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一 齊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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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高帝
名道成이요 姓蕭氏니 漢相何二十四世孫이라

齊紀 附北朝魏

太祖高帝道成이요 姓蕭氏漢相二十四世孫이라 在位四年이요 壽五十四라

齊紀 - 北朝의 魏를 붙임 -

太祖高帝는 이름이 道成이고 성이 蕭氏이니, 漢나라 정승蕭何의 24세손이다. 재위가 4년이고 壽가 54세이다.

[己未] 宋昇明三年, 齊太祖建元元年

[己未] 〈宋昇明三年이요 齊太祖建元元年이요 魏太和三年이라 ○ 是歲에 宋亡齊代하니라〉

기미(479) - 宋나라 昇明 3년이고, 齊나라 太祖의 建元 元年이고, 魏나라 太和 3년이다. ○ 이해에 宋나라가 망하고 齊나라가 대신하였다.-

三月에 宋이 封道成十郡하야 爲齊王하니 四月에 王이 稱皇帝하고 卽位【齊奉宋主汝陰王이라】하다

3월에 宋나라가 蕭道成에게 10郡을 봉해 주어 齊王으로 삼았는데, 4월에 齊王이 황제를 칭하고즉위하였다.【齊나라가 宋主를 받들어 汝陰王으로 삼았다.】

[壬戌] 齊建元四年, 魏太和六年

[壬戌] 〈齊建元四年이요 魏太和六年이라〉

임술(482) - 齊나라 建元 4년이고, 魏나라 太和 6년이다. -

齊主殂하고 太子卽位하다 高帝沈深有大量하고 博學能文이라 性淸儉하야 每曰 使我治天下十年이면 當使黃金으로 與土同價라하니라

[新增]胡氏曰 物之不齊는 物之情也라 人之慕儉而賤貨者 莫不有金玉同價之言이나 然無此理也라 顧可使貴賤有等하야 人不妄用金玉하야 不至踊貴【踊은 刖足者屨也니 言刖足者多하야 屨無用故로 賤하고 踊有用故로 貴라】焉耳니 必欲與土同價인댄 雖齊高帝在位百年이라도 亦不能致也리라

[史略 史評]史斷曰 蕭道成이 屬劉宋傾危하니 蒼梧王暴虐하야 百姓凜凜하야 命懸朝夕이라 當是時하야 道成이 果有忠宋之心이면 與袁粲等으로 協謀하야 廢黜異姓하고 建立宗藩하야 以隆宋祚하야 爲宋忠臣이 此上計也요 如其不然이면 正蒼梧之僞冒하고 明劉氏之已絶하야 播告中外하야 與天下放伐之然後에 王儉이 進易代之謀하고 太后下宋終之詔면 事機脗合하고 亦庶幾近正矣어늘 而乃自立順帝하야 北面事之하고 旣已委質爲臣이라가 又欲窺圖禪代하야 取國未幾에 復行弑逆하야 盡勦劉氏之族而殄其祀焉하니 鼯鼠鴟鴞 奸計百出이라 積惡創業하니 何以傳後리오 齊祚之不長이 視六國에 最甚焉하니 豈無故夫아 然이나 其簒國之後에 以身率下하고 以儉化民하야 不御精細之物하고 不好珠玉之玩하야 內殿에 施黃紗帳하고 宮人이 著紫皮履하며 珍奇異物을 棄毁不用하고 而又訪政術於劉讞하고 詢得失於群臣하니 亦足以爲一代之賢主矣로다

齊主가 죽고太子가 즉위하였다. 高帝는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으며 박학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매양 말하기를 “만일 내가 십 년 동안 천하를 다스린다면 황금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만들 수 있다.”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물건이 똑같지 않은 것은 물건의 實情이다. 사람들 중에 검소함을 좋아하고 재물을 천하게 여기는 자들은 모두 金玉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하겠다는 말을 하나 이러한 이치는 없다. 다만 貴賤이 차등이 있어서 사람들이 金玉을 함부로 사용하지 아니하여 값이 뛰는【踊은 刖刑(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당한 자의 신발이니, 刖刑을 당한 자가 많아서 보통 신발은 수요가 없기 때문에 싸고 踊은 수요가 있기 때문에 비쌈을 말한다.】 데에 이르지 않게 할 뿐이니, 반드시 金玉을 흙과 같이 천해지게 하려 한다면 비록 齊나라 高帝가 백 년 동안 재위한다 하더라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蕭道成은 劉宋이 위태로울 때를 만났으니, 劉宋은 蒼梧王(劉昱)이 포학해서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蕭道成이 과연 宋나라에 충성할 마음이 있었다면 袁粲 등과 함께 의논하여 異姓을 廢黜하고 宗室의 藩王을 세워서 宋나라의 國運을 융성하게 하여 宋나라의 忠臣이 되는 것이 上策이요,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蒼梧王이 거짓으로 劉氏姓을 일컬은 것을 바로잡고 劉氏의 대가 이미 끊어졌음을 밝혀서 中外에 선포하여 天下와 함께 그를 추방하고 정벌한 뒤에 王儉이 왕조를 바꾸는 계책을 올리고 太后가 宋나라가 끝났다는 조칙을 내리게 했다면 事機가 잘 부합되고 또한 거의 正道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스스로 順帝를 세워서 北向하여 섬기고,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었다가 또 禪讓을 받아 대신할 것을 도모하고자 하여 나라를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弑逆을 행하여 劉氏의 집안을 모두 죽이고 그 제사를 끊었으니, 박쥐와 올빼미와 같은 간사한 계책이 백 가지로 나왔다. 惡行을 쌓아 創業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에 전하겠는가. 齊나라의 國運이 길지 못한 것이 六國에 비해 가장 심하였으니,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찬탈한 뒤에는 몸소 아랫사람에게 솔선을 보이고 검소함으로 백성을 교화시켜 정교한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珠玉으로 꾸민 玩好品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內殿에는 황색 비단 휘장을 치고 宮人들은 자주색 가죽신을 신으며 진기하고 기이한 물건을 버리고 쓰지 않았으며, 또 정책을 劉讞에게 묻고 得失을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니, 또한 한 시대의 어진 군주라고 할 것이다.”

