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二 梁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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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

梁紀

高祖武帝
名衍이요 姓蕭니

梁紀 附北朝東魏

高祖武帝이요 姓니 在位四十八年이요 壽八十六이라

梁紀 - 北朝의 東魏를 붙임 -

高祖武帝는 이름이 이고 姓이 蕭氏이니, 재위가 48년이고 壽가 86세이다.

[壬午] 齊中興二年, 梁高祖天監元年

[壬午] 〈齊中興二年이요 梁高祖天監元年이요 魏景明三年이라 ○ 是歲에 齊亡하고 梁代之하니라〉

임오(502) - 齊나라 中興 2년이고, 梁나라 高祖의 天監 元年이고, 魏나라 景明 3년이다. ○ 이해에 齊나라가 망하고梁나라가 이를 대신하였다.-

齊進大司馬하야 都督中外諸軍事하고 詔進大司馬位相國, 總百揆【揆는 度也니 揆度庶政之官也라】, 揚州牧하고 封十郡爲梁公하다 二月에 詔梁公하야 進爵爲王하다

齊나라가 大司馬蕭衍을 승진시켜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 齊主가 명령하여 大司馬의 지위를 相國으로 승진시켜 百揆【揆는 헤아리는 것이니, 百揆는 庶政을 헤아려 처리하는 관직이다.】를 총괄하게 하고 揚州牧으로 삼으며, 10개 郡을 봉해 주어 梁公으로 삼았다.

2월에 齊主가 명령하여梁公의 작위를 올려서 梁王으로 삼았다.

齊主下詔하야 禪位于梁王하니 卽皇帝位하다

齊主가 조서를 내려 梁王에게 帝位를 禪讓하니, 梁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甲申] 梁天監三年, 魏正始元年

[甲申] 〈梁天監三年이요 魏正始元年이라〉

갑신(504) - 梁나라 天監 3년이고, 魏나라 正始 元年이다. -

魏詔營繕國學하다 時에 魏平寧日久하니 學業이 大盛하야 燕, 齊, 趙, 魏之間에 敎授者 不可勝數라 弟子著錄이 多者는 千餘人이요 少者도 猶數百이라 州擧茂異하고 郡貢孝廉하야 每年逾(愈)衆이러라

魏主(北魏)가 명령하여 國學을 새로 짓고 수리하게 하였다. 이때 魏나라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니, 학문하는 氣風이 크게 성하여 燕‧齊‧趙‧魏 등지에서 학생들에게 敎授하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弟子로 기록된 자가 많게는 천여 명이고 적은 경우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州에서는 재능이 뛰어나고 특이한 자를 천거하고 郡에서는 효도하고 청렴한 자를 추천해서, 해마다 사람의 숫자가 더욱 많아졌다.

○ 十月에 梁이 大擧伐魏하다

○ 10월에 梁나라가 군대를 크게 일으켜 魏나라를 정벌하였다.

[丙戌] 梁天監五年, 魏正始三年

[丙戌] 〈梁天監五年이요 魏正始三年이라〉

병술(506) - 梁나라 天監 5년이고, 魏나라 正始 3년이다. -

太子統【諡曰昭明이라】이 生五歲에 能遍誦五經이어늘 始自禁中【謂門戶有禁하야 非侍御通籍之臣이면 不得入也라】으로 出居東宮하다

梁나라 太子 蕭統【梁나라 太子 蕭統은 시호를 昭明이라 하였다.】은 나이 다섯 살에 五經을 두루 외웠다. 처음으로 太子가 궁중【禁中은 門戶에 금령이 있어서 侍御하는 신하나 門籍에 이름을 올린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음을 이른다.】에서 나가 東宮에 거처하였다.

[己丑] 梁天監八年, 魏永平二年

[己丑] 〈梁天監八年이요 魏永平二年이라〉

기축(509) - 梁나라 天監 8년이고, 魏나라 永平 2년이다. -

十一月에 魏主專尙釋氏하니 遠近이 承風하야 無不事佛이라 比及延昌【世宗宣武帝恪之末年號라】히 州郡에 共有一萬三千餘寺러라

11월에 魏主(宣武帝)가 오로지 佛敎를 숭상하니, 이로 인하여 원근에서 영향을 받아 부처를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延昌【延昌은 世宗 宣武帝 元恪의 말년의 연호이다.】 年間에 이르기까지 北魏 境內의 州郡에 모두 1만 3천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乙未] 梁天監十四年, 魏延昌四年

[乙未] 〈梁天監十四年이요 魏延昌四年이라〉

을미(515) - 梁나라 天監 14년이고, 魏나라 延昌 4년이다. -

正月에 魏主殂하고 太子詡卽皇帝位【宣武(長)[第二]子니 (世)[肅]宗孝明皇帝라】하니 胡太后【宣武帝恪之后而帝詡母라】臨朝稱制하다 于忠【姓名이니 侍中, 領軍將軍이라】이 居門下하야 總宿衛하야 遂專朝政하다

정월에 魏主가 죽고 太子元詡가 〈6세의 나이로〉 皇帝에 즉위하니,【太子 元詡는 宣武帝의 둘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肅宗 孝明皇帝이다.】 胡太后【胡太后는 宣武帝 元恪의 后妃이고, 황제 元詡의 母后이다.】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于忠【于忠은 姓名이니, 侍中‧領軍將軍이었다.】이 門下省에 侍中으로 있으면서 또 宿衛를 총괄하여 마침내 조정의 정사를 전횡하였다.

○ 初에 魏世宗이 作瑤光寺라가 未就러니 是歲에 胡太后 又作永寧寺하니 皆極土木之美하야 爲九層浮圖호되 掘地築基하야 下及黃泉하고 浮圖【見二十九卷이라】高九十丈에 上刹【梵言刹은 華言竿이니 卽幡柱라 】復高十丈이라 每夜靜에 鈴鐸聲이 聞十里하고 僧房千間에 珠玉錦繡 駭人心目하니 自佛法入中國으로 塔廟【佛弟子 收奉舍利를 號爲塔이라하니 猶華言宗廟也라】之盛이 未之有也러라

○ 처음에 魏나라 世宗이 瑤光寺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해에 胡太后가 또다시 永寧寺를 지으니, 두 절 모두 건축의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여 9층의 浮圖(佛塔)를 만들되 땅을 파서 기반을 다져 아래로 黃泉에까지 미쳤고, 浮圖【浮圖는 해설이 29권에 보인다.】의 높이가 90길인데 浮圖 위에 다시 10길 높이의 相輪【梵語의 刹은 중국어로 장대이니, 곧 幡柱이다.】이 있었다. 매일 밤 고요할 때에는 浮圖 위의 鈴鐸(風磬) 소리가 10리 밖에까지 들렸고, 僧房 천 칸에 珠玉과 錦繡가 휘황찬란하여 사람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니, 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로 塔廟(寺塔)【佛弟子가 舍利를 거두어 봉안한 것을 塔이라고 이름하니, 중국어의 宗廟와 같다.】의 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丁酉] 梁天監十六年, 魏肅宗孝明帝詡熙平二年

[丁酉] 〈梁天監十六年이요 魏肅宗孝明帝熙平二年이라〉

정유(517) - 梁나라 天監 16년이고, 魏나라 肅宗孝明帝元詡의 熙平 2년이다. -

四月에 梁이 詔以宗廟用牲牢【牛羊豕曰太牢요 羊豕曰小牢니 牢는 閑防也라】는 有累冥道하니 宜皆以麪爲之하라하니 於是에 朝野諠譁하야 以宗廟去牲은 乃是不復血食이라호되 梁主竟不從하다

[新增]朱氏(黼)曰 仁者는 以其所愛로 及其所不愛하고 不仁者는 以其所不愛로 及其所愛하나니 仁不仁之辨은 義與利之間也라 伏羲作綱罟하고 焚山澤하고 驅龍蛇하고 周公驅虎豹犀象하시니 夫豈不仁哉아 原其設心하면 正欲萬物遂性하고 生民奠居而已라 鳥獸魚鱉이 由是咸若하고 山川鬼神이 亦莫不寧하니 是之謂以其所愛로 及其所不愛라 梁武帝는 不以生類爲藥하고 不以犧牲爲祀하고 不以仙人鳥獸之形爲衣하니 其設心이 豈誠仁恕【梁天監十六年에 勅太醫하야 不以生類爲藥이라 又詔曰 文錦不得爲人獸之形하라하니 爲其裁翦이 有乖仁恕라】리오 不過信佛氏之說하야 求將來福報而已라 然이나 一有利取國之心이면 至弑二君【二君은 東昏侯寶卷, 和帝寶融이라】, 殺六寶【寶晊, 寶玄, 寶夤, 寶攸, 寶嵩, 寶貞이라】而不之恤하고 一有利守國之心이면 作浮山堰【魏降人이 陳計하야 堰淮水以灌壽陽하니 梁主發徐, 揚民二十萬하야 築之하다】하야 以灌壽陽하야 緣百里內老少皆役하야 負者肩穿하고 寒暑疾疫에 死者相枕이러니 一日潰決에 緣淮數十萬이 盡葬魚腹하야 顧雖鷄犬이라도 不得寧也하니 是之謂以其所不愛로 及其所愛也라 以義而殺이 不害其爲仁이요 以利而不殺이 不免爲不仁이니 仁不仁之效는 義與利之別而已니라

4월에 梁主가 명령하여 宗廟의 제사에 희생【소와 양과 돼지를 太牢라 하고 양과 돼지를 小牢라 하니, 牢는 짐승을 가두어 놓는 우리이다.】을 사용하는 것은 冥道에 방해가 되니, 마땅히 모두 밀가루로 희생 모양을 빚어 대신하라고 하였다. 이에 朝野가 의론이 분분하여 宗廟의 제사에 희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다시는 血食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梁主는 끝내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新增]朱氏(朱黼)가 말하였다.

“仁한 자는 사랑하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지 않는 바에까지 미치고 不仁한 자는 사랑하지 않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는 바에까지 미치니, 仁과 不仁의 분별은 義와 利의 차이일 뿐이다. 伏羲氏는 그물을 만들어 짐승과 물고기를 잡았고, 임금은 산과 늪에 불을 놓아 금수를 몰아내었고, 禹王은 용과 뱀을 몰아내었고, 周公은 범과 표범과 무소와 코끼리를 몰아내셨으니, 그 마음이 어찌 不仁해서였겠는가. 그 마음씀을 미루어 근원해 보면 바로 萬物이 本性을 이루고 生民들이 편안히 살게 하고자 해서일 뿐이다. 새와 짐승과 물고기와 자라가 이로 말미암아 모두 순하게 살고 山川과 鬼神이 또한 편안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를 일러 사랑하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지 않는 바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梁나라 武帝는 생명이 있는 것으로 藥을 만들지 않고, 희생으로 제사 지내지 않고, 비단에 신선과 鳥獸의 모양을 수놓아 옷을 만들지 않았으니, 그 마음씀이 어찌 참으로 어질고 너그러워서였겠는가.【[頭註]不以生類爲藥……豈誠仁恕:梁나라 天監 16년(517)에 太醫에게 명령을 내려 생명이 있는 것으로 藥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령을 내리기를 “무늬 있는 비단에 仙人과 鳥獸의 모양을 수놓지 못하게 하라.” 하니, 옷을 재단할 때에 비단 위에 있는 사람과 조수의 무늬가 가위에 잘리는 것이 仁恕의 도리에는 어긋난다고 생각해서였다.】 佛氏의 말을 믿어서 장래의 복과 보답을 바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한번 나라를 취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자 심지어 두 군주【두 군주는 齊나라 東昏侯 蕭寶卷과 和帝 蕭寶融이다.】를 시해하고 六寶【六寶는 蕭寶晊‧蕭寶玄‧蕭寶夤‧蕭寶攸‧蕭寶嵩‧蕭寶貞이다.】를 죽이면서도 돌아보지 않았고, 한번 나라를 지키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자 浮山堰【北魏에서 항복해 온 자가 계책을 올려 淮水에 제방을 쌓아 壽陽城에 물을 댈 것을 청하니, 梁主가 徐州와 揚州의 백성 20만 명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았다.】을 만들어 壽陽城에 물을 대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 리 안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이 모두 부역해서 등짐을 지는 자들이 어깨가 헐어서 살이 뚫리고 추위와 더위와 역병에 죽은 자가 서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둑이 터지자 淮水 연안에 있는 수십만 명이 모두 물고기 밥이 되어 비록 닭과 개라도 편안할 수가 없었으니, 이를 일러 사랑하지 않는 바를 미루어 사랑하는 바에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의로움으로 죽이는 것이 仁이 됨에 해롭지 않고, 이익으로 죽이지 않는 것이 不仁이 됨을 면치 못하니, 仁과 不仁의 효험은 義와 利의 구분일 뿐이다.”

[己亥] 梁天監十八年, 魏神龜二年

[己亥] 〈梁天監十八年이요 魏神龜二年이라〉

기해(519) - 梁나라 天監18년이고, 魏나라 神龜 2년이다. -

魏殿中尙書崔亮이 爲吏部尙書하다 이 奏爲格制하야 不問士之賢愚하고 專以停解【停官解任也라】日月爲斷하니 沈滯者皆稱其能이라 洛陽令琡이 上書言 黎元之命이 係於長吏하니 若以選曹唯取年勞하고 不簡【簡은 與揀通이라】賢否인댄 義均行雁하야 次若貫魚하야 執簿呼名에 一吏足矣니 數人而用이면 何謂銓衡【稱量人物也라 銓은 衡也, 量也라】이리잇고 書奏에 不報러니 其後에 甄琛等이 繼爲吏部尙書하야 利其便己하야 踵而行之하니 魏之選擧失人이 自始也러라

致堂管見曰 聖帝明王이 代天理物에 莫急於求賢才而任使之라 今夫抱關者는 啓閉必以時하고 擊柝者는 晨夕必有節이니 爲委吏而會計不當이면 則蓄積缺焉하고 爲乘田而牛羊不息이면 則芻牧闕焉이니 是皆小役細務로되 猶不可任非其才라 若夫環百里而爲縣에 縣有令하고 環千里而爲州에 州有守하니 所統凡幾民이며 所治凡幾事완대 乃不選擇勝其任者하야 畀之하고 而付諸年格고 夫天下之善人少하고 不善人多하며 才者無幾하고 不才者皆是也어늘 不問其才하고 專以停解日月爲斷이면 其爲蠹政害民이 不旣多乎아 自崔亮制年格으로 後世襲以爲常하야 更明君碩輔 亦衆矣로되 而竟不能易이라 彼其以一定之法으로 用天下之才면 其爲力이 若不勞라 故로 後世守之而勿失하니 不知天下之人被其害者 深矣니 吁可歎哉인저

魏나라의 殿中尙書崔亮이 吏部尙書가 되었다. 崔亮이 새로운 선발 제도를 만들 것을 奏請하여 선비(관원)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재직【停解는 停官과 解任이다.】한 年數로써 단정을 하니, 승진하지 못했던 자들이 모두 崔亮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다.

洛陽令薛琡이 上書하기를 “만백성의 목숨이 長吏(지위가 높은 지방관)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選曹(吏部)에서 관원을 선발할 때에 오직 재직한 年數를 취하여 기준으로 삼고 재능의 高下를 가리지【簡字는 揀字(선별)와 통한다.】 않는다면 〈재직한 연수가 차면 저절로 관직에 임용되어서〉 行義는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항렬과 같아지고 차례는 줄줄이 꿰어놓은 물고기 꿰미와 같아져서 장부를 쥐고 호명할 때에 아전 한 명이면 충분할 것이니, 사람이 재직한 연수만을 헤아려서 등용한다면 어찌 銓衡【銓衡은 人物을 저울질하고 헤아리는 것이다. 銓은 저울질하는 것이고 헤아리는 것이다.】이라고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上書를 올린 뒤에 魏主가 회답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 뒤 甄琛 등이 崔亮을 이어 吏部尙書가 되어서 자신에게 편리함을 이롭게 여겨 뒤따라서 이를 시행하니, 魏나라가 인재를 선발할 때 적임자를 뽑지 못한 것이 崔亮으로부터 비롯되었다.

致堂(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聖明한 帝王이 하늘을 대신하여 물건(사람)을 다스릴 때에 덕이 있는 자와 재주 있는 자를 찾아 임무를 맡기고 일을 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지금 관문을 지키는 자는 관문을 열고 닫는 것을 반드시 제때에 하고, 목탁을 치는 자는 새벽과 저녁에 반드시 절도가 있게 하니, 委吏(창고를 맡은 관리)가 되어서 회계를 마땅하게 하지 못하면 저축이 모자라게 되고, 乘田(축산을 맡은 관리)이 되어서 소와 양을 번식시키지 못하면 芻牧(가축)이 부족하게 되니, 이는 모두 작은 일과 하찮은 일인데도 오히려 재주 없는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 리를 한정하여 縣을 만들되 縣에는 縣令이 있고, 천 리를 한정하여 州를 만들되 州에는 太守가 있으니, 통솔하는 백성이 모두 몇 명이며 다스리는 일이 모두 몇 가지이기에 마침내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를 가려서 맡기지 않고 停年格에 맡긴단 말인가. 천하에 善한 사람은 적고 不善한 사람은 많으며, 재주 있는 자는 몇 명 안 되고 재주 없는 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이러한 사람들인데, 그 재주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오직 재직한 연수로써 단정을 한다면 정사를 좀먹고 백성을 해침이 너무 많지 않겠는가.

崔亮이 停年格을 만든 뒤로 후대에 이를 인습하여 떳떳한 법으로 삼아서, 현명한 군주와 훌륭한 輔弼之臣이 다스리는 세상을 거쳐온 것이 또한 많았으나 끝내 이것을 바꾸지 못하였다. 저들은 일정한 법으로써 천하의 인재를 등용한다면 별로 수고롭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후세에 이것을 지키고 잃지 않았으니, 천하 사람 중에 그 폐해를 입은 자가 많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아! 한탄스럽다.”

[丙午] 梁普通七年, 魏孝昌二年

[丙午] 〈梁普通七年이요 魏孝昌二年이라〉

병오(526) - 梁나라 普通 7년이고, 魏나라 孝昌 2년이다. -

九月에 魏葛榮【魏五原降戶單于修禮가 反魏하니 長孫稚討不克이라 賊帥元洪業이 殺修禮降魏러니 其黨葛榮이 復殺洪業하고 又襲殺魏都督章武融而自稱天子하다】이 自稱天子하고 國號를 齊라하고 改元廣安하다

9월에 魏나라 葛榮【魏나라 五原의 降戶인 單于 修禮가 魏나라를 배반하자, 長孫稚가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賊의 장수인 元洪業이 單于 修禮를 죽이고 魏나라에 항복하였는데, 그 도당인 葛榮이 다시 元洪業을 죽이고 또 魏나라 都督인 章武融을 습격하여 죽이고서 스스로 天子라 칭하였다.】이 스스로 天子라 칭하고, 國號를 齊라 하고 廣安으로 개원하였다.

