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之二 秦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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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東周君==== </div><div class="clsB"> =====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div><div class="contData">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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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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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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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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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襄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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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는 自[[考王]]封其弟于河南하니 是爲[[桓公]]이라 以續[[周公]]官職이러니 [[桓公]]卒에 子[[威公]]立하고 [[威公]]卒에 子[[惠公]]立이라 [[惠公]]이 乃封其少子於鞏하야 以奉王하고 號[[東周惠公]]이라하니라 〈出史記 ○ 東西周之稱이 又起於此라 索隱曰 [[惠公]]立長子하니 曰[[西周公]]이요 又封少子於鞏하야 仍襲父號하니 曰[[東周惠公]]이라 於是에 又稱東西二周也하니라 按世本에 [[西周桓公]]은 名[[揭]]니 居河南하고 [[東周惠公]]은 名[[班]]이니 居洛陽이 是也라 [[復齋胡氏]]曰 其後에 揭沒而長子[[成公]]이 襲有其地하고 少子[[班]]이 專制洛陽하야 兄弟角立하니 史冊逸其世數名氏라 至[[赧王]]三十四年하야 楚謀入寇어늘 王使[[東周君]]으로 諭止之하니 蓋[[]]之後也라 至[[赧王]]入秦하야 秦遷[[西周君]]於★{單/心}狐聚하야 而河南亡하고 [[莊襄]]元年에 遷[[東周君]]於陽人聚而洛陽之鞏亡하니라〉
+
※名[[]][[孝文王]]子라 初質於趙러니 因[[不韋]]策하야 歸以爲嗣하니라 其先은 [[柏翳]]이니 佐[[]]有功하야 賜姓[[]]이라 後有非子封秦하고 秦仲始大하며 自[[孝公]][[商鞅]]하야 以利而致富强하고 廢井田, 開阡陌하며 [[莊襄]]滅周러니 三年而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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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宮氏]][[靖一]]曰 周自[[武王]]으로 至[[東周君]]滅而周始亡于秦하니 斯實錄也라 後有秉春秋之筆者면 盍改而正諸리오 按舊本엔 仍[[溫公]]之書하야 自[[赧王]]入秦之後로 卽以[[秦昭襄]]承周統爲秦紀러니 剡旣已遵朱子綱目之例하야 正之矣요 今復得[[南宮氏]]之說이어늘 而[[雙湖胡氏]]深有取焉하니 極爲確論하니 眞所謂發先賢之所未發者也라 舊本正之而未盡이어늘 今復正之于左하야 以俟質于高明[[史學先生]]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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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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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周는 [[考王]]이 그 아우를 河南에 봉함으로부터 비롯되니, 이가 [[桓公]]이다. [[周公]]의 官職을 이었는데, [[桓公]]이 죽자 아들[[威公]]이 서고, [[威公]]이 죽자 아들[[惠公]]이 섰다. [[惠公]]은 마침내 그 少子(작은아들)를 鞏 땅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 이름을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史記》에 나옴 ○ 東周와 西周의 칭호가 또 여기서 시작되었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惠公]]이 長子를 세우니[[西周公]]이라 하였고, 또 少子를 鞏 땅에 봉하여 아버지의 칭호를 그대로 세습하니 東周[[惠公]]이라 하였다. 이에 또 東周와 西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世本에 “西周의 [[桓公]]은 이름이 [[揭]]이니 河南에 거주하고, 東周의 [[惠公]]은 이름이 [[班]]이니 洛陽에 거주하였다.” 하였다. [[復齋胡氏]]가 말하기를 “그 뒤에 揭가 죽고 長子인 [[成公]]이 세습하여 河南을 소유하고 少子인 [[班]]이 오로지 洛陽을 점령하여 형제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그 世數와 名氏를 잃었다. [[赧王]] 34년에 이르러 楚나라가 周나라를 침입할 것을 도모하자 [[赧王]]은 [[東周君]]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 [[東周君]]은 [[班]]의 후손일 것이다. [[赧王]]이 秦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秦나라가 [[西周君]]을 ★{單/心}狐聚로 옮겨서 河南이 망하였고, [[莊襄王]] 元年에 [[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겨서 洛陽의 鞏이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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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襄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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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宮靖一]]이 말하였다. “周나라는 [[武王]]으로부터 [[東周君]]이 멸망함에 이르러 周나라가 비로소 秦나라에게 망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기록이다. 뒤에 春秋의 붓을 잡는 자(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지 않겠는가.” - 살펴보건대 舊本에는 [[溫公]]의 《資治通鑑》을 따라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뒤로부터 곧바로 秦나라 [[昭襄王]]이 周나라의 계통을 이어받아 秦紀로 삼았는데, 내(劉剡)가 이미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의 例를 따라서 바로잡았고, 이제 다시 [[南宮氏]]의 說을 얻었는데 [[雙湖胡氏(胡一桂)]]가 이것을 깊이 취함이 있었으니, 지극히 확고한 논의가 되는 바, 진실로 이른바 ‘先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舊本에는 바로잡았으나 미진하였는데, 이제 다시 아래에 바로잡아서 高明한 [[史學先生]]을 기다려 질정하는 바이다.-
+
※莊襄王은 이름이 楚이니 孝文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趙나라에 볼모가 되었는데 呂不韋의 계책을 따라 秦나라로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었다. 그 선조는 柏翳이니 舜임금을 도와 공이 있어서 嬴氏姓을 하사받았다. 뒤에 非子가 있어 秦나라에 봉해지고 秦仲이 비로소 나라를 키웠으며, 孝公이 商鞅을 등용하여 이익으로 부강함을 이룩하였으며 井田法을 폐지하고 阡陌을 개간하였다. 莊襄王이 周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즉위한 지 3년에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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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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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喜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建十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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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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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元年이라 〈秦[[昭襄王]][[]]五十二요 楚[[考烈王]]八이요 燕[[孝王]]三이요 [[魏安釐王]]二十二요 趙[[孝成王]]十一이요 韓[[桓惠王]]十八이요 [[齊王]][[建]]十年이라 ○ 凡七國이라〉
+
[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建]]十七年이라 ○ 凡七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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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民이 東亡이어늘 秦이 取其寶器하고 遷[[西周公]]於★{單/心}狐聚<font color="#0054FF" size="2">【索隱曰 西周公은 武公子文公也라 ★{單/心}狐는 地名이니 ★{單/心}은 音憚이라 徐廣曰 ★{單/心}狐聚는 近陽人聚하니 在洛陽南百五十里라 括地志에 汝州之外古梁城이 卽★{單/心}狐聚라 】</font>하다 ○ 秦丞相[[范睢]]免하다
+
日食하다 ○ 秦이 伐趙하야 定太原하고 取三十七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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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병오 B.C.255)) - 秦[[昭襄王]][[]] 52년, [[考烈王]]8년,燕[[孝王]] 3년, 魏[[安釐王]]22년,趙[[孝成王]]11년,韓[[桓惠王]]18년,[[齊王]][[建]] 10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
계축(B.C.248) - 秦[[莊襄王]] 2년, 楚 [[考烈王]] 15년, [[燕王]][[]] 7년, 魏[[安釐王]] 29년, 趙[[孝成王]] 18년, 韓[[桓惠王]] 25년, [[齊王]][[建]] 17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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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周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도망하자, 秦나라가 그 寶器를 취하고 [[西周公]]을 ★{單/心}狐聚로 옮겼다.<font color="#0054FF" size="2">【≪史記索隱≫에 말하기를 “西周公은 武公의 아들 文公이다.” 하였다. ★{單/心}狐는 지명이니 ★{單/心}은 음이 탄이다. 徐廣이 말하기를 “★{單/心}狐聚는 陽人聚에 가까우니, 洛陽 남쪽 150리에 있다.” 하였다. ≪括地志≫에 “汝州의 밖 옛 梁城이 곧 ★{單/心}狐聚이다.” 하였다.】</font>
+
日食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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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승상 [[范睢]]가 면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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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가 趙나라를 쳐서 太原을 평정하고 37개 성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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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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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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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丁未]二年이라 〈秦五十三, 楚九, 燕王[[喜]]元, 魏二十三, 趙十二, 韓十九, 齊十一年이라〉
+
[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이라 是歲에 秦亡하고 [[呂政]]代하니라〉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秦伐魏하야 取吳城하다 ○ [[韓王]]이 入朝於秦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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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2년(정미 B.C.254)) - 秦나라 53년, 楚나라 9년, [[燕王]][[喜]] 元年, 魏나라 23년, 趙나라 12년,韓나라 19년,齊나라 11년이다. -
 