世祖武帝
名賾이니 高帝長子라

世祖武帝이니 高帝長子라 在位十一年이요 壽五十四라

世祖武帝는 이름이 이니, 高帝의 長子이다.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54세이다.

[癸亥] 齊武帝永明元年, 魏太和七年

[癸亥] 〈齊武帝永明元年이요 魏太和七年이라〉

계해(483) - 齊나라 武帝의 永明 元年이고, 魏나라 太和 7년이다. -

齊以宋末治民之官六年過久라하야 乃以三年爲斷하고 謂之小滿이나 而遷換去來에 又不能依三年之制러니 三月에 詔호되 自今으로 一以小滿爲限이라하다

齊나라는 宋나라 말기에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임기가 6년인 것은 너무 오래라고 하여 마침내 3년으로 단축하고 이를 일러 小滿이라 하였다. 그러나 관원이 승진되고 바뀌어 오고 감에 또 완전히 3년의 제도를 따르지는 못했는데, 3월에 詔命을 내려 “지금으로부터 한결같이 小滿을 기한으로 삼는다.” 하였다.

[甲子] 齊永明二年, 魏太和八年

[甲子] 〈齊永明二年이요 魏太和八年이라〉

갑자(484) - 齊나라 永明 2년이고, 魏나라 太和 8년이다. -

蕭衍【字叔達이니 蘭陵人이라 兒時에 能蹈空而行하니 是爲梁高祖라】이 好籌略하고 有文武才幹이라 王儉이 深器異之하야 曰 蕭郞이 出三十이면 貴不可言【本紀에 蕭郞이 三十內에 當作侍中이요 出此면 貴不可言이라하니라】이라하더라

齊나라 蕭衍蕭衍은 字가 叔達이니, 蘭陵 사람이다. 아이였을 때에 허공을 밟고 다닐 수 있었으니, 이가 바로 梁나라 高祖이다.】이 계책을 좋아하고 文과 武 양 방면에 재간이 있으므로 王儉이 매우 소중하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蕭郞이 30년이 지나면 귀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頭註]蕭郞……貴不可言:≪梁書≫〈武帝本紀〉에 “蕭郞은 30세 안에 마땅히 侍中이 될 것이요, 30세가 지나면 귀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癸酉] 齊永明十一年, 魏太和十七年

[癸酉] 〈齊永明十一年이요 魏太和十七年이라〉

계유(493) - 齊나라 永明 11년이고, 魏나라 太和 17년이다. -

魏主以平城地寒하야 六月雨雪하고 風沙常起라하야 將遷都洛陽할새 恐群臣不從하야 乃議大擧伐齊하다 秋七月에 魏主發平城하니 步騎三十萬이러라

魏主가 수도인 平城 지방이 추워서 6월에도 눈이 내리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항상 일어난다 하여 洛陽으로 천도하려 할 적에 여러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마침내 크게 군대를 일으켜 齊나라를 칠 것을 의논하였다.

가을 7월에 魏主가 平城을 출발하니, 보병과 기병이 30만 명이었다.

