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三十一 宋紀

yjw2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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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朝

按南北二朝 不能混一하니

〈按南北二朝 不能混一하니 今依綱目하야 各分註其年하고 以紀其事하야 以見天下國統之離析也하노라〉

[史略 史評]南朝는 自晉以傳之宋하고 宋傳之齊하고 齊傳梁하고 梁傳陳하고 北朝는 自諸國倂於魏로 魏後分爲西魏, 東魏하야 東魏는 傳北齊하고 西魏는 傳後周하니라 後周倂北齊而傳之隋하고 隋滅陳然後에 南北이 混爲一하니 今以南爲提頭하고 而附北於其間하노라

- 南朝와 北朝 두 왕조는 통일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資治通鑑綱目》을 따라 각각 그 연도를 分註하고 그 일을 기록하여, 天下의 國統이 분열되었음을 나타내었다. -

[史略 史評]南朝는 晉나라로부터 宋나라에 전하고 宋나라는 齊나라에 전하고 齊나라는 梁나라에 전하고 梁나라는 陳나라에 전하였으며, 北朝는 여러 나라가 魏나라에 합병된 뒤로 魏나라가 뒤에 나뉘어 西魏와 東魏가 되어서 東魏는 北齊에 전하고 西魏는 後周에 전하였다. 後周가 北齊를 합병하여 隋나라에 전하고, 隋나라가 陳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南朝와 北朝가 통일되었는데, 이제 南朝를 첫머리에 제시하고 北朝를 그 사이에 붙였다.

宋紀

高祖武帝
高祖武帝 姓劉요 名裕요 字德輿니 彭城人이라 在位三年이요 壽六十七이라

宋紀 附北朝魏

高祖武帝【威强(獻)[敵]德曰武라 生而母死한대 父將棄之러니 從母救而乳之하다 少字寄奴니 嘗行할새 遇大蛇하야 擊傷之러니 後至其所하니 群兒搗藥曰 吾王이 爲劉寄奴所傷이로라 裕曰 何不殺고 兒曰 寄奴는 王者라 不死니라 叱之한대 卽散不見하니라】요 名요 字德輿니 彭城人이라 在位三年이요 壽六十七이라

宋紀 - 北朝의 魏를 붙임 -

高祖武帝【위엄 있고 강하여 德이 있는 자와 대등한 것을 武라 한다. 태어나서 바로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버리려 하였는데, 從母가 구원하여 길렀다. 어릴 때의 字가 寄奴이니, 일찍이 길을 가다가 큰 뱀을 만나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는데, 뒤에 그곳에 가보니 어린아이들이 약을 찧으며 말하기를 “우리 王이 劉寄奴에게 부상을 당했다.” 하였다. 劉裕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죽이지 않는가?” 하니, 아이가 대답하기를 “劉寄奴는 王者여서 죽지 않는다.” 하였다. 아이들을 꾸짖자, 즉시 흩어지고 보이지 않았다.】는 성이 이고 이름이 이고 字가 德輿이니, 彭城 사람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67세이다.

[庚申]二年

[庚申]二年이라 〈宋高祖劉裕永初元年이요 魏太宗明元帝拓跋嗣泰常五年이요 西秦文昭王乞伏熾磐建弘元年이요 夏世祖赫連勃勃眞興二年이요 燕太祖馮跋太平十(一)[二]年이요 北涼武宣王沮渠蒙遜玄始(八)[九]年이요 西涼公李恂永建元年이라 ○ 是歲에 晉亡宋代하니 凡七國이라〉

元熙 2년(경신 420) - 宋나라 高祖劉裕의 永初 元年이고, 魏나라 太宗明元帝拓跋嗣의 泰常 5년이고, 西秦文昭王乞伏熾磐의 建弘 元年이고, 夏나라 世祖赫連勃勃의 眞興 2년이고, 燕나라 太祖馮跋의 太平 12년이고, 北涼武宣王沮渠蒙遜의 玄始 9년이고, 西涼公李恂의 永建 元年이다. ○ 이해에 晉나라가 망하고 宋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일곱 나라이다.-

宋王이 欲受禪而難於發言이러니 六月에 宋王이 至建康이어늘 傅亮이 具詔草하야 使帝書之한대 帝欣然操筆하고 謂左右曰 桓玄之時에 晉氏已無天下러니 重爲劉公所延하야 將二十載라 今日之事는 本所甘心이라하고 遂書赤紙爲詔하고 遜于琅邪(琊)第하다 王이 爲壇於南郊하야 卽位하고 立王太子義符하야 爲皇太子하다

宋王(劉裕)이 선양받고자 하였으나 말을 꺼내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6월에 宋王이 建康에 이르자, 傅亮이 양위하는 詔書의 초고를 갖추어서 황제로 하여금 그대로 쓰게 하였는데, 황제가 흔쾌히 붓을 잡고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桓玄의 때에 晉나라가 이미 천하를 잃었는데, 劉公에 의해 거듭 연장된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다. 오늘의 일은 내 본래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는 마침내 붉은 종이에 써서 詔書를 만들고 물러나 琅邪王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宋王이 建康 남쪽 교외에서 壇을 만들어 황제에 즉위하고 王太子劉義符를 세워 皇太子로 삼았다.

[壬戌] 宋永初三年, 魏泰常七年

[壬戌] 〈宋永初三年이요 魏泰常七年이라〉

임술(422) - 宋나라 永初 3년이고, 魏나라 泰常 7년이다. -

五月에 宋高祖疾甚이어늘 司空徐羨之와 中書令傅亮과 領軍將軍謝晦와 鎭北將軍檀道濟 同被顧命하다 高祖殂於西殿하니 太子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宋武帝桓玄之亂하야 首倡義兵하야 奮臂一呼에 兇黨瓦解어늘 遂奉迎乘輿하야 再興晉室하니 厥功이 已不細矣라 旣而요 治兵整衆하야 經營四方하야 揚旗東征에 則廣固潰하고 卷甲南趨에 則盧循滅하고 偏師西上에 譙縱授首하고 銳卒北征에 姚泓面縛하야 遂汛掃伊, 洛하고 修奉園陵하야 震驚旃裘之心하고 發舒華夏之氣하니 南國之盛이 未有過於此者也로다 惜乎라 席不暇暖에 擧千里之秦하야 付之嬰孺하고 引兵遽還하니 志在簒國이라 蓋一擧足에 而赫連氏 已躡踵而入關中하야 卒不復見中原之定하니 可勝歎哉아 然이나 迹其取國以來로 淸簡寡欲하고 嚴整有度하며 被服布素하고 遊宴絶希하며 嬪御寡少하고 不畜私藏하며 孝于後母하고 又詔幼主當朝에 母后不得預政하면 此八者는 皆人君之要行이어늘 而武帝兼之하니 亦足以爲一代之良主矣로다

5월에 宋나라 高祖의 병이 심해지자, 司空徐羨之와 中書令傅亮과 領軍將軍謝晦와 鎭北將軍檀道濟가 함께 顧命을 받았다. 高祖가 서쪽 궁전에서 죽으니, 太子가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宋나라 武帝桓玄의 난리를 틈타 맨 먼저 義兵을 일으켜서 팔을 걷어붙이고 한 번 고함치자 흉악한 역적의 무리들이 와해되어 마침내 皇帝를 맞이해서 다시 晉나라 황실을 일으켰으니, 그 공이 이미 작지 않다. 이윽고 군대를 다스리고 무리를 정돈하여 사방을 경영해서 旗幟를 날리며 동쪽을 정벌하자 廣固가 궤멸되었고,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남쪽으로 달려가자 盧循이 멸망하였으며, 偏師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가자 譙縱이 머리를 바쳤고, 정예병을 이끌고 북쪽을 정벌하자 姚泓이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伊水와 洛水 지역을 깨끗이 소탕하고 園陵을 수리하고 받들어서 털가죽 옷을 입는 북쪽 오랑캐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中夏의 기풍을 발양하였으니, 南朝의 강성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애석하다.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이 千里나 되는 秦나라 땅을 들어서 어린 자식에게 맡기고 군대를 이끌고 급히 돌아오니, 마음이 나라를 찬탈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한 발짝을 떼기 무섭게 赫連氏가 벌써 뒤따라 關中으로 들어와서 끝내 다시는 中原이 평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차지한 이후로 청렴하고 소탈해서 욕심이 적고 엄정하여 법도가 있었으며, 옷은 삼베옷과 명주옷을 입고 놀거나 잔치하는 일이 매우 적었으며, 妃嬪들과 모시는 여인들이 적었고 사사로운 창고에 재물을 쌓아 두지 않았으며, 繼母에게 효도하였고 또 어린 군주가 조정을 맡았을 때에 母后가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것을 살펴보면 이 여덟 가지는 모두 군주의 중요한 행실인데 武帝가 이것을 겸하였으니, 또한 충분히 한 시대의 훌륭한 군주라고 할 만하다.”

營陽王
營陽王 名義符니 高祖長子라

營陽王義符니 高祖長子라 史曰少帝니 在位一年이요 壽十九라

營陽王은 이름이 義符이니, 高祖의 長子이다. 史書에는 少帝라 하였으니, 재위가 1년이고 壽가 19세이다.

[癸亥] 宋主義符景平元年, 魏泰常八年

[癸亥] 〈宋主義符景平元年이요 魏泰常八年이라〉

계해(423) - 宋主劉義符의 景平 元年이고, 魏나라 泰常 8년이다. -

魏主拔洛陽魏主拓跋嗣라 拔은 克城邑이니 若拔樹木에 幷而取之其根本也라】하다

魏主가 洛陽을 함락하였다.魏主拓跋嗣이다. 拔은 城邑을 함락시키는 것이니, 樹木을 뽑을 적에 그 뿌리까지 아울러 취하는 것과 같다.】

○ 五月에 魏主還平城하다

○ 5월에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 [[魏(太祖)[太宗]]]【當作太宗이라】殂하니 世祖卽位太宗長子也니 是爲世祖太武皇帝라[頭註]世祖라】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少帝體易染之資하고 稟可下之質하야 外物이 錯亂其心하고 所欲을 必從其志하야 遊狎無度하고 施爲乖戾하니 徐羨之等이 廢而弑之는 自取之也니라

○ 魏나라 太宗太祖는 마땅히 太宗이 되어야 한다.】이 죽으니, 世祖【[原註]太宗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世祖太武皇帝이다.[頭註]世祖拓跋燾이다.】가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少帝(營陽王)는 물들기 쉬운 자질을 타고났고 하등한 자질을 부여받아 外物이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耳目口鼻의 욕망을 반드시 뜻대로 따라서, 놀고 친압함이 한도가 없고 시행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으니, 徐羨之 등이 폐위하고 시해한 것은 少帝가 자초한 것이다.”

太祖文帝
名義隆이니 高祖第三子라

太祖文帝太祖는 始祖也니 始受命稱太祖라 慈惠愛民曰文이라】義隆이니 高祖第三子라 在位三十年이요 壽四十七이라

太祖文帝太祖는 始祖이니, 처음 天命을 받은 분을 太祖라 칭한다. 자혜로움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文이라 한다.】는 이름이 義隆이니, 高祖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30년이고, 壽가 47세이다.

[甲子] 宋景平二, 太祖文帝元嘉元年, 魏世祖太武帝燾始光元年

[甲子] 〈宋景平二이요 太祖文帝元嘉元年이요 魏世祖太武帝始光元年이라〉

갑자(424) - 宋나라 景平 2년이고, 太祖文帝의 元嘉 元年이고,魏나라 世祖太武帝拓跋燾의 始光 元年이다. -

宋主義符居喪無禮하고 好與左右狎暱【狎은 親近也요 暱은 日日相近也라】하야 遊戲無度어늘 徐羨之, 檀道濟等이 廢其主義符하야 爲營陽王하고 以宜都王義隆으로 纂承大統하다 八月에 宜都王이 至建康하니 百官이 奉璽綬어늘 卽位하여 以謝晦로 爲荊州刺史하다

宋主劉義符가 執喪함에 예의가 없고 좌우의 신하들과 친압【狎은 친근한 것이요, 暱은 날마다 서로 가까이 지내는 것이다.】하기를 좋아하여 놀고 희롱함이 한도가 없자, 徐羨之檀道濟 등이 그 군주 劉義符를 폐하여營陽王으로 삼고, 宜都王劉義隆으로 大統을 이었다.

8월에 宜都王이 建康에 이르니 百官들이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올렸다. 즉위하여謝晦를 荊州刺史로 삼았다.

