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五十 後周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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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
太祖요 姓郭氏요 字仲文이니

後周紀

太祖요 姓郭氏요 字仲文이니 邢州堯山人이라 在位三年이요 壽五十二이라

太祖는 이름이 이고 성이 郭氏이고 字가 仲文이니, 邢州堯山사람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52세이다.

[辛亥]周太祖郭威廣順元年

[辛亥]〈周太祖郭威廣順元年이라 ○ 北漢主劉崇乾祐四年이라 ○ 是歲에 周代漢하고 北漢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신해(951) - 周나라 太祖郭威의 廣順 元年이다. ○ 北漢主劉崇의 乾祐 4년이다. ○ 이해에 周나라가 漢나라를 대신하고 北漢이 건국하였으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春正月에 漢監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周라하다

봄 정월에 漢나라의 監國(郭威)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周라 하였다.

○ 初에 漢河東節度使兼中書令劉崇【漢高祖母弟라 】이 聞隱帝遇害하고 欲起兵南向이러니 聞迎立湘陰公하고 乃止曰 吾兒爲帝하니 吾又何求리오 及廢에 乃卽皇帝位於晉陽하야 更名하고 仍用乾祐【隱帝年號라 】年號하다 〈是爲北漢이라〉

처음에 漢나라 河東節度使兼中書令劉崇劉崇은 漢나라 高祖(劉知遠)의 同母弟이다.】隱帝(劉承祐)가 시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湘陰公(劉贇)을 맞이하여 황제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내가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劉贇이 폐위되자, 劉崇이 晉陽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으로 고치고乾祐라는【乾祐는 隱帝의 연호이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것이 北漢이다. -

○ 初에 周主討河中【己酉年에 節度使李守貞反이어늘 討殺之하니라 】하니 已爲人望所屬이라 李穀이 時爲轉運使러니 周主數以微言諷之호되 穀이 但以人臣盡節로 爲對라 周主以是賢之하야 卽位에 首用爲相하니라 時에 國家新造하야 四方多故어늘 王峻【左僕射兼門下侍郞이라 】은 夙夜盡心하야 知無不爲하야 軍旅之謀를 多所裨益하고 范質【戶部侍郞判三司라 】은 明敏彊記하야 謹守法度하고 李穀【中書侍郞 同平章事라 】은 沈毅有器略하야 在周主前論議할새 辭氣忼(慷)慨【忼은 亦作慷하니 竭誠也요 又倜儻貌라 】하고 善譬諭하야 以開主意하니라

처음에 周主(郭威)가 河中을 토벌하니,【己酉年(949)에 河中節度使李守貞이 반란하자 周主가 토벌하여 죽였다.】 이미 사람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李穀이 당시 轉運使로 있었는데, 周主가 여러 번 은미한 말로 넌지시 말하였으나 李穀은 단지 ‘신하는 충절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周主가 이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즉위한 뒤에 첫 번째로 등용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국가를 새로 세워 사방에 사고가 많았는데, 王峻王峻은 左僕射兼門下侍郞이다.】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여 아는 것을 시행하지 않음이 없어 군대의 계책에 도움이 되는 바가 많았고, 范質范質은 戶部侍郞 判三司이다.】 밝고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법도를 삼가 지켰고, 李穀李穀은 中書侍郞 同平章事이다.】 침착하고 굳세고 기국과 지략이 있어 周主 앞에서 의논할 적에 말소리가 비분강개하고【忼은 또한 慷으로도 쓰니, 정성을 다하고 또 기개가 있는 모양이다.】 비유를 잘하여 군주의 마음을 열어주곤 하였다.

唐主邊鎬唐主李昪長子也요 邊鎬는 信州刺史라 】하야 平湖南【湖南은 楚馬氏라 】하고 以로 爲武安節度使하다

唐主邊鎬를 보내어唐主李昪의 長子인 李璟이고, 邊鎬는 信州刺史이다.】湖南을 평정하고【湖南은 楚나라 馬氏이다.】邊鎬를 武安節度使로 임명하였다.

遼 穆宗璟應曆元年

○ 遼 〈穆宗應曆元年이라〉

遼나라 - 穆宗耶律璟의 應曆 元年이다. -

[壬子]周廣順二年

[壬子]〈周廣順二年이라 ○ 是歲에 周, 南漢, 蜀, 唐, 北漢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凡三鎭이라〉

임자(952) - 周나라 廣順 2년이다. ○ 이해에 周‧南漢‧蜀‧唐‧北漢 모두 다섯 나라이고, 吳越‧湖南‧荊南 모두 세 鎭이다.-

周主自入秋로 得風痺疾【脚冷濕病이라 】하야 害於食飮及步趨하니라

周主가 가을이 된 뒤로 중풍에 걸려 수족이 마비되어서【痺疾은 다리가 차고 습한 병이다.】 음식을 먹을 때와 걸음을 걸을 때 장애가 되었다.

遼 應曆二年

○ 遼 〈應曆二年이라〉

遼나라 - 應曆 2년이다. -

[甲寅]周顯德元年

[甲寅]〈周顯德元年正月에 睿武孝文皇帝立하고 北漢乾祐七年에 孝和帝立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갑인(954) - 周나라 顯德 元年 정월에 睿武孝文皇帝郭榮이 즉위하고, 北漢乾祐 7년에 孝和帝劉鈞이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

春正月에 周加晉王太祖養子니 是爲世宗이라 】兼侍中判內外兵馬事하다 時에 群臣이 希(稀)得見周主하야 中外恐懼러니 聞晉王典兵하고 人心稍安하니라 壬辰에 周主殂하니 晉王이 卽皇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周祖兩弑其君하고 簒取大位러니 得國之初에 罷四方貢獻珍食하고 詔百官上封事하며 毁漢宮寶器하고 立訴訟法하며 定稅牛皮法하고 罷戶部營田務하고 除租牛課하며 又如曲阜하야 謁孔子祠하고 拜其墓라 況有王峻以贊軍事하고 范質以守法度하고 李穀以道上意하니 雖享國日淺이나 而施爲有足稱者라 故로 先儒稱其爲唐明, 周世之亞는 蓋以此耳라 然이나 其旣已文身而甘心從夷하고 又偃然自處天位하니 則是黃屋之中에 居一黥人耳니 何以令天下衆庶乎아 觀其語劉崇曰 自古豈有花項天子리오하니 則周祖之自處 亦是明矣니라

봄 정월에 周나라가 晉王郭榮에게晉王郭榮太祖(郭威)의 양자이니, 이가 世宗이다.】兼侍中判內外兵馬事를 가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周主를 만나보는 일이 드물어서 中外가 두려워하였는데, 晉王이 군대를 맡았다는 말을 듣고는 인심이 다소 안정되었다. 壬辰日에 周主가 죽으니, 晉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周나라 太祖(郭威)는 두 번이나 군주를 시해하고 大位를 찬탈하였는데, 나라를 얻은 초기에 四方에서 貢獻과 진귀한 음식을 바치는 것을 중지시키고 百官들에게 명하여 封事疏를 올리게 하였으며, 後漢의 궁궐과 寶器를 부수고 訴訟하는 法을 만들었으며, 牛皮에 세금을 매기는 法을 정하고 戶部의 營田하는 일을 파하고 소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을 면제하였으며, 曲阜에 가서 孔子의 祠堂에 배알하고 묘소에 참배하였다. 더구나 王峻이 軍事를 돕고 范質이 法度를 지키고 李穀이 上의 뜻을 말하게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누린 것은 日淺하였으나 시행한 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先儒가 唐나라 明宗과 周나라 世宗의 다음이라고 칭찬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文身을 하여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또 버젓이 스스로 天子의 자리에 거하였으니, 이는 黃屋(임금의 자리)의 가운데에 한 文身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니, 어떻게 천하의 백성들을 호령할 수 있겠는가. 그가 劉崇에게 ‘예로부터 어찌 花項天子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을 보면 周나라 太祖가 자처한 것이 또한 분명하다.”

北漢主劉崇이라 】太祖晏駕하고 甚喜하야 謀大擧入寇할새 遣使請兵于遼하다

北漢主(劉崇)北漢主劉崇이다.】太祖(郭威)가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대를 크게 일으켜 침략할 것을 도모할 적에 遼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대를 청하였다.

○ 二月에 遼主遣其將兗하야 將萬餘騎하고 如晉陽한대 北漢主自將兵三萬하고 與契丹으로 南趣(趨)潞州하다 周主世宗이 聞北漢主入寇하고 欲自將兵禦之하니 群臣皆曰 劉崇이 自平陽遁走【辛亥年에 崇稱帝於晉陽하고 乞師契丹하야 會伐周러니 久不克하고 乏食이어늘 燒營夜遁하니라】以來로 勢蹙氣沮하야 必不敢自來요 陛下新卽位하사 山陵有日하니 人心易搖라 不宜輕動이니 宜命將禦之니이다 世宗이 幸我大喪하고 輕朕年少新立하야 有呑天下之心하야 此必自來하리니 朕不可不往이니라 乙酉에 周主發大梁하야 壬辰에 過澤州하야 宿於州東北이러니 北漢主不知周主至하고 過潞州不攻하고 引兵而南하야 是夕에 軍於高平之南하다 周主介馬【介는 甲也라 】하고 自臨陣督戰할새 合戰未幾에 樊愛能, 何徽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요 何徽는 步軍都指揮使라 】引騎兵先遁하야 右軍潰하니 步兵千餘人이 解甲呼萬歲하고 降于北漢이라 周主見兵勢危하고 自引兵하야 親犯矢石督戰하니 太祖皇帝時爲宿衛將太祖皇帝는 謂宋太祖趙匡胤也라 】하야 謂同列曰 主危如此하니 吾屬이 何得不致死리오 又謂張永德【殿前都指揮使也라 太祖之壻니 掌禁兵하니라 】曰 賊氣驕하니 力戰이면 可破也라하고 乃身先士卒하야 馳犯其鋒한대 士卒死戰하야 無不一當百하니 北漢兵披靡【披는 分也니 言相違라 】라 時에 南風益盛이어늘 周兵爭奮하니 北漢兵이 大敗라 追至高平하니 僵尸滿山谷하고 委棄御物【謂服御之物이라 】及輜重器械雜畜이 不可勝紀러라

2월에 遼主가 그의 장수[ 楊兗]을 보내어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晉陽으로 가게하니, 北漢主가 스스로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契丹과 함께 남쪽으로 潞州로 진출하였다.

周主世宗(郭榮)北漢主가 쳐들어와 침략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군대를 인솔하여 막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劉崇이 平陽에서 패하여 도망간【辛亥年(951)에 劉崇이 晉陽에서 황제를 칭하고 거란에 군대를 요청하여 모여서 周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바닥나자, 진영을 불태우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래로 형세가 위축되고 기운이 꺾여서 반드시 감히 직접 오지 못할 것이고, 폐하께서는 새로 즉위하여 山陵에 장례를 모실 날이 잡혀 있으니, 인심이 동요되기 쉽습니다.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되니, 마땅히 장수에게 명하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世宗이 말하기를 “劉崇이 우리나라에 大喪(國喪)이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며, 朕이 나이가 젊고 새로 즉위한 것을 깔보아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이번에 반드시 스스로 올 것이니,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乙酉日(11일)에 周主가 大梁을 출발하여壬辰日(18일)에 澤州를 지나澤州의 동북쪽에 유숙하였다. 北漢主周主가 온 것을 알지 못하여潞州를 지나가면서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이날 저녁 高平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周主가 갑옷을 입힌 戰馬를 타고【介는 갑옷이다.】 스스로 陣에 임하여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교전한 지 얼마 안 되어 樊愛能何徽樊愛能은 馬軍都指揮使이고, 何徽는 步軍都指揮使이다.】 기병을 이끌고 먼저 도망하여右軍이 무너지니, 보병 천여 명이 갑옷을 벗고 만세를 부르며 北漢에 항복하였다.

周主는 전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니, 宋나라 太祖皇帝(趙匡胤)가 이때 宿衛將으로 있으면서太祖皇帝는 宋나라 太祖趙匡胤을 이른다.】 同列들에게 이르기를 “군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또 張永德에게 이르기를張永德은 殿前都指揮使이다. 太祖(郭威)의 사위이니 禁兵을 관장하였다.】 “적의 기세가 교만하니, 우리가 힘써 싸우면 격파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달려가 적의 칼날을 무릅쓰자, 병졸들이 결사적으로 싸워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내지 않는 자가 없으니, 北漢의 군대가 패하여흩어져달아났다.【披는 나뉘는 것이니, 서로 떠남을 말한다.】

이때 남풍이 매우 거세게 불어오므로 周나라 군사들이 다투어 분발하니, 北漢軍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高平에 이르니, 쓰러진 시체가 산골짜기에 가득하고 버려진 御用 物品과【御物은 임금의 服飾과 車馬 따위의 물건을 이른다.】 輜重, 병기와 각종 가축들을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 周樊愛能等이 聞周兵大捷하고 與士卒로 稍稍復還이라 周主欲誅樊愛能等하야 以肅軍政하야 卽收愛能, 及所部軍吏以上七十餘人하야 責之曰 汝輩皆累朝宿將으로 非不能戰이어늘 今望風奔逃者는 無他라 正欲以朕爲奇貨하야 賣與劉崇耳라하고 悉斬之하니 自是로 驕將惰卒이 始知所懼하야 不行姑息之政矣러라

周나라 樊愛能 등이 周軍이 크게 승리했다는 말을 듣고, 사졸들과 함께 차츰차츰 다시 돌아왔다. 周主樊愛能 등을 죽여 軍政을 엄숙하게 하고자 해서 즉시 樊愛能何徽 및 그들 휘하의 軍吏 이상 70여 명을 잡아 꾸짖기를 “너희들은 모두 여러 조정을 섬긴 옛 장수로서 잘 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지금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도망한 것은 딴 이유가 없다. 바로 짐을 奇貨로 여겨 劉崇에게 팔아넘기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고 모두 목을 베니, 이로부터 교만한 장수와 나태한 사졸들이 비로소 두려워할 줄을 알아서 당장 눈앞의 편안함만 구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았다.

