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五十 後漢紀

yjw2999
이동: 둘러보기, 검색

五代紀

後漢紀

高祖
高祖在位二年이요 壽五十四

高祖※在位二年이요 壽五十四라

※ 名은 요 姓은 劉氏니 本名은 知遠이요 其先은 沙陀人이라 晉開運二年에 封北平王이러니 四年에 晉主北遷高祖한대 乃圖義擧하야 卽位於晉陽하니라

高祖는 재위가 2년이고, 壽가 54세이다.

高祖는 이름이 이고 姓이 劉氏이니, 本名은 知遠이고 그 선조는 沙陀사람이다. 晉나라 開運 2년(945)에 北平王에 봉해졌는데, 4년에 晉主(石重貴)가 高祖를 북쪽의 藩鎭으로 옮기자, 마침내 의거를 도모하여 晉陽에서 즉위하였다.

[丁未]

[丁未]〈漢高祖劉知遠은 仍稱晉天福十二年하니라 ○ 是歲에 晉亡漢興하니 幷蜀, 南漢, 南唐하야 凡四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정미(947) - 漢나라 高祖劉知遠은 晉나라 天福 12년을 그대로 칭하였다. ○ 이해에 晉나라가 망하고漢나라가 일어나니, 蜀‧南漢‧南唐을 아울러 모두 네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春正月朔에 契丹主至大梁하야 以晉主로 爲負義侯하야 置於黃龍府【黃龍府는 在臨潢府東南二百餘里라 按契丹國志에 東渡遼水하야 至(勃)[渤]海國鐵州요 又行七八日하야 過南海府하야 〈遂至黃龍府也라〉初에 契丹主阿保機 見黃龍在其氈屋上하고 連發二矢殪之러니 後에 太子德光이 於其地에 置黃龍府하니라 】하다

봄 정월 초하루에 契丹主가 大梁에 이르러晉主負義侯로 강등시키고黃龍府에 유치하였다.【黃龍府는 臨潢府의 동남쪽 200여 리 지점에 있다. 살펴보건대 《契丹國志》에 “동쪽으로 遼水를 건너 渤海國의 鐵州에 이르고, 또 7, 8일을 걸어 南海府를 지나 〈마침내 黃龍府에 이른다.〉” 하였다. 처음에 契丹主耶律阿保機가 黃龍이 털방석으로 만든 지붕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연이어 두 발의 화살을 쏘아 죽였는데, 뒤에 太子 耶律德光이 이곳에 黃龍府를 설치하였다.】

契丹主縱胡騎四出하야 以牧馬爲名하고 分番剽掠【剽는 劫奪也라 】하니 謂之打草穀이라 丁壯은 斃於鋒刃하고 老弱은 委於溝壑하야 自東西兩畿【東西二京也라 畿는 天子千里之地니 夏曰縣內요 殷曰畿內라 大梁屬縣은 爲東畿요 洛陽屬縣은 西畿니라 】로 及鄭, 滑, 曹, 濮히 數百里間에 財畜殆盡하니 於是에 內外怨憤하고 始患苦契丹하야 皆思逐之矣러라

契丹主가 오랑캐 기병을 풀어놓아 사방으로 내보내서 말을 먹인다고 이름하고 番을 나누어 노략질하니,【剽는 위협하여 빼앗는 것이다.】 이를 일러 打草穀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中國의 壯丁들은 칼날에 죽고 노약자들은 시신이 도랑에 버려져서 東京과 西京의 兩畿로부터【東西兩畿는 東京과 西京 두 京師이다. 畿는 天子가 다스리는 千里의 땅이니, 夏나라는 縣內라고 하였고 殷나라는 畿內라고 하였다. 大梁의 屬縣은 東畿가 되고, 洛陽의 屬縣은 西畿가 된다.】鄭州‧滑州‧曹州‧濮州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 사이에 재물과 가축이 거의 다 없어지니, 이에 內外가 원망하고 분노하였으며, 비로소 契丹을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모두 쫓아낼 것을 생각하였다.