[乙丑]宋元嘉二年, 魏始光二年, 夏主赫連昌承光元年

[乙丑] 〈宋元嘉二年이요 魏始光二年이요 夏主赫連昌承光元年이라〉

을축(425) - 宋나라 元嘉 2년이고, 魏나라 始光 2년이고, 夏主赫連昌의 承光 元年이다. -

正月에 宋徐羨之, 傅亮이 上表歸政이어늘 表三上에 宋主始親萬機하다

正月에 宋나라 徐羨之傅亮이 表文을 올려 정사를 돌려줄 것을 上奏하였는데, 表文을 세 번 올리자 宋主가 비로소 萬機를 직접 다스렸다.

[丙寅] 宋元嘉三年, 魏始光三年

[丙寅] 〈宋元嘉三年이요 魏始光三年이라〉

병인(426) - 宋나라 元嘉 3년이고, 魏나라 始光 3년이다. -

宋이 下詔하야 暴【顯示也라】徐羨之, 傅亮, 謝晦營陽, 廬陵王之罪【營陽은 義符요 廬陵은 義眞이니 皆於甲子六月에 殺之하다】하야 誅之하다

宋나라가 조서를 내려 徐羨之傅亮謝晦營陽王廬陵王을 죽인 죄營陽王은 劉義符이고 廬陵王은 劉義眞이니, 모두 甲子年(424) 6월에 살해당하였다.】를 드러내어【暴은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을 죽였다.

[丁卯] 宋元嘉四年, 魏始光四年

[丁卯] 〈宋元嘉四年이요 魏始光四年이라〉

정묘(427) - 宋나라 元嘉 4년이고, 魏나라 始光 4년이다. -

奚斤【姓名也니 山陽公이라】이 與夏平原公으로 相持於長安이러니 魏主 欲乘虛伐統萬【夏赫連勃勃이 於黑水之南에 營都하고 號統萬하니 卽朔方也라】하야 以輕騎【人馬不帶甲曰輕騎라】三萬으로 倍道【凡軍은 日行三十里則止하니 過六十里以上을 爲倍道요 亦曰倍日兼行이라 】先行하다 夏主 將步騎三萬하고 出城이어늘 魏主 乃分騎爲左右隊하야 以掎之【隗囂傳曰 秦失其鹿에 劉季逐而掎之라하니라 註見漢昭烈帝章武二年掎角하니라 [通鑑要解]掎는 音己니 罥其首曰角이요 掎其足曰掎也라】하니 夏衆이 大潰라 夏主不及入城하고 遂奔上邽하다 魏主爲人이 壯健鷙勇하야 臨城對陳【鷙는 凡鳥之勇銳와 獸之猛悍者를 皆名鷙也라 陳은 與陣同이라】에 親犯矢石하고 左右死傷相繼호되 神色이 自若하니 由是로 將士畏服하야 咸盡死力이러라 明於知人하야 或拔士於卒伍之中하야 惟其材用所長하고 不論本末하며 聽察이 精微하야 下無遁情이라 賞不遺賤하고 罰不避貴하야 雖所甚愛之라도 終無寬假라 常曰 法者는 朕與天下共之니 何敢輕也리오 然이나 性殘忍하야 果於殺戮이라 往往已殺而復悔之러라

魏나라 奚斤【奚斤은 姓名이니, 山陽公이다.】이 夏나라 平原公赫連定과 長安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魏主가 빈틈을 타고 統萬【夏나라 赫連勃勃이 黑水의 남쪽에 도성을 경영하고 統萬이라 하였으니, 바로 朔方이다.】을 정벌하고자 해서 경무장한 기병【사람과 말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을 輕騎라 한다.】 3만 명을 데리고 행군속도를 배가하여【무릇 군대는 하루에 30리를 가면 그치니, 60리 이상을 넘는 것을 倍道라 하고, 또한 倍日兼行이라고도 한다.】 먼저 떠났다. 夏主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오자, 魏主가 마침내 기병을 나누어 左隊와 右隊를 만들어서 협공하니,【[釋義]≪後漢書≫〈隗囂傳〉에 이르기를 “秦나라가 그 사슴을 잃었을 때에 劉季가 쫓아가 잡았다.” 하였다. 註는 漢나라 昭烈帝 章武 2년(222) 掎角條에 보인다. [通鑑要解]掎는 음이 기이니,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을 角이라 하고, 발을 잡아당기는 것을 掎라 한다.】夏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夏主가 미처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上邽로 도망하였다.

魏主는 사람됨이 건장하고 사납고 용맹스러워서 성에 임하여 적과 대치하여 진을 칠 적에【鷙는 새가 용맹하고 날랜 것과 짐승이 사나운 것을 모두 鷙라고 이름한다. 陳은 陣과 같다.】 직접 화살과 포석을 무릅썼으며 좌우에 죽고 부상한 자가 속출하였으나 안색이 태연자약하니, 이로 말미암아 장병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해서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인재를 알아보는 데 밝아서 혹 대오 가운데에서 인재를 발탁하여 오직 재주의 所長만을 따르고 本末(출신)을 따지지 않았으며, 듣고 살핌이 정밀하여 아랫사람들이 실정을 숨기지 못하였다. 상을 줄 때에는 천한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줄 때에는 귀한 사람을 피하지 않아서 비록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끝내 너그럽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法이라는 것은 朕이 천하와 함께 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가벼이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잔인하여 살육을 결행하고는 왕왕 죽이고 난 뒤에 다시 뉘우쳤다.

[庚午] 宋元嘉七年, 魏神䴥三年

[庚午] 〈宋元嘉七年이요 魏神䴥三年이라〉

경오(430) - 宋나라 元嘉 7년이고, 魏나라 神䴥 3년이다. -

宋主有恢復【恢는 大也라】河南之志라 三月에 詔簡甲卒五萬【簡은 與揀通이라】하야 給右將軍到彦之하고 遣使告魏主曰 河南은 舊是宋土러니 中爲彼所侵이라 今當修復舊境하리니 不關河北이니라 魏主大怒曰 我生髮未燥【燥는 乾也라】하야 已聞河南是我地어늘 此豈可得이리오 必若進軍인대 今當權斂戍魏主大怒하야 欲擊之어늘 乃陳天時不利하야 進兵有五敗하니 明君은 順三才而發之라 故萬全云云하니 當權斂戍也라하니라】相避라가 須冬寒地凍【須는 待也라】하고 河冰堅合하야 自更取之호리라 到彦之自淮入泗하야 至須昌하야 乃泝河西上【逆流而上曰泝라】한대 魏主以河南四鎭【碻磝, 滑臺, 洛陽, 虎牢라】兵少라하야 命諸軍하야 收衆北渡하니 碻磝, 滑臺, 洛陽, 虎牢戍兵이 皆棄城去라 於是에 司兗이 旣平이어늘 諸軍이 皆喜호되 王仲德이 獨有憂色하야 曰 諸賢이 不諳北土情僞하니 必墮其計하리라 虜雖仁義不足이나 而凶狡有餘【狡는 狡獪也라】하니 今斂戍北歸는 必幷力完聚라 若河冰旣合이면 將復南來하리니 豈可不以爲憂乎아

[新增]胡氏王仲德이 身爲副帥하니 見可知難하야 進退在己者也라 知其不可면 則宜遍白諸將하고 悉以上聞이라 文帝는 親決萬機하고 又非昏主니 固可爲忠言者라 使之知彼己形勢하야 早爲善後之圖면 斯不負委寄之意矣어늘 乃私言之하고 而不告于上하야 知難而不退하야 竟以取敗하니 非忠臣也니라

宋主가 河南 지방을 회복【恢는 큼이다.】할 뜻이 있었다. 3월에 명하여 甲卒 5만 명을 선발【簡字는 揀字와 통한다.】하여 右將軍到彦之에게 주고, 使者를 보내어 魏主에게 고하기를 “河南은 예로부터 宋나라 영토였는데 중간에 저들에게 침략을 당하였다. 이제 마땅히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것일 뿐이니, 너희 河北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니, 魏主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태어나서 머리털이 채 마르기【燥는 마름이다.】 전부터 이미 河南은 우리 영토라고 들었는데, 이제 와서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저들이 반드시 진군하여 攻取하려 한다면 이제 마땅히 우리는 잠시 지키는 병사들을 거두어【魏나라 太武帝가 크게 노하여 宋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崔浩가 마침내 아뢰기를 “天時가 불리하여 進軍하면 다섯 가지 패할 징조가 있으니, 현명한 군주는 天‧地‧人 三才를 따라 행하므로 萬全한 것입니다. …… 이제 마땅히 지키는 병사들을 잠시 거두십시오.” 하였다.】 피했다가 겨울철에 날씨가 추워져서 땅이 얼고 河水에 얼음이 단단히 얼기를 기다려【須는 기다림이다.】 그때 다시 攻取하겠다.” 하였다.

到彦之가 淮水로부터 泗水로 들어가 須昌에 이르러서 마침내 黃河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갔다.【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泝라 한다.】魏主가 河南의 네 진영【네 鎭은 碻磝‧滑臺‧洛陽‧虎牢이다.】에 병력이 적다고 해서 諸軍에 명하여 무리를 거두어 북쪽으로 건너오게 하니, 碻磝‧滑臺‧洛陽‧虎牢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城을 버리고 떠났다. 이에 司州와 兗州가 이미 평정되자 諸軍이 모두 기뻐하였으나 王仲德만은 홀로 근심하는 기색을 띠며 말하기를 “諸賢은 북쪽 지방 사람의 眞僞(사정)를 알지 못하니, 반드시 그들의 계책에 넘어갈 것이다. 오랑캐들이 仁義는 부족하나 흉악하고 교활함【狡는 교활함이다.】은 충분하니, 이제 저들이 지키는 병사들을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반드시 힘을 합하고 한군데로 모이는 것이다. 만약 황하에 얼음이 얼고 나면 장차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니, 어찌 이것을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王仲德은 副元帥의 몸으로 가능함을 보면 전진하고 어려움을 알면 후퇴하여 전진하고 후퇴함이 자기에게 달려 있는 자였으니, 싸움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마땅히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아뢰고 모두 다 임금에게 보고했어야 한다. 文帝는 직접 萬機를 결단하였고 또 어두운 군주가 아니었으니, 진실로 忠言을 올릴 수 있는 자였다. 文帝로 하여금 彼我의 형세를 알게 해서 뒷갈망을 잘할 계책을 일찍 세우게 했더라면 임무를 맡기고 부탁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을 터인데, 마침내 사사로이 말하고 군주에게는 아뢰지 않아 어려움을 알고도 후퇴하지 않아서 끝내 패망함을 취하였으니, 충신이 아니다.”

十月에 宋到彦之等이 沿河置守어늘 魏河北諸軍이 會於七女津하야 進攻虎牢拔之하니 尹沖及滎陽太守崔模 降魏하다

10월에 宋나라 到彦之 등이 黃河를 따라 수비하는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魏나라 河北의 여러 군사들이 七女津에 집결해서 虎牢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尹沖과 滎陽太守崔模가 魏나라에 항복하였다.

○ 十一月에 宋이 加檀道濟都督征討諸軍事하야 帥衆伐魏하니 魏長孫道生等이 引兵而南이라 到彦之 聞洛陽, 虎牢不守하고 引兵還하니 靑, 兗이 大擾라 彦之坐免官하다

○ 11월에 宋나라가 檀道濟에게 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魏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魏나라 長孫道生 등이 군대를 이끌고 黃河를 건너 남쪽으로 갔다. 到彦之가 洛陽과 虎牢가 지켜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靑州와 兗州가 크게 소요하였다. 到彦之가 죄에 걸려 면직되었다.

