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十七 晉紀

yjw2999
이동: 둘러보기, 검색

晉紀

中宗元皇帝

中宗元皇帝 名睿니 宣帝曾孫이요 琅琊王覲之子라 在位六年이요 壽四十六이라

中宗元皇帝【始建國都曰元이요 主義行德曰元이라】宣帝曾孫이요 琅琊王之子라 在位六年이요 壽四十六이라

中宗 元皇帝【나라의 도읍을 처음으로 세운 것을 元이라 하고, 義를 주장하고 덕을 행한 것을 元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宣帝의 曾孫이고 琅琊王司馬覲의 아들이다. 재위가 6년이고 壽가 46세이다.

[丁丑]建武元年

[丁丑]建武元年이라 〈漢麟嘉二年이요 涼元公[[張寔{珍}]]建興五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幷成小國一이며 新小國一이니 凡三僭國이라〉

琅琊王【晉初에 有牛繼馬之謠러니 宣帝曾孫琅邪(琊)王覲之妃夏侯氏 通小吏牛金而生帝하다 中國多難이어늘 帝欲避難하야 求外補하야 得平陳將軍하고 鎭下邳하다 用王導策하야 移鎭建業하고 承制爲晉王이러니 愍帝凶聞至에 乃卽帝位하니라】이 卽晉王位하야 大赦改元하고 始備百官하고 立宗廟, 建社稷하니 是時에 承喪亂之後하야 江東이 草創이라 刁協이 久宦中朝하야 諳練舊事하고 賀循이 爲世儒宗하야 明習禮樂하니 凡有疑議에 皆取決焉하니라

建武 元年(정축 317) - 漢나라 麟嘉 2년이요, 涼나라(前涼) 元公張寔의 建興 5년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成나라까지 아울러 小國이 하나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琅琊王【晉나라 초기에 ‘소[牛]가 말[馬]을 잇는다.’는 讖謠가 있었는데, 宣帝(司馬懿)의 曾孫인 琅琊王 司馬覲의 妃인 夏侯氏가 아전인 牛金과 간통하여 元帝를 낳았다. 中原이 다사다난하므로 元帝가 난리를 피하고자 하여 外職에 보임되기를 청하여 平陳將軍을 얻고 下邳에 鎭駐하였다. 王導의 계책을 따라 옮겨서 建業을 鎭守하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晉王이 되었는데, 愍帝의 訃告가 이르자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晉王에 즉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치며 처음으로 백관을 구비하고 宗廟를 세우고 社稷을 세우니, 이때에 喪亂을 겪은 뒤여서 江東 지방이 어수선하였다. 刁協은 오랫동안 조정에서 벼슬하여 故事에 정통하고 賀循은 세상의 儒宗이 되어서 禮樂에 밝고 익숙하니, 모든 의심스러운 의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이들에게 가서 결정하였다.

劉琨, 段匹磾 相與歃血同盟하고 期以翼戴晉室하다

劉琨段匹磾가 함께 歃血하여 동맹을 하고 晉나라 황실을 보좌하고 떠받들 것을 기약하였다.

○ 十一月에 征南軍司戴邈이 上疏하야 以爲 喪亂以來로 庠序隳廢라 議者或謂平世엔 尙文하고 亂世엔 尙武라하니 此言이 似之而實不然이라 今王業이 肇建하야 萬物이 權輿【始也라】하니 謂宜篤道崇儒하야 以勵風化니이다 王이 從之하야 始立太學하다

○ 11월에 征南軍司戴邈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喪亂을 겪은 이래로 庠序(학교)가 폐지되었습니다. 의론하는 자가 혹 말하기를 ‘태평한 세상에는 文을 숭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武를 숭상한다.’ 하니, 이 말이 옳은 듯하나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지금 王業이 처음 창건되어 만물이 비로소 떨치고 일어나니【權輿는 시작이다.】道를 돈독히 하고 儒學을 높여서 風化를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서 비로소 太學을 세웠다.

漢主이 出畋할새 以愍帝로 行車騎將軍하야 戎服으로 執戟前導하니 見者指之曰 此는 故長安天子也라하고 聚而觀之하고 故老有垂泣者러라

漢主劉聰이 나가서 사냥할 적에 愍帝에게 명하여 車騎將軍을 대리하여 군복 차림으로 창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니, 보는 자들이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분은 옛날 長安의 천자이다.” 하고 모여서 구경하였고, 故老 중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 十二月에 이 饗群臣于光極殿할새 使愍帝로 行酒洗爵이라가 已而요 更衣하고 又使之執蓋하니 晉臣이 多涕泣有失聲者라 尙書郞辛賓이 起하야 抱帝大哭하니 이 命引出斬之하고 愍帝도 遂遇害於平陽하다

○ 12월에 劉聰이 光極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적에 愍帝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술잔을 씻게 하였다가 이윽고 옷을 갈아입고 또 日傘을 잡게 하니, 晉나라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어 失聲한 자가 많았다. 尙書郞辛賓이 일어나 愍帝를 껴안고 크게 통곡하니, 劉聰이 명하여 끌어내어 목을 베게 하고愍帝도 마침내 平陽에서 살해당하였다.

[戊寅]太興元年

[戊寅]太興元年이라 〈漢主劉曜光初元年이라〉

三月에 愍帝凶問이 至建康이어늘 王이 斬衰【喪衣下不縫者를 爲斬衰라 [通鑑要解]父服曰斬衰요 母服曰齊衰라】居廬러니 旣而요 卽皇帝位하야 大赦改元하니 百官이 皆陪列【猶陪位라】이라 帝命王導하야 升御床共坐한대 固辭曰 若太陽이 下同萬物인대 蒼生이 何由仰照리잇고 帝乃止하다

太興 元年(무인 318) - 漢主劉曜의 光初 元年이다. -

3월에 愍帝의 訃告가 建康에 이르자, 晉王(司馬覲)이 斬衰服【[釋義]상복의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것을 斬衰라 한다. [通鑑要解]아버지를 위해서 입는 상복을 斬衰라 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상복을 齊衰라 한다.】 차림으로 廬幕에 거하였는데, 이윽고 황제에 즉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치니, 백관들이 모두 陪侍【陪列은 陪位(자리에서 모심)와 같다.】하였다. 황제가 王導에게 명하여 御床에 올라와 함께 앉자고 하자, 王導가 한사코 사양하며 말하기를 “만약 태양이 아래로 지상의 만물과 함께 있다면 蒼生들이 어떻게 태양이 환하게 내리 비추는 것을 우러러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황제가 비로소 중지하였다.

漢主이 卒하고 太子이 卽位러니 爲靳準【大司空이라】所殺이라 丞相卽皇帝位하고 石勒을 進爵爲趙王【準이 弑粲而代之어늘 石勒이 引兵討準한대 丞相曜自立하고 封勒爲趙公이러니 明年에 勒自稱趙王하니라 曜는 劉淵族子也라】하다

漢主劉聰이 죽고 太子劉粲이 즉위하였는데 靳準【靳準은 大司空이다.】에게 살해당하였다. 丞相劉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石勒의 작위를 올려 주어 趙王이라 하였다.【靳準이 劉粲을 시해하고 대신 서자, 石勒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靳準을 토벌하였다. 丞相 劉曜가 스스로 즉위하고 石勒을 봉하여 趙公으로 삼았는데, 다음 해에 石勒이 趙王이라 자칭하였다. 劉曜는 劉淵의 族子이다.】

[己卯]二年

[己卯]二年이라 〈漢改號趙하니 光初二年이라 ○ 後趙高祖石勒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成, 涼小國二며 新大國一이니 凡四僭國이라〉

太興 2년(기묘 319) - 漢나라가 趙(前趙)로 국호를 고치니 光初 2년이다. ○ 後趙高祖石勒의 元年이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成‧涼 등 小國이 둘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넷이다.-

漢主還都長安하고 改國號曰趙라하고 以單于爲祖【以冒頓配天하고 光文配上帝라 冒頓은 漢高時頭曼單于之子也니 曜以爲祖라 光文은 劉淵之諡也라】하다

漢主劉曜가 〈平陽에서〉 다시 長安에 도읍하고 국호를 趙라 고치고單于를 始祖로 삼았다.【冒頓(묵특)을 하늘에 배향하고 光文을 上帝에게 배향하였다. 冒頓은 漢나라 高祖 때 頭曼單于의 아들이니, 劉曜가 그를 시조로 삼은 것이다. 光文은 劉淵의 시호이다.】

石勒【後趙也라】이 始與絶하고 自稱趙王하다

○ 石勒【石勒은 後趙의 왕이다.】이 처음으로 劉曜와 단절하고 趙王이라 자칭하였다.

[庚辰]三年

[庚辰]三年이라 〈趙光初三年이요 後趙二年이라〉

祖逖이 鎭雍丘하고 數遣兵하야 邀擊【邀는 遮也라】後趙兵하니 後趙鎭戍歸逖者 甚多라 境土漸蹙이러라 七月에 詔加鎭西將軍하다 이 在軍에 與將士同甘苦하고 約己務施하고 勸農桑하고 撫納新附하야 雖疎賤者라도 皆結以恩禮하니 自河以南이 多叛後趙하고 歸于晉이러라 逖이 練兵積穀하야 爲取河北之計한대 後趙王勒이 患之하야 乃下幽州하야 爲修祖, 父墓【逖范陽人이니 其祖, 父墓在焉之라】하고 置守冢二家하고 因與書하야 求通하다 의 牙門童建이 殺〈新〉蔡內史周密하고 降于後趙어늘 이 斬之하야 送首於하고 曰 叛臣逃吏는 吾之深仇라 將軍之惡 猶吾惡【惡는 皆烏路切이라】也라하니 이 深德之하야 自是로 後趙人이 叛歸者를 皆不納하고 禁諸將하야 不使暴後趙之民하니 邊境之間이 稍得休息이러라

太興 3년(경진 320) - 趙나라(前趙) 光初 3년이고, 後趙 2년이다. -

祖逖이 雍丘에 鎭駐하고 자주 군대를 보내어 後趙의 군대를 요격【邀는 遮(기다리고 있다가 차단함)이다.】하니, 後趙의 鎭營에서 지키는 자들 중에 祖逖에게 歸附하는 자가 매우 많아서 後趙의 국경이 점점 줄어들었다.

7월에 詔書를 내려 祖逖에게 鎭西將軍을 가하였다. 祖逖이 軍中에 있을 때에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게 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힘쓰며 농업과 養蠶을 권장하고 새로 歸附한 자들을 어루만지고 받아들여서 비록 소원하고 천한 자라도 모두 은혜와 예로써 맺으니, 黃河 이남 지방이 대부분 後趙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귀부하였다.

祖逖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河北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니, 後趙王石勒이 이를 근심하여 마침내 幽州로 내려가서 祖逖을 위하여 祖逖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를 수축하였으며【祖逖은 范陽 사람이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가 그곳에 있었다.】 묘를 지키는 집 두 가호를 설치하고 이를 기화로 祖逖에게 편지를 보내어 사신을 통하기를 청하였다. 祖逖의 牙門(衙門)童建이 新蔡內史周密을 죽이고後趙에 항복하자, 石勒이 그의 목을 베어 머리를 祖逖에게 보내고 말하기를 “배반한 신하와 도망간 관리는 내가 깊이 미워하는 자이다. 장군이 증오하는 것은 또한 내가 증오하는 것과 같다.【惡는 모두 烏路切(오)이다.】” 하니, 祖逖이 그의 은덕에 깊이 감격하여 이후로는 石勒을 배반하고 祖逖에게 귀부하려는 後趙 사람들을 祖逖이 다 받아 주지 않았으며, 諸將들을 금지하여 後趙의 백성들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니, 변경 사이가 차츰 안정되어 갔다.

