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 東周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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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以續周公官職이러니 桓公卒에 子威公立하고 威公卒에 子惠公立이라 惠公이 乃封其少子於鞏하야 以奉王하고 號東周惠公이라하니라 〈出史記 ○ 東西周之稱이 又起於此라 索隱曰 惠公立長子하니 曰西周公이요 又封少子於鞏하야 仍襲父號하니 曰東周惠公이라 於是에 又稱東西二周也하니라 按世本에 西周桓公은 名니 居河南하고 東周惠公은 名이니 居洛陽이 是也라 復齋胡氏曰 其後에 揭沒而長子成公이 襲有其地하고 少子이 專制洛陽하야 兄弟角立하니 史冊逸其世數名氏라 至赧王三十四年하야 楚謀入寇어늘 王使東周君으로 諭止之하니 蓋之後也라 至赧王入秦하야 秦遷西周君於★{單/心}狐聚하야 而河南亡하고 莊襄元年에 遷東周君於陽人聚而洛陽之鞏亡하니라〉

南宮氏靖一曰 周自武王으로 至東周君滅而周始亡于秦하니 斯實錄也라 後有秉春秋之筆者면 盍改而正諸리오 按舊本엔 仍溫公之書하야 自赧王入秦之後로 卽以秦昭襄承周統爲秦紀러니 剡旣已遵朱子綱目之例하야 正之矣요 今復得南宮氏之說이어늘 而雙湖胡氏深有取焉하니 極爲確論하니 眞所謂發先賢之所未發者也라 舊本正之而未盡이어늘 今復正之于左하야 以俟質于高明史學先生云이라〉

東周는 考王이 그 아우를 河南에 봉함으로부터 비롯되니, 이가 桓公이다. 周公의 官職을 이었는데, 桓公이 죽자 아들威公이 서고, 威公이 죽자 아들惠公이 섰다. 惠公은 마침내 그 少子(작은아들)를 鞏 땅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 이름을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史記》에 나옴 ○ 東周와 西周의 칭호가 또 여기서 시작되었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惠公이 長子를 세우니西周公이라 하였고, 또 少子를 鞏 땅에 봉하여 아버지의 칭호를 그대로 세습하니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이에 또 東周와 西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世本에 “西周의 桓公은 이름이 이니 河南에 거주하고, 東周의 惠公은 이름이 이니 洛陽에 거주하였다.” 하였다. 復齋胡氏가 말하기를 “그 뒤에 揭가 죽고 長子인 成公이 세습하여 河南을 소유하고 少子인 이 오로지 洛陽을 점령하여 형제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그 世數와 名氏를 잃었다. 赧王 34년에 이르러 楚나라가 周나라를 침입할 것을 도모하자 赧王東周君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 東周君의 후손일 것이다. 赧王이 秦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秦나라가 西周君을 ★{單/心}狐聚로 옮겨서 河南이 망하였고, 莊襄王 元年에 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겨서 洛陽의 鞏이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南宮靖一이 말하였다. “周나라는 武王으로부터 東周君이 멸망함에 이르러 周나라가 비로소 秦나라에게 망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기록이다. 뒤에 春秋의 붓을 잡는 자(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지 않겠는가.” - 살펴보건대 舊本에는 溫公의 《資治通鑑》을 따라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뒤로부터 곧바로 秦나라 昭襄王이 周나라의 계통을 이어받아 秦紀로 삼았는데, 내(劉剡)가 이미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의 例를 따라서 바로잡았고, 이제 다시 南宮氏의 說을 얻었는데 雙湖胡氏(胡一桂)가 이것을 깊이 취함이 있었으니, 지극히 확고한 논의가 되는 바, 진실로 이른바 ‘先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舊本에는 바로잡았으나 미진하였는데, 이제 다시 아래에 바로잡아서 高明한 史學先生을 기다려 질정하는 바이다.-

[丙午]元年

[丙午]元年이라 〈秦昭襄王五十二요 楚考烈王八이요 燕孝王三이요 魏安釐王二十二요 趙孝成王十一이요 韓桓惠王十八이요 齊王十年이라 ○ 凡七國이라〉

周民이 東亡이어늘 秦이 取其寶器하고 遷西周公於★{單/心}狐聚【索隱曰 西周公은 武公子文公也라 ★{單/心}狐는 地名이니 ★{單/心}은 音憚이라 徐廣曰 ★{單/心}狐聚는 近陽人聚하니 在洛陽南百五十里라 括地志에 汝州之外古梁城이 卽★{單/心}狐聚라 】하다 ○ 秦丞相范睢免하다