[辛未] 宋元嘉八年, 魏神䴥 四年

[辛未] 〈宋元嘉八年이요 魏神䴥 四年이요 燕王馮弘太興元年이요 北涼義和元年이라 ○ 是歲에 秦, 夏皆亡하니 凡四國이라〉

신미(431) - 宋나라 元嘉 8년이고, 魏나라 神䴥 4년이고, 燕王馮弘의 太興 元年이고, 北涼義和 元年이다. ○ 이해에 秦나라(西秦)와 夏나라가 모두 망하니, 모두 네 나라이다.-

二月에 宋檀道濟等이 進至濟上하야 二十餘日間에 前後與魏三十餘戰하야 道濟多捷이라 軍至歷城하니 魏叔孫建等이 縱輕騎하야 邀其前後하고 焚燒穀草라 道濟等이 食盡하야 自歷城引還할새 軍士有亡降魏者하야 具告之한대 魏人이 追之하니 衆이 恟懼將潰라 道濟夜唱籌量沙하야 以所餘少米로 覆其上이러니 及旦에 魏軍見之하고 謂道濟資糧有餘라하야 以降者爲妄而斬之하니 道濟全軍而反하다

[新增]養心吳氏曰 善用兵者는 有餘而示之不足하야 敵莫得以測其伏하고 不足而示之有餘하야 敵莫得以擣其虛【擣는 疑操字之誤니 操卽探字라】하나니 孫臏之減竈【減竈는 見一卷庚辰年이라】는 是所謂有餘而示之不足也요 檀道濟之量沙는 是所謂不足而示之有餘也니라

2월에 宋나라 檀道濟 등이 진격하여濟水 가에 이르러서 20여 일 동안 전후로 魏나라와 30여 차례 싸웠는데, 檀道濟가 대부분 승리하였다. 宋나라 군대가 歷城에 이르니, 魏나라 叔孫建 등이 날랜 기병을 풀어 앞뒤를 요격하고 곡식과 마초를 불태웠다. 檀道濟 등이 식량이 다 떨어져 歷城으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이때 군사 중에 도망하여 魏나라에 항복한 자가 있어서 이 사실을 자세히 고하였다. 魏나라 사람이 추격해 오니, 檀道濟의 군사들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장차 무너지려 하였다. 檀道濟가 밤에 큰 소리로 숫자를 세면서 모래를 쌀인 것처럼 말[斗]로 되고 남아 있던 소량의 쌀로 그 위를 덮었다. 아침이 되자 魏軍이 이것을 보고는 檀道濟의 물자와 군량이 충분하다고 여겨 항복한 자가 망언을 했다 하여 목을 베니, 檀道濟가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돌아왔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用兵을 잘하는 자는 충분하면서도 부족함을 보여서 적이 그 숨기고 있는 상황을 측량하지 못하게 하고, 부족하면서도 충분함을 보여서 적이 그 허를 틈타지【擣는 의심컨대 操字의 잘못이니, 操는 곧 探字이다.】 못하게 하니, 孫臏이 아궁이 수를 줄인 것【孫臏이 아궁이의 수를 줄인 것은 1권의 庚辰年條(B.C.339)에 보인다.】은 이른바 충분하면서도 부족함을 보인다는 것이요, 檀道濟가 모래를 말로 된 것은 이른바 부족하면서도 충분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癸酉] 宋元嘉十年, 魏延和二年

[癸酉] 〈宋元嘉十年이요 魏延和二年이요 北涼王沮渠牧犍永和元年이라〉

계유(433) - 宋나라 元嘉 10년이고, 魏나라 延和 2년이고, 北涼王沮渠牧犍의 永和 元年이다. -

涼王蒙遜蒙遜은 沮渠氏니 見上卷이라】이 卒하고 牧犍【蒙遜子라 [通鑑要解]國人以世子菩提幼弱하고 而其兄牧犍이 和雅有度라하야 立爲世子하다 蒙遜卒하고 牧犍立하야 請命於魏主하니 遣李順하야 拜牧犍爲河西公하니라】이 卽位하다

涼王沮渠蒙遜蒙遜은 沮渠氏이니 上卷 辛丑年條(401)에 보인다.】이 죽고, 沮渠牧犍【[頭註]沮渠牧犍은 沮渠蒙遜의 아들이다. [通鑑要解]나라 사람들이 世子沮渠菩提는 어리고 약한 반면 그 형 沮渠牧犍은 온화하고 文雅하며 도량이 있다 하여 沮渠牧犍을 세워 世子로 삼았다. 沮渠蒙遜이 죽고 沮渠牧犍이 즉위하여 魏主에게 명을 청하니, 李順을 보내어 沮渠牧犍을 임명하여 河西公으로 삼았다.】이 즉위하였다.

[丙子]宋元嘉十三年, 魏太延二年

[丙子] 〈宋元嘉十三年이요 魏太延(三)[二]年이라 ○ 是歲에 燕亡하니 凡三國이라〉

병자(436) - 宋나라 元嘉 13년이고, 魏나라 太延 2년이다. ○ 이 해에 燕나라가 망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檀道濟 立功前朝하야 威名甚重하니 朝廷이 疑畏之라 三月에 下詔誅之하다 道濟見收에 憤怒하야 目光如炬하고 脫幘【髮布巾曰幘이라】投地曰 乃壞汝萬里長城이로다 魏人이 聞之하고 喜曰 道濟死하니 吳子【宋本吳地라 故로 言吳子輩라 侯景旣克建康하고 亦曰 吳兒却易取라하다】는 不足復憚이라하더라

宋나라 檀道濟가 前代의 조정에 공을 세워 위엄과 명성이 매우 두터우니, 조정에서 그를 의심하고두려워하였다. 3월에 조서를 내려 그를 죽였다. 檀道濟가 체포당할 적에 분노하여 눈빛이 타오르는 횃불과 같았다. 幘【머리를 싸매는 삼베 두건을 幘이라 한다.】을 벗어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의 만리장성을 파괴하는구나.” 하였다. 魏나라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檀道濟가 죽었으니, 吳子의 무리【宋나라는 본래 吳나라 땅이다. 그러므로 宋나라 사람들을 吳子의 무리라고 한 것이다. 侯景도 建康을 점령하고 나서 말하기를 “吳나라 아이들은 취하기가 쉽다.” 하였다.】는 다시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 魏攻燕滅之하니 燕王이 奔高麗하다

○ 魏나라가 燕나라(北燕)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니, 燕王馮弘이 高句麗로 도망하였다.

[戊寅] 宋元嘉十五年, 魏太延四年

[戊寅] 〈宋元嘉十五年이요 魏太延四年이라〉

무인(438) - 宋나라 元嘉 15년이고, 魏나라 太延 4년이다. -

宋主性仁厚恭儉하고 勤於爲政이라 守法而不峻하고 容物而不弛하야 百官皆久於其職하고 守宰以六朞爲斷하니 吏不苟免하고 民有所係라 三十年間에 四境之內 晏安無事하야 戶口蕃息하고 出租供徭를 止於歲賦【歲賦는 常賦也니 言不額外取라】하고 晨出暮歸하야 自事【言民自事其事也라】而已라 閭閻之內에 講誦相聞하며 士敦操尙하고 鄕恥輕薄하야 江左風俗이 於斯爲美하니 後之言政治者 皆稱元嘉焉이러라

宋主는 성품이 仁厚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정사에 부지런하였다. 법을 지키되 준엄하지 않고 사람을 포용하되 해이하지 않아서 백관들은 모두 그 직임에 오래 머물고 郡守와 縣令은 6년으로 임기를 삼으니, 관리들은 구차히 면직하려 하지 않고 백성들은 의뢰하는 바가 있었다. 30여 년간 사방의 境內가 편안하고 아무 일이 없어서 戶口가 늘어났으며, 조세를 징수하고 요역을 징발하는 것이 1년에 한 차례에 그쳤고【歲賦는 1년에 한 번 바치는 일정한 세금이니, 정해진 액수 이외의 것은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백성들이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서 자신의 일에 종사【自事는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일에 종사함을 말한다.】할 뿐이었다. 閭閻 사이에 글 외는 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선비들은 지조를 돈독히 힘쓰고 鄕里에서는 경박함을 부끄러워해서 江左의 풍속이 이때에 아름다우니, 후세에 정치를 담론하는 자들이 모두 元嘉 연간을 칭송하였다.

[己卯] 宋元嘉十六年, 魏太延五年

[己卯] 〈宋元嘉十六年이요 魏太延五年이라 ○ 是歲에 涼亡하니 凡二國이라〉

기묘(439) - 宋나라 元嘉 16년이고, 魏나라 太延 5년이다. ○ 이해에 涼나라(北涼)가 망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三月에 魏伐涼滅之하니 牧犍이 降하다 涼州自張氏以來【晉時에 張軌據有涼州러니 其後에 張寔, 張茂, 張駿, 張重華, 張曜靈, 張祚, 張玄靜, 張天錫凡九主니 國號涼이라 至孝武時하야 秦王苻堅이 滅之하고 以梁熙爲刺史러니 後에 呂光이 殺熙而代之하니 呂紹, 呂纂, 呂隆凡四主라 安帝時에 後秦王姚興이 徵隆爲散騎常侍하고 以王常代之하다 秦復以南涼王禿髮傉檀代之러니 爲西秦王熾槃所滅이라 後에 北涼王沮渠蒙遜이 稱藩이라 故로 命爲涼州刺史하고 蒙遜卒에 牧犍立이러니 至是에 魏滅之하니라】로 號爲多士【永嘉之亂에 中洲之人이 避地河西하니 張氏禮而用之러니 子孫相承하야 衣冠不墮故로 涼州號爲多士也하니라】沮渠牧犍이 尤喜文學하야 以索敞, 陰興으로 爲國師助敎러니 魏主克涼州하고 皆禮而用之하니 由是로 魏之儒風이 始振이러라

3월에 魏나라가 涼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沮渠牧犍이 항복하였다. 涼州는 張氏가 涼나라를 세운 이후로【晉나라 때에 張軌가 涼州를 점령하였는데, 그 뒤에 張寔張茂張駿張重華張曜靈張祚張玄靜張天錫 등 모두 아홉 군주였으니, 國號를 涼(前涼)이라 하였다. 孝武帝 때에 이르러 秦王苻堅이 이들을 멸망시키고 梁熙를 刺史로 삼았는데, 뒤에 呂光(後涼)梁熙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니 呂紹呂纂呂隆 등 모두 네 군주였다. 安帝 때에 後秦王姚興呂隆을 불러 散騎常侍로 삼고 王常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秦나라가 다시 南涼王禿髮傉檀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西秦王乞伏熾磐에게 멸망당하였다. 뒤에 北涼王沮渠蒙遜이 藩屛을 칭하였으므로 명하여 涼州刺史로 삼았고 沮渠蒙遜이 죽자 沮渠牧犍이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선비(인재)가 많다고 이름이 났다.【[通鑑要解]涼州自張氏以來 號爲多士:永嘉의 亂에 中原 사람들이 河西로 피란하니 張氏가 이들을 예우하여 등용하였는데,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衣冠(文物)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므로 涼州에 선비가 많다고 이름난 것이다.】沮渠牧犍은 특히 문학을 좋아하여 索敞陰興을 國師助敎로 삼았는데, 魏主가 涼州를 점령하고 이들을 모두 예우하여 등용하니 이로 말미암아 魏나라의 儒風이 비로소 떨쳐졌다.

[丙戌] 宋元嘉二十三年, 魏太平眞君七年

[丙戌] 〈宋元嘉二十三年이요 魏太平眞君七年이라〉

병술(446) - 宋나라 元嘉 23년이고, 魏나라 太平眞君 7년이다. -

魏崔浩勸魏主하야 盡誅天下沙門【見漢明帝乙丑年이라 [通鑑要解]見前註라 魏主與崔浩皆重信寇謙之하야 奉其道라 浩素不信佛法하야 每言魏主호되 以爲佛法虛誕하니 宜悉除之라하니 魏主從之하야 命有司하야 宣詔國內하야 毁破經像寺院하니라】하고 毁諸經像이어늘 從之하니 塔廟在魏境者 無復孑遺【孑은 無右臂貌요 遺는 餘也니 言無復有半身之遺者라 一說에 孑은 獨立之貌요 遺는 脫也라】러라

[新增]尹氏曰 自佛入中國으로 人皆敬奉其法하야 以求福利하고 未有敢訾之者【訾는 毁也라】러니 至魏主하야 乃毅然【毅는 果敢也라】去之하니 亦可謂剛正不惑者矣라 然이나 世之議者 或以魏主不得其終【見弑라】으로 爲毁佛之報라하니 抑不知梁主이 奉佛尤篤이나 得禍尤慘【餓死臺城이라】하니 豈佛獨靈於魏而不靈於梁耶아 要知人之禍福이 自係乎善惡之積이요 而奉佛與否는 初無預【預는 與通이라】也라 夫居中國而從夷狄하고 捨(王)[正]道而尙異端하야 棄君臣, 絶父子하고 滅人倫, 毁形體하며 游手游食하야 以耗蠹平民【齊民同이라 齊는 等也니 無有貴賤故로 曰齊民이라 記王制曰 古者에 公田을 籍而不稅라하니라 其法이 計口授田하야 初無貧富不均之患이라 故로 曰齊民이니 言民業均齊也라】하고 至於藏姦蓄穢하야 淫汚雜揉【魏主至長安하야 入佛寺러니 從官入其室이라가 見大有兵器하고 以白魏主한대 魏主怒曰 此는 非沙門所用이라하고 命有司하야 閱其財産하야 大得釀具及窟室婦女라 崔浩因說魏主하야 悉誅沙門하고 焚壞經像이어늘 魏主從之하니라 窟室은 穴地爲室하야 以匿婦女라】를 又有不可勝言者하니 宜乎朱子筆之하야 以爲誅沙門也라 其義深矣로다