○ 帝之始鎭江東也에 王敦이 與從弟로 同心翼戴라 帝亦推心任之하야 總征討하고 專機政하고 群從子弟【兄弟之子를 相謂從이라하니 從昆弟는 言本同祖나 從父而別也라】布列顯要하니 時人이 爲之語曰 王與馬【王은 謂王導宗族이요 馬는 謂晉帝司馬氏라】共天下라하더라 後에 이 自恃有功하고 且宗族彊盛하야 稍益驕恣어늘 帝畏而惡之하야 乃引劉隗, 刁協等하야 以爲腹心하고 稍抑損王氏之權하니 亦漸見疎外라 能任眞推分【任從其眞性하야 不肯假借하고 推之分齊하야 無復顧惜이라 [通鑑要解]帝抑損王氏權하야 導漸見疎外어늘 而能任其眞性하고 推之分限하야 不介于懷하니 言自然安分이요 非矯情也라】하야 澹如也하니 有識이 皆稱其善處興廢호되 而은 益懷不平하야 遂構嫌隙이러라

○ 황제가 처음 江東에 鎭駐했을 때에 王敦이 從弟 王導와 함께 한마음으로 황제를 보좌하고 떠받들었다. 황제 또한 誠心으로 그들을 신임해서 王敦은 토벌하는 軍務를 총괄하고 王導는 중요한 政事를 전담하였으며 여러 從子와 從弟들【兄弟의 아들을 서로 이르기를 從이라 하니, 從昆弟는 본래 조부는 같으나 아버지를 따라서 구별됨을 말한 것이다.】이 현달하고 중요한 관직에 布陳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王(王氏)과 馬(司馬氏)【王은 王導의 宗族을 이르고, 馬는 晉帝 司馬氏를 이른다.】가 천하를 함께 누린다.” 하였다. 뒤에 王敦이 建國하는 데에 功이 있음을 자부하고 또 종족이 강성하여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지자, 황제가 두려워하고 미워해서 마침내 劉隗刁協 등을 나오게 하여 심복으로 삼고 차츰 王氏의 권한을 억제하고 줄이니, 王導 역시 점점 소외당하였다. 王導는 천진한 성품에 맡겨 두고 스스로 분수를 지켜【[釋義]천진한 성품 그대로 맡겨 두어 거짓으로 꾸미려 하지 않고 分齊(분수, 본분)를 지켜 다시 돌아보거나 아까워함이 없는 것이다. [通鑑要解]황제가 王氏의 권한을 억제하고 줄여서 王導가 점점 소외당하였으나 王導는 천진한 성품에 맡겨 두고 스스로 分限(분수)을 지켜 마음에 개의치 않았으니, 자연히 분수를 편안히 여긴 것이고 實情을 속인 것이 아님을 이른다.】 담담하니, 식견 있는 자들이 모두 興亡의 시기에 잘 대처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王敦은 더욱 불평하는 마음을 품어 마침내 틈이 벌어졌다.

[辛巳]四年

[辛巳]四年이라 〈趙光初四年이요 後趙三年이라〉

七月에 以戴淵으로 爲征西將軍, 都督司, 兗, 豫, 幷, 幽, 冀六州諸軍事하고 鎭合肥하다 豫州刺史祖逖이 以戴淵吳士【淵은 廣陵人이니 廣陵은 故吳王濞所都라】로 雖有才望이나 無弘致遠識하고 且己剪荊棘【猶亂也라】하고 收河南地어늘 而이 雍容一旦來統之라하야 意甚怏怏하고 又聞王敦이 與, 【劉隗, 刁協이라】構隙하야 將有內難하야 知大功不遂하고 感激發病하야 九月에 卒於雍丘하니 豫州士女 若喪父母라 王敦이 久懷異志러니 聞卒하고 益無所憚이러라 十月에 以으로 爲西平將軍, 豫州刺史하야 領之衆하다

[新增]胡氏祖士雅【士雅는 祖逖字니 傳作士稚라】慷慨忠義하고 有智略以行之하니 豈惟晉臣이리오 亦自古難得之才也라 惜其未聞道也여 易曰 知進而不知退하고 知存而不知亡하고 知得而不知喪하나니 其惟聖人이라야 知之而不失其正乎인저하니 戴淵이 可與共事者면 同心協力하야 以圖終功이 可也요 不可與共事而朝廷無用我之意者면 歸納印符하고 角巾東路니 南山之南과 北山之北이 何往而不適哉아 又況王敦所以隱而未叛은 徒以豫州爲虞니 士雅知內難將作인댄 尤當訓明軍旅하고 張皇義聲하야 使奸人懾息하야 不敢動이요 如其事擧면 不妄投軀니 豈不善哉아 道二而已라 儻以全身爲賢이면 則由前所陳이요 儻以許國爲重이면 則由後所論이니 於義皆得이라 若夫功之成否는 皆天也니 又何必怏怏發病而喪其軀哉아 謂之不聞大道가 不亦宜乎아

太興 4년(신사 321) - 趙나라 光初 4년이고, 後趙 3년이다. -

7월에 戴淵을 征西將軍‧都督司州兗州豫州幷州幽州冀州諸軍事로 삼고 合肥에 鎭駐하게 하였다. 豫州刺史祖逖戴淵이 吳나라 사람【戴淵은 廣陵 사람이니, 廣陵은 옛날 吳王 劉濞가 도읍했던 곳이다.】으로 비록 재주와 명망이 있으나 원대한 志趣와 고원한 識見이 없고, 또 자신이 온갖 고난【荊棘은 亂과 같다.】을 제거하고 河南 지역을 수복하였는데 戴淵이 한가롭게 하루아침에 와서 통솔한다 하여 마음에 몹시 불쾌해 하였으며, 또 王敦이 劉隗‧刁協【劉, 刁는 劉隗와 刁協이다.】과 틈이 생겨서 장차 內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큰 공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 알고 感慨하고 激憤하여 병이 나서 9월에 雍丘에서 죽으니, 豫州의 남녀 백성들이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 王敦이 오랫동안 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祖逖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10월에 祖逖의 아우 祖約을 西平將軍‧豫州刺史로 삼아서 祖逖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祖士雅(祖逖)【士雅는 祖逖의 字이니, ≪晉書≫ 〈祖逖傳〉에는 ‘士稚’로 되어 있다.】는 강개하고 충의심이 있으며 지략이 있어 이로써 행하였으니, 어찌 晉나라의 신하일 뿐이겠는가. 또한 예로부터 얻기 어려운 인재였다. 그러나 그가 道를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周易》 乾卦에 이르기를 ‘나아감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보존함만 알고 망할 줄을 모르며, 얻음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니, 오직 聖人이라야 進退와 存亡의 이치를 알아 正道를 잃지 않는다.’ 하였다. 戴淵이 함께 일할 만한 자였다면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쳐서 종말의 공을 도모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함께 일할 수가 없고 조정에서 자신을 써줄 마음이 없으면 印符를 반납하고 角巾을 쓰고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어야 할 것이니, 南山의 남쪽과 北山의 북쪽이 어디를 간들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또 더구나 王敦이 逆心을 숨기고 배반하지 않은 까닭은 한갓 豫州를 걱정해서였으니, 士雅가 장차 內亂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더욱 마땅히 군대를 訓明(훈련)시키고 의로운 명성을 넓혀서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야 할 것이요, 만일 그 일이 거행되었다면 망령되이 투신하지 않았어야 하니, 이렇게 하면 어찌 좋지 않았겠는가. 방법은 두 가지일 뿐이니, 진실로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을 어질게 여긴다면 앞에 말한 것을 따랐어야 할 것이요, 만일 나라에 몸을 허락하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면 뒤에 논한 것을 따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두 의리에 맞았을 것이다. 공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면 모두 天運이니, 또 어찌 굳이 怏怏하여 병이 나서 자기 몸을 잃는단 말인가. 이를 일러 大道를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 十一月에 以慕容廆로 爲都督幽, 平二州諸軍事하고 封遼東公하니 立子皝하야 爲世子하다

○ 11월에 慕容廆를 都督幽州平州諸軍事로 삼고遼東公에 봉하니, 慕容廆가 아들慕容皝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壬午]永昌元年

[壬午]永昌元年이라 〈趙光初五年이요 後趙四年이라〉

王敦이 將作亂할새 謂謝鯤劉隗【帝引劉隗等하야 欲抑王氏하니 見上庚辰이라】奸邪하야 將危社稷이라 吾欲除君側之惡하노니 何如오 誠始禍나 然城狐社鼠【城狐不灌하고 社鼠不燻은 謂其得所依憑也니 指人君左右近習이라】니이다 怒曰 君은 庸才라 豈達大體리오하고 遂擧兵於武昌하야 上疏罪狀劉隗한대 沈充이 亦起兵於吳興하야 以應하다 至蕪湖하야 又上表罪狀刁協하니 帝大怒하야 詔曰 王敦이 憑恃寵靈【靈亦寵也라】하고 敢肆狂逆하야 方朕太甲【方은 比也라 敦上疏曰 昔에 太甲顚覆厥度로되 幸納伊尹之忠하야 殷道復昌故云云이라】하야 欲見幽囚하니 是可忍也인댄 孰不可忍이리오 今親帥六軍하야 以誅大逆호리니 有殺者면 封五千戶侯하리라 〈敦傳〉

永昌 元年(임오 322) - 趙나라 光初 5년이고, 後趙 4년이다. -

王敦이 난을 일으키려 할 적에 謝鯤에게 이르기를 “劉隗【황제가 劉隗 등을 나오게 하여 王氏를 억제하고자 하였으니, 앞의 庚辰年條(320)에 보인다.】가 간사하여 장차 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내가 군주 곁에 있는 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자, 謝鯤이 말하기를 “劉隗가 진실로 禍의 시초이지만 城 안에 사는 여우와 社에 사는 쥐【성 안에 사는 여우는 물을 대어 잡을 수가 없고 社에 사는 쥐는 불을 질러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의거할 곳을 얻었음을 이르니, 임금의 좌우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近臣을 가리킨다.】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王敦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용렬한 재주이니, 어찌 일의 大體를 알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武昌에서 군대를 일으키고서 상소하여 劉隗의 죄상을 나열하니, 沈充이 또한 吳興에서 군대를 일으켜 王敦에게 호응하였다. 王敦이 蕪湖에 이르러서 또다시 表文을 올려 刁協의 죄상을 아뢰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王敦이 은총과 신임【靈도 역시 총애하는 것이다.】을 믿고서 감히 미치고 패역한 짓을 恣行하여 朕을 太甲에게 비교하여【方은 비교함이다. 王敦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太甲이 法度를 전복시켰으나 다행히 伊尹의 忠言을 받아들여 殷나라의 道가 다시 창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幽閉하고 가두려 하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을 차마 못하겠는가. 이제 六軍을 직접 거느리고서 大逆罪를 범한 자를 주벌할 것이니, 王敦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五千戶의 侯에 봉하겠다.” 하였다.- 《晉書》〈王敦傳〉에 나옴 -