 
</div>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秦나라가 魏나라를 정벌하여吳城을 점령하였다.
+
[[蒙驁]]<font color="#0054FF" size="2">【齊人이니 [[蒙武]]之父요 [[蒙恬]]之祖也라 】</font>帥師伐魏하니 魏師數敗라 [[魏王]]이 患之하야 乃使人請[[信陵君]]<font color="#0054FF" size="2">【卽公子[[無忌]]也라 】</font>於趙한대 [[信陵君]]이 畏得罪하야 不肯還이라 [[毛公]], [[薛公]]이 見[[信陵君]]하고 曰 公子所重於諸侯者는 徒以有魏也라 今魏急而公子不恤이라가 一旦에 秦人이 克大梁<font color="#0054FF" size="2">【魏地라 按魏有小梁이라 故以大梁別之라 】</font>하고 夷先王之宗廟면 公子何面目立天下乎잇가 語未畢에 [[信陵君]]이 色變하야 趣(促)駕還魏하니 [[魏王]]이 持[[信陵君]]而泣하고 以爲上將軍하다 [[信陵君]]이 使人求援於諸侯한대 諸侯聞[[信陵君]]復爲魏將하고 皆遣兵救魏하니 [[信陵君]]이 率五國之師하야 敗[[蒙驁]]於河外<font color="#0054FF" size="2">【謂陝華二州也라 河外者는 河南岸也니 魏州地라 】</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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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韓王]]이 秦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다.
+
[史略 史評][[臨江梁氏寅]]曰 從橫之說이 固皆詭術이나 然爲從者는 實六國之利也라 當[[無忌]]之時하야 六國이 益不支於秦矣라 然이나 [[無忌]]一旦爲魏將에 五國이 助之하야 大破秦軍하니 況於其初에 能以信義相親하여 幷力西向이면 則秦雖强暴나 安得而亡之哉아 故로 曰滅六國者는 六國也요 非秦也라하니라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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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五年=====
 
</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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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庚戌]五年이라 〈秦五十六, 楚十二, 燕四, 魏二十六, 趙十五, 韓二十二, 齊十四年이라〉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秋에 秦[[昭襄王]]이 薨하고 子[[孝文王]][[]]立하다 ○ 趙[[公子勝]]이 卒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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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5년(경술 B.C.251)) - 秦나라 56년, 楚나라 12년,燕나라 4년, 魏나라 26년, 趙나라 15년,韓나라 22년,齊나라 14년이다. -
+
갑인(B.C.247) - 秦나라 3년, 楚나라 16년,燕나라 8년, 魏나라 30년, 趙나라 19년,韓나라 26년, 齊나라 18년이다. ○ 이 해에 秦나라가 망하고 [[呂政]]이 대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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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가을에 秦나라 [[昭襄王]]이 죽고아들[[孝文王]][[柱]]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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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趙나라 公子[[]]이 별세하였다.
+
蒙驁가<font color="#0054FF" size="2">【蒙驁는 齊나라 사람이니, 蒙武의 아버지이고 蒙恬의 조부이다.】</font> 군대를 이끌고 魏나라를 정벌하니, 魏나라 군대가 자주 패하였다. [[魏王]]이 근심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趙나라에 있는 [[信陵君]](公子 無忌)을 청하니,<font color="#0054FF" size="2">【信陵君은 바로 公子 無忌이다.】</font>[[信陵君]]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毛公]]과 [[薛公]]이 [[信陵君]]을 만나 말하기를 “公子께서 諸侯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다만 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魏나라가 급한데 公子가 돌보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秦나라 사람들이 大梁을 이기고<font color="#0054FF" size="2">【大梁은 魏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魏나라에 小梁이 있기 때문에 大梁이라 하여 구별한 것이다.】</font> 先王의 宗廟를 부순다면 公子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div>
 
