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一 周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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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通鑑節要 卷之一

周紀

威烈王

名午요 考王子니 在位二十四年이라

【紀는 理也니 統理衆事하야 繫之於年月日者也라 帝王之書를 稱紀者는 言爲後代綱紀也라 】

威烈王※ 名考王子니 在位二十四年이라

※周自武王으로 至平王히 凡十三世요 自平王으로 至威烈王히 又十八世라 是時에 周室衰微하야 徒擁虛器하야 號爲天下共主라 傳至赧王하야 五世에 爲秦所滅하니라

【紀는 다스림이니, 여러 가지 일을 統理하여 年月日에 다는 것이다. 帝王의 기록을 紀라고 칭하는 것은 後代의 綱紀가 됨을 말한 것이다.】

威烈王※은 이름이 이고 考王의 아들이니, 재위가 24년이다.

※周나라는 武王으로부터 平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13대이고 平王으로부터 威烈王에 이르기까지 또 18대이다. 이때 周나라 王室이 쇠약하여 오직 天子라는 빈 그릇(天子의 자리)만 간직하고 있으면서 이름하여 天下共主(천하가 함께 높이는 宗主, 즉 天子)라 하였다. 전하여 赧王에 이르러서 5대 만에 秦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戊寅]二十三年

[戊寅]二十三年이라

初命晉大夫【晉은 姬姓이니 侯爵이라 周成王이 封母弟叔虞於唐이러니 至于子燮하야 改國號曰晉이라하니 靜(靖)公은 乃叔虞之三十九世也라 】魏斯【本姓姬니 周武王이 封公高於畢하니 於是에 以畢爲姓하다 晉獻公이 封苗裔畢萬於魏하니 從其國〈號〉하야 稱魏氏라 至六世魏舒하야 爲晉正卿하고 三世至斯라 】, 趙籍【本嬴姓이니 周穆王이 封造父以趙城하니 由此爲趙氏라 至二十五世盾하야 始爲晉正卿하고 又六世에 至籍하니라 】, 韓虔【姬姓이니 晉封武子於韓原이러니 至獻子하야 始從封爲姓이라 傳二世韓厥하야 爲晉正卿하고 又三世에 至虔하니라 】하야 爲諸侯【春秋之世에 晉有范氏, 中行氏, 智氏及韓, 魏, 趙하니 是爲六卿이라 後에 三家皆爲韓, 魏, 趙所滅하고 三分晉地而有之러니 至此에 始請命於天子하야 爲諸侯하니라 】하다

23년(무인 B.C.403))

처음으로 晉나라 大夫【晉은 姬姓이니 侯爵이다. 周나라 成王이 同母弟인 叔虞를 唐에 봉하였는데, 子燮에 이르러 국호를 晉이라 고쳤다. 마지막 군주인 靖公은 바로 叔虞의 39세손이다.】魏斯魏斯는 本姓이 이니 周나라 武王公高를 畢에 봉하니, 이에 畢을 姓으로 삼았다. 晉나라 獻公이 그의 후손인 畢萬을 魏에 봉하니, 국호를 따라 魏氏라 칭하였다. 6세손인 魏舒에 이르러 晉나라 正卿이 되었고 3대에 魏斯에 이르렀다.】趙籍趙籍은 본래 嬴姓이니 周나라 穆王造父를 趙城에 봉하니, 이로 말미암아 趙氏가 되었다. 25세손인 趙盾(돈)에 이르러 비로소 晉나라 正卿이 되었고 또 6대에 趙籍에 이르렀다.】韓虔韓虔은 姬姓이니, 晉나라가 武子를 韓原에 봉하였는데, 獻子에 이르러 비로소 封地를 따라 姓으로 삼았다. 2대를 전하여 韓厥에 이르러 晉나라 正卿이 되었고 또 3대에 韓虔에 이르렀다.】을 명하여 諸侯로 삼았다.【春秋時代에 晉나라에 范氏中行氏智氏韓氏魏氏趙氏가 있었으니, 이를 六卿이라 하였다. 그 후 〈范氏中行氏智氏〉 三家가 모두 韓氏魏氏趙氏에게 멸망당하고 韓氏魏氏趙氏가 晉나라 땅을 셋으로 나누어 소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天子에게 명을 청하여 諸侯가 된 것이다.】

溫公曰天子之職은 莫大於禮요 禮莫大於分이요 分莫大於名이라 何謂禮오 紀綱이 是也요 何謂分고 君臣이 是也요 何謂名고 公, 侯, 卿, 大夫 是也라 夫以四海之廣과 兆民之衆으로 受制於一人하야 雖有絶倫之力과 高世之智라도 莫不奔走而服役者는 豈非以禮爲之紀綱哉아 是故로 天子統三公하고 三公率諸侯하고 諸侯制卿大夫하고 卿大夫治士庶人하야 貴以臨賤하고 賤以承貴하야 上之使下가 猶心腹之運手足과 根本之制枝葉하고 下之事上이 猶手足之衛心腹과 枝葉之庇本根이니 然後에 能上下相保하야 而國家治安이라 故曰 天子之職 莫大於禮也라

溫公이 말하였다.

“天子의 직책은 禮보다 더 큰 것이 없고, 禮는 分보다 더 큰 것이 없고, 分은 名稱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무엇을 禮라 이르는가? 紀綱이 이것이요, 무엇을 分이라 이르는가? 君臣이 이것이요, 무엇을 名稱이라 이르는가? 公‧侯‧卿‧大夫가 이것이다. 四海의 넓음과 億兆 百姓의 많음을 가지고 君主 한 사람에게 통제를 받아서 비록 절륜한 힘과 세상의 뛰어난 지혜가 있는 자라 하더라도 군주를 위해 분주히 달려가서 일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어찌 禮를 기강으로 삼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天子는 三公을 통솔하고 三公은 諸侯를 거느리고 諸侯는 卿大夫를 통제하고 卿大夫는 士庶人을 다스려서, 귀한 사람으로서 천한 사람에게 임하고 천한 사람으로서 귀한 사람을 받들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心腹이 手足을 운용하고 根本이 枝葉을 통제하듯이 하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手足이 心腹을 호위하고 枝葉이 本根을 비호하듯이 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보호하여 국가가 다스려지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天子의 직책은 禮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文王序易에 以乾坤爲首어시늘 孔子繫之曰 天尊地卑하니 乾坤定矣요 卑高以陳하니 貴賤位矣라하시니 言君臣之位 猶天地之不可易也라 春秋에 抑諸侯하고 尊周室하야 王人雖微나 序於諸侯之上하니 以是로 見聖人於君臣之際에 未嘗不惓惓也라 非有之暴와 之仁으로 人歸之, 天命之면 君臣之分을 當守節伏死而已矣라 故曰 禮莫大於分也라

文王이 《周易》을 서술할 때에 乾卦와 坤卦를 첫머리로 삼았는데, 孔子가 말씀을 달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乾과 坤이 정해지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진열되니 貴와 賤이 자리가 정해졌다.” 하셨으니, 君臣의 지위는 하늘과 땅이 뒤바뀔 수 없음과 같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春秋》에 諸侯를 억제하고 周나라 왕실을 높여서 天子國의 사람은 비록 미천하나 諸侯의 위에 서열하였으니, 이로써 聖人(孔子)이 君臣의 사이에 있어 일찍이 惓惓하지 않음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의 포악함과 의 仁으로 사람들이 귀의하고 하늘이 命을 내림이 있지 않으면 君臣間의 분수는 마땅히 절개를 지켜 죽을 뿐이다. 그러므로 禮는 分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夫禮는 辨貴賤, 序親疎하고 裁群物, 制庶事하니 非名이면 不著요 非器【名은 爵號也요 器는 車服也라 】면 不形이라 名以命之하고 器以別之니 然後에 上下粲然有倫하니 此禮之大經也라 名器旣亡이면 則禮安得獨存哉아 昔에 仲叔于奚 有功於衛러니 辭邑而請繁(鞶)纓【繁은 馬鬣上飾이요 纓은 馬膺前飾이라 [頭註]繁은 鞶同하니 今馬之大帶요 纓은 削革爲之니 諸侯之服이라 】한대 孔子以爲不如多與之邑이라 惟器與名은 不可以假人이니 君之所司也라 政亡이면 則國家從之라하시고 衛君이 待孔子而爲政한대 孔子欲先正名하사 以爲名不正이면 則民無所措手足이라하시니 夫繁纓은 小物也로되 而孔子惜之하시고 正名은 細務也로되 而孔子先之는 誠以名器旣亂이면 則上下無以相(有)[保]故也라 故曰 分莫大於名也라

禮는 貴賤을 분별하고 親疎를 서열하고 온갖 물건을 재단하고 여러 가지 일을 제재하니, 명칭이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기물이 아니면【名은 爵號이고, 器는 수레와 의복이다.】 나타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명칭으로써 명명하고 기물로써 구별하니, 이렇게 한 뒤에 上下가 찬란하게 차례가 있게 되니, 이것이 禮의 큰 법이다. 명칭과 기물이 이미 없어지면 禮가 어떻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옛날에 仲叔于奚가 衛나라에 큰 공이 있었는데 고을을 사양하고 제후가 사용하는 繁纓을 요청하자, 【[釋義]繁은 말 갈기 위의 장식이고, 纓은 말 가슴 앞의 장식이다. [頭註]繁은 鞶과 같으니 지금 말의 큰 띠이고, 纓은 가죽을 깎아 만드니 諸侯가 사용하는 복식이다.】孔子가 말씀하기를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남에게 빌려줄 수가 없으니, 군주가 맡은 것이니 〈명칭과 기물을 주는 것은 정권을 주는 것과 같다.〉 정사가 망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한다.” 하였으며, 衛나라 군주가 孔子를 기다려 政事를 하려 하자, 孔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시어 말씀하기를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手足을 둘 곳이 없다.” 하였다. 繁纓은 작은 물건인데도 孔子가 그에게 주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은 하찮은 일인데도 孔子가 이것을 우선하신 것은 진실로 명칭과 기물이 이미 혼란하면 上下가 서로 보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分은 명칭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嗚呼라 失德에 周道日衰라 綱紀散壞하야 下陵上替하야 諸侯專征하고 大夫擅政하야 禮之大體 什喪七八矣로되 之祀 猶緜緜相屬者는 蓋以周之子孫이 尙能守其名分故也라 何以言之오 昔에 晉文公이 有大功於王室하고 請隧【隧는 墓道也니 掘地通道하니 王之葬禮也요 諸侯懸棺而下라 】襄王한대 襄王不許曰 王章【章은 表也니 所以表名天子與諸侯異物也라 周德雖衰나 天下未有代周之德者어늘 晉欲擬天子하니 是有二王이라 】也니 未有代德而有二王은 亦叔父之所惡也라 不然이면 叔父有地어늘 而隧又何請焉이리오한대 文公이 於是乎懼而不敢違라 是故로 以周之地則不大於曹滕이요 以周之民則不衆於邾莒나 然歷數百年토록 宗主天下하야 雖以晉, 楚, 齊, 秦之彊으로도 不敢加兵者는 何哉오 徒以名分尙存故也라 至於季氏【魯大夫니 世執國政하야 季平子逐昭公하고 季康子逐哀公이나 然終身北面하야 不敢簒國이라 孟孫, 仲孫, 季孫이 皆桓公之子니 是爲三桓이라 】之於魯와 田常【卽陳恒이니 溫公避國諱하야 改恒曰常이라 陳氏를 稱田氏하니 見下田和註라 】之於齊와 白公【見下二卷이라 白은 楚邑也니 楚僭稱王하야 邑宰皆僭稱公하니 勝其名也라 楚太子建之子也라 】之於楚와 智伯【智伯於晉大夫에 最强하야 攻晉出公하니 出公道死라 智伯欲幷晉而不敢하야 乃奉哀公驕立之하니라 】之於晉에 其勢皆足以逐君而自爲나 然而卒不敢者는 豈其力不足而心不忍哉아 乃畏奸名犯分而天下共誅之也라 今晉大夫 暴蔑其君하야 剖分晉國이어늘 天子旣不能討하고 又寵秩之하야 使列於諸侯하니 是는 區區之名分도 復不能守而幷棄之也니 先王之禮 於斯盡矣라

아, 幽王厲王이 德을 잃음에 周나라 道(정치)가 날로 쇠하였다. 紀綱이 흩어지고 무너져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하여 諸侯가 제멋대로 征伐하고 大夫들이 정사를 擅斷하여 禮의 大體가 10에 7, 8이 없어졌으나 文王武王의 제사가 아직도 면면히 서로 이어진 것은 周나라 자손들이 아직도 그 名稱과 分을 잘 지켰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가? 옛날에 晉나라 文公이 왕실에 큰 공이 있고서 襄王에게 隧를 내려줄 것을 청하자,【隧는 무덤으로 통하는 길이니, 땅을 파 길을 내는 것으로 天子의 장례이며, 諸侯는 棺을 매달아 下棺한다.】襄王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王章(天子의 禮法)이니,【章은 표시하는 것이니, 天子와 諸侯의 물건이 다름을 표시하여 밝히는 것이다. 周나라의 德이 비록 쇠하였으나 천하에 아직 周나라의 德을 대신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은데 晉나라가 天子에게 견주고자 하였으니, 이는 두 王이 있는 것이다.】 德을 대신한 자가 있지 않은데 두 王(天子)이 있는 것은 또한 숙부께서도 싫어하는 바이다. 그렇지 않다면 숙부는 영토를 소유한 제후인데 隧를 또 어찌하여 청하는가?” 하니, 文公이 이에 두려워하여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周나라의 영토를 가지고 말하면 曹나라와 滕나라보다 크지 않았고, 周나라의 백성을 가지고 말하면 邾나라와 莒나라보다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백 년이 지나도록 천하의 宗主가 되어서 비록 晉‧楚‧齊‧秦의 강함으로도 감히 침공을 가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다만 名稱과 分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季氏【季氏는 魯나라 大夫이니, 대대로 國政을 잡아 季平子(季孫意如)가 昭公을 축출하고 季康子(季孫肥)가 哀公을 축출하였으나 종신토록 신하로서 北面하여 감히 魯나라를 찬탈하지 못하였다. 孟孫‧仲孫‧季孫은 모두 桓公의 아들이니, 이를 三桓이라 한다.】魯나라에 있어서와 田常【田常은 바로 陳恒이니, 溫公이 國諱를 피하여 恒을 고쳐 常이라 하였다. 陳氏를 田氏라 칭하였으니, 뒤의 安王 11년(경인 B.C.391) 田和 註에 보인다.】齊나라에 있어서와 白公【뒤의 2권에 보인다. 白은 楚나라 고을이니 楚나라가 참람하여 王이라고 칭하자 邑宰들이 모두 참람하여 公이라고 칭하였으니, 勝은 그 이름인 바, 楚나라 太子 建의 아들이다.】楚나라에 있어서와 智伯智伯이 晉나라 大夫 중에 가장 강하여 晉나라 出公을 공격하니, 出公이 도중에 죽었다. 智伯이 晉나라를 겸병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하지 못하여 마침내 哀公 驕를 받들어 세웠다.】晉나라에 있어서는 그 세력이 모두 충분히 군주를 쫓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끝내 감히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은 어찌 그 힘이 부족하고 마음이 차마 하지 못해서였겠는가. 이것은 바로 名稱을 범하고 分을 범하여 天下가 함께 討伐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지금 晉나라 大夫가 그 군주를 업신여기고 무시하여 晉나라를 쪼개어 차지하였는데, 天子가 이미 토벌하지 못하고 또 은총으로 品階를 높여서 제후에 나열하게 하였으니, 이는 구구한 名稱과 分마저도 다시 지키지 못하여 함께 버린 것이니, 先王의 禮가 이때에 다 없어졌다.

或者는 以爲當是之時하야 周室微弱하고 三晉【魏趙韓三家 共分晉地故로 曰三晉이라 】彊盛하니 雖欲勿許나 其可得乎아하니 是는 大不然이라 夫三晉雖彊이나 苟不顧天下之誅而犯義侵禮면 則不請於天子而自立矣요 不請於天子而自立이면 則爲悖逆之臣이니 天下에 苟有【齊桓公은 小白이요 晉文公은 重耳니 皆霸諸侯也니라 】之君이면 必奉禮義而征之리라 今請於天子而天子許之하니 是는 受天子之命而爲諸侯也니 誰得而討之리오 故로 三晉之列於諸侯는 非三晉之壞禮라 乃天子自壞之也니라

혹자는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周나라 왕실은 微弱하고 三晉(韓‧魏‧趙)은【魏‧趙‧韓 三家가 함께 晉나라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三晉이라 한 것이다.】 强盛하였으니, 〈天子가〉 비록 이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이는 크게 옳지 않다. 三晉이 비록 강성하나 만일 천하의 토벌을 개의치 않고 禮義를 침범하였다면 天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을 것이요, 天子에게 청하지 않고 스스로 섰다면 悖逆의 臣下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만일 齊桓公晉文公【齊나라 桓公은 이름이 小白이고 晉나라 文公은 이름이 重耳이니, 모두 諸侯의 霸者이다.】 같은 군주가 있다면 반드시 禮義를 받들어 정벌할 것이다. 이제 天子에게 청하여 天子가 허락하였으니, 이는 天子의 명령을 받고서 諸侯가 된 것이니, 누가 그들을 토벌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三晉이 諸侯의 반열에 오른 것은 三晉이 禮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바로 天子가 스스로 파괴한 것이다.”

初에 趙簡子使尹鐸爲晉陽한대 請曰 以爲繭絲乎잇가 抑爲保障乎잇가【繭絲者는 指稅賦而言이요 保障者는 指藩籬而言이니 尹鐸之意 不在稅賦而在藩籬하니 此其所以保晉陽也라 】簡子曰 保障哉인저 尹鐸이 損其戶數【謂減損戶數니 則賦稅輕하야 民力舒也라 】하다 簡子無恤曰 晉國에 有難이어든 而無以尹鐸爲少【少는 輕之也니 重之曰多요 輕之曰少라 】하고 無以晉陽爲遠하고 必以爲歸라하더니 及智宣子卒하고 智襄子爲政에 請地於韓康子한대 康子致萬家之邑하니 智伯이 悅하야 又求地於魏桓子한대 桓子復與之萬家之邑하니 智伯이 又求蔡皐狼之地【皐狼은 地名이니 屬趙邑이라 本春秋蔡地라 故曰蔡皐狼이라 】趙襄子【無恤立하니 是爲趙襄子라 】한대 襄子弗與하다 智伯이 怒하야 帥之甲하고 以攻趙氏하니 襄子將出曰 吾何走乎아 從者曰 長子慈湖王氏曰 長子는 周史辛甲所封이니 後爲趙邑하야 屬上黨이라 禮職方氏에 其川漳이라한대 註에 漳出長子라하니라 】近하고 且城厚完하니이다 襄子曰 民罷力以完之하고 又斃死以守之면 其誰與我리오 從者曰 邯鄲慈湖王氏曰 邯鄲은 趙地名이라 今磁州縣이니 在州北五十里하니 洛州肥鄕縣도 亦邯鄲地也라 有邯鄲山이 在東城下라 】之倉庫實하니이다 襄子曰 浚民之膏澤하야 以實之하고 又因而殺之면 其誰與我리오 其晉陽乎인저 先主之所屬也요 尹鐸之所寬也니 民必和矣라하고 乃走晉陽하다

처음에 趙簡子(趙鞅)尹鐸으로 하여금 晉陽을 다스리게하자, 尹鐸이 청하기를 “繭絲를 하오리까, 아니면 保障을 하오리까?”【繭絲는 賦稅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保障은 울타리(보호 장벽)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 尹鐸의 뜻이 賦稅에 있지 않고 울타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晉陽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니, 簡子가 말하기를 “保障을 하라.” 하였으므로 尹鐸이 그 호구수를 줄였다.【損其戶數는 戶口數를 減少함을 이르니, 이렇게 하면 세금이 가벼워져서 백성들의 힘이 펴진다.】簡子가 아들無恤에게 이르기를 “晉나라에 難이 있거든 너는 尹鐸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少는 가볍게(하찮게) 여김이니, 중하게(훌륭하게) 여김을 多라 하고 가볍게 여김을 少라 한다.】晉陽을 멀다고 여기지 말고 반드시 그곳을 의귀처로 삼아라.” 하였다.

智宣子(智申)가 죽고智襄子(智瑤)가 정사를 하게 되자, 智襄子韓康子(韓虎)에게 땅을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니, 康子가 만 가호의 고을을 주었다. 智伯(智襄子)이 기뻐하여 또다시 魏桓子(魏駒)에게 땅을【皐狼은 지명이니, 趙氏의 고을에 속하였다. 본래 春秋時代에 蔡나라 땅이었으므로 蔡나라 皐狼이라 한 것이다.】요구하자, 桓子가 또다시 만 가호의 고을을 주었다. 智伯이 또다시 蔡나라 皐狼의 땅을 趙襄子(無恤)에게【〈趙簡子가 죽고〉 無恤이 즉위하니, 이가 趙襄子이다.】요구하였으나襄子가 주지 않았다.

智伯이 노하여 韓氏魏氏의 군대를 거느리고 趙氏를 공격하니, 襄子가 장차 도성을 나가려 하면서 말하기를 “내 어디로 달아나야 하겠는가?” 하니, 수행하는 자가 말하기를 “長子(지명)가慈湖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長子는 周나라 史官인 辛甲의 封地이니, 뒤에 趙氏의 고을이 되어 上黨에 속하였다. ≪周禮≫〈職方氏〉에 ‘이곳 냇물을 漳이라 한다.’ 하였는데, 註에 ‘漳水는 長子에서 나온다.’ 하였다.”】 가깝고 또 城이 튼튼하고 완전합니다.” 하였다. 襄子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城을 완전히 하고 또 죽음으로써 城을 지키게 하면 그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하니, 수행하는 자가 말하기를 “邯鄲의慈湖王氏가 말하였다. “邯鄲은 趙나라 지명이다. 지금 磁州縣이니, 州의 북쪽 50리 지점에 있는 바, 洛州의 肥鄕縣도 邯鄲의 땅이다. 邯鄲山이 東城의 아래에 있다.”】 창고가 충실합니다.” 하였다. 襄子가 말하기를 “백성의 피와 땀을 짜내어 창고를 충실하게 하고 또 이로 인하여 백성들을 죽게 한다면 그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 아마도 晉陽으로 가야 할 것이다. 先主(簡子)께서 부탁한 바이고 尹鐸이 너그러운 정사를 베푼 곳이니, 백성들이 반드시 화목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晉陽으로 도망하였다.

三家以國人으로 圍而灌之하니 城不浸者三版慈湖王氏曰 浸은 當作沒이라 廣二尺曰版이라 】이요 沈竈産鼃호되 民無叛意러라 趙襄子使張孟談으로 潛出見二子曰 臣聞脣亡則齒寒이라하니 今智伯이 帥而攻하니 亡則爲之次矣리라 二子乃陰與張孟談約하고 爲之期日而遣之러니 襄子夜使人殺守隄之吏하고 而決水灌智伯軍하니 智伯軍이 救水而亂이어늘 翼而擊之하고 襄子將卒犯其前하야 大敗智伯之衆하고 遂殺智伯하고 盡滅智氏之族하다

三家(, , )가 온 나라 사람을 동원하여 晉陽城을 포위하고 물을 대니, 城이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이 세 版뿐이고慈湖王氏가 말하였다. “浸은 마땅히 沒이 되어야 한다. 너비(높이)가 두 자인 것을 版이라 한다.”】 부엌이 오랫동안 물에 잠겨 개구리가 새끼를 쳤으나 백성들은 배반할 뜻이 없었다.

趙襄子張孟談을 시켜 몰래 나가 二子(魏桓子韓康子)를 만나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하였으니, 지금 智伯韓氏魏氏의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趙氏를 공격하니, 趙氏가 망하고 나면 韓氏魏氏가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二子가 마침내 은밀히 張孟談과 약속하고는 날짜를 기약하고 張孟談을 보내었다.

趙襄子가 밤에 사람을 시켜 제방을 지키는 관리를 죽이고 물을 터서智伯의 軍中에 대니, 智伯의 군사들이 물에서 헤어나오느라 혼란하였다. 韓氏魏氏는 좌우에서 공격하고趙襄子는 병졸을 거느리고 그 앞을 막아 智伯의 무리(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마침내 智伯을 죽이고智氏의 종족을 모두 멸하였다.

溫公智伯之亡也는 才勝德也라 夫才與德異어늘 而世俗이 莫之能辨하고 通謂之賢이라하니 此其所以失人也라 夫聰察彊毅之謂才요 正直中和之謂德이니 才者는 德之資也요 德者는 才之帥也라 是故로 才德兼全을 謂之聖人이요 才德兼亡(無)를 謂之愚人이요 德勝才를 謂之君子요 才勝德을 謂之小人이니 凡取人之術은 苟不得聖人君子而與之인댄 與其得小人으론 不若得愚人이라 何則고 君子는 挾才以爲善하고 小人은 挾才以爲惡하나니 挾才以爲善者는 善無不至矣요 挾才以爲惡者는 惡亦無不至矣라 愚者는 雖欲爲不善이나 智不能周하고 力不能勝하니 譬之乳狗搏人하야 人得而制之어니와 小人은 智足以遂其姦하고 勇足以決其暴하니 是는 虎而翼者也니 其爲害 豈不多哉리오 自古昔以來로 國之亂臣과 家之敗子가 才有餘而德不足하야 以至於顚覆者多矣니 豈特智伯哉리오

溫公이 말하였다.

智伯이 망한 것은 재주가 德을 이겼기 때문이다. 재주와 德은 다른데 세속 사람들이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똑같이 어질다 하니, 이것이 사람을 잃는 까닭이다. 聰明하고 彊毅함을 재주라 하고, 正直하고 中和함을 德이라 하니, 재주는 德의 재료요 德은 재주의 우두머리이다. 이 때문에 재주와 德이 겸하여 온전한 것을 聖人이라 하고 재주와 德이 겸하여 없는 것을 愚人이라 하고 德이 재주를 이긴 것을 君子라 하고 재주가 德을 이긴 것을 小人이라 이르니, 무릇 사람을 취하는 방법은 만일 聖人과 君子를 얻어 더불지 못할진댄 小人을 얻기보다는 愚人을 얻는 것이 낫다. 어째서인가? 君子는 재주를 간직하여 善을 하고 小人은 재주를 간직하여 惡을 하니, 재주를 간직하여 善을 하는 자는 善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고 재주를 간직하여 惡을 하는 자는 惡함이 또한 지극하지 않음이 없다. 어리석은 자는 비록 不善을 하고자 하나 지혜가 주밀하지 못하고 힘이 감당해 내지 못하니, 이는 비유하면 어린 강아지가 사람을 치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러나 小人은 지혜가 충분히 그 간악함을 이룰 수 있고 용맹이 충분히 그 포악함을 결행할 수 있으니, 이는 비유하면 범이 날개를 단 것과 같으니 그 해로움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나라의 亂臣과 집안의 敗子가 재주는 넉넉하고 德은 부족하여 顚覆함에 이른 자가 많았으니, 어찌 다만 智伯뿐이겠는가.”