帝徵戴淵, 劉隗하야 入衛建康하니 至하야 與刁協勸帝하야 盡誅王氏어늘 帝不許하니 隗始有懼色이러라 司空 帥其從弟中領軍와 左衛將軍廙와 侍中, 과 及諸宗族二十餘人하고 每旦에 詣臺【尙書는 爲中臺요 御史는 爲憲臺라】待罪하다 顗將入할새 呼之曰 伯仁【周顗字也라】아 以百口累卿【累는 猶托也라 人謂其家之親屬曰百口라하니 欲使顗保護導하야 以全其家也라】하노라 直入不顧러니 旣見帝에 言忠誠하야 申救甚至하니 帝納其言하다 喜飮酒하야 至醉而出할새 猶在門하야 又呼之어늘 不與言하고 顧左右曰 今年에 殺諸賊奴하고 取金印如斗大하야 繫肘後호리라 旣出에 又上表하야 明無罪하야 言甚切至호되 不之知하고 甚恨之러라 帝命還朝服하고 召見之하니 稽首曰 賊臣逆子 何代無之리오마는 不意今者에 近出臣族이로소이다 帝跣而執其手하고 曰 茂弘【導字라】아 方寄卿以百里之命【欲托孤라 】이어늘 是何言耶오

황제가 戴淵劉隗를 불러 들어와서 建康을 호위하게 하였다. 劉隗가 이르러서 刁協과 함께 황제에게 권하여 王氏를 다 죽이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니, 劉隗가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司空王導가 그의 從弟中領軍王邃와 左衛將軍王廙와 侍中王侃王彬 및 여러 宗族 20여 명을 거느리고 매일 아침마다 臺에 나아가【尙書는 中臺라 하고, 御史는 憲臺라 한다.】 待罪하였다. 周顗가 들어가려 할 적에 王導가 불러 이르기를 “伯仁【伯仁은 周顗의 字이다.】아, 우리 집안 一族의 목숨을 卿에게 부탁한다.【累는 맡김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親屬을 일러 百口라 하니, 周顗로 하여금 王導를 보호하게 하여 그 집안을 온전히 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는데, 周顗가 곧바로 들어가고 돌아보지 않았으나 황제를 뵙자 王導의 충성을 말하여 변명하고 구원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周顗가 기뻐하여 술을 마시고 취해서 나오니, 王導가 아직도 문 앞에 있다가 또다시 周顗를 불렀다. 周顗王導와 말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금년에 여러 역적 놈들을 죽이고서 말[斗]처럼 큰 金印을 취하여 팔뚝 뒤에 매달겠다.” 하였다. 이미 나온 뒤에 또다시 表文을 올려 王導의 무죄함을 밝혀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나 王導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매우 한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王導에게 朝服을 도로 돌려주게 하고 그를 불러서 보았다. 王導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賊臣과 逆子가 어느 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번에 가까이 신의 집안에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황제가 맨발로 나와 그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茂弘【茂弘은 王導의 字이다.】아, 막 卿에게 百里의 政令【百里의 命은 어린 군주를 부탁하고자 한 것이다.】을 맡기려 하는데, 이 무슨 말인가.” 하였다.

○ 三月에 以로 爲前鋒大都督하고 加戴淵驃騎將軍하고 詔曰 以大義滅親하니 可以吾爲安東時節【懷帝時에 元帝嘗爲安東將軍하야 都督揚州하니라】假之라하다 以周顗로 爲尙書左僕射하고 王邃로 爲右僕射하다

○ 3월에 王導를 前鋒大都督으로 삼고 戴淵에게 驃騎將軍을 가하고 조서를 내리기를 “王導는 大義를 지키기 위해 친척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내가 安東將軍으로 있었을 때의 符節【懷帝 때에 元帝가 일찍이 安東將軍이 되어서 揚州를 都督하였다.】을 그에게 빌려 주겠다.” 하였다. 周顗를 尙書左僕射로 삼고, 王邃를 右僕射로 삼았다.

據石頭【城名이니 今建業이라】하야 歎曰 吾不復得爲盛德事矣로다 帝命刁協, 劉隗, 戴淵하야 帥衆攻石頭러니 , 俱敗어늘 帝令公卿百官으로 詣石頭見하고 以爲丞相, 都督中外諸軍, 錄尙書事하다 呂猗【敦參軍也라】周顗, 戴淵이 皆有高名하야 足以惑衆이니 公不除之면 恐必有再擧之憂니라 然之하야 從容問호되 不答【敦參軍呂猗說之하니 然之하여 以問導曰 周, 戴는 南北之望이니 當登三司無疑也라하야늘 導不答하고 又曰 止應令僕邪아하야늘 又不答하고 敦曰 若不爾면 正當誅爾라하야늘 又不答하니 收顗及淵殺之하니라 顗被收에 路經太廟하니 大言曰 賊臣王敦이 傾覆社稷하고 枉殺忠臣하니 神祗有靈인댄 當速殺之리라하니 收人以戟傷其口하야 流血至踵이나 容止自若하니 觀者 皆爲流涕라 幷淵殺之하다】이어늘 收하야 殺之하다 王導後에 料檢【料理也라】中書故事라가 乃見救己之表하고 執之流涕曰 吾雖不殺伯仁이나 伯仁이 由我而死【自愧於敦三問不答之意也라】하니 幽冥之中에 負此良友라하더라 竟不朝天子而還武昌하다 旣得志에 暴慢滋甚하야 四方貢獻을 多入其府하고 將相岳牧【舜有四岳十二牧이라 故로 後之居方面者를 謂之岳牧이라】이 皆出其門하니라

[新增]朱氏(黼)王敦之反에 王導不能無罪也라 晉靈公이 欲殺盾한대 趙盾出奔이어늘 其弟趙穿이 遂弑靈公于桃園이러니 春秋書曰 趙盾이 弑其君夷皐라하고 客有毁郭解【漢武時人이라】者어늘 解之客이 殺之한대 公孫弘曰 解雖不知나 其罪甚於解殺之라하고 遂族解하니 二事雖不同이나 原心定罪하야 推其所自來하면 , 固有難辭其責者라 旣當國하니 은 其從父兄也라 以王氏失職이라하야 致興兵犯順이어늘 不能防之於始하고 又不能止之於今하니 雖欲辭其責이나 可乎아 賊旣東下에 始闔門待罪하고 石頭失守나 位爵如昨하고 至行胸臆報恩怨하야 不免假手于賊이라 自我雖不殺伯仁이나 伯仁由我而死一語로 推之컨대 雖有格天之烈, 蓋世之功이나 欲免趙盾郭解之誅면 終不能也니라

王敦이 石頭城【石頭는 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建業이다.】를 점거하고서 한탄하기를 “내가 다시는 훌륭한 德이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황제가 刁協劉隗戴淵에게 명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石頭城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刁協劉隗가 모두 패하였다. 황제가 公卿과 百官으로 하여금 石頭城에 나아가 王敦을 만나 보게 하고 王敦을 丞相‧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로 삼았다.

呂猗【呂猗는 王敦의 參軍이다.】王敦을 설득하기를 “周顗戴淵이 모두 높은 명망이 있어서 충분히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으니, 公이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차 군대를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王敦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조용히 王導에게 물었으나 王導가 대답하지 않자,【王敦의 參軍인 呂猗가 王敦을 설득하니, 王敦이 그 말을 옳게 여겨 王導에게 묻기를 “周顗와 戴淵은 南方과 北方의 명망 있는 사람이니, 이들이 三公의 지위에 올라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였으나 王導가 대답하지 않았다. 王敦이 또 말하기를 “三公이 못 된다면 尙書令이나 尙書左‧右僕射에 그쳐야 하겠는가?” 하였으나 또 대답하지 않았다. 王敦이 말하기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만 그들을 죽일 뿐이다.” 하였으나 王導가 또 대답하지 않으니, 王敦이 周顗와 戴淵을 체포하여 죽였다. 周顗가 체포당할 때 도중에 太廟를 지나게 되자, 큰 소리로 말하기를 “賊臣인 王敦이 社稷을 전복하고 忠臣을 억울하게 죽이니, 天地神明이 계신다면 속히 그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체포해 가는 사람이 창으로 그의 입을 찔러 피가 흘러서 발꿈치에까지 이르렀으나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니,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周顗를 戴淵과 함께 죽였다.】周顗戴淵을 체포하여죽였다. 王導가 뒤에 中書省의 옛일을 정리【料檢은 헤아려서 정리하는 것이다.】하다가 마침내 周顗가 자신을 구원해 준 表文을 보고는 표문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伯仁이 나 때문에 죽었으니,【王敦이 세 번 물었을 때에 대답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뜻이다.】 이러한 좋은 벗을 저버려서 마침내 죽게 만들었다.” 하였다.

王敦이 끝내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고 武昌으로 돌아갔다. 王敦은 이미 뜻을 얻고 나자, 포악하고 태만함이 더욱 심하여 사방의 貢獻을 대부분 자기의 창고로 들이고 將相과 岳牧(牧伯)【舜임금은 四岳과 十二牧이 있었다. 그러므로 후에 方面을 다스리는 자를 일러 岳牧이라 한다.】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新增]朱氏(朱黼)가 말하였다.

王敦이 배반한 것에 대해 王導도 죄가 없지 못하다. 晉나라 靈公趙盾을 죽이려고 하자 趙盾이 도망갔다. 그 아우 趙穿이 마침내 靈公을 桃園에서 시해하였는데, 《春秋》에 쓰기를 ‘趙盾이 그 군주 夷皐를 시해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郭解【郭解는 漢나라 武帝 때 사람(俠客)이다.】를 헐뜯자 郭解의 문객이 그를 죽였는데, 公孫弘이 말하기를 ‘郭解가 비록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나 죄는 郭解가 직접 죽인 것보다 심하다.’ 하고 마침내 郭解의 三族을 멸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비록 똑같지 않으나 마음을 근원하여 죄를 확정해서 그 由來한 바를 미루어 본다면 趙盾郭解가 진실로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 王導가 이미 국정을 담당하였으니, 王敦은 그의 從兄이었다. 王氏가 직책을 잃었다 하여 王敦이 군대를 일으켜 順理를 범하였는데 王導가 처음에 이것을 막지 못하였고 또 지금에 저지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책임을 면하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역적인 王敦이 이미 동쪽으로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闔門에서 待罪하였고, 石頭城을 빼앗겼으나 지위와 관작이 예전과 똑같았으며, 심지어는 자기 감정대로 은혜와 원수를 갚아서 적에게 손을 빌려 줌을 면치 못하였다. ‘내가 비록 伯仁을 죽이지 않았으나 伯仁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한 마디 말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王導가 비록 하늘을 감동시킬 만한 정성과 세상을 뒤덮을 만한 공로가 있다 해도 趙盾郭解의 벌을 면하고자 한다면 끝내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祖逖이 旣卒에 後趙屢寇河南이어늘 祖約이 不能禦하고 退屯壽春한대 後趙遂取陳留하니 梁, 鄭之間이 復騷然矣러라

祖逖이 죽은 뒤에 後趙가 자주 河南을 침략하였는데, 〈祖逖의 아우인〉 祖約이 막지 못하고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後趙가 마침내 陳留를 점령하니, 梁‧鄭 지방이 다시 소란하였다.

