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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line Narrative===
 
===Storyline Narrative===
  
=='''에피소드 1: 조선시대 공주 덕온의 생애와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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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조선 후기 덕온공주의 생애'''==
  
 
{{StoryGraph | db =Class2024 | project =skku2025Seung | title =SKKU2025:Seung-Ep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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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Korean Narrative:===
 
===Episode 1 Korean Narrative:===
조선 시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와 순조(純祖, 1790~1834)의 사랑은 여러 자녀를 통해 역사에 기록되었다. 순원왕후는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그리고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를 낳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복의 아름다움과 같이 세세한 부분에서도 깊은 의미와 역사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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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궐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인물과 관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덕온공주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덕온공주는 1822년에 태어나 1829년에 봉작되었으며, 1837년에는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1823~1887)과 화려한 혼례를 올렸다. 이 혼례는 『덕온공주가례등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덕온공주의 혼례는 당시 사회의 문화와 예법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덕온공주와 남녕위 윤의선 사이에는 친자식이 없었지만,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양자로 삼아 그들의 가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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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온공주는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43 순조]}}(純祖, 1790~1834)의 딸로,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924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소중한 딸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1822년에 태어나 여러 자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녀의 자매들로는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명온공주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복온공주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그리고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811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있었죠. 어머니 순원왕후는 이들 모두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덕온공주의 유품은 그녀의 삶과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유품은 후대인 윤백영(尹伯榮, 1888~1986)에 의해 기증되었다고 전해진다. 윤백영은 윤용구의 딸로, 가문의 역사와 유산을 이어받아 그 의미를 새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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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덕온공주는 공식적으로 {{형광펜|봉작}}을 받았고,<ref>[https://sillok.history.go.kr/id/kwa_12903006_004 『순조실록』 30권, 순조 29년(1829) 3월 6일 경자 4번째기사.]</ref> 이로 인해 그녀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녀의 {{형광펜|혼례}}는 1837년에 열렸으며, 이 중요한 사건은 {{형광펜|[https://jsg.aks.ac.kr/dir/view?dataId=JSG_K2-2631 『덕온공주가례등록』]}}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513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1823~1887)이었고, 이 결혼은 두 사람의 인연을 공고히 했습니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xa_10308013_001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1837) 8월 13일 무오 1번째기사.]</ref>
  
숙의 박씨(淑儀 朴氏, ?~1854)는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를 낳았고, 순조는 숙의 박씨와 순원왕후를 비롯한 여러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는 순조의 정비로서, 그녀의 자녀들은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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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들은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477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윤용구는 훗날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덕온공주와 윤의선의 이야기는 조선 왕실 내에서 사랑과 의무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의 사회적 지위, 결혼, 가족 관계 등을 통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열어준다. 각각의 인물과 사건은 "조선시대 공주 덕온의 생애와 유품"라는 주제 아래에서 조선 시대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교훈과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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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왕후는 다섯 명의 자녀들을 두었고, 순조의 후궁인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숙의_박씨_(순조) 숙의 박씨]}}(淑儀 朴氏, ?~1854) 또한 {{형광펜|[https://dh.aks.ac.kr/sillokwiki/index.php/영온옹주(永溫翁主)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왕실은 다양한 관계로 얽혀 있었으며, 각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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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관계와 사건들은 조선 왕실의 복잡한 구조와 함께 그 안에서 각 인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덕온공주와 그녀의 가족은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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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유학 생활에서 더욱 깊어진 우리 옷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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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석주선, 일본 유학 생활에서 더욱 깊어진 우리 옷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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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Korean Narrative:===
 