○ 魏盜賊日滋하야 征討不息하니 國用이 耗竭하야 豫徵六年租調호되 猶不足이라 乃罷百官所給酒肉하고 又稅入市者人一錢하고 及邸店에 皆有稅하니 百姓이 嗟怨이러라

○ 魏나라 경내에 도적이 날로 불어나서 정벌하고 토벌함이 그치지 않으니,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6년치 租調(조세)를 미리 징수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였다. 이에 백관들에게 지급하는 술과 고기를 없애고, 또 시장에 들어오는 자에게 한 사람당 一錢씩 세금을 징수하고 邸店에도 모두 세금을 물리니, 백성들이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戊申] 梁大通二年, 魏孝昌四

[戊申] 〈梁大通二年이요 魏孝昌四요 敬宗孝莊帝子攸永安元年이라〉

무신(528) - 梁나라 大通 2년이고, 魏나라 孝昌 4년이고, 敬宗孝莊帝元子攸의 永安 元年이다. -

正月에 魏太后再臨朝【太后胡氏는 肅宗詡之母니 而武始伯國珍之女也라 頗事粧飾하고 穢德彰聞이라 太傅(靑)[淸]河王懌이 美風儀러니 胡太后逼而幸之라 江陽王繼子元叉 爲侍中, 領軍將軍하고 叉妻胡氏爲女侍中하니 叉恃寵驕恣어늘 懌이 每裁抑之하니 叉怨之하다 庚子年에 遂殺懌하고 幽太后于北宮하고 詐爲太后詔하야 稱有疾하야 還政魏主러니 乙巳年에 太后復臨朝하야 誅元叉하니라】以來로 嬖倖用事하니 政事縱弛하고 威恩不立【羽林, 虎賁作亂하야 殺將軍張彛之子仲瑀어늘 只誅八人하고 其餘는 不復窮治하다 高歡見之하고 還家하야 傾財結客曰 宿衛焚大臣之第어늘 朝廷懼而不問하니 事可知矣라하니라】하야 盜賊蜂起【言盜賊之衆이 如蜂之飛起也라】하고 封疆日蹙【日蹙은 謂秦, 隴以西와 冀, 幷以北은 皆爲盜區요 淮汝淮泗之間은 皆爲梁所侵也라】이라 是時에 討虜大都督爾朱榮【爾朱는 複姓이라 其先은 契胡部落人이니 代爲酋帥하야 居爾朱川일새 因以爲氏하니라[頭註]爾朱榮은 本東胡種이니 高歡妃父라】이 兵勢彊盛하니 魏朝憚之라 高歡【渤海蓨人이라 字賀六渾이니 是爲北齊神武帝라】이 往歸한대 曰 但言爾意하라 曰 今天子闇弱하고 太后淫亂하야 嬖孼【孼者는 猶木之有蘖生也라】擅命하고 朝政不行하니 以明公雄武로 乘時奮發이면 霸業【霸는 把也니 把持諸侯之權이요 又把持天子之政이라 或作伯하니 蓋取牧伯長諸侯之義러니 後人이 恐與侯伯字相混이라 故借用霸字하야 以別之하니라】을 可擧鞭而成하리이다 이 大悅하야 自是로 每參軍謀하다

[新增]胡氏曰 魏之中葉엔 以門地【家門地位라】取士러니 及其衰也하야는 以停年【卽停解日月이니 見上己亥年이라】用人이라 於是에 英雄散逸하고 才智不用하니 思有以振而發之로되 而天下始多故矣라 向使魏朝收而用之런들 二百年之基業이 豈易傾乎아

정월에 魏나라 胡太后가 다시 조정에 臨御【太后 胡氏는 肅宗 元詡의 母后이니, 武始伯 胡國珍의 딸이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추문이 자자하였다. 太傅인 淸河王 元懌이 풍채가 아름다웠는데, 胡太后가 강제로 핍박하여 총애하였다. 江陽王 元繼의 아들인 元叉는 侍中‧領軍將軍이 되고 元叉의 아내인 胡氏는 女侍中이 되었는데, 元叉가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자 元懌이 그때마다 제재하고 억제하니 元叉가 그를 원망하였다. 庚子年(520)에 元叉가 마침내 元懌을 죽이고 太后를 北宮에 유폐시키고, 거짓으로 太后의 詔書를 만들어 병이 있다고 칭하고서 정권을 魏主에게 돌려주었는데, 乙巳年(525)에 太后가 다시 조정에 임어하여 元叉를 죽였다.】한 뒤로 총애하는 小人들이 用事하니, 정사가 해이하고 조정의 위엄과 은혜가 서지 못하여【羽林軍과 虎賁衛가 난을 일으켜서 將軍 張彛의 아들 張仲瑀를 죽였는데, 胡太后가 다만 8명만 주벌하고 그 외의 사람은 더 이상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 高歡이 이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재물을 털어 문객과 교분을 맺으며 말하기를 “宿衛兵이 大臣의 집을 불태웠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못하니, 일을 알 만하다.” 하였다.】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도적의 무리가 벌이 떼 지어 일어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국경이 나날이 축소되었다.【나날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秦‧隴 이서와 冀州‧幷州 이북은 모두 도적들의 소굴이 되고, 淮‧汝와 淮‧泗 지역은 모두 梁나라에게 침식당하였음을 이른다.】 이때 討虜大都督 爾朱榮【[釋義]爾朱는 複姓이다. 그 선조는 契胡(긱호, 글호) 부락 사람이니, 대대로 酋長이 되어 爾朱川에 거주하였으므로 인하여 姓氏로 삼은 것이다.[頭註]爾朱榮은 본래 동쪽 오랑캐 종족이니, 高歡의 后妃의 아버지이다.】의 군세가 강성하니, 魏나라 조정에서 그를 두려워하였다. 高歡【高歡은 渤海 蓨縣 사람이다. 字가 賀六渾이니, 이가 바로 北齊의 神武帝이다.】爾朱榮을 찾아가자, 爾朱榮이 말하기를 “다만 너의 뜻을 말해 보라.” 하였다. 高歡이 말하기를 “지금 天子는 어리석고 약하며 太后는 음란하여 총애하는 小人들【孼은 나무에 움이 싹트는 것과 같은 것이다.】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明公의 뛰어난 武略을 가지고 이러한 기회를 틈타 분발한다면 채찍만 들고도 霸業【霸는 손으로 쥐는 것이니, 제후의 권력을 쥐고 또 천자의 정사를 거머쥐는 것이다. 혹은 伯으로 쓰니, 牧伯이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는 뜻을 취한 것인데, 후인들이 侯伯이라는 글자와 혼동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霸字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爾朱榮이 크게 기뻐하여 이로부터 늘 군사 작전에 高歡을 참여시켰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魏나라 중엽에는 門地(門閥)【門地는 家門의 地位이다.】로써 선비를 뽑았는데, 쇠퇴함에 미쳐서는 재직한 연수【停年은 곧 직임을 맡은 세월이니, 停解는 앞의 己亥年條(519)에 보인다.】로써 사람을 등용하였다. 이에 영웅들이 흩어지고 재주 있는 자와 지혜로운 자가 등용되지 못하니, 진작하여 분발하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천하에 비로소 변고가 많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魏나라 조정에서 인재를 거두어 등용했더라면 2백 년의 基業이 어찌 쉽게 기울어졌겠는가.”

魏肅宗【明帝詡라】이 亦惡鄭儼, 徐紇等호되 逼於太后하야 不能去라 密詔하야 擧兵內向하야 欲以脅太后한대 이 以高歡爲前鋒하야 行至上黨하니 魏主復以私詔止之하다 , 이 恐禍及己하야 陰與太后로 謀酖魏主하다 二月癸丑에 魏主暴殂【暴은 急也라】어늘 太后改立故臨洮【隴西邑이니 屬後魏라】王寶暉世子釗【文帝宏之孫이니 太后欲久專政故로 利其幼而立之라】하니 始生三歲라 爾朱榮이 聞之하고 與元天穆【幷州刺史라】議하야 以彭城武宣王【勰은 顯祖獻文帝弘之子라】이 有忠勳하고 其子長樂王子攸 素有令望이라하야 欲立之하다 四月에 이 濟河하니 百官이 奉璽綬하고 備法駕하야 迎敬宗【名子攸니 獻文之孫이라 卽帝位하니 是爲敬宗孝莊皇帝라】於河橋【榮이 沈太后胡氏及幼主釗于河하고 殺王公以下二千人하야 自爲太原王이라】하다

[新增]胡氏曰 魏氏之亂이 始於世宗奉佛하야 政事不修하고 重以肅宗幼弱하고 胡后稱制하야 穢德彰聞이요 元澄, , 【司徒任城王澄과 太保高陽王雍이 同總國事라 懌은 太傅淸河王也라】은 才薄力弱하고 劉騰, 元叉【劉騰은 衛將軍이니 後爲司空이요 元叉는 見上再臨朝注라】는 擅權黷貨하야 以召六鎭【時에 爾朱榮爲車騎將軍으로 幷, 肆, 汾, 廣, 恒, 雲六州討虜大都督이라】之兵이라 雖然이나 其間에 非無忠謀至計로 排難解紛者어늘 而朝廷忽焉하야 如元匡, [[崔(洸)[光]]], 袁飜, 李崇, 張普惠, [[薛(淑)[琡]]], 元孚, [[元(深)[諶]]], 元順, [[元(纂)[贊]]], 辛雄, 路思令, 楊椿, [[源子(邕)[雍]]]之言을 皆不聽也라 然則非爾朱榮, 高歡이 能爲魏毒也요 魏自亡爾니라

魏나라 肅宗【肅宗은 明帝 元詡이다.】이 또한 鄭儼徐紇 등을 미워하였으나 太后에게 견제당하여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魏主가 은밀히 爾朱榮에게 명령을 내려 군대를 일으켜서 서울로 향하게 하여 太后를 협박하고자 하였다. 爾朱榮高歡을 先鋒으로 삼아 행군하여 上黨에 이르자, 魏主가 다시 은밀히 명령을 내려 중지하게 하였다. 鄭儼徐紇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은밀히 太后와 함께 魏主를 독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2월 癸丑日(25일)에 魏主가 갑자기【暴은 갑자기이다.】 죽자, 太后가 다시 죽은 臨洮【臨洮는 隴西의 고을이니, 後魏에 속한다.】元寶暉의 世子인 元釗【元釗는 文帝 元宏의 손자이니, 太后가 정사를 오랫동안 전횡하고자 하였으므로 元釗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롭게 여겨 세운 것이다.】를 세우니, 元釗의 나이 세 살이었다. 爾朱榮이 이 말을 듣고 元天穆【元天穆은 幷州刺史이다.】과 의논하여 彭城武宣王 元勰【元勰은 顯祖 獻文帝 元弘의 아들이다.】이 충성을 다해 세운 공훈이 있고 그 아들長樂王元子攸가 평소에 훌륭한 명망이 있다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4월에 爾朱榮이 黃河를 건너오니, 百官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法駕를 갖추어서 敬宗(元子攸)【敬宗은 이름이 子攸이니 獻文帝의 손자이다.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敬宗 孝莊皇帝이다.】을 河橋에서 맞이하였다.【爾朱榮이 太后 胡氏와 어린 군주인 元釗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王公 이하 2천 명을 죽이고서 스스로 太原王이 되었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魏나라의 혼란은 世宗이 佛法을 신봉하여 정사가 닦여지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고, 다시 肅宗이 어리고 약하며 胡后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해서 추문이 드러난 데에서 더욱 심해졌다. 元澄‧元雍‧元懌【司徒 任城王 元澄과 太保 高陽王 元雍이 함께 國事를 총괄하였다. 元懌은 太傅 淸河王이다.】은 재주가 부족하고 힘이 약하였으며, 劉騰과 元叉【劉騰은 衛將軍이니 뒤에 司空이 되었고, 元叉는 앞의 戊申年(528) ‘魏太后再臨朝’의 注에 보인다.】는 권력을 독점하고 재물을 탐하여 爾朱榮의 六鎭【당시에 爾朱榮은 車騎將軍으로 幷州‧肆州‧汾州‧廣州‧恒州‧雲州 등 6州의 討虜大都督이었다.】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충성스러운 모의와 지극한 계책으로 國難을 물리치고 紛亂을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홀대하여 元匡崔光袁飜李崇張普惠薛琡元孚元諶元順元贊辛雄路思令楊椿源子雍 같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爾朱榮高歡이 魏나라의 해독이 된 것이 아니라, 魏나라가 스스로 망하였을 뿐이다.”

北海王【於帝爲從兄弟라】來奔이어늘 梁主魏王하고 遣陳慶之하야 將兵送之還北하다

魏나라 北海王 元顥【北海王 元顥는 황제에게 從兄弟가 된다.】가 梁나라로 도망오자, 梁主元顥魏王으로 삼고陳慶之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호송하여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己酉] 梁中大通元年, 魏永安二年

[己酉] 〈梁中大通元年이요 魏永安二年이라〉

기유(529) - 梁나라 中大通 元年이고, 魏나라 永安 2년이다. -

魏顥陳慶之로 進拔滎城하고 卽帝位於睢陽城南하다

魏나라 元顥陳慶之와 함께 진격하여 滎城을 함락시키고睢陽城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 五月에 魏顥克梁國【今汴州也라】하고 引兵西하야 拔滎陽하니 魏主出避어늘 入洛陽宮하야 改元建武하다 慶之以數千之衆으로 自發銍縣으로 至洛陽히 取三十二城하고 四十七戰하야 所向皆克이라 爾朱榮이 聞魏主北出하고 馳傳하야 見魏主於長子【註見周威烈王二十三年하니라】하고 行且部分이라 卽日南還할새 이 爲前驅하야 與爾朱兆, 賀拔勝【兆는 榮之從子也요 賀拔은 複姓이니 大都督이라】等으로 進擊하니 帥麾下數百騎하고 南走어늘 陳慶之帥衆東還하니 所得諸城이 復降於魏하다 至臨潁縣하니 卒江豐이 斬之하야 傳首洛陽하다

○ 5월에 魏나라 元顥가 梁國【梁國은 지금의 汴州이다.】을 점령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滎陽을 함락하니, 魏主가 성을 나가 元顥를 피하였다. 元顥가 洛陽宮으로 들어가 建武로 개원하였다. 陳慶之가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銍縣을 출발한 뒤로 洛陽에 이르기까지 32개의 성을 취하고 47차례 싸워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爾朱榮魏主가 북쪽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역마를 달려 長子縣【長子는 周 威烈王 23年條에 註가 보인다.】에서 魏主를 뵙고 한편으로는 행군하고 한편으로는 구원 부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魏主가 당일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爾朱榮이 선두가 되어서 爾朱兆賀拔勝【[頭註]爾朱兆, 賀拔勝:爾朱兆는 爾朱榮의 從子이고, 賀拔은 複姓이니 賀拔勝은 大都督이다.】 등과 함께 元顥를 공격하니, 元顥가 휘하의 수백 騎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陳慶之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陳慶之가 차지했던 여러 城이 다시 魏나라에 항복하였다. 元顥臨潁縣에 이르니, 병졸 江豐이 그의 목을 베어서 首級을 洛陽에 전달하였다.

○ 九月에 梁主幸同泰寺하야 設四部無遮大會하다 釋御服, 持法衣하고 行淸淨大捨【釋氏語錄에 三捨는 謂內外身心을 一時俱捨하고 隨方應物하야 能所皆忘을 是謂大捨요 行道布德하야 無所希望을 是謂中捨요 修行衆善하야 有所希望을 是謂小捨라】하고 素床瓦器하며 親爲四衆【釋氏經云 比丘, 尼는 出家二衆也니 比丘는 僧也요 尼는 女僧也라 梵語比丘는 華言乞士니 謂士於諸佛에 乞法하야 資益色身也라 優婆塞, 優婆夷 在家二衆也니 如今之苦行이라 中華翻爲近住하니 言受戒行하야 堪近住也라】하야 講涅槃經【梵語涅槃은 華言示寂也라 佛以人死면 其精神尙存하니 佛之死는 示寂滅而已요 非眞死也라 多心經注에 梵語涅槃은 此云無爲라하고 楞伽經云 乃不生不死之地니 一切修行之所依歸也라하니라】하니 群臣이 以錢一億萬으로 奉贖하고 表請還宮이어늘 三請에 乃許하다

[新增]朱子胡氏云 佛行有五要하니 舍(捨)其一也라 梁武爲帝王하야 享天位하야 內蓄姬妾하고 外列官師하며 富貴之崇하고 子孫之衆하고 宮室城池로 守衛之密이로되 猶以爲未足하야 又命將出兵하야 爭奪于外하야 惟恐失之하니 安在其能舍乎아 不惟君子非之라 爲佛之道如達磨【南天竺國人이니 得般若多羅하야 傳正法眼藏이러니 梁武詔至金陵하야 問道라 後至于嵩山少林寺하야 面壁九年에 端坐而逝라】者 亦不取也니라 或曰 然則達磨之言이 不亦可取歟아 曰 爲佛之道者는 淺深精粗 雖所得不同이나 要其極致하면 歸于殄滅倫理라 以之爲己면 則逆而不祥이요 以之爲人이면 則偏而不公이요 以之爲天下國家면 蓋無所處而得其當이니 儒者棄而絶之 可也니라

尹氏曰 甚哉라 梁武之愚也여 人生天地間에 有此生則有此身이라 生不可滅이면 則身不可捨니 抑不知梁武之所謂捨者 以何爲捨爾라 若以屛【屛은 除也요 斥也라】富貴, 棄妻子로 爲捨耶인댄 則是爲捨物이요 而非曰捨身也며 若以委其身於佛氏로 爲捨耶인댄 則爲佛者 當取其身而用之 可也라 今旣曰捨로되 而其身猶在면 則是初未嘗捨也니 身未嘗捨而强名曰捨면 則固已昧其心於不誠矣라 他時諸臣이 又以金而贖其身하니 不知當其捨之之時에 孰從而受之며 而贖之之時에 又孰從而歸之也오 梁主는 身非賣僮而可捨可贖이니 此不惟愚誑其民, 愚誑其身이요 抑且愚誑其所謂佛者라 末年荷荷之時【見下己巳年이라】에 又復戀戀而不能捨는 何哉오 孟子有言捨魚而取熊掌하고 捨生而取義라하시니 夫魚熊掌은 二物也니 固可捨其一而取其一이어니와 若捨生取義면 則必殺身徇義而後可니 萬一其生猶在면 則亦不謂之捨矣니라

○ 9월에 梁主가 同泰寺에 행차하여 四部無遮大會를 열었다. 이때 梁主가 御衣를 벗고 法衣를 입으며, 淸淨大捨【釋氏의 語錄에 “三捨는 內外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모두 버리고 방편에 따라 사물에 응해서 能(인식의 주체)과 所(인식의 대상)를 모두 잊는 것을 大捨라 이르고, 道를 행하고 德을 펴면서 바라는 바가 없는 것을 中捨라 이르고, 많은 善行을 닦으면서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을 小捨라 이른다.” 하였다.】를 행하고 밥을 먹을 때에 소박한 상과 질그릇을 사용하며, 친히 四衆【釋氏의 經에 이르기를 “比丘와 比丘尼는 出家한 두 무리이니, 比丘는 승려이고 比丘尼는 여승이다. 梵語의 比丘는 중국어로 乞士이니, 선비가 여러 부처에게 法을 청하여 色身(육신)을 유익하게 함을 이른다. 優婆塞(우바새)와 優婆夷(우바이)는 在家의 두 무리이니, 지금의 苦行과 같다. 중국어로 번역하면 近住라 하니, 戒行을 받아서 三寶에 가까이 머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을 위하여 涅槃經【梵語의 涅槃은 중국어로 示寂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신은 오히려 남아 있으니, 불교의 죽음은 寂滅을 보일 뿐이고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多心經≫ 注에 “梵語의 涅槃은 無爲를 이른다.” 하였고, ≪楞伽經≫에 “이것(涅槃)은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 곳이니, 일체의 수행이 의귀하는 바이다.” 하였다.】을 강하니, 여러 신하들이 一億萬錢을 바쳐 대속하고 表文을 올려 환궁할 것을 청하였는데, 세 번을 청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新增]朱子가 말하였다.

