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八 漢紀

yjw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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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太宗孝文皇帝 下

[壬申]十一年

[壬申]十一年이라

匈奴數爲邊患이어늘 鼂錯【音朝, 厝라 史記에 錯는 又如字讀이라 】上言兵事曰 臣聞用兵臨戰에 合刃之急이 有三하니 一曰得地形이요 二曰卒服習【服은 亦習也라 內成曰器니 甲冑之屬이요 外成曰械니 戈矛弓戟之屬이라 】이요 三曰器用利라 故로 兵法에 器械不利면 以其卒予敵也요 卒不可用이면 以其將予敵也요 將不知兵이면 以其主予敵也요 君不擇將이면 以其國予敵也라하니 四者는 兵之至要也니이다 臣又聞以蠻夷攻蠻夷는 中國之形也라하니이다 今에 匈奴地形技藝 與中國異하니 上下山阪하며 出入溪澗은 中國之馬 弗與也【與는 猶如也라 】요 險道傾仄에 且馳且射는 中國之騎 弗與也요 風雨罷(疲)勞에 飢渴不困은 中國之人 弗與也니 此는 匈奴之長技也니이다

11년(임신 B.C.169))

匈奴가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자, 鼂錯가【鼂錯는 음이 조이다. ≪史記≫에 “錯는 또 본래의 글자대로 착으로 읽는다.” 하였다.】 兵事에 대해 上言하였다.

“신이 들으니 군대를 써서 전투에 임할 적에 칼날을 부딪쳐 接戰함에 급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地形을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병졸들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이고,【服은 또한 익힘이다. 안에서 만드는 것을 器라 하니 甲冑의 등속이고, 밖에서 만드는 것을 械라 하니 戈‧矛‧弓‧戟의 등속이다.】 세 번째는 병기가 예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兵法에 ‘기계(병기)가 예리하지 않으면 그 병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고, 병졸이 〈훈련이 되지 않아서〉 쓸 수가 없으면 그 장수를 적에게 주는 것이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군주를 적에게 주는 것이고, 군주가 장수를 가려 뽑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네 가지는 군대의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은 또 들으니 蠻夷로 蠻夷를 공격함은 中國의 형세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匈奴의 地形과 技藝가 中國과 다르니, 산언덕을 오르내리며 시내를 드나드는 것은 中國의 말이 匈奴의 말만 못하고, 험한 길과 기울어져 있는 곳에서 한편으로 말을 달리고 한편으로 활을 쏘는 것은 中國의 騎兵이 그들을 상대하지 못하고,【與는 如와 같다.】 비바람을 맞고 피로할 적에 굶주리고 목말라도 피곤해 하지 않음은 中國 사람들이 그들을 상대하지 못하니, 이것은 匈奴의 長技입니다.

若夫平原易地에 輕車突騎면 則匈奴之衆이 易撓亂【撓는 攪也니 字從手라 】也요 勁弩長戟으로 射疏及遠【王氏曰 長戟은 恐誤라 或者勁弩니 如今九牛大弩니 以槍爲矢라 故可射疏及遠이라 然戟有鉤하야 又不可射라 疏는 與疎通이라 [頭註] 勁弩는 所以射疏요 長戟은 所以及遠이라 疏亦遠也라 】이면 則匈奴之弓이 弗能格也요 堅甲利刃으로 長短相雜하고 遊弩往來하야 什伍【伍人爲伍요 二伍爲什이라 】俱前이면 則匈奴之兵이 弗能當也요 材官騶發【騶는 矢之善者니 發矢以射也라】에 矢道同的【的은 所射之準臬也니 手工矢善故로 中則同的이니 言其工妙라】이면 則匈奴之革笥木薦【革笥는 以皮作如鎧者하야 被之요 木薦은 以木板作하니 如楯이라 】이 弗能支也요 下馬地鬪에 劍戟相接하야 去就相薄이면 則匈奴之足이 弗能給也니 此는 中國之長技也라 以此觀之컨대 匈奴之長技는 三이요 中國之長技는 五니이다 帝王之道는 出於萬全하나니 今에 降胡義渠【括地志에 今寧, 涇, 慶三州 本義渠地也라 】 來歸義者數千이라 長技與匈奴同하니 可賜之堅甲利兵하고 益以邊郡之良騎하야 平地通道에는 則以輕車材官制之하야 兩軍이 相爲表裏면 此는 萬全之術이니이다 帝嘉之하야 賜書寵答焉하다

만약 평원과 평탄한 땅에서 가벼운 전차와 돌격 기병을 사용하면 匈奴의 무리가 쉽게 교란당하고,【撓는 흔듦이니, 手자를 따른다.】 굳센 쇠뇌와 긴 창으로 멀리 쏘아 먼 곳까지 미치게 하면【[釋義] 王氏가 말하였다. “긴 창은 잘못된 듯하다. 혹은 강한 쇠뇌일 것이니, 지금의 九牛大弩와 같은 것으로 창을 화살로 삼는다. 그러므로 멀리 쏘아 먼 곳까지 미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창은 갈고리가 있어서 또 쏠 수가 없다. 疏는 疎와 통한다.” [頭註] 勁弩는 먼 곳에 쏘는 것이고, 長戟은 먼 곳에 미치는 것이다. 疏 또한 멂이다.】匈奴의 활이 막아내지 못하고,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칼날로 긴 병기와 짧은 병기가 서로 뒤섞이고 유격대의 궁노수가 왕래(출몰)하여 什伍가【5人을 伍라 하고, 二伍를 什이라 한다.】 함께 전진하면 匈奴의 병사가 당해내지 못하고, 材官이 좋은 활을 쏠【騶는 좋은 화살이니, 화살을 발사하여 쏘는 것이다.】 적에 화살의 路線이 표적을 똑같이 하면【的은 활을 쏘는 표준이니, 솜씨가 공교롭고 화살이 좋기 때문에 맞으면 한 표적에 함께 맞는 것이니, 그 공교롭고 묘함을 말한 것이다.】匈奴의 갑옷과 나무 방패가【革笥는 가죽으로 갑옷과 같은 것을 만들어 입히는 것이고, 木薦은 나무판자로 만드니 방패와 같은 것이다.】 지탱하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땅에서 싸울 적에 칼과 창으로 서로 接戰하여 가고 나아가 서로 부딪치면 匈奴의 발이 상대하지 못하니, 이는 中國의 장기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匈奴의 장기는 셋이고, 中國의 장기는 다섯입니다. 帝王의 道는 萬全에서 나오니, 이제 항복한 오랑캐인 義渠가【≪括地志≫에 “지금의 寧州, 涇州, 慶州 세 州가 본래 義渠 땅이다.” 하였다.】 와서 歸義(의리에 귀순)한 자가 수천 명입니다. 이들의 장기가 匈奴와 같으니, 이들에게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를 주고 변방 고을의 정예 기병을 더 보태 주어서, 평탄한 지역과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는 가벼운 전차와 材官을 가지고 敵을 제재하게 하여 두 군대가 서로 表裏가 되게 하면 이는 萬全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가상히 여겨서 글을 내려 예우하여 답하였다.

又上言曰 胡, 貉(貊)之人은 其性이 耐寒하고 揚, 粤(越)之人은 其性이 耐暑라 秦之戍卒은 不耐【漢書에 竝作能字하니 注讀曰耐라】其水土하야 戍者死於邊하고 輸者僨於道하니 秦民이 見行을 如往棄市라 陳勝이 先倡에 天下從之者는 秦以威劫而行之之敝也니이다 不如選常居者하야 爲室屋, 具田器하고 乃募民하야 免罪, 拜爵하야 復其家【復은 除也니 謂有罪者免之하고 無罪者拜爵하야 以勸其徙하며 民之欲往者를 除其家征役이라 】하고 予冬夏衣廩【古者에 給人以食에 取諸倉廩이라 故稱廩給廩食이라 [頭註] 米藏曰廩이요 穀藏曰倉이라 】호되 胡人入驅어든 而能止所驅者는 以其半予之니 如是면 則邑里相救助하야 赴胡不避死하리니 非以德上也요 欲全親戚而利其財也라 此는 與東方之戍卒의 不習地勢而心畏胡者로 功相萬也니이다 上이 從其言하야 募民徙塞下하다 〈出錯本傳〉

鼂錯가 또 上言하였다.

“胡‧貉의 북쪽 사람들은 그 성질이 추위를 잘 견디고, 揚‧粤의 남쪽 사람들은 더위를 잘 견디는데, 秦나라의 수자리 사는 병사들은 水土(물과 風土)를 견디지【耐는 ≪漢書≫에 모두 能字로 되어 있는데, 注에 “能는 耐로 읽는다.” 하였다.】 못해서 수자리 살던 자가 변경에서 죽고 물자를 수송하던 자가 도로에서 쓰러지니, 秦나라 백성들이 부역 가는 것 보기를 사형장에 가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陳勝이 先唱을 하자, 천하가 이를 따른 것은 秦나라가 위엄으로 협박하여 억지로 가게 한 폐단이었습니다. 항상 거주할 자를 선발하여 집을 마련해 주고 농기구를 갖춰 주고, 이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죄를 면해 주고 관작을 제수해서 그 집에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고【復은 면제함이니, 죄가 있는 자는 죄를 면제해 주고 죄가 없는 자는 관작을 제수해서 옮겨 가도록 권장하며, 백성들 중에 가고자 하는 자는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겨울과 여름철에 옷과 곡식을【[釋義] 廩은 옛날에 사람에게 양식을 지급할 적에 倉廩에서 취하였으므로 廩給, 廩食이라 칭하였다. [頭註] 쌀을 보관하는 것을 廩이라 하고, 곡식을 보관하는 것을 倉이라 한다.】 주되 오랑캐가 쳐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몰고 가면 그 몰고 가는 것을 저지시킨 자에게 그 반을 주는 것만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邑과 里가 서로 구원하고 도와서 오랑캐에게 달려들고 죽음을 피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君上에게 은덕을 입어서가 아니라 친척을 온전히 하고 그 재물을 이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東方의 수자리 사는 병졸들이 地勢에 익숙하지 못해서 마음에 오랑캐를 두려워하는 것과는 功效가 만 배나 차이가 납니다.”

上이 그 말을 따라서 백성들을 모집하여 변방(만리장성) 아래로 옮겼다. - 《漢書 鼂錯傳》에 나옴 -

[癸酉]十二年

[癸酉]十二年이라

復言於上曰 有九年之水하고 有七年之旱호되 而國亡(無)捐瘠者는 以蓄積多而備先具也라 今海內爲一하야 土地人民之衆이 不減, 하고 加以無天災數年之水旱이로되 而蓄積未及者는 何也오 地有遺利하고 民有餘力하야 生穀之土를 未盡墾하고 山澤之利를 未盡出하고 游食之民을 未盡歸農也니이다 夫寒之於衣에 不待輕暖하고 飢之於食에 不待甘旨니 飢寒至身이면 不顧廉恥라 人情이 一日不再食則飢하고 終歲不製衣則寒하나니 夫腹飢不得食하고 膚寒不得衣면 雖慈父라도 不能保其子하나니 君安能以有其民哉리잇고 是故로 明君은 貴五穀而賤金玉하나니 方今之務 莫若使民務農而已라 欲民務農인대 在於貴粟이요 貴粟之道는 在於使民以粟爲賞罰이니 今募天下하야 入粟縣官하야 得以拜爵하고 得以除罪하소서 如此면 富人有爵하고 農民有錢하고 粟有所渫이리이다 爵者는 上之所擅이라 出於口而无窮하고 粟者는 民之所種이라 生於地而不乏하나니 夫得高爵與免罪는 人之所甚欲也라 使天下人으로 入粟於邊하야 以受爵免罪하시면 不過三歲에 塞下之粟이 必多矣리이다 帝從之하야 令民入粟邊拜爵호되 各以多少級數爲差하다

12년(계유 B.C.168))

鼂錯가 다시 上에게 말하였다.

임금은 9년의 홍수가 있었고 湯王은 7년의 가뭄이 있었으나 나라에 굶어 죽은 자가 없었던 것은 저축이 많아서 대비가 미리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海內가 통일되어 토지와 인민의 많음이 湯王禹王보다 적지 않고, 겸하여 天災와 여러 해의 홍수나 가뭄이 없었으나 저축이 미치지 못함은 어째서입니까? 땅은 버려진 이익이 있고 백성들은 남은 힘이 있어서 곡식을 생산하는 땅을 다 개간하지 않고 山澤의 이익을 다 생산해 내지 않으며, 놀고 먹는 백성들을 다 농사에 돌아가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운 자는 옷에 있어 가볍고 따뜻한 것을 기다리지 않고, 굶주린 자는 음식에 있어 달고 맛있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니,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지극하면 염치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人情은 하루에 두 끼니를 먹지 않으면 굶주리고 1년을 마치도록 옷을 만들어 입지 않으면 추우니, 배가 고픈데도 밥을 먹지 못하고 피부가 추운데도 옷을 입지 못하면 비록 자애로운 부모라도 그 자식을 보전할 수가 없는데, 군주가 어떻게 그 백성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五穀을 귀하게 여기고 金玉을 천하게 여기니, 현재의 급선무는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힘쓰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농사를 힘쓰게 하고자 한다면 곡식을 귀하게 함에 있고, 곡식을 귀하게 하는 방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을 가지고 상과 벌을 삼게 하는 데에 있으니, 이제 천하 백성들에게 모집하되 곡식을 縣官(守令)에 納入하여 관작을 제수받고 죄를 면제받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부자들은 관작을 소유하게 되고 농민들은 돈이 있으며, 곡식이 유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관작이라는 것은 위에서 마음대로 주는 것이어서 입에서 나와 무궁무진하고, 곡식이라는 것은 백성들이 심는 것이어서 땅에서 나와 다함이 없으니, 높은 관작을 얻고 죄를 면제받는 것은 사람들이 매우 바라는 것입니다.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변방에 곡식을 바쳐서 관작을 받고 죄를 면제받게 하시면 3년이 지나지 않아서 변방의 곡식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황제가 그 말을 따라 백성들로 하여금 변방에 곡식을 바쳐 관작을 제수받게 하되, 각각 바친 곡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 級數에 차등을 두었다.