元年(병오 B.C.255)) - 秦昭襄王 52년, 楚 考烈王8년,燕孝王 3년, 魏安釐王22년,趙孝成王11년,韓桓惠王18년,齊王 10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周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도망하자, 秦나라가 그 寶器를 취하고 西周公을 ★{單/心}狐聚로 옮겼다.【≪史記索隱≫에 말하기를 “西周公은 武公의 아들 文公이다.” 하였다. ★{單/心}狐는 지명이니 ★{單/心}은 음이 탄이다. 徐廣이 말하기를 “★{單/心}狐聚는 陽人聚에 가까우니, 洛陽 남쪽 150리에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汝州의 밖 옛 梁城이 곧 ★{單/心}狐聚이다.” 하였다.】

○ 秦나라 승상 范睢가 면직하였다.

[丁未]二年

[丁未]二年이라 〈秦五十三, 楚九, 燕王元, 魏二十三, 趙十二, 韓十九, 齊十一年이라〉

秦伐魏하야 取吳城하다 ○ 韓王이 入朝於秦하다

2년(정미 B.C.254)) - 秦나라 53년, 楚나라 9년, 燕王 元年, 魏나라 23년, 趙나라 12년,韓나라 19년,齊나라 11년이다. -

秦나라가 魏나라를 정벌하여吳城을 점령하였다.

韓王이 秦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다.

[庚戌]五年

[庚戌]五年이라 〈秦五十六, 楚十二, 燕四, 魏二十六, 趙十五, 韓二十二, 齊十四年이라〉

秋에 秦昭襄王이 薨하고 子孝文王立하다 ○ 趙公子勝이 卒하다

5년(경술 B.C.251)) - 秦나라 56년, 楚나라 12년,燕나라 4년, 魏나라 26년, 趙나라 15년,韓나라 22년,齊나라 14년이다. -

가을에 秦나라 昭襄王이 죽고아들孝文王가 즉위하였다.

○ 趙나라 公子이 별세하였다.

[辛亥]六年

[辛亥]六年이라 〈秦孝文王, 楚十三, 燕五, 魏二十七, 趙十六, 韓二十三, 齊十五年이라〉

十月에 秦王卽位三日에 薨하고 子立하니 是爲莊襄王이러라

6年(신해 B.C.250)) - 秦孝文王 元年, 楚나라 13년,燕나라 5년, 魏나라 27년, 趙나라 16년,韓나라 23년, 齊나라 15년이다. -

10月에 秦王가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고子楚가 즉위하니, 이가 莊襄王이다.

○ 燕將이 攻齊聊城慈湖王氏曰 聊城은 在平原이라 〈括〉地志에 故聊城은 在博州聊城縣西二十里하니 戰國時에 亦齊地라 秦漢이 皆爲東郡之聊城하니라 慈湖王氏는 名幼學이요 字行卿이니 後只稱王氏曰이라 】하야 拔之러니 或이 譖之燕王한대 燕將이 保聊城하고 不敢歸라 齊田單이 攻之歲餘에 不下어늘 魯仲連이 乃爲書하야 約之矢【王氏曰 纏束書於矢上이라 】하야 以射城中하야 遺燕將하야 陳利害【遺燕將曰 爲公計者컨대 不歸燕則歸齊니 今猶守孤城이라가 齊兵日益而燕救不至면 將何爲乎아 】한대 燕將이 見書하고 泣三日에 遂自殺하니 聊城이 亂이라 田單이 克聊城하고 歸言魯仲連齊王하야 欲爵之한대 仲連이 逃之海上曰 吾與富貴而詘於人【記儒行曰 不充詘於富貴라한대 註에 〈充〉詘은 喜失節也라 】으론 寧貧賤而輕世肆志【輕世는 眇視天下也요 肆志는 放縱志意也라 】焉이라하더라