胡氏가 이르기를 ‘부처의 행실에는 五要가 있으니, 捨身(육신을 버림)이 그중 하나이다. 梁武帝가 帝王이 되어 天子의 지위를 누려서 안으로는 姬妾을 기르고 밖으로는 백관을 나열하며, 부귀가 높고 자손들이 많고 宮室과 城池로 호위하기를 치밀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다시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밖에서 다투고 빼앗아 행여 잃을까 두려워하였으니, 捨身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는 君子들이 비난할 뿐만 아니라 佛法을 행하는 達磨【達磨는 南印度 사람이니 般若多羅尊者의 제자가 되어 正法을 전수받았는데, 梁나라 武帝가 명령을 내려 金陵에 이르게 하여 道에 대해 물었다. 뒤에 嵩山의 少林寺에 이르러 面壁한 지 9년 만에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 같은 자도 또한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達磨의 말도 취할 만하지 않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佛法을 행하는 자들은 깊고 얕음과 정밀하고 거친 것이 비록 얻은 바가 똑같지 않으나 그 극치를 요약해 보면 윤리를 없애는 데로 귀결된다. 이것을 자신에게 행하면 逆이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이것을 남에게 베풀면 편벽되어 공평하지 못하며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면 처하는 곳마다 마땅함을 얻지 못하니, 儒者는 버리고 끊는 것이 옳다.’ 하였다.”

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심하다, 梁 武帝의 어리석음이여.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남에 이 生命이 있으면 이 육신이 있으니, 生命을 없앨 수 없다면 육신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梁 武帝의 이른바 ‘捨’라는 것은 무엇을 捨라고 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약 富貴를 물리치고【屛은 제거하는 것이고 물리치는 것이다.】 妻子를 버리는 것을 捨라고 했다면 이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요 육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만약 자기 육신을 佛氏에게 바치는 것을 捨라고 했다면 부처가 그 육신을 취하여 써야 할 것이다. 이제 이미 捨라고 말하였으나 육신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는 애당초 육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니, 육신을 일찍이 버리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捨라고 이름한다면 참으로 이미 그 마음을 진실하지 못함으로 어둡게 한 것이다. 후일 여러 신하들이 또 돈으로 贖身하였으니, 捨身할 때에는 이 육신을 누가 받았으며 贖身할 때에는 이 육신을 또 누가 돌려주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梁나라 군주의 육신은 팔려간 하인처럼 捨身하거나 贖身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백성들을 우롱하고 속이며 자신을 우롱하고 속였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부처를 우롱하고 속인 것이다. 말년에 한탄하고 죽을 때에【荷荷는 해설이 뒤의 己巳年條(549)에 보인다.】 다시 연연해하며 捨身하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孟子가 말씀하기를 ‘魚物을 버리고 熊掌을 취하며,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한다.’ 하였다. 어물과 웅장은 두 가지 물건이어서 진실로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할 수 있지만, 만약 생명을 버리고 義를 취해야 한다면 반드시 몸을 죽이고 義를 따른 뒤에야 가능하니, 만일 생명이 그대로 있다면 또한 이것을 捨라고 이르지 못한다.”

[庚戌] 梁中大通二年, 魏永安三年

[庚戌] 〈梁中大通二年이요 魏永安三年이요 建明元年이라〉

경술(530) - 梁나라 中大通 2년이고, 魏나라 永安 3년이고, 元曄의 建明 元年이다. -

八月이라 魏爾朱榮이 雖居外藩이나 遙制朝政하니 樹置親黨하야 布列魏主左右하야 伺察動靜【伺는 候也라】하야 大小를 必知라 魏主雖受制於이나 然性勤政事하야 朝夕不倦하야 數親覽辭訟하고 理寃獄하니 이 聞之하고 不悅이라 魏主旣外逼於하야 恒怏怏不樂이러니 遂與城陽王로 圖殺之하다 是夜에 爾朱世隆【榮之從弟니 時爲僕射라】이 帥部曲하야 焚西陽門하고 出屯河陰하다 十月에 汾州刺史爾朱兆死하고 自汾州로 帥騎據晉陽이러니 世隆이 至長子어늘 來會之하야 共推太原太守長廣王【太武帝燾子요 追尊景穆皇帝晃之孫이라】하야 卽皇帝位하고 大赦하고 改元建明하다

8월이다.魏나라 爾朱榮이 비록 몸은 外藩(太原王의 封地)에 있었으나 멀리서 조정의 정사를 控制하니, 黨與와 신임하는 자들을 많이 심어놓아서 魏主의 좌우에 포진시키고 조정의 動靜을 사찰【伺는 살핌이다.】하게 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정사를 반드시 알았다. 魏主가 비록 爾朱榮에게 控制당하였으나 타고난 성품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조석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자주 辭訟을 직접 살피고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니, 爾朱榮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魏主가 이미 밖으로 爾朱榮에게 핍박당하여 항상 앙앙불락했는데, 마침내 城陽王元徽와 함께 도모하여 爾朱榮을 죽였다. 이날 밤(9월 25일)에 爾朱世隆【爾朱世隆은 爾朱榮의 從弟이니, 이 당시 尙書左僕射였다.】爾朱榮의 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西陽門을 불태우고 나가서 河陰에 주둔하였다.

10월에 汾州刺史爾朱兆爾朱榮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汾州로부터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晉陽을 점거하였는데, 爾朱世隆이 長子縣에 이르자 爾朱兆가 와서 회동하여 太原太守인 長廣王 元曄【長廣王 元曄은 太武帝 拓跋燾의 아들이고, 景穆皇帝로 追尊된 拓跋晃의 손자이다.】을 함께 추대해서 황제에 즉위하게 한 다음 크게 사면하고 建明으로 개원하였다.

○ 十二月에 魏輕兵으로 倍道兼行하야 從河橋西渡하다 先是에 敬宗【魏莊帝子攸廟號라】이 以大河深廣이라하야 謂未能猝濟러니 是日에 水不沒馬腹하고 暴風에 黃塵이 漲天이라 騎叩宮門이어늘 宿衛乃覺하고 彎弓欲射로되 矢不得發이라 一時散走어늘 騎執其主하야 鎖於永寧寺樓上이러니 遷於晉陽하야 縊殺之하다

○ 12월에 魏나라 爾朱兆가 경무장한 기병으로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河橋의 서쪽으로부터 건너왔다. 이보다 앞서 敬宗【魏나라 莊帝 元子攸의 廟號이다.】은 黃河가 깊고 넓어서 爾朱兆가 갑자기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날 黃河의 물이 말의 배에도 차지 않았고 폭풍이 불어 누런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爾朱兆의 기병이 궁궐 문을 공격하자, 宿衛兵이 비로소 깨닫고 활을 당겨 쏘고자 하였으나 바람이 너무 거세어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일시에 흩어져 도망하니, 爾朱兆의 기병이 군주를 사로잡아 永寧寺 樓上에 가두었는데, 晉陽으로 옮겨서 목 졸라 죽였다.

○ 魏初에 葛榮部衆流入幷, 肆【二州名이라】者 二十餘萬이러니 爲契胡【謂爾朱氏也니 見上戊申年이라 契은 音喫이니 如契丹之契이라】陵暴하야 皆不聊生하야 謀亂不止라 患之하야 問計於高歡한대 曰 宜選王腹心하야 使統之라한대 遂以其衆委焉하다 이 以醉로 恐醒而悔之하야 遂出宣言호되 受委하야 統州鎭兵하니 可集汾東하야 受號令하라하고 乃建牙陽曲川하니 軍士素惡而樂屬하야 莫不皆至라 長史慕容紹宗이 諫曰 不可하다 方今에 四方紛擾하야 人懷異望하고 高公은 雄才蓋世하니 復使握大兵於外면 譬如借蛟龍以雲雨하야 將不可制矣리이다 弗聽하다

○ 魏나라 초기에 葛榮의 部衆으로서 流落하다가 幷州와 肆州【幷과 肆는 두 州의 이름이다.】로 들어간 자가 20여만 명이었는데, 契胡(爾朱氏)【契胡는 爾朱氏를 이르니, 앞의 戊申年條(528)에 보인다. 契은 音이 긱(글)이니, 契丹(글안)의 契과 같다.】에게 능멸당하여 모두 살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爾朱兆가 이를 걱정하여 高歡에게 계책을 묻자, 高歡이 말하기를 “왕의 심복을 뽑아서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爾朱兆가 마침내 葛榮의 무리를 高歡에게 맡겼다. 高歡爾朱兆가 이때 술에 취했으므로 술이 깨면 후회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軍營에 나와서 선언하기를 “내가 王의 위임을 받아 州鎭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니, 汾河 동쪽에 집결하여 나의 호령을 받으라.” 하고는 마침내 陽曲川(汾水)에 牙旗를 꽂으니, 軍士들이 평소 爾朱兆를 미워하고 高歡에게 소속되는 것을 즐거워하여 모두 이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長史慕容紹宗이 간하기를 “안 됩니다. 지금 사방이 분분하고 소란해서 사람마다 모반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며 高公은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으니, 그로 하여금 다시 밖에서 大軍을 장악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면 蛟龍에게 구름과 비를 빌려 주는 것과 같아서 장차 控制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爾朱兆가 듣지 않았다.

[辛亥] 梁中大通三年, 魏節閔帝恭普泰元

[辛亥] 〈梁中大通三年이요 魏節閔帝普泰元이요 (王)[[[元]朗]]中興元年이라〉

신해(531) - 梁나라 中大通 3년이고, 魏나라 節閔帝元恭의 普泰 元年이고, 元朗(後廢帝)의 中興 元年이다. -

二月에 魏爾朱世隆이 以長廣王之命【以曄疎遠하고 又無人望일새 欲更立近親이라】으로 禪位于廣陵王【是爲節閔皇帝라[頭註]爾朱世隆이 廢其主曄하야 爲東海王하고 立廣陵王恭이라 恭은 獻文帝弘之孫이요 而廣陵王羽之子라】하다 魏高歡이 起兵討爾朱氏하니 以敬宗也일새라

2월에 魏나라 爾朱世隆長廣王元曄의 命으로【元曄이 소원하고 또 人望이 없으므로 가까운 친족으로 바꾸어 세우고자 한 것이다.】廣陵王 元恭(前廢帝)【[原註]廣陵王은 바로 節閔皇帝이다.[頭註]爾朱世隆이 그 군주 元曄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고 廣陵王 元恭을 세웠다. 元恭은 獻文帝 拓跋弘의 손자이고, 廣陵王 元羽의 아들이다.】에게 讓位하였다. 魏나라 高歡이 군대를 일으켜 爾朱氏를 토벌하니, 爾朱兆敬宗(孝莊帝)元子攸를 시해하였기 때문이었다.

[壬子] 梁中大通四年, 魏普泰二, 中興二, 孝武帝脩永熙元年

[壬子] 〈梁中大通四年이요 魏普泰二요 中興二요 孝武帝永熙元年이라〉

임자(532) - 梁나라 中大通 4년이고, 魏나라 元恭의 普泰 2년이고, 元朗의 中興 2년이고, 孝武帝元脩(出帝)의 永熙 元年이다. -

魏歡이 進擊爾朱兆等於鄴하야 大破之하니 自殺이어늘 盡滅爾朱氏之黨하고 遂幽節閔帝於崇訓佛寺하고 更立平陽王【獻文帝弘之子가 彭城王勰이요 勰子가 莊帝子攸요 子攸子가 廣平王懷니 懷之子也라】하니 戊子에 孝武帝【名脩니 孝莊孫이요 廣平王之子也라】卽位於東郭之外하야 酖節閔帝於門下省하다

魏나라 高歡이 鄴城으로 진격하여 爾朱兆 등을 대파하니, 爾朱兆가 자살하였다. 爾朱氏의 黨을 모두 없앤 다음 마침내 節閔帝를 崇訓佛寺에 유치하고 다시 平陽王元脩【獻文帝 拓跋弘의 아들이 彭城王 元勰이요, 元勰의 아들이 莊帝 元子攸요 元子攸의 아들이 廣平王 元懷이니, 平陽王 元脩는 元懷의 아들이다.】를 세우니, 戊子日(4월 25일)에 孝武帝【孝武帝는 이름이 脩이니, 孝莊帝(元子攸)의 손자이고 廣平王(武穆王 元懷)의 아들이다.】東郭 밖에서 즉위하고節閔帝를 門下省에서 독살하였다.

[癸丑] 梁中大通五年, 魏永熙二年

[癸丑] 〈梁中大通五年이요 魏永熙二年이라〉

계축(533) - 梁나라 中大通 5년이고, 魏나라 永熙 2년이다. -

賀拔岳【勝之弟也니 時爲關中行臺라】이 遣使詣晉陽하야 與約爲兄弟【謂勝與岳也라】어늘 司馬宇文泰【代郡武川人이라 其先은 出自炎帝하니 炎帝子孫이 遁居朔野하다 其後에 有葛烏(老)[免]者 有雄略하니 鮮卑奉以爲主하야 世爲大人이라 裔孫普回 得玉璽하니 文曰 皇帝璽라하니 普回以爲天授라 其俗謂天子曰宇文이라 故로 國號宇文하고 幷以爲氏하다 泰는 乃普回十四世孫也라 追諡德皇帝하니 (耽)[肱]之少子也라 世子覺이 簒西魏하니 是謂後周라】自請詣晉陽하야 以觀之爲人하다 이 奇其狀貌하야 曰 此兒視瞻非常이라하고 將留之러니 固求復命이어늘 이 旣遣而悔之하다 至長安하야 謂高歡이 所以未簒者는 正憚公兄弟爾니 公이 但潛爲之備면 圖不難하리이다하니 이 大悅하다 以夏州被邊要重【謂要害重地라】이라하야 欲求良刺史以鎭之한대 衆擧宇文泰어늘 이 表用之하다

魏나라 賀拔岳【賀拔岳은 賀拔勝의 아우이니, 이 당시 關中行臺였다.】이 使者를 보내어 晉陽에 가서 高歡과 함께 형제【兄弟는 賀拔勝과 賀拔岳을 이른다.】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司馬인 宇文泰【宇文泰는 代郡 武川 사람이다. 그 선조는 炎帝氏로부터 나왔으니, 〈炎帝가 黃帝에게 멸망당하자〉 炎帝의 자손이 도망하여 朔方의 들에 거주하였다. 그 후에 葛烏免라는 자가 웅대한 지략이 있으니, 鮮卑族이 그를 받들어 군주로 삼아 대대로 大人이 되었다. 후손 중에 普回가 〈사냥하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옥새의 내용에 “황제의 옥새”라고 되어 있으니, 普回는 이를 하늘이 준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 풍속에 天子를 宇文이라 하였으므로 國號를 宇文이라 하고 아울러 이로써 姓氏를 삼았다. 宇文泰는 바로 普回의 14세손이다. 德皇帝라 追諡하니, 宇文肱의 작은 아들이다. 世子 宇文覺이 西魏를 찬탈하니, 이를 後周라 이른다.】가 晉陽에 가서 高歡의 사람됨을 관찰하기를 자청하였다. 高歡이 〈宇文泰를 보고〉 그의 얼굴 생김새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눈길이 비범하다.” 하고는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였는데, 宇文泰가 한사코 復命할 것을 청하자 高歡이 보낸 뒤에 후회하였다. 宇文泰가 長安에 이르러 賀拔岳에게 말하기를 “高歡이 帝位를 찬탈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公의 형제를 두려워해서일 뿐이니, 公이 단지 은밀히 대비하기만 하면 高歡을 도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賀拔岳이 크게 기뻐하였다. 賀拔岳은 夏州가 변방의 요충지【要重은 요해처가 되는 중요한 곳을 이른다.】라 하여 어진 刺史를 구하여 진무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宇文泰를 천거하자 賀拔岳孝武帝에게 表文을 올려 그를 등용하였다.

[甲寅] 梁中大通六年, 魏永熙三年,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

[甲寅] 〈梁中大通六年이요 魏永熙三年이요 東魏孝靜帝善見天平元年이라 ○ 是歲에 魏分爲二하니 凡三國이라〉

갑인(534) - 梁나라 中大通 6년이고, 魏나라 永熙 3년이고, 東魏孝靜帝元善見의 天平 元年이다. ○ 이해에 魏나라가 나뉘어 둘이 되니, 모두 세 나라이다.-

中軍將軍王思政이 言於魏主高歡之心은 昭然可知라 洛陽은 非用武之地요 宇文泰는 乃心王室하니 今往就之하면 還復舊京을 何慮弗克이리잇고 魏主深然之하야 以五千騎로 西出長安하니 備儀衛하고 迎帝하야 謁見於東陽驛이라 魏主遂入長安하야 以爲尙書令하야 軍國之政을 咸取決焉하다

中軍將軍王思政魏主에게 말하기를 “高歡의 야심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습니다. 洛陽은 무력을 쓸 수 있는 요충지가 아니고 宇文泰는 마침내 王室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 지금 그에게 찾아가서 의지한다면 다시 옛 서울인 洛陽을 수복하지 못할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魏主가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겨서 5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해 長安으로 나가니, 宇文泰가 의장대와 호위병을 갖추고 황제를 맞이하여 東陽驛에서 알현하였다. 魏主가 마침내 長安으로 들어가서 宇文泰를 尙書令으로 삼아 軍國의 정사를 모두 그에게서 결단하였다.

○ 十月에 魏丞相이 至洛陽하야 集百官耆老하고 立淸河世子【淸河는 亶이니 乃文帝宏之孫이라】善見하야 爲帝하니 孝靜帝卽位於城東北하고 遷都鄴【世號東魏가 始於此라】하다

○ 10월에 魏나라 丞相高歡이 洛陽에 이르러서 百官과 元老들을 모아놓고 淸河王【淸河王은 元亶이니, 바로 孝文帝 元宏의 손자이다.】의 世子인 元善見을 세워 황제로 삼으니, 孝靜帝가 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鄴城으로 천도하였다.【[原註]孝靜帝卽位於城東北 遷都鄴:孝靜帝가 洛陽城 동북쪽에서 즉위하고 鄴城으로 천도하니, 세상에서 東魏라고 이름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魏孝武帝 復與有隙【孝武閨門無禮하야 從妹不嫁者三人을 〈皆封公主라〉 平原公主明月은 南陽王寶炬之同産也라 從入關이러니 泰使人殺之하니 孝武不悅이라 由是로 復與泰有隙하니라】이라 十二月에 魏主飮酒遇酖而殂하니 乃奉太宰南陽王寶炬【文帝宏子京兆王愉之子라】而立之하다

○ 魏나라 孝武帝가 다시 宇文泰와 틈이 있었다.【孝武帝는 閨門에 禮가 없어 從妹 중에 시집가지 않은 자 세 명을 모두 봉하여 公主로 삼았다. 平原公主 明月은 南陽王 元寶炬의 동복형제로 孝武帝를 따라 關中에 들어왔는데, 宇文泰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니, 孝武帝가 좋아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宇文泰와 틈이 생겼다.】12월에 魏主가 술을 마시다가 짐독에 중독되어 죽으니, 宇文泰가 마침내 太宰인 南陽王 元寶炬【元寶炬는 孝文帝 元宏의 아들인 京兆王 元愉의 아들이다.】를 받들어 그를 세웠다.

