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五 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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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紀

後皇帝 下

[甲寅]十二年

後皇帝 下 附魏, 吳, 晉三僭國年紀라

[甲寅]十二年이라 〈魏靑龍二年이요 吳嘉禾三年이라〉

春二月에 丞相이 率大衆十萬하고 由斜谷하야 伐魏할새 遣使約吳하야 同時大擧하다

後皇帝(劉禪) 下 - 魏‧吳‧晉 세 僭國(참람한 나라)의 年紀를 붙였다. -

建興 12년(갑인 234) - 魏나라 靑龍 2년이고, 吳나라 嘉禾 3년이다. -

봄 2월에 丞相諸葛亮이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斜谷을 경유하여 魏나라를 정벌할 때에 使者를 보내 吳나라와 약속하여 동시에 크게 군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 夏四月에 丞相이 至郿하야 軍於渭水之南하니 司馬懿引軍度(渡)渭하야 背水爲壘以拒之할새 謂諸將曰 이 若出武功【武功은 縣名이니 屬右扶風이라】하야 依山而東이면 誠爲可憂어니와 若西止五丈原이면 諸將이 無事矣【懿已料亮之必屯五丈原이나 而力不能制일새 姑爲此言하야 以安諸將之心也라】리라하더니 이 果屯五丈原【在扶風郿縣域中하니라】하다 以前者數出에 皆以運糧不繼하야 使己志不伸이라하야 乃分兵屯田하야 爲久駐之基하니 耕者雜於渭濱居民之間이로되 而百姓安堵하고 軍無私焉이러라

[新增]胡氏司馬懿之言이 譎也라 實畏孔明屯五丈原하고 又憚於逆擊이라 故로 爲此語하야 以安其下爾라 孔明은 此擧에 蓋不復爲退計矣라 親統大軍하고 入他人境하야 久駐而魏師不敢攻하고 雜耕而居民無所苦하니 三代之兵若時雨를 孔明其庶幾矣어늘 或譏其短於將略【下陳壽註라 】하니 可謂誤矣로다

○ 여름 4월에 丞相諸葛亮이 郿縣에 이르러 渭水의 남쪽에 주둔하니, 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渭水를 건너서 강을 등지고 보루를 만들어 대항할 때에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諸葛亮이 만약 武功縣【武功은 縣의 이름이니, 右扶風에 속한다.】으로 나와서 산을 의지하여 동쪽으로 오면 진실로 우려할 만하지만 만약 서쪽으로 五丈原에 그치면 장수들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通鑑要解]若西止五丈原 諸將無事矣:司馬懿는 諸葛亮이 반드시 五丈原에 주둔할 것임을 헤아렸으나 자신의 힘이 諸葛亮을 제어할 수 없으므로 우선 이러한 말을 하여 장수들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이다.】” 하였는데, 諸葛亮이 과연 五丈原【五丈原은 扶風郡 郿縣의 구역 안에 있다.】에 주둔하였다. 諸葛亮은 지난번에 여러 번 출동했을 때에 모두 군량을 운반해 오는 것이 계속 이어지지 못해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했다 하여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둔전을 해서 오랫동안 머물 기반을 닦으니, 둔전하는 병사들이 渭水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사들은 사리사욕을 꾀함이 없었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司馬懿의 말은 속임수이다. 실제로는 諸葛孔明이 五丈原에 주둔할까 두려워하고, 또 逆攻을 할까 꺼렸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서 부하들을 안심시킨 것일 뿐이다. 諸葛孔明은 이 거사에 다시는 후퇴할 계책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친히 大軍을 통솔하고 다른 나라의 국경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주둔하였으나 魏나라 군대가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고, 屯田하는 병사들이 백성들 사이에 섞여서 경작하였으나 거주하는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바가 없었으니, 三代時代의 군대를 백성들이 단비처럼 여겼는 바, 諸葛孔明이 거의 이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혹자는 그가 장수의 韜略에 있어서 부족하다고 비판하니,【이 내용은 아래 陳壽의 史評의 註에 보인다.】 잘못이라고 이를 만하다.”

八月에 相守百餘日이라 이 數挑戰호되 不出이어늘 이 乃遺巾幗【婦人喪冠也라 以巾上覆髮하니 如帕之類라 [通鑑要解]據劉昭續輿服志컨대 公卿, 列侯夫人紺繒幗이라하니 蓋婦人首飾之稱이요 不特喪冠也라】婦人之服한대 怒하야 上表請戰하니 魏主使衛尉辛毗로 杖節爲軍師하야 以制之하다 護軍姜維辛佐治【佐治는 辛毗字라】杖節而到하니 賊이 不復出矣리이다 曰 彼本無戰情이로되 所以固請戰者는 以示武於其衆耳니라 이 遣使者하야 至軍한대 問其寢食及事之煩簡하고 不問戎事所憚者也라 問其寢食及事之煩簡하야 以覘壽命之久近耳니 戎事何必問耶리오】라 使者對曰 諸葛公이 夙興夜寐하야 罰二十已上은 皆親覽焉호되 所噉食이 不至數升【古升小故로 數升이라】이니이다 告人曰 諸葛孔明이 食少事煩하니 其能久乎아 이 病篤이어늘 帝使尙書僕射李福으로 省侍하고 因諮以國家大計러니 曰 公所問者는 公琰【蔣琬字라】이 其宜也니라 이 復請蔣琬之後에 誰可任고 文偉【費褘字라】可以繼之니라 又問其次한대 이 不答이러라 是月에 이 卒於軍中하니 長史楊儀 整軍而出하다 百姓이 奔告司馬懿한대 追之러니 姜維로 反旗鳴鼓하야 若將向者하니 斂軍退하야 不敢偪이러라 於是에 儀結陳而去하야 入谷【谷은 斜谷이라 】然後에 發喪하니라 百姓이 爲之諺曰 死諸葛이 走生仲達이라하니 聞之하고 笑曰 吾能料生이요 不能料死故也로다 案行之營壘處所하고 歎曰 天下奇才也로다 追至赤岸이라가 不及而還【前에 趙子龍이 至此橋而退軍할새 燒壞赤崖閣道緣谷一百餘里라 其閣梁一頭入山腹이요 一頭立柱於水中이러니 今水大而急하야 不得安柱라 赤崖는 卽赤岸이라】하다

[新增]尹氏孔明이 進軍渭南하야 分兵屯田하니 雖引兵拒守나 甘受巾幗婦人之服하야 勢已窮蹙이어늘 而乃告終이라 天不祚漢하야 使之功業不就하니 謂之何哉리오 然이나 受遺託孤之際에 蓋嘗以竭股肱之力하고 效忠正之節하야 繼之以死로 爲告하고 至其出軍上表하야는 又以鞠躬盡力하야 死而後已로 爲言하니 由今觀之컨대 誠謂不食其言矣라 其討賊之義가 死而不屈하야 至今凜凜하야 猶有生氣하니 其視, 【曹操, 司馬懿라】輩欺孤弱寡하야 狐媚以取人家國者하면 曾犬彘之不若也니 世豈可以成敗論人物哉아

8월에 司馬懿諸葛亮과 서로 백여 일 동안 대치했다. 諸葛亮이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司馬懿가 출전하지 않자諸葛亮이 마침내 司馬懿에게 婦人들이 사용하는 首飾인 巾幗【[釋義]巾幗은 부인의 喪冠이다. 두건의 윗부분으로 머리카락을 덮어씌우는 것이니, 帕(머리띠)과 같은 따위이다. [通鑑要解]劉昭의 ≪續輿服志≫에 의거하건대 “公卿과 列侯의 夫人은 紺色 비단으로 幗을 한다.” 하였으니, 巾幗은 婦人의 머리 장식의 명칭이요, 다만 喪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을 보내었다. 司馬懿가 노하여 表文을 올려 싸울 것을 청하니, 魏主曹叡가 衛尉인 辛毗로 하여금 節을 잡고 軍師가 되어 제재하게 하였다. 護軍姜維諸葛亮에게 이르기를 “辛佐治(辛毗)【佐治는 辛毗의 字이다.】가 節을 잡고 이르렀으니, 적이 다시는 출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諸葛亮이 말하기를 “저들이 본래 싸울 마음이 없는데 굳이 출전을 청한 이유는 그의 무리들에게 威武를 보이고자 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諸葛亮이 使者를 보내어 司馬懿의 군중에 이르자, 司馬懿諸葛亮이 자고 먹는 것과 매일 처리하는 일의 많고 적음만 묻고 군대의 일을 묻지 않았다.【[通鑑要解]懿問其寢食……不問戎事:司馬懿가 두려워한 것은 諸葛亮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잠자는 것과 먹는 것과 처리하는 일의 많고 적음을 물어 壽命의 길고 짧음을 엿보려 한 것일 뿐이니, 어찌 군대의 일을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使者가 대답하기를 “諸葛公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杖 20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살피되 먹는 음식은 몇 되【옛날의 升은 작기 때문에 몇 升이라고 한 것이다.】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니, 司馬懿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諸葛孔明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이 하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諸葛亮의 병이 위독해지자, 황제가 尙書僕射李福으로 하여금 살피면서 모시게 하고 인하여 國家의 大計를 묻게 하였는데, 諸葛亮이 말하기를 “公이 물은 것은 公琰(蔣琬)【公琰은 蔣琬의 字이다.】이 마땅하다.” 하였다. 李福이 다시 “蔣琬의 뒤에는 누가 맡길 만한 자입니까?” 하고 묻자, 諸葛亮은 말하기를 “文偉(費褘)【文偉는 費褘의 字이다.】가 뒤를 이을 만하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묻자, 諸葛亮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달에 諸葛亮이 군중에서 죽으니, 長史楊儀가 군대를 정돈하여 물러 나왔다. 백성들이 달려가 司馬懿에게 고하자司馬懿가 추격하였는데, 姜維楊儀로 하여금 깃발을 돌리고(군대를 돌이키고) 북을 울려서 진군하여 司馬懿를 공격할 것처럼 하니, 司馬懿가 군대를 거두고 후퇴하여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이에 楊儀가 진영을 구축하고 떠나서 斜谷【谷은 斜谷이다.】에 들어온 뒤에야 喪을 발표하였다. 백성들이 이 때문에 속담을 만들어 이르기를 “죽은 諸葛亮이 산 仲達(司馬懿의 字)을 패주시켰다.” 하니, 司馬懿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가 산 것만 헤아렸지 죽은 것은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司馬懿諸葛亮의 營壘가 있는 곳을 순시하고서 탄식하기를 “천하의 奇才이다.” 하였다. 추격하여 赤岸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通鑑要解]追至赤岸 不及而還:예전에 趙子龍(趙雲)이 이 다리에 이르러 군대를 퇴각시킬 때에 골짜기를 따라 1백여 리에 이르는 赤崖의 閣道를 불태워 파괴하였다. 閣道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한 갈래는 산허리로 들어가고 한 갈래는 물속에다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은 수량이 많고 물살이 급하여 기둥을 지탱할 수가 없다. 赤崖는 바로 赤岸이다.】

[新增]尹氏(尹莘)가 말하였다.

諸葛孔明이 渭水의 남쪽으로 進軍하여 병력을 나누어서 屯田을 하니, 司馬懿가 비록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항거하고 지켰으나 婦人들이 사용하는 巾幗을 기꺼이 받아서 형세가 이미 위축되었는데 諸葛亮이 마침내 죽음을 고하였다. 하늘이 漢나라를 돕지 않아서 그의 功業이 성취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諸葛亮이 遺命을 받고 어린 고아인 劉禪을 부탁받았을 때에 일찍이 股肱의 힘을 다하고 忠正의 절개를 바쳐서 죽음으로 잇겠다고 고하였고, 군대를 출동하면서 出師表를 올림에 이르러서는 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매진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겠다고 말하였으니, 이제 살펴보면 진실로 食言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죽어도 굽히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늠름하여 오히려 생기가 있으니, 曹操와 司馬懿【曹馬는 曹操와 司馬懿이다.】 등이 고아를 속이고 과부를 무시하여 여우처럼 홀려서 남의 집안과 나라를 취한 것에 비한다면 일찍이 저들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그러하니 세상에 어찌 성패만 가지고 인물을 논할 수 있겠는가.”

初에 前軍師【蜀置中軍師, 前軍師, 後軍師하니라】魏延이 勇猛過人하고 善養士卒이라 每隨出에 輒欲請兵萬人하야 與異道하야 會于潼關을 如韓信故事【見四卷丁酉年이라】호되 이 制而不許한대 이 常謂爲怯이라하고 歎恨己才用之不盡하니라

처음에 前軍師【蜀漢은 中軍師‧前軍師‧後軍師를 두었다.】魏延이 용맹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사졸들을 잘 길렀다. 諸葛亮을 따라 출전할 때마다 번번이 만 명의 병력을 청하여 諸葛亮과 길을 달리하여 진출해서 潼關에서 만나 옛날 韓信의 故事【韓信이 군대를 청한 故事는 앞의 4권 丁酉年條(B.C.204)에 보인다.】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 諸葛亮이 제재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魏延이 항상 諸葛亮을 일러 겁쟁이라 하고 자신의 재주를 다 쓰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 諸軍이 還成都하니 諡諸葛亮曰 忠武侯라하다 丞相長史張裔 常稱曰 公이 賞不遺遠하고 罰不阿近하며 爵不可以無功取하고 刑不可以貴勢免하니 此는 賢愚之所以僉忘其身【僉은 皆也라】者也라하니라

陳壽評諸葛亮之爲相國也에 撫百姓하야 示儀軌하고 約官職하야 從權制하고 開誠心, 布公道하며 盡忠益時者는 雖讐必賞하고 犯法怠慢者는 雖親必罰하고 服罪輸情者는 雖重必釋하고 游辭巧飾者는 雖輕必戮하야 善無微而不賞하고 惡無纖而不貶이라 庶事精練하고 物理其本【言事事物物을 必從其本而治也라】하며 循名責實하야 虛僞不齒하야 終於邦域之內에 咸畏而愛之하야 刑政雖峻而無怨者는 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니 可謂識治之良才요 , 【管仲, 蕭何라】之亞匹矣【本傳에 又云 連年動衆이로되 未能成功하니 蓋應變將略은 非其所長이라하니라】로라 〈出亮本傳〉

朱黼孔明이 高臥南陽하야 自比, 【管仲, 樂毅라】하니 時人이 莫之許也라 余切(竊)論之컨대 孔明은 王者之佐로 伊尹【伊는 姓이요 尹은 字요 名은 摯라】之儔也라 , 之比는 特主乎撥亂繼絶之志하야 一時自寓之言耳니 若陳壽者 奚足以知孔明哉리오 夫孔明之於伊尹에 所遇雖異나 處心則同하니 要未可以差殊觀也라 夫躬耕有莘而樂之道하고 躬耕南陽而吟梁父【梁父(甫)吟에 步出齊城門하야 遙望蕩陰里라 里中有三墳하니 纍纍正相似라 問是誰家塚고 田疆古冶氏라 力能排南山이요 文能絶地紀라 一朝被讒言하야 二桃殺三士라 誰能爲此謀오 相國齊晏子라하니라 景公이 畜勇士公孫接, 田開疆, 古冶子하니 三人見晏子不禮라 晏子請去之하고 乃饋之二桃하야 令計功而食하다 公孫接, 田開疆云云한대 古冶子曰 吾嘗從君濟河할새 黿唫左驂이어늘 左操馬尾하고 右挈黿頭而出하니 若冶之功은 可以食桃矣니라 二子恥其功不及하야 自殺하니 古冶子亦自殺하다 孔明步齊城할새 見三墳하고 作是(今)[吟]以嘆之하니라】는 同一隱晦也요 聘幣三往而後起하고 枉駕三顧而後從은 同一出處也요 一夫不被則有納溝之恥하고 漢室未復則爲一己之責은 同是自任也라 伊尹이 往來之間호되 二國이 不以爲間【間은 去聲이니 疾也요 訾也라】하고 就而復伐之호되 天下不以爲叛하고 相太甲而復放之하고 復太甲而終相之호되 天下不以爲專이라 孔明兄弟 分仕三國【諸葛誕은 仕魏하고 諸葛瞻은 仕吳하니라】호되 國人이 不以爲二하고 勸昭烈劉璋而迄取之호되 後世不以爲貪하고 昭烈이 令輔後帝하고 且曰 苟不可輔어든 公自取之라호되 孔明이 不以爲嫌하고 專國一十二年호되 後帝不以爲偪하니 果何修而得此哉아 孟子伊尹이 耕於有莘之野에 非其道也며 非其義也어든 祿之天下라도 弗顧也하고 繫馬千駟라도 弗視也라하시니 豈非其素所不屑【屑은 潔也라】者 足以取信於人哉아 方孔明蕭然草廬之中하고 資衣食於耒耜之業하야 擁膝長嘯하야 不求聞達하니 顧豈有一毫富貴之念이리오 迫之而起는 要爲天下大義하야 撥亂繼絶耳니 其肯以天下動其心乎아 其肯負其主하야 以利其家乎아 其肯爲不義하야 以利其身乎아

[新增]南軒張氏贊曰 維忠武侯는 識其大者하니 仗義履仁하야 卓然不舍(捨)라 方臥南陽에 若將終身이러니 三顧而起하니 時哉屈伸이라 難平者事【平은 音病이니 平其不平曰平이라】요 不昧者幾니 大綱旣得에 萬目乃隨라 我奉天討하야 不震不竦【詩通釋에 不震動, 不竦懼라하니라】이라 惟一其心하야 而以時動하니 噫侯此心이여 萬世不泯이라 遺像有嚴하니 瞻者起敬이어다

○ 여러 군대가 成都로 돌아오니, 諸葛亮의 시호를 忠武侯라 하였다. 丞相長史인 張裔가 항상 諸葛亮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公은 상을 내릴 때에 소원한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내릴 때에 가까운 사람을 두둔하지 않았으며, 관작은 功이 없이 취할 수 없고 형벌은 귀한 형세로 면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모두【僉은 모두이다.】 자기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했던 이유이다.” 하였다.

陳壽의 評에 말하였다.

諸葛亮이 相國이 되었을 때에 백성들을 어루만져서 儀軌(모범)를 보이고 관직을 줄여서 權制(임시의 제도)를 따르며 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정한 道를 폈으며, 충성을 다하여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賞을 주었고 法을 범하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罪를 자복하고 實情을 바치는 자는 비록 무거운 죄라도 반드시 풀어 주고 근거 없는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여서, 善은 아무리 작아도 상 주지 않음이 없고 惡은 아무리 작아도 폄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모든 일을 精하게 단련하고 일마다 근본에 따라 다스리며,【모든 일과 모든 물건을 반드시 그 근본에 따라 다스림을 말한다.】 명분에 따라 실제를 요구해서 허위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여, 끝내 나라 안에서 모두 두려워하고 사랑해서 刑法과 政令이 비록 준엄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마음 씀이 공평하고 善을 권면하고 惡을 경계함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諸葛亮은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훌륭한 인재이고 管仲과 蕭何【管蕭는 管仲과 蕭何이다.】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이를 만하다.【[原註]諸葛亮之爲相國也……管蕭之亞匹矣:≪三國志≫ 〈諸葛亮傳〉에 또 이르기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변화에 대응하는 將略은 그의 所長이 아니다.” 하였다.】” - 《三國志 諸葛亮傳》에 나옴 -

朱黼가 말하였다.

諸葛孔明이 南陽 땅에 은거하여 스스로 管仲樂毅【管樂은 管仲과 樂毅이다.】에게 견주니, 당시 사람들이 허여하지 않았다. 내가 적이 논하건대 諸葛孔明은 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질로 伊尹【伊는 姓이고 尹은 字이고 이름은 摯이다.】의 무리이다. 管仲樂毅에게 자신을 견준 것은 다만 亂을 다스리고 끊어진 代를 잇는 뜻을 위주로 해서 한때 스스로 붙인 말일 뿐이니, 陳壽와 같은 자가 어찌 충분히 諸葛孔明을 알았겠는가. 諸葛孔明伊尹에게 있어서 만난 처지는 비록 달랐으나 마음에 보존한 것은 똑같았으니, 요컨대 차별을 두어 보아서는 안 된다.

