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二 後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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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紀

孝獻皇帝 上

孝獻皇帝 上 名은 이요 字는 伯和靈帝中子라

孝獻【聰明睿智曰獻이라】皇帝※ 上 名은 이요 字는 伯和靈帝中子라 在位三十一年이요 壽四十一이라

※ 獻生不辰하야 身播國屯하야 終我四百하고 永作虞賓하니라

孝獻【총명하고 지혜로움을 獻이라 한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字가 伯和이니 靈帝의 中子이다. 재위가 31년이고 壽가 41세이다.

獻帝는 좋지 못한 때에 태어나 몸이 播遷하고 나라가 어려워서 우리(漢나라) 400년의 國運을 마치고 길이 虞賓이 되었다.

[庚午]初平元年

[庚午]初平元年이라

正月에 關東州郡이 皆起兵하야 以討董卓할새 推渤海太守袁紹하야 爲盟主하니 는 屯河內하고 曹操는 屯酸棗【退溪頭註에 縣名이라】하고 袁術은 屯魯陽하니 衆各數萬이라 豪傑이 多歸心袁紹者로되 鮑信이 獨謂曹操曰 大略은 不世出하나니 能撥亂反正者는 君也라 苟非其人이면 雖强이나 必斃하리니 君은 殆天之所啓乎인저

初平 元年(경오 190)

正月에 關東의 州郡이 모두 군대를 일으켜서 董卓을 토벌할 적에 渤海太守袁紹를 추대하여 盟主로 삼으니, 袁紹는 河內에 주둔하고曹操는 酸棗縣【酸棗는 退溪의 頭註에 縣의 이름이라고 하였다.】에 주둔하고袁術은 魯陽에 주둔하였는바, 병력이 각각 수만 명이었다. 호걸들이 袁紹에게 마음을 돌리는 자가 많았으나 鮑信은 홀로 曹操에게 이르기를 “큰 지략은 세상에 자주 나오지 않으니, 亂을 다스려서 본래의 바름으로 돌아오게 할 자는 君이다. 만일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강하더라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니, 君은 아마도 하늘이 이 난세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낸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董卓이 以山東兵盛이라하야 欲遷都以避之하야 遂燒焚宮廟官府하고 劫遷天子하야 三月에 車駕入長安하다

董卓은 山東의 군사(토벌군)들이 강성하다 하여 遷都하여 피하고자 해서 마침내 궁궐과 祠堂과 官府를 불태우고 天子를 위협하여 옮겨서 3월에 車駕(天子)가 長安으로 들어갔다.

○ 長沙太守孫堅【後에 其子卽位하니 是爲吳라】이 亦起兵討董卓이러니 至南陽하니 衆已數萬人이라 前到【前進也라】魯陽하야 與袁術合兵하니 이 由是得據南陽하고 表行破虜將軍하다

○ 長沙太守 孫堅【뒤에 그 아들 孫權이 즉위하니, 이것이 吳나라이다.】이 또한 군대를 일으켜 董卓을 토벌하였는데 南陽에 이르니 병력이 이미 수만 명이었다. 魯陽으로 전진【前到는 전진함이다.】하여 袁術과 병력을 합하니, 袁術이 이로 말미암아 南陽을 점거하고 表文을 올려 孫堅을 천거하여 破虜將軍으로 삼았다.

○ 幽州牧劉虞 務存寬政하고 勸督農桑하니 民悅年登하야 穀石三十【穀一石에 錢三十也라】이라 靑,徐士庶避難歸虞者 百萬이러니 皆忘其遷徙焉이러라

○ 幽州牧劉虞가 힘써 너그러운 정사를 보존하고 농사와 양잠을 권면하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年事가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한 섬에 30錢【곡식이 한 섬에 30錢인 것이다.】이었다. 靑州와 徐州의 士庶人들이 戰亂을 피하여 劉虞에게 歸附한 자가 백만 명이었는데, 모두 타향살이하는 시름을 잊었다.

[辛未]二年

[辛未]二年이라

孫堅이 進屯陽人【聚名이니 聚는 見三卷★{單+心}狐聚注라 】하야 與董卓戰하야 大破之하다 이 進至雒陽하야 掃除陵廟하니 이 奔還長安이어늘 이 遂軍魯陽하다

初平 2년(신미 191)

孫堅이 전진하여 陽人聚【陽人은 聚落의 이름이니, 陽人聚는 3권 ★{單+心}狐聚의 注에 보인다.】에 주둔해서 董卓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孫堅이 전진하여 雒陽에 이르러서 陵墓를 청소하니 董卓이 달아나 長安으로 돌아가자, 孫堅이 마침내 魯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劉表時爲荊州刺史라 袁術이 使孫堅어늘 黃祖逆戰하야 射殺之【袁術이 與袁紹有隙하야 各立黨援以相圖라 術은 結公孫瓚하고 紹는 連劉表한대 術使堅擊表라】하다

劉表가 이때 荊州刺史로 있었다. 袁術孫堅으로 하여금 劉表를 공격하게 하자, 劉表黃祖를 보내어 맞이해 싸워서 孫堅을 쏘아죽였다.【袁術이 袁紹와 틈이 있자, 각각 지원하는 黨與를 세워서 서로 도모하였다. 袁術은 公孫瓚과 동맹을 맺고 袁紹는 劉表와 연합하였는데, 袁術이 孫堅으로 하여금 劉表를 공격하게 하였다.】

公孫瓚【渤海校尉라】이 大破靑州黃巾하니 威名이 大震이러라

○ 公孫瓚【公孫瓚은 渤海의 校尉였다.】이 靑州의 黃巾賊을 크게 격파하니, 위엄과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 初에 涿郡劉備【備는 後爲昭烈帝하니라】中山靖王【名勝이니 景帝賈夫人之所生이라】之後也라 垂手下膝하고 顧自見其耳하며 有大志, 少語言하고 喜怒를 不形於色이러라 嘗與公孫瓚으로 同師事盧植이라 由是로 往見한대 以爲平原相하다 少與河東關羽와 涿郡張飛로 相友善이러니 以, 로 爲別部司馬하야 分統部曲하다 與二人으로 寢則同牀하야 恩若兄弟하며 而稠人廣坐에 侍立終日하야 隨周旋하고 不避艱險이러라

○ 처음에 涿郡의 劉備【劉備는 뒤에 蜀漢의 昭烈帝가 되었다.】는 中山靖王【中山靖王은 이름이 勝이니, 景帝 賈夫人의 소생이다.】의 후손이었다.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내려오고 돌아보면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으며 큰 뜻이 있고 말수가 적으며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감정을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公孫瓚과 함께 盧植을 師事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公孫瓚을 찾아가 만났는데, 公孫瓚이 그를 平原相으로 삼았다.

劉備는 젊어서 河東의 關羽, 涿郡의 張飛와 서로 친했는데, 關羽張飛를 別部司馬로 삼아서 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劉備는 두 사람과 함께 잘 때에는 한 침상에서 자서 은혜가 형제와 같았으며, 여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앉아 있을 때에 關羽張飛劉備를 모시고 서서 날을 마쳐 劉備를 따라 周旋하고 어려움과 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公孫度【遼東人이라 董卓이 薦爲遼東太守한대 爲遼東郡所輕이어늘 皆以法誅之하니 郡中震慄하며 東伐高句麗하고 西擊烏丸하야 威行海外하니라】威行海外하니 中國人士避亂者 多歸之라 北海管寧【字幼安이라】邴原, 王烈이 皆往依焉하다 이 少時에 與華歆爲友러니 嘗與共鋤菜라가 見地有金하고 은 揮鋤不顧하야 與瓦石無異로되 은 捉而擲之하니 人이 以是로 知其優劣이러라 王烈은 器業【器局功業이라】이 過人하야 少時에 名聞이 在原, 寧之右하고 善於敎誘라 鄕里에 有盜牛者하야 主得之러니 盜請罪曰 刑戮은 是甘이어니와 乞不使王彦方【烈字라】知也라하니라 이 聞而使人謝之하고 遺布一端【六丈曰端이니 一曰八丈也요 又古以二丈爲端이라】하다 或이 問其故한대 曰 盜懼吾聞其過하니 是는 有恥惡之心이라 旣知恥惡이면 則善心將生이라 故로 與布하야 以勸爲善也로라 後有老父 遺劍於路러니 行道一人이 見而守之라 至暮에 老父還尋得劍하고 怪之하야 以事告한대 이 使推求하니 乃先盜牛者也러라 諸有爭訟曲直에 將質之於烈이라가 或至塗而反하며 或望廬而還하야 皆相推【推는 朱子綱目에 移也라하니라】以直하야 不敢使烈聞之러라

○ 公孫度【公孫度는 遼東 사람이다. 董卓이 천거하여 遼東太守를 삼으니 遼東郡에서 경멸하였다. 公孫度가 모두 법대로 이들을 주벌하니 고을 안이 두려워하였으며, 동쪽으로 高句麗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烏丸(烏桓)을 공격하여 위엄이 海外에 행해졌다.】가 海外에 위엄이 행해지니, 中國의 人士로서 피난하는 자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다. 北海의 管寧【管寧은 字가 幼安이다.】邴原王烈이 모두 가서 그에게 귀의하였다. 管寧은 젊었을 때에 華歆과 친한 벗이 되었는데, 일찍이 華歆과 함께 채소밭을 김매다가 땅속에 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管寧은 호미만 휘두를 뿐 금을 쳐다보지 아니하여 기와나 자갈과 다름없이 여겼으나 華歆은 금을 주웠다가 던지니, 사람들이 이 일로써 그 優劣을 알았다.

王烈은 器局과 功業【器業은 器局과 功業이다.】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젊었을 때의 명성이 邴原管寧보다 위에 있었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도하기를 잘하였다. 鄕里에 소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소 주인이 이를 잡자, 도둑이 죄를 받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형벌은 달게 받겠으나 王彦方(王烈)【彦方은 王烈의 字이다.】으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王烈이 이를 듣고 사람을 시켜 사례하고 베 한 필【〈布帛의 길이가〉 6丈인 것을 端이라 하니, 어떤 本에는 8丈을 端이라 하였고, 또 옛날에는 2丈을 端이라 하였다.】을 주니, 혹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王烈이 말하기를 “도둑이 자기 잘못을 내가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惡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미 惡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으면 善한 마음이 장차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삼베를 주어서 善을 행하기를 권장한 것이다.” 하였다.

뒤에 노인이 길에서 劍을 잃어버렸는데, 길 가던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는 지키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서 노인이 다시 돌아와서 劍을 찾고는 기이하게 여겨 이 사실을 王烈에게 고하였다. 王烈이 사람을 시켜서 사실을 캐어 보니, 바로 예전에 소를 훔쳤던 자였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曲直을 쟁송할 때에 장차 王烈에게 질정하려고 하다가 혹은 중간에 되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王烈의 집을 바라보고는 돌아와서 모두 정직함으로써 서로 미루어【推는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옮겨 주는 것이다” 하였다.】 감히 王烈로 하여금 이 말을 듣지 못하게 하였다.

[壬申]三年

[壬申]三年이라

初에 荀淑이 有孫하니 曰이라 少有才名이러니 何顒이 見而異之曰 王佐才也라하더라 及天下亂에 이 聞曹操有才略하고 乃從하니 與語大悅하야 曰 吾子房張良字라】也라하고 以爲奮武司馬【朱子綱目에 初起兵에 爲奮武將軍이라 故로 以爲奮武司馬也라】하다

初平 3년(임신 192)

처음에 荀淑이 손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이었다. 어려서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何顒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이다.” 하였다. 천하가 혼란하게 되자 荀彧曹操가 재주와 지략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曹操를 따르니, 曹操荀彧과 말을 해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張子房【子房은 張良의 字이다.】이다.” 하고, 荀彧을 奮武司馬【朱子의 ≪資治通鑑綱目≫에 “曹操가 처음에 군대를 일으킬 때에 奮武將軍이었으므로 荀彧을 奮武司馬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로 삼았다.

董卓의 車服이 僭擬天子라 司徒王允이 與司隷校尉黃琬과 僕射士孫瑞【士는 姓이요 孫瑞는 名也라】로 密謀誅하고 使中郞將呂布로 持矛刺하고 趣(促)兵斬之하니 百姓이 歌舞於道러라

董卓의 수레와 의복이 참람하여 天子와 같았다. 司徒王允이 司隷校尉黃琬, 僕射 士孫瑞【士는 姓이고 孫瑞는 이름이다.】와 함께 董卓을 죽일 것을 은밀히 모의하고 中郞將呂布로 하여금 창을 잡고 董卓을 찌르고 군대를 재촉하여 목을 베게 하니, 백성들이 길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 靑州黃巾이 寇兗州하야 殺刺史劉岱라】어늘 濟北相鮑信等이 迎東郡太守曹操하야 領兗州刺史하니 追擊黃巾하야 悉降之하고 得精兵三十餘萬하다

○ 靑州의 黃巾賊이 兗州를 침략하여 刺史【刺史는 劉岱이다.】를 죽이자, 濟北의 相인 鮑信 등이 東郡太守曹操를 맞이하여 領兗州刺史가 되게 하니, 曹操는 黃巾賊을 추격하여 모두 항복시키고 정예병 30여만 명을 얻었다.

董卓의 部將李傕, 郭汜【似泛二音이라. 】等이 攻長安하야 殺王允하다

董卓의 部將李傕과 郭汜【汜는 ‘사’와 ‘범’ 두 가지 음이 있다.】 등이 長安을 공격하여王允을 죽였다.

袁術이 進據壽春하고 遂領其州하다

袁術이 전진하여 壽春을 점거하고 마침내 그 州를 거느렸다.

