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三 陳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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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

陳紀

高祖武帝
霸先이요 姓陳氏

陳紀 附北朝周, 齊

高祖武帝霸先이요 姓陳氏요 字興國이니 在位三年이요 壽五十七이라

陳紀 - 北朝의 周와 齊를 붙임 -

高祖武帝는 이름이 霸先이고 姓이 陳氏이며 字가 興國이니, 재위가 3년이고 壽가 57세이다.

[丁丑]梁太平二年

[丁丑]〈梁太平二年이요 陳高祖永定元年이요 魏恭帝四年이요 齊天保八年이라 ○ 周[[孝(愍)[閔]帝]]宇文覺元이요 九月以後는 世宗明帝元年이라 ○ 是歲에 梁魏皆亡하고 陳, 周代라 幷齊하야 三大國이요 後梁一小國이니 凡四國이라〉

정축(557) - 梁나라 太平 2년이고, 陳나라 高祖의 永定 元年이고, 魏나라 恭帝4년이고, 齊나라 天保 8년이다. ○ 周나라 孝閔帝宇文覺의 元年이고, 9월 이후는 世宗明帝宇文毓의 元年이다. ○ 이해에 梁나라와 魏나라가 모두 망하고 陳나라와 周나라가 대신하였다. 齊나라까지 아울러 大國이 셋이고 後梁 등 小國이 하나이니, 모두 네 나라이다.-

正月에 周公이 卽天王位宇文泰事魏하야 爲冢宰러니 其子이 襲位하야 封周公이라가 尋建國爲周하니 始見於此라 是爲孝閔帝라】하다 八月에 梁이 進丞相霸先하야 爲相國하야 總百揆하고 封陳公하다

正月에 周公(宇文覺)이 天王의 지위에 올랐다.宇文泰가 魏나라를 섬겨 冢宰가 되었는데, 그 아들 宇文覺이 지위를 이어받아 周公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나라를 세워 周나라라고 하였으니, 여기에 처음 보인다. 이가 바로 孝閔帝이다.】

8월에 梁나라가 丞相陳霸先을 승진시켜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陳公에 봉하였다.

晉公閔帝하니 寧都公이 卽天王位寧都公閔帝弟니 是爲世宗明皇帝라】하다

周나라 晉公宇文護閔帝를 시해하니, 寧都公宇文毓【寧都公 宇文毓은 閔帝의 아우이니, 이가 바로 世宗 明皇帝이다.】이 天王의 지위에 올랐다.

○ 十月에 梁이 進陳公爲王이러니 辛未에 梁敬帝 禪位于하니 陳王이 卽皇帝位하다

○ 10월에 梁나라가 陳公(陳霸先)을 승진시켜陳王으로 삼았는데, 辛未日(6일)에 梁나라 敬帝陳王에게 讓位하니, 陳王皇帝에 즉위하였다.

[戊寅]陳永定二年, 周明帝二年, 齊天保九年

[戊寅]〈陳永定二年이요 周明帝二年이요 齊天保九年이라〉

무인(558) - 陳나라 永定 2년이고, 周나라 明帝 2년이고, 齊나라 天保 9년이다. -

正月에 周太師 上表歸政이어늘 周主始親萬機호되 軍旅之事는 護猶總之하다

정월에 周나라 太師宇文護가 表文을 올려 정사를 돌려주자, 周主가 비로소 萬機를 직접 다스렸으나 軍旅의 일은 여전히 宇文護가 총괄하였다.

[己卯]陳永定三年, 周武成元年, 齊天保十年

[己卯]〈陳永定三年이요 周武成元年이요 齊天保十年이라〉

기묘(559) - 陳나라 永定 3년이고, 周나라 武成 元年이고, 齊나라 天保 10년이다. -

陳主殂하다 陳主臨戎制勝하야 英謀獨運하고 而爲政에 務崇寬簡이러라 臨川王이 卽位하다

陳主가 죽었다. 陳主는 전투에 임해서는 적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어 영명한 계책을 홀로 운용하였고, 정사를 할 때에는 되도록 너그럽고 간략함을 숭상하였다. 臨川王陳蒨(文帝)이 즉위하였다.

○ 八月에 周主始稱皇帝하고 改元武成하다 ○ 九月에 齊顯祖高洋이니 之第二子라】嗜酒成疾하야 十月에 殂하니 太子이 卽位하다

○ 8월에 周主가 처음으로 皇帝를 칭하고武成으로 改元하였다.

○ 9월에 北齊顯祖(文宣帝)顯祖高洋이니, 高歡의 둘째 아들이다.】가 술을 좋아한 나머지 병이 나서10월에 죽으니, 太子高殷이 즉위하였다.

世祖文帝
이요 字子華武帝始興王之子라

世祖文帝이요 字子華武帝始興王之子라 在位七年이요 壽四十五라

世祖文帝는 이름이 蒨(천)이고 字가 子華이니, 武帝의 형인 始興王(陳道譚)의 아들이다. 재위가 7년이고 壽가 45세이다.

[庚辰]陳世祖天嘉元年, 周武成二年, 齊主殷乾明元年

[庚辰]〈陳世祖天嘉元年이요 周武成二年이요 齊主乾明元年이요 肅宗孝昭帝皇建元年이라〉

경진(560) - 陳나라 世祖의 天嘉 元年이고, 周나라 武成 2년이고, 齊主高殷의 乾明 元年이고, 肅宗孝昭帝高演의 皇建 元年이다. -

四月에 周世宗이 殂하고 武帝이니 文帝宇文泰第四子라】卽位하다 ○ 八月에 太皇太后文宣婁氏라】下令하야 廢齊主이니 神武第六子이 廢其主하고 自立이라】濟南王하야 出居別宮하고 以常山王으로 入纂大統하니 肅宗이 卽位於晉陽【名이요 文宣之弟니 是爲肅宗孝昭皇帝라】하다

4월에 周나라 世宗이 죽고武帝武帝宇文邕이니, 文帝宇文泰의 넷째 아들이다.】가 즉위하였다.

○ 8월에 北齊의 太皇太后【太皇太后는 文宣帝高洋의 后妃인 婁氏이다.】가 명령을 내려 齊主齊主高殷이니, 神武帝(高歡)의 여섯째 아들인 高演이 군주인 高殷을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를 폐하여濟南王으로 삼아 나가서 別宮에 살게 하고 常山王高演으로 들어와 大統을 잇게 하니, 肅宗【肅宗은 이름이 高演이고 文宣帝 高洋의 아우이니, 이가 바로 肅宗 孝昭皇帝이다.】이 晉陽에서 즉위하였다.

[辛巳] 陳天嘉二年, 周高祖武帝邕保定元年, 齊世祖武成帝湛太寧元年

[辛巳] 〈陳天嘉二年이요 周高祖武帝保定元年이요 齊世祖武成帝太寧元年이라〉

신사(561) - 陳나라 天嘉 2년이고, 周나라 高祖武帝宇文邕의 保定元年이고, 北齊世祖武成帝高湛의 太寧 元年이다. -

十月에 齊肅宗이 殂하고 世祖이니 肅宗母弟라】卽位하다

10월에 北齊의 肅宗이 죽고, 世祖【世祖는 高湛이니, 肅宗(孝昭帝) 高演의 同母弟이다.】가 즉위하였다.