復奏호되 陛下幸使天下로 入粟以拜爵하시니 甚大惠也라 邊食이 足以支五歲어든 可令入粟郡縣하고 郡縣이 足支一歲以上이어든 可時赦하야 勿收農民租하소서 如此면 德澤이 加於萬民하고 民愈勤農하야 大富樂矣리이다 上이 復從其言하야 詔賜農民今年租稅之半하다 〈出食貨志〉 ○ 爲人이 峭直【峭는 本作陗하니 謂陗直峻陿也라 】刻深하야 以其辯得幸하니 太子號曰智囊【王氏曰 智囊은 言一身所有 皆是智算이라 若囊槖之盛物然이라 】이라하다 〈出錯本傳〉

鼂錯가 다시 아뢰기를 “폐하께서 다행히 천하로 하여금 곡식을 바쳐 관작을 제수받게 하시니, 매우 큰 은혜입니다. 변방의 곡식이 충분히 5년을 지탱할 수 있으면 郡縣에 곡식을 바치게 하고, 郡縣의 곡식이 1년 이상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으면 때로 사면하여 농민들에게 조세를 거두지 마소서. 이와 같이 하면 덕택이 만민에게 가해지고 백성들이 더욱 농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크게 부유해지고 즐거울 것입니다.” 하니, 上이 다시 그의 말을 따라 조칙을 내려서 농민들에게 금년 조세의 절반을 감면해 주게 하였다.- 《漢書 食貨志》에 나옴 -

鼂錯는 사람됨이 엄격하고 강직하며【峭는 본래 陗로 되어 있으니, 陗直하고 험하고 좁음을 이른다.】 각박하였는데, 말을 잘함으로 총애를 얻으니, 태자가 이름하기를 ‘智囊’이라【王氏가 말하였다. “智囊은 한 몸에 소유한 것이 모두 지혜로운 계책이어서, 주머니에 물건을 담은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漢書 鼂錯傳》에 나옴 -

○ 齊太倉令淳于意 有罪當刑이어늘 詔獄逮繫長安【詔獄은 有詔繫獄也라 逮는 及也니 辭之所及者則追捕之라 故曰逮라 】이러니 其少女緹縈이 上書曰 妾父爲吏에 齊中이 皆稱其廉平이러니 今坐法當刑하니 妾이 傷夫死者는 不可復生이요 刑者는 不可復屬이라 雖後欲改過自新이나 其道無繇(由)也니 妾이 願沒入爲官婢하야 以贖父刑罪하야 使得自新하노이다 天子憐悲其意하야 詔除肉刑【王氏曰 肉刑者는 墨, 劓, 臏, 宮, 大辟也라 除者는 有以易之也라 鄭氏云 皐陶改臏爲剕하야 呂刑에 有剕이러니 周改爲刖이라 本紀에 詔曰 今法有肉刑三이라한대 注에 高帝約法三章에 无肉刑이러니 文帝則有肉刑이라 孟曰 黥劓二요 左右趾合一이니 凡三也라 索隱曰 斷趾黥劓之屬이라 漢律序云 文帝除肉刑而宮不易이라한대 張斐曰 以淫亂人族類라 故不易之也라 】하다

陳季雅曰 古人肉刑之法은 所以使民易避而難犯也라 故로 人人自愛而重犯法이라 夫以古人用法之意若此어늘 而文帝乃以爲可畏라하야 易之以笞法하니 殊不知此法一立이면 上之人輕用之하고 下之人輕犯之라 按刑法志에 文帝肉刑之除가 乃在於刑錯(措)之後러니 自是而下로 以致人輕冒法而文書盈於几閣하야 不足以勝姦矣니라

[史略 史評] 陳氏曰 以一女子言而改古法은 非有不忍人之心者면 不能也니 可謂仁矣로다

齊나라 太倉令淳于意가 죄가 있어 형벌을 받게 되었으므로 獄吏에게 명하여 체포해서 長安의 獄에 가두게 하였는데,【詔獄은 天子의 詔命이 있어 옥에 가두는 것이다. 逮는 미침이니, 獄辭가 미치는 곳에는 〈獄吏가〉 뒤쫓아 가서 체포하기 때문에 逮라 한 것이다.】 그의 어린 딸인 緹縈이 상소하기를 “첩의 아비가 관리가 되었을 적에 齊나라 지방이 모두 청렴하고 공평함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법에 걸려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첩은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고 형벌을 받은 자는 다시 이어 붙일 수가 없음을 슬퍼합니다. 비록 뒤에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고자 하나 그 길이 방도가 없으니, 첩이 籍沒되어 들어가 官婢가 되어서 아버지의 형벌 받을 죄를 속죄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니, 天子가 그 뜻을 가엾고 애처롭게 여겨서 조서를 내려 肉刑을 면제해 주었다.【王氏가 말하였다. “肉刑이라는 것은 墨(자자)‧劓(코를 벰)‧臏(종지뼈를 뺌)‧宮(거세함)‧大辟(사형)이다. 除한다는 것은 딴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鄭氏가 말하기를 ‘皐陶가 臏을 고쳐 剕라 하여 ≪書經≫ 〈呂刑〉에 剕가 있었는데, 周나라에서 刖이라고 바꾸었다.’ 하였다. ≪漢書≫ 〈文帝紀〉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 법에 세 가지 肉刑이 있다.’ 하였는데, 注에 ‘高帝가 법 3章을 약속할 적에 肉刑이 없었는데, 文帝 때에는 肉刑이 있다.’ 하였다. 孟康이 말하기를 ‘黥과 劓가 둘이요, 좌우의 발을 합하여 하나이니, 모두 셋이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발을 자르고 刺字하고 코를 베는 등속이다. 〈崔浩의〉 ≪漢律≫ 序에 이르기를 「文帝가 肉刑을 제거하였으나 宮刑은 바꾸지 않았다.」 하였는데, 張斐가 말하기를 「음란하여 사람의 族類를 바꾸기 때문에 바꾸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

陳季雅가 말하였다.

“옛사람의 肉刑의 제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피하기 쉽고 범하기 어렵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제 몸을 스스로 아껴서 法을 범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었다. 옛사람의 법을 사용한 뜻이 이와 같았는데, 文帝는 도리어 두려워할 만하다 하여 笞刑으로 바꾸었으니, 이 법이 한번 세워지면 윗사람은 형벌을 가볍게 쓰고 아랫사람은 죄를 가볍게 범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漢書》〈刑法志〉를 살펴보면 文帝가 肉刑을 없앤 것이 바로 죄인이 적어서 형벌을 폐지한 뒤에 있었는데, 이로부터 이후로는 사람들이 가볍게 법을 범하여 죄인을 다루는 문서가 궤짝에 가득 차서 간사함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

陳氏가 말하였다.

“한 여자의 말 때문에 옛 법을 고치는 것은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하니, 仁하다고 이를 만하다.”

○ 上이 旣躬修玄黙【玄은 深也니 微妙之極致也라 道德經曰 玄之又玄이 衆妙之門이라한대 註云 微妙之極致也라하니라 】하고 而將相이 皆舊功臣이라 少文多質하야 懲惡亡秦之政하야 論議務在寬厚하고 恥言人之過失하니 化行天下하야 告訐【訐은 面相斥罪也라 】之俗이 易하야 吏安其官하고 民樂其業하야 畜積歲增하고 戶口寖息하며 風流篤厚하고 禁罔(網)疏闊【罔은 與網通하고 疏는 與疎通하니 言禁防이 如網之疎闊也라 】하야 罪疑者를 予民【予는 猶與也니 從輕斷也라 】이라 是以로 刑罰이 大省하야 至於斷獄四百【謂天下之死罪人이 不過四百也라 】하야 有刑錯(措)之風【錯는 置也라 古者에 民不犯法하야 錯而不用하니 今雖未及於古나 亦庶幾有古人之遺風이라】焉이러라 〈出刑法志〉

上이 이미 조용히 침묵함을【玄은 깊음이니, 미묘함의 극치이다. ≪道德經≫에 “현묘하고 또 현묘함이 여러 묘함의 門이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玄은 미묘함의 극치이다.” 하였다.】 몸소 닦고, 장수와 정승이 모두 옛날의 功臣이었으므로 文飾이 적고 질박함이 많았다. 그리하여 망한 秦나라의 정사를 징계하고 싫어하여 의논함이 되도록 너그럽고 후함에 있었고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교화가 천하에 행해져서 고자질하는【訐은 대면하여 서로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풍속이 바뀌어 관리들은 관직을 편안히 여기고 백성들은 생업을 즐거워하여 저축이 해마다 증가하고 戶口가 점점 불어나며, 풍속이 후해지고 법망이 성글어져서【罔은 網과 통하고 疏는 疎와 통하니, 禁罔疏闊은 禁防이 그물의 엉성함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백성들에게 형벌을 맡겨 가벼운 죄를 적용하였다.【予는 與와 같으니, 가벼운 쪽을 따라 결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형벌이 크게 줄어들어서 1년에 옥사를 처결하는 것이 4백 건에【천하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4백 명에 지나지 않음을 이른다.】 이르러 형벌을 버려 두고 쓰지 않는 遺風이【錯는 버려 둠이다. 옛날에 백성들이 법을 범하지 아니하여 형벌을 버려 두고 쓰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거의 古人의 遺風이 있는 것이다.】 있었다.- 《漢書 刑法志》에 나옴 -

○ 六月에 詔曰 農은 天下之本이라 務莫大焉이어늘 今勤身從事호되 而有租稅之賦하니 是爲本末者 無以異【本은 農也요 末은 賈也니 言農與賈 俱出租無異也라 故除田租라 】也라 其於勸農之道에 未備하니 其除田之租稅하라 〈出本紀〉

6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농사는 天下의 근본이다.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지금 몸을 부지런히 놀려 농업에 종사하여도 조세를 거두는 賦稅가 있으니, 이는 本業과 末業을 하는 자가 차이가 없는 것이다.【本은 농업이고 末은 장사이니, 농부와 장사꾼이 모두 조세를 내어 차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부에게 田地의 조세를 면제해 준 것이다.】 농업을 권장하는 방도에 미비하니, 田地의 조세를 면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漢書 文帝紀》에 나옴 -

[乙亥]十四年

[乙亥]十四年이라

冬에 匈奴老上單于十四萬騎로 入朝那, 蕭關【朝那는 縣名이니 屬河西安定郡하니 括地志에 故城이 在原州百泉縣西七十里라 蕭關은 秦北關也니 在上郡北이라 括地志에 今靈武 卽古蕭關也라 】하야 殺北地都尉【北地는 本春秋義渠戎國이니 秦置北地郡하고 屬雍州하니 今寧, 涇, 慶三州 皆北地也라 都尉는 佐郡守하야 典武職甲卒이라 按史에 都尉는 姓孫, 名卬이라 】하고 遂至彭陽이어늘 上이 親勞軍하고 自欲征匈奴러니 皇太后固要【要는 劫也라 如淳曰 固要必不得自征也라 】한대 乃止하다 於是에 以張相如로 爲大將軍하야 擊之하니 逐出塞하고 卽還하다

14년(을해 B.C.166))

겨울에 匈奴의 老上單于가 14만 기병으로 朝那와 蕭關에【朝那는 縣名이니, 河西 安定郡에 속하는 바, ≪括地志≫에 “옛 城이 原州 百泉縣 서쪽 70리에 있다.” 하였다. 蕭關은 秦나라 北關이니, 上郡의 북쪽에 있었다. ≪括地志≫에 “지금의 靈武가 바로 옛날 蕭關이다.” 하였다.】 침입하여 北地都尉를【北地는 본래 春秋時代 오랑캐 나라인 義渠이니, 秦나라가 北地郡을 설치하고 雍州에 소속시켰는 바, 지금의 寧州, 涇州, 慶州가 모두 北地이다. 都尉는 군수를 보좌하여 武官職과 甲卒을 주관하였다. 역사책을 살펴보면 이때의 北地都尉는 성이 孫이고 이름이 卬이다.】 살해하고 마침내 彭陽에 이르렀다. 上이 친히 군대를 위로하고 직접 匈奴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皇太后가 굳이 만류하자【要는 강요함이다. 如淳이 말하였다. “굳이 스스로 정벌하지 말기를 강요한 것이다.”】 비로소 중지하였다. 이에 張相如를 大將軍으로 삼아 匈奴를 공격하게 하니, 匈奴를 축출하여 변경으로 내보내고 즉시 돌아왔다.

朱黼文帝於備邊一事에 未嘗少忽이라 雖恬靜玄黙이나 而躬騎射之習하고 雖慈祥淡泊이나 而甘遊畋之娛하며 雖尊禮大臣이나 而方正常侍之士와 日與馳逐하고 雖勤恤民隱이나 而六郡【隴西, 天水, 安定, 北地, 上郡, 西河라 】良家之子를 悉皆調集하며 雖愛惜財用이나 而繕修城堡하야 未嘗靳費하고 衛軍罷矣나 而廣武之兵猶聚也요 苑囿弛矣나 而上林之射不息也하며 高祛一言之賢에 每飯不忘하고 一論之善에 拊髀【髀는 音卑요 又音陛니 股之外也라 拊之者는 有所激然耳라 】稱嘆하며 晁(鼂)錯一奏邊事에 璽書褒美하고 請徙民守塞면 則募徙民하고 請入粟實邊이면 則詔入粟하야 凡二十三年之間에 其商略區畫이 舍(捨)農桑外에 所深注意者는 獨邊事而已라 然이나 其卑辭屈己하야 歲致金繒하야 與犬羊結好者를 豈得已哉아 帝亦度匈奴桀驁之勢를 未可以遽服이요 而瘡痍甫定之民을 未可以遽用이라 故로 雖外爲和親之禮나 而實在內에 未嘗輕棄自治之策이라 帝于是에 憤怒激烈하고 銳志雪恥하야 屯兵三郡하고 親御六飛【天子駕六馬하니 六馬之疾若飛라 故曰六飛라 】하야 勞軍勒兵【勒은 猶戒嚴也니 凡治行李曰戒嚴이라 】하야 申敎令하고 賜士卒하야 必欲躬自北伐하야 雖群臣之諫이나 不聽하니 豈非仁者之勇哉아

朱黼가 말하였다.

文帝는 변방을 대비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성품이 편안하고 고요하고 조용히 침묵하였으나 말 타고 활쏘는 익힘을 몸소 행하였고, 비록 자상하고 담박하였으나 유람하고 사냥하는 즐김을 좋아하였으며, 大臣들을 높이고 예우하였으나 方正하여 항상 모시는 선비들과 날로 말을 달려 사냥을 하였고, 비록 백성들의 고통을 지극히 걱정하였으나 六郡의【六郡은 隴西‧天水‧安定‧北地‧上郡‧西河이다.】良家 자제들을 모두 징발하여 집합시켰으며, 비록 재물을 아꼈으나 城과 堡壘를 수리하여 일찍이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호위병을 파하였으나 廣武에 군대를 오히려 모았으며, 苑囿를 풀어주었으나 上林苑의 활쏘기를 그치지 않았다. 高祛李齊의 어짊을 한번 말하자 밥을 먹을 때마다 이것을 잊지 못하였고, 馮唐廉頗李牧의 훌륭함을 한번 논하자 무릎을 치며【髀는 음이 비이고 또 음이 폐이니, 다리의 바깥쪽이다. 다리를 치는 것은 격한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이다.】 칭찬하였고, 晁錯가 변방의 일을 한번 아뢰자 親書로 칭찬하였으며, 백성들을 옮겨 변방을 지킬 것을 청하자 즉시 백성들을 모집하여 옮겼고 곡식을 바쳐 변경을 충실히 할 것을 청하자 곡식을 바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재위한 23년 동안에 계획하고 조처한 것이 農桑(농업과 양잠)을 제외하고는 깊이 유념한 것이 유독 변방의 일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공손히 하고 몸을 굽혀서 해마다 金과 비단을 바쳐 匈奴와 우호를 맺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文帝 또한 匈奴의 거만한 형세를 대번에 굴복시킬 수 없고, 전쟁의 상처에서 겨우 진정된 백성들을 대번에 동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비록 밖으로 和親하는 禮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안에서 自治하는 계책을 한번도 가볍게 버리지 않은 것이다. 文帝가 이에 憤怒가 격렬하고 雪辱하려는 마음이 가득하여 三郡에 군대를 주둔시키고는 친히 六馬를【天子의 수레는 여섯 필의 말을 멍에 하니, 말 여섯 마리의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으므로 六飛라 한 것이다.】 몰고 가서 군대를 위로하고 군사들을 무장시켜서【勒은 戒嚴과 같으니, 무릇 행장을 챙기는 것을 戒嚴이라 한다.】敎令을 밝히고 士卒들에게 상을 주어 반드시 직접 北伐을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여러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니, 이 어찌 仁者의 용맹이 아니겠는가.”