[癸酉]四年

[癸酉]四年이라

初에 京雒이 遭董卓之亂하야 民이 流移東出하야 多依徐土러니 遇曹操至하야 坑殺男女數十萬口於泗水하니 水爲不流라 進攻睢陵, 夏丘하야 皆屠之하니 鷄犬이 亦盡하고 墟邑에 無復行人曹操이 避難하야 在瑯琊어늘 迎之러니 陶謙別將이 掩襲殺之하니 引兵하야 擊徐州하니라】이러라

初平 4년(계유 193)

처음에 京雒(낙양)이 董卓의 난을 만나 백성들이 流離하여 동쪽으로 옮겨 가서 徐州 땅에 많이 의지하였는데, 曹操가 이르러서 男女 수십만 명을 泗水에 빠뜨려죽이니, 물이 이 때문에 흐르지 못하였다. 전진하여 睢陵과 夏丘를 공격해서 모두 도륙하니, 닭과 개도 다 없어지고 빈 고을엔 다시 行人이 없었다.【曹操의 아버지 曹嵩이 난을 피하여 瑯琊에 있으므로, 曹操가 맞이해 오려고 하였는데, 陶謙의 別將이 기습하여 죽이니,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徐州를 공격하였다.】

公孫瓚이 攻劉虞殺之하고 盡有幽州之地【建安四年에 爲袁紹所滅이라】하다

公孫瓚劉虞를 공격하여죽이고幽州 땅을 다 소유하였다.【[原註]公孫瓚……盡有幽州之地:公孫瓚은 建安 4년에 袁紹에게 멸망당하였다.】

[甲戌]興平元年

[甲戌]興平元年이라

曹操之攻陶謙也에 平原相劉備 將兵救之하고 遂歸하다 이 疾篤하야 謂別駕東海糜竺曰 非劉備면 不能安此州也라하더니 卒에 이 率州人迎한대 遂領徐州하다

興平 元年(갑술 194)

曹操陶謙을 공격할 때에 平原相劉備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원하고 마침내 陶謙에게 귀의하였다. 陶謙이 병이 위독해지자 別駕인 東海糜竺에게 이르기를 “劉備가 아니면 이 州를 안정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陶謙이 죽자 糜竺이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劉備를 맞이하니, 劉備가 마침내 徐州를 거느리게 되었다.

○ 初에 孫堅이 生四男하니 , , , 이라 은 年十餘歲에 已交結知名하니 舒人周瑜同年으로 亦英達夙成이라 聞策聲問【問은 與聞通하니 聲所至也라】하고 自舒來造焉하야 便推結分好【分, 好는 竝去聲이라[釋義]謂推結交分愛好也라】러니 及死에 年十七이라 乃渡江居江都하야 結納豪俊하야 有復讐之志러라 到壽春하야 見袁術한대 이 甚奇之하야 以餘兵千餘人으로 還하고 表爲懷義校尉하다

○ 처음에 孫堅이 네 아들을 낳으니, 孫策孫權孫翊孫匡이었다. 孫策은 나이 십여 세에 이미 명성이 알려진 사람들과 교분을 맺으니, 舒縣 사람 周瑜孫策과 同年으로 또한 英明하고 豁達하며 夙成하였다. 孫策의 명성【問은 聞과 통하니, 名聲이 이르는 것이다.】을 듣고는 舒州로부터 와서 두 사람이 곧 誠心을 미루어 分好(友誼)를 맺었는데,【[原註]分과 好는 모두 去聲이다.[釋義]誠心을 미루어 교분과 우호를 맺음을 이른다.】孫堅이 죽을 적에 孫策의 나이가 17세였다. 마침내 揚子江을 건너 江都에 거주하면서 호걸들과 교분을 맺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할 뜻이 있었다. 壽春에 이르러 袁術을 뵙자, 袁術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서 孫堅의 남은 병력 천여 명을 孫策에게 돌려주고 表文을 올려 그를 懷義校尉로 삼았다.

[乙亥]二年

[乙亥]二年이라

曹操攻鉅野하야 斬呂布薛蘭하다 陶謙已死라하야 欲遂取徐州하고 還乃定어늘 荀彧曰 昔에 高祖保關中하고 光武據河內하야 皆深根固本하야 以制天下하야 進足以勝敵하고 退足以堅守라 故로 雖有困敗나 而終濟大業하니이다 將軍이 本以兗州首事하야 平山東之難【謂黃巾이니 見上壬申年이라】하니 百姓이 無不歸心悅服이요 且河, 濟는 天下之要地也라 今雖殘壞나 猶易以自保니 是亦將軍之關中, 河內也라 不可以不先定이니이다 操乃止하다

興平 2년(을해 195)

曹操가 鉅野를 공격하여呂布의 장수 薛蘭을 목 베었다. 曹操陶謙이 이미 죽었다 하여 마침내 徐州를 점령하고 돌아와서 呂布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荀彧이 말하기를 “옛날에 高祖는 關中을 확보하고 光武帝는 河內를 점거하여, 모두 뿌리를 깊게 하고 근본을 견고히 하여 천하를 제압해서, 나아가면 충분히 적을 이길 수 있고 물러나면 충분히 굳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어려움과 실패가 있었으나 끝내 大業을 이룬 것입니다. 장군이 본래 兗州를 가지고 일을 시작해서 山東의 난【山東의 難은 黃巾賊을 이르니, 앞의 壬申年條에 보인다.】을 평정하였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와 기뻐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또 黃河와 濟水는 천하의 요해지입니다. 현재 비록 殘破하였으나 오히려 보존하여 지키기가 쉬우니, 이 또한 장군의 關中이요 河內입니다. 이곳을 먼저 평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曹操가 마침내 徐州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중지하였다.

李傕, 【後에 曹操誅李傕三族하고 郭汜는 爲其將所殺하니라】爭權하야 治兵相攻하다 이 迎帝하야 幸其營하고 遂燒宮殿官府어늘 七月에 楊奉, 董承等이 將兵送乘輿東歸하니 乘輿居棘籬中이러라

李傕과 郭汜【뒤에 曹操가 李傕을 죽이고 三族을 멸하였으며, 郭汜는 그의 장수에게 살해당하였다.】가 권력을 다투어서 군대를 다스려 서로 공격하였다. 李傕이 황제를 맞이하여 자기 진영으로 행차하게 하고 마침내 궁전과 관부를 불태웠다. 7월에 楊奉董承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乘輿를 전송하여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乘輿가 가시울타리 속에 있었다.

孫策이 說袁術曰 家有舊恩在江東하니 願助舅之舅는 吳景이다. 】討橫江하야 橫江이 拔이어든 因投本土【綱目에 策本江東人故로 謂之本土라】하야 召募면 可得兵하리니 以佐定天下하리이다하니 이 許之하다 이 渡江轉鬪하야 所向에 皆破하니 莫敢當其鋒者라 百姓이 聞孫郞이 年雖少나 有位號일새 吳人皆謂之孫郞이라】至하고 皆失魂魄【心之精爽이라】이러니 及至에 軍士奉令하고 不敢虜掠하야 鷄犬菜茹【茹도 亦菜也라】를 一無所犯이라 民乃大悅하야 競以牛酒勞軍이러라 의 爲人이 美姿顔, 能笑語하고 性이 闊達聽受하야 善於用人하니 是以로 士民見者 莫不盡心하야 樂爲致死하니 威震江東이러라

孫策袁術을 설득하기를 “저희 집안은 江東 지방에 옛 은혜가 있으니, 원컨대 외삼촌【孫策의 외숙은 吳景이다.】을 도와 橫江을 토벌하여 橫江이 함락되거든 인하여 本土【≪資治通鑑綱目≫에 “孫策은 본래 江東 사람이므로 本土라고 일렀다.” 하였다.】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면 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袁術이 이를 허락하였다.

孫策이 揚子江을 건너 전전하며 싸워서 가는 곳마다 모두 격파하니, 감히 그의 예봉을 당해 내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은 孫郞【孫策이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爵位와 名號가 있었으므로 吳지방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모두 그를 孫郞이라 칭하였다.】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魂飛魄散【魂魄은 마음의 精靈이다.】하였는데, 孫策이 이르자 군사들이 명령을 잘 받들고 감히 노략질하지 아니하여 닭과 개와 채소【茹도 채소이다.】를 하나도 범하는 바가 없었다. 백성들이 이에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孫策은 사람됨이 얼굴이 아름답고 談笑를 잘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여서 사람을 쓰기를 잘하였다. 이 때문에 선비와 백성들 중에 그를 만나 본 자는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치니, 위엄이 江東 지방에 떨쳐졌다.

[丙子]建安元年

[丙子]建安元年이라

袁術이 攻劉備하야 以爭徐州어늘 使張飛守下邳하고 自將拒이러니 呂布【初에 騎都尉丁原이 以爲主簿하야 甚見親待러니 董卓이 誘하고 幷其兵하고 以爲騎都尉하야 誓爲父子하고 甚愛信之하다 嘗小失有隙이러니 王允謀誅할새 使爲內應하니 遂刺殺하고 與李傕等戰敗하야 投袁紹하니 袁術이 引劉備하다 〈豫州刺史〉이 勸襲下邳하고 許助軍糧한대 襲下邳하고 虜妻子及將吏家口라 收餘兵하야 與戰敗하고 降於하니 亦忿運糧不繼하야 復以爲豫州刺史하니라】襲下邳하니 張飛敗走라 降於하니 復以豫州刺史하고 는 自稱徐州牧이라하다

建安 元年(병자 196)

袁術劉備를 공격하여徐州를 다투자, 劉備張飛로 하여금 下邳를 지키게 하고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袁術을 막았는데, 呂布【처음에 騎都尉 丁原이 呂布를 主簿로 삼아서 매우 친애하고 우대하였는데, 董卓이 呂布를 유인하여 丁原을 죽이고 그 군대를 병합한 다음 呂布를 騎都尉로 삼아서 父子間이 되기로 맹세하고, 매우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일찍이 작은 잘못으로 틈이 있었는데, 王允이 董卓을 죽일 것을 모의할 적에 呂布를 시켜서 내응하게 하니, 呂布가 마침내 董卓을 찔러 죽였다. 董卓의 장수인 李傕 등과 싸워 패하고는 袁紹에게 돌아가니 袁術이 呂布를 데리고 劉備를 공격하였다. 豫州刺史 袁術이 呂布에게 下邳를 습격하도록 권하고 군량을 도울 것을 허락하였는데, 呂布가 下邳를 습격하고 劉備의 妻子 및 장수와 관리들의 家率들을 사로잡았다. 劉備가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袁術과 싸워 패하고는 呂布에게 항복하니, 呂布 또한 袁術이 군량을 계속 운반해 주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다시 劉備를 豫州刺史로 삼았다.】가 下邳를 습격하니張飛가 패하여 도망하였다. 劉備呂布에게 항복하니, 呂布가 다시 劉備를 豫州刺史로 삼고 呂布는 徐州牧이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楊奉, 暹이 奉車駕至雒陽하니 是時에 宮室이 燒盡하야 百官이 披荊棘【荊은 楚木也요 棘은 小棗叢生者라】하고 依牆壁間이러라 曹操在許하야 謀迎天子한대 衆以爲山東未定이라하니 荀彧曰 昔에 晉文公이 納周襄王에 而諸侯景(影)從【景은 讀曰影이니 言如影之從形也라 左傳에 孤偃이 言於晉文公曰 求諸侯인댄 莫如勤王이니 諸侯信之요 且大義也라하니 晉侯以左師逆王하다 王入于王城하야 以取太叔于溫하야 殺之于濕城하다 遂定霸業하니 天下服從하니라】하고 漢高祖義帝【繒之精白者라】素에 而天下歸心이니이다 自天子蒙塵【左傳註云 天子出奔을 謂之蒙塵이라하니라[頭註]言播越하야 在草莽蒙冒塵埃也라】으로 將軍이 首唱義兵이나 徒以山東擾亂으로 未遑遠赴러니 今鑾駕旋軫【軫은 車後橫木也니 旋軫은 猶言回轅이라】에 東京이 榛蕪【榛은 木叢生之貌요 蕪는 荒穢也라】라 義士는 有存本之思하고 兆民은 懷感舊之哀하니 誠因此時하야 奉主上以從人望은 大順也요 秉至公以服天下는 大略也요 扶弘義以致英俊은 大德也니 四方에 雖有逆節이나 其何能爲리잇고 乃將兵詣雒陽하야 引董昭【曹操謀臣이라】問計한대 曰 惟有移駕幸許耳라한대 曰 此는 孤之本志也라하고 遂遷都許하다

楊奉韓暹이 車駕를 받들고 雒陽에 이르니, 이때에 궁실이 불타 없어져서 백관들이 荊棘【荊은 가시나무이고, 棘은 멧대추나무로 叢生한다.】을 헤치고 담장과 벽 사이에 의지해 있었다. 曹操가 許 땅에 있으면서 天子를 맞이해 올 것을 모의하자, 사람들은 山東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荀彧은 말하기를 “옛날에 晉나라 文公이 周나라 襄王을 맞아들이자 諸侯들이 그림자처럼 따랐고,【景은 影으로 읽으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春秋左傳≫에 孤偃이 晉 文公에게 말하기를 “諸侯의 霸者가 되려고 한다면 天子의 일에 盡力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다른 諸侯들이 믿을 것이고 또 大義名分이 있습니다.” 하니, 文公이 左軍으로 襄王을 맞이하였다. 襄王이 王城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킨 太叔을 溫 땅에서 잡아 濕城에서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文公이 마침내 霸業을 정하니 천하가 복종하였다.】漢나라 高祖義帝를 위하여 喪服【縞는 비단 중에 精하고 흰 것이다.】을 입자 天下의 마음이 돌아왔습니다. 天子가 蒙塵【[釋義]≪春秋左傳≫의 註에 이르기를 “天子가 도망하여 달아나는 것을 蒙塵이라 한다.” 하였다.[頭註]蒙塵은 帝王이 播越(播遷)하여 草野에서 먼지를 뒤집어씀을 말한다.】한 뒤로 將軍께서 먼저 義兵을 제창하였으나 다만 山東이 소란하므로 멀리 달려갈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鑾駕가 멍에를 돌림【軫은 수레 뒤에 가로댄 나무이니, 旋軫은 멍에를 돌린다는 말과 같다.】에 東京이 황폐해졌습니다.【榛은 나무가 叢生하는 모양이고 蕪는 황폐함이다.】 그리하여 忠義의 선비는 근본을 보존할 생각이 있고 億兆의 백성들은 옛날을 생각하는 슬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진실로 이때를 이용하여 主上을 받들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義理에 크게 순하고, 至公無私함을 잡아 지켜 천하를 복종시킴은 큰 지략이고, 大義를 붙들어 영걸들을 招致함은 큰 德이니, 사방에 비록 반역하는 賊臣이 있으나 그들이 어찌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曹操가 이에 군대를 거느리고 雒陽에 나아가서 董昭【董昭는 曹操의 謀臣이다.】를 데려다가 계책을 물으니, 董昭가 말하기를 “오직 車駕를 옮겨 許 땅으로 감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曹操는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본뜻이다.” 하고는 마침내 許 땅으로 遷都하였다.

