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五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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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太祖高皇帝 下

[己亥]五年

[己亥]五年이라

冬十月에 漢王이 追項羽至固陵【縣名이라 括地志에 在陳州宛丘西北四十二里라 一云卽光州固始是라】하야 與齊王과 魏相國【初에 越收魏地十餘城하고 將兵歸漢하야 請立魏後漢王西魏豹는 眞魏後라하니 乃以爲魏相하야 使將兵略定魏地하니라 은 魏人이라】로 期會擊楚러니 , 이 不至라 楚擊漢軍大破之하니 漢王이 堅壁自守하고 謂張良曰 諸侯不從하니 奈何오 對曰 楚兵且破에 二人이 未有分地하니 其不至固宜라 君王이 能與共天下하시면 可立致也리니 今能取睢陽以北至穀城은 皆以王彭越하고 從陳以東傅海는 與齊王하소서 能出捐此地하야 以許兩人하야 使各自爲戰이면 則楚를 易破也리이다 漢王이 從之하니 於是에 韓信, 彭越이 皆引兵來하다 〈出漢本紀〉

5년(기해 B.C.202))

겨울 10월에 漢王項羽를 추격하여固陵에【[釋義] 固陵 : 固陵은 縣의 이름이다. ≪括地志≫에 “陳州宛丘縣 서북쪽 42리 지점에 있다.” 하였고, 一本(≪漢書≫ 晉灼의 註)에는 “光州의 固始縣이 이곳이다.” 하였다.】이르러서齊王韓信과 魏나라 相國彭越【처음에 彭越이 魏나라 땅의 10여 개 성을 수복한 다음 군대를 거느리고 漢나라로 돌아와 漢王에게 魏나라 후손을 세워줄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西魏의 王 는 참으로 魏나라 후손입니다.” 하니, 마침내 彭越을 魏나라 정승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魏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彭越은 魏나라 사람이다.】 함께 모여 楚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韓信彭越이 오지 않았다. 楚나라가 漢軍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漢王이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지키고張良에게 이르기를 “제후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張良이 대답하기를 “楚나라 군대가 장차 격파될 터인데 이 두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 준 것이 있지 않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군왕께서 이들과 천하를 함께 하시면 당장 오게 할 수가 있으니, 이제 睢陽 以北으로부터 穀城까지는 모두 彭越에게 왕 노릇 하게 하시고, 陳으로부터 以東으로 東海까지는 齊王韓信에게 주소서. 능히 이 땅을 出捐하여 두 사람에게 허락해서 각각 따로 전투하게 하시면 楚나라를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漢王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에 韓信彭越이 모두 병력을 인솔하고 왔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十二月에 項王이 至垓下【聚邑名이니 在沛之洨縣이요 又堤名이라 正義云 垓是高岡絶巖이니 今猶高三四丈이라 其聚邑及堤 在垓之側일새 因名垓下하니 今在亳州眞源東十里라】하니 兵少食盡이라 與漢戰不勝하야 入壁이어늘 漢軍及諸侯兵이 圍之數重하다 項羽夜聞漢軍四面이 皆楚歌하고 乃大驚曰 漢이 皆已得楚乎아 是何楚人之多也【楚人之歌니 猶言吳謳越吟也라 九江兵歸漢이라 故로 多楚聲이라】오 乃夜起하야 飮帳中하고 〈史記羽本紀曰 有美人하니 名요 駿馬名騅라 乃悲歌慷慨하야 自爲歌詩하니 曰 力拔山兮氣蓋世로다 時不利兮騅不逝로다 騅不逝兮可奈何오 兮奈若何오〉 因泣下하니 左右皆泣하야 莫能仰視러라 於是에 項王이 乘其駿馬하니 麾下壯士騎從者八百餘人이라 直(値)夜【直는 當也니 古字例以直爲値라】하야 潰圍南出馳走러니 平明에 漢軍이 乃覺之하고 令騎將灌嬰으로 以五千騎追之하다 項王이 渡淮에 騎能屬者 纔百餘人이라 至陰陵【地志에 九江郡陰陵縣은 今無爲州是라 方輿勝覽에 和州烏江縣西北四十五里에 有陰陵山하니 卽項羽迷失道處라 括地志에 陰陵故城이 在濠州定遠西北六十里라】하야 迷失道하야 問一田父한대 田父紿曰 左【王氏曰 紿曰左句絶이라 紿는 欺言也니 欺令向左去라】하라 左라가 乃陷大澤中하니 以故로 漢追及之하다

12월에 項王이 垓下에【垓下는 聚邑(작은 고을) 이름이니 沛州의 洨縣에 있고, 또 제방의 이름이기도 하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垓는 높은 산등성이의 가파른 바위이니, 지금도 높이가 서너 길이나 된다. 聚邑과 제방이 垓의 곁에 있기 때문에 인하여 垓下라고 이름하였으니, 지금 亳州眞源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이르니,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였다. 漢나라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성벽으로 들어가자, 漢軍과 제후의 군사들이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項羽는 밤에 漢軍이 사면에서 모두 楚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마침내 크게 놀라 말하기를 “漢나라가 이미 楚나라를 모두 얻었는가? 어찌하여 楚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釋義]項羽夜聞……楚人之多也 : 楚歌는 楚나라 사람의 노래이니 ‘吳나라의 노래’, ‘越나라의 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九江의 병사들이 漢나라에 귀순하였기 때문에 楚나라 노랫소리가 많은 것이다.】하고, 마침내 밤에 일어나 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史記》〈項羽本紀〉에 이르기를 “美人이 있으니 이름이 요, 준마가 있으니 이름이 였다. 마침내 슬피 노래하고 慷慨하여 스스로 詩歌를 지으니, 이르기를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온 세상을 뒤덮도다. 때가 불리하니 騅馬도 가지 않는구나. 騅馬가 가지 않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虞美人이여, 虞美人이여, 어찌한단 말인가.’ 했다.” 하였다.- 인하여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울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에 項王이 준마를 타니 휘하의 장사로서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백여 명이었다. 밤을 당하여【直는 당함이니, 古字에는 으레 値를 直로 썼다.】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도망하였는데, 平明(새벽)에야 漢나라 군대에서 비로소 이를 깨닫고 기병장 灌嬰으로 하여금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다. 項王이 淮水를 건널 적에 기병으로서 소속된 자가 겨우 백여 명이었다. 陰陵에【陰陵은 ≪漢書≫ 〈地理志〉에 “九江郡 陰陵縣은 지금의 無爲州가 바로 이곳이다.” 하였고, ≪方輿勝覽≫에 “和州 烏江縣 서북쪽 45리 지점에 陰陵山이 있으니, 곧 項羽가 길을 잃었던 곳이다.” 하였고, ≪括地志≫에 “陰陵의 옛 城이 濠州 定遠縣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러 혼미하여 길을 잃고 한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 말하기를 “왼쪽으로 가라.”【[釋義]田父紿曰 左 : 王氏가 말하였다. “紿曰左에서 句를 떼어야 한다. 紿는 속여서 말하는 것이니, 속여서 왼쪽으로 향하여 가게 한 것이다.”】 하였다. 왼쪽으로 갔다가 마침내 큰 늪 가운데에 빠지니, 漢나라 군사들이 이 때문에 추격하여 따라잡았다.

項王이 乃復引兵至東城【地志에 九江(卽)[郡]東城縣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濠州定遠東南五十里라】하니 乃有二十八騎라 項王이 自度不得脫하고 謂其騎曰 吾起兵至今八歲矣라 身七十餘戰에 未嘗敗北러니 今卒困이 如此하니 此는 天之亡我요 非戰之罪也라 今日에 固決死로니 願斬將刈旗三勝之하야 令諸君으로 知天亡我요 非戰之罪호리라하고 斬漢一將, 一都尉하고 殺數十百人하니 諸騎皆伏이러라

項王이 이에 다시 병력을 이끌고 東城에【東城은 ≪漢書≫ 〈地理志〉에 “九江郡 東城縣이다.” 하였고, ≪括地志≫에 “옛 城이 濠州 定遠縣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니, 마침내 28명의 기병만 있었다. 項王이 스스로 탈출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그 기병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지금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를 싸웠으나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곤궁함이 이와 같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니다. 오늘 진실로 결사전을 하겠으니, 적장을 목 베고 적의 깃발을 베어 세 번 이겨서 諸君들로 하여금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전투를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게 하겠다.” 하고는 漢나라의 장수 한 명과 都尉 한 명을 목 베고 수십 명에서 백 명을 죽이니, 모든 기병이 모두 탄복하였다.

於是에 項王이 欲東渡烏江이러니 烏江亭長【括地志에 卽和州烏江縣이라 方輿勝覽에 烏江縣東四里에 有烏江浦하니 卽亭長檥船待項王處라】이 檥船【檥는 音蟻니 附也라 整船向岸曰檥라】待라가 謂項王曰 江東이 雖小나 地方千里라 亦足王也니 願大王急渡하소서 項王이 笑曰 天之亡我어늘 我何渡爲리오 且이 與江東子弟八千人으로 渡江而西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兄이 憐而王我인들 我何面目見之며 縱彼不言이나 獨不愧於心乎아하고 乃令騎로 皆下馬步行하야 持短兵接戰하니 獨의 所殺漢軍이 數百人이요 身亦數十餘創이라 乃曰 吾聞漢購我頭千金, 邑萬戶라하니 吾爲若德이라하고 乃自刎而死하다 〈出史記項羽紀〉

이에 項王이 동쪽으로 烏江을 건너려 하니, 烏江의 亭長이【烏江亭은 ≪括地志≫에 “바로 和州 烏江縣이다.” 하였고, ≪方輿勝覽≫에 “烏江縣 동쪽 4리 지점에 烏江浦가 있으니, 바로 亭長이 배를 대고 項王을 기다렸던 곳이다.” 하였다.】 배를 대고【檥는 음이 의이니, 붙이는 것이다. 배를 정돈하여 江岸으로 향하는 것을 檥라고 한다.】 기다리다가 項王에게 이르기를 “江東이 비록 작으나 땅의 넓이가 천 리입니다. 또한 충분히 왕 노릇 할 수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급히 건너소서.” 하였다. 이에 項王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내 어찌 이 강을 건너겠는가? 또 내가 江東의 子弟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이제 한 사람도 돌아가는 자가 없으니, 비록 江東의 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 노릇 하게 한다 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이들을 볼 것이며, 비록 저들이 말하지 않으나 내가 홀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項羽가 마침내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短兵을 잡고 접전하게 하였는데, 項籍이 홀로 죽인 漢軍이 수백 명이고 자신도 또한 수십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이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漢나라에서 내 머리에 千金과 萬戶의 고을을 현상하였다 하니,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풀겠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죽었다.- 《史記 項羽本紀》에 나옴 -

○ 楚地悉定호되 獨魯不下라 漢王이 欲屠之하야 至其城下러니 猶聞弦誦之聲이어늘 謂其守禮義之國이 爲主死節【懷王이 初封羽爲魯公故也라 葬項王穀城東하니 去縣十五里에 有塚이라】이라하고 乃持項王頭示之하니 魯乃降하다 〈出漢書本紀及儒林傳〉 漢以魯公禮로 葬項王하고 封項伯하야 爲列侯【項伯은 羽之季父니 名纏이요 字伯陵이라 項氏支屬을 皆不誅하고 封項伯等四人하야 爲列侯하니라】하다

楚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魯 지방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漢王이 魯 지방을 도륙하고자 하였는데, 그 성 아래에 이르니 아직도 현악기를 타고 詩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漢王이 이르기를 “禮義를 지키는 나라가 군주를 위하여 죽음으로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懷王이 처음에 項羽를 魯公으로 봉하였기 때문에 군주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고 한 것이다. 項王을 穀城 동쪽에 장사 지내니, 縣에서 15리 떨어진 곳에 무덤이 있다.】 하고 마침내 項王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보여주니, 魯 지방이 그제서야 항복하였다.- 《漢書》〈高帝紀〉와 〈儒林傳〉에 나옴 - 漢나라가 項王魯公의 禮로 장례하고項伯을 봉하여列侯로 삼았다.【[頭註]封項伯 爲列侯 : 項伯은 項羽의 季父이니, 이름이 纏이고 字가 伯陵이다. 項氏의 친족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項伯 등 네 사람을 봉하여 列侯로 삼았다.】

太史公起隴畮(畝)之中하야 三年에 遂將五諸侯兵하고 滅秦하야 分裂天下而封王侯하고 政由出하니 位雖不終이나 近古以來에 未嘗有也라 及背關懷楚하고 放逐義帝而自立하야 怨王侯叛己면 難矣라 自矜功伐하고 奮其私智而不師古하야 謂霸王之業을 欲以力征하야 經營天下五年에 卒亡其國하고 身死東城이로되 尙不覺悟而自責하고 乃引天亡我, 非用兵之罪也하니 豈不謬哉아

太史公(司馬遷)이 말하였다.

項羽가 밭두둑 가운데서 일어나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누어 王侯를 봉하고 政事를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지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 못하였으나 近古 이래에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다. 項羽가 關中의 약속을 저버리고 楚나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으며 義帝를 추방하고 스스로 왕위에 서고는 王侯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한다면 곤란하다.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뽐내어 옛 도리를 본받지 않고서 霸王의 業을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천하를 경영한 지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잃고 자신은 동쪽 城에서 죽었다. 그런데도 깨달아 자책하지 못하고, 마침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용병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揚子法言曰 或問楚敗垓下하야 方死曰 天也라하니 諒乎【信如羽之言否아】아 曰漢屈群策【王氏曰 按揚子註解에 漢能屈己以用群臣之策이라하니 謂群策이 無能出漢之右者라】하야 群策屈群力【王氏曰 群力이 皆爲群策所制라 故曰屈群力이라하니라】하고 楚憞群策하야 而自屈其力【憞는 廢也라 言楚旣廢群策而不能用하니 是自屈其力也라 宋咸曰 憞는 惡也라 項羽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其惡群策을 可知矣니라】이라 屈人者克하고 自屈者負하나니 天曷故焉【言天豈故爲之哉리오 亦人事也라】이리오 〈出揚子重藜篇〉

《揚子法言》에 말하였다.

“或者가 묻기를 楚나라 項羽가 垓下에서 패전하여 막 죽을 때에 말하기를 ‘하늘(天運)이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項羽의 말과 같이 하늘이 있습니까?【‘진실로 項羽의 말과 같은가?’라고 물은 것이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漢나라는 여러 계책을 다 받아들여서【王氏가 말하였다. “≪揚子法言≫의 註解에 ‘漢나라는 자기 몸을 굽혀 여러 신하의 계책을 썼다.’고 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계책을 쓴 것은 漢나라보다 뛰어난 자가 없는 것이다.”】 여러 계책이 여러 힘을 굴복시켰고,【王氏가 말하였다. “여러 힘이 모두 여러 계책에 제어를 받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여러 힘을 굴복시켰다.’고 한 것이다.”】楚나라는 여러 계책을 폐하여 스스로 그 힘을 굽혔다.【憞는 폐함이다. 楚나라가 이미 여러 계책을 폐하여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그 힘을 굽힌 것이다. 宋咸이 말하기를 “憞는 미워함이다. 項羽는 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말을 쓰지 못하였으니, 여러 계책을 미워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남에게 굽히는 자는 이기고 스스로 굽히는 자는 지니, 하늘이 무슨 연고가 있겠는가.”【하늘이 무슨 연고가 되겠는가. 또한 사람의 일임을 말한 것이다.】 - 《揚子法言 重藜篇》에 나옴 -

黃公度曰 智可以來天下로되 不可以留天下며 力可以得天下로되 不可以有天下하니 有天下者는 忘天下者也라 嬴秦이 取天下於六國分裂之餘하야 百戰百勝하야 僅能得之하니 得之艱難일새 惟恐去之或速하야 凡可以制民之死命者를 無不可爲而彊擧之하야 雖翦滅屠戮이라도 有所不恤하니 天下不勝嬴秦之猜疑하야 相率而跳於刑法之外라 項氏見民之易叛하고 恐今日之於吾에 猶昔日之於秦也하야 擧一城則坑之하고 攻一邑則屠之하니 嗟乎라 亦人耳니 好生惡殺이 誰無是心哉리오 所以斬伐而無一寸愛惜者는 亦疑之深矣일새라 疑民之叛하야 而求以殺戮止之하니 乃所以速其叛也라 帝之入關엔 約法三章하고 之入關엔 烽火三月하며 帝之所過엔 秋毫無犯하고 之所過엔 噍類不遺하니 嗟乎라 民之歸於君者는 求以生我耶아 殺我耶아 相率而歸之어늘 從而殺之면 何苦歸之하야 以求殺哉아 帝不取天下於秦之手하고 而取於吾民之心하야 信其自來하고 聽其自至하니 非寬仁大度者면 有所不能也니라

黃公度가 말하였다.

“지혜는 천하 사람을 오게 할 수 있으나 천하 사람을 머물게 할 수는 없으며, 힘은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천하를 소유할 수는 없으니, 천하를 소유하는 자는 천하를 잊는 자이다. 嬴秦이 六國이 분열된 뒤에 천하를 취하여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서 겨우 얻었으니, 얻기를 어렵게 하였기 때문에 행여 떠나감이 혹 빠를까 염려하여, 백성의 목숨을 제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할 만하다고 여겨 억지로 들지 않음이 없어서 비록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도륙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 바가 있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嬴秦의 시기와 의심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거느리고 刑法의 밖에서 날뛰었다.

項氏는 백성들이 쉽게 배반하는 것을 보고는 오늘날 자신에게 있어서도 옛날 秦나라에 있어서와 같을까 염려하여 한 城을 함락하면 백성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한 邑을 공격하면 백성들을 도륙하였으니, 아! 項羽도 또한 사람이니 살려주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함이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백성들을 베어 죽이고 한 치의 애석함도 없었던 까닭은 또한 의심이 깊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살륙으로써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반란을 재촉한 것이다.

高帝가 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三章의 法을 약속하였고 項羽가 關中에 들어갔을 때에는 봉화가 3개월 동안 이어졌으며, 高帝가 지나간 곳에는 秋毫도 범함이 없었고 項羽가 지나간 곳에는 백성의 무리가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아! 백성들이 군주에게 돌아가는 것은 자신을 살려주기를 바라서이겠는가. 자신을 죽이기를 바라서이겠는가. 서로 이끌고서 돌아갔는데 따라서 죽인다면 어찌 괴롭게 그에게 돌아가서 자기를 죽이기를 바라겠는가. 高帝는 천하를 秦나라와 項羽의 손에서 취하지 않고 우리 백성들의 마음에서 취하여, 스스로 오도록 내버려 두고 스스로 이르도록 하였으니, 관대하고 인자하고 도량이 큰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漢王이 還至定陶하야 馳入齊王壁하야 奪其軍하다 春正月에 更立齊王하야 爲楚王하고 王淮北하야 都下邳하고 封魏相國彭越하야 爲梁王하고 王魏故地하야 都定陶하다 〈出漢書本紀〉

漢王이 돌아와 定陶에 이르러서 齊王韓信의 성벽으로 달려 들어가 그의 병력을 빼앗았다. 봄 정월에 齊王韓信을 바꾸어 세워 楚王으로 삼고 淮北에 왕 노릇 하여 下邳에 도읍하게 하였으며, 魏나라 相國彭越을 봉하여 梁王을 삼고 魏나라의 옛 땅에 왕 노릇 하여 定陶에 도읍하게 하였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韓信이 至楚하야 召漂母하야 賜千金하고 召辱己少年하야 以爲中尉하고 告諸將相曰 此는 壯士也라 方辱我時에 寧不能殺之耶리오마는 殺之無名이라 故로 忍而就此【就는 成也니 成今日之功也라】로라 〈出漢書本傳〉

韓信이 楚나라에 이르러 漂母를 불러 千金을 주고, 자기를 욕보였던 소년을 불러 中尉로 삼고, 여러 將相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壯士이다. 막 나를 욕보일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마는 죽이는 것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참아서 이를 이루었다.”【就는 이룸이니, 今日의 功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漢書 韓信傳》에 나옴 -

○ 諸侯王이 皆上疏하야 請漢王爲皇帝어늘 二月甲午에 王이 卽皇帝位于汜(사)水之陽하다 〈出漢書本紀〉

제후왕들이 모두 글을 올려 漢王에게 皇帝가 될 것을 청하였다. 2월 甲午에 왕이 汜水의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 夏五月에 帝置酒洛陽南宮【括地志에 南宮은 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六里洛陽故城中이라】하다 上曰 徹侯【舊曰徹侯러니 避武帝諱하야 曰通侯라 [釋義] 徹은 通也니 言其上通王室也라】諸將은 毋敢隱朕하고 皆言其情하라 吾所以有天下者는 何며 項氏之所以失天下者는 何오 高起王陵이 對曰 陛下는 嫚而侮人하시고 項羽는 仁而愛人이나 然陛下는 使人攻城略地면 因以與之하사 與天下同其利하시고 項羽는 妬賢嫉能하야 有功者를 害之하고 賢者를 疑之하니 此其所以失天下也니이다 上曰 公知其一이요 未知其二로다 夫運籌帷幄之中하야 決勝千里之外는 吾不如子房이요 鎭國家, 撫百姓하고 給餉餽【餉은 通作饟이요 餽는 通作饋라】하야 不絶糧道는 吾不如蕭何요 連百萬之衆하야 戰必勝, 攻必取는 吾不如韓信이니 三者는 皆人傑이어늘 吾能用之하니 此所以取天下者也요 項羽는 有一范增이로되 而不能用하니 此所以爲我禽(擒)也니라 群臣이 悅服이러라 〈出史本紀〉

여름 5월에 황제가 洛陽의 南宮에서【洛陽의 南宮은 ≪括地志≫에 “南宮은 洛州 洛陽縣 동북쪽 26리 되는 洛陽의 옛 城 가운데에 있다.” 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었다. 上이 말하기를 “徹侯와【[原註] 옛날에는 徹侯라고 하였는데, 武帝의 諱를 피하여 通侯라고 하였다. [釋義] 徹은 通함이니 위로 王室과 통함을 말한다.】 여러 장수들은 감히 朕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각기 그 실정을 말하라. 내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 까닭은 무엇이며, 項氏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高起王陵이 대답하기를 “폐하는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項羽는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면 인하여 그들에게 주어서 천하와 그 이익을 함께 하셨고, 項羽는 현자를 투기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미워하여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였으니,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上이 말하기를 “공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나. 帷幄의 가운데에서 궁리하고 계획하여 천 리의 밖에서 승리를 결단함은 내가 子房(張良)만 못하고, 국가를 진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여【餉은 饟과 통용되고, 餽는 饋와 통용된다.】糧道를 끊어지지 않게 함은 내가 蕭何만 못하고, 百萬의 무리를 연합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함은 내가 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인데, 내가 이들을 등용하였으니 이 때문에 내가 천하를 취한 것이요, 項羽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龜山楊氏高祖項羽有一范增而不能用故로 爲我禽이라하니 初以爲信然이러니 及觀之所以佐者然後에 知雖用이나 無益於敗亡也로라 項籍이 以閭閻匹夫之資로 首天下諸侯하야 西向而幷爭이러니 視秦車之覆이로되 曾不知戒하고 猶蹈其故轍하야 欲以力制天下하야 屠咸陽하고 殺子嬰하고 燒秦宮室하며 所過에 無不殘滅하니 是는 以秦攻秦也라 范增이 曾無一言及此하고 乃汲汲於殺沛公하니 假令沛公死라도 天下에 其無沛公乎아 況已知沛公有天子氣어늘 又可殺乎아

龜山楊氏(楊時)가 말하였다.