伊尹이〉 有莘의 들에서 몸소 밭을 갈면서 의 道를 즐거워하고 〈諸葛孔明이〉 몸소 南陽 땅에서 밭을 갈면서 梁父吟【梁甫吟에 “걸어서 齊나라 都城門을 나가 멀리 蕩陰里를 바라보네. 마을 가운데 세 무덤이 있으니 연이어 있는 것이 서로 똑같구나. 뉘 집 무덤이냐고 물었더니 田開疆과 古冶氏라 하네. 힘은 南山을 밀어낼 만하고 文章은 땅의 이치를 다할 수 있었네. 하루아침에 讒言을 입어 두 개의 복숭아에 세 壯士 죽었다네. 누가 이러한 계책을 냈는가. 齊나라의 相國인 晏子라오.” 하였다. 齊나라 景公이 勇士인 公孫接‧田開疆‧古冶子를 길렀는데, 이들 세 사람은 晏子를 보고도 예우하지 않았다. 晏子가 이들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마침내 복숭아 두 개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功을 따져서 먹게 하였다. 公孫接과 田開疆이 복숭아를 먹기 위해 이리이리 자신의 공로를 말하자, 古冶子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군주를 따라 黃河를 건널 때 큰 자라가 왼쪽 驂馬를 삼켰는데, 내가 왼손으로는 말 꼬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자라목을 잡고서 나왔으니, 나의 공으로 말하자면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 하였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功이 古冶子에게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자살하니, 古冶子 또한 자살하였다. 諸葛孔明이 齊나라 城을 걸어 나올 적에 이들의 세 무덤을 보고 이 梁甫吟을 지어 탄식하였다.】을 읊은 것은 똑같은 은둔이요, 〈伊尹湯王이〉 폐백을 가지고 聘問하여 세 차례나 찾아간 뒤에야 나오고 〈諸葛孔明昭烈帝가〉 직접 枉臨하여 세 차례나 草廬로 찾아온 뒤에 따른 것은 똑같은 출처이며, 〈伊尹이〉 한 지아비라도 은택을 입히지 못하면 도랑에 밀어 넣은 것처럼 부끄러워하였고 〈諸葛孔明이〉 漢나라 皇室을 興復하지 못하면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것은 똑같은 自任이었다.

伊尹임금과 桀王의 사이를 왕래하였으나 두 나라에서 일찍이 헐뜯지【間은 去聲이니, 미워하고 헐뜯는 것이다.】 않았고, 桀王에게 나아갔다가 다시 桀王을 정벌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은 그가 배반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太甲을 돕다가 다시 추방하고 太甲을 돌아오게 하여 끝내 그를 도왔으나 천하 사람들은 그가 專橫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諸葛孔明은 형제가 세 나라에 나뉘어서 벼슬하였으나【〈諸葛亮은 蜀漢에서 벼슬하고〉 諸葛誕은 魏나라에서 벼슬하고, 諸葛瞻은 吳나라에서 벼슬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그가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하지 않았고, 昭烈帝에게 劉璋을 치도록 권면하고 끝내 취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가 탐욕스럽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昭烈帝後帝(劉禪)를 보좌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보필할 수 없거든 공이 직접 취하라.’ 하였으나 諸葛孔明이 이를 혐의하지 않았으며, 國政을 12년 동안 독단하였으나 後帝가 핍박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과연 어떻게 닦았기에 이러한 훌륭한 명성을 얻었는가.

孟子가 말씀하기를 ‘伊尹이 有莘의 들에서 밭 갈면서 道가 아니고 義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말 千駟를 매어 놓더라도 보지 않았다.’ 하였으니, 어찌 평소에 富貴를 좋게 여기지 않은【屑은 깨끗하게(좋게) 여기는 것이다.】 것이 충분히 사람들에게 신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諸葛孔明이 草廬 가운데에서 쓸쓸히 살고 쟁기로 농사짓는 데에서 衣食을 마련하여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길게 휘파람 불면서 영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털끝만큼인들 부귀해지려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사람들에게 몰려서 세상에 나온 것은 요컨대 천하의 大義를 위해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고 끊어진 대를 잇고자 해서였을 뿐이니, 어찌 천하로 마음을 동요하려 하였겠으며, 어찌 군주를 저버리고 자기 집안을 이롭게 하려고 하였겠으며, 어찌 不義를 저질러서 자기 몸을 이롭게 하려고 하였겠는가.”

[新增]南軒張氏(張栻)의 贊에 말하였다.

忠武侯는 그 大體를 알았으니, 義를 따르고 仁을 행하여 우뚝 서서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南陽 땅에 은거할 때에는 이대로 일생을 마칠 듯하였는데 三顧草廬한 뒤에 나오니, 이는 때에 따라 굽히고 편 것이다. 평탄하기 어려운 것은 일이고【平은 음이 병(평)이니, 평탄하지 않은 것을 평탄하게 하는 것을 平이라 한다.】 어둡지 않은 것은 기미이니, 큰 綱領을 이미 얻으면 만 개의 條目은 따르게 마련이다. 내 天討(하늘의 토벌)를 봉행하여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므로【不震不竦은 ≪詩傳通釋≫에 “동요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음이다.” 하였다.】 오직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때에 따라 움직이니, 아! 諸葛武侯의 이 마음이여,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 遺像이 엄숙하니 보는 자들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킬지어다.”

初에 長水校尉廖立이 自謂才名이 宜爲諸葛亮之副라하더니 嘗(常)以職位游散이라하야 怏怏怨謗無已어늘 이 廢立爲民하야 徙之汶山【汶은 音岷이니 汶山은 本冉駹國이라 漢武帝置汶山郡하니 三國系蜀이라】이러니 及卒에 이 垂泣曰 吾終爲左袵矣로다 李平聞之하고 亦發病死하다 이 常冀亮復收己하야 得自補復이러니 策後人不能故也【按綱目分注辛亥九年에 丞相亮攻祁山時에 以李嚴으로 爲中都護하야 署府事하고 更名平하다 會天霖雨하니 平主督運이러니 恐糧不繼하야 遣參軍하야 呼亮還하다 亮旣退軍에 平乃更言하여 軍糧饒足이어늘 何爲而退오하야 欲殺督運하야 以解不辦之責이라 亮出其前後手書하니 本末違錯이라 平辭窮謝罪하니 於是에 亮免其官하고 削爵土하야 徙梓(橦)[潼]郡하고 復以平子豐으로 爲中郞將, 參軍事하니라[頭註]策은 料也니 後之人이 必不復收錄我也라】러라

習鑿齒論曰 昔에 管仲이 奪伯氏騈邑三百호되 沒齒而無怨言이어늘 聖人以謂難이라하시니 諸葛亮之使廖立垂泣하고 李嚴致死는 豈徒無怨言而已哉아 夫水至平而邪者取法하고 鑑至明而醜者亡怒하니 水鑑之所以能窮物而無怨者는 以其無私也일새라 水鑑無私로도 猶以免謗이어든 況大人君子懷樂生之心하고 流矜恕之德하야 法行於不可不用하고 刑加乎自犯之罪하며 爵之而非私하고 誅之而不怒면 天下有不服者乎아

처음에 長水校尉廖立은 스스로 자신의 재주와 명망이 응당 諸葛亮에게 버금간다고 여겼는데, 항상 職位가 일정치 않고 閑散職이라 하여 앙앙불락하여 원망하고 비방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諸葛亮廖立을 폐하여 평민으로 삼아汶山【汶은 音이 민이니, 汶山은 본래 冉駹國이다. 漢나라 武帝가 汶山郡을 설치하였으니 三國時代에 蜀에 속하였다.】으로 유배 보냈다. 諸葛亮이 죽자 廖立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끝내 左袵(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하는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였다. 李平諸葛亮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병이 나서 죽었다. 李平은 항상 諸葛亮이 다시 자기를 거두어 등용해서 스스로 과실을 보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諸葛亮의 뒤를 잇는 자가 다시는 자신을 거두어 써 주지 않을 것을 헤아렸기 때문이다.【[釋義]李平聞之……不能故也:[釋義]≪資治通鑑綱目≫ 辛亥 9年條에 分注하기를 “丞相諸葛亮이 祁山을 공격할 때에 李嚴을 中都護로 삼아 府의 일을 맡게 하고 이름을 平으로 바꾸었다. 마침 날씨가 장마가 지니, 李平은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는데 군량을 계속 대지 못할까 염려해서 參軍을 보내어 諸葛亮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諸葛亮이 이미 군대를 후퇴시킨 뒤에 李平이 마침내 말을 바꾸어 ‘군량이 풍족한데 어찌하여 후퇴하였습니까?’라고 하여, 군량의 운반을 감독하는 자를 죽여서 자신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려고 하였다. 이에 諸葛亮이 전후에 손수 쓴 편지를 내보이니, 本末이 서로 어긋났다. 그리하여 李平이 말문이 막혀 사죄하자, 이에 諸葛亮은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작위와 토지를 삭탈하여 梓潼郡으로 귀양 보내고 다시 李平의 아들 李豐을 中郞將‧參軍事로 삼았다.” 하였다.[頭註]策은 헤아림이니, 諸葛亮의 뒤를 잇는 사람이 반드시 다시는 자신을 거두어 錄用하지 않을 줄을 헤아린 것이다.】

習鑿齒의 論에 말하였다.

“옛날 管仲伯氏의 騈邑 300호를 빼앗았으나 일생을 마치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는데 聖人이 이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으니, 諸葛亮廖立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李嚴으로 하여금 죽게 한 것은 어찌 다만 원망하는 말이 없었을 뿐이었겠는가. 물은 지극히 평평하지만 간사한 자가 취하여 법으로 삼고 거울은 지극히 밝지만 추악한 자가 비춰 보고 노여워함이 없으니, 평평한 물과 밝은 거울이 물건으로 하여금 끝까지 다 드러나게 하는데도 원망함이 없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평평한 물과 밝은 거울이 사사로움이 없어도 오히려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大人君子가 살려 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德을 펴서, 法이 쓰지 않을 수 없는 데에 행해지고 형벌이 스스로 범한 죄에 가해지며, 관작을 내려도 사사로이 봐준 것이 아니고 죽여도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천하에 어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帝以丞相長史蔣琬으로 爲尙書令하야 摠統國事하다 時에 新喪元帥하니 遠近이 危悚호되 이 出類拔萃하야 處群僚之右하야 旣無戚容하고 又無喜色하야 神守擧止 有如平日하니 由是로 衆望이 漸服이러라

황제가 丞相長史蔣琬을 尙書令으로 삼아서 國事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때 새로 元帥를 잃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으나 蔣琬은 무리들 가운데 뛰어나서 여러 동료들 위에 거하여, 이미 슬퍼하는 모습이 없고 또 기뻐하는 기색이 없어서 神守(精神)와 행동거지가 평소와 같으니,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신망이 점점 굴복하였다.

[乙卯]十三年

[乙卯]十三年이라 〈魏靑龍三年이요 吳嘉禾四年이라〉

正月에 魏以大將軍司馬懿로 爲太尉하다

建興 13년(을묘 235) - 魏나라 靑龍 3년이고, 吳나라 嘉禾 4년이다. -

정월에 魏나라가 大將軍司馬懿를 太尉로 삼았다.

○ 四月에 以蔣琬으로 爲大將軍, 錄尙書事하고 費褘로 爲尙書令하다

○ 4월에 蔣琬을 大將軍‧錄尙書事로 삼고費褘를 尙書令으로 삼았다.

[丙辰]十四年

[丙辰]十四年이라 〈魏靑龍四年이요 吳嘉禾五年이라〉

魏詔公卿하야 擧才德兼備者各一人한대 司馬懿以兗州刺史王昶으로 應選하다 은 爲人謹厚라 名其兄子曰, 曰이라하고 名其子曰, 曰이라하고 爲書戒之曰 吾以四者爲名은 欲使汝曹顧名思義하야 不敢違越也하노라 夫物이 速成則疾亡하고 晩就則善終이라 朝華之草는 夕而零落하고 松柏之茂는 隆寒不衰하나니 是以로 君子戒於闕黨【闕黨童子將命한대 子曰 吾見其居於位也하며 見其與先生竝行也하니 欲速成者也라한대 注에 童子當隅坐隨行이어늘 此童子不循此禮하니 但欲速成爾라하니라】也하시니라 夫能屈以爲伸하며 讓以爲得하며 弱以爲彊이면 鮮不遂矣니 夫毁譽者는 愛惡之原而禍福之機也라 孔子曰 吾之於人에 誰毁誰譽리오하시니 以聖人之德으로도 猶尙如此온 況庸庸之徒而輕毁譽哉아 人或毁己어든 當退而求之於身하야 若己有可毁之行이면 則彼言이 當矣요 若己無可毁之行이면 則彼言이 妄矣라 當則無怨於彼요 妄則無害於身이니 又何反報焉이리오 諺曰 救寒은 莫如重裘요 止謗은 莫如自修라하니 斯言이 信矣니라

建興 14년(병진 236) - 魏나라 靑龍 4년이고, 吳나라 嘉禾 5년이다. -

魏나라가 公卿들에게 명하여 재주와 덕을 겸비한 자를 각각 한 명씩 천거하게 하자, 司馬懿가 兗州刺史王昶으로 선발에 응하였다. 王昶은 사람됨이 신중하고 후덕하여 형의 아들을 이름하기를 ‘王黙’, ‘王沈’이라 하고, 자신의 아들을 이름하기를 ‘王渾’, ‘王深’이라 하고는 글을 지어 이들을 경계하였다.

“내가 이 네 글자로 너희들의 이름을 정한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해서 감히 어기지 않게 하고자 해서이다. 일은 속히 이루어지면 빨리 망하고 늦게 이루어지면 잘 끝마친다. 아침에 꽃이 피는 풀은 저녁이면 시들어 떨어지고 소나무와 잣나무의 무성함은 엄동설한에도 쇠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君子가 闕黨童子를 경계하신【闕黨童子가 명령을 전달하자,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그가 자리에 〈버젓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며 先生과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속히 이루고자 하는 자이다.” 하였는데, 注에 “童子는 〈자리 한가운데에 앉지 말고〉 마땅히 귀퉁이에 앉아야 하고 뒤에서 어른을 隨行해야 하는데, 이 童子가 이 禮를 따르지 않으니, 다만 속히 이루고자 하는 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것이다. 굽힘으로 폄을 삼고 사양으로 얻음을 삼으며 약함으로 강함을 삼을 수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적으니, 훼방과 칭찬은 사랑과 미움의 근원이고 禍와 福의 기틀이다.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내 남에 대해서 누구를 훼방하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하셨으니, 聖人의 德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용렬한 무리들이 가볍게 남을 훼방하고 칭찬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남이 만약 자신을 훼방하거든 마땅히 물러나서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아 만약 자신이 훼방 받을 만한 행실이 있으면 저의 비방하는 말이 마땅한 것이요, 만약 자신이 훼방 받을 만한 행실이 없으면 저의 비방하는 말이 망령된 것이다. 마땅하면 저를 원망할 것이 없고 망령되면 내 몸에 해로움이 없으니 또 어찌 되갚을 것이 있겠는가. 속담에 이르기를 ‘추위를 면함은 두터운 갖옷만 한 것이 없고, 비방을 그치게 함은 스스로 자기 몸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 말이 사실이다.”

[丁巳]十五年

[丁巳]十五年이라 〈魏景初元年이요 吳嘉禾六年이라〉

魏主 詔散騎常侍劉邵하야 作考課法하니 作都官考課法七十二條어늘 詔下百官하야 議한대 崔林曰 考課之法이 存乎其人하니 若大臣이 能任其職하야 式是百辟이면 則孰敢不肅이릿고 烏在考課哉릿고 杜恕曰 明試以功하야 三考黜陟은 誠帝王之盛制也라 然이나 歷六代【唐, 虞, 夏, 商, 周, 漢이라】而考績之法이 不著하고 關七聖【關은 通也, 過也라 七聖은 堯, 舜, 禹, 湯, 文, 武, 周公이라】而課試之文이 不垂라 語曰 世有亂人而無亂法【治亂曰亂이라】이라하니 若使法可專任이면 則唐, 虞可無須, 之佐요 殷, 周無貴, 之輔矣리이다 議久不決하니 事竟不行하다

建興 15년(정사 237) - 魏나라 景初 元年이고, 吳나라 嘉禾 6년이다. -

魏主曹叡가 散騎常侍劉邵에게 명하여 考課法을 만들게 하니, 劉邵가 《都官考課法》 72개 조항을 만들었다. 조서를 백관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자, 崔林이 말하기를 “考課하는 법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만약 大臣이 자신의 직무를 잘 맡아서 百官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면 누가 감히 엄숙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考課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杜恕가 말하기를 “功으로써 분명히 시험하여 세 번 상고한 다음 내치고 올림은 진실로 帝王의 훌륭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여섯 王朝【여섯 代(王朝)는 唐‧虞‧夏‧商‧周‧漢이다.】가 지나도록 考課하는 법이 드러나지 않았고, 일곱 聖人을 거쳤어도【關은 통하는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다. 일곱 聖人은 堯‧舜‧禹‧湯‧文‧武‧周公이다.】 課試하는 글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세상에 다스리는 사람은 있으나 다스리는 법은 없다.’【어지러움을 다스리는 것을 亂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만약 法에만 전적으로 맡길 수 있다면 의 보좌가 필요 없었을 것이요, 殷‧周는 伊尹呂尙의 보필을 귀하게 여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의논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니,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溫公曰 爲治之要는 莫先於用人이로되 而知人之道는 聖賢所難也라 是故로 求之於毁譽면 則愛憎競進하야 而善惡渾殽하고 考之於功狀이면 則巧詐橫生하야 而眞僞相冒하니 要之컨대 本在於至公至明而已矣라 爲人上者 至公至明이면 則群下之能否가 焯然形於目中하야 無所復逃矣어니와 苟爲不公不明이면 則考課之法이 適足以爲曲私欺罔之資也라 或曰 考績之法은 , 所爲라 京房【漢元帝時人이라】, 劉邵述而修之耳니 烏可廢哉아 曰 , 之官은 其居位也久하고 其受任也專하며 其立法也寬하고 其責成也遠이라 故之治水에 九載績用不成然後에 治其罪하고 之治水에 九州攸同하고 四隩旣宅然後에 賞其功하니 非若京房, 劉邵之法의 校其米鹽之課하고 責其旦夕之效也라 事固有名同而實異者하니 不可不察也니라 考績은 非可行於, 而不行於漢, 魏요 由京房, 劉邵不得其本하고 而奔趨其末故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정치하는 요점은 인물을 등용하는 것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지만 인물을 알아보는 방법은 聖賢도 어렵게 여겼다. 이 때문에 만약 사람들의 훼방과 칭찬하는 말에서 인재를 구하면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가 다투어 나와서 善惡이 뒤섞이고, 만약 功狀(공로를 기록한 글)에서 인물을 考課하면 잔꾀와 속임수가 제멋대로 나와서 眞僞가 분명치 못하니, 요컨대 근본은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분명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남의 윗사람이 된 자가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분명하면 여러 아랫사람들의 능력의 有無가 환하게 안중에 나타나서 다시 회피할 곳이 없겠지만 만일 공정하지 못하고 분명하지 못하면 考課하는 법은 다만 부정하고 欺罔하는 자료가 될 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考課하는 법은 시대에 만든 것이다. 京房【京房은 漢나라 元帝 때 사람이다.】劉邵는 이것을 계승해서 보충하였을 뿐이니,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관원은 지위에 있는 기간이 오래고 임무를 받은 것이 전일하였으며, 법을 세움이 관대하였고 성공을 책임 지움이 원대하였다. 그러므로 이 洪水를 다스릴 때에 9년 동안 功績을 이루지 못한 뒤에야 그 죄를 다스려 벌을 주었고,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九州가 똑같이 잘 다스려지고 四隩(사해의 물가)가 이미 집을 짓고 살 수 있게 된 뒤에야 그 공을 칭찬하여 상을 주었으니, 京房劉邵의 法처럼 자질구레한 일을 따지고 조석간에 효험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일은 진실로 명칭은 같으나 실제는 다른 경우가 있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考課하는 법을 시대에는 행할 수 있고 漢‧魏 시대에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京房劉邵가 그 根本을 알지 못하고 末節만 급히 따랐기 때문이다.”

七月에 皇后張氏崩하다

7월에 황후 張氏가 崩하였다.