○ 七月에 齊主不豫하야 以朝事로 委西昌侯【齊王兄道生之子라】이러니 齊主殂하니 이 奉太孫鬱林王【昭業이라 永明十一年正月에 皇太子長懋薨하니 立長懋子昭業하야 爲皇太孫하니라】하야 立之하다 世祖留心政事하야 務摠大體하고 嚴而有斷하며 郡縣을 久於其職하고 長吏犯法이어든 封刃行誅라 故로 永明之世에 百姓豐樂하고 賊盜屛息이라 然이나 頗好遊宴華靡【靡는 麗也라】之事하야 常言恨之나 未能頓遣【頓은 遽也요 遣은 祛也니 言未能祛逐遊宴之失也라】이라

○ 7월에 齊主가 몸이 편찮아서 조정의 일을 西昌侯蕭鸞西昌侯蕭鸞齊王(高帝蕭道成)의 형인 蕭道生의 아들이다.】에게 맡겼는데 齊主가 죽으니, 蕭鸞이 太孫인 鬱林王鬱林王蕭昭業이다. 永明 11년(493) 정월에 皇太子 蕭長懋가 薨하니, 蕭長懋의 아들 蕭昭業을 세워서 皇太孫으로 삼았다.】을 받들어 그를 세웠다. 世祖(武帝)는 정사에 유념하여 大體를 총괄하는 데 힘쓰고 엄격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郡縣의 관리들이 직책을 오랫동안 맡게 하고 高官이 법을 범하면 使者에게 寶劍을 내려 주벌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永明 연간에는 백성들이 풍요롭고 즐거우며 도적들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자못 놀고 잔치하며 화려하고 사치함【靡는 고움(화려함)이다.】을 일삼기를 좋아하여 항상 이것을 恨한다고 말하였으나 대번에 제거하지는 못하였다.【頓은 갑자기이고 遣은 제거하는 것이니, 놀고 잔치하는 잘못을 제거하여 없애지는 못함을 말한 것이다.】

魏主自發平城으로 至洛陽히 霖雨不止라 乃詔諸軍前發【前進也라】할새 帝戎服執鞭하고 乘馬而出하니 尙書李沖等曰 今者之擧는 天下所不願이어늘 唯陛下欲之하시니 臣은 不知陛下獨行하야 竟何之也니이다 帝乃諭群臣曰 朕이 世居幽朔하야 欲南遷中土하노니 苟不南伐이면 當遷都於此하리라 時에 舊人이 雖不願內徙나 而憚於南伐하야 無敢言者라 遂定遷都之計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武帝纘位之初에 詔免逋租하야 革晉宋之敝政하니 中外欣悅이라 總攬大體하야 每以富國爲先하고 嚴明有斷하며 郡縣이 久於其職하고 長吏犯法에 封刃行誅라 故로 永明之世에 外表無塵하고 內朝多豫하야 百姓豐樂하고 盜賊屛息하니 雖宮室園囿 頗好華靡나 然亦可謂齊之良主也로다

魏主가 平城을 출발하여洛陽에 이를 때까지 장맛비가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諸軍에 명하여 전진【前發은 전진하는 것이다.】하게 할 적에 황제가 군복 차림에 채찍을 잡고 말을 타고서 나가니, 尙書李沖 등이 말하기를 “이번 擧措는 천하 사람은 원하지 않고 오직 폐하께서만 하고자 하시니, 신은 폐하께서 홀로 가시어 끝내 어디로 가려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마침내 여러 신하들에게 타이르기를 “朕은 대대로 북쪽 지역에 거주하면서 남쪽인 中原 땅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으니, 만일 남쪽을 정벌하지 않겠다면 이곳으로 천도하겠다.” 하였다. 이때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內地로 옮겨 가기를 원치 않았으나 남쪽을 정벌하는 것을 꺼려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洛陽으로 천도하는 계획을 확정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武帝(蕭賾)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초기에 조서를 내려 밀린 조세를 면제해 주어 晉나라와 宋나라의 폐단이 많은 정사를 개혁하니, 中外에서 기뻐하였다. 大體를 총괄하여 매번 국가를 부강하게 함을 우선으로 여겼고, 엄격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郡縣의 관리들이 직책을 오랫동안 맡고 高官이 법을 범하면 使者에게 寶劍을 내려 주벌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永明 연간에는 지방에 난리가 없고 조정에 즐거운 일이 많아서 백성들이 풍요롭고 즐거워하였으며 도적들이 숨을 죽이니, 비록 宮室과 園囿를 꾸밀 때 자못 화려하고 사치함을 좋아하였으나 또한 齊나라의 어진 군주라 이를 만하다.”

齊紀 高宗明帝
名鸞이니 高帝兄之子라

高宗明帝【照臨四方曰明이라】이니 高帝始安貞王之子라 少孤하야 高帝撫育如己子하니라 在位五年이요 壽四十이라

高宗明帝【사방에 밝게 임하는 것을 明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高帝의 형인 始安貞王(蕭道生)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高帝가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길렀다. 재위가 5년이고, 壽가 40세이다.