[壬午]陳天嘉三年, 齊河淸元年, 周保定二年, 後梁世宗巋天保元年

[壬午]〈陳天嘉三年이요 齊河淸元年이요 周保定二年이요 後梁世宗天保元年이라〉

임오(562) - 陳나라 天嘉 3년이고, 齊나라 河淸 元年이고, 周나라 保定 2년이고, 後梁世宗蕭巋의 天保 元年이다. -

後梁主이 殂하고 太子 卽位하다

後梁主蕭詧이 죽고, 太子蕭巋가 즉위하였다.

[甲申]陳天嘉五年, 周保定四年, 齊河淸三年

[甲申]〈陳天嘉五年이요 周保定四年이요 齊河淸三年이라〉

갑신(564) - 陳나라 天嘉 5년이고, 周나라 保定 4년이고, 齊나라 河淸 3년이다. -

齊主傳位於太子하니 太子卽位世祖之子니 是爲後主라】하다

齊主가 太子高緯에게 전위하니, 太子가 즉위하였다.【太子 高緯는 世祖(武成帝 高湛)의 아들이니, 이가 바로 後主이다.】

[丙戌]陳天康元年, 周天和元年, 齊後主緯天統二年

[丙戌]〈陳天康元年이요 周天和元年이요 齊後主天統二年이라〉

병술(566) - 陳나라 天康 元年이고, 周나라 天和 元年이고, 齊나라 後主高緯의 天統 2년이다. -

四月癸酉에 陳主殂하고 太子卽位하다

4월 癸酉日(27일)에 陳主가 죽고太子가 즉위하였다.

臨海王
伯宗이니 文帝長子로 史曰 廢帝

臨海王伯宗이니 文帝長子로 史曰 廢帝라 在位二年이요 壽十九라

臨海王은 이름이 伯宗이니, 文帝의 長子로 역사책에는 廢帝라 칭하였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19세이다.

[丁亥]陳主伯宗光元年, 周天和二年, 齊天統三年

[丁亥]〈陳主伯宗光大元年이요 周天和二年이요 齊天統三年이라〉

정해(567) - 陳主陳伯宗의 光大 元年이고, 周나라 天和 2년이고, 齊나라 天統 3년이다. -

陳國政이 盡歸於安成王은 音勖이니 武帝霸先兄追封始興昭烈王道譚之子라】하다

陳나라의 國政이 모두 安成王陳頊【頊은 음이 욱이니, 陳頊은 武帝 陳霸先의 형으로 始興王에 추봉된 昭烈王 陳道譚의 아들이다.】에게 돌아갔다.

[戊子]陳光大二年, 周天和三年, 齊天統四年

[戊子]〈陳光大二年이요 周天和三年이요 齊天統四年이라〉

무자(568) - 陳나라 光大 2년이고, 周나라 天和 3년이고, 齊나라 天統 4년이다. -

十一月에 陳安成王廢帝臨海王하다

11월에 陳나라 安成王陳頊황제(陳伯宗)를 폐위하여臨海王으로 삼았다.

高宗宣帝
高宗宣帝이니 始興王第二子라

高宗宣帝이니 始興王第二子라 在位十四年이요 壽五十二라

高宗 宣帝는 이름이 이니, 始興王陳道譚의 둘째 아들이다. 재위가 14년이고, 壽가 52세이다.

[己丑]陳高宗太建元年, 周天和四年, 齊天統五年

[己丑]〈陳高宗太建元年이요 周天和四年이요 齊天統五年이라〉

기축(569) - 陳나라 高宗의 太建 元年이고, 周나라 天和 4년이고, 齊나라 天統 5년이다. -

正月에 陳安成王이 卽位하다

정월에 陳나라 安成王陳頊이 즉위하였다.

[辛卯]陳太建三年, 齊武平二年, 周天和六年

[辛卯]〈陳太建三年이요 齊武平二年이요 周天和六年이라〉

신묘(571) - 陳나라 太建 3년이고, 齊나라 武平 2년이고, 周나라 天和 6년이다. -

楊素【汾州刺史楊敷子也니 後爲淸河公이라】 少多才藝하고 有大志하야 不拘小節이라 周主爲詔書면 下筆立成호되 詞義兼美어늘 周主曰 勉之하고 勿憂不富貴하라 曰 但恐富貴來逼臣이요 臣은 無心圖富貴也로소이다

周나라 楊素【楊素는 汾州刺史 楊敷의 아들이니, 뒤에 淸河公이 되었다.】는 젊어서부터 재주와 기예가 많고 큰 뜻이 있어서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周主楊素에게 명하여 詔書를 작성하게 하면 붓을 대자마자 곧바로 완성하되 말과 뜻이 모두 아름다웠다. 周主가 이르기를 “부디 노력하고 부귀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라.” 하니, 楊素가 대답하기를 “다만 부귀가 臣에게 가까이 올까 두려울 뿐이요, 臣은 부귀를 도모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였다.

[壬辰]陳太建四年, 齊武平三年, 周建德元年

[壬辰]〈陳太建四年이요 齊武平三年이요 周建德元年이라〉

임진(572) - 陳나라 太建 4년이고, 齊나라 武平 3년이고, 周나라 建德 元年이다. -

陳主謀伐齊할새 公卿이 各有異同호되 唯鎭(南)[前]將軍【南字는 前字之誤也니 本文에 書前字라 註云 梁武帝置八鎭將軍하니 東西南北은 止施在外하고 左右前後는 止施在內라하니라】吳明徹이 決策請行하다 壬午에 分命【分字는 分付之義也라】衆軍하고 以明徹로 都督征討諸軍事하야 統衆十萬하야 伐齊하다

陳主가 北齊를 토벌할 것을 도모할 적에 公卿들의 의견이 각각 달랐으나 오직 鎭前將軍【鎭南將軍의 南字는 前字의 잘못이니, ≪資治通鑑≫ 本文에는 ‘前’字로 되어 있다. 註에 이르기를 “梁나라 武帝가 八鎭將軍을 두었으니, 鎭東將軍‧鎭西將軍‧鎭南將軍‧鎭北將軍은 다만 밖의 일을 시행하고, 鎭左將軍‧鎭右將軍‧鎭前將軍‧鎭後將軍은 다만 안의 일을 시행했다.” 하였다.】吳明徹이 계책을 결정하고 출정할 것을 청하였다. 壬午日(3월 16일)에 여러 군사들에게 집결하도록 분부【分字는 분부한다는 뜻이다.】하고 吳明徹을 都督征討諸軍事로 삼아 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北齊를 토벌하게 하였다.

