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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div class="clsB"> ==通鑑節要 卷之三十== </div><div class="clsB"> ===晉紀=== </div><div class="clsB"> ====安皇帝==== </div><div class="clsB"> =====安皇帝 名은 德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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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 卷之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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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 卷之二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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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紀===
 
===晉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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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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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宗孝武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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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安皇帝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
=====烈宗孝武皇帝 名曜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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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font color="#0054FF" size="2">【寬容和平曰安이라】</font> 名은 [[德宗]]이니 [[武帝]]太子라 在位二十二年이요 壽三十七이라
+
[[烈宗孝武皇帝]] [[]]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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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皇帝<font color="#0054FF" size="2">【너그럽고 포용하여 화평한 것을 安이라 한다.】</font>는 이름이 [[德宗]]이니 [[武帝]]의 태자이다. 재위가 22년이고 壽가 37세이다.
+
[[烈宗]][[孝武皇帝]]는 이름이 [[司馬曜]]이고 자가 [[昌明]]이니, [[簡文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4년이요, 壽가 35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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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隆安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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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寧康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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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酉]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요 秦皇初四요 魏皇始(三)[二]年이라 ○ [[南涼王]][[禿髮烏孤]]太初元年이요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小國二요 新小國二니 凡七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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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寧康元年이라 〈秦建元九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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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珪]] 自將圍中山하니 中山이 飢甚이라 [[慕容麟]]이 帥二萬餘人하고 出據新市어늘 甲子晦에 [[魏王]][[珪]]進軍攻之할새 太史令太史令[[鼂崇]]曰 不吉하니이다 昔에 [[紂]]以甲子亡하니 謂之疾日<font color="#0054FF" size="2">【左傳昭九年 辰在子卯謂之疾日注에 疾은 惡也니 紂以甲子喪하고 桀以乙卯亡이라 故로 以爲忌라】</font>이라 兵家忌之하니이다 [[珪]]曰 [[]]는 以甲子亡이어니와 [[武王]]은 不以甲子興乎아 [[]]無以對러라 十月甲戌에 [[珪]]與[[麟]]으로 戰於義臺하야 大破之하니 [[麟]]遂奔鄴하다 甲申에 魏克中山<font color="#0054FF" size="2">【是年三月에 魏王珪 圍中山한대 燕王寶走出이어늘 慕容詳이 城守拒魏하고 自謂能却魏兵하야 兵威已振이라하야 遂卽帝位러니 麟襲殺詳而自立이라 至是하야 珪克中山이라】</font>하다 [[]]至鄴하야 復稱[[趙王]]하다
+
二月에 大司馬大司馬[[]]이 來朝어늘 詔吏部尙書謝安과 侍中王坦之하야 迎于新亭하다 是時에 都下人情이 恟恟<font color="#0054FF" size="2">【恟은 音胸이니 懼也라】</font>하야 或云欲誅王, 謝하고 因移晉室이라하니 坦之는 甚懼호되 安은 神色不變하고 晉祚存亡이 決於此行이라하니라 [[]]이 旣至에 百官이 拜於道側이어늘 [[]]이 大陳兵衛하고 延見朝士하니 有位望者 皆戰慴<font color="#0054FF" size="2">【慴은 與懾同하니 懼也라】</font>失色이라 坦之는 流汗沾衣하고 倒執手版<font color="#0054FF" size="2">【手版은 笏也라】</font>호되 安은 從容就席하야 笑語移日이러라 郗超常爲溫謀主라 安이 與坦之見溫할새 [[]]이 使超臥帳中<font color="#0054FF" size="2">【安謂溫曰 安聞諸侯有道면 守在四隣이라하니 明公은 何須壁後置人耶아하니 溫笑曰 不能不爾라하고 命撤之하니라】</font>하야 聽其言이러니 風動帳開어늘 安笑曰 [[郗生]]은 可謂入幕之賓矣로다 時에 天子幼弱하고 外有彊臣호되 安與坦之 盡忠輔衛하야 卒安晉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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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元年(정유 397) - 燕나라 永康 2년이고, 秦나라 皇初 4년이고, 魏나라 皇始 2년이다. ○ [[南涼王]][[禿髮烏孤]]의 太初 元年이고, [[北涼王]][[段業]]의 神璽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과 涼 등 小國이 둘이고,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
寧康 元年(계유 373) - 秦나라 建元 9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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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拓跋珪]]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中山을 포위하니, 中山이 饑饉이 몹시 심하였다. [[慕容麟]]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新市를 점거하자, 甲子日(9월 29일) 그믐에 [[魏王]][[拓跋珪]]가 진군하여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太史令太史令[[鼂崇]]이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옛날에 [[紂王]]이 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날을 疾日<font color="#0054FF" size="2">【≪春秋左傳≫ 昭公 9年條의 ‘辰在子卯 謂之疾日(일진이 甲子와 乙卯에 있는 것을 疾日이라 한다)’ 注에 “疾은 불길한 것이니, 紂王은 甲子日에 망하였고 桀王은 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font>이라 이르는 바, 兵家에서 이를 꺼립니다.” 하였다. [[拓跋珪]]가 말하기를 “[[紂王]]은 갑자일에 망하였으나 [[武王]]은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는가?” 하니, [[鼂崇]]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
2월에 大司馬大司馬[[桓溫]]이 조회 오자, 황제가 吏部尙書吏部尙書[[謝安]]과 侍中侍中[[王坦之]]에게 명하여 新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都城의 민심이 흉흉<font color="#0054FF" size="2">【恟은 音이 흉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font>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桓溫]][[王坦之]][[謝安]]을 죽이고 인하여 晉나라 황실을 차지하고자 한다.”고 하니, [[王坦之]]는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謝安]]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晉나라 운명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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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甲戌日(10일)에 [[拓跋珪]][[慕容麟]]과 義臺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慕容麟]]이 마침내 鄴城으로 도망하였다. 甲申日(20일)에 魏나라가 中山을 이겼다.<font color="#0054FF" size="2">【이해 3월에 魏王 拓跋珪가 中山을 포위하자 燕王 慕容寶가 달아나니 慕容詳이 城을 수비하여 魏나라를 막고서, 스스로 魏나라 군대를 물리쳐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졌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慕容麟이 慕容詳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拓跋珪가 中山을 이겼다.】</font>[[慕容麟]]은 鄴城에 이르러 다시 [[趙王]]이라 칭하였다.
+
[[桓溫]]이 이르자 백관들이 길가에서 절하였는데, [[桓溫]]이 호위하는 병사들을 대단히 많이 진열하고 조정의 관원들을 만나니, 지위와 명망 있는 자들이 모두들 두려워 벌벌 떨며<font color="#0054FF" size="2">【慴은 懾과 같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font> 사색이 되었다. 이에 [[王坦之]]는 땀이 흘러 옷을 적셨으며 手版()을 거꾸로 쥐었는데,<font color="#0054FF" size="2">【手版은 笏이다.】</font>[[謝安]]은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서 [[桓溫]]과 한참 동안 웃으며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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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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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二年이라 〈[[燕主]][[慕容盛]]建平元이요 秦皇初五요 魏天興元年이라 ○ [[南燕王]][[慕容德]]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西秦, 涼, 南涼, 北涼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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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慕容麟]]이 說[[范陽王]][[]]하야 南徙滑臺하니 魏遂取鄴하다 [[]]이 上尊號於[[]]하니 [[]]이 用兄垂故事하야 稱[[燕王]]<font color="#0054FF" size="2">【燕은 南燕이라[釋義][[慕容德]]은 字[[元明]]이니 [[皝]]少子也라 [[寶]]敗走에 [[德]]稱[[燕王]]하고 據廣固하니라】</font>하다
+
[[郗超]]가 항상 [[桓溫]]의 主要 參謀 노릇을 하였다. [[謝安]][[王坦之]]와 함께 [[桓溫]]을 만날 때에 [[桓溫]]이 [[郗超]]를 시켜 장막 안에 누워서<font color="#0054FF" size="2">【謝安이 桓溫에게 이르기를 “제가 들으니 ‘諸侯에게 道가 있으면 지키는 것이 사방의 이웃 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明公은 어찌 굳이 벽 뒤에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溫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벽 뒤의 郗超를 물러가도록 명하였다.</font> 그의 말을 엿듣게 하였는데, 바람에 날려 장막이 걷히는 바람에 탄로가 나자 [[謝安]]이 웃으며 말하기를 “[[郗生]]이야말로 入幕賓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때 天子는 幼弱하고 밖에는 강대한 신하가 있었으나 [[謝安]]이 [[王坦之]]와 함께 충성을 다해 보필하고 호위해서 끝내 晉나라 황실을 편안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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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2년(무술 398) - [[燕主]][[慕容盛]]의 建平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5년이고, 魏나라 天興 元年이다. ○ [[南燕王]][[慕容德]]의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西秦‧涼(後涼)‧南涼‧北涼 등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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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慕容麟]]이 [[范陽王]][[慕容德]]을 설득하여 남쪽으로 도읍을 滑臺에 옮기니, 魏나라가 마침내 鄴城을 취하였다. [[慕容麟]]이 [[慕容德]]에게 尊號를 올리니, [[慕容德]]이 [[慕容垂]]의 故事를 따라 [[燕王]]이라 칭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原註]燕은 南燕이다.[釋義][[慕容德]]은 字가 [[元明]]이니 [[慕容皝]]의 작은아들이다. [[慕容寶]]가 패주하자, [[慕容德]]이 [[燕王]]을 칭하고 廣固를 점거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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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王]][[]]卒하니 [[長樂王]][[盛]]<font color="#0054FF" size="2">【後燕也니 [[寶]]之子라】</font>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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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이 有疾하야 還姑孰하다 [[]]이 以世子熙才弱이라하야 使弟沖으로 領其衆하고 俄頃에 薨하다 沖이 稱溫遺命하고 以少子玄爲嗣하니 時에 方五歲라 襲封南郡公하다 [[]]이 旣代溫居任하야 盡忠王室이라 或이 勸沖誅除時望하고 專執時權이로되 [[]]이 不從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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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王]][[慕容寶]]가 죽으니, [[長樂王]][[慕容盛]]<font color="#0054FF" size="2">【[[長樂王]][[慕容盛]]은 後燕이니, [[慕容寶]]의 아들이다.】</font>황제에 즉위하였다.
+
3월에 [[桓溫]]이 병이 나서姑孰으로 돌아갔다. [[桓溫]]이 세자세자[[桓熙]]가 재주가 부족하다 해서 자신의 아우인 [[桓沖]]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얼마 후에 [[桓溫]]이 죽었다. [[桓沖]][[桓溫]]의 遺命이라 칭하고 [[桓溫]]의 어린 아들인 [[桓玄]]을 후계자로 삼으니, 이때 [[桓玄]]의 나이가 5세였는데 [[南郡公]]의 봉작을 계승하였다. [[桓沖]]이 이미 [[桓溫]]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게 되자,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혹자가 [[桓沖]]에게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혼자서 당시의 大權을 장악하라고 권하였으나 [[桓沖]]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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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月에 [[魏王]][[珪]]卽皇帝位하야 改元天興하고 命朝野하야 皆束髮加帽<font color="#0054FF" size="2">【帽는 小兒蠻夷蒙頭衣니 晉書輿服志曰 帽는 猶冠也라하니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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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兵이 入寇梁, 益하고 遂取成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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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魏王]][[拓跋珪]]가 황제에 즉위하여天興으로 개원하고, 朝野에 명해서 모두 중국식으로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쓰게<font color="#0054FF" size="2">【帽는 오랑캐 어린아이의 蒙頭衣(蒙頭里)니, ≪晉書≫〈輿服志〉에 이르기를 “帽는 冠과 같다.” 하였다.】</font>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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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군대가 梁州와 益州로 쳐들어와 침략하고 마침내 成都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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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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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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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三年이라 〈燕長樂元이요 秦弘始元이요 魏天興二年이라 ○ [[涼主]][[呂纂]]咸寧元이요 北涼天璽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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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二年이라 〈秦建元十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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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珪]]置五經博士五經博士하고 增國子國子太學太學生員하야 合三千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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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에 詔[[謝安]]하야 摠中書하다 安이 好聲律하야 朞功之慘<font color="#0054FF" size="2">【謂有周朞, 大功, 小功之服이라】</font>에 不廢絲竹하니 士大夫效之하야 遂以成俗이라 王坦之 屢以書苦諫之曰 天下之寶<font color="#0054FF" size="2">【禮法爲天下之寶라】</font>를 當爲天下惜之라호되 安이 不能從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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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3년(기해 399) - 燕나라 長樂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元年이고, 魏나라 天興 2년이다. ○ [[涼主]][[呂纂]]의 咸寧 元年이고, 北涼天璽 元年이다.-
+
寧康 2년(갑술 374) - 秦나라 建元 10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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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拓跋珪]]가 五經博士五經博士를 설치하고國子學國子學과 太學太學의 生員生員을 늘려 모두 3천 명이 되게 하였다.
+
2월에 [[謝安]]에게 명하여 中書省中書省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謝安]]이 聲律를 좋아하여 朞年服과 大功‧小功의 喪<font color="#0054FF" size="2">【朞功之慘은 朞年과 大功 9월, 小功 5월의 服이 있음을 이른다.】</font>에도 관현악을 폐하지 않으니, 士大夫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 [[王坦之]]가 자주 편지로 간절히 간하기를 “〈禮法은 천하의 보물이니〉 천하의 보물<font color="#0054FF" size="2">【禮法이 천하의 보물이다.】</font>을 마땅히 천하를 위해 아껴야 한다.” 하였으나 [[謝安]]이 따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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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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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이 引師而南하니 北鄙諸郡이 皆降之어늘 遂定都廣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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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亥]三年이라 〈秦建元十一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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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에 秦淸河武侯[[王猛]]이 寢疾<font color="#0054FF" size="2">【寢은 浸也, 臥也라】</font>하야 上疏曰 伏惟陛下는 威烈震乎八荒하고 聲敎<font color="#0054FF" size="2">【風聲敎化也니 振聲於此而遠者聞焉故로 謂之聲이요 軌範于此而遠者效焉故로 謂之敎라】</font>光乎六合하야 九州百郡에 十居其七이라 平燕定蜀<font color="#0054FF" size="2">【平燕은 在庚午年이요 定蜀은 在癸酉年이라】</font>을 有如拾芥<font color="#0054FF" size="2">【草芥之橫在地上者를 俯而拾之니 言易而必得也라】</font>하니이다 夫善作者 不必善成하고 善始者 不必善終이라 是以로 古先哲王이 知功業之不易하고 戰戰兢兢<font color="#0054FF" size="2">【戰戰은 恐懼貌요 兢兢은 音京이니 戒愼貌라】</font>하야 如臨深谷하니 伏惟陛下 追蹤前聖하시면 天下幸甚이리이다 [[]]이 覽之悲慟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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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慕容德]]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니, 북쪽 변방의 여러 郡이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廣固에 도읍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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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康 3년(을해 375) - 秦나라 建元 11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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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秦나라 [[淸河武侯]][[王猛]]이 병이 중해지자,<font color="#0054FF" size="2">【寢은 점점 더해지는 것이요, 눕는 것이다.】</font>상소하기를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엄과 공렬이 八方의 먼 곳에까지 떨쳐지고 聲威와 敎化<font color="#0054FF" size="2">【聲敎는 風聲과 敎化이니, 여기에서 소리를 울리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들으므로 이를 일러 聲이라 하고, 여기에서 본보기가 되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본받으므로 이를 일러 敎라 한다.】</font>가 천지와 사방에 빛나서 九州九州의 백 개 郡 가운데 10분의 7을 차지하였으며, 燕나라를 평정하고 蜀 지방을 평정하기<font color="#0054FF" size="2">【燕나라를 평정한 것은 庚午年條(370)에 있고, 蜀 지방을 평정한 것은 癸酉年條(373)에 있다.】</font>를 땅 위의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하셨습니다.<font color="#0054FF" size="2">【拾芥는 땅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지푸라기를 허리를 굽혀 줍는 것이니, 쉬워서 반드시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font> 創業을 잘한 자가 반드시 守成을 잘하지는 못하고, 시작을 잘한 자가 반드시 끝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명철한 王들은 功業을 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깊은 골짝에 임하듯이 전전긍긍<font color="#0054FF" size="2">【戰戰은 두려워하는 모양이고 兢兢은 音이 경(긍)이니, 경계하고 삼가는 모양이다.】</font>한 것이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예전의 聖明한 王을 뒤따르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이것을 보고 비통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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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會稽世子]]<font color="#0054FF" size="2">【會稽王은 道子이니 卽瑯琊王이라】</font>[[元顯]]이 性苛刻하야 生殺任意하니 [[孫恩]]<font color="#0054FF" size="2">【琅琊人이니 世奉五斗米道라 恩叔父泰 有秘術하야 愚者敬之如神하야 皆竭財産하고 進子女하야 以祈福慶이러니 爲會稽王道子所誅한대 恩逃于海하다 衆聞泰死하고 惑之하야 皆謂蟬蛻登仙이라 故로 就海中資給하니 恩聚合亡命하야 志欲復讐하고 因民心騷動하야 遂叛하니라 後爲臨海太守辛景所討하야 窮蹙赴海自沈하니 妖黨謂之水仙이라하야 投水從死者百數러라 五斗米道는 見二十三卷米賊注하니라】</font>이 因民心騷動하야 自海島로 帥其黨하야 殺上虞令上虞令하고 遂攻會稽하다 於是에 會稽及東陽, 新安凡八郡人이 一時起兵하야 殺長吏以應恩하니 旬日之中에 衆이 數十萬이러라 時에 三吳承平<font color="#0054FF" size="2">【承은 一作昇이라】</font>日久하야 民不習戰이라 故로 郡縣兵이 皆望風奔潰라 恩據會稽하야 自稱征東將軍征東將軍하고 表[[會稽王]][[道子]]及世子世子[[元顯]]之罪하야 請誅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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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에 [[]]이 親至猛第하야 視疾하고 訪以後事한대 [[猛]]曰 晉雖僻處江南이나 然正朔相承<font color="#0054FF" size="2">【正者는 歲之首也요 朔者는 說文에 月一日也라】</font>하고 上下安和하니 臣沒之後에 願勿以晉爲圖하시고 鮮卑, 西羌<font color="#0054FF" size="2">【西羌은 謂姚萇也니 其後에 秦地果爲二族所據하니라】</font>은 我之仇敵이라 終爲人患하리니 宜漸除之하소서 言終而卒하니 [[堅]]謂太子宏曰 天不欲使吾平壹六合耶아 何奪吾景略<font color="#0054FF" size="2">【王猛字라】</font>之速也오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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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會稽王]]의 世子<font color="#0054FF" size="2">【會稽王은 司馬道子이니, 곧 瑯琊王이다.】</font>인 [[司馬元顯]]이 성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孫恩<font color="#0054FF" size="2">【孫恩은 琅琊 사람이니, 대대로 五斗米道를 믿었다. 孫恩의 叔父인 孫泰가 비밀스런 방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神처럼 공경하여 모두 재산을 탕진하고 자녀를 바쳐 福을 빌었는데, 會稽王 司馬道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孫恩이 海島로 도망하였다. 사람들이 孫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혹하여 모두 이르기를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海島에 나아가 物資를 공급하니, 孫恩이 망명한 자들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자 하여 민심이 騷動한 틈을 타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뒤에 臨海太守 辛景에게 토벌당하여 궁지에 몰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요망한 무리가 水仙(水國의 神仙)이라 이르며 물속에 투신하여 따라 죽은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려졌다. 五斗米道는 23권 米賊 注에 보인다.】</font>이 民心이 소요한 틈을 타서 海島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上虞令上虞令을 죽이고 마침내 會稽를 공격하였다. 이에 會稽와 東陽, 新安 등 모두 여덟 郡의 사람들이 일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수령을 죽이고 [[孫恩]]에게 호응하니,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三吳 지방은 태평을 누린<font color="#0054FF" size="2">【承은 다른 곳에는 昇으로 되어 있다.】</font> 지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郡縣의 병력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었다. [[孫恩]]이 會稽를 점거하여征東將軍征東將軍이라 자칭하고, 表文을 올려 [[會稽王]][[司馬道子]]와 世子世子인 [[司馬元顯]]의 죄를 열거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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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苻堅]]이 친히 [[王猛]]의 집에 이르러서 병을 살펴보고 차후의 일을 물었는데, [[王猛]]이 답하기를 “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江南에 있으나 正朔(正統)이 서로 이어지고<font color="#0054FF" size="2">【正은 한 해의 처음이요, 朔은 ≪說文解字≫에 “매월 1일이다.” 하였다.】</font> 상하가 편안하고 화목하니 바라건대 신이 죽은 뒤에 晉나라를 도모하지 마시고, 鮮卑와 西羌<font color="#0054FF" size="2">【西羌은 姚萇을 이르니, 뒤에 秦나라 지역이 과연 鮮卑族과 羌族 두 종족에게 점거당하였다.】</font>은 우리의 원수이고 적이어서 끝내 우리의 폐해가 될 것이니 마땅히 점차 제거하소서.”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苻堅]]太子太子[[苻宏]]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나로 하여금 六合(천하)을 통일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우리 景略(王猛)<font color="#0054FF" size="2">【景略은 王猛의 字이다.】</font>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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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太元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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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帝卽位以來로 內外乖異하야 石頭以南은 皆爲荊, 江所據<font color="#0054FF" size="2">【荊은 殷仲堪이요 江은 王愉라】</font>하고 以西는 皆豫州所專<font color="#0054FF" size="2">【豫는 庾楷라】</font>이요 京口及江北은 皆[[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彭城人이니 沈毅多計畫이라 爲桓玄參軍하야 領精銳하고 爲前鋒하야 百戰百勝하니 號爲北(部)[府]하고 敵人畏之라 復爲龍驤將軍, 領江州而死하니라】</font>及廣陵相高雅之所制하야 朝政所行은 惟三吳而已러니 及[[孫恩]]作亂에 八郡<font color="#0054FF" size="2">【謂荊, 江, 豫, 京口, 江北及三吳라】</font>이 皆爲恩有하야 畿內諸縣에 盜賊이 處處蜂起<font color="#0054FF" size="2">【言其衆也라】</font>하고 [[恩]]黨이 亦有潛伏在建康者하니 人情危懼하야 常懼竊發이러라 於是에 內外戒嚴하야 加[[道子]]黃鉞하고 [[元顯]]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하고 命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하야 兼督吳興義興軍事하야 以討[[恩]]하고 [[劉牢]]之亦發兵討[[恩]]할새 拜表輒行하다 十二月에 [[謝琰]]이 與[[牢之]]로 轉鬪<font color="#0054FF" size="2">【轉相戰鬪也라】</font>而前하니 所向輒克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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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太元元年이라 〈秦建元十二年이라 是歲에 涼, 代皆亡하니 僭國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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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에 涼公張天錫<font color="#0054FF" size="2">【玄靚叔父也라 涼州弑其君祚하고 立玄靚爲涼王이러니 天錫이 弑其君玄靚而自立이라 玄靚은 曜靈弟也라】</font>이 荒於酒色<font color="#0054FF" size="2">【荒은 無厭也라】</font>하야 不親庶務하니 人情이 憤怨이라 [[秦王]][[]]이 遣苟萇, 姚萇하야 將兵滅之하니 涼州郡縣이 悉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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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 군벌이 서로 괴리되어서 石頭城 이남은 모두 荊州와 江州의 두 刺史刺史에게 점거당하였고<font color="#0054FF" size="2">【荊州刺史는 殷仲堪이요, 江州刺史는 王愉이다.】</font>石頭城 이서는 모두 豫州의 전유물이 되었으며,<font color="#0054FF" size="2">【豫州刺史는 庾楷이다.】</font>京口와 江北은 모두 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劉牢之는 彭城 사람이니, 침착하고 굳세며 계책이 많았다. 桓玄의 參軍이 되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백전백승하니, 이름하기를 北府兵이라 하고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다시 龍驤將軍‧領江州刺史가 되었다가 죽었다.】</font>와 廣陵相廣陵相인 [[高雅之]]에게 控制당하여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는 곳은 오직 三吳 지방뿐이었다. [[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여덟 郡<font color="#0054FF" size="2">【여덟 郡은 荊州, 江州, 豫州, 京口, 江北 및 三吳(吳郡, 吳興, 丹陽)를 이른다.】</font>이 모두 [[孫恩]]의 소유가 되자, 畿內畿內의 諸縣에서 도적들이 곳곳마다 봉기<font color="#0054FF" size="2">【蜂起는 많음을 말한 것이다.】</font>하고 [[孫恩]]의 도당 중에 또한 建康에 잠복해 있는 자가 있으므로 人情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적이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안팎으로 엄밀하게 경계하여 [[司馬道子]]에게 黃鉞을 가하고 [[司馬元顯]]에게 領中軍將軍領中軍將軍을 가하였으며 徐州刺史徐州刺史[[謝琰]]에게 명하여 吳興과 義興郡의 軍事를 겸하여 도독해서 [[孫恩]]을 토벌하게 하였다. [[劉牢之]] 또한 군대를 일으켜 [[孫恩]]을 토벌할 적에 표문을 올리고 즉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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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元年(병자 376) - 秦나라 建元 12년이다. ○ 이해에 涼과 代가 모두 망하니, 僭國이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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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謝琰]]이 [[劉牢之]]와 轉轉하여 싸우면서<font color="#0054FF" size="2">【轉鬪는 轉轉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font> 전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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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涼公]] 張天錫<font color="#0054FF" size="2">【張天錫은 張玄靚의 叔父이다. 涼州 사람이 군주 張祚를 시해하고 張玄靚을 세워 涼王으로 삼았는데, 張天錫이 그 군주 張玄靚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하였다. 張玄靚은 張曜靈의 아우이다.】</font>酒色에 빠져<font color="#0054FF" size="2">【荒은 만족함이 없는 것이다.】</font> 여러 가지 사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분해 하고 원망하였다. [[秦王]][[苻堅]]이 [[苟萇]]과 [[姚萇]]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하게 하니, 涼州의 군현이 모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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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彭城[[劉裕]]<font color="#0054FF" size="2">【宋[[高祖]]라】</font> 勇健有大志라 僅識文字하고 以賣履爲業하고 好樗蒲<font color="#0054FF" size="2">【老子所作이니 令人擲之爲戲라 以五木爲之子하니 有梟盧雉犢塞五者하야 爲勝負之策하니 卽今之骰子라 骰는 音頭니 骰子는 博陸彩具라】</font>하니 爲鄕閭所賤이라 [[劉牢之]]擊[[孫恩]]할새 引[[裕]]參軍事하고 使將數十人하야 覘賊이러니 遇賊數千人하야 卽迎擊之라가 從者皆死하고 [[裕]]墜岸下라 賊이 臨岸欲下어늘 [[裕]]奮長刀하야 仰斫殺數人하고 乃得登岸하야 仍大呼逐之하니 賊皆走하고 [[裕]]所殺傷이 甚衆이러라 [[劉敬宣]]<font color="#0054FF" size="2">【牢之之子라】</font>이 怪[[裕]]久不返하야 引兵尋之라가 見[[裕]]獨驅數千人하고 咸共歎息하야 因進擊賊하야 大破之하고 斬獲千餘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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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에 [[秦王]][[堅]]이 遣唐公洛<font color="#0054FF" size="2">【綱目作行唐公洛이니 行唐은 縣名이라】</font>하야 將兵十萬하야 擊代한대 代王什翼犍이 奔陰山之北하니 部衆이 逃潰하야 國中이 大亂이라 其孫珪<font color="#0054FF" size="2">【珪는 [[拓跋珪]]니 是爲元魏의 道武라】</font>尙幼러니 珪母賀氏<font color="#0054FF" size="2">【東部大人賀野干之女라】</font> 以珪走依賀訥<font color="#0054FF" size="2">【野干子라】</font>이어늘 [[]]이 分代民하야 爲二部하고 使劉庫仁<font color="#0054FF" size="2">【衛辰之族이니 什翼犍之甥也라】</font>, 劉衛辰으로 統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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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彭城의 劉裕<font color="#0054FF" size="2">【劉裕는 宋나라 高祖이다.】</font>가 용맹하고 굳세며 큰 뜻이 있었다. 겨우 글자를 알고 짚신을 파는 것을 生業으로 삼으며 樗蒲(쌍륙과 골패 놀이)<font color="#0054FF" size="2">【老子가 만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던지게 하여 놀이를 하는 것이다. 五木으로 子를 삼는데, 梟‧盧‧雉‧犢‧塞의 다섯 가지가 있어 勝負의 策으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骰子(주사위)이다. 骰는 音이 두(투)이니, 骰子는 博陸(쌍륙)할 때 사용하는 彩具이다.】</font>를 좋아하니, 鄕閭에서 천대를 받았다. [[劉牢之]]가 [[孫恩]]을 공격할 적에 [[劉裕]]를 임용하여 參軍事參軍事로 삼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수천 명의 적을 만나 즉시 요격하였다가 수행했던 자는 모두 죽고 [[劉裕]]는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적이 언덕에서 굽어보고 내려오려 하자, [[劉裕]]가 긴 칼을 휘둘러 몇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찔러 죽이고 마침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크게 고함치면서 그들을 쫓아가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으며, [[劉裕]]에게 살상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劉敬宣<font color="#0054FF" size="2">【劉敬宣은 劉牢之의 아들이다.】</font>[[劉裕]]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찾아 나섰다가 [[劉裕]]가 홀로 수천 명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함께 감탄하고 인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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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秦王]][[苻堅]]이 [[唐公]] 苻洛<font color="#0054FF" size="2">【‘唐公洛’은 ≪資治通鑑綱目≫에 ‘行唐公洛’으로 되어 있으니, 行唐은 縣 이름이다.】</font>을 보내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代를 공격하게 하니, [[代王]][[拓跋什翼犍]]이 陰山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部衆이 도망하고 궤멸되어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의 손자 [[拓跋珪]]<font color="#0054FF" size="2">【珪는 拓跋珪이니, 이가 바로 元魏(北魏)의 道武帝이다.】</font>는 아직 어렸는데, [[拓跋珪]]의 어머니 賀氏<font color="#0054FF" size="2">【賀氏는 東部大人 賀野干의 딸이다.】</font>가 [[拓跋珪]]를 데리고 도망하여 賀訥<font color="#0054FF" size="2">【賀訥은 賀野干의 아들이다.】</font>에게 의지하였다. [[苻堅]]이 代나라의 백성을 나누어 두 部로 만들고 劉庫仁<font color="#0054FF" size="2">【劉庫仁은 匈奴인 劉衛辰의 일족이니, 拓跋什翼犍의 조카이다.】</font>[[劉衛辰]]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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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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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에 [[恩]]聞八郡響應하고 謂其屬曰 天下無復事矣라 當與諸君으로 朝服至建康이라하더니 旣而오 聞[[牢之]]引兵濟江하고 [[]]驅男女二十餘萬口하야 復逃入海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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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二年이라 〈秦建元十三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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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時에 朝廷이 方以秦寇爲憂하야 詔求文武良將可以鎭禦北方者어늘 [[謝安]]이 以兄子玄으로 應詔하니 [[郗超]]聞之<font color="#0054FF" size="2">【初에 中書郞郗超 自以其父愔位遇 應在謝安之右어늘 而優遊散地하야 常憤悒하야 形於辭色하야 由是로 與謝氏有隙이라 雖是有隙之間이나 以其明故로 如是而稱也라】</font>하고 歎曰 安之明으로 乃能違衆擧親하니 玄之才 足以不負所擧라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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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孫恩]]이 여덟 郡이 호응한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 朝服을 입고 建康에 이르러 帝位에 오르겠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劉牢之]]가 군대를 이끌고 [[浙江]]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는 [[孫恩]]이 남녀 백성 20여만 명을 몰고 다시 海島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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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2년(정축 377) - 秦나라 建元 13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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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막 조정이 秦나라의 침략을 우려하여 황제가 詔命을 내려 북방을 진무하고 방어할 만한 文武 겸비한 훌륭한 장수를 구하게 하였다. [[謝安]]이 형의 아들[[謝玄]]으로 詔命에 응하니, [[郗超]]가 이 말을 듣고<font color="#0054FF" size="2">【처음에 中書郞 郗超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 郗愔의 지위와 대우가 마땅히 謝安의 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부친이 閑散職에 정체되어 있다 하여 항상 분해 하고 원망하여 말과 안색에 드러나서 이로 인해 謝氏와 틈이 있었다. 비록 틈이 있는 사이였으나 謝安이 현명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한 것이다.】</font> 감탄하기를 “[[謝安]]의 현명함으로 마침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어기고 친척을 등용하였으니, [[謝玄]]의 재주가 자신을 천거한 [[謝安]]을 저버리지 않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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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太元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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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仲堪]]<font color="#0054FF" size="2">【時爲荊州剌史하니라】</font>이 恐[[桓玄]]跋扈<font color="#0054FF" size="2">【見十九卷丙戌年注라】</font>하야 乃與[[楊佺期]]<font color="#0054FF" size="2">【雍州刺史라】</font>로 結婚爲援이어늘 [[玄]]이 引兵擊殺之하다 [[玄]]이 旣克荊, 雍하고 表求領荊, 江二州하니 朝廷이 不能違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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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太元四年이라 〈秦建元十五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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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殷仲堪<font color="#0054FF" size="2">【殷仲堪이 이때 荊州剌史로 있었다.】</font>은 [[桓玄]]이 跋扈<font color="#0054FF" size="2">【跋扈는 19권 丙戌年(146) 注에 보인다.】</font>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楊佺期<font color="#0054FF" size="2">【楊佺期는 雍州刺史로 있었다.】</font>와 혼인을 맺어 서로 원조하게 하였는데, [[桓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殷仲堪]]과 [[楊佺期]]를 공격하여죽였다. [[桓玄]]이 이미 荊州와 雍州를 점령하고 表文을 올려 荊州와 江州 두 州를 거느릴 것을 청하니, 朝廷에서 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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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安이 爲宰相에 秦人이 屢入寇하니 邊兵失利하야 衆心危懼라 [[]]이 每鎭之以和靜하고 其爲政에 務擧大綱하고 不爲小察하니 時人이 比安於王導而謂其文雅<font color="#0054FF" size="2">【儒雅閒雅라】</font>過之라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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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涼王]][[光]]이 卒하고 [[太子]][[紹]]卽位하니 [[太原公]][[纂]]<font color="#0054FF" size="2">【纂이 嗜酒好獵이어늘 隆安五年에 呂超殺之하고 而立呂隆이러니 安帝元興二年에 降于秦하야 涼遂滅하니라[頭註]太原公纂은 紹之庶兄이라】</font>이 殺之하고 而卽天王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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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4年(기묘 379) - 秦나라 建元 15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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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涼王]][[呂光]]이 죽고太子太子[[呂紹]]가 즉위하니, [[太原公]] 呂纂<font color="#0054FF" size="2">【[原註]呂纂이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자, 隆安 5년(401)에 從弟 呂超가 그를 죽이고 呂隆을 세웠는데, 安帝 元興 2년(403)에 秦나라 姚興에게 항복함으로써 涼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頭註]太原公 呂纂은 呂紹의 庶兄이다.】