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 周紀

yjw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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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紀

赧王 下

[甲辰]五十八年

[甲辰]五十八年이라

魏王이 使晉鄙救趙러니 秦王이 使謂曰 吾攻趙하야 旦暮에 且下하리니 諸侯敢救者면 必移兵先擊之하리라 魏王이 恐하야 止晉鄙壁鄴하고 又使將軍新垣衍으로 說趙王하야 欲共尊秦爲帝하야 以却其兵이러라 魯仲連이 聞之하고 往見曰 彼秦者는 棄禮義而上首功之國【譙周曰 秦用商鞅計하야 置爵二十等하고 以戰獲首級者로 計而受爵하니 天下謂之上首功之國이라하니 皆以惡之也라 索隱云 秦法에 斬首多爲上功하니 謂斬一人首면 賜爵一級이라 故謂之首功之國이라 】也라 彼卽肆然而爲帝면 則은 有蹈東海而死耳언정 不願爲之民也하노라 今秦도 萬乘之國也요 梁亦萬乘之國也어늘 從而帝之면 秦이 將行天子之禮하야 以號令於天下하고 變易諸侯之大臣하리니 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하며 奪其所憎而與其所愛하면 梁王이 安得晏然而已乎아 이 起再拜曰 吾乃今에 知先生天下之士也로니 不敢復言帝秦矣리이다

58년(갑진 B.C.257))

魏王晉鄙를 시켜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秦王이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에 이르기를 “내가 趙나라를 공격하여 조만간에 장차 항복시킬 것이니, 諸侯 중에 감히 구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군대를 옮겨 먼저 공격하겠다.” 하였다. 魏王이 두려워하여 晉鄙를 중지시켜鄴 땅의 성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장군 新垣衍을 시켜 趙王을 설득해서 함께 秦나라를 높여 황제로 삼아 秦나라의 군대를 퇴각하게 하고자 하였다.

魯仲連이 이 말을 듣고 가서 新垣衍을 보고 말하기를 “저 秦나라는 禮義를 버리고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이다.【譙周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商鞅의 계책을 써서 20등급의 작위를 설치하고 전투에서 잡은 적의 首級을 계산하여 작위를 주자, 천하에서 이를 일러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라고 하였으니, 모두 이를 미워한 것이다.” ≪史記索隱≫에 말하였다. “秦나라 법에는 首級을 많이 벤 것을 상등의 功으로 삼았으니, 적 한 명의 목을 베면 한 등급의 작위를 하사하였기 때문에 이를 일러 戰功을 으뜸으로 삼는 나라라고 한 것이다.”】 저들이 만약 방자하게(건방지게) 황제가 된다면 나(連)는 東海에 뛰어들어 죽음이 있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지금 秦나라도 萬乘의 나라이고 梁(魏)나라 또한 萬乘의 나라인데, 따라서 저 秦나라를 황제로 삼으면 秦나라는 장차 天子의 禮를 행하여 천하에 호령하고 제후들의 대신을 바꾸어 둘 것이니, 저 秦나라가 장차 不肖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어질다고 여기는 자에게 주고 미워하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 사랑하는 자에게 준다면 梁王이 어떻게 편안히 있을 뿐이겠는가?” 하니, 新垣衍이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였다. “나는 지금에야 선생이 천하의 선비인 줄을 알았으니, 감히 다시는 秦나라를 황제로 삼자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 初에 魏公子無忌愛人下士【下는 謂禮遇之라 】하야 致食客이 三千人이라 魏有隱士하니 曰侯嬴【姓名也니 嬴은 音盈이라 索隱云 又音羸라】이라 年七十에 家貧하야 爲夷門監者【夷門은 梁城之東門이라 按魏公子傳曰 夷門之抱關者也라하니라 】러니 公子置酒하고 大會賓客할새 坐定에 公子從車騎虛左【師古曰 凡乘車에 尊者居左하고 御者居中하고 又一人處車之右하야 以備傾側이라하니 虛左者는 謂空左方一位以迎之니 蓋尊之也라 】하고 自迎侯生이라가 侯生至에 引坐上坐(座)하니 賓客이 皆驚이러라

