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六 晉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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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紀

世祖武皇帝

世祖武皇帝 名炎이 姓司馬니 懿之孫이요 昭之子라

世祖武【威彊敵德曰武라】皇帝 名이요 姓司馬之孫이요 之子라 世執魏政이라가 取之於魏라 在位一十一年이요 壽五十五라

世祖[[武[頭註]武위엄 있고 굳세어 德이 있는 자와 맞설 수 있는 것을 武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성이 司馬이니, 司馬懿의 손자이고 司馬昭의 아들이다. 대대로 魏나라의 정권을 쥐고 있다가 魏나라에게서 탈취하였다.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55세이다.

[庚子]太康元年

[庚子]太康元年이라

正月에 杜預는 向江陵하고 王渾은 出橫江하야 攻吳鎭, 戍【戍는 守邊也라】하니 所向皆克이라 吳人이 於江磧【磧은 水渚有石이라】要害之處에 竝以鐵鎖橫截之하고 又作鐵錐【錐는 鋒芒銳者라】하니 長이 丈餘라 暗置江中하야 以逆拒舟艦이러니 이 作大筏【筏은 編竹爲之하니 簟筏也라】數十하니 方이 百餘步라 縛草爲人하야 被甲持杖하고 令善水者로 以筏先行이라가 遇鐵錐면 錐輒著筏【著은 置也라】而去하고 又作大炬하니 長이 十餘丈이요 大數十圍라 以麻油하야 在船前이라가 遇鎖면 然(燃)炬燒之하니 須臾에 融液【融은 焮氣上出也요 液은 流膏也라】斷絶이라 於是에 船無所礙러라 庚申에 이 克西陵하고 壬戌에 克荊門【今江陵府荊門州니 漢之南郡의 當陽, 編都二縣이 皆荊門地라 有荊門山이 在夷陵縣江南岸하니 其山對起如門하고 上合下開하야 與江北岸虎牙山相對하니라】, 夷道二城하다 杜預遣(衙)[牙]門【古者에 軍行有牙하니 尊者所在러니 後人이 因以所治爲(衙)[牙]하고 曰(衙)[牙]門者는 謂牙之門也라 韻會에 牙는 旗名이니 以象牙로 飾其旗竿하야 立於帳前하고 謂之牙門이라】周旨等하야 帥騎八百하고 汎船夜渡江하야 襲樂鄕하고 多張旗幟하고 起火巴山【在歸州巴東縣이라】하니 吳都督孫歆이 懼曰 北來諸軍이 乃飛渡江也라하더라 乙丑에 杜預進攻江陵克之하니 於是에 沅, 湘【沅水는 出象郡潭城西하야 (都)[東]注于江하야 合洞庭中하고 湘水는 出零陵郡始安縣陽海山하야 東入洞庭下라】以南으로 接于交廣【交廣은 卽今廣州也라】히 州郡이 皆望風送印綬어늘 預杖節稱詔而綏撫之하다

太康 元年(경자 280)

정월에 杜預는 江陵으로 향하고 王渾은 橫江으로 출동하여 吳나라 鎭과 戍(변방의 요새)【戍는 변방을 지키는 것이다.】를 공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吳나라 사람이 長江의 자갈이 깔린 여울【磧은 물가에 돌이 있는 것이다.】의 요해처를 모두 쇠사슬로 가로막고, 또 길이가 한 길이 넘는 쇠몽둥이【錐는 끝이 뾰족한 것이다.】를 만들어서 몰래 강물 속에 설치하여 舟艦을 대비하였다. 王濬이 넓이가 사방 백여 보쯤 되는 큰 뗏목【筏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이니, 뗏목이다.】 수십 척을 만들어서 풀을 묶어 인형을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쥐게 하고는 헤엄을 잘 치는 자로 하여금 뗏목을 타고 먼저 가다가 쇠몽둥이가 있는 곳에 이르면 몽둥이가 그때마다 뗏목에 걸리게【著은 둠이다.】 하여 제거하였으며, 또 길이가 십여 丈이고 크기가 수십 圍나 되는 큰 횃불을 만들어 여기에 삼씨기름을 부어 船團 앞에 놓아두었다가 쇠사슬을 쳐 놓은 곳에 이르면 횃불에 불을 붙여 태우니, 삽시간에 쇠사슬이 녹아 끊어졌다.【融은 뜨거운 기운이 위로 나오는 것이고, 液은 녹아 흘러내리는 것이다.】 이에 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어졌다.

庚申日(3일)에 王濬이 西陵을 함락하고, 壬戌日(5일)에 荊門【荊門은 지금의 江陵府 荊門州이니, 漢나라 南郡의 當陽과 編都 두 현은 모두 荊門 땅이다. 荊門山이 夷陵縣의 江 南岸에 있으니, 산이 마주 보고 우뚝 솟아 문과 같으며, 위는 합하고 아래는 열려서 江 北岸의 虎牙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과 夷道 두 성을 함락하였다. 杜預가 牙門【옛날에 군대가 출동할 때에는 牙旗가 있었으니 〈牙旗를 세워〉 높은 분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後人들이 인하여 일을 다스리는 곳을 牙라 하고 牙門이라 한 것은 牙旗를 세운 軍門을 이른다. ≪韻會≫에 “牙는 旗의 이름이니 상아로 깃대를 장식하여 휘장 앞에 세우고 이것을 牙門이라 한다.” 하였다.】周旨 등을 보내어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밤에 강을 건너 樂鄕을 습격하여 깃발을 많이 진열하고 巴山【巴山은 歸州 巴東縣에 있다.】에 불을 놓으니, 吳나라 都督孫歆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북쪽에서 온 여러 군대가 마침내 나는 것처럼 강을 건넜다.” 하였다. 乙丑日(8일)에 杜預가 江陵으로 進擊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沅水‧湘水【沅水는 象郡 潭城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揚子江으로 들어가서 洞庭湖 가운데에서 합류하고, 湘水는 零陵郡 始安縣 陽海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洞庭湖 아래로 들어간다.】 이남으로부터 廣州【交廣은 바로 지금의 廣州이다.】에 이르기까지 州郡들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투항하여 印綬를 보내오니, 杜預가 節을 잡고 王命이라 칭하며 그들을 편안히 위무하였다.

杜預與衆軍會議할새 或曰 百年之寇를 未可盡克이니 方春水生하야 難於久駐라 宜候來冬하야 更爲大擧라하야늘 曰 昔에 樂毅藉濟西【藉는 借也라[頭註]樂毅는 燕將也니 見一卷丙子年이라】一戰하야 以幷彊齊하니 今兵威已振하야 譬如破竹이라 數節之後에는 皆迎刃而解하야 無復着手處也라하고 遂指授群帥方略하고 徑造【造는 進也라】建業하다 吳主使丞相張悌等으로 帥衆三萬하야 渡江逆戰이라가 大敗하다 王濬이 至西陵하니 杜預與之書曰 足下旣摧其西藩하니 便當徑取建業하야 討累世之逋寇하고 釋吳人於塗炭하고 振旅【振은 止也니 言戰罷而止其衆以入也라】還都면 亦曠世一事【言歷世所曠見之事也라】也니라 이 大悅【初에 詔濬下建平하야 受杜預節度하고 至建業하야 受王渾節度러니 濬至西陵한대 預曰 已得建平이면 則威名已著하니 不宜受制於我라하고 遂與書曰 云云하니 濬이 大悅하니라】하야 自武昌順流하야 徑趣(趨)建業하다 吳主遣游擊將軍張象하야 帥舟師萬人하야 禦之러니 衆이 望旗而降이라 이 兵甲滿江하고 旌旗燭天【燭은 王濬傳에 作蜀이라】하야 威勢甚盛이어늘 吳人이 大懼하야 分遣使者하야 奉書於, , 王渾, 王濬, 琅琊王伷라】하야 以請降하다 壬寅에 王濬의 舟師過三山【太平州繁昌縣東北四十里에 有三山磯하니 下流 去(無)[蕪]湖縣二十五里라】할새 王渾이 遣信要濬【信은 卽信使요 要는 與邀通이라】하야 暫過論事【詔王濬하야 受王渾節度어늘 而惡其不受하고 且忌先其功也라 故로 欲留之라】한대 이 擧帆直指建業하고 報曰 風利하야 不得泊也라하니라 是日에 이 戎卒八萬이요 方舟百里라 鼓譟入于石頭【譟는 群呼也라 石頭는 城名이니 在金陵하니라】하니 吳主面縛輿櫬【注見漢帝禪炎興元年注하니라[頭註]輿는 共擧也요 櫬은 空棺也니 輿棺從之者는 示其將受死라】하고 詣軍門降하다

杜預가 여러 군사들과 모여서 의논할 적에 혹자가 말하기를 “백년의 역사를 지닌 오랑캐를 전부 이길 수는 없습니다. 현재 봄물이 불어나서 오래 주둔하기가 어려우니, 겨울을 기다려서 다시 크게 쳐들어와야 합니다.” 하니, 杜預가 말하기를 “옛날 樂毅濟西의 一戰을 빌려서【[原註]藉는 빌림이다.[頭註]樂毅는 燕나라 장수이니, 앞의 1권 丙子年條(B.C.285)에 보인다.】 강한 齊나라를 겸병하였다. 지금 우리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져서 비유하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으니, 몇 마디를 쪼갠 뒤에는 그 나머지는 모두 칼날이 닿는 대로 저절로 쪼개져서 다시는 손쓸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하고는 마침내 여러 장수들에게 方略을 지시하고 곧바로 建業(建康)으로 나아갔다.【造는 나아감이다.】

吳나라 군주가 丞相張悌 등으로 하여금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적을 맞이하여 싸우게 하였는데, 대패하였다. 王濬이 西陵에 이르자, 杜預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足下가 이미 적의 서쪽 울타리(西陵)를 꺾었으니, 마땅히 곧바로 建業을 취하여 여러 대를 두고 멀리 도망해 있던 도둑을 토벌하고 吳나라 사람들을 도탄에서 구출한 다음 군대를 정돈하여【振은 그침이니, 전쟁이 끝나고 군사를 거두어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도성으로 돌아온다면 이 또한 세상에 드문 훌륭한 한 가지 일【역대에 보기 드문 일을 말한다.】일 것이다.” 하니, 王濬이 크게 기뻐하여【처음에 황제가 王濬에게 명하여 建平을 함락시키고 나서 杜預의 節度(지휘)를 받게 하고, 建業에 이르러서는 王渾의 節度를 받게 하였는데, 王濬이 西陵에 이르자 杜預가 말하기를 “이미 建平을 얻었으면 위엄과 명망이 이미 드러난 것이니, 나에게 통제를 받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는 마침내 편지를 보내어 이리이리 말하니, 王濬이 크게 기뻐하였다.】武昌으로부터 강물을 따라 곧바로 建業으로 진출하였다. 吳나라 군주가 游擊將軍張象을 보내어 舟師(水軍) 만 명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張象의 무리가 적의 깃발만 바라보고도 투항하였다. 王濬의 병기와 갑옷이 강에 가득하고 깃발이 하늘을 찔러【燭은 〈王濬傳〉에 蜀으로 되어 있다.】 위세가 매우 대단하니, 吳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使者를 나누어 보내어 王渾王濬琅琊王司馬伷【渾‧濬‧伷는 王渾‧王濬‧琅琊王 司馬伷이다.】에게 항복 문서를 바치고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壬寅日(3월 15일)에 王濬의 水軍이 三山【太平州 繁昌縣 동북쪽으로 40리 지점에 三山磯가 있으니, 下流는 蕪湖縣에서 25리 떨어져 있다.】을 지나갈 때에 王渾王濬에게 使者를 보내어【信은 곧 소식을 전달하는 使者이고, 要는 邀와 통한다.】 잠시 들러 일을 의논하자고 하였는데,【황제가 王濬에게 명하여 王渾의 節度(지휘)를 받게 하였는데, 王渾은 王濬이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음을 미워하였고, 또 王濬의 공이 자기보다 앞설까 꺼렸기 때문에 王濬을 지체시키고자 한 것이다.】王濬이 돛을 올려 곧장 建業으로 향하고는 답하기를 “바람의 기세가 빨라서 배를 멈출 수가 없다.” 하였다. 이날 王濬은 병력이 8만 명이고 배들이 백 리에 길게 뻗쳐 있었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石頭城에 들어가니,【譟는 여럿이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石頭는 城의 이름이니 金陵에 있다.】吳나라 군주 孫皓가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하고서 관을 수레에 싣고【[釋義]面縛輿櫬은 注가 蜀漢 帝禪 炎興 元年(263)의 注에 보인다.[頭註]輿는 함께 드는 것이고 櫬은 빈 관이니, 빈 관을 함께 들고 따라가는 것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 軍門에 나와서 항복하였다.

右吳는 四主에 共五十九年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吳自孫堅으로 始擧兵於江東하야 破張角, 誅區星하니 勇鷙剛果가 當時鮮及이라 觀其導溫戮卓하고 不許和親하며 汛掃陵寢하고 平塞發掘하니 可謂壯矣러니 其後에 爲善不終하야 受袁術所使하야 以擊劉表라가 卒斃於矢下하야 不死於勤王而死於助하니 惜哉라 孫策은 以童子로 〈提〉一旅之衆하야 揮馬箠以下江東한대 耆儒宿將이 狼狽失據하야 開地千里하니 眞奇才也라 然이나 輕躁好殺하야 卒殞其身이라 孫權은 席父兄之烈하고 師友忠賢하야 以成前志하고 赤壁之役에 決志定策하야 以摧大敵하니 非明而有勇이면 能若是乎아 奄有荊揚하고 薄(迫)於南海하야 傳祚累世 宜矣로다 惜乎라 見義不明하고 守節不謹하야 今年에 臣于操하고 明年에 降于魏하며 今年에 受之命하야 領荊州하고 明年에 受魏之封하야 爲吳王하야 不能討賊而甘心助賊하고 不能仗義而甘心不義하니 其得保一隅 幸也로다 孫亮은 以童孺之資로 乏賢哲之輔하야 輕淺果銳하고 爲謀太疎하니 其替位不終은 理所必然이요 休는 以宿愛舊恩으로 任用, 하고 不能拔進賢才하야 改絃易轍하니 雖尙辭好學이나 何捄亂亡이리오 孫皓는 天性凶頑하고 肆行殘虐하야 忠諫者誅하고 讒諛者進하야 公卿大臣이 頸血相濺하고 虐用其民하야 窮奢溢侈하니 欲求不亡이나 得乎아 迹吳之爲國하면 自據一方으로 旣無存漢之心하고 又無呑魏之謀하야 上不係於漢祚之存亡하고 下無關於曹魏之强弱하니 尙奚論焉이리오 君子謂曹氏爲漢賊이요 不知孫氏眞漢賊耳라 先主孔明이 正做得好時라가 又爲其壞了라하니 嗚呼라 其知言乎인저

歷年圖曰 破虜堅은 以孤遠之兵으로 決忠憤之志하야 首犯賊鋒하고 深蹂【音柔니 踐也라】洛川하야 汛掃【汛은 音信이니 灑也라】陵寢하니 有足多者라 討逆【策爲討逆將軍이라】策은 以童子로 提一旅【五人爲伍, 五伍爲兩, 四兩爲卒, 五卒爲旅니 五百人也요 五旅爲師, 五師爲軍이니 萬人也라】之衆하야 揮馬箠以下江東한대 耆儒宿將【宿은 素也라】이 狼狽【狼은 前則跋其胡하고 退則疐其尾라 狽는 狼屬이라 又狽前足絶短하야 每行에 常駕狼하니 失狼則不能動이라 故世言事乖者를 稱狼狽라】失據하야 開地千里하니 眞英才也라 大帝【孫權이라】는 承父兄之烈하고 師友忠賢하야 以成前志하고 赤壁之役에 決策定慮하야 以摧大敵하니 非明而有勇이면 能如是乎아 奄有荊揚하야 薄于南海【薄은 迫也니 迫近之義라】하야 傳祚累世가 宜矣라 候官, 景帝【候官은 亮也니 爲候官侯하니 見二十五卷戊寅年會稽王注라 景帝는 休也라】는 皆明(惠)[慧]敢決하야 有先世之風하고 歸命【皓也라】은 驕愎殘虐이 深於, 하니 求欲不亡이나 得乎아

이상 吳나라는 네 군주에 모두 59년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吳나라는 孫堅으로부터 江東에서 처음 군대를 일으켜 張角을 격파하고 區星을 주벌하니, 용맹함과 과단성이 당시에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살펴보건대 張溫을 인도하여 董卓을 죽이려 하고 和親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陵寢을 깨끗이 소제하고 發掘한 것을 메워서 평평하게 하였으니, 훌륭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끝을 잘 마치지 못하여 袁術의 사주를 받고 劉表를 공격하다가 마침내 싸움터에서 죽어서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데에 죽지 않고 桀王을 돕다가 죽었으니, 애석하다.

孫策은 童子로서 1旅(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말채찍을 휘둘러 江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늙은 선비와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 낭패하고 거점을 잃어서 땅을 천 리나 개척하였으니, 참으로 奇才였다. 그러나 경솔하고 조급해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마침내 자기 몸을 죽였다.

孫權은 父兄의 공렬을 밑바탕으로 삼고는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스승 삼고 벗 삼아 前代의 뜻을 이룩하였으며, 赤壁의 전투에서 굳게 마음 먹고 계책을 정하여 큰 적(曹操)을 꺾었으니, 총명하고 용맹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곧바로 荊州와 揚州 지역을 소유하고 南海에 이르러서 國運을 여러 대에 전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애석하다. 義를 봄이 분명하지 못하고 절개를 지킴이 신중하지 못하여, 금년에는 曹操에게 신하 노릇 하고 다음 해에는 魏나라에 항복하였으며 금년에는 曹操의 명령을 받아 荊州를 영솔하고 다음 해에는 魏나라의 封함을 받고 吳王이 되어서, 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기꺼이 賊을 도와주며 義를 지키지 못하고 不義를 마음에 달게 여겼으니, 江東 한 모퉁이를 보전한 것만 해도 다행이다.

孫亮은 어린아이의 자질로 賢哲의 보좌가 없어서, 경솔하고 얕고 과감하고 날카로우며 도모하는 것이 너무 엉성하니, 왕위를 내주고 끝마치지 못함은 이치상 필연적인 것이었다. 孫休는 예전의 친애함과 지난날의 은혜로 濮陽興張布를 임용하였으며 賢才를 발탁 등용하여 禮樂과 制度를 고치지 못하였으니, 비록 文章을 숭상하고 學問을 좋아하였으나 어찌 국가의 혼란과 멸망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孫皓는 天性이 흉악하며 殘虐한 짓을 제멋대로 행하여 충성스럽게 간하는 자를 죽이고 아첨하는 자를 올려 주어서 公卿과 大臣이 목의 피를 서로 뿌렸으며 백성들을 학대하여 극도로 사치하였으니, 망하지 않기를 바라나 될 수 있었겠는가.