 
</div>
 
</div>
|}</div><div class="clsB">
 
=====[辛亥]六年=====
 
</div><div class="contData">
 
{| class="wikitable" style="width:8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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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family:맑은고딕;font-size:20px;backgroubd-color:gray;text-align:left;">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辛亥]六年이라 〈秦[[孝文王]][[]][[]], 楚十三, 燕五, 魏二十七, 趙十六, 韓二十三, 齊十五年이라〉
+
말을 마치기 전에 [[信陵君]]이 낯빛이 변해서 수레를 재촉하여 魏나라로 돌아오니, [[魏王]][[信陵君]]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上將軍으로 삼았다. [[信陵君]]이 사람을 시켜 諸侯들에게 구원을 청하니, 諸侯들이 [[信陵君]]이 다시 魏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대를 보내어 魏나라를 구원하였다. [[信陵君]]이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河外에서 [[蒙驁]]를 패배시켰다.<font color="#0054FF" size="2">【河外는 陝州와 華州 두 州를 이른다. 河外는 黃河의 남쪽 기슭이니, 魏州 땅이다.】</font>
 
</div>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十月에 [[秦王]][[柱]]卽位三日에 薨하고 子[[楚]]立하니 是爲[[莊襄王]]이러라
+
[史略 史評][[臨江梁氏(梁寅)]]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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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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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6年(신해 B.C.250)) - 秦[[孝文王]][[柱]] 元年, 楚나라 13년,燕나라 5년, 魏나라 27년, 趙나라 16년,韓나라 23년, 齊나라 15년이다. -
 
 
</div>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10月에 [[秦王]][[]]가 즉위한 지 3일 만에 죽고[[子楚]]가 즉위하니, 이가 [[莊襄王]]이다.
+
“合從과 連橫의 내용이 진실로 모두 속이는 술책이나, 六國이 合從하는 것은 실로 六國의 이익이었다. [[無忌]]의 때를 당해서는 六國이 더욱 秦나라를 버텨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無忌]]가 하루아침에 魏나라 장수가 되자, 다섯 나라가 도와서 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니, 하물며 六國이 처음에 신의로써 서로 친하여 힘을 합해 서쪽으로 秦나라를 향하였더라면 秦나라가 비록 강하고 포악하나 어떻게 六國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六國을 멸망시킨 것은 六國 자신이고 秦나라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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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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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燕將이 攻齊聊城<font color="#0054FF" size="2">【[[慈湖王氏]]曰 聊城은 在平原이라 〈括〉地志에 故聊城은 在博州聊城縣西二十里하니 戰國時에 亦齊地라 秦漢이 皆爲東郡之聊城하니라 慈湖王氏는 名幼學이요 字行卿이니 後只稱王氏曰이라 】</font>하야 拔之러니 或이 譖之[[燕王]]한대 燕將이 保聊城하고 不敢歸라 齊[[田單]]이 攻之歲餘에 不下어늘 [[魯仲連]]이 乃爲書하야 約之矢<font color="#0054FF" size="2">【王氏曰 纏束書於矢上이라 】</font>하야 以射城中하야 遺燕將하야 陳利害<font color="#0054FF" size="2">【遺燕將曰 爲公計者컨대 不歸燕則歸齊니 今猶守孤城이라가 齊兵日益而燕救不至면 將何爲乎아 】</font>한대 燕將이 見書하고 泣三日에 遂自殺하니 聊城이 亂이라 [[田單]]이 克聊城하고 歸言[[魯仲連]]於[[齊王]]하야 欲爵之한대 [[仲連]]이 逃之海上曰 吾與富貴而詘於人<font color="#0054FF" size="2">【記儒行曰 不充詘於富貴라한대 註에 〈充〉詘은 喜失節也라 】</font>으론 寧貧賤而輕世肆志<font color="#0054FF" size="2">【輕世는 眇視天下也요 肆志는 放縱志意也라 】</font>焉이라하더라
+
五月에 [[秦王]]薨하니 立三年이라 其子[[]]이 <font color="#0054FF" size="2">【時政生十三年矣라 ○ 潁濱蘇轍이 嘗謂六國未亡에 而嬴氏先亡이라하니 信哉라 言乎여 】</font>하야 封相國[[呂不韋]]하야 [[文信侯]]하고 號稱仲父라하다
 
