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五 唐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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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紀

高祖神堯皇帝

이요 姓

歐陽公이 作唐新史하야 成於嘉祐五年하고 溫公通鑑은 以治平開局하니 要之컨대 新史, 通鑑이 皆被旨編定之書니 學者通用無害也라 又有貞觀政要, 魏鄭公諫錄及唐舊史하니 通鑑이 皆參用之나 文多不同이라 今學者 用唐史에 只稱史臣이요 不必泥出處라 今略具大槩하야 以備檢閱하노니 其遺闕處는 皆舊史也라

高祖神堯【善行德義曰堯라 字淑德이니 漢將李廣之後也라 七世祖暠 當晉末하야 據燉煌以自王하니 是爲涼武昭王이라 暠五世孫으로 追諡景皇帝하고 廟號太祖諱虎가 仕周하야 伐魏有功하고 封唐公하니 諡襄公이요 襄公生昞하야 卒諡仁公하니 是爲世祖요 生高祖하야 襲封唐公하니라】皇帝※ 名이요 姓니 在位九年이요 壽七十이라

※ 擧晉陽精兵하고 承亡隋之敝하야 席卷長驅하야 奄有關中하고 命將出師하야 掃除亂略하야 六年之中에 海內咸服하니 何成功之速哉아 蓋以太宗之爲子也일새라

通鑑節要 卷之三十五

唐紀

살펴보건대 歐陽公은 《新唐書》를 지어서 嘉祐 5년(1060)에 완성하였고, 司馬溫公의 《資治通鑑》은 治平 연간(1064~1067)에 編修局을 열었다. 요컨대 《新唐書》와 《資治通鑑》은 모두 황제의 뜻을 받들어 편찬한 책이니, 배우는 자들이 통용하는 것이 무방하다. 또 《貞觀政要》, 《魏鄭公諫錄》, 《舊唐書》가 있으니, 《資治通鑑》은 이를 모두 참고하여 썼으나 내용이 같지 않은 부분이 많다. 지금 배우는 자들이 唐나라 역사책을 인용할 때에는 단지 史臣이라고만 칭하고 굳이 출처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제 대략 대강을 갖추어서 檢閱에 대비하니, 빠진 부분은 모두 《舊唐書》의 내용이다.

高祖 神堯【德義를 잘 행함을 堯라 한다. 字가 淑德이니 漢나라 장수 李廣의 후손이다. 7世祖 李暠가 晉나라 말기에 燉煌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가 바로 涼武昭王(李玄盛)이다. 李暠의 5세손으로 景皇帝라 追諡하고 廟號가 太祖인 李虎가 周나라에 벼슬하여 魏나라를 정벌해서 공을 세우고 唐公에 봉해지니 諡號가 襄公이요, 襄公이 李昞을 낳았는데 죽자 諡號를 仁公이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世祖요, 李昞이 高祖(李淵)를 낳았는데 세습하여 唐公에 봉해졌다.】皇帝※는 이름이 이고 姓이 李氏이니, 재위가 9년이고 壽가 70세이다.

※ 唐나라 高祖李淵은 晉陽의 정예병을 일으키고 망해가는 隋나라의 피폐함을 이어받아서 영토를 휩쓸고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關中을 소유하였으며, 장수에게 명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난리를 소탕해서 6년 만에 온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으니, 어찌하여 성공이 이리도 빨랐는가. 이는 太宗(李世民)이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戊寅] 隋恭帝侑義寧二年, 恭帝侗皇泰元年, 唐高祖武德元年, 夏王竇建德五鳳元年, 涼王李軌安樂元年, 楚王朱粲昌達元年

[戊寅] 〈隋恭帝義寧二年이요 恭帝皇泰元年이요 唐高祖武德元年이요 夏王竇建德五鳳元年이요 涼王李軌安樂元年이요 楚王朱粲昌達元年이라 ○ 是歲에 幷楚士弘, 魏, 定楊, 梁師都, 秦, 梁銑하야 凡十二國이러니 隋煬帝, 恭帝, 秦, 魏亡이라〉

무인(618) - 隋나라 恭帝楊侑의 義寧 2년이고, 恭帝(越王)楊侗의 皇泰 원년이고, 唐나라 高祖의 武德 원년이고, 夏王竇建德의 五鳳 원년이고, 涼王李軌의 安樂 원년이고, 楚王朱粲의 昌達 원년이다. ○ 이해에 楚나라의 林士弘, 魏나라, 定楊(劉武周), 梁師都, 秦, 梁나라의 蕭銑까지 아울러 모두 12개국이었는데, 隋나라의 煬帝楊廣恭帝楊侑, 秦나라, 魏나라가 망하였다.-

四月에 宇文化及之子也라 初에 化及無賴러니 事帝於東宮하니 寵昵之하다 化及이 從帝楡林할새 冒禁하고 與突厥交市어늘 帝怒하야 將斬之러니 旣而오 釋之하야 以爲屯衛將軍하니라】이 弑煬帝於江都하고 自稱大丞相하다

4월에 宇文化及【宇文化及은 宇文述의 아들이다. 처음에 宇文化及은 무뢰배였는데, 煬帝가 東宮으로 있었을 때 煬帝를 섬기니 총애하고 가까이하였다. 宇文化及이 황제를 따라 楡林에 갔을 적에 禁令을 무릅쓰고 突厥과 交易하니 황제가 노하여 목을 베려 하였는데, 얼마 뒤 석방하여 右屯衛將軍으로 삼았다.】煬帝를 江都에서 시해하고 스스로 大丞相이라 칭하였다.

○ 梁蕭銑이 卽皇帝位하다 於是에 東自九江으로 西抵三峽하고 南盡交趾하고 北距漢川히 皆有之하니 勝兵이 四十餘萬이러라

○ 梁나라 蕭銑皇帝에 즉위하였다. 이때에 동쪽으로 九江으로부터 서쪽으로 三峽에 이르고, 남쪽으로 交趾까지 다하고 북쪽으로 漢川에 이르기까지 蕭銑이 모두 소유하니, 勝兵(精兵)이 40여만 명이었다.

○ 五月戊午에 隋恭帝禪位于唐하니 唐王이 卽皇帝位하다

○ 5월 戊午日(16일)에 隋나라 恭帝가 唐나라에 讓位하니, 唐王(李淵)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隋煬帝凶問이 至東都어늘 留守官이 奉越王【代王侑之兄이라 [通鑑要解]侗은 眉目如畵하고 溫厚仁愛하고 風格儼然이라】하야 卽帝位하고 改元皇泰하다 以王世充으로 爲左僕射하야 摠督內外諸軍事하다 世充이 漸結黨援【援은 音圓이니 引也, 牽也라】하야 恣行威福하고 子弟咸典兵馬하야 勢震內外하니 皇泰王은 拱手而已러라

○ 隋나라 煬帝의 부음이 東都에 이르자, 留守官이 越王楊侗【[頭註]越王 楊侗은 代王 楊侑의 형이다. [通鑑要解]楊侗은 미목이 그린 듯이 아름다웠고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풍격이 엄숙하였다.】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하게 하고皇泰로 改元하였다. 王世充을 左僕射로 삼아서 내외의 여러 軍事를 총독하게 하였다. 王世充이 점점 黨援【援은 音이 ‘원’이니, 끌어들임이요, 당김이다.】을 맺어서 상벌을 마음대로 내리고 子弟들이 모두 兵馬를 관장하여 권세가 내외에 진동하니, 皇泰王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 時에 中國人避亂者 多入突厥하니 突厥【夏曰獯鬻이요 商曰鬼方이요 周曰獫狁이요 漢曰匈奴요 魏曰突厥이라 突厥은 其姓阿史那氏니 蓋古匈奴北部也라】이 彊盛이라 東自契丹【契은 音乞이니 本東胡種이라 其先이 居鮮卑山이러니 至元魏하야 自號契丹이라】, 室韋【契丹之別種也요 丁零之苗裔니 地據黃龍하니라】로 西盡吐谷渾, 高昌【吐谷渾은 西域國이니 其先은 本遼東鮮卑라 (徙)[徒]河涉歸之長子曰吐谷渾이니 其孫葉延이 遂以其(自)[名]으로 爲吐谷渾氏하니라 高昌은 西域小國이라】諸國이 皆臣之하니 控弦이 百餘萬이라 唐初起兵에 資其兵馬하고 前後餉遺를 不可勝紀러라 〈出突厥傳〉

○ 이때에 中國에서 피난 가는 漢族들이 突厥로 많이 들어가니, 突厥【夏나라 때에는 獯鬻이라 하고, 商나라 때에는 鬼方이라 하고, 周나라 때에는 獫狁이라 하고, 漢나라 때에는 匈奴라 하고, 魏나라 때에는 突厥이라 하였다. 突厥은 그 姓이 阿史那氏이니, 옛날 匈奴의 北部이다.】이 강성해졌다. 동쪽으로 契丹【契丹의 契은 음이 걸(글)이니, 본래 東胡의 종족이다. 그 선조가 鮮卑山에서 살았는데, 元魏(北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 契丹이라 이름하였다.】과 室韋【室韋는 契丹의 別種이고 丁零의 후손이니, 黃龍 땅을 점거하였다.】로부터 서쪽으로 吐谷渾과 高昌【吐谷渾은 西域의 나라이니, 그 선조는 본래 遼東의 선비족이었다. 徒河涉歸의 長子가 吐谷渾이니, 그 손자인 葉延이 마침내 그 이름을 따라 吐谷渾氏라 하였다. 高昌은 西域의 작은 나라이다.】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突厥의 신하가 되니,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군사가 백여만 명이었다. 唐나라가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突厥의 兵馬를 이용하였으며 전후로 그들이 보내준 군량과 물건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 《唐書 突厥傳》에 나옴 -

○ 唐이 命裴寂, 劉文靜等하야 修定律令하다 置國子, 太學, 四門生【四門學은 始於魏하니 於四門에 置學이라 唐有二館七學하니 曰弘文館, 崇文館은 皆以宰相領之하고 其生徒를 以皇屬國戚及大臣子孫爲之하며 曰國子學, 曰太學은 亦以大臣子孫爲之하며 曰廣文, 曰四門은 以朝臣之子孫與庶人之俊秀者爲之하며 曰律學, 曰書學, 曰算學은 皆以庶人之通其學者爲之하니 凡六學은 隷於國子監하니라 [通鑑要解]唐六典에 國子生은 文武官三品巳上及國公子孫과 從二品已上曾孫이요 四門生은 文武官七品巳上及侯, 伯, 子, 男과 若庶人子爲俊士生者라】하니 合三百餘員이요 郡縣學에 各置生員하다 〈出刑法, 選擧志〉

○ 唐나라에서 裴寂劉文靜 등에게 명하여 律令을 닦아 정하게 하였다. 國子學, 太學校, 四門學【[附註]四門學은 魏나라에서 시작되었으니, 四門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唐나라는 2館 7學이 있었으니, 弘文館과 崇文館은 모두 재상이 맡았고 皇族과 國戚(외척) 및 大臣의 자손을 生徒로 삼았으며, 國子學과 太學은 또한 大臣의 자손을 生徒로 삼았고, 廣文學과 四門學은 朝臣의 자손과 庶人 중에 준수한 자를 生徒로 삼았고, 律學‧書學‧算學은 모두 庶人 중에 그 학문에 통달한 자를 生徒로 삼았으니, 6學은 모두 國子監에 소속되었다. [通鑑要解]≪唐六典≫에 의하면 國子學生은 文武官 3品 이상 및 國公의 子孫과 從2品 이상의 曾孫이요, 四門學生은 文武官 7品 이상 및 侯‧伯‧子‧男과 庶人의 자제 중 俊士生이 된 자이다.】 등의 학교를 설치하니 生員이 도합 3백여 명이었으며, 郡縣의 學에도 각각 生員을 두었다. - 《唐書》의 〈刑法志〉와 〈選擧志〉에 나옴 -

唐主裴寂特厚하야 稱爲裴監【寂爲晉陽宮監일새 親之하야 以舊稱之라】而不名하고 委蕭瑀【內史令이라】以庶政하야 事無大小히 莫不關掌【關은 由也니 如行者之有關津也라】하다 亦孜孜盡力하야 繩違【繩은 直其失也라】擧過하니 人皆憚之러라

唐主裴寂을 특별히 후대하여 裴監【裴監은 裴寂이 〈隋나라에 벼슬하여〉 晉陽宮監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를 친근히 여겨 옛 관직명으로 부른 것이다.】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蕭瑀蕭瑀는 內史令이었다.】에게 모든 정사를 맡겨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關掌【關은 경유함이니, 길을 가는 자가 관문과 나루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蕭瑀 또한 부지런히 힘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고【繩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허물을 들어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 唐萬年縣法曹孫伏伽 上表하야 以爲隋以惡聞其過로 亡天下라 陛下龍飛晉陽에 遠近이 響應하야 未朞年而登帝位하시니 徒知得之之易하고 不知隋失之之不難也라 臣謂宜易其覆轍하야 務盡下情이라하노이다 唐主省表大悅하야 下詔褒稱하고 擢爲治書侍御史하고 賜帛三百匹하다 〈出伏伽傳〉

[新增]范氏曰 天下之勢는 如人一身하야 必氣血周流無壅而後에 能存이니 諫者는 使下情上通하고 上意下達하야 如血氣之周流於一身也라 故로 言路開則治하고 言路塞則亂이라 高祖鑑隋之所以亡하야 首闢言路하니 可謂知先務矣라 是以로 民知上之憂己하야 而疾痛에 將有所赴愬也리니 唐室之興이 不亦宜乎아

○ 唐나라 萬年縣의 法曹인 孫伏伽가 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隋나라는 과실을 듣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폐하께서 晉陽에서 龍飛(興起)하자 遠近에서 호응하여 1년이 채 못 되어 황제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한갓 천하를 얻기 쉬운 줄만 아시고 천하를 잃기 어렵지 않음은 알지 못하십니다. 臣은 마땅히 隋나라의 覆轍(실패한 자취)을 바꾸어서 되도록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다 아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唐主가 表文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孫伏伽를 治書侍御史로 발탁하고 비단 300필을 하사하였다. - 《唐書 孫伏伽傳》에 나옴 -

[新增]范氏가 말하였다.

“천하의 형세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반드시 氣와 血이 두루 유행하고 막힘이 없은 뒤에야 생존할 수 있으니, 간하는 자는 아랫사람의 실정을 위로 통하게 하고 윗사람의 마음을 아래로 통하게 해서 血과 氣가 온몸에 두루 유행하는 것과 같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言路가 막히면 나라가 혼란해지는 것이다. 高祖는 隋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거울로 삼아서 첫 번째로 言路를 열어놓았으니, 급선무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윗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근심해 줌을 알아서 괴로울 때에 장차 달려가 하소연할 곳이 있을 것이니, 唐나라 황실이 흥왕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八月에 秦主薛擧卒하고 太子杲立하다

8월에 秦主薛擧가 죽고, 太子薛仁杲가 즉위하였다.

○ 九月이라 初에 魏公李密이 旣殺翟讓【先是에 翟讓이 以立密自負하고 求寶貨於房彦藻한대 彦藻等이 因說密殺之하니라】하고 頗自驕矜이라 開洛口倉하야 散米할새 無防守하니 取之者 隨意多少하야 或離倉之後에 力不能致하야 委棄衢路하니 自倉城으로 至郭門히 米厚數寸이요 群盜來就食者 近百萬口라 이 喜하야 謂賈閏甫曰 此可謂足食矣로다 閏甫對曰 國은 以民爲本이요 民은 以食爲天이니 今民所以襁負如流而至者는 以所天【民은 以食爲天이라】在此故也어늘 而有司曾無愛吝하고 屑越【荀子에 (屑)[薛]越이라하니 言輕棄之也라 [通鑑要解]屑은 輕也요 越은 語辭라】如此하니 切恐一旦에 米盡民散이면 明公이 孰與成大業哉잇고 李密이 與王世充【隋大業初에 爲民部郞이러니 善伺帝顔色하야 以媚帝하니 帝愛昵之하다 世充이 觀隋政亂하고 陰結豪傑하니 帝以有將略이라하야 委以捕諸盜러니 所向輒定하니라 後에 自爲太尉, 中書令하야 置官屬하고 矯恭帝詔하야 自爲鄭王하다 又矯皇泰主侗策禪位하야 國號鄭하고 遂鴆侗이러니 後爲秦王所禽하니라】戰하야 失利하고 與衆三萬人으로 歸關中하다 〈出李密傳〉

○ 9월이다. 처음에 魏公李密翟讓을 죽인 뒤에【이보다 앞서 翟讓이 李密을 魏公으로 세웠다고 자부하고 房彦藻에게 寶貨를 요구하자, 房彦藻 등이 이로 인하여 李密을 설득해서 그를 죽였다.】 자못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였다. 洛口倉을 열어 쌀을 나누어 줄 때에 방비하고 지키는 자가 없어서 쌀을 가져가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많이 가져갔다가 혹은 창고를 떠난 뒤에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길거리에 쌀을 버리니, 倉城으로부터 郭門에 이르기까지 쌀이 몇 치 두께로 깔렸으며 여러 도둑떼들이 와서 먹는 것이 백만 명에 가까웠다.

李密이 기뻐하여 賈閏甫에게 이르기를 “이는 양식이 풍족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賈閏甫가 대답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으니, 지금 백성들이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물이 흐르듯이 오는 이유는 하늘로 여기는 곡식【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는다.】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有司가 일찍이 곡식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함부로 버리니,【[釋義]≪荀子≫ 〈王制〉에 “薛越”이라 하였으니, 가볍게 버린다는 말이다. [通鑑要解]屑은 가벼움이요, 越은 어조사이다.】 하루아침에 쌀이 다 없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면 明公은 누구와 함께 큰 사업을 이루시겠습니까?” 하였다.

李密이 王世充【王世充은 隋나라 大業 초년에 民部郞이 되었는데, 황제의 얼굴빛을 잘 살펴서 황제에게 아첨하니, 황제가 사랑하고 가까이하였다. 王世充이 隋나라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은밀히 호걸들과 교분을 맺으니, 황제가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여 도둑들을 잡는 일을 맡겼는데, 향하는 곳마다 곧 평정하였다. 뒤에 스스로 太尉‧中書令이 되어 官屬을 두고 恭帝의 詔書를 위조하여 스스로 鄭王이 되었다. 또다시 皇泰王 楊侗(恭帝)의 策書를 위조하여 禪位를 받아 國號를 鄭이라 하고 마침내 楊侗을 독살하였는데, 뒤에 秦王 李世民에게 사로잡혔다.】과 싸워 실패하고 무리 3만 명과 함께 關中으로 돌아갔다. - 《唐書 李密傳》에 나옴 -

薛仁杲之爲太子也에 與諸將으로 各有隙이러니 及卽位에 衆心이 猜懼하니 由是로 國勢浸弱이러라 秦王世民이 至高墌【墌은 音隻이라 城名이니 在定平縣이라】하니 仁杲使宗羅㬋로 將兵拒戰이어늘 唐世民이 引大軍하고 自原北으로 出其不意하니 羅㬋士卒이 大潰라 斬首數千級하다 世民이 率二千餘騎하야 追之曰 破竹之勢를 不可失也라하고 遂進至城下圍之하다 夜半에 守城者爭自投下하니 仁杲計窮出降하다 諸將이 皆賀하고 因問曰 大王이 一戰而勝하고 輕騎로 直造城下하시니 衆皆以爲不克이러니 而卒取之는 何也잇고 世民羅㬋所將은 皆隴外之人이라 將驍卒悍하니 吾特出其不意而破之요 斬獲이 不多라 若緩之면 則皆入城하리니 仁杲撫而用之면 未易克也요 急之면 則散歸隴外하야 折墌【城名이니 在保定縣이라 仁杲所據라】虛弱하리니 仁杲破膽하야 不暇爲謀라 此吾所以克也니라 衆皆悅服이러라 世民이 所得降卒을 悉使仁杲兄弟及宗羅㬋로 將之하야 與之射獵에 無所疑間하니 賊이 畏威銜恩하야 皆願效死【效는 致也라】러라 〈出仁杲傳〉

薛仁杲가 太子였을 적에 여러 장수들과 각각 틈이 있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이로 말미암아 國勢가 점점 약해졌다. 秦王李世民이 高墌城【墌은 音이 ‘척’이다. 高墌은 城의 이름이니 定平縣에 있다.】에 이르니, 薛仁杲宗羅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막아 싸우게 하였다. 唐나라 李世民이 大軍을 이끌고 淺水原 북쪽으로부터 불의에 출격하니, 宗羅㬋의 士卒들이 크게 궤멸되어 秦王이 수천 명의 首級을 베었다. 李世民이 2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며 말하기를 “破竹之勢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였다. 한밤중에 성을 지키는 자들이 다투어 스스로 투항하니, 薛仁杲가 계책이 다하여 나와서 항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秦王李世民에게 축하하고 인하여 “大王께서 한 번 싸워 이기고는 경무장한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성 밑에 이르시니, 여러 사람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내 점령함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李世民이 대답하기를 “宗羅㬋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隴外 사람이다. 장수가 용맹하고 군사들이 사나우니 내가 단지 불의에 출격하여 격파했을 뿐이요,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은 많지 못하다. 만약 이들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니, 薛仁杲가 이들을 어루만져 사용한다면 쉽게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요, 만약 이들을 급하게 몰아붙인다면 흩어져 隴外로 돌아가서 折墌城【折墌은 城의 이름이니, 保定縣에 있다. 薛仁杲가 점거한 곳이다.】이 허약해질 것이니, 薛仁杲의 간담이 서늘해져서 도모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李世民이 항복한 병졸들을 모두 薛仁杲의 형제와 宗羅㬋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그들과 활을 쏘고 사냥할 때에 의심하거나 간격을 두는 바가 없으니, 적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를 생각해서 모두 死力을 바치기【效는 바침이다.】를 원하였다. - 《唐書 薛仁杲傳》에 나옴 -

唐主使李密로 迎秦王世民於豳州하다 이 自恃智略功名하야 見上에 猶有傲色이러니 及見世民에 不覺驚服하고 私謂殷開山【名嶠라 以學行으로 爲元帥長史하야 從秦王討薛擧라가 爲所敗하야 除名爲이러니 從平仁杲하고 討世充하야 以功封鄖國公하니라】眞英主也라 不如是면 何以定禍亂乎아 〈出密傳〉