처음에 魏나라 公子無忌가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下는 〈몸을 낮추어〉 예우함을 이른다.】 食客을 招致한 것이 3천 명이었다. 魏나라에 隱士가 있으니 侯嬴【侯嬴은 성명이니, 嬴은 음이 영이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또 다른 음은 리이다.” 하였다.】이라 하였다. 나이 70에 집이 가난하여 夷門의 監者(문을 감독하는 사람)【夷門은 梁나라 도성의 동쪽 문이다. 살펴보건대 ≪史記≫ 〈魏公子傳〉에 “夷門을 지키는 자이다.” 하였다.】가 되었는데, 公子가 술자리를 베풀고 빈객을 크게 모을 적에 빈객이 자리를 정하자, 公子가 車騎를 수행시키되 왼쪽을 비워두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무릇 수레를 탈 적에 높은 자는 왼쪽에 타고, 수레를 모는 자는 가운데에 타고, 또 한 사람은 수레의 오른쪽에 타서 수레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에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왼쪽을 비워두었다는 것은 왼쪽 한 자리를 비워두어 맞이함을 이르니, 높이는 것이다.】 직접 侯生을 맞이하러 갔다가 侯生이 이르자 인도하여 上座에 앉히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及秦圍趙에 趙平原君之夫人은 公子無忌之姊也라 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하야 讓公子曰 이 所以自附於婚姻者는 以公子之高義로 能急人之困也러니 今邯鄲이 旦暮降秦이어늘 而魏救不至라한대 公子數請魏王晉鄙救趙하고 及賓客辯士 遊說【荀悅曰 飾辯辭, 設詐謀하야 馳逐於天下하야 以要時勢者를 謂之遊說라 】萬端호되 王終不聽이러라 公子乃屬賓客하야 約車騎百餘乘하야 欲赴鬪以死於趙할새 過見侯生한대 曰 公子無他端하야 而欲赴秦軍하시니 如以肉投餒虎니 何功之有리잇고 公子再拜問計한대 曰 吾聞晉鄙兵符【慈湖王氏曰 符는 信也요 輔也니 所以輔信이라 古者에 以竹爲之라 故字從竹이러니 後世詐僞蜂起하니 以竹易得之物이라 不足爲之防이라하야 於是에 有銅鐵金銀으로 鑄爲物象而用之라 漢文帝初에 與郡國爲銅虎符竹使符라 應劭曰 銅虎符는 長六寸이니 第一至五는 國家發兵遣使에 至郡合符하야 符合이면 乃聽受之라 竹使符는 以竹箭五枚로 長五寸이요 旁鐫篆書하고 亦一至五하니 出人徵發에 用之라 張晏曰 符以代古之珪璋하니 從簡易也라 師古曰 與郡國爲符호되 各分一半하야 右留京師하고 左以與之하니 此漢制也라 唐高祖入長安에 罷隋竹使符하고 班銀菟符러니 其後에 改爲銅魚木契하니 朝廷徵發에 下敕書契魚어든 都督郡府參驗하야 皆合然後遣之하니라 】在王臥內하고 而如姬【其愛姬姓如氏라 】最幸이라하니 力能竊之요 且公子嘗爲報其父仇하니 如姬欲爲公子하야 死無所辭라 誠一開口면 則得虎符하야 奪鄙兵하리니 北救趙하고 西却秦이면 此는 五伯(霸)之功也니이다 公子如其言하야 得兵符한대 侯生曰 將在外에는 君令도 有所不受하나니 有如鄙疑而復請之면 則事危矣라 臣客朱亥는 力士니 可與俱라가 鄙不聽이어든 使擊之하소서