</div>
 
</div>
 +
<div class="para" style="padding:10px;">
 +
[新增][[胡氏]]曰 [[不韋]]能以其子로 爲[[秦王]]之子하니 豈不能疾去二君하야 以其子爲王哉아 要之[[孝文]][[莊襄]]이 蓋死於弑也니라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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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나라 장수가 齊나라 聊城을 공격하여<font color="#0054FF" size="2">【慈湖王氏가 말하였다. “聊城은 平原에 있다. ≪括地志≫에 ‘옛 聊城은 博州 聊城縣 서쪽 20리 지점에 있으니, 戰國時代에도 齊나라 땅이었다. 秦나라와 漢나라가 모두 東郡의 聊城으로 삼았다.’ 하였다.” 慈湖王氏는 이름이 幼學이고 字가 行卿이니, 이 뒤로는 다만 ‘王氏曰’이라고 칭하였다.】</font>함락하였는데, 혹자가 [[燕王]]에게 참소하니, 燕나라 장수가 聊城을 지키고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齊나라 [[田單]]이 이를 공격한 지 1년이 넘었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자, [[魯仲連]]이 마침내 편지를 써서 이것을 화살에 묶어<font color="#0054FF" size="2">【王氏가 말하였다. “편지를 화살 위에 묶은 것이다.”】</font> 城안으로 쏘아 燕나라 장수에게 보내서 利害를 말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燕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公을 위하여 계획해 보건대 燕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齊나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도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齊나라 군대는 날로 증강되고 燕나라의 구원은 이르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font>燕나라 장수가 그 편지를 보고 3일 동안 울다가 마침내 자살하니, 聊城이 혼란하였다. [[田單]]이 聊城을 이기고 돌아가 [[魯仲連]]을 [[齊王]]에게 말하여 벼슬을 주려 하자, [[魯仲連]]이 海上으로 도망하며 말하기를 “내 부귀하면서 남에게 예절을 잃기보다는<font color="#0054FF" size="2">【≪禮記≫ 〈儒行〉에 이르기를 “부귀 때문에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註에 “充詘은 기쁜 나머지 예절을 잃는 것이다.” 하였다.】</font> 차라리 빈천하면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내 뜻대로 하겠다.”<font color="#0054FF" size="2">【輕世는 천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이고, 肆志는 뜻대로 방종하는 것이다.】</font>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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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雙湖胡氏]]曰 七國이 莫强於秦이요 亦莫强於六國이로되 [[]]은 用遠交近攻之策하야 卒以蠶食天下하고 六國은 爲謀不固하며 齊獨坐視五國之亡하고 自謂得計라가 同歸于盡하니 吁라 秦이 非强也라 詐有餘也요 六國이 非弱也라 智不足也니 使智足以燭秦之詐하고 信足以結六國之交하고 義足以尊周而爲之主면 雖族秦하여 求吾所大欲이라도 可也어늘 奈何其不然하고 以待覆亡之不暇하니 可勝歎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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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安釐王이 問天下之高士於[[子順]]<font color="#0054FF" size="2">【孔斌字니 孔子六世孫이라 】</font>한대 [[子順]]曰 世無其人也어니와 抑可以爲次는 其[[魯仲連]]乎인저 王曰 [[魯仲連]]은 彊作之者니 非體自然也니라 [[子順]]曰 人皆作之하나니 作之不止면 乃成君子요 作之不變하야 習與體成이면 則自然也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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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 [[安釐王]]이 천하에 道德이 높은 선비를 [[子順(孔斌)]]에게 묻자,<font color="#0054FF" size="2">【[[子順]]은 [[孔斌]]의 字이니, [[孔子]]의 6세손이다.】</font>[[子順]]이 대답하기를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으나 그 다음이 될 만한 자는 [[魯仲連]]일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魯仲連]]은 억지로 힘써서 作爲하는 자이니, 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자, [[子順]]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모두 作爲하니, 作爲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마침내 君子를 이루고, 作爲하기를 변치 아니하여 습관이 體와 더불어 이루어지면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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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秦王]]이 죽으니, 즉위한 지 3년이었다. 그 아들[[]]이 즉위해서<font color="#0054FF" size="2">【이때 政이 태어난 지 13년이었다. ○ 潁濱 蘇轍이 일찍이 이르기를 “六國이 멸망하기 전에 嬴氏가 먼저 망하였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다.</font>相國[[呂不韋]]를 봉하여 [[文信侯]]로 삼고 仲父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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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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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子]七年이라 〈秦[[莊襄王]]楚元, 楚十四, 燕六, 魏二十八, 趙十七, 韓二十四, 齊十六年이라 是歲에 周亡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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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이 以[[呂不韋]]爲相國하야 封[[文信侯]]하다 ○ [[東周君]]이 與諸侯로 謀伐秦이어늘 [[秦王]]이 使相國[[呂不韋]]로 帥師滅之하고 遷[[東周君]]於陽人聚<font color="#0054FF" size="2">【地理志云 河南梁縣에 有陽人聚라 括地志云 陽人故城은 在汝州梁縣西四十里라 】</font>하니 周遂不祀하다 周比亡에 凡有七邑<font color="#0054FF" size="2">【徐廣曰 周比亡時에 凡七縣이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是也라 】</font>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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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雙湖胡氏]]曰 西都는 自涇舟膠楚澤<font color="#0054FF" size="2">【涇은 水名이니 在西周地라 昭王이 巡狩濟漢이러니 漢濱人이 以膠膠舟하야 中流膠液하야 王溺死하니라 漢은 楚地라 】</font>하고 下堂見諸侯<font color="#0054FF" size="2">【平王東遷하야 都于洛邑한대 王室微弱하야 政由下하니 下堂見諸侯하니라 】</font>로 綱常陵遲하야 已爲春秋之漸이요 東都는 自春秋已來로 弱不可支로되 猶幸五霸<font color="#0054FF" size="2">【齊桓, 晉文, 秦穆, 宋襄, 楚莊이라 】</font>挾天子하야 以令諸侯하야 尙寄空名於天下라 然이나 繻葛倒懸<font color="#0054FF" size="2">【周桓王伐鄭한대 鄭與王戰于繻葛할새 射王中肩하니 易理猶倒懸也라 】</font>하야 已爲戰國之漸이요 戰國엔 首命韓趙魏爲諸侯하야 綱常之道盡矣라 於是에 七雄競彊하야 [[蘇秦]][[張儀]]肆從橫之術하니 從者는 猶知合六國以抗秦이로되 橫者는 甘於事秦而不恥라 事秦者는 固不知有周요 抗秦者도 不過自爲니 亦豈復知有周哉아 而周亡에 亦無一能倡大義於天下하고 僅有[[魯仲連]]이 義不帝秦하야 負當世高士重名이라 使當時之士에 有如[[三老]][[董公]]之遮說하고 當時之君에 有如[[漢王]]三軍縞素하야 爲[[赧王]]하야 與[[東周君]]發喪하야 爲天下誅無道秦하야 名其爲賊이면 敵乃可服이리니 [[齊桓]][[晉文]]之事를 寧不可復見於今日이리오 何計不出此하고 顧乃區區欲與秦鬪智角力이라가 卒之賓服恐後하야 以待滅亡之不暇하니 可痛也哉인저 又嘗合三代論之컨대 三代之王은 有天下가 一千九百六十九年이어늘 何聖賢之君無幾하야 夏有[[禹]], [[啓]], [[少康]]하고 商有[[成湯]], [[太甲]], [[太戊]], [[盤庚]], [[武丁]]하고 周有[[武王]], [[成王]], [[康王]], [[宣王]]이요 外無聞焉이라 然이나 後之言治者 以三代爲稱首하야 巍巍皇皇하야 卓冠千古하야 