○ 上이 輦過郞署【輦은 輓車也니 駕人以行曰輦이라 郞官은 有議郞, 中郞, 侍郞郞(官)[中]이라 署는 府署也라 文帝乘輦하고 經過郞署하니 時에 馮唐이 爲郞中署長이라 】할새 問馮唐曰 父家安在오 對曰 臣大父는 趙人이니이다 上曰 昔에 有爲我言【上居代時에 尙食高祛之言也라 每食時에 未嘗不在鉅鹿은 念高祛之言이라 】趙將李齊之賢호되 戰於鉅鹿下라하니 今吾每飯【飯은 餐食也라 馮唐傳에 作每飮食이라 】에 意未嘗不在鉅鹿也로라 이 對曰 尙不如廉頗, 李牧之爲將也니이다 上이 拊髀曰 嗟乎라 吾獨不得廉頗, 李牧爲將이니 吾豈憂匈奴哉리오 曰 陛下雖得廉頗, 李牧이나 弗能用也시리이다 上이 怒하야 讓한대 曰 上古王者之遣將也에 跪而推轂【言擧薦人을 如推車轂之轉運也라 】曰 閫以內【閫은 義與闑同하니 馮唐傳에 作闑이라 韋昭曰 闑은 門中橛이니 俗言門限也라 以內는 謂郭門內也라 】는 寡人이 制之하고 閫以外는 將軍이 制之라하고 軍功爵賞을 皆決於外라 李牧이 是以로 北逐單于하고 破東胡하고 滅澹林하고 西抑强秦하고 南支韓, 魏니이다 今魏尙이 爲雲中守하야 其軍市租【案軍市는 謂軍人貨易之地也라 市有稅하니 稅卽租也라   】를 盡以饗士卒하니 匈奴遠避하야 不敢近塞라 虜曾一入에 이 率車騎擊之하야 所殺이 甚衆이어늘 上功幕府【師出無常處하야 所在에 張幕居之라 故曰幕府라 [釋義] 上功은 謂尺籍所上斬首捕虜之數也라 尺籍者는 謂書其斬捕之功於一尺之版이라 幕府者는 以軍幕爲義하니 古者出征에 以幕帳爲府署也라 】에 一言不相應【謂斬捕之數不同也라 】이라하야 文吏以法繩之【繩은 索也니 所以彈畫而取直者라 言文法之吏 正治其事를 亦猶繩也라 】하야 其賞이 不行하니 陛下賞太輕하고 罰太重이라 魏尙이 坐上功首虜差六級【秦法에 以斬敵一首하면 拜爵一級이라 故因謂一首爲一級이라 今魏尙이 差上首虜六級而坐以罪라 】이어늘 陛下下之吏하사 削其爵하고 罰及之하시니 由此言之컨대 陛下雖得廉頗, 李牧이나 弗能用也시리이다 上이 說하야 是日에 令持節赦魏尙하야 復以爲雲中守하고 而拜爲車騎都尉하다 〈出本傳〉

上이 輦을 타고 郎署를 지날 적에【輦은 끄는 수레이니, 사람을 멍에 하여 가는 것을 輦이라 한다. 郎官은 議郞, 中郞, 侍郞, 郎中이 있다. 署는 부서이다. 文帝가 輦을 타고 郎署를 지나갔는데, 이때 馮唐이 郎中으로 郞署의 長이 되었다.】馮唐에게 묻기를 “그대 아버지의 집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니, 馮唐이 대답하기를 “신의 大父(祖父)는 趙나라 사람입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옛날에 나에게 趙나라 장수 李齊의 훌륭함을 말하면서【上이 代나라에 있을 때에 尙食인 高祛가 한 말이다.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 일찍이 鉅鹿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高祛의 말을 생각한 것이다.】鉅鹿의 아래에서 싸우던 일을 이야기한 자가 있으니, 지금 나는 매번 밥을 먹을 때마다【每飯의 飯은 저녁밥을 먹는 것이다. ≪漢書≫ 〈馮唐傳〉에는 ‘每飮食’으로 되어 있다.】 뜻이 일찍이 鉅鹿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니, 馮唐이 대답하기를 “오히려 廉頗李牧이 장수가 되었던 것만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넓적다리를 치며 말하기를 “아, 내가 다만 廉頗李牧 같은 사람을 얻어서 장수를 삼지 못해서이니,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 어찌 匈奴를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馮唐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비록 廉頗李牧 같은 이를 얻더라도 등용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노하여 馮唐을 꾸짖으니, 馮唐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上古時代에 王者가 장수를 싸움터로 보낼 적에 무릎을 꿇고서 수레바퀴를 밀며【推轂은 사람을 천거하기를 수레바퀴를 밀어 굴러 가게 하는 것과 같이 함을 말한 것이다.】 말하기를 ‘도성 안은【閫은 뜻이 闑과 같으니, 〈馮唐傳〉에는 闑로 되어 있다. 韋昭가 말하였다. “闑은 문 가운데의 말뚝이니, 세속에서 門限이라고 말한다. 以內는 도성문 안을 이른다.”】과인이 통제하고, 도성 밖은 장군이 통제하라.’ 하고, 軍功으로 관작을 주고 상을 내리는 것을 모두 밖에서 〈장군이〉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李牧이 이 때문에 북쪽으로 單于를 축출하고東胡를 격파하고 澹林을 멸하고 서쪽으로 강한 秦나라를 억제하고 남쪽으로 韓나라와 魏나라를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魏尙이 雲中太守가 되어 군대가 있는 시장의 조세를 모두 거두어【軍市는 군인들이 貨物을 교역하는 곳을 이른다. 시장에는 세금이 있으니, 세금이 바로 租이다.】 士卒에게 먹이니, 匈奴가 멀리 피하여 감히 변경에 가까이 오지 못했습니다. 오랑캐가 일찍이 한 번 침입하자, 魏尙이 전차와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하여 죽인 자가 매우 많았는데, 幕府에 공을 보고할 적에【[原註] 군대가 출동하는 곳이 일정하지 않아서 있는 곳에 장막을 펴고 거처하므로 幕府라 한다. [釋義] 上功은 한 자 되는 문서[尺籍]에 적의 首級을 벤 것과 포로의 숫자를 적어 올림을 이른다. 尺籍은 적의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功을 한 자 되는 판자에 씀을 이른다. 幕府는 軍幕을 뜻으로 삼으니, 옛날 출정할 때에 帳幕으로 부서를 만들었다.】 한 마디 말이 서로 맞지 않는다 하여【一言不相應은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숫자가 똑같지 않음을 이른다.】 법을 맡은 관리가 법으로 다스려서【繩은 먹줄이니, 먹줄을 튕겨 획을 그어서 곧게 만드는 것이다. 文法을 맡은 관리가 그 일을 바르게 다스리기를 또한 먹줄과 같이 함을 말한다.】 그 賞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폐하께서는 賞은 너무 가볍고 罰은 너무 무겁습니다.

魏尙이 戰功을 보고할 때에 적의 首級과 포로가 6급이 차이가 났는데,【秦나라 법에 적 한 명의 목을 베면 관작 한 계급을 제수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여 한 사람의 머리를 한 級이라 한 것이다. 지금 魏尙이 적의 수급과 포로를 올려 보고할 적에 6級이 차이가 나서 죄를 받은 것이다.】 폐하께서 그를 獄吏에게 내리시어 그 관작을 삭탈하고 형벌이 미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폐하께서는 비록 廉頗李牧을 얻더라도 등용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上이 기뻐하여 이날 당장 馮唐으로 하여금 節을 가지고 가서 魏尙을 사면하여 다시 雲中太守로 삼게 하고 馮唐을 車騎都尉로 임명하였다. - 《漢書 馮唐傳》에 나옴 -

○ 春에 詔하야 廣增諸祀壇場珪幣【謂祭神之玉帛이라 】하고 且曰 吾聞祠官祝釐【祠官은 謂攝行祀事者라 釐는 音僖니 福也라 】에 皆歸福於朕躬하고 不爲百姓이라하니 朕甚愧之하노라 夫以朕之不德으로 而專饗獨美其福하고 百姓不與焉하니 是는 重吾不德也라 其令祠官致敬하고 無有所祈하라하다 〈出本紀〉

봄에 조서를 내려 여러 제사의 壇과 마당과 珪幣를【珪幣는 神에게 제사하는 옥과 폐백을 이른다.】 더 늘리게 하고, 또 말하기를 “내 들으니, 祠官이 복을 빌 적에【祠官은 제사의 일을 대행하는 자를 이른다. 釐는 음이 희이니, 福이다.】 모두 짐의 몸에 福을 돌리고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 하니, 짐이 매우 부끄러워하노라. 부덕한 짐이 그 복을 오로지 누리고 홀로 차지하고 백성들은 참여되지 못하니, 이는 나의 부덕함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祠官으로 하여금 공경만 지극히 하고 福을 기원하는 바가 없게 하라.” 하였다.- 《漢書 文帝紀》에 나옴 -

[丁丑]十六年

[丁丑]十六年이라

得玉杯【新垣平이 使人持玉杯하고 上書闕下獻之하다 平이 言上曰 闕下에 有寶玉氣來者라하야늘 已視之하니 果有獻玉杯者라 刻曰 人主延壽라 明年에 人有告平所言이 皆詐也라한대 下吏治하야 誅平하다 】하고 於是에 始更以十七年爲元年하다 〈出本紀及郊祀志〉

16년(정축 B.C.164))

옥잔을 얻고,【新垣平이 사람을 시켜 옥잔을 가지고 대궐 아래로 가서 글을 올려 바치게 하였다. 新垣平이 上에게 아뢰기를 “대궐 아래에 寶玉의 기운을 가지고 오는 자가 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윽고 살펴보니 과연 옥잔을 올리는 자가 있었는 바, 여기에 “人主가 수명을 연장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듬해에 어떤 사람이 新垣平이 말한 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고발하자, 獄吏에게 내려 치죄해서 新垣平을 죽였다.】 이에 처음으로 17년을 고쳐서 元年이라 하였다. - 《史記 孝文本紀》와 《漢書 郊祀志》에 나옴 -

[戊寅]後元年

[戊寅]後元年이라

詔曰 間者에 數年不登하고 又有水旱疾疫之災하니 朕甚憂之호되 愚而不明하야 未達其咎하노니 意者컨대 朕之政이 有所失而行有過與(歟)아 乃天道有不順하고 地利或不得하며 人事多失和하고 鬼神廢不享與아 何以致此오 將百官之奉養或廢하고 無用之事或多與아 何其民食之寡乏也오 夫度田에 非益寡【度은 計料也니 言頃畝之數如故하야 未嘗加少라 】요 而計民에 未加益하니 以口量地하면 其於古에 猶有餘로되 而食之甚不足者는 其咎安在오 無乃百姓之從事於末以害農者蕃하고 爲酒醪以靡穀者【陸氏曰 醪는 汁滓酒也요 靡는 音縻니 散也라 】多하며 六畜之食焉者衆與아 細大之義를 吾未得其中이로니 其與丞相, 列侯, 吏二千石, 博士로 議之하야 有可以佐百姓者어든 率意遠思하야 無有所隱하라 〈出漢書及本紀〉

後元年(무인 B.C.163))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근간에 몇 년 동안 풍년이 들지 않고, 또 水災와 旱災, 염병의 재앙이 있으니, 짐이 매우 근심하나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그 허물을 알지 못하노니, 짐작컨대 짐의 정사가 잘못됨이 있고 행실에 과실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天道가 순하지 않음이 있고 地利가 혹 맞지 못하며, 人事가 不和함이 많고 귀신을 폐하고 祭享하지 않아서인가? 어찌하여 이러한 재앙을 초래하였는가? 아니면 百官의 봉양이 혹 폐해지고 쓸데없는 일이 혹 많아서인가? 어찌하여 백성들의 양식이 적고 부족한가? 田地를 헤아려 봄에 더 줄어든 것도 아니고,【度은 헤아림이니, 〈非益寡는〉 밭의 이랑수가 예전과 같아서 일찍이 더 적어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백성을 헤아려 봄에 더 늘어나지도 않았으니, 인구를 가지고 田地를 헤아려 보면 옛날에 비해 오히려 남아야 할 터인데 양식이 매우 부족한 것은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백성들이 末業에 종사하여 농사를 해치는 자가 많고 술을 만들어서 곡식을 허비하는 자가【陸氏가 말하였다. “醪는 찌꺼기를 거른 술이요, 靡는 음이 미이니, 흩음(소비함)이다.”】 많으며 六畜이 먹는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크고 작은 뜻을 내가 그 알맞은 이유를 알지 못하겠으니, 그 丞相과 列侯, 二千石의 관원과 博士들과 함께 이를 의논하여, 백성을 도울 만한 것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원대하게 생각해서 숨기는 바가 없게 하라.” - 《漢書 文帝紀》와 《史記 孝文本紀》에 나옴 -

本紀曰 二年에 匈奴和親이어늘 詔曰 朕旣不明하야 不能遠德하야 使方外之國으로 或不寧息하야 憂苦萬民하니 爲之惻怛不安이라 故로 遣使者하야 冠蓋相望하야 結轍於道하야 以諭朕志於單于러니 今單于新與朕俱棄細過하고 偕之大道하야 以全天下元元【元者는 善人也니 元元者는 非一人也라 古者에 謂人云善하고 因善爲元이라 故云黎元也라 】之民하니 和親已定을 始於今年하노라

《史記》〈孝文本紀〉에 말하였다.

“2년에 匈奴가 화친을 하자,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이미 밝지 못하여 멀리 덕을 베풀지 못해서 外方의 나라로 하여금 혹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여 만민을 근심하고 괴롭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마음이 서글프고 편치 않았다. 그러므로 使者를 보내어 관을 쓰고 일산을 잡은 사신의 행차가 서로 이어져서 수레바퀴 자국이 길에 패이도록 짐의 뜻을 單于에게 諭示하였다. 그런데 지금 單于가 새로 짐과 더불어 작은 과실을 모두 버리고 함께 大道로 가서 천하의 착한【元은 善人이니, 元元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옛날에 사람을 일러 善이라 하고, 인하여 善을 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黎元이라 한 것이다.】 백성을 온전히 하게 하였으니, 화친을 이미 정함을 금년부터 시작하노라.’ 하였다.”

