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四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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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昭烈皇帝

昭烈皇帝요 字玄德이니 涿郡人이라 漢景帝中山靖王劉勝之後라 在位三年이요 壽六十三이라

昭烈【聖聞周達曰昭요 執德進業曰烈이라】皇帝※ 名요 字玄德이니 涿郡人이라 漢景帝中山靖王劉勝之後라 在位三年이요 壽六十三이라

※ 嘗奉密詔하야 討曹操不克하고 後曹丕簒漢에 遂正位于蜀하니라

[新增]尹氏曰 三代而下로 惟漢이 得天下爲正이라 誅無道하고 討逆賊하야 傳祚踰四百年하니 尺地一民이 莫非漢有라 至不君하고 董卓煽禍하야 英雄群起而攻之하니 旣誅戮이면 則天下는 固漢之天下어늘 曹操乘時擅命하야 脅制天子하고 戕殺國母하니 義士爲之歎憤이라 苟有一夫倡義於天下에 皆君子之所予【予는 與與通이라】하니 況於堂堂帝室之冑로 英名蓋世者乎아 旣簒立에 漢祀無主라 昭烈이 正位蜀漢하야 親承大統하니 名正言順하야 本無可疑라 自陳壽志三國【陳壽는 晉人이라】으로 全以天子之制予魏하고 而以列國待漢이라 故로 通鑑因之하야 以魏紀年이러니 至綱目하야 始以昭烈로 承獻帝之後하야 紹漢遺統하야 取春秋之義하야 以示天下하니 萬世之正論也라 愚承師命【番陽松塢王先生이니 名逢이라】하야 一遵朱子例而正之于左하노라

昭烈【聖明하다는 명성이 두루 알려짐을 昭라 하고, 德을 잡아 功業에 나아감을 烈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字가 玄德이니, 涿郡 사람이다. 漢나라 景帝의 손자인 中山靖王劉勝의 후손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63세이다.

※ 일찍이 密詔를 받들어 曹操를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뒤에 曹丕가 漢나라를 찬탈하자 마침내 蜀에서 천자의 지위에 올랐다.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三代 이후로 오직 漢나라만이 천하를 올바르게 얻었다. 무도한 秦나라를 멸망시키고 역적인 項羽를 토벌하여 帝位를 전한 것이 400년을 넘었으니, 한 자의 땅과 한 명의 백성도 漢나라의 소유가 아님이 없었다. 桓帝靈帝에 이르러 군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董卓이 禍를 일으키자 영웅들이 떼지어 일어나 공격하였으니, 董卓이 이미 誅戮당했으면 天下는 진실로 漢나라의 天下인 것이다. 그런데 曹操가 때를 타고 명령을 독단해서 天子를 위협하고 제재하며 國母를 시해하니, 義士들이 이 때문에 탄식하고 격분하였다. 만약 한 명의 지아비라도 천하에 倡義하는 자가 있었다면 모두 君子가 허여【予는 與(許與)와 통한다.】하였을 것이니, 하물며 당당한 皇室의 後裔로서 뛰어난 명성이 세상을 뒤덮을 만한 자(劉備)에 있어서이겠는가.

曹丕가 이미 찬탈하여 즉위한 뒤에 漢나라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昭烈이 蜀漢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친히 大統을 이으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본래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陳壽의 《三國志》【陳壽는 晉나라 사람이다.】로부터 완전히 天子의 제도를 魏나라에게 주고 列國으로써 蜀漢을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에서 이를 인습하여 魏나라로 年度를 기록했는데,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서 비로소 昭烈獻帝의 뒤를 계승하여 漢나라의 남은 正統을 이어서 《春秋》의 義理를 취하여 천하에 보였으니, 이는 萬世의 올바른 의논이다. 나는 선생의 말씀【스승은 番陽의 松塢 王先生이니, 이름은 逢이다.】을 받들어 한결같이 朱子의 例를 따라 아래에 바로잡았다.”

[辛丑]章武元年

[辛丑]章武元年이라 〈魏黃初二年이라〉

蜀中이 傳言호되 漢帝已遇害라하니 於是에 漢中王이 發喪制服하고 諡曰孝愍【在國遭亂曰愍이라】皇帝라하고 夏四月에 漢中王이 卽帝位於武擔之南【武擔山은 在成都城北二百步라 [通鑑要解]此山在西北하니 蓋以乾位在西北이라 故로 就之以卽祚也하니라】하야 大赦改元하고 以諸葛亮爲丞相하고 許靖爲司徒하다

章武 元年(신축 221) - 魏나라 黃初 2년이다. -

蜀 지방의 전하는 말에 漢나라 獻帝가 이미 살해되었다 하니, 이에 漢中王이 喪을 발표하고 喪服을 입고 獻帝의 諡號를 孝愍【나라에서 난을 만난 것을 愍이라 한다.】皇帝라 하였다. 여름 4월에 漢中王이 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라【[釋義]武擔山은 成都의 성 북쪽으로 200보 지점에 있다. [通鑑要解]이 山은 서북쪽에 있으니, 乾位가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 山에 나아가 卽祚(卽位)한 것이다.】 사면령을 크게 내리고 연호를 고쳤으며, 諸葛亮을 丞相으로 삼고許靖을 司徒로 삼았다.

溫公曰 三代之前에 海內萬國有民人社稷者를 通謂之君이요 合萬國而君之하야 立法度, 班號令【班은 布也라】하야 而天下莫敢違者를 乃謂之王이요 王德旣衰에 彊大之國이 能帥諸侯하야 以尊天子者를 則謂之霸라 自漢儒로 推五德生勝【見周得火德注라】하야 以爲閏位【考索曰 秦本西戎이니 餘分閏位라 不足繼周라하야 班固削而不取焉하니 周以(水)[木]而漢以火 宜矣라하니라 不得正王之位하니 如歲月之餘分爲閏也라】하야 在木火之間이라하야 霸而不王이라 於是에 正閏之論이 興矣라 及漢室顚覆에 三國鼎峙【三國은 漢, 魏, 吳요 鼎峙는 言三國如鼎之立也라】하고 晉氏失馭에 五胡【謂漢劉元海는 匈奴也요 後趙石勒은 羯也요 前燕慕容廆는 鮮卑也요 前秦苻洪은 氐也요 後秦姚弋仲은 羌也라】雲擾하며 宋, 魏以降으로 南北【南은 謂宋, 齊, 梁, 陳이요 北은 謂後魏, 北齊, 後周也라】分治하야 各有國史하야 互相排黜【謂彼此貶斥也라 南謂北爲索虜하고 北謂南爲島夷라】이라 朱氏代唐【後梁朱晃受唐禪하니라】에 四方幅裂하고 朱邪入汴【後唐莊宗李存勖은 本姓朱邪氏니 入汴滅後梁이라 按朱邪는 處月之別種이니 西突厥苗裔라 本號朱邪니 世居金婆山之陽蒲類海東이라 其地有大磧하야 名沙陀하니 後因以沙陀爲號하고 以朱邪爲姓이라 唐憲宗時에 有朱邪盡忠이 始見於中國이러니 懿宗時에 賜姓李하고 名國昌하니 克用은 其子也라】에 比之, 新【窮은 謂后羿也니 簒國하야 自號有窮하고 新은 謂王莽이니 簒位하야 國號新室이라】하야 運歷年紀를 皆棄而不數하니 此皆偏辭요 非公論也라 故로 今此書에 獨以周, 秦, 漢, 晉, 隋, 唐으로 爲正統하야 其後子孫이 雖微弱播遷【播散也라】이나 猶承祖宗之業하니 四方與之爭衡者는 皆其故臣也라 故로 全用天子之制以臨之하고 至於天下離析하야 本非君臣者는 皆以列國之制處之라 然이나 不可無歲時月日以識事之先後라 漢傳於魏而晉受之하고 晉傳於宋이러니 以至於陳而隋取之하고 唐傳於梁하야 以至於周而大宋承之라 故로 不得不取其年號하야 以紀其國之事요 非尊此而卑彼하야 有正閏之辨也라 昭烈之於漢에 雖云中山靖王之後라하나 而族屬疎遠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하니 亦猶南唐烈祖稱吳王恪【吳字는 恐誤하니 唐書에 吳王恪은 是太宗子也요 而建王恪이 乃憲宗子也라】하야 是非難辨이라 故不敢以光武及晉【東晉이라】元帝爲比하야 使得紹漢氏之遺統也로라

胡氏管見曰 司馬氏昭烈이 於中山靖王에 族屬疎遠하야 不能紀其世數名位하야 是非難辨이라하야 遂抑之하야 不使得紹漢統하니 則未知其去取之意也라 自司馬氏로 至三國은 七百餘年이니 固不詳昭烈之世數어니와 而諸葛公은 去中山靖王이 才(纔)三百餘年이라 草廬傾蓋之時에 卽稱昭烈爲帝室之冑하니 豈憑虛無據而云爾耶아 若秦始皇은 明爲呂不韋之子요 琅邪王睿는 顯著小吏牛金所生이로되 司馬氏尙係諸秦晉하야 不革而正之라 乃推獎荀彧하고 寬宥曹操하야 至謂取天下於群盜요 非取之於漢室이라하고 而抑退漢之昭烈하야 不少假借하고 於孔明北伐에 以入寇書之하니 亦獨何哉아

[新增]尹氏曰 按陳壽志하면 昭烈은 涿縣人이요 中山靖王之後라 이 元狩六年에 封涿縣陸城亭侯러니 坐酎金【見九卷이라】失侯하야 因家焉하다 祖는 이요 父는 이니 生昭烈이라하야 其世次本末甚明이라 又按歐陽脩五代史하면 載南唐世家하니 李昪은 徐州人이라 世本微賤하고 父이 遇唐末之亂하야 不知所終이라 昪少孤어늘 楊行密이 養以爲子하고 又乞與徐溫하야 因冒姓徐라가 至簒吳之後하야 始復姓李하고 自言唐憲宗建王之後라 及考通鑑하면 則曰唐主欲祖吳王恪이러니 或曰誅死하니 不若祖鄭王元懿【元懿는 唐太宗弟라】라한대 唐主命有司하야 考二王苗裔하니 以吳王孫有功하고 이 爲宰相이라하야 遂祖吳王하야 〈云〉自五世至父이라하니 其名이 率皆有司所撰이라 此與昭烈로 大相遼絶이라 況諸葛이 一見昭烈에 首稱將軍帝室之冑하고 及後求救孫權에도 亦以豫州王室之冑로 對稱之하니 은 固非妄言者也라 是以로 張松之說劉璋에도 且謂豫州使君之宗室이요 而異時苻堅苻融諫伐晉之語에도 亦曰劉禪【昭烈帝子라】은 可非漢之遺祚【祚는 福也라 與胙通하니 福之하야 使社稷之長曰胙라】리오 然이나 亦爲中國所幷이라하니 然則昭烈之爲漢裔가 顯顯無疑하니 以之紹統이 夫復何說이리오 是年에 曹丕旣立일새 昭烈이 卽正位號하야 不使漢統墜地하니 深合事宜라 其與光武卽位于鄗하고 晉元卽位江左로 先後一轍이니 固非其他僭竊急於自帝者之比라 斯事는 在綱目中에 最其大者라 予故로 歷考巓末하야 詳而辨之하야 以告後之君子하고 亦使朱子秉筆之志로 暴白於天下耳라 愚故로 備錄尹氏發明綱目之義于此하야 以祛【却也라】學者之惑云이라

溫公이 말하였다.

“三代 이전에 온 천하 모든 나라의 人民과 社稷을 보유한 자를 통틀어 君이라 일렀고, 모든 나라를 합하여 통치해서 法度를 세우고 號令을 반포【班은 頒布함이다.】하여 天下가 감히 어기지 못하는 자라야 비로소 王이라 일렀고, 王의 德이 이미 쇠한 뒤에 强大國이 諸侯들을 거느리고서 天子를 높이는 것을 霸者라 일렀다.