秦나라가 趙나라를 포위하자, 趙나라 平原君의 부인은 公子無忌의 누님이었으므로 平原君의 使者들의 冠蓋가 魏나라에 서로 이어져 公子를 꾸짖기를 “내()가 스스로 婚姻하여 장가든 것은 公子의 높은 의리로 남의 곤궁함을 급히 구원해 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邯鄲이 조만간에 秦나라에게 항복하게 되었는데도 魏나라의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 하였다. 公子가 여러 번 魏王에게 晉鄙에게 명하여 趙나라를 구원하게 할 것을 청하고 빈객과 변사들도 萬端으로 설득하였으나【荀悅이 말하였다. “말을 잘 꾸미고 속이는 모략을 써서 천하를 놓고 角逐을 벌여 당시의 권세를 잡으려고 하는 것을 일러 유세라 한다.”】 왕은 끝내 듣지 않았다. 公子가 마침내 빈객들을 모으고 車騎 백여 乘을 모아 싸움에 달려가 趙나라에서 죽고자 할 적에 지나는 길에 侯生을 방문하니, 侯生이 말하기를 “公子가 별다른 방도가 없이 秦나라 군대에게 달려가 싸우고자 하시니, 이는 마치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으니, 무슨 공(효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公子가 재배하고 계책을 물으니, 侯生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晉鄙의 兵符【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符는 符信이고 돕는 것이니, 信을 돕는 것이다. 옛날에는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가 竹자를 따랐는데, 후세에 속임수가 벌떼처럼 일어나자, 대나무는 얻기가 쉬운 물건이라 위조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해서 이에 銅과 鐵과 金과 銀을 주조하여 물건의 모양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漢나라 文帝 초년에 郡國에게 銅虎符와 竹使符를 만들어 주었다. 應劭는 말하기를 ‘銅虎符는 길이가 6寸이니 제1부터 제5까지는 국가에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낼 적에 郡에 이르러 兵符를 맞춰보아 兵符가 맞으면 비로소 명을 따랐다. 竹使符는 竹箭 5매로 길이가 5寸이고 옆에 篆書를 새기며 또한 1부터 5까지 있으니 사람을 내고 징발할 적에 이것을 썼다.’ 하였다. 張晏이 말하기를 ‘符는 옛날의 珪璋을 대신한 것인데 간편함을 따른 것이다.’ 하였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郡國에게 符를 만들어 주되 각각 반씩을 나누어 오른쪽은 京師에 남겨두고 왼쪽은 郡國에게 주었으니, 이는 漢나라의 제도이다. 唐나라 高祖가 長安에 들어가자 隋나라의 竹使符를 없애고 銀菟符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뒤에 銅魚와 木契를 만드니, 조정에서 징발할 적에 敕書와 契魚를 내리면 都督이 郡府의 것과 맞춰보아 모두 합치된 뒤에야 보냈다.’ 하였다.”】가 왕의 침실 안에 있고, 如姬【如姬는 王이 총애하는 여자의 姓이 如氏인 것이다.】가 가장 총애를 받는다 하니, 힘이 兵符를 훔쳐낼 수 있으며, 또 公子가 일찍이 그녀 아비의 원수를 갚아 주었으니, 如姬는 公子를 위하고자 하여 죽는 것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한번 입을 열면 虎符(兵符)를 얻어 晉鄙의 군대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니, 북쪽으로 趙나라를 구원하고 서쪽으로 秦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면 이는 五霸의 공입니다.”

公子가 그 말과 같이 하여 兵符를 얻으니, 侯生이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장군이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晉鄙가 의심하여 다시 청하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신의 門客인 朱亥는 힘이 센 장사이니, 함께 갔다가 晉鄙가 듣지 않거든 공격하게 하소서.”