[甲戌] 齊主昭業隆昌元年, 昭文延興元

[甲戌] 〈齊主昭業隆昌元이요 昭文延興元이요 高宗明帝建武元年이며 魏太和十八年이라〉

갑술(494) - 齊主蕭昭業의 隆昌 元年이고, 蕭昭文의 延興 元年이고, 高宗明帝의 建武 元年이며, 魏나라 太和 18년이다. -

七月에 齊西昌侯이 引兵入雲龍門하야 弑其君昭業하고 以太后令으로 廢爲鬱林王하다 迎新安王昭文昭業之弟라】하야 卽帝位하니 以으로 爲驃騎大將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鬱林이 地居身嫡하야 瑕釁未彰이요 而武皇之心이 未變周道라 故로 得保玆守器하야 正位宸極이러니 旣而요 愆鄙內作하고 猜忌百生이라 禍起宮闈하야 身竟不保하니 齊氏之亂이 胎於此矣로다

7월에 齊나라 西昌侯蕭鸞이 군대를 이끌고 建康宮의 雲龍門에 들어와서 그 군주 蕭昭業을 시해하고太后의 명령으로 蕭昭業을 폐하여鬱林王을 삼았다. 新安王蕭昭文蕭昭文蕭昭業의 아우이다.】을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시키니, 蕭鸞을 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鬱林王(蕭昭業)은 지위가 嫡子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직 흠이 드러나지 않았고 武皇(世祖 武帝)의 마음이 큰 원칙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켜오던 皇統을 보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윽고 허물이 안에서 생겨나고 시기하는 마음이 갖가지로 일어났으므로 禍가 궁궐에서 일어나 몸을 끝내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齊나라의 혼란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九月에 魏主陸叡曰 北人이 每言北俗質魯하니 何由知書리오하니 朕聞之하고 深用憮然【憮는 憂也라】하노라 今知書者甚衆이나 豈皆聖人이리오 顧學與不學爾라 朕修百官, 興禮樂은 其志固欲移風易俗이니 朕爲天子하야 何必居中原이리오 正欲卿等子孫이 漸染【漸은 漸漬而染也라】美俗하야 聞見廣博이니 若永居恒北하야 復値不好文之主면 不免面牆爾니라

○ 9월에 魏主陸叡에게 이르기를 “북쪽 지방(北朝)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북쪽 지방은 풍속이 질박하고 노둔하니, 어떻게 글을 알겠는가.’라고 하니, 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낙심하였다.【憮는 근심함이다.】 지금 글을 아는 자가 매우 많으나 어찌 모두 聖人이겠는가. 다만 배우고 배우지 않은 데 불과할 뿐이다. 朕이 百官을 정돈하고 禮樂을 일으킴은 그 뜻이 진실로 풍속을 바꾸고자 해서이니, 朕이 天子가 되어서 무엇 때문에 꼭 中原에 거하려 하겠는가. 바로 卿들의 자손이 아름다운 풍속에 감화되어【漸은 물이 번져서 물드는 것이다.】 見聞이 넓어지기를 바라서이니, 만약 恒山 북쪽에 길이 거주하면서 文事를 좋아하지 않는 군주를 다시 만난다면 담장을 마주 대하고 선 것같이 견문이 좁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 十月에 齊蕭鸞이 以皇太后【鸞以口者요 非眞有此指也라】曰 嗣主幼沖하야 弗克負荷하니 太傅宣城王【是年에 進封西昌侯宣城公이러니 又進爵爲王이라】이 宜入承寶命이요 帝는 可降封海陵王이라한대 高宗이 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鬱林이 爲蕭鸞所弑하야 而立海陵王하니 當是時하야 軍國大事 盡摠於하고 乘輿起居 皆咨稟而後行하니 則亦寄生而已矣로다

○ 10월에 齊나라 蕭鸞이 皇太后의 명령이라 하고【皇太后의 명령이란 蕭鸞이 구실로 삼은 것이요, 皇太后가 참으로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다.】 말하기를 “왕위를 이은 군주가 어려서 황제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太傅인 宣城王【이해에 西昌侯蕭鸞의 封爵을 높여 宣城公이라 하였는데, 또 봉작을 높여 宣城王이라 하였다.】이 들어와서 寶命(天命)을 받들어야 하고 황제는 강등하여 海陵王으로 봉해야 한다.” 하였다. 高宗이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鬱林王蕭鸞에게 시해당하여海陵王(蕭昭文)을 세웠다. 이때를 당하여 軍國의 大事가 모두 蕭鸞에게 맡겨지고, 황제의 起居를 모두 그에게 자문한 뒤에 행하였으니, 그렇다면 海陵王蕭鸞에게 寄生한 것일 뿐이다.”

魏主欲變易舊風하야 乃詔禁士民胡服하니 國人이 多不悅이러라

魏主가 옛 풍속을 바꾸고자 해서 마침내 명령을 내려 선비와 백성들에게 胡服 차림을 금지시키니, 國人들이 기뻐하지 않았다.