漢나라의 儒者로부터 五行의 德이 相生하고 相剋하는 이치【五德生勝에 대한 설명은 周得火德의 注에 보인다.】를 미루어 秦나라를 閏位로 삼아【≪考索≫에 이르기를 “秦나라는 본래 西戎이니 여분의 閏位여서 周나라를 계승할 수 없다 하여 班固가 삭제하고 취하지 않았으니, 周나라는 木德을 하고 漢나라는 火德을 함이 당연하다.” 하였다. 정식으로 왕의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세월의 餘分이 윤달이 되는 것과 같다.】 木德과 火德의 사이에 있다 하여 秦나라를 霸者로 여기고 王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正位와 閏位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漢나라 皇室이 전복되자 三國이 솥발처럼 대치하고,【三國은 蜀漢‧魏‧吳이고, 鼎峙는 세 나라가 솥발이 서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晉나라가 통치권을 상실하자 五胡【五胡란 漢의 劉元海(劉淵)는 匈奴族이고, 後趙의 石勒은 羯族이고, 前燕의 慕容廆는 鮮卑族이고, 前秦의 苻洪은 氐族이고, 後秦의 姚弋仲은 羌族이다.】가 구름처럼 일어나 시끄러웠으며, 宋‧魏 이후로는 南北【南朝는 宋‧齊‧梁‧陳을 이르고, 北朝는 後魏‧北齊‧後周를 이른다.】이 나뉘어 다스려져 각각 國史가 있어서 서로 배척하였다.【互相排黜은 피차간에 폄하하고 배척함을 이른다. 南朝에서는 北朝를 일러 索虜라 하고, 北朝에서는 南朝를 일러 島夷라 하였다.】朱氏(朱全忠)가 唐나라를 대신하자【後梁의 朱晃(朱全忠)이 唐나라의 禪讓을 받았다.】 사방이 분열되었고, 朱邪氏(李存勖)가 汴京에 들어오자【後唐의 莊宗 李存勖은 본래 姓이 朱邪氏이니, 汴京에 들어와 後梁을 멸망시켰다. 살펴보건대 朱邪는 處月의 別種이니 西突厥族의 후예이다. 본래 칭호가 朱邪이니, 대대로 金婆山의 陽蒲 類海 동쪽에 거주하였다. 이 지역에는 큰 사막이 있어 이름을 沙陀라 하였는데, 뒤에 인하여 沙陀를 칭호로 삼고 朱邪를 姓으로 삼았다. 唐나라 憲宗 때에 朱邪盡忠이 처음 중국에 출현하는데, 懿宗 때에 國姓인 李氏姓과 國昌이란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李克用은 그의 아들이다.】 옛날 夏나라를 찬탈한 有窮氏와 漢나라를 찬탈한 王莽의 新나라에【[釋義]窮 新:窮은 后羿를 이르니 夏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有窮이라 이름하였고, 新나라는 王莽을 이르니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여 국호를 新室이라 하였다.】 비유하여 曆法과 紀年을 모두 버리고 세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편벽된 말이요 공정한 의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책에서는 오직 周나라‧秦나라‧漢나라‧晉나라‧隋나라‧唐나라만을 정통으로 삼아서 그 뒤의 자손들이 비록 미약하고 流離【播遷은 흩어짐이다.】하였으나 오히려 祖宗의 基業을 잇게 하였으니, 사방에서 이들과 더불어 優劣을 다투는 자들이 모두 옛 신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天子의 제도를 써서 그들에게 임하였고, 천하가 분열되어서 본래 君臣 관계가 아닌 자에 있어서는 모두 列國의 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歲時(年과 春‧夏‧秋‧冬의 四時)와 月日로써 일의 先後를 표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漢나라가 魏나라에 전하여 晉나라가 받았고, 晉나라가 宋(南朝)나라에 전하였는데 陳나라에 이르러 隋나라가 취하였으며, 唐나라가 梁나라에 전하여 周나라에 이르러서 大宋이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그 年號를 취하여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요, 이것을 높이고 저것을 낮추어서 正位와 閏位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昭烈이 漢나라에 있어서는 비록 中山靖王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나 族屬이 소원하여 그 代數와 名稱과 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으니, 또한 南唐의 烈祖李昪吳王李恪의 후손이라고 自稱한 것【吳字는 誤字인 듯하니, ≪唐書≫에 吳王 恪은 太宗의 아들이요, 建王 恪이 바로 憲宗의 아들이다.】과 같아서 是非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감히 東漢의 光武帝가 西漢을 계승한 것과 東晉【晉은 東晉이다.】元帝가 西晉을 계승한 것에 비유하여 漢나라의 傳統을 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司馬溫公昭烈帝中山靖王에 있어서 族屬이 소원하여 그 代數와 名稱과 地位를 기록할 수가 없어 是非를 분별하기 어렵다고 해서 마침내 억제하여 漢나라의 大統을 이을 수 없게 하였으니, 그 去取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司馬溫公으로부터 三國까지는 700여 년이니 진실로 昭烈의 代數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諸葛亮中山靖王과의 간격은 겨우 300여 년이다. 諸葛亮이 草廬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 곧바로 昭烈을 칭하여 황실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믿고 근거 없이 이렇게 말하였겠는가.

秦始皇으로 말하면 분명히 呂不韋의 자식이고 琅邪王司馬睿는 小吏인 牛金의 소생임이 명백한데도 司馬溫公은 오히려 秦나라와 晉나라의 뒤를 잇게 하고 고쳐서 바로잡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荀彧을 추대하고 장려하며 曹操를 너그럽게 용서해서, 심지어는 曹操가 천하를 여러 도둑에게서 취하였고 漢나라 황실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하였으며, 漢나라 昭烈帝를 억누르고 물리쳐서 조금도 봐주지 않고 諸葛孔明이 북쪽으로 魏나라를 정벌한 곳에는 ‘入寇’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유독 무슨 이유에서인가?”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陳壽의 《三國志》를 살펴보면 ‘昭烈은 涿縣 사람이고 中山靖王劉勝의 후손이다. 劉勝의 아들劉正이 元狩 6年에 涿縣의 陸城亭侯에 봉해졌는데, 酎金【酎金에 대한 내용은 本書 9권의 武帝 元光 6年條(B.C.129)에 보인다.】에 걸려 侯의 지위를 잃고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조부는 이고 부친은 이니 昭烈을 낳았다.’ 하여 그 世次와 本末이 매우 분명하다.

歐陽脩의 《五代史》를 살펴보면 〈南唐世家〉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李昪은 徐州 사람이다. 대대로 본래 미천하였고 아버지 李榮은 唐나라 말기의 난리를 만나서 어느 곳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李昪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는데 楊行密이 길러 자식으로 삼았고, 또 徐溫에게 주어서 인하여 徐氏 姓을 따르다가 吳 땅을 찬탈한 뒤에 비로소 李氏 姓을 회복하고는 스스로 唐나라 憲宗의 아들인 建王의 후손이라 했다.’ 하였다.

또 《資治通鑑》을 살펴보면 ‘唐主(南唐의 군주 李昪)가 吳王을 先祖로 삼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吳王 은 죄를 짓고 죽었으니, 鄭王元懿【元懿는 唐나라 太宗의 아우이다.】를 先祖로 삼는 것만 못하다.」하자, 唐主가 有司에게 명령하여 두 王의 후손들을 상고하게 하였는 바, 吳王孫子禕가 功이 있고 禕의 아들 峴이 재상이 되었다 하여 마침내 吳王을 선조로 삼아 峴으로부터 5대를 지나 아버지 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그 이름이 모두 有司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하였다.

이는 昭烈帝와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구나 諸葛亮이 한 번 昭烈帝를 보자 맨 먼저 ‘장군은 皇室의 後孫’이라고 칭하였고, 뒤에 孫權에게 구원을 청할 때에도 孫權을 대하여 ‘劉豫州는 王室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으니, 諸葛亮은 진실로 함부로 말하는 자가 아니다. 이 때문에 張松劉璋을 설득할 때에도 ‘劉豫州는 使君의 宗室’이라고 말하였고, 다른 날에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諫하는 苻融에게 대답한 말에 또한 이르기를 ‘劉禪【劉禪은 昭烈帝(劉備)의 아들이다.】은 漢나라의 遺祚(後嗣)【祚는 복이다. 胙와 통하니, 복을 주어 社稷을 장구하게 하는 것을 胙라 한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中國에게 겸병당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昭烈이 漢나라 황실의 후손이 됨은 명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는 바, 이로써 大統을 이음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해에 曹丕가 즉위하자 昭烈이 곧바로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아서 漢나라의 국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사리의 마땅함에 깊이 부합한다. 光武帝가 鄗에서 즉위하고 晉나라 元帝가 江左에서 즉위한 것과 전후로 자취가 똑같으니, 진실로 기타의 참람하게 도둑질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함을 급하게 여긴 자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일은 《資治通鑑綱目》 가운데 가장 중대한 일이다. 나는 그러므로 顚末을 낱낱이 상고하고 자세히 분별하여 후세의 君子에게 고하고, 또한 朱子가 붓을 잡아 기록한 뜻을 온 천하에 밝게 드러내는 바이다.”

나(劉剡)는 이 때문에 尹氏가 《資治通鑑綱目》의 뜻을 發明한 것을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여 배우는 자의 의혹을 제거【祛는 물리침이다.】하는 바이다.”

立宗廟하고 祫祭【祫은 胡夾切이니 大合祭라 三年一祫, 五年一禘하고 禘以夏四月, 祫以冬十月이라 禘之爲言은 諦也니 諦審昭穆尊卑之義요 祫者는 合也니 冬十月에 五穀成이라 故로 骨肉合飮食於太祖하니라】高皇帝以下하다

宗廟를 세우고 高皇帝 이하에게 祫祭祀【祫은 음이 胡夾切(협)이니, 크게 合祀하는 것이다. 3년에 한 번 祫제사를 지내고 5년에 한 번 禘제사를 지내며, 禘제사는 여름 4월에 지내고 祫제사는 겨울 10월에 지낸다. 禘라는 말은 살핀다는 뜻이니 昭穆의 尊卑를 살핀다는 뜻이요, 祫은 합한다는 뜻이니 겨울 10월에는 五穀이 성숙하였기 때문에 親族들이 太祖의 사당에 모여 먹고 마시는 것이다.】를 지냈다.

○ 五月에 立夫人吳氏【將軍之妹요 劉璋兄之之妻라】하야 爲皇后하고 子【甘皇后子也라】爲皇太子하다

○ 5월에 부인 吳氏【吳氏는 將軍 吳懿의 누이이고, 劉璋의 형인 劉瑁의 妻이다.】를 세워 황후로 삼고, 아들 禪【劉禪은 甘皇后가 낳은 아들이다.】을 황태자로 삼았다.

○ 帝恥關羽之沒하야 將擊孫權할새 群臣諫者甚衆호되 帝皆不聽하다 車騎將軍張飛는 雄壯威猛이 亞於關羽는 善待卒伍而驕於士大夫하고 는 愛禮君子而不恤軍人하니 帝常戒曰 卿이 刑殺旣過差하고 又日鞭撾健兒而令在左右하니 此는 取禍之道也라호되 猶不悛이러라 帝將伐孫權할새 當率兵萬人하고 自閬州로 會江州【括地志에 江州는 在巴子都之北하니 又峽州界라】러니 臨發에 其帳下張達, 范彊이 殺하고 以其首로 順流奔孫權이라 帝聞營都督有表하고 曰 噫라 死矣【噫는 恨聲이라 飛當自表어늘 而都督越次上之라 故로 知其必死也라】라하니라

陳壽評關羽張飛는 皆稱萬人之敵하니 爲世虎臣이라 報效曹公하고 義釋嚴顔【飛與諸葛亮으로 攻劉璋하야 破嚴顔生獲이라 飛呵顔曰 大軍至어늘 何以不降고 顔曰 卿等無狀하야 侵奪我州하니 我州는 但有斷頭將軍이요 無降將軍이니라 飛怒하야 令左右斫頭한대 顔色不變曰 斫頭면 便斫頭니 何爲怒耶아하니 飛壯而釋之하고 引爲賓客하니라】하야 竝有國士之風이라 然이나 剛而自矜하고 暴而無恩하야 以短取敗하니 理數之常也니라

昭烈帝關羽가 전사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장차 孫權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群臣들 중에 간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昭烈帝는 모두 듣지 않았다. 車騎將軍張飛는 雄壯함과 위엄과 용맹이 關羽의 다음이었다. 關羽는 士卒들을 잘 대우하였으나 士大夫에게는 교만하였고, 張飛는 君子를 사랑하고 예우하였으나 士卒들을 돌보지 않으니, 昭烈帝가 항상 張飛에게 훈계하기를 “卿은 형벌하여 죽임이 지나치고 또 날마다 건장한 군사들을 매질하고는 그들을 좌우의 측근에 있게 하니, 이는 禍를 취하는 길이다.” 하였으나 張飛는 오히려 고치지 않았다.

昭烈帝가 장차 孫權을 정벌하려 할 적에 張飛가 병졸 만 명을 인솔하고 閬州로부터 江州【≪括地志≫에 “江州는 巴子都의 북쪽에 있으니, 또 峽州의 경계이다.” 하였다.】에 이르러 모이기로 하였는데, 출발할 때에 임하여 張飛 幕下에 있던 張達范彊張飛를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가지고 물길을 따라 孫權에게 달려가 투항하였다. 昭烈帝張飛 군영의 都督이 表文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는 이르기를 “아! 張飛가 죽었구나.”【噫는 한탄하는 소리이다. 張飛가 직접 表文을 올려야 하는데, 都督이 서열을 건너뛰어 表文을 올렸으므로 劉備는 張飛가 반드시 죽었음을 안 것이다.】 하였다.

陳壽의 《三國志 蜀志》〈關張馬黃趙傳〉 評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關羽張飛는 모두 萬人을 대적할 수 있다고 일컬어졌으니, 세상의 용맹한 신하였다. 關羽曹公(曹操)에게 보답하였고 張飛는 의롭게 嚴顔【張飛는 諸葛亮과 함께 劉璋을 공격하여 嚴顔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張飛가 嚴顔을 꾸짖기를 “大軍이 왔는데 어찌 항복하지 않는가?” 하니, 嚴顔이 말하기를 “卿들이 無狀(형편없는)한 짓을 하여 우리 州를 침탈하였으니, 우리 州는 다만 斷頭將軍(머리가 잘려 죽임을 당한 장군)만이 있을 뿐이요 항복하는 장군은 없다.” 하였다. 張飛가 노하여 좌우 사람들로 하여금 작두로 머리를 베게 하자, 嚴顔은 낯빛을 바꾸지 않으며 말하기를 “머리를 자르려면 곧바로 머리를 자르면 되었지 어찌 노여워하는가?” 하였다. 張飛는 그를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는 인도하여 빈객으로 삼았다.】을 풀어 주어 모두 國士의 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關羽는 剛愎하고 스스로 과시하였고 張飛는 포악하고 은혜가 없어서 이러한 단점 때문에 실패를 취하였으니, 이는 이치와 운수에 당연한 것이다.”

七月에 帝自率諸軍하고 擊孫權하니 이 以鎭西將軍陸遜으로 爲大都督하야 以拒之하다

7월에 황제가 직접 諸軍을 거느리고 孫權을 공격하니, 孫權이 鎭西將軍陸遜을 大都督으로 삼아 막게 하였다.