○ 周太師中書令瀛文懿王馮道卒하다 少以孝謹知名이러니 唐莊宗世에 始貴顯하야 自是로 累朝에 不離將相三公三師之位하다 爲人이 淸儉寬弘하야 人莫測其喜慍하고 滑稽【滑은 音骨이니 亂也요 稽는 音鷄니 同也라 言辯捷之人은 言非若是하고 言是若非하야 能亂異同也라 】多智하야 浮沈取容이라 嘗著長樂老敍【道自號長樂老하고 著書數百言하야 陳己更事四姓과 契丹所賜階勳官爵하고 以爲榮하야 自謂 孝於家하고 忠於國하며 有子有孫이라 時開一卷하고 時飮一杯하니 何樂如之리오하니 其自述之(意)[敍] (太)[大]略如是하니라 】할새 自述累朝榮遇之狀하니 時人이 往往皆以德量推之하니라

周나라 太師中書令瀛文懿王馮道가 별세하였다. 馮道는 젊어서부터 효도와 恭謹함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唐나라 莊宗 때에 처음으로 부귀하고 현달하여 이후로 역대의 조정에 장수와 재상, 三公과 三師의 지위를 떠나지 않았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소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사람들이 그의 기쁨과 성냄을 측량하지 못하였고, 익살을 부리고【滑은 음이 골이니 어지럽힘이요, 稽는 음이 계이니 같음이다. 말을 잘하고 빨리하는 사람은 그른 것을 말하면서 옳은 것처럼 하고 옳은 것을 말하면서 그른 것처럼 하여 同異를 혼란시킴을 말한 것이다.】 지혜가 많아서 세상을 따라 부침하여 임금에게 용납됨을 취하였다. 일찍이 〈長樂老敍〉를馮道가 스스로 長樂老라 이름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네 姓氏의 王朝를 번갈아 섬긴 것과 契丹에서 하사한 品階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 영화롭게 여겨 스스로 이르기를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훌륭한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다. 때로 책 한 권을 펼치고 때로 술 한 잔을 마시니, 어떤 즐거움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니, 그 스스로 지은 敍文의 내용이 대략 이와 같았다.】 지을 적에 역대의 조정에서 총애와 예우를 받은 내용을 스스로 기술하니, 당시 사람들이 왕왕 모두 德量이 있다고 推重하였다.

歐陽修論曰 禮義廉恥는 國之四維【維는 綱也라 】니 四維不張이면 國乃滅亡이라 禮義는 治人之大法이요 廉恥는 立人之大節이니 況爲大臣而無廉恥면 天下其有不亂이요 國家其有不亡者乎아 予讀馮道長樂老敍컨대 見其自述以爲榮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니 則天下國家를 可從而知也라 予於五代에 得全節之士三【五代史에 王彦章, 裴均, 劉仁贍이라 】과 死事之臣十有五張源德, 夏魯奇, 姚洪, 王思同, 張敬達, 翟進宗, 沈斌, 王淸, 史彦超, 孫晟, 鄭遨, 張薦明, 石昂, 程福斌, 李自倫이니 訓義엔 [[鄭(邊)[遨]]]以下五人을 作馬彦超, 宋〈令〉詢, 李遐, 張彦卿, 鄭昭業하니라 】하니 皆武夫戰卒이니 豈於儒者에 果無其人哉아 得非高節之士는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아 抑君天下者不足顧而莫能致之歟아 予嘗聞五代時에 有王凝者하니 家靑齊之間하야 爲虢州司戶參軍이러니 以疾卒于官이라 凝家素貧하고 一子尙幼어늘 妻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이라가 止於旅舍하니 主人不納이라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이 牽其臂而出之한대 李氏仰天慟曰 我爲婦人하야 不能守節하야 而此手爲人所執邪아하고 卽引斧하야 自斷其臂하니 見者爲之嗟泣이라 開封尹이 聞之하고 白其事於朝하야 厚恤李氏하고 而笞其主人하니라 嗚呼라 士不自愛其身하고 而忍恥以偸生者 聞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歐陽修가 논평하였다.

“禮‧義‧廉‧恥는 국가를 다스리는 네 가지 綱維이니,【維는 벼릿줄이다.】 네 가지 綱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마침내 멸망한다. 禮義는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요, 廉恥는 사람을 세우는 큰 절개이니, 하물며 大臣이 되어서 염치가 없다면 천하가 어찌 혼란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국가가 어찌 망하지 않는 경우가 있겠는가. 내가 馮道의 〈長樂老敍〉를 읽어보건대 스스로 기술하고 영화라고 여겼으니, 廉恥가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하니 천하와 나라와 집안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五代時代의 역사 가운데에 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과【절개를 온전히 지킨 선비 3명은 《五代史》의 王彦章, 裴均, 劉仁贍이다.】 국사를 위해 죽은 신하 15명을 얻었는데【국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 15명은 張源德夏魯奇姚洪王思同張敬達翟進宗沈斌王淸‧[ 史彦超]‧[ 孫晟]‧鄭遨張薦明‧[ 石昂]‧程福斌‧[ 李自倫]이니, 《資治通鑑訓義》에는 鄭遨 이하 5명을 [ 馬彦超]‧[ 宋令詢]‧李遐張彦卿鄭昭業이라 하였다.】 모두 武夫와 戰士이니, 어찌 儒者 중에 과연 그러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이는 절개가 높은 선비들은 세상이 혼란한 것을 싫어하여 세상을 비루하게 여겨 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 노릇하는 자가 돌아볼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초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으니, 五代時代에 王凝이란 자가 있었으니, 靑州와 齊州 사이에 거주하면서 虢州司戶參軍이 되었는데 병으로 인해 관청에서 죽었다. 王凝은 집이 평소 가난하고 한 아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그의 아내 李氏가 아들을 데리고 그의 遺骸를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동쪽으로 開封府를 지나다가 여관방에 머물게 되었는데, 주인이 받아주지 않았다. 李氏가 하늘을 보니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가려고 하지 않자, 주인이 그녀의 팔뚝을 잡아 끌어 나가게 하였다. 이에 李氏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아녀자의 몸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팔뚝을 남의 남자에게 잡힌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도끼를 가져다 스스로 자기 팔뚝을 자르니, 보는 자들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開封府尹이 이 말을 듣고 그 일을 조정에 아뢰어서 李氏를 후하게 구휼하고 그 여관 주인을 매질하였다.

아! 선비들 가운데 스스로 자기 몸의 지조를 아끼지 않고 부끄러움을 참고 구차하게 살기를 꾀한 자들이 李氏의 유풍을 들으면 마땅히 다소 부끄러움을 알 것이다.”

溫公曰 天地設位어늘 聖人則之하야 以制禮立法하야 內有夫婦하고 外有君臣하니 婦之從夫에 終身不改하고 臣之事君에 有死無貳는 此人道之大倫也니 苟或廢之면 亂莫大焉이라 范質이 稱馮道厚德稽古하고 宏材偉量하야 雖朝代遷貿나 人無間言하야 屹若【危峻貌라 】巨山하야 不可轉也라하니 臣愚以爲正女는 不從二夫하고 忠臣은 不事二君하나니 爲女不正【正은 本作貞하니 避宋仁宗嫌名하야 作正하니라 】이면 雖復華色之美하고 織(袵)[絍]【絍은 繒帛之屬이라 】之巧라도 不足賢矣요 爲臣不忠이면 雖復才智之多하고 治行之優라도 不足貴矣니 何則고 大節已虧故也라 之爲相에 歷五朝八姓하야 若逆旅之視過客하야 朝爲仇敵이라가 暮爲君臣하야 易面變辭하야 曾無愧怍이라 大節如此하니 雖有小善이나 庸足稱乎아

溫公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이 높고 낮은 자리를 베풀자, 聖人이 이것을 본받아 禮를 만들고 法을 세워서 안에는 夫婦가 있고 밖에는 君臣이 있게 하였다. 부인이 남편을 따름에 종신토록 바꾸지 않고, 신하가 군주를 섬김에 죽음은 있고 두 마음이 없는 것은 이는 人道의 큰 윤리이니, 만일 혹시라도 이것을 폐하면 禍亂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范質馮道를 칭찬하기를 ‘후덕하고 옛일을 상고하여 잘 알며 재주가 크고 도량이 뛰어나서 비록 朝代(王朝)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이 없어 큰 산이 우뚝히【屹若는 높고 험한 모양이다.】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동요시킬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내가 생각건대 貞操를 지키는 여자는 두 남편을 따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 법이니,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면【正은 본래 貞으로 되어 있으니 宋나라 仁宗의 이름을 휘하여 正으로 쓴 것이다.】 비록 다시 꽃다운 용모가 아름답고 길쌈하는 솜씨가【絍은 비단 등속이다.】 공교롭더라도 어질게 여길 것이 못 되며, 신하가 충성스럽지 않으면 비록 다시 재주와 지혜가 많고 다스린 업적이 뛰어나더라도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어째서인가? 큰 절개가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馮道가 재상이 되었을 적에 다섯 王朝와 여덟 姓의 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逆旅(여관)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는 것처럼 아침에는 원수가 되었다가 저녁에는 군신간이 되어 얼굴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서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큰 절개가 이와 같았으니, 비록 작은 善行이 있으나 어찌 칭찬할 것이 있겠는가.

或以爲自唐室之亡으로 群雄力爭하야 帝王興廢가 遠者는 十餘年이요 近者는 四三年이니 雖有忠智나 將若之何오 當是之時하야 失臣節者 非一人이니 豈得獨罪哉아하니 臣愚는 以爲忠臣은 憂公如家하고 見危致命이라 君有過어든 則强諫力爭하고 國敗亡이면 則竭節效死하며 智士는 邦有道則見하고 邦無道則隱하야 或滅跡山林하고 或優遊下僚하나니 今는 尊寵則冠三師하고 權任則首諸相이어늘 國存則依違拱黙하야 竊位素餐하고 國亡則圖全苟免하야 迎謁勸進하야 君則興亡接踵이나 則富貴自如하니 玆乃奸臣之尤라 安得與他人爲比哉리오 或謂 能全身遠害於亂世하니 斯亦賢已라하니 臣謂君子有殺身成仁이요 無求生害仁하나니 豈專以全身遠害爲賢哉리오 然則盜跖病終而子路【許亥反이니 肉醬也라 】하니 果誰賢乎아 抑此非特之愆也요 時君亦有責焉이라 何則고 不正之女는 中士羞以爲家하고 不忠之人은 中君羞以爲臣하나니 彼相前朝하야 語其忠하면 則反君事讐하고 語其智면 則社稷爲墟어늘 後來之君이 不誅不棄하고 乃復用以爲相하니 彼又安肯忠於我而能獲其用乎아 故로 曰非特之愆이요 亦時君之責也라하노라

혹자는 말하기를 ‘唐나라 황실이 멸망한 뒤로부터 여러 영웅들이 힘으로 다투어서 제왕들이 흥하고 망한 것이 오래가면 십여 년이고 짧으면 3, 4년이었으니, 비록 충성과 지혜가 있으나 장차 어찌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하의 절개를 잃은 자가 馮道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홀로 馮道만 나무랄 것이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생각하건대, 충신은 국가를 근심하기를 자기 집안일처럼 여기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군주가 잘못이 있으면 강력히 간쟁하고 나라가 패망하면 충절을 다하여 목숨을 바치며, 지혜로운 선비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나타나고 나라에 道가 없으면 은둔하여, 혹은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혹은 낮은 벼슬아치가 되어 한가롭게 논다. 그런데 지금 馮道는 존귀함과 총애가 三師(三公) 중에 으뜸이었고 권력과 직임이 여러 재상 중에 으뜸이었는데, 나라가 보존되면 依違(觀望)하여 팔짱을 끼고 침묵해서 지위를 도둑질하고 공밥을 먹으며, 나라가 망하면 生命을 보전하기를 도모하고 죽음을 구차히 면해서 새 군주를 맞이하여 뵙고 즉위하기를 권하였다. 그리하여 군주는 흥망이 서로 이어졌지만 馮道는 부귀함이 그대로였으니, 이는 바로 간신 중에 뛰어난 자이다. 어찌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馮道가 난세에 자기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하였으니, 이 또한 어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군자는 목숨을 바쳐 仁을 이룸은 있고 삶을 구하여 仁을 해침은 없으니, 어찌 오로지 몸을 보전하고 폐해를 멀리한 것만 가지고 어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盜跖은 天壽를 누리다가 병들어 죽었고 子路는 죽임을 당하여 젓 담가졌으니,【醢는 許亥反(해)이니 肉醬이다.】 과연 누가 어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단 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의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숙하지 못한 여자는 보통의 남자도 室家(아내)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보통의 군주도 신하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저 馮道가 前朝의 재상이 되어 그 충성으로 말하면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겼고, 그 지혜로 말하면 사직이 폐허가 되었는데, 후래의 군주가 그를 죽이거나 버리지 않고 도리어 다시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았으니, 저가 또 어찌 기꺼이 나에게 충성하여 그를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단 馮道의 잘못일 뿐만이 아니요, 당시 군주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이다.”