[二十史略]魏殺其司徒崔浩하고 夷其族하다 浩自明元時로 已爲謀臣하야 輒有功이러니 信道士寇謙之하야 勸魏主崇奉하야 立天師道場하야 受符籙하고 而最惡佛法하야 誅沙門하고 毁佛像佛書하다 魏主命浩修國史한대 書魏先世事를 皆詳實하야 刊石立之衢路하니 北人忿恚하야 譖浩暴揚國惡이라한대 魏主大怒하야 遂案誅之하다

[史略 史評]尹氏曰 符籙之事는 前所未聞이요 而始見於此라 魏主虔恭受之하니 自宜神物後先이어늘 而乃其身不保하니 然則果何益哉오 夫沙門은 居中國而從夷狄하고 捨正道而尙異端하야 棄君臣, 絶父子하고 滅人倫, 毁形體하며 遊手遊食하야 以耗蠹民財하니 其罪大矣라 誅而滅之 不亦宜乎아 後之欲尊奉二敎者는 可以鑑矣니라

[史略 史評]石氏原曰 天師道場符籙은 不過惑世誣民하야 竊財以自利而已니 原情定罪하면 寔天地間一妖妄人也라 漢人目之曰米賊이 夫豈過哉아

魏나라 崔浩魏主에게 권하여 天下의 승려들【[頭註]沙門에 대한 설명은 漢나라 明帝 乙丑年條(65)에 보인다. [通鑑要解]앞의 註에 보인다. 魏主崔浩와 함께 모두 寇謙之를 중시하고 신임하여 寇謙之의 道敎를 신봉하였다. 崔浩는 본래 佛法을 신봉하지 않아서 매양 魏主에게 이르기를 “佛法은 허탄하니, 마땅히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그 말을 따라 有司에게 명하여 나라 안에 詔書를 반포해서 佛經과 佛像과 寺院을 헐어 버렸다.】을 다 죽이고 여러 불경과 불상을 철거할 것을 청하자 이를 따르니, 魏나라 경내에 있는 佛塔과 佛廟(佛寺)가 다시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孑은 오른쪽 팔이 없는 모양이고 遺는 남은 것이니, 다시는 반쪽도 남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一說에 孑은 홀로 서 있는 모습이고 遺는 빠진 것이라고 한다.】

[新增]尹氏(尹起莘)가 말하였다.

“佛敎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모두 佛法을 공경히 받들어 복과 이익을 구하고 감히 비방하는 자가 없었는데,【訾는 헐뜯음이다.】魏主拓跋燾(元燾)에 이르러서 비로소 과감하게【毅는 과감함이다.】 제거하였으니, 굳세고 발라서 현혹되지 않은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세상의 비평하는 자들은 혹 魏主가 제명에 죽지 못했다【魏主 拓跋燾는 끝내 시해당하였다.】 하여 부처를 비방한 응보라고 말하는데, 알지 못하겠으나 梁主蕭衍(武帝)은 부처를 신봉하기를 특히 돈독히 하였으나 禍를 받음이 더욱 참혹하였으니,梁主蕭衍은 臺城에서 侯景에게 핍박받아 굶어 죽었다.】 어찌 부처가 유독 魏나라에는 영험하고 梁나라에는 영험하지 않단 말인가. 요컨대 사람의 禍와 福은 원래 善과 惡이 쌓임에 달려 있는 것이고 부처를 신봉하느냐의 여부와는 애당초 상관이 없음【預는 與(예)와 통한다.】을 알아야 한다. 中國에 있으면서 夷狄의 道를 따르며, 王道를 버리고 異端을 숭상하여 君臣間의 義理를 버리고 父子間의 人倫을 끊으며, 人倫을 멸하고 형체를 훼손하며 무위도식하여 일반 백성들【平民은 齊民과 같다. 齊는 동등함이니 貴賤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齊民이라 한 것이다. ≪禮記≫〈王制〉에 이르기를 “옛날에 公田은 백성의 힘을 빌려서 경작하고 私田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하였다. 그 법이 식구수를 계산하여 식구수대로 田地를 주어 애당초 빈부가 고르지 못한 폐단이 없었으므로 齊民이라 한 것이니, 백성들의 생활이 고르고 가지런함을 말한 것이다.】의 재물을 허비하고 좀먹으며, 심지어 간사한 마음을 숨기고 더러운 행실을 감추어 음탕하고 잡됨魏主가 長安에 이르러 佛寺에 들어갔는데 수행하는 관원들이 그 방에 들어갔다가 병기가 많이 있는 것을 보고 魏主에게 아뢰자, 魏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沙門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有司에게 명하여 그 재산을 조사하게 해서 술 빚는 도구와 굴속에 숨겨 놓은 부녀자들을 많이 찾아내었다. 崔浩가 이로 인하여 魏主를 설득해서 沙門을 다 죽이고 佛經과 佛像을 불태우고 부수게 하자, 魏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窟室은 땅을 파서 방을 만들어 부녀자를 숨겨 놓은 것이다.】이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朱子가 이것을 써서 ‘沙門을 주벌했다.’고 함이 당연하다. 그 뜻이 참으로 깊다.”

[二十史略]魏나라가 司徒崔浩를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하였다. 崔浩明帝元帝 때부터 이미 謀臣이 되어 많은 功을 세웠는데, 道士寇謙之를 신임하여 魏主에게 우러러 받들기를 권하여 天師道場을 세워서 符籙을 받게 하였고, 佛法을 가장 싫어하여 승려들을 죽이고 佛像과 佛書을 훼손하였다. 魏主崔浩에게 國史를 修撰하도록 명하였는데 魏나라 先代의 事實을 모두 상세하게 써서 돌에 새겨 네거리에 세우니, 북쪽 지방(魏나라) 사람들이 분노하여崔浩가 魏나라의 나쁜 점을 폭로하였다고 참소하였다. 이에 魏主가 크게 노하여 마침내 조사하게 하여 죽인 것이다.

[史略 史評]尹氏가 말하였다.

“符籙에 대한 일은 前代에 듣지 못하였고 여기에 처음 보인다. 魏主가 경건히 이것을 받았으니, 마땅히 神物이 앞뒤에서 번갈아 가며 보호해 주어야 할 터인데 마침내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沙門은 中國에 있으면서 夷狄의 道를 따르며 正道를 버리고 異端을 숭상하여, 君臣間의 義理를 버리고 父子間의 人倫을 끊으며 人倫을 멸하고 形體를 훼손하며, 무위도식하여 일반 백성들의 재물을 허비하고 좀먹으니, 그 죄가 크다. 이들을 주벌하여 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후대에 佛敎와 道敎를 높여 신봉하고자 하는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史略 史評]石原이 말하였다.

“天師(張道陵의 존칭)의 道場과 符籙은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여서 재물을 도둑질하여 자신을 이롭게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니, 實情을 미루어서 죄를 정한다면 진실로 천지간의 한 요망한 사람일 뿐이다. 漢나라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米賊이라 한 것이 어찌 지나친 것이겠는가.”

[己丑] 宋元嘉二十六年, 魏太平眞君十年

[己丑] 〈宋元嘉二十六年이요 魏太平眞君十年이라〉

기축(449) - 宋나라 元嘉 26년이고, 魏나라 太平眞君 10년이다. -

宋主欲經略【彊(疆)理也라】中原하니 群臣이 爭獻策하야 以迎合取寵이라 彭城太守王玄謨 尤好進言하니 宋主謂侍臣曰 觀玄謨所陳하면 令人有封狼居胥意【王氏曰 謂令我遂起北伐之意也라 狼居胥는 匈奴中山名이라[頭註]漢武封狼居胥山하니 見十卷壬戌年이라】로다 御史中丞袁淑이 言於上曰 陛下今當席卷趙, 魏하고 檢玉岱宗【檢玉은 註見漢光武建武中元元年하고 岱宗은 註見漢章帝元和二年하니라[頭註]岱宗은 見漢光武丙辰年이라】이라 臣逢千載之會하야 願上封禪書【史記註云 此泰山上에 築土爲壇以祭天하야 報天之功이라 故曰封이요 此泰山下小山上에 除地以祭하야 報地之功이라 故曰禪이니 言禪者는 神之也라 白虎通云 或曰 封者는 金〈泥〉銀繩이라하고 或曰 石泥金繩하고 封之印璽也라하니라】하노이다 上이 悅하다

宋主가 中原을 경략【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계책을 올려서 군주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취하였다. 彭城太守王玄謨가 더욱 進言하기를 좋아하니, 宋主가 近臣에게 이르기를 “王玄謨가 아뢴 것을 보면 나로 하여금 狼居胥山에 봉할 마음이 들게 한다.【[釋義]王氏가 말하였다. “狼居胥山에 봉할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마침내 북벌할 마음을 일으키게 함을 이른다. 狼居胥는 匈奴 지역의 山 이름이다.”[頭註]漢나라 武帝가 霍去病을 狼居胥山에 봉하였으니, 10권 壬戌年條(B.C.119)에 보인다.】” 하였다. 御史中丞袁淑이 上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이제 趙와 魏 지방을 석권하고 玉檢을 들고 岱宗(泰山)에 올라가 封禪을 행하시게 될 것이니,【[釋義]檢玉은 註가 漢나라 光武 建武 中元 元年條(56)에 보이고, 岱宗은 註가 漢나라 章帝 元和 2年條(85)에 보인다.[頭註]岱宗은 漢나라 光武帝 丙辰年條(56)에 보인다.】 신은 千載一遇의 기회를 만나 封禪書【≪史記≫ 註에 이르기를 “이 泰山 위에 흙을 쌓아 壇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하여 하늘의 공에 보답하기 때문에 封이라 말하고, 이 泰山 아래 작은 산 위에 땅을 평평히 닦고 제사하여 땅의 공에 보답하기 때문에 禪이라 말하니, 禪이라고 말한 것은 神으로 여긴 것이다. ≪白虎通≫에 이르기를 ‘혹자는 「封이란 金泥와 銀繩을 말한다.」 하고, 혹자는 「石泥와 金繩을 하고 이것을 印璽로써 봉한 것이다.」한다.’ 했다.” 하였다.】를 올리기를 원합니다.” 하니, 上이 기뻐하였다.

宋主欲伐魏한대 徐湛之, 江湛, 王玄謨等이 竝勸之어늘 沈慶之諫曰 我步彼騎하니 其勢不敵이라 檀道濟再行無功하고 到彦之失利而返하니 今料王玄謨等이 未踰兩將하고 六軍之盛이 不過往時하니 恐重辱王師하노이다 宋主曰 王師再屈은 別自有由라 道濟는 養寇自資하고 彦之는 中塗(途)疾動하니 虜所恃者는 唯馬라 今夏水浩汗에 河道流通하니 汎舟北下면 碻磝【註見孝武帝太元九年하니라】必走요 滑臺【註見孝武帝太元九年하니라】小戍를 易可覆拔이니 克此二城하고 館穀弔民【館은 舍也요 穀은 食也요 弔는 問也니 居其軍之館하고 食其軍之穀也라】이면 虎牢, 洛陽이 自然不固하리니 比及冬初하야 城守相接이면 虜馬過河라가 卽成擒矣리라 慶之又固陳不可한대 宋主使徐湛之, 江湛難之하니 慶之曰 治國은 如治家하야 耕當問奴요 織當問婢어늘 陛下今欲伐國而與白面書生【素非更事者라】輩로 謀之하시니 事何由濟리잇고 宋主不從하다 秋七月庚午에 大起軍旅할새 王公, 妃主及朝士, 牧守로 下至富民히 各獻金帛雜物하야 以助國用하고 又以兵力不足이라하야 悉發靑, 冀, 徐, 豫 二兗六州三五民丁【三丁發一하고 五丁發二하야 以爲兵이라】호되 倩使蹔行【倩은 假也라】하야 緣江五郡은 集廣陵하고 緣淮三郡은 集盱眙하고 使王玄謨로 進圍滑臺하다 九月辛卯에 魏主引兵南救之할새 玄謨士衆甚盛하고 器械精嚴이라 時에 河, 洛之民이 出穀操兵하고 來赴者 日以千數로되 玄謨不卽其長帥하고 而以配私暱【卽은 就也니 言當就用其來赴者之長帥라 [通鑑要解]言不能就其長帥而用之하고 使各爲部隊하야 而以其人으로 分配私所愛暱者라】하니 由是로 衆心失望하야 攻城數月에 不下러라

宋主가 魏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徐湛之江湛王玄謨 등이 모두 권하였는데, 沈慶之가 간하기를 “우리는 보병이고 저들은 기병이니, 형세상 이미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檀道濟가 두 차례 출정했으나 전공이 없었고 到彦之는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헤아려 보건대 王玄謨 등은 두 장수보다 못하고 六軍의 강성함은 지난날보다 못하니, 거듭 王의 군대를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宋主가 말하기를 “王의 군대가 두 번 굴복한 것은 따로 이유가 있으니, 檀道濟는 적을 쉬게 하여 스스로 보충할 수 있게 하였고 到彦之는 중도에 병이 났기 때문이다. 오랑캐가 믿는 것은 다만 말[馬]이 있는 것뿐이다.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서 水路가 통하니, 배를 띄워 북쪽으로 내려가면 碻磝【碻磝는 註가 孝武帝 太元 9년(384)에 보인다.】의 적군이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滑臺【滑臺는 註가 孝武帝 太元 9년(384)에 보인다.】의 적은 병력은 쉽게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성을 점령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성의 곡식을 먹고 백성들을 위로한다면【館은 머무름이요, 穀은 곡식을 먹음이요, 弔는 위문함이니, 그 군대의 관사에 머물고 그 군대의 곡식을 먹는 것이다.】虎牢와 洛陽은 자연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초겨울이 되어서 城을 지키는 수비군과 서로 연결되면 오랑캐의 말이 황하를 지나오다가 우리 군대에게 즉시 사로잡힐 것이다.” 하였다.