○ 八月에 吳孫權이 遣使稱臣하고 卑辭奉章하야 幷送于禁等還【己亥年에 使曹仁關羽할새 遣禁助仁이러니 禁降孫權하야 禁在吳러니 稱藩魏하고 遣禁還이라】하니 朝臣이 皆賀호되 劉曄이 獨曰 이 無故來降하니 必內有急이라 이 前襲殺關羽하니 劉備必大興師伐之라 外有彊寇하야 衆心이 不安하고 又恐中國이 往乘其釁이라 故로 委地求降하야 一以却中國之兵하고 二以假中國之援하야 以彊其衆而疑敵人耳라 天下三分에 中國이 十有其八하고 吳, 蜀은 各保一州【謂吳保揚, 蜀保益也라】하야 阻山依水【阻는 恃也니 恃險自固라】하니 有急相救면 此는 小國之利也어늘 今還自相攻하니 天亡之也라 宜大興師하야 徑渡江襲之하야 蜀攻其外하고 我襲其內면 吳之亡이 不出旬月矣리이다 吳亡則蜀孤하리니 若割吳之半하야 以與蜀이라도 蜀固不能久存이온 況蜀得其外하고 我得其內乎잇가

○ 8월에 吳나라 孫權이 魏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라 칭하고 言辭를 낮추어 奏章을 올리면서 于禁 등을 함께 보내어 魏나라로 돌려보내었다.【기해년(建安 24년)에 曹操가 曹仁으로 하여금 關羽를 토벌하게 하면서 于禁을 보내어 曹仁을 돕게 하였는데, 于禁이 關羽에게 패하여 항복하였다. 孫權이 關羽를 사로잡아 于禁이 吳나라에 있었는데, 孫權이 魏나라에 藩臣을 칭하고 于禁을 魏나라로 돌려보내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劉曄만은 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權이 까닭 없이 와서 항복하니, 반드시 국내에 위급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孫權이 지난번에 關羽를 기습하여 죽였으니, 劉備가 반드시 크게 군대를 일으켜 정벌할 것입니다. 孫權은 밖에 강한 적이 있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또 中國(우리나라)이 가서 그 틈을 타 공격할까 두렵기 때문에 땅을 바치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한편으로는 中國의 군대를 물리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中國의 원조를 빌어서 그들의 무리를 강하게 하여 적들을 의심하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천하가 셋으로 나누어짐에 中國이 열에 여덟을 소유하고 吳와 蜀은 각각 한 州를 보전하여【각각 한 州를 보전하였다는 것은 吳나라는 揚州를 보전하고, 蜀漢은 益州를 보전함을 이른다.】 山水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니,【阻는 믿음이니, 험고한 지형을 믿고 스스로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구원한다면 이는 약소국에게 유리할 터인데, 이제 도리어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니 하늘이 이들을 멸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揚子江을 건너가 기습하여 蜀은 그 밖을 공격하고 우리는 그 안을 기습한다면 吳나라의 멸망은 열흘 내지 한 달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吳나라가 망하면 蜀이 고립될 것이니, 만약 吳나라의 절반을 떼어 蜀에 준다 하더라도 蜀은 본래 오래 보존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蜀은 그 밖(吳나라의 변두리 지역)을 얻고 우리는 그 안(吳나라의 수도)을 얻음에 있어서겠습니까.”

魏主曰 人이 稱臣降이어늘 而伐之면 疑天下欲來者心이니 不若且受吳降而襲蜀之後也라하고 遂受吳降하고 遣太常邢貞하야 奉策【策은 與冊通하니 符命也라】하야 卽【就也니 就其所居而拜之也라】孫權吳王하고 加九錫하다 邢貞이 至吳에 吳王이 出都亭候이러라 이 入門에 不下車한대 張昭曰 夫禮無不敬이요 法無不行이어늘 而君이 敢自尊大하니 豈以江南寡弱하야 無方寸之刃乎아 卽下車하다 中郞將徐盛이 忿憤하야 顧謂同列曰 等이 不能爲國家하야 幷許洛, 呑巴蜀하고 而令吾君으로 與盟하니 不亦辱乎아하고 因涕泣橫流하니 이 聞之하고 謂其徒曰 江東將相이 如此하니 非久下人者也로다 〈孫權傳註〉

魏主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신하라고 칭하고 항복하는데 그를 정벌한다면 천하에 歸附하려는 자들의 마음을 의심하게 할 것이니, 우선 吳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蜀의 후미를 습격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吳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太常邢貞을 보내어 策命【策은 冊과 통하니, 符命(황제의 명령)이다.】을 받들고 가서【卽은 나아감이니, 그 처소에 나아가 임명하는 것이다.】孫權을 임명하여 吳王으로 삼고九錫을 加賜하였다.

邢貞이 吳나라에 이르자, 吳王이 都亭으로 나와 邢貞을 맞이하였다. 邢貞이 문에 들어가 수레에서 내리지 않자, 張昭邢貞에게 이르기를 “禮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法은 행하지 않음이 없는데, 君이 감히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하니, 어찌 우리 江南이 적고 약하여 한 치의 칼날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邢貞이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中郞將徐盛은 분하고 원통하여 同列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들이 나라를 위하여 許都와 洛陽을 겸병하고 巴와 蜀을 병탄하지 못하여 우리 군주로 하여금 邢貞과 맹세하게 하니, 치욕스럽지 않은가.” 하고는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니, 邢貞이 이 말을 듣고 그의 무리에게 이르기를 “江東의 장수와 정승이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하였다. - 《三國志 吳志 徐盛傳》 에 나옴 -

吳主遣中大夫趙咨入謝하니 魏主問咨曰 吳王은 何等主也오 對曰 聰明仁智雄略之主也니이다 魏主問其狀한대 對曰 納魯肅於凡品하니 是其聰也요 拔呂蒙於行陳하니 是其明也요 獲于禁而不害하니 是其仁也요 取荊州에 兵不血刃하니 是其智也요 據三州【荊, 揚, 交也라】하야 虎視於天下하니 是其雄也요 屈身於陛下하니 是其略也니이다 吳王頗知學乎아 咨曰 吳王은 浮江萬艘요 帶甲百萬이요 任賢使能하고 志存經略하야 雖有餘閑하야 博覽書傳하고 歷史籍하야 采奇異나 不效書生尋章擿(摘)句而已【魏主好文章이라 故로 咨以此譏之라】니이다 曰 吳可征不(否)아 對曰 大國은 有征伐之兵하고 小國은 有備禦之固【此二語는 本之管子하니라】니이다 曰 吳難魏乎아 對曰 帶甲이 百萬이요 江漢爲池하니 何難之有리잇고 曰 吳如大夫者幾人고 對曰 聰明特達者 八九十人이요 如臣之比는 車載斗量이라 不可勝數니이다

吳主가 中大夫趙咨를 魏나라에 보내어 들어가 사례하게 하였다. 魏主曹丕趙咨에게 묻기를 “吳王은 어떤 군주인가?” 하니, 趙咨가 대답하기를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혜롭고 영웅스럽고 지략이 있는 군주입니다.” 하였다. 魏主가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趙咨가 대답하기를 “魯肅을 보통 사람 중에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귀가 밝음이요, 呂蒙을 行伍에서 발탁하였으니 이는 총명함이요, 于禁을 사로잡고도 살해하지 않았으니 이는 인자함이요, 荊州를 취할 적에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이는 지혜로움이요, 三州【三州는 荊州‧揚州‧交州이다.】를 점거하여 천하를 범처럼 노려보고 있으니 이는 영웅스러움이요, 폐하에게 몸을 굽히니 이는 지략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曹丕가 말하기를 “吳王이 자못 학문을 아는가?” 하니, 趙咨가 대답하기를 “吳王은 강에 떠 있는 배가 만 척이고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며,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력 있는 자를 부리며, 뜻이 사방을 經略함에 있어서 비록 여가에 서책을 널리 보고 史籍을 섭렵하여 기이한 精華를 채택하나 書生들이 章을 찾고 文句를 따다가 쓰는【魏主가 문장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趙咨가 이 말로써 기롱한 것이다.】 것은 본받지 않습니다.” 하였다.

曹丕가 말하기를 “吳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大國은 정벌하는 군대가 있고 小國은 수비하는 견고함이 있습니다.”【[通鑑要解]大國有征伐之兵 小國有備禦之固:이 두 마디 말은 ≪管子≫에서 근본한 것이다.】 하였다. 曹丕가 말하기를 “吳나라가 魏나라를 어렵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고 揚子江과 漢水를 참호로 삼으니, 어찌 어렵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曹丕가 말하기를 “吳나라에 大夫(趙咨)와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총명하여 특별히 통달한 자가 8, 90명이요, 신과 같은 무리는 수레로 싣고 말[斗]로 헤아릴 정도여서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壬寅]二年

[壬寅]二年이라 〈魏黃初三年이요 吳大帝黃武元年이라 舊國一이요 新國一이니 凡二僭國이라〉

五月에 帝自巫峽, 建平【巫峽은 在夔州巫山縣西하니 首尾百六十里라 圖經云 巫山十二峯上에 有神女廟, 陽雲臺하니 山은 在縣西北五十步라 建平은 縣名이라 屬南郡이러니 吳置建平郡於巫縣하니 今歸州是也라】으로 連營至夷陵界하야 立數十屯하고 自正月로 與吳相拒하야 至六月不決이라 帝遣吳班하야 將數千人하고 於平地에 立營하니 吳將卒이 皆欲擊之어늘 陸遜曰 此必有譎이니 且觀之하라 帝知其計不行하고 乃引伏兵八千하야 從谷中出한대 曰 所以不聽諸君擊之者는 揣之必有巧故也로라

章武 2년(임인 222) - 魏나라 黃初 3년이고, 吳나라 大帝黃武 元年이다. 오래된 나라가 하나이고 새로운 나라가 하나이니, 참람한 나라가 모두 둘이다.-

5월에 昭烈帝가 巫峽과 建平【巫峽은 夔州 巫山縣의 서쪽에 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160리이다. ≪圖經≫에 이르기를 “巫山 열두 봉우리 위에 神女의 사당과 陽雲臺가 있으니, 이 산은 縣의 서북쪽 50보 지점에 있다. 建平은 縣의 이름이다. 南郡에 속하였는데 吳나라가 建平郡을 巫縣에 두었으니, 지금의 歸州가 이곳이다.” 하였다.】으로부터 진영을 연결하여 夷陵의 경계에 이르러서 수십 개의 주둔지를 세우고 정월부터 吳나라와 서로 대치하여 6월에 이르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昭烈帝吳班을 보내어 수천 명을 거느리고 평지에 진영을 세우게 하니, 吳나라의 將卒들이 모두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陸遜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속임수가 있을 것이니 우선 두고 보자.” 하였다. 昭烈帝가 이 계책이 시행되지 못할 줄을 알고 마침내 伏兵 8천 명을 이끌고 골짜기 가운데에서 나오자, 陸遜이 말하기를 “내가 諸君들의 공격하자는 소청을 따르지 않은 까닭은 저들에게 반드시 計巧가 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하였다.

○ 閏月에 이 將進攻漢軍한대 諸將이 竝曰 攻는 當在初어늘 今乃令入五六百里하야 相守經七八月하야 其諸要害를 皆已固守하니 擊之면 必無利矣리이다 是猾虜라 更事嘗多하고 其軍始集에 思慮精專하야 未可干也어니와 今住已久에 不得我便하야 兵疲意沮하니 計不復生이라 掎角【左傳襄十四年에 譬如捕鹿하야 晉人角之하고 諸戎掎之라한대 註云 角은 謂禦其上이니 猶執鹿之角이요 掎는 謂亢其下니 猶戾鹿之足이라】此寇 正在今日이라하고 乃先攻一營이러니 不利라 諸將皆曰 空殺兵耳라한대 曰 吾已曉破之之術이라하고 乃勅人하야 各持一把【把는 掌握也라】茅하고 以火攻拔之하야 斬張南, 馮習等하고 破其四十餘營하니 漢將杜路, 劉寧等이 窮逼請降이라 帝升馬鞍山【馬鞍山은 在今峽州夷陵縣이라】하야 陳兵自繞어늘 이 督促諸軍하야 四面蹙之하니 土崩瓦解하야 死者萬數라 帝夜遁하야 僅得入白帝城하니 其舟船器械와 水步軍資를 一時略盡하고 尸骸塞江而下러라 帝大慙恚曰 吾乃爲陸遜所折辱하니 豈非天耶아