趙襄子智伯之頭하야 以爲飮器【慈湖王氏曰 索隱曰 大宛傳에 匈奴破月氏하고 以其王頭爲飮器라 韋昭云 飮器는 椑榼也라하고 晉灼云 飮器는 虎子屬也라하니라 今按 椑榼은 用以盛酒耳요 非用飮者라 晉以爲溲便器者는 以韓子呂氏春秋에 竝云 襄子漆智伯頭하야 爲溲杯故也라 〈顔〉師古引匈奴傳하야 謂爲飮酒器라하니 貴之也라 且死骨凶穢요 又惡人頭顱가 豈俎豆所宜乎아 晉灼釋爲溲便이라하니 蓋似之라 】러니 智伯之臣豫讓이 欲爲之報仇하야 乃詐爲刑人【周禮大司寇에 凡萬民之有罪過而未麗於法者를 役諸司空이라한대 注에 使治百工之役也라 】하야 挾匕首【匕는 音比라 說苑云 尺八劍也니 其頭類匕라 故名匕首라 】하고 入襄子宮中하야 塗厠이러니 襄子如厠이라가 心動이어늘 索之하야 獲豫讓하니 左右欲殺之어늘 襄子曰 義士也라 吾謹避之耳라하고 乃舍(捨)之하다 豫讓이 又漆身爲癩【慈湖王氏曰 漆有毒하야 人近之則患瘡腫하야 若癩然이라 故讓漆身以變其容이라 癩는 惡疾也라 】하고 呑炭爲啞【慈湖王氏曰 國策曰 豫讓乞食이러니 其妻曰 貌不似吾夫나 何其音似吾夫오한대 讓遂呑炭以變其音이라 啞는 瘖也니 通作瘂라 】하야 行乞於市하니 其妻는 不識也로되 其友識之하고 爲之泣曰 以子之才로 臣事趙孟【趙盾의 字孟故로 後世子孫이 皆曰趙孟이라 】이면 必得近幸하리니 子乃爲所欲爲 顧不易耶아 何乃自苦如此오 豫讓曰 不可하다 旣已委質爲臣【委質은 委其體以事君이니 示必死節於其主也라 】이요 而又求殺之면 是는 二心也라 凡吾所爲者極難耳나 然所以爲此者는 將以愧天下後世之爲人臣하야 懷二心者也로라 襄子出할새 豫讓이 伏於橋下러니 襄子至橋에 馬驚이어늘 索之하야 得豫讓하야 遂殺之하다

賈誼治安策曰 豫讓이 必報襄子하야 五起而不中이라 人問之曰 子嘗事范中行氏러니 智伯滅之로되 子不爲報讐하고 反臣事智伯이라가 今智伯死에 子何爲報之深也오 對曰 中行은 衆人畜我하니 我故衆人事之요 智伯은 國士遇我하니 我故國士報之라 故로 此一豫讓也로되 反君事讐하야 行若狗彘러니 已而요 抗節致忠하야 行出乎烈士하니 皆人主使然也니라 〈然則爲人君者 可不以禮遇其臣下哉아〉

胡氏管見曰 君子爲名譽而爲善이면 則其善이 必不誠이요 人臣爲利祿而效忠이면 則其忠이 必不盡이라 智伯無後矣하야 氣勢無所可倚矣요 富貴無所可求矣요 子孫無所可託矣어늘 而也 不忘國士之遇하고 以死報之하야 至再至三而愈篤하니 則無所爲而爲之者라 故로 曰眞義士也라하니 此非特可爲委質事人之法이라 無所爲而爲善은 雖大學之道라도 不過是也라 〈然이나 襄子知其如此而終殺之하니 何以爲人臣之勸哉아〉

趙襄子가 智伯의 머리에 옻칠하여 飮器를 만들었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史記索隱≫에 ‘〈大宛傳〉에 이르기를 「匈奴가 月氏를 쳐부수고 그 왕의 머리로 飮器를 만들었다.」 하였는데, 韋昭는 이르기를 「飮器는 椑榼(둥근 합)이다.」 하였고, 晉灼은 이르기를 「飮器는 虎子의 等屬이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椑榼은 술을 담는 데 사용하는 기물이고 마시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晉灼이 溲便器(소변기)라고 말한 것은 ≪韓非子≫와 ≪呂氏春秋≫에 모두 襄子가 智伯의 머리에 옻을 칠하여 오줌그릇을 만들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顔師古는 〈匈奴傳〉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술을 마시는 그릇이다.’ 하였으니, 이를 귀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또 죽은 자의 해골은 흉하고 더러우며, 또 악한 사람의 두개골이 어찌 俎豆에 합당한 것이겠는가. 晉灼이 溲便器라고 풀이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이 옳은 듯하다.”】智伯의 신하 豫讓智伯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해서, 마침내 거짓으로 刑人처럼 위장하여【刑人은 ≪周禮≫ 〈大司寇〉에 “모든 萬民으로서 罪過가 있으나 법에 걸리지 않은 자를 司空에서 일을 시킨다.”라고 하였는데, 注에 “百工의 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匕首(단검)를【匕는 音이 비이다. ≪說苑≫에 “1척 8촌의 劍이니, 그 머리 부분이 숟가락[匕]과 유사하므로 이름을 匕首라 했다.” 하였다.】 지니고 襄子의 궁중에 들어가 측간에 흙을 바르고 있었다. 襄子가 측간으로 가다가 마음이 섬뜩하므로 수색하여 豫讓을 잡았다. 左右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니, 襄子가 말하기를 “義士이다. 내가 삼가 그를 피할 뿐이다.” 하고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豫讓이 또다시 몸에 옻을 칠하여 문둥이처럼 꾸미고【慈湖王氏가 말하기를 “옻에는 독이 있어서 사람이 옻을 가까이하면 살이 헐고 종기가 나서 마치 문둥이와 같다. 그러므로 豫讓이 자기 몸에 옻칠을 하여 그 모습을 바꾼 것이다.” 하였다. 癩는 나쁜 병이다.】 달군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서【慈湖王氏가 말하기를 “≪戰國策≫에 이르기를 ‘豫讓이 乞食을 하였는데, 그 아내가 〈보고〉 말하기를 「모습은 우리 남편과 같지 않으나 어쩌면 그리도 音聲이 우리 남편과 같은가?」 하자, 豫讓이 마침내 불에 달군 숯을 삼켜 그 음성을 바꾸었다.’ 했다.” 하였다. 啞는 벙어리이니 瘂와 통한다.】 시장을 다니며 구걸하니, 그의 아내는 몰라보았으나 그의 친구가 알아보고는 그를 위하여 울며 말하기를 “자네의 높은 재주를 가지고 신하가 되어 趙孟을 섬기면【趙盾의 字가 孟이었기 때문에 그 후 후세의 자손들이 모두 趙孟이라 하였다.】 반드시 가까이하고 총애함을 얻을 것이니, 자네가 그때에 비로소 하고 싶은 바(복수)를 하는 것이 도리어 쉽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마침내 스스로 고생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豫讓이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미 몸을 바쳐 신하가 되고【委質은 그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반드시 군주를 위하여 忠節을 다해 죽을 것임을 보이는 것이다.】 또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무릇 내가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나 이것을 하는 까닭은 장차 天下와 後世에 남의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襄子가 외출할 때에 豫讓이 다리 아래에 엎드려 있었는데, 襄子가 다리에 이르자 말이 놀라므로 수색하여 豫讓을 잡아서 마침내 죽였다.

賈誼의 治安策에 말하였다.

豫讓이 반드시 襄子에게 보복하려 하여 다섯 번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그대가 일찍이 范氏中行氏를 섬겼었는데 智伯이 그를 멸망시켰으나 그대는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신하가 되어 智伯을 섬기다가 지금 智伯이 죽자 그대가 智伯을 위하여 원수를 갚기를 이처럼 심하게 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豫讓이 대답하기를 ‘中行氏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으므로 나도 그를 보통 사람으로 섬긴 것이요, 智伯은 나를 國士로 대우하였으므로 나도 國士로서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똑같은 豫讓인데 예전에는 군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겨서 행실이 개 돼지와 같다가 얼마 후에는 절개를 높이고 충성을 바쳐서 烈士의 행실을 하였으니, 이는 모두 人主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人君된 자가 禮로써 신하를 대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胡氏(胡寅)의 《讀史管見》에 말하였다.

“君子가 명예를 위하여 善을 행하면 그 善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하고, 人臣이 이익과 녹봉을 위하여 충성을 바치면 그 충성이 반드시 극진하지 못하다. 智伯이 후손이 없어서 의지할 만한 기세가 없고, 구할 만한 부귀가 없고, 부탁할 만한 후손이 없었는데, 豫讓이 國士로 대우해 준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을 바쳐 원수를 갚으려 하여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러 더욱 돈독히 하였으니, 이는 위한 바가 없이 한 자이다. 그러므로 〈趙襄子가〉 ‘진실로 義士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다만 몸을 바쳐 남(군주)을 섬기는 法이 될 뿐만 아니라, 위한 바가 없이 善을 행함은 비록 大學의 道라 하더라도 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趙襄子가 이와 같음을 알면서도 끝내 豫讓을 죽였으니, 어떻게 人臣을 권면할 수 있겠는가.”

魏斯者는 桓子之孫也니 是爲文侯文侯卜子夏, 田子方으로 爲師하고 每過段干木【老子之子宗이 爲魏將하야 封於段干하니 蓋因邑爲姓이라 】之廬에 必式【慈湖王氏曰 記曲禮篇에 尸必式이라한대 註에 小俛以禮之라 韻會註에 乘而俛首致恭曰式이니 義取憑軾也라 軾은 車前橫板이니 有所敬이면 則俯而憑之라 孔曰 古者에 車箱長四尺四寸이니 而三分之하야 前一後二라 橫一木하야 下去車牀三尺三寸을 謂之軾이요 軾上二尺二寸에 橫一木을 謂之較이라 立乘은 平常則憑較하나니 若應爲敬이면 則落手隱下軾而頭得俯俛이라 】하니 四方賢士多歸之【古帝王이 皆有師러니 戰國以來로 人君有師者 惟文侯라 】러라 文侯與群臣으로 飮酒樂而天雨어늘 命駕將適野한대 左右曰 今日에 飮酒樂하고 天又雨하니 君將安之잇고 文侯曰 吾與虞人【守苑囿之吏也라 虞는 度也니 度知山林之大小及其所生也라 】期獵하니 雖樂이나 豈可無一會期【昔與之期하니 今往會之요 罷之는 往告之以雨而罷獵이라 】哉아하고 乃往하야 身自罷之하다

魏斯桓子의 손자이니, 이가 文侯이다. 文侯卜子夏田子方을 스승으로 삼고 매번 段干木의【老子의 아들 宗이 魏나라 장수가 되어서 段干邑에 봉해지니, 고을의 이름을 따라서 段干을 姓으로 삼았다.】 집을 지날 때에 반드시 경례하니,【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禮記≫ 〈曲禮篇〉에 ‘尸童에게 반드시 경례한다.’ 하였는데, 註에 ‘조금 고개를 숙여서 禮한다.’ 하였다. ≪韻會≫의 註에 ‘수레를 타고서 고개를 숙여 공경의 뜻을 나타냄을 式이라 하니, 뜻은 軾에 기댐을 취한 것이다. 軾은 수레 앞에 가로댄 판자이니, 공경할 대상이 있으면 여기에 몸을 구부려 의지한다.’ 하였다. 孔氏(孔穎達)는 말하기를 ‘옛날에 수레의 상자는 길이가 4척 4촌이니, 이것을 3등분 하여 앞이 1할이고 뒤가 2할이다. 한 나무를 가로대어 아래로 수레의 牀과 3척 3촌 떨어져 있는 것을 軾이라 이르고, 軾 위의 2척 2촌이 되는 곳에 한 나무를 가로댄 것을 較이라 이른다. 서서 수레를 탈 경우 평상시에는 較에 기대는데, 만약 마땅히 공경해야 할 대상이면 손을 내려 軾 밑에 숨겨 머리가 숙여지게 한다.’ 하였다.”】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였다.【옛날 帝王들은 모두 스승이 있었는데, 戰國時代 이래로 임금 중에 스승을 둔 자는 오직 文侯뿐이다.】

文侯가 여러 신하들과 술을 마셔 즐기는데 하늘에서 비가 왔다. 文侯가 수레에 멍에를 매도록 명하여 장차 들로 가려 하자, 左右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오늘 술을 마셔 즐겁고 또 비가 오는데, 군주께서는 장차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하였다. 文侯는 말하기를 “내 虞人과【虞人은 苑囿를 지키는 관리이다. 虞는 헤아림이니, 山林의 크고 작음과 여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헤아려 아는 것이다.】 사냥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비록 즐거우나 어찌 한 번 모이기로 한 약속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會期는 옛날에 그(虞人)와 더불어 기약하였으니 이제 가서 만나는 것이요, 罷之는 비 때문에 사냥을 파함을 가서 고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가서 몸소 직접 약속을 파하였다.

文侯使樂羊으로 伐中山【狄都也라 索隱曰 今中山府是也라 】克之하야 以封其子하고 文侯問於群臣曰 我何如主오 皆曰 仁君이니이다 任座曰 君得中山하사 不以封君之弟하시고 而以封君之子하시니 何謂仁君이니잇고 文侯怒하니 任座趨出이어늘 次問翟璜【翟은 按姓苑에 翟은 本音狄이니 後人姓 乃音澤이라 璜은 音黃이라 】한대 對曰 仁君也니이다 文侯曰 何以知之오 對曰 君仁則臣直이라하니 嚮者에 任座之言이 直이라 是以知之하노이다 文侯悅하야 使翟璜으로 召任座而反之하고 親下堂迎之하야 以爲上客하니라

文侯樂羊으로 하여금 中山을 정벌하게 하여【中山은 狄의 都邑이다. ≪史記索隱≫에 “지금 中山府가 이곳이다.” 하였다.】 이기고서 그 아들을 봉하였다. 文侯가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나는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모두들 대답하기를 “어진 군주입니다.” 하였다. 任座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中山을 얻어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으시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셨으니, 어찌 어진 군주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文侯가 노여워하니, 任座가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文侯가 다음으로 翟璜에게【翟은 살펴보건대 ≪姓苑≫에 “翟은 本音이 적이니, 후세 사람들이 姓으로 쓸 때에는 마침내 音이 택(책)이다.” 하였다. 璜은 音이 황이다.】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진 군주입니다.” 하였다. 文侯가 “무엇으로 아는가?”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군주가 어질면 신하가 곧은 말을 한다 하니, 조금 전에 任座의 말이 곧았습니다. 이 때문에 압니다.” 하였다. 文侯가 기뻐하여 翟璜으로 하여금 任座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직접 堂을 내려가 그를 맞이해서 上客으로 삼았다.

子擊이 出할새 遭田子方於道하야 下車伏謁호되 子方이 不爲禮어늘 子擊이 怒하야 謂子方曰 富貴者驕人乎아 貧賤者驕人乎아 子方曰 亦貧賤者驕人耳니 富貴者安敢驕人이리오 國君而驕人則失其國하고 大夫而驕人則失其家하나니 失其國者는 未聞有以國待之者也요 失其家者는 未聞有以家待之者也로라 夫士는 貧賤者라 言不用, 行不合이면 則納履而去耳니 安往而不得貧賤哉리오 子擊이 乃謝之하다

[新增]東萊曰 夫富貴는 固不可驕人이어니와 貧賤亦豈驕人得이리오 蓋驕之一字는 雖以周公之聖으로도 尙不敢加之於身이라 如曰使驕且吝이면 其餘는 不足觀也已라하니 若子方이 豈可驕人乎아 子擊은 欲以勢驕人하고 子方은 却欲以學驕人하니 二者病則一般이라 田子方子夏門人이로되 歷於戰國하여 不免爲風聲氣習之所移라 故로 有驕之失이라 其後에 子方之學이 流爲莊周하여 傲物輕世하니 皆從驕之一字失이니라

子擊이 외출하였을 때에 田子方을 길에서 만나 수레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배알하였으나 田子方이 禮를 하지 않자, 子擊이 노하여 田子方에게 이르기를 “부귀한 자가 남에게 교만히 하는가, 빈천한 자가 남에게 교만히 하는가?” 하였다. 田子方이 대답하기를 “역시 빈천한 자가 남에게 교만히 하는 것이니, 부귀한 자가 어찌 감히 남에게 교만히 하겠는가? 國君으로서 남에게 교만히 하면 그 나라를 잃고 大夫로서 남에게 교만히 하면 그 집을 잃으니, 그 나라를 잃은 자를 國君으로 대우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그 집을 잃은 자를 家를 소유한 大夫로 대우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선비는 빈천한 자이다. 말이 쓰여지지 않고 행실이 합하지 않으면 신을 신고 떠나갈 뿐이니, 어디를 간들 빈천하지 않겠는가.” 하니, 子擊이 마침내 사과하였다.

[新增]東萊(呂祖謙)가 말하였다.

“부귀한 자는 진실로 남에게 교만할 수 없지만 빈천한 자가 또한 어찌 남에게 교만할 수 있겠는가. 驕라는 한 글자는 비록 周公 같은 聖人도 오히려 자기 몸에 가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만일 교만하고 또 인색하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田子方과 같은 자가 어찌 남에게 교만할 수 있겠는가. 子擊은 권세로써 남에게 교만하고자 하였고, 田子方은 학문으로써 남에게 교만하고자 하였으니, 두 사람의 병통은 똑같은 것이다. 田子方子夏의 문인이었으나 戰國時代를 거쳐 風聲과 氣習에 변화됨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교만한 잘못이 있는 것이다. 그 뒤에 田子方의 학문이 흘러 莊周가 되어서 남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시하였으니, 이는 모두 驕 한 글자로부터 잘못된 것이다.”

文侯李克曰 先生이 嘗有言曰 家貧에 思賢妻하고 國亂에 思良相이라하니 今所置 非이니 二子何如오 對曰 居視其所親하며 富視其所與하며 達視其所擧하며 窮視其所不爲하며 貧視其所不取니 五者에 足以定之矣니이다 文侯曰 先生은 就舍하라 吾之相을 定矣로라 李克이 出한대 翟璜曰 君召卜相하시니 果誰爲之오 魏成이니라 이 忿然曰 西河【春秋晉地니 今太原府汾州是라 】吳起도 臣所進也요 君이 內以鄴爲憂【如河伯娶婦之類라 史記에 西門豹爲鄴令하니 三老廷掾이 歲斂民錢하야 爲河伯娶婦할새 巫行視小家女好者하면 聘取를 如嫁女하고 床席에 令女居上하야 浮之河中이라 豹呼河伯婦曰 是女不好라 煩大巫嫗하노니 爲入報河伯하고 更求好女하라하고 使吏卒抱巫嫗하야 投之河中하고 復以弟子投河中하야 凡三投에 豹曰 是皆不能白하니 煩三老入白之하라하고 復投三老하다 良久에 豹曰 欲使廷掾與豪長者로 趣(促)之하노라한대 皆叩頭流血이라 吏民大驚하니 自此로 不敢復言하니라 】어시늘 臣進西門豹하고 君이 欲伐中山이어시늘 臣進樂羊하고 中山已拔에 無使守之어늘 臣進先生하고 君之子無傅어늘 臣進屈侯鮒【傅는 相也라 屈은 姓也요 名은 鮒라 】하니 以耳目之所睹記로 臣何負於魏成이리오 魏成은 食祿千鍾【量名이라 釜十爲鍾이니 六斛四斗也라 十斗爲斛이요 釜는 六斗四升이라 】에 什에 九는 在外하고 什에 一은 在內라 是以로 東得卜子夏, 田子方, 段干木하니 此三人者는 君皆師之하시고 子所進五人은 君皆臣之하시니 子惡得與魏成比也리오 이 再拜曰 은 鄙人也라 失對하니 願卒爲弟子하노이다

文侯李克에게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할 때에는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혼란할 때에는 어진 정승을 생각한다.’ 하였으니, 지금 정승으로 세울 사람이 魏成이 아니면 翟璜이니, 두 사람이 어떠한가?” 하였다. 李克이 대답하기를 “거처할 때에는 그 친한 바를 살펴보며 부유할 때에는 그 주는 바를 살펴보며, 영달했을 때에는 그 천거한 바를 살펴보며 곤궁할 때에는 그 하지 않는 바를 살펴보며, 가난할 때에는 그 취하지 않는 바를 살펴보아야 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文侯가 말하기를 “선생은 館舍로 가라. 나의 정승을 결정했다.” 하였다.

李克이 나오자, 翟璜이 묻기를 “임금께서 당신을 불러 정승을 점치셨으니, 과연 누가 됐습니까?” 하자, 李克이 “魏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翟璜이 분해 하며 말하기를 “西河守【西河는 春秋時代 晉나라 땅이니, 지금의 太原府 汾州가 이곳이다.】吳起도 신이 천거한 자이고, 임금께서 내심 鄴縣을 걱정하시므로【鄴縣을 걱정하였다는 것은 河伯(黃河의 神)이 장가든 것과 같은 따위이다. ≪史記≫에 西門豹가 鄴縣의 令이 되었는데, 三老와 廷掾(아전)이 해마다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어 河伯을 위해 여자를 시집보내었다. 무당이 민가를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딸을 보면 맞이하여 데려가기를 딸을 시집보낼 때와 똑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여자를 침상 위에 앉히고 이것을 黃河 가운데로 띄워 보내었다. 西門豹가 河伯의 신부를 불러 말하기를 “이 여자는 아름답지 않으니, 수고스럽지만 무당할미가 물속에 들어가 河伯에게 보고하고 다시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라.” 하고 관리와 병졸들로 하여금 무당할미를 안아다가 黃河 속에 던지게 했다. 그리고 그 무당의 제자를 다시 黃河에 던졌는데 모두 세 번이나 이렇게 하였다. 서문표가 말하기를 “이들이 모두 河伯에게 제대로 아뢰지 못하니, 수고스럽지만 三老가 물 속에 들어가 아뢰어라.” 하고 다시 三老를 黃河 속에 던졌다. 얼마 후 西門豹가 “廷掾과 土豪와 長者에게 시켜 재촉하고 싶다.” 하니, 이들이 모두 머리를 찧으며 사죄해서 이마에 피가 흘렀다. 관리와 백성들이 크게 놀라니, 이 뒤로는 다시 감히 말하지 못하여 이 폐해가 없어지게 되었다.】 신이 西門豹를 천거하였고, 임금께서 中山을 정벌하려고 하시므로 신이 樂羊을 천거하였고, 中山이 함락되자 지키게 할 사람이 없으므로 신이 先生을 천거하였고, 임금의 아들이 師傅가 없으므로 신이 屈侯 鮒를 천거하였으니,【傅는 相(도와주는 사람)이다. 屈은 姓이고 이름은 鮒이다.】 귀와 눈에 보고 기억하는 바로써 볼 때에 신이 어찌 魏成에게 뒤지겠습니까.” 하였다. 李克이 말하기를 “魏成은 千鍾의 녹봉 중에【千鍾은 量의 이름이다. 10釜를 鍾이라 하니 6斛 4斗이다. 10斗를 斛이라 하고, 釜는 6斗 4升이다.】 10분의 9는 〈곡식을 풀어 남에게 주어〉 밖에 있고 10분의 1은 〈자신을 위해서 써서〉 안에 있었다. 이 때문에 동쪽으로 卜子夏田子方段干木을 얻었는데 이 세 사람은 군주가 모두 스승으로 섬기시고, 그대가 천거한 다섯 사람은 군주가 모두 신하로 삼으셨으니, 그대가 어떻게 魏成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翟璜이 再拜하고 말하기를 “저는 비루한 사람입니다. 대답할 바를 잃었으니, 마침내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吳起者는 衛人【衛는 姬姓이니 侯爵이라 武王同母弟〈封〉이 爲成王大司寇하야 食采於康이라 故로 成王이 封康叔於衛러니 傳四十二世하야 爲秦所廢하니라 】이라 仕於魯러니 齊人이 伐魯어늘 魯人이 欲以爲將호되 取(娶)齊女하여 爲妻라 魯人이 疑之하니 殺妻以求將하야 大破齊師하다 或이 譖之魯侯始事曾參이라가 母死에 不奔喪이어늘 曾參이 絶之러니 今又殺妻以求爲君將하니 는 殘忍薄行人也라 且以魯國區區而有勝敵之名이면 則諸侯圖魯矣리이다한대 恐得罪하야 聞魏文侯賢하고 乃往歸之하다 文侯問諸李克한대 는 貪而好色【慈湖王氏曰 索隱曰 李克言吳起貪이라하나 下文云 魏文侯知起廉平이라하고 又公叔之僕이 稱起節廉하니 豈前貪而後廉耶아 起家本千金이러니 破産求仕하니 今言貪은 非實貪也요 貪榮名耳니 母死不歸하고 殺妻求將이 是也라 】이나 然이나 用兵은 司馬穰苴【田完之裔니 先爲齊大司馬라 故稱司馬穰苴라 所著書를 名司馬法이라 】라도 弗能過也리이다 於是에 文侯以爲將하야 擊秦拔五城하다 之爲將에 與士卒最下者로 同衣食하며 臥不設席하고 行不騎乘하며 親裹贏糧하야 與士卒로 分勞苦러라 卒에 有病疽者어늘 爲吮之러니 卒母聞而哭之한대 人曰 子卒也어늘 而將軍이 自吮其疽하니 何哭爲오 母曰 往年에 吳公이 吮其父하니 其父戰不旋踵하야 遂死於敵이러니 吳公이 今又吮其子하니 妾은 不知其死所矣라 是以哭之하노라

[新增]東萊曰 殺妻求將은 未必是貪官爵이니 後便求爲將은 只緣學得兵法精이라 便被他使作하야 求逞其技能이라 以此知人有知能이 固善이나 除是有技能後에 能制得他住【言能制技能하야 不爲所動이라 】하야 而不爲技能所使者尤善이라 故로 吳起終爲魯人所譖하니라 人言樂羊伐中山할새 對使者하야 食其子【魏文侯遣樂羊으로 攻中山하니 時羊子在中山이라 中山君이 烹其子而遺之羹한대 羊啜之하고 攻拔中山하니라 】한대 文侯賞其功而疑其心하고 易牙齊威公할새 公盡嘗天下異味로되 獨未嘗人이라 問易牙한대 易牙殺其子以進이라하니라 樂羊之食其子와 易牙之殺其子와 吳起之殺其妻가 皆是於其所厚者薄이라 凡人於所厚者厚之면 則人亦厚之하고 於所厚者薄之면 則人亦薄之하나니 是其初本欲求君之喜나 終反爲君之疑라 吳起爲人이 貪財好色이러니 及爲將하야는 則與士卒同甘苦하야 臥不設席하고 行不騎乘하니 是前則貪, 後則廉也라 非是後能廉也라 前之貪은 是貪財요 後之與士卒同甘苦는 乃是貪功名之心使之니라 是移前之貪於功名上이니 其貪則一이라 今漁人이 以餌致魚하나니 非是肯捨餌也요 意在得魚也니 畢竟是貪心所使니라

吳起는 衛나라 사람이다.【衛나라는 姬姓이니 侯爵이다. 武王의 同母弟인 成王의 大司寇가 되어서 康을 采邑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成王康叔을 衛나라에 봉하였는데, 42대를 전하여 秦나라에게 폐출당하였다.】魯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齊나라 사람이 魯나라를 정벌하자, 魯나라 사람이 吳起를 장수로 삼으려하였으나吳起가 齊나라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으므로魯나라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였다. 이에 吳起는 아내를 죽이고 장수가 되기를요구하여齊나라 군대를 大破하였다.

或者가 吳起를 魯나라 군주에게 참소하기를 “吳起가 처음 曾參을 섬겼는데,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喪에 달려가지 않으므로 曾參이 그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아내를 죽여서 임금의 장수가 되기를 요구하였으니, 吳起는 잔인하고 행실이 각박한 사람입니다. 또 구구한 魯나라로서 적을 이겼다는 명성(소문)이 있게 되면 諸侯들이 魯나라를 치려고 도모할 것입니다.” 하니, 吳起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魏나라 文侯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가서 귀의하였다.

文侯李克에게 묻자, 李克이 대답하기를 “吳起는 명예를 탐하고 女色을 좋아하나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史記索隱≫에 ‘李克이 「吳起는 탐하였다.」 말하였으나 아랫글에 이르기를 「魏나라 文侯吳起의 청렴하고 공평함을 알았다.」 하였고, 또 公叔의 마부가 吳起의 절약하고 청렴함을 칭찬하였으니, 어찌 먼저는 탐욕스럽고 나중에는 청렴했겠는가. 吳起의 집이 본래 千金을 소유한 부잣집이었는데 파산하고 벼슬을 구하였으니, 지금 탐하였다고 말한 것은 실로 재물을 탐한 것이 아니고 영화와 명예를 탐했을 뿐이니, 어미가 죽었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아내를 죽여 장수가 되기를 요구함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用兵術은 司馬穰苴司馬穰苴田完의 후손이니, 먼저(예전에) 齊나라 大司馬가 되었으므로 司馬穰苴라 칭한 것이다. 그가 지은 책을 ≪司馬法≫이라 이름한다.】 그보다 낫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文侯吳起를 장수로 삼아서秦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城을 함락하였다.

吳起는 장수가 되었을 적에 士卒 중에 가장 낮은 자와 衣食을 함께 하며, 누울 때에는 자리를 펴지 않고 다닐 때에는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지 않았으며, 몸소 양식을 싸서 짊어져 士卒과 노고를 나누었다. 병졸 중에 등창을 앓는 자가 있자 吳起가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그 병졸의 어미가 이 말을 듣고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의 아들은 병졸인데 장군이 직접 등창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어찌하여 통곡하는가?” 하자, 어미가 대답하기를 “지난해에 吳公이 그 아비의 종기를 빨아주었는데, 그 아비가 〈은혜에 감격하여〉 용감히 싸우고 후퇴하지 않아서 마침내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吳公이 이제 또다시 그 자식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첩은 제 자식이 싸우다가 어느 곳에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통곡합니다.” 하였다.

[新增]東萊가 말하였다.