高祖가 이르기를 ‘項羽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혔다.’ 하였으니, 내가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는데, 范增項羽를 보좌한 것을 살펴본 뒤에야 項羽가 비록 范增의 말을 따랐더라도 패망함에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項籍은 閭閻의 匹夫의 자질로 천하 제후들 중에 으뜸이 되어서 서쪽을 향하여 함께 다투었는데, 秦나라 수레가 전복된 것을 보고도 일찍이 경계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 前轍을 밟아서 힘으로써 천하를 제압하고자 하여, 咸陽을 도륙하고子嬰을 죽이고 秦나라 궁실을 불태웠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해치고 멸망시키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秦나라로써 秦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范增은 일찍이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도리어 沛公을 죽이는 데에 급급하였으니, 가령 沛公이 죽었더라도 천하에 어찌 또 다른 沛公이 없겠는가. 더구나 范增沛公이 천자의 기운이 있음을 알았는데 또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新增] 陳氏曰 吾觀不如之論은 固帝之誠이나 然不如는 亦足以見帝於君臣之間에 無復有猜忌之謀하야 而有以安慰臣下之心也라 嗚呼라 風雲霜露가 無一氣而非天이요 芽甲根荄가 無一物而非地니 天下之善이 誰非人主之善乎아 小夫窶人이 借隙光以自飾하고 竊勺水以自多로되 要不出範圍之內라 天覆地載가 豈與是瑣瑣者爭衡哉아 吾差有取於高帝로라

陳氏가 말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그만 못하다’는 의논은 진실로 漢나라 高祖의 성심이었으나 ‘그만 못하다’는 것에서 또한 高帝가 君臣間에 다시는 시기하는 계책이 있지 아니하여 신하들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었음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아! 바람과 구름과 서리와 이슬이 한 기운도 하늘 아님이 없으며 싹과 껍질과 뿌리가 한 물건도 땅 아님이 없으니, 천하의 善이 어느 것인들 人主의 善이 아니겠는가. 작은 지아비와 가난한 사람들이 틈 사이의 빛을 빌려 스스로 꾸미고 한 잔의 물을 도둑질하여 스스로 많은 체하나 요컨대 天地와 日月의 범위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만물을 덮어주는 하늘과 만물을 실어주는 땅이 어찌 이 자질구레한 것들과 다투겠는가. 내 高帝에게서 크게 취함이 있노라.”

項羽已滅에 田橫【齊王儋死에 橫自立爲齊王하다】이 懼誅【齊王田榮死에 子廣立하고 田橫相之러니 韓信이 虜齊王田廣한대 橫收散兵하야 自立爲王하고 與灌嬰戰敗而走彭越하다 及羽滅에 而越爲漢梁王하니 橫懼誅하니라】하야 與其徒五百餘人으로 入居海島中이러니 帝恐其爲亂하야 乃使人赦罪하고 而召之曰 아 來하라 大者면 王이요 小者면 侯어니와 不來면 且擧兵加誅호리라 이 乃與其客二人으로 乘傳詣洛陽【蘇鶚〈演義〉曰 傳은 以木爲之하니 長尺五寸이니 書符其上하고 又以一板으로 偕封以御史印章하니 所以爲信이라 乘傳者는 依乘符傳而行이니 若今使者持節耳라 師古曰 傳者는 若今之驛也라 古者에 以車謂之傳車러니 其後에 又置單馬하고 謂之驛騎라 洛陽은 注見前하니라】이러니 未至三十里하야 自殺이어늘 帝拜其二客하야 爲都尉하고 以王禮葬之하다 旣葬에 二客이 穿其冢旁하고 皆自剄下從之라 帝聞之大驚하야 聞其餘尙五百人이 在海中하고 使使召之러니 至則聞死하고 亦皆自殺하다 〈出史田儋傳〉

項羽가 이미 멸망하자, 田橫이【齊王 田儋이 죽자 田橫이 스스로 서서 齊王이 되었다.】 주벌을 두려워하여【齊王 田榮이 죽자 아들 廣이 즉위하고 田橫이 정승이 되어 그를 도왔는데, 韓信이 齊王 田廣을 사로잡자 田橫이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고, 灌嬰과 싸워 패전하고 彭越에게 달려가 귀의하였다. 項羽가 멸망하자 彭越이 漢나라의 梁王이 되니, 田橫이 주벌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 무리 5백여 명과 海島 가운데로 들어가 거주하였다. 황제는 이들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람을 보내 田橫의 죄를 사면하고 부르기를 “田橫아, 오너라. 크게는 王을 시킬 것이고 작게는 侯를 시킬 것이며, 오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주벌을 가하겠다.” 하였다.

田橫이 마침내 그 문객 두 사람과 역말을 타고 낙양에 왔는데,【≪蘇鶚演義≫에 이르기를 “傳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尺 5寸이다. 그 위에 符(신표)를 쓰고 또 한 판자를 御史의 印章과 함께 봉하니, 이를 信標로 삼는 것이다. 乘傳은 신표에 따라 역마를 타고 가는 것이니, 지금 使者가 부절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傳은 지금의 驛馬(파발마)와 같은 것이다. 옛날에 수레를 일러 傳車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또 匹馬를 두고 이를 일러 驛騎라고 했다.” 하였다. 洛陽은 注가 앞에 보인다.】 30리 못 미친 곳에서 자살하였다. 황제가 두 문객을 임명하여 都尉로 삼고 王의 禮로 田橫을 장례 하였다. 田橫을 장례 지내자, 두 문객이 그 무덤 옆을 뚫고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그 나머지 5백 명이 아직도 海中에 있다는 말을 듣고 使者를 보내어 불렀는데, 이들이 와서는 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史記 田儋傳》에 나옴 -

季布項籍將하야 數窘辱帝러니 項籍滅에 帝購求布千金호되 敢舍匿이면 罪三族호리라 乃髡鉗【髡은 ★髮也라 鉗은 以鐵束頸也라】爲奴하야 自賣於魯朱【朱家는 魯人也라 季布先匿濮陽周氏러니 周氏曰 漢求將軍急하야 (邇)[迹]且至臣家하리니 臣敢獻計라하고 乃髡鉗布하야 衣裮衣하고 置廣柳車中하고 幷與其家僮數十人으로 至朱家賣之하니라 案廣柳車는 喪車也라 [頭註] 朱家는 所藏活豪士以百數요 其餘庸人을 不可勝數로되 終不伐功하고 諸所賞施를 猶恐人見之하니라】러니 朱家心知其季布也하고 買置田舍하고 身之洛陽하야 見滕公하고 說曰 季布何罪오 臣各爲其主用職耳【謂臣職當然耳라】라 今上이 始得天下하야 而以私怨으로 求一人하시니 何示不廣也오 且以季布之賢으로 漢이 求之急하니 此不北走胡면 南走越耳라 君은 何不從容爲上言之오 滕公이 待間(閒)하야 言於上호되 如朱家指한대 上이 乃赦하고 召拜郞中하다 〈出史本傳〉

季布項籍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황제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였다. 項籍이 멸망하자 황제가 季布를 찾되 천금을 현상으로 걸고 ‘감히 집에 숨겨주면 三族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季布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목에 項鎖(항쇄)를 차고 노예가 되어서【髡은 머리를 깎는 것이고, 鉗은 쇠로 목을 묶는 것이다.】 스스로 魯 땅의 朱家에【朱家는 魯나라 사람이다. 季布가 먼저 濮陽의 周氏 집에 숨었는데, 周氏가 말하기를 “漢나라에서 장군을 급히 찾아 추적하는 자가 장차 신의 집에 이를 것이니, 신이 감히 계책을 바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季布의 머리를 깎고 목에 項鎖를 채워 裮衣를 입히고 廣柳車 속에 넣은 다음, 그 집의 종 수십 명과 함께 朱家에 이르러서 팔았다. 살펴보건대 廣柳車는 喪車이다. [頭註] 朱家는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숨겨 살려준 것이 백 명으로 헤아릴 정도이고 그 나머지 용렬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끝내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상을 주고 은혜를 베푼 것을 행여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였다.】팔려갔다. 朱家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季布임을 알고 밭과 집을 사서 주고는 몸소 洛陽에 가서 滕公(夏侯嬰)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季布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신하가 각각 군주를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 당연한 직분입니다.【用職은 신하의 직분에 당연한 것일 뿐임을 이른다.】 지금 上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얻고서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을 찾으시니, 어찌 도량이 넓지 못함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또 季布의 어짊으로 漢나라가 그를 급하게 찾으니, 이 사람이 북쪽으로 胡로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으로 越나라로 달아날 뿐입니다. 君께서는 어찌하여 조용히 上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하니, 滕公이 한가한 틈을 기다려 上에게 아뢰기를 朱家가 지시한 대로 하였다. 上은 마침내 季布를 사면하고 불러 郎中을 제수하였다.- 《史記 季布傳》에 나옴 -

의 母弟丁公【薛人也니 名固라 [通鑑要解] 名固니 與布로 異父同母弟라】이 亦爲項羽將하야 逐窘帝彭城西하야 短兵接【王氏曰 短兵接爲句라 楚辭九歌篇에 車錯轂兮短兵接이라한대 朱子註云 短兵은 刀劍也라 言戎車相迫에 輪轂相錯하야 長兵不施라 故用刀劍以相接擊也라】이러니 帝急하야 顧謂丁公曰 兩賢이 豈相戹(厄)哉아하니 丁公이 引兵而還하다 及項王滅에 丁公이 謁見이어늘 帝以丁公으로 徇軍中曰 丁公이 爲項王臣不忠하야 使項王失天下라하고 遂斬之曰 使後爲人臣으로 無傚丁公也하노라

季布의 同母弟인 丁公이【[釋義] 丁公은 薛 땅 사람이니, 이름이 固이다. [通鑑要解] 丁公은 이름이 固이니, 季布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아우이다.】 또한 項羽의 장수가 되어서 황제를 彭城의 서쪽에서 추격하여 곤궁하게 하여 短兵으로 접전하였다.【王氏가 말하였다. “短兵接에서 句를 뗀다. ≪楚辭≫ 〈九歌篇〉에 ‘車錯轂兮短兵接’이라 하였는데, 朱子의 註에 ‘短兵은 刀劍이다. 戰車가 바싹 서로 붙어있어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쳐서 긴 병기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刀劍을 사용해서 서로 접근하여 공격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다급하여 丁公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두 현자가 어찌 서로 곤궁하게 하는가?” 하니, 丁公이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項王이 멸망하자 丁公이 찾아와 뵈니, 황제가 丁公을 군중에 돌려 보이며 말하기를 “丁公項王의 신하가 되어 불충해서 項王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말하기를 “후세의 人臣이 된 자로 하여금 丁公을 본받지 말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溫公高祖起豐沛以來로 罔(網)羅豪傑하야 招亡納叛이 亦已多矣러니 及卽帝位하야 而丁公이 獨以不忠受戮은 何哉오 夫進取之與守成이 其勢不同일새라 當群雄角逐之際하야 民無定主하니 來者受之 固其宜也어니와 及貴爲天子하야는 四海之內 無不爲臣하니 苟不明禮義以示之하야 使爲臣者로 人懷貳心하야 以徼大利면 則國家其能久安乎아 是故로 斷以大義하야 使天下曉然皆知爲臣不忠者無所自容하야 而懷私結恩者는 雖至於活己라도 猶以義不與也라 戮一人而千萬人懼하니 其慮事 豈不深且遠哉아 子孫享有天祿四百餘年이 宜矣로다

溫公이 말하였다.

高祖가 豐沛에서 起兵한 이래로 호걸들을 망라하여 도망한 자들을 불러오고 배반한 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그런데 帝位에 오르자 丁公이 홀로 불충하다고 하여 죽임을 당함은 어째서인가? 進取와 守成은 그 형세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영웅들이 角逐할 때를 당해서는 백성들이 정해진 군주가 없었으니, 오는 자를 받아주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귀함이 천자가 되어서는 四海의 안이 신하가 되지 않음이 없으니, 만일 禮義를 밝혀 보여주지 않아서 신하된 자로 하여금 사람마다 두 마음을 품어 큰 이익을 바라게 한다면 국가가 어찌 오랫동안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큰 의리로 결단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는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어서, 사심을 품고 은혜를 맺은 자는 비록 자기를 살려주었다 해도 오히려 의리로 허여하지 않음을 분명히 모두 알게 한 것이다. 한 사람을 죽여 천만 사람이 두려워하였으니, 일을 생각함이 어찌 깊고 원대하지 않은가. 자손들이 天祿을 누리기를 4백여 년 동안 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齊人婁敬이 戍隴西할새 過洛陽이라가 脫輓輅【輅者는 一木橫遮車前하야 二人輓之하고 一人推之니 所謂輓輅라】, 衣羊裘하고 因虞將軍하야 見上曰 陛下都洛陽하시니 豈欲與周室比隆哉잇가 上曰 然하다 婁敬曰 洛邑은 天下之中이라 有德則易以王이요 無德則易以亡이어니와 夫秦地는 被山帶河하야 四塞以爲固하고 卒然有急이면 百萬之衆을 可具하니 此亦扼天下之吭而拊其背也【扼은 音厄이니 捉持也라 吭은 音剛이니 咽喉也니 以喩關中이라 拊는 擊也니 以背脊으로 喩天下라】니이다 帝問群臣한대 群臣이 皆山東人이라 爭言 周는 王數百年하고 秦은 二世卽亡하니이다 洛陽은 東有成皐하고 西有殽, 澠하고 倍(背)河向洛하니 其固를 足恃也니이다 上問張良한대 曰 洛陽이 雖有此固나 四面受敵하니 非用武之國也라 關中은 左殽, 函【殽는 與崤字通이라 括地志에 殽山은 一名嶔岑山이니 在洛州永寧縣西北하니 卽古之殽道也라 函은 謂函谷이니 在陝西桃林縣南十二里하니 有洪溜澗水하고 山形如函이라 故稱函이요 關路在谷口라 故名函谷이라】이요 右隴, 蜀이요 沃野千里【沃은 灌沃也니 言其土壤廣遠하고 有灌漑之利라】며 阻三面而固守하고 獨以一面으로 東制諸侯하니 此는 所謂金城千里요 天府之國【財物所聚曰府라 關中物産饒多하야 可備贍給이라 故稱天府하니 天所造也라】이니 婁敬說이 是也니이다 上이 卽日【蓋其日卽定計요 非卽日遂行也라】에 車駕【謂天子乘車而行이니 不敢指斥也라】西都長安하고 號婁敬하야 爲奉春君【春은 歲之始也니 以婁敬首謀都關中故로 號奉春君이라】하고 賜姓劉氏하다 〈出史張良, 婁敬傳〉

齊나라 사람 婁敬이 隴西로 수자리 살러 갈 적에 洛陽을 지나다가 수레의 끈을 벗겨 놓고는【輅는 한 나무를 수레 앞에 가로대어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미는 것이니, 이른바 輓輅라는 것이다.】 양가죽 옷을 입고 虞將軍을 통하여 上을 뵙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洛陽에 도읍하시니, 어찌 周나라 왕실과 높음을 나란히 하고자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렇다.” 하고 대답하였다. 婁敬이 말하기를 “洛陽은 천하의 중앙이라서 德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가 쉽고, 德이 없으면 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秦나라 지역은 산으로 덮여 있고 黃河가 띠처럼 둘러 있어서 사방이 요새지로 막혀 있어 견고하고, 별안간 급한 일이 있더라도 백만 명의 군대를 갖출 수 있는 바, 이는 또한 천하의 목을 잡고 그 등을 치는 것과 같은 곳입니다.”【扼은 음이 액이니, 잡는 것이다. 吭은 음이 강으로 목이니, 關中을 비유한 것이다. 拊는 침이니, 등뼈로써 天下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山東 사람이었으므로 다투어 말하기를 “周나라는 수백 년 동안 왕 노릇 하였고, 秦나라는 2세에 곧바로 망하였습니다. 洛陽은 동쪽에는 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殽山과 澠池가 있으며 黃河를 등지고 洛水를 향하고 있으니, 그 견고함을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 하였다.

上이 張良에게 물으니, 張良이 대답하기를 “洛陽이 비록 이러한 견고함이 있으나 사면으로 적의 침공을 받으니, 무력을 쓸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關中은 왼쪽에는 殽山과 函谷關이【殽는 崤字와 통한다. ≪括地志≫에 “殽山은 一名 嶔岑山으로 洛州 永寧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바로 옛날의 殽道이다. 函은 函谷을 이르는 바, 陝西 桃林縣 남쪽 12리 지점에 있으니, 크게 모여 흐르는 澗水가 있고 산 모양이 函과 같으므로 函이라고 칭하고, 關門의 길이 골짝 어귀에 있으므로 函谷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있고 오른쪽에는 隴과 蜀이 있고 비옥한 들이 천 리이며,【沃은 물을 대는 것이니, 土壤(土地)이 광활하고 물을 대는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三面이 막혀서 굳게 지키고 오직 한 면을 가지고 동쪽으로 제후를 제압하니, 이는 이른바 金城(철옹성)이 천 리이고 天府(천연적인 府庫)의 나라라는 것이니,【財物을 모아놓은 곳을 府라고 한다. 關中은 物産이 풍부하여 넉넉히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天府라고 칭하니 하늘이 만든 것이다.】婁敬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上이 당일로【그날 즉시 계책을 결정한 것이요, 그날로 마침내 關中으로 간 것은 아니다.】 수레를 타고【車駕는 天子가 수레를 타고 감을 이르니, 감히 天子라고 지척하지 못한 것이다.】 서쪽으로 가서 長安에 도읍하기로 하고, 婁敬을 이름하여 奉春君이라【봄은 한 해의 시작이니, 婁敬이 첫 번째로 關中에 도읍할 것을 계획하였기 때문에 奉春君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하고 劉氏姓을 하사하였다.- 《史記》〈張良傳〉과 〈婁敬傳〉에 나옴 -

[史略 史評] 胡氏高帝起兵八年에 歲無寧居러니 至是에 天下平定하니 當亦少思安逸之時也어늘 而敏於用言하야 不自遑暇如此하니 其成帝業이 宜哉인저 光武下隴하고 歸才(纔)六日에 潁川盜起而往征之하니 可謂能繩祖武矣로다

胡氏가 말하였다.

高帝가 군대를 일으킨 8년 동안 편안히 거처한 해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다소 安逸을 생각해야 할 때인데, 남의 말을 따름에 민첩해서 스스로 편안할 겨를이 없음이 이와 같았으니, 帝業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 光武帝는 隴을 함락하고 돌아온 지 겨우 6일 만에 潁川의 도둑떼가 일어나자 직접 가서 정벌하였으니, 先祖의 발자취를 이었다고 이를 만하다.”

張良이 素多病이러니 從上入關하야 卽道(導)引하야 不食穀【服辟穀藥而不食하고 靜居行氣以學道라 莊子刻意篇에 道(導)引之士라한대 注에 導氣令其和하고 引體令其柔라 華陀傳曰 古僊(仙)人道引之事는 熊經, 鴟顧하야 引接要(腰)體하고 動諸關節하야 以求難老라】하고 曰 家世相韓이러니 及韓滅에 不愛萬金之資하고 爲韓報讐彊秦하야 天下振動이라 今以三寸舌로 爲帝者師하야 封萬戶侯하니 此는 布衣之極이라 於良에 足矣니 願棄人間事하고 欲從赤松子遊耳라하더라 〈出留侯世家〉

張良이 평소 병이 많았는데, 상을 따라 關中에 들어와서는 즉시 導引하여 곡식을 먹지 않으며【道引은 辟穀하는 약을 먹고 곡식은 먹지 않으며 고요히 거하여 기운을 운행하게 해서 道를 배우는 것이다. ≪莊子≫ 〈刻意篇〉에 導引之士라고 하였는데, 注에 “기운을 유도하여 和하게 하고 몸을 인도하여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後漢書≫ 〈華陀傳〉에 이르기를 “옛날에 신선이 導引하는 일은 곰이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올빼미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돌리는 것처럼 하여, 허리와 몸을 끌어당기고 關節을 움직여서 장수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말하기를 “집안이 대대로 韓나라의 정승이 되었는데, 韓나라가 멸망하자 萬金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韓나라를 위하여 강한 秦나라에 원수를 갚으려 하여 천하가 진동하였다. 이제 세 치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어 萬戶侯에 봉해졌으니, 이는 布衣(평민)로서 최고의 지위이다. 나(良)에게 충분하니 人間의 일을 버리고 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한다.”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溫公曰 夫生之有死는 譬猶夜旦之必然이니 自古及今히 固未嘗有超然而獨存者也라 以子房之明辨達理로 足以知神仙之爲虛僞矣리라 然이나 其欲從赤松子游者는 其智를 可知也라 夫功名之際는 人臣之所難處라 如高帝所稱者는 三傑而已로되 淮陰誅夷하고 蕭何繫獄은 非以履盛滿而不止耶아 故로 子房이 託於神仙하고 遺棄人間하야 等功名於外物하고 置榮利而不顧하니 所謂明哲保身者를 子房이 有焉이로다

溫公이 말하였다.