===Episode 2 Korean Narrative:===
한때 조선의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평양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그중 김의식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석승서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녀의 아들 중 한 명인 석주명은 근대 조선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다른 아들 석주선은 예술과 교육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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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펜|김의식}}(金毅植)은 {{형광펜|석승서}}(石承瑞)와의 사랑의 결실로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6 석주명]}}(石宙明, 1908~1950)과 {{형광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훌륭한 자녀를 두었다. 석주명은 그의 부모님이 보여준 지혜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한편, 그의 여동생 석주선은 어머니 김의식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석주선은 평양 명륜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 고등양재학원에서도 공부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일본 갱생복 디자인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하며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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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은 1934년에 {{형광펜|명륜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녀의 학업과 예술적 열정을 일본으로 옮겼다. 1938년, 석주선은 {{형광펜|일본 도쿄}}로 이사하여,<ref>1938년 동경제국대학에서 열리는 국제에스페란토 대회에 참가하는 석주명을 따라 일본으로 가게 된다.([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151210905&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1쪽.)</ref> 그곳에 위치한 {{형광펜|고등양재학원}}에 입학하였다. 1940년, 이곳을 졸업<ref>일본 동경 고등양재학원 졸업연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보인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2012년에 발간한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221쪽)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 기사)에서는 석주선이 1940년에 졸업했다고 하고 있으나,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석주선 석주선]" 기사)에서는 1941년에 졸업했다고 표기하고 있다.</ref>한 그녀는 일본에서 열린 {{형광펜|갱생복 디자인 공모전}}에 참가하여 1등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공모전은 {{형광펜|일본 주식회사 주부의 친구}}가 주관한 것이었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16쪽.</ref>
  
평양의 요릿집 우춘관은 그의 아버지 석승서가 관리하던 곳으로, 이곳은 평양권번이라 불리는 기생조합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석주선의 가족은 예술과 문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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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은 {{형광펜|오페라 무대의상}} 창작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고, 이는 그녀의 예술적 성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형광펜|[https://en.wikipedia.org/wiki/Tamaki_Miura 미우라 타마키]}}(三浦 環, Miura Tamaki, 1884~1946) 같은 유명한 오페라 가수들에 의해 입혀졌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16쪽.</ref>
  
한편, 일본의 유명한 오페라 가수 미우라 타마키는 오페라 무대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습니다. 이 무대의상은 석주선에 의해 창작되었으며, 그의 예술적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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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형 석주명 역시 그의 아버지 석승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 속에서 성장했다. 김의식과 석승서 부부의 지혜와 사랑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삶과 선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한 가족이 남긴 예술적 유산과 그 영향력을 드러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박물관과 역사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주선이 창작한 작품들은 그가 꿈꾸던 세상에 대한 창조적 표현으로,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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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김의식 가족의 이야기는 가족 간의 사랑과 영향이 어떻게 자녀들의 삶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간 이들 모두는 서로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응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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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석주선 박사와 덕온가(德溫家) 복식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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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3: 덕온가(德溫家) 유물과 석주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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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Graph | db =Class2024 | project =skku2025Seung | title =SKKU2025:Seung-Ep03 }}
  
 
===Episode 3 Korean Narrative:===
 
===Episode 3 Korean Narrative:===
옛날, 덕온공주라는 이름의 고귀한 공주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녹색당의와 원삼을 입고, 혼례라는 특별한 행사에서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수많은 귀중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고, 이 유물들은 후대에 전해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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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이야기는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513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1823~1887)과 그의 아내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덕온공주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로부터 시작됩니다. 남녕위 윤의선은 덕온공주의 남편으로, 그들의 사랑은 깊고 진실되었습니다. 하지만 덕온공주는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들은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477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1959년 8월 9일, 유물 수집가 석주선과 그의 친구 윤백영은 덕온공주의 녹색당의와 자적당의를 수집하였습니다. 이 수집은 1960년대에도 계속되어, 원삼과 제비부리댕기 등 다양한 의상이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유물들은 덕온공주의 혼례와 봉작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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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온공주는 그녀의 소중한 유품을 남겼습니다. 이 유품들은 덕온공주의 삶과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간직한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이 유품들은 이후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윤백영 윤백영]}}(尹伯榮, 1888~1986)에게 기증되었고, {{형광펜|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에 포함되어 보존되었습니다.<ref>박성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389 덕온공주 유물(德溫公主 遺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석주선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윤백영과도 오랜 친구였습니다. 그는 덕온공주의 집안 유물을 모으고, 이를 박물관에 전시하여 많은 이들이 한국의 전통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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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은 이 유물을 수집하며 덕온공주의 이야기를 더욱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윤백영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며 역사적 가치를 존중했습니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151210905&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3~224쪽.</ref>
  