沈慶之가 또다시 불가함을 굳이 아뢰자, 宋主徐湛之江湛으로 하여금 논란하게 하니, 沈慶之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서, 밭을 가는 것은 사내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것은 계집종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지금 다른 나라를 치고자 하면서 白面書生【白面書生은 세상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자이다.】의 무리와 모의하시니,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宋主가 따르지 않았다.

가을 7월 庚午日(12일)에 크게 군대를 일으킬 적에 위로 王公과 왕비와 공주 및 朝士와 牧使와 守令으로부터 아래로 부유한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각각 금과 비단과 여러 물건을 바쳐서 나라의 재정을 돕게 하였다. 또 병력이 부족하다 하여 靑州‧冀州‧徐州‧豫州‧두 兗州(南兗과 北兗) 등 여섯 州의 民丁을 3명 중 1명, 5명 중 2명꼴로 징발【3명의 장정 중 1명을 징발하고 5명의 장정 중 2명을 징발하여 이로써 兵卒을 삼은 것이다.】하되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대신 갈 수 있게 하여【[釋義]倩(청)使蹔行:倩은 빌리는 것이다.】揚子江 연안의 다섯 郡은 廣陵에 집결하게 하고 淮水 연안의 세 郡은 盱眙에 집결하게 하며 王玄謨로 하여금 전진하여 滑臺를 포위하게 하였다.

9월 辛卯日(4일)에 魏主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와서 滑臺를 구원하였는데, 王玄謨의 군대가 매우 강성하고 병기가 정밀하고 삼엄하였다. 이때 黃河와 洛水 부근의 백성들이 곡식을 바치고 병기를 잡고 와서 따르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려졌는데, 王玄謨가 그들의 원래 우두머리에게 나아가게 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에게 배속시키니,【[釋義]卽은 나아감이니, 來附한 바의 우두머리에게 나아가 쓰게 함을 말한 것이다. [通鑑要解]그들의 원래 우두머리에게 나아가게 하여 그들을 쓰게 하지 않고, 각각 部隊를 만들게 하여 그 사람들을 자신의 측근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실망해서 성을 공격한 지 여러 달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冬十月乙丑에 魏主渡河하니 衆號百萬이요 鞞鼓之聲【鞞는 騎上鼓也라 鞞는 裨也니 裨助鼓聲也라】이 震動天地라 玄謨懼하야 退走어늘 魏人이 追擊之하니 死者萬餘人이러라 十一月辛卯에 弘農太守柳元景이 使薛安都等으로 攻陝하니 魏張是連提【洛州刺史니 張是는 複姓也라】 帥衆二萬하고 度崤救陝이어늘 安都等이 與戰於城南하니 魏衆이 大潰하야 斬張是連提하다 甲午에 克陝城하고 進攻潼關據之하니 關中豪傑이 所在蜂起者 來送款이러라 上이 以王玄謨敗退하야 魏軍深入하니 柳元景等이 不宜獨進이라하야 皆召還하다 魏主至彭城하야 引兵南下하니 所過에 無不殘滅이라 城邑이 皆望風奔潰하다 己未에 魏軍이 至淮上하다 魏人之南寇也에 不齎糧用하고 唯以抄掠爲資러니 及過淮에 民多竄匿하야 抄掠에 無所得하니 人馬飢乏이라 至瓜步하야 壞民廬舍하고 及伐葦爲筏【筏은 桴也니 大曰筏이요 小曰桴라】하야 聲言欲渡江하니 建康이 震懼하야 民皆荷擔而立이라 宋主登石頭城하야 有憂色하야 謂江湛曰 北伐之計를 同議者少러니 今日에 士民勞怨하니 予之過也라하고 又曰 檀道濟若在면 豈使胡馬至此리오하니라

겨울 10월 乙丑日(9일)에 魏主가 황하를 건너니, 병력을 백만이라 칭하고 鞞鼓 소리【鞞는 말 위에서 치는 북이다. 鞞는 돕는다는 뜻이니, 북소리를 돕는 것이다.】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王玄謨가 두려워서 후퇴하여 도망하자 魏나라 사람이 추격하니,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11월 辛卯日(5일)에 弘農太守柳元景薛安都 등으로 하여금 陝 땅을 공격하게 하니, 魏나라 張是連提【張是連提는 洛州刺史니 張是는 複姓이다.】가 군대 2만을 거느리고 崤山을 넘어 陝 땅을 구원하였다. 薛安都 등이 이들과 城 남쪽에서 싸우니, 魏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져 張是連提를 목 베었다.

甲午日(8일)에 陝城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潼關을 점령하니, 도처에서 봉기한 關中의 豪傑들이 와서 항복하였다. 上이 “王玄謨가 패전하여 후퇴해서 魏나라 군대가 깊이 쳐들어오니, 柳元景 등이 혼자 진격할 수 없다.” 하여 모두 불러서 돌아오게 하였다.

魏主가 彭城에 이르러 병력을 이끌고 남하할 적에 지나가는 곳마다 殘滅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城邑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흩어져 달아났다.

己未日(12월 4일)에 魏나라 군대가 淮水 가에 이르렀다. 魏나라 사람이 남쪽을 침략할 적에 양식과 물자를 가져오지 않고 오직 노략질한 것을 이용하였는데, 淮水를 지나갈 적에 백성들이 양식과 물자를 많이 숨겨서 노략질해도 소득이 없으니, 사람과 말이 굶주리고 궁핍하였다. 魏軍은 瓜步에 이르러서 백성들의 집을 파괴하고, 또 갈대를 베어 뗏목【筏은 뗏목이니, 큰 것을 筏이라 하고 작은 것을 桴라 한다.】을 만들어서 양자강을 건너고자 한다고 소문을 내니, 建康이 진동하고 두려워해서 백성들이 모두 이삿짐을 싸고 서 있었다. 宋主가 石頭城에 올라 근심하는 기색을 띠며 江湛에게 말하기를 “북벌 계획을 찬동하는 자가 적었는데, 오늘 병사와 백성들이 피로하고 원망하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檀道濟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어찌 오랑캐의 말이 이곳에 이르게 하였겠는가.” 하였다.

[辛卯] 宋元嘉二十八年, 魏太平眞君十二年

[辛卯] 〈宋元嘉二十八年이요 ○ 魏太平眞君十二年이라〉

신묘(451) - 宋나라 元嘉 28년이고, 魏나라 太平眞君 12년이다. -

魏人이 凡破南兗, 徐, 〈兗〉【兗은 卽北兗이라】, 豫, 靑, 冀六州에 殺掠을 不可勝計라 丁壯【凡民이 始生爲黃이요 四歲爲小요 十六爲中이요 二十二爲丁이요 六十爲老라 黃者는 謂稚幼髮黃也요 小는 謂細弱也요 老는 謂甲子一周니 血氣已衰故로 免放之也라 說文에 丁을 謂之丁者는 丁屬南方하니 夏時에 萬物이 盛於丙而成於丁也라】者는 卽加斬截하고 嬰兒【胸前을 謂之嬰이니 置之胸前이라 故曰嬰兒라】는 貫於槊上【槊은 音朔이니 矛長丈八者라】하야 槃舞【槃은 回也라】以爲戲하니 所過郡縣이 赤地【空盡無物曰赤이니 言在地之物皆盡也라】無餘하야 春燕이 歸巢於林木이라 魏之士馬死傷이 亦過半하니 國人이 皆尤之러라

魏나라 사람이 南兗州‧徐州‧兗州(北兗州)【徐兗의 兗은 곧 北兗이다.】‧豫州‧靑州‧冀州 등 6주를 격파함에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丁壯【모든 백성이 갓 태어난 것을 黃이라 하고, 4세를 小라 하고, 16세를 中이라 하고, 22세를 丁이라 하고, 60세를 老라 한다. 黃은 어려서 머리가 노란 것을 이르고, 小는 細弱(가늘고 약함)함을 이르고, 老는 六十甲子가 한 번 되돌아옴을 이르니 血氣가 이미 쇠했기 때문에 軍籍에서 면제하는 것이다. ≪說文解字≫에 “男丁을 丁이라 이르는 것은 丁은 남방에 속하니, 여름철에 만물이 丙에서 성하여 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였다.】들은 즉시 목을 베고 어린아이【가슴 앞을 嬰이라 이르니, 어린아이를 가슴 앞에 두기 때문에 嬰兒라 이르는 것이다.】는 창끝【槊은 音이 삭이니, 창의 길이가 1丈 8尺인 것이다.】에 꿰어 빙빙 돌리면서【槃은 돌리는 것이다.】 춤을 추어 놀이로 삼으니, 이들이 지나가는 郡縣마다 赤地【텅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을 赤이라 하니, 땅에 있는 물건이 모두 다 없어졌음을 말한다.】로 변해 버리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어서 봄에 제비가 돌아와 〈집이 아닌〉 숲 속의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 죽고 부상한 魏나라 병사와 말이 또한 반을 넘으니, 魏나라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 上이 每命將出師에 常授以成律하고 交戰日時도 亦待中詔라 是以로 將帥趑趄하야 莫敢自決하고 又江南白丁【言素非軍旅之人이라】이 輕進易退하니 此其所以敗也라 自是로 邑里蕭條하야 元嘉之政이 衰矣러라

○ 上이 장수를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할 때마다 항상 만들어 놓은 규율을 내려 주고 교전하는 날짜와 시각도 궁중의 詔書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장수들이 주저하여 감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江南의 임시로 징집한 白丁【白丁은 〈임시로 징집된 壯丁이요〉 본래 군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님을 말한다.】들은 가볍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났으니, 이것이 宋나라 군대가 패한 원인이었다. 이로부터 宋나라의 邑里가 쓸쓸해져서 元嘉의 정사가 쇠퇴하였다.

[壬辰] 宋元嘉二十九年, 魏高宗文成帝濬興安元年

[壬辰] 〈宋元嘉二十九年이요 魏高宗文成帝興安元年이라〉

임진(452) - 宋나라 元嘉 29년이고, 魏나라 高宗文成帝拓跋濬의 興安 元年이다. -

魏中常侍宗愛弑其君어늘 尙書源賀, 陸鹿이 勒兵【勒은 檢勒也니 猶戒嚴也라】하고 奉皇孫景穆太子之子니 是爲高宗文成皇帝라】하야 卽位하고 改元興安하다

魏나라 中常侍宗愛가 군주 拓跋燾를 시해하자, 尙書源賀陸鹿이 군대를 정돈하여【勒은 군대를 점검하여 정돈하는 것이니, 戒嚴과 같다.】宗愛를 죽이고 皇孫인 拓跋濬拓跋濬景穆太子(拓跋晃)의 아들이니, 이가 高宗文成皇帝이다.】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고 興安으로 개원하였다.