○ 윤달에 陸遜이 장차 진군하여 蜀漢의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劉備를 공격하려면 마땅히 초기에 했어야 하는데, 이제 저들로 하여금 국경을 5, 6백 리나 들어오게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 8개월이 지나서 여러 요해처를 모두 이미 굳게 지키고 있으니, 저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陸遜이 말하기를 “劉備는 교활한 놈이다. 일찍이 싸우는 일을 경험한 것이 많고, 그 군사들이 처음 집결함에 생각이 정밀하고 전일하여 범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주둔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우리에게서 유리한 곳을 얻지 못하여 병사들이 지치고 의욕이 저상되었으니, 계책을 다시 내지 못할 것이다. 이 적을 掎角(앞뒤에서 몰아침)【≪春秋左傳≫ 襄公 14년조에 “비유하면 사슴을 잡는 것과 같아서 晉나라 사람들은 뿔을 잡고 여러 戎族들은 발을 잡는다.” 하였는데, 註에 이르기를 “角은 그 위를 막음을 이르니 사슴의 뿔을 잡는 것과 같고, 掎는 그 아래를 옥죔을 이르니 사슴의 발을 비트는 것과 같다.” 하였다.】하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하고는 마침내 먼저 한 진영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질없이 병사만 죽일 뿐입니다.”라고 하자, 陸遜이 말하기를 “내 이미 격파할 방법을 깨달았다.” 하고는 마침내 사람들에게 명하여 각각 한 줌【把는 손아귀로 쥐는 것이다.】의 띠풀을 잡게 하고 火攻으로 함락시켜張南馮習 등을 목 베고 40여 개의 진영을 격파하니, 蜀漢의 장수 杜路劉寧 등이 궁색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昭烈帝가 馬鞍山【馬鞍山은 지금의 峽州 夷陵縣에 있다.】에 올라가서 군대를 진열하여 자기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는데, 陸遜이 諸軍들을 독촉하여 사면으로 압박하니, 蜀漢의 군대가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부서지듯 무너져서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昭烈帝가 밤중에 도망하여 겨우 白帝城으로 들어가니, 선박과 병장기와 水軍과 步兵의 군수물자를 삽시간에 모두 잃어버리고 시체가 강을 가득히 메우고 떠내려갔다. 昭烈帝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해 하며 말하기를 “내가 마침내 陸遜에게 꺾이고 모욕을 당하였으니, 일찍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初에 諸葛亮이 與尙書令法正으로 好尙不同이나 而以公義相取하야 이 每奇智術이러니 及帝伐吳而敗하얀 時에 正已卒이라 歎曰 孝直【法正字也라】이 若在면 必能制主上東行이요 就使東行이라도 必不傾危矣라하더라

○ 처음에 諸葛亮이 尙書令法正과는 좋아하고 숭상함이 똑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의리로 서로 취하여(존중하여) 諸葛亮이 언제나 法正의 지혜와 술책을 기이하게 여겼는데, 昭烈帝가 吳나라를 정벌하다가 실패함에 이르러서는 이때 法正이 이미 죽은 후였다. 諸葛亮이 한탄하기를 “孝直(法正)【孝直은 法正의 字이다.】이 만약 살아 있었더라면 主上이 동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반드시 제재했을 것이요, 가령 동쪽으로 출정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위태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初에 魏主 聞漢兵樹柵連營七百餘里하고 謂群臣曰 不曉兵이로다 豈有七百里營으로 可以拒敵者乎아 包原濕險阻而爲軍者는 爲敵所禽하나니 此는 兵忌也라 孫權上事 今至矣【謂封上破漢之事 今將到來也라】라하더니 後七日에 破漢書到러라

○ 처음에 魏主曹丕는 蜀漢의 군대가 700여 리에 木柵을 세워 진영을 연결했다는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劉備는 兵法을 알지 못하는구나. 어찌 700리의 진영을 가지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언덕과 습지와 험조한 지형을 포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히기 마련이니, 이는 兵家에서 꺼리는 것이다. 孫權이 勝戰을 보고하는 글이 이제 이를 것이다.【일을 보고하는 것이 이제 이를 것이라는 것은 孫權이 蜀漢을 격파한 일을 봉함하여 올리는 글이 이제 장차 도착할 것임을 이른다.】”라고 하였는데, 7일 후에 吳나라가 蜀漢을 격파했다는 글이 도착하였다.

吳王侍子【送子入侍하니 質子也라】 不至어늘 魏主怒하야 遂伐之하다

吳王의 侍子【侍子는 아들을 보내 入侍하게 하는 것이니, 質子(볼모)이다.】가 이르지 않자, 魏主曹丕가 노하여 마침내 吳나라를 정벌하였다.

吳王이 使使聘于帝어늘 帝遣使報之하니 吳, 漢이 復通하다

吳王이 使者를 보내어 昭烈帝에게 빙문하자 昭烈帝가 사자를 보내어 답하니, 吳나라와 蜀漢이 다시 교통하였다.

[癸卯]三年

[癸卯]三年【按綱目攷異曰 當依提要及紫陽書院本하야 大書三年하고 分註帝禪建興元年이니 今綱目은 蓋傳寫鈔錄之誤耳라】이라 〈帝禪建興元年이요 魏黃初四年이요 吳黃武二年이라〉

章武 3년(계묘 223)【살펴보건대 ≪通鑑綱目攷異≫에 이르기를 “마땅히 ≪綱目提要≫와 紫陽書院刊本 ≪綱目≫을 따라 三年이라고 크게 쓰고 帝禪 建興 元年이라고 分註해야 하는데, 지금 ≪資治通鑑綱目≫은 傳寫할 때에 기록을 잘못한 것이다.” 하였다.】 - 帝禪建興 元年, 魏나라 黃初 4년, 吳나라 黃武 2년이다. -

初에 魏主賈詡曰 吾欲伐不從命하야 以一天下하노니 吳, 蜀에 何先고 對曰 攻取者는 先兵權하고 建本者는 尙德化하나니 陛下應期受禪하사 撫臨率土하시니 若綏之以文德하야 而俟其變이면 則平之不難矣리이다 吳, 蜀이 雖蕞爾【蕞는 小貌라】小國이나 依山阻水하며 劉備는 有雄才하고 諸葛亮은 善治國하고 孫權은 識虛實하고 陸遜은 見兵勢하야 據險守要하고 汎舟江湖【守要는 謂蜀이요 江湖는 謂吳라】하니 皆難卒(猝)謀也니이다 用兵之道는 先勝後戰하고 量敵論將이라 故로 擧無遺策하나니 臣은 竊料群臣에 無, 【對는 當也니 言無劉備孫權之對也라】하니 雖以天威臨之나 未見萬全之勢也니이다 不納이러니 軍竟無功하니라

처음에 魏主曹丕賈詡에게 묻기를 “내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니, 吳와 蜀漢 중에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니, 賈詡가 대답하기를 “공격해서 취하는 자는 兵略과 권모술수를 먼저 하고 근본을 세우는 자는 德化를 숭상합니다. 폐하께서는 天時에 응하여 禪讓을 받아 온 천하에 君臨하시니, 만약 文德으로써 민심을 편안하게 하면서 적의 변란이 있기를 기다린다면 천하를 평정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吳와 蜀漢은 비록 매우 작은【蕞는 작은 모양이다.】 약소국이지만 산과 물의 험고함에 의지하여 지키고 있으며, 劉備는 뛰어난 재주가 있고 諸葛亮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孫權은 虛實을 알고 陸遜은 군대의 형세에 정통하여, 蜀漢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요해처를 지키며 吳나라는 江湖에 배를 띄우고 있으니,【[頭註]據險守要 汎舟江湖:요해처를 지킨다는 것은 蜀漢을 이르고, 江湖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吳나라를 이른다.】 모두 갑자기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用兵하는 방법은 먼저 승산을 따져 본 뒤에 싸우고, 적을 헤아리며 장수를 논합니다. 그러므로 거행함에 잘못된 계책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헤아려보건대 여러 신하 중에 劉備孫權의 적수가 없으니,【[頭註]無備 權對:對는 대적함이니, 劉備와 孫權의 상대가 없음을 말한다.】 비록 황제의 위엄으로 직접 정벌한다 하시더라도 萬全의 형세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曹丕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군대가 끝내 戰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 帝病篤하야 命丞相하야 輔太子하고 以尙書令李嚴爲副하다 帝謂曰 君才十倍曹丕하니 必能安國이요 終定大事하리니 若嗣子 可輔어든 輔之하고 如其不才어든 君可自取하라 涕泣曰 臣이 敢不竭股肱之力하야 效忠貞之節하고 繼之以死리잇고 帝又爲詔하야 勅太子曰 人五十이면 不稱夭【短折曰夭라】라하니 吾年이 已六十有餘라 何所復恨이리오마는 但以卿兄弟爲念耳니 勉之勉之하야 勿以惡小而爲之하고 勿以善小而不爲하라 惟賢惟德이라야 可以服人이니 汝父는 德薄이라 不足效也어니와 汝與丞相從事하야 事之如父하라하고 四月에 帝崩於永安【漢魚腹縣이니 屬巴郡이라 公孫述更名白帝城하고 有永安宮일새 昭烈이 改永安縣하니라】하니 諡曰 昭烈이라하다 丞相이 奉喪還成都하고 留李嚴하야 鎭永安하다

[史略 史評]愚按 昭烈이 以帝室之冑요 傑出之才로 起兵涿郡하야 志存匡復하야 受天子之密詔하고 討擅命之姦臣이라 旁求群賢하야 不辭三顧하니 伏龍이 以之而奮躍하고 鳳雛以之而飛翔하야 雖顚沛險難而信義愈明하고 勢迫事危而言不失道하야 追景升之顧則情動三軍하고 戀赴義之士則甘與同敗라 故로 能合吳軍而大破瞞於赤壁하고 仗義兵而薄伐劉璋於成都하며 用趙雲而取漢中하고 遣關羽而攻樊許하야 威震華夏하야 幾復舊都러니 惜乎라 因爭荊州而孫權離心하고 致吳違盟而關羽喪首하야 卒不能削平僭僞하고 混一中原하니 可勝歎哉아 然이나 能君臨蜀都하야 使赤帝子之祀로 不至墜絶이 又數十年이라 與光武卽位鄗南과 晉元卽位江左로 先後一轍하니 謂非中興賢君이 可乎아

昭烈帝가 병이 위독하자, 승상諸葛亮에게 명하여 太子를 보필하게 하고尙書令李嚴을 副로 삼았다. 昭烈帝諸葛亮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재주가 曹丕보다 열 배이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천하통일의 大業을 정할 것이다. 만일 嗣子(太子)가 보필할 만하거든 그를 보필하고, 만일 재주가 없거든 그대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취하라.” 하였다. 諸葛亮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감히 股肱의 힘을 다하여 忠貞의 절개를 바치고 죽음으로써 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昭烈帝가 또다시 조칙을 내려 太子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이 50에 죽으면 요절【短折(젊은 나이에 죽음)을 夭라 한다.】했다고 칭하지 않는데, 내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으니, 어찌 다시 한하는 바가 있겠는가. 다만 卿의 형제 때문에 염려할 뿐이니, 힘쓰고 힘써서 惡이 작다 하여 하지 말고 善이 작다 하여 하지 않지 말라.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만 남을 복종시킬 수 있으니, 너의 아비는 덕이 적어 본받을 것이 못 된다. 너는 승상과 함께 國政에 종사하여 승상을 섬기기를 이 아비와 같이 하라.” 하고, 4월에 昭烈帝가 永安【永安은 漢나라의 魚腹縣이니 巴郡에 속하였다. 公孫述이 이름을 白帝城이라 바꾸었으며, 永安宮이 있으므로 昭烈帝가 永安縣으로 이름을 고쳤다.】에서 별세하니, 시호를 昭烈이라 하였다.

승상諸葛亮이 喪을 받들어 成都로 돌아오고, 李嚴을 남겨 두어 永安을 진무하게 하였다.

[史略 史評]내 살펴보건대 昭烈은 황실의 후손이요 傑出한 재주로 涿郡에서 군대를 일으켜 뜻이 나라를 광복함에 있어서, 天子의 密詔를 받고 명령을 제멋대로 내리는 姦臣을 토벌하였다. 사방으로 여러 賢者들을 구하여 三顧草廬를 사양하지 않으니, 伏龍(諸葛亮)이 이 때문에 분발하여 뛰어나왔고 鳳雛(龐統)가 이 때문에 날아올라서, 비록 전복되고 험난하였으나 信義가 더욱 드러나고, 형세가 급박하고 사정이 위태로웠으나 말이 도리를 잃지 않아서, 景升(劉表)이 어린 자식을 돌보고 부탁한 것을 追念하여 眞情이 三軍을 감동시켰고, 義를 따르는 선비들을 생각하여 그들과 함께 패함을 달게 여겼다. 이 때문에 吳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曹瞞을 赤壁江에서 대파하고 義兵을 내세워 劉璋을 成都에서 잠깐 정벌하였으며, 趙雲을 등용하여 漢中을 점령하고 關羽를 보내어 樊城과 許都를 공격해서 위엄이 華夏에 진동하여 거의 옛 도읍을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荊州를 다툼으로 인하여 孫權이 반심을 품었고, 吳나라가 맹약을 어기도록 하여 關羽가 머리를 잃어서 끝내 참람하고 거짓된 曹丕를 평정하고 中原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니, 탄식함을 이루 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蜀都에 군림하여 赤帝子의 제사를 끊어짐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이 또한 수십 년이었다. 이는 光武帝가 鄗邑의 남쪽에서 즉위한 것과 晉나라 元帝가 江東에서 즉위한 것과 앞뒤로 똑같으니, 中興의 어진 군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五月에 太子이 卽位하니 時年이 十七이라 尊皇后曰 皇太后라하고 封丞相하야 爲武鄕侯하야 領益州牧하고 政事를 無巨細히 咸決於하니 이 乃約官職하고 修法制하다 이 嘗自校簿書러니 主簿顒이 直入諫曰 爲治有體하니 上下不可相侵이라 是故로 古人이 稱坐而論道는 謂之王公이요 作而行之는 謂之士大夫라 故로 丙吉이 不問橫道死人而憂牛喘하고 陳平이 不肯知錢穀之數하고 云自有主者라하니 彼誠達於位分之體也라 今明公爲治에 乃躬自校簿書하야 流汗終日하니 不亦勞乎아하니 이 謝之러니 及卒에 이 垂泣三日하니라

5월에 太子이 제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皇后를 높여 皇太后라 하고, 승상諸葛亮을 봉하여 武鄕侯로 삼아益州牧을 겸하게 하고, 정사를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諸葛亮에게서 결정하니, 諸葛亮이 마침내 관직을 단속하고 법제를 닦았다.