</font>이 그를 죽이고天王天王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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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安]]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秦나라 사람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침략하였는데, 변방의 병사들이 승리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謝安]]이 매번 화평함과 고요함으로 사람들을 진정시켰으며 정사를 할 적에 큰 綱領을 행하기를 힘쓰고 작은 일을 살피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謝安]][[王導]]에게 견주되 그 文雅<font color="#0054FF" size="2">【우아하고 단아한 것이다.】</font>는 [[王導]]보다 낫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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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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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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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子]四年이라 〈燕長樂二요 秦弘始二요 魏天興三年이라 ○ 南燕建平元이요 [[南涼王]][[禿髮利鹿孤]]建和元年이요 [[西涼公]][[李暠]]庚子元年이라 ○ 是歲에 西秦降秦하니 舊大國三이요 小國四요 新小國一이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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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午]七年이라 〈秦建元十八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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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王]][[]]이 會群臣于太極殿하고 議曰 自吾承業으로 垂三十載<font color="#0054FF" size="2">【垂는 幾也라】</font>에 四方略定호되 唯東南一隅 未霑王化하니 今略計吾士卒컨대 可得九十七萬이라 吾欲自將以討之하노니 何如오 [[權翼]]<font color="#0054FF" size="2">【尙書左僕射라 昔에 紂爲無道나 三仁在朝일새 武王猶爲之旋師하니 今晉雖微弱云云也라】</font>曰 晉雖微弱이나 未有大惡하고 [[謝安]], [[桓沖]]은 皆江表偉人으로 君臣輯睦하니 未可圖也니이다 石越曰 今福德이 在吳<font color="#0054FF" size="2">【漢天文志曰 歲星所在之國은 不可伐이요 可以伐人이니라 索隱曰 歲星所在엔 其國有福이라 故曰福德이라[頭註]石越曰 今者에 歲鎭守斗라하니 歲는 木星이요 鎭은 土星이요 斗는 南斗라 斗, 牛, 女는 吳, 越, 揚州分이라 [通鑑要解]石越은 時太子左衛率也라】</font>하니 伐之면 必有天殃이요 且彼據長江之險하고 民爲之用하니 殆未可伐也니이다 [[堅]]曰 今以吾之衆으로 投鞭於江이라도 足斷其流어든 又何險之足恃乎아 且築室道旁이면 無時可成이니 吾當內斷於心爾로라 陽平公融曰 今伐晉이 有三難하니 天道不順이 一也요 晉國無釁이 二也요 我數戰兵疲하야 民有畏敵之心이 三也라 晉未可滅이 昭然甚明하니 今勞師大擧면 恐無萬全之功일까하노이다 且臣之所憂는 不止於此라 陛下寵育鮮卑, 羌, 羯<font color="#0054FF" size="2">【羯은 胡戎別號也라】</font>하야 布滿畿甸<font color="#0054FF" size="2">【畿는 天子環內地方千里요 甸은 夏書의 五百里註에 曰甸之言은 治也라】</font>하니 此屬은 皆我之深仇어늘 太子獨與弱卒數萬으로 留守京師하시니 臣은 懼有不虞之變<font color="#0054FF" size="2">【不虞는 猶不測也라】</font>이 生於腹心肘腋<font color="#0054FF" size="2">【肘는 臂節也요 腋은 胳也니 在肘後라】</font>이면 不可悔也니이다 王景略<font color="#0054FF" size="2">【景略은 猛字라】</font>은 一時英傑이라 陛下常比之[[諸葛武侯]]하시니 獨不記其臨沒之言乎잇가 堅不聽이어늘 融又諫曰 國家는 本戎狄<font color="#0054FF" size="2">【苻氏는 氐也니 西南夷種이라】</font>也라 正朔朝會不歸하고 江東은 雖微弱僅存이나 然中華正統이니 天意必不絶之리이다 堅曰 帝王曆數<font color="#0054FF" size="2">【帝王相繼之次第가 猶歲時氣節之先後라】</font> 豈有常耶아 汝不達變通爾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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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4년(경자 400) - 燕나라 長樂 2년이고, 秦나라 弘始 2년이고, 魏나라 天興 3년이다. ○ 南燕建平 元年이고, [[南涼王]][[禿髮利鹿孤]]의 建和 元年이고, [[西涼公]][[李暠]]의 庚子 元年이다. ○ 이해에 西秦이 秦나라에 항복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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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7년(임오 382) - 秦나라 建元 18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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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王]][[苻堅]]이 여러 신하들을 太極殿에 모이게 하고 의논하기를 “내가 基業을 받든 뒤로 거의 30년 만에<font color="#0054FF" size="2">【垂는 거의이다.】</font> 사방이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 한 귀퉁이가 아직도 帝王의 敎化를 입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 士卒들을 대략 계산해 보건대 97만 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직접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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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이 卽皇帝位于廣固하고 更名[[備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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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翼<font color="#0054FF" size="2">【權翼은 尙書左僕射이다. 權翼이 말하기를 “옛날에 紂가 無道하였으나 三仁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武王이 오히려 그 때문에 군대를 되돌려 돌아왔으니, 지금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라고 하였다.】</font>은 아뢰기를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큰 죄악이 있지 않고, [[謝安]][[桓沖]]은 모두 江南 지방의 偉人으로 군주와 신하가 화목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고, [[石越]]은 아뢰기를 “지금 福德星(歲星)이 吳지방에 있으니<font color="#0054FF" size="2">【[釋義]≪漢書≫ 〈天文志〉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나라는 정벌할 수 없고, 그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는 있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곳은 그 나라에 福이 있으므로 福德星이라 한다.” 하였다.[頭註]石越이 말하기를 “지금 歲(木星)와 鎭(土星)斗를 지킨다.” 하였으니, 歲는 木星이고 鎭은 土星이고 斗는 南斗이다. 斗‧牛‧女는 吳‧越과 揚州의 分野이다. [通鑑要解]石越은 이때 太子左衛率이었다.】</font> 그곳을 치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요, 또 저들은 長江의 험고한 지형을 점거하였고 백성들이 잘 쓰여지고 있으니, 아마도 정벌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로 볼 때 채찍만 강에 던져 넣어도 충분히 흐르는 강물을 차단시킬 수가 있는데, 또 어찌 험고함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길가에 집을 지으면 異說이 많아 완성될 날이 없을 것이니, 내 마음속에 결단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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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平公]][[苻融]]이 말하기를 “지금 晉나라를 정벌함에 세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天道가 따라주지 않음이 첫 번째요, 晉나라에 잘못이 없음이 두 번째요, 우리가 자주 싸워 군사들이 피로해서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晉나라를 멸할 수 없음이 昭然하여 매우 분명하니, 이제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크게 동원한다면 萬全의 공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우려하는 것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鮮卑族과 羌族, 羯族<font color="#0054FF" size="2">【羯은 胡戎의 別號이다.】</font>을 총애하고 기르셔서 畿甸(都城)<font color="#0054FF" size="2">【畿는 天子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 안의 땅이 사방 千里인 것이요, 甸은 ≪書經≫ 〈夏書〉의 五百里 註에 “甸이란 말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였다.】</font>에 두루 가득합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데 太子가 홀로 약한 군졸 수만 명을 데리고 남아서 都城을 지킬 것이니, 신은 예상하지 못한 변란<font color="#0054FF" size="2">【不虞는 不測과 같다.】</font>이 腹心(긴요한 곳)과 팔꿈치와 겨드랑이(매우 가까운 곳)<font color="#0054FF" size="2">【肘는 팔 관절이고, 腋은 겨드랑이이니 팔뚝의 뒤에 있다.】</font>에서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까 두렵습니다. 王景略<font color="#0054FF" size="2">【景略은 王猛의 字이다.】</font>은 한때의 영웅호걸입니다. 폐하께서 항상 그를 [[諸葛武侯]]에게 비견하곤 하셨으니, 어찌하여 그가 죽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하였으나 [[苻堅]]이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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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燕王]][[慕容德]]이 廣固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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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苻融]]이 또 간언하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戎狄<font color="#0054FF" size="2">【苻氏는 氐族이니, 서남지방 오랑캐 종족이다.】</font>이 건립한 나라로서 正朔과 朝會가 돌아오지 않았고, 江東은 비록 미약하여 겨우 보존되었으나 中華의 정통이니, 하늘의 뜻이 반드시 끊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帝王의 운수<font color="#0054FF" size="2">【曆數는 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가 歲時의 節氣의 先後와 같은 것이다.】</font>가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너는 변통할 줄을 모른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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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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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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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五年이라 〈[[燕主]][[慕容熙]]光始元이요 秦弘始三이요 魏天興四年이라 ○ [[涼王]][[呂隆]]神鼎元이요 [[北涼王]][[沮渠蒙遜]]永安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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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八年이라 〈秦建元十九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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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에 [[秦王]][[]]이 下詔하야 大擧<font color="#0054FF" size="2">【群臣이 皆不可라호되 獨冠軍將軍慕容垂勸故로 大擧也라】</font>入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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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 5년(신축 401) - [[燕主]][[慕容熙]]의 光始 元年이고, 秦나라 弘始 3년이고, 魏나라 天興 4년이다. [[涼王]][[呂隆]]의 神鼎 元年이고, [[北涼王]][[沮渠蒙遜]]의 永安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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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8년(계미 383) - 秦나라 建元 19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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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秦王]][[苻堅]]이 詔命을 내려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font color="#0054FF" size="2">【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冠軍將軍 慕容垂만이 권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크게 동원한 것이다.】</font>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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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武威王]][[利鹿孤]]<font color="#0054FF" size="2">【以元興元年卒하니 弟傉檀立하야 自稱南涼王하니라[附註]禿髮氏也니 鮮卑別種으로 與拓跋同祖라 晉志에 河西鮮卑人也라 七祖壽闐在孕할새 母因寢而産於被中하니 鮮卑謂被爲禿髮일새 因而氏焉이라 至孫樹機〈能〉하야 據有涼州之地하고 至烏孤嗣位러니 呂光이 署爲冠軍大將軍하다 丁酉年에 自稱西平王이러니 烏孤死에 弟利鹿孤立하니라】</font> [[河西王]]하다 北涼[[沮渠蒙遜]]<font color="#0054FF" size="2">【沮渠는 官名이라 其先世爲匈奴左沮渠일새 蒙遜以官爲氏라】</font>이 [[涼王業]]<font color="#0054FF" size="2">【建康太守段業也라 丁酉年叛하야 自稱涼州牧, 建康公하다 蒙遜이 以衆歸之하고 己亥年에 自稱涼王이러니 至是에 蒙遜殺之하니라】</font>하고 自稱涼州牧涼州牧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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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八月에 [[]]이 遣[[陽平公]][[融]]하야 督後將軍督後將軍張蚝<font color="#0054FF" size="2">【有前將軍, 後將軍이라 蚝는 七志切이라】</font>와 冠軍將軍冠軍將軍[[慕容垂]]等의 步騎二十五萬하야 爲前鋒하고 以兗州刺史兗州刺史[[姚萇]]으로 爲龍驤將軍龍驤將軍하다 [[慕容楷]]<font color="#0054FF" size="2">【楷는 音皆라】</font>, [[慕容紹]] 言於[[慕容垂]]曰 主上이 驕矜已甚하니 叔父建中興之業이 在此行也니이다 [[垂]]曰 然하다 非汝면 誰與成之리오 甲子에 [[堅]]이 發長安戎卒六十餘萬과 騎二十七萬하니 旗鼓相望하야 前後千里러라 詔以[[謝石]], [[謝玄]]으로 帥衆八萬하야 拒之할새 秦兵이 至潁口하니 兵旣盛하야 都下震恐이라 [[玄]]이 入問計於[[謝安]]한대 [[]]이 夷然<font color="#0054FF" size="2">【夷는 坦也, 平也니 言坦然無異平日也라】</font>答曰 已別有旨라하고 旣而寂然이라 [[玄]]不敢復言하고 乃令[[張玄]]重請한대 [[安]]遂命駕하야 出遊山墅<font color="#0054FF" size="2">【墅는 田廬也라】</font>하니 親朋이 畢集이라 與[[]]으로 圍碁賭墅할새 安碁常劣於[[玄]]이러니 是日에 [[玄]]懼하야 便爲敵手而又不勝<font color="#0054FF" size="2">【敵手는 謂下子爭行劫하야 智算相敵也라 玄意不在碁故로 不能勝安이라】</font>하다 [[安]]이 遂遊陟<font color="#0054FF" size="2">【陟은 登也니 遊山登高也라】</font>이라가 至夜乃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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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武威王]] 禿髮利鹿孤<font color="#0054FF" size="2">[原註]禿髮利鹿孤가 元興 元年(402)에 죽자 아우 禿髮傉檀이 즉위하여 스스로 南涼王이라 칭하였다.[附註]利鹿孤는 禿髮氏이니 鮮卑族의 別種으로 拓跋氏와 조상이 같다. ≪晉書≫ 〈載記〉에 “禿髮利鹿孤는 河西 鮮卑族 사람이다. 7세조 壽闐이 胎中에 있을 때에 어머니가 잠을 자다가 이불 속에서 그를 낳으니, 鮮卑族은 이불을 禿髮이라 하기 때문에 인하여 姓氏로 삼았다. 손자인 禿髮樹機能에 이르러 涼州 지역을 점령하였고 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呂光이 임명하여 冠軍大將軍으로 삼았다. 정유년(397)에 西平王이라 자칭하였는데, 禿髮烏孤가 죽자 아우 禿髮利鹿孤가 즉위했다.” 하였다.】</font>[[河西王]]을 칭하였다. 北涼의 沮渠蒙遜<font color="#0054FF" size="2">【沮渠는 官名이다. 그 선조가 匈奴의 左沮渠였으므로 蒙遜이 관명으로써 姓氏를 삼은 것이다.】</font>[[涼王]] 段業<font color="#0054FF" size="2">【涼王 業은 建康太守 段業이다. 정유년(397)에 배반하여 스스로 涼州牧‧建康公이라 칭하였다. 沮渠蒙遜이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였고, 기해년(399)에 스스로 涼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때(401)에 沮渠蒙遜이 그를 죽인 것이다.】</font>을 죽이고 스스로 涼州牧涼州牧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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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苻堅]]이 [[陽平公]][[苻融]]을 보내어 後將軍後將軍 張蚝<font color="#0054FF" size="2">【前將軍과 後將軍이 있다. 蚝는 음이 七志切(치)이다.】</font>와 冠軍將軍冠軍將軍[[慕容垂]] 등의 步兵 및 騎兵 25만 명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부대로 삼고, 兗州刺史兗州刺史[[姚萇]]을 龍驤將軍龍驤將軍으로 삼았다. 慕容楷<font color="#0054FF" size="2">【楷는 音이 개()이다.】</font>와 [[慕容紹]]가 [[慕容垂]]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교만하고 자랑함이 너무 심하니, 叔父께서 中興의 基業을 세우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희들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중흥의 기업을 이루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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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日(8일)에 [[苻堅]]이 長安에서 병졸 60여만 명과 기병 27만 명을 동원하니,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이어져 앞뒤로 천 리에 뻗쳤다. 황제가 명하여 [[謝石]]과 [[謝玄]]에게 8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막게 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潁口에 이르니 군대의 기세가 이미 대단하여 都下가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謝玄]]이 들어가 [[謝安]]에게 계책을 묻자, [[謝安]]은 태연히<font color="#0054FF" size="2">【夷는 평탄하고 평온함이니, 평탄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font>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따로 지시한 것이 있다.” 하고는 이윽고 잠잠하였다. [[謝玄]]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張玄]]으로 하여금 거듭 묻게 하자, [[謝安]]이 마침내 멍에 하도록 명하여 산장<font color="#0054FF" size="2">【墅는 농막이다.】</font>에 나가서 노니,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謝安]]이 [[謝玄]]과 바둑을 둘 적에 산장을 걸고 내기를 하였는데, [[謝安]]의 바둑 실력이 항상 [[謝玄]]만 못하였으나 이날은 [[謝玄]]이 [[謝安]]을 두려워해서 곧 막상막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敵手는 바둑을 둘 때에 서로 뺏기고 빼앗아서 지략과 계산이 서로 대등함을 이른다. 謝玄의 뜻이 바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謝安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font>[[謝安]]이 마침내 산에 올라가 놀다가<font color="#0054FF" size="2">【陟은 올라감이니, 산에 놀러 가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다.】</font>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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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主]][[]]이 卒하고 [[]]<font color="#0054FF" size="2">【垂之少子라】</font>卽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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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桓沖]]<font color="#0054FF" size="2">【彛之子요 溫之弟也라 時爲都督諸江, 荊等州諸軍事, 儀同三司라】</font>이 深以根本爲憂하야 遣精銳三千하야 入援京師어늘 [[謝安]]이 固却之曰 朝廷이 處分已定하고 兵甲無闕하니 西藩宜留以爲防이라한대 [[]]이 對佐吏歎曰 [[謝安石]]<font color="#0054FF" size="2">【安字也라】</font>이 有廟堂之量이나 不閑將略<font color="#0054FF" size="2">【閑은 習也라】</font>이라 今大敵垂至어늘 方遊談不暇하고 遣諸不經事少年하야 拒之하고 衆又寡弱하니 天下事를 已可知라 吾其左袵<font color="#0054FF" size="2">【袵은 衣衿也니 夷狄之俗은 左其衣袵이라】</font>矣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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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主]][[慕容盛]]이 죽고 慕容熙<font color="#0054FF" size="2">【慕容熙는 慕容垂의 작은 아들이다.】</font>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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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沖<font color="#0054FF" size="2">【桓沖은 桓彛의 아들이고 桓溫의 아우이다. 이 당시 都督江州荊州等諸軍事‧儀同三公이었다.】</font>이 근본(都城)을 우려하여 정예병 3천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京師의 호위를 원조하게 하자, [[謝安]]이 굳이 퇴각시키며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고 군대가 부족하지 않으니, 서쪽 변경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막아야 한다.” 하였다. [[桓沖]]이 보좌하는 관리들에게 한탄하기를 “謝安石<font color="#0054FF" size="2">【安石은 謝安의 字이다.】</font>은 재상의 器量이 있으나 장수의 韜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다.<font color="#0054FF" size="2">【閑은 익숙함이다.】</font> 이제 큰 적이 쳐들어오는데 산에 올라가 놀고 벗들과 閑談을 하기에 겨를이 없으며,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연소한 사람을 보내어 적을 막게 하며, 병력이 또 적고 약하니, 천하의 일을 이미 알 만하다. 나는 아마도 오랑캐가 되어 左袵<font color="#0054FF" size="2">【袵은 옷깃이니, 夷狄의 풍속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font>을 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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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元興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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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元興元年이라 〈燕光始二요 秦弘始四요 魏天興五年이라 ○ [[南涼王]][[禿髮傉檀]]弘昌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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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月에 秦[[陽平公]][[融]]等이 攻壽陽하야 癸酉에 克之하고 將軍[[梁成]]<font color="#0054FF" size="2">【秦將이라】</font>等이 帥衆五萬하야 屯于洛澗하고 柵淮以遏東兵하니 [[謝石]], [[謝玄]]等이 去洛澗二十五里而軍하고 憚[[成]]不敢進이라 融於壽陽에 遣尙書尙書[[朱序]]<font color="#0054FF" size="2">【序先爲梁州刺史러니 爲秦所執하니라】</font>하야 來說[[謝石]]等하야 使降이러니 [[序]]私謂[[石]]等曰 若秦百萬之衆이 盡至면 誠難與爲敵이라 今乘諸軍未集하야 宜速擊之니 若敗其前鋒이면 則彼已奪氣하야 可遂破也리이다 [[]]이 從[[]]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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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元年(임인 402) - 燕나라 光始 2년이고, 秦나라 弘始 4년이고, 魏나라 天興 5년이다. [[南涼王]][[禿髮傉檀]]의 弘昌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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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秦나라 [[陽平公]][[苻融]] 등이 壽陽을 공격하여 癸酉日(18일)에 함락시키고, 장군 梁成<font color="#0054FF" size="2">【梁成은 秦나라 장수이다.】</font> 등이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洛澗에 주둔하고 淮水에 성책을 쌓아 동쪽 군대를 막으니, [[謝石]]과 [[謝玄]] 등이 洛澗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는 [[梁成]]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苻融]]이 壽陽에서 尙書尙書 朱序<font color="#0054FF" size="2">【朱序는 이전에 梁州刺史로 있었는데, 秦나라에 사로잡혀 갔다.】</font>를 보내어 晉나라 군영에 와서 [[謝石]] 등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는데, [[朱序]]가 은밀히 [[謝石]] 등에게 이르기를 “만약 秦나라의 백만 대군이 모두 몰려오면 진실로 상대하여 싸우기 어렵다. 이제 여러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를 틈타서 공격해야 하니, 만약 그 선봉부대를 패퇴시키면 저들은 이미 기가 꺾여서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謝石]][[朱序]]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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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尙書令尙書令[[元顯]]으로 爲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하야 討[[桓玄]]할새 以[[劉牢之]]로 爲前鋒前鋒하고 [[譙王]][[尙之]]로 爲後部後部하다 [[]]이 大驚하야 欲完聚保江陵이어늘 長史長史[[卞範之]]曰 明公은 英威振於遠近하고 [[元顯]]은 口尙乳臭요 [[劉牢之]]는 大失物情하니 若兵臨近畿하야 示以禍福이면 土崩之勢를 可翹足<font color="#0054FF" size="2">【翹는 企也라】</font>而待하리니 何有延敵入境하야 自取窮蹙者乎잇가 [[]]이 從之하다 [[玄]]至新亭<font color="#0054FF" size="2">【在江寧縣南十里하니 俯近江渚라 周顗嘗與群公으로 遊宴于此하니라】</font>하니 [[元顯]]이 引兵欲還宮이어늘 [[]]이 遣人拔刀하야 隨後大呼曰 放仗<font color="#0054FF" size="2">【放仗은 謂呼令放棄兵仗也라】</font>하라하니 軍人이 皆崩潰러라 [[]]이 入京하야 摠百揆<font color="#0054FF" size="2">【書云納于百揆라한대 蔡氏傳曰 揆는 度也니 百揆는 揆度庶政之官이라 惟唐, 虞有之하니 猶周之冢宰也라】</font>하고 [[元顯]][[東海王]][[彦璋]], [[譙王]][[尙之]]等於建康市하니 [[劉牢之]]는 北走至新州하야 縊而死하고 [[道子]]等도 皆死하다 自隆安<font color="#0054FF" size="2">【帝之初年號라】</font>以來로 中外之人이 厭於禍亂이라 及[[]]初至하야 黜奸佞하고 擢雋(俊)賢하니 京師欣然하야 冀得少安이러니 旣而오 [[]]이 奢豪縱逸하야 政令이 無常하고 朋黨이 互起하야 陵侮朝廷하고 裁損乘輿供奉之具하니 帝幾不免飢寒이라 由是로 衆心이 失望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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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一月에 [[謝玄]]이 遣[[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廣陵相이라】</font>하야 帥精兵五千하야 趣(趨)洛澗할새 未至十里에 [[梁成]]이 阻澗爲陳(陣)<font color="#0054FF" size="2">【阻는 恃也니 恃澗自固也라 陳은 讀曰陣이라】</font>以待之어늘 [[牢之]]直前渡水하야 擊[[成]]大破之하야 斬[[]]하고 又分兵斷其歸津하니 秦步騎崩潰하야 爭赴淮水하야 士卒死者 萬五千人이라 執秦揚州刺史揚州刺史[[王顯]]等하고 盡收其器械軍資하다 於是에 [[謝石]]等諸軍이 水陸繼進하다 [[秦王]][[]]이 [[陽平公]][[]]으로 登壽陽城하야 望之할새 見晉兵部陳嚴整하고 又望見八公山草木하고 皆以爲晉兵<font color="#0054FF" size="2">【王氏曰 八公山은 在安豐壽春縣北四里라 乃苻堅伐晉할새 望山上草木하니 皆人形이 卽此라 [通鑑要解]八公은 在今壽春縣北四里하니라 世傳漢淮南王安이 好神仙이러니 忽有八公鬚眉皓素하여 詣門求見云云이라하니 煩不引이라】</font>이라 顧謂[[]]曰 此亦勍敵<font color="#0054FF" size="2">【勍은 强也라】</font>이니 何謂弱也오 憮然<font color="#0054FF" size="2">【失意貌라】</font>始有懼色이러라 秦兵이 逼淝水而陳하니 晉兵이 不得渡라 [[謝玄]]이 遣使하야 謂[[陽平公]][[融]]曰 君이 懸軍深入하야 而置陳逼水하니 此乃持久之計요 非欲速戰者也로다 若移陳少却하야 使晉兵得渡하야 以決勝負면 不亦善乎아 秦諸將이 皆曰 我衆彼寡하니 不如遏之하야 使不得上하야 可以萬全이리이다 [[堅]]曰 但引兵少却하야 使之半渡하고 我以鐵騎로 蹙而殺之면 蔑不勝矣라한대 [[融]]亦以爲然하야 遂麾兵使却하니 秦兵이 遂退하야 不可復止라 [[謝玄]], [[謝琰]], [[桓伊]]等이 引兵渡水擊之하니 [[融]]이 馳騎略陳<font color="#0054FF" size="2">【略은 行也니 巡行曰略이라】</font>하야 欲以帥退者라가 馬倒하야 爲晉兵所殺하니 秦兵이 遂潰라 [[玄]]等이 乘勝追擊하야 至于靑岡<font color="#0054FF" size="2">【在安豐軍하니 去壽春三十里라】</font>하니 秦兵이 大敗하야 自相蹈藉<font color="#0054FF" size="2">【藉는 與踖同하니 踐也라】</font>而死者 蔽野塞川하고 其走者는 聞風聲鶴唳하고 皆以爲晉兵且至라하야 晝夜不敢息하야 草行露宿하고 重以飢凍하야 死者什에 七八이러라 初에 秦兵小却이어늘 [[朱序]]在陳後하야 呼曰 秦兵이 敗矣라하니 衆遂大奔이라 [[序]]因與[[張天錫]]<font color="#0054FF" size="2">【丙子年에 降秦이라】</font>으로 皆來奔하다 [[]]은 中流矢<font color="#0054FF" size="2">【中은 傷也라 飛矢曰流矢라】</font>하고 單騎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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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曰 蜀漢之中은 古未有興王之迹也어늘 而[[漢高祖]]起自南鄭하야 以取關中하고 樊鄧之間은 古未有中興之迹也어늘 而[[漢光武]]起自南陽하야 以定河北이라 而況江東之地는 首起西陵하고 尾接東海하니 其兵之犀銳<font color="#0054FF" size="2">【犀는 堅也니 古以犀兕皮爲鎧라 故로 謂堅曰犀라】</font>는 足以破秦兵於鉅鹿<font color="#0054FF" size="2">【謂項羽라】</font>하고 其財之富厚는 足以復唐祚於靈武<font color="#0054FF" size="2">【唐[[肅宗]]이니 見四十二卷丙申年이라】</font>라 然이나 自吳以下로 國於江東者 凡六朝<font color="#0054FF" size="2">【吳, 東晉, 宋, 齊, 梁, 陳이라】</font>라 [[周瑜]]有赤壁之勝하고 [[祖逖]]<font color="#0054FF" size="2">【晉元帝丁丑年에 流民張平樊雅가 各聚衆在譙하야 爲塢主러니 逖攻降之하니라】</font>有譙城之勝하고 [[褚裒]]有彭城之勝하고 [[桓溫]]有灞上之勝하고 [[謝玄]]有淝水之勝하고 [[劉裕]]<font color="#0054FF" size="2">【在三十卷乙卯年이라】</font>有關中之勝하고 到彦之<font color="#0054FF" size="2">【在三十一卷庚午年이라】</font>有淮南之勝하고 蕭衍<font color="#0054FF" size="2">【齊[[明帝]]니 乙亥年에 與魏戰勝之라】</font>有義陽之勝하고 [[陳慶之]]<font color="#0054FF" size="2">【見三十二卷己酉年이라】</font>有洛陽之勝하고 吳明徹<font color="#0054FF" size="2">【見三十三卷癸巳年이라】</font>有淮南之勝하니 此十者는 皆起江東之師하야 以取勝中原이니 其剋敵制勝之功이 亦奇矣라 然終不能渡江而北定中原하야 以一天下하니 此는 非江東之地 便於守而不便於攻이요 蓋江東之人이 知有江東而不知有天下也일새라 向使六朝君臣이 素有幷呑之志하야 先定規模於未勝之前하고 而進乘機會於旣勝之後런들 則千乘萬騎로 起自江東而入中原이면 蓋可以鞭撻四夷하고 坐制六合이니 誰謂江東之地 土綿力薄<font color="#0054FF" size="2">【綿은 弱也라】</font>하야 而不足以擧天下也哉아 惟其平居暇日에 初未嘗有進取之心하야 而預爲必復中原之計라 是以로 一旦欲乘機會로되 而倉皇失措<font color="#0054FF" size="2">【倉皇은 一作倉黃하니 失措貌라 詩註에 忽遽貌라하니라】</font>하야 竟不能成混一之功이라 且[[苻堅]]養兵於秦中이 幾三十年이라 一旦에 驅之南下하야 欲以幷呑吳會할새 顧謂大江之流하고 投鞭可斷이라하니 志則誇矣나 而兵始一交에 全師潰散하야 相與枕藉於淝水之中하야 晉之君臣이 嘗試睥睨<font color="#0054FF" size="2">【邪視也라】</font>一世하니 此乾坤何等時耶아 挽吳江之水하야 以洗關河嵩洛之腥穢<font color="#0054FF" size="2">【謂五胡라 】</font>가 其不在玆時耶아 奈何徘徊於兗豫之間하야 竟不能過關踰鄴하야 以圖混一하고 而乃今日運米於枋頭하야 以濟[[苻丕]]之飢<font color="#0054FF" size="2">【在下甲申年이라】</font>하고 明日率軍於關陝하야 以爲[[苻堅]]之助오 夫淮淝百萬은 志欲何爲오 幸其天敗하야 粮盡力困하야 不奮兵以勦除之하고 乃擧國之大讐하야 付之相忘之域하니 豈不深可惜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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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令尙書令[[司馬元顯]]을 驃騎大將軍驃騎大將軍으로 삼아 [[桓玄]]을 토벌할 때에 [[劉牢之]]를 前鋒都督前鋒都督으로 삼고 [[譙王]][[司馬尙之]]를 後部都督後部都督으로 삼았다. [[桓玄]]이 크게 놀라서 성곽을 수리하고 식량을 모아 江陵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長史長史[[卞範之]]가 말하기를 “明公께서는 용맹과 위엄이 원근에 떨쳐졌는데, [[司馬元顯]]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고 [[劉牢之]]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만일 우리 군대가 近畿에 가서 禍福의 道理를 보여 준다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를 발돋움하고<font color="#0054FF" size="2">【翹는 발돋움하고 바라는 것이다.】</font>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맞아들여 경내로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곤궁하고 위축됨을 취한단 말입니까?하니, [[桓玄]]이 그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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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에 [[謝玄]]이 劉牢之<font color="#0054FF" size="2">【劉牢之는 廣陵의 相이다.】</font>를 보내어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洛澗으로 달려갈 적에 洛澗에서 10리 못 미친 곳에 이르러서 [[梁成]]이 澗水를 견고하다고 믿어 陣을 치고<font color="#0054FF" size="2">【阻는 믿는 것이니, 澗水를 믿어 스스로 견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陳은 陣으로 읽는다.】</font> 대비하였다. [[劉牢之]]가 곧장 전진하여 澗水를 건너가서 [[梁成]]을 공격하여대파하고[[梁成]]을 목 벤 다음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돌아가는 나루터를 차단하니, 秦나라의 보병과 기병이 궤멸되어 다투어 淮水에 뛰어들어 죽은 士卒이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 秦나라의 揚州刺史揚州刺史[[王顯]] 등을 사로잡고 그 병기와 군수물자를 전부 몰수하였다. 이에 [[謝石]] 등의 諸軍이 水陸으로 계속하여 전진하였다. [[秦王]][[苻堅]]이 [[陽平公]][[苻融]]과 壽陽城에 올라가 이것을 바라보니 晉나라 군대의 陣列이 모두 엄정하였으며, 또 멀리서 八公山의 초목을 바라보고 모두 晉나라 병사라고 여겼다.<font color="#0054FF" size="2">【[釋義]望見八公山草木 皆以爲晉兵:[釋義]王氏가 말하였다. “八公山은 安豐軍 壽春縣 북쪽 4리에 있다.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할 때에 산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通鑑要解]八公山은 지금 壽春縣 북쪽 4里 되는 지점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漢나라 淮南王인 劉安이 神仙을 좋아하였는데, 홀연히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센 八公이 갑자기 문에 찾아와 만나 보기를 구하였으므로 八公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번거로우므로 인용하지 않는다.】</font> 그리하여 [[苻融]]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또한 강적<font color="#0054FF" size="2">【勍은 강함이다.】</font>인데, 어찌 약하다고 이른단 말인가.” 하고, 낙심하여<font color="#0054FF" size="2">【憮然은 실의한 모양이다.】</font>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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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玄]]이 新亭<font color="#0054FF" size="2">【新亭은 江寧縣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 부근이다. 周顗가 일찍이 여러 공들과 여기에서 놀고 잔치하였다.】</font>에 이르니, [[司馬元顯]]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桓玄]]이 사람을 보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따라가며 크게 고함치기를 “병장기를 버리라.” 하니,<font color="#0054FF" size="2">【放仗은 고함을 쳐서 병장기를 버리게 함을 이른다.】</font> 군사들이 모두 와해되었다. [[桓玄]]이 서울로 들어가서 百官을 총령하고<font color="#0054FF" size="2">【≪書經≫ 〈舜典〉에 이르기를 “百揆에 앉혔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揆는 헤아림이니, 百揆는 여러 정사를 헤아리는 관원이다. 오직 唐‧虞 시대에만 있었으니, 周나라의 冢宰와 같다.” 하였다.】</font>[[司馬元顯]], [[東海王]][[司馬彦璋]], [[譙王]][[司馬尙之]] 등을 建康의 시장에서 목 베니, [[劉牢之]]는 북쪽으로 달아나 新州에 이르러 목을 매어죽고[[司馬道子]] 등도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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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군대가 淝水에 바짝 붙여서 陣을 치니, 晉나라 군대가 건너갈 수가 없었다. [[謝玄]]이 사자를 보내어 [[陽平公]][[苻融]]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懸軍(원군 없이 고립된 군대)을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淝水에 바짝 붙여서 진을 치니, 이는 바로 지구전을 하려는 계책이고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영을 옮겨 조금 뒤로 물러나서 晉나라 군대가 물을 건너가게 하여 승부를 결단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秦나라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군대가 많고 저들은 군대가 적으니, 막아서 올라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萬全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苻堅]]이 말하기를 “다만 군대를 이끌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저들이 반쯤 건너왔을 때에 우리가 鐵騎兵을 몰고 들어가서 저들을 죽인다면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는데, 苻融苻融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여 다시는 후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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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安<font color="#0054FF" size="2">【晉나라 安帝의 처음 年號이다.】</font> 이래로 中外의 사람들이 재앙과 난리를 싫어하였다. [[桓玄]]이 처음에 이르러서 간신들을 물리치고 준걸들을 발탁하니, 京師가 기뻐하여 다소 편안해지기를 바랐는데, 이윽고 [[桓玄]]이 사치하고 방종하여 정사와 명령이 일정함이 없고 朋黨이 서로 일어나서 조정을 능멸하고 乘輿(皇帝)에게 供奉하는 물품을 대폭 줄이니, 황제가 거의 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뭇사람들이 실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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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玄]], [[謝琰]], [[桓伊]] 등이 군대를 이끌고 물을 건너와 공격하였다. [[苻融]]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軍陣을 순행<font color="#0054FF" size="2">【略은 돌아다니는 것이니, 巡行하는 것을 略이라 한다.】</font>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다가 말이 쓰러져서 晉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궤멸되었다. [[謝玄]] 등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靑岡<font color="#0054FF" size="2">【靑岡은 安豐軍에 있으니, 壽春縣에서 30리 떨어져 있다.】</font>에 이르니, 秦軍이 대패하여 자기들끼리 밟히고 깔려서<font color="#0054FF" size="2">【藉는 踖과 같으니, 밟는 것이다.】</font> 죽은 시체가 들을 뒤덮고 냇물을 막았다. 도망하던 자들은 바람 소리와 학 울음소리를 듣고도 모두 晉나라 군대가 이르는 것이라고 여겨서 밤낮으로 도망하여 감히 쉬지 못하였다. 이들은 인적이 드문 풀숲 길로 걸어가며 露地에서 잠을 잔데다 기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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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秦나라 군대가 조금 퇴각했을 때에 [[朱序]]가 진영의 뒤에 있다가 고함치기를 “秦나라 군대가 패했다.” 하니, 秦나라 군사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다. [[朱序]]가 인하여 張天錫<font color="#0054FF" size="2">【張天錫은 丙子年(376)에 秦나라에 항복하였다.】</font>과 함께 모두 晉나라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苻堅]]은 빗나간 화살을 맞고<font color="#0054FF" size="2">【中은 상함이다. 빗나간 화살을 流矢라 한다.】</font> 單騎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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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臣李舜臣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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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恩]]이 赴海死하니 衆이 推[[恩]]妹夫[[盧循]]하야 爲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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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蜀漢 지방은 옛날에 왕업을 일으킨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高祖]]가 南鄭에서 일어나 關中 지방을 취하였고, 樊城과 鄧城 사이는 옛날에 중흥한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光武帝]]가 南陽에서 일어나 河北 지방을 평정하였다. 더구나 江東 지역은 머리는 西陵에서 시작되고 꼬리는 東海와 접하였으니, 병기의 단단함과 예리함<font color="#0054FF" size="2">【犀는 견고함이니, 옛날에 犀兕(무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견고한 것을 일러 犀라고 한다.】</font>은 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font color="#0054FF" size="2">【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하였다는 것은 項羽를 이른다.】</font>할 수 있었고 재물의 풍족함은 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font color="#0054FF" size="2">【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한 것은 唐나라 肅宗이니, 42권 丙申年條(756)에 보인다.】</font>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吳나라 이후로 江東에 나라를 정한 것이 모두 여섯 왕조<font color="#0054FF" size="2">【六朝는 吳‧東晉‧宋‧齊‧梁‧陳이다.】</font>였는데, [[周瑜]]는 赤壁의 승리가 있었고, 祖逖<font color="#0054FF" size="2">【晉나라 元帝 丁丑年(317)에 流民인 張平과 樊雅가 각각 譙郡에서 무리를 모아 塢主가 되었는데, 祖逖이 공격하여 항복시켰다.】</font>은 譙城의 승리가 있었고, [[褚裒]]는 彭城의 승리가 있었고, [[桓溫]]은 灞上의 승리가 있었고, [[謝玄]]은 淝水의 승리가 있었고, 劉裕<font color="#0054FF" size="2">【劉裕는 해설이 30권 乙卯年條(415)에 보인다.】</font>는 關中의 승리가 있었고, 到彦之<font color="#0054FF" size="2">【到彦之는 해설이 31권 庚午年條(430)에 보인다.】</font>는 淮南의 승리가 있었고, 蕭衍<font color="#0054FF" size="2">【蕭衍은 齊(南齊)나라 明帝이니, 乙亥年(495)에 魏(北魏)와 싸워 승리하였다.】</font>은 [[義陽]]의 승리가 있었고, 陳慶之<font color="#0054FF" size="2">【陳慶之는 해설이 32권 己酉年條(529)에 보인다.】</font>는 洛陽의 승리가 있었고, 吳明徹<font color="#0054FF" size="2">【吳明徹은 해설이 33권 癸巳年條(573)에 보인다.】</font>은 淮南의 승리가 있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江東의 군대를 일으켜 中原에서 승리를 취한 것이니, 적을 이기고 승리한 공이 또한 기이하다. 그러나 끝내 양자강을 건너가서 북쪽으로 中原을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江東 지역이 지키기에 편리하고 공격하기에 불편해서가 아니라, 江東 사람들은 江東이 있는 줄만 알고 천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六朝의 君臣들이 평소에 中原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서 승리하기 전에 規模를 미리 정하고 승리한 뒤에 나아가 기회를 탔더라면,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을 가지고 江東에서 일어나 中原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이렇게 했더라면 사방의 오랑캐들을 채찍질하고 가만히 앉아서 六合을 제어하였을 것이다. 누가 江東 지역이 영토가 좁고 힘이 부족해서<font color="#0054FF" size="2">【綿은 약함이다.】</font>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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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평소 한가로운 날에 처음부터 진취할 마음을 갖고 반드시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기회를 타려고 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font color="#0054FF" size="2">【倉皇은 혹 倉黃으로도 쓰니,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詩經≫ 註에 “몹시 급한 모양이다.” 하였다.】</font> 끝내 천하통일의 공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또 [[苻堅]]은 秦나라에서 군대를 기른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하루아침에 이들을 몰아 南下하여 吳會 지방을 병탄하고자 할 때에 큰 강(揚子江)이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는 채찍만 던져 넣어도 강물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뜻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처음 한번 교전하자마자 全軍이 궤멸되어 흩어져서 淝水 가운데에 시신이 낭자하여 晉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한 세상을 얕보게<font color="#0054FF" size="2">【睥睨는 곁눈질하는 것이다.】</font> 하였으니, 이 乾坤은 어떠한 때란 말인가. 吳江의 물을 끌어다가 函谷關 등의 관문과 黃河와 嵩山과 洛陽을 차지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들<font color="#0054FF" size="2">【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는 五胡를 이른다.】</font>을 씻어 버리는 것이 어찌하여 이때에 있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兗州와 [[豫州]] 사이에서 배회하여 끝내 關中을 지나가고 鄴城을 넘어가서 통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마침내 오늘 枋頭에서 쌀을 운반하여 [[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하고<font color="#0054FF" size="2">【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한 것은 뒤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font> 다음날은 [[關陝]]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苻堅]]을 도왔단 말인가. 淮水와 淝水의 백만 군대는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하늘이 패망하게 하여 양식이 다하고 힘이 곤궁해진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군대를 떨쳐 섬멸하지 않고, 마침내 나라의 큰 원수를 들어서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곳에 내버려 두었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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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恩]]이 바다에 뛰어들어죽으니, 무리들이 [[孫恩]]의 매부인 [[盧循]]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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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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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卯]二年이라 〈燕光始三이요 秦弘始五요 魏天興六年이라 ○ 是歲에 涼亡하니 大三이요 小四니 凡七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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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時에 諸軍이 皆潰호되 惟[[慕容垂]]<font color="#0054FF" size="2">【己巳年에 奔秦하니 乃以[[垂]]爲冠軍將軍冠軍將軍이라】</font>所將三萬人이 獨全이어늘 [[堅]]以千餘騎赴之하다 世子寶言於[[垂]]曰 [[秦王]]이 兵敗하야 委身於我하니 是는 天借之以復燕祚니 此時를 不可失也니이다 [[垂]]曰 汝言이 是也라 然이나 彼以赤心으로 投命於我어늘 若之何害之리오 若[[氐]]運<font color="#0054FF" size="2">【苻氏는 氐也라 運은 運祚也라】</font>이 必窮이면 吾當懷集關東하야 以復先業耳리라 [[垂]]의 親黨이 多勸垂殺[[堅]]호되 垂皆不從하고 悉以兵授[[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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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2년(계묘 403) - 燕나라 光始 3년이고, 秦나라 弘始 5년이고, 魏나라 天興 6년이다. ○ 이해에 涼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넷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