[己未]延熙二年

[己未]延熙二年이라 〈魏景初三年이요 吳赤烏二年이라〉

春正月에 魏主寢疾【寢은 益也라】이어늘 司馬懿入見한대 魏主執其手하고 曰 吾以後事屬君하노니 君與曹爽으로 輔少子하라 是日에 立齊王芳【明帝無子하여 養爲太子하니 不知所來라 或曰 任城王楷之子라】하야 爲皇太子하고 尋殂하다

孫盛論曰 魏明帝沈毅【毅는 果敢也라】好斷하고 優禮大臣하며 開容善直하야 雖犯顔極諫이나 無所摧戮하니 其君人之量이 如此之偉也라 然이나 不思建德垂風【建其德이요 垂其風이라】하야 不固維城之基【詩에 宗子維城이라하니 同姓也니 言猜忌宗室以亡魏라】하야 至使大權偏據하고 社稷無衛하니 悲夫라

延熙 2년(기미 239) - 魏나라 景初 3년이고, 吳나라 赤烏 2년이다. -

봄 정월에 魏主曹叡가 병이 위독하자【寢은 병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司馬懿가 들어가 뵈니, 魏主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그대는 曹爽과 함께 少子를 보필하라.” 하였다. 이날 齊王曹芳明帝가 아들이 없으므로 齊王曹芳을 길러 太子로 삼으니, 누구의 소생인지 알 수 없다. 혹자는 이르기를 “任城王曹楷의 아들이다.” 한다.】을 세워 皇太子로 삼고曹叡가 얼마 후 죽었다.

孫盛의 論에 말하였다.

“魏나라 明帝는 침착하고 과감하고【毅는 과감한 것이다.】 결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大臣들을 예우하고 선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관대하게 포용해서 비록 안색을 범하면서 지극히 간하더라도 迫害하거나 죽이는 바가 없었으니, 人君 노릇 하는 도량이 이와 같이 컸다. 그러나 德을 세우고 훌륭한 風敎를 드리울 것【建德垂風은 德을 세우고 風敎를 드리우는 것이다.】을 생각하지 않아서 維城(宗室)의 기틀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여【≪詩經≫ 〈大雅 板〉에 “宗子는 나라의 城이다.” 하였다. 維城은 同姓이니, 宗室을 시기하여 魏나라를 망하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大權을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고 社稷을 호위할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 슬프다.”

魏主이 嗣位하니 年八歲라 加曹爽, 司馬懿侍中하야 都督中外諸軍하고 錄尙書事【旣督中外諸軍하고 又錄尙書事하니 則文武大權이 盡歸之矣라】하다

魏主曹芳이 지위를 이으니, 나이가 8세였다. 曹爽司馬懿에게 侍中을 가하여 中外의 諸軍을 都督하게 하고 尙書省의 일까지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頭註]都督中外諸軍 錄尙書事:이미 中外의 諸軍을 都督하고 또 尙書省의 일까지 겸하여 관장하니, 文武의 大權이 모두 曹爽司馬懿에게 돌아갔다.】

[辛酉]四年

[辛酉]四年이라 〈魏主正始二年이요 吳赤烏四年이라〉

魏欲廣田畜(蓄)穀於揚, 豫之間이어늘 鄧艾以爲昔太祖破黃巾하고 因爲屯田하사 積穀許都하야 以制四方이러시니 今三隅已定하니 事在淮南이라 每大軍出征에 運兵이 過半하니 功費巨億이라 陳, 蔡之間은 土下田良하니 可省許昌左右諸稻田【省許都之稻田하고 而耕於此也라】하고 幷水【汝水, 潁水, 蒗蕩渠水, 渦水가 皆經陳蔡之間하야 而東入淮하니라】東下하야 令淮北에 屯二萬人하고 淮南에 屯三萬人하야 十二分休【十人之中에 以二人으로 分番休息이라】하면 常有四萬人이 且田且守【淮北이 二萬人이요 淮南이 三萬人이니 幷五萬人이라 分一萬하야 番休迭戍하야 周而復始하면 是常有四萬人屯田이라】요 益開河渠하야 以增漑灌, 通漕運하며 計除衆費하고 歲定五百萬斛하야 以爲軍資하면 六七年間에 可積三千萬斛於淮上하리니 此則十萬之衆의 五年食也니 以此乘吳【〈左傳杜預注〉 乘은 伐也라】하면 無不克矣리이다 太傅懿善之하야 是歲에 始開廣漕渠하고 每東南有事에 大興軍衆하야 汎舟而下하야 達于江, 淮하니 資食有儲하고 而無水害러라

延熙 4년(신유 241) - 魏主曹芳의 正始 2년이고, 吳나라 赤烏 4년이다. -

魏나라가 揚州와 豫州의 사이에 田地를 넓혀 곡식을 저축하고자 하자, 鄧艾가 말하기를 “옛날 太祖(曹操)가 黃巾賊을 격파하고 인하여 屯田을 해서 許都에 곡식을 쌓아 四方을 제압하셨는데, 지금 세 귀퉁이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일이 淮南에 달려 있습니다. 매번 大軍이 출정할 때마다 군량을 운반하는 군사가 반을 넘으니, 공력과 비용이 億으로 헤아릴 정도입니다. 陳‧蔡의 사이는 지형이 낮고 토지가 비옥하니 許昌 부근의 여러 稻田을 줄일 수 있으며,【許都의 볏논을 줄이고 여기에서 경작하는 것이다.】 여러 물을 따라【汝水‧潁水‧蒗蕩渠水‧渦水가 모두 陳‧蔡의 사이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淮水로 들어간다.】 동쪽으로 내려가서 淮北 지방에 2만 명을 주둔시키고 淮南 지방에 3만 명을 주둔시켜서 10분의 2를 나누어 쉬게 하면【十二分休는 열 명 중에 두 명씩 番을 나누어 쉬게 하는 것이다.】 항상 4만 명이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는 지키게 될 것이요,【淮北이 2만 명이고 淮南이 3만 명이니 합쳐서 5만 명이다. 〈10분의 2인〉 1만 명을 나누어 번차례로 쉬고 교대로 변경을 지키게 하여 一週하고 나면 다시 시작하니, 이렇게 하면 항상 4만 명이 屯田을 하게 된다.】 運河를 더욱 개척해서 灌漑 시설을 늘리고 漕運을 통하게 하며, 여러 비용을 계산하여 제하고 해마다 5백만 斛을 정하여 軍資로 삼는다면 6, 7년 사이에 3천만 斛을 淮水 가에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10만 명의 병력이 5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이니, 이로써 吳나라를 토벌【≪春秋左傳≫의 杜預 注에 “乘은 정벌하는 것이다.” 하였다.】하면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太傅司馬懿가 그 말을 좋게 여겨서 이해에 비로소 漕運하는 運河를 넓히고 매번 동남 지방에 일이 있을 때마다 군대를 크게 일으켜서 배를 타고 내려가 곧장 揚子江과 淮水에 도달하니, 물자와 양식이 저축됨이 있었고 水害가 없었다.

[癸亥]六年

[癸亥]六年이라 〈魏正始四年이요 吳赤烏六年이라〉

十一月에 帝以費褘로 爲大將軍, 錄尙書事하다

延熙 6년(계해 243) - 魏나라 正始 4년이고, 吳나라 赤烏 6년이다. -

11월에 황제가 費褘를 大將軍‧錄尙書事로 삼았다.

○ 魏宗室曹冏이 上書曰 古之王者 必建同姓하야 以明親親하고 必樹異姓하야 以明賢賢하야 親疎를 竝用이라 故로 能保其社稷이러니 今州郡牧守 皆跨有千里하고 兼軍武之任호되 或比國數人이요 或兄弟竝據어늘 而宗室子弟는 王空虛之地하고 君不使之民하야 曾無一人間厠其間【上間字는 隔也요 厠은 雜也라】하야 與相維制하니 非所以彊幹弱枝하야 備萬一之虞也니이다 語曰 百足之蟲은 至死不僵이라하니 以其扶之者衆也일새니 此言이 雖小나 可以譬大니이다 冏이 欲以此論으로 感寤曹爽호되 不能用이러라

○ 魏나라 宗室 曹冏이 상서하기를, “옛날 王者들은 반드시 同姓의 諸侯를 封하여 친척을 친애함을 밝히고 반드시 異姓의 諸侯를 세워 賢人을 존중함을 밝혀서, 친한 자와 소원한 자를 함께 등용하였으므로 社稷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州郡의 牧使와 守令이 모두 천리의 땅을 점유하고 文武의 관직을 겸임하여 혹은 나라에 견줄 만한 자가 몇 사람이고 혹은 형제가 함께 점거하고 있는데도 宗室의 子弟는 공허한 땅에 왕 노릇 하고 부릴 수 없는 백성들에게 군주 노릇 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위의 間字는 막음이요, 厠은 섞임이다.】 서로 더불어 異姓의 諸侯를 견제하지 못하니, 根幹을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하여 만일의 근심에 대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발이 백 개인 벌레는 죽음에 이르도록 쓰러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붙들어 주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비록 하찮으나 큰일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曹冏이 이 의논으로 曹爽을 감동시켜 깨우치고자 하였으나 曹爽이 쓰지 못하였다.

[乙丑]八年

[乙丑]八年이라 〈魏正始六年이요 吳赤烏八年이라〉

吳丞相陸遜이 卒하니 其子이 爲建武校尉하야 代領其衆하다

延熙 8년(을축 245) - 魏나라 正始 6년이고, 吳나라 赤烏 8년이다. -

吳나라 丞相陸遜이 죽으니, 그 아들陸抗이 建武校尉가 되어서 그 무리를 대신 거느렸다.

○ 八月에 皇太后吳氏崩하다

○ 8월에 皇太后吳氏가 崩하였다.

○ 十一月에 大司馬과 尙書令董允이 皆卒하니 以尙書呂乂로 爲尙書令하다 董允이 秉心公亮【亮은 信也라】하야 獻可替否【君所謂可而有否焉이어든 臣獻其否以成其可하고 君所謂否而有可焉이어든 臣獻其可以替其否라】하니 帝甚憚之러라 宦人黃皓便僻佞慧【便者는 便人所好요 僻者는 避人所惡라 慧는 儇也, 利也, 敏也라】하니 帝愛之라 皓畏允하야 不敢爲非하고 終允之世토록 位不過黃門丞【續漢志에 黃門令丞一人은 以宦者로 爲之라하니라】이러니 費褘陳祗로 代爲侍中하니 相表裏라 始預政하야 累遷至中常侍하야 操弄威柄하야 終以覆國하니라

○ 11월에 大司馬蔣琬과 尙書令董允이 모두 죽으니, 尙書呂乂를 尙書令으로 삼았다. 董允은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성실【亮은 성실함이다.】하여 황제가 否하다고 해도 可하면 可를 올리고, 황제가 可하다고 해도 否하면 可를 바꾸어 否를 올리니,【군주가 말한 바가 옳더라도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옳지 않은 것을 아뢰어 옳은 것을 이루게 하며, 군주가 말한 바가 옳지 않더라도 옳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옳은 것을 아뢰어 옳지 않은 것을 폐하게 하는 것이다.】 황제가 매우 두려워하였다. 환관인 黃皓가 겉치레를 잘하고간사하고지혜로우니,【便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僻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慧는 총명하고 예리하고 민첩한 것이다.】황제가 총애하였다. 黃皓董允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하고 董允이 일생을 마치도록 黃皓의 지위가 黃門丞【≪後漢書≫ 〈百官志〉에 “黃門令 아래에 丞이 한 명 있으니, 宦者로써 삼았다.” 하였다.】에 지나지 않았는데, 費褘董允을 대신하여 陳祗를 侍中으로 삼으니, 陳祗黃皓와 서로 表裏가 되었다. 黃皓가 비로소 정사에 관여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中常侍에 이르러서 위엄과 權柄을 쥐고 희롱하여 끝내 나라를 전복시켰다.

[丙寅]九年

[丙寅]九年이라 〈魏正始七年이요 吳赤烏九年이라〉

秋九月에 以姜維로 爲衛將軍하야 與費褘로 竝錄尙書事하다

延熙 9년(병인 246) - 魏나라 正始 7년이요, 吳나라 赤烏 9년이다. -

가을9월에 姜維를 衛將軍으로 삼아서費褘와 함께 錄尙書事로 삼았다.

[丁卯]十年

[丁卯]十年이라 〈魏正始八年이요 吳赤烏十年이라〉

魏大將軍이 用何晏, 鄧颺, 丁謐之謀하야 遷太后於永寧宮【太后는 明帝后郭氏라】하고 專擅朝政하야 多樹親黨하고 屢改制度하니 太傅不能禁이라 與有隙하야 稱疾하고 不與政事하다

延熙 10년(정묘 247) - 魏나라 正始 8년이고, 吳나라 赤烏 10년이다. -

魏나라 大將軍曹爽何晏鄧颺丁謐의 계책을 따라 太后【太后는 明帝의 皇后인 郭氏이다.】를 永寧宮으로 옮기고 조정의 정사를 專橫하여 친한 도당을 많이 세우고 여러 번 제도를 고치니, 太傅인 司馬懿가 금지하지 못하였다. 司馬懿曹爽과 틈이 있어서 병을 칭탁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戊辰]十一年

[戊辰]十一年이라 〈魏正始九年이요 吳赤烏十一年이라〉

五月에 費褘出屯漢中하다 自蔣琬히 雖身居於外나 慶賞威刑을 皆遙先諮斷然後에 乃行하니라 雅性謙素【雅는 素也라】하야 當國功名이 略與比러라

延熙11년(무진 248) - 魏나라 正始 9년이고, 吳나라 赤烏 11년이다. -

5월에 費褘가 나가 漢中에 주둔하였다. 蔣琬으로부터 費褘에 이르기까지 비록 몸은 外地에 있으나 경사스러운 일에 상을 주는 것과 위엄을 보여 형벌을 내리는 것을 모두 멀리 있는 황제에게 먼저 자문하여 결단한 뒤에야 비로소 행하였다. 費褘는 본디【雅는 본디이다.】 타고난 성품이 겸손하고 검소하여 국정을 담당한 功名이 대략 蔣琬과 비슷하였다.

○ 十一月에 魏太傅 陰與其子中護軍와 散騎常侍【師는 名也니 師, 昭는 皆懿子라】로 謀誅曹爽하다

○ 11월에 魏나라 太傅司馬懿가 은밀히 그의 아들中護軍司馬師와 散騎常侍 司馬昭【師는 이름이니, 司馬師와 司馬昭는 모두 司馬懿의 아들이다.】와 더불어 曹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己巳]十二年

[己巳]十二年이라 〈魏嘉平元年이요 吳赤烏十二年이라〉

魏太傅 以皇太后令【以者는 非眞有此令也라】으로 閉諸城門하고 勒兵據武庫하다 奏호되 이 與何晏, 鄧颺, 丁謐, 畢軌等으로 陰謀反逆이라하고 於是에 收, , , , , , , 【羲, 訓二人은 曹爽弟也요 勝은 李勝也라】하야 皆下獄하고 劾以大逆不道하야 夷三族하다

延熙12년(기사 249) - 魏나라 嘉平 元年이고, 吳나라 赤烏 12년이다. -

魏나라 太傅司馬懿가 皇太后의 명령이라 칭하고서【以는 참으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성문을 닫고 군대를 무장하여 武庫를 점령하였다. 司馬懿가 아뢰기를 “曹爽何晏鄧颺丁謐畢軌 등과 은밀히 반역을 도모하였습니다.” 하고, 이에 曹爽曹羲曹訓何晏鄧颺丁謐畢軌李勝【[釋義]收爽……勝:曹羲와 曹訓 두 사람은 曹爽의 아우이고, 勝은 李勝이다.】을 체포하여 모두 하옥시키고 대역무도하다고 탄핵하여 三族을 멸하였다.

○ 魏管輅之舅謂曰 爾前何以知, 之敗오 之行步는 筋不束骨하고 脈不制肉하고 起立傾倚하야 若無手足하니 此爲鬼躁요 何之視候엔 則魂不守宅하고 血不華色하며 精爽이 烟浮하고 容若槁木하니 此爲鬼幽라 二者 皆非遐福之象也라하더라

○ 魏나라 管輅의 外叔이 管輅에게 이르기를 “네가 지난번에 何晏鄧颺이 실패할 줄을 어찌 알았느냐?” 하니, 管輅가 말하기를 “鄧颺의 걸음걸이는 힘줄이 뼈마디를 단속하지 못하고 脈이 살을 제어하지 못해서 일어설 때에 몸이 기울어 手足이 없는 듯하니 이것은 鬼躁이고, 何晏이 安候를 살필 때에 魂魄이 집(身體)을 떠난 듯하고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하여 화색이 없으며 정신은 떠 있는 연기와 같고 용모는 마른나무와 같으니 이것은 鬼幽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큰 福(長壽)을 누릴 수 있는 象이 아닙니다.” 하였다.

○ 魏何晏이 性自喜하야 粉白을 不去手【自以塗澤也라】하고 行步에 顧影하고 尤好, 【老子는 見九卷하니라 莊子는 名周요 字子休니 號曰南華仙人이라 嘗爲蒙縣漆園吏하니 與梁惠王, 齊宣王同時라 老, 莊은 皆尙虛無之學하니라】之書하야 與夏侯玄, 荀粲【彧之子라】王弼之徒로 競爲淸談하고 祖尙虛無하야 謂六經爲聖人糟粕【桓公讀書事는 見莊子하니라 公이 讀書堂上이러니 輪扁問 讀何書니잇고 曰 讀古人書니라 扁曰 古人在否잇가 曰 已死矣니라 扁曰 然則是古人糟粕矣니이다】이라하니 由是로 天下士大夫 爭慕效之하야 遂成風流하야 不可復制焉하니라

○ 魏나라 何晏은 성품이 자기 몸을 치장하기를 좋아하여 흰 粉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스스로 분을 칠하여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걸음을 걸을 때에는 그림자를 돌아보았으며, 【[附註]老 莊:老子는 9권에 보인다. 莊子는 이름이 周이고 字가 子休이니 號를 南華仙人이라 하였다. 일찍이 蒙縣의 漆園吏가 되었으니, 梁惠王‧齊宣王과 같은 때이다. 老子와 莊子는 모두 허무한 학설을 숭상하였다.】의 글을 특히 좋아하여 夏侯玄‧荀粲【荀粲은 荀彧의 아들이다.】‧王弼의 무리와 다투어 淸談을 하고 허무한 학설을 元祖로 삼아 숭상하여 六經을 일러 聖人의 糟粕(찌꺼기)【桓公이 독서한 일은 ≪莊子≫에 보인다. 桓公이 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수레바퀴를 만드는 扁이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桓公이 “古人의 책을 읽고 있다.” 하고 대답하니, 扁이 “古人은 살아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환공이 “이미 죽었다.” 하고 대답하니, 扁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것은 古人의 糟粕일 뿐입니다.” 하였다.】이라 하니,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士大夫들이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아서 마침내 風流를 이루어 다시 제재할 수 없었다.

○ 魏以太傅로 爲丞相하고 加九錫하니 固辭不受하다

○ 魏나라가 太傅司馬懿를 丞相으로 삼고 九錫을 가하니, 司馬懿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秋에 姜維伐魏하야 攻雍州어늘 鄧艾禦之하니 軍이 遂還하다

○ 가을에 姜維가 魏나라를 정벌하여 雍州를 공격하자 鄧艾가 막으니, 姜維의 군대가 마침내 돌아왔다.

[庚午]十三年

[庚午]十三年이라 〈魏嘉平二年이요 吳赤烏十三年이라〉

吳主立少子하야 爲太子하다

延熙13년(경오 250) - 魏나라 嘉平 2년이고, 吳나라 赤烏 13년이다. -

吳主가 少子 孫亮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

[辛未]十四年

[辛未]十四年이라 〈魏嘉平三年이요 吳太元元年이라〉

八月에 魏司馬懿卒하니 以其子로 爲撫軍大將軍, 錄尙書事하다

延熙14년(신미 251) - 魏나라 嘉平 3년이고, 吳나라 太元 元年이다. -

8월에 魏나라 司馬懿가 죽으니, 그의 아들司馬師를 撫軍大將軍‧錄尙書事로 삼았다.