諸葛亮이 일찍이 직접 문서를 대조하였는데, 主簿楊顒이 곧바로 들어와 간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체통이 있으니, 上下가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옛사람이 ‘앉아서 道를 논하는 것을 王公이라 이르고 일어서서 시행하는 것을 士大夫라 이른다.’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丙吉이 죽은 사람이 길에 가로누워 있는 것은 묻지 않고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걱정하였으며, 陳平이 돈과 곡식의 숫자를 알려고 하지 않고 따로 주관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저들은 진실로 지위와 분수의 체통에 통달한 것입니다. 이제 明公께서 정치를 함에는 도리어 직접 문서를 따져서 종일토록 땀을 흘리고 있으니, 수고롭지 않습니까.” 하니, 諸葛亮이 사례하였다. 楊顒이 죽자, 諸葛亮은 사흘 동안 눈물을 흘렸다.

○ 八月에 遣尙書鄧芝하야 修好於吳하다 時에 吳王이 猶未與魏絶이라 不時見어늘 乃自表請見曰 臣이 今來는 亦欲爲吳요 非但爲蜀也니이다 吳王이 見之하고 曰 孤誠願與蜀和親이나 然恐蜀主幼弱하고 國小勢偪하야 爲魏所乘하야 不自保全耳로라 對曰 吳, 蜀二國은 四州【荊, 揚, 梁, 益이라】之地요 大王은 命世之英이요 諸葛亮은 亦一時之傑也라 蜀有重險之固【重險은 謂外有斜谷, 駱谷, 子午谷之險也요 內有劍閣之險也라】하고 吳有三江【松江, 錢塘江, 浦陽江이라】之阻하니 合此二長하야 共爲脣齒면 進可幷兼天下요 退可鼎足而立하리이다 大王이 今若委質於魏면 魏必上望大王之入朝하고 下求太子之內侍요 若不從命이면 則奉辭伐叛하고 蜀亦順流하야 見可而進하리니 如此면 江南之地는 非復大王之有也리이다 吳遂絶魏하고 專與漢連和하다

○ 8월에 尙書鄧芝를 보내어 吳나라에 修好(우호를 닦음)하였다. 이때 吳王이 아직도 魏나라와 단절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吳王이 제때에 鄧芝를 만나 주지 않자, 鄧芝가 마침내 스스로 表文을 올려 만나 볼 것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번에 온 것은 또한 吳나라를 위하고자 해서이고, 단지 蜀漢을 위해서일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吳王이 그를 만나 보고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蜀漢과 화친하고자 하나 蜀漢의 군주가 유약하며 나라가 작고 세력이 강하지 못해서, 魏나라에게 제압당하여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니, 鄧芝가 대답하기를 “吳와 蜀漢 두 나라는 네 州【四州는 荊州‧揚州‧梁州‧益州이다.】의 땅을 보유하고 大王은 재주가 세상에 뛰어난 영웅이요 諸葛亮 또한 한때의 영걸입니다. 蜀漢은 지형이 겹겹이 험한 견고함【重險은 밖으로는 斜谷‧駱谷‧子午谷의 험함이 있고, 안으로는 劍閣의 험함이 있음을 이른다.】이 있고 吳나라는 三江【三江은 松江‧錢塘江‧浦陽江이다.】의 막힘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장점을 합하여 함께 입술과 이처럼 밀접하게 돕는다면, 전진하면 天下를 겸병할 수 있고 물러서면 솥발처럼 벌여 설 수 있습니다. 大王이 이제 만약 魏나라에 폐백을 바쳐 신하가 되시면 魏나라는 반드시 위로는 大王이 들어와 조회하기를 바라고 아래로는 太子가 들어와 모시기를 요구할 것이요,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황제의 토벌하라는 명을 받들어 배반한 자를 정벌할 것이고 蜀漢 또한 강물을 따라 내려와 가능한 기회를 보고 전진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江南의 땅은 다시 大王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吳나라는 마침내 魏나라와 단절하고 오로지 蜀漢과 연합하였다.

○ 立張氏하야 爲皇后하니 之女也러라

張氏를 세워서 皇后로 삼으니, 張飛의 딸이었다.

後皇帝 上

後皇帝 上 名禪이요 字公嗣니 昭烈皇帝之子라 在位四十年이요 壽六十五라

後皇帝 上 名이요 字公嗣昭烈皇帝之子라 在位四十年이요 壽六十五라

後皇帝는 이름이 이고 字가 公嗣이니, 昭烈皇帝의 아들이다. 재위가 40년이고 壽가 65세이다.

[甲辰]建興二年

後皇帝 上 名이요 字公嗣昭烈皇帝之子라 在位四十年이요 壽六十五라

[甲辰]建興二年이라 〈魏黃初五年이요 吳黃武三年이라〉

後皇帝는 이름이 이고 字가 公嗣이니, 昭烈皇帝의 아들이다. 재위가 40년이고 壽가 65세이다.

建興 2년(갑진 224) - 魏나라 黃初 5년이요, 吳나라 黃武 3년이다. -

魏主大興軍伐吳할새 留尙書僕射司馬懿하야 鎭許昌하고 爲水軍하야 親御龍舟하고 至廣陵【廣陵은 禹貢揚州也라 漢爲荊王國, 吳王國이러니 景帝更江都國하고 武帝更廣陵郡하고 唐爲楊州하니라】하니 時에 江水盛長이라 臨望하고 歎曰 魏雖有武騎千群이나 無所用之니 未可圖也로다 御龍舟러니 會에 暴風이 漂蕩하야 幾至覆沒이라 乃旋師하다

魏主曹丕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할 때에 尙書僕射司馬懿를 남겨 두어 許昌을 진무하게 하고, 水軍을 다스려 친히 龍舟를 타고 廣陵【廣陵은 ≪書經≫ 〈禹貢〉의 揚州이다. 漢나라 때 荊王의 나라와 吳王의 나라가 되었는데, 景帝가 江都國으로 고치고 武帝가 廣陵郡으로 고쳤으며, 唐나라는 楊州라고 하였다.】에 이르니, 이때 揚子江의 물이 크게 불어 넘쳤다. 曹丕가 강에 임하여 바라보고 탄식하기를 “魏나라에 비록 武騎 천만 무리가 있으나 쓸 곳이 없으니, 도모할 수 없다.” 하였다. 曹丕가 龍舟에 타고 있었는데, 마침 폭풍을 만나 배가 위아래로 일렁여서 거의 전복될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回軍하였다.

[乙巳]三年

[乙巳]三年이라 〈魏黃初六年이요 吳黃武四年이라〉

丞相이 率衆討雍闓【闓는 與開同하니 姓名也라 益州耆帥雍闓 殺太守하고 求附於吳라】할새 參軍謖이 送之어늘 曰 雖共謀之歷年이나 今可更惠良規하라 曰 南中이 恃其險遠하야 不服이 久矣라 雖今日破之나 明日復反하리니 夫用兵之道는 攻心이 爲上이요 攻城이 爲下며 心戰이 爲上이요 兵戰이 爲下니 願公은 服其心而已니이다 이 納其言하다

建興 3년(을사 225) - 魏나라 黃初 6년이요, 吳나라 黃武 4년이다. -

丞相諸葛亮이 병력을 거느리고 雍闓【闓는 開와 같으니, 雍闓는 姓名이다. 益州의 耆帥인 雍闓가 太守를 죽이고 吳나라에 歸附하기를 구하였다.】를 토벌할 때에 參軍 馬謖이 전송하였다. 諸葛亮이 말하기를 “비록 함께 이 일을 도모한 지가 여러 해이지만 이제 다시 좋은 계책을 세워 주게.” 하였다. 馬謖이 말하기를 “남쪽 지방은 지형이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오늘 그들을 격파한다 해도 내일 다시 배반할 것입니다. 用兵하는 방법은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上策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이 下策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上策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이 下策이니, 公이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니, 諸葛亮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 七月에 丞相이 至南中하야 所在에 戰捷이라 由越嶲【嶲는 音髓니 郡名이라】入하야 斬雍闓하다 孟獲이 收闓餘衆하야 以拒하니 이 素爲夷, 漢所服이라 이 募生致之하야 旣得에 使觀於營陳之間하고 問曰 此軍이 何如오 曰 向者에 不知虛實故로 敗어니와 今蒙賜觀營陳하니 若秪(只)如此면 卽定易勝耳니이다 이 笑하고 縱使更戰하야 七縱七禽하고 而猶遣한대 이 止不去曰 公은 天威也라 南人이 不復反矣라하니 自是로 終之世토록 夷不復反하니라

○ 7월에 丞相諸葛亮이 南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싸워서 승리하였다. 越嶲郡【嶲는 음이 수이니, 越嶲는 郡의 이름이다.】으로부터 쳐들어가 雍闓를 목 베었다. 孟獲雍闓의 남은 병력을 거두어 諸葛亮에게 항거하니, 孟獲은 평소 오랑캐와 漢族에게 심복을 받고 있었다. 諸葛亮이 현상금을 내걸어 생포해 오게 하고, 이미 사로잡은 뒤에 孟獲으로 하여금 陣營 사이를 구경하게 하고는 묻기를 “이 군대가 어떠한가?” 하니, 孟獲이 말하기를 “지난번에는 虛實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였지만 지금 은혜를 입어 진영을 구경하였으니, 만약 단지 이와 같을 뿐이라면 즉시 정히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였다. 諸葛亮이 웃고 풀어 주어 그로 하여금 다시 싸우게 해서 일곱 번 풀어 주었다가 일곱 번 사로잡고는 諸葛亮이 오히려 孟獲을 보내 주니, 孟獲이 멈추고 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公은 하늘이 내신 위엄이십니다. 남쪽 사람들이 감히 다시는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후로 諸葛亮이 생애를 마치도록 오랑캐가 다시는 배반하지 않았다.

○ 八月에 魏主以舟師로 自譙循渦【地志에 沛郡에 有譙縣이러니 魏爲譙郡하고 後周改亳州하니 今因之하니라 渦는 水名이니 在沛國譙縣이라】入淮하야 十月에 如廣陵하야 臨江觀兵【觀은 音貫이니 觀示兵威也니 謂陳兵脅之也라】하니 戎卒이 十餘萬이요 旌旗數百里라 有渡江之志러니 吳人이 嚴兵固守하고 時에 大寒冰하야 舟不得入江이라 見波濤洶涌하고 歎曰 嗟乎라 固天所以限南北也로다

○ 8월에 魏主曹丕가 舟師(水軍)를 거느리고 譙縣으로부터 渦水를 따라【≪漢書≫ 〈地理志〉에 沛郡에 譙縣이 있었는데, 魏나라가 譙郡으로 삼았고 後周가 亳州라고 고쳤으니, 지금 그대로 따르고 있다. 渦는 물 이름이니 沛國의 譙縣에 있다.】淮水로 들어갔다. 10월에 廣陵에 가서 강가에 임하여 군대를 사열【觀은 음이 관이다. 군대의 威容을 보여 주는 것이니, 병력을 진열하여 위협함을 이른다.】하니, 병졸이 십여만 명이고 깃발이 수백 리에 이어졌다. 揚子江을 건너갈 뜻을 품고 있었는데, 吳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정돈하여 견고하게 수비하고 있었고 이때 큰 추위가 닥쳐 수면이 얼어서 배가 강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曹丕는 揚子江의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아! 이는 진실로 하늘이 이 江을 가지고 남과 북을 한계 지은 것이구나.” 하였다.

[丙午]四年

[丙午]四年이라 〈魏黃初七年이요 吳黃武五年이라〉

五月에 魏主疾篤하니 立【與睿同이라】爲太子하다 丙辰에 召曹眞, 陳群, 司馬懿하야 竝受遺詔輔政하고 丁巳에 殂하니 太子立하다

建興 4년(병오 226) - 魏나라 黃初 7년이요, 吳나라 黃武 5년이다. -

5월에 魏主曹丕가 병이 위독하니, 曹叡【叡는 睿와 같다.】를 세워 太子로 삼았다. 丙辰日에 曹眞陳群司馬懿를 불러 함께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게 하고, 丁巳日에 曹丕가 죽으니태자曹叡가 즉위하였다.

[丁未]五年

[丁未]五年이라 〈魏明帝曹叡太和元年이요 吳黃武六年이라〉

三月에 丞相이 率諸軍하야 北駐漢中할새 使長史張裔와 參軍蔣琬으로 統留府事하고 臨發에 上疏曰 先帝創業【創은 與刱同하니 造也라】未半而中道崩殂하시고 今天下三分에 益州疲敝하니 此誠危急存亡之秋也니이다 然이나 侍衛之臣이 不懈於內하고 忠志之士 忘身於外者는 蓋追先帝之殊遇하야 欲報之於陛下也니이다 誠宜開張聖聽하야 以光先帝遺德하시고 恢弘志士之氣요 不宜妄自菲【菲는 微薄也라】薄하야 引喩失義하야 以塞忠諫之路也니이다 親賢臣, 遠小人은 此先漢所以興隆也요 親小人, 遠賢臣은 此後漢所以傾頹也라 先帝在時에 每與臣으로 論此事에 未嘗不歎息痛恨於, 也니이다

建興 5년(정미 227) - 魏나라 明帝曹叡太和 元年이요, 吳나라 黃武 6년이다. -

3월에 丞相諸葛亮이 諸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漢中에 주둔할 때에 長史張裔와 參軍蔣琬으로 하여금 남아서 丞相府의 일을 통솔하게 하고 출발에 앞서 다음과 같이 上疏하였다.