[癸巳]陳太建五年, 齊武平四年, 周建德二年

[癸巳]〈陳太建五年이요 齊武平四年이요 周建德二年이라〉

계사(573) - 陳나라 太建 5년이고, 齊나라 武平 4년이고, 周나라 建德 2년이다. -

十月에 陳吳明徹이 攻壽陽할새 堰肥水以灌城하니 齊行臺右僕射皮景和等이 救壽陽이라가 怯懦不敢前이라 明徹이 乃躬擐甲冑【擐은 音患이니 貫也라 左傳에 擐甲執兵이라하니라】하고 四面疾攻하야 一鼓拔之하고 生擒王琳, 王貴顯, 盧潛等하야 送建康하니 景和北遁하다 齊穆提婆【尙書左僕射라】, 韓長鸞【領軍大將軍이라】이 聞壽陽陷하고 握槊【胡中戲니 卽今雙陸也라】不輟曰 本是彼物이니 從其取去로다 齊主聞之하고 頗以爲憂어늘 提婆等曰 假使國家盡失黃河以南이라도 猶可作一龜玆國이라한대 齊主卽大喜하다

10월에 陳나라 吳明徹이 壽陽城을 공격할 적에 肥水를 막아 壽陽城에 물을 대니, 齊나라 河南行臺右僕射皮景和 등이 壽陽城을 구원하려다가 겁을 먹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吳明徹이 마침내 몸소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擐은 음이 환이니 꿰어 입는다는 뜻이다. ≪春秋左傳≫에 “갑옷을 입고 병기를 잡는 것이다.” 하였다.】 사면에서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여 한 번의 공격으로 壽陽城을 함락시키고王琳王貴顯盧潛 등을 생포하여建康으로 보내니, 皮景和가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齊나라 穆提婆【穆提婆는 尙書左僕射였다.】와 韓長鸞【韓長鸞은 領軍大將軍이었다.】이, 壽陽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握槊(雙六)【握槊은 북쪽 오랑캐 지역의 놀이이니, 바로 지금의 雙六이다.】 놀이를 중지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壽陽城은 본래 저들 南朝의 땅이었으니, 저들이 가져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하였다. 齊主가 패전했다는 말을 듣고 자못 근심하자, 穆提婆 등이 말하기를 “설사 黃河 이남 지역을 다 잃는다 해도 오히려 한 龜玆國이 될 수 있습니다.” 하니, 齊主가 크게 기뻐하였다.

○ 十二月에 陳定州刺史田龍秋 以江北六州, 七鎭으로 叛하야 入于齊어늘 安州刺史周炅이 擊斬之하고 盡復江北之地하다

○ 12월에 陳나라 定州刺史田龍秋가 江北의 여섯 州와 일곱 鎭을 가지고 배반하여 齊나라에 들어가자, 安州刺史周炅이 그를 공격하여목을 베고江北의 땅을 모두 수복하였다.

[乙未]陳太建七年, 齊武平六年, 周建德四年

[乙未]〈陳太建七年이요 齊武平六年이요 周建德四年이라〉

을미(575) - 陳나라 太建 7년이고, 齊나라 武平 6년이고, 周나라 建德 4년이다. -

七月에 周主如雲陽宮하다 大將軍楊堅【父이 從周太祖하야 以功封隋國이러니 子이 襲爵하야 封隋王하니 是爲隋文帝라】이 姿相奇偉라 來和【姓名이라】嘗謂曰 公이 眼如曙星하야 無所不照하니 當王天下【王은 去聲이라】하리라

7월에 周主가 雲陽宮에 갔다. 大將軍楊堅【楊堅의 아버지 楊忠이 北周의 太祖 宇文泰를 따라서 출정하여 功을 세우고 이로 인해 隋國에 봉해졌는데, 아들 楊堅이 작위를 이어받아 隋王에 봉해지니, 이가 바로 隋나라 文帝이다.】은 모습과 인상이 기이하고 거룩하였다. 來和【來和는 姓名이다.】가 일찍이 楊堅에게 이르기를 “公은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나서 비추지 않는 바가 없으니, 마땅히 천하에 왕 노릇 할 것입니다.【王은 去聲(왕 노릇 하다)이다.】” 하였다.

[丙申]陳太建八年, 齊隆化元年, 周建德五年

[丙申]〈陳太建八年이요 齊隆化元年이요 周建德五年이라〉

병신(576) - 陳나라 太建 8년이고, 齊나라 隆化 元年이고, 周나라 建德 5년이다. -

九月에 周主謂群臣曰 齊朝昏亂하야 政由群小하니 百姓嗷然하야 朝不謀夕이라 天與不取면 恐貽後悔하노라 冬十月에 周主自將伐齊하야 克晉州하다 戊申에 周主至平陽하야 勒諸軍擊齊師하니 齊主北走하고 齊師大潰하야 死者萬餘人이라 遂帥諸將하야 追齊師한대 齊主入晉陽하야 憂懼不知所之하니 齊臣降者相繼러라 齊主還鄴하니 幷州將帥 請安德王延宗【澄之第五子也라 齊主緯 詔延宗爲相國, 幷州剌史하야 總山西兵하야 委以備禦하다 幷州將帥 請於延宗曰 王不爲天子면 諸人은 實不能爲王出死力이라하니 延宗이 不得已卽位하다 是年에 望氣者言 當有革易이라하니라 齊王 傳位于太子하다】 卽位하다 周軍이 圍晉陽하야 攻東門克之하니 延宗이 戰力屈하야 走至城北이어늘 周人이 擒之하다 癸酉에 周師趣(趨)鄴【趣는 讀曰趨라】하다

9월에 周主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齊나라 조정이 혼란하여 정사가 小人들로부터 나오니, 백성들이 원망하여 아침에도 저녁일을 도모할 수가 없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데도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두렵다.” 하였다.

겨울 10월에 周主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齊나라를 토벌하여晉州를 함락하였다. 戊申日(12월 4일)에 周主가 平陽에 이르러 諸軍을 무장시켜 齊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齊主가 북쪽으로 도망하고齊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將을 거느리고 齊나라 군대를 추격하자, 齊主가 晉陽으로 들어가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니, 齊나라 신하 중에 항복하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齊主가 鄴城으로 돌아가니, 幷州의 장수들이 安德王高延宗【高延宗은 高澄의 다섯째 아들이다. 齊主 高緯(後主)가 명령을 내려 高延宗을 相國‧幷州剌史로 삼아 山西의 군대를 총괄하게 해서 수비와 방어를 맡겼다. 幷州의 將帥들이 高延宗에게 청하기를 “王이 天子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실로 王을 위하여 死力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高延宗이 부득이 즉위하였다. 이해에 雲氣를 관찰하여 일의 조짐을 알아내는 자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王朝가 바뀔 것이다.” 하였다. 齊王 高緯가 太子 高恒(幼主)에게 전위하였다.】에게 즉위할 것을 청하였다. 周나라 군대가 晉陽을 포위하여 東門을 공격하여함락하였다. 高延宗이 싸우다가 힘이 꺾여서 도망하여 성 북쪽에 이르자 周나라 사람이 그를 사로잡았다. 癸酉日(12월 29일)에 周나라 군대가 鄴城으로 향하였다.【趣는 趨로 읽는다.】