○ 中平【靈帝年號라】以來로 天下亂離하야 民棄農業하니 諸軍竝起에 率乏糧穀하야 無終歲之計라 飢則寇略【略은 掠通이니 取也라】하고 飽則棄餘하야 瓦解【瓦解는 言如衆瓦之解라】流離하야 無敵自破者 不可勝數러라 袁紹는 在河北에 軍人이 仰食桑椹【椹은 桑實也라】하고 袁術은 在江, 淮에 取給蒲蠃【蠃는 或作螺니 蚌屬이라】하니 民多相食하야 州里蕭條라 羽林監棗祗 請建置屯田이어늘 曹操從之하야 以爲屯田都尉하고 以騎都尉任峻으로 爲典農中郞將하야 募民屯田許下【許는 謂許州也라 許下는 洛曰洛下, 郟曰郟下之類也라】하야 得穀百萬斛이라 於是에 州郡이 例置田官하야 所在에 積穀하야 倉廩이 皆滿이라 故로 征伐四方에 無運糧之勞하야 遂能兼幷群雄하니 軍國之饒 起於祗而成於峻이러라

○ 中平【中平은 靈帝의 年號이다.】 이래로 천하가 혼란하고 분열되어 백성들이 농업을 폐기하니, 여러 군대가 아울러 일어남에 대부분 糧穀이 부족하여 한 해를 마칠 계책도 없었다. 굶주리면 노략질【略은 掠(약탈)과 통하니, 빼앗음이다.】하고 배부르면 나머지를 버려서 와해【瓦解는 기와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되고 유리하여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멸망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袁紹는 河北에 있을 때에 군사들이 〈먹을 것이 없어〉 뽕나무 열매(오디)【椹은 뽕나무 열매(오디)이다.】를 따서 먹었고 袁術은 長江과 淮河 사이에 있을 때에 蒲蠃(소라)【蠃는 혹 螺로 쓰기도 하니, 蒲蠃는 蚌蛤(조개)의 종류이다.】를 채취해 먹으니, 백성들이 대부분 서로 잡아먹어서 州里가 쓸쓸하였다. 羽林監棗祗가 屯田을 설치할 것을 청하자, 曹操가 그의 말을 따라 棗祗를 屯田都尉로 삼고 騎都尉任峻을 典農中郞將으로 삼아서 백성을 모집하여 許都 아래【許는 許州를 이른다. 許下는 洛을 洛下라 하고, 郟을 郟下라고 말하는 따위이다.】에서 屯田을 경작하게 하여 곡식 백만 斛을 얻었다. 이에 州郡에서 으레 田官(농사짓는 관원)을 두어 소재지마다 곡식을 쌓아 두어 倉廩이 모두 가득하였다. 이 때문에 曹操가 四方을 정벌할 때에 양식을 운반하는 노고가 없어 마침내 群雄들을 겸병할 수 있었으니, 군대와 국가의 풍요로움이 棗祗에게서 시작되어 任峻에게서 이루어졌다.

劉備合兵하야 得萬餘人하니 呂布惡之하야 自出兵攻敗走하야 歸曹操하니 厚遇之하고 以爲豫州牧하다

劉備가 병력을 규합하여 만여 명을 얻으니, 呂布가 이를 미워하여 스스로 군대를 내어 劉備를 공격하였다. 劉備가 패주하여曹操에게 귀의하니, 曹操가 그를 후대하고 豫州牧으로 삼았다.

[丁丑]二年

[丁丑]二年이라

春에 袁紹曹操書호되 辭語驕慢이어늘 荀彧, 郭嘉曰 今에 將討不義而力不敵하니 何如오 對曰 , 之不敵은 公所知也라 漢祖는 唯智勝項羽라 故로 雖彊이나 終爲所禽하니 今에 紹有十敗하고 公有十勝【紹繁禮多儀어늘 公體任自然하니 此道勝也요 紹以逆動이어늘 公奉順以率天下하니 此義勝也요 紹以寬濟寬이어늘 公糾之以猛하야 上下知制하니 此治勝也요 紹(內)[外]寬(外)[內]忌하야 用人而疑어늘 公外寬內明하야 用人無疑하니 此度勝也요 紹多謀少決하야 失在後事어늘 公得策輒行하야 應變無窮하니 此謀勝也요 紹高義揖遜하야 以收名譽어늘 公至心待人하야 不爲虛美하야 忠正遠見之士 皆願爲用하니 此德勝也요 紹見人飢寒이면 念形於色이나 其所不見엔 慮或不及이어늘 公雖所不見이나 慮無不周하니 此仁勝也요 紹大臣爭權하야 讒言惑亂이어늘 公御下以道하야 浸潤不行하니 此明勝也요 紹是非不可知어늘 公所是는 進之以禮하고 所不是는 正之以法하니 此文勝也요 紹好爲虛勢하야 不知兵要어늘 公以少克衆하야 用兵如神하니 此武勝也라】하니 雖彊이나 無能爲也니이다

建安 2년(정축 197)

봄에 袁紹曹操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言辭가 오만하였다. 曹操荀彧郭嘉에게 이르기를 “지금 의롭지 못한 자(袁紹)를 토벌하려 하나 힘이 대등하지 못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劉邦項羽가 대등하지 못했던 것은 公이 아시는 바입니다. 漢高祖(劉邦)는 오직 지혜로 項羽를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項羽가 비록 강하였으나 끝내 劉邦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제 袁紹는 열 가지 패배할 이유가 있고 公은 열 가지 이길 이유가 있으니,【袁紹의 열 가지 패배할 이유와 曹操의 열 가지 이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袁紹는 禮儀가 번거로운데 公은 自然에 맡겨 두니 이는 道가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逆行하는데 公은 順理를 받들어 천하를 거느리니 이는 義가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너그러움으로써 너그러움을 구제하는데 公은 엄함으로써 바로잡아서 上下가 제재할 줄 아니 이는 다스림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겉으로는 너그러우나 속으로는 시기하여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하는데 公은 겉으로 너그럽고 속으로 밝아서 사람을 씀에 의심함이 없으니 이는 度量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여 일을 뒤늦게 함에 문제가 있는데 公은 계책을 얻으면 즉시 행하여 변화에 응하여 다함이 없으니 이는 智謀가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의리가 높고 揖讓하여 명예를 거두는데 公은 지극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여 공연히 찬미하지 않아서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식견이 원대한 선비들이 모두 쓰여지기를 원하니 이는 德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사람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가엾게 여기는 생각이 낯빛에 나타나지만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혹 미치지 못하는데 公은 비록 보지 않은 것이라도 생각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仁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大臣들이 권력을 다투어서 참소하는 말로 미혹시키고 어지럽히는데 公은 아랫사람을 道로써 어거하여 浸潤(물이 젖어서 번지는 것처럼 조금씩 오래도록 함)의 참소가 행해지지 않으니 이는 밝음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는데 公은 옳게 여기는 사람은 禮로써 올려 주고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法으로써 바로잡으니 이는 文이 이기는 것이요, 袁紹는 허장성세를 좋아하여 用兵의 요점을 알지 못하는데 公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이겨서 用兵術이 神과 같으니 이는 武가 이기는 것입니다.”】袁紹가 비록 강대하나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袁術이 稱帝於壽春하다

袁術이 壽春에서 帝를 칭하였다.

○ 始에 呂布陳登하야 求徐州牧이라가 不得하다 이 還이어늘 布怒하야 拔戟斫几曰 卿父【陳珪也라 秦漢以來로 君呼臣以卿이러니 隋唐以來로 尊之則稱公이요 儕輩以下則稱卿也라】勸吾하야 叶(協)同曹操하고 絶婚公路【袁術字也라】【布以備爲豫州刺史하고 自爲徐州牧한대 術懼하야 爲子求婚하니 布許之하다 術遣使하야 以稱帝告布하고 因以迎婦하니 布遣女하다 陳珪恐合從爲難하야 乃說布曰 曹公奉迎天子하야 輔贊國政하니 將軍이 宜與協謀하야 共存大計어늘 今與術結婚이면 必受不義之名하야 將有累卵之危하리이다하니 時女已在途러니 布追還絶婚하니라】러니 今吾所求無獲하고 而卿父子竝顯重하니 但爲卿所賣耳로다 이 不爲動容하고 徐對之曰 이 見曹公言호되 養將軍은 譬如養虎하야 當飽其肉이니 不飽則將噬人이라한대 公曰不如卿言하다 譬如養鷹하야 飢卽爲用이요 飽則颺去라하니 其言이 如此라한대 布意乃解하다

○ 처음에 呂布陳登을 통하여 徐州牧이 될 것을 요구했다가 얻지 못하였다. 陳登이 돌아오자 呂布가 노하여 창을 뽑아 책상을 내리치며 말하기를 “卿의 아버지(陳珪)【卿의 아버지는 陳珪이다. 秦‧漢 이후로 군주가 신하를 부를 때에 卿이라 하였는데, 隋‧唐 이후로는 높일 경우에는 公이라 칭하고 同列 이하일 경우에는 卿이라 칭하였다.】가 나에게 권하여 曹操와 협동하고 公路(袁術)【公路는 袁術의 字이다.】와 혼인을 끊게 하였는데,【呂布가 劉備를 豫州刺史로 삼고 스스로 徐州牧이라 하자, 袁術이 두려워하여 아들을 위해 혼인할 것을 요구하니, 呂布가 이를 허락하였다. 袁術이 使者를 보내어서 帝를 칭한 사실을 呂布에게 고하고 인하여 며느리를 맞이하니, 呂布가 딸을 보냈다. 陳珪는 呂布와 袁術이 合縱하여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해서 마침내 呂布를 설득하기를 “曹公이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여 국정을 돕고 있으니, 장군이 曹公과 協謀하여 함께 큰 계책을 보존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袁術과 결혼하면 반드시 의롭지 못한 이름을 받아서 장차 累卵의 위태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때 딸이 이미 출발하여 도중에 있었는데 呂布가 쫓아가 딸을 돌아오게 하고 혼인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제 나는 구하던 바를 얻지 못하고 卿의 父子는 모두 현달하고 중하게 되었으니, 한갓 卿에게 속임을 당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陳登이 말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제가 曹公을 만나 말하기를 ‘장군(呂布를 가리킴)을 기르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물 것입니다.’라고 하자, 曹公이 말하기를 ‘卿의 말과 같지 않다.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곧 쓰임이 될 것이요, 배가 부르면 날아갈 것이다.’ 하였으니, 그의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자, 呂布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戊寅]三年

[戊寅]三年이라

曹操呂布殺之【布가 復與術通也라】하다

建安 3년(무인 198)

曹操呂布를 공격하여죽였다.【呂布가 다시 袁術과 내통하였다.】

[己卯]四年

[己卯]四年이라

袁紹公孫瓚【遼西人이라 拜降虜校尉하니 虜憚其勇하야 莫敢抗犯하고 遠竄塞外라 然恃其才力하야 不卹百姓하고 睚眦必報하며 州里善士에 名在其右者는 必以法害之하고 所在侵暴하니 百姓怨之하니라 上癸酉年에 殺劉虞하고 盡有幽州之地하니라】하야 滅之하다

建安 4년(기묘 199)

袁紹가 公孫瓚【公孫瓚은 遼西 사람이다. 降虜校尉에 제수되니, 오랑캐들이 그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거나 침범하지 못하고 멀리 변방 밖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재주와 힘을 믿고서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눈을 흘기는 작은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으며, 州里의 훌륭한 선비 중에 명망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는 반드시 법으로써 옭아매어 해치고 있는 곳마다 침해하고 포학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앞의 癸酉年條에 보면 ‘公孫瓚이 劉虞를 살해하고는 幽州의 땅을 다 소유했다.’ 하였다.】을 공격하여멸망시켰다.

