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九 晉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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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紀

烈宗孝武皇帝

烈宗孝武皇帝 名曜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烈宗孝武皇帝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烈宗孝武皇帝는 이름이 司馬曜이고 자가 昌明이니, 簡文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4년이요, 壽가 35세이다.

[癸酉]寧康元年

[癸酉]寧康元年이라 〈秦建元九年이라〉

二月에 大司馬이 來朝어늘 詔吏部尙書謝安과 侍中王坦之하야 迎于新亭하다 是時에 都下人情이 恟恟【恟은 音胸이니 懼也라】하야 或云欲誅王, 謝하고 因移晉室이라하니 坦之는 甚懼호되 安은 神色不變하고 曰 晉祚存亡이 決於此行이라하니라 이 旣至에 百官이 拜於道側이어늘 이 大陳兵衛하고 延見朝士하니 有位望者 皆戰慴【慴은 與懾同하니 懼也라】失色이라 坦之는 流汗沾衣하고 倒執手版【手版은 笏也라】호되 安은 從容就席하야 笑語移日이러라 郗超常爲溫謀主라 安이 與坦之見溫할새 이 使超臥帳中【安謂溫曰 安聞諸侯有道면 守在四隣이라하니 明公은 何須壁後置人耶아하니 溫笑曰 不能不爾라하고 命撤之하니라】하야 聽其言이러니 風動帳開어늘 安笑曰 郗生은 可謂入幕之賓矣로다 時에 天子幼弱하고 外有彊臣호되 安與坦之 盡忠輔衛하야 卒安晉室하니라

寧康 元年(계유 373) - 秦나라 建元 9년이다. -

2월에 大司馬桓溫이 조회 오자, 황제가 吏部尙書謝安과 侍中王坦之에게 명하여 新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都城의 민심이 흉흉【恟은 音이 흉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桓溫王坦之謝安을 죽이고 인하여 晉나라 황실을 차지하고자 한다.”고 하니, 王坦之는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謝安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晉나라 운명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桓溫이 이르자 백관들이 길가에서 절하였는데, 桓溫이 호위하는 병사들을 대단히 많이 진열하고 조정의 관원들을 만나니, 지위와 명망 있는 자들이 모두들 두려워 벌벌 떨며【慴은 懾과 같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색이 되었다. 이에 王坦之는 땀이 흘러 옷을 적셨으며 手版(笏)을 거꾸로 쥐었는데,【手版은 笏이다.】謝安은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서 桓溫과 한참 동안 웃으며 말하였다.

郗超가 항상 桓溫의 主要 參謀 노릇을 하였다. 謝安王坦之와 함께 桓溫을 만날 때에 桓溫郗超를 시켜 장막 안에 누워서【謝安이 桓溫에게 이르기를 “제가 들으니 ‘諸侯에게 道가 있으면 지키는 것이 사방의 이웃 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明公은 어찌 굳이 벽 뒤에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溫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벽 뒤의 郗超를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말을 엿듣게 하였는데, 바람에 날려 장막이 걷히는 바람에 탄로가 나자 謝安이 웃으며 말하기를 “郗生이야말로 入幕賓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때 天子는 幼弱하고 밖에는 강대한 신하가 있었으나 謝安王坦之와 함께 충성을 다해 보필하고 호위해서 끝내 晉나라 황실을 편안하게 하였다.

○ 三月에 이 有疾하야 還姑孰하다 이 以世子熙才弱이라하야 使弟沖으로 領其衆하고 俄頃에 薨하다 沖이 稱溫遺命하고 以少子玄爲嗣하니 時에 方五歲라 襲封南郡公하다 이 旣代溫居任하야 盡忠王室이라 或이 勸沖誅除時望하고 專執時權이로되 이 不從하다

○ 3월에 桓溫이 병이 나서姑孰으로 돌아갔다. 桓溫이 세자桓熙가 재주가 부족하다 해서 자신의 아우인 桓沖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얼마 후에 桓溫이 죽었다. 桓沖桓溫의 遺命이라 칭하고 桓溫의 어린 아들인 桓玄을 후계자로 삼으니, 이때 桓玄의 나이가 5세였는데 南郡公의 봉작을 계승하였다. 桓沖이 이미 桓溫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게 되자,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혹자가 桓沖에게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혼자서 당시의 大權을 장악하라고 권하였으나 桓沖이 따르지 않았다.

○ 秦兵이 入寇梁, 益하고 遂取成都하다

○ 秦나라 군대가 梁州와 益州로 쳐들어와 침략하고 마침내 成都를 점령하였다.

[甲戌]二年

[甲戌]二年이라 〈秦建元十年이라〉

二月에 詔謝安하야 摠中書하다 安이 好聲律하야 朞功之慘【謂有周朞, 大功, 小功之服이라】에 不廢絲竹하니 士大夫效之하야 遂以成俗이라 王坦之 屢以書苦諫之曰 天下之寶【禮法爲天下之寶라】를 當爲天下惜之라호되 安이 不能從이러라

寧康 2년(갑술 374) - 秦나라 建元 10년이다 -

2월에 謝安에게 명하여 中書省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謝安이 聲律를 좋아하여 朞年服과 大功‧小功의 喪【朞功之慘은 朞年과 大功 9월, 小功 5월의 服이 있음을 이른다.】에도 관현악을 폐하지 않으니, 士大夫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 王坦之가 자주 편지로 간절히 간하기를 “〈禮法은 천하의 보물이니〉 천하의 보물【禮法이 천하의 보물이다.】을 마땅히 천하를 위해 아껴야 한다.” 하였으나 謝安이 따르지 못하였다.

[乙亥]三年

[乙亥]三年이라 〈秦建元十一年이라〉

六月에 秦淸河武侯王猛이 寢疾【寢은 浸也, 臥也라】하야 上疏曰 伏惟陛下는 威烈震乎八荒하고 聲敎【風聲敎化也니 振聲於此而遠者聞焉故로 謂之聲이요 軌範于此而遠者效焉故로 謂之敎라】光乎六合하야 九州百郡에 十居其七이라 平燕定蜀【平燕은 在庚午年이요 定蜀은 在癸酉年이라】을 有如拾芥【草芥之橫在地上者를 俯而拾之니 言易而必得也라】하니이다 夫善作者 不必善成하고 善始者 不必善終이라 是以로 古先哲王이 知功業之不易하고 戰戰兢兢【戰戰은 恐懼貌요 兢兢은 音京이니 戒愼貌라】하야 如臨深谷하니 伏惟陛下 追蹤前聖하시면 天下幸甚이리이다 이 覽之悲慟이러라

寧康 3년(을해 375) - 秦나라 建元 11년이다 -

6월에 秦나라 淸河武侯王猛이 병이 중해지자,【寢은 점점 더해지는 것이요, 눕는 것이다.】상소하기를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엄과 공렬이 八方의 먼 곳에까지 떨쳐지고 聲威와 敎化【聲敎는 風聲과 敎化이니, 여기에서 소리를 울리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들으므로 이를 일러 聲이라 하고, 여기에서 본보기가 되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본받으므로 이를 일러 敎라 한다.】가 천지와 사방에 빛나서 九州의 백 개 郡 가운데 10분의 7을 차지하였으며, 燕나라를 평정하고 蜀 지방을 평정하기【燕나라를 평정한 것은 庚午年條(370)에 있고, 蜀 지방을 평정한 것은 癸酉年條(373)에 있다.】를 땅 위의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하셨습니다.【拾芥는 땅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지푸라기를 허리를 굽혀 줍는 것이니, 쉬워서 반드시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創業을 잘한 자가 반드시 守成을 잘하지는 못하고, 시작을 잘한 자가 반드시 끝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명철한 王들은 功業을 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깊은 골짝에 임하듯이 전전긍긍【戰戰은 두려워하는 모양이고 兢兢은 音이 경(긍)이니, 경계하고 삼가는 모양이다.】한 것이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예전의 聖明한 王을 뒤따르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이것을 보고 비통해하였다.

○ 七月에 이 親至猛第하야 視疾하고 訪以後事한대 曰 晉雖僻處江南이나 然正朔相承【正者는 歲之首也요 朔者는 說文에 月一日也라】하고 上下安和하니 臣沒之後에 願勿以晉爲圖하시고 鮮卑, 西羌【西羌은 謂姚萇也니 其後에 秦地果爲二族所據하니라】은 我之仇敵이라 終爲人患하리니 宜漸除之하소서 言終而卒하니 이 謂太子宏曰 天不欲使吾平壹六合耶아 何奪吾景略【王猛字라】之速也오하니라

○ 7월에 苻堅이 친히 王猛의 집에 이르러서 병을 살펴보고 차후의 일을 물었는데, 王猛이 답하기를 “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江南에 있으나 正朔(正統)이 서로 이어지고【正은 한 해의 처음이요, 朔은 ≪說文解字≫에 “매월 1일이다.” 하였다.】 상하가 편안하고 화목하니 바라건대 신이 죽은 뒤에 晉나라를 도모하지 마시고, 鮮卑와 西羌【西羌은 姚萇을 이르니, 그 뒤에 秦나라 지역이 과연 鮮卑族과 羌族 두 종족에게 점거당하였다.】은 우리의 원수이고 적이어서 끝내 우리의 폐해가 될 것이니 마땅히 점차 제거하소서.”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苻堅이 太子苻宏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나로 하여금 六合(천하)을 통일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우리 景略(王猛)【景略은 王猛의 字이다.】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丙子]太元元年

[丙子]太元元年이라 〈秦建元十二年이라 ○ 是歲에 涼, 代皆亡하니 僭國一이라〉

五月에 涼公張天錫【玄靚叔父也라 涼州弑其君祚하고 立玄靚爲涼王이러니 天錫이 弑其君玄靚而自立이라 玄靚은 曜靈弟也라】이 荒於酒色【荒은 無厭也라】하야 不親庶務하니 人情이 憤怨이라 秦王이 遣苟萇, 姚萇하야 將兵滅之하니 涼州郡縣이 悉降하다

太元 元年(병자 376) - 秦나라 建元 12년이다. ○ 이해에 涼과 代가 모두 망하니, 僭國이 하나이다.-

5월에 涼公 張天錫【張天錫은 張玄靚의 叔父이다. 涼州 사람이 군주 張祚를 시해하고 張玄靚을 세워 涼王으로 삼았는데, 張天錫이 그 군주 張玄靚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하였다. 張玄靚은 張曜靈의 아우이다.】이 酒色에 빠져【荒은 만족함이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분해 하고 원망하였다. 秦王苻堅苟萇姚萇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하게 하니, 涼州의 군현이 모두 항복하였다.