[丁酉]陳太建九年, 齊幼主恒承光元年, 周建德六年

[丁酉]〈陳太建九年이요 齊幼主承光元年이요 周建德六年이라 ○ 是歲에 齊亡하다 陳, 周二大國이요 後梁一小國이니 凡三國이라〉

정유(577) - 陳나라 太建 9년이고, 齊나라 幼主高恒의 承光 元年이고, 周나라 建德 6년이다. ○ 이해에 齊나라가 망하였다. 陳나라와 周나라 등 大國이 둘이고 後梁 등 小國이 하나이니, 모두 세 나라이다.-

壬辰에 周師至鄴城下하야 圍之하고 燒城西門하니 齊人이 出戰이어늘 周師奮擊하야 大破之하다 齊主從百騎東走어늘 追及하야 擒之【齊王緯 從百騎東走러니 其日에 幼主禪位于大丞相任成王(階)[湝]하니 尊上皇緯爲無上皇하고 幼主爲(宗)[宋]國天王하다 無上皇이 與皇后로 携幼主하고 走靑州어늘 周將尉遲綱이 擒之하다 其後에 周人이 誣緯與宣州刺史穆提婆謀反이라하야 延宗等數十人을 無少長히 賜死하다 (階)[湝]는 歡之(二十人)[第十子]라 】하다

歷年圖曰 神武【高歡이라】以高世之略으로 平爾朱之亂하야 功大勢盛하야 爲魏武【脩라】所疑하야 雖有逐君之慙이나 而能惓惓盡恭하야 以事靜帝【善見이라】하야 沒身不怠하니 此其可稱者也라 文襄【歡子澄이라】은 有俊才而無重德하야 悖慢無禮하야 終隕身於奴隸하고 文宣【洋이니 澄之弟라】은 淫湎【湎은 沈於酒也라】殘暴가 甚於로되 而能信用賢臣하야 委之以政하야 威加隣敵하고 終其天年하니 蓋亦有以得之矣라 孝昭【演이니 洋之弟라】는 明達愷悌하야 實有齊之令主러니 享國不永하니 惜哉라 武成【湛이니 演之弟라】은 驕淫奢縱하야 齊業始衰하고 後主【緯니 演之長子라】繼之에 昏狂尤甚하야 誅翦忠良【忠良은 太尉趙郡王叡라】하고 信用讒邪【讒邪는 和士開라】하니 十年而亡이 已爲幸矣니라

壬辰日(정월 18일)에 周나라 군대가 鄴城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고鄴城의 西門을 불태우니齊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싸웠는데, 周나라 군대가 맹렬히 공격하여대파하였다. 齊主가 백 명의 騎兵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망하자 추격하여 사로잡았다.【齊王 高緯가 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주하였는데, 그날 幼主 高恒이 大丞相인 任成王 高湝에게 讓位하니, 上皇 高緯를 높여서 無上皇이라 하고 幼主를 宋國天王이라 하였다. 無上皇이 皇后와 함께 幼主를 데리고 靑州로 도망하였는데, 周나라 장수 尉遲綱이 사로잡았다. 그 후에 周나라 사람이 高緯가 宣州刺史 穆提婆와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고 모함하여 高延宗 등 수십 명을 젊은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賜死하였다. 高湝는 高歡의 열 번째 아들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東魏의 神武帝(高歡)【神武帝는 高歡이다.】는 세상에 뛰어난 지략으로써 爾朱氏의 난리를 평정하여 공이 크고 세력이 성대해지자 北魏의 武帝(元脩)【魏武帝는 元脩이다.】에게 의심을 받아 군주를 축출한 부끄러운 일이 있었으나 惓惓히 공손함을 다하여 靜帝(元善見)【靜帝는 元善見이다.】를 섬겨서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칭찬할 만한 것이다. 文襄帝(高澄)【文襄帝는 高歡의 아들 高澄이다.】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후중한 德이 없어서 패역하고 오만하고 무례하여 끝내 노예의 손에 죽었고, 北齊의 文宣帝(高洋)【文宣帝는 高洋이니, 高澄의 아우이다.】는 酒色에 빠지며【湎은 술에 빠지는 것이다.】 잔악하고 포악함이 보다 심하였으나 어진 신하를 믿고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이웃하고 있는 적국에게 위엄이 가해지고 天壽를 누렸으니, 또한 정치할 줄을 안 것이다. 孝昭帝(高演)【孝昭帝는 高演이니, 高洋의 아우이다.】는 밝게 통달하고 화락하여 실로 齊나라의 훌륭한 군주였는데 나라를 향유한 것이 길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武成帝(高湛)【武成帝는 高湛이니, 高演의 아우이다.】는 교만하고 음탕하고 사치하고 방종해서 齊나라의 기업이 비로소 쇠하였고, 後主(高緯)【後主는 高緯이니, 高演의 장자이다.】가 계승하자 사리에 어둡고 광포함이 더욱 심해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죽이며【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는 太尉인 趙郡王 高叡이다.】 참소하고 간사한 자들을 신임하고 등용하였으니,【참소하고 간사한 자는 和士開이다.】 10년 만에 망한 것도 이미 요행이다.”

[戊戌]陳太建十年, 周宣帝宣政元年

[戊戌]〈陳太建十年이요 周宣帝贇宣政元年이라〉

무술(578) - 陳나라 太建 10년이고, 周나라 宣帝宇文贇의 宣政 元年이다. -

陳主聞周人滅齊하고 欲爭徐, 兗하야 詔吳明徹하야 督諸軍伐之하다 明徹이 圍周彭城이러니 王軌【大將軍이라】引兵圍而蹙之하야 衆潰하니 明徹이 爲周人所執이라 將士三萬과 幷器械輜重이 皆沒於周하니라

陳主가 周나라 사람이 齊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周나라의〉 徐州‧兗州를 다투고자 하여 吳明徹에게 명해서 諸軍을 감독하여周나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吳明徹이 周나라 彭城을 포위하였는데, 王軌【王軌는 周나라 大將軍이다.】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포위 압박하여陳나라 군대가 궤멸되니, 吳明徹이 周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혔다. 장병 3만 명과 器械와 輜重을 모두 周나라에게 몰수당하였다.