이때 諸軍이 모두 궤멸되었으나 오직 慕容垂<font color="#0054FF" size="2">【慕容垂가 己巳年(369)에 秦나라로 달아나니, 秦나라에서 마침내 慕容垂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font>가 거느리던 3만 명만은 온전하였는데, [[苻堅]]이 천여 騎를 데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世子世子[[慕容寶]]가 [[慕容垂]]에게 말하기를 “[[秦王]][[苻堅]]이 전투에 패하여 우리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빌려 주어 燕나라의 국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네 말이 옳으나 저가 진심으로 자신의 命運을 아낌없이 나에게 던졌는데, 어떻게 그를 해친단 말인가. 만약 우리 氐族의 운명<font color="#0054FF" size="2">【苻氏는 氐族이다. 運은 國運이다.】</font>이 반드시 곤궁하다면 나는 關東 지방을 安集시켜서 先祖의 기업을 회복할 뿐이다.” 하였다. [[慕容垂]]의 친당들이 많이 [[慕容垂]]에게 [[苻堅]]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이를 따르지 않고 병력을 다 [[苻堅]]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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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에 冊命[[]]하야 爲相國相國하야 摠百揆하고 封十郡하야 爲[[楚王]]하고 加九錫九錫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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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安]]이 得驛書하야 知秦兵已敗하다 時에 方與客圍碁러니 攝書<font color="#0054FF" size="2">【攝은 收也라】</font>置牀上하고 了無喜色하고 圍碁如故어늘 客問之한대 徐答曰 小兒輩 遂已破賊이라하더니 旣罷에 還內過戶限할새 不覺屐齒之折<font color="#0054FF" size="2">【喜甚也라 屐은 木屐이라】</font>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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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桓玄]]을 책봉하여相國相國으로 삼아 百揆를 총괄하게 하고, 열 郡을 봉해 주어 [[楚王]]으로 삼고九錫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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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安]]이 역참에서 띄운 승전보를 받고서 秦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았다. 이때 막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공문서를 거두어<font color="#0054FF" size="2">【攝은 거두는 것이다.】</font>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전처럼 바둑을 두었다. 손님이 묻자, [[謝安]]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아이들이 이미 적을 격파했습니다.” 하였는데, 바둑이 끝난 뒤 內室로 돌아가면서 문턱을 넘어갈 적에 흥분하여 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기뻐한 것이다. 屐은 나막신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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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月에 玄이 卽皇帝位하다 [[]]이 入建康宮建康宮하야 登御座할새 而床忽陷이라 群臣이 失色이어늘 [[殷仲文]]<font color="#0054FF" size="2">【侍中也니 玄之妹夫라】</font>曰 將由聖德深厚하야 地不能載라한대 [[]]이 大悅하다 辛亥에 玄이 遷帝於尋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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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王]][[]]이 收集離散하야 比至洛陽하니 衆이 十餘萬이요 百官儀物軍容이 粗備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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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桓玄]]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桓玄]]이 建康宮에 들어가서 御座에 오를 적에 龍床이 갑자기 바닥이 꺼졌다. 여러 신하들이 사색이 되었는데 [[殷仲文]]<font color="#0054FF" size="2">【殷仲文은 侍中이니, 桓玄의 妹夫이다.】</font>이 말하기를 “아마도 聖德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닥이 꺼진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桓玄]]이 크게 기뻐하였다. 辛亥日(22일)에 [[桓玄]]이 황제를 尋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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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王]][[苻堅]]이 흩어진 병력을 수합하여 洛陽에 이르니, 무리가 십여만이었고 百官百官과 儀仗으로 쓰는 器物과 군사 장비가 대강 갖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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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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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三年이라 〈燕光始四요 秦弘始六이요 魏天賜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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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桓脩]]<font color="#0054FF" size="2">【徐兗州刺史, 安成王이라】</font>入朝어늘 [[玄]]謂王謐<font color="#0054FF" size="2">【司徒니 爲玄佐命元臣이라】</font>曰 [[裕]]風骨不常하니 蓋人傑也라하더라 [[玄后劉氏]] 有智鑑이라 謂[[玄]]曰 [[劉裕]]龍行虎步하고 視瞻不凡하니 恐終不爲人下하노니 不如早除之라한대 [[玄]]曰 我方平蕩<font color="#0054FF" size="2">【蕩은 滌也라】</font>中原호니 非裕면 莫可用者라 俟關, 河平定然後에 別議之爾라하더라
+
[[慕容垂]]言於[[]]曰 北鄙之民이 聞王師不利하고 輕相扇動하니 臣이 請奉詔書하야 以鎭慰安集之하고 因過謁陵廟하노이다 [[堅]]이 許之하다 [[權翼]]이 諫曰 國兵이 新破에 四方이 皆有離心하니 宜徵集名將하야 置之京師하야 以固根本이니이다 [[垂]]는 勇略過人하고 世豪東夏하니 顧以避禍而來언정 其心이 豈止欲作冠軍而已哉잇가 譬如養鷹하야 飢則附人이나 每聞風飆<font color="#0054FF" size="2">【飆는 畢遙切이니 疾風也라】</font>之起하면 常有凌霄<font color="#0054FF" size="2">【霄는 雲霄也라】</font>之志하니 正宜謹其絛籠<font color="#0054FF" size="2">【絛는 他刀切이라 絲繩也니 所以紲鷹이요 籠은 所以畜鳥也라】</font>이니 豈可解縱하야 任其所欲哉잇가 [[堅]]曰 卿言이 是也라 然이나 朕已許之하니 匹夫도 猶不食言이어든 況萬乘乎아 天命이 有廢興하니 固非智力所能移也니라 [[翼]]曰 陛下重小信而輕社稷하시니 臣은 見其往而不返이니 關東之亂이 自此始矣리이다 [[堅]]이 不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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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興 3년(갑진 404) - 燕나라 光始 4년이고, 秦나라 弘始 6년이고, 魏나라 天賜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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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垂]]가 [[苻堅]]에게 말하기를 “북쪽 변방의 백성들이 王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경솔하게 서로 선동하니, 신이 청컨대 조서를 받들고 먼저 가서 그들을 鎭撫鎭撫하고 安集시키고, 인하여 지나는 길에 陵廟를 배알할까 합니다.” 하니, [[苻堅]]이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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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翼]]이 간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격파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방이 모두 조정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명장들을 불러 모아서 京師에 安置하여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慕容垂]]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대대로 東夏 지방에서 호걸이라고 일컬어졌으니, 다만 화를 피하기 위하여 秦나라에 왔을지언정 그의 心算이 어찌 冠軍將軍冠軍將軍이 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굶주릴 때에는 사람을 따르나 매번 회오리바람<font color="#0054FF" size="2">【飆는 畢遙切(표)이니, 빠른 바람이다.】</font>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하늘 높이 날려는<font color="#0054FF" size="2">【霄는 하늘이다.】</font>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끈과 새장<font color="#0054FF" size="2">【絛는 他刀切(도)이다. 실끈이니 매를 묶어 매는 것이요, 籠(새장)은 새를 기르는 것이다.】</font>을 조심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니, 어찌 풀어놓아서 그가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이미 허락하였으니, 匹夫도 오히려 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萬乘의 천자에 있어서랴. 天命은 폐하고 흥함이 있으니, 진실로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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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桓脩<font color="#0054FF" size="2">【桓脩는 徐州兗州刺史‧安成王으로 있었다.】</font>를 따라 入朝하자, [[桓玄]]이 王謐<font color="#0054FF" size="2">【王謐은 司徒이니, 桓玄의 佐命元臣이다.】</font>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풍채와 골격이 비범하니, 인걸이다.” 하였다. [[桓玄]]의 아내인 [[劉氏]]는 智謀와 識鑑이 있었는데, [[桓玄]]에게 이르기를 “[[劉裕]]는 걸음을 걷는 모양이 용과 범 같고 눈초리가 비범하여 끝내 남의 아랫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니,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내가 막 중원을 평정<font color="#0054FF" size="2">【蕩은 씻어내는 것이다.】</font>하려 하니, [[劉裕]]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다. 關中과 黃河 지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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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翼]]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작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社稷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은 그가 가는 것만 볼뿐 돌아오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關東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苻堅]]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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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與[[何無忌]]<font color="#0054FF" size="2">【琅琊內史라】</font>로 同舟還京口하야 密謀復興晉室하다 [[劉毅]]家於京口하야 亦與[[無忌]]로 謀討[[玄]]이러니 [[無忌]]曰 天下草澤之中에 非無英雄也니라 [[毅]]曰 所見에 唯有[[劉下邳]]<font color="#0054FF" size="2">【裕爲下邳太守하니라】</font>니라 [[無忌]]笑而不答하고 還以告裕하고 遂與[[毅]]定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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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乞伏國仁<font color="#0054FF" size="2">【隴西鮮卑人이라】</font>이 反於隴西하니 衆至十餘萬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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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何無忌<font color="#0054FF" size="2">【何無忌는 琅琊內史이다.】</font>와 함께 배를 같이 타고 京口로 돌아와 은밀히 晉나라 황실을 부흥할 것을 모의하였다. [[劉毅]]가 京口에 거주하여 또한 [[何無忌]]와 함께 [[桓玄]]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何無忌]]가 말하기를 “천하의 초야 가운데에 영웅이 없지 않다.” 하니, [[劉毅]]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오직 劉下邳(劉裕)<font color="#0054FF" size="2">【劉裕가 이때 下邳太守로 있었다.】</font>가 있을 뿐이다.” 하였다. [[何無忌]]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고서 돌아가 이것을 [[劉裕]]에게 고하고 마침내 [[劉毅]]와 함께 계책을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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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乞伏國仁<font color="#0054FF" size="2">【乞伏國仁은 隴西의 鮮卑族 사람이다.】</font>이 隴西에서 배반하니, 무리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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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乙卯에 裕託以遊獵하고 與[[無忌]]로 收合徒衆하야 得百餘人하다 詰旦<font color="#0054FF" size="2">【平旦也라】</font>에 京口城開어늘 [[無忌]]著傳詔服하고 稱勅居前하니 徒衆이 隨之齊入하야 卽斬[[桓脩]]以徇<font color="#0054FF" size="2">【行示也라】</font>하다 衆推[[]]爲盟主하니 [[玄]]이 憂懼特甚이라 或曰 [[劉裕]]等은 烏合<font color="#0054FF" size="2">【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font>微弱하야 勢必無成하리니 陛下何慮之深이니잇고 [[]][[劉裕]]는 足爲一世之雄이요 [[劉毅]]는 家無襜石之儲<font color="#0054FF" size="2">【襜은 齊人이 名小甖爲襜이라 石은 斗石也라】</font>로되 樗蒲에 一擲百萬하고 [[何無忌]]는 酷似其舅<font color="#0054FF" size="2">【酷은 甚也라 舅는 謂劉牢之라】</font>어늘 共擧大事하니 何謂無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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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垂]]至安陽하니 [[長樂公]][[]]<font color="#0054FF" size="2">【苻堅之庶長子니 時鎭鄴이라】</font> 館垂於鄴西어늘 [[]]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丁零翟斌<font color="#0054FF" size="2">【見上卷하니 仕秦爲中郞이라】</font>이 起兵叛이어늘 [[秦王]][[]]이 驛書하야 使垂將兵討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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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乙卯日(27일)에 [[劉裕]]가 사냥을 나간다고 칭탁하고서 [[何無忌]]와 함께 무리를 수합하여 백여 명을 얻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font color="#0054FF" size="2">【詰旦은 平旦(동틀 때)이다.】</font>京口의 성문이 열리자, [[何無忌]]가 傳詔(詔令을 전달하는 관원)의 옷을 입고 勅使라 칭하고 앞에 있으니, 무리가 뒤를 따라 일제히 城에 들어가서 곧바로 [[桓脩]]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려 보였다.<font color="#0054FF" size="2">【徇은 다니면서 보이는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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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慕容垂]]가 [[安陽]]에 이르니, [[長樂公]] 苻丕<font color="#0054FF" size="2">【長樂公 苻丕는 苻堅의 庶長子이니, 이때 鄴城에 鎭駐하였다.】</font>[[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자,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燕나라의 옛 基業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丁零族 翟斌<font color="#0054FF" size="2">【丁零 翟斌은 上卷에 보이니, 秦나라에 벼슬하여 中郞이 되었다.】</font>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秦王]][[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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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劉裕]]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으니, [[桓玄]]이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특히 심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劉裕]] 등은 烏合之卒<font color="#0054FF" size="2">【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font>이라 역량이 미약하여 형세를 살펴보건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 깊이 염려하십니까?” 하니, [[桓玄]]이 말하기를 “[[劉裕]]는 한 시대의 영웅이 될 만하고, [[劉毅]]는 집안에 한 말과 한 섬의 저축<font color="#0054FF" size="2">【襜은 齊나라 사람들이 작은 술단지를 이름하여 襜이라 한다. 石은 말[斗]과 섬[石]이다.】</font>도 없었으나 樗蒲 놀이할 때에 한 번에 백만 전을 걸었으며, [[何無忌]]는 모습이 그의 외삼촌([[劉牢之]])과 매우 흡사한데,<font color="#0054FF" size="2">【酷은 매우이다. 外叔은 劉牢之를 이른다.】</font> 이들이 함께 大事를 일으켰으니,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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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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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劉毅]]等으로 分爲數隊하야 竝進할새 [[]]以身先之하니 將士皆殊死戰하야 無不一當百이요 呼聲이 動天地라 時에 東北風이 急이어늘 因縱火焚之하니 煙火熛<font color="#0054FF" size="2">【火飛也라】</font>天하고 鼓譟之音이 震動京邑하니 諸軍이 大潰라 [[]]이 帥親信數千人하고 走趨石頭하니 [[]]入建康하야 帥百官하야 奉迎乘輿하고 誅[[]]宗族在建康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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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九年이라 〈秦建元二十年이라 [[世祖慕容垂]]元年이라 ○ 後秦[[太祖姚萇]]白雀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新大國二니 凡三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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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慕容垂]]自稱[[燕王]]하고 遣田山如鄴하야 告[[慕容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고 以弟[[德]]으로 爲車騎大將軍車騎大將軍하야 封[[范陽王]]하고 帥衆二十餘萬하야 長驅向鄴하다 [[慕容農]]이 起兵於列人<font color="#0054FF" size="2">【列人은 城名이라 垂至安陽하니 丕身自迎之하다 趙秋勸垂於座取丕하고 因據鄴起兵이로되 垂不從하다 丕謀襲擊垂러니 姜讓이 諫曰 垂叛形未著라한대 丕從之하고 館垂於鄴西하니 垂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翟斌叛이어늘 秦王堅이 驛書로 使垂討翟斌한대 石越이 言於丕曰 垂有興復舊業之志어늘 今復資之以兵이면 此爲虎傅(附)翼이니 請除之하소서 丕曰 淮南之敗에 垂侍衛乘輿하니 此功을 不可忘也니라 越退曰 公父子好爲小仁하고 不顧大計하니 終當爲人擒耳니라 丕遣苻飛龍하야 帥氐騎一千하야 爲之副하야 密計謀垂하다 垂聞丕, 飛龍謀하고 怒曰 吾盡忠於苻氏어늘 而彼專欲圖吾父子하니 雖欲已나 得乎아하고 乃募兵八千하야 夜襲飛龍殺之하고 遣人告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니 農等이 遂將數十騎하고 微服出鄴하야 奔列人하니라】</font>하니 衆至數萬이라 [[長樂公]][[丕]] 使[[石越]]로 將兵討之러니 [[]]이 大敗秦兵하고 斬越하니 於是에 人情騷動하고 盜賊群起러라 垂至鄴하니 [[]]이 引兵會之하야 進攻鄴이어늘 [[]]退守中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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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劉裕]][[劉毅]] 등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함께 진군할 적에 [[劉裕]]가 앞장서서 솔선하니, 장병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一當百의 기세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었고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때 동북풍이 맹렬히 불자, 이 틈을 타서 불을 놓아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까지 치솟고<font color="#0054FF" size="2">【熛는 불똥이 튀는 것이다.】</font> 북소리와 고함 소리가 京邑을 진동하여 〈[[桓謙]] 등의〉 여러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桓玄]]이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아나 石頭城으로 향하니, [[劉裕]]가 建康에 들어가 백관을 거느리고 尋陽에서 乘輿(황제)를 맞이하고 建康에 있는 [[桓玄]]의 宗族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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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9년(갑신 384) - 秦나라 建元 20년이다. 燕(後燕)[[世祖]][[慕容垂]]의 元年이다. ○ 後秦[[太祖]][[姚萇]]의 白雀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새로운 大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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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慕容垂]]가 [[燕王]]이라 자칭하고[[田山]]을 보내어 鄴城에 가서 [[慕容農]] 등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고, 아우 [[慕容德]]을 車騎大將軍車騎大將軍으로 삼아[[范陽王]]에 봉하고 20여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기세를 몰아 鄴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慕容農]]列人城에서 군대를 일으키니,<font color="#0054FF" size="2">【列人은 城의 이름이다. 慕容垂가 安陽에 이르니, 苻丕가 몸소 그를 맞이하였다. 趙秋가 慕容垂에게 그 자리에서 苻丕를 죽이고 인하여 鄴城을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따르지 않았다. 苻丕가 慕容垂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姜讓이 간하기를 “慕容垂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자, 苻丕가 그 말을 따르고 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니,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함께 燕나라의 국통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翟斌이 배반하자, 秦王 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翟斌을 토벌하게 하였다. 石越이 苻丕에게 말하기를 “慕容垂가 옛 基業을 흥복하려는 뜻이 있는데, 이제 다시 군대를 빌려 준다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입니다. 제거하십시오.” 하니, 苻丕가 말하기를 “淮南의 패전에 慕容垂가 乘輿를 호위하였으니, 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石越이 물러 나와 말하기를 “公의 父子가 작은 仁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으니, 끝내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苻丕가 苻飛龍을 보내어 氐族의 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慕容垂의 副將이 되게 하여 은밀히 慕容垂를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苻丕와 苻飛龍이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慕容垂가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苻氏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父子를 도모하고자 하니, 내 비록 그만두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8천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밤에 苻飛龍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慕容農 등에게 알려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니, 慕容農 등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微服 차림으로 鄴城을 나와 列人城으로 달려 왔다.】</font>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長樂公]][[苻丕]]가 [[石越]]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慕容農]]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慕容農]]이 秦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石越]]의 목을 베니, 이에 인심이 동요하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났다. [[慕容垂]]가 鄴城에 이르자 [[慕容農]]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서 鄴城으로 진격하니, [[苻丕]]가 후퇴하여中城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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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裕]]始至建康하야 諸大處分<font color="#0054FF" size="2">【處는 區處也요 分은 分別也라】</font>을 皆委於[[劉穆之]]<font color="#0054FF" size="2">【裕召爲主簿라】</font>하니 倉猝立定에 無不允愜이라 [[裕]]遂託以心腹하야 動止를 諮焉하니 [[穆之]]亦竭節盡誠하야 無所遺隱이러라 時에 晉政寬弛하야 綱紀不立하고 豪族陵縱하야 小民窮蹙하며 重以[[司馬元顯]]의 政令違舛<font color="#0054FF" size="2">【舛은 錯謬也라】</font>하니 [[桓玄]]이 雖欲釐整이나 而科條繁密하야 衆莫之從이러니 [[穆之]]斟酌時宜하야 隨方矯正<font color="#0054FF" size="2">【揉曲爲矯니 言隨事矯揉하야 使歸於正이라】</font>하고 [[]]以身範物하야 先以威禁하니 內外百官이 皆肅然奉職하야 不盈旬日에 風俗이 頓改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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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北地<font color="#0054FF" size="2">【郡名也라】</font>長史[[慕容泓]]이 [[燕王垂]]攻鄴하고 亡奔關東하야 收集鮮卑하니 衆至數千이라 還屯華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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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처음 建康에 이르러서 모든 중대사의 처분<font color="#0054FF" size="2">【處는 구분하여 처리하는 것이고, 分은 分別이다.】</font>을 劉穆之<font color="#0054FF" size="2">【劉穆之는 劉裕가 불러서 主簿를 삼았다.】</font>에게 다 맡기니, 창졸간에 신속하게 결정함에 사람들이 지당하게 생각하고 흡족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劉裕]]가 마침내 그를 心腹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막론하고 그에게 자문하니, [[劉穆之]] 또한 충절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빠뜨리거나 숨기는 바가 없었다. 이때 晉나라의 정사가 해이해져 紀綱이 서지 않고 豪族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서 庶民들이 곤궁하였으며 여기에 [[司馬元顯]]의 정사와 명령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니,<font color="#0054FF" size="2">【[釋義]重以司馬元顯 政令違舛:舛은 어그러지고 잘못됨이다.】</font>[[桓玄]]이 비록 정리하여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法條文이 번거롭고 세밀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다. [[劉穆之]]가 時宜를 참작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로잡고<font color="#0054FF" size="2">【휘어서 구부리는 것을 矯라 하니, 일에 따라 바로잡아서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font>[[劉裕]]가 앞장서서 남들에게 모범이 되어 먼저 위엄으로 금지시키니, 내외의 백관들이 모두 숙연히 직책에 종사해서 열흘이 못 되어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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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北地<font color="#0054FF" size="2">【北地는 郡의 이름이다.】</font>長史 [[慕容泓]][[燕王]][[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關東으로 도망하여 鮮卑族을 수합하니,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돌아와 華陰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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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劉毅]], [[何無忌]]等이 襲破尋陽城하다 [[桓玄]]이 挾帝하고 單舸西走하야 入江陵이어늘 遂斬之하다 乘輿反正於江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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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陽太守平陽太守[[慕容沖]]이 亦起兵於平陽하야 有衆二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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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劉毅]]와 [[何無忌]] 등이 尋陽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桓玄]]이 황제를 끼고 한 척의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도망하여 江陵으로 들어가자, 〈益州督護益州督護[[馮遷]]이〉 마침내 [[桓玄]]을 목 베었다. 乘輿(황제)가 강릉에서 反正(復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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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陽太守平陽太守[[慕容沖]]이 또한 平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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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魏主]][[珪]] 置六謁官하니 準古六卿六卿이요 又官名을 多不用漢, 魏之舊하고 倣上古龍官, 鳥官<font color="#0054FF" size="2">【伏羲氏受命時에 有龍瑞故로 以龍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龍爲名號하고 少昊氏之時에 鳳鳥適至故로 以鳥紀事하야 百官師長을 皆以鳥爲名號하니라】</font>하야 謂諸曹之使하야 爲鳧鴨이라하니 取其飛之迅疾也요 謂候官伺察者하야 爲白鷺라하니 取其延頸遠望也라 餘皆類此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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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將[[姚萇]]<font color="#0054FF" size="2">【[[姚弋仲]]之子요 [[襄]]之弟라】</font>이 起兵於北地하고 自稱[[後秦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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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主]][[拓跋珪]]가 여섯 명의 謁官을 두니 옛날의 六卿六卿을 따른 것이요, 또 관직명에 漢나라와 魏나라 때의 옛 명칭을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上古時代의 龍官과 鳥官<font color="#0054FF" size="2">【伏羲氏가 天命을 받았을 때에 龍의 상서가 있었으므로 龍으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龍으로써 명칭을 삼았고, 少昊氏 때에 鳳鳥가 마침 이르렀으므로 새로써 일을 기록하여 百官의 師長을 모두 새로써 명칭을 삼았다.】</font>을 따라서 여러 曹의 使者使者를 일러 鳧鴨(오리)이라 하였으니 鳧鴨은 나는 것이 신속한 뜻을 취한 것이요, 斥候와 伺察을 맡은 자를 일러 白鷺라 하였으니 白鷺는 목을 늘여 멀리 바라보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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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나라 장수 姚萇<font color="#0054FF" size="2">【姚萇은 姚弋仲의 아들이고 姚襄의 아우이다.】</font>이 北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後秦王]]이라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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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義熙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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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義熙元年이라 〈燕光始五요 秦弘始七이요 魏天賜二年이라 ○ [[南燕主]][[慕容超]]太上元이요 西涼建初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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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秦[[竇衝]]이 擊[[慕容沖]]于河東하야 大破之하니 [[沖]]이 奔[[慕容泓]]하다 [[泓]]衆이 至十餘萬이라 進向長安이러니 六月에 [[泓]]의 謀臣[[高蓋]] 殺[[]]하고 立[[]]爲皇太弟하야 承制行事하고 置百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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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元年(을사 405) - 燕나라 光始 5년이고, 秦나라 弘始 7년이고, 魏나라 天賜 2년이다. ○ 南燕主南燕主[[慕容超]]의 太上 元年이고, 西涼建初 元年이다.-
+
秦나라 [[竇衝]]이 [[慕容沖]]을 河東에서 공격하여대파하니, [[慕容沖]]이 [[慕容泓]]에게로 달아났다. [[慕容泓]]의 병력이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전진하여 長安으로 향하였는데, 6월에 [[慕容泓]]의 謀臣인 [[高蓋]]가 [[慕容泓]]을 죽이고 [[慕容沖]]을 세워 皇太弟로 삼아서 制를 받들어 정사를 행하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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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帝至建康하야 以[[劉裕]]로 都督中外諸軍事하다 四月에 [[]]還鎭京口하다 八月에 [[南燕王]][[備德]]<font color="#0054FF" size="2">【上庚子年에 南燕王慕容德이 稱帝하고 更名備德하니라】</font>이 卒하고 兄子[[]]<font color="#0054FF" size="2">【備德이 無子일새 以兄北海王納之子超로 爲嗣하니라】</font>襲位하다
+
○ 八月에 燕兵이 圍秦[[長樂公]][[]]於鄴하니 鄴中이 芻粮俱盡하야 削松木飼馬라 [[燕王垂]]謂諸將曰 [[苻丕]]는 窮寇라 必無降理니 不如退屯新城하야 開丕西歸之路하야 以謝秦王疇昔之恩<font color="#0054FF" size="2">【疇는 發語辭라 己巳年에 垂奔秦하니 秦王堅이 郊迎하야 以爲冠軍將軍하니라】</font>이라하고 乃解圍하고 趨新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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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황제가 建康에 이르러서 [[劉裕]]를 都督中外諸軍事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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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에 燕나라 군대가 秦나라 [[長樂公]][[苻丕]]를 鄴城에서 포위하니, 鄴城 안의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소나무를 벗겨 말을 먹일 지경에 이르렀다. [[燕王]][[慕容垂]]가 諸將에게 이르기를 “[[苻丕]]는 곤궁한 적이다.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후퇴하여 新城에 주둔해서 [[苻丕]]가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어 [[秦王]]의 옛 은혜<font color="#0054FF" size="2">【疇는 發語辭이다. 己巳年(369)에 慕容垂가 秦나라로 도망쳐 오니, 秦王 苻堅이 郊外에서 맞이하여 그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font>에 사례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新城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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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劉裕]]가 돌아와 京口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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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南燕王]] 慕容備德<font color="#0054FF" size="2">【위의 庚子年條(400)에 南燕王 慕容德이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慕容備德으로 고쳤다.】</font>이 죽고 형의 아들 慕容超<font color="#0054FF" size="2">【慕容備德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兄인 北海王 慕容納의 아들 慕容超를 후사로 삼았다.】</font>가 왕위를 세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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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三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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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三年이라 〈秦弘始九요 魏天賜四年이라 ○ [[燕主]][[高雲]]正始元年이요 [[夏主]][[赫連勃勃]]<font color="#0054FF" size="2">【自謂夏后氏之苗裔하야 稱大夏하니 匈奴南單于苗裔也라 謂帝王繼天爲子하니 是爲徽赫이 實與天連이라하고 改姓曰赫連氏라하니라】</font>龍昇元年이라 ○ 是歲에 燕[[慕容熙]]亡하니 舊大國二요 小國四요 新小國二니 凡八僭國이라〉
+
[[太保安]]<font color="#0054FF" size="2">【安은 謝安이라】</font>이 奏請호되 乘[[苻氏]]傾敗하야 開拓<font color="#0054FF" size="2">【拓은 斥開也라】</font>中原이라하야 以[[謝玄]], [[]], [[石虔]]等으로 伐秦하니 河南城堡<font color="#0054FF" size="2">【堡는 廣韻에 堡障은 小城也라하니라】</font> 皆來歸附라 [[謝玄]]이 遣晉陵太守晉陵太守[[滕恬之]]하야 渡河據黎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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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3년(정미 407) - 秦나라 弘始 9년이고, 魏나라 天賜 4년이다. [[燕主(北燕)]]高雲高雲의 正始 元年이고, [[夏主]] 赫連勃勃<font color="#0054FF" size="2">【赫連勃勃이 스스로 夏后氏의 후손이라 하여 大夏天王이라 칭하였으니, 匈奴 南單于의 후손이다. 말하기를 “帝王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들이 되니, 이것은 그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실로 하늘과 이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劉氏姓을 고쳐 赫連氏라 하였다.】</font>의 龍昇 元年이다. ○ 이해에 燕나라(後燕) [[慕容熙]]가 망하였다.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小國이 넷이며 새로운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
○ 太保太保 謝安<font color="#0054FF" size="2">【安은 謝安이다.】</font>이 주청하기를 “[[苻氏]]가 형세가 기울어 패한 틈을 타서 中原을 개척<font color="#0054FF" size="2">【拓은 물리쳐서 개간하는 것이다.】</font>해야 한다.”고 하여 [[謝玄]]과 [[謝桓]][[石虔]] 등을 데리고 가서 秦나라를 치니, 河南의 城堡<font color="#0054FF" size="2">【堡는 ≪廣韻≫에 “堡障은 작은 城이다.하였다.】</font>가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謝玄]]이 晉陵太守晉陵太守[[滕恬之]]를 보내서 황하를 건너 黎陽을 점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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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魏主]][[]]滅劉衛辰<font color="#0054FF" size="2">【劉淵之族也라】</font>하니 其子[[勃勃]]이 奔秦이어늘 [[秦主]][[]]이 見而奇之하야 使鎭朔方이러니 久之에 復叛秦하고 自稱[[大夏天王]]하다
+
[[燕王]][[]] 復引兵圍鄴하니 [[丕]]進退路窮이라 會에 [[謝玄]]이 遣[[劉牢之]]等하야 據碻磝<font color="#0054FF" size="2">【王氏曰 碻磝는 城名이라 然二字俱在五爻韻이요 又碻는 本作䂭라 按宋重修廣韻註하면 䂭는 口交反이요 磝는 五交反이라 䂭磝는 (成)[城]名이니 今濟州是라】</font>, 滑臺<font color="#0054FF" size="2">【春秋鄭之廩延邑이니 後魏置東郡하고 又改滑州하니라】</font>러니 [[丕]]請救於[[玄]]이어늘 [[玄]]이 乃遣[[劉牢之]]하야 率衆二萬하야 救鄴하고 [[]]告饑어늘 [[]]이 水陸運米二千斛以饋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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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魏主]][[拓跋珪]]가 劉衛辰<font color="#0054FF" size="2">【劉衛辰은 劉淵의 종족이다.】</font>을 멸하자, 그 아들[[劉勃勃(赫連勃勃)]]이 秦나라로 도망하였다. [[秦主]][[姚興]]이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朔方을 鎭撫鎭撫하게 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시 秦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大夏天王]]이라 칭하였다.
+
[[燕王]][[慕容垂]]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鄴城을 포위하니, [[苻丕]]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침 [[謝玄]]이 [[劉牢之]] 등을 보내 碻磝<font color="#0054FF" size="2">【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碻磝는 城의 이름이다. 그러나 碻와 磝 두 글자가 모두 五爻(요)의 韻에 있으며, 또 碻는 본래 䂭字로 되어 있다. 宋나라에서 重修한 ≪廣韻≫의 註를 살펴보면 䂭는 口交反(교)이고 磝는 五交反(요)이다. 䂭磝는 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濟州가 이곳이다.” 하였다.】</font>와 滑臺城<font color="#0054FF" size="2">【滑臺는 春秋時代 鄭나라의 廩延邑이니, 後魏가 東郡을 설치하고 또 滑州로 고쳤다.】</font>을 점거하였는데, [[苻丕]][[謝玄]]에게 구원을 청하자 [[謝玄]]이 마침내 [[劉牢之]]를 보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鄴城을 구원하게 하였으며, [[苻丕]]가 굶주림을 고하자 [[謝玄]]이 水陸으로 쌀 2천 斛을 운반하여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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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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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十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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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四年이라 〈秦弘始十이요 魏天賜五年이요 南涼嘉平元年이라〉