○ 十一月에 帝憂憤成疾하야 崩하니 司空王導 受遺詔輔政하다 帝恭儉有餘나 而明斷不足이라 故로 大業未復하고 而禍亂內興이러라 太子卽皇帝位하다

永嘉陳氏曰 自古로 爭天下者는 常易하고 收天下者는 常難이라 唐人有言호되 神堯【唐高祖李淵이라】以一旅取天下어늘 而子孫不能以天下取河北이라하니 嗟夫라 是亦其勢然也라 夫以匹夫而爭天下와 與失天下而收之者는 其勢甚不相若也라 凡人之情은 輕於用人之所有하고 重於用己之所愛하나니 輕則勇하고 重則怯하니 此爭天下與收天下之所以異也라 昔漢高帝資三尺之劍하야 五載而成帝業하니 何其銳也오 蓋高帝崛起豐沛之微하야 無寸土爲之階하니 兵은 秦兵也요 粟은 秦粟也요 城邑은 秦之城邑也라 驅非己之民하고 食非己之粟하야 而收非己之城邑이라 故得以肆意而爲之하야 降數十郡而喪之를 不恨也하고 捐數千里而授三將을 不惜也요 睢水之圍와 滎陽之脫에 濱於死而不衰也라 以匹夫而爭天下에 其幸而集【成也라】則帝王이요 不幸而不集이면 吾如彼何哉리오 高帝亦不得不勇爲之矣라 晉元之南渡也에 撫江都之勝하고 兼吳會【吳地는 爲荊, 揚, 交, 廣之都會라】之饒하니 亦足以奮矣로되 而沒齒不能歸侵疆之咫尺者는 非他也라 其心이 愛夫一隅之可以自託하야 惴惴然惟恐其用之而倂失之也일새라 故曰是亦其勢然也라하노라 三代之後에 中興之功이 莫易於光武하니 豈光武獨能也哉아 蓋其勢亦高帝之勢요 而光武亦以高帝之道用之也일새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元帝는 本牛氏之子로 冒典午之裔하야 遯居江表라 天下士民이 有思晉者 皆裹粮而歸之하야 中外勸進호되 拒而弗從이라가 及愍帝遇害에 始正位號하니 亦庶乎知節者라 加以天性簡儉하고 容受直言이라 初鎭江東에 頗荒于酒러니 王導正色直諫한대 亟命引觴覆之하고 所幸鄭夫人이 衣無文綵하고 布帳練帷하며 詳刑簡化하니 史氏稱其光啓中興이 非溢美矣라 然이나 帝才具不優하고 志氣非遠이라 初以懷帝之命으로 來臨江左하니 國有緩急이면 固宜糾合義旅하야 入衛王室이어늘 而乃自爲封殖之謀하고 無慷慨救時之志하야 懷帝遂以蒙塵호되 迄不聞勤王之擧하며 愍帝嗣立에 增重寄委하고 制詔深切하니 所宜動心이로되 顧乃坐視神州陸沈과 戎馬縱橫하야 曾不以介意焉이라 方且陽爲出師하야 遷延不進하야 遂使河南으로 終淪左袵하니 惜哉라 夫受君父之托而坐視其禍變하고 因時事之艱難而僥倖以自利하야 三綱淪矣니 其能以討賊乎아 此所以建國規模 亦復不競하고 亂臣賊子에 如王敦者 不旋踵以起하니 豈無自而然哉아

○ 11월에 황제가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어 崩하니, 司空王導가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였다. 황제가 공손함과 검소함은 有餘하였으나 총명함과 결단성은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大業을 회복하지 못하고 禍亂이 안으로부터 일어났다.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永嘉陳氏가 말하였다.

“예로부터 천하를 다투는 것은 항상 쉽고, 천하를 잃었다가 收復하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唐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神堯【神堯는 唐나라 高祖 李淵이다.】는 1旅(500명)로 천하를 취하였으나 자손들은 천하를 가지고도 河北을 취하지 못했다.’ 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는 또한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匹夫로서 천하를 다투는 것과 천하를 잃었다가 수복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매우 다르다. 무릇 사람의 情은 남이 소유한 것을 쓰는 것은 가볍게 여기고, 자신이 아끼는 것을 쓰는 것은 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가볍게 여기면 용감하고 중하게 여기면 겁을 내니, 이는 천하를 다투는 것과 천하를 잃었다가 수복하는 것이 다른 까닭이다.

옛날 漢나라 高帝는 三尺劍을 잡고 5년 만에 帝業을 이룩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빨랐는가. 高帝는 豐沛의 미천한 신분으로 일어나서 한 자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였으니, 군대는 秦나라 군대였고 곡식은 秦나라 곡식이었고 성읍은 秦나라의 城邑이었다.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부리고 자기의 곡식이 아닌 것을 먹고 자기 城邑이 아닌 곳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어서 수십 개의 郡을 적에게 내주고도 이것을 잃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수천 리의 땅을 떼어서 세 명의 장수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睢水에서 포위당하고滎陽에서 탈출할 때에 거의 죽을 뻔했는데도 쇠하지 않은 것이다. 匹夫로서 천하를 다툴 때에 다행히도 성공【集은 이룸이다.】하면 帝王이 될 것이요, 불행히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저 天運을 어찌하겠는가. 高帝는 또한 용감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晉나라 元帝가 남쪽으로 건너올 때에 江都의 아름다운 경치를 어루만지고 吳會【吳地는 荊州‧揚州‧交州‧廣州의 都會地(모두 모이는 곳)이다.】 지방의 풍요로움을 겸하였으니, 또한 충분히 분발할 수 있었으나 죽을 때까지 침략당한 강토를 咫尺도 돌려받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그 마음속으로 한 귀퉁이에 스스로 의탁할 수 있음을 아까워해서 벌벌 떨며 행여 이것을 쓰다가 아울러 그것마저 잃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는 또한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三代 이후에 中興한 功이 光武帝보다 더 쉬운 사람이 없었으니, 어째서 光武帝만 홀로 능하였겠는가. 이는 그 형세가 또한 高帝의 형세였고 光武帝가 또한 高帝의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元帝는 본래 牛氏의 아들인데 거짓으로 典午(司馬氏)의 後裔라 하고 江表(江南)에 도망가 있었다. 天下의 선비와 백성 중에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모두 양식을 싸 가지고 그에게 돌아가서 中外에서 帝位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다가 愍帝가 살해당하자 비로소 天子의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았으니, 또한 忠節을 아는 자에 가까웠다. 더구나 天性이 간소하고 검약하며 直言을 받아들였다. 처음 江東에 鎭駐했을 때에 한창 술에 빠졌는데, 王導가 正色하고 直諫하자 급히 술잔을 가져다 엎어 버리도록 명하였으며, 총애하는 鄭夫人은 옷에 문채가 없었고 삼베 장막에 마전한 삼베로 휘장을 만들었으며, 형벌을 자세히 살피고 교화를 간략히 하였으니, 史官이 中興을 크게 열었다고 칭찬한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元帝는 才具(재능)가 넉넉하지 못하고 志氣가 원대하지 못하였다. 처음에 懷帝의 명령으로 江左(江東)에 와서 임하였으니,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진실로 義兵을 규합하여 들어가서 王室을 호위했어야 할 터인데, 마침내 자신이 諸侯에 봉해질 계책만 세우고 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懷帝가 마침내 蒙塵하였으나 끝내 勤王하는 일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愍帝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더욱 중하게 위임하고 詔書의 내용이 깊고 간절하였으니 마땅히 마음을 움직였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神州(中國)가 외적에게 망하고 오랑캐의 軍馬가 종횡으로 치달리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일찍이 介意치 않았다. 그리고 또 겉으로 출병하는 체하면서 지체하고 전진하지 않아서 마침내 河南 지방으로 하여금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하였으니, 애석하다.

君父의 부탁을 받았으면서 禍變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時事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요행을 바라 자신에게 이롭게 하여 三綱이 매몰되었으니, 어찌 逆賊을 토벌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建國한 規模가 또한 다시 떨쳐지지 못하였고 亂臣賊子 중에 王敦과 같은 자가 미처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나왔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러했겠는가.”

肅宗明皇帝

肅宗明皇帝 名紹요 字道畿니 元帝長子라 在位三年이요 壽二十七이라

肅宗明皇帝【照臨四方曰明이라】요 字道畿元帝長子라 在位三年이요 壽二十七이라

肅宗 明皇帝【四方에 밝게 임하는 것을 明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고 字가 道畿이니, 元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27세이다.

[甲申]太寧二年

[甲申]太寧二年이라 〈趙光初七年이요 後趙六年이라〉

五月에 王敦이 疾甚하니 矯詔拜王應【敦兄含子니 敦無子하야 以應爲嗣하니라】하야 爲武衛將軍하야 以自副하고 以王含으로 爲驃騎大將軍하다 錢鳳이 謂曰 脫有不諱【脫은 或然之辭라】인댄 便當以後事付應耶잇가 曰 非常之事는 非常人所能爲요 且應年少하니 豈堪大事리오 我死之後에 莫若釋兵散衆하고 歸身朝廷하야 保全門戶 上計也요 退還武昌하야 收兵自守하야 貢獻不廢 中計也요 及吾尙存하야 悉衆而下하야 萬一僥倖이 下計也니라 謂其黨曰 公之下計는 乃上策也라하고 遂與沈充定謀하야 俟死하야 卽作亂하다

太寧 2년(갑신 324) - 趙나라 光初 7년이고, 後趙 6년이다. -

5월에 王敦이 병이 위독하니, 詔命을 사칭하고 아들 王應【王應은 王敦의 형인 王含의 아들이니, 王敦이 아들이 없어서 王應을 후사로 삼았다.】을 임명하여 武衛將軍으로 삼아서 자신의 副로 삼고 형 王含을 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錢鳳王敦에게 이르기를 “만일 숨길 수 없는 일(王敦의 죽음)이 있게 되면【脫은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말이다.】 곧 後事를 王應에게 맡겨야 합니까?” 하니, 王敦이 말하기를 “非常한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또 王應이 나이가 어리니 어찌 큰일을 감당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병기를 버리고 무리를 해산하고 조정에 몸을 의탁하여 門戶를 보전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上策이요, 물러가 武昌으로 돌아가서 군대를 거두어 스스로 지키면서 貢獻(貢物의 헌납)을 폐하지 않는 것이 中策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병력을 통솔하고 동쪽으로 내려가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는 것이 下策이다.” 하였다. 錢鳳이 그의 同黨에게 이르기를 “公의 下策이 바로 上策이다.” 하고는 마침내 沈充과 계책을 정하여 王敦이 죽기를 기다려 곧 난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 司徒疾篤하고 率子弟하야 爲發哀【欲討敦이라가 知其物情所畏하고 乃僞言敦死라】하니 衆以爲信死라하야 咸有奮志러라 於是에 尙書謄詔下【謄은 傳也요 敦府는 敦之官府라】하야 列敦罪惡하니 이 見詔甚怒而病轉篤하야 不能自將하고 以王含爲元帥하야 以誅姦臣溫嶠【初에 嶠爲劉琨使江東할새 其母不欲이어늘 嶠絶裾而行이러니 旣至에 不得還하니 終身恨之하다 帝旣親任하니 敦惡之하야 請爲左司馬어늘 嶠乃詐爲勤敬하고 進密謀하야 以附其欲이라 深結錢鳳하고 爲之聲譽하야 每曰 錢世儀精神滿腹이라하니 嶠素有藻鑑之名일새 鳳甚悅하다 會丹陽尹缺이어늘 嶠言於敦曰 京尹은 咽喉之地니 公宜自選이니이다 敦然之하야 問誰可者오한대 嶠薦鳳하니 鳳亦推嶠라 嶠僞辭하니 遂表用之하야 使覘朝廷이라 嶠與敦別할새 洒(灑)涕러니 嶠至建康하야 盡以敦逆謀告帝하고 與尙書令庾亮으로 畫計討之한대 敦聞之하고 大怒曰 吾乃爲小物所欺라하니라】等으로 爲名하고 水陸五萬이 奄至江寧南岸이라 帝帥諸軍하야 出屯南皇堂하고 夜募壯士하야 遣將軍段秀等하야 帥甲卒千人하야 渡水掩其未備하고 平旦에 戰於越城하야 大破之하고 斬其前鋒將何康하다 敗하고 大怒曰 我兄은 老婢耳라 門戶衰하니 世事去矣로다 我當力行호리라하고 因作勢而起라가 困乏復臥라 이 尋卒하니 黨이 悉平이라 有司發王敦瘞하야 出尸하야 焚其衣冠하고 跽而斬之하다