“아내를 죽여 장수가 되기를 구한 것은 吳起가 반드시 관작을 탐해서가 아닐 것이니, 뒤에 장수가 되기를 구한 것은 다만 吳起가 병법을 정밀하게 배웠기 때문이니, 그가 병법에 부림을 당하여 그 기능을 발휘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써 사람이 지능이 있음은 진실로 좋으나 기능을 소유한 뒤에는【기능을 제재하여 동요당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을 제재하여 기능에 동요당하지 않는 자가 더욱 훌륭함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吳起가 끝내 魯나라 사람들에게 참소를 당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樂羊이 中山을 정벌할 적에 使者를 대하여 자기 자식을 먹자,【魏나라 文侯樂羊을 보내어 中山을 공격하게 하니, 이때 樂羊의 아들이 中山에 있었다. 中山의 군주가 樂羊의 아들을 삶아 죽여 국을 보내주자, 樂羊이 이것을 먹고 中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文侯는 그 功을 상주면서도 그 마음을 의심하였고, 易牙가 齊나라 威公(桓公)을 섬길 적에 威公이 천하의 별미를 다 맛보았으나 오직 사람고기만은 맛보지 못하였다. 이에 威公易牙에게 묻자 易牙가 자기 자식을 죽여서 올렸다.’라고 하였다. 樂羊이 자기 자식을 먹은 것과 易牙가 자기 자식을 죽인 것과 吳起가 자기 아내를 죽인 것은 모두 후하게 대해야 할 바에게 박하게 대한 것이다. 무릇 사람이 후하게 대해야 할 바에게 후하게 대하면 남들도 그에게 후하게 하고, 후하게 대해야 할 바에게 박하게 대하면 남들도 그에게 박하게 대하니, 처음에는 본래 군주가 기뻐하기를 바라고자 해서였으나, 끝내는 도리어 군주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吳起는 사람됨이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였는데, 장수가 됨에 이르러서는 士卒들과 고락을 함께 하여 누울 때에 자리를 펴지 않았고 다닐 때에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지 않았으니, 이는 吳起가 전에는 탐욕스럽고 뒤에는 청렴한 것이다. 그러나 吳起가 뒤에 능히 청렴해진 것이 아니요, 전에 탐욕스러웠던 것은 재물을 탐한 것이었고, 뒤에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한 것은 바로 功名을 탐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이는 예전의 탐욕스러움을 功名 위에 옮겨 놓은 것이니, 탐욕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고기 잡는 사람이 낚싯밥으로 고기를 잡으니, 이는 낚싯밥을 주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요 뜻이 고기를 잡으려는 데에 있는 것이니, 필경 이는 탐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己卯]二十四年

[己卯]二十四年이라

王崩하고 子安王驕立하다

24년(기묘 B.C.402))

왕이 죽고아들安王가 즉위하였다.

安王

安王 名驕요 威烈王子니 在位二十六年이라

安王威烈王子니 在位二十六年이라

安王은 이름이 이고 威烈王의 아들이니, 재위가 26년이다.

[庚寅]十一年

[庚寅]十一年이라

田和陳厲公佗之子之九世田常之曾孫也라 이 避禍奔齊한대 齊以陳爲田氏하고 爲齊世卿이러니 嘗弑簡公하다 簒齊爲諸侯하니 是爲威王이라 陳은 嬀姓이요 侯爵이니 帝舜之後라 武王이 封閼父之子滿於陳이러니 三十四世에 爲楚所滅하니라 】齊康公於海上하고 使食一城하야 奉先祀하다

11년(경인 B.C.391)

田和田和는 陳나라 厲公의 아들 의 9세손인 田常(陳恒)의 曾孫이다. 이 禍를 피하여 齊나라로 달아나니, 齊나라에서 陳氏를 田氏로 삼고 齊나라의 世卿을 삼았는데, 그는 일찍이 簡公을 시해하였다. 曾孫인 가 齊나라를 찬탈하여 諸侯가 되니, 이가 威王이다. 陳나라는 嬀姓이고 侯爵이니, 帝舜의 후손이다. 武王閼父의 아들 滿을 陳나라에 봉하였는데, 34世 만에 楚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가 齊나라 康公을 海上으로 옮기고 한 城을 食邑으로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하였다.

[壬辰]十三年

[壬辰]十三年이라

田和求爲諸侯어늘 魏文侯爲之請於王及諸侯한대 王許之하다

13년(임진 B.C.389))

齊나라 田和가 제후가 되기를구하자魏나라 文侯가 그를 위하여 왕과 제후들에게 청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甲午]十五年

[甲午]十五年이라

魏文侯薨하고 太子이 立하니 是爲武侯武侯浮西河【括地志云 河在冀州西라 故名西河라 】而下할새 中流에 顧謂吳起曰 美哉라 山河之固여 此는 魏國之寶也로다 對曰 在德이요 不在險이니이다 昔에 三苗氏書蔡氏傳曰 三苗國은 在江南荊揚之間하니 恃險爲亂者也라 今湖南溪洞에 時猶竊發하고 俘而詢之하면 多爲猫姓이라하니 豈其遺種歟아 正義曰 今潭州 古三苗國이라 [頭註]黃帝時에 夏官縉雲氏之後也라 】는 左洞庭【洞庭湖는 在岳州巴陵西하니 西呑赤沙하고 南連靑草하야 橫亘七八百里라 正義曰 以天子在北이라 故洞庭在西爲左요 彭蠡在東爲右니 彭蠡湖在潯陽이라 】이요 右彭蠡【東南五十二里라 禹貢에 彭蠡旣瀦라한대 蔡氏傳曰 地志에 在豫章彭澤縣東하니 合江西江東諸水하야 洿[跨]豫章, 饒州, 南康之地하니 所謂鄱陽湖者是也라 】로되 德義不修어늘 滅之하시고 夏桀之居【帝王世紀에 伯하니 今河南陽翟縣이 是라 汲冢古文에 太康居斟鄩이러니 羿亦居之하고 又居焉이라 括地志云 鄩城은 在洛州鞏縣이라 】는 左河濟【禹貢에 濟河에 惟兗州라한대 蔡氏傳曰 兗州之域은 東南據濟하고 西北距河하니 河濟之間이 相去不遠이라 】요 右泰華【泰는 通作太라 禹貢에 至于太華라한대 蔡氏傳曰 地志에 太華山은 在弘農華陰縣하니 今華州華陰南二十里也라 】요 伊闕【括地志云 闕塞山은 一名伊闕이요 而俗名龍門이라 高誘曰 伊闕은 在洛陽西南六十里하니 所辟也라 酈道元註에 水經云疏龍門以通水라하니 兩山相對하야 望之若闕然이요 伊水歷其間이라 故名伊闕이라 】이 在其南하고 羊腸【羊腸山은 在太原西北九十里라 正義曰 羊腸阪道는 在太行山上하니 南口屬懷州하고 北口屬潞州라 括地志云 羊腸阪은 在懷州河內縣北二十五里라 】이 在其北호되 修政不仁이어늘 이 放之하시고 商紂之國慈湖王氏曰 〈鄭玄曰〉 商國은 在泰華之陽이라 〈皇甫謐曰〉 今上洛이 商也이라 〈括地志云〉 商州東八十里商洛縣이 古商國也라 】은 左孟門慈湖王氏曰 〈賈逵曰〉 孟門, 太行은 皆晉山隘也라 劉氏 按紂都朝歌하니 孟門在其西라 今言 紂之國이 左孟門이라하니 則東邊에 別有孟門也라 或謂 今石州孟門縣이 是라 】이요 右太行【行은 音杭이라 太行山은 在河內山陽縣西北上黨南이라 正義曰 在懷州河內北二十五里라 】이요 常山이 在其北하고 大河經其南호되 修政不德이어늘 武王이 殺之하시니 由此觀之컨대 在德이요 不在險이니 若君不修德이면 舟中之人이 皆敵國也니이다 武侯曰 善하다

15년(갑오 B.C.387))

魏나라 文侯가 죽고太子이 즉위하니 이가 武侯이다. 武侯가 西河에【西河는 ≪括地志≫에 “黃河가 冀州의 서쪽에 있으므로 西河라 이름했다.” 하였다.】 배를 띄워 내려갈 적에 中流에서 吳起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름답다, 山河의 險固함이여. 이는 魏나라의 보배이다.” 하였다. 이에 吳起가 대답하기를 “나라를 잘 지킴은 德에 있고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옛날 三苗氏【[釋義]三苗氏는 ≪書經≫蔡氏(蔡沈) 傳에 이르기를 “三苗의 나라는 江南의 荊州‧揚州의 사이에 있었는 바, 지형의 험고함을 믿고 亂을 일으킨 자이다.” 하였다. 지금 湖南의 溪洞에 아직도 때로 몰래 나와 亂을 일으키는데, 이들을 잡아 심문하면 대부분 猫姓이라 하니, 아마도 그 遺種(남은 종자)인가 보다. ≪史記正義≫에 “지금의 潭州가 바로 옛날의 三苗國이다.” 하였다. [頭註]三苗黃帝 때에 夏官인 縉雲氏의 후손이다.】 왼쪽에 洞庭湖가 있고【洞庭湖는 岳州巴陵의 서쪽에 있으니, 서쪽으로 赤沙를 倂呑하고 남쪽으로 靑草湖를 연결하여 너비가 7, 8백 리에 이른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天子가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洞庭湖가 서쪽에 있는 것을 左라 하고 彭蠡湖가 동쪽에 있는 것을 右라 하였으니, 彭蠡湖는 潯陽에 있다.” 하였다.】 오른쪽에 彭蠡湖가 있었으나【彭蠡는 동남쪽 52리 지점에 있다. ≪書經≫〈禹貢〉에 “彭蠡에 이미 물을 가두었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漢書≫〈地理志〉에 豫章의 彭澤縣 동쪽에 있으니, 江西와 江東의 여러 물을 모아 豫章과 饒州, 南康의 땅을 지나니, 이른바 鄱陽湖라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德義를 닦지 않으므로 禹王이 그를 멸망시키셨고, 夏이 살던 도읍은【≪帝王世紀≫에 “禹王夏伯에 봉하니, 지금 河南의 陽翟縣이 이곳이다.” 하였다. ≪汲冢古文≫에 “太康이 斟鄩에 거주하였는데, 羿 또한 이곳에 거주하였고 桀王 또한 이곳에 거주했다.” 하였다. ≪括地志≫에 “鄩城은 洛州의 鞏縣에 있다.” 하였다.】 왼쪽에는 黃河와 濟水가 있고【≪書經≫〈禹貢〉에 “濟河에 兗州이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兗州 지역은 동남쪽으로 濟水를 점유하고 서북쪽으로 黃河에 이르니, 黃河와 濟水 사이는 거리가 멀지 않다.” 하였다.】 오른쪽에는 泰華山이 있었으며【泰는 太로도 쓴다. ≪書經≫〈禹貢〉에 “太華에 이른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漢書≫〈地理志〉에 太華山은 弘農華陰縣에 있으니, 지금의 華州華陰縣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伊闕山이伊闕은 ≪括地志≫에 이르기를 “闕塞山은 일명 伊闕이요, 속명 龍門이라 한다.” 하였다. 高誘가 말하기를 “伊闕은 洛陽의 서남쪽 60리 지점에 있으니, 禹王이 개척한 곳이다.” 하였다. 酈道元의 註에 “≪水經≫에 이르기를 ‘禹王이 龍門을 뚫어 물을 통하게 했다.’ 하였으니, 두 산이 서로 마주하여 바라보면 闕門과 같고 伊水가 그 사이를 지나간다. 그러므로 伊闕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그 남쪽에 있었고 羊腸이【羊腸山은 太原의 서북쪽 90리 지점에 있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羊腸의 비탈길은 太行山 위에 있으니, 남쪽 어귀는 懷州에 속하고 북쪽 어귀는 潞州에 속한다.” 하였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羊腸阪은 懷州河內縣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그 북쪽에 있었으나 政事를 닦음에 仁하지 않으므로 湯王이 추방하셨고, 商紂의 國都는慈湖王氏가 말하였다. “鄭玄이 말하기를 ‘商나라의 國都는 泰華山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皇甫謐이 말하기를 ‘지금의 上洛이 商縣이다.’ 하였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商州 동쪽 80리 지점에 있는 商洛縣이 옛날 商나라 國都이다.’ 하였다.”】 왼쪽에는 孟門山이 있고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賈逵가 말하기를 ‘孟門과 太行은 모두 晉나라의 험한 산이다.’ 하였다. 劉氏는 ‘살펴보건대 紂는 朝歌에 도읍하였으니, 孟門山이 그 서쪽에 있다. 그런데 지금 말하기를 「의 國都가 왼쪽에 孟門이 있다.」고 하였으니, 東邊에 별도로 孟門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或者는 이르기를 ‘지금 石州의 孟門縣이 이곳이다.’ 한다.”】 오른쪽에는 太行山이 있고【太行의 行은 音이 항이다. 太行山은 河內山陽縣 서북쪽 上黨 남쪽에 있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懷州河內의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常山(恒山)이 그 북쪽에 있고 大河가 그 남쪽을 경유하였으나 政事를 닦음에 德을 베풀지 않으므로 武王이 죽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나라를 지킴은 德에 있고 험함에 있지 않으니, 만약 임금께서 德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敵國이 될 것입니다.” 하니, 武侯가 “좋다.”고 칭찬하였다.

○ 魏置相할새 相田文하니 吳起不悅하야 謂田文曰 請與子論功이 可乎아 田文曰 可하다 曰 將三軍하야 使士卒樂死하고 敵國不敢謀는 子孰與曰 不如子로라 曰 治百官, 親萬民, 實府庫는 子孰與曰 不如子로라 曰 守西河면 而秦兵이 不敢東鄕(嚮)하고 韓趙賓從은 子孰與曰 不如子로라 曰 此三者는 子皆出吾下어늘 而位加吾上은 何也오 曰 主少國疑에 大臣이 未附하고 百姓이 不信하니 方是之時하야 屬之子乎아 屬之我乎아 黙然良久에 曰 屬之子矣리라 久之요 魏武侯疑之【魏相公叔座譖之하니라 公叔은 氏니 衛之公族이라 】어늘 懼誅하야 遂奔楚하니 楚悼王이 素聞其賢이라 至則任之爲相하다 明法審令하야 捐不急之官하고 廢公族疏遠者하야 以撫養戰鬪之士하니 要在彊兵이라 破遊說【飾辯辭하고 設詐謀하야 馳逐於天下하야 以要時勢者也라 】之言從橫者【慈湖王氏曰 橫은 與衡通이라 孟康曰 南北爲從이요 東西爲橫이라하고 瓚曰 以利合爲從이요 以威勢相脅爲橫이라한대 正義曰 諸說皆未允이라 關東地從長이어늘 六國共居之하니 蘇秦相六國하야 令從親而擯秦이라 故曰合從이요 關西地橫廣이어늘 秦獨居之하니 張儀相秦하야 破關東從道하야 使連秦之橫이라 故曰連橫이라 】하다 於是에 南平百越【謂非一種也니 猶言百蠻이라 韋昭曰 越有百邑이라 故曰百越이라 】하고 北却三晉하고 西伐秦하니 諸侯皆患楚之彊하고 而楚之貴戚大臣이 多怨吳起者러라

魏나라가 정승을 세울 때에 田文을 정승으로 삼으니, 吳起가 기뻐하지 아니하여 田文에게 이르기를 “그대와 功을 논할 것을 청하노니, 허락하겠는가?” 하자, 田文이 “좋다.” 하였다. 吳起가 말하기를 “三軍을 거느려 士卒들로 하여금 결사적으로 싸우기를 좋아하고 敵國이 감히 도모하지 못하게 함은 그대가 어찌 나만 하겠는가?” 하자, 田文이 “그대만 못하다.” 하였다. 吳起가 말하기를 “百官을 다스리고 萬民을 친애하고 府庫를 꽉 채우는 것은 그대가 어찌 나만 하겠는가?” 하자, 田文이 “그대만 못하다.” 하였다. 吳起가 말하기를 “西河를 지키면 秦나라 군대가 감히 동쪽을 향해 오지 못하고 韓나라와 趙나라가 손님처럼 공경히 따르게 함은 그대가 어찌 나만 하겠는가?” 하자, 田文이 “그대만 못하다.” 하였다. 吳起가 말하기를 “이 세 가지는 모두 그대가 나만 못한데도 地位는 나의 위에 있음은 어째서인가?” 하자, 田文이 말하기를 “君主가 나이가 젊고 나라가 의심스러워 大臣이 따르지 않고 百姓들이 믿지 않으니, 이때를 당하여 國政을 자네에게 맡기겠는가, 나에게 맡기겠는가?” 하니, 吳起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에게 맡기겠다.” 하였다.

얼마 후 魏나라 武侯가 의심하자,【魏나라 정승인 公叔座가 참소한 것이다. 公叔은 氏이니 衛나라의 公族이다.】吳起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楚나라로 도망하였다. 楚나라 悼王은 평소에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吳起가 이르자 그에게 정사를 맡겨 정승으로 삼았다. 吳起는 법령을 밝히고 명령을 자세히 살펴 시급하지 않은 관원을 줄이고 公族으로서 소원한 자들을 폐하여 전투하는 軍士를 어루만지고 기르니, 요점이 군대를 강하게 함에 있었다. 유세하면서【遊說는 말을 꾸미고 속임수를 써서 천하에 분주히 돌아다니며 당시의 權勢를 바라는 것이다.】合從과 連橫을 말하는 자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橫은 衡과 통한다. 孟康이 말하기를 ‘南北을 從(縱)이라 하고, 東西를 橫이라 한다.’ 하였고, 薛瓚은 말하기를 ‘이로움으로 합하는 것을 從이라 하고, 위엄과 세력으로 서로 위협함을 橫이라 한다.’ 하였는데,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여러 해설이 모두 합당하지 못하다. 關東은 땅이 從(세로)으로 길었는데 六國이 함께 이곳에 있었는 바, 蘇秦이 六國의 정승이 되어 從親하여 秦나라를 물리치게 하였으므로 合從이라 하였고, 關西는 땅이 橫(가로)으로 넓었는데 秦나라가 홀로 이곳에 있었는 바, 張儀가 秦나라의 정승이 되어 關東의 合從하는 길을 깨뜨려서 秦나라의 橫을 連하게 하였으므로 連橫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을 파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百越【百越은 한 종류가 아님을 이르니, 百蠻이라는 말과 같다. 韋昭가 말하기를 “越나라에 백 개의 고을이 있으므로 百越이라 했다.” 하였다.】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三晉(韓‧魏‧趙)을 퇴각시키고 서쪽으로 秦나라를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楚나라의 강성함을 걱정하였고楚나라의 貴戚大臣들은 吳起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乙未]十六年

[乙未]十六年이라

初命齊大夫田和하야 爲諸侯하다

16년(을미 B.C.386)

처음으로 齊나라 大夫田和를 명하여 諸侯로 삼았다.

[庚子]二十一年

[庚子]二十一年이라

悼王이 薨커늘 貴戚大臣이 作亂하야 攻殺하다

21년(경자 B.C.381)

楚나라 悼王이 죽자, 貴戚大臣들이 亂을 일으켜서吳起를 공격하여죽였다.

[壬寅]二十三年

[壬寅]二十三年이라

康公이 薨하니 無子라 田氏遂幷齊而有之하다

23년(임인 B.C.379))

齊나라 康公이 죽으니 자식이 없었다. 田氏가 마침내 齊나라 땅을 겸병하여 모두 소유하였다.

[甲辰]二十五年

[甲辰]二十五年이라

子思苟變衛侯曰 其材可將五百乘이니이다 公曰 吾知其可將이나 然이나 變也嘗爲吏하야 賦於民而食人二鷄子라 故로 弗用也하노라 子思曰 夫聖人之官人이 猶匠之用木也하야 取其所長하고 棄其所短이라 故로 杞梓連抱【言兩手方周圍라 】而有數尺之朽라도 良工은 不棄하나니 今君이 處戰國之世하야 選爪牙之士어늘 而以二卵으로 棄干城之將慈湖王氏曰 詩兎罝篇에 公侯干城이라한대 註에 干은 扞也라 箋云 干也, 城也는 皆以禦難也니 謂可以干城其民이라 干如字하니 干楯은 所以自蔽扞也라 左傳註에 謂扞蔽其民을 若城然이라 】하시니 此는 不可使聞於隣國也로소이다 公再拜曰 謹受敎矣리이다

25년(갑진 B.C.377))

子思苟變에 대해 衛나라 임금에게 말씀하기를 “그 재목이 5백 乘을 거느릴 만합니다.” 하니, 公이 대답하기를 “나도 그가 충분히 거느릴 수 있음을 아나 苟變이 일찍이 관리가 되어서 백성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남의 계란 두 개를 먹었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子思가 말씀하기를 “聖人이 사람을 벼슬시킴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아서 그 장점을 취하고 그 단점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몇 아름이 되는 杞나무와 梓나무【連抱는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를 말한다.】는 몇 자의 썩은 부분이 있더라도 훌륭한 木工은 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지금 군주께서 戰國의 세상에 처하여 발톱과 이빨과 같은 勇士를 선발하시면서 계란 두 개 때문에 干城과 같은 장수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詩經≫〈兎罝篇〉에 ‘公侯의 干城이다.’ 하였는데, 註에 ‘干은 막음이다.’ 하였고 ≪毛詩箋≫에 ‘방패와 城은 다 難을 막는 것이니, 백성을 방패와 성처럼 막아 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干은 本字대로 읽으니, 방패는 스스로 자기 몸을 가리고 막는 것이다.’ 하였다. ≪左傳≫의 註에 ‘백성을 막아주고 가려주기를 城과 같이 한다.’ 하였다.”】를 버리시니, 이는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公은 두 번 절하고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하였다.

衛侯言計非是로되 而群臣和者 如出一口라 子思曰 以吾觀衛컨대 所謂君不君, 臣不臣者也로다 夫不察事之是非하고 而悅人讚己하니 闇莫甚焉이요 不度理之所在하고 而阿諛求容하니 諂莫甚焉이라 君闇臣諂하야 以居百姓之上이면 民不與也니 若此不已면 國無類【言亡也라 】矣리라 子思言於衛侯曰 君之國事 將日非矣리이다 君出言에 自以爲是어든 而卿大夫莫敢矯其非하고 卿大夫出言에 自以爲是어든 而士庶人이 莫敢矯其非하야 君臣이 旣自賢矣어든 而群下同聲賢之하니 賢之則順而有福하고 矯之則逆而有禍하나니 如此면 則善安從生이리잇고 詩曰 具(俱)曰予聖이어니 誰知烏之雌雄고하니 抑亦似君之君臣乎인저

衛나라 임금이 계책을 말한 것이 옳지 않은데도 여러 신하들이 화답하는 것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똑같이 찬성하였다. 子思가 말씀하기를 “내가 衛나라를 살펴보건대 이른바 君主는 군주답지 못하고 臣下는 신하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고 남이 자신을 칭찬하는 것만 좋아하니 어둠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고, 이치가 있는 곳을 헤아리지 않고 아첨하여 용납되기를 구하니 아첨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군주는 어둡고 신하는 아첨하면서 백성의 위에 있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나라에 남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나라에 남는 무리가 없다는 것은 망함을 말한다.】 하였다.

子思가 衛나라 임금에게 말씀하기를 “임금의 나라 일이 장차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군주가 말을 하고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卿‧大夫가 감히 그 그름을 바로잡지 못하고, 卿‧大夫가 말을 하고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士‧庶人이 감히 그 그름을 바로잡지 못해서, 군주와 신하가 이미 스스로 어질다고 하면 여러 아랫사람들이 똑같은 소리로 어질다고 하니, 어질다고 하면 윗사람의 뜻에 순하여 福이 있고, 바로잡으려면 거슬려서 禍가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善이 어디로부터 생겨나겠습니까? 《詩經》에 이르기를 ‘모두 내가 聖人이라고 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임금의 君臣과 같습니다.” 하였다.

[乙巳]二十六年

[乙巳]二十六年이라

王崩하고 子烈王喜立하다

26년(을사 B.C.376))

王이 죽고아들烈王가 즉위하였다.

○ 韓, 魏, 趙共廢晉靖公하야 爲家人【謂居家之人也니 無官職也라 】하고 而分其地【養心吳氏曰 初에 魏, 韓, 趙分晉이로되 尙以晉靖公食一城이러니 至此하야 共奪其城하고 使爲庶人하니라 】하다

韓‧魏‧趙가 함께 晉나라 靖公을 폐하여庶人으로 삼고【家人은 집안에 거하는 사람을 이르니, 관직이 없는 것이다.】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養心吳氏가 말하였다. “처음에 魏‧韓‧趙가 晉나라를 나누어 가졌으나 그래도 晉나라 靖公에게 한 城을 食邑으로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城마저 함께 빼앗고 庶人으로 삼은 것이다.”】

烈王

安王子니 在位七年이라

烈王安王子니 在位七年이라

烈王은 이름이 이고 安王의 아들이니, 재위가 7년이다.

[辛亥]六年

[辛亥]六年이라

齊威王이 來朝하다 是時에 周室이 微弱하야 諸侯莫朝어늘 而齊獨朝之하니 天下以此로 益賢威王이러라

6년(신해 B.C.370))

齊나라 威王이 周나라에 와서 조회하였다. 이때 周나라 왕실이 미약하여 제후들이 조회하는 자가 없었는데, 齊나라 威王이 홀로 조회하니, 천하 사람들이 이 때문에 威王을 더욱 어질게 여겼다.

威王이 召卽墨【本萊州邑이니 今膠州縣也라 括地志云 故卽墨城은 在今登州膠水縣南六十里라 】大夫하야 語之曰 自子之居卽墨也로 毁言이 日至어늘 吾使人視卽墨하니 田野闢하고 人民給하고 官無事하야 東方以寧하니 是는 子不事吾左右以求助也라하고 封之萬家하다 召阿杜預曰 濟北東阿는 是本齊之柯邑이라 齊桓公이 與魯會柯而盟이 卽此니 今爲祝阿라 括地志云 故城이 在今東平府東阿縣西南이라 】大夫하야 語之曰 自子守阿로 譽言이 日至어늘 吾使人視阿하니 田野不闢하고 人民貧餒하고 昔日에 趙攻鄄【音絹이니 鄄城縣은 今屬濮州라 】호되 子不救하고 衛取薛陵호되 子不知하니 是는 子厚幣事吾左右以求譽也라하고 是日에 烹阿大夫及左右嘗譽者하다 於是에 群臣이 悚懼하야 莫敢飾非하고 務盡其情하니 齊國이 大治하야 彊於天下러라

齊나라 威王이 [[卽墨[釋義]卽墨卽墨은 본래 萊州의 고을이니, 지금의 膠州縣이다. ≪括地志≫에 “옛 卽墨城은 지금의 登州膠水縣 남쪽 6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大夫]]를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卽墨에 부임하면서부터 헐뜯는 말이 날로 이르므로 내가 사람을 시켜서 卽墨을 시찰하게 하였더니, 田野가 개간되고 人民이 넉넉(풍족)하며 官廳이 일이 없어서 東方이 편안하였으니, 이는 그대가 나의 좌우 신하를 섬겨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 그에게 萬家를 봉해 주었다.

[[阿[釋義]阿杜預가 말하기를 “濟水의 북쪽 東阿는 바로 본래 齊나라의 柯邑이다. 齊나라 桓公이 魯나라와 柯 땅에서 만나 盟約한 곳이 바로 여기이니, 지금에는 祝阿라 한다.” 하였다. ≪括地志≫에 “옛 城이 지금의 東平府東阿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大夫]]를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阿를 맡으면서부터 칭찬하는 말이 날로 이르므로 내가 사람을 시켜서 阿를 시찰하게 하였더니, 田野가 개간되지 못하고 人民이 가난하고 굶주리며, 옛날에 趙나라가 鄄을 공격하였으나【鄄은 음이 견이니, 鄄城縣은 지금 濮州에 속한다.】 그대가 구원하지 않았고 衛나라가 薛陵을 점령하였으나 그대가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대가 많은 幣帛으로 나의 좌우를 섬겨서 칭찬을 구하였기 때문이다.” 하고, 그날로 阿大夫와 좌우 신하로서 일찍이 그를 칭찬했던 자들을 삶아죽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것을 좋게 꾸미지 못하고 힘써 그 實情을 다하니, 齊나라가 크게 다스려져서 천하에 강하였다.

[壬子]七年

[壬子]七年이라

王崩하고 弟顯王扁이 立하다

7년(임자 B.C.369))

왕이 죽고아우顯王이 즉위하였다.

顯王

名扁이요 烈王之弟니 在位四十八年이라

顯王이요 烈王之弟니 在位四十八年이라

顯王은 이름이 이고 烈王의 아우이니, 재위가 48년이다.

[己未]七年

[己未]七年이라

孝公이 立하다 是時에 河, 山以東에 彊國이 六이요 淮, 泗之間에 小國이 十餘라 楚魏與秦接界하야 皆以夷狄遇秦하야 擯斥之하야 不得與中國之會盟하니 於是에 孝公이 發憤하야 布德修政하야 欲以彊秦이러라

7년(기미 B.C.362))

秦나라 孝公이 즉위하였다. 이때에 黃河와 太行山 以東에 강한 나라가 여섯이었고 淮水와 泗水 사이에 작은 나라가 10여 개였다. 楚나라와 魏나라는 秦나라와 국경이 접했는데, 모두 秦나라를 夷狄으로 대하여 배척해서 中國의 會盟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에 孝公은 분발하여 德을 펴고 政事를 닦아서 秦나라를 강성하게 하고자 하였다.