○ 初에 董承【車騎將軍이니 獻帝后父라】이 稱受帝衣帶中密詔라하고 與劉備로 謀誅曹操하다 從容謂曰 今天下英雄은 惟使君與耳니 本初【袁紹字라】之徒는 不足數也라하니 方食이라가 失匕(匙)箸【匕는 匙也요 箸는 挾也라 備以操知其英雄하고 懼將圖己라 故로 驚失匕箸하니라】러니 値雷震이라 因曰 聖人云 迅雷風烈에 必變이라하니 良有以也로다 遂與承及种輯等으로 同謀러니 會에 遣備邀袁術이어늘 遂殺徐州刺史車冑하고 留關羽하야 守下邳하야 行太守事하고 身還小沛하니 郡縣이 多叛爲備하야 備衆이 數萬人이라 遣使하야 與袁紹連兵하다

[新增]尹氏曰 自曹操劫遷天子以來로 天下已非漢有라 董承이 以元舅之尊으로 親承密詔하야 與昭烈로 謀誅而不克이라 故로 昭烈在徐하야 因遂起兵이라 然前史에 未有書其討者요 獨范史【范曄은 劉宋文帝時人이니 撰東漢史라】에 載董承等受密詔誅하야 其立義頗精이라 然이나 不言昭烈之擧라 至陳壽志魏하야는 反謂董承等謀反伏誅하니 其謬妄無理가 莫甚於此러니 及其志蜀하야는 始於昭烈稱漢中王之下에 錄其與董承等同謀誅之語하니 此則實事難泯하야 不可得而曲說者也라 今朱子綱目이 於此에 特筆起義曰起兵徐州하야 討曹操者는 正所以扶三綱, 立人極하야 誅亂臣賊子於千百載之下하야 使古今大義로 無時而不明하야 要使逆亂之徒로 終無以自立於天下하니 其垂世敎也大矣라 故로 予曰綱目修而亂臣賊子懼라하노라

○ 처음에 董承【董承은 車騎將軍이니 獻帝의 后妃의 아버지이다.】이 황제(獻帝)에게서 衣帶 속에 있던 密詔를 받았다고 칭하고는 劉備와 더불어 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曹操가 조용히 劉備에게 이르기를 “이제 천하의 영웅은 오직 使君과 나뿐이니, 本初(袁紹)【本初는 袁紹의 字이다.】의 무리는 셀 것이 못 된다.” 하였다. 劉備가 막 밥을 먹다가 수저를 놓쳤는데【匕는 숟가락이고 箸는 젓가락이다. 劉備는 曹操가 자신이 영웅임을 알아보고 장차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우렛소리에 놀라 숟가락과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처럼 하여 자신이 영웅이 아님을 보인 것이다.(영웅은 이처럼 작은 일에 절대로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우레가 치니, 劉備가 인하여 말하기를 “聖人이 말씀하기를 ‘빠른 우레와 거센 바람이 있으면 반드시 낯빛을 변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하였다. 劉備는 마침내 董承, 种輯 등과 함께 曹操를 살해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마침 曹操劉備를 보내어 袁術을 맞이하게 하였다. 劉備가 마침내 徐州刺史車冑를 죽이고 關羽를 남겨 두어 下邳를 지키면서 太守의 일을 행하게 하고 자신은 小沛로 돌아가니, 郡縣들이 대부분 曹操를 배반하고劉備의 편이 되어서 劉備의 병력이 수만 명이었다. 使者를 보내어 袁紹와 군대를 연합하였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曹操가 天子를 위협하여 遷都한 이래로 천하가 이미 漢나라의 소유가 아니었다. 董承이 元舅(國舅)의 높은 신분으로 직접 密詔를 받들어 昭烈과 함께 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昭烈이 徐州에 있으면서 인하여 마침내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역사책에는 昭烈曹操를 토벌한 내용을 쓴 것이 없고, 다만 范曄의 《後漢書》【范曄은 劉宋(南朝 때 劉裕가 세운 宋나라) 文帝 때 사람이니, ≪後漢書≫를 지었다.】董承 등이 密詔를 받고 曹操를 주벌했다고 기재하여 義를 세움이 자못 정밀하였다. 그러나 昭烈曹操를 토벌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陳壽의 《三國志》에 魏나라의 일을 기록함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董承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잘못되고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는데, 蜀漢의 일을 기록함에 미쳐 처음으로 昭烈漢中王을 칭한 내용 아래에 董承 등과 함께 曹操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는 말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실제 사실을 없애기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굽혀 말한 것이다.(부득이 돌려서 말한 것이다.)

지금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하여 특별히 기록하여 義例를 세우고 ‘徐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曹操를 토벌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三綱을 扶持하고 人極(사람의 도리)을 세워서 亂臣賊子를 천백년 뒤에 토벌하여 古今의 大義로 하여금 밝혀지지 않을 때가 없어서 요컨대 逆臣과 亂臣의 무리로 하여금 끝내 천하에 설 수 없게 한 것이니, 세상에 가르침을 드리움이 크다. 그러므로 나는 《資治通鑑綱目》이 만들어짐에 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庚辰]五年

[庚辰]五年이라

欲自攻한대 諸將이 皆曰 袁紹方來어늘 而棄之東이라가 紹乘人後면 若何오 郭嘉曰 紹性遲而多疑하니 來必不速이요 新起에 衆心이 未附하니 急擊之면 必敗하리이다 師遂東하다

建安 5년(경진 200)

曹操가 직접 劉備를 공격하고자 하자, 諸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袁紹가 막 쳐들어올 터인데 그를 버리고 동쪽으로 갔다가 袁紹가 기회를 틈타 배후를 공격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며 반대하였다. 郭嘉가 말하기를 “袁紹는 성질이 느리고 의심이 많으니 오더라도 반드시 속히 오지 않을 것이요, 劉備가 새로 일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완전히 따르지 않으니 급히 공격하면 반드시 패퇴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曹操의 군대가 마침내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 冀州別駕田豐이 說袁紹曹操劉備連兵하니 未可卒解【卒은 讀曰猝이요 解는 判也라】라 公이 擧軍而襲其後면 可一往而定하리이다 辭以子疾未得行【豐이 擧杖擊地曰 嗟呼라 遭難遇之時어늘 而以嬰兒之病失其會하니 惜哉라 事去不諧矣로다】하다

○ 冀州의 別駕田豐袁紹를 설득하기를 “曹操劉備와 전쟁을 계속하니, 대번에 결판【卒은 猝로 읽고, 解는 판가름이다.】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公이 군대를 일으켜 曹操의 후미를 습격하면 한 번 가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袁紹는 아들의 병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通鑑要解]說袁紹……未得行:田豐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하기를 “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니, 안타깝다. 일이 글러 버려 이루어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曹操劉備破之하야 獲其妻子하고 進拔下邳하야 禽關羽하다 奔靑州하야 歸袁紹하니 還軍官渡【地名이니 在河南이라】하다

曹操劉備를 공격하여깨뜨려서 그 처자식을 사로잡고, 進軍하여 下邳를 함락하고關羽를 사로잡았다. 劉備가 靑州로 달아나 袁紹에게 歸附하니,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官渡【官渡는 지명이니, 河南에 있다.】로 돌아왔다.

乃議攻許【曹操迎帝하야 都許하니라】하야 進軍黎陽하고 遣其將顔良하야 攻劉延於白馬어늘 曹操北救劉延하니 顔良이 來逆戰이라 操使張遼, 關羽로 先登【猶言先軍이니 左傳注에 率先鄭兵以登許國之城이라하니라】擊之러니 望見良麾蓋【大將軍所乘戎車에 設幢麾張蓋라】하고 策馬하야 刺於萬衆之中하야 斬其首而還하니 軍이 莫能當者라 遂解白馬之圍하다

袁紹가 마침내 許都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曹操가 황제를 맞이하여 許縣에 도읍하였다.】黎陽으로 진군하고, 장수 顔良을 보내어 白馬에서 劉延을 공격하였다. 曹操가 북쪽으로 가서 劉延을 구원하니, 顔良이 와서 맞이하여 싸웠다. 曹操張遼關羽로 하여금 先鋒【先登은 先軍(先鋒)이란 말과 같으니, ≪春秋左傳≫ 注에 “鄭나라 군대에게 솔선을 보여 許나라의 城에 올라갔다.” 하였다.】이 되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關羽顔良의 지휘하는 깃발과 日傘【麾蓋는 大將軍이 타는 戎車에 幢麾를 설치하고 일산을 편 것이다.】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달려 나가 수많은 무리 가운데에서 顔良을 찔러 머리를 베고 돌아오니, 袁紹의 군사들이 맞서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白馬의 포위가 풀렸다.

○ 初에 關羽之爲人이나 而察其心神하니 無久留之意라 使張遼로 以其情問之한대 歎曰 吾極知曹公待我厚나 然이나 吾受劉將軍恩하야 誓以共死하니 不可背之라 吾終不留니 要當立效하야 以報曹公하고 乃去耳리라 言報한대 義之러라 及顔良에 拜書告辭하고 而奔劉備【時에 備與紹連兵이라】하니 左右欲追之어늘 曰 彼各爲其主니 勿追也하라하다

○ 처음에 曹操關羽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겼으나 그의 心神을 관찰해보니 오랫동안 머물 뜻이 없었다. 張遼를 시켜 그 사정을 묻자, 關羽가 탄식하기를 “曹公께서 나를 후대하신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으나 나는 劉將軍의 은덕을 입어서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으니, 그를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끝내 머물지 않을 것이니, 다만 功를 세워서 曹公에게 보답한 뒤에 비로소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張遼關羽의 말을 曹操에게 보고하니, 曹操가 의롭게 여겼다. 關羽顔良을 죽였을 때에 글을 올려 하직을 고하고 袁紹 軍中의 劉備에게 달려가니,【당시에 劉備는 袁紹와 병력을 연합하였다.】左右가 그를 추격하려 하자 曹操가 말하기를 “저는 각기 그 주인을 위하는 것이니, 쫓지 말라.” 하였다.

孫策【孫堅生四男하니 曰策, 權, 翊, 匡이라】이 病甚하니 呼하야 佩以印綬하고 謂曰 擧江東之衆하야 決機於兩陳之間하야 與天下爭衡【衡은 所以平輕重也라 爭衡은 言分爭之世에 兵力所加에 天下大勢爲之輕重也라】은 卿不如我요 擧賢任能하야 各盡其心하야 以保江東은 我不如卿이라하다 이 卒하니 張昭, 周瑜等이 謂權可與共成大業이라하야 遂委心而服事焉이러라

○ 孫策【孫堅은 네 아들을 낳았으니, 孫策‧孫權‧孫翊‧孫匡이다.】이 병이 심해지자, 孫權을 불러서 印綬를 채워 주고 이르기를 “江東의 무리를 동원하여 두 진영 사이에서 기회를 노려 천하의 영웅들과 승패를 다툼【저울대는 輕重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爭衡은 분쟁하는 세상에 兵力이 어느 한쪽에 가해지면 천하의 大勢가 이 때문에 가벼워졌다 무거워졌다 함을 말한다.】은 卿이 나만 못하고, 어진 사람을 들어 쓰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서 각각 그 마음을 다하여 江東을 보존하게 하는 것은 내가 卿만 못하다.” 하였다. 孫策이 죽으니, 張昭周瑜 등은 孫權이 함께 대업을 이룰 만하다고 여겨 마침내 마음을 바쳐 복종하고 섬겼다.

袁紹軍陽武어늘 曹操擊破之하야 盡燔其糧穀하고 殺士卒千餘人하야 皆取其鼻하야 以示軍하니 於是에 軍이 驚擾大潰라 與八百騎로 渡河走어늘 追之不及하다 의 爲人이 寬雅有局度하야 喜怒를 不形於色이나 而性이 矜愎【愎은 字彙에 自用也요 又咈也라】自高하야 短於從善이라 故로 至於敗러라

袁紹가 陽武에 주둔하자, 曹操가 그를 격파하여 糧穀을 다 불태우고 士卒 천여 명을 죽여서 그 코를 모두 베어 袁紹의 군사들에게 보이니, 이에 袁紹의 군사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크게 무너졌다. 袁紹가 800명의 騎兵과 黃河를 건너 도망하였는데, 曹操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袁紹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여 기국과 도량이 있어서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품이 교만하고 괴팍하여【愎은 ≪字彙≫에 “스스로 자신만 옳다고 하는 것이요, 또 성내는 것이다.” 하였다.】 스스로 높은 체해서 善言을 따르는 데에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실패함에 이른 것이다.

[辛巳]六年

[辛巳]六年이라

曹操自擊劉備於汝南하니 劉表【荊州刺史라】至하고 自出郊迎하야 以上賓禮待之하고 益其兵하야 使屯新野하다 在荊州數年이러니 嘗於坐에 起至厠이러니 慨然流涕어늘 怪問한대 曰 平常에 身不離鞍하야 髀【股骨也니 股外曰髀라】肉이 皆消러니 今不復騎하야 髀裏肉生이라 日月如流하야 老將至矣어늘 而功業을 不建이라 是以로 悲耳라하더라

建安 6년(신사 201)

曹操가 직접 劉備를 汝南에서 공격하니, 劉備가 劉表【劉表는 이때 荊州刺史였다.】에게 달려갔다. 劉表劉備가 왔다는 말을 듣고 직접 郊外에 나가서 맞이하여 上賓의 예로써 대우하고 병력을 보태 주어 新野에 주둔하게 하였다. 劉備가 荊州에 있은 지 몇 년이 되었는데, 한번은 劉表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측간에 갔는데 갑자기 慨然히 눈물을 흘렸다. 劉表가 괴이하게 여겨 劉備에게 묻자, 劉備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평상시에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서 넓적다리【髀는 넓적다리의 뼈이니, 다리의 바깥쪽을 髀라 한다.】의 살이 항상 적었는데,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아서 넓적다리에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늙음이 장차 이를 터인데 功業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壬午]七年

[壬午]七年이라

袁紹自軍敗로 慙憤發病하야 夏五月에 薨하다 有三子하니 , , 이라 衆이 以譚長이라하야 欲立之러니 審配【姓名이라】【托也라】紹命立尙하니 譚不得立하고 自稱將軍하야 屯黎陽하다

建安 7년(임오 202)

袁紹는 군대가 패한 뒤로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겨 병이 나서 여름 5월에 죽었다. 袁紹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袁譚袁熙袁尙이다. 사람들은 袁譚이 나이가 많다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審配【審配는 姓名이다.】袁紹의 命이라고 칭탁【矯는 칭탁(사칭)함이다.】하여 袁尙을 세우니, 袁譚이 서지 못하고 스스로 將軍이라 칭하고 黎陽에 주둔하였다.