公子至鄴하니 晉鄙合符하고 果疑之하야 擧手視公子曰 吾擧十萬之衆하야 屯於境上하니 國之重任이어늘 今單車來代之는 何如哉오 袖四十斤鐵椎라가 椎殺하다 公子下令曰 父子俱在軍中者는 父歸하고 兄弟俱在軍中者는 兄歸하고 獨子無兄弟者는 歸養하라하야 得選兵八萬人하야 將之而進하다 王齕이 久圍邯鄲호되 不拔하고 諸侯來救하야 數戰不利라 武安君이 聞之하고 曰 王不聽吾計러니 今何如矣오 秦王이 聞之하고 怒하야 免武安君하야 爲士伍【嘗有爵而有罪奪爵者를 稱士伍라하니 言使役士卒之伍也라 】하야 遷之陰密할새 至杜郵하야 使使者賜之劍한대 武安君이 遂自殺하니 秦人이 憐之러라 魏公子無忌 大破秦師於邯鄲下하니 王齕이 解邯鄲圍하고 走하다 公子無忌旣存趙에 遂不敢歸魏하고 使將으로 將其軍以還하다 〈無忌 封爲信陵君

公子가 鄴 땅에 이르자, 晉鄙가 兵符를 맞춰보고 과연 의심하여 손을 들어 公子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니 국가의 중대한 임무인데, 이제 단 한 대의 수레로 와서 이를 대신함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朱亥가 40근짜리 철퇴를 소매 속에 넣고 있다가 晉鄙를 쳐서 죽였다.

公子가 명령을 내리기를 “父子가 함께 軍中에 있는 자는 아버지가 돌아가고, 兄弟가 함께 軍中에 있는 자는 兄이 돌아가고, 獨子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하여 선발한 병사 8만 명을 얻어서 이들을 거느리고 전진하였다.

王齕이 오랫동안 邯鄲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諸侯들이 와서 구원하여 여러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武安君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왕께서 내 계책을 듣지 않더니, 지금 어떠한가?” 하니, 秦王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武安君을 파면하여 士伍(卒兵)로 만들고【일찍이 벼슬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벼슬을 빼앗긴 자를 士伍라 칭하니, 사역하는 士卒의 대오를 말한다.】陰密로 유배 보낼 적에, 杜郵라는 곳에 이르러 使者를 시켜 검을 하사하니, 武安君이 마침내 자살하였다. 이에 秦나라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魏나라 公子無忌가 秦나라 군대를 邯鄲 아래에서 대파하니, 王齕이 邯鄲의 포위를 풀고 도망하였다. 公子無忌가 趙나라를 보존하고는 마침내 감히 魏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수를 시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가게 하였다.- 無忌信陵君으로 봉하였다.-

秦太子之子異人【孝文王子也니 後更名楚하니라 】이 自趙逃歸秦하다 太子妃曰華陽夫人이니 無子하고 夏姬生子異人하야 質於趙러니 秦數伐趙하니 趙不禮之하야 困不得意라 陽翟大賈【索隱曰 翟은 音狄이니 俗又音宅이라 地理志에 潁川陽翟縣이라 慈湖王氏曰 按戰國策에 以不韋爲濮陽人이라하니라 正義云 陽翟은 今河南府也라 賈는 音古니 往來賤買貴賣者也라 】呂不韋 適邯鄲이라가 見之하고 曰 此는 奇貨可居【慈湖王氏曰 以異人으로 方財貨也라 居는 蓄積也라 漢張湯傳에 田信居物致富라한대 註云 謂居蓄賤物하야 以乘時射利也라 】라하고 乃說之曰 秦王老矣요 太子愛華陽夫人而無子하고 子之兄弟二十餘人에 子居中하야 不甚見幸하니 太子卽位라도 子不得爭爲嗣矣리라 異人曰 奈何오 不韋曰 能立適(嫡)嗣者는 獨華陽夫人耳니 不韋雖貧이나 請以千金爲子西游하야 立子爲嗣호리라 異人曰 必如君策인대 秦國을 與子共之호리라

秦나라 太子의 아들 異人【異人은 孝文王의 아들이니, 뒤에 이름을 楚로 고쳤다.】이 趙나라에서 도망하여 秦나라로 돌아왔다.