○ 司徒王導王敦이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子弟를 거느리고 가서 王敦을 위해 訃告를 발표하니,【王導가 王敦을 토벌하고자 하다가 物情(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王敦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말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王敦이 참으로 죽었다고 여겨서 모두 분발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때에 尙書가 조칙을 謄書하여 王敦의 官府에 내려 보내어【謄은 전함이요, 敦府는 王敦의 官府이다.】王敦의 죄악을 열거하니, 王敦이 조서를 보고 매우 노하여 병이 더욱 도져서 스스로 군대를 거느릴 수가 없으므로 王含을 元帥로 삼아, 간신 溫嶠【처음에 溫嶠가 劉琨을 위해 江東으로 사신 갈 때에 그 어머니가 가지 못하게 하자 溫嶠가 옷자락을 끊고 갔었는데,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니 종신토록 한하였다. 황제가 溫嶠를 친애하고 믿자, 王敦이 그를 미워하여 자신의 左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溫嶠가 이에 거짓으로 王敦의 官府의 일을 열심히 하고 공경히 하였으며 은밀한 계책을 올려서 그의 바람을 맞춰 주었다. 溫嶠가 錢鳳과 깊이 교분을 맺고 그를 칭찬하여, 말할 때마다 “錢世儀(錢鳳)는 神彩가 전신에 꽉 차 있다.” 하니, 溫嶠가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錢鳳이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 丹陽尹의 자리가 비자, 溫嶠가 王敦에게 말하기를 “京尹은 매우 중요한 자리이니, 公이 직접 선발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王敦이 옳게 여겨 누가 적임자인지 묻자 溫嶠가 錢鳳을 천거하니, 錢鳳이 또한 溫嶠에게 사양하였다. 溫嶠가 거짓으로 사양하니, 王敦이 마침내 表文을 올려 溫嶠를 등용해서 조정을 엿보게 하였다. 溫嶠가 王敦과 작별할 적에 거짓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溫嶠가 建康에 이르러서는 王敦의 반역하려는 계책을 모두 황제에게 아뢰고 尙書令 庾亮과 함께 王敦을 토벌할 계책을 세우니, 王敦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 마침내 하찮은 놈에게 속임을 당했다.” 하였다.】 등을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水軍과 陸軍 5만 명이 江寧의 南岸에 갑자기 이르렀다. 황제가 諸軍을 거느리고 나와 南皇堂에 주둔하였다. 밤에 壯士를 모집하여 將軍段秀 등을 보내서 甲兵 천 명을 거느리고 물을 건너 아직 대비하지 못했을 때에 기습하게 하여 해뜰 때 越城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前鋒將何康을 목 베었다. 王敦王含이 패전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은 퇴물이다. 가문이 쇠하니 대세가 이미 글렀다. 내 마땅히 억지로라도 가야겠다.” 하고는 인하여 불끈 힘을 주어 일어나다가 기력이 부쳐 도로 누웠다. 王敦이 얼마 후에 죽으니, 王敦의 黨이 모두 평정되었다. 有司가 王敦을 매장한 무덤을 파서 그의 시신을 꺼내어 衣冠을 불태우고 꿇어앉혀서 목을 베었다.

[乙酉]三年

[乙酉]三年이라 〈趙光初八年이요 後趙七年이라〉

五月에 以陶侃으로 爲征西大將軍, 都督荊, 湘, 雍, 梁四州諸軍事, 荊州刺史하니 荊州士女相慶이러라 이 性聰敏恭勤하야 終日斂膝危坐하고 軍府衆事를 檢攝無遺하야 未嘗少閑하다 常語人曰 大禹는 聖人이로되 乃惜寸陰하시니 至於衆人하야는 當惜分陰【分은 分寸之分也라】이니 豈可但逸遊荒醉하야 生無益於時하고 死無聞於後리오 是는 自棄也라하니라 嘗造船할새 其木屑竹頭를 이 皆令籍而掌之한대 人咸不解所以러니 後正會【會正歲之首月也라】에 積雪初晴하야 廳事前에 餘雪猶濕이어늘 乃以木屑布地하고 及桓溫伐蜀에 又以所貯竹頭로 作丁【丁은 讀曰釘이라】裝船하니 其綜理微密이 皆此類也러라

[新增]養心吳氏曰 晉俗之敝가 在於淸談廢事어늘 而能勤事如此하니 可謂砥柱中流【書禹貢에 砥作底라 在冀州大河中流하니 其形如柱라】하야 不爲習俗所移라 賢於王導, 謝安이 遠矣니라

太寧 3년(을유 325) - 趙나라 光初 8년이고, 後趙 7년이다. -

5월에 陶侃을 征西大將軍‧都督荊州湘州雍州梁州諸軍事‧荊州刺史로 삼으니, 荊州의 남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陶侃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손하고 부지런하여 종일토록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서 軍府의 여러 가지 일을 단속하여 빠뜨림이 없어 일찍이 조금도 한가한 적이 없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大禹는 聖人인데도 마침내 寸陰【分은 分寸의 分이다.】을 아끼셨으니, 衆人들에 이르러서는 分陰을 아껴야만 한다. 어찌 다만 편안히 놀고 할 일을 폐한 채 술에 취하여, 살아서는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알려짐이 없게 하겠는가. 이는 자포자기이다.” 하였다. 일찍이 배를 만들 때에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陶侃이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관장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뒤에 元旦의 모임【正會는 正歲의 첫 달에 모이는 것이다.】에 눈이 많이 내리다가 날씨가 막 개어서 廳事 앞에 남은 눈이 아직도 젖어 있자 이에 톱밥을 땅에 뿌렸으며, 桓溫이 蜀을 정벌할 때에 또 陶侃이 저장해 두었던 대나무 조각으로 대못【丁은 釘으로 읽는다.】을 만들어 배를 정비하니, 일을 종합하고 처리함에 치밀하고 빈틈없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晉나라 풍속의 병폐는 淸談을 하여 일을 폐지하는 데 있었는데, 陶侃이 일을 부지런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中流의 砥柱【≪書經≫ 〈禹貢〉에는 ‘砥’가 ‘底’로 되어 있다. 冀州의 大河(黃河) 中流에 있으니, 그 모양이 기둥과 같다.】가 되어서 習俗에 옮김을 당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王導謝安보다 크게 어질다.”

七月에 帝崩하다 帝明敏有機斷이라 故로 能以弱制强하야 誅剪逆臣하고 克復大業하니라 太子卽皇帝位하니 生五年矣라 太后【荀氏라】臨朝稱制하고 以司徒로 錄尙書事하고 與中書令庾亮과 尙書令卞壼으로 參輔朝政이나 然事之大要는 皆決於亮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明帝는 潛謀獨斷하야 躬率六軍하고 掃除大憝하야 未及朞年에 黨悉平하니 雖享國日淺이나 而志亦可壯矣니라

7월에 황제가 崩하였다. 황제는 명민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약한 형세로 강한 자를 제압하여 逆臣을 죽이고 大業을 회복하였다. 太子가 황제에 즉위하니, 나이가 5세였다. 太后【太后는 荀氏이다.】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고 司徒王導를 錄尙書事로 삼고, 中書令庾亮과 尙書令卞壼과 함께 참여하여 조정의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의 大體는 모두 庾亮에게서 결정되었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明帝는 은밀히 도모하고 홀로 결단하여 몸소 六軍(全軍)을 거느리고 元兇을 소탕하여 미처 期年이 되기 전에 王敦의 도당이 모두 평정되었으니, 비록 재위한 연수는 짧으나 뜻은 또한 장하게 여길 만하다.”

顯宗成皇帝

顯宗成皇帝 名衍이 明帝長子也라 在位十七年이요 壽二十二라

顯宗成皇帝【安民立政曰成이라】이니 明帝長子也라 在位十七年이요 壽二十二라

顯宗 成皇帝【백성을 안정시키고 정사를 확립한 것을 成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明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17년이고 壽가 22세이다.

[丁亥]咸和二年

[丁亥]咸和二年이라 〈趙光初十年이요 後趙九年이라〉

十月에 庾亮이 以蘇峻【懷帝永嘉之亂에 糾合數千家하니 元帝以爲鷹揚將軍이러니 後討敦有功한대 進持節, 冠軍將軍하다 旣有功에 潛有異志하니라】在歷陽하야 終爲禍亂이라하야 欲下詔徵之하야 訪於司徒한대 은 猜險하니 必不奉詔니 不若且包容之니라 卞壼, 溫嶠累書止하고 擧朝以爲不可라호되 皆不聽하다 於是에 下優詔徵하야 爲大司農하니 이 遂不應命하다 이 知祖約怨朝廷【約은 逖之弟也라 約自以名輩不後郄鑒, 卞壼이어늘 而不與顧命遺詔러니 褒進大臣에 又不及己하니 疑亮削之하야 乃怨亮하니라】하고 乃遣使하야 推約하고 請共討庾亮하니 이 大喜하야 以兵會하다

咸和2년(정해 327) - 趙나라 光初 10년이고, 後趙 9년이다. -

10월에 庾亮은 蘇峻【蘇峻이 懷帝 永嘉의 亂에 수천 가호를 규합하니 元帝가 蘇峻을 鷹揚將軍으로 삼았는데, 뒤에 王敦을 토벌한 공이 있자 持節‧冠軍將軍으로 승진시켰다. 공을 세운 뒤에 남몰래 딴 마음을 품었다.】이 歷陽에 있어서 끝내 禍亂을 일으킬 것이라 하여 조서를 내려 부르고자 해서 司徒王導에게 묻자, 王導가 말하기를 “蘇峻은 시기하고 음험하니, 반드시 조서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卞壼溫嶠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庾亮을 만류하고 온 조정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庾亮이 모두 듣지 않았다. 이에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 蘇峻을 불러 大司農으로 삼으니, 蘇峻이 마침내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蘇峻祖約이 조정을 원망한다【祖約은 祖逖의 아우이다. 祖約이 스스로 ‘名聲과 行輩(지위)가 郄鑒과 卞壼에게 뒤지지 않는데도 顧命의 遺詔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여겼는데, 대신들을 승진시킬 때에 또 자신에게 미치지 않으니, 庾亮이 삭제한 것이라고 의심해서 마침내 庾亮을 원망하였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使者를 보내어 祖約을 추대하여 높이고 함께 庾亮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祖約이 크게 기뻐하여 병력을 데리고 蘇峻과 만났다.