周主違衆議하고 破北漢하니 自是로 政事無大小히 皆親決하고 百官은 受成於下而已러라

周主가 衆論을 어기고 北漢을 격파하니, 이로부터 크고 작은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 직접 결정하고 백관들은 이뤄놓은 계책을 아래에서 받을 뿐이었다.

○ 初에 宿衛之士 累朝相承하야 務求姑息하고 不欲簡閱【簡은 選也요 閱은 數也라 】하야 恐傷人情하니 由是로 羸老者居多하고 但驕蹇【驕는 恣也요 蹇은 險難也라 】不用命하야 實不可用이라 每遇大敵에 不走卽降하니 其所以失國이 亦多由此라 周主因高平之戰하야 始知其弊하고 謂侍臣曰 凡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라 今以農夫百으로 未能養甲士一이어늘 奈何浚【浚은 取出之也라 】民之膏澤하야 養此無用之物乎아 且健懦不分이면 衆無所勸이라하고 乃命大簡諸軍하야 精銳者는 升之上軍하고 羸弱者는 斥去之하다 又以驍勇之士 多爲諸藩鎭所蓄이라하야 詔募天下壯士하야 咸遣詣闕하고 命宋太祖皇帝하야 選其尤者하야 爲殿前諸班하고 其騎步諸軍은 各命將帥選之하다 由是로 士卒精强이 近代無比하야 征伐四方에 所向皆捷하니 選練之力也러라

[新增]胡氏曰 五代之主 多刻於民而紓於軍이어늘 世宗則嚴於軍而寬於民이라 旣得柄에 制輕重之權하고 又沙汰羸老하야 簡升驍銳라 且曰 兵은 務精이요 不務多니 百農夫未能養一甲士어늘 奈何浚民膏血하야 養無用之物고 且健懦不分이면 衆何所勸고하니 聖人復起사도 不易此言矣시리라

처음에 宿衛하는 군사들이 여러 왕조를 서로 이어오면서 되도록 당장의 편안함을 구하고, 군사들을 선발하고 사열하여【簡은 선발함이고, 閱은 헤아림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거나 상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약하고 늙은 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오직 교만하기만 하여【驕는 방자함이고, 蹇은 험난함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아서 실로 쓸 수가 없었다. 매번 큰 적을 만날 때마다 도망가지 않으면 항복하니, 나라를 잃게 된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周主는 高平의 전투로 인해 비로소 그 폐단을 알고는 近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는다. 지금 농부 백 명으로 甲士 한 명을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浚은 착취하는 것이다.】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또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권면하는 바가 없다.” 하고, 마침내 명하여 여러 군사들을 크게 사열하여 정예한 자는 上軍으로 올리고 파리하고 약한 자는 물리쳐 보냈다.

또 날래고 용감한 군사들은 대부분 여러 藩鎭에서 길러지고 있다 하여, 천하의 壯士들을 모집해서 모두 서울로 보내어 대궐에 이르게 해서 宋나라 太祖皇帝에게 명하여 그 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殿前諸班으로 삼고, 기병과 보병의 여러 군사들은 각각 장수에게 명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들의 정예롭고 강함이 근대에 견줄 데가 없어서 사방을 정벌할 적에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니, 이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여 훈련하였기 때문이었다.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五代의 군주들은 대부분 백성들에게서 깎아 군사들에게 후하게 하였는데, 世宗은 군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너그럽게 하였다. 정권을 얻은 뒤에 輕重의 권한을 통제하였고, 또 약하고 늙은 자들을 도태시켜 날래고 정예한 자들을 簡拔하여 올렸다. 周主(郭榮)가 또 말하기를 ‘군대는 정예함을 힘쓰고 많음을 힘쓰지 않으니, 백 명의 농부가 한 명의 甲士를 기르지 못하는데, 어찌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내어 이런 무용지물을 기른단 말인가. 건장한 자와 나약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군사들이 어떻게 권면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聖人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北漢主殂하니 子承鈞이 立하야 更名이라하다 北漢孝和帝 性孝謹이러니 旣嗣位에 勤於爲政하고 愛民禮士하니 境內粗安이러라

北漢主(劉崇)가 죽으니, 아들劉承鈞이 즉위하여 이름을 이라고 고쳤다. 北漢의 孝和帝(劉鈞)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恭謹하였는데, 왕위를 계승한 뒤에 정사를 다스림에 부지런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예우하니, 경내가 다소 편안해졌다.

遼 應曆四年

○ 遼 〈應曆四年이라〉

遼나라 - 應曆 4년이다. -

世宗
名은 榮이요 姓은 柴氏니 太祖柴皇后兄守禮之子라

世宗※在位六年이요 壽三十九라

※ 名은 이요 姓은 柴氏太祖柴皇后守禮之子라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五代之君에 世宗이 最號英武어늘 而享年不永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世宗은 재위가 6년이고 壽가 39세이다.

世宗은 이름이 이고 성이 柴氏이니, 太祖柴皇后의 오라비인 柴守禮의 아들이다. 太祖가 後嗣가 없으므로 길러서 아들로 삼았다. 五代의 군주 중에 世宗이 가장 英明하고 武勇이 있다고 이름났으나 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太平한 업적을 하늘이 장차 聖人(宋나라 太祖趙匡胤)에게 열어서 주려고 한 것이니, 人力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乙卯]

[乙卯]〈周世宗이 仍稱顯德二年하니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을묘(955) - 周나라 世宗은 顯德 2년이라고 그대로 칭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周世宗이 常憤廣明【唐僖宗廣明元年에 黃巢入長安하니 自此之後로 彊藩割據하야 中國日蹙矣라 】以來로 中國日蹙하더니 及高平旣捷에 慨然有削平天下之志하니라

周나라 世宗이 廣明 연간【唐나라 [ 僖宗]廣明 元年(880)에 黃巢가 長安으로 쳐들어오니, 이로부터 이후로 강한 藩鎭들이 할거하여 中國의 영토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래로 中國의 영토가 날로 위축됨을 항상 분하게 여겼는데, 高平에서 승리한 뒤에 慨然히 천하를 평정할 뜻을 두었다.

○ 周世宗이 謂宰相曰 朕이 每思致治之方호되 未得其要하야 寢食不忘하노라 又自唐, 晉以來로 吳, 蜀, 幽, 幷【吳는 李氏요 蜀은 孟氏요 幽는 入於契丹하고 幷은 爲北漢하니라 】이 皆阻聲敎하야 未能混一하니 宜命近臣하야 著爲君難爲臣不易論及開邊策一篇하라 朕將覽焉호리라 比部郞中【官名이라 】王朴이 獻策하야 以爲中國之失吳, 蜀, 幽, 幷【梁失吳하고 唐得蜀而復失之하고 晉失幽하고 周失幷하니라 】이 皆由失道하니 今必先觀所以失之之原이니 然後에 知所以取之之術이니이다 其始失之也에 莫不以君暗臣邪하고 兵驕民困하며 姦黨內熾하고 武夫外橫하야 因小致大하고 積微成著하니 今欲取之인댄 莫若反其所爲而已니이다 夫進賢, 退不肖는 所以收其才也요 恩德誠信은 所以結其心也요 賞功罰罪는 所以盡其力也요 去奢節用은 所以豐其財也요 時使薄斂은 所以阜其民也라 俟群才旣集하고 政事旣治하고 財用旣充하고 士民旣附하야 然後에 擧而用之하면 功無不成矣리이다 彼之人이 觀我有必取之勢하면 則知其情狀者는 願爲間諜하고 知其山川者는 願爲嚮導하야 民心旣歸면 天意必從矣리이다

周나라 世宗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짐이 매양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그 요점을 얻지 못하여 잠을 자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것을 잊지 못하였다. 또 唐(後唐)나라와 晉(後晉)나라 이후로 吳‧蜀과 幽州‧幷州가【[頭註] 吳, 蜀, 幽, 幷:吳 지방은 李氏(李璟의 南唐)이고, 蜀땅은 孟氏(孟知詳)이고, 幽州는 契丹으로 들어갔고, 幷州는 北漢이 되었다.】 모두 聲敎가 미치지 못하여 통일되지 못하니, 마땅히 近臣에게 명하여 爲君難爲臣不易論과 開邊策을 한 편씩 지으라. 짐이 장차 이것을 보겠다.” 하였다.

이에 比部郞中【比部郞中은 관직명이다.】王朴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中國이 吳‧蜀과 幽州‧幷州를【[頭註] 中國之失吳, 蜀, 幽, 幷:梁나라는 吳를 잃었고, 唐나라는 蜀을 얻었다가 다시 잃었고, 晉나라는 幽州를 잃었고, 周나라는 幷州를 잃었다.】 잃은 것은 모두 군주가 道를 잃은 데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이제 반드시 먼저 영토를 잃게 된 근본 원인을 살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잃어버린 영토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토를 잃었을 적엔 군주가 어둡고 신하가 간사하며, 군사들이 교만하고 백성들이 곤궁하며, 간사한 무리들은 안에서 치성하고 武夫들은 밖에서 횡행하여 작은 것으로부터 커지게 되고 은미한 것이 쌓여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잃어버린 영토를 취하고자 한다면 그 시행한 바를 예전과 반대로 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침은 인재를 거두는 방법이요, 은덕을 베풀고 성실하게 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방법이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내림은 그 힘을 다하게 하는 방법이요, 사치를 제거하고 財用을 절약함은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요, 철(농한기)에 따라 농민을 부역시키고 세금을 적게 거둠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러 인재들이 이미 모이고 정사가 이미 다스려지고 財用(財政)이 이미 충족하고 士民들이 이미 따르기를 기다려서 그런 뒤에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쓴다면 공을 이루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저 적국의 백성들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저들을 취할 수 있는 형세가 있음을 보게 되면 이러한 정상을 아는 자는 간첩이 되기를 원할 것이요, 산천의 지리를 잘 아는 자는 嚮導가 되기를 원할 것이니, 그리하여 민심이 이미 돌아오면 하늘의 뜻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입니다.

凡攻取之道는 必先其易者하나니 唐李璟이라 】與吾接境이 幾二千里하야 其勢易擾也라 擾之는 當以無備之處爲始하야 備東則擾西하고 備西則擾東이면 彼必奔走而救之하리니 奔走之間에 可以知其虛實强弱이라 然後에 避實擊虛하고 避强擊弱호되 未須大擧요 且以輕兵擾之하면 南人懦怯하야 聞小有警이면 必悉師以救之하리니 師數動이면 則民疲而財竭하고 不悉師면 則我可以乘虛取之니이다 如此면 江北諸州 將悉爲我有하리니 旣得江北이어든 則用彼之民하야 行我之法이면 江南을 亦易取也라 得江南이면 則巴蜀은 可傳檄而定이요 南方旣定이면 則燕地【時에 契丹이 跨有燕地하니라 】必望風內附하니 若其不至어든 移兵攻之하면 席卷可平矣리이다 惟河東【北漢據河東하야 與周爲世仇也라 】은 必死之寇라 不可以恩信誘요 必當以强兵制之니이다 然이나 彼自高平之敗로 力竭氣沮하야 必未能爲邊患이니 宜且以爲後圖하야 俟天下旣平하고 然後伺間一擧하면 可擒也니이다 今士卒精練하고 甲兵有備하며 群下畏法하고 諸將效力하야 期年之後에 可以出師니 宜自夏秋로 蓄積實邊矣니이다 世宗이 欣然納之러라 時에 群臣이 多守常偸安하야 所對少有可取者로되 惟이 神峻氣勁하고 有謀能斷하야 凡所規畫【規圖也라 】이 皆稱世宗意하니 世宗이 由是로 重其器識하니라