而莫及者는 [[禹]][[湯]][[文]][[武]] 以聖王之道로 立經陳紀하고 創法定制라 其尤卓卓然者는 如井田封建學校兵師之要가 靡不備具하고 而又固結之以仁하고 維持之以禮하야 端本洪源하야 自足與天無極이라 故其後世子孫이 非有剛惡如[[桀]][[紂]][[幽]][[厲]]之暴하고 非有柔惡如[[赧王]]之衰면 皆足以世守之而勿失也니 豈偶然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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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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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歷年圖曰 周自[[平王]]東遷으로 日以衰微하고 至於戰國하야는 又分而爲二하야 其土地人民이 不足以比彊國之大夫라 然이나 天下猶尊而事之하야 以爲共主하야 守[[]][[]]之宗祧하야 綿綿然久而不絶하니 其故는 何哉오 植本固而發源深也일새라 昔周之興也에 禮以爲本하고 仁以爲源이라 自[[后稷]]以來로 至於[[文]][[武]][[成]][[康]]히 其講禮也備矣요 其施仁也深矣라 民習於耳目하고 浹於骨髓하야 雖後世微弱이나 其民將有陵慢之心이면 則畏先王之禮而不敢爲하고 將有離散之心이면 則思先王之仁而不忍去하니 此其所以享國長久之道也라 不然이면 以區區數邑으로 處於七暴國之間하야 一日不可存이어든 況於數十年乎아 〈歷年圖는 乃[[溫公]]未作通鑑之前에 先進此圖하니 歷述古今治亂호되 於一代之終엔 則立一論하야 以斷其興亡하니 後倣此하니라〉
+
[[呂不韋]]가 자기 자식을 [[秦王]]의 자식으로 삼았으니, 어찌 속히 두 人君을 제거하여 자기 자식을 왕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요컨대 [[孝文王]][[莊襄王]][[呂不韋]]의 시해에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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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임자 B.C.249) - 秦[[莊襄王]][[]] 元年, 楚나라 14년,燕나라 6년, 魏나라 28년, 趙나라 17년,韓나라 24년, 齊나라 16년이다. 이 해에 周나라가 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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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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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가 [[呂不韋]]를 相國으로 삼아[[文信侯]]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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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國은 秦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고 또한 六國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으나, 秦나라는 遠交近攻의 계책을 써서 끝내 천하를 잠식하였고, 六國은 계책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齊나라는 五國이 망하는 것을 단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여겼다가 똑같이 멸망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秦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가 有餘해서였고, 六國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해서였으니, 만일 지혜가 秦나라의 속임수를 환히 알 수 있고 믿음이 六國의 교제를 공고히 할 수 있고 義理가 천자국인 周나라를 높여 宗主로 삼을 수 있었더라면 비록 秦나라를 멸망시켜 자신들이 크게 원하는 바를 구하더라도 가능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고는 손쓸 새도 없이 전복하고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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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周君]]이 諸侯와 더불어 秦나라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자, [[秦王]]이 相國[[呂不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망시키고[[東周君]]을 陽人聚로 옮기니,<font color="#0054FF" size="2">【陽人聚는 ≪漢書≫ 〈地理志〉에 “河南 梁縣에 陽人聚가 있다.” 하였고, ≪括地志≫에 “陽人의 古城이 汝州 梁縣 서쪽 40리에 있다.” 하였다.】</font>周나라가 마침내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개 고을을 소유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徐廣이 말하였다. “周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러 모두 7縣이 있었으니, 河南, 洛陽, 穀城, 平陰, 偃師, 鞏, 緱氏가 이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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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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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都(西周)는 涇水의 배가 楚나라의 못에서 아교가 녹아 침몰되고,<font color="#0054FF" size="2">【涇은 물 이름이니, 西周의 땅에 있다. 周나라 昭王이 巡狩하여 漢水를 건너가는데, 漢水 가에 있는 사람이 아교풀로 배를 붙여 놓았다. 그리하여 중류에 이르러서 아교가 녹자 昭王이 漢水에 빠져 죽었다. 漢水는 楚나라 땅이었다.】</font> 堂 아래로 내려가서 제후를 만나 본 뒤로부터<font color="#0054FF" size="2">【平王이 동쪽으로 遷都하여 洛邑에 도읍하자, 왕실이 미약해져서 정사가 아랫사람에게서 나오니, 天子가 堂을 내려가 諸侯를 보게 되었다.】</font> 綱常이 침체되어 이미 春秋時代의 조짐이 있었으며, 東都(東周)는 春秋時代 이후로 미약하여 지탱할 수가 없었으나 그래도 다행히 五霸가<font color="#0054FF" size="2">【五霸는 齊나라 桓公, 晉나라 文公, 秦나라 穆公, 宋나라 襄公, 楚나라 莊王이다.】</font> 천자를 끼고서 제후를 호령하여 天子라는 빈 칭호를 천하에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繻葛의<font color="#0054FF" size="2">【周나라 桓王이 鄭나라를 정벌하자, 鄭나라가 王과 繻葛에서 싸울 적에 왕을 쏘아 어깨를 맞혔으니, 이치를 거역함이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것이다.】</font> 싸움에서 군신간의 도리가 도치되어서 이미 戰國時代의 조짐이 되었고, 戰國時代에는 먼저 韓‧趙‧魏를 명하여 제후로 삼아서 綱常의 道가 다 없어졌다. 이에 七雄이 강성함을 다투어 [[蘇秦]]과 [[張儀]]가 合縱과 連橫의 술책을 펴니, 合縱하는 자들은 그래도 六國을 모아 秦나라에 항거할 줄을 알았으나, 連橫하는 자들은 秦나라를 섬기는 것을 달게 여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秦나라를 섬기는 자들은 진실로 周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秦나라에 대항하는 자들도 또한 자신을 위함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또한 어찌 다시 周나라가 있음을 알았겠는가. 周나라가 망하자 또한 大義를 천하에 제창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겨우 [[魯仲連]]이 있어서 의리상 秦나라를 황제로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당대 高士의 두터운 名望을 지니게 되었다. 만일 당시의 선비 중에 三老인 [[董公]]이 [[漢王(劉邦)]]을 가로막고 설득한 것과 같이 하고, 당시의 군주 중에 [[漢王]]이 三軍에게 소복을 입힌 것과 같이 하여, [[赧王]]을 위해 [[東周君]]과 함께 發喪해서 천하를 위해 무도한 秦나라를 주벌하여 역적임을 분명히 밝혔으면 적이 비로소 굴복하였을 것이니, 齊나라 [[桓公]]과 晉나라 [[文公]]의 일을 어찌 다시 今日에 보지 못하였겠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고, 도리어 마침내 구구히 秦나라와 지혜를 다투고 힘을 겨루고자 하다가 끝내 복종함이 뒤늦을까 두려워하여 멸망함을 기다릴 겨를조차 없었으니, 애통해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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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찍이 三代를 합하여 논하건대, 三代가 왕 노릇 함은 천하를 소유한 것이 1천 9백 69년이었는데,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몇 명이 못되어서 夏나라에는 [[禹王]]‧[[啓]]‧[[少康]]이 있었고, 商나라에는 [[成湯]]‧[[太甲]]‧[[太戊]]‧[[盤庚]]‧[[武丁]]이 있었고, 周나라에는 [[武王]]‧[[成王]]‧[[康王]]‧[[宣王]]이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알려진 군주가 없다. 