燕나라 장수가 齊나라 聊城을 공격하여【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聊城은 平原에 있다. ≪括地志≫에 ‘옛 聊城은 博州 聊城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니, 戰國時代에도 齊나라 땅이었다. 秦나라와 漢나라가 모두 東郡의 聊城으로 삼았다.’ 하였다.” 慈湖王氏는 이름이 幼學이고 字가 行卿이니, 이 뒤로는 다만 ‘王氏曰’이라고 칭하였다.】함락하였는데, 혹자가 燕王에게 참소하니, 燕나라 장수가 聊城을 지키고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齊나라 田單이 이를 공격한 지 1년이 넘었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자, 魯仲連이 마침내 편지를 써서 이것을 화살에 묶어【王氏가 말하였다. “편지를 화살 위에 묶은 것이다.”】 城안으로 쏘아 燕나라 장수에게 보내서 利害를 말하였다.【燕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公을 위하여 계획해 보건대 燕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齊나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도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齊나라 군대는 날로 증강되고 燕나라의 구원은 이르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燕나라 장수가 그 편지를 보고 3일 동안 울다가 마침내 자살하니, 聊城이 혼란하였다. 田單이 聊城을 이기고 돌아가 魯仲連齊王에게 말하여 벼슬을 주려 하자, 魯仲連이 海上으로 도망하며 말하기를 “내 부귀하면서 남에게 예절을 잃기보다는【≪禮記≫ 〈儒行〉에 이르기를 “부귀 때문에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註에 “充詘은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는 것이다.” 하였다.】 차라리 빈천하면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내 뜻대로 하겠다.”【輕世는 천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고, 肆志는 뜻대로 방종하는 것이다.】 하였다.

○ 魏安釐王이 問天下之高士於子順【孔斌字니 孔子六世孫이라 】한대 子順曰 世無其人也어니와 抑可以爲次는 其魯仲連乎인저 王曰 魯仲連은 彊作之者니 非體自然也니라 子順曰 人皆作之하나니 作之不止면 乃成君子요 作之不變하야 習與體成이면 則自然也니이다

魏나라 安釐王이 천하에 道德이 높은 선비를 子順(孔斌)에게 묻자,子順孔斌의 字이니, 孔子의 6세손이다.】子順이 대답하기를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으나 그 다음이 될 만한 자는 魯仲連일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魯仲連은 억지로 힘써서 作爲하는 자이니, 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子順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모두 作爲하니, 作爲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君子를 이루고, 作爲하기를 변치 아니하여 습관이 體와 더불어 이루어지면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였다.

[壬子]七年

[壬子]七年이라 〈秦莊襄王楚元, 楚十四, 燕六, 魏二十八, 趙十七, 韓二十四, 齊十六年이라 是歲에 周亡이라〉

秦이 以呂不韋爲相國하야 封文信侯하다 ○ 東周君이 與諸侯로 謀伐秦이어늘 秦王이 使相國呂不韋로 帥師滅之하고 遷東周君於陽人聚【地理志云 河南梁縣에 有陽人聚라 括地志云 陽人故城은 在汝州梁縣西四十里라 】하니 周遂不祀하다 周比亡에 凡有七邑【徐廣曰 周比亡時에 凡七縣이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是也라 】이러라