+
[乙酉]十年이라 〈[[秦王]][[苻丕]]大安元이요 燕二요 後秦白雀二年이라 ○ [[西燕主]][[慕容沖]]更始元年이라 ○ [[西秦王]][[乞伏國仁]]建義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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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禿髮傉檀]]<font color="#0054FF" size="2">【傉은 力沃切이니 利鹿孤之子라】</font>이 稱[[涼王]]하다
+
正月에 [[慕容沖]]이 卽帝位於阿房<font color="#0054FF" size="2">【是爲西燕이라 [通鑑要解]先時에 謠曰 鳳凰止阿房이라하니 堅曰 鳳凰은 非梧桐이면 不捿요 非竹實이면 不食이라하고 乃植桐竹數十萬株于阿房하야 以待之하니라 沖小字鳳凰이니 至是하야 止阿房城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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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義熙 4년(무신 408) - 秦나라 弘始 10년이고, 魏나라 天賜 5년이고, 南涼의 嘉平 元年이다. -
+
太元 10년(을유 385) - [[秦王]][[苻丕]]의 大安 元年이고, 燕나라 2년이고, 後秦白雀 2년이다. ○ [[西燕主]][[慕容沖]]의 更始 元年이다. ○ [[西秦王]][[乞伏國仁]]의 建義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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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禿髮傉檀<font color="#0054FF" size="2">【傉은 음이 力沃切()이니 禿髮利鹿孤의 아들이다.】</font>이 [[涼王]]을 칭하였다.
+
正月에 [[慕容沖]]이 [[阿房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原註]이(慕容沖)가 바로 西燕이다. [通鑑要解]이보다 앞서 동요에 이르기를 “鳳凰이 阿房에 머문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阿房城에 심어 놓고 봉황을 기다렸다. 慕容沖의 小字가 鳳凰이니, 이때에 이르러 阿房城에 머물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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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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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五年이라 〈秦弘始十一이요 [[魏太宗]][[拓跋嗣]]永興元年이라 ○ [[燕王]][[馮跋]]太平元年이요 西秦更始元年이라 ○ 舊大國二요 南涼, 北涼, 南燕, 西涼, 燕, 夏小國六이요, 新小國一이니 凡九僭國이라〉
+
○ 四月에 [[劉牢之]]至鄴하니 [[燕王]]垂 邀擊大破之라 坐軍敗하야 徵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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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5년(기유 409) - 秦나라 弘始 11년이고, 魏나라 [[太宗]][[拓跋嗣]]의 永興 元年이다. ○ [[燕王]][[馮跋]]의 太平 元年이고, 西秦의 更始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둘이고, 南涼‧北涼‧南燕‧西涼‧燕‧夏 등 小國이 여섯이고, 새로운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아홉이다.-
+
○ 4월에 [[劉牢之]]가 鄴城에 이르자 [[燕王]][[慕容垂]]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대파하니, 敗戰한 죄에 걸려서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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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抗表<font color="#0054FF" size="2">【抗은 擧也라】</font>伐南燕할새 帥舟師하고 自淮入泗하니 或謂[[]]曰 燕人이 若塞大峴<font color="#0054FF" size="2">【山名이니 其地險固하니 在琅邪郡陽都縣이라】</font>之險하고 或堅壁淸野면 大軍深入하야 不唯無功이요 將不能自歸하리니 奈何오 [[]]曰 吾慮之熟矣로라 鮮卑貪婪하야 不知遠計하야 進利虜獲하고 退惜禾苗라 謂我孤軍遠入하야 不能持久라하야 不過進據臨朐<font color="#0054FF" size="2">【東莞郡邑이니 屬靑州라 今益都府臨朐縣이라】</font>하고 退守廣固요 必不能守險淸野하리니 敢爲諸君保之하노라 [[]]過大峴호되 燕兵不出이라 [[]]擧手指天하야 喜形于色이어늘 左右曰 公이 未見敵而先喜는 何也잇고 [[]]曰 兵已過險하야 士有必死之志하고 餘粮棲畝하야 人無匱乏之憂하니 虜已入吾掌中矣로다 進與燕兵戰于臨朐하니 燕衆이 大敗라 斬[[段暉]]等大將十餘人하니 [[]]遁還廣固하다 [[]]乘勝逐北<font color="#0054FF" size="2">【北은 乃陰方이니 軍敗曰北라 】</font>하야 至廣固하야 克其大城하니 [[]]收衆入保小城이어늘 [[]]築長圍守之하니 北方之民이 執兵負粮하고 歸裕者日以千數러라
+
○ 五月에 [[西燕主]][[沖]]<font color="#0054FF" size="2">【垂復興於山東하고 而沖稱號於關中이라 故로 書西燕以別之也라】</font>이 攻長安이어늘 [[秦王]][[]]이 身自督戰할새 飛矢滿體하야 流血淋漓라 沖이 縱兵暴掠하니 關中士民이 流散하고 道路斷絶하야 千里無煙이러라 [[]]이 大懼하야 以讖書云 帝出五將이면 久長得이라하야 乃留[[太子宏]]하야 守長安하고 遂出奔五將山하다 [[後秦王]][[]]이 遣驍騎將軍驍騎將軍[[吳忠]]하야 帥騎圍之하니 秦兵이 皆散走호되 [[]]이 神色自若하야 坐而待之라 俄而오 [[]]至執之하야 送詣新平하야 幽於別室<font color="#0054FF" size="2">【後秦王萇이 幽秦堅於別室하고 使求傳國璽하니 堅叱之曰 五胡次序에 無汝羌名이라 璽已送晉하니 不可得也라하니라 萇이 遣人殺之하고 欲隱其名하야 諡堅曰 壯烈天王이라하다】</font>이러니 [[]]이 遣人하야 縊[[]]於新平佛寺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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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번째 줄: 706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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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表文을 올리고<font color="#0054FF" size="2">【抗은 들어 올리는 것이다.】</font>南燕을 정벌할 때에 舟師(水軍)를 거느리고 淮水로부터 泗水에 들어가니, 혹자가 [[劉裕]]에게 이르기를 “燕나라 사람이 만약 大峴山<font color="#0054FF" size="2">【大峴은 山의 이름이니 지역이 험고하다. 琅琊郡 陽都縣에 있다.】</font>의 험한 요새를 막고 혹 성벽을 굳게 지키고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의 곡식을 깨끗이 없앤다면 큰 군대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가서 공을 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심사숙고해 보았다. 鮮卑(慕容超)는 탐욕스러워서 장구한 계책을 알지 못하여, 전진하면 노획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후퇴하면 벼싹을 아까워한다. 내가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깊숙이 쳐들어 와서 지구전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들은 전진하면 臨朐<font color="#0054FF" size="2">【臨朐는 東莞郡의 邑이니, 靑州에 속하였다. 지금의 益都府 臨朐縣이다.】</font>를 점거하고 후퇴하면 廣固를 지킴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험한 곳을 지키고 들의 곡식을 말끔히 없애지 못할 것이니, 감히 諸君에게 보장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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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西燕主]] 慕容沖<font color="#0054FF" size="2">【慕容垂는 山東에서 燕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慕容沖은 關中에서 燕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西燕이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font>이 長安을 공격하자, [[秦王]][[苻堅]]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때 流矢가 몸에 가득 꽂혀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慕容沖]]이 군대를 풀어서 사납게 노략질하니, 關中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고 도로에 행인들이 끊어져 천리를 가도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苻堅]]이 크게 두려워하여 圖讖書에 “皇帝가 나가서 五將에 이르면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하여, 마침내 太子太子[[慕容宏]]을 남겨 두어 長安을 지키게 하고는 마침내 나가 五將山으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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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大峴山을 지났는데도 燕나라 군대가 나오지 않자, [[劉裕]]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완연하였다. 좌우가 말하기를 “公이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기뻐함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劉裕]]가 대답하기를 “군대가 이미 험한 곳을 빠져나와서 군사들이 필사의 각오가 있을 것이요, 그들이 남겨 놓은 양식이 밭에 있어서 우리들이 궁핍할 우려가 없으니, 적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전진하여 燕나라 군대와 臨朐에서 싸웠는데,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段暉]] 등 大將大將 십여 명의 목을 베니, [[慕容超]]가 도망하여 廣固로 돌아갔다. [[劉裕]]가 승세를 타고 도망하는 자들<font color="#0054FF" size="2">【北은 바로 陰方이니, 군대가 패한 것을 北라 한다.】</font>을 추격하여 廣固에 이르러 큰 성(外城)을 함락하니, [[慕容超]]가 군사들을 거두어 작은 성(內城)에 들어가 지켰다. [[劉裕]]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고 지키니, 북방의 백성들이 병기를 쥐고 양식을 짊어지고 [[劉裕]]에게 귀의하는 자가 하루에 천 명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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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秦王]][[姚萇]]이 驍騎將軍驍騎將軍[[吳忠]]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苻堅]]은 정신과 얼굴빛을 변치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吳忠]]이 이르러 [[苻堅]]을 사로잡아서新平으로 보내어 별실에 가두었는데,<font color="#0054FF" size="2">【後秦王 姚萇이 秦王 苻堅을 別室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傳國璽를 요구하니, 苻堅이 꾸짖기를 “五胡의 次序에 너희 羌人의 이름은 없다. 傳國璽는 이미 晉나라로 보냈으니 줄 수가 없다.” 하였다. 姚萇이 사람을 보내어 苻堅을 죽이고 자기 이름을 숨기고자 하여 苻堅의 시호를 壯烈天王이라 하였다.】</font>[[姚萇]]이 사람을 보내 新平의 佛寺에서 [[苻堅]]을 목 졸라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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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曰 論者皆以爲[[秦王]][[堅]]之亡은 由不殺[[慕容垂]], [[姚萇]]故也라하나 臣獨以爲不然이라 [[許劭]]謂[[魏武帝]]는 治世之能臣이요 亂世之姦雄이라하니 使[[堅]]治國에 無失其道면 則[[垂]], [[萇]]은 皆秦之能臣也니 烏能爲亂哉아 [[堅]]之所以亡은 由驟勝而驕故也라 [[魏文侯]]問[[李克吳]]之所以亡한대 對曰 數戰數勝이니이다 [[文侯]]曰 數戰數勝은 國之福也어늘 何故亡고 對曰 數戰則民疲하고 數勝則主驕하니 以驕主御疲民이면 未有不亡者也라하니 [[秦王]][[堅]]이 似之矣로다
○ 魏[[淸河王]][[]]<font color="#0054FF" size="2">【珪之庶子라】</font> [[魏主]][[]]어늘 [[齊王]][[]]<font color="#0054FF" size="2">【珪之長子也니 是爲太宗明元皇帝라】</font>聞變而出하니 大臣이 翕然奉迎이라 [[]][[]]하고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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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石氏]]之彊也에 氐, 羌之屬이 無不內徙而爲臣이러니 一朝失馭에 而角立爲患하니 理固然也라 [[苻洪]]이 徘徊枋頭하야 有虎踞中原之志라 以健<font color="#0054FF" size="2">【洪之世子라】</font>爲不肖나 然猶西取關中<font color="#0054FF" size="2">【肖는 似也라 洪病甚하야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는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는 非汝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豎子所困은 謂趙將麻秋 爲洪所獲하야 以爲將軍이러니 秋因宴鴆洪하니라】</font>하고 幷[[姚襄]]<font color="#0054FF" size="2">【姚襄은 弋仲第五子니 見二十八卷丙辰年의 奔平陽注라】</font>하고 却[[桓溫]]<font color="#0054FF" size="2">【見二十八卷甲寅年이라】</font>하야 遂彊其國하며 [[]]以雄才英略으로 加之慈惠忠信하고 擧[[王猛]]於布衣하야 任之以政하야 勳舊不能離하고 親戚不敢妬하니 非至明이면 能如是乎아 故로 能呑彊燕, 擧河西하고 兼巴蜀, 包漢沔하고 俘索頭<font color="#0054FF" size="2">【索頭는 鮮卑別部也니 姓拓跋氏라 其俗이 以索辮髮이라 因號索頭라】</font>, 屠龜玆<font color="#0054FF" size="2">【龜는 音丘요 玆는 音慈라[頭註]龜玆는 西域國名이라】</font>하야 奄有天下十分之九하니 五胡<font color="#0054FF" size="2">【見二十六卷이라】</font>之盛이 未有如[[]]者也라 觀其擧百萬之衆하야 以攻晉할새 先爲之除宮築第하야 以待其君臣하니 意以爲羅中之禽을 往無不獲也러니 及一戰而敗에 遂顚沛不振하야 昔之俘囚降虜가 皆起而爲敵이라 數月之間에 寇讐徧於四方하고 戎馬塞於郊甸<font color="#0054FF" size="2">【甸은 自邦國以及四郊之內라】</font>하야 以至身死人手하고 子孫殄滅은 何哉오 論者皆咎堅寵信羌與鮮卑<font color="#0054FF" size="2">【謂姚萇, 慕容垂라】</font>하고 輕於伐晉이나 彼皆睹其迹而言之요 未達其本也라 要之컨대 [[]]恃其强大하야 易而無備하니 此其所以敗亡也夫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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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公]]이 말하였다.
魏나라 [[淸河王]] 拓跋紹<font color="#0054FF" size="2">【淸河王 拓跋紹는 拓跋珪의 庶子이다.】</font>[[魏主]][[拓跋珪]]를 시해하였다. [[齊王]] 拓跋嗣<font color="#0054FF" size="2">【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니, 이가 바로 太宗 明元皇帝이다.】</font>가 변고를 듣고 출동하니,大臣大臣들이 翕然히 받들어 맞이하였다. [[拓跋嗣]][[拓跋紹]]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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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秦王]][[苻堅]]이 멸망한 것은 [[慕容垂]]와 [[姚萇]]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許劭]]가 이르기를 ‘魏나라 [[武帝(曹操)]]는 治世의 유능한 신하이고 亂世의 姦雄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苻堅]]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慕容垂]]와 [[姚萇]]은 모두 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니, 어찌 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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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苻堅]]이 망한 이유는 갑자기 승리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魏나라 [[文侯]]가 [[李克]]에게 吳나라가 망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文侯]]가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함은 국가의 복인데, 무슨 이유로 망하였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우면 백성들이 지치고 자주 승리하면 군주가 교만해지니, 교만한 군주로써 지친 백성을 부리면 망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秦王]][[苻堅]]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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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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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氏]]가 강할 때에는 氐族과 羌族의 무리가 안으로 옮겨 와서 신하 노릇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통치 능력을 잃게 되자 맞서서 우환이 되었으니,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苻洪]]은 枋頭에 배회하여 범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中原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며, 苻健<font color="#0054FF" size="2">【苻健은 苻洪의 세자이다.】</font>은 불초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쪽으로 關中을 취하고<font color="#0054FF" size="2">【[附註]以健爲不肖 然猶西取關中:肖는 같음이다. 苻洪이 병이 심해지자, 아들인 苻健에게 이르기를 “내가 關中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은 中州(東晉)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도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 中州는 네가 차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關中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것은 趙나라 장수 麻秋가 苻洪에게 사로잡히자 그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麻秋가 연회를 틈타 苻洪에게 짐독을 먹인 일을 이른 것이다.】</font>[[姚襄]]을 겸병하며<font color="#0054FF" size="2">【姚襄은 姚弋仲의 다섯째 아들이니, 28권 丙辰年條(356)의 奔平陽 注에 보인다.】</font>[[桓溫]]을 물리쳐서<font color="#0054FF" size="2">【桓溫을 물리친 일은 28권 甲寅年條(354)에 보인다.】</font> 마침내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였으며, [[苻堅]]은 영웅의 재주와 지략에 자애로운 은혜와 忠信을 겸하였고 布衣로 있던 [[王猛]]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勳舊의 신하가 이간질하지 못하고 친척들이 감히 질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한 燕나라를 병탄하고河西 지방을 차지하고 巴‧蜀 지방을 겸병하고 漢‧沔 지방을 포괄하며 索頭<font color="#0054FF" size="2">【索頭는 鮮卑族 중의 한 부족이니, 姓은 拓跋氏이다. 풍속에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索頭라 호칭한 것이다.】</font>를 사로잡고 龜玆國<font color="#0054FF" size="2">【[原註]龜는 음이 구이고, 玆는 음이 자이다.[頭註]龜玆는 西域의 나라 이름이다.】</font>을 도륙하여 순식간에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으니, 五胡<font color="#0054FF" size="2">【五胡는 26권에 보인다.】</font>의 성대함이 [[苻堅]]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苻堅]]이 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晉나라를 공격할 때에 먼저 궁궐을 소제하고 집을 지어서 晉나라의 君臣들을 대비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晉나라의 君臣들은 그물 속의 새와 같아서 어디를 가든 잡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인데, 한번 싸워 패하자 마침내 낭패를 당하여 떨치지 못해서 옛날 포로로 잡혔던 죄수와 항복한 오랑캐들이 모두 일어나 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 달 사이에 적과 원수가 사방에 두루 널리고 軍馬가 郊甸<font color="#0054FF" size="2">【甸은 나라 안으로부터 사방 郊外의 이내까지이다.】</font>에 가득 차서 몸이 남의 손에 죽고 자손이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苻堅]]이 羌族과 鮮卑族<font color="#0054FF" size="2">【羌族과 鮮卑族은 姚萇과 慕容垂를 이른다.】</font>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며 晉나라를 경솔하게 정벌한 것을 탓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그 자취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요 그 근본은 알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苻堅]]은 자기 나라가 강성하고 큰 것만 믿고 상대방을 쉽게 여겨 대비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쩌면 패망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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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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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六年이라 〈秦弘始十二요 魏永興二年이라 ○ 是歲에 南燕亡하니 大二, 小六이니 凡八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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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保太保[[安]]이 薨하니 以[[琅邪(琊)王]][[道子]]<font color="#0054FF" size="2">【簡文帝子라】</font>로 錄尙書事錄尙書事<font color="#0054FF" size="2">【錄은 總也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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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6년(경술 410) - 秦나라 弘始 12년이요,魏나라 永興 2년이다. ○ 이해에 南燕이 망하였다. 大國이 둘이요 小國이 여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덟이다.-
+
太保太保[[謝安]]이 죽으니, [[琅琊王]] 司馬道子<font color="#0054FF" size="2">【司馬道子는 簡文帝(司馬昱)의 아들이다.】</font>를 錄尙書事<font color="#0054FF" size="2">【錄은 총괄하는 것이다.】</font>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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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樂公]][[]] 在鄴이라가 將西赴長安이러니 入至晉陽하야 始知長安不守하야 [[]]已死하고 乃發喪하고 卽皇帝位하다
南燕尙書尙書[[悅壽]]<font color="#0054FF" size="2">【姓名也라】</font> 開門納晉師하니 [[]]與左右數十騎로 踰城하야 突圍出走어늘 追獲之하다 [[裕]]忿廣固久不下하야 欲阬之하고 以妻女賞將士러니 [[韓範]]諫曰 晉室南遷에 中原鼎沸라 士民이 無援하야 彊則附之하니 旣爲君臣이면 必須爲之盡力이라 彼皆衣冠舊族이요 先帝遺民이라 今王師弔伐이어늘 而盡阬之<font color="#0054FF" size="2">【阬은 塹也, 陷也니 謂陷之於阬而殺之라】</font>면 使安所歸乎잇가 竊恐西北之人이 無復來蘇之望<font color="#0054FF" size="2">【書曰 徯我后하노니 后來하시면 其蘇라한대 蔡傳曰 蘇는 復生也니 謂后來면 我其復生也라】</font>矣일까하노이다 [[裕]]改容謝之라 然이나 猶斬王公以下三千人하고 沒入家口萬餘하고 夷其城隍<font color="#0054FF" size="2">【夷는 平之也요 城隍은 外塹也라 有水曰池요 無水曰隍이라】</font>하고 送[[]]詣建康하야 斬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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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樂公]][[苻丕]]가 鄴城에 있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長安으로 달려가려 하였는데, 晉陽에 들어와서 비로소 長安을 지켜내지 못하여 [[苻堅]]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는 마침내 喪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南燕의 尙書尙書 悅壽<font color="#0054FF" size="2">【悅壽는 姓名이다.】</font>가 성문을 열고 晉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慕容超]]가 좌우에서 따르던 騎兵 수십 명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망을 뚫고 도망했는데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劉裕]]는 廣固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서 성 안의 병사들을 묻어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晉나라 장병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는데, [[韓範]]이 간하기를 “晉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하자, 中原이 물 끓듯 소란하였습니다. 선비와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누구든 강대하면 그에게 歸附한 것이니, 이미 군신간이 되었으면 반드시 이들을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舊族(예부터 내려온 지체 높은 집안)이요, 先帝의 遺民들입니다. 지금 王의 군대가 죄 있는 자를 정벌하여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해야 할 터인데, 모조리 묻어 죽인다면<font color="#0054FF" size="2">【阬은 구덩이(참호)이고 빠지는 것이니,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이른다.】</font>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생각건대 西北 사람들이 다시는 의로운 군대가 와서 소생하게 해줄 것이라 희망<font color="#0054FF" size="2">【≪書經≫ 〈仲虺之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니, 임금께서 오시면 소생할 것이다.” 하였는데, 蔡氏의 傳에 이르기를 “蘇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임금님이 오시면 우리들이 다시 살아남을 이른다.” 하였다.】</font>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劉裕]]가 낯빛을 고치고 사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王公 이하 관원 3천 명을 목 베고 그들의 家屬 1만여 명을 籍沒하여 노비로 삼고 廣固의 城隍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들었으며,<font color="#0054FF" size="2">【夷는 평평하게 하는 것이요, 城隍은 바깥 참호이다. 물이 있는 곳을 池라 하고 물이 없는 곳을 隍이라 한다.】</font>[[慕容超]]를 建康으로 압송하여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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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二月에 [[燕王]][[]] 始定都中山하고 卽皇帝位하다
[[溫公]]曰 晉自濟江以來로 威靈不競하니 戎狄橫騖하야 虎噬中原이라 [[劉裕]]始以王師로 翦平東夏어늘 不於此際에 旌禮賢俊하고 慰撫疲民하야 宣愷悌之風하고 滌殘穢之政하야 使群士嚮風하고 遺黎企踵하고 而更恣行屠戮하야 以快忿心하니 迹其施設하면 曾[[]], [[姚]]<font color="#0054FF" size="2">【苻堅與姚萇이라】</font>之不如라 宜其不能蕩壹四海하야 成莫大之業이니 豈非雖有智勇이나 而無仁義하야 使之然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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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에 [[燕王]][[慕容垂]]가 비로소 中山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溫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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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가 남쪽으로 揚子江을 건너온 뒤로부터 국가의 威勢가 떨쳐지지 못하니, 오랑캐들이 횡행하여 범처럼 中原을 집어 삼켰다. [[劉裕]]가 처음에 王의 군대로 東夏(齊나라 지역)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때에 어진 이와 준걸스런 이를 표창하고 예우하며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여, 화락한 풍속을 펴며 잔학하고 더러운 정사를 씻어서,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風聞만 듣고도 향하게 하고 오랑캐의 통치하에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발돋움하고 기다리게 하지 않고는 도리어 살육을 자행하여 분한 마음을 쾌하게 하였으니,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일찍이 [[苻氏]]와 姚氏<font color="#0054FF" size="2">【苻와 姚는 前秦의 苻堅과 後秦의 姚萇이다.】</font>만도 못하다. 그가 四海를 통일하여 위대한 기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당연하니, 지모와 용맹은 있었으나 仁義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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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徐道覆]]이 聞[[劉裕]]北伐하고 勸[[盧循]]<font color="#0054FF" size="2">【徐道覆은 廣州刺史盧循之妹夫也요 循은 乃孫恩之黨而恩之妹夫也니 見上己亥年이라】</font>하야 乘虛襲建康하니 [[循]]從之하다 朝廷이 急徵[[劉裕]]하니 [[裕]]方議留鎭下邳하야 經營司, 雍<font color="#0054FF" size="2">【二州名이니 司州는 洛陽이요 雍州는 長安이라】</font>이러니 會得詔書하고 引兵還할새 以船載輜重하고 自帥精銳步歸라 至山陽하야 聞[[何無忌]]敗死<font color="#0054FF" size="2">【無忌引兵討[[盧循]]이라가 遇道覆하야 戰敗死之라】</font>하고 慮京邑失守하야 卷甲兼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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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光]]<font color="#0054FF" size="2">【秦尙書呂婆樓之子也라 略陽氐人이니 是爲後涼이라】</font>이 自稱涼州刺史涼州刺史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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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徐道覆]]이 [[劉裕]]가 북쪽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 [[盧循]]에게 권하여<font color="#0054FF" size="2">【徐道覆은 廣州刺史 盧循의 妹夫이고, 盧循은 바로 孫恩의 黨이면서 孫恩의 妹夫이니, 앞의 己亥年條(399)에 보인다.】</font> 빈틈을 타서 建康을 습격하게 하니, [[盧循]]그 말을 따랐다. 朝廷에서 급히 [[劉裕]]를 부르니, [[劉裕]]가 막 下邳에 주둔해서 司州와 雍州<font color="#0054FF" size="2">【司州와 雍州는 두 州의 이름이니, 司州는 洛陽이고 雍州는 長安이다.】</font>를 경영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마침 詔書를 받게 되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올 적에 배에다 輜重을 싣고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보로 돌아왔다. 山陽에 이르러 [[何無忌]]가 패전하여 죽었다<font color="#0054FF" size="2">【何無忌가 군대를 이끌고 盧循을 토벌하다가 徐道覆을 만나 전투에 패하여 죽었다.】</font>는 말을 듣고 京邑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까 염려해서 갑옷을 벗어서 말아 짊어지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였다.
+
○ 呂光<font color="#0054FF" size="2">【呂光은 秦나라 尙書 呂婆樓의 아들이다. 略陽의 氐人이니, 이가 바로 後涼이다.】</font>이 涼州刺史涼州刺史라고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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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에 [[劉毅]]與[[循]]으로 戰于桑落(州)[洲]하야 [[毅]]兵이 大敗라 乙丑에 [[盧循]]이 至淮口하니 中外戒嚴이라 [[裕]]謂將佐曰 賊이 若於新亭直進이면 其鋒을 不可當이니 宜且迴避어니와 若回泊西岸이면 此成擒爾니라 十二月에 裕帥衆軍하고 齊力擊[[循]]하니 [[循]]兵이 大敗라 走趣豫章이라가 收散卒하야 徑還番禺<font color="#0054FF" size="2">【番는 音波라】</font>하다
+
○ [[乞伏國仁]]이 自稱秦, 河二州牧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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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에 [[劉毅]]가 [[盧循]]과 桑落洲에서 싸워 [[劉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乙丑日(14일)에 [[盧循]]이 淮口에 이르니, 中外가 삼엄하게 경계하였다. [[劉裕]]가 장수와 보좌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만약 新亭에서 곧바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의 銳鋒(날카롭게 공격하는 기세)을 당해낼 수 없으니 마땅히 우선 회피해야 하겠지만, 만약 진로를 바꾸어 西岸에 정박한다면 우리에게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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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12월에 [[劉裕]]가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힘을 합하여 [[盧循]]을 공격하니, [[盧循]]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도망하여 豫章으로 향했다가 흩어진 군대를 수합하여 곧바로 番禺<font color="#0054FF" size="2">【番는 음이 파이다.】</font>로 돌아갔다.
+
○ 西秦의 [[乞伏國仁]]이 秦州와 河州 두 州의 牧을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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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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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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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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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七年이라 〈秦弘始十三이요 魏永興三年이라〉
+
[丙戌]十一年이라 〈[[秦王]][[苻登]]太初元이요 燕建興元이요 後秦建初元이요 [[西燕主]][[慕容永]]中興元年이라 ○ [[魏太祖]][[道武帝]][[拓跋珪]]登國元年이요 [[涼王]][[呂光]]太安元年이라 ○ 舊大國四요 小國一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七僭國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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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盧循]]이 奔交州어늘 刺史刺史[[杜慧度]]斬之<font color="#0054FF" size="2">【循至龍編津하니 杜慧度 悉散家財以賞軍士하고 與循合戰할새 擲雉尾炬하야 焚其艦하고 以步兵俠岸射之하니 衆潰하야 自投于水어늘 慧度取尸斬首하야 函送建康하니라】</font>하야 送首建康하다
+
正月에 [[拓跋珪]]<font color="#0054FF" size="2">【見上丙子年이라 拓跋은 複姓이니 立爲代王이라】</font> 大會於牛川하고 卽代王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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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7년(신해 411) - 秦나라 弘始 13년이고, 魏나라 永興 3년이다. -
+
太元 11년(병술 386) - [[秦王]][[苻登]]의 太初 元年이고, 燕나라(後燕) 建興 元年이고, 後秦建初 元年이고, [[西燕主]][[慕容永]]의 中興 元年이다. ○ 魏나라 [[太祖]]道武帝道武帝[[拓跋珪]]의 登國 元年이고, [[涼王(後涼)]][[呂光]]의 太安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넷이고 小國이 하나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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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盧循]]이 交州로 도망하자, 交州刺史交州刺史[[杜慧度]]가 그의 목을 베어<font color="#0054FF" size="2">【盧循이 龍編津에 이르니, 杜慧度가 家財를 다 털어 軍士들에게 상을 주고 盧循과 맞붙어 싸울 때에 雉尾炬를 던져서 戰艦을 불태우고 步兵을 거느리고서 강 언덕을 끼고 활을 쏘니, 盧循의 무리가 궤멸되었다. 盧循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자, 杜慧度가 盧循의 시체를 건져서 목을 베어 함에 넣어 建康으로 보냈다.】</font> 首級을 建康으로 보내었다.
+
正月에 拓跋珪<font color="#0054FF" size="2">【拓跋珪는 앞의 丙子年條(376)에 보인다. 拓跋은 複姓이니 즉위하여 代王이 되었다.】</font>가 牛川에서 군대를 크게 모으고, [[代王]]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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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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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九年이라 〈秦弘始十五요 魏永興五年이요 夏鳳翔元年이라〉
+
○ 西燕左將軍左將軍[[韓延]]이 [[燕主沖]]<font color="#0054FF" size="2">【慕容沖은 見上甲申年이라】</font>하고 立[[]][[段隨]]하야 爲燕主러니 [[慕容永]]<font color="#0054FF" size="2">【廆弟之子라】</font>이 襲[[段隨]]破之하고 帥鮮卑男女하야 去長安而東하니 衆이 推[[永]]爲河東主라 於是에 長安이 空虛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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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王]][[勃勃]]이 [[叱(于)[干]阿利]]<font color="#0054FF" size="2">【叱干은 代北複姓也요 阿利는 其名이라】</font>로 領將作大匠將作大匠하야 發嶺北夷, 夏十萬人하야 築都城於朔方水北, 黑水之南<font color="#0054FF" size="2">【朔方水北은 資治에 水作郡이라 [通鑑要解]勃勃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font>하다 [[阿利]]性巧而殘忍하야 蒸土築城할새 錐入一寸이면 卽殺作者而幷築之어늘 [[勃勃]]이 以爲忠이라하야 委任之하니 凡造兵器成에 呈之하면 工人이 必有死者라 射甲不入則斬弓人하고 入則斬甲匠하니 由是로 器物이 皆精利러라 [[勃勃]]이 謂古人氏族無常이라하야 改姓[[赫連氏]]<font color="#0054FF" size="2">【言其徽赫與天連也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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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9년(계축 413) - 秦나라 弘始 15년이고, 魏나라 永興 5년이고, 夏나라 鳳翔 元年이다. -
+
○ 西燕의 左將軍左將軍[[韓延]]이 [[燕主]][[慕容沖]]을 죽이고<font color="#0054FF" size="2">【慕容沖은 앞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font>[[慕容沖]]의 장수 [[段隨]]를 세워 [[燕主]]로 삼았는데, 慕容永<font color="#0054FF" size="2">【慕容永은 慕容廆의 아우의 아들이다.】</font>이 [[段隨]]를 습격하여격파하고鮮卑族의 남녀 백성들을 거느리고 長安을 떠나 동쪽으로 가니, 무리들이 [[慕容永]]을 추대하여 [[河東主]]로 삼았다. 이에 長安이 텅 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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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王]][[劉勃勃]]이 叱干阿利<font color="#0054FF" size="2">【叱干은 代北 지방의 複姓이고, 阿利는 이름이다.】</font>로 將作大匠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嶺北에서 오랑캐와 漢族 10만 명을 징발해서 朔方水 이북과 黑水 이남에 都城을 쌓게 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頭註]朔方水北은 ≪資治通鑑≫에 水字가 郡字로 되어 있다. [通鑑要解]赫連勃勃이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font>[[叱干阿利]]는 성품이 아첨을 잘하고 잔인하여 진흙을 쪄서 성을 쌓을 때에 송곳이 한 치 깊이만 들어가면 즉시 그 담장을 쌓은 자를 죽여서 그 시체를 진흙과 함께 쌓았다. [[劉勃勃]]이 이것을 충성이라 여겨서 그에게 위임하니, 무릇 병기를 만들어 올리면 工人 중에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있었다. 갑옷을 활로 쏘아서, 화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활을 만든 사람을 목 베고 화살이 들어가면 갑옷을 만든 자를 목 베니, 이로 말미암아 기물이 모두 정교하고 예리했다. [[劉勃勃]]이 古人의 姓氏에 일정한 규정이 없다 하여 姓을 赫連氏<font color="#0054FF" size="2">【赫連은 아름다움과 밝게 빛남이 하늘과 이어져 있음을 이른다.】</font>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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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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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十一年이라 〈秦弘始十七이요 魏神瑞二年이라〉
+
○ 四月에 [[後秦王]][[]]이 自安定으로 入長安하야 卽皇帝位하고 國號를 大秦이라하고 立子興하야 爲皇太子하다
</div>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正月에 [[秦王]][[興]]이 卒하고 [[太子]][[]]이 卽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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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11년(을묘 415) - 秦나라 弘始 17년이고, 魏나라 神瑞 2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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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정월에 [[秦王(後秦)]][[姚興]]이 죽고태자태자[[姚泓]]황제에 즉위하였다.
+
○ 4월에 [[後秦王]][[姚萇]]이 [[安定]]으로부터 長安에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大秦이라 하고 아들[[姚興]]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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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에 太尉太尉[[]]戒嚴하야 將伐秦할새 [[]][[劉穆之]]爲左僕射左僕射하야 入居東府<font color="#0054FF" size="2">【東府城은 安帝所築이라】</font>하야 總攝內外하니 [[穆之]]內總朝政하고 外供軍旅할새 決斷如流라 賓客輻湊<font color="#0054FF" size="2">【輻은 輪中木之直指轂者니 凡輪有三十輻하야 共湊於一轂일새 以諭四方皆來라】</font>하야 求訴百端하고 內外諮稟이 盈堦滿室호되 目覽辭訟하고 手答牋書하며 耳行聽受하고 口竝酬應하야 不相參涉하고 悉皆贍擧러라
+
九月에 西燕[[慕容永]]이 擊秦主[[]]於鄴하야 殺之하고 [[]]이 遂進據長子하야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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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太尉太尉[[劉裕]]가 삼엄하게 경계하여 秦나라(後秦)를 정벌하려 할 적에 [[劉裕]][[劉穆之]]를 尙書左僕射尙書左僕射로 삼아 東府<font color="#0054FF" size="2">【東府城은 安帝가 쌓은 것이다.】</font>에 들어가 있으면서 조정 안팎의 일을 總攝하게 하니, [[劉穆之]]가 안으로는 조정의 정사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대에 군수품을 공급할 적에 일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처리하였다. 賓客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font color="#0054FF" size="2">【輻은 수레바퀴 가운데의 나무가 곧게 바퀴통으로 향한 것이니, 수레바퀴에는 30개의 바퀴살이 있어서 모두 한 바퀴통으로 집중되므로 이로써 사방에서 모두 몰려옴을 비유한 것이다.】</font> 요구하고 소송하는 것이 천만 가지이고, 내외에서 자문하고 보고하는 자들이 뜰에 가득하고 방 안에 가득하였으나, 눈으로는 글과 訟辭를 보고 손으로는 牋書에 답을 하며 귀로는 남의 말을 듣고 입으로는 함께 수응(응대)하되 서로 뒤섞임 없이 모두 여유 있게 행하였다.
+
9월에 西燕의 [[慕容永]][[秦主]][[苻丕]]를 鄴城에서 공격하여죽이고, [[慕容永]]이 마침내 진격하여 長子縣을 점령하고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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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번째 줄: 911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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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月丁巳에 [[]]發建康할새 遣[[王鎭惡]], [[檀道濟]], [[沈田子]]等하야 數道竝進하다
+
十一月에 秦[[南安王]][[]]<font color="#0054FF" size="2">【丕之子라】</font>이 發喪行服하고 乃爲壇於隴東하고 卽皇帝位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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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丁巳日(12일)에 [[劉裕]]가 建康을 출발할 때에 [[王鎭惡]]‧[[檀道濟]]‧[[沈田子]] 등을 보내어 여러 길로 일제히 진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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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秦의 [[南安王]] 苻登<font color="#0054FF" size="2">【南安王 苻登은 苻丕의 아들이다.】</font>이 喪을 발표하고 服을 입고는 마침내 隴東에서 壇을 만들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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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l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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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十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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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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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月에 [[王鎭惡]]<font color="#0054FF" size="2">【王猛孫也라】</font>, [[檀道濟]]入秦境하야 所向皆捷이라 進逼洛陽하야 克之하다
+
[丁亥]十二年이라 〈秦太初二요 燕建興二요 後秦建初二요 魏登國二年이라〉
 +
</div>
 +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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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拓跋珪]] 改稱[[魏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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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9월에 王鎭惡<font color="#0054FF" size="2">【王鎭惡은 王猛의 손자이다.】</font>과 [[檀道濟]]가 秦나라 경내에 들어가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전진하여 洛陽을 압박하여 점령하였다.
+
太元 12년(정해 387) - 秦나라 太初 2년이고, 燕나라 建興 2년이고, 後秦建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2년이다. -
 +
</div>
 +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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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拓跋珪]]가 [[魏王]]이라고 개칭하였다.
 