○ 十月에 秦王이 遣唐公洛【綱目作行唐公洛이니 行唐은 縣名이라】하야 將兵十萬하야 擊代한대 代王什翼犍이 奔陰山之北하니 部衆이 逃潰하야 國中이 大亂이라 其孫珪【珪는 拓跋珪니 是爲元魏의 道武라】尙幼러니 珪母賀氏【東部大人賀野干之女라】 以珪走依賀訥【野干子라】이어늘 이 分代民하야 爲二部하고 使劉庫仁【衛辰之族이니 什翼犍之甥也라】, 劉衛辰으로 統之하다

○ 10월에 秦王苻堅唐公 苻洛【‘唐公洛’은 ≪資治通鑑綱目≫에 ‘行唐公洛’으로 되어 있으니, 行唐은 縣 이름이다.】을 보내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代를 공격하게 하니, 代王拓跋什翼犍이 陰山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部衆이 도망하고 궤멸되어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의 손자 拓跋珪【珪는 拓跋珪이니, 이가 바로 元魏(北魏)의 道武帝이다.】는 아직 어렸는데, 拓跋珪의 어머니 賀氏【賀氏는 東部大人 賀野干의 딸이다.】拓跋珪를 데리고 도망하여 賀訥【賀訥은 賀野干의 아들이다.】에게 의지하였다. 苻堅이 代나라의 백성을 나누어 두 部로 만들고 劉庫仁【劉庫仁은 匈奴인 劉衛辰의 일족이니, 拓跋什翼犍의 조카이다.】劉衛辰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丁丑]二年

[丁丑]二年이라 〈秦建元十三年이라〉

是時에 朝廷이 方以秦寇爲憂하야 詔求文武良將可以鎭禦北方者어늘 謝安이 以兄子玄으로 應詔하니 郗超聞之【初에 中書郞郗超 自以其父愔位遇 應在謝安之右어늘 而優遊散地하야 常憤悒하야 形於辭色하야 由是로 與謝氏有隙이라 雖是有隙之間이나 以其明故로 如是而稱也라】하고 歎曰 安之明으로 乃能違衆擧親하니 玄之才 足以不負所擧라하더라

太元 2년(정축 377) - 秦나라 建元 13년이다. -

이때에 막 조정이 秦나라의 침략을 우려하여 황제가 詔命을 내려 북방을 진무하고 방어할 만한 文武 겸비한 훌륭한 장수를 구하게 하였다. 謝安이 형의 아들謝玄으로 詔命에 응하니, 郗超가 이 말을 듣고【처음에 中書郞 郗超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 郗愔의 지위와 대우가 마땅히 謝安의 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부친이 閑散職에 정체되어 있다 하여 항상 분해 하고 원망하여 말과 안색에 드러나서 이로 인해 謝氏와 틈이 있었다. 비록 틈이 있는 사이였으나 謝安이 현명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한 것이다.】 감탄하기를 “謝安의 현명함으로 마침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어기고 친척을 등용하였으니, 謝玄의 재주가 자신을 천거한 謝安을 저버리지 않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己卯]太元四年

[己卯]太元四年이라 〈秦建元十五年이라〉

謝安이 爲宰相에 秦人이 屢入寇하니 邊兵失利하야 衆心危懼라 이 每鎭之以和靜하고 其爲政에 務擧大綱하고 不爲小察하니 時人이 比安於王導而謂其文雅【儒雅閒雅라】過之라하더라

太元 4年(기묘 379) - 秦나라 建元 15년이다. -

謝安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秦나라 사람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침략하였는데, 변방의 병사들이 승리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謝安이 매번 화평함과 고요함으로 사람들을 진정시켰으며 정사를 할 적에 큰 綱領을 행하기를 힘쓰고 작은 일을 살피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謝安王導에게 견주되 그 文雅【우아하고 단아한 것이다.】王導보다 낫다고 하였다.

[壬午]七年

[壬午]七年이라 〈秦建元十八年이라〉

秦王이 會群臣于太極殿하고 議曰 自吾承業으로 垂三十載【垂는 幾也라】에 四方略定호되 唯東南一隅 未霑王化하니 今略計吾士卒컨대 可得九十七萬이라 吾欲自將以討之하노니 何如오 權翼【尙書左僕射라 昔에 紂爲無道나 三仁在朝일새 武王猶爲之旋師하니 今晉雖微弱云云也라】曰 晉雖微弱이나 未有大惡하고 謝安, 桓沖은 皆江表偉人으로 君臣輯睦하니 未可圖也니이다 石越曰 今福德이 在吳【漢天文志曰 歲星所在之國은 不可伐이요 可以伐人이니라 索隱曰 歲星所在엔 其國有福이라 故曰福德이라[頭註]石越曰 今者에 歲鎭守斗라하니 歲는 木星이요 鎭은 土星이요 斗는 南斗라 斗, 牛, 女는 吳, 越, 揚州分이라 [通鑑要解]石越은 時太子左衛率也라】하니 伐之면 必有天殃이요 且彼據長江之險하고 民爲之用하니 殆未可伐也니이다 曰 今以吾之衆으로 投鞭於江이라도 足斷其流어든 又何險之足恃乎아 且築室道旁이면 無時可成이니 吾當內斷於心爾로라 陽平公融曰 今伐晉이 有三難하니 天道不順이 一也요 晉國無釁이 二也요 我數戰兵疲하야 民有畏敵之心이 三也라 晉未可滅이 昭然甚明하니 今勞師大擧면 恐無萬全之功일까하노이다 且臣之所憂는 不止於此라 陛下寵育鮮卑, 羌, 羯【羯은 胡戎別號也라】하야 布滿畿甸【畿는 天子環內地方千里요 甸은 夏書의 五百里註에 曰甸之言은 治也라】하니 此屬은 皆我之深仇어늘 太子獨與弱卒數萬으로 留守京師하시니 臣은 懼有不虞之變【不虞는 猶不測也라】이 生於腹心肘腋【肘는 臂節也요 腋은 胳也니 在肘後라】이면 不可悔也니이다 王景略【景略은 猛字라】은 一時英傑이라 陛下常比之諸葛武侯하시니 獨不記其臨沒之言乎잇가 堅不聽이어늘 融又諫曰 國家는 本戎狄【苻氏는 氐也니 西南夷種이라】也라 正朔朝會不歸하고 江東은 雖微弱僅存이나 然中華正統이니 天意必不絶之리이다 堅曰 帝王曆數【帝王相繼之次第가 猶歲時氣節之先後라】 豈有常耶아 汝不達變通爾로다

太元 7년(임오 382) - 秦나라 建元 18년이다. -

秦王苻堅이 여러 신하들을 太極殿에 모이게 하고 의논하기를 “내가 基業을 받든 뒤로 거의 30년 만에【垂는 거의이다.】 사방이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 한 귀퉁이가 아직도 帝王의 敎化를 입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 士卒들을 대략 계산해 보건대 97만 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직접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權翼【權翼은 尙書左僕射이다. 權翼이 말하기를 “옛날에 紂가 無道하였으나 三仁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武王이 오히려 그 때문에 군대를 되돌려 돌아왔으니, 지금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라고 하였다.】은 아뢰기를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큰 죄악이 있지 않고, 謝安桓沖은 모두 江南 지방의 偉人으로 군주와 신하가 화목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고, 石越은 아뢰기를 “지금 福德星(歲星)이 吳지방에 있으니【[釋義]≪漢書≫ 〈天文志〉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나라는 정벌할 수 없고, 그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는 있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곳은 그 나라에 福이 있으므로 福德星이라 한다.” 하였다.[頭註]石越이 말하기를 “지금 歲(木星)와 鎭(土星)이 斗를 지킨다.” 하였으니, 歲는 木星이고 鎭은 土星이고 斗는 南斗이다. 斗‧牛‧女는 吳‧越과 揚州의 分野이다. [通鑑要解]石越은 이때 太子左衛率이었다.】 그곳을 치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요, 또 저들은 長江의 험고한 지형을 점거하였고 백성들이 잘 쓰여지고 있으니, 아마도 정벌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로 볼 때 채찍만 강에 던져 넣어도 충분히 흐르는 강물을 차단시킬 수가 있는데, 또 어찌 험고함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길가에 집을 지으면 異說이 많아 완성될 날이 없을 것이니, 내 마음속에 결단하겠다.” 하였다.

陽平公苻融이 말하기를 “지금 晉나라를 정벌함에 세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天道가 따라주지 않음이 첫 번째요, 晉나라에 잘못이 없음이 두 번째요, 우리가 자주 싸워 군사들이 피로해서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晉나라를 멸할 수 없음이 昭然하여 매우 분명하니, 이제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크게 동원한다면 萬全의 공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우려하는 것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鮮卑族과 羌族, 羯族【羯은 胡戎의 別號이다.】을 총애하고 기르셔서 畿甸(都城)【畿는 天子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 안의 땅이 사방 千里인 것이요, 甸은 ≪書經≫ 〈夏書〉의 五百里 註에 “甸이란 말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였다.】에 두루 가득합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데 太子가 홀로 약한 군졸 수만 명을 데리고 남아서 都城을 지킬 것이니, 신은 예상하지 못한 변란【不虞는 不測과 같다.】이 腹心(긴요한 곳)과 팔꿈치와 겨드랑이(매우 가까운 곳)【肘는 팔 관절이고, 腋은 겨드랑이이니 팔뚝의 뒤에 있다.】에서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까 두렵습니다. 王景略【景略은 王猛의 字이다.】은 한때의 영웅호걸입니다. 폐하께서 항상 그를 諸葛武侯에게 비견하곤 하셨으니, 어찌하여 그가 죽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하였으나 苻堅이 듣지 않았다.

苻融이 또 간언하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戎狄【苻氏는 氐族이니, 서남지방 오랑캐 종족이다.】이 건립한 나라로서 正朔과 朝會가 돌아오지 않았고, 江東은 비록 미약하여 겨우 보존되었으나 中華의 정통이니, 하늘의 뜻이 반드시 끊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帝王의 운수【曆數는 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가 歲時의 節氣의 先後와 같은 것이다.】가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너는 변통할 줄을 모른다.” 하였다.

[癸未]八年

[癸未]八年이라 〈秦建元十九年이라〉

七月에 秦王이 下詔하야 大擧【群臣이 皆不可라호되 獨冠軍將軍慕容垂勸故로 大擧也라】入寇하다

太元 8년(계미 383) - 秦나라 建元 19년이다. -

7월에 秦王苻堅이 詔命을 내려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冠軍將軍 慕容垂만이 권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크게 동원한 것이다.】 쳐들어왔다.