[新增]雙湖胡氏曰 西都는 自涇舟膠楚澤【涇은 水名이니 在西周地라 昭王이 巡狩濟漢이러니 漢濱人이 以膠膠舟하야 中流膠液하야 王溺死하니라 漢은 楚地라 】하고 下堂見諸侯【平王東遷하야 都于洛邑한대 王室微弱하야 政由下하니 下堂見諸侯하니라 】로 綱常陵遲하야 已爲春秋之漸이요 東都는 自春秋已來로 弱不可支로되 猶幸五霸【齊桓, 晉文, 秦穆, 宋襄, 楚莊이라 】挾天子하야 以令諸侯하야 尙寄空名於天下라 然이나 繻葛倒懸【周桓王伐鄭한대 鄭與王戰于繻葛할새 射王中肩하니 易理猶倒懸也라 】하야 已爲戰國之漸이요 戰國엔 首命韓趙魏爲諸侯하야 綱常之道盡矣라 於是에 七雄競彊하야 蘇秦張儀肆從橫之術하니 從者는 猶知合六國以抗秦이로되 橫者는 甘於事秦而不恥라 事秦者는 固不知有周요 抗秦者도 不過自爲니 亦豈復知有周哉아 而周亡에 亦無一能倡大義於天下하고 僅有魯仲連이 義不帝秦하야 負當世高士重名이라 使當時之士에 有如三老董公之遮說하고 當時之君에 有如漢王三軍縞素하야 爲赧王하야 與東周君發喪하야 爲天下誅無道秦하야 名其爲賊이면 敵乃可服이리니 齊桓晉文之事를 寧不可復見於今日이리오 何計不出此하고 顧乃區區欲與秦鬪智角力이라가 卒之賓服恐後하야 以待滅亡之不暇하니 可痛也哉인저 又嘗合三代論之컨대 三代之王은 有天下가 一千九百六十九年이어늘 何聖賢之君無幾하야 夏有, , 少康하고 商有成湯, 太甲, 太戊, 盤庚, 武丁하고 周有武王, 成王, 康王, 宣王이요 外無聞焉이라 然이나 後之言治者 以三代爲稱首하야 巍巍皇皇하야 卓冠千古하야 而莫及者는 以聖王之道로 立經陳紀하고 創法定制라 其尤卓卓然者는 如井田封建學校兵師之要가 靡不備具하고 而又固結之以仁하고 維持之以禮하야 端本洪源하야 自足與天無極이라 故其後世子孫이 非有剛惡如之暴하고 非有柔惡如赧王之衰면 皆足以世守之而勿失也니 豈偶然哉아

溫公歷年圖曰 周自平王東遷으로 日以衰微하고 至於戰國하야는 又分而爲二하야 其土地人民이 不足以比彊國之大夫라 然이나 天下猶尊而事之하야 以爲共主하야 守之宗祧하야 綿綿然久而不絶하니 其故는 何哉오 植本固而發源深也일새라 昔周之興也에 禮以爲本하고 仁以爲源이라 自后稷以來로 至於히 其講禮也備矣요 其施仁也深矣라 民習於耳目하고 浹於骨髓하야 雖後世微弱이나 其民將有陵慢之心이면 則畏先王之禮而不敢爲하고 將有離散之心이면 則思先王之仁而不忍去하니 此其所以享國長久之道也라 不然이면 以區區數邑으로 處於七暴國之間하야 一日不可存이어든 況於數十年乎아 〈歷年圖는 乃溫公未作通鑑之前에 先進此圖하니 歷述古今治亂호되 於一代之終엔 則立一論하야 以斷其興亡하니 後倣此하니라〉

7년(임자 B.C.249) - 秦莊襄王 元年, 楚나라 14년,燕나라 6년, 魏나라 28년, 趙나라 17년,韓나라 24년, 齊나라 16년이다. 이 해에 周나라가 망하였다. -

秦나라가 呂不韋를 相國으로 삼아文信侯에 봉하였다.

東周君이 諸侯와 더불어 秦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자, 秦王이 相國呂不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망시키고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기니,【陽人聚는 ≪漢書≫ 〈地理志〉에 “河南 梁縣에 陽人聚가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陽人의 古城이 汝州 梁縣 서쪽 40리에 있다.” 하였다.】周나라가 마침내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개 고을을 소유하였다.【徐廣이 말하였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縣이 있었으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이것이다.”】