○ 十一月에 費褘北屯漢壽【縣名이라】하니 以陳祗로 守尙書令하다

○ 11월에 費褘가 북쪽으로 가서 漢壽縣【漢壽는 縣의 이름이다.】에 주둔하니, 陳祗로 尙書令을 맡게 하였다.

[壬申]十五年

[壬申]十五年이라 〈魏嘉平四年이요 吳主孫亮建興元年이라〉

四月에 吳主殂하니 諡曰大皇帝라하다 太子이 卽位하다

延熙15년(임신 252) - 魏나라 嘉平 4년이고, 吳主孫亮의 建興 元年이다. -

4월에 吳主가 죽으니 시호를 大皇帝라 하였다. 太子孫亮이 즉위하였다.

姜維負其才武하고 每欲興軍大擧어늘 費褘常裁制不從하고 與其兵호되 不過萬人하고 曰 吾等이 不如丞相【謂孔明이라】 亦已遠矣라 丞相도 猶不能定中夏온 況吾等乎아 不如且保國治民하야 謹守社稷이요 如其功業은 以俟能者라하더니 及死에 得行其志하야 乃將數萬人하고 出石營하야 伐魏圍狄道하다

姜維가 자신의 재주와 武略을 믿고 매번 군대를 일으켜 크게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費褘가 항상 제재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에게 병력을 주되 만 명을 초과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丞相【丞相은 諸葛孔明(諸葛亮)을 이른다.】만 못함이 또한 너무나도 현격하다. 丞相도 오히려 中夏를 평정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들에 있어서랴. 우선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들을 다스려서 社稷을 삼가 지키는 것만 못하고, 功業에 있어서는 유능한 자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하였다. 費褘가 죽자, 姜維가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가 있어서 마침내 수만 명을 거느리고 石營으로 나가 魏나라를 정벌하여 狄道를 포위하였다.

[甲戌]十七年

[甲戌]十七年이라 〈魏主曹髦正元元年이요 吳五鳳元年이라〉

夏에 姜維伐魏하다

延熙17년(갑술 254) - 魏主曹髦의 正元 元年이고, 吳나라 五鳳 元年이다. -

여름에 姜維가 魏나라를 정벌하였다.

○ 九月에 魏大將軍 廢其主하고 迎高貴鄕公하야 卽皇帝位하다

○ 9월에 魏나라 大將軍司馬師가 군주인 曹芳을 폐하고高貴鄕公曹髦를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게 하였다.

[乙亥]十八年

[乙亥]十八年이라 〈魏正元二年이요 吳五鳳二年이라〉

司馬師卒하니 詔以弟로 爲大將軍, 錄尙書事하다

延熙18년(을해 255) - 魏나라 正元 2년이고, 吳나라 五鳳 2년이다. -

魏나라 司馬師가 죽으니, 황제가 명령하여 司馬師의 아우인 司馬昭를 大將軍‧錄尙書事로 삼았다.

[丙子]十九年

[丙子]十九年이라 〈魏甘露元年이요 吳太平元年이라〉

春正月에 以姜維로 爲大將軍하다

延熙 19년(병자 256) - 魏나라 甘露 元年이고, 吳나라 太平 元年이다. -

봄 정월에 姜維를 大將軍으로 삼았다.

○ 魏賜大將軍袞冕之服【袞은 龍服也라 龍首袞然蟠曲故로 曰袞이니 三公所命服이라 冕은 大夫以上冠이라】하고 赤舃副【重底曰舃이요 單底曰屨라 李氏曰 天子諸侯 冕服用舃하고 他服用屨라 副는 后夫人祭服之首飾이니 編髮爲之者라】焉하다

○ 魏나라가 大將軍司馬昭에게 용을 수놓은 袞衣와 冕冠【袞은 龍을 수놓은 옷이다. 龍의 머리가 숙이고 서려 있기 때문에 袞이라 한 것이니, 三公의 命服이다. 冕은 大夫 이상이 쓰는 冠이다.】을 하사하고 赤舃(붉은 가죽신) 한 쌍【신발의 밑바닥이 이중으로 된 것을 舃이라 하고, 신발의 밑바닥이 홑겹으로 된 것을 屨라 한다. 李氏가 말하기를 “天子와 諸侯가 冕服에는 舃을 신고 다른 옷에는 屨를 신는다.” 하였다. 副는 后夫人의 祭服의 머리 장식이니, 머리카락을 땋아서 만든 것이다.】을 아울러 하사하였다.

[丁丑]二十年

[丁丑]二十年이라 〈魏甘露二年이요 吳太平二年이라〉

秋九月에 姜維聞魏分關中兵하야 以赴淮南하고 率數萬人하야 出駱谷하니 安西將軍鄧艾 進兵據之하야 以拒維하다 是時에 維數出兵하니 蜀人이 愁苦어늘 譙周作仇國論【吾聞之하니 處大無患者는 常多慢이요 處小有憂者는 常思善이라하니 多慢生亂이요 思善生治라 今民之疲勞하니 則騷擾之兆生이요 上慢下暴하니 則瓦解之形起라 諺曰 射幸數跌이 不如審發이라하니 上是論也라】하야 以諷之하다

延熙 20년(정축 257) - 魏나라 甘露 2년이고, 吳나라 太平 2년이다. -

가을 9월에 姜維는 魏나라가 關中의 병력을 나누어 淮南으로 달려간다는 말을 듣고는 수만 명을 거느리고 駱谷으로 진출하니, 安西將軍鄧艾가 진군하여 점거하고 姜維를 막았다. 이때 姜維가 군대를 자주 출동시키니, 蜀 지방 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는데, 譙周가 仇國論을 지어서【仇國論에 “내가 듣건대 ‘큰 나라에 거하여 우환이 없는 자는 항상 태만함이 많고, 작은 나라에 거하여 우환이 있는 자는 항상 善을 생각한다.’ 하였으니, 태만함이 많으면 亂이 생겨나고 善을 생각하면 다스림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금 백성들이 피로하니 소요할 조짐이 생겨나고, 윗사람은 태만하고 아랫사람은 사나우니 와해될 형세가 시작된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활을 쏠 때에 요행을 바라다가 여러 번 빗나가는 것이 신중히 살핀 뒤에 발사하는 것만 못하다.’ 했다.” 하였으니, 이 의논을 올린 것이다.】 풍자하였다.

[戊寅]景耀元年

[戊寅]景耀元年이라 〈魏甘露三年이요 吳景帝孫休永安元年이라〉

五月에 魏詔以司馬昭로 爲相國하야 封晉公하고 加九錫하다

景耀 元年(무인 258) - 魏나라 甘露 3년이고, 吳나라 景帝孫休의 永安 元年이다. -

5월에 魏나라가 명하여 司馬昭를 相國으로 삼아 晉公에 봉하고 九錫을 가하였다.

○ [[吳孫(琳)[綝]]]이 廢吳主【權之少子也라】하야 爲會稽王【亮은 後黜爲(侯)[候]官侯하니 自殺하니라】하고 迎立琅邪(琊)王休【權中子也라】하다

○ 吳나라 孫綝이 吳主(孫亮)【吳主는 孫權의 막내아들이다.】를 폐하여 會稽王으로 삼고【[原註]吳孫綝……爲會稽王:孫亮은 뒤에 쫓겨나서 候官侯가 되자 자살하였다.】琅邪王 孫休【琅邪王 孫休는 孫權의 둘째 아들이다.】를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웠다.

[庚辰]三年

[庚辰]三年이라 〈魏元帝曹奐景元元年이요 吳永安三年이라〉

正月에 魏主 見威權日去하고 不勝其忿하야 曰 司馬昭之心은 路人所知也라 吾不能坐受廢辱이니 今日에 當自出討之하리라하고 遂拔劍升輦하야 率殿中宿衛蒼頭【長大有膂力者之號요 又魏兵卒之號라 漢名奴爲蒼頭者는 服純墨而別於良人也라】官僮하고 鼓譟而出하니 中護軍賈充【惠帝賈后父也라】이 自外入하야 逆與戰於南闕下러니 太子舍人成濟 抽戈刺【髦自用劍하니 衆欲退어늘 成濟問於充而抽戈前斬하니라】하야 殞于車下하다 太后下令하야 罪狀高貴鄕公하야 廢爲庶人하고 使中護軍司馬炎으로 迎常道鄕公璜【武帝孫燕王宇之子也라】於鄴하야 以爲明帝嗣하니 之子也라 六月에 常道鄕公이 卽皇帝位하다

景耀 3년(경진 260) - 魏나라 元帝曹奐의 景元 元年이고, 吳나라 永安 3년이다. -

정월에 魏主曹髦가 위엄과 권력이 날로 떠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하기를 “司馬昭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내 가만히 앉아서 폐출당하고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금일에 마땅히 스스로 궁을 나가 司馬昭를 토벌하겠다.” 하였다. 마침내 검을 뽑아 들고 輦에 올라 殿中을 宿衛하는 蒼頭【蒼頭는 체격이 長大하고 완력이 강한 자의 호칭이요, 또 魏나라 병졸의 호칭이다. 漢나라 때에 종을 이름하여 蒼頭라고 한 것은 옷이 순흑색이어서 良人과 다르기 때문이다.】와 官僮(노복)들을 거느리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나가니, 中護軍 賈充【賈充은 惠帝의 后妃인 賈后의 아버지이다.】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曹髦를 맞아 남쪽 대궐문 아래에서 싸웠다. 太子舍人成濟가 창을 뽑아 曹髦를 찔러서【[通鑑要解]太子舍人成濟 抽戈刺髦:曹髦가 본래 칼을 잘 쓰니 군사들이 물러나려고 하였는데, 成濟가 賈充에게 묻고는 창을 뽑아 면전에서 曹髦를 목 베었다.】曹髦가 수레 아래에서 죽었다. 太后가 명령을 내려 高貴鄕公의 죄상을 공포하고 폐위하여 庶人으로 삼고서 中護軍司馬炎으로 하여금 常道鄕公 曹璜【常道鄕公 曹璜은 武帝(曹操)의 孫子인 燕王 曹宇의 아들이다.】을 鄴에서 맞이하여 明帝의 後嗣로 삼게 하니, 司馬炎司馬昭의 아들이다.

6월에 常道鄕公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壬午]五年

[壬午]五年이라 〈魏景元三年이요 吳永安五年이라〉

八月에 大將軍姜維 伐魏洮陽【洮水之陽也라】이어늘 鄧艾與戰破之하다

景耀 5년(임오 262) - 魏나라 景元 3년이고, 吳나라 永安 5년이다. -

8월에 大將軍姜維가 魏나라 洮陽【洮陽은 洮水의 북쪽이다.】을 정벌하자, 鄧艾가 더불어 싸워 격파하였다.

○ 魏譙郡嵇康이 文辭壯麗하고 好言하며 而尙奇任俠【注見武帝元朔二年하니라】이라 與陳留阮籍兄子과 河內山濤와 河南向秀와 琅邪王戎과 沛人劉伶으로 特相友善하니 號竹林七賢이라 皆崇尙虛無하고 輕蔑禮法하야 縱酒昏酣하야 遺落世事러라 阮籍이 爲步兵校尉러니 其母卒에 이 方與人圍碁할새 對者求止어늘 이 留與決賭【決은 勝負也요 賭는 博也라】하다 旣而요 飮酒二斗하고 擧聲一號하야 吐血數升하고 毁瘠骨立【毁는 瘁也요 瘠은 瘦也니 而至於骨立은 哀痛之甚故也라】이나 居喪飮酒를 無異平日이러라 劉伶이 嗜酒하야 常乘鹿車【言其小하야 僅可容一鹿이라】하고 携一壺酒하고 使人荷鍤【荷는 負也요 鍤은 鍫也라】隨之하고 曰 死便埋我하라하니 當時士大夫 皆以爲賢하야 爭慕效之하야 謂之放達【以玄虛放宏爲夷達也요 又一說에 放誕豁達也라】이러라 鍾會方有寵於司馬昭라 聞嵇康名而造之러니 이 箕踞而鍛【王氏曰 箕踞는 傲坐니 伸兩足하고 以手按膝하야 其形如箕也라 鍛은 小冶니 徐氏曰 椎之而已요 不消故로 曰小冶라 晉書註에 嵇康善鍊鍛이라하니라】하고 不爲之禮어늘 將去한대 曰 何所聞而來라가 何所見而去오 曰 聞所聞而來라가 見所見而去로라하고 遂深銜之【銜은 恨也니 鍾會恨嵇康之無禮하니라】하니라

○ 魏나라 譙郡 사람 嵇康은 文辭가 장엄하고 화려하고 을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이함을 숭상하고 任俠【任俠은 注가 武帝 元朔 2年條(B.C.127)에 보인다.】하였다. 陳留, 阮籍, 阮籍의 형의 아들인 阮咸, 河內의 山濤, 河南의 向秀, 琅琊의 王戎, 沛 땅 사람 劉伶 등과 특별히 서로 친하니, 竹林七賢이라 이름하였다. 이들은 모두 의 허무한 학설을 숭상하고 禮法을 경멸하여, 술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해서 세상일을 잊었다.

阮籍이 步兵校尉가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별세하였을 때에 阮籍은 한창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대국하던 자가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阮籍은 만류하고 승부를 판가름 지었다.【決은 승부를 결단하는 것이고, 賭는 도박이다.】 이윽고 술 두 말을 마시고 큰 소리로 한번 號哭하고는 몇 되의 피를 토하고 몸이 훼손되어 뼈만 앙상하였으나【毁는 파리함이고 瘠은 수척함이니, 몸이 야위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기까지 한 것은 애통함이 심하기 때문이다.】 居喪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劉伶은 술을 좋아해서 항상 鹿車【鹿車는 수레가 작아서 겨우 사슴 한 마리가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를 타고 술 한 병을 차고는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荷는 짊어지는 것이요, 鍤은 가래이다.】 따르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곧 그 자리에 나를 묻으라.” 하니, 당시의 士大夫들이 모두 어질다고 여겨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으면서 그를 放達(호방하고 활달하여 禮俗에 구애받지 않음)【玄虛하고 放宏함을 夷達이라 하고, 또 一說에는 “방탕하고 허탄하며 활달함이다.” 하였다.】하다고 일렀다.

鍾會는 한창 司馬昭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嵇康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나 嵇康이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아 쇠를 단련하기만 하고【王氏가 말하기를 “箕踞는 거만하게 앉은 것이니, 두 발을 쭉 뻗고 손으로 무릎을 짚어서 그 모습이 키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鍛은 小冶이니, 徐氏가 말하기를 “쇠를 불려 두드리기만 할 뿐, 쇠를 녹이지는 않기 때문에 小冶라고 한다.” 하였다. ≪晉書≫의 註에 “嵇康은 쇠를 잘 단련하였다.” 하였다.】 예우하지 않았다. 鍾會가 장차 떠나려 하자, 嵇康이 말하기를 “무슨 말을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가?” 하니, 鍾會가 말하기를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가 본 바(형편없는 것)를 보고 간다.” 하고 마침내 깊이 원망을 품었다.【銜은 恨하는 것이니, 鍾會는 嵇康이 자신을 예우해 주지 않음을 恨한 것이다.】

○ 魏司馬昭姜維數北伐하야 欲大擧入寇어늘 朝臣이 多以爲不可라호되 獨司隷校尉鍾會勸之라 諭衆曰 自定壽春以來【乙亥年에 揚州都督毌丘儉과 刺史文欽이 討司馬師어늘 師擊敗之하니 欽奔吳하고 儉走死하니라】로 息役六年하야 治兵繕甲하야 以擬二虜라 今吳는 地廣大而下濕하야 攻之에 用功最難이니 不如先定巴蜀하고 三年之後에 因順流之勢하야 水陸竝進하니 此는 滅虢取虞之勢【春秋僖二年에 晉假道於虞하야 以伐虢滅〈下陽이라 五年에 晉復假道於虞하야 以伐虢滅〉之하고 師還할새 館于虞라가 遂襲虞滅之하니라】라 今絆【縶維之也라】姜維於沓中【地名이니 在諸羌中이라】하야 使不得東顧하고 直指駱谷【漢中郡興勢에 有駱谷路하니 南口曰儻谷이요 北口曰駱谷이라】하야 出其空虛之地하야 以襲漢中이면 以劉禪之闇으로 而邊城外破에 士女內震하리니 其亡을 可知也라하고 乃以鍾會로 爲鎭西將軍하야 都督關中하다 姜維表帝호되 聞鍾會治兵關中하야 欲規進取하니 宜竝遣左右車騎張翼, 廖化【時翼爲左車騎將軍이요 化爲右車騎將軍이라】하야 督諸軍하야 分護陽安關口及陰平【今文(州)[縣]是라 漢武開西南夷하고 置陰平道하야 屬廣漢이러니 晉爲陰平郡하니라】之橋頭하야 以防未然이니이다 黃皓信巫鬼하야 謂敵終不自致라하야 啓帝寢其事하니 群臣이 莫知러라

○ 魏나라 司馬昭姜維가 자주 북쪽을 침략하는 것을 염려하여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蜀漢으로 쳐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유독 司隷校尉鍾會만은 이를 권하였다. 司馬昭가 무리에게 타이르기를 “壽春을 평정한 이래로【을해년(255)에 揚州都督 毌丘儉과 揚州刺史 文欽이 司馬師를 토벌하였는데, 司馬師가 공격하여 이들을 패배시키니, 文欽은 吳나라로 달아나고 毌丘儉은 패주하다가 죽었다.】 6년 동안 戰役을 중지하고서 군대를 다스리고 갑옷을 수선하여 두 오랑캐를 잡으려고 하였다. 이제 吳나라는 땅이 광대하고 低濕하여 공격했을 때 공을 세우기가 가장 어렵다. 우선 巴蜀을 평정하고 3년 뒤에 순탄하게 흘러가는 형세를 이용하여 水陸으로 함께 진군하는 것만 못하니, 이는 晉나라가 虢을 멸망시키고 虞를 취하는 형세【≪春秋左傳≫ 僖公 2年에 晉나라가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을 정벌하여 〈下陽을 멸망시켰다. 5년에 晉나라가 다시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군대가 돌아올 적에 虞나라에 머물다가 마침내 虞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이다. 지금 姜維를 沓中【沓中은 地名이니, 諸羌 안에 있다.】에 묶어 두어【絆은 동여매고 옭아매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동쪽을 돌아보지 못하게 하고 곧바로 駱谷【漢中郡 興勢縣에 駱谷路가 있으니, 남쪽 어귀를 儻谷이라 하고 북쪽 어귀를 駱谷이라 한다.】으로 향하여 그들의 허술한 곳으로 나가 漢中을 습격하면, 용렬한 劉禪으로 볼 때 변방의 성이 밖에서 격파됨에 따라 남녀 백성들이 안에서 두려워할 것이니, 멸망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鍾會를 鎭西將軍으로 삼아 關中을 都督하게 하였다.

姜維가 황제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鍾會가 關中에서 군대를 정돈하여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차지하려고 획책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땅히 左‧右車騎將軍인 張翼과 廖化【이때에 張翼은 左車騎將軍이고, 廖化는 右車騎將軍이었다.】를 함께 보내어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陽安關의 어귀와 陰平【陰平은 지금의 文縣이 이곳이다. 漢나라 武帝가 서남쪽 오랑캐 지역을 개통하고 陰平道를 설치하여 廣漢郡에 속하게 하였는데, 晉나라가 陰平郡으로 만들었다.】의 橋頭에 나누어 주둔하게 해서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黃皓가 무당과 귀신을 믿어 적이 끝내 스스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해서 황제에게 아뢰어 그 일을 회부하지 않도록 하니, 여러 신하들이 이 일을 알지 못하였다.

