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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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최동원, 중앙일보.
이름 최동원
출생 1958.05.24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사망 2011.09.14 /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학력 구덕초 - 토성중 - 경남고 -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 77)
신체 179cm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1차 지명 (롯데)
연봉 8910만원 / 1988년
등장곡 없음
응원가 없음



정의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롯데 자이언츠에서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인물.

뛰어난 실력과 투혼으로 롯데 자이언츠 우승에 기여한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프로 초창기 선수 권리의 신장을 위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최초의 회장을 역임함.

아마추어 시절부터 이어진 혹사 때문에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


내용

아마추어 시절

최동원 선수는 경남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5년과 1976년 청룡기 우승을 이끌며 '고교야구의 전설'로 불렸고,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혹사'의 시작을 알렸다. 연세대학교와 실업팀 롯데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하며 대통령기 우승,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금메달 등을 차지하며 한국 야구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프로 시절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최동원 선수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는 한국시리즈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으로, 그를 한국시리즈의 사나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1988년 선수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선수협의회 결성을 주도하다 구단의 반발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1990년,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그의 투혼과 야구에 대한 열정은 한국 야구사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는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1]


은퇴 후

야구계 활동과 지도자 생활 은퇴 후, 최동원은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걷지 못했다. 선수협의회 주도에 대한 여파로 프로 구단 취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팬들에게 야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전달했다.

정치 활동과 개인사 최동원 선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지만, 아쉽게 낙선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출마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간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야구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고, 투병 중에도 야구 경기를 관람하거나 야구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등 야구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그러다 2011년 9월 14일, 최동원은 영원한 별이 됐다. 그는 오랜 투병 끝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은 야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를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졌다. 롯데 자이언츠는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고, 한국 프로야구는 그의 투혼과 열정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한국 야구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2]

멀티미디어


[

주석

  1. 최동원 선수 경력, 나무위키.
  2. 최동원 은퇴 후, 나무위키.
<최동원의 수상 내역>
연도 상세
1984 한국시리즈 우승 /
1984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4 MVP
1984 최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