宋主魏世祖殂하고 更謀北伐하야 遣蕭思話【撫軍將軍이라】하야 督張永【冀州刺史라】等하야 向碻磝하고 魯爽【司州刺史라】은 將荊州甲士四萬하야 出許, 洛하고 雍州刺史臧質은 帥所領하야 趣潼關하다 諸軍이 攻碻磝호되 累旬不拔이라 張永이 夜徹圍退하니 士卒이 驚擾【魏人이 夜에 自地道潛出하야 燒營及攻具어늘 張永이 夜撤圍退軍할새 不告諸將하니 士卒驚擾하니라】라 魏兵乘之하니 死傷塗地라 遂引兵還하다

宋主가 魏나라 世祖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북벌을 도모하여 蕭思話蕭思話는 撫軍將軍이었다.】를 보내어 張永張永은 冀州刺史였다.】 등을 독려해서 碻磝로 향하게 하고, 魯爽魯爽은 司州刺史였다.】은 荊州의 甲士 4만 명을 거느리고서 許와 洛으로 출동하게 하고, 雍州刺史臧質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을 인솔하고 潼關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諸軍이 碻磝를 공략하였으나 수십 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張永이 밤에 포위를 거두고 후퇴하니, 士卒들이 놀라서 동요하였다.【[頭註]夜徹圍退 士卒驚擾:魏나라 사람이 밤에 땅속으로 파놓은 길을 따라 몰래 나와서 陣營과 城을 공략하는 기구를 불태우자, 張永이 밤에 포위를 거두고 군대를 후퇴시킬 적에 諸將에게 고하지 않으니, 士卒들이 놀라서 동요하였다.】魏나라 군대가 이 틈을 타서 공격하니 사상자가 땅에 널렸다. 宋나라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癸巳] 宋元嘉三十年, 魏興安二年

[癸巳] 〈宋元嘉三十年이요 魏興安二年이라〉

계사(453) - 宋나라 元嘉 30년이고, 魏나라 興安 2년이다. -

二月에 宋太子 弑其君義隆【劭巫蠱事覺이로되 赦不誅러니 至是하야 弑之라】이어늘 夏四月에 武陵王駿이 擧兵誅하고 武陵王駿이 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文帝躬勤政事하야 侃侃忘疲하고 性存儉約하야 不事侈靡하고 加以在位日久하야 綱維備擧하고 條禁明密하야 四境晏然하고 戶口蕃息하야 政平訟理라 惜乎라 內無股肱之臣하고 外乏爪牙之士하야 以萬里長城之人으로 不免死於讒間之口하고 而所與謀者는 不過白面書生而已라 而又不量其力하고 橫挑强胡하야 使師徒殲於河南하고 戎馬飮於江津하며 及其末路에 狐疑不決하야 卒成子禍하니 豈非文有餘而武不足耶아

2월에 宋나라 太子劉劭가 군주劉義隆을 시해하였다.【宋나라 太子 劉劭가 巫術로 저주한 일이 발각되었으나 文帝가 용서해 주고 죽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文帝를 시해하였다.】 여름 4월에 武陵王劉駿이 군대를 일으켜 劉劭를 죽이고, 武陵王劉駿이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文帝는 정사를 몸소 부지런히 힘써서 피로함을 잊었고 타고난 성품이 검약하여 사치함을 일삼지 않았다. 더구나 在位한 시일이 장구하여 紀綱이 골고루 거행되었으며, 법규와 금령이 분명하고 치밀해서 사방의 경내가 편안하고 戶口가 늘어나서 政事가 공평하고 訟事가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안으로는 股肱의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爪牙(발톱이나 이빨)의 勇士가 없어서, 萬里長城과 같은 사람을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말 때문에 죽게 함을 면치 못하였고 더불어 도모한 자는 白面書生에 불과할 뿐이었다. 또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멋대로 강한 오랑캐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군사들이 河南에서 섬멸당하고 오랑캐의 軍馬가 江津에서 물을 마시게 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해서 끝내 자식에게 시해당하는 禍를 이루었으니, 어찌 文은 유여하였으나 武가 부족해서가 아니겠는가.”

世祖孝武帝
名駿이요 字休隆이니 文帝第三子라

世祖孝武帝【祖는 法也요 夸志多窮曰武라】駿이요 字休隆이니 文帝第三子라 在位十一年이요 壽三十五라

世祖孝武帝【祖는 본받음이요, 뜻이 커서 무력을 끝까지 사용한 것을 武라 한다.】는 이름이 駿이고 字가 休隆이니, 文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11년이고, 壽가 35세이다.

[甲午]宋世祖孝建元年, 魏興光元年

[(癸卯)[甲午]] 〈宋世祖孝建元年이요 魏興光元年이라〉

갑오(454) - 宋나라 世祖의 孝建 元年이고, 魏나라 興光 元年이다. -

宋主爲人이 機警【謂關機警悟也라】勇決하며 學問博洽하고 文章華敏이라 省讀書奏에 能七行俱下【一注目間에 能了七行文義라】하고 又善騎射나 而奢欲無度라 自晉氏渡江已來로 宮室草創이라 宋興에 無所增改러니 至是하야 始大修宮室하고 土木에 被錦繡라 侍中袁顗 因盛稱高祖儉素之德한대 宋主曰 田舍公得此는 已爲過矣【〈上이 壞高祖所居陰室하고 於其處에 起玉燭殿할새 與群臣觀之하니〉 牀頭에 有土(墻)[障]하고 壁上에 掛葛燈籠, 麻蠅拂이어늘 袁顗因盛稱高祖儉素之德한대 宋主云云이라 土障은 所以障風者요 葛燈籠은 蒙以葛布者라】라하니라

宋主는 사람됨이 기민하고【機警은 機智가 있고 영특하여 빨리 깨달음을 이른다.】 과감하게 결단하며 학문이 넓고 풍부하고 문장이 화려하고 민첩하였다. 書奏를 훑어볼 때에 일곱 줄을 한번에 읽어 내려갔고,【글을 읽을 때에 한 번 주목하는 사이에 일곱 줄의 글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나 사치한 욕심이 한도가 없었다. 晉나라가 양자강을 건너온 이후로 궁실을 아주 간소하게 지었는데, 宋나라가 일어난 뒤에도 더하고 고치는 바가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궁실을 크게 건축하고, 궁전의 土木에 錦繡로 장식하였다. 侍中袁顗가 인하여 高祖(劉裕)의 검소한 德을 크게 칭찬하자, 宋主가 말하기를 “시골 늙은이는 이것을 얻은 것만 해도 이미 과분하다.”【[附註]田舍公得此 已爲過矣:宋主는 高祖가 거처하던 陰室을 헐고 그 자리에다가 玉燭殿을 지으려 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보니, 평상 머리에는 土障이 있고 벽 위에는 葛燈籠과 麻蠅拂이 걸려 있었다. 袁顗가 인하여 高祖의 검소한 德을 크게 칭찬하자, 宋主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土障은 바람을 막는 것이요, 葛燈籠은 葛布를 씌운 것이다.】 하였다.

[甲辰] 宋大明八年, 魏和平五年

[甲辰] 〈宋大明八年이요 魏和平五年이라〉

갑진(464) - 宋나라 大明 8년이고, 魏나라 和平 5년이다. -

宋主駿이 殂하고 太子子業이 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孝武因元兇之逆하야 首倡義旅하야 不逾月間에 勦除逆亂하고 師直爲壯하니 成功이 固宜로되 卽位未幾에 沈湎于酒하고 荒淫于色하고 貪冒于貨하며 嘲狎公卿하고 誅仇諫士하며 大興宮室하고 濫賞嬖幸하야 帑藏空虛하니 迹其無道하면 不若이니 得保首領하야 以沒於牖下 蓋亦幸矣로다

宋主劉駿이 죽고, 太子劉子業이 즉위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孝武帝(劉駿)는 元兇의 반역으로 인하여 맨 먼저 義兵을 일으켜서 채 한 달도 못 되어 반란을 일으킨 역도들을 제거하였고 올바른 명분 아래 군대 역시 강하였으니, 성공함이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술에 탐닉하고 여색에 빠지고 재물을 탐하였으며, 公卿들을 업신여기고 諫言하는 선비들을 죽였으며, 宮室을 크게 일으키고 총애하는 자들에게 함부로 상을 내려서 國庫가 텅 비었으니, 그 無道함을 살펴보면 漢나라의 桓帝靈帝만도 못하다. 머리를 보전하여 창문 아래(正寢)에서 죽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것이다.”

太宗明帝
名彧이니 文帝第十一子라

太宗明帝【宗은 尊也니 有德可尊이라 明臨四方曰明이라】이니 文帝第十一子라 在位七年이요 壽三十四라

太宗 明帝【宗은 높음이니 德이 있어서 높일 만한 것이다. 밝게 四方에 임하는 것을 明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文帝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재위가 7년이고, 壽가 34세이다.

[乙巳] 宋主子業景和元年, 太宗泰始元年

[乙巳] 〈宋主子業景和元이요 太宗泰始元年이요 魏和平六年이라〉

을사(465) - 宋主劉子業의 景和 元年이고, 太宗(劉彧)의 泰始 元年이며, 魏나라 和平 6년이다. -

五月에 魏主殂하다 初에 魏世祖【太武帝燾라】經營四方하니 國頗虛耗하고 重以內難【內難은 謂見弑也니 在上壬辰年이라 [通鑑要解]內難은 宗愛旣弑世祖하고 又弑南安王라 】하야 朝野楚楚【苦楚不安之貌라】러니 高宗文成帝이라】이 嗣之하야 與時消息하야 靜以鎭之하야 懷集中外하니 民心이 復安이라 顯祖弘高宗長子也니 是爲顯祖獻文皇帝라】이 卽位하니 時年十二라 馮太后臨朝稱制하다

5월에 魏主가 죽었다. 처음에 魏나라 世祖世祖太武帝拓跋燾이다.】가 四方을 경영하니, 나라가 자못 허약해지고 내란까지 겹쳐서【[頭註]內難은 시해당한 것을 이르니, 앞의 壬辰年條(452)에 보인다. [通鑑要解]內難은 宗愛가 이미 世祖를 시해하고, 또다시 南安王拓跋余를 시해한 것이다.】 朝野가 고통으로 신음하였는데,【楚楚는 고생하여 편안하지 않은 모양이다.】高宗高宗文成帝拓跋濬이다.】이 왕위를 이어받은 뒤에는 時世에 따라 변화하여 고요함으로 국가를 진정시켜 中外를 회유하고 편안하게 하니, 民心이 다시 안정되었다. 顯祖拓跋弘拓跋弘高宗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顯祖獻文皇帝이다.】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馮太后가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 宋沈慶之 復啓聽民私鑄錢하니 由是로 錢貨亂敗하야 千錢이 長不盈三寸이요 大小稱此하니 謂之鵝眼錢이라하고 劣於此者는 謂之綖環錢【綖與線同하니 私箭切이라 貫之綖하면 其狀如環故로 曰綖環이라】이라 貫之以縷하야 入水不沈하고 隨手破碎하니 市井이 不復料數【料는 計也라】라 十萬錢이 不盈一掬【今俗謂兩手所捧을 爲一掬이니 則數合耳라】하고 斗米一萬이라 商貨不行이러라

○ 宋나라 沈慶之가 다시 아뢰어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니, 이로 말미암아 화폐가 문란해지고 조악해졌다. 千錢을 꿴 길이가 채 세 치가 못 되고 돈의 크기가 이와 서로 걸맞으니, 이것을 鵝眼錢이라 일렀으며 이보다 못한 것은 綖環錢【綖은 線과 같으니, 음이 私箭切(선)이다. 돈을 끈으로 꿰면 돈을 꿴 모양이 고리와 같으므로 綖環이라고 한 것이다.】이라 일렀다. 이것을 끈으로 꿰어 물속에 넣으면 가라앉지 않고 손으로 만지면 부서지니, 市井에서 돈을 사용할 때 다시는 多少의 數를 헤아리지【料는 계산하는 것이다.】 않았다. 십만 전이 한 줌【지금 풍속에 양손으로 받는 것을 한 움큼[一掬]이라 하니, 몇 홉일 뿐이다.】이 못 되고 쌀 한 말의 값이 1만 전이니, 장사와 무역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였다.