[己卯]二年

[己卯]二年이라

帝以皇后弟竇廣國이 賢有行이라하야 欲相之러니 曰 恐天下以吾私廣國이라하고 久念不可라하야 乃以申屠嘉爲相하니 爲人이 廉直하야 門不受私謁이라 是時에 鄧通이 方愛幸하야 賞賜累鉅萬이요 寵幸無比라 嘗入朝에 而通居上旁(傍)하야 有怠慢之禮어늘 奏事畢에 因言曰 陛下愛幸群臣이시면 則富貴之어니와 至於朝廷之禮하야는 不可以不肅이니이다 罷朝에 坐府中하야 爲檄召通호되 詣丞相府하라 不來면 且斬하리라 이 恐하야 言上한대 上曰 汝第往하라 이 詣丞相府하야 免冠徒跣하고 頓首謝어늘 坐自如하야 弗爲禮하고 責曰 夫朝廷者는 高帝之朝廷也어늘 이 小臣으로 戲殿上하니 大不敬이라 當斬이니 吏今行斬之하라 이 頓首出血호되 不解라 上이 度丞相已困하고 使使持節하야 召而謝丞相曰 此는 吾弄臣【弄은 戲也니 謂狎褻하야 無關大體라 】이니 君은 釋之하라 鄧通이 旣至에 爲上泣曰 丞相이 幾殺臣이러이다 〈出嘉本傳〉

2년(기묘 B.C.162))

황제가 황후의 동생 竇廣國이 어질고 훌륭한 행실이 있다 하여 정승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이 나더러 竇廣國을 사사로이 한다(봐준다)고 할까 두렵다.” 하고는 오랫동안 생각하고는 불가하다 하여 마침내 申屠嘉를 정승으로 삼았다.

申屠嘉는 사람됨이 청렴하고 정직하여 집에서 사사로운 청탁을 받지 않았다. 이때 鄧通이 한창 군주의 총애를 받아서 상으로 하사받음이 여러 鉅萬(수백만 전)이었고, 총애가 견줄 자가 없었다. 申屠嘉가 일찍이 들어가 조회할 적에 鄧通이 上의 곁에 있으면서 태만한 禮가 있자, 申屠嘉가 일을 다 아뢰고 인하여 아뢰기를 “폐하께서 여러 신하를 총애하신다면 그를 부귀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조정의 禮에 있어서는 엄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회를 파하자, 申屠嘉가 丞相府에 앉아서 檄文을 만들어 鄧通을 부르기를 “승상부로 오라. 오지 않으면 장차 목을 베겠다.” 하였다. 鄧通이 두려워하여 上에게 말하자, 上이 말하기를 “너는 우선 가라.” 하였다. 鄧通이 승상부에 나아가서 冠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으나 申屠嘉는 그대로 앉아서 답례를 하지 않고 꾸짖기를 “조정이라는 것은 高帝의 조정인데, 鄧通이 낮은 신하로서 대궐 위에서 희롱하였으니, 크게 불경하다. 참형에 해당하니 관리는 지금 즉시 참형을 시행하라.” 하였다. 鄧通이 머리를 조아려 피가 났으나 풀어주지 않았다. 上은 丞相이 이미 鄧通에게 곤욕을 주었을 것이라고 헤아리고는 使者를 시켜 節을 가지고 가서 鄧通을 부르고, 승상에게 사례하기를 “이는 내가 희롱하는 신하이니,【弄은 희롱함이니, 친압하고 설만하여 大體에 관계됨이 없음을 이른다.】 그대는 풀어주라.” 하였다. 鄧通이 이미 이르자, 上에게 울면서 아뢰기를 “승상이 거의 신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漢書 申屠嘉傳》에 나옴 -

朱黼曰 人主不能行法於天下어든 能容臣下之守法이니 而後에 人主之勢尊하고 人臣奉法於天下인댄 能不容人主之撓法이니 而後에 人主之法信이라 文帝寬厚仁恕하여 非有震世之威하고 坦夷平易하여 非有絶物之勢하고 柔巽謙抑하여 非有獨運之權이라 然이나 權不求重而人莫之褻하고 威不求震而人莫之抗하고 勢不求尊而人莫之幷者는 何也오 以其能容臣下守法而不撓也라 夫太中大夫中二千石은 至貴也로되 一戲殿上이면 則丞相得以檄召而議斬하고 非至於困辱이면 則不之召而且遣使以謝丞相하며 太子는 君之貳요 藩王은 帝之愛子也로되 一不下司馬門【張釋之拜公車令이러니 太子與梁王으로 共車入朝할새 不下司馬門한대 釋之追止之하고 劾不敬이어늘 薄太后詔謝公車하니라 司馬令一人이 掌宮南闕門하니라 】이면 則六百石之公車令이 得以劾奏而遮留하고 非太后之詔면 則不得赦而且謝敎子之不謹하며 郎中令은 小臣也로되 得以妃妾之分而徹夫人之坐席하고 軍門都尉는 冗官也로되 得以將軍之令而遏天子之乘輿【天子至尊하야 不敢斥言之라 故托於乘輿라 天子以四海爲家故로 行曰乘輿요 止曰行在라 】5)라 人臣執法하여 不以天子之故而喪其所守하고 人主徇法하여 不以臣下之微而撓其所執하니 此漢室之所以興隆이요 而文帝之柔道 所以能致治安歟인저

朱黼가 말하였다.

“군주가 천하에 法令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으면 신하들이 법을 지키는 것을 용납해 준 뒤에야 군주의 권위가 높아지고, 신하가 천하에 법을 받들어 시행하려고 하면 군주가 법을 동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뒤에야 군주의 법이 신임을 받게 된다. 文帝는 寬厚하고 仁恕하여 세상을 진동하는 위엄이 있지 않았고, 평탄하고 평이하여 남보다 뛰어난 권세가 있지 않았고, 유순하고 겸손하여 홀로 운용하는 권력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이 무겁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고, 위엄이 진동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고, 권세가 높기를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견줄 수 없었던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들이 법을 지키는 것을 용납하여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太中大夫의 中二千石은 지극히 귀한 신분이었으나 대궐 위에서 한 번 희롱하면 丞相이 檄文으로 불러서 斬刑을 논하였고, 곤욕을 치름에 이르지 않으면 황제가 부르지 않고 또 使者를 보내어 丞相에게 사례하였으며, 太子는 임금의 儲貳이고 藩王은 황제의 총애하는 아들이었으나 司馬門에서 한 번 내리지 않으면【張釋之가 公車令에 제수되었는데, 太子가 梁王(劉揖)과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와 조회하면서 司馬門에서 내리지 않았다. 張釋之가 쫓아와 저지하고 不敬하다고 탄핵하자, 薄太后는 두 아들에게 명하여 公車令에게 사과하게 하였다. 司馬令 한 사람이 궁궐 남쪽 문을 관장하였다.】 六百石의 公車令이 탄핵하여 아뢰고 길을 막았으며, 太后의 명령이 아니면 사면하지 못하였고 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음을 사례하게 하였으며, 郎中令은 작은 신하였으나 妃와 妾의 신분에 따라 愼夫人의 앉는 자리를 뒤로 물렸으며, 軍門都尉는 하찮은 벼슬이었으나 將軍의 명령에 따라 天子의 수레를【天子가 지극히 높아 감히 指斥하여 말할 수가 없으므로 乘輿라고 칭탁한 것이다. 天子는 四海를 집안으로 삼기 때문에 출행하면 乘輿라 하고 멈추면 行在라 한다.】 막을 수 있었다. 신하가 법을 소신대로 집행하여 天子 때문에 지키는 바를 상실하지 않고, 군주가 법을 따라 신하가 미천하다 하여 지키는 바를 동요하지 않았으니, 이는 漢나라 皇室이 興隆하게 된 이유이고, 文帝의 유순한 道가 治安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癸未]六年

[癸未]六年이라

冬에 匈奴三萬騎入上郡하고 三萬騎入雲中하니 烽火通於甘泉【山名이니 在雲陽이라 甘泉宮은 因山名宮하니라】, 長安이라 以周亞夫爲將軍하야 次細柳【細柳在直城門外阿房宮西北維라 括地志에 細柳倉은 在雍州咸陽縣西南이라 [通鑑要解] 亞夫는 勃之子也라 一宿曰宿이요 再宿曰信이요 過信曰次라】하고 劉禮爲將軍하야 次霸上【霸水之上地名이니 在長安東三十里라 三秦記에 霸水는 古滋水也니 出雍州藍田谷하야 北入渭라 】하고 徐厲爲將軍하야 次棘門【在長安北하니 秦宮門也라 括地志에 棘門은 在(橫)[撗]門之外라 三輔黃圖에 長安城北出西頭에 第一門曰撗門이니 撗은 音光이라 】하야 以備胡하다 上이 自勞軍할새 至霸上及棘門軍하야는 直馳入하니 將以下騎送迎이러니 已而요 之細柳軍하니 軍士吏被甲銳兵刃하고 彀弩持滿【彀는 張也라 持滿者는 但引滿而不發이라 】하여 天子先驅【先驅는 卽前導也라 在前引導車駕者니 猶唐之武侯隊라 】至하야 不得入이라 先驅曰 天子且至라한대 軍門都尉曰 將軍令曰 軍中엔 聞將軍令이요 不聞天子詔【索隱曰 六韜云 軍中之事는 不聞君命이라하고 又管子, 司馬兵法曰 將在軍에는 君命을 有所不受라하니라 】라호이다 上이 至하야 又不得入이라 於是에 上이 使使持節하야 詔將軍호되 吾欲入營勞軍하노라 〈此用史記句〉 亞夫乃傳言開壁門하니 壁門士請車騎曰 〈此用漢書句〉 將軍이 約호되 軍中엔 不得馳驅라호이다 於是에 天子乃按轡徐行至營하니 將軍亞夫持兵揖 〈此用史記句〉 曰 介冑之士는 不拜【王氏曰 介는 甲也요 冑는 兜鍪也라 記曲禮에 介冑則有不可犯之色이라하고 又曰 介者不拜하니 爲其拜而蓌拜라한대 注에 蓌則失容節이라 蓌猶詐也니 音挫요 又音乍라 朱氏(朱子)曰 蓌는 猶言有所枝柱하야 不利屈伸也라 】하나니 請以軍禮見하노이다 天子改容式車【凡言式車者는 謂俛身撫式(軾)하야 以禮待人이라 】하고 使人稱謝호되 皇帝敬勞將軍이라하고 成禮而去하다 旣出軍門에 群臣이 皆驚이러니 上曰 嗟乎라 此眞將軍矣로다 曩者에 霸上, 棘門軍은 若兒戲爾라 其將은 固可襲而虜也어니와 至於亞夫하야는 可得而犯邪아하고 稱善者久之러라 月餘에 漢兵이 至邊하니 匈奴亦遠塞【王氏曰 遠塞句絶하니 言出塞遠去也라 】어늘 漢兵亦罷하고 〈此用匈奴傳文〉 乃拜周亞夫하야 爲中尉【掌徼循京師하니 武帝更名執金吾하니라 】하다 〈出史記本紀周勃世家及匈奴傳漢書同〉

6년(계미 B.C.158))

겨울에 匈奴가 침입하여 3만 명의 기병은 上郡에 침입하고, 3만 명의 기병은 雲中에 침입하니, 봉화가 甘泉과【甘泉은 산 이름이니, 雲陽에 있다. 甘泉宮은 이 산을 따라 궁궐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長安에 통하였다. 周亞夫를 장군으로 삼아 細柳에 주둔시키고,【[釋義] 細柳는 直城門 밖 阿房宮 서북쪽 모퉁이에 있었다. ≪括地志≫에 “細柳의 창고는 雍州 咸陽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通鑑要解] 周亞夫는 周勃의 아들이다. 하룻밤 자는 것을 宿이라 하고, 이틀 밤 자는 것을 信이라 하고, 信을 넘는 것을 次라 한다.】劉禮를 장군으로 삼아 霸上에【霸上은 霸水 가의 지명이니, 長安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三秦記≫에 “霸水는 옛날 滋水이니, 雍州 藍田 골짜기에서 나와 북쪽으로 渭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주둔시키고, 徐厲를 장군으로 삼아 棘門에【棘門은 長安의 북쪽에 있으니, 秦나라의 궁문이다. ≪括地志≫에 “棘門은 撗門 밖에 있다.” 하였다. ≪三輔黃圖≫에 “長安城 북쪽으로 서쪽 머리에 첫 번째 문을 撗門이라 한다.” 하였으니, 撗은 음이 광이다.】 주둔시켜서 오랑캐를 막게 하였다.

上이 직접 이들 군영을 위로할 적에 霸上과 棘門의 군영에 이르러서는 곧장 달려 들어가니, 장수 이하가 말을 타고서 전송하고 맞이하였는데, 이윽고 細柳의 군영에 가니, 군사와 관리들이 갑옷을 입고 칼날을 예리하게 하고 활시위를 가득히 당겨【彀는 활을 펼침이다. 持滿이라는 것은 다만 활을 가득히 당기기만 하고 발사하지 않는 것이다.】 天子의 先驅(前導)가【先驅는 바로 선두이다. 앞에 있으면서 車駕를 인도하는 자이니, 唐나라의 武侯隊와 같다.】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先驅가 말하기를 “天子가 장차 이르실 것이다.” 하였으나 軍門都尉가 말하기를 “장군이 명령하시기를 ‘군영 안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듣고 天子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하였습니다.”【≪史記索隱≫에 말하였다. “≪六韜≫에 ‘軍中의 일은 군주의 명을 듣지 않는다.’ 하였고, 또 ≪管子≫와 ≪司馬兵法≫에 ‘장군이 군대에 있을 때에는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였다.”】 하였다. 上이 이르렀으나 또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上이 使者를 시켜 節을 가지고 가서 장군에게 명하기를 “내 군영에 들어가 군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노라.” 하였다.- 이는 《史記》의 句를 쓴 것임 - 周亞夫가 이에 말을 전하여 성벽의 문을 열어주게 하니, 성벽의 문을 지키는 군사가 車騎에게 청하기를 - 이는 《漢書》의 句를 쓴 것임 - “장군이 약속하기를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려 수레를 몰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天子가 마침내 고삐를 잡고 徐行하여 군영에 이르니, 장군 周亞夫가 병기를 잡고 읍하며 아뢰기를 - 이는 《史記》의 句를 쓴 것임 -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사는 절하지 않는 법이니,【王氏가 말하였다. “介는 갑옷이고 冑는 투구이다. ≪禮記≫ 〈曲禮〉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면 범할 수 없는 엄숙한 기색이 있어야 한다.’ 하였고, 또 ‘갑옷을 입은 자는 절하지 않으니, 절할 적에 몸을 굽힘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注에 ‘버티면 容節을 잃는다. 蓌는 詐(거짓)와 같으니, 음이 좌요 또 다른 음은 사이다.’ 하였다.” 朱子가 말하였다. “蓌는 걸리는 바가 있어서 屈伸에 불리하다고 말함과 같다.”】 청컨대 軍禮로써 뵙겠습니다.” 하였다.

天子가 용모를 고쳐 수레에서 답례하고【무릇 式車라고 말하는 것은 〈수레에서〉 몸을 숙이고 軾을 어루만져서 禮로써 상대방을 대함을 이른다.】 사람을 시켜 致辭하기를 “황제가 공경히 장군을 위로한다.” 하고 禮를 마치고 떠나갔다. 이미 軍門을 나오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놀라니, 上이 말하기를 “아, 이 사람은 참으로 장군이다. 지난번 霸上과 棘門의 군영은 아이들 장난과 같을 뿐이다. 그 군영의 장수는 진실로 습격하여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周亞夫에 이르러서는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를 한동안 하였다.