○ 晉劉知遠이 在河東하야 富强이 冠諸鎭하야 步騎至五萬人이라 晉主與契丹結怨하니 知遠이 知其必危호되 而未嘗論諫하다 契丹이 屢深入호되 知遠이 初無邀遮【邀도 亦遮也라 】入援之志러니 及聞契丹入汴하고 知遠이 分兵守四境하야 以防侵軼이라 於是에 將佐勸知遠稱尊號하야 以號令四方한대 知遠이 不許어늘 軍士皆曰 今契丹이 陷京城, 執天子하야 天下無主하니 主天下者 非我王而誰오 宜先正位號하고 然後出師하소서

晉나라 劉知遠이 河東에 있으면서 부강함이 여러 鎭 중에 으뜸이 되어 보병과 기병이 5만 명에 이르렀다. 晉主가 契丹과 원한을 맺으니, 劉知遠은 반드시 위험을 초래할 줄을 알았으나 한번도 의논하고 간하지 않았다. 契丹이 여러 번 깊숙히 침입하였지만 劉知遠은 애당초 적을 가로막고【邀 또한 가로막는 것이다.】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었는데 契丹이 汴州로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劉知遠은 군대를 나누어 사방의 경계를 수비하여 침략을 방비하였다. 이에 장수와 막료들이 劉知遠에게 존호를 칭하여 사방을 호령할 것을 권하자, 劉知遠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契丹이 京城을 함락하고 천자를 사로잡아 천하에 군주가 없으니, 천하를 주관할 자가 우리 왕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마땅히 먼저 皇帝의 지위와 존호를 바로잡고 그런 뒤에 출정하소서.” 하였다.

○ 二月辛未에 晉知遠이 卽皇帝位하야 自言未忍改晉國이라하고 又惡開運【晉齊王年號라 】之名하야 乃更稱天福【晉高祖年號라 】十二年하다

2월 辛未日(15일)에 晉나라 劉知遠이 황제에 즉위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차마 晉나라의 국호를 고칠 수 없다.” 하고, 또 開運이라는 명칭을 싫어하여【開運은 晉나라 齊王(石重貴)의 연호이다.】 마침내 다시 天福 12년이라고 칭하였다.【天福은 晉나라 高祖(石敬瑭)의 연호이다.】

○ 東方에 群盜大起어늘 契丹主謂左右曰 我不知中國之人을 難制如此로다 復召晉百官하야 諭之曰 天時向暑하니 吾難久留라하고 以蕭翰契丹主邪(耶)律德光〈太〉后述律太后之兄子라 其妹復爲契丹主后하니 始以爲姓이라 自是로 契丹后族을 皆稱蕭氏하니라 】으로 爲節度使하다 契丹이 建國號遼하다 遼主發大梁하니 晉文武諸司從者數千人이라 盡載府庫之實以行하다

東方에 도둑떼가 크게 일어나자, 契丹主가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中國 사람들을 제어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을 줄은 알지 못했다.” 하고, 다시 晉나라 百官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날씨가 더워지니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기가 어렵다.” 하고, 蕭翰蕭翰契丹主耶律德光의 太后인 [ 述律太后]의 오라비의 아들이다. 그 누이가 다시 契丹主의 后가 되니, 처음으로 蕭氏를 姓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契丹의 后族을 모두 蕭氏라 칭하였다.】節度使로 삼았다.

契丹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遼라 하였다. 遼主가 大梁을 출발하니, 晉나라의 여러 文武 官司 중에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府庫에 가득한 물건을 모조리 싣고 갔다.

