頸脩七寸이요 腹脩五寸이요 口徑二寸半이요 容斗五升하나니 壺中에 實小豆焉은 爲其矢之躍而出也라 矢以柘若棘호되 長二尺八寸이요 無去其皮하니 取其堅而重이라 投之하야 勝者飮不勝者하야 以爲優劣也라】하고 臨終에 遺戒薄葬하고 問以家事호되 終無所言이러라 其後朝會에 帝每歎曰 安得憂國奉公을 如祭征虜者乎아 〈出遵本傳〉

建武 9년(계사 33)

祭遵【祭는 側界切(채)이니, 征虜將軍으로 潁陽侯에 봉해졌다.】이 죽었다. 祭遵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약하고 소심하여 사욕을 이기고 公(국가)을 위해 봉직하며, 賞으로 하사한 것을 모두 士卒들에게 주고 約束(명령이나 법규)이 엄정하니, 그가 있는 곳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군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선비를 뽑을 적에 모두 儒學한 자를 썼으며, 술자리를 대하고 풍악을 연주할 때에 반드시 雅詩를 노래하고 投壺를 하였으며,【[釋義]雅歌投壺는 ≪詩經≫의 〈大雅〉와 〈小雅〉를 노래하고 投壺를 하여 즐김을 이른다. 投壺는 ≪禮記≫ 〈投壺篇〉에 자세히 보인다. [通鑑要解]雅歌는 ≪詩經≫의 〈大雅〉와 〈小雅〉를 노래함을 이른다. 投壺는 ≪禮記≫ 註에 “병 목의 길이는 7寸, 복판의 길이는 5寸, 주둥이의 너비는 2寸 반이고, 한 말 다섯 되가 들어가니, 병 속에 팥을 채우는 것은 화살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화살은 산뽕나무와 가시나무로 하되 길이가 2尺 8寸이고 껍질을 벗기지 않으니, 견고하고 무거움을 취한 것이다. 이것을 병 속에 던져 넣어 이긴 자가 이기지 못한 자에게 罰酒를 먹여 優劣로 삼는다.】 임종할 때에는 薄葬하도록 유언하였고 家事를 물었으나 끝내 말한 바가 없었다. 그 후 조회할 때마다 황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가를 걱정하고 公正하게 봉직하기를 祭征虜(祭遵)와 같이 하는 자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後漢書 祭遵傳》에 나옴 -

隗囂疾且餓하야 恚憤【恚는 怒恨也요 憤은 懣也라】而卒하니 少子이 立爲王하다 〈出囂傳〉秋에 來歙이 率馮異等五將軍하고 討隗純於天水하다 〈出本紀〉

隗囂가 병들고 또 굶주려서 노여워하고 답답해하다가【恚는 노여워하고 한함이요, 憤은 답답해함이다.】죽으니, 작은아들인 隗純이 서서 王이 되었다. - 《後漢書 隗囂傳》에 나옴 -

가을에 來歙馮異 등 다섯 장군을 거느리고 隗純을 天水에서 토벌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甲午]十年

[甲午]十年이라

十月에 隗純이 降하니 隴右遂安하다

建武 10년(갑오 34)

10월에 隗純이 항복하니隴右(隴西)가 마침내 편안하였다.

[乙未]十一年

[乙未]十一年이라

岑彭이 數攻田戎等하야 不克이어늘 帝遣吳漢하야 發荊州兵하야 與會荊門하다 이 裝戰船千艘【艘는 蘇刀反이니 船之總名이라】하야 直衝浮橋【公孫述이 遣其將田戎任滿等하야 據荊門하고 起浮橋以絶水道하고 結營跨山以塞陸路하니라】하야 順風竝進하니 所向에 無前이라 蜀兵이 大亂하야 溺死者數千人이라 長驅入江關하야 令軍中無得虜掠하니 百姓이 大喜하야 爭開門降이러라

建武 11년(을미 35)

岑彭이 자주 田戎 등을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자, 황제가 吳漢을 보내어 荊州의 군대를 징발해서 岑彭과 함께 荊門에서 만나게 하였다. 岑彭이 戰船 1천 척【艘는 蘇刀反(소)이니, 배의 총칭이다.】을 정비해서 곧바로 浮橋【[頭註]浮橋:公孫述이 그 장수인 田戎과 任滿 등을 보내서 荊門을 점거하고, 浮橋를 일으켜 水路를 끊고, 陣營을 설치하되 山을 넘어 陸路를 막았다.】를 충돌하여 순풍을 타고 함께 전진하니, 배가 향하는 곳에는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蜀軍이 크게 혼란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승승장구하여 江關(강가에 있는 관문)에 들어간 다음 군중에 명령하여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니, 蜀 지방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 六月에 來歙이 與蓋延等으로 進攻, 【元, 安은 述將王元及環安也라 王元初爲隗囂將이러니 今述以元爲將軍하야 與安拒河池也라】하야 大破之하니 蜀人이 大懼하야 使刺客으로 刺中傷而絶이라 趙王良【帝叔也라】이 從帝送歙喪喪還洛陽할새 乘輿縞素臨弔하고 送葬이라】할새 還入夏城門【洛陽城十二門은 每一方三門이니 夏門在亥라】하야 與中郞將張邯爭道하야 叱旋車하고 又詰責門候하야 使前走數十步어늘 司隷校尉鮑永이 劾奏호되 이 無藩臣禮하니 大不敬이니이다 이 貴戚尊重이어늘 而이 劾之하니 朝廷이 肅然이러라 이 辟扶風鮑恢【辟은 召也라 一曰除也니 拜官曰除라】하야 爲都官從事하니 恢亦抗直【抗은 與亢同하니 上下相當하야 無所畢屈曰抗이라】하야 不避彊禦【彊禦는 彊梁禦善之人也라 又禦禁也니 言力强不可禁也니 詩注에 暴虐之臣이라하니라】라 帝常曰 貴戚이 且斂手하야 以避二鮑라하더라

○ 6월에 來歙蓋延 등과 함께 진격하여 王元環安을 공격하여【元과 安은 公孫述의 장수인 王元과 環安이다. 王元은 처음에 隗囂의 장수였는데, 지금 公孫述이 王元을 장수로 삼아 環安과 함께 河池縣을 막게 하였다.】大破하니, 蜀 땅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來歙을 찔러 중상을 입혀 죽게 하였다. 趙王 劉良【趙王 劉良은 황제의 叔父이다.】이 황제를 따라 來歙의 喪을 장송【來歙의 喪이 洛陽으로 돌아올 때에 乘輿(황제)가 喪服을 입고 친히 임하여 조문하고 장송하였다.】할 때에 돌아와 夏城門【洛陽城의 열두 門은 매 방위마다 세 門이니, 夏門은 亥方에 있다.】으로 들어가 中郞將張邯과 길을 다투어서 張邯을 꾸짖어 수레를 되돌리게 하였고, 또 門候를 힐책하여 앞으로 수십 보를 달리게 하였다. 司隷校尉鮑永劉良을 탄핵하여 아뢰기를 “劉良이 藩臣의 禮가 없으니, 크게 불경합니다.” 하였다. 劉良은 貴戚으로 신분이 높고 귀중하였는데 鮑永이 그를 탄핵하니, 조정이 숙연해졌다. 鮑永扶風鮑恢를 불러【辟은 부름이다. 一說에는 除라고 하니,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除라고 한다.】都官從事로 삼으니, 鮑恢 또한 성질이 꼿꼿하고 곧아서【抗은 亢과 같으니, 上下가 서로 맞서서 끝내 굽히는 바가 없음을 抗이라 한다.】 권세가 있는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彊禦는 세력이 강하여 善을 막는 사람이다. 또 禦는 禁하는 것이니 힘이 강하여 금할 수 없음을 이르는 바, ≪詩經≫의 注에는 포학한 신하라고 하였다.】 황제가 항상 말하기를 “貴戚들도 두 손을 들고 二鮑(鮑永과 鮑恢)를 피한다.” 하였다.

公孫述이 使其將延岑拒廣漢하고 侯丹拒黃石【廣漢, 黃石은 皆地名이라 黃石은 黃石灘也라】이어늘 岑彭이 襲擊侯丹하야 大破之하고 因晨夜하야 倍道兼行二千餘里하야 徑拔武陽【武陽縣은 屬犍爲郡이라】하고 使精騎로 馳擊廣都할새 去成都數十里하야 勢若風雨하니 所至에 皆犇散이러라 初에 이 聞漢兵在平曲이라 故로 遣大兵逆之러니 及至武陽하야 繞出延岑軍後하니 蜀地震駭라 이 大驚하야 以杖擊地曰 是何神也오하고 〈出彭傳〉乃使刺客으로 詐爲亡奴하야 降岑彭이라가 夜에 刺殺하다 〈出彭傳〉

公孫述이 그의 장수延岑으로 하여금 廣漢을 막게 하고, 侯丹으로 하여금 黃石을 막게 하였다.【[通鑑要解]延岑拒廣漢 侯丹拒黃石:廣漢과 黃石은 모두 地名이다. 黃石은 黃石灘이다.】岑彭侯丹을 습격하여 대파하고 이른 새벽과 밤을 틈타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2천여 리를 가서 곧바로 武陽【武陽縣은 犍爲郡에 속하였다.】을 함락하고, 정예기병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廣都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成都와의 거리가 수십 리에 불과하여 형세가 폭풍우와 같으니, 이르는 곳마다 적병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

처음에 公孫述은 漢나라 군대가 平曲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大兵을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岑彭이 武陽에 이르러서 延岑의 군대 뒤를 빙 돌아 나오니, 蜀 지방이 진동하여 놀랐다. 公孫述이 크게 놀라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어쩌면 이리도 신속한가?” 하고 - 《後漢書 岑彭傳》에 나옴 - 마침내 자객을 도망한 종인 것처럼 꾸며서, 岑彭에게 항복하였다가 밤에 岑彭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後漢書 岑彭傳》에 나옴 -

馬成等이 破河池하고 遂平武都하다

馬成 등이 河池縣을 격파하고 마침내 武都를 평정하였다.

郭伋【姓名이니 字細侯라】이 爲幷州牧하야 過京師할새 帝問以得失한대 曰 選補衆職인대 當簡(揀)天下賢俊이요 不宜專用南陽人【帝南陽上蔡人也라】이니이다 是時에 在位多鄕曲故舊라 故로 言及之러라 〈出伋傳〉

○ 郭伋【郭伋은 성명이니, 字가 細侯이다.】이 幷州牧이 되어서 京師를 지날 적에 황제가 정사의 得失을 묻자, 郭伋이 대답하기를 “여러 직책을 선발하여 補任하려 한다면 천하의 어질고 준걸스러운 사람을 가려 써야 하고, 오로지 南陽 사람만을 써서는 안 됩니다.【오로지 南陽 사람만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光武帝가 南陽의 上蔡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때 지위에 있는 자들이 황제의 고향 사람과 옛 친구가 많았으므로 郭伋이 언급한 것이었다.- 《後漢書 郭伋傳》에 나옴 -

[丙申]十二年

[丙申]十二年이라

吳漢이 將步騎二萬하고 進逼成都하야 與公孫述로 戰於廣都, 成都之間하야 八戰八克하다 〈出吳漢傳〉

建武 12년(병신 36)

吳漢이 步兵과 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전진해서 成都를 압박하여 公孫述과 함께 廣都와 成都의 사이에서 싸웠는데, 여덟 번 싸워 여덟 번 승리하였다. - 《後漢書 吳漢傳》에 나옴 -

○ 十一月에 臧宮이 軍咸陽門하니 이 自將數萬人하야 攻吳漢하고 使延岑으로 拒宮大戰할새 이 三合三勝하다 自旦及日中에 軍士不得食하야 竝疲어늘 漢이 因使護軍高午, 唐邯으로 將銳卒數萬하야 擊之하니 述兵이 大亂이라 高午犇陳하야 刺述洞胸【穿胸也라】墮馬한대 左右輿入城이러니 이 以兵屬延岑하고 其夜에 死하니 明旦에 延岑이 以城降하다 〈出述傳〉

○ 11월에 臧宮이 咸陽門에 군대를 주둔시키니, 公孫述이 직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吳漢을 공격하고, 延岑으로 하여금 臧宮을 막게 하여 크게 싸웠는데, 延岑이 세 번 會戰하여 세 번 승리하였다.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군사들이 밥을 먹지 못하여 모두 피로해하자, 漢나라가 이 틈을 타 護軍인 高午唐邯으로 하여금 정예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니, 公孫述의 군대가 크게 혼란하였다. 高午가 적진으로 달려가서 公孫述을 찔러 가슴을 관통하여【洞胸은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말에서 떨어뜨리니, 좌우의 측근들이 수레에 태워 城 안으로 들어갔다. 公孫述이 군대를 延岑에게 맡기고 그날 밤에 죽으니, 다음 날 아침에 延岑이 城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後漢書 公孫述傳》에 나옴 -

○ 初에 이 徵廣漢, 李業하야 爲博士한대 이 固稱疾不起라 이 羞不能致하야 賜以毒酒하니 이 乃嘆曰 古人이 危邦不入하고 亂邦不居는 爲此故也로다하고 遂飮毒而死【述聞之하고 恥有殺賢之名하여 遣使弔祠하고 賻繒百匹하니라】하다 이 又聘巴郡譙玄한대 이 不詣어늘 亦遣使者하야 以毒藥劫之하다 이 徵蜀郡王皓, 王嘉할새 恐其不至하야 先繫其妻子하니 , 皆自殺하고 犍爲費貽 不肯仕述하야 漆身爲癩【漆有毒하야 近之則患瘡하야 若癩然이라】하야 陽(佯)狂以避之하고 同郡任永, 馮信이 皆托靑盲하야 以辭徵命하니라 帝旣平蜀에 譙玄이 已卒이어늘 祠以中牢【牛羊豕曰太牢요 羊豕曰中牢라】하고 勅所在하야 還其家錢하고 而表李業之閭하고 徵費貽, 任永, 馮信하니 會에 , 은 病卒하고 獨仕하야 至合浦太守하니라 〈以上 竝出獨行傳〉

○ 처음에 公孫述廣漢李業을 불러 博士로 삼았는데, 李業이 굳이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았다. 公孫述은 그를 초치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毒酒를 하사하니, 李業이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이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 거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고는 마침내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公孫述이 이 말을 듣고 賢者를 죽였다는 이름이 있음을 부끄러워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으며, 비단 100필을 부의하였다.】

公孫述이 또 巴郡의 譙玄을 초빙하였으나 譙玄이 오지 않자, 또한 使者를 보내어 독약으로 위협하였다. 公孫述이 蜀郡의 王皓王嘉를 부를 적에 그들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먼저 그 妻子를 포박하자 王皓王嘉가 모두 자살하였고, 犍爲郡의 費貽公孫述에게 벼슬하려고 하지 아니하여 몸에 옻칠하여 문둥이가 되고【옻은 독이 있어서 가까이하면 상처가 생겨 문둥이와 같이 된다.】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피하였으며, 同郡의 任永馮信은 모두 靑盲(봉사)이 되었다고 칭탁하고 부르는 명령을 사절하였다.

