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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조선시대 행사에서의 연희

조선시대의 전통연희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수륙재, 우란분재, 문희연, 관아 행사, 동제, 사대부가의 잔치 등에서 연행되었다. 이밖에도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을 모신 문묘를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사 시, 왕세자의 태를 태봉에 묻을 때,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며 일종의 모의 농경의례인 내농작을 거행할 때, 지방관을 환영할 때 등에도 연희가 연행되었다.
연희는 왕조의 성립과 교체와 같은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장르였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 행사들이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어 국가 행사와 궁정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이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의 연희 문화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국가적인 행사로서의 나례는 축소, 폐지되었고, 연행하던 연희자들은 민간에서의 공연활동을 이어갔다.

Synopsis

전통연희가 행해졌던 행사 scene을 메타버스로 구현
각 행사와 관련된 역사문화 지식을 wiki를 통해 정리

Storyline

Episode 1: 중국 사신 영접행사에서의 전통연희-아극돈의 조선 방문

중국의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은 1717년에서 1725년 사이 네 차례나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이다.
1717년 조선에서 숙종임금의 안질 치료에 필요한 공청을 구하러 청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강희제는 숙종의 치세를 높이 평가하며 특별히 공청을 보내도록 명했고, 그 해 9월 18일 아극돈을 정사, 장정매를 부사로 하는 사신단이 파견되어 조선을 방문했다. 이 때 아극돈은 수많은 즉흥시를 남겼고, <아극돈시>라는 시집으로 남아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아극돈이 두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조선에서 귀국한지 3일째 되는 날 황태후가 승하하자 이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임명되며 오게 되었다. 서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722년 4월로 경종임금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어 그 이복동생인 연잉군 이금 (영조)을 세제로 삼는 다는 조서를 전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수행인원이 75명이되는 대규모 사신단이었다. 이후 1724년 12월 19일 네번째로 조선을 받문하게 되는데, 이때는 각라서로와 아극돈이 경종에게 사제 및 세제 이금을 국왕으로 봉한다는 조서를 전하는 임무로 온 것으로, 조선에서 정사 각라서로가 병을 앓는 바람에 이듬해 3월에 귀국하게 된다.
아극돈은 1725년(영조1) 조선에 관한 풍물과 자신에 대한 영접 행사를 묘사한 스무폭짜리 화첩 <봉사도>를 만들었다. 이 중 제7폭에 그려진 모화관 마당 연희 공연에서는 대접돌리기, 땅재주(물구나무서기), 탈춤, 줄타기 등이 묘사되어 있고, 소규모 산대도 보인다. 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도 보인다. 이 7폭의 배경이 되는 모화관은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머물던 곳으로 지금의 독립문 근처이다.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한 대산대를 만드는 데만 각각 수군 천사백명과 천삼백명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중국 사신 영접의 나례는 정조 8년 (1784)에 폐지되었다.[1]

Episode 2: 부묘 후 환궁행사와 전통 연희

궁중 연향의 공연 공간은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싼 구조를 이루며 무대와 객석이 고정된 단일 공간의 성격인 반면, 행렬 의식에서의 공연공간은 무대가 고정되고 객석이 이동하거나, 객석이 고정되고 무대가 이동하는 복합공간의 성격을 가진다. 궁중 연향에서는 술과 음식을 올리는 의례 절차에 따라 7~9개의 정재가 공연된 반면, 행렬 의식에서는 복잡한 공간의 성격에 따라 정재의 공연 방식과 무대 장치에 변화를 주었다. 즉 공연 종목을 축소하되 출연자의 수를 늘리고 크고 화려한 무대장치를 사용해 거리 공연의 효과를 높인 것이다. 반주에 있어서도 연향에서는 등가악을 사용한 반면 행렬 의식에서는 고취악을 사용했다. 행렬 의식은 특별한 계기를 맞이해 궁궐 밖에서 거행하는 일련의 의전 행사를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 친경의, 배릉례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 여러 행사를 베풀었다.