吳나라가 나라를 다스린 자취를 살펴보면 한쪽 지방을 점거한 뒤로부터 이미 漢나라를 보전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또 魏나라를 倂呑하려는 계책도 없어서, 위로는 漢나라의 存亡에 관계치 않고 아래로는 曹魏의 强弱에 상관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君子가 이르기를 ‘曹氏는 漢나라의 賊이었지만 孫氏야말로 참으로 漢나라의 賊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先主(劉備)諸葛孔明이 마침 좋은 기회를 만들었다가 또 이 때문에 무너졌다.’라고 하였으니, 아! 진리를 아는 말이라 하겠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破虜將軍孫堅은 고립되고 멀리 떠나온 군대로써 忠憤의 뜻을 결단하여 맨 먼저 적의 예봉을 범하고 洛川을 깊이 유린【蹂는 음이 유이니, 짓밟는 것이다.】해서 陵寢을 깨끗이 소제【汛은 음이 신이니, 물을 뿌리는 것이다.】하였으니, 훌륭한 점이 있었다. 討逆將軍 孫策【孫策이 討逆將軍이 되었다.】은 童子로서 1旅【5명을 伍라 하고 5伍를 兩이라 하고 4兩을 卒이라 하고 5卒을 旅라 하니 1旅는 500명이요, 5旅를 師라 하고 5師를 軍이라 하니 1軍은 만 명이다.】의 군대를 이끌고 말채찍을 휘둘러 江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늙은 선비와 경험이 풍부한 장수【宿은 素이다.】가 낭패【狼은 〈턱 밑에 늘어진 살이 있어서〉 앞으로 가면 턱살이 밟혀 넘어지고 뒤로 가면 꼬리가 밟혀 넘어진다. 狽는 狼의 등속이다. 또 狽는 앞발이 짧아서 매번 다닐 때마다 항상 狼을 타고 다니니, 狼을 잃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이 어긋나는 것을 말할 때에 狼狽라고 칭한다.】하고 거점을 잃어서 땅을 천 리나 개척하였으니, 참으로 英才였다. 大帝 孫權【大帝는 孫權이다.】은 父兄의 공렬을 이어받고는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스승 삼고 벗 삼아 前代의 뜻을 이룩하였으며, 赤壁의 전투에서 방책을 결정하여 강한 적(曹操)을 꺾었으니, 총명하고 용맹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곧바로 荊州와 揚州 지역을 소유하고 南海에 이르러서【薄은 닥침이니, 매우 가깝다는 뜻이다.】 國運을 여러 대에 전한 것이 당연하다. 候官侯孫亮景帝孫休【[頭註]候官 景帝:候官은 孫亮이니, 候官侯가 된 것이 25권 戊寅年(258) 會稽王의 注에 보인다. 景帝는 孫休이다.】는 모두 밝고 지혜롭고 과감하게 결단하여 先代의 유풍이 있었고, 歸命侯 孫皓【歸命侯는 孫皓이다.】는 교만하고 괴팍하고 잔악함이 보다도 심하였으니, 망하지 않기를 구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四月에 詔賜孫皓爵歸命侯하다

4월에 황제가 명하여 孫皓에게 歸命侯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 五月에 引見歸命侯한대 登殿稽顙이어늘 帝謂曰 朕設此座하야 以待卿이 久矣로라 曰 臣於南方에 亦設此座하야 以待陛下러이다 賈充이 謂曰 聞君在南方하야 鑿人目하고 剝人面皮라하니 此何等刑也오 曰 人臣이 有弑其君【充弑高貴鄕公髦하니 見上卷庚辰年이라】하고 及姦回不忠者면 則加此刑耳니라 이 黙然甚愧러라

○ 5월에 歸命侯孫皓를 인견하였는데, 孫皓가 殿閣에 올라와 머리를 조아리자, 황제가 孫皓에게 이르기를 “朕이 이 자리를 마련하고서 卿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다.” 하니, 孫皓가 말하기를 “신도 역시 南方에서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고서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하였다. 賈充孫皓에게 이르기를 “듣자하니, 그대가 남방에 있을 적에 사람의 눈을 파내고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겼다 하니, 이것이 무슨 형벌인가?” 하자, 孫皓가 말하기를 “신하로서 자기 군주를 시해하고【賈充이 高貴鄕公 曹髦를 시해하였으니, 이 사실이 25권 庚辰年條(260)에 보인다.】 간사하여 불충한 자가 있으면 이 형벌을 가했다.” 하니, 賈充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王濬之入建業也에 其明日에 王渾이 乃濟江하야 以不待己至하고 先受孫皓降이라하야 意甚愧忿하야 將攻이러니 何攀이 勸하야 送하니 由是로 事得解하니라 이 與爭功이라 이 表違詔하고 不受節度【見上論事注하니라】라하야 誣以罪狀하고 渾子常山公主【(文帝昭)[武帝炎]之女也라 尙은 奉也니 奉事公主也요 又尙者는 尊也니 帝王之女를 尊而尙之하야 不敢斥言娶라 天子之女曰公主니 周制에 天子嫁女에 不自主하고 使諸侯同姓者主之라 故謂之公主라 帝姊妹를 爲長公主요 姑爲大長公主라】하야 宗黨이 强盛이라 有司奏請檻車徵이어늘 帝不許하다 王濬이 自以功大어늘 而爲父子及黨與의 所挫抑이라하야 每進見에 陳其攻伐之勞와 及見枉之狀하고 或不勝忿憤하야 徑出不辭호되 帝每容恕之하니라 益州護軍范通이 謂曰 卿이 功則美矣나 然恨所以居美者 未盡善也로다 卿이 旋旆之日에 角巾【以葛爲之하니 居士野人之服也라】私第하야 口不言平吳之事하고 若有問者어든 輒曰 聖主之德이요 群帥之力이니 老夫何力之有리오하면 此는 藺生이 所以屈廉頗【藺生, 廉頗는 事見周赧王三十六年하니라】王渾이 能無愧乎아 曰 吾始懲鄧艾之事【事見漢帝禪炎興元年하니라】하야 懼禍及身하니 不得無言이어니와 其終不能遣諸胸中은 是吾褊也【褊은 小也라】니라 時人이 咸以功重報輕이라하야 爲之憤邑【憤은 懣也요 邑은 本作悒하니 憂也라】이어늘 博士秦秀等이 上表하야 訟之屈한대 帝乃遷鎭軍大將軍하다

王濬이 建業으로 들어간 그 다음 날에 王渾이 마침내 강을 건너와서, 王濬이 자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孫皓의 항복을 받았다 하여 마음속으로 몹시 부끄러워하고 분히 여겨 장차 王濬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何攀王濬에게 권하여 孫皓王渾에게 보내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일의 실마리가 풀렸다. 王渾王濬과 공을 다툴 때에 王渾이 表文을 올려 王濬이 詔命을 어기고 節度(지휘)를 받지 않았다【王濬이 王渾의 지휘를 받지 않은 것은 앞의 ‘論事’ 注에 보인다.】 하여 거짓 죄상을 꾸며 誣告하였다. 王渾의 아들王濟常山公主에게 장가들어【常山公主는 武帝 司馬炎의 딸이다. 尙은 받듦이니 공주를 받들어 섬긴다는 뜻이요, 또 尙은 높임이니 帝王의 딸을 높여서 감히 장가든다고 指斥하여 말하지 못한 것이다. 天子의 딸을 公主라 하니, 周나라 제도에 天子가 딸을 시집보낼 때에 직접 주관하지 않고 同姓인 諸侯로 하여금 혼인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公主라 이른 것이다. 帝王의 자매를 長公主라 하고, 고모를 大長公主라 한다.】 宗黨(친족)이 매우 강성하였는데, 有司가 檻車로 王濬을 소환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王濬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공이 큰데도 王渾 父子와 그들의 도당에게 꺾이고 눌린다.’ 하여 매번 나아가 황제를 뵐 때마다 자신이 정벌한 공로와 억울한 情狀을 아뢰었으며, 때로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 곧바로 나오고 황제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지 않았으나 황제가 매번 용서하였다.

益州護軍范通王濬에게 이르기를 “卿이 공은 훌륭한데 훌륭한 공에 자처하는 방법이 지극히 선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卿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던 날에 私邸로 돌아와서 角巾【角巾은 葛布로 만드니, 居士와 野人의 복장이다.】을 쓰고 입으로 吳나라를 평정한 일을 말하지 않고 만일 묻는 자가 있거든 그때마다 말하기를 ‘聖主의 德이요 여러 장수의 힘이니, 늙은 지아비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했다면, 이는 옛날 藺生(藺相如)廉頗를 굴복시킨 방법이니,【藺生과 廉頗의 일은 周 赧王 36年條(B.C.279)에 보인다.】王渾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王濬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鄧艾의 일【鄧艾의 일은 蜀漢 帝禪 炎興 元年條(263)에 보인다.】을 징계하여 화가 몸에 미칠까 두려워하여 변명하는 말이 없을 수 없었으나 끝내 이것을 가슴속에서 잊어버리지 못함은 나의 도량이 편협한【褊은 작음이다.】 것이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王濬은 공로가 큰데 보답이 가볍다 하여 이 때문에 분해 하고 근심하였다.【憤은 분개하는 것이요, 邑은 본래 悒으로 쓰니 근심함이다.】博士秦秀 등이 表文을 올려 王濬의 억울함을 말하자, 황제가 마침내 王濬을 鎭軍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

杜預還襄陽하야 以爲天下雖安이나 忘戰必危라하야 乃勤於講武하고 申嚴戍守하다 身不跨馬하고 射不穿札【言〈射〉無力也라 或云 札은 甲也라】호되 而用兵制勝은 諸將이 莫及이러라

杜預가 襄陽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천하가 비록 안정되었으나 전쟁의 대비를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하여 마침내 무예를 강마함에 힘쓰고 변경의 수비를 거듭 엄하게 하였다. 杜預는 직접 말을 타지 않았으며 활을 쏨에 힘이 없어 화살이 갑옷의 葉片을 뚫지 못하였으나【활을 쏨에 화살이 갑옷을 뚫지 못하였다는 것은 활을 쏨에 힘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札은 갑옷이다.” 하였다.】 군대를 운용하여 승리하는 것은 諸將이 미치지 못하였다.

○ 詔曰 昔在漢末에 四海分崩하야 刺史內親民事하고 外領兵馬러니 今天下爲一하니 當韜戢干戈【韜, 戢은 皆藏也라】라 刺史分職을 皆如漢氏故事하야 悉去州郡兵하고 大郡에 置武吏百人하고 小郡에 五十人하라 交州牧陶璜이 上言호되 州兵을 未宜約損하야 以示單虛니이다 僕射山濤 亦言不宜去州郡武備라호되 帝不聽이러니 及永寧【惠帝年號라】以後에 盜賊群起에 州郡無備하야 不能禽制【禽은 擒也니 言鳥力少하야 可擒捉而取之라】하야 天下遂大亂하야 如所言이라 然이나 其後에 刺史復兼兵民之政하니 州鎭이 愈重矣러라

○ 詔에 이르기를 “과거 漢나라 말기에 온 천하가 분열되어 刺史가 안에서는 백성의 일을 직접 처리하고 밖에서는 兵馬를 통솔하였는데, 지금은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창과 방패를 거두어 깊이 간직【韜와 戢은 모두 감춤이다.】해야 한다. 刺史의 직책을 모두 漢나라의 故事와 같이 하여 州郡의 병력을 다 제거하고, 큰 郡에는 武吏 100명, 작은 郡에는 50명을 두라.” 하였다. 交州牧陶璜이 上言하기를 “州의 병력을 줄여서 미약하고 비어 있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尙書僕射山濤 또한 州郡의 武備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永寧【永寧은 晉나라 惠帝의 年號이다.】 이후로 도적들이 떼 지어 일어났는데, 州郡에 武備가 없어서 도적들을 사로잡아 제어【禽은 사로잡는 것이니, 새는 힘이 부족하여 산 채로 잡아서 취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하지 못하니, 천하가 마침내 크게 혼란해져서 山濤가 말한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뒤에 刺史가 다시 軍政과 民政을 겸하니, 州鎭의 지위가 더욱 중요해졌다.

○ 漢, 魏以來로 羌【羌在西方이라 本牧羊人이니 三苗는 羌氏之別裔라】, 胡, 鮮卑【本山名이니 東胡之別種이러니 因退保此山하고 遂以爲號하니라[頭註]其先東胡이니 漢初에 爲匈奴所敗하야 保鮮卑山하고 因以爲號하니라】降者를 多處之塞內諸郡이러니 其後에 數因忿恨하야 殺害長吏하야 漸爲民患이라 侍御史郭欽이 上疏曰 戎狄이 彊獷【彊은 暴橫也요 獷은 若犬之獷獷하야 不可附也라】하야 歷古爲患하니 宜及平吳之威와 謀臣猛將之略하야 漸徙內郡雜胡【謂戎狄之在塞內諸郡者 雜居不一이라】於邊地하야 峻四夷出入之防하고 明先王荒服【見下要荒註하니 服은 從天子之事라】之制면 此는 萬世之長策也니이다 帝不聽하다

[新增]養心吳氏曰 觀漢魏居戎於內郡하면 便當知五胡【漢劉淵은 字元海니 匈奴也라 漢高以宗女爲公主하야 以妻冒頓故로 其子孫이 遂冒姓劉氏하니라 後趙石勒은 羯也요 前燕慕容廆는 鮮卑也요 前秦苻洪은 氐也요 後秦姚弋仲은 羌也라】之亂所由始요 觀郭欽之疏不行하면 便當知五胡之亂所以不可制也니라

○ 漢‧魏 이래로 羌族【羌은 西方에 있다. 본래 양을 치던 사람이니, 三苗는 羌氏의 別裔이다.】‧胡族‧鮮卑族【[釋義]鮮卑는 본래 산 이름이니 東胡의 別種이었는데, 인하여 물러가 이 산을 확보하고 마침내 칭호로 삼았다.[頭註]선조는 東胡이니, 漢나라 初에 匈奴에게 패배당하여 물러가 鮮卑山을 확보하고 인하여 이로써 칭호를 삼았다.】 중에 항복한 자들을 대부분 변방(만리장성) 안의 여러 郡에 살게 하였는데, 그 후에 여러 차례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서 長吏를 살해하여 점점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侍御史郭欽이 상소하기를 “戎狄이 거칠고 사나워서【彊은 포악하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요, 獷은 개처럼 제멋대로 날뛰어서 따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근심이 되었으니, 吳나라를 평정한 위엄과 謀臣과 猛將들의 지략을 가지고 內地의 郡縣에 있는 여러 오랑캐들【雜胡는 변방 안의 여러 郡에 있는 오랑캐들이 섞여 살아서 한 종류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을 차츰 변방으로 옮겨서, 사방 오랑캐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防岸(禁令)을 엄격하게 하고 先王의 荒服【荒服은 설명이 뒤의 ‘要荒’ 註에 보이니, 服은 天子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을 다스리던 제도를 분명하게 한다면 이는 만대토록 이어질 장구한 계책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漢나라와 魏나라가 오랑캐들을 內地의 郡縣에 살게 한 것을 보면 五胡【漢나라(五胡十六國의 前趙) 劉淵은 字가 元海이니 匈奴이다. 漢나라 高祖가 종실의 딸을 公主라 하여 冒頓(묵특)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마침내 가탁하여 劉氏를 姓으로 삼은 것이다. 後趙의 石勒은 羯族이고 前燕의 慕容廆는 鮮卑族이고 前秦의 苻洪은 氐族이고 後秦의 姚弋仲은 羌族이다.】의 亂이 생겨난 이유를 알 수 있고, 郭欽의 상소가 시행되지 않은 것을 보면 五胡의 亂을 제재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辛丑]二年

[辛丑]二年이라

三月에 詔選孫皓宮人五千人하야 入宮하다 帝旣平吳에 頗事遊宴【宴은 與燕通이라】하고 怠於政事하니 掖庭【掖宮은 旁舍也니 如人臂掖也라】이 殆將萬人이라 常乘羊車【晉志에 一名輦車라하니라】하고 恣其所之하야 至便宴寢하니 宮人이 競以竹葉揷戶하고 鹽汁洒(灑)地하야 以引帝車【羊嗜竹葉而喜醎故로 以二者로 引帝車라】하고 而后父楊駿이 始用事하야 交通請謁하니 勢傾內外러라

太康 2년(신축 281)

3월에 명령을 내려 孫皓의 궁녀 5천 명을 선발하여 입궁하게 하였다. 황제가 吳나라를 평정한 뒤에 宴會【宴은 燕과 통한다.】를 일삼고 정사를 태만히 하니, 掖庭【掖宮은 곁에 딸린 방이니, 사람의 팔뚝과 겨드랑이와 같은 것이다.】이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황제가 항상 羊이 끄는 수레【≪晉書≫ 〈輿服志〉에 “羊車는 一名 輦車이다.” 하였다.】를 타고 양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羊이 이르는 곳에서 곧 잔치를 베풀고 머무니, 궁녀들이 다투어 대나무 잎을 문에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서 황제의 수레를 유인하였고,【羊이 대나무 잎을 잘 먹고 짠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로써 황제의 수레를 유인한 것이다.】 황후의 아버지인 楊駿이 처음으로 用事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가서 사사로이 청탁을 하니, 권세가 內外를 휩쓸었다.

[壬寅]三年

[壬寅]三年이라

帝問司隷校尉劉毅曰 朕이 可方漢之何帝오 對曰 , 이니이다 帝曰 何至於此오 對曰 , 은 賣官錢入官庫어니와 陛下는 賣官錢入私門하시니 以此言之컨대 殆不如也니이다 帝大笑曰 , 之世에는 不聞此言이러니 今朕은 有直臣하니 固爲勝之로다

太康 3년(임인 282)

황제가 司隷校尉劉毅에게 묻기를 “짐은 漢나라의 어떤 황제에게 견줄 만한가?” 하니, 劉毅가 대답하기를 “桓帝靈帝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桓帝靈帝는 관직을 판 돈을 國庫에 넣었으나 陛下는 관직을 판 돈을 私家로 들이시니, 이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못 桓帝靈帝만도 못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桓帝靈帝 때에는 이러한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짐은 그대와 같은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진실로 그들보다 낫다.” 하였다.

