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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조선시대 행사에서의 연희
Synopsis
조선시대의 전통연희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수륙재, 우란분재, 문희연, 관아 행사, 동제, 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밖에도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을 모신 문묘를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사 시, 왕세자의 태를 태봉에 묻을 때,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며 일종의 모의 농경의례인 내농작을 거행할 때, 지방관을 환영할 때 등에도 연희가 연행되었다.
연희는 왕조의 성립과 교체와 같은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장르였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 행사들이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어 국가 행사와 궁정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벌이게 되었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의 연희 문화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이 스토리에서는 그 새로운 국면 전에 전통연희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Storyline
Episode 1: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의 전통연희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는 땅재주 또는 솟대타기, 줄타기, 방울 받기, 인형극, 무동, 각종 동물춤 등 다양한 전통연희 공연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 예겸(1415~1479)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 황주, 개성, 한양에 오산과 채붕을 설치하여 연희 공연을 했다. 또한 조선에서는 중국 사신이 한양에 들어오기 전에 모화관에 머물렀는데, 모화관에 머무는 동안 의례적으로 놀이판을 벌였다.[1] 세종 32년(1450) 윤정월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1415~1479)의 <조선기사>에 의하면 당시 중국 사신 영접 때 평양, 황주, 개성, 서울에서 오산과 채붕을 설치하고 연희를 공연했다고 한다.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연희 장면은 아국돈(1685~1756)의 <봉사도>가 있다.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한 대산대를 만드는 데만 각각 수군 천사백명과 천삼백명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국 사신 영접의 나례는 정조 8년 (1784)에 폐지되었다.
Episode 2: 환궁행사에서의 전통연희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 친경의, 배릉례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 여러 행사를 베풀었다. 임금의 행차가 지나는 좌우 양쪽에 나례를 별였고, 광화문 밖에 산대나 채붕을 좌우에 하나씩 설치했다. 연(가마)이 광화문 밖에 이르고, 채붕에서 공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인조는 반정 이후에 왕실의 유연(遊宴)에 관한 기물들을 대로에서 불태우는 상징적 행사를 단행하고, 왕실 의식과 행사를 간소화하며, 환궁 행사로서의 나례는 폐지했다.
Episode 3: 문희연에서의 전통연희
문희연(聞喜宴)은 사대부가의 과거 급제 축하 잔치이다. 문희연 외에 과거제도와 관련된 행사로는 아래의 행사들이 있다.
구성 | 장소 | 내용 |
---|---|---|
방방의(放榜儀) | 의정부 | 왕이 참석하여 합격증인 홍패, 백패, 모화, 개, 주과 등을 하사하는 의식 |
은영연 | 의정부 | 임금이 급제자에게 베푼 잔치 |
유가 | 한양 거리 | 한양에 거주하는 과거 급제자가 세악수(삼현육각), 광대, 재인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사흘간 돌아다니며 하는 거리 행진 |
도문(到門) | 급제자 지역의 거리 | 60일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가 문묘에 절한 후 거리 행진 |
영친의 | 급제자의 지역 관아 | 지방 출신 급제자가 고향으로 왔을 때 그 지방 수령이 급제자와 부모를 관아에 초청해 베푸는 축하 잔치 |
홍패고사 | 급제자의 집 사당 | 삼일유가를 함께 한 광대들과 집에 도착해 광대가 마당에 소반을 놓고 그 위에 쌀, 그 위에 홍패를 올리고서 고사를 지냄. 고사 내용은 우주가 생긴 이래 삼한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약술, 그 집의 세간 등 묘사, 급제한 사실 고지, 앞으로 부귀를 누리라는 덕담으로 구성 |
소분 | 선산 | 도문 이후에 선산에 성묘 |
문희연 | 급제자의 집 사당 | 사대부가의 과거 급제 축하 잔치로 전문 연희자들이 성대한 연희를 펼침 |
문희연을 치르기 위해 전문 연희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과거가 임방하면 지방 연희자들이 한양으로 몰렸다. 여러 놀이패가 상경해 문희연에 초청받기 위해 기량을 과시하는 모습을 <관우희> 44수와 45수에서 알 수 있다. 문희연의 연희자들은 주로 재인청에 소속된 재인이었다.
Episode 4: 전통연희의 무대
조선 전기 명나라 사신이 올 때는 광화문 밖 양쪽에 광화문처럼 높고 큰 산대를 하나씩, 모두 두 개를 만들었었다. 이후 임병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졌고, 광화문 앞에 기존 대산대를 세우던 장소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서 대산대를 세울 만한 공간도 부족했다. 또한 중국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며 중국 사신 영접의 열기가 시들해졌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소규모 산대를 사용했다. 아국돈의 <봉사도>에 그려진 산대는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는 것으로 예산대, 산거, 산붕이라 불리던 것이다. 여기에는 맨 아래 낚시질하는 신선과 춤추는 선녀인형이 있고, 가운데 원숭이 인형, 맨 위에 붉은 옷을 입은 인형이 상반신만 보인다. 산모양 구조물에는 나무와 누대도 설치되어 있다. 이 인형 잡상들은 단순한 진열물이 아니라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잡상놀이로 알려져있다.
Episode 5: 죄가 된 풍자, 공길의 우희
우인 공길이 노유희(老儒戱)를 만들어 말하기를 '전하는 요순같은 임금이요, 저는 고요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 같은 임금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요 같은 신하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 <논어>를 외우며 말하길,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워야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설사 쌀이 있은들 제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임금은 그의 말이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해 형장을 치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연산군일기> 11년 12월 29일조
이 우희가 연행된 날짜의 기록에서 연산군은 '나례는 배우의 장난으로,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이유를 들어 나례 중지를 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로 <왕의 남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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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 ↑ 태종실록 8년(1408) 4월 16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