한 달 남짓에 漢나라 군대가 변경에 이르자, 匈奴 또한 변방에서 멀리 떠나갔으므로【王氏가 말하였다. “遠塞에서 句를 떼니, 변방을 나가 멀리 감을 말한 것이다.”】漢나라 군대 또한 해산하고 - 이는 《漢書 匈奴傳》의 글임 - 마침내 周亞夫를 임명하여 中尉로【中尉는 京師를 순찰함을 관장하니, 武帝가 이름을 바꾸어 執金吾라 하였다.】 삼았다. - 《史記》〈孝文本紀〉, 〈周勃世家〉, 〈匈奴列傳〉에 나옴. 《漢書》도 같음 -

[甲申]七年

[甲申]七年이라

夏六月에 帝崩하다

班固贊曰 孝文皇帝卽位二十三年에 宮室苑囿와 車騎服御 無所增益하고 有不便이면 輒弛以利民이라 嘗欲作露臺【王氏曰 臺는 累土爲之니 將以承露라 索隱曰 案新豐南驪山之頂에 有露臺鄕하야 極爲高顯하니 文帝所欲作臺之舊址存焉이라 徐廣曰 露는 一作靈이라 】하야 召匠計之하니 直百金【王氏曰 直(値)는 價也라 公羊傳에 隱五年에 百金之(魚)[直]라한대 注에 百金은 猶百萬也라 古者에 以金重一斤은 若今萬錢矣라 食貨志에 亦云 黃金一斤이 直萬錢이라하니 則知文帝言百金中人十家之産은 卽爲金百斤이니 爲錢百萬也라】이어늘 上曰 百金은 中人【謂處富者貧者之中이라 】十家之産也라 吾奉先帝宮室에 常恐羞之어늘 何以臺爲리오하니라 身衣弋綈【索隱曰 弋은 黑色也요 綈는 厚繒也라하니 蓋今之絁也라 說文에 粗紬니 經緯不同者라하니 文帝以爲衣而身自衣之라 】하고 所幸愼夫人 衣不曵地【曳는 引也니 不曳地는 謂衣之長이 不被土也라 唐輿服志曰 婦人은 裙不過五幅이요 曳地不過三寸이라하니라 】하며 帷帳無文繡하야 以示敦朴하야 爲天下先하며 治霸陵할새 皆瓦器요 不得以金銀銅錫爲飾하고 因其山하야 不起墳하니라 南越尉佗【尉는 爵이요 佗는 名이니 姓趙라】 自立爲帝한대 召尉佗兄弟하야 以德懷之하니 遂稱臣이라 與匈奴結和親이러니 後而背約入盜한대 令邊備守하고 不發兵深入하니 恐煩百姓이라 吳王이 詐病不朝한대 賜以几杖【几는 老者所以凭而坐요 杖은 老者所以倚而行이라 記曲禮曰 大夫七十而致仕하나니 若不得謝면 則必賜之几杖이라한대 注에 所以養其身體라하니라 】하고 群臣袁盎等이 諫說雖切이나 常假借納用【師古曰 謂假借以辭色하야 納其言而用之라 】焉하며 張武等이 受賂金錢이라가 覺한대 更加賞賜하야 以媿其心하야 專務以德化民이라 是以로 海內殷富하고 興於禮義하야 斷獄數百하야 幾致刑措하니 嗚呼仁哉라

敍傳曰 太宗穆穆하야 允恭元(玄)黙【卽玄黙也라 】이라 化民以躬하고 率下以德이라 農不供貢【除民田租라 】하고 罪不收孥하며 宮不新館하고 陵不崇墓라 我德如風하니 民應如草라 國富刑淸하야 登我漢道라

7년(갑신 B.C.157))

여름 6월에 皇帝가 崩하였다.

班固의 《漢書》〈文帝紀〉 贊에 말하였다.

孝文皇帝는 즉위한 23년 동안 宮室과 동산과 수레와 말과 복식과 사용하는 물건을 더 보탠 것이 없으며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곧 풀어주어 이롭게 하였다. 일찍이 露臺를【王氏가 말하였다. “臺는 흙을 쌓아서 만드니 장차 이슬을 받으려고 해서이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新豐 남쪽 驪山의 꼭대기에 露臺鄕이 있어, 지극히 높고 드러나니, 文帝가 露臺를 지으려고 하던 옛 터가 남아 있다.’ 하였다. 徐廣이 말하기를 ‘露는 一本에는 靈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짓고자 하여 匠人을 불러 계산해 보니, 百金이 든다고 하자,【王氏가 말하였다. “直는 값이다. ≪春秋公羊傳≫ 隱公 5년에 ‘百金之直’라 하였는데, 그 注에 ‘百金은 百萬과 같다. 옛날에 金 1斤은 지금의 萬錢과 같다.’ 하였다. ≪漢書≫ 〈食貨志〉에 또한 이르기를 ‘黃金 1斤이 값어치가 萬錢이다.’ 하였으니, 文帝가 ‘百金은 중등 사람 열 가호의 재산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金 100斤이니, 百萬錢이다.”】上이 말하기를 ‘百金은 중등 사람【中人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중간에 처함을 이른다.】 열 가호의 재산이다. 내가 先帝의 宮室을 받들 적에 항상 욕을 끼칠까 걱정하였는데 어찌 臺를 짓겠는가.’ 하고 중지하였다. 몸소 검은 비단을【≪史記索隱≫에 이르기를 “弋은 黑色이고 綈는 두꺼운 비단이다.” 하였으니, 지금의 絁이다. ≪說文解字≫에 “거친 명주이니 씨실과 날실이 같지 않은 것이다.” 하였으니, 文帝가 이것으로 옷을 만들어 몸소 스스로 입은 것이다.】 입었고 총애하는 愼夫人은 옷이 땅에 끌리지 않았으며,【曳는 끄는 것이니, 땅에 끌리지 않았다는 것은 옷이 길어서 땅을 덮지 않음을 이른다. ≪唐書≫ 〈輿服志〉에 이르기를 “婦人은 치마가 5幅을 넘지 않았고 땅에 끌리는 것은 3寸을 넘지 않았다.” 하였다.】 휘장에 무늬를 놓거나 수를 놓지 아니하여 질박함을 보여서 天下의 솔선이 되었으며, 霸陵(文帝의 陵)을 만들 적에 모두 土器를 사용하였고 金銀과 구리와 주석으로 꾸미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山勢를 따라서 봉분을 크게 일으키지 않았다. 南越의 尉인 趙佗가【尉는 爵位이고 佗는 이름이니, 姓은 趙이다.】 스스로 서서 황제가 되자, 上이 趙佗의 형제들을 불러 귀하게 해서 德으로 회유하니, 趙佗가 마침내 臣을 칭하였다. 匈奴와 화친을 맺었는데 뒤에 약속을 저버리고 들어와 침략하자, 변경 고을로 하여금 방비하여 지키게 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들을 번거롭게 할까 두려워해서였다. 吳王가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않자 几杖을【几는 노인이 기대어 앉는 것이고 杖은 노인이 의지하여 짚고 다니는 것이다. ≪禮記≫ 〈曲禮〉에 이르기를 “大夫는 70세에 일을 내놓으니, 만약 물러감을 허락하지 않으면 반드시 几와 지팡이를 하사한다.” 하였는데, 注에 “身體를 봉양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하였고, 여러 신하와 袁盎 등이 비록 간절하게 간하였으나 〈물리치지 않고〉 항상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며,【顔師古가 이르기를 “말과 안색을 너그럽게 하여 그 말을 받아들여 쓰는 것을 이른다.” 하였다.】張武 등이 뇌물로 주는 돈을 받았다가 발각되자 다시 상을 하사하여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해서 오로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을 힘썼다. 이 때문에 海內가 부유하고 禮義를 일으켜서 1년 동안 옥사를 결단하는 것이 겨우 수백 건뿐이어서 거의 형벌을 버려 두고 쓰지 않음에 이르렀으니, 아 인자하다.”

《漢書》〈敍傳〉에 말하였다.

太宗이 공경하고 공경하여 진실로 공손하고 깊이 침묵하였다.【元黙은 바로 玄黙이다.】 몸소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고 아랫사람들을 德으로 통솔하였다. 농부들은 貢物을 바치지 않고【田地에 대한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한 것이다.】 죄는 처자식에게까지 미치지 않았으며, 궁궐을 새로 짓지 않고 陵墓를 높이 만들지 않았다. 나의 덕이 바람과 같으니 백성들의 응함이 풀과 같았다. 나라가 부유하고 형벌이 깨끗하여 우리 漢나라의 道를 이루었다.”

東萊呂氏曰 治天下者는 不盡人之財하고 不盡人之力하고 不盡人之情하나니 是三者는 可盡也而不可繼也라 古之人이 有行之者하니 漢文帝是也라 露臺惜百金之費하고 後宮衣不曳地하니 可謂不敢輕靡天下之財요 匈奴三入而三拒之하고 未嘗窮兵出塞하니 可謂不敢輕用天下之力이요 吳王不朝에 賜之几杖하고 張武受賂에 金錢愧心하니 可謂不敢輕索天下之情이라 當是時하야 文帝可爲而能不爲하야 以其所餘로 貽厥子孫하니 凡四百年之漢이 用之不窮者는 皆文帝之所留也니라

[史略 史評] 愚按 文帝以儉自奉故로 租稅雖免이나 而國用不乏하고 以德化民故로 肉刑雖除나 而獄訟不興하니 宜其海內富庶하야 幾致刑措也라 然이나 惑於妖言而祠五帝之廟하고 溺於小仁而短三年之喪하야 深爲盛德之累하니 惜哉인저

東萊呂氏가 말하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의 힘을 다하지 않고 남의 情을 다하지 않으니, 이 세 가지는 다할 수 있으나 계속할 수는 없다. 옛사람 중에 이것을 행한 자가 있으니, 漢나라 文帝가 이 경우이다. 露臺를 만들려다가 百金의 비용이 드는 것을 아까워하고 후궁들의 옷이 땅에 끌리지 않았으니 감히 천하의 재물을 함부로 허비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고, 匈奴가 세 번 쳐들어 와도 세 번 막기만 하고 전쟁을 극도로 하여(무력을 남용하여) 변방을 나간 적이 없으니 감히 천하의 힘을 가볍게 쓰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며, 吳王이 조회 오지 않자 그에게 几杖을 하사하고 張武가 뇌물을 받자 돈을 주어 마음을 부끄럽게 하였으니 감히 천하의 情을 가볍게 찾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당시에 文帝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서 남은 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었으니, 무릇 400년의 漢나라가 財用이 다하지 않은 것은 모두 文帝가 남겨준 것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文帝는 검소함으로 자기 몸을 받들었기 때문에 租稅를 비록 면제하였으나 국가의 재용이 부족하지 않았고, 德으로 백성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肉刑을 비록 제거하였으나 獄事과 訟事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온 천하가 부유하고 많아서 거의 형벌을 폐지하여 쓰지 않음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요망한 말에 혹하여 五帝의 사당에 제사하고, 하찮은 인정에 빠져서 3년의 부모상을 단축하여 깊이 성대한 德에 누가 되었으니, 애석하다.

孝景皇帝

名啓요 文帝之子니 在位十六年이요 壽四十八이라

孝景皇帝※ 名文帝之子니 在位十六年이요 壽四十八이라

孝景皇帝는 이름이 啓이고 文帝의 아들이니, 재위가 16년이고 壽가 48세이다.

※ 遵孝文之業하야 五六十載之間에 至於移風易俗하야 黎民醇厚하야 周云, 하고 漢言, 하니 美矣라 然稽古禮文之事는 猶多闕焉하니라

孝文帝의 遺業을 준수해서 5, 60년 사이에 풍속을 바꿈에 이르러서 백성들이 醇厚하여 周나라에서는 成王康王을 말하고, 漢나라에서는 文帝景帝를 말하니, 아름답다. 그러나 옛날 禮文을 상고하는 일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았다.

[乙酉]元年

[乙酉]元年이라

五月에 復收民田半租호되 三十而稅一하다 〈出食貨志〉

元年(을유 B.C.156))

5월에 다시 백성들의 田地의 조세를 절반만 거두되 3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하였다. - 《漢書 食貨志》에 나옴 -

○ 初에 文帝除肉刑하니 外有輕刑之名이나 內實殺人이라 斬右趾者는 又當死하고 斬左趾者는 笞五百하고 當劓者는 笞三百하니 率多死【斬右趾者는 棄市故로 人多死라 以笞五百으로 代斬左趾하고 笞三百으로 代劓하니 笞數旣多하야 亦不活也라 】라 是歲에 下詔曰 加笞는 重罪無異라 幸而不死라도 不可爲人이니 其定律하야 笞五百曰三百이라하고 笞三百曰二百이라하다 〈出刑法志〉

처음에 文帝가 肉刑을 없애니, 밖으로는 형벌을 경감했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실로 사람을 죽게 하였다. 오른쪽 발을 벨 자는 또 사형에 해당시키고, 왼쪽 발을 벨 자는 笞刑 500대를 치고, 코를 베는 데 해당하는 자는 태형 300대를 치니, 대부분 죽는 자가 많았다.【오른발을 벨 자는 棄市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은 것이다. 笞刑 500대로 왼발을 베는 형벌을 대신하고 笞刑 300대로 코 베는 형벌을 대신하니, 笞刑의 수가 이미 많아서 또한 살지 못하였다.】 이 해에 조서를 내리기를 “태형을 가함은 중한 죄(사형)와 다름이 없다. 요행히 죽지 않더라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법률을 정하여 태형 500대는 300대로 하고, 태형 300대는 200대로 하라.” 하였다.- 《漢書 刑法志》에 나옴 -

○ 秋에 與匈奴和親하다 〈出本紀〉 ○ 梁孝王이 以竇太后幼子故로 有寵하야 王四十餘城하야 居天下膏腴地【腹之下肥曰腴라 故取以喩肥饒之地라】하고 賞賜를 不可勝紀러라

가을에 匈奴와 화친하였다. - 《漢書 文帝紀》에 나옴 -

○ 梁나라 孝王(劉武)竇太后의 어린 아들이라는 이유로 총애가 있어서 40여 성에 왕 노릇 하여 천하의 비옥한 땅을【배의 아래쪽 살찐 부분을 腴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취하여 비옥하고 풍요한 땅을 비유한다.】 차지하고, 상으로 하사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丁亥]三年

[丁亥]三年이라

梁孝王이 來朝하다 時에 上이 未置太子러니 與王宴飮이라가 從容言曰 千秋萬歲後에 傳於王호리라 王이 辭謝하니 雖知非至言이나 然이나 心內喜하고 太后亦然之러니 詹事【詹은 省也, 供也라 皇后太子 各置詹事하니 隨其所在하야 以名官이라 秩二千石이라】竇嬰이 引巵酒進曰 天下者는 高祖之天下요 父子相傳은 漢之約也어늘 上이 何以得傳梁王이시닛고 太后는 由此憎하니 王은 以此益驕러라

3년(정해 B.C.154))

梁나라 孝王이 조회를 왔다. 이때 上이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왕(梁王)과 더불어 잔치하며 술을 마시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千秋萬歲 후에 왕에게 傳位하리라.” 하니, 왕이 사양하였다. 왕은 비록 진담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 기뻐하였고 太后 또한 그러하였는데, 詹事【詹은 살핌이고 바침이다. 皇后와 太子가 각기 詹事를 두었으니, 있는 곳에 따라 관명을 삼았다. 품계가 2천 석이다.】竇嬰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아뢰기를 “천하라는 것은 高祖의 천하이고 父子가 서로 傳位함은 漢나라의 약속인데, 上께서 어떻게 梁王에게 전위한단 말입니까?” 하니, 太后가 이로 말미암아 竇嬰을 미워하니, 梁王이 이 때문에 더욱 교만하였다.