[乙卯] 梁大同元年, 魏文帝寶炬大統元年

[乙卯] 〈梁大同元年이요 魏文帝寶炬大統元年이요 東魏天平二年이라〉

을묘(535) - 梁나라 大同 元年이고, 魏文帝元寶炬의 大統 元年이고, 東魏天平 2年이다. -

正月朔에 魏文帝卽位【帝名寶炬니 孝文之孫이라】하다 進丞相하야 爲安定公하다

정월 초하루에 魏나라 文帝【文帝는 이름이 寶炬이니, 孝文帝(元宏)의 손자이다.】가 즉위하였다. 丞相宇文泰를 승진시켜 安定公으로 삼았다.

○ 東魏【始於上甲寅年이라】封丞相之子【洋이 纂東魏하니 是爲北齊라 歡嘗欲觀諸子意識하야 使治亂絲하니 洋獨抽刀斬之하고 曰 亂者必斬이라하다】하야 爲太原公하다 二年九月에 東魏以定州刺史侯景으로 兼尙書右僕射, 南道行臺【行臺는 見二十六卷이라】하고 督諸將入寇하다 十月에 이 進軍淮上이어늘 陳慶之擊破之하니 이 棄輜重走하다

○ 東魏【東魏는 앞의 甲寅年條(534)에서 시작되었다.】가 丞相高歡의 아들 高洋【高洋이 東魏를 찬탈하니, 이것이 바로 北齊이다. 高歡이 일찍이 여러 아들들의 識見을 살펴보고자 하여 아들들로 하여금 엉킨 실을 다스리게 하니, 유독 高洋만은 칼을 뽑아 엉킨 실을 끊어버리고 말하기를 “엉킨 것은 반드시 끊어버려야 한다.” 하였다.】을 봉하여 太原公으로 삼았다. 梁나라 大同 2년(536) 9월에 東魏가 定州刺史侯景으로 하여금 尙書右僕射‧南道行臺【行臺는 해설이 26권에 보인다.】를 겸임하게 하고 諸將을 독려하여 梁나라를 침범하였다.

10월에 侯景이 淮水 가에 진군하자 陳慶之가 이를 격파하니, 侯景이 輜重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乙丑] 梁大同十一年, 魏大統十一年

[乙丑] 〈梁大同十一年이요 魏大統十一年이요 東魏武定三年이라〉

을축(545) - 梁나라 大同11년이고, 魏나라 大統 11년이고, 東魏武定 3년이다. -

賀琛이 啓陳四事【一曰 今北邊稽服하니 正是生聚敎訓之時어늘 而天下戶口減落하며 郡不堪州侵하고 縣不堪郡責하고 民不堪縣徵하니 此豈非牧守之過歟잇가 二曰 今守宰風俗侈靡하니 欲使人守廉白이나 可得耶잇가 三曰 陛下憂念四海하야 不憚勤勞나 至於百司하야는 奏事에 詭競求進하고 不論大體하니 誠願責其公平之效하고 黜其讒慝之心이면 則下安上謐이리이다 四曰 今天下無事하니 省事省費하고 養民聚財云云하다 啓奏하니 梁主大怒하야 切責之하니라】하야 言奢侈賦役之敝한대 梁主切責之【惡其觸實故로 怒라】하다 梁主爲人이 孝慈恭儉하고 博學能文하며 陰陽卜筮와 騎射聲律과 草隷圍棊를 無不精妙라 勤於政務하야 冬月四更竟이면 卽起視事하니 執筆觸寒하야 手爲皴裂【皴은 細皮起也라】이러라 自天監中으로 用釋氏法하야 長齋斷魚肉하고 日止一食호되 惟菜羹糲飯【糲는 麤米也니 所謂脫粟飯也라 [通鑑要解]糲는 與䊪通하니 張宴曰 一斛粟舂하야 七斗米爲糲라 】而已요 或遇事繁하야 日移中이면 則嗽(漱)口以過러라 身衣布衣하고 木綿皁帳【皁는 柞實也니 可染黑色이라 故通用爲黑色也라 木綿은 丘濬曰 禹貢島夷卉服注에 以爲吉貝라하니 則虞時에 已有之하야 時或以充貢이라 漢, 唐之世에 遠夷雖以入貢이나 中國未有也러니 宋, 元之間에 始傳其種하야 關, 陜, 閩, 廣이 先得其利하니 蓋閩, 廣은 海通商舶하고 關, 陜은 壤接西域故也라 今則遍布天下하야 地無南北히 皆宜之하니라】하며 一冠三載하고 一衾二年이요 後宮貴妃以下 衣不曳地【曳는 引也니 衣長不被土라】라 性不飮酒하고 非宗廟祭祀大饗宴及諸法事【法事는 謂奉佛爲梵唄也니 梵音曰唄라】면 未嘗作樂하고 雖居暗室이나 恒理衣冠하고 小坐盛暑에 未嘗褰袒하며 對內豎小臣을 如遇大賓이라 然이나 優假士人大(太)過하니 牧守多侵漁百姓하고 使者干擾郡縣이러라 又好親任小人【小人은 謂朱异, 周石珍輩也라】하고 頗傷苛察하며 多造塔廟하야 公私費損하고 江南久安에 風俗奢靡라 故로 奏及之러라

梁나라 賀琛이 네 가지 일【賀琛이 아뢰기를 “첫째는 지금 북쪽 변경의 東魏가 복종하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백성을 길러 군대를 양성하고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천하의 戶口가 줄어들며 郡에서는 州의 침탈을 감당하지 못하고 縣에서는 郡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며 백성들은 縣의 징발을 감당하지 못하니, 이는 어찌 지방 수령들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지금 지방의 수령들의 풍속이 사치스러우니, 사람들로 하여금 청렴하고 결백하게 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폐하께서는 四海를 근심하고 염려하여 근로함을 꺼리지 않으시나 百司들에 이르러서는 정사를 아뢸 적에 속이고 다투어 승진되기만을 구하고 大體를 논하지 않으니, 진실로 바라건대 公平한 성과를 책임지우며 참소하고 간사한 마음을 물리친다면 아랫사람이 편안하고 윗사람이 고요할 것입니다. 넷째는 지금 천하가 무사하니 일을 줄이고 비용을 줄여서 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아야 합니다.” 하고 운운하였다. 이 네 가지 일을 아뢰자, 梁主가 크게 노하여 심하게 책망하였다.】을 아뢰어 사치함과 부역의 병폐를 말하자, 梁主가 심하게 책망하였다.【梁主는 그의 말이 실제를 저촉하여 말이 너무 솔직한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노여워한 것이다.】

梁主는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陰陽‧卜筮와 말타기‧활쏘기‧聲律과 草書‧隷書‧바둑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精妙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에 부지런하여 겨울철에도 4경만 지나면 즉시 일어나 정사를 보았는데, 날씨가 추워서 붓을 잡은 손이 얼어 터졌다.【皴은 얇은 피부가 일어나는 것이다.】天監 연간으로부터 釋氏(佛法)를 신봉하여 오랫동안 채식을 하고 魚肉을 먹지 않았으며, 하루에 단지 한 끼만 먹되 나물국과 거친밥【[釋義]糲는 거친 쌀이니, 糲飯은 이른바 脫粟飯이라는 것이다. [通鑑要解]糲는 䊪와 통하니, 張宴이 말하기를 “1斛의 곡식을 찧어 7斗의 쌀이 나오는 것을 糲라 한다.” 하였다.】뿐이었고, 혹 일이 많고 번거로울 때를 만나 해가 中天을 지나면 물로 입을 헹구고 넘어갔다. 몸에는 삼베옷을 입고 침상에는 木綿으로 짠 검은 휘장을 쳤으며,【皁는 도토리(상수리) 열매이니, 흑색을 물들일 수 있으므로 통용하여 흑색을 말한다. 木綿은 丘濬이 이르기를 “≪書經≫ 〈禹貢〉 ‘島夷卉服’의 注에 ‘吉貝’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虞나라 때에 이미 이것이 있어서 때로 혹 貢物로 충당한 것이다. 漢‧唐 시대에는 먼 오랑캐들이 비록 공물로 바쳤으나 중국에는 있지 않았는데, 宋‧元 시대에 비로소 그 종자가 전래되어 關‧陜과 閩‧廣에서 먼저 그 이익을 얻었으니, 閩‧廣은 바다로 상인들의 선박이 통행하고 關‧陜은 땅이 西域과 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온 천하에 두루 퍼져서 남쪽 북쪽 지역 할 것 없이 모두 잘 된다.” 하였다.】 冠 하나로 3년을 쓰고 이불 한 채로 2년을 지냈으며, 後宮과 貴妃 이하의 부인들은 옷이 땅에 끌리지 않았다.【曳는 끄는 것이니, 衣不曳地는 옷의 길이가 땅을 덮지 않는 것이다.】 성품이 술을 마시지 않고 宗廟의 祭祀와 큰 연향과 여러 法事【法事는 佛法을 신봉하여 梵唄를 연주하는 것을 이르니, 불교 음악을 唄라 한다.】가 아니면 일찍이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비록 어두운 방에 거처하더라도 항상 衣冠을 정제하였고, 궁중의 別室에 앉아 있거나 무더운 여름철에도 일찍이 옷을 풀어헤치거나 걷어 올리지 않았으며, 宦官과 小臣들을 큰 손님을 대하듯이 공경하였다. 그러나 선비를 너무 지나치게 우대하여 지방의 관원들이 백성들을 많이 침탈하였고 조정의 使者들이 郡縣을 소란하게 하였다. 또 간사한 소인들【小人은 朱异와 周石珍의 무리를 이른다.】을 친애하고 등용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등용할 때에 까다롭게 살피는 실책을 범하였고, 佛塔과 佛殿을 많이 지어서 공사간에 비용을 낭비하였다. 江南이 오랫동안 태평하여 풍속이 사치하고 화려하였으므로 賀琛이 아뢸 때에 이것을 언급하였다.

○ 上이 敦尙文雅하고 疎簡刑法하야 自公卿大臣으로 咸不以鞫獄【鞫은 見上卷覆獄注라】爲意하니 奸吏招權弄法하야 貨賂成市하야 枉濫者多라 時에 王侯子弟多驕淫不法호되 上이 年老하야 厭於萬幾(機)하고 又專精佛戒하야 每斷重罪면 則終日不懌하고 或謀反逆이라가 事覺이라도 亦泣而宥之【如臨賀王正德父子가 是也라】하니 由是로 王侯益橫하야 或白晝殺人於都街하고 或晝夜公行剽掠하며 有罪亡命者 匿於主家하면 有司不敢搜捕라 上이 深知其敝나 而溺於慈愛하야 不能禁也러라

○ 上이 文雅를 지극히 숭상하고 刑法을 소략히 하여 公卿과 大臣으로부터 모두 옥사를 鞫問【鞫은 해설이 上卷의 ‘覆獄’ 注에 보인다.】하여 처벌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간사한 아전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법을 농간해서 뇌물이 성행하여 억울하게 형벌을 받은 자가 많았다. 이때에 王侯의 子弟들이 교만하고 음란하여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上이 연로하여 萬機(政務)를 처리하는 것을 싫증 내고, 또 오로지 불교의 계율을 專心으로 닦아서 매번 중죄를 판결하면 종일토록 기뻐하지 않았으며, 혹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주었다.【[頭註]或謀反逆……亦泣而宥之:臨賀王 蕭正德 父子와 같은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이 때문에 王과 諸侯들이 더욱 횡포를 부려 혹은 대낮에 도로에서 사람을 죽이고 혹은 밤낮없이 공공연하게 약탈을 행하였으며, 죄를 짓고 도망한 자가 王侯의 집안에 숨으면 有司가 감히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다. 上이 그 폐해를 깊이 알았으나 佛敎의 慈悲에 빠져 이러한 불법 행위를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丙寅] 梁中大同元年, 魏大統十二年

[丙寅] 〈梁中大同元年이요 魏大統十二年이요 東魏武定四年이라〉

병인(546) - 梁나라 中大同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2년이고, 東魏武定 4년이다. -

三月에 上이 幸同泰寺하야 遂停寺省【同泰寺에 有便省이라 上臨幸時에 居之故로 曰便省이라하니 言留停於同泰寺便省也라】하고 講三慧經이러니 是夜에 同泰寺浮圖災【同泰寺는 在臺城內라 梁武造大佛閣七層이러니 爲天火所焚하니라 浮圖는 塔也니 梵語浮圖는 華言聚相이라 左傳에 天火曰災요 人火曰火라하고 公羊傳에 大者曰災요 小者曰火라하니 大者는 謂正寢, 宗廟, 社稷, 朝廷也요 下此則小矣라 疏云 本實是火로되 而謂之災하니 災者는 害物之名이라 故로 可以見其大於火也니라】어늘 上曰 此는 魔也니 宜廣爲法事라하고 遂起十二層浮圖러니 將成에 値侯景亂而止하니라

[新增]胡氏梁武溺於佛이나 而亦不知佛也라 江南雖小나 號爲帝王이면 則一日二日之間에 幾事豈少哉아 乃留居僧寺하야 至於逾月【三月에 講三慧經於同泰寺하야 四月에 解講이라】하니 必以境內爲晏然하야 無所廢闕也하야 而不知所失多矣라 浮屠之災는 蓋天火之所以警戒也어늘 方且迷而不復하고 歸於魔障【下詔曰 道高魔盛하고 行善障生이라하니라 障은 障礙也라】하야 窮極土木하야 以肆(狠)[狼]心하니 烏在乎其爲淸心能捨也리오

3월에 上이 同泰寺에 행차하여 마침내 절 안의 便省에 머물면서【同泰寺에 便省이 있다. 上이 거둥하였을 때에 이곳에 거처하기 때문에 便省이라 하였으니, 停寺省은 同泰寺의 便省에 머물렀음을 말한다.】《三慧經》을 강하였는데, 이날 밤에 同泰寺의 浮圖에 화재가 발생하자,【同泰寺는 臺城 안에 있다. 梁 武帝가 大佛閣 7층을 조성하였는데, 天火(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에 불타 없어졌다. 浮圖는 塔이니, 梵語의 浮圖는 중국어로 聚相이다. ≪春秋左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을 災라 하고 사람이 낸 불을 火라 한다.” 하였고, ≪春秋公羊傳≫에 “큰 것을 災라 하고 작은 것을 火라 한다.” 하였으니, 큰 것은 正寢과 宗廟와 社稷과 朝廷을 이르고, 그 이하는 작은 것이다. 疏에 이르기를 “본래 실제는 火인데 이것을 災라 일렀으니, 災는 물건을 해치는 것을 이름하므로 火보다 재앙이 더 큼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上이 말하기를 “이는 마귀의 장난이니, 크게 佛事를 거행해야 한다.” 하고는 마침내 12층의 浮圖를 건립하였는데,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侯景의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梁나라 武帝는 佛法에 빠졌으나 또한 佛法을 알지 못하였다. 江南이 비록 작지만 帝王이라고 이름했으면 하루 이틀 사이에도 중요한 政務가 어찌 적겠는가. 그런데 僧寺에 머물러서 달을 넘기기까지【3월에 同泰寺에서 ≪三慧經≫을 講하여 4월에 講을 끝맺었다.】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境內가 태평하여 폐지되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겨서 잘못된 바가 많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浮屠에 화재가 난 것은 天火(하늘이 내린 불)로 경계한 것인데, 그런데도 미혹되어 돌이켜 살피지 않고 魔障【詔書를 내리기를 “道가 높으면 魔가 성하고 善을 행하면 장애를 만나게 된다.” 하였다. 障은 장애이다.】의 탓으로 돌려서 토목공사를 크게 벌여 이리처럼 욕심을 부렸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여 捨身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丁卯] 梁太淸元年, 魏大統十三年

[丁卯] 〈梁太淸元年이요 魏大統十三年이요 東魏武定五年이라〉

정묘(547) - 梁나라 太淸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3년이고, 東魏武定 5년이다. -

正月에 東魏獻武王高歡이 卒하다 이 性深密하야 終日儼然하니 人不能測이라 機權之際에 變化若神하고 制馭軍旅에 法令嚴肅하며 聽斷明察하니 不可欺犯이라 由是로 文武樂爲之用이러라

정월에 東魏獻武王高歡이 죽었다. 高歡은 성품이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엄숙하니, 사람들이 그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임기응변할 때에는 변화함이 신출귀몰하고, 군대를 제어할 때에는 법령이 엄숙하며, 정사를 처단함에 분명히 살피니, 속이거나 범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무백관들이 모두 그를 위해 쓰여지는 것을 좋아하였다.

侯景이 素輕高澄이라 自念己與高氏有隙하고 內不自安하야 據河南叛하야 歸于魏하고 又遣丁和來하야 上表言호되 臣與高澄【歡之子요 洋之兄이라】有隙하니 請擧十三州하야 內附하노이다 上이 召群臣廷議하니 尙書僕射謝擧等이 皆曰 頃歲에 與魏通和하야 邊境이 無事어늘 今納其叛臣이면 竊謂非宜라하노이다 上曰 得則塞北을 可淸이니 機會難得이라 豈宜膠柱리오 然이나 意未決하야 嘗獨言호되 我國家如金甌【甌는 小盆也라】하야 無一傷缺이어늘 今忽受景地면 詎是事宜리오 脫致【脫은 或然之辭라】紛紜이면 悔之何及이리오 朱异揣知上意하고 對曰 聖明御宇에 南北歸仰하니 拒而不內(納)이면 恐絶後來之望하노이다 上이 乃定議納景하야 以爲大將軍하고 封河南王하다 周弘正【時에 平西諮議也라】이 善占候러니 前此에 謂人曰 國家數年後에 當有兵起라하더니 及聞納하고 曰 亂階在此矣라하니라

侯景이 평소 高澄을 경시하였다. 그러므로 〈高歡이 죽자〉 자신과 高氏가 틈이 있음을 염려하고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河南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켜 西魏에 歸附하였으며, 또 丁和를 보내어 梁나라에 와서 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高澄【高澄은 高歡의 아들이고, 高洋의 형이다.】과 틈이 있으니, 13州를 들어 內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上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尙書僕射謝擧 등이 모두 말하기를 “지난해 西魏와 화친하여 변경에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반역한 신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삼가 생각건대 옳지 않습니다.” 하니, 上이 말하기를 “侯景을 얻으면 변방 북쪽을 깨끗이 평정할 수 있으니 이런 기회는 얻기 어렵다. 어찌 고지식하여 변통할 줄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아직 결정하지 못하여 일찍이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金甌【甌는 작은 동이이다.】와 같아서 한 곳도 흠난 곳이 없다. 이제 갑자기 侯景의 땅을 받는다면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것이겠는가. 만일 이로 인하여 혼란을 야기한다면【脫은 혹시 그럴까 의심하는 말이다.】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朱异가 임금의 뜻을 미루어 헤아리고는 대답하기를 “聖明하신 군주께서 천하를 다스리심에 남쪽과 북쪽에서 歸附하여 우러러 사모하니, 이들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후로 歸附하려는 자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上이 이에 侯景을 받아들이기로 의론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侯景을 대장군으로 삼고 河南王에 봉하였다.