[癸未]炎興元年

[癸未]炎興元年이라 〈魏景元四年이요 吳永安六年이라 ○ 是歲에 漢亡하니라〉

秋에 魏欲大擧兵하야 入寇漢中할새 遣鄧艾하야 督三萬餘人하야 自狄道로 趣甘松【地名이니 在諸羌中이라】, 沓中하야 以連綴姜維하고 諸葛緖는 督三萬餘人하야 自祁山으로 趣武街橋頭하야 絶維歸路하고 鍾會는 統十萬餘衆하야 分從斜谷, 駱谷, 子午谷하야 趣漢中하고 以廷尉衛瓘으로 持節하야 監, 軍事하다

炎興 元年(계미 263) - 魏나라 景元 4년이고, 吳나라 永安 6년이다. ○ 이해에 漢나라(蜀漢)가 망하였다.-

가을에 魏나라가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漢中으로 쳐들어가고자 할 적에 鄧艾를 보내어 3만여 명을 독려하여 狄道로부터 甘松【甘松은 地名이니, 諸羌 안에 있다.】과 沓中으로 달려가 姜維를 옭아매게 하고, 諸葛緖는 3만여 명을 독려하여 祁山으로부터 武街의 橋頭로 달려가 姜維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고, 鍾會는 10여만 명의 군사를 통솔하여 나누어서 斜谷‧駱谷‧子午谷을 따라 漢中으로 달려가게 하고, 廷尉인 衛瓘에게 節을 잡고 鄧艾鍾會의 軍事를 감독하게 하였다.

○ 或以問劉寔, 이 其平蜀乎아 曰 破蜀은 必矣어니와 而皆不還하리라 客이 問其故한대 寔이 笑而不答이러라

○ 혹자가 劉寔에게 묻기를 “鍾會鄧艾가 蜀을 평정하겠는가?” 하니, 劉寔이 말하기를 “蜀은 틀림없이 격파하겠지만 두 사람 모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客이 그 이유를 묻자, 劉寔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 八月에 魏軍이 發洛陽하야 長驅而前【長驅는 謂無禦之者니 〈顔師古曰〉 猶言直進也라】하다 維聞鍾會諸軍이 已寇漢中하고 引兵하야 與廖化, 張翼, 董厥等으로 合兵守劍閣하야 以拒하다

○ 8월에 魏나라 군대가 洛陽을 출발하여 乘勝長驅하면서 전진하였다.【長驅는 막는 자가 없음을 이르니, 顔師古가 말하기를 “直進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姜維鍾會의 여러 군대가 이미 漢中을 침략했다는 말을 듣고는 병력을 인솔하여 廖化張翼董厥 등과 함께 병력을 합하여 劍閣을 지켜 鍾會를 막았다.

姜維列營守劍閣하니 攻之不能克하고 粮道險遠하야 欲引還이러니 鄧艾上言호되 漢兵이 摧折하니 宜遂乘之라 若從陰平由邪徑하야 經漢德陽亭하야 趣涪하야 出劍閣西百里하면 去成都三百餘里라 奇兵이 衝其腹心하야 出其不意하면 劍閣之守 必還赴涪하리니 則方軌而進【軌는 車轍也니 方軌는 言竝轍而進也라 爾雅云 方舟者는 倂兩(舟)[船]이라하니 則此軌亦兩也라】이요 劍閣之軍이 不還이면 則應涪之兵이 寡矣라하고 遂自陰平으로 行無人之地七百餘里하야 鑿山通道하고 造作橋閣하니 山高谷深하야 至爲艱險하고 又糧運將匱하야 瀕於危殆【瀕은 際也라 古濱字니 近也라】以氈自裹하야 推轉而下한대 將士皆攀木緣崖하고 魚貫而進【謂若魚貫之連接而進也라】하다 先登至江油【本廣漢郡剛氐道地라 三國에 魏得其地하야 置江油郡이라 〈西魏立龍州하니〉 今龍州에 有江油縣이라】하니 蜀守將馬邈이 降이라 諸葛瞻이 督諸軍하야 拒러니 大破之하고 斬하다

姜維가 진영을 나열하여 劍閣을 지키니, 鍾會가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군량을 수송하는 길도 험하고 멀어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려 하였는데, 鄧艾가 上言하기를 “漢나라 군대가 이미 꺾였으니, 마땅히 이때를 틈타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 陰平에서 출발하여 샛길을 따라 漢나라 德陽亭을 지나 涪縣으로 달려가서 劍閣 서쪽으로 100리를 진출하면 成都와의 거리가 300여 리입니다. 奇兵이 그 중심부로 쳐들어가서 예상치 못한 데로 나오면 劍閣의 수비 군대가 반드시 진로를 바꾸어 涪縣으로 달려갈 것이니, 이렇게 되면 鍾會의 군대는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전진【軌는 수레바퀴 자국이니, 方軌는 두 대의 수레가 나란히 전진함을 말한 것이다. ≪爾雅≫에 이르기를 “方舟는 나란히 가는 두 척의 배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여기의 方軌도 역시 둘인 것이다.】할 수 있을 것이고, 劍閣의 군대가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涪縣에서 대응하는 병력이 적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陰平에서 출발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700여 리를 행군하여 산을 뚫어 길을 내고 橋閣(棧道, 閣道)을 만드니, 산이 높고 골짝이 깊어서 지극히 어렵고 험하였으며, 또 운반해 놓은 군량이 떨어져 가서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瀕은 가장자리이다. 瀕은 濱의 古字이니 附近이다.】鄧艾가 털방석으로 몸을 감싸고 굴러 내려가니, 장병들이 모두 나무를 부여잡고 벼랑을 따라 물고기 두름처럼 전진하였다.【魚貫而進은 물고기 두름처럼 연이어서 나아감을 이른다.】 선발부대가 올라가 江油【江油는 본래 廣漢郡 剛氐道의 땅이다. 三國時代에 魏나라가 이 땅을 점령하여 江油郡을 설치하였다. 西魏가 龍州를 세우니, 지금 龍州에 江油縣이 있다.】에 이르니, 蜀의 수비 장수인 馬邈이 항복하였다. 諸葛瞻이 諸軍을 독려하여 鄧艾를 막았는데, 鄧艾가 크게 격파하고諸葛瞻을 목 베었다.

○ 漢人이 不意魏兵卒至하야 不爲城守調度【賦調用度也라】러니 聞已入平土하고 百姓이 擾擾하야 皆迸山野【迸은 散走也라】하니 不可禁制라 譙周(詣)[請]降이어늘 乃遣使奉璽綬하고 詣降하니 北地王【諶은 後主子也라】이 怒曰 若理窮力屈하야 禍敗將及인댄 便當父子君臣이 背城一戰하야 同死社稷하야 以見先帝可也어늘 奈何降乎잇가 帝不聽한대 이 哭於昭烈之廟하고 先殺妻子而後에 自殺하다 至成都北하니 帝率太子諸王及群臣하고 面縛【縛手於背하고 而面向前也라】輿櫬【輿는 共擧也요 櫬은 空棺也니 棺輿從之者는 皆示其君將受死也라】하고 詣軍門降하다 姜維得帝勅命하고 乃與廖化, 張翼, 董厥等으로 同詣會降하다

[新增]尹氏姜維身都【都는 居也라】將相하야 喪師蹙境하고 黃皓寵冠一時하야 殄民誤國이라가 漢祚顚覆에 偸生苟免하고 至於死節之臣하야는 乃在傅僉【守關口하야 格鬪而死하니라】, 諸葛瞻父子【瞻父亮이라】北地王而已라 是時에 鄧艾孤軍深入하니 使漢之君臣이 能竭力死守면 未必遽爾滅亡이어늘 帝庸才라 旣不知國君死社稷之義하고 譙周諸人은 又輕以其國予賊하니 其視同死社稷之言과 與夫哭於昭烈之廟而死之節하면 曾犬彘之不若이라 嗚呼라 雖已死나 其言이 至今凜凜猶有生氣라 之有子如此로되 而不能聽用其言하니 可謂上愧乃父하고 下愧乃子矣니 噫라

[史略 史評]愚按 天意不回하야 漢祚傾覆하니 當是之時하야 降賊貪生을 如姜維者 非一人이어늘 而諸葛瞻父子 獨能冒犯鋒刃하고 視死如歸하니 雖其資質有過人者나 而亦家法之有自也니 忠武公은 可謂有子有孫矣로다 嗚呼라 尙雖死나 其忠烈之風이 至今凜凜猶有生氣하니 彼爲臣不死忠而偸生一時者는 視瞻尙에 寧無愧乎아

[史略 史評]史斷曰 後主才雖中下나 然建興之初에 猶能委任賢相하고 抗衡强國하야 今年에 征四郡하고 明年에 屯漢中하고 明年에 出散關하고 又明年에 攻武都陰平이라 是以로 國富兵强하야 征伐四克이러니 迨殞星告變에 賢相云亡이라 於是에 姜維産禍하고 宦寺專權하니 雖無緣崖之寇라도 其能久有國哉아 緜竹之戰에 臣死於君하고 成都之降에 子死於父하야 勢窮力蹙에 束手就縛而漢亡矣니 可悲也夫인저

○ 漢나라 사람들은 魏나라 군대가 갑자기 이를 것을 생각지 못하여 城을 지키고 調度【調度는 用度에 맞게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하지 않았는데, 鄧艾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백성들이 소요하여 모두 山野로 달아나니,【迸은 흩어져 달아나는 것이다.】 금지하고 제재할 수가 없었다. 譙周가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청하자, 마침내 사자를 보내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鄧艾에게 나아가 항복하게 하였다. 北地王劉諶【劉諶은 後主 劉禪의 아들이다.】이 노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치가 궁하고 힘이 다해서 禍敗가 장차 미치게 되었다면 곧 父子와 君臣이 城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서 함께 社稷을 위해 죽어 지하에서 先帝를 뵙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항복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황제가 듣지 않자, 劉諶昭烈皇帝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妻子를 먼저 죽인 뒤에 자살하였다. 鄧艾가 成都의 북쪽에 이르니, 황제가 태자와 諸王 및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만 쳐든 채【面縛은 두 손은 등 뒤로 돌려 묶고 얼굴은 앞을 향하는 것이다.】 관을 함께 들고【輿는 함께 드는 것이고 櫬은 빈 관이니, 빈 관을 들고 따르는 것은 그 군주가 장차 죽임을 당할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軍門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姜維가 황제의 칙명을 얻고 廖化張翼董厥 등과 함께 鍾會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姜維는 장수와 정승을 도맡았으면서【都는 거함이다.】 군대를 잃고 국경을 위축시켰고, 黃皓는 한때 은총이 으뜸이었으면서 백성들을 해치고 나라를 그르치다가 漢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욕되이 살기를 꾀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하였으며, 忠節에 죽은 신하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傅僉【傅僉은 陽安關 어귀를 수비하여 육박전을 벌이다가 죽었다.】諸葛瞻 父子【諸葛瞻의 아버지는 諸葛亮이다.】北地王劉諶이 있을 뿐이었다. 이때에 鄧艾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이 침입하였으니, 만일 蜀漢의 군주와 신하가 힘을 다하여 결사적으로 지켰다면 반드시 대번에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後主劉禪은 용렬한 재주라서 이미 國君이 社稷을 위해 죽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고, 譙周 등 여러 사람들은 또 자기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을 가볍게 여겼으니, 劉諶의 社稷을 위해 함께 죽자는 말과 昭烈帝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죽은 절개에 비하면 일찍이 개돼지만도 못한 것이다. 아! 劉諶은 비록 이미 죽었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도 늠름하여 오히려 생기가 있다. 劉禪은 이처럼 훌륭한 자식을 두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자기 아버지에게 부끄럽고 아래로는 자기 자식에게 부끄럽다고 이를 만하다. 슬프다!”

[史略 史評]내(劉剡)가 살펴보건대 하늘의 뜻이 돌아오지 않아서 漢나라의 國運이 기우니, 이때를 당하여 적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탐하기를 姜維와 같이 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諸葛瞻 父子는 홀로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겼으니, 비록 그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또한 家法이 由來한 바가 있는 것이다. 忠武公(諸葛亮)은 훌륭한 아들이 있고 훌륭한 손자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아! 諸葛瞻諸葛尙은 비록 죽었으나 그 忠烈의 流風이 지금까지도 凜凜하여 아직도 생기가 있으니, 저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위해 죽지 않고 구차하게 한때의 목숨을 구걸하여 살기를 꾀한 자들은 諸葛瞻諸葛尙을 볼 때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後主는 재주가 비록 中에 下였으나 建興 초기에는 오히려 어진 정승에게 國政을 맡겨 강한 적에게 대항할 수 있어서, 금년에 네 郡을 정벌하고 明年에 漢中에 주둔하고 明年에 散關으로 출동하고 또 明年에 武都와 陰平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국가가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여 정벌함에 사방으로 이겼는데, 별이 떨어져 변고를 알리자 어진 정승이 사망하였다. 이에 姜維가 禍亂을 만들어내고 宦官들이 권력을 전횡하니, 비록 벼랑을 타고 올라오는 적이 없다 한들 어찌 오랫동안 나라를 보유할 수 있었겠는가. 緜竹의 전투에서는 신하가 군주를 위하여 죽고 成都의 항복에는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죽어서, 형세가 곤궁하고 힘이 위축되어 할 수 없이 손을 뒤로 묶고 나아가 항복하자 漢나라가 망하였으니, 슬퍼할 만하다.”

右漢은 昭烈後皇帝히 共四十三年이라

歷年圖曰 昭烈은 以敗亡之餘로 羈旅漢南이로되 而能屈體英傑하고 要結同志하야 摧沮勍敵하야 因敗爲功하고 顚沛之際에 不忘德義하니 美矣라 劉璋昧弱이어늘 侮而兼之【書에 兼弱攻昧하며 取亂侮亡이라하니라】하야 遂奄有巴蜀하야 君臨一隅라 安樂公【魏封漢帝禪하야 爲安樂公이라】은 材雖下中이나 然委任賢相하야 抗衡中國이러니 及用事하야는 而面縛爲虜하니 宜矣라 ○ 漢은 二十六帝에 合四百六十九年이라

이상 漢나라는 昭烈帝로부터 後皇帝劉禪까지 모두 43년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昭烈은 패망한 뒤에 漢水 남쪽에 나그네로 의탁하고 있었지만 영웅들에게 몸을 굽히고 同志들과 결탁해서 강한 적을 꺾고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었으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위급한 때에도 덕과 의리를 잊지 않았으니, 훌륭하다. 劉璋이 어둡고 약하였는데 그를 해치고 겸병하여【≪書經≫ 〈仲虺之誥〉에 “약한 자를 겸병하고 어두운 자를 공격하며, 어지러운 자를 취하고 망하는 자를 상하게 한다.” 하였다.】 마침내 巴蜀을 소유해서 한 지방에 군림하였다. 安樂公劉禪【魏나라가 漢나라 황제 劉禪을 봉하여 安樂公으로 삼았다.】은 재주가 비록 下에 中이었으나 어진 정승(諸葛亮)에게 위임하여 中國과 겨루었는데, 姜維黃皓가 用事함에 미쳐서는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만 내놓고서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으니, 당연하다.”

○ 漢나라는 26帝에 합하여 469년이다.

魏之攻蜀也에 吳人이 或謂襄陽張悌司馬氏得政以來로 大難이 屢作【邵陵厲公芳嘉平元年에 王淩叛하고 高貴鄕公髦正元元年에 毌丘儉叛하고 甘露二年에 諸葛誕叛하니라】하야 百姓이 未服이어늘 今又勞力遠征하니 敗於不暇라 何以能克이리오 曰 不然하다 曹操雖功蓋中夏나 民畏其威而不懷其德也요 , 承之하야 刑繁役重이라 司馬懿父子 除其煩苛而布其平惠하고 爲之謀主而救其疾苦하니 淮南이 三叛【三叛은 卽王淩, 毌丘儉, 諸葛誕擧兵也라】이나 而腹心不擾하고 曹髦之死에 四方不動이라 任賢使能하야 各盡其心하니 其根本固矣에 奸計立矣라 今蜀은 閹宦專朝【閹宦은 黃皓也라】에 國無政令하니 因危而伐이면 殆無不克이라 噫라 彼之得志는 我之憂也라한대 吳人이 笑其言이러니 至是乃服하니라

魏나라가 蜀을 공격할 때에 吳나라 사람이 혹 襄陽張悌에게 이르기를 “司馬氏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큰 난리가 여러 번 일어나서【邵陵厲公 曹芳의 嘉平 元年(249)에 王淩이 배반하고, 高貴鄕公 曹髦의 正元 元年(254)에 毌丘儉이 배반하고, 甘露 2년(257)에 諸葛誕이 배반하였다.】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데, 이제 또다시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여 멀리 정벌하니 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승리하겠는가?” 하니, 張悌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曹操는 비록 功이 中夏를 뒤덮었으나 백성들이 위엄만 두려워하고 德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으며, 曹丕曹叡가 그 뒤를 이어서 형벌이 번거롭고 부역이 무거웠다. 그러나 司馬懿 父子는 번거롭고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고 공평함과 은혜를 베풀며, 謀主가 되어서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淮南 지방이 세 번 배반하였으나【세 번 배반하였다는 것은 王淩, 毌丘儉, 諸葛誕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腹心이 흔들리지 않았고, 曹髦가 죽음에 사방이 동요하지 않았다.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려서 각각 그 마음을 다하니, 근본이 견고해지자 간사한 계책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제 蜀은 환관【환관은 黃皓이다.】이 조정을 독점하여 나라에 政令이 없으니 위태로운 틈을 타서 정벌하면 아마도 이기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아! 저(司馬懿)가 뜻을 얻음이 바로 우리의 걱정이다.” 하였다. 吳나라 사람들이 그의 말을 비웃었었는데, 蜀이 망한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승복하였다.

鄧艾以書言於晉公曰 兵有先聲而後實者하니 今因平蜀之勢하야 以乘吳면 吳人이 震恐하리니 席卷之時也라 然이나 大擧之後에 將士疲勞하야 不可便用이니 且徐緩之하야 留隴右兵二萬人과 蜀兵二萬人하야 煮鹽興冶하야 爲軍農要用하고 竝作舟船하야 預爲順流之事니 然後發使하야 告以利害면 吳必歸化하리니 可不征而定也리이다 今宜厚劉禪하야 以致孫休【孫休는 吳主姓名이라】니 封扶風王하야 以顯歸命之寵하노이다 昭使監軍衛瓘으로 喩호되 事當須報요 不宜輒行이니라 重言【重은 猶難也라】曰 春秋之義에 大夫出疆하야 有可以安社稷, 利國家면 專之可也라하니 今吳未賓하야 勢與蜀連하니 不可拘常以失事機라한대 鍾會內有異志하야 乃與으로 密白有反狀하다

鄧艾가 편지로 晉公司馬昭에게 말하기를 “군대는 먼저 소문을 퍼뜨리고 뒤에 실제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蜀을 평정한 형세를 인하여 吳나라를 정벌한다면 吳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니, 席卷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크게 군대를 일으킨 뒤여서 장병들이 피로하여 곧바로 쓸 수가 없습니다. 우선 서서히 늦춰 주어서 隴右의 병력 2만 명과 蜀 지방의 병력 2만 명을 남겨 두어 소금을 굽고 쇠를 주조하는 일을 일으켜 군사와 농사의 요긴한 비용으로 삼고, 아울러 배를 만들어서 강을 따라 내려가 吳나라를 공격할 일을 미리 준비한 다음, 使者를 보내어 利害로써 타이르면 吳나라가 반드시 歸化할 것이니,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劉禪을 후대해서 孫休孫休는 吳主의 姓名이다.】를 오게 해야 할 것이니, 劉禪을 봉하여 扶風王으로 삼아서 명령에 귀순한 은총을 드러내소서.” 하였다.

司馬昭가 監軍衛瓘을 시켜 鄧艾를 타이르기를 “이 일은 반드시 회답을 기다려야 할 것이요, 곧바로 행해서는 안 된다.” 하니, 鄧艾가 신중히【重은 難(신중함)과 같다.】 말하기를 “《春秋》의 의리에 ‘大夫가 국경을 나가서 社稷을 평안히 하고 國家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하였습니다. 지금 吳나라가 복종하지 아니하여 형세가 蜀과 연결되니, 常規에 구애되어 事機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鍾會가 마음속에 딴 뜻이 있어서 마침내 鄧艾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있다고 衛瓘과 함께 은밀히 보고하였다.