[庚申]八年

[庚申]八年이라

孝公이 令國中曰 賓客群臣에 有能出奇計彊秦者면 吾且尊官하고 與之分土【分은 別也니 凡裂土以封諸侯에 其受封者 各有分也라 】하리라 於是에 衛公孫鞅公孫은 氏也요 은 名也라 秦封鞅商, 於十五邑하고 號曰商君이라하니라 】이 聞令하고 乃西入秦하야 因嬖臣景監【嬖臣은 便幸近習之人也라 景監은 姓名이니 楚之族이라 】하야 以求見孝公하고 說以富國彊兵之術한대 公이 大悅하야 與議國事하다

8년(경신 B.C.361)

孝公이 國中에 명령하기를 “빈객과 여러 신하들 중에 기이한 계책을 내어 秦나라를 강하게 할 자가 있으면 내 우선 벼슬을 높여 주고 그에게 땅을 나누어 주겠다.”【分은 구별함이니,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해 줄 적에 分封을 받는 자가 각각 구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衛나라의 公孫鞅公孫은 氏이고 은 이름이다. 秦나라는 公孫鞅에게 商‧於의 15개 읍을 봉해 주고 商君이라 이름하였다.】이 명령을 듣고 마침내 서쪽으로 秦나라에 들어가 총애하는 신하인 景監【嬖臣은 군주가 총애하고 가까이하는 사람(환관)이다. 景監은 姓名이니 楚나라의 족속(왕족)이다.】을 통하여 孝公을 만나 보기를 구하고 富國强兵하는 방법으로 설득하니, 孝公이 크게 기뻐하여 그와 더불어 國事를 의논하였다.

[壬戌]十年

[壬戌]十年이라

衛鞅이 欲變法호되 秦人不悅이어늘 衛鞅이 言於秦孝公曰 夫民은 不可與慮始요 而可與樂成이니 論至德者는 不和於俗하고 成大功者는 不謀於衆이라 是以로 聖人이 苟可以彊國인대 不法其故니이다 甘龍曰 不然하다 緣法而治者는 吏習而民安之니라 衛鞅曰 常人은 安於故俗하고 學者는 溺於所聞하나니 以此兩者로 居官守法은 可也어니와 非所與論於法之外也라 智者作法에 愚者制焉하고 賢者更禮에 不肖者拘焉【賢智之人이 作法更禮하면 而愚不肖者 不明變通而輒拘制하야 不使之行이라 】이니이다 公曰 善타하고 以衛鞅으로 爲左庶長【秦第十爵名이라 秦制에 爵二十級이니 一公士요 二上造요 三簪褭요 四不更이요 五大夫요 六官大夫요 七公大夫요 八公乘이요 九五大夫요 十左庶長이요 十一右庶長이요 十二左更이요 十三中更이요 十四右更이요 十五小上造이요 十六大上造요 十七駟車庶長이요 十八大庶長이요 十九關內侯요 二十徹侯라 】하야 卒定變法之令하다 令民으로 爲什伍而相收司連坐慈湖王氏曰 什伍者는 五家爲保하고 十家相連이라 收司는 相糾發也니 一家有罪하면 九家擧發이요 若不糾擧면 則十家連坐라 司는 猶管也니 爲什伍之法하야 使之相收相管이라 】호되 告姦者는 與斬敵首同賞하고 不告姦者는 與降敵同罰【同賞은 謂告姦一人則得爵一級이요 同罰은 降敵者는 誅其身하고 沒其家라 】하고 有軍功者는 各以率受上爵하고 爲私鬪者는 各以輕重被刑하고 大小僇(戮)力【古字與戮同하니 說文에 幷力也라 】하야 本業耕織하야 致粟帛多者는 復其身【復은 如漢法除其賦役也라 [釋義]復은 音福이니 除也니 謂除免其身役이라 】하고 事末利慈湖王氏曰 事는 務也요 末利는 工商也라 蓋農桑爲本이라 故上文云 本業耕織이라하니라 】하며 及怠而貧者는 擧以爲收孥【孥는 妻子也니 秦法에 一人有罪하면 幷其室家라 [釋義]慈湖王氏曰 謂糾擧而收錄其妻子하야 沒爲官奴婢라 】하고 有功者는 顯榮하고 無功者는 雖富나 無所芬華러라

10년(임술 B.C.359))

衛鞅(衛나라 公孫鞅)이 法을 변경하려 하였으나 秦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衛鞅이 秦나라 孝公에게 말하기를 “백성은 시작은 더불어 도모할 수 없고 성공은 더불어 즐길 수 있습니다. 지극한 德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고, 큰 功을 이루는 자는 민중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聖人이 만일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면 옛것을 그대로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甘龍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 법을 따라 다스리면 관리가 익숙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 하였다.

衛鞅이 논박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배운 자는 자기가 들은 바에 빠져 있으니,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나 더불어 법 밖의 일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가 법을 만들면 어리석은 자가 제재를 가하고, 어진 자가 禮를 바꾸면 不肖한 자가 견제합니다.”【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法을 만들고 禮를 고치면 어리석고 불초한 자가 변통할 줄 모르고 속박과 제재를 가하여 행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公은 “좋다.” 하고는 衛鞅을 左庶長【左庶長은 秦나라의 열 번째 官爵 이름이다. 秦나라 제도에 관작이 모두 20등급이니, 1은 公士, 2는 上造, 3은 簪褭, 4는 不更, 5는 大夫, 6은 官大夫, 7은 公大夫, 8은 公乘, 9는 五大夫, 10은 左庶長이고, 11은 右庶長, 12는 左更, 13은 中更, 14는 右更, 15는 小上造, 16은 大上造, 17은 駟車庶長, 18은 大庶長, 19는 關內侯, 20은 徹侯이다.】으로 삼아 마침내 法을 변경하는 법령을 정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什과 伍를 만들어 서로 糾察하고 連坐하게 하되,【慈湖王氏가 말하였다. “什伍는 5가호가 보증하고 10가호가 서로 연좌하는 것이다. 收司는 서로 규찰하는 것이니, 한 집이 죄가 있으면 아홉 집이 이를 들어 고발하고, 만약 규찰하여 드러내지 않으면 열 집이 연좌되는 것이다. 司는 管과 같으니, 什伍의 法을 만들어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것이다.”】 간악함을 고발하는 자는 적의 수급을 벤 것과 똑같은 상을 내리고 간악함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적에게 항복한 것과 똑같이 처벌하며,【同賞은 한 간사한 사람을 고발하면 한 계급의 관작을 얻음을 이르며, 同罰은 적에게 항복한 자는 그 몸을 죽이고 집안을 몰살하는 것이다.】 軍功이 있는 자는 각기 비율에 따라 높은 관작을 받고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자는 각기 輕重에 따라 형벌을 받으며, 크고 작은 사람이 힘을 합하여【古字에 戮과 같으니, ≪說文解字≫에 “힘을 합하는 것이다.” 하였다.】 밭을 갈고 비단을 짜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 곡식과 비단을 많이 바친 자는 그 身役을 면제해 주고【復은 漢나라 법에 그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과 같다. [釋義]復은 음이 복이니, 면제하는 것이니, 그 신역을 면제해 줌을 이른다.】 상공업[末利]에 종사하거나慈湖王氏가 말하였다. “事는 힘씀이고 末利는 상공업이다.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윗글에 이르기를 ‘밭을 갈고 비단을 짜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또는 게을러 가난한 자는 들어(적발하여) 처자를 노비로 삼았으며,【[原註]孥는 처자식이니, 秦나라 법에 한 사람이 죄가 있으면 그 집안식구들을 아울러 처벌하였다. [釋義]慈湖王氏가 말하였다. “규찰하여 적발해서 그 처자식까지 거두어 기록하여 모두 관노비로 삼는 것이다.”】 공이 있는 자는 현달하고 영화롭고 공이 없는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화려한 바가 없게 하였다.

令을 旣具未布에 恐民之不信하야 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하고 募民호되 有能徙置北門者면 予十金【平準書에 〈秦〉以一鎰爲一金이요 漢以一斤爲一金이라하니 直(値)二千五百文이라 食貨志에 秦은 金方寸重一斤을 以鎰名이러니 漢復周制하야 一斤名金이라 諸言賜黃金者는 實與之金이요 不言黃者는 一金爲萬錢也라 】호리라 民이 怪之하야 莫敢徙어늘 復曰 能徙者면 予五十金호리라 有一人이 徙之어늘 輒予五十金하고 乃下令하다 令行朞(期)年에 秦民이 之國都하야 言新令之不便者以千數러라 於是에 太子犯法이어늘 衛鞅曰 法之不行은 自上犯之니 太子는 君嗣也라 不可施刑이라하고 刑其傅公子虔하고 黥其師公孫賈하니 明日에 秦人이 皆趨令하야 行之十年에 秦國이 道不拾遺하고 山無盜賊하며 民이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니 鄕邑이 大治러라 秦民이 初言令不便者 有來言令便者어늘 衛鞅曰 此는 皆亂法之民也라하고 盡遷之於邊하니 其後에 民이 莫敢議令이러라

法令을 이미 갖추었으나 아직 선포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세 길 되는 나무를 國都의 시장 南門에 세워 놓고 懸賞하여 백성들을 모집하되 “이것을 北門으로 옮겨 놓는 자가 있으면 10金【≪史記≫〈平準書〉에 “秦나라는 一鎰(24냥)을 一金이라 하고, 漢나라는 一斤을 一金이라 했다.” 하였으니, 一金은 값어치가 2,500文이다. ≪漢書≫〈食貨志〉에 “秦나라는 金이 두께가 一寸, 무게가 一斤인 것을 鎰이라 이름하였는데, 漢나라는 周나라 제도를 회복하여 一斤을 一金이라 했다.” 하였다. 무릇 黃金을 하사했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 金을 준 것이고, 黃을 말하지 않은 것은 一金이 萬錢에 해당된다.】을 주겠다.” 하였다.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옮기는 자가 있으면 50金을 주겠다.” 하였다. 한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즉시 50금을 주고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행한 지 1년 만에 秦나라 백성들이 國都에 가서 새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천 명으로 헤아려졌다. 이때에 太子가 법을 범하자, 衛鞅이 말하기를 “법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 범하기 때문이니, 태자는 임금의 후계자라서 형벌을 加할 수 없다.” 하고는 그 傅인 公子을 형벌하고 그 師인 公孫賈를 刺字하니, 다음날에 秦나라 사람들이 모두 법령을 따랐다. 그리하여 법령을 행한 지 10년 만에 秦나라는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산에는 도적이 없으며 백성들이 公戰(국가간의 전투)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겁을 내니, 鄕邑이 크게 다스려졌다.

秦나라 백성 중에 처음에 새로운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한 자가 다시 와서 법령이 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衛鞅이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이다.” 하고는 모두 변경으로 옮기니, 이후로는 백성들이 감히 법령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溫公曰 夫信者는 人君之大寶也라 國保於民하고 民保於信하니 非信이면 無以使民이요 非民이면 無以守國이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不欺四海하고 霸【把也니 把持諸侯之權이요 把持天子之政이라 或作伯하니 蓋取牧伯長諸侯之義러니 後人이 恐與侯伯字相混이라 故借用霸字以別之하니라 】者는 不欺四隣하며 善爲國者는 不欺其民하고 善爲家者는 不欺其親이라 不善者는 反之하야 欺其隣國하고 欺其百姓하며 甚者는 欺其兄弟하고 欺其父子하야 上不信下하고 下不信上하야 上下離心하야 以至於敗라 所利 不能藥其所傷하고 所獲이 不能補其所亡하니 豈不哀哉아 昔에 齊桓公은 不背曹沫之盟【沫은 亦作劌니 音末이라 齊桓公이 與魯莊公으로 會于柯할새 將盟에 曹沫이 執匕首하야 劫桓公曰 請歸侵地하라하니 桓公이 許之하다 後에 桓公이 欲背約勿與한대 管仲曰 不可라하니 乃悉以侵地로 歸之于魯하니라 】하고 晉文公은 不貪伐原之利【晉文公이 圍原할새 命三日之糧하다 原不降이어늘 命去之러니 諜曰 原將降矣라하야늘 軍吏請待之한대 公曰 信은 國之寶也라 得原失信이면 所亡滋多라하고 退一舍러니 而原降하니라 】하고 魏文侯는 不棄虞人之期하고 秦孝公은 不廢徙木之賞하니 此四君者는 道非粹白이요 而商君은 尤稱刻薄하며 又處戰攻之世하야 天下趨於詐力이로되 猶且不忘信하야 以畜其民하니 況爲四海治平之政者哉아

蘇東坡曰 天下不樂戰則不可與從事於危요 好戰則不可與從事於安이라 秦之法이 使吏士自爲戰하야 戰勝而利歸於民이라 所得於敵者를 卽以與之하야 使民知所以養生送死者 非殺敵이면 無由取라 故로 其民以好戰幷天下하고 而亦以亡이라 始皇이 雖已墮名城하고 殺豪俊하고 銷鋒鏑이나 而民之好戰之心이 囂然其未已也라 故로 不可休息하야 而至於亡하니라 ○ 又曰 秦固天下之强國이요 而孝公亦有志之君也라 修其政刑十年에 不爲聲色遊畋之所敗하니 雖微商鞅이나 有不富强乎아 秦之所以富强은 孝公務本力穡之効요 非流血刻骨之功也며 秦之所以見疾於民을 如豺虎毒藥하여 一夫作難에 而子孫無遺種은 則實使之也니라

[新增]養心吳氏曰 秦之所以亡은 其原이 蓋出於此라 其後에 呂不韋爲相하야 自作令書하야 布咸陽城門하고 懸千金於其上하고 延諸侯遊士賓客하야 有能增減一字者면 予千金이라호되 莫有易者也하니라 以今觀之하면 豈誠無一字可增減哉아 誠以秦之人이 爲積威之所劫하야 雖欲議之나 而有所不敢이라 自不韋制令之書無敢議로 遂至於趙高指鹿爲馬하야는 相異如此로되 而人臣猶不敢言하니 則知秦人爲積威之所劫也甚矣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信은 人君의 큰 보배이다.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존되고 백성은 信에서 보존되니, 信이 아니면 백성을 부릴 수 없고 백성이 아니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이 때문에 옛날의 王者들은 四海를 속이지 않았고 霸【霸는 잡음이니, 諸侯의 권리를 잡고 天子의 정사를 잡는다는 뜻이다. 혹은 伯로도 쓰니, 牧伯로 제후의 으뜸이 된다는 뜻을 취한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侯伯이란 伯자와 서로 혼용할까 염려되므로 霸字를 사용하여 구별한 것이다.】者들은 사방의 이웃 나라를 속이지 않았으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그 백성을 속이지 않고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는 그 친척을 속이지 않았다. 잘하지 못하는 자는 이와 반대로 하여 이웃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속이며, 심한 자는 형제를 속이고 부자간을 속여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믿지 못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믿지 못하여 上下가 마음이 離反되어 패망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로운 바가 그 손상된 바를 치료하지 못하고 얻은 바가 그 잃은 바를 보충하지 못하니, 어찌 애처롭지 않겠는가.

옛날 齊나라 桓公曹沫과의 맹세【曹沫의 沫은 또한 劌로도 쓰니, 音은 말이다. 齊나라 桓公이 魯나라 莊公과 柯 땅에서 會盟하였는데, 장차 盟約하려 할 적에 曹沫이 匕首를 잡고 桓公을 위협하며 침략한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니, 桓公이 이를 허락하였다. 뒤에 桓公이 맹약을 저버리고 돌려주지 않으려 하자, 管仲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마침내 침략한 땅을 魯나라에 돌려주었다.】를 저버리지 않았고, 晉나라 文公은 原 땅을 정벌하는 이익【晉나라 文公이 原 땅을 포위할 적에 3일 내에 함락할 것을 명하고 3일 동안의 양식만 주었다. 3일이 되어도 原 땅이 항복하지 않자 포위를 풀고 떠나도록 명하였는데, 첩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原 땅이 장차 항복하려 한다.” 하였다. 軍吏가 하루만 더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文公은 말하기를 “信義는 국가의 보배이니, 原 땅을 얻고 신의를 잃는다면 잃는 것이 더 많다.” 하고 一舍(30리)를 후퇴하였는데, 原 땅이 항복하였다.】을 탐하지 않았고, 魏나라 文侯는 虞人과의 약속을 버리지 않았고, 秦나라 孝公은 나무를 옮긴 것에 대한 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 네 군주들은 道가 순수하지 못하였고 商君은 더더욱 각박하다고 알려졌으며, 또 전쟁하고 공격하는 세상에 처하여 천하가 속임수와 무력으로 달려갔으나 오히려 信을 잊지 아니하여 그 백성을 길렀으니, 하물며 四海를 다스리는 정사를 하는 자에 있어서랴.”

蘇東坡(蘇軾)가 말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전투하는 것을 수월하게 여기지 않으면 함께 위태로운 일에 종사할 수가 없고, 전투하는 것을 좋아하면 함께 편안한 일에 종사할 수가 없다. 秦나라의 法은 관리와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투하게 하여 전투에 승리하면 이익이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에게서 얻은 것을 즉시 백성들에게 주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葬送하는 것이 적을 죽이지 않고는 취할 수 없음을 알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전투하는 것을 좋아하여 천하를 겸병하였고 또한 이 때문에 망한 것이다. 秦始皇이 비록 이미 유명한 城을 허물고 豪傑들을 죽이고 창날과 화살촉을 녹여 무기를 없앴으나 백성들의 好戰하는 마음이 분분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휴식할 수가 없어서 멸망함에 이른 것이다.”

○ 또 말하였다.

“秦나라는 진실로 천하의 강대국이요, 孝公 또한 훌륭한 뜻이 있는 군주였다. 정사와 형벌을 닦는 10년 동안 음악과 여색과 놀이와 사냥에 빠지지 않았으니, 비록 商鞅이 없었더라도 나라가 부강해지지 않았겠는가. 秦나라가 부강해진 것은 孝公이 근본에 힘써 농사를 힘쓴 효험이었고 商鞅이 피를 흘리고 뼈를 깎은 공로가 아니며, 秦나라가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아 백성들이 승냥이와 범과 독약처럼 싫어해서 한 지아비가 난을 일으킴에 자손들이 남은 종자가 없었던 것은 商鞅이 진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秦나라가 멸망한 까닭은 그 근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 뒤에 呂不韋가 정승이 되어서 스스로 令書를 만들어 咸陽의 城門에 公布하고는 그 위에 千金을 상으로 내걸고 제후국의 유세하는 선비와 빈객들을 맞이하여 ‘한 글자라도 보태거나 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千金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것을 바꾼 자가 있지 않았다. 지금 살펴보면 어찌 진실로 한 글자도 보태거나 뺄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 이는 진실로 秦나라 사람들이 商鞅이 예전부터 쌓아온 강대한 위세에 눌려서 비록 의논하고자 하나 감히 하지 못한 것이다. 呂不韋가 지은 令書의 글에 대해 아무도 감히 의논하지 못한 뒤로부터 마침내 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함에 이르러서는 실제와 서로 다름이 이와 같았으나 신하들이 오히려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秦나라 사람들이 商鞅의 강대한 위세에 눌림이 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丙寅]十四年

[丙寅]十四年이라

齊威王, 魏惠王이 會田於郊【田은 取禽也니 去禽獸害稼者라 故로 以田言之라 】할새 惠王曰 齊亦有寶乎아 威王曰 無有로라 惠王曰 寡人國은 雖小나 尙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하니 豈以齊大國而無寶乎리오 威王曰 寡人之所以爲寶者는 與王異라 吾臣에 有檀子【檀은 姓也니 史失其名이라 索隱曰 古者에 大夫皆稱子라 】者하니 使守南城【縣名이니 屬泰山이라 】이면 則楚人이 不敢爲寇하고 泗上十二諸侯皆來朝하며 吾臣에 有盼子【盼은 與盻同이라 [釋義]田盼也라 】者하니 使守高唐【本博州縣이니 今改州하야 屬東昌路라 】이면 則趙人이 不敢東漁於河하고 吾吏에 有黔夫【姓名이라 】者하니 使守徐州【慈湖王氏曰 徐州는 卽薛縣也라 徐는 音舒니 非九州之徐라 春秋에 作舒州하고 說文에 作䣄라 】면 則燕人【燕은 姬姓이니 伯爵이라 武王封召公奭於燕이러니 傳三十三世하야 爲秦所滅하니라 召公은 文王庶子라 】은 祭北門하고 趙人은 祭西門【賈逵曰 燕, 趙之人이 畏齊侵伐이라 故로 祭以求福이라 】하고 徙而從者七十餘家요 吾臣에 有種首【慈湖王氏曰 種首는 名也니 史失其姓이라 】者하니 使備盜賊이면 則道不拾遺하나니 此四臣者는 將照千里하리니 豈特十二乘哉리오 惠王이 有慙色이러라

[新增]養心吳氏曰 戰國諸侯之所寶는 惟以珠玉爲論하니 而知所寶者는 惟齊威王, 楚王孫而已라 威王은 不以徑寸之珠爲寶하고 楚王孫은 不以白珩爲寶하니 是知所寶在此而不在彼也니라

14년(병인 B.C.355)

齊나라 威王과 魏나라 惠王이 교외에서 모여 사냥할 적에【田은 짐승을 잡는 것이니, 곡식을 해치는 새와 짐승을 잡기 때문에 田이라고 말한 것이다.】惠王이 묻기를 “齊나라에도 보물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威王이 말하기를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惠王이 말하기를 “과인의 나라는 비록 작으나 오히려 지름이 한 치 되는 진주가 수레의 앞뒤로 각각 12乘을 비출 수 있는 것이 10개가 있으니, 어찌 齊나라와 같이 큰 나라가 보물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威王이 대답하기를 “과인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왕과는 다릅니다. 내 신하 중에 檀子【檀은 성이니, 史書에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옛날에 大夫는 모두 子라고 칭했다.” 하였다.】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南城【南城은 縣의 이름이니, 泰山에 속한다.】을 지키게 하면 楚나라 사람들이 감히 노략질하지 못하고 泗上의 열두 諸侯가 모두 와서 조회하며, 내 신하 중에 盼子【[原註]盼은 盻와 같다. [釋義]盼子는 田盼이다.】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高唐【高唐은 본래 博州縣이니 지금 州를 고쳐서 東昌路에 속하였다.】을 지키게 하면 趙나라 사람이 감히 동쪽으로 黃河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며, 내 관리 중에 黔夫【黔夫는 姓名이다.】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徐州【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徐州는 바로 薛縣이다. 徐는 음이 서이니, 九州의 하나인 徐州가 아니다. ≪春秋≫에는 舒州로 되어 있고, ≪說文解字≫에는 䣄로 되어 있다.”】를 지키게 하면 燕나라 사람【燕나라는 姬姓이니 伯爵이다. 武王이 召公 奭을 燕에 봉하였는데, 33대를 전하여 秦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召公은 文王의 衆子이다.】은 北門에 제사하고 趙나라 사람은 西門에 제사하고【賈逵가 말하였다. “燕나라와 趙나라 사람들이 齊나라가 침공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門에 제사 지내어 복을 구한 것이다.”】 옮겨서 따라온 자가 70여 집이며, 내 신하 중에 種首【慈湖王氏가 말하였다. “種首는 이름이니 史書에 그 姓은 전하지 않는다.”】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도적을 막게 하면 길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습니다. 이 네 신하는 장차 千里를 비출 것이니 어찌 다만 12乘뿐이겠습니까?” 하니, 惠王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戰國時代 제후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珠玉만을 가지고 논하였으니, 보배로 여길 바를 안 자는 오직 齊나라 威王과 楚나라 王孫圉뿐이었다. 威王은 지름이 한 치 되는 진주를 보배로 여기지 않았고 楚나라 王孫圉는 白珩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보배로 여길 바가 이 인물에 있고 저 주옥에 있지 않음을 안 것이다.”

[庚午]十八年

[庚午]十八年이라

韓昭侯申不害爲相하다 申不害者는 鄭之賤臣【鄭은 姬姓이니 伯爵이라 周宣王이 封同母弟友於鄭이러니 傳二十一世하야 爲韓所滅하니라 】也라 學黃老刑名【慈湖王氏曰 申不害本傳에 申子之學은 本於黃老而主刑名이라하니 黃老之法은 淸簡無爲하야 君臣自正이라 黃帝之言은 無傳耳요 老聃之書는 有八十一篇이라 [頭註]刑名은 治刑法及名實也라 名者는 循其名以責其實이니 其尊君卑臣하고 崇上抑下가 合於六經也라 】하야 以干昭侯한대 昭侯用爲相하야 內修政敎하고 外應諸侯하니 十五年에 終申子之身토록 國治兵强이러라 韓昭侯有弊袴러니 命藏之한대 侍者曰 君亦不仁者矣로이다 不賜左右而藏之온여 昭侯曰 吾聞明主는 愛一嚬一咲(笑)【嚬咲는 上音頻이니 宜作顰이니 愁蹙之貌요 下는 古笑字라 】라하니 今袴豈特嚬咲哉리오 吾必待有功者하노라

18년(경오 B.C.351)

韓나라 昭侯申不害를 정승으로 삼았다. 申不害는 鄭나라의 천한 신하【鄭나라는 姬姓이니 伯爵이다. 周나라 宣王이 同母弟인 友를 鄭에 봉하였는데, 21대를 전하여 韓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였다. 와 刑名을 배워【[釋義]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史記≫의 申不害 本傳에 ‘申子의 학문은 黃老에 근본하고 刑名을 주장했다.’ 하였으니, 黃老의 法은 淸淨하고 簡易하고 無爲여서 君臣이 스스로 바루어지는 것이다. 黃帝의 말은 전하는 것이 없고 老聃의 글은 ≪老子≫ 81편이 있다.” [頭註]刑名은 刑法과 名實을 다스리는 것이다. 名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따라 실상을 責하는 것이니,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윗사람을 높이고 아랫사람을 억제함이 六經에 부합하는 것이다.】昭侯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자, 昭侯가 등용하여 정승을 삼아서 안으로 政敎를 닦고 밖으로 諸侯를 응대하게 하니, 15년 동안 申子의 몸을 마치도록 나라가 다스려지고 군대가 강하였다.

韓나라 昭侯가 해진 바지가 있었는데, 이것을 잘 보관하라고 명하자 모시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또한 仁者가 못되십니다. 좌우에게 하사하지 않고 보관하게 하십니다.” 하였다. 昭侯가 말하기를 “내 들으니 현명한 군주는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아낀다고 하니【嚬咲는 위의 嚬자는 음이 빈이니 마땅히 顰자가 되어야 하니, 근심하여 찌푸리는 모양이고, 아래의 咲자는 笑자의 古字이다.】, 이 바지가 어찌 다만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일 뿐이겠는가? 나는 반드시 功이 있는 자를 기다린다.” 하였다.