무릇 적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방법은 반드시 쉬운 곳을 먼저 공격해야 하니, 南唐(李璟)【唐은 南唐의 李璟이다.】 우리와 접경하고 있는 것이 거의 2천 리여서 그 형세가 동요시키기가 쉽습니다. 적국을 동요시킬 때에는 마땅히 대비가 없는 곳부터 시작하여, 적국이 동쪽을 대비하면 서쪽을 동요시키고 서쪽을 대비하면 동쪽을 동요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분주히 달려가 구원할 것이니, 분주히 달려가는 사이에 그들의 虛實과 强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견실한 곳을 피하고 허약한 곳을 공격하며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되, 굳이 크게 군대를 일으킬 것 없이 우선 경무장한 군대로 적을 동요시킨다면 남쪽 사람들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소소한 警報만 들어도 반드시 군대를 모두 동원하여 구원할 것이니, 군대가 자주 출동하면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군대를 다 동원하지 않으면 우리가 빈틈을 타고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江北의 여러 州가 장차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니, 이미 江北을 얻고 난 뒤에 저들의 백성을 사용하여 우리의 방법을 시행한다면 江南도 취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江南을 얻으면 巴蜀은 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고, 南方이 이미 평정되면 燕 지방(幽州)은【당시에 契丹이 燕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드시 소문만 듣고도 歸附할 것이니, 만약 歸附해 오지 않거든 군대를 옮겨 공격한다면 석권하여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河東(北漢)은【北漢이 河東을 차지하여 周나라(後周)와 대대로 원수가 되었다.】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도적이니, 은혜와 신의로 유인할 수 없고 반드시 강한 군대로 제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高平에서 패전한 뒤로 힘이 다하고 사기가 꺾여 반드시 변경의 우환이 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우선 후일을 도모하여 천하가 이미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틈을 타서 한번 출동하면 漢主(劉崇)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졸들이 정예롭고 훈련이 잘 되어 있으며 갑옷과 병기가 모두 충분한 대비가 있으며, 아랫사람들이 군법을 두려워하고 諸將들이 힘을 다 바쳐서 期年이 지난 뒤에는 군대를 출동할 수 있으니, 마땅히 가을과 겨울로부터 저축하여 변경을 충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世宗이 흔연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대부분 일상적인 방법을 지키고 구차하게 安逸을 탐하여 대답한 내용이 취할 만한 것이 적었으나 오직 王朴만은 정신이 높고 기개가 굳세며 책략이 있고 결단력이 있어서 모든 계획한 바가【規畫은 계획하는 것이다.】 모두 世宗의 뜻에 맞으니, 世宗이 이로 말미암아 그의 기국과 식견을 소중히 여겼다.

[丙辰]周顯德三年

[丙辰]〈周顯德三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四鎭이라〉

병진(956) - 周나라 顯德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네 鎭이다.-

正月庚子에 周世宗이 下詔하고 親征淮南할새 命歸德節度使李重進하야 將兵先赴正陽하다 李谷(穀)【谷은 綱目에 作穀이라 以穀爲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하니 淮南은 謂唐也라 】이 攻壽州호되 久不克이러니 唐劉彦貞【北面行營都部署라 】이 引兵救之어늘 李重進이 度淮하야 逆戰於正陽東하야 大破之하고 斬彦貞하다

정월 庚子日(6일)에 周나라 世宗이 조서를 내리고 친히 淮南(南唐)을 정벌할 적에 歸德節度使李重進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正陽으로 달려가게하였다. 李穀【‘谷’은 《資治通鑑綱目》에 ‘穀’으로 되어 있다. 李穀을 淮南道前軍行營都部署로 임명하니, 淮南은 南唐을 이른다.】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못하였는데, 唐나라(南唐)의 [ 劉彦貞]이【[ 劉彦貞]은 北面行營都部署이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구원하자, 李重進이 淮水를 건너 正陽의 동쪽에서 그를 맞아 싸워 크게 쳐부수고[ 劉彦貞]의 목을 베었다.

○ 是時에 江淮久安하고 民不習戰하니 彦貞旣敗에 唐人이 大恐이라 皇甫暉, 姚鳳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요 姚鳳은 常州團鍊使라 】이 退保淸流關이어늘 丙辰에 周世宗이 至壽州城下하야 命諸軍하야 圍壽州하다 二月에 世宗이 命太祖皇帝하야 倍道襲淸流關하니 皇甫暉等이 陳(陣)於山下하고 方與前鋒戰할새 太祖皇帝引兵出山後하니 等이 大驚하야 走入滁州하야 欲斷橋自守라 太祖皇帝躍馬麾兵하고 涉水하야 直抵城下하니 曰 人各爲其主니 願容成列而戰하노라 太祖皇帝笑而許之하니 整衆而出이라 宋太祖皇帝擁馬頸하고 突陳而入하야 大呼曰 吾止取皇甫暉요 他人은 非吾敵也라하고 手劍擊中腦하야 生擒之하고 幷擒姚鳳하야 遂克滁州하다 後에 世宗이 遣翰林學士竇儀하야 籍滁州帑藏【帑은 音儻이니 金帛所藏이라 】이러니 宋太祖皇帝遣親吏하야 取藏中絹한대 曰 公이 初克城時엔 雖傾藏取之라도 無傷也어니와 今旣籍爲官物하니 非有詔書면 不可得也니라 宋太祖皇帝由是로 重하니라

이때 江淮 지방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으니, [ 劉彦貞]이 이미 패한 뒤에 南唐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皇甫暉姚鳳皇甫暉는 奉化節度使同平章事이고, 姚鳳은 常州團鍊使이다.】후퇴하여淸流關을 지켰다. 丙辰日(22일)에 周나라 世宗이 壽州城 아래에 이르러서 諸軍에게 명해 壽州城을 포위하게 하였다.

2월에 世宗太祖皇帝(趙匡胤)에게 명하여 행군속도를 배가해서 淸流關을 습격하게 하니, 皇甫暉 등이 산 아래에 진을 치고 周나라의 선봉부대와 싸울 적에 太祖皇帝가 군대를 거느리고 산 뒤로 나오니, 皇甫暉 등이 크게 놀라서 도망하여滁州로 들어가 다리를 끊고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 太祖皇帝가 말에 뛰어올라 병기를 휘두르며 물을 건너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니, 皇甫暉가 말하기를 “사람은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니, 대열을 이루기를 기다린 뒤에 싸우기를 원한다.” 하였다. 太祖皇帝가 웃으면서 허락하니, 皇甫暉가 무리를 정돈하고 출전하였다.

宋나라 太祖皇帝가 말의 목을 끼고 陣中으로 돌진하여 들어가서 크게 고함치기를 “나는 다만 皇甫暉를 잡고자 할 뿐이요, 다른 사람은 나의 적수가 아니다.” 하고는 손에 잡은 검으로 皇甫暉를 공격하여 그의 뇌를 맞혀 사로잡고 아울러 姚鳳을 사로잡아 마침내 滁州를 함락시켰다.

뒤에 世宗이 翰林學士竇儀를 보내어滁州 창고의 재물을【帑은 음이 儻(탕)이니, 황금과 비단을 보관하는 곳이다.】 장부에 기재하게하였는데, 宋나라 太祖皇帝가 심복인 관리를 보내어 창고 안에 있는 비단을 가져가려하였다. 竇儀가 말하기를 “公이 처음 성을 함락시켰을 때엔 비록 창고에 있는 물건을 모두 가져가더라도 나쁠 것이 없지만, 지금은 이미 장부에 기재하여 관청의 물건이 되었으니 황제의 조서가 있지 않으면 가져갈 수 없다.” 하였다. 宋나라 太祖皇帝가 이로 말미암아 竇儀를 소중히 여겼다.

○ 初에 周劉詞遺表하야 薦其幕僚薊人趙普有才可用이러니 會에 滁州平이어늘 范質이 薦爲滁州軍事判官한대 宋太祖皇帝與語悅之하니라 宋太祖皇帝 威名日盛이라 每臨陳에 必繁纓【見一卷하니라 】飾馬하고 鎧仗鮮明하니 或曰 如此면 爲敵所識이라한대 宋太祖皇帝曰 吾固欲其識之耳라하니라

처음에 周나라 劉詞가 죽을 때에 표문을 올려 그의 막료인 薊州 사람 趙普가 쓸 만한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였는데, 마침 滁州가 평정되자 范質趙普를 천거하여滁州軍事判官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宋나라 太祖皇帝趙普와 함께 말을 해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宋나라 太祖皇帝는 위엄과 명망이 날로 성하였다. 매번 적진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繁纓으로【繁纓은 1卷에 보인다.】 말을 꾸미고 투구와 의장을 선명하게 하니, 혹자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적들에게 인식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宋나라 太祖皇帝는 말하기를 “내 진실로 저들에게 인식되고자 한다.” 하였다.

唐主兵屢敗하니 懼亡하야 乃遣鍾謨, 李德明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요 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라 】하야 奉表稱臣하고 來請平【平은 和也라 】하다 , 德明이 素辯口하니 周世宗이 知其欲遊說【飾辨辭하고 設詐謀하야 馳逐於諸侯하야 以要時勢者라 】하고 盛陳甲兵而見之하야 曰 我非六國【戰國韓趙魏燕齊楚라 】愚主니 豈汝口舌所能移邪아 可歸語汝主호되 亟來見朕하고 再拜謝過하면 則無事矣어니와 不然이면 朕欲往觀金陵城하고 借府庫하야 以勞軍하노니 汝君臣이 得無悔乎아 , 德明이 戰栗【恐懼貌라 】하야 不敢言하니라

唐主(李璟)는 南唐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자, 나라가 망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鍾謨李德明鍾謨는 翰林學士戶部侍郞이고, 李德明은 工部侍郞文理院學士였다.】보내어 표문을 받들어 올려 臣을 칭하고 와서 화평을 청하였다.【평은 화평함이다.】鍾謨李德明은 평소에 말을 잘하니, 周나라 世宗은 이들이 유세하고자【말을 꾸미고 속임수를 써서 諸侯들을 쫓아 時勢에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갑옷과 병기를 성대하게 진열하고 만나보며 말하기를 “나는 戰國時代六國의【六國은 戰國時代의 韓, 趙, 魏, 燕, 齊, 楚나라이다.】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니, 어찌 너희들의 입과 혀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겠는가.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군주에게 말하여 빨리 와서 짐을 만나 재배하고 사과하도록 하라. 이렇게 하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짐이 직접 가서 金陵城을 구경하고 창고에 있는 재물을 빌어 군사들을 위로하고자 하니, 이렇게 되면 너희 군주와 신하가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鍾謨李德明이 두려워 몸이 떨려서【戰栗은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唐主復使李德明, 孫晟【右僕射라 】으로 言於周世宗하야 請去帝號하고 割壽, 濠, 泗, 楚, 光, 海六州之地하고 仍歲輸金帛百萬하야 以求罷兵이로되 世宗이 以淮南之地已半爲周有하고 諸將捷奏日至라하야 欲盡得江北之地하야 不許라 德明이 見周兵日進하고 奏稱호되 唐主不知陛下兵力如此之盛하니 願寬臣五日之誅하야 得歸白唐主면 盡獻江北之地하리이다 世宗이 乃許之하고 賜唐主詔書하니 其略曰 但存帝號면 何爽歲寒【爽은 差也라 言歲寒知松柏之後凋는 此約不差也니 許唐主自帝江南이라 】이리오 倘堅事大之心이면 終不迫人于險하리라 又曰 俟諸郡【江北諸郡이라 】之悉來하야 卽大軍之立罷호리니 言盡於此하고 更不煩云하노니 苟曰未然이면 請從玆絶하노라 德明이 稱世宗威德과 及甲兵之强하고 勸唐主割江北之地한대 唐主大怒하야 斬德明於市하고 命齊主景達唐主之弟라 】하야 將兵以拒周하다 景達이 將兵二萬하고 自瓜步【山名이라 】로 濟江하야 距六合【縣名이라 】二十餘里하야 設柵不進하니 諸將이 欲擊之어늘 宋太祖皇帝曰 彼設柵自固는 懼我也라 今吾衆이 不滿二千하니 若往擊之면 則彼見吾衆寡矣라 不如俟其來而擊之하니 破之必矣리라 居數日에 唐出兵趣(趨)六合이어늘 宋太祖皇帝 奮擊大破之하야 殺獲近五千人호되 餘衆이 尙萬餘라 走渡江하야 爭舟溺死者甚衆하니 於是에 唐之精卒이 盡矣러라 是戰也에 士卒有不致力者어늘 宋太祖皇帝陽(佯)爲督戰하야 以劍斫其皮笠이라가 明日에 徧閱皮笠하고 有劍跡者數十人을 皆斬之하니 由是로 部兵이 莫敢不盡死하니라

唐主가 다시 李德明과 [ 孫晟]으로 하여금【[ 孫晟]은 右僕射이다.】周나라 世宗에게 말하여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는 한편 壽州‧濠州‧泗州‧楚州‧光州‧海州 등 여섯 州의 땅을 떼어 바치고, 이어서 해마다 황금과 비단 백만을 바쳐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世宗은 淮南 땅의 절반이 이미 周나라의 소유가 되었고 諸將들의 승전보고가 날로 이른다 하여 江北 땅을 다 얻고자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李德明은 周나라 군대가 날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世宗에게 아뢰기를 “唐主는 폐하의 병력이 이처럼 강성한지 알지 못하니, 바라건대 臣을 5일 동안만 정벌하지 말아서 臣으로 하여금 돌아가 唐主에게 아뢸 수 있게 해주신다면 江北의 땅을 모두 바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世宗이 마침내 허락하고唐主에게 詔書를 내리니,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단지 황제의 칭호를 보존한다면 역경에도 변치 않는 歲寒의 志操를 어찌 어기겠는가.【爽은 어긋나는 것이다. 해가 저물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마른다고 말한 것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니, 唐主가 스스로 江南에서 황제 노릇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진실로 그대가 大國을 섬기려는 마음만 견고하다면 나는 끝내 사람을 험난한 데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여러 郡을【諸郡은 江北의 여러 郡이다.】 다 바쳐 오기를 기다려서 당장 大軍을 철수하겠다. 말은 이에서 다하고 다시 번거롭게 말하고자 하지 않으니,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로부터 국교를 단절할 것을 청한다.” 하였다.