遼主至殺胡林【胡는 本作狐라 按契丹志에 殺狐林者는 村民이 於林中에 射殺一狐하고 因名焉이라 今名死狐嶺하니 在眞定府欒城縣北하니라 】而卒이어늘 國人이 剖其腹하고 實鹽數斗하야 載之北去하니 晉人이 謂之帝羓【羓는 音巴니 腊屬이라 凡獸全乾者曰腊이니 卽太宗德光也라 】라하니라

遼主가 殺胡林에 이르러죽자,【殺胡林의 胡는 본래 狐로 되어있다. 살펴보건대 《契丹志》에 “殺狐林은 마을 백성들이 숲속에서 여우 한 마리를 쏘아 죽이고 인하여 이렇게 이름했다.” 하였다. 지금은 死狐嶺이라고 이름하니, 眞定府欒城縣의 북쪽에 있다.】 國人들이 그의 배를 가르고 소금 몇 말을 뱃속에 채워 수레에 싣고 북쪽으로 가니, 晉나라 사람들이 이를 일러 帝羓라 하였다.【羓는 음이 巴이니, 포의 종류이다. 모든 짐승 고기를 완전히 말린 것을 포라고 하니, 帝羓는 바로 太宗耶律德光이다.】

楚王希範馬殷子也니 見上卷하니라 】이 卒하니 將佐奉其弟希廣立之하다

楚王馬希範馬希範馬殷의 아들이니, 上卷에 보인다.】죽으니, 장수와 막료들이 그의 아우希廣을 받들어 세웠다.

晉主劉知遠이라 】發太原하야 自陰地關으로 出晉, 絳【地名이라 】하니 史弘肇【侍衛都指揮使라 】奏克澤州【契丹昭義節度使耿崇美 屯澤州하야 將攻潞州어늘 弘肇取之하니라 】하다 弘肇爲人이 沈毅寡言하고 御衆整하야 所向必克하니 晉主自晉陽으로 安行하야 入洛及汴에 兵不血刃은 皆弘肇之力也라 晉主由是로 倚愛之하니라

晉主(劉知遠)晉主劉知遠이다.】太原을 출발하여陰地關으로부터 晉州와 絳州로 나오니,【晉州와 絳州는 지명이다.】史弘肇史弘肇는 侍衛都指揮使이다.】澤州를 점령하였음을아뢰었다.【거란의 昭義節度使[ 耿崇美]가 澤州에 주둔하여 潞州를 공격하려 하자, 史弘肇가 澤州를 점령하였다.】史弘肇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말이 적으며 무리를 어거함에 엄격하고 정돈되어서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승리하니, 晉主가 晉陽으로부터 편안히 행군하여 洛陽과 汴州(大梁)에 들어갈 적에 병사들이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은 모두 史弘肇의 힘이었다. 晉主가 이로 말미암아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였다.

蕭翰이 聞晉主擁兵而南하고 欲北歸호되 恐中國無主하야 必大亂이러니 時에 唐明宗許王從益이 與王淑妃許王母라 】로 在洛陽이어늘 이 迎而立之하야 以爲帝하다

蕭翰晉主가 군대를 거느리고 南下한다는 말을 듣고는 북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中國에 군주가 없어서 반드시 크게 혼란해질까 두려워하였다. 이때 唐나라 明宗의 아들許王李從益王淑妃와 함께王淑妃許王(李從益)의 어머니이다.】洛陽에 있었는데, 蕭翰이 그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웠다.

○ 六月에 吳越忠獻王弘佐卒할새 遺令하야 以丞相弘倧弘佐之弟라 】으로 爲鎭海, 鎭東節度使하다 〈是歲에 爲內牙統軍使胡進思所廢하고 更立其弟弘淑하니라〉

6월에 吳越의 忠獻王錢弘佐가 죽을 적에 遺命을 내려丞相錢弘倧錢弘倧錢弘佐의 아우이다.】鎭海‧鎭東節度使로 삼게하였다. - 이해에 錢弘倧이 內牙統軍使胡進思에게 폐위당하고, 다시 그의 아우 錢弘淑을 세웠다.-

晉主至洛陽하야 命鄭州防禦使郭從義하야 先入大梁淸宮【灑掃殿內也라 】하고 密令殺李從益王淑妃하다

晉主(劉知遠)가 洛陽에 이르러鄭州防禦使郭從義에게 명하여大梁(汴州)에 먼저 들어가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게하고【淸宮은 궁전 안에 물을 뿌려 청소하는 것이다.】 은밀히 李從益王淑妃를 죽이게하였다.