[戊子]三年

[戊子]三年이라 〈趙光初十一年이요 後趙太和元年이라〉

蘇峻이 帥衆二萬人하야 濟自橫江하다 二月庚戌에 이 至蔣陵覆舟山하니 陶回【司徒司馬也니 司徒屬官에 有司馬하니라】庾亮이 知石頭有重戍하야 不敢直下하고 必向小丹楊(陽)南道하야 步來하리니 宜伏兵邀之면 可一戰擒也리이다 이 不從이러니 이 果自小丹楊來라가 迷失道하야 夜行에 無復部分하니 乃悔之러라 이 攻淸溪柵이어늘 卞壼이 帥諸軍拒擊이라가 不能禁하니 이 因風縱火하야 燒臺省及諸營, 寺署【府庭所在를 皆謂之寺요 官舍曰署라】庾亮이 帥衆하고 將陳于宜陽門內라가 未及成列하야 士衆이 皆棄甲走하니 이 奔尋陽하다 兵이 入臺城하야 稱詔大赦호되 惟庾亮兄弟는 不在原例【赦罪曰原이라】라 以王導有德望이라하야 猶使以本官으로 居己之右하고 祖約으로 爲侍中, 太尉, 尙書令하고 이 自爲驃騎將軍, 錄尙書事하다

[新增]尹氏蘇峻이 狼子野心이어늘 庾亮이 旣不能思所處之【亮嘗言於朝曰 峻은 狼子野心하니 終必爲亂이라하니라】하고 而乃遽頒召命하야 自速其反이라 方其下詔之初에 擧朝以爲不可어늘 乃愎諫自用하니 其失이 一也요 溫嶠欲帥衆入衛하고 三吳【蘇潤湖三州是라】欲起兵赴難이어늘 皆拒之【徵峻호되 峻不應命이어늘 溫嶠欲入衛建康하고 三吳亦欲起義兵이러니 亮報嶠書曰 吾憂西陲를 過於歷陽하니 足下無過雷池一步라하니라】하니 其失이 二也요 孔坦【尙書左丞이라】이 請斷阜陵하고 守當利【地名이니 一云 當利便處諸江口라하니라】諸口어늘 而不從하니 其失이 三也요 陶回請伏兵小丹陽南道어늘 又不許하니 其失이 四也라 由是而觀하면 召釁稔禍를 誰其尸之오 至於國破君危하야 宗社不守어늘 不能於此灰身以謝天下하고 方且奉頭鼠竄하야 草間求活하니 向非溫嶠諸賢이 戮力討賊이면 則晉氏必不血食이리니 雖萬死나 猶爲無補라 誤國如此어늘 尙可不加誅責【誅亦責也라】乎아

咸和3년(무자 328) - 趙나라 光初 11년이고, 後趙太和 元年이다. -

蘇峻이 병력 2만 명을 거느리고 橫江으로부터 건너왔다. 2월 경술일(1일)에 蘇峻이 蔣山丘陵의 覆舟山에 이르니, 陶回【陶回는 司徒의 司馬였으니, 司徒의 屬官에 司馬가 있다.】庾亮에게 이르기를 “蘇峻이 石頭城에 重兵의 수비가 있음을 알아서 감히 곧바로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小丹陽城으로 향하여 남쪽 길을 따라 걸어서 올 것이니, 마땅히 군대를 매복했다가 맞아서 싸우면 一戰에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庾亮이 따르지 않았다. 蘇峻이 과연 小丹陽城에서 오다가 길을 잃어서 밤에 행군할 때에 部隊의 질서가 없으니, 庾亮이 비로소 후회하였다. 蘇峻이 淸溪(建康城 동쪽)의 柵을 공격하자 卞壼이 諸軍을 거느리고 공격에 맞섰으나 저지하지 못하니, 蘇峻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三臺五省과 여러 軍營과 寺署(官署)【府庭(衙門)이 있는 곳을 일러 寺라 하고, 官舍를 署라 한다.】를 불태웠다. 庾亮이 병력을 인솔하고 宜陽門 안에서 陣을 치려다가 미처 대열을 이루기도 전에 군사들이 모두 갑옷을 버리고 달아나니, 庾亮溫嶠가 있는 尋陽으로 도망하였다. 蘇峻의 군대가 臺城에 들어와 황제의 조서라고 칭하고 크게 사면하였으나 庾亮 형제만은 용서해 주는 例【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原이라 한다.】에 들어 있지 않았다. 王導는 덕망이 있다 하여 오히려 王導로 하여금 본래의 관직을 지닌 채 자신의 윗자리에 있게 하고 祖約을 侍中‧太尉‧尙書令으로 삼았으며, 蘇峻 자신은 驃騎將軍‧錄尙書事가 되었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蘇峻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庾亮이 이미 대처【庾亮이 일찍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蘇峻은 이리와 같은 야심을 품고 있으니, 끝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소환하는 명령을 반포하여 스스로 반란을 재촉하였다. 조서를 내리던 초기에 온 조정이 불가하다고 말하였으나 庾亮이 마침내 고집을 부려 諫言을 듣지 않고 자기 의견을 썼으니 그 잘못이 하나요, 溫嶠가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고자 하고 三吳【三吳는 蘇州‧潤州‧湖州의 세 州가 바로 이것이다.】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켜 난을 구하러 달려오고자 하였으나 庾亮이 모두 거절하였으니【蘇峻을 불렀으나 蘇峻이 명에 응하지 않자 溫嶠가 들어가 建康을 호위하고자 하였고, 三吳 또한 義兵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 庾亮이 溫嶠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내 서쪽 변방을 우려하기를 歷陽보다 더하게 하니, 足下는 雷池에서 한 걸음도 떼지 말라.” 하였다.】 그 잘못이 둘이요, 孔坦【孔坦은 尙書左丞이다.】이 阜陵을 차단하고 當利【當利는 지명이니, 一說에 이르기를 “마땅히 강어귀에 처하게 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하였다.】의 여러 어구를 지킬 것을 청하였는데 庾亮이 따르지 않았으니 그 잘못이 셋이요, 陶回가 小丹陽의 남쪽 길에 군대를 매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庾亮이 또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잘못이 넷이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재앙을 부르고 화를 키움을 누가 주장하였는가. 국가가 망하고 군주가 위태로워서 宗社를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庾亮이 이때에 몸을 죽여서 천하에 사죄하지 못하고 또 머리를 받들고 쥐처럼 숨어서 풀숲에서 구차히 살기를 바랐다. 그때 만일 溫嶠 등 여러 賢者가 힘을 합쳐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다면 晉나라는 반드시 나라를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니, 庾亮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보탬이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이와 같이 그르쳤는데, 오히려 주벌【誅 또한 꾸짖음이다.】을 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四月에 庾亮, 溫嶠 將起兵討할새 遣督護王愆期하야 詣荊州邀陶侃【邀與要通하니 求也라】하야 與之同赴國難이러니 이 卽戎服登舟하야 晝夜而進하다 溫嶠有衆七千이러니 洒(灑)泣登舟하고 郄鑒【郄는 晉書에 作郗하니 音絺니 姓名也라】이 在廣陵하야 城孤糧少하고 逼近胡寇하야 人無固志러니 得詔書하고 卽流涕하야 誓衆入赴國難하니 將士爭奮이러라 等이 同趣(趨)建康하니 戎卒四萬이요 旌旗七百餘里요 鉦鼓【鉦은 音正이니 鐃也, 鐲也라 鐲은 似小鍾이요 鐃는 似鈴也라】之聲이 震於遠近이러라 蘇峻이 聞西方兵起하고 乙未에 逼遷帝於石頭어늘 督水軍하야 向石頭하고 庾亮, 溫嶠, 趙胤이 帥步兵萬人하야 從白石南上하야 欲挑戰하다 이 將八千人逆戰이라가 馬躓어늘 의 部將彭世, 李千等이 投之以矛하니 墜馬한대 斬首臠【力轉切이니 切肉也라】割之하고 焚其骨하다 三軍이 皆稱萬歲【七國時엔 衆所喜慶于君者에 皆呼萬歲러니 秦漢以下로 臣下對見于君하야 拜恩慶賀에 率以爲常이라】하니 餘衆이 大潰러라 司馬任(護)[讓]等이 共立하야 爲主하고 閉城自守라 趙胤이 遣將擊祖約于歷陽하니 이 奔後趙하다

4월에 庾亮溫嶠가 장차 군대를 일으켜 蘇峻을 토벌하려 할 적에 督護王愆期를 보내어 荊州에 나아가 陶侃을 맞이해서【邀는 要와 통하니, 구하는 것이다.】 함께 國難에 달려가자 하니, 陶侃이 즉시 군복을 입고 배에 올라서 밤낮으로 진군하였다. 溫嶠는 7천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蘇峻의 죄상을 열거하자 7천 명의 군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배에 올랐고, 郄鑒【郄는 ≪晉書≫에 郗로 되어 있다. 音이 치이니 姓名이다.】은 廣陵에서 城이 고립되고 양식이 부족하며 오랑캐들(後趙)과 가까이 있어서 사람들이 견고히 지킬 뜻이 없었으나 조서를 읽고는 금방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國難에 달려갈 것을 맹세하니, 장병들이 다투어 분발하였다. 溫嶠 등이 建康으로 함께 달려오니 병력이 4만 명이요 旌旗가 7백여 리에 뻗쳤으며 징【鉦은 音이 정이니, 징이며 방울이다. 鐲은 작은 鍾과 비슷하고 鐃는 방울과 비슷하다.】소리와 북소리가 遠近에 진동하였다.

蘇峻이 西方에서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을미일(5월 18일)에 황제를 위협하여石頭城으로 옮기자, 陶侃은 水軍을 독려하여 石頭城으로 향하고庾亮溫嶠趙胤은 步兵 만 명을 거느리고 白石 남쪽에서 올라가서 도전하고자 하였다. 蘇峻이 8천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다. 싸우다가 말이 넘어지자, 陶侃의 部將彭世李千 등이 창을 던지니, 蘇峻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목을 베고 살점을 저미고【臠은 力轉切(련)이니 저민 고기이다.】 뼈를 불태웠다. 三軍이 모두 만세를 부르니,【戰國 시대에는 뭇 백성들이 임금에게 기쁜 경사가 있을 때에 모두 萬歲를 불렀는데, 秦漢 이후로는 臣下가 임금을 대면하여 謝恩肅拜하고 慶賀할 때에 대체로 만세를 부르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나머지 무리가 크게 무너졌다. 蘇峻의 司馬任讓 등이 함께 蘇峻의 아우 蘇逸을 세워서 군주로 삼고 성문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趙胤이 장수를 보내어 祖約을 歷陽에서 공격하니, 祖約이 後趙로 도망하였다.

○ 後趙中山公虎【字季龍이니 石勒之從子라】 擊趙어늘 趙主 大敗之하다 濟自大陽하야 圍石生【後趙將이라】於金墉하니 襄國【石勒所據之地也라】이 大震이러라

○ 後趙中山公 石虎【中山公 石虎는 字가 季龍이니, 石勒의 조카이다.】가 趙나라를 공격하자, 趙主劉曜가 대패시켰다. 劉曜가 大陽으로부터 건너가서 石生石生은 後趙의 장수이다.】을 金墉에서 포위하니, 襄國【襄國은 石勒이 점거한 곳이다.】이 크게 진동하였다.

○ 十一月에 後趙王이 自將救洛陽하야 大破趙兵하고 斬首五萬餘級하고 遂殺하다

○ 11월에 後趙王石勒이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洛陽을 구원하여 趙兵을 대파하고 5만여 명의 首級을 베고 마침내 劉曜를 죽였다.