유물 수집이 진행되는 동안, 1963년과 1964년에 걸쳐 추가적인 의상들이 수집되었고, 1969년에는 부금견마기가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모든 유물들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존되어, 역사의 한 조각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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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는 {{형광펜|덕온공주의 유품}}을 통해 조선 시대의 삶과 관계를 재조명하며,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덕온공주의 유품과 집안의 유물은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후손들에게 값진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덕온공주의 이야기와 그녀의 유물들은 석주선과 윤백영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유산을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옷과 역사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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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남겨진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그 가치가 바래지 않으며, 조선 왕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오늘날까지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와 유물은 한국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과거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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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감격스러운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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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4: 감격스러운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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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Graph | db =Class2024 | project =skku2025Seung | title =SKKU2025:Seung-Ep04 }}
  
 
===Episode 4 Korean Narrative:===
 
===Episode 4 Korean Narrative:===
1958년, 서울 북창동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공보관에서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이조의상전시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행사는 석주선이라는 학자가 주도하여 한국의 전통 의상을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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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형광펜|서울 북창동}}에 자리한 {{형광펜|중앙공보관}}에서는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인 {{형광펜|'이조의상전시회'}}(李朝衣裳展示會, 1958.8.15.~8.22.)가 열렸습니다. 이 전시회는 {{형광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인물이 주도하여 기획되었으며, 그의 열정과 지식이 이 행사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ref>장상훈, "[https://webzine.museum.go.kr/sub.html?amIdx=15080 가장 많은 특별전시회가 열린 특별한 한 해]", 『박물관신문』 제609호(2022년 05월), 국립중앙박물관;<br/>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2~27쪽;<br/>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151210905&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2쪽.</ref>
  
석주선은 한국의 전통 복식을 연구하며,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의 지도 아래 열린 이조의상전시회는 많은 이들에게 한국 의상의 아름다움과 그 역사적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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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은 전통 의상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큰 열정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그는 전시회를 통해 한국의 고유 복식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조의상전시회는 성황리에 개최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시회는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창덕궁에 소장된 유물의 축소판 복원품을 통해 옛 시대의 향기를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원품은 총 240여 점이 전시되어 관람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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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는 중앙공보관에서 진행되었으며, 건물은 예전에 서울 북창동에 위치했던 곳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형광펜|창덕궁 소장 유물의 축소판 복원품}} 240여 점을 선보이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석주선의 기획 아래 꼼꼼하게 큐레이트되었고, 각기 다른 시기의 복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었습니다.
  
중앙공보관은 과거 서울 북창동에 위치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 자리를 다른 건물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곳에서 열린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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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국의 전통 의상이 가진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조의상전시회는 단순한 복식 전시를 넘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시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전시는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소중한 문화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조의상전시회는 단순한 의상 전시가 아니라, 한국 문화의 깊이를 탐구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석주선의 열정과 노력이 담긴 전시회는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한국 전통 의상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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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Graph | db =Class2024 | project =skku2025Seung | title =SKKU2025:Seung-Ep05 }}
 
{{StoryGraph | db =Class2024 | project =skku2025Seung | title =SKKU2025:Seung-Ep05 }}
  