唐主李密로 하여금 豳州에서 秦王李世民을 맞이하게 하였다. 李密이 스스로 智略과 功名을 자부하여 上을 뵐 때에도 오히려 오만한 기색이 있었는데, 李世民을 만나 볼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복종하고는 殷開山【殷開山은 이름이 嶠이니 學行으로 元帥府 長史가 되어 秦王 李世民을 따라 薛擧를 토벌하다가 패배당하여 〈陳郡公에서〉 除名되어 庶民이 되었다. 뒤에 薛仁杲를 평정하고 王世充을 토벌하여 그 功으로 鄖國公에 봉해졌다.】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참으로 英明한 군주이다. 이와 같지 않다면 어떻게 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하였다.- 《唐書 李密傳》에 나옴 -

徐世勣이 據李密舊境하야 未有所屬이러니 魏徵이 隨至長安하야 久不爲朝廷所知라 乃自請安集山東이어늘 唐主以爲秘書丞하야 乘傳【乘傳者 依乘符傳命行이 若使者持節爾라 傳者는 以木爲之하니 長尺五요 書符其上하야 以爲信이라】至黎陽【上丁丑年에 李密이 取黎陽倉이라】하야 遺徐世勣書하야 勸之早降하다 世勣이 遂決計西向할새 謂郭孝恪【長史라】曰 此民衆土地는 皆魏公有也니 吾若上表獻之면 是는 利主之敗하야 自爲功以邀富貴也니 吾實恥之하노라 今宜籍郡縣戶口士馬之數하야 以啓魏公하야 使自獻之라하고 乃遣孝恪詣長安하다 唐主世勣使者至에 無表하고 止有啓與【與는 予通하니 送也라】하고 甚怪之러니 孝恪이 具言世勣意한대 唐主乃歎曰 徐世勣이 不背德, 不邀功하니 眞純臣也라하고 賜姓하다 〈出本傳〉

[新增]范氏曰 古者天子建國에 賜姓命氏는 所以別其族類之所出이니 子孫이 各本於其祖하야 不可改也라 漢〈高〉祖賜婁敬姓爲하니 鄙陋無稽甚矣어늘 而唐世遂以爲法하야 或加於盜賊夷虜하야 遂以逆族異類로 爲同宗하니 然則古之賜姓者는 別之러니 而後之賜姓者는 亂之也라 夫天親은 不可以人爲어늘 而强欲同之면 豈〈循〉理也哉아 上瀆其姓하고 下忘其祖하니 非先王之制라 不可爲後世法也니라

徐世勣李密의 옛 영토를 점거하고서 아직 귀속한 바가 있지 않았다. 魏徵李密을 따라 長安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朝廷에 알려지지 못하자 마침내 스스로 山東 지방을 安集시킬 것을 청하니, 唐主가 그를 秘書丞으로 삼아 驛馬를 타고【乘傳은 符傳을 가진 자가 符傳에 따라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것이 使者가 符節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傳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尺 5寸이요, 그 위에 符를 써서 信標로 삼는다.】 黎陽【앞의 丁丑年(617)에 李密이 黎陽倉을 취하였다.】에 이르러서 徐世勣에게 편지를 보내어 빨리 항복하라고 권하게 하였다. 徐世勣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서쪽을 향하여 귀순하려 할 적에 郭孝恪【郭孝恪은 長史였다.】에게 이르기를 “이 민중과 토지는 모두 魏公(李密)의 소유이다. 내가 만약 表文을 올려 이것을 바친다면 이는 主君의 실패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아 富貴를 바라는 것이니,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이제 마땅히 郡縣의 戶口와 군사와 말의 숫자를 장부에 적어 魏公에게 아뢰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바치게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郭孝恪을 보내어 長安에 이르게 하였다.

唐主徐世勣의 使者가 왔는데, 表文은 없고 다만 李密에게 보내는【與는 予와 통하니 보내는 것이다.】 狀啓만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郭孝恪徐世勣의 뜻을 말하자 唐主가 마침내 감탄하여 이르기를 “徐世勣이 은덕을 배반하지 않고 功을 바라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이다.” 하고 李氏姓을 하사하였다.- 《唐書 李勣傳》에 나옴 -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옛날 天子가 나라를 세울 적에 姓氏를 하사한 것은 그 族類가 나온 바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자손들이 각각 先祖를 근본으로 삼아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漢나라 高祖婁敬에게 姓을 하사하여 劉氏로 삼으니 비루하여 황당무계함이 심하였는데, 唐나라 때에는 마침내 이것을 法으로 삼아서 혹은 도적과 오랑캐에게도 姓을 하사하여 마침내 역적의 집안과 다른 종족을 同宗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옛날에 姓을 하사한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였는데 후세에 姓을 하사한 것은 혼란하게 만든 것이다. 天然의 血族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가 없는데 억지로 같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順理이겠는가. 위로는 姓을 모독하고 아래로는 선조를 잊는 것이니, 先王의 제도가 아니어서 後世의 法이 될 수 없다.”

李密이 驕貴日久하고 又自負歸國之功하야 朝廷待之가 不副本望【初에 密將至할새 唐主遣使迎勞相望하니 密喜曰 我擁衆百萬이라가 解甲歸唐하니 功亦不細라 豈不以台司見處乎아하더니 至長安하야 乃拜光祿卿, 邢國公하니 密大失望하니라 [通鑑要解]李密이 遇會하야 職當進食하니 深恥之라 退하야 以告王伯當한대 伯當曰 天下事在公度內耳라하니 乃言於唐王而請之云云이라】이라하야 鬱鬱不樂이라 乃獻策於唐主曰 山東之衆은 皆臣故時麾下니 請往收而撫之하야 憑藉國威면 取王世充을 如拾地芥耳리이다 乃以王伯當으로 爲副而遣之하다 十二月에 李密이 遂據桃林縣城하야 驅掠徒衆하고 直趣南山하야 乘險而東이어늘 盛彦師【行軍總管이라】擊斬之하고 傳首長安하다 〈出本傳〉

李密이 교만하고 귀해진 지가 오래되었고 또 唐나라로 歸附한 공로를 자부하여, 조정의 대우가 본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附註]처음에 李密이 오려 할 적에 唐主가 사신을 보내 영접하고 위로함이 서로 이어지자, 李密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백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고 있다가 갑옷을 벗고 唐나라로 歸附하니, 공이 또한 적지 않다. 어찌 台司의 벼슬로 대접해 주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長安에 이르러서 마침내 光祿卿‧邢國公에 봉해지니, 李密이 크게 실망하였다. [通鑑要解]李密이 연회할 때를 만나 직무상 음식 공급을 담당하게 되자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연회에서 물러나와 王伯當에게 얘기하니, 王伯當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공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唐王에게 말하여 이렇게 청한 것이다.】 해서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에 唐主에게 계책을 올리기를 “山東의 무리는 모두 臣이 예전에 거느리던 부하들입니다. 청컨대 가서 그들을 거두어 어루만져 국가의 위엄을 빙자한다면 王世充을 잡는 것은 땅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王伯當李密의 副官으로 삼아서 보내었다.

12월에 李密이 마침내 桃林縣의 城을 점거하여 무리를 몰아 노략질하고 곧바로 南山으로 달려가서 험고한 곳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오자, 盛彦師【盛彦師는 行軍總管이었다.】가 공격하여목을 베고首級을 長安에 전달하였다. - 《唐書 李密傳》에 나옴 -

○ 有犯法不至死者어늘 唐主特命殺之러니 監察御史李素立이 諫曰 三尺法【以三尺竹簡으로 書法律이라】은 王者所與天下共之也니 法一動搖면 人無所措手足이니이다 陛下甫創鴻業【鴻은 與洪通이라】에 奈何棄法이니잇고 臣忝法司하니 不敢奉詔로소이다 唐主從之하니 自是로 特承恩遇라 命所司하야 授以七品淸要官하니 所司擬雍州司戶어늘 唐主曰 此官은 要而不淸이니라 又擬秘書郞한대 唐主曰 此官은 淸而不要라하고 遂擢授侍御史하다

○ 법을 범하였으나 死罪(사형에 처해야 할 죄)에 이르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唐主가 特命으로 그를 죽이게 하자, 監察御史李素立이 간하기를 “三尺의 法【三尺法은 3尺의 竹簡에 法律을 쓴 것이다.】은 王者가 천하 사람들과 함께 준수하는 것이니, 법이 한 번 동요되면 사람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습니다. 陛下께서 이제 겨우 큰 基業【鴻은 洪과 통한다.】을 창건하셨는데, 어찌하여 법을 버리신단 말입니까. 臣이 외람되이 法司를 맡고 있으니, 감히 詔命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특별히 은혜와 대우를 받았다. 관계 部署에 명하여 그에게 7품의 淸要官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관계 部署에서 雍州司戶에 의망하자 唐主가 말하기를 “이 벼슬은 要職이기는 하나 깨끗하지 않다.” 하고, 또 秘書郞에 의망하자 “이 벼슬은 깨끗하기는 하나 요직이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李素立을 발탁하여 侍御史에 제수하였다.

[己卯] 隋恭帝侗皇泰二年

[己卯] 〈隋恭帝皇泰二年이요 唐武德二年이요 鄭王王世充開明元이요 梁王沈法興延康元이요 吳王李子通明政元年이라 是歲에 隋, (梁)[涼], 楚粲亡하니 幷楚, 夏, 定楊, 梁師都, 梁하야 凡九國이라〉

기묘(619) - 隋나라 恭帝楊侗의 皇泰 2년이고, 唐나라 武德 2년이고, 鄭王王世充의 開明 원년이고, 梁王沈法興의 延康 원년이고, 吳王李子通의 明政 元年이다. ○ 이해에 隋나라, 涼나라(李軌), 楚王朱粲이 망하니, 楚나라(林士弘), 夏나라(竇建德), 定楊(劉武周), 梁師都, 梁나라의 蕭銑까지 아울러 모두 아홉 나라이다.-

唐이 初定租, 庸, 調法【此는 唐賦役之法也라 有田則有租하고 有家則有調하고 有身則有庸하니 租出穀하고 庸出絹하고 調出繒纊布麻하니라】하야 每丁에 租二石과 絹二匹과 綿三兩이요 自玆以外에는 不得橫有調斂【橫, 調는 竝去聲이니 調는 謂賦也라】하다 〈出本紀及食貨志〉

唐나라가 처음으로 租‧庸‧調法【租‧庸‧調法은 唐나라 때의 賦役을 부과하는 法이다. 田地가 있으면 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調가 있고, 몸이 있으면 庸이 있으니, 租는 곡식으로 내고 庸은 絹으로 내고 調는 〈그 지방에서 나는 産物에 따라〉 絹綾과 고치와 삼베와 麻로 냈다.】을 제정하여 壯丁마다 租는 2석, 絹은 2필, 綿은 3량을 내게 하고 이 이외에는 제멋대로 징발하거나 거두어들이지【橫과 調는 모두 去聲이니, 調는 賦稅를 이른다.】 못하게 하였다. - 《唐書》의 〈高祖本紀〉와 〈食貨志〉에 나옴 -

唐主考第群臣할새 以李綱, 孫伏伽【李綱은 太子少保요 孫伏伽는 治書侍御史라】로 爲第一하다 因置酒高會【皆召尊爵이라 故曰高會라 一說에 大會라하니라】하고 謂裴寂等曰 隋氏以主驕臣諂으로 亡天下라 朕이 卽位以來로 每虛心求諫이나 然唯李綱이 差盡忠款하고 孫伏伽는 可謂誠直이요 餘人은 猶踵敝風하야 俛眉而已니 豈朕所望哉아 〈出伏伽傳〉

唐主가 여러 신하들을 고과하여 등급을 매길 적에 李綱과 孫伏伽【李綱은 太子少保이고, 孫伏伽는 治書侍御史였다.】를 제일로 삼았다. 인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성대하게 연회【높은 작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부르기 때문에 高會라고 한다. 一說에는 大會(많이 모임)라고 한다.】를 베풀고는 裴寂 등에게 이르기를 “隋나라는 군주가 교만하고 신하가 아첨하여 천하를 잃었다. 朕이 즉위한 이후로 언제나 마음을 겸허히 하여 諫言을 구하였으나 오직 李綱만이 비교적 충성을 다하였고 孫伏伽는 진실하고 충직하다고 이를 만하며, 그밖의 사람은 아직도 옛 풍속을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니, 이것이 어찌 朕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하였다.- 《唐書 孫伏伽傳》에 나옴 -

王世充이 卽帝位하고 國號를 鄭이라하다

王世充이 황제에 즉위하고 國號를 鄭이라 하였다.

○ 七月에 劉武周進逼幷州어늘 齊王元吉이 棄州하고 奔還長安하니 晉陽土豪薛深이 以城納武周하다

○ 7월에 劉武周가 진격하여 幷州를 핍박하자齊王李元吉이 幷州를 버리고 도망하여 長安으로 돌아오니, 晉陽의 土豪인 薛深劉武周에게 城을 바쳤다.

武周軍勢甚銳하니 關中이 震駭라 上이 悉發關中兵하야 以益世民所統하야 使擊武周하다

劉武周의 軍勢가 매우 精銳로우니, 關中이 진동하고 놀랐다. 上이 關中의 병력을 모두 징발해서 李世民이 통솔하는 군대에 보태어 劉武周를 공격하게 하였다.

○ 五月에 鄭主世充이 弑隋主世充이 遣人酖之라 隋主 請與太后訣이나 不許하니 乃布席禮佛曰 自今以往으로 不復生帝王家라하다 以帛縊殺之하다】하고 諡曰恭皇帝라하다

○ 5월에 鄭主王世充隋主楊侗을 시해하고【王世充이 사람을 보내어 鴆毒으로 隋主를 죽이게 하였다. 隋主가 太后와 永訣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자리를 깔고 禮佛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후로 다시는 王家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독을 마셨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자〉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시호를 恭皇帝라 하였다.

[庚辰] 唐武德三年

[庚辰] 〈唐武德三年이라 ○ 是歲에 幷楚, 夏, 定楊, 梁師都, 梁, 鄭, 梁法興, 吳하야 凡九國이러니 定楊, 梁法興亡하니라〉

경진(620) - 唐나라 武德 3년이다. ○ 이해에 楚나라, 夏나라, 定楊(劉武周), 梁師都, 梁나라의 蕭銑, 鄭나라, 梁王沈法興, 吳王까지 아울러 모두 아홉 나라였는데, 定楊과 梁나라의 沈法興이 망하였다.-

世民이 與劉武周宋金剛으로 相持할새 世民이 屢破金剛將尉遲敬德, 尋相尉遲는 複姓이요 尋相은 姓名이라 [通鑑要解]敬德은 字也요 이 名也라】等하다 四月에 金剛이 食盡北走어늘 世民이 追及尋相於呂州하야 大破之하고 乘勝逐北【北은 陰方이니 軍敗曰北라】하야 一晝夜에 行二百餘里하야 戰數十合하고 追及金剛於雀鼠谷하야 一日八戰에 皆破之하니 世民이 不食이 二日이요 不解甲이 三日矣러라 敬德이 與尋相으로 擧介(州)[休]及永安降이어늘 世民이 得敬德甚喜하야 以爲右一府統軍하고 使將其舊衆八千하야 與諸營相參하다 劉武周金剛敗하고 大懼하야 棄幷州하고 走突厥이어늘 金剛이 亦與百餘騎로 走突厥하니 幷州悉平하다 〈出敬德等傳〉

唐나라 李世民劉武周의 장수인 宋金剛과 서로 대치할 적에 李世民宋金剛의 장수인 尉遲敬德과 尋相【[頭註]尉遲는 複姓이고 尋相은 姓名이다. [通鑑要解]敬德은 字이고 恭이 이름이다.】 등을 여러 번 격파하였다. 4월에 宋金剛이 양식이 떨어져 북쪽으로 도망하자李世民이 추격하여尋相을 呂州에서 따라잡아 대파하였다. 승세를 타고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북쪽은 陰方이니 군대가 패한 것을 北라 한다.】하여 하루 만에 2백여 리를 행군해서 數十合을 싸우고 宋金剛을 雀鼠谷에서 따라잡아 하루 동안 여덟 번을 싸워 모두 격파하니, 李世民이 밥을 먹지 않은 것이 이틀이었고 갑옷을 벗지 않은 것이 사흘이었다. 尉遲敬德尋相과 함께 介休縣과 永安縣을 가지고 항복하자, 李世民尉遲敬德을 얻고는 매우 기뻐하여 그를 右一府統軍으로 삼고 옛날에 거느리던 휘하 8천 명을 거느려 여러 營과 서로 참여하게 하였다. 劉武周宋金剛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幷州를 버리고 突厥로 달아나자宋金剛도 백여 명의 기병과 함께 突厥로 도망하니, 幷州가 모두 평정되었다.- 《唐書》의 〈尉遲敬德傳〉 등에 나옴 -

○ 七月에 唐이 詔秦王世民하야 督諸軍하야 擊王世充하다

○ 7월에 唐나라가 秦王李世民에게 명해서 諸軍을 감독하여 王世充을 공격하게 하였다.

劉武周降將尋相等이 多叛去어늘 諸將이 疑尉遲敬德하야 囚之軍中이러니 屈突通【屈突은 複姓이라】, 殷開山이 言於世民敬德은 驍勇絶倫하니 今旣囚之에 心必怨望이라 留之면 恐爲後患이니 不如遂殺之니이다 世民曰 不然하다 敬德이 若叛이면 豈在尋相之後耶아 遽命釋之하고 引入臥內하야 賜之金曰 丈夫【十尺爲丈이니 人長八尺이라 故云이요 又尊嚴之稱이라】意氣相期하니 勿以小嫌介意하라 吾終不信讒言以害忠良하리니 公宜體之하라 必欲去者면 以此金相資하야 表一時共事之情也로라 已而오 世民이 以五百騎로 行戰地하야 登魏宣武陵【謂後魏宣武帝陵也라】이러니 王世充이 帥步騎萬餘하고 猝至圍之하고 單雄信【單은 時戰反이니 姓也라】이 引槊【槊은 與矟同이라】直趨世民이어늘 敬德이 躍馬大呼하야 橫刺雄信墜馬하니 世充兵이 稍却이라 敬德이 翼世民出圍하다 世民, 敬德이 更帥騎兵還戰할새 出入世充陳하야 往返에 無所礙라 屈突通이 引大兵繼至하니 世充이 兵大敗하야 僅以身免이어늘 斬首千餘級하다 世民이 謂敬德曰 公何相報之速也오하고 賜敬德金銀一篋하니 自是로 寵遇日隆이러라 敬德이 善避矟【矟은 與槊同하니 矛長八尺曰矟이라】하야 每單騎로 入敵陳中에 敵이 叢矟【叢은 聚也라】刺之하되 終莫能傷이요 又能奪敵矟하야 返刺之러라 齊王元吉이 以善馬矟으로 自負러니 聞敬德之能하고 請與敬德較勝負할새 元吉이 操矟躍馬하야 志在刺之로되 敬德이 須臾에 三奪其矟이러라 〈出敬德傳〉

劉武周의 항복한 장수인 尋相 등이 대부분 배반하고 도망가자, 諸將이 尉遲敬德을 의심하여 軍中에 가두었다. 屈突通【屈突은 複姓이다.】殷開山李世民에게 말하기를 “尉遲敬德은 날래고 용감함이 무리들 중에 뛰어난데 이제 이미 그를 가두었으니, 그 마음에 반드시 원망할 것입니다. 그를 남겨 둔다면 후환이 될까 두려우니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李世民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尉遲敬德이 만약 배반하려 했다면 어찌 尋相의 뒤에 배반하겠는가.” 하고 급히 명하여 풀어 주게 하고는 그를 데리고 침실 안으로 들어와서 金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대장부【10척을 1丈이라 하니, 사람(男子)의 키가 8척이기 때문에 丈夫라고 이른 것이요, 또 존엄한 자의 칭호이다.】가 意氣로써 서로 약속하였으니 작은 혐의를 개의치 말라. 내 끝내 참소하는 말을 믿어 忠良한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이니, 공은 내 마음을 체찰하라. 기어이 떠나고자 한다면 이 金을 주어서 우리가 한때 일을 함께 한 情誼를 표하노라.” 하였다.

얼마 뒤에 李世民이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쟁터를 순행하여 後魏宣武帝의 능【宣武陵은 後魏 宣武帝의 陵을 이른다.】에 올랐는데, 王世充이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갑자기 와서 포위하였고 單雄信【單은 時戰反(선)이니 姓이다.】이 창【槊은 矟과 같다.】을 잡고 곧바로 李世民을 향해 달려왔다. 尉遲敬德이 말에 뛰어올라 크게 고함을 치고 單雄信을 옆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지게 하자, 王世充의 군대가 조금 퇴각하였으므로 尉遲敬德李世民을 도와 포위망을 탈출하였다. 李世民尉遲敬德이 다시 기병을 거느리고 돌아와 싸울 적에 王世充의 진영을 출입하여 가고 돌아옴에 막히는 바가 없었다. 屈突通이 大兵을 이끌고 계속하여 이르자, 王世充의 군대가 대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가니, 천여 명의 首級을 베었다. 李世民尉遲敬德에게 이르기를 “公은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리도 빠른가.” 하고는 尉遲敬德에게 金銀 한 상자를 하사하니, 이로부터 총애와 대우가 날로 높아졌다.