○ 後將軍【有前, 後將軍하니라】王愷는 文明皇后【帝皇母后라】之弟也요 散騎常侍石崇之子也라 二人이 皆富於財하야 競以奢侈相高할새 는 以★{米+台}【★{米+台}는 米餹이니 卽餳이라】澳澳釜【以水沃釜爲澳이라】하고 은 以蠟代薪하며 는 作紫絲步障【今罣罳也니 以小竹交結爲之하야 衣以布或帛하야 可卷可舒라 韻會에 罣는 音卦니 網이요 罳는 音司니 絲也라 謂織絲之文이 輕疎浮虛之貌니 夾道設之하야 以爲屛障者라】四十里하고 은 作錦步障五十里하며 은 塗屋以椒【以椒和泥塗壁하니 取其溫煖而辟除라】하고 는 用赤石脂【藥名이니 本草에 大溫하니 養心氣라하니라】라 帝每助하야 嘗以珊瑚樹賜之하니 高二尺許라 以示한대 이 便以鐵如意【執之所以供指揮者로 以鐵爲之하니 卽骨朵子라 】로 碎之어늘 怒하야 以爲疾己之寶라하니 曰 不足爲恨이라 今還卿호리라하고 乃令左右로 悉取其家珊瑚【生海中하니 色赤也라】樹하니 高三四尺者六七株요 如比者는 甚衆이러라

○ 後將軍【前將軍과 後將軍이 있다.】王愷는 文明皇后【文明皇后는 武帝의 母后이다.】의 아우이고, 散騎常侍石崇石苞의 아들이다. 두 사람이 모두 재물이 풍족하여 다투어 사치함을 가지고 서로 고저를 비교할 적에 王愷는 米餹【[釋義]以{米+台}:米台는 米餹이니, 바로 엿이다.】으로 솥을 닦고【물을 솥에 붓는 것을 澳이라 한다.】石崇은 밀랍을 장작 대신 사용하였으며, 王愷는 붉은색 명주로 40리 길이의 步障【步障은 지금의 罣罳이니, 작은 대나무를 서로 엮어 만들어 삼베나 비단을 입혀서 말 수도 있고 펼 수도 있는 것이다. ≪韻會≫에 “罣는 음이 괘이니 그물이고 罳는 음이 사(시)이니 실이다. 罣罳는 실로 짠 무늬가 가볍고 성글며 하늘거리는 모양을 이르니, 이것을 길 좌우에 설치하여 병풍으로 삼는 것이다.” 하였다.】을 만들고 石崇은 비단으로 50리 길이의 步障을 만들었으며, 石崇은 집을 산초로 칠하였고【산초를 진흙에 개어 벽에 발랐으니, 기운이 따뜻하며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뜻을 취한 것이다.】王愷는 赤石脂【赤石脂는 藥의 이름이니, ≪證類本草≫에 “매우 따뜻하니, 心氣를 기른다.” 하였다.】를 사용하였다. 황제가 매번 王愷를 도와주어 그에게 일찍이 높이가 두 자가 넘는 珊瑚樹를 하사하였는데, 王愷가 이것을 石崇에게 보여 주니 石崇이 곧 鐵如意【鐵如意는 손에 잡고서 指揮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으로 쇠로써 만드니, 곧 骨朵子이다.】로 이것을 부수었다. 王愷가 노하여 石崇이 자신의 보물을 질투한 것이라고 말하자, 石崇이 말하기를 “족히 한할 것이 없다. 이제 卿에게 돌려주겠다.” 하고는 마침내 좌우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집에 있는 珊瑚【珊瑚는 바다 속에서 나오니, 색깔이 붉다.】樹를 전부 가지고 오게 하니, 높이가 3, 4척에 이르는 것이 6, 7개였고 王愷의 것과 비슷한 것은 아주 많았다.

[甲辰]五年

[甲辰]五年이라

初에 陳群이 以吏部不能審覈天下之士라하야 故令郡國하야 各置中正하고 州置大中正하되 皆取本土之人의 任朝廷官, 德充才盛者로 爲之하야 使銓次【王氏曰 考其才(材)德而等第之를 謂之銓次라 [通鑑要解]取本土之人의 見任朝廷之官, 德充而才盛者로 爲中正하야 使之銓次等級하야 爲九品也라】等級하야 以爲九品하야 有言行修著則升之하고 道義虧缺則降之어든 吏部憑之하야 以補授百官이러니 行之浸久에 中正이 或非其人하야 奸敝日滋라 劉毅上疏曰 今立中正하야 定九品하니 高下任意하고 榮辱在手라 操人主之威福하고 奪天朝之權勢하야 公無考校之負하고 私無告訐之忌하야 用心百態요 營求萬端이라 廉讓之風이 滅하고 爭訟之俗이 成하니 臣은 竊爲聖朝恥之하노이다 蓋中正之設이 於損政之道에 有八하니 高下逐强弱하고 是非隨興衰하야 一人之身이 旬日異狀하니 上品은 無寒門하고 下品은 無勢族이라 陛下賞善罰惡을 無不裁之以法이어늘 獨置中正하야 委以一國之重하야 曾無賞罰之防하고 又禁人不得訴訟하야 使之縱橫任意하고 無所顧憚케하시니 諸受枉者 抱怨積直하야 不獲上聞이라 由此論之컨대 職名中正이나 寔爲奸府요 事名九品이나 而有八損【高下逐强弱하고 是非隨興衰하야 上品無寒門하고 下品無勢族이 一也요 重其任而輕其人하야 使駁論橫於州里하고 嫌隙結於大臣이 二也요 立格九品者는 才德有優劣하고 倫輩有首尾也어늘 而優劣易地하고 首尾倒錯이 三也요 中正無賞罰之防하고 又禁人訴訟하야 受枉者 不得上聞이 四也요 一國之士 多者千數하니 或流徙異邦하면 面猶不識이어늘 而采譽於臺府하고 納毁於流言하야 任己則有不識之蔽하고 聽受則有彼此之偏이 五也요 凡求人才는 以治民也어늘 今當官著效者는 或附卑品하고 在官無績者는 更獲高敍하야 長浮華而廢功績이 六也요 凡官不同人하고 事不同能이어늘 今不狀其才之所宜하고 而但第爲九品하야 以品取人하고 或非才能之所長이로되 以狀取人하니 則爲本品之所限하야 徒結白論하야 品狀相妨이 七也요 所下를 不彰其罪하고 所上을 不列其善하야 各任愛憎하야 以植其私하니 天下之人이 焉得不懈德行而銳人事리오 八也니라】하니 古今之失이 莫大於此라 愚臣은 以爲宜罷中正하고 除九品하야 棄魏氏之敝法하고 更立一代之美制하노이다 帝雖善其言이나 而終不能改也러라

太康 5년(갑진 284)

처음에 陳群이 吏部에서 천하의 선비들을 자세히 살피고 조사하지 못한다 하여 명령을 내려 郡國에는 각각 中正을 두고 州에는 大中正을 두게 하되, 모두 本土 사람 중에 조정의 관직을 맡고 있거나 德이 충만하고 재주가 훌륭한 자를 中正과 大中正으로 삼아 이들로 하여금 등급을 銓衡하여 차등을 매겨서【[釋義]王氏가 말하였다. “재주와 덕을 상고하여 차등을 매기는 것을 銓次라고 이른다.” [通鑑要解]本土 사람 중에 현재 조정의 관직을 맡고 있거나 德이 충만하고 재주가 훌륭한 자를 뽑아 中正으로 삼아서 그들로 하여금 등급을 銓衡하여 차등을 매기게 하여 九品을 만드는 것이다.】九品을 만들어, 말이 닦여지고 행실이 드러난 자가 있으면 陞級하고 道義에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있으면 降等하게 하였다. 그리고 吏部에서는 이에 의거하여 百官을 補任하고 임명하게 하였는데, 이를 시행한 지가 점점 오래되자 中正이 혹 적임자가 아니어서 간사한 폐단이 날로 불어났다.

이에 劉毅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이제 中正을 세워 九品을 정하니, 높이고 낮추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영화롭고 욕됨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어, 군주의 상벌을 주는 권한을 쥐고 天朝의 권세를 빼앗아서 公的으로는 考課할 때에 공정함을 잃는 것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고 私的으로는 남의 약점을 고자질하는 것을 꺼리지 않아서 마음 씀이 천태만상이고 이익을 도모하기를 萬端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청렴하고 겸양하는 풍속이 없어지고 다투고 송사하는 풍속이 이루어지니, 臣은 聖朝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깁니다. 中正을 설치한 것이 정사하는 방도에 손해되는 점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등급을 높이고 낮출 때에 권세의 强弱을 따르며 옳고 그름을 가릴 때에 가문의 성쇠를 따라서 동일한 한 사람에 대해서 열흘 사이에 평가하는 내용이 달라지니, 上品에 오른 사람 치고 빈한한 가문이 없고 下品에 든 사람 치고 세력 있는 집안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을 법으로 제한하지 않음이 없으신데, 오직 中正을 두어 한 나라의 重任을 맡겨서 일찍이 賞罰의 제한이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이 소송하지 못하도록 금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마음대로 횡행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게 하시니,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원망을 품으며 直情(꾸밈없는 솔직한 심정)을 가슴속에 쌓아 두기만 하고 위로 아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하건대 관직은 中正이라고 이름하나 진실로 간사한 府庫가 되고, 일은 九品이라고 말하나 여덟 가지 손해되는 것【여덟 가지 손해되는 것은, 등급을 높이고 낮출 때에 권세의 强弱을 따르고 옳고 그름을 가릴 때에 가문의 盛衰를 따라서 上品 치고 빈한한 가문이 없고 下品 치고 세력 있는 집안이 없는 것이 첫 번째요, 그 직임은 중하게 여기면서 그 직임을 맡을 사람은 가볍게 선발하여 반박하는 의론이 州里에 제멋대로 행해지고 大臣들 사이에 서로 꺼리고 싫어하는 틈이 생기게 하는 것이 두 번째요, 九品의 격식을 세운 것은 재주와 덕에 優劣의 구분이 있고 同類들 사이에 高下의 구별이 있어서인데 優劣이 뒤바뀌고 高下가 전도되는 것이 세 번째요, 中正은 상벌의 제한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소송하지 못하도록 금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위로 아뢸 수 없는 것이 네 번째요, 一國의 선비가 많을 경우에는 천 명으로 헤아려지니 혹 다른 고을로 옮겨 가면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中正이 臺府에서 칭찬하는 말을 듣고 뽑으며 유언비어 중에 그의 잘못을 채택해서 자신의 견해만 믿으면 사람을 알지 못하는 폐단이 있고 남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피차의 편벽됨이 있는 것이 다섯 번째요, 무릇 인재를 구함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인데 지금 관직을 맡아서 성적이 현저한 자는 혹 낮은 등급에 있고 관직에 있으면서 공적이 없는 자는 도리어 높은 등급을 얻어서 겉으로만 화려함을 조장하고 실제의 공적을 폐지하는 것이 여섯 번째요, 모든 관직은 일이 똑같지 않고 사람은 재능이 똑같지 않은데 이제 그 재주의 마땅한 바를 살피지 않고 다만 등급을 九品으로 만들어 등급에 따라 사람을 취하고 혹은 재능이 뛰어난 분야가 아닌데도 평가한 말만 가지고 사람을 취하니, 본래의 등급에 제한되어 한갓 근거 없는 빈 말을 늘어놓아 등급과 평가한 말이 서로 방해가 되는 것이 일곱 번째요, 등급을 강등한 사람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지 않고 등급을 올려 준 사람은 그들의 선을 나열하지 않아서 각각 자기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따라 私黨을 심으니 천하 사람들이 어찌 德行을 닦기를 게을리 하고 人事만을 예의주시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여덟 번째이다.】이 있으니, 古今의 잘못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臣은 생각건대 마땅히 中正을 파하고 九品을 없애어 魏나라의 나쁜 법을 버리고 다시 한 왕조의 아름다운 제도를 세워야 합니다.”

황제가 비록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

○ 初에 帝以才人謝玖로 賜太子하야 生皇孫遹하다 宮中이 嘗夜失火어늘 帝登樓望之할새 年五歲라 牽帝裾하야 入闇中하고 曰 暮夜倉猝이라 宜備非常이니 不可令照見人主니이다 帝由是奇之하야 嘗對群臣에 稱宣帝【司馬懿니 追尊爲宣帝라】하니 故로 天下咸歸仰之라 帝知太子不才나 然恃明慧라 故로 無廢立之心이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司馬氏 經營大業하야 把握政權이 已逾數世라 至武帝得國하고 又能平吳하야 以一天下러니 曾不數年에 紀綱板蕩하고 宗廟丘墟하니 其故는 何哉오 蓋自古有天下之君이 未有無功德於民而能享國長久者라 司馬懿는 以陰賊狡險으로 禍人之國하고 而, 는 又以廢弑不道로 取人之國하고 武帝承平하야 又無遠略하야 荒耽酒色하고 保養奸回하야 風俗尙浮虛하고 士夫賊名檢하야 廉恥道喪하고 賄賂公行하야 罪積數世而功德不及於民하니 欲保邦而長世나 得乎아

○ 처음에 황제가 才人謝玖를 太子에게 내려 皇孫司馬遹을 낳았다. 궁궐 안에서 일찍이 밤중에 실화로 불이 났는데, 황제가 누대에 올라 이를 바라보았다. 이때 司馬遹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황제의 소매를 끌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늦은 밤에 창졸간이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여야 하니, 불빛이 비쳐 군주를 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로 말미암아 기특하게 여겨 항상 신하들을 대할 때에 司馬遹宣帝【宣帝는 司馬懿이니 追尊하여 宣帝라 하였다.】와 유사하다고 일컬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歸服하고 우러렀다. 황제는 太子가 재주가 없음을 알았으나 司馬遹의 지혜로움을 믿었다. 그러므로 태자를 廢立할 마음이 없었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司馬氏가 大業을 경영하여 政權을 장악한 지 이미 여러 대를 지났다. 武帝(司馬炎)에 이르러 나라를 얻고 또 吳나라를 평정하여 天下를 통일하였는데, 일찍이 몇 년이 못 되어 紀綱이 어지러워지고 宗廟가 폐허가 되었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예로부터 天下를 소유한 군주가 백성들에게 功德이 없으면서 나라를 장구하게 누린 자는 있지 않았다. 司馬懿는 음험하고 교활함으로 남의 나라를 禍에 빠지게 하였고, 司馬昭司馬師는 또 폐위하고 시해하는 무도함으로 남의 나라를 탈취하였으며, 武帝는 태평한 때를 이었고 또 원대한 계책이 없어서 酒色에 빠지고 간신을 보호하고 길러서 風俗이 浮虛함을 숭상하고 사대부들이 名檢(禮法)을 해쳤다. 그리하여 廉恥의 道가 상실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 罪가 몇 대에 걸쳐 누적되고 功德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국가를 보존하여 오래가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孝惠皇帝

孝惠皇帝 名衷이요 字正度니 武帝第二子라 在位十七年이요 壽四十八이라

孝惠皇帝【柔質慈民曰惠라】이요 字正度武帝第二子라 在位十七年이요 壽四十八이라

孝惠皇帝【바탕이 유순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惠라 한다.】는 이름이 이요 字가 正度이니 武帝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가 17년이고 壽가 48세이다.

[庚戌]永熙元年

[庚戌]永熙元年이라

四月에 帝崩하다 帝宇量宏厚하야 明達好謀하고 容納直言하야 未嘗失色於人이러라 太子卽皇帝位하야 詔以太尉楊駿【武帝炎后父也라】으로 爲太傅하야 錄朝政하니 百官이 總己以聽하니라

永熙 元年(경술 290)

4월에 황제가 崩하였다. 황제는 도량이 크고 관후하여 사리에 밝게 통달하고 도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직언을 용납하여 일찍이 사람들 앞에서 낯빛을 잃은 적이 없었다. 太子가 황제의 지위에 올라 명령을 내려 太尉楊駿【楊駿은 武帝 司馬炎의 황후의 아버지이다.】을 太傅로 삼아 조정의 정사를 기록하게 하니, 百官들이 자신의 직책을 모두 총괄하여 그에게 명령을 들었다.

[辛亥]元康元年

[辛亥]元康元年이라

賈后惠帝后賈充女也라】凶悍多權略하야 每欲干預政事로되 而爲太傅駿所抑이라 遂構駿以謀反하야 殺之하고 廢太后【賈后爲太子妃時에 嘗以妬로 手殺數人하고 又以戟擲孕妾하야 子隨刃墮라 武帝大怒하야 將廢之러니 楊后曰 賈公閭有勳於社稷하니 豈可忘之리오하야 妃得不廢하다 后數誡妃하니 妃不知助己하고 反以爲恨이라 至是에 不以婦道事太后하고 又欲預政이라가 而爲楊駿所抑이라 故殺駿하고 廢太后하니라】하고 徵汝南王【亮은 宣帝懿第三子라】과 及衛瓘하야 秉政【徵汝南王亮爲太宰하여 與太保衛瓘으로 皆錄尙書事하야 輔政이라】이러니 賈后復召楚王瑋【瑋는 武帝炎第五子라】하야 使殺하고 尋復殺하고 委張華以朝政하다 盡忠帝室하야 彌縫遺闕【彌縫은 猶補合也라】하니 賈后雖凶險이나 猶知敬重模與, 頠로 同心輔政이라 故로 數年之間에 雖闇主在上이나 而朝野安靜하니 等之功也러라

元康 元年(신해 291)

賈后【賈后는 惠帝의 황후이니, 賈充의 딸이다.】가 흉악하고 사나우며 權謀와 智略이 많아서 매양 정사에 간여하고자 하였으나 太傅楊駿에게 억제당하였다. 賈后가 마침내 모반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楊駿을 죽이고楊太后를 폐위【賈后가 太子妃였을 때에 일찍이 질투하여 직접 여러 사람을 죽였고, 또 잉태한 첩을 창으로 찔러 뱃속의 자식이 칼날을 따라 떨어졌다. 武帝가 크게 노하여 太子妃를 폐하려 하였는데, 楊后가 말하기를 “賈公閭(賈充)가 社稷에 큰 공이 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太子妃가 폐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楊后가 여러 차례 太子妃를 경계하니, 太子妃는 楊后가 자신을 도와주는 줄 모르고 도리어 한스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賈后가 며느리의 도리로 太后를 섬기지 않고, 또 정사에 관여하려 하다가 楊駿에게 억제당하였다. 그러므로 楊駿을 죽이고 太后를 폐한 것이다.】하고는 汝南王司馬亮【司馬亮은 宣帝 司馬懿의 셋째 아들이다.】衛瓘을 불러서 정권을 잡게 하였는데,【汝南王 司馬亮을 불러 太宰로 삼아 太保 衛瓘과 함께 모두 尙書의 일을 총괄하여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賈后가 다시 楚王司馬瑋【司馬瑋는 武帝 司馬炎의 다섯째 아들이다.】를 불러서司馬亮衛瓘을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司馬瑋를 죽이고張華에게 조정의 정사를 맡겼다. 張華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보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니,【彌縫은 기워서 합하는 것과 같다.】賈后가 비록 흉악하고 음험하였으나 오히려 張華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길 줄을 알았다. 賈模張華裴頠와 함께 한마음으로 정사를 보필하였다. 그러므로 수년 동안 비록 혼암한 군주가 위에 있었으나 朝野가 편안하고 조용하였으니, 이는 張華 등의 공이었다.