[辛未]十九年

[辛未]十九年이라

秦商鞅이 築冀闕【王氏曰 冀는 記也니 記列敎令을 當於此門闕也라 闕在門兩旁하고 中央闕然爲道라 崔豹註云 人臣至此면 則思其所闕이라 蓋爲二臺於門外하고 作樓觀於上하니 上圓下方이라 以其縣法이라하야 謂之象魏라하니 象은 治象也요 魏者는 其狀巍然高大니 使民觀之라하야 因謂之觀이라 兩觀雙植하고 中不爲門하니 是觀與象魏, 闕은 一物而三名이라 】宮庭於咸陽【慈湖王氏曰 咸陽은 漢高更名新城이러니 漢武更名渭城하니 今長安이 是也라 秦孝公都咸陽은 今渭城이 是요 始皇都咸陽은 今城南大城이 是也라 山南曰陽이요 水北亦曰陽이라 其城이 在渭水北하고 又在九峻諸山之南이라 故名咸陽이라 】하야 徙都之하고 幷諸小鄕聚【秦制에 大曰鄕요 小曰聚라 】하야 集爲一縣하고 縣置令丞【萬戶以上은 爲令하고 减萬戶爲長하니 皆有丞尉라 】하니 凡三十一縣이라 廢井田하고 開阡陌【路南北曰阡이요 東西曰陌이니 開田界道하야 使不相干이라 [頭註]阡陌者는 正其疆界하야 使之不相侵占也라 今鞅開披之하니라 】하다

19년(신미 B.C.350)

秦나라 商鞅이 冀闕의【王氏가 말하였다. “冀는 기록함이니, 敎令을 기록하여 나열하기를 이 門闕에 하는 것이다. 闕은 문의 양쪽 곁에 있고 중앙은 비워놓아 길을 만들었다. 崔豹의 ≪古今註≫에 이르기를 ‘신하가 여기(궐문)에 이르면 그 빠뜨린 것을 생각한다.’ 하였다. 문밖에 두 개의 臺를 만들고 위에 누관을 지으니,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지다. 여기에 법령을 게시한다 하여 象魏라 하는 바, 象은 治象(政敎와 法令을 기재한 문자)이고 魏는 그 모습이 우뚝이 높고 큰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한다 하여 이름을 觀이라 한 것이다. 두 觀을 쌍으로 세우고 가운데에 문을 만들지 않으니, 이 觀과 象魏와 闕은 한 가지 물건이면서 명칭이 세 가지인 것이다.”】 宮庭을 咸陽에 건축하여【慈湖王氏가 말하였다. “咸陽은 漢高祖가 新城이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漢武帝가 渭城이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長安이 이곳이다. 秦나라 孝公이 도읍한 咸陽은 지금의 渭城이 이곳이고 始皇帝가 도읍한 咸陽은 지금의 城南의 大城이 이곳이다. 산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또한 陽이라 한다. 그 城이 渭水 북쪽에 있고 또 九峻 등 여러 산의 남쪽에 있으므로 咸陽이라 이름한 것이다.”】 옮겨 도읍하고 여러 작은 鄕과 聚落을 아울러 모아서【秦나라 제도에 큰 고을을 鄕이라 하고, 작은 고을을 聚라 하였다.】 한 縣을 만들고 縣에 令과 丞을 두니,【萬戶 이상의 고을은 令을 두고 萬戶가 못되는 곳은 長을 두었으니, 고을에는 모두 丞과 尉가 있었다.】 모두 31개 縣이었다. 井田法을 폐하고阡陌을 개간하였다.【[原註]길이 남북으로 난 것을 阡이라 하고 동서로 난 것을 陌이라 하니, 田地의 경계에 길을 내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頭註]阡陌은 田地의 경계를 바로잡아서 서로 침범하거나 점유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商鞅이 이것을 모두 개간한 것이다.】

[庚辰]二十八年

[庚辰]二十八年이라

龐涓이 伐韓한대 韓이 請救於齊어늘 齊威王이 因起兵하야 使田忌, 田嬰, 田盼將之하고 孫臏은 刖也니 因刖兩足하고 遂名也라 吳王闔閭之將孫武之後라 】爲師하야 以救韓할새 直走魏都하니 龐涓이 聞之하고 去韓而歸魏하다 魏大發兵하야 以太子申爲將하야 以禦齊師어늘 孫子田忌曰 彼三晉之兵이 素悍勇而輕齊하야 齊號爲怯이라하니 善戰者는 因其勢而利導之하나니 兵法에 百里而趣(趨)利者는 蹶上將【蹶은 劉氏云 斃也니 大將軍必致僵仆라 】하고 五十里而趣利者는 軍半至라하고 乃使齊軍으로 入魏地하야 爲十萬竈하고 明日에 爲五萬竈하고 又明日에 爲二萬竈하다 龐涓이 行三日에 大喜曰 我固知齊軍怯이로다 入吾地三日에 士卒亡者過半矣라하고 乃棄其步軍하고 與其輕銳로 倍日幷行【一日에 兼行兩日之程也니 凡軍은 日行三十里라 】逐之하다 孫子度其行하니 暮當至馬陵【慈湖王氏曰 馬陵은 濮州鄄城東北六十里에 有陵하니 澗谷深峻하야 可以置伏이라 按龐涓敗在此라 或云 在魏州元城이라하나 非라 】이요 馬陵은 道陿而旁多阻隘하야 可伏兵이라 乃斫大樹하야 白而書之曰 龐涓이 死此樹下하리라하고 於是에 令齊師善射者萬弩로 夾道而伏하고 期日暮하야 見火擧而俱發이러니 龐涓이 果夜至斫木下하야 見白書하고 以火燭之하야 讀未畢에 萬弩俱發하니 魏師大亂相失이라 龐涓이 自知智窮兵敗하고 乃自剄하니 齊因乘勝하야 大破魏師하다

28년(경진 B.C.341))

魏나라 龐涓이 韓나라를 정벌하자, 韓나라가 齊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齊나라 威王이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田忌, 田嬰, 田盼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孫臏【臏은 발꿈치를 베는 형벌이니, 〈龐涓에 의해〉 두 발이 잘렸기 때문에 마침내 臏이라고 이름하였다. 孫臏吳王闔閭의 名將인 孫武의 후손이다.】軍師로 삼아 韓나라를 구원하게 하여, 이들이 곧바로 魏나라 도성으로 달려가니, 龐涓이 이 소식을 듣고 韓나라를 버리고 魏나라로 돌아왔다.

魏나라는 크게 군대를 일으켜 太子을 장수로 삼아 齊나라 군대를 막게 하였다. 孫子(孫臏)田忌에게 이르기를 “저 三晉(魏)의 군사들은 본래 사납고 용맹하여 우리 齊나라를 경시해서 齊나라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불렀으니,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그 형세를 인하여 이롭게 이끌어 낸다. 兵法에 〈하루에〉 100리씩 달려 이익을 쫓는 자는 上將이 쓰러지고,【蹶은 劉氏가 이르기를 “죽음이다.” 하였으니, 大將軍이 반드시 엎어지고 쓰러지는 것이다.】 50리씩 달려 이익을 쫓는 자는 군대가 절반만 도착한다고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齊나라 군대로 하여금 魏나라 땅에 들어가 10만 개의 아궁이(취사장)를 만들고, 다음날에는 5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고, 또 다음날에는 2만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하였다. 龐涓이 추격하여 행군한 지 3일 만에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齊나라 군사들이 겁쟁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땅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士卒들이 도망한 자가 반이 넘는구나.” 하고는 마침내 步軍을 버리고 輕銳兵과 함께 이틀에 갈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려 추격하였다.【倍日幷行은 하루에 이틀 갈 노정을 겸하여 가는 것이다. 모든 군대는 하루에 30里를 간다.】

孫子가 그 行軍 속도를 헤아려 보니, 저물녘에 마땅히 馬陵慈湖王氏가 말하였다. “馬陵은 濮州鄄城 동북쪽 60리 지점에 구릉이 있으니, 골짝이 깊고 험준하여 군대를 매복시킬 수 있다. 살펴보건대 龐涓이 패한 곳이 이곳에 있다. 혹자(徐廣)는 이르기를 ‘魏州의 元城에 있다.’고 하나 잘못이다.”】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馬陵은 길이 좁고 옆에 막힌 곳이 많아서 병사를 매복시킬만 하였다. 이에 큰 나무를 깎아 희게 하고 쓰기를 “龐涓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으리라.” 하였다. 이에 齊나라 군사 중에 弓弩를 잘 쏘는 자들로 하여금 만 개의 쇠뇌를 가지고 길 좌우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날이 저물어 불이 들려지는 것을 보면 함께 발사하기로 약속하였다. 龐涓이 과연 밤에 깎아 놓은 나무 아래에 이르러 흰 나무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고는 불을 밝혔는데,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만 개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니, 魏나라 군사들이 크게 혼란하여 법도(정신)를 잃었다. 龐涓은 지혜가 다하고 군대가 패한 줄을 스스로 알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죽으니, 齊나라가 이로 인하여 승세를 타고 魏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辛巳]二十九年

[辛巳]二十九年이라

秦이 封衛鞅商, 於十五邑【索隱曰 商, 於는 地名이니 皆在弘農이라 正義曰 古商國이니 今商洛縣이 是라 在商州東九十里요 於는 在鄧州內鄕縣東七里라 按十五邑이 近此二邑이라 】하고 號曰商君이라하다

29년(신사 B.C.340))

秦나라가 衛鞅을 商‧於의 열다섯 고을에 봉하고【≪史記索隱≫에 말하였다. “商과 於는 지명이니, 모두 弘農에 있다.” ≪史記正義≫에 말하였다. “商은 옛날 商나라 도성이니, 지금의 商洛縣으로 商州 동쪽 90리 지점에 있고, 於는 鄧州內鄕縣 동쪽 7리 지점에 있다. 살펴보건대 열다섯 고을은 이 두 읍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름을 商君이라 하였다.

[癸未]三十一年

[癸未]三十一年이라

孝公이 薨하고 子惠文王이 立하니 公子虔之徒 告商君欲反이어늘 發吏捕之하다 商君이 亡之魏호되 魏人이 不受【先時에 爲秦將하야 伐魏한대 魏使公子將之하니 書曰 吾始與公子相歡이러니 今俱爲兩國將하니 不忍相攻이라 欲與公子相見盟하고 樂飮而罷兵하노라 卬以爲然하야 乃與會盟한대 伏甲襲하야 大破之하니 困以歸라 魏人怨之故로 不受納之하니라 】하고 復內(納)之秦한대 商君이 與其徒로 之商於러니 秦人이 攻殺之하야 車裂以徇하고 盡滅其家하다 初에 商君이 相秦에 用法嚴酷하야 嘗臨渭論囚할새 渭水盡赤하니 爲相十年에 人多怨之러라

31년(계미 B.C.338))

秦나라 孝公이 죽고아들惠文王이 즉위하니, 公子의 무리가 商君이 배반하려 한다고 고발하므로 관리를 내어 체포하게 하였다. 商君이 魏나라로 도망갔으나 魏나라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고【이보다 앞서 衛鞅이 秦나라 장수가 되어 魏나라를 공격하니, 魏나라에서는 公子 卬을 장수로 임명하여 막게 하였다. 衛鞅公子 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나는 처음에 公子와 친하게 지냈는데, 이제 모두 두 나라의 장수가 되니, 차마 서로 공격할 수가 없다. 公子와 서로 만나 맹약하고 즐겁게 술을 마신 다음 군대를 해산하고 싶다.” 하였다. 公子 卬이 그 말을 믿고 맹약하러 가자, 衛鞅은 군대를 매복하였다가 公子 卬을 기습공격하여 대파하니, 公子 卬은 낭패하고 돌아왔다. 魏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衛鞅을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받아주지 않고 다시 秦나라로 들여보낸 것이다.】 다시 秦나라로 들여보내니, 商君이 그 무리와 함께 商‧於로 갔다. 秦나라 사람들이 그를 공격하여 죽여서 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조리돌리고 一家를 다 멸하였다.

처음에 商君이 秦나라에 정승이 되었을 적에 법을 적용하기를 엄하고 혹독하게 하여, 일찍이 渭水 가에 임해 죄수를 論罪할 적에 피가 흘러 渭水가 모두 붉게 물들었으니, 정승이 된 지 10년에 백성들이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趙良이 見商君한대 商君이 問曰 子觀我治秦컨대 孰與五羖大夫【百里奚自賣五羖皮하야 爲人養牛하고 以是要秦이라 故號五羖大夫라 】賢고 趙良曰 千人之諾諾이 不如一士之諤諤이라하니 僕이 請終日正言而無誅하노니 可乎아 商君曰 諾다 趙良五羖大夫는 荊之鄙人也慈湖王氏曰 左傳僖五年에 晉執虞大夫井伯하야 以媵秦穆姬라하고 晉世家에 作虜井伯百里奚라 正義曰 百里奚는 (宋)[字]井伯이니 宛人也라 宛屬楚하니 楚初國于荊州라 故云荊이라 按春秋컨대 初엔 例稱荊이러니 僖公后稱楚라 百里奚後亡走宛이러니 楚鄙人執之한대 秦穆公이 以五羖羊皮贖之하야 授以國政하고 號五羖大夫라 或曰 百里奚自賣五羖皮하야 爲人養牛以要秦이라 故曰擧之牛口之下라 】穆公이 擧之牛口之下하야 而加之百姓之上하니 秦國이 莫敢望焉이라 相秦六七年에 而東伐鄭하고 三置晉君【謂立晉惠公, 懷公, 文公也라 】하고 一救荊禍【索隱曰 按年表컨대 秦穆公二十八年에 會晉伐楚朝周하니 此云救荊禍는 未詳이라 】하며 其爲相也에 勞不坐乘하고 暑不張蓋하니 五羖大夫死에 秦國이 男女流涕하고 童子不歌謠하고 舂者不相杵【相은 謂送杵聲이니 以聲音(自)[相]勤也라 】라 今君之從政也에 陵轢公族하고 殘傷百姓하니 公子虔이 杜門不出이 已八年矣요 君이 又殺祝驩而黥公孫賈하니 詩曰 得人者는 興하고 失人者는 崩이라하니 此數者는 非所以得人也라 君之危若朝露어늘 而尙貪商於之富하고 【以專秦國之政으로 爲寵也라 】하야 畜百姓之怨하니 秦王이 一旦에 捐賓客而不立朝면 秦國之所以收君者 豈其微哉於秦無仁恩이라 故秦之將欲收者 其效甚明矣라 故云豈其微哉아하니라 】商君이 弗從이러니 居五月而難作하니라

蘇東坡商君之法이 使民務本力農하고 勇於公戰하고 怯於私鬪하야 食足兵强하야 以成帝業이라 然이나 其民이 見刑而不見德하고 知利而不知義하야 卒以此亡이라 故로 帝秦者商君也요 亡秦者亦商君也라 其生에 有南面之樂하니 旣足以報其帝秦之功矣요 而死有車裂之禍하니 僅足以償其亡秦之罰이라 理勢自然이니 無足怪者니라

趙良商君을 뵙자, 商君이 묻기를 “그대가 보기에 내가 秦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五羖大夫(百里奚)百里奚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자신의 몸을 팔아서 남을 위해 소를 먹이고 이로써 秦나라에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五羖大夫라고 이름한 것이다.】와 더불어 누가 나은가?” 하니, 趙良이 대답하기를 “‘천 사람이 옳다옳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한 선비가 바른말 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제가 종일토록 바른말을 하더라도 주벌하지 말 것을 청하오니, 허락하시겠습니까?” 하였다. 商君이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하자, 趙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五羖大夫는 荊(楚)나라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慈湖王氏가 말하였다. “≪春秋左傳≫ 僖公 5年條에 ‘晉나라가 虞나라 大夫 井伯(百里奚)을 잡아서 秦나라 穆姬의 媵臣으로 삼았다.’ 하였고, 〈晉世家〉에 ‘井伯百里奚를 사로잡았다.’ 하였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百里奚는 字가 井伯이니, 宛 땅 사람이다.’ 하였다. 宛은 楚나라에 속하였으니, 楚나라가 처음에 荊州에 도읍하였으므로 荊이라고 이른 것이다. ≪春秋左傳≫을 살펴보건대 처음엔 으레 荊이라고 칭하였는데 僖公 이후에 楚라고 칭하였다. 百里奚가 나중에 도망하여 宛 땅으로 갔는데, 楚나라 변방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秦나라 穆公이 다섯 마리 양가죽으로 代贖하여 國政을 맡기고 五羖大夫라고 이름하였다. 혹자는 百里奚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자신의 몸을 팔아서 남을 위해 소를 먹임으로써 秦나라에 등용되기를 요구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를 소 먹이는 비천한 신분에서 등용했다.’고 한 것이다.”】穆公이 그를 소 먹이는 비천한 신분에서 등용하여 백성의 위에 올려놓으니, 秦나라에서 감히 그와 같기를 바라지 못하였습니다. 秦나라의 정승이 된 지 6, 7년 만에 동쪽으로 鄭나라를 정벌하고 세 번 晉나라 군주를 세우고【세 번 晉나라 군주를 세웠다는 것은 晉나라 惠公, 懷公, 文公을 세웠음을 이른다.】 한 번 荊나라의 禍를 구원하였으며,【≪史記索隱≫에 말하였다. “≪史記≫〈十二諸侯年表〉를 살펴보건대 秦나라 穆公 28년에 晉나라와 모여 楚나라를 정벌하고 周나라에 조회했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荊나라의 禍를 구원하였다는 것은 자세하지 않다.】 재상이 되었을 적에 수고로워도 수레에 앉지 않고 더워도 일산을 펴지 않았습니다. 五羖大夫가 죽자 秦나라의 남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방아찧는 자는 방아찧는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相은 방아찧을 때 내는 소리이니, 소리로써 서로 권면하고 도움을 이른다.】 이제 君께서 정사에 종사함에 公族을 능멸하고 짓밟고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하니, 公子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가 이미 8년이고, 君은 또 祝驩을 죽이고公孫賈를 刺字하였습니다. 《詩經》에 이르기를 ‘인심을 얻은 자는 일어나고 인심을 잃은 자는 무너진다.’ 하였으니, 이 몇 가지는 인심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君의 위태로움이 아침의 이슬과 같은데도 아직 商‧於의 부유함을 탐하고 秦나라의 정사를 독단하는 것을 영화로 여겨서【秦나라의 정사를 독단하는 것을 영화로 여김을 이른다.】 백성의 원망을 쌓고 있으니, 秦王이 하루아침에 빈객을 버리고 별세하여 조정에 서지 못하신다면 秦나라에서 君을 잡으려는 자가 어찌 적겠습니까?”商鞅이 秦나라에서 仁德과 은혜가 없었으므로 秦나라에서 장차 商鞅을 잡으려 하는 것이 그 징험이 매우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君을 잡으려는 자가 어찌 적겠는가’라고 이른 것이다.】

商鞅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5개월 만에 난이 일어났다.

蘇東坡가 말하였다.

商君의 法은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을 힘써 농사에 힘쓰며 공적인 싸움에는 용감하고 사사로운 싸움은 두려워하게 해서, 양식이 풍족하고 군대가 강하여 帝王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이 형벌만 보고 덕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익만 알고 의리를 알지 못하여 끝내 이 때문에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秦나라를 황제로 만든 것도 商君이요, 秦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도 商君이다. 그가 살아서는 商君에 봉해져 군주가 되어 南面하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이미 秦나라를 황제로 만든 공을 충분히 보상받은 것이요, 죽어서는 수레로 四肢가 찢기는 화를 당하였으니 秦나라를 멸망하게 한 벌을 겨우 갚은 것이다. 이치와 형세가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

[乙酉]三十三年

[乙酉]三十三年이라

鄒人孟軻魏惠王한대 王曰 叟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有以利吾國乎잇가 孟子曰 君은 何必曰利잇고 仁義而已矣니이다 初에 孟子子思할새 嘗問牧民之道는 何先이니잇고 子思曰 先利之니라 孟子曰 君子所以敎民은 亦仁義而已矣니 何必利닛고 子思曰 仁義는 固所以利之也라 上不仁이면 則下不得其所하고 上不義면 則下樂爲詐也니 此爲不利大矣라 故로 易曰 【易乾卦文言也라 利者는 生物之遂니 各得其分之和라 】라하고 又曰 【易繫辭에 精義入神은 以致用也요 利用安身은 以崇德也라하니라 】라하니 此皆利之大者也니라

33년(을유 B.C.336))

鄒나라 사람 孟軻가 魏나라 惠王을 뵙자, 王이 말하기를 “노인께서 천리 길을 멀다고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또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孟子가 말씀하기를 “임금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仁義일 뿐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孟子子思를 師事할 적에 “백성을 기르는 道(방법)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子思는 “먼저 백성을 이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孟子가 “군자가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또한 仁義일 뿐이니 하필 이익입니까?” 하고 묻자, 子思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仁義는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윗사람이 仁하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그 처소(살 곳)를 얻지 못하고, 윗사람이 의롭지 못하면 아랫사람이 속이기를 좋아하니, 이는 이롭지 못함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周易》에 이르기를 ‘利는 義의 和함이다.’【이것은 ≪周易≫ 乾卦 〈文言傳〉의 내용이다. 利는 生物(물건을 낳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각각 그 분수의 和함을 얻는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씀을 이롭게 하고 몸을 편안히 하여 德을 높인다.’【≪周易≫〈繫辭傳〉에 “義를 정밀하게 연구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감은 씀을 지극히 하기 위한 것이요, 씀을 이롭게 하고 몸을 편안히 함은 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이로움의 큰 것이다.”

溫公子思, 孟子之言이 一也니 夫唯仁者라야 爲知仁義之利니 不仁者는 不知也라 故로 孟子之對梁王에 直以仁義하시고 而不及利者는 所與言之人이 異故也니라

[新增]張南軒曰 學者莫先於義利之辨이라 蓋聖人之學은 無所爲而然者니 命之所以不已요 性之所以不偏이요 而敎之所以無窮也라 自非卓然先審夫義利霄壤之判하야 慮思力行하야 不舍晝夜면 其能眞有得乎아 其事雖善이나 而納交要譽與惡其聲之念이 或萌于中이면 是亦利而已矣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子思孟子의 말씀이 똑같으니, 오직 仁者라야 仁義의 이로움을 알 수 있으니, 仁하지 못한 자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孟子梁王에게 대답할 적에 다만 仁義만 말씀하고 이익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더불어 말한 바의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新增]張南軒(張栻)이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義와 利를 분별하는 것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다. 聖人의 학문은 위하는 바가 없으면서 그러한 것이니, 이는 天命이 그치지 않는 것이고 性이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가르침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만일 우뚝이 높아서 義와 利를 먼저 살피기를 하늘과 땅처럼 구분해서 잘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참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그 일은 비록 善하다 하더라도 교분을 맺기 위해서 하고 명예를 구하기 위해서 하고 잔인하다는 惡名을 싫어해서 하려는 생각이 혹 마음속에 싹튼다면 이 또한 이로움일 뿐이다.”

[戊子]三十六年

[戊子]三十六年이라

初에 洛陽人蘇秦이 說秦王以兼天下之術호되 秦王이 不用其言이라 蘇秦이 乃去하야 說燕文公曰 燕之所以不犯寇被兵者는 以趙爲之蔽也니 願大王은 與趙從親【卽縱橫之縱이라 】하야 天下爲一이면 則燕國이 必無患矣리이다 文公이 從之하야 資蘇秦車馬하야 以說趙肅侯曰 當今에 山東之國이 莫强於趙요 秦之所害도 亦莫如趙나 然而秦不敢伐趙者는 畏韓, 魏之議其後也라 秦之攻韓, 魏也에 無有名山大川之限하야 稍蠶食之면 韓, 魏不能支하야 必入臣於秦하리니 秦無韓, 魏之規면 則禍中於趙矣리이다 夫衡(橫)人者는 皆欲割諸侯之地하야 以與秦하나니 秦成則其身富榮【慈湖王氏曰 身富榮句絶이라 】하고 國被秦患이라도 而不與其憂니이다 竊爲大王計컨대 莫若一韓, 魏, 齊, 楚, 燕, 趙하야 爲從親以擯秦이니 令天下之將相으로 會 於洹水【相州縣名이니 後屬魏州라 左傳註에 洹水는 出汲郡林慮縣하야 東北至魏郡長樂縣하야 入淸水라 洹은 音桓이니 今土俗音袁이라 】之上하야 約曰 秦이 攻一國이어든 五國이 各出銳師하야 或撓秦하고 或救之호되 有不如約者어든 五國이 共伐之라하면 則秦甲이 必不敢出函谷以害山東矣리이다 肅侯大悅하야 厚待蘇秦하고 尊寵賜賚之하야 以約於諸侯하다

36년(무자 B.C.333))

처음에 洛陽 사람 蘇秦秦王에게 天下를 겸병하는 방법으로 설득하였으나 秦王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蘇秦이 마침내 秦나라를 떠나 燕나라 文公을 설득하기를 “燕나라가 敵侵을 당하지 않고 병란을 입지 않는 까닭은 趙나라가 울타리가 되어 주기 때문이니, 원컨대 대왕은 趙나라와 從親【從은 바로 縱橫의 縱이다.】하소서. 그리하여 천하가 하나가 되면 燕나라가 반드시 兵禍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文公이 그 말을 따라 蘇秦에게 수레와 말을 주어서 趙나라 肅侯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게 하였다.

“지금 山東의 나라 중에 趙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없고, 秦나라의 폐해도 趙나라보다 더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秦나라가 감히 趙나라를 정벌하지 못하는 것은 韓나라와 魏나라가 그 뒤를 도모할까 두려워해서입니다. 秦나라가 韓, 魏를 공격함에는 名山大川의 한계가 없어서 차츰 蠶食해 가면 韓, 魏가 지탱하지 못하여 반드시 秦나라에 들어가 신하가 될 것이니, 秦나라에 韓, 魏의 견제가 없으면 禍가 趙나라에 집중될 것입니다. 連橫하는 사람들은 모두 諸侯의 땅을 떼어 秦나라에 주려고 하니, 秦나라가 성공하면 자신은 부유하고 영화로우며,【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身富榮’에서 句를 뗀다.”】 자기 나라가 秦나라의 환난을 입더라도 자신은 그 우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대왕을 위하여 계책해 보건대 韓‧魏‧齊‧楚‧燕‧趙를 하나로 만들어 從親을 해서 秦나라를 물리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천하의 將相들로 하여금 洹水【洹水는 相州의 고을 이름이니, 뒤에 魏州에 속하였다. ≪春秋左傳≫ 註에 “洹水는 汲郡 林慮縣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魏郡 長樂縣에 이르러 淸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洹은 음이 환이니, 지금 土俗의 음은 원이다.】 가에 모여 약속하기를 ‘秦나라가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하거든 다섯 나라가 각각 정예병을 내어, 혹은 秦나라를 撓亂시키고 혹은 공격당하는 나라를 구원하되 약속과 같이 하지 않는 나라가 있거든 다섯 나라가 함께 공격한다.’라고 하면 秦나라 군대가 반드시 函谷關을 나와 山東 지방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肅侯가 크게 기뻐하여 蘇秦을 후대하고 높이고 총애하며 물건을 많이 하사하여 諸侯들과 약속하게 하였다.

於是에 蘇秦이 說韓王曰 韓은 地方九百餘里요 帶甲이 數十萬이요 天下之强弓勁弩利劍이 皆從韓出이라 今大王이 事秦하시면 秦이 必求宜陽, 成皐요 今玆效之면 明年에 又復求割地하리니 地有盡이나 而秦之求無已하리이다 鄙諺曰 寧爲鷄口언정 無爲牛後慈湖王氏曰 戰國策에 作寧爲鷄尸언정 不爲牛從이라한대 延駕註에 尸는 主也요 從은 牛子也니 言寧爲鷄中之主언정 不爲牛子之從後也라 鮑彪沈括辨에 皆以爲鷄尸牛從이라 按蘇秦稱牛後者는 蓋故以惡語侵韓하야 欲(昭)[威]侯怒而從之耳니 鷄尸牛從은 謬誤也라 正義曰 鷄口雖小나 猶能進食이요 牛後雖大나 乃出糞也라하니라 】라하니 以大王之賢으로 挾彊韓之兵하야 而有牛後之名하시니 竊爲大王羞之하노이다 韓王이 從其言하다

이에 蘇秦韓王(宣惠王)을 설득하기를 “韓은 땅이 9백여 리이고 갑옷 입은 병사가 수십만 명이며 천하의 강한 활과 굳센 쇠뇌와 예리한 검이 모두 韓나라로부터 나옵니다. 이제 대왕이 秦나라를 섬기시면 秦나라가 반드시 宜陽과 成皐를 요구할 것이요, 금년에 이것을 바치면 명년에 또다시 땅을 떼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니, 땅은 다함이 있으나 秦나라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차라리 닭의 주둥이가 될지언정 소의 뒤(항문)는 되지 말라.’慈湖王氏가 말하였다. “≪戰國策≫에 ‘차라리 닭들 가운데에 주장이 될지언정 어미소의 뒤를 따라가는 송아지는 되지 말라.’ 하였는데, 延駕의 註에 ‘尸는 주장함이요 從은 소 새끼(송아지)이니, 차라리 닭들 가운데에 주장이 될지언정 뒤에 따라가는 소 새끼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하였다. 鮑彪沈括의 辨에 모두 鷄尸牛從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蘇秦이 牛後(소의 항문)라고 칭한 것은 고의로 이런 나쁜 말을 하여 韓나라를 비하해서 威侯로 하여금 노하여 자신의 말을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니, 鷄尸牛從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史記正義≫에 이르기를 ‘닭의 주둥이는 비록 작으나 오히려 음식을 올리는 곳이요, 소의 항문은 비록 크나 바로 똥이 나오는 곳이다.’ 하였다.”】 하였으니, 대왕의 현명함으로 강한 韓나라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소의 뒤라는 이름이 있으시니, 저는 속으로 대왕을 위하여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韓王이 그의 말을 따랐다.

蘇秦이 說魏王曰 大王之地方千里요 武士二十萬이요 蒼頭蒼頭【長大有膂力者之號라 項羽傳에 異軍蒼頭라하니라 應劭曰 言其與衆異也니 蒼頭는 若赤眉靑領以相別也라 國策註에 蒼頭는 魏兵卒之號也라 】二十萬이요 奮擊二十萬이요 廝徒【廝는 養馬之賤者也요 徒는 僕隷也라 】十萬이요 車六百乘이요 騎五千匹이어늘 乃聽群臣之說하야 而欲臣事秦하시니 願大王熟察之하소서 魏王이 聽之하다

蘇秦魏王을 설득하기를 “대왕은 땅이 천 리이고 武士가 20만이고 蒼頭【蒼頭는 신체가 장대하고 완력이 있는 자의 호칭이다. ≪漢書≫〈項羽傳〉에 ‘異軍蒼頭(딴 군대와 식별하기 위하여 蒼頭를 함)’라 하였다. 應劭가 말하였다. “그 무리와 달리함을 말한 것이니, 蒼頭는 눈썹을 붉게 하고 옷깃을 푸르게 하여 서로 구별한 것과 같은 것이다.” ≪戰國策≫ 註에 “蒼頭는 魏나라 병졸의 호칭이다.” 하였다.】가 20만이고 奮擊하는 자가 20만이고 소와 말을 먹이는 廝徒【廝는 말을 기르는 천한 일을 하는 자이고, 徒는 종이다.】가 10만이고 수레가 6백 승이고 騎兵이 5천 필인데, 마침내 여러 신하들의 말을 듣고서 신하가 되어 秦나라를 섬기고자 하시니, 원컨대 대왕은 익숙히 살피소서.” 하니, 魏王이 그 말을 따랐다.