尉遲敬德은 창【矟은 槊과 같으니, 창의 길이가 8尺인 것을 矟이라 한다.】을 잘 피하여 매번 單騎로 적진에 돌진할 때마다 적들이 일제히 창을 모아【叢은 모음이다.】 찔렀으나 끝내 부상시키지 못하였으며, 또 적의 창을 잘 빼앗아 도리어 찌르곤 하였다. 齊王李元吉이 말 위에 창을 잘 쓰는 것으로 자부하였는데, 尉遲敬德이 창을 잘 쓴다는 말을 듣고는 尉遲敬德과 승부를 겨루기를 청하였다. 李元吉이 창을 잡고 말에 뛰어올라 尉遲敬德을 찔러 죽이려는 데에 뜻이 있었으나 尉遲敬德이 잠깐 동안에 세 번이나 그의 창을 빼앗았다.- 《唐書 尉遲敬德傳》에 나옴 -

[辛巳] 唐武德四年

[辛巳] 〈唐武德四年이라 ○ 是歲에 夏, 鄭, 梁, 吳亡하니 幷楚, 梁師都하야 凡三國이라〉

신사(621) - 唐나라 武德 4년이다. ○ 이해에 夏나라, 鄭나라, 梁나라의 蕭銑, 吳王이 망하니, 楚나라와 梁師都까지 아울러 모두 세 나라이다.-

唐兵이 圍洛陽王世充이 在洛陽이라】하니 城中이 乏食이라 竇建德【見上卷하니 丁丑年에 稱長樂王이러니 戊寅年에 聞江都敗하고 定都于河間府樂壽縣이라 備百官하고 改國號夏하고 改元五鳳하니라】이 救之할새 乃遺世民書하야 請退軍潼關하야 復脩前好하다 世民이 集將佐議之하니 皆請避其鋒이어늘 郭孝恪王世充이 窮蹙하야 垂將【垂는 幾也라】面縛이어늘 竇建德이 運糧하야 遠來助之【隋末에 王世充이 據洛陽하야 稱鄭하고 竇建德이 據河北하야 稱夏하니라】하니 此는 天意欲兩亡之也라 不過二旬에 兩主就縛矣리이다 世民이 善之하야 將驍騎하고 出武牢東하니 建德이 迫於武牢하야 不得進하고 數戰不利라 建德이 中槊【中은 去聲이라】이어늘 楊武威逐之하니 建德이 墜馬라 武威下擒之하다 世民이 囚建德等하고 至洛陽城下하야 以示世充하니 世充諸將曰 吾所恃者는 夏主러니 今已爲擒하니 雖得出이라도 終必無成이리이다 世充이 素服으로 帥太子群臣二千餘人하고 詣軍門降이어늘 世民이 入宮城하야 觀隋宮殿하고 歎曰 逞侈心【逞은 快也니 恣肆快意也라】하야 窮人欲하니 無亡이나 得乎아하고 命撤端門樓【皇城南正中門曰端門이라】하고 焚乾陽殿하며 毁則天門【宮城正中門이라】及闕【門觀이니 人臣至此에 思其所闕이라 爲二臺於門外하고 作樓觀於上하고 因謂之觀이라 又缺也니 兩觀雙植하고 中央缺然而爲道라 故謂之闕이라】하고 廢諸道場하다 〈出世充, 建德傳〉

[史略 史評]愚按 王世充이 弑其君而自立하니 其罪大矣라 是宜明正其罪而誅之可也어늘 世民이 旣赦之하고 而又潛殺하니 豈義也哉리오

唐나라 군대가 洛陽을 포위하니,【王世充이 洛陽에 있었다.】 성안에 양식이 바닥났다. 竇建德【竇建德은 상권에 보이니, 정축년(617)에 長樂王이라 칭하였는데, 무인년(618)에 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河間府 樂壽縣에 도읍을 정하였다. 백관을 갖추고 국호를 夏라 고치고 五鳳으로 改元하였다.】王世充을 구원할 적에 마침내 李世民에게 편지를 보내 潼關으로 군대를 후퇴시켜서 다시 前日의 우호를 닦을 것을 청하였다. 李世民이 장수와 보좌들을 모아 의논하니 모두 예봉을 피할 것을 청하였는데, 郭孝恪이 말하기를 “王世充이 곤궁하고 위축되어 얼굴을 쳐들고 두 손을 등 뒤로 묶고서 거의【垂는 거의이다.】 항복하게 되었는데, 竇建德이 양식을 운반하여 멀리 와서 도우니,【[原註]王世充……遠來助之:隋나라 말기에 王世充은 洛陽을 점거하여 鄭나라라 칭하고, 竇建德은 河北을 점거하여 夏나라라 칭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 둘 다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20일이 못 되어 두 군주가 다 포박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李世民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겨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武牢의 동쪽으로 나오니, 竇建德이 武牢에서 압박당하여 전진하지 못하였으며 자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竇建德이 창에 찔렸는데,【中은 去聲(맞음)이다.】楊武威가 그를 추격하니 竇建德이 말에서 떨어졌으므로 楊武威가 말에서 내려 그를 사로잡았다.

李世民竇建德 등을 가두고 洛陽城 아래에 이르러 이들을 王世充에게 보이니, 王世充의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는 것은 夏主(竇建德)뿐이었는데 이제 이미 사로잡혔으니, 포위망을 탈출하더라도 끝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王世充이 소복을 입고 태자와 신하 2천 명을 거느리고 軍門에 나와서 항복하였다. 李世民이 宮城에 들어가서 隋나라 궁전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사치하려는 마음을 부려【逞은 유쾌함이니,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욕심을 끝까지 다하였으니 멸망하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명령을 내려 端門樓【皇城의 남쪽에 있는 正中門을 端門이라 한다.】를 철거하고 乾陽殿을 불태웠으며 則天門【則天門은 宮城의 正中門이다.】과 闕【闕은 門觀(門闕)이니, 신하가 이곳(궐문)에 이르면 군주의 부족한 점을 생각한다. 문밖에 두 개의 臺를 만들고 그 위에 樓觀을 짓고는 인하여 觀이라 이른다. 闕은 또 빠뜨린다는 뜻이니, 두 개의 觀을 양쪽에 세우고 중앙은 비워놓아 길을 만들기 때문에 闕이라고 이른다.】을 부수고 여러 道場(도량)을 폐지하였다.- 《唐書》의 〈王世充傳〉과 〈竇建德傳〉에 나옴 -

[史略 史評]내가 살펴보건대 王世充은 군주(楊侗)를 시해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니, 그 죄가 크다. 마땅히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주벌하는 것이 옳은데, 李世民이 이미 그를 용서해 주고 또다시 몰래 죽였으니 어찌 의로운 일이겠는가.

○ 七月에 建德部將劉黑闥이 起兵於漳南하니 兵勢大振이라 十一月에 陷冀州하고 擊李世勣等하야 破之하고 遂攻拔相州하고 又取黎, 衛二州하니 半歲之間에 盡復建德舊境이라 丁卯에 命秦王世民, 齊王元吉하야 討之하다

○ 7월에 竇建德의 部將인 劉黑闥이 漳南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軍勢가 크게 떨쳐졌다. 11월에 冀州를 함락하고李世勣 등을 쳐서 격파하고는 마침내 相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또다시 黎州와 衛州의 두 고을을 점령하니, 반년 사이에 竇建德의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丁卯日(12월 15일)에 秦王李世民齊王李元吉에게 명하여 劉黑闥을 토벌하게 하였다.

○ 隋末에 錢幣濫薄하야 至裁皮糊紙하야 爲之하니 民間이 不勝其敝러니 至是하야 唐이 初行開元通寶錢【食貨志注에 錢文曰開元通寶라 歐陽詢이 制詞及書하니 其文回環可讀이라하니라 】이라 積十錢하면 重一兩하야 輕重大小 最爲折衷【言極停當也라[頭註]衷은 去聲이라 折은 斷也요 衷은 正當也니 若斷折其物에 與度相正當也라】하니 遠近이 便之러라 〈出食貨志〉

○ 隋나라 말기에 錢幣(돈)가 남발되고 얇아져 가죽을 자르거나 종이에 풀칠을 해서 돈을 만들기까지 하니 민간에서 그 폐단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唐나라가 처음으로 開元通寶錢【≪新唐書≫ 〈食貨志〉 注에 “돈에 ‘開元通寶’ 네 글자를 썼다. 歐陽詢이 글을 짓고 글자를 썼는데, ‘開元通寶’ 네 글자를 돌려가면서 읽으면 文章이 되어 읽을 수 있다.” 하였다.】을 유통시키니 10錢을 쌓으면 무게가 한 냥이었다. 輕重(무게)과 大小(크기)가 가장 알맞으니【[釋義]가장 절충이 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정당(적당)함을 말한다.[頭註]衷은 去聲(합당하다)이다. 折은 절단함이고 衷은 정당함이니, 마치 물건을 절단할 때에 자와 서로 딱 들어맞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근에서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唐書 食貨志》에 나옴 -

唐主秦王世民이 功大하니 前代官은 不足以稱之라하야 特置天策上將하니 位在王公上이라 冬十月에 以世民爲天策上將하고 開天策府하야 置官屬하다 世民이 以海內浸平이라하야 乃開館於宮西하고 延四方文學之士하야 出敎【敎는 韻書에 詔命이니 帝曰詔요 王及后妃曰敎요 太子曰令이라하니라】할새 以王府屬【秦王府官屬이라】杜如晦와 記室房玄齡, 虞世南과 文學褚亮, 姚思廉과 主簿李玄道와 參軍蔡允恭, 薛元敬, 顔相時와 諮議典籤蘇勗과 天策府從事中郞于志寧과 軍諮祭酒蘇世長과 記室薛收와 倉曹李守素와 國子助敎陸德明, 孔穎達信都蓋文達【信都는 縣名이라 文達은 冀州信都人이니 蓋은 凡姓에 皆音盍이라】과 宋州總管府戶曹許敬宗으로 竝以本官으로 兼文學館學士하고 分爲三番하야 更日直宿하고 供給珍膳하야 恩禮優厚하니라 世民이 朝謁公事之暇에 輒至館中하야 引諸學士하야 討論文籍하야 或夜分乃寢하다 乃使庫直【隷親事府라 】閻立本【毗之子라】圖像하고 褚亮爲贊하고 號를 十八學士라하니 士大夫得預其選者면 時人이 謂之登瀛洲【瀛洲는 山名이니 神仙居焉이라 前郊祀志에 蓬萊, 方丈, 瀛洲 此三神山은 傳在海中이라하니 登瀛洲者는 言如昇仙也라】라하니라 〈出本紀及褚亮傳〉

唐主秦王李世民이 공이 커서 前代의 관직은 그 功에 걸맞지 않다 하여 특별히 天策上將을 설치하니, 지위가 王公의 위에 있었다. 겨울 10월에 李世民을 天策上將으로 삼고 天策府를 열어 官屬을 두었다. 李世民은 海內가 점점 평정되어간다 하여 마침내 왕궁 서쪽에 學館을 열고 사방의 文學하는 선비를 초빙하여, 敎書【敎는 ≪韻書≫에 “詔命이니, 皇帝의 命은 詔라 하고, 王과 后妃의 命은 敎라 하고, 太子의 命은 令이라 한다.” 하였다.】를 낼 적에 秦王府 官屬【王府屬은 秦王府의 官屬이다.】杜如晦, 記室인 房玄齡虞世南, 文學인 褚亮姚思廉, 秦王府主簿인 李玄道, 參軍인 蔡允恭薛元敬顔相時, 諮議典籤인 蘇勗, 天策府從事中郞인 于志寧, 軍諮祭酒인 蘇世長, 記室인 薛收, 倉曹인 李守素, 國子助敎인 陸德明孔穎達, 信都縣의 蓋文達,【信都는 縣의 이름이다. 蓋文達은 冀州 信都 사람이니, 蓋은 姓으로 쓸 때에는 모두 음이 ‘합’이다.】宋州總管府戶曹인 許敬宗을 모두 本職을 지닌 채 文學館 學士를 겸하게 하고는 세 번으로 나누어 격일로 숙직하게 하고 진귀한 음식을 공급하여 은총과 예우가 지극하였다.

李世民이 父王을 뵙고 公事를 처리하는 여가에 번번이 館中에 이르러 여러 학사들을 데리고 문헌과 전적을 토론하여 혹 밤이 늦어서야 비로소 잠을 자곤 하였다. 마침내 庫直【庫直은 親事府에 소속되어 있었다.】인 閻立本【閻立本은 閻毗의 아들이다.】으로 하여금 이들의 畵像을 그리고 褚亮으로 하여금 贊辭를 짓게 하고는 이들을 18學士라 칭하니, 士大夫로서 선발에 참여되면 당시 사람들이 ‘登瀛洲’【瀛洲는 三神山의 이름이니 神仙이 사는 곳이다. ≪前漢書≫ 〈郊祀志〉에 “蓬萊‧方丈‧瀛洲 이 세 神山은 바다 속에 있다고 전해온다.” 하였으니, 瀛洲에 올랐다는 것은 得道하여 신선이 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唐書》의 〈高祖本紀〉와 〈褚亮傳〉에 나옴 -

○ 初에 杜如晦爲秦王府兵曹參軍이라가 俄遷陝州【陝은 音閃이라】長史하다 時에 府僚多補外官하니 世民이 患之어늘 房玄齡曰 餘人은 不足惜이어니와 至如杜如晦하야는 王佐之才라하니 卽奏爲府屬하다 與玄齡으로 常從世民征伐하야 參謀帷幄하니 軍中이 多事로되 如晦剖決如流라 世民이 每破軍克城에 諸將佐 爭取寶貨하되 玄齡은 獨收采人物하야 致之幕府하고 又將佐有勇略者면 玄齡이 必與之深相結하야 使爲世民盡死力하니라 每令玄齡入奏事에 唐主歎曰 玄齡이 爲吾兒陳事하니 雖隔千里나 皆如面談이라하니라 〈出玄齡傳〉

○ 처음에 杜如晦가 秦王府의 兵曹參軍이 되었다가 얼마 후 陝州【陝은 음이 섬이다.】長史로 옮겼다. 이때 秦王府의 屬僚 중에 外職으로 補任되는 자가 많자 李世民이 이를 걱정하였는데, 房玄齡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굳이 애석할 것이 없지만 杜如晦에 이르러서는 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입니다.” 하니, 李世民이 즉시 아뢰어 秦王府의 官屬으로 삼았다. 杜如晦房玄齡과 함께 항상 李世民을 따라 정벌하여 軍幕의 모의에 참여하니, 軍中에 일이 많았으나 杜如晦가 흐르는 물처럼 신속하게 결단하였다.

李世民이 매번 적군을 격파하고 城을 점령할 때마다 여러 장수와 보좌들은 다투어 寶貨를 취하였으나 房玄齡만은 인재를 거두어 모아서 幕府에 데려왔으며, 또 장수와 보좌 중에 용맹과 지략이 있는 자가 있으면 房玄齡이 반드시 그와 깊이 교분을 맺어 그로 하여금 李世民을 위해 死力을 다하게 하였다. 李世民房玄齡으로 하여금 入朝하여 일을 아뢰게 할 때마다 唐主가 감탄하기를 “房玄齡이 내 아들을 위하여 일을 아뢰니, 비록 천리 멀리 떨어져 있으나 모두 마주 보고 말하는 것처럼 상세하다.” 하였다.- 《唐書 房玄齡傳》에 나옴 -

唐이 詔發巴, 蜀兵하야 以趙郡王孝恭【高祖叔父니 初封越이러니 後改河間이라】, 李靖으로 統十二總管하야 自夔州로 順流東下하야 以擊蕭銑하다 時에 蕭銑이 以罷兵營農也로 纔留宿衛數千人이러니 聞唐兵至하고 大懼하야 倉猝徵兵하니 皆在江嶺之外하야 道塗阻遠하야 不能遽集이라 乃悉見兵【謂見在之兵也라】하야 出拒戰이어늘 李靖이 縱兵하야 奮擊大破之하고 乘勝直抵江陵하야 入其外郭하고 又攻水城拔之하야 大獲舟艦이러니 李靖이 使孝恭으로 盡投之江中한대 諸將이 皆曰 破敵所獲을 當藉其用이어늘 奈何棄以資敵이니잇고 蕭銑之地는 南出嶺表하고 東距洞庭하니 吾懸軍深入하야 若攻城未拔하고 援兵四集이면 吾表裏受敵하야 進退不獲하리니 雖有舟楫이나 將安用之리오 今棄舟艦하야 使塞江而下면 援兵이 見之하고 必謂江陵已破라하야 未敢輕進하고 往來覘伺하야 動淹旬月하리니 吾取之必矣리라 援兵이 見舟艦하고 果疑不進하니 이 內外阻絶이라 이 乃謂群下曰 天不祚梁하니 不可復支矣로다 若必待力屈이면 則百姓蒙患하리니 奈何以我一人之故로 陷百姓於塗炭乎아하고 乃下令하야 開門出降하다 降數日에 援兵至者十餘萬이러니 聞江陵不守하고 皆釋甲而降하다 孝恭이 送於長安하니 斬於都市【范氏曰 蕭銑은 故梁子孫이라 因亂하야 保據荊, 楚하고 欲復先業하니 最無罪어늘 而唐誅之하니 淫刑甚矣라 胡氏曰 若以文告之하고 辭招而撫之하야 再三不下然後에 用兵이요 旣服이어든 當矜其志하고 胙以江南百里之地하야 使奉梁祀면 則唐之德이 幾乎武王下車之政이어늘 而以盜賊待之하니 其不仁이 甚矣로다】하다 〈出李靖及蕭銑傳〉

唐主가 명하여 巴‧蜀의 군대를 동원해서 趙郡王 李孝恭【趙郡王 李孝恭은 高祖의 숙부이다. 처음에 越에 봉해졌는데, 뒤에 河間郡王으로 고쳐 봉해졌다.】李靖으로 하여금 12명의 總管을 거느리고 夔州로부터 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서 蕭銑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蕭銑은 군대를 파하고 농사를 짓고 있었으므로 겨우 宿衛하는 군사 수천 명만 남겨 두었는데, 唐나라 군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창졸간에 군사를 징발하니, 모두 江南과 嶺南 밖에 있어서 도로가 험하고 멀어 갑자기 모일 수가 없었다. 이에 현재 보유한 병력【見兵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군대를 이른다.】을 다 동원하여 막고 싸우게 하였다. 李靖이 군대를 풀어 奮擊해서 大破하고는 승세를 타고 곧바로 江陵에 이르러 그 外郭으로 들어가고, 또 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전함을 크게 노획하였다.

李靖李孝恭으로 하여금 노획한 전함을 모두 강물 속에 던져버리게 하자, 諸將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격파하고 노획한 것을 사용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버려서 적에게 이용하게 하십니까?” 하니, 李靖이 대답하기를 “蕭銑의 지역은 남쪽으로는 五嶺 밖으로 나가고 동쪽으로는 洞庭湖에 이른다. 내가 만약 군대를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만약 城을 공격하다가 함락하지 못하고 적의 구원병이 사방에서 모인다면 나는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할 것이니, 비록 배와 노가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이제 전함을 버려서 강을 가득히 메우고 떠내려가게 하면 구원병들이 이를 보고서 반드시 江陵이 이미 격파되었다고 생각하여 감히 가볍게 전진하지 못하고, 오가면서 엿보아 그때마다 열흘이나 한 달이 걸릴 것이니, 이렇게 되면 틀림없이 내가 점령할 수 있다.” 하였다.

蕭銑의 구원병이 전함을 보고 과연 의심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蕭銑이 안팎으로 막히고 끊겼다. 蕭銑이 마침내 여러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梁나라를 도와주지 않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만약 반드시 힘이 다하기를 기다린 뒤에 굴복한다면 백성들이 폐해를 입을 것이니, 어찌 나 한 사람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겠는가.” 하고는 蕭銑이 마침내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蕭銑이 항복한 지 며칠 만에 도착한 구원병이 11만 명이었는데, 江陵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갑옷을 벗고 항복하였다. 李孝恭蕭銑을 長安으로 압송하니, 도성의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었다.【范氏가 말하였다. “蕭銑은 옛날 梁나라의 子孫이다. 난리를 틈타 荊‧楚 지방을 점거하고 先代의 基業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니 가장 죄가 없는데, 唐나라에서 그를 죽였으니 형벌을 남용함이 심하였다.” 胡氏가 말하였다. “만약 글로써 고하고, 글로써 불러서 위무하기를 여러 번 했는데도 항복하지 않은 뒤에 武力을 동원하며, 이미 복종했으면 그 뜻을 가엾게 여기고 江南의 백 리 되는 땅을 주어서 梁나라 제사를 받들게 했어야 하니, 이렇게 하였다면 唐나라의 德이 거의 武王이 처음 즉위하여 베푼 정사에 가까웠을 터인데, 그를 도적으로 대하였으니 不仁함이 심하다.”】 - 《唐書》의 〈李靖傳〉과 〈蕭銑傳〉에 나옴 -

[壬午] 唐武德五年

[壬午] 〈唐武德五年이요 漢東王劉黑闥天造元年이라 ○ 是歲에 楚幷梁하니 凡三國이라〉

임오(622) - 唐나라 武德 5년이고, 漢東王劉黑闥의 天造 원년이다. ○ 이해에 楚가 梁을 겸병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正月에 劉黑闥【本王世充故臣也라 建德, 世充旣定에 建德諸將으로 居閭里暴橫者를 繩之하니 皆驚懼不安이러니 會에 詔悉徵建德故將한대 於是에 相謂曰 世充이 以洛陽降唐이어늘 其將相大臣을 皆夷滅之하니 吾屬이 至長安이면 必不免이라하고 乃謀作亂하야 以黑闥爲主하니라】이 自稱漢東王하고 都洺州러니 唐秦王世民이 擊破之한대 黑闥이 奔突厥하니 山東이 悉平이라 六月에 黑闥이 引突厥하야 寇山東하다

정월에 劉黑闥【劉黑闥은 본래 王世充의 옛 신하였다. 竇建德과 王世充이 평정되고 난 뒤 唐主가 竇建德의 장수들 중에 閭里에 있으면서 횡포를 부린 자들을 다스리니,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였다. 이때 마침 조서를 내려 竇建德의 옛 장수들을 모두 부르자, 이에 서로 말하기를 “王世充이 洛陽을 가지고 唐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 장수와 정승 등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멸하였으니, 우리들이 長安에 이르면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모의하고 난리를 일으켜서 劉黑闥을 盟主로 삼았다.】이 스스로 漢東王이라 칭하고洺州에 도읍하였는데, 唐나라 秦王李世民이 이들을 격파하자 劉黑闥이 突厥로 도망하니, 山東 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6월에 劉黑闥이 突厥을 이끌고 山東을 침략하였다.

○ 八月己未에 突厥頡利可汗이 寇幷州하고 遣兵寇原州어늘 唐主謂群臣曰 突厥이 入寇而復求和하니 和與戰이 孰利오 太常卿鄭元璹曰 戰則怨深하리니 不如和利니이다 中書令封德彛曰 突厥이 恃犬羊之衆하야 有輕中國之意하니 若不戰而和하여 示之以弱이면 明年에 將復來하리니 臣愚以爲不如擊之요 旣勝而後與和면 則恩威兼著矣리이다 唐主從之하다

○ 8월 己未日(10일)에 突厥의 頡利可汗이 幷州를 침략하고군대를 보내어原州를 침략하였다. 唐主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突厥이 쳐들어와서 약탈하고 다시 화친을 요구하니, 화친과 전투 중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 하니, 太常卿鄭元璹이 말하기를 “싸우면 원망이 심할 것이니, 화친의 이로움만 못합니다.” 하였다. 中書令인 封德彛가 말하기를 “突厥이 개와 양과 같은 오랑캐의 많은 무리를 믿고서 中國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으니, 만약 싸우지 않고 화친하여 약함을 보여주면 내년에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그들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 이미 이기고 난 뒤에 화친하면 은혜와 위엄이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 九月에 劉黑闥이 陷瀛州하고 進陷鹽州하다

○ 9월에 劉黑闥이 瀛州를 함락하고 진격하여 鹽州를 함락하였다.

