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五十 後漢紀
通鑑節要 卷之五十
五代紀
後漢紀
高祖
○ 契丹主縱胡騎四出하야 以牧馬爲名하고 分番剽掠【剽는 劫奪也라 】하니 謂之打草穀이라 丁壯은 斃於鋒刃하고 老弱은 委於溝壑하야 自東西兩畿【東西二京也라 畿는 天子千里之地니 夏曰縣內요 殷曰畿內라 大梁屬縣은 爲東畿요 洛陽屬縣은 西畿니라 】로 及鄭, 滑, 曹, 濮히 數百里間에 財畜殆盡하니 於是에 內外怨憤하고 始患苦契丹하야 皆思逐之矣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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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主가 오랑캐 기병을 풀어놓아 사방으로 내보내서 말을 먹인다고 이름하고 番을 나누어 노략질하니,【剽는 위협하여 빼앗는 것이다.】 이를 일러 打草穀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中國의 壯丁들은 칼날에 죽고 노약자들은 시신이 도랑에 버려져서 東京과 西京의 兩畿로부터【東西兩畿는 東京과 西京 두 京師이다. 畿는 天子가 다스리는 千里의 땅이니, 夏나라는 縣內라고 하였고 殷나라는 畿內라고 하였다. 大梁의 屬縣은 東畿가 되고, 洛陽의 屬縣은 西畿가 된다.】鄭州‧滑州‧曹州‧濮州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에 재물과 가축이 거의 다 없어지니, 이에 內外가 원망하고 분노하였으며, 비로소 契丹을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모두 쫓아낼 것을 생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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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劉知遠이 河東에 있으면서 부강함이 여러 鎭 중에 으뜸이 되어 보병과 기병이 5만 명에 이르렀다. 晉主가 契丹과 원한을 맺으니, 劉知遠은 반드시 위험을 초래할 줄을 알았으나 한번도 의논하고 간하지 않았다. 契丹이 여러 번 깊숙히 침입하였지만 劉知遠은 애당초 적을 가로막고【邀 또한 가로막는 것이다.】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었는데 契丹이 汴州로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劉知遠은 군대를 나누어 사방의 경계를 수비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이에 장수와 막료들이 劉知遠에게 존호를 칭하여 사방을 호령할 것을 권하자, 劉知遠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契丹이 京城을 함락하고 천자를 사로잡아 천하에 군주가 없으니, 천하를 주관할 자가 우리 왕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마땅히 먼저 皇帝의 지위와 존호를 바로잡고 그런 뒤에 출정하소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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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에 도둑떼가 크게 일어나자, 契丹主가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中國 사람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을 줄은 알지 못했다.” 하고, 다시 晉나라 百官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날씨가 더워지니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기가 어렵다.” 하고, 蕭翰을【蕭翰은 契丹主耶律德光의 太后인 [ 述律太后]의 오라비의 아들이다. 그 누이가 다시 契丹主의 后가 되니, 처음으로 蕭氏를 姓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契丹의 后族을 모두 蕭氏라 칭하였다.】節度使로 삼았다. 契丹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遼라 하였다. 遼主가 大梁을 출발하니, 晉나라의 여러 文武 官司 중에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府庫에 가득한 물건을 모조리 싣고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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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主(劉知遠)가【晉主는 劉知遠이다.】太原을 출발하여陰地關으로부터 晉州와 絳州로 나오니,【晉州와 絳州는 지명이다.】史弘肇가【史弘肇는 侍衛都指揮使이다.】澤州를 점령하였음을아뢰었다.【거란의 昭義節度使[ 耿崇美]가 澤州에 주둔하여 潞州를 공격하려 하자, 史弘肇가 澤州를 점령하였다.】史弘肇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말이 적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엄격하고 정돈되어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하니, 晉主가 晉陽으로부터 편안히 행군하여 洛陽과 汴州(大梁)에 들어갈 적에 병사들이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은 모두 史弘肇의 힘이었다. 晉主가 이로 말미암아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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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皇帝