[甲申]魏咸熙元年

[甲申]〈魏咸熙元年이요 吳主孫皓元興元年이니 凡二國이라〉

正月에 魏詔以檻車【車上에 着板四周하고 載囚其中이라】로 徵赴京師하다 所憚은 惟러니 艾父子【父子는 惠及忠也라】旣禽에 獨統大衆하니 威震西土라 遂決意謀反하다 丁丑에 矯太后遺詔【矯는 托也라】하야 使起兵하야 廢司馬昭하다 姜維欲使로 盡殺北來諸將하고 已因殺會하고 盡坑魏兵하야 復立故漢帝러니 衆兵이 作亂하야 格斬姜維하고 爭前殺하니 鄧艾本營將士 追出於檻車하야 迎還이어늘 衛瓘이 遣兵襲하야 斬父子하다

[新增]尹氏曰 夫恃强凌弱하야 奪人土地하야 使不得有其臣民하고 毁人宗廟하야 使不得奉其祭祀는 非至不仁者면 莫之忍爲라 劉禪庸愚하야 不能死國하고 貪生苟免하니 固可深責이어니와 鍾鄧은 臣事弑逆之人하야 呑滅蜀漢하야 以成晉簒하니 有功於 大矣나 其如漢祀何哉오 思昔昭烈君臣이 間關隴蜀【間關은 猶艱難이라】하야 仗義討賊이러니 不幸天不祚漢하야 逆賊逋誅라 其子承襲一方하야 少延赤帝子之祀어늘 이 設謀動衆하야 戕民鋒鏑之下하고 自謂不世之功이러니 未及受賞에 皆赤其族하니 然後에 知天道昭昭하야 特假手誅夷하야 以償滅漢之罪爾라 語曰 興滅國하고 繼絶世에 天下之民이 歸心焉이라하니 後之謀欲滅人家國者는 可以觀矣니라

갑신(264) - 魏나라 咸熙 元年이고, 吳主孫皓元興 元年이니, 모두 두 나라이다. -

정월에 魏나라가 명령을 내려 檻車【檻車는 수레 위에 판자를 붙여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 죄수를 태운다.】鄧艾를 불러 京師로 오게 하였다. 鍾會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鄧艾뿐이었는데, 鄧艾 父子【鄧艾 父子는 鄧艾와 그의 아들 鄧惠와 鄧忠이다.】가 사로잡힌 뒤에 鍾會가 홀로 大軍을 통솔하여 위엄이 서쪽 지방에 진동하니, 마침내 모반하기로 결심하였다. 정축일(16일)에 太后의 遺詔를 사칭【矯는 칭탁함이다.】하여 ‘鍾會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司馬昭를 폐하게 한다.’ 하였다. 姜維鍾會로 하여금 북쪽에서 온 여러 장수를 다 죽이게 한 다음, 스스로 이 기회를 틈타 鍾會를 죽이고 魏나라 군사들을 다 묻어 죽이고서 다시 옛 漢나라 황제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鍾會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켜姜維를 쳐죽이고 앞 다투어 鍾會를 죽이니, 鄧艾 本營의 장병들이 쫓아가 檻車에서 鄧艾를 꺼내어 맞이하여돌아왔다. 衛瓘이 군대를 보내어 鄧艾를 습격해서鄧艾 父子를 목 베었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아서 신하와 백성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남의 宗廟를 헐어서 제사를 받들지 못하게 함은, 지극히 不仁한 자가 아니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다. 劉禪은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하고 살기를 꾀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하였으니, 진실로 깊이 책망할 만하다. 그러나 鍾會鄧艾는 弑逆한 사람을 신하가 되어 섬겨서 蜀漢을 倂呑하여 멸망시켜 晉나라의 찬탈을 도와 이루었으니, 司馬昭에게 功을 세움이 크지만 漢나라 제사를 어찌한단 말인고. 생각건대 옛날 昭烈帝는 군주와 신하가 隴蜀에서 間關(어려움)【間關은 艱難과 같다.】을 겪으면서 大義를 따라 역적을 토벌하였는데, 불행히도 하늘이 漢나라를 도와주지 않아 역적이 죽음을 면하였다. 그 아들劉禪이 한쪽 지방에서 왕위를 물려받아 赤帝子의 제사를 조금 이어 갔는데, 鍾會鄧艾가 꾀를 내고 병력을 동원하여 칼날 아래에서 백성들을 해치고 스스로 좀처럼 보기 드문 훌륭한 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미처 상을 받기도 전에 一族이 다 죽었으니, 그런 뒤에야 天道가 밝아서 다만 딴 사람의 손을 빌려 그들을 죽여 蜀漢을 멸망시킨 죄를 갚았음을 알 수 있다. 《論語》에 이르기를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 주자, 천하의 民心이 돌아왔다.’ 하였으니, 후세에 남의 집안과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魏封故漢帝하야 爲安樂公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西漢은 自高祖而下로 有이요 東漢은 自光武以下로 有, 이요 其餘는 無稱焉이라 河汾王通이 以七制로 斷之하니 善矣라 反覆兩漢之世컨대 大抵仁義公恕하고 役簡刑淸하야 如七制之盛者는 兩漢之所以興也요 母后擅權하고 戚宦用事하야 如七制以下者는 兩漢之所以亡也라 迨曹氏簒漢而爲魏에 昭烈이 以帝裔로 卽位于蜀하고 孫權이 亦自王於吳하야 而天下遂分於三矣라 雖以昭烈孔明으로 戮力興復이나 而死灰難燃하야 不能復振하니 譬於人家컨대 家道陵夷하고 生業已盡하야 豪奴悍僕이 或潛據於內하고 或竊處於外하고 而其家之故子遺孫이 伶仃漂泊하야 其氣奄奄殆盡이어늘 而方區區在外하야 收拾寸土하야 以爲興復計하니 亦已難矣로다 由是論之컨대 民心思漢엔 以王郞假之而有餘하고 民心去漢엔 以孔明留之而不可하니 吁可嘆哉인저

魏나라가 옛 漢나라 황제인 劉禪을 봉하여安樂公으로 삼았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西漢은 高祖 이하로 文帝武帝宣帝가 있었고, 東漢은 光武帝 이하로 明帝章帝가 있었으며, 그 나머지는 칭할 만한 자가 없다. 河汾의 王通이 七制로 결단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兩漢의 세대를 반복해 보건대 대체로 仁義와 公恕를 행하며 부역이 간략하고 형벌이 맑아져서 七制의 전성기와 같았던 것은 兩漢이 흥성한 이유이고, 母后가 권력을 독단하고 외척과 환관들이 用事하여 七制 이후와 같았던 것은 兩漢이 멸망한 이유이다. 曹氏가 漢나라를 찬탈하여 魏나라가 되자 昭烈帝는 황제의 후손으로 蜀에서 즉위하였고, 孫權 또한 吳나라에서 스스로 왕 노릇하여 천하가 마침내 셋으로 나뉘었다. 비록 昭烈帝諸葛孔明으로서 힘을 다하여 興復하였으나 꺼진 재를 다시 타오르게 하기 어려워 다시 떨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집안에 비유하면 家道가 침체되고 生業이 이미 다하여 호방하고 사나운 奴僕들이 혹은 안에서 몰래 점거하고 혹은 밖에 몰래 숨어 있고, 그 집안의 옛 주인의 아들과 남은 손자들이 외롭게 漂泊하여 간신히 숨만 붙어 있어 거의 다 망하게 되었는데, 구구하게 밖에서 한 치 되는 땅을 수습하여 興復할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으니, 또한 너무나도 어렵다. 이로 말미암아 논해 보건대 민심이 漢나라(西漢)를 그리워할 때에는 王郞劉氏라고 사칭하기만 해도 충분했고, 민심이 漢나라(蜀漢)를 떠난 뒤에는 孔明이 부지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으니, 아! 탄식할 만하다.”

吳主殂하니 卽皇帝位【皓는 權之孫이요 和之子也라】하다

吳主孫休가 죽으니孫皓孫皓孫權의 손자이고 孫和의 아들이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晉王이 立爲世子하다

晉王司馬炎을 세워世子로 삼았다.

[乙酉]魏咸熙二年

[乙酉]〈魏咸熙二年이요 晉世祖司馬炎泰始元年이요 吳甘露元年이라 ○ 是歲에 魏亡晉代하니 凡二國이라〉

八月魏晉王卒하고 太子이 嗣爲相國, 晉王하다

을유(265) - 魏나라 咸熙 2년이고, 晉나라 世祖司馬炎의 泰始 元年이고, 吳나라 甘露 元年이다. ○ 이해에 魏나라가 망하고 晉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8월에 魏나라 晉王司馬昭가 죽고, 太子司馬炎이 뒤를 이어 相國과 晉王이 되었다.

○ 冬에 吳主徙都武昌하다

○ 겨울에 吳主가 도읍을 武昌으로 옮겼다.

○ 十二月에 魏主禪位于晉王하니 王이 卽皇帝位하고 奉魏主陳留王하다

○ 12월에 魏主晉王에게 禪位하니, 晉王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魏主를 받들어 陳留王으로 삼았다.

右魏는 五主에 共四十六年이라

歷年圖曰 漢室不綱에 群雄糜擾하야 乘輿播蕩하야 莫之收省이어늘 太祖獨奉迎而相之하야 披荊棘【喩難也라】以立朝廷하니 則其名義固足以結民心矣요 加之英威明略이 過絶於人하야 驅策賢豪하야 糞除【糞은 掃除也라】奸宄라 於是에 張綉屈膝【張綉는 祖厲人이라 麴勝이 殺祖厲長하니 綉爲縣吏라가 間伺殺勝이라 郡內義之하니 遂招合少年하야 爲邑中豪傑이라 屯宛하야 與劉表合이러니 魏太祖南征하니 綉擧衆降하니라】하고 呂布【見上二十二卷丙子年이라】授首하고 公路【袁術字라】野死하고 本初【袁紹字라】覆亡하고 劉琮獻地하고 , 【韓遂, 馬超니 漢獻帝辛卯年에 魏祖擊破하니라 後에 超奔備하고 遂爲下所殺이라】遁逃하야 中原肅淸하고 戎狄請服하니 然則魏取天下於群盜요 非取之於漢室也라 惜其狹中多詐하야 猜忌賢能하니 此海內所以不盡服也라 及文帝【曹丕라】受禪하고 明帝【曹叡라】繼業하야 內綏外禦하야 不廢前功이러니 而明帝於彌留【病彌甚而留連也 】之際에 爲奸臣【司馬懿라】牽率이라 嗣子幼弱하고 寄託非人하며 曹爽驕戇하고 黨(友)[與]輕佻【佻는 薄也라】하야 禍自內興하야 遂衰微不振하야 以至易姓하니 悲夫라

[史略 史評]愚按 有魏之興이 實自始라 曹丕 因而簒漢을 如拾芥然하고 明帝는 性雖明敏이나 而好土功하니 其衰微之兆 已見矣요 邵陵孤幼에 寄托非人하야 陵遲至陳留하야 而晉人取之亦不難은 何歟오 曹操以亂世之奸雄으로 乘漢室之衰弱하야 欺人孤兒寡婦하야 狐媚以取天下하니 原情定罪하면 直巨盜耳라 以此創業하야 亦以此亡하니 豈無天道哉아 傳曰 出乎爾者 反乎爾者라하니 爲人臣而懷姦幸釁하야 竊人宗社者는 尙鑒于玆어다

이상 魏나라는 다섯 군주에 모두 46년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漢나라 皇室이 기강을 잃자 여러 영웅들이 어지럽게 소요해서 乘輿(황제)가 파천하여 거두고 살피는 이가 없었는데, 太祖(曹操)가 홀로 받들어 황제를 맞이하여 도와서 苦難【荊棘은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다.】을 헤치고 朝廷을 세우니, 그 명분과 의리가 진실로 民心을 결속시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英明한 위엄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서, 현자와 호걸들을 몰고 부려서 간사한 자들을 제거【糞은 소제하는 것이다.】하였다. 이에 張綉가 무릎을 꿇고【張綉는 祖厲 사람이다. 麴勝이 祖厲의 長을 죽이자, 張綉가 이때 縣의 아전으로 있다가 틈을 엿보아 麴勝을 죽였다. 郡 안의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기니, 張綉가 마침내 少年들을 불러 모아 邑 안의 호걸이라 하였다. 〈무리를 이끌고〉 宛 땅에 주둔해서 劉表와 연합하였는데, 魏 太祖(曹操)가 남쪽을 정벌하니 張綉가 무리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呂布【呂布는 앞의 22권 丙子年條(196)에 보인다.】가 머리를 내주었으며, 公路(袁術)【公路는 袁術의 字이다.】가 들에서 죽고 本初(袁紹)【本初는 袁紹의 字이다.】가 패망하였으며, 劉琮이 땅을 바치고 韓遂와 馬超【韓‧馬는 韓遂와 馬超이니, 漢나라 獻帝 신묘년(211)에 魏 太祖가 격파하였다. 뒤에 馬超는 劉備에게 망명하였고, 韓遂는 아랫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가 도망하여 中原이 깨끗해지고 오랑캐들이 복종하기를 청하였으니, 그렇다면 魏나라는 天下를 여러 도둑들에게서 취한 것이요, 漢나라 황실에서 취한 것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마음이 좁고 속임수가 많아서 덕이 있는 자와 유능한 자를 시기하였으니, 이것이 온 천하가 다 복종하지는 않았던 이유이다. 文帝(曹丕)【文帝는 曹丕이다.】가 禪位를 받고 明帝(曹叡)【明帝는 曹叡이다.】가 기업을 잇게 되자, 안으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밖으로는 적을 막아서 예전의 공을 실추시키지 않았는데, 明帝가 병이 오래 낫지 않을【彌留는 병이 갈수록 심해지고 낫지 않는 것이다.】 때에 간신(司馬懿)【奸臣은 司馬懿이다.】에게 제재를 당하였다. 嗣子(曹芳)는 어리고 국정을 나쁜 사람(司馬懿)에게 맡겼으며, 曹爽은 교만하고 어리석으며 黨與는 경솔【佻는 경박함이다.】해서, 禍가 안으로부터 일어나 마침내 쇠미하고 떨치지 못해서 왕조가 바뀌는 데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史略 史評]내(劉剡)가 살펴보건대 魏나라가 일어남은 실로 曹操로부터 시작되었다. 曹丕는 인하여 漢나라를 찬탈하는 것을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하였고, 明帝는 비록 성품이 명민하였으나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쇠미할 조짐이 이미 나타났으며, 邵陵厲公(曹芳)은 어린 고아로 국정을 나쁜 사람(司馬懿)에게 맡겨서 침체하여 陳留王(曹奐)에 이르러서는 晉나라 사람이 또한 쉽게 차지하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曹操가 亂世의 奸雄으로 漢나라 황실이 쇠약함을 틈타서 남의 고아와 과부들을 속여 여우처럼 간사하게 천하를 취하였으니, 그 실정을 따져 죄를 정한다면 단지 큰 도둑일 뿐이다. 이로써 創業하여 또한 이로써 망하였으니, 어찌 天道가 없겠는가. 옛 책에 이르기를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신하가 되어 간사한 마음을 품고 나라에 禍가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남의 종묘사직을 도둑질하는 자들은 부디 이것을 거울로 삼을지어다.

時에 晉主承魏氏刻薄奢侈之後하야 欲矯以仁儉【矯는 以{謂}矯正其曲也라】이러니 有司言御牛靑絲紖【王氏曰 紖은 著牛鼻繩이니 所以牽牛者니 以靑絲爲之라[頭註]記祭統에 迎牲하여 君執紖〈注에 紖은 所以牽牲也〉라하니라 】斷이라하야늘 詔以靑麻代之하다

이때 晉主가 魏나라의 각박하고 사치한 정사의 뒤를 이어서 인자함과 검소함으로 바로잡고자【矯는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하였는데, 有司가 황제의 제사에 사용하는 소인 御牛의 청색 명주실로 만든 코뚜레 끈【[釋義]王氏가 말하기를 “紖은 소의 코에 꿰는 끈이니, 소를 끄는 것인 바, 청색 명주실로 만든다.” 하였다.[頭註]≪禮記≫ 〈祭統〉의 ‘犧牲을 맞이하여 군주가 犧牲의 고삐를 잡는다.’는 經文의 注에 “紖은 犧牲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하였다.】이 끊어졌다고 말하자 청색 삼끈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 晉이 初置諫官하고 以傅玄爲之하니 이 以魏末士風頹敝라하야 上疏曰 臣은 聞先王之御天下에 敎化隆於上하고 淸議行於下러니 近者에 魏武好法術하야 而天下貴刑名하고 魏文이 慕通達하야 而天下賤守節하니 其後로 綱維不攝【攝은 整也라】하고 放誕盈朝【放誕은 謂何晏, 阮籍輩也라】하야 遂使天下로 無復淸議니이다 陛下龍興受禪하사 弘, 之化하시되 惟未擧淸遠有禮之臣하야 以敦風節하시고 未退虛鄙之士하야 以懲不恪하시니 臣이 是以로 猶敢有言하노이다 晉主嘉納其言이나 然亦不能革이러라

○ 晉나라가 처음에 諫官을 두고 傅玄을 諫官으로 삼으니, 傅玄이 魏나라 말기에 선비들의 기풍이 무너졌다 하여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先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敎化가 위에 높고 깨끗한 의논이 아래에 행해졌는데, 근자에는 魏나라 武帝가 法術을 좋아하여 천하 사람들이 刑名을 귀하게 여기고 魏나라 文帝가 通達함을 사모하여 천하 사람들이 절개를 지키는 것을 천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綱維(紀綱)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攝은 가지런함이다.】 放誕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放誕은 何晏과 阮籍 같은 무리를 이른다.】 마침내 천하로 하여금 다시는 깨끗한 의논이 없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王業을 일으켜 禪讓을 받으셔서 의 교화를 넓히셨으나 오직 식견이 깨끗하고 원대하며 禮가 있는 신하를 천거해서 風節을 돈독히 하지 못하시고 허황하고 비루한 선비를 물리쳐서 삼가지 않는 자를 징계하지 못하시니, 신이 이 때문에 오히려 감히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晉主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으나 또한 개혁하지 못하였다.

[丙戌]晉泰始二年

[丙戌]〈晉泰始二年이요 吳寶鼎元年이라〉

吳主居武昌하니 揚州之民이 泝流供給하야 甚苦之어늘 陸凱上疏曰 武昌은 土地危險瘠确【确은 磽确이니 石地라】하니 非王者之都요 且童謠云 寧飮建業水언정 不食武昌魚요 寧還建業死언정 不止武昌居라하니 以此觀之컨댄 足明民心與天意矣니이다 十二月에 吳主還都建業하다

병술(266) - 晉나라 泰始 2년이고, 吳나라 寶鼎 元年이다. -

吳主가 武昌에 거하니, 揚州의 백성들이 長江을 거슬러 올라가 공급하느라 매우 괴로워하였다. 陸凱가 상소하기를 “武昌은 토지가 위험하고 척박【确은 땅이 메마른 것이니, 자갈땅이다.】하니 王者가 도읍할 곳이 아니요, 또 童謠에 이르기를 ‘차라리 建業의 물을 마실지언정 武昌의 물고기를 먹지 않고, 차라리 建業에 돌아가 죽을지언정 武昌에 머물러 살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民心과 하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2월에 吳主가 다시 建業에 도읍하였다.