晉主【綱目에 作漢主라 】至大梁하야 復以汴州爲東京하고 改國號曰漢이라하고 仍稱天福年하고 曰 余未忍忘晉也라하니라

晉主晉主는 《資治通鑑綱目》에는 [ 漢主]로 되어 있다.】大梁에 이르러 다시 汴州를 東京이라 하고 국호를 漢으로 고치고, 天福이라는 연호를 그대로 칭하며 말하기를 “내가 晉나라를 차마 잊지 못해서이다.”라고 하였다.

遼 大同元年

○ 遼 〈大同元年九月에 世宗(元)[兀]欲이 更名阮하고 天祿元年이라〉

遼나라 - 大同 元年 9월에 世宗耶律兀欲이 이름을 으로 고치고天祿 元年이라 칭하였다. -

[戊申]漢改乾祐元年

[戊申]〈漢改乾祐元年하다 二月에 隱帝承祐立하니라 ○ 是歲에 凡四國, 三鎭이라〉

무신(948) - 漢나라는 乾祐 元年으로 고쳤다. 2월에 隱帝劉承祐가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네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正月에 晉主不豫어늘 召蘇逢吉, 楊邠, 史弘肇, 郭威蘇逢吉은 同平章事요 楊邠은 樞密使요 郭威는 副樞密使라 】하야 入受顧命할새 曰 承祐幼弱하니 後事를 託在卿輩하노라 二月에 立皇子承祐周王하야 卽皇帝位하다

봄 정월에 晉主가 편찮았는데, 蘇逢吉楊邠史弘肇郭威를 불러蘇逢吉은 同平章事이고, 楊邠은 樞密使이고, 郭威는 副樞密使였다.】 궁궐에 들어와서 顧命을 받게 하고, 말하기를 “承祐가 어리고 약하니, 뒷일을 경들에게 부탁한다.” 하였다.

2월에 皇子劉承祐周王으로 세워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 冬十月에 荊南節度使南平獻王高從誨卒하니 其子保融이 知留後하다

겨울 10월에 荊南節度使南平獻王高從誨가 죽으니, 그의 아들高保融이 留後를 맡았다.

遼 天祿二年

○ 遼 〈天祿二年이라 遼主太祖太子人皇王子니 是爲孝和莊憲皇帝라〉

遼나라 - 天祿 2년이다. 遼主耶律阮太祖(耶律阿保機)의 太子인 人皇王耶律倍의 아들이니, 이가 孝和莊憲皇帝이다.-

隱皇帝
名은 承祐高祖第二子라

隱皇帝 名은 承祐高祖第二子라 在位三年이요 壽二十이라

隱皇帝는 이름이 承祐이니, 高祖(劉知遠)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20세이다.

[庚戌]漢乾祐三年

[庚戌]〈漢乾祐三年이라 ○ 是歲에 四國, 三鎭이러니 漢亡하니라〉

경술(950) - 漢나라 乾祐 3년이다. ○ 이해에 네 나라이고 세 鎭이었는데, 漢나라가 망하였다.-

夏四月에 漢朝以契丹近入寇橫行호되 河北諸藩鎭이 各自守하고 無扞禦之者라하야 制하야 以郭威로 爲鄴都留守天雄節度使하야 樞密使는 如故漢主卽位하야 以威로 仍爲樞密使同平章事하니라 】하고 以左監門衛將軍郭榮으로 爲天雄衙內都指揮使하다 은 本姓이 니 父守禮郭威之妻兄也라 未有子時에 養以爲子하니라 〈威微時에 刺其頂上하야 爲雀兒하니 人皆稱爲郭雀兒러니 後爲周高祖하고 世宗하니라〉