 어가(御駕)가 움직이면 고취(鼓吹)가 진작(振作)하고 종친(宗親) 및 백관(百官)들이 몸을 굽힌[鞠躬]다. 
〈어가가〉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하[平身]여 차례로 시위(侍衛)하고 도종(導從)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의금부(義禁府)의 군기감(軍器監)이 종묘(宗廟)의 동구(洞口)에서 나례(儺禮)를 올리고,
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종루(鍾樓)의 서가(西街)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교방(敎坊)에서 혜정교(惠政橋) 동쪽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이어 정재(呈才)한다.
그리고 또 광화문(光化門) 밖의 좌우(左右)에다 채붕(綵棚)을 맺는다.
어가(御駕)가 광화문(光化門) 밖의 시신 하마소(侍臣下馬所)에 이르러 잠시 멈추면,
시신(侍臣)이 모두 말에서 내려 나누어 서서 몸을 굽힌[鞠躬]다.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한[平身]다. 어가(御駕)가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면, 악(樂)이 그친다.
판통례(判通禮)가 연(輦) 앞에 나아가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라."고 계청하고,
부복하였다 일어나서 돌아와 시립(侍立)한다.
전하께서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들어가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고,
시신(侍臣)이 뒤를 따라 전정(殿庭)에 이른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전의(典儀)가 종친 및 백관들의 자리를 설치하고,
병조(兵曹)에서 여러 위(衛)를 거느리고 대장(大仗)을 진열(陳列)하고 군사(軍士)들을 늘어 세운다.
판통례(判通禮)가 외판(外辦)을 아뢰면, 전하께서 여(輿)를 타고 나와 어좌(御座)에 올라가서 하례(賀禮)를 받고,
이내 유서(宥書)를 반포하기를 상시(常時)의 의식과 같이 한다.
【다만 여러 도(道)에서 하례(賀禮)하여 올리는 전(箋)을 받는 것이 다르다.】
또 유사(攸司)에 명하여 향관(享官)과 여러 집사(執事)들에게 잔치를 내린다.
세종실록 권135 오례 흉례 의식 부묘의


임금의 행차가 지나는 좌우 양쪽에 나례를 별였고, 광화문 밖에 산대나 채붕을 좌우에 하나씩 설치했다. 연(가마)이 광화문 밖에 이르고, 채붕에서 공연이 이어졌다고 한다. 인조는 반정 이후에 왕실의 유연(遊宴)에 관한 기물들을 대로에서 불태우는 상징적 행사를 단행하고, 왕실 의식과 행사를 간소화하며, 환궁 행사로서의 나례는 폐지했다.

Episode 3: 과거급제자의 행사와 전통연희 - 은영연, 삼일유가, 홍패고사 그리고 문희연까지

  1. 과거 시험 이후, 문과와 무과의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고 과거급제자에게 왕의 명의로 발급되는 합격증서인 홍패(紅牌)와 부관 뒤에 꽂는 어사화(御賜花)를 하사하는 의식인 '문무과 방방의(文武科放榜儀)'가 열린다. 이때 하사 받은 어사화는 이후 과거급제자가 유가(游街)를 할 때 머리에 쓰는 부관 뒤쪽에 꽂고 행진을 할 때 사용하고, 홍패는 삼일유가 후 광대들과 집에 도착해 고사를 지낼 때 올려놓는다. 홍패에는 과거급제자의 성명, 성적, 등급이 기록되어 있다. 방방의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관련 기록물로는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1795, 정조의 화성 능행을 그린 화성능행도병에 포함된 장면)로 낙남헌에서 과거를 치르고 난 뒤 방방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이 늘어서 있고, 그림 왼쪽 하단에 유가를 위해 화려한 복장을 한 광대들의 모습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2. 문무과 방방의가 끝나면 임급이 과거급제자에게 베푸는 잔치인 '은영연'이 열린다. 은영연에서 접시돌리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의 잡희가 펼쳐지는데, 이는 《은영연도》(1580, 요메이분코 소장, 일본)라는 그림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3. 이후 한양에 거주하는 급제자는 한양거리에서 세악수, 광대, 재인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사흘간 돌아다니며 거리 행진을 하는데, 이를 '삼일 유가'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청구야담』에 실린 기록과 유득공의 『경도잡지』 등의 문헌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때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김준근의 《청출신신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일 유가는 양반들의 생애를 그린 《평생도》에도 묘사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김홍도가 그린 모당 홍이상의 평생도와 담와 홍계희의 평생도에도 각각 묘사되어 있다. 어사화를 부관 뒤에 꽂고 행진하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보통 유가에는 악사 5~6명과 광대 3~4명이 따랐다고 하는데, 그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다.
    1. 한양에 거주하는 급제자는 삼일유가가 끝나면 삼일유가를 함께 한 광대들과 집에 도착해 광대가 마당에 소반을 놓고, 그 위에 쌀, 그 위에 홍패를 올리고 고사를 지내는데 이를 '홍패고사'라고 한다. 고사의 내용은 우주가 생긴 이래 삼한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를 약술하고, 그 집의 세간 등을 묘사하고,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고지하고, 앞으로 부귀를 누리라는 덕담으로 구성된다.
    2. 급제자의 집에서 과거 급제 축하를 위해 '문희연'을 펼친다. 이때 전문 연희자들이 성대한 연희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는 유득공의 『경도잡지』, 유만공의 『세시풍요』, 송만재의 『관우희』 등의 문헌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4. 반면 지방 출신 과거 급제자는 '도문(到門)'이라고 하여 60일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가 문묘에 절을 한 후 거리 행진을 한다.
    1. 도문 이후에는 소분 절차를 진행한다. 소분은 선산에 성묘를 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2. 소분 후 급제자의 지역 관아에서 과거 급제 축하를 위해 '영친연'을 열어준다. 이 잔치는 그 지방의 수령이 급제자와 부모를 관아에 초청해 베푸는 축하 잔치이다.