○ 五月에 周高祖武帝이라】殂하니 年이 三十六이라 太子卽位【名贇이라 武帝長子니 是爲宣帝라】하다 始立하야 卽逞奢欲하야 大行【人主之喪하야 不反之辭也라 人主新崩에 未有定諡故로 總其名曰大行이라】이 在殯호되 曾無戚容이러라

○ 5월에 周나라 高祖【周나라 高祖武帝宇文邕이다.】가 죽으니, 나이가 36세였다. 太子【太子는 이름이 宇文贇이다. 武帝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宣帝이다.】가 즉위하였다. 宇文贇이 처음 즉위하자 사치하고 욕심을 부려서 大行王【大行은 임금이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임금이 갓 죽었을 때에는 정해진 諡號가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총괄하여 大行이라 한다.】의 시신이 빈소에 있었으나 일찍이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己亥]陳太建十一年, 周靜帝闡大象元年

[己亥]〈陳太建十一年이요 周靜帝大象元年이라〉

기해(579) - 陳나라 太建 11년이고, 周나라 靜帝宇文闡의 大象 元年이다. -

周宣帝傳位於太子闡【是爲靜帝라】하고 大赦하고 改元大象하고 自稱天元皇帝라하니 驕侈彌甚하고 務自尊大하야 無所顧憚이라 隋公楊堅이 私謂大將軍汝南公曰 天元이 實無積德하고 視其相貌하니 壽亦不長이요 又諸藩微弱이어늘 各令就國하야 曾無深根固本之計하니 羽翮旣翦이라 何能及遠哉리오

周나라 宣帝(宇文贇)가 太子宇文闡【太子 宇文闡이 바로 靜帝이다.】에게 전위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大象이라 改元하고 스스로 天元皇帝라 칭하니, 교만하고 사치함이 더욱 심하였으며 자신을 높이고 잘난 체하기를 힘써서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隋公楊堅이 大將軍인 汝南公宇文慶에게 은밀히 이르기를 “天元皇帝가 실로 積德한 것이 없고 그의 相貌를 살펴보니 壽命이 또한 길지 못할 것이요, 또 여러 藩王의 세력이 미약한데 그들로 하여금 각각 封國으로 나아가게 해서 일찍이 근본을 깊고 견고하게 하는 장구한 계책이 없으니, 羽翼이 이미 잘린 것이다. 국가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庚子]陳太建十二年, 周大象二年

[庚子]〈陳太建十二年이요 周大象二年이라〉

경자(580) - 陳나라 太建 12년이고, 周나라 大象 2년이다. -

天元이 昏暴滋甚하야 喜怒乖度라 后父堅이 位望隆重하니 天元이 忌之라 이 旣爲帝所忌하야 情不自安이러니 天元이 備法駕하고 幸天興宮이라가 不豫而還하야 是日에 天元이 殂하니 以으로 總知中外兵馬事하다 이 革宣帝苛酷之政하야 更爲寬大하야 刪略舊律하고 作刑書要制하야 奏而行之하고 躬履節儉하니 中外悅之러라

周나라 天元皇帝(宣帝)는 어둡고 포악함이 더욱더 심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절도를 잃었다. 皇后의 부친인 楊堅이 지위와 명망이 높고 중하니, 天元皇帝가 그를 시기하였다. 楊堅이 이미 황제에게 시기를 받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天元皇帝가 法駕를 갖추고 天興宮에 행차했다가 몸이 불편하여 돌아와서 이날 天元皇帝가 죽으니, 〈劉昉鄭譯皇帝의 詔書를 사칭하여〉 楊堅에게 中外의 군대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楊堅宣帝의 가혹한 政令을 개혁하여 관대한 정사로 바꾸었다. 옛날의 刑律을 삭제하여 줄이고《刑書要制》를 제정하여靜帝에게 아뢰어 시행하고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니, 中外가 기뻐하였다.

○ 十二月에 周以大丞相으로 爲相國하야 摠百揆하고 進爵爲王하다

○ 12월에 周나라가 大丞相楊堅을 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隋國公에서〉 관작을 올려 隋國王으로 삼았다.

[辛丑]陳太建十三年, 周大象三年

[辛丑]〈陳太建十三年이요 周大象三年이니 二月後는 隋高祖文帝楊堅開皇元年이라 ○ 是歲에 周亡隋代하니 凡三國이라〉

신축(581) - 陳나라 太建 13년이고, 周나라 大象 3년이니, 2월 이후는 隋나라 高祖文帝楊堅의 開皇 元年이다. ○ 이해에 周나라가 망하고隋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二月에 周主下詔하야 遜位居別宮하고 命奉皇帝璽紱【音弗이니 印組也라】하야 禪位于隋하다

歷年圖曰 文帝【宇文泰라】以關中之衆으로 東迎孝武【魏武帝脩라】하야 收疲散之兵하고 撫貧困之民하며 任賢使能하야 列官布職하며 明部分하고 務農桑하야 以輔魏室하니 雖以高氏【高歡族黨이라】之强으로도 不能陵也라 其所爲典法이 施於後世하니 可不謂賢乎아 武帝【高祖邕이니 文帝第四子라】는 以英傑之資로 受制强臣【宇文護니 專權이라】이러니 恭黙端拱하야 十有餘年에 須其罪盈惡熟하야 爲衆所棄하야 一旦除之【壬辰年에 周主討殺太師護라】를 若撥麷【撥은 治也라 麷은 音豐이니 熬麥也라】振槁하니 可謂知柔知剛하야 知(智)勇兼備者矣라 然後에 親統六師하야 以征東夏하니 齊之嶮(險)阻不守하고 士卒不戰하야 數月之間에 縛其君臣하야 致之鼓下하야 使有周之境으로 東漸于海하고 南傅于江하니 雖魏室全盛之時라도 不能及也라 惜乎라 宣帝【贇이라】恣其淫侈하고 逞其苛譎하야 自絶于天하고 結怨于民하야 不及三年에 而爲異姓所有하니 悲夫라

2월에 周主가 詔書를 내려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別宮에 거처하였으며, 皇帝의 옥새와 인끈【紱은 음이 불이니, 인끈이다.】을 받들어서 隋나라에 讓位하도록 명하였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文帝(宇文泰)【文帝는 宇文泰이다.】가 關中의 병력을 끌고 동쪽으로 가서 孝武帝(元脩)【孝武帝는 北魏 武帝 元脩이다.】를 맞이하여 피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어진 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려서 관직에 나열하게 하며, 부대를 분명하게 나누고 농사와 養蠶을 힘써서 魏나라 황실을 보필하였으니, 비록 高氏【高氏는 高歡의 族黨이다.】의 강성함으로도 능멸하지 못하였다. 그가 만든 典法이 후세에 시행되었으니, 어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武帝(宇文邕)【武帝는 高祖 宇文邕이니, 文帝의 넷째 아들이다.】는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녔으면서 강성한 신하(宇文護)【강성한 신하는 宇文護이니, 권력을 전횡하였다.】에게 제재당하였는데, 공손히 침묵하고 단정히 손을 모으고서 십여 년 동안 그의 罪가 가득 차고 惡이 무르익어서 무리들에게 버림받기를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제거하여【壬辰年(572)에 周主(宇文邕)가 太師 宇文護를 토벌하여 죽였다.】 볶은 보리【撥은 다스림이다. 麷은 음이 풍이니, 볶은 보리이다.】의 싹을 없애고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듯이 하였으니, 柔해야 할 때에 柔할 줄 알고 剛해야 할 때에 剛할 줄 알아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 뒤에 직접 六軍을 거느리고 東夏를 정벌하였는데, 齊나라의 험한 요새가 지켜지지 못하고 사졸들이 싸우지 않아서 몇 달 만에 齊나라의 군주와 신하를 포박하여 鼓下(軍中)로 끌어와서 周나라의 국경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揚子江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魏나라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을 때라 해도 이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애석하다. 宣帝(宇文贇)【宣帝는 宇文贇이다.】는 음란함과 사치함을 제멋대로 행하고 가혹함과 속임수를 부려서 스스로 天理를 끊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어 3년이 못 되어 국가가 다른 姓氏의 소유가 되게 하였으니, 슬프다.”