“生에 死가 있음은 비유하면 밤과 아침이 필연적인 것과 같으니,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초연히 홀로 생존한 자가 있지 않다. 子房과 같이 밝게 분변하고 이치를 통달한 자는 신선술이 허망한 거짓임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하였으니, 그 지혜를 알 수 있다. 功名의 사이는 신하가 처하기 어려운 바이다. 高帝가 칭찬한 사람은 三傑(張良韓信蕭何)뿐이었는데, 淮陰侯(韓信)는 죽임을 당하여 멸하였고 蕭何는 옥에 갇혔으니, 이는 성하고 가득참을 누리고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子房(張良)이 神仙에 의탁하고 人間의 일을 버려서 功名을 外物과 똑같이 여기고 영화와 이익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니, 이른바 明哲하여 몸을 보존했다는 것을 子房이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新增] 愚按 尹氏曰 神仙詭誕之說은 先儒論之詳矣요 有如張良欲從赤松子遊는 司馬公亦旣及之矣라 綱目에 前書張良謝病辟穀하야 疑若眞有導引長年之事러니 至壬子六年하야 書留侯張良卒하니 則知子房託於神仙之意를 昭然可見이니 而詭誕之說을 不攻自破矣로다

내가 살펴보건대 尹氏(尹起莘)가 말하기를 “神仙의 허탄한 말은 先儒들이 자세히 논하였고, 張良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하였음은 司馬溫公도 이미 언급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는 예전에 張良이 병으로 사절하고 辟穀을 하였다고 써서 참으로 導引法과 長生不死하는 일이 있는 듯하였는데, 임자 6년에 이르러 留侯張良이 죽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張良이 신선에 가탁한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허탄한 말을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진 것이다.” 하였다.

[庚子]六年

[庚子]六年이라

楚王이 初之國하야 行縣邑할새 陳兵出入하니 人有告信反者라 帝問陳平한대 曰 古者에 天子巡狩하야 會諸侯하니 陛下第出하야 僞游雲夢하야 會諸侯於陳이면 이 聞天子出游하고 其勢必郊迎謁하리니 而陛下因禽(擒)之하시면 此特一力士之事耳니이다 帝以爲然하야 乃會諸侯於陳하다 이 謁上이어늘 上이 令武士縛信하야 載後車한대 曰 果若人言이로다 狡兎死에 走狗烹하고 高鳥盡에 良弓藏하고 敵國破에 謀臣亡【黃石公之三略中言耳라】이라하더니 天下已定하니 我固當烹이로다 上曰 人告公反이라하고 遂械繫【械者는 加以杻械요 繫者는 加以係索也라 械는 형틀을 가하는 것이고, 繫는 포승줄을 가하는 것이다.】以歸하다 〈出史記本傳〉

6년(경자 B.C.201))

楚王韓信이 처음 楚나라에 가서 縣邑을 순행할 적에 병력을 진열하고 출입하니, 韓信이 배반했다고 고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황제가 陳平에게 물으니, 陳平이 대답하기를 “옛날 天子가 巡狩하여 제후들을 모았으니, 폐하께서 다만 나가서 거짓으로 雲夢에 유람한다고 하고 제후들을 陳 땅에 모이게 하시면 韓信은 천자가 나와 유람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 형세가 반드시 교외에서 맞이하여 배알할 것이니, 폐하께서 인하여 사로잡으신다면 이는 다만 한 力士의 일일 뿐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서 마침내 제후들을 陳 땅에 모이게 하였다. 韓信이 上을 뵙자, 上이 武士를 시켜 韓信을 포박해서 뒷수레에 싣게 하니, 韓信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는 사냥개가 삶겨져서 죽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이 감춰지고, 적국이 격파되면 謀臣이 망한다고 하더니,【이 내용은 黃石公의 ≪三略≫에 나오는 말이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진실로 삶겨져서 죽겠구나.”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어떤 이가 公이 배반한다고 고발했다.” 하고는 마침내 韓信에게 형틀을 씌우고 포박하여【2)[頭註]械繫 : 械者는 加以杻械요 繫者는 加以係索也라 械는 형틀을 가하는 것이고, 繫는 포승줄을 가하는 것이다.】 돌아왔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新增] 陳季雅曰 人皆謂漢封建無制故로 諸侯强大라하야 以爲三代封建之法을 不可復이라하니 殊不知三代封建之意가 已壞於此라 何也오 天子適諸侯曰巡狩요 諸侯朝於天子曰述職이니 今高祖用僞遊之計하야 以執이면 則是壞先王巡狩之意요 至呂后하야 召諸王하야 至長安이면 以鴆【鳥名이라 出南方하니 大如鴞요 紫黑色이며 頸長七八寸이니 唯食毒蛇라 蛇入石穴이면 於穴外에 禹步作法【禹步法은 則三步九跡也라 天藏遁法云 先一左足하고 二右足하며 三左足하고 四右足하며 五左足하고 六右足하며 七左足하고 八右足하며 九左足行也라】이라가 有頃에 石碎어든 啄蛇食之하니 鴆在處엔 草木不生이라 秋冬間에 脫羽어든 人以銀箸拾取하야 着甁中하나니 否則人手爛墮라 鴆屎着人이면 立死요 屎着石이면 石爛이요 翮歷酒飮이면 殺人이니 唯犀角解之라】殺之하야 遂使後有望京師而泣者하니 則諸侯述職之法이 又壞矣니라

陳季雅가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漢나라 때에 封建하는 것이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제후가 강대해졌다.’고 하여, 말하기를 ‘三代時代의 封建하는 법을 다시 시행할 수 없다.’고 하니, 三代時代의 封建하는 뜻이 이미 여기에서 파괴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천자가 제후국에 가는 것을 巡狩라 하고, 제후가 천자에게 조회 가는 것을 述職이라 하니, 지금 高祖가 거짓으로 유람하는 계책을 써서 韓信을 사로잡았으면 이는 先王의 巡狩하는 뜻을 파괴한 것이요, 呂后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왕들을 불러 長安에 이르면 鴆毒으로【鴆은 새 이름이다. 南方에서 나오니 크기는 부엉새와 같고 紫黑色이며 목의 길이가 7, 8촌인데 오직 毒蛇만을 먹는다. 뱀이 돌구멍으로 들어가면 鴆새가 구멍 밖에서 禹步(겅중겅중 뜀)를 하다가【禹王의 步法은 3步에 아홉 번 발을 떼는 것이다. 天藏遁法에 “먼저 왼발을 떼고 두 번째는 오른발을 떼며, 세 번째는 왼발을, 네 번째는 오른발을, 다섯 번째는 왼발을, 여섯 번째는 오른발을, 일곱 번째는 왼발을, 여덟 번째는 오른발을, 아홉 번째는 왼발을 떼는 것이다.” 하였다.】 잠시 후에 돌이 부서지면 뱀을 쪼아서 먹으니, 鴆새가 있는 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못한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깃이 빠지면 사람들이 은젓가락으로 깃을 주워서 병 속에 담으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손이 문드러져서 떨어진다. 鴆새의 똥이 사람에게 닿으면 즉사하고 똥이 돌에 묻으면 돌이 부서지며 깃털을 술에 담갔다가 마시면 사람을 죽이니, 오직 물소 뿔만이 해독할 수 있다.】 죽여서 마침내 여러 왕들로 하여금 뒤에는 京師만 바라보고도 우는 자가 있게 하였으니, 諸侯의 述職하는 법이 또 파괴된 것이다.”

田肯이 賀上曰 陛下得韓信하시고 又治秦中【王氏曰 治秦中은 謂定都關中也니 時에 山東人이 呼關中爲秦中이라】하시니 秦은 形勝之國이라 帶山河之險【秦地被山帶河하야 爲形勢之勝便하고 地形險固라 故로 能勝人也라】하야 持戟百萬에 秦得百二【蘇林曰 得百中之二焉이니 秦地險固하야 二萬人이 足當諸侯百萬人也라】焉이라 地勢便利하야 以其下兵於諸侯 譬猶居高屋之上하야 建瓴水也【建은 音蹇이니 覆也요 瓴은 盛水甁(缾)也니 居高屋之上而翻瓴水는 譬其向下之勢易也라】요 夫齊는 東有瑯琊, 卽墨之饒하고 南有太山之固하고 西有濁河之限【晉灼曰 齊西有平原郡하니 河水東北過平原孟津하니 號黃河라 故曰濁河요 踰河卽屬趙라 故曰限이라】하고 北有勃海之利【王氏曰 勃은 通作渤하니 旁跌也라 旁跌出者橫在濟北이라 故齊都賦云 海旁出爲勃이니 因名勃海郡하니 有鹽魚之利라】하야 持戟百萬에 齊得十二【二十萬人이 當百萬이라】焉이라 故로 此東西秦【齊地形勝이 與秦抗衡也라】也니 非親子弟면 莫可使王齊矣니이다 帝曰 善타하다 〈出史本紀〉

田肯이 上에게 축하하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韓信을 잡으시고 또 秦中(關中)에 도읍을 정하시니,【王氏가 말하였다. “治秦中은 關中에 도읍을 정함을 이르니, 당시 山東 사람이 關中을 秦中이라고 불렀다.”】秦나라는 형세가 뛰어난 나라입니다. 험한 山河를 두르고 있어,【[釋義]形勝之國 帶山河之險 : 秦나라의 지형은 산이 뒤덮고 물이 둘러싸서 形勢가 뛰어나고 편리하며 地形이 險固하기 때문에 남을 이길 수 있었다.】 창을 잡은 군사 백만이 쳐들어옴에 秦나라는 100분의 2인 2만 명만 가지면 막아낼 수 있습니다.【[原註]持戟百萬 秦得百二:蘇林이 말하였다. “백 중에 둘을 얻는 것이니, 秦나라의 지형이 험고하여 2만 명만 가지면 諸侯 백만 명을 충분히 당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지형이 편리하여 제후들에게 出兵하는 것이 비유하면 높은 지붕 위에 있으면서 물병의 물을 쏟는 것과 같습니다.【[釋義]居高屋之上 建瓴水也:建은 음이 건이니 뒤엎는 것이고 瓴은 물을 담는 병이니, 높은 지붕 위에 있으면서 물병의 물을 뒤엎는다(쏟는다)는 것은 아래로 향하는 형세가 쉬움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齊나라는 동쪽으로 瑯琊와 卽墨의 비옥함이 있고 남쪽으로는 太山의 험고함이 있고 서쪽으로는 濁河의 한계가 있고【晉灼이 말하였다. “齊나라 서쪽에 平原郡이 있는데, 河水가 동북쪽으로 平原의 孟津을 지나니 黃河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濁河라고 하였고, 河水를 건너면 바로 趙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限이라고 한 것이다.”】 북쪽으로는 渤海의 이로움이 있어,【王氏가 말하였다. “勃은 渤과 통용되니 옆에서 나오는 것이다. 옆에서 나온 것이 濟北에 가로 놓여 있다. 이 때문에 左太沖의 齊都賦에 이르기를 ‘바다가 옆에서 나온 것을 勃이라 하니, 인하여 勃海郡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소금과 魚物의 이익이 있다.”】 창을 잡은 군사 백만 중에 齊나라는 10분의 2인 20만 명만 가지면 막아낼 수 있습니다.【[原註]持戟百萬 齊得十二:20만 명이 백만 명을 당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동쪽과 서쪽의 秦나라인 것이니,【동쪽과 서쪽의 秦나라는 齊나라의 지형의 뛰어남이 秦나라와 대등하다는 것이다.】 親子나 親弟가 아니면 齊나라에 왕을 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니, 황제가 옳다고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新增] 唐仲友曰 看田肯說親王子弟王齊하면 便合知齊後於漢에 有制呂氏【高后八年에 諸呂欲爲亂이러니 朱虛侯章이 以呂祿女爲婦하야 知其謀하고 陰告其兄齊王襄하야 令發兵而討之하고 朱虛侯爲內應하니 襄及章은 皆齊王肥子라】이니라

唐仲友가 말하였다.

田肯이 親王의 子弟를 齊나라에 왕 노릇 하게 하도록 설득한 것을 보면 곧 齊나라가 뒤에 漢나라에 있어 呂氏를 제압한 공로가【高后 8년에 呂氏들이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 朱虛侯 劉章이 呂祿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으므로 그 계획을 알고는 그의 형 齊王 劉襄에게 은밀하게 고하여 병력을 동원해서 呂氏 일족을 토벌하게 하고 朱虛侯가 內應하니, 劉襄과 劉章은 모두 齊王 肥의 아들이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上이 還至洛陽하야 赦韓信하야 封爲淮陰侯하니 이 知漢王畏惡其能하야 多稱病不朝하고 羞與, 等列이러라 上이 嘗從容與으로 言諸將能將兵多少【漢書本傳云 諸將能各有差라】러니 上問曰 如我는 能將幾何오 曰 陛下는 不過能將十萬이니이다 上曰 於君엔 何如오 曰 臣은 多多益善耳니이다 上笑曰 多多益善【漢書에 作益辦이라】이면 何爲爲我禽(擒)고 曰 陛下는 不能將兵而善將將하시니 此所以爲陛下禽也니이다 且陛下는 所謂天授요 非人力也니이다 〈出史本傳〉

上이 돌아와 洛陽에 이르러서 韓信을 사면하고봉하여淮陰侯로 삼으니, 韓信漢王이 자신의 능함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서 대부분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않았고, 絳侯(周勃)灌嬰 등과 동렬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上이 일찍이 조용히 韓信과 더불어 여러 장수들이 거느릴 수 있는 병력의 많고 적음에 관하여【≪漢書≫ 〈淮陰侯傳〉에 이르기를 “여러 장수들의 능력이 각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말하였는데, 上이 묻기를 “나와 같은 자는 몇 명을 거느릴 수 있는가?” 하니, 韓信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십만 명을 거느림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上이 묻기를 “그대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漢書≫에는 ‘益善’이 ‘益辦’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사로잡혔는가?” 하니, 韓信이 대답하기를 “폐하는 병사들을 거느리는 것은 잘하지 못하시나 장수를 잘 거느리시니, 이것이 제(信)가 폐하께 사로잡히게 된 이유입니다. 또 폐하께서는 이른바 하늘이 준 것이고 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 始剖符【與其符에 剖而分之하야 授其半하니 將以合也라】하야 封諸功臣하야 爲徹侯할새 蕭何封酇侯【酇은 今光(華)[化]軍이 是라 此南陽酇縣이니 屬荊州요 非沛國酇縣也라 沛之酇은 音祚柯反이라】하야 所食邑이 獨多라 功臣이 皆曰 臣等은 身被堅執銳하야 多者는 百餘戰이요 少者는 數十合이러니 今蕭何는 未嘗有汗馬之勞【馳逐行陣이면 馬亦汗流라】하고 徒持文墨議論이어늘 反居臣等上은 何也잇고 帝曰 諸君은 知獵乎아 追殺獸兎者【漢書에 無兎字라】는 狗也요 而發縱指示獸處者는 人也【縱은 史記에 作蹤하고 無音이요 漢書에 作縱하고 音子用反이라 [釋義] 發縱은 解紲而縱放之也요 指示는 以手指示之也라 若依史記하면 發蹤은 謂發其蹤하야 指而示之也라 孔氏曰 縱音子用反은 非라】라 今諸君은 徒能得走獸耳니 功이 狗也요 至如蕭何하야는 發縱指示하니 功이 人也라한대 群臣이 皆莫敢言이러라 〈出史蕭相國世家〉

처음에 兵符를 나누어【剖符는 符節을 줄 적에 쪼개어 나누어서 그 반을 주니, 장차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 공신들을 봉해서 徹侯를 삼을 적에 蕭何酇侯에 봉하여【酇은 지금의 光化軍이 이곳이다. 이곳은 南陽의 酇縣이니 荊州에 속하고 沛國의 酇縣이 아니다. 沛의 酇은 음이 祚柯反이다.】 먹는 바의 邑이 유독 많았다. 공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들은 몸소 견고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병기를 잡아, 많은 자는 백여 번을 싸우고 적은 자도 수십 번을 싸웠습니다. 이제 蕭何는 일찍이 말이 땀을 흘린 수고로움이【달려서 行軍하면 말 또한 땀이 흐르는 것이다.】 있지 않고 한갓 文墨만 잡고 의논하였는데도 도리어 신들의 위에 있음은 어째서입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제군들은 사냥하는 방법을 아는가? 짐승과 토끼를 쫓아가 잡는 것은【‘追殺獸兎者’는 ≪漢書≫에는 兎字가 없다.】 사냥개이고, 끈을 풀어놓아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사람이다.【[原註] 發縱의 縱이 ≪史記≫에는 蹤으로 되어 있고 音이 없으며, ≪漢書≫에는 縱으로 되어 있고 音이 子用反이다. [釋義] 發縱은 끈을 풀어서 놓아주는 것이고 指示는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만약 ≪史記≫를 따르면 發蹤은 종적을 발견하여 가리켜 보여줌을 이른다. 孔氏(孔毅父)가 말하였다. “縱의 音을 子用反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제 제군들은 다만 달아나는 짐승을 잡았을 뿐이니 공이 개에 해당하고, 蕭何에 이르러서는 끈을 풀어놓아 가리켜 보였으니 공이 사람에 해당한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에 나옴 -

張良이 爲謀臣하야 亦無戰鬪功이러니 帝使自擇齊三萬戶한대 曰 臣이 始起下邳【地志에 東海郡下邳縣이라】하야 與上會留하니 此는 天以臣授陛下라 陛下用臣計하사 幸以時中하시니 臣願封留足矣요 不敢當三萬戶로소이다 乃封張良하야 爲留侯하다 〈出留侯世家〉

張良이 謀臣이 되어 또한 전투한 공로가 없었는데, 황제가 스스로 齊 지방의 3만 호를 고르게 하자, 張良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下邳에서【下邳는 ≪漢書≫ 〈地理志〉에 “東海郡 下邳縣이다.” 하였다.】 起兵하여 上과 留 땅에서 만났으니,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에게 준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의 계책을 써서 다행히 때로 맞으셨으니, 신은 留에 봉해지면 충분하고 감히 3만 호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張良을 봉하여 留侯로 삼았다.-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 封陳平하야 爲戶牖侯【秦時戶牖鄕이 在陳留陽武縣하니 漢以爲東昏縣이라 括地志에 東昏故城은 在汴州陳留東北九十里라】하니 辭曰 此는 非臣之功也니이다 上曰 吾用先生謀計하야 戰勝克敵하니 非功而何오 曰 非魏無知면 臣安得進이리잇고 上曰 若子는 可謂不背本矣라하고 乃復賞魏無知하다 〈出陳丞相世家〉

陳平을 봉하여 戶牖侯를【秦나라 때의 戶牖鄕이 陳留 陽武縣에 있으니, 漢나라 때에는 東昏縣이라고 하였다. ≪括地志≫에 “東昏의 옛 城이 汴州 陳留 동북쪽 9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삼으니, 陳平이 사양하기를 “이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내가 선생의 계책을 써서 싸워 승리하여 적을 이겼으니, 功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니, 陳平이 말하기를 “魏無知가 아니면 신이 어떻게 등용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上은 “그대와 같은 자는 근본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다시 魏無知에게 상을 내렸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 帝以天下初定하고 子幼, 昆弟少하며 懲秦孤立而亡하야 欲大封同姓하야 以鎭撫天下할새 春에 立從兄하야 爲荊王하고 弟楚王하고 兄代王하고 微時外婦之子齊王【外婦는 謂與傍通者라 漢書高帝八子에 孫夫人이 生齊悼惠王肥하니라 齊形勝이 次於秦中故로 以封子肥也라】하다 〈出荊王賈及楚元王交等傳〉

황제는 천하가 처음 정해졌고 아들이 어리고 형제가 적으며 秦나라가 고립되어 망한 것을 징계하여, 同姓을 크게 봉하여 천하를 鎭撫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봄에 從兄 를 세워서 荊王으로 삼고, 아우 楚王으로 삼고, 형 를 代王으로 삼고, 미천했을 때 外婦의 아들齊王으로 삼았다.【外婦는 곁에 있는 자와 간통함을 이른다. ≪漢書≫에 “高帝의 여덟 아들 중에 孫夫人이 齊나라 悼惠王 肥를 낳았다.” 하였다. 齊나라 지형의 뛰어남이 秦나라 關中의 다음이기 때문에 아들 肥를 齊王에 봉한 것이다.】 - 《漢書》〈荊王傳〉과 〈楚元王傳〉에 나옴 -

[新增] 唐仲友曰 大封同姓은 本以制異姓이나 然卒致七國之禍【吳王濞는 高帝兄仲之子요 楚王(武)[戊]는 高帝弟交之孫이요 趙王遂는 高帝子友之子요 膠西王卬과 膠東王雄渠와 菑川王賢과 濟南王辟光은 皆高帝子齊王肥之子니 約從謀反하니라】하니라

唐仲友가 말하였다.