○ 八月에 이 遣陽平公하야 督後將軍張蚝【有前將軍, 後將軍이라 蚝는 七志切이라】와 冠軍將軍慕容垂等의 步騎二十五萬하야 爲前鋒하고 以兗州刺史姚萇으로 爲龍驤將軍하다 慕容楷【楷는 音皆라】, 慕容紹 言於慕容垂曰 主上이 驕矜已甚하니 叔父建中興之業이 在此行也니이다 曰 然하다 非汝면 誰與成之리오 甲子에 이 發長安戎卒六十餘萬과 騎二十七萬하니 旗鼓相望하야 前後千里러라 詔以謝石, 謝玄으로 帥衆八萬하야 拒之할새 秦兵이 至潁口하니 兵旣盛하야 都下震恐이라 이 入問計於謝安한대 이 夷然【夷는 坦也, 平也니 言坦然無異平日也라】答曰 已別有旨라하고 旣而寂然이라 이 不敢復言하고 乃令張玄重請한대 遂命駕하야 出遊山墅【墅는 田廬也라】하니 親朋이 畢集이라 與으로 圍碁賭墅할새 安碁常劣於이러니 是日에 懼하야 便爲敵手而又不勝【敵手는 謂下子爭行劫하야 智算相敵也라 玄意不在碁故로 不能勝安이라】하다 이 遂遊陟【陟은 登也니 遊山登高也라】이라가 至夜乃還하다

○ 8월에 苻堅陽平公苻融을 보내어 後將軍 張蚝【前將軍과 後將軍이 있다. 蚝는 음이 七志切(치)이다.】와 冠軍將軍慕容垂 등의 步兵 및 騎兵 25만 명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부대로 삼고, 兗州刺史姚萇을 龍驤將軍으로 삼았다. 慕容楷【楷는 音이 개(해)이다.】慕容紹慕容垂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교만하고 자랑함이 너무 심하니, 叔父께서 中興의 基業을 세우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희들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중흥의 기업을 이루겠는가.” 하였다.

甲子日(8일)에 苻堅이 長安에서 병졸 60여만 명과 기병 27만 명을 동원하니,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이어져 앞뒤로 천 리에 뻗쳤다. 황제가 명하여 謝石謝玄에게 8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막게 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潁口에 이르니 군대의 기세가 이미 대단하여 都下가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謝玄이 들어가 謝安에게 계책을 묻자, 謝安은 태연히【夷는 평탄하고 평온함이니, 평탄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따로 지시한 것이 있다.” 하고는 이윽고 잠잠하였다. 謝玄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張玄으로 하여금 거듭 묻게 하자, 謝安이 마침내 멍에 하도록 명하여 산장【墅는 농막이다.】에 나가서 노니,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謝安謝玄과 바둑을 둘 적에 산장을 걸고 내기를 하였는데, 謝安의 바둑 실력이 항상 謝玄만 못하였으나 이날은 謝玄謝安을 두려워해서 곧 막상막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였다.【敵手는 바둑을 둘 때에 서로 뺏기고 빼앗아서 지략과 계산이 서로 대등함을 이른다. 謝玄의 뜻이 바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謝安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謝安이 마침내 산에 올라가 놀다가【陟은 올라감이니, 산에 놀러 가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桓沖【彛之子요 溫之弟也라 時爲都督諸江, 荊等州諸軍事, 儀同三司라】이 深以根本爲憂하야 遣精銳三千하야 入援京師어늘 謝安이 固却之曰 朝廷이 處分已定하고 兵甲無闕하니 西藩宜留以爲防이라한대 이 對佐吏歎曰 謝安石【安字也라】이 有廟堂之量이나 不閑將略【閑은 習也라】이라 今大敵垂至어늘 方遊談不暇하고 遣諸不經事少年하야 拒之하고 衆又寡弱하니 天下事를 已可知라 吾其左袵【袵은 衣衿也니 夷狄之俗은 左其衣袵이라】矣로다

○ 桓沖【桓沖은 桓彛의 아들이고 桓溫의 아우이다. 이 당시 都督江州荊州等諸軍事‧儀同三公이었다.】이 근본(都城)을 우려하여 정예병 3천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京師의 호위를 원조하게 하자, 謝安이 굳이 퇴각시키며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고 군대가 부족하지 않으니, 서쪽 변경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막아야 한다.” 하였다. 桓沖이 보좌하는 관리들에게 한탄하기를 “謝安石【安石은 謝安의 字이다.】은 재상의 器量이 있으나 장수의 韜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다.【閑은 익숙함이다.】 이제 큰 적이 쳐들어오는데 산에 올라가 놀고 벗들과 閑談을 하기에 겨를이 없으며,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연소한 사람을 보내어 적을 막게 하며, 병력이 또 적고 약하니, 천하의 일을 이미 알 만하다. 나는 아마도 오랑캐가 되어 左袵【袵은 옷깃이니, 夷狄의 풍속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을 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 十月에 秦陽平公等이 攻壽陽하야 癸酉에 克之하고 將軍梁成【秦將이라】等이 帥衆五萬하야 屯于洛澗하고 柵淮以遏東兵하니 謝石, 謝玄等이 去洛澗二十五里而軍하고 憚不敢進이라 融於壽陽에 遣尙書朱序【序先爲梁州刺史러니 爲秦所執하니라】하야 來說謝石等하야 使降이러니 私謂等曰 若秦百萬之衆이 盡至면 誠難與爲敵이라 今乘諸軍未集하야 宜速擊之니 若敗其前鋒이면 則彼已奪氣하야 可遂破也리이다 이 從言하다

○ 10월에 秦나라 陽平公苻融 등이 壽陽을 공격하여 癸酉日(18일)에 함락시키고, 장군 梁成【梁成은 秦나라 장수이다.】 등이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洛澗에 주둔하고 淮水에 성책을 쌓아 동쪽 군대를 막으니, 謝石謝玄 등이 洛澗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는 梁成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苻融이 壽陽에서 尙書 朱序【朱序는 이전에 梁州刺史로 있었는데, 秦나라에 사로잡혀 갔다.】를 보내어 晉나라 군영에 와서 謝石 등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는데, 朱序가 은밀히 謝石 등에게 이르기를 “만약 秦나라의 백만 대군이 모두 몰려오면 진실로 상대하여 싸우기 어렵다. 이제 여러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를 틈타서 공격해야 하니, 만약 그 선봉부대를 패퇴시키면 저들은 이미 기가 꺾여서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謝石朱序의 말을 따랐다.

○ 十一月에 謝玄이 遣劉牢之【廣陵相이라】하야 帥精兵五千하야 趣(趨)洛澗할새 未至十里에 梁成이 阻澗爲陳(陣)【阻는 恃也니 恃澗自固也라 陳은 讀曰陣이라】以待之어늘 牢之直前渡水하야 擊大破之하야 斬하고 又分兵斷其歸津하니 秦步騎崩潰하야 爭赴淮水하야 士卒死者 萬五千人이라 執秦揚州刺史王顯等하고 盡收其器械軍資하다 於是에 謝石等諸軍이 水陸繼進하다 秦王이 與陽平公으로 登壽陽城하야 望之할새 見晉兵部陳嚴整하고 又望見八公山草木하고 皆以爲晉兵【王氏曰 八公山은 在安豐壽春縣北四里라 乃苻堅伐晉할새 望山上草木하니 皆人形이 卽此라 [通鑑要解]八公은 在今壽春縣北四里하니라 世傳漢淮南王安이 好神仙이러니 忽有八公鬚眉皓素하여 詣門求見云云이라하니 煩不引이라】이라 顧謂曰 此亦勍敵【勍은 强也라】이니 何謂弱也오 憮然【失意貌라】始有懼色이러라 秦兵이 逼淝水而陳하니 晉兵이 不得渡라 謝玄이 遣使하야 謂陽平公曰 君이 懸軍深入하야 而置陳逼水하니 此乃持久之計요 非欲速戰者也로다 若移陳少却하야 使晉兵得渡하야 以決勝負면 不亦善乎아 秦諸將이 皆曰 我衆彼寡하니 不如遏之하야 使不得上하야 可以萬全이리이다 曰 但引兵少却하야 使之半渡하고 我以鐵騎로 蹙而殺之면 蔑不勝矣라한대 亦以爲然하야 遂麾兵使却하니 秦兵이 遂退하야 不可復止라 謝玄, 謝琰, 桓伊等이 引兵渡水擊之하니 이 馳騎略陳【略은 行也니 巡行曰略이라】하야 欲以帥退者라가 馬倒하야 爲晉兵所殺하니 秦兵이 遂潰라 等이 乘勝追擊하야 至于靑岡【在安豐軍하니 去壽春三十里라】하니 秦兵이 大敗하야 自相蹈藉【藉는 與踖同하니 踐也라】而死者 蔽野塞川하고 其走者는 聞風聲鶴唳하고 皆以爲晉兵且至라하야 晝夜不敢息하야 草行露宿하고 重以飢凍하야 死者什에 七八이러라 初에 秦兵小却이어늘 朱序在陳後하야 呼曰 秦兵이 敗矣라하니 衆遂大奔이라 因與張天錫【丙子年에 降秦이라】으로 皆來奔하다 은 中流矢【中은 傷也라 飛矢曰流矢라】하고 單騎走하다

李舜臣曰 蜀漢之中은 古未有興王之迹也어늘 而漢高祖起自南鄭하야 以取關中하고 樊鄧之間은 古未有中興之迹也어늘 而漢光武起自南陽하야 以定河北이라 而況江東之地는 首起西陵하고 尾接東海하니 其兵之犀銳【犀는 堅也니 古以犀兕皮爲鎧라 故로 謂堅曰犀라】는 足以破秦兵於鉅鹿【謂項羽라】하고 其財之富厚는 足以復唐祚於靈武【唐肅宗이니 見四十二卷丙申年이라】라 然이나 自吳以下로 國於江東者 凡六朝【吳, 東晉, 宋, 齊, 梁, 陳이라】周瑜有赤壁之勝하고 祖逖【晉元帝丁丑年에 流民張平樊雅가 各聚衆在譙하야 爲塢主러니 逖攻降之하니라】有譙城之勝하고 褚裒有彭城之勝하고 桓溫有灞上之勝하고 謝玄有淝水之勝하고 劉裕【在三十卷乙卯年이라】有關中之勝하고 到彦之【在三十一卷庚午年이라】有淮南之勝하고 蕭衍【齊明帝니 乙亥年에 與魏戰勝之라】有義陽之勝하고 陳慶之【見三十二卷己酉年이라】有洛陽之勝하고 吳明徹【見三十三卷癸巳年이라】有淮南之勝하니 此十者는 皆起江東之師하야 以取勝中原이니 其剋敵制勝之功이 亦奇矣라 然終不能渡江而北定中原하야 以一天下하니 此는 非江東之地 便於守而不便於攻이요 蓋江東之人이 知有江東而不知有天下也일새라 向使六朝君臣이 素有幷呑之志하야 先定規模於未勝之前하고 而進乘機會於旣勝之後런들 則千乘萬騎로 起自江東而入中原이면 蓋可以鞭撻四夷하고 坐制六合이니 誰謂江東之地 土綿力薄【綿은 弱也라】하야 而不足以擧天下也哉아 惟其平居暇日에 初未嘗有進取之心하야 而預爲必復中原之計라 是以로 一旦欲乘機會로되 而倉皇失措【倉皇은 一作倉黃하니 失措貌라 詩註에 忽遽貌라하니라】하야 竟不能成混一之功이라 且苻堅養兵於秦中이 幾三十年이라 一旦에 驅之南下하야 欲以幷呑吳會할새 顧謂大江之流하고 投鞭可斷이라하니 志則誇矣나 而兵始一交에 全師潰散하야 相與枕藉於淝水之中하야 晉之君臣이 嘗試睥睨【邪視也라】一世하니 此乾坤何等時耶아 挽吳江之水하야 以洗關河嵩洛之腥穢【謂五胡라 】가 其不在玆時耶아 奈何徘徊於兗豫之間하야 竟不能過關踰鄴하야 以圖混一하고 而乃今日運米於枋頭하야 以濟苻丕之飢【在下甲申年이라】하고 明日率軍於關陝하야 以爲苻堅之助오 夫淮淝百萬은 志欲何爲오 幸其天敗하야 粮盡力困하야 不奮兵以勦除之하고 乃擧國之大讐하야 付之相忘之域하니 豈不深可惜哉아