여름 4월에 漢나라 조정에서는 契丹이 가까이 침입하여 횡행하였으나 河北의 여러 藩鎭들이 각각 자신만 지키고 거란을 막는 자가 없다 하여, 制書를 내려 郭威를 鄴都留守天雄節度使로 임명하여樞密使는 예전처럼 맡게 하고,漢主(劉承祐)가 즉위하여 郭威를 樞密使 同平章事에 그대로 임명하였다.】左監門衛將軍郭榮을 天雄衙內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郭榮은 本姓이 이니, 아버지守禮郭威의 妻兄이었다. 郭威가 아들이 없었을 때에 길러서 양자로 삼았다.- 郭威가 미천했을 때 이마 위에 雀兒라고 刺字하니, 사람들이 모두 郭雀兒라고 칭하였는데, 뒤에 郭威는 周나라 高祖가 되고 郭榮世宗이 되었다.-

漢主自卽位以來로 楊邠은 總機政하고 郭威는 主征伐하고 史弘肇는 典宿衛하고 王章【三司使同平章事라 】은 掌財賦하니 以是로 國家粗安이러라 이 聚斂刻急하야 有犯鹽礬【礬은 藥石也니 有白靑黃黑赤五種이라 或染者 借以成色하니라 】酒麯之禁者면 錙銖涓滴이라도 罪皆死하다 이 尤不喜文臣하야 嘗曰 此輩는 授之握算이면 不知縱橫【算之橫豎니 王章爲三司使하야 寔掌財賦故로 云然也라 】이니 何益於用이리오 史弘肇曰 安定國家는 在長搶大劍이니 安用毛錐【筆也라 以束毛爲筆하니 形如錐也라 】리오 曰 無毛錐면 則財賦何從可出고하니 於是에 將相이 始有隙하니라

漢主(劉承祐)가 즉위한 이래로 楊邠은 機務와 정사를 총괄하고郭威는 정벌을 주관하고史弘肇는 宿衛를 맡고王章王章은 三司使 同平章事이다.】 財賦를 맡으니, 이 때문에 국가가 다소 편안하였다. 王章은 재정을 거두어들일 적에 각박하고 급박해서 소금과 백반과【礬은 藥石이니, 백색‧청색‧황색‧흑색‧적색 다섯 종류가 있다. 염색하는 자가 이를 이용하여 색(물감)을 만들기도 한다.】 술과 누룩에 대한 금령을 범한 자가 있으면 저울눈만한 것과 물방울만한 것이라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王章은 더욱이 文臣들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들은 握算(주판)을 주면 다룰 줄 모르니,【縱橫은 주판의 가로와 세로이니, 王章이 三司使가 되어 실로 財賦를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등용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하였다. 史弘肇가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긴 창과 큰 검에 달려 있으니, 毛錐(붓)를【毛錐는 붓이다. 털을 묶어서 붓을 만드니, 모양이 송곳과 같다.】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 王章이 말하기를 “毛錐가 없다면 財賦가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수와 정승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다.