그러나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들은 三代를 첫 번째로 칭하여, 드높고 위대하여 우뚝이 千古에 뛰어나서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禹王]]‧[[成湯]]‧[[文王]]‧[[武王]]이 聖王의 道로써 떳떳한 법칙을 세우고 기강을 펴며 법을 창건하고 제도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중에도 더욱 우뚝이 드러난 것은 井田, 封建, 學校, 兵師와 같은 중요한 제도들이 자세히 구비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 仁으로 굳게 맺고 禮로 유지하여, 뿌리를 바로잡고 근원을 키워서 스스로 하늘과 더불어 무궁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자손들이 剛惡(剛이 過함)함으로 [[桀王]]‧[[紂王]]‧[[幽王]]‧[[厲王]] 같은 포악함이 있지 않고, 柔惡(柔가 過함)함으로 [[赧王]]과 같이 나약한 자가 있지 않으면 모두 충분히 대대로 지켜서 잃지 않은 것이니,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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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의 《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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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나라는 [[平王]]이 東遷(東都인 洛邑으로 遷都)한 뒤로부터 날마다 쇠약해졌고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또 나뉘어 둘이 되어서 그 土地와 人民이 강대국의 大夫에도 비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하가 오히려 周나라를 높여 섬겨서 共主라 하여, [[文王]]‧[[武王]]의 宗廟를 지켜 綿綿히 이어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으니, 그 연고는 어째서인가?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고 나오는 근원이 깊기 때문이었다. 옛날 周나라가 일어날 때에 禮로써 뿌리를 삼고 仁으로써 근원을 삼았다. 后稷으로부터 이래로 [[文王]], [[武王]], [[成王]], [[康王]]에 이르기까지 禮를 강론함이 구비되었고 仁을 베풂이 깊었다. 백성들이 귀와 눈에 익숙하고 골수에 젖어 들어서 비록 후세가 미약하였으나 그 백성들이 장차 능멸하고 태만한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禮를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고, 장차 離反할 마음이 있게 되면 先王의 仁을 생각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나라를 향유하기를 장구하게 한 방도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구한 몇 고을을 가지고 포악한 일곱 나라의 사이에 처하여 단 하루도 보존할 수가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수십 년을 보존함에 있어서이겠는가.” - 《歷年圖》는 바로 [[溫公]]이 《資治通鑑》을 저술하기 전에 먼저 이 《歷年圖》를 올렸는 바, 古今의 다스려짐과 혼란함을 차례로 서술하되 한 왕조가 끝날 때에는 한 議論을 세워서 興亡을 결단하였으니, 뒤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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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周는 三十七王이니 幷東周君이라 按經世書하면 始武王己卯하야 終東周君壬子히 該八百七十三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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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愚按 [[南宮氏]]曰 作史者는 〈[[司馬氏]]〉 當於[[莊襄]]元年東周旣滅에 方書周亡하고 然後進秦하야 使接周統이요 於[[莊襄]]終年[[呂政]]嗣位에 特書秦亡하고 然後正其姓氏하야 別爲後秦이니 斯實錄矣라 今乃不然하야 東周未滅에 遽進[[昭襄]]之秦하고 [[呂政]]嗣位로되 猶冒嬴秦之姓하야 於周則絶之如恐其不亟하고 於秦則進之如恐其不多하야 好惡不公하고 是非逆置하니 其諸謂之何哉오 秦自[[孝公]]以來로 累世窺周하야 一念僭竊이라가 至[[莊襄]]하야 百有餘年에 東周始滅하니 彼固謂[[嬴氏]]之業이 可傳之不墜러니 未幾에 [[呂政]]立而[[嬴氏]]之秦이 已亡이라 嗚呼라 [[赧王]]入秦之後에 歷七年而東周如線之緖尙存이러니 [[莊襄]]取周之餘才(纔)三載에 而[[柏翳]]<font color="#0054FF" size="2">【書 稱伯益이라 [[周平王]]이 封[[伯益]]之裔[[襄公]]於秦하니라 】</font>數百年之宗祀遽滅<font color="#0054FF" size="2">【襄公始封諸侯로 至莊襄甲寅히 五百七十年이라 】</font>이라 [[孟子]]曰 殺人之父면 人亦殺其父하고 殺人之兄이면 人亦殺其兄이라하시니 天道好還하야 福善禍淫이 無毫髮爽이어늘 而世之窺覦僭竊于人之國者 每迷而不悟하니 悲夫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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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周나라는 37왕이니, [[東周君]]까지 넣었다. 《皇極經世書》를 살펴보면 [[武王]]己卯年에서 시작하여 [[東周君]]壬子年에 이르기까지 총 87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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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胡一桂]]의 《史纂通要》)가 살펴보건대, [[南宮氏(南宮靖一)]]가 말하기를 “역사책을 지은 자(司馬光을 가리킴)가 마땅히 [[莊襄王]]元年에 東周가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周나라가 망한 것을 쓰고 그런 뒤에 秦나라를 올려서 周나라의 계통을 이었어야 하고, [[莊襄王]]의 마지막 해에 [[呂政]]이 왕위를 계승함에 있어서는 秦나라가 망한 것을 특별히 쓰고 그런 뒤에 姓氏를 바로잡아 별도로 後秦이라고 했어야 하니, 이것이 사실 그대로의 진실한 기록이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東周가 멸망하기 전에 갑자기 [[昭襄王]]의 秦나라를 올리고, [[呂政]]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대로 嬴秦의 姓을 무릅써서, 周나라에 있어서는 끊어버리기를 행여 빨리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하고, 秦나라에 있어서는 올리기를 행여 많이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해서, 좋아하고 미워함이 공정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이 도치되었으니 이를 일러 뭐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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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는 [[孝公]] 이래로 여러 대 동안 周나라 왕실을 엿보아 한결같이 참람하고 도둑질할 것을 생각하다가 [[莊襄王]]에 이르러 백여 년 만에 東周가 비로소 멸망하자, 저들은 진실로 [[嬴氏]]의 基業이 길이 전해져 실추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呂政]]이 즉위하자 [[嬴氏]]의 秦나라가 이미 망하였다. 아, [[赧王]]이 秦나라로 들어간 후에 7년이 지나도록 東周의 실낱같은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었는데, [[莊襄王]]이 周나라를 취한 뒤로 겨우 3년 만에 柏翳의<font color="#0054FF" size="2">【柏翳를 ≪書經≫에는 伯益이라 칭하였다. 周나라 平王이 伯益의 후손인 襄公을 秦나라에 봉하였다.】</font> 수백 년 동안 이어온 宗祀가 마침내 멸망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襄公을 처음 제후로 봉한 뒤로부터 莊襄王 갑인년까지 570년이다.】</font>[[孟子]]가 말씀하기를 “남의 아버지를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이면 남이 또한 나의 형을 죽인다.”라고 하였으니, 天道는 돌려주기를 좋아하여 선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려줌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는데, 세상에 남의 나라를 엿보고 도둑질하는 자들은 매양 어두워 깨닫지 못하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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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6일 (금) 00:35 기준 최신판