宋主子業이 殘暴日甚하니 宗室百官이 濫被誅殺이라 壽寂之【子業之左右라】弑之하고 迎湘東王하야 卽位하고 罷二銖錢하고 禁鵝眼, 綖環錢하고 餘皆通用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廢帝之立에 凶悖轉甚하야 誅殺無度하야 內外反目이라 假使中才之君이 有一于此라도 足殞其軀온 況兼此衆惡하니 不亡其何待乎아

宋主劉子業이 잔인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니, 宗室과 百官들이 〈죄가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주살당하였다. 壽寂之壽寂之劉子業의 近臣이다.】宋主를 시해하고湘東王劉彧을 맞이하여즉위하게하고는二銖錢을 없애고 鵝眼錢과 綖環錢을 금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통용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廢帝(劉子業)가 즉위하자 흉악함과 패역함이 더욱 심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한도가 없어서 內外가 반목하였다. 가령 중등의 재주를 지닌 군주가 이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족히 목숨을 잃을 터인데, 하물며 이 여러 가지 惡을 겸하였으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丙午] 宋泰始二年, 魏顯祖獻文帝弘天安元年

[丙午] 〈宋泰始二年이요 魏顯祖獻文帝天安元年이라〉

병오(466) - 宋나라 泰始 2년이고, 魏나라 顯祖獻文帝拓跋弘의 天安 元年이다. -

宋徐州刺史薛安都와 汝南太守常珍奇 竝遣使乞降宋主子業이 忌其弟江州刺史晉安王子勛하야 謀欲鴆之하니 子勛叛이라 安都應之러니 及子勛敗死에 安都乞降하다 又子勛이 以雍州刺史袁顗로 爲僕射한대 誘汝南司馬珍奇하야 殺其太守하고 以珍奇로 代爲太守하니라】이어늘 宋主以南方已平이라하야 欲示威淮北【靑, 冀, 司, 豫等州니 皆應子勛이라】하야 乃命張永, 沈攸之하야 將甲士五萬하야 迎薛安都하니 安都聞大兵北上하고 懼【將兵五萬하야 迎安都한대 蔡興宗安都歸順不虛하니 正須單使라 今以重兵迎之하면 勢必疑懼리이다 宋主不聽이러니 安都等이 果懼하니라】하야 遣使乞降於魏하고 常珍奇亦以懸瓠【縣名이라】降魏하야 皆請兵自救하니 魏遣尉元【尉은 音菀이니 姓名也라】等하야 救彭城하다

宋나라 徐州刺史薛安都와 汝南太守常珍奇가 함께 使者를 보내어 항복하기를청하니,宋主劉子業이 아우인 江州刺史晉安王劉子勛을 시기하여 鴆毒으로 죽이고자 하니, 劉子勛이 반란을 일으켰다. 薛安都劉子勛에게 내응하였는데, 劉子勛이 패하여 죽자 薛安都가 항복하기를 청한 것이다. 또 劉子勛이 雍州刺史袁顗를 僕射로 삼았는데, 袁顗가 汝南司馬常珍奇를 유인해서 그 태수를 죽이고 常珍奇를 대신 太守로 삼았었다.】宋主는 南方이 이미 평정되었다고 생각하고 淮水 북쪽 지역【淮北은 靑州‧冀州‧司州‧豫州 등이니, 모두 劉子勛에게 내응하였다.】에 위엄을 보이고자 해서 張永沈攸之에게 명하여 甲士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薛安都를 맞이하게 하였다. 薛安都는 대규모 병력이 北上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宋나라가 군대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薛安都를 맞이하려 하자, 蔡興宗이 아뢰기를 “薛安都가 귀순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니, 바로 한 명의 사자만 보내면 됩니다. 이제 많은 병력으로 맞이하면 형세상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宋主가 듣지 않았는데, 薛安都 등이 과연 두려워하였다.】使者를 보내서 魏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고, 常珍奇 또한 〈汝南의 治所인〉 懸瓠縣【懸瓠는 縣의 이름이다.】을 가지고 魏나라에 항복하면서 모두 군대를 파견하여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魏나라가 尉元【尉은 音이 울이니, 尉元은 姓名이다.】 등을 보내어 彭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丁未] 宋泰始三年, 魏皇興元年

[丁未] 〈宋泰始三年이요 魏皇興元年이라〉

정미(467) - 宋나라 泰始 3년이고, 魏나라 皇興 元年이다. -

張永等이 棄城夜遁【會에 天大雪하니 士卒凍死太半이요 手足斷者 十七八이라】이어늘 尉元은 邀其前하고 薛安都는 乘其後하야 大破等於呂梁【山名이요 又縣名이라】之東하니 死者以萬數요 枕尸六十餘里라 沈攸之僅以身免하니 由是로 失淮北四州【靑, 冀, 徐, 兗이라】及豫州淮西【汝南, 新蔡, 南頓, 潁川等郡이라】之地하니라

宋나라 張永 등이 城을 버리고 밤에 도망하자,【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내리니, 士卒들이 얼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고, 손과 발이 얼어서 끊어진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었다.】尉元은 그 앞을 가로막고 薛安都는 그 뒤를 추격하여 張永 등을 呂梁【呂梁은 山 이름이요, 또 縣의 이름이다.】의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니,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지고 60여 리에 시신이 널렸다. 張永 등이 沈攸之와 함께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니, 이로 말미암아 淮北의 네 州【네 州는 靑州‧冀州‧徐州‧兗州이다.】와 豫州의 淮西【淮西는 汝南郡‧新蔡郡‧南頓郡‧潁川郡 등이다.】 지역을 잃었다.

宋主蕭道成【建康令也니 字는 紹伯이라 其先이 居東海蘭陵縣하니 是爲齊太祖라】하야 將千人하야 鎭淮陰이어늘 道成이 收養豪傑하니 賓客이 始盛이러라

宋主蕭道成蕭道成은 建康令이니, 字가 紹伯이다. 그 선조가 東海 蘭陵縣에 살았으니, 이가 바로 齊나라 太祖이다.】을 보내어 천 명을 거느리고 淮陰에 진주하게 하자, 蕭道成이 호걸들을 거두어 기르니 門下의 賓客들이 비로소 많아졌다.

[辛亥] 宋泰始七年, 魏高祖孝文帝拓跋宏延興元年

[辛亥] 〈宋泰始七年이요 魏高祖孝文帝拓跋宏延興元年이라〉

신해(471) - 宋나라 泰始 7년이고, 魏나라 高祖孝文帝拓跋宏(元宏)의 延興 元年이다. -

宋이 以淮陰爲北兗州하고 徵蕭道成入朝어늘 道成所親이 以朝廷方誅大臣이라하야 勸勿就徵한대 道成曰 主上이 自以太子稚弱이라하야 翦除諸弟하니 何預他人이리오 今唯應速發이니 淹留【淹은 漬也니 久留也라】顧望이면 必將見疑요 且骨肉相殘하니 自非靈長【靈은 善也라】之祚라 禍難이 將興하리니 方與卿等으로 戮(勠)力【〈左傳戮力一心注에〉 倂力也니 戮〈字〉는 本作勠이라】爾니라

宋나라가 淮陰을 北兗州로 삼고 蕭道成을 불러서 입조하게 하였는데, 蕭道成과 친한 사람이 조정에서 지금 大臣들을 죽인다고 하여 부름에 나아가지 말 것을 권하자, 蕭道成이 말하기를 “主上이 스스로 太子가 어리다고 해서 다른 형제들을 죽이는 것이니, 타인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지금은 다만 속히 출발해야 하니 지체하여【淹은 담그는 것이니,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다.】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면 장차 의심을 받을 것이요, 또 골육간에 서로 해치니 본래 興旺하고 장구할 수 있는【靈은 善함이다.】 福이 아니다. 재앙과 환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니, 막 卿들과 힘을 합할【戮力은 ≪春秋左傳≫의 ‘戮力一心’ 注에 “힘을 합하는 것이니, 戮字는 본래 勠으로 쓴다.” 하였다.】 뿐이다.” 하였다.

○ 魏顯祖【獻文帝弘이라】聰睿夙成하고 剛毅【剛은 是堅剛不軟不屈이요 毅는 却有奮發作興氣象이라】有斷이나 而好黃老浮屠之學【黃老는 黃帝, 老子也요 浮屠는 釋氏也라 浮屠는 通作浮圖하니 正號〈曰〉佛陀라 佛陀는 與浮屠聲相近하니 皆西方字니 其來에 轉爲二音也라】하야 每引朝士及沙門하야 共談玄理【玄은 微也라】하고 雅薄富貴【雅는 素也라】하야 常有遺世之心이라 乃奉皇帝璽綬하야 傳位於太子하니 生五年矣라 高祖【顯祖長子니 是爲高祖孝文皇帝라】卽位하야 改元延興하다 高祖幼有至性하야 顯祖病癰에 高祖親吮이러니 及受禪에 悲泣不自勝이어늘 顯祖問其故한대 對曰 代親之感이 內切於心이니이다 群臣奏曰 今皇帝幼沖【沖은 本作种이니 稚也라】하니 萬機大政을 猶宜陛下摠之라 謹上尊號曰太上皇帝니이다하니 顯祖從之하다 上皇이 徙居崇光宮하고 國之大事를 咸以聞하다

[新增]尹氏曰 古人兢兢業業하야 一日萬機하니 豈因厭逸樂而好勤勞哉아 所居天位요 所治天職이라 祖宗基業之付託이요 海宇民物之歸仰이니 宵衣旰食이라도 猶懼不勝이어든 烏有尊居人上而厭棄塵勞者哉아 必若淸虛恬淡인댄 毋亦擇賢而用하야 委任責成하야 總其大綱이면 猶或庶幾라 況嗣子方穉어늘 乃欲委而去之는 何耶오 異時에 鴆毒潛行【丙辰年에 太后馮氏가 密行鴆毒하야 殺其主弘하고 復稱制하다 弘은 顯祖名이라】하야 其身不保하니 亦以大權去手하야 莫能致詰故爾니 尙誰咎哉아 雖然이나 魏主屛去聲色하고 超然物外하니 其與奢侈縱欲으로 相去何止什百이리오 然而不享, 【喬는 王喬니 周靈王太子晉也라 好吹笙作鳳鳴이러니 遇浮丘公하야 接之仙去하니라 松은 赤松子也니 神農時에 爲雨師라 常止西王母石室하야 隨風雨上下하니라】之壽하고 反貽覆身之禍하니 然則浮屠黃老之學이 果何益哉아 噫라

○ 魏나라 顯祖顯祖獻文帝拓跋弘이다.】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조숙하며 강하고 굳세어【剛은 성질이 단단하고 굳세어 무르지 않고 굽히지 않는 것이요, 毅는 분발하여 흥기하는 氣象이 있는 것이다.】 결단력이 있었으나 黃帝老子와 佛敎의 학문【黃老는 黃帝老子이고, 浮屠는 釋氏이다. 浮屠는 일반적으로 浮圖로 쓰니, 정식 명칭은 佛陀이다. 佛陀는 浮屠와 음이 서로 비슷하니, 모두 西域의 글자인데 중국에 들어올적에 바뀌어 두 가지 음이 된 것이다.】을 좋아하여 매양 조정의 선비들과 沙門을 引見하여 함께 현묘한 이치【玄은 은미함이다.】를 말하였고 평소【雅는 평소이다.】 富貴에 담박하여 세상사를 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황제의 옥새와 인끈을 받들어 太子拓跋宏에게 傳位하니, 太子가 태어난 지 다섯 해였다. 高祖高祖顯祖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高祖孝文皇帝이다.】가 즉위하여延興으로 개원하였다.

高祖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顯祖가 종기를 앓자 高祖가 직접 종기를 빨았는데, 顯祖에게 禪讓을 받자 슬피 울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였다. 顯祖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어버이를 대신한 슬픈 감회가 안으로 마음속에 간절해서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지금 皇帝가 어리시니,【沖은 본래 种字로 쓰니, 어린 것이다.】 萬機의 큰 정사를 아직도 폐하께서 총괄해야 합니다. 삼가 尊號를 올려 太上皇帝라 하겠습니다.” 하니, 顯祖가 그 말을 따랐다. 上皇(拓跋弘)이 崇光宮으로 옮겨 거처하고 나라의 큰일을 모두 보고받았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옛사람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루에 萬機를 다스린 것은 어찌 편안히 노는 것을 싫어하고 부지런히 일함을 좋아해서이겠는가. 거한 바가 하늘이 준 지위이고, 다스리는 바가 하늘이 준 직책이기 때문이었다. 祖宗의 基業을 부탁받았고 온 나라 안의 백성과 만물들이 歸附하여 우러르니, 정사에 매진하여 날이 채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진 후에 저녁밥을 먹는다 해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찌 존귀하게 사람들 위에 있으면서 塵世의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버린단 말인가. 魏나라 顯祖(獻文帝)가 반드시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편안하고 담박하기를 바랐다면 또한 어진 인재를 가려 등용해서 임무를 맡기고 성공을 책임지워 大綱을 총괄하게 했어야 하니, 그랬더라면 오히려 혹 괜찮았을 것이다. 더구나 嗣子가 한참 어린데, 마침내 맡기고 떠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魏나라 顯祖는 후일 鴆毒으로 은밀히 독살당하여【병진년(476)에 太后馮氏가 남몰래 鴆毒을 써서 魏主拓跋弘을 죽이고 다시 조정에 臨御하여 制를 칭하였다. 顯祖의 이름이다.】 자기 몸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大權이 手中에서 떠나 힐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그러나 魏主는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外物에 초연하였으니, 사치하여 욕심을 부린 것과는 그 차이가 어찌 십 배와 백 배에 그칠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王子喬赤松子는 王子이니 周나라 靈王의 太子 이다. 생황을 불어 봉황새 울음소리를 내기 좋아하였는데, 浮丘公을 만나 그를 따라 신선이 되어 떠났다. 松은 赤松子이니 神農氏 때에 雨師가 되어 항상 西王母의 石室에 머물면서 비바람을 따라 오르내렸다.】의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몸을 망치는 화를 입었으니, 그렇다면 浮屠와 의 학문이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 아! 슬프다.”