“同姓을 크게 봉함은 본래 異姓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끝내 七國의 禍를 불러들였다.”【吳王 濞는 高帝의 兄인 仲의 아들이고, 楚王 戊는 高帝의 아우인 交의 손자이고, 趙王 遂는 高帝의 아들 友의 아들이고, 膠西王 卬과 膠東王 雄渠와 菑川王 賢과 濟南王 辟光은 모두 高帝의 아들인 齊王 肥의 아들이니, 〈이들은 景帝 때에〉 연합하여 謀反하였다.】

○ 上이 已封大功臣二十餘人하고 其餘는 日夜爭功不決이러니 上이 在洛陽南宮하야 望見諸將하니 往往相與坐沙中偶語라 上曰 此何語오 留侯曰 陛下起布衣하사 以此屬으로 取天下어시늘 今爲天子에 而所封은 皆故人이요 所誅는 皆仇怨이라 故로 相聚謀反耳니이다 上이 憂之曰 爲之奈何오 留侯曰 上의 平生所憎에 群臣所共知 誰最甚者잇고 上曰 雍齒與我有故怨【帝初起에 令雍齒守豊이러니 齒雅不欲屬帝하야 卽以豊降魏라 帝屢攻之後에 克也하니라】하야 數窘辱我하니 欲殺之로되 爲其功多故로 不忍이로라 留侯曰 今에 急先封雍齒하시면 則群臣이 人人自堅矣리이다 於是에 上이 乃置酒하고 封雍齒爲什方侯【高祖功臣侯年表에 作(計)[汁]邡하고 註에 音什方이라하고 索隱註에 又如字讀이라 縣屬廣漢郡하니 今漢州縣이라】하고 而急趣(促)丞相御史하야 定功行封하니 群臣이 罷酒에 皆喜曰 雍齒도 尙爲侯【漢書云 雍齒且侯라】하니 我屬은 無患矣라하더라 〈出留侯世家〉

上이 이미 큰 공신 20여 명을 봉하고 그 나머지는 밤낮으로 공을 다투어 결단하지 못하였다. 上이 洛陽의 南宮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바라보니, 왕왕 서로 백사장 가운데에 앉아서 함께 귓속말을 하였다. 上이 묻기를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하니, 留侯(張良)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布衣로 일어나시어 이들로 천하를 취하셨는데, 이제 천자가 되시자 봉한 것은 다 옛 친구들이고 죽인 것은 모두 원수나 원한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서로 모여 반란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걱정하여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留侯가 대답하기를 “上께서 평소 미워하는 사람 중에 여러 신하들이 함께 아는 것은 누가 가장 심한 자입니까?” 하니, 上이 말하기를 “雍齒가 나와 옛 원한이 있어서【高帝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雍齒로 하여금 豊邑을 지키게 하였는데, 雍齒가 평소 高帝에게 소속되기를 싫어하여 즉시 豊邑을 가지고 魏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高帝가 여러 번 공격한 뒤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여러 번 나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였으니, 내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공이 많기 때문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노라.” 하였다. 留侯가 말하기를 “지금 급히 먼저 雍齒를 봉해주시면 여러 신하들이 사람마다 스스로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上이 술자리를 베풀고 雍齒를 봉하여 什方侯로【什方侯가 ≪史記≫ 〈高祖功臣侯年表〉에는 ‘汁邡’으로 되어 있고 註에 “音이 什方이다.” 하였다. ≪史記索隱≫ 註에는 또 ‘본래 글자대로 읽는다.’고 하였다. 縣이 廣漢郡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漢州縣이다.】 삼고, 급히 丞相과 御史를 재촉하여 공을 결정해서 分封을 시행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술자리가 파하자 모두 기뻐하여 말하기를 “雍齒도 오히려 侯가 되었으니,【‘雍齒尙爲侯’가 ≪漢書≫에는 ‘雍齒도 侯가 되었다.[雍齒且侯]’로 되어 있다.】 우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에 나옴 -

溫公張良이 爲高帝謀臣하야 委以心腹하니 宜其知無不言이어늘 安有聞諸將謀反하고 必待高帝自見偶語然後에 乃言之耶아 蓋以高帝初得天下하야 數用愛憎行誅賞하야 或時害至公하니 群臣이 往往有觖望自危之心【觖望은 猶言怨望也라 一說에 觖者는 缺也니 不滿所望而怨耳라】이라 故로 이 因事納忠하야 以變移帝意하야 使上無阿私之失하고 下無猜忌之謀하야 國家無虞하고 利及後世하니 若者는 可謂善諫矣로다

溫公이 말하였다.

張良高帝의 謀臣이 되어 心腹의 임무를 맡았으니, 마땅히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어야 할 터인데, 어찌 諸將이 모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도 반드시 高帝가 諸將들이 무리지어 귓속말을 하는 것을 직접 보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말하였는가? 이는 高帝가 처음 천하를 얻고서 자주 愛憎의 감정에 따라 罰과 賞을 시행하여 혹은 때로 지극히 공정함을 해치니, 群臣들이 왕왕 원망하여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였다.【觖望은 怨望이란 말과 같다. 一說에 “觖은 缺이니, 기대하던 바에 못 미쳐 원망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張良이 일로 인하여 忠言을 바쳐서 高帝의 생각을 바꾸게 하여, 위로는 아첨하는 실수가 없고 아래로는 시기하는 계책이 없어서 국가가 근심이 없고 이익이 후세에 미치게 한 것이니, 張良과 같은 자는 잘 간했다고 이를 만하다.”

[新增] 唐仲友曰 人但知子房雍齒言하고 不知爲救雲夢之失이니라

唐仲友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다만 子房雍齒를 위하여 말한 것만 알고 雲夢의 잘못을 바로잡은 줄은 알지 못한다.”

列侯畢已受封에 詔定元功十八人位次【蕭相國世家云 奏位次라 ○ 高祖功臣表云 作十八侯之位次라하니라】한대 皆曰 平陽侯曹參이 身被七十創하고 攻城略地하야 功最多하니 宜第一이니이다 鄂千秋進曰 群臣議皆誤로소이다 夫曹參이 雖有野戰略地之功이나 此特一時之事니이다 上이 與楚相距五歲에 失軍亡衆하야 跳身【跳는 音調니 輕身走去也라】遁者數矣어시늘 蕭何嘗從關中하야 遣軍補其處하고 又軍無見(現)糧이어늘 蕭何轉漕關中하야 給食不乏하고 陛下雖數亡山東이나 何常全關中하야 以待陛下하니 此는 萬世之功也니이다 今雖亡等百數나 何缺於漢이완대 奈何欲以一旦之功으로 而加萬世之功哉리잇고 蕭何第一이요 曹參이 次之니이다 上曰 善타하고 於是에 乃賜蕭何帶劍履上殿하고 入朝不趨【古者에 君必帶劍하니 衛身且昭武備也라 秦法에 群臣上殿에 不得持尺寸之兵하니라 草曰菲요 麻曰屨요 皮曰履니 所以從軍이니 軍容不入國이라 故皆不許上殿이라 又趨君前은 必崇敬故也니 今賜劍履上殿入朝不趨는 皆殊禮也라】하다 上曰 吾聞進賢受上賞이라하니 蕭何功雖高나 得鄂君하야 乃益明이라하고 於是에 封鄂千秋하야 爲安平侯하다 〈出蕭相國世家〉

列侯가 모두 封爵을 받자, 조칙을 내려 元功(元勳) 18명의 位次를 정하게 하니,【≪史記≫ 〈蕭相國世家〉에는 “功臣의 位次를 아뢴 것이다.” 하였다. ○ ≪史記≫ 〈高祖功臣表〉에는 “18侯의 位次를 만든 것이다.” 하였다.】 모두들 말하기를 “平陽侯曹參은 몸에 70군데의 상처를 입고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여 공이 가장 많으니, 마땅히 제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鄂千秋가 나와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曹參이 비록 들에서 싸워 땅을 공략한 공이 있으나 이는 다만 한 때의 일일 뿐입니다. 上이 楚나라와 5년 동안 서로 대치하여 군대를 잃고 무리를 잃어 單身으로【跳는 음이 조이니, 跳身은 가볍게 경무장하고 달아나는 것이다.】 도망한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蕭何가 항상 關中에서 군대를 보내어 그 빈 곳을 보충하였고, 또 군대가 당장 먹을 양식이 없었는데 蕭何가 關中에서 轉漕하여 식량을 공급해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폐하가 비록 여러 번 山東을 잃었으나 蕭何가 항상 關中을 온전히 하여 폐하를 기다렸으니, 이는 만대의 공로입니다. 이제 비록 曹參 등은 백 명이 없다 한들 漢나라에 무슨 결함이 되기에 어찌하여 하루아침의 공을 가지고 만대의 공 위에 올려 놓으려 한단 말입니까? 蕭何가 제일이요, 曹參은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上이 “옳다.” 하고 마침내 蕭何에게 칼을 차고 무신이 신는 신을 신고 大殿에 오르며 조정에 들어올 때에 종종걸음으로 달리지 않도록 특전을 내렸다.【옛날에 임금은 반드시 검을 차니, 몸을 호위하고 또 武備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秦나라의 法에 신하들은 大殿에 올라갈 때에 한 치나 한 자의 병기도 휴대할 수가 없었다. 짚으로 만든 신을 菲라 하고, 삼으로 만든 신을 屨라 하고, 가죽으로 만든 신을 履라 하는 바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가는 것이니 군복 차림으로는 國都에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모두 大殿에 올라옴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또 임금의 앞에서 종종걸음 치는 것은 군주를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이제 검을 하사해 주고 가죽신을 신고 大殿 위에 올라오며 조정에 들어와 종종걸음 치지 않게 함은 모두 〈蕭何에게만은 특전을 내려〉 특별히 예우한 것이다.】上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어진 이를 추천하면 최고의 상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蕭何의 공이 비록 높으나 鄂君을 얻어서 더욱 분명해졌다.” 하고는 이에 鄂千秋를 봉하여 安平侯를 삼았다. - 《史記 蕭相國世家》에 나옴 -

○ 初에 匈奴畏秦하야 北徙十餘年이러니 及秦滅에 匈奴復稍南渡러라 單于頭曼【頭曼은 單于之名이라】이 有太子하니 曰冒頓이라 自立爲單于하야 遂滅東胡하고 走月氏【走는 驅而走之也라 月氏는 西域國이니 初在蔥嶺西安息東이러니 後爲匈奴擊破하고 遂分爲兩種하야 遠去過大宛하야 西擊大夏而臣之하니 都嬀水北者는 爲大月氏요 其餘小衆이 保南山羌者는 號小月氏니 去陽關幾萬里라 或曰 氏는 音支요 〈字〉或作支라 括地志에 涼甘(蕭)[肅]延沙等州 本月氏地라】하고 侵燕, 代하다 是時에 漢, 楚相距하야 中國이 罷於兵革이라 以故로 冒頓이 得自强하야 控弦之士【控은 引也니 謂能滿引弓弩者라】 三十餘萬이라 圍韓王【故韓襄王孽子니 高祖二年에 爲韓王하니라】於馬邑한대 이 以馬邑降하니 匈奴冒頓이 因引兵南踰句注하야 攻太原하야 至晉陽하다 〈出匈奴傳〉

처음에 匈奴가 秦나라를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옮겨간 지 10여 년이었는데, 秦나라가 멸망하자 匈奴가 다시 차츰 남쪽으로 건너왔다. 單于 頭曼에게【頭曼은 單于의 이름이다.】태자가 있었으니, 이름을 冒頓이라 하였다. 그는 스스로 서서 單于가 되어 마침내 東胡를 멸망시키고月氏를 패주시키고【走는 몰아서 달아나게 하는 것이다. 月氏는 西域의 나라이니, 처음에 蔥嶺의 서쪽, 安息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뒤에 匈奴에게 격파당하고 마침내 둘로 나뉘어 멀리 떠나 大宛을 지나 서쪽으로 大夏를 공격해서 신하로 삼으니, 嬀水 북쪽에 도읍한 것은 大月氏이고, 그 나머지 소수의 무리가 南山의 羌을 보전한 것은 小月氏라고 이름하였는 바, 陽關과의 거리가 수만 리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氏는 음이 지이고 글자를 혹 支로도 쓴다.” 하였다. ≪括地志≫에 “涼州‧甘州‧肅州‧延州‧沙州 등이 본래 月氏의 땅이다.” 하였다.】燕‧代 지방을 침략하였다. 이때 漢나라와 楚나라가 서로 대치하여 중국이 전란에 피폐하였다. 이 때문에 冒頓이 스스로 강해질 수가 있어서 활을 당겨 쏘는 힘센 군사가【控은 당김이니, 控弦之士는 활과 쇠뇌를 가득히 당길 수 있는 자를 이른다.】 30여만 명이었다. 韓王을 馬邑에서 포위하자 韓王 信이【韓王 信은 옛날 韓나라 襄王의 庶子이니, 高祖 2년에 韓王으로 삼았다.】馬邑을 가지고 항복하니, 흉노冒頓이 인하여 병력을 인솔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句注를 넘어 太原을 공격하여 晉陽에 이르렀다.- 《史記 匈奴列傳》에 나옴 -

○ 帝悉去秦苛儀法하야 爲簡易하니 群臣이 飮酒爭功하고 醉或妄呼하고 拔劍擊柱어늘 帝益厭之라 叔孫通이 說上曰 儒者는 難與進取요 可與守成이니 臣은 願徵魯諸生하야 與臣弟子로 共起朝儀하노이다 帝曰 得無難乎아 五帝異樂하고 三王不同禮하니 二者는 因時世人情하야 爲之節文者也라 臣은 願采古禮與秦儀하야 雜就之하노이다 上曰 可하다 試爲之호되 令易知하야 度吾所能行하야 爲之하라 魯有兩生이 不肯行曰 今에 天下初定하야 死者未葬하고 傷者未起어늘 又欲起禮樂하니 禮樂所由起는 積德百年而後에 可興也【言行德敎百年然後에 可起禮樂이라】라 吾不忍爲公所爲로니 公往矣어다 叔孫通이 笑曰 鄙儒不知時變이라하고 遂與所徵三十人西하야 及上左右爲學者와 與其弟子百餘人으로 爲緜蕞하야 野外習之【蕞은 立竹及茅索營之하야 習禮於其中也라 [釋義] 緜蕞은 表位標準也라 一說에 緜은 謂置設緜索하야 爲習肄處요 蕞은 謂以茅翦植地하야 爲(蕞)[纂]位尊卑之次라】하다

황제가 秦나라의 까다로운 儀法(의식과 예법)을 모두 제거하여 簡易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술을 마시고 공을 다투며, 취하면 혹 함부로 고함치고 검을 뽑아 기둥을 치기도 하니, 황제가 더욱 이를 싫어하였다. 叔孫通이 上을 설득하기를 “儒者는 함께 進取하기는 어렵고 함께 守成은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魯 지방의 여러 儒生들을 불러 신의 제자와 함께 조정의 예의를 起草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황제가 “어렵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다. 叔孫通이 대답하기를 “五帝는 음악을 달리하였고 三王은 禮가 같지 않으니, 두 가지는 時代와 人情을 따라 節文하는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옛날의 禮와 秦나라의 儀式을 채택하여 섞어서 만들었으면 합니다.” 하니, 上이 “가하다. 시험 삼아 만들되 알기 쉽게 하여 내가 행할 수 있는가를 헤아려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魯 지방에 두 유생이 가려고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갓 평정되어 죽은 자를 아직 장례 하지 못하였고 부상한 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또다시 禮樂을 일으키고자 하니, 禮樂이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德을 쌓은 지 백 년이 된 뒤에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德敎를 백 년 동안 행한 뒤에야 禮樂을 일으킬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나는 公이 하는 짓을 차마 할 수가 없으니, 公은 가라.” 하였다. 叔孫通이 웃으며 말하기를 “비루한 儒者가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는 마침내 불러온 30명과 함께 서쪽으로 가서 上의 좌우 신하 중에 학문을 한 자와 그의 제자 백여 명과 함께 緜蕞을 만들어 야외에서 익혔다.【[原註] 蕞은 대나무와 띠풀의 새끼줄을 세워 자리를 만들어서 그 가운데에서 禮를 익힌 것이다. [釋義] 緜蕞은 자리를 표시하는 標準이다. 一說에 “緜은 끈을 설치하여 〈조회하는 의식을〉 익히는 곳을 만듦을 이르고, 蕞은 띠풀을 잘라 땅에 세워 尊卑의 위차를 자리매김을 이른다.” 하였다.】

[辛丑]七年

[辛丑]七年이라

冬十月【時尙以十月爲歲首故로 行朝賀之禮라】에 長樂宮이 成하다 諸侯群臣이 皆朝賀할새 諸侯王以下至吏六百石히 莫不震恐肅敬하고 禮畢에 復置法酒【猶言禮酌이니 法者는 進止有禮也라 古人飮酒에 不過三爵하고 君臣百拜하야 終日宴에 不爲亂也라】하니 諸侍坐殿上이 皆伏抑首하야 以尊卑次로 起上壽【壽者는 人之所欲이라 故卑下奉觴進酒에 皆稱上壽하니라】하고 無敢讙譁失禮者라 於是에 帝曰 吾乃今日에 知爲皇帝之貴也라하고 乃拜叔孫通하야 爲太常【漢傳云 拜通爲奉常하니 出史叔孫通傳이라 [釋義] 百官志에 太常卿은 掌禮儀祭祀하야 每祭祀에 先奏其禮儀하고 及行事에 常贊天子라】하다

7년(신축 B.C.200))

겨울 10월에【이때는 아직도 秦나라 제도를 따라 10월을 歲首로 삼았기 때문에 朝賀하는 禮를 행한 것이다.】長樂宮이 완성되었다. 제후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朝賀할 적에 제후왕 이하로 연봉 6백 석을 받는 관리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엄숙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禮가 끝나자 다시 法酒(법식을 갖춘 酒宴)를【法酒는 禮酌이란 말과 같으니, 法은 나아가고 멈춤에 禮法이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않았고, 君臣間에 백 번 절하여 종일토록 잔치를 해도 문란하지 않았다.】 베풀었는데 殿 위에서 모시고 앉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숙여서 尊卑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 祝壽를 올리고【壽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므로 낮은 자들이 술잔을 받들어 술을 올릴 때에 모두 上壽라고 칭한다.】 감히 떠들어 失禮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내 오늘날에야 비로소 황제가 된 귀함을 알았다.” 하고는 마침내 叔孫通을 太常으로 임명하였다.【[原註]拜叔孫通 爲太常 : [原註] ≪漢書≫ 〈叔孫通傳〉에는 “叔孫通을 奉常으로 임명했다.” 하였으니, 위의 내용은 ≪史記≫ 〈叔孫通傳〉에 나온 것이다. [釋義] ≪後漢書≫ 〈百官志〉에 “太常卿은 禮儀와 祭祀를 관장하여 제사 지낼 때마다 먼저 禮儀를 아뢰고 제사 지낼 때에 이르면 항상 天子를 돕는다.” 하였다.】

○ 初에 秦有天下에 悉內(納)六國禮儀하야 采其尊君抑臣者存之러니 及通制禮하야 大抵皆襲秦故【襲은 因也니 因襲秦時故事라】러라

처음에 秦나라가 천하를 소유했을 적에 六國의 예의를 모두 받아들여 그 중에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는 것을 채택해 남겨두었는데, 叔孫通이 禮를 제정하게 되자 모두 秦나라의 옛것을 인습하였다.【襲은 인습함이니, 襲秦故는 秦나라 때의 故事를 인습한 것이다.】

溫公曰 禮之爲物이 大矣라 用之於身이면 則動靜有法하야 而百行備焉이요 用之於家면 則內外有別하야 而九族睦焉이요 用之於鄕이면 則長幼有倫하야 而俗化美焉이요 用之於國이면 則君臣有敍하야 而政治成焉이요 用之於天下면 則諸侯順服하야 而紀綱正焉이니 豈直几席之上과 戶庭之間에 得之而不亂哉아 夫以高祖之明達로 聞陸賈之言而稱善하고 睹叔孫通之儀而歎息이나 然所以不能肩於三代之王者는 病於不學而已라 當是之時하야 得大儒而佐之하야 與之以禮爲天下런들 其功烈이 豈若是而止哉아 惜夫라 叔孫生之爲器小也여 徒竊禮之糠粃하야 以依世諧俗하야 取寵而已라 遂使先王之禮로 淪沒而不振하야 以迄于今하니 豈不痛甚哉아

溫公이 말하였다.

“禮란 물건이 중대하다. 자기 몸에 사용하면 動靜이 법도가 있어서 온갖 행실이 구비되고, 가정에서 사용하면 內外가 분별이 있어서 九族이 화목하고, 鄕里에서 사용하면 長幼가 차례가 있어서 풍속의 교화가 아름답고, 국가에서 사용하면 君臣이 차례가 있어서 정치가 이루어지고, 천하에 사용하면 제후들이 순히 복종하여 기강이 바루어지니, 어찌 几席의 위와 戶庭의 사이에서 禮를 얻어 혼란하지 않을 뿐이겠는가. 高祖의 밝고 통달함으로 陸賈의 말을 듣고서 좋다고 칭찬하였고 叔孫通의 의식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그러나 三代의 王에게 비견되지 못하는 까닭은 배우지 않은 병통일 뿐이다. 이때를 당하여 큰 유학자를 얻어 보좌하게 해서 그와 더불어 禮로써 천하를 다스렸던들 그 功烈(업적)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는가. 애석하다. 叔孫生의 그릇이 작음이여! 한갓 禮의 糠粃(허울)만 도둑질하여 세상을 따르고 풍속에 영합하여 영광을 취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先王의 禮로 하여금 매몰되어 떨치지 못해서 지금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심히 애통하지 않겠는가.”