○ 初에 孝文時에 吳太子入見에 得侍皇太子하고 飮博할새 吳太子博이라가 爭道【謂爭行棊之路라】不恭이어늘 皇太子引博局【猶今言棊盤(槃)이라 】하야 提殺之【徐廣曰 〈提音弟라〉 史記周勃世家에 太后以冒絮提文帝라한대 索隱曰 〈服虔云〉 提는 音弟니 或(音)[作]啼라하니 非也라 蕭該는 音底요 提는 擲也라하니 按蕭音爲是라 】하니 吳王이 由此로 稍失藩臣之禮하야 稱疾不朝京師하고 始有反謀라 〈本傳無此句〉 文帝吳王几杖하고 老不朝라하니 得釋其罪하고 謀亦益解라 然이나 其居國이 以銅鹽爲資【吳有銅山하니 招致天下亡命하야 以爲鑄錢하고 煮海水爲鹽이라 故無賦而國用足이라 】라 故로 百姓이 無佗(他)賦하고 郡國吏欲來捕亡人者【捕亡人은 謂避禍而逃亡者를 討捕之也라 】어든 公共禁弗予【史記吳王濞傳에 公作訟하니 註에 如淳曰 訟은 公也라 正義曰 訟은 音容이니 言其相容하야 禁止不與也라 】하니 如此者四十餘年이러라

처음 孝文帝 때에 吳나라 태자가 들어와 뵐 때에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었는데, 吳나라 태자가 바둑을 두다가 길을 다투며【爭道는 장기를 두는 길을 다툼을 이른다.】 不恭하자, 황태자가 바둑판을【博局은 지금 바둑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끌어다가 던져서 죽이니,【徐廣이 말하기를 “提는 음이 弟이다.” 하였다. ≪史記≫ 〈周勃世家〉에 “太后가 冒絮를 文帝에게 던졌다.” 하였는데,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服虔이 이르기를 ‘提는 음이 弟이니 혹은 啼자로도 쓴다.’ 하였으니, 잘못이다. 蕭該는 ‘음이 저이고 提는 던짐이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蕭該의 음이 옳다.” 하였다.】吳王이 이로 말미암아 차츰 제후왕의 禮를 잃어서 병을 핑계 대고 京師에 조회 오지 않다가 처음으로 배반할 계획을 두었다. - 《史記 吳王濞列傳》에는 이 句가 없음 - 文帝吳王에게 几杖을 하사하고 늙었다 하여 조회하지 말라 하니, 吳나라가 그 죄를 풀게 되었고 배반하려던 계획도 더욱 해이해졌다. 그러나 吳王이 소유한 나라는 구리와 소금을 밑천으로 삼았기【吳나라에 銅山이 있으니, 천하의 망명한 자들을 불러 모아 銅山에서 銅을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세금이 없어 국가의 재정이 풍족한 것이다.】 때문에 〈재정이 풍족하여〉 백성들이 딴 부세가 없었고, 郡國의 관리가 와서 도망한 사람을 체포하고자 하면【亡人을 체포한다는 것은 禍를 피하여 도망한 자를 토벌하여 체포함을 이른다.】 공공연히 금하고 내주지 않으니,【≪史記≫ 〈吳王濞列傳〉에는 公이 訟으로 되어 있는데, 註에 如淳이 말하기를 “訟은 公이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訟은 음이 용이니, 서로 용납하여 금지하고 주지 않음을 말한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鼂錯數上書言吳過可削이라호되 文帝寬不忍罰하니 以此로 日益橫이러라 及帝卽位에 說上曰 昔에 高帝初定天下에 昆弟少하고 諸子弱이라하사 大封同姓하시니 齊七十餘城이요 楚四十餘城이요 吳五十餘城이라 封三庶孼【王氏曰 正長曰嫡이요 其餘曰庶요 妾隷之子曰孼이니 孼之言은 蘖也라 有罪之女 沒廢役之而已어늘 得幸於君하야 有所生이면 若木旣伐而生枿也라 枿은 與蘖通이라 】하사 分天下半이러시니 今吳王이 前有太子之郤(隙)이라하야 詐稱病不朝하니 於古法에 當誅어늘 文帝不忍하사 因賜几杖하시니 德至厚也라 當改過自新이어늘 反益驕溢하야 卽山鑄錢하고 煮海爲鹽하며 誘天下亡人하야 謀作亂하니 今에 削之亦反이요 不削亦反이어니와 削之면 反亟禍小하고 不削이면 反遲禍大하리이다 〈以上 出史記吳王濞傳〉 上이 令公卿列侯宗室雜議하니 莫敢難이러라 〈出錯本傳〉

鼂錯가 자주 글을 올려 吳나라의 잘못은 영토를 떼어 낼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文帝가 너그러워 차마 벌을 내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吳나라가 날로 더욱 횡포를 부렸다. 景帝가 새로 즉위하자, 鼂錯가 上을 설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高帝가 처음 천하를 평정하시자 형제가 적고 여러 아들들이 약하다 하여 同姓을 크게 봉해주시니, 齊나라는 70여 城邑이요, 楚나라는 40여 성읍이요, 吳나라는 50여 성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세 庶孼을【王氏가 말하였다. “正妻의 長子를 嫡이라 하고, 그 나머지를 庶라 하고, 첩과 노비의 자식을 孼이라 하니, 孼이라는 말은 나무의 옆에서 나온 싹이다. 죄가 있는 여자는 籍沒하여 사역시킬 뿐인데,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서 자식을 낳으면 나무가 이미 베어졌으나 움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枿은 蘖과 통한다.”】 봉하여 천하의 절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지금 吳王이 예전에 태자의 일로 틈이 있다 하여 거짓으로 병을 핑계 대고 조회 오지 않으니, 옛 법에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文帝가 차마 하지 못하시어 인하여 几杖을 하사하시니, 덕이 지극히 후합니다. 마땅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야 하는데 도리어 더욱 교만하고 넘쳐서, 산에 나아가 구리를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한 사람들을 유인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합니다. 지금 吳나라의 영토를 떼어 내도 반란하고 떼어 내지 않더라도 또한 반란할 것이나 땅을 떼어 내면 반란은 빨라도 화가 작고 떼어 내지 않으면 반란은 더디나 화가 클 것입니다.” - 이상은 《史記 吳王濞列傳》에 나옴 -

上이 公卿, 列侯와 宗室들로 하여금 여럿이 모여 의논하게 하니, 〈鼂錯의 말에〉 감히 논란하는 자가 없었다. - 《史記 鼂錯列傳》에 나옴 -

○ 初에 楚元王이 好書하야 與魯申公【申公은 魯人이라 史記云 言詩於魯則申培公이라한대 韋昭曰 培는 申公之名이라 】, 穆生, 白生으로 俱受詩於浮丘伯【齊人이니 浮丘는 複姓也요 伯은 名也라 索隱曰 呂后時에 浮丘伯이 在長安하니 申公이 與元王子郢으로 俱卒學也하니라 】이러니 及王楚에 以三人으로 爲中大夫하다 穆生이 不嗜酒어늘 元王이 每置酒에 常爲穆生設醴하고 及子夷王, 孫王戊卽位하야도 常設이러니 後乃忘設焉이어늘 穆生이 退曰 可以逝矣로다 醴酒를 不設하니 王之意怠라 不去면 楚人이 將鉗【以鐵束頸也라 元王傳에 王戊淫暴어늘 申公, 白生이 諫호되 不聽하고 胥靡之하고 衣之赭衣하야 使杵臼雅舂於市라 胥靡는 聯繫하야 使隨而服役之라 杵臼는 爲木杵手舂이니 今謂步臼者요 赭衣는 罪人所服赤衣也라 正身舂之曰雅舂이라 】我於市라하고 遂謝病去하다 〈出漢書楚元王交傳〉

처음에 楚나라 元王이 글을 좋아하여 魯나라 申公과【申公은 魯나라 사람이다. ≪史記≫ 〈儒林傳〉에 이르기를 “詩로 말하면 魯나라에서는 申培公이다.” 하였는데, 韋昭가 말하기를 “培는 申公의 이름이다.” 하였다.】穆生, 白生과 함께 浮丘伯에게【浮丘伯은 齊나라 사람이니, 浮丘는 복성이고 伯은 이름이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呂后 때에 浮丘伯이 長安에 있었는데, 申公이 元王의 아들 郢과 함께 모두 ≪詩經≫을 배웠다.” 하였다.】《詩經》을 배웠는데, 楚나라에 왕 노릇 하게 되자 세 사람을 中大夫로 삼았다.

穆生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元王은 매번 술자리를 베풀 적에 항상 穆生을 위하여 단술을 진설하였다. 아들夷王과 손자 王戊가 즉위함에 미쳐서도 항상 단술을 진설하였는데, 뒤에는 마침내 진설하는 것을 잊었다. 穆生이 물러가며 말하기를 “떠나갈 만하다. 단술을 진설하지 않으니,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다. 떠나가지 않으면 楚나라 사람이 장차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시장에서 재갈을【鉗은 쇠사슬로 목을 묶는 것이다. ≪史記≫ 〈元王列傳〉에 “王戊가 지나치게 포악하자, 申公과 白生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을 입혀서 절구질하게 하여 시장에서 방아를 찧게 했다.” 하였다. 胥靡는 연결하여 묶어서 따라 다니며 복역하게 하는 것이다. 杵臼는 나무로 절구공이를 만들어 손으로 찧는 것이니, 지금 步臼하는 자를 이르고, 赭衣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이다. 몸을 바로하여 방아찧는 것을 雅舂이라 한다.】 물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떠나갔다.- 《漢書 楚元王交傳》에 나옴 -

楚王戊【高帝弟楚王交孫이라 嗣二十一年에 反하니 都彭城하니라】來朝어늘 因言호되 往年에 爲薄太后服할새 私奸服舍【爲奸於服舍也니 服舍는 喪服之次라 】라하야 削東海郡하고 前年에 趙王【名遂니 高帝孫幽王友子라 嗣二十六年에 反하니 都邯鄲하니라 】이 有罪라하야 削其常山郡하고 膠西王【卬은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平〉昌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密州高密縣이라 按高密은 今屬膠州하니 膠州理膠西縣이라 】이 以賣爵事로 有奸이라하야 削其六縣하고 廷臣이 方議削吳러니 吳王【劉仲之子라 索隱曰 澎은 濞字也라 〈正義曰〉 都吳나 其實은 在江都라 】이 恐削地無已하야 因發謀擧事할새 說膠西王하야 約齊, 菑川【菑川王은 名賢이니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武城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劇이라 按劇縣은 屬菑川이라 菑川은 隋置菑州하니 今盤陽이 是라 括地志에 故劇城은 在靑州壽光南三十里라 】, 膠東【膠東王은 雄渠니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昌)[白]石侯라 (五)[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卽墨이라 括地志에 卽墨故城은 在今登州膠水縣東六十里라 故曰膠東이라 】, 濟南【濟南王은 辟光이니 辟은 音壁이라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初)[朸]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濟南이라 括地志에 濟南故城은 在菑川長(止)[山]縣西北三十里라 】하니 楚, 趙皆反이라 發使遺諸侯書하야 罪狀晁(鼂)錯【狀은 〈形〉容之也라 其書形狀鼂錯之罪니 猶莊子自狀其過也라】하야 欲合兵誅之러라 〈出漢書吳王濞傳 無此二句〉

楚王 戊가【楚王 戊는 高帝의 아우인 楚王 交의 손자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1년에 반란하였으니, 彭城에 도읍하였다.】 조회를 오자, 鼂錯가 인하여 말하기를 “가 지난해 薄太后를 위하여 服을 입을 적에 복 입는 곳에서 은밀히 간통했습니다.”【服舍에서 간음한 것이니, 服舍는 상복을 입는 장소이다.】라고 하여 東海郡을 떼어 내고, 지난해에 趙王이【趙王은 이름이 遂이니, 高帝의 손자인 幽王 友의 아들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6년에 반란하였는 바, 邯鄲에 도읍하였다.】 죄가 있다 하여 常山郡을 떼어 내고, 膠西王 卬은【卬은 高帝의 손자인 齊나라 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平昌侯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密州의 高密縣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高密은 지금의 膠州에 속하니, 膠州의 治所가 膠西縣이다.】 관작을 팔아먹은 일로 간사(부정)함이 있다 하여 여섯 縣을 떼어 내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막 吳나라의 땅을 떼어 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吳王은【吳王(濞)은 劉仲의 아들이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澎은 濞의 字이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吳에 도읍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江都에 있었다.” 하였다.】 제후들의 땅을 떼어 냄이 끝이 없을까 두려워해서 인하여 계책을 내어 擧事할 적에 膠西王을 설득하여 齊, 菑川,【菑川王은 이름이 賢이니, 高帝의 손자인 齊나라 悼惠王의 아들로 옛 武城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劇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劇縣은 菑川에 속하였다. 菑川은 隋나라가 菑州를 두었으니, 지금의 盤陽이 이곳이다. ≪括地志≫에 “옛 劇城은 靑州 壽光縣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膠東【膠東王은 이름이 雄渠이니, 高帝의 손자인 齊나라 悼惠王의 아들로 옛 白石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卽墨에 도읍하였다. ≪括地志≫에 “卽墨의 옛 성은 지금의 登州 膠水縣 동쪽 60리 지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膠東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濟南과【濟南王은 이름이 辟光이니, 辟은 음이 벽이다. 高帝의 손자인 齊나라 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朸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濟南에 도읍하였다. ≪括地志≫에 “濟南의 옛 성은 菑川 長山縣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약속하게 하니, 楚와 趙가 모두 반란하였다. 使者를 내어 제후들에게 글을 보내어 鼂錯의 죄상을【狀은 형용함이다. 그 글에 鼂錯의 죄를 형용한 것이니, ≪莊子≫에 “스스로 그 과실을 기록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적어서 병력을 연합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漢書 吳王濞傳》에는 이 두 句가 없음 -

○ 初에 文帝且崩에 戒太子曰 卽有緩急이어든 周亞夫는 眞可任將兵이라하더니 及七國反書聞에 上이 乃拜中尉周亞夫하야 爲太尉하야 將三十六將軍하야 往擊吳, 楚하고 遣酈寄擊趙하고 欒布擊齊하다

처음에 文帝가 崩하려 할 적에 태자에게 경계하기를 “만일 위급한 일이 있거든 周亞夫는 참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임무를 맡길 만하다.” 하였는데, 吳와 楚 등 7국이 반란하였다는 글이 보고되자, 上이 마침내 中尉인 周亞夫를 임명하여太尉로 삼아서 3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吳와 楚를 공격하게 하고, 酈寄를 보내어 趙를 공격하게 하고, 欒布를 보내어 齊를 공격하게 하였다.