[癸未]八年

[癸未]八年이라

袁譚, 袁尙이 治兵相攻하다 時에 曹操劉表하야 軍西平이러니 이 遣辛毗하야 詣請救어늘 群下 多以爲劉表彊하니 宜先平之요 , 은 不足憂也라하니 荀攸曰 天下方有事어늘 而劉表坐保江漢之間하니 其無四方之志를 可知矣요 袁氏는 據四州【袁紹爲大將軍하야 兼督冀, 靑, 幽, 幷四州하니라】之地하야 帶甲이 數十萬이라 使二子和睦이면 則天下之難【謂能爲曹操患也라】이 未息也리니 今及其亂而取之면 天下定矣리이다 從之하다

建安 8년(계미 203)

袁譚袁尙이 군대를 다스려 서로 공격하였다. 이때 曹操劉表를 공격하여 西平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袁譚辛毗를 보내어 曹操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曹操의 여러 부하들은 대부분 “劉表가 강성하니 마땅히 먼저 평정해야 하고, 袁譚袁尙은 족히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荀攸는 말하기를 “천하가 지금 일(전쟁)이 한창인데 劉表가 앉아서 江漢의 사이를 보존하고 있으니, 사방을 경영할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으며, 袁氏는 4州【4州는 袁紹가 大將軍이 되어서 冀州‧靑州‧幽州‧幷州의 네 州를 겸하여 맡았다.】의 땅을 점거하여 帶甲(갑옷 입은 군졸)이 수십만 명입니다. 만일 이들 두 아들이 화목한다면 천하의 患難【천하의 환난이란 曹操의 근심거리가 될 수 있음을 이른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제 그들이 싸울 때에 미쳐서 그들을 취한다면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 하였다. 曹操가 그의 말을 따랐다.

[甲申]九年

[甲申]九年이라

曹操袁尙破之하니 는 俱奔遼西하고 은 叛走南皮【滄州南皮縣은 漢屬河間國하니라】어늘 追斬之하다

建安 9년(갑신 204)

曹操袁尙을 공격하여 쳐부수니, 袁尙袁熙는 遼西로 함께 달아나고 袁譚은 배반하고 南皮【滄州의 南皮縣은 漢나라 때 河間國에 속하였다.】로 도망갔는데,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九月에 詔以操領冀州牧하다

○ 9월에 명하여 曹操를 領冀州牧으로 삼았다.

[丁亥]十二年

[丁亥]十二年이라

初에 琅邪諸葛亮이 寓居襄陽隆中【襄陽은 春秋楚邑이러니 秦兼天下하고 自漢以北爲南陽하니 今鄧州是요 自漢以南爲南郡하니 今荊州是라 襄陽은 乃〈南陽南郡〉二郡之地라 本傳註에 家于南陽鄧縣하니 號曰隆中이라】하야 每自比管仲, 樂毅하니 時人이 莫之許也로되 惟潁川徐庶崔州平【烈之子라】이 謂爲信然이러라 劉備在荊州하야 訪士於襄陽司馬徽한대 曰 儒生俗士 豈識時務리오 識時務者는 在乎俊傑하니 此間에 自有伏龍, 鳳雛니라 問爲誰오 曰 諸葛孔明【亮字라】龐士元【統字라】也니라 徐庶於新野하니 器之【物之有用者를 謂之器라하니 器之者는 重之也라】러니 諸葛孔明臥龍也니 將軍은 豈願見之乎아 曰 君與俱來하라 曰 此人은 可就見이언정 不可屈致也니 將軍이 宜枉駕顧之하라

建安 12년(정해 207)

처음에 琅邪 사람인 諸葛亮이 襄陽의 隆中【襄陽은 春秋時代 楚나라의 邑이었는데, 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하고 漢水 이북을 南陽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鄧州가 이곳이요, 漢水 이남을 南郡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荊州가 이곳이다. 襄陽은 바로 南陽과 南郡 두 郡의 땅이다.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의 註에 “諸葛亮은 南陽의 鄧縣에 거주하였으니, 隆中이라 이름한다.” 하였다.】에 우거하여 항상 자신을 管仲樂毅에게 비교하니, 세상 사람들은 허여하지 않았으나 오직 潁川의 徐庶와 崔州平【崔州平은 崔烈의 아들이다.】만은 진실로 그렇다고 말하였다.

劉備가 荊州에 있을 때에 襄陽의 司馬徽에게 훌륭한 선비를 묻자, 司馬徽가 말하기를 “儒生과 俗士가 어찌 時務를 알겠는가? 時務를 아는 것은 俊傑에게 달려 있으니, 이 지역에 진실로 伏龍鳳雛가 있다.” 하였다. 劉備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諸葛孔明(諸葛亮)【孔明은 諸葛亮의 字이다.】과 龐士元(龐統)【士元은 龐統의 字이다.】이다.” 하였다.

徐庶가 新野에서 劉備를 만나 보니 劉備는 그를 소중히 여겼다.【유용한 물건을 器라고 이르니, 器之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徐庶劉備에게 말하기를 “諸葛孔明은 臥龍(숨어 있는 용)이니, 장군은 어찌 그를 만나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劉備가 말하기를 “君이 그와 함께 오라.” 하니, 徐庶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찾아가서 볼 수는 있을지언정 굽혀서 오게 할 수는 없으니, 장군이 마땅히 枉駕하여 가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하였다.

由是詣하야 凡三往乃見하고 因屛人曰 漢室傾頹에 姦臣【謂曹操라】이 竊命하니 孤不度德量力하고 欲信(伸)大義於天下호되 而智術이 短淺이라 遂用猖蹶【蹶은 僵也니 失脚貌라】하야 至于今日이나 然志猶未已하니 君은 謂計將安出고 曰 今曹操已擁百萬之衆하야 挾天子以令諸侯하니 此는 誠不可與爭鋒이요 孫權은 據有江東하야 已歷三世【堅, 策, 權이라】에 國險而民附하고 賢能이 爲之用하니 此는 可與爲援而不可圖也라 荊州는 北據漢, 沔【禹貢荊州注曰 荊州之域은 北距南條荊山하고 南盡衡山之陽이라하니 今江陵府是라 括地志云 沔水는 出武都郡하야 東南入江이라 漢水源出梁州金牛縣東一十八里嶓冢山하니라】하고 利盡南海하며 東連吳會【吳都曰吳會니 今蘇州是라 宋陞平江府하니라[頭註]吳地니 爲荊揚交廣之都會라】하고 西通巴蜀하니 此는 用武之國이로되 而其主不能守하니 此는 殆天所以資將軍也라 益州는 險塞요 沃野千里하야 天府之土【財物所聚曰府니 言益州之地는 物産饒多하야 可備贍給이라】어늘 劉璋【焉之子也니 景帝子魯恭王之後라 焉은 以宗室로 拜中郞하고 領益州牧이러니 子璋襲位라】이 闇弱하고 張魯【卽五斗米賊이니 以鬼道惑人하야 久據漢中하니라】在北하야 民殷國富로되 而不知存恤하니 智能之士【張松法正之徒라】 思得明君이라 將軍이 旣帝室之冑【裔也라】로 信義著於四海하니 若跨有荊, 益하야 保其巖阻【巖險也라】하고 撫和戎, 越하고 結好孫權하야 內修政治하고 外觀時變이면 則霸業을 可成이요 漢室을 可興矣리이다 曰 善타하다 於是에 與情好日密하니 關羽, 張飛不悅이어늘 解之曰 孤之有孔明은 猶魚之有水也니 願諸君은 勿復言하라 , 乃止하다

[新增]尹氏曰 自三代衰, 王政廢로 士之隨世就功名者 多矣라 當漢之末하야 群雄雲擾에 凡一智一能之士 莫不乘時奮發하야 蘄【與祈通이라】以自見하니 孰謂一世人龍如孔明者 方且高臥隆中하야 抱膝長吟하야 略無意於當世하고 而又以管樂自許者哉아 向使昭烈이 不垂三顧之勤이면 則將槁死巖穴하야 與草木俱腐耳리라 及其一起하야는 則功名事業이 彪炳【彪는 虎文也라】顯著하야 不可得而泯沒하니 豈大言無當者리오 彼其擇理甚精而處己甚明하니 謂枉己면 不可以直人也라 故로 不苟合以求售하고 謂托身을 不可以非所也라 故로 不肯苟仕於僭竊하야 時乎未遇면 則高蹈丘園하고 道苟可行이면 則奮志事業이라 君臣旣合에 魚水相懽하니 則聲大義於天下하야 使興衰繼絶하야 翊扶正統之志가 昭如日星이라 然後에 簒竊之徒가 其罪始暴白而不可掩하니 是豈區區一智一能之士隨世就功名者 可同日語哉아 朱子筆之曰 劉備諸葛亮於隆中이라하시니 其與聘莘野, 訪渭濱【莘野는 伊尹이요 渭濱은 太公이라】者로 越千載如出一轍이라 嗚呼라 三代而下로 孰謂出處之正이 有如孔明者哉아 不有君子表而出之면 則孔明亦後世人物耳리니 噫라

[史略 史評]胡氏曰 三國人才之盛은 後世鮮及이라 然이나 孔明則高邁獨出하야 巍然三代之佐矣라 亞於어늘 而以自比者는 謙辭也니 才與管仲等而德則過之니라

劉備는 이로 말미암아 諸葛亮을 찾아가, 무릇 세 번을 가서야 비로소 諸葛亮을 만나 보고 인하여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漢나라 황실이 기울어짐에 姦臣(曹操)【姦臣은 曹操를 이른다.】들이 國權을 도둑질하니, 나는 자신의 德과 力量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大義를 펴고자 하나 智謀가 짧고 얕아서 마침내 좌절과 실패【蹶은 쓰러짐이니, 失足한 모양이다.】를 겪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의 뜻은 오히려 그치지 않으니, 君은 장차 어떻게 계책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하니, 諸葛亮이 대답하였다.

“이제 曹操는 이미 백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天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니 이는 진실로 더불어 銳鋒을 다툴 수 없으며, 孫權은 江東 지방을 점거하여 이미 三代【3代는 孫堅, 孫策, 孫權이다.】를 지나서 地勢가 험하고 백성들이 따르며 덕 있는 자와 유능한 자들이 쓰여지고 있으니 이는 더불어 同盟이 되어야 하고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荊州는 북쪽으로 漢水와 沔水를 점거하고【≪書經≫ 〈禹貢〉의 荊州 註에 “荊州 지역은 북으로 南條荊山에 이르고 남쪽으로 衡山의 남쪽을 다한다.” 하였으니, 지금 江陵府가 이곳이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沔水는 武都郡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양자강으로 들어간다. 漢水는 근원이 梁州 金牛縣 동쪽 18리 지점인 嶓冢山에서 나온다.” 하였다.】 남쪽으로 南海의 이익을 다 차지하며 동쪽으로 吳會【[釋義]吳都를 吳會라 하니, 지금의 蘇州가 이곳이다. 宋나라 때 平江府로 승격되었다.[頭註]吳會는 吳 지방이니, 荊州‧揚州‧交州‧廣州의 都會이다.】와 연접하고 서쪽으로 巴蜀과 통하니, 이는 武力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내려 주어 장군의 밑천으로 삼게 하려는 것인 듯합니다. 益州는 험한 요새지이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이어져 있어 天府의 땅【재물이 모이는 곳을 府라 하니, 益州 땅은 물산이 풍부하여 넉넉히 공급함에 대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인데 이곳을 다스리는 劉璋【劉璋은 劉焉의 아들이니, 景帝의 아들인 魯恭王의 후손이다. 劉焉은 宗室로서 中郞에 제수되고 領益州牧이 되었는데, 아들 劉璋이 지위를 세습하였다.】이 어리석고 무능하며, 張魯【張魯는 바로 五斗米敎의 賊이니, 귀신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오랫동안 漢中을 점거하였다.】가 북쪽에 있어 백성이 많고 나라가 부유하나 백성들을 보존하고 구휼할 줄 모르니, 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들【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는 張松과 法正의 무리이다.】이 현명한 군주를 얻을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將軍은 皇室의 후손【冑는 후예이다.】으로 信義가 四海에 드러났으니, 만약 荊州와 益州를 차지하여 산천의 험고함【巖阻는 높고 험한 것이다.】을 확보하고 戎族과 越 지방을 어루만져 화친하고 孫權과 우호를 맺어,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時變을 관찰한다면 霸業을 이룩할 수 있고 漢나라 황실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劉備가 말하기를 “좋다.” 하고, 이에 諸葛亮과 情誼가 날로 친밀해지니, 關羽張飛가 기뻐하지 않았다. 劉備는 이들에게 해명하기를 “나에게 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諸君들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니, 關羽張飛가 이에 그쳤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三代가 쇠하고 王政이 폐해짐으로부터 세상을 따라 功名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漢나라 말기를 당하여 群雄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자, 무릇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들이 때를 타고 분발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바라지【蘄는 祈와 통한다.】 않은 자가 없었으니, 한 세상의 人龍(俊傑)으로서 孔明과 같은 자가 막 隆中에 높이 누워(은거하여) 무릎을 껴안고 앉아 길게 시를 읊으면서 조금도 당세에 뜻이 없고, 또 管仲樂毅로써 자신을 허여하는 자인 줄을 그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그때 만일 昭烈諸葛亮의 草屋으로 세 번이나 찾아가지 않았다면 諸葛亮은 장차 巖穴에서 말라 죽어서 초목과 함께 썩어 없어졌을 것이다. 한 번 세상에 나옴에 미쳐서는 功名과 事業이 찬란하게【彪는 호피 무늬이다.】 드러나서 매몰될 수가 없었으니, 諸葛亮이 어찌 큰소리만 치고 부합함이 없는 자이겠는가. 저 사람은 이치를 가림이 매우 정밀하고 처신함이 매우 분명하였으니, 자기 몸을 굽히면 남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구차히 영합하여 팔리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의탁하는 것을 올바르지 않은 곳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참람하고 도둑질한 자에게 구차히 벼슬하려고 하지 아니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면 山林에 은거하고 道를 만일 행할 수 있으면 事業에 뜻을 분발하였다. 군주와 신하가 이미 부합함에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서로 기뻐하자 천하에 大義를 밝혀서 쇠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어서 正統을 도와 부지하려는 뜻이 해와 별처럼 밝았다. 그런 뒤에야 찬탈하고 도둑질한 무리들이 그 죄가 비로소 크게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었으니, 이 어찌 구구하게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가 세상을 따라 功名을 이룬 것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朱子가 쓰기를 ‘劉備諸葛亮을 隆中에서 만나 보았다.’ 하였으니, 이는 湯王伊尹을 莘野에서 초빙한 것과 文王太公望을 渭水 가로 방문한 것【[頭註]聘莘野 訪渭濱:莘野는 莘野에서 농사지은 伊尹이요, 渭濱은 渭水 가에서 낚시질한 姜太公이다.】과 천 년을 뛰어넘어 한 자취에서 나온 것과 같다. 아, 三代 이후로 出處의 올바름이 孔明과 같은 자가 있을 줄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君子가 이것을 표출하지 않았다면 孔明 또한 후세의 인물일 뿐이었을 것이니, 아! 슬프다.”