[乙亥] 齊建武二年, 魏太和十九年

[乙亥] 〈齊建武二年이요 魏太和十九年이라〉

을해(495) - 齊나라 建武 2년이고, 魏나라 太和 19년이다. -

六月에 魏主下詔하야 不得爲北俗之語於朝廷하고 違者는 免所居官하다

6월에 魏主가 詔命을 내려 북쪽 지방의 말인 鮮卑語를 조정에서 쓰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맡고 있는 관직을 면직시켰다.

○ 魏詔求遺書하되 秘閣【漢時書府는 在外則有太常, 太史, 博士掌之하고 內則有延閣, 廣內, 石渠之藏이라 後漢則藏之東觀이요 晉有中外三閣하니 此秘閣之名所由始也라】所無로 有益時用者는 加以優賞하다

○ 魏나라가 詔命을 내려 散佚된 책들을 구하되 秘閣【漢나라 때의 書府는 지방에서는 太常‧太史‧博士가 관장하였고 서울에는 延閣‧廣內‧石渠閣이 있었다. 後漢 때에는 東觀에 보관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中外에 三閣이 있었으니, 〈秘書郞이 三閣의 秘書를 관장하였다.〉 이것이 秘閣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유래이다.】에 없는 것으로 세상에 유익할 경우에는 후한 상을 내렸다.

○ 八月에 魏立國子, 太學, 四門【四門學始此하니 於四門置學이라】小學於洛陽하다

○ 8월에 魏나라가 洛陽에 國子學‧太學‧四門【四門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洛都의 四門에 학교를 설치하였다.】小學을 세웠다.

魏高祖好讀書하야 手不釋卷하고 在輿據鞍에 不忘講道하고 善屬文하야 多於馬上口占【隱度其辭하야 口以授人曰口占이라】하고 旣成에 不更一字러라 自太和十一年以後로 詔策을 皆自爲之하고 好賢樂善하야 情如飢渴하고 所與遊接을 常寄以布素之意하니 如李沖, 李彪, 高閭, 王肅, 郭祚, 宋弁, 劉芳, 崔光, 邢巒之徒 皆以文雅見親하고 貴顯用事라 制禮作樂이 鬱(蔚)然可觀하야 有太平之風焉이러라

○ 魏나라 高祖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수레에 타거나 말안장에 앉아 있을 때에도 道를 강론함을 잊지 않았다. 글을 잘 지었는데, 대부분 말 위에서 입으로 불러 주었고【속으로 문장을 헤아리고서 입으로 불러 주는 것을 口占이라 한다.】 이미 완성하고 나서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太和 11년(487) 이후로 詔令과 策文을 모두 직접 지었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善을 즐거워하여 절실한 마음이 굶주리고 목마를 때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았으며, 더불어 교유하고 대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布衣와 교제하는 질박한 뜻을 붙이니, 李沖李彪高閭王肅郭祚宋弁劉芳崔光邢巒 같은 무리들이 모두 文雅로써 친애함을 받았으며 존귀하고 현달하여 用事하였다. 禮樂을 제정한 것이 성대하여 볼 만해서 太平한 유풍이 있었다.

[丙子] 齊建武三年, 魏太和二十年

[丙子] 〈齊建武三年이요 魏太和二十年이라〉

병자(496) - 齊나라 建武 3년이고, 魏나라 太和 20년이다. -

魏主下詔하야 改姓元氏魏主이 下詔하야 以爲 北人은 謂土(所)[爲]拓하고 謂后爲跋하니 魏之先은 出於黃帝하야 以土德王이라 故로 爲拓跋氏라 夫土者는 黃中之色이요 萬物之元也니 宜改姓元氏라하니라】하다

魏主가 詔命을 내려서 元氏로 姓을 고쳤다.魏主拓跋宏이 詔命을 내려 이르기를 “북쪽 사람들은 땅을 일러 拓이라 하고 임금을 일러 跋이라 하니, 魏나라의 先代는 黃帝에게서 나와 土德으로 왕 노릇 하였기 때문에 拓跋氏라 한 것이다. 土는 중앙의 색깔이요 만물의 시작이니, 마땅히 姓을 元氏로 고쳐야 한다.” 하였다.】

[戊寅] 齊建武五年, 魏太和二十二年

[戊寅] 〈齊建武五年이요 魏太和二十二年이라〉

무인(498) - 齊나라 建武 5년이고, 魏나라 太和 22년이다. -

七月에 齊主殂于正福殿하니 太子寶卷이 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蕭鸞이 殺鄱陽王等七人하고 未幾에 再行弑逆하야 遂簒大位하고 踐阼以來로 數行誅戮하야 疑忌橫生에 術數是用이라 旣而요 自植本根이나 枝胤이 孤弱하고 貽厥所授나 屬在凶愚하야 用覆宗祊하니 亦其宜也로다

7월에 齊主가 正福殿에서 죽으니, 太子蕭寶卷이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蕭鸞鄱陽王蕭鏘 등 7명을 죽이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弑逆을 행하여 마침내 大位를 찬탈하였으며, 즉위한 이래로 자주 주륙을 행하여 의심과 시기가 멋대로 생겨나자 權謀術數를 사용하였다. 이윽고 스스로 뿌리(基業)를 세웠으나 가지인 아들이 외롭고 약하였으며,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마침 흉악하고 어리석은 자여서 宗廟를 전복하였으니, 또한 당연하다 할 것이다.”

