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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사비시대, 왕실과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던 곳</big>
 
<big>사비시대, 왕실과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던 곳</big>
  
정림사지는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옮긴 시기의 대표적인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1942년발굴조사 때, ‘정림사(定林寺)’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어 그 후부터 정림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림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가 밝혀졌다. 정림사는 금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 배치를 보여준다. 이는 더 후대에 조성된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어서 백제의 가람 배치 양식이 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백제가 사비에 도읍하던 시기의 도성 풍경을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에서는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寺塔甚多).”고 하였다. 실제 부여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군수리사지,가탑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용정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호암사지, 외리 사지, 임강사지, 천왕사지 등이 확인됨으로써 중국 사서의 기록이 타당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웅진(오늘날의 공주)에 도읍하던 시기의 사찰은 대통사와 수원사 및 부여 일대의 용정리사지에 불과하다. 그 반면 사비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창건되고, 불교가 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는 왕권 강화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공간이 사찰이었기에 사찰은 왕실과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백제인 전체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특히 정림사는 사비도성 내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이어서 그 상징성이 더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정림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정림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다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를 남겼던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妖婦)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아첨꾼이었다. 이처럼 당의 장수 소정방은 당의 시각에서 백제 멸망의 이유를 적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처음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운 전승기념탑이라는 오해를 받는 수모를 겪었고, 해방 후에는 치욕적인 탑을 허물어 버리자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소정방이 정림사의 탑에 글귀를 남긴 것은 정림사가 백제 도읍 사비를 대표하는 사찰, 왕실과 국가의 명운을 상징하는 중심 사찰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꿋꿋하게그 자리를 지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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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는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옮긴 시기의 대표적인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1942년발굴조사 때, ‘정림사(定林寺)’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어 그 후부터 정림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림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가 밝혀졌다. 정림사는 금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 배치를 보여준다. 이는 더 후대에 조성된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어서 백제의 가람 배치 양식이 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백제가 사비에 도읍하던 시기의 도성 풍경을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에서는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寺塔甚多).”고 하였다. 실제 부여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군수리사지,가탑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용정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호암사지, 외리 사지, 임강사지, 천왕사지 등이 확인됨으로써 중국 사서의 기록이 타당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웅진(오늘날의 공주)에 도읍하던 시기의 사찰은 대통사와 수원사 및 부여 일대의 용정리사지에 불과하다. 그 반면 사비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창건되고, 불교가 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는 왕권 강화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공간이 사찰이었기에 사찰은 왕실과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백제인 전체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특히 정림사는 사비도성 내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이어서 그 상징성이 더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정림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정림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다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를 남겼던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妖婦)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아첨꾼이었다. 이처럼 당의 장수 소정방은 당의 시각에서 백제 멸망의 이유를 적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처음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운 전승기념탑이라는 오해를 받는 수모를 겪었고, 해방 후에는 치욕적인 탑을 허물어 버리자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소정방이 정림사의 탑에 글귀를 남긴 것은 정림사가 백제 도읍 사비를 대표하는 사찰, 왕실과 국가의 명운을 상징하는 중심 사찰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꿋꿋하게그 자리를 지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f url="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4074&amp;bbsId=BBSMSTR_1021">출처 : 문화재청, 『충청도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문화재청, 2012, pp. 171-174.</ref>
  
  
 