[丁巳]七年

[丁巳]七年이라

九月에 以尙書右僕射王戎으로 爲司徒하다 戎爲三公에 與時浮沈하야 無所匡救하고 委事僚寀【僚는 與寮同이라 爾雅에 寀, 寮는 官也라한대 註云 (同)[官]地爲寀요 同官爲寮라】하고 輕出遊放하니라 性復貪吝하야 園田이 徧天下러니 每自執牙籌하야 晝夜會計하야 常若不足이러라 家有好李러니 賣之에 恐人得種하야 鑽其核하고 凡所賞拔을 專事虛名이러라 阮咸之子이 嘗見한대 問曰 聖人은 貴名敎하고 , 은 明自然하니 其旨同異아 曰 將無同【將無는 猶言無乃, 得無之類니 其意蓋言同也라 [通鑑要解]不直云同而云將無同者는 晉人語度自爾也니 意以爲是而不敢自主也라】가한대 이 咨嗟良久에 遂辟之하니 時人이 謂之三語掾【三語는 指將無同三字라】이라하니라 是時에 王衍【戎之從弟라】이 爲尙書令하고 樂廣이 爲河南尹하야 皆善淸談하고 宅心事外【宅은 居也라】하야 名重當世하니 朝野之人이 多慕效之러라 이 與弟으로 好品題【題亦品也라】人物하니 擧世以爲儀準하니라 이 神精明秀라 少時에 山濤見之하고 嗟歎良久曰 何物老嫗 生寧馨兒【寧馨은 猶言恁地也라 王若虛曰 寧은 猶言如此요 馨은 語助也라】오 然이나 誤天下蒼生者는 未必非此人也라하더라 樂廣이 性沖約【沖은 深也라】淸遠하야 與物無競하고 每談論에 以約言析理【王氏曰 約言以分別義理를 如破木然이라】하야 厭人之心【厭은 足也, 飽也라】하고 而其所不知는 黙如也하며 凡論人에 必先稱其所長하니 則所短은 不言自見이라 王澄阮咸의 從子胡母輔之, 謝鯤, 王尼, 畢卓이 皆以任放【任은 縱意也요 放은 謂放誕也라 [通鑑要解]任者는 任物之自然이요 放者는 縱其心而不制라】爲達이러라 畢卓이 嘗爲吏部郞하야 比舍郞【比는 〈周〉禮에 五家爲比니 取其相聯比而居也라】의 釀熟이어늘 이 因醉하야 夜至甕間盜飮之라가 爲掌酒者所縛이러니 明旦視之하니 乃吏部也라 樂廣이 聞而笑之曰 名敎內에 自有樂地하니 何必乃爾리오하니라

元康 7년(정사 297)

9월에 尙書右僕射王戎을 司徒로 삼았다. 王戎이 三公이 되자, 세상을 따라 변하여 바로잡고 구원하는 바가 없었고, 官事를 僚寀(屬僚)【僚는 寮와 같다. ≪爾雅≫에 “寀와 寮는 벼슬이다.”라고 하였는데, 〈郭璞의〉 註에 이르기를 “官에 속한 토지(采地)를 寀라 하고, 같은 벼슬에 있는 것을 寮라 한다.” 하였다.】에게 맡기고 가볍게 나가서 놀고 방탕하였다. 성질이 또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田園이 천하에 두루 널려 있었는데, 매양 스스로 牙籌(상아로 만든 주판)를 잡고서 밤낮으로 회계하면서 항상 衣食이 부족한 것처럼 하였다. 집에 좋은 오얏이 있었는데, 이것을 팔 때에 남들이 좋은 씨앗을 얻을까 염려하여 오얏씨에 구멍을 뚫었으며, 무릇 칭찬하고 발탁할 때에 오로지 虛名을 숭상하였다. 阮咸의 아들阮瞻이 일찍이 王戎을 찾아가 보았는데, 王戎이 “聖人은 名敎를 귀하게 여기고 老子莊子는 自然을 밝혔으니, 그 뜻이 같은가, 다른가?” 하고 묻자, 阮瞻이 말하기를 “아마도 같지 않겠습니까.[將無同]”【[釋義]將無는 無乃‧得無라고 말하는 종류와 같으니, 그 뜻은 같음을 말한다. [通鑑要解]곧바로 ‘같다.’고 이르지 않고 ‘아마도 같지 않겠는가.’라고 이른 것은 晉나라 사람의 語法이 본래 그러한 것이니, 마음속에 옳다고 여기면서도 감히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戎이 한동안 감탄하고는 마침내 그를 불러 속관으로 삼으니, 당시 사람들이 ‘三語掾’【三語는 ‘將無同’ 세 글자를 가리킨 것이다.】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王衍【王衍은 王戎의 從弟이다.】이 尙書令이 되고 樂廣이 河南尹이 되어 모두 淸談을 잘하고 마음을 사물 밖에 두어【宅은 거함이다.】 名望이 당대에 중하니, 朝野의 사람들이 많이 사모하고 본받았다. 王衍이 아우 王澄과 함께 인물을 品題【題도 평가하는 것이다.】하기를 좋아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法度와 標準으로 삼았다. 王衍은 정신과 의표가 밝고 빼어났다. 젊었을 때에 山濤가 그를 보고 한동안 감탄하고 말하기를 “어떤 노부인이 이런【寧馨은 恁地(이와 같음)와 같다. 王若虛가 말하였다. “寧은 如此라는 말과 같고, 馨은 어조사이다.”】 아이를 낳았는가? 그러나 천하의 백성을 그르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樂廣은 성품이 담박하고 검약하며【沖은 깊음이다.】 깨끗하고 원대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고, 매양 담론할 때에 간략한 말로 이치를 분석【王氏가 말하였다. “간략한 말로 의리를 분별하기를 나무를 쪼개듯이 하는 것이다.”】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厭은 만족한 것이고 배부른 것이다.】하게 하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침묵하였으며, 무릇 인물을 논할 때에 반드시 먼저 그의 所長을 칭찬하니 그의 단점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났다. 王澄阮咸阮咸의 從子인 阮脩胡母輔之謝鯤王尼畢卓은 모두 방종하고 방탕함【[釋義]任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요, 放은 放誕함을 이른다. [通鑑要解]任은 사물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요, 放은 마음대로 풀어놓고 제재하지 않는 것이다.】을 통달한 것이라 여겼다. 畢卓이 일찍이 吏部의 郎官이 되어서 이웃집 郎官【比는 ≪周禮≫ 〈地官〉에 5가호를 比라 하였으니, 서로 나란히 이어서 거함을 취한 것이다.】의 술이 익자, 畢卓이 술에 취해 밤에 술동이를 보관해 놓은 곳에 이르러 몰래 술을 훔쳐 마시다가 술을 관장하는 자에게 포박당했는데, 다음 날 새벽에 살펴보니 바로 畢卓이었다. 樂廣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名敎의 안에 본래 즐거운 경지가 있으니, 하필 이와 같이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初에 何晏等이 祖述老莊하야 立論以爲호되 天地萬物이 皆以無爲本【無爲는 本何晏之志니 以爲事事物物이 自無而有하니 無者는 物之未生이요 事之未形者也라 故曰 無者는 開物成務라하니라】하니 無也者는 開物成務하야 無往不存者也라 陰陽이 恃以化生하고 賢者恃以成德이라 故로 無之爲用이 無爵而貴矣라하니 王衍之徒 皆愛重之라 由是로 朝廷士大夫 皆以浮誕爲美하야 弛廢職業이라 裴頠著崇有論하야 以釋其蔽나 然習俗已成하야 論이 亦不能救也러라

처음에 何晏 등이 의 道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여 이르기를 “천지의 만물이 모두 無를 근본으로 삼으니,【無爲는 본래 何晏의 뜻이니, 何晏이 이르기를 “事事物物이 無로부터 有가 되었으니, 無는 물건이 아직 생기기 이전이요 일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無는 물건을 열어주고 일을 이루어 준다.’고 했다.” 하였다.】 無라는 것은 물건을 열어주고 일을 이루어(사물을 揭示하여 人事로 하여금 각각 마땅함을 얻게 하여) 가는 곳마다 존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陰陽이 이 無에 의지하여 化生하고 賢者가 이 無에 의지하여 德을 이룬다. 그러므로 無의 쓰임이 관작이 없어도 귀하다.” 하니, 王衍의 무리가 모두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의 士大夫들이 모두 浮華하고 放誕함을 아름답게 여겨서 자신의 직무를 폐하였다. 裴頠가 〈崇有論〉을 지어서 그 폐단을 말하였으나 습속이 이미 이루어져서 裴頠의 의론도 바로잡지 못하였다.

[己未]九年

[己未]九年이라

太子洗馬【官名이라 洗는 與先通하니 蘇典反이라 前也니 太子出則前導威儀하니라】江統이 以爲戎, 狄이 亂華하니 宜早絶其原이라하야 乃作徙戎論하야 以警朝廷하니 曰 夫夷, 蠻, 戎, 狄이 地在要, 荒【禹貢에 五服은 甸, 侯, 綏, 要, 荒也라 要者는 取要約之意니 特羈縻之義요 荒者는 以其荒野故로 謂之荒이니 皆夷, 狄之地也라】하야 平水土에 而西戎이 卽敍【卽은 就也요 敍는 功也라】라 其性氣貪婪하고 凶悍不仁호되 四夷之中에 戎, 狄爲甚이라 弱則畏服하고 彊則侵叛하니 當其彊也하야는 以漢之高祖로도 而困於白登하고 孝文이 軍於霸上하며 及其弱也하야는 以, 之微로도 而單于入朝하니 此其已然之效也라 是以로 有道之君이 牧夷狄也에 惟以待之有備하고 禦之有常하야 雖稽顙執贄【贄之言은 至也라 古者相見之禮에 手有所執하야 以告至也라 記曲禮云 凡摯는 天子鬯이요 諸侯圭요 卿羔요 大夫雁이요 士雉요 庶人之摯匹(鴄)이며 野外軍中엔 無摯하야 以纓拾矢可也요 婦人之摯는 椇榛脯脩棗栗이라하니라 鄭氏曰 天子는 無客禮하니 以鬯爲摯者는 所以唯用告神爲至也라 說者以匹爲鶩하니 〈鶩은〉 鴨也라 纓은 馬繁纓也요 拾은 謂射韝也라 椇는 俱羽反이니 枳也니 有實이라 榛은 實似栗而小라】나 而邊城이 不弛固守【漢元時에 匈奴請罷邊備어늘 漢以爲不可라하니 所謂不弛固守也라】하고 彊暴爲寇라도 而兵革이 不加遠征【周宣이 薄伐玁狁하야 至于太原하야 盡境而還이라】하야 期令境內獲安하고 疆埸不侵而已라 魏興之初에 與蜀分隔하야 疆埸之戎이 一彼一此러니 武帝徙武都氐於秦川하야 欲以弱寇彊國하야 扞禦蜀虜하니 此蓋權宜之計요 非萬世之利也니 今者當之에 已受其敝矣라 夫關中【古者에 郊畿千里니 王業本根이 於是在焉이라 秦嘗用之하야 以(領)[顧]諸侯하고 漢嘗因之하야 以定四海하니라 三輔云 東有函谷하고 南有嶢武하고 西有散關하고 北有蕭關하야 四關之中이라 故謂之關中也라】은 土沃物豐하니 帝王所居【周都豐, 鎬하고 秦都咸陽하고 漢都長安하니 皆關中之地라】니 未聞戎狄이 宜在此土也라 非我族類면 其心이 必異어늘 而因其衰敝하야 遷之畿服【畿服은 邦畿千里之內라】하니 士庶翫習하야 侮其輕弱하야 使其怨恨之氣로 毒於骨髓라가 至於蕃育衆庶면 則坐生其心하리니 以貪悍之性으로 挾憤怒之情하야 候隙乘便하야 輒爲橫逆【橫은 不以理也라】호되 而居封域之內하야 無障塞之隔하야 掩不備之人하고 收散野之積이라 故로 能爲禍滋蔓하고 暴害不測하니 此는 必然之勢요 已驗之事也라 犬馬肥充이면 則有噬齧이어든 況於夷狄이 能不爲變이리오 但顧其微弱【顧는 內顧也라】하야 勢力不逮耳라 夫爲邦者는 憂不在寡【論語에 孔子曰 丘聞호니 有國有家者는 不患寡而患不均하며 不患貧而患不安이라하니라】而在不安이니 以四海之廣과 庶民之富로 豈須夷虜在內然後에 取足哉리오 此等을 皆可申諭發遣하야 還其本域하야 慰彼羇旅懷土之思하고 釋我華夏纖芥【纖은 細也라 芥는 菜名이니 其實至細하야 以喩事之至微라】之憂하야 惠此中國하야 以綏四方하고 德施永世가 於計에 爲長也라호되 朝廷이 不能用이러라

元康 9년(기미 299)

太子洗馬【洗馬는 관직명이다. 洗는 先과 통하는 바, 蘇典反(선)이다. 앞이란 뜻으로, 太子가 출행하면 앞에서 威儀를 인도하는 것이다.】江統이 생각하기를 ‘戎‧狄이 中華를 어지럽히니, 마땅히 일찍 그 근원을 끊어야 한다.’ 하여 마침내 〈徙戎論〉을 지어 조정을 경계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東夷‧南蠻‧西戎‧北狄은 지역이 要服과 荒服【≪書經≫ 〈禹貢〉에 “五服은 甸服‧侯服‧綏服‧要服‧荒服이다.” 하였다. 要는 요약하는 뜻을 취한 것이니, 단지 회유해서 얽어매어 둔다는 뜻이요, 荒은 그 지역이 荒野이기 때문에 이를 일러 荒이라고 한 것이니, 要服과 荒服은 모두 오랑캐 지역이다.】의 먼 곳에 있어서 임금이 水土를 다스렸을 때에 西戎이 따라서 복종하게 되었다.【卽은 나아감이요, 敍는 功이 펴짐이다.】 그들은 성품과 기질이 탐욕스럽고 흉악하며 사납고 不仁한데, 이 四夷 가운데에서도 戎‧狄이 가장 심하여 세력이 약할 때에는 두려워 복종하고 강성할 때에는 침략하고 배반한다. 戎‧狄이 강성할 때를 당해서는 漢나라 高祖로서도 白登에서 곤욕을 당하였고 孝文帝가 霸上에 군대를 주둔하였으며, 戎‧狄이 약할 때에 미쳐서는 미약한 元帝成帝 때에도 單于가 들어와 조회하였으니, 이는 이미 정해진 분명한 징험이다. 이 때문에 道가 있는 군주는 夷狄을 기를 때에 다만 그들을 상대함에 방비가 있고 그들을 막음에 일정한 법도가 있어, 비록 오랑캐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폐백을 가지고 오더라도【贄라는 말은 지극함이다. 옛날에 서로 만나 보는 禮에 손에 잡는 것(폐백)이 있어서 이것으로써 정성이 지극함을 고하였다. ≪禮記≫ 〈曲禮〉에 이르기를 “무릇 폐백은, 天子는 울창주이고 諸侯는 圭이고 卿은 염소이고 大夫는 기러기이고 士는 꿩이고 庶人의 폐백은 오리이다. 野外와 軍中에서는 폐백이 없어서 갓끈과 팔찌와 화살을 쓰는 것도 괜찮으며 부인의 폐백은 탱자와 개암과 포수와 대추와 밤이다.” 하였다. 鄭氏가 말하기를 “天子는 客의 禮가 없는데 울창주를 폐백으로 삼는 것은 오직 神에게 고할 때 써서 정성이 지극함으로 삼는 것이다. 해설하는 자가 匹은 鶩이라 하였으니, 鶩은 오리이다. 纓은 말의 뱃대끈이요 拾은 활쏘기 할 때 쓰는 팔찌를 이른다. 椇는 음이 구이다. 탱자이니 열매가 있다. 개암나무는 열매가 밤과 비슷한데 작다.” 하였다.】 굳게 수비함을 풀지 않았으며【漢나라 元帝 때에 匈奴가 변경의 수비를 파하기를 청하였으나 漢나라가 불가하다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굳게 수비함을 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랑캐들이 강하고 사나워 침략하더라도 군대가 멀리 정벌하러 나가지 않아서,【周나라 宣王이 잠깐 玁狁을 정벌하여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太原에 이르러 축출하기만 하고 국경에 이르러서 돌아왔다.】 국경 안이 편안함을 얻고 강역이 침략당하지 않기만을 기약할 뿐이었다.

魏나라가 일어난 초기에 蜀과 사이가 벌어져서 변경의 戎이 한때는 저쪽에 붙었다가 한때는 이쪽에 붙었는데, 武帝(曹操)가 武都郡의 氐族을 秦川으로 옮겨서 적을 약하게 만들고 국력을 강하게 하여 蜀나라의 침략군을 막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때에 따라 마땅함을 저울질하는 일시적인 계책이고 만대토록 이로운 것이 아니어서 이제 받들어 계승함에 이미 그 폐해를 받고 있다.

關中【옛날에 郊畿(서울 근교)가 천 리였으니, 王業의 근본이 여기에 있었다. 秦나라가 일찍이 이 關中을 이용하여 제후들을 통솔하였고, 漢나라가 일찍이 關中으로 인하여 사해를 평정하였다. ≪三輔黃圖≫에 이르기를 “동쪽에는 函谷關이 있고 남쪽에는 嶢關과 武關이 있고 서쪽에는 散關이 있고 북쪽에는 蕭關이 있어서 네 관문의 가운데이기 때문에 關中이라 이른다.” 하였다.】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帝王이 거주했던 곳이니,【周나라는 豐과 鎬에 도읍하고, 秦나라는 咸陽에 도읍하고, 漢나라는 長安에 도읍하였으니, 모두 關中 지역이다.】戎‧狄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우리 同族이 아니면 그 마음속에 반드시 딴 마음을 품을 터인데 그들이 쇠퇴하고 피폐함을 틈타 그들을 畿服【畿服은 邦畿 千里 지역의 안이다.】으로 옮겼으니, 군사와 백성들이 익숙해져서 만만하게 보고 그들의 미약함을 업신여겨 그들의 원망하고 한하는 기운을 골수에 사무치게 하였다가, 저들이 무리를 길러서 번성하게 되면 그로 인해 나쁜 마음이 생겨나서, 탐욕스럽고 사나운 성질로 분노를 품고서 기회를 노리고 편리한 틈을 틈타 곧바로 이치에 어긋나는 짓【橫은 도리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을 할 것이다. 그런데도 국경 안에 살게 하여 요새와 보루를 두지 않아서 대비가 없는 백성들을 엄습하고 들에 흩어져 있는 露積을 거두게 한다. 그러므로 禍亂이 더욱 불어나고 크나큰 害를 측량할 수가 없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고 이미 징험한 사실이다. 개와 말도 살찌고 충실하면 사람을 무는데, 하물며 夷狄이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夷狄이 변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다만【顧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형세가 미약하여 세력이 미치지 못해서일 뿐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근심할 것이 백성들의 숫자가 적은 데에 있지 않고【≪論語≫ 〈季氏〉에 孔子가 말씀하기를 “나(丘)는 들으니, 나라를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한다.” 하였다.】 백성들이 불안해하는 데에 있으니, 넓은 四海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어찌 굳이 오랑캐가 內地에 있은 뒤에야 만족함을 취하겠는가. 이 무리를 모두 거듭 타일러 내보내서 본래의 지역으로 돌려보내어, 저들이 객지에 머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위로하고 우리 華夏의 티끌만 한【纖은 가는 것이다. 芥는 푸성귀의 이름이니, 씨앗이 지극히 작으므로 이로써 지극히 세미한 일을 비유한 것이다.】 우환을 풀어서 이 中國을 은혜롭게 하여, 사방을 편안하게 하고 德을 영원토록 베푸는 것이 계책에 있어서 좋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帝爲人戇騃【愚癡也라】라 嘗在華林園【魏起芳林園이러니 後避齊王芳諱라 故로 改曰華林이라】하야 聞蝦蟆하고 謂左右曰 此鳴者 爲官乎아 爲私乎【爲는 竝去聲이라】아하다 時에 天下荒饉하야 百姓이 餓死러니 帝聞之하고 曰 何不食肉糜【糜는 粥也라】오하니 由是로 權在群下하고 政出多門하야 勢位之家 更相薦託하야 有如互市【綱紀大壞하야 貨賂公行하고 更相薦擧라 故로 謂之互市라】러라 , 【賈는 賈后女弟之子賈謐이요 郭은 后從舅郭彰, 母郭槐라】이 恣橫하야 貨賂公行이어늘 魯褒作錢神論하야 以譏之曰 錢之爲體 有乾坤之象【有乾坤二象者는 取圓方之義라】하야 親之如兄하고 字曰孔方이라 無德而尊하고 無勢而熱하야 排金門, 入紫闥【闥은 宮中小門이라】하야 危可使安이요 死可使活이요 貴可使賤이요 生可使殺이라 是故로 忿爭은 非錢不勝이요 幽滯는 非錢不拔이요 怨讐는 非錢不解요 令聞은 非錢不發이라 洛中朱衣當塗之士 愛我家兄을 皆無已已하야 執我之手하고 抱我終始하니 凡今之人은 惟錢而已라하니라

○ 황제는 사람됨이 어리석었다.【戇騃는 어리석음이다.】 일찍이 華林園【魏나라가 芳林園을 세웠는데, 뒤에 齊王 曹芳의 諱를 피하였기 때문에 華林園이라 고친 것이다.】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개구리가 우는 것은 官府를 위해서 우는 것인가? 私家를 위해서 우는 것인가?”【[頭註]爲官乎 爲私乎:爲는 모두 去聲(위하다)이다.】 하였으며, 이 당시 천하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어 죽었는데,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먹을 곡식이 없으면〉 어찌 고기죽【糜는 죽이다.】을 먹지 않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권력이 여러 신하들에게 있고 정령이 여러 部門에서 나와, 권세 있는 집안들이 번갈아 서로 천거하고 청탁해서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듯이 하였다.【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세력 있는 집안들이 번갈아 서로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일러 互市(서로 물건을 교역함)라 한 것이다.】

賈氏와 郭氏【賈는 賈后의 여동생의 아들인 賈謐이고, 郭은 賈后의 從舅인 郭彰과 賈后의 어머니인 郭槐이다.】가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자, 魯褒가 〈錢神論〉을 지어 풍자하기를 “돈의 모양이 乾과 坤의 형상이 있어서【乾과 坤의 두 형상이 있다는 것은 돈의 모양이 바깥은 하늘처럼 둥글고 안은 땅처럼 네모난 뜻을 취한 것이다.】 돈을 친애하기를 형처럼 하고 字를 孔方이라 한다. 德이 없으면서도 지위가 높고 세력이 없으면서도 현달하여 대궐문을 밀치고 궁궐 안으로【闥은 궁중의 작은 문이다.】 들어가, 위태로운 자를 편안하게 하고 죽을 자를 살려 주며 귀한 자를 천하게 하고 살 자를 죽게 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침체함(벼슬이 오르지 못함)은 돈이 아니면 발탁되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훌륭한 명성은 돈이 아니면 나타나지 못한다. 洛陽의 붉은 옷을 입고 要路를 담당한 선비들이 우리 家兄(돈)을 좋아하기를 모두 끝없이 하여 나의 손을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하였다.