周弘正【周弘正은 이 당시 平西諮議參軍이었다.】이 天象의 변화를 보고 길흉을 잘 점쳤다. 이 일에 앞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수년 뒤에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侯景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禍亂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 東魏高澄이 入朝于鄴【東魏都鄴하니 見上甲寅年이라】하다

○ 東魏의 高澄이 鄴城에 들어가 조회하였다.【東魏는 鄴城에 도읍하였으니, 앞의 甲寅年條(534)에 보인다.】

○ 東魏(靖)[[[靜]帝]]【靜字之誤라】 美容儀하고 膂力過人하야 射無不中하고 好文學하야 從容沈雅하니 時人이 以爲有孝文風烈【靜帝善見은 乃文帝宏之孫이라】이라 大將軍이 深忌之어늘 帝謀誅이라가 事覺하니 이 幽帝於含章堂하다

○ 東魏의 靜帝【靖은 靜字의 誤字이다.】는 용모가 아름답고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었으며, 文學을 좋아하여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침착하며 고상하니, 당시 사람들이 “孝文帝의 풍채가 있다.”【靜帝 元善見은 바로 北魏 孝文帝 元宏의 손자이다.】고 하였다. 대장군高澄이 그를 매우 시기하였으므로 황제가 高澄을 도모하여 죽이고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高澄이 황제를 含章堂에 유폐하였다.

○ 東魏使軍司杜弼로 作檄移梁【魏侯景이 以河南降魏라가 又以河南으로 叛附于梁하니 梁封景爲河南王하고 遣兵援之하니라】侯景이 自生猜貳하야 遠託關, 隴하고 依憑奸僞【關隴과 奸僞는 皆指西魏라】하야 逆主【指魏主寶炬라】로 定君臣之分하고 僞相【指宇文泰라】으로 結兄弟之親하니 豈曰無恩이리오마는 終成難養이어늘 今乃授之以利器【威權也라】하고 誨之以慢藏하니 使其勢得容奸하고 時堪乘便이면 則必自據淮南하야 亦欲稱帝【用黥布事하니 見漢高乙巳年이라】하리니 但恐楚國亡猿에 禍延林木하고 城門失火에 殃及池魚【池魚는 人姓名이라 風俗通에 有池仲魚러니 城門失火하야 仲魚燒死라 故로 諺曰 城門失火에 殃及池魚라하니라 一云汲池救火하야 患及於魚也라】라하더니 其後에 梁室禍敗 皆如言하니라

○ 東魏에서 軍司杜弼을 시켜 檄文을 지어 梁나라에 보내어【東魏의 侯景이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했다가 또 河南을 가지고 배반하여 梁나라에 붙으니, 梁나라가 侯景을 봉하여 河南王으로 삼고 군대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이르기를 “侯景이 스스로 의심하여 두마음을 품어서 멀리 關中과 隴 지방에 몸을 의탁하며 간사하고 참람한 조정(西魏)에 의지하여【[頭註]遠託關隴 依憑奸僞:關‧隴과 奸僞는 모두 西魏를 가리킨다.】 반역한 군주인 西魏의 文帝(元寶炬)【반역한 군주는 魏主인 元寶炬를 가리킨다.】와 군신간의 분수를 정하고 가짜 조정의 정승인 宇文泰【가짜 재상은 宇文泰를 가리킨다.】와 형제간의 친분을 맺었으니, 어찌 은혜가 없다고 말하겠는가마는 반역한 小人은 끝내 기르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제 도리어 저들에게 예리한 병기【利器는 위세와 권력을 이른다.】를 주고 허술하게 관리하여 盜心을 불러일으키니, 만약 형세상 간교한 계책을 행할 수 있고 시기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에 편리하다고 판단되면 반드시 스스로 淮南을 점거하여 또한 황제라 칭하고자 할 것이다.【黥布의 故事를 인용한 것이니, 漢나라 高祖 乙巳年條(B.C.196)에 보인다.】 다만 楚나라에서 원숭이를 잃자 화가 숲의 나무에 뻗치고, 성문에 불이 나자 재앙이 池魚에게 미칠까【池魚는 사람의 姓名이다. ≪風俗通義≫에 “池仲魚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城門에 불이 나서 池仲魚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城門에 불이 나자 재앙이 池魚에게 미쳤다.’ 한다.” 하였다. 一說에는 “연못의 물을 길어다 불을 꺼서 재앙이 물고기에게 미쳤다.”고 한다.】 두렵다.” 하였는데, 그 뒤에 梁나라의 禍敗가 모두 杜弼의 말처럼 되었다.

[戊辰] 梁太淸二年, 魏大統十四年

[戊辰] 〈梁太淸二年이요 魏大統十四年이요 東魏武定六年이라〉

무진(548) - 梁나라 太淸 2년이고, 魏나라 大統 14년이고, 東魏武定 6년이다. -

侯景이 與東魏戰敗하고 自求貶削이어늘 梁主兵新破라하야 未忍移易하고 卽以爲南豫州牧한대 蕭介上表諫曰 竊聞凶人之性不移는 天下之惡이 一也라하니이다 侯景이 以凶狡之才로 荷高歡卵翼之遇어늘 墳土未乾에 卽還反噬라가 逃死關西하니 宇文不容이라 故로 復投身於我니이다 棄鄕國을 如脫屣【履不躡跟曰屣(躧)니 脫之者는 言易棄也라】하고 背君親을 如遺芥하니 豈知遠慕聖德하야 爲江, 淮之純臣乎잇가 梁主不能用이러라

侯景이 東魏와 싸워 패전하고 스스로 직책을 낮출 것을 청하자, 梁主侯景의 군대가 처음으로 격파되었다 하여 차마 봉지를 옮기거나 바꾸지 못하고 곧 侯景을 南豫州牧으로 삼았다. 蕭介가 表文을 올려 간하기를 “삼가 듣건대 흉악한 사람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 것은 천하의 악한 사람이 똑같다고 하였습니다. 侯景이 흉악하고 교활한 재주로 高歡의 품어주고 길러주는 우대를 입었는데, 高歡이 죽자 무덤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즉시 高氏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關西 지방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런데 宇文泰가 그를 용납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우리 梁나라에 투신한 것입니다. 故國을 저버리는 것을 헌신짝처럼 여기고【신발을 발꿈치까지 신지 않은 것(신을 발끝에 꿰고 바삐 걷는 것)을 屣라고 하니, 이것을 벗는다는 것은 쉽게 버림을 말한다.】 군주와 친척을 배반하는 것을 草芥처럼 여기니, 멀리서 폐하의 聖德을 사모하여 江‧淮(梁나라)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으나, 梁主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 二月에 東魏大將軍이 遣書復求通好어늘 梁主與朝臣議之하니 朱异, 張綰【朱异는 右衛將軍이요 張綰은 御史中丞이라】等이 皆曰 靜寇息民은 和實爲便이니이다 司農卿傅岐獨高澄이 何事須和리오 必是設間【間은 去聲이라】하야 欲令侯景自疑니 意不安이면 必圖禍亂하리니 若許通好면 正墮其計中이니이다 等이 固執宜和어늘 梁主亦厭用兵하야 乃從言하니 이 果爲反計러라

○ 2월에 東魏의 大將軍高澄이 梁나라에 편지를 보내어 다시 우호를 맺을 것을 청하였다. 梁主가 조정의 신하들과 의논하니, 朱异와 張綰【朱异는 右衛將軍이고, 張綰은 御史中丞이었다.】 등이 모두 말하기를 “兵亂을 종식시키고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는 데는 화친하는 것이 실로 상책입니다.” 하였다. 司農卿傅岐만이 홀로 말하기를 “高澄이 무슨 일로 화친하려 하겠습니까. 반드시 이간질【間은 去聲(이간질하다)이다.】하는 계책을 써서 侯景으로 하여금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니, 侯景은 마음이 불안해지면 반드시 반란을 도모할 것입니다. 만약 東魏와 우호를 맺기를 허락한다면 바로 그들의 이간질하는 술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朱异 등이 화친해야 한다고 굳이 고집하자, 梁主 또한 用兵하는 것을 싫어해서 마침내 朱异 등의 말을 따랐는데, 侯景이 과연 모반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臨賀王正德【臨川王宏之子라】이 所至에 貪暴不法하야 屢得罪於梁主하니 由是로 憤恨하야 陰養死士하고 儲米積貨하고 幸國家有變이러니 知之하고 致牋於正德曰 今天子年尊에 姦臣이 亂國하야 大王이 屬當儲貳어늘 中被廢黜하니 四海業業하야 歸心大王이라 雖不敏이나 實思自效하노니 願王允副하소서 正德이 大喜曰 機事는 在速이니 今其時矣로다 이 反於壽陽이어늘 梁主臨賀王正德으로 爲平北將軍, 都督京師諸軍事하야 屯丹陽郡하다 正德이 遣大船數十艘【艘는 音搔니 船之總名이라】하야 詐稱載荻이라하고 密以濟한대 自橫江으로 濟于采石하니 有馬數百匹과 兵八千人이러라 至慈湖하니 是時에 梁興四十七年에 境內無事하야 公卿在位及閭里士大夫 罕見兵甲이러니 賊至猝迫하니 公私駭震이라 正德이 守宣陽門이라가 帥衆하고 於張侯橋에 迎入宣陽門하야 至闕下하다 正德이 卽皇帝位하다

臨賀王 蕭正德【蕭正德은 臨川王 蕭宏의 아들이다.】은 부임하는 곳마다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不法을 자행하여 梁主에게 자주 죄를 얻으니, 이로 말미암아 분하게 여기고 한하여 남몰래 결사대를 길렀으며 쌀을 비축하고 재화를 모으고서 국가에 변란이 생기기를 바랐다. 侯景이 이것을 알고 蕭正德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지금 天子의 춘추가 높으시니 간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大王이 본래 儲貳(太子)가 되었어야 하는데 중간에 폐출당하니, 온 천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大王에게 민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실로 왕을 위하여 스스로 힘을 바칠 것을 생각하니, 바라건대 왕은 민심에 부응하소서.” 하였다. 蕭正德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기밀의 일은 신속함에 달려 있으니,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하였다.

侯景이 壽陽에서 반란하자,梁主臨賀王蕭正德을 平北將軍‧都督京師諸軍事로 삼아서 丹陽郡에 주둔하게 하였다. 蕭正德이 큰 배 수십 척【艘는 음이 소이니, 배의 총칭이다.】을 보내면서 갈대를 실어 온다고 속이고는 은밀히 侯景을 건네 주었다. 侯景이 橫江으로부터 采石으로 건너오니, 軍馬가 수백 필이요 병사가 8천 명이었다. 慈湖에 이르니, 이때는 梁나라가 건국한 지 47년이었는데, 나라 안이 평안하고 무사하여 벼슬자리에 있는 公卿들로부터 閭里의 士大夫들에 이르기까지 병기와 갑옷을 본 일이 드물었으므로 적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관원과 백성들이 놀라고 진동하였다. 蕭正德이 宣陽門을 지키다가 군대를 거느리고 張侯橋에서 侯景을 맞이하여 宣陽門으로 들어와 대궐 아래에 이르렀다. 蕭正德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己巳] 梁太淸三年, 魏大統十五年

[己巳] 〈梁太淸三年이요 魏大統十五年이요 東魏武定七年이라〉

기사(549) - 梁나라 太淸 3년이고, 魏나라 大統 15년이고, 東魏武定 7년이다. -

正月에 侯景이 百道攻城하야 晝夜不息이라 梁主聞城已陷하고 歎曰 自我得之하고 自我失之하니 亦復何恨이리오 俄而오 이 入見於太極東堂할새 以甲士五百人으로 自衛러니 이 稽顙殿下하야 不敢仰視하고 汗流被面이라 退謂王僧貴【景之親貴隆重者라】曰 吾常跨鞍對陳(陣)에 矢刃交下로되 而意氣安緩하야 了無怖心이러니 今見蕭公에 使人自慴【慴은 音疊이니 懼怯也라】하니 豈非天威難犯이리오 吾不可以再見之라하더라 是後에 梁主所求를 多不遂志【爲侯景所制라】하고 飮膳도 亦爲所裁節하니 憂憤成疾하다 五月丙辰에 梁主臥淨居殿이라가 口苦하야 索蜜不得이라 再曰 荷荷라하고 遂殂하니 年八十六이라 是日에 太子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梁武以齊之同姓으로 世系有考하고 遭時昏亂하야 遂移齊鼎이라 孝慈恭儉하고 博學能文하며 敬禮大臣하고 勤於庶政하며 立贖刑條하고 赦吉(翁)[翂]死하며 徵士求言하고 尊經興學하야 禮樂制度 相望于冊이라 是以로 天監之世에 時和歲豐하야 海內無事라 然이나 晩節末路에 釁起蕭墻하고 禍成戎羯하야 衣冠이 斃鋒鏑之下하고 老幼粉戎馬之足하야 金甌遂缺하고 寶鼎屢移하야 爲千古所閔笑者는 何哉오 議者僉謂 帝信朱异之謀하고 貪河南之地하야 棄與國하고 納叛人하야 其禍遂至於此라하니 殊不知帝崇尙釋敎하야 變夏爲夷하야 堂堂袞冕이 至加夷狄之衣하고 宗廟去牲하야 至具蔬果之薦하니 如是면 則不待侯景入國而江左已爲夷狄之區요 不待社稷變遷而宗廟已不血食矣라 其後에 臣叛其君하고 子叛其父하야 或頓兵自固而不急君父之難하고 或擧州降仇而不恤宗國之亡하니 夫以浮屠之學이 棄君臣, 絶父子하야 而末流之禍 其烈如此어늘 有國家者 尙欲崇奉其敎而不悟하니 果何爲哉오

정월에 侯景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梁主는 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스스로 천하를 얻었고 내가 스스로 천하를 잃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侯景이 들어와서 太極殿 東堂에서 뵐 적에 甲士 5백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侯景이 大殿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황제를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얼굴이 온통 땀으로 뒤덮였다. 侯景이 물러가 王僧貴【王僧貴는 侯景이 친애하고 귀하게 여겨 높이고 중시하는 자이다.】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안장에 올라 적진과 대치할 적에 화살과 칼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으나 뜻과 기운이 편안하고 느긋하여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蕭公을 뵙자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두렵게 만드니,【慴은 음이 접(습)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天子의 위엄을 범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하였다.

이후로 梁主는 요구하는 바를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고,【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侯景에게 제재당한 것이다.】 마시는 음료와 반찬도 제재당하니,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5월 丙辰日(2일)에 梁主가 淨居殿에 누워 있다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荷荷’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으니, 이때 나이가 86세였다. 이날 太子가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梁나라 武帝는 齊나라의 同姓으로서 상고할 만한 世系가 있고 혼란한 때를 만나서 마침내 齊나라의 政權을 잡았다.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博學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大臣들을 공경히 예우하고 政事에 부지런하였으며, 贖刑의 조목을 세우고 吉翂의 죽음을 용서해 주었으며, 선비를 초빙하여 훌륭한 말을 구하고, 經書를 높이고 학교를 일으켜서 禮樂과 制度가 서책에 서로 이어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天監 연간에는 四時가 조화롭고 年事가 풍년이 들어서 海內에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틈이 내부에서 생겨나고 禍가 오랑캐에게 이루어져서, 衣冠 차림의 士大夫들이 칼날 아래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혀 가루가 되게 하여, 金甌(국가)가 마침내 손상되고 寶鼎(정권)이 여러 번 바뀌어 천고에 불쌍히 여겨지고 비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武帝朱异의 계책을 믿고 河南 땅을 탐해서 동맹국을 버리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여 그 禍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武帝가 佛敎를 숭상해서 中夏를 바꾸어 오랑캐가 되게 하여, 당당한 곤룡포와 면류관을 오랑캐의 옷[袈裟]밑에 받쳐 입고, 宗廟에 희생을 없애고 채소와 과일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다면 侯景이 梁나라에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江東 지역이 이미 오랑캐의 구역이 되었고, 社稷이 바뀌고 옮겨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宗廟가 이미 血食을 못하게 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신하가 군주를 배반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혹은 군대를 주둔시켜 자신만 견고히 지키면서 君父의 어려움을 급히 구원하지 않고, 혹은 고을을 가지고 원수에게 항복하여 宗國(祖國)이 망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浮屠의 학문이 군신간의 의리를 버리고 부자간의 인륜을 끊어서 末流의 앙화가 그 혹독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國家를 소유한 군주가 오히려 佛敎의 가르침을 신봉하고자 하고 그 폐단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과연 어째서인가?”

○ 六月에 梁臨賀王正德이 怨侯景賣己하야 密書로 召鄱陽王範【合州刺史라】하야 使以兵入이러니 景이 遮得【謂遮截於路而得之라】其書하고 縊殺之【侯景殺蕭正德이라】하다

○ 6월에 梁나라 臨賀王蕭正德侯景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밀서로 鄱陽王 蕭範【鄱陽王 蕭範은 合州刺史였다.】을 불러서 병력을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는데, 侯景이 그 편지를 가로채고는【遮得은 길에서 가로막고 얻음을 이른다.】蕭正德을 목 졸라죽였다.【侯景이 蕭正德을 죽인 것이다.】

○ 八月에 東魏高澄이 爲蘭京所殺은 衡州刺史(起)[欽]之子니 以爲膳奴라 京屢訴어늘 欲殺之하니 因是謀亂하니라 [通鑑要解]澄嘗獲衡州刺史蘭欽子京하야 爲膳奴라 京屢自訴하니 澄杖之曰 更訴하면 當殺하리라하다 後에 京이 進食할새 置刀盤下라가 殺之하다】하다 時에 變起倉猝하니 內外震駭라 太原公이 聞之하고 指麾部分하야 入討群賊하야 斬而臠之하다 至하야 大會文武할새 神彩英暢하고 言辭敏洽하니 衆皆大驚이러라 政令有不便者면 皆改之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高澄이 初爲世子에 以好色之故로 幾陷其父於槊刃之下하야 已不容誅어늘 及其嗣霸에 不承先志하고 肆爲悖逆하야 幽辱其主를 如拘寇仇라 未幾에 膳奴之刃이 禍起不測하니 天道好還이 有以也夫인저

○ 8월에 東魏의 高澄蘭京에게 살해당하였다.【[釋義]蘭京은 衡州刺史 蘭欽의 아들이니, 高澄이 음식을 만드는 종으로 삼았다. 蘭京이 여러 번 하소연하자 高澄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로 인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通鑑要解]高澄은 일찍이 衡州刺史 蘭欽의 아들 蘭京을 잡아 음식 만드는 종으로 삼았는데, 蘭京이 자주 하소연하니 高澄이 매질하며 이르기를 “다시 하소연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후에 蘭京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두었다가 高澄을 찔러 죽였다.】 이때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내외가 진동하고 놀랐다. 太原公高洋이 이 말을 듣고 휘하의 부대를 지휘하여 들어와서 역적들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살을 저몄다. 高洋이 晉陽에 이르러서 문무백관들을 크게 모을 때에 神彩가 英明하고 발랄하며 言辭가 민첩하고 흡족하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高澄의 政令 중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高洋이 모두 고쳤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高澄이 과거 世子였을 때에 여색을 좋아한 것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高歡)를 창과 칼날 아래에 거의 빠뜨릴 뻔하여 그 죄가 이미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 霸業을 잇게 되자 先王의 뜻을 계승하지 않고 제멋대로 悖逆한 짓을 하여 군주를 幽置하고 욕보이기를 도둑과 원수처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만드는 종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숨겼다가〉 高澄을 찔러 죽여 禍가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났으니, 天道가 돌려주기를 좋아함이 이유가 있는 것이다.”