[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三國時代에 훌륭한 인재가 많음은 후세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諸葛孔明은 고매하고 특출하여 우뚝이 三代時代의 보좌였다. 그리하여 伊尹傅說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管仲樂毅로써 자신을 비유한 것은 겸사이니, 재주는 管仲과 비슷하였으나 德은 管仲을 능가하였다.”

司馬徽淸雅하야 有知人之鑑이라 同縣龐德公【統從父也라】이 素有重名하니 兄事之러라 德公이 常(嘗)謂孔明臥龍이요 士元鳳雛德操【司馬徽字라】爲水鑑이라하니 故로 德操劉備語而稱之하니라

司馬徽는 깨끗하고 고상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鑑識이 있었다. 同縣의 龐德公【德公은 龐統의 從父(伯叔父)이다.】이 평소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司馬徽가 그를 형으로 섬겼다. 龐德公이 일찍이 孔明臥龍이라 하고, 士元鳳雛라 하고, 德操(司馬徽)【德操는 司馬徽의 字이다.】水鑑이라 하였으므로 德操劉備와 말할 때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 秋七月에 曹操南擊劉表할새 會에 卒하고 子이 爲嗣러니 九月에 至新野하니 이 遂擧州降하다

○ 가을7월에 曹操가 남쪽으로 劉表를 공격할 때에 마침 劉表가 죽고 아들劉琮이 후사를 이었는데, 9월에 曹操가 新野에 이르니 劉琮이 마침내 州를 들어 曹操에게 항복하였다.

○ 時에 劉備屯樊【城名이니 在襄陽城西北五里하니라】이러니 大驚【聞劉琮降於操하니 操之在宛故也라】하야 呼部曲共議하니 或이 勸이면 荊州를 可得이라한대 劉荊州臨亡에 託我以孤遺하니 背信自濟는 吾所不爲로라 將其衆去하야 過襄陽하니 荊州人이 多歸하야 比到當陽【縣名이라】하야는 衆이 十餘萬人이요 輜重이 數千兩이라 日行十餘里하고 別遣關羽하야 乘船數百艘【艘는 音騷이니 船之總名이라】하야 使會江陵【江陵者는 禹貢荊州니 春秋楚之郢都라 三國에 吳立荊州러니 後宋爲江陵府하니라】하다 或謂曰 宜速行하야 保江陵이니이다 曰 夫濟大事인댄 必以人爲本이니 今人歸吾어늘 吾何忍棄去리오

習鑿齒【晉人이라】論曰 劉玄德【備字라】이 雖顚沛險難이나 而信義愈明하고 勢偪事危나 而言不失道하야 追景升之顧【思劉表之托孤幼라】하야 則情感三軍하고 戀赴義之士【謂人歸而不忍棄去라】하야 則甘與同敗하니 終濟大業이 不亦宜乎아

○ 이때 劉備가 樊城【樊은 城의 이름이니 襄陽城 서북쪽 5리 지점에 있다.】에 주둔해 있었는데 〈曹操가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劉備가 크게 놀란 것은 劉琮이 曹操에게 항복했다는 말을 들어서이니, 이때 曹操가 宛 땅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部曲을 불러 함께 의논하니, 혹자가 劉備에게 劉琮을 공격하면 荊州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劉備는 말하기를 “劉荊州(劉表)가 죽을 때에 나에게 그 孤兒를 부탁하였으니, 信義를 저버리고 자신의 일을 이루는 것은 내 하지 않겠다.” 하였다. 劉備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 襄陽을 지나가니, 荊州 사람들이 劉備에게 많이 귀의하여 當陽【當陽은 縣의 이름이다.】에 이름에 미쳐서는 무리가 10여만 명이었고 輜重이 수천 대였다. 하루에 십여 리를 가고, 따로 關羽를 보내어 수백 척의 배【艘는 음이 소이니, 배의 총칭이다.】를 타고서 江陵【江陵은 ≪書經≫ 〈禹貢〉의 荊州이니, 春秋時代 楚나라의 郢都이다. 三國時代에 吳나라가 荊州를 세웠는데, 뒤에 宋나라가 江陵府로 삼았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혹자가 劉備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신속히 가서 江陵을 지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劉備는 말하기를 “大事를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제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는데 내 어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 하였다.

習鑿齒【習鑿齒는 晉人이다.】가 논하였다.

“劉玄德【玄德은 劉備의 字이다.】이 비록 顚沛하고 험난하였으나 信義가 더욱 드러나고, 형세가 절박하고 사정이 위태로웠으나 말이 도리를 잃지 않았다. 景升(劉表)이 죽을 때 돌아보고 부탁한 일을 追念하여【景升이 돌아보고 부탁한 일을 추념한다는 것은 劉表가 어린 고아를 부탁하였음을 생각한 것이다.】 眞情이 三軍을 감동시켰고, 義를 따르는 선비들을 연연해하여【義를 따르는 선비들을 연연해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劉備에게 귀의하므로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함을 이른다.】 그들과 환난을 함께 함을 달게 여겼으니, 끝내 大業을 이룬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曹操以江陵에 有軍實【謂車徒器械芻糧之類라】하니 恐劉備據之라하야 乃釋輜重하고 輕軍至襄陽하야 聞已過하고 將精騎五千하고 往追之할새 一日一夜에 行三百餘里하야 及於當陽之長坂【南陽當陽縣이니 今屬荊門州하니 縣在州西北九十里라 元和志云 綠林山이 在當陽縣東南百二十里하니 卽所謂當陽之長坂也라】하니 棄妻子走하다

曹操가 江陵에 軍實(군사와 무기)【軍實은 車兵과 步卒, 器械, 꼴과 양식 따위를 이른다.】이 있었으니 劉備가 점거할까 두렵다 하여 마침내 輜重隊를 버리고 경무장한 군대로 襄陽에 이르러 劉備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曹操는 정예 기병 5천 명을 데리고 가서 추격할 때에 一晝夜 만에 300여 리를 행군하여 當陽의 長坂【當陽의 長坂은 南陽의 當陽縣으로 지금 荊門州에 속하니, 縣은 州의 서북쪽 90리 지점에 있다. ≪元和志≫에 이르기를 “綠林山이 當陽縣 동남쪽 120리 지점에 있으니, 바로 이른바 當陽의 長坂이라는 곳이다.” 하였다.】에서 따라잡으니, 劉備가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曹操進軍江陵하다

曹操가 江陵으로 進軍하였다.

○ 初에 魯肅이 聞劉表卒하고 言於孫權호되 請往說劉備하야 使撫表衆하야 共治曹操라하더니 會에 南走어늘 迎之於當陽長坂하야 謂討虜【孫權爲討虜將軍하니라】는 敬賢禮士하고 兵精糧多하니 足以立事라 今爲君計컨대 莫若遣腹心하야 自結於東이니이다 計하야 進住鄂縣之樊口【在江夏郡鄂縣하니라】하다

○ 처음에 魯肅劉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孫權에게 말하기를 “가서 劉備를 설득하여 劉表의 무리를 어루만지게 해서 함께 曹操에게 대응하자.”고 하였는데, 마침 劉備가 남쪽으로 도망왔다. 魯肅은 當陽의 長坂에서 맞이하여 劉備에게 이르기를 “孫討虜(孫權)【孫權이 討虜將軍이 되었으므로 孫討虜라 한 것이다.】는 賢者를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며 군사들이 정예하고 양식이 많으니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君을 위하여 계책을 헤아려 보건대 心腹을 보내어 스스로 江東과 동맹을 맺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劉備魯肅의 계책을 따라 나아가서 鄂縣의 樊口【樊口는 江夏郡 鄂縣에 있다.】에 주둔하였다.

曹操自江陵으로 將順江東下어늘 諸葛亮曰 事急矣라 請奉命求救於孫將軍이라하고 遂與魯肅으로 詣孫權하다 曰 海內大亂에 將軍은 起兵江東하고 劉豫州【劉備爲豫州刺史라 故云劉豫州라하니라】는 收衆漢南하야 與曹操로 竝爭天下러니 今芟夷【芟은 刈요 夷는 平이라】大難하야 略已平矣요 遂破荊州【劉表子琮이 降操하니라】하야 威震四海하니 英雄【謂劉豫州라】이 無用武之地라 故로 豫州遁逃至此하니 願將軍은 量力而處之하소서 若能以吳, 越之衆으로 與中國抗衡인댄 不如早與之絶이요 若不能인댄 何不北面而事之릿고 劉豫州何不遂事之乎아 田橫은 齊之壯士耳로되 猶守義不辱【七國時에 齊王田榮死어늘 橫自立이러니 及項羽滅에 橫懼誅하야 與其徒五百人으로 入居海島하다 漢高祖赦而召之한대 橫與其客二人으로 詣洛陽이라가 未至三十里自殺하니 帝拜二客爲都尉하고 以王禮葬하다 田橫旣葬에 二客穿其冢旁하고 皆自剄下從之어늘 帝又召其海中五百人하야 使至러니 聞橫死하고 亦皆自殺하니라】이어든 況劉豫州는 王室之冑요 英才蓋世하니 安能爲之下乎잇가 勃然曰 吾不能擧全吳之地하야 受制於人이로다 吾計決矣라 非劉豫州면 莫可以當曹操者라 然이나 豫州新敗之後에 安能抗此難乎아 曰 今戰士還者及關羽水軍精甲이 萬人이요 劉琦【江夏太守니 表子琮兄이라】合江夏【春秋時에 謂之江汭하고 漢置江夏郡하야 領鄂縣이러니 三國에 吳更名武昌하고 隋改鄂州하니라】戰士하면 亦不下萬人이라 曹操之衆이 遠來疲敝하고 聞追豫州하야 輕騎一日一夜에 行三百餘里라하니 此所謂强弩之末이 勢不能穿魯縞【繒之精白者曰縞니 曲阜之俗이 善作之하야 尤爲輕細라 故謂之魯縞라】者也라 故로 兵法에 忌之曰 必蹶上將軍【蹶은 斃也니 大將軍이 必致僵仆也라】이라하니이다 且北方之人이 不習水戰하고 又荊州之民附者는 偪兵勢耳요 非心服也니 今將軍이 誠能與豫州로 協規同力이면 破軍이 必矣요 軍敗면 則荊, 吳【荊은 謂備요 吳는 謂權이라】之勢强하고 鼎足之形成矣리이다

曹操가 江陵으로부터 장차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려 하였다. 諸葛亮劉備에게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孫將軍에게 구원을 요청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魯肅과 함께 孫權을 찾아갔다. 諸葛亮孫權을 설득하기를 “海內가 크게 어지러워 장군은 江東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劉豫州(劉備)【劉備가 豫州刺史가 되었기 때문에 劉豫州라고 이른 것이다.】는 漢水의 남쪽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曹操와 함께 천하를 다투었는데, 이제 曹操가 큰 난리를 평정【芟은 벰이요, 夷는 평정함이다.】하여 대략 이미 평정되었고, 마침내 荊州를 격파하여【荊州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劉表의 아들인 劉琮이 曹操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위엄이 四海에 진동하니, 영웅【英雄은 劉豫州(劉備)를 이른다.】이 무력을 쓸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劉豫州가 도망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힘을 헤아려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吳‧越의 병력을 가지고 중국과 맞서려 한다면 일찍 曹操와 끊어 버리는 것만 못하고,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어찌 北面하여 그를 섬기지 않습니까.” 하였다.