裴頠가 薦韋忠張華어늘 辟之러니 이 辭疾不起하다 人問其故한대 張茂先【華字라】은 華而不實하고 裴逸民【頠字라】은 慾而無厭하야 棄典禮而附賊后하니 此豈大丈夫之所爲哉리오 逸民이 每有心託我호되 我常恐其溺於深淵而餘波及我어든 況可褰裳而就之哉아 關內侯【列侯는 出關就國이어늘 關內侯는 但爵其身이라 其有家累者는 與之關內之邑하여 食其租稅也라】索靖이 知天下將亂하고 指洛陽宮門銅駝【秦始皇所鑄也라】하야 歎曰 會見汝在荊棘中耳라하니라

裴頠韋忠張華에게 천거하자 張華가 불렀는데, 韋忠이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韋忠이 말하기를 “張茂先(張華)【茂先은 張華의 字이다.】은 화려하기만 하고 실제가 없으며 裴逸民(裴頠)【逸民은 裴頠의 字이다.】은 욕심이 많고 만족함이 없어서 典禮를 버리고 역적인 賈后에게 붙었으니, 이 어찌 대장부가 할 짓이겠는가. 裴逸民이 매번 나에게 정사를 맡기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나는 그때마다 항상 깊은 못에 빠져 여파가 나에게 미칠까 염려하였는데, 더구나 내가 치마를 걷고 제 발로 물속으로 들어가겠는가.” 하였다. 關內侯【列侯는 關門을 나가 本國으로 나아가는데, 關內侯는 단지 몸에 관작만을 내릴 뿐이다. 家累(家率)가 있는 자는 關內의 읍을 주어서 그 조세를 받아먹게 한다.】索靖은 천하가 장차 혼란해질 줄 알고 洛陽의 宮門에 있는 구리 낙타【구리 낙타는 秦始皇이 鑄造한 것이다.】를 가리키면서 한탄하기를 “마침내 네가 荊棘 중에 있는 것을 보겠구나.” 하였다.

[庚申]永康元年

[庚申]永康元年이라

賈后毒殺太子어늘 趙王倫, 孫秀【趙王倫은 宣帝懿第九子요 孫秀는 倫之嬖倖人이라】이 起兵殺后【賈后淫虐放恣라 洛南都尉部小吏 端麗美容止라 忽有非常衣服이어늘 衆咸疑其竊盜하니 尉嫌而辨之한대 小吏云 行逢一老嫗하니 說家有疾病에 師卜云 宜得城南少年壓之라하니 欲暫相煩하노니 必有重報라하야늘 於是隨去하니 上車下帷하고 納簏箱中이라 行可十餘里하야 過六七門限하야 開簏箱하니 見樓閣好屋이라 問此是何處오한대 云是天上이라 卽以香湯見浴하고 好衣美食하다 將入見一婦人하니 年可三十五六이요 短形靑黑色이요 眉後有疵라 見留數夕에 共寢歡宴이러니 臨出에 贈此衆物이라하니 聽者聞其形狀하고 知是賈后라 他人入者多死로되 惟此小吏는 以后愛之하야 得全而出하니라】하고 收張華, 裴頠等하야 皆殺之하다 石崇, 潘岳等이 皆遇害【初에 孫秀嘗爲小吏한대 岳屢撻之하고 崇之甥歐陽建이 素與倫忤라 崇有愛妾하니 曰綠珠라 秀求之호되 不與러니 及淮南王允敗하야 秀因稱崇, 岳, 建奉允爲亂이라하야 收之하다 又事文類抄에 初에 崇이 以眞珠二斛買而爲妾이라 故로 因名之也라】이 歎曰 奴輩利吾財爾로다 收者曰 知財爲禍인댄 何不早散之오하니 이 不能答이라 遂皆族誅하고 籍沒崇家하다

永康 元年(경신 300)

賈后가 太子를 독살하자, 趙王司馬倫孫秀【趙王 司馬倫은 宣帝 司馬懿의 아홉 번째 아들이고, 孫秀는 司馬倫이 총애하는 신하이다.】이 군대를 일으켜 賈后를 죽이고【賈后는 음탕하고 사나우며 방자하였다. 洛南都尉部의 아전이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행동거지가 아름다웠는데, 갑자기 평범하지 않은 옷을 입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도둑질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都尉가 혐의쩍다 하여 따져 묻자, 아전이 대답하기를 “길을 가다가 한 늙은 할미를 만났는데, 말하기를 ‘집에 질병이 있는데 卜人이 점을 치고서 城南에 사는 소년을 찾아 陰氣를 눌러야 한다고 하므로 잠시 번거롭게 하고자 하니, 반드시 크게 보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갔는데, 수레에 오르자 휘장을 내리고 대나무 상자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족히 십여 리쯤 가서 6, 7개의 門限(문턱)을 지난 뒤에 상자를 열어 주었는데, 누각과 아름다운 집이 보였습니다. 제가 ‘이곳이 어디인가?’ 하고 묻자, ‘天上이다.’ 하고는 즉시 향기로운 물로 목욕을 시키고 좋은 옷을 입히고는 맛 좋은 음식을 주었습니다. 데리고 들어가 한 부인을 만나게 하였는데, 나이가 족히 35, 6세쯤 되었습니다. 키가 작고 얼굴은 검푸른 색이었으며 눈썹 뒤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며칠 밤을 머물면서 잠자리를 함께 하며 몹시 좋아하였는데, 나올 때에 이러한 여러 가지 물건을 주었습니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그 형상을 듣고는 賈后인 줄을 알았다. 다른 사람 중에 궁에 들어간 자는 대부분 죽었으나 오직 이 아전만은 賈后가 사랑하여 온전히 살아나올 수 있었다.】張華裴頠 등을 잡아 모두 죽였다. 石崇潘岳 등이 모두 살해당하였다.【[通鑑要解]石崇潘岳等 皆遇害:처음에 孫秀가 일찍이 小吏였을 때에 潘岳이 자주 그를 楚撻하였으며, 石崇의 생질인 歐陽建은 평소 司馬倫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石崇은 綠珠라는 애첩이 있었다. 孫秀가 요구하였으나 石崇이 주지 않았는데, 淮南王 司馬允이 패하게 되자 孫秀가 이로 인하여 ‘石崇‧潘岳‧歐陽建이 司馬允을 받들어 난을 일으켰다.’고 칭하고 잡아들였다. 또 ≪事文類抄≫에는 “처음에 石崇이 眞珠 2斛을 주고 사서 妾을 삼았기 때문에 인하여 綠珠라고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石崇이 한탄하기를 “종놈들이 나의 재물을 이롭게 여긴 것이로다.” 하였다. 잡으러 온 자가 말하기를 “재물이 화가 될 줄 알았다면 어찌 일찌감치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하니, 石崇이 대답하지 못했다. 마침내 三族을 모두 멸하고石崇의 가산을 적몰하였다.

[辛酉]永寧元年

[辛酉]永寧元年이라

趙王倫이 簒位하니 黨與超階越次者 不可勝紀라 每朝會에 貂蟬【貂蟬은 侍中, 中常侍冠也니 以貂尾爲飾하고 附蟬爲文이라 貂는 取其內勁悍而外溫潤이요 蟬은 居高淸潔하고 飮露而不食하니 此因物(生)[主]義라 故以爲冠飾이라 漢輿服志에 惠文冠은 是一名武弁이요 又曰武冠이라하니라 [通鑑要解]貂蟬은 出東北夷하니 朔地苦寒하야 人以其皮溫額이어늘 後代效之요 因以金璫飾首하고 前揷貂尾라 至漢하야는 因焉하고 加以附蟬爲文也라】이 盈坐하니 時人이 爲之諺曰 貂不足하야 狗尾續이라하니라 齊王冏【文帝昭之孫이요 齊王攸之子라】等이 起兵하야 討倫殺之하니 乘輿反正【非我失之나 自我復之를 爲中興이요 自我失之나 因人復之를 謂之反正이라】하다

永寧 元年(신유 301)

趙王司馬倫이 帝位를 찬탈하니, 〈黨與가 모두 卿相에 제수되어〉 黨與 중에 계급을 뛰어넘고 차례를 뛰어넘은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매번 조회할 때마다 貂蟬冠【[釋義]貂蟬은 侍中과 中常侍의 冠이니, 담비 꼬리로 장식하고 매미 모양의 장식을 붙여 문식하였다. 담비는 안의 성질은 굳세고 겉모습은 따뜻하고 윤택함을 취한 것이고, 매미는 높은 곳에 있어서 청결하며 이슬만 마시고 다른 것을 먹지 않음을 취한 것이니, 이는 물건을 인하여 뜻을 위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冠의 꾸밈으로 삼은 것이다. ≪漢書≫ 〈輿服志〉에 “惠文冠은 일명 武弁이요, 또 武冠이라 한다.” 하였다. [通鑑要解]貂蟬은 東北 오랑캐 지역에서 나온다. 북쪽 지역은 매우 추워서 사람들이 그 가죽으로 이마를 보온하는데, 후대에 이것을 흉내 내고 인하여 금과 옥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앞에 담비 꼬리를 꽂은 것이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를 그대로 따르고 겸하여 매미 모양의 장식을 붙여 문식하였다.】을 쓴 벼슬아치들이 자리에 가득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속담을 지어 말하기를 “담비 꼬리가 부족하여 개 꼬리로 이어 붙였다.” 하였다. 齊王 司馬冏【齊王 司馬冏은 文帝 司馬昭의 손자이고, 齊王 司馬攸의 아들이다.】 등이 군대를 일으켜서司馬倫을 토벌하여죽이니, 乘輿(황제)가 反正【내가 잃은 것이 아니나 내가 회복한 것을 中興이라 하고, 나로 말미암아 잃었으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회복하는 것을 일러 反正이라 한다.】하였다.

[壬戌]太安元年

[壬戌]太安元年이라

齊王이 旣得志에 頗驕奢擅權하니 中外失望이라 顧榮, 張翰이 皆慮及禍러니 因秋風하야 起思菰菜, 蓴羹, 鱸魚膾【王氏曰 記內則注에 菰는 雕胡也니 江南人呼爲茭草라 蓴은 水葵也니 生水中하고 葉似鳧葵하니 採莖可噉이라 三月至八月은 莖細如釵股하니 名曰絲蓴이요 九月至十月은 漸粗하야 在泥中하니 名曰(溾)[塊]蓴이니 以五味和煮爲羹也라 鱸魚는 巨口細鱗이니 松江之鱸也라 少儀曰 聶而切之爲鱠(膾)라한대 注에 聶之言은 䐑也라 先藿葉切之하고 復報切之면 則成鱠라】하야 歎曰 人生은 貴適志耳니 富貴何爲오하고 卽引去하니라

太安 元年(임술 302)

齊王司馬冏이 이미 뜻을 얻고 나자 자못 거만하고 사치하며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하니 中外가 실망하였다. 顧榮張翰이 모두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는데, 張翰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인 吳中의〉 고비나물과 순챗국과 농어회【王氏가 말하였다. “≪禮記≫ 〈內則〉의 注에 ‘菰는 雕胡이다.’ 하였으니, 강남 사람들은 茭草라고 부른다. 蓴은 水葵이다. 물속에서 자라고 잎이 鳧葵와 비슷하며, 줄기를 채취하여 먹을 수 있다. 3월부터 8월까지는 줄기가 가늘어 비녀다리와 같으니 이름을 絲蓴이라 하고, 9월부터 10월까지는 점점 굵어져서 진흙 속에 있으니 이름을 塊蓴이라 하는데, 五味로 간을 맞추어 삶아서 국을 끓인다. 농어는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느니, 松江의 농어이다. ≪禮記≫ 〈少儀〉에 이르기를 ‘얇게 저민 것을 膾라 한다.’ 하였는데, 鄭玄의 注에 ‘聶이라는 말은 가늘게 써는 것이다. 먼저 콩잎만한 크기로 썰고 그것을 다시 가로로 썰면 膾가 된다.’ 하였다.”】가 생각나서 한탄하기를 “인생은 뜻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부귀한들 무엇하겠는가.” 하고 그날로 떠났다.

河間王成都王【河間王顒은 宣帝懿弟安平王孚子요 成都王穎은 武帝炎之子라】等이 起兵討齊王하야 殺之하다

河間王司馬顒成都王司馬穎河間王司馬顒宣帝司馬懿의 아우인 安平王司馬孚의 아들이요, 成都王司馬穎武帝司馬炎의 아들이다.】 등이 병력을 일으켜齊王司馬冏을 토벌해서죽였다.

[甲子]永興元年

[甲子]永興元年이라 〈漢高祖劉淵元熙元年이요 成太宗李雄建興元年이라 是歲에 僭國二니 大一, 小一이라〉

永興 元年(갑자 304) - 漢나라 高祖劉淵의 元熙 元年이요, 成나라 太宗李雄의 建興 元年이다. 이해에 僭國이 둘이니,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다. -

成都王으로 爲皇太弟하다

成都王司馬穎을 皇太弟로 삼았다.

○ 初에 太弟이 表匈奴左賢王劉淵하야 爲冠軍將軍하다 의 子이 驍驍勇絶人하고 博涉經史하고 善屬文【屬은 之六切이니 著也라】하고 彎弓三百斤이라 弱冠【去聲이니 二十曰弱冠이라】에 游京師하니 名士莫不與交러라 이 以爲積弩將軍하다 의 從祖右賢王宣이 謂其族人曰 自漢亡以來로 我單于徒有虛號하야 無復尺土하고 自餘王侯는 降同編戶【編은 排也니 編戶者는 謂列次民籍也라】라 今吾衆이 雖衰나 猶不減二萬이어늘 奈何斂手受役하야 奄過百年이리오 左賢王은 英武超世하니 天苟不欲興匈奴인댄 必不虛生此人也리라 今司馬氏骨肉相殘하야 四海鼎沸하니 復呼韓邪之業이 此其時也라하고 乃相與謀하야 推大單于하고 使其黨呼延攸【匈奴名也니 複姓이라 呼延氏는 本曰呼衍이러니 後入中國하야 語轉衍爲延耳라 [通鑑要解]北狄傳에 匈奴四姓은 有呼延氏, 卜氏, 蘭氏, 喬氏로되 而呼延氏最貴하니라】로 詣鄴告之하다 이 白穎請歸會葬이어늘 이 弗許러니 及王浚, 東嬴公騰【王浚은 幽州都督이요 東嬴公騰은 幷州刺史니 晉宗室之疎戚이라】이 起兵에 이 說穎曰 請爲殿下하야 還說五部【曹操分南匈奴하야 爲五部하고 以淵父豹로 爲左部帥也라】하야 以赴國難하리니 二豎之首【二豎는 謂浚與騰也라】를 可指日而懸也리이다 이 悅하야 拜北單于, 參丞相軍事하다 이 至左國城이어늘 劉宣等이 上大單于之號하니 二旬之間에 有衆五萬이라 遷都左國城【匈奴左部所居城也라】하니 胡, 晉歸之者 愈衆이라 이 謂群臣曰 昔에 漢有天下久長하야 恩結於民하니 吾는 漢氏之甥【漢高以宗室女로 爲公主하야 以妻冒頓하고 約爲兄弟라 故로 其子孫冒姓劉氏라】으로 約爲兄弟라 兄亡弟紹 不亦可乎아 乃建國號曰漢이라하고 卽漢王位하야 改元元熙하고 尊漢安樂公하야 爲孝懷皇帝하다

○ 처음에 太弟 司馬穎이 表文을 올려 匈奴左賢王劉淵을 冠軍將軍으로 삼았다. 劉淵의 아들劉聰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文章을 잘 지었으며【屬은 之六切(족)이니 저술하는 것이다.】 무게가 300근이 나가는 활을 당겼다. 弱冠【去聲이니, 20세를 弱冠이라 한다.】 시절에 京師에 유람하니, 名士들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 자가 없었다. 司馬穎劉聰을 積弩將軍으로 삼았다.

劉淵의 從祖인 右賢王劉宣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漢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 單于가 단지 빈 이름만 소유하여 다시는 한 자 되는 땅도 없고 그 나머지 王侯는 강등되어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호적에 편입【編은 배열함이니, 編戶는 平民의 호적에 차례로 나열함을 이른다.】되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쇠미해졌으나 그래도 2만 명을 밑돌지 않는데, 어찌 손을 놓고 사역당하여 이대로 백 년을 지낸단 말인가. 左賢王은 英明함과 武勇이 세상에 뛰어나니, 하늘이 만일 우리 匈奴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태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司馬氏가 골육간에 서로 해쳐서 온 천하가 솥의 물이 끓는 듯하니, 呼韓邪單于의 王業을 회복하려면 바로 지금이 기회이다.” 하고, 마침내 서로 모의하여 劉淵을 추대하여大單于로 삼고 그의 黨인 呼延攸【[釋義]呼延攸는 匈奴의 이름이니 複姓이다. 呼延氏는 본래 呼衍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中國에 들어와 語音이 변하여 衍을 延으로 쓴 것이다. [通鑑要解]≪晉書≫ 〈北狄傳〉에 “匈奴의 네 姓은 呼延氏‧卜氏‧蘭氏‧喬氏가 있는데, 呼延氏가 가장 귀하다.” 하였다.】로 하여금 鄴 땅에 나아가 이를 고하게 하였다.