上이 自將擊韓王【韓王信이 二年에 以馬邑으로 降匈奴也라】할새 居晉陽이러니 聞冒頓居代谷하고 欲擊之하야 使人覘匈奴한대 冒頓이 匿其壯士肥牛馬하고 但見老弱及羸畜【見은 露也니 下見所長, 見短幷同이라】이라 使者十輩來하야 皆言匈奴可擊이라한대 上이 復使劉敬往이러니 이 還曰 兩國이 相擊하니 此宜夸矜見所長이어늘 今臣往에 徒見羸瘠老弱하니 此는 必欲見短하고 伏奇兵以爭利니 愚는 以爲匈奴不可擊이라하노이다 上이 怒罵曰 齊虜以口舌得官【婁敬은 齊人也라 故云齊虜라 本姓婁러니 高祖賜姓劉하니라】이러니 今乃妄言沮吾軍이라하고 械繫敬廣武【地志에 雁門郡廣武縣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代州雁門縣句注山南四十五里라】하다 帝先至平城【地志에 雁門郡平城縣이니 秦雲中郡雲中縣이다. 括地志에 朔州東三十里定襄縣이 漢平城也니 今大同府是라】하야 兵未盡到에 冒頓이 縱精兵四十萬騎【匈奴傳云 縱精兵三十餘萬騎라】하야 圍帝於白登【括地志에 平城東北三十里에 有白登山하니 白登臺在焉이라】七日이러니 帝用陳平秘計하야 厚遺閼氏【閼氏는 匈奴皇后號라 [釋義] 應劭曰 平이 使畫工圖美女하야 間遣人遺閼氏云호되 漢有美女如此하니 今皇帝困阨하야 欲獻之라한대 閼氏畏奪己寵하야 因謂單于曰 漢天子亦有神靈하야 得其土地하니 非能有之라하니 於是에 匈奴開其一角하야 得突出이라 師古曰 應說은 出桓譚新論이요 非記傳所載니 譚以意測耳라】한대 乃解圍라 上이 至廣武하야 赦劉敬하고 斬前使十輩하고 封爲關內侯【秦制에 有侯號而居京畿하야 無國邑이러니 至漢하야 有食邑하니라】하야 號爲建信侯하다 〈出高紀及劉敬匈奴等傳〉

上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韓王 信을【韓王 信이 2년에 馬邑을 가지고 匈奴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공격한 것이다.】 공격할 적에 晉陽에 머물러 있었는데, 冒頓이 代谷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공격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匈奴를 엿보게 하였는 바, 冒頓이 壯士와 살찐 소와 말은 숨겨두고 다만 노약자와 파리한 가축만을 보이게 하였다.【見은 드러냄이니, 아래의 ‘見所長’과 ‘見短’의 見도 모두 같다.】使者 10명이 와서 모두 匈奴를 공격할 만 하다고 말하자, 上이 다시 劉敬을 시켜 가서 보게 하니, 劉敬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니, 마땅히 뛰어난 점을 과시하고 자랑하여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제 신이 가서 다만 파리하고 수척한 노약자만 보았으니, 이는 반드시 단점을 보여주고 奇兵(기습하는 군대)을 매복하여 이익을 다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匈奴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上이 노하여 劉敬을 꾸짖기를 “齊나라 포로가 口舌로 벼슬을 얻더니【婁敬이 齊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齊나라 포로라고 말하였다. 본래 姓은 婁인데, 高祖가 劉姓을 하사하였다.】 이제 마침내 망언을 하여 우리 군대의 사기를 沮喪하게 한다.” 하고는 劉敬을 형틀을 씌워 廣武에【廣武는 ≪漢書≫ 〈地理志〉에 “雁門郡 廣武縣이다.” 하였고, ≪括地志≫에 “옛 城이 代州 雁門縣 句注山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구류하였다.

황제가 먼저 平城에【平城은 ≪漢書≫ 〈地理志〉에 “雁門郡 平城縣이니 秦나라 雲中郡 雲中縣이다.” 하였고, ≪括地志≫에 “朔州 동쪽 30리 定襄縣이 漢나라 平城이니 지금의 大同府가 이곳이다.” 하였다.】 이르러 군대가 다 도착하지 않았는데, 冒頓이 精兵 40만 騎兵을 풀어놓아【≪漢書≫ 〈匈奴傳〉에는 “精兵 30여만 騎를 풀어놓았다.” 하였다.】 황제를 白登에서【白登은 ≪括地志≫에 “平城 동북쪽 30리에 白登山이 있으니, 白登臺가 이곳에 있다.” 하였다.】 7일 동안 포위하였다. 황제가 陳平의 은밀한 계책을 써서 閼氏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니,【[原註] 閼氏는 匈奴 皇后의 호칭이다. [釋義] 應劭가 말하였다. “陳平이 畫工을 시켜 美女를 그리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 이를 閼氏에게 보내고 이르기를 ‘漢나라에 이와 같은 美女가 있으니, 지금 皇帝가 곤궁하여 이 미녀를 바치고자 한다.’고 하자, 閼氏가 자신의 총애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單于에게 이르기를 ‘漢나라 天子는 또한 神靈함이 있어서 그 땅을 얻었으니,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匈奴가 한 귀퉁이를 열어주어 탈출할 수가 있었다.” 顔師古가 말하였다. “應氏의 말은 桓譚의 ≪新論≫에서 나온 내용이고 歷史의 傳記에 실려있는 것이 아니니, 桓譚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억측한 것일 뿐이다.”】 마침내 포위를 풀었다. 上이 廣武에 이르러 劉敬을 사면하고 먼저 갔던 사신 10명을 목 베었으며, 劉敬을 關內侯로【關內侯는 秦나라 제도에는 侯의 칭호는 있으나 京畿에 거하여 國邑이 없었는데, 漢나라 때에 이르러 食邑이 있었다.】 삼고 號를 建信侯라 하였다.- 《史記》〈高祖本紀〉, 〈劉敬傳〉, 〈匈奴傳〉 등에 나옴 -

○ 帝南過曲逆이라가 曰 壯哉라 縣이여 吾行天下에 獨見洛陽與是耳라하고 乃更封陳平하야 爲曲逆侯【地志에 中山國曲逆縣이니 因濡水至城北하야 曲而西流하야 因名曲逆이러니 章帝醜其名하야 改曰蒲陰이라 括地志에 定州北平縣東南十五里蒲陰故城이 是라 或讀曲逆 音去遇하니 非是라】하다 이 常從征伐하야 凡六出奇計【王氏曰 六出奇計는 請捐金行反間이 一也요 以惡草具進楚使 二也요 夜出女子二千人하야 解滎陽圍 三也요 躡足請封齊王信이 四也요 請僞遊雲夢하야 縛信이 五也요 今解白登之圍 六也라】하니 輒益封邑焉이러라 〈出平本傳〉

황제가 남쪽으로 曲逆縣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웅장하다. 이 縣이여! 내가 천하를 다녀봄에 다만 洛陽과 이곳만을 보았을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陳平을 바꾸어 봉하여 曲逆侯로【曲逆은 ≪漢書≫ 〈地理志〉에 “中山國 曲逆縣이니 濡水를 따라 城 북쪽에 이르러 굽어 서쪽으로 흘러가므로 인하여 曲逆이라고 이름하였는데, 章帝가 그 이름을 나쁘게 여겨 蒲陰으로 고쳤다.” 하였다. ≪括地志≫에 “定州 北平縣 동남쪽 15리 지점의 蒲陰의 옛 城이 이곳이다.” 하였다. 혹은 曲逆의 음을 去遇라고 읽으니 옳지 않다.】 삼았다. 陳平이 항상 정벌에 따라다니면서 무릇 여섯 번 기이한 계책을 내니,【王氏가 말하였다. “여섯 번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는 것은, 黃金을 내어 楚나라에 反間을 행한 것이 첫 번째이고, 나쁘고 거친 음식을 楚나라 사신에게 올린 것이 두 번째이고, 밤에 여자 2천 명을 내보내어 滎陽의 포위를 풀게 한 것이 세 번째이고, 漢王의 발을 밟아 노여움을 제지하여 韓信을 齊王에 봉하게 한 것이 네 번째이고, 거짓으로 雲夢에 노닐게 하여 韓信을 사로잡은 것이 다섯 번째이고, 白登의 포위를 풀게 한 것이 여섯 번째이다.”】 그때마다 封邑을 더하였다.- 《史記 陳丞相世家》에 나옴 -

○ 上이 至長安하니 蕭何治未央宮【在雍州長安縣西北十里長安故城中이라 名未央者는 取詩夜未央하니 勤政之義也라】이어늘 上이 見其壯麗하고 甚怒하야 謂曰 天下匈匈하야 勞苦數歲에 成敗를 未可知어늘 是何治宮室過度也오 何曰 天下方未定이라 故로 可因以就宮室이니이다 且夫天子는 以四海爲家하니 非壯麗면 亡(無)以重威요 且亡(無)令後世有以加也니이다 上이 說하다 〈出漢書高祖紀〉

上이 長安에 이르니, 蕭何가 未央宮을【未央宮은 雍州 長安縣 서북쪽 10리 지점인 長安의 옛 城 가운데에 있다. 未央이라고 이름한 것은 ≪詩經≫ 〈小雅 庭燎〉의 “밤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夜未央]”는 뜻을 취한 것이니, 정사에 부지런히 힘쓴다는 뜻이다.】 잘 꾸몄다. 上은 궁궐이 너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는 매우 노하여 蕭何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흉흉하여 노고한 지 수년이 되었으나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는데, 이 어찌 궁실을 꾸미기를 도에 지나치게 하는가?” 하였다. 蕭何가 대답하기를 “천하가 막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하여 궁실을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천자는 四海를 집으로 삼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중하게 할 수가 없으며, 또 후세로 하여금 궁궐을 이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漢書 高帝紀》에 나옴 -

溫公曰 王者는 以仁義爲麗하고 道德爲威하나니 未聞以宮室鎭服天下也라 天下未定이면 當克己節用하야 以趨民之急이어늘 而顧以宮室爲先하니 豈可謂之知所務哉아 昔에 卑宮室이어늘 而爲瓊宮하니 創業垂統之君이 躬行節儉하야 以訓示子孫이라도 其末流猶入於淫靡어든 況示之以侈乎아 乃云無令後世有以加라하니 豈不謬哉아 至於孝武하야 卒以宮室로 罷敝天下하니 未必不由酇侯啓之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王者는 仁義를 화려함으로 삼고 道德을 위엄으로 삼으니, 궁실을 가지고 천하를 제압하고 복종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천하가 안정되지 못했으면 마땅히 私欲을 이기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시급한 것을 따라야 할 터인데, 도리어 궁실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어찌 힘써야 할 바를 안다고 이르겠는가. 옛날 임금은 궁실을 낮게 지었는데 桀王은 옥으로 궁실을 꾸몄으니, 創業하여 후세에 훌륭한 전통을 남긴 군주가 몸소 절약과 검소함을 실천하여 자손에게 훈시해도 그 末流에는 음탕하고 화려한 데로 들어갔는데, 하물며 사치함을 보여준단 말인가. 그런데 도리어 후세로 하여금 이보다 더할 수 없게 하려 한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孝武帝에 이르러 마침내 궁실로 인해 천하를 피폐하게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酇侯(蕭何)로 말미암아 啓導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新增] 朱氏黼曰 何爲家而不治垣屋하고 曰 令後世賢이면 師吾儉이라하더니 今其爲國엔 而獨以侈示之하니 是는 分國家爲二하야 不以待其子孫者로 而望其君之後世也라 柏梁建章之作이 比未央하면 不知幾倍하니 安在其無以加乎아

朱氏(朱黼)가 말하였다.

蕭何가 집을 지으면서 담장과 지붕을 수리하지 않고는 말하기를 ‘만일 後世가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유독 사치함을 보여주었으니, 이는 집과 나라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그 자손을 대하는 것을 가지고 군주의 후세에 바라지 않은 것이다. 柏梁臺와 建章臺를 지은 것이 未央宮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이보다 더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壬寅]八年

[壬寅]八年이라

匈奴冒頓이 數苦北邊하니 上이 患之어늘 劉敬曰 天下初定에 士卒이 罷於兵하니 未可以武服也요 冒頓이 殺(弑)父代立하야 妻群母【殺은 讀曰弑라 冒頓之父名頭曼이니 以鳴鏑射殺之하고 遂妻其母하니라 [通鑑要解] 匈奴傳에 其俗이 父死에 妻其母하고 兄弟死에 又娶其妻라하니라】하야 以力爲威하니 未可以仁義說也라 誠能以適長公主妻之면 彼必慕以爲閼氏하리니 生子면 必爲太子라 冒頓이 在면 固爲子壻요 死면 則外孫爲單于【單은 音蟬이니 匈奴天子之號也라】니 豈嘗聞外孫이 敢與大父抗禮哉잇가

8년(임인 B.C.199))

匈奴冒頓이 자주 북쪽 변경을 괴롭히니, 上이 이것을 걱정하였다. 劉敬이 말하기를 “천하가 갓 평정됨에 士卒들이 병란에 피폐하니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가 없으며, 冒頓이 아비를 죽이고 대신 즉위하여 여러 어미들을 아내로 삼아【[釋義] 殺父의 殺은 弑로 읽는다. 冒頓의 아버지 이름이 頭曼이니, 鳴鏑이라는 화살로 아비를 쏘아 죽이고 마침내 그 어머니를 아내로 삼았다. [通鑑要解] ≪漢書≫ 〈匈奴傳〉에 “그 풍속이 아버지가 죽으면 어머니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또 그 아내(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산다.” 하였다.】 힘으로써 위엄을 삼으니 仁義로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適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면 저가 반드시 사모하여 閼氏로 삼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태자가 될 것입니다. 冒頓이 생존해 있으면 진실로 子壻(사위)가 되고 죽으면 外孫이 單于가【單은 음이 선이니, 單于는 匈奴 天子의 호칭이다.】 될 것이니, 어찌 일찍이 外孫이 감히 大父(외조부)와 더불어 대등한 예를 행한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하였다.

[癸卯]九年

[癸卯]九年이라

上이 取家人子【謂庶人家之女子라 [通鑑要解] 帝欲遣長公主한대 呂后不可라하니 乃取家人子也라 一說에 家人子는 宮人名號也라】하야 名爲長公主라하야 以妻單于하고 使劉敬으로 結和親約하다 〈出史劉敬傳〉

9년(계묘 B.C.198))

上이 家人의 자식을【[釋義] 家人子는 일반 백성의 딸을 이른다. [通鑑要解] 高帝가 長公主를 보내고자 하였는데 呂后가 不可하다 하니, 마침내 家人의 자식을 취한 것이다. 一說에 “家人子는 宮人의 명칭이다.” 하였다.】 취하여 이름을 長公主라 하여 單于에게 시집보내고劉敬으로 하여금 和親의 맹약을 맺게 하였다. - 《史記 劉敬傳》에 나옴 -

溫公建信侯冒頓殘賊하야 不可以仁義說라하고 而欲與爲婚姻하니 何前後之相違也오 夫骨肉之恩과 尊卑之敍는 唯仁義之人이 爲能知之어늘 奈何欲以此服冒頓哉아 蓋上世帝王之御夷狄也는 服則懷之以德하고 叛則震之以威하니 未聞與爲婚姻也라 且冒頓이 視其父如禽獸而獵之하니 奚有於婦翁이리오 建信侯之術이 固已疎矣라 況魯元【元은 長也니 食邑於魯라 高帝五年에 趙王張耳卒하고 子敖嗣하야 而尙高帝長女魯公主爲后하니라】이 已爲趙后하니 又可奪乎아

溫公이 말하였다.

建信侯(劉敬)가 이르기를 ‘冒頓이 잔인하고 해쳐서 仁義로 설득할 수가 없다.’ 하고는 그와 더불어 혼인하고자 하였으니, 어찌하여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가. 骨肉의 은혜와 尊卑의 질서는 오직 어질고 의로운 사람만이 능히 알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가지고 冒頓을 굴복시키고자 한단 말인가. 上古時代에 帝王이 夷狄을 제어함은 복종하면 덕으로써 품어주고 배반하면 위엄으로써 두렵게 하였으니, 그와 더불어 혼인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 冒頓이 그 아비를 보기를 禽獸처럼 여겨서 사냥하였으니, 어찌 婦翁(장인)이 안중에 있겠는가. 建信侯의 방법이 진실로 이미 엉성하다. 더구나 嫡長公主인 魯元公主가【元은 으뜸이니, 魯나라를 食邑으로 삼았다. 高帝 5년에 趙王 張耳가 죽고 아들 敖가 뒤를 이어서 高帝의 長女인 魯公主를 后로 삼았다.】 이미 趙王張敖의 后가 되었으니, 또 빼앗아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

是歲에 更以丞相로 爲相國하다

이 해에 다시 丞相蕭何를 相國으로 삼았다.

[甲辰]十年

[甲辰]十年이라

戚姬有寵於上하야 生趙王如意【趙王敖廢하야 爲宣平侯하고 徙代王如意하야 爲趙王하니라】러니 上이 以太子仁弱이라하야 欲廢之而立趙王하니 大臣이 爭之호되 皆莫能得이라 御史大夫周昌이 廷爭之彊이어늘 上이 問其說한대 의 爲人이 吃【音訖이니 言之難也라】이요 又盛怒하야 曰 臣이 口不能言이나 然臣이 期期【王氏曰 期期者는 以其口吃故로 疊語라】知其不可하노니 陛下欲廢太子인댄 臣은 期期不奉詔호리이다 上이 欣然而笑하다

10년(갑진 B.C.197))

戚姬가 上에게 총애가 있어 趙王 如意를【趙王 敖가 폐위되어 宣平侯가 되고, 代王 如意를 옮겨 趙王으로 삼았다.】 낳았는데, 上은 태자가 인자하고 나약하다 하여 그를 폐하고 趙王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니, 대신들이 이를 간쟁하였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였다. 御史大夫周昌이 조정에서 간쟁하기를 강력히 하자, 上이 그 이유를 물었다. 周昌은 사람됨이 말을 더듬었으며,【吃은 音이 흘이니, 말을 더듬는 것이다.】 또 대단히 노하여 말하기를 “신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기기 기필코【王氏가 말하였다. “期期는 말을 더듬기 때문에 말을 중첩한 것이다.”】 그 불가함을 아오니, 폐하께서 태자를 폐하고자 하신다면 신은 기기 기필코 詔命을 받들지 않겠습니다.” 하자, 上이 흔연히 웃었다.

○ 初에 上이 以陽夏侯豨로 爲相國하야 監趙, 代邊兵이러니 過辭淮陰侯한대 淮陰侯挈其手하고 辟左右하고 嘆曰 公所居는 天下精兵處也요 而公은 陛下之信幸臣也라 人言公畔(叛)이면 陛下必不信이라가 三至면 必怒而自將하리니 吾爲公從中起면 天下를 可圖也리라 陳豨曰 謹奉敎호리이다 九月에 遂與王黃等反하야 自立爲代王하고 劫略趙, 代어늘 上이 自擊之러니 至邯鄲하야 喜曰 不南據邯鄲하고 而阻漳水【阻는 恃也라 地志에 漳水有二하니 一은 出上黨沾縣大黽谷하니 今平定軍樂平縣少山也니 名爲淸漳이요 一은 出上黨長子縣鹿谷山하니 今潞州長子發鳩山也니 名爲濁漳이라 東至鄴하야 與淸漳合이라】하니 吾知其無能爲矣로다 上이 令周昌으로 選趙壯士可令將者한대 白見四人【謂告白於天子而召見之也니 見如字라】이어늘 上이 嫚罵曰 豎子能將乎아하니 四人이 慙하야 皆伏地라 封各千戶하야 以爲將하니 左右諫曰 今에 封此何功이니잇고 上曰 非汝所知라 陳豨反하야 趙代地皆豨有하니 吾以羽檄【檄은 以木簡爲書하니 長尺二寸이라 有急事면 則加鳥羽揷之하니 示速疾也라】으로 徵天下兵호되 未有至者하니 今計는 唯獨邯鄲中兵耳라 吾何愛四千戶하야 不以慰趙子弟리오한대 皆曰 善타하다 上이 聞將이 皆故賈人하고 曰 吾知所以與之矣라하고 乃多以金購將하니 將이 多降이러라 〈出史高紀及韓信傳〉

처음에 上이 陽夏侯陳豨를 相國으로 삼아 趙나라와 代나라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陳豨淮陰侯(韓信)를 방문하여 하직인사를 하자, 淮陰侯가 그의 손을 잡고 좌우를 물리치고서 한탄하기를 “公이 있는 곳은 천하의 精銳兵이 모인 곳이고, 公은 폐하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입니다. 사람들이 公이 배반했다고 말하면 폐하는 반드시 믿지 않다가 세 번 이르면 반드시 노하여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할 것이니, 내가 公을 위하여 중앙에서 일어나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陳豨가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9월에 마침내 陳豨王黃 등과 함께 배반하여 스스로 서서 代王이 되고趙나라와 代나라를 위협하여 공략하였다. 上이 직접 출정하여 공격하였는데, 邯鄲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하기를 “陳豨가 남쪽으로 邯鄲을 점거하지 않고 漳水를 의지하고【阻는 믿음이다. 漳水는 ≪漢書≫ 〈地理志〉에 “漳水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上黨 沾縣 大黽谷에서 나오니 지금의 平定軍 樂平縣 少山인 바, 淸漳이라 이름하고, 하나는 上黨 長子縣 鹿谷山에서 나오니 지금의 潞州 長子縣 發鳩山인 바, 濁漳이라 이름한다. 동쪽으로 鄴에 이르러 淸漳과 합류한다.” 하였다.】 있으니, 나는 그가 큰 일을 하지 못함을 알겠다.” 하였다.

上이 周昌으로 하여금 趙나라 壯士 중에 장수를 시킬 만한 자를 선발하게 하니, 황제에게 아뢰어서 네 사람을 불러 보았다.【천자에게 아뢰어서 네 사람을 불러 본 것이니, 見은 본래의 글자대로 읽는다.】上이 거만스레 꾸짖어 말하기를 “豎子가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 하니, 네 사람이 부끄러워하여 모두 땅에 엎드렸다. 〈上이〉 이들을 각각 千戶에 봉하여 장수로 삼자, 좌우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지금에 이들을 봉하심은 무슨 공로가 있어서입니까?” 하니, 上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陳豨가 배반하여 趙나라와 代나라 지역이 모두 陳豨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긴급한 檄文으로【檄文은 木簡으로 글을 만드니, 길이가 1척 2寸이다. 긴급한 일이 있으면 새의 깃을 檄書의 위에 꽂으니, 신속해야 함을 보인 것이다.】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나 오는 자가 없으니, 지금의 계책은 오직 邯鄲에 있는 병력일 뿐이다. 내 어찌 4천 호를 아껴서 趙나라 지방의 子弟들을 위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上은 陳豨의 장수들이 모두 옛날 장사꾼이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이들을 상대할 바를 알았다.” 하고는 이에 많은 금을 가지고 陳豨의 장수들을 매수하니,陳豨의 장수들이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 《史記》〈高祖本紀〉와 〈淮陰侯列傳〉에 나옴 -

東萊呂氏曰 踞洗以挫黥布하고 隨以王者之供帳하며 嫚罵以挫趙將하고 而隨以千戶之侯封하야 用不測之辱하고 施不測之恩하야 顚倒豪傑하야 莫知端倪하니 此帝之所以能鼓舞一世也니라

東萊呂氏가 말하였다.