은영연, (삼일)유가, 홍패고사, 문희연, 영친연 등의 행사를 위해 전문 연희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과거 시험이 임박하면면 지방 연희자들이 한양으로 몰렸다. 여러 놀이패가 상경해 문희연에 초청받기 위해 기량을 과시하는 모습에 대해 <관우희> 44수와 45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Episode 4: 그림으로 보는 조선의 다양한 공연 무대 모습

조선 시대 공연예술의 연행에 있어 다양한 무대가 존재했다. 조선 전기 명나라 사신이 올 때 채붕 잡희를 갖추어 맞이하고 예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8월 15일 갑진 1번째기사) 채붕 또는 산대는 사신을 영접할 때는 모화관 앞에 설치되기도 하였고 광화문 밖에도 설치된 적이 있다. (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 9월 21일 신사 1번째 기사 ) 산대의 크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31권, 세종8년 2월 28일 임진 3번째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병조에서 계하기를, 
"산대(山臺)의 높이는 상세한 규정이 없어서,
산대를 맺을 적마다 좌우편쪽만 높게 하려 하였다가,
바람이 심하면 혹 기울어져 쓰러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산대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60척 이상을 더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0척은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8m 정도이고, 그 이상으로 못 짓게 하는 규정을 만들자 한 것으로 보아 높이가 최소 18m 였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대의 모습은 어땠는지는 전해지는 그림자료를 통해 볼 수 있다.

  1. 청나라의 정여가 그린 봉사도 7폭에는 예산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 그려진 산대는 움직이는 소규모의 예산대로, 예산대는 산의 형태를 띤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을 형상화해서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산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들을 설치하여 잡상雜像놀이를 펼치는 무대 구조물이다. 이 무대는 이동이 가능하게 바퀴가 달린 것으로 다른 장소에서 제작됐거나 보관하고 있다가 행사 장소로 끌고 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기서의 산대는 수레와 3단의 가산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인데, 1층은 수레 윗면인 평지와 산기슭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누각과 원숭이 형상, 맨 위층인 3층에는 동자와 깃발이 있다. 그림만으로 여기 사람이 등장한 것인지 인형장치를 이용해 연출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2. 1752년~1796년까지 경기 화성에 성을 쌓고 그에 대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 담긴《낙성연도》를 통해 채붕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흑백 그림을 보면 채붕 안이 비어있다. 2016년 6월 27일, 프랑스 국립파리동양어학교와 국립도서관에서 어람용 채색본 '정리의궤'가 발견되는데, 이는 국내에는 없는 판본으로 '현릉원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성역의궤' 등에 나오는 핵심 사항을 한글 필사본으로 정리한 채색본이다. 여기에는 기존 의궤에서 보던 것과 달리 채붕의 모습에 색을 입힌 것은 물론 실제 연행의 한 장면을 담아 무대와 공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왼쪽 채붕에는 붉은색 탈을 쓴 취발이와 붉은색 치마에 푸른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고, 오른쪽 채붕에는 칡베장삼을 입은 노승과 붉은색 치마에 노란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관객들을 향해 노래와 재담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침향산'은 향악정재를 공연할 때 쓰는 산 모양의 무용 물품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무대를 지칭하기도 한다. 침향산은 산대가 폐지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산대로 기존 산대보다 크기를 줄이고 바퀴를 달아, 별도의 보관장소에서 보관하며 정기적인 보수작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해당 기록은 광해군일기 (중초본) 1117권, 광해 9년 7월 8일 경오 3번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침향산은 산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중인형, 불탑, 동물 잡상들을 꾸며 놓았다.


Storytelling Network


Metaverse

메타버스의 구현 내용은 줄타기, 솟대타기, 땅재주 등 연희 종목들을 영상 갤러리로 구성하고, 해당 기량과 관계된 훈련/운동 영상을 함께 배치
전체 무드는 봉사도와 왕의 남자를 떠올렸을 때 가진 시각 자료들을 활용할 예정

references

  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참고문헌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은영연도>, 1580, 요메이분코, 일본.
아극돈, <봉사도>, 1725. <연산군일기>
<단종실록>
김홍도, <평안감사향연도>
김홍도, <8폭 평생도> 중 삼일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