</div>
 
</div>
 
</div>
 
</div>
 
|}</div><div class="clsB">
 
|}</div><div class="clsB">
=====[丁巳]十三年=====
+
=====[戊子]十三年=====
 
</div><div class="contData">
 
</div><div class="cont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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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번째 줄: 955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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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丁巳]十三年이라 〈秦永和二요 魏泰常二年이라 ○ [[西涼公]][[李歆]]嘉興元年이라 ○ 是歲에 秦亡하니 大一, 小五니 凡六僭國이라〉
+
[戊子]十三年이라 〈秦太初三이요 燕建興三이요 後秦建初三이요 魏登國三年이라 ○ [[西秦王]][[乞伏乾歸]]太初元年이라〉
 +
</div>
 +
<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
[[呂光]]이 卽[[三河王]]位하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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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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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번째 줄: 966번째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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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13년(정사 417) - 秦나라 永和 2년이고, 魏나라 泰常 2년이다. ○ [[西涼公]][[李歆]]의 嘉興 元年이다. ○ 이해에 秦(後秦)나라가 망하였다.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다섯이니, 僭國이 모두 여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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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13년(무자 388) - 秦나라 太初 3년이고, 燕나라 建興 3년이고, 後秦建初 3년이고, 魏나라 登國 3년이다. ○ [[西秦王]][[乞伏乾歸]]의 太初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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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光]]이 [[三河王]]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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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十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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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에 [[魏主]][[]]<font color="#0054FF" size="2">【拓跋珪長子라】</font>問於[[崔浩]]曰 [[劉裕]]伐[[姚泓]]하니 果能克乎아 對曰 克之니이다 [[嗣]]曰 [[裕]]才何如[[慕容垂]]오 對曰 勝之니이다 [[垂]]는 藉父兄之資하야 修復舊業하니 國人歸之를 若夜蟲之就火하야 少加倚仗이면 易以立功이니이다 [[劉裕]]는 奮起寒微하야 不階尺土하야 討滅[[桓玄]]하고 興復晉室하고 北禽[[慕容超]]하고 南梟[[盧循]]하야 所向無前하니 非其才之過人이면 安能如是乎잇가 [[裕]]克秦而歸면 必簒其主하리이다 關中은 華, 戎雜錯하야 風俗勁悍하니 [[裕]]欲以荊, 揚之化로 施之函秦<font color="#0054FF" size="2">【秦地에 有函谷關하니 秦人恃之하야 以爲險固라 故曰函秦이라】</font>이면 此는 無異解衣包火하고 張羅捕虎니 雖留兵守之라도 人情未()[]하고 趨向不同하야 適足爲寇敵之資爾리니 願按兵<font color="#0054FF" size="2">【按은 止也라】</font>息民하야 以觀其變이면 秦地는 終爲國家之有하야 可坐而守也리이다 [[嗣]]笑曰 卿이 料之審矣로다 [[浩]]曰 臣이 嘗私論近世將相之臣컨대 若王猛之治國은 苻堅之管仲也요 慕容恪之輔幼主는 慕容暐之霍光也요 [[劉裕]]之平禍亂은 司馬德宗<font color="#0054FF" size="2">【安帝之諱라】</font>之[[曹操]]也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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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十四年이라 〈秦太初四요 燕建興四요 後秦建初四요 魏登國四年이라 ○ 涼麟嘉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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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帝旣親政事에 威權이 己出하야 有人主之量이러니 旣而오 溺於酒色하야 委事於[[琅琊王]][[道子]]라 [[道子]]亦嗜酒하야 日夕에 與帝酣<font color="#0054FF" size="2">【酒樂이라】</font>歌爲事하고 又崇尙浮屠<font color="#0054FF" size="2">【三十二卷丙寅年注에 梵言浮屠는 華言聚相이라하니 通作浮圖라 釋典云 僧曰浮屠요 塔亦曰浮屠라하니 正號佛佗니 與浮屠로 聲相近이라 華言正覺이니 今略稱佛이라】</font>하야 窮奢極()[]하니 左右近習이 爭弄權柄하야 交通請托하야 賄賂<font color="#0054FF" size="2">【賄는 財也요 又贈送也며 賂는 以財與人也라 [通鑑要解]賄는 音灰라 金玉曰貨요 布帛曰賄라】</font>公行하며 官賞이 濫雜하고 刑獄이 謬亂<font color="#0054FF" size="2">【帝乃昏暗하고 [[道子]]亂政이라 左將軍左將軍[[許營]]上疏어늘 不省하니라】</font>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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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魏主]] 拓跋嗣<font color="#0054FF" size="2">【魏主 拓跋嗣는 拓跋珪의 長子이다.】</font>가 [[崔浩]]에게 묻기를 “[[劉裕]]가 [[姚泓(後秦)]]을 정벌하니,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말하기를 “[[劉裕]]의 재주는 [[慕容垂(後燕)]]와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니, [[崔浩]]가 대답하기를 “[[劉裕]]가 [[慕容垂]]보다 낫습니다. [[慕容垂]]는 父兄의 힘을 빌려서 옛 基業을 회복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歸附하는 것이 밤에 벌레들이 불빛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그들에게 조금만 의뢰하면 쉽게 공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劉裕]]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떨치고 일어나 한 자의 땅도 이용하지 않고서 [[桓玄]]을 토벌하고 晉나라 황실을 부흥하였으며, 북쪽에서 [[慕容超(南燕)]]를 사로잡고 남쪽에서 [[盧循]]을 효시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는 자가 없었으니, 그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劉裕]]가 秦나라를 이기고 돌아가면 반드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것입니다. 關中은 漢族과 오랑캐가 뒤섞여 살아서 風俗이 굳세고 사나우니, [[劉裕]]가 荊州와 揚州를 다스렸던 방법을 函谷關 안의 秦나라 땅<font color="#0054FF" size="2">【秦나라 땅에 函谷關이 있으니, 秦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서 험고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函秦이라 한 것이다.】</font>에 시행한다면 이는 옷을 벗어서 불을 싸고 새그물을 펼쳐 범을 잡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비록 병력을 남겨 두어 그곳을 지키게 하더라도 人心이 흡족해하지 않고 趨向이 똑같지 않아서 다만 외적에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전쟁을 중지하고<font color="#0054FF" size="2">【按은 중지하는 것이다.】</font>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고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면 秦나라 땅은 결국 우리나라 소유가 되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拓跋嗣]]가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잘 헤아렸다.”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근세 將相의 신하를 사사로이 논하건대 [[王猛]]이 나라를 다스림은 [[苻堅(前秦)]]의 [[管仲]]이고, [[慕容恪]]이 어린 군주를 보필함은 [[慕容暐(前燕)]]의 [[霍光]]이고, [[劉裕]]가 禍亂을 평정함은 司馬德宗(安帝)<font color="#0054FF" size="2">【司馬德宗은 安帝의 諱이다.】</font>의 [[曹操]]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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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14년(기축 389) - 秦나라 太初 4년이고, 燕나라 建興 4년이고, 後秦建初 4년이고, 魏나라 登國 4년이다. ○ 涼나라(後涼) 麟嘉 元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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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황제가 이미 친히 정사를 행하자, 위엄과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와 人君의 도량이 있었는데, 이윽고 酒色에 빠져 [[琅琊王]][[司馬道子]]에게 정사를 맡겼다. [[司馬道子]] 또한 술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황제와 술 마시고<font color="#0054FF" size="2">【酣은 술을 즐기는 것이다.】</font> 노래하는 것을 일삼고 또 불교<font color="#0054FF" size="2">【≪通鑑節要≫ 32권 丙寅年(546) 注에 “梵語의 浮屠는 중국말의 聚相이다.” 하였으니, 일반적으로 浮圖로 쓴다. 釋典에 이르기를 “승려를 浮屠라 하고, 塔을 또한 浮屠라 한다. 정식 명칭은 佛佗이니 浮屠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중국말로는 正覺이니, 지금은 佛이라고 약칭한다.” 하였다.】</font>를 숭상해서 극도로 사치하고 낭비하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 다투어 권력을 농간하여 연줄을 대어 사사로운 일을 청탁해서 뇌물<font color="#0054FF" size="2">【[頭註]賄는 財貨이고 또 財貨를 보내는 것이며, 賂는 재화를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通鑑要解]賄는 音이 회이다. 金玉을 貨라 하고 布帛을 賄라 한다.】</font>공공연히 오가고 관작과 賞이 남발되고 혼잡하였으며 형벌과 옥사가 잘못되고 혼란해졌다.<font color="#0054FF" size="2">【武帝가 昏暗하고 司馬道子가 정사를 어지럽히므로 左將軍 許營이 상소하였으나 살펴보지 않았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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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十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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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月辛丑에 [[裕]]至潼關하니 [[秦主]][[泓]]이 使[[姚丕]]로 守渭橋어늘 [[王鎭惡]]이 大破[[丕]]於渭橋하니 [[泓]]兵이 不戰而潰라 單馬로 還宮하야 癸亥에 將妻子群臣하고 詣[[王鎭惡]]壘門降이어늘 [[鎭惡]]이 撫慰하고 號令嚴肅하니 百姓이 安堵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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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十七年이라 〈秦太初七이요 燕建興七이요 後秦建初七이요 魏登國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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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郡公]][[桓玄]]<font color="#0054FF" size="2">【溫之少子니 見上癸酉年이라】</font>負其才地<font color="#0054FF" size="2">【地는 謂地位門地라】</font>하고 以雄豪<font color="#0054FF" size="2">【雄은 武稱이요 豪는 弛也라 又獸之將群者爲雄이요 智過百人謂豪라】</font>自處한대 朝廷이 疑而不用이라 年二十三에 始拜太子洗馬太子洗馬하고 後에 出補義興太守義興太守하니 鬱鬱不得志<font color="#0054FF" size="2">【玄爲洗馬時에 琅琊王道子 値其酣醉하야 張目謂客曰 桓溫晩塗欲作賊은 云何오하니 玄伏地流汗하야 不能起라 由是로 不自安而切齒於道子云云이라】</font>하야 歎曰 父爲九州伯九州伯이어늘 兒爲五湖<font color="#0054FF" size="2">【滆湖, 洮湖, 射湖, 貴湖, 及太湖爲五湖라 湖之小支 俱連太湖故로 太湖兼得五湖之名이라】</font>長고하고 遂棄官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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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辛丑日(2일)에 [[劉裕]]가 潼關에 이르니, [[秦主]](後秦) [[姚泓]]이 [[姚丕]]로 하여금 渭橋를 지키게 하였다. [[王鎭惡]]이 渭橋에서 [[姚丕]]를 대파하니, [[姚泓]]의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궤멸되었다. [[姚泓]]이 한 필의 말로 궁중에 돌아와서 癸亥日(24일)에 처자와 군신들을 거느리고 [[王鎭惡]]의 軍門軍門에 나와 항복하였다. [[王鎭惡]]이 백성들을 위무하고 호령이 엄숙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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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17년(임진 392) - 秦나라 太初 7년이고, 燕나라 建興 7년이고, 後秦建初 7년이고, 魏나라 登國 7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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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郡公]] 桓玄<font color="#0054FF" size="2">【桓玄은 桓溫의 작은아들이니, 앞의 癸酉年條(373)에 보인다.】</font>이 자신의 재주와 門閥<font color="#0054FF" size="2">【地는 지위와 門地(門閥)를 이른다.】</font>을 믿고 영웅호걸<font color="#0054FF" size="2">【雄은 용맹하다는 명성이고, 豪는 방종함이다. 또 짐승 중에 무리를 거느리는 것을 雄이라 하고, 지혜가 백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豪라 한다.】</font>로 자처하자, 조정에서 의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나이 23세에 비로소 太子洗馬太子洗馬에 제수되고 뒤에 나가 義興太守義興太守에 보임되니, 답답하여 뜻을 얻지 못해서<font color="#0054FF" size="2">【桓玄이 太子洗馬였을 때에 琅琊王 司馬道子가 마침 술에 취하여 술김에 눈을 부릅뜨고 객에게 이르기를 “桓溫이 말년에 모반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桓玄이 땅에 엎드려 진땀을 흘리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桓玄이 이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司馬道子에 대해 이를 갈며 원망하였다.】</font> 탄식하기를 “아버지는 九州九州의 伯伯이 되었는데, 자식은 五湖<font color="#0054FF" size="2">【滆湖‧洮湖‧射湖‧貴湖‧太湖를 五湖라 한다. 五湖의 작은 支流가 모두 太湖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太湖가 五湖의 명칭을 겸하여 얻은 것이다.】</font>의 長이 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南郡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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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十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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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月이라 始에 太尉裕 欲留長安하야 經略<font color="#0054FF" size="2">【疆理也라】</font>西北이러니 而諸將士 皆久役思歸라 會에 [[劉穆]]之卒이어늘 [[裕]]以根本無託이라하야 遂決意東還할새 乃以次子[[桂陽公]][[義眞]]으로 爲都督雍, 梁, 秦三州諸軍事하니 [[義眞]]時年十二라 以[[王鎭惡]]으로 爲司馬司馬하다 [[鎭惡]]功多라 由是로 南人이 皆忌之러라 [[沈田子]]自以嶢柳之捷<font color="#0054FF" size="2">【是年七月에 擊秦兵하야 斬萬餘級하야 泓奔還霸上하니 威振三輔하니라】</font>이라하야 與[[鎭惡]]爭功不平이러니 [[]]將還할새 [[田子]]及[[傅弘之]] 屢言於[[裕]]曰 [[鎭惡]]이 家在關中하니 不可保信이니이다 [[裕]]曰 今留卿文武將士精兵萬人하노니 彼若欲爲不善이면 正足自滅爾니 勿復多言하라 [[裕]]私謂[[田子]]曰 [[鍾會]]不得遂其亂者는 以有[[衛瓘]]<font color="#0054FF" size="2">【鍾會, 衛瓘은 曹魏人이라】</font>故也라 語曰 猛獸不如群狐라하니 卿等十餘人이 何懼[[王鎭惡]]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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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十八年이라 〈秦太初八이요 燕建興八이요 後秦建初八이요 魏登國八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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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月에 [[後秦主]][[]]이 卒하고 [[太子興]]이 卽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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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다. 처음에 太尉太尉[[劉裕]]가 長安에 머물면서 서북 지역을 경략<font color="#0054FF" size="2">【經略은 경계를 구획하고 다스리는 것이다.】</font>하려 하였는데, 여러 장수와 장병들이 모두 오랫동안 부역하였으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 [[劉穆之]]가 죽자, [[劉裕]]는 근본(후방)을 의탁할 곳이 없다 하여 마침내 결심하고 동쪽으로 돌아갈 적에 次子인 [[桂陽公]][[劉義眞]]을 都督雍‧梁‧秦三州諸軍事로 삼으니, [[劉義眞]]의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王鎭惡]]을 [[司馬]]로 삼았다. 〈長安을 수복할 때〉 [[王鎭惡]]이 공이 많으니, 이로 말미암아 남쪽(東晉)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시기하였다. [[沈田子]]가 스스로 嶢柳의 승리<font color="#0054FF" size="2">【이해 7월에 東晉의 군대가 秦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만여 명의 首級을 베어서 姚泓이 달아나 霸上으로 돌아가니, 위세가 三輔 지방에 진동하였다.】</font>에 공로가 있다 하여 [[王鎭惡]]과 공을 다투어 불평하였다. [[劉裕]]가 장차 돌아가려 할 적에 [[沈田子]]와 [[傅弘之]]가 여러 번 [[劉裕]]에게 말하기를 “[[王鎭惡]]은 집안이 關中에 있으니, 보장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劉裕]]가 말하기를 “지금 卿과 文武 관원과 정예병 만여 명을 남겨 두었으니, 저가 만일 나쁜 짓을 하고자 한다면 바로 자멸할 뿐이다. 다시 여러 말 하지 말라.” 하였다. [[劉裕]]가 은밀히 [[沈田子]]에게 이르기를 “[[鍾會]]가 난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衛瓘]]<font color="#0054FF" size="2">【[頭註]鍾會不得遂其亂者 以有衛瓘:鍾會와 衛瓘은 曹操의 魏나라 사람이다.】</font>있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맹수 한 마리가 여러 여우만 못하다.’ 하였으니, 卿들 십여 명이 어찌 [[王鎭惡]]을 두려워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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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18년(계사 393) - 秦나라 太初 8년이고, 燕나라 建興 8년이고, 後秦建初 8년이고, 魏나라 登國 8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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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後秦主]][[姚萇]]이 죽고, 太子太子[[姚興]]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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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十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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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十九年이라 〈[[秦主]][[苻崇]]延初元이요 燕建興九요 [[後秦主]][[姚興]]皇初元이요 魏登國九年이라 ○ 是歲에 秦及西燕亡하니 大三, 小二니 凡五僭國이라〉
[[溫公]]曰 古人有言호되 疑則勿任하고 任則勿疑라하니 [[]]旣委[[鎭惡]]以關中이어늘 而復與[[田子]]有後言은 是鬪之하야 使爲亂也라 惜乎라 百年之寇와 千里之土를 得之艱難하고 失之造次<font color="#0054FF" size="2">【急遽也라】</font>하야 使豐, 鄗(鎬)之都로 復輸寇手로다 [[荀子]]曰 兼幷은 易能也요 堅凝之難이라하니 信哉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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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19년(갑오 394) - [[秦主]][[苻崇]]의 延初 元年이고, 燕나라 建興 9년이고, [[後秦主]][[姚興]]의 皇初 元年이고, 魏나라 登國 9년이다. ○ 이해에 秦나라와 西燕이 멸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溫公]]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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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말에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으니, [[劉裕]]가 이미 [[王鎭惡]]에게 關中을 맡기고는 다시 [[沈田子]]와 뒷말을 한 것은 이들을 싸우게 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애석하다. 백년을 끌어온 적과 천리의 땅을 어렵게 얻고 순식간에<font color="#0054FF" size="2">【造次는 몹시 급작스러운 모양이다.】</font> 잃어서, 豐과 鄗의 옛 도읍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바치게 되었다. [[荀子]]가 말하기를 ‘겸병하기는 쉽고 단단히 지키기는 어렵다.’ 하였으니,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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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秦父老 聞[[]]將還하고 詣門流涕訴曰 殘民이 不霑王化가 於今百年이러니 始覩衣冠하니 人人相賀라 長安十陵은 是公家墳墓요 咸陽宮殿은 是公家室宅이니 捨此欲何之乎<font color="#0054FF" size="2">【十陵은 漢高帝長陵, 惠帝安陵, 文帝霸陵, 景帝陽陵, 武帝茂陵, 昭帝平陵, 宣帝杜陵, 元帝渭陵, 成帝延陵, 哀帝義陵, 平帝康陵이니 皆在關中이라 凡十一陵이어늘 言十者는 擧大數也라 長安宮殿이 皆漢故跡이요 〈裕는〉 劉氏子孫이라 故父老以此爲言而留之하니라】</font>잇가 [[]]爲之愍然<font color="#0054FF" size="2">【愍은 悲也, 憐也라】</font>하야 慰諭之曰 受命朝廷하니 不得擅留라 誠多諸君懷本之志하야 今以次息<font color="#0054FF" size="2">【義眞也니 長曰義符요 次曰義眞이요 次曰義隆이라】</font>與文武賢才로 共鎭此境하니 勉與之居하라하다 十二月에 [[]]發長安하야 自洛入河할새 開汴渠以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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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主]][[登]]이 聞[[後秦主]][[萇]]卒하고 盡衆而東<font color="#0054FF" size="2">【秦主登이 聞後秦主萇死하고 喜曰 姚興少兒는 吾折杖笞之耳라하고 乃留安成王廣守雍하고 太子崇守胡空堡하고 盡衆而東하다】</font>이어늘 [[後秦主]][[興]]이 自安定으로 如涇陽하야 與[[登]]으로 戰于山南하야 執[[登]]殺之하니 [[秦太子]][[]]이 奔湟中하야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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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秦의 父老들이 [[劉裕]]가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劉裕]]의 집 문 앞에 와서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기를 “遺民들이 조정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가 지금껏 백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中原의 衣冠을 보고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하하였습니다. 長安의 열 개 陵은 公의 집안의 墳墓이고 咸陽의 宮殿은 公의 집안의 住宅이니,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font color="#0054FF" size="2">【[附註]長安十陵……捨此欲何之乎:十陵은 漢나라 高帝의 長陵, 惠帝의 安陵, 文帝의 霸陵, 景帝의 陽陵, 武帝의 茂陵, 昭帝의 平陵, 宣帝의 杜陵, 元帝의 渭陵, 成帝의 延陵, 哀帝의 義陵, 平帝의 康陵이니 모두 關中에 있다. 모두 11陵인데 10이라고 말한 것은 큰 수를 든 것이다. 長安의 宮殿이 모두 漢나라의 故跡이었고 劉裕는 劉氏의 자손이었다. 그러므로 父老들이 이것을 말하여 머물게 한 것이다.】</font> 하였다. [[劉裕]]가 민망히 여겨<font color="#0054FF" size="2">【愍은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font> 그들을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내 조정에서 명령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머물 수가 없다. 진실로 諸君들이 근본(조상의 뿌리)을 그리워하는 뜻을 고맙게 여겨서 이제 둘째 자식<font color="#0054FF" size="2">【둘째 자식은 劉義眞이니, 첫째는 劉義符이고, 그 다음은 劉義眞이고, 그 다음은 劉義隆이다.】</font>과 어질고 재주 있는 문무 관원을 보내어 함께 이 지역을 鎭守鎭守하게 하였으니, 이들과 잘 지내기를 힘쓰라.” 하였다. 12월에 [[劉裕]]가 長安을 출발하여 洛水로부터 黃河로 들어올 적에 汴渠를 개통한 뒤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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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主]][[苻登]]이 [[後秦主]][[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오자,<font color="#0054FF" size="2">【秦主 苻登이 後秦主 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姚興과 같은 어린 아이는 내가 나뭇가지를 꺾어 매질할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安成王 苻廣을 남겨 두어 雍城을 지키게 하고 太子 苻崇은 胡空堡를 지키게 하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갔다.】</font>[[後秦主]][[姚興]]이 [[安定]]으로부터 涇陽에 가서 [[苻登]]山南에서 싸워서 [[苻登]]을 잡아 죽이니, 秦나라 太子太子[[苻崇]]이 湟中으로 달아나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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閏月에 [[夏王]][[勃勃]]이 聞太尉太尉[[]]東還하고 大喜하야 問[[王買德]]曰 朕欲取關中하노니 卿이 試言其方略하라 [[買德]]曰 關中은 形勢之地어늘 而[[]]以幼子守之하고 狼狽而歸하니 正欲急成簒事爾라 不暇復以中原爲意하리니 此는 天以關中賜我니 不可失也니이다 [[勃勃]]이 乃使其子[[]]<font color="#0054FF" size="2">【璝는 瑰라】</font>로 帥騎二萬하야 向長安하고 [[勃勃]]은 自將大軍하고 爲後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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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에 [[崇]]이 爲[[梁王]][[乾歸]]<font color="#0054FF" size="2">【[[乞伏國仁]]之弟也니 [[國仁]]卒에 [[乾歸]]嗣하야 爲[[河南王]]이라 登爲後秦所敗하니 遣子[[]][[乾歸]]爲質하야 請救하니라】</font>所殺하니 [[乾歸]] 於是에 盡有隴西之地하고 自稱[[西秦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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閏月(윤12월)에 [[夏王]][[赫連勃勃]]이 太尉太尉[[劉裕]]가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王買德]]에게 묻기를 “朕이 關中 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니, 卿이 한번 그 방략을 말해 보라.” 하니, [[王買德]]이 말하기를 “關中關中 지방은 지형이 뛰어난 곳인데, [[劉裕]]가 어린 아들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갔으니, 바로 찬탈하는 일을 급히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다시는 中原에 뜻을 둘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는 하늘이 關中關中 지방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赫連勃勃]]이 아들인 赫連璝<font color="#0054FF" size="2">【璝는 瑰이다.】</font>로 하여금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長安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後繼(후원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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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苻崇]]이 [[梁王]] 乞伏乾歸<font color="#0054FF" size="2">【梁王 乞伏乾歸는 乞伏國仁의 아우이니, 乞伏國仁이 죽은 뒤에 乞伏乾歸가 왕위를 이어 河南王이 되었다. 苻登이 後秦에게 패배하니, 아들 苻崇을 乞伏乾歸에게 보내어 인질로 삼고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font>에게 살해당하니, [[乞伏乾歸]]이에 隴西 지역을 다 소유하고 [[西秦王]]이라 자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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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十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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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十四年이라 〈魏泰常三年이요 夏昌武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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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夏[[赫連璝]] 至渭하니 關中民降之者 屬路라 [[沈田子]]將兵拒之하다 [[田子]][[王鎭惡]]으로 素有相圖之志러니 俱出北地하야 以拒夏兵할새 [[田子]]請[[鎭惡]]至[[傅弘之]]營하야 計事라가 [[田子]]求屛人語하고 使其宗人<font color="#0054FF" size="2">【官名이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家宗人은 掌家禮라 此는 猶田單宗人이니 乃田子之族人이라】</font>[[沈敬仁]]斬之하다 [[弘之]]奔告[[劉義眞]]한대 [[義眞]]이 與[[王脩]]로 被甲登撗門<font color="#0054FF" size="2">【撗은 音光이니 長安城門名也라】</font>하야 以察其變이러니 脩執[[田子]]하야 數以專戮하야 斬之하다 [[弘之]]大破[[赫連璝]]하니 夏兵이 乃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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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主]][[]] 攻西燕하야 執[[西燕主]][[]]하야 斬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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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熙 14년(무오 418) - 魏나라 泰常 3년이고, 夏나라 昌武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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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主]][[慕容垂]]가 西燕을 공격해서[[西燕主]][[慕容永]]을 잡아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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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月에 夏나라 [[赫連璝]]가 渭水에 이르니, 關中의 백성들 중에 항복하는 자가 길에 이어졌다. [[沈田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沈田子]]는 [[王鎭惡]]과 평소에 서로 상대방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함께 북쪽 지방에 나가서 夏나라 군대를 막게 되자 [[王鎭惡]]에게 [[傅弘之]]의 진영에 이르러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가 〈[[王鎭惡]]이 이르자〉 사람을 물리치고 조용히 말할 것을 요구하고는 宗人<font color="#0054FF" size="2">【宗人은 官名이다. ≪周禮≫에 都宗人과 家宗人이 있으니, 家宗人은 家禮를 맡는다. 이것은 田單宗人과 같으니, 바로 沈田子의 族人이다.】</font>인 [[沈敬仁]]으로 하여금 [[王鎭惡]]의 목을 베게 하였다. [[傅弘之]]가 [[劉義眞]]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劉義眞]]이 [[王脩]]와 함께 갑옷을 입고 撗門<font color="#0054FF" size="2">【撗은 音이 광이니, 撗門은 長安의 城門 이름이다.】</font>에 올라서 사태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王脩]]가 [[沈田子]]를 잡아서 將領을 제멋대로 죽인 죄를 물어 목을 베었다. [[傅弘之]]가 [[赫連璝]]를 대파하니, 夏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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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二十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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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月에 [[宋公]][[]] 始受相國相國, 九錫之命<font color="#0054FF" size="2">【太尉裕 始受相國, 宋公, 九錫之命이라】</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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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二十年이라 〈燕建興十年이요 秦皇初二요 魏登國十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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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珪]] 叛燕하야 侵逼附塞諸部어늘 五月에 [[燕主]][[垂]] 遣[[太子寶]]와 [[遼西王]][[農]]과 [[趙王]][[麟]]<font color="#0054FF" size="2">【農, 麟은 皆寶之弟라】</font>하야 帥衆八萬하야 伐魏한대 [[珪]]縱兵擊之하니 燕兵死者 以萬數라 [[太子寶]]等이 皆單騎로 僅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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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에 [[宋公]][[劉裕]]가 비로소 相國相國과 九錫의 命을 받았다.<font color="#0054FF" size="2">【太尉 劉裕가 비로소 相國‧宋公‧九錫의 명을 받은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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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20년(을미 395) - 燕나라 建興 10년이고, 秦나라(後秦) 皇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10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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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拓跋珪]]가 燕나라를 배반하고서 변방에 가까운 여러 部를 침략하고 핍박하였다. 5월에 [[燕主]][[慕容垂]]가 太子太子[[慕容寶]], [[遼西王]][[慕容農]], [[趙王]] 慕容麟<font color="#0054FF" size="2">【慕容農과 慕容麟은 모두 慕容寶의 아우이다.】</font>을 보내어 군사 8만 명을 거느리고서 魏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拓跋珪]]가 군대를 풀어 공격하니 燕나라 병사 중에 죽은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太子太子[[慕容寶]] 등이 모두 單騎로 빠져나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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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二十一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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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十月에 [[夏王]][[勃勃]]이 進據咸陽<font color="#0054FF" size="2">【山南曰陽이요 水北曰陽이니 在渭水北, 九峻諸山之南이라 故로 名咸陽이라】</font>하니 長安樵采路絶이라 [[裕]]聞之하고 召[[義眞]]東歸하고 以[[朱齡石]]으로 代鎭長安하다 [[赫連璝]]帥衆三萬하고 追[[義眞]]하야 力戰連日에 晉兵大敗라 [[義眞]]이 僅得免歸하다
+
[丙申]二十一年이라 〈[[燕主]][[慕容寶]]永康元이요 秦皇初三이요 魏皇始元年이요 涼龍飛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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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에 [[燕主]][[垂]]卒<font color="#0054FF" size="2">【垂憤太子寶 敗於魏而還하야 引兵하고 出魏不意하야 襲平城破之하다 過燕軍大敗處할새 軍士慟哭하야 聲振山谷하니 垂慙憤嘔血死云云이라】</font>하고 [[太子寶]]卽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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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夏王]][[赫連勃勃]]이 전진하여 咸陽<font color="#0054FF" size="2">【山의 남쪽을 陽이라 하고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니, 咸陽(長安)은 渭水의 북쪽과 九峻山 등 諸山의 남쪽에 있으므로 咸陽이라고 이름한 것이다.】</font>을 점거하니, 長安의 나무 채취하는 길이 끊겼다. [[劉裕]]가 이 말을 듣고 [[劉義眞]]을 불러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朱齡石]]을 長安에 대신 진주하게 하였다. [[赫連璝]]가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 [[劉義眞]]을 추격하여 연일 힘써 싸우니, 晉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劉義眞]]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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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元 21년(병신 396) - [[燕主]][[慕容寶]]의 永康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3년이고, 魏나라 皇始 元年이고, 涼나라 龍飛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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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燕主]][[慕容垂]]가 죽고<font color="#0054FF" size="2">【燕主 慕容垂는 太子 慕容寶가 魏나라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것을 분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불시에 魏나라로 출병하여 平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한 곳(參合坡)을 지날 때에 군사들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산골짝에 진동하니, 慕容垂가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겨 피를 토하고 죽었다.】</font>太子太子[[慕容寶]]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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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月에 [[齡石]]<font color="#0054FF" size="2">【相國右司馬라】</font>이 奔潼關이라가 爲人執送長安하니 [[勃勃]]이 殺之하다 [[勃勃]]이 卽皇帝位于灞上하고 都統萬<font color="#0054FF" size="2">【勃勃이 築城於朔方郡北黑水之南하고 曰 朕方統一天下하야 君臨萬邦하니 新城宜名統萬이라하다】</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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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에 [[三河王]][[呂光]]이 卽天王位하야 國號를 大涼이라하고 以[[世子紹]]로 爲太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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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朱齡石<font color="#0054FF" size="2">【朱齡石은 相國 劉裕의 右司馬이다.】</font>이 潼關으로 도망했다가 사람에게 사로잡혀 長安으로 보내지니, [[赫連勃勃]]이 그를 죽였다. [[赫連勃勃]]이 灞上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統萬<font color="#0054FF" size="2">【赫連勃勃이 朔方郡 북쪽과 黑水 남쪽에 都城을 쌓고 말하기를 “朕이 비로소 天下를 통일하여 萬邦에 군림하였으니, 새로 쌓은 城은 마땅히 統萬이라 이름해야 한다.” 하였다.】</font>에 도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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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三河王]][[呂光]]이 天王天王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涼이라 하고, 世子世子[[呂紹]]를 太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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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公]][[裕]] 以讖<font color="#0054FF" size="2">【符命之書니 說文에 驗也라 凡讖, 緯는 皆言將來之驗이니 釋名曰 纖也니 其義纖微라】</font>云昌明<font color="#0054FF" size="2">【簡文帝子武帝曜之字라 [通鑑要解]晉書帝紀曰 初에 簡文帝見讖하니 云 晉祚盡於昌明이라 及孝武帝之在孕也하야 李太后夢神人謂之曰 汝生男하리니 以昌明爲名하라 及産에 東方始明하니 因以爲名이라 簡文이 後悟流涕하니라】</font>之後에 尙有二帝라하야 乃使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하야 與帝左右로 密謀弑帝하고 而立[[琅琊王]][[德文]]하니 戊寅에 [[德文]]이 卽皇帝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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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安帝]]弗辨寒燠하고 口不能言이어늘 [[道子]], [[元顯]]이 幷傾朝政하야 納賄窮奢가 不知紀極하니 主昏臣亂이 莫熾於斯라 [[桓玄]]乘釁하야 遂行簒奪이어늘 [[劉裕]]擧兵誅[[]]하고 再安宗社라 自時厥後로 伐南燕, 斬[[盧循]], 滅[[姚泓]]하야 晉之威令이 雖伸이나 而[[裕]]之權勢 駸駸乎非復前日[[劉下邳]]矣니 晉欲安이나 可得乎아
+
○ 魏群臣이 勸[[魏王]][[]]하야 稱尊號어늘 [[]]始建天子旌旗하고 出警入蹕<font color="#0054FF" size="2">【天子出則稱警하니 示戒肅也요 入則言蹕하니 所以止行人淸道也라 又示出入皆有蹕하니 互文耳라】</font>하며 改元皇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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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公]][[劉裕]]가 圖讖書<font color="#0054FF" size="2">【讖은 符命의 글이니, ≪說文解字≫에 “징험(예언)하는 것이다.” 하였다. 무릇 讖과 緯는 모두 장래의 일을 징험하는 것이니, ≪釋名≫에 이르기를 “讖은 섬세함이니 그 뜻이 纖微한 것이다.” 하였다.】</font>에 “昌明(司馬曜)<font color="#0054FF" size="2">【[頭註]昌明은 簡文帝의 아들인 武帝 司馬曜의 字이다. [通鑑要解]≪晉書≫ 〈孝武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簡文帝가 圖讖書를 보니, 도참서에 ‘晉나라의 국통이 昌明에서 다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孝武帝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에 李太后의 꿈에 神人이 이르기를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니, 昌明으로 이름을 삼으라.’ 하였다. 해산할 때에 東方이 비로소 밝아오니, 인하여 昌明이라고 이름하였다. 簡文帝가 뒤에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font>의 뒤에 아직도 두 황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여 마침내 中書侍郞中書侍郞[[王韶之]]를 시켜서 황제의 좌우 사람들과 함께 은밀히 모의하여 황제를 시해하고[[琅琊王]][[司馬德文]]을 세우니, 戊寅日(12월 17일)에 [[司馬德文]]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魏나라의 신하들이 [[魏王]][[拓跋珪]]에게 권하여 尊號를 칭하게 하자, [[拓跋珪]]가 처음으로 天子의 旌旗를 세우고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하며<font color="#0054FF" size="2">【天子가 나갈 때에는 警이라 칭하니 경계하고 엄숙함을 보이는 것이요, 들어올 때에는 蹕이라 칭하니 行人들을 막고 길을 치움을 보이는 것이다.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함은 또 天子가 나가고 들어올 때에 모두 벽제함을 보인 것이니, 出警入蹕은 互文이다.】</font>皇始라고 改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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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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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帝]]는 추위와 더위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司馬道子]]와 [[司馬元顯]]이 함께 朝廷의 정사를 위태롭게 하여 뇌물을 받고 극도로 사치하여 끝을 알지 못하였으니, 군주가 어리석고 신하가 어지러움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桓玄]]이 이 틈을 타서 찬탈하자, [[劉裕]]가 군대를 일으켜 [[桓玄]]을 주벌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 뒤로부터 南燕(慕容超)을 정벌하고 [[盧循]]을 목 베고 [[姚泓(後秦)]]을 멸망시켜 晉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비록 베풀어졌으나 [[劉裕]]의 권세가 점점 더해져 더 이상 전날의 下邳太守下邳太守인 [[劉裕]]가 아니었으니, 晉나라가 편안하고자 하나 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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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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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 名德文이요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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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 名[[德文]]이요 字[[德文]]이니 [[安帝]]母弟라 在位二年이요 壽三十七이니 傳于宋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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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月에 帝崩<font color="#0054FF" size="2">【帝醉하야 寢할새 貴人이 使婢以被蒙面而弑之하고 賂左右하야 曰因魘暴崩이라하다】</fon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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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皇帝]]는 이름이 [[德文]]이고 자가 [[德文]]이니, [[安帝]]의 同母弟이다. 재위가 2년이고 壽가 37세이니, 宋나라에 전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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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황제([[司馬曜]])가 승하하였다.<font color="#0054FF" size="2">【孝武帝가 술에 취하여 잘 적에 貴人이 계집종을 시켜 황제의 얼굴을 덮어씌워 질식시켜 시해하고는 左右를 뇌물로 매수하고 이르기를 “가위에 눌려 갑자기 崩하였다.”고 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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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元熙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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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元熙元年이라 〈魏泰常四年이요 夏眞興元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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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珪]] 潛自晉陽으로 開[[韓信]]故道<font color="#0054FF" size="2">【[[韓信]]擊趙故道라】</font>하고 自井陘으로 趨中山하니 自常山以東으로 守宰或走或降하야 諸郡縣이 皆附於魏호되 惟中山, 鄴, 信都三城이 爲燕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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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에 [[宋公]][[裕]] 進爵爲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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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武帝]]卽位에 而能委任[[謝安]], [[謝玄]]等이라 故로 新亭數語 足折桓溫之氣하고 淝水一戰에 大敗苻秦之師라 是以로 上下輯睦하야 晉室이 似有生意矣라 然이나 帝方溺於酒, 荒于色하야 奏凱方旋에 驕氣掬面하고 曾不閱時에 遽用讒言하야 疎退賢輔하야 遂使王綱不振하고 恩威不立이라 [[道子]]荒于朝政하고 [[國寶]]彙以小人하니 拜授之榮이 初非天旨요 鬻刑之貨 旁午權門하야 毒賦年滋하고 愁民歲廣이라 內殿嚴邃에 雜處浮屠하고 請修[[]]廟에 䟽入不報하고 晩年에 長星告變호되 猶不警悟하고 房幃烈禍 起自戲言하니 晉祚至此에 蓋已亡而未滅耳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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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曰 晉室旣衰에 中原雲擾하니 戎狄腥羶之氣 瀰漫河, 洛하고 薰蒸岱, 華하야 宮闕蕪沒하고 陵廟隳焚이라 [[元帝]]<font color="#0054FF" size="2">【琅琊王睿라】</font>以宗室疎屬으로 遯居江表하니 天下士民有思晉者 皆裹糧而歸之하야 國於荊揚之間하야 子孫相承하야 不絶如線이라 獨明帝<font color="#0054FF" size="2">【紹니 元帝長子라】</font>英武하야 克淸大憝<font color="#0054FF" size="2">【憝는 惡也니 謂王敦이라】</font>러니 不幸享國不永하고 自餘는 孱弱孤危하야 外陵內叛하야 寄命於虎狼之口하야 幾遇呑食者數矣라 然이나 卒能保其位號하야 宗廟血食이 百有餘年은 何哉오 有[[王導]], [[卞壼]], [[溫嶠]], [[陶侃]], [[謝安]], [[謝幼度]]<font color="#0054FF" size="2">【玄字라】</font>爲之臣也일새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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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曰 [[劉裕]]弑[[安帝]]而立[[恭帝]]러니 卒爲[[裕]]所簒하니 而昌明後二帝之讖이 應矣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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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胡氏曰 [[元帝]]는 忘國大讐하야 無恢復之志하고 惟[[明帝]]는 才略最優호되 又降年不永하고 餘皆碌碌하야 不足算也라 嘗怪[[王敦]], [[蘇峻]]構亂하고 [[桓溫]]廢立하야 屢起逆謀하고 [[桓玄]]已簒이라 然이나 猶綿歷百有餘年之久者는 尙賴[[王導]], [[祖逖]], [[溫嶠]], [[謝安]], [[謝玄]], [[王坦]]之諸賢이 忠義奮發하야 平內難하고 却强秦하야 以扶持之也일새라 然而卒莫能恢拓中原者는 蓋以[[導]]知寬簡植國하야 而不能從[[祖逖]]雍丘益兵之語하고 安知和靜鎭國하야 而不能從[[謝玄]]乘勝自往彭城之謀故也라 群賢旣沒에 而[[道子]], [[元顯]]之徒輔之하니 敗亡이 不亦宜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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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熙 元年(기미 419) - 魏나라 泰常 4년이고, 夏나라 眞興 元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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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宋公]][[劉裕]]가 작위가 승진되어 [[宋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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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王]][[拓跋珪]]가 몰래 晉陽으로부터 [[韓信]]의 옛길<font color="#0054FF" size="2">【옛길은 韓信이 趙나라를 공격했던 옛길이다.】</font>을 열고 井陘으로부터 中山으로 달려가니, 常山 이동 지방의 수령들이 혹은 달아나고 혹은 항복하여 모든 郡縣들이 魏나라에 붙었으나 오직 中山과 鄴城과 [[信都]] 세 성만이 燕나라를 위하여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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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年圖》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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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나라 황실이 이미 쇠약해지자 中原이 소란하니, 오랑캐의 비린내 나는 기운(야만스러운 풍속)이 黃河와 洛水 지역에 가득히 퍼지고 岱山과 華山까지 올라가서 궁궐이 황폐해지고 능묘가 무너지고 불탔다. 元帝<font color="#0054FF" size="2">【元帝는 琅琊王 司馬睿이다.】</font>가 종실의 먼 친족으로 도망하여 江東 지방에 거주하니, 晉나라를 그리워하는 천하의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양식을 싸가지고 그에게 귀부하여荊州와 揚州의 사이에 나라를 세워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오직 明帝<font color="#0054FF" size="2">【明帝는 司馬紹이니, 元帝의 장남이다.】</font>만이 英明하고 武勇이 있어서 악의 원흉인 王敦<font color="#0054FF" size="2">【憝는 악이니, 大憝는 王敦을 이른다.】</font>을 깨끗이 제거하였으나 불행히도 국가를 소유한 햇수가 길지 못하였고, 그 밖에는 잔약하고 외롭고 위태로워서 밖에서는 능멸하고 안에서는 배반하여 호랑이의 입에 목숨을 맡겨서 거의 먹힐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지위와 명호를 보전하여 宗廟에 血食을 올린 것이 백여 년이나 이어진 것은 어째서인가? 王導‧卞壼‧溫嶠‧陶侃‧謝安‧謝幼度(謝玄)<font color="#0054FF" size="2">【幼度는 謝玄의 字이다.】</font>가 신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와 [[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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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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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裕]]가 [[安帝]]를 시해하고[[恭帝]]를 세웠는데, 끝내 [[劉裕]]에게 찬탈당하였으니, [[昌明]]의 뒤에 두 황제가 있다는 讖言이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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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略 史評][[胡氏]]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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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帝]]는 즉위하자 [[謝安]]과 [[謝玄]] 등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新亭의 몇 마디 말로 [[桓溫]]의 기운을 충분히 꺾었고, 淝水의 전투에서 苻秦의 군대를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때문에 上下가 화목하여 晉나라 황실이 생기가 도는 듯 하였다. 그러나 [[武帝]]가 한창 술에 빠지고 여색에 빠져 凱旋歌를 부르며 돌아온 뒤에 교만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으며, 채 한 철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참소하는 말을 따라 어진 보필을 멀리 물리쳐서 제왕의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고 은혜와 위엄이 바로 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司馬道子]]가 조정의 정사를 게을리 하고 [[王國寶]]가 소인들을 모으니, 관직을 제수하는 영화가 애당초 天子의 뜻이 아니었고 형벌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받은 財貨가 權門勢家에 몰려들어서 가혹한 세금이 해마다 늘어나고 근심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많아졌다. 그윽하고 깊숙한 內殿에 승려들이 뒤섞여 거처하였고 [[孔子]]의 사당을 수리하자고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晩年에 長星이 변고를 알렸음에도 경계하여 깨닫지 못하였고 房幃의 독한 화가 희롱하는 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晉나라의 國運은 여기에 이르러 이미 망하였으나 아직 사라지지만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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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ara" style="text-indent:0px;">
 