劉淵司馬穎에게 아뢰어 돌아가서 會葬할 것을 청하였으나 司馬穎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王浚東嬴公司馬騰王浚은 幽州都督이고 東嬴公司馬騰은 幷州刺史이니, 晉나라 宗室의 먼 친척이다.】이 군대를 일으키자劉淵司馬穎을 설득하기를 “청컨대 전하를 위해서 돌아가서 五部【曹操가 南匈奴를 나누어 五部로 만들고, 劉淵의 아버지 劉豹를 左部帥로 삼았다.】를 설득하여 國難에 달려오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두 놈【二豎는 王浚司馬騰을 이른다.】의 머리를 머지않아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司馬穎이 기뻐하여 劉淵을 北單于‧參丞相軍事로 삼았다.

劉淵이 左國城에 이르자劉宣 등이 大單于의 칭호를 올리니, 20일 동안에 5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도읍을 左國城【左國城은 匈奴의 左部가 거주하는 城이다.】으로 옮기니, 오랑캐와 晉나라 사람들 중에 귀의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劉淵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漢나라는 천하를 오랫동안 보유하여 은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니, 우리는 漢나라의 外孫으로 漢나라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漢나라 高祖가 종실의 딸을 公主라 하여 冒頓(묵특)에게 시집보내고 兄弟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이 마침내 가탁하여 劉氏를 姓으로 삼은 것이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승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국호를 漢이라 하였다. 漢王의 位에 올라 元熙라 개원하고漢나라 安樂公劉禪을 추존하여孝懷皇帝라 하였다.

○ 十月에 李雄【李特子라 前年에 李特起蜀하니라[釋義]李雄은 字仲雋이니 特之第三子也라[附註〕初에 特이 隨流人入蜀하야 聚爲寇盜하고 自稱益州牧이러니 與益州刺史羅尙戰敗死하다 其子雄이 攻走羅尙하고 遂入成都하야 自稱成都王하니라】이 卽成都王位하다

○ 10월에 〈成나라〉 李雄【[原註]李雄李特의 아들이다. 전 해(303)에 李特이 蜀에서 군대를 일으켰다.[釋義]李雄은 字가 仲雋이니, 李特의 셋째 아들이다.[附註]처음에 李特이 유랑하는 사람을 따라 蜀으로 들어가서 무리를 모아 도둑질을 하고 益州牧이라고 자칭하였는데, 益州刺史羅尙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그의 아들 李雄羅尙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成都에 들어가 成都王이라고 자칭하였다.】成都王의 자리에 올랐다.

○ 帝旣還洛陽에 張方【河間王顒之將이라】이 擁兵하야 專制朝政하니 太弟이 不得復預事라 詔太弟穎하야 以成都王으로 還第케하고 更立豫章王하야 爲皇太弟하다

○ 황제가 洛陽으로 돌아가자 張方張方河間王司馬顒의 장수이다.】이 군대를 끼고 조정의 정사를 專制하니, 太弟司馬穎이 다시는 정사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太弟司馬穎에게 명하여 成都王의 작위를 가지고 私家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豫章王司馬熾를 세워 皇太弟로 삼았다.

○ 十一月에 張方이 劫帝하야 遷都長安하다

○ 11월에 張方이 황제를 위협하여長安으로 천도하였다.

[丙寅]光熙元年

[丙寅]光熙元年이라 〈漢元熙三年이요 成晏平元年이라〉

東海王이 起兵討張方하고 收成都王하야 殺之하다

光熙 元年(병인 306) - 漢나라 元熙 3년이고, 成나라 晏平 元年이다. -

東海王司馬越이 군대를 일으켜張方을 토벌하고成都王司馬穎을 체포하여죽였다.

成都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成이라하다

成都王李雄이 황제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大成이라 하였다.

○ 十一月에 帝食䴵中毒崩【或曰 太傅越鴆之也라】하니 太弟卽皇帝位하다 懷帝始遵舊制하야 於東堂聽政하고 每至宴會하야 輒與群官으로 論衆務하고 考經籍하니 黃門侍郞傅宣이 歎曰 今日에 復見武帝之世矣라하더라

[史略 史評]史斷曰 惠帝昏愚하야 不辨菽麥하야 權在群下하고 政出多門이라 忠賢路絶하고 讒諛得志하야 交相互市하며 皇(帝)[后]太子 四廢五復호되 莫能詰問하고 東奔西逸에 受制他人하야 莫適爲主라 上不保母后하고 次不保妻子하고 終不保其身하야 食餠中毒에 弗知禍端하니 議者謂足以報曹氏受制於司馬懿者焉이라

○ 11월에 황제가 떡을 먹다가 중독되어 죽으니,【혹자는 말하기를 “太傅인 司馬越이 鴆毒으로 황제를 독살한 것이다.” 한다.】 太弟(司馬熾)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懷帝(司馬熾)가 처음으로 옛 제도를 따라 東堂에서 정사를 다스리고 매번 연회에 이르러서 그때마다 여러 관원들과 여러 가지 정무를 논하고 經籍을 상고하니, 黃門侍郞傅宣이 감탄하기를 “오늘에야 다시 武帝(司馬炎)의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惠帝는 어둡고 어리석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여, 권력이 여러 신하에게 있었고 정사가 여러 部門에서 나왔다. 충성스럽고 어진 자를 등용하는 길이 끊어지고 참소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번갈아 서로 천거하고 청탁해서 벼슬을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듯이 하였으며, 皇后와 太子가 네 번이나 폐해지고 다섯 번이나 復位되었으나 詰問하지 못하였으며, 동쪽으로 달아나고 서쪽으로 숨음에 다른 사람에게 견제당해서 주장하여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母后(楊太后)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다음으로는 妻子를 보전하지 못하고 끝에는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떡을 먹다가 독살당하면서도 禍의 실마리를 알지 못하였으니, 의론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曹氏司馬懿에게 견제당한 것을 갚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孝懷皇帝

孝懷皇帝 名熾니 武帝第二十五子라 在位六年이요 壽三十이라

孝懷皇帝【慈仁短折曰懷라】武帝第二十五子라 在位六年이요 壽三十이라

孝懷皇帝【자애롭고 인자하나 일찍 죽은 것을 懷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武帝의 스물다섯 번째 아들이다. 재위가 6년이고 壽가 30세이다.

[丁卯]永嘉元年

[丁卯]永嘉元年이라 〈漢元熙四年이라〉

琅琊王【卽東晉元帝也라 初에 有牛繼馬後之謠하니 司馬懿忌牛氏하야 酖其將牛金이러니 懿曾孫琅琊恭王覲之妃夏侯氏 通小吏牛氏而生元帝하니 姓冒司馬氏하고 都建業하다 秦時에 望氣者 言五百年後에 金陵有天子氣라하니 始皇이 東遊而壓之하고 改其地曰秣陵이라하고 塹北山而絶其勢하다 後四百三十七年에 孫權稱帝하고 自謂當之러니 至元帝하야 乃五百二十六年이니 其言乃驗이라 此云牛金所生은 未詳이라 [通鑑要解]琅琊王睿는 宣帝懿之曾孫이니 是爲東晉元帝라】로 爲安東將軍하야 都督揚州하고 鎭建業하다 以安東司馬王導로 爲謀主하야 推心親信하고 每事咨焉이러라 睿名論【名譽議論也라】素輕하야 吳人不附하야 居久之로되 士大夫莫有至者하니 導患之러라 會에 出觀禊【禊者는 潔也라 鄭國之俗이 以上巳采蘭芷하야 跋除不祥하니라 漢禮儀志에 三月上巳에 官民皆潔於東流水上하야 洗去宿垢하니 潔은 祭名이라 [通鑑要解]禊는 胡計切이니 祓除不祥也라 除惡祭名이니 三月上巳에 臨水祓除不祥也라】어늘 使乘轝하야 具威儀하고 與名勝으로 皆騎從【騎는 奇寄切이요 從은 才用切이니 竝去聲이라 跨馬曰騎는 平聲이요 馬軍則騎는 去聲이라 從은 就也, 順也則平聲이요 隨行也則去聲이라】하니 紀瞻, 顧榮等이 見之驚異하야 相帥拜于道左러라 因說顧榮, 賀循은 此土之望이라 宜引之하야 以結人心이니 二子旣至면 則無不來矣리이다 乃使로 躬造, 하니 二人이 皆應命而至라 爲吳國內史하고 爲軍司하야 加散騎常侍하고 凡軍府政事를 皆與之謀議하고 又以紀瞻으로 爲軍祭酒【官名이니 在官之長也라 賓客得主人饌이면 則老者一人이 先擧酒하야 祭之라 故로 以祭酒爲稱也라 祭는 沃也라】하고 卞壼으로 爲從事하다 王導하야 謙以接士하고 儉以足用하고 以淸淨爲政하고 撫綏新舊【新은 謂自中原來者요 舊는 謂江東人이라】라 故로 江東이 歸心焉하니라

永嘉 元年(정묘 307) - 漢나라 元熙 4년이다. -

琅琊王司馬睿【[附註]琅琊王 司馬睿는 바로 東晉의 元帝이다. 처음에 소[牛]가 말[馬]의 뒤를 잇는다는 동요가 있으니, 司馬懿가 牛氏를 꺼려 그 장수 牛金을 독약을 먹여 죽였다. 그런데 司馬懿의 曾孫인 琅琊恭王 司馬覲의 妃인 夏侯氏가 아전인 牛氏와 간통하여 元帝를 낳으니, 거짓으로 司馬氏의 姓을 칭하고 建業에 도읍하였다. 秦나라 때에 雲氣를 관찰하는 자가 말하기를 “500년 뒤에 金陵에 천자의 기운이 있을 것이다.” 하니, 始皇帝가 동쪽 지방에 가서 이 기운을 누르고 그 지명을 秣陵이라고 고쳤으며 북산에 참호를 파서 산세를 끊었다. 437년 뒤에 孫權이 황제를 칭하고 자신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는데, 元帝 때가 바로 526년이었으니 그 말이 비로소 맞았다. 여기에서 牛金의 소생이라고 말한 것은 未詳이다. [通鑑要解]琅琊王 司馬睿는 宣帝 司馬懿의 曾孫이니, 바로 東晉의 元帝이다.】를 安東將軍으로 삼아 揚州를 都督하고 建業에 鎭駐하게 하였다. 司馬睿는 安東司馬王導를 謀主로 삼아 마음을 미루어 친애하고 신임하였으며 매사를 자문하였다. 司馬睿는 명성과 의론【名論은 명예와 의론이다.】이 평소 가벼워서 吳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아 오랫동안 머물러도 士大夫들이 찾아오는 자가 없으니, 王導가 이를 염려하였다. 마침 司馬睿가 禊【[附註]禊는 깨끗함이다. 鄭나라 풍속은 上巳日에 蘭草와 芷草를 캐어 불길한 것을 제거하였다. ≪後漢書≫ 〈禮儀志〉에 “3월 上巳日에 관원과 백성들이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 물가에서 깨끗이 씻어 묵은 때를 제거하니, 潔은 제사 이름이다.” 하였다. [通鑑要解]禊는 胡計切(혜)이니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쁜 것을 제거하는 제사 이름이니, 3월 上巳日에 물가에 임하여 불길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를 구경하러 나가자, 王導司馬睿로 하여금 轝(가마)를 태워 위의(儀仗)를 갖추게 하고, 자신은 유명 인사들과 함께 모두 기병을 데리고 뒤따르니,【騎는 奇寄切(기)이요 從은 才用切(종)이니 모두 去聲이다. 말을 탄다는 뜻의 騎字는 平聲이고 馬軍(騎兵)이라는 뜻의 騎字는 去聲이다. 從은 나아가다, 따르다의 뜻일 때에는 平聲이고, 隨行한다는 뜻일 때에는 去聲이다.】紀瞻顧榮 등이 이것을 보고 놀랍고 신기하게 여겨 서로 이끌고 가서 길가에서 절하였다. 王導가 인하여 司馬睿를 설득하기를 “顧榮賀循은 이 지방의 명망 있는 사람입니다. 마땅히 이들을 나오게 하여 인심을 맺어야 하니, 두 사람이 이르고 나면 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司馬睿가 마침내 王導로 하여금 몸소 賀循顧榮을 찾아가게 하니, 두 사람이 모두 명령에 응하여 왔다. 賀循을 吳國內史로 삼고顧榮을 軍司로 삼아散騎常侍를 가하고 모든 軍府의 정사를 모두 그들과 모의하였다. 또 紀瞻을 軍祭酒【祭酒는 관직명이니, 관원들 중에 우두머리이다. 빈객이 주인의 음식을 얻으면 늙은 사람 한 명이 먼저 술을 들어 祭(고수레)한다. 그러므로 祭酒라고 칭한 것이다. 祭는 술을 붓는 것이다.】로 삼고卞壼을 從事로 삼았다. 王導司馬睿를 설득하여 겸손함으로 선비들을 대하고 검소함으로 재용을 풍족하게 하며 淸淨함으로 정사를 다스리고 中原에서 강을 건너온 사람과 江東 지역의 옛 사람【새로운 사람은 中原으로부터 온 자를 이르고, 옛 사람은 江東 사람을 이른다.】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江東의 민심이 돌아왔다.

○ 十一月에 以王衍爲司徒하다 이 說太傅曰 朝廷이 危亂하니 當賴方伯이라 宜得文武兼資以任之라하야 乃以弟으로 爲荊州都督하고 族弟으로 爲靑州刺史하고 語之曰 荊州는 有江, 漢之固하고 靑州는 有負海之險하니 卿二人在外하고 而吾居中이면 足以爲三窟【窟은 穴也라 俗云 兎營三窟하니 必背丘相通이라하니 所謂兎三窟矣라】矣라하니라

○ 11월에 王衍을 司徒로 삼았다. 王衍이 太傅司馬越을 설득하기를 “조정이 위태롭고 혼란하니, 마땅히 方伯에게 의뢰하여야 합니다. 文武를 겸비한 인재를 찾아서 맡겨야만 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아우인 司馬澄을 荊州都督으로 삼고 族弟인 司馬敦을 靑州刺史로 삼고는 이들에게 말하기를 “荊州는 揚子江과 漢水의 험고함이 있고 靑州는 바다를 뒤에 등진 험준함이 있으니, 卿 두 사람이 밖에 있고 내가 중앙에 있으면 충분히 세 개의 굴【窟은 구멍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는데, 반드시 언덕을 등지고 서로 통하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토끼가 세 개의 숨는 굴을 파놓는다.’는 것이다.】이 될 수 있다.” 하였다.

[戊辰]二年

[戊辰]二年이라 〈漢永鳳元年이라〉

三月에 詔封張軌【涼州刺史라】하야 爲西平公하다

永嘉 2년(무진 308) - 漢나라 永鳳 元年이다. -

3월에 황제가 명하여 張軌【張軌는 涼州刺史이다.】를 봉해서 西平公으로 삼았다.

漢主이 卽皇帝位하야 以其子으로 爲大將軍하고 族子로 爲龍驤大將軍하다

漢主劉淵이 황제에 즉위하여 그의 아들劉聰을 大將軍으로 삼고族子劉曜를 龍驤大將軍으로 삼았다.

[己巳]三年

[己巳]三年이라 〈漢河瑞元年이라〉

初에 何曾이 侍武帝宴【武帝는 炎也라】하고 退謂諸子曰 主上이 開創【創與刱通하니 造也라】大業호되 吾每宴見에 未嘗聞經國遠圖하고 惟說平生常事하니 非貽厥孫謀之道也라 及身而已니 後嗣는 其殆乎인저 汝輩는 猶可以免이어니와 指諸孫曰 此屬은 必及於難이리라 이 日食萬錢호되 猶云無下箸處라하니라

永嘉 3년(기사 309) - 漢나라 河瑞 元年이다. -

처음에 何曾이 武帝【武帝는 司馬炎이다.】를 모시고 宴會를 열고는 물러나와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大業을 창건【創은 刱과 통하니, 만드는 것이다.】하였으나 내가 매번 宴會에서 뵐 때마다 국가를 경륜하는 원대한 도모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고 오직 평소의 일상적인 일만 말씀하니, 후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방도가 아니다. 자신에게만 미칠 뿐이니 후손들이 위태로울 것이다. 너희들은 오히려 화를 면할 수 있겠지만.” 하고, 여러 손자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반드시 난에 미칠 것이다.” 하였다. 何曾이 하루에 만 전의 비용을 들여 珍味를 먹으면서도 오히려 젓가락을 댈 곳이 없다고 말하였다.

石勒【羯也라】이 寇鉅鹿, 常山하니 衆至十餘萬이라 以張賓爲謀主하니 幷州諸胡羯이 多從之하니라

○ 石勒【石勒은 羯族이다.】이 鉅鹿과 常山을 침략하니, 무리가 십여 만 명에 이르렀다. 張賓을 謀主로 삼으니幷州의 여러 胡(흉노)와 羯族들이 많이 따랐다.

[庚午]四年

[庚午]四年이라 〈漢烈宗劉聰光興元年이라〉

七月에 漢主이 寢疾【寢은 益也라】하야 以楚王聰으로 爲大司馬, 大單于러니 이 卒하니 이 卽帝位하다

[庚午]四年이라 〈漢烈宗劉聰光興元年이라〉

7월에 漢主劉淵이 병이 심해져서【寢은 더 심해지는 것이다.】楚王劉聰을 大司馬‧大單于로 삼았는데, 劉淵이 죽자 劉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京師饑困이 日甚이어늘 太傅이 遣使하야 以羽檄【尺書也니 有急則揷羽其上이라】으로 徵天下兵하야 使入援京師【帝謂使者曰 爲我語征鎭等將호되 今日尙可救어니와 後則無及矣라하라[頭註]時에 漢入寇라】러니 旣而요 卒無至者하니라

○ 京師에 기근과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太傅司馬越이 使者를 보내 羽檄【羽檄은 尺書(詔書)이니, 위급한 일이 있으면 그 위에 깃털을 꽂는다.】으로 천하의 병력을 징집하여 들어와서 京師를 구원하게 하였는데,【[通鑑要解]황제가 使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征과 鎭의 장수들에게 말하되 오늘은 그래도 구제할 수 있겠지만 늦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라.” 하였다.[頭註]이때에 漢나라가 침략하였다.】 이윽고 끝내 이른 자가 없었다.