漢主年益壯에 厭爲大臣所制하야 積不能平이어늘 左右因乘間하야 譖之於漢主호되 云 等이 專恣하니 終當爲亂이라한대 漢主信之하야 遂謀誅等하다 十一月丙子에 等이 入朝할새 有甲士數十이 自廣政殿出하야 殺, 弘肇, 於東廡下하다 漢主遣供奉官孟業하야 齎密詔하고 詣澶州及鄴都하야 殺王殷【侍衛步軍都指揮使니 時在澶州하니라 】, 郭威, 王峻【監軍宣徽殿使니 時與郭威로 在鄴都하니라 】하니 郭威召郭崇威【行營馬軍都指揮使라 】, 曹威【行營步軍都指揮使라 】及諸將하야 告以楊邠等寃死와 及有密詔之狀하고 且曰 吾與諸公으로 披荊棘【荊棘은 喩亂也라 】하고 從先帝하야 取天下하야 受託孤之任하야 竭力以衛國家러니 今諸公已死하니 吾何心獨生이리오 郭崇威等이 皆泣曰 天子幼沖하니 此必左右群小所爲리니 願從公入朝自訴하야 盪滌鼠輩하야 以淸朝廷이요 不可爲單使所殺이니이다 郭威乃留其養子하야 鎭鄴都하고 命郭崇威하야 將騎兵前驅하고 自將大軍繼之하야 至封丘하니 人情恟懼러라 漢主慕容彦超【奉寧節度使니 時徵諸帥하야 以從兵衛宮闕하니라 】等하야 將兵拒之러니 彦超等이 戰敗遂還이어늘 是日에 漢主出勞軍이라가 兵敗하야 爲亂兵所弑하다 郭威自迎春門入하야 丁亥에 帥百官하고 起居太后하고 具奏稱호되 軍國事殷【殷은 盛也라 】하니 請早立嗣君이니이다 太后誥迎漢主弟河東節度使贇漢主弟요 河東節度使之子요 高祖之猶子니라 】하야 卽皇帝位하다

漢主(劉承祐)는 나이가 더욱 장성하자 大臣들에게 제재받는 것을 싫어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쌓여갔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를 틈타서 漢主에게 참소하기를 “楊邠 등이 전횡하고 방자하니, 끝내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니, 漢主가 그 말을 믿고 마침내 楊邠 등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11월 丙子日(13일)에 楊邠 등이 들어와 조회할 적에 甲士 수십 명이 廣政殿으로부터 뛰쳐나와서楊邠史弘肇王章을 동쪽 행랑채 아래에서 죽였다. 漢主가 供奉官[ 孟業]을 보내어 密詔를 가지고 澶州와 鄴都로 가서 王殷王殷은 侍衛步軍 都指揮使이니, 이때 澶州에 있었다.】郭威王峻王峻은 監軍宣徽殿使이니, 이때 郭威와 함께 鄴都에 있었다.】죽이게하니, 郭威가 [ 郭崇威]와【[ 郭崇威]는 行營馬軍 都指揮使이다.】曹威曹威는 行營步軍 都指揮使이다.】 및 여러 장수들을 불러 楊邠 등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과 황제가 密詔를 내린 실상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諸公들과 온갖 고난을 헤치고【荊棘은 난리를 비유한 것이다.】 先帝(劉知遠)를 따라 천하를 차지하여 孤兒(나이 어린 군주)를 부탁하는 중임을 받고 힘을 다해 국가를 보위하였는데, 이제 諸公들이 이미 죽었으니, 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살겠는가.” 하였다.

[ 郭崇威] 등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天子의 나이가 어리니, 이는 반드시 좌우에 있는 여러 소인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公을 따라 조정에 들어가서 스스로 황제에게 하소연하고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소탕하여 조정을 깨끗이 청소해야 할 것이요, 일개 使者에게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郭威가 마침내 그의 養子인 郭榮을 남겨두어鄴都에 鎭駐하게하고, [ 郭崇威]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려 先鋒이 되게 하고 자신은 大軍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封丘縣에 이르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漢主慕容彦超慕容彦超는 奉寧節度使이니, 이때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병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호위하였다.】 등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게하였는데, 慕容彦超 등이 싸움에 패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이날 漢主가 친히 나가 군사를 위로하다가 군사들이 패하여 亂兵에게 시해당하였다. 郭威가 迎春門으로 들어와丁亥日(24일)에 百官을 거느리고 太后의 안부를 물었으며, 글을 갖추어 上奏하기를 “軍國의 일이 많으니【殷은 많은 것이다.】 뒤를 이을 군주를 일찍 세우소서.” 하였다. 太后가 誥命을 내려 漢主의 아우(從弟) 河東節度使劉贇劉贇漢主(劉承祐)의 아우이고, 河東節度使劉崇의 아들이며, 高祖劉暠(劉知遠의 改名)의 조카이다.】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하였다.