황제가 蜀을 평정하자 譙玄이 이미 죽었으므로 中牢【소와 양과 돼지를 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를 中牢라 한다.】로써 제사하고 그가 살던 지방에 명령하여 집과 돈을 돌려주었으며 李業의 마을에 정표하고 費貽任永馮信을 불렀는데, 마침 任永馮信은 병으로 죽었고 오직 費貽만 벼슬하여 合浦太守에 이르렀다. - 이상은 모두 《後漢書 獨行傳》에 나옴 -

○ 帝以睢陽令任延으로 爲武威太守하고 親見戒之曰 善事上官하야 無失名譽하라 對曰 臣聞忠臣은 不私하고 私臣은 不忠이라하니 履正奉公은 臣子之節이요 上下雷同【附利之義也라 震驚百里而百里一同이라 故事無可否而同之者를 謂之雷同이라 又雷之發聲에 物無不同時應者라】은 非陛下之福이니 善事上官은 臣不敢奉詔니이다 帝歎息曰 卿言이 是也로다 〈出循吏傳〉

○ 황제가 睢陽令任延을 武威太守로 삼고, 친히 만나 보고 당부하기를 “上官을 잘 섬겨서 명예를 잃지 말라.” 하였다. 任延이 대답하기를 “신은 듣건대 忠臣은 사사롭지 않고 사사로운 신하는 충성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正道를 행하고 公(국가)을 위해 봉직하는 것은 신하의 절개이고 상하가 附和雷同【雷同은 이익에 붙는다는 뜻이다. 우레가 백 리에 진동하면 백 리 안이 똑같이 놀란다. 그러므로 일의 可否를 따지지 않고 똑같이 찬동하는 자를 雷同이라 이른다. 또 우레가 소리를 낼 때에 물건이 동시에 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雷同이라 한다.】하는 것은 陛下의 福이 아니니, 上官을 잘 섬기라는 말씀은 신이 감히 명령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卿의 말이 옳다.” 하였다.- 《後漢書 循吏傳》에 나옴 -

[丁酉]十三年

[丁酉]十三年이라

時에 異國이 有獻名馬者하니 日行千里하고 又獻寶劍하니 價直(値)百金이라 詔以劍賜騎士하고 馬駕鼓車【馬在軛中曰駕라 天子車駕出이면 後有黃門鼓車라 按鼓車는 (駕)[載]鼓之車也라】하다 上이 雅不喜聽音樂하고 手不持珠玉이러라 〈出循吏傳序〉 嘗出獵이라가 車駕夜還이러니 上東門候郅惲【上東門은 雒陽十二門이라 按十二支니 每一方三門이니 上東者는 寅方門也라 每門候一人이니 秩六百石이라 屬城門校尉하니 司啓閉出入이라 郅惲은 其姓名이라】이 拒關不開라 上이 令從者로 見面於門間한대 曰 火明遼遠이라하고 遂不受詔어늘 上이 乃回하야 從中東門入【中東門은 卯方也라】하다 明日에 이 上書諫曰 昔에 文王이 不敢盤(般)于游田【盤은 與般通하니 樂也라】하고 以萬民惟正之供이러시니 而陛下遠獵山林하야 夜以繼晝하시니 如社稷宗廟【宗은 尊也요 廟는 貌也니 尊先祖貌也라】何잇고 書奏에 賜布百匹하고 貶中東門候하야 爲參封尉【參封은 縣名이니 屬琅邪郡이라 尉는 主盜賊이라】하다 〈出本傳〉

建武 13년(정유 37)

이때 異國에서 名馬를 올린 자가 있으니 하루에 천리 길을 갔고, 또 寶劍을 올리니 값어치가 百金이었다. 上이 명령하여 劍은 騎士에게 하사하고 말은 鼓車(북을 싣고 다니는 수레)에 멍에하게 하였다.【말이 멍에 안에 있는 것을 駕라 한다. 天子의 車駕가 출행하면 黃門(宦官)의 鼓車가 뒤따라간다. 살펴보건대 鼓車는 북을 싣고 다니는 수레이다.】上은 평소에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손에는 珠玉을 잡지 않았다.- 《後漢書 循吏傳》 序에 나옴 -

上이 일찍이 사냥을 나갔다가 車駕가 밤에 돌아왔는데, 上東門의 門候(문지기)인 郅惲【上東門은 雒陽의 12門 중의 하나이다. 살펴보건대 12支가 있으니, 방위마다 세 개의 문이 있는데 上東門은 寅方의 문이다. 문마다 門候 한 사람이 있으니, 품계가 6백 석이다. 城門校尉에 속하니, 성문을 열고 닫으며 출입하는 것을 관장한다. 郅惲은 그의 성명이다.】이 관문을 막고 열어 주지 않았다. 上이 從者로 하여금 문틈으로 얼굴을 보게 하였으나 郅惲은 말하기를 “불빛이 멀어 식별할 수가 없다.” 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받들지 않으므로 上이 마침내 돌아서 中東門으로 들어왔다.【中東門은 卯方이다.】

다음 날 郅惲이 上書하여 간하기를 “옛날에 文王은 감히 유람과 사냥을 즐기지【盤은 般과 통하니 즐거워하는 것이다.】 않고 萬民들이 바르게 공양하는 것만 받으셨는데, 폐하께서는 멀리 山林에 사냥 나가서 밤으로써 낮을 이으시니, 社稷과 宗廟【宗은 높이는 것이고 廟는 모습이니, 先祖의 모습을 높이는 것이다.】를 어찌하시렵니까?” 하였다. 글을 아뢰자, 郅惲에게 삼베 100匹을 하사하고 中東門의 候를 좌천시켜 參封縣의 尉【參封은 縣의 이름이니, 琅邪郡에 속한다. 尉는 도적을 맡은 벼슬이다.】로 삼았다.- 《後漢書 郅惲傳》에 나옴 -

大饗將士功臣하고 定封할새 鄧禹爲高密侯【齊地北海郡高密縣이니 在臨淄之東하니 今密州是라】하야 食四縣하고 李通爲固始侯【固始는 卽固陵이라 本屬陳州러니 後改固始하니 今屬光州라】하고 賈復爲膠東侯【括地志에 卽墨故城은 在密州膠水縣東南六十里하니 卽膠東國이라】하야 食六縣하고 餘皆有差하다 帝在兵間久하야 厭武事하고 且知天下疲耗하야 思樂息肩하고 自隴, 蜀平後로 非警急이면 未嘗復言軍旅러라 皇太子嘗問攻戰之事한대 帝曰 昔에 衛靈公問陳(陣)에 孔子不對하시니 此는 非爾所及이라하니라 〈出本紀〉

將兵과 功臣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고 封邑을 정할 때에 鄧禹가 高密侯【齊나라 땅 北海郡의 高密縣이니 臨淄의 동쪽에 있었으니, 지금의 密州가 이곳이다.】가 되어 4縣을 식읍으로 하고, 李通이 固始侯【固始는 바로 固陵이다. 본래 陳州에 속하였는데 뒤에 固始로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光州에 속한다.】가 되고 賈復이 膠東侯【≪括地志≫에 “卽墨의 옛 城은 密州 膠水縣 동남쪽 60리에 있었으니, 바로 膠東國이다.” 하였다.】가 되어 6縣을 식읍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이 있었다.

황제가 전쟁터에 오래 있어서 전쟁하는 일을 싫어하고, 또 천하가 피폐하고 소모하여 어깨를 쉴 것(평화)을 생각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隴과 蜀이 평정된 이후로 급한 경보가 아니면 일찍이 다시 군대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일찍이 공격하고 전쟁하는 일을 묻자, 황제가 말하기를 “옛날 衛나라 靈公이 陣法을 묻자 孔子가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鄧禹, 賈復이 知帝偃干戈, 修文德하며 不欲功臣擁衆京師하고 乃去甲兵하고 敦儒學하니 帝亦思念하고 欲完功臣爵土하야 不令以吏職爲過【恐其以職事有過而失爵邑也라】하야 遂罷左右將軍官하니 耿弇等이 亦上大將軍印綬하고 皆以列侯就第하니 加位特進奉朝請【春朝曰朝요 秋朝曰請이니 言奉朝會請召而已라】이러라 〈出耿弇, 賈復傳〉 鄧禹內行淳備하야 有子十三人호되 各使守一藝하야 修整閨門하고 敎養子弟하니 皆可以爲後世法이요 資用國邑하야 不修産利러라 〈出禹傳〉賈復은 爲人이 剛毅方直하고 多大節이라 旣還私第에 闔門養威重이러니 朱祐等이 薦復宜爲宰相이로되 帝方以吏事責三公【太尉公은 掌四方兵事하고 司徒公은 掌人民孝弟謙儉事하고 司空公은 掌水土營城起邑浚溝洫修墳坊事라】이라 故로 功臣이 竝不用이라 是時列侯에 唯高密, 固始, 膠東三侯 與公卿으로 參議國家大事하야 恩遇甚厚러라 〈出復傳〉帝雖制御功臣이나 而每能回容【回는 曲也니 謂曲法以容也라】하야 宥其少失하고 遠方貢珍甘에 必先徧賜諸侯하야 而太官【百官志에 掌御膳, 具酒果라】無餘라 故로 皆保其福祿하야 無誅譴者러라 〈出馬武傳〉

朱黼曰 三公은 所與共天位, 治天職, 代天工者也니 惟其宜而已라 豈可以功臣而爲之區別也리오 太甲이 所與圖回庶政者는 皆鳴條牧野之士요 , , , 之世에 所任爲執政者는 皆高帝之故臣也라 升陑【湯이 升自陑라 陑는 地名이니 湯伐桀所라】鷹揚之相은 固不敢以望後世나 然販繒織薄(箔)之徒【謂周勃灌嬰也라】도 亦足以安社稷而重朝廷하니 功臣任事에 果亦何負於天下也哉아 雲臺諸將이 平時專以健武自名者는 雖不足以緝熙帝載나 而之流는 文足以緯國하고 智足以謀王하니 固皆公輔之器요 經綸之才也어늘 乃以功臣이라하야 例擯不用은 謂之何哉오 夫天下權柄은 必有所歸요 人主聰明은 必有所寄라 光武不任大臣하야 而體統已失하니 所以後世托孤之際에 不免政歸房闥【章帝后竇氏, 和帝母梁氏, 殤帝母鄧氏, 安帝后閻氏, 順帝后梁氏 皆以太后臨朝라】이라 終漢之世토록 朝廷之權이 不在母后則在外戚【章帝時竇憲, 和帝時梁竦, 順帝時梁冀라】하고 不在外戚則在宦官【和帝時鄭衆, 順帝時孫程王康等이 皆爲列侯하니 是爲十九侯요 桓帝時單超, 徐璜, 具瑗, 左琯, 唐衡等이 是爲五侯라】하고 不在宦官則在武將【靈帝時董卓袁紹와 獻帝時山東曹操袁術等이라 起兵討卓하니 漢隨以亡이라】하야 而漢隨以亡하니 豈非造端之不審耶아

鄧禹賈復은 황제가 전쟁을 종식하고 文德을 닦으며, 功臣들이 京師에서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바라지 않음을 알고는 마침내 甲兵을 버리고 儒學을 돈독히 힘쓰니, 황제 또한 이것을 생각하고 功臣의 爵位와 土地를 완전히 보전하게 하고자 하여, 功臣들로 하여금 관리의 직책을 허물로 삼아 爵邑을 잃지【職事에 과실이 있어 爵邑을 잃을까 걱정한 것이다.】 않게 하려고 하여 마침내 좌우 장군의 관직을 파하니, 耿弇 등이 또한 大將軍의 印綬를 올리고 모두 列侯로서 집에 나아가니 特進의 지위를 가하고 朝請을 받들게 하였다.【봄에 조회하는 것을 朝라 하고, 가을에 조회하는 것을 請이라 하니, 〈실무는 보지 않고〉 조회할 때에 초청하여 부르는 명령만 받들 뿐임을 말한 것이다.】 - 《後漢書》〈耿弇傳〉과 〈賈復傳〉에 나옴 -

鄧禹는 內行(집안에서의 행실)이 순수하고 구비하여 아들 13명이 있었는데, 각각 한 가지 經書를 전공하게 하여 閨門을 닦고 정돈하며 子弟를 敎養하니 모두 후세의 法이 될 만하였으며, 本國의 食邑에서 의뢰하여 쓰고 재산과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 《後漢書 鄧禹傳》에 나옴-

賈復은 사람됨이 剛毅(굳세고 강직)하고 方直(바르고 곧음)하였으며, 〈大義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큰 절개가 많았다. 이미 私第로 돌아오자 문을 닫고 위엄과 후중함을 길렀는데, 朱祐 등이 賈復을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이때 막 관리의 일을 三公에게 책임지웠으므로【太尉公은 사방의 군대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司徒公은 人民들에게 孝悌와 겸양과 검소함을 가르치는 일을 관장하고, 司空公은 水土와 城을 경영하고 邑을 일으키며 도랑을 깊이 파고 堤防을 수리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功臣들이 모두 등용되지 않았다. 이때 列侯 중에 오직 高密侯(鄧禹)‧固始侯(李通)‧膠東侯(賈復)만이 公卿들과 함께 국가의 大事에 참여하여 의논해서 은혜와 예우가 매우 후하였다.- 《後漢書 賈復傳》에 나옴 -

황제가 비록 功臣들을 제어하였으나 매번 너그러이 포용【回는 굽힘이니, 法을 굽혀 용납해 줌을 이른다.】하여 작은 과실을 용서하였고, 먼 지방에서 진귀한 물건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면 반드시 먼저 제후들에게 두루 하사하여 太官【太官은 ≪後漢書≫ 〈百官志〉에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관장하고 酒果를 장만한다.” 하였다.】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功臣들이 모두 福祿을 보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견책을 받은 자가 없었다.- 《後漢書 馬武傳》에 나옴 -

朱黼가 말하였다.

“三公은 군주와 天位(지위)를 함께하고 天職(직책)을 다스리고 天工(일)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자이니, 오직 마땅하게 할 뿐이다. 어찌 功臣이라고 하여 구별한단 말인가. 太甲成王康王이 더불어 庶政을 바로잡을 것을 도모한 것은 모두 鳴條와 牧野에서 싸운 용사였고, 惠帝文帝景帝武帝의 세대에 맡겨서 執政大臣으로 삼은 자는 모두 高帝의 옛 신하였다. 〈光武帝가 天子의 지위에 오를 때에〉【湯王이 陑 땅에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陑는 지명이니 湯王이 桀王을 정벌한 곳이다.】湯王을 보좌한 伊尹武王을 보좌한 姜太公과 같은 정승은 진실로 감히 후세에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단을 팔고 발을 짜는 무리들【비단을 팔고 발을 짜는 무리는 周勃과 灌嬰을 이른다.】도 충분히 社稷을 편안히 하고 朝廷을 중하게 할 수 있으니, 功臣이 정사를 맡음에 과연 또한 어찌 천하를 저버리겠는가. 雲臺에 얼굴이 그려진 여러 장수가 평소에 오로지 굳세고 힘센 것으로 스스로 이름이 난 자는 비록 황제의 일을 계속하여 밝힐 수 없었으나 寇恂鄧禹景丹賈復과 같은 무리들은 文은 충분히 나라를 경륜하고 지혜는 충분히 王者를 도모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모두 公輔의 그릇이요 천하를 경륜할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런데 도리어 功臣이라 하여 으레 물리치고 쓰지 않음을 뭐라고 이르겠는가.

천하의 權柄은 반드시 돌아가는 곳이 있고 人主의 聰明은 반드시 맡기는 바가 있는 것이다. 光武帝가 大臣에게 맡기지 아니하여 體統을 이미 잃었으니, 이 때문에 후세에 孤兒(어린 군주)를 부탁할 때에 정사가 房闥(宮中의 內殿)에 돌아감【章帝의 后妃인 竇氏, 和帝의 母后인 梁氏, 殤帝의 母后인 鄧氏, 安帝의 后妃인 閻氏, 順帝의 后妃인 梁氏가 모두 太后로서 조정에 臨御하였다.】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漢나라 세대를 마치도록 조정의 권력이 母后에게 있지 않으면 外戚【外戚은 章帝 때의 竇憲, 和帝 때의 梁竦, 順帝 때의 梁冀이다.】에게 있고 외척에게 있지 않으면 宦官【宦官은 和帝 때의 鄭衆, 順帝 때의 孫程과 王康 등이 모두 列侯가 되었으니 바로 이들이 十九侯이고, 桓帝 때의 單超‧徐璜‧具瑗‧左琯‧唐衡 등이 바로 이들이 五侯이다.】에게 있고 환관에게 있지 않으면 武將【武將은 靈帝 때의 董卓과 袁紹, 獻帝 때에 山東의 曹操와 袁術 등이다. 이들이 군대를 일으켜 董卓을 토벌하였는데, 漢나라도 따라서 망하였다.】에게 있어 漢나라가 따라서 망하였으니, 어찌 처음에 단서를 만듦에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時에 兵革이 旣息하니 天下少事하야 文書調役에 務從簡寡하야 至乃十存一焉이러라 〈出本紀〉

이때 병란이 이미 종식되니, 천하에 일이 적어서 각종 문서와 調發하고 徭役할 때에 되도록 간략하고 적음을 따라서 마침내 열에 하나가 남는 데에 이르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戊戌]十四年

[戊戌]十四年이라

梁統이 上疏曰 臣이 竊見元帝初元五年에 輕殊死刑【殊는 絶也, 異也니 言其身首離絶而異處也라 輕其殊死는 謂減死一等이라】이 三十四事요 哀帝建平元年에 輕殊死刑이 八十一事라 其四十二事에 手殺人者는 減死一等하니 自是以後로 著爲常準이라 故로 人輕犯法하고 吏易殺人이니이다 經曰【經曰下는 亦第二上疏也라】 爰制百姓于刑之衷【衷은 與中通하니 去聲이라】이라하니 衷之爲言은 不輕不重之謂也라 自高祖로 至于孝宣히 海內稱治러니 至初元, 建平하야 而盜賊이 浸多하니 皆刑罰不衷【謂淫刑濫罰也라】하야 愚人易犯之所致也라 由此觀之컨대 則刑輕之作이 反生大患하야 惠加奸軌(宄)而害及良善也니이다 事寢不報하다

建武 14년(무술 38)

梁統이 上疏하기를 “신이 삼가 보니, 元帝初元 5년에 殊死刑(참수형)을 減刑【殊는 끊음이고 다름이니, 몸통과 머리가 떨어지고 끊어져서 달리 처함을 말한다. 殊死刑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사형에서 한 등급을 감형함을 이른다.】한 것이 34가지 일이고, 哀帝建平 元年에 殊死刑을 減刑한 것이 81가지 일이었습니다. 42가지 일 중에 직접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서 한 등급을 減刑하니, 이 뒤로부터 드러나 떳떳한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볍게 법을 범하고 관리들은 쉽게 사람을 죽입니다. 《書經》에 이르기를【‘經曰’ 이하는 또한 梁統의 두 번째 上疏이다.】 ‘이에 백성들을 형벌의 衷【衷은 中과 통하니 去聲이다.】에 맞게 한다.’ 하였으니, 衷이라는 말은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음을 이릅니다. 高祖로부터 孝宣帝에 이르기까지 海內가 잘 다스려졌다고 일컬어졌는데, 初元과 建平 연간에 이르러서 도적들이 점점 많아졌으니, 이는 모두 형벌이 알맞지 못하여【刑罰이 알맞지 못하다는 것은 형벌을 남용함을 이른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쉽게 법을 범하는 소치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형벌을 가볍게 하는 일은 도리어 큰 병폐를 낳아서 은혜가 간사한 자들에게 가해지고 폐해가 선량한 사람에게 미치게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덮어두고 답하지 않았다.