李德明이 돌아가 世宗의 위엄과 덕망 및 군대의 강성함을 극구 말하고 唐主에게 江北의 땅을 떼어 바칠 것을 권하자, 唐主가 크게 노하여 시장에서 李德明의 목을 베고, 齊主李景達에게李景達唐主의 아우이다.】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周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李景達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瓜步山로부터【瓜步는 山의 이름이다.】양자강을 건너 六合縣에서【六合은 縣의 이름이다.】 20여 리 떨어진 지점에 城柵을 만들고전진하지 않으니, 周나라의 諸將들이 이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宋나라 太祖皇帝가 말하기를 “저들이 城柵을 만들어 스스로 굳게 지킴은 우리를 두려워해서이다. 지금 우리의 병력이 채 2천 명이 되지 못하니, 만약 가서 공격한다면 저들은 우리의 병력이 적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이 오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唐나라가 出兵하여六合縣으로 진출하자, 宋나라 太祖皇帝가 분발하여 공격해서唐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5천 명에 가까웠으나 남은 무리가 아직도 만여 명이었다. 이들이 도망하여 강을 건너느라 배를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 때문에 唐나라 정예병이 다 없어졌다.

이 전투에서 사졸들 가운데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있자, 宋나라 太祖皇帝가 거짓으로 督戰하는 체하면서 검으로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졸의 皮笠을 찍어 두었다가 다음날 皮笠을 살펴보고 검으로 찍은 흔적이 있는 자 수십 명을 모두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部下 병사들이 감히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다.

○ 周以太祖皇帝로 爲定國節度使【定國軍은 卽同州匡國軍也라 太祖登極이어늘 避御名하야 始改爲定國軍이러니 史亦因以後所改軍號書之也라 】兼殿前都指揮使하다

周나라가 太祖皇帝(趙匡胤)를 定國節度使【定國軍은 바로 同州匡國軍이다. 太祖가 登極하자 御名의 匡을 피하여 비로소 定國軍이라고 고쳤는데, 역사책에도 이로 인해 이후로는 軍號를 고쳐서 쓴 것이다.】兼殿前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丁巳]周顯德四年

[丁巳]〈周顯德四年이라 ○ 北漢天會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정사(957) - 周나라 顯德 4년이다. ○ 北漢天會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周兵이 圍壽春【縣名이니 屬壽州하니라 】하야 連年未下어늘 議者以唐援兵尙强이라하야 多請罷兵하니 世宗疑之라 李穀이 寢疾在第러니 二月에 世宗이 使范質, 王溥【中書侍郞同平章事라 】로 就與之謀한대 이 上疏하야 以爲壽春危困하야 破在旦夕하니 若鑾駕【和鑾은 皆鈴也니 和는 金口木舌이요 鑾은 金口金舌이니 所以節車之行이라 乘車則馬動하고 馬動則鑾鳴하고 鑾鳴則和應하야 自然有箇節奏로되 車駕大(太)速則不相應이요 大(太)遲則不響하며 若雜然響이면 則不合節奏也라 乘車는 和在軾하고 鑾在衡하며 戎車는 鑾(輿)[在]鑣하니 駟馬는 八鑾也라 】親征하시면 則將士爭奮하고 援兵震恐하리니 城中知亡이면 必可下矣리이다 世宗이 悅하다

周나라 군대가 壽春縣을【壽春은 縣의 이름이니, 壽州에 속하였다.】포위하였으나여러 해가 지나도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南唐의 구원병이 아직도 강성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世宗이 의심하였다. 이때 李穀이 병이 들어 집에 있었는데, 2월에 世宗范質王溥로 하여금王溥는 中書侍郞 同平章事이다.】 찾아가서 그와 상의하게 하니, 李穀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壽春縣이 위태롭고 곤궁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격파당할 터인데, 만약 皇上이【和와 鑾은 모두 방울이니, 和는 쇠로 된 입에 나무로 된 혀이고, 鑾은 쇠로 된 입에 쇠로 된 혀이니, 수레가 가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다. 수레를 타면 말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이면 鑾이 울리고 鑾이 울리면 和가 응하여 자연히 節奏(리듬)가 있게 되는데, 車駕가 너무 빠르면 서로 응하지 못하고 너무 느리면 소리가 나지 않으며, 만약 뒤섞여 소리가 나면 節奏에 합하지 않는다. 乘車는 和가 軾에 있고 鑾이 衡에 있으며, 戎車는 鑾이 재갈에 있으니, 駟馬는 鑾이 여덟 개이다.】 친히 정벌하신다면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고 南唐의 구원병이 두려워할 것이니,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이 자기 나라가 망할 줄을 알게 되면 우리가 틀림없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世宗이 기뻐하였다.

○ 二月乙亥에 周主世宗이 發大梁하다 先是에 周與唐戰할새 唐水軍銳敏하야 周人이 無以敵之라 世宗이 每以爲恨이러니 返自壽春으로 於大梁城西汴水側에 造戰艦數百艘하고 命唐降卒하야 敎北人水戰하니 數月之後에 縱橫出沒이 殆勝唐兵이라 至是에 命右驍衛大將軍王環하야 將水軍數千하고 自閔河로 沿潁入淮하니 唐人이 見之하고 大驚하니라 壬辰旦에 世宗이 軍于趙步하니 諸將이 擊唐紫金山寨하야 大破之하고 殺獲萬餘人하다 甲辰에 世宗이 耀兵于壽春城北이라 唐淸淮節度使劉仁贍이 病甚하야 不知人하니 監軍使周廷構等이 作仁贍表하야 舁仁贍하야 出城降하다 夏四月에 周世宗이 還大梁하다

2월 乙亥日(17일)에 周主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周나라가 南唐과 싸울 적에 南唐의 수군이 예리하고 민첩해서 周나라 사람들이 상대할 수가 없었다. 世宗은 매번 이것을 통한으로 여겼는데, 壽春에서 돌아온 뒤로 大梁城 서쪽 汴水 가에 전함 수백 척을 建造하고南唐의 항복한 병졸들에게 명하여 북쪽 사람들에게 水戰을 가르치게 하니, 몇 달 뒤에 周나라 수군이 종횡으로 출몰함에 자못 南唐의 수군보다도 나았다. 이때에 이르러 右驍衛大將軍王環에게 명하여 수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閔河로부터 潁水를 따라 淮水로 들어가게하니, 南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壬辰日(3월 5일) 아침에 世宗이 趙步에 군대를 주둔하니, 諸將들이 南唐의 紫金山 城寨를 공격하여대파하고 만여 명을 죽이거나사로잡았다. 甲辰日(17일)에 世宗이 壽春城 북쪽에서 군용을 과시하였다. 唐나라 淸淮節度使劉仁贍이 질병이 심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監軍使周廷構 등이 劉仁贍의 이름으로 표문을 지어 劉仁贍을 가마로 메고서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여름4월에 世宗이 大梁으로 돌아왔다.

○ 冬十月에 周世宗이 發大梁하야 十一月에 至濠州하야 大破唐兵於洞口하니 斬首五千餘級이요 降卒二千餘人이라 因鼓行而東하니 所至皆下하다 唐兵이 退保淸口러니 戊午旦에 世宗이 自將親軍하고 自淮北進하야 命宋太祖皇帝하야 將步騎하야 自淮南進하고 諸將은 以水軍으로 自中流進하야 共追唐兵하니 所獲戰船이 燒沈之餘에 得三百餘艘하고 士卒殺溺之餘에 得七千餘人이라 唐之戰船在淮上者 於是盡矣하니라

겨울 10월에 周나라 世宗이 大梁을 출발하여11월에 濠州에 이르러南唐의 군대를 洞口에서 대파하니, 머리를 벤 것이 5천여 수급이고 항복한 병사가 2천여 명이었다. 이어서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면서 행군하여 동쪽으로 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南唐의 군대가 후퇴하여淸口를 지키자, 戊午日(12월 6일) 아침에 世宗은 스스로 친위군을 거느리고 淮水 북쪽으로부터 전진하고, 宋나라 太祖皇帝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淮水 남쪽으로부터 전진하게 하고, 諸將들은 수군을 거느리고 中流로부터 전진하게 하여 함께 南唐의 군대를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노획한 전선은 불타고 침몰한 것 이외에 3백여 척을 얻었으며, 사졸은 죽임을 당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 이외에 7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淮水 가에 있던 南唐의 戰船이 이때에 다 없어졌다.

[戊午]周顯德五年

[戊午]〈周顯德五年이라 ○ 唐中興元年이요 南漢主大寶元年이라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무오(958) - 周나라 顯德 5년이다 ○ 南唐의 中興 元年이고, 南漢主劉鋹의 大寶 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三月에 周世宗이 如迎鑾鎭【今眞州是라 五代時에 僞吳置迎鑾鎭이러니 後에 宋改建安軍하고 眞宗時에 陞眞州하니라 】하야 屢至江口하야 遣水軍하야 擊唐兵破之하니 唐主世宗在江上하고 恐遂南渡하고 又恥降號稱藩하야 乃遣兵部侍郞陳覺하야 奉表請傳位於太子弘冀하야 使聽命於中國하니 時에 淮南에 惟廬, 舒, 鄿, 黃이 未下라 覺이 至迎鑾하야 見周兵之盛하고 白世宗하야 請遣人渡江取表하야 獻四州之地하고 畫江爲境하야 以求息兵호되 辭旨甚哀라 世宗曰 朕本興師는 止取江北이러니 今爾主能擧國內附하니 朕復何求리오 覺이 拜謝而退하야 遣其屬劉承遇【閤門承旨라 】하야 如金陵【唐所都라 】이라 世宗이 賜唐主書호되 稱 皇帝恭問江南國主하노라하고 慰納之하다 唐主復遣承遇하야 奉表獻江北四州하고 歲輸貢物數十萬하니 於是에 江北이 悉平이라 得州十四와 縣六十하다 是月에 浚汴口하야 導河流하야 達于淮하니 於是에 江淮舟檝(楫)이 始通【此卽唐時運路也라 自江淮爲南唐所據로 運漕不通하야 水路湮塞이러니 今復浚之하니라】하니라

3월에 周나라 世宗이 迎鑾鎭에【迎鑾鎭은 지금의 眞州가 이곳이다. 五代時代에 괴뢰정권인 吳나라가 迎鑾鎭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宋나라가 建安軍으로 개칭하고 眞宗 때에 眞州로 승격시켰다.】 가서 여러 차례 江口에 이르러 수군을 보내 南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唐主世宗이 강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남쪽으로 강을 건너올까 두렵고, 또 황제의 칭호를 貶降하고 藩臣을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兵部侍郞陳覺을 周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太子李弘冀에게 傳位할 것을 청하고太子로 하여금 中原(周)의 명령을 듣게 하니, 이때 淮水 남쪽에 오직 廬州‧舒州‧鄿州‧黃州만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陳覺이 迎鑾鎭에 이르러周나라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世宗에게 아뢰어서 사람을 보내 양자강을 건너가 表文을 가져와 네 州의 땅을 바치고 江을 국경으로 삼아서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애처로웠다. 世宗이 말하기를 “朕이 본래 군대를 일으킨 것은 다만 江北을 취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너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歸附하니, 朕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陳覺이 절하고 사례하고물러가서 그의 관속인 [ 劉承遇]를【[ 劉承遇]는 閤門承旨이다.】金陵에 보내었다.【金陵(南京)은 당나라가 도읍한 곳이다.】世宗唐主에게 내린 서신에 이르기를 “皇帝는 공손히 江南國主에게 묻노라.”라고 하여 위무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唐主가 다시 [ 劉承遇]를 보내어 表文을 올려 江北의 네 州를 바치고 해마다 貢物 수십만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에 江北이 모두 평정되어 14州와 60縣을 얻었다. 이달에 汴口를 깊이 파서 黃河의 물을 인도하여 淮水에 도달하게 하니, 이에 江淮의 선박이 비로소 통하였다.【[頭註] 江淮舟檝(楫) 始通:이는 唐나라 때 漕運하던 길이었다. 江‧淮가 南唐에게 점거당한 뒤로 漕運이 통하지 아니하여 水路가 막혔는데, 지금 다시 통하게 된 것이다.】

○ 五月에 唐主避周諱하야 更名唐主는 本名이니 以周太祖之高祖亦名이라 故로 避하니라】하다

5월에 唐主가 周나라의 諱를 피하여 이름을 으로 고쳤다.唐主는 본래 이름이 이니, 周나라 太祖의 高祖도 이름이 이었다. 그러므로 피한 것이다.】

○ 南漢中宗【漢晉王也라 】이 殂하니 長子衛王繼興이 卽帝位하야 更名하다

南漢의 中宗이 죽으니,【南漢의 中宗은 漢나라의 晉王劉晟이다.】長子衛王劉繼興이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으로 고쳤다.