[己丑]四年

[己丑]四年이라 〈趙光初十二年이요 後趙太和二年이라 ○ 是歲에 趙亡하니 大一, 小二니 凡三僭國이라〉

正月에 趙太子 帥百官하야 奔上邽하니 關中이 大亂이라 將軍蔣英, 辛恕 據長安하고 遣使降于後趙하다

咸和4년(기축 329) - 趙나라 光初 12년이고, 後趙太和 2년이다. ○ 이해에 趙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정월에 趙나라 太子劉熙가 百官을 거느리고 上邽로 도망가니, 關中이 크게 혼란하였다. 장군 蔣英辛恕가 長安을 점거하고 使者를 보내어 後趙에 항복하였다.

○ 二月에 諸軍이 攻石頭할새 西軍【侃等諸軍이라】이 獲蘇逸斬之하다

○ 2월에 諸軍이 石頭城을 공격할 때에 西軍【西軍은 陶侃 등의 諸軍이다.】蘇逸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 群臣이 見帝하고 頓首號泣請罪하다 司徒入石頭하야 令取故節한대 陶侃이 笑曰 蘇武節은 似不如是라하니 導有慚色이러라

○ 여러 신하들이 황제를 뵙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고 벌줄 것을 청하였다. 司徒王導가 石頭城에 들어가서 옛 節(깃발)을 가져오게 하자, 陶侃이 웃으며 말하기를 “蘇武의 節은 이와 같지 않을 듯하다.” 하니, 王導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 是時에 宮闕灰燼하야 以建平園爲宮이라 溫嶠는 欲遷都豫章하고 三吳之豪는 欲都會稽하야 二論이 紛紜未決이어늘 司徒孫仲謀, 劉玄德이 俱言建康은 王者之宅이라하니 古之帝王이 不以豐儉【豐은 大也요 儉은 小也라】移都라 苟務本節用이면 何憂彫(凋)敝리오 若農事不修면 則樂土爲墟矣요 且北寇游魂【言其遊散이라】이 伺我之隙하니 一旦示弱하야 竄於蠻越하야 求之望實【望은 聞望也요 實은 實事也라】이면 懼非良計니 今特宜鎭之以靜이면 群情自安이리이다 由是로 不復徙都하다

○ 이때에 궁궐이 다 불타서 建平園을 궁궐로 삼았다. 溫嶠는 豫章으로 천도하고자 하고 三吳의 호걸들은 會稽에 도읍하고자 해서 두 가지 의론이 분분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司徒王導가 말하기를 “孫仲謀劉玄德이 모두 말하기를 ‘建康은 王者가 살 곳이다.’ 하였으니, 옛날 帝王들은 부유하고 곤궁함【豐은 큼이요, 儉은 작음이다.】에 따라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만일 本業(농사)에 힘쓰고 財用을 절약한다면 어찌 피폐함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농사가 닦여지지 않으면 樂土가 빈 터가 될 것이요, 또 북쪽 오랑캐의 떠돌아다니는 魂【游魂은 떠돌아다니고 흩어진 무리를 이른다.】이 우리의 틈을 엿볼 것이니, 하루아침에 약함을 보이고 도망하여 蠻, 越(豫章과 會稽)에 이르러서 저들로 하여금 우리를 중하게 여겨 주기【望은 명망이요, 實은 實事(實際)이다.】를 구한다면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하다. 이제 다만 마땅히 고요함으로써 진정하면 민심이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다시는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庚寅]五年

[庚寅]五年이라 〈趙建平元年이라〉

二月에 後趙群臣이 請後趙王하야 卽皇帝位한대 이 乃稱大趙天王하고 行皇帝事하다

咸和5년(경인 330) - 趙나라(後趙) 建平 원년이다. -

2월에 後趙의 여러 신하들이 後趙王石勒에게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청하자, 石勒이 마침내 大趙天王이라 칭하고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壬辰]咸和七年

[壬辰]咸和七年이라 〈趙建平三年이라〉

正月에 趙王이 大享群臣할새 謂徐光曰 朕可方自古何等主오 對曰 陛下의 神武謀略이 過於漢高하야 後世에 無可比者니이다 笑曰 人豈不自知리오 卿言이 太過로다 朕이 若遇漢高祖인대 當北面事之하야 與, 比肩이요 若遇光武인대 當竝驅中原하야 未知鹿【史記蒯通曰 秦失其鹿에 天下共逐之러니 高才(材)疾足者 先得焉이라한대 註云 以鹿喩帝位也라하니라】死誰手라 大丈夫行事를 宜礌礌落落【礌는 與磊通이라 韻會에 落字下註云 磊落은 魁★{石+壘}貌라하니라】하야 如日月皎然이요 終不效曹孟德, 司馬仲達이 欺人孤兒寡婦하야 狐媚以取天下也니라 群臣이 皆頓首稱萬歲러라 雖不學이나 好使諸生讀書而聽之하고 時以其意로 論古今得失하니 聞者莫不悅服이러라 嘗使人讀漢書라가 聞酈食其勸立六國後하고 驚曰 此法은 當失이어늘 何以遂得天下오 及聞留侯【留侯는 張良也니 諫立六國後 其不可者八하니라】하고 乃曰 賴有此耳라하니라

[新增]胡氏曰 石世龍이 謂人豈不自知리오하니 信矣나 而未知知人之不易也라 光武之於漢高는 猶武王之於文王也어늘 勒謂遇漢高면 卽與, 比肩이요 遇光武면 則當竝驅中原이라하니 是는 以光武, 之流니 豈知光武者哉리오 〈高帝는 開四百餘年基業하고 石勒은 肉未及冷에 妻子已不能保어늘 徐光이 乃謂神武謀略이 過於漢高라하니 主有侈心에 臣進諛說하니 其不能長世也 宜哉로다〉

咸和7년(임진 332) - 趙나라 建平 3년이다. -

정월에 趙王石勒이 여러 신하들에게 크게 宴享할 적에 徐光에게 이르기를 “朕은 옛날의 어떤 군주에 비교할 만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폐하의 神武와 謀略이 漢나라 高祖보다 뛰어나서 후세에 비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石勒이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알지 못하겠는가. 卿의 말이 너무 지나치다. 朕이 만약 漢나라 高祖를 만났으면 北面하고 섬겨서 韓信彭越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을 것이요, 만약 光武帝를 만났으면 함께 말을 몰고 中原을 달려서 사슴【≪史記≫에 蒯通이 말하기를 “秦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함께 쫓았는데, 재주가 높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잡았다.” 하였다. 註에 이르기를 “사슴으로 황제의 자리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이 누구 손에 죽었을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大丈夫는 일을 행하는 것을 명백하고 시원하게 해서【礌는 磊와 통한다. ≪古今韻會擧要≫에 落字 아래의 註에 이르기를 “磊落은 뛰어난 모양이다.” 하였다.】 마치 해와 달처럼 분명하게 할 것이요, 끝내 曹孟德(曹操)司馬仲達(司馬懿)이 남의 고아와 과부를 속여 여우처럼 홀려서 천하를 취하는 것은 본받지 않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를 불렀다.

石勒은 비록 배우지 않았으나 諸生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고 듣기를 좋아하였으며 때로는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古今의 得失을 논하니, 듣는 자들이 기뻐하고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이 사람을 시켜 《漢書》를 읽게 하다가 酈食其가 六國의 후손을 세우기를 권하는 대목을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 방법은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천하를 얻었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다가 留侯(張良)가 간했다【留侯는 張良이니, 六國의 후손을 세움에 불가한 점 여덟 가지를 간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石世龍이 이르기를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옳으나 사람을 알기가 쉽지 않음은 알지 못하였다. 光武帝가 漢나라 高祖에게 있어서는 武王文王에 있어서와 같은데, 石勒이 이르기를 ‘내가 漢나라 高祖를 만났으면 韓信彭越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섬겼을 것이요, 光武帝를 만났으면 나란히 中原을 치달렸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光武帝韓信彭越의 부류로 여긴 것이다. 어찌 光武帝를 안 자이겠는가. 高帝는 4백여 년의 基業을 열었고 石勒은 죽어서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처자식이 이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徐光이 도리어 石勒을 칭찬하여 神武와 謀略이 漢나라 高祖보다 낫다고 말하였으니, 군주가 사치한 마음이 있음에 신하가 아첨하는 말을 올린 것이다. 나라를 장구하게 전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癸巳]八年

[癸巳]八年이라 〈趙建平四年이라〉

五月에 遼東慕容廆卒하니 世子皝이 以平北將軍으로 行平州刺史하다

咸和8년(계사 333) - 趙나라 建平 4년이다. -

5월에 遼東의 慕容廆가 죽으니, 世子慕容皝이 平北將軍의 신분으로 平州刺史의 일을 행하였다.

○ 七月에 趙主이 卒하니 太子이 卽位하다

○ 7월에 趙主石勒이 죽으니, 太子石弘이 즉위하였다.

[甲午]九年

[甲午]九年이라 〈趙主石弘延熙元年이라〉

成主이 卒하고 太子이 卽位러니 其弟 謀作亂하야 因班夜哭하야 弑之【班未葬之前에 哭於殯宮이어늘 班之弟李越이 潛殺之殯宮하고 立其次弟期하야 卽位하니라】하고 卽皇帝位【期後爲漢王壽所弑하고 壽卽位하야 改國號漢하니라】하다

咸和9년(갑오 334) - 趙主石弘의 延熙 元年이다. -

〈6월에〉 成主李雄이 죽고太子李班이 즉위하였는데, 〈10월에〉 그의 아우 李期가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李班이 밤에 곡할 때를 틈타 李班을 시해하고【李班이 李雄을 장례하기 전에 殯宮에서 곡하였는데, 李班의 아우 李越이 몰래 殯宮에서 그를 시해하고 그의 다음 아우인 李期를 세워 즉위시켰다.】李期가 황제에 즉위하였다.【李期는 뒤에 漢王 李壽에게 시해당하였고, 李壽가 즉위하여 국호를 漢으로 바꾸었다.】

○ 加庾亮征西將軍, 假節, 都督江, 荊, 豫, 益, 梁, 雍六州諸軍事하야 鎭武昌하니 이 辟殷浩【浩는 羨之子니 陶侃旣沒에 亮이 始專制上流하니라】하야 爲記室參軍하다 與豫章太守褚裒와 丹楊丞杜乂로 皆以識度淸遠하고 善談老, 易【老는 謂老子道德經이요 易은 謂周易也라】이라하야 擅名江東이로되 而尤爲風流所宗이러라 桓彛嘗謂季野【褚裒字라】有皮裏春秋라하니 言其外無臧否【否는 音鄙니 臧은 善也요 否는 不善也라】나 而內有褒貶也요 謝安雖不言이나 而四時之氣 已備矣라하니라

庾亮을 征西將軍‧假節‧都督江州荊州豫州益州梁州雍州諸軍事에 임명하여 武昌에 鎭駐하게 하니, 庾亮殷浩를 불러【殷浩는 殷羨의 아들이니, 陶侃이 죽은 뒤에야 庾亮이 비로소 建康의 上流에 주둔한 군대를 專制하였다.】記室參軍으로 삼았다. 殷浩는 豫章太守褚裒, 丹楊丞杜乂와 함께 모두 식견과 도량이 깨끗하고 원대하며 《道德經》과 《周易》【老는 老子의 ≪道德經≫이요, 易은 ≪周易≫을 이른다.】을 잘 담론한다 하여 江東 지방에 명성을 날렸는데, 殷浩는 더욱이 風流의 宗主가 되었다. 桓彛가 일찍이 褚裒를 평하여 이르기를 “季野【季野는 褚裒의 字이다.】는 皮裏春秋가 있다.” 하였으니, 겉으로는 잘잘못【否는 음이 비이니, 臧은 善함이고 否는 不善함이다.】을 분별함이 없으나 마음속에 褒貶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요, 謝安이 말하기를 “褚裒가 비록 말하지 않으나 四時의 기운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하였다.