○ 十二月에 梁始興太守陳霸先【字興國이니 吳興長城人이라 其本甚微일새 自云漢太丘長寔之後也라하니 是爲陳高祖라】이 結郡中豪傑하야 欲討侯景할새 郡人侯安都와 張偲等이 各帥衆千餘人하고 歸之어늘 遣使하야 間道【間은 去聲이니 微路也라 投空隙而行하야 不公顯也라】詣江陵하야 受湘東王【武帝第七子니 是爲元帝라】節度하다

[二十史略]魏主이 殂하니 諡曰宣武皇帝라하고 廟號世宗이라하다 子立하니 甫六歲일새 母胡氏稱制러니 及魏主旣長에 好遊騁하야 不親視朝하고 而胡后方淫亂하니 魏政始衰하니라 將軍張彛之子仲瑀 上封事하야 排抑武人하니 喧謗盈路라 立榜大巷하고 剋期會集하야 屠其家라호되 父子不以爲意러니 至是하야 羽林, 虎賁近千人이 相率至尙書省하야 詬罵하고 以瓦石으로 擊省門하니 上下懾懼하야 不敢禁討라 遂至第하야 焚其舍하고 曳父子하야 敺擊投火中하니 仲瑀는 重傷走免하고 는 死하니 遠近震駭라 胡后收其兇强八人하야 斬之하고 餘不復治하고 大赦以安之하니라 懷朔鎭函使高歡이 至洛陽이라가 見張彛之死하고 還家傾貲하야 以結客하니 或問其故한대 曰 宿衛相率하야 焚大臣之第호되 朝廷이 懼而不問이라 爲政如此하니 事可知矣니 財物을 豈可常守邪아 이 自先世로 坐法徙北邊하야 遂習鮮卑之俗하고 深沈有大志하야 與侯景等으로 相友善하고 以任俠으로 雄鄕里하니라

[二十史略]魏胡太后 臨朝以來로 嬖倖用事하야 政事縱弛하니 盜賊蜂起하고 封疆日蹙이라 魏主寖長에 太后自知所爲不謹하고 務爲壅蔽하니 母子嫌隙日深이러라 時에 六州大都督秀容酋長爾朱榮이 兵强이라 高歡이 見하고 卽勸擧兵하야 淸帝側이러니 會에 魏主殂하니 胡太后鴆之也라 後에 諡曰孝明皇帝라하다 爾朱榮이 擧兵하야 立孝文之姪長樂王子攸하고 沈胡太后于河하니 封太原王하야 還晉陽하다 北海王奔梁이어늘 梁이 立之하고 遣將送入洛陽하니 子攸出奔이라 이 渡河來救하니 走死어늘 子攸歸하야 加天柱大將軍하다 이 蓄不臣之志어늘 魏主密謀誅之하고 入에 手刺之하니 爾朱世隆이 與爾朱兆로 立宗室長廣王하야 入洛陽하다 子攸遇弑하니 後에 諡曰孝莊皇帝라하다 世隆은 又以疏遠이라하야 廢之하고 而立孝文之姪廣陵王이러니 高歡이 起兵誅爾朱氏하고 入洛陽하야 廢而立孝文之孫平陽王하다 하니 後에 諡曰節閔皇帝라하다 이 自爲大丞相하야 建府於晉陽하고 居之하다 魏主하야 謀伐晉陽이러니 이 擁兵來어늘 魏主奔長安하야 依關西大都督宇文泰하고 以로 爲大丞相하니 魏主不及이라 遂立淸河王世子善見於洛陽하고 遷于鄴하니 魏自道武로 至是一百四十九年而分爲東魏, 西魏하다

[二十史略]至長安하야 踰半年에 又與로 有隙하니 鴆之러니 後에 諡曰孝武皇帝라하다 南陽王寶炬하니라 이 與로 連年相攻戰하야 互有勝負러니 卒에 遺書囑其子侯景이 有飛揚跋扈之志하니 非汝所能制요 堪敵者는 惟慕容紹宗이라하더니 이 果叛하야 以河南으로 降西魏라가 未幾에 復附于梁하니 梁이 封爲河南王하다 使至梁이어늘 梁群臣이 皆不欲納하고 梁主亦自謂我國家如金甌하야 無一傷缺하니 恐納이면 因以生事라호되 惟朱异力勸納之하니라 東魏遣慕容紹宗하야 擊하니 이 敗南走하야 襲梁壽春據之하고 請命梁하니 就以爲南豫州牧하다 旣而요 東魏求成於梁하니 意欲得이라 恨梁通東魏하야 遂反於壽陽하야 引兵南渡하야 圍建康하니라 梁主自卽位以來로 江左久無事라 惟崇佛法하야 屢捨身佛寺하니 上下化之러니 及景逼臺城에 援兵至者 皆爲景所敗하고 城中飢甚이라 梁主遣人하야 與景盟하고 以爲大丞相하니 臺城이 受圍五月而陷이라 梁主爲景所制하고 飮膳을 亦被裁損이라 憂憤成疾하야 口苦索蜜이라가 不得하야 再曰荷荷라하고 遂殂하니 在位四十八年에 改元者七이니 曰天監, 普通, 大通, 中大通, 大同, 中大同, 太淸이라 先是에 太子統이 仁明孝儉하고 好學有文하야 在東宮三十年而終하니라 梁主舍嫡孫而立別子하야 至是卽位하니 是爲太宗簡文皇帝러라

○ 12월에 梁나라 始興太守陳霸先【陳霸先은 字가 興國이니, 吳興 長城 사람이다. 근본이 매우 미미하므로 스스로 이르기를 “漢나라 太丘長 陳寔의 후예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가 바로 陳나라 高祖이다.】이 郡內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侯景을 토벌하려고 할 적에 고을 사람 侯安都張偲 등이 각각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歸附하자, 使者를 보내어 샛길【間은 去聲이니 샛길이다. 좁은 틈으로 길을 가서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로 江陵에 이르러서 湘東王 蕭繹【湘東王 蕭繹은 武帝의 일곱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元帝이다.】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二十史略]魏主(北魏)元恪이 죽으니, 시호를 宣武皇帝라 하고 廟號를 世宗이라 하였다. 아들元詡가 즉위하니, 나이가 겨우 6세이므로 母后胡氏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魏主가 장성하자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여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지 않았고 胡后가 음란하니, 魏나라 정사가 비로소 쇠하였다. 장군 張彛의 아들張仲瑀가 封事를 올려 武人을 배척하고 억제하니, 비방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에 武人들이 큰 길거리에 비방하는 榜을 써 붙이고 날짜를 잡아 모여서 그의 집을 도륙하기로 약속하였으나 張彛 父子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에 侍從을 맡은 羽林軍과 虎賁衛 근 천 명이 서로 이끌고 尙書省에 이르러서 張彛 父子를 욕하고 꾸짖고는 기와와 돌로 尙書省의 門을 치니, 上下가 두려워하여 감히 금지하고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마침내 張彛의 집에 이르러서 집에 불을 지르고 張彛 父子를 끌어내어 구타하고 불 속에 던져넣으니, 張仲瑀는 중상을 입고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張彛는 죽었다. 이에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胡后가 그들 중 흉악하고 세력이 강한 자 8명만 체포하여 목을 베고, 그 나머지는 다시 죄를 다스리지 않고 크게 사면하여 이들을 안심시켰다.

懷朔鎭函使인 高歡이 洛陽에 왔다가 張彛가 죽은 것을 보고는 집에 돌아와 재산을 모두 털어 문객들과 교분을 맺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高歡이 말하기를 “宿衛兵들이 서로 이끌고서 大臣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않는다. 정사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만하다. 재물을 어찌 항상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高歡은 先代로부터 법에 걸려 북쪽 변방으로 이주당해서 마침내 鮮卑族의 풍속을 익혔으며,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큰 뜻이 있어서 侯景 등과 서로 친하였고 任俠으로 鄕里에 알려졌다.

[二十史略]魏나라 胡太后가 조정에 임어한 이후로 총애하는 小人들이 用事하여 政事가 해이해지니, 도적들이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고 국경이 날로 위축되었다. 魏主元詡가 점점 장성하자 太后는 자신의 행실이 신중하지 못하였음을 알고 은폐하기를 힘쓰니, 母子間에 틈이 날로 깊어졌다. 이때 六州大都督인 秀容縣 酋長 爾朱榮의 군대가 강성하였다. 高歡爾朱榮을 만나 보고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황제의 측근을 깨끗이 소탕할 것을 권하였는데, 마침 魏主가 죽으니胡太后가 독살한 것이었다. 후에 시호를 孝明皇帝라 하였다.

爾朱榮이 군대를 일으켜孝文帝의 조카인 長樂王元子攸를 세우고胡太后를 黃河에 빠뜨려죽이니, 魏나라에서 爾朱榮太原王에 봉하여晉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北海王元顥가 梁나라로 도망하자, 梁나라에서 그를 황제로 세우고 장수를 보내어 호송해서 洛陽으로 들여보내니, 元子攸가 도망하였다. 爾朱榮이 황하를 건너와서 구원하니, 元顥가 패주하다가죽었으므로元子攸가 돌아와서爾朱榮을 天柱大將軍에 임명하였다. 爾朱榮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자 魏主가 은밀히 그를 죽일 것을 도모하고는 爾朱榮이 들어오자 직접 찔러죽이니, 爾朱榮의 從弟인 爾朱世隆爾朱榮의 從子인 爾朱兆와 함께 宗室인 長廣王元曄을 세워洛陽으로 들어갔다. 元子攸가 시해당하니, 뒤에 시호를 孝莊皇帝라 하였다.

爾朱世隆은 또 元曄이 왕실과 혈연관계가 소원하다 하여 폐위하고孝文帝의 조카인 廣陵王元恭을 세웠는데, 高歡이 군대를 일으켜 爾朱氏를 죽이고는 洛陽으로 들어와 元恭을 폐위하고 孝文帝의 손자인 平陽王元脩를 세웠다. 元脩元恭을 시해하니, 뒤에 시호를 節閔皇帝라 하였다.

高歡이 스스로 大丞相이 되어 晉陽에 府를 세우고 그곳에 거주하였다. 魏主高歡을 두려워하여 晉陽을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高歡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魏主가 長安으로 도망하여 關西大都督宇文泰에게 의지하고 宇文泰를 大丞相으로 삼았다.(이것이 西魏임) 高歡魏主를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淸河王의 세자인 元善見을 洛陽에 세우고 鄴으로 돌아가니,(이것이 東魏임) 魏나라는 道武帝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149년 만에 東魏와 西魏로 나누어졌다.

[二十史略]元脩가 長安에 이르러 반 년이 지나서 또다시 宇文泰와 틈이 생기자 宇文泰가 그를 독살하였는데, 뒤에 시호를 孝武皇帝라 하였다.

宇文泰南陽王元寶炬를 세웠다. 高歡宇文泰는 여러 해를 계속하여 공격하고 싸워서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高歡이 죽을 때에 遺書를 남겨 그의 아들高澄에게 부탁하기를 “侯景은 잘난 체하고 발호하려는 뜻이 있으니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侯景을 대적할 만한 자는 慕容紹宗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侯景이 과연 배반하여 河南 땅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梁나라에 붙으니, 梁나라에서 侯景을 봉하여 河南王으로 삼았다. 侯景의 使者가 梁나라에 이르자, 梁나라 신하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梁나라 군주도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金甌(금으로 만든 작은 사발)와 같아서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으니, 侯景을 받아들이면 이로 인하여 일이 생길까 두렵다.” 하였으나 오직 朱异가 강력히 권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東魏가 慕容紹宗을 보내어 侯景을 공격하니, 侯景이 패배하여 남쪽으로 도망가서 梁나라 壽春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梁나라에 은혜로운 명령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梁나라가 이에 그를 南豫州牧으로 삼았다. 이윽고 東魏가 梁나라에게 화해할 것을 청하니, 侯景을 잡으려고 해서였다. 侯景은 梁나라가 東魏와 통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마침내 壽陽(壽春)에서 배반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 建康을 포위하였다.

梁主가 즉위한 뒤로 江東 지방이 오랫동안 태평하였으므로 오직 佛法을 숭상하여 여러 번 佛寺에 捨身하니, 上下가 모두 이를 따라하였다. 侯景이 臺城을 압박해 들어오자 구원하러 온 군대가 모두 侯景에게 패하였고 城 안이 몹시 굶주렸다. 梁主가 사람을 보내어 侯景과 맹약하고 侯景을 大丞相으로 삼으니, 臺城이 포위된 지 5개월 만에 함락되었다.

梁主侯景에게 제재당하고 음식 또한 삭감당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梁主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荷荷’ 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었다. 재위 48년 동안에 改元한 것이 일곱 번이니, 天監‧普通‧大通‧中大通‧大同‧中大同‧太淸이다. 이보다 앞서 太子 蕭統은 인자하고 총명하고 효도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이 있었는데, 東宮에 있은 지 30년 만에 죽었다. 梁主가 嫡孫을 버리고 別子(蕭綱)를 세워 이때에 이르러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太宗簡文皇帝이다.

太宗簡文帝
名綱이 武帝第三子라

太宗簡文帝【一德不懈曰簡이라】이니 武帝第三子라 在位二年이요 壽四十九라

太宗 簡文帝【德을 한결같이 하여 게으르지 않은 것을 簡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武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49세이다.

[庚午] 梁太宗大寶元年, 魏大統十六年

[庚午] 〈梁太宗大寶元年이요 魏大統十六年이요 東魏武定八年이요 齊顯祖文宣帝高洋天保元年이라 ○ 是歲에 東魏亡하니 齊代하니라〉

경오(550) - 梁나라 太宗의 大寶 元年이고, 魏나라 大統 16년이고, 東魏武定 8년이고, 齊나라 顯祖文宣帝高洋의 天保 元年이다. ○ 이해에 東魏가 망하니, 齊나라가 대신하였다.-

東魏進太原公高洋位丞相, 齊郡王하고 下詔禪位於齊王【洋이 使侍中張亮으로 逼東魏主以禪하고 封東魏主爲中山王하니라】하니 王이 卽皇帝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東魏之興이 實自孝靜이라 于時에 國政이 盡出高氏하니 雖篤好文學하고 從容沈雅라도 何救敗亡이리오 是可慨也로다

東魏에서 太原公高洋의 지위를 丞相‧齊郡王으로 승진시키고 조서를 내려 齊王에게 讓位하니,【高洋이 侍中 張亮으로 하여금 東魏主를 핍박하여 讓位하게 하고 東魏主를 봉하여 中山王으로 삼았다.】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東魏가 흥한 것은 실로 孝靜帝(元善見)로부터이다. 이때에 國政이 모두 高氏에게서 나왔으니, 孝靜帝가 비록 文學을 독실히 좋아하였으며 조용하고 침착하고 고상하였으나 어찌 패망을 구원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개탄할 만한 일이다.”

○ 梁湘東王이 以天子制於賊臣이라하야 不肯從大寶之號하고 猶稱太淸四年하다 丙午에 이 下令하야 大擧討侯景할새 移檄遠近하다

○ 梁나라 湘東王蕭繹이 天子가 賊臣인 侯景에게 제재를 받는다 하여 大寶라는 연호를 따르려 하지 않고 그대로 太淸 4년이라 칭하였다.

丙午日(4월 27일)에 蕭繹이 명령을 내려 크게 군대를 일으켜 侯景을 토벌할 적에 遠近에 檄文을 보냈다.

○ 九月에 梁이 進侯景位相國하고 封二十郡한대 自稱漢王하다

○ 9월에 梁나라가 侯景의 지위를 相國으로 승진시키고 20개 郡을 봉해 주었는데, 侯景이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였다.

○ 魏丞相 始籍民之才力者爲府兵하야 身租, 庸, 調【有田則有租하고 有身則有庸하고 有戶則有調하니 凡受田之丁이 歲輸粟을 謂之租요 用人之力호되 歲二十日하고 閏加二日하며 不役者는 日出絹三尺을 謂之庸이요 每丁隨鄕所出하야 歲輸絹綾絁繭布綿麻호되 非蠶鄕則歲輸銀을 謂之調라 調는 去聲이라】를 一切蠲之하고 以農隙으로 講閱戰陳하고 馬畜粮備를 六家供之하야 合爲百府하고 每府에 一郞將主之하야 分屬二十四軍【凡十二將軍이니 每將軍이 各統開府二人하고 開府各領一軍이라】하니라

○ 魏나라 丞相宇文泰가 처음으로 백성 중에 재주와 힘이 출중한 자를 장부에 올려 府兵을 만들어서 이들의 租‧庸‧調【田地가 있으면 租가 있고, 몸이 있으면 庸이 있고, 戶가 있으면 調가 있으니, 무릇 田地를 받은 壯丁이 해마다 곡식을 바치는 것을 租라 이르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하되 1년에 20일이고 윤달이 든 해에는 2일을 더하며 부역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루에 비단 3尺을 내게 하는 것을 庸이라 이르며, 壯丁마다 그 지방에서 나는 土産物에 따라 해마다 絹綾과 고치와 삼베와 綿과 麻를 바치게 하되 누에 치는 고을이 아니면 해마다 銀을 바치게 하는 것을 調라 일렀다. 調는 去聲이다.】를 일체 면제해 주고, 〈장부에 올린 府兵들은〉 농한기에 전투하고 진 치는 법을 조련하고 사열하였으며, 〈府兵에게 필요한〉 馬匹과 양식과 꼴을 여섯 가호가 함께 공급하여 모두 100개의 軍府를 만들고 府마다 郞將 한 명이 주관하게 하여 24軍【24軍에는 모두 12장군이 있었으니, 매 장군마다 각각 開府 2인을 통솔하고 開府는 각각 1軍을 지휘하였다.】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辛未] 梁大寶二年, 魏大統十七年

[辛未] 〈梁大寶二年이요 魏大統十七年이요 齊天保二年이라〉

신미(551) - 梁나라 大寶 2년이고, 魏나라 大統 17년이고, 齊나라 天保 2년이다. -

三月에 魏主【文帝寶炬也라】하고 太子이 立하다

3월에 魏主【魏主는 文帝 元寶炬이다.】가 죽고太子元欽이 즉위하였다.

○ 齊以湘東王으로 爲梁相國하야 建梁臺【臺는 行臺라 】하야 摠百揆하고 承制하다

○ 齊나라가 湘東王蕭繹을 梁相國으로 삼아 梁臺【臺는 行臺이다.】를 세워 百揆를 총괄하고 皇帝의 制를 받들게 하였다.