[己亥]十五年

[己亥]十五年이라

春에 大司徒韓歆이 免하다 이 好直言하고 無隱諱하야 帝每不能容이라 이 於上前에 證歲將饑凶할새 指天畫地하고 言甚剛切이라 故로 坐免하야 歸田里러니 帝猶不釋하고 復遣使宣詔責之하니 子嬰이 皆自殺하다 이 素有重名이러니 死非其罪하니 衆多不厭이라 帝乃追賜錢穀하야 以成禮葬之【成禮는 具禮也니 言不以非命而降其葬禮라】하다

建武 15년(기해 39)

봄에 大司徒韓歆이 면직되었다. 韓歆은 直言을 좋아하고 숨김이 없어서 황제가 매번 용납하지 못하였다. 韓歆이 上의 앞에서 年事(농사)가 장차 흉년이 들 것을 증명할 때에 〈태도가 격렬하여〉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그었으며 말이 매우 강직하고 간절하였다. 이 때문에 죄에 걸려 면직하고 田里로 돌아갔는데, 황제가 여전히 노여움을 풀지 않고 다시 使者를 보내어 敎書를 내려 꾸짖으니, 韓歆과 그의 아들이 모두 자살하였다. 韓歆은 평소 중한 명망이 있었는데, 죄가 아닌 것으로 죽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승복하지 않았다. 황제가 마침내 뒤늦게 돈과 곡식을 하사하여 成禮로써 장례하였다.【成禮는 禮를 갖춘 것이니, 非命에 죽었다 하여 그 장례를 낮추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溫公曰 昔에 高宗曰 若藥弗瞑眩【瞑眩은 憒亂也라 方言에 飮藥而毒을 海岱之間謂之瞑眩이라하니 方言은 書名이니 漢揚雄所著라 本書에 海岱之間이 作東齊라】이면 厥疾弗瘳라하니 夫切直之言은 非人臣之利요 乃國家之福也라 是以로 人君이 夙夜求之하야 唯懼弗得聞하나니 惜乎라 以光武之世에 而韓歆이 用直諫死하니 豈不爲仁明之累哉아

溫公이 말하였다.

“옛날에 殷나라 高宗(武丁)이 傅說에게 명하기를 ‘만약 藥이 독하여 어지럽지 않으면【瞑眩은 어지러운 것이다. ≪方言≫에 “약을 마셔서 독한 것을 海岱 사이에서는 이를 일러 瞑眩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方言은 書名이니 漢나라 揚雄이 지은 것이다. 本書에는 海岱之間이 東齊로 되어 있다.】 그 병이 낫지 않는다.’ 하였으니, 간절하고 곧은 말은 신하의 이익이 아니고 바로 국가의 福인 것이다. 이 때문에 人君이 밤낮으로 直言을 구하여 행여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애석하다. 光武帝의 시대에 韓歆이 直諫 때문에 죽었으니, 어찌 인자하고 현명한 군주의 累가 되지 않겠는가.”

帝以天下墾田이 多不以實自占하고 又戶口年紀 互有增減이라하야 乃詔下州郡檢覈【覈實也라】하니 於是에 刺史, 太守 多爲詐巧하야 苟以度田爲名하고 聚民田中하야 幷度廬屋里落하니 民이 遮道啼呼하며 或優饒豪右하고 侵刻羸弱【謂貧民下戶라】이러라 時에 諸郡이 各遣使奏事할새 帝見陳留吏牘【牘은 音讀이니 書字也라 奏(郯)[剡]曰牘이라 [通鑑要解]陳留吏는 陳留郡奏事之吏也라】上有書라 視之하니 云 潁川, 弘農은 可問이어니와 河南, 南陽은 不可問【河南南陽不可問은 謂此二郡에 多有近臣近親하야 不可得而理問也라】이라하야늘 帝詰吏由【謂詰問吏之因由라】한대 吏不肯服하고 抵言【托辭也라】於長壽街上得之라하다 帝怒하니 時에 皇子東海公陽이 年十二라 在幄後라가 言曰 吏受郡勅하야 當欲以墾田相方【求問其墾田之數以相比也라】耳니이다 帝曰 卽如此면 何故로 言河南, 南陽은 不可問고 對曰 河南은 帝城이라 多近臣하고 南陽은 帝鄕이라 多近親하니 田宅이 踰制하야 不可爲準이니이다 帝令虎賁將으로 詰問吏한대 吏乃首服【謂首陳其非而服其罪라】하니 如東海公對라 上이 由是로 益奇愛하고 遣謁者하야 考實二千石長吏阿枉【謂阿諛枉曲也라】不平者하다

황제는 天下의 개간한 田地가 대부분 실제로 점유(등록)하지 않았고, 또 戶口와 年紀(연령)가 서로 增減이 있다 하여 마침내 州郡에 조서를 내려 실제를 조사【檢覈은 실제를 조사하는 것이다.】하게 하니, 이에 刺史와 太守가 대부분 교묘하게 속임수를 써서 구차히 田地를 헤아린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田地 가운데에 모아 놓고 아울러 집과 村落을 헤아리게 하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었으며, 혹은 土豪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羸弱은 貧民의 下戶를 이른다.】을 침해하였다.

이때 여러 郡이 각각 使者를 보내어 일을 아뢸 때에 황제가 陳留의 아전이 올린 문서【[釋義]牘은 音이 독이니, 글자를 쓰는 것이다. 奏剡(奏札)을 牘이라 한다. [通鑑要解]陳留吏는 陳留의 고을에 일을 아뢰는 아전이다.】 위에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내용을 살펴보니, 거기에 “潁川과 弘農은 물을 수 있으나 河南과 南陽은 물을 수 없다.”【[釋義]潁川, 弘農……不可問:河南과 南陽은 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두 고을에 가까운 신하와 가까운 친척이 많이 있어서 다스려 물을 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고 씌어 있었다. 황제가 아전에게 그 이유를 詰問하자,【光武帝가 아전에게 그 연유를 詰問하였음을 이른 것이다.】 아전이 自服하려 하지 않고 長壽街 위에서 얻었다고 칭탁하여 말하니,【칭탁하여 말한 것이다.】 황제가 노하였다.

이때 皇子인 東海公이 나이가 12세였는데, 장막 뒤에 있다가 말하기를 “아전이 郡의 신칙(당부)을 받고서 〈딴 郡縣의〉 개간한 토지의 숫자를 물어서 서로 비교【相方은 딴 郡縣의 개간한 田地의 숫자를 물어서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河南과 南陽은 물을 수 없다고 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河南은 황제의 都城이라 가까운 신하가 많고 南陽은 황제의 고향이라 가까운 친척이 많으니, 밭과 집이 정해진 한도를 넘어서 기준을 삼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虎賁將을 시켜 아전을 詰問하니 아전이 그제야 自服【首服은 잘못을 자수하여 아뢰고, 그 죄에 굴복함을 이른다.】하였는데 東海公의 대답과 같았다. 上이 이로 말미암아 을 더욱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고, 謁者를 보내어 二千石의 長吏로서 아첨하고 굽혀【阿枉은 아첨하여 굽힘을 이른다.】 공평하지 않은 자들을 조사하게 하였다.

張堪이 拜漁陽太守하다 이 視事八年에 匈奴不敢犯塞하고 勸民耕稼하야 以致殷富하니 百姓이 歌曰 桑無附枝【蠶月에 旣採桑하고 斫去繫枝하야 留其特長이면 則來年桑葉盛茂라】하고 麥穗兩岐【穗는 苗(美)[秀]者요 岐는 旁出者니 謂一莖而兩穗也라】張君爲政에 樂不可支라하더라 〈出堪本傳〉

張堪이 漁陽太守에 임명되었다. 張堪이 정사를 본 지 8년에 흉노가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고, 백성들에게 밭을 갈고 곡식을 심는 것을 권장하여 백성들이 부유함을 이루니,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뽕나무는 붙은 가지가 없고【누에 치는 달에 이미 뽕잎을 따고 난 뒤에 붙은 가지를 제거하고 특별히 긴 것만 남겨 두면 이듬해에 뽕잎이 무성하다.】 보리 이삭은 두 갈래로 패었도다.【穗는 이삭이 팬 것이고 岐는 옆에서 나온 것이니, 한 줄기에 이삭이 두 개가 나옴을 이른다.】張君이 정사를 하니 즐거움을 주체할 수가 없다.” 하였다.- 《後漢書 張堪傳》에 나옴 -

[庚子]十六年

[庚子]十六年이라

郡國에 群盜處處竝起하야 郡縣이 追討할새 到則解散하고 去復屯結호되 靑, 徐, 幽, 冀四州尤甚이라 冬十月에 遣使者하야 下郡國하야 聽群盜自相糾擿(摘)하고 五人이 共斬一人者는 除其罪하니 於是에 更相追捕하야 賊竝解散이라 徙其魁帥於他郡하고 賦田受禀(廩)【讀曰廩이라 古者에 給人以食에 取諸倉廩이라 故稱廩給, 廩食이라】하야 使安生業하니 自是로 牛馬를 放牧不收하고 邑門을 不閉러라 〈出本紀〉

建武 16년(경자 40)

郡國에 여러 도적들이 곳곳에서 함께 일어나 郡縣에서 추격하여 토벌할 때에 군대가 도착하면 해산하고 군대가 떠나가면 다시 주둔하여 결집하였는데, 靑州‧徐州‧幽州‧冀州 네 고을이 더욱 심하였다.

겨울10월에 使者를 郡國에 내려 보내어 여러 도적들이 스스로 규찰하여 적발하도록 허락하고 다섯 명이 함께 한 명을 목 베면 그 죄를 면제해 주니, 이에 번갈아 서로 추격하여 체포해서 도적들이 모두 해산되었다. 그 괴수를 다른 郡으로 옮기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주고 양식【禀은 廩으로 읽는다. 옛날에 사람들에게 양식을 줄 때에 창고에서 취하였으므로 廩給, 廩食이라 칭하였다.】을 받아서 生業을 편안하게 하니, 이로부터 소와 말을 방목하여 거두지 않고 고을의 성문을 닫지 않았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辛丑]十七年

[辛丑]十七年이라

郭后【大鴻臚郭況之妹也라】寵衰하야 數懷懟어늘 上이 怒之하야 廢皇后郭氏하고 立貴人陰氏【光武適新野하여 聞其美而悅之라】하야 爲皇后하다 〈出郭后紀〉

建武 17년(신축 41)

郭后【郭后는 大鴻臚 郭況의 누이이다.】의 은총이 쇠하여 자주 원망하는 마음을 품자, 上이 노하여 皇后 郭氏를 폐하고 貴人 陰氏【光武帝가 新野에 가서 그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였다.】를 세워 皇后로 삼았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 帝幸章陵【六年에 以舂陵鄕爲章陵縣이라】하야 修園廟하고 祠舊宅하고 觀田廬하고 置酒作樂賞賜하니 時에 宗室諸母因酣悅하야 相與語曰 文叔이 少時謹信하야 與人不款曲【周旋貌라】하고 唯直柔耳러니 今乃能如此로다 帝聞之하고 大笑曰 吾治天下에 亦欲以柔道行之로라 〈出本紀〉

[史略 史評]胡氏曰 君道는 則天而不可過於剛이라 故로 不耀威武하고 不峻刑誅하야 謙抑以受言하고 溫恭以接下하니 所以濟其剛也요 臣道는 則地而不可過於柔라 故로 不爲利回하고 不爲祿徙하야 君不義則必爭하고 道不合則必去하니 所以濟其柔也라 此所謂天道下濟(際)하고 地道上行하야 上下交而其志通이니 君臣之理 正光武之謂也로다

○ 황제가 章陵【建武 6년에 舂陵鄕을 章陵縣이라 하였다.】에 행차하여 園廟를 수리하고 옛집에 제사하였으며, 옛날 토지와 집을 구경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풍악을 울리고 賞을 내리니, 이때 宗室의 諸母들이 술에 취하여 기뻐하며 서로 말하기를 “文叔이 젊었을 때엔 근신하고 신실하여 남과 어울리지【款曲은 주선하는(남과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않고 오직 다만 유순할 뿐이었는데, 지금 마침내 이와 같다.”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다스림에 또한 부드러운 道로 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군주의 道는 하늘을 본받으나 지나치게 강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엄과 무력을 밝히지 않고 형벌을 준엄하게 하지 않아서, 겸손하고 억제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고 온화하고 공손하여 아랫사람을 접하는 것이니 이는 그 강함을 구제하는 것이요, 신하의 道는 땅을 본받으나 지나치게 유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익에 굽히지 않고 녹봉에 옮겨 가지 않아서 군주가 의롭지 않으면 반드시 간쟁하고 道가 합하지 않으면 반드시 떠나가는 것이니 이는 그 유순함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天道가 아래로 사귀고 地道가 위로 행해서 上下가 사귀어 그 뜻이 통한다.’는 것이니, 君臣의 이치는 바로 光武帝를 말함일 것이다.”

交趾女子【交趾는 麊泠縣이라 雒將女子徵側은 朱鳶人詩索妻니 甚雄勇이라 交趾太守以法繩之한대 徵側이 怒하야 與妹徵貳叛하야 凡掠六十五城하고 自立爲王하니라 注에 麊는 音縻요 泠은 音零이라 雒將은 姓名也라 女弟曰妹라】反이어늘 拜馬援爲伏波將軍하야 以擊交趾하야 大破之하다

○ 交趾의 여자【交趾는 麊泠縣이다. 雒將의 딸인 徵側은 朱鳶 사람 詩索의 아내였는데, 매우 몸집이 크고 용감하였다. 交趾太守가 법으로 다스리자, 徵側이 노하여 여동생인 徵貳와 배반해서 모두 65개의 城을 노략질하고 스스로 서서 王이 되었다. 注에 “麊는 音이 미이고 泠은 音이 령이다. 雒將은 사람의 성명이다. 여동생을 妹라 한다.” 하였다.】가 배반하였으므로 馬援을 伏波將軍으로 임명해서 交趾를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癸卯]十九年

[癸卯]十九年이라

郭后旣廢에 太子彊이 意不自安이라 郅惲이 說太子曰 久處疑位면 上違孝道요 下近危殆니 不如辭位하야 以奉養母氏라하야늘 太子從之하야 數因左右及諸王하야 陳其懇誠하고 願備藩國하니 上이 不忍遲回【不決意貌라 或遲待回避也라】者 數歲라 六月에 詔曰 春秋之義에 立子以貴【公羊傳云 隱元年에 立適以長이요 不以賢하며 立子以貴요 不以長이라한대 註云 適은 謂適夫人之子니 尊無與敵이라 故以齒요 子는 謂左右媵及姪娣之子니 位有貴賤하고 又防其同時而生이라 故以貴也라하니라】하니 東海王은 皇后之子라 宜承大統이요 皇太子은 崇執謙退하야 願備藩國하니 父子之情에 重【猶難也라】久違之라 其以東海王하고 立爲皇太子하고 改名하라 〈出本紀〉

袁宏論曰 夫建太子는 所以重宗統, 一民心也니 非有大惡於天下면 不可移也라 世祖中興漢業하니 宜遵正道하야 以爲後法이라 今太子之德이 未虧於外어늘 內寵旣多하야 嫡子遷位하니 可謂失矣라 然이나 東海歸藩에 謙恭之心彌亮하고 明帝承統에 友于之情愈篤하니 雖長幼易位하고 興廢不同이나 父子兄弟 至性無間이라 夫以三代之道處之라도 亦何以過乎아

[新增]胡氏曰 春秋之義에 立子以長하고 不以功하며 以德하고 不以貴하니 無立子以貴之說也라 借如立貴者라도 彊非后子乎아 蓋不得於義故로 不得於言하야 曰 春秋之義에 立子以貴하니 東海王은 皇后之子라 宜承大統이라하니 則是得失之分이 不待辨而自明矣니라

建武 19년(계묘 43)

郭后가 폐위되자 太子은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郅惲이 太子를 설득하기를 “오랫동안 의심스러운 자리에 있으면 위로는 효도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위태로움에 가까우니, 太子의 지위를 사양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太子가 그의 말을 따라 자주 황제의 좌우 신하들과 諸王들을 통하여 자신의 간곡한 정성을 아뢰고 藩國에 갖추어지기를 원하니, 上이 차마 太子를 폐위하지 못하여 머뭇거리고 지체한【遲回는 뜻을 결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혹은 늦춰 기다리고 회피하는 것이다.】 지가 여러 해였다.