高帝가 거만하게 床에 걸터앉아 발을 씻음으로써 黥布를 꺾고는 王者가 사용하는 물품과 휘장을 뒤이어 주었으며, 만만하게 꾸짖어서 趙나라 장수를 꺾고는 千戶의 封侯를 뒤따르게 해서, 측량할 수 없는 모욕을 쓰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서 豪傑들을 전도시켜 단서를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高帝가 한 세상을 鼓舞할 수 있었던 바이다.”

[乙巳]十一年

[乙巳]十一年이라

軍이 遂敗【十二年에 追斬之하다】하다 淮陰侯이 稱病不從擊하고 陰使人至所하야 與通謀러니 其舍人弟【舍人은 親近左右之通稱也라 其弟謝公著 嘗得罪於韓信이어늘 信欲殺之하니라】 上變하야 告信欲反이어늘 呂后蕭相國謀하고 詐令人從上所來하야 言 已得死라하니 列侯群臣이 皆賀라 相國이 紿曰 雖疾이나 彊入賀하라 入이어늘 呂后使武士로 縛斬之한대 方斬에 曰 吾悔不用蒯徹之計하야 乃爲兒女子所詐하니 豈非天哉리오 遂夷信三族하다 〈出史記本傳〉

11년(을사 B.C.196))

陳豨의 군대가 마침내 패배하였다.【12년에 陳豨를 잡아 목을 베었다.】淮陰侯韓信이 병을 칭탁하여 陳豨를 치는 上을 따라가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시켜 陳豨의 처소에 이르러서 반란하는 계책을 공모하였다. 그 舍人의 아우가【舍人은 좌우의 가까운 사람의 통칭이다. 그의 아우 謝公著가 일찍이 韓信에게 죄를 짓자 韓信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告變하여韓信이 배반하고자 한다고 고발하자, 呂后蕭相國과 모의하고는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上의 처소에서 온 것처럼 하여 ‘陳豨가 이미 잡혀 죽었다.’고 말하게 하니, 列侯와 群臣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蕭相國韓信을 속여 말하기를 “비록 질병이 있으나 억지로 들어가 축하하라.” 하였는데, 韓信이 들어오자 呂后가 武士로 하여금 韓信을 포박하게 하여 목을 베었다. 막 목을 베려 할 적에 韓信이 말하기를 “내가 후회스럽게도 蒯徹의 계책을 쓰지 아니하여 마침내 아녀자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天運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韓信의 三族을 멸하였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옴 -

溫公曰 世或以韓信爲首建大策하야 與高祖로 起漢中하야 定三秦하고 分兵以北하야 禽(擒)魏, 取代하고 仆趙【成安君陳餘 爲代王하니라 仆趙는 歇也라】, 脅燕하고 東擊齊而有之하고 南滅楚垓下하니 漢之所以得天下者는 大抵皆之功也라 觀其距蒯徹之說하고 迎高祖於陳하면 豈有反心哉아 良由失職怏怏하야 遂陷悖逆이라 夫以盧綰은 里閈舊恩으로도 猶南面王燕이어늘 乃以列侯奉朝請【朝는 朝謁이니 春朝曰朝요 秋朝曰請이니 言奉朝會請召而已라 上庚子年에 封信爲淮陰侯하니라】하니 豈非高祖亦有負於哉아하나니 臣以爲高祖用詐謀하야 禽於陳하니 言負則有之어니와 雖然이나 亦有以取之也니이다 始에 漢與楚相距滎陽에 滅齊하고 不還報而自王하며 其後에 漢追楚至固陵하야 與期共攻楚로되 而不至하니 當是之時하야 高祖固有取之心矣나 顧力不能耳니 及天下已定하야는 則復何恃哉잇가 夫乘時以徼利者는 市井之志也요 酬功而報德者는 士君子之心也라 이 以市井之志로 利其身하고 而以士君子之心으로 望於人이면 不亦難哉잇가 是故로 太史公【司馬遷傳註에 百官表에 無太史公하고 談爲太史令耳니 遷이 尊其父稱公이라 又云 周制에 外史掌四方之志하야 布在諸侯國하니 其位上士라 皆在諸侯之卿上하니 秦亦有之라 故漢儀所云太史在丞相上이 謂此也라】論之曰 假令韓信이 學道謙讓하야 不伐【伐은 誇功이니 如伐木之伐이라 凡人矜其行能이면 乃所以自伐其能也라 故謂伐也라】己功하고 不矜其能이런들 則庶幾哉라 於漢家勳에 可以比周太公之徒하야 後世血食矣어늘 不務出此하고 而天下已集에 乃謀畔逆하니 夷滅宗族이 不亦宜乎아하니이다

溫公이 말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韓信이 첫 번째로 큰 계책을 세워 高祖와 함께 漢中에서 일어나 三秦을 평정하고, 군대를 나누어 북쪽으로 가서 魏王을 사로잡고 代나라를 점령하고 趙나라를 쓰러뜨리고【成安君 陳餘가 代王이 되었다. 趙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趙王 歇을 사로잡은 것이다.】燕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齊나라를 공격하여 소유하고 남쪽으로 楚나라를 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漢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은 대저 모두 韓信의 공로이다. 그가 蒯徹의 말을 거절하고 高祖를 陳 땅에서 맞이한 것을 보면 어찌 배반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진실로 직책을 잃고 怏怏不樂하여 마침내 悖逆에 빠지게 된 것이다. 盧綰은 한 마을 사람이라는 옛 은혜 때문에 오히려 南面하여 燕나라에 왕이 되었는데, 韓信은 마침내 列侯로서 朝請을 받들게 하였으니,【朝는 朝謁이니, 봄에 뵙는 것을 朝라 하고 가을에 뵙는 것을 請이라 하니, 조회와 부름을 받들 뿐임을 말한 것이다. 앞의 庚子年에 韓信을 봉하여 淮陰侯로 삼았다.】 어찌 高祖가 또한 韓信을 저버림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臣이 생각하건대 高祖가 속임수를 써서 韓信을 陳에서 사로잡았으니, 그를 저버렸다는 것은 그러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韓信 또한 이것을 自取함이 있습니다. 처음에 漢나라가 楚나라와 滎陽에서 서로 대치할 적에 韓信은 齊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와 보고하지 않고는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 漢나라가 楚나라를 추격하여 固陵에 이르러서 韓信과 함께 楚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韓信이 오지 않았으니, 이때를 당하여 高祖가 진실로 韓信을 잡으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다만 힘이 불가능하였을 뿐입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이르러서는 韓信이 다시 무엇을 믿겠습니까.

때를 타서 이익을 바라는 것은 市井輩의 마음이요, 공로에 보답하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은 士君子의 마음입니다. 韓信이 시정배의 마음으로 그 몸을 이롭게 하고 士君子의 마음을 남에게 바란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太史公(司馬遷)이【≪漢書≫ 〈司馬遷傳〉의 註에 “≪漢書≫ 〈百官表〉에는 太史公이 없고 司馬談이 太史令이 되었을 뿐이니, 司馬遷이 그 아버지를 높여 公이라고 칭한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周나라 제도에 外史는 四方의 기록을 관장하여 諸侯國에 널리 있으니, 그 지위가 上士이다. 모두 諸侯國의 卿 위에 있으니, 秦나라에도 또한 있었다. 그러므로 ≪漢官儀≫에 이른바 ‘太史가 丞相의 위에 있다.’는 것은 이것을 이른다.” 하였다.】 논평하기를 ‘가령 韓信이 道를 배워 겸양해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伐은 공로를 과시함이니, 나무를 벤다는 伐과 같다. 무릇 사람이 자신의 행실과 재능을 자랑하면 이는 바로 자신의 재능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伐이라 이른다.】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았던들 거의 漢나라의 공훈에 있어서 周公, 召公太公의 무리에 견주어지고 후세에 血食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여기로 나오기를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마침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종족을 멸함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한 것입니다.”

[新增] 胡氏曰 功過를 當相準이니 功을 不可忘也라 迎陳之禮는 可以贖自王之釁이요 拒之意는 可以免失期之罪니 未有反計면 則當侯以次國이요 逆謀旣露라도 猶當宥其子孫이니 如此면 則漢祖之功과 討信之罪에 各盡其道而無負矣리라

胡氏가 말하였다.

“功과 과오를 마땅히 따져 상쇄하여야 하니, 韓信의 功을 잊어서는 안 된다. 陳 땅에서 高祖를 맞이한 禮는 스스로 서서 왕이 된 잘못을 속죄할 수 있었고, 蒯徹의 말을 거절한 뜻은 기한을 어긴 죄를 면할 수 있었으니, 배반할 계책이 있지 않았다면 작은 나라의 侯로 봉해주었어야 하고, 逆謀가 이미 드러났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자손을 용서해 주었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였다면 漢나라 高祖韓信의 功을 기억함과 韓信의 죄를 토벌함에 있어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저버림이 없었을 것이다.”

上이 還洛陽하야 聞淮陰侯死하고 問呂后死에 亦何言고 后曰 言恨不用蒯徹之計라하더이다 上이 詔齊捕之한대 蒯徹이 至어늘 上曰 若이 敎淮陰侯反乎아 對曰 然하니이다 秦失其鹿에 天下共逐之【以鹿喩帝位라 太公六韜曰 取天下如逐鹿이라하니라】하야 高材疾足者先得焉이라 跖【跖作蹠하니 柳下惠之弟라 正義曰 蹠은 本黃帝時大盜名이니 下惠弟爲天下大盜故로 亦號盜跖하니라】之狗吠하니 非不仁이언마는 狗固吠非其主니 當是時하야 臣이 唯知韓信이요 非知陛下니이다 上曰 置之하라 〈出蒯通傳〉

上이 洛陽으로 돌아와 淮陰侯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呂后에게 묻기를 “韓信이 죽을 적에 또한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呂后가 대답하기를 “韓信蒯徹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上이 齊나라에 명하여 蒯徹을 체포하게 하니, 蒯徹이 잡혀왔다. 上이 말하기를 “네가 淮陰侯에게 배반하도록 가르쳤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秦나라가 그 사슴(帝位)을 잃자, 천하가 이를 함께 쫓아가서【사슴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에 비유한 것이다. 太公의 ≪六韜≫에 이르기를 “천하를 취함은 사슴을 쫓는 것과 같다.” 하였다.】 재주가 높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었습니다. 盜跖의【跖은 蹠으로 쓰기도 하니, 柳下惠의 아우이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蹠은 본래 黃帝 때 큰 도둑의 이름이니, 柳下惠의 아우가 천하의 큰 도둑이 되었기 때문에 또한 盜跖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개가 임금을 보고 짖으니, 임금이 仁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개는 진실로 그 주인이 아닌 자를 보면 짖는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신은 오직 韓信만을 알았고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니, 上이 “놓아 주어라.” 하였다.- 《漢書 蒯通傳》에 나옴 -

○ 初에 上之擊陳豨也에 徵兵於梁이러니 梁王이 稱病하고 使將으로 將兵詣邯鄲이어늘 上怒하야 使人讓之하다 梁王이 恐하야 欲自往謝한대 其將扈輒이 勸王反이어늘 梁王이 不聽이러니 梁太僕이 得罪走漢하야 告梁王이 與扈輒謀反이라하다 於是에 上이 使使掩王하야 囚之洛陽하야 有司治하니 反形이 已具【扈輒勸反이어늘 越不誅하니 是反形也라】라 上이 赦以爲庶人하야 傳處蜀靑衣【傳은 驛遞也니 謂轉轉相傳也하야 處之於蜀郡이라】하다 西逢呂后從長安來하야 彭王이 爲呂后泣하야 自言無罪하고 願處故昌邑이어늘 呂后許諾하고 與俱東至洛陽하야 白上曰 彭王은 壯士라 今徙之蜀이면 此는 自遺患이니 不如遂誅之라 妾이 謹與俱來호이다 呂后乃令其舍人으로 告彭越復謀反이라하야 夷越三族하고 梟越首【梟首는 懸首也라 梟은 不孝鳥니 一名流離이라 少好而長醜하고 大則食其母라 說文에 夏至捕梟하야 磔之而曝하고 以頭掛木上하니 今謂掛首를 謂梟也라】洛陽하고 下詔有收視者면 輒捕之라하다

처음에 上이 陳豨를 공격할 적에 梁나라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는데, 梁王(彭越)이 병을 칭탁하고 장수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邯鄲에 이르게 하니, 상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서 꾸짖었다. 梁王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가서 사죄하고자 하자, 그 장수 扈輒이 왕에게 배반할 것을 권하였으나 梁王이 듣지 않았다. 梁나라 太僕이 죄를 얻고 漢나라로 도망가서 梁王扈輒과 모반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上이 使者를 시켜 왕을 엄습하게 하여 그를 洛陽에 가두고서 有司가 治罪하니 배반하려 한 형상이 이미 갖추어졌다.【扈輒이 배반할 것을 권하였는데 彭越이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배반한 형상이다.】上이 사면하여 庶人으로 삼아서 驛馬로 蜀郡의 靑衣縣에 처하게 하였다.【傳은 驛站이니, 파발마로 서로 전해서 蜀郡에 처하게 한 것이다.】

서쪽으로 가다가 長安에서 오는 呂后를 만나서, 彭王(彭越)呂后에게 울면서 스스로 무죄함을 말하고 옛 昌邑에 처할 것을 원하였다. 呂后가 이를 허락하고 함께 동쪽으로 洛陽에 와서 上에게 아뢰기를 “彭王은 장사입니다. 이제 그를 蜀 지방으로 옮기면 이는 스스로 후환을 남기는 것이니, 마침내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첩이 삼가 함께 왔습니다.” 하였다. 呂后는 마침내 舍人을 시켜 彭越이 다시 모반하였다고 고발하게 하여 彭越의 三族을 멸하고彭越의 머리를 洛陽에 梟示한 다음,【梟首는 머리를 매다는 것이다. 올빼미는 불효하는 새이니, 일명 流離라고 하는데, 어려서는 예쁘나 자라서는 추하고 크면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 ≪說文解字≫에 “夏至에 올빼미를 잡아서 살을 찢어 햇볕에 말리고 머리를 나무 위에 매달아 놓으므로 지금 머리를 매다는 것을 일러 梟首라 한다.” 하였다.】 조서를 내려 彭越의 시신을 거두어 살피는 자가 있으면 곧 체포하겠다고 하였다.

梁大夫欒布 使於齊라가 還하야 奏事越頭下하고 祠(祀)而哭之어늘 吏捕以聞한대 上이 欲烹之러니 曰 願一言而死하노이다 上曰 何言고 曰 方上之困於彭城하시고 敗滎陽成皐間에 王이 一顧與楚則漢破하고 與漢則楚破라 天下已定에 彭王이 剖符受封하야 亦欲傳之萬世러니 今陛下一徵兵에 彭王이 病不行이어늘 而陛下誅滅之하시니 臣은 恐功臣人人自危也하노이다 今彭王已死하니 臣은 生不如死라 請就烹하노이다 上이 乃釋罪하고 拜爲都尉하다 〈出史彭越及欒布傳〉

梁나라 大夫인 欒布가 齊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와 彭越의 머리 아래에 일을 아뢰고 제사 하여 곡하니, 관리가 欒布를 체포하여 보고하였다. 上이 欒布를 삶아 죽이고자 하니, 欒布가 말하기를 “한마디 말씀을 올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上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자, 欒布가 말하기를 “上께서 彭城에서 곤궁하시고 滎陽과 成皐 사이에서 패하였을 적에 彭王이 한 번 돌아보아 楚나라에 가담하면 漢나라가 격파되고, 漢나라에 가담하면 楚나라가 격파되었습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彭王이 符節을 나누어 封爵을 받아서 또한 이를 만세에 물려주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한 번 군대를 징발함에 彭王이 병으로 가지 못하자 폐하께서 그를 죽이고 멸하시니, 신은 공신들이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길까 두렵습니다. 이제 彭王이 이미 죽었으니 신은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삶겨 죽임에 나아가겠습니다.” 하니, 上이 마침내 欒布의 죄를 풀어주고 都尉로 임명하였다.- 《史記》〈彭越傳〉과 〈欒布傳〉에 나옴 -

陸賈時時前說稱詩書【時時는 非一時也니 每於上前에 說論稱道詩書라】한대 帝罵之曰 乃公【高祖自謂也라】이 居馬上得之하니 安事詩書리오 曰 馬上得之어니와 寧可以馬上治之乎잇가 且는 逆取而順守之【湯武革命에 順天應人하니 未聞其取之逆也라 秦漢之際에 習亂旣久하야 遂以逆取順守로 爲當然하야 至倂與湯武而誣之하니 陸生之言이 其禍天下後世 豈淺哉아】하시니 文武竝用이 長久之術也니이다 帝曰 試爲我著秦所以失天下와 吾所以得之者와 及古成敗之國하라 陸生이 乃粗述存亡之徵하야 凡著十二篇하니 每奏一篇에 帝未嘗不稱善하고 號其書曰新語【以高祖素未嘗聞此言이라 故曰新語라 太史公曰 余讀陸生新語하니 固當世之辯士也라하니라】라하다 〈出史本傳〉

陸賈가 때때로 上의 앞에서 詩‧書를 말하고 일컫자,【時時는 한때가 아니니, 상의 앞에서 말할 적마다 詩‧書를 일컬은 것이다.】 황제가 꾸짖기를 “네 어르신이【乃公은 高祖가 자신을 말한 것이다.】 馬上에 거하여 천하를 얻었으니, 어찌 詩‧書를 일삼겠는가.” 하였다. 陸賈가 대답하기를 “馬上에서 얻으셨지만 어찌 馬上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또 湯王武王은 逆으로 취하여 順으로 지켰으니,【湯王과 武王이 革命할 적에 하늘을 순히 따르고 인심에 순응하였으니, 취하기를 逆으로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秦나라와 漢나라 즈음에는 난리에 익숙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어 마침내 逆으로 취하고 順으로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湯王과 武王까지 함께 무함하였으니, 陸生의 말이 天下와 後世에 화를 끼침이 어찌 적겠는가.】 文과 武를 아울러 쓰는 것이 장구한 계책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시험 삼아 나를 위해서 秦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은 이유 및 고금에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를 드러내어 밝히라.” 하였다. 陸生이 마침내 存亡의 징조를 대략 기술하여 모두 12篇을 저술하였는데, 한 편을 아뢸 때마다 황제가 좋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 책을 이름하기를 《新語》라고 하였다.【[釋義]帝未嘗不稱善 號其書曰新語 : 高祖가 평소에 이러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新語≫라고 한 것이다. 太史公이 말하기를 “내가 陸生의 ≪新語≫를 읽어보니, 진실로 당세의 辯士였다.” 하였다.】 - 《史記 陸賈傳》에 나옴 -

漢書本紀曰 詔曰 聞王者는 莫高於周文이요 霸者는 莫高於齊桓이니 皆待賢人而成名이라 賢士大夫有肯從我游者면 吾能尊顯之하리니 御史中執法이 下郡守하야 其有意稱明德者어든 必身勸爲之駕【郡守身往勸勉하고 駕車遣之라 [釋義] 身勸爲之駕者는 必須身親敦勸하야 自爲其駕車而遣之라】하라

《漢書》〈高帝紀〉에 말하였다. “조칙을 내리기를 ‘내 들으니 王者는 周나라 文王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霸者는 齊나라 桓公보다 더 높은 이가 없는데, 모두 賢人을 기다려 이름을 이루었다고 한다. 어진 士大夫로서 기꺼이 나를 따라 놀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높여 주고 현달하게 할 것이니, 御史中執法은 郡守에게 하달하여 明德에 걸맞게 하는 데에 뜻이 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몸소 권하고 위하여 수레를 태워 보내라.’【[原註] 郡守가 몸소 가서 권면하고 수레를 태워 보내는 것이다. [釋義] 身勸爲之駕는 반드시 몸소 친히 권면하여 스스로 수레에 태워 보내는 것이다.】 하였다.”