孫權이 말하기를 “劉豫州는 어찌하여 마침내 그를 섬기지 않는가?” 하니, 諸葛亮이 말하기를 “田橫은 齊나라의 壯士였을 뿐인데도 義를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는데,【七國時代(戰國時代)에 齊王 田榮이 죽자 田橫이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는데, 項羽가 멸망하자 田橫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그 무리 500명과 함께 海島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漢나라 高祖가 사면하고 부르자, 田橫은 그의 門客 두 사람과 함께 洛陽으로 오다가 30리 못 미친 곳에서 자살하니, 高祖는 두 문객을 제수하여 都尉로 삼고 王의 禮로 장사 지냈다. 田橫을 장례한 뒤에 두 문객은 무덤의 옆을 뚫고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어서 九泉으로 따라갔다. 高祖가 또다시 海中의 500명을 불러서 오게 하였는데, 이들은 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하물며 劉豫州는 왕실의 후손이고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을 만하니, 어찌 그의 아래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孫權이 발끈하여 말하기를 “내가 吳나라 전 지역을 들어서 남에게 제재받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劉豫州가 아니면 曹操를 당해 낼 만한 자가 없다. 그러나 劉豫州가 새로 패전한 뒤에 어떻게 이러한 난에 맞서겠는가?” 하니, 諸葛亮이 말하기를 “지금 돌아온 병사와 關羽의 수군 정예병이 만 명이고, 劉琦【劉琦는 江夏太守였으니, 劉表의 아들이고 劉琮의 형이다.】가 江夏【江夏는 春秋時代에는 江汭라 일렀고, 漢나라는 江夏郡을 설치하고 鄂縣을 거느렸는데, 三國時代에 吳나라가 武昌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隋나라는 鄂州로 고쳤다.】의 병사를 규합하면 또한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曹操의 무리는 먼 길을 오느라 피폐하고, 듣건대 劉豫州를 추격할 때에 경무장한 기병이 一晝夜에 300여 리를 행군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쇠뇌의 화살이 끝에 가면 형세가 魯나라의 얇은 비단【비단 중에 곱고 흰 것을 縞라 하니, 曲阜의 풍속이 이 비단을 잘 만들어서 특히 가볍고 가늘었기 때문에 魯縞라고 한 것이다.】도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孫子兵法》에 이를 꺼려 말하기를 ‘반드시 上將軍이 쓰러진다.’【蹶은 쓰러짐이니 급히 행군하면 大將軍이 반드시 쓰러지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북방 사람들은 水戰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荊州의 백성들이 曹操에게 歸附한 것은 군대의 위세에 핍박을 받아서일 뿐이요 마음으로 복종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將軍이 진실로 劉豫州와 계획을 같이하고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曹操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며, 曹操의 군대가 패하면 荊州와 吳【荊은 劉備를 이르고, 吳는 孫權을 이른다.】의 형세가 강해져서 三國이 솥발처럼 벌여 서는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是時에 曹操書曰 近者에 奉辭伐罪하야 旌麾南指하니 劉琮이 束手라 今治水軍八十萬衆하야 方與將軍으로 會獵於吳호리라 以示群下하니 莫不響震失色이라 長史張昭等曰 將軍大勢 可以拒者는 長江也러니 今得荊州하야 長江之險을 以與我共之矣니 不如迎之니이다 魯肅이 密言於權曰 向察衆人之議하니 專欲誤將軍이라 不足與圖大事하니 願早定大計하소서

이때 曹操孫權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근자에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죄 있는 자를 토벌해서 깃발이 남쪽을 향하니, 劉琮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였다. 이제 水軍 80만 명을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吳 지방에서 만나 싸우려 한다.” 하였다. 孫權이 이 편지를 여러 부하들에게 보이니, 목소리가 떨리고 낯빛이 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長史張昭 등은 말하기를 “장군의 大勢로 볼 때 曹操를 막을 수 있는 것은 長江이었는데, 이제 曹操가 荊州를 얻어서 長江의 험고함을 우리와 함께 나누어 가졌으니, 그를 맞이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魯肅이 은밀하게 孫權에게 말하기를 “조금 전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살펴보니, 오로지 장군을 그르치고자 합니다. 족히 큰일을 도모할 수 없으니, 큰 계책을 속히 정하소서.” 하였다.

時에 周瑜至鄱陽이라 이 勸하야 召【瑜已前受命이나 蓋行未遠이라 故로 召還也라】한대 至에 謂雖托名漢相이나 其實은 漢賊也라 將軍이 割據江東하야 兵精足用하니 當橫行天下하야 爲漢家除殘【殘은 賊也요 害也라 孟子에 賊義者를 謂之殘이라】去穢어든 況自送死 而可迎之耶잇가 請爲將軍籌之호리이다 今北土未平에 馬超, 韓遂【超가 靈帝末에 與遂로 起事於西州하여 鎭關中하니라 [通鑑要解]國誌에 超는 遂之甥姪也라】 尙在關西하야 爲後患이어늘 而舍鞍馬하고 杖舟楫【杖은 持也라 北人은 便於鞍馬하고 南人은 便於舟楫하니 言操舍長取所短也라】하야 與吳, 越爭衡하고 又今盛寒에 馬無藁草어늘 驅中國士衆하야 遠涉江, 湖之間하니 不習水土하야 必生疾病하리니 此數者는 用兵之患也라 請得精兵五萬人하야 保爲將軍破之하리이다

이때 周瑜가 鄱陽에 이르렀는데, 魯肅孫權에게 권하여 周瑜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周瑜가 이미 전에 명을 받고 길을 떠났으나 아직 멀리 가지 않았으므로 불러서 돌아오게 한 것이다.】周瑜가 이르자, 孫權에게 이르기를 “曹操가 비록 명색은 漢나라 정승이라고 칭탁하고 있으나 실제는 漢나라의 역적입니다. 將軍은 江東 지방을 할거하여 군사들이 정예로워 충분히 쓸 수 있으니, 천하에 횡행하여 漢나라를 위해 殘害하는 자들을 제거하고【殘은 상하게 함이요, 해침이다. ≪孟子≫에 “義를 해치는 자를 殘이라 이른다.” 하였다.】 더러움을 제거해야 할 터인데, 더구나 曹操가 스스로 죽으러 왔는데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將軍을 위하여 계획할 것을 청합니다. 지금 북쪽 지방이 평정되지 못하여 馬超와 韓遂【[頭註]馬超가 靈帝 말년에 韓遂와 더불어 西州에서 擧事하여 關中을 鎭撫하였다. [通鑑要解]≪三國志≫에 “馬超는 韓遂의 甥姪이다.” 하였다.】가 아직도 關西 지방에 있어 曹操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曹操가 안장 얹은 말을 버리고 배와 노에 의지하여【[頭註]操舍鞍馬 杖舟楫:杖은 잡음이다. 북쪽 지방 사람들은 안장 얹은 말(騎馬戰)을 편하게 여기고, 남쪽 지방 사람들은 배와 노(水戰)를 편하게 여기니, 曹操가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였음을 말한 것이다.】吳‧越과 다투고, 또 지금 엄동설한에 말은 짚과 마초가 없는데 中國의 군사들을 몰아서 멀리 江‧湖의 사이를 건너오니, 水土에 익숙하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 몇 가지는 用兵의 병통입니다. 제가 정예병 5만 명을 얻어서 보장하고(책임지고) 將軍을 위해 격파하겠습니다.” 하였다.

曰 老賊이 欲廢漢自立이 久矣로되 徒忌二袁【紹, 術이라】, 呂布, 劉表與孤耳러니 今數雄已滅하고 惟孤尙存하니 孤與老賊으로 勢不兩立이라 君言當擊하니 此는 天以君授孤也로다 因拔刀斫案曰 諸將吏 敢復有言當迎者면 與此案同하리라하고 因撫背曰 公瑾【瑜字라】아 卿言이 至此하니 甚合孤心이로다 五萬兵은 難卒合【卒은 急也라】이어니와 已選三萬人하니 卿與子敬【肅字也라】, 程公【程公은 謂程普라】으로 便在前發하라 孤當續發人衆하야 爲卿後援이라하고 遂以周瑜, 程普로 爲左右督하야 將兵하야 與幷力逆하고 以魯肅으로 爲贊軍【使之贊軍謀하고 因以爲官稱이라】校尉하야 助畫方略하다 劉備在樊口하야 日遣邏吏【邏는 遊偵也, 探伺也니 遊兵也라】於水次하야 候望權軍이러니 吏望見船하고 馳往白한대 乃乘單舸하고 往見하고 問曰 今拒曹公이 深爲得計니 戰卒이 有幾오 曰 三萬人이로라 曰 恨少로다 曰 此自足用이니 豫州는 但觀破之하라하고 進與遇於赤壁【王氏曰 按方輿勝覽黃州註에 引水經하야 載赤鼻山하고 齊安拾遺에 遂〈以赤鼻山〉爲赤壁山하니 其說乖繆라 蓋周瑜自柴桑으로 至武昌縣樊口하고 而後遇於赤壁하니 則赤壁은 當臨大江하야 在樊口之上이어늘 今赤鼻山은 在樊口對岸하니 何待進軍而後遇之乎아 又赤壁初戰에 操軍不利하야 引次江北하야 而後有烏林之敗하니 則烏林은 當在江之北岸이요 赤壁은 在江之南岸이어늘 今乃云赤壁在江之北이라하니 亦非也라】하다

孫權이 말하기를 “老賊(曹操)이 漢나라를 폐하고 스스로 서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다만 두 袁氏【두 袁氏는 袁紹와 袁術이다.】呂布劉表와 나를 꺼릴 뿐이었는데, 이제 영웅들이 이미 멸망하고 오직 나만 남아 있으니, 나는 老賊과 형세가 兩立할 수 없다. 그대가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다.” 하였다. 孫權은 인하여 칼을 뽑아 책상을 내리치며 말하기를 “여러 장수와 관리 중에 감히 다시 曹操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과 똑같이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周瑜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公瑾【公瑾은 周瑜의 字이다.】아! 卿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나의 마음과 매우 부합한다. 5만 명의 병력은 갑자기【卒은 갑자기이다.】 모으기 어려우나 이미 3만 명을 선발하였으니, 卿이 子敬(魯肅)【子敬은 魯肅의 字이다.】‧程公(程普)【程公은 程普를 이른다.】과 함께 앞에서 출발하라. 나는 계속하여 사람들을 징발해서 卿의 후원이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周瑜程普를 左右督으로 삼아서 병력을 거느리고 劉備와 힘을 합해 曹操를 맞아 싸우게 하고, 魯肅을 贊軍校尉【贊軍은 그로 하여금 군대의 策略을 돕게 하고, 인하여 이로써 관직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로 삼아 方略을 도와서 계획하게 하였다.

劉備는 樊口에 있으면서 날마다 巡邏하는 관리【邏는 돌아다니며 정탐하고 탐색하여 엿보는 것이니, 정탐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 없이 돌아다니는 병사이다.】를 물가에 보내어 孫權의 군대를 정탐하게 하였는데, 巡邏하는 관리가 周瑜의 배가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달려가 劉備에게 아뢰었다. 劉備가 마침내 배 한 척을 타고 가서 周瑜을 만나 보고 묻기를 “지금 曹公에게 대항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계책인데, 싸울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周瑜가 대답하기를 “3만 명입니다.” 하였다. 劉備가 말하기를 “적은 것이 한스럽다.” 하니, 周瑜가 말하기를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쓸 수 있으니, 劉豫州는 다만 이 周瑜曹操의 군대를 격파하는 것을 구경만 하십시오.” 하고 나아가서 曹操와 赤壁【王氏가 말하였다. “≪方輿勝覽≫의 黃州 註에 ≪水經≫을 인용하여 赤鼻山이라 기재하였고, ≪齊安拾遺≫에는 마침내 赤鼻山을 赤壁山이라 하였으니, 그 말이 잘못되었다. 周瑜가 柴桑으로부터 武昌縣의 樊口에 이르고 뒤에 赤壁에서 만났으니, 赤壁은 마땅히 大江에 임하여 樊口의 위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赤鼻山은 樊口의 對岸에 있으니, 어찌 進軍한 뒤에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 또 赤壁의 처음 싸움에 曹操의 군대가 이롭지 못하여 군대를 이끌고 江北에 주둔하여 뒤에 烏林의 敗戰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烏林은 마땅히 강의 北岸에 있어야 하고 赤壁은 강의 南岸에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赤壁이 강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또한 잘못이다.”】에서 만났다.