“先帝께서 창업【創은 刱과 같으니, 만듦이다.】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별세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 益州가 피폐하니, 이는 진실로 국가가 위급하여 보존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모시고 호위하는 신하들이 안(조정)에서 게을리 하지 않고, 충성스럽고 뜻있는 군사들이 밖(외지)에서 자기 몸을 잊는 것은 先帝의 특별하신 대우를 추념하여 폐하에게 이를 갚고자 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聖聽을 열어 先帝의 遺德을 빛내시고 志士들의 사기를 넓히고 키울 것이요, 망령되이 스스로 하찮게【菲는 작고 박한 것이다.】 여겨 이끌어 비유함에 本義를 잃어서 충성스럽게 간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賢臣을 가까이하고 小人을 멀리함은 先漢(漢의 先代)이 흥성했던 이유이고, 小人을 가까이하고 賢臣을 멀리함은 後漢(漢의 後代)이 기울고 패망한 이유입니다. 先帝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에 언제나 신과 이 일을 논할 적마다 일찍이 桓帝靈帝에 대하여 탄식하고 통한으로 여기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臣本布衣로 躬耕南陽하야 苟全性命於亂世하고 不求聞達於諸侯러니 先帝不以臣卑鄙하시고 猥【鄙也요 又多也라】自枉屈하사 三顧臣於草廬之中하시고 諮臣以當世之事하시니 由是感激하야 遂許先帝驅馳러니 後値傾覆하야 受任於敗軍之際하고 奉命於危難之間이 爾來二十有一年矣라 先帝知臣謹愼이라 故로 臨崩에 寄臣以大事也하시니 受命以來로 夙夜憂懼하야 恐付托不效하야 以傷先帝之明이라 故로 五月渡瀘【瀘水는 一名若水니 在蜀이라 出旄牛徼外하니 有瘴氣라 今嶲州에 有瀘津關하니 三四月經之면 多死하니 五月渡瀘는 以言其艱也라 按方輿勝覽註云 姚州雲南郡에 有瀘南縣하니 則瀘水는 當在姚州라하니 未詳孰是라】하야 深入不毛【不毛는 言草木不生也라】러니 今南方已定하고 兵甲已足하니 當獎率三軍하야 北定中原이니 庶竭駑鈍하야 攘除奸凶하고 興復漢室하야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라 至於斟酌損益하야 進盡忠言은 則攸之, , 【表曰 侍中侍郞郭攸之, 費褘, 董允等은 皆良實忠純하야 先帝拔以遺陛下니이다하니라】之任也니 願陛下는 托臣以討賊興復之效하사 不效면 則治臣之罪하야 以告先帝之靈하시고 〈若無興德之言이면〉責攸之, , 等之慢하야 以彰其咎하시고 陛下亦宜自謀하사 以諮諏【諏는 謀也라】善道하시고 察納雅言하야 深追先帝遺詔하소서 臣不勝受恩感激이라 今當遠離에 臨表涕零하야 不知所言이로이다 遂行하다

신은 본래 布衣(평민)로 몸소 南陽에서 농사를 지어 亂世에 구차하게 性命(생명)을 보전하려 하였고 諸侯들에게 알려지거나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先帝께서는 臣을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猥는 비루함이요, 또 많음이다.】 직접 왕림하시어 草廬 가운데로 세 번이나 臣을 찾아 주시고 臣에게 當世의 일을 자문하시니, 臣은 이 때문에 감격하여 마침내 先帝께 國事에 진력할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후 나라가 기울어지고 엎어질 때를 만나 敗軍한 즈음에 임무를 받고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명령을 받든 지가 그로부터 지금 21년이 되었습니다.

先帝께서는 臣이 謹愼함을 아셨기 때문에 임종하실 때에 臣에게 大事를 맡기시니, 臣은 명령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부탁하신 것을 이루지 못해서 先帝의 밝음(사람을 알아보는 지혜)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월에 瀘水를 건너서【瀘水는 일명 若水이니, 蜀 지방에 있다. 旄牛徼 밖에서 나오니, 瘴氣가 있다. 지금 嶲州에 瀘津關이 있는데 3, 4월에 이 물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 5월에 瀘水를 건너갔다는 것은 그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方輿勝覽≫의 註에 “姚州 雲南郡에 瀘南縣이 있으니, 瀘水는 마땅히 姚州에 있다.”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 깊이 불모지【不毛는 草木이 자라지 않음을 말한다.】로 쳐들어갔습니다. 이제 南方이 이미 평정되었고 무기와 갑옷이 이미 충분하니, 마땅히 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中原을 평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행여 저의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姦凶을 제거하고 漢나라 皇室을 興復(부흥)하여 옛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이 臣이 先帝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짐작하여 損益(加減)해서 忠言을 올리고 다 아뢰는 것으로 말하면 郭攸之費褘董允【諸葛亮의 〈出師表〉에 이르기를 “侍中侍郞인 郭攸之‧費褘‧董允 등은 모두 어질고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순수하여 先帝께서 선발하여 陛下에게 물려주셨습니다.” 하였다.】 등의 책임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臣에게 역적을 토벌하여 漢나라 황실을 興復하는 일을 맡기시어 臣이 일을 이루지 못하거든 臣의 죄를 다스려 先帝의 靈前에 고하시고, 〈만일 德을 일으키는 말이 없으면〉 郭攸之費褘董允 등의 태만함을 책하시어 그 허물을 드러내시며, 폐하께서도 또한 스스로 도모하시어 善한 道를 자문【諏는 상의함이다.】하시고 바른말을 살펴 받아들이시어 先帝의 遺詔를 깊이 추념하소서.

신은 은혜를 받고 감격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멀리 떠나야 하니, 表文을 대함에 눈물이 흘러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諸葛亮이 마침내 출정하였다.

○ 六月에 魏以司馬懿로 都督荊, 豫州諸軍事하다

○ 6월에 魏나라가 司馬懿로 荊州와 豫州 諸軍의 일을 都督하게 하였다.

[戊申]六年

[戊申]六年이라 〈魏太和二年이요 吳黃武七年이라〉

初에 魏以夏侯楙【楙는 與懋同이라 音茂니 淵子也라】로 鎭長安이러니 至是하야 丞相이 將伐魏할새 與群下謀之하니 魏延【時爲司馬也니 漢丞相有長史而無司馬어늘 是時用兵이라 故로 置司馬하니라】夏侯楙는 怯而無謀하니 今假延精兵五千이면 直從褒中出하야 循秦嶺【秦嶺은 在虢州閺鄕縣南하니 周回三百里라】而東하고 當子午【長安의 山名秦嶺이요 谷名子午라 子는 北方이요 午는 南方이니 言通南北道相當故로 名子午谷이라】而北하야 不過十日에 可到長安하리이다 楙聞延奄至면 必棄城逃走하리니 比東方相合【比는 及也라】에 尙二十許日이요 而公從斜谷來면 亦足以達하리니 如此면 則一擧而咸陽以西를 可定矣리이다

建興 6년(무신 228) - 魏나라 太和 2년이요, 吳나라 黃武 7년이다. -

처음에 魏나라가 夏侯楙【楙는 懋와 같다. 음이 무이니, 夏侯淵의 아들이다.】로 하여금 長安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丞相諸葛亮이 장차 魏나라를 정벌하려 하면서 여러 부하들과 상의하니, 魏延【魏延이 이때 司馬였으니, 漢나라 丞相은 長史를 두고 司馬는 없었으나 이때 군대를 출동하였기 때문에 司馬를 둔 것이다.】이 말하기를 “夏侯楙는 겁이 많고 智謀가 없으니, 이제 저에게 정예병 5천 명을 빌려 주시면 곧바로 褒中을 따라 진출하여 秦嶺山【秦嶺山은 虢州 閺鄕縣의 남쪽에 있으니, 둘레가 300리이다.】을 따라 동쪽으로 가고 子午谷【長安의 산 이름이 秦嶺이고 골짜기 이름이 子午이다. 子는 북방이요 午는 남방이니, 남북을 통하는 길에 서로 위치하였기 때문에 子午谷이라 이름한 것이다.】을 당하여 북쪽으로 진출해서 열흘을 넘기지 않고 長安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夏侯楙는 제가 갑자기 쳐들어 왔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城을 버리고 도망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魏나라가 동방에 군대를 집결할 때까지는【比는 미침이다.】 아직 20여 일이 남아 있고 公께서 斜谷을 따라 오시면 또한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거에 咸陽 이서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 以此爲危計라 不如安從坦道하야 可以平取隴右니 十全必克而無虞라 故로 不用延計하다 이 身率大軍하야 攻祁山【祁山은 在岷州長道縣南十里라】할새 戎陳이 整齊하고 號令이 明肅【本傳云 賞罰肅而號令明이라】이러라 始에 魏以漢昭烈旣崩하고 數歲寂然無聞이라 是以로 略無備豫【不豫爲之備也라】러니 而卒(猝)聞出하고 朝野恐懼라 於是에 天水, 南安【屬廣漢郡하니 昭烈改漢壽縣하고 唐置南安州하니 今大安軍是라】, 安定이 皆叛應하니 關中이 響震이라 朝臣이 未知計所出이러니 魏主이 阻山爲固러니 今者自來하니 正合兵書致人之術이니 破이 必矣라하고 乃勒兵馬步騎五萬하고 遣右將軍張郃督之하야 西拒하다

[新增]愚按 先儒之說에 謂孔明左右【與佐佑通이라】昭烈하야 爲漢討賊하야 聲大義於天下하니 功雖不就나 名則正矣라 自陳壽志三國으로 以魏爲主하야 例書入寇하니 壽固萬世之罪人也어늘 而司馬公이 亦因而書之는 何哉오 今依朱子綱目하야 以昭烈로 紹漢之統이라 故로 於孔明興師엔 則改書伐魏하고 而魏兵犯境엔 則改書入寇하니 然後에 名正言順하야 而正僞之辨이 自明矣라 後皆倣此하니 再不重述하노라

諸葛亮은 이것은 위험한 계책이니, 평안히 평탄한 길을 따라 편온하게 隴右를 취할 수 있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십분 안전하여 반드시 이기고 근심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魏延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諸葛亮이 직접 大軍을 거느리고서 祁山【祁山은 岷州 長道縣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을 공격할 때에 軍陣이 정돈되고 호령이 분명하고 엄숙하였다.【[原註]戎陳整齊 號令明肅:위의 내용이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에는 “상벌이 엄숙하고 호령이 분명했다.”로 되어 있다.】 처음에 魏나라는 漢나라 昭烈帝가 이미 죽었고 여러 해 동안 조용하여 들리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조금도 미리 대비함이 없었는데,【略無備豫는 미리 대비하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 諸葛亮이 출병했다는 말을 듣고 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天水‧南安【南安은 廣漢郡에 속하니, 昭烈帝가 漢壽縣으로 고쳤고 唐나라가 南安州를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大安軍이 이곳이다.】‧安定이 모두 배반하여 諸葛亮에게 호응하니, 關中이 이 소문을 듣고 진동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계책을 낼 바를 알지 못했는데, 魏主曹叡가 말하기를 “諸葛亮이 산을 막아 견고하게 지켰는데 이제 스스로 왔으니, 이는 바로 兵書에 사람을 오게 하는 방법과 부합한다. 諸葛亮을 틀림없이 격파할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병사와 軍馬를 무장하여 步兵과 騎兵 5만 명을 거느리고 右將軍張郃을 보내어 이들을 독려해서 서쪽으로 諸葛亮을 막게 하였다.

[新增]내(劉剡)가 살펴보건대 先儒의 말에 “諸葛孔明昭烈帝를 보좌【左右는 佐佑(도움)와 통한다.】하여 漢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벌해서 大義를 천하에 밝혔으니, 功은 비록 이루지 못하였으나 명분은 바르다.” 하였다. 그런데 陳壽의 《三國志》로부터 魏나라를 위주로 하여 으레 ‘入寇’라고 썼으니, 陳壽는 진실로 萬代의 죄인인데 司馬溫公이 또한 이것을 그대로 인습하여 씀은 어째서인가? 지금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昭烈로 漢나라의 大統을 이었다. 그러므로 諸葛孔明이 군대를 일으킨 경우에는 ‘魏나라를 정벌했다.[伐魏]’고 고쳐 쓰고, 魏나라 군대가 국경을 침범한 경우에는 ‘入寇’라고 고쳐 썼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해서 올바름과 거짓됨의 구분이 저절로 밝아지는 것이다. 뒤는 모두 이를 따랐으니, 다시 거듭 말하지 않는다.

初에 越嶲太守馬謖이 才器過人하야 好論軍計하니 諸葛亮이 深加器異라 昭烈이 臨終에 謂馬謖이 言過其實하야 不可大用이니 君其察之하라 이 猶謂不然하고 以爲參軍하야 每引見談論에 自晝達夜러니 及出軍祁山에 이 不用舊將魏延, 吳懿等하야 爲先鋒하고 而以督諸軍在前하야 與張郃戰于街亭【方輿勝覽興元府에 有街亭하니 註에 魏張郃이 與漢馬謖戰于此라하니라】이러니 이 違亮節度하야 擧措煩擾하고 舍水上山하야 不下據城이러니 張郃이 絶其汲道하고 擊大破之하니 士卒이 離散이라 이 進無所據하야 乃拔西縣千餘家하다 還漢中하야 收下獄殺之하고 自臨祭하야 爲之流涕하고 撫其遺孤하야 恩若平生이러라 於是에 考微勞하고 甄壯烈【甄은 別也요 察也라】하며 引咎責躬하야 布所失於境內하고 厲兵講武하야 以爲後圖하니 戎事簡練하고 民忘其敗矣러라

처음에 越嶲太守馬謖이 재주와 기국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군대의 계책을 논하기 좋아하니, 諸葛亮이 깊이 소중히 여기고 특이하게 여겼다. 昭烈帝가 임종할 때에 諸葛亮에게 말하기를 “馬謖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쳐 크게 쓸 수 없으니, 君은 살피라.” 하였다. 諸葛亮은 그래도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馬謖을 參軍으로 삼아 매번 인견하여 談論할 때에 낮부터 밤에 이르곤 하였는데, 祁山으로 출병하게 되자 諸葛亮이 舊將인 魏延吳懿 등을 先鋒으로 삼지 않고, 馬謖으로 하여금 諸軍을 독려하면서 앞에 있게 하여 張郃과 街亭【≪方輿勝覽≫의 興元府 街亭條 註에 “魏나라 張郃이 蜀漢의 馬謖과 이곳에서 싸웠다.” 하였다.】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馬謖諸葛亮의 節度(지휘)를 어겨 擧措가 번거롭고 요란하였으며 물이 있는 곳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와 산 아래의 城을 점거하지 않았다. 張郃이 물을 길어 가는 통로를 차단하고공격해서대파하니, 사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諸葛亮은 進軍해도 점거할 곳이 없어서 마침내 西縣의 천여 가호를 공략하였다. 漢中으로 돌아온 다음 馬謖을 체포하여 하옥시켜 죽이고는諸葛亮이 직접 喪에 가서 제사하여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의 어린 자식을 어루만져 은혜가 평소와 같았다. 諸葛亮은 이에 작은 공로를 살피고 국가를 위해 壯烈하게 전사한 자를 선발하며,【甄은 분별함이요, 살핌이다.】 잘못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잘못한 바를 境內에 알리고 병기를 예리하게 하였고 武藝를 익혀 후일을 도모하니, 군대의 일이 간략하고 단련되었으며 백성들이 그 실패를 잊었다.