[己未]周顯德六年

[己未]〈周顯德六年六月에 恭帝宗訓이 立하다 ○ 是歲에 凡五國, 三鎭이라〉

기미(959) - 周나라 顯德 6년 6월에 恭帝柴宗訓이 즉위하였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鎭이다.-

周淮南饑어늘 世宗이 命以米貸之한대 或曰 民貧하니 恐不能償이니이다 世宗曰 民은 吾子也라 安有子倒懸而父不爲之解哉며 安在責其必償也리오

周나라 淮南 지방이 굶주리자世宗이 쌀을 꾸어주도록명하였다. 혹자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가난하니 제대로 갚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世宗이 말하기를 “백성들은 나의 자식이다. 자식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곤궁한데) 아버지가 어찌 풀어주지 않겠으며, 어찌 반드시 갚기를 바라겠는가?” 하였다.

遼 應曆九年

○ 遼 〈應曆九年이라〉

[新增]胡氏世宗이 視民猶子하야 匡救其乏而不責其必償하니 仁人之心이요 王者之政也라 五代十二君에 愛民者三人【唐明宗, 周太祖, 世宗이라 】이로되 而世宗爲最라 漕運給耗【乙卯年에 漕運不給하야 斗耗更多하야 以虧欠抵罪한대 詔每斛에 給耗一斗하니라】는 慮倍輸也요 保任令錄【或以父任爲官하고 或以兄任爲官者를 謂之任子하니 任亦保也라 乙卯年에 令翰林學士院으로 自擧令錄호되 除官之日에 仍署擧者姓名하고 若貪佞敗官이면 竝當連坐하니라 】은 防貪穢也요 冬役春罷는 恐妨農也요 毁寺, 禁度僧【乙卯年에 廢(殷銅)[寺院]二萬七百三十六하고 存者二千六百九十四요 禁私度僧尼하야 令諸州로 每歲造僧帳하야 有死者歸俗이면 皆隨時開落하니 見存僧尼七萬六百九十이요 (殷)[毁]銅佛하야 (壽)[鑄]錢하니라 】은 減蠹弊也요 立兩(歲)[稅]限【丙辰年에 立兩稅起徵할새 限以徵斂穀帛호되 多不竢收穫紡績之畢이러니 乃詔호되 自今으로 夏稅以六月하고 秋稅以十月起徵이라하니 民便之하니라 】은 知早徵之害也요 設科求士는 欲吏治有方也요 均定田租는 使富不掩貧也요 倂鄕置團耆【戊午年에 諸州倂鄕村할새 率以百戶爲團하고 團置耆長三人하니 團은 聚也라 六十曰耆니 記曰 耆指使라하니 言指事使人也라 】는 絶公皁【猶言公吏也라 】侵漁也요 罷課戶俸戶【戊午年에 詔凡諸色課戶及俸戶를 竝勒歸州縣하고 自今으로 竝支俸錢及(未)[米]麥이라하다 唐初에 諸司置公廨本錢하야 以貿易取息하고 計員多少爲月料러니 其後에 罷諸司公廨本錢하고 以天下上戶七千人으로 爲胥士而收其課하고 計官多少而給之하니 此所謂課戶라 唐又簿斂一歲稅호되 以高戶主之하고 月收息給俸하니 此所謂俸戶라 】는 省官方私擾也요 稱貸【稱은 去聲이니 擧也라 今所謂擧錢也라 貸는 從人求物也라】不責償은 庶下沾實惠也라 蓋自唐宣宗而後로 政不及民하야 而置諸湯火【民之危險이 如墜湯火之中하니 卽書所謂塗炭也라】之中者 將百年이러니 而後에 世宗이 有人君之德하야 行不忍人之政이라 蓋嘗因與將相食할새 曰 連日之寒에 朕深愧無功於民而坐享天祿하노니 惟親冒矢石하야 爲百姓除害라야 差可自安耳라하고 又命刻木爲耕夫織婦하야 置諸庭하야 留心邦本이 如此하니 宜其赫然南面指麾하야 而四海賓服也니라

遼나라 - 應曆 9년이다. -

[新增]胡氏(胡寅)가 말하였다.

世宗은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여겨 궁핍함을 구휼해주고 꾸어준 곡식을 반드시 갚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仁人의 마음이고 王者의 정사이다. 五代時代 12명의 군주 중에 백성을 사랑한 자가 3명인데,【백성을 사랑한 군주 세 명은 唐나라(後唐) 明宗과 周나라 太祖世宗이다.】世宗이 그 중에 으뜸이다.

漕運할 때 耗穀을 지급한 것은【乙卯年에 漕運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한 말씩 지급하던 耗穀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漕運하는 자들이 곡식을 축낸 것으로 처벌받게 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매 斛마다 耗穀 한 말을 지급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곱절로 갚을까 염려해서였고, 保任한 자들을 기록하게 한 것은【혹은 아버지가 보증하여 관원이 되고 혹은 형이 보증하여 관원이 되는 것을 任子라 하니, 任 또한 보증하는 것이다. 乙卯年에 翰林學士院으로 하여금 스스로 천거하여 任子를 기록하게 하되 관직을 제수하는 날에 擧者의 姓名을 연이어 쓰고, 만약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관직을 망치면 모두 連坐하게 하였다.】 탐욕을 부려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겨울에만 부역시키고 봄에는 부역을 중지한 것은 농사에 방해될까 염려해서였고, 사찰을 허물고 승려의 度牒을 주는 것을 금한 것은【乙卯年에 寺院 20,736개를 없애고 남은 것이 2,694개였으며, 도첩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여 여러 州로 하여금 매년 僧侶의 명부를 만들어서 사망하거나 환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그때마다 제명하게 하니, 현재 남아있는 승려가 70,690명이었고, 구리로 만든 불상을 부수어 돈을 주조하였다.】 재물을 좀먹는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兩稅의 기한을 정한 것은【丙辰年에, 예전에 兩稅法을 만들어 세금을 징수할 적에 곡식과 비단으로 거두되 대부분 곡식을 수확하거나 길쌈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는데, 이때 마침내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 여름세금은 6월에, 가을세금은 10월에 징수한다.” 하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일찍 징수하는 폐해를 알기 때문이었고,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것은 관리의 다스림이 좋은 방법을 얻기를 바라서였고, 田租를 똑같이 정함은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鄕을 겸병하고 團耆를 둔 것은【戊午年에 여러 州에서 鄕村을 겸병할 적에 대체로 100戶를 團으로 삼고 團에는 耆長 3명을 두니, 團은 모은다는 뜻이다. 60세를 耆라 하니, 《禮記》에 이르기를 “60세 된 노인은 〈직접 일하지 않고〉손가락으로 남을 지시하여 부린다.” 하였으니, 일을 지시하여 사람을 부림을 말한 것이다.】 公皁(公吏)가 백성들을 침탈함을 끊기 위해서였고,【公皁는 公吏(국가의 관리)라는 말과 같다.】 課戶와 俸戶를【戊午年에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모든 종류의 課戶와 俸戶를 모두 강제로 州縣에 돌리고, 〈막료들과 州縣의 관원들에게는〉지금부터 官府에서 俸錢과 쌀과 보리를 아울러 지급한다.” 하였다. 唐나라 초기에 諸司에서는 公廨(공청)에 本錢을 적립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물건을 매매하여 利息을 취해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月料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諸司의 公廨에 있는 本錢을 없애고는 천하의 上戶(부유한 가호) 7천 명을 胥士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이것으로 관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課戶라는 것이다. 唐나라는 또 1년의 세금을 장부에 기재하여 거두되 高戶(富戶)로써 이것을 주관하게 하고 매월 利息을 취하여 녹봉을 지급하니, 이것이 이른바 俸戶라는 것이다.】 파한 것은 官方의 사사로운 소요를 줄이기 위해서였고, 곡식을 꾸어주되【稱은 去聲이니, 빌리는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擧錢(빚을 빌림)이란 것이다. 貸는 남에게 물건을 구하는(빌리는) 것이다.】 갚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랫사람들이 실제 혜택을 입기를 바라서였다.

唐나라 宣宗 이후로 어진 정사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아니하여 백성들을 끓는 물과 불 속(塗炭)에【백성들의 위태로움이 끓는 물과 불 속에 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니, 곧 《書經》의 이른바 塗炭이라는 것이다.】 버려둔 지가 거의 백 년이었는데, 그런 뒤에 世宗이 임금의 덕이 있어서 백성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사(仁政)를 행하였다. 世宗이 일찍이 將相들과 밥을 먹을 적에 인하여 말하기를 ‘연일 계속되는 추위에 짐은 백성들에게 공이 없으면서 가만히 앉아서 天祿을 누리는 것이 매우 부끄러우니, 오직 내가 백성들을 위해 직접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서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제거하여야 다소 스스로 편안할 수 있다.’ 하였고, 또 나무를 조각하여 밭 가는 지아비와 길쌈하는 지어미의 像을 만들어서 이것을 뜰에다 놓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에게 마음을 둠이 이와 같았으니, 赫然히 남면하고 지휘함에 온 천하가 복종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周世宗이 以北鄙未復이라하야 將幸滄州할새 卽日에 帥步騎數萬하고 直趍(趨)契丹之境하니 契丹守將이 皆擧城降이라 於是에 關南【瓦橋關以南이라 】이 悉平하다

周나라 世宗이 북쪽 변방을 아직 수복하지 못했다 하여 장차 滄州로 행차하려 할 적에 당일로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契丹의 국경으로 곧장 향하니, 契丹의 수비하는 장수들이 모두 성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에 關南 지방이【關南은 瓦橋關 이남 지방이다.】 모두 평정되었다.

○ 六月에 唐主遣其子紀公從善하야 與鍾謨로 俱入貢이어늘 周主曰 江南【唐也라 】이 亦治兵修守備乎아 對曰 旣臣事大國하니 不敢復爾【爾는 猶言如此也라 】로소이다 上曰 不然하다 曏時則爲仇敵이어니와 今日則爲一家라 吾與汝國으로 大義已定하니 保無他虞라 然이나 人生難期하야 至於後世면 則事不可知니 歸語汝主호되 可及吾時하야 完城郭, 繕甲兵하고 據守要害하야 爲子孫計하라 謨歸하야 以告唐主한대 唐主乃城金陵하고 凡諸州城之不完者를 葺之하고 戍兵少者를 益之하니라

6월에 唐主가 그의 아들紀公李從善을 보내어鍾謨와 함께 入朝해서 공물을 바치게하였다. 周主鍾謨에게 묻기를 “江南(南唐)【江南은 唐나라이다.】 또한 군대를 다스려 수비를 하는가?” 하니, 鍾謨가 대답하기를 “이미 신하로서 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감히 다시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爾는 이와 같다는 말이다.】

上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난날에는 우리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지만 지금은 한 집안이 되었다. 우리는 너희 나라와 군신간의 大義가 이미 정해졌으니, 보장하건대 딴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기약하기 어려워 후세에 이르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돌아가 너의 군주에게 고하되 ‘내가 살아있을 때에 성곽을 완전히 보수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요해처를 점거하고지켜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라.’고 하라.” 하였다.

鍾謨가 돌아가 唐主에게 이것을 아뢰자, 唐主가 이에 金陵에 城을 쌓고 여러 州의 城 가운데 완전하지 못한 것들을 수리하고 수자리 사는 병사가 적은 곳을 보충하여늘렸다.