時에 軍衆이 已有疾疫하야 初一交戰에 軍不利하야 引次江北이라 部將黃蓋曰 今寇衆我寡하니 難與持久요 軍이 方連船艦하야 首尾相接하니 可燒而走也라하고 乃取蒙衝鬪艦【蒙衝은 戰船也라 所以衝突敵船이니 字與艨艟通이라 釋名에 上下重板曰艦이요 外狹而長曰艨艟이라】하야 載燥荻枯柴하고 灌油其中하고 先以書遺하야 詐云欲降이라하니 時에 東南風이 急이라 蓋以十艦으로 最著前하야 中江擧帆하고 餘船은 以次俱進하니 軍吏士 皆出營立觀하고 指言蓋降이러라 去北軍二里餘에 同時發火하니 火烈風猛하야 船往如箭이라 燒盡北船하고 延及岸上營落【落은 居也니 人所聚居曰村落이라】하니 人馬燒溺하야 死者甚衆이라 等이 率輕騎하고 繼其後하야 靁(雷)鼓【靁는 與雷同하니 去聲이니 疾擊鼓也라】大進하니 北軍이 大壞라 引兵從華容道步走어늘 劉備, 周瑜水陸竝進하야 追至南郡하다 時에 軍이 兼以饑疫死者太半【凡三分有二爲太半이요 有一爲少半이라】이라 乃留曹仁, 徐晃하야 守江陵하고 引軍北還하니 於是에 將士形勢自倍라 乃渡江屯北岸하야 與相拒하다

蘇東坡魏武長於料事而不長於料人이라 是故로 有所重發而喪其功하고 有所輕爲而至於敗라 劉備는 有蓋世之才而無應卒之機라 方其新破劉璋人未附하야 一日而四五驚하야 斬之不能禁하니 釋此時不取라가 而其後에 遂至於不敢加兵者 終其身이라 孫權은 勇而有謀하니 此不可以聲勢恐喝取也어늘 魏武不用中原之長技【卽鞍馬라】하고 而與之爭於舟楫之間하고 一日一夜에 行三百里以爭利하야 犯此二敗하야 以攻孫權이라 是以로 喪師於赤壁하야 以成吳之强이라 且夫劉備는 可以急取而不可以緩圖니 方其危疑之間하야 卷甲而趨之가 雖兵法之所忌나 可以得志요 孫權은 可以計取而不可以勢破也어늘 而欲以荊州新附之卒로 乘勝而取之하니 彼非不知其難이요 特欲僥倖於之不敢抗也니 此는 用之於新造之蜀이라야 乃可以逞이라 故로 夫魏武重發於劉備而喪其功하고 輕爲於孫權而至於敗하니 此不亦長於料事而不長於料人之過歟아

李舜臣曰 擧江東之力이면 足以抗天下之全師者는 赤壁之戰이 爲之張本也라 當漢之季하야 曹操以陰賊嶮狠之資로 潛移漢鼎이라 荊州之役에 長驅數十萬衆하야 飄忽奮迅而下江陵하니 目中에 已無吳越矣러니 尙賴江東諸將의 忠憤激烈하야 出而與劉豫州等으로 合謀倂力하야 一擧而焚之於赤壁之下하니 當此之時하야 老瞞褫魄【老瞞은 曹操小字阿瞞也라 褫魄은 褫는 奪也니 言喪其魄也라】하야 顚沛頻[瀕]死하야 義師之勝氣가 大振於東南이라 江東君相이 儻能乘此之銳하야 蹶彼之困하야 命一二驍將하야 間道㗸枚【似箸니 使士卒銜之하야 以止語也라】하야 以要其歸路하고 而周瑜輩는 以大兵躡之런들 則彼衆可盡得이요 而可生虜리라 惜夫라 不知出此也여 曹操旣遁하야 荊楚旣平하니 其意謂虎豹豺狼之屬을 旣已驅而出境이라하야 不啻便足이라 於是에 關羽周瑜雜處南郡하고 劉豫州亦駐兵公安【縣名이라】하야 聚三雄於荊州하고 而縱曹操於河南하니 則是曹操以荊州爲餌而漁天下也라 嗚呼라 以一荊州而縶三雄하야 遽至於頓輿【頓은 次也라】息轡而倒戈相攻하니 此何爲哉아 知此然後에 知赤壁之役에 所以不能遂入中原者는 非江東土綿力【綿은 弱也라】薄之罪요 而縱敵以爭荊州之罪也라 且荊州는 吳蜀之衝也라 天下有變이어든 命一上將하야 將荊州之衆하야 以向宛洛【宛은 南陽宛縣이요 洛은 洛陽也라】이면 則足以衝敵人之胸腹이니 於此而爭之 固也라 然이나 愚以爲之爭荊州는 當爭於赤壁未戰之前이요 不當爭於赤壁旣戰之後라하노라 何則고 江東之師 聯鑣竝轡하야 才(纔)過襄鄧이면 則荊州已爲筌蹄【筌은 取魚竹器요 蹄는 取兎之具니 得魚忘筌하고 得兎忘蹄라】矣어늘 奈何로 【周瑜, 呂蒙也라】之徒 眷眷於此오 自赤壁旣勝之後로 且戰且攻이라가 至荊州而遽止하야 終不肯越荊襄一步하야 以向中原이라 今日借荊州하고 明日索荊州하며 今日奪荊州하고 明日分荊州하야 六七年間에 以一荊州之故로 內自相攻하야 而中原國賊【謂曹操라】을 乃置之度外하니 此果何爲者哉아

이때 曹操의 군사들이 이미 疫病을 앓고 있어서 처음 한 번 교전했을 때에 曹操의 군대가 불리하였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강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周瑜의 部將黃蓋가 말하기를 “이제 敵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더불어 持久戰을 하기 어렵고, 曹操의 군대는 막 艦船을 연결시켜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있으니 불을 놓고 도망할 만하다.” 하고, 마침내 蒙衝의 戰艦【蒙衝은 戰船이다. 적의 선박에 충돌하는 배이니, 글자가 艨艟와 통한다. ≪釋名≫에 “위아래에 두꺼운 판자가 있는 것을 艦이라 하고, 밖이 좁고 긴 것을 艨艟이라 한다.” 하였다.】을 가져다가 마른 갈대와 마른 나무를 가득 실은 다음 그 가운데 기름을 붓고는 曹操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 東南風이 거세게 불자, 黃蓋가 10척의 전함을 가장 前面에 배치한 다음 강 복판에서 닻을 들어 올리고 나머지 배들은 차례로 함께 나아가니, 曹操 軍中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구경하고 손가락질하며 ‘黃蓋가 항복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北軍(江北의 曹操 군대)과 2里 남짓 떨어졌을 때 동시에 불을 놓으니, 불이 맹렬하고 바람이 세차서 배가 쏜살같이 갔다. 북쪽의 戰船들을 모두 불태우고 江岸 위에 있는 진영과 群落【落은 거처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村落이라 한다.】에까지 뻗치니, 사람과 말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周瑜 등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우레처럼 북을 치며【靁는 雷와 같으니, 去聲이니, 靁鼓는 북을 빠르게 치는 것이다.】 크게 전진하니, 北軍이 크게 무너졌다. 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華容道를 따라 徒步로 도망하자, 劉備周瑜가 水陸으로 함께 전진하여 曹操를 추격해서 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曹操의 군사들은 饑餓와 疫病까지 겹쳐서 죽은 자가 太半【무릇 3분의 2를 太半이라 하고, 3분의 1을 少半이라 한다.】이었다. 曹操는 마침내 曹仁徐晃을 남겨 두어 江陵을 지키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가니, 이에 孫權劉備 장병들의 形勢가 저절로 倍加되었다. 周瑜는 마침내 강을 건너 北岸에 주둔해서 曹仁과 서로 대치하였다.

蘇東坡(蘇軾)가 말하였다.

“魏武帝(曹操)는 일을 헤아리는 데는 뛰어났으나 사람을 헤아리는 데는 뛰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신중하게 대응하여 功을 잃은 경우가 있고, 가볍게 행동하여 실패에 이른 경우가 있다.

劉備는 세상을 뒤덮을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별안간에 대응하는 機智는 없었다. 劉備가 처음 劉璋을 격파했을 때에 蜀 지방 사람들이 따르지 아니하여 하루에도 네댓 차례씩 놀라서 〈지키는 장수들이〉 斬刑을 가하여 진압해도 안정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曹操는 이때 내버려 두고 취하지 않다가 그 뒤에 마침내 감히 군대를 내어 공격하지 못해서 죽을 때까지 그러하였다.

그리고 孫權은 용맹하고 智謀가 있었으니 이는 聲勢와 恐喝로 취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魏武帝는 中原의 長技인 騎兵【長技는 바로 鞍馬(騎兵)를 가리킨다.】을 사용하지 않고 배와 노를 사용한 水戰으로 다투었으며 一晝夜 만에 300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실수를 범하고孫權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赤壁大戰에서 군대를 잃어 吳나라의 강성함을 이루어 준 것이다.

劉備는 급히 취해야 하고 늦게 도모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할 때를 당해서 갑옷을 벗고 급히 달려갔어야 하니, 이는 비록 병법에서 꺼리는 것이지만 魏武帝가 이 계책을 썼으면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孫權은 계책으로 취할 수는 있어도 세력으로 격파할 수는 없는데, 魏武帝가 荊州의 새로 歸附한 군사들을 가지고 승세를 타 孫權을 취하고자 하였으니, 저 魏武帝가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孫權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기를 요행으로 바랐던 것이니, 이 계책은 새로 만들어진 蜀漢(劉備)에 썼어야 비로소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므로 魏武帝劉備에게는 신중하게 대응하여 功을 잃었고 孫權에게는 가볍게 행동하여 실패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일을 헤아리는 데는 뛰어나나 사람을 헤아리는 데에는 뛰어나지 못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李舜臣이 말하였다.

“江東 지방의 병력을 다 동원하였으면 충분히 온 천하의 군대에게 맞설 수 있음은 赤壁大戰이 그 張本이 된다. 漢나라 말기를 당하여 曹操는 음흉하고 사나운 자품으로 漢나라의 國統을 몰래 차지하려 하였다. 荊州의 싸움에 수십만의 군대를 몰아서 폭풍처럼 빨리 江陵으로 내려가니, 吳越 지방은 이미 眼中에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江東의 장수들이 忠憤心의 격렬함을 힘입어 출동하여 劉豫州 등과 계책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서 일거에 曹操의 군대를 赤壁江 아래에서 불태웠으니, 이때를 당하여 老瞞(曹操)은 魂飛魄散하여【老瞞은 曹操의 어릴 때의 字가 阿瞞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褫는 빼앗음이니, 褫魄은 넋을 잃음을 말한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義兵의 勝氣가 東南地方에 크게 떨쳐졌다.

江東(吳)의 군주와 정승이 만일 이 銳氣를 틈타 저의 곤궁함을 쓰러뜨려서 한두 명의 용맹한 장수에게 명하여 샛길로 가되 군사들에게 재갈【枚는 젓가락과 비슷하니, 병졸에게 이것을 물려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을 물려 은밀히 출동하여 曹操가 돌아가는 길을 차단하게 하고, 周瑜 등은 大軍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들 저 曹操의 무리를 다 잡을 수 있었을 것이며 曹操를 생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孫權劉備가 이렇게 할 줄 모른 것이 애석하다.

曹操가 이미 도망하여 荊楚 지방이 평안해지니, 그들의 마음에 호랑이와 표범과 승냥이와 이리의 무리를 이미 몰아내어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고 여겨서 곧바로 만족할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 關羽周瑜는 南郡에 뒤섞여 있었고 劉豫州 또한 公安【公安은 縣의 이름이다.】에 군대를 주둔하여 荊州에 세 영웅이 몰려 있었고 河南에다가 曹操를 풀어 주었으니, 이는 曹操가 荊州를 가지고 미끼를 삼아 천하를 낚은 것이다. 아! 한 荊州를 가지고 세 영웅을 옭아매어서 별안간 수레를 멈추고【頓은 주둔함이다.】 고삐를 쉬게 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 서로 공격함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짓인가. 이것을 안 뒤에 赤壁의 싸움에 마침내 中原으로 쳐들어가지 못한 것은 江東 지방이 국토가 작고 힘이 약한【綿은 약함이다.】 죄가 아니요, 孫權劉豫州가 賊을 풀어 주고서 荊州를 다툰 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荊州는 吳와 蜀의 요충지이다. 천하에 변란이 있어 한 上將軍에게 명하여 荊州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宛縣과 洛陽【宛은 南陽의 宛縣이고, 洛은 洛陽이다.】으로 향하게 한다면 충분히 적(曹操)의 心腹을 찌를 수 있으니, 孫權劉備가 이때에 다툰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생각건대 孫權劉備가 荊州를 다툰 것은 赤壁에서 싸우기 전에 다투었어야 하고, 赤壁에서 싸운 뒤에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어째서인가? 江東의 군대가 재갈을 연결하고 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겨우 襄陽과 鄧州를 지나가기만 하면 荊州는 이미 통발과 올가미가 되어 쓸모없는 것이 되는데,【筌은 물고기를 잡는 대나무 그릇(통발)이고 蹄는 토끼를 잡는 기구(올가미)이니,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려야 하고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어버려야 한다.】 어찌하여 周瑜와 呂蒙【周呂는 周瑜와 呂蒙이다.】의 무리는 이곳을 연연해했단 말인가. 赤壁에서 이미 승리한 뒤로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공격하다가도 荊州에 이르면 즉시 그쳐서 끝내 荊州와 襄陽을 한 걸음이라도 넘어가서 中原으로 향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今日에는 荊州를 빌려 주었다가 明日에는 荊州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今日에는 荊州를 빼앗았다가 明日에는 荊州를 나누어 주어, 6, 7년 사이에 한 荊州 때문에 안으로 자기들끼리 공격하고 中原의 國賊인 曹操【國賊은 曹操를 이른다.】를 마침내 度外에 버려두었으니, 마침내 과연 무엇하는 짓이란 말인가.”

十二月에 劉備劉琦하야 爲荊州刺史하고 引兵南徇【略也라】하니 武陵, 長沙, 桂陽, 零陵四郡이 皆降之하다

12월에 劉備가 表文을 올려 劉琦를 荊州刺史로 삼고 군대를 이끌어 남쪽으로 순행【徇은 경략함이다.】하니, 武陵‧長沙‧桂陽‧零陵 네 郡이 모두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