吳王이 使鄱陽太守周魴으로 遣人賚牋하야 以誘揚州都督曹休하야 言欲以郡降이라하니 率步騎十萬하야 以應이라가 與陸遜으로 戰於石亭하야 大敗而還하다

吳王이 鄱陽太守周魴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牋文을 가지고 가서 揚州都督曹休를 유인하여 “郡을 바치고 항복하고자 한다.”고 말하게 하니, 曹休가 步兵과 騎兵 10만 명을 이끌고 周魴에게 호응하였다가陸遜과 石亭에서 싸워 대패하고 돌아갔다.

○ 丞相이 聞曹休敗하고 欲出兵擊魏하니 群臣이 多以爲疑【因祁山敗하야 疑魏不可伐也라】이 上言於帝曰 先帝深慮以漢賊不兩立하고 王業不偏安【王業不可偏全於蜀都라】이라 故로 托臣以討賊하시니 以先帝之明으로 量臣之才에 固當知臣伐賊이 才弱敵强이나 然不伐賊이면 王業亦亡하리니 惟【思也라】坐而待亡으론 孰與【與는 如也라】伐之릿고 是故로 托臣而不疑也하시니이다 今賊이 適疲於西【五年에 亮이 攻祁山하니 南安, 天水, 安定三郡이 皆叛하야 應亮하니라】하고 又務於東【曹休與吳陸遜으로 戰于街亭하야 大敗하니라】하니 兵法에 乘勞라하니 此는 進趨之時也니이다 高帝明竝日月하시고 謀臣이 淵深이나 然涉險被創【創은 傷也니 漢曹參은 身被七十創하니라】하야 危然後安하시니 今陛下未及高帝하시고 謀臣이 不如良平張良, 陳平이라】이어늘 而欲以長計取勝하야 坐定天下하시니 此는 臣之未解也로이다 曹操智計 殊絶於人하야 其用兵也 髣髴孫臏, 吳起라】나 然困於南陽【操與張繡로 戰於南陽宛縣할새 爲流矢所中이라】하고 險於烏巢【袁紹拒操於官渡할새 紹輜重萬餘在烏巢하니 時에 操糧少하야 欲還許하니라】하고 危於祁連【祁連은 西域國名이라】하고 偪於黎陽【袁譚據之러니 操用兵吳蜀하니 譚兵逼其後하니라】하고 幾敗北山【上卷己亥年에 操爭漢中이러니 趙雲躡之하니 操軍蹂踐하야 墮漢水中하니라 資治에 北作伯山하니 訓義에 謂與烏桓戰於白狼山時也라】하고 殆死潼關【馬超, 韓遂 據潼關한대 操討之러니 超攻之하야 矢下如雨라 許褚扶操上船하니 船工中矢死어늘 褚左手擧鞍蔽操하고 右手刺船하야 乃得渡하니라】然後에 僞定【言雖定一時之功이나 而有心於篡漢故로 曰僞定이라】一時耳니이다 況臣才弱이어늘 而欲以不危而定之哉잇가 臣은 鞠躬【曲其躬曰鞠이라】盡力하야 死而後已니 至於成敗利鈍하야는 非臣之明의 所能逆覩也니이다

○ 丞相諸葛亮曹休가 패전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출병하여 魏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의심하였다.【祁山에서 패전함으로 인하여 魏나라를 칠 수 없다고 의심한 것이다.】諸葛亮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上言하였다.

“先帝께서는 漢과 賊(魏나라)이 兩立할 수 없고 王業이 한쪽 구석인 蜀都에서 편안할 수 없음【王業不偏安은 王業을 한쪽 구석인 蜀都에서 보전할 수 없음을 이른다.】을 깊이 염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에게 적을 토벌하는 일을 맡기셨으니, 先帝의 밝으신 지혜로 신의 재주를 헤아리심에 진실로 신이 적을 토벌하는 것이 신의 재주는 약하고 적은 강하다는 것을 당연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王業이 또한 망할 것이니, 생각건대【惟는 생각함이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을 토벌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셨기【與는 같음이다.】 때문에 신에게 맡기고 의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지금 적이 마침 서쪽에서 피폐하고【疲於西는 5년(魏 明帝 太和 5년으로 서기 231)에 諸葛亮이 祁山을 공격하자, 南安郡‧天水郡‧安定郡 세 郡이 모두 魏나라를 배반하고 諸葛亮에게 호응한 일을 가리킨다.】 또 동쪽에서 일(전쟁)을 벌이고【務於東은 曹休가 吳나라 陸遜과 街亭에서 싸워 크게 패한 일을 가리킨다.】 있습니다. 兵法에 ‘적의 피로한 틈을 타라.’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진취할 때입니다.

高帝께서는 밝음이 日月과 같으시고 謀臣들은 지혜가 깊었으나 그런데도 위험을 겪고 상처를 입어서【創은 상처이니 漢나라 曹參은 전투하다가 몸에 70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위태로운 뒤에야 편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는 밝음이 高帝에 미치지 못하시고 謀臣들의 지혜도 張良陳平【良平은 張良과 陳平이다.】만 못한데도 장구한 계책으로 승리를 취하여 가만히 앉아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시니 이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曹操는 智謀가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 用兵하는 것이 孫武吳起【孫吳는 孫臏과 吳起이다.】와 방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南陽에서 곤궁하고【困於南陽은 曹操가 張繡와 南陽의 宛縣에서 싸울 때에 流矢에 맞은 일을 가리킨다.】烏巢에서 위험을 겪고【險於烏巢는 袁紹가 官渡에서 曹操와 대치할 때에 袁紹는 輜重車 만여 대가 烏巢에 있었는데, 이때 曹操는 군량이 부족하여 許都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일을 가리킨다.】祁連에서 위태롭고【祁連은 西域의 나라 이름이다.】黎陽에서 핍박을 받고【偪於黎陽은 袁譚이 黎陽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曹操가 吳‧蜀과 전쟁을 벌이자, 袁譚이 그 후미를 핍박한 일을 가리킨다.】北山에서 패할 뻔하고【幾敗北山은 上卷(23권) 己亥年條(建安 24)에 曹操가 漢中을 다투었는데, 趙雲이 뒤를 따르니 曹操의 군대가 자기들끼리 서로 밟혀 漢水에 빠져 죽은 일을 가리킨다. ≪資治通鑑≫에는 北山이 伯山으로 되어 있는 바, ≪資治通鑑訓義≫에 “烏桓과 白狼山에서 싸울 때이다.” 하였다.】潼關에서 죽을 뻔한【殆死潼關은 馬超와 韓遂가 潼關을 점거하자 曹操가 이들을 토벌하였는데, 馬超가 공격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許褚가 曹操를 부축하여 배에 오르니, 뱃사공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許褚가 왼손으로는 말안장을 들어 曹操의 몸을 가리고, 오른손으로는 배를 저어 마침내 건너갈 수 있었던 일을 가리킨다.】 뒤에야 거짓으로(임시로)【비록 한때를 평정하는 功을 이루었으나 漢나라를 찬탈하려는 마음이 있으므로 僞定이라고 한 것이다.】 한때를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신은 재주가 미약한데, 위태롭지 않고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몸을 굽히고【그 몸을 굽히는 것을 鞠이라 한다.】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에 이르러서는 신의 지혜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十二月에 이 引兵出散關하야 圍陳倉이러니 陳倉이 已有備라 이 不能克하다

12월에 諸葛亮이 군대를 이끌고 散關으로 나와 陳倉을 포위하였는데, 陳倉이 이미 대비가 있었다. 그리하여 諸葛亮이 이기지 못하였다.

魏主張郃于方城하야 使擊할새 魏主曰 遲【去聲이니 待也라】將軍到하면 이 得無已得陳倉乎아 이 知深入無穀하고 屈指計曰 比臣到면 已走矣리이다 이 晨夜進道하야 未至에 이 粮盡引去러니 將軍王雙이 追之어늘 이 擊斬雙하다

魏主曹叡張郃을 方城에서 불러와 諸葛亮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魏主曹叡張郃에게 묻기를 “장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遲는 去聲이니 기다림이다.】諸葛亮이 이미 陳倉을 점령하지 않겠는가?” 하니, 張郃諸葛亮이 깊이 쳐들어와 식량이 없음을 알고는 손가락을 꼽아 계산하며 말하기를 “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諸葛亮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하였다. 張郃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길을 달려 도착하기 전에 諸葛亮은 군량이 떨어져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將軍王雙이 추격하자諸葛亮王雙을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己酉]七年

[己酉]七年이라 〈魏太和三年이요 吳黃龍元年이라〉

四月에 吳王이 卽皇帝位하야 大赦하고 改元黃龍하고 追尊父堅하야 爲武烈皇帝하고 兄策爲長沙桓王하고 立子하야 爲皇太子하다

建興 7년(기유 229) - 魏나라 太和 3년이요, 吳나라 黃龍 元年이다. -

4월에 吳王(孫權)이 황제에 즉위하여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黃龍으로 고쳤다. 아버지 孫堅을 추존하여武烈皇帝라 하고, 형 孫策長沙桓王이라 하고, 아들孫登을 세워서 皇太子로 삼았다.

○ 九月에 吳王이 遷都建業【本楚邑이니 名曰金陵이라 漢屬丹陽郡이러니 吳改爲建業하니라】하다

○ 9월에 吳王이 建業【建業은 본래 楚나라 邑이니, 이름을 金陵이라 하였다. 漢나라 때 丹陽郡에 속했는데, 吳나라가 고쳐서 建業이라 하였다.】으로 遷都하였다.

[庚戌]八年

[庚戌]八年이라 〈魏太和四年이요 吳黃龍二年이라〉

丞相이 以蔣琬爲長史하다 이 數外出에 이 常足兵食하야 以相供給하니 이 每言公琰【蔣琬字也라】이 託志忠雅하니 當與吾共贊王業者也라하더라

建興 8년(경술 230) - 魏나라 太和 4년이요, 吳나라 黃龍 2년이다. -

丞相諸葛亮蔣琬을 長史로 삼았다. 諸葛亮이 여러 번 밖으로 出征하였을 때에 蔣琬이 항상 군사와 군량을 풍족히 하여 공급해 주니, 諸葛亮이 언제나 말할 적마다 “公琰(蔣琬)公琰蔣琬의 字이다.】은 충성스럽고 高雅함에 뜻을 두니, 마땅히 나와 함께 王業을 도울 자이다.” 하였다.

[辛亥]九年

[辛亥]九年이라 〈魏太和五年이요 吳黃龍三年이라〉

二月에 丞相이 率諸軍伐魏하야 圍祁山할새 以木牛運하니 魏遣司馬懿하야 西屯長安하고 督將軍張郃等하야 以禦之하다 三月에 留兵守上邽하고 餘衆悉出하야 西救祁山이어늘 이 分兵留攻祁山하고 自逆于上邽之東하니 斂軍依險하야 兵不得交라 이 引還하니 等이 尋後하야 至於鹵城이라 曰 彼遠來逆我하야 請戰不得하니 謂我利在不戰하야 欲以長計制之也요 且祁山이 知大軍已在近하고 人情自固하리니 可止屯於此하고 分爲奇兵하야 示出其後요 不宜進前而不敢偪하야 坐失民望也니이다 今이 孤軍食少하니 亦行去【行은 猶將也라】矣리이다 不從하고 故尋【有意爲之曰故라 尋者는 隨而躡其後라】이러니 旣至에 又登山掘營하고 不肯戰이어늘 賈詡, 魏平曰 公이 畏蜀을 如虎하니 奈天下笑何니잇고 病之【病은 患也라 懿實畏亮하고 又以張郃嘗再拒亮하야 名著關右하니 不欲從其計하고 及進而不敢戰하야 情見勢屈하야 爲諸將所笑하니라】하니 諸將이 咸請戰이라 五月에 使攻無當【蜀軍部之號니 言其軍精勇하야 無能當者라 或曰 地名이라】하고 自按中道하야 向이어늘 이 使魏延, 高翔, 吳班으로 逆戰하니 魏兵이 大敗라 漢人이 獲甲首三千【謂所斬人頭被甲者三千首라】하니 還保營하다 六月에 이 以糧盡退軍이러니 遣張郃追之어늘 漢兵이 乘高布伏하야 弓弩亂發하니 飛矢中右膝而卒하다

[新增]尹氏司馬懿用兵如神하야 算無遺策하니 未易敵也라 然이나 每與丞相交鋒에 動輒敗北라 是以로 其徒有畏蜀如虎之譏라 然之將略이 果有大過人者어늘 而陳壽乃以將略非所長貶之하니 則其妄肆譏評은 不攻自破矣라 世以成敗論人하야 若壽輩者 非一이니 可勝歎哉아

朱氏曰 時에 이 垂兵【遠出之貌라】遠出하야 糧餉不繼어늘 以銳師大衆으로 乘氣而扞禦之로되 猶狼狽【詩에 狼跋其胡요 載疐其尾라하고 又狽前足絶短하야 每行에 常駕狼하니 失狽[狼]則不能動이라 故로 世言事乖者稱狼狽라하니라】如許라 況五丈原之出【見下甲寅年이라】에 恩信이 行於中原하고 威略이 震乎遠邇하며 屯田積聚하야 軍旅雜於居民而莫之間【去聲이니 隔也라】하니 使不死數月이면 其能與戰而遂取勝乎아 故로 之敵也니라

建興 9년(신해 231) - 魏나라 太和 5년이요, 吳나라 黃龍 3년이다. -

2월에 丞相諸葛亮이 諸軍을 거느리고 魏나라를 정벌하여 祁山을 포위할 때에 木牛(나무로 만든 소)로 군량을 운반하니, 魏나라가 司馬懿를 보내어 서쪽으로 長安에 주둔시키고 將軍張郃 등을 보내어막게 하였다.