素與吳相袁盎不善이러니 〈此句不同〉 이 夜見竇嬰하고 爲言吳所以反하고 願至上前하야 口對狀【王氏曰 言不用奏章하고 願至主上前하야 口對說也라 】이어늘 이 入言한대 上乃召하니 이 入見하다 〈出袁盎傳〉

鼂錯는 본래 吳나라 정승 袁盎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이 句는 똑같지 않음 - 袁盎이 밤에 竇嬰을 만나 吳나라가 배반한 이유를 말한 다음 上의 앞에 가서 구두로 상황을 대답할 것을 원하였다.【王氏가 말하였다. “章奏를 사용하지 않고 主上의 앞에 이르러서 입으로 대답하기를 원함을 이른다.”】竇嬰이 궁중에 들어가 上에게 말하자, 上이 마침내 袁盎을 부르니 袁盎이 들어가 뵈었다.- 《漢書 袁盎傳》에 나옴 -

上이 方與로 調兵食【調는 計也니 謂計發兵食也라 】이러니 上이 問호되 今吳, 楚反하니 於公意에 何如오 對曰 願屛左右하소서 趨避東廂하야 甚恨이러라 上이 卒問한대 對曰 吳, 楚相遺書하야 言高帝王子弟에 各有分地어늘 今賊臣鼂錯 擅適(謫)諸侯하야 削奪其地라 以故로 反하야 欲共誅하고 復故地而罷라하니 方今計는 獨有斬하고 發使赦七國하야 復其故地면 則兵可毋血刃而俱罷하리이다 上이 黙然良久에 曰 顧誠何如니 吾不愛一人以謝天下라하니 殊不知러라 上이 使中尉召하야 紿載行市하니 衣朝衣하고 斬東市하다

上이 이때 막 鼂錯와 군량 조달을 헤아리고 있었는데,【調는 계산함이니, 兵食(군량)을 계산해 냄을 이른다.】上이 袁盎에게 묻기를 “지금 吳와 楚가 배반하니, 公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좌우를 물리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鼂錯가 종종걸음으로 동쪽 행랑으로 피하면서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上이 마침내 袁盎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吳와 楚가 서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高帝가 子弟를 왕 노릇 시킬 적에 각각 나누어 준 땅이 있었는데, 지금 賊臣인 鼂錯가 제멋대로 제후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땅을 깎아 빼앗았다. 이 때문에 반란하여 함께 鼂錯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하고서 그만두고자 한다.’ 하니, 지금의 계책은 오직 鼂錯를 목 베고 使者를 보내어 七國을 용서하고 그 옛 땅을 회복해 주면 군대가 병기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모두 중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다만 진실로 어떠한가 할 뿐이니, 내가 한 사람을 아껴서 천하에 사죄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鼂錯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上이 中尉로 하여금 鼂錯를 불러 속여서 수레를 태워 시장을 순행하게 하니, 鼂錯가 朝服을 입고 동쪽 시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謁者僕射鄧公【漢書에 作鄧先이라 孔文祥曰 姓은 鄧이요 名은 先이라 】이 上書言軍事曰 吳爲反計 數十歲矣라 發怒削地하야 以誅爲名이나 其意는 不在也니이다 夫鼂錯患諸侯彊大하야 不可制라 故로 請削之하야 以尊京師하니 萬世之利也어늘 計畫이 始行에 卒受大戮하야 內杜忠臣之口하고 外爲諸侯報仇하니 臣은 竊爲陛下不取也하노이다 帝喟然曰 吾亦恨之하노라 〈出鼂錯傳〉

謁者僕射인 鄧公이【鄧公은 ≪漢書≫에 ‘鄧先’으로 되어 있다. 孔文祥이 말하였다. “성은 鄧이요 이름은 先이다.”】상소하여 軍事에 대해 말하기를 “吳나라가 반란할 계획을 세운 지가 수십 년입니다. 땅을 깎은 데 성을 내어 鼂錯를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그 뜻은 鼂錯에게 있지 않습니다. 鼂錯는 제후들이 강대해져서 제재할 수 없음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땅을 떼어 내어 京師를 높이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萬代의 이로움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처음 행해짐에 갑자기 큰 죽임을 당하여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니,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하여 취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나 또한 한스럽게 여기노라.” 하였다.- 《漢書 鼂錯傳》에 나옴 -

永嘉陳氏吳王이 招納亡叛하야 反形已具하니 漢固不可不爲之慮也어니와 其他若楚, 趙, 常山, 膠西之徒는 初曷嘗有反謀者哉리오 向使鼂錯之議가 止於削吳면 則其所反也 獨一吳耳리라 今也에 削地之令이 未加之謀反之吳하고 而先加之未反之國하야 使吳王得以藉口하야 誘諸侯爲左右手하야 幾於危劉氏之社稷하니 然則揚子雲爲愚라하니 誠可謂愚矣로다

永嘉陳氏가 말하였다.

吳王은 도망한 자와 배반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받아들여 배반할 형세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漢나라가 진실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기타 楚나라와 趙나라, 常山, 膠西의 무리로 말하면 처음에 어찌 일찍이 모반하려는 자가 있었겠는가. 그때 만일 鼂錯의 의론이 吳나라의 땅을 깎는 데에 그쳤더라면 반란한 것이 다만 吳나라뿐이었을 것이다. 이제 땅을 깎으라는 명령이 모반한 吳나라에게 가해지지 않고 모반하지 않은 나라에 먼저 가해져서, 吳王으로 하여금 이를 구실삼아 諸侯들을 유인하여 左右의 手足으로 삼아서 劉氏의 社稷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다. 그렇다면 揚子雲鼂錯를 어리석다고 말하였으니, 진실로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又曰 吳王之謀反也는 其志蓋萌於太子博局之死하니 而停蓄含忍於文帝几杖之賜요 西向之心이 未嘗不欲逞也라 景帝之立에 之側目京師하야 狺然而噬者屢矣어늘 而鼂錯削地之策이 適犯其怒하야 而泄其不逞【不快也니 謂不得恣肆快意者也라 一云 包藏禍心하고 不得逞者也라】之謀하야 卒死讒鋒하야 爲言事者戒하니 誠可悲也哉인저

또 말하였다.

吳王가 모반한 것은 그 뜻이 太子가 자기 아들을 장기판으로 쳐 죽인 데서 시작되었으니, 文帝가 几杖을 하사해 줌으로 인해 분한 마음을 쌓아두고 참은 것이요, 서쪽(長安)을 향하여 공격하려는 마음은 〈분함을〉 풀고 싶어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景帝가 즉위했을 때에 가 京師를 곁눈질하여 개처럼 으르렁거리고 물어뜯으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鼂錯의 땅을 깎는 계책이 마침 그의 노여움을 건드려 〈마음속에 품고〉 풀지 못한【不逞은 不快함이니, 제멋대로 행동하여 뜻에 상쾌하지 못한 자를 이른다. 一說에는 “나쁜 마음을 마음속에 품고 이것을 풀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계책을 누설해서 끝내 참소하는 칼날에 죽음으로써 일을 말하는 자들의 경계가 되었으니, 鼂錯는 참으로 가련하다.”

亞夫言於上曰 楚兵이 剽輕【剽는 亦輕也니 不持重也라 】하니 難與爭鋒이라 願以梁委之하야 絶其食道라야 乃可制也리이다 上이 許之하다 亞夫乘傳하고 將會兵滎陽할새 發至霸上하니 趙涉이 遮說亞夫吳王이 知將軍且行하고 必置人於殽, 澠【殽는 山名이니 今陝縣이 是也라 東崤至西崤二十五里니 在秦關之東, 漢關之西라 殽는 通作崤라 括地志에 洛州永寧西北二十里 古殽道也라 澠은 屬弘農하니 禹貢所屬河西郡이라 澠은 當作黽이니 俗作澠이라 】之間하리이다 且兵事는 尙神密이니 將軍은 何不右去하야 走藍田【按漢地志에 京兆有藍田縣이라 括地志云 藍田山은 三皇舊居니 在雍州東南八十里라 從藍田關하야 西入縣이라 】, 出武關【秦之南關也니 通南陽이라 括地志에 故關은 在商州商洛東하니 春秋時少習也라 】, 抵洛陽하야 直入武庫【在未央宮하니 蕭何造하야 以藏兵器라 】오 諸侯聞之면 以爲將軍이 從天而下也라하리이다 太尉如其計러니 至洛陽하야 曰 今吾據滎陽하니 滎陽以東은 無足憂者라하고 使使搜殽, 澠間이러니 果得吳伏兵하다

周亞夫가 上에게 말하기를 “楚나라 군대는 날래고 가벼우니,【剽 또한 가벼움이니, 몸가짐이 진중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銳鋒을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梁나라를 버려서 그 식량 수송로를 끊어야만 비로소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周亞夫가 역말을 타고 장차 군대를 滎陽에서 회합하려 하였는데, 출발하여 霸上에 이르니, 趙涉이 길을 가로막고 周亞夫를 설득하기를 “吳王은 장군이 장차 이곳으로 갈 것을 알고는 반드시 伏兵을 殽山과 澠水의【殽는 산 이름이니, 지금 陝縣이 이곳이다. 東崤로부터 西崤에 이르기까지 25리이니, 秦關의 동쪽, 漢關의 서쪽에 있다. 殽는 崤와 통용한다. ≪括地志≫에 “洛州 永寧縣 서북쪽 20리 지점이 옛날 殽道이다.” 하였다. 澠은 弘農에 속하니, ≪書經≫ 〈禹貢〉에는 河西郡에 속하였다. 澠은 黽이 되어야 하니, 세속에서 澠으로 쓴다.】 사이에 두었을 것입니다. 또 군대의 일은 신속하고 은밀함을 숭상하니, 장군은 어찌하여 오른쪽으로 가서 藍田으로【藍田은 ≪漢書≫ 〈地理志〉에 “京兆에 藍田縣이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藍田山은 三皇이 옛날에 살던 곳이니, 雍州의 동남쪽 80리 지점에 있다. 藍田關을 따라 서쪽으로 縣에 들어간다.” 하였다.】 달려가 武關을【武關은 秦나라의 남쪽 관문이니, 南陽과 통한다. ≪括地志≫에 “옛 관문은 商州 商洛縣 동쪽에 있었으니, 春秋 때의 少習이다.” 하였다.】 나와 洛陽에 이르러 곧바로 武庫로【武庫는 未央宮에 있었으니, 蕭何가 만들어 병기를 보관하였다.】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할 경우〉 제후들이 이것을 들으면 장군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太尉가 그의 계책과 같이 하였는데, 洛陽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이제 滎陽을 점거하였으니, 滎陽 이동은 굳이 근심할 것이 없다.” 하고, 使者를 시켜 殽山과 澠水의 사이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과연 吳나라의 伏兵을 찾아내었다.

吳攻梁急이어늘 亞夫堅壁不出하고 使輕騎로 出淮泗口【在今淮安州北이라 水經注에 淮水는 在山陽北五里하니 淮水之會는 卽城角也라 左右兩川이 夾翼二水以入하니 卽泗口也라 自鼈山北으로 縈迴楚城하야 東入于海라 】하야 絶吳, 楚兵後하고 塞其饟(餉)道하니 吳糧絶卒飢하야 數挑戰호되 終不出하다 條侯軍中이 夜驚하야 內相攻擊하야 擾亂至帳下로되 亞夫堅臥不起러니 頃之요 復定하다 吳犇壁東南陬어늘 亞夫使備西北이러니 已而요 果犇西北하야 不得入이라 吳, 楚士卒이 多飢死叛散하야 乃引去어늘 亞夫出精兵하야 追擊大破之하다 吳王이 棄軍走度(渡)淮【王氏曰 度는 與渡通하니 濟也라 風俗通云 淮廟在唐州東二十里라 廟前槐樹下에 有一泉眼하니 淮水出焉이라 其源甚窄하야 可驀而踰라가 流至揚, 徐間하야 始大라 禹貢蔡氏傳曰 淮水出南陽平氏縣胎簪山하야 北過桐柏山하야 東南入海라 今唐州에 有桐柏縣이라 走는 疾趨也라 】하야 保東越이러니 東越이 殺之하다 楚王은 自殺하고 齊王은 飮藥死하고 膠西王은 自殺하고 膠東, 菑川, 濟南王은 皆伏誅하다 〈出亞夫傳〉

吳나라가 梁나라를 맹렬히 공격하자, 周亞夫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출전하지 않고, 경무장한 기병으로 하여금 淮水와 泗水의 어귀로【淮泗口는 지금 淮安州의 북쪽에 있다. ≪水經注≫에 “淮水는 山陽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니, 淮水가 모이는 곳은 바로 城 모퉁이이다. 좌우의 두 냇물이 두 물을 나래처럼 끼고 들어오니, 바로 泗口이다. 鼈山 북쪽으로부터 楚城을 감돌아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나가 吳‧楚의 군대의 후미를 차단하고 식량 수송로를 막게 하니, 吳나라가 양식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려서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周亞夫는 끝내 출전하지 않았다.

條侯(周亞夫)의 군중이 밤에 놀라서 안에서 서로 공격하여 소란함이 장막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周亞夫가 꼼짝 않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는데, 잠시 후 다시 진정되었다.

吳나라 군대가 周亞夫의 성벽 동남쪽 모퉁이로 달려오자, 周亞夫는 서북쪽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과연 〈吳나라 군대가〉 서북쪽으로 달려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吳‧楚의 사졸들이 대부분 굶어 죽고 배반하여 흩어져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가자, 周亞夫가 정예병을 내어 추격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吳王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淮水를 건너서【王氏가 말하였다. “度는 渡와 통하니, 건넘이다. ≪風俗通≫에 이르기를 ‘淮水의 사당이 唐州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사당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 샘구멍이 있으니, 여기에서 淮水가 나온다. 그 水源이 매우 좁아서 사람들이 뛰어넘어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물이 흘러 揚州와 徐州 사이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하였다. ≪書經≫ 〈禹貢〉의 蔡氏傳에 이르기를 ‘淮水가 南陽 平氏縣 胎簪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桐柏山을 지나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唐州에 桐柏縣이 있다. 走는 빨리 달림이다.”】東越을 확보하였는데, 東越이 그를 죽였다. 楚王은 자살하였고, 齊王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膠西王은 자살하였고, 膠東王菑川王濟南王은 모두 죄를 받고 죽었다.- 《漢書 周亞夫傳》에 나옴 -

[辛卯]七年

[辛卯]七年이라

廢太子하야 爲臨江王하다 ○ 立膠東王하야 爲皇太子【長公主嫖는 景帝之姊也라 欲以女嫁太子榮한대 榮母栗姬不許어늘 乃嫁徹하고 公主嗛栗姬하야 日讒栗姬하고 而譽徹之美라 由是로 廢立之하니라 】하다 〈出本紀〉

7년(신묘 B.C.150))

太子을 폐하여 臨江王으로 삼았다.