帝有疾臥禁中하야 詔戶者無得入하니 群臣絳灌等이 莫敢入이 十餘日이러니 樊噲排闥直入【王氏曰 排는 推開也요 闥은 宮中小門이라】한대 大臣이 隨之하니 上이 獨枕一宦者臥라 等이 見上流涕曰 始에 陛下與臣等으로 起豐沛, 定天下에 何其壯也러니 今天下已定에 又何憊也【憊는 力極也라 [釋義] 憊는 羸困也라】잇고 且陛下는 獨不見趙高之事【王氏曰 秦皇崩時에 獨趙高與幸宦五六人知之러니 高遂詐爲詔하야 賜長子扶蘇死하니라】乎잇가 帝笑而起하다 〈出史本傳〉

황제가 병이 있어 禁中(宮中)에 누워서 문지기에게 명하여 입궐하지 못하게 하니, 여러 신하와 絳侯(周勃)灌嬰 등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 지가 십여 일이었다. 樊噲가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자【王氏가 말하였다. “排는 밀어젖혀 여는 것이고, 闥은 宮中의 작은 門이다.”】大臣들이 뒤따라 들어가니, 上이 홀로 한 宦者를 베고 누워 있었다. 樊噲 등이 上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처음에 폐하께서 신들과 豐沛에서 기병하여 천하를 평정할 때에는 어쩌면 그리도 건장하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또 어쩌면 이리도 지치셨습니까.【[原註] 憊는 힘이 다한 것이다. [釋義] 憊는 지치고 고달픈 것이다.】 또 폐하는 홀로 趙高의 일을【王氏가 말하였다. “秦始皇이 崩할 때에 오직 趙高와 총애하는 환관 5, 6명 만이 알았는데, 趙高가 마침내 거짓으로 詔書를 만들어 長子 扶蘇에게 내려 죽게 하였다.】 보지 못하셨습니까?” 하니, 황제가 웃고 일어났다.- 《史記 樊噲傳》에 나옴 -

○ 初에 淮陰侯死에 淮南王黥布 已心恐이러니 及彭越誅에 醢其肉【黥布傳注에 反者被誅면 爲醢하니 刑法志에 菹其骨肉이 是也라】하야 以賜諸侯하니 大恐하야 發兵反하니라 上이 召諸將問計한대 皆曰 竪子何能爲乎리잇고 汝陰侯滕公【夏侯嬰也니 食邑汝陰縣하고 諡文侯라 初爲滕令하야 奉車라 故號滕公하니라】이 召故楚令尹薛公問之한대 令尹曰 是固當反이니이다 往年에 殺彭越하고 前年【亦與往年同也라】에 殺韓信하니 此三人者는 同功一體之人也라 自疑禍及身故로 反耳니이다 滕公이 言之上한대 上이 乃召薛公問之하니 對曰 使出於上計면 山東은 非漢之有也요 出於中計면 勝敗之數를 未可知也요 出於下計면 陛下安枕而臥矣시리이다 上曰 何謂上計오 對曰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齊取魯하고 傳檄燕趙하야 固守其所면 山東은 非漢有也리이다 何謂中計오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韓取魏하야 據敖倉之粟하고 塞成皐之口면 勝敗之數를 未可知也리이다 何謂下計오 東取吳하고 西取下蔡하고 歸重於越【重은 輜重也니 歸之於越地라】하고 身歸長沙【布娶於長沙王故로 策其身歸長沙라】면 陛下安枕而臥하야 漢無事矣리이다 上曰 是計將安出고 對曰 出下計하리이다 는 故驪山之徒【布初坐法黥論決하야 而徒役於驪山이라】也라 致萬乘之主하니 皆爲身이요 不顧後爲百姓萬世慮者也라 故로 曰出下計라하노이다 帝曰 善타하고 封薛公千戶하고 自將兵而東하다 之初反에 謂其將曰 上이 老矣라 必不能來요 淮陰, 彭越이 皆死하니 餘不足畏라하고 遂反하야 果如薛公之言하야 擊荊擊楚하고 引兵而西러라

처음에 淮陰侯가 죽자 淮南王黥布가 이미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彭越이 죽자 그 살을 젓 담아【≪漢書≫ 〈黥布傳〉의 注에 “반역한 자가 주벌을 당하면 젓을 담는다. ≪漢書≫ 〈刑法志〉에 ‘그 骨肉을 젓 담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제후들에게 하사하니, 黥布가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였다. 上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竪子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汝陰侯 滕公이【滕公은 夏侯嬰이니, 汝陰縣을 食邑으로 삼았고 시호가 文侯이다. 처음에 滕令이 되어서 수레를 받들었기 때문에 滕公이라 호칭한 것이다.】 옛날 楚나라 令尹인 薛公을 불러 물으니, 令尹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마땅히 배반할 만합니다. 지난해에【前年은 또한 往年과 같다.】彭越을 죽이고 그 전 해에 韓信을 죽였으니, 이 세 사람은 功이 같고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의심하였기 때문에 배반한 것입니다.” 하였다.

滕公이 이를 上에게 말하니, 上이 마침내 薛公을 불러 묻자, 대답하기를 “만일 黥布가 上計에서 나온다면 山東은 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고, 中計에서 나온다면 勝敗의 數를 알 수 없으며, 下計에서 나온다면 폐하가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워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무엇을 上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동쪽으로 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취하고, 齊나라를 겸병하고 魯나라를 점령하고, 燕나라와 趙나라에 檄文을 돌려 그곳을 굳게 지킨다면 산동 지방은 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무엇을 中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동쪽으로 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취하고, 韓나라를 겸병하고 魏나라를 점령하여敖倉의 곡식을 점거하고 成皐의 어귀를 막는다면 勝敗의 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무엇을 下計라고 하는가?” 하고 묻자, “동쪽으로 吳나라를 취하고 서쪽으로 下蔡를 취하고, 輜重을 越 지방에 돌려보내고【重은 輜重이니, 輜重을 越 지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자신은 長沙로 돌아간다면【黥布가 長沙王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長沙로 돌아갈 것을 계책하는 것이다.】 폐하께서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우시어 漢나라가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이번 黥布의 계책이 장차 어디로 나오겠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下計로 나올 것입니다. 黥布는 옛날 驪山에서 노역하던 무리로【黥布가 처음에 법에 걸렸는데, 墨刑으로 판결하여 驪山에서 부역에 종사하였다.】萬乘의 군주가 되었으니, 모두 자신만을 위할 뿐 뒤를 돌아보아 백성과 만세를 위하여 생각할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下計로 나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좋다.” 하고는 薛公을 千戶에 봉하고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黥布가 처음 배반할 적에 그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上은 늙어서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고 淮陰侯彭越이 모두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고는 마침내 배반하여 과연 薛公의 말대로 荊나라와 楚나라를 공격하고 군대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갔다.

[丙午]十二年

[丙午]十二年이라

冬十月에 上이 與兵으로 遇於蘄西하야 大戰하다 軍敗하야 走渡淮하야 數戰不利어늘 與百餘人으로 走江南이러니 上이 令別將追之한대 番陽人이 殺玆鄕民田舍하다 〈出史記本傳〉

12년(병오 B.C.195))

겨울 10월에 上이 黥布의 군대와 蘄 땅 서쪽에서 만나 크게 싸웠다. 黥布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해서 淮水를 건너 여러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백여 명과 함께 江南으로 달아나자, 上이 別將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하였는데, 番陽 사람이 黥布를 玆鄕의 백성 田舍(농막)에서 죽였다.- 《史記 黥布傳》에 나옴 -

○ 十一月에 過魯할새 以太牢【凡用牲에 繫養曰牢니 牛曰太牢요 羊曰小牢라 將祭에 必先擇牲하야 繫于牢하니 牢는 閑也, 圈也니 防禁觸也라】로 祠孔子하다

11월에 魯나라를 지날 적에 太牢로【무릇 희생을 제사에 사용할 때에 희생을 매어 놓고 기르는 곳을 牢라 하니, 소를 太牢라 하고 양을 小牢라 한다. 장차 제사 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희생을 골라서 牢에 매어 기르니, 牢는 막는 것이고 짐승을 가두는 우리인 바, 치받는 것을 막고 금하는 것이다.】孔子에게 제사 하였다.

[新增] 愚按 尹氏曰 自旣沒로 天生孔子하야 爲萬代仁義禮樂之宗主하시니 生民之類가 不至糜爛絶滅者는 吾聖道扶持之功用也라 自秦燔詩書, 坑學士로 天下大亂하야 其禍至於陳項하야 極矣라 漢高之興에 以馬上得天下하야 不事詩書하고 嫚罵溺冠하야 其視儒道를 不啻枘鑿之不相入이라 然이나 過魯祠孔子가 乃見於兵戈倥偬之日이라 故로 綱目에 特筆予之하니 亦以見天理之在人心하야 自有不可得而泯沒者라 漢氏四百年基業이 其精神命脈이 蓋在於此라 自是而後로 儒道稍稍振起하야 除挾書禁하고 置博士官하고 開獻書路가 迭見於繼世之後하니 亦足以見當時崇尙之意라 然이나 漢治終於不古者는 粗得其一二之緖餘하고 而精微體用을 未之明也일새라 雖然이나 吾道在天地間은 如一元之氣周流磅礴하야 未始一日不存하니 不以秦而泯하고 不以漢而興이라 時君世主 苟能知其功用之大하야 振而起之면 則聖人綏來動和之效와 帝王時雍迓衡之治를 可復見於天下矣리라 惜乎라 漢人은 不足以語此니라

내가 살펴보건대 尹氏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 , 文王武王이 이미 별세함으로부터 하늘이 孔子를 내시어 만대의 仁義‧禮樂의 宗主로 삼았으니, 生民(백성)의 무리가 문드러지고 없어짐에 이르지 않은 것은 우리 聖人(孔子)의 道가 부지한 공로였다. 秦나라가 詩‧書를 불태우고 學士를 구덩이에 묻어 죽인 뒤로부터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그 禍가 陳勝項籍에게 이르러 지극하였다. 漢나라 高祖가 일어날 때에 馬上에서 천하를 얻어 詩‧書를 일삼지 않았고, 거만하게 꾸짖으며 선비의 冠에 오줌을 누어서, 儒道를 보기를 네모난 자루와 둥근 구멍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魯나라를 지날 적에 孔子에게 제사 한 것이 마침내 병기와 창이 시끄럽게 일어나던 날에 보인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특별히 써서 허여하였으니, 또한 天理가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스스로 泯滅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漢나라 4백 년의 基業이, 그 精神과 命脈이 여기에 있었다.

이로부터 이후로 儒道가 차츰 떨치고 일어나서 挾書를 금지하는 법령을 없애고 博士의 관직을 설치하고서 책을 올리는 길을 연 것이 몇 대를 계승한 뒤에 차례로 보이니, 또한 당시에 숭상한 뜻을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漢나라 정치가 끝내 예스럽지 못한 것은 한두 가지의 실마리만을 대강 얻고, 精微한 體用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儒道가 천지 사이에 있음은 한 元氣가 두루 유행하여 가득히 성함과 같아서 일찍이 단 하루도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秦나라라고 하여 없어지지도 않고 漢나라라고 하여 일어나지도 않는다. 세상의 군주들이 만일 그 功用의 큼을 알아서 진작하여 일으킨다면, 편안하게 하면 오고 동하게 하면 和應하는 聖人의 효험과 이에 화락하게 하고 태평을 맞이하는 帝王의 다스림을 다시 천하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다! 漢나라 사람은 이것을 말할 수 없다.”

上이 還過沛宮할새 置酒하야 悉召故人父老하고 酒酣에 上이 自爲歌起舞하고 〈本紀曰 上擊筑【以竹曲五弦之樂也라 應氏曰 似琴而大頭하니 以竹擊之라 故名筑이라 師古曰 今筑은 形似瑟而小하고 細(頭)[項]라】自歌曰 大風起兮雲飛揚이로다 威加海內兮歸故鄕이로다 安得猛士兮守四方고하고 上迺起舞하다〉 泣謂沛父兄曰 游子悲故鄕이로라 朕이 自沛公으로 以誅暴逆하야 遂有天下하니 其以沛로 爲朕湯沐邑【謂以其賦稅로 供湯沐之具也라 [頭註] 湯沐은 王制註에 浴用湯하고 沐用潘이라하니 潘은 淅米汁이라 浴은 洗身也요 沐은 濯髮也라】하라하다 〈出史本紀〉

上이 돌아오는 길에 沛宮을 지날 적에 술자리를 베풀고 故人(옛 친구)과 父老들을 모두 부른 다음 술이 취하자, 上이 직접 노래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 《史記》〈高祖本紀〉에 이르기를 “상이 筑을【筑은 대나무를 구부려 다섯 줄을 맨 악기이다. 應氏가 말하였다. “琴과 비슷한데 머리가 크니 대나무로 치기 때문에 筑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顔師古가 말하였다. “지금의 筑은 모양이 瑟과 비슷하면서 작고 목이 가늘다.”】 치고 스스로 노래하기를 ‘大風이 일어나니 구름이 날도다. 위엄이 海內에 더해지고 고향에 돌아오도다. 어이하면 용맹한 장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 것인가.’ 하고는 上이 마침내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하였다.- 上이 울면서 沛縣의 父兄들에게 이르기를 “떠돌이인 이 사람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짐이 沛公으로부터 포악하고 반역하는 자들을 주벌하고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沛縣을 짐의 湯沐邑으로【[釋義] 湯沐邑은 그 지방의 세금을 가지고 황제의 목욕하는 비용에만 씀을 이른다. [頭註] 湯沐은 ≪禮記≫ 〈王制〉의 註에 “몸을 씻을 때에는 끓인 물을 사용하고 머리를 감을 때에는 쌀뜨물을 사용한다.” 하였으니, 潘은 쌀을 씻어낸 뿌연 즙이다. 浴은 몸을 씻는 것이고, 沐은 머리를 감는 것이다.】 삼겠다.”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史略 史評] 廬陵劉氏曰 自坑焚禍烈로 吾道幾墜러니 高帝以不事詩書之資로 方破布還하야 乃能動念及此하야 至以太牢祀孔子하니 帝亦有大過人者矣라 漢四百年吾道之重이 實自此始라 故로 綱目에 特書美之라 然이나 其君天下而私一邑은 後世에 不能無譏焉이니라

廬陵劉氏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서적을 불태우고 儒生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여 禍가 혹독해짐으로부터 우리 道가 거의 실추되었는데, 高帝가 詩‧書에 종사하지 않은 자질로 막 黥布를 격파하고 돌아와서는 마침내 생각이 이에 미쳐서 太牢로 孔子를 제사함에 이르렀으니, 高帝는 또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는 자이다. 漢나라 4백 년 동안 우리 儒道의 중함이 실로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특별히 이것을 써서 찬미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에 군주가 되어서 한 고을을 사사로이 한 것은 후세에 비판이 없지 못하다.”

○ 立兄子하야 爲吳王하고 王三郡五十三城하다

형의 아들를 세워서 吳王으로 삼고 3郡 53城에 왕 노릇 하게 하였다.

○ 上이 從破歸하야 疾益甚하야 愈欲易太子어늘 張良이 諫호되 不聽이라 叔孫通이 諫曰 晉獻公이 以驪姬之故로 廢太子하고 立奚齊【獻公太子는 名申生이라 獻公伐驪戎하야 得驪姬하야 生奚齊한대 公欲廢申生而立之러니 會에 申生이 薦祭母之胙於公이어늘 驪姬預置毒胙中이라가 公欲享한대 姬止之曰 宜試之하소서 與犬하니 犬死하고 與小臣하니 小臣死라 申生이 聞之懼하야 奔新城이어늘 公乃誅其傅한대 申生自殺하니라】라가 晉國亂者數十年이요 秦이 以不蚤(早)定扶蘇【扶蘇는 始皇長子也니 不早定太子之位라가 後以諫坑儒獲罪하야 使監蒙恬軍於上郡이러니 始皇崩에 趙高乃詐爲遺詔하야 賜扶蘇死하니라】라가 令趙高로 得以詐立胡亥하야 自使滅祀하니 此는 陛下所親見이니이다 今太子仁孝를 天下皆聞之하니 陛下必欲廢適(嫡)而立少인댄 臣은 願先伏誅하야 以頸血汙地호리이다 帝曰 吾直戲耳로라 叔孫通曰 太子는 天下本이라 本一搖면 天下震動하나니 奈何以天下戲乎잇가 時에 大臣固爭者多라 上이 知群臣心이 皆不附趙王하고 乃止不立하다 〈出史叔孫通傳〉

상이 黥布를 격파하고 돌아온 뒤로부터 병이 더욱 심하여 더욱 태자를 바꾸고자 하였다. 張良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叔孫通이 간하기를 “晉나라 獻公驪姬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奚齊를 세웠다가【獻公의 太子는 이름이 申生이다. 獻公이 驪戎을 정벌해서 驪姬를 얻어 奚齊를 낳자, 獻公이 申生을 폐하고 奚齊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申生이 어머니를 제사 한 고기를 獻公에게 바치니, 驪姬가 미리 고기 속에 독약을 넣어 두었다가 獻公이 먹으려고 하자 驪姬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셔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고, 小臣에게 주니 小臣이 죽었다. 申生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新城으로 달아났는데, 獻公이 마침내 그 師傅를 죽이자 申生이 自殺하였다.】晉나라가 혼란한 것이 수십 년이었으며, 秦나라가 일찍 扶蘇를 태자로 정하지 않았다가【扶蘇는 始皇의 長子이니, 太子의 자리를 일찍 정하지 않았다가 뒤에 儒生들을 묻어 죽인 일을 간하다가 죄를 얻어 上郡에 있던 蒙恬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始皇이 죽자 趙高는 마침내 거짓으로 遺詔를 만들어 扶蘇에게 주어 죽게 하였다.】趙高로 하여금 거짓으로 胡亥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宗祀를 멸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폐하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이제 태자의 인자하고 효성스러움을 천하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 알고 있는데, 폐하께서 기필코 適子를 폐하고 少子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먼저 죽임을 받아 목의 피로써 땅을 더럽히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 다만 농담하였을 뿐이다.” 하니, 叔孫通이 말하기를 “태자는 천하의 근본이니,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어찌하여 천하를 가지고 농담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때 대신 중에 굳이 간쟁하는 자가 많았다. 上은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모두 趙王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중지하고 趙王을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史記 叔孫通傳》에 나옴 -

張良傳云 呂后使建成侯呂澤으로 劫호되 爲我畫計하라한대 曰 此는 難以口舌爭也라 顧上所不能致者四人【四人은 謂東園公, 綺里季, 夏黃公, 甪里先生이라 音義曰 東, 綺, 夏, 甪은 四姓也라 甪字는 從兩點下用하니 音鹿이라 索隱曰 東園公은 姓唐이요 字宣明이니 居園中하야 因號焉이라 夏黃公은 姓崔요 名廣이요 字少道요 齊人이니 隱居夏里하야 因號焉이라 甪里先生은 河內軹人이니 泰伯之後라 姓周요 名術이요 字元道니 京師號曰霸上先生이요 一曰甪里先生이라】이니 固請이면 宜來리니 令上見之면 則一助也리라 呂澤이 使人奉太子書하야 卑辭厚禮하야 迎此四人하다 四人이 至하야 客建成侯所러니 及宴置酒에 太子侍할새 四人者從太子하니 年皆八十有餘요 須(鬚)眉【須는 面毛也니 今以須爲所須字하고 而別作鬚라 在頤曰須요 在頰曰髥也라】皓白하고 衣冠甚偉라 上이 怪問曰 何爲者오 四人이 前對하야 各言其姓名하니 上迺驚曰 吾求公호되 避逃我러니 今公이 何自從吾兒游乎아 四人曰 陛下輕士善罵하시니 臣等이 義不辱故로 恐而亡匿이러니 今聞太子仁孝恭敬愛士하시니 天下莫不延頸하야 願爲太子死者라 故로 臣等이 來로소이다 上曰 煩公하노니 幸卒調護【調는 謂和平也요 護는 謂保安之也라】太子하라 四人이 爲壽已畢에 趨去어늘 上이 目送之하고 召戚夫人하야 指視曰 我欲易之러니 彼四人이 爲之輔하야 羽翼이 已成하니 難動矣라하고 上이 罷酒하니 竟不易太子者는 이 本招此四人之力也러라

《史記》〈張良傳〉에 말하였다.

呂后建成侯呂澤으로 하여금 張良을 위협하게 하여 ‘나를 위해 계책을 세우라’ 하니, 張良이 말하기를 ‘이는 口舌로 간쟁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아보건대 上이 초치하지 못한 자가 네 사람인데,【네 사람은 東園公, 綺里季, 夏黃公, 甪里先生을 이른다. ≪音義≫에 이르기를 “東, 綺, 夏, 甪은 네 姓이다. 甪字는 두 점을 따르고 아래는 用字이니 음이 록이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東園公은 姓이 唐이고 字가 宣明이니 園中에 살았으므로 인하여 號로 삼은 것이다. 夏黃公은 姓이 崔이고 이름이 廣이고 字가 少道이고 齊나라 사람이니 夏里에 은거하였으므로 인하여 號로 삼은 것이다. 甪里先生은 河內 軹縣 사람이니 泰伯의 후손이다. 姓이 周이고 이름이 術이고 字가 元道이니 京師에서 霸上先生이라 호하였고 一說에는 甪里先生이라 하였다.】 이들을 굳이 청하면 마땅히 올 것이니, 上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시게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呂澤이 사람을 시켜 태자의 편지를 받들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 이 네 사람을 맞이하였다. 네 사람이 와서 建成侯의 처소에 손님으로 머물렀는데, 잔치하여 술자리를 베풀게 되자, 태자가 황제를 모실 적에 네 사람이 태자를 따라오니, 나이가 모두 80여 세여서 수염과 눈썹이【須는 얼굴의 수염이니, 지금은 須자를 ‘所須[필요한 바]’의 須자로 삼고, 수염이라는 뜻은 따로 鬚字를 만들어 쓴다. 수염이 턱에 난 것을 須라 하고, 수염이 뺨에 난 것을 髥이라 한다.】 희고 의관이 매우 거룩하였다. 上이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이들은 무엇하는 자들인가?’ 하니, 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여 각기 자신들의 성명을 말하였다. 上은 마침내 놀라며 말하기를 ‘내가 公들을 찾았으나 나를 도망하여 피하더니, 이제 公들이 어찌하여 스스로 내 아들을 따라 노는가?’ 하였다. 네 사람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경시하고 꾸짖기를 잘하시니, 신들이 의리상 욕을 당할 수가 없으므로 두려워서 도망해 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듣자오니, 태자가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공경하며 선비들을 사랑하시어, 천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태자를 위해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온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공들에게 번거롭게 당부하노니 부디 끝까지 태자를 調護하라.’【調는 和平함을 이르고, 護는 보호하여 편안히 함을 이른다.】 하였다.

네 사람이 祝壽하기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나가자, 上이 눈여겨 전송하고 戚夫人을 불러 이들을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태자를 바꾸고자 하였는데, 저 네 사람이 태자의 보필이 되어 羽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동요시키기가 어렵다.’ 하고는 上이 술자리를 파하였다. 끝내 태자를 바꾸지 않은 것은 張良이 본래 이 네 사람을 불러온 힘이었다.”

[史略 史評] 胡氏曰 善乎라 子房之能納說也여 不先事而强聒하고 不後事而失幾하야 不問則不言하고 言則必當其可라 故로 聽之易而用之不難也라 至於招致四人하야 以安太子하야는 則其績尤偉어늘 而司馬公이 乃致疑焉하야 以爲若審有此면 是는 子房이 爲子植黨하야 以拒父也라하니 夫高祖之雄傑이 豈四叟所能抗이며 而大臣力諫之强이 豈不賢於四叟之助리오 嗚呼라 是未知春秋深許首止之盟이요 而易有納約自牖之象也라 故로 今特據舊史하야 復詳載其事云이라

胡氏가 말하였다.