○ 武平節度使馬希萼希廣之兄이라 】이 攻楚王希廣殺之하고 自稱武安, 靜江, 寧遠等軍節度使하다

武平節度使馬希萼馬希萼馬希廣의 형이다.】楚王馬希廣을 공격하여죽이고, 스스로 武安軍‧靜江軍‧寧遠軍 등의 節度使를 칭하였다.

遼主入寇어늘 漢太后郭威하야 將大軍擊之하다 十二月에 發大梁하야 館于澶州러니 癸丑旦에 將發할새 將士數千人이 忽大譟어늘 命閉門하니 將士踰垣登屋而入曰 天子는 須侍中自爲之요 將士已與劉氏【漢姓이라 】爲仇하니 不可立也라하고 或裂黃旗하야 以被體하고 共扶抱之하야 呼萬歲震地하고 因擁南行이라 乃上太后牋호되 請奉漢宗廟하고 事太后爲母라하다 己未에 太后誥廢하야 爲湘陰公하고 以侍中로 監國하니 百官藩鎭이 相繼上表勸進하다

遼主가 들어와 침략하자漢나라 太后郭威에게 명하여 大軍을 거느리고공격하게하였다.

12월에 郭威가 大梁을 출발하여澶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癸丑日(20일) 아침 장차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병 수천 명이 갑자기 크게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郭威가 성문을 닫도록 명하니, 장병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지붕 위로 올라와 궁중 안으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천자는 모름지기 郭侍中(郭威)께서 스스로 해야 할 것이요, 장병들은 이미 劉氏劉氏는 漢나라의 姓이다.】 원수가 되었으니, 그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혹자는 황색 깃발을 찢어 郭威의 몸에 입혀주고 함께 부둥켜 안고서 만세를 불러 만세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인하여 郭威를 옹위하고 남쪽으로 갔다.

郭威가 마침내 태후에게 牋文을 올려 “漢나라 종묘를 받들고 태후를 섬겨 어머니로 삼겠다.”고 청하였다. 己未日(26일)에 太后가 誥命을 내려 劉贇을 폐하여湘陰公으로 삼고侍中郭威를 監國으로 삼으니, 百官과 藩鎭이 서로 이어 郭威에게 표문을 올려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歷年圖曰 高祖擁精銳之兵하고 居形便之地러니 屬胡騎北旋하고 中州乏主라 故로 雍容南面而天下歸之하니 豈其材德之首出哉아 乃會其時之可爲也라 夫根疏者不固하고 基薄者易危라 隱帝는 雖有南面之號나 而政非己出하야 民不知君하고 輕信群小之謀하야 欲除跋扈之臣이라가 禍不旋踵하니 自然之勢也라 父子相繼四年而滅하니 自古享國之短이 未有若玆也니라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祖(劉知遠)는 정예한 병력을 보유하고 지형이 유리한 지역에 있었는데, 마침 오랑캐의 기병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中原에 주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온화하게 南面하여 천하가 그에게 歸附하였으니, 어찌 그의 재주와 덕이 크게 뛰어났기 때문이겠는가. 바로 큰일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났기 때문이다. 뿌리가 엉성한 자는 견고하지 못하고, 기반이 약한 자는 위태롭기가 쉽다.

隱帝(劉承祐)는 비록 南面(제왕)의 칭호를 소유하였으나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군주를 알지 못하였고, 여러 소인들의 계책을 가볍게 믿어서 발호하는 신하를 제거하고자 하다가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禍가 미쳤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이다. 父子가 서로 계승해서 4년 만에 멸망하였으니, 예로부터 나라를 누린 것이 이와 같이 짧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右後漢은 二主에 共四年이라

이상 後漢은 두 군주에 모두 4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