“[[元帝]]는 국가의 큰 원수를 잊어 中原을 회복할 뜻이 없었고, [[明帝]]는 재주와 지략이 가장 넉넉하였으나 또 하늘이 내려 준 수명이 길지 못하였으며, 그 밖에는 모두 碌碌하여 따질 것이 못 된다. 내 일찍이 [[王敦]]과 [[蘇峻]]이 난리를 일으키고 [[桓溫]]이 자기 마음대로 군주를 폐위하고 세워서 여러 번 역모를 일으켰으며 [[桓玄]]이 이미 찬탈하였는데도 오히려 晉나라의 國統이 백여 년 동안이나 면면히 이어진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니, 이는 [[王導]]‧[[祖逖]]‧[[溫嶠]]‧[[謝安]]‧[[謝玄]]‧[[王坦之]] 등 여러 賢人들이 忠義心을 분발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강한 秦나라를 물리쳐서 晉나라를 부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中原을 회복하지 못한 것은 [[王導]]는 너그러움과 간략함으로 나라를 세울 줄만 알아서 雍丘에 병력을 더 증원해 달라는 [[祖逖]]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고, [[謝安]]은 온화함과 고요함으로 나라를 鎭定할 줄만 알아서 승세를 타고 직접 彭城으로 가겠다는 [[謝玄]]의 계책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현자들이 죽자 [[司馬道子]]와 [[司馬元顯]]의 무리가 보필하였으니, 패망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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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東西二晉은 合一百五十六年이니 凡一十五帝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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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東晉과 西晉은 합하여 156년이니, 모두 15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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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5일 (목) 22:49 판

晉紀

烈宗孝武皇帝

烈宗孝武皇帝 名曜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烈宗孝武皇帝요 字昌明이니 簡文帝第三子라 在位二十四年이요 壽三十五라

烈宗孝武皇帝는 이름이 司馬曜이고 자가 昌明이니, 簡文帝의 셋째 아들이다. 재위가 24년이요, 壽가 35세이다.

[癸酉]寧康元年

[癸酉]寧康元年이라 〈秦建元九年이라〉

二月에 大司馬大司馬이 來朝어늘 詔吏部尙書謝安과 侍中王坦之하야 迎于新亭하다 是時에 都下人情이 恟恟【恟은 音胸이니 懼也라】하야 或云欲誅王, 謝하고 因移晉室이라하니 坦之는 甚懼호되 安은 神色不變하고 曰 晉祚存亡이 決於此行이라하니라 이 旣至에 百官이 拜於道側이어늘 이 大陳兵衛하고 延見朝士하니 有位望者 皆戰慴【慴은 與懾同하니 懼也라】失色이라 坦之는 流汗沾衣하고 倒執手版【手版은 笏也라】호되 安은 從容就席하야 笑語移日이러라 郗超常爲溫謀主라 安이 與坦之見溫할새 이 使超臥帳中【安謂溫曰 安聞諸侯有道면 守在四隣이라하니 明公은 何須壁後置人耶아하니 溫笑曰 不能不爾라하고 命撤之하니라】하야 聽其言이러니 風動帳開어늘 安笑曰 郗生은 可謂入幕之賓矣로다 時에 天子幼弱하고 外有彊臣호되 安與坦之 盡忠輔衛하야 卒安晉室하니라

寧康 元年(계유 373) - 秦나라 建元 9년이다. -

2월에 大司馬大司馬桓溫이 조회 오자, 황제가 吏部尙書吏部尙書謝安과 侍中侍中王坦之에게 명하여 新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都城의 민심이 흉흉【恟은 音이 흉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해서 혹자가 말하기를 “桓溫王坦之謝安을 죽이고 인하여 晉나라 황실을 차지하고자 한다.”고 하니, 王坦之는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謝安은 안색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晉나라 운명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桓溫이 이르자 백관들이 길가에서 절하였는데, 桓溫이 호위하는 병사들을 대단히 많이 진열하고 조정의 관원들을 만나니, 지위와 명망 있는 자들이 모두들 두려워 벌벌 떨며【慴은 懾과 같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색이 되었다. 이에 王坦之는 땀이 흘러 옷을 적셨으며 手版(笏)을 거꾸로 쥐었는데,【手版은 笏이다.】謝安은 조용히 자리에 나아가서 桓溫과 한참 동안 웃으며 말하였다.

郗超가 항상 桓溫의 主要 參謀 노릇을 하였다. 謝安王坦之와 함께 桓溫을 만날 때에 桓溫郗超를 시켜 장막 안에 누워서【謝安이 桓溫에게 이르기를 “제가 들으니 ‘諸侯에게 道가 있으면 지키는 것이 사방의 이웃 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明公은 어찌 굳이 벽 뒤에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桓溫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고, 벽 뒤의 郗超를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말을 엿듣게 하였는데, 바람에 날려 장막이 걷히는 바람에 탄로가 나자 謝安이 웃으며 말하기를 “郗生이야말로 入幕賓이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이때 天子는 幼弱하고 밖에는 강대한 신하가 있었으나 謝安王坦之와 함께 충성을 다해 보필하고 호위해서 끝내 晉나라 황실을 편안하게 하였다.

○ 三月에 이 有疾하야 還姑孰하다 이 以世子熙才弱이라하야 使弟沖으로 領其衆하고 俄頃에 薨하다 沖이 稱溫遺命하고 以少子玄爲嗣하니 時에 方五歲라 襲封南郡公하다 이 旣代溫居任하야 盡忠王室이라 或이 勸沖誅除時望하고 專執時權이로되 이 不從하다

○ 3월에 桓溫이 병이 나서姑孰으로 돌아갔다. 桓溫이 세자세자桓熙가 재주가 부족하다 해서 자신의 아우인 桓沖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얼마 후에 桓溫이 죽었다. 桓沖桓溫의 遺命이라 칭하고 桓溫의 어린 아들인 桓玄을 후계자로 삼으니, 이때 桓玄의 나이가 5세였는데 南郡公의 봉작을 계승하였다. 桓沖이 이미 桓溫을 대신하여 임무를 맡게 되자,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다. 혹자가 桓沖에게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혼자서 당시의 大權을 장악하라고 권하였으나 桓沖이 따르지 않았다.

○ 秦兵이 入寇梁, 益하고 遂取成都하다

○ 秦나라 군대가 梁州와 益州로 쳐들어와 침략하고 마침내 成都를 점령하였다.

[甲戌]二年

[甲戌]二年이라 〈秦建元十年이라〉

二月에 詔謝安하야 摠中書하다 安이 好聲律하야 朞功之慘【謂有周朞, 大功, 小功之服이라】에 不廢絲竹하니 士大夫效之하야 遂以成俗이라 王坦之 屢以書苦諫之曰 天下之寶【禮法爲天下之寶라】를 當爲天下惜之라호되 安이 不能從이러라

寧康 2년(갑술 374) - 秦나라 建元 10년이다 -

2월에 謝安에게 명하여 中書省中書省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謝安이 聲律를 좋아하여 朞年服과 大功‧小功의 喪【朞功之慘은 朞年과 大功 9월, 小功 5월의 服이 있음을 이른다.】에도 관현악을 폐하지 않으니, 士大夫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마침내 풍속을 이루었다. 王坦之가 자주 편지로 간절히 간하기를 “〈禮法은 천하의 보물이니〉 천하의 보물【禮法이 천하의 보물이다.】을 마땅히 천하를 위해 아껴야 한다.” 하였으나 謝安이 따르지 못하였다.

[乙亥]三年

[乙亥]三年이라 〈秦建元十一年이라〉

六月에 秦淸河武侯王猛이 寢疾【寢은 浸也, 臥也라】하야 上疏曰 伏惟陛下는 威烈震乎八荒하고 聲敎【風聲敎化也니 振聲於此而遠者聞焉故로 謂之聲이요 軌範于此而遠者效焉故로 謂之敎라】光乎六合하야 九州百郡에 十居其七이라 平燕定蜀【平燕은 在庚午年이요 定蜀은 在癸酉年이라】을 有如拾芥【草芥之橫在地上者를 俯而拾之니 言易而必得也라】하니이다 夫善作者 不必善成하고 善始者 不必善終이라 是以로 古先哲王이 知功業之不易하고 戰戰兢兢【戰戰은 恐懼貌요 兢兢은 音京이니 戒愼貌라】하야 如臨深谷하니 伏惟陛下 追蹤前聖하시면 天下幸甚이리이다 이 覽之悲慟이러라

寧康 3년(을해 375) - 秦나라 建元 11년이다 -

6월에 秦나라 淸河武侯王猛이 병이 중해지자,【寢은 점점 더해지는 것이요, 눕는 것이다.】상소하기를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엄과 공렬이 八方의 먼 곳에까지 떨쳐지고 聲威와 敎化【聲敎는 風聲과 敎化이니, 여기에서 소리를 울리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들으므로 이를 일러 聲이라 하고, 여기에서 본보기가 되면 먼 곳에 있는 자가 본받으므로 이를 일러 敎라 한다.】가 천지와 사방에 빛나서 九州九州의 백 개 郡 가운데 10분의 7을 차지하였으며, 燕나라를 평정하고 蜀 지방을 평정하기【燕나라를 평정한 것은 庚午年條(370)에 있고, 蜀 지방을 평정한 것은 癸酉年條(373)에 있다.】를 땅 위의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하셨습니다.【拾芥는 땅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지푸라기를 허리를 굽혀 줍는 것이니, 쉬워서 반드시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創業을 잘한 자가 반드시 守成을 잘하지는 못하고, 시작을 잘한 자가 반드시 끝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명철한 王들은 功業을 세움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깊은 골짝에 임하듯이 전전긍긍【戰戰은 두려워하는 모양이고 兢兢은 音이 경(긍)이니, 경계하고 삼가는 모양이다.】한 것이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예전의 聖明한 王을 뒤따르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이것을 보고 비통해하였다.

○ 七月에 이 親至猛第하야 視疾하고 訪以後事한대 曰 晉雖僻處江南이나 然正朔相承【正者는 歲之首也요 朔者는 說文에 月一日也라】하고 上下安和하니 臣沒之後에 願勿以晉爲圖하시고 鮮卑, 西羌【西羌은 謂姚萇也니 其後에 秦地果爲二族所據하니라】은 我之仇敵이라 終爲人患하리니 宜漸除之하소서 言終而卒하니 이 謂太子宏曰 天不欲使吾平壹六合耶아 何奪吾景略【王猛字라】之速也오하니라

○ 7월에 苻堅이 친히 王猛의 집에 이르러서 병을 살펴보고 차후의 일을 물었는데, 王猛이 답하기를 “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江南에 있으나 正朔(正統)이 서로 이어지고【正은 한 해의 처음이요, 朔은 ≪說文解字≫에 “매월 1일이다.” 하였다.】 상하가 편안하고 화목하니 바라건대 신이 죽은 뒤에 晉나라를 도모하지 마시고, 鮮卑와 西羌【西羌은 姚萇을 이르니, 그 뒤에 秦나라 지역이 과연 鮮卑族과 羌族 두 종족에게 점거당하였다.】은 우리의 원수이고 적이어서 끝내 우리의 폐해가 될 것이니 마땅히 점차 제거하소서.”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苻堅이 太子太子苻宏에게 이르기를 “하늘이 나로 하여금 六合(천하)을 통일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우리 景略(王猛)【景略은 王猛의 字이다.】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 하였다.

[丙子]太元元年

[丙子]太元元年이라 〈秦建元十二年이라 ○ 是歲에 涼, 代皆亡하니 僭國一이라〉

五月에 涼公張天錫【玄靚叔父也라 涼州弑其君祚하고 立玄靚爲涼王이러니 天錫이 弑其君玄靚而自立이라 玄靚은 曜靈弟也라】이 荒於酒色【荒은 無厭也라】하야 不親庶務하니 人情이 憤怨이라 秦王이 遣苟萇, 姚萇하야 將兵滅之하니 涼州郡縣이 悉降하다

太元 元年(병자 376) - 秦나라 建元 12년이다. ○ 이해에 涼과 代가 모두 망하니, 僭國이 하나이다.-

5월에 涼公 張天錫【張天錫은 張玄靚의 叔父이다. 涼州 사람이 군주 張祚를 시해하고 張玄靚을 세워 涼王으로 삼았는데, 張天錫이 그 군주 張玄靚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하였다. 張玄靚은 張曜靈의 아우이다.】이 酒色에 빠져【荒은 만족함이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분해 하고 원망하였다. 秦王苻堅苟萇姚萇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멸하게 하니, 涼州의 군현이 모두 항복하였다.

○ 十月에 秦王이 遣唐公洛【綱目作行唐公洛이니 行唐은 縣名이라】하야 將兵十萬하야 擊代한대 代王什翼犍이 奔陰山之北하니 部衆이 逃潰하야 國中이 大亂이라 其孫珪【珪는 拓跋珪니 是爲元魏의 道武라】尙幼러니 珪母賀氏【東部大人賀野干之女라】 以珪走依賀訥【野干子라】이어늘 이 分代民하야 爲二部하고 使劉庫仁【衛辰之族이니 什翼犍之甥也라】, 劉衛辰으로 統之하다

○ 10월에 秦王苻堅唐公 苻洛【‘唐公洛’은 ≪資治通鑑綱目≫에 ‘行唐公洛’으로 되어 있으니, 行唐은 縣 이름이다.】을 보내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代를 공격하게 하니, 代王拓跋什翼犍이 陰山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部衆이 도망하고 궤멸되어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의 손자 拓跋珪【珪는 拓跋珪이니, 이가 바로 元魏(北魏)의 道武帝이다.】는 아직 어렸는데, 拓跋珪의 어머니 賀氏【賀氏는 東部大人 賀野干의 딸이다.】拓跋珪를 데리고 도망하여 賀訥【賀訥은 賀野干의 아들이다.】에게 의지하였다. 苻堅이 代나라의 백성을 나누어 두 部로 만들고 劉庫仁【劉庫仁은 匈奴인 劉衛辰의 일족이니, 拓跋什翼犍의 조카이다.】劉衛辰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丁丑]二年

[丁丑]二年이라 〈秦建元十三年이라〉

是時에 朝廷이 方以秦寇爲憂하야 詔求文武良將可以鎭禦北方者어늘 謝安이 以兄子玄으로 應詔하니 郗超聞之【初에 中書郞郗超 自以其父愔位遇 應在謝安之右어늘 而優遊散地하야 常憤悒하야 形於辭色하야 由是로 與謝氏有隙이라 雖是有隙之間이나 以其明故로 如是而稱也라】하고 歎曰 安之明으로 乃能違衆擧親하니 玄之才 足以不負所擧라하더라

太元 2년(정축 377) - 秦나라 建元 13년이다. -

이때에 막 조정이 秦나라의 침략을 우려하여 황제가 詔命을 내려 북방을 진무하고 방어할 만한 文武 겸비한 훌륭한 장수를 구하게 하였다. 謝安이 형의 아들謝玄으로 詔命에 응하니, 郗超가 이 말을 듣고【처음에 中書郞 郗超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 郗愔의 지위와 대우가 마땅히 謝安의 위에 있어야 하는데도 부친이 閑散職에 정체되어 있다 하여 항상 분해 하고 원망하여 말과 안색에 드러나서 이로 인해 謝氏와 틈이 있었다. 비록 틈이 있는 사이였으나 謝安이 현명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칭찬한 것이다.】 감탄하기를 “謝安의 현명함으로 마침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어기고 친척을 등용하였으니, 謝玄의 재주가 자신을 천거한 謝安을 저버리지 않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己卯]太元四年

[己卯]太元四年이라 〈秦建元十五年이라〉

謝安이 爲宰相에 秦人이 屢入寇하니 邊兵失利하야 衆心危懼라 이 每鎭之以和靜하고 其爲政에 務擧大綱하고 不爲小察하니 時人이 比安於王導而謂其文雅【儒雅閒雅라】過之라하더라

太元 4年(기묘 379) - 秦나라 建元 15년이다. -

謝安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秦나라 사람들이 자주 쳐들어와서 침략하였는데, 변방의 병사들이 승리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謝安이 매번 화평함과 고요함으로 사람들을 진정시켰으며 정사를 할 적에 큰 綱領을 행하기를 힘쓰고 작은 일을 살피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謝安王導에게 견주되 그 文雅【우아하고 단아한 것이다.】王導보다 낫다고 하였다.