東昏侯
名寶卷이요 字智藏이니 明帝第三子라

東昏侯寶卷이요 字智藏이니 明帝第三子라 在位二年이요 壽一十九라

東昏侯는 이름이 寶卷이고 字가 智藏이니, 明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19세이다.

[己卯] 齊主寶卷永元元年, 魏太和二十三年

[己卯] 〈齊主寶卷永元元年이요 魏太和二十三年이라〉

기묘(499) - 齊主蕭寶卷의 永元 元年이고, 魏나라 太和 23년이다. -

高祖殂하니 太子이 卽位【是爲世祖宣武皇帝라】하다

魏나라 高祖가 죽으니, 太子元恪이 즉위하였다.【太子 元恪이 卽位하니, 이가 바로 世祖 宣武皇帝이다.】

齊主在東宮에 不好學하고 唯嬉戲無度러니 及卽位에 不與朝士相接하고 專親信宦官及左右하다 是時에 始安王遙光【鸞兄鳳之子也라】等이 更直內省【在禁中이라】하야 分日帖勅【於勅後에 聯紙書行이니 所謂畫勅也라】이어늘 雍州刺史蕭衍이 聞之하고 謂張弘策【衍之從舅니 錄事參軍也라】曰 一國三公도 猶不堪이온 況六貴【始安王遙光, 尙書令徐孝嗣, 右僕射江祏, 左將軍蕭坦之, 侍中江祀, 衛尉劉暄이라】同朝하니 勢必相圖하야 亂將作矣리니 避禍圖福은 無如此州라하고 乃密與弘策으로 修武備하고 聚驍勇하야 以萬數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東昏旣立에 嬉戲無度하야 所寵左右嬖臣을 至呼爲阿父, 阿兄而不恥하고 親信宦官하야 不與朝士相接하고 誅鋤大臣을 發於倉卒하야 人人이 不能自保矣하니 未幾遇弑 豈偶然哉아

齊主가 東宮에 있을 적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놀고 희롱하여 한도가 없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조정의 선비들과 접견하지 않고, 오로지 환관과 좌우의 近臣들만 친애하고 믿었다. 이때에 始安王 蕭遙光【蕭遙光은 蕭鸞의 형인 蕭鳳의 아들이다.】 등이 번갈아 內省【內省은 궁궐 안에 있다.】에서 숙직하고 날짜를 나누어 勅書 뒷면에 종이를 붙여 의견을 쓰자,【勅書 뒷면에 종이를 붙여서 쓴 것이니, 이른바 畫勅이라는 것이다.】雍州刺史蕭衍이 이것을 듣고 張弘策【張弘策은 蕭衍의 從舅이니 벼슬이 錄事參軍이었다.】에게 이르기를 “한 나라에 三公이 있는 것도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데 여섯 貴人【여섯 貴人은 始安王 蕭遙光‧尙書令 徐孝嗣‧右僕射 江祏‧左衛將軍 蕭坦之‧侍中 江祀‧衛尉 劉暄이다.】이 조정에 함께 있으니, 형편상 반드시 서로 쟁탈하여 장차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 禍를 피하고 福을 도모하는 데는 이 雍州 만한 곳이 없다.” 하고, 마침내 은밀히 張弘策과 함께 武備를 닦고 날래고 용맹스러운 자를 모아,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東昏侯(蕭寶卷)는 즉위하자 놀고 희롱하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총애하는 좌우의 嬖臣을 심지어 阿父‧阿兄이라 부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宦官들을 가까이하고 신임해서 조정의 선비들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大臣을 죽이는 것을 창졸간에 결정하여 사람마다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얼마 되지 않아 시해당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庚辰] 齊永元二年, 魏世宗宣武帝恪景明元年