<big>1,4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백제의 탑</big>
 
<big>1,4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백제의 탑</big>
  
소정방이 당나라의 시각으로 전승 내용을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히려 가장 백제다운 탑이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수도가 자리 잡고 있는 부여에서 1,400년 동안 큰 훼손없이 원래의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격의 백제 국가유산에 해당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백제탑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특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짜인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 오층탑은 7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고혹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이 탑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조 건축물의 양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창의적으로 표현되었다는 평과 함께 목조탑의 양식을 계승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源) 양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국가유산으로 꼽힌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석불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도 남아 있어서,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또한 발굴조사 때 백제와 고려시대의 기와 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 토기 등의 생활용구와 흙으로 빚은 불상 편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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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당나라의 시각으로 전승 내용을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히려 가장 백제다운 탑이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수도가 자리 잡고 있는 부여에서 1,400년 동안 큰 훼손없이 원래의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격의 백제 국가유산에 해당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백제탑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특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짜인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 오층탑은 7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고혹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이 탑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조 건축물의 양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창의적으로 표현되었다는 평과 함께 목조탑의 양식을 계승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源) 양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국가유산으로 꼽힌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석불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도 남아 있어서,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또한 발굴조사 때 백제와 고려시대의 기와 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 토기 등의 생활용구와 흙으로 빚은 불상 편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ref url="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14074&amp;bbsId=BBSMSTR_1021">출처 : 문화재청, 『충청도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문화재청, 2012, pp. 171-17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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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25일 (월) 08:40 판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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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_자리_지킨_사비의_얼굴 [탑명(塔銘)]大唐平百濟國碑銘 hasContextualElement
1400년_자리_지킨_사비의_얼굴 [명문(銘文)]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 hasContextualE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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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시대, 왕실과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던 곳

정림사지는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옮긴 시기의 대표적인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1942년발굴조사 때, ‘정림사(定林寺)’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어 그 후부터 정림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림사의 가람 배치와 규모가 밝혀졌다. 정림사는 금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 1금당식 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 배치를 보여준다. 이는 더 후대에 조성된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어서 백제의 가람 배치 양식이 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백제가 사비에 도읍하던 시기의 도성 풍경을 중국 사서인 『주서(周書)』 백제전에서는 “절과 탑이 매우 많았다(寺塔甚多).”고 하였다. 실제 부여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군수리사지,가탑리사지, 금강사지, 서복사지, 용정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호암사지, 외리 사지, 임강사지, 천왕사지 등이 확인됨으로써 중국 사서의 기록이 타당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웅진(오늘날의 공주)에 도읍하던 시기의 사찰은 대통사와 수원사 및 부여 일대의 용정리사지에 불과하다. 그 반면 사비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창건되고, 불교가 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는 왕권 강화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공간이 사찰이었기에 사찰은 왕실과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백제인 전체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특히 정림사는 사비도성 내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이어서 그 상징성이 더 큰 사찰이었던 것이다. 정림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정림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다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를 남겼던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밖으로는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부(妖婦)를 믿어 형벌이 미치는 것은 오직 충량(忠良)에게 있으며 총애와 신임이 더해지는 것은 반드시 먼저 아첨꾼이었다. 이처럼 당의 장수 소정방은 당의 시각에서 백제 멸망의 이유를 적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처음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세운 전승기념탑이라는 오해를 받는 수모를 겪었고, 해방 후에는 치욕적인 탑을 허물어 버리자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소정방이 정림사의 탑에 글귀를 남긴 것은 정림사가 백제 도읍 사비를 대표하는 사찰, 왕실과 국가의 명운을 상징하는 중심 사찰로서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꿋꿋하게그 자리를 지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름입니다, 너무 많은 등


1,40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백제의 탑

소정방이 당나라의 시각으로 전승 내용을 새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오히려 가장 백제다운 탑이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수도가 자리 잡고 있는 부여에서 1,400년 동안 큰 훼손없이 원래의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격의 백제 국가유산에 해당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백제탑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특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당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짜인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 오층탑은 7세기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고혹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이 탑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목조 건축물의 양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창의적으로 표현되었다는 평과 함께 목조탑의 양식을 계승한 한국 석탑의 시원(始源) 양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국가유산으로 꼽힌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석불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도 남아 있어서,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또한 발굴조사 때 백제와 고려시대의 기와 편을 비롯하여 백제시대의 벼루, 토기 등의 생활용구와 흙으로 빚은 불상 편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름입니다, 너무 많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