[新增]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西都(西周)는 涇水의 배가 楚나라의 못에서 아교가 녹아 침몰되고,【涇은 물 이름이니, 西周의 땅에 있다. 周나라 昭王이 巡狩하여 漢水를 건너가는데, 漢水 가에 있는 사람이 아교풀로 배를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중류에 이르러서 아교가 녹자 昭王이 漢水에 빠져 죽었다. 漢水는 楚나라 땅이었다.】 堂 아래로 내려가서 제후를 만나 본 뒤로부터【平王이 동쪽으로 遷都하여 洛邑에 도읍하자, 왕실이 미약해져서 정사가 아랫사람에게서 나오니, 天子가 堂을 내려가 諸侯를 보게 되었다.】 綱常이 침체되어 이미 春秋時代의 조짐이 있었으며, 東都(東周)는 春秋時代 이후로 미약하여 지탱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다행히 五霸가【五霸는 齊나라 桓公, 晉나라 文公, 秦나라 穆公, 宋나라 襄公, 楚나라 莊王이다.】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여 天子라는 빈 칭호를 천하에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繻葛의【周나라 桓王이 鄭나라를 정벌하자, 鄭나라가 王과 繻葛에서 싸울 적에 왕을 쏘아 어깨를 맞혔으니, 이치를 거역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것이다.】 싸움에서 군신간의 도리가 도치되어서 이미 戰國時代의 조짐이 되었고, 戰國時代에는 먼저 韓‧趙‧魏를 명하여 제후로 삼아서 綱常의 道가 다 없어졌다. 이에 七雄이 강성함을 다투어 蘇秦張儀가 合縱과 連橫의 술책을 펴니, 合縱하는 자들은 그래도 六國을 모아 秦나라에 항거할 줄을 알았으나, 連橫하는 자들은 秦나라를 섬기는 것을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秦나라를 섬기는 자들은 진실로 周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秦나라에 대항하는 자들도 또한 자신을 위함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또한 어찌 다시 周나라가 있음을 알았겠는가. 周나라가 망하자 또한 大義를 천하에 제창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겨우 魯仲連이 있어서 의리상 秦나라를 황제로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당대 高士의 두터운 名望을 지니게 되었다. 만일 당시의 선비 중에 三老인 董公漢王(劉邦)을 가로막고 설득한 것과 같이 하고, 당시의 군주 중에 漢王이 三軍에게 소복을 입힌 것과 같이 하여, 赧王을 위해 東周君과 함께 發喪해서 천하를 위해 무도한 秦나라를 주벌하여 역적임을 분명히 밝혔으면 적이 비로소 굴복하였을 것이니, 齊나라 桓公과 晉나라 文公의 일을 어찌 다시 今日에 보지 못하였겠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고, 도리어 마침내 구구히 秦나라와 지혜를 다투고 힘을 겨루고자 하다가 끝내 복종함이 뒤늦을까 두려워하여 멸망함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하다.

또 일찍이 三代를 합하여 논하건대, 三代가 왕 노릇 함은 천하를 소유한 것이 1천 9백 69년이었는데,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몇 명이 못되어서 夏나라에는 禹王少康이 있었고, 商나라에는 成湯太甲太戊盤庚武丁이 있었고, 周나라에는 武王成王康王宣王이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알려진 군주가 없다. 그러나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들은 三代를 첫 번째로 칭하여, 드높고 위대하여 우뚝이 千古에 뛰어나서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禹王成湯文王武王이 聖王의 道로써 떳떳한 법칙을 세우고 기강을 펴며 법을 창건하고 제도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중에도 더욱 우뚝이 드러난 것은 井田, 封建, 學校, 兵師와 같은 중요한 제도들이 자세히 구비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 仁으로 굳게 맺고 禮로 유지하여, 뿌리를 바로잡고 근원을 키워서 스스로 하늘과 더불어 무궁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자손들이 剛惡(剛이 過함)함으로 桀王紂王幽王厲王 같은 포악함이 있지 않고, 柔惡(柔가 過함)함으로 赧王과 같이 나약한 자가 있지 않으면 모두 충분히 대대로 지켜서 잃지 않은 것이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溫公의 《歷年圖》에 말하였다.

“周나라는 平王이 東遷(東都인 洛邑으로 遷都)한 뒤로부터 날마다 쇠약해졌고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또 나뉘어 둘이 되어서 그 土地와 人民이 강대국의 大夫에도 비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하가 오히려 周나라를 높여 섬겨서 共主라 하여, 文王武王의 宗廟를 지켜 綿綿히 이어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으니, 그 연고는 어째서인가?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고 나오는 근원이 깊기 때문이었다. 옛날 周나라가 일어날 때에 禮로써 뿌리를 삼고 仁으로써 근원을 삼았다. 后稷으로부터 이래로 文王, 武王, 成王, 康王에 이르기까지 禮를 강론함이 구비되었고 仁을 베풂이 깊었다. 백성들이 귀와 눈에 익숙하고 골수에 젖어 들어서 비록 후세가 미약하였으나 그 백성들이 장차 능멸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禮를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고, 장차 離反할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仁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향유하기를 장구하게 한 방도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구한 몇 고을을 가지고 포악한 일곱 나라의 사이에 처하여 단 하루도 보존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수십 년을 보존함에 있어서이겠는가.” - 《歷年圖》는 바로 溫公이 《資治通鑑》을 저술하기 전에 먼저 이 《歷年圖》를 올렸는 바, 古今의 다스려짐과 혼란함을 차례로 서술하되 한 왕조가 끝날 때에는 한 議論을 세워서 興亡을 결단하였으니, 뒤도 이와 같다.-