隋以蘇威로 兼納言, 度支尙書하다 三月에 隋以賀若弼로 爲吳州總管하야 鎭廣陵하고 韓擒虎로 爲廬州總管하야 鎭廬江하다 隋主有幷呑江南之志하야 問將帥於熲한대 擒虎라 故로 置於南邊하야 使潛爲經略하니라

隋나라가 蘇威를 兼納言‧度支尙書로 삼았다.

3월에 隋나라가 賀若弼을 吳州總管으로 삼아서廣陵에 진주하게 하고, 韓擒虎를 廬州摠管으로 삼아서廬江에 진주하게 하였다. 隋主가 江南(陳나라)을 병탄할 마음을 품고서 高熲에게 쓸 만한 장수를 물었는데, 高熲賀若弼韓擒虎를 천거하였으므로 이들을 남쪽 변방에 배치하여 은밀히 경략하게 한 것이다.

○ 隋高熲, 蘇威同心協贊하니 政刑大小를 帝無不與之謀議然後行之라 故로 革命數年에 天下稱平하니라

○ 隋나라 高熲蘇威가 한마음으로 함께 보좌하니, 크고 작은 정사와 형벌을 文帝가 이들과 함께 도모하고 의논한 뒤에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文帝가 革命하여 周나라를 대신한 수년 동안 천하가 태평함을 일컬었다.

[壬寅]陳太建十四年, 隋開皇二年

[壬寅]〈陳太建十四年이요 隋開皇二年이라〉

임인(582) - 陳나라 太建 14년이고, 隋나라 開皇 2년이다. -

春正月에 陳主이라】殂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다

봄 정월에 陳主【陳主는 陳나라 宣帝 陳頊이다.】가 죽고太子(陳叔寶)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長城公
名叔寶요 字元秀니 高宗長子로

長城公叔寶요 字元秀高宗長子로 史曰後主라 在位七年에 隋滅之하니라

長城公은 이름이 叔寶이고 字가 元秀이니, 高宗(宣帝陳頊)의 長子로 역사책에는 後主라 칭하였다. 재위 7년에 隋나라가 멸망시켰다.

[乙巳]陳至德三年, 隋開皇五年

[乙巳]〈陳至德三年이요 隋開皇五年이라〉

을사(585) - 陳나라 至德 3년이고, 隋나라 開皇 5년이다. -

隋主不喜辭華하야 詔天下하야 公私文翰을 竝宜實錄하다 治書侍御史李諤이 亦以當時屬文이 體尙輕薄이라하야 上書曰 魏之三祖【三祖는 太祖武帝, 高祖文帝, 烈祖明帝라】 崇尙文詞하야 忽君人之大道하고 好雕蟲之小藝하니 下之從上하야 遂成風俗이라 遂江左, 齊, 梁에 其敝彌甚하야 競一韻之奇하고 爭一字之巧하야 連篇累牘이 不出月露之形하고 積案盈箱이 盡是風雲之狀이라 世俗이 以此相高하고 朝廷이 據玆擢士하야 祿利之路旣開에 愛尙之情이 愈篤이라 於是에 閭里童昏과 貴遊總丱【丱은 音慣이니 束髮爲角하야 兩髮相竝이라】이 未窺六甲【黃帝命大撓하야 探五行之情하고 占斗綱所建하야 作甲子하고 以十干十二支相配하야 而成六甲이라】에 先製五言이라 故로 文筆日繁하고 其政日亂하니 良由棄大聖之軌模하고 構無用以爲用也라 今朝廷이 雖有是詔나 如聞外州遠縣이 仍踵敝風하노이다 詔以所奏로 頒示四方하다

隋主는 文辭가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三祖는 魏나라 太祖 武帝(曹操), 高祖 文帝(曹丕), 烈祖 明帝(曹叡)이다.】 천하에 명하여 公私의 文書를 모두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게 하였다. 治書侍御史李諤 또한 당시 사람들이 문장을 짓는 것이 경박하고 화려한 문체를 숭상한다 하여 상소하기를 “魏나라의 세 황제가 文詞를 숭상하여 군주의 큰 도리를 소홀히 하고 詩文과 詞賦의 작은 기예를 좋아하니,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따라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江左(東晉)와 齊나라, 梁나라 때에는 이러한 文風의 폐단이 더욱 심해져서 사람들이 한 韻字의 기이함을 다투고 한 글자의 교묘함을 다투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글들이 달빛과 이슬을 형용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책상에 가득한 글들이 모두 바람과 구름의 형상을 읊었습니다. 세속에서는 이로써 서로 높이고 조정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선비들을 발탁해서 녹봉과 이익의 길이 열리게 되자 사람들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경박한 것을 숭상하는 정이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그리하여 閭里의 어린 童子는 물론이고 王公의 子弟들【丱은 음이 관이니, 總丱은 머리를 땋아 묶어서 뿔 모양으로 만들어 두 갈래의 머리가 서로 나란한 것이다.】에 이르기까지 六甲【黃帝가 大撓에게 명하여 五行의 실정을 탐구하고 북두칠성의 자루가 가리키는 바를 살펴서 甲子를 만들고 十干과 十二支를 서로 배합하여 六十甲子를 완성하였다.】을 엿보기도 전에 먼저 五言詩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文翰이 날로 더욱 많아지고 정사가 날로 더욱 혼란해지니, 이는 진실로 大聖人의 규범을 버리고 쓸데없는 글을 얽어서 쓰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비록 화려한 문장을 금하는 詔令을 내렸으나 신이 듣건대 변방의 먼 州縣에서는 여전히 옛날의 잘못된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李諤이 아뢴 것을 사방에 반포하였다.