===Episode 4 Korean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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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Korean Narrative:===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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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화려했던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378 창덕궁]}}의 복원된 유물들은 고전 의상전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1963년, {{형광펜|고전의상전}}은 {{형광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인물의 주도로 개최되었다.<ref>"[https://www.donga.com/archive/newslibrary/view?ymd=19630803 이조시대의상전개최]", 『동아일보』 석간 5면 사회, 1963.08.03.</ref> 그는 한국 전통 복식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여러 차례 전시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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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상전에서는 {{형광펜|대한제국 적의 복원품}}과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389 덕온공주의 유품]}}이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전시회는 단순히 복식의 전시가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덕온공주의 유품과 {{형광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3768 심동신 금관조복]}}은 {{형광펜|이조의상유물전}}(1966년)에서도 전시되어, 그 가치가 한층 더 빛났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8~30쪽;<br/>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151210905&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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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구황실재산사무총국 구황실재산관리총국]}}에 보관되었던 {{형광펜|활옷 조각}}<ref>"[https://museum.dankook.ac.kr/web/museum/-15?p_p_id=Relic_WAR_museumportlet&_Relic_WAR_museumportlet_RELIC_NB=B003156&_Relic_WAR_museumportlet_action=view_message 활옷 조각]",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ref>은 불행히도 1960년에 발생한 화재<ref>"[https://ko.wikipedia.org/wiki/구황실재산사무총국#연혁 구황실재산사무총국]", 『위키백과』;<br/>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3쪽;<br/>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151210905&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2쪽.</ref>로 인해 한때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다행히도 창덕궁 소장 유물로서 복원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활옷 조각은 구황실재산관리총국과 {{형광펜|구황실재산관리총국 화재}}와 관련이 깊다. 이는 석주선이 주도한 전시회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고, 그가 이끌었던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인 {{형광펜|이조의상전시회}}(1958년)에서 240여 점의 {{형광펜|창덕궁 소장 유물 축소판 복원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ref>본 디지털 큐레이션 스토리의 "[https://dh.aks.ac.kr/~hyunseung/wiki/index.php/SKKU2025:Seung-Ep04#cite_note-1 에피소드 4: 감격스러운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의 주석과 동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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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석주선은 다양한 전통 복식 전시회를 통해 한국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잊혀졌던 유물들이 다시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고전 의상전은 단순한 전시가 아닌,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의미 깊은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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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Korean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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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Korean Narrative:===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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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펜|[https://www.dankook.ac.kr/web/kor 단국대학교]}}는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장형_(1889년) 장형]}}(張炯, 1889~1964)에 의해 설립된 명문 대학교로,<ref>"[https://www.dankook.ac.kr/web/kor/-12 종합대학기]", 『단국대학교』</ref> 그의 아들 {{형광펜|[https://ko.wikipedia.org/wiki/장충식_(1932년) 장충식]}}(張忠植, 1932~)은 {{형광펜|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을 창립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석주선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형광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18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은 1911년에 태어나 1996년에 세상을 떠난 한국의 저명한 인물로, 그는 {{형광펜|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을 수집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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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은 현재 {{형광펜|[https://museum.dankook.ac.kr/web/museum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위치해 있으며, 이는 석주선의 노력 덕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이 유물들을 수집하여 {{형광펜|석주선의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후에 이 소장품들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특히, 1976년에는 민속복식품 3,365점을 기증<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276785942&viewType=AH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36쪽.</ref> 하여 한국 전통문화 보존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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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선기념박물관은 단국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으로 불렸습니다. 이 박물관은 석주선과 그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수집품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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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은 아버지 장형의 뜻을 이어받아 박물관과 대학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를 통해 한국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단국대학교와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지키고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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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2일 (일) 13:59 기준 최신판

스토리라인: 조선시대 공주의 복식이 현대 후손에게 전해지기까지



Storyline Narrative

에피소드 1: 조선 후기 덕온공주의 생애



Episode 1 Korean Narrative:

조선 시대의 궁궐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인물과 관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덕온공주는 순조(純祖, 1790~1834)의 딸로,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소중한 딸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는 1822년에 태어나 여러 자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녀의 자매들로는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그리고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있었죠. 어머니 순원왕후는 이들 모두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1829년, 덕온공주는 공식적으로 봉작을 받았고,[1] 이로 인해 그녀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녀의 혼례는 1837년에 열렸으며, 이 중요한 사건은 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1823~1887)이었고, 이 결혼은 두 사람의 인연을 공고히 했습니다.[2]