[壬午]七年

[壬午]七年이라 〈秦建元十八年이라〉

秦王이 會群臣于太極殿하고 議曰 自吾承業으로 垂三十載【垂는 幾也라】에 四方略定호되 唯東南一隅 未霑王化하니 今略計吾士卒컨대 可得九十七萬이라 吾欲自將以討之하노니 何如오 權翼【尙書左僕射라 昔에 紂爲無道나 三仁在朝일새 武王猶爲之旋師하니 今晉雖微弱云云也라】曰 晉雖微弱이나 未有大惡하고 謝安, 桓沖은 皆江表偉人으로 君臣輯睦하니 未可圖也니이다 石越曰 今福德이 在吳【漢天文志曰 歲星所在之國은 不可伐이요 可以伐人이니라 索隱曰 歲星所在엔 其國有福이라 故曰福德이라[頭註]石越曰 今者에 歲鎭守斗라하니 歲는 木星이요 鎭은 土星이요 斗는 南斗라 斗, 牛, 女는 吳, 越, 揚州分이라 [通鑑要解]石越은 時太子左衛率也라】하니 伐之면 必有天殃이요 且彼據長江之險하고 民爲之用하니 殆未可伐也니이다 曰 今以吾之衆으로 投鞭於江이라도 足斷其流어든 又何險之足恃乎아 且築室道旁이면 無時可成이니 吾當內斷於心爾로라 陽平公融曰 今伐晉이 有三難하니 天道不順이 一也요 晉國無釁이 二也요 我數戰兵疲하야 民有畏敵之心이 三也라 晉未可滅이 昭然甚明하니 今勞師大擧면 恐無萬全之功일까하노이다 且臣之所憂는 不止於此라 陛下寵育鮮卑, 羌, 羯【羯은 胡戎別號也라】하야 布滿畿甸【畿는 天子環內地方千里요 甸은 夏書의 五百里註에 曰甸之言은 治也라】하니 此屬은 皆我之深仇어늘 太子獨與弱卒數萬으로 留守京師하시니 臣은 懼有不虞之變【不虞는 猶不測也라】이 生於腹心肘腋【肘는 臂節也요 腋은 胳也니 在肘後라】이면 不可悔也니이다 王景略【景略은 猛字라】은 一時英傑이라 陛下常比之諸葛武侯하시니 獨不記其臨沒之言乎잇가 堅不聽이어늘 融又諫曰 國家는 本戎狄【苻氏는 氐也니 西南夷種이라】也라 正朔朝會不歸하고 江東은 雖微弱僅存이나 然中華正統이니 天意必不絶之리이다 堅曰 帝王曆數【帝王相繼之次第가 猶歲時氣節之先後라】 豈有常耶아 汝不達變通爾로다

太元 7년(임오 382) - 秦나라 建元 18년이다. -

秦王苻堅이 여러 신하들을 太極殿에 모이게 하고 의논하기를 “내가 基業을 받든 뒤로 거의 30년 만에【垂는 거의이다.】 사방이 대략 평정되었으나 오직 동남쪽 한 귀퉁이가 아직도 帝王의 敎化를 입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 士卒들을 대략 계산해 보건대 97만 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직접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權翼【權翼은 尙書左僕射이다. 權翼이 말하기를 “옛날에 紂가 無道하였으나 三仁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武王이 오히려 그 때문에 군대를 되돌려 돌아왔으니, 지금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라고 하였다.】은 아뢰기를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큰 죄악이 있지 않고, 謝安桓沖은 모두 江南 지방의 偉人으로 군주와 신하가 화목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고, 石越은 아뢰기를 “지금 福德星(歲星)이 吳지방에 있으니【[釋義]≪漢書≫ 〈天文志〉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나라는 정벌할 수 없고, 그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는 있다.” 하였다. ≪史記索隱≫에 이르기를 “歲星이 있는 곳은 그 나라에 福이 있으므로 福德星이라 한다.” 하였다.[頭註]石越이 말하기를 “지금 歲(木星)와 鎭(土星)이 斗를 지킨다.” 하였으니, 歲는 木星이고 鎭은 土星이고 斗는 南斗이다. 斗‧牛‧女는 吳‧越과 揚州의 分野이다. [通鑑要解]石越은 이때 太子左衛率이었다.】 그곳을 치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요, 또 저들은 長江의 험고한 지형을 점거하였고 백성들이 잘 쓰여지고 있으니, 아마도 정벌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로 볼 때 채찍만 강에 던져 넣어도 충분히 흐르는 강물을 차단시킬 수가 있는데, 또 어찌 험고함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길가에 집을 지으면 異說이 많아 완성될 날이 없을 것이니, 내 마음속에 결단하겠다.” 하였다.

陽平公苻融이 말하기를 “지금 晉나라를 정벌함에 세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天道가 따라주지 않음이 첫 번째요, 晉나라에 잘못이 없음이 두 번째요, 우리가 자주 싸워 군사들이 피로해서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晉나라를 멸할 수 없음이 昭然하여 매우 분명하니, 이제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크게 동원한다면 萬全의 공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우려하는 것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鮮卑族과 羌族, 羯族【羯은 胡戎의 別號이다.】을 총애하고 기르셔서 畿甸(都城)【畿는 天子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 안의 땅이 사방 千里인 것이요, 甸은 ≪書經≫ 〈夏書〉의 五百里 註에 “甸이란 말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하였다.】에 두루 가득합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데 太子가 홀로 약한 군졸 수만 명을 데리고 남아서 都城을 지킬 것이니, 신은 예상하지 못한 변란【不虞는 不測과 같다.】이 腹心(긴요한 곳)과 팔꿈치와 겨드랑이(매우 가까운 곳)【肘는 팔 관절이고, 腋은 겨드랑이이니 팔뚝의 뒤에 있다.】에서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까 두렵습니다. 王景略【景略은 王猛의 字이다.】은 한때의 영웅호걸입니다. 폐하께서 항상 그를 諸葛武侯에게 비견하곤 하셨으니, 어찌하여 그가 죽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하였으나 苻堅이 듣지 않았다.

苻融이 또 간언하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戎狄【苻氏는 氐族이니, 서남지방 오랑캐 종족이다.】이 건립한 나라로서 正朔과 朝會가 돌아오지 않았고, 江東은 비록 미약하여 겨우 보존되었으나 中華의 정통이니, 하늘의 뜻이 반드시 끊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帝王의 운수【曆數는 帝王이 서로 계승하는 차례가 歲時의 節氣의 先後와 같은 것이다.】가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너는 변통할 줄을 모른다.” 하였다.

[癸未]八年

[癸未]八年이라 〈秦建元十九年이라〉

七月에 秦王이 下詔하야 大擧【群臣이 皆不可라호되 獨冠軍將軍慕容垂勸故로 大擧也라】入寇하다

太元 8년(계미 383) - 秦나라 建元 19년이다. -

7월에 秦王苻堅이 詔命을 내려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冠軍將軍 慕容垂만이 권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크게 동원한 것이다.】 쳐들어왔다.

○ 八月에 이 遣陽平公하야 督後將軍督後將軍張蚝【有前將軍, 後將軍이라 蚝는 七志切이라】와 冠軍將軍冠軍將軍慕容垂等의 步騎二十五萬하야 爲前鋒하고 以兗州刺史兗州刺史姚萇으로 爲龍驤將軍龍驤將軍하다 慕容楷【楷는 音皆라】, 慕容紹 言於慕容垂曰 主上이 驕矜已甚하니 叔父建中興之業이 在此行也니이다 曰 然하다 非汝면 誰與成之리오 甲子에 이 發長安戎卒六十餘萬과 騎二十七萬하니 旗鼓相望하야 前後千里러라 詔以謝石, 謝玄으로 帥衆八萬하야 拒之할새 秦兵이 至潁口하니 兵旣盛하야 都下震恐이라 이 入問計於謝安한대 이 夷然【夷는 坦也, 平也니 言坦然無異平日也라】答曰 已別有旨라하고 旣而寂然이라 이 不敢復言하고 乃令張玄重請한대 遂命駕하야 出遊山墅【墅는 田廬也라】하니 親朋이 畢集이라 與으로 圍碁賭墅할새 安碁常劣於이러니 是日에 懼하야 便爲敵手而又不勝【敵手는 謂下子爭行劫하야 智算相敵也라 玄意不在碁故로 不能勝安이라】하다 이 遂遊陟【陟은 登也니 遊山登高也라】이라가 至夜乃還하다

○ 8월에 苻堅陽平公苻融을 보내어 後將軍後將軍 張蚝【前將軍과 後將軍이 있다. 蚝는 음이 七志切(치)이다.】와 冠軍將軍冠軍將軍慕容垂 등의 步兵 및 騎兵 25만 명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부대로 삼고, 兗州刺史兗州刺史姚萇을 龍驤將軍龍驤將軍으로 삼았다. 慕容楷【楷는 音이 개(해)이다.】慕容紹慕容垂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교만하고 자랑함이 너무 심하니, 叔父께서 中興의 基業을 세우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희들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중흥의 기업을 이루겠는가.” 하였다.

甲子日(8일)에 苻堅이 長安에서 병졸 60여만 명과 기병 27만 명을 동원하니,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이어져 앞뒤로 천 리에 뻗쳤다. 황제가 명하여 謝石謝玄에게 8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막게 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潁口에 이르니 군대의 기세가 이미 대단하여 都下가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謝玄이 들어가 謝安에게 계책을 묻자, 謝安은 태연히【夷는 평탄하고 평온함이니, 평탄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따로 지시한 것이 있다.” 하고는 이윽고 잠잠하였다. 謝玄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張玄으로 하여금 거듭 묻게 하자, 謝安이 마침내 멍에 하도록 명하여 산장【墅는 농막이다.】에 나가서 노니,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謝安謝玄과 바둑을 둘 적에 산장을 걸고 내기를 하였는데, 謝安의 바둑 실력이 항상 謝玄만 못하였으나 이날은 謝玄謝安을 두려워해서 곧 막상막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였다.【敵手는 바둑을 둘 때에 서로 뺏기고 빼앗아서 지략과 계산이 서로 대등함을 이른다. 謝玄의 뜻이 바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謝安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謝安이 마침내 산에 올라가 놀다가【陟은 올라감이니, 산에 놀러 가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桓沖【彛之子요 溫之弟也라 時爲都督諸江, 荊等州諸軍事, 儀同三司라】이 深以根本爲憂하야 遣精銳三千하야 入援京師어늘 謝安이 固却之曰 朝廷이 處分已定하고 兵甲無闕하니 西藩宜留以爲防이라한대 이 對佐吏歎曰 謝安石【安字也라】이 有廟堂之量이나 不閑將略【閑은 習也라】이라 今大敵垂至어늘 方遊談不暇하고 遣諸不經事少年하야 拒之하고 衆又寡弱하니 天下事를 已可知라 吾其左袵【袵은 衣衿也니 夷狄之俗은 左其衣袵이라】矣로다

○ 桓沖【桓沖은 桓彛의 아들이고 桓溫의 아우이다. 이 당시 都督江州荊州等諸軍事‧儀同三公이었다.】이 근본(都城)을 우려하여 정예병 3천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京師의 호위를 원조하게 하자, 謝安이 굳이 퇴각시키며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고 군대가 부족하지 않으니, 서쪽 변경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막아야 한다.” 하였다. 桓沖이 보좌하는 관리들에게 한탄하기를 “謝安石【安石은 謝安의 字이다.】은 재상의 器量이 있으나 장수의 韜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다.【閑은 익숙함이다.】 이제 큰 적이 쳐들어오는데 산에 올라가 놀고 벗들과 閑談을 하기에 겨를이 없으며,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연소한 사람을 보내어 적을 막게 하며, 병력이 또 적고 약하니, 천하의 일을 이미 알 만하다. 나는 아마도 오랑캐가 되어 左袵【袵은 옷깃이니, 夷狄의 풍속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을 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 十月에 秦陽平公等이 攻壽陽하야 癸酉에 克之하고 將軍梁成【秦將이라】等이 帥衆五萬하야 屯于洛澗하고 柵淮以遏東兵하니 謝石, 謝玄等이 去洛澗二十五里而軍하고 憚不敢進이라 融於壽陽에 遣尙書尙書朱序【序先爲梁州刺史러니 爲秦所執하니라】하야 來說謝石等하야 使降이러니 私謂等曰 若秦百萬之衆이 盡至면 誠難與爲敵이라 今乘諸軍未集하야 宜速擊之니 若敗其前鋒이면 則彼已奪氣하야 可遂破也리이다 이 從言하다

○ 10월에 秦나라 陽平公苻融 등이 壽陽을 공격하여 癸酉日(18일)에 함락시키고, 장군 梁成【梁成은 秦나라 장수이다.】 등이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洛澗에 주둔하고 淮水에 성책을 쌓아 동쪽 군대를 막으니, 謝石謝玄 등이 洛澗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는 梁成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苻融이 壽陽에서 尙書尙書 朱序【朱序는 이전에 梁州刺史로 있었는데, 秦나라에 사로잡혀 갔다.】를 보내어 晉나라 군영에 와서 謝石 등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는데, 朱序가 은밀히 謝石 등에게 이르기를 “만약 秦나라의 백만 대군이 모두 몰려오면 진실로 상대하여 싸우기 어렵다. 이제 여러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를 틈타서 공격해야 하니, 만약 그 선봉부대를 패퇴시키면 저들은 이미 기가 꺾여서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謝石朱序의 말을 따랐다.

○ 十一月에 謝玄이 遣劉牢之【廣陵相이라】하야 帥精兵五千하야 趣(趨)洛澗할새 未至十里에 梁成이 阻澗爲陳(陣)【阻는 恃也니 恃澗自固也라 陳은 讀曰陣이라】以待之어늘 牢之直前渡水하야 擊大破之하야 斬하고 又分兵斷其歸津하니 秦步騎崩潰하야 爭赴淮水하야 士卒死者 萬五千人이라 執秦揚州刺史揚州刺史王顯等하고 盡收其器械軍資하다 於是에 謝石等諸軍이 水陸繼進하다 秦王이 與陽平公으로 登壽陽城하야 望之할새 見晉兵部陳嚴整하고 又望見八公山草木하고 皆以爲晉兵【王氏曰 八公山은 在安豐壽春縣北四里라 乃苻堅伐晉할새 望山上草木하니 皆人形이 卽此라 [通鑑要解]八公은 在今壽春縣北四里하니라 世傳漢淮南王安이 好神仙이러니 忽有八公鬚眉皓素하여 詣門求見云云이라하니 煩不引이라】이라 顧謂曰 此亦勍敵【勍은 强也라】이니 何謂弱也오 憮然【失意貌라】始有懼色이러라 秦兵이 逼淝水而陳하니 晉兵이 不得渡라 謝玄이 遣使하야 謂陽平公曰 君이 懸軍深入하야 而置陳逼水하니 此乃持久之計요 非欲速戰者也로다 若移陳少却하야 使晉兵得渡하야 以決勝負면 不亦善乎아 秦諸將이 皆曰 我衆彼寡하니 不如遏之하야 使不得上하야 可以萬全이리이다 曰 但引兵少却하야 使之半渡하고 我以鐵騎로 蹙而殺之면 蔑不勝矣라한대 亦以爲然하야 遂麾兵使却하니 秦兵이 遂退하야 不可復止라 謝玄, 謝琰, 桓伊等이 引兵渡水擊之하니 이 馳騎略陳【略은 行也니 巡行曰略이라】하야 欲以帥退者라가 馬倒하야 爲晉兵所殺하니 秦兵이 遂潰라 等이 乘勝追擊하야 至于靑岡【在安豐軍하니 去壽春三十里라】하니 秦兵이 大敗하야 自相蹈藉【藉는 與踖同하니 踐也라】而死者 蔽野塞川하고 其走者는 聞風聲鶴唳하고 皆以爲晉兵且至라하야 晝夜不敢息하야 草行露宿하고 重以飢凍하야 死者什에 七八이러라 初에 秦兵小却이어늘 朱序在陳後하야 呼曰 秦兵이 敗矣라하니 衆遂大奔이라 因與張天錫【丙子年에 降秦이라】으로 皆來奔하다 은 中流矢【中은 傷也라 飛矢曰流矢라】하고 單騎走하다

李舜臣曰 蜀漢之中은 古未有興王之迹也어늘 而漢高祖起自南鄭하야 以取關中하고 樊鄧之間은 古未有中興之迹也어늘 而漢光武起自南陽하야 以定河北이라 而況江東之地는 首起西陵하고 尾接東海하니 其兵之犀銳【犀는 堅也니 古以犀兕皮爲鎧라 故로 謂堅曰犀라】는 足以破秦兵於鉅鹿【謂項羽라】하고 其財之富厚는 足以復唐祚於靈武【唐肅宗이니 見四十二卷丙申年이라】라 然이나 自吳以下로 國於江東者 凡六朝【吳, 東晉, 宋, 齊, 梁, 陳이라】周瑜有赤壁之勝하고 祖逖【晉元帝丁丑年에 流民張平樊雅가 各聚衆在譙하야 爲塢主러니 逖攻降之하니라】有譙城之勝하고 褚裒有彭城之勝하고 桓溫有灞上之勝하고 謝玄有淝水之勝하고 劉裕【在三十卷乙卯年이라】有關中之勝하고 到彦之【在三十一卷庚午年이라】有淮南之勝하고 蕭衍【齊明帝니 乙亥年에 與魏戰勝之라】有義陽之勝하고 陳慶之【見三十二卷己酉年이라】有洛陽之勝하고 吳明徹【見三十三卷癸巳年이라】有淮南之勝하니 此十者는 皆起江東之師하야 以取勝中原이니 其剋敵制勝之功이 亦奇矣라 然終不能渡江而北定中原하야 以一天下하니 此는 非江東之地 便於守而不便於攻이요 蓋江東之人이 知有江東而不知有天下也일새라 向使六朝君臣이 素有幷呑之志하야 先定規模於未勝之前하고 而進乘機會於旣勝之後런들 則千乘萬騎로 起自江東而入中原이면 蓋可以鞭撻四夷하고 坐制六合이니 誰謂江東之地 土綿力薄【綿은 弱也라】하야 而不足以擧天下也哉아 惟其平居暇日에 初未嘗有進取之心하야 而預爲必復中原之計라 是以로 一旦欲乘機會로되 而倉皇失措【倉皇은 一作倉黃하니 失措貌라 詩註에 忽遽貌라하니라】하야 竟不能成混一之功이라 且苻堅養兵於秦中이 幾三十年이라 一旦에 驅之南下하야 欲以幷呑吳會할새 顧謂大江之流하고 投鞭可斷이라하니 志則誇矣나 而兵始一交에 全師潰散하야 相與枕藉於淝水之中하야 晉之君臣이 嘗試睥睨【邪視也라】一世하니 此乾坤何等時耶아 挽吳江之水하야 以洗關河嵩洛之腥穢【謂五胡라 】가 其不在玆時耶아 奈何徘徊於兗豫之間하야 竟不能過關踰鄴하야 以圖混一하고 而乃今日運米於枋頭하야 以濟苻丕之飢【在下甲申年이라】하고 明日率軍於關陝하야 以爲苻堅之助오 夫淮淝百萬은 志欲何爲오 幸其天敗하야 粮盡力困하야 不奮兵以勦除之하고 乃擧國之大讐하야 付之相忘之域하니 豈不深可惜哉아

○ 11월에 謝玄이 劉牢之【劉牢之는 廣陵의 相이다.】를 보내어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洛澗으로 달려갈 적에 洛澗에서 10리 못 미친 곳에 이르러서 梁成이 澗水를 견고하다고 믿어 陣을 치고【阻는 믿는 것이니, 澗水를 믿어 스스로 견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陳은 陣으로 읽는다.】 대비하였다. 劉牢之가 곧장 전진하여 澗水를 건너가서 梁成을 공격하여대파하고梁成을 목 벤 다음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돌아가는 나루터를 차단하니, 秦나라의 보병과 기병이 궤멸되어 다투어 淮水에 뛰어들어 죽은 士卒이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 秦나라의 揚州刺史揚州刺史王顯 등을 사로잡고 그 병기와 군수물자를 전부 몰수하였다. 이에 謝石 등의 諸軍이 水陸으로 계속하여 전진하였다. 秦王苻堅陽平公苻融과 壽陽城에 올라가 이것을 바라보니 晉나라 군대의 陣列이 모두 엄정하였으며, 또 멀리서 八公山의 초목을 바라보고 모두 晉나라 병사라고 여겼다.【[釋義]望見八公山草木 皆以爲晉兵:[釋義]王氏가 말하였다. “八公山은 安豐軍 壽春縣 북쪽 4리에 있다.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할 때에 산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通鑑要解]八公山은 지금 壽春縣 북쪽 4里 되는 지점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漢나라 淮南王인 劉安이 神仙을 좋아하였는데, 홀연히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센 八公이 갑자기 문에 찾아와 만나 보기를 구하였으므로 八公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번거로우므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苻融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또한 강적【勍은 강함이다.】인데, 어찌 약하다고 이른단 말인가.” 하고, 낙심하여【憮然은 실의한 모양이다.】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秦나라 군대가 淝水에 바짝 붙여서 陣을 치니, 晉나라 군대가 건너갈 수가 없었다. 謝玄이 사자를 보내어 陽平公苻融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懸軍(원군 없이 고립된 군대)을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淝水에 바짝 붙여서 진을 치니, 이는 바로 지구전을 하려는 계책이고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영을 옮겨 조금 뒤로 물러나서 晉나라 군대가 물을 건너가게 하여 승부를 결단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秦나라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군대가 많고 저들은 군대가 적으니, 막아서 올라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萬全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苻堅이 말하기를 “다만 군대를 이끌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저들이 반쯤 건너왔을 때에 우리가 鐵騎兵을 몰고 들어가서 저들을 죽인다면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는데, 苻融苻融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여 다시는 후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謝玄, 謝琰, 桓伊 등이 군대를 이끌고 물을 건너와 공격하였다. 苻融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軍陣을 순행【略은 돌아다니는 것이니, 巡行하는 것을 略이라 한다.】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다가 말이 쓰러져서 晉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궤멸되었다. 謝玄 등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靑岡【靑岡은 安豐軍에 있으니, 壽春縣에서 30리 떨어져 있다.】에 이르니, 秦軍이 대패하여 자기들끼리 밟히고 깔려서【藉는 踖과 같으니, 밟는 것이다.】 죽은 시체가 들을 뒤덮고 냇물을 막았다. 도망하던 자들은 바람 소리와 학 울음소리를 듣고도 모두 晉나라 군대가 이르는 것이라고 여겨서 밤낮으로 도망하여 감히 쉬지 못하였다. 이들은 인적이 드문 풀숲 길로 걸어가며 露地에서 잠을 잔데다 기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秦나라 군대가 조금 퇴각했을 때에 朱序가 진영의 뒤에 있다가 고함치기를 “秦나라 군대가 패했다.” 하니, 秦나라 군사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다. 朱序가 인하여 張天錫【張天錫은 丙子年(376)에 秦나라에 항복하였다.】과 함께 모두 晉나라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苻堅은 빗나간 화살을 맞고【中은 상함이다. 빗나간 화살을 流矢라 한다.】 單騎로 도망하였다.

李舜臣李舜臣이 말하였다.

“蜀漢 지방은 옛날에 왕업을 일으킨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高祖가 南鄭에서 일어나 關中 지방을 취하였고, 樊城과 鄧城 사이는 옛날에 중흥한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漢나라 光武帝가 南陽에서 일어나 河北 지방을 평정하였다. 더구나 江東 지역은 머리는 西陵에서 시작되고 꼬리는 東海와 접하였으니, 병기의 단단함과 예리함【犀는 견고함이니, 옛날에 犀兕(무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견고한 것을 일러 犀라고 한다.】은 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秦나라 군대를 鉅鹿에서 격파하였다는 것은 項羽를 이른다.】할 수 있었고 재물의 풍족함은 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唐나라의 국운을 靈武에서 회복한 것은 唐나라 肅宗이니, 42권 丙申年條(756)에 보인다.】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吳나라 이후로 江東에 나라를 정한 것이 모두 여섯 왕조【六朝는 吳‧東晉‧宋‧齊‧梁‧陳이다.】였는데, 周瑜는 赤壁의 승리가 있었고, 祖逖【晉나라 元帝 丁丑年(317)에 流民인 張平과 樊雅가 각각 譙郡에서 무리를 모아 塢主가 되었는데, 祖逖이 공격하여 항복시켰다.】은 譙城의 승리가 있었고, 褚裒는 彭城의 승리가 있었고, 桓溫은 灞上의 승리가 있었고, 謝玄은 淝水의 승리가 있었고, 劉裕【劉裕는 해설이 30권 乙卯年條(415)에 보인다.】는 關中의 승리가 있었고, 到彦之【到彦之는 해설이 31권 庚午年條(430)에 보인다.】는 淮南의 승리가 있었고, 蕭衍【蕭衍은 齊(南齊)나라 明帝이니, 乙亥年(495)에 魏(北魏)와 싸워 승리하였다.】義陽의 승리가 있었고, 陳慶之【陳慶之는 해설이 32권 己酉年條(529)에 보인다.】는 洛陽의 승리가 있었고, 吳明徹【吳明徹은 해설이 33권 癸巳年條(573)에 보인다.】은 淮南의 승리가 있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江東의 군대를 일으켜 中原에서 승리를 취한 것이니, 적을 이기고 승리한 공이 또한 기이하다. 그러나 끝내 양자강을 건너가서 북쪽으로 中原을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江東 지역이 지키기에 편리하고 공격하기에 불편해서가 아니라, 江東 사람들은 江東이 있는 줄만 알고 천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六朝의 君臣들이 평소에 中原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서 승리하기 전에 規模를 미리 정하고 승리한 뒤에 나아가 기회를 탔더라면,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을 가지고 江東에서 일어나 中原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이렇게 했더라면 사방의 오랑캐들을 채찍질하고 가만히 앉아서 六合을 제어하였을 것이다. 누가 江東 지역이 영토가 좁고 힘이 부족해서【綿은 약함이다.】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다만 평소 한가로운 날에 처음부터 진취할 마음을 갖고 반드시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기회를 타려고 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倉皇은 혹 倉黃으로도 쓰니,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詩經≫ 註에 “몹시 급한 모양이다.” 하였다.】 끝내 천하통일의 공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또 苻堅은 秦나라에서 군대를 기른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하루아침에 이들을 몰아 南下하여 吳會 지방을 병탄하고자 할 때에 큰 강(揚子江)이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는 채찍만 던져 넣어도 강물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뜻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처음 한번 교전하자마자 全軍이 궤멸되어 흩어져서 淝水 가운데에 시신이 낭자하여 晉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한 세상을 얕보게【睥睨는 곁눈질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乾坤은 어떠한 때란 말인가. 吳江의 물을 끌어다가 函谷關 등의 관문과 黃河와 嵩山과 洛陽을 차지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들【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는 五胡를 이른다.】을 씻어 버리는 것이 어찌하여 이때에 있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兗州와 豫州 사이에서 배회하여 끝내 關中을 지나가고 鄴城을 넘어가서 통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마침내 오늘 枋頭에서 쌀을 운반하여 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하고【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한 것은 뒤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 다음날은 關陝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苻堅을 도왔단 말인가. 淮水와 淝水의 백만 군대는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하늘이 패망하게 하여 양식이 다하고 힘이 곤궁해진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군대를 떨쳐 섬멸하지 않고, 마침내 나라의 큰 원수를 들어서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곳에 내버려 두었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은가.

是時에 諸軍이 皆潰호되 惟慕容垂【己巳年에 奔秦하니 乃以爲冠軍將軍冠軍將軍이라】所將三萬人이 獨全이어늘 以千餘騎赴之하다 世子寶言於秦王이 兵敗하야 委身於我하니 是는 天借之以復燕祚니 此時를 不可失也니이다 曰 汝言이 是也라 然이나 彼以赤心으로 投命於我어늘 若之何害之리오 若【苻氏는 氐也라 運은 運祚也라】이 必窮이면 吾當懷集關東하야 以復先業耳리라 의 親黨이 多勸垂殺호되 垂皆不從하고 悉以兵授하다

이때 諸軍이 모두 궤멸되었으나 오직 慕容垂【慕容垂가 己巳年(369)에 秦나라로 달아나니, 秦나라에서 마침내 慕容垂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가 거느리던 3만 명만은 온전하였는데, 苻堅이 천여 騎를 데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世子世子慕容寶慕容垂에게 말하기를 “秦王苻堅이 전투에 패하여 우리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빌려 주어 燕나라의 국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慕容垂가 말하기를 “네 말이 옳으나 저가 진심으로 자신의 命運을 아낌없이 나에게 던졌는데, 어떻게 그를 해친단 말인가. 만약 우리 氐族의 운명【苻氏는 氐族이다. 運은 國運이다.】이 반드시 곤궁하다면 나는 關東 지방을 安集시켜서 先祖의 기업을 회복할 뿐이다.” 하였다. 慕容垂의 친당들이 많이 慕容垂에게 苻堅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이를 따르지 않고 병력을 다 苻堅에게 주었다.

謝安이 得驛書하야 知秦兵已敗하다 時에 方與客圍碁러니 攝書【攝은 收也라】置牀上하고 了無喜色하고 圍碁如故어늘 客問之한대 徐答曰 小兒輩 遂已破賊이라하더니 旣罷에 還內過戶限할새 不覺屐齒之折【喜甚也라 屐은 木屐이라】이러라

謝安이 역참에서 띄운 승전보를 받고서 秦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았다. 이때 막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공문서를 거두어【攝은 거두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전처럼 바둑을 두었다. 손님이 묻자, 謝安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아이들이 이미 적을 격파했습니다.” 하였는데, 바둑이 끝난 뒤 內室로 돌아가면서 문턱을 넘어갈 적에 흥분하여 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기뻐한 것이다. 屐은 나막신이다.】

秦王이 收集離散하야 比至洛陽하니 衆이 十餘萬이요 百官儀物軍容이 粗備러라

秦王苻堅이 흩어진 병력을 수합하여 洛陽에 이르니, 무리가 십여만이었고 百官百官과 儀仗으로 쓰는 器物과 군사 장비가 대강 갖추어졌다.

慕容垂言於曰 北鄙之民이 聞王師不利하고 輕相扇動하니 臣이 請奉詔書하야 以鎭慰安集之하고 因過謁陵廟하노이다 이 許之하다 權翼이 諫曰 國兵이 新破에 四方이 皆有離心하니 宜徵集名將하야 置之京師하야 以固根本이니이다 는 勇略過人하고 世豪東夏하니 顧以避禍而來언정 其心이 豈止欲作冠軍而已哉잇가 譬如養鷹하야 飢則附人이나 每聞風飆【飆는 畢遙切이니 疾風也라】之起하면 常有凌霄【霄는 雲霄也라】之志하니 正宜謹其絛籠【絛는 他刀切이라 絲繩也니 所以紲鷹이요 籠은 所以畜鳥也라】이니 豈可解縱하야 任其所欲哉잇가 曰 卿言이 是也라 然이나 朕已許之하니 匹夫도 猶不食言이어든 況萬乘乎아 天命이 有廢興하니 固非智力所能移也니라 曰 陛下重小信而輕社稷하시니 臣은 見其往而不返이니 關東之亂이 自此始矣리이다 이 不聽하다

慕容垂苻堅에게 말하기를 “북쪽 변방의 백성들이 王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경솔하게 서로 선동하니, 신이 청컨대 조서를 받들고 먼저 가서 그들을 鎭撫鎭撫하고 安集시키고, 인하여 지나는 길에 陵廟를 배알할까 합니다.” 하니, 苻堅이 이를 허락하였다.

權翼이 간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격파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방이 모두 조정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명장들을 불러 모아서 京師에 安置하여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慕容垂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대대로 東夏 지방에서 호걸이라고 일컬어졌으니, 다만 화를 피하기 위하여 秦나라에 왔을지언정 그의 心算이 어찌 冠軍將軍冠軍將軍이 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굶주릴 때에는 사람을 따르나 매번 회오리바람【飆는 畢遙切(표)이니, 빠른 바람이다.】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하늘 높이 날려는【霄는 하늘이다.】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끈과 새장【絛는 他刀切(도)이다. 실끈이니 매를 묶어 매는 것이요, 籠(새장)은 새를 기르는 것이다.】을 조심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니, 어찌 풀어놓아서 그가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이미 허락하였으니, 匹夫도 오히려 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萬乘의 천자에 있어서랴. 天命은 폐하고 흥함이 있으니, 진실로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權翼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작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社稷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은 그가 가는 것만 볼뿐 돌아오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關東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苻堅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 秦乞伏國仁【隴西鮮卑人이라】이 反於隴西하니 衆至十餘萬이러라

○ 秦나라 乞伏國仁【乞伏國仁은 隴西의 鮮卑族 사람이다.】이 隴西에서 배반하니, 무리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慕容垂至安陽하니 長樂公【苻堅之庶長子니 時鎭鄴이라】 館垂於鄴西어늘 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丁零翟斌【見上卷하니 仕秦爲中郞이라】이 起兵叛이어늘 秦王이 驛書하야 使垂將兵討之하다

慕容垂安陽에 이르니, 長樂公 苻丕【長樂公 苻丕는 苻堅의 庶長子이니, 이때 鄴城에 鎭駐하였다.】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자,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燕나라의 옛 基業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丁零族 翟斌【丁零 翟斌은 上卷에 보이니, 秦나라에 벼슬하여 中郞이 되었다.】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秦王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甲申]九年

[甲申]九年이라 〈秦建元二十年이라 ○ 燕世祖慕容垂元年이라 ○ 後秦太祖姚萇白雀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新大國二니 凡三僭國이라〉

正月에 慕容垂自稱燕王하고 遣田山如鄴하야 告慕容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고 以弟으로 爲車騎大將軍車騎大將軍하야 封范陽王하고 帥衆二十餘萬하야 長驅向鄴하다 慕容農이 起兵於列人【列人은 城名이라 垂至安陽하니 丕身自迎之하다 趙秋勸垂於座取丕하고 因據鄴起兵이로되 垂不從하다 丕謀襲擊垂러니 姜讓이 諫曰 垂叛形未著라한대 丕從之하고 館垂於鄴西하니 垂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會에 翟斌叛이어늘 秦王堅이 驛書로 使垂討翟斌한대 石越이 言於丕曰 垂有興復舊業之志어늘 今復資之以兵이면 此爲虎傅(附)翼이니 請除之하소서 丕曰 淮南之敗에 垂侍衛乘輿하니 此功을 不可忘也니라 越退曰 公父子好爲小仁하고 不顧大計하니 終當爲人擒耳니라 丕遣苻飛龍하야 帥氐騎一千하야 爲之副하야 密計謀垂하다 垂聞丕, 飛龍謀하고 怒曰 吾盡忠於苻氏어늘 而彼專欲圖吾父子하니 雖欲已나 得乎아하고 乃募兵八千하야 夜襲飛龍殺之하고 遣人告農等하야 使起兵相應하니 農等이 遂將數十騎하고 微服出鄴하야 奔列人하니라】하니 衆至數萬이라 長樂公 使石越로 將兵討之러니 이 大敗秦兵하고 斬越하니 於是에 人情騷動하고 盜賊群起러라 垂至鄴하니 이 引兵會之하야 進攻鄴이어늘 退守中城하다

太元 9년(갑신 384) - 秦나라 建元 20년이다. ○ 燕(後燕)世祖慕容垂의 元年이다. ○ 後秦太祖姚萇의 白雀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하나이고 새로운 大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셋이다.-

正月에 慕容垂燕王이라 자칭하고田山을 보내어 鄴城에 가서 慕容農 등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고, 아우 慕容德을 車騎大將軍車騎大將軍으로 삼아范陽王에 봉하고 20여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기세를 몰아 鄴城으로 향하게 하였다. 慕容農이 列人城에서 군대를 일으키니,【列人은 城의 이름이다. 慕容垂가 安陽에 이르니, 苻丕가 몸소 그를 맞이하였다. 趙秋가 慕容垂에게 그 자리에서 苻丕를 죽이고 인하여 鄴城을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으나 慕容垂가 따르지 않았다. 苻丕가 慕容垂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姜讓이 간하기를 “慕容垂가 배반하려는 형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자, 苻丕가 그 말을 따르고 慕容垂에게 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니,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의 옛 신하들과 함께 燕나라의 국통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翟斌이 배반하자, 秦王 苻堅이 파발을 띄워 慕容垂로 하여금 翟斌을 토벌하게 하였다. 石越이 苻丕에게 말하기를 “慕容垂가 옛 基業을 흥복하려는 뜻이 있는데, 이제 다시 군대를 빌려 준다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입니다. 제거하십시오.” 하니, 苻丕가 말하기를 “淮南의 패전에 慕容垂가 乘輿를 호위하였으니, 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石越이 물러 나와 말하기를 “公의 父子가 작은 仁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큰 계책은 생각하지 않으니, 끝내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苻丕가 苻飛龍을 보내어 氐族의 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慕容垂의 副將이 되게 하여 은밀히 慕容垂를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苻丕와 苻飛龍이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慕容垂가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苻氏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父子를 도모하고자 하니, 내 비록 그만두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8천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밤에 苻飛龍을 습격하여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慕容農 등에게 알려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게 하니, 慕容農 등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微服 차림으로 鄴城을 나와 列人城으로 달려 왔다.】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長樂公苻丕石越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慕容農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慕容農이 秦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石越의 목을 베니, 이에 인심이 동요하고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났다. 慕容垂가 鄴城에 이르자 慕容農이 군대를 이끌고 모여서 鄴城으로 진격하니, 苻丕가 후퇴하여中城을 지켰다.