太子의 妃는 華陽夫人인데 아들이 없었고, 夏姬가 아들異人을 낳아 趙나라에 인질이 되었는데, 秦나라가 자주 趙나라를 정벌하니 趙나라가 그를 예우하지 아니하여 곤궁해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陽翟의 큰 장사꾼【≪史記索隱≫에 말하였다. “翟은 음이 적이니, 시속의 또 다른 음은 택(책)이다. ≪漢書≫ 〈地理志〉에 ‘潁川郡 陽翟縣이다.’ 하였다.” 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戰國策≫에 ‘呂不韋는 濮陽 사람이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陽翟은 지금의 河南府이다.’ 하였다. 賈는 음이 고이니, 왕래하면서 싼 것을 사다가 비싸게 파는 자이다.”】呂不韋가 邯鄲에 갔다가 異人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기이한 보화이니 쌓아둘 만하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異人을 재화에 견준 것이다. 居는 쌓아두는 것이다. ≪漢書≫ 〈張湯傳〉에 ‘田信이 물건을 사서 쌓아두어 부자가 되었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싼 물건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기회를 틈타 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설득하기를 “秦王이 늙었고 太子가 華陽夫人을 사랑하나 아들이 없으며, 그대의 형제 20여 명 중에 그대는 중간에 있어 그리 총애받지는 못하니, 태자가 즉위하더라도 그대가 後嗣(후계자)가 됨을 다투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異人이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묻자, 呂不韋가 말하기를 “嫡嗣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華陽夫人뿐이니, 내(不韋)가 비록 가난하나 청컨대 천금을 가지고 그대를 위하여 서쪽으로 가서, 그대를 세워 후사로 삼게 하겠다.” 하니, 異人이 말하기를 “반드시 그대의 계책처럼 한다면 秦나라를 그대와 함께 하겠다.” 하였다.

不韋乃與五百金하야 令結賓客하고 復以五百金으로 買奇物玩好하야 自奉而西하야 見夫人姊而以獻於夫人하고 因譽異人之賢호되 賓客이 遍天下하고 日夜에 泣思太子及夫人曰 異人也 以夫人爲天이라한대 夫人이 喜러라 不韋因使其姊說曰 夫人이 愛而無子하니 不以繁華時로 蚤(早)自結於諸子中賢孝者하야 擧以爲適이라가 卽色衰愛弛면 雖欲開一言이나 尙可得乎아 今異人賢而自知中子不得爲適하니 誠以此時拔之면 是는 異人은 無國而有國이요 夫人은 無子而有子也니 則終身有寵於秦矣리이다 夫人이 以爲然하야 乘間言之러니 太子與夫人으로 又刻玉符하야 約以爲嗣하고 因請不韋하야 傅之하다

不韋가 마침내 5백 금을 異人에게 주어서 賓客을 맺게(사귀게) 하고, 다시 5백 금을 가지고 기이한 물건과 玩好品을 사서 스스로 받들고 서쪽으로 가서 부인의 언니를 만나 이것을 부인에게 바치게 하고, 인하여 異人의 어짊을 칭찬하되 〈異人은 교유하는〉 빈객이 온 천하에 두루 널리 퍼져 있으며 밤낮으로 울면서 태자와 부인을 생각하여 ‘異人은 부인을 하늘로 여긴다.’고 말한다 하니, 부인이 기뻐하였다.

不韋가 인하여 그 언니를 시켜 부인을 설득하기를 “부인이 사랑을 받고 있으나 아들이 없으니, 번화할 때에 일찍 스스로 여러 아들 중에 어질고 효성스러운 자를 맺어서 그를 들어 嫡子로 삼지 않았다가 만일 미모가 쇠하여 사랑이 풀어지면 비록 한마디 말을 하고자 한들 오히려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異人이 어질지만 스스로 中子라서 嫡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진실로 이러한 때에 그를 嫡子로 뽑는다면 異人은 나라가 없다가 나라가 있게 되고 부인은 자식이 없다가 자식이 있게 되는 것이니, 종신토록 秦王에게 총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그 말을 옳게 여겨 틈을 타서 태자에게 말하니, 태자가 부인과 함께 또 玉符를 새겨 後嗣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인하여 呂不韋를 청하여 異人을 가르치게 하였다.

