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

Korea100
이동: 둘러보기, 검색
Eng icon.JPG


김대중: 고난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되다

김대중 납치 사건

대한민국 제15대(1998~2003)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1924~2009)은 재야 인사로서 30년 가까이 온갖 고초를 겪었다.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0년 망명 생활도 겪었으며 납치와 가택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한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인동초란 겨울을 이겨낸 풀이라는 뜻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 존재를 의미한다.

김대중이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토예비군 폐지, 비정치적 남북 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안보와 경제성장론을 내세운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반유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그는 일본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국 정부는 일본과 접촉하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 해임, 김대중이 외국에서 했던 언행에 대한 면책과 김종필 당시 총리가 사과하기 위해 일본에 방문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

파란만장 정치 역정

1974년 김대중은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가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다시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되자 김대중은 가택 연금에서 벗어나 사면 복권되었다. 1980년 초 김대중은,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체포, 수감하였고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주동자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비난,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이어지자 전두환 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1982년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갔던 김대중은 1985년 귀국하여 1987년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말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영국으로 갔다가 6개월 만에 귀국하여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정계 은퇴를 번복한 데 대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국민의 정부 대통령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선거에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과감한 경제 개혁에 착수하여 IMF 관리 체제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금융 개혁 등의 정책을 펼쳤다.

또 ‘햇볕 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쳐 남북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2000년 3월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고 그 해 6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 정상 회담을 갖고 6·15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15남북공동성명은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경제 협력 확대 등을 통해 남북 관계를 화해 · 협력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평화의 장을 여는 데 기여한 공로로 김대중은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관련항목

참고문헌

  • 40대 기수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심지연,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 백산서당, 2013.
김영삼, 『40대 기수론』, 신진문화사, 1971.


『한국정당정치사 : 위기와 통합의 정치』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당시 제창된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접근하여 분석해 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한국정치사를 정당 중심으로 접근하여 살펴보면서,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한국정당정치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해 내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제4장에서 박정희 시대 정당정치의 전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3선 개헌과 함께 시도된 박정희 정권의 권력 연장 시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야당의 움직임, 그 속에 새로운 정치세대의 등장을 알린 ‘40대 기수론’의 내용과 의미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설명하였다. 한국현대정치의 전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40대 기수론』은 1971년 박정희의 3선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면서 회자되었던 40대 기수론의 내용을, 제창자인 김영삼의 손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인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언과 담론을 이 책을 통해 설명하고 확산시키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국 현대정치사상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40대 기수론이라는 담론의 내용과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 제창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직접적인 문헌으로써 40대 기수론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문헌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류상영 외 공저,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김대중, 김경재 공저,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 광장, 1992.


『김대중과 한일관계 : 민주주의와 평화의 한일현대사』는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활동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정리해낸 책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서 일본과의 관계에 큰 관심을 두고 적지 않은 비중으로 일본을 대상으로 한 정치활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특히 이 책은 제4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그 모략과 발생의 배경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 정치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관계가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양국 정권이 납치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을 함께 펼치는 등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동시에 김대중 납치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와 상처를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과 함께 한일 양국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 [김대중 납치사건의 재조명]』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일본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체와 내용을 회고하여 정리한 책이다. 3선 개언 끝에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등장한 김대중의 활약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다방면의 외교적 노력 끝에 풀려난 뒤 계속된 정치적 탄압 속에 살야야 했던 정치인 김대중은 이후 자신이 겪었던 납치 당시의 상황과 실제 정황들을 회고하면서 이 책을 남겨놓았다. 납치 사건 당사자의 생생한 기억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책은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모략과 음모의 한 사례로 언급되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와 생생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존 딜러리, 강태호 공저,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4.
김대중 외 공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 문이당, 2000.


『김대중과 그레그의 운명적 만남 : 민주화와 탈냉전기 한미관계의 한 단면』은 정치인 김대중과 미국의 외교관인 도널드 그레그의 친교관계 속에 김대중의 정치적 위기 극복의 사례를 살펴보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전개된 한미외교관계의 양상을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김대중은 군부독재시절 오랜 기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인물이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납치되어 암살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후 1980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내란 음모’를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수차례 생명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그를 외교적으로 후원하고 지원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그레그였다. 그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는 CIA 한국지부 책임자로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당시에는 주한 미 대사의 신분에서 김대중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그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널드 그레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전말과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사형 선고가 언도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정치인 김대중이 당시 사실을 회고하며 정리한 책이다. 박정희 정권과 더불어 그것을 계승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끊임없이 정치 보복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은 급기야 내란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정치계와 종교계,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방면의 외교적 활동 속에 결국 미국으로 추방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정치적인 망명 생활을 하며 일정한 탄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은 총 25명의 공저자들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여 비평하고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담아 기록한 책이다. 특히 가장 말미에 역사학자 이만열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그 역사적 의의가 어떠한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내려는 시도도 함께 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의 기억을 통해 회고되는 전말과 내용이라는 점에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