[辛未]五年

[辛未]五年이라 〈漢嘉平元年이요 成玉衡元年이라〉

東海王이 薨커늘 王衍等이 奉越喪하야 還葬東海할새 石勒이 帥輕騎追之【勒率輕騎하고 追越喪於苦縣하야 大敗晉兵하다 執太尉衍等하야 排墻殺之하며 剖越柩하야 燒其尸하고 曰 亂天下者 此人也니 吾爲天下報之하노라】하니 無一人得免者라 執太尉等하야 坐之幕下하고 問以晉故한대 이 具陳禍敗之由하고 云計不在己라하고 且自言少無宦情하야 不豫世事라하고 因勸勒稱尊號하야 冀以自免이라 曰 君이 少壯登朝하야 名蓋四海하고 身居重任이어늘 何得言無宦情邪아 破壞天下 非君而誰오

永嘉 5년(신미 311) - 漢나라 嘉平 元年이고, 成나라 玉衡 元年이다. -

東海王司馬越이 죽자, 王衍 등이 司馬越의 喪을 받들어 東海로 돌아가 장례할 때에 石勒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니,【石勒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司馬越의 喪을 추격하여 苦縣에서 따라잡아 晉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太尉 王衍 등을 사로잡아 담장을 밀어 무너뜨려 압사시켰으며, 司馬越의 관을 꺼내어 그 시신을 불태우고 말하기를 “天下를 어지럽힌 자가 바로 이 사람이니, 나는 천하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준 것이다.” 하였다.】 한 사람도 빠져나간 자가 없었다. 石勒이 太尉王衍 등을 사로잡아 幕下에 앉히고 晉나라가 실패하게 된 이유를 묻자, 王衍이 禍敗(재앙과 실패)를 당한 이유를 자세히 말하고 국가의 계책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음을 말하였으며, 또 스스로 말하기를 “젊어서부터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고, 인하여 石勒에게 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여 스스로 화를 면하기를 바랐다. 石勒이 말하기를 “君이 젊고 건장한 시절에 조정에 올라 명성이 四海를 뒤덮고 몸이 重任을 맡았는데, 어찌 벼슬할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파괴한 것은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였다.

漢主이 使前軍大將軍呼延晏으로 將兵二萬七千하야 寇洛陽이러니 比及河南하야 晉兵이 前後十二敗에 死者三萬餘人이라 始安王曜, 王彌, 石勒【始安王曜는 劉淵族子요 王彌石勒은 皆漢將이라 惤縣令柏根反이어늘 王浚討斬之하니 其長史王彌 遂盜하야 寇靑, 徐러니 後에 降漢이라 後에 石勒誘殺之하니라 惤은 音弦이라】이 皆引兵會之러니 未至에 이 先至洛陽하야 以外繼不至라하야 俘掠而去할새 帝具舟於洛水하야 將東走러니 이 盡焚之하다 王彌, 始安王繼至에 呼延晏이 克宣陽門入이어늘 帝出華林園門하야 欲奔長安이러니 漢兵이 追執之하다

漢主劉聰이 前軍大將軍呼延晏으로 하여금 2만 7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洛陽을 침략하게 하였는데, 河南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晉나라 군대가 전후로 열두 차례 패전하여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始安王劉曜와 王彌‧石勒【始安王 劉曜는 劉淵의 조카이고, 王彌와 石勒은 모두 漢나라 장수이다. 惤縣令 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王浚이 토벌하여 베어 죽이니, 그 長史인 王彌가 마침내 도적이 되어 靑州와 徐州를 침략하였는데, 뒤에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뒤에 石勒이 유인하여 죽였다. 惤은 音이 현이다.】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회합하기로 하였는데,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呼延晏이 먼저 洛陽에 이르러서 외부에서 오기로 한 군대가 이르지 않았다 하여 노략질하고 떠나갔다. 이때에 황제가 洛水에 배를 준비해 두었다가 장차 동쪽으로 달아나려 하였는데, 呼延晏이 이것을 모두 불태웠다. 王彌始安王劉曜가 잇따라 이르자 呼延晏이 宣陽門을 점령하고 들어오니, 황제가 華林園의 문으로 나가서 長安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漢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 時에 海內大亂호되 獨江東이 差安하니 中國士民避亂者 多南渡江이라 鎭東司馬王導琅琊王하야 收其賢俊하야 與之共事한대 從之하야 辟掾屬百餘人하니 時人이 謂之百六掾【掾은 官屬也니 言置掾屬一百六人이라】이라 刁恊, 卞壼, 陳頵, 庾亮, 甘卓, 周訪, 陶侃이 皆與焉하다

○ 이때에 海內가 크게 혼란하되 유독 江東만은 다소 평안하니, 中原에서 피난 온 선비와 백성들이 대부분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갔다. 鎭東司馬王導琅琊王司馬睿를 설득하여 이들 중 어진 이와 준걸스러운 이를 수용하여 이들과 정사를 함께하도록 하였는데, 司馬睿가 그의 말을 따라서 掾屬(官屬) 백여 명을 부르니, 당시 사람들이 百六掾【掾은 官屬이니, 百六掾은 官屬 106명을 두었음을 말한 것이다.】이라고 불렀다. 刁恊卞壼陳頵庾亮甘卓周訪陶侃이 모두 여기에 참여하였다.

○ 八月에 漢主이 遣始安王等하야 攻長安克之하고 以爲車騎大將軍하야 鎭長安하다

○ 8월에 漢主劉聰始安王劉曜 등을 보내어 長安을 공격하여함락시키고劉曜를 車騎大將軍으로 삼아 長安에 鎭駐하게 하였다.

○ 安定太守賈疋(雅)【疋는 古文雅字라】與馮翊太守索綝【姓名이라】으로 謀興復晉室하야 乃共帥衆向長安하다 劉曜等으로 戰於黃丘라가 衆이 大敗하니 於是에 等의 兵勢大振이라 迎秦王愍帝也니 武帝孫이요 吳王子也라】하야 入於雍城하다

○ 安定太守 賈疋【疋는 雅의 古字이다.】가 馮翊太守 索綝【索綝은 성명이다.】과 晉나라 왕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여 마침내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였다. 劉曜賈疋 등과 黃丘에서 싸우다가 劉曜의 군대가 대패하니, 이에 賈疋 등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賈疋秦王 司馬業【秦王 司馬業은 愍帝이니, 武帝 司馬炎의 손자이고 吳王 司馬晏의 아들이다.】을 맞이하여 雍城으로 들어왔다.

顗奔琅琊王하니 爲軍諮祭酒하다 前騎都尉桓彛 亦避亂過江이라가 見微弱하고 謂曰 我以中州多故로 來此求全이러니 而單弱이 如此하니 將何以濟리오 旣而요 見王導하야 共論世事하고 退謂曰 向見管夷吾【春秋에 齊管仲은 (字)[名]夷吾니 相桓公霸諸侯러니 今以王導比之하니라】하니 無復憂矣라하니라 諸名士相與登新亭游宴할새 周顗中坐歎曰 風景은 不殊하나 擧目에 有江河之異【言洛都遊宴에 多在河濱이러니 而新亭臨江者也라】라하고 因相視流涕하다 王導愀然【變色也라】變色曰 當共勠(戮)力王室하야 克復神州【王氏曰 中國을 名曰赤縣神州라 赤縣神州內에 自有九州하니 禹之序九州是也라 杜氏通典曰 神州는 謂王者所〈卜〉居吉土니 五千里內地名이라 注에 崑崙東南地方五千里를 名曰神州라】어늘 何至作楚囚【晉侯見鍾儀하고 曰 南冠而縶者는 誰也오 有司對曰 鄭人所獻楚囚也니이다하니 南冠은 楚冠也라】對泣耶아하니 衆皆收淚謝之하니라

周顗琅琊王司馬睿에게 망명해오니司馬睿周顗를 軍諮祭酒로 삼았다. 前騎都尉桓彛도 난리를 피하여 揚子江을 지나다가 司馬睿의 세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周顗에게 이르기를 “나는 中原이 多難하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온전하기를 바랐는데, 고단하고 미약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中原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王導를 만나 함께 세상일을 논하고 물러나와 周顗에게 이르기를 “방금 管夷吾【春秋時代에 齊나라 管仲은 이름이 夷吾로, 桓公을 도와 諸侯들 중에 霸者가 되게 하였는데, 이제 王導를 管仲에게 견준 것이다.】를 만났으니 다시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여러 名士들이 함께 新亭에 올라가 놀고 잔치할 때에 周顗가 잔치 자리에서 한탄하기를 “풍경은 옛날과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바라보니 山河의 차이가 있다(山河는 옛 산하가 아니다).【洛都에서 놀고 잔치할 때에 대부분 黃河 가에서 하였는데, 지금 新亭이 揚子江 가에 임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서로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다. 王導가 愀然히【愀然은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다.】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함께 왕실을 위해 힘을 합쳐 中原【王氏가 말하기를 “中國을 赤縣神州라 이름한다. 赤縣神州 안에 본래 九州가 있었으니, 禹임금이 九州를 차서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杜氏(杜佑)의 ≪通典≫에 이르기를 “神州는 王者가 거주하는 길한 곳을 이르니, 5천 리 안에 있는 지역을 이른다.” 하였는데, 그 注에 “崑崙山 동남쪽으로 사방 5천 리 이내의 지역을 神州라 이름한다.” 하였다.】을 회복할 생각을 해야 할 때에 어쩌자고 楚나라 죄수【≪春秋左傳≫ 成公 9年條에 “晉侯가 鍾儀를 보고 말하기를 ‘南方의 冠을 쓰고 묶여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有司가 대답하기를 ‘鄭人이 바친 楚나라 죄수입니다.’ 했다.” 하였다. 南冠은 楚나라 冠이다.】처럼 서로들 울기만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거두고 사과하였다.

賈疋等이 圍長安數月하니 漢中山王連戰皆敗라 驅掠士女하고 奔于平陽이어늘 秦王이 自雍入于長安하다

賈疋 등이 長安을 수개월 동안 포위하니, 漢나라 中山王劉曜가 연달아 싸워 모두 패하였다. 劉曜가 남녀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平陽으로 달아나자, 秦王司馬業이 雍城으로부터 長安으로 들어갔다.

○ 九月에 賈疋等이 奉秦王業하야 爲皇太子하고 建行臺【自魏, 晉有之라 晉文帝討諸葛誕할새 裴秀等이 以行臺從하니 別置官屬하니라 其官置令僕射하고 其尙書丞郞을 皆隨時權置하니 謂之行臺省하야 以行尙書事하니라】於長安하다

○ 9월에 賈疋 등이 秦王司馬業을 받들어 皇太子로 삼고行臺(임시 조정)【行臺는 魏‧晉 시대부터 있었다. 晉나라 文帝(司馬昭)가 諸葛誕을 토벌할 적에 裴秀 등이 行臺를 가지고 따라가니, 별도로 관속을 두었다. 관원은 令과 僕射를 두고 尙書丞과 郞을 모두 때에 따라 임시로 설치하였으니, 이를 일러 行臺省이라 하고 尙書의 일을 행하게 하였다.】를 長安에 세웠다.

○ 南安赤亭羌【弋仲六世祖遷郡하야 內附東漢하니 處南安之赤亭이라】姚弋仲이 東徙楡眉하니 戎, 夏襁負從之者 數萬이러라

○ 南安郡赤亭의 羌族【姚弋仲의 6세조가 고을을 옮겨 東漢에 內應하니, 南安郡의 赤亭에 살게 하였다.】姚弋仲이 〈부족을 이끌고〉 동쪽 楡眉縣으로 옮겨 가니, 戎族과 漢族 중에서 포대기로 자식을 업고 따르는 자가 수만 명이었다.

○ 鎭東將軍顧榮과 前太子洗馬衛玠皆卒하다 美風神하고 善淸談이라 常以爲人有不及이면 可以情恕요 非意相干이면 可以理遣이라 故로 終身不見喜怒之色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懷帝는 天資淸邵하야 過惡不彰이로되 而爲胡漢所擒하야 俾着靑衣하고 侍宴行酒하니 識者謂足以報齊王奪璽之忿焉이라하니라

○ 鎭東將軍顧榮과 前 太子洗馬衛玠가 모두 별세하였다. 衛玠는 風神이 아름답고 淸談을 잘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實情을 살펴 용서할 수 있고, 나쁜 뜻으로 침범하는 것이 아니면 이치로 따져서 떨쳐 버릴 수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懷帝는 天資가 깨끗하고 높아서 과실과 악행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오랑캐인 漢나라에게 사로잡혀 漢主懷帝로 하여금 천한 자가 입는 靑衣를 입고 연향 때 옆에 모시고서 술을 따라 돌리게 하였으니, 識者들이 이르기를 ‘齊王曹芳司馬師에게 玉璽를 빼앗긴 분노를 갚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孝愍皇帝

孝愍皇帝는 名鄴이니 武帝孫이요 吳王晏子也라 在位四年이요 壽十八이라

孝愍皇帝【愍은 與閔通하니 在國逢難曰閔이라】는 名이니 武帝孫이요 吳王子也라 在位四年이요 壽十八이라

孝愍皇帝【愍은 閔과 통하니, 나라 안에서 병난을 만난 것을 閔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武帝의 손자이고 吳王司馬晏의 아들이다. 재위가 4년이고 壽가 18세이다.

[癸酉]建興元年

[癸酉]建興元年이라 〈漢嘉平三年이라〉

春正月에 漢主이 宴群臣於光極殿【劉淵이 起光極殿於平陽이라】할새 使懷帝로 着靑衣行酒어늘 庾珉, 王雋等이 不勝悲憤하야 因號泣하니 이 惡之하다 二月에 이 殺, 等故晉臣十餘人하고 懷帝亦遇害라 四月에 懷帝凶問이 至長安하니 皇太子擧哀하고 卽皇帝位하야 以麴允으로 爲左僕射하고 索綝으로 爲衛將軍하야 軍國之事를 悉以委之하다

建興 元年(계유 313) - 漢나라 嘉平 3년이다. -

봄 정월에 漢主劉聰이 光極殿【劉淵이 平陽에 光極殿을 세웠다.】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懷帝로 하여금 靑衣를 입고 술잔을 돌리게 하자, 庾珉王雋 등이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인하여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니, 劉聰이 이들을 미워하였다. 2월에 劉聰庾珉王雋 등 옛 晉나라의 신하 10여 명을 죽였고, 懷帝 또한 살해당하였다. 4월에 懷帝의 訃音이 長安에 이르자, 皇太子가 發喪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麴允을 尙書左僕射로 삼고 索綝을 衛將軍으로 삼고서 軍務와 國政을 모두 이들에게 자문하였다.

○ 初에 中國士民避亂者 多北依王浚호되 이 不能存撫하고 又政法不立하니 士民이 往往復去之러라 唯慕容廆【鮮卑也니 後爲前燕하니라 有熊氏之裔니 曾祖莫護跋이 魏宣帝時에 有功得封하야 始建國於棘城하니라 時에 燕, 代多冠步搖冠하니 莫護跋이 見而好之하야 乃斂髮襲冠하고 因號爲步搖러니 其後에 音訛하야 遂爲慕容하니라 或云慕二儀之德하고 繼三光之容이라하야 遂以慕容爲氏라하니라】 政事修明하고 愛重人物이라 故로 士民이 多歸之어늘 擧其英俊하야 隨才授任하다

○ 처음에 中國에서 피난 온 선비와 백성들이 대부분 북쪽으로 가서 王浚에게 의지하였으나 王浚이 보호하고 按撫해 주지 못하고 또 정사와 법이 확립되지 못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왕왕 다시 떠나갔다. 오직 慕容廆【慕容廆는 鮮卑族이니 뒤에 前燕의 선조가 된다. 熊氏의 후손이니, 曾祖 莫護跋이 魏나라 宣帝(司馬懿) 때에 功이 있어 封地를 얻어 비로소 棘城에 建國하였다. 이때 燕‧代 지방에서 步搖冠(婦人의 冠)을 많이 썼는데, 莫護跋이 이것을 보고 좋아하여 마침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冠을 썼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인하여 그를 步搖라고 불렀는데, 그 뒤에 音이 잘못되어 마침내 慕容이 되었다. 혹자는 이르기를 “二儀(天地)의 德을 사모[慕]하고 三光(日‧月‧星)의 모습[容]을 이었다 하여 마침내 慕容을 氏로 삼았다.” 하였다.】만이 정사가 잘 닦여지고 분명하며 인재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니, 慕容廆가 그중에 영특하고 준걸스러운 자를 발탁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맡겼다.

○ 初에 范陽祖逖이 少有大志러니 與劉琨으로 俱爲司州主簿하야 同寢할새 中夜에 聞鷄鳴하고 蹴琨覺【蹴은 踏也요 覺는 居效切이니 寤也라】曰 此非惡聲也라하고 因起舞【蹴은 蹋也라 天官書에 夜半鷄를 謂之荒鷄라하니 荒鷄鳴이면 天下亂이라하고 晉書에 史臣曰 劉琨, 祖逖이 聞鷄暗舞하야 思中原之燎火하고 幸天步之多艱하니 原其素懷하면 抑爲貪亂者矣라하니라 李白詩에 劉琨祖逖이 起舞鷄鳴晨하니 雖有匡濟心이나 終爲樂禍人이라하니라】러니 及渡江에 以爲軍諮祭酒하다 逖居京(師)[口]에 糾合【繩三合曰糾니 猶言交締也라】驍健하고 言於曰 晉室之亂은 非上無道而下怨叛也요 由宗室爭權하야 自相魚肉【魚肉可食하니 猶言自相呑啖也라】하야 遂使戎狄乘隙하야 毒流中土라 今遺民이 旣遭殘賊하야 人思自奮하니 大王이 誠能命將出師하야 使如逖者統之하야 以復中原이면 郡國豪傑이 必有望風響應者矣리이다 素無北伐之志라 以爲奮威將軍, 豫州刺史하야 給千人廩, 布三千匹하고 不給鎧仗【仗은 兵器니 刀戟總名이라】하고 使自召募하다 이 將其部曲【大將軍營은 五部에 部校尉一人하고 部有曲하니 曲有軍候一人이라】百餘家하야 渡江中流할새 擊楫而誓曰 祖逖이 不能淸中原而復濟者면 有如大江이라하다 遂屯淮陰하야 起冶鑄兵하야 募得二千餘人而後에 進하다

○ 처음에 范陽의 祖逖이 젊어서 큰 뜻이 있었다. 劉琨과 함께 모두 司州의 主簿가 되어서 함께 잘 때에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祖逖劉琨을 발로 차서 깨우며【蹴은 발로 차는 것이요, 覺는 居效切(교)이니 잠에서 깨는 것이다.】 말하기를 “이는 나쁜 소리가 아니다.” 하고 인하여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附註]蹴琨……起舞:蹴은 발로 참이다. ≪史記≫ 〈天官書〉에 “새벽이 되기 전인 한밤중에 우는 닭을 荒鷄라 하니, 荒鷄가 울면 천하가 혼란해진다.” 하였다. ≪晉書≫ 〈祖逖傳〉에 史臣이 말하기를 “劉琨과 祖逖이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몰래 춤을 추어 中原이 불탈 것을 생각하고 天運이 多難한 것을 요행으로 여겼으니, 평소에 품은 뜻을 살펴보면 또한 천하를 탐낸 자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李白의 詩에 “劉琨과 祖逖이 닭이 우는 새벽에 일어나 춤을 추었으니, 비록 세상을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끝내 禍를 좋아한 사람이다.” 하였다.】 강을 건너오자 司馬睿가 그를 軍諮祭酒로 삼았다. 祖逖이 京口에 있을 때에 날래고 건장한 자들을 규합【노끈 세 가닥을 꼰 것을 糾라고 하니, 糾合은 締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하고서 司馬睿에게 말하기를 “晉나라 皇室의 혼란은 윗사람이 무도하여 아랫사람들이 원망하고 배반해서가 아니요, 宗室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 屠戮해서【魚肉은 먹을 수 있으니, 자기들끼리 서로 삼키고 먹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침내 戎狄으로 하여금 틈을 타게 하여 해독이 中原에까지 미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遺民들은 이미 해를 입어서 사람마다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것을 생각하니, 大王이 진실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서 저와 같은 자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中原을 수복한다면 郡國의 豪傑들이 반드시 높은 명망을 듣고 호응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司馬睿는 본래 北伐할 뜻이 없었으므로 祖逖을 奮威將軍‧豫州刺史로 삼고서 군사 천 명 분의 군량과 삼베 3천 필을 주고, 갑옷과 병기【仗은 兵器이니, 칼과 창의 총칭이다.】는 주지 않고 祖逖으로 하여금 스스로 불러 모집하게 하였다. 祖逖이 그의 部曲【〈古代의 군대 編制에〉 大將軍의 진영에는 5部에 部마다 校尉 한 사람이 있고, 部에는 曲이 있는 바, 曲에는 軍候 한 사람이 있었다.】 100여 家를 거느리고서 揚子江 中流를 건너갈 적에 노를 치며 맹세하기를 “내가 中原을 깨끗이 소탕하지 않고는 다시 이 강을 건너오지 않을 것이니, 大江을 두고 맹세하겠다.” 하였다. 마침내 淮陰에 주둔하고서 쇠를 불려 병기를 주조하고 모집하여 2천여 명을 얻은 뒤에 진격하였다.