6월에 詔書를 내리기를 “《春秋》의 義理에 아들을 세울 때에는 신분의 귀함으로써 하였으니,【≪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隱公 元年에 適子(嫡子)를 세울 때에는 연장자로써 하고 어진 자로써 하지 않으며, 아들(庶子)을 세울 때에는 귀함으로써 하고 연장자로써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適은 適夫人의 아들을 이르니 높음이 대적할 자가 없으므로 年齒로써 하는 것이요, 아들은 좌우의 媵妾과 황후의 조카와 여동생의 아들을 이르니 지위에 귀천이 있고 또 동시에 태어났을 경우 발생하는 우환을 막으려 하기 때문에 귀함으로써 하는 것이다.” 하였다.】東海王은 황후의 아들이어서 마땅히 大統을 이어야 할 것이요, 皇太子은 겸손함을 높여 지켜서 藩國에 갖추어지기를 원하니, 父子의 情理上 오랫동안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렵다.【重은 難(어렵게 여김)과 같다.】東海王으로 삼고 을 세워 황태자로 삼고 이름을 으로 고친다.” 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袁宏의 《後漢紀》〈光武皇帝紀〉 論에 말하였다.

“太子를 세움은 宗統을 중히 여기고 民心을 통일하는 것이니, 천하에 큰 악행이 있지 않으면 바꿀 수가 없다. 世祖가 漢나라의 기업을 중흥하였으니, 正道를 따라서 후세의 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太子의 德이 밖에 훼손됨이 없는데 안에 총애받는 자가 이미 많아서 嫡子가 지위를 옮겼으니, 잘못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東海王이 藩屛으로 돌아갈 때에 겸손하고 공손한 마음이 더욱 드러났고 明帝가 大統을 이을 때에 형제간에 우애하는 情이 더욱 돈독하였으니, 비록 長幼의 자리가 뒤바뀌고 興廢가 똑같지 않으나 부자간과 형제간의 지극한 성품이 間隙이 없었다. 三代의 道로써 대처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春秋》의 義理에 아들을 세울 때에는 年長으로써 하고 功으로써 하지 않으며 德으로써 하고 귀함으로써 하지 않으니, 아들을 세울 때에 귀함으로써 한다는 말이 없다. 가령 귀한 자를 세운다 하더라도 은 后妃의 아들이 아닌가. 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말하기를 ‘《春秋》의 義理에 太子를 세울 때에는 신분의 귀함으로써 하였으니, 東海王은 황후의 아들이어서 마땅히 大統을 이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잘잘못의 구분이 변론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분명해진다.”

上이 以桓榮爲議郞하야 使授太子經하고 車駕幸太學하니 會에 諸博士 論難於前할새 이 辨明經義하야 儒者莫之及이라 特加賞賜하다

上이 桓榮을 議郞으로 삼아서 太子에게 經書를 가르치게 하고 御駕가 太學에 행차하니, 마침 여러 博士들이 임금의 앞에서 論難하였는데 桓榮이 經書의 뜻을 분명하게 밝혀서 학자들 중에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이에 특별히 그에게 賞賜를 가하였다.

○ 陳留董宣이 爲雒陽令이러니 湖陽公主蒼頭 白日殺人하고 因匿主家하니 吏不能得이라 及主出行에 以奴驂乘이어늘 이 於夏門亭에 候之라가 駐車叩馬【叩는 牽馬也라 音口니 持也라】하고 以刀畫地하야 大言數【計其失而一一責之라】主之失하고 叱奴下車하야 因格殺【謂不用器械而白手殺之라】之하다 主卽還宮訴帝한대 帝大怒하야 召欲箠殺之러니 이 叩頭曰 願乞一言而死하노이다 帝曰 欲何言고 曰 陛下聖德中興이어시늘 而縱奴殺人하시니 將何以治天下乎잇가 臣을 不須箠라 請得自殺하노이다하고 卽以頭擊楹하야 流血被面이라 帝令小黃門으로 持之하고 使叩頭謝主한대 이 不從이어늘 彊使頓之하니 이 兩手據地하고 終不肯俯라 主曰 文叔이 爲白衣時에 藏亡匿死호되 吏不敢至門이러니 今爲天子하야 威不能行一令乎아 帝笑曰 天子不與白衣同이라하고 因勅彊【言不低屈也라】項令出하고 賜錢三十萬하니 이 悉以班諸吏하다 由是로 能搏擊豪彊하니 京師莫不震慄이러라 〈出宣本傳〉

○ 陳留의 董宣이 雒陽令이 되었는데, 湖陽公主의 종이 白晝에 사람을 죽이고는 인하여 공주의 집에 숨으니, 관리가 체포하지 못하였다. 공주가 出行할 때에 그 종으로 하여금 驂乘을 하게 하였는데, 董宣이 夏門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수레를 멈추고 말고삐를 잡고는【叩는 말을 끄는 것이다. 음이 구이니 붙잡는 것이다.】 칼로 땅을 그으며 큰 소리로 공주의 잘못을 數罪【數는 그 잘못을 따져서 하나하나 꾸짖는 것이다.】하고, 종을 꾸짖어 수레에서 내리게 한 다음 인하여 맨손으로 쳐서 죽였다.【格殺은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죽임을 이른다.】

공주가 즉시 궁중으로 돌아와 황제에게 하소연하자, 황제가 크게 노하여 董宣을 불러 매를 때려 죽이려고 하였는데, 董宣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한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董宣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聖德으로 중흥하셨는데 종을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시니, 장차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려 하십니까? 신은 굳이 매를 때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스스로 죽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서 피가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황제가 小黃門(宦官)으로 하여금 그를 붙잡게 하고 董宣으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려 공주에게 사죄하게 하였는데, 董宣이 따르지 않으므로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니, 董宣이 양손으로 땅을 짚고 버티어 끝내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

공주가 말하기를 “文叔(光武帝의 字)이 白衣(평민)로 있었을 때에는 도망온 자를 감추어 주고 죽을 죄를 지은 자를 숨겨 주었으나 관리들이 감히 집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지금 天子가 되어서는 위엄이 한 縣令에게도 행해지지 못한단 말인가?”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天子는 白衣와 같지 않다.” 하고는 인하여 목을 뻣뻣이 펴고【彊은 고개를 숙이지 않음을 말한다.】 나가도록 명하고 30만 錢을 하사하니, 董宣이 이것을 모두 여러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호걸스럽고 강한 자들을 마음대로 공격하게 되니 京師에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後漢書 董宣傳》에 나옴 -

[甲辰]二十年

[甲辰]二十年이라

廣平忠侯【忠은 諡也니 史氏追稱之라】吳漢이 病篤이어늘 車駕親臨하야 問所欲言한대 對曰 臣愚는 無所知識이요 唯願陛下愼無赦而已라하더라

[史略 史評]唐太宗曰 赦者는 小人之幸이요 君子之不幸也니 夫養稂莠者는 害嘉穀하고 赦有罪者는 害良善이라 故로 朕不欲數赦는 恐小人恃之하야 輕犯憲章이라하니 吳漢光武無赦 亦此意也니라

建武 20년(갑진 44)

廣平忠侯【忠은 시호이니, 史官이 追尊하여 일컬은 것이다.】吳漢이 병이 위독하자, 車駕(大駕)가 친히 왕림하여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답하기를 “어리석은 신은 아는 바가 없고, 오직 폐하께서 부디 죄인을 사면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였다.

[史略 史評]唐太宗이 말하기를 “赦免은 小人의 다행이고 君子의 불행이니, 잡초를 기르는 것은 아름다운 곡식을 해치고 죄 있는 자를 사면하는 것은 선량한 사람을 해친다. 그러므로 朕은 자주 사면하고자 하지 않으니, 이는 소인들이 이를 믿고서 憲章을 가벼이 범할까 두려워해서이다.” 하였으니, 吳漢光武帝에게 사면하지 말 것을 간한 것도 이러한 뜻이다.

○ 以郭況爲大鴻臚【況은 郭皇后弟라 臚는 陵如反이요 鴻은 聲也요 又傳也니 序以傳聲하고 贊道九賓이라 漢武所置라】하고 帝數幸其第하야 賞賜金帛하니 豐盛이 莫比라 京師號況家하야 爲金穴이라하니라

郭況을 大鴻臚로 삼고,【郭況은 郭皇后의 아우이다. 臚는 陵如反(려)이고, 鴻은 소리이고 또 전하는 것이니, 차례로 소리를 전달하고 九賓을 도와 인도하는 것이다. 漢 武帝가 설치하였다.】 황제가 자주 그의 집에 행차하여 금과 비단을 賞으로 하사하니, 풍성함이 견줄 사람이 없었다. 京師에서는 郭況의 집을 이름하여 황금굴이라 하였다.

○ 秋九月에 馬援이 自交趾還이어늘 孟冀迎勞之한대 曰 方今匈奴, 烏桓이 尙擾北邊하니 欲自請擊之하노라 男兒要當死於邊野하야 以馬革裹尸還葬耳니 何能臥床上하야 在兒女子手中耶아 曰 諒爲烈士인댄 當如是矣라하더라 〈出援本傳〉

○ 가을9월에 馬援이 交趾에서 돌아오자 孟冀가 맞이하여 위로하였는데, 馬援이 말하기를 “지금 匈奴와 烏桓이 아직도 북쪽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있으니, 자청하여 그를 공격하고자 한다. 男兒는 마땅히 변경의 들에서 죽어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서 돌아와 장례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 아녀자의 손안에서 죽겠는가.” 하였다. 孟冀가 말하기를 “진실로 烈士가 되려면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乙巳]二十一年

[乙巳]二十一年이라

莎車【本城名이니 後因名國하니라】이 欲兼幷西域하니 諸國이 愁懼하야 車師【卽姑師國也라】等十八國이 俱遣子入侍하고 願得都護어늘 帝以中國初定에 北邊未服이라하야 皆還其侍子하고 厚賞賜之하다

建武 21년(을사 45)

莎車【莎車는 본래 城의 이름인데, 뒤에 인하여 國名으로 삼았다.】이 西域을 겸병하고자 하니, 여러 나라가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車師【車師는 바로 姑師國이다.】 등 열여덟 나라가 모두 아들을 보내어 入侍하고 都護를 얻기를 원하였는데, 황제는 중국이 갓 평정되어 북쪽 변경이 복종하지 않는다 하여 侍子를 모두 돌려보내고 후하게 賞을 하사하였다.

[丙午]二十二年

[丙午]二十二年이라

初에 劉昆이 爲江陵令이러니 縣有火災어늘 이 向火叩頭하니 火尋滅하고 後爲弘農太守러니 虎皆負子渡河라 帝聞而異之하야 徵昆爲光祿勳【百官表에 郞中令은 秦官이니 漢武改名光祿勳하니라】하고 帝問昆曰 前在江陵에 反風滅火하고 後守弘農에 虎北渡河하니 行何德政而致是事오 對曰 偶然耳니이다 左右皆笑하니 帝嘆曰 此는 長者之言也라하고 顧命書諸策【回視曰顧요 竹簡曰策이니 回顧史官하야 令寫入史策이라】하다 〈出儒林昆本傳〉

建武 22년(병오 46)

처음에 劉昆江陵令이 되었는데 縣에 火災가 있자, 劉昆이 불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니 불이 얼마 후 꺼졌으며, 뒤에 弘農太守가 되었는데 호랑이가 모두 새끼를 업고 河水(黃河)를 건너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劉昆을 불러서 光祿勳【≪漢書≫ 〈百官表〉에 “郎中令은 秦나라 관명이니, 漢武帝가 光祿勳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였다.】을 삼았다.

황제가 劉昆에게 묻기를 “지난번 江陵에 있을 때에는 바람이 거꾸로(반대방향으로) 불게 하여 불을 끄고, 뒤에 弘農을 맡았을 때에는 호랑이가 북쪽으로 河水를 건너갔으니, 어떤 德政을 행하였기에 이러한 일을 이루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연일 뿐입니다.”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웃으니, 황제가 감탄하기를 “이는 長者의 말이다.” 하고, 史官을 돌아보며 史策에 쓰도록 명하였다.【돌아보는 것을 顧라 하고 竹簡을 策이라 하니, 史官을 돌아보고서 史策에 써넣게 한 것이다.】 - 《後漢書 儒林傳 劉昆》에 나옴 -

○ 西域諸國侍子 久留敦煌【都護不出而侍子皆還하니 大憂하야 乃與敦煌太守謀하야 留侍子하야 以示莎車하고 言 侍子見留하니 都護尋至라하야 冀且息其兵變이라한대 遵以聞하니 帝許之하니라】하니 皆愁思亡歸라 莎車王이 知都護不至하고 擊破鄯善하고 攻殺龜玆【西域小國이니 在大宛國西天竺國東이라】王하니 鄯善王이 上書하야 願復遣子入侍하고 更請都護호되 都護不出이면 誠迫於匈奴라하야늘 帝報曰 今使者大兵이 未能得出이니 如諸國이 力不從心이면 東西南北이 自在【任其所從이라】也니라 於是에 鄯善, 車師 復附匈奴하다 〈出西域傳〉

班固論曰 孝武之世에 圖制匈奴할새 患其兼從【兼은 幷也요 從은 親也니 謂與西域諸國으로 兼幷合從也라】西國하고 結黨南羌하야 乃表河曲, 列四郡【河西九曲은 本西戎地니 在河關縣西라 公羊傳云 河千里而一曲이라하니 按曲은 言其隈地也라 四郡은 謂酒泉, 武威, 張掖, 敦煌이라】하고 開玉門, 通西域하야 以斷匈奴右臂하고 隔絶南羌月氏하니 單于失援이라 由是遠遁하야 而幕南無王庭【單于無城郭하야 其穹廬前地 若庭이라 故云王庭也라】이라 遭値玄黙하야 養民五世【五世는 高惠及呂后文景이라】에 財力有餘하고 士馬彊盛이라 故로 能睹犀布瑇瑁則建珠厓七郡하고 感蒟醬竹杖則開牂牁越嶲하고 聞天馬葡萄則通大宛安息이라 自是로 殊方異物이 四面而至라 於是에 開苑囿【古謂之囿요 漢謂之苑이라】, 廣宮室하고 盛帷帳, 美服玩하며 設酒池肉林하야 以饗四夷之客하고 作魚龍角抵(觝)之戲【魚龍者는 含利之獸니 先戲於庭이라가 乃入殿前激水하야 化成比目魚하고 躍水作霧하야 化黃龍하야 出水戲於庭이라 西京賦注에 角觝戲者는 兩兩相對하야 角力技藝射御라 故名角觝라 含利는 獸名이니 以其吐金이라 故名이라】하야 以觀視之하며 及賂遺贈送을 萬里相奉하야 師旅之費를 不可勝計라 至於用度不足하야 乃榷酒酤, 筦(管)鹽鐵하고 鑄白金, 造皮幣하며 算至車船하고 租及六畜하야 民力屈, 財用竭하고 因之以凶年하야 寇盜竝起하야 道路不通하니 直指之使가 衣繡杖斧하고 斷斬於郡國然後에 勝之라 是以로 末年에 遂棄輪臺之地하고 而下哀痛之詔하니 豈非仁聖之所悔哉아 建武以來로 西域이 思漢威德하고 咸樂內屬하야 數遣使置質于漢하고 願請都護어늘 聖上이 遠覽古今하고 因時之宜하야 辭而未許하니 雖大禹之序西戎【書禹貢에 西戎卽敍라한대 註云 西方戎落이 皆就次序하니 美禹之功이 及戎狄也라하니라】周公之讓白雉【越裳氏獻白雉曰 天之無烈風淫雨하고 海不揚波三年矣니 意者컨대 中國有聖人乎인저 盍往朝之리오한대 周公謙讓(之)[而]歸之成王하니 稱先王神致라하야 薦于宗廟하니라】太宗之卻(却)走馬【太宗은 文帝也라 時有獻千里馬者어늘 帝曰 鸞旗在前하고 屬車在後하니 朕乘千里馬하고 獨先安之리오하니라】라도 義兼之矣니라 〈出前西域傳贊〉

○ 西域의 여러 나라에서 보낸 侍子들이 오랫동안 敦煌에 머무르니,【이보다 앞서 漢나라 都護가 나오지 않고 侍子가 모두 돌아오니, 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크게 걱정하여 마침내 敦煌太守와 상의하고는 侍子를 머물게 하여 莎車王에게 보이고, “侍子가 머물고 있으니 都護가 얼마 후에 이른다고 말하여 莎車王의 공격을 우선 중지시키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敦煌太守 王遵이 아뢰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모두 근심하여 도망쳐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莎車王은 漢나라 都護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는 鄯善國을 격파하고 龜玆國【龜玆는 西域의 작은 나라이니, 大宛國의 서쪽 天竺國의 동쪽에 있었다.】의 王을 쳐서 죽이니, 鄯善王이 글을 올려 다시 아들을 보내어 입시하기를 원하고, 다시 都護가 와 주기를 청하되 都護가 나오지 않으면 진실로 흉노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답서를 보내기를 “지금 使者의 大兵이 나갈 수가 없으니, 만일 여러 나라가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면 동서남북 따르고 싶은 대로【自在는 따르고 싶은 대로 따르는 것이다.】 하라.” 하였다. 이에 鄯善과 車師가 다시 匈奴에 붙었다.- 《後漢書 西域傳》에 나옴 -

班固의 《漢書》〈西域傳〉 贊에 말하였다.