不韋娶邯鄲姬絶美者하야 與居하야 知其有娠이러니 異人이 見而請之어늘 不韋佯怒라가 旣而요 獻之하야 期年而生子【慈湖王氏曰 呂不韋傳에 姬自匿有身(娠)하야 至大期時하야 生子政이라 註에 徐廣曰 期는 十二月也라 索隱曰 譙周云 人十月生이어늘 此過二月이라 故云大期라하니 蓋當然也라 旣云自匿有娠이면 則生政自當踰常期也라 政後爲秦始皇帝하니라 】하니 異人이 遂以爲夫人하다 邯鄲之圍에 趙人이 欲殺之어늘 不韋賂守者하야 得脫이라 亡赴秦軍하야 遂歸하다 異人이 楚服而見夫人【慈湖王氏曰 不韋以王后楚人이라 故使異人服楚製而說(悅)之하니라 】한대 夫人曰 吾는 楚人也니 當自子之【慈湖王氏曰 子는 嗣也니 我當自養之爲嗣也라 】라하고 更名曰楚【戰國策曰 本名異人이러니 王后說其狀하고 高其(智)[志]하야 曰 吾楚人也니 而(自子)[子字]之라하고 乃變其名曰楚라하니라 更은 改也라 】라하다

呂不韋는 邯鄲의 여자로 絶色인 자를 취하여 함께 살아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았는데, 異人이 그녀를 보고 청하였다. 呂不韋는 거짓으로 노한 체하다가 이윽고 그녀를 바쳐 期年(1년) 만에 아들을 낳으니,【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史記≫ 〈呂不韋傳〉에 ‘여자가 스스로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大期에 이르러 아들 政을 낳았다.’ 하였는데, 註에 徐廣이 말하기를 ‘期는 12개월이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譙周가 이르기를 「사람이 열 달 만에 태어나는데, 이는 두 달이 더 지난 것이다. 그러므로 大期라고 이른 것이다.」 하였으니, 마땅하다. 이미 스스로 임신한 사실을 숨겼다고 했으면 政을 낳은 것은 마땅히 보통 기한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政은 뒤에 秦始皇帝가 되었다.’ 하였다.”】異人이 마침내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邯鄲이 포위되자 趙나라 사람들이 異人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呂不韋가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어 탈출할 수 있었다. 異人이 도망하여 秦나라 군영으로 달려와서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왔다.

異人이 楚나라 복식을 하고 부인을 뵈니,【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王后가 楚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呂不韋가 異人에게 楚나라 옷을 입게 하여 王后를 기쁘게 한 것이다.”】 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사람이니, 마땅히 스스로 너를 길러 아들(後嗣)로 삼겠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子는 후사이니, 내가 마땅히 스스로 길러 후사로 삼겠다고 한 것이다.”】 하고는 이름을 고쳐 라고 하였다.【≪戰國策≫ 〈秦策〉에 이르기를 “본명이 異人이었는데 王后가 그의 모습을 좋아하고 그의 뜻을 높이 여겨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사람이니 너를 아들로 삼아 기르겠다.’ 하고 마침내 그의 이름을 고쳐 楚라고 했다.” 하였다. 更은 고침이다.】