莊襄王

※名孝文王子라 初質於趙러니 因不韋策하야 歸以爲嗣하니라 其先은 柏翳이니 佐有功하야 賜姓이라 後有非子封秦하고 秦仲始大하며 自孝公商鞅하야 以利而致富强하고 廢井田, 開阡陌하며 莊襄滅周러니 三年而亡하니라

秦紀

※莊襄王은 이름이 楚이니 孝文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趙나라에 볼모가 되었는데 呂不韋의 계책을 따라 秦나라로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었다. 그 선조는 柏翳이니 舜임금을 도와 공이 있어서 嬴氏姓을 하사받았다. 뒤에 非子가 있어 秦나라에 봉해지고 秦仲이 비로소 나라를 키웠으며, 孝公이 商鞅을 등용하여 이익으로 부강함을 이룩하였으며 井田法을 폐지하고 阡陌을 개간하였다. 莊襄王이 周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즉위한 지 3년에 망하였다.

[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喜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建十七年

[癸丑]〈秦莊襄王二, 楚考烈王十五, 燕王七, 魏安釐王二十九, 趙孝成王十八, 韓桓惠王二十五, 齊王十七年이라 ○ 凡七國이라〉

日食하다 ○ 秦이 伐趙하야 定太原하고 取三十七城하다

계축(B.C.248) - 秦莊襄王 2년, 楚 考烈王 15년, 燕王 7년, 魏安釐王 29년, 趙孝成王 18년, 韓桓惠王 25년, 齊王 17년이다. ○ 모두 일곱 나라이다. -

日食이 있었다.

○ 秦나라가 趙나라를 쳐서 太原을 평정하고 37개 성을 점령하였다.