溫公曰 或問臣호되 五代帝王에 唐莊宗, 周世宗은 皆稱英武하니 二主孰賢고하니 臣應之曰 莊宗은 善戰者也라 故로 能以弱晉勝彊梁이러니 旣得之하야 曾不數年에 外內離叛하야 置身無所하니 誠由知用兵之術이요 不知爲天下之道故也라 世宗은 以信令御群臣하고 以正義責諸國이라 王環以不降受賞王環이 爲蜀鳳州節度使러니 世宗이 攻之한대 堅守라가 力屈就擒하니 世宗嘆曰 用之면 可勸事君者라하고 乃拜爲右驍衛將軍하니라 】하고 劉仁贍以堅守蒙褒【南唐이 以仁贍爲淸淮節度使하야 鎭壽州러니 世宗이 攻之하야 踰時不下라 仁贍崇諫이 幸其病하야 謀降이어늘 仁贍이 命斬之하다 病甚에 副使孫羽詐爲書하야 以城降하니 是日에 卒이라 世宗이 復其軍曰忠正軍이라하야 以旌仁贍之節也하니라】하고 嚴續以盡忠獲存陳覺이 自周하야 矯世宗之命하야 謂唐主曰 江南連歲拒命은 皆宰相嚴續之謀니 當爲我斬之하라 唐主素與有隙하고 未之信하야 使鍾謨復命曰 久拒王師는 皆臣愚迷요 非之罪라하다 世宗聞之하고 大驚曰 審如此면 則乃忠臣이니 朕爲天下主하야 豈敎人殺忠臣乎아하니라 】하고 蜀兵以反覆就誅世宗이 謀取蜀, 秦하고 遣鳳翔節度使王景攻之하야 虜其蜀將王(蠻)[巒]及其將士三千人하다 秦州降하니 世宗이 赦所俘蜀兵하야 隷軍籍하고 從征淮南이러니 (後王)[復亡]하야 走入唐이어늘 唐主獻五十人하니 世宗이 悉命斬之하니라】하고 馮道以失節被棄하고 張美以私恩見疎【(宗族之類)[[[世宗]]之爲]晉王也하야 在(亶)[澶]州할새 掌州穀이러니 世宗이 或私有所求면 曲爲供副하다 及其卽位에 以治積穀이 當時鮮及이라 故로 以利權授之하니 征伐四方호되 用度不乏은 之力也라 然이나 終不以公忠待之하니라 供副者는 供給軍需辦以應副所求라 】하며 江南未服이면 則親犯矢石하야 期於必克하고 旣服이면 則愛之如子하야 推誠盡言하야 爲之遠慮하니 其宏規大度가 莊宗이 豈得同日語哉리오 書曰 無偏無黨하면 王道蕩蕩【偏은 不中也요 黨은 不公也라 蕩蕩은 廣遠也라 】이라하고 又曰 大邦畏其力하고 小邦懷其德이라하니 世宗近之矣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혹자가 나에게 묻기를 ‘五代時代의 帝王 중에 唐나라 莊宗과 周나라 世宗은 모두 英武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두 군주 중에 누가 더 어진가?’라고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莊宗은 전투를 잘한 자이다. 그러므로 약한 晉나라를 가지고 강한 梁나라를 이겼는데,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일찍이 몇 년이 못 되어 내외가 이반하여 몸 둘 곳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用兵하는 방법만 알고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世宗은 진실한 명령으로 신하들을 어거하고 正義로 여러 나라를 책망하였다. 그리하여 王環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상을 받았고王環이 蜀나라 鳳州節度使가 되었는데, 世宗이 공격하자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사로잡히니, 世宗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등용하면 군주를 섬기는 자를 권면할 수 있다.” 하고 마침내 右驍衛將軍으로 임명하였다.】劉仁贍은 굳게 성을 지킴으로써 표창을 받았으며,【南唐이 劉仁贍을 淸淮節度使로 임명하여 壽州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世宗이 壽州를 공격하여 한 철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劉仁贍의 아들[ 劉崇諫]이 아버지의 병환을 요행으로 여겨 항복할 것을 모의하자 劉仁贍이 명령하여 자식의 목을 베게 하였다. 劉仁贍의 병이 위독해지자, 副使孫羽가 거짓으로 항복문서를 만들어 城을 가지고 항복하니, 이날 劉仁贍이 죽었다. 世宗이 그의 군대를 회복하여 忠正軍이라 이름해서 劉仁贍의 충절을 표창하였다.】[ 嚴續]은 충성을 다함으로써 생존을 얻었고陳覺이 周나라로부터 돌아와서 世宗의 命을 사칭하여 唐主에게 이르기를 “江南이 여러 해를 이어 황제(世宗)의 명령에 항거한 것은 모두 宰相 [ 嚴續]이 모의한 것이니, 마땅히 나를 위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하였다. 唐主陳覺이 평소 [ 嚴續]과 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말을 믿지 않고 鍾謨를 시켜 世宗에게 복명하기를 “오랫동안 王의 군대에게 항거한 것은 모두 신의 어리석고 혼미함 때문이지, [ 嚴續]의 죄가 아닙니다.” 하였다. 世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다면 [ 嚴續]은 바로 충신이니, 짐이 천하의 군주가 되어서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충신을 죽이게 하겠는가.” 하였다.】蜀나라의 병사들은 반복무상함으로써 죽임을 당하였으며,世宗이 蜀과 秦지방을 점령할 것을 모의하고 鳳翔節度使王景을 보내어 공격하게 해서 蜀나라의 장수 [ 王巒]과 그의 장병 3천 명을 사로잡았다. 秦州가 항복하니, 世宗이 사로잡은 蜀나라의 병사들을 사면하여 軍籍에 예속시키고 從軍하여 淮南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다시 도망하여 南唐으로 달아나자, 唐主가 이들 50명을 바치니, 世宗이 모두 명하여 목을 베게 하였다.】馮道는 절개를 잃었다 하여 버림받고 張美는 사사로운 은혜로 인해 소외당하였으며,世宗晉王가 되어 澶州에 있을 적에 張美가 州의 곡식을 관장하였는데, 世宗이 혹 사사로이 요구하는 바가 있으면 張美가 곡진히 장만하여 요구에 부응하였다, 世宗이 즉위하자 張美가 비축한 곡식을 다스림에 당시 그를 따라갈 만한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권을 그에게 주니, 사방을 정벌할 적에 用度가 궁핍하지 않은 것은 모두 張美의 공로였다. 그러나 끝내 공평함과 충성함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供副는 軍需를 공급하고 마련하여 요구에 부응함을 이른다.】江南 지방이 복종하기 전에는 친히 화살과 砲石을 무릅쓰고 기필코 이길 것을 기약하였고 이미 복종한 뒤에는 자식처럼 사랑하여 정성을 다하고 아는 것을 다 말해서 그들을 위하여 멀리 생각하였으니, 그 큰 규모와 큰 도량을 어찌 莊宗과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書經》에 이르기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王道가 蕩蕩하다.」 하였고,【偏은 中하지 못한 것이요, 黨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蕩蕩은 넓고도 먼 것이다.】 또 말하기를 「큰 나라는 그의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의 덕을 그리워한다.」라고 하였으니, 世宗이 이에 가깝다.’”

周主立皇子宗訓하야 爲梁王하다 癸巳에 周主世宗이 殂하다 世宗이 在藩에 多務韜晦【謂韜光晦跡이라 】러니 及卽位에 破高平之寇하니 人이 始服其英武하니라 其御軍에 號令이 嚴明하야 人莫敢犯하고 攻城對敵에 矢石이 落其左右하야 人皆失色이로되 而世宗이 略不動容하고 應機決策이 出人意表하다 又勤於爲治하야 百司簿籍을 過目無所忘하고 發奸擿伏【擿은 他歷反이니 挑也요 伏은 隱也니 凡隱匿者를 爲動發之라】에 聰察如神이라 閑暇則召儒者하야 讀前史하야 商確【確은 訖岳反이니 博求義理當否也라 】大義하며 性不好絲竹珍玩之物이라 常言太祖養成王峻, 王殷王峻은 樞密使平虜節度使同平章事요 王殷은 邠郡節度使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라 】之惡하야 致君臣之分不終【上庚戌年에 漢隱帝孟業하야 殺監軍王峻等이러니 王殷이 先知其事하고 (因多製書)[囚業遣人]하야 以密詔示太祖하다 太祖起兵할새 王殷이 以部兵數百하고 亦以監軍從하야 夙夜盡心하야 多有佐命功이라 由是로 恃功專橫하다 王峻言事에 帝或未允이면 輒慍하야 語多不遜하고 忌鎭寧節度使晉王榮之英烈하야 沮其入朝라 太祖不悅하고 因入朝하야 殺之하고 貶爲商州司馬而卒하니라 】이라 故로 群臣有過則面責之하야 服則赦之하고 有功則厚賞之하고 文武參用하야 各盡其能하니 人無不畏其明而懷其惠라 故로 能破敵廣地하야 所向無前이러라 然이나 用法大(太)嚴하야 群臣職事 小有不擧하면 往往寘(置)之極刑하야 雖素有才幹聲名이라도 無所開宥하고 尋亦悔之러니 末年에 浸寬이러라 登遐之日에 遠邇哀慕焉하니라

[新增]歐陽氏脩曰 嗚呼라 五代는 可謂亂世也歟인저 世宗이 區區五六年間에 取秦隴【世宗二年에 克成階鳳州하니 時三州入于蜀하니라 】하고 平淮右【世宗五年에 克淮南四十州하니라 】하고 復三關【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皆中國故地라 】하야 威武之聲이 震懾【懾은 懼也니 通作讋이니 失氣也라 】夷夏하고 而方內(納)延【內은 與納通이라 】儒學文章之士하야 考制度하고 修通禮하고 定正樂하고 議刑統하야 其制作之法이 皆可施於後世라 其爲人이 明達英果하고 論議偉然하야 卽位之明年에 廢天下佛寺三千【綱目及資治에 作二萬하니라 】三百三十六이라 是時에 中國乏錢이어늘 乃詔悉毁天下銅佛像하야 以鑄錢이라 嘗曰 吾聞佛說이 以身世爲妄而以利人爲急이라하니 使其眞身尙在인댄 苟利於世면 猶欲割截이어든 況此佛像을 豈其所惜哉아하니 由是로 群臣이 皆不敢言이라 嘗夜讀書라가 見唐元稹均田圖하고 慨然嘆曰 此致治之本也니 王者之政이 自此始라하고 乃詔頒其圖法하야 使吏民先習知之하야 期以一歲大均天下之田하니 其規爲志意 大矣哉라

周主(世宗)가 皇子柴宗訓梁王으로 세웠다. 癸巳日(6월 19일)에 周主世宗이 죽었다. 世宗은 藩邸(藩王의 저택)에 있을 적에 되도록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감추었는데,【韜晦는 재능을 감추고 행적을 숨김을 이른다.】 즉위하자 高平의 적을 격파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英明함과 武勇에 탄복하였다. 군대를 통솔할 적에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해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고, 적의 성을 공격하고 적진을 대할 적에 적의 화살과 포석이 좌우에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으나 世宗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임기응변하여 계책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意表를 찔렀다. 또 정사를 다스림에 부지런하여 여러 官司의 장부를 눈으로 한 번 보고 지나가면 잊는 법이 없었으며, 간악한 일을 적발하고 숨겨진 일을 적발함에【擿은 他歷反(적)이니 들추어내는 것이고, 伏은 숨겨진 것이니, 모든 숨겨져 있는 것을 들추어 드러내는 것이다.】 총명하게 살피는 것이 귀신과 같았다. 한가할 때에는 儒者들을 불러서 예전의 역사책을 읽게 하여 大義를 강구하고 의논하였으며【確은 訖岳反(확)이니, 의리에 합당한지 여부를 널리 찾는 것이다.】 타고난 성품이 관현악과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太祖王峻王殷王峻은 樞密使 平虜節度使 同平章事이고, 王殷은 邠郡節度使 兼親軍都指揮使同平章事였다.】 惡을 양성하여 군신간의 분수를 잘 끝마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였다.【앞의 庚戌年(950)에 漢나라 隱帝가 [ 孟業]을 보내어서 監軍王峻 등을 죽이게 하였는데, 王殷이 그 일을 미리 알고는 [ 孟業]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密詔를 太祖에게 보였다. 太祖가 군대를 일으킬 적에 王殷이 휘하의 군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수행하였으며, 王峻 또한 監軍을 거느리고 수행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다해 왕이 창업할 때 보좌한 功이 많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들이 공을 믿고 專橫하였다. 王峻이 일을 말할 적에 황제가 혹 윤허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성을 내어 불손한 말이 많았으며, 鎭寧節度使晉王柴榮의 英烈함을 시기하여 그가 들어와 조회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에 太祖가 기뻐하지 않고 王殷이 入朝함을 틈타 그를 죽였고, 王峻을 商州司馬로 좌천시켜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대면하고 책망하여 죄를 인정하면 용서하고 공이 있으면 상을 후하게 내렸으며, 文武의 인재를 섞어 등용해서 각각 재능을 다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의 총명함을 두려워하고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을 격파하고 영토를 넓혀서 향하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너무 엄격하여 신하들 중에 직분에 관계된 일을 조금이라도 거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왕왕 극형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평소에 재간과 명망이 있는 자라도 관대하게 용서해주는 법이 없었고 얼마 뒤엔 또한 이를 후회하였는데, 말년에는 점점 너그러워졌다. 승하하는 날에 원근에서 모두 슬퍼하고 사모하였다.

[新增]歐陽氏(歐陽脩)가 말하였다.

“아! 五代時代는 난세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런데 世宗은 구구하게 5, 6년 동안에 秦隴을 취하고【世宗 2년(955)에 成州, 階州, 鳳州를 점령하니, 이 당시에 이 세 州가 蜀으로 들어가 있었다.】淮右를 평정하고【世宗 5년(958)에 淮南의 40州를 점령하였다.】三關을 수복하여【三關은 游口關, 益津關, 瓦橋關이니, 모두 中原의 옛 영토이다.】威武의 명성이 오랑캐 지방과 中夏에 진동하였고,【懾은 두려워하는 것으로 讋과 통하니 의기소침하여 기운을 잃은 것이다.】 유학과 문장을 하는 선비들을 사방에서 받아들여【內은 納과 통한다.】 제도를 고찰하고 통행하는 禮를 닦고 純正한 음악을 제정하고 刑統을 의논하여 제작한 법이 모두 후세에 시행할 만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고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의논이 훌륭하여 즉위한 다음 해에 천하의 佛寺 3【三千은 《資治通鑑綱目》과 《資治通鑑》에는 二萬으로 되어 있다.】336개소를 폐지하였다. 이때 中國에 돈이 없자, 마침내 명하여 천하의 銅으로 만든 불상들을 모두 부수어서 돈을 주조하게 하였다.