[戊子]晉泰始四年

[戊子]〈晉泰始四年이요 吳寶鼎三年이라〉

晉主詔河南尹杜預하야 爲黜陟之課한대 預奏호되 古者黜陟이 擬議於心하고 不泥於法【泥는 滯陷不通이라】이러니 末世에 不能紀遠而專求微密하야 疑心而信耳目하고 疑耳目而信簡書하니 簡書愈繁하고 官方【方은 術也니 言爲官之方術也라】愈僞라 魏氏考課는 卽京房之遺意【其意有京房之遺風也라 漢元帝時에 京房이 奏考功課吏法하니라】니 其文이 可謂至密이나 然失於苛細하야 以違本體라 故로 歷代不能通也니이다 豈若申唐之舊制하야 取大捨小하고 去密就簡하야 俾之易從也리잇고 夫曲盡物理하야 神而明之는 存乎其人하니 去人而任法이면 則以文傷理라 莫若委任達官【顯官也니 居要官之長하야 其事得傳達於上이라】하야 各考所統하야 其有優劣【六優六劣이니 謂六優는 六載俱優요 六劣은 六載俱劣이라】徇情하고 不叶(協)【叶은 合也라】公論者어든 當委監司【謂御史, 司隷及諸州刺史也라】하야 隨而彈之【彈은 糾也라】니 若令上下로 公相容過면 此爲淸議大頹라 雖有考課之法이나 亦無益也니이다 事竟不行하다

무자(268) - 晉나라 泰始 4년이고, 吳나라 寶鼎 3년이다. -

晉主가 河南尹杜預에게 명하여 공적을 따져서 관리를 내치고 올리는 考課法을 만들게 하자, 杜預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내치고 올리는 것을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법에만 집착하지 않았는데,【泥는 막히고 빠져서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말세에는 원대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잘하고 치밀한 것만을 구해서 진심을 의심하여 귀와 눈을 믿고, 귀와 눈을 의심하여 簡書를 믿으니, 簡書가 더욱 많아질수록 관리들의 대응【方은 방법이니, 관리 노릇 하는 방법을 말한다.】도 더욱 교묘해졌습니다. 魏나라의 考課法은 바로 京房이 남긴 뜻이니【그 뜻에 京房의 遺風이 있는 것이다. 漢나라 元帝 때에 京房이 공적을 살펴 관리들을 고과하는 법인 考功課吏法을 아뢰었다.】 그 글이 지극히 치밀하다고 이를 수 있으나 너무 까다롭고 세세함에 잘못되어서 본체를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歷代에 시행되지 못한 것입니다. 어찌 의 옛 제도를 펴서, 큰 것을 취하고 작은 것을 버리며 치밀한 것을 제거하고 간략한 데로 나아가서 따르기 쉽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사물의 이치를 곡진히 다하여 神明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버리고 법에 맡기면 글로 이치를 상하게 됩니다. 達官【達官은 현달한 관원이니, 要職의 우두머리 자리에 거하여 일을 윗사람에게 전달할 수가 있다.】에게 임무를 맡겨 각각 통솔하는 사람들을 고찰해서 優劣【優劣은 六優와 六劣이니, 六優는 6년 동안 성적이 모두 優인 것이고, 六劣은 6년 동안 성적이 모두 劣인 것을 이른다.】을 매기는 것을 감정대로 하여 公論에 맞지 않는【叶은 합함이다.】 자가 있거든 監司【監司는 御史‧司隸 및 여러 州의 刺史를 이른다.】에게 맡겨 따라서 규탄【彈은 규탄하는 것이다.】하는 것만 못하니, 만약 上下로 하여금 공공연히 서로 허물을 용납해 주게 하면 이는 깨끗한 의논이 크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비록 考課하는 法이 있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일이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다.

[己丑]晉泰始五年

[己丑]〈晉泰始五年이요 吳建衡元年이라〉

晉主有滅吳之志하야 以尙書左僕射羊祜로 都督荊州諸軍事하야 鎭襄陽이러니 綏懷遠近하야 甚得江, 漢之心이라 與吳人으로 開布大信하야 降者欲去면 皆聽之하고 減戍邏【戍는 守邊也요 邏는 遊兵也라】之卒하야 以墾田八百餘頃하니 其始至也에 軍無百日之糧이러니 及其季年에 乃有十年之積하니라 在軍에 常輕裘緩帶하고 身不被甲하고 鈴, 閤之下【都督閤內에 置鈴架하야 以警防不虞하니라 [通鑑要解]鈴閤은 鈴下卒과 閤下威儀也라 鈴下者는 有使令則掣鈴以呼之일새 因以爲名이요 閤下威儀는 掌出入贊導及納謁受事也라】에 侍衛不過十數人이러라

기축(269) - 晉나라 泰始 5년이고, 吳나라 建衡 元年이다. -

晉主가 吳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뜻이 있어서 尙書左僕射羊祜로 하여금 荊州의 여러 軍事를 都督하여 襄陽을 진무하게 하였는데, 羊祜가 遠近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품어 주어 揚子江과 漢水 지역의 民心을 매우 얻었다. 吳나라 사람들과 큰 신의를 펴 보여 항복한 자가 떠나가고자 하면 모두 들어주고 수자리 사는 병사와 변경을 순라하는 병사【戍는 변방을 지키는 것이요, 邏는 遊兵(유격대)이다.】를 줄여서 田地 800여 頃을 개간하니, 그가 처음 부임해 왔을 때에는 군중에 100일 동안 먹을 군량이 없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10년의 저축이 있었다. 羊祜는 軍中에 있을 때에 항상 가벼운 갖옷을 입고 띠를 느슨히 매고 몸에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鈴下卒과 閤下威儀【[釋義]都督의 閤 안에 방울 다는 시렁을 설치하여 비상사태를 경계하고 방비하였다. [通鑑要解]鈴閤은 鈴下卒과 閤下威儀이다. 鈴下는 使令할 것이 있으면 방울을 들어 부르기 때문에 인하여 이로써 명칭을 삼은 것이요, 閤下威儀는 출입할 때의 贊導 및 納謁과 受事를 관장한다.】 이하의 시위병이 십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庚寅]晉泰始六年

[庚寅]〈晉泰始六年이요 吳建衡二年이라〉

四月에 吳以鎭軍大將軍陸抗으로 都督西陵, 夷道, 樂鄕, 公安諸軍事하다 抗以吳主政事多闕이라하야 上疏曰 臣은 聞德均則衆者勝寡하고 力侔則安者制危라하니 此는 六國所以幷於秦이요 西楚所以屈於漢也라 今敵之所據는 非關右之地, 鴻溝以西【資治에 非下有特字라】어늘 而國家外無連衡之援하고 內非西楚之彊이라 議者所恃는 徒以長江峻山이 限帶封域이어니와 此는 乃守國之末事요 非智者之所先也라 臣이 每念及此에 中夜撫枕하고 臨餐忘食하야 謹陳時宜十七條하야 以聞하노이다 吳主不納하다

경인(270) - 晉나라 泰始 6년이고, 吳나라 建衡 2년이다. -

4월에 吳나라가 鎭軍大將軍陸抗으로 西陵‧夷道‧樂鄕‧公安의 여러 軍事를 都督하게 하였다. 陸抗吳主의 정사가 결함이 많다 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德이 비슷하면 병력이 많은 자가 적은 자를 이기고, 힘이 대등하면 편안한 자가 위태로운 자를 제압한다.’ 하였으니, 이는 六國이 秦나라에게 겸병당하고 西楚가 漢나라에게 굴복당한 이유입니다. 지금 적이 점거하고 있는 지역은 단지 關右(關西) 지역과 鴻溝 以西만이 아닌데,【≪資治通鑑≫에는 ‘非’자 아래에 ‘特’자가 있다.】 우리 국가는 밖에는 連衡(동맹국)의 원조가 없고 안에는 西楚의 강성함이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믿는 것은 단지 長江과 험준한 산이 국경을 띠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나라를 지키는 지엽적인 일이요 지혜로운 자가 먼저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은 매번 이것을 생각하면 한밤중에도 베개를 어루만지며 잠 못 이루고 밥상을 대하고도 밥 먹는 것을 잊어서 時宜 17조항을 삼가 진술하여 아룁니다.” 하였으나 吳主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吳人刁玄【刁玄은 姓名이라】이 詐增讖文하야 云 黃旗紫蓋【時에 吳王不修德政而欲兼幷하야 使術士로 筮取天下한대 對曰 庚子年에 靑蓋當入洛陽이라하니 蓋指銜璧之事라 江表傳曰 이 使蜀이라가 得司馬徽論運命歷數事하고 因詐增其文以誑吳人이라】見於東南하니 終有天下者는 荊, 揚之君이라한대 吳主信之하야 大擧兵하야 出華里라가 行遇大雪하야 兵士寒凍殆死라 皆曰 若遇敵이면 便當倒戈【戈는 平頭戟이니 倒戈는 謂倒以戈(兵)[柄]授人하고 而反自攻其後也라 今喩人自攻其黨曰倒戈라하니 書武成에 前徒倒戈하야 攻于後以北라하니라 】라하야늘 吳主聞之하고 乃還하다

○ 吳나라 사람 刁玄【刁玄은 姓名이다.】이 讖言의 내용을 거짓으로 보태어 이르기를 “황색 깃발과 자주색 일산【당시에 吳王이 德政을 닦지 않고 천하를 兼幷하고자 하여 術士로 하여금 天下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 점을 치게 하였는데, 術士가 대답하기를 “庚子年(280)에 푸른 일산이 마땅히 洛陽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吳王이 銜璧하는 일을 가리킨 것이다. 〈江表傳〉에 이르기를 “刁玄이 蜀에 사신 갔다가 司馬徽가 運命과 歷數에 관해 논한 일을 얻고는 인하여 거짓으로 그 내용을 보태어 吳나라 사람을 속인 것이다.” 하였다.】이 동남 지방에 나타나니, 끝내 천하를 소유할 자는 荊州와 揚州 지방의 군주이다.” 하였는데, 吳主가 이 말을 믿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華里로 나갔다가 도중에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추위에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적을 만나면 곧 창을 거꾸로 잡겠다.【戈는 끝이 평평한 창이니, 倒戈는 거꾸로 창 자루를 딴 사람에게 주고 도리어 스스로 후미(자기편)를 공격함을 이른다. 지금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편을 공격하는 것을 비유하여 倒戈라고 하니, ≪書經≫ 〈武成〉에 “앞에 있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서 후미를 공격하여 패배했다.” 하였다.】” 하니, 吳主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辛卯]晉泰始七年

[辛卯]〈晉泰始七年이요 吳建衡三年이라〉

十一月에 晉安樂公劉禪이 卒하니 諡曰【謀慮不愆曰思라】라하다

신묘(271) - 晉나라 泰始 7년이고, 吳나라 建衡 3년이다. -

11월에 晉나라 安樂公劉禪이 죽으니, 시호를 【諡法에 “謀慮가 허물이 없는 것을 思라 한다.” 하였다.】라 하였다.

[壬辰]晉泰始八年

[壬辰]〈晉泰始八年吳鳳凰元年〉

王濬이 爲益州刺史하다 初에 이 爲羊祜參軍하니 深知之러라 時에 晉主羊祜로 陰謀伐吳할새 以爲伐吳인댄 宜藉上流之勢라하야 密表留하야 復爲益州刺史하야 使治水軍하고 大作戰艦【艦은 戰船也니 四方施板以禦矢하야 其狀如牢라】하다 時에 作船木柹【柹는 音肺니 韻會云 削木札樸也라】蔽江而下어늘 吳建平太守吾彦이 取流柹하야 以白吳主曰 晉必有攻吳之計하니 宜增建平兵하야 以塞其衝要니이다 吳主不從이어늘 이 乃爲鐵鎖하야 橫斷江路하다

임진(272) - 晉나라 泰始 8년이고, 吳나라 鳳凰 元年이다. -

晉나라 王濬이 益州刺史가 되었다. 처음에 王濬羊祜의 參軍이 되니, 羊祜가 그를 깊이 인정하였다. 이때 晉主羊祜와 함께 은밀히 吳나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羊祜가 말하기를 “吳나라를 정벌하려면 마땅히 上流의 형세를 이용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여 은밀히 表文을 올려 王濬을 잔류하게 하고 다시 益州刺史를 삼아 水軍을 다스리고 전함【艦은 戰船이니, 사방에 화살을 막도록 판자를 대어서 그 모양이 짐승을 가두는 우리와 같은 것이다.】을 크게 만들게 하였다. 이때 배를 만드느라 나무를 깎은 대팻밥【柹는 음이 폐이니, ≪韻會≫에 “나무를 깎은 대팻밥이다.” 하였다.】이 강물을 뒤덮고 떠 내려오자, 吳나라 建平太守吾彦이 강물에 떠 내려온 대팻밥을 취하여 吳主에게 아뢰기를 “晉나라가 반드시 吳나라를 공격하려는 계책이 있으니, 建平의 병력을 증가시켜 요충지를 막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吳主가 따르지 않자, 吾彦이 마침내 鐵鎖(쇠사슬)를 만들어 강의 물길을 가로로 차단하였다.

○ 八月에 吳主徵西陵督步闡하다 이 世在西陵【吳王權이 用步騭하야 督西陵이러니 騭卒하니 子協繼라 闡은 協弟也라】이라가 猝被徵하니 自懼有讒하야 據城降晉이어늘 晉이 以闡으로 爲都督西陵諸軍〈事〉하다 吳陸抗이 討之어늘 晉主羊祜하야 救之不克이라 이 遂拔西陵하고 誅하다 吳主旣克西陵하고 自謂得天助라하야 志益張大【張은 去聲이니 心自侈大也라】하야 不修德政하고 專爲兼幷之計러라

○ 8월에 吳主가 西陵의 督인 步闡을 불렀다. 步闡이 대대로 西陵에 있다가【吳王 孫權이 步騭을 등용하여 西陵의 督으로 삼았는데, 步騭이 죽자 아들 步協이 계승하였다. 步闡은 步協의 아우이다.】 갑자기 부름을 받자 스스로 참소함이 있었는가 두려워하여 城을 점거하고 晉나라에 항복하니, 晉나라가 步闡을 都督西陵諸軍事로 삼았다. 吳나라 陸抗步闡을 토벌하자, 晉主羊祜를 보내어 구원하였으나이기지 못하였다. 陸抗이 마침내 西陵을 함락하고步闡을 목 베었다. 吳主가 이미 西陵을 이기자 스스로 하늘의 도움을 얻었다 하여 야심이 더욱 커져서【張은 去聲이니, 야심이 스스로 커지는 것이다.】 德政을 닦지 않고 오로지 겸병할 계책을 세웠다.

○ 晉羊祜歸自江陵하야 務修德信하야 以懷吳人하야 每交兵에 刻日方戰하고 不爲掩襲之計하며 將帥有欲進譎計者어든 輒飮以醇酒하야 使不得言하니라 出軍行吳境할새 刈穀爲粮하고 皆計所侵하야 送絹償之하고 每會衆江沔游獵에 常止晉地하고 若禽獸先爲吳人所傷而爲晉兵所得者를 皆送還之하니 於是에 吳邊人이 皆悅服이러라 陸抗對境하야 使命常通이라 酒한대 飮之不疑하고 疾에 求藥於한대 以成藥【謂已合成熟藥이라】與之하니 卽服之어늘 人多諫한대 曰 豈有酖人羊叔子【叔子는 羊祜字也라】哉아하다 이 告其邊戍曰 彼專爲德하고 我專爲暴하니 是는 不戰而自服也니 各保分界而已요 無求細利하라하더라

○ 晉나라 羊祜가 江陵으로부터 돌아가서 德과 信義를 힘써 닦아 吳나라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매번 교전할 때마다 날짜를 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싸우고 엄습하는 계책을 취하지 않았으며, 장수 중에 속이는 계책을 올리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독한 술을 마시게 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羊祜가 출병하여 吳나라 경내를 순행할 적에 곡식을 베어 군량을 충당하고는 占用한 數量을 모두 헤아려서 비단을 보내어 곡식 주인에게 보상하였고, 매번 무리들과 長江과 沔水에서 놀고 사냥할 때에 항상 晉나라 경내로 한정하였으며, 만약 禽獸가 먼저 吳나라 사람에게 부상당했다가 뒤에 晉나라 군사들에게 잡혔으면 모두 吳나라에 보내어 돌려주니, 이에 吳나라 변방 사람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羊祜陸抗과 국경에서 대치하였는데, 使命(명령을 전달하는 使者)이 항상 통하였다. 陸抗羊祜에게 술을 보내자 羊祜가 의심하지 않고 술을 마셨으며, 陸抗이 병이 나서 羊祜에게 약을 청하였는데 羊祜가 달여 놓은 약【成藥은 이미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조제하여 달여 놓은 약을 이른다.】을 주자 陸抗이 즉시 약을 복용하였다. 사람들이 대부분 陸抗을 말리자 陸抗이 말하기를 “어찌 짐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羊叔子(羊祜)【叔子는 羊祜의 字이다.】가 있겠는가.” 하였다. 陸抗이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고하기를 “저들은 오로지 덕을 행하고 우리는 오로지 포악함을 행하니, 이는 이미 싸우지 않아도 스스로 굴복하게 되어 있다. 각각 경계선을 지킬 뿐이요,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라.” 하였다.

○ 晉羊祜不附結中朝權貴하니 荀勗, 馮紞之徒 皆惡之라 從甥王衍이 詣論事에 辭甚淸辯호되 不然之하니 이 拂衣去어늘 顧謂賓客曰 王夷甫【夷甫는 衍字라】方當以盛名處大位나 然敗俗傷化는 必此人也라하더라

○ 晉나라 羊祜가 조정 안의 權貴에게 붙고 결탁하지 않으니, 荀勗馮紞의 무리가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從甥인 王衍羊祜에게 나아가 일을 의논하되 말이 매우 깨끗하고 유려하였으나 羊祜가 옳게 여기지 않으니, 王衍이 옷을 떨치고 떠나갔다. 그러자 羊祜가 빈객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王夷甫(王衍)【夷甫는 王衍의 字이다.】는 성대한 명성으로 큰 지위에 처하겠지만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손상시키는 것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甲午]晉泰始十年

[甲午]〈晉泰始十年이요 吳鳳凰三年이라〉

晉이 以山濤로 爲吏部尙書하다 典選【晉主受禪에 濤自吏部郞遷尙書러니 居母喪에 復奪情하야 起典選也하니라】十餘年에 甄拔【甄은 察也요 拔은 擢也라】人物하야 各爲題目而奏之하니 時稱山公啓事라하니라

갑오(274) - 晉나라 泰始 10년이고, 吳나라 鳳凰 3년이다. -

晉나라가 山濤를 吏部尙書로 삼았다. 山濤가 관리의 임용을 맡은【晉主가 禪讓을 받을 때에 山濤가 吏部郞으로부터 尙書로 승진하였는데, 어머니의 喪中에 다시 出仕하여 나와서 관리의 임용을 맡은 것이다.】 지 10년 만에 인물을 살피고 선발【甄은 살핌이요, 拔은 발탁함이다.】하여 각각 題目을 만들어 아뢰니, 당시에 山公啓事라고 일컬었다.

○ 吳大司馬陸抗이 疾病【有加而無瘳曰病이라】하야 上疏曰 西陵, 建平은 國之蕃(藩)表【蕃은 籬也요 表는 外也니 謂二郡爲蕃籬於外라】라 旣處上流하야 受敵二境하니 若敵이 汎舟順流하야 星奔電邁면 非可恃援他郡하야 以救倒縣(懸)也라 臣父이 昔在西垂(陲)하야 上言호되 西陵은 國之西門이라 雖云易守나 亦復易失이니 若有不守면 非但失一郡이라 荊州非吾有也라하니 臣死之後에 乞以西方爲屬【屬은 之欲切이니 猶注也니 謂注意也라】하노이다

○ 吳나라 大司馬陸抗이 병이 심해지자,【병이 더 심해지고 낫지 않는 것을 病이라 한다.】 上疏하기를 “西陵과 建平은 우리 吳나라의 울타리【蕃은 울타리이고 表는 밖이니, 西陵과 建平 두 郡이 밖에서 울타리가 됨을 이른다.】입니다. 이미 上流 지방에 있어 양면으로 적의 침략을 받을 것이니, 만약 적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와서 유성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달려오면 다른 郡의 援助에 의지하여 위급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아비 陸遜이 일찍이 서쪽 변방에 있으면서 上言하기를 ‘西陵은 吳나라의 西門이다. 비록 지키기 쉽다 하나 또한 다시 잃기가 쉽다. 만약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한 郡을 잃을 뿐만이 아니니, 荊州가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신이 죽은 뒤에 西方에 관심을 기울일【屬은 之欲切(족)이다. 注와 같으니, 뜻을 기울임을 이른다.】 것을 당부합니다.” 하였다.

[丙申]晉咸寧二年

[丙申]〈晉咸寧二年이요 吳天璽元年이라〉

十月에 晉羊祜請伐吳曰 先帝西平巴, 蜀하고 南和吳, 會하야 庶幾海內得以休息이러니 而吳復背信하야 使邊事更興하니 夫期運은 雖天所授나 而功業은 必因人而成이니 不一大擧掃滅하면 則兵役이 無時得息也라 蜀平之時에 天下皆謂吳當幷亡이라하더니 自是以來로 十有三年矣니이다

병신(276) - 晉나라 咸寧 2년이고, 吳나라 天璽 元年이다. -

10월에 晉나라 羊祜가 吳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先帝께서 서쪽으로 巴‧蜀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吳‧會稽와 화합하여 온 천하가 휴식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吳나라가 다시 배반하여 변방의 전투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時運은 비록 하늘이 주는 것이지만 功業은 반드시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번 크게 군대를 일으켜 소탕하고 멸망시키지 않으면 兵役이 그칠 때가 없을 것입니다. 蜀漢이 평정되었을 때 천하 사람들이 모두 ‘吳나라도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13년이 지났습니다.