[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

[甲寅]〈秦三, 楚十六, 燕八, 魏三十, 趙十九, 韓二十六, 齊十八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고 呂政代하니라〉

蒙驁【齊人이니 蒙武之父요 蒙恬之祖也라 】帥師伐魏하니 魏師數敗라 魏王이 患之하야 乃使人請信陵君【卽公子無忌也라 】於趙한대 信陵君이 畏得罪하야 不肯還이라 毛公, 薛公이 見信陵君하고 曰 公子所重於諸侯者는 徒以有魏也라 今魏急而公子不恤이라가 一旦에 秦人이 克大梁【魏地라 按魏有小梁이라 故以大梁別之라 】하고 夷先王之宗廟면 公子何面目立天下乎잇가 語未畢에 信陵君이 色變하야 趣(促)駕還魏하니 魏王이 持信陵君而泣하고 以爲上將軍하다 信陵君이 使人求援於諸侯한대 諸侯聞信陵君復爲魏將하고 皆遣兵救魏하니 信陵君이 率五國之師하야 敗蒙驁於河外【謂陝華二州也라 河外者는 河南岸也니 魏州地라 】하다

[史略 史評]臨江梁氏寅曰 從橫之說이 固皆詭術이나 然爲從者는 實六國之利也라 當無忌之時하야 六國이 益不支於秦矣라 然이나 無忌一旦爲魏將에 五國이 助之하야 大破秦軍하니 況於其初에 能以信義相親하여 幷力西向이면 則秦雖强暴나 安得而亡之哉아 故로 曰滅六國者는 六國也요 非秦也라하니라

갑인(B.C.247) - 秦나라 3년, 楚나라 16년,燕나라 8년, 魏나라 30년, 趙나라 19년,韓나라 26년, 齊나라 18년이다. ○ 이 해에 秦나라가 망하고 呂政이 대신하였다. -

蒙驁가【蒙驁는 齊나라 사람이니, 蒙武의 아버지이고 蒙恬의 조부이다.】 군대를 이끌고 魏나라를 정벌하니, 魏나라 군대가 자주 패하였다. 魏王이 근심하여 마침내 사람을 시켜 趙나라에 있는 信陵君(公子 無忌)을 청하니,【信陵君은 바로 公子 無忌이다.】信陵君이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毛公薛公信陵君을 만나 말하기를 “公子께서 諸侯들에게 존중받는 것은 다만 魏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魏나라가 급한데 公子가 돌보지 않다가 하루 아침에 秦나라 사람들이 大梁을 이기고【大梁은 魏나라 땅이다. 살펴보건대 魏나라에 小梁이 있기 때문에 大梁이라 하여 구별한 것이다.】 先王의 宗廟를 부순다면 公子께서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말을 마치기 전에 信陵君이 낯빛이 변해서 수레를 재촉하여 魏나라로 돌아오니, 魏王信陵君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上將軍으로 삼았다. 信陵君이 사람을 시켜 諸侯들에게 구원을 청하니, 諸侯들이 信陵君이 다시 魏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대를 보내어 魏나라를 구원하였다. 信陵君이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河外에서 蒙驁를 패배시켰다.【河外는 陝州와 華州 두 州를 이른다. 河外는 黃河의 남쪽 기슭이니, 魏州 땅이다.】

[史略 史評]臨江梁氏(梁寅)가 말하였다.

“合從과 連橫의 내용이 진실로 모두 속이는 술책이나, 六國이 合從하는 것은 실로 六國의 이익이었다. 無忌의 때를 당해서는 六國이 더욱 秦나라를 버텨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無忌가 하루아침에 魏나라 장수가 되자, 다섯 나라가 도와서 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니, 하물며 六國이 처음에 신의로써 서로 친하여 힘을 합해 서쪽으로 秦나라를 향하였더라면 秦나라가 비록 강하고 포악하나 어떻게 六國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六國을 멸망시킨 것은 六國 자신이고 秦나라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 五月에 秦王薨하니 立三年이라 其子이 立【時政生十三年矣라 ○ 潁濱蘇轍이 嘗謂六國未亡에 而嬴氏先亡이라하니 信哉라 言乎여 】하야 封相國呂不韋하야 爲文信侯하고 號稱仲父라하다

[新增]胡氏不韋能以其子로 爲秦王之子하니 豈不能疾去二君하야 以其子爲王哉아 要之孝文莊襄이 蓋死於弑也니라

[史略 史評]雙湖胡氏曰 七國이 莫强於秦이요 亦莫强於六國이로되 은 用遠交近攻之策하야 卒以蠶食天下하고 六國은 爲謀不固하며 齊獨坐視五國之亡하고 自謂得計라가 同歸于盡하니 吁라 秦이 非强也라 詐有餘也요 六國이 非弱也라 智不足也니 使智足以燭秦之詐하고 信足以結六國之交하고 義足以尊周而爲之主면 雖族秦하여 求吾所大欲이라도 可也어늘 奈何其不然하고 以待覆亡之不暇하니 可勝歎哉아

5월에 秦王이 죽으니, 즉위한 지 3년이었다. 그 아들이 즉위해서【이때 政이 태어난 지 13년이었다. ○ 潁濱 蘇轍이 일찍이 이르기를 “六國이 멸망하기 전에 嬴氏가 먼저 망하였다.” 하였으니, 그 말이 사실이다.】相國呂不韋를 봉하여 文信侯로 삼고 仲父라 칭하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呂不韋가 자기 자식을 秦王의 자식으로 삼았으니, 어찌 속히 두 人君을 제거하여 자기 자식을 왕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요컨대 孝文王莊襄王呂不韋의 시해에 죽은 것이다.”

[史略 史評]雙湖胡氏(胡一桂)가 말하였다.

“七國은 秦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고 또한 六國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으나, 秦나라는 遠交近攻의 계책을 써서 끝내 천하를 잠식하였고, 六國은 계책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齊나라는 五國이 망하는 것을 단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여겼다가 똑같이 멸망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秦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가 有餘해서였고, 六國이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해서였으니, 만일 지혜가 秦나라의 속임수를 환히 알 수 있고 믿음이 六國의 교제를 공고히 할 수 있고 義理가 천자국인 周나라를 높여 宗主로 삼을 수 있었더라면 비록 秦나라를 멸망시켜 자신들이 크게 원하는 바를 구하더라도 가능하였을 터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고는 손쓸 새도 없이 전복하고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