孝武帝 때에 匈奴를 제어할 것을 도모할 때에 匈奴가 西域을 겸병하여 合從【兼은 아우름이요 從은 친함이니, 西域의 여러 나라와 함께 兼幷하고 合從함을 말한 것이다.】하고 南羌과 黨을 맺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河西의 九曲을 표하여 4郡을 나열하고【河西의 九曲은 본래 西戎 땅이니, 河關縣의 서쪽에 있었다. ≪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黃河는 천 리에 한 번 굽어진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曲은 그 굽이진 곳을 말한 것이다. 四郡은 酒泉郡‧武威郡‧張掖郡‧敦煌郡을 이른다.】玉門關을 열어 西域을 통하여, 匈奴의 오른쪽 팔을 자르고 南羌과 月氏를 두절시키니, 單于가 원조를 잃게 되었다. 이 때문에 單于가 멀리 도망하여 沙漠의 남쪽에 王庭【單于는 城郭이 없어서 높은 穹廬 앞의 땅이 뜰과 같았으므로 이를 王庭이라고 이른 것이다.】이 없게 되었다. 文帝景帝의 玄黙을 만나서 백성을 기른 지 5대【5世는 高帝, 惠帝 및 呂后, 文帝, 景帝이다.】에 재력이 충분하고 군사와 말이 강성하였다. 그러므로 犀布와 瑇瑁를 보면 珠厓의 7郡을 세우고, 蒟醬과 竹杖에 감동되면 牂牁郡과 越嶲郡을 개통하고 天馬와 葡萄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大宛郡과 安息郡을 개통하였다. 이로부터 먼 지방의 색다른 물건이 사면에서 이르렀다.

이에 苑囿【옛날에는 囿라 하였고, 漢나라는 苑이라 하였다.】를 열고 宮室을 넓히고 帷帳을 성대하게 하고 복식과 노리개를 아름답게 하며, 酒池肉林을 만들어서 사방 오랑캐의 손님에게 宴饗을 베풀고, 魚龍이 싸우는 놀이【魚龍은 含利라는 짐승이니, 먼저는 뜰에서 놀다가 마침내 궁전 앞의 세차게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比目魚로 변하고, 물에서 뛰놀며 안개를 일으켜서 黃龍으로 변하여, 마침내 물에서 나와 宮庭에서 놀았다. 張衡의 西京賦 注에 “角觝戲는 둘이 상대하여 기예와 활쏘기와 말타기를 겨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角觝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含利는 짐승의 이름이니, 金을 토해내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를 만들어서 보여 주고 구경시키며, 뇌물과 선물의 贈送을 만 리에 서로 받들어서 군대의 비용을 이루 계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用度가 부족함에 이르자 마침내 술의 판매를 독점하고 鹽鐵을 관장하며 白金을 주조하고 皮幣를 만들며 세금이 배와 수레에까지 미치고 조세가 六畜에까지 미쳐서 백성의 힘이 꺾이고 재용이 고갈되었으며 인하여 흉년이 들어서 도둑들이 함께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못하니, 直指使者(暗行御史)가 수놓은 옷을 입고 도끼를 잡고서 郡國에서 베고 끊은 뒤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말년에 마침내 輪臺의 땅을 버리고 애통해하는 詔書를 내린 것이니, 어찌 仁聖의 후회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建武 이래로 西域이 漢나라의 위엄과 德을 사모하고 모두 內屬하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번 使者를 보내어 인질을 漢나라에 두고 都護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으나 聖上이 고금을 멀리 내다보고 때의 마땅함을 따라서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비록 大禹가 西戎을 차례로 펴지게 하고【≪書經≫ 〈禹貢〉에 “西戎이 차례로 펴짐에 나아갔다.” 하였는데, 註에 “西方의 오랑캐 부락이 모두 차례로 펴짐에 나아간 것이니, 禹임금의 공이 戎狄에게까지 미침을 찬미한 것이다.” 하였다.】周公이 흰 꿩을 사양하고【越裳氏가 흰 꿩을 바치며 말하기를 “하늘에 세찬 바람과 지나친 비가 없고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은 지가 3년이니, 생각건대 中國에 聖人이 있을 것이다. 어찌 가서 조회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周公이 겸양하여 이것을 成王에게 돌리니, 先王의 神이 이룬 것이라고 칭하여 宗廟에 제사를 올렸다.】太宗(文帝)이 잘 달리는 말을 물리친【太宗은 文帝이다. 당시에 千里馬를 올리는 자가 있었는데, 황제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鸞旗가 앞에 있고 屬車(뒤따라오는 수레)가 뒤에 있으니, 朕이 千里馬를 타고 홀로 먼저 어디를 가겠는가.” 하였다.】 것이라도 〈光武帝는〉 이러한 뜻을 모두 겸하였다.” - 앞의 《後漢書 西域傳》 贊에 나옴 -

[戊申]二十四年

[戊申]二十四年이라

匈奴八部大人이 共議立日逐王【匈奴官號라】比하야 爲呼韓邪單于【匈奴單于輿立하야 以從弟比로 爲日逐王하야 領南邊이러니 及輿死하고 弟左賢王蒲奴立하야 使兩骨都侯로 監領比所部한대 比遂斂所主南邊八部衆而叛하니 南邊八部共立比爲呼韓邪單于라 於是에 始分爲南北單于하니라】하고 款五原塞【謂叩塞門하야 來服從也니 款은 叩也라】하야 願永爲藩蔽하야 扞禦北虜라하야늘 〈出匈奴傳〉事下公卿하니 議者 皆以爲天下初定에 中國空虛하고 夷狄은 情僞難知하니 不可許니이다 五官中郞將耿國이 獨以爲宜如孝宣故事受之하야 令東扞鮮卑하고 北拒匈奴하고 率厲四夷하야 完復邊郡【時에 邊郡創(瘡)殘이어늘 有南匈奴爲扞弊면 則可以完復矣라】케하소서 帝從之하다 〈出耿國傳〉

建武 24년(무신 48)

匈奴의 八部 大人이 함께 의논하고 日逐王【日逐王은 匈奴의 官號이다.】를 세워서 呼韓邪單于를 삼고,【[附註]匈奴八部大人……爲呼韓邪單于:匈奴의 單于인 輿가 즉위하여 從弟인 比를 日逐王으로 삼아서 남쪽 변방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輿가 죽고 아우 左賢王 蒲奴가 즉위하여 兩骨都侯로 하여금 比가 거느리던 곳을 감독하여 관장하게 하자, 比가 마침내 주관하던 남쪽 변방 여덟 부족의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니, 남쪽 변방의 여덟 부족이 함께 比를 세워 呼韓邪單于라 하였다. 이에 匈奴가 비로소 南單于와 北單于로 나뉘게 되었다.】五原의 변방의 관문을 두드리고 와서【五原에 있는 변방의 관문을 두드리고 와서 복종한 것이니, 款은 두드림이다.】 영원히 藩蔽(藩屛)가 되어 북쪽 오랑캐를 방어할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 《後漢書 匈奴傳》에 나옴 -

이 일을 公卿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하가 처음 평정됨에 중국이 텅 비었고 오랑캐들은 실정과 거짓을 알기 어려우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五官中郞將耿國이 홀로 아뢰기를 “마땅히 孝宣帝의 故事와 같이 이들을 받아 주어 동쪽으로는 鮮卑를 막고 북쪽으로는 匈奴를 막고 사방 오랑캐들을 인솔하고 장려해서 변방의 고을을 다시 완전하게 하소서.【이 때에 변방의 고을이 해를 입어 잔폐하였는데, 南匈奴를 울타리로 삼는다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後漢書 耿國傳》에 나옴 -

○ 秋七月에 武陵蠻이 寇臨沅【武陵은 禹貢荊州之域이니 秦爲黔中郡하고 光武改〈名〉光陵郡하니 今常德府是라 臨沅은 縣名이니 屬武陵하니 以南臨沅水라 故名焉하니 今〈常德府〉沅江縣이 是라[頭註]寇는 群行攻劫也라】이어늘 馬成【中山太守라】이 討之不克하다 馬援이 請行이어늘 帝愍其老하야 未許러니 曰 臣이 尙能被甲上馬니이다 帝令試之하니 이 據鞍顧盻하야 以示可用이라 帝笑曰 矍鑠哉라 是翁【矍鑠은 輕健貌라 東觀記에 作矆哉是翁하니라】이여하고 遂遣하야 將四萬餘人하야 征五溪【謂雄溪, 樠溪, 西溪, 潕溪, 辰溪니 皆槃瓠子孫所居니 謂之五溪蠻也라 按水經註에 沅水는 出牂牁郡且蘭縣하야 去武陵界하야 分五溪하니 今在辰州라】하다 이 謂友人杜愔曰 吾受國厚恩하야 年迫日索【迫은 逼也요 索은 盡也니 謂歲月老也라】일새 常恐不得死國事러니 今獲所願하니 甘心瞑目이로라

○ 가을7월에 武陵의 蠻族이 臨沅을 침략하자,【[釋義]武陵은 ≪書經≫ 〈禹貢〉의 荊州 지역이니, 秦나라는 黔中郡으로 삼았고 光武帝는 光陵郡으로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常德府가 이곳이다. 臨沅은 縣의 이름이니 武陵에 속하였는 바, 남쪽에 沅水가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니, 지금 常德府 沅江縣이 이곳이다.[頭註]寇는 무리 지어 가서 공격하여 위협하는 것이다.】 馬成【馬成은 中山太守이다.】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馬援이 出征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그의 늙음을 딱하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는데, 馬援이 말하기를 “신이 아직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시험해 보게 하니, 馬援이 말안장에 걸터앉아 좌우를 돌아보면서 아직도 쓸 만함을 과시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건장하다. 이 노인이여.”【[釋義]矍鑠哉 是翁:矍鑠은 몸이 가볍고 건장한 모양이다. ≪東觀記≫에는 ‘矆哉是翁’으로 되어 있다.】 하고는 마침내 馬援을 보내어 4만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五溪【五溪는 雄溪‧樠溪‧西溪‧潕溪‧辰溪를 이르니, 모두 槃瓠의 자손들이 사는 곳으로 이들을 五溪蠻이라 이른다. 살펴보건대 ≪水經註≫에 “沅水는 牂牁郡 且蘭縣에서 나와 武陵의 경계로 흘러가서 五溪로 나누어지니, 지금의 辰州에 있다.” 하였다.】를 정벌하게 하였다. 馬援이 친구인 杜愔에게 이르기를 “내가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 나이가 죽을 때에 가까워 살 날이 다하였으므로【迫은 가까움이고 索은 다함이니, 세월이 다하여 늙음을 이른다.】 항상 國事에 죽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소원을 얻었으니 달가운 마음으로 눈을 감겠다.” 하였다.

○ 冬十月에 匈奴日逐王 自立爲南單于하고 遣使詣闕하야 奉藩稱臣이어늘 上이 以問朗陵侯臧宮한대 曰 匈奴飢疫分爭하니 臣은 願得五千騎하야 以立功하노이다 帝笑曰 常勝之家는 難與慮敵이니 吾方自思之호리라 〈出宮傳〉

○ 겨울 10월에 匈奴의 日逐王가 스스로 서서 南單于가 되고, 使臣을 보내어 궁궐에 나와 藩屛의 禮를 받들어 臣이라고 칭하였다. 上이 이 일을 가지고 朗陵侯臧宮에게 묻자, 臧宮이 대답하기를 “匈奴가 기근이 들고 염병이 돌며 분열되어 다투고 있으니, 신은 원컨대 5천 명의 騎兵을 얻어 功을 세웠으면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항상 승리한 사람과는 敵을 도모하기 어려우니, 내 바야흐로 스스로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後漢書 臧宮傳》에 나옴 -

[己酉]二十五年

[己酉]二十五年이라

馬援軍이 至臨鄕하야 擊破蠻兵하고 斬獲二千餘人하다 의 兄子, 이 竝喜譏議하고 通輕俠【輕은 去聲이니 不持重也요 俠之言은 挾이니 以權力俠輔人者라】이어늘 이 前在交趾하야 遺書戒之曰 吾欲汝曹 聞人過失에 如聞父母之名하야 耳可得聞이언정 口不可得言也하노라 好議人長短하며 妄是非政法은 此吾所大惡也니 寧死언정 不願聞子孫有此行也하노라 龍伯高【山都長龍述이라】는 敦厚周愼하야 口無擇言하며 謙約節儉하고 廉公有威하니 吾愛之重之하야 願汝曹效之하노라 杜季良【越騎司馬杜保라】은 豪俠好義하야 憂人之憂하고 樂人之樂하야 父喪致客에 數郡이 畢至하니 吾愛之重之어니와 不願汝曹效也하노라 效伯高不得이라도 猶爲謹勅之士니 所謂刻鵠不成이라도 尙類鶩【鵠은 胡沃反이니 鳥名이라 鶩은 亡遇, 莫卜二切이니 可畜而不能高飛者鴨이요 野生而高飛者鶩也라】者也어니와 效季良不得이면 陷爲天下輕薄子하리니 所謂畫虎不成이면 反類狗者也니라

建武 25년(기유 49)

馬援의 군대가 臨鄕에 이르러서 蠻軍을 격파하고 2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馬援의 형의 아들인 이 모두 비판하고 논평하기를 좋아하고 경박한 俠客들과 교제하였는데,【輕은 去聲이니 몸가짐이 진중하지 못한 것이요, 俠은 挾이니 권세와 힘으로써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馬援이 전에 交趾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이들을 경계하였다.

“나는 너희 무리들이 남의 과실을 들으면 부모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하여 귀로는 얻어 들을지언정 입으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라노라. 남의 장단점을 논평하기를 좋아하며 政事와 法을 함부로 시비함은 내가 크게 싫어하는 바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손 중에 이러한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지 않노라. 龍伯高【龍伯高는 山都長 龍述이다.】는 돈후하고 치밀하고 삼가서 입에 가릴 말이 없으며 謙約하고 節儉하며 청렴하고 공정하고 위엄이 있으니, 나는 그를 애지중지하여 너희들이 본받기를 원하노라. 杜季良【杜季良은 越騎司馬 杜保이다.】은 호협하여 義를 좋아해서 남의 근심을 근심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여 〈淸流(좋은 사람)에게나 濁流(나쁜 사람)에게나 잃은 바가 없어서〉 아버지의 초상에 조문객이 옴에 몇 고을이 모두 왔으니, 나는 그를 애지중지하지만 너희들이 본받기를 원하지는 않노라. 龍伯高를 본받다가 되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니, 이른바 ‘고니를 조각하다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오리를 닮는다.’【[通鑑要解]刻鵠不成 尙類鶩:鵠은 胡沃反(혹)이니 새 이름이다. 鶩은 音이 亡遇切(무) 또는 莫卜切(목)이니, 집에서 기를 수 있고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은 鴨이고, 야생이고 높이 날 수 있는 것은 鶩이다.】는 것이다. 杜季良을 본받다가 되지 못하면 빠져서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될 것이니, 이른바 ‘호랑이를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개를 닮는다.’는 것이다.”