夫謀之雖多나 決之欲獨이니 凡以險阻【阻亦險也라】得全者는 謂其勢鈞(均)力敵耳라 若輕重不齊하고 强弱異勢면 雖有險阻나 不可保也니이다 蜀之爲國이 非不險也라 皆云一夫荷戟에 千人莫當이라하더니 及進兵之日하야 曾無藩籬之限하고 乘勝席卷하야 徑至成都하니이다 今江, 淮之險이 不如劍閣하고 孫皓之暴 過於劉禪하고 吳人之困이 甚於巴蜀하고 而大晉兵力이 盛於往時하니 不於此際에 平一四海하고 而更阻兵【阻는 恃也라】相守하야 使天下困於征戍하야 經歷盛衰【謂將兵以盛壯之年에 出戍하야 經歷營陣이라가 至衰老也라】는 不可長久也니이다

모의는 비록 많이 하나 결단은 홀로 하고자 하니, 무릇 지형의 험고함【阻 또한 험함이다.】을 이용하여 온전함을 얻는 것은 형세가 비슷하고 힘이 대등한 경우를 이를 뿐입니다. 만약 형세의 경중이 똑같지 않고 강약의 형세가 다르면 비록 險阻한 지형이 있더라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蜀이란 나라가 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말하기를 ‘한 지아비가 창을 메고 있으면 천 명이 당해내지 못한다.’ 하였는데, 進軍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무인지경을 통과하듯〉 일찍이 울타리의 한계가 없었고 승세를 타고 석권해서 곧바로 成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揚子江과 淮水의 험고함이 劍閣만 못하고 孫皓의 포악함이 劉禪보다 더하며 吳나라 사람의 곤궁함이 巴‧蜀보다 심하고 大晉의 병력이 지난날보다 강성하니, 이러한 때에 四海를 평정하여 통일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믿고【阻는 믿음이다.】 서로 지켜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변경에 가서 수자리 사느라 고생하여 盛年부터 老年에 이르기까지 陣營을 두루 經歷【盛衰를 두루 거친다는 것은 將兵이 혈기 왕성한 한창 나이에 수자리 살러 나와서 營陣을 두루 경력하여 노쇠함에 이름을 이른다.】하게 하는 것은 장구한 방법이 아닙니다.

今若引梁, 益王濬, 唐彬所統이라】之兵하야 水陸俱下하고 荊, 楚【羊祜所統이라】之衆이 進臨江陵하고 平南, 豫州【平南은 胡奮爲平南將軍이요 豫州는 王戎爲刺史라】는 直指夏口하고 徐, 揚, 靑, 兗【徐, 揚은 王渾所統이요 靑, 兗은 琅邪王伷所統이라】이 竝會秣陵이면 以一隅之吳로 當天下之衆하야 勢分形散하야 所備皆急하리니 巴, 漢奇兵이 出其空虛하야 一處傾壞면 則上下震蕩하야 雖有智者라도 不能爲吳謀矣리이다 孫皓恣情任意하야 與下多忌하고 其俗이 急速하야 不能持久라 弓弩戟楯이 不如中國이요 唯有水戰이 是其所便이니 一入其境이면 則長江이 非復所保라 還趣城池하야 去長入短이면 非吾敵也니 如此면 軍不踰時하야 克可必矣리이다

지금 만약 梁州와 益州【梁州와 益州는 王濬과 唐彬이 통솔하였다.】의 군대를 이끌고 水陸으로 함께 내려가고, 荊州와 楚【荊州와 楚 지방은 羊祜가 통솔하였다.】 지방의 병력은 전진하여 江陵에 임하고, 平南과 豫州【平南은 胡奮이 平南將軍이 되었고, 豫州는 王戎이 刺史가 되었다.】의 병력은 곧바로 夏口로 향하고, 徐州‧揚州‧靑州‧兗州【徐州와 揚州는 王渾이 통솔하고, 靑州와 兗州는 琅邪王 司馬伷(주)가 통솔하였다.】의 병력은 함께 秣陵에 모인다면 궁벽한 한 모퉁이의 吳나라를 가지고 천하의 군대를 상대하게 되어 세력이 나누어지고 형세가 흩어져서 방비하는 것이 모두 급하게 될 것이니, 巴‧漢의 奇兵이 그 빈틈을 공격하여 한 곳이 기울어지고 무너지면 상하가 진동하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吳나라를 위해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孫皓는 감정대로 하고 뜻대로 하여 아랫사람들을 대함에 시기함이 많고 풍속이 급하여 오랫동안 버티지 못합니다. 활과 쇠뇌와 창과 방패는 中國만 못하고 오직 水戰만이 그들의 익숙한 바이니, 우리가 한번 그들의 경내에 들어가면 長江이 다시는 그들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城池로 달려가서 그들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쓴다면 우리의 적수가 못 될 것이니, 이와 같으면 군대가 한 철을 지나지 않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晉主深納之로되 而朝議方以秦, 涼爲憂【先에 鄧艾納鮮卑降者數萬하야 置雍, 涼之間하야 與民雜居러니 晉恐其爲患하야 乃分雍, 涼, 梁州하야 置秦州한대 遂爲亂하니 見二十六卷庚子年하니라】어늘 復表曰 吳平則胡自定이니 但當速濟大功耳니이다 議者多有不同호되 賈充, 荀勗, 馮紞이 尤以伐吳爲不可라하야늘 歎曰 天下不如意事 十常居八九로다 天與不取하니 豈非更事者 恨於後時【言吳可取而不取하야 機會一失이면 經見其事 豈不有後時之恨哉아】哉아 唯度支尙書杜預와 中書令張華晉主意合하야 贊成其計하니라

晉主는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한창 秦州와 涼州를 걱정하고 있었다.【먼저 鄧艾가 鮮卑族의 항복한 자 수만 명을 받아들여 雍州와 涼州의 사이에 두고 백성들과 섞여 살게 하였는데, 晉나라에서 이들이 우환이 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雍州‧涼州‧梁州에서 약간의 郡縣을 나누어 秦州를 설치하자 마침내 난을 일으켰는 바, 뒤의 26권 庚子年條(280)에 보인다.】 그러자 羊祜가 다시 表文을 올려 아뢰기를 “吳나라가 평정되면 오랑캐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니, 다만 속히 큰 공을 이루어야 할 뿐입니다.”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는데, 賈充荀勗馮紞이 더욱 吳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자, 羊祜가 탄식하기를 “천하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열 중에 항상 여덟아홉을 차지한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경험하여 아는 자가 때에 뒤늦음을 한하지【때에 뒤늦음을 恨한다는 것은 吳나라를 취할 수 있는데 취하지 않아서 기회를 한 번 놓치게 되면 그 일을 경험하여 알 자가 어찌 시기에 늦음을 한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않겠는가.” 하였다. 오직 度支尙書杜預와 中書令張華晉主와 뜻이 합하여 羊祜의 계책에 찬동하였다.

[戊戌]晉咸寧四年

[戊戌]〈晉咸寧四年이요 吳天紀二年이라〉

正月에 晉羊祜面陳伐吳之計한대 晉主善之라 以疾하야 不宜數入이라하야 更遣張華하야 就問籌策한대 孫皓暴虐已甚하니 於今에 可不戰而克이어니와 若不幸而沒하고 吳人이 更立令主면 雖有百萬之衆이라도 長江을 未可窺也니 將爲後患矣리라 深然之어늘 曰 成吾志者는 子也라하더라 晉主欲使臥護諸將이어늘 曰 取吳는 不必臣行이어니와 但旣平之後에 當勞聖慮耳라 功名之際엔 臣不敢居어니와 若事了인댄 當有所付授니 願審擇其人【以東南壤界濶遠하니 當得人以鎭撫之也라】也하소서

무술(278) - 晉나라 咸寧 4년이고, 吳나라 天紀 2년이다. -

정월에 晉나라 羊祜晉主를 대면하여 吳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아뢰니, 晉主가 이를 좋게 여겼다. 羊祜가 병 때문에 자주 들어올 수 없다 하여 다시 張華를 보내어 찾아가서 계책을 묻게 하자, 羊祜가 말하기를 “孫皓는 포악함이 너무 심하니 현재는 싸우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지만 만약 孫皓가 불행히도 죽고 吳나라 사람들이 다시 훌륭한 군주를 세운다면 비록 백 만의 병력이 있더라도 長江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니 장차 후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張華가 그의 말을 깊이 옳게 여기니, 羊祜가 말하기를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는 그대이다.” 하였다. 晉主羊祜로 하여금 누워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게 하고자 하니, 羊祜가 말하기를 “吳나라를 취하는 것은 굳이 신이 출전할 것이 없습니다만 평정한 뒤에는 聖上께서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功名을 꾀하는 즈음은 신하가 감히 차지할 수가 없지만, 만약 일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맡길 사람이 있어야 하니, 적임자를 신중히 가리시기【동남쪽 경계는 넓고 머니, 마땅히 적임자를 얻어서 鎭撫해야 한다.】 바랍니다.” 하였다.

○ 十月에 晉以衛瓘으로 爲尙書令하다 是時에 朝野咸知太子昏愚【太子는 卽惠帝衷也니 武帝炎之子라】하야 不堪爲嗣어늘 이 每欲陳啓而未敢發이러니 會에 侍宴凌雲臺【卽魏文帝之所作也 】할새 이 陽醉하야 跪晉主牀前하야 曰 臣이 欲有所啓하노이다 晉主曰 公所言이 何耶오 이 欲言而止者三이라가 因以手撫牀하고 曰 此座可惜이로소이다 晉主意悟하고 因謬曰 公眞大醉耶아하니 이 於此에 不復有言하다

○ 10월에 晉나라가 衛瓘을 尙書令으로 삼았다. 이때 朝野에서는 太子【太子는 곧 惠帝 司馬衷이니, 武帝 司馬炎의 아들이다.】가 昏愚하여 後嗣가 될 수 없음을 다 알고 있었다. 衛瓘이 매번 이것을 아뢰고자 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凌雲臺【凌雲臺는 곧 魏나라 文帝(曹丕)가 지은 것이다.】에서 晉主를 모시고 잔치할 적에 衛瓘이 거짓으로 취한 체하여 晉主의 龍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晉主가 말하기를 “公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衛瓘이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기를 세 차례 하고는, 인하여 손으로 龍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였다. 晉主가 마음속으로 그의 意向을 깨닫고 인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公이 참으로 크게 취했는가?” 하니, 衛瓘이 이에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 十一月에 晉太醫【屬宗正也라】司馬程據 獻雉頭裘【以雉頭毛로 織爲裘라】어늘 晉主焚之於殿前하고 勅內外하야 敢有獻奇技異服者면 罪之하리라하다

○ 11월에 晉나라 太醫【太醫는 宗正에 속하였다.】司馬程據가 雉頭裘【雉頭裘는 꿩 머리의 털을 짜서 갖옷을 만든 것이다.】를 바치자, 晉主가 이것을 궁전 앞에서 불태우고 內外에 명령을 내려 “감히 기이한 技藝와 이상한 服飾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겠다.” 하였다.

○ 晉羊祜疾篤하야 擧杜預自代어늘 乃以로 爲鎭南大將軍, 都督荊州諸軍事하다 卒하니 晉主哭之甚哀하다 南州民【南州는 荊州也라】이 聞卒하고 爲之罷市하니 巷【邑中道也라】 哭聲이 相接하고 吳守邊將士 亦爲之泣이러라 好遊峴山【在襄陽城南十里라】이러니 襄陽人이 建碑立廟於其地하고 歲時祭祀하니 望其碑者 無不流涕라 因謂之墮淚碑라하니라

○ 晉나라 羊祜가 병이 위독하자 杜預를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니, 마침내 杜預를 鎭南大將軍‧都督荊州諸軍事로 삼았다. 羊祜가 죽으니, 晉主가 통곡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남쪽 고을 백성들【남쪽 고을은 荊州이다.】羊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시장을 파하니 거리【巷은 고을 안의 길이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고, 吳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장병들도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羊祜는 峴山【峴山은 襄陽城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 襄陽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고는 歲時에 제사를 올리니, 비석을 바라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인하여 이 비를 일러 墮淚碑라고 하였다.

[己亥]晉咸寧五年

[己亥]〈晉咸寧五年이요 吳天紀三年이라〉

初에 魏曹操分南匈奴하야 爲五部하고 以左賢王로 爲左部帥러니 豹子【淵은 字元海니 〈匈奴左賢王豹之子也라〉 初에 漢高以宗女爲公主하야 以妻冒頓이라 故其子孫이 遂冒姓劉氏하니라】이 幼而雋(俊)異하고 博習經史라 嘗謂同門生曰 吾常恥, 無武【隨, 陸은 隨何, 陸賈니 皆事漢高, 惠하니라】하고 , 無文【絳은 周勃也니 封絳侯하고 灌은 謂灌嬰也니 共立漢文帝하니라】하노니 , 은 遇高帝而不能建封侯之業하고 , 은 遇文帝而不能興庠序之敎하니 豈不惜哉아 於是에 兼學武事하다 及長에 猿臂【如猿通臂也라】善射하고 膂力【膂는 脊骨上肉이라】過人이라 爲侍子하야 在洛陽할새 王渾이 重之【王渾及其子濟가 皆重之하니라】러라 齊王【文帝昭之子요 武帝炎之弟라】言於晉主曰 陛下不除劉淵이면 臣恐幷州不得久安일까하노이다 王渾曰 大晉이 方以信懷殊俗하니 奈何以無形之疑로 殺人侍子乎잇가 晉主曰 渾言이 是也니라 會에 卒커늘 以으로 代爲左部帥【後에 爲五胡亂華之首하니라】하다

기해(279) - 晉나라 咸寧 5년이고, 吳나라 天紀 3년이다. -

처음에 魏나라 曹操가 南匈奴를 나누어 5部로 만들고 左賢王劉豹를 左部帥로 삼았는데, 劉豹의 아들劉淵【劉淵은 字가 元海이니, 匈奴 左賢王 劉豹의 아들이다. 처음에 漢나라 高祖가 종실의 딸을 공주라 하여 冒頓(묵특)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이 마침내 가탁하여 劉氏를 姓으로 삼은 것이다.】이 어린데도 준걸스럽고 기이하였으며 經史를 널리 익혔다. 劉淵이 일찍이 同門의 生徒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항상 隨何陸賈【隨, 陸은 隨何陸賈이니, 모두 漢나라 高祖와 惠帝를 섬겼다.】가 武功이 없고 絳侯灌嬰【絳은 周勃이니 絳侯에 봉해졌고 灌은 灌嬰을 이르니, 함께 漢나라 文帝를 세웠다.】이 文才가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隨何陸賈高祖를 만났으나 侯에 봉해지는 功業을 세우지 못하였고 絳侯灌嬰文帝를 만났으나 庠序의 교육을 振興시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에 武藝를 겸하여 배웠다. 장성하자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猿臂는 원숭이처럼 팔이 긴 것이다.】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힘【膂는 등골뼈 위의 살이다.】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侍子가 되어 洛陽에 있을 때에 王渾이 그를 소중히 여겼다.【王渾과 그의 아들 王濟가 모두 劉淵을 소중하게 여겼다.】齊王司馬攸【齊王 司馬攸는 文帝 司馬昭의 아들이고 武帝 司馬炎의 아우이다.】晉主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劉淵을 제거하지 않으면 臣은 幷州가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王渾이 말하기를 “大晉이 이제 막 신의로 풍속이 다른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있으니, 어찌 드러나지 않은 의심 때문에 남의 侍子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晉主가 말하기를 “王渾의 말이 옳다.” 하였다. 마침 劉豹가 죽자, 劉淵을 대신 左部帥로 삼았다.【뒤에 五胡가 中華를 어지럽히는 시초가 되었다.】

○ 晉益州刺史王濬이 上疏曰 孫皓荒淫凶逆하니 宜速征伐하소서 若一旦死하고 更立賢主면 則彊敵也요 臣이 作船七年에 日有朽敗하고 臣年七十이라 死亡無日하니 三者에 一乖면 則難圖也니 誠願陛下無失事機하소서 晉主於是에 決意伐吳러니 議明年出師하다 杜預上表曰 羊祜不先博謀於朝臣하고 而密與陛下로 共施此計라 故로 令朝臣多異同之議하니 凡事를 當以利害相校라 今此擧之利는 十有八九요 而其害一二니 止於無功耳라 必使朝臣으로 言破敗之形이라도 亦不可得이니 直【猶但也라】是計不出己하야 功不在身이라 各恥其前言之失而固守之也리이다

○ 晉나라 益州刺史王濬이 상소하기를 “孫皓가 荒淫無道하고 흉악하며 패역하니 마땅히 속히 정벌해야 합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孫皓가 죽어 다시 어진 군주를 세우면 강한 적이 될 것이요, 신이 배를 만든 지가 7년이 되어 배가 날로 썩고 부서지며, 신의 나이가 70이어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세 가지 중에 하나만 틀려도 도모하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폐하께서는 事機를 놓치지 마소서.” 하였다. 晉主가 이에 吳나라를 정벌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듬해에 출병할 것을 의논하였다.

杜預가 表文을 올려 아뢰기를 “羊祜가 조정의 신하들에게 먼저 널리 상의하지 않고 은밀히 폐하와 함께 이 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異同의 의논이 많으니, 모든 일은 마땅히 利害를 가지고 서로 따져야 합니다. 이제 이 일에 있어 이로운 것은 열에 여덟아홉이고, 해로운 것은 한둘이니 다만 戰功이 없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일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우리가 적을 격파할 형세를 말하게 한다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단지【直은 다만과 같다.】 이 계책이 자신들에게서 나오지 아니하여 功이 자신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吳나라를 정벌하여 승리한다면 조정의 신하들은〉 각각 지난날 吳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했던 자신들의 의론이 잘못되었음이 증명될까 부끄러워하여 완고하게 지킬 것입니다.” 하였다.

晉主張華圍碁러니 表適至어늘 推(秤)[枰]【棊局也라】斂手하고 曰 陛下는 聖武하시고 國富兵彊하며 吳主는 淫虐하야 誅殺賢能하니 當今討之면 可不勞而定이니 願勿以爲疑하소서 晉主乃許之하다 山濤退而告人曰 自非聖人인댄 外寧이면 必有內憂하나니 今釋吳하야 以爲外懼 豈非算乎아

晉主張華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杜預의 表文이 마침 이르자 張華가 바둑판【枰은 바둑판이다.】을 밀치고 拱手하고서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聖明하고 英武하시며 나라와 군대는 부유하고 강합니다. 吳主는 황음무도하고 사나워서 어진 이와 유능한 이를 함부로 죽이니, 지금 이를 토벌하면 수고롭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의심하지 마소서.” 하니, 晉主가 마침내 정벌할 것을 허락하였다. 山濤가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聖人이 아닐진댄 밖이 편안하면 반드시 안에 우환이 있는 법이니, 지금 吳나라를 내버려 두어서 밖의 두려움으로 삼는 것이 어찌 좋은 계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十一月에 晉이 大擧伐吳할새 遣琅琊王【伷는 同冑라 武帝之叔父也라】하야 出涂中【涂는 音途니 水名이라 出益州牧靡南山하야 西北入澠하니라】하고 王渾은 出江西하고 王戎은 出武昌하고 胡奮은 出夏口하고 杜預는 出江陵하고 王濬, {出巴東}唐彬은 出巴, 蜀하니 東西凡二十餘萬이러라

○ 11월에 晉나라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吳나라를 정벌할 적에 琅琊王 司馬伷【伷는 冑와 같다. 司馬伷는 武帝 司馬炎의 叔父이다.】를 보내어서 涂中【涂는 음이 도이니, 물 이름이다. 益州의 牧靡南山에서 나와서 서북쪽으로 흘러 澠水로 들어간다.】으로 나가게 하고, 王渾은 江西로 나가고 王戎은 武昌으로 나가고 胡奮은 夏口로 나가고 杜預는 江陵으로 나가고 王濬唐彬은 巴‧蜀으로 나가게 하니, 東西의 병력이 모두 20여만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