[庚辰] 〈齊永元二年이요 魏世宗宣武帝景明元年이라〉

경진(500) - 齊나라 永元 2년이고, 魏나라 世宗宣武帝元恪의 景明 元年이다. -

正月에 齊豫州刺史裴叔業이 聞齊主數誅大臣하고 心不自安하야 遣人至襄陽하야 問蕭衍以自安之計하야 曰 天下大勢를 可知라 恐無復自存之理하니 不若回面向北【北은 謂魏也라】하야 不失作河南公【言若降魏면 則不失爵賞也라】이리라 報曰 群小用事하니 豈能及遠이리오 若意外相逼이면 當勒馬步二萬하야 直出橫江【在和州界하니 往來齊渡處라】하야 以斷其後니 則天下之事를 一擧可定이라 若欲北向이면 彼必遣人相代【言代守其任이라】하고 以河北一州相處하리니 河南公을 寧可復得耶【叔業이 沈疑未決하야 遣其子芬之하야 入建康爲質하고 亦遣信詣魏豫州刺史薛眞度하야 問以入魏可否之義하니 眞度勸其早降이라 叔業이 遂遣使奉表降魏하니 魏遣彭城王勰, 將軍王肅하야 帥騎十萬赴之하다 復以爲司徒, 領揚州刺史하야 鎭壽陽이러니 叔業이 尋卒하다】

正月에 齊나라 豫州刺史裴叔業齊主가 大臣들을 자주 주륙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스스로 불안해하여 사람을 襄陽에 보내 蕭衍에게 자기 몸을 보전할 계책을 물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大勢를 알 만하다. 다시는 스스로 몸을 보존할 방법이 없을 듯하니, 전향하여 魏나라에 투항해서【북쪽은 魏나라를 이른다.】河南公이 됨을 잃지 않는 것만 못하다.【만약 魏나라에 항복하면 爵賞을 잃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하니, 蕭衍이 대답하기를 “소인의 무리가 用事하고 있으니, 어찌 長久할 수 있겠는가. 만약 뜻밖에 서로 핍박하면 마땅히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무장시켜 곧바로 橫江【橫江은 和州 경계에 있으니, 齊나라를 왕래할 때에 건너는 곳이다.】으로 출동해서 建康의 後援을 끊어야 하니, 이렇게 하면 천하의 일을 일거에 평정할 수 있다. 만약 북쪽을 향하여 魏나라에 투항하고자 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보내어 후임자로 삼고【相代는 대신 그 직임을 맡게 함을 말한다.】 당신에게는 河北의 한 州를 가지고 상대할 것이니, 河南公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通鑑要解]河南公 寧可復得耶:裴叔業이 의심하고 결정하지 못하여 아들 芬之를 보내어 建康에 들어가 인질이 되게 하고, 또한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 豫州刺史 薛眞度에게 찾아가 魏나라에 입조하는 것이 의리에 옳은가, 그른가를 묻자, 薛眞度는 일찍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裴叔業이 마침내 사자를 보내어 表文을 올리고 魏나라에 항복하니, 魏나라는 彭城王 元勰과 將軍 王肅을 보내어 기병 10만 명을 거느리고서 달려가게 하였다. 〈齊나라에서 詔命을 내려 裴叔業을 토벌하게 하자〉 다시 元勰을 司徒, 領揚州刺史로 삼아 壽陽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裴叔業이 얼마 뒤에 죽었다.】 하였다.

○ 十月에 齊蕭衍이 集僚佐하야 謂曰 昏主暴虐하야 惡踰於紂하니 當與卿等으로 共除之하리라 是時에 南康王寶融이 爲荊州刺史라 乃以寶融敎【用寶融之敎令이라】로 以爲使持節都督前鋒諸軍事하고 移檄建康하야 數寶卷罪惡하고 稱奉宣德皇太后【廢帝海陵王昭文之母也라 廢居宣德宮故로 假以稱之라 海陵王은 見上甲戌年이라】令하야 南康王이 宜纂承皇祚라하고 廢寶卷하야 爲涪陵王하다

○ 10월에 齊나라 蕭衍이 僚佐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어두운 군주가 포학해서 악함이 紂王보다 더하니, 경들과 함께 그를 제거하겠다.” 하였다. 이때 南康王蕭寶融이 荊州刺史로 있었다. 이에 蕭寶融의 敎令으로【蕭寶融의 敎令을 사용한 것이다.】蕭衍을 使持節都督前鋒諸軍事로 삼고, 建康에 檄文을 돌려서 蕭寶卷의 죄악을 나열하고 “宣德皇太后【宣德皇太后는 廢帝 海陵王 蕭昭文의 어머니이다. 폐위되어 宣德宮에 거하였기 때문에 이를 빌려서 宣德皇太后라 칭한 것이다. 海陵王은 앞의 甲戌年條(494)에 보인다.】의 명령을 받들었다고 칭하여 “南康王皇帝의 大統을 이어야 한다.” 하고는 蕭寶卷을 폐하여 涪陵王으로 삼았다.

和皇帝
名寶融이니 明帝第八子라

和皇帝【不剛不柔曰和라】寶融이니 明帝第八子라 在位一年이요 壽十六이라

和皇帝【강하지도 않고 유하지도 않은 것을 和라 한다.】는 이름이 寶融이니, 明帝(蕭鸞)의 여덟째 아들이다. 재위가 1년이고, 壽가 16세이다.