○ 十月에 唐淮陽王道玄唐主從兄之子라】이 與黑闥로 戰於下博이라가 兵敗하야 爲黑闥所殺하니 山東震駭하야 州縣皆叛하야 附於黑闥이라 旬(月)[日]間에 黑闥이 盡復故地하고 進據洺州하다

○ 10월에 唐나라 淮陽王李道玄淮陽王李道玄唐主의 從兄의 아들이다.】劉黑闥과 下博縣에서 싸우다가 군대가 패하여劉黑闥에게 살해되자, 山東이 동요하고 놀라서 州縣이 모두 배반하여劉黑闥에게 붙었다. 열흘 만에 劉黑闥이 옛 땅을 모두 수복하고진격하여洺州를 점거하였다.

道玄이 數從秦王世民하야 征伐이러니 死時年十九라 世民이 深惜之하야 謂人曰 道玄이 常從吾征伐에 見吾深入賊陳하고 心慕效之하야 以至於此라하고 爲之流涕러라 世民이 自起兵以來로 前後數十戰에 常身先士卒하야 輕騎深入에 雖屢危殆나 而未嘗爲矢刃所傷이러라

李道玄이 여러 번 秦王李世民을 따라 정벌하였는데, 죽었을 때 나이가 19세였다. 李世民이 그를 매우 아까워하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李道玄이 항상 나를 따라 정벌할 때에 내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본받아서 이에 이르게 되었다.” 하고는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李世民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전후로 수십 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士卒들보다 앞장서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만났으나 일찍이 화살과 칼날에 부상당한 적이 없었다.

○ 初에 唐主之起兵晉陽也는 皆秦王世民之謀라 唐主世民曰 若事成이면 則天下皆汝所致니 當以汝爲太子라하더니 及爲唐王에 將佐亦請以世民爲世子어늘 唐主將立之러니 世民이 固辭而止하다 太子建成은 喜酒色遊畋하고 齊王元吉은 多過失하야 皆無寵이라 世民이 功名日盛하니 唐主常有意以代建成이어늘 建成이 內不自安하야 乃與元吉協謀하고 共傾世民할새 曲意事諸妃嬪하야 以求媚於上秦王이 每侍宴宮中에 思太穆皇后早終하야 不得見唐主有天下하야 或噓流唏涕하니 唐主不樂이라 諸妃嬪曰 陛下春秋高邁하시니 宜相娛樂이어늘 而秦王如此하니 正是憎疾妾等이라 陛下萬歲後에 妾子母必無孑遺矣리이다 云云하니 由是로 無易太子意하고 待世民浸疎也하니라】이라 太子中允王【中允은 官名이라】와 洗馬魏徵이 說太子曰 秦王은 功蓋天下하야 中外歸心하고 殿下는 但以年長으로 位居東宮하야 無大功以鎭海內하니이다 今劉黑闥은 散亡之餘에 衆不滿萬하고 資糧匱乏하니 以大軍臨之면 勢如拉朽【拉은 洛合反이니 折也라】하리니 殿下宜自擊之하야 以取功名하고 因結納山東豪傑이면 庶可自安하리이다 太子乃請行이어늘 唐主許之하다 〈出建成傳〉甲申에 詔太子建成하야 將兵討黑闥하다 黑闥이 引兵而南이어늘 建成, 元吉이 擊破之하니 黑闥이 食盡衆散하야 遂夜遁하다

范祖禹, 以輔導東宮爲職하니 當勸建成以孝於高祖하고 友於秦王이면 則儲位安矣리라 且建成이 旣爲太子면 則國其國也니 安在於立功이리오 乃使之擊賊以立威하고 結豪傑以自助하니 是는 導之以爭也니 禍亂이 何從而息乎아 夫以, 之賢으로도 其爲建成謀 猶如此어든 況庸人乎아

○ 처음에 唐主가 晉陽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은 모두 秦王李世民의 계책이었다. 唐主李世民에게 이르기를 “만약 일이 성공하면 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한 것이니 마땅히 너를 태자로 삼겠다.” 하였다. 唐王이 되자 장수와 보좌들 또한 李世民을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니, 唐主李世民을 세자로 삼으려하였는데李世民이 한사코 사양하여그만두었다. 太子李建成은 주색과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였고齊王李元吉은 과실이 많아 모두 唐主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李世民의 공명이 날로 성해지니, 唐主가 항상 李世民으로 李建成을 대신할 의향이 있었다. 李建成이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마침내 李元吉과 도모하여 李世民을 함께 거꾸러뜨리기로 하고 뜻을 굽혀 여러 妃嬪들을 섬겨서 上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였다.【[通鑑要解]曲意事諸妃嬪 求媚於上:秦王李世民이 매번 궁중에서 上을 모시고 연회를 열 때마다 太穆皇后가 일찍 죽어 唐主가 천하를 소유한 것을 보지 못하였음을 생각해서 혹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唐主가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妃嬪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춘추가 높으시니 의당 즐겁게 해드려야 할 터인데, 秦王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저희 첩들을 미워해서입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저희들 母子는 반드시 모두 죽임을 당하여 씨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唐主가 이 때문에 太子를 바꾸려던 뜻이 없어지고 李世民을 대하는 것이 점점 소원해졌다.】

太子中允王珪【中允은 官名이다.】와 太子洗馬魏徵이 太子를 설득하기를 “秦王은 功이 천하를 뒤덮어 中外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殿下는 다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東宮의 지위에 있어서 海內를 압도할 만한 큰 공덕이 없습니다. 지금 劉黑闥은 흩어져 도망한 뒤에 남은 무리가 만 명이 못 되고 물자와 군량이 다 떨어졌으니, 大軍으로써 임한다면 형세가 썩은 나무를 취하는【拉은 洛合反(랍)이니, 꺾음이다.】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그를 공격하여 공명을 취하고 인하여 山東의 호걸들과 교분을 맺는다면 아마도 스스로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太子가 마침내 출정할 것을 청하자唐主가 이를 허락하였다.- 《唐書 高祖諸子傳 隱太子建成》에 나옴 -

甲申日(11월 7일)에 太子李建成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劉黑闥을 토벌하게하였다. 劉黑闥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오자李建成李元吉이 그를 격파하니, 劉黑闥이 식량이 떨어지고 무리가 흩어져서 마침내 밤중에 도망하였다.

范祖禹가 말하였다.

王珪魏徵이 東宮을 輔導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으니, 마땅히 高祖에게 효도하고 秦王에게 우애하도록 李建成에게 권했어야 했다. 이렇게 했으면 太子의 지위가 편안했을 것이다. 또 李建成이 이미 태자가 되었으면 唐나라는 자기 나라이니, 어찌 공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李建成으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여 위엄을 세우게 하고 호걸들과 결탁하여 자신을 돕게 하였다. 이것은 다툼으로 인도한 것이니, 禍亂이 어디로부터 그치겠는가. 王珪魏徵같이 어진 이도 李建成을 위하여 도모한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용렬한 사람에 있어서랴.”

[癸未] 唐武德六年

[癸未] 〈唐武德六年이라 ○ 是歲에 漢東亡하니 幷梁하야 凡(三)[二]國이라〉

계미(623) - 唐나라 武德 6년이다. ○ 이해에 漢東이 멸망하니, 梁까지 아울러 모두 두 나라이다.-

黑闥所署饒州刺史諸葛德威【姓名也라】黑闥하고 擧城降이어늘 斬之하다

劉黑闥이 임명했던 饒州刺史諸葛德威諸葛德威는 姓名이다.】劉黑闥을 사로잡고 성을 가지고 唐나라에 항복하자劉黑闥의 목을 베었다.

[甲申]武德七年

[甲申]武德七年이라 〈是歲에 皆敗死하고 唯梁師都 至貞觀二年하야 乃亡하니라〉

武德 7年(갑신 624) - 이해에 모두 패하여 죽고 오직 梁師都만이 貞觀 2년(628)에 이르러 비로소 망하였다. -

正月에 依周, 齊舊制하야 每州에 置大中正一人하야 掌知州內人物하야 品量望第호되 以本州門望【家門物望이라】高者하야 領之하고 無品秩하다

정월에 周나라와 齊나라의 옛 제도를 따라 州마다 大中正 한 명을 두어 州內의 인물을 맡아서 그들의 인망과 등급을 品量(品評)하게 하되 本州의 문벌과 명망【門望은 가문과 物望(人望)이다.】이 높은 자를 등용하여 이 일을 맡게 하고 품계를 없게 하였다.

○ 二月에 詔諸州하야 有明一經以上未仕者어든 咸以名聞하고 州縣及鄕에 皆置學하다

○ 2월에 여러 州에 명하여 五經 중 한 가지 經書 이상에 밝으면서도 아직 벼슬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두 이름을 아뢰게 하고, 州‧縣 및 鄕에 모두 학교를 세웠다.

○ 四月에 初定均田【均은 平也니 均給天下人田이라】租, 庸, 調法하야 丁, 中之民【丁者는 當也니 當强壯之時요 中者는 謂上下通也라 四歲爲小요 十六爲中이요 二十爲丁이요 六十爲老라】은 給田一頃【畝百爲頃이니 六尺爲步요 步百爲畝라 一畝는 又徑一步長百步爲畝라 折而方之면 則東西南北이 各十步라】하고 篤疾은 減什之六하고 寡妻妾은 減七호되 皆以什之二로 爲世業하고 八로 爲口分【口分田은 人八十畝라[附註]食貨志에 田多하야 可以足其人을 爲寬鄕이요 少者를 爲狹鄕이라 凡庶人徙鄕及貧無以葬者는 得賣世業田이요 自狹鄕而徙寬鄕者는 得幷賣口分田이로되 已賣者는 不復授하고 死者는 收之하야 以授無田者하니라】하다 每丁에 歲入이 租는 粟二碩이요 調는 隨土地所宜하야 綾絹絁布【風土不同이라 故로 其宜亦異也라 布帛之細曰綾이요 繒如麥稍曰絹이요 絲經枲緯曰絁요 經緯皆枲曰布라】요 歲役은 二旬이라 不役이면 則收其傭호되 日三尺【王氏曰 傭은 通作庸하니 唐用人力이 歲二十日이요 閏加二日이며 不役者는 則日收綾或絹或絁或布三尺하니 是之謂庸이라】이요 有事而加役者는 旬有五日이면 免其調하고 三旬이면 租, 調를 俱免이라 水旱蟲霜이 爲災하야 什에 損四以上이면 免租하고 損六以上이면 免調하고 損七以上이면 課役을 俱免하다 〈食貨志〉

○ 4월에 처음으로 均田【均은 균평함이니, 均田은 천하 사람들에게 田地를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다.】과 租‧庸‧調法을 정해서 丁男과 中男의 백성【[釋義]丁, 中之民:丁은 당함이니 强壯할 때를 당한 것이고, 中은 위아래로 통함을 이른다. 4세를 小라 하고, 16세를 中이라 하고, 20세를 丁이라 하고, 60세를 老라 한다.】은 모두 田地 1頃【100畝를 頃이라 하니, 6尺이 1步이고 100步가 1畝이다. 1畝는 또 가로 1步에 세로 100步를 1畝라 한다. 잘라서 네모지게 만들면 동서남북이 각각 10步이다.】을 주며, 위독한 병이 있는 자는 10분의 6을 감하고 과부가 된 妻妾은 10분의 7을 감하되 모두 10분의 2를 世業田으로 삼고 10분의 8을 口分田으로 삼게 하였다.【[釋義]口分田은 사람마다 80묘이다.[附註]≪新唐書≫ 〈食貨志〉에 “田地가 많아서 백성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곳을 寬鄕이라 하고 田地가 부족한 곳을 狹鄕이라 한다. 무릇 庶民 중에 고을을 떠나거나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자는 世業田을 팔 수 있고, 狹鄕에서 寬鄕으로 옮겨 가는 자는 口分田까지 아울러 팔 수 있으나 이미 판 자에게는 다시 주지 않고, 죽은 자의 것은 회수하여 田地가 없는 자에게 준다.” 하였다.】 매 장정마다 1년에 국가에 납입하는 것이 租는 粟米 2碩(石)이요, 調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건에 따라 綾‧絹‧絁‧布【[釋義]調隨土地所宜 綾絹絁布:風土가 똑같지 않으므로 지방에 따라 잘 자라는 것 또한 다른 것이다. 布帛 중에 고운 것을 綾이라 하고, 비단이 보리 줄기 끝과 같은 것을 絹이라 하고, 날줄을 生絲로 하고 씨줄을 모시로 한 것을 絁라 하고, 날줄과 씨줄이 모두 모시인 것을 布라 한다.】요, 매년의 부역은 20일인데 부역하지 않으면 그 傭의 값을 거두되 하루에 3尺으로 하고,【[釋義]歲役二旬……日三尺:王氏가 말하였다. “傭은 庸으로 통용하니, 唐나라에서 백성들의 힘을 쓰는 것은 한 해에 20일이고 윤달이 있으면 2일을 더하였으며, 부역하지 않으면 그 대신 하루에 綾‧絹‧絁‧布 중의 하나를 3척씩 거두었는데, 이것을 庸이라 일렀다.”】 일이 있어 부역을 더 시킬 경우 15일을 더 시키면 調를 면제해 주고, 30일을 더 시키면 租와 調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장마와 가뭄, 蟲害와 霜害가 재앙이 되어서 10분의 4 이상이 손실되었으면 租를 면제해 주고, 10분의 6 이상이 손실되었으면 租와 調를 면제해 주고, 10분의 7 이상이 손실되었으면 租‧庸‧調를 모두 면제해 주었다.- 《唐書 食貨志》에 나옴 -

○ 七月에 或說上曰 突厥이 所以屢寇關中者는 以子女玉帛이 皆在長安故也니 若焚長安而不都면 則胡寇自息矣리이다 上以爲然이어늘 秦王世民이 諫曰 戎狄爲患은 自古有之라 陛下以聖武龍興하야 光宅中夏하시니 精兵이 百萬이요 所征에 無敵이어시늘 奈何以胡寇擾邊으로 遽遷都以避之하야 貽四海之羞하고 爲百世之笑乎잇가 彼霍去病은 漢庭一將이로되 猶志滅匈奴어든 況臣忝備藩維하니 願假數年之期면 請係頡利之頸하야 致闕下하리니 若其不敵이어든 遷都未晩이니이다 上曰 善하다 建成이 與妃嬪으로 因共譖世民曰 突厥이 雖屢爲邊患이나 得賂則退하니 秦王이 外託禦寇之名하고 內欲總兵權하야 成其簒奪之謀耳니이다 上이 每有寇盜에 輒命世民討之하고 事平之後에는 猜嫌益甚이러라 〈出突厥及建成傳〉

○ 7월에 혹자가 上을 설득하기를 “突厥이 關中을 자주 침략하는 까닭은 子女와 玉帛이 모두 長安에 있기 때문이니, 만약 長安을 불태우고 도읍으로 삼지 않으면 오랑캐의 침략이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하니, 上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秦王李世民이 간하기를 “戎狄의 폐해는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聖明함과 용맹함으로 創業하여 영광스럽게 中夏를 소유하시니, 정예병이 백만이요 정벌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어찌 오랑캐가 침범해서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 하여 갑자기 도읍을 옮겨서 그들을 피하여 천하에 수치를 당하고 백세의 웃음거리가 된단 말입니까. 저 霍去病은 漢나라 조정의 일개 장수였는데도 오히려 匈奴를 멸하는 데에 뜻을 두었는데, 하물며 신은 외람되이 변경을 맡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몇 년의 기한을 빌려 주신다면 頡利可汗의 목에 올가미를 매어서 대궐 아래로 끌고 올 것이니, 만약 효과가 없으면 그때 가서 도읍을 옮겨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上이 “좋다.” 하였다.

李建成이 妃嬪들과 함께 이 틈을 타서 李世民을 참소하기를 “突厥이 비록 여러 번 변방의 폐해가 되었으나 뇌물을 얻으면 바로 물러갔으니, 이는 秦王이 밖으로 외적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안으로 병권을 총괄하여 찬탈하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매번 外寇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李世民에게 적을 토벌하도록 명하고는 일이 평정된 뒤에는 그를 시기하고 혐의함이 더욱 심해졌다.- 《唐書》의 〈突厥傳〉과 〈高祖諸子傳隱太子建成〉에 나옴 -

○ 八月에 突厥이 寇原, 忻, 幷, 綏四州하니 京師戒嚴이라 是時에 頡利, 突利二可汗이 擧國入寇하야 連營南上【上은 時掌切이라 [通鑑要解]上은 時亮切이니 則去聲이라 崇也, 尊也니 太上은 極尊之稱이라 又上聲이니 時掌切이라 登也니 自下而上也라】이어늘 秦王世民齊王元吉이 引兵拒之하다 世民이 與虜遇於豳州【豳은 通作邠하니 古西戎地라 周時에 公劉所居라 故로 詩爲豳國이라 漢爲右扶風하고 西魏置豳州러니 唐玄宗이 以豳字類幽字故로 遂改爲邠하니라】하야 勒兵【勒은 猶戒嚴也라】將戰할새 可汗이 帥萬餘騎하고 奄至城下한대 元吉이 懼曰 虜形勢如此하니 奈何輕出이리오 世民曰 汝不敢出이면 吾當獨往호리라하고 乃帥騎馳詣虜陳(陣)하야 告之曰 國家與可汗和親이어늘 何爲負約하고 深入我地오 我는 秦王也니 可汗아 能鬪어든 獨出與我鬪하라 又遣騎하야 前告【前은 進也라】突利曰 爾往與我盟호되 有急相救어늘 今乃引兵相攻하니 何無香火之情也【謂引神明以懼之也라[頭註]古者엔 盟誓에 質諸天地山川鬼神하야 歃血而已러니 後世엔 誓者에 有禮佛立誓者하야 始有香하니라】世民이 又前하야 將度(渡)溝水하니 頡利世民輕出하고 又聞香火之言하고 疑突利世民有謀하야 乃遣止世民曰 王은 不須度하소서 我無他意요 更欲與王申固盟約耳라하고 乃引兵稍却하다 是後에 霖雨益甚이어늘 世民이 謂諸將曰 虜所恃者는 弓矢耳라 今積雨彌時【彌는 延也라】하야 筋膠俱解하야 弓不可用하리니 彼如飛鳥之折翼이요 吾는 屋居火食하고 刀槊이 犀利【犀는 堅也니 師古曰 古以犀兕皮爲鎧라 故謂堅曰犀라하니라】하니 以逸制勞라 此而不乘이면 將復何待리오 乃潛師夜出하야 冒雨而進하니 突厥이 大驚이러라 世民이 又遣說突利以利害하니 突利說(悅)하야 聽命이라 頡利欲戰호되 突利不可라하니 乃遣突利하야 來見世民하고 請和親이어늘 世民이 許之하다 突利因自託於世民하고 請結爲兄弟하니 世民이 亦以恩意撫之하야 與盟而去하다

○ 8월에 突厥이 原州‧忻州‧幷州‧綏州 네 州를 침략하자 京師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이때 頡利突利 두 可汗이 거국적으로 쳐들어왔는데, 진영을 연결하여 남쪽으로 올라오자,【[頭註]南上의 上은 時掌切(상)이다. [通鑑要解]上은 時亮切(상)이니 去聲이다. 높고 존귀한 것이니, 太上은 지극히 높은 자의 칭호이다. 또 上聲이니 時掌切(상)이다. 오름이니,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秦王李世民齊王李元吉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막았다. 李世民이 오랑캐들과 豳州【豳은 邠과 통하니, 옛날 西戎 지역이다. 周나라 때 公劉가 살았기 때문에 ≪詩經≫에 豳國이라 하였다. 漢나라 때에는 右扶風이라 하고 西魏 때에는 豳州를 두었는데, 唐나라 玄宗이 豳字가 幽字와 비슷하다 하여 마침내 고쳐서 邠이라 하였다.】에서 만나 군대를 무장하고【勒은 戒嚴과 같다.】 싸우려 할 적에 可汗이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 아래에 들이닥치자, 李元吉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오랑캐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어찌 가볍게 출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李世民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출전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마땅히 혼자서 가겠다.” 하였다.

李世民이 마침내 기병을 거느리고 달려나가 오랑캐 진영에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可汗과 화친을 맺었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저버리고 우리 영토에 깊이 쳐들어왔는가. 나는 秦王이니 可汗이 싸울 수 있으면 단독으로 출전하여 나와 싸우자.” 하고, 또 기병을 보내 突利可汗에게 가게 하여 고하기를【前은 나아감이다.】 “네가 지난번 우리와 맹약할 때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서로 구원하기로 했는데, 이제 도리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어찌 향불을 피우고 맹세한 情이 없단 말인가.【[釋義]어찌 향불을 피우고 맹세한 情이 없느냐는 것은 神明을 끌어들여 상대방을 두렵게 함을 이른다.[頭註]옛날에는 맹세할 때에 天地山川의 鬼神에게 질정하여 입에 희생의 피를 바를 뿐이었는데, 후세에는 맹세할 때에 禮佛을 올려 맹세를 입증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비로소 향을 피우는 일이 있게 되었다.】” 하였다. 李世民이 또 진격하여溝水를 건너려 하자, 頡利可汗李世民이 가볍게 나오는 것을 보고 또 향불을 피우고 맹세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突利可汗李世民과 모종의 모략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마침내 사람을 보내 李世民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秦王은 굳이 건너올 필요가 없다. 나는 별다른 뜻은 없고 다시 秦王과 옛 맹약을 거듭 견고히 하고자 할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약간 후퇴하였다.

이후로 장마가 더욱 심해지자 李世民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오랑캐가 믿는 것은 활과 화살뿐이다. 이제 장마가 오래 계속되어【彌는 뻗어감이다.】 활의 힘줄과 아교가 모두 느슨해져서 활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저들은 날개 꺾인 새와 같다. 우리는 편안히 집에 거주하고 火食을 하며 칼과 창이 견고하고【犀는 견고함이니, 顔師古가 말하기를 “옛날에 무소 뿔과 무소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기 때문에 견고한 것을 犀라 한다.” 하였다.】 예리하니, 아군의 편안함으로 피로한 적을 제압해야 한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고 장차 다시 무엇을 기다린단 말인가.” 하였다. 마침내 은밀히 군대를 밤에 출동시켜 비를 무릅쓰고 진격하니, 突厥이 크게 놀랐다.

