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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일 (수) 17:24 기준 최신판

백제 무왕
(武王)
백제 무왕.jpg
한글 백제 무왕
한자 武王
생몰년 (미상)~641년(무왕 42)
이칭 장(璋),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
배우자 사택왕후(沙宅王后), 선화공주(善花公主)
자녀 백제 의자왕(義慈王)
부(父) 백제 법왕(法王)



내용

무왕(武王)[재위 600~641]은 백제의 제30대 왕으로, 전략적 요충지이자 성장 세력 기반인 익산 지역에 왕궁평성(王宮坪城)과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는 불교 정책을 펼쳤다.

무왕은 600년에 즉위하였다. 중국과의 외교를 통하여 책봉을 받게 됨으로써 왕위 계승에서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였다. 대외적으로는 수나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 하였는데, 607년 3월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 공격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고구려에 대한 포위 전략을 지속함으로써 국방 정책에 비중을 두었다. 무왕은 재위 41년 동안 신라와 총 13회의 전쟁을 치르며 영토 회복에도 힘썼다, 특히 624년의 전투를 통하여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여 642년 의자왕 대의 대야성전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활동으로 무왕의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국력은 회복되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익산 지역에 미륵사와 왕흥사 등 왕건 강화와 관련한 사찰을 건립하였으며, 궁궐을 중수하고 6좌평제를 확립하여 통치 체제의 안정을 이루었다. 641년 사망하였다.

2018년 익산시 쌍능길 65[석왕동 6-13]에 있는 익산 쌍릉 대왕릉의 인골 분석을 통하여 피장자는 나이가 최소 50대에서 60대의 노년층이며, 연대는 서기 620년에서 659년으로 산출되었다. 따라서 641년 사망한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1]

참고문헌

Web Resource

Category Title Site Url
사전 백제 무왕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aks.ai/GC07500672
사진 백제 무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75/L/menu/473brdType=R&thisPage=5&bbIdx=8483&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주석

  1. "백제 무왕", 『디지털익산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