[乙亥]三年

[乙亥]三年이라 〈漢建元元年이라〉

詔進拓跋猗盧【後爲元魏하니라】【拓跋은 複姓이니 後改姓元氏하니라 初에 匈奴劉虎附漢이어늘 劉琨將討之할새 說猗盧하야 請兵하야 遂破劉虎하니라 琨結爲兄弟하고 表爲大單于하야 封之代公이러니 後爲元魏하니라 魏之先은 出自黃帝라 受封國에 有大鮮卑山하야 因以大鮮卑爲號하니라】爵하야 爲代王하다

建興 3년(을해 315) - 漢나라 建元 元年이다. -

황제가 명하여 拓跋猗盧【[原註]拓跋猗盧는 뒤에 元魏(北魏)의 선조가 된다.】【[附註]拓跋은 複姓이니, 뒤에 성을 元氏로 고쳤다. 처음에 匈奴 劉虎가 漢나라에 붙자, 劉琨이 그를 토벌하려 할 적에 拓跋猗盧를 설득하여 병력을 청하여 마침내 劉虎를 격파하였다. 劉琨이 拓跋猗盧와 의형제를 맺고 表文을 올려 大單于로 삼아서 代公에 봉하였는데, 뒤에 元魏가 되었다. 魏나라의 先祖는 黃帝로부터 나왔다. 封國을 받은 곳에 大鮮卑山이 있어서 인하여 大鮮卑라고 호칭하였다.】의 작위를 올려 代王으로 삼았다.

陶侃이 爲廣州刺史하다 이 在廣州에 無事면 輒朝運百甓【甓은 韻會云 瓴甋을 謂之甓이라】於齋外하고 暮運於齋內어늘 人問其故한대 答曰 吾方致力中原하노니 過爾優逸이면 恐不堪事라 故自勞爾라하더라

陶侃이 廣州刺史가 되었다. 陶侃이 廣州에 있을 적에 일이 없으면 그때마다 아침에 백 장의 벽돌【甓은 ≪韻會≫에 이르기를 “벽돌을 甓이라 한다.” 하였다.】을 집 밖으로 운반했다가 저녁이면 집 안으로 운반하였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내가 막 中原에 힘을 다하려 하니, 지나치게 편안하면 일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스스로 수고롭게 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丙子]四年

[丙子]四年이라 〈漢麟嘉元年이라〉

八月에 漢大司馬 逼長安하다 九月에 攻陷長安하니 帝乘羊車하고 肉袒銜璧【縛手하야 不能執璧故로 銜之以爲降也라 降은 他註에 作贄라】輿櫬하고 出東門降이어늘 焚櫬受璧하고 遷帝及公卿以下於其營이러니 辛丑에 送至平陽하다

(于)[干]寶【東晉人이라】論曰 晉之亡也는 樹立失權하고 托付非才하야 四維【禮義廉恥라】不張하야 而苟且之政이 多也일새라 夫基廣則難傾이요 根深則難拔이요 理節則不亂【理節은 謂政敎有條理節度也라】이요 膠結則不遷【膠는 固也라 言君布仁惠之德이면 則根基深廣하고 人心固結하야 不可遷也라】이니 昔之有天下에 所以能長久는 用此道也라 今晉之興也는 創基立本이 固異於先代矣요 加以朝寡純德之人하고 鄕乏不貳之老하야 風俗淫僻하고 恥尙失所라 學者는 以, 爲宗【莊, 老는 謂莊子, 老子也니 皆虛無之學也라 王氏曰 按玄妙內篇曰 莊子는 姓莊이요 名周요 字子休니 生宋國睢陽蒙縣하고 號曰南華仙人이라 嘗爲蒙漆園吏하니 與梁惠王同時라 其學이 無所不闚나 然其要는 本歸于老子之言이라 著書十餘萬言하니 其言이 恍洋自恣하야 以適己라 老子는 姓李요 名耳라 字伯陽이니 一名重耳요 外字聃이니 或云 諡曰聃이라하니 周時人이라 李母懷胎八十一載에 逍遙李樹下라가 乃剖左腋而生하니 生卽皓然이라 故로 曰老子라 後爲周守藏室之史러니 見周之衰하고 去周西度關할새 關令尹喜見之하고 曰子將隱矣하니 强爲我著書하라 於是에 著道德二篇上下經五千餘言而去하니 竟莫知其所終이라】而黜六經하고 談者는 以虛蕩爲辨而賤名檢【法度也라】하고 行身者는 以放濁爲通而狹節信하고 進仕者는 以苟得爲貴而鄙居正하고 當官者는 以望空【望은 名也니 猶言虛名也라】爲高而笑勤恪이라 是以로 劉頌【武帝時에 守廷尉라】이 屢言治道하고 傅咸【武帝時에 襲父玄爵하고 累遷尙書右丞하니 剛簡有大節이라 風格峻整하고 識性明悟하야 疾惡如仇하고 推心善樂하니라】이 每糾邪正이나 皆謂之俗吏라하고 其倚仗虛曠하고 依阿無心者는 皆名重海內하니 禮法刑政이 於此大壞라 國之將亡에 本必先顚은 其此之謂乎인저 故로 觀阮籍之行이면 而覺禮敎崩弛之由하고 察庾純, 賈充之爭賈充이 與朝士宴할새 庾純行酒호되 不時飮하니 醉하야 與爭言曰 長者爲壽어늘 何敢爾乎아 充曰 父老不歸養하니 卿無天地로다 曰 高貴鄕公何在오하니 充慚怒하야 上表解職하고 純亦自劾한대 詔免하니 純以榮官忘親하고 而充嘗弑高貴鄕公也라】이면 而見師尹之多僻하고 考平吳之功이면 而知將帥之不讓하고 思郭欽之謀면 而寤戎狄之有釁하고 覽傅玄, 劉毅之言이면 而得百官之邪하고 核傅咸之奏【咸爲司隷校尉하야 上言호되 貨賂流行하니 所宜深絶이라하니라 時에 朝政寬弛하야 權豪放恣러니 咸奏免河南尹澹等官하니 京師肅然하니라】, 錢神之論이면 而覩寵賂之彰이라 民風國勢如此하니 雖以中庸【謂不賢不愚之才라】之君과 守文之主【謂守常平治世之主也라】治之라도 猶懼致亂이어든 況惠帝以放蕩之德으로 臨之哉아 懷帝【惠帝衷이요 懷帝熾니 皆武帝炎子라】는 承亂(得)[卽]位하야 羈以强臣【太傅越輩라】하고 愍帝【鄴이라】는 奔播之後에 徒守虛名하야 天下之勢旣去하니 非命世之雄才【謂天命之生斯世之雄才也라】면 不能復取之矣니라

歷年圖曰 武帝旣遷魏祚에 席卷全吳하고 纘舊服이러니 恃其治安하고 荒于酒色하며 以開基之始에 不爲遠圖하야 崇尙浮華하고 敗棄禮法이라 惠帝昏愚하야 不辨菽麥하니 比之컨대 萬金之寶를 委之中衢하고 無人守之하니 安得不爲他人有乎아 禍生於閨闥하고 成於宗室하야 骨肉相殘하니 胡, 羯, 氐, 羌, 鮮卑【胡는 謂劉淵이요 羯은 謂石勒이요 氐는 謂苻堅이요 羌은 謂姚弋仲이요 鮮卑는 謂慕容廆니 此謂五胡也라】 爭承其敝하야 剖裂中原하고 虀【音躋니 凡醯醬所和를 細切爲虀라】醢生民하야 積骸成丘하고 流血成淵이 幾三百年하니 豈不哀哉아

[史略 史評]史斷曰 愍帝는 僅得虛名하야 服廩不給하고 荐被圍辱하야 輿櫬出降하고 蒲伏虜庭하야 洗爵執蓋하니 識者謂足以報高貴鄕公墮車之痛焉이라하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司馬炎이 簒魏以有天下라 然이나 以創業垂統之君으로 於風俗之衰에 恬不介意하니 蓋自竹林七賢之徒 以虛無之敎로 滅魏는 炎所知也라 使其平吳之後에 正風俗하고 崇儒雅런들 尙可匡救어늘 奈何付託이 旣非其人이요 而王戎, 王衍輩 崇尙淸談하고 遺落世事하야 卒至八王構禍而骨肉相殘하고 二帝遠狩而冠屨倒置하니 是誰之過歟오 吁라 之學이 禍人國家 如此하니 後世人主 可不戒哉아

建興 4년(병자 316) - 漢나라 麟嘉 元年이다. -

8월에 漢나라 大司馬劉曜가 長安을 핍박하였다. 9월에 劉曜가 長安을 공격하여함락시키니, 황제가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肉袒하고 璧玉을 입에 물고【손을 포박하여 璧玉을 잡을 수 없으므로 입에 물고 항복하는 것이다. 降은 다른 註에는 贄로 되어 있다.】 棺을 수레에 싣고서 東門에 나가 항복하였다. 劉曜가 棺을 불태우고 璧玉을 받고서 皇帝와 公卿 이하를 軍營으로 옮겼는데, 辛丑日(17일)에 平陽으로 압송하였다.

干寶【干寶는 東晉 사람이다.】의 論에 말하였다.

“西晉이 멸망한 것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잘못 선발하였고, 왕의 보필을 맡긴 신하가 적임자가 아니어서 禮‧義‧廉‧恥의 四維【四維는 禮‧義‧廉‧恥이다.】가 확립되지 못하여 구차한 정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터전이 넓으면 기울기 어렵고 뿌리가 깊으면 뽑기가 어려우며 조리가 있고 절도가 있으면 어지럽지 않고【理節은 政敎에 條理와 節度가 있음을 이른다.】 人心이 굳게 뭉치면 바뀌지 않으니,【膠는 견고함이다. 군주가 어질고 은혜로운 德을 베풀면 근본과 터전이 깊고 넓으며 人心이 굳게 결속하여 옮겨 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옛날 천하를 소유함에 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지금 晉나라가 일어남은 터전을 마련하고 근본을 세운 것이 진실로 先代와 달랐다. 게다가 조정에는 순수한 德을 갖춘 사람이 적고 지방에는 두마음을 품지 않은 노인이 없어서 풍속이 음탕하고 간사하며 부끄러워하고 숭상함이 기준을 잃었다. 배우는 자들은 莊子老子를 종주로 삼고【莊‧老는 莊子와 老子를 이르니, 모두 허무한 학설을 주장하였다. 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玄妙內篇≫에 莊子는 성이 莊이고 이름이 周이며 자가 子休이니, 宋나라 睢陽 蒙縣에서 출생하였고 호를 南華仙人이라 하였다. 일찍이 蒙縣 漆園의 관리가 되었으니, 梁惠王과 동시대였다. 그의 학문은 엿보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그 요점은 본래 老子의 말로 귀결되었다. 10여만 자에 이르는 책을 지었는데, 그 말을 황당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스스로 만족해했다. 老子는 성이 李이고 이름이 耳이다. 자는 伯陽이니, 일명은 重耳이고 다른 자는 聃인데 혹자는 시호가 聃이라고 한다. 周나라 때 사람이다. 李耳의 어머니가 임신한 지 81년 만에 오얏나무 아래를 거닐다가 마침내 왼쪽 겨드랑이 밑을 가르고 낳았는데, 낳고 보니 머리가 희었으므로 老子라 하였다. 뒤에 周나라 藏室을 지키는 柱下史가 되었다. 周나라가 쇠한 것을 보고 周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갈 적에 關令 尹喜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가 장차 은둔하려 하니, 부디 나를 위하여 책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이에 ≪道德經≫ 上‧下 두 편 5천여 자를 짓고 떠나갔는데, 마침내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六經을 내쳤으며, 말하는 자들은 허황된 말을 才辯으로 삼고 名檢(禮法)【名檢은 법도이다.】을 천하게 여겼으며, 行身(修身)하는 자들은 방탕하고 혼탁한 것을 통달한 것이라 여기고 절개와 신의를 협소하게 여겼으며, 나아가 벼슬하는 자들은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구차히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正道를 지키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으며, 관직을 맡은 자들은 헛된 명망【望은 명망이니, 望空은 虛名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을 淸高하다고 여기고 부지런함과 근신함을 비웃었다. 이 때문에 劉頌【劉頌은 武帝 때에 廷尉를 맡았다.】이 여러 번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말하고 傅咸【傅咸은 武帝 때에 아버지 傅玄의 爵位를 세습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尙書右丞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간략하며 큰 절개가 있었다. 풍채와 품격이 준엄하고 단정하였으며, 지식이 밝고 성품이 깨여서 惡을 미워하기를 원수와 같이 하고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선한 일을 즐거워하였다.】이 매번 간사함과 바름을 규찰하여 드러냈으나 모두 이들을 일러 俗吏라 하였으며, 空論만 일삼고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과 아첨하고 주관이 없는 자들은 모두 명망이 海內에 중하였으니, 禮法과 刑政이 이에 크게 무너졌다.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면 근본이 먼저 흔들린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阮籍의 방자한 행실을 보면 禮敎가 무너지고 해이해진 이유를 깨달을 수 있고, 庾純賈充의 다툼【賈充이 朝士와 연회할 때에 庾純이 술잔을 돌렸으나 賈充이 제때에 마시지 않자, 庾純이 술에 취하여 말다툼하기를 “長者가 祝壽하는 술잔을 올렸는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하니, 賈充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늙었는데도 돌아가서 봉양하지 않으니, 卿은 天地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庾純이 말하기를 “高貴鄕公(曹髦)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賈充이 부끄러워하고 노여워하여 表文을 올려 직책에서 물러났고, 庾純 또한 스스로 탄핵하자 면직하도록 명하였으니, 庾純은 관직을 영화롭게 여겨 어버이를 잊었고 賈充은 일찍이 高貴鄕公을 시해하였기 때문이다.】을 보면 師尹(高官)이 편벽됨이 많음을 볼 수 있고, 吳나라를 평정한 공을 살펴보면 장수들이 겸양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郭欽의 계책을 생각하면 오랑캐들이 틈을 타고 일어남을 깨달을 수 있고, 傅玄劉毅의 말을 보면 百官들의 간사함을 알 수 있고, 傅咸의 奏疏【傅咸이 司隸校尉가 되어서 上言하기를 “뇌물이 공공연히 유행하니, 마땅히 깊이 끊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정이 느슨하고 해이해져서 權臣과 土豪들이 방자하였는데, 傅咸이 河南尹 司馬澹 등의 관직을 면직할 것을 아뢰니, 京師가 숙연하였다.】와 〈錢神論〉을 살펴보면 은총이 남발되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의 풍속과 나라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비록 中庸(中等)【中庸은 현명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재주를 이른다.】의 재주와 떳떳한 法을 지키는 군주【守文은 떳떳한 법을 지켜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를 이른다.】가 다스렸더라도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까 두려운데, 더구나 惠帝가 방탕한 덕으로 임함에 있어서겠는가. 懷帝【[頭註]況惠帝……懷帝:惠帝는 司馬衷이요 懷帝는 司馬熾이니, 모두 武帝 司馬炎의 아들이다.】는 난리 중에 즉위하여 강한 신하【강한 신하는 太傅 司馬越의 무리이다.】에게 제재당하였고 愍帝【愍帝는 司馬鄴이다.】는 도망하여 파천한 뒤에 한갓 헛된 이름만 지켜서 天下의 大勢가 이미 떠나갔으니, 세상에 이름날 만한 영웅의 재주【하늘이 명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을 이른다.】가 아니라면 다시 천하를 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武帝는 이미 魏나라의 국통을 옮기자 吳나라 전 지역을 석권하고 禹王의 옛 강토를 이었는데, 나라가 잘 다스려져 안정됨을 믿고는 주색에 빠지며 開國하는 초기에 원대한 도모를 하지 않아서 浮華함을 숭상하고 禮法을 버렸다. 惠帝는 어둡고 어리석어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여, 비유하면 萬金의 보물을 길거리에 버려두고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았으니, 어찌 타인의 소유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禍가 閨門에서 생겨나고 宗室에서 이루어져 골육간에 서로 해치고 죽이니, 胡族‧羯族‧氐族‧羌族‧鮮卑族【胡族은 劉淵(前趙)을 이르고, 羯族은 石勒(後趙)을 이르고, 氐族은 苻堅(前秦)을 이르고, 羌族은 姚弋仲(後秦)을 이르고, 鮮卑族은 慕容廆(前燕)를 이르니, 이를 일러 五胡라 한다.】이 다투어 그 피폐한 틈을 타서 中原을 분열시키며 백성들을 屠戮【虀는 음이 제이니, 식초와 醬을 섞어 절인 것을 가늘게 썬 것을 虀라 한다.】하여, 해골이 쌓여 언덕을 이루고 피가 흘러 연못을 이룬 것이 거의 300년에 이르렀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愍帝는 겨우 허울뿐인 이름만을 얻어 의복과 양식이 부족하였고 거듭 포위를 당하여 수레에 관을 싣고 나가서 항복하였으며 오랑캐의 뜰에서 포복하여 잔을 씻고 일산을 잡았으니, 識者들이 이르기를 ‘高貴鄕公(曹髦)이 수레에서 떨어져 죽은 원통함을 씻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司馬炎이 魏나라를 찬탈하여 천하를 소유하였다. 그러나 창업하여 國統을 전한 군주로서 風俗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서도 태연하게 개의치 않았으니, 竹林七賢의 무리가 의 虛無한 가르침으로 魏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司馬炎도 아는 바였다. 그가 만일 吳나라를 평정한 뒤에 風俗을 바로잡고 儒雅를 숭상하였으면 오히려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었을 터인데, 부탁하여 맡긴 자가 이미 적임자가 아니었고 王戎王衍의 무리가 淸談을 숭상하고 세상일을 내버려두어 끝내 八王이 화근을 만들어 골육간에 서로 해치고 죽이며 二帝가 멀리 파천하여 上下가 전도됨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아, 의 학설이 사람과 국가에 화를 끼침이 이와 같으니, 後世의 군주가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