李世民이 또 사람을 보내어 利害를 가지고 突利可汗을 설득하니, 突利可汗이 기뻐하여 명령을 따랐다. 頡利可汗이 싸우고자 하였으나 突利可汗이 안 된다고 하자, 마침내 突利可汗을 보내어 李世民을 뵙고 和親을 요청하므로 李世民이 이를 허락하였다. 突利可汗이 인하여 스스로 李世民에게 의탁하고 의형제를 맺기를 청하니, 李世民 또한 은택과 情誼로 이들을 어루만져 이들과 맹약을 맺고 떠나갔다.

[乙酉]八年

[乙酉]八年이라

正月에 以壽州都督張鎭周로 爲舒州都督하다 鎭周以舒州本其鄕里라하야 到州에 就故宅하야 多市酒肴하고 召親戚하야 與之酣宴할새 散髮箕踞【傲坐也니 坐伸兩足하고 以手按膝하야 形如箕也라】하야 如爲布衣時를 凡十日이러라 旣而요 分贈金帛하고 泣與之別曰 今日엔 張鎭周猶得與故人歡飮이어니와 明日之後엔 則舒州都督으로 治百姓耳라 君民禮隔하니 不復得爲交遊라하고 自是로 親戚故人이 犯法이면 一無所縱하니 境內肅然이러라 〈出本傳〉

武德 8年(을유 625)

정월에 壽州都督張鎭周를 舒州都督으로 삼았다. 張鎭周는 舒州가 본래 자기 고향이라 하여 舒州에 부임하자 옛날 살던 집에 가서 술과 안주를 많이 사고 親戚들을 불러서 그들과 실컷 마시고 잔치하였는데, 이때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箕踞는 거만하게 앉는 것이니, 앉아서 두 다리를 뻗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아 그 모습이 키와 같은 것이다.】 평민이었을 때처럼 하기를 모두 열흘 동안 하였다. 이윽고 친척들에게 금과 비단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과 작별하기를 “오늘은 내가 오히려 옛 벗들과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지만 내일 이후로는 舒州의 都督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릴 뿐이다. 使君(사또)과 백성은 禮法이 현격하니 다시는 교유할 수 없다.” 하였다. 이로부터 친척과 옛 벗이 법을 범하면 하나도 풀어줌이 없으니 境內가 肅然해졌다.- 《唐書 張鎭周傳》에 나옴 -

[丙戌]九年

[丙戌]九年이라

太史令傅奕이 上疏하야 請除佛法曰 佛在西域하야 言妖路遠이러니 漢譯胡書【西胡之書難曉라 故로 以漢語譯之하니 後秦姚興이 使鳩摩羅什으로 翻譯西域經論하니라】하야 恣其假託하야 使不忠不孝로 削髮而揖君親하고 遊手遊食으로 易服以逃租賦하며 僞啓三途【釋氏는 以地獄, 餓鬼, 畜生을 爲三途라하여 言人之爲惡者는 必墜此地라하니라】하고 謬張六道【又添阿修羅, 天神, 地祇라】하야 遂使愚迷로 妄求功德하고 不憚科禁하야 輕犯憲章하니이다 且生死壽夭는 由於自然이요 刑德威福은 關之人主요 貧富貴賤은 功業所招어늘 而愚僧矯詐하야 皆云由佛이라하야 竊人主之權하고 擅造化之力하니 其爲害政이 良可悲矣니이다 自漢以前으로 初無佛法호되 君明臣忠하고 祚長年久러니 自立胡神【謂佛也니 漢明帝 始遣使하야 之天竺하야 求其道하고 得其書하니라】으로 羌, 戎亂華하야 主庸臣佞하고 政虐祚短하니 梁武, 齊襄【北齊文襄이니 名澄이라 [通鑑要解]梁武帝는 餓死臺城하고 齊文襄은 爲膳奴所弑也라】이 足爲明鏡이라 今天下僧尼 數盈十萬하니 請令匹配면 卽成十萬餘戶라 産育男女하야 十年長養하고 一紀【十二年이라】敎訓이면 可以足兵하리이다

武德 9년(병술 626)

太史令傅奕이 상소하여 佛法을 제거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佛法이 西域에 있어서 말이 요망하고 중국과의 거리가 먼데, 漢나라 사람이 西域 오랑캐의 佛經을 번역하면서【西域 오랑캐의 서책이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漢語로 번역하였으니, 後秦의 姚興이 鳩摩羅什으로 하여금 西域의 經論(經藏과 論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제멋대로 假託하여,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서 군주와 어버이에게 揖만 하여 〈무릎 꿇고 절하지 않게 하고,〉 무위도식하는 자들로 하여금 의복을 바꾸어 僧服을 입고서 租稅와 田賦를 피하게 하며, 佛敎에서 三途【불교에서는 地獄‧餓鬼‧畜生을 三途라 하여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 떨어진다고 하였다.】를 거짓으로 열어놓고 六道【六道는 三途에 다시 阿修羅‧天神‧地祇를 더한 것이다.】를 잘못 펼쳐놓아서 마침내 어리석고 미혹된 자로 하여금 함부로 功德을 바라고 禁令을 꺼리지 않아서 경솔하게 憲章을 범하게 합니다. 또 살고 죽고 장수하고 요절함은 자연에 연유하고, 형벌과 덕과 위엄과 복은 人主에게 달려 있고, 貧富와 貴賤은 功業이 부르는 것인데, 어리석은 승려들이 속여서 모두 부처에게서 연유된다고 말하여 人主의 권한을 훔치고 造化의 功을 제멋대로 쥐고 있으니, 정사를 해침이 진실로 슬퍼할 만합니다. 漢나라 이전에는 애당초 佛法이 없었지만 군주가 현명하고 신하가 충성하였으며, 國祚가 장구하고 歷年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漢나라 明帝가〉 西域에서 전래된 神佛【胡神은 부처를 이르니, 漢나라 明帝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天竺國에 가서 그 道를 구하고 그 책을 얻어오게 하였다.】을 세운 뒤로부터 羌族과 戎族이 중화를 어지럽혀 군주가 용렬하고 신하가 간사하며 정사가 포악해지고 國祚가 짧아졌으니, 梁나라 武帝(蕭衍)와 齊나라 文襄帝(高澄)【[頭註]齊襄은 北齊의 文襄帝이니, 이름이 高澄이다. [通鑑要解]梁武帝는 臺城에서 굶어 죽었고, 北齊의 文襄帝는 음식 만드는 종에게 시해당하였다.】가 충분히 밝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천하에 승려의 수가 10만을 넘으니, 청컨대 이들로 하여금 각자 배필을 맞이하게 한다면 바로 10여만 戶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들딸을 낳고 길러서 10년 동안 기르고 12년【一紀는 12년이다.】 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킨다면 군대를 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上이 詔百官하야 議其事하니 唯太僕卿【掌邦國廐牧車輿之政令이라】張道源이 稱奕言合理라 蕭瑀曰 佛은 聖人也어늘 而이 非之하니 非聖人者는 無法이니 當治其罪니이다 曰 人之大倫이 莫如君父어늘 佛以世嫡而叛其父하고 以匹夫而抗天子【釋典에 佛以王太子로 出家故로 言以世嫡叛其父요 釋氏之法에 不拜君親이라 故言以匹夫而抗天子라하니라】蕭瑀不生於空桑【列子云 伊尹이 生於空桑이라하고 傳記曰 伊尹母旣孕에 夢神告之曰 臼出水어든 而東走하라 明日에 視臼出水하고 東走十里하야 而顧其邑하니 盡爲水라 身因化爲空桑이러니 有莘氏女採桑이라가 得嬰兒於空桑中하고 命之曰伊尹이라 長而賢하야 爲殷湯相이라하니라 按此는 乃妄誕之說이어늘 引之는 但以證傅奕之言耳라】이어늘 乃遵無父之敎하니 非孝者無親은 之謂矣니이다 不能對하고 但合手【相合하야 表心敬이라】曰 地獄之設이 正爲是人이로이다 上亦惡沙門, 道士 苟避征徭하고 不守戒律하야 皆如言이라 乃下詔命有司하야 沙汰【汰는 擇也니 謂選擇之有所棄斥者也라】天下僧, 尼, 道士【士는 事也니 身心順理하야 唯道是從하야 從道爲事라 故曰道士라】하다 〈傅奕傳〉

上이 百官에게 명하여 이 일을 의논하게 하니, 오직 太僕卿【太僕卿은 나라의 廐牧(飼養과 放牧)과 수레의 政令을 관장하였다.】張道源만이 傅奕의 말이 이치에 부합한다고 말하였다. 蕭瑀가 말하기를 “부처는 聖人인데 傅奕이 비방하니, 聖人을 비방하는 자는 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傅奕이 말하기를 “사람의 큰 윤리가 君父만 한 것이 없는데, 부처는 代를 이을 嫡子의 몸으로 아버지를 배반하였고 匹夫의 몸으로 天子에게 항거하였습니다.【[通鑑要解]佛以世嫡而叛其父 以匹夫而抗天子:佛經에 ‘부처는 王太子의 몸으로 출가했다.’ 하였기 때문에 대를 이을 嫡子의 몸으로 아버지를 배반했다고 말한 것이요, 佛法에 군주와 어버이에게 절을 하지 않기 때문에 匹夫의 몸으로 天子에게 항거하였다고 말한 것이다.】蕭瑀가 空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列子≫에 이르기를 “伊尹은 空桑에서 태어났다.” 하였고, 傳記에 이르기를 “伊尹의 어머니가 이미 잉태하였을 적에 꿈속에 神이 고하기를 ‘절구확에서 물이 나오거든 동쪽으로 달아나라.’ 하였다. 다음 날 절구확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동쪽으로 10리를 달아나서 그 고을을 돌아보니, 다 물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몸이 인하여 空桑(속이 빈 뽕나무)으로 化하였는데, 有莘氏의 딸이 뽕잎을 따다가 空桑 속에서 어린아이를 얻고는 이름하기를 伊尹이라 하였다. 伊尹은 장성하자 어질어서 殷나라 湯王의 정승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것은 망령되고 허탄한 말인데 이것을 인용한 것은 다만 傅奕의 말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마침내 어버이를 무시하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 ‘孝를 그르다고 하는 자는 어버이를 무시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蕭瑀 같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蕭瑀가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合掌【合手는 두 손을 모아서 마음속의 공경을 표시하는 것이다.】하고서 말하기를 “地獄을 만든 것은 바로 이런 사람 때문입니다.” 하였다. 上도 沙門과 道士들이 구차하게 부역을 피하고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여 모두 傅奕의 말과 같음을 미워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有司에게 명해서 천하의 비구승‧비구니‧道士【士는 일삼음이니, 몸과 마음이 이치를 따라 오직 道만을 따라서 道를 따르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道士라고 한 것이다.】를 도태시키게【汰는 가리는 것이니, 沙汰는 가려서 버리고 배척함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唐書 傅奕傳》에 나옴 -

○ 六月丁巳에 太白이 經天하다 秦王世民이 旣與太子建成齊王元吉로 有隙이라 以洛陽形勝【得形勢之勝便이니 地形險固故로 能勝人也라】之地니 恐一朝有變하야 欲出保之어늘 上이 亦謂世民曰 首建大謀하야 削平海內는 皆汝之功이라 吾欲立汝爲嗣러니 汝固辭하고 且建成이 年長하야 爲嗣日久하니 吾不忍奪也로라 觀汝兄弟하니 似不相容【建成이 夜召世民하야 飮酒而酖之하니 世民이 暴心痛하야 吐血數升이라가 更甦也라 故云不相容也라】이라 同處京邑이면 必有紛競하리니 當遣汝還行臺하리니 居洛陽하야 自陝以東을 皆主之하라 仍命汝建天子旌旗하야 如漢梁王故事【漢景帝同母弟也니 賜天子旌旗하야 出警入蹕에 擬於天子라】하리라 世民이 涕泣하고 辭以不欲遠離膝下하다 建成, 元吉이 與後宮으로 日夜譖訴世民於上하니 上信之라 元吉이 密請殺秦王한대 上曰 彼有定天下之功하고 罪狀이 未著하니 何以爲辭오 元吉曰 但應速殺이니 何患無辭릿고 上이 不應하다

○ 6월 丁巳日(1일)에 太白星(金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쳐 있었다.

秦王李世民이 이미 太子李建成齊王李元吉과 틈이 있었다. 그리하여 秦王李世民이 洛陽은 지형이 뛰어난【形勝은 형세의 우세함과 편리함을 얻은 것이니, 지형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곳이니, 하루아침 도성(長安)에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나가서 洛陽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上 또한 李世民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큰 계책을 세워서 海內를 평정한 것은 모두 너의 공이다. 내가 너를 세워 후사로 삼으려 하였는데 네가 한사코 사양하였고, 또 建成은 나이가 가장 많은데다 후사로 있었던 날짜가 오래니, 내가 차마 태자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 네 형제들을 살펴보니 서로 용납하지 못할 듯하다.李建成이 밤에 李世民을 불러 술을 먹이면서 술에 酖毒을 타니, 李世民이 갑자기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피를 몇 되나 토하다가 소생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京邑(長安)에 함께 머물면 반드시 분쟁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너를 보내어 洛陽의 行臺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洛陽에 머물면서 陜州 이동 지방을 다 주관하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너에게 명하여 천자의 旌旗를 세워 漢나라 梁孝王의 故事梁孝王(劉武)은 漢나라 景帝의 同母弟이니, 景帝가 天子의 깃발을 내려주어 梁孝王이 나가고 들어올 때에 사람들을 경계하고 辟除하는 것을 天子에 견주게 하였다.】와 같이 하겠다.” 하니, 李世民이 눈물을 흘리며 膝下를 멀리 떠나고 싶지 않다고 사양하였다.

李建成李元吉이 後宮들과 함께 밤낮으로 上에게 李世民을 참소하니, 上이 그 말을 믿었다. 李元吉이 은밀히 秦王을 죽일 것을 청하자, 上이 말하기를 “저 秦王은 천하를 평정한 공이 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무엇을 구실로 삼겠는가?” 하니, 李元吉이 말하기를 “다만 빨리 죽여야 하니, 어찌 구실이 없음을 근심하십니까?” 하였다. 그러나 上이 응하지 않았다.

世民의 腹心長孫無忌, 高士廉, 尉遲敬德等이 日夜勸世民하야 誅建成, 元吉이어늘 世民歎曰 骨肉相殘은 古今大惡이라 吾誠知禍在朝夕이나 欲俟其發然後에 以義討之하노니 不亦可乎아 衆曰 大王이 以爲何如人이닛고 曰 聖人也시니라 衆曰 使浚井不出【舜之母蚤死어늘 瞽瞍 再娶而生하니 愛之하야 常欲殺하다 後에 嘗使穿井하고 旣入深에 瞽瞍下土實井이나 乃爲匿空이라가 旁出去하니라】이면 則爲井中之泥요 塗廩不下瞽瞍使上塗廩하고 旣上에 瞽瞍從下焚廩이나 乃以兩笠自扞而下하야 獲免하니라】면 則爲廩上之灰니 安能澤被天下하고 法施後世乎리잇고 是以로 小杖則受하고 大杖則走하니 蓋所存者大故也니이다 世民이 命卜之러니 幕僚張公謹이 自外來라가 見之하고 取龜投地曰 卜以決疑어늘 今事在不疑러니 尙何卜乎잇가 卜而不吉이라도 庸得已乎【庸은 豈也라】잇가 於是에 定計하다

李世民의 心腹인 長孫無忌高士廉尉遲敬德 등이 밤낮으로 李世民에게 李建成李元吉을 죽이도록권하니, 李世民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骨肉間에 서로 해침은 古今의 가장 큰 죄악이다. 내 진실로 禍가 朝夕 사이에 있음을 알지만 그들이 먼저 발동하기를 기다린 뒤에 의리로써 토벌하고자 하니, 이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大王은 임금이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하니, 李世民이 대답하기를 “聖人이시다.”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령 瞽瞍임금으로 하여금 우물을 치러 들어가게 했을 때에 임금이 나오지 못했으면의 어머니가 일찍 죽자 의 아버지 瞽瞍가 다시 장가들어 을 낳았는데, 을 몹시 사랑하여 항상 을 죽이고자 하였다. 뒤에 한번은 瞽瞍으로 하여금 우물을 치게 하고는 이 우물로 깊이 들어가자 瞽瞍가 흙을 쏟아부어 우물을 메웠으나 이 마침내 몸을 숨기기 위한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가 옆으로 나와서 죽음을 면하였다.】 우물 속의 진흙이 되었을 것이요, 창고에 흙을 바르게 했을 때에 임금이 내려오지 못했으면瞽瞍으로 하여금 창고에 올라가 흙을 바르게 하고는 이 올라간 뒤에 瞽瞍가 아래에서 〈사다리를 치우고〉 창고를 불태웠으나 이 마침내 삿갓 두 개로 스스로 막으면서 내려와 죽음을 면하였다.】 창고 위의 재가 되었을 것이니, 어떻게 은택이 天下에 입혀지고 법이 후세에 베풀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때문에 父母가 작은 몽둥이로 때리면 받고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하는 것이니, 이는 보존하는 것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李世民이 점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幕僚인 張公謹이 밖에서 오다가 이것을 보고는 점을 치는 거북껍질을 취하여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점을 치는 것은 의심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무슨 점을 친단 말입니까. 점을 쳐서 길하지 않다 해도 어찌【庸은 어찌이다.】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에 계책을 정하였다.

己未에 太白이 復經天【王氏曰 按天官書컨대 太白出不經天하니 經天則天下革政이라 韓詩外傳云 太白이 春見東方以晨을 爲啓明이요 秋見西方以夕을 爲長庚이라 晉氏曰 太白은 陰星이니 上公, 大將軍之象이라 出東이면 當伏東이요 出西면 當伏西라 過午爲經天이니 謂晝見午上也라 [通鑑要解]經은 謂如織經之往來也라】이어늘 傅奕이 密奏호되 太白이 見秦分【王氏曰 禮春官保章氏에 以星土辨九州하야 所封 〈封〉域에 皆有分星하야 以觀妖祥이라 注에 鶉首는 秦也라 星經云 東井, 輿鬼는 秦之分野니 雍州也라】하니 秦王이 當有天下하리이다 上이 以其狀授世民하니 於是에 世民이 密奏호되 建成, 元吉이 淫亂後宮이라하고 且曰 臣於兄弟에 無絲毫負어늘 今欲殺臣하니 似爲世充, 建德報讐니이다 上이 省之하고 愕然【愕은 驚也라】報曰 明【明은 謂明日이라】當鞫問하리니 汝宜早參【參은 謂朝參이라 】하라 庚申에 世民이 遂帥長孫無忌等하고 入하야 伏兵於玄武門이라가 世民이 射建成殺之하고 尉遲敬德이 將七十騎繼至하야 左右射元吉墜馬러니 世民馬逸入林下라가 爲木枝所絓하야 墜不能起라 元吉이 遽至하야 奪弓將扼【扼은 與搤同하니 捉也라】之어늘 敬德이 躍馬叱之하니 元吉이 步欲趨武德殿이어늘 敬德이 追射殺之하다

己未日(6월 3일)에 太白星이 다시 하늘에 뻗쳐 있자,【[釋義]王氏가 말하였다. “≪天官書≫를 살펴보건대 ‘太白星은 나와서 하늘에 뻗쳐 있지 않으니 하늘을 뻗쳐 있으면 天下의 政權이 바뀐다.’ 하였고, ≪韓詩外傳≫에 이르기를 ‘太白星은 봄철에 동방에 나타나 새벽에 보이는 것을 啓明星이라 하고, 가을에 서방에 나타나 저녁에 보이는 것을 長庚星이라 한다.’ 하였다.” 晉氏(晉灼)가 말하였다. “太白星은 陰星으로 上公과 大將軍의 형상이다. 동쪽에서 나왔으면 동쪽으로 지고 서쪽에서 나왔으면 서쪽으로 져야 하는데 별이 午時가 넘도록 하늘에 뻗쳐 있는 것을 經天이라 하니, 낮에 별이 午上(남방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이른다.” [通鑑要解]經은 베를 짤 때 날실이 왕래하는 것과 같음을 이른다.】傅奕이 은밀히 아뢰기를 “太白星이 秦나라 분야【王氏가 말하였다. “≪周禮≫ 〈春官 保章氏〉에 ‘星土(별이 주관하는 지역)를 가지고 九州를 분별하여 봉해 준 경계에는 모두 그 분야의 별이 있어 요망함과 상서로움을 관찰한다.’ 하였는데, 鄭玄의 注에 ‘鶉首는 秦나라(長安)의 분야이다.’ 하였고, ≪星經≫에 이르기를 ‘東井과 輿鬼는 秦나라의 분야이니 雍州이다.’ 하였다.”】에 나타났으니, 秦王이 마땅히 천하를 소유할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傅奕이 은밀히 아뢴 글을 李世民에게 주었다. 이에 李世民李建成李元吉이 후궁들과 음란하였음을 은밀히 아뢰고, 또 말하기를 “臣은 형제들에게 털끝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지금 신을 죽이고자 하니, 형제들이 王世充竇建德을 위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하니, 上이 이것을 살펴보고 깜짝 놀라【愕은 놀람이다.】 말하기를 “내일【明은 내일을 이른다.】 마땅히 국문할 것이니, 너는 내일 일찍 朝參【參은 朝參을 이른다.】하라.” 하였다.

庚申日(4일)에 李世民이 마침내 長孫無忌 등을 거느리고 들어가 玄武門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李世民李建成을 쏘아죽였으며, 尉遲敬德은 7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러서 좌우에서 李元吉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는데, 李世民의 말이 달아나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李世民이 말에서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李元吉이 급히 이르러 활을 빼앗고 목을 조르려【扼은 搤과 같으니, 잡음이다.】 하였는데, 尉遲敬德이 말에 뛰어올라 크게 꾸짖었다. 李元吉이 도보로 武德殿으로 달아나려 하자, 尉遲敬德이 쫓아가 활을 쏘아죽였다.

