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사택지적
KHS DH wiki
사택지적 (沙宅智積) |
|
한글 | 사택지적 |
---|---|
한자 | 沙宅智積 |
내용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고위 관리로 백제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이자 사비 시기에 왕실 외척으로 급부상한 귀족 가문인 사씨로 나지성(奈祗城) 출신이다. 사택지적의 사택씨(沙宅氏)는 사탁씨(沙矺氏) 또는 사탁씨(沙乇氏)라고도 불리며, 단일성으로 표기할 때는 사씨(沙氏)이다. 사택지적은 사비 도읍기인 의자왕 대 대좌평(大佐平)을 지냈다. 백제가 왜에 파견한 사신 가운데 최고위직이었다. 642년(의자왕 2)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8월에 귀국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皇極紀) 원년인 642년 2월 조에 의하면, 일본에 파견된 백제 조문사가 641년 11월 대좌평 지적이 죽었다는 보고를 한 내용이 확인되며, 7월 조에는 왜에서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智積) 등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연회가 끝난 뒤 사택지적은 백제에서 추방된 교기를 찾아가 문 앞에서 절하였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을 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으로 볼 때, 642년(의자왕 2)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뒤, 654년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사택지적이 관직에서 물러난 배경에 대해서는 642년 의자왕이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48년 부여읍 관북리에서 발견된 보물 부여 사택지적비(扶餘 砂宅智積碑)는 사택지적이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사택지적은 654년 「사택지적비문」을 썼다.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지성(奈祗城)의 사택지적은 몸이 세월과 함께 쉽게 가 버리고, 다시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프게 여기노라. 이에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우뚝 솟은 그 자애로운 위용은 신광을 토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높디높은 그 자비로운 모습은 성명(聖明)을 머금고”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
실습:부여 사택지적비 | 실습: 사택지적 | A는 B에 소장되어있다. |
참고문헌
Web Resource
Category | Title | Site | Url |
---|---|---|---|
사전 | 사택지적 | 디지털부여문화대전 | http://aks.ai/GC09000753 |
사진 | 사택지적 | 디지털부여문화대전 | https://www.grandculture.net/buyeo/toc/GC09000753#:~:text=%EC%82%AC%ED%83%9D%EC%A7%80%EC%A0%81%20%EC%9D%80%20%EC%82%AC%EB%B9%84 |
사전 | 한국고중세사사전 | 국가유산포털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18267&cid=62047&categoryId=62047 |
주석
- 이동 ↑ "보물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