右周는 三十七王이니 幷東周君이라 按經世書하면 始武王己卯하야 終東周君壬子히 該八百七十三年이라

[新增]愚按 南宮氏曰 作史者는 〈司馬氏〉 當於莊襄元年東周旣滅에 方書周亡하고 然後進秦하야 使接周統이요 於莊襄終年呂政嗣位에 特書秦亡하고 然後正其姓氏하야 別爲後秦이니 斯實錄矣라 今乃不然하야 東周未滅에 遽進昭襄之秦하고 呂政嗣位로되 猶冒嬴秦之姓하야 於周則絶之如恐其不亟하고 於秦則進之如恐其不多하야 好惡不公하고 是非逆置하니 其諸謂之何哉오 秦自孝公以來로 累世窺周하야 一念僭竊이라가 至莊襄하야 百有餘年에 東周始滅하니 彼固謂嬴氏之業이 可傳之不墜러니 未幾에 呂政立而嬴氏之秦이 已亡이라 嗚呼라 赧王入秦之後에 歷七年而東周如線之緖尙存이러니 莊襄取周之餘才(纔)三載에 而柏翳【書 稱伯益이라 周平王이 封伯益之裔襄公於秦하니라 】數百年之宗祀遽滅【襄公始封諸侯로 至莊襄甲寅히 五百七十年이라 】이라 孟子曰 殺人之父면 人亦殺其父하고 殺人之兄이면 人亦殺其兄이라하시니 天道好還하야 福善禍淫이 無毫髮爽이어늘 而世之窺覦僭竊于人之國者 每迷而不悟하니 悲夫라

이상 周나라는 37왕이니, 東周君까지 넣었다. 《皇極經世書》를 살펴보면 武王己卯年에서 시작하여 東周君壬子年에 이르기까지 총 873년이다.

내(胡一桂의 《史纂通要》)가 살펴보건대, 南宮氏(南宮靖一)가 말하기를 “역사책을 지은 자(司馬光을 가리킴)가 마땅히 莊襄王元年에 東周가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周나라가 망한 것을 쓰고 그런 뒤에 秦나라를 올려서 周나라의 계통을 이었어야 하고, 莊襄王의 마지막 해에 呂政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는 秦나라가 망한 것을 특별히 쓰고 그런 뒤에 姓氏를 바로잡아 별도로 後秦이라고 했어야 하니,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진실한 기록이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東周가 멸망하기 전에 갑자기 昭襄王의 秦나라를 올리고, 呂政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대로 嬴秦의 姓을 무릅써서, 周나라에 있어서는 끊어버리기를 행여 빨리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하고, 秦나라에 있어서는 올리기를 행여 많이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해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도치되었으니 이를 일러 뭐라고 하겠는가.

秦나라는 孝公 이래로 여러 대 동안 周나라 왕실을 엿보아 한결같이 참람하고 도둑질할 것을 생각하다가 莊襄王에 이르러 백여 년 만에 東周가 비로소 멸망하자, 저들은 진실로 嬴氏의 基業이 길이 전해져 실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呂政이 즉위하자 嬴氏의 秦나라가 이미 망하였다. 아,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후에 7년이 지나도록 東周의 실낱같은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었는데, 莊襄王이 周나라를 취한 뒤로 겨우 3년 만에 柏翳의【柏翳를 ≪書經≫에는 伯益이라 칭하였다. 周나라 平王이 伯益의 후손인 襄公을 秦나라에 봉하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宗祀가 마침내 멸망하였다.【襄公을 처음 제후로 봉한 뒤로부터 莊襄王 갑인년까지 570년이다.】孟子가 말씀하기를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형을 죽인다.”라고 하였으니, 天道는 돌려주기를 좋아하여 선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려줌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는데, 세상에 남의 나라를 엿보고 도둑질하는 자들은 매양 어두워 깨닫지 못하니,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