上이 謂裴寂等曰 不圖今日에 乃見此事하니 當如之何오 蕭瑀, 陳叔達建成, 元吉이 疾秦王功高望重하야 共爲姦謀러니 今秦王이 已討而誅之하니 秦王은 功蓋宇宙하야 率土歸心이니이다 陛下若處以元良【記에 一人元良이면 萬國以貞이라하니 世子之謂也라하니라】하야 委之國務면 無復事矣리이다 上曰 善하다 此는 吾之夙心也라하고 癸亥에 立世民하야 爲皇太子하고 又詔호되 自今으로 軍國庶事를 無大小히 悉委太子處決然後에 聞奏하라하다 〈出本紀及建成等傳〉

上이 裴寂 등에게 이르기를 “오늘에 이러한 일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 마땅히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蕭瑀陳叔達이 아뢰기를 “李建成李元吉이, 秦王이 공이 높고 명망이 중한 것을 미워하여 함께 간사한 계책을 세웠는데, 이제 秦王이 이미 이들을 토벌하여 죽였으니, 秦王은 功이 온 우주를 뒤덮어 온 宇宙 안의 민심이 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秦王을 元良(太子)【≪禮記≫ 〈文王世子〉에 “‘한 사람이 크게 선량하면 萬邦이 바르게 된다.’ 하였으니, 世子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으로 처우하여 국가의 사무를 맡기신다면 다시는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좋다. 이는 내가 진작부터 마음먹은 것이다.” 하였다.

癸亥日(6월 7일)에 上이 李世民을 세워 皇太子로 삼고, 또 명하기를 “지금부터 軍國의 여러 政事는 大小를 막론하고 모두 태자에게 맡겨 처결하게 한 뒤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唐書》의 〈高祖本紀〉와 〈李建成傳〉 등에 나옴 -

溫公曰 立嫡以長【公羊傳隱元年에 立嫡以長이요 不以賢하며 立子以貴요 不以長이라한대 注云 嫡은 謂嫡夫人之子니 尊無與敵이라 故以齒也요 子는 謂左右媵及娣姪之子니 位有貴賤하고 又防其同時而生이라 故以貴也라하니라】은 禮之正也라 然高祖所以有天下는 皆太宗之功이라 隱太子以庸劣居其右【隱太子는 建成也니 後追封息隱王하니라 庸劣은 謂庸暗愚劣也라 古者에 地道尙左일새 以右爲上也라】하니 地嫌勢逼하야 必不相容이라 曏使高祖有文王之明【記檀弓云 昔者에 文王이 舍伯邑考而立武王이라한대 注에 文王之立武王은 權也니 伯邑考는 文王長子也라】하고 隱太子有泰伯之賢【周太王三子에 長泰伯이요 次仲雍이요 次季歷이라 季歷이 生子昌하니 有聖德이어늘 太王이 欲傳位於季歷하야 以及昌한대 泰伯知之하고 卽與仲雍으로 逃之荊蠻하니라】하고 太宗子臧之節【春秋에 曹宣公庶子子臧은 乃負芻之兄이라 宣公卒에 負芻殺其太子하고 自立이어늘 晉厲公執之하다 諸侯以子臧賢이라하야 欲立之한대 子臧辭而奔宋하니라】이면 則亂何自而生哉아 旣不能然인댄 太宗始欲俟其先發然後에 應之하니 如此면 則事非獲已니 猶爲愈也리라 旣而요 爲群下所迫하야 遂至蹀血【蹀은 履也니 謂殺人(而)[血]流에 履涉之也라】禁門하고 推刃同氣하야 貽譏千古하니 惜哉라 夫創業垂統之君은 子孫之所儀刑也니 彼, , , 【中은 中宗이요 明은 明皇이요 肅은 肅宗이요 代는 代宗이니 竝以兵淸內難而繼統이라 明皇을 不稱廟號는 避宋諱也라】之傳繼에 得非有所指擬하야 以爲口實乎아

孫甫曰 立嫡以長者는 所以止爭奪之心也니 行之平世는 固爲常法이어니와 若夫古之世子不賢이면 尙求聖人하야 以傳大位어든 況長子不賢하고 次子聖乎아 安得局於常法也리오 唐有天下는 本秦王之謀라 功德之大하야 海內屬望하니 其勢可終爲人臣乎아 建成이 自擧兵以來로 無一事可道어늘 但以年長으로 使居聖子上하니 雖至愚者라도 知其不可也라 胡不虛其位하야 待天命之定乎아 況受禪之初에 天下未定하니 何汲汲於立子也리오 善哉라 寧王【睿宗長子也니 初名成器라 嘗爲太子러니 玄宗이 爲楚王하야 有大功한대 而憲讓之하니 封爲宋王이라 玄宗七年에 徙宋王成器爲寧王하고 改名憲이라 二十九年薨하니 追諡讓皇帝하니라】의 讓太子之言曰 時平則先嫡長하고 世亂則先有功이라하니 此는 萬世不易之論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嫡子를 세울 때에 연장자로써 하는 것은【≪春秋公羊傳≫ 隱公 元年에 “嫡子를 세울 때에는 연장자로써 하고 어짊으로 하지 않으며, 庶子를 세울 때에는 어머니의 귀함으로써 하고 연장자로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注에 이르기를 “嫡(嫡子)은 嫡夫人의 아들을 이르니 높음이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으므로 연치로써 하고, 子(庶子)는 좌우의 媵妾과 夫人의 여동생과 조카의 아들을 이르니 지위에 貴賤이 있고 또 동시에 태어났을 경우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귀함으로써 한다.” 하였다.】 올바른 禮이다. 그러나 高祖(李淵)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모두 太宗(李世民)의 공이었다. 隱太子(李建成)가 용렬한 재주로써 李世民의 위에 있었으니,【隱太子는 李建成이니, 뒤에 息隱王에 追封되었다. 庸劣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고 못남을 이른다. 옛날에 地道는 왼쪽을 높이므로 오른쪽을 上이라 한 것이다.】 지위가 혐의스럽고 형세상 핍박하여 반드시 서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만일 高祖文王의 현명함이 있고【≪禮記≫ 〈檀弓〉에 이르기를 “옛날에 文王이 伯邑考를 버리고 武王을 세웠다.” 하였는데, 그 注에 “文王이 武王을 세운 것은 權道이니, 伯邑考는 文王의 長子이다.” 하였다.】隱太子泰伯의 어짊이 있고【周나라 太王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長子는 泰伯이고, 그 다음은 仲雍이고, 그 다음은 季歷이었다. 季歷이 아들 昌을 낳으니 聖德이 있었으므로 太王이 季歷에게 王位를 전하여 昌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였는데, 泰伯이 이것을 알고 즉시 仲雍과 함께 荊蠻으로 도망하였다.】太宗子臧의 절개가 있었더라면【≪春秋左傳≫에 曹나라 宣公의 庶子 子臧은 바로 負芻(成公)의 형이었다. 宣公이 죽자 負芻가 太子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晉나라 厲公이 그를 사로잡았다. 諸侯들이 子臧이 어질다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子臧이 사양하고 宋나라로 도망하였다.】 亂이 어디로부터 생겨났겠는가. 이미 이와 같지 못할 바에는 太宗이 처음에 그들이 먼저 발동하기를 기다린 뒤에 응하고자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였다면 형편상 부득이해서였으므로 그래도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에 아랫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 마침내 禁門에서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밟고 갔으며【[釋義]蹀(접)血:蹀은 밟음이니, 蹀血은 사람을 죽여서 유혈이 낭자함에 피를 밟고 건너감을 이른다.】 同氣間을 칼로 찔러 죽여서 천고에 비난을 남겼으니, 애석하다. 국가를 創業하여 傳統을 드리운 군주는 자손들이 본보기로 삼는 바이니, 저 中宗明皇(玄宗)肅宗代宗【[頭註]中, 明, 肅, 代:中은 中宗이고 明은 明皇이고 肅은 肅宗이고 代는 代宗이니, 모두 군대를 동원하여 內亂을 소탕하고 國統을 이었다. 明皇을 廟號(玄宗)로 칭하지 않은 것은 宋나라의 諱를 피한 것이다.】이 왕위를 전하고 계승할 때에 李世民을 가리키면서 견주어 구실로 삼은 바가 되지 않았겠는가.”

孫甫가 말하였다.

“嫡子를 세울 때에 연장자로써 하는 것은 왕위를 다투고 빼앗으려는 마음을 저지하려는 것이니, 태평한 세상에 이를 행하는 것은 진실로 常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옛날에 世子가 어질지 못하면 聖人을 찾아서 大位를 전하였는데, 하물며 長子가 어질지 못하고 次子가 聖스러움에 있어서랴. 어찌 常法에 구애될 것이 있겠는가. 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본래 秦王의 계책이었다. 功德이 커서 海內가 촉망하니, 형세상 끝내 남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李建成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한 가지 일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는데, 단지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아들의 위에 있게 하였으니, 지극히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그 불가함을 알 것이다. 어찌하여 자리를 비워두어 天命이 정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는가. 더구나 高祖가 隋나라로부터 讓位 받은 초기에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급급히 世子를 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 훌륭하다! 寧王 李憲【寧王 李憲은 睿宗의 長子이니, 初名이 成器이다. 일찍이 태자가 되었는데, 玄宗이 楚王이 되어 큰 공을 세우자 李憲이 그에게 사양하니 李憲을 봉하여 宋王으로 삼았다. 玄宗 開元 7년(719)에 宋王 李成器를 옮겨 寧王으로 삼고 이름을 憲으로 고쳤다. 玄宗 開元 29년(741)에 죽자 讓皇帝라 追諡하였다.】이 太子의 자리를 사양한 말에 이르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嫡長子를 먼저 하고 세상이 혼란하면 功이 있는 자를 먼저 한다.’ 하였으니, 이는 만대토록 바꿀 수 없는 의론이다.”

初에 洗馬魏徵이 常勸太子建成하야 早除秦王이러니 及建成敗에 世民이 召하야 謂曰 汝何爲離間我兄弟오 衆이 爲之危懼호되 이 擧止自若하야 對曰 先太子早從言이런들 必無今日之禍하리이다 世民이 素重其才하야 改容禮之하고 引爲詹事【詹은 省也, 供也라】主簿하고 亦召王, 韋挺於雋州【先是에 楊文幹이 與建成親善이러니 文幹反에 珪, 挺이 皆爲太子官屬이라 故로 高祖委罪於二人而流於雋州하니라】하야 皆以爲諫議大夫하다

范祖禹齊桓公이 殺公子하니 召忽은 死之어늘 管仲은 不死하고 又相桓公以霸는 何哉오 桓公, 子糾 皆以公子出奔하니 子糾는 未嘗爲世子也니 桓公이 先入而得齊는 非取諸子糾也라 桓公旣入에 而殺子糾하니 惡則惡矣나 然納桓公者는 齊也라 春秋에 書公伐齊納라하야 不稱子하니 不當立者也요 齊小白入于齊라하야 以小白繫之齊【小白은 齊桓公之名이라 以小白繫之齊는 謂春秋에 以小白을 繫于齊字下라】하니 當立者也라 又曰齊人取子糾殺之라하야 稱子糾하니 所以惡齊也라 是以로 管仲이 不得終讐桓公하고 而得以之爲君이라 今建成은 爲太子하고 且兄也요 秦王은 爲藩王하고 又弟也라 , 受命하야 爲東宮之臣이면 則建成은 其君也니 豈有人殺其君이어늘 而可北面爲之臣乎아 且以弟殺兄하고 以藩王殺太子하야 而奪其位하니 , 魏不事太宗이 可也라 夫食君之祿而不死其難하고 朝以爲讐라가 暮以爲君하야 於其不可事而事之하니 皆有罪焉이라 臣之事君은 如婦之從夫也니 其義不可以不明이라 苟不明於君臣之義而委質於人이면 雖曰不利라도 臣不信也로라

[史略 史評]朱子管仲은 有功而無罪라 故로 聖人이 不責其死而稱其功이어니와 , 는 先有罪而後有功하니 則不以相掩이 可也니라

처음에 太子洗馬魏徵이 항상 太子李建成에게 秦王을 일찌감치 제거하라고 권하였다. 李建成이 실패하자, 李世民魏徵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를 이간질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魏徵을 위하여 염려하고 두려워하였으나 魏徵은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며 대답하기를 “先太子(李建成)께서 진작 저의 말을 따랐더라면 필시 오늘날의 禍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李世民이 평소 그의 재주를 중하게 여겨 용모를 고쳐 예우하고 그를 천거하여 詹事[頭註]詹事詹은 살핌이요, 이바지함이다.主簿로 삼았으며, 또한 王珪韋挺을 雋州에서 불러와【이에 앞서 楊文幹李建成과 친하였는데, 楊文幹이 배반하자 王珪韋挺이 모두 太子의 官屬이었으므로 高祖가 두 사람에게 죄를 돌려 雋州로 유배 보냈었다.】 모두 諫議大夫로 삼았다.

范祖禹가 말하였다.

齊桓公이 公子를 죽이자, 召忽은 죽었는데 管仲은 죽지 않고 또 桓公을 도와 霸者가 되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桓公子糾는 모두 公子의 신분으로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子糾는 일찍이 世子가 된 적이 없으니, 桓公이 먼저 들어와 齊나라를 얻은 것은 子糾에게서 취한 것이 아니다. 桓公이 이미 齊나라에 들어온 뒤에 子糾를 죽였으니, 악하기는 악하지만 桓公을 받아들인 것은 齊나라였다. 《春秋》에 ‘魯나라 莊公이 齊나라를 쳐서 를 본국으로 들여보냈다.[公伐齊納糾]’고 써서 〈‘糾’라고만 하고〉 ‘子糾’라고 칭하지 않았으니 세워서는 안 될 자라는 뜻이요, ‘齊나라 小白이 齊나라에 들어갔다.[齊小白入於齊]’고 써서 小白을 ‘齊’字 아래에 달아 놓았으니【小白은 齊나라 桓公의 이름이다. 小白을 ‘齊’字에 달아 놓았다는 것은 ≪春秋≫에 ‘齊小白入於齊’라 써서 小白을 ‘齊’字 아래에 두었음을 이른다.】 세워야 할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또 말하기를 ‘齊나라 사람이 子糾를 잡아서 죽였다.[齊人取子糾殺之]’고 써서 ‘子糾’라 칭하였으니, 齊나라를 미워한 것이다. 이 때문에 管仲桓公을 끝까지 원수로 여기지 않고 그를 군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李建成은 太子이자 형이고, 秦王李世民은 藩王이자 동생이다. 王珪魏徵이 命을 받고서 東宮의 신하가 되었으면 李建成은 그의 군주이니, 어찌 남이 자기 군주를 시해하였는데 北面하고서 그의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동생의 몸으로 형을 죽이고 藩王의 신분으로 太子를 죽이고서 그 자리를 빼앗았으니, 王珪魏徵太宗을 섬기지 않는 것이 옳았다. 군주의 녹봉을 먹었으면서 그 난리에 죽지 않았고 아침에는 원수로 여겼다가 저녁에는 군주로 삼아서 섬겨서는 안 될 사람인데 그를 섬겼으니, 모두 죄가 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의리를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君臣間의 의리를 분명히 하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겨 신하 노릇 한다면 〈사람들이〉 비록 이익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史略 史評]朱子가 말씀하였다.

管仲은 功이 있고 죄가 없으므로 聖人이 그의 죽음을 꾸짖지 않고 그의 功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러나 王珪魏徵은 먼저 죄가 있고 뒤에 功이 있었으니, 功을 가지고 罪를 덮어주지 않는 것이 옳다.”

世民이 命縱禁苑鷹犬하고 罷四方貢獻하며 聽百官各陳治道하야 政令이 簡肅하니 中外大悅이러라

李世民이 명령을 내려 궁궐과 苑囿의 매와 개를 풀어주고 四方의 進貢(貢物을 바침)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百官들이 각각 政治하는 方道를 아뢰도록 허락하여 정사와 명령이 간결하고 엄숙하니, 中外가 크게 기뻐하였다.

○ 八月癸亥에 詔傳位於太子하니 太宗이 卽皇帝位於東宮顯德殿하고 赦天下【此已下稱上者는 竝是太宗이라】하다 〈竝出太宗紀〉

高祖贊曰 唐有天下 幾三百年이니 可謂盛哉라 豈非人厭隋亂而蒙德澤이리오 繼以太宗之治에 制度紀綱之法이 後世有以憑藉扶持而能永其天命歟인저

[史略 史評]史斷曰 唐之興은 蓋以人厭隋亂이라 高祖起太原하야 初伐西河하야 首斬佞臣하고 慰撫居民하야 秋毫無犯하니 義聲所曁에 聞者響應이라 於是에 取霍邑하고 克汾, 絳하고 降馮翊하고 守潼關하고 徇渭北하야 乘勝攻圍하야 遂克長安하야 雄據京邑하니 興王之業이 已定於此라 自時厥後로 降李密於黎陽하고 俘建德於河北하고 擒世充於東都하고 芟武周於幷州하고 翦黑闥於山東하고 夷蕭銑於江陵하고 殄薛仁杲於涇水하야 六年之間에 海內咸服하니 其成功이 何其速哉오 蓋以太宗爲之子也라 惜其擧事之初에 設詐罔衆하고 殺人利己라 況昵裴寂之邪而受宮女하고 聽劉文靜之說而臣突厥이온여 以此貽謀하니 何以爲訓이리오 是以로 唐世에 人主無正家之法하고 戎狄多猾夏之禍하니 蓋高祖以此始也일새라 然이나 能定律令하고 置學校하고 旌擢孫伏伽, 李素立等하며 又錄隋之子孫하야 量才授任하니 由魏晉以降으로 最爲忠厚라 其享國久長이 豈無自而然哉리오

○ 8월 癸亥日(8일)에 조명을 내려 太子에게 전위하니, 太宗이 東宮의 顯德殿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天下에 사면령을 내렸다.【이 이하로부터 上이라고 칭한 것은 모두 太宗이다.】 - 모두 《唐書 太宗本紀》에 나옴 -

高祖의 贊에 말하였다.

“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것이 거의 300년에 이르렀으니, 융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는 어찌 사람들이 隋나라의 난리를 싫어하고 唐나라의 은택을 입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뒤이어 太宗이 다스릴 때에 제도와 기강의 법도가 후세에 빙자하고 유지할 만한 것이 있어서 天命을 길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唐나라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隋나라의 난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高祖가 太原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西河를 정벌하여 맨 먼저 아첨하는 신하(高德儒)를 목 베고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무하여 추호도 범함이 없으니, 의로운 소문이 미치는 바에 듣는 자들이 모두 호응하였다. 이에 霍邑을 점령하고, 臨汾郡과 絳郡을 이기고, 馮翊을 함락하고, 潼關을 지키고, 渭水 북쪽 지역을 순행하여 승세를 타고 적을 공격, 포위해서 마침내 長安을 취하여 京邑(長安)을 웅거하였으니, 王業을 일으키는 것이 이때에 이미 결정되었다. 高祖가 이 뒤로 李密을 黎陽에서 항복시키고, 竇建德을 河北에서 사로잡고, 王世充을 東都(洛陽)에서 사로잡고, 劉武周를 幷州에서 베고, 劉黑闥을 山東에서 제거하고, 蕭銑을 江陵에서 평정하고, 薛仁杲를 涇水에서 죽여서 6년 만에 海內가 모두 복종하였으니, 성공함이 어쩌면 이리도 신속하였는가. 이는 太宗을 아들로 두었기 때문이다.

애석하다. 擧事하는 초기에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속이고 남을 죽여서 자신을 이롭게 하였다. 더구나 裴寂같이 간사한 자를 가까이하여 宮女를 받아들였고, 劉文靜의 말을 듣고 突厥에게 신하 노릇 하였다. 이로써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 주었으니 어떻게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唐나라 때에 군주가 집안을 바로잡는 법이 없고 오랑캐들이 中夏를 어지럽히는 禍가 많았으니, 이는 高祖가 이로써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律令을 정하고 학교를 설치하였으며, 孫伏伽李素立 등을 旌表하여 발탁하였고, 또 隋나라의 子孫들을 錄用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맡겼으니, 魏‧晉 이후로 가장 忠厚하였다. 唐나라가 오랫동안 나라를 누린 것이 어찌 아무 이유없이 그러하였겠는가.”

詔以宮女衆多하야 幽閟【閉也라】可愍하니 宜簡【與揀通이라】出之하야 各歸親戚하야 任其適人하라하다 〈出太宗紀〉

조서를 내려 “궁녀가 많아 깊은 궁중【閟는 닫힘이다.】에 갇혀 있는 것이 가여우니, 골라서【簡은 揀과 통한다.】 내보내어 각각 친척에게 돌아가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게 하라.” 하였다. - 《唐書 太宗本紀》에 나옴 -

○ 己卯에 突厥이 進寇高陵이어늘 辛巳에 涇州道行軍總管尉遲敬德이 與突厥로 戰於涇陽하야 大破之하다 癸未에 頡利可汗이 進至渭水便橋【王氏曰 長安城北面西頭門曰便門이니 卽平門也라 古者에 平, 便은 字通이라 初에 漢武於此作橋하야 跨渭水上하야 以趨茂陵하니 其道易直하고 橋正與便門相對할새 因號便橋하니라】之北하야 遣其腹心執失思力【執失은 虜複姓也요 思力은 名也라】하야 入見以觀虛實할새 思力이 盛稱頡利, 突利二可汗이 將兵百萬하야 今至矣라하니 上讓之曰 吾與汝可汗으로 面結和親하고 贈遺金帛이 前後無算이어늘 汝可汗이 自負盟約하고 引兵深入하니 於我에 無愧아 汝雖戎狄이나 亦有人心이어늘 何得全忘大恩하고 自誇彊盛고 我今先斬汝矣리라 思力이 懼而請命【謂請貸其死命也라】이어늘 蕭瑀, 封德彛請禮遣之한대 上曰 我今遣還이면 虜謂我畏之라하야 愈肆憑陵이라하고 乃囚思力於門下省【省은 音生이니 上聲이라 禁署也니 漢以避元后父諱하야 改名省中하야 以禁中爲省中也라】하다

○ 己卯日(8월 24일)에 突厥이 진격하여高陵縣을 침략하자, 辛巳日(8월 26일)에 涇州道行軍總管尉遲敬德이 涇陽에서 突厥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癸未日(8월 28일)에 頡利可汗이 전진하여渭水의 便橋【王氏가 말하였다. “長安城 북쪽의 서쪽 머리에 있는 문을 便門이라 하니 바로 平門이다. 옛날에 平과 便은 글자가 통용되었다. 처음에 漢나라 武帝가 여기에 다리를 만들어서 渭水 위를 넘어 茂陵으로 달려가게 하니, 그 길이 평평하고 곧으며 다리가 바로 便門과 서로 마주하였으므로 인하여 便橋라 이름하였다.】 북쪽에 이르러서 심복인 執失思力【執失은 오랑캐의 複姓이며 思力은 이름이다.】을 보내어 入朝하게 해서 唐軍의 虛實을 관찰하게 하였다. 執失思力頡利突利 두 可汗이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제 이를 것이라고 극구 말하자, 上이 그를 꾸짖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 可汗과 대면하여 화친을 맺고 금과 비단을 선물로 준 것이 전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너희 可汗이 스스로 맹약을 저버리고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오니, 나에게 부끄러움이 없는가. 네가 비록 오랑캐이지만 또한 사람의 마음이 있을 터인데, 어찌 큰 은혜를 전부 잊고 스스로 강성함을 과시한단 말인가. 내 지금 너의 목부터 먼저 베겠다.” 하니, 執失思力이 두려워하여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다.【請命은 죽을 목숨을 살려 달라고 청함을 이른다.】

蕭瑀封德彛가 그를 예우하여 돌려보낼 것을 청하자, 上이 말하기를 “내 이제 執失思力을 살려 보내면 오랑캐들은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여 더욱더 침략하여 능멸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執失思力을 門下省【省은 음이 ‘생(성)’이니 上聲이다. 禁中(궁중)의 官署이니, 漢나라 때에 元后 아버지의 諱인 王禁을 피하여 省中이라 고쳐서 禁中을 省中이라 하였다.】에 가두었다.