初에 이 在交趾에 常餌薏苡【藥名이라 味甘微寒하고 主風濕瘴下氣하니 久服하면 輕身延年이라】實하야 能輕身勝瘴氣라 軍還에 載之一車러니 及卒後에 有上書譖之者【虎賁中郞將梁松이 拜床下어늘 援不答하니 松意不平하다 會에 杜保仇人이 上書訟保爲行浮薄하야 亂群惑衆일새 馬援이 萬里遣書하야 戒兄子라하니 而梁松以之交結이라 帝召松하야 以訟書及援戒書示之한대 松叩頭流血하야 得不罪하고 詔免保官하다 及援討武陵蠻할새 與耿舒爭道하야 譖之어늘 帝使梁松責問援하고 因代監軍이러니 會援卒이라 松遂構陷援하니 帝怒하야 追收援新息侯印綬하니라 又有譖其明珠文犀者한대 帝乃益怒러니 因朱勃之諫하야 稍解하니라】하야 以爲前所載還이 皆明珠文犀【犀는 南徼外獸라 爾雅註에 形似水牛하니 猪頭二角이니 一在頂하고 一在鼻라 文犀는 卽通天犀니 角上白縷 直至端이라】라한대 帝怒하니 의 妻孥【孥는 子孫也라】惶懼하야 不敢以喪還舊塋하고 槀葬【猶言草葬이니 草草(言)[其]葬也라】城西하다 〈以上出援本傳〉

[史略 史評]胡氏光武平日에 料敵制勝에 明見萬里之外러니 乃於此擧에 屢失事宜하니 得非春秋旣高하야 智有所困邪아 不然이면 有臣如而不保令終하니 其爲君德之累 豈小小哉아

처음에 馬援이 交趾에 있을 때에 항상 薏苡(율무)【薏苡는 약 이름이다. 맛이 달고 약간 차며 風濕과 瘴毒을 주로 치료하고 기운을 내리게 하니, 오랫동안 복용하면 몸을 가볍게 하고 수명을 연장한다.】 열매를 먹어서 몸을 가볍게 하고 瘴氣를 이겨냈다. 군대가 돌아올 때에 이것을 한 수레에 가득히 싣고 왔는데, 그가 죽은 뒤에 글을 올려 참소하는 자가 있어서【虎賁中郞將 梁松이 平床 아래에서 馬援에게 절하였으나 馬援이 답례하지 않으니, 梁松이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다. 마침 杜保(杜季良)의 원수가 글을 올려 고발하기를 “杜保가 행실이 경박하여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무리를 미혹시키므로 馬援이 만 리 먼 곳에서 글을 보내어 형의 아들을 경계했다.” 하였는데, 梁松이 杜保와 교분을 맺었다. 황제가 梁松을 불러 고발한 글과 馬援이 조카들을 경계한 편지를 보여 주었다. 梁松은 머리를 땅에 찧어 피가 흐르도록 사죄하여 죄를 받지 않게 되었고, 황제가 명하여 杜保의 벼슬을 면직하였다. 馬援이 武陵蠻을 토벌할 때에 耿舒와 공격로를 다투어 耿舒가 馬援을 참소하니, 황제가 梁松으로 하여금 馬援을 문책하게 하고 인하여 대신 監軍으로 삼았는데, 마침 馬援이 죽었다. 梁松이 마침내 馬援을 모함하니, 황제가 노하여 馬援의 봉호인 新息侯의 印綬를 뒤따라 환수하게 하였다. 또 馬援이 交阯에서 明珠와 文犀를 실어왔다고 참소하는 자가 있자, 황제가 이에 더욱 노여워하였는데, 朱勃의 간언으로 인하여 다소 노여움이 풀렸다.】 이르기를 “지난번 수레에 가득히 싣고 온 것이 모두 明珠와 文犀(무늬있는 犀角)【犀는 남쪽 변방 밖에 있는 짐승이다. ≪爾雅≫의 註에 “모습이 물소와 비슷하니, 돼지머리에 뿔이 둘인데 하나는 정수리에 있고 하나는 코에 있다.” 하였다. 文犀는 바로 通天犀이니, 뿔 위에 있는 흰 선이 곧바로 끝에 이른다.】입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노하였다. 馬援의 아내와 子孫들【孥는 子孫이다.】은 황송하여 감히 옛 고향의 先山으로 돌아가 장례하지 못하고 城 서쪽에 薄葬【槀葬은 草葬이란 말과 같으니, 장례를 매우 간략히 치르는 것이다.】하였다.- 이상은 《後漢書 馬援傳》에 나옴 -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光武帝가 평소 적을 헤아려 勝機를 잡을 때에는 만 리 밖을 밝게 보았는데, 마침내 이 일에 있어서는 일의 마땅함을 여러 번 잃었으니, 春秋(연세)가 높아서 지혜가 곤궁한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馬援과 같은 신하가 있었는데도 끝을 잘 마침을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군주의 德에 누가 됨이 어찌 작겠는가?”

[庚戌]二十六年

[庚戌]二十六年이라

初作壽陵【壽陵은 卽原陵也니 去洛陽十五里라 帝生前에 豫作陵墓라 故曰壽陵이라하니라[頭註]初作陵하야 未有名故로 號壽陵이라하니 蓋取長久義라 壽陵은 始於文帝하니라】할새 帝曰 古者帝王之葬에 皆陶人【謂陶瓦爲人之形也라】瓦器하고 木車茅馬하야 使後世之人으로 不知其處하니 今所制는 地不過二三頃하고 無爲山陵波(陂)池하야 裁(纔)令流水而已【顔之推曰 波(陂)池는 當讀如坡陀니 猶言靡迤耳라 言不須高作山陵하고 但令小隆起坡陀然하야 裁得流泄水潦耳라 今讀者謂爲波(陂)池하야 令得流水라하니 誤矣라 裁令은 僅令也라】하야 使迭興之後에 與丘隴同體【王氏曰 丘는 小山也요 隴은 大阪也니 謂異時易姓受命之後에 庶使陵墓與丘隴之形體無別也라】케하라 〈出本紀〉

建武 26년(경술 50)

처음에 壽陵을 만들 때에【[釋義]壽陵은 바로 原陵이니, 洛陽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황제가 생전에 미리 陵墓를 만들었으므로 壽陵이라 한 것이다.[頭註]처음 陵을 만들어 아직 명칭이 없으므로 壽陵이라 이름한 것이니, 壽는 장구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壽陵을 만든 것은 文帝 때에 비롯되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옛날에 帝王을 장례할 때에 모두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陶人은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듦을 이른다.】 질그릇을 쓰며 나무로 수레를 만들고 띠풀로 말을 만들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장례 지낸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금 만드는 陵은 땅은 2, 3頃을 넘지 않게 하고 山陵과 언덕을 만들지 말아서 겨우 물만 흘러가게 할 뿐이어서【[釋義]無爲山陵波池 裁令流水而已:顔之推가 말하기를 “波池는 마땅히 坡陀와 같이 읽어야 하니, 靡迤라는 말과 같다. 굳이 높게 山陵을 만들지 말고 다만 조금 隆起하여 언덕과 같게 해서 겨우 장마물이 흘러 빠지게 할 뿐임을 말한 것이다. 지금 讀者들은 ‘波池를 만들어서 물이 그리로 흘러가게 한 것이다.’라고 하니, 잘못이다.” 하였다. 裁令은 겨우 하여금이다.】 〈易姓革命하여〉 다음 王朝가 일어난 뒤에 丘隴과 일체가 되게 하라.【王氏가 말하였다. “丘는 작은 산이고 隴은 큰 언덕이니, 후일에 易姓하여 天命을 받은 뒤에 陵墓로 하여금 丘隴의 형체와 거의 구별이 없게 함을 이른다.”】” 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辛亥]二十七年

[辛亥]二十七年이라

北匈奴遣使詣武威하야 求和親이어늘 帝召公卿하야 廷議호되 不決이러니 皇太子言曰 南單于新附而反하야 交通北虜하니 臣은 恐南單于將有二心일까하노이다 帝然之하야 詔武威太守하야 勿受其使하다 〈出匈奴傳〉臧宮, 馬武 上書曰 匈奴貪利하고 無有禮信하야 窮則稽首하고 安則侵盜라 今에 人畜이 疫死하고 旱蝗赤地【空盡無物曰赤이니 言在地之物이 皆盡也라】하야 疲困乏力하야 不當中國一郡이니 今命將臨塞하야 厚縣(懸)購賞이면 北虜之滅이 不過數年이리이다 詔報曰 黃石公記曰柔能制剛하고 弱能制彊【柔者는 德也요 剛者는 賊也며 弱者는 仁之所助也요 强者는 惡之所歸也라】하며 舍近謀遠者는 勞而無功하고 舍遠謀近者는 逸而有終이라 故曰 務廣地者는 荒하고 務廣德者는 彊이라하니 今國無善政하야 災變不息이어늘 而復欲遠事邊外乎아 誠能擧天下之半하야 以滅大寇 豈非至願이리오마는 苟非其時면 不如息民이라하니 自是로 諸將이 莫敢復言兵事者러라 〈出宮傳〉

林之奇光武以兵定天下로되 而用兵이 果光武之心乎아 觀其遣馮異入關에 必先告之曰 征伐은 非必略地屠城이라 要在平定安集之耳요 且平定之將은 不足以立威라하니 方群雄角逐之時하야도 猶不欲以威勝이어든 而況於匈奴乎아 方投戈講藝之餘하야 正欲與天下相安於無事어늘 而二子 必欲求逞於一劍하니 嗟呼라 一劍用而吾民之命이 殘矣라 求以殘匈奴는 適以殘吾民이니 光武之心이 豈忍爲之哉아 故로 不得不持黃石之說하야 以自戒而固却之也니라

建武 27년(신해 51)

北匈奴가 使臣을 보내어 武威郡에 와서 화친할 것을 구하자, 황제가 公卿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황태자가 말하기를 “南單于가 새로 歸附하였다가 배반하여 북쪽 오랑캐와 교통(왕래)하니, 신은 南單于가 장차 두 마음을 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서 武威太守에게 명하여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게 하였다.- 《後漢書 匈奴傳》에 나옴 -

臧宮馬武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匈奴는 이익을 탐하고 禮와 신의가 없어서 곤궁하면 머리를 조아려 복종하고 편안하면 침략하고 도둑질합니다. 지금 사람과 가축이 병들어 죽고 가뭄과 蟲害로 〈큰 흉년이 들어〉 거둘 만한 농작물이 하나도 없어서【비고 다하여 물건이 없는 것을 赤이라 하니, 赤地는 地面에 있는 물건이 모두 없음을 말한 것이다.】 지치고 기력이 다하여 중국의 한 郡을 당해내지 못하니, 이제 장수를 명하여 변방에 임해서 후하게 賞을 내건다면 북쪽 오랑캐의 멸망은 몇 년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조서를 내려 답하기를 “黃石公의 기록인 《素書》에 ‘柔한 것이 剛한 것을 제압하고 弱한 것이 彊한 것을 제압하며,【유순한 자는 덕이 있고 굳센 자는 해치며, 약한 자는 仁이 도와주는 바이고 강한 자는 惡이 돌아가는 바이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하는 자는 수고롭기만 하고 功이 없으며,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하는 자는 편안하면서도 끝마침이 있다. 그러므로 땅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황폐해지고 德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강해진다.’ 하였으니, 지금 우리나라에 좋은 정사가 없어서 災變이 그치지 않는데, 다시 변방 밖을 멀리 정벌하고자 하는가. 진실로 천하의 半을 들어서 큰 도적을 멸망하는 것이 어찌 나의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는가마는 만일 적당한 때가 아니면 백성을 쉬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이로부터 여러 장수들이 감히 다시는 전쟁하는 일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後漢書 臧宮傳》에 나옴 -

林之奇가 말하였다.

光武帝가 군대를 가지고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군대를 사용함이 과연 光武帝의 마음이었겠는가. 살펴보건대 馮異를 보내 關中에 들어갈 때에 반드시 먼저 고하기를 ‘정벌은 굳이 땅을 공략하고 城을 도륙하는 것이 아니라 요점이 平定하고 安集하는 데에 있을 뿐이요, 또 平定하는 장수는 위엄을 세울 수 없다.’ 하였으니, 群雄이 角逐할 때를 당해서도 오히려 위엄으로써 이기고자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匈奴에 있어서겠는가. 막 창을 던지고 문예를 익힌 뒤에 바로 천하와 더불어 無事함을 서로 편안히 하고자 하였는데, 臧宮馬武 두 사람이 기필코 한 칼에 무찔러 쾌함을 구하고자 하였으니, 아! 슬프다. 한 칼을 쓰면 우리 백성들의 목숨이 해를 입는다. 匈奴를 해치려는 것은 다만 우리 백성들을 해치는 것일 뿐이니, 光武帝의 마음이 어찌 차마 이것을 하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黃石公의 말을 가져다가 스스로 경계하고 굳이 물리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壬子]二十八年

[壬子]二十八年이라

以博士桓榮【上이 大會群臣하고 問 誰可傅太子者오하니 群臣이 承望上意하야 皆言 太子舅執金吾陰識가 可니이다 博士張佚이 正色曰 今立太子 爲陰氏乎아 爲天下乎아 爲陰氏인댄 則陰識可矣어니와 爲天下인댄 宜用天下之賢才니이다 帝曰 今博士不難正朕이온 況太子乎아하고 拜爲太子太傅하고 桓榮爲少傅하니라】으로 爲太子少傅하고 賜以輜車乘馬【輧車에 有衣蔽하고 無後轅者를 謂之輜車也라 四馬曰乘이라】하니 이 大會諸生하야 陳其車馬印綬【印은 雙印이니 長寸二分이요 方六分이라 黑犀爲文하니 有刻文光明章表하고 轉相結綬라 故로 謂之綬니 加以雙印之飾이라】하고 曰 今日所蒙은 稽古之力也라하더라 〈出榮傳〉

建武 28년(임자 52)

博士 桓榮【上이 신하들을 크게 모아 놓고 “누가 太子의 師傅로 삼을 만한 자인가?” 하고 물으니, 신하들이 上의 뜻에 영합하여 모두 말하기를 “太子의 外叔인 執金吾 陰識가 가합니다.” 하였다. 博士 張佚이 正色하고 말하기를 “지금 太子를 세운 것은 陰氏를 위한 것입니까? 天下를 위한 것입니까? 陰氏를 위한 것이라면 陰識를 太子의 師傅로 삼는 것이 가하지만 天下를 위한 것이라면 마땅히 天下의 어진 이와 재능이 있는 자를 등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지금 博士가 朕을 바로잡는 것도 어렵게 여기지 않는데, 더구나 太子에 있어서이겠는가.” 하고는 張佚을 제수하여 太子太傅로 삼고 桓榮을 少傅로 삼았다.】을 太子少傅로 삼고 輜車와 乘馬(4필의 말)【輧車에 옷의 가림이 있고 뒤의 끌채가 없는 것을 輜車라 이른다. 말 네 마리를 乘이라 한다.】를 하사하니, 桓榮이 諸生을 크게 모아 車馬와 印綬【印은 두 개의 印이니, 길이가 1촌 2푼이고 넓이가 6푼이다. 검은 犀角에 글을 짓는데, 글을 새겨 밖에 드러나 있고 돌려가며 서로 끈을 묶는다. 그러므로 綬라 이르니, 두 개의 印에 꾸밈을 가한 것이다.】를 진열해 놓고 말하기를 “오늘날 이 상을 받은 것은 옛 經書를 상고한 덕분이다.” 하였다. - 《後漢書 桓榮傳》에 나옴 -

[甲寅]三十年

[甲寅]三十年이라

車駕東巡하니 群臣이 上言호되 卽位三十年이니 宜封禪泰山이라하야늘 詔曰 卽位三十年에 百姓怨氣滿腹하니 吾誰欺오 欺天乎아 曾謂泰山이 不如林放【王氏曰 禮에 諸侯祭山川在其封內者라 泰山은 在魯地하니 魯公所當祭어늘 今季氏祭之는 非禮也라 孔子意謂 神不享非禮라 林放도 尙知問禮어든 誰道泰山之神이 反不如林放耶아하야 欲誣而祭之라 今光武擧此語者는 謂泰山不可欺也라】아 何事汚七十二代之編錄【封禪書에 管仲曰 古者封泰山, 禪梁父者 七十二君이나 而夷吾所記者는 十有二焉이니 昔無懷氏, 伏羲, 神農, 炎帝, 黃帝, 顓頊, 帝嚳, 堯, 舜, 禹, 湯, 成王이 皆受命然後得封禪이라 正義曰 〈管〉仲所記는 十二家요 其六十家는 無記錄이라 今光武言何事汚者는 猶言何必汚涴也라】이리오 於是에 群臣이 不敢復言이러라 〈出祭祀志〉