○ 是歲에 陳主於光昭殿前에 起臨春, 結綺, 望仙三閣하니 各高數十丈이요 連延數十間이라 其牕牖【在屋曰牕이요 在墻曰牖라】, 壁帶【壁中橫木이 露出如帶者라】와 懸(縣)楣【楣는 門上橫木이니 所以安戶扉者라】, 欄檻을 皆以沈, 檀【皆香木이라】爲之하야 飾以金玉하고 間以珠翠【珠는 珍珠요 翠는 翡翠毛라】하며 外施珠簾하고 內有寶牀寶帳하니 其服玩瑰麗【瑰는 美也, 盛也라】 近古所未有라 每微風(漸)[暫]至에 香聞數里러라 其下에 積石爲山하고 引水爲池하야 雜植奇花異卉【卉는 百草總名이라】하다 上每飮酒에 使諸妃嬪及女學士로 與狎客共賦詩하야 互相贈答하고 采其尤艶麗者하야 被以新聲하고 選宮女千餘人하야 習而歌之하되 分部迭進이라 其曲에 有玉樹後庭花, 臨春樂【樂은 音洛이니 言臨春閣之樂也라】等하니 大略皆美諸妃嬪之容色이라 君臣酣歌하야 自夕達旦하야 以此爲常하니라

○ 이해에 陳主가 光昭殿 앞에 臨春閣‧結綺閣‧望仙閣 세 누각을 지으니, 각각 높이가 수십 길이고 연달아 이어진 것이 수십 칸이었다. 窓戶【지붕에 있는 것을 牕이라 하고, 담장에 있는 것을 牖라 한다.】와 壁帶(壁에 가로지른 나무)【벽 속의 가로댄 나무가 허리띠처럼 노출된 것이다.】와 縣楣【楣는 문 위에 가로 댄 나무(上引枋)*) 이니, 문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上引枋)와 난간을 모두 沈香木과 紫檀木【沈香木과 紫檀木은 모두 향나무이다.】으로 만들어서 금과 옥으로 꾸미고 진주와 비취새 깃털【珠는 진주이고 翠는 비취새 깃털이다.】을 섞었으며, 밖에는 珠簾을 달고 안에는 寶牀과 寶帳을 두니, 服飾과 器玩의 화려함【瑰는 아름답고, 성대한 것이다.】이 근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바였다. 매양 微風이 잠시 불어올 때마다 향기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그 아래에 돌을 쌓아 假山을 만들고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들어서 진귀한 꽃과 풀【卉는 온갖 풀의 총칭이다.】을 섞어 심었다. 上이 매번 술을 마실 때마다 여러 妃嬪과 女學士들로 하여금 狎客과 함께 詩를 지어서 서로 화답하게 하고, 그중에 특히 요염하고 화려한 것을 골라서 새 곡조에 올리고 궁녀 천여 명을 선발하여 이것을 익혀서 노래하게 하되 몇 組로 나누어서 번갈아 연주하게 하였다. 樂曲 중에 玉樹後庭花‧臨春樂【樂은 음이 락이니, 臨春樂은 臨春閣의 즐거움을 말한다.】 등이 있으니, 대체로 여러 妃嬪의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찬미한 것이었다. 군주와 신하가 마음껏 술을 마시고 노래하여, 밤을 새워 새벽에 이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丙午]陳至德四年, 隋開皇六年

[丙午]〈陳至德四年이요 隋開皇六年이요 梁後主廣運元年이라〉

병오(586) - 陳나라 至德 4년이고, 隋나라 開皇 6년이고, 梁나라 後主蕭琮의 廣運 元年이다. -

梁主【後梁巋라】殂하니 諡曰孝明皇帝世宗【孝明帝廟號라】이 孝慈儉約하니 境內安之러라 太子이 嗣하다

梁主【梁主는 後梁의 蕭巋이다.】가 죽으니 시호를 孝明皇帝라고 하였다. 世宗【世宗은 孝明帝(蕭巋)의 廟號이다.】이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검약하니, 境內가 편안하였다. 太子蕭琮이 뒤를 이었다.

○ 隋度支尙書長孫平이 奏호되 令民으로 每秋에 家出粟麥호되 貧富爲差하야 儲之當社하고 委社司檢校하야 以備凶年하고 名曰義倉이라하니 隋主從之하다

○ 隋나라 度支尙書長孫平이 아뢰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매년 가을에 집집마다 곡식과 보리를 내게 하되 貧富에 차등을 두어서 이것을 해당 社 안에 비축해 두고 社司에게 맡겨 검사하고 관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고 명칭을 義倉이라 하소서.” 하니, 隋主가 이를 따랐다.

[丁未]陳禎明元年, 隋開皇七年

[丁未]〈陳禎明元年이요 隋開皇七年이라 ○ 是歲에 梁亡하니 凡二國이라〉

정미(587) - 陳나라 禎明 元年이고, 隋나라 開皇 7년이다. ○ 이해에 梁나라가 망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八月에 隋徵梁主入朝하다 廢梁國하야 拜梁主〈上〉柱國하고 賜爵莒公【後梁祚終하니 三主에 凡三十三年이라】하다

8월에 隋나라가 梁主를 불러 入朝하게 하였다. 梁나라를 폐하여梁主蕭琮을 上柱國에 임명하고강등하여莒公의 작위를 내렸다.【[原註]隋徵梁主入朝……賜爵莒公:後梁의 국운이 끝나니, 세 군주에 모두 33년이다.】

[戊申]陳禎明二年, 隋開皇八年

[戊申]〈陳禎明二年이요 隋開皇八年이라〉

무신(588) - 陳나라 禎明 2년이고, 隋나라 開皇 8년이다. -

隋主問取陳之策於高熲한대 對曰 江北은 地寒하야 田收差晩하고 江南은 水田早熟하니 量彼收(獲)[穫]之際하야 微徵士馬하야 聲言掩襲이면 彼必屯兵守禦하리니 足得廢其農時요 彼旣聚兵이어든 我便解甲하야 再三若此면 彼以爲常하야 後更集兵이라도 彼必不信하리니 猶豫【猶는 獸名이니 性多疑하야 聞有聲則登木하야 下上不一이라 故로 不決曰猶豫라 又猶는 犬子也니 人將犬行에 犬好豫在人前하야 待人이라가 又來迎候라 故謂不決曰猶豫라】之頃에 我乃濟師하야 登陸而戰이면 兵氣益倍하리이다 又江南은 土薄하야 舍多茅竹하고 所有儲積이 皆非地窖【窖는 地藏也라】니 密遣行人하야 因風縱火하고 待彼修立하야 復更燒之면 不出數年에 自可財力俱盡하리이다 隋主用其策하니 陳人이 始困이라 於是에 楊素, 賀若弼高勵, 崔仲方賀若弼은 吳州總管이요, 高勵는 光州刺史요, 崔仲方은 虢州刺史라】等이 爭獻平江南之策【晉州刺史皇甫績이 言陳有三可滅하니 大可呑小 一也요 以有道伐無道 二也요 納反臣蕭巖하야 於我有詞 三也라 陛下若命將出士인댄 臣願展絲髮之效하리이다 隋主勞而遣之也하니라】이어늘 隋主高熲【尙書右僕射라】曰 我爲民父母하야 豈可限一衣帶水하야 不拯之乎아 甲子에 隋出師할새 命晉王秦王【皆文帝子니 廣은 卽煬帝라】淸河公楊素하야 皆爲行軍元帥하야 與韓擒虎【廬州總管이라】, 賀若弼等으로 率兵五十一萬하니 東接滄海하고 西距巴, 蜀하며 旌旗舟楫이 橫亘【亘은 竟也요 又延袤也라】數千里러라