○ 11월에 謝玄이 劉牢之【劉牢之는 廣陵의 相이다.】를 보내어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洛澗으로 달려갈 적에 洛澗에서 10리 못 미친 곳에 이르러서 梁成이 澗水를 견고하다고 믿어 陣을 치고【阻는 믿는 것이니, 澗水를 믿어 스스로 견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陳은 陣으로 읽는다.】 대비하였다. 劉牢之가 곧장 전진하여 澗水를 건너가서 梁成을 공격하여대파하고梁成을 목 벤 다음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돌아가는 나루터를 차단하니, 秦나라의 보병과 기병이 궤멸되어 다투어 淮水에 뛰어들어 죽은 士卒이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 秦나라의 揚州刺史王顯 등을 사로잡고 그 병기와 군수물자를 전부 몰수하였다. 이에 謝石 등의 諸軍이 水陸으로 계속하여 전진하였다. 秦王苻堅陽平公苻融과 壽陽城에 올라가 이것을 바라보니 晉나라 군대의 陣列이 모두 엄정하였으며, 또 멀리서 八公山의 초목을 바라보고 모두 晉나라 병사라고 여겼다.【[釋義]望見八公山草木 皆以爲晉兵:[釋義]王氏가 말하였다. “八公山은 安豐軍 壽春縣 북쪽 4리에 있다.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할 때에 산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通鑑要解]八公山은 지금 壽春縣 북쪽 4里 되는 지점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漢나라 淮南王인 劉安이 神仙을 좋아하였는데, 홀연히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센 八公이 갑자기 문에 찾아와 만나 보기를 구하였으므로 八公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번거로우므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苻融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또한 강적【勍은 강함이다.】인데, 어찌 약하다고 이른단 말인가.” 하고, 낙심하여【憮然은 실의한 모양이다.】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秦나라 군대가 淝水에 바짝 붙여서 陣을 치니, 晉나라 군대가 건너갈 수가 없었다. 謝玄이 사자를 보내어 陽平公苻融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懸軍(원군 없이 고립된 군대)을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淝水에 바짝 붙여서 진을 치니, 이는 바로 지구전을 하려는 계책이고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영을 옮겨 조금 뒤로 물러나서 晉나라 군대가 물을 건너가게 하여 승부를 결단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秦나라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군대가 많고 저들은 군대가 적으니, 막아서 올라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萬全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苻堅이 말하기를 “다만 군대를 이끌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저들이 반쯤 건너왔을 때에 우리가 鐵騎兵을 몰고 들어가서 저들을 죽인다면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는데, 苻融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여 다시는 후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謝玄, 謝琰, 桓伊 등이 군대를 이끌고 물을 건너와 공격하였다. 苻融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軍陣을 순행【略은 돌아다니는 것이니, 巡行하는 것을 略이라 한다.】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다가 말이 쓰러져서 晉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궤멸되었다. 謝玄 등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靑岡【靑岡은 安豐軍에 있으니, 壽春縣에서 30리 떨어져 있다.】에 이르니, 秦軍이 대패하여 자기들끼리 밟히고 깔려서【藉는 踖과 같으니, 밟는 것이다.】 죽은 시체가 들을 뒤덮고 냇물을 막았다. 도망하던 자들은 바람 소리와 학 울음소리를 듣고도 모두 晉나라 군대가 이르는 것이라고 여겨서 밤낮으로 도망하여 감히 쉬지 못하였다. 이들은 인적이 드문 풀숲 길로 걸어가며 露地에서 잠을 잔데다 기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秦나라 군대가 조금 퇴각했을 때에 朱序가 진영의 뒤에 있다가 고함치기를 “秦나라 군대가 패했다.” 하니, 秦나라 군사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다. 朱序가 인하여 張天錫【張天錫은 丙子年(376)에 秦나라에 항복하였다.】과 함께 모두 晉나라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苻堅은 빗나간 화살을 맞고【中은 상함이다. 빗나간 화살을 流矢라 한다.】 單騎로 도망하였다.

李舜臣이 말하였다.

“蜀漢 지방은 옛날에 왕업을 일으킨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高祖가 南鄭에서 일어나 關中 지방을 취하였고, 樊城과 鄧城 사이는 옛날에 중흥한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光武帝가 南陽에서 일어나 河北 지방을 평정하였다. 더구나 江東 지역은 머리는 西陵에서 시작되고 꼬리는 東海와 접하였으니, 병기의 단단함과 예리함【犀는 견고함이니, 옛날에 犀兕(무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견고한 것을 일러 犀라고 한다.】은 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하였다는 것은 項羽를 이른다.】할 수 있었고 재물의 풍족함은 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한 것은 唐나라 肅宗이니, 42권 丙申年條(756)에 보인다.】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吳나라 이후로 江東에 나라를 정한 것이 모두 여섯 왕조【六朝는 吳‧東晉‧宋‧齊‧梁‧陳이다.】였는데, 周瑜는 赤壁의 승리가 있었고, 祖逖【晉나라 元帝 丁丑年(317)에 流民인 張平과 樊雅가 각각 譙郡에서 무리를 모아 塢主가 되었는데, 祖逖이 공격하여 항복시켰다.】은 譙城의 승리가 있었고, 褚裒는 彭城의 승리가 있었고, 桓溫은 灞上의 승리가 있었고, 謝玄은 淝水의 승리가 있었고, 劉裕【劉裕는 해설이 30권 乙卯年條(415)에 보인다.】는 關中의 승리가 있었고, 到彦之【到彦之는 해설이 31권 庚午年條(430)에 보인다.】는 淮南의 승리가 있었고, 蕭衍【蕭衍은 齊(南齊)나라 明帝이니, 乙亥年(495)에 魏(北魏)와 싸워 승리하였다.】義陽의 승리가 있었고, 陳慶之【陳慶之는 해설이 32권 己酉年條(529)에 보인다.】는 洛陽의 승리가 있었고, 吳明徹【吳明徹은 해설이 33권 癸巳年條(573)에 보인다.】은 淮南의 승리가 있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江東의 군대를 일으켜 中原에서 승리를 취한 것이니, 적을 이기고 승리한 공이 또한 기이하다. 그러나 끝내 양자강을 건너가서 북쪽으로 中原을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江東 지역이 지키기에 편리하고 공격하기에 불편해서가 아니라, 江東 사람들은 江東이 있는 줄만 알고 천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六朝의 君臣들이 평소에 中原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서 승리하기 전에 規模를 미리 정하고 승리한 뒤에 나아가 기회를 탔더라면,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을 가지고 江東에서 일어나 中原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이렇게 했더라면 사방의 오랑캐들을 채찍질하고 가만히 앉아서 六合을 제어하였을 것이다. 누가 江東 지역이 영토가 좁고 힘이 부족해서【綿은 약함이다.】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다만 평소 한가로운 날에 처음부터 진취할 마음을 갖고 반드시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기회를 타려고 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倉皇은 혹 倉黃으로도 쓰니,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詩經≫ 註에 “몹시 급한 모양이다.” 하였다.】 끝내 천하통일의 공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또 苻堅은 秦나라에서 군대를 기른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하루아침에 이들을 몰아 南下하여 吳會 지방을 병탄하고자 할 때에 큰 강(揚子江)이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는 채찍만 던져 넣어도 강물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뜻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처음 한번 교전하자마자 全軍이 궤멸되어 흩어져서 淝水 가운데에 시신이 낭자하여 晉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한 세상을 얕보게【睥睨는 곁눈질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乾坤은 어떠한 때란 말인가. 吳江의 물을 끌어다가 函谷關 등의 관문과 黃河와 嵩山과 洛陽을 차지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들【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는 五胡를 이른다.】을 씻어 버리는 것이 어찌하여 이때에 있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兗州와 豫州 사이에서 배회하여 끝내 關中을 지나가고 鄴城을 넘어가서 통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마침내 오늘 枋頭에서 쌀을 운반하여 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하고【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한 것은 뒤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 다음날은 關陝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苻堅을 도왔단 말인가. 淮水와 淝水의 백만 군대는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하늘이 패망하게 하여 양식이 다하고 힘이 곤궁해진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군대를 떨쳐 섬멸하지 않고, 마침내 나라의 큰 원수를 들어서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곳에 내버려 두었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은가.

是時에 諸軍이 皆潰호되 惟慕容垂【己巳年에 奔秦하니 乃以爲冠軍將軍이라】所將三萬人이 獨全이어늘 以千餘騎赴之하다 世子寶言於秦王이 兵敗하야 委身於我하니 是는 天借之以復燕祚니 此時를 不可失也니이다 曰 汝言이 是也라 然이나 彼以赤心으로 投命於我어늘 若之何害之리오 若【苻氏는 氐也라 運은 運祚也라】이 必窮이면 吾當懷集關東하야 以復先業耳리라 의 親黨이 多勸垂殺호되 垂皆不從하고 悉以兵授하다

이때 諸軍이 모두 궤멸되었으나 오직 慕容垂【慕容垂가 己巳年(369)에 秦나라로 달아나니, 秦나라에서 마침내 慕容垂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가 거느리던 3만 명만은 온전하였는데, 苻堅이 천여 騎를 데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世子慕容寶慕容垂에게 말하기를 “秦王苻堅이 전투에 패하여 우리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빌려 주어 燕나라의 국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네 말이 옳으나 저가 진심으로 자신의 命運을 아낌없이 나에게 던졌는데, 어떻게 그를 해친단 말인가. 만약 우리 氐族의 운명【苻氏는 氐族이다. 運은 國運이다.】이 반드시 곤궁하다면 나는 關東 지방을 安集시켜서 先祖의 기업을 회복할 뿐이다.” 하였다. 慕容垂의 친당들이 많이 慕容垂에게 苻堅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이를 따르지 않고 병력을 다 苻堅에게 주었다.