[乙巳]五十九年

[乙巳]五十九年이라

秦伐韓하야 取陽城負黍【徐廣曰 陽城에 有負黍聚라 括地志云 陽城은 洛州縣也요 負黍亭은 在陽城西南三十五里하니 故周之邑이라 左傳云 鄭伐周負黍 是也니 戰國屬韓이라 慈湖王氏曰 取者는 春秋傳例曰 克邑에 不用師徒曰取라 左傳昭四年에 取鄫하니 言易也라하니 是已라 】하니 斬首四萬이요 伐趙하야 取二十餘縣하니 斬首九萬이라 赧王이 恐하야 倍(背)秦하고 與諸侯約從하야 欲伐秦이러니 秦이 使將軍【將軍之名也니 史失其姓이라 前漢百官表曰 前後左右將軍은 皆周末官이니 秦因之라 位上卿이요 漢不常置하니라 】로 攻西周하니 赧王이 入秦하야 頓首【下首也라 拜而額至手伏地久라가 方起를 謂之稽首니 稽는 遲也라 拜而額至手卽起를 謂之頓首요 拜而頭不至地卽起를 謂之控首라 】受罪하고 盡獻其邑三十六과 口三萬이어늘 秦受其獻而歸赧王於周러니 是歲에 赧王崩하다

59년(을사 B.C.256))

秦나라가 韓나라를 정벌하여 陽城의 負黍를 점령하니【徐廣이 말하기를 “陽城에 負黍聚가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陽城은 洛州縣이고 負黍亭은 陽城 서남쪽 35리 지점에 있으니, 옛날 周나라 읍이다. ≪春秋左傳≫에 ‘鄭나라가 周나라 負黍를 쳤다.’는 것이 이곳이다.” 하였다. 戰國時代에 韓나라에 속하였다. 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取는 ≪春秋集傳纂例≫에 이르기를 ‘邑을 점령할 적에 군대를 사용하지 않고 취하는 것을 取라고 한다.’ 하였다. ≪春秋左傳≫ 昭公 4年에 ‘鄫을 取하였으니, 쉬움을 말한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首級을 벤 것이 4만이었고, 趙나라를 정벌하여 20여 縣을 점령하니 首級을 벤 것이 9만이었다. 赧王이 두려워하여 秦나라를 배반하고 諸侯들과 合從을 약속하여 秦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秦나라가 장군 樛를【樛는 장군의 이름이니, 姓은 史策에 전해지지 않는다. ≪漢書≫ 〈百官表〉에 이르기를 “前後左右의 將軍은 모두 周나라의 말단 관직이니, 秦나라가 이것을 따랐다. 지위는 上卿이고, 漢나라 때에는 항상 설치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시켜 西周를 공격하니, 赧王이 秦나라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頓首는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아 오랫동안 엎드려 있다가 비로소 일어나는 것을 稽首라 이르니 稽는 지체한다는 뜻이다. 절하여 이마가 손에 닿으면 즉시 일어나는 것을 頓首라 이르고, 절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고 즉시 일어나는 것을 控首라 이른다.】 죄를 받고 고을 36개와 戶口 3만을 모두 바쳤다. 秦나라가 그 바치는 것을 받고 赧王을 周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이 해에 赧王이 崩하였다.

○ 先是에 東, 西周分治【雙湖胡氏曰 赧王微弱하야 東西周分王正理하야 各居一都라 故曰東西周라 高誘曰 西周王城은 今河南이요 東周鞏은 今成周洛陽也라 】러니 赧王이 徙都西周【自洛陽徙河南이라 】하니 〈出史記〉 蓋以微弱하야 不能主盟이라 會武公【武公은 西周君也라 】焉하니라

이보다 앞서 周나라가 東周와 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졌는데【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赧王이 미약하여 周나라가 東周와 西周로 나뉘어 다스려져서 각각 한 도읍에 거하였기 때문에 東西周라 한 것이다. 高誘가 말하기를 ‘西周의 王城은 지금의 河南이고, 東周의 鞏은 지금의 成周 洛陽이다.’ 하였다.”】赧王이 도읍을 西周로 옮기니,【赧王이 도읍을 洛陽으로부터 河南으로 옮긴 것이다.】 - 《史記》에 나옴 - 이는 미약하여 盟約을 주관할 수 없어서였다. 武公에게 의지하였다.【武公은 西周의 임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