○ 秦北地【郡名也라】長史慕容泓이 聞燕王垂攻鄴하고 亡奔關東하야 收集鮮卑하니 衆至數千이라 還屯華陰하다

○ 秦나라 北地【北地는 郡의 이름이다.】長史 慕容泓燕王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關東으로 도망하여 鮮卑族을 수합하니,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돌아와 華陰에 주둔하였다.

○ 平陽太守平陽太守慕容沖이 亦起兵於平陽하야 有衆二萬하다

○ 平陽太守平陽太守慕容沖이 또한 平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 秦將姚萇姚弋仲之子요 之弟라】이 起兵於北地하고 自稱後秦王하다

○ 秦나라 장수 姚萇【姚萇은 姚弋仲의 아들이고 姚襄의 아우이다.】이 北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後秦王이라 자칭하였다.

○ 秦竇衝이 擊慕容沖于河東하야 大破之하니 이 奔慕容泓하다 衆이 至十餘萬이라 進向長安이러니 六月에 의 謀臣高蓋하고 立爲皇太弟하야 承制行事하고 置百官하다

○ 秦나라 竇衝慕容沖을 河東에서 공격하여대파하니, 慕容沖慕容泓에게로 달아났다. 慕容泓의 병력이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전진하여 長安으로 향하였는데, 6월에 慕容泓의 謀臣인 高蓋慕容泓을 죽이고 慕容沖을 세워 皇太弟로 삼아서 制를 받들어 정사를 행하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 八月에 燕兵이 圍秦長樂公於鄴하니 鄴中이 芻粮俱盡하야 削松木飼馬라 燕王垂謂諸將曰 苻丕는 窮寇라 必無降理니 不如退屯新城하야 開丕西歸之路하야 以謝秦王疇昔之恩【疇는 發語辭라 己巳年에 垂奔秦하니 秦王堅이 郊迎하야 以爲冠軍將軍하니라】이라하고 乃解圍하고 趨新城하다

○ 8월에 燕나라 군대가 秦나라 長樂公苻丕를 鄴城에서 포위하니, 鄴城 안의 꼴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 소나무를 벗겨 말을 먹일 지경에 이르렀다. 燕王慕容垂가 諸將에게 이르기를 “苻丕는 곤궁한 적이다.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후퇴하여 新城에 주둔해서 苻丕가 서쪽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어 秦王의 옛 은혜【疇는 發語辭이다. 己巳年(369)에 慕容垂가 秦나라로 도망쳐 오니, 秦王 苻堅이 郊外에서 맞이하여 그를 冠軍將軍으로 삼았다.】에 사례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新城으로 달려갔다.

太保安【安은 謝安이라】이 奏請호되 乘苻氏傾敗하야 開拓【拓은 斥開也라】中原이라하야 以謝玄, , 石虔等으로 伐秦하니 河南城堡【堡는 廣韻에 堡障은 小城也라하니라】 皆來歸附라 謝玄이 遣晉陵太守晉陵太守滕恬之하야 渡河據黎陽하다

○ 太保太保 謝安【安은 謝安이다.】이 주청하기를 “苻氏가 형세가 기울어 패한 틈을 타서 中原을 개척【拓은 물리쳐서 개간하는 것이다.】해야 한다.”고 하여 謝玄謝桓石虔 등을 데리고 가서 秦나라를 치니, 河南의 城堡【堡는 ≪廣韻≫에 “堡障은 작은 城이다.” 하였다.】가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謝玄이 晉陵太守晉陵太守滕恬之를 보내서 황하를 건너 黎陽을 점거하였다.

燕王 復引兵圍鄴하니 進退路窮이라 會에 謝玄이 遣劉牢之等하야 據碻磝【王氏曰 碻磝는 城名이라 然二字俱在五爻韻이요 又碻는 本作䂭라 按宋重修廣韻註하면 䂭는 口交反이요 磝는 五交反이라 䂭磝는 (成)[城]名이니 今濟州是라】, 滑臺【春秋鄭之廩延邑이니 後魏置東郡하고 又改滑州하니라】러니 請救於이어늘 이 乃遣劉牢之하야 率衆二萬하야 救鄴하고 告饑어늘 이 水陸運米二千斛以饋之하다

燕王慕容垂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鄴城을 포위하니, 苻丕가 진퇴양난에 빠졌다. 마침 謝玄劉牢之 등을 보내 碻磝【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碻磝는 城의 이름이다. 그러나 碻와 磝 두 글자가 모두 五爻(요)의 韻에 있으며, 또 碻는 본래 䂭字로 되어 있다. 宋나라에서 重修한 ≪廣韻≫의 註를 살펴보면 䂭는 口交反(교)이고 磝는 五交反(요)이다. 䂭磝는 城의 이름이니, 지금의 濟州가 이곳이다.” 하였다.】와 滑臺城【滑臺는 春秋時代 鄭나라의 廩延邑이니, 後魏가 東郡을 설치하고 또 滑州로 고쳤다.】을 점거하였는데, 苻丕謝玄에게 구원을 청하자 謝玄이 마침내 劉牢之를 보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鄴城을 구원하게 하였으며, 苻丕가 굶주림을 고하자 謝玄이 水陸으로 쌀 2천 斛을 운반하여 공급했다.

[乙酉]十年

[乙酉]十年이라 〈秦王苻丕大安元이요 燕二요 後秦白雀二年이라 ○ 西燕主慕容沖更始元年이라 ○ 西秦王乞伏國仁建義元年이라 ○ 舊大國三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正月에 慕容沖이 卽帝位於阿房【是爲西燕이라 [通鑑要解]先時에 謠曰 鳳凰止阿房이라하니 堅曰 鳳凰은 非梧桐이면 不捿요 非竹實이면 不食이라하고 乃植桐竹數十萬株于阿房하야 以待之하니라 沖小字鳳凰이니 至是하야 止阿房城이라】하다

太元 10년(을유 385) - 秦王苻丕의 大安 元年이고, 燕나라 2년이고, 後秦白雀 2년이다. ○ 西燕主慕容沖의 更始 元年이다. ○ 西秦王乞伏國仁의 建義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셋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正月에 慕容沖阿房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原註]이(慕容沖)가 바로 西燕이다. [通鑑要解]이보다 앞서 동요에 이르기를 “鳳凰이 阿房에 머문다.” 하니, 苻堅이 말하기를 “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阿房城에 심어 놓고 봉황을 기다렸다. 慕容沖의 小字가 鳳凰이니, 이때에 이르러 阿房城에 머물렀다.】

○ 四月에 劉牢之至鄴하니 燕王垂 邀擊大破之라 坐軍敗하야 徵還하다

○ 4월에 劉牢之가 鄴城에 이르자 燕王慕容垂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대파하니, 敗戰한 죄에 걸려서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다.

○ 五月에 西燕主【垂復興於山東하고 而沖稱號於關中이라 故로 書西燕以別之也라】이 攻長安이어늘 秦王이 身自督戰할새 飛矢滿體하야 流血淋漓라 沖이 縱兵暴掠하니 關中士民이 流散하고 道路斷絶하야 千里無煙이러라 이 大懼하야 以讖書云 帝出五將이면 久長得이라하야 乃留太子宏하야 守長安하고 遂出奔五將山하다 後秦王이 遣驍騎將軍驍騎將軍吳忠하야 帥騎圍之하니 秦兵이 皆散走호되 이 神色自若하야 坐而待之라 俄而오 至執之하야 送詣新平하야 幽於別室【後秦王萇이 幽秦堅於別室하고 使求傳國璽하니 堅叱之曰 五胡次序에 無汝羌名이라 璽已送晉하니 不可得也라하니라 萇이 遣人殺之하고 欲隱其名하야 諡堅曰 壯烈天王이라하다】이러니 이 遣人하야 縊於新平佛寺하다

○ 5월에 西燕主 慕容沖【慕容垂는 山東에서 燕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慕容沖은 關中에서 燕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西燕이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이 長安을 공격하자, 秦王苻堅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때 流矢가 몸에 가득 꽂혀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慕容沖이 군대를 풀어서 사납게 노략질하니, 關中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고 도로에 행인들이 끊어져 천리를 가도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苻堅이 크게 두려워하여 圖讖書에 “皇帝가 나가서 五將에 이르면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하여, 마침내 太子太子慕容宏을 남겨 두어 長安을 지키게 하고는 마침내 나가 五將山으로 도망하였다.

後秦王姚萇이 驍騎將軍驍騎將軍吳忠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苻堅은 정신과 얼굴빛을 변치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吳忠이 이르러 苻堅을 사로잡아서新平으로 보내어 별실에 가두었는데,【後秦王 姚萇이 秦王 苻堅을 別室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傳國璽를 요구하니, 苻堅이 꾸짖기를 “五胡의 次序에 너희 羌人의 이름은 없다. 傳國璽는 이미 晉나라로 보냈으니 줄 수가 없다.” 하였다. 姚萇이 사람을 보내어 苻堅을 죽이고 자기 이름을 숨기고자 하여 苻堅의 시호를 壯烈天王이라 하였다.】姚萇이 사람을 보내 新平의 佛寺에서 苻堅을 목 졸라죽였다.

溫公曰 論者皆以爲秦王之亡은 由不殺慕容垂, 姚萇故也라하나 臣獨以爲不然이라 許劭魏武帝는 治世之能臣이요 亂世之姦雄이라하니 使治國에 無失其道면 則, 은 皆秦之能臣也니 烏能爲亂哉아 之所以亡은 由驟勝而驕故也라 魏文侯李克吳之所以亡한대 對曰 數戰數勝이니이다 文侯曰 數戰數勝은 國之福也어늘 何故亡고 對曰 數戰則民疲하고 數勝則主驕하니 以驕主御疲民이면 未有不亡者也라하니 秦王이 似之矣로다

歷年圖曰 石氏之彊也에 氐, 羌之屬이 無不內徙而爲臣이러니 一朝失馭에 而角立爲患하니 理固然也라 苻洪이 徘徊枋頭하야 有虎踞中原之志라 以健【洪之世子라】爲不肖나 然猶西取關中【肖는 似也라 洪病甚하야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는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는 非汝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豎子所困은 謂趙將麻秋 爲洪所獲하야 以爲將軍이러니 秋因宴鴆洪하니라】하고 幷姚襄【姚襄은 弋仲第五子니 見二十八卷丙辰年의 奔平陽注라】하고 却桓溫【見二十八卷甲寅年이라】하야 遂彊其國하며 以雄才英略으로 加之慈惠忠信하고 擧王猛於布衣하야 任之以政하야 勳舊不能離하고 親戚不敢妬하니 非至明이면 能如是乎아 故로 能呑彊燕, 擧河西하고 兼巴蜀, 包漢沔하고 俘索頭【索頭는 鮮卑別部也니 姓拓跋氏라 其俗이 以索辮髮이라 因號索頭라】, 屠龜玆【龜는 音丘요 玆는 音慈라[頭註]龜玆는 西域國名이라】하야 奄有天下十分之九하니 五胡【見二十六卷이라】之盛이 未有如者也라 觀其擧百萬之衆하야 以攻晉할새 先爲之除宮築第하야 以待其君臣하니 意以爲羅中之禽을 往無不獲也러니 及一戰而敗에 遂顚沛不振하야 昔之俘囚降虜가 皆起而爲敵이라 數月之間에 寇讐徧於四方하고 戎馬塞於郊甸【甸은 自邦國以及四郊之內라】하야 以至身死人手하고 子孫殄滅은 何哉오 論者皆咎堅寵信羌與鮮卑【謂姚萇, 慕容垂라】하고 輕於伐晉이나 彼皆睹其迹而言之요 未達其本也라 要之컨대 恃其强大하야 易而無備하니 此其所以敗亡也夫인저

溫公이 말하였다.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秦王苻堅이 멸망한 것은 慕容垂姚萇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許劭가 이르기를 ‘魏나라 武帝(曹操)는 治世의 유능한 신하이고 亂世의 姦雄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苻堅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慕容垂姚萇은 모두 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니, 어찌 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苻堅이 망한 이유는 갑자기 승리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魏나라 文侯李克에게 吳나라가 망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文侯가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함은 국가의 복인데, 무슨 이유로 망하였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우면 백성들이 지치고 자주 승리하면 군주가 교만해지니, 교만한 군주로써 지친 백성을 부리면 망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秦王苻堅이 이와 같았다.”

《歷年圖》에 말하였다.

石氏가 강할 때에는 氐族과 羌族의 무리가 안으로 옮겨 와서 신하 노릇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통치 능력을 잃게 되자 맞서서 우환이 되었으니,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苻洪은 枋頭에 배회하여 범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中原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며, 苻健【苻健은 苻洪의 세자이다.】은 불초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쪽으로 關中을 취하고【[附註]以健爲不肖 然猶西取關中:肖는 같음이다. 苻洪이 병이 심해지자, 아들인 苻健에게 이르기를 “내가 關中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은 中州(東晉)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도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 中州는 네가 차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關中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것은 趙나라 장수 麻秋가 苻洪에게 사로잡히자 그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麻秋가 연회를 틈타 苻洪에게 짐독을 먹인 일을 이른 것이다.】姚襄을 겸병하며【姚襄은 姚弋仲의 다섯째 아들이니, 28권 丙辰年條(356)의 奔平陽 注에 보인다.】桓溫을 물리쳐서【桓溫을 물리친 일은 28권 甲寅年條(354)에 보인다.】 마침내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였으며, 苻堅은 영웅의 재주와 지략에 자애로운 은혜와 忠信을 겸하였고 布衣로 있던 王猛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勳舊의 신하가 이간질하지 못하고 친척들이 감히 질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한 燕나라를 병탄하고河西 지방을 차지하고 巴‧蜀 지방을 겸병하고 漢‧沔 지방을 포괄하며 索頭【索頭는 鮮卑族 중의 한 부족이니, 姓은 拓跋氏이다. 풍속에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索頭라 호칭한 것이다.】를 사로잡고 龜玆國【[原註]龜는 음이 구이고, 玆는 음이 자이다.[頭註]龜玆는 西域의 나라 이름이다.】을 도륙하여 순식간에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으니, 五胡【五胡는 26권에 보인다.】의 성대함이 苻堅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苻堅이 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晉나라를 공격할 때에 먼저 궁궐을 소제하고 집을 지어서 晉나라의 君臣들을 대비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晉나라의 君臣들은 그물 속의 새와 같아서 어디를 가든 잡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인데, 한번 싸워 패하자 마침내 낭패를 당하여 떨치지 못해서 옛날 포로로 잡혔던 죄수와 항복한 오랑캐들이 모두 일어나 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 달 사이에 적과 원수가 사방에 두루 널리고 軍馬가 郊甸【甸은 나라 안으로부터 사방 郊外의 이내까지이다.】에 가득 차서 몸이 남의 손에 죽고 자손이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苻堅이 羌族과 鮮卑族【羌族과 鮮卑族은 姚萇과 慕容垂를 이른다.】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며 晉나라를 경솔하게 정벌한 것을 탓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그 자취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요 그 근본은 알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苻堅은 자기 나라가 강성하고 큰 것만 믿고 상대방을 쉽게 여겨 대비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쩌면 패망한 이유일 것이다.”

太保太保이 薨하니 以琅邪(琊)王道子【簡文帝子라】로 錄尙書事錄尙書事【錄은 總也라】하다

太保太保謝安이 죽으니, 琅琊王 司馬道子【司馬道子는 簡文帝(司馬昱)의 아들이다.】를 錄尙書事【錄은 총괄하는 것이다.】로 삼았다.

長樂公 在鄴이라가 將西赴長安이러니 入至晉陽하야 始知長安不守하야 已死하고 乃發喪하고 卽皇帝位하다

長樂公苻丕가 鄴城에 있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長安으로 달려가려 하였는데, 晉陽에 들어와서 비로소 長安을 지켜내지 못하여 苻堅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는 마침내 喪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二月에 燕王 始定都中山하고 卽皇帝位하다

○ 12월에 燕王慕容垂가 비로소 中山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呂光【秦尙書呂婆樓之子也라 略陽氐人이니 是爲後涼이라】이 自稱涼州刺史涼州刺史하다

○ 呂光【呂光은 秦나라 尙書 呂婆樓의 아들이다. 略陽의 氐人이니, 이가 바로 後涼이다.】이 涼州刺史涼州刺史라고 자칭하였다.

乞伏國仁이 自稱秦, 河二州牧하다

○ 西秦의 乞伏國仁이 秦州와 河州 두 州의 牧을 자칭하였다.

[丙戌]十一年

[丙戌]十一年이라 〈秦王苻登太初元이요 燕建興元이요 後秦建初元이요 西燕主慕容永中興元年이라 ○ 魏太祖道武帝拓跋珪登國元年이요 涼王呂光太安元年이라 ○ 舊大國四요 小國一이요 新大國一이요 小國一이니 凡七僭國이라〉

正月에 拓跋珪【見上丙子年이라 拓跋은 複姓이니 立爲代王이라】 大會於牛川하고 卽代王位하다

太元 11년(병술 386) - 秦王苻登의 太初 元年이고, 燕나라(後燕) 建興 元年이고, 後秦建初 元年이고, 西燕主慕容永의 中興 元年이다. ○ 魏나라 太祖道武帝道武帝拓跋珪의 登國 元年이고, 涼王(後涼)呂光의 太安 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大國이 넷이고 小國이 하나이며, 새로운 大國이 하나이고 小國이 하나이니, 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正月에 拓跋珪【拓跋珪는 앞의 丙子年條(376)에 보인다. 拓跋은 複姓이니 즉위하여 代王이 되었다.】가 牛川에서 군대를 크게 모으고, 代王에 즉위하였다.

○ 西燕左將軍左將軍韓延이 殺燕主沖【慕容沖은 見上甲申年이라】하고 立段隨하야 爲燕主러니 慕容永【廆弟之子라】이 襲段隨破之하고 帥鮮卑男女하야 去長安而東하니 衆이 推爲河東主라 於是에 長安이 空虛하다

○ 西燕의 左將軍左將軍韓延燕主慕容沖을 죽이고【慕容沖은 앞의 甲申年條(384)에 보인다.】慕容沖의 장수 段隨를 세워 燕主로 삼았는데, 慕容永【慕容永은 慕容廆의 아우의 아들이다.】段隨를 습격하여격파하고鮮卑族의 남녀 백성들을 거느리고 長安을 떠나 동쪽으로 가니, 무리들이 慕容永을 추대하여 河東主로 삼았다. 이에 長安이 텅 비게 되었다.

○ 四月에 後秦王이 自安定으로 入長安하야 卽皇帝位하고 國號를 大秦이라하고 立子興하야 爲皇太子하다

○ 4월에 後秦王姚萇安定으로부터 長安에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大秦이라 하고 아들姚興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 九月에 西燕慕容永이 擊秦主於鄴하야 殺之하고 이 遂進據長子하야 卽皇帝位하다

○ 9월에 西燕의 慕容永秦主苻丕를 鄴城에서 공격하여죽이고, 慕容永이 마침내 진격하여 長子縣을 점령하고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一月에 秦南安王【丕之子라】이 發喪行服하고 乃爲壇於隴東하고 卽皇帝位하다

○ 11월에 秦의 南安王 苻登【南安王 苻登은 苻丕의 아들이다.】이 喪을 발표하고 服을 입고는 마침내 隴東에서 壇을 만들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丁亥]十二年

[丁亥]十二年이라 〈秦太初二요 燕建興二요 後秦建初二요 魏登國二年이라〉

拓跋珪 改稱魏王하다

太元 12년(정해 387) - 秦나라 太初 2년이고, 燕나라 建興 2년이고, 後秦建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2년이다. -

拓跋珪魏王이라고 개칭하였다.

[戊子]十三年

[戊子]十三年이라 〈秦太初三이요 燕建興三이요 後秦建初三이요 魏登國三年이라 ○ 西秦王乞伏乾歸太初元年이라〉

呂光이 卽三河王位하다

太元 13년(무자 388) - 秦나라 太初 3년이고, 燕나라 建興 3년이고, 後秦建初 3년이고, 魏나라 登國 3년이다. ○ 西秦王乞伏乾歸의 太初 元年이다.-

呂光三河王에 즉위하였다.

[己丑]十四年

[己丑]十四年이라 〈秦太初四요 燕建興四요 後秦建初四요 魏登國四年이라 ○ 涼麟嘉元年이라〉

初에 帝旣親政事에 威權이 己出하야 有人主之量이러니 旣而오 溺於酒色하야 委事於琅琊王道子道子亦嗜酒하야 日夕에 與帝酣【酒樂이라】歌爲事하고 又崇尙浮屠【三十二卷丙寅年注에 梵言浮屠는 華言聚相이라하니 通作浮圖라 釋典云 僧曰浮屠요 塔亦曰浮屠라하니 正號佛佗니 與浮屠로 聲相近이라 華言正覺이니 今略稱佛이라】하야 窮奢極(貴)[費]하니 左右近習이 爭弄權柄하야 交通請托하야 賄賂【賄는 財也요 又贈送也며 賂는 以財與人也라 [通鑑要解]賄는 音灰라 金玉曰貨요 布帛曰賄라】公行하며 官賞이 濫雜하고 刑獄이 謬亂【帝乃昏暗하고 道子亂政이라 左將軍左將軍許營上疏어늘 不省하니라】이러라

太元 14년(기축 389) - 秦나라 太初 4년이고, 燕나라 建興 4년이고, 後秦建初 4년이고, 魏나라 登國 4년이다. ○ 涼나라(後涼) 麟嘉 元年이다.-

처음에 황제가 이미 친히 정사를 행하자, 위엄과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와 人君의 도량이 있었는데, 이윽고 酒色에 빠져 琅琊王司馬道子에게 정사를 맡겼다. 司馬道子 또한 술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황제와 술 마시고【酣은 술을 즐기는 것이다.】 노래하는 것을 일삼고 또 불교【≪通鑑節要≫ 32권 丙寅年(546) 注에 “梵語의 浮屠는 중국말의 聚相이다.” 하였으니, 일반적으로 浮圖로 쓴다. 釋典에 이르기를 “승려를 浮屠라 하고, 塔을 또한 浮屠라 한다. 정식 명칭은 佛佗이니 浮屠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중국말로는 正覺이니, 지금은 佛이라고 약칭한다.” 하였다.】를 숭상해서 극도로 사치하고 낭비하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 다투어 권력을 농간하여 연줄을 대어 사사로운 일을 청탁해서 뇌물【[頭註]賄는 財貨이고 또 財貨를 보내는 것이며, 賂는 재화를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通鑑要解]賄는 音이 회이다. 金玉을 貨라 하고 布帛을 賄라 한다.】이 공공연히 오가고 관작과 賞이 남발되고 혼잡하였으며 형벌과 옥사가 잘못되고 혼란해졌다.【武帝가 昏暗하고 司馬道子가 정사를 어지럽히므로 左將軍 許營이 상소하였으나 살펴보지 않았다.】

[壬辰]十七年

[壬辰]十七年이라 〈秦太初七이요 燕建興七이요 後秦建初七이요 魏登國七年이라〉

南郡公桓玄【溫之少子니 見上癸酉年이라】이 負其才地【地는 謂地位門地라】하고 以雄豪【雄은 武稱이요 豪는 弛也라 又獸之將群者爲雄이요 智過百人謂豪라】自處한대 朝廷이 疑而不用이라 年二十三에 始拜太子洗馬太子洗馬하고 後에 出補義興太守義興太守하니 鬱鬱不得志【玄爲洗馬時에 琅琊王道子 値其酣醉하야 張目謂客曰 桓溫晩塗欲作賊은 云何오하니 玄伏地流汗하야 不能起라 由是로 不自安而切齒於道子云云이라】하야 歎曰 父爲九州伯九州伯이어늘 兒爲五湖【滆湖, 洮湖, 射湖, 貴湖, 及太湖爲五湖라 湖之小支 俱連太湖故로 太湖兼得五湖之名이라】長고하고 遂棄官歸하다

太元 17년(임진 392) - 秦나라 太初 7년이고, 燕나라 建興 7년이고, 後秦建初 7년이고, 魏나라 登國 7년이다. -

南郡公 桓玄【桓玄은 桓溫의 작은아들이니, 앞의 癸酉年條(373)에 보인다.】이 자신의 재주와 門閥【地는 지위와 門地(門閥)를 이른다.】을 믿고 영웅호걸【雄은 용맹하다는 명성이고, 豪는 방종함이다. 또 짐승 중에 무리를 거느리는 것을 雄이라 하고, 지혜가 백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豪라 한다.】로 자처하자, 조정에서 의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나이 23세에 비로소 太子洗馬太子洗馬에 제수되고 뒤에 나가 義興太守義興太守에 보임되니, 답답하여 뜻을 얻지 못해서【桓玄이 太子洗馬였을 때에 琅琊王 司馬道子가 마침 술에 취하여 술김에 눈을 부릅뜨고 객에게 이르기를 “桓溫이 말년에 모반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桓玄이 땅에 엎드려 진땀을 흘리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桓玄이 이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司馬道子에 대해 이를 갈며 원망하였다.】 탄식하기를 “아버지는 九州九州의 伯伯이 되었는데, 자식은 五湖【滆湖‧洮湖‧射湖‧貴湖‧太湖를 五湖라 한다. 五湖의 작은 支流가 모두 太湖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太湖가 五湖의 명칭을 겸하여 얻은 것이다.】의 長이 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南郡으로 돌아왔다.

[癸巳]十八年

[癸巳]十八年이라 〈秦太初八이요 燕建興八이요 後秦建初八이요 魏登國八年이라〉

十二月에 後秦主이 卒하고 太子興이 卽位하다

太元 18년(계사 393) - 秦나라 太初 8년이고, 燕나라 建興 8년이고, 後秦建初 8년이고, 魏나라 登國 8년이다. -

12월에 後秦主姚萇이 죽고, 太子太子姚興이 즉위하였다.

[甲午]十九年

[甲午]十九年이라 〈秦主苻崇延初元이요 燕建興九요 後秦主姚興皇初元이요 魏登國九年이라 ○ 是歲에 秦及西燕亡하니 大三, 小二니 凡五僭國이라〉

太元 19년(갑오 394) - 秦主苻崇의 延初 元年이고, 燕나라 建興 9년이고, 後秦主姚興의 皇初 元年이고, 魏나라 登國 9년이다. ○ 이해에 秦나라와 西燕이 멸망하였다. 大國이 셋이고 小國이 둘이니, 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秦主이 聞後秦主卒하고 盡衆而東【秦主登이 聞後秦主萇死하고 喜曰 姚興少兒는 吾折杖笞之耳라하고 乃留安成王廣守雍하고 太子崇守胡空堡하고 盡衆而東하다】이어늘 後秦主이 自安定으로 如涇陽하야 與으로 戰于山南하야 執殺之하니 秦太子이 奔湟中하야 卽皇帝位하다

秦主苻登後秦主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오자,【秦主 苻登이 後秦主 姚萇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姚興과 같은 어린 아이는 내가 나뭇가지를 꺾어 매질할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安成王 苻廣을 남겨 두어 雍城을 지키게 하고 太子 苻崇은 胡空堡를 지키게 하고, 모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갔다.】後秦主姚興安定으로부터 涇陽에 가서 苻登과 山南에서 싸워서 苻登을 잡아 죽이니, 秦나라 太子太子苻崇이 湟中으로 달아나 황제에 즉위하였다.

○ 十月에 이 爲梁王乾歸乞伏國仁之弟也니 國仁卒에 乾歸嗣하야 爲河南王이라 登爲後秦所敗하니 遣子乾歸爲質하야 請救하니라】所殺하니 乾歸 於是에 盡有隴西之地하고 自稱西秦王하다

○ 10월에 苻崇梁王 乞伏乾歸【梁王 乞伏乾歸는 乞伏國仁의 아우이니, 乞伏國仁이 죽은 뒤에 乞伏乾歸가 왕위를 이어 河南王이 되었다. 苻登이 後秦에게 패배하니, 아들 苻崇을 乞伏乾歸에게 보내어 인질로 삼고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에게 살해당하니, 乞伏乾歸가 이에 隴西 지역을 다 소유하고 西秦王이라 자칭하였다.

燕主 攻西燕하야 執西燕主하야 斬之하다

燕主慕容垂가 西燕을 공격해서西燕主慕容永을 잡아 목을 베었다.

[乙未]二十年

[乙未]二十年이라 〈燕建興十年이요 秦皇初二요 魏登國十年이라〉

魏王 叛燕하야 侵逼附塞諸部어늘 五月에 燕主太子寶遼西王趙王【農, 麟은 皆寶之弟라】하야 帥衆八萬하야 伐魏한대 縱兵擊之하니 燕兵死者 以萬數라 太子寶等이 皆單騎로 僅免하다

太元 20년(을미 395) - 燕나라 建興 10년이고, 秦나라(後秦) 皇初 2년이고, 魏나라 登國 10년이다. -

魏王拓跋珪가 燕나라를 배반하고서 변방에 가까운 여러 部를 침략하고 핍박하였다. 5월에 燕主慕容垂가 太子太子慕容寶, 遼西王慕容農, 趙王 慕容麟【慕容農과 慕容麟은 모두 慕容寶의 아우이다.】을 보내어 군사 8만 명을 거느리고서 魏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拓跋珪가 군대를 풀어 공격하니 燕나라 병사 중에 죽은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다. 太子太子慕容寶 등이 모두 單騎로 빠져나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丙申]二十一年

[丙申]二十一年이라 〈燕主慕容寶永康元이요 秦皇初三이요 魏皇始元年이요 涼龍飛元年이라〉

四月에 燕主【垂憤太子寶 敗於魏而還하야 引兵하고 出魏不意하야 襲平城破之하다 過燕軍大敗處할새 軍士慟哭하야 聲振山谷하니 垂慙憤嘔血死云云이라】하고 太子寶卽位하다

太元 21년(병신 396) - 燕主慕容寶의 永康 元年이고, 秦나라 皇初 3년이고, 魏나라 皇始 元年이고, 涼나라 龍飛 元年이다. -

4월에 燕主慕容垂가 죽고【燕主 慕容垂는 太子 慕容寶가 魏나라에게 패배하고 돌아온 것을 분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불시에 魏나라로 출병하여 平城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燕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한 곳(參合坡)을 지날 때에 군사들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산골짝에 진동하니, 慕容垂가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겨 피를 토하고 죽었다.】太子太子慕容寶가 즉위하였다.

○ 六月에 三河王呂光이 卽天王位하야 國號를 大涼이라하고 以世子紹로 爲太子하다

○ 6월에 三河王呂光이 天王天王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涼이라 하고, 世子世子呂紹를 太子로 삼았다.

○ 魏群臣이 勸魏王하야 稱尊號어늘 始建天子旌旗하고 出警入蹕【天子出則稱警하니 示戒肅也요 入則言蹕하니 所以止行人淸道也라 又示出入皆有蹕하니 互文耳라】하며 改元皇始하다

○ 魏나라의 신하들이 魏王拓跋珪에게 권하여 尊號를 칭하게 하자, 拓跋珪가 처음으로 天子의 旌旗를 세우고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하며【天子가 나갈 때에는 警이라 칭하니 경계하고 엄숙함을 보이는 것이요, 들어올 때에는 蹕이라 칭하니 行人들을 막고 길을 치움을 보이는 것이다.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辟除함은 또 天子가 나가고 들어올 때에 모두 벽제함을 보인 것이니, 出警入蹕은 互文이다.】皇始라고 改元하였다.

○ 九月에 帝崩【帝醉하야 寢할새 貴人이 使婢以被蒙面而弑之하고 賂左右하야 曰因魘暴崩이라하다】하다

○ 9월에 황제(司馬曜)가 승하하였다.【孝武帝가 술에 취하여 잘 적에 貴人이 계집종을 시켜 황제의 얼굴을 덮어씌워 질식시켜 시해하고는 左右를 뇌물로 매수하고 이르기를 “가위에 눌려 갑자기 崩하였다.”고 하였다.】

魏王 潛自晉陽으로 開韓信故道韓信擊趙故道라】하고 自井陘으로 趨中山하니 自常山以東으로 守宰或走或降하야 諸郡縣이 皆附於魏호되 惟中山, 鄴, 信都三城이 爲燕守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武帝卽位에 而能委任謝安, 謝玄等이라 故로 新亭數語 足折桓溫之氣하고 淝水一戰에 大敗苻秦之師라 是以로 上下輯睦하야 晉室이 似有生意矣라 然이나 帝方溺於酒, 荒于色하야 奏凱方旋에 驕氣掬面하고 曾不閱時에 遽用讒言하야 疎退賢輔하야 遂使王綱不振하고 恩威不立이라 道子荒于朝政하고 國寶彙以小人하니 拜授之榮이 初非天旨요 鬻刑之貨 旁午權門하야 毒賦年滋하고 愁民歲廣이라 內殿嚴邃에 雜處浮屠하고 請修廟에 䟽入不報하고 晩年에 長星告變호되 猶不警悟하고 房幃烈禍 起自戲言하니 晉祚至此에 蓋已亡而未滅耳니라

魏王拓跋珪가 몰래 晉陽으로부터 韓信의 옛길【옛길은 韓信이 趙나라를 공격했던 옛길이다.】을 열고 井陘으로부터 中山으로 달려가니, 常山 이동 지방의 수령들이 혹은 달아나고 혹은 항복하여 모든 郡縣들이 魏나라에 붙었으나 오직 中山과 鄴城과 信都 세 성만이 燕나라를 위하여 지켰다.

[史略 史評]史斷에 말하였다.

武帝는 즉위하자 謝安謝玄 등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新亭의 몇 마디 말로 桓溫의 기운을 충분히 꺾었고, 淝水의 전투에서 苻秦의 군대를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上下가 화목하여 晉나라 황실이 생기가 도는 듯 하였다. 그러나 武帝가 한창 술에 빠지고 여색에 빠져 凱旋歌를 부르며 돌아온 뒤에 교만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으며, 채 한 철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참소하는 말을 따라 어진 보필을 멀리 물리쳐서 제왕의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고 은혜와 위엄이 바로 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司馬道子가 조정의 정사를 게을리 하고 王國寶가 소인들을 모으니, 관직을 제수하는 영화가 애당초 天子의 뜻이 아니었고 형벌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받은 財貨가 權門勢家에 몰려들어서 가혹한 세금이 해마다 늘어나고 근심하는 백성들이 해마다 많아졌다. 그윽하고 깊숙한 內殿에 승려들이 뒤섞여 거처하였고 孔子의 사당을 수리하자고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晩年에 長星이 변고를 알렸음에도 경계하여 깨닫지 못하였고 房幃의 독한 화가 희롱하는 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晉나라의 國運은 여기에 이르러 이미 망하였으나 아직 사라지지만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