謝安이 得驛書하야 知秦兵已敗하다 時에 方與客圍碁러니 攝書【攝은 收也라】置牀上하고 了無喜色하고 圍碁如故어늘 客問之한대 徐答曰 小兒輩 遂已破賊이라하더니 旣罷에 還內過戶限할새 不覺屐齒之折【喜甚也라 屐은 木屐이라】이러라

謝安이 역참에서 띄운 승전보를 받고서 秦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았다. 이때 막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공문서를 거두어【攝은 거두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전처럼 바둑을 두었다. 손님이 묻자, 謝安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아이들이 이미 적을 격파했습니다.” 하였는데, 바둑이 끝난 뒤 內室로 돌아가면서 문턱을 넘어갈 적에 흥분하여 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기뻐한 것이다. 屐은 나막신이다.】

秦王이 收集離散하야 比至洛陽하니 衆이 十餘萬이요 百官儀物軍容이 粗備러라

秦王苻堅이 흩어진 병력을 수합하여 洛陽에 이르니, 무리가 십여만이었고 百官과 儀仗으로 쓰는 器物과 군사 장비가 대강 갖추어졌다.

慕容垂言於曰 北鄙之民이 聞王師不利하고 輕相扇動하니 臣이 請奉詔書하야 以鎭慰安集之하고 因過謁陵廟하노이다 이 許之하다 權翼이 諫曰 國兵이 新破에 四方이 皆有離心하니 宜徵集名將하야 置之京師하야 以固根本이니이다 는 勇略過人하고 世豪東夏하니 顧以避禍而來언정 其心이 豈止欲作冠軍而已哉잇가 譬如養鷹하야 飢則附人이나 每聞風飆【飆는 畢遙切이니 疾風也라】之起하면 常有凌霄【霄는 雲霄也라】之志하니 正宜謹其絛籠【絛는 他刀切이라 絲繩也니 所以紲鷹이요 籠은 所以畜鳥也라】이니 豈可解縱하야 任其所欲哉잇가 曰 卿言이 是也라 然이나 朕已許之하니 匹夫도 猶不食言이어든 況萬乘乎아 天命이 有廢興하니 固非智力所能移也니라 曰 陛下重小信而輕社稷하시니 臣은 見其往而不返이니 關東之亂이 自此始矣리이다 이 不聽하다

慕容垂苻堅에게 말하기를 “북쪽 변방의 백성들이 王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경솔하게 서로 선동하니, 신이 청컨대 조서를 받들고 먼저 가서 그들을 鎭撫하고 安集시키고, 인하여 지나는 길에 陵廟를 배알할까 합니다.” 하니, 苻堅이 이를 허락하였다.

權翼이 간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격파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방이 모두 조정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명장들을 불러 모아서 京師에 安置하여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慕容垂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대대로 東夏 지방에서 호걸이라고 일컬어졌으니, 다만 화를 피하기 위하여 秦나라에 왔을지언정 그의 心算이 어찌 冠軍將軍이 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굶주릴 때에는 사람을 따르나 매번 회오리바람【飆는 畢遙切(표)이니, 빠른 바람이다.】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하늘 높이 날려는【霄는 하늘이다.】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끈과 새장【絛는 他刀切(도)이다. 실끈이니 매를 묶어 매는 것이요, 籠(새장)은 새를 기르는 것이다.】을 조심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니, 어찌 풀어놓아서 그가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이미 허락하였으니, 匹夫도 오히려 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萬乘의 천자에 있어서랴. 天命은 폐하고 흥함이 있으니, 진실로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權翼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작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社稷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은 그가 가는 것만 볼뿐 돌아오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關東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苻堅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 秦乞伏國仁【隴西鮮卑人이라】이 反於隴西하니 衆至十餘萬이러라

○ 秦나라 乞伏國仁【乞伏國仁은 隴西의 鮮卑族 사람이다.】이 隴西에서 배반하니, 무리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慕容垂至安陽하니 長樂公【苻堅之庶長子니 時鎭鄴이라】 館垂於鄴西어늘 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丁零翟斌【見上卷하니 仕秦爲中郞이라】이 起兵叛이어늘 秦王이 驛書하야 使垂將兵討之하다

慕容垂安陽에 이르니, 長樂公 苻丕【長樂公 苻丕는 苻堅의 庶長子이니, 이때 鄴城에 鎭駐하였다.】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자,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燕나라의 옛 基業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丁零族 翟斌【丁零 翟斌은 上卷에 보이니, 秦나라에 벼슬하여 中郞이 되었다.】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秦王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甲申]九年

[甲申]九年이라 〈秦建元二十年이라 ○ 燕世祖慕容垂元年이라 ○ 後秦太祖姚萇白雀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新大國二니 凡三僭國이라〉

正月에 慕容垂自稱燕王하고 遣田山如鄴하야 告慕容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고 以弟으로 爲車騎大將軍하야 封范陽王하고 帥衆二十餘萬하야 長驅向鄴하다 慕容農이 起兵於列人【列人은 城名이라 垂至安陽하니 丕身自迎之하다 趙秋勸垂於座取丕하고 因據鄴起兵이로되 垂不從하다 丕謀襲擊垂러니 姜讓이 諫曰 垂叛形未著라한대 丕從之하고 館垂於鄴西하니 垂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翟斌叛이어늘 秦王堅이 驛書로 使垂討翟斌한대 石越이 言於丕曰 垂有興復舊業之志어늘 今復資之以兵이면 此爲虎傅(附)翼이니 請除之하소서 丕曰 淮南之敗에 垂侍衛乘輿하니 此功을 不可忘也니라 越退曰 公父子好爲小仁하고 不顧大計하니 終當爲人擒耳니라 丕遣苻飛龍하야 帥氐騎一千하야 爲之副하야 密計謀垂하다 垂聞丕, 飛龍謀하고 怒曰 吾盡忠於苻氏어늘 而彼專欲圖吾父子하니 雖欲已나 得乎아하고 乃募兵八千하야 夜襲飛龍殺之하고 遣人告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니 農等이 遂將數十騎하고 微服出鄴하야 奔列人하니라】하니 衆至數萬이라 長樂公 使石越로 將兵討之러니 이 大敗秦兵하고 斬越하니 於是에 人情騷動하고 盜賊群起러라 垂至鄴하니 이 引兵會之하야 進攻鄴이어늘 退守中城하다

太元 9년(갑신 384) - 秦나라 建元 20년이다. ○ 燕(後燕)世祖慕容垂의 元年이다. ○ 後秦太祖姚萇의 白雀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새로운 大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正月에 慕容垂燕王이라 자칭하고田山을 보내어 鄴城에 가서 慕容農 등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고, 아우 慕容德을 車騎大將軍으로 삼아范陽王에 봉하고 20여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기세를 몰아 鄴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慕容農이 列人城에서 군대를 일으키니,【列人은 城의 이름이다. 慕容垂가 安陽에 이르니, 苻丕가 몸소 그를 맞이하였다. 趙秋가 慕容垂에게 그 자리에서 苻丕를 죽이고 인하여 鄴城을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따르지 않았다. 苻丕가 慕容垂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姜讓이 간하기를 “慕容垂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자, 苻丕가 그 말을 따르고 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니,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함께 燕나라의 국통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翟斌이 배반하자, 秦王 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翟斌을 토벌하게 하였다. 石越이 苻丕에게 말하기를 “慕容垂가 옛 基業을 흥복하려는 뜻이 있는데, 이제 다시 군대를 빌려 준다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입니다. 제거하십시오.” 하니, 苻丕가 말하기를 “淮南의 패전에 慕容垂가 乘輿를 호위하였으니, 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石越이 물러 나와 말하기를 “公의 父子가 작은 仁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으니, 끝내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苻丕가 苻飛龍을 보내어 氐族의 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慕容垂의 副將이 되게 하여 은밀히 慕容垂를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苻丕와 苻飛龍이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慕容垂가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苻氏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父子를 도모하고자 하니, 내 비록 그만두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8천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밤에 苻飛龍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慕容農 등에게 알려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니, 慕容農 등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微服 차림으로 鄴城을 나와 列人城으로 달려 왔다.】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長樂公苻丕石越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慕容農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慕容農이 秦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石越의 목을 베니, 이에 인심이 동요하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났다. 慕容垂가 鄴城에 이르자 慕容農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서 鄴城으로 진격하니, 苻丕가 후퇴하여中城을 지켰다.

○ 秦北地【郡名也라】長史慕容泓이 聞燕王垂攻鄴하고 亡奔關東하야 收集鮮卑하니 衆至數千이라 還屯華陰하다

○ 秦나라 北地【北地는 郡의 이름이다.】長史 慕容泓燕王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關東으로 도망하여 鮮卑族을 수합하니,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돌아와 華陰에 주둔하였다.

○ 平陽太守慕容沖이 亦起兵於平陽하야 有衆二萬하다

○ 平陽太守慕容沖이 또한 平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 秦將姚萇姚弋仲之子요 之弟라】이 起兵於北地하고 自稱後秦王하다

○ 秦나라 장수 姚萇【姚萇은 姚弋仲의 아들이고 姚襄의 아우이다.】이 北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後秦王이라 자칭하였다.

○ 秦竇衝이 擊慕容沖于河東하야 大破之하니 이 奔慕容泓하다 衆이 至十餘萬이라 進向長安이러니 六月에 의 謀臣高蓋하고 立爲皇太弟하야 承制行事하고 置百官하다

○ 秦나라 竇衝慕容沖을 河東에서 공격하여대파하니, 慕容沖慕容泓에게로 달아났다. 慕容泓의 병력이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전진하여 長安으로 향하였는데, 6월에 慕容泓의 謀臣인 高蓋慕容泓을 죽이고 慕容沖을 세워 皇太弟로 삼아서 制를 받들어 정사를 행하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 八月에 燕兵이 圍秦長樂公於鄴하니 鄴中이 芻粮俱盡하야 削松木飼馬라 燕王垂謂諸將曰 苻丕는 窮寇라 必無降理니 不如退屯新城하야 開丕西歸之路하야 以謝秦王疇昔之恩【疇는 發語辭라 己巳年에 垂奔秦하니 秦王堅이 郊迎하야 以爲冠軍將軍하니라】이라하고 乃解圍하고 趨新城하다

○ 8월에 燕나라 군대가 秦나라 長樂公苻丕를 鄴城에서 포위하니, 鄴城 안의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소나무를 벗겨 말을 먹일 지경에 이르렀다. 燕王慕容垂가 諸將에게 이르기를 “苻丕는 곤궁한 적이다.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후퇴하여 新城에 주둔해서 苻丕가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어 秦王의 옛 은혜【疇는 發語辭이다. 己巳年(369)에 慕容垂가 秦나라로 도망쳐 오니, 秦王 苻堅이 郊外에서 맞이하여 그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에 사례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新城으로 달려갔다.