上이 自出玄武門하야 與高士廉, 房玄齡等六騎로 徑詣渭水上하야 與頡利로 隔水而語할새 責以負約하니 突厥이 大驚하야 皆下馬羅拜러라 俄而요 諸軍이 繼至하니 頡利執失思力不返하고 而上挺身【挺은 超拔也라】輕出하며 軍容甚盛하고 有懼色이러라 上이 麾諸軍【麾는 又與撝同하니 以手指麾也라】하야 使却而布陳하고 獨留하야 與頡利語하다 蕭瑀以上輕敵이라하야 叩馬【叩는 音扣니 持也라】固諫이어늘 上曰 吾籌之已熟하니 非卿所知라 突厥이 所以敢傾國而來하야 直抵郊甸者는 以我國內有難하고 朕新卽位하야 謂我不能扞禦故也라 我若示之以弱하야 閉門拒守면 虜必放兵大掠하야 不可復制라 故로 朕이 輕騎獨出하야 示若輕之하고 又震耀軍容하야 使知必戰하야 出虜不意하야 使之失圖면 虜入我地旣深하야 必有懼心이라 故로 與戰則克하고 與和則固矣리니 制服突厥이 在此一擧니 卿은 第觀之【第는 但也라】하라 是日에 頡利請和어늘 詔許之하고 上卽日還宮하다 乙酉에 又幸城西하야 斬白馬하야 與頡利로 盟于便橋之上하니 突厥이 引兵退하다

上이 직접 玄武門을 나가 高士廉房玄齡 등 여섯 명의 騎兵과 함께 곧바로 渭水 가로 나아가서頡利可汗과 물을 사이에 두고 말할 적에 약속을 저버린 것을 꾸짖으니, 突厥이 크게 놀라 모두 말에서 내려 죽 늘어서서 절하였다. 이윽고 諸軍이 뒤이어 이르자 頡利執失思力이 돌아오지 않았고 上이 단신으로 뛰쳐나와【挺은 뛰쳐나옴이다.】 가볍게 나오며 軍容이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上이 諸軍을 지휘하여【麾는 또 撝와 같으니, 손으로 지휘하는 것이다.】 퇴각하여 포진하게 하고 홀로 남아 頡利可汗과 말하였다.

蕭瑀가 上이 적을 깔본다 하여 말고삐를 잡고【叩는 음이 구이니 붙잡음이다.】 한사코 간하자, 上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익숙히 계획하였으니 卿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突厥이 감히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 와서 곧바로 郊甸에 이른 까닭은 우리나라에 內亂이 있고 朕이 새로 즉위하여 내가 저들을 제대로 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약함을 보여서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군대를 풀어 크게 노략질해서 다시는 제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朕이 경무장한 기병만 대동하고 홀로 나가서 마치 저들을 깔보는 것처럼 보이고, 또 軍容을 크게 떨쳐서 저들로 하여금 반드시 싸울 것임을 알게 하여 저들이 예상치 못하는 데로 나가서 적들로 하여금 계책을 잃게 한다면 적들은 우리 땅에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과 싸우면 이기고 저들과 화친하면 견고할 것이다. 突厥을 제어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이 한 번의 움직임에 달려 있으니, 卿은 다만【第는 다만이다.】 지켜보라.” 하였다. 이날 頡利可汗이 화친을 청하자 조명을 내려 허락하고 上이 당일로 還宮하였다.

乙酉日(8월 30일)에 또다시 城 서쪽으로 가서 白馬의 피를 내어 頡利可汗과 便橋 위에서 맹약하니, 突厥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蕭瑀請於上曰 突厥未和之時에 諸將이 爭請戰호되 陛下不許하시니 臣等이 亦以爲疑러니 旣而요 虜自退하니 其策이 安在잇고 上曰 吾觀突厥之衆하니 雖多而不整하고 君臣之志 唯賄是求라 當其請和之時하야 可汗은 獨在水西하고 達官은 皆來謁我하니 我若醉而縛之하고 因襲擊其衆이면 勢如拉朽【拉은 折也라】요 又命長孫無忌, 李靖하야 伏兵於幽州以待之라가 虜若奔歸어든 伏兵은 邀其前【邀는 遮也라】하고 大軍은 躡其後면 覆之如反掌耳로되 所以不戰者는 吾卽位日淺하야 國家未安하고 百姓未富하니 且當靜以撫之라 一與虜戰이면 所損이 甚多요 虜結怨旣深하고 懼而修備면 則吾未可以得志矣라 故로 卷甲韜戈하야 啗以金帛이니 彼旣得所欲이면 理當自退요 志意驕惰하야 不復設備하리니 然後에 養威俟釁이면 一擧可滅也라 將欲取之인댄 必固與之【老子語라】 此之謂也니 卿知之乎아 再拜曰 非所及也니이다 是年九月에 突厥頡利 獻馬三千匹과 羊萬口어늘 上이 不受하고 但詔歸所掠中國戶口하고 徵溫彦博하야 還朝【乙酉七月에 突厥寇邊이어늘 詔左衛大將軍張瑾禦之러니 敗績하니 長史溫彦博이 被執이라 虜問國家兵糧虛實호되 彦博不對하니 虜遷之陰山하니라】하다 〈出突厥傳及政要〉

蕭瑀가 上에게 묻기를 “突厥이 화친하지 않았을 때에 諸將들이 다투어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陛下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들 또한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오랑캐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그 계책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내가 突厥의 무리를 보니 비록 숫자는 많으나 정돈되지 못하였고, 군주와 신하의 뜻이 오직 재물을 구할 뿐이었다. 그들이 화친을 청할 때를 당하여 可汗은 홀로 渭水 서쪽에 있고 達官들은 모두 와서 나를 알현하였으니, 내가 만약 이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해서 포박한 다음 이를 틈타 그 무리를 습격했다면 형세가 썩은 나무를 꺾는【拉은 꺾음이다.】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이다. 또 長孫無忌李靖에게 명하여 幽州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가 오랑캐가 만약 도망하여 돌아가거든 伏兵은 그 앞을 요격하고【邀는 가로막음이다.】 大軍은 그 뒤를 밟았다면 그들을 전복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저들과 싸우지 않은 까닭은, 내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가가 아직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들이 부유하지 못하니, 우선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져야 한다. 한 번 오랑캐와 싸우게 되면 손해가 매우 많고 오랑캐와 원한을 맺음이 이미 깊어지며, 저들이 두려워하여 수비를 잘 닦으면 내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갑옷과 창을 거두고 금과 비단으로 저들을 유인한 것이다. 저들이 이미 원하는 바를 얻게 되면 이치상 당연히 스스로 물러날 것이요, 뜻이 교만하고 느슨해져서 더이상 軍備를 갖추지 않을 것이니, 그런 뒤에 위엄을 기르고 기회를 기다린다면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다. ‘장차 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선 주어야 한다.’【[頭註]將欲取之 必固與之:이는 老子의 말이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卿은 이것을 아는가?” 하니, 蕭瑀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제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해 9월에 突厥의 頡利可汗이 말 3천 필과 羊 만 마리를 바쳤는데, 上이 받지 않고 다만 詔命을 내려 약탈해 간 중국의 戶口를 돌려보내게 하고 溫彦博을 불러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을유년(625) 7월에 突厥이 변경을 침략하자, 황제가 左衛大將軍 張瑾에게 명하여 突厥을 막게 하였는데 패전하니, 이때 長史 溫彦博이 突厥에게 사로잡혔다. 적들이 국가(당나라)의 軍糧과 虛實을 물었으나 溫彦博이 대답하지 않으니, 적들이 溫彦博을 陰山으로 옮겼다.】 - 《唐書 突厥傳》과 唐吳兢의 《貞觀政要》에 나옴 -

○ 上이 引諸衛將卒하야 習射於顯德殿庭할새 諭之曰 戎狄侵盜는 自古有之하니 患在邊境小安이면 則人主逸遊忘戰이라 是以로 寇來에 莫之能禦라 今朕이 不使汝曹穿池築苑하고 專習弓矢하야 居閑無事면 則爲汝師하고 突厥入寇면 則爲汝將하노니 庶幾中國之民이 可以少安乎인저 於是에 日引數百人하야 敎射於殿庭할새 上이 親臨試하야 中多者는 賞以弓刀帛하고 其將帥를 亦(可)[加]上考하니 群臣이 多諫【諫曰 於律에 以兵刃至御在所者는 絞어늘 今使將卒習射殿庭하시니 萬一狂夫竊發하야 出於不意면 非所以重社稷也니이다 上曰 王者는 視四海云이라】이라 上이 皆不聽曰 王者는 視四海를 如一家하나니 封域之內는 皆朕赤子【嬰兒는 體色赤이라 故曰赤子라】라 朕常推心하야 置其腹中하노니 奈何宿衛【宿은 守也라】之士를 亦加猜忌乎아 由是로 人思自勵하야 數年之間에 悉爲精銳하니라

范祖禹曰 有國家者 雖不可忘戰이나 然而敎士卒習射者는 有司之事요 殿庭은 非其所也라 苟將師得其人이면 何患乎士之不勇과 技之不精乎아 夫以萬乘之主로 而爲卒伍之師하니 非所以示德也라 且人君始卽位하야 不以敎化禮樂爲先務하고 而急於習射하니 志則陋矣라 雖士勵兵强하야 征伐四克하야 威加海外나 非帝王之盛節이니 亦不足貴也니라

○ 上이 各衛의 將卒들을 데리고 顯德殿 뜰에서 활쏘기를 익힐 적에 그들에게 유시하기를 “오랑캐가 침략하고 도둑질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근심(폐해)은 변경이 다소 편안해지면 人主가 안일하고 놀이에 빠져 싸움을 잊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도둑이 쳐들어왔을 때에 막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朕은 너희들로 하여금 못을 파고 동산을 쌓게 하지 않고 오로지 활쏘는 것만을 익히게 해서, 한가히 거처하여 일이 없을 때에는 내가 너희들의 스승이 되고, 돌궐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내가 너희들의 장수가 될 것이니, 이렇게 하면 거의 中國의 백성들이 다소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날마다 수백 명을 데리고 궁전의 뜰에서 활쏘기를 가르쳤는데, 上이 직접 나와서 시험하여 많이 적중시킨 자에게는 활과 칼과 비단을 상으로 내려 주고 그 장수도 上等의 考課를 가해 주니, 여러 신하들이 많이 간하였다.【여러 신하들이 간하기를 “법률에 ‘병기를 휴대하고 황제가 계신 곳에 이른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졸들로 하여금 궁전의 뜰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하시니, 만에 하나 뜻하지 않게 미친 자가 몰래 뛰쳐나와 일이 예상치 못한 데서 나온다면 社稷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王者는 四海를 보기를 한 집안처럼 여긴다.……” 하였다.】上이 모두 듣지 않고 말하기를 “王者는 온 천하 보기를 한 집안처럼 여기니, 封域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朕의 赤子(無知한 백성)【嬰兒는 피부색이 붉기 때문에 赤子라고 한다.】이다. 朕이 항상 진심을 미루어서 그들의 뱃속에 두니, 어찌 宿衛【宿은 지킴이다.】하는 군사들에게 또한 猜忌(의심하고 꺼림)를 가한단 말인가.” 하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스스로 힘쓸 것을 생각하여 수년 사이에 모두 정예병이 되었다.

范祖禹가 말하였다.

“국가를 소유한 자는 비록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되나 士卒들에게 활쏘기를 익히도록 가르치는 것은 有司의 일이요, 궁전의 뜰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만일 장수와 軍師가 적임자를 얻는다면 이 군사들이 용맹하지 못함과 기예가 정교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萬乘의 군주로서 卒伍의 스승 노릇을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德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人君이 처음 즉위하여 敎化와 禮樂을 급선무로 삼지 않고 활쏘기를 익히는 것을 급하게 여겼으니, 뜻이 비루하다. 비록 군사들이 분발하고 군대가 강하여 정벌함에 사방에서 이겨 위엄이 海內에 가해졌으나 帝王의 훌륭한 일이 아니니, 또한 귀하게 여길 만하지 못하다.”

上이 嘗言호되 吾自少로 經略四方하야 頗知用兵之要라 每親敵陳이면 則知其彊弱하야 常以吾弱當其彊하고 彊當其弱하노니 彼乘吾弱이면 逐奔이 不過數(千)[十]百步로되 吾乘其弱이면 必出其陳後하야 返擊之하니 無不潰敗라 所以取勝이 多在此也로라 〈出政要〉

上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四方을 經略하여 자못 用兵하는 요점을 알고 있다. 매번 적진을 볼 적이면 저들의 强弱을 알아서 항상 우리의 약한 것을 가지고 저들의 강한 것을 당해 내고 우리의 강한 것을 가지고 저들의 약한 것을 당해 내게 하였으니, 저들이 우리의 약한 점을 틈탔을 경우에는 추격하는 것이 수십 보나 백 보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저들의 약한 점을 틈탔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들 진영의 뒤로 나가서 반격하니, 이렇게 하면 궤멸되지 않음이 없었다. 승리를 취한 이유가 대부분 여기에 있었다.” 하였다.- 《貞觀政要》에 나옴 -

○ 上이 面定勳臣長孫無忌等爵邑할새 命陳叔達하야 於殿下에 唱名示之하고 且曰 朕敍卿等勳賞이 或未當이어든 宜各自言하라 於是에 諸將이 爭功하야 紛紜不已라 淮安王神通曰 臣이 擧兵關西하야 首應義旗어늘 今房玄齡, 杜如晦等이 專弄刀筆【刀는 所以削書니 古者에 用簡牒이라 故吏皆以刀筆隨하니라】하고 功居臣上하니 臣竊不服하노이다 上曰 義旗初起에 叔父雖首唱擧兵이나 蓋亦自營脫禍요 及竇建德이 呑噬山東에 叔父全軍覆沒하고 劉黑闥이 再合餘燼에 叔父望風奔北라 玄齡等은 運籌帷幄하야 坐安社稷하니 論功行賞에 固宜居叔父之先이라 叔父는 國之至親이니 朕이 誠無所愛나 但不可以私恩으로 濫與勳臣同賞耳로라 諸將이 乃相謂曰 陛下至公하야 雖淮安王이라도 尙無所私하니 吾儕何敢不安其分이리오하고 遂皆悅服하니라 〈出玄齡傳〉

○ 上이 대면하고서 勳臣인 長孫無忌 등의 爵位와 封邑을 정할 적에 陳叔達에게 명하여 궁전 아래에서 이름을 불러 보여주게 하고, 또 말하기를 “朕이 서열을 정한 卿들의 공훈과 상이 혹 합당하지 못하면 각자 말하라.” 하니, 이에 諸將들이 공을 다투어서 분분한 의론이 그치지 않았다. 淮安王李神通이 말하기를 “臣은 關西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켜 맨 먼저 義旗(의로운 군대의 旗幟)에 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房玄齡杜如晦 등은 오로지 칼과 붓【칼은 썼던 글을 깎아내기 위한 것이니, 옛날에는 簡牒(簡牘)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모두 칼과 붓을 가지고 다녔다.】을 희롱하였을 뿐인데 功이 신의 위에 있으니, 신은 적이 승복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義旗를 처음 일으켰을 때에 叔父가 첫 번째로 先唱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이는 또한 화에서 벗어나기를 스스로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竇建德이 山東 지방을 병탄하자 叔父는 전군이 전복되어 몰살하였고, 劉黑闥이 다시 남은 무리를 규합하자 叔父는 소문만 듣고도 도망하여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房玄齡 등은 帷幄(작전 계획을 짜는 곳)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가만히 앉아서 社稷을 편안히 하였으니 論功行賞할 때에 진실로 叔父의 위에 있어야 합니다. 叔父는 국가의 至親이니, 朕이 진실로 아까워하는 바가 없으나(높은 작위를 주고 싶지만) 다만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함부로 勳臣들과 똑같이 賞을 줄 수가 없을 뿐입니다.” 하였다. 諸將들이 이에 서로 말하기를 “陛下가 지극히 공정하여 비록 淮安王이라 해도 사사로이 봐 주는 것이 없으니, 우리들이 어찌 감히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모두 다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唐書 房玄齡傳》에 나옴 -

房玄齡이 嘗言호되 秦府舊人未遷官者 皆嗟怨하야 曰 吾屬이 奉事左右 幾何年矣어늘 今除官【拜官曰除니 除者는 去舊官하야 就新官이라】에 反出前宮, 齊府【太子建成이요 齊府는 齊王元吉이라】人之後라한대 上曰 王者는 至公無私故로 能服天下之心이라 朕與卿輩로 日所衣食이 皆取諸民者也라 故로 設官分職은 以爲民也니 當擇賢才而用之어늘 豈以新舊爲先後哉아 必也新而賢하고 舊而不肖면 安可捨新而取舊乎아 今不論其賢不肖하고 而直言嗟怨하니 豈爲政之體乎아 〈出政要〉

房玄齡이 일찍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秦王府에 있던 사람 중에 관직이 승진되지 못한 자들이 모두 원망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좌우에서 받들어 섬긴 지가 여러 해인데, 이제 관직을 제수【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除라 하니, 除는 옛 관직을 버리고 새 관직에 나아간다는 뜻이다.】할 때에 도리어 前 東宮과 齊王府【前 東宮은 太子 李建成이고, 齊王府는 齊王李元吉이다.】에 있던 사람의 뒤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王者는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천하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이다. 朕이 卿들과 함께 날마다 입고 먹는 것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관청을 두고 직책을 분배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을 가려서 써야 하니, 어찌 新舊를 가지고 先後를 삼는단 말인가. 만약 새로운 사람은 어질고 옛사람은 불초하다면 어찌 새로운 사람을 버리고 옛사람을 취하겠는가. 이제 어질고 불초함은 논하지 않고 단지 원망만을 말하니, 어찌 정사하는 체통이겠는가.” 하였다.- 《貞觀政要》에 나옴 -

○ 上이 於弘文殿에 聚四部書【書는 經, 史, 子, 集이라 薛稷知集庫하고 馬懷素知經庫하고 沈佺期知史庫하고 武平一知子庫하니 通曰四部요 又有甲, 乙, 丙, 丁部하니라 [通鑑要解]自漢以來로 史官이 列其名氏篇第하야 以爲六藝七略이러니 至唐하야 始分爲四類하야 曰經, 史, 子, 集이라하고 以甲, 乙, 丙, 丁爲次하야 謂之四庫書요 亦曰四部書라】二十餘萬卷하고 置弘文館於殿側하고 精選天下文學之士虞世南, 褚亮, 姚思廉, 歐陽詢, 蔡允恭, 蕭德言等하야 以本官으로 兼學士하야 令更日宿直하고 聽朝之隙에 引入內殿하야 講論前言往行하고 商確【商은 度也요 榷은 擧其略也라】政事하야 或至夜分乃罷하다 又取三品已上子孫하야 充弘文館學生하다 〈出儒學傳序〉

○ 上이 弘文殿에 經‧史‧子‧集 四部書【[附註]四部書는 經‧史‧子‧集이다. 薛稷이 集庫를 맡고 馬懷素가 經庫를 맡고 沈佺期가 史庫를 맡고 武平一이 子庫를 맡으니, 이것을 통틀어 四部라 하였고, 또 甲部‧乙部‧丙部‧丁部가 있었다. [通鑑要解]漢나라 이후로 史官이 著者의 이름과 篇章의 차례를 열거하여 ‘六藝七略’이라 하였는데, 唐나라에 이르러 처음으로 四類로 구분하여 經‧史‧子‧集이라 하고, 甲‧乙‧丙‧丁으로 차례를 매겨 四庫書라 하고, 또한 四部書라고도 하였다.】 20여만 권을 모으고 弘文殿 옆에 弘文館을 설치한 다음 天下의 文學하는 선비인 虞世南褚亮姚思廉歐陽詢蔡允恭蕭德言 등을 정선하여, 本職으로 學士를 겸하게 하고는 이들로 하여금 날짜를 바꾸어 숙직하게 하였으며, 政務를 보는 여가에 이들을 데리고 內殿으로 들어와 예전의 훌륭한 말씀과 지나간 행실을 강론하고 政事를 의논【商은 헤아림이요, 榷은 그 大體를 드는 것이다.】하게 하여 때로는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또 3품 이상 관원의 자손들을 취하여 弘文館의 학생으로 충원하였다.- 《唐書 儒學傳序》에 나옴 -

○ 民部尙書裴矩奏호되 民遭突厥暴殘者를 請戶給絹一匹하노이다 上曰 朕以誠信御下하야 不欲虛有存恤之名而無其實하노니 戶有小大하니 豈得雷同【雷之發聲에 物無不同時應者라 故曰雷同이라】給賜乎아하고 於是에 計口爲率하다

○ 民部尙書裴矩가 아뢰기를 “백성들 중 突厥에게 포학함과 殘虐한 해를 입은 자들에게 戶口마다 한 필의 비단을 줄 것을 청합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朕은 誠信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려서 헛되이 구휼한다는 명분만 있고 그 실제가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 戶口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니, 어찌 부화뇌동【우레가 소리를 낼 적에 물건이 동시에 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함께 찬동하는 것을〉 雷同이라 한다.】하여 똑같이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식구 수를 계산하여 비율을 삼았다.