子房은 말을 아뢰기를 잘하였다. 일에 앞서서 억지로 떠들지 않고 일에 뒤늦어 기회를 잃지 아니하여,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말하면 반드시 그 옳음에 합당하였다. 그러므로 듣기가 쉽고 따르기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네 사람(商山四皓)을 초치하여 太子를 편안히 함에 이르러서는 그 공적이 더욱 훌륭한데, 司馬溫公은 도리어 의심하여 말하기를 ‘만약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子房이 아들을 위하여 徒黨을 심어서 아버지를 막은 것이다.’ 하였으니, 高祖의 雄傑함이 어찌 네 노인이 항거할 수 있는 바였겠으며, 大臣들이 강력히 간함이 어찌 네 노인의 도움보다 낫지 않았겠는가. 아, 이는 《春秋》에 首止의 맹약을 깊이 허여하고, 《周易》에 ‘사람을 깨우치되 밝은 곳으로부터 한다.’는 象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특별히 옛 역사책에 의거하여 다시 그 일을 자세히 기재하는 것이다.”

相國 以長安地陿하고 上林中에 多空地棄【謂多有空隙之地하야 捐棄無用이라】라하야 願令民으로 得入田하고 毋收藁하야 爲禽獸食하노이다 上이 大怒曰 相國이 多受賈人財物하야 爲請吾苑이라하고 下廷尉하야 械繫之러니 數日에 王衛尉【衛尉는 秦官이니 掌宮門衛屯兵이라 王은 姓也니 史失其名이라】侍라가 前問曰 相國이 胡大罪완대 陛下繫之暴也시니잇고 上曰 受賈豎金하고 請吾苑하야 以自媚於民故로 繫治之로라 王衛尉曰 有便於民而請之하니 眞宰相事니이다 且陛下距楚數歲요 陳豨, 黥布反에 陛下自將而往하시니 當是時하야 相國이 守關中이라 關中이 搖足이면 則關以西는 非陛下有也어늘 相國이 不以此時爲利하고 今乃利賈人之金乎잇가 帝不豫【豫는 悅也니 感衛尉之言이라 故慙悔而不悅也라】하야 是日에 使使持節하야 赦出何하다 何入謝어늘 帝曰 相國이 爲民請苑이어늘 吾不許하니 我는 不過爲主요 而相國은 爲賢相이라 吾故繫相國하야 欲令百姓聞吾過로라 〈出蕭相國世家〉

相國蕭何가 ‘長安은 땅이 좁고 上林苑은 가운데에 빈 땅으로 버려진 것이 많다.’【多空地棄는 빈 땅이 많이 있어서 버려지고 쓸모가 없음을 이른다.】고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와 농사를 짓되 짚을 거두지 말아서 금수의 먹이로 삼게 할 것을 원하였다. 上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相國이 장사꾼들의 재물을 많이 받고서 그들을 위하여 내 동산을 청한다.” 하고는 廷尉에게 내려 형틀에 묶었다.

며칠 뒤에 王衛尉가【衛尉는 秦나라 관직이니, 궁궐문을 지키는 병사를 관장하는 자이다. 王은 姓이니, 역사책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모시고 있다가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相國이 무슨 큰 죄가 있기에 폐하께서 갑자기 구속하셨습니까?” 하니, 上이 말하기를 “장사꾼들의 돈을 받고 내 동산을 청하여 스스로 백성들에게 잘 보이려 하였으므로 구속하여 죄를 다스린 것이다.” 하였다. 王衛尉가 말하기를 “백성에게 편리함이 있어 청한 것이니, 이는 참으로 재상이 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폐하께서 楚나라와 대치한 지가 몇 년이었고, 陳豨黥布가 배반하자 폐하께서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셨으니, 이때를 당하여 相國이 關中을 지켰습니다. 關中이 발(기초)이 흔들렸으면 關中 以西는 폐하의 소유가 아니었을 터인데, 相國이 이때를 이로움으로 삼지 않고 이제 마침내 장사꾼들의 돈을 이로움으로 삼겠습니까.” 하니, 上이 기뻐하지 않고는【豫는 기쁨이니, 王衛尉의 말에 감동되었기 때문에 부끄럽고 뉘우쳐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이날 使者를 시켜 節을 가지고 가서 蕭何를 사면하여 내보내게 하였다.

蕭何가 들어와 사례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相國이 백성을 위하여 동산을 청하였는데 내 허락하지 않았으니, 나는 와 같은 군주에 불과하고 相國은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고의로 相國을 구속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나의 과실을 듣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에 나옴 -

○ 上이 擊時에 爲流矢所中하야 行道疾甚이어늘 呂后迎良醫入見한대 上이 嫚罵之曰 吾以布衣로 持三尺【三尺은 三尺劍也라 上制에 劍長三尺이요 重三斤十二兩이라】하야 取天下하니 此非天命乎아 命乃在天하니 雖扁鵲【春秋時良醫也니 齊勃(渤)海郡鄭縣人이라 姓秦이요 名越人이라 〈黃帝〉八十一難序云 秦越人이 與軒轅時扁鵲相類라 故仍號扁鵲이요 又家於盧國하야 因名盧醫라하니라】인들 何益이리오하고 遂不使治疾하다 〈出本紀〉

上이 黥布를 공격할 때에 流矢에 맞아 길을 가는 도중에 병이 심하였다. 呂后가 훌륭한 의원을 맞이하여 들어와 보게 하자, 上이 거만하게 꾸짖기를 “내가 布衣로 3尺의 劍을 잡고【3尺은 3尺의 劍이다. 上古時代의 제도에 劍은 길이가 3尺이고 무게가 3斤 12兩이었다.】 천하를 취하였으니, 이는 天命이 아니겠는가. 命이 바로 하늘에 달려 있으니, 비록 扁鵲인들【扁鵲은 春秋時代의 良醫이니, 齊나라 渤海郡 鄭縣 사람이다. 姓은 秦이고 이름은 越人이다. ≪黃帝內經≫ 八十一難序에 이르기를 “秦越人이 黃帝軒轅氏 때의 扁鵲과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扁鵲이라 이름하고, 또 盧國에서 살았으므로 인하여 盧醫라고도 이름한다.” 하였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병을 치료하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呂后問曰 陛下百歲後에 蕭相國이 旣死어든 誰令代之잇고 上曰 曹參이 可니라 問其次한대 曰 王陵이 可어니와 然이나 少戇하니 陳平이 可以助之요 陳平이 知(智)有餘나 然難獨任이라 周勃이 重厚少文이나 然이나 安劉氏者는 必也니 可令爲太尉니라 呂后復問其次한대 上曰 此後는 亦非乃所知也니라 〈出本紀〉 ○ 夏四月에 帝崩하다

呂后가 묻기를 “폐하가 百歲가 된(돌아가신) 뒤에 蕭相國이 이미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대신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上이 대답하기를 “曹參이 괜찮다.” 하였다. 그 다음을 묻자 대답하기를 “王陵이 괜찮으나 조금 우직하니 陳平이 도울 수 있으며, 陳平은 지혜는 충분하나 홀로 맡기기는 어렵다. 周勃이 후중하고 文雅가 적으나 우리 劉氏를 편안히 할 자는 周勃이니, 그를 太尉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呂后가 다시 그 다음을 묻자, 上이 말하기를 “이 뒤는 또한 네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史記 高祖本紀》에 나옴 -

○ 여름 4월에 황제가 崩하였다.

[新增] 唐仲友曰 看帝屬呂后하면 合知諸呂終爲所制니라

唐仲友가 말하였다.

高帝呂后를 부탁한 것을 보면 여러 呂氏들이 끝내 陳平周勃에게 제어 당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史略 史評] 愚按 高帝起布衣하야 提三尺劍하야 八年而成帝業하니 何其速哉오 惟寬仁愛人하고 知人善任而已라 其入關也에 不殺子嬰하고 約法三章하야 而大本以立이요 其伐楚也에 縞素興師하야 不忘故主하야 而大義以明이라 當是之時하야 張良은 說謀하고 韓信은 行兵하고 蕭何는 給餉하니 用人者昌이 固其宜也라 及天下已定하야는 則赦季布하야 以旌委身徇主之烈士하고 斬丁公하야 以厲懷私結恩之姦臣하고 祀孔子하야 以崇繼天立極之大聖하니 其慮事深遠이 如此하니 子孫享有天祿四百餘年이 不亦宜乎아 然이나 殺韓信, 醢彭越하야 而君臣之義虧하고 疎呂后, 寵戚姬하야 而夫婦之道缺하고 欲易太子하야 而父子之恩乖하고 至於不事詩書하고 溺冠侮士하며 禮文制度가 大抵襲秦하니 此는 漢治所以不能復古니 惜哉로다

내가 살펴보건대 高帝가 布衣로 일어나 三尺의 검을 잡고서 8년 만에 帝業을 이루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신속한가. 이는 오직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알아 잘 맡겼기 때문이다. 關中에 들어가서는 子嬰을 죽이지 않고 三章의 법을 약속하여 큰 근본이 확립되었고, 楚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군사들에게 素服을 입히고 군대를 일으켜서 옛 군주를 잊지 아니하여 大義가 밝아졌다. 이때를 당하여 張良은 계책을 말하고 韓信은 군대를 운용하고 蕭何는 軍糧을 공급하였으니, 사람을 잘 등용한 자가 번창함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미쳐서는 季布를 사면하여 몸을 바쳐 군주를 위한 烈士를 표창하였고, 丁公을 목 베어서 私心을 품고 은혜를 맺은 姦臣을 징계하였으며, 孔子를 제사 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운 大聖人을 높였다. 일을 생각함의 깊고 원대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손이 天祿을 4백여 년 동안 누림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韓信을 죽이고 彭越을 젓 담가서 君臣間의 의리가 훼손되었고, 呂后를 소원히 하고 戚姬를 총애하여 夫婦間의 道가 무너졌고, 太子를 바꾸고자 하여 父子間의 은혜가 괴리되었고, 詩書를 일삼지 않고 冠에 오줌을 누어 선비를 업신여김에 이르렀으며, 禮文과 制度가 대체로 秦나라를 인습하였으니, 이는 漢나라의 다스림이 옛날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니, 애석하다.

○ 初에 高祖不修文學而性明達하고 好謀能聽하야 自監門戍卒로 見之如舊라 初順民心하야 作三章之約이러니 天下旣定에 命蕭何하야 次律令【以初約三章之法이 不足以禦奸이라 故命蕭何하야 (操)[捃]摭秦法하야 作律九章이라 次는 謂第其輕重이라】하고 韓信이 申軍法하고 張倉이 定章程【如淳曰 章은 歷數之章術也요 程은 法式也니 謂權衡丈尺斛斗之平法이라 (贊)[瓚]曰 按茂陵{中}書에 丞相爲工用程數其中이라하니 言百工用材多少之量及制度之程品이 是已라 定은 謂始計定之也라】하고 叔孫通이 制禮儀하고 又與功臣으로 剖符作誓【剖는 析符竹이니 使世襲其爵而誓之曰 使黃河如帶하고 泰山若礪토록 國以永存하야 爰及苗裔라하니라】하야 丹書鐵券【券은 符契也라 以鐵鐫之하야 朱書字也니 國之所以示信이라 後唐明宗이 問趙鳳曰 帝王賜人鐵券은 何也오 對曰 與之立誓하야 令其子孫으로 長享爵祿耳라하니라】을 金匱石室【金匱는 猶金縢也니 以誓書로 藏之匱中而緘之以金하야 不欲人開之요 又以石爲室하고 置匱其中하야 藏於宗廟하야 使與國同休라】로 藏之宗廟하니 雖日不暇給【給은 足也니 衆事煩多하야 常汲汲也라】이나 規摹(模)【規는 正圓之器요 摹는 規倣也니 取喩規摹는 謂立制垂範也라 摹는 與模同이라】弘遠矣러라 〈出漢書本紀〉

처음에 高祖가 文學을 닦지 않았으나 성품이 총명하고 통달하며, 智謀를 좋아하고 남의 의견을 잘 들어 監門과 戍卒도 한 번만 보면 舊面과 같았다. 처음에 民心을 순응하여 三章의 약속을 만들었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蕭何에게 명하여 律令을 차례로 정하게 하고,【처음에 약속한 3章의 法만 가지고는 간사함을 충분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蕭何에게 명하여 秦나라 法을 뽑아 律法 9章을 만든 것이다. 次는 輕重을 차례 매김을 이른다.】韓信에게 軍法을 펴게 하고 張倉에게 章程을 정하게 하고【如淳이 말하였다. “章은 曆數의 章術이고, 程은 法式이니 權衡과 丈尺과 斛斗를 공평하게 하는 법을 이른다.” 薛瓚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茂陵書≫에 ‘丞相이 工人들이 사용하는 것을 위하여 그 가운데를 程數한다.’ 하였으니, 百工들이 쓰는 재목의 多少의 量 및 制度의 程品을 말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定은 처음에 계획하여 정함을 이른다.】叔孫通에게 禮儀를 짓게 하였고, 또 공신들과 符節을 나누어 맹약하는 글을 만들어서【剖는 符竹을 쪼개는 것이니, 爵位를 世襲하게 하고 맹세하기를 “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라고 하였다.】 丹書‧鐵券을【券은 符契(符節)이다. 丹書鐵券은 쇠에 새겨 朱砂로 글자를 쓰는 것이니, 국가에서 신의를 보이는 것이다. 後唐의 明宗이 趙鳳에게 “帝王이 사람들에게 鐵券을 하사함은 어째서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그와 더불어 맹세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길이 爵祿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金匱‧石室에【金匱는 金縢과 같으니 맹세한 글을 궤 속에 보관하고 쇠줄로 묶어서 사람들이 열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요, 또 돌로 집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궤를 넣어 宗廟에 간직해서 국가와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다.】 넣어 宗廟에 보관하니, 비록 시일은 부족하였으나【給은 넉넉함이니, 여러 일이 많아서 항상 여유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규모는 원대하였다.【規는 둥근 것을 바로잡는 기구이고 摹는 모방하는 것이니, 規摹를 취하여 비유함은 제도를 세우고 모범을 드리움을 이른 것이다. 摹는 模와 같다.】 - 《漢書 高帝紀》에 나옴 -

[新增] 唐仲友曰 誤聽守關計하야 取項羽怒라가 賴張良免하고 誤聽立六國計라가 賴張良不敗事하고 誤聽使者十輩言하야 圍平城이라가 遂用婁敬和親約하고 誤欲止宮休舍라가 賴張良諫止하고 誤欲敗項羽라가 賴蕭何諫就封하고 誤罵齊使라가 賴諫止하고 誤欲西歸라가 賴諫追하고 誤言安事詩書라가 賴陸賈諫聽하고 誤不知尊太公이라가 賴家令言【家令이 說太公曰 皇帝雖子나 人主也요 太公雖父나 人臣也니 奈何令人主拜人臣而使威重不行乎잇가 後에 上이 朝太公할새 太公이 擁篲迎門却行이어늘 上大驚하야 下扶太公한대 太公曰 帝는 人主니 奈何以我亂天下法이리오한대 上乃尊太公하야 爲太上皇하고 賜家令金百斤하다 註에 家令은 掌太公家라】卽聽하고 誤欲易太子라가 賴張良四皓定하고 誤囚蕭何라가 賴王衛尉諫改하니 誤處는 皆緣不學이요 改處는 皆緣性明達이니 若使高祖學이면 亦無此誤리라

唐仲友가 말하였다.

“關中을 지키라는 계책을 잘못 따라 項羽에게 노여움을 샀다가 張良에게 힘입어 화를 면하였고, 六國을 세우라는 계책을 잘못 따랐다가 張良에게 힘입어 일을 패하지 않았고, 使者 열 명의 말을 잘못 따라 平城에 포위당했다가 마침내 婁敬의 말을 써서 화친을 맺었고, 〈咸陽에 들어가〉 잘못 秦나라 宮 안에 머물면서 휴식하려고 했다가 張良의 諫言에 힘입어 중지하였고, 잘못 項羽를 공격하려고 했다가 蕭何의 諫言에 힘입어 封地인 漢中으로 나아갔고, 잘못 齊나라(韓信)의 使者를 꾸짖다가 張良陳平의 諫言에 힘입어 중지하였고, 잘못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가 張良陳平의 諫言에 힘입어 項羽를 추격하였고, 잘못 詩‧書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가 陸賈의 諫言에 힘입어 들었고, 잘못 太公을 높일 줄 몰랐다가 家令의 말에【家令이 高祖의 아버지인 太公을 설득하기를 “황제가 비록 아들이나 군주이고 太公이 비록 아버지이나 신하이니, 어찌 군주로 하여금 신하에게 절하게 하여 황제의 위엄이 행해지지 않게 하십니까?” 하였다. 뒤에 上이 太公을 뵈올 적에 太公이 빗자루를 잡고 문에서 맞이하여 뒷걸음질 치니, 上이 크게 놀라 수레에서 내려 太公을 부축하였다. 太公은 말하기를 “황제는 군주이니, 어찌 나 때문에 천하의 법을 어지럽힌단 말입니까?” 하니, 上이 마침내 太公을 높여 太上皇이라 하고 家令에게 백 근의 金을 하사하였다. 注에 “家令은 太公의 집을 관장하는 관원이다.” 하였다.】 힘입어 따랐고, 잘못 太子를 바꾸고자 했다가 張良四皓를 불러온 것에 힘입어 정하였고, 잘못 蕭何를 가두었다가 王衛尉의 諫言에 힘입어 고쳤으니, 잘못된 부분은 모두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고 고친 부분은 모두 天性이 밝게 통달했기 때문이니, 만약 高祖가 배웠더라면 또한 이런 잘못이 없었을 것이다.”

班固贊曰 漢帝는 本系出自唐帝라 降及于周하고 在秦作劉러니 涉魏而東하야 遂爲豐公하니 豐公은 蓋太上皇父也라 由是推之하면 漢承運하야 德祚已盛하고 斷蛇著符하야 旗幟尙赤하야 協於火德하니 自然之應이 得天統矣니라

班固의 《漢書》〈高帝紀〉 贊에 말하였다.

“漢나라 高帝는 본래 계통이 임금에게서 나왔다. 후대로 내려와 周나라에 이르고 秦나라에서는 劉氏姓이 되었는데 魏나라로 들어가 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豐公이 되니, 豐公은 太上皇의 아버지이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漢나라는 임금의 運을 이어서 福祿이 이미 성하였고, 뱀을 죽여 符驗이 드러나서 旗幟를 赤色을 숭상하여 火德에 맞았으니, 자연의 응함이 天統을 얻은 것이다.”

敍傳曰 皇矣漢祖여 纂之緖하니 實天生德하야 聰明神武라 秦人不綱하고 網漏于楚라 爰玆發迹하야 斷蛇奮旅하고 神母告符하야 朱旗乃擧라 粤蹈秦郊하니 嬰來稽首라 革命創制에 三章是紀하야 應天順民하니 五星同晷라 項氏畔換하야 黜我巴漢하니 西土宅心하고 戰士憤怨이라 乘釁而運하야 席卷三秦하고 割據河山하야 保此懷民이라 股肱社稷是經하고 爪牙信布와 腹心이 龔行天罰하야 赫赫明明이라

《漢書》〈敍傳〉에 말하였다.

“훌륭한 漢나라 高祖여, 임금의 계통을 이으니 실로 하늘이 德을 내어 총명하고 神武하였다. 秦나라 사람들이 기강을 세우지 못하고, 楚나라(項羽)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다. 이에 자취를 드러내어 뱀을 죽이고 군대를 일으켰으며, 神母가 符驗을 고하여 붉은 깃발을 이에 들었다. 秦나라 郊外를 밟으니 秦王子嬰이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革命하여 제도를 만들 때에 三章의 法을 만들어 天心에 응하고 民心에 순응하니 五星이 함께 빛났다. 項氏가 강성하여 자신을 巴漢으로 내치니, 서쪽 지방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오고 戰士들은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틈을 타서 움직여 三秦을 석권하고 山河를 점거하여 德을 그리워하는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였다. 股肱과 같은 蕭何曹參이 社稷을 경영하고, 爪牙와 같은 韓信黥布, 腹心과 같은 張良陳平과 함께 천벌을 행하여 赫赫하고 明明하였다.”

班彪王命論曰 蓋在高祖에 其興也有五하니 一曰帝之苗裔요 二曰體貌多奇異요 三曰神武有徵應이요 四曰寬明而仁恕요 五曰知人善任使라 加之以誠信好謀하고 達於聽受하야 見善如不及하고 用人如由己하며 從諫如順流하고 趣(趨)時如嚮(響)赴라 當食吐哺하야 納子房之策하고 拔足揮洗하야 揖酈生之說하며 寤戍卒之言하야 斷懷土之情하고 高四皓之名하야 割肌膚之愛하며 擧韓信於行陣하고 拔陳平於亡命하야 英雄陳力하고 群策畢擧하니 此高祖之大略이 所以成帝業也니라

班彪의 王命論에 말하였다.

高祖 때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 다섯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帝堯의 후손이요, 두 번째는 體貌가 奇異함이 많은 것이요, 세 번째는 神武하여 징험이 있는 것이요, 네 번째는 너그럽고 밝으면서도 인자한 것이요, 다섯 번째는 사람을 알아 잘 맡긴 것이다. 게다가 성실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받아들여 善을 보면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고 사람을 등용할 때에 자기 몸과 같이 하였으며, 諫言을 따르기를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고 시기를 맞추기를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하였다. 밥을 먹다가 먹던 밥을 뱉고서 張子房의 계책을 받아들이고, 발 씻던 것을 치우고서 酈生의 말에 揖하였으며, 수자리 살러 가는 군사의 말을 받아들여 고향을 그리워하는 情을 끊었고, 商山四皓의 명성을 높게 여겨 피붙이의 사랑을 끊었으며, 韓信을 行陣에서 들어 쓰고 陳平을 망명온 사람 중에서 발탁하여, 영웅들이 힘을 펴고 여러 계책이 다 시행되었으니, 이는 高祖의 큰 도략이 帝業을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