太保安【安은 謝安이라】이 奏請호되 乘苻氏傾敗하야 開拓【拓은 斥開也라】中原이라하야 以謝玄, , 石虔等으로 伐秦하니 河南城堡【堡는 廣韻에 堡障은 小城也라하니라】 皆來歸附라 謝玄이 遣晉陵太守滕恬之하야 渡河據黎陽하다

○ 太保 謝安【安은 謝安이다.】이 주청하기를 “苻氏가 형세가 기울어 패한 틈을 타서 中原을 개척【拓은 물리쳐서 개간하는 것이다.】해야 한다.”고 하여 謝玄謝桓石虔 등을 데리고 가서 秦나라를 치니, 河南의 城堡【堡는 ≪廣韻≫에 “堡障은 작은 城이다.” 하였다.】가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謝玄이 晉陵太守滕恬之를 보내서 황하를 건너 黎陽을 점거하였다.

燕王 復引兵圍鄴하니 進退路窮이라 會에 謝玄이 遣劉牢之等하야 據碻磝【王氏曰 碻磝는 城名이라 然二字俱在五爻韻이요 又碻는 本作䂭라 按宋重修廣韻註하면 䂭는 口交反이요 磝는 五交反이라 䂭磝는 (成)[城]名이니 今濟州是라】, 滑臺【春秋鄭之廩延邑이니 後魏置東郡하고 又改滑州하니라】러니 請救於이어늘 이 乃遣劉牢之하야 率衆二萬하야 救鄴하고 告饑어늘 이 水陸運米二千斛以饋之하다

燕王慕容垂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鄴城을 포위하니, 苻丕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침 謝玄劉牢之 등을 보내 碻磝【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碻磝는 城의 이름이다. 그러나 碻와 磝 두 글자가 모두 五爻(요)의 韻에 있으며, 또 碻는 본래 䂭字로 되어 있다. 宋나라에서 重修한 ≪廣韻≫의 註를 살펴보면 䂭는 口交反(교)이고 磝는 五交反(요)이다. 䂭磝는 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濟州가 이곳이다.” 하였다.】와 滑臺城【滑臺는 春秋時代 鄭나라의 廩延邑이니, 後魏가 東郡을 설치하고 또 滑州로 고쳤다.】을 점거하였는데, 苻丕謝玄에게 구원을 청하자 謝玄이 마침내 劉牢之를 보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鄴城을 구원하게 하였으며, 苻丕가 굶주림을 고하자 謝玄이 水陸으로 쌀 2천 斛을 운반하여 공급했다.

[乙酉]十年

[乙酉]十年이라 〈秦王苻丕大安元이요 燕二요 後秦白雀二年이라 ○ 西燕主慕容沖更始元年이라 ○ 西秦王乞伏國仁建義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正月에 慕容沖이 卽帝位於阿房【是爲西燕이라 [通鑑要解]先時에 謠曰 鳳凰止阿房이라하니 堅曰 鳳凰은 非梧桐이면 不捿요 非竹實이면 不食이라하고 乃植桐竹數十萬株于阿房하야 以待之하니라 沖小字鳳凰이니 至是하야 止阿房城이라】하다

太元 10년(을유 385) - 秦王苻丕의 大安 元年이고, 燕나라 2년이고, 後秦白雀 2년이다. ○ 西燕主慕容沖의 更始 元年이다. ○ 西秦王乞伏國仁의 建義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正月에 慕容沖阿房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原註]이(慕容沖)가 바로 西燕이다. [通鑑要解]이보다 앞서 동요에 이르기를 “鳳凰이 阿房에 머문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阿房城에 심어 놓고 봉황을 기다렸다. 慕容沖의 小字가 鳳凰이니, 이때에 이르러 阿房城에 머물렀다.】

○ 四月에 劉牢之至鄴하니 燕王垂 邀擊大破之라 坐軍敗하야 徵還하다

○ 4월에 劉牢之가 鄴城에 이르자 燕王慕容垂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대파하니, 敗戰한 죄에 걸려서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다.

○ 五月에 西燕主【垂復興於山東하고 而沖稱號於關中이라 故로 書西燕以別之也라】이 攻長安이어늘 秦王이 身自督戰할새 飛矢滿體하야 流血淋漓라 沖이 縱兵暴掠하니 關中士民이 流散하고 道路斷絶하야 千里無煙이러라 이 大懼하야 以讖書云 帝出五將이면 久長得이라하야 乃留太子宏하야 守長安하고 遂出奔五將山하다 後秦王이 遣驍騎將軍吳忠하야 帥騎圍之하니 秦兵이 皆散走호되 이 神色自若하야 坐而待之라 俄而오 至執之하야 送詣新平하야 幽於別室【後秦王萇이 幽秦堅於別室하고 使求傳國璽하니 堅叱之曰 五胡次序에 無汝羌名이라 璽已送晉하니 不可得也라하니라 萇이 遣人殺之하고 欲隱其名하야 諡堅曰 壯烈天王이라하다】이러니 이 遣人하야 縊於新平佛寺하다

○ 5월에 西燕主 慕容沖【慕容垂는 山東에서 燕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慕容沖은 關中에서 燕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西燕이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이 長安을 공격하자, 秦王苻堅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때 流矢가 몸에 가득 꽂혀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慕容沖이 군대를 풀어서 사납게 노략질하니, 關中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고 도로에 행인들이 끊어져 천리를 가도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苻堅이 크게 두려워하여 圖讖書에 “皇帝가 나가서 五將에 이르면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하여, 마침내 太子慕容宏을 남겨 두어 長安을 지키게 하고는 마침내 나가 五將山으로 도망하였다.

後秦王姚萇이 驍騎將軍吳忠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苻堅은 정신과 얼굴빛을 변치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吳忠이 이르러 苻堅을 사로잡아서新平으로 보내어 별실에 가두었는데,【後秦王 姚萇이 秦王 苻堅을 別室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傳國璽를 요구하니, 苻堅이 꾸짖기를 “五胡의 次序에 너희 羌人의 이름은 없다. 傳國璽는 이미 晉나라로 보냈으니 줄 수가 없다.” 하였다. 姚萇이 사람을 보내어 苻堅을 죽이고 자기 이름을 숨기고자 하여 苻堅의 시호를 壯烈天王이라 하였다.】姚萇이 사람을 보내 新平의 佛寺에서 苻堅을 목 졸라죽였다.

溫公曰 論者皆以爲秦王之亡은 由不殺慕容垂, 姚萇故也라하나 臣獨以爲不然이라 許劭魏武帝는 治世之能臣이요 亂世之姦雄이라하니 使治國에 無失其道면 則, 은 皆秦之能臣也니 烏能爲亂哉아 之所以亡은 由驟勝而驕故也라 魏文侯李克吳之所以亡한대 對曰 數戰數勝이니이다 文侯曰 數戰數勝은 國之福也어늘 何故亡고 對曰 數戰則民疲하고 數勝則主驕하니 以驕主御疲民이면 未有不亡者也라하니 秦王이 似之矣로다

歷年圖曰 石氏之彊也에 氐, 羌之屬이 無不內徙而爲臣이러니 一朝失馭에 而角立爲患하니 理固然也라 苻洪이 徘徊枋頭하야 有虎踞中原之志라 以健【洪之世子라】爲不肖나 然猶西取關中【肖는 似也라 洪病甚하야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는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는 非汝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豎子所困은 謂趙將麻秋 爲洪所獲하야 以爲將軍이러니 秋因宴鴆洪하니라】하고 幷姚襄【姚襄은 弋仲第五子니 見二十八卷丙辰年의 奔平陽注라】하고 却桓溫【見二十八卷甲寅年이라】하야 遂彊其國하며 以雄才英略으로 加之慈惠忠信하고 擧王猛於布衣하야 任之以政하야 勳舊不能離하고 親戚不敢妬하니 非至明이면 能如是乎아 故로 能呑彊燕, 擧河西하고 兼巴蜀, 包漢沔하고 俘索頭【索頭는 鮮卑別部也니 姓拓跋氏라 其俗이 以索辮髮이라 因號索頭라】, 屠龜玆【龜는 音丘요 玆는 音慈라[頭註]龜玆는 西域國名이라】하야 奄有天下十分之九하니 五胡【見二十六卷이라】之盛이 未有如者也라 觀其擧百萬之衆하야 以攻晉할새 先爲之除宮築第하야 以待其君臣하니 意以爲羅中之禽을 往無不獲也러니 及一戰而敗에 遂顚沛不振하야 昔之俘囚降虜가 皆起而爲敵이라 數月之間에 寇讐徧於四方하고 戎馬塞於郊甸【甸은 自邦國以及四郊之內라】하야 以至身死人手하고 子孫殄滅은 何哉오 論者皆咎堅寵信羌與鮮卑【謂姚萇, 慕容垂라】하고 輕於伐晉이나 彼皆睹其迹而言之요 未達其本也라 要之컨대 恃其强大하야 易而無備하니 此其所以敗亡也夫인저