[庚戌]〈漢乾祐三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러니 漢亡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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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950) - 漢나라 乾祐 3년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었는데, 漢나라가 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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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에 漢나라 조정에서는 契丹이 가까이 침입하여 횡행하였으나 河北의 여러 藩鎭들이 각각 자신만 지키고 거란을 막는 자가 없다 하여, 制書를 내려 郭威를 鄴都留守天雄節度使로 임명하여樞密使는 예전처럼 맡게 하고,【漢主(劉承祐)가 즉위하여 郭威를 樞密使 同平章事에 그대로 임명하였다.】左監門衛將軍郭榮을 天雄衙內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郭榮은 本姓이 柴이니, 아버지守禮는 郭威의 妻兄이었다. 郭威가 아들이 없었을 때에 길러서 양자로 삼았다.- 郭威가 미천했을 때 이마 위에 雀兒라고 刺字하니, 사람들이 모두 郭雀兒라고 칭하였는데, 뒤에 郭威는 周나라 高祖가 되고 郭榮은 世宗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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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主(劉承祐)가 즉위한 이래로 楊邠은 機務와 정사를 총괄하고郭威는 정벌을 주관하고史弘肇는 宿衛를 맡고王章은【王章은 三司使 同平章事이다.】 財賦를 맡으니, 이 때문에 국가가 다소 편안하였다. 王章은 재정을 거두어들일 적에 각박하고 급박해서 소금과 백반과【礬은 藥石이니, 백색‧청색‧황색‧흑색‧적색 다섯 종류가 있다. 염색하는 자가 이를 이용하여 색(물감)을 만들기도 한다.】 술과 누룩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가 있으면 저울눈만한 것과 물방울만한 것이라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王章은 더욱이 文臣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들은 握算(주판)을 주면 다룰 줄 모르니,【縱橫은 주판의 가로와 세로이니, 王章이 三司使가 되어 실로 財賦를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등용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하였다. 史弘肇가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긴 창과 큰 검에 달려 있으니, 毛錐(붓)를【毛錐는 붓이다. 털을 묶어서 붓을 만드니, 모양이 송곳과 같다.】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 王章이 말하기를 “毛錐가 없다면 財賦가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수와 정승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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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主年益壯에 厭爲大臣所制하야 積不能平이어늘 左右因乘間하야 譖之於漢主호되 云 邠等이 專恣하니 終當爲亂이라한대 漢主信之하야 遂謀誅邠等하다 十一月丙子에 邠等이 入朝할새 有甲士數十이 自廣政殿出하야 殺邠, 弘肇, 章於東廡下하다 漢主遣供奉官孟業하야 齎密詔하고 詣澶州及鄴都하야 殺王殷【侍衛步軍都指揮使니 時在澶州하니라 】, 郭威, 王峻【監軍宣徽殿使니 時與郭威로 在鄴都하니라 】하니 郭威召郭崇威【行營馬軍都指揮使라 】, 曹威【行營步軍都指揮使라 】及諸將하야 告以楊邠等寃死와 及有密詔之狀하고 且曰 吾與諸公으로 披荊棘【荊棘은 喩亂也라 】하고 從先帝하야 取天下하야 受託孤之任하야 竭力以衛國家러니 今諸公已死하니 吾何心獨生이리오 郭崇威等이 皆泣曰 天子幼沖하니 此必左右群小所爲리니 願從公入朝自訴하야 盪滌鼠輩하야 以淸朝廷이요 不可爲單使所殺이니이다 郭威乃留其養子榮하야 鎭鄴都하고 命郭崇威하야 將騎兵前驅하고 自將大軍繼之하야 至封丘하니 人情恟懼러라 漢主遣慕容彦超【奉寧節度使니 時徵諸帥하야 以從兵衛宮闕하니라 】等하야 將兵拒之러니 彦超等이 戰敗遂還이어늘 是日에 漢主出勞軍이라가 兵敗하야 爲亂兵所弑하다 郭威自迎春門入하야 丁亥에 帥百官하고 起居太后하고 具奏稱호되 軍國事殷【殷은 盛也라 】하니 請早立嗣君이니이다 太后誥迎漢主弟河東節度使贇【贇은 漢主弟요 河東節度使崇之子요 高祖暠之猶子니라 】하야 卽皇帝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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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主(劉承祐)는 나이가 더욱 장성하자 大臣들에게 제재받는 것을 싫어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쌓여갔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를 틈타서 漢主에게 참소하기를 “楊邠 등이 전횡하고 방자하니, 끝내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니, 漢主가 그 말을 믿고 마침내 楊邠 등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11월 丙子日(13일)에 楊邠 등이 들어와 조회할 적에 甲士 수십 명이 廣政殿으로부터 뛰쳐나와서楊邠‧史弘肇‧王章을 동쪽 행랑채 아래에서 죽였다. 漢主가 供奉官[ 孟業]을 보내어 密詔를 가지고 澶州와 鄴都로 가서 王殷‧【王殷은 侍衛步軍 都指揮使이니, 이때 澶州에 있었다.】郭威‧王峻을【王峻은 監軍宣徽殿使이니, 이때 郭威와 함께 鄴都에 있었다.】죽이게하니, 郭威가 [ 郭崇威]와【[ 郭崇威]는 行營馬軍 都指揮使이다.】曹威【曹威는 行營步軍 都指揮使이다.】 및 여러 장수들을 불러 楊邠 등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과 황제가 密詔를 내린 실상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諸公들과 온갖 고난을 헤치고【荊棘은 난리를 비유한 것이다.】 