그러나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그들은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윤용구는 훗날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덕온공주와 윤의선의 이야기는 조선 왕실 내에서 사랑과 의무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순원왕후는 다섯 명의 자녀들을 두었고,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淑儀 朴氏, ?~1854) 또한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조선의 왕실은 다양한 관계로 얽혀 있었으며, 각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모든 관계와 사건들은 조선 왕실의 복잡한 구조와 함께 그 안에서 각 인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덕온공주와 그녀의 가족은 그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2: 석주선, 일본 유학 생활에서 더욱 깊어진 우리 옷 사랑



Episode 2 Korean Narrative:

김의식(金毅植)은 석승서(石承瑞)와의 사랑의 결실로 석주명(石宙明, 1908~1950)과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훌륭한 자녀를 두었다. 석주명은 그의 부모님이 보여준 지혜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한편, 그의 여동생 석주선은 어머니 김의식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석주선은 1934년에 명륜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녀의 학업과 예술적 열정을 일본으로 옮겼다. 1938년, 석주선은 일본 도쿄로 이사하여,[3] 그곳에 위치한 고등양재학원에 입학하였다. 1940년, 이곳을 졸업[4]한 그녀는 일본에서 열린 갱생복 디자인 공모전에 참가하여 1등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공모전은 일본 주식회사 주부의 친구가 주관한 것이었다.[5]

석주선은 오페라 무대의상 창작에 있어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고, 이는 그녀의 예술적 성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미우라 타마키(三浦 環, Miura Tamaki, 1884~1946) 같은 유명한 오페라 가수들에 의해 입혀졌다.[6]

그녀의 형 석주명 역시 그의 아버지 석승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 속에서 성장했다. 김의식과 석승서 부부의 지혜와 사랑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삶과 선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김의식 가족의 이야기는 가족 간의 사랑과 영향이 어떻게 자녀들의 삶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간 이들 모두는 서로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응원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갔다.

에피소드 3: 덕온가(德溫家) 유물과 석주선의 만남



Episode 3 Korean Narrative:

조선 후기의 이야기는 남녕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 1823~1887)과 그의 아내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로부터 시작됩니다. 남녕위 윤의선은 덕온공주의 남편으로, 그들의 사랑은 깊고 진실되었습니다. 하지만 덕온공주는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들은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양자로 들였습니다.

덕온공주는 그녀의 소중한 유품을 남겼습니다. 이 유품들은 덕온공주의 삶과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간직한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이 유품들은 이후 윤백영(尹伯榮, 1888~1986)에게 기증되었고, 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에 포함되어 보존되었습니다.[7]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은 이 유물을 수집하며 덕온공주의 이야기를 더욱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윤백영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며 역사적 가치를 존중했습니다.[8]

이 모든 이야기는 덕온공주의 유품을 통해 조선 시대의 삶과 관계를 재조명하며,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덕온공주의 유품과 집안의 유물은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후손들에게 값진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겨진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그 가치가 바래지 않으며, 조선 왕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오늘날까지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와 유물은 한국 문화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과거의 삶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에피소드 4: 감격스러운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



Episode 4 Korean Narrative:

1958년 8월, 서울 북창동에 자리한 중앙공보관에서는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인 '이조의상전시회'(李朝衣裳展示會, 1958.8.15.~8.22.)가 열렸습니다. 이 전시회는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인물이 주도하여 기획되었으며, 그의 열정과 지식이 이 행사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9]

석주선은 전통 의상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큰 열정을 가진 학자였습니다. 그는 전시회를 통해 한국의 고유 복식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이조의상전시회는 성황리에 개최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시회는 중앙공보관에서 진행되었으며, 이 건물은 예전에 서울 북창동에 위치했던 곳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창덕궁 소장 유물의 축소판 복원품 240여 점을 선보이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석주선의 기획 아래 꼼꼼하게 큐레이트되었고, 각기 다른 시기의 복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었습니다.

전시회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국의 전통 의상이 가진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조의상전시회는 단순한 복식 전시를 넘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시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소중한 문화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에피소드 5: 위기를 극복하고 마음을 담아 여는 한국 공예품 전시회



Episode 5 Korean Narrative:

한때 화려했던 창덕궁의 복원된 유물들은 고전 의상전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1963년, 고전의상전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이라는 인물의 주도로 개최되었다.[10] 그는 한국 전통 복식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여러 차례 전시회를 이끌었다.