溫公이 말하였다.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秦王苻堅이 멸망한 것은 慕容垂姚萇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許劭가 이르기를 ‘魏나라 武帝(曹操)는 治世의 유능한 신하이고 亂世의 姦雄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苻堅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慕容垂姚萇은 모두 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니, 어찌 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苻堅이 망한 이유는 갑자기 승리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魏나라 文侯李克에게 吳나라가 망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文侯가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함은 국가의 복인데, 무슨 이유로 망하였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우면 백성들이 지치고 자주 승리하면 군주가 교만해지니, 교만한 군주로써 지친 백성을 부리면 망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秦王苻堅이 이와 같았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石氏가 강할 때에는 氐族과 羌族의 무리가 안으로 옮겨 와서 신하 노릇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통치 능력을 잃게 되자 맞서서 우환이 되었으니,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苻洪은 枋頭에 배회하여 범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中原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며, 苻健【苻健은 苻洪의 세자이다.】은 불초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쪽으로 關中을 취하고【[附註]以健爲不肖 然猶西取關中:肖는 같음이다. 苻洪이 병이 심해지자, 아들인 苻健에게 이르기를 “내가 關中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은 中州(東晉)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도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 中州는 네가 차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關中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것은 趙나라 장수 麻秋가 苻洪에게 사로잡히자 그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麻秋가 연회를 틈타 苻洪에게 짐독을 먹인 일을 이른 것이다.】姚襄을 겸병하며【姚襄은 姚弋仲의 다섯째 아들이니, 28권 丙辰年條(356)의 奔平陽 注에 보인다.】桓溫을 물리쳐서【桓溫을 물리친 일은 28권 甲寅年條(354)에 보인다.】 마침내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였으며, 苻堅은 영웅의 재주와 지략에 자애로운 은혜와 忠信을 겸하였고 布衣로 있던 王猛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勳舊의 신하가 이간질하지 못하고 친척들이 감히 질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한 燕나라를 병탄하고河西 지방을 차지하고 巴‧蜀 지방을 겸병하고 漢‧沔 지방을 포괄하며 索頭【索頭는 鮮卑族 중의 한 부족이니, 姓은 拓跋氏이다. 풍속에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索頭라 호칭한 것이다.】를 사로잡고 龜玆國【[原註]龜는 음이 구이고, 玆는 음이 자이다.[頭註]龜玆는 西域의 나라 이름이다.】을 도륙하여 순식간에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으니, 五胡【五胡는 26권에 보인다.】의 성대함이 苻堅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苻堅이 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晉나라를 공격할 때에 먼저 궁궐을 소제하고 집을 지어서 晉나라의 君臣들을 대비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晉나라의 君臣들은 그물 속의 새와 같아서 어디를 가든 잡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인데, 한번 싸워 패하자 마침내 낭패를 당하여 떨치지 못해서 옛날 포로로 잡혔던 죄수와 항복한 오랑캐들이 모두 일어나 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 달 사이에 적과 원수가 사방에 두루 널리고 軍馬가 郊甸【甸은 나라 안으로부터 사방 郊外의 이내까지이다.】에 가득 차서 몸이 남의 손에 죽고 자손이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苻堅이 羌族과 鮮卑族【羌族과 鮮卑族은 姚萇과 慕容垂를 이른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며 晉나라를 경솔하게 정벌한 것을 탓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그 자취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요 그 근본은 알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苻堅은 자기 나라가 강성하고 큰 것만 믿고 상대방을 쉽게 여겨 대비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쩌면 패망한 이유일 것이다.”

太保이 薨하니 以琅邪(琊)王道子【簡文帝子라】로 錄尙書事【錄은 總也라】하다

太保謝安이 죽으니, 琅琊王 司馬道子【司馬道子는 簡文帝(司馬昱)의 아들이다.】를 錄尙書事【錄은 총괄하는 것이다.】로 삼았다.

長樂公 在鄴이라가 將西赴長安이러니 入至晉陽하야 始知長安不守하야 已死하고 乃發喪하고 卽皇帝位하다

長樂公苻丕가 鄴城에 있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長安으로 달려가려 하였는데, 晉陽에 들어와서 비로소 長安을 지켜내지 못하여 苻堅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는 마침내 喪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二月에 燕王 始定都中山하고 卽皇帝位하다

○ 12월에 燕王慕容垂가 비로소 中山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呂光【秦尙書呂婆樓之子也라 略陽氐人이니 是爲後涼이라】이 自稱涼州刺史하다

○ 呂光【呂光은 秦나라 尙書 呂婆樓의 아들이다. 略陽의 氐人이니, 이가 바로 後涼이다.】이 涼州刺史라고 자칭하였다.

乞伏國仁이 自稱秦, 河二州牧하다

○ 西秦의 乞伏國仁이 秦州와 河州 두 州의 牧을 자칭하였다.

[丙戌]十一年

[丙戌]十一年이라 〈秦王苻登太初元이요 燕建興元이요 後秦建初元이요 西燕主慕容永中興元年이라 ○ 魏太祖道武帝拓跋珪登國元年이요 涼王呂光太安元年이라 ○ 舊大國四요 小國一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七僭國이라〉

正月에 拓跋珪【見上丙子年이라 拓跋은 複姓이니 立爲代王이라】 大會於牛川하고 卽代王位하다

太元 11년(병술 386) - 秦王苻登의 太初 元年이고, 燕나라(後燕) 建興 元年이고, 後秦建初 元年이고, 西燕主慕容永의 中興 元年이다. ○ 魏나라 太祖道武帝拓跋珪의 登國 元年이고, 涼王(後涼)呂光의 太安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넷이고 小國이 하나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正月에 拓跋珪【拓跋珪는 앞의 丙子年條(376)에 보인다. 拓跋은 複姓이니 즉위하여 代王이 되었다.】가 牛川에서 군대를 크게 모으고, 代王에 즉위하였다.

○ 西燕左將軍韓延이 殺燕主沖【慕容沖은 見上甲申年이라】하고 立段隨하야 爲燕主러니 慕容永【廆弟之子라】이 襲段隨破之하고 帥鮮卑男女하야 去長安而東하니 衆이 推爲河東主라 於是에 長安이 空虛하다

○ 西燕의 左將軍韓延燕主慕容沖을 죽이고【慕容沖은 앞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慕容沖의 장수 段隨를 세워 燕主로 삼았는데, 慕容永【慕容永은 慕容廆의 아우의 아들이다.】段隨를 습격하여격파하고鮮卑族의 남녀 백성들을 거느리고 長安을 떠나 동쪽으로 가니, 무리들이 慕容永을 추대하여 河東主로 삼았다. 이에 長安이 텅 비게 되었다.

○ 四月에 後秦王이 自安定으로 入長安하야 卽皇帝位하고 國號를 大秦이라하고 立子興하야 爲皇太子하다

○ 4월에 後秦王姚萇安定으로부터 長安에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大秦이라 하고 아들姚興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 九月에 西燕慕容永이 擊秦主於鄴하야 殺之하고 이 遂進據長子하야 卽皇帝位하다

○ 9월에 西燕의 慕容永秦主苻丕를 鄴城에서 공격하여죽이고, 慕容永이 마침내 진격하여 長子縣을 점령하고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一月에 秦南安王【丕之子라】이 發喪行服하고 乃爲壇於隴東하고 卽皇帝位하다

○ 11월에 秦의 南安王 苻登【南安王 苻登은 苻丕의 아들이다.】이 喪을 발표하고 服을 입고는 마침내 隴東에서 壇을 만들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丁亥]十二年

[丁亥]十二年이라 〈秦太初二요 燕建興二요 後秦建初二요 魏登國二年이라〉

拓跋珪 改稱魏王하다

太元 12년(정해 387) - 秦나라 太初 2년이고, 燕나라 建興 2년이고, 後秦建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2년이다. -

拓跋珪魏王이라고 개칭하였다.

[戊子]十三年

[戊子]十三年이라 〈秦太初三이요 燕建興三이요 後秦建初三이요 魏登國三年이라 ○ 西秦王乞伏乾歸太初元年이라〉

呂光이 卽三河王位하다

太元 13년(무자 388) - 秦나라 太初 3년이고, 燕나라 建興 3년이고, 後秦建初 3년이고, 魏나라 登國 3년이다. ○ 西秦王乞伏乾歸의 太初 元年이다.-

呂光三河王에 즉위하였다.

[己丑]十四年

[己丑]十四年이라 〈秦太初四요 燕建興四요 後秦建初四요 魏登國四年이라 ○ 涼麟嘉元年이라〉

初에 帝旣親政事에 威權이 己出하야 有人主之量이러니 旣而오 溺於酒色하야 委事於琅琊王道子道子亦嗜酒하야 日夕에 與帝酣【酒樂이라】歌爲事하고 又崇尙浮屠【三十二卷丙寅年注에 梵言浮屠는 華言聚相이라하니 通作浮圖라 釋典云 僧曰浮屠요 塔亦曰浮屠라하니 正號佛佗니 與浮屠로 聲相近이라 華言正覺이니 今略稱佛이라】하야 窮奢極(貴)[費]하니 左右近習이 爭弄權柄하야 交通請托하야 賄賂【賄는 財也요 又贈送也며 賂는 以財與人也라 [通鑑要解]賄는 音灰라 金玉曰貨요 布帛曰賄라】公行하며 官賞이 濫雜하고 刑獄이 謬亂【帝乃昏暗하고 道子亂政이라 左將軍許營上疏어늘 不省하니라】이러라

太元 14년(기축 389) - 秦나라 太初 4년이고, 燕나라 建興 4년이고, 後秦建初 4년이고, 魏나라 登國 4년이다. ○ 涼나라(後涼) 麟嘉 元年이다.-

처음에 황제가 이미 친히 정사를 행하자, 위엄과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와 人君의 도량이 있었는데, 이윽고 酒色에 빠져 琅琊王司馬道子에게 정사를 맡겼다. 司馬道子 또한 술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황제와 술 마시고【酣은 술을 즐기는 것이다.】 노래하는 것을 일삼고 또 불교【≪通鑑節要≫ 32권 丙寅年(546) 注에 “梵語의 浮屠는 중국말의 聚相이다.” 하였으니, 일반적으로 浮圖로 쓴다. 釋典에 이르기를 “승려를 浮屠라 하고, 塔을 또한 浮屠라 한다. 정식 명칭은 佛佗이니 浮屠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중국말로는 正覺이니, 지금은 佛이라고 약칭한다.” 하였다.】를 숭상해서 극도로 사치하고 낭비하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 다투어 권력을 농간하여 연줄을 대어 사사로운 일을 청탁해서 뇌물【[頭註]賄는 財貨이고 또 財貨를 보내는 것이며, 賂는 재화를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通鑑要解]賄는 音이 회이다. 金玉을 貨라 하고 布帛을 賄라 한다.】이 공공연히 오가고 관작과 賞이 남발되고 혼잡하였으며 형벌과 옥사가 잘못되고 혼란해졌다.【武帝가 昏暗하고 司馬道子가 정사를 어지럽히므로 左將軍 許營이 상소하였으나 살펴보지 않았다.】

[壬辰]十七年

[壬辰]十七年이라 〈秦太初七이요 燕建興七이요 後秦建初七이요 魏登國七年이라〉

南郡公桓玄【溫之少子니 見上癸酉年이라】이 負其才地【地는 謂地位門地라】하고 以雄豪【雄은 武稱이요 豪는 弛也라 又獸之將群者爲雄이요 智過百人謂豪라】自處한대 朝廷이 疑而不用이라 年二十三에 始拜太子洗馬하고 後에 出補義興太守하니 鬱鬱不得志【玄爲洗馬時에 琅琊王道子 値其酣醉하야 張目謂客曰 桓溫晩塗欲作賊은 云何오하니 玄伏地流汗하야 不能起라 由是로 不自安而切齒於道子云云이라】하야 歎曰 父爲九州伯이어늘 兒爲五湖【滆湖, 洮湖, 射湖, 貴湖, 及太湖爲五湖라 湖之小支 俱連太湖故로 太湖兼得五湖之名이라】長고하고 遂棄官歸하다

太元 17년(임진 392) - 秦나라 太初 7년이고, 燕나라 建興 7년이고, 後秦建初 7년이고, 魏나라 登國 7년이다. -

南郡公 桓玄【桓玄은 桓溫의 작은아들이니, 앞의 癸酉年條(373)에 보인다.】이 자신의 재주와 門閥【地는 지위와 門地(門閥)를 이른다.】을 믿고 영웅호걸【雄은 용맹하다는 명성이고, 豪는 방종함이다. 또 짐승 중에 무리를 거느리는 것을 雄이라 하고, 지혜가 백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豪라 한다.】로 자처하자, 조정에서 의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나이 23세에 비로소 太子洗馬에 제수되고 뒤에 나가 義興太守에 보임되니, 답답하여 뜻을 얻지 못해서【桓玄이 太子洗馬였을 때에 琅琊王 司馬道子가 마침 술에 취하여 술김에 눈을 부릅뜨고 객에게 이르기를 “桓溫이 말년에 모반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桓玄이 땅에 엎드려 진땀을 흘리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桓玄이 이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司馬道子에 대해 이를 갈며 원망하였다.】 탄식하기를 “아버지는 九州의 伯이 되었는데, 자식은 五湖【滆湖‧洮湖‧射湖‧貴湖‧太湖를 五湖라 한다. 五湖의 작은 支流가 모두 太湖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太湖가 五湖의 명칭을 겸하여 얻은 것이다.】의 長이 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南郡으로 돌아왔다.