蘇秦이 說齊王曰 齊는 四塞之國이라 地方二千餘里요 帶甲數十萬이요 粟如丘山하고 臨淄之塗에 車轂擊하고 人肩摩하며 連袵成帷하고 揮汗成雨하니 夫韓魏之所以重畏秦者는 爲與秦接境也어니와 今에 秦之攻齊則不然하야 雖欲深入이나 則恐韓魏之議其後하니 秦之不能害齊亦明矣라 夫不料秦之無奈齊何하고 而欲西面而事之하시니 是는 群臣之計過也로소이다 齊王이 許之하다

蘇秦齊王을 설득하기를 “齊나라는 사방이 막혀 있는 요새의 나라입니다. 땅이 2천여 리이고 갑옷 입은 병사가 수십만 명이고 곡식이 언덕과 산처럼 쌓여 있으며, 도성인 臨淄의 길에 수레는 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은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이며 소매가 이어져 휘장을 이루고 사람들이 뿌린 땀이 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韓, 魏가 秦나라를 중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까닭은 秦나라와 접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秦나라가 齊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깊이 쳐들어오고자 하나 韓, 魏가 그 뒤를 도모할까 두려워하니, 秦나라가 齊나라를 해치지 못할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秦나라가 齊나라에게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서쪽을 향하여 秦나라를 섬기고자 하시니, 이는 여러 신하들의 계책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니, 齊王이 허락하였다.

乃南說楚王曰 楚는 天下之彊國也라 地方六千餘里요 帶甲百萬이요 粟支十年하니 此는 霸王之資也라 楚强則秦弱하고 秦强則楚弱하야 其勢不兩立이라 故로 爲大王計컨대 莫如從親以孤秦이라 故로 從親則諸侯割地以事楚요 衡合則楚割地以事秦이니 此兩策者는 相去遠矣니 大王은 何居焉이시리잇고 楚王이 亦許之하다 於是에 蘇秦이 爲從約長하야 幷相六國하고 北報趙하니 車騎輜重【慈湖王氏曰 輜는 載衣車요 重은 載物車라 〈顔〉師古曰 行者之資를 總曰輜重이라 】이 擬於王者러라

蘇秦은 마침내 남쪽으로 가서 楚王을 설득하기를 “楚나라는 천하의 강대국입니다. 땅이 6천여 리이고 갑옷 입은 병사가 100만이고 곡식이 10년을 지탱할 수 있으니, 이는 霸王의 밑천입니다. 楚나라가 강하면 秦나라가 약해지고 秦나라가 강하면 楚나라가 약해지니, 그 형세가 둘이 함께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大王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보건대 從親하여 秦나라를 고립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從親을 하면 제후들이 땅을 떼어 楚나라를 섬기고, 連橫을 하면 楚나라가 땅을 떼어 秦나라를 섬기니, 이 두 가지 계책은 서로 거리가 멉니다. 대왕은 어느 쪽에 있으시겠습니까?” 하니, 楚王도 허락하였다.

이에 蘇秦이 從約長이 되어 아울러 六國의 정승이 되고 北으로 趙나라에 보고하니, 車騎와 輜重【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輜는 옷을 싣는 수레이고 重은 물건을 싣는 수레이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길 가는 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통틀어 輜重이라고 한다.’ 하였다.”】이 王者에 비견되었다.

[己丑]三十七年

[己丑]三十七年이라

秦惠王이 使犀首【魏官名이라 公孫衍爲此官하야 因號犀首하니 猶虎牙將軍之稱이라 】로 欺齊, 魏하야 與共伐趙하야 以敗從約이어늘 趙肅侯蘇秦한대 秦이 恐하야 請使燕必報齊라하고 蘇秦이 去趙하니 而從約이 皆解러라

37년(기축 B.C.332))

秦나라 惠王犀首(公孫衍)【犀首는 魏나라의 관직명이다. 公孫衍이 이 벼슬을 하고 인하여 犀首라고 이름하였으니, 虎牙將軍이라는 호칭과 같은 것이다.】로 하여금 齊, 魏를 속여 함께 趙나라를 치게해서 從約을 무너뜨렸다. 趙나라 肅侯蘇秦을 꾸짖자, 蘇秦이 두려워하여燕나라에 사신 가서 반드시 齊나라에 보복하게 하겠다고 청하고蘇秦이 趙나라를 떠나니, 從約이 모두 와해되었다.

[丙申]四十四年

[丙申]四十四年이라

夏四月에 秦이 初稱王하다

44년(병신 B.C.325))

여름 4월에 秦나라가 처음으로 王을 칭하였다.

[丁酉]四十五年

[丁酉]四十五年이라

蘇秦이 說燕易王曰 臣居燕이면 不能使燕重이요 而在齊則燕重이리이다 易王이 許之어늘 乃僞得罪於燕而奔齊하니 齊宣王이 以爲客卿【戰國時官名이니 爲他國遊宦者設也라 】하다 蘇秦이 說齊王하야 高宮室, 大苑囿하야 以明得意하니 欲以敝齊而爲燕이러라

45년(정유 B.C.324))

蘇秦이 燕나라 易王을 설득하기를 “臣이 燕나라에 있으면 燕나라를 중하게 하지 못하고, 齊나라에 있으면 燕나라가 중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易王이 이를 허락하였다. 蘇秦이 마침내 거짓으로 燕나라에서 죄를 얻었다 하고 齊나라로 달아나니, 齊나라 宣王이 客卿【客卿은 戰國時代의 관명이니, 다른 나라에 가서 벼슬하는 자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으로 삼았다. 蘇秦齊王을 설득하여 궁실을 높게 짓고苑囿를 크게 넓혀서 得意함을 밝히게 하니, 齊나라를 피폐하게 하여 燕나라를 위하고자 해서였다.

[己亥]四十七年

[己亥]四十七年이라

張儀免相하고 相魏하야 欲使魏先事秦하야 而諸侯效之호되 魏王이 不聽이라 秦王이 復陰厚張儀益甚이러라

47년(기해 B.C.322))

秦나라 張儀가 정승을 면직하고魏나라 정승이 되어서魏나라로 하여금 먼저 秦나라를 섬겨 제후들이 본받게 하고자 하였으나 魏王이 듣지 않았다. 秦王은 다시 은밀히 張儀를 후대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庚子]四十八年

[庚子]四十八年이라

王崩하고 子愼靚王이 立하다

田文이 嗣爲薛公【封田嬰於薛하니 田文은 嬰之孼子러니 嗣封於薛하니라 】하니 號曰孟嘗君【孟은 字요 嘗은 邑名이니 在薛之旁하니라 】이라 招致諸侯遊士及有罪亡人하야 皆厚遇之하니 食客이 嘗(常)數千人이라 各自以爲孟嘗君親己라하니 由是로 孟嘗君之名이 重天下러라

48년(경자 B.C.321))

王이 崩하고아들愼靚王이 즉위하였다.

齊나라 田文이 뒤를 이어 薛公이 되니,【孟은 字이고 嘗은 고을의 이름이니. 薛邑의 옆에 있었다.】 이름을 孟嘗君【田嬰을 薛邑에 봉하였으니, 田文은 田嬰의 庶子였는데 뒤를 이어 薛邑에 봉해졌다.】이라 하였다. 孟嘗君이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 및 죄가 있어 도망온 사람들을 招致하여 모두 후대하니, 食客이 항상 수천 명이었다. 이들은 각자 孟嘗君이 자기를 친애한다고 생각하니, 이 때문에 孟嘗君의 이름이 천하에 중하게 되었다.

溫公曰 君子之養士는 以爲民也라 易曰 聖人養賢하야 以及萬民이라하니 夫賢者는 其德이 足以敦化正俗하고 其才足以頓綱振紀하고 其明이 足以燭微慮遠하고 其强이 足以結仁固義하야 大則利天下요 小則利一國이라 是以로 君子豐祿以富之하고 隆爵以尊之하나니 養一人而及萬人者는 養賢之道也라 今孟嘗君之養士也는 不恤智愚하고 不擇臧否하고 盜其君之祿하야 以立私黨, 張虛譽하야 上以侮其君하고 下以蠹其民하니 是는 奸人之雄也라 烏足尙哉아 書曰 受爲天下逋逃主하야 萃淵藪라하니 此之謂也니라

溫公이 말하였다.

“君子가 선비를 기르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周易》 頤卦에 이르기를 ‘聖人이 賢者를 길러서 萬民에게 미친다.’ 하였으니, 賢者는 그 德이 충분히 교화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그 재주가 기강을 정돈하고 떨칠 수 있으며, 그 밝음이 은미함을 밝히고 먼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 강함이 仁義를 굳게 맺을 수가 있어서, 크게는 천하를 이롭게 하고 작게는 한 나라를 이롭게 한다. 이 때문에 君子가 녹봉을 많이 주어 부유하게 하고 벼슬을 높여 주어 존귀하게 하는 것이니, 한 사람을 길러 만민에게 미치는 것은 현자를 기르는 道이다. 그런데 지금 孟嘗君이 선비를 기른 것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돌아보지 않고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가리지 않고, 군주의 녹을 도둑질하여 사사로운 徒黨을 세우고 헛된 명예를 떠벌여 위로는 군주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좀먹었으니, 이는 간사한 사람의 우두머리이다. 어찌 숭상할 것이 있겠는가. 《書經》 〈武成〉에 이르기를 ‘殷王는 천하의 도망한 자들의 주인이 되어, 물고기가 못에 모이고 짐승이 수풀에 모이듯 한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

愼靚王

名定이요 顯王子니 在位七年이라

愼靚王이요 顯王子니 在位七年이라

愼靚王은 이름이 이고 顯王의 아들이니, 재위가 7년이다.

[癸卯]三年

[癸卯]三年이라

楚, 趙, 魏, 韓, 燕이 同伐秦하야 攻函谷關이러니 秦人이 出兵逆之한대 五國之師皆敗走하다

3년(계묘 B.C.318))

楚‧趙‧魏‧韓‧燕이 함께 秦나라를 정벌하여 函谷關을 공격하였는데, 秦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내어 逆攻하니, 다섯 나라의 군대가 모두 敗走하였다.

[甲辰]四年

[甲辰]四年이라

齊大夫與蘇秦爭寵하야 刺殺之하다 張儀說魏襄王曰 梁地는 四平하야 無名山大川之限하고 卒戍楚, 韓, 齊, 趙之境하야 守亭障【亭은 候望者所居요 障은 山中小城이라 漢制塞上要害處에 別築爲城하고 置吏士하야 以捍寇하니 卽此亭障也라 】者 不下十萬하니 梁之地勢 固戰場也라 夫諸侯之約從에 盟洹水之上하야 結爲兄弟以相堅也어니와 今親兄弟同父母라도 尙有爭錢財相殺傷이어늘 而欲恃反覆蘇秦之餘謀하시니 其不可成이 亦明矣니이다 魏王이 乃倍(背)從約而因儀하야 以請成【成은 平也, 和也라 】于秦하니 張儀歸復相秦하다

4년(갑진 B.C.317))

齊나라 大夫가 蘇秦과 은총을 다투어 蘇秦을 찔러 죽였다. 張儀가 魏나라 襄王을 설득하기를 “梁나라 땅은 사방이 평평하여 명산 대천의 한계가 없고 병사들이 楚‧韓‧齊‧趙의 국경에 수자리를 가서 亭障을 지키는【亭은 望樓에서 관망하는 자가 머무는 곳이고, 障은 산속의 작은 城이다. 漢나라 제도에 변방의 要害處에 별도로 城을 쌓고 관리와 군사를 배치하여 적을 막았으니, 바로 亭障이다.】 자가 10만명을 밑돌지 않으니, 梁나라의 지형은 진실로 전쟁터입니다. 제후들이 約從할 때에 洹水 가에서 맹세하여 兄弟를 맺고 서로 우호를 견고히 하였으나, 지금 친형제로 부모를 함께 한 자들도 오히려 돈과 재물을 다투어 서로 죽이고 傷害를 입히는 자가 있는데, 번복하는 蘇秦의 남은 계책을 믿으려 하시니, 성공할 수 없음이 또한 분명합니다.” 하였다. 魏王이 마침내 從約을배반하고張儀를 인하여 秦나라에 화친을 청하니,【成은 평온함이요 화친함이다.】張儀가 秦나라로 돌아가 다시 정승이 되었다.

[乙巳]五年

[乙巳]五年이라

蘇秦, 亦以遊說로 顯於諸侯라 燕相子之蘇代婚하야 欲得燕權이러니 蘇代使於齊而還이어늘 燕王問曰 齊王이 其霸乎아 對曰 不能이러이다 王曰 何故오 對曰 不信其臣이러이다 於是에 燕王이 屬國於子之【鹿毛壽謂燕王曰 人謂堯賢者는 以其能讓於天下故也니 今王以國讓子之하면 是王與堯同名也라하니 從之하니라 】하니 子之南面行王事하고 而老不聽政하고 顧爲臣【顧는 反也니 言燕君이 反爲子之之臣이라 】하야 國事皆決於子之하다

[史略 史評]孟子子噲도 不得與人燕이며 子之도 不得受燕於子噲라하시니 說者謂 諸侯는 土地人民을 受之天子하고 傳之先君하니 私以與人이면 則與者受者가 皆有罪也라하니라

5년(을사 B.C.316))

蘇秦의 아우 蘇代蘇厲 또한 유세로 제후에게 현달하였다. 燕나라 정승 子之蘇代와 혼인을 맺어 燕나라 권력을 얻고자 하였는데, 蘇代가 齊나라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자, 燕王가 묻기를 “齊王이 霸者가 되겠는가?” 하니, 蘇代가 대답하기를 “못됩니다.” 하였다. 燕王이 “무슨 연고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그 신하를 믿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燕王이 국정을 子之에게 맡기니,【鹿毛壽가 燕王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堯임금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천하를 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왕께서 나라를 子之에게 사양하시면 왕께서는 堯임금과 이름이 같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子之가 南面하여 왕의 일을 행하고, 는 늙어서 정사를 다스리지 못하고 도리어 子之의 신하가 되어【顧는 도리어이니, 顧爲臣은 燕나라 임금이 도리어 子之의 신하가 되었음을 말한다.】 國事가 모두 子之에게서 결단되었다.

[史略 史評]孟子가 말씀하기를 “燕王子噲도 남에게 燕나라를 줄 수 없으며, 子之子噲에게서 燕나라를 받을 수 없다.” 하니, 해설하는 자가 이르기를 “諸侯는 토지와 인민을 天子에게서 받았으며 先君에게서 물려받았으니, 만일 사사로이 남에게 준다면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丙午]六年

[丙午]六年이라

王崩하고 子赧王【諡法에 无赧字하니 赧은 慙之甚者라 輕微危弱하야 寄住東西하야 足爲慙赧故로 號之曰赧이라 】이 立하다

6년(병오 B.C.315))

왕이 죽고 아들 赧王【諡法(諡號 짓는 법)에 赧字가 없으니, 赧은 부끄러움이 심한 것이다. 경미하고 위태롭고 약하여 동쪽과 서쪽에 더부살이하여 족히 부끄러워할 만하기 때문에 赧이라고 이름한 것이다.】이 즉위하였다.

赧王

이요 愼靚王子니 在位五十九年이라

赧王이요 愼靚王子니 在位五十九年이라

赧王은 이름이 이고 愼靚王의 아들이니, 재위가 59년이다.

[丁未]元年

[丁未]元年이라

子之爲王三年에 國內大亂이어늘 齊王이 伐燕하야 取子之醢之하고 遂殺燕王하다

元年(정미 B.C.314))

燕나라 子之가 왕이 된 지 3년에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齊王이 燕나라를 정벌하여子之를 잡아 죽여서 젓을 담그고 마침내 燕王를 죽였다.

[己酉]三年

[己酉]三年이라

燕人이 共立太子平하니 是爲昭王이라 昭王이 於破燕之後에 卽位하야 弔死問孤하고 與百姓同甘苦하며 卑身厚幣하야 以招賢者할새 謂郭隗曰 齊因孤【與臣民言則稱孤하니 孤者는 特立无德之稱이라 】之國亂하야 而襲破燕하니 孤極知燕小力少하야 不足以報나 然誠得賢士하야 與共國하야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니 先生은 視可者하라 得身事之호리라 郭隗曰 古之人君이 有以千金으로 使涓人【韋昭曰 涓人은 今中涓也라 漢儀註에 天子有中涓이라한대 〈顔〉師古曰 涓은 潔也니 主居中而潔除之人이라 】하야 求千里馬者러니 馬已死라 買其骨五百金而返이어늘 君大怒한대 涓人曰 死馬도 且買之온 況生者乎잇가 馬今至矣리이다하더니 不期年에 千里之馬至者三이라하니이다 今王이 必欲致士인댄 先從始하시면 況賢於者 豈遠千里哉리잇고 於是에 昭王이 爲하야 改築宮而師事之하니 於是에 士爭趣(趨)燕이라 樂毅는 自魏往하고 劇辛은 自趙往하니 昭王이 以樂毅爲亞卿하야 任以國政하다

[史略 史評]愚按 燕昭遭家不造하야 破滅之餘에 爲衆所立하니 卽欲爲君父報仇라도 宜若衰微而不能濟也라 然이나 燕이 弔死問生하고 親賢下士하며 委任樂毅하야 使之伐齊하야 六月之間에 下齊七十餘城하니 其治效가 猶若是之速이온 而況强大之國과 聖明之君이 能用天下之賢才者乎아 詩曰 無競維人이면 四方其訓之라하니 豈不信哉아

3년(기유 B.C.312))

燕나라 사람들이 함께 太子을 세우니 이가 昭王이다. 昭王은 燕나라가 격파된 뒤에 즉위하여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고아들을 위문하며, 백성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하며, 몸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하여 賢者를 부를 적에 郭隗에게 말하기를 “齊나라는 孤(과인)의【군주가 신하와 백성들을 상대하여 말할 때에 孤라고 칭하니, 孤는 외로이 서서 德이 없는 칭호이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 燕나라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과인은 燕나라가 작고 힘이 부족하여 보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나 진실로 어진 선비를 얻어 나라를 함께 다스려서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과인의 소원이니, 선생은 합당한 자를 살펴보라. 몸소 그를 섬기겠다.” 하였다. 이에 郭隗가 말하였다.

“옛날 人君 중에 千金을 가지고 涓人을【韋昭가 말하였다. “涓人은 지금의 中涓이다.” ≪漢儀≫의 註에 “天子는 中涓이 있다.” 하였는데, 顔師古가 말하기를 “涓은 깨끗함이니, 궁중에 있으면서 깨끗이 소제하는 것을 맡은 사람이다.” 하였다.】 시켜 千里馬를 구하게 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千里馬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뼈를 五百金에 사 가지고 돌아오니, 군주가 크게 노하였습니다. 이에 涓人이 아뢰기를 ‘죽은 말도 샀으니 하물며 산 놈이겠습니까? 千里馬가 이제 이를 것입니다.’ 하였는데, 1년이 못되어 千里馬가 이른 것이 세 필이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반드시 어진 선비를 초치하려고 하신다면 먼저 이 郭隗부터 시작하신다면 하물며 郭隗보다 어진 자가 어찌 千里를 멀다고 여기겠습니까?”

이에 昭王郭隗를 위하여 궁궐을 개축하고 스승으로 섬기니, 이에 선비들이 다투어 燕나라로 달려왔다. 그리하여 樂毅는 魏나라에서 가고 劇辛은 趙나라에서 가니, 昭王樂毅를 亞卿으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史略 史評]내가 살펴보건대 燕나라 昭王은 국가의 불행함을 만나서 국가가 파멸된 뒤에 민중에 의해 옹립되었으니, 만일 君父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해도 마땅히 미약하여 이루지 못했을 듯하다. 그러나 燕나라가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 산 사람을 위문하며,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선비들에게 자기 몸을 낮추며, 樂毅에게 國政을 맡겨서 그로 하여금 齊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6개월 만에 齊나라 70여 개의 城을 함락하였으니, 그 다스림의 효과가 오히려 이와 같이 신속하였는데, 하물며 강대한 나라와 聖明한 군주가 천하의 어진 이와 재주 있는 이를 등용함에 있어서랴. 《詩經》에 이르기를 “이보다 더 강함이 없는 사람(훌륭한 인재)을 등용하면 四方에서 그를 법으로 삼는다.” 하였으니,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庚戌]四年

[庚戌]四年이라

張儀楚王曰 夫爲從者는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니 不格【猶言不敵也라 】이 明矣니이다 今王이 不事秦하시면 秦이 劫韓驅梁而攻楚하리니 則楚危矣리이다 楚王이 許之하다 張儀遂之韓하야 說韓王曰 夫戰孟賁, 烏獲之士하야 以攻不服之弱國은 無異垂千鈞【十黍爲絫요 絫百爲銖요 二十四銖爲兩이니 象二十四氣요 十六兩成斤하니 象四時乘四方也요 三十斤成鈞이니 象一月也요 四鈞成石이니 象四時요 重百二十斤은 象十二月也라 】之重於鳥卵之上이니 必無幸矣리이다 大王이 不事秦하시면 秦이 下甲【猶言頓兵也라 】하야 據宜陽하고 塞成皐하리니 則王之國이 分矣리니 爲大王計컨대 莫如事秦而攻楚니이다 韓王이 許之하다 張儀歸報秦王하니 復使東說齊王曰 從人說大王者 必曰 齊蔽於三晉하고 地廣兵彊하니 雖有百秦이라도 將無奈齊何라하나니 今에 秦, 楚嫁女娶婦하야 爲昆弟之國하고 韓獻宜陽하고 梁效河外【河之南邑이니 若曲沃, 平周等이라 正義에 謂同華州地也라 】하고 趙王이 入朝하야 割河間以事秦하니 大王이 不事秦하시면 秦이 驅韓, 梁, 趙하야 攻之하리니 雖欲事秦이나 不可得也리이다 齊王이 許之하다

4년(경술 B.C.311))

張儀楚王을 설득하기를 “合從을 하는 것은 여러 羊을 몰아 사나운 범을 공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대적하지 못할 것이【不格은 대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분명합니다. 지금 王이 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秦나라가 韓나라를 위협하고 梁(魏)나라를 몰아 楚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楚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楚王이 허락하자, 張儀가 마침내 韓나라에 가서 韓王을 설득하였다.

孟賁烏獲같은 용사를 싸우게 하여 복종하지 않는 약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千鈞(3만 근)의【10黍를 絫라 하고 100絫를 銖라 하고 24銖를 兩이라 하니 24節氣를 상징한 것이요, 16兩을 斤이라 하니 四時가 四方을 탐을 상징한 것이요, 30斤을 鈞이라 하니 한 달을 상징한 것이요, 4鈞을 石이라 하니 四時를 상징한 것이요, 1石의 무게가 120斤인 것은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무게를 새알의 위에 올려놓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大王이 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秦나라가 군대를 주둔하여【下甲은 군대를 주둔하였다는 말과 같다.】宜陽을 점거하고 成皐를 막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왕의 나라가 분열될 것입니다. 大王을 위하여 계책해 보건대 秦나라를 섬기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韓王이 허락하자, 張儀가 돌아가 秦王에게 보고하니, 〈秦王은〉 다시 동쪽으로 사신 가서 齊王을 설득하게 하였다.

“合從하는 사람으로 大王을 설득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齊나라는 三晉에 가려져 있고 땅이 넓고 군대가 강하니, 비록 백 개의 秦나라가 있더라도 장차 齊나라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秦나라와 楚나라가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얻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韓나라는 宜陽을 바치고 梁나라는 河外를 바치고【河外는 黃河 남쪽의 고을이니, 曲沃과 平周 등과 같은 것이다. ≪史記正義≫에 “同州와 華州 땅을 이른다.” 하였다.】趙王은 入朝하여 河間을 떼어 秦나라를 섬기니, 大王이 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秦이 韓‧梁‧趙를 몰아 공격할 것이니, 비록 秦나라를 섬기고자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齊王이 허락하였다.

張儀去하야 西說趙王曰 大王이 收率天下하야 以擯秦하시니 秦兵이 不敢出函谷關이 十五年이라 大王之威 行於山東이어니와 今에 楚與秦爲昆弟之國하고 而韓, 梁이 稱東藩之臣하고 齊獻魚鹽之地하니 此는 斷趙之右肩也라 夫斷右肩而與之鬪하고 失其黨而孤居하면 求欲無危나 得乎잇가 爲大王計컨대 莫如與秦王面約하야 常爲兄弟之國이니이다 趙王이 許之하다 張儀乃北說燕王曰 大王이 不事秦하시면 秦이 下甲雲中, 九原하야 驅趙而攻燕하리니 則易水, 長城은 非大王之有也리이다 燕王이 請獻常山之尾五城하야 以和하다 張儀歸報할새 未至咸陽하야 秦惠王薨하고 子武王立하니 武王이 自爲太子時로 不說(悅)張儀러니 及卽位에 群臣이 多毁短之라 諸侯聞秦王有隙하고 皆畔(叛)衡하고 復合從하다

張儀가 떠나 서쪽으로 가서 趙王을 설득하였다.

“大王이 천하를 거두어 인솔하여 秦나라를 물리치시니, 秦나라 군대가 감히 函谷關을 나가지 못한 지가 15년입니다. 대왕의 위엄이 山東 지방에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지금 楚나라는 秦나라와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韓나라와 梁나라는 東藩의 신하를 칭하고 齊나라는 어물과 소금이 나는 땅을 바쳤으니, 이는 趙나라의 오른쪽 어깨를 끊은 것입니다. 오른쪽 어깨를 끊기고서 남과 싸우며 黨을 잃고 외롭게 있으면서 위태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대왕을 위하여 계책해 보건대 秦王과 대면하여 맹약해서 항상 형제의 나라가 되는 것만 못합니다.”

趙王이 허락하자, 張儀가 마침내 북쪽으로 가서 燕王을 설득하였다.

“대왕이 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秦나라가 군대를 雲中과 九原에 주둔시키고 趙나라를 몰아 燕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易水와 長城은 大王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이에 燕王이 常山의 끝 다섯 城을 떼어 바쳐 화친을 청하였다.

張儀가 秦나라에 돌아가 보고할 적에 咸陽에 이르기 전에 秦나라 惠王이 죽고 아들武王이 즉위하니, 武王은 太子 시절부터 張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張儀를 비방하고 단점을 지적하는 자가 많았다. 諸侯들은 張儀秦王과 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連橫을 배반하고 다시 合從을 하였다.

[辛亥]五年

[辛亥]五年이라

張儀相魏一歲에 卒하다 蘇秦이 皆以縱橫之術로 遊諸侯하야 致位富貴하니 天下爭慕效之러라 又有魏人公孫衍者하니 號曰犀首라 亦以談說로 顯名하고 其餘蘇代, 蘇厲, 周最, 樓緩之徒 紛紜徧於天下하야 務以辯詐相高하니 不可勝紀로되 而, , 이 最著러라

[史略 史評]景春公孫衍張儀는 豈不誠大丈夫乎아 一怒而諸侯懼하고 安居而天下熄이라하니 孟子曰 是는 妾婦之道也니 惡得爲大丈夫乎리오 居天下之廣居하며 立天下之正位하며 行天下之大道하야 得志하야는 與民由之하고 不得志하야는 獨行其道하야 富貴不能淫하며 貧賤不能移하며 威武不能屈이 此之謂大丈夫라하시니라

5년(신해 B.C.310))

張儀가 魏나라에서 정승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張儀蘇秦은 모두 合從, 連橫의 방법으로 諸侯를 유세하여 富貴한 지위를 이루니, 天下가 다투어 사모하고 본받았다. 또 魏나라 사람 公孫衍이란 자가 있어 호를 犀首라 하였는데 그 역시 유세로 이름을 드날렸고, 그 나머지 蘇代蘇厲周最樓緩의 무리가 분분하게 천하에 널려 있어 변설과 속임수로 서로 높이기를 힘쓰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나 그 중에 張儀蘇秦, 公孫衍이 가장 드러났다.

[史略 史評]景春이 말하기를 “公孫衍張儀는 어찌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한 번 노하면 諸侯들이 두려워하고 편안히 있으면 천하가 잠잠하였습니다.” 하니, 孟子가 말씀하기를 “이는 妾婦의 道이니, 어떻게 대장부가 될 수 있겠는가. 천하의 넓은 집[仁]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큰 道[義]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함께 이것을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道를 행해서,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의지를 바꾸지 못하고 위엄과 무력이 지조를 굽히지 못하는 것, 이것을 일러 대장부라 한다.” 하였다.

[壬戌]十六年

[壬戌]十六年이라

秦王【昭襄王稷也니 立於乙卯年이라 】이 約楚王會盟於武關이러니 楚王이 入秦한대 秦人이 留之하다

16년(임술 B.C.299))

秦王【秦王은 昭襄王 稷이니 을묘년에 즉위하였다.】楚王과 武關에서 會盟하기로 약속하였는데, 楚王이 秦나라로 들어가자 秦나라 사람이 억류하였다.