고전의상전에서는 대한제국 적의 복원품덕온공주의 유품이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전시회는 단순히 복식의 전시가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덕온공주의 유품과 심동신 금관조복이조의상유물전(1966년)에서도 전시되어, 그 가치가 한층 더 빛났다.[11]

과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에 보관되었던 활옷 조각[12]은 불행히도 1960년에 발생한 화재[13]로 인해 한때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다행히도 창덕궁 소장 유물로서 복원되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활옷 조각은 구황실재산관리총국과 구황실재산관리총국 화재와 관련이 깊다. 이는 석주선이 주도한 전시회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고, 그가 이끌었던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인 이조의상전시회(1958년)에서 240여 점의 창덕궁 소장 유물 축소판 복원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14]

이렇게 석주선은 다양한 전통 복식 전시회를 통해 한국 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그의 노력 덕분에 잊혀졌던 유물들이 다시금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고전 의상전은 단순한 전시가 아닌,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의미 깊은 시간이 되었다.

에피소드 6: 석주선 박사의 소장품 기증, 석주선기념박물관의 탄생



Episode 6 Korean Narrative:

단국대학교장형(張炯, 1889~1964)에 의해 설립된 명문 대학교로,[15] 그의 아들 장충식(張忠植, 1932~)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을 창립하였습니다. 이 박물관은 석주선의 소중한 기념품들을 보존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석주선(石宙善, 1911~1996)은 1911년에 태어나 1996년에 세상을 떠난 한국의 저명한 인물로, 그는 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을 수집하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덕온공주 집안의 유물은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위치해 있으며, 이는 석주선의 노력 덕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이 유물들을 수집하여 석주선의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었고, 후에 이 소장품들은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특히, 1976년에는 민속복식품 3,365점을 기증[16] 하여 한국 전통문화 보존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은 단국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으로 불렸습니다. 이 박물관은 석주선과 그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수집품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충식은 아버지 장형의 뜻을 이어받아 박물관과 대학을 발전시켜 왔으며, 이를 통해 한국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단국대학교와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지키고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 『순조실록』 30권, 순조 29년(1829) 3월 6일 경자 4번째기사.
  2. 『헌종실록』 4권, 헌종 3년(1837) 8월 13일 무오 1번째기사.
  3. 1938년 동경제국대학에서 열리는 국제에스페란토 대회에 참가하는 석주명을 따라 일본으로 가게 된다.(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1쪽.)
  4. 일본 동경 고등양재학원 졸업연도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보인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2012년에 발간한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221쪽)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석주선" 기사)에서는 석주선이 1940년에 졸업했다고 하고 있으나, 『위키백과』("석주선" 기사)에서는 1941년에 졸업했다고 표기하고 있다.
  5.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16쪽.
  6.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16쪽.
  7. 박성실, "덕온공주 유물(德溫公主 遺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8.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3~224쪽.
  9. 장상훈, "가장 많은 특별전시회가 열린 특별한 한 해", 『박물관신문』 제609호(2022년 05월), 국립중앙박물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2~27쪽;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2쪽.
  10. "이조시대의상전개최", 『동아일보』 석간 5면 사회, 1963.08.03.
  1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8~30쪽;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3쪽.
  12. "활옷 조각", 『석주선기념박물관』, 단국대학교.
  13. "구황실재산사무총국", 『위키백과』;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23쪽;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가의 유물』, 단국대학교출판부, 2012, 222쪽.
  14. 본 디지털 큐레이션 스토리의 "에피소드 4: 감격스러운 한국 최초의 전통 복식 전시회"의 주석과 동일.
  15. "종합대학기", 『단국대학교』
  16.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편, 『(석주선 박사의) 우리옷 나라 : 1900년~1960년대 신여성 한복 best collection』, 단국대학교출판부, 2016, 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