先帝(劉知遠)를 따라 천하를 차지하여 孤兒(나이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중임을 받고 힘을 다해 국가를 보위하였는데, 이제 諸公들이 이미 죽었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살겠는가.” 하였다. [ 郭崇威] 등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天子의 나이가 어리니, 이는 반드시 좌우에 있는 여러 소인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公을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황제에게 하소연하고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소탕하여 조정을 깨끗이 청소해야 할 것이요, 일개 使者에게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郭威가 마침내 그의 養子인 郭榮을 남겨두어鄴都에 鎭駐하게하고, [ 郭崇威]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려 先鋒이 되게 하고 자신은 大軍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封丘縣에 이르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漢主가 慕容彦超【慕容彦超는 奉寧節度使이니, 이때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호위하였다.】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게하였는데, 慕容彦超 등이 싸움에 패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이날 漢主가 친히 나가 군사를 위로하다가 군사들이 패하여 亂兵에게 시해당하였다. 郭威가 迎春門으로 들어와丁亥日(24일)에 百官을 거느리고 太后의 안부를 물었으며, 글을 갖추어 上奏하기를 “軍國의 일이 많으니【殷은 많은 것이다.】 뒤를 이을 군주를 일찍 세우소서.” 하였다. 太后가 誥命을 내려 漢主의 아우(從弟) 河東節度使劉贇을【劉贇은 漢主(劉承祐)의 아우이고, 河東節度使劉崇의 아들이며, 高祖劉暠(劉知遠의 改名)의 조카이다.】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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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郭威가 大梁을 출발하여澶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癸丑日(20일) 아침 장차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병 수천 명이 갑자기 크게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郭威가 성문을 닫도록 명하니, 장병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지붕 위로 올라와 궁중 안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천자는 모름지기 郭侍中(郭威)께서 스스로 해야 할 것이요, 장병들은 이미 劉氏와【劉氏는 漢나라의 姓이다.】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혹자는 황색 깃발을 찢어 郭威의 몸에 입혀주고 함께 부둥켜 안고서 만세를 불러 만세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인하여 郭威를 옹위하고 남쪽으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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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劉知遠)는 정예한 병력을 보유하고 지형이 유리한 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오랑캐의 기병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中原에 주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온화하게 南面하여 천하가 그에게 歸附하였으니, 어찌 그의 재주와 덕이 크게 뛰어났기 때문이겠는가. 바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기 때문이다. 뿌리가 엉성한 자는 견고하지 못하고, 기반이 약한 자는 위태롭기가 쉽다. 隱帝(劉承祐)는 비록 南面(제왕)의 칭호를 소유하였으나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였고, 여러 소인들의 계책을 가볍게 믿어서 발호하는 신하를 제거하고자 하다가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禍가 미쳤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이다. 父子가 서로 계승해서 4년 만에 멸망하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누린 것이 이와 같이 짧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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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後漢은 二主에 共四年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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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後漢은 두 군주에 모두 4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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