[新增]通鑑筆義曰 封禪은 其秦漢之侈心乎인저 雖聖人復起라도 不易斯言矣시리라 人之好自侈大가 何所不至哉아 極其侈大之意하야 施於人하야 無以加矣요 而復飾說以誣上天하야 盛禮樂하고 侈儀衛하야 張大功德하야 升中喬嶽【升은 上也요 中은 猶成也니 謂巡狩至於方岳하야 燔柴祭天하고 告以諸侯之成功也라 記禮器篇注에 中은 平也, 成也니 巡狩而至方岳之下하야 升進此方諸侯治功平成之事하야 以告於天이라】하고 告成于天하니 若此면 可以明布天下하고 誇示群臣하며 跨越前王하고 傳誦來世라하니 此秦始皇之初心也라 後之人君이 曷爲而效之오 有言亡秦之政於太平之時면 則聞者莫不惡之하고 又從而罪之어늘 獨乃何效秦始皇之侈하야 以爲帝王之盛事乎아 吾觀漢光武, 唐太宗은 皆明智有餘로되 而執德不堅하야 始之所行이 未嘗不善이나 終之所行은 乃大不然하니 余是以로 知侈心之難忘也라 光武之言曰 吾誰欺오 欺天乎인저 曾謂泰山不如林放乎아하니 其自知甚明이요 自處甚謙이라 然이나 未嘗以封禪爲非是也러니 他日感會昌之符【見下丙辰年이라】하야 欣然從之하야 固亦不待勸請矣라 太宗之論은 又異於光武矣라 若曰 天下乂安하고 家給人足이면 雖不封禪이나 庸何傷乎아 秦始皇封禪하고 而漢文帝不封禪하니 後世豈以文帝之賢이 爲不及始皇耶아하더니 群臣猶固請不已한대 帝意欲從之나 獨魏鄭公【魏徵封鄭公이라】이 以爲時不可耳라 貞觀之末에 屢欲東封이라가 以事而止【三十七卷壬辰年에 會大水하야 事寢이라】하니 由此言之하면 太宗은 非眞知封禪之不足爲요 魏鄭公은 非眞知封禪之不可爲요 意有所欲爲로되 事有所未可行하야 待時而後動爾라 夫王者는 父事天하고 母事地하야 兆南郊而就陽【十六卷丙戌年에 所謂立郊兆於城南者라 兆는 與垗通하니 爲畤界하야 祭其中也라 南은 卽陽也라】하고 因吉土【通典曰 神州는 謂王者所居吉土니 五千里內地名이라 記禮器注에 吉土王者所卜而建都之地라하니라】以升中하며 巡狩而告祭柴望【柴는 燔柴以祭天이요 望은 謂名山大川五岳四瀆을 望而祭之也라 燔柴는 加牲其上而焚之라 或云 但取烟上升하니 祭祀求諸陽之義也라】하야 對越上天이 可也요 燔燎於山下면 則固已畢祭矣라 登封於山上하야 金泥玉檢之藏하야 秘而不得宣이 果何爲說이리오 是亦不過秘祝之意耳니 果何與於事天哉아 勞民費財하야 上不足以格天而下無補於民이요 徒事外虛名하야 以驚世俗이니 此三代聖人所決不爲者라 後之儒者 事至治之君하고 當太平之時인댄 其毋曰封禪云이면 則善矣니라

建武 30년(갑인 54)

車駕가 동쪽으로 순행하니, 여러 신하들이 上言하기를 “즉위하신 지가 30년이니, 마땅히 泰山에 封禪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즉위한 지 30년에 백성들의 怨氣가 뱃속에 가득하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일찍이 泰山의 산신령이 林放만 못하단 말인가?【王氏가 말하였다. “禮에 제후는 자기 封內에 있는 山川에 제사한다. 泰山은 魯나라 땅에 있으니, 魯나라 군주가 마땅히 제사해야 하는데 지금 季氏가 제사함은 禮가 아니다. 孔子의 뜻은 ‘泰山의 神은 禮가 아닌 제사를 흠향하지 않는다. 林放도 오히려 禮를 물을 줄 알았는데, 누가 泰山의 神이 도리어 林放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속여서 제사 지내려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이제 光武帝가 이 말을 거론한 것은 泰山을 속일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어찌 72代의 編錄을 더럽힐 것이 있겠는가.【≪史記≫ 〈封禪書〉에 管仲이 말하기를 “옛날에 泰山을 封하고 梁父에 禪한 자가 72명의 군주이다.” 하였다. 그런데 管夷吾(管仲)가 기록한 것은 12명뿐이니, 옛날 無懷氏‧伏羲‧神農‧炎帝‧黃帝‧顓頊‧帝嚳‧堯‧舜‧禹王‧湯王‧成王이 모두 天命을 받은 뒤에 封禪을 하였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管仲이 기록한 것은 12명이고 60명은 기록이 없다.” 하였다. 지금 光武帝가 ‘何事汚’라고 말한 것은 ‘하필 더럽힐 것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後漢書 祭祀志》에 나옴 -

[新增]戴溪의 《通鑑筆義》에 말하였다.

“封禪은 秦나라와 漢나라의 사치한(과시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것이니, 비록 聖人이 다시 나오신다 해도 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과시하고 큰 체함을 좋아하는 것이 어찌 이르지 않는 바가 있겠는가. 과시하고 큰 체하는 뜻을 지극히 하여 사람을 남에게 베풀어서 이보다 더할 수가 없고, 다시 말을 꾸며 上天을 속여서 禮樂을 성대하게 갖추고 儀仗과 護衛를 많이 하여 功德을 과장해서 喬嶽에 성공을 올리고【升은 오름이고 中은 成과 같으니, 巡狩하여 方岳에 이르러서 나무섶을 태워 하늘에 제사하고 諸侯의 成功을 고함을 이른다. ≪禮記≫ 〈禮器篇〉 注에 “中은 평함이고 이룸이니, 巡狩하여 方岳의 아래에 이르러서 해당 方位의 제후가 均平하게 다스린 功績의 일을 올려 하늘에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늘에 성공을 알렸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하면 천하에 분명히 포고하고 군신들에게 과시하며 前王을 뛰어넘고 來世에 傳誦될 수 있다고 여겼으니, 이는 秦始皇의 처음 마음이었다. 후세의 人君이 어찌 이것을 본받는단 말인가.

태평할 때에 망한 秦나라의 정사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듣는 자가 미워하지 않음이 없고 또 따라서 죄주는데, 홀로 어찌하여 秦始皇의 사치한 마음을 본받아서 帝王의 성대한 일이라고 여긴단 말인가. 내가 살펴보건대 漢나라 光武帝와 唐나라 太宗은 모두 밝음과 지혜가 有餘하였으나 德을 잡아지킴이 견고하지 못해서 처음에 행한 바는 일찍이 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종말에 행한 바는 도리어 크게 옳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때문에 사치한 마음을 잊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光武帝의 말에 이르기를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일찍이 泰山의 산신령이 林放만 못하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스스로 앎이 매우 분명하고 스스로 처함이 매우 겸손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封禪을 나쁘다고 하지 않았는데, 후일에 會昌符【會昌符는 아래 光武帝 中元元年 丙辰年條에 보인다.】에 감동되어서 欣然히 이것을 따라 진실로 또한 권고하고 청원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太宗의 말은 또 光武帝와 다르다. 대략 이르기를 ‘천하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집집마다 여유롭고 사람마다 풍족하면 비록 封禪을 하지 않으나 어찌 해롭겠는가. 秦始皇은 封禪을 하였고 漢나라 文帝는 封禪을 하지 않았는데 후세에 어찌 文帝의 어짊이 始皇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는가.’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오히려 굳이 청하고 그치지 않자 황제가 마음속에 이것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오직 魏鄭公(魏徵)【魏徵을 鄭公에 봉하였다.】만이 때가 不可하다고 말하였다.

貞觀 말년에 여러 번 동쪽으로 가서 封禪을 하려다가 일 때문에 중지하였으니,【本書 37권 太宗 貞觀 6년 壬辰年條에 〈唐나라 太宗이 封禪을 하려고 하였으나〉 큰 홍수를 만나 일이 중지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太宗은 封禪이 할 만한 일이 못 됨을 참으로 안 것이 아니고, 魏鄭公은 封禪이 불가하다는 것을 참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요,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으나 일이 행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때를 기다린 뒤에 움직이려고 했을 뿐이다.

王者는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겨서 남쪽 郊外에서 陽에 나아가고【本書 16권 光武帝 建武 2년 丙戌年條에 이른바 ‘郊兆를 城의 남쪽에 세웠다.’는 것이다. 兆는 垗와 통하니, 祭壇의 경계를 만들고 그 가운데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다. 南은 곧 陽이다.】 길한 땅【≪通典≫에 이르기를 “神州는 王者가 거처하는 吉土를 이르니 5천 리 안의 地名이다.” 하였다. ≪禮記≫ 〈禮器〉 注에 “吉土는 王者가 점쳐서 도읍을 세운 곳이다.” 하였다.】을 인하여 하늘에 제사하여 成功을 고하며, 巡狩하여 고하고 祈雨祭를 지내고 나무를 불태워 望제사를 지내서【柴는 나무섶을 태워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고, 望은 名山‧大川과 五岳‧四瀆을 바라보고 제사함을 이른다. 燔柴는 나무섶 위에 희생을 올려놓고 태우는 것이다. 或者는 이르기를 “다만 연기가 올라가는 것만을 취하니, 제사 지낼 때에 陽에서 魂을 구하는 뜻이다.” 한다.】 上天을 대하는 것이 가하고 산 아래에서 불태우면 진실로 이미 제사가 끝나는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 封禪하여 金泥로 써서 玉檢에 보관하여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과연 무슨 말인가. 이 또한 은밀히 축원하는 뜻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이것이 과연 하늘을 섬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여 위로는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도움됨이 없고 다만 밖으로 虛名을 일삼아서 세속을 놀라게 할 뿐이니, 이는 三代의 聖人이 결코 하지 않은 것이다. 후세의 儒者들이 지극히 다스리는 군주를 섬기고 태평한 때를 당한다면 封禪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乙卯]三十一年

[乙卯]三十一年이라

京兆掾第五倫【第五는 複姓也요 倫은 其名也라 本出於齊諸田之後하니 田氏徙園陵者多라 故以次第爲氏하니라】이 領長安市【長安縣司市也 】하야 公平廉介하니 市無奸枉이라 每讀詔書에 常嘆息曰 此는 聖主也라 一見決矣라하더라

建武 31년(을묘 55)

京兆掾 第五倫【第五는 複姓이고, 倫은 그의 이름이다. 본래 齊나라 여러 田氏의 후예에서 나왔으니, 田氏가 園陵으로 옮겨 간 자가 많았으므로 차례를 가지고 氏를 삼은 것이다.】이 長安의 시장을 맡아【長安縣에서 시장을 맡은 것이다.】 공평하고 청렴하니, 시장에 간사하고 부정함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조서를 읽을 때마다 항상 감탄하기를 “이는 聖主이다. 한 번만 보면 결단한다.” 하였다.

[丙辰]中元元年

[丙辰]中元元年【綱目에 冠以建武中元元年이라 梁武帝大同大通에 俱有中字하니 是亦憲章於此라 只書中元者는 從簡易耳라】이라

上이 讀河圖會昌符【符者는 讖記之書也요 會昌은 其書之名也라】하니 曰赤劉之九【赤은 火色이니 漢姓劉요 以火德王이라 故尙赤하니 赤劉는 猶言炎正也라 九는 世數也니 光武는 高帝九世孫故로 云이라】에 會命岱宗【岱宗은 泰山也라 岱宗은 宗長也니 東岳爲泰山이니 衆山之宗이요 五嶽之長也라】이라하야늘 上이 感此文하야 乃詔梁松等하야 按索河雒讖文【易繫辭曰 河出圖하고 洛出書어늘 聖人則之라한대 孔安國曰 河圖者는 伏羲氏王에 龍馬出河어늘 遂則其文하야 以畫八卦하고 洛書者는 禹治水時에 神龜負文而列於背호되 有數至九어늘 禹遂因而(敍)[第]之하야 以成九疇也라하니라 讖은 符命之書也라】하니 言九世에 當封禪者 三十六事라 於是에 張純等이 復奏請封禪한대 上이 乃許焉하고 登山하야 以璽로 親封玉牒檢【凡封禪에 用玉牒書하야 藏方石하니 有玉檢하고 又用石檢十枚하야 列於石旁이라 檢用金繩하고 纏以玉하고 以水銀和金爲泥하야 封之하고 印以受命之璽라 又有玉匱一하니 長一尺三寸이니 以藏上帝之冊이라 韻書에 檢者는 書函之蓋也니 玉檢은 謂以玉爲檢(冊)[束]也라[頭註]見元封故事(武帝封禪故事也)하니 則用方石하야 置壇中호되 皆方五尺, 厚一尺이요 用玉牒書하야 藏方石하니 牒은 厚五寸, 長尺三寸, 廣五寸이라 有玉檢하고 又有石檢十枚를 列於石旁하니 東西各三이요 南北各二니 皆長五尺, 廣三尺, 厚七寸이라 檢中刻三處하니 深四寸, 方五寸이요 有蓋檢하니 用金縷五周하야 以水銀和金以爲泥라】하다 〈出郊祀志〉

[新增]胡氏曰 七十二君之編錄은 詩書禮典에 略不經見하니 審有是事인댄 乃天下國家之盛擧라 이 皆身致太平하니 安得闕而不講이리오 故로 前世論登封者 莫善於許懋【按梁武帝時에 有請封會稽禪國山者러니 許懋諫之而止하니라】어늘 惜乎라 世祖【光武也라】之臣이 智不及此하야 陷其君於過擧而不得聞也여

延平陳氏曰 三十年에 群臣이 請封禪한대 詔引欺天林放之語하야 以止之라 然而信聖人之言이 不如信圖讖之篤也로다

中元 元年(병진 56)【≪資治通鑑綱目≫에는 앞에 建武中元元年이라고 되어 있다. 梁武帝의 大同과 大通에도 모두 〈中大同元年, 中大通元年이라 하여〉 中字가 있으니, 이 또한 이것을 본받은 것인데 다만 中元이라고 쓴 것은 간략함을 따른 것이다.】

上이 河圖의 會昌符【符는 圖讖을 기록한 글이고, 會昌은 그 글의 이름이다.】를 읽어보니, 그 내용에 이르기를 “赤劉의 九【赤은 火色이니, 漢나라 國姓이 劉氏이고 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기 때문에 赤色을 숭상하였으니, 赤劉는 炎正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9는 代數이니, 光武帝가 高帝의 9대손이므로 말한 것이다.】에 岱宗【岱宗은 泰山이다. 岱宗은 宗長이란 뜻이니, 東岳을 泰山이라 하니, 모든 산의 宗主이고 五嶽의 으뜸인 것이다.】에 會命한다.” 하였다. 上이 이 글에 감동되어 마침내 梁松 등에게 명해서 河雒의 圖讖文【≪周易≫ 〈繫辭傳〉에 이르기를 “河水에서 그림이 나오고 洛水에서 글이 나오자, 聖人이 이를 본받았다.” 하였는데, 孔安國이 말하기를 “河圖는 伏羲氏가 왕 노릇 할 때에 龍馬가 河水에서 나오자 마침내 그 무늬를 본받아서 八卦를 그었고, 洛書는 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神龜가 등에 무늬가 나열된 것을 지고 나왔는데, 數가 1부터 9까지 있으므로 禹임금이 마침내 이것을 따라 차례로 진열하여 洪範 九疇를 이루었다.” 하였다. 讖은 符命을 적은 책이다.】을 상고하고 찾게 하니, 이르기를 “9世에 마땅히 封禪해야 할 것이 36가지 일이다.” 하였다. 이에 張純 등이 다시 封禪할 것을 奏請하니, 上이 마침내 허락하고 泰山에 올라 玉璽로써 친히 玉牒의 檢(뚜껑)【[附註]무릇 封禪할 때에 玉牒書를 사용하여 네모난 돌에 보관하니, 여기에 玉檢이 있고 또 石檢 10枚를 돌 옆에 나열한다. 檢은 쇠줄을 사용하고 옥으로 묶으며, 水銀에다가 金을 섞어 진흙처럼 개어서 봉함하고 受命之璽를 찍는다. 또 玉匱 하나가 있으니, 길이가 1尺 3寸이니, 上帝之冊을 보관한다. ≪古今韻會擧要≫에 “檢은 책을 넣는 함의 뚜껑이다.” 하였으니, 玉檢은 玉으로 檢束함을 이른다.[頭註]武帝의 元封 年間에 행한 封禪의 故事에 보이니, “네모진 돌을 壇 가운데에 넣어 두되 모두 사방 5尺, 두께 1尺이다. 玉牒書를 네모진 돌에 보관하니, 牒은 두께가 5寸, 길이 1尺 3寸, 너비가 5寸이다. 玉檢이 있고 또 石檢 10枚를 돌 옆에 나열하되 동서에는 각각 3개, 남북에는 각각 2개씩 하니 모두 길이가 5尺, 너비가 3尺, 두께가 7寸이다. 檢 가운데에 세 곳을 새기되 깊이가 4寸, 사방 5寸으로 하며, 뚜껑이 있으니 金絲로 다섯 번 두르고 水銀과 金을 합하여 개어서 봉함한다.” 하였다.】을 봉함하였다.- 《後漢書 郊祀志》에 나옴 -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封禪한 72명의 군주의 編錄은 詩書와 禮典에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바로 천하와 국가의 거룩한 일이다. 禹王湯王과 周나라의 武王成王康王昭王宣王이 모두 몸소 태평을 이루었으니, 어찌 이것을 빼놓고 講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前代에 泰山에 올라 封禪함을 논한 것은 許懋보다 더 훌륭한 자가 없는데,【[原註]前世論登封者 莫善於許懋:살펴보건대 梁나라 武帝 때에 會稽山에 封하고 國山에서 禪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許懋가 간하여 저지하였다.】 애석하다! 世祖(光武帝)【世祖는 光武帝이다.】의 신하들이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군주를 지나친 행동에 빠지게 하고 아뢰지 못하였다.”

