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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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제례악과 함께 예술이 된 종묘제례
왕과 왕비의 영혼을 위한 곳, 종묘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에서 수도를 한양으로 이전하여 궁궐을 지었다. 먼저 북악산(北岳山) 아래 경복궁(景福宮)이 자리 잡고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따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이 만들어졌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사당이었다. 또한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종묘는 1396년 태조가 자신의 선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正殿)에는 20개의 붉은 기둥이 정연하게 늘어서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기둥으로 나뉘는 신실 한 칸에 한 분씩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좌우 협실까지 101미터의 긴 건물이고 지붕의 경사가 심해서 지붕이 더욱 크게 눈에 띤다. 정전의 19개 신실에는 19명의 왕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서쪽부터 윗대 왕을 봉안하여 태조가 맨 왼쪽, 순종이 맨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후대의 왕들 중 공덕이 특히 높은 왕들을 모셨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먼저 정전에 모시고, 5대가 지난 후에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는 그대로 모시고, 다른 왕들은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 서편에 있는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4대 선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다른 곳에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 지을 때는 4대 선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네 칸, 양옆 익실 각 한 칸으로 모두 여섯 칸이었는데, 증축으로 거듭하여 지금은 총 열여섯 칸 규모가 되었다. 영녕전에는 임금 16명, 왕비 17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정전과 영녕전은 1836년 헌종 때 증축된 건물들이다. 정전과 뜰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궁궐이나 사원이 화려하고 장식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종묘는 검소한 양식으로 건립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 유형을 보인다.
나라의 제사, 종묘대제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의 영혼을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향 의식이다. 조선시대의 나라제사 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다섯 의례(五禮) 중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다.
종묘 제향에는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세번째 미일(未日))에 지낸 정시제(定時祭)와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 이를 종묘에 알리기 위해 지내는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불만 올렸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향불조차 못 올리다가 1969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이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다. 이를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종묘대제의 제관은 각 신실의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을 비롯하여 총 302명으로 편성된다.
종묘대제는 오전 아홉 시에 영녕전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오에는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취위(就位: 제사를 시작하기 전 제관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전폐(奠幣: 헌관이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림), 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신에게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아헌례(亞獻禮: 두 번째 술잔을 올림), 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의 순으로 진행된다.
예술로서의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은 조상의 문덕과 무덕을 칭송하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음악과 춤을 일컫는다. 제악(祭樂)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때 정대업, 보태평으로 처음 정리되었고 세조 때에 이를 바탕으로 가감하여 종묘제례악을 개정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당피리, 축, 편종, 장고, 젓대, 방향(方響), 해금, 태평소, 대금, 진고(晋鼓) 등이 사용된다. 종묘제례악이 연주되는 동안 문치와 무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용[佾舞]인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곁들여 진다.
종묘 제례 때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은 임금의 예모(禮帽)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인데 이 이름은 관 위의 직사각형 판을 ‘면(冕)’이라 하고 면의 앞뒤로 구슬을 꿰어 늘어뜨린 것을 ‘류(旒)’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류’는 끈에 열두 개의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이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산(山), 용(龍),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종묘 제향에 쓰던 술잔), 조(藻: 수초), 화(火), 분미(粉米: 쌀알), 보(黼: 도끼), 불(黻: 亞자 문양)의 9장문(章紋)을 새긴 곤룡포이다.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도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1462년에 만들어진 형식이 현재까지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500년 전의 선율과 춤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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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참고문헌
- 종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강문식 외,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인 종묘와 사직에 대한 책이다.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조선인의 정신세계였던 유교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통해 조선의 국운과 운명을 함께 살펴보고, 조선의 문화, 예술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종묘 제례, 제례악 등 제사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효에 대한 관념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종묘에서 내쳐진 이유와 전쟁터를 누빈 종묘와 사직 등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그려냈다.
- 종묘제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 한형주,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 민속원, 2016. |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는 조선 후기 종묘 전례에 대해 연구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예서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각종 예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종묘와 궁묘 조선왕실의 제사』는 조선 왕실의 조상제사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왕실제사의 범위와 특수성부터 종묘 제사, 영녕전 제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하였다.
- 종묘제례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 박성연, 『종묘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 문사철, 2013. |
• 종묘제례악 보존회, 『종묘제례악』, 민속원, 2012. |
『종묘 제례악: 그 역사와 사상』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편찬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종묘제례악의 제도적 기반과 사상적 기반, 한국적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하던 음악인 ‘종묘제례악’의 악보를 담은 책이다. 최근 기관이나 개인이 발간한 종묘제례악 악보들이 서로 달라 빚어지는 혼선을 줄이고자 국립국악원이 펴낸 『국악전집』을 참고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