[癸亥]十七年

[癸亥]十七年이라

秦王이 聞孟嘗君之賢하고 使涇陽君【名悝니 秦王同母弟라 】으로 爲質於齊하고 以請하니 孟嘗君이 來入秦이라 秦王이 以爲丞相한대 或謂秦王孟嘗君이 相秦이면 必先齊而後秦하리니 秦其危哉리이다 秦王이 乃以樓緩爲相하고 囚孟嘗君하야 欲殺之하다 孟嘗君이 使人으로 求解於秦王한대 曰 願得君狐白裘【以狐之白毛爲裘라 謂集狐腋之毛니 言美而難得者라 說者謂此天子諸侯燕居之盛服이라 】하노라 孟嘗君이 有狐白裘러니 已獻之秦王하야 無以應求라 客에 有善爲狗盜者하야 入秦藏中하야 盜狐白裘하야 以獻한대 乃爲之言於王而遣之러니 王이 後悔하야 使追之하다 孟嘗君이 至關하니 關法에 鷄鳴이라야 而出客이라 時尙早하고 追者將至러니 客에 有善爲鷄鳴者하야 野鷄聞之하고 皆鳴이어늘 孟嘗君이 乃得脫歸하다

[史略 史評]王荊公曰 世皆稱孟嘗君이 能得士라 士以故歸之하여 而卒賴其力하여 以脫於虎豹之秦이라하니 嗟乎라 孟嘗君은 特鷄鳴狗吠之雄耳니 豈足以言得士리오 不然이면 擅齊之强하여 得一士焉이라도 宜可以南面而制秦이어니 尙取鷄鳴狗吠之力哉아 鷄鳴狗吠之出其門하니 此士之所以不至也니라

17년(계해 B.C.298))

秦王孟嘗君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涇陽君【涇陽君은 이름이 悝이니, 秦王의 同母弟이다.】으로 하여금 齊나라에 인질이 되게 하고 孟嘗君을 청하니, 孟嘗君이 秦나라로 들어갔다. 秦王孟嘗君을 丞相으로 삼자, 혹자가 秦王에게 이르기를 “孟嘗君이 秦나라의 정승이 되면 반드시 齊나라를 먼저 하고 秦나라를 뒤로 할 것이니, 秦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秦王이 마침내 樓緩을 정승으로 삼고 孟嘗君을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孟嘗君이 사람을 시켜 秦王幸姬(총애하는 애첩)에게 풀어줄 것을 요구하니, “君의 狐白裘【狐白裘는 여우의 흰 털로 갖옷을 만든 것이다. 여우의 겨드랑이에 있는 흰 털을 모은 것을 이르는 바, 아름다워 얻기가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해설하는 자가 이르기를 “이것은 천자와 제후가 편안히 거처할 때에 입는 성대한 복장이다.” 하였다.】를 얻기를 원한다.” 하였다. 孟嘗君이 狐白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秦王에게 바쳐 幸姬의 요구에 응할 수가 없었다. 따라온 門客 중에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있어서 秦나라의 창고 안에 들어가 狐白裘를 훔쳐 幸姬에게 바치니, 幸姬가 마침내 그를 위하여 王에게 말하여 보내주었는데, 왕이 후회하여 그를 뒤쫓게 하였다. 孟嘗君이 關門에 이르니 關門의 법에 닭이 울어야 객을 내보냈다. 때는 아직 이르고 추격하는 자는 장차 이르게 되었는데, 門客 중에 닭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자가 있어서 들의 닭들이 이 소리를 듣고 모두 울었으므로 孟嘗君이 마침내 탈출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史略 史評]王荊公(王安石)이 말하였다.

“세상에서 모두 칭하기를 ‘孟嘗君이 선비를 얻었으므로 선비들이 이 때문에 그에게 귀의하여 孟嘗君이 마침내 그 힘을 의뢰하여 호랑이와 표범과 같은 秦나라에서 벗어났다’ 하니, 아! 슬프다. 孟嘗君은 다만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자들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어찌 선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齊나라의 강성함을 독차지해서 한 선비만 얻어도 南面하여 秦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니, 오히려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자의 힘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 닭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자가 그 門下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훌륭한 선비들이 이르지 않은 이유이다.”

趙王이 封其弟하야 爲平原君하니 平原君이 好士하야 食客이 常數千人이러라

趙王이 그의 아우을 봉하여 平原君을 삼으니, 平原君이 선비를 좋아하여 食客이 항상 수천 명이었다.

[乙丑]十九年

[乙丑]十九年이라

楚懷王이 發病하야 薨於秦하니 楚人이 皆憐之하야 如悲親戚이라 諸侯由是로 不直秦이러라

[史略 史評]臨江梁氏懷王이 以貪地之故로 而爲秦所誑하여 輕絶齊交하고 又興忿兵하야 伐秦取敗하니 亦可悟矣어늘 而又信秦之詭言하고 往會武關하야 迫以入秦하고 朝於章臺하야 要以割地라가 卒至客死하니 可悲也夫인저

19년(을축 B.C.296))

楚나라 懷王이 병이 나서秦나라에서 죽으니, 楚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겨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였다. 諸侯들이 이 때문에 秦나라를 정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史略 史評]臨江梁氏(梁寅)가 말하였다.

懷王이 땅을 탐하였기 때문에 秦나라에게 속임을 당하여 齊나라와의 國交를 가볍게 끊고, 또 분개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秦나라를 공격하다가 패하였으니, 또한 깨달을 만하다. 그런데 또다시 秦나라의 속이는 말을 믿고 武關의 모임에 가서 강제로 秦나라로 들어갔고, 章臺宮에 조회하여 땅을 떼어 줄 것을 요구하다가 끝내 客死하였으니, 가련하다.”

[丙子]三十年

[丙子]三十年이라

齊湣王이 旣滅宋而驕하야 乃南侵楚하고 西侵三晉하고 欲幷二周하야 爲天子라 燕昭王이 日夜에 撫循其人하고 乃與樂毅로 謀伐齊할새 王이 悉起兵하야 以樂毅로 爲上將軍하고 幷將秦, 魏, 韓, 趙之兵하야 以伐齊하니 齊湣王이 悉國中之衆하야 以拒之할새 戰于濟西하야 齊師大敗라 遂進軍한대 齊人이 大亂失度하니 湣王이 出走하다 樂毅入臨淄【臨淄水는 出泰山梁父縣西北하야 入汶하니 隋置淄州라 括地志云 靑州臨淄縣은 一名齊城이니 古營丘地니 今益都屬縣이라 】하야 取寶物祭器【凡王者大祭祀에 必陳設文物軒車彛器等하니 因謂此爲祭器라 】하야 輸之於燕하니 燕王이 封樂毅하야 爲昌國【地志에 齊〈郡〉有昌國縣이라 括地志云 漢武更山陽爲昌國하니 今曹州城武東北三十二里梁丘故城이 是라 】君하고 遂使留徇【巡師宣令也라 】齊城之未下者하다 齊王이 走莒【今益都莒州是라 故莒子國이니 郭周四十餘里라 】어늘 楚 使淖齒【淖는 姓也라 楚人이니 江都易王傳에 有美人淖姬한대 蘇林註에 淖音은 泥淖之淖니 尼敎反이라 】로 將兵救齊하고 因爲齊相이러니 淖齒欲與燕分齊地하야 乃遂弑王於鼓里하다

[史略 史評]荀子曰 國者는 天下之利用也요 人主者는 天下之利勢也라 得道以持之면 則大安也요 大榮也요 積美之源也며 不得道以持之면 則大危也요 大累也니 有之不如無之라 及其綦也하야는 索爲匹夫라도 不可得也니 齊湣宋獻이 是也니라

30년(병자 B.C.285))

齊나라 湣王이 宋나라를 멸망시키고는 교만해져서 마침내 남쪽으로 楚나라를 침공하고 서쪽으로 三晉을 침공하고 두 周나라를 兼倂하여 天子가 되고자 하였다. 燕나라 昭王이 밤낮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 따르게 하고, 마침내 樂毅와 齊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다. 昭王이 군대를 모두 일으켜 樂毅를 上將軍으로 삼고는秦‧魏‧韓‧趙의 군대를 아울러 거느리고 齊나라를 정벌하였다. 齊나라 湣王이 국중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항거할 적에 濟西에서 싸워 齊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樂毅가 마침내 進軍하자 齊나라 사람들이 크게 혼란하여 법도를 잃으니, 湣王이 나가 도망하였다.

樂毅가 齊나라 都城인 臨淄【臨淄水는 泰山 梁父縣 서북쪽에서 나와 汶水로 들어가니, 隋나라 때 淄州를 두었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靑州 臨淄縣은 일명 齊城이니 옛날 營丘 땅으로 지금 益都의 屬縣이다.” 하였다.】에 들어가 寶物과 祭器를 취하여【王者가 크게 제사 지낼 때에 반드시 文物과 軒車와 彛器(종묘의 제기) 등을 진설하니, 인하여 이런 것들을 일러 祭器라고 한 것이다.】燕나라로 수송하니, 燕王樂毅를 봉하여 昌國【昌國은 ≪漢書≫ 〈地理志〉에 “齊郡에 昌國縣이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이르기를 “漢나라 武帝가 山陽을 고쳐 昌國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曹州 城武 동북쪽 32리 梁丘의 옛 城이 이곳이다.” 하였다.】君을 삼고 마침내 齊나라에 머물면서 齊나라 성 가운데 아직 항복하지 않은 곳을 순행하여【留徇은 군대를 순행하여 명령을 선포하는 것이다.】 항복받게 하였다. 齊王이 莒【莒는 지금의 益都 莒州가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莒는 子爵의 나라이니, 성곽의 둘레가 40여 리였다.】 땅으로 도망가자楚나라가 淖齒【淖는 姓이다. 楚나라 사람이니, ≪漢書≫ 〈江都易王傳〉에 “미인 淖姬가 있다.” 하였는데, 蘇林의 註에 “淖의 音은 泥淖의 淖로 읽으니, 尼敎反(뇨)이다.” 하였다.】를 시켜 병력을 인솔하고 齊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인하여 齊나라 정승이 되게 하였는데, 淖齒가 燕나라와 함께 齊나라 땅을 나누어 소유하고자 하여 마침내 湣王을 鼓里에서 시해하였다.

[史略 史評]荀子가 말하였다.

“나라는 천하의 이로운 쓰임이고, 人主는 천하의 이로운 권세이다. 道를 얻어 이를 유지하면 크게 편안하고 크게 영화롭고 아름다움이 쌓이는 근원이며, 道를 얻어 이를 유지하지 못하면 크게 위태롭고 크게 누가 되니, 있는 것이 없는 것만 못하다. 그 심함에 미쳐서는 匹夫가 되려 해도 될 수가 없으니, 齊나라 湣王과 宋나라 獻王이 이들이다.”

聞畫邑【括地志云 戟里城은 在臨淄西北三十里하니 春秋棘邑也라 又名畫邑이니 王蠋所居라 】人王賢하고 令軍中하야 環畫邑三十里無入하고 使人請한대 이 謝不往이어늘 燕人曰 不來면 吾且屠邑【屠는 殺也니 殺其民을 若屠六畜然也라 】하리라 曰 忠臣은 不事二君이요 烈女는 不更二夫라 齊王이 不用吾諫故로 退而耕於野러니 國破君亡에 吾不能存하고 而又欲劫之以兵하니 吾與其不義而生으론 不若死라하고 遂經其頸而死하니라

樂毅는 畫邑【畫邑은 ≪括地志≫에 이르기를 “戟里城이 臨淄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니, 春秋時代의 棘邑이다. 또 畫邑이라고도 이름하니, 王蠋이 살던 곳이다.” 하였다.】 사람 王蠋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는 軍中에 명령하여 畫邑 30리를 에워싸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시켜 王蠋을 초청하였으나 王蠋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燕나라 사람이 위협하기를 “오지 않으면 내 장차 고을을 屠戮하겠다.”【屠는 죽임이니, 백성을 죽이기를 六畜(집에서 기르는 여섯 가지 가축인 소, 말, 양, 돼지, 개, 닭)을 도살하듯이 하는 것이다.】 하니, 王蠋이 말하기를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烈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齊王이 내 諫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나 들에서 농사짓고 있었는데, 나라가 격파되고 군주가 망함에 내가 보존하지 못하였고 또 그대들이 군대로 위협하니, 내 의롭지 못하게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죽었다.

○ 燕師乘勝長驅하니 齊城이 皆望風奔潰러라 樂毅修整燕軍하야 禁止侵掠하고 求齊之逸民하야 顯而禮之【逸民者는 節行超逸也라 林少穎曰 逸은 俊逸之逸이니 如俊民之義요 非隱逸也라 禮之는 謂以禮遇之也라 】하며 寬其賦斂하고 除其暴令하고 修其舊政하니 齊民이 喜悅이라 祀桓公, 管仲於郊하고 表賢者之閭하고 封王蠋之墓하니 六月之間에 下【彼自歸伏曰下요 又以兵威伏人曰下라 】齊七十餘城하야 皆爲郡縣하다

燕나라 군대가 승승장구하니, 齊나라 城들이 모두 멀리서 기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졌다. 樂毅는 燕나라 군대를 정돈하여 침략하는 것을 금지하고 齊나라의 逸民(뛰어난 인물)을 찾아 드러내어 예우하였으며,【逸民은 절행이 뛰어난 것이다. 林少穎(林之奇)이 말하였다. “逸은 俊逸(재주가 뛰어남)의 逸이니, 俊民이라는 뜻과 같고 隱逸을 말한 것이 아니다. 禮之는 禮로써 대우함을 이른다.”】 부역과 세금을 관대하게 하고 포악한 명령을 제거하고 옛 政事를 닦으니, 齊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桓公管仲을 郊外에서 제사하고 어진 자의 마을 문에 旌表하고 王蠋의 무덤을 봉분하니, 여섯 달 사이에 齊나라 70여 성을 항복시켜【저가 스스로 귀순하여 항복하는 것을 下라고 하고, 또 군대의 위세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을 下라고 한다.】 모두 郡縣을 만들었다.

[戊寅]三十二年

[戊寅]三十二年이라

淖齒之亂에 王孫賈湣王이라가 失王之處러니 其母曰 汝朝出而晩來면 則吾倚門而望하고 汝暮出而不還이면 則吾倚閭而望이로라 汝今事王이라가 王走어시늘 汝不知其處하니 汝尙何歸焉고 王孫賈乃攻淖齒하야 殺之하니 於是에 齊亡臣이 相與求湣王法章하야 立以爲齊王하고 保莒城하야 以拒燕하다

32년(무인 B.C.283))

齊나라 淖齒의 난리에 王孫賈湣王을 수행하다가 왕이 계신 곳을 잃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늦게 오면 내가 문에 기대어 바라보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바라본다. 네가 이제 왕을 섬기다가 왕이 도망가셨는데 네가 그 처소를 알지 못하니, 네가 그러고도 어떻게 돌아온단 말이냐?” 하였다. 王孫賈가 마침내 淖齒를 공격하여죽이니, 이에 齊나라의 도망한 신하들이 서로 함께 湣王의 아들法章을 찾아 세워 齊王으로 삼고莒城을 지켜 燕나라에 항거하였다.

趙王이 得楚和氏璧【卞和는 楚之野民이라 韓子曰 和得璞於楚山中하야 獻之武王한대 王使玉人相之러니 曰 石也라하야늘 刖其左足하고 文王立에 和又奉璞獻한대 玉人曰 石也라하야늘 刖其右足하다 成王立에 和抱璞泣이어늘 王使玉人破之하야 得寶하니라 】이러니 秦昭王이 欲之하야 請易以十五城이라 趙王이 以 問相如【韓獻子玄孫曰康이니 食邑於藺하야 因氏焉이라 按藺은 趙邑이라 】한대 對曰 秦以城求璧이어늘 而王不許면 曲在我矣요 我與之璧이어늘 而秦不與我城이면 則曲在秦이니 臣은 願奉璧而往하야 使秦城不入이어든 臣이 請完璧而歸호리이다 相如至秦하니 秦王이 無意償趙城이라 相如乃紿秦王하야 復取璧하야 遣使者懷歸趙하고 而以身待命於秦하니 秦王이 賢而弗誅하고 禮而歸之라 趙王이 以相如爲上大夫하다

趙王이 楚나라 和氏璧【卞和는 楚나라의 시골 백성이다. ≪韓非子≫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卞和가 楚나라 산중에서 璞玉을 얻어 武王에게 바쳤는데, 왕이 玉工으로 하여금 이것을 감정하게 하니, ‘돌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또다시 璞玉을 받들고 가서 바쳤으나 玉工이 ‘돌입니다.’ 하니, 왕이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成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璞玉을 안고 우니, 왕이 玉工을 시켜 그것을 깨게 하여 寶玉을 얻었다.”】을 얻었는데, 秦나라 昭王이 이것을 욕심내어 15개 城과 바꿀 것을 청하였다. 趙王이 이것을 藺相如【藺相如는 韓獻子의 玄孫인 康이니, 藺을 食邑으로 받았으므로 인하여 氏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藺은 趙나라 邑이다.】에게 물으니, 藺相如가 대답하기를 “秦나라가 城을 가지고 璧玉(화씨벽)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데 왕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잘못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秦나라에 벽옥을 주었는데도 秦나라가 우리에게 城을 주지 않는다면 잘못이 秦나라에 있으니, 신이 원컨대 벽옥을 받들고 가서 만일 秦나라가 성을 들이지 않으면 신이 벽옥을 온전히 하여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藺相如가 秦나라에 이르니, 秦王은 趙나라에 성을 줄 뜻이 없었다. 藺相如가 마침내 秦王을 속여 다시 벽옥을 취해서, 使者에게 품고서 趙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秦나라에서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니, 秦王이 어질게 여겨 죽이지 않고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趙王藺相如를 上大夫로 임명하였다.

[壬午]三十六年

[壬午]三十六年이라

秦王이 會趙王於河外澠池할새 王與趙王으로 飮酒酣에 秦王이 請趙王鼓瑟【瑟은 二十五絃이니 伏羲所作이라 趙人善瑟故로 秦王請鼓之하니라 】한대 趙王이 鼓之어늘 藺相如復請秦王擊缶【缶는 盛酒瓦器니 秦俗에 擊之以節樂이라 爾雅云 盎을 謂之缶라한대 註에 盆也라 】한대 秦王이 不肯이라 相如曰 五步之內【禮記에 八尺爲步요 今以周尺六尺四寸爲步라 此言五步之內는 蓋言至近也라 】에 臣이 請得以頸血濺大王矣리이다 左右欲刃相如어늘 相如張目叱之하니 左右皆靡라 王不豫하야 爲一擊缶하고 罷酒하다 秦終不能有加於趙하고 趙人亦盛爲之備하니 秦不敢動이러라

36년(임오 B.C.279))

秦王趙王과 河外의 澠池에서 會盟할 적에 秦王趙王과 함께 술을 마셔 취하였다. 秦王趙王에게 비파를 탈 것을 청하자【비파는 스물다섯 개의 줄이 있는 현악기이니, 伏羲氏가 만든 것이다. 趙나라 사람이 비파를 잘 탔기 때문에 秦王이 비파를 타기를 청한 것이다.】趙王이 비파를 타니, 藺相如가 다시 秦王에게 질장구를 칠 것을 청했으나【缶는 술을 담는 질그릇이니, 秦나라 풍속에 이것을 두드려 음악의 장단을 맞추었다. ≪爾雅≫에 이르기를 “盎을 일러 缶라 한다.” 하였는데, 註에 “동이이다.” 하였다.】秦王은 치려 하지 않았다. 藺相如가 말하기를 “5步 안【≪禮記≫ 〈王制〉에 “옛날에는 8척을 1보라 하였고, 지금은 周尺으로 6척 4촌을 1보라 한다.” 하였다. 여기에서 5보의 안이라고 말한 것은 지극히 가까움을 이른다.】에서 신이 목의 피를 대왕에게 뿌리겠습니다.” 하니, 左右의 신하들이 藺相如를 칼로 찌르고자 하였다. 藺相如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흩어졌다. 秦王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趙王을 위하여 한 번 질장구를 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秦나라는 끝내 趙나라에 침략을 가하지 못하였고 趙나라 사람들도 성대히 대비하니, 秦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趙王이 歸國하야 以藺相如爲上卿하니 位在廉頗之右라 廉頗曰 我見相如하면 必辱之하리라 相如聞之하고 每朝에 常稱病하고 不欲爭列하야 出而望見이면 輒引車避匿하니 其舍人【親近左右之通稱也니 後遂以爲親屬官號하니라 】이 皆以爲恥라 相如曰 子視廉將軍컨대 孰與秦王고 曰 不若이니이다 相如曰 夫以秦王之威로도 而相如廷叱之하고 辱其群臣하니 相如雖駑나 獨畏廉將軍哉아 顧吾念之컨대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는 徒以吾兩人在也라 今兩虎共鬪면 其勢不俱生이니 吾所以爲此者는 先國家之急而後私讐也로라 廉頗聞之하고 肉袒負荊【荊은 楚也니 可以爲鞭이니 蓋令其鞭己以謝罪也라 】하야 至門謝罪하고 遂 爲刎頸之交【刎은 斷也라 崔浩曰 言交契深重하야 要齊生死하야 雖斷頸而無悔니 是爲刎頸之交라 】하니라

龜山楊氏曰 趙社稷安危之機가 不在璧之存亡이라 夫以小事大에 古人有以皮幣犬馬珠玉而不得免者【謂太王事니 見孟子하니라 】어든 況一璧乎아 雖與之라도 可也라 相如計不出此라가 不三數年에 趙卒有覆軍陷城之禍者하니 徒以璧爲之祟也라 然則全璧歸趙가 何益哉아 至於澠池之會하야는 則其危又甚矣라 相如智勇이 不足重趙하야 使秦不敢惴【惴는 憂懼也니 言秦不敢使趙憂懼也라 】焉하고 乃欲以頸血濺之하니 豈孔子所謂暴虎憑河하야 死而無悔者歟아

趙王이 서울로 돌아와 藺相如를 上卿으로 삼으니, 지위가 廉頗의 위에 있었다. 廉頗가 말하기를 “내 藺相如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 하니 藺相如가 이 말을 듣고 매번 조회할 때마다 항상 병을 칭탁하여 班列을 다투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가다가 廉頗가 멀리 보이면 번번이 수레를 이끌고 피하여 숨으니, 舍人들【舍人은 左右에 가까이 있는 사람의 통칭인데, 후세에는 마침내 親屬의 官名으로 삼았다.】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藺相如가 말하기를 “그대가 보기에 廉將軍秦王이 누가 더 무서운가?” 하니, “秦王만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藺相如가 말하기를 “秦王의 위엄에도 내가 조정에서 그를 꾸짖고 여러 신하들을 모욕하였으니, 내가 비록 노둔하나 유독 廉將軍을 두려워하겠는가? 다만 내가 생각건대 강한 秦나라가 감히 우리 趙나라에 침략을 가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마리 범이 함께 싸우면 그 형세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니,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廉頗가 이 말을 듣고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지고【면할 수 없다는 것은 周나라 太王의 일을 이르니, ≪孟子≫ 〈梁惠王 下〉에 보인다.】藺相如의 문(집)에 이르러 사죄하고 마침내 刎頸之交【荊은 가시나무이니 채찍을 만들 수 있는 바, 자신을 채찍질하게 하여 謝罪한 것이다.】를 맺었다.

龜山楊氏(楊時)가 말하였다.

“趙나라 社稷의 편안하고 위태로운 기틀은 璧玉의 存亡에 달려 있지 않았다.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을 섬길 때에 옛사람은 짐승의 가죽과 폐백과 개와 말과 주옥을 가지고 섬겼어도 위태로움을 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惴는 근심하고 두려워함이니, 秦나라가 감히 趙나라로 하여금 〈秦나라를〉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하물며 한 벽옥에 있어서이겠는가. 비록 이것을 秦나라에 준다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藺相如는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았다가 수삼 년이 못되어 趙나라는 끝내 군대가 전복되고 성이 함락되는 화가 있었으니, 이는 한갓 이 벽옥이 빌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벽옥을 온전히 보전하여 趙나라로 돌아온 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澠池의 會盟에 이르러서는 그 위태로움이 더 심하였다. 藺相如의 지혜와 용맹이 趙나라를 중하게 만들어서 秦나라가 〈趙나라를〉 감히 두려워하게 하지 못하고는【刎은 자름이다. 崔浩가 말하였다. “교분이 깊고 중해서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여 비록 목을 베이더라도 후회함이 없음을 이르니, 이것을 刎頸之交라 한다.”】 마침내 목의 피를 뿌리고자 하였으니, 어찌 孔子의 이른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고 맨몸으로 黃河를 건너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다.’는 자가 아니겠는가.”

○ 是時에 齊地皆屬燕호되 獨莒, 卽墨이 未下라 樂毅圍卽墨하니 卽墨大夫出戰而死어늘 卽墨人曰 安平之戰에 田單宗人【田單은 臨淄市掾이니 齊之踈族이라 宗人은 官名也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掌禮與其衣服宮室車旗之禁令이라 】이 以鐵籠得全【田單이 使其宗人으로 以鐵籠傅車轊라 註에 傅는 音附요 轊는 音衛라 傅者는 截其軸하야 與轂齊하야 以鐵鍱傅軸末하고 施轄於鐵中하야 以制轂하야 堅而易進也라 轊는 車軸頭也라 [頭註]得全은 以鐵籠傅車轊니 及城潰에 人爭門出할새 皆以軸折被擒이로되 獨單宗人이 得免하야 奔卽墨하니라 】하니 是는 多智習兵이라하고 因共立以爲將하야 以拒燕하다

이때에 齊나라 땅이 모두 燕나라에 속하였으나 오직 莒와 卽墨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樂毅가 卽墨을 포위하니卽墨大夫가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卽墨사람들이 말하기를 “安平의 전투에서 田單의 宗人만이【田單은 臨淄 시장의 아전이니, 齊나라의 먼 王族이었다. 宗人은 官名이다. ≪周禮≫에 都宗人과 家宗人이 있는 바, 禮와 衣服‧宮室‧車旗의 禁令을 맡았다.】 鐵籠으로 온전하였으니,【[釋義]田單이 宗人으로 하여금 鐵籠을 수레바퀴 축의 끝 부분에 붙이게 한 것이다. 註에 “傅는 음이 부이고 轊는 음이 위이다. 傅는 수레바퀴 축을 잘라 수레바퀴통과 똑같게 하고 쇳조각을 수레바퀴 축의 끝 부분에 붙인 다음 빗장을 鐵籠 가운데에 걸어서 바퀴통을 제어하여 견고하고 나아가기 쉽게 한 것이다. 轊는 차축의 끝 부분이다.” 하였다. [頭註]得全은 鐵籠을 차축에 붙인 것이니, 城이 함락되자 사람들이 다투어 성문을 나올 적에 모두 차축이 부러져 사로잡혔으나 유독 田單의 宗人만은 죽음을 면하여 卽墨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이는 지혜가 많고 병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고는 인하여 함께 세워서 장군으로 삼아燕나라에 항거하였다.

樂毅圍二邑三年에 未下라 或이 讒之於燕昭王樂毅는 智謀過人하야 伐齊呼吸之間에 剋七十餘城하고 今不下者兩城爾니 非其力不能拔이라 欲久仗兵威하야 以服齊人하야 南面而王爾라하다 昭王이 於是에 置酒大會하고 引言者하야 斬之하고 遣國相하야 立樂毅齊王하니 惶恐不受하고 拜書하야 以死自誓라 由是로 齊人이 服其義하고 諸侯畏其信하야 莫敢復有謀者러라

樂毅가 莒와 卽墨 두 고을을 포위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함락하지 못하니, 혹자가 燕나라 昭王에게 참소(모함)하기를 “樂毅는 智謀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齊나라를 정벌하여 숨쉬는 사이(잠깐 동안)에 70여 개의 성을 이기고 지금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두 성뿐이니, 그 힘이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군대의 위엄에 의지하여 齊나라 사람들을 복종시켜 南面하여 왕 노릇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昭王이 이에 술자리를 베풀어 크게 사람들을 모으고, 참소한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고는 國相을 보내어 樂毅를 세워 齊王으로 삼으니, 樂毅가 황공하여 받지 않고 글을 올려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다. 이 때문에 齊나라 사람들은 그 의리에 감복하고 諸侯들은 그의 신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도모하는 자가 없었다.