[壬子] 宋泰豫元年, 魏延興二年

[壬子] 〈宋泰豫元年이요 魏延興二年이라〉

임자(472) - 宋나라 泰豫 元年이고, 魏나라 延興 2년이다. -

四月에 宋主이 殂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니 時方十歲러라

[史略 史評]史斷曰 明帝頗好文義하야 舊臣才學之士 多見拔擢이라 然이나 猜疑諱忌하야 言語文字에 有禍敗凶喪疑似之語應回避者하야 犯卽加戮하고 而又保字螟蛉하고 勦拉同氣하야 晩年에 以神器之重으로 付諸李氏之子하니 作宋史者는 當於明帝之崩에 直書劉氏之絶이 斯實錄矣로다

4월에 宋主劉彧이 죽고太子가 皇帝에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열 살이었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明帝(劉彧)는 文辭를 자못 좋아하여 옛 신하 중에 재주와 학문이 있는 선비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시기하고 의심하여, 언어와 문자 중에 마땅히 회피해야 할 禍敗와 凶喪 및 이와 유사한 내용이 있어서 이것을 범하면 즉시 주륙을 가하였고, 또 養子를 보호하여 사랑하고 동기간들을 죽여서 만년에 중요한 神器를 李氏의 자식에게 맡겼으니, 宋나라 역사를 저술하는 자는 마땅히 明帝가 죽었을 때에 劉氏가 끊어졌다고 곧바로 쓰는 것이 實錄이라 할 것이다.”

蒼梧王
名昱이니 明帝之子라

蒼梧王이니 明帝之子라 在位五年이요 壽十五라

蒼梧王은 이름이 이니, 明帝의 아들이다. 재위가 5년이고, 壽가 15세이다.

[甲寅] 宋主昱元徽二年, 魏延興四年

[甲寅] 〈宋主元徽二年이요 魏延興四年이라〉

갑인(474) - 宋主劉昱의 元徽 2년이고, 魏나라 延興 4년이다. -

顯祖勤於爲治하야 賞罰이 嚴明하고 愼擇牧守하야 進廉退貪이라 尤重刑罰하야 大刑은 多令覆鞫하야 或囚繫積年하니 群臣이 多以爲言이어늘 上〈皇〉曰 滯獄은 誠非善治나 不猶愈於倉猝而濫乎아 夫人(憂)[幽]苦則思善이라 故로 智者는 以囹圄爲福堂하나니 朕特苦之는 欲其改悔而加矜恕爾로다

[史略 史評]史斷曰 蒼梧王은 異姓之子라 加以童孺之年에 冒僞類於呂秦하고 暴虐이 浮於하며 遊蕩罔節하고 誅戮無常하야 未五年間而遇弑하니 識者謂天厭劉氏라 故로 假異姓하야 以絶其國耳라

魏나라 顯祖는 정사에 부지런하여 賞罰이 엄격하고 분명하였으며 州郡의 지방관들을 신중히 택하여 청렴한 자를 등용하고 탐욕스러운 자를 물리쳤다. 형벌을 더욱 중하게 여겨 큰 형벌(사형 등의 중형)은 대부분 반복하여 국문하도록 명령해서 때로는 죄수를 옥에 가두어 두는 것이 여러 해에 이르기도 하니, 여러 신하들이 이에 대해 말이 많았다. 上皇이 말하기를 “옥사를 지체함은 참으로 좋은 정치가 아니나 그래도 창졸간에 처리하여 형벌을 남용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사람이 갇혀 있는 고통을 겪다 보면 〈지난날의 잘못을 고치고〉 선해질 것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감옥을 福堂으로 삼으니, 朕이 특별히 죄수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죄를 고치고 뉘우치게 하여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蒼梧王(劉昱)은 異姓의 자식이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劉氏 姓을 거짓으로 일컬은 것이 呂秦(秦始皇)과 유사하고 포학함이 보다 더하였으며, 놀고 방탕함이 절도가 없고 주륙함이 일정함이 없어서 5년이 채 못 되어 시해당하였으니, 識者들이 이르기를 ‘하늘이 劉氏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異姓을 빌어서 그 나라를 끊은 것이다.’ 하였다.”

順帝
名準이니 明帝第三子라

順帝【慈和徧服曰順이라】이니 明帝第三子라 在位三年이요 壽十(二)[一]이라

順帝【자애롭고 온화하여 백성을 두루 복종시키는 것을 順이라 한다.】는 이름이 이니, 明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3년이고, 壽가 11세이다.

[丁巳] 宋順帝昇明元年, 魏太和元年

[丁巳] 〈宋順帝昇明元年이요 魏太和元年이라〉

정사(477) - 宋나라 順帝의 昇明 元年이고, 魏나라 太和 元年이다. -

宋主이 忌蕭道成威名하야 欲殺之어늘 道成이 憂懼하야 使楊玉夫【昱之左右라】하고 迎立安成王하야 以太后令으로 追封蒼梧王하다 安成王이 卽位하니 時年이 (十一)[九]라 以道成爲司空, 錄尙書事【錄은 總也라】하다 荊州刺史沈攸之道成專制朝權이라하야 勒兵하고 移檄遠近이어늘 道成이 擊斬之하다

宋主劉昱蕭道成의 위엄과 명망을 시기하여 죽이고자하니, 蕭道成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楊玉夫楊玉夫劉昱의 近臣이다.】를 시켜서 劉昱을 시해하고安成王을 맞아들여즉위하게하였다. 太后의 명령으로 劉昱을 추봉하여蒼梧王으로 삼았다. 安成王劉準이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9세였다. 蕭道成을 司空‧錄尙書事【錄은 총괄함이다.】로 삼았다. 荊州刺史沈攸之蕭道成이 조정의 권력을 전횡한다 하여 군대를 무장하고 遠近에 檄文을 보냈는데, 蕭道成이 공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戊午] 宋昇明二年, 魏太和二年

[戊午] 〈宋昇明二年이요 魏太和二年이라〉

무오(478) - 宋나라 昇明 2년이고, 魏나라 太和 2년이다. -

詔進道成假黃鉞, 大都督中外諸軍事, 太傅, 領揚州牧하다

歷年圖曰 晉氏渡江【元帝南遷이라】以來로 君弱臣彊하야 禍亂相繼하고 至于元興【安帝라】하야 而桓氏【玄이라】簒位라 高祖劉裕라】首唱大義하고 糾合同志하야 起於草萊之間하야 奮臂一呼에 凶黨瓦解하야 遂梟靈寶【桓玄也라[頭註]玄字라】之首하고 奉迎乘輿하야 再興王室하니 厥功已不細矣라 旣而요 治兵誓衆하야 經營四方하야 揚旗東征에 廣固【南燕慕容德이 據廣固하니라】橫潰하고 卷甲南趨에 盧循殄滅하고 偏師西上에 譙縱授首하고 銳卒北驅에 姚泓面縛하야 遂汛掃【汛은 洒也라】伊, 洛하고 修奉園陵하야 震驚旃(氈)裘【旃은 與氈通이라】之心하고 發舒華夏之氣하니 南國之盛이 未有過於斯時者也라 然이나 區宇未一에 躋於天位하고 委棄秦雍하야 以資寇敵하야 使大功不成하니 惜哉라 文帝【義隆이라】勤於爲治하고 子惠庶民하니 足爲承平之良主로되 而不量其力하고 橫挑彊胡하야 使師徒殲於河南하고 代馬飮於江津【代는 北魏也라】이라 及其末路하야는 狐疑不決하야 卒成子禍【子禍는 見殺於太子劭라】하니 豈非文有餘而武不足耶아 夫以孝武【駿이라】之驕淫과 明帝【彧이라】之猜忌로 得保首領하야 以沒於牖下 幸矣니 其何後之有리오

황제가 명하여 蕭道成에게 假黃鉞의 호칭을 가하고 大都督中外諸軍事‧太傅‧領揚州牧으로 올려 주었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晉나라는 揚子江을 건너온元帝가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옮겼다.】 이후로 군주는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재앙과 난리가 서로 이어졌고, 安帝元興【元興은 安帝의 연호이다.】 연간에 이르러서는 桓氏【桓氏는 桓玄이다.】가 지위를 찬탈하였다. 宋나라 高祖(劉裕)高祖劉裕이다.】가 제일 먼저 大義를 제창하고 동지들을 규합해서 초야의 사이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한번 고함치자 흉악한 역적의 무리가 와해되어 마침내 靈寶(桓玄)【[原註]靈寶桓玄이다.[頭註]靈寶桓玄의 字이다.】의 머리를 효시하고 황제를 받들어 맞이해서 王室을 다시 일으켰으니, 그 공이 이미 작지 않다. 이윽고 군대를 다스리고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四方을 경영해서 旗幟를 날리며 동쪽을 정벌하자 廣固(南燕)【南燕의 慕容德이 廣固를 점거하였다.】가 궤멸되었고,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남쪽으로 달려가자 盧循이 멸망하였으며, 偏師를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가자 譙縱이 머리를 바쳤고, 정예병을 이끌고 북쪽을 정벌하자 姚泓이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伊水와 洛水 지역을 깨끗이 소탕하고【汛은 물을 뿌려 씻는 것이다.】 園陵을 수리하고 받들어서 털가죽 옷을 입는 북방 오랑캐들【旃은 氈과 통한다.】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中夏의 기풍을 발양하였으니, 南朝의 강성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區宇(海內)를 통일하기 전에 天子의 지위에 오르고 秦雍 지역을 버려서 적을 도움으로써 큰 功業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석하다.

文帝(劉義隆)文帝劉義隆이다.】는 정사에 부지런하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충분히 태평성세의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제멋대로 강한 오랑캐에게 싸움을 걸어 군사들이 河南에서 죽고 代 지방(北魏)【代는 北魏이다.】 의 말이 江津에서 물을 마시게 만들었다. 말로에 이르러서는 매사에 지나치게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해서 끝내 자식에게 시해당하는 화【子禍(자식의 禍)는 太子 劉劭에게 시해당한 것을 이른다.】를 이루었으니, 아마도 文은 유여하나 武가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孝武帝(劉駿)【孝武帝는 劉駿이다.】의 교만하고 음탕함과 明帝(劉彧)明帝劉彧이다.】의 시기심으로 볼 때 목을 보전하고 창문 아래(正寢)에서 죽은 것만 해도 다행이니, 어찌 후손이 있겠는가.”

右宋은 八主에 合六十年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晉氏渡江以來로 威靈不兢하니 戎狄橫騖하야 虎視中原일새 宋祖首興義兵하고 糾合同志하야 誅桓玄하야 討簒晉之賊하고 興復晉室하니 固自以爲大有功矣라하나 曾未幾時에 躬行簒奪하야 旣廢其主하고 復以兵守之라가 又逾月而弑之하니 視桓玄之禍하면 尤烈焉이라 旣而요 二子俱不得其死하고 傳之六主에 皆不壽終하니 豈無天道哉아 然이나 自宋以後로 姦人이 急於簒國하야 貪心愈銳에 不待再傳而亟取之라 如齊, 梁, 陳, 北朝以後로 諸君이 朝謀夕取者 比比而是也니 又可以驗世變之益衰와 人心之益薄矣니 悲夫인저

이상 宋나라는 여덟 군주에 합하여 60년이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晉나라가 양자강을 건너온 이후로 국가의 위세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제멋대로 횡행하여 中原을 호시탐탐 노렸다. 이에 宋나라 太祖가 맨 먼저 義兵을 일으키고 同志들을 규합하여 桓玄을 죽여서 晉나라를 찬탈한 역적을 토벌하고 晉나라 황실을 부흥시켰으니, 진실로 크게 공이 있다고 자부할 만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직접 찬탈을 행하여 군주를 폐위한 뒤에 다시 군사로 지키게 하였다가 또다시 한 달이 지나자 그를 시해하였으니, 桓玄의 禍에 비하면 더욱더 혹독하다. 이윽고 두 아들이 모두 제명에 죽지 못하였고, 여섯 군주에게 帝位를 전함에 모두 天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어찌 天道가 없겠는가. 그러나 宋나라 이후로는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찬탈하는 것을 급하게 여겨 탐내는 마음이 더욱 치열해져서 두 번 전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취하였다. 예컨대 齊‧梁‧陳과 北朝 이후로는 여러 군주들이 아침에 도모하여 저녁에 취한 자가 즐비하였으니, 또 세상의 변화가 더욱 쇠퇴함과 人心이 더욱 박해짐을 징험할 수 있다.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