○ 九月에 侯景이 逼梁主하야 禪位於豫章王【棟은 昭明太子統子華容公歡之子也라】이라가 尋弑之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簡文이 幼而聰睿하야 多聞博達하고 富贍詞藻러니 不幸遭家不造하야 正位宸極에 受制賊臣하야 卒罹土囊之痛焉이라 當是時하야 太陰晝見하고 天雨黃沙하며 太白經天이라가 更日乃止하야 梁祚將傾에 天文告變하니 雖以才如周公이라도 猶難戡難이온 況是文成宮體 何補滅亡이리오 賊이 陰簒弑之謀하고 蕭棟이 陽受禪之號하야 而建康之梁이 爲汚矣로다

○ 9월에 侯景梁主를 핍박하여 豫章王【豫章王 蕭棟은 昭明太子 蕭統의 아들인 華容公 蕭歡의 아들이다.】에게 讓位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시해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簡文帝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見聞이 많고 널리 통달하며 문장력이 풍부하였는데, 불행히도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 帝王의 자리[宸極]에서 왕위를 바로잡음에 賊臣(侯景)에게 제재당하여 끝내 土囊의 애통함을 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太陰(달)이 낮에 나타나고 하늘에서 黃沙가 내렸으며 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쳐 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쳐서 梁나라의 國運이 기울려 하자 天文이 변고를 알렸으니, 비록 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어도 오히려 난리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하니 더구나 문장이 宮體를 이루었다 한들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 무슨 보탬이 있었겠는가. 역적인 侯景은 남몰래 찬탈하고 시해할 계책을 세우고, 蕭棟은 겉으로 禪讓을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建康의 梁나라가 侯景에게 더렵혀지고 말았다.”

○ 梁王僧辯【大都督이라】等이 聞太宗殂하고 啓湘東王하야 請上尊號하다

○ 梁나라 王僧辯【王僧辯은 大都督이다.】 등이 太宗(簡文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湘東王蕭繹에게 아뢰어 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 梁豫章王이 禪位于하니 卽位하야 稱帝于南郊하다 大赦하고 改元太始하고 封淮陰王하다

[二十史略]簡文皇帝는 名이니 在東宮十八年而後에 遇侯景之亂하야 旣立에 受制於而已러라 湘東王이 鎭江陵하야 自稱假黃越, 大都督이라하야 中外諸軍이 承制러니 岳陽王昭明太子之第三子也라 鎭襄陽하야 與으로 相攻할새 이 遣使降于西魏하야 以求援하니 西魏立梁蕭詧하야 爲梁王하다

[二十史略]侯景이 自稱漢王이라하고 廢梁主弑之하니 尸位不及三年에 改元者一이니 曰大寶라 이 立豫章王이러니 已而요 簒位하다 先是에 始興太守陳霸先이 起兵討하고 湘東王이 遣王僧辯하니 이 簒位數月而爲僧辯霸先所敗하야 亡走吳하야 欲入海라가 爲其下所斬이라 送尸建康하야 傳首江陵하고 截其手足하야 送於北齊하니라 湘東王立하니 是爲元皇帝러라

○ 梁나라 豫章王蕭棟侯景에게 讓位하니, 侯景이 즉위하여南郊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크게 사면하고 太始로 改元하였으며, 蕭棟을 봉하여 淮陰王으로 삼았다.

[二十史略]簡文皇帝는 이름이 蕭綱이니, 東宮에 있은 지 18년 만에 侯景의 난리를 만나 즉위하였는데, 즉위한 뒤에 侯景에게 제재당하기만 하였을 뿐이다. 湘東王蕭繹이 江陵에 鎭駐하여 假黃越‧大都督이라 스스로 칭하여 中外의 여러 군대가 그의 통제를 받았다. 岳陽王蕭詧昭明太子蕭統의 셋째 아들인데, 襄陽에 鎭駐하여 蕭繹과 서로 공격할 때에 蕭詧이 사신을 보내 西魏에 항복하고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西魏가 梁나라 蕭詧을 세워梁王으로 삼았다.

[二十史略]侯景이 스스로 漢王이라 칭하고梁主簡文帝를 폐위하였다가시해하니, 梁主가 자리만 지키고 있은 지가 채 3년이 못 되었고 改元한 것이 한 번이니, 大寶이다. 侯景豫章王蕭棟을 세웠는데 얼마 후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이보다 앞서 始興太守陳霸先이 군대를 일으켜 侯景을 토벌하고湘東王蕭繹王僧辯을 보내어 侯景을 토벌하니, 侯景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지 몇 개월 만에 王僧辯陳霸先에게 패하여 吳 지방으로 달아나서 海島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부하에게 참수당하였다. 그의 시신을 建康으로 보내어 머리는 江陵에 전달하고 손과 발은 잘라서 北齊로 보내었다. 湘東王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元皇帝이다.

世祖孝元帝
世祖孝元帝 名繹이니 武帝第七子라

世祖孝元帝【行義悅民曰元이라】이니 武帝第七子라 在位三年이요 壽四十七이라

世祖 孝元帝【義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元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武帝의 일곱째 아들이다. 재위가 3년이요, 壽가 47세이다.

[壬申] 梁世祖承聖元年, 魏主欽元年, 齊天保三年

[壬申] 〈梁世祖承聖元年이요 魏主元年이요 齊天保三年이라〉

임신(552) - 梁나라 世祖(元帝)의 承聖 元年이고, 魏主元欽의 元年이고, 齊나라 天保 3년이다. -

湘東王이 與王僧辯, 陳霸先等으로 東擊侯景하니 兵大潰하야 與百餘騎東走어늘 追及斬之하다

梁나라 湘東王蕭繹王僧辯陳霸先 등과 함께 동쪽으로 侯景을 공격하니, 侯景의 군대가 크게 무너져서 백여 명의 기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였는데, 추격하여 따라잡아 목을 베었다.

○ 己丑에 梁僧辯等이 上表勸進【勸進은 進上尊號也라】하고 且迎都建業이어늘 湘東王答曰 淮海長鯨【長鯨은 喩侯景이라】이 雖云授首나 襄陽短狐 未全革面【短狐는 喩岳陽王詧이요 革面은 言變革其面而從也라[附註]短狐는 𧌒也니 本草에 謂之射工이라 在水中하야 含沙射人이면 皮膚成瘡이라 梁主以捨詧而立綱爲太子라하야 內常愧之하야 寵亞諸子하고 詧亦內懷不平하고 遂畜財下士하야 招募勇敢士러니 庚午年에 魏(主)[立]詧하야 爲梁主하니라】하니 太平玉燭【泰階六星이 平則治라 四時調曰玉燭이라[附註]爾雅에 春爲靑陽이요 夏爲朱明이요 秋爲白藏이요 冬爲玄英이니 四時和를 謂之玉燭이라하니라 此는 釋太平之時에 四氣和暢하야 以致嘉祥之事也라 謂之玉燭者는 言四時和氣 溫潤明照라 故로 謂之玉燭이라】이어든 爾乃議之하라

○ 己丑日(3월 21일)에 梁나라 王僧辯 등이 湘東王에게 表文을 올려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권하고【勸進은 皇帝의 尊號를 올린 것이다.】 또 그를 맞이하여 建業에 도읍하게 하자, 湘東王이 답하기를 “淮海의 큰 고래(侯景)【長鯨은 侯景을 비유한 것이다.】가 비록 머리를 바쳤으나 襄陽의 短狐(蕭詧)가 아직 완전히 귀순하지 않았으니,【[釋義]襄陽短狐 未全革面:[釋義]短狐는 岳陽王 蕭詧을 비유한 것이고, 革面은 얼굴빛을 바꾸고 복종함을 말한다.[附註]短狐는 물여우이니, ≪本草綱目≫에 이를 일러 射工이라 하였다. 물속에 있으면서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쏘면 사람의 피부에 부스럼이 생긴다. 梁主(武帝)가 蕭詧을 버리고 蕭綱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해서 내심 항상 이를 부끄러워하여 蕭詧을 여러 아들 다음으로 총애하였고, 蕭詧 또한 내심 불평을 품고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어서 용감한 군사들을 불러 모집하였다. 庚午年(550)에 魏나라가 梁王 蕭詧을 梁主로 삼았다.】 天下가 태평해지고 四時가 고르게 되거든【[釋義]泰階(三台星)의 여섯 별이 고르면 세상이 다스려진다. 四時가 고른 것을 玉燭이라 한다.[附註]玉燭은 ≪爾雅≫에 “봄을 春陽이라 하고 여름을 朱明이라 하고 가을을 白藏이라 하고 겨울을 玄英이라 하니, 四時가 조화로운 것을 玉燭이라 이른다.” 하였다. 이는 태평한 시대에는 四時의 기운이 화창해서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을 이르게 함을 말한 것이다. ‘玉燭’이라고 이른 것은 四時에 화기가 溫潤하고 밝게 비추기 때문에 玉燭이라 이른 것이다.】 그대들은 그때 가서 비로소 이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 益州刺史武陵王元帝之兄이라】 頗有武略이러니 聞侯景陷臺城하고 四月에 卽皇帝位하다

○ 益州刺史武陵王蕭紀【武陵王 蕭紀는 元帝 蕭繹의 형이다.】가 자못 武略이 있었는데, 侯景이 臺城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4월에 皇帝에 즉위하였다.

○ 十一月에 梁湘東王이 卽位於江陵하야 改元大赦하다

○ 11월에 梁나라 湘東王蕭繹이 江陵에서 즉위하여 改元하고 크게 사면하였다.

[癸酉] 梁承聖二年, 魏主欽二年, 齊天保四年

[癸酉] 〈梁承聖二年이요 魏主二年이요 齊天保四年이라〉

계유(553) - 梁나라 承聖 2년이고, 魏主元欽의 2년이고, 齊나라 天保 4년이다. -

正月에 梁王僧辯이 發建康하고 承制하야 使陳霸先으로 代鎭揚州하다

정월에 梁나라 王僧辯이 〈군대를 이끌어〉 建康을 출발하고, 皇帝의 制를 받들어 陳霸先으로 하여금 揚州를 대신 진무하게 하였다.

○ 魏太師魏主文帝寶炬長子이니 爲宇文泰所廢弑라】하고 立其弟齊王文帝第四子니 是爲恭帝라】하다

○ 魏나라 太師宇文泰魏主 元欽【魏主 元欽은 文帝 元寶炬의 長子이니, 宇文泰에게 폐위되어 시해당하였다.】을 폐하고, 그의 아우齊王 元廓【齊王 元廓은 文帝의 넷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恭帝이다.】을 세웠다.

梁主好玄談【莊, 老尙玄이요 釋氏尙空이라】하야 九月에 於龍光殿에 講老子하다

梁主가 玄談【莊子와 老子는 玄虛를 숭상하고, 釋氏는 空을 숭상하였다.】을 좋아하여 9월에 龍光殿에서 《老子》를 강하였다.

○ 魏遣于謹, 宇文護, 楊忠하야 將兵五萬하야 入寇하니 梁王이 帥衆會之하다 梁主停講하고 內外戒嚴이러니 王이 報曰 吾至石梵하니 境上이 帖然이러이다 梁主聞而疑之러니 乃復開講一日하니 百官이 戎服以聽이라 丁亥에 魏兵이 至柵下호되 梁主巡城하야 猶口占爲詩하고 群臣이 亦有和者【和는 去聲이니 應也라】라 甲寅에 魏人이 百道攻城하니 反者開(四)[西]門하고 納魏師어늘 梁主白馬素衣로 出降하다

歷年圖曰 武帝【蕭衍이라】當齊之季하야 任居方面【謂爲荊州刺史라】하고 危不自安하야 乘時奮起하야 以除昏主而成大業이라 及享國日久에 普通, 大通之際에 遭魏氏衰微하야 王公牧守 繈屬【繈은 索也니 言若繩索之相屬이라】而歸之하고 戎車北征하야 至於洛汭라 觀其勤身約己하고 好尙文雅하야 拊循士大夫하면 亦可謂恭儉寬惠之君矣라 然이나 以萬乘之主로 爲桑門之行하야 屈身傾國하야 以奉浮屠하고 恩勝於威하야 紀綱不立이라 信佞臣之謀하고 貪河南之地하야 棄與國【謂東魏라】하고 寵叛人【侯景이라】하야 遂使臺城覆沒하고 老而餒死하야 江淮以南이 鞠爲荊棘하니 其智未足稱也라 夫德澤不能及而享其大利를 聖人禍之하니 譬如悅盜賊之財而延之入室이면 財不可得而喪其所有 必矣라 其子孫이 各擁强兵하야 列居重鎭이나 不救君父之危하고 而窺間乘便하야 更相屠滅하니 元帝【繹이라】於兄弟之中에 殘忍尤甚이라 是以로 雖翦兇渠【渠는 大也니 謂侯景이라】하야 而克復故業이나 旋踵之間에 身爲俘馘【生獲曰俘요 斷耳曰馘이라】하니 豈特人心之不與哉리오 亦天地之所誅也니라

○ 魏나라가 于謹宇文護楊忠을 보내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니, 梁王蕭詧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과 회합하였다. 梁主가 講을 정지하고 내외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는데, 王琛이 보고하기를 “제가 石梵에 이르니 국경이 조용하였습니다.” 하였다. 梁主가 이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였는데, 다시 《老子》 講을 하루 동안 여니, 百官들이 군복 차림으로 講을 들었다. 丁亥日(11월 5일)에 魏나라 군대가 城柵 아래에 이르렀으나 梁主는 성을 순행하면서 여전히 입으로 詩를 지어 읊었고 신하들 중에도 화답하는 자【和는 去聲이니, 응답하는 것이다.】가 있었다. 甲寅日(12월 2일)에 魏나라 사람들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니, 城안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서쪽 城門을 열어 魏나라 군대를 들어오게 하였다. 梁主가 白馬에 素服 차림으로 나와서 항복하였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武帝【武帝는 蕭衍이다.】는 齊나라 말엽을 당하여 方面【方面은 荊州刺史가 되었음을 이른다.】의 임무를 맡고는 위태롭게 여기고 스스로 편안히 여기지 않아서 때를 틈타 분발하여 일어나서 어두운 군주를 제거하고 大業을 이루었다. 황제의 지위에 오른 지 오래되자 普通 연간과 大通 연간 사이에 魏나라가 쇠미해질 때를 당하여 王公과 지방 수령들이 계속 이어서【繈은 끈이니, 繈屬은 마치 끈이 서로 이어진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돌아오고 兵車로 북쪽을 정벌하여 洛汭에까지 이르렀다. 몸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하며 文雅를 좋아하고 숭상해서 士大夫들을 어루만진 것을 보면 또한 공손하고 검소하며 너그럽고 은혜로운 군주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萬乘의 군주로서 桑門(승려)의 행실을 하여 몸을 굽히고 나라를 기울여 浮屠를 받들었으며 은혜가 위엄을 이겨 기강이 서지 못하였다. 간신(朱异)의 꾀를 믿고 河南 땅을 탐내어 동맹국인 東魏【與國(동맹국)은 東魏를 이른다.】를 배반하고 모반한 侯景【모반한 사람은 侯景이다.】을 총애하여 마침내 臺城을 전복시켰으며 늙어서 굶어 죽어 江淮 이남 지방이 마침내 쑥대밭이 되게 하였으니, 그 지혜는 칭찬할 것이 못 된다. 덕택이 미치지 못하면서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을 聖人은 재앙으로 여겼으니, 비유하건대 도적의 재물을 좋아하여 도적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어오게 하면 재물을 얻기는커녕 자신의 소유를 잃을 것이 틀림없다. 자손들이 각각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서 重鎭에 포진하고 있었으나 君父의 위태로움을 구원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고 편리한 틈을 타서 번갈아 서로 도륙하고 멸망시켰으니, 元帝【元帝는 蕭繹이다.】는 형제 중에서도 잔인함이 더욱 심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元兇인 侯景【渠는 큼이니, 兇渠는 侯景을 이른다.】을 제거하여 옛 기업을 회복하였으나 돌아서기도 전에 몸이 포로【사로잡은 것을 俘라 하고, 귀를 베는 것을 馘이라 한다.】가 되었으니, 어찌 다만 人心이 허여하지 않았을 뿐이겠는가. 또한 天地가 벌을 내린 것이다.

魏立梁王하야 爲梁王하고 資以荊州之地하니 是爲後梁【梁昭明太子之子니 附於魏하니라[頭註]魏取襄陽하야 徙梁王詧하야 使稱帝于江陵하고 屯兵守之하니 名曰助防이라하나 實以制詧也라 詧은 音察이라】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元帝武帝之子로 摠上流之重이라 方其京師覆沒하고 君父告危하니 於斯時에 奔走赴難이 可也어늘 而竟逡巡不進하고 繼而徵兵湘州하야 少不如意면 則含忍以就大事 可也어늘 而遽行骨肉之誅하고 終而簡文嗣位하야 國祚幸存이면 則翼戴以隆梁祚 亦可也어늘 而乃不稟正朔하고 復興成濟之謀라 觀其始終一念이 上不在其君親하고 下不在其兄弟하야 僥倖國釁하고 希覬身謀하야 師出無名하니 何以討賊이리오 是以로 纔誅侯景하고 卽安江陵이라가 未越三期에 寇戎交逼이라 身在漂搖扤捏之中하야 不思保國之計하고 方且躬御龍光하야 親講老子하야 使百官으로 戎服以聽하며 不思反己하고 猶焚圖書하니 其愚蔽亦甚矣라 卒之喪師覆旅하고 身就拘囚하니 豈非上靈降鑑에 此焉假手리오 天道人事를 其可誣乎아

魏나라가 梁王蕭詧을 세워梁王으로 삼고 荊州 지역을 밑천으로 삼게 하니, 이것이 바로 後梁이다.【[原註]魏立梁王詧……是爲後梁:[原註]梁王 蕭詧은 梁나라 昭明太子의 아들이니, 魏나라에 붙었다.[頭註]魏나라가 襄陽을 취하고 梁王 蕭詧을 옮겨서 江陵에서 稱帝하게 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니, 명색은 방어를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蕭詧을 제재하고자 한 것이었다. 詧은 음이 찰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元帝(蕭繹)武帝(蕭衍)의 아들로 揚子江 上流 지역의 重任을 총괄하고 있었다. 京師인 建康이 함락되고 君父가 위태로움을 고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급히 달려가 國難을 구원하는 것이 옳았는데 끝내 머뭇거리고 전진하지 않았으며, 뒤이어 湘州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에 치욕을 참고서 大事를 이루는 것이 옳았는데 대번에 골육간의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簡文帝가 왕위를 계승하여 國統이 다행히 보존되었으면 그를 돕고 추대하여 梁나라의 國統을 융성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았는데 마침내 正朔을 받지 않고 다시 成濟의 계책을 일으켰다. 살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생각이 위로는 군주와 어버이에게 있지 않고 아래로는 형제들에게 있지 않아서, 국가의 災禍를 요행으로 여기고 오직 자신을 위한 계책만을 생각하여 명분 없는 군대를 출동시켰으니, 어떻게 역적을 토벌하겠는가. 이 때문에 겨우 侯景을 토벌하고 곧바로 江陵을 안정시켰다가 3년이 못 되어 오랑캐가 번갈아 핍박하였던 것이다. 몸이 飄搖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보전할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또 몸소 龍光殿에 나아가 친히 《老子》를 講해서 百官들로 하여금 군복 차림으로 듣게 하였으며, 자기 몸에 돌이켜 반성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古今의 도서 14만 권을 불태웠으니, 어리석음과 가려짐이 또한 심하다. 끝내 군대를 패망시키고 자신이 구속되고 갇히게 되었으니, 어찌 上天의 신령이 굽어보시어 이들에게 손을 빌린 것이 아니겠는가. 天道와 人事를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敬帝
敬帝 名方智니 元帝第九子라

敬帝方智元帝第九子라 在位二年이요 壽十六이라

敬帝는 이름이 方智이니, 元帝의 아홉째 아들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16세이다.