[癸巳]十八年

[癸巳]十八年이라 〈秦太初八이요 燕建興八이요 後秦建初八이요 魏登國八年이라〉

十二月에 後秦主이 卒하고 太子興이 卽位하다

太元 18년(계사 393) - 秦나라 太初 8년이고, 燕나라 建興 8년이고, 後秦建初 8년이고, 魏나라 登國 8년이다. -

12월에 後秦主姚萇이 죽고, 太子姚興이 즉위하였다.

[甲午]十九年

[甲午]十九年이라 〈秦主苻崇延初元이요 燕建興九요 後秦主姚興皇初元이요 魏登國九年이라 ○ 是歲에 秦及西燕亡하니 大三, 小二니 凡五僭國이라〉

太元 19년(갑오 394) - 秦主苻崇의 延初 元年이고, 燕나라 建興 9년이고, 後秦主姚興의 皇初 元年이고, 魏나라 登國 9년이다. ○ 이해에 秦나라와 西燕이 멸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秦主이 聞後秦主卒하고 盡衆而東【秦主登이 聞後秦主萇死하고 喜曰 姚興少兒는 吾折杖笞之耳라하고 乃留安成王廣守雍하고 太子崇守胡空堡하고 盡衆而東하다】이어늘 後秦主이 自安定으로 如涇陽하야 與으로 戰于山南하야 執殺之하니 秦太子이 奔湟中하야 卽皇帝位하다

秦主苻登後秦主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오자,【秦主 苻登이 後秦主 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姚興과 같은 어린 아이는 내가 나뭇가지를 꺾어 매질할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安成王 苻廣을 남겨 두어 雍城을 지키게 하고 太子 苻崇은 胡空堡를 지키게 하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갔다.】後秦主姚興安定으로부터 涇陽에 가서 苻登과 山南에서 싸워서 苻登을 잡아 죽이니, 秦나라 太子苻崇이 湟中으로 달아나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月에 이 爲梁王乾歸乞伏國仁之弟也니 國仁卒에 乾歸嗣하야 爲河南王이라 登爲後秦所敗하니 遣子乾歸爲質하야 請救하니라】所殺하니 乾歸 於是에 盡有隴西之地하고 自稱西秦王하다

○ 10월에 苻崇梁王 乞伏乾歸【梁王 乞伏乾歸는 乞伏國仁의 아우이니, 乞伏國仁이 죽은 뒤에 乞伏乾歸가 왕위를 이어 河南王이 되었다. 苻登이 後秦에게 패배하니, 아들 苻崇을 乞伏乾歸에게 보내어 인질로 삼고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에게 살해당하니, 乞伏乾歸가 이에 隴西 지역을 다 소유하고 西秦王이라 자칭하였다.

燕主 攻西燕하야 執西燕主하야 斬之하다

燕主慕容垂가 西燕을 공격해서西燕主慕容永을 잡아 목을 베었다.

[乙未]二十年

[乙未]二十年이라 〈燕建興十年이요 秦皇初二요 魏登國十年이라〉

魏王 叛燕하야 侵逼附塞諸部어늘 五月에 燕主太子寶遼西王趙王【農, 麟은 皆寶之弟라】하야 帥衆八萬하야 伐魏한대 縱兵擊之하니 燕兵死者 以萬數라 太子寶等이 皆單騎로 僅免하다

太元 20년(을미 395) - 燕나라 建興 10년이고, 秦나라(後秦) 皇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10년이다. -

魏王拓跋珪가 燕나라를 배반하고서 변방에 가까운 여러 部를 침략하고 핍박하였다. 5월에 燕主慕容垂가 太子慕容寶, 遼西王慕容農, 趙王 慕容麟【慕容農과 慕容麟은 모두 慕容寶의 아우이다.】을 보내어 군사 8만 명을 거느리고서 魏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拓跋珪가 군대를 풀어 공격하니 燕나라 병사 중에 죽은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太子慕容寶 등이 모두 單騎로 빠져나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丙申]二十一年

[丙申]二十一年이라 〈燕主慕容寶永康元이요 秦皇初三이요 魏皇始元年이요 涼龍飛元年이라〉

四月에 燕主【垂憤太子寶 敗於魏而還하야 引兵하고 出魏不意하야 襲平城破之하다 過燕軍大敗處할새 軍士慟哭하야 聲振山谷하니 垂慙憤嘔血死云云이라】하고 太子寶卽位하다

太元 21년(병신 396) - 燕主慕容寶의 永康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3년이고, 魏나라 皇始 元年이고, 涼나라 龍飛 元年이다. -

4월에 燕主慕容垂가 죽고【燕主 慕容垂는 太子 慕容寶가 魏나라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것을 분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불시에 魏나라로 출병하여 平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한 곳(參合坡)을 지날 때에 군사들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산골짝에 진동하니, 慕容垂가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겨 피를 토하고 죽었다.】太子慕容寶가 즉위하였다.

○ 六月에 三河王呂光이 卽天王位하야 國號를 大涼이라하고 以世子紹로 爲太子하다

○ 6월에 三河王呂光이 天王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涼이라 하고, 世子呂紹를 太子로 삼았다.

○ 魏群臣이 勸魏王하야 稱尊號어늘 始建天子旌旗하고 出警入蹕【天子出則稱警하니 示戒肅也요 入則言蹕하니 所以止行人淸道也라 又示出入皆有蹕하니 互文耳라】하며 改元皇始하다

○ 魏나라의 신하들이 魏王拓跋珪에게 권하여 尊號를 칭하게 하자, 拓跋珪가 처음으로 天子의 旌旗를 세우고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하며【天子가 나갈 때에는 警이라 칭하니 경계하고 엄숙함을 보이는 것이요, 들어올 때에는 蹕이라 칭하니 行人들을 막고 길을 치움을 보이는 것이다.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함은 또 天子가 나가고 들어올 때에 모두 벽제함을 보인 것이니, 出警入蹕은 互文이다.】皇始라고 改元하였다.

○ 九月에 帝崩【帝醉하야 寢할새 貴人이 使婢以被蒙面而弑之하고 賂左右하야 曰因魘暴崩이라하다】하다

○ 9월에 황제(司馬曜)가 승하하였다.【孝武帝가 술에 취하여 잘 적에 貴人이 계집종을 시켜 황제의 얼굴을 덮어씌워 질식시켜 시해하고는 左右를 뇌물로 매수하고 이르기를 “가위에 눌려 갑자기 崩하였다.”고 하였다.】

魏王 潛自晉陽으로 開韓信故道韓信擊趙故道라】하고 自井陘으로 趨中山하니 自常山以東으로 守宰或走或降하야 諸郡縣이 皆附於魏호되 惟中山, 鄴, 信都三城이 爲燕守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武帝卽位에 而能委任謝安, 謝玄等이라 故로 新亭數語 足折桓溫之氣하고 淝水一戰에 大敗苻秦之師라 是以로 上下輯睦하야 晉室이 似有生意矣라 然이나 帝方溺於酒, 荒于色하야 奏凱方旋에 驕氣掬面하고 曾不閱時에 遽用讒言하야 疎退賢輔하야 遂使王綱不振하고 恩威不立이라 道子荒于朝政하고 國寶彙以小人하니 拜授之榮이 初非天旨요 鬻刑之貨 旁午權門하야 毒賦年滋하고 愁民歲廣이라 內殿嚴邃에 雜處浮屠하고 請修廟에 䟽入不報하고 晩年에 長星告變호되 猶不警悟하고 房幃烈禍 起自戲言하니 晉祚至此에 蓋已亡而未滅耳니라

魏王拓跋珪가 몰래 晉陽으로부터 韓信의 옛길【옛길은 韓信이 趙나라를 공격했던 옛길이다.】을 열고 井陘으로부터 中山으로 달려가니, 常山 이동 지방의 수령들이 혹은 달아나고 혹은 항복하여 모든 郡縣들이 魏나라에 붙었으나 오직 中山과 鄴城과 信都 세 성만이 燕나라를 위하여 지켰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武帝는 즉위하자 謝安謝玄 등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新亭의 몇 마디 말로 桓溫의 기운을 충분히 꺾었고, 淝水의 전투에서 苻秦의 군대를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上下가 화목하여 晉나라 황실이 생기가 도는 듯 하였다. 그러나 武帝가 한창 술에 빠지고 여색에 빠져 凱旋歌를 부르며 돌아온 뒤에 교만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으며, 채 한 철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참소하는 말을 따라 어진 보필을 멀리 물리쳐서 제왕의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고 은혜와 위엄이 바로 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司馬道子가 조정의 정사를 게을리 하고 王國寶가 소인들을 모으니, 관직을 제수하는 영화가 애당초 天子의 뜻이 아니었고 형벌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받은 財貨가 權門勢家에 몰려들어서 가혹한 세금이 해마다 늘어나고 근심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많아졌다. 그윽하고 깊숙한 內殿에 승려들이 뒤섞여 거처하였고 孔子의 사당을 수리하자고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晩年에 長星이 변고를 알렸음에도 경계하여 깨닫지 못하였고 房幃의 독한 화가 희롱하는 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晉나라의 國運은 여기에 이르러 이미 망하였으나 아직 사라지지만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