隋主가 陳나라를 취할 계책을 高熲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江北은 지역이 추워서 밭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다소 늦고 江南은 논에 심어 수확하는 것이 일찍 성숙하니, 저들이 수확할 시기를 헤아려서 군사와 말을 약간 징집하여 江南을 습격하려 한다고 소문을 내면 저들은 반드시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할 것이니, 충분히 저들의 추수할 시기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이미 병력을 모으고 난 뒤에 우리가 곧 갑옷을 벗고 군대를 해산하여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하면 저들은 이것을 일상적인 일로 여겨서 이후로는 우리가 다시 병력을 모으더라도 저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할【猶는 짐승의 이름이니, 성품이 의심이 많아서 소리가 들리면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오르락내리락 하기를 여러 번 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猶豫라 한다. 또 猶는 개의 새끼이니, 사람이 개를 데리고 길을 갈 때에 개가 사람보다 앞서 가서 사람을 기다리다가 또다시 사람 앞으로 와서 맞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猶豫라 한다.】 때에 우리가 마침내 군대를 渡江시켜 육지에 올라가 싸우게 하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倍加될 것입니다. 또 江南은 지대가 低濕해서 띠풀과 대나무로 지은 집이 많고 소유하고 있는 저축을 모두 땅의 움【窖는 땅속의 창고이다.】속에 보관하지 않으니,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저들의 곡식 창고를 불태운 다음 저들이 수리하고 다시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놓아 태운다면 몇 년이 못 되어 저들의 재물과 힘이 모두 고갈될 것입니다.” 하였다. 隋主가 그 계책을 따르니, 陳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곤궁해졌다. 이에 楊素賀若弼高勵崔仲方【[頭註]楊素……崔仲方:賀若弼은 吳州總管이고, 高勵는 光州刺史이고, 崔仲方은 虢州刺史였다.】 등이 다투어 江南을 평정할 계책【晉州刺史 皇甫績이 말하기를 “陳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으니, 大國으로서 小國을 병탄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有道함으로써 無道함을 토벌한 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陳나라가 우리를 배반한 蕭巖을 받아들여 우리에게 군대를 출동할 명분이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시키신다면 臣은 미력이나마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隋主가 그를 위로하고 보내었다.】을 올렸다. 隋主高熲【高熲은 尙書右僕射이다.】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어찌 옷의 띠처럼 작은 물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江南의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甲子日(10월 28일)에 隋나라가 군대를 출동하여 陳나라를 토벌할 적에 晉王楊廣(煬帝)秦王楊俊【晉王 楊廣과 秦王 楊俊은 모두 文帝의 아들이니, 楊廣은 바로 煬帝이다.】淸河公楊素을 임명하여 모두 行軍元帥로 삼아 韓擒虎【韓擒虎는 廬州總管이다.】賀若弼 등과 함께 51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하니, 동쪽으로는 滄海에 닿고 서쪽으로는 巴‧蜀에 이르렀으며 旌旗와 舟楫이 수천 리에 걸쳐 뻗쳤다.【亘은 마침이요, 또 뻗어 나감이다.】

○ 十二月에 隋軍이 臨江하니 高熲이 謂薛道衡【行臺의 吏部郎中이라】曰 今玆大擧에 江東을 必可克乎아 道衡曰 克之니라 常(嘗)聞郭璞【東晉時善卜人이라】有言호되 江東分王三百年에 復與中國合이라하니 今此數將周【晉元帝南渡하야 卽王位於建康하니 歲在丁丑이요 是年이 歲戊申이니 凡二百七十二年이라】하니 一也요 主上은 恭儉勤勞하고 叔寶【陳後主名이라】는 荒淫驕侈하니 二也요 國之安危는 在所寄任이어늘 彼以江(摠)[總]爲相하고 唯事詩酒하니 三也요 我는 有道而大하고 彼는 無德而小하며 量其甲士컨대 不過十萬하니 西自巫峽으로 東至滄海에 分之則勢懸而力弱하고 聚之則守此而失彼니 四也라 席卷之勢 事在不疑니라 이 忻然曰 得君言成敗之理하니 令人豁然이로다

○ 12월에 隋軍이 강가에 임하니 高熲薛道衡【薛道衡은 行臺의 吏部郎中이다.】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대거 출병하여 陳나라를 토벌함에 江東을 반드시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薛道衡이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郭璞【郭璞은 東晉 때 점을 잘 쳤던 사람이다.】이 말하기를 ‘江東 지방이 나뉘어 왕 노릇한 지 300년 만에 다시 中原과 통일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300년의 週期가 다 차려 하니【晉나라 元帝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 建康에서 王에 즉위한 것이 丁丑年(317)이고 이해가 戊申年(588)이니, 모두 272년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主上은 공손하고 검소하고 부지런한데 陳叔寶【叔寶는 陳나라 後主의 이름이다.】는 주색에 빠져 교만하고 사치하니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고, 국가의 安危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달려 있는데 저들은 江總을 재상으로 삼아 오직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을 일삼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고, 우리는 道가 있으면서 나라가 크고 저들은 德이 없으면서 나라가 작으며 저들의 甲士를 헤아려 보건대 십만에 불과하여 서쪽으로 巫峽으로부터 동쪽으로 滄海에 이르기까지 만약 군대를 나누어 수비하면 형세가 달리고 힘이 약하며 만약 군대를 집결시켜 수비하면 이곳을 지킬 경우 저곳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형세상 우리 隋나라가 席卷할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였다. 高熲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성패의 이치를 분석한 것을 들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환히 깨닫게 한다.” 하였다.

陳主從容謂侍臣曰 王氣在此【王은 去聲이니 興也라】하야 齊兵三來하고 周師再來호되 無不摧敗어늘 彼는 何爲者邪아 孔範【都官尙書라】曰 長江天塹이 古以爲限隔南北하니 今日虜軍이 豈能飛渡邪잇가 帝笑以爲然이라 故로 不爲深備하고 奏伎【伎는 女樂也라】, 縱酒, 賦詩를 不輟이러라

○ 陳後主가 近臣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興旺【王은 去聲이니 흥왕함이다.】하는 기운이 이곳에 있어서 齊나라 군대가 세 번 쳐들어오고 周나라 군대가 두 번 쳐들어 왔으나 꺾이고 실패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저 隋나라 군대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니, 孔範【孔範은 都官尙書이다.】이 말하기를 “長江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참호가 예로부터 남북을 가로막고 있으니, 오늘날 적군이 어찌 長江을 날아서 건너오겠습니까.” 하니, 後主가 웃고 옳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깊이 대비하지 않고 女樂이 進獻하는 歌舞를 즐기며【伎는 女子 樂士이다.】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기를 그치지 않았다.

右陳은 五主에 合三十二年이라

이상 陳나라는 다섯 군주에 합하여 32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