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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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를 쓰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그와 관련된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묘청의 난의 진압과 <삼국사기>의 편찬이다.

그는 삼국 통일을 이끈 신라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 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묘청의 난 평정

1126년 고려의 임금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일어난 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고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개경(지금의 개성)의 왕기가 약해져서 고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며 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왕기(王氣)가 충만한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묘청이 추천한 곳은 서경(지금의 평양)이었다. 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북벌(北伐)도 주장하였다. 중국 여러 나라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 스스로 황제국이 되어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과 외교 관계를 펴나갈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천도를 위해 서경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기득권층은 서경 천도에 반대하였다. 김부식은 천도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반대 세력을 설득하지 못한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였다.

서경 천도 계획이 실패하자 묘청 일파는 1135년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는 김부식에게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김부식은 군사를 이끌고 서경 가까이 다가가 묘청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의 중심 인물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 등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목을 가져간 윤첨(尹瞻)을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광 등은 항복해도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다. 반란군의 항전이 1년 넘게 계속되자 식량이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1136년 진압군은 서경을 함락하였고 반란군의 우두머리들이 자결함으로써 묘청의 난이 끝났다.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묘청의 난을 개경파와 서경파, 불가와 유가,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결로 보았다. 그는 묘청이 실패함으로써 유가(儒家)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애석해했다. 그런 결과의 중심에 김부식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부식은 임금의 명령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1145년에 <삼국사기> 50권을 인종에게 바쳤다. 현재 전하는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는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기전체로 집필되었다. 전체는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는 편찬자들이 독단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고기(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국내 문헌과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각 부분의 머리말, 사료의 취사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배운 사람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진삼국사기표에 <삼국사기>의 편찬 동기와 목적, 방향을 언급하였다. 그 첫째는, 중국 문헌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왕과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1174년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송나라 왕응린의 책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판본은 ‘성암본(誠庵本)’이라 불리는데 이는 13세기 후반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김부식과 묘청의 난(서경천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정출헌, 『김부식과 일연의 왜』, 한겨레출판사, 2012.
김정권, 『묘청란 묘청란 연구』, 충남대학교출판부, 2007.
김창현,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구다』, 경인문화사, 2008.


『김부식과 일연은 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나란히 놓고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필자의 관점을 비교한 책이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혹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선별하여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며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차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얼마나 다르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두 남성의 시선을 아우르며 다양한 시각으로 표현된 옛이야기를 통해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주목해서 볼 부분은 이 책의 1부로, 유학자인 김부식과 탈속 승려인 일연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비교할 수 있다.

『묘청란 묘청란 연구』은 고려 인종 시기 김부식과 대립을 하며 서경천도를 주장하였던 묘청과 묘청란에 대한 연구서이다. 신채호를 기점으로 한 그동안의 묘청란 연구는 다분히 합리적 선택론이라는 역사 인식론적 토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필자는 연구과정에서 일종의 획정의 담론적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통합적이고도 연합적인 성격의 '정치세대'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중기 인종대를 유신정치의 시대로 상정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정치질서 형성의 다이내믹스를 살필 수 있었다.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는 천하를 꿈꾼 윤관과 묘청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의 역사를 조명한다. 고려 중기의 역사는 귀족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파탄에 이른 결과 이자겸 난, 묘청 정변, 무신정변이 연이어 발생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책은 이러한 시각에서 탈피한 시점으로 그려졌다. 변화와 발전의 역동적인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 『삼국사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신형식,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 경인문화사, 2011.
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삼국사기의 종합적 연구』는 『삼국사기』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책으로, 『삼국사기』를 항목별로 분석했다. 이 책은 삼국사회의 종합적 이해를 돕고, 신문화사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고대사에 심층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삼국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을 『삼국사기』라는 창구를 통해 정리한다.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는 『삼국사기』를 현대적으로 분석한 안내서이다. 이 책은 『삼국사기』가 다루고 있는 삼국시대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단군조선으로부터의 역사 과정, 삼국 멸망 후 고려조의 역사 과정과 배경, 편찬자와 편찬 목적, 영향, 평가 등을 종합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와 주장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