世宗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佛家의 학설은 몸과 세상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급하게 여긴다고 하니, 만약 眞身(부처)이 아직 살아있을 경우 만일 세상에 이롭기만 하다면 자기 몸을 베어주고자 할 터인데, 하물며 이 불상을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밤중에 책을 읽다가 唐나라 元稹의 均田圖를 보고 慨然히 감탄하기를 ‘이는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이니, 王者의 정사가 이로부터 시작된다.’ 하고는 마침내 명하여 이 그림과 법을 천하에 반포해서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익숙히 알게 해서 1년 동안에 천하의 田地를 크게 균등하게 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그 規爲(규모)와 의지가 참으로 훌륭하다.”

甲午에 宣遺詔하야 命梁王宗訓하야 卽皇帝位하니 生七年矣러라

甲午日(6월 20일)에 遺詔를 선포해서梁王柴宗訓에게 명하여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태어난 지 겨우 7세였다.

○ 周世宗이 仍歲征伐할새 宋太祖累立大功하고 加以法令嚴明하니 士卒畏服이라 恭帝幼沖하니 中外物情이 皆附于太祖하야 密有推戴之意하니라

周나라 世宗이 해마다 정벌할 적에 宋나라 太祖가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게다가 法令이 엄격하고 분명하니, 사졸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恭帝는 나이가 어리니, 中外의 물정(인심)이 모두 太祖에게 歸附하여 은밀히 황제로 추대할 뜻을 두었다.

恭帝
名은 宗訓이니 世宗長子라

恭帝 名은 宗訓이니 世宗長子라 在位半年에 禪于宋하니라

恭帝는 이름이 宗訓이니, 世宗의 長子이다. 재위한 지 반년 만에 宋나라에 禪讓하였다.

[庚申]

[庚申]〈周恭帝는 仍稱顯德七年하니라 正月은 宋太祖皇帝建隆元年이라 ○ 是歲에 周禪于宋하니라〉

경신(960) - 周나라 恭帝는 顯德 7년을 그대로 칭하였다. 정월은 宋나라 太祖皇帝의 建隆 元年이다. ○ 이해에 周나라가 宋나라에 禪讓하였다.-

正月에 鎭定驛告호되 河東劉鈞北漢主라 】이 結遼兵入寇라하니 周主宋太祖北征이러니 至陳橋驛하야 諸將이 擁逼南歸하야 自仁和門入하다 宋太祖歸公署하니 宰相范質等이 詣崇元殿하야 召文武百僚하야 至晡班定【晡曰申時라 】하다 周恭帝自內降制曰 天生蒸民에 樹之司牧이라 二帝는 惟公而禪位하고 三王은 乘時而革命하니 其極은 一也라 予末小子【末은 弱也라 】遭家不造【造는 成也라 】하야 人心已去하고 天命有歸라 咨爾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趙某는 禀上聖之姿하고 有神武之略하야 佐我高祖하야 格于皇天하고 逮事世宗하야 功存納麓【書에 納于大麓이라 】하고 東征西怨하야 厥績懋焉【懋는 美也요 又通作茂하니 盛也라 】하니 天地鬼神이 享于有德하고 謳歌獄訟이 歸于至仁이라 應天順人하야 法하니 如釋重負라 予其作賓하노니 嗚呼欽哉하라 祇畏天命하노라 〈陶穀所撰也라〉宣徽使引宋太祖하야 就龍墀하야 聽命訖에 宰相이 掖宋太祖升殿이어늘 由東序하야 服御服하고 登座하니 群臣朝賀하다 詔改周顯德七年하야 爲建隆元年하고 國號를 大宋이라하니 正月五日也러라

정월에 鎭定驛에서 아뢰기를 “河東의 劉鈞劉鈞은 北漢의 군주이다.】遼나라 군대와 결탁하여 쳐들어와서 침략했다.” 하니, 周主(恭帝)가 宋나라 太祖에게 명하여 북쪽을 정벌하게하였다. 宋나라 太祖가 陳橋驛에 이르자, 諸將들이 옹위하고핍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하니, 仁和門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宋나라 太祖가 公署로 돌아가니, 재상 范質 등이 崇元殿에 나와 文武百官을 불러 晡時(申時)에 이르자 반열을 정하였다.【晡는 申時(오후 4시 전후)를 이른다.】周나라 恭帝가 大內에서 다음과 같은 制書를 내렸다.

“하늘이 만백성을 내고 司牧(군주)을 세웠다. 임금과 임금은 공변되어 禪位하였고 三王은 때를 틈타 혁명하였으니, 그 극치는 똑같다. 나 末小子는【末은 미약함이다.】 국가가 편안하지 못할 때를 만나서【造는 이룸이다.】 人心이 이미 떠나가고 天命이 딴 사람에게 돌아갔다.

아! 너 歸德軍節度使殿前都點撿趙某는 上聖의 자질을 타고났으며 神武한 지략이 있어서 우리 高祖를 보좌하여 皇天을 감동시키고 世宗을 섬겨 큰 정사를 총괄함에 공적이 남아있으며,【《書經》〈舜典〉에 “임금이 임금을 받아들여 萬機의 정사를 기록하게 했다.”라고 보인다.】 동쪽 나라를 정벌하면 서쪽 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뒤에 정벌하는 것을 원망하여 그 공적이 성대하니,【懋는 아름다움이요, 또 茂로도 통용하여 쓰니, 성대함이다.】 천지의 귀신은 덕이 있는 자에게 흠향하고 백성들의 謳歌하고 訟事함은 지극히 인자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는 하늘의 뜻에 부응하고 인심을 따라서 임금이 임금에게 禪讓한 것을 본받으니, 나는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이 홀가분하다. 나는 손님이 될 것이니, 아! 공경하라. 천명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라.” - 陶穀이 지은 것이다.-

宣徽使의 인도로 宋나라 太祖가 龍墀에 나아가 명령을 다 들은 다음 재상들이 宋나라 太祖를 부축하여 殿에 오르게 하였다. 東序를 통해 올라가서 御服을 입고 자리에 오르니, 여러 신하들이 조회하고 축하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周나라 顯德 7년을 고쳐 建隆 元年이라 하고 국호를 大宋이라 하니, 정월 5일이었다.

歷年圖曰 太祖郭威라 】負震主之威하고 挾不賞之功하야 措身無所하야 乘危而發【見上庚戌年하니라 】하야 雖履天下之籍이나 而室家先覆【漢隱帝太祖擧兵渡河하고 乃誅太祖家屬于京師하야 嬰孺無免者하니라 】矣라 世祖는 以異姓之親世宗은 名이니 太祖柴皇后守禮之子라 太祖無嗣하야 養以爲子하니라 】으로 入承大統에 知近世之弊起於威令不行하야 下陵上替라 故로 高平之役에 首誅, , 는 見上甲寅年이라 】하야 以振軍法하야 遂能變弱爲强하고 因敗爲功하야 乘勝逐北하야 至于太原이라 歸而簡師習戰하야 幷心進取하니 於是에 南割江淮하고 西克秦鳳하고 北開關南하야 攻無堅城하고 戰無彊陣이라 又以枹鼓之隙에 治律曆, 明典禮하고 審法令, 修政事하고 收賢才, 養百姓하니 可謂知治安之本矣라 大功未成에 中道而夭하니 蓋太平之業을 天將啓聖人而授之니 非人謀之所及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恭帝以區區孺子로 纂承大統하야 不足以當皇天之眷命이라 然이나 眞人德業日隆하야 已爲天下所歸戴면 則其重負를 安得而不釋乎아 昔聞諸先儒說호니 五代之君이 更十有二에 周世宗爲上이요 唐明宗次之요 餘無足稱焉이라하니라 歷考五代之世컨대 正如中夜晦冥하니 孤山窮谷之間에 鼯鼠鴟鴞와 狐狸鬼魅가 何物不有리오 故로 有以盜賊而君天下者하니 朱梁이 是也요 有以夷人而君天下者하니 後唐, 晉, 漢諸君이 是也요 有以黥卒而君天下者하니 周郭威 是也요 有以丐養之子而君天下者하니 唐明宗, 潞王, 周世宗이 是也라 其變之大者는 則同姓之親은 斃於刀鋸而不恤하고 盜賊夷人之裔는 則養爲己子하야 使紹大統而不顧하며 中國之君은 己之所嘗北面而委質者어늘 則叛逆簒弑而忍爲하고 夷狄之主는 中國所當拒絶者어늘 則稱父稱臣而不恥하야 首足倒懸하고 冠屨逆置라 自書契以來로 其禍敗之慘과 滅亡之速이 未有甚於斯時者也하니 人生斯世는 何其不幸歟아

《歷年圖》에 말하였다.

太祖(郭威)太祖郭威이다.】 군주를 두렵게 할 만한 위엄을 가지고 상 줄 수 없는 큰 공을 지녀 몸 둘 곳이 없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하여【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발신한 것은 앞의 庚戌年(950)에 보인다.】 비록 天子의 지위에 올랐으나 室家가 먼저 전복되었다.【漢나라 隱帝(劉承祐)太祖(郭威)가 군대를 일으켜 강을 건너온다는 말을 듣고, 京師에서 太祖의 家屬을 죽여 갓난아이도 화를 면한 자가 없었다.】

世祖는 異姓의 친척으로世宗은 이름이 이니, 太祖柴皇后의 오라비인 柴守禮의 아들이다. 太祖가 後嗣가 없어 그를 길러 아들로 삼았다.】 들어와서 大統을 이음에 근세의 병폐가 군주의 위엄과 명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되어 아랫사람이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高平의 전쟁에 첫 번째로 樊愛能何徽樊愛能何徽의 일은 앞의 甲寅年(954)에 보인다.】 주벌하여 군법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함을 바꾸어 강하게 만들고 실패를 바꾸어 성공으로 삼아서, 승세를 타고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太原에 이르렀다. 돌아와 군사들을 선발해서 전투하는 방법을 익히게 하여 進取하는 데에 온 마음을 쏟으니, 이에 남쪽으로 江淮를 할양받고 서쪽으로 秦州와 鳳翔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關南을 개척하여 공격하면 견고한 성이 없고 싸우면 강한 적이 없었다. 또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 틈에 律曆을 다스리고 典禮를 밝히며 법령을 살피고 정사를 닦으며 어진 이와 재능이 있는 자를 거두어 쓰고 백성을 길렀으니,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근본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큰 공이 이루어지기 전에 중도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태평한 기업을 하늘이 장차 聖人(趙匡胤)에게 열어서 주려고 한 것이니, 사람의 지모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史略 史評]史斷(史官의 論斷)에 말하였다.

恭帝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로 大統을 이어받아서 皇天의 돌아보는 天命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眞人(宋 太祖)의 德業이 날로 높아져서 이미 천하 사람들이 귀의하고 추대하는 바가 되었으니, 그 무거운 짐(帝位)을 어찌 벗어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先儒들의 말씀을 들어보니, ‘五代時代의 군주가 12명인데 周나라 世宗이 가장 으뜸이고 唐나라 明宗이 그 다음이며 나머지는 칭찬할 만한 사람이 없다.’ 하였다.

五代의 세상을 차례로 살펴보건대 바로 한밤중처럼 깜깜하니, 외로운 산과 깊은 골짜기에 날다람쥐와 올빼미, 솔개와 여우, 살쾡이와 도깨비 같은 것들이 어떤 나쁜 물건인들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도둑으로서 天下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朱全忠의 梁나라가 이것이요, 오랑캐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後唐과 晉‧漢의 여러 군주가 이것이요, 文身한 병졸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周나라 郭威가 이것이요, 데려다 기른 자식으로서 천하에 군주 노릇을 한 자가 있으니 唐나라 明宗潞王, 周나라 世宗이 이것이다.

변고 중에 가장 큰 것은, 同姓의 친척이 칼과 톱에 형벌을 당하여 죽어도 걱정하지 않고, 도적과 오랑캐 자식을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아 大統을 잇게 하면서도 돌아보지 않으며, 中國의 군주는 자신이 일찍이 북향하여 폐백을 바치고 섬겼던 자인데도 叛逆과 찬탈과 시해를 자행하였고, 夷狄의 군주는 中國에서 마땅히 거절해야 할 자인데도 아버지라고 칭하고 신하라고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머리와 발이 거꾸로 달리고 冠과 신발이 거꾸로 놓였다. 文字가 생긴 이래로 禍敗의 참혹함과 멸망의 신속함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았으니, 이때에 태어난 사람은 어쩌면 그리도 불행한가.”

右後周는 三主에 共十年이라

이상 後周는 세 임금에 모두 1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