膠東王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長公主 嫖는 景帝의 누이이다. 딸을 태자 榮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는데, 榮의 어미인 栗姬가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徹에게 시집보내고는 長公主가 栗姬를 미워하여 날마다 栗姬를 참소하고 徹의 훌륭함을 칭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태자 榮을 폐하고 徹을 세운 것이다.】 - 《漢書 景帝紀》에 나옴 -

[丁酉]中六年

[丁酉]中六年이라

上이 旣減笞法호되 笞者猶不全이라 乃更減하야 笞三百曰二百이요 笞二百曰一百이라하고 又定箠令하니 自是로 笞者得全이라 然이나 死刑旣重하고 而生刑又輕하야 民易犯之러라 〈出漢書刑法志〉

中6年(정유 B.C.144))

上이 이미 笞刑의 법을 줄였으나 笞刑을 당한 자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이에 다시 더 줄여서 태형 300대를 200대로 하고 태형 200대를 100대로 하였으며, 또 매질하는 법령을 정하니, 이로부터 笞刑을 당한 자가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死刑은 이미 무겁고 生刑(死刑 이외의 형벌)은 또 가벼워서 백성들이 쉽게 죄를 범하였다.- 《漢書 刑法志》에 나옴 -

[戊戌]後元年

[戊戌]後元年이라

直不疑爲御史大夫하다 初에 不疑爲郞에 同舍有告歸할새 誤持其同舍郞金去하다 已而요 同舍郞이 覺亡하고 意不疑어늘 不疑謝有之하고 買金償이러니 後에 告歸者至而歸金한대 亡金郞이 大慙이라 以此로 稱爲長者러라 〈出漢書本傳〉

後元年(무술 B.C.143))

直不疑가 御史大夫가 되었다. 처음에 直不疑가 郎官이 되었을 적에 같은 집에 있던 어떤 낭관이 휴가를 받아 돌아가면서 잘못하여 같은 집에 있던 다른 낭관의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이윽고 같은 집에 있던 낭관이 금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는 直不疑를 의심하자, 直不疑가 자기가 가져 갔다고 사죄하고 금을 사서 보상하였는데, 뒤에 휴가를 받고 돌아갔던 자가 와서 금을 돌려주니, 금을 잃었던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 때문에 直不疑가 長者라고 일컬어졌다.- 《漢書 直不疑傳》에 나옴 -

[庚子]三年

[庚子]三年이라

十二月에 帝崩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니 年十六이러라 〈出本紀〉 漢書에 曰 漢興에 接秦之弊하야 自天子로 不得具鈞駟【王氏曰 天子駕駟馬하니 其色宜齊同이로되 言當時國家貧하야 天子不能具鈞色之駟馬라 漢書에 作醇駟하니 注에 醇은 與純同이니 一色也라 】하고 而將相이 或乘牛車하고 齊民이 無蓋藏【如淳曰 齊等하야 無有貴賤이라 故曰齊民이니 若今言平民也라 記王制曰 古者에 公田을 籍而不稅라하니 其法이 計口授田하야 初無貧富不均之患이라 故曰齊民이니 言民業均齊也라 無蓋藏은 謂無物可蓋藏也라 月令에 孟冬에 命百官하야 謹蓋藏이라한대 註에 府庫囷倉에 有藏物也라 】이라 天下已平에 高祖乃令賈人으로 不得衣絲乘車하고 重租稅以困辱之러니 孝惠, 高后時에 爲天下初定이라하야 復弛商賈之律이라 然이나 市井之子孫이 亦不得仕宦爲吏하고 量吏祿, 度官用하야 以賦於民하고 而山川園池市井租稅之入을 自天子로 以至于封君湯沐邑히 皆各爲私奉養焉하야 不領於天下之經費하고 漕轉山東粟하야 以給中都官【京師諸官府라 】호되 歲不過數十萬石이러라 繼以孝文, 孝景이 淸淨恭儉하야 安養天下하니 〈史無此二句〉 七十餘年之間에 國家無事하고 非遇水旱之災하야 民則人給家足하야 都鄙【國都及邊鄙라 】에 廩庾皆滿하고 而府庫에 餘貨財하야 京師之錢이 累巨萬이라 貫朽而不可校하고 太倉之粟이 陳陳相因하야 充溢露積【積은 音恣니 儲蓄也라 凡指所聚之物而言之則去聲이요 聚物而積累之則入聲也라 】於外하야 至腐敗不可食이라 衆庶街巷【邑中道也니 又直曰街요 曲曰巷이라 阡陌은 田間界也요 又壟也라】有馬하니 而阡陌之間에 成群하야 乘字牝者를 擯而不得聚會【王氏曰 字牝은 畜母也라 漢書音義曰 皆乘父馬하니 有牝馬間其間이면 則相踶齧이라 故斥不得聚會라 】하고 守閭閻者食粱肉하고 爲吏者長子孫【時無事하야 吏不數遷하야 至於子孫長大而不轉職任이라 】하고 居官者以爲姓號【王氏曰 謂以官名爲姓氏라 如淳曰 倉氏庾氏는 則倉庫吏之後라 】라 故로 人人自愛而重犯法【重은 難也라 】하야 先行義而後絀(屈)辱焉이러라 當此之時하야 罔(網)疏而民富하고 役財驕溢하야 或至兼幷하며 豪黨之徒 以武斷於鄕曲【鄕曲豪富 無官位로되 而以威勢主斷曲直이라 故曰武斷이라 秦國策注에 曲者는 里之一曲이니 如韋曲杜曲이라 】하고 宗室有土【宗室受封邑有地者라 】와 公卿大夫以下 爭事奢侈하야 室廬輿服이 僭于上하야 無限度하니 物盛而衰는 固其變也라 自是之後로 內窮侈靡하고 外攘夷狄하니 天下蕭然하야 財力耗矣러라

班固贊曰 孔子稱 斯民也는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하시니 信哉라 周秦之弊는 罔(網)密文峻이로되 而奸軌【軌는 音咎니 與究通하니 亂在外爲奸이요 在內爲軌라】不勝이러니 漢興에 掃除煩苛하고 與民休息하며 至于孝文하야 加之以恭儉하고 孝景遵業하야 五六十載之間에 至於移風易俗하야 黎民醇厚하야 周云하고 漢言하니 美矣라

致堂管見曰 養民이 厚矣나 稽諸仲尼之言이면 則亦富庶之而已요 未有以敎之也라 然이나 文帝는 寬厚長者라 以德化民하야 無事則謙抑如不能하고 有事則英氣奮發이어니와 景帝는 刻薄任數하야 以詐力御下하야 平居則誅賞肆行하고 緩急則惴慄失措하며 而又以無寵廢正后하야 而夫婦之道薄하고 以無罪廢太子하야 而父子之恩睽하고 過愛梁王하야 輕許傳位하야 而兄弟之好 不終하고 信讒用佞하야 絀申屠嘉【鼂錯寵幸하야 言事輒聽하고 法令多更定이라 丞相嘉自絀疾錯러니 因事請誅錯호되 上不聽한대 嘉嘔血死하니라】하고 戮鼂錯하고 殺周亞夫【亞夫子盜賣官物하야 連汚亞夫하야 下廷尉한대 嘔血死하니라】하야 而君臣之義 有缺하니 其大致懸絶이 如此요 獨節儉愛民一事가 克遵前業耳니 夫豈可與文帝同稱也哉아

3년(경자 B.C.141))

12월에 황제가 崩하고 태자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니, 나이가 16세였다. - 《漢書 景帝紀》에 나옴 -

《漢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漢나라가 일어날 적에 秦나라의 피폐함을 이어서 天子로부터 같은 색깔의 駟馬를 갖추지 못하였고,【王氏가 말하였다. “天子는 駟馬를 타니, 말의 색깔이 똑같아야 하는데, 당시에 국가가 가난하여 天子가 똑같은 색깔의 駟馬를 갖출 수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漢書≫에는 ‘醇駟’로 되어 있는데, 注에 ‘醇은 純과 같으니, 색깔이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장수와 정승이 혹 소가 끄는 수레를 탔으며, 평민들은 덮어 보관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如淳이 말하였다. “등급이 똑같아서 귀천이 없으므로 齊民이라 한 것이니, 지금 평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禮記≫ 〈王制〉에 이르기를 “옛날에 公田은 백성들의 힘을 빌려 경작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 법이 식구를 계산하여 田地를 주어서 애초에 빈부가 똑같지 않은 근심이 없었기 때문에 齊民이라 한 것이니, 백성의 생업이 똑같음을 말한 것이다. 無蓋藏은 덮어 보관할 만한 물건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月令〉에 “孟冬에 百官에게 명하여 蓋藏을 삼간다.” 하였는데, 註에 “府庫와 囷倉에 보관한 물건이 있다.” 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高帝가 마침내 상인들로 하여금 비단옷을 입거나 수레를 타지 못하게 하였고, 조세를 무겁게 하여 곤욕스럽게 하였는데, 孝惠帝高后 때에는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었다 하여 다시 商賈를 제재하는 법률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市井(상인)의 자손이 또한 벼슬하여 관리가 될 수는 없었으며, 관리의 녹봉을 헤아리고 관청의 비용을 헤아려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山川과 園池와 市井에 대한 조세의 수입을 天子로부터 封君(제후)의 湯沐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각 사사로이 봉양하게 하여 천하의 경비에 넣지 않고, 山東의 곡식을 漕運하고 수송하여 中都(京師)의 여러 官府에【中都官은 京師의 여러 官府들이다.】 공급하였으나 1년에 수십만 석에 지나지 않았다.

뒤이어 孝文帝孝景帝가 淸淨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천하를 편안히 기르니, - 《史記》에는 이 두 句가 없음 - 70여 년 동안 국가에 일이 없고 水災와 旱災를 만나지 않아, 백성들은 사람마다 넉넉하고 집집마다 풍족하여 都鄙(도시와 시골)에【都鄙는 國都와 邊鄙(먼 시골)이다.】 창고가 모두 가득하고 府庫에 財貨가 남아서 京師의 돈이 여러 巨萬이었다. 그리하여 돈꿰미가 썩어서 돈이 얼마인지를 따질 수가 없고, 太倉의 곡식이 묵고 묵어 서로 쌓여서 차고 넘쳐 밖에 노적을 쌓아서【積은 음이 자이니 저축함이다. 무릇 모아놓은 물건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去聲이고, 물건을 모아 쌓아놓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入聲이다.】 곡식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서민들도 길거리에【街巷은 邑 안의 길이니, 또 곧은 것을 街라 하고 굽은 것을 巷이라 한다. 阡陌은 밭 사이의 경계이고 또 밭두둑이다.】 말을 보유하니, 길 사이에 말이 무리를 이루어서 새끼 딸린 암말을 탄 자는 물리쳐 모임에 모이지 못하게 하고,【[釋義]乘字牝者 擯而不得聚會:王氏가 말하였다. “字牝은 새끼를 기르는 어미 말이다. ≪漢書音義≫에 ‘사람들이 모두 수말을 탔으니, 암말이 그 사이에 끼면 서로 차고 물기 때문에 배척하여 모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여염을 지키는 자들이 기장과 고기를 먹고, 관리가 된 자는 자손이 장성할 때까지 계속하였고(직임을 바꾸지 않았고),【당시에 일이 없어 관리들이 자주 옮겨 다니지 않아서 자손이 장성하고 큼에 이르도록 직임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관직에 있는 자는 관명을 姓의 칭호로 삼았다.【王氏가 말하였다. “관직의 이름을 가지고 성씨를 삼음을 이른다. 如淳이 말하기를 ‘倉氏와 庾氏는 창고를 맡은 관리의 후손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몸을 아껴서 법을 범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重은 어렵게 여김이다.】 자신이 義를 행함을 우선으로 여기고 남에게 굴욕을 보이는 것을 뒤에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法網이 엉성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재물을 쓰는 것이 교만하고 지나쳐서 혹은 兼幷함에 이르렀으며, 세력 있는 무리들이 鄕曲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위세를 부리고,【[釋義]豪黨之徒 以武斷於鄕曲:鄕曲에 부유한 자들은 관직과 지위가 없었으나 威勢로 曲直을 결단함을 주관하였다. 그러므로 武斷이라 한 것이다. ≪戰國策≫ 〈秦策〉의 注에 “曲이란 마을의 한 굽이이니, 韋曲‧杜曲과 같다.” 하였다.】 토지를 소유한 宗室과【有土는 宗室로서 封邑을 받아 토지를 소유한 자이다.】 公卿과 大夫 이하가 다투어 사치를 일삼아서 집과 수레와 의복이 上보다 참람하여 한도가 없었으니, 사물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진실로 변화의 이치이다. 이로부터 孝武帝가 안으로는 사치와 화려함을 지극히 하고 밖으로는 夷狄을 물리치니, 천하가 소란하여 재력이 소모되었다.”

班固의 《漢書》〈景帝紀〉 贊에 말하였다.

孔子가 말씀하기를 ‘지금 이 백성들은 三代時代에 정직한 道를 행하던 백성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周나라와 秦나라의 병폐는 법망이 치밀하고 법조문이 준엄하였으나 간사한 자들을【軌는 음이 구이니 宄와 통하는 바, 亂이 외부에 있는 것을 奸이라 하고 내부에 있는 것을 軌라 한다.】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漢나라가 일어나자 번거롭고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고 백성들과 함께 편안히 쉬었으며, 孝文帝에 이르러서는 겸하여 공손하고 겸손하였고 孝景帝는 先王의 基業을 따라 5, 60년 동안 풍속을 바꿈에 이르러서 백성들이 醇厚하였다. 그리하여 周나라에서는 成王康王을 칭하고 漢나라에서는 文帝景帝를 말하니, 참으로 아름답다.”

致堂(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文帝景帝가 백성을 기른 것이 후하였으나 仲尼의 말씀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또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많게 하였을 뿐이요 가르침이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文帝는 寬厚한 長者라서 德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여, 일이 없으면 겸양하여 능하지 못한 것처럼 하였고 일이 있으면 英氣가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景帝는 각박하고 術數에 맡겨서 속임수와 힘으로 아랫사람들을 제어하여, 평소에는 주벌과 상을 제멋대로 행하고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두려워서 조처할 바를 몰랐으며, 또 총애가 없다 하여 正后를 폐해서 夫婦間의 道가 박해졌고, 죄없이 太子를 폐하여 父子間의 은혜가 괴리되었고, 梁王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경솔하게 傳位하겠다고 허락하여 兄弟間의 우호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고,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간신을 등용하여 申屠嘉를【鼂錯가 총애를 받아 일을 말하면 그때마다 들어주고 법령을 많이 변경하였다. 申屠嘉가 내침을 당하고는 鼂錯를 미워하였는데, 일로 인하여 鼂錯를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上이 들어주지 않으니, 申屠嘉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내치고 鼂錯를 죽이고 周亞夫를 죽여서【周亞夫의 아들이 관청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팔아서 죄가 周亞夫에게까지 연루되어 廷尉에게 내리니, 周亞夫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君臣間의 의리에 결함이 있었으니, 大體上에 현격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절약하고 검소하여 백성을 사랑한 한 가지 일만이 前王의 業을 따랐을 뿐이니, 어찌 文帝와 함께 칭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