延平陳氏가 말하였다.

“建武 30년에 신하들이 封禪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詔書를 내려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林放만 못하겠는가.’라는 말을 인용하여 저지하였다. 그러나 聖人의 말씀을 믿음이 圖讖說을 믿는 것처럼 돈독하지 못하였다.”

京師에 醴泉【言泉之味甘如醴라】이 涌出하고 又有赤草【朱草也라 [通鑑要解]日生一葉이라가 至十五日以後엔 日落一葉하야 周以復始하니라】生於水涯하며 郡國이 頻上甘露라 群臣이 奏言호되 靈物이 仍降하니 宜令太史撰集하야 以傳來世라하야늘 帝不納하고 常自謙無德하고 郡國所上을 輒抑而不當이라 故로 史官이 罕得記焉이러라 〈出本紀〉

京師에 醴泉【醴泉은 샘물의 맛이 단술처럼 닮을 말한 것이다.】이 솟아나오고 또 상서로운 풀인 赤草【[釋義]赤草는 朱草이다. [通鑑要解]하루에 한 잎씩 나오다가 보름이 지난 뒤에는 하루에 한 잎씩 떨어져서, 한 바퀴 돌면 다시 시작된다.】가 물가에서 자랐으며, 郡國에서 甘露水가 자주 나온 사실을 올렸다. 여러 신하들이 上奏하기를 “신령스러운 물건이 거듭 내려오니, 마땅히 太史로 하여금 이것을 撰集해서 來世에 전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스스로 德이 없다고 겸손해 하고, 郡國에서 올린 상서로운 일을 번번이 억제하고 자신에게 해당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史官이 기록한 것이 드물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 是歲에 起靈臺, 明堂, 辟雍하고 宣布圖讖於天下하다 〈出本紀〉帝以赤伏符로 卽位라하야 由是로 信用讖文하고 多以決定嫌疑라 桓譚이 上疏하야 極言讖之非經【言讖文이 不合經典이라】하니 帝大怒曰 桓譚이 非聖無法하니 將下斬之하라 이 叩頭流血이어늘 良久에 乃得解하야 出爲六安하다 〈出本紀〉

○ 이 해에 靈臺‧明堂‧辟雍을 일으키고, 圖讖說을 천하에 선포하였다. -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황제가 赤伏符로 즉위했다고 하여 이로 말미암아 圖讖의 내용을 신용하고 대부분 이로써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였다. 桓譚이 글을 올려 圖讖이 經典의 뜻에 부합하지 않음【圖讖의 내용이 經典에 부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을 지극히 말하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桓譚이 聖人을 비난하여 법도가 없으니, 장차 끌어내려서 목을 베라.” 하였다. 桓譚이 머리를 찧어 피가 흐르자,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풀려나서 외직으로 나가 六安縣의 丞이 되었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丁巳]二年

[丁巳]二年이라

二月에 帝崩하니 年이 六十二라 帝每旦視朝하고 日仄(昃)【仄은 古側字니 與昃同이라 日向西曰昃이라】乃罷하며 數引公卿郞將하야 講論經理【謂五經之義理라】하고 夜分乃寐하니 皇太子見帝勤勞不怠하고 乘間諫曰 陛下有之明이시어늘 而失黃老養性之福하시니 願頤愛【頤는 養也라】精神하야 優游自寧하노이다 帝曰 我自樂此하니 不爲疲也로라 雖以征伐濟大業이나 及天下旣定에 乃退功臣而進文吏하야 明愼政體하고 總攬權綱하며 量時度力하야 擧無過事라 故로 能恢復前烈하야 身致太平이러라 〈出本紀〉

[史略 史評]史斷曰 光武膺受命之符하야 起兵舂陵하야 興復帝室할새 鏖戰昆陽에 人服其武하고 司隷入洛에 人服其度하고 持節渡河에 人服其德하니 此三者는 中興之本也라 故로 能克復宗社하야 不改舊物이라 卽位之後에 首以卓茂爲太傅하야 封褒德侯하야 而當世多循吏하고 天下略定에 卽起太學하야 親臨視之하야 而東都盛儒學하고 徵三處士하야 而末造多節義之士하니 其所以祀漢配天하야 以垂二百年之基者 實在於此라 然이나 以私愛로 廢皇后太子하고 聽讒言하야 收新息侯印綬하고 信圖讖하야 竟事封禪하니 此三者는 不能不爲盛德之累어니와 至其加恩廢后母子親黨하야는 則又後世人主所難能也니라

中元 2년(정사 57)

2월에 황제가 승하하니, 나이가 62세였다. 황제가 매일 아침 일찍 조회를 보고 해가 기울어야【仄은 側의 古字이니, 昃과 같다. 해가 서쪽을 향함을 昃이라 한다.】 비로소 파하였으며, 자주 公卿과 郎將들을 인견하여 經傳의 의리【經理는 五經의 義理를 이른다.】를 강론하고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잠을 자니, 황태자는 황제가 근로하여 게을리 하지 않음을 보고는 틈을 타서 간하기를 “폐하께서는 禹王湯王의 총명함이 있으신데 黃帝老子의 養性(養生)하는 福을 잃으시니, 원컨대 정신을 기르고 아껴서【頤는 기름이다.】 한가롭게 지내어 스스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이것을 즐거워하니, 피곤하지 않다.” 하였다.

황제가 비록 정벌로 大業을 이루었으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마침내 功臣을 물리치고 文官을 등용해서 정사하는 체통을 밝게 알고 삼가며, 권세와 紀綱을 총괄하고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조처함에 잘못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前代의 功烈을 회복하여 몸소 太平을 이룩할 수 있었다.- 《後漢書 光武帝紀》에 나옴 -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光武帝가 天命을 받는다는 符書에 응하여 舂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皇室을 다시 일으켰는데, 昆陽에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그 武勇에 감복하였고, 司隷로 洛陽에 들어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度量에 감복하였고, 符節을 잡고 黃河를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그 德에 탄복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중흥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宗廟 社稷을 다시 수복하여 옛 물건을 고치지 않은 것이다. 즉위한 뒤에는 맨 먼저 卓茂를 太傅로 삼아 褒德侯에 봉해서 당대에 循吏가 많았고, 천하가 대략 평정되자 즉시 太學을 일으키고 친히 왕림하여 시찰해서 東都(洛陽)에 儒學이 성하였고, 세 處士(周黨, 王良, 王成)를 불러 말년에 節義의 선비가 많았으니, 漢나라를 제사하여 하늘에 配享해서 2백 년의 기업을 드리운 것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사랑으로 皇后와 太子를 폐하고, 참소하는 말을 따라서 新息侯(馬援)의 印綬를 거두고, 圖讖說을 믿어서 끝내 封禪을 일삼았으니, 이 세 가지는 盛德의 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폐출한 皇后의 母子와 親黨에 은혜를 가함에 이르러서는 또 후세의 임금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 太子卽皇帝位하다

贊曰 炎正【漢以火德故로 曰炎正이라】中微에 大盜移國하니 九縣飇回【九縣은 九州也라 飇回는 謂亂也라】에 三精【日月星也라】霧塞이라 人厭淫祚하고 神思反德하니 光武誕命하야 靈貺自甄【甄은 音眞이니 明也라】이라 沈幾先物하고 深略緯文이라 尋邑百萬이 貔虎爲群하야 長轂雷野하고 高鋒彗雲【長轂은 兵車라 雷野는 言聲盛이라 彗는 掃也라】이러니 英威旣振에 新都【莽初封新都侯라】自焚이라 虔劉庸代【虔, 劉는 皆殺也라 庸, 代는 公孫述稱帝於庸蜀하고 盧芳據代都라】하고 紛紜【梁은 謂劉永이요 趙는 謂王郞이라】하며 三河未澄【三河는 河南河北河東이니 朱鮪據洛州하야 未附也라】하고 四關重擾【四關은 謂長安四塞之國이라 更始已定關中이어늘 劉盆子入關하야 殺更始하고 發掘諸陵也라】러니 神旌乃顧하야 遽行天討라 金湯失險【金湯은 金城湯池니 喩城池之堅固也라】하고 車書共道하니 靈慶【符讖也라】旣啓에 人謀咸贊이라 明明廟謨요 赳赳雄斷이라 於赫有命이여 系隆我漢이라

○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范曄의 《後漢書》〈光武帝紀〉 贊에 말하였다.

“炎正【漢나라는 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기 때문에 炎正이라고 한 것이다.】이 중간에 쇠하자 大盜가 國統을 차지하니, 九縣이 어지러워【九縣은 九州이다. 飇回는 어지러움을 이른다.】 三精【三精은 해와 달과 별이다.】이 안개 속에 가려졌다. 사람들은 淫祚를 싫어하고 神은 德을 돌이킬 것을 생각하니, 光武帝가 크게 天命을 받아 신령을 내려 주어 스스로 밝혔다.【甄은 음이 진이니, 밝음이다.】 침착한 幾微는 남보다 먼저 알고 깊은 智略은 文으로 다스렸다. 王尋王邑의 백만 군대가 貔虎처럼 떼를 이루어서 兵車의 바퀴소리는 들에서 천둥처럼 울리고 높은 칼날은 구름(하늘)을 뒤덮었는데,【[頭註]長轂雷野 高鋒彗雲:長轂(수레바퀴 통이 긴 것)은 兵車이다. 천둥처럼 울린다는 것은 소리가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 彗는 비로 쓰는 것이다.】 英威를 이미 떨치자 新都侯(王莽)【王莽이 처음에 新都侯에 봉해졌다.】가 스스로 불타 죽었다. 庸(公孫述)과 代(盧芳)를 죽이고【虔과 劉는 모두 죽이는 것이다. 庸과 代는 〈公孫述과 盧芳을 이르니〉 公孫述은 庸蜀에서 皇帝를 칭하였고 盧芳은 代都에 웅거하였다.】梁(劉永)과 趙(王郞)【梁은 劉永을 이르고, 趙는 王郞을 이른다.】 두 지방이 어지러웠으며 三河가 맑지 못하고【三河는 河南‧河北‧河東이니, 朱鮪가 洛州에 웅거하여 따르지 않았다.】 四關(長安)이 거듭 소요하였는데,【四關은 長安이 사방으로 요새인 지방임을 이른다. 更始가 이미 關中(長安)을 평정하자, 劉盆子가 關中에 들어가 更始를 죽이고 諸陵을 파내었다.】 신명스런 깃발로 돌아보아 급히 천벌을 행하였다. 金城湯池가 험함을 잃고【金湯은 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놓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못이니, 성과 못의 견고함을 비유한 것이다.】 수레의 궤도와 문서의 글자가 道를 함께하니, 신령스러운 경사의 符讖【신령스러운 경사는 符讖을 가리킨 것이다.】이 이미 나오자 사람들의 계책이 모두 도왔다. 廟堂의 계책이 분명하고 영웅다운 결단이 씩씩하였다. 아! 빛나는 天命이여. 우리 漢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漢書循吏傳敍에 曰光武長於民間하야 頗達情僞하고 見稼穡艱難과 百姓病害라 至天下已定하야 務用安靜하야 解王莽之繁密하고 還漢世之輕法하며 身衣大練하고 色無重綵하며 耳不聽鄭衛之音하고 手不持珠玉之玩하며 宮房에 無私愛하고 左右에 無偏恩하며 其以手迹으로 賜方國者 皆一札十行에 細書成文하니 勤約之風이 行於上下라 故로 能內外匪懈하고 百姓寬息이라 然이나 建武, 永平之間에 吏事刻深하야 亟以謠言單辭로 轉易守長이라 故로 朱浮數上書諫하고 而鍾離意亦規諷하야 殷勤以長者爲言호되 而不能得也라 所以中興之美 蓋未盡焉이러라

蘇東坡世祖旣立에 上懲韓彭之難하고 中鑑七國之變하고 下悼王氏之禍라 於是에 盡侯諸將하고 而不任以事하며 裁減同姓之封하고 而黜三公之權하야 以爲前世之弊를 盡去矣러니 及其衰也엔 宦官之權盛而黨錮之難起라 士大夫相與搤腕而游談者 以爲天子一日誅宦官而解黨錮면 則天下猶可以無事라하니 於是에 外召諸將【在二十一卷己巳年이라】而內脅其君하야 宦官旣誅에 而董卓曹操之徒亦因以亡漢이라 漢之所憂者 凡六變【六變은 謂韓彭, 七國, 王氏, 黨錮, 宦官, 召外將이라】이로되 而其亂與亡은 輒出於其所不憂하야 而終不可備하니 由此觀之하면 治亂存亡之勢 其皆有以取之歟아 抑將不可推하야 如江河之推移하야 其勢自有以相激而不可救歟아 其亦可以理推力救而莫之爲也니라

東萊呂氏高祖創西漢하고 光武創東漢하니 皆是創業垂統하야 以爲一代之規模體統이나 以大要論之하면 高祖는 識大體로되 其間條目品節은 有疏漏處요 光武는 條目品節이 甚詳悉이나 然於大體에 却遺하니 所以兩漢의 風聲氣習寬狹厚薄緩急이 大抵不同이라 光武는 不任三公하야 事歸臺閣【尙書諸司라】하야 以人主로 下親簿書期會之事하니 此最是失政事體統이니라

《漢書》〈循吏傳〉 序에 말하였다.

光武帝는 민간에서 생장하여 자못 실정과 거짓을 알았고,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았다. 그러므로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천하를 다스림에〉 되도록 편안하고 고요함을 써서 王莽의 번거롭고 치밀함을 풀어 주고 漢代의 간략한 법을 회복하였으며, 몸소 大練을 입고 색깔은 채색을 이중으로 함이 없었으며, 귀로는 鄭나라와 衛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고 손으로는 珠玉 등의 玩好하는 물건을 잡지 않았으며, 宮房(後宮)에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이가 없고 좌우에는 편벽되이 은혜를 받은 자가 없으며, 직접 쓴 간찰을 사방의 나라에 하사할 때에는 모두 한 장에 열 줄을 써서 작은 글씨로 글을 적으니, 부지런하고 검약한 풍속이 상하에 행해졌다. 이 때문에 內外가 게으르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建武와 永平 연간에는 獄吏들이 까다롭고 가혹함을 일삼아 자주 謠言(떠도는 말)과 신빙성 없는 말 때문에 수령들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朱浮가 자주 글을 올려 간하였고 鍾離意 또한 諷諫하여 은근하게 너그러운 長者여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中興의 아름다움이 미진하였다.

蘇東坡가 말하였다.

世祖가 이미 즉위한 뒤에 위로는 韓信彭越의 난리를 징계하고 중간에는 吳楚七國의 變亂을 거울로 삼고 아래로는 王氏의 禍를 서글퍼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모두 侯로 삼고 정사를 맡기지 않았으며 同姓의 봉함을 줄이고 三公의 권한을 축소해서 前代의 폐단을 모두 제거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쇠할 때에 미쳐서는 환관의 권력이 성해져서 黨錮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士大夫로서 서로 팔뚝을 걷어붙이고 유세하는 자가 이르기를 ‘天子가 단 하루 환관을 죽이고 黨錮를 풀면 천하가 오히려 무사할 수 있다.’라고 하니, 이에 밖으로 여러 장수들을 부르고【밖으로 장수들을 부른 일은 本書 21권 靈帝 中平6년 己巳年條에 있다.】 안으로 그 군주를 위협하여 환관들을 죽였는데, 董卓曹操의 무리가 또한 인하여 漢나라를 망쳤다. 漢나라가 걱정한 것은 모두 여섯 번의 변란【여섯 번의 변란은 韓信과 彭越의 난, 吳楚七國의 반란, 王氏의 화, 黨錮의 화, 宦官의 화, 外地의 장수(董卓)를 부른 일 등을 이른다.】이었는데 혼란과 멸망은 번번이 걱정하지 않은 데에서 나와 끝내 대비할 수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관찰한다면 治亂과 存亡의 형세는 다 自取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차 추측할 수 없어서 江河가 옮겨가듯 하여 그 형세가 서로 격해져서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또한 이치로 미루고 힘으로 구원할 수 있으나 하지 않은 것이다.

東萊呂氏가 말하였다.

高祖는 西漢을 창건하고 光武帝는 東漢을 창건하였으니, 다 창업하여 전통을 드리워서 한 왕조의 規模와 體統으로 삼았으나 大要를 가지고 논하면 高祖는 大體를 알았지만 그 사이의 조목과 품절은 소략한 부분이 있었고, 光武帝는 조목과 품절은 매우 상세하고 다하였으나 大體에 있어서는 도리어 빠뜨렸으니, 이 때문에 兩漢의 風聲과 氣習의 관대함과 좁음, 후함과 박함, 느림과 급함이 대체로 똑같지 않은 것이다. 光武帝는 三公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아서 일이 臺閣【臺閣은 尙書와 여러 官司이다.】으로 돌아가 군주로서 아래로 문서와 期會를 따지는 일을 직접 다스렸으니, 이는 政事의 體統을 가장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