○ 十一月에 趙丞相【卽中山公虎라】趙主하야 爲海陽王하고 自稱居攝【攝은 假也니 非其位而居之者를 謂之攝也라】趙天王하다

○ 11월에 趙나라 丞相 石虎【丞相 虎는 바로 中山公 石虎이다.】趙主石弘을 폐위하여海陽王으로 삼고 자칭 居攝【攝은 빌리는 것이니, 자기 자리가 아닌데 거하는 것을 일러 攝이라 한다.】趙天王이라 하였다.

王導太原王하야 爲掾하고 王述爲中兵屬하다 性沈靜하야 每坐(座)客이 辨(辯)論蜂起호되 而은 處之恬如也러라 年三十에 尙未知名하니 人謂之癡라 以門地辟之하야 旣見에 唯問在東米價한대 이 張目不答이어늘 王掾이 不癡어늘 人何言癡也오 嘗見每發言에 一坐莫不贊美어늘 正色曰 人非, 이어니 何得每事盡善이리오하니 改容謝之하니라

王導가 太原의 王濛을 불러 아전을 삼고王述을 中兵屬으로 삼았다. 王述은 성품이 침착하고 고요해서 매번 座客들이 다투어 변론하여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王述은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나이 30세가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못하니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였다. 王導가 문벌로써 그를 초빙하여 만나 본 뒤에 다만 동쪽 지방에 있을 때의 쌀값을 묻자, 王述이 〈그를 비루하다고 여겨〉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니, 王導가 말하기를 “王述이 바보가 아닌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바보라 말하는가?” 하였다. 일찍이 王導가 매번 말할 때마다 온 좌석에 있는 사람들이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王述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이 아니거늘 어찌 每事가 모두 선하겠는가.” 하니, 王導가 얼굴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 九月에 趙王 遷都于鄴하다

○ 9월에 趙王石虎가 鄴으로 천도하였다.

[戊戌]咸康四年

[戊戌]咸康四年이라 〈趙太祖石虎建武四年이라 ○ 成改號漢하야 中宗李壽漢興元年이라 ○ 代高祖什翼犍建國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漢, 涼小國二요 新小國一이니 凡四僭國이라〉

咸康 4년(무술 338) - 趙나라 太祖石虎建武 4년이다. ○ 成나라는 국호를 漢으로 고쳐서 中宗李壽의 漢興 元年이다. ○ 代나라 高祖拓跋什翼犍의 建國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漢과 涼 등 小國이 둘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넷이다.-

五月에 以司徒로 爲太傅하야 都督中外諸軍事하고 郄鑒爲太尉하고 庾亮爲司空하다 是時에 이 雖居外鎭이나 而遙執朝廷之權하고 旣據上流하야 擁强兵하니 趣勢者多歸之라 內不能平【亮與郗鑒書하야 吾與君欲起兵廢導라한대 鑒不聽이어늘 或言之於導라 故로 心內不平이라】하야 常遇西風塵起면 擧扇自蔽하고 曰 元規【庾亮字라】塵汚人이라하더라

5월에 司徒王導를 太傅로 삼아서 中外의 여러 軍事를 都督하게 하고 郄鑒을 太尉로 삼고庾亮을 司空으로 삼았다. 이때에 庾亮이 비록 바깥 鎭營(武昌)에 있었으나 멀리에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이미 〈建康의〉 上流를 점거하여 강한 병력을 보유하니, 세력을 따르는 자가 많이 귀복하였다. 王導가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겨【庾亮이 郗鑒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 그대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王導를 폐하고자 한다.” 하였으나 郗鑒이 듣지 않았는데, 혹자가 이것을 王導에게 말하였으므로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항상 西風이 불어 먼지가 일어날 때를 당하면 부채를 들어 스스로 가리면서 천천히 말하기를 “元規(庾亮)【元規는 庾亮의 字이다.】의 먼지가 사람을 더럽힌다.” 하였다.

代王翳槐【拓拔猗盧之孫이라】卒하고 弟什翼犍이 卽代王位하니 雄勇有智略하야 國人이 附之라 於是에 東自濊貊으로 西及落那하고 南距陰山하고 北盡沙漠히 率皆歸服하니 有衆數十萬人이러라

代王 拓拔翳槐【拓拔翳槐는 拓拔猗盧의 손자이다.】가 죽고 아우 拓拔什翼犍代王에 즉위하니, 뛰어나게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따랐다. 이에 동쪽으로 濊貊으로부터 서쪽으로 落那에 이르고 남쪽으로 陰山에 이르고 북쪽으로 沙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복하니, 수십만 명의 무리를 소유하였다.

慕容皝【廆之子라】이 卽燕王位하다

○ 慕容皝【慕容皝은 慕容廆의 아들이다.】燕王에 즉위하였다.

[己亥]五年

[己亥]五年이라 〈趙建武五年이라〉

七月에 王導薨하다 簡素寡欲하고 善因事就功하야 雖無日用之益이나 而歲計有餘라 輔相三世【元, 明, 成也라】에 倉無儲穀하고 衣不重帛이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東晉中興은 王導之功이 居多焉이라 方元帝之在藩也에 獨知其可輔하고 陳以興復之計하야 傾心推奉하니 其於中興之功이 一也요 旣而西都覆沒에 四方勸進하고 王敦이 憚帝嚴明하야 欲更議所立이라가 賴固爭하야 厥議遂止하니 其於中興之功이 二也요 及其輔政에 不以江左寡弱이라하야 而爲偸安之計하고 方且大立規模하고 廣連羽翼하야 先用顧榮, 賀循하야 以來衆士하고 盡收過江名流하야 以佐謀畫이라 故로 桓彛見其亟談時事而輟憂하고 周顗聞其志復神州而收淚하니 其於中興之功이 三也라 是以로 賢士競進하고 百姓歸心하야 荊揚晏安에 戶口殷實하야 江左立國이 幾百餘年하니 之功이 豈小小哉아

咸康 5년(기해 339) - 趙나라 建武 5년이다. -

7월에 王導가 薨하였다.王導는 간략하고 소박하고 욕심이 적으며 일을 따라 공을 이루기를 잘하여 비록 平日에 볼 수 있는 큰 유익함은 없었으나 해로 계산하면 유여하였다. 3代【三世는 元帝‧明帝‧成帝를 이른다.】의 황제를 보필함에 창고에 쌓인 곡식이 없고 옷은 여벌의 비단옷이 없었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東晉이 中興한 것은 王導의 功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元帝가 藩屛에 있을 때에 王導만이 오직 元帝가 보필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興復할 계책을 아뢰어서 온 마음을 기울여 추대하고 받들었으니 이것이 中興의 功에 있어 첫 번째이고, 이윽고 西都(長安)가 함락되자 四方에서 皇族들에게 帝位에 오를 것을 권하였고 王敦明帝의 엄숙함과 밝음을 꺼려서 다시 세울 사람을 의논하려고 하다가 王導가 굳이 만류함에 힘입어서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으니 이것이 中興의 功에 있어 두 번째이고, 정사를 보필하게 되자 江左가 적고 약하다 하여 구차히 안주하려는 계책을 세우지 않고 막 規模를 크게 세우고 羽翼을 널리 연결하였다. 그리하여 顧榮賀循을 먼저 등용하여 여러 선비들을 오게 하였으며 揚子江을 건너온 名流들을 다 수용하여 謀畫을 돕게 하였다. 그러므로 桓彛는 그가 세상일을 지극히 말하는 것을 보고는 근심을 거두었고, 周顗는 그가 神州를 회복하려는 뜻이 있음을 듣고 눈물을 거두었으니, 이것이 中興의 功에 있어 세 번째이다. 이 때문에 어진 선비들이 다투어 나오고 백성의 마음이 돌아와서 荊州와 揚州가 편안하여 戶口가 많아지고 충실하여 江左에 나라를 세운 것이 거의 백여 년 동안 이어졌으니, 王導의 功이 어찌 적겠는가.”

[壬寅]八年

[壬寅]八年이라 〈趙建武八年이라〉

五月에 帝不豫【豫는 安也라】하니 帝二子【丕, 奕이라】皆在襁褓라 庾冰【中書監이라】이 說帝以國有彊敵【漢, 趙也라】하니 宜立長君이라하야 請以同母弟琅邪王爲嗣한대 帝許之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成帝頗務簡約하니 雄武之度는 雖有慊於前王이나 而恭儉之德은 足追蹤於往烈이요 又能敬禮故老大臣하야 有足稱者라 惜乎라 政出渭陽에 賞刑顚錯하야 殺戮近親하고 貶黜舊傅라 帝僅六歲에 已能詰問流涕면 則庾亮之專國擅權을 可知矣라 蘇峻이 雖云狂悖나 逆謀未彰이어늘 處置失宜하야 激成反狀하고 乃奉頭鼠竄하야 僥倖求免이라가 遂致遺憂國母하고 遷帝石頭하니 倘非溫嶠, 陶侃諸君子의 戮力討賊하야 斬平亂이면 則社稷幾非晉有리니 嗚呼危哉로다

咸康 8년(임인 342) - 趙나라 建武 8년이다. -

5월에 황제가 편찮으니【豫는 편안함이다.】 황제의 두 아들【두 아들은 司馬丕와 司馬奕이다.】이 모두 강보에 싸여 있었다. 庾冰【庾冰은 中書監이다.】이 황제를 설득하기를 “나라 안에 강한 적【강한 적은 漢나라와 趙나라이다.】이 있으니, 나이가 많은 군주를 세워야 한다.” 하여 同母弟인 琅邪王司馬岳을 후사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成帝는 자못 간소함과 검약함을 힘썼으니, 雄武한 도량은 비록 前王에 비해 부족함이 있었으나 공손하고 검소한 德은 지나간 前烈을 충분히 뒤따를 수 있었으며, 또 元老大臣을 공경하고 예우하여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사가 外叔(庾亮)에게서 나와 상과 벌이 전도되고 잘못되어서 가까운 친척들을 살육하고 옛 師傅를 축출하였다. 成帝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도 이미 詰問하고 눈물을 흘렸으니, 그렇다면 庾亮이 국정을 독점하고 권력을 독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蘇峻이 비록 狂悖하다고 하나 逆謀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庾亮이 잘못 조처하여 격발시켜서 배반하는 상황을 만들고는 도리어 머리를 받들고 쥐처럼 도망하여 요행으로 화를 면하기를 바라다가 마침내 國母에게 근심을 끼치고 皇帝를 石頭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만일 溫嶠陶侃 등 여러 君子가 힘을 다하여 역적을 토벌해서 蘇峻을 목 베고 난리를 평정하지 않았다면 社稷이 거의 晉나라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니, 아! 위태롭다.”

○ 六月에 帝崩하니 琅琊王이 卽皇帝位하다

○ 6월에 황제가 崩하니, 琅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