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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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
집필자 황인희
교열자 유안리
인물/기관/단체 넬슨 만델라, 박정희, 김동운, 김종필,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계엄사령부, 김영삼, 신군부, 민주자유당,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의 정부, 김정일
장소/공간 명동성당, 한반도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3·1민주구국선언, 10.26,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IMF 관리 체제, 베를린 선언, 6·15남북공동성명
개념용어 인동초, 향토예비군, 4대국 안전보장안, 긴급조치 9호, 10월 유신, 햇볕 정책,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노벨평화상



1차 원고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기어이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해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데에 합의했다.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중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지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는 후유증이 생겼고 햇볕 정책의 무리한 추진, 임기 말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연구원 검토

검토의견
- 김대중의 정치노선에 대해 설명하고, 대통령으로서 정책 수행의 주요 내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으면 좋겠다. 대통령 당선 이전 야당 대표로서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한국의 중요인물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대통령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실시한 과감한 경제 개혁 착수는 어떤 것이며, IMF 관리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 조정 및 대외 개방, 금융 개혁에 대해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 햇볕정책, ‘베를린선언’, 6.15남북공동성명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서술해 줄 것

- 김대중 대통령 시기 정책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한계가 나타난 배경에 대해서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설명하 것 : 외환 위기 극복과정에서 빈부 격차가 커진 이유와 노동 조건이 악화된 배경 등


수정 원고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기어이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해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데에 합의했다.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중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교열본

김대중 납치 사건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

파란만장 정치 역정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의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의 정부 대통령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