[辛巳] 齊和帝中興元年, 魏景明二年

[辛巳] 〈齊和帝中興元年이요 魏景明二年이라〉

신사(501) - 齊나라 和帝의 中興 元年이고, 魏나라 景明 2년이다. -

正月에 齊蕭衍이 發襄陽하다

正月에 齊나라 蕭衍이 襄陽을 출발하였다.

魏主時年이 十六이라 不能親決庶務하고 委之左右하니 於是에 倖臣趙邕及外戚高肇等이 始用事하야 魏政이 浸衰러라

魏主의 이때 나이가 16세였다. 직접 여러 가지 政務를 결정하지 못하고 좌우에게 맡기니, 이에 총신인 趙邕과 外戚인 高肇 등이 비로소 用事하여 魏나라의 정사가 점점 쇠퇴하였다.

○ 三月에 齊南康王寶融이 卽位於江陵하다 加蕭衍征東大將軍, 都督征討諸軍事하고 假黃鉞이러니 己巳에 이 以宣德太后令으로 追廢涪陵王하야 爲東昏侯하다

○ 3월에 齊나라 南康王蕭寶融이 江陵에서 즉위하였다. 蕭衍에게 征東大將軍‧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고 假黃鉞의 호칭을 더하였다. 己巳日(12월 9일)에 蕭衍宣德太后의 명령으로 涪陵王을 追廢하여東昏侯로 삼았다.

右齊는 七主에 合二十四年이라

歷年圖曰 高帝【蕭道成이라】는 以功名之盛으로 不容於昏暴之朝하고 逆取而順守之하니 亦一時之良主也라 明帝【蕭鸞이라】는 自以得於不義【弑君而立이라】라하야 猜忌, 【高帝道成及武帝賾이라】子孫하야 誅夷殆盡【甲戌年에 鸞이 殺鄱陽王鏘等七人하고 又殺衡陽王鉤等四人하고 又殺海陵王하며 乙亥年에 殺西陽王子明等三人하고 戊寅年에 殺河東王鉉等十人하니라】하고 深戒東昏以先事制人【明帝嘗戒東昏侯하야 使先事制人也라】이러니 而大臣疑懼하야 禍變相尋하야 卒亡其國이라 夫不務令德하고 而殺人以自安이면 自古以來로 未有能濟者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蕭衍이 因伯氏被禍하야 起兵襄陽하야 遂移齊鼎이라 當是時하야 四海分裂에 人厭齊亂하니 雖欲不梁이나 其可得乎아 齊之爲國이 運祚不長은 何哉오 蓋高祖는 以弑逆得天下하고 明帝는 以猜忌殺宗親하고 東昏繼之에 淫虐尤甚하니 促其年代 有自來矣라 然則國祚脩斷이 雖係乎天이나 而實人自爲之니 有國家者는 尙鑑于玆어다

이상 齊나라는 일곱 군주에 합하여 24년이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高帝【高帝는 蕭道成이다.】는 공명이 성대하였으므로 어둡고 포학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역으로 취하고 순으로 지켰으니, 또한 한때의 어진 군주이다. 明帝【明帝는 蕭鸞이다.】는 스스로 의롭지 못하게【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군주를 시해하고 즉위한 것이다.】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高帝武帝【[頭註]高, 武:高, 武는 高帝 蕭道成과 武帝 蕭賾을 이른다.】의 자손들을 시기하여 주벌해서 거의 다 죽였으며,【갑술년(494)에는 蕭鸞이 鄱陽王 蕭鏘 등 7명을 죽이고, 또 衡陽王 蕭鉤 등 4명을 죽이고, 또 海陵王을 죽였으며, 을해년(495)에는 西陽王 蕭子明 등 3명을 죽이고, 무인년(498)에는 河東王 蕭鉉 등 10명을 죽였다.】東昏侯에게 먼저 손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라고 경계하였는데,【明帝는 일찍이 東昏侯에게 먼저 손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라고 경계하였다.】 대신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화와 변란이 서로 이어져서 끝내 그 나라를 잃었다. 훌륭한 德을 힘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 편안하다고 한다면 예로부터 성공한 자가 있지 않았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蕭衍伯氏가 禍를 입음으로 인하여 襄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마침내 齊나라의 정권을 옮겼다. 이때를 당하여 온 천하가 분열되자 사람들이 齊나라의 혼란함을 싫어하였으니, 비록 梁나라가 되지 않고자 하나 어찌 될 수 있었겠는가. 齊나라의 國運이 길지 못하였음은 어째서인가? 高祖는 弑逆으로 천하를 얻었고, 明帝는 시기심으로 宗親들을 죽였으며, 東昏侯는 이 뒤를 계승하여 음탕하고 잔학함이 더욱 심하였으니, 국가의 운명을 재촉한 것이 유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國運이 길고 끊김은 비록 天運에 달려 있기는 하나 실로 사람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 국가를 소유한 자는 부디 이를 거울삼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