3월에 司馬懿가 병력을 남겨 두어 上邽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출동하여 서쪽으로 가서 祁山을 구원하였다. 諸葛亮이 병력을 나누어 남겨 두어 祁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上邽의 동쪽에서 司馬懿를 맞아싸웠는데, 司馬懿가 군대를 거두어 험고한 곳에 의지하여 지키니, 兩軍이 교전할 수가 없었다. 諸葛亮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司馬懿 등이 諸葛亮의 뒤를 따라 鹵城에 이르렀다.

張郃이 말하기를 “저들은 멀리서 와서 우리 군대를 맞아 싸우기를 청했으나 싸울 수가 없으니, 우리들의 이로움이 싸우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하여 장구한 계책으로 제어하고자 할 것입니다. 또 祁山에서는 우리 大軍이 이미 가까이 있음을 알고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 견고해질 것이니, 이곳에 멈춰 주둔하고 군대를 나누어 奇兵(기습병)을 만들어서 적의 후면으로 나감을 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여 앉아서 백성들의 희망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諸葛亮은 고립된 군대로 양식이 부족하니, 또한 장차【行은 장차와 같다.】 떠나갈 것입니다.” 하였다.

司馬懿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諸葛亮의 뒤를 밟았는데,【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을 故(일부러)라고 한다. 尋은 따라서 그 뒤를 밟는 것이다.】 도착한 다음 또다시 山에 올라가 진영을 파고 싸우려 하지 않자, 賈詡魏平이 말하기를 “공이 蜀漢을 두려워하기를 범을 무서워하듯이 하니,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였다. 司馬懿가 이를 걱정하니,【病은 걱정함이다. 司馬懿는 실로 諸葛亮을 두려워하였으며, 또 張郃이 일찍이 두 번이나 諸葛亮을 막아서 이름이 關西 지방에 드러나니 그의 계책을 따르고자 하지 않았고, 전진하였으나 감히 싸우지 못하게 되자 실정이 드러나고 세력이 굽히게 되어 諸將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이다.】 諸將들이 모두 싸우기를 청하였다.

5월에 司馬懿張郃으로 하여금 無當【無當은 蜀漢의 부대의 호칭이니, 군대가 정예하고 용맹하여 대적할 자가 없음을 말한다. 혹자는 이르기를 “地名이다.” 하였다.】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간의 길을 점거하여 諸葛亮을 핍박하였는데, 諸葛亮魏延高翔吳班으로 하여금 맞아싸우게 하니, 魏나라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漢나라 군대가 甲士의 首級 3천 명을 얻으니,【甲首 三千은 갑옷을 입은 병사의 머리를 벤 것이 3천 명임을 이른다.】司馬懿가 돌아와 진영을 지켰다.

6월에 諸葛亮이 양식이 다하여 군대를 후퇴시켰는데, 司馬懿張郃을 보내어 추격하였다. 蜀漢의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포진하고 매복하여 활과 쇠뇌를 어지럽게 쏘아대니, 流矢(빗나간 화살)가 張郃의 오른쪽 무릎을 명중시켜 죽었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司馬懿는 用兵術이 神과 같아서 계산함에 미비한 계책이 없으니, 쉽게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번 丞相諸葛亮과 교전할 때에는 그때마다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무리들이 司馬懿가 蜀漢을 두려워하기를 범을 무서워하듯이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諸葛亮의 將略(장수로서의 智略)이 진실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인데, 陳壽는 도리어 將略은 諸葛亮의 所長이 아니라고 폄하하였으니, 그가 함부로 비평한 것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진다. 세상에서는 成敗를 가지고 인물을 논하여 陳壽와 같은 무리들이 한둘이 아니니, 한탄스러움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朱氏(朱黼)가 말하였다.

“이때 諸葛亮은 군대를 끌고 멀리 출전하여【垂兵은 군대가 멀리 나간 모양이다.】 군량이 계속 공급되지 못하였는데, 司馬懿가 정예병과 大軍으로 기세를 타고 막았으나 오히려 낭패함【≪詩經≫ 〈豳風〉에 “이리가 앞으로 나아가면 턱살이 밟히고 뒤로 물러나면 꼬리가 밟히도다.” 하였고, 또 ≪酉陽雜俎≫ 〈毛篇〉에는 “狽는 앞 다리가 매우 짧아서 언제나 갈 때마다 狼을 타니, 狽가 狼을 잃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이 어그러지는 것을 일러 狼狽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였다.】이 이와 같았다. 더구나 諸葛亮은 五丈原에 出兵했을 때에【五丈原에 出兵한 것은 뒤의 甲寅年條에 보인다.】 은혜와 신의가 中原에 행해지고 위엄과 智略이 遠近에 떨쳐졌으며, 屯田을 만들어 곡식을 모아서 군사들이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간격【間은 去聲이니, 간격이다.】이 없었으니, 만일 몇 달 동안 죽지 않았다면 司馬懿가 어찌 諸葛亮과 싸워서 마침내 승리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司馬懿諸葛亮의 적수가 아닌 것이다.”

[癸丑]十一年

[癸丑]十一年이라 〈魏靑龍元年吳嘉禾二年〉

丞相이 勸農講武하고 作木牛流馬武侯出軍至祁山하야 始以木牛運하고 後出斜谷하야 以流馬運이라 杜氏通典註曰 按亮集에 督軍廖立, 杜叡, 胡忠等이 推意作木牛流馬라 其木牛法은 方腹曲脛이요 一(股)[脚]四足이며 頭入領中하고 舌著於腹하니 載多而行少라 特行者數十里요 群行者二十里니 曲者爲牛頭요 雙者爲牛脚이요 橫者爲牛領이요 轉者爲牛足이요 覆者爲牛背요 方者爲牛腹이요 垂者爲牛舌이요 曲者爲牛肋이요 刻者爲牛齒요 立者爲牛角이요 細者爲牛鞅이요 攝者爲牛鞦軸이라 牛(御)[仰]雙轅하야 人行六尺하고 牛行四步하니 人不大勞하고 牛不飮食이라 其流馬法의 尺寸之數는 肋長三尺五寸이요 廣三寸이요 厚二寸二分이니 左右同이라 前軸孔은 分墨去頭四寸이요 徑中二寸이며 前脚孔은 分墨 〈二寸이니 去前軸孔이〉 去頭四寸五分이요 {長一寸五分} 廣一寸이며 前杠孔은 去前脚孔分墨二寸七分이요 孔長二寸이요 廣一寸이라 後軸孔은 去前杠孔이 分墨一尺五寸이요 大小同이라 〈後脚孔은 分墨去後軸孔 三寸九分이요 大小與前同이라〉 後杠孔은 〈分墨〉去後脚孔이 分墨二寸(二)[七]分이요 〈後載剋은 去〉後杠孔이 分墨四寸五分이요 前杠은 長一尺八寸이요 廣二寸이요 厚一寸五分이라 後杠與等이라 板方囊二枚니 {板}厚八分이요 長二尺七寸이요 高一尺六寸五分이요 廣一尺六寸이니 每枚에 受米二斛三斗라 從上杠孔은 去肋下七寸이니 前後同이라 上杠孔은 去下杠孔이 分墨一尺三寸이요 孔長一寸五分이요 廣七分이니 八孔同이라 前後四脚은 廣二寸이요 厚一寸五分이니 形制如象이라 靬長四寸이요 徑面四寸三分이요 孔徑中三脚杠은 長二尺一寸이요 廣一寸五分이요 厚一寸四分이라 靬은 居言反이니 弓衣也라】하야 運米集斜谷口하야 治斜谷邸閣하고 息民休士하야 三年而後用之하다

建興 11년(계축 233) - 魏나라 靑龍 元年이요, 吳나라 嘉禾 2년이다. -

丞相諸葛亮이 농사를 권장하고 무예를 강마하며 木牛와 流馬【諸葛武侯가 出兵하여 祁山에 이르러서 처음에는 木牛를 이용하여 군수품을 운반하였고 뒤에는 斜谷으로 진출하여 流馬로 운반하였다. 杜氏(杜佑)의 ≪通典≫ 註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諸葛亮集≫을 살펴보면 군대를 감독하던 廖立‧杜叡‧胡忠 등이 諸葛亮의 뜻을 미루어 木牛와 流馬를 만들었다. 木牛를 만드는 방법은 배부분은 네모나고 다리는 굽게 만들었으며 한 다리에 네 개의 발이 있는데 머리는 목 속으로 들어가 있고 혀는 배에 붙어 있으니, 짐은 많이 실을 수 있으나 속도는 느리다. 혼자 갈 때에는 수십 리를 가고 무리 지어 갈 때에는 20리를 간다. 구부러진 것은 木牛의 머리가 되고 한 쌍인 것은 木牛의 다리가 되며, 가로로 된 것은 木牛의 목이 되고 도는 것은 木牛의 발이 되며, 덮여 있는 것은 木牛의 등이 되고 네모난 것은 木牛의 배가 되며, 드리워져 있는 것은 木牛의 혀가 되고 굽은 것은 木牛의 갈빗대가 되며, 뾰족한 것은 木牛의 이가 되고 서 있는 것은 木牛의 뿔이 되며, 가는 것은 木牛의 고삐가 되고 쥐는 것은 木牛의 鞦軸(소의 꼬리에 거는 끈)이 된다. 木牛는 두 개의 멍에를 우러러보는 바, 사람은 1步에 6尺을 가는데 소는 4步를 가니 이것을 이용하면 사람은 크게 피로하지 않고 木牛는 먹이를 먹지 않아 편리하다.” 流馬를 만드는 방법과 치수는 다음과 같다. “갈빗대는 길이는 3尺 5寸이고 너비는 3寸이며 두께는 2寸 2分으로 좌우가 같다. 앞 軸(수레바퀴의 한가운데 끼는 굴대)의 구멍은 分墨이 머리까지는 4寸이며 지름은 2寸이다. 앞다리의 구멍은 分墨이 머리까지 2寸이니 앞 軸의 구멍과는 4寸 5分이며 너비는 1寸이다. 앞부분의 杠(車蓋의 밑 테두리)의 구멍은 앞다리의 구멍과는 分墨이 2寸 7分이고 구멍의 길이는 2寸이며 너비는 1寸이다. 뒤 軸의 구멍은 앞부분의 杠의 구멍과는 分墨이 1尺 5寸이며 크기는 앞부분과 같다. 뒷다리의 구멍은 分墨이 뒤 軸의 구멍과는 3寸 9分이며 크기는 앞부분과 같다. 뒷부분의 杠의 구멍은 뒷다리의 구멍과는 分墨이 2寸 7分이고 뒷부분의 물건 싣는 곳에서 뒷부분의 杠의 구멍과는 分墨이 4寸 5分이다. 앞부분의 杠은 길이는 1尺 8寸이고 너비는 2寸이며 두께는 1寸 5分이다. 뒷부분의 杠도 이와 같다. 판자 사방에 주머니 2개를 다는데, 두께는 8分이고 길이는 2尺 7寸이고 높이는 1尺 6寸 5分이고 너비는 1尺 6寸이니, 주머니마다 쌀 2斛 3斗를 담을 수 있다. 윗부분의 杠에 난 구멍에서 갈빗대 아래까지는 7寸이니, 앞뒤가 모두 같다. 윗부분의 杠의 구멍에서 아랫부분에 난 杠의 구멍까지는 分墨이 1尺 3寸이고 구멍의 길이는 1寸 5分이며 너비는 7分인데, 8개의 구멍이 똑같다. 앞뒤로 4개의 다리가 있는데 너비는 2寸이고 두께는 1寸 5分이니 그 모양은 코끼리와 같으며, 활집 전대의 길이는 4寸이고 지름은 4寸 3分이며 구멍의 지름에는 3개의 杠이 있는데 길이는 2尺 1寸이고 너비는 1寸 5分이며 두께는 1寸 4分이다. 靬은 음이 居言反(건)이니, 활집이다.”】를 만들어 쌀을 운반하여斜谷 어구에 모아서 斜谷의 邸閣(양곡을 보관해 두는 창고)을 수리하고 백성들과 군사들을 쉬게 하여 3년 뒤에야 이들을 동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