○ 上이 與群臣으로 論止盜할새 或請重法以禁之어늘 上哂之曰 民之所以爲盜者는 由賦繁役重하고 官吏貪求하야 飢寒切身故로 不暇顧廉恥耳라 朕이 當去奢省費하고 輕徭薄賦하고 選用廉吏하야 使民衣食有餘면 則自不爲盜하리니 安用重法耶아 自是로 數年之後에 海內昇平하야 路不拾遺하고 外戶不閉【扉從外闔하고 不用關閉之也라 重門擊柝은 本禦暴客이니 旣無盜竊이면 則戶無俟於閉也라 〈外戶者는〉 戶設於外而閉之向內也라】하고 商旅野宿焉이러라

[新增]范氏季康子患盜하야 問於孔子한대 孔子曰 苟之不欲이면 雖賞之라도 不竊이라하시니 信哉라 斯言也여 蓋君者는 本也요 民者는 末也며 君者는 源也요 民者는 流也니 本正則末正하고 源淸則流淸矣라 是以로 先王之治는 必反求諸己하니 己正而物莫不應矣라 夫重法以止盜면 法繁而盜愈多하리니 去奢省費하고 輕徭薄賦 此淸源正本하야 止欲之道也라 太宗行之에 其效如此하니 君人者 無以迂言爲難行하고 而以峻法爲足恃면 則知致治之方矣리라

○ 上이 신하들과 도둑을 방지하는 방법을 의논할 적에 혹자가 엄중한 법으로 금지할 것을 청하자, 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백성들이 도둑이 되는 까닭은 賦稅와 徭役이 무거우며 관리들이 탐욕스러워 苛斂誅求해서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기 때문에 염치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이다. 朕은 사치함을 제거하고 비용을 줄이며,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거두며, 청렴한 관리를 선발하여 등용해서 백성들의 의식을 넉넉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엄중한 법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수년 뒤에 海內가 태평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고 바깥문을 닫지 않았으며【外戶不閉는 사립문을 밖에서 닫아두기만 하고 잠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중문을 설치하고 밤에 딱따기를 치며 도는 것은 본래 사나운 도적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미 도둑이 없다면 문을 잠글 필요가 없는 것이다. 外戶라는 것은 지게문을 밖에 설치하여 문을 닫으면 안쪽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상인과 나그네가 들에서 노숙하였다.

[新增]范氏가 말하였다.

“季康子가 도둑을 걱정하여 孔子에게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만일 그대가 탐욕하지 않으면 비록 상을 주어 도둑질하게 하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다. 이 말씀이여. 군주는 나무의 뿌리이고 백성은 지엽이며, 군주는 물의 根源이고 백성은 支流이니, 뿌리가 바르면 지엽이 바루어지고 근원이 맑으면 지류가 맑다. 이 때문에 先王의 다스림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였으니, 자신이 바르면 남들이 응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준엄한 법으로 도둑을 방지하려 하면 법이 번거로울수록 도둑이 더욱 많아지게 된다. 사치함을 제거하고 경비를 줄이며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거두는 것이 근원을 깨끗이 하고 근본을 바로잡아서 욕심을 방지하는 방법이다. 太宗이 이것을 행함에 그 효과가 이와 같았으니, 人君된 자가 오활한 말이라서 행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고 준엄한 법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법을 안다 할 것이다.”

上이 又嘗謂侍臣曰 君依於國하고 國依於民하니 刻民以奉君이면 猶割肉以充腹이라 腹飽而身斃하고 君富而國亡이라 故로 人君之患이 不自外來요 常由身出이니 夫欲盛則費廣하고 費廣則賦重하고 賦重則民愁하고 民愁則國危하고 國危則君喪矣라 朕이 常以此思之故로 不敢縱欲也하노라

上이 또 일찍이 侍臣들에게 이르기를 “군주는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니, 백성에게 가혹하게 하여 군주를 받들면 자기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배가 부르면 몸이 죽고 군주가 풍족하면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人君의 재앙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이니, 욕심이 많으면 비용이 커지고, 비용이 커지면 부세가 무거워지고, 부세가 무거워지면 백성이 근심하게 되고, 백성이 근심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군주가 지위를 잃게 된다. 朕은 항상 이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 上謂裴寂曰 比多上書言事者어늘 朕皆粘之屋壁하고 得出入省覽하며 每思治道하야 或深夜方寢하노니 公輩도 亦當恪勤職業하야 副朕此意하라 〈出政要〉

○ 上이 裴寂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글을 올려 일을 말하는 자가 많기에 朕이 모두 집의 벽 위에 붙여놓고 출입할 때에 살펴보고 열람하며 매양 政治하는 方道를 생각하여 혹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잠이 드니, 公들도 마땅히 맡은 일을 삼가고 부지런히 힘써서 朕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貞政觀要》에 나옴 -

○ 上이 勵精求治하야 數引魏徵入臥內하야 訪以得失하니 이 知無不言이라 上이 皆欣然嘉納하다 〈出魏鄭公諫錄〉

○ 上이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자주 魏徵을 불러 침실 안에 들어오게 해서 政治의 得失을 물으니, 魏徵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上이 모두 欣然히 받아들였다.- 唐王方慶의 《魏鄭公諫錄》에 나옴 -

○ 上이 遣使點兵할새 封德彛奏호되 中男【唐制에 民年十六을 謂之中男이라 十八에 始成丁이요 二十一에 爲丁하야 充力役이라】雖未十八이나 其軀幹壯大者를 亦可幷點【幷은 與倂同이라】이니이다 上이 從之하다 勅出에 魏徵이 固執하야 以爲不可라하야 不肯署勅【卽帖勅也니 聯紙書行也라 署는 着押也라】이 至于數四라 上怒하야 召而讓之曰 中男壯大者는 乃奸民詐妄하야 以避征役이니 取之何害완대 而卿이 固執至此오 對曰 夫兵은 在御之得其道요 不在衆多니이다 陛下取其壯健하야 以道御之면 足以無敵於天下어늘 何必多取細弱하야 以增虛數乎잇가 且陛下每云吾以誠信御天下하야 欲使臣民으로 皆無欺詐라하시더니 今卽位未幾에 失信者數矣니이다 上이 愕然曰 朕이 何爲失信고 對曰 陛下初卽位에 下詔云 逋負【逋는 亡也라 受貸不償曰負라】官物을 悉令蠲免이라하시더니 有司以爲負秦府國司者는 非官物이라하야 徵督이 如故하니이다 陛下以秦王으로 升爲天子하시니 國司之物이 非官物而何니잇고 又曰 關中은 免二年租調하고 關外는 給復【復은 除其賦役也라】一年이라하시더니 旣而오 繼有勅云 已役已輸者는 以來年爲始라하야 散還之後에 方復更徵【言旣散還其已輸之物而復徵之니 徵은 賦也라】하시니 百姓이 固已不能無怪니이다 今旣徵得物하고 復點爲兵하시니 何謂來年爲始乎잇가 又陛下所與共治天下者 在於守宰라하야 居常簡閱을 咸以委之러시니 至於點兵하야는 獨疑其詐하시니 豈所謂以誠信爲治乎잇가 上이 悅曰 曏者에 朕以卿固執으로 疑卿不達政事러니 今卿이 論國家大體에 誠盡其精要라 夫號令不信이면 則民不知所從하나니 天下何由而治乎아 朕過深矣로다하고 乃不點中男하고 賜金甕하다 〈出鄭公諫錄〉

○ 上이 使者를 보내어 군대를 점검할 적에 封德彛가 아뢰기를 “中男【唐나라 제도에 백성 중에 나이가 16세인 자를 中男이라 이른다. 18세에 비로소 成丁이 되고, 21세에 丁이 되어 力役에 충당되었다.】 중에 비록 18세가 못 되었으나 체구가 크고 튼튼한 자는 또한 아울러【幷은 倂과 같다.】 점검하여 군대에 충원해야 합니다.” 하니, 上이 그 말을 따랐다. 勅令이 나오자 魏徵이 한사코 고집하며 불가하다고 하여 勅書에 서명【署勅은 바로 帖勅이니, 〈勅書 뒷면에〉 종이를 붙여서 쓴 것이다. 署는 手決이다.】하려 하지 않은 것이 서너 차례에 이르렀다. 上이 노하여 魏徵을 불러서 꾸짖기를 “中男으로 체구가 크고 튼튼한 자는 바로 간사한 백성들이 나이를 속여서 征役을 피하려는 짓이니, 그들을 취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기에 卿이 고집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니, 魏徵이 대답하기를 “군대는 그들을 다스리는 것이 올바른 방도를 얻음에 달려 있지, 숫자가 많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陛下께서 체구가 건장한 자를 취해서 올바른 방도로 그들을 다스리신다면 충분히 天下無敵이 될 수 있는데, 하필 어리고 약한 자를 많이 취하여 虛數를 보태려 하신단 말입니까. 또 폐하께서는 매번 말씀하기를 ‘내가 誠信으로 천하를 다스려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속임이 없게 하고자 한다.’ 하셨는데, 지금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의를 잃은 것이 여러 번입니다.” 하였다.

上이 놀라며 말하기를 “朕이 언제 신의를 잃었는가?” 하니, 魏徵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실 때에 조명을 내리시기를 ‘逋欠【逋는 도망함이다. 貸與를 받고 갚지 않는 것을 負라 한다.】낸 官物(관청 소유의 물건)을 모두 면제하게 한다.’ 하셨는데, 有司가 秦王府의 國司를 포흠낸 것은 官物이 아니라 하여 징수하고 재촉함이 예전과 같습니다. 폐하께서 秦王으로부터 올라와서 天子가 되셨으니, 國司의 재물이 官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關中은 2년 동안의 租와 調를 면제해 주고, 關中 밖은 1년 동안의 徭役을 면제【復은 부역을 면제하는 것이다.】해 준다.’ 하시고는, 얼마 뒤에 이어서 칙명을 내리시기를 ‘이미 부역하고 이미 징수하여 바친 자는 내년부터 시작한다.’ 하여 흩어서 돌려보낸 뒤에 바야흐로 다시 징수【이미 바친 물건을 흩어서 돌려보낸 뒤에 다시 징수하는 것을 말하니, 徵은 부과하는 것이다.】하시니, 백성들이 진실로 이미 괴이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지 못합니다. 지금 이미 징수하여 재물을 얻으시고 또다시 中男을 점검하여 군대에 충원하려 하시니, 어찌 내년부터 시작한다고 하십니까. 또 폐하께서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지방관에게 달려 있다 하여 평상시에 가려서 조사하는 것을 모두 그들에게 맡기셨는데, 군대를 점검함에 이르러서는 유독 속임수가 있는가 의심하시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誠信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上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지난번에 朕은 卿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므로 卿이 정사를 통달하지 못했다고 의심했었는데, 이제 卿이 국가의 大體를 논함에 진실로 그 정밀함과 요긴함을 다하였다. 號令이 미덥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를 바를 모르게 되니, 천하가 어떻게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朕의 허물이 깊다.” 하고는 마침내 中男을 점검하여 군대에 충원하지 않고, 魏徵에게 금항아리를 하사하였다.- 《魏鄭公諫錄》에 나옴 -

張蘊古【前幽州記室直中書省이라 】上大寶箴【箴은 戒也라】하니 其略曰 聖人受命하야 拯溺亨屯【王氏曰 出溺爲拯이니 拯溺은 謂拯救天下之沒溺也라 亨은 通也요 屯은 難也니 言亨通天下之屯難也라】이라 故로 以一人治天下요 不以天下奉一人이라하고 又曰 壯九重【楚辭에 君之門九重이라한대 註에 關門, 遠郊門, 近郊門, 城門, 皐門, 庫門, 雉門, 應門, 路門이라】於內라도 所居는 不過容膝이어늘 彼昏不知하야 瑤其臺而瓊其室【汲冢古文曰 桀作瓊宮, 瑤臺하고 紂作瓊室, 立玉門하니 其大三里요 高千尺이니 七年乃成이라하니라】하고 羅八珍於前【王氏曰 禮膳夫珍用八物 〈注〉에 一淳熬니 淳은 沃也요 熬는 煎也니 煎醢加于陸稻上하고 沃之以膏하야 煎成之라 二淳毋니 毋讀作模하니 象也니 作此象淳熬라 三炮니 取豚若牂刳之하야 實棗於其腹中하고 編萑以苴之하야 塗之以(瑾)[謹]塗하야 炮之라 四擣珍이니 取肉必脄라 脄音梅니 夾脊肉이요 擣는 捶之也라 五漬니 取牛肉新殺者하야 薄切하야 湛諸美酒하야 期朝而食之라 六爲熬니 於火上爲之하니 今火脯似矣라 七糝이니 取牛羊豕肉호되 三如一하야 小切之하고 肉一, 稻米二하야 合以爲餠하야 煎之라 八肝膋니 取狗肝하야 幪之以其膋하야 濡炙之라 膋는 腸間脂니 音遼라】이라도 所食은 不過適口어늘 惟狂罔念하야 丘其糟而池其酒【汲冢古文에 桀作酒池하야 可以運船하고 糟堤可望十里하며 紂爲酒池하야 回(盤)[船]하고 糟丘而牛飮者 三千餘人爲輩라하니라】라하고 又曰 勿沒沒【諸本에 作汶汶하니 誤라 按王氏曰 左傳襄二十四年의 何沒沒也註에 沒沒은 沈滅之言이니 沒은 一音妹라하니라】而闇하고 勿察察而明하라 雖冕旒蔽目【王氏曰 旒는 垂玉也라 王五冕이 旒皆十二니 不如是면 不爲蔽明이라 其諸臣之旒는 數雖不同이나 然垂皆過目이라】이나 而視於未形하고 雖黈纊塞耳【黈는 黃色이요 纊은 新綿也라 以黃綿爲丸하고 用組垂之於冕하야 當兩耳傍이니 所以塞聰하야 示不外聽也라】나 而聽於無聲이라하야늘 上이 嘉之하야 賜以束帛【易賁卦注에 五匹爲束이라하고 禮雜記에 束五兩이요 兩五尋이라한대 注에 一束은 十卷也라 八尺爲尋이요 五尋爲匹이니 匹은 四十尺也라 從兩端卷至中이면 則每卷二十尺이요 合則四十尺이니 五匹이 爲五箇兩卷이라 故曰束五兩이라하니 其實五匹也라 匹은 猶匹偶之云이니 古人은 每匹에 作兩箇卷子하니라】하고 除大理丞하다 〈出本傳〉

○ 張蘊古【張蘊古는 예전 幽州의 記室로 直中書省이었다.】가 大寶箴【箴은 경계하는 것이다.】을 올리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聖人은 天命을 받아 도탄에 빠진 자를 구원하고 곤경에 처한 자를 형통하게 합니다.【王氏가 말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을 拯이라 하니, 拯溺은 천하 사람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구원해 줌을 이른다. 亨은 통함이고 屯는 어려움이니, 천하의 어려움을 형통하게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요, 천하로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안에 구중궁궐【≪楚辭≫에 “君主의 門은 9중이다.” 하였는데, 註에 “關門‧遠郊門‧近郊門‧城門‧皐門‧庫門‧雉門‧應門‧路門이다.” 하였다.】을 장엄하게 짓더라도 군주가 거처하는 것은 무릎을 용납할 만한 작은 방에 지나지 않는데, 저 昏愚한 자는 알지 못하여 樓臺를 옥으로 꾸미고 방 안을 옥으로 장식하였습니다.【≪汲冢古文≫에 이르기를 “桀은 瓊宮과 瑤臺를 지었으며, 紂는 瓊室을 짓고 玉門을 세웠는데 크기가 3里이고 높이가 千尺이니, 7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였다.】 앞에 八珍味를 나열하더라도【王氏가 말하였다. “≪周禮≫ 〈天官 膳夫〉에 ‘珍味로 여덟 가지를 쓴다.’ 하였는데, 그 註에 첫 번째는 淳熬이니 淳은 붓는 것이고 熬는 달이는 것으로 젓갈을 달여 陸稻 위에 가하고 기름을 부어서 달여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淳毋이니 毋는 模字로 읽으니 본뜬다는 뜻으로 이것을 만들 때 淳熬를 본뜨는 것이다. 세 번째는 炮이니 돼지와 양을 취하여 배를 가르고 대추를 뱃속에 채운 다음 갈대를 엮어 이것을 싸서 점토를 발라 굽는 것이다. 네 번째는 擣珍이니 고기를 취하되 반드시 脄(등심)를 취한다. 脄는 음이 매이니 척추 양쪽의 등뼈에 붙은 살이요, 擣는 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漬이니 새로 잡은 쇠고기를 취하여 얇게 썰어서 맛좋은 술에 담갔다가 만 하루만에 먹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熬로 불 위에서 만드니, 지금의 火脯와 같은 것이다. 일곱 번째는 糝이니 소‧양‧돼지의 고기를 취하되 세 가지의 量을 똑같게 하여 작게 썰고, 고기 1에 稻米 2의 비율로 섞어서 떡을 만들어 굽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肝膋이니 개의 간을 취하여 창자의 기름으로 싸서 촉촉하게 굽는 것이다. 膋는 창자 사이의 기름이니, 음이 료이다.”】 군주가 먹는 것은 입에 맞는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 저 狂妄한 자는 생각하지 못하여 술지게미로 언덕을 만들고 술로 못을 만들었습니다.【≪汲冢古文≫에 “桀은 술로 연못을 만들어 배를 운행할 수 있었고 술지게미로 둑을 만들어 높기가 십 리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紂는 술로 연못을 만들어 배를 돌릴 수 있었고 술지게미로 언덕을 만들어 소처럼 둘러서서 술을 마시는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沒沒【諸本에는 沒沒이 汶汶으로 되어 있으니, 잘못이다. 살펴보건대 王氏가 말하기를 “≪春秋左傳≫ 襄公 24年條에 ‘어찌 沒沒한고[何沒沒也]’라고 하였는데, 그 註에 ‘沒沒은 가라앉아 없어진다는 말이니, 沒의 다른 음은 매이다.’ 했다.” 하였다.】하여 너무 어둡지 말고 察察하여 너무 밝게 하지 마소서. 비록 면류관의 술이 눈을 가리나【王氏가 말하였다. “旒는 면류관의 앞뒤에 드리운 珠玉을 꿴 술이다. 王의 다섯 가지 면류관은 旒가 모두 12개이니, 이와 같지 않으면 밝게 보는 것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旒는 숫자는 비록 다르지만 드리운 술이 모두 눈앞을 지나간다.】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보아야 하고 비록 귀막이 솜이 귀를 막고 있으나【黈는 황색이고, 纊은 새솜이다. 누런 새솜으로 丸을 만들고 끈을 사용하여 이것을 冕에 늘어뜨려서 귀 양옆에 닿게 하니, 이것은 밝게 듣는 것을 막아서 밖의 소리를 듣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소리가 없는 데에서 들어야 합니다.” 하였다. 上이 가상하게 여겨 束帛【≪周易≫ 賁卦 注에 “5匹을 束이라 한다.” 하였고, ≪禮記≫ 〈雜記〉에 “1束은 5兩이고, 1兩은 5尋이다.” 하였는데, 注에 “1束은 10卷(두루마리)이다. 8尺을 尋이라 하고 5尋을 匹이라 하니, 1匹은 40尺이다. 양끝에서부터 말아와 중간에 이르면 매 卷마다 20尺이고 합하면 40尺이니, 5匹은 두 卷짜리가 5개이다. 그러므로 1束이 5兩이라고 하였으니, 사실은 5匹이다. 匹은 匹偶라는 말과 같으니, 옛사람은 매 匹마다 두 개의 두루마리를 만들었다.” 하였다.】을 하사하고 大理丞을 제수하였다.- 《唐書 文苑 張蘊古傳》에 나옴 -

○ 上이 患吏多受賕【賕는 以財物로 枉法相謝라】하야 密使左右試賂之러니 有司門令史【司門은 屬刑部하니 掌天下門關出入之籍賦라 有令史六人이라】受絹一匹이어늘 上欲殺之한대 民部尙書裴矩諫曰 爲吏受賂하니 罪誠當死나 但陛下使人遺之而受하니 乃陷人於法也라 恐非所謂道之以德이요 齊之以禮니이다 上이 悅하야 召文武五品已上하야 告之曰 裴矩能當官力爭하고 不爲面從하니 儻每事皆然이면 何憂不治리오 〈出本傳〉

○ 上이 관리들이 대부분 법을 어기고 뇌물을 받는 것【賕는 재물을 가지고 법을 어겨 서로 사례하는 것이다.】을 걱정하여 은밀히 좌우 신하들을 시켜서 시험 삼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게 하였는데, 司門令史【司門은 刑部에 속하니, 天下의 門과 關으로 출입하는 籍賦(賦稅)를 관장한다. 令史 6인이 있다.】가 비단 한 필을 받았다. 上이 그를 죽이고자 하자, 民部尙書裴矩가 간하기를 “관리가 되어 뇌물을 받았으니, 죄가 진실로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폐하께서 사람을 시켜 뇌물을 주어 받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法網에 빠뜨린 것입니다. 이른바 ‘백성을 인도하기를 德으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禮로써 한다.’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上이 기뻐하여 5품 이상의 文武官을 불러 말하기를 “裴矩가 관직을 맡아서 극력 간쟁하고 면전에서 순종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매사를 모두 이렇게 한다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唐書 裴矩傳》에 나옴 -

溫公曰 古人有言호되 君明臣直이라하니 裴矩佞於隋【如說伐高麗之類라】而忠於唐하니 非其性之有變也라 君惡聞其過면 則忠化爲佞하고 君樂聞直言이면 則佞化爲忠하나니 是知君者는 表也요 臣者는 景(影)【景은 古影字니 後人이 加彡이라】也니 表動則景隨矣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하다.’ 하였다. 裴矩가 隋나라에서는 아첨하고【隋나라에 아첨하였다는 것은 高句麗를 정벌하도록 설득한 것과 같은 것이다.】唐나라에서는 충성하였으니, 성품에 변화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군주가 과실을 듣기 싫어하면 충성이 변하여 아첨이 되고, 군주가 直言을 듣기 좋아하면 아첨이 변하여 충성이 된다. 여기에서 군주는 儀表이고 신하는 그림자【景은 옛날의 影字이니, 후인들이 彡을 가하였다.】이니, 儀表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