[乙亥] 梁敬帝紹泰元年, 魏恭帝廓二年

[乙亥] 〈梁敬帝紹泰元年이요 魏恭帝廓二年이요 齊天保六年이요 後梁中宗宣帝蕭詧(天)[大]定元年이라 ○ 凡四國이라〉

을해(555) - 梁나라 敬帝의 紹泰 元年이고, 魏나라 恭帝元廓의 2년이고, 齊나라 天保 6년이고, 後梁中宗宣帝蕭詧의 大定 元年이다. ○모두 네 나라이다.-

正月에 梁王이 卽皇帝位於江陵하고 上疏於魏에 則稱臣하고 奉其正朔周建子, 商建丑, 夏建寅이니 是改正也요 周夜半, 商鷄鳴, 夏平旦이니 是改朔也라】하다

정월에 梁王蕭詧이 江陵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魏나라에 상소할 적에 신하라고 칭하고 正朔【周나라는 建子月, 商나라는 建丑月, 夏나라는 建寅月을 정월로 삼았으니 이는 정월을 고친 것이요, 周나라는 夜半, 商나라는 鷄鳴, 夏나라는 平旦을 썼으니 이는 초하루를 고친 것이다.】을 받들었다.

○ 二月에 梁晉安王方智 至自尋陽하야 卽梁王位하니 時年十三이라 以太尉王僧辯으로 爲都督中外諸軍事하고 加陳霸先征西大將軍하다

○ 2월에 梁나라 晉安王蕭方智가 尋陽에서 와서 梁王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太尉王僧辯을 都督中外諸軍事로 삼고陳霸先에게 征西大將軍을 加하였다.

○ 齊【北齊高洋이라】與王僧辯書하야 以爲嗣主沖藐【沖은 與种通하니 稚也요 藐는 音妙니 弱也라】하야 未堪負荷요 貞陽侯淵明【武帝兄長沙王懿之子也라】은 以年以望으로 堪保金陵이니 以爲梁主하야 納於彼國하라 癸卯에 淵明이 入建康하야 丙午에 卽皇帝位하고 以晉安王으로 爲皇太子하다

○ 齊【齊는 北齊의 高洋이다.】나라가 王僧辯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嗣主는 어려서【沖은 种과 통하니 어린 것이요, 藐는 음이 묘이니 약한 것이다.】 군주의 직임을 감당할 만하지 못하고 貞陽侯 蕭淵明【蕭淵明은 武帝의 형인 長沙王 蕭懿의 아들이다.】이 나이로 보나 명망으로 보나 金陵을 보전할 만하니, 그를 梁主로 삼아서 저들의 나라로 들여보내라.” 하였다. 癸卯日(5월 24일)에 蕭淵明이 建康으로 들어가서 丙午日(5월 27일)에 황제에 즉위하고晉安王을 皇太子로 삼았다.

○ 初에 梁王僧辯이 與陳霸先으로 共滅侯景하고 情好甚篤이러니 及僧辯이 納貞陽侯淵明하야는 霸先이 遣使苦爭之하야 往返數四호되 僧辯이 不從이라 霸先이 乃擧兵襲僧辯하야 執而縊殺之하니 貞陽侯淵明이 遜位하고 出就邸하다 冬十月에 晉安王이 卽皇帝位하다

○ 처음에 梁나라 王僧辯陳霸先과 함께 侯景을 멸망시키고 情誼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王僧辯貞陽侯蕭淵明을 받아들이자陳霸先이 사자를 보내어 극력 간쟁해서 사자가 왕복하기를 서너 차례 하였으나 王僧辯이 따르지 않았다. 陳霸先이 이에 군대를 일으켜 王僧辯을 습격해서 사로잡아 목을 졸라죽이니, 貞陽侯蕭淵明이 황제의 자리를 내어놓고 나가서 私邸로 갔다. 겨울 10월에 晉安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初에 魏太師 以漢, 魏官繁이라하야 命蘇綽及尙書令盧辯하야 依周禮하야 更定六官하다

○ 처음에 魏나라 太師宇文泰가 漢과 魏의 관직이 너무 많다고 하여 蘇綽과 尙書令盧辯에게 명해서 《周禮》를 따라 다시 六官으로 정하게 하였다.

[丙子] 梁太平元年, 魏恭帝三年

[丙子] 〈梁太平元年이요 魏恭帝三年이요 齊天保七年이라〉

병자(556) - 梁나라 太平 元年이고, 魏나라 恭帝3년이고, 齊나라 天保 7년이다. -

正月에 魏初建六官【大冢宰, 大司徒, 大宗伯, 大司馬, 大司寇, 大司空이라】하야 以宇文泰로 爲太師, 大冢宰하고 自餘百官은 皆倣周禮하다

正月에 魏나라가 처음으로 六官【六官은 大冢宰‧大司徒‧大宗伯‧大司馬‧大司寇‧大司空이다.】을 세워 宇文泰를 太師‧大冢宰로 삼고, 그 나머지 백관은 모두 《周禮》를 따랐다.

○ 十月에 魏安定文公宇文泰 病이어늘 召中山公【泰之從子라】하야 謂曰 吾諸子皆幼하고 外寇方彊하야 天下之事를 屬之於汝하노니 宜努力하야 以成吾志하라 乙亥에 卒하다 能駕馭英豪하야 得其力用하고 性好質素하야 不尙虛飾하며 明達政事하고 崇儒好古하야 凡所施設을 皆依倣三代而爲之러라 丙子에 世子이 嗣位하야 爲太師, 大冢宰하야 出鎭同州하니 時年十五라 護綱紀內外하야 撫循文武하니 人心이 遂安이러라

○ 10월에 魏나라 安定文公宇文泰가 병이 위독하자, 中山公 宇文護【中山公 宇文護는 宇文泰의 從子이다.】를 불러 말하기를 “나의 여러 아들은 모두 어리고 外寇는 막 강성하여 天下의 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마땅히 노력하여 내 뜻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乙亥日(4일)에 宇文泰가 죽었다.

宇文泰는 영웅호걸들을 마음대로 부려서 그들로 하여금 전력을 다 기울이게 하였고, 성품이 질박하고 검소함을 좋아하여 겉치레를 숭상하지 않았으며, 정사에 밝게 통달하고 선비를 높이고 옛것을 좋아하여 모든 시설을 모두 三代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丙子日(5일)에 世子宇文覺이 지위를 이어받아 太師‧大冢宰가 되어 나가서 同州를 鎭守하니,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宇文護가 내외에 紀綱을 세워 문무백관을 어루만지니, 인심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 十二月에 魏以(歧)[岐]陽之地로 封世子하야 爲周公하니 魏宇文護周公幼弱이라하야 欲早使正位하야 以定人心이라 庚子에 以魏恭帝로 禪位于【魏主廓이 禪位于周公하니 廢魏主爲宋公하고 又弑之하니라】하다

歷年圖曰 後魏之先은 世居朔野【北方曰朔이라】하야 有國久矣라 道武【拓跋珪라】乘燕氏之衰【燕主慕容垂 時叛燕하니 見二十九卷乙未年이라】하고 悉擧引弓之民하야 以憑陵中夏하니 馬首所向에 無不望風奔潰라 南取幷州【道武가 丙申年에 擊燕하야 取幷州라】하고 東擧幽, 冀하야 兵不留行하야 而數千里之地定矣라 繼以明元太武【明元嗣는 道武長子요 太武燾는 明元長子라】 兼靑兗, 包司豫하고 摧赫連, 開關中하며 梟蒲弘【前秦也라 弘이 據枋頭하고 獲故趙將麻秋하야 爲將이라가 爲秋所酖하고 且前秦爲西秦乞伏乾歸所滅하니 此云梟蒲弘者는 未詳이라】, 呑遼碣하고 虜沮渠【北涼也라】, 幷河右하며 高車【北狄部落이라】入臣하고 蠕蠕【蠕은 音軟이니 卽柔然이라 宋, 齊謂之芮芮라하니 北狄國이라 魏太武 以其無知하야 狀類動蟲이라 故로 改其號曰蠕蠕이라하니라】遠遁하야 自淮以北으로 逾於大漠【北方流沙曰漠이라 沙漠之北은 匈奴南界也니 卽突厥中磧耳라】히 悉爲其有요 子孫稱帝者 百有餘年하니 左袵之盛이 未之有也라 及孝文【宏이니 太武四世孫이라】嗣世에 乃貶戎狄之俗하고 修帝王之政하야 崇儒雅하고 興禮樂하야 其風聲文物이 蔚然可觀矣라 宣武【恪이니 孝文第二子라】懦弱하야 不克負荷라 寵信讒諛【趙邕, 高肇等也니 見上卷辛巳年이라】하고 賊虐親賢하니 元氏【見上卷改姓元氏注라】之業이 於玆始衰요 重之以孝明【詡이니 宣武第二子라】幼沖하고 胡后【宣武后胡氏라】淫恣하야 嬖倖盈朝하야 政出多門하니 賞罰無章하고 紀綱大壞라 守令貪殘하고 黎民愁怨하니 盜賊蜂起하야 日滋月益이라 上之人이 曾無悛心하고 而內自睽離하야 以招外盜라 於是에 爾朱榮이 乘之而起하야 興晉陽之甲하야 直指伊, 洛하니 母后幼主 沈於回淵【戊申年에 爾朱榮이 擧兵晉陽하야 立長樂王子攸하고 而沈太后胡氏及幼主釗于河라】하고 公卿百官이 血濡馬足【爾朱榮이 殺王公以下二千人이라】이라 雖孝莊【子攸이니 文帝弟요 彭城王勰之子라 勰은 音協이라】勇決하야 手刃賊臣【庚戌年에 帝殺爾朱榮이라】이나 而枝黨四集하야 禍不旋踵【見上庚戌年이라】이라 孝武【脩니 文帝子廣平懷之第三子라】高歡之偪하야 逃遁入關이라가 遭宇文之禍하야 不能自脫하야 東西分裂하야 相繼皆亡이라 嗚呼라 人主當國家全盛之時하야 宴安怠惰하야 以失其威福之柄이면 及民心已去하고 禍亂已成하야는 雖有明斷之才라도 猶不能救어든 況庸君乎아

○ 12월에 魏나라가 岐陽 땅을 世子宇文覺에게 봉해 주어 周公으로 삼으니, 魏나라 宇文護周公이 어리고 약하다 하여 일찍 황제의 자리를 바로잡아 인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庚子日(30일)에 魏나라 恭帝의 詔命으로 周公에게 讓位하였다.【魏主 元廓이 周公에게 讓位하니, 魏主를 폐하여 宋公으로 삼았다가 또다시 시해하였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後魏의 선대는 대대로 朔方(北方)의 들【北方을 朔이라 한다.】에 살면서 나라를 소유한 지가 오래되었다. 道武帝【道武帝는 拓跋珪이다.】는 燕나라가 쇠약한【燕主 慕容垂가 이때 燕나라를 배반하였으니, 29권 乙未年條(395)에 보인다.】 틈을 타서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백성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세력을 믿고 中夏를 침범하니, 말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幷州를 취하고【魏나라 道武帝가 丙申年(396)에 燕나라를 공격하여 幷州를 취하였다.】 동쪽으로 幽州와 冀州를 점령하여,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아서 수천 리의 땅이 평정되었다. 뒤이어 明元帝와 太武帝【明元帝 拓跋嗣는 道武帝의 長子이고, 太武帝 拓跋燾는 明元帝의 長子이다.】가 靑州와 兗州를 겸병하고司州와 豫州를 포괄하며, 赫連氏를 꺾고關中 지방을 개척하며, 蒲弘을 효수하고【蒲(苻)弘은 前秦을 가리킨다. 蒲弘이 枋頭를 점거하고 옛날 後趙의 장수인 麻秋를 사로잡아 장수로 삼았다가 麻秋에게 독살당하였으며, 또 前秦은 西秦의 乞伏乾歸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여기에서 蒲弘을 효수하였다고 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遼碣을 병탄하며, 沮渠氏【沮渠氏는 北涼이다.】를 사로잡고河右를 겸병하며, 高車【高車는 北狄의 部落이다.】가 들어와 신하가 되고 匈奴族의 別種인 蠕蠕【蠕은 음이 연이니, 곧 柔然이다. 宋나라와 齊나라에서는 이를 일러 芮芮라 하였으니, 北狄의 나라이다. 魏나라 太武帝가 그들이 無知하여 꿈틀거리는 벌레와 비슷하다 하여 호칭을 고쳐 蠕蠕이라 하였다.】이 멀리 도망하여, 淮水 이북으로부터 大漠(고비 사막)【北方의 사막 지역을 漠이라 한다. 沙漠의 북쪽은 匈奴의 남쪽 경계이니, 바로 突厥의 沙磧이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자손 중에 황제를 칭한 자가 백여 년을 이어갔으니, 左袵한 오랑캐의 성함이 일찍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孝文帝【孝文帝는 元宏이니, 太武帝의 4세손이다.】가 뒤를 잇자, 마침내 戎狄의 풍속을 물리치고 帝王의 정사를 닦아서 儒雅를 숭상하고 禮樂을 일으켜서 風敎와 文物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宣武帝【宣武帝는 元恪이니, 孝文帝의 둘째 아들이다.】는 나약하여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참소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참소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는 趙邕과 高肇 등이니, 上卷의 辛巳年條(501)에 보인다.】를 총애하고 신임하며 친척과 현자를 해치고 모질게 대하니, 元氏【元氏는 上卷의 ‘改姓元氏’ 注에 보인다.】의 基業이 이에 비로소 쇠하였고, 게다가 孝明帝【孝明帝는 元詡이니, 宣武帝의 둘째 아들이다.】는 어리고 약하며 胡后【胡后는 宣武后 胡氏이다.】는 음란하고 방자하여 총애하는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해서 정사가 여러 문에서 나오니, 상벌에 기준이 없고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수령들이 탐욕스러워 백성들을 해치며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니, 도적들이 봉기하여 나날이 불어나고 다달이 늘어났다. 그런데도 윗사람은 일찍이 잘못을 고칠 마음이 없고 內部에서는 서로 이반하여 밖의 도둑을 불러들였다. 이에 爾朱榮이 이 틈을 타고 일어나 晉陽의 군사를 일으켜서 곧바로 伊水와 洛水 지역으로 향하니, 母后와 어린 군주가 回淵에 빠져 죽고【戊申年(528)에 爾朱榮이 晉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長樂王 元子攸를 세우고 太后 胡氏와 幼主 元釗를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公卿과 百官들의 피가 말발굽을 적셨다.【爾朱榮이 王公 이하 2천 명을 죽였다.】 비록 孝莊帝【孝莊帝는 元子攸이니 文帝의 아우이고 彭城王 元勰의 아들이다. 勰은 음이 협이다.】가 용감하게 결단하여 賊臣 爾朱榮을 손수 칼로 찔러 죽였으나【庚戌年(530)에 황제가 爾朱榮을 죽였다.】 徒黨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발길을 돌려 돌아서기도 전에 화가 곧바로 닥쳤다.【앞의 庚戌年條(530)에 보인다.】 孝武帝【孝武帝는 元脩이니, 文帝의 아들인 廣平王 元懷의 셋째 아들이다.】高歡의 핍박을 싫어하여 도망쳐 關中으로 들어갔다가 宇文氏의 화를 만나 스스로 벗어나오지 못하여 東魏와 西魏로 분열되었다가 서로 뒤이어 모두 멸망하였다.

아, 人主가 국가가 全盛할 때를 당하여 안일하고 태만하여 賞罰을 내리는 군주의 권한을 잃으면 민심이 이미 떠나고 禍亂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밝게 결단하는 재주가 있어도 구원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용렬한 군주에 있어서겠는가.”

右梁은 四主에 合五十六年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北周起於宇文泰라 因元魏擾亂하야 孝武西奔에 遂挾天子而令之하야 披草萊하고 立朝廷하니 其爲國也 微矣라 然이나 卒收威定霸하고 以弱爲强하야 南淸江, 漢하고 西擧巴, 蜀하고 北控沙漠하고 東據伊, 瀍하며 而又得蘇綽之奇才하야 修一代之文物이라 乃擯黜晉魏하고 憲章古昔하야 依周禮而建六官하고 作九命以敍官爵하니 自三代以來로 官名法度 少有可觀者는 唯宇文氏耳라 然이나 泰旣鴆孝武하고 又黜廢帝하니 迹其所爲하면 特亂臣賊子之所作이니 視賀六渾에 有慙德焉이라 史謂其功業如此하야 能以善終이라하니 吾誰欺오 欺天乎아

[史略 史評]史斷曰 西魏自孝武西奔長安으로 軍國大權이 悉由於宇文氏하야 方坐困窮屯蹇之中이어늘 而恣情縱欲하야 爲人道所不爲之事하니 不亡其何待乎아 文帝雖負剛斷之資나 而權柄이 久有所屬하야 陵遲至恭帝而見滅於周矣라

이상 梁나라는 네 군주에 합하여 56년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北周는 宇文泰에게서 시작되었다. 元魏가 소란한 틈을 타서 孝武帝(元修)가 서쪽으로 도망하자 마침내 天子를 끼고 호령하여 황폐한 곳을 헤치고 조정을 세우니, 그 나라가 미약하였다. 그러나 끝내 위엄을 거두어 霸業을 정하고 약한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서, 남쪽으로는 江‧漢 지방을 깨끗이 소탕하고 서쪽으로는 巴‧蜀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控制하고 동쪽으로는 伊水와 瀍水를 점거하였으며, 또 기이한 재주가 있는 蘇綽을 얻어 한 시대의 文物을 닦았다. 이에 晉나라와 魏나라의 제도를 물리치고 옛 법을 憲章으로 삼아서 《周禮》를 따라 六官을 세우고 九命을 만들어 官爵을 서열하니, 三代 이후로 官名과 法度가 다소 볼 만한 것은 오직 宇文氏일 뿐이다. 그러나 宇文泰孝武帝를 독살하고 또 廢帝를 축출하였으니, 그가 한 짓을 살펴보면 다만 亂臣賊子의 행위일 뿐이니, 賀六渾에게 비교함에 부끄러운 德(마음)이 있다. 史臣이 ‘그의 功業이 이와 같아서 잘 마쳤다.’고 말하였으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인단 말인가.”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西魏는 孝武帝가 서쪽 長安으로 달아난 뒤로부터 軍國의 大權이 모두 宇文氏에게서 나와서 곤궁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었는데도 마음대로 욕심을 부려서 사람의 도리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였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文帝가 비록 꿋꿋하게 결단하는 資品을 타고났으나 權柄이 오랫동안 소속한 곳이 있어서 침체되어 恭帝에 이르러 周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