頃之요 昭王薨하고 惠王立하니 惠王은 自爲太子時로 嘗不快於樂毅러라 田單이 聞之하고 乃縱反間【孫子兵法曰 反間者는 因敵間而用之也니 凡軍之所欲擊과 城之所欲攻과 人之所欲殺에 必先知其守將左右謁者(間)[門]者舍人之姓名하고 令吾之間으로 必索敵間之來間我者하야 因而利〈之〉하고 導〈而〉舍之라 故反間을 可得用也라하니라 】樂毅燕新王으로 有隙하야 畏誅而不敢歸하고 以伐齊爲名하니 齊人은 唯恐他將來면 卽墨殘矣라하다 燕王已疑러니 得齊反間하고 乃使騎劫【姓名也라 】代將하고 而召樂毅한대 遂犇(奔)趙하니 燕將士由是로 憤惋不和러라 田單이 乃身操 版鍤【與臿通하니 鍫也라 】하야 與士卒分功하고 妻妾을 編於行伍【二十五人爲行이요 伍人爲伍라 】之間하고 盡散飮食하야 饗士하며 令甲卒皆伏하고 使老弱女子로 乘城【登城而守也라 】約降하니 燕軍益懈라

얼마 후 昭王이 죽고 惠王이 즉위하니, 惠王은 태자가 되었을 때부터 일찍이 樂毅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田單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反間을 놓아【≪孫子兵法≫에 말하였다. “反間은 적의 첩자를 인하여 이용하는 것이니, 무릇 군대를 공격하고자 하고 성을 공략하고자 하고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守將과 左右 謁者와 문지기와 舍人의 姓名을 알아낸 다음 반드시 우리측 첩자로 하여금 적국의 첩자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첩자 노릇 하는 자를 찾아내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유도하여 놓아 보낸다. 그러므로 反間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말하기를 “樂毅가 燕나라의 새로 즉위한 왕과 틈이 있어서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齊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니, 齊나라 사람들은 행여 다른 장수가 오면 卽墨이 잔파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燕王이 이미 樂毅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齊나라의 反間을 얻고는 마침내 騎劫【騎劫은 姓名이다.】으로 하여금 대신 장수가 되게 하고 樂毅를 불렀다. 이에 樂毅가 趙나라로 도망가니, 燕나라 장병들이 이로 말미암아 분해 하며 불화하였다.

田單이 마침내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鍤은 臿과 통하니 가래이다.】 사졸들과 일을 나누고, 妻妾을 行伍의 사이에 편입시키고【25명을 行이라 하고 5명을 伍라 한다.】 음식을 모두 흩어 군사들을 먹이며, 갑옷 입은 병사들을 모두 매복시키고 노약자와 여자들로 하여금 城에 올라가【乘城은 성에 올라가서 지키는 것이다.】 항복할 것을 약속하게 하니, 燕나라 군사들이 더욱 해이해졌다.

田單이 乃收城中하야 得牛千餘하야 爲絳繒衣호되 畫以五采龍文하고 束兵刃於其角하고 而灌脂束葦於其尾하야 燒其端하고 鑿城數十穴하야 夜縱牛하고 壯士五千人이 隨其後하니 牛尾熱하야 怒而奔燕軍이라 燕軍이 大驚視牛하니 皆龍文이라 所觸에 盡死傷이요 而城中이 鼓譟從之하고 老弱이 皆擊銅器爲聲하니 聲動天地라 燕軍이 大敗走어늘 齊人이 殺騎劫하고 追亡 逐北【逃亡者追之하고 奔北者逐之라 北方은 幽陰之地니 軍敗曰北라 】하니 所過城邑이 皆叛燕하고 復爲齊하야 齊七十餘城이 皆復焉이라 乃迎襄王於莒하야 入臨淄하니 封田單하야 爲安平君하다

田單이 마침내 城 안에서 거두어 천여 마리의 소를 얻어서 붉은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되 五采와 용 무늬를 그리고 소의 뿔에 병기와 칼날을 묶어 매고는 기름을 부은 갈대를 소꼬리에 묶어 그 끝에 불을 붙이고, 城에 수십 군데 구멍을 뚫은 다음 밤에 소를 풀어놓고 장사 5천 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소는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이 나서 燕나라 군대로 달려갔다. 燕나라 군사들이 크게 놀라 소를 바라보니 모두 용의 문채였다. 소에게 받쳐 모두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으며, 城 안에서는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소의 뒤를 따르고 노약자들이 모두 구리 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燕나라 군사들이 대패하여 도망하자, 齊나라 사람들은 騎劫을 죽이고 도망하는 자를 추격하고 敗走하는 자를 쫓아가니,【追亡逐北는 도망가는 자를 추격하고, 패하여 달아나는 자를 쫓는 것이다. 北方은 그윽한 陰地이기 때문에 군대가 패주하는 것을 北라 한다.】 지나가는 城邑들이 모두 燕나라를 배반하고 다시 齊나라가 되어서 齊나라 70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마침내 襄王을 莒에서 맞이하여 臨淄로 들어오니, 田單을 봉하여 安平君을 삼았다.

田單이 將攻狄할새 往見魯仲連한대 仲連曰 將軍攻狄에 不能下也리라 田單曰 臣이 以卽墨破亡餘卒로 破萬乘之燕하고 復齊之墟어늘 今攻狄而不下는 何也오하고 上車弗謝而去하다 遂攻狄하야 三月不克하니 田單이 乃懼하야 問魯仲連한대 仲連曰 將軍之在卽墨엔 坐則織蕢하고 立則杖鍤하야 爲士卒倡하니 當此之時하야 將軍은 有死之心하고 士卒은 無生之氣라 所以破燕也어니와 今엔 將軍이 東有夜(掖)邑【益封田單以夜邑萬戶하니 今益都萊州掖縣이 是也라 】之奉하고 西有淄上之娛하고 黃金橫帶而騁乎淄, 澠【澠은 音繩이라 淄水는 出淄州淄川縣하고 澠水는 出益都臨淄縣이라 】之間하야 有生之樂하고 無死之心하니 所以不勝也니라 田單之有心을 先生志之矣로다하고 明日에 乃厲(勵)氣循城하야 立於矢石【越范蠡始制石砲하니 重十二斤이라 爲機以發하면 行三百步라 】之所하야 援枹鼓之하니 狄人이 乃下하다

田單이 狄(북쪽 오랑캐)을 공격하려 할 적에 魯仲連을 찾아가서 만나 보니, 魯仲連이 말하기를 “장군이 狄을 공격함에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田單이 말하기를 “신이 卽墨의 패망하고 남은 병졸로 萬乘의 燕나라를 격파하고 齊나라의 옛 땅을 수복하였는데 지금 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다고 함은 어째서인가?” 하고, 수레에 올라 하직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마침내 狄을 공격하여 석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니, 田單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魯仲連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魯仲連이 대답하기를 “장군이 卽墨에 있을 적에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잡아 사졸들의 창도가 되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장군은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고 士卒들은 살려는 기운이 없었다. 이 때문에 燕나라를 격파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장군이 동쪽으로는 掖邑【田單에게 夜邑 만 호를 더 봉해 주니, 지금의 益都 萊州 掖縣이 이곳이다.】의 받듦이 있고 서쪽으로는 淄水 가의 즐거움이 있고 황금을 띠에 두르고 淄水와 澠水【澠은 음이 승이다. 淄水는 淄州 淄川縣에서 발원하고 澠水는 益都 臨淄縣에서 발원한다.】 사이를 달려서 사는 즐거움이 있고 죽으려는 마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田單이 말하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선생이 알았다.” 하고는 다음날 마침내 기운을 가다듬어 성을 순행하여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越나라 范蠡가 처음으로 石砲를 만드니, 무게가 12斤이었다. 틀을 만들어 발사하면 300步를 날아갔다.】 곳에 서서 북채를 당겨 북을 치니, 狄人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辛卯]四十五年

[辛卯]四十五年이라

魏人睢亡入秦하야 說秦王曰 以秦國之大와 士卒之勇으로 以治諸侯는 譬如走韓盧【盧는 田犬也니 韓國盧는 天下之駿犬이라 】而搏蹇兎也어늘 而閉關十五年에 不敢窺兵於山東者는 是穰侯爲秦謀不忠이요 而大王之計 亦有所失也로소이다 王跽曰 願聞失計하노라 曰 夫穰侯越韓魏而攻齊는 非計也라 今王은 不如遠交而近攻이니 得寸이면 則王之寸也요 得尺이면 則王之尺也라 今夫韓魏는 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니 王若欲霸인댄 必親中國하야 以爲天下樞【猶言出入來往所由라 】하야 以威楚趙니 楚趙皆附면 齊必懼矣요 齊附則韓魏를 因可虜也리이다 王曰 善타하고 乃以范睢爲客卿하야 與謀國事러라

林之奇曰 六國之於秦에 其地則六倍之地요 其兵則六倍之兵이요 其食則六倍之食이로되 所以卒幷於秦者는 蓋秦知天下之勢하고 而六國不知故也라 秦之所以知之者는 其謀出於范睢遠交近攻之策이라 取韓魏하야 以執天下之樞하야 旣在我矣면 則齊楚安得而不滅哉아 其遠交齊楚也라 故로 二十年不加兵於楚하고 四十年不加兵於齊하며 其近攻韓魏也라 故로 今年伐韓하고 明年伐魏하야 更出迭入하야 殆無寧歲라 故로 韓魏不支하야 終折而入於秦하니 韓魏旣折而入于秦은 此燕齊楚所以相繼而亡也라 秦之取六國에 謂之蠶食이라하니 蓋蠶之食葉이 自近而及遠이라 六國이 不知天下之樞在於韓魏하야 秦人伐之로되 而齊楚不救하니 是는 以天下之樞로 而委之於秦也니 六國이 安得而不亡哉리오 大抵欲平天下者는 必先知其難易之勢니 自其易而攻之而後에 及其難이라 故로 唐憲宗이 欲平藩鎭에 張弘靖以爲先淮蔡而後魏博하고 周世宗이 欲平天下에 王朴以爲先江南而後河東이러니 卒如其言하니라

45년(신묘 B.C.270))

魏나라 사람 范睢가 도망하여秦나라에 들어가서 秦王을 설득하기를 “秦나라의 강대함과 士卒의 용맹함을 가지고 諸侯를 다스리는 것은 비유하면 韓盧(名犬)【盧는 사냥개이니, 韓나라의 盧犬은 천하의 잘 달리는 개였다.】를 달리게 하여 다리를 저는 토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關門을 닫은 지 15년 동안 감히 山東 지방에 군대를 출동시켜 엿보지 못하는 것은 穰侯가 秦나라를 위하여 도모함이 불충하고 大王의 계책이 또한 잘못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王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失策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范睢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穰侯가 韓‧魏를 넘어 齊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왕께서는 먼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가까운 나라를 공격할 경우〉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치 땅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자 땅이 될 것입니다. 지금 韓‧魏는 中國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이고 天下의 中樞이니, 왕께서 만약 霸者가 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中國(韓‧魏)을 가까이하여 천하의 중추를 삼아서(잡아서)【출입하고 왕래할 적에 경유하는 곳이라고 말함과 같다.】楚와 趙를 위협해야 할 것이니, 楚와 趙가 모두 따르면 齊나라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齊나라가 따르면 韓과 魏를 인하여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王이 “좋다.” 하고는 마침내 范睢를 客卿으로 삼아 함께 國事를 도모하였다.

林之奇가 말하였다.

“六國이 秦나라에 있어서 영토는 여섯 배의 땅을 소유하였고, 병력은 여섯 배의 군대를 보유하였고, 식량은 여섯 배의 양식이 있었으나 끝내 秦나라에게 겸병당한 까닭은 秦나라는 천하의 형세를 알았고 六國은 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秦나라가 이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계책이 范睢의 遠交近攻(먼 나라와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계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韓나라와 魏나라를 취하여 천하의 中樞를 잡아서 이미 자신에게 있게 한다면 먼 齊나라와 楚나라가 어찌 멸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멀리 있는 齊나라와 楚나라와는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20년 동안 楚나라에 침공을 가하지 않고 40년 동안 齊나라에 침공을 가하지 않았으며, 가까이 있는 韓나라와 魏나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올해에 韓나라를 정벌하고 다음해에 魏나라를 공격하여 번갈아 출병하고 번갈아 들어와서 자못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 때문에 韓나라와 魏나라가 지탱하지 못하고 끝내 꺾여서 秦나라에 들어갔으니, 韓나라와 魏나라가 이미 꺾여서 秦나라에 들어간 것이 燕나라와 齊나라와 楚나라가 서로 뒤이어 멸망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秦나라가 六國을 취할 때에 蠶食이라고 말하였으니,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른다. 六國은 천하의 중추가 韓나라와 魏나라에 있음을 알지 못해서 秦나라 사람들이 韓나라와 魏나라를 공격하는데도 齊나라와 楚나라가 구원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의 중추를 秦나라에 내버린 것이니, 六國이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어렵고 쉬운 형세를 알아야 하니, 그 쉬운 곳부터 공격한 뒤에야 그 어려운 곳에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唐나라 憲宗이 藩鎭을 평정하고자 하자 張弘靖이 ‘淮蔡를 먼저 토벌하고 魏博을 뒤에 토벌해야 한다.’고 주청하였고, 周나라 世宗이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자 王朴이 ‘江南을 먼저 정벌하고 河東을 뒤에 정벌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는데, 끝내 그의 말과 같았다.”

[辛丑]五十五年

[辛丑]五十五年이라

秦左庶長王齕이 伐韓하야 攻上黨【地理志에 河東上黨縣은 屬幷州라 正義曰 潞州에 有上黨縣이라 】拔之하니 上黨民이 走趙라 趙廉頗軍於長平【在上黨滋氏縣이라 】하야 以按(遏)據【按은 抑也, 止也요 據는 依據也라 】上黨民하니 王齕이 因伐趙한대 趙軍이 戰數不勝이라 廉頗堅壁不出이어늘 趙王이 以失亡多而更怯不戰이라하야 怒數讓之하다 應侯使人反間曰 秦之所畏는 獨畏馬服君之子趙括爲將爾니 廉頗는 易與요 且降矣리라 趙王이 遂以趙括로 代頗將하니 藺相如曰 王以名使括하시니 若膠柱鼓瑟【鼓瑟者는 絃有緩急하니 調之在於運轉其柱어늘 若膠其柱면 則絃不可得以調之라 】이로소이다 은 徒能讀其父書傳이요 不知合變【兵은 以正合하고 以奇變이라 】也니이다 王이 不聽하다

55년(신축 B.C.260))

秦나라 左庶長王齕이 韓나라를 정벌하여 上黨【上黨은 ≪漢書≫ 〈地理志〉에 “河東 上黨縣은 幷州에 속한다.” 하였고, ≪史記正義≫에 “潞州에 上黨縣이 있다.” 하였다.】을 공격해서 함락시키니, 上黨의 백성들이 趙나라로 도망하였다. 趙나라 장군 廉頗가 長平【長平은 上黨 滋氏縣에 있다.】에 군대를 주둔시켜【按은 억제함이고 그침이며, 據는 의거함이다.】上黨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살게 하니, 王齕이 인하여 趙나라를 정벌하였는데, 趙나라 군대가 여러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廉頗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출전하지 않자, 趙王廉頗가 망실한 것이 많고 또 겁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노하여 여러 번 꾸짖었다. 應侯(范睢)가 사람을 시켜 反間하기를 “秦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馬服君(趙奢)의 아들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일 뿐이니, 廉頗는 상대하기 쉽고 장차 항복할 것이다.” 하였다.

趙王이 마침내 趙括廉頗를 대신하여 장수를 삼으니, 藺相如가 간하기를 “王께서 명성만 가지고 趙括을 부리시니, 雁足을 아교풀로 붙여놓고 비파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비파를 연주하는 자는 줄에 느림(풀어놓음)과 빠름(조임)이 있으니, 이것을 고름은 雁足을 움직임에 달려 있는데, 만약 雁足에 풀을 칠하여 고정시키면 줄을 고를 수가 없다.】趙括은 다만 그 아비가 글로 전한 것을 읽었을 뿐이고 변화에 대응할 줄은 알지 못합니다.”【군대는 正(정면 공격)으로써 合戰하고 奇(기습 공격)로써 변화하여 예측할 수 없게 한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 初에 趙括이 自少時로 學兵法하야 以天下莫能當이라 嘗與其父로 言兵事에 不能難이나 然不謂善이라 母問其故한대 曰 兵은 死地也어늘 而이 易言之하니 趙若將이면 破趙軍者는 必也리라하니라 及將行에 其母上書하야 言不可使라한대 王曰 吾已決矣로라 母曰 卽有不稱이라도 妾은 請無隨坐【謂相隨而坐罪也라 】하소서 王이 許之하다

처음에 趙括이 어렸을 때부터 병법을 배워 천하가 자신을 당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일찍이 그 아비 趙奢와 군대의 일을 말할 적에 趙奢가 논란하지 못하였으나 잘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趙括의 어미가 그 이유를 묻자, 趙奢가 말하기를 “전쟁은 죽는 곳인데 趙括이 쉽게 말하니, 趙나라에서 만약 趙括을 장수로 삼는다면 趙나라 군대를 패망시킬 자는 반드시 趙括일 것이다.” 하였다.

趙括이 장차 길을 떠나게 되자, 그 어미가 글을 올려 趙括을 시켜서는 안됨을 말하니, 王이 말하기를 “내 이미 결정하였다.” 하였다. 어미가 말하기를 “만일 趙括이 임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함이 있더라도 첩은 따라서 연좌시키지 마소서.”【隨坐는 서로 따라서 죄에 연좌됨을 이른다.】 하니, 王은 이를 허락하였다.

秦王은 聞爲趙將하고 乃陰使武安君爲上將하고 而王齕爲裨將하야 令軍中호되 有敢泄武安君將者면 斬하리라

秦王趙括이 趙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은밀히 武安君(白起)을 上將軍으로 삼고 王齕을 裨將(副將)으로 삼고서 군중에 명령하기를 “武安君이 장수가 된 것을 감히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斬刑에 처하겠다.” 하였다.

趙括이 至軍하야 悉更約束하고 易置軍吏하고 出兵擊秦이어늘 武安君이 佯敗而走하고 張二奇兵【奇는 謂無窮이니 奇正還相生하야 如環之無端이라 】하야 以劫之하다 趙括이 乘勝하야 追造秦壁하니 堅拒不得入하고 奇兵이 絶趙軍之後하니 趙軍이 食絶四十六日에 皆內陰相殺食이라 趙括이 自出銳卒하야 搏戰이러니 秦人이 射殺之한대 趙師大敗하야 卒四十萬人이 皆降이라 武安君이 乃挾詐而盡坑殺之【坑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坑而殺之라 】하고 遺其小者二百四十人하야 歸趙하다

趙括이 군중에 이르러 약속(規約)을 모두 변경하고軍吏를 바꾸어 두고는 군대를 내어 秦나라를 공격하였다. 武安君이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두 奇兵(기습부대)을【奇는 무궁함을 이르니, 奇와 正이 번갈아 相生하여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풀어 위협하였다. 趙括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秦나라 성벽에 이르렀는데, 秦나라에서 굳게 항거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奇兵이 趙나라 군대의 후미를 끊으니, 趙나라 군대가 양식이 떨어진 지 46일 만에 모두 안으로 몰래 서로 잡아먹었다. 趙括이 스스로 精銳兵을 내어 육박전을 하였는데, 秦나라 사람이 그를 쏘아죽이니, 趙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병졸 40만 명이 모두 항복하였다. 武安君이 마침내 속임수를 써서 모두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고,【坑은 구덩이요 빠뜨림이니, 구덩이에 빠뜨려서 죽임을 이른다.】 나이 어린 자 240명을 남겨서 趙나라로 돌려보냈다.

[壬寅]五十六年

[壬寅]五十六年이라

秦之始伐趙也에 魏王이 問諸大夫한대 皆以爲秦伐趙는 於魏에 便이라하야늘 孔斌【孔子六世孫子順也라 】曰 不然하다 秦은 貪暴之國也라 勝趙면 必復他求하리니 吾恐於時【猶言於此時也라 】에 魏受其師也하노라 先人有言호되 燕雀이 處堂에 子母相哺하야 呴呴焉相樂也하야 自以爲安이라 竈突炎上하야 棟宇將焚호되 燕雀이 顔不變하야 不知禍之將及己也라하니 今子不悟趙破면 患將及己하니 可以人而同於燕雀乎아 當今에 山東之國이 敝而不振하고 三晉이 割地以求安하고 二周折而入秦하고 燕, 齊, 楚已屈服矣니 以此觀之컨대 不出二十年하야 天下其盡爲秦乎인저

56년(임인 B.C.259))

秦나라가 처음 趙나라를 정벌할 적에 魏王이 여러 大夫에게 물으니, 모두 秦나라가 趙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魏나라에게 편리하다고 말하였으나 孔斌【孔斌은 孔子의 6세손인 子順이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秦나라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나라이다. 趙나라를 이기면 반드시 다시 다른 것을 요구할 것이니, 나는 이때 魏나라가 그 군대의 침공을 받을까 두려워한다.【於時는 ‘이때에’라는 말과 같다.】 先人이 말하기를 ‘제비가 堂에 살면서 새끼와 어미가 서로 먹여 주어 다정하게 서로 즐거워하여 스스로 편안하다고 여긴다. 부엌 굴뚝에서 불길이 올라와 집이 장차 타려 하는데도 제비는 낯빛을 변치 않고 禍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 줄을 알지 못한다.’ 하였으니, 지금 그대들은 趙나라가 격파되면 환난이 장차 자신에게 미칠 줄을 깨닫지 못하니, 사람으로서 제비와 같을 수 있겠는가? 지금에 山東의 나라가 피폐하여 떨치지 못하고 三晉이 땅을 떼어 秦나라에 바쳐서 편안함을 구하고, 二周(西周와 東周)가 꺾여서 秦나라에 들어가고 燕‧齊‧楚가 이미 굴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20년이 못되어 天下는 모두 秦나라가 될 것이다.”

[癸卯]五十七年

[癸卯]五十七年이라

秦이 以王陵攻邯鄲하니 武安君【武安은 縣名이라 一說에 戰必克하야 得百姓安集故로 曰武安也라 】曰 邯鄲이 實하니 未易攻也요 且諸侯之救日至하리니 破秦軍必矣라하고 辭疾不行한대 乃以王齕代王陵하다

57년(계묘 B.C.258))

秦나라가 王陵으로 邯鄲을 공격하자, 武安君【武安은 縣의 이름이다. 一說에 白起가 싸우면 반드시 이겨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았으므로 武安이라고 했다 한다.】이 말하기를 “邯鄲은 충실하니 쉽게 공격할 수가 없고 또 諸侯들의 구원이 날로 이를 것이니, 秦나라 군대가 틀림없이 격파당할 것이다.” 하고는 병으로 사양하고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王齕王陵을 대신하였다.

趙王이 使平原君으로 求救於楚한대 平原君이 約其門下食客文武備具者二十人하야 與之俱러니 得十九人하고 餘無可取者라 毛遂自薦於平原君이어늘 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는 譬若錐之處囊中하야 其末立見하나니 今先生이 處之門下 三年於此矣로되 이 未有所聞하니 是는 先生이 無所有也로다 毛遂曰 臣乃今日에 請處囊中爾니 使遂蚤(早)得處囊中이면 乃穎脫而出【脫은 突也요 穎은 錐鋩也니 言猶錐鋩銳上突然而出이라 】이요 非特其末見而已니이다 平原君이 乃與之俱하니 十九人이 相與目笑之러라

趙王平原君을 시켜 楚나라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平原君은 門下의 食客 중에 文武를 구비한 자 20명과 약속하여 함께 가려고 하였는데, 19명만 얻고 나머지는 취할 만한 자가 없었다.

毛遂가 자신을 平原君에게 천거하자, 平原君이 말하기를 “어진 선비가 세상에 처함은 비유하건대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서 그 끝이 당장 드러나는 것과 같소. 이제 선생이 나의 문하에 있은 지가 지금 3년이 되었는데 내가 들은 바가 없으니, 이는 선생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오.” 하였다.

毛遂가 대답하기를 “신이 오늘에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하는 것이니, 만일 제가 진작 주머니 속에 처할 수 있었다면 마침내 송곳 끝이 〈주머니 밖으로〉 빠져 나왔을 것이요,【脫은 돌출하여 나온 것이고 穎은 송곳 끝이니, 송곳 끝이 위로 돌출하여 〈주머니 밖으로 빠져〉 나옴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어서〉 다만 그 끝이 드러날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平原君이 마침내 毛遂와 함께 가니, 19명이 서로 눈짓하며 비웃었다.

平原君이 至楚하야 與楚王으로 言合從之利害할새 日出而言之하야 日中不決이라 毛遂按劍歷階而上하야 謂平原君曰 從之利害는 兩言而決爾어늘 今에 日出而言하야 日中不決은 何也잇고 楚王이 怒叱曰 胡不下오 吾乃與而君言이어늘 汝는 何爲者也오 遂按劍而前曰 王之所以叱遂者는 以楚國之衆이어니와 今十步之內에 不得恃衆也리이다 王之命이 懸於手하니 吾君이 在前이어늘 叱者는 何也잇고 今以楚之彊으로 天下弗能當이라하나 白起는 小竪子【言其庸劣無智하야 若童竪然이라 】爾로되 一戰而擧鄢郢하고 再戰而燒夷陵하고 三戰而辱王之先人하니 此는 百世之怨이요 而趙之所羞어늘 而王弗知惡焉하시니 合從者는 爲楚요 非爲趙也니이다 楚王曰 唯唯라 誠若先生之言인댄 謹奉社稷以從호리라 毛遂楚王之左右曰 取鷄狗馬之血來하라 毛遂奉銅盤而跪進之楚王曰 王은 當歃血【盟者以血塗口旁曰歃血이라 師古曰 預盟者各歃血하고 餘者瘞之라 故云歃이라 索隱曰 盟之用牲에 貴賤不同하야 天子用牛馬하고 諸侯犬猳하고 大夫以下用鷄하니 毛遂請取鷄狗馬血來者는 蓋總盟之用牲也라 】而定從하소서 次者는 吾君이요 次者는 라하고 遂定從於殿上하고 毛遂左手持盤血而右手招十九人하야 歃血於堂下하고 曰 公等은 碌碌하니 所謂因人成事者也로다 平原君이 已定從而歸하야 至於趙하야 曰 이 不敢復相天下士矣라하고 遂以毛遂爲上客하다 於是에 楚王이 使春申君으로 將兵救趙하다

平原君이 楚나라에 이르러 楚王과 合從의 이해를 말할 적에 해가 뜨면서부터 말을 하여 해가 중천인데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毛遂가 칼을 어루만지면서 계단을 지나 올라가서 平原君에게 말하기를 “合從의 利害는 두 마디 말이면 결정되는데 지금 해가 뜨면서부터 말씀을 하여 해가 중천인데도 결정하지 못함은 어째서입니까?” 하였다. 楚王이 노하여 꾸짖기를 “어찌 내려가지 않는가? 내가 너의 군주와 말을 하는데, 너는 어떠한 자인가?” 하니, 毛遂가 검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군주께서 저를 꾸짖는 까닭은 楚나라의 많은 병력 때문이겠지만 이제 10보 안에서는 많은 병력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의 목숨이 이 毛遂의 손에 달렸으니, 우리 군주가 앞에 계신데 꾸짖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제 楚나라의 강함을 천하가 당해낼 수 없다고 말하나 白起는 철부지 어린아이【小竪子는 용렬하고 지혜가 없어 어린아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일 뿐인데 한 번 싸워 鄢과 郢을 점령하고 두 번 싸워 夷陵을 불태우고 세 번 싸워 왕의 先人(先親)을 욕보였으니, 이는 楚나라에 百代의 원수이고 우리 趙나라에서도 수치로 여기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왕이 미워할 줄을 알지 못하시니, 合從하는 것은 楚나라를 위한 것이지 우리 趙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에 楚王은 “옳소. 옳소. 진실로 선생의 말과 같을진댄 삼가 사직(국가)을 받들어 따르겠소.” 하였다. 毛遂楚王의 左右에게 이르기를 “개와 닭과 말의 피를 가지고 오라.” 하였다. 毛遂가 〈짐승의 피가 담긴〉 구리 쟁반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楚王에게 올리며 말하기를 “왕은 마땅히 피를 마셔【맹약하는 자가 피를 입가에 바르는 것을 歃血이라고 한다. 顔師古가 말하였다. “맹약에 참여한 자가 각자 입가에 피를 바르고 나머지는 땅에 묻는다. 그러므로 歃이라고 한 것이다.” ≪史記索隱≫에 말하였다. “맹세할 때에 쓰는 희생은 귀천이 똑같지 않아 천자는 소와 말을 쓰고 제후는 개와 돼지를 쓰고 대부 이하는 닭을 썼으니, 毛遂가 닭과 개와 말의 피를 가지고 올 것을 청한 것은 맹세할 때 쓰는 희생을 총괄한 것이다.”】合從을 정하소서. 다음은 우리 군주이고 다음은 이 毛遂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전각 위에서 合從을 정하였다. 毛遂가 왼손으로 쟁반의 피를 잡고 오른손으로 19명을 불러 堂下에서 피를 마시게 하며 말하기를 “公들은 碌碌(평범하고 보잘것없음)하니, 이른바 ‘다른 사람을 인하여 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하였다.

平原君이 이미 合從을 정하고 돌아와 趙나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감히 다시 천하의 선비를 相 본다고 못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毛遂